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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파괴자 1

영혼의 파괴자

이수광

 

1장 지옥을 떠나 오다

 

1

밖에는 주룩주룩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미경은 차가운 마룻바닥에 옆으로 누워 봄비가 주룩거리는 창밖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2월인데도 날씨가 포근했다. 어제만 해도 바람이 칼날처럼 매섭더니 벌써 봄이란 말인가. 교도소의 마룻바닥이 여전히 차갑기는 하지만 운동을 하러 밖으로 나가면 양지쪽에 봄풀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다시 봄이야.

미경은 습관처럼 중얼거리며 시름에 젖었다. 봄이라는 단어가 촉촉한 봄비처럼 가슴으로 젖어드는 기분이었다.

봄이 오면...

봄이 오면 봄풀이 돋아나듯 겨울 내내 웅크리고 있던 내 마음이 기지개를 켤 것인가. 한숨과 시름도 얼음이 녹듯 따스한 봄볕에 녹아버릴 것인가.

봄이 오면...

봄이 오면 푸른 수의를 입고 있는 나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것인가.

미경은 시를 읊듯이 중얼거렸다.

"에그 옥살이하는 년 처량하게 왠 놈의 봄비야..."

그때 벽 쪽에 누워있던 여자가 반쯤 일어나 앉으며 한탄조로 중얼거렸다. 간통 사건으로 들어왔다는 407호였다. 다른 여자들도 몸을 뒤척이는 것을 보면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미경도 무겁게 한숨을 토했다. 한숨도 전염이 되는 것인가. 미경은 가슴이 무거운 돌멩이를 얹어 놓은 것처럼 답답했다. 이럴 수가 있는 것인가. 내 삶이 이토록 기구할 수도 있는 것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늑대 같은 사내들에게 짓밟히고 지옥 같은 교도소 생활을 해야 하는가. 하늘이 저주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비참한 운명도 흔치 않을 것이 아닌가. 미경은 하루에도 몇 번씩 되살아나는 의문을 머릿속에서 반추하고 있었다.

"잠들 오냐?"

407호가 여자들을 향해 낮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여자들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이년들이 귀가 처먹었나? 빵장이 묻는데 왜 대답이 없어?"

407호가 언성을 높여 굼시렁거렸다. 그러나 입만 걸지 그다지 악의가 있는 욕설은 아니었다.

"그만 자."

402호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402호는 퇴폐이발소의 여주인이었다. 처음엔 여자 면도사로 시작하여 이발사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한 뒤 이발소를 개업했었다. 그러나 결혼을 한지 5년 만에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자 자신이 손수 이발소를 경영하게 되었다. 그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무엇보다도 머리를 깎는 손님이 없다는 점이었다. 젊은 남자들은 머리를 깎으러 미장원으로 가고 중년 남자들은 퇴폐이발소로 몰렸다. 402호도 어쩔 수 없이 퇴폐이발소로 영업 방침을 바꿨다. 예쁘장한 여자 면도사들을 대거 기용하고 그녀들에게 변태 영업을 시켰다. 이발소에 칸막이를 설치하고 샤워 시설도 갖추었다. 그러자 손님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402호는 흡족했다. 일제 단속이 몇 번 있었으나 미꾸라지가 빠져나가듯이 단속망을 잘 빠졌다. 일제 단속이 있으면 상납을 받는 기관에서 미리 연락을 주었고 단속에 걸려도 벌금형을 받거나 영업정지 10일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2, 3년에 한 번이 고작이었다. 나머지는 단속에 걸려도 돈으로 해결을 했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기독교단체가 앞장을 서서 단속을 하는 바람에 빠져나갈 방법이 전혀 없었다. 1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청주 여자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402!"

"왜 그래?"

"잠도 오지 않는데 이발소 얘기나 해봐."

"맨날 한 얘기를 뭘하러 또 해?"

402호가 시큰둥하게 받았다.

"담배 하나 줄께."

"그까짓 담배는..."

"..."

그러나 402호도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교도소 안에서 담배는 한 가치에 몇만 원씩에 암거래되기 때문이었다. 407호와 402호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감방 안에 담배연기 냄새가 구수하게 퍼졌다.

"이발소에서는 어떻게 그 짓을 해?"

"이발하고 면도하고 그래."

"그다음엔?"

"면도를 해."

"그거야 누구나 다 아는 얘기잖아?"

"면도를 한 뒤엔 안마를 해."

"안마?"

"안마를 할 때는 맨 처음에 손부터 하지. 손가락 하나하나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는데 그때 남자의 손이 슬그머니 면도사의 가슴에 닿게 하거나 허벅지를 스치게 하여 남자를 자극하지. 안마를 하면서 남자를 흥분시키는 거야."

여자들이 402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미경은 자신도 모르게 402호를 향해 귀를 모았다. 벌써 몇 번씩이나 들은 얘기인데도 402호의 얘기가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엔 남자의 다리를 안마하는 거야. 다리를 안마하면서 슬쩍슬쩍 남자의 그곳을 애무해."

"죽여주네!"

누군가 402호의 얘기에 비음을 섞어 말하자 여자들이 일제히 까르르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기랄, 여기서 나가면 여자 면도사나 되어야지. 그럼 남자 거기는 실컷 만질 거 아니야?"

"만지기만 하나?"

"시끄러워!"

여자들이 왁자하게 떠들자 407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자들이 입을 삐쭉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계속해 봐. 옷을 입은 채로 만지는 거야?"

". 그럼 대부분의 남자들은 가만히 있어. 그때 면도사는 자신의 젖가슴으로 남자의 가슴을 지그시 누르면서 가만히 속삭이는 거야."

"뭐라구 속삭이는데?"

407호가 402호에게 바짝 다가갔다.

"마사지 해드릴까요?"

"그럼 뭐라고 그래?"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지. 그때쯤이면 벌써 남자의 거기가 바짝 서 있으니까."

"그럼 바로 시작하는 거야?"

"아니야. 다음엔 어떻게 해드릴까요? 하고 물어. 그러면 남자들은 어떻게 해야 돼? 하고 묻지... 그럼 면도사는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마음대로 고르세요 그래."

"세 가지?"

"첫째는 손으로 하는 핸드플레이, 둘째는 입으로 하는 마우스플레이, 셋째는 거기로 하는 스페셜 플레이가 있다고 가르쳐 주는 거야."

미경은 쓴웃음이 나왔다. 이발소에서 하는 윤락행위도 그렇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남자들이 뭐라고 그래?"

"대개 입으로 하거나 거기로 해달라고 하지."

"입으로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야?"

"실제로 입으로 하지는 않아. 손님들의 눈을 수건으로 가렸기 때문에 입으로 해주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기구로 하는 거야."

"그럼 기구로 즐긴다는 말이야?"

". 그런데 쓰는 기구가 따로 있어. 그것이 여자의 거기처럼 보드랍기 때문에 남자들은 전혀 몰라. 그저 좋다고 낑낑대고 용을 쓰다가 물총을 딱 하고 쏘는 거야."

여자들이 또 다시 까르르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미경은 철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둠 속에서 주룩주룩 내리던 빗발이 더욱 굵어지고 있었다. 빗소리 때문에 407호와 402호의 얘기가 잘 들리지 않았으나 미경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감옥에서도 퇴폐적인 것, 쎈스, 음란, 욕망... 그런 것들이 화제가 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 모습인지 알 수 없었으나 미경은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퇴폐적인 것은 단순하게 퇴폐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수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폭력은 반드시 탐욕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빗발은 이제 쏴아 소리까지 내면서 장대질을 하고 있었다. 봄비로서는 드물게 내리는 폭우였다. 감옥 안이 벌써 축축한 습기로 가득차 있었다.

(모든 것이 헛된 일이야. )

미경은 철창밖에 하얗게 쏟아지는 빗발을 바라보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헛되고 헛되도다, 세상만사 헛되도다라는 말은 성경의 전도서에 있는 말이었다. 미경은 그 말이 지금처럼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은 적이 없었다.

(허지만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어... )

미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자신이 범죄자가 되어 교도소에 들어온 일을 생각할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어금니를 깨무는 미경이었다.

(이건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거대한 조직의 음모야. )

미경은 그 음모만은 무슨 일이 있던지 밝혀야 하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었다. 미경이 음모에 말려든 것은 2년 전의 일이었다. 미경은 그때까지도 자신이 거대한 조직의 음모에 휘말리고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초여름이었다. 아침부터 날씨가 찌푸퉁하더니 오후가 되자 빗발이 후드득대고 있었다. 미경은 늦은 점심을 먹고 베란다에 나가서 비가 오는 것을 구경했다. 오랜 가뭄 끝에 모처럼 내리는 비였다. 아파트의 광장을 하얗게 물들이며 쏟아지는 빗발을 내다보자 가슴에 가득 차 있던 응어리가 시원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아파트 광장은 비 때문인지 인적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평소에는 단지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으나 지금은 고적할 정도였다.

(시원스럽게도 쏟아지네. )

미경은 정신없이 빗줄기를 내다보았다. 하얀 빗줄기는 베란다의 유리창까지 두들겨대고 있어서 빗물이 유리창으로 줄지어 흘러내리고,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들이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비산하고 있었다. 미경은 허공으로 흩어져 날리는 비의 입자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미경은 거실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안미경씨 댁이죠?"

"."

"경찰입니다. 김석호씨 교통사고 때문에 조사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모시러 갈 테니까 댁에서 기다리십시오."

전화의 목소리는 위압적이고 거칠었다.

"저를요?"

미경은 어리둥절했다.

"아닙니다. 용의자를 한 사람 잡았는데 안미경씨가 아는 사람인지 확인을 해주셔야 합니다."

"네에."

미경은 낮게 대답을 했다. 비로소 경찰이 무엇 때문에 전화를 했는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10분 정도 지나서 모시러 가겠습니다."

전화는 미경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찰칵하고 끊겼다. 미경은 상대방의 전화가 불쾌했으나 경찰이라고 하므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경은 다시 베란다로 나갔다. 경찰이 말하는 용의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용의자는 일반적으로 범죄 혐의자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이 말하는 용의자에 대해서 미경은 전혀 어림을 할 수 없었다. 미경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넋을 잃고 내다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가고 스쳐왔으나 빗소리가 금방 지워버리곤 했다. 그때 아파트의 광장으로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미경은 승용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승용차는 미경의 아파트 바로 앞에까지 와서 멎더니 젊은 남자 둘이 내렸다. 그들은 우산도 쓰지 않고 미경의 아파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미경의 아파트를 감시하는 기색이었다.

(뭘하는 사람들일까?)

미경은 우두커니 생각에 잠겼다. 사내들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아파트의 넓은 광장에는 이내 승용차만이 남아서 비를 맞게 되었다. 미경은 베란다의 창을 열었다. 그러자 쏴아 하는 빗소리와 함께 푸슷한 빗방울들이 미경의 얼굴을 때렸다. 미경은 재빨리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형사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거실을 거쳐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직도 속옷 차림이었다. 미경은 요즈음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고 하루종일 집에서 빈둥거릴 때도 있었다. 남편이 죽은 후 그녀의 일상은 암흑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거실엔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 복서(The boxer)가 감미롭게 흐르고 있었다.

I’m just a boy(나는 아주 불행한 소년입니다. )

Though my storys seldom told(나의 얘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

미경은 타올로 얼굴의 빗물을 훔친 뒤 서둘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복서는 70년대에 유행했던 노래인데 미국의 가난한 소년이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하다가 권투선수가 된다는 내용으로 노랫말이 애절하여 전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속옷은 아침에 갈아입은 것이었으나 그래도 다시 바꿔 입었다. 브래지어와 팬티가 모두 보라색의 세트였다. 남편에게서 선물 받았던 것으로 착용감이 뛰어난 속옷이었다. 겉옷은 검은색 반바지에 검은색 폴로 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반바지 속에는 살빛의 밴드 스타킹을 신었다. 비가 오고 있으므로 그 위에 레인코트를 걸치면 되는 것이다. 그때 현관에서 차임벨이 울렸다. 미경은 장롱 속에서 레인코트를 찾아 걸치고 거실의 전축을 끈 뒤 현관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경찰입니다."

목소리가 무뚝뚝했다. 미경은 공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걸쇠를 벗기고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밖에는 승용차에서 내린 두 사내가 서 있었다.

"준비되셨습니까?"

머리가 짧은 사내가 물었다. 경찰이라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범죄자의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

미경은 짧게 끊어서 대답하고 사내들을 따라 아파트를 나섰다. 그리고 그것이 미경을 지옥으로 떨어뜨린 첫걸음이었다.

 

여자들이 낮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밖에는 여전히 빗발이 쏴아 소리를 내며 쏟아지고 있었다. 407호와 402호는 얘기가 모두 끝났는지 조용했다. 미경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이곳에서는 잠을 자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먹고 자고 일하고 잠을 자야만 각자에게 남겨진 형기를 손꼽아 보지 않아도 되고 교도소 생활의 시름도 잊게 되는 것이다.

 

2

미경은 시멘트벽 밑에 몸을 바짝 웅크렸다. 그만해도 양지쪽이기 때문일까. 벽 밑에 샛노란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미경은 그 꽃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싸하게 저려왔다. 간밤의 비 때문인지 민들레는 노란빛이 더욱 선연했다. 미경은 그 꽃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다가 벽에 등을 기댔다. 여자들은 가벼운 산책을 하거나 2. 3명씩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침 산책 시간이었다. 미경은 푸른 죄수복을 걸친 채 먼 산을 시린 눈빛으로 응시했다. 아직 산에는 잔설이 남아있는 골짜기도 있었고 수목들은 앙상하게 헐벗은 채 아지랑이가 아른대는 하늘을 이고 있었다.

(이젠 봄이 오는 거야.... )

미경은 속으로 생각했다. 산에 있는 나무며 교도소의 담장 앞에 있는 나무들이 점차 연두빛을 띄어 가고 있었다. 그 연두빛이 초록빛으로 바뀌어야 미경은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개새끼들.... )

미경은 출소할 날을 머릿속에 꼽아 보다가 이를 갈았다. 또다시 짧은 머리의 뼁뱀눈의 사내가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눈에서는 파랗게 불꽃이 일어나고 주먹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들은 미경을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뜨린 사내들이었다.

 

사내들이 미경을 승용차에 밀어 넣었다. 미경은 사내의 손이 미경을 승용차에 밀어 넣기 위해 엉덩이를 밀자 재빨리 그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그 사내가 미경을 힐끗 쏘아보았다. 눈이 옆으로 가늘게 찢어진 사내였다. 그래서 그런지 눈빛이 뱀처럼 차가웠다.

"가자구."

뱀눈이 운전석에 앉아있는 짧은 머리에게 말했다.

"알았어."

짧은 머리가 미경을 기분 나쁜 눈빛으로 쏘아보고 시동을 걸었다. 미경은 시트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빗줄기가 승용차의 지붕을 우박을 쏟아 놓듯이 요란하게 두들겨대고 있었다. 미경은 승용차의 앞유리창으로 아파트 광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승용차는 옆과 뒤가 모두 짙은 감청색으로 선팅이 되어있었다. 미경은 기분이 이상했다. 비 때문인지 아파트 광장은 인적이 끊어져 오가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다. 그때 승용차가 부르릉 소리를 내고 아파트 광장을 떠났다. 미경은 눈을 감았다. 옆에 앉은 뱀눈의 사내가 자꾸 자신을 힐끔거리는 것 같아 그 시선을 떼어버리기가 난처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있으면 뱀눈의 사내를 의식하지 않게 될 것 같아서였다.

"어디로 가지?"

김포읍으로 들어서자 짧은 머리가 뱀눈에게 물었다.

"근처에 야산 있잖아?"

뱀눈이 반문했다. 미경은 눈을 감고 두 사내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내의 대화가 점점 수상스러워지고 있었다.

"천둥산 어때?"

"그래. 거기 아무 데나 승용차를 들이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지 않을까?"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무슨 사람들이야?"

승용차가 서울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미경은 얼굴을 찡그렸다. 두 사내의 대화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경찰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경찰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걱정을 하는 것일까. 어쩐지 이 사람들은 경찰 같지 않아. 경찰 냄새라고는 전혀 풍기지 않잖아... 미경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승용차가 다시 왼쪽으로 핸들을 꺽었다. 미경이 눈을 뜨자 천둥산 밑의 농로로 승용차가 뒤뚱거리며 들어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미경은 그제서야 사내들에게 물었다. 사내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왜 이런 곳으로 가요?"

미경이 재촉하듯이 다시 물었다.

"가보면 알잖아?"

뱀눈이 딱딱하게 잘라 말했다. 미경은 입을 다물었다. 뱀눈의 한 마디에 가슴이 철렁했다.

(경찰이 아니야!)

미경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그때 승용차가 멎었다. 그러나 시동은 끄지 않아 윈도우 브러시가 계속해서 전면 유리창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힘겹게 밀어내고 있었다.

"잘 들어!"

갑자기 뱀눈이 미경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뱀눈의 손에는 어느덧 날카로운 생선회칼이 들려 있었다.

"왜 이래요?"

미경은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우린 경찰이 아니야!"

"...."

"우리는 네년을 죽여 없애라는 명령을 받았어. 그러나 죽이고 싶지는 않아. 네년을 죽이고 살인자가 되고 싶지 않단 말이야! 그러니 끽 소리 하지 말고 우리가 시키는대로 해! 알겠어?"

미경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슴이 마구 뛰고 턱이 덜덜 떨렸다.

"대답해!."

뱀눈이 생선회칼을 미경의 목에 바짝 들이댔다. 미경은 섬칫하여 몸을 뒤로 젖혔다. 금방이라도 생선회칼이 미경의 목을 찔러 버릴 것 같아 겁이 덜컥 났다.

", ...."

"이유 같은 것은 묻지 말아. 세상에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서 땅속에 묻히거나 갑자기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무수히 많아. 소위 실종자라는 사람들이지......"

뱀눈이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았다.

"허지만 왜 저를..... 제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래요?"

미경은 다급하게 물었다. 사내들이 왜 자신을 납치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내들이 무엇인가 잘못 알고 자신을 납치한 것이리라. 착오에 의해서가 아니면 나 같이 평범한 여자를 이들이 납치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미경은 언뜻 그런 생각을 했다.

"이유 같은 것은 묻지 말라고 그랬잖아? 너 같은 계집애 하나 죽여서 산에다 암매장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야. 알았어?"

"."

미경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뱀눈이 미경의 가슴을 덥썩 잡았다. 미경은 얼굴을 찡그렸다. 뱀눈의 넓은 손바닥에 잡힌 젖가슴이 자지러대는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잠자코 있어!"

뱀눈이 미경을 윽박질렀다.

"."

미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묶고 해!"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내가 뱀눈에게 수갑을 던졌다. 미경은 하얗게 반짝이는 수갑을 보자 또다시 가슴이 철렁했다. 이들은 정말 경찰인가. 아무래도 경찰 같지는 않아.... 아니야. 경찰이 분명해. 경찰이 아니면 어떻게 경찰 장비인 수갑을 가지고 다닐 수 있어.... 허지만 경찰이 이런 짓을 할 리 없어.... 미경이 두서없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뱀눈이 생선회칼로 위협을 해왔다.

"뒤로 돌아!"

미경은 뱀눈이 시키는대로 뒤로 돌아 앉았다. 그러자 뱀눈이 미경의 두 손을 뒤로 잡아당겨 손목에 철컥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는 미경을 돌려 앉힌 뒤에 입에 테이프를 붙였다. 미경은 뱀눈이 입에 테이프를 붙이지 못하게 세차게 도리질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쁜 놈들!)

미경은 사내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지 알아차리고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

"빨리 끝낼 테니까 참으라구...."

뱀눈이 야비하게 웃으며 미경의 바지 벨트를 푸르기 시작했다. 미경은 발버둥을 쳐서라도 저항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사내들에게 수갑이 채워져 있는 신세였다. 이런 상태라면 저항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깨끗하게 놈들에게 당하는 것이 고통이라도 덜 당하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비가 오고 있기 때문인지 주위엔 인적도 없었다. 뱀눈에 의해 미경의 바지가 벗겨져 나갔다. 뱀눈은 미경이 저항을 하지 않자 빠르게 바지를 벗기고 속옷을 무릎 밑으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미경은 그 순간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낯선 사내들에게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강타하고 있었다. 미경은 사력을 다해 몸을 비틀며 다리를 바둥거렸다.

"용쓰지 마...."

뱀눈이 낄낄거리고 웃었다. 미경은 그 소리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이런다고 말뚝 못박겠어."

뱀눈의 더운 입김이 미경의 얼굴 위로 퍼부어졌다. 미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수치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내가 네놈들에게 죽지만 않으면 반드시 복수를 할 거야!)

그 대신 미경은 머릿속으로 무서운 결심을 했다. 미경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뱀눈이 미경의 몸 위로 올라왔다. 미경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뱀눈이 미경의 무릎을 억지로 벌리고 있었다. 미경은 남편을 생각했다. 이렇게 위급한 일을 당하고 있을 때 남편이 나타나서 도와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으나 죽은 남편이 살아서 돌아올 까닭이 없었다. 남편은 그녀와 결혼을 한 지 보름 만에 교통사고로 죽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

미경은 속으로 남편을 향해 중얼거렸다. 남편의 슬퍼하는 얼굴이 망막을 스치고 있었다. 비록 남편이 죽었다고 해도 남편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

그때 미경은 갑자기 목이 꽉 막혀 왔다. 뱀눈이 어느 사이에 그녀의 몸속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미경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사내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하체가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미경이 눈을 뜬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미경은 짧은 머리까지 일을 치르고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자 비로소 눈을 떴다. 사내들에게 짓밟힌 아랫도리가 얼얼했다. 그러나 아랫도리의 통증보다 미경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일을 치르고 나자 사내들이 미경의 나신을 카메라의 후레쉬까지 터뜨리며 샅샅이 찍었기 때문이었다. 미경의 나체 사진으로 협박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

미경은 그때 피눈물을 흘리며 사내들을 저주했다. 후레쉬가 터질 때마다 자신의 치부가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생각을 하자 치가 떨렸다.

 

미경은 먼 산과 교도소의 높은 담장에서 우울한 시선을 거두었다. 출소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물이 오르는 초목을 통해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초목에 물이 오르면 금세 나뭇잎들이 싹이 틀 신록이 무성한 6월이라야 금방인 것이다. 미경은 교도소에 들어온 날부터

오로지 출소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복수할 거야. 나를 짓밟은 것처럼 그놈들도 철저하게 짓밟을 거야!)

미경은 새삼스럽게 주먹을 움켜쥐고 몸을 떨었다. 그날 뱀눈과 짧은 머리에게 당한 일을 생각하자 분노로 이가 갈렸다.

 

3

하늘은 부옇게 흐려 있었다. 오후의 작업을 끝내자 이른 봄의 저녁해가 서쪽 담장으로 설핏이 기울고 있었다. 세면장에서 작업으로 더러워진 손과 얼굴을 씻고 식당으로 향하다가 문득 미경은 복도의 창으로 설핏이 기울고 있는 저녁해를 보았다. 어둑하게 저물고 있는 봄날의 저녁 풍경이 미경의 가슴을 또다시 아리게 하고 있었다. 미경은 두 사내에게 윤간을 당한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꿈에서도 겪지 못했던 일이었다. 미경은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사람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짐승에게 당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무엇보다 두 사내가 그녀의 허벅지에 배설한 미끌미끌한 정액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도록 치욕스러웠다. 그러나 그 뒤에 미경이 겪은 일은 더욱 처참한 것이었다. 미경은 짐승 같은 사내들에 의해 술집으로 팔려 갔는데 그곳은 지옥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비참한 곳이었다.

 

두 사내에게 윤간을 당한 미경은 승용차로 어디론가 끌려갔다. 비는 그때까지도 계속 퍼부었고 미경은 손에 수갑이 채이고 입을 테이프로 봉해져 승용차 뒷좌석에 실렸다. 그러나 큰 길이 가까워지자 사내들은 미경에게 레인코트를 뒤집어씌워 승용차 뒤의 트렁크에 짐짝처럼 구겨 넣었다. 미경은 승용차의 트렁크에서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트렁크 안이 후덥지근하여 숨이 턱턱 막혔다. 미경은 사흘 동안을 트렁크 안에 갇혀 지냈다. 사내들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미경을 계속 끌고 다니기만 했다.

(이러다가 나는 죽게 될 거야.... )

미경은 비참했다. 트렁크 안에 갇혀서 소리 없이 울었으나 사내들은 그녀를 꺼내 주지 않았다. 사내들이 미경을 꺼내는 것은 욕망을 배설할 때뿐이었다. 사내들은 더러운 욕망을 배설하는 도구로 미경을 이용할 속셈인지 걸핏하면 미경을 꺼내 옷을 벗겼다. 미경이 그곳에 도착한 것은 사내들에게 납치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그곳에 닿을 때까지 검문을 두 번 받았으나 경찰은 한 번도 승용차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오히려 사내들이 신분증을 내보이면 수고하십니다, 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기까지 했다. 미경은 사내들의 신분이 의아스러웠다. 사내들은 분명히 경찰이 아니었으나 검문소의 경찰들은 그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있었다. 미경이 그곳에 닿은 것은 거의 저녁 시간이었다. 사내들에 의해 미경이 트렁크에서 끌려 나오자 어둠이 서리서리 내리고 있는 뒷골목이었다. 그러나 사내들에게 양쪽 팔이 잡혀 골목으로 끌려 나오자 뜻밖에 번화한 거리였다. 이미 사방은 어둠컴컴해져 있었고 집집마다 네온싸인이 화려하게 켜져 있었다.

(엘로우 하우스야!)

미경은 트렁크에 오랫동안 갇혀 있어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으나 언뜻 그런 생각을 했다. 업소마다 쑈윈도우가 설치되어 있었고 무슨 상품을 진열하듯이 짙은 화장을 한 여자들이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언뜻 보면 지극히 화려한 곳이었다. 그러나 미경은 술집이 아닌 어느 주택으로 끌려 들어갔다. 지하실이었다. 간이 쇠침대가 하나 놓여 있을 뿐 지하실은 썰렁하게 비어있었다. 미경은 수갑이 채인 채로 그곳에 갇혔다. 사내들은 미경을 쇠침대에 내던졌다. 미경은 쇠침대에서 비로소 다리를 쭉 뻗었다. 승용차의 트렁크에 갇혀서 지냈기 때문인지 서 있을 수도 없었고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미경은 그 지경을 당했으면서도 잠이 쏟아졌다.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가늠을 해보려고 했으나 온몸의 기운이 탈진하여 잠만 계속 쏟아졌다.

미경이 눈을 뜬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지하실 철문이 덜컹 열리고 나이 지긋한 여자가 들어왔다. 몸이 뚱뚱한 여자였다. 뮈몸에서 싸구려 화장품 냄새가 왈칵 풍겼다.

"견딜만 해?"

여자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

미경은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

"몰라요."

"부산 완월동이야. 엘로우 하우스라고 들어봤겠지?"

"."

"이제 여기서 일해야 해."

미경은 여자를 앙칼진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여자의 말은 미경에게 술을 팔고 몸을 팔라는 뜻이었다.

"왜 내게 그런 일을 시키죠? 난 평범한 가정주부예요. 가정이 있는 여자란 말예요!"

"과부라고 그러던데 뭘 그래?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고 아이는 없고.... 여기서 일한다고 아무도 뭐라고 그럴 사람이 없잖아? 걸리적거릴 것두 없구...."

"그렇다고 몸을 팔아요?"

"어차피 망가진 몸 아니야?"

여자가 비웃음기를 가득 담은 눈으로 미경을 쏘아보았다. 미경은 어처구니가 없어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세상에는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그러던데 이 여자가 그런 여자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보내 주세요."

"아직 여기 생리를 잘 모르나 본데 한번 들어오면 죽기 전에는 나갈 수 없어!"

"! 난 어떻게 하던지 나가겠어요! 그리고 내가 나가면 당신들을 경찰에 고발하겠어요!"

미경이 단호하게 외쳤다.

"이년이 !"

"함부로 욕하지 말아요!"

"뭐야?"

"난 창녀가 아니예요! 당신들처럼 사람을 팔고 사는 더러운 짐승이 아니란 말예요!"

"이게 아직 뜨거운 맛을 못봤군!"

여자가 갑자기 미경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미경은 여자를 독기 서린 눈으로 쏘아보았다. 수갑이 채워져 있어서 여자에게 대항할 수 없는 것이 분통했다.

"아직 뜨거운 맛을 덜 본 모양인데 어디 한번 당해봐!"

여자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갔다. 미경은 침대에 벌렁 누웠다. 며칠째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아 극심한 허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할 수가 없었다. 미경은 침대에 누운 채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하실인데도 밖에서 빗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하실 문이 다시 덜컹 열렸다. 미경은 지하실 문을 쳐다보았다. 여자가 낯선 사내들을 데리고 들어오고 있었다. 미경은 겁에 질려 사내들을 쏘아보았다. 사내들의 손에는 각목이 들려 있었다.

"손 좀 봐!"

여자가 짧게 토막을 치듯이 말했다.

"알았수다."

사내 하나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미경에게 다가왔다. 왼쪽 얼굴에 길다란 흉터가 있는 사내였다. 미경은 침대에 앉은 채 재빨리 뒷걸음질을 쳤다.

"이 몸은 이 바닥에서 도치라고 불리는 어른이야. 말을 듣지 않는 계집들에게 손을 봐주는 걸 업으로 삼고 있어."

도치라는 사내가 야비하게 웃으며 각목을 허공에 휘둘렀다. 각목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휘익 하고 들렸다. 미경은 소름이 오싹 끼쳐 왔다.

"내 몸에 손을 대지 마!"

미경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 사흘이나 굶겼다더니 쌩쌩하네!"

도치가 미경을 향해 껌을 퉤 뱉았다. 미경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도치가 미경의 멱살을 잡아 시멘트 바닥으로 팽개쳤다. 미경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그때 도치가 미경의 어깻죽지를 각목으로 힘껏 내리쳤다. 미경은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악, 하는 비명을 질러댔다.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 주지!"

도치가 다시 각목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미경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시멘트 바닥을 때굴때굴 굴렀다. 도치라는 사내는 그런데도 미경을 사정없이 각목으로 두들겼다.

", 잘못했어요!"

미경은 그때서야 도치를 향해 울면서 빌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시키는 대로 다 하겠어요!"

그러나 도치는 미경이 애원을 하는데도 5분 남짓 미경을 사정없이 각목으로 멈추었다. 미경은 지하실 바닥을 엉금엉금 기면서 울었다.

"수갑 풀러!"

도치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낯선 사내가 재빨리 미경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수갑을 풀렀다.

"침대로 올라가!"

도치가 구둣발로 미경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미경은 가슴을 싸안고 나뒹굴었다.

"빨리 올라가! 나는 리바이벌이 싫어!"

도치가 이번엔 미경의 아랫배를 구둣발로 밟았다. 미경은 아랫배가 터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재빨리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미경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벗어!"

도치가 짧게 소리를 질렀다. 미경은 도치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자 허겁지겁 바지를 벗었다. 그리고 도치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슬금슬금 도치의 눈치를 살피며 속옷까지 벗었다.

 

미경은 손등으로 눈가를 씻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가면 결코 울지 않을 거야!)

미경은 속으로 굳게 다짐을 했다. 늦은 시간이었다. 여자 수인들은 이제 모두 잠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미경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따금 복도를 오가는 여자 교도관들의 구둣발 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미경은 옆으로 누워 창으로 시선을 보냈다. 감방의 창은 유리로 되어있었으나 밖에는 쇠파이프가 박혀 있었다. 철창이었다. 그러나 그 철창으로 별들이 빼곡한 하늘이 내다보였다. 어두운 하늘에 총총하게 박혀 있는 별들은 흡사 와르르 쏟아지기라도 할 듯이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미경은 그날 도치라는 사내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것은 그날뿐이 아니었다. 미경은 부산 완월동으로 끌려간 뒤 사흘 동안을 매를 맞아 정신이상 증세까지 일으켰었다. 도치라는 사내와 그곳의 여자는 미경이 헛소리를 하자 그때서야 매질을 멈추고 닷새를 더 가두어 두었다. 미경이 그 지하실에서 나온 것은 김포에서 납치된 지 열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 집은 부산 완월동에서도 악명 높은 접대부 알선업소였다. 그러나 말이 알선업소이지 인신매매단으로부터 여자를 사들여 길을 들인 뒤 업소에 되팔아 넘기는 집이었다. 여자는 그 일대에서 '구미호'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미경은 보름 만에 그곳의 '비너스'라는 집에 팔려가 쑈윈도우에 진열되었다. 이미 그녀의 몸은 무수한 사내들에 의해 망가질대로 망가져 있어 몸을 파는 것을 거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하는 기능이 폐쇄되어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기억이 아슴했다.

그러나 미경은 언제나 탈출만을 궁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방법을 생각해 냈다. 미경이 그곳을 빠져나온 것은 3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미경은 손님과 동침을 하다가 손님의 지갑을 훔쳐서 감추었다. 그러자 그 손님이 미경을 파출소에 신고했다. 미경은 파출소 순경들에 의해 절도죄로 구속되었다. 판사는 미경이 초범이지만 법정 태도가 나쁘다고 하여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미경이 재판과정에서 그까짓 돈 좀 훔친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판사들에게 대들며 패악질을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미경이 치밀하게 세운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국선 변호인은 아연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고 비너스집 주인을 비롯해 그곳에 빌붙어 살고 있는 기생충 같은 폭력배들도 저 년이 아예 미쳤군, 하는 눈치였다.

(내가 부산 완월동까지 끌려온 것은 인신매매단의 짓이 아니야..... )

미경은 자신을 지옥으로 떨어뜨린 것은 폭력배들의 뒤에 어떤 조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조직의 감시에서 벗어 나는 일은 실성한 시늉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경이 잠이 든 것은 거의 새벽이 가까웠을 때였다. 수인들이 부스럭대는 소리에 눈을 뜨자 벌써 아침이었다. 미경은 모포와 담요를 개어 놓고 식사를 할 준비를 했다. 청주 여자교도소는 시설이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게다가 초범과 장기수들을 분류하여 수용한 까닭에 미경이 있는 감방은 자유만 유보되어 있을 뿐 크게 불편한 것은 없었다. 하루에 세 번씩 하는 식사도 교도관들의 인도를 받아 식당에서 했고 식사가 끝나면 아침 산책시간까지. 그리고는 각자의 작업장으로 인도되어 작업을 했다.

3. 1절 특사 소식이 미경에게 전해진 것은 그날 작업을 모두 끝냈을 때였다. 보안과장이 명단을 들고 나타나 가석방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미경도 끼어 있었다. 3년의 형기가 지난 815일에 광복절 특사로 2년으로 감형되었고, 이번에 형집행정지에 의한 가석방자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하늘이 나를 돕는 거야!)

가석방자 명단이 발표되자 미경은 두 눈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3.1절이라고 해야 이제 겨우 사흘이 남은 것이다.

 

 

2장 세상 밖으로

 

1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교도소의 쪽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자 철문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모두들 허름한 보따리나 낡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가족들의 마중을 받았으나 미경처럼 그렇지 못한 여자들도 있었다.

"어 춥다!"

"뭔 놈의 날씨가 요로큼 춥다냐?"

"고생 많았쟈?"

"고생은 무슨 고생이라요? 새끼들은 잘 있지라우?"

"그럼. 새끼들 걱정은 말구 두부나 먹어라."

교도소 앞의 풍경은 드라마나 영화와 흡사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드라마나 영화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이고 을씨년스럽다는 것뿐이었다. 미경은 교도소의 쪽문을 나서자 가슴이 뭉클해 왔다. 불과 16개월밖에 있지 않았는데도 10년을 살다가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먼저 주위의 풍경을 살핀 뒤 얼굴을 찡그렸다. 교도소 앞의 넓은 길을 찬바람이 흙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휘몰아쳐 오고 있었다. 2월 하순이지만 날씨가 다시 살을 에일 듯이 추워져 있었다. 미경은 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바쁜 것도 없지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걸음이 활발하지 않았다.

"403!"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미경의 귓전을 때렸다. 미경은 흠칫하여 몸을 돌렸다. 그러자 사내처럼 어깨가 떡 벌어진 여자가 젊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두부를 게걸스럽게 입에 쑤셔 넣으며 그녀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미경은 파리한 입언저리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동료 죄수인 411호였다. 미아리 어디에선가 술집을 경영한다는 여자였다. 고향이 마산이라 미아리나 감방에서는 마산댁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리와 보래이!"

411호 마산댁이 악을 써댔다. 말투에 항상 경상도 억양이 섞여 있어서 사람을 부르는 것도 시비를 거는 것처럼 요란했다. 미경은 고개를 흔들고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시국사범이라도 풀려 나왔는지 한 떼의 젊은 학생들이 교도소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미경은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학생들은 앳된 여학생을 둘러싸고 경건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죽음이 두려우랴 감옥이 두려우랴

앞서간 학우도 깃발 들고 싸웠노라

 

미경은 고개를 흔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직도 사회변혁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으나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것이 꼭 내 말을 안 들어!"

등 뒤에서 마산댁이 시빗조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미경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떼어놓았다.

"!"

마산댁이 등 뒤까지 달려와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미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마산댁이 느닷없이 두부를 미경의 입속에 쑤셔 넣었다. 미경은 고개를 흔들며 두부를 뱉어냈다. 마산댁이 어린아이처럼 깔깔대고 웃다가 그녀의 등짝을 세차게 후려쳤다.

"왜 이래?"

미경은 쌀쌀한 눈빛으로 마산댁을 흘겨보았다.

"어디로 갈 거야?"

"몰라."

"나 하고 같이 갈래?"

"....."

"기왕에 내돌린 몸뚱인데 나하고 같이 벌자구. 내가 섭섭치 않게 대우해 줄게.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거 팔아 번 돈 뺏기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매음을 하지 않아."

미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마산댁이 이상한 년이라는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뭐.... 그럼 우리 집에서 며칠 쉬었다가 가. 나도 출감하자 마자 바로 그 짓 다시 하지는 못해. 어디 온천에라도 가서 때라도 벗기고 새로 시작해야지.... 마땅하게 갈 곳이 없으면 따라와. 내가 이래뵈두 의리 하나는 끝내 주는 년이니까...."

마산댁이 미경에게 등을 돌린 채 여자들 있는 데로 가기 시작했다. 미경은 교도소 앞의 넓은 길로 걸음을 떼어 놓으려다가 멈칫했다. 저 멀리 아스팔트 길의 전봇대 옆에 잠바를 입은 두 사내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미경은 그들을 보자 찬물을 뒤집어 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산댁!"

미경은 갑자기 마산댁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

"가겠어."

미경은 마산댁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잠바를 입은 사내들이 아직도 자신을 쫓고 있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잘 생각했어...."

마산댁이 미경을 돌아보고 빙그레 웃었다. 마산댁을 찾아온 여자들은 봉고차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미경이 마산댁을 따라 봉고차에 올라타자 여자들은 담배를 나누어 피우며 왁자하게 떠들어댔다. 미경은 그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며 차창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그녀의 뇌리로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오고 있었다.

 

휘이이잉....

벌판을 달려오는 바람이 아수라의 울부짖음처럼 음산했다. 미경은 책을 읽다 말고 창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얼굴을 찌푸렸다. 태풍주의보가 내린 탓일까. 아까부터 불길한 예감이 자꾸 뒤통수로 엄습해 오고 있었다. 바람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벌써 벌판을 달려오는 바람에 유리창이 덜컹대고 흔들리고 허공이 바람소리로 가득했다. 미경은 마음이 심란하여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까지 내리면 더욱 음산한 밤이 되겠군.... )

미경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경이 난처한 처지를 당하거나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곧잘 짓는 표정이었다. 미경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날씨가 음산하여 아까부터 자꾸 신경이 쓰였다. 아파트의 거실도 오늘따라 이상하게 삭막하고 황량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기다리는 일이 몹시 지루하고 따분했다. 남편이 귀가할 시간에 맞춰 저녁을 짓고 찌개를 맛있게 끓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남편이 아무 연락도 없이 퇴근이 늦어 그녀는 기다리다가 지쳐 혼자 저녁을 먹었던 것이다.

미경의 나이는 이제 불과 25세였다. 신문기자인 남편과 2주일 전에 결혼식을 올렸으므로 아직도 달콤한 신혼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보다 다섯 살이 위로 신문사 문화부에서 문학 담당 기자로 일을 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곧 바로 신문사에 취직을 하여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대학교에 재학 중일 때는 운동권으로 수배를 받은 일이 있을 정도로 사회 변혁 운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취업을 하여 직장생활에만 충실하고 있었다.

미경이 제약회사의 홍보부에서 사보 편집을 하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듯이 그녀의 남편도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불만이 전혀 없었다. 남편은 생활에 충실했고 아파트도 한 채 갖고 있었다. 아파트를 살 때 그녀가 직장에서 받은 퇴직금과 적금을 약간 보태기는 했으나 두 사람만의 공간인 아파트가 있다는 것은 꿈처럼 즐거운 일이었다.

휘이이잉....

또 다시 아수라의 울부짖음 같은 바람 소리가 귓전을 때리며 유리창이 덜컹대고 흔들렸다. 미경은 책에서 시선을 떼고 창밖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바람이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미경은 심호흡을 하듯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여자의 삶이 남편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남편이 아직도 귀가하지 않고 있어 우울했다.

11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신문사에서 동료 기자들과 술을 마시고 귀가한다고 해도 이제는 집에 도착해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남편은 아직 새신랑인 것이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으나 아직까지 이렇게 귀가가 늦어진 일은 없었다.

(정류장까지 우산을 가지고 나갈까?)

미경은 책을 건성으로 읽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책의 활자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기만 할뿐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용없는 짓이었어.... )

미경은 자신의 옷차림을 살피며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의 옷차림이 새삼스럽게 눈에 거슬렸다. 남편이 귀가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살결이 은은하게 내비치는 속옷과 나이트 가운으로 갈아 입었던 것이다. 남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속옷을 요염한 것으로 갈아 입었으나 남편이 귀가하지 않아 짜증이 나고 있었다.

(여자는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거야. )

미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남편을 위해 밤에 요염한 속옷을 입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는가. 남편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속옷을 예쁘게 입으라고....

미경은 다시 창밖을 쳐다보았다.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2킬로미터 남짓 되는 거리였다. 우산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고스란히 비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류장까지는 길이 너무 어두웠다. 그 길은 낮에도 인적이 드물어 다니기가 꺼려지는 길이었다. 비교적 적은 돈으로 아파트를 마련하다 보니 교통이 불편한 서울을 벗어나 김포에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남편은

불평 없이 출퇴근을 하였다. 빗발이 뿌리거나 밤늦은 시간이 아니면 공기가 맑고 호젓해서 오히려 별장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미경은 책을 덮고 나이트 가운 위에 레인코트를 찾아 걸쳤다. 아무래도 남편을 마중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남편을 기다리고 마중 나가는 것도 집에 있는 아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미경이 우산까지 챙겨 들고 아파트를 나서자 사나운 바람이 미경을 향해 세차게 몰아쳐 왔다. 미경은 어깨를 잔뜩 웅크렸다. 바람을 안고 걷게 되어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경은 몸을 잔뜩 숙이고 걸음을 떼어놓았다. 벌판을 달려오는 사나운 바람에는 차가운 빗발까지 한두 방울씩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우산을 쓰지 않고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재게 놀렸다. 세찬 바람 때문에 우산을 펴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코트의 깃을 바짝 여미고 걸음을 서둘렀다.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어서인지 버스정류장에도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이따금 버스가 한 대씩 와서 드문드문 승객들을 내려놓으면 승객들은 어둠 속으로 황황히 사라져 버렸다. 거리는 점점 인적이 끊어져 가고 있었다.

(외박을 하려는 것일까?)

미경은 팔목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느덧 1140분이 지나 있었다. 남편이 타고 오는 버스는 1040분이 막차였다. 저녁 늦은 시간에는 차가 막히는 일도 없어 언제나 1140분을 2, 3분 전후하여 정류장에 도착하곤 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남편은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다.

(아까 그 버스가 막차인가?)

미경은 불길한 예감이 뒤통수로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아스팔트 길에 시선을 못박았다.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는 아스팔트 길에는 어느덧 차량마저 끊어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버스정류장에서 1220분까지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나 남편은 그때까지도 귀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외박을 하는 거야!)

미경은 남편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술에 취해 다른 여자를 껴안는 모습이 자꾸 연상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미경은두 다리에 맥이 탁 풀리면서 눈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미경은 입술을 깨물며 걸음을 돌렸다. 이제는 버스조차 오지 않아 남편을 더 이상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망한 일이었다. 미경은 바람에 등을 떠밀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내 뚝길이 나타났다. 뚝길 양쪽으로는 벌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나지 않았을 때만 해도 뚝길 양쪽으로는 황금 들판이 눈이 시리게 펼쳐져 있어서 보기만 해도 가슴이 뿌듯하곤 했었다. 남편도 그녀도 낟알이 탐스럽게 영글어 누렇게 고개 숙인 가을 들판이 마음에 들어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에다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밤에는 다니기가 무서울 정도로 한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급적이면 밤 외출을 하지 않았다. 뚝길 밑으로는 하천이었다. 농수로로 쓰는 하천을 따라 뚝길이 길게 아파트단지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녀와 남편은 그 길을 이용해 버스정류장을 오고 갔다.

(빗발이 굵어지네!)

미경은 얼굴을 들고 캄캄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등을 떠밀어대는 세찬 바람에 굵은 빗발이 섞여 있었다. 벌판을 달려오는 바람은 악마가 만또자락을 펄럭이며 돌아다니는 것처럼 귀기스러웠다. 그때 세찬 바람소리에 섞여 끙, 하는 신음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뚝길 밑에서였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하여 걸음을 멈추고 뚝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뚝길 밑에는 캄캄한 어둠이 늪처럼 괴어 있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천은 장마가 지거나 농사철이 아니면 언제나 물이 말라 있었다. 농사철이 되어야 한강에서 물을 내려보내는 까닭에 바닥이 드러나 있었고 잡초가 허리까지 올라올 정도로 웃자라 있었다. 가을이 되면서 잡초가 누렇게 마른 뒤에는 새떼와 들쥐 떼가 그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들쥐일거야.... )

미경은 가슴이 방망이질을 치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다시 몹시 괴로워하는 듯한 신음소리가 끙, 하고 들렸다. 그녀는 머리끝이 곧추 서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뒤돌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이런 밤에 하천 바닥에 사람이 쓰러져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세상이 떠나갈 듯한 비바람 소리로 인해 잘못 들었거나 짐승이 놀라서 풀숲을 돌아다니는 소리일 터였다. 미경은 뛰듯이 걸음을 빨리했다. 빗발이 점점 굵어지면서 뚝길이 질퍽거리고 있었다. 빗발은 레인코트를 입었는데도 미경의 얼굴과 머리로 사정없이 들이치고 있었다. 미경은 마구 달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비가 오기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는지도 몰라. )

미경은 아파트에 도착하자 남편이 귀가하지 않는 이유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 졌다. 그녀는 레인코트를 벗어 벽에 걸고 거울을 보며 머리와 얼굴의 빗물을 훔쳤다. 남편과 떨어져 잠을 자야 한다고 생각하자 집안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미경은 샤워를 한 뒤 침실에 들어가 누웠다. 그러나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미경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온갖 생각을 했다. 결혼한 뒤의 첫 번째 외박이었다. 물론 신문사에서 당직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신문사에서 당직을 한다면 연락이라도 했을 터였다. 남편이 이 늦은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남자들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외박을 하게 되면 어디서 잠을 자게 되는 것일까. 남편은 혹시 술집 여자와 함께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경은 남편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남편의 외박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초조하고 불안한지 알 수 없었다.

(배신하면 죽일 거야!)

미경은 바람에 덜컹대는 유리창 밖의 어둠을 향해 무섭게 눈을 부릅떴다. 남편이 호텔의 침대에서 다른 여자를 껴안고 뒹군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봉고차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저녁때가 가까워서였다. 여자들이 고속도로의 휴게소에 도착할 때마다 내려서 커피를 마시느라고 법석을 떨어댔고 이천에 이르자 온천에 들려 목욕도 하고 점심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미경도 휴게소에서 내려서 커피를 마셨다. 거의 1년 반 만에 마시는 커피였으나 미경은 커피에 대한 감동보다도 자신에게 일어난 악몽 같은 일을 되돌아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모든 것은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하던 날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발적인 사고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너무나 많았다.

 

2

마산댁이 술집을 경영하고 있는 곳은 미아리 텍사스촌이었다. 엄격히 따지면 길음동에 있었으나 사람들은 기억하기 쉽게 미아리 텍사스라고 부르고 있었다. 미경은 마산댁의 안채에서 출감 첫날밤을 지냈다. 그러나 일찍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마산댁은 과부였고 남자 동생과 함께 술집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은 마산댁의 남자 동생이 마산댁을 환영한다고 장사까지 그만두고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는 바람에 그곳의 여자들과 함께 술을 마셨던 것이다. 미경은 이튿날 정오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언제 일어났는지 마산댁이 해장국을 끓여 가지고 미경을 깨웠던 것이다. 미경은 마산댁과 함께 해장국을 먹고 목욕을 갔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요를 깔고 누웠다. 미경은 마산댁의 술집에서 며칠동안 계속해서 먹고 자기만 했다. 먹으면 잠을 잤고 잠에서 깨어나면 먹기만 했다. 잠은 죽음처럼 깊고 어두웠다.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은 310일이었다. 교도소에서 출감한 지 열흘이 더 되는 날이었다.

"나도 홀에 나갈까?"

미경은 마산댁에게 넌지시 물었다.

마산댁이 담배를 피우다가 말고 멀뚱히 미경을 쳐다보았다.

"나한테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 너 하나는 충분히 먹여줄 수 있으니까 필요한 만치 쉬어."

"놀면 뭘 해?"

미경은 마산댁의 흉내를 내어 입언저리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정말 일 할래?"

"."

"이런 일 안 하겠다고 했잖아?"

"놀자니 답답해서 그래."

"집에나 가보지 그래? 가족들이 보고 싶지도 않아?"

"이런 꼴이 되어서 가족을 만나면 뭘 해? 그냥 이렇게 살다가 말겠어. 이 직업이 나쁜 것도 아니구.... 일부러 바람 피우는 여자도 있다는데 실컷 즐길 수도 있구....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어?"

"하긴 즐길려고 든다면 괜찮은 직업이지....."

마산댁이 입을 벌리고 사내들처럼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미경은 입가로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었다. 미경은 그날부터 홀에 나가서 손님을 맞기 시작했다.

 

사내는 옆구리를 잔뜩 움켜쥐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어서 어디가 어디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필사적으로 엉금엉금 기었다. 이렇게 쓰러져 있으면

죽게 되는 거야, 어떻게 하던지 사람들 눈에만 띠게 되면 살 수 있어.... 그는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수습하며 속으로 절규하듯이 외쳤다. 죽음은 허무한 것이다. 무엇보다 꽃 같은 아내를 두고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결혼식을 올린 지 이제 불과 보름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점점 의식이 꺼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이 이렇게 허무하게 오다니.... 그는 자신에게 닥친 일이 믿을 수가 없었다. 사내는 몸을 바로 눕혔다. 벌써 몇 번째 의식을 잃었다가 되찾고 의식을 잃었다가 되찾고는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의식을 잃으면 두 번 다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위로 밀어 올렸다. 눈꺼풀이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거웠다.

(나는 죽으면 안돼!)

사내는 입속으로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이상하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상처라면 소리를 지르며 미쳐 날뛸 정도로 통증이 와야 했으나 기이할 정도로 통증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문득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꿈이 아니라면 이렇게 큰 상처를 당했는데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사내는 오늘따라 늦게 퇴근을 했다. 낮부터 바람이 음산하게 불어 퇴근을 일찍하려고 했었으나 퇴근이 늦어진 것은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는 여류작가 정주연이 뒤늦게 연재원고를 가지고 나타났기 때문에 그녀를 접대하느라고 시간이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미 베스트셀러 작가로 화려한 명성을 날리고 있었으나 소설의 내용보다 대학교수라는 이미지로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파격적인 고료를 지급하며 모셔온 작가이기 때문에 대접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정주연은 여류작가로는 드물게 술까지 잘 마셨다. 문화부장과 차장, 출판 담당 기자와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간단하게 반주로 시작한 술이 23차로 이어져 그는 9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술자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의기양양하군..... )

그는 퇴근하는 버스에 오르자 정주연의 얼굴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겠다고 하자 정주연이 조소하는 듯한 얼굴로 요즈음 젊은 아이들은 버릇이 없어서.... 하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그것은 노골적으로 그에게 들으라는 말이었다. 그는 얼굴이 벌개졌으나 신문사 문화부장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못들은 체하고 자리를 빠져 나왔던 것이다.

(쌍년!)

그러나 밖으로 나오자 그는 침부터 칵 뱉았다. 정주연에 대한 불쾌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거리엔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었다. 휴짓조각이 세찬 바람에 날아다니고 여자들이 짧은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그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빨리 했다. 버스가 그의 집 근처에 도착한 것은 10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으므로 그는 걸음을 빨리했다. 집에는 그의 아내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김 기자!"

그가 뚝길로 향하는 모퉁이를 돌려고 했을 때 낮고 강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뒤에는 캄캄했고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그는 바람소리 때문에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려니 생각하고 몸을 돌려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공연히 뒤통수가 서늘해져 왔다.

"김 기자!"

그때 또다시 그를 부르는 낮고 음침한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누구요?"

그는 가슴이 철렁하여 어둠 속을 향해 소리쳤다.

"나요."

상대방은 어둠 속에 있었다. 그는 우두커니 상대방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기를 기다렸다. 아직 상대방이 누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 기자라고 자신을 분명하게 부른 이상 낯선 인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퇴근이 늦었수다."

상대방이 어둠 속에서 가까이 오기 시작했다. 어둠 때문에 자세히 볼 수 없었으나 상대방은 바지에 잠바차림이었다.

"누구요?"

"나요. 벌써 나를 잊었소?"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해야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상대방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상대방을 기다리는 시간이 초조하여 담배를 빼어 물고 성냥을 꺼내 불을 켜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찬 바람 때문에 성냥불이 제대로 켜지지 않았다. 그는 몸을 잔뜩 숙이고 몇 번이나 성냥을 그어댔다.

"이걸로 붙이시오."

상대방이 1회용 라이터를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그는 무심결에 라이터를 받아들고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머리를 숙이고 라이터를 켰다.

"!"

그때 목덜미가 쇠망치에 얻어맞은 듯이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는 숨이 컥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도 알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한 방에 끝냈군...."

누군가 낮게 웃으며 말질을 했다.

"빨리 해치워!"

"."

낮은 대답소리와 함께 후닥닥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누군가 목덜미를 쇠망치 같은 것으로 강하게 내려쳤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렇게 맥없이 꼬꾸라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때 부릉부릉 하고 시동을 거는 찻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밝은 헤트라이트 불빛이 이쪽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직도 숨이 막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하듯이 느리게 호흡을 해야 꽉 막힌 호흡이 뚫리는 것이다. 찻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전속력으로 이쪽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는 헤트라이트 불빛이 보였다.

(!)

그는 눈앞이 아득해 왔다. 자동차가 달려오면 꼼짝없이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는 헤트라이트 불빛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고 해보았으나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헤트라이트의 불빛이 그의 동공 속에서 확대된 순간 벼락을 치듯 쾅 하는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 위로 육중한 탱크 같은 것이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사내가 의식을 회복한 것은 한참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지옥에서 들려오는 아수라의 울부짖음 같은 음산한 바람소리가 그의 의식을 깨웠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의식을 회복하고 눈을 뜨자 칠흑의 어둠만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여기가 어디일까?)

사내는 자신이 쓰러져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차츰차츰 의식이 명료해지자 자신이 차에 치었고, 쓰러져 있는 곳이 하천 바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의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해 교통사고로 위장 당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참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할만큼 원한을 산 일도 없었다. 그는 가쁜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차가 어디를 어떻게 치었는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옆구리에서는 무엇인가 쉴 새 없이 끈적거리는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으나 그의 주위에서는 피비린내까지 풍기고 있었다.

(뚝길을 지나가는 여자한테 소리를 질러야 했어..... )

그는 비감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누군가 종종걸음을 치면서 뚝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뚝길의 여자에게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이었지 입조차 벙긋할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통은 없었으나 전혀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그는 허공을 향하여 몇 번이나 헛되이 손을 흔들었을 뿐이었다.

(나는 죽어 가고 있는 거야.)

그는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을 감았다기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감당할 수가 없어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러자 얼굴 위로 차가운 빗발이 느껴졌다.

 

손바닥만한 창으로 나른한 봄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미경은 팬티와 브래지어 차림으로 엎드려서 주간지를 뒤적거렸다. 아직 영업이 이른 시간이었다. 어느 방에서 화투를 치는지 여자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미경이 텍사스촌의 꽃순이가 된 지 어느덧 2개월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동안 미경의 신변엔 많은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머리는 짧게 숏커트를 친 뒤에 파머를 했고 화장은 언제나 횟가루를 바른 듯이 짙게 했다. 텍사스촌의 꽃순이로의 변신이었다. 죽은 남편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의던 타의던 그녀는 부산 완월동에서 뭇사내들의 노리개 노릇을 했던 것이다.

(내가 밤거리의 꽃순이가 되다니.... )

물론 아직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는 생각은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밤에 손님을 맞는 것도 다른 여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텍사스촌에 오는 손님들이 모두 그렇듯이 미경은 그들의 요구에 따라 유두주를 만들기도 했고 계곡주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나체로 술 시중을 들고 나체로 춤을 추었다. 그리고는 즉석 불고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느 정도 주석이 무르익어 파장이 되어 가면 파트너를 데리고 구석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것이 하루에 두 팀씩 걸릴 때도 있었다. 밤에는 늘 술에 젖어 살았고 열두 시까지 죽음처럼 깊은 잠을 잤다. 그러나 미경은 때때로 어둠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았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직까지 자신을 미행하고 있었다.

 

3

미경은 두 달 만에 술집을 옮겼다.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미경이 두 번째로 옮긴 곳은 건국대 후문 쪽에 있는 텍사스촌이었다. 미경은 그곳에서도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감시의 눈길이 훨씬 느슨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밤은 몹시 길었다. 미경은 밤을 거의 꼬박 밝히고는 새벽녘에야 잠깐 잠이 들었다. 밤새도록 허공을 달려와 유리창을 흔들어대는 비바람소리에 머리맡이 어수선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미경은 몇 번이나 잠이 들었다가 깨고 잠이 들었다가 깨고는 했다. 꿈자리도 뒤숭숭한 밤이었다. 미경은 남편이 술집 여자와 벌거벗고 뒹구는 꿈을 꾸었다. 미경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꿈도 꾸었다. 그러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던 것이다. 미경은 잠결에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재빨리 침대 머리맡의 수화기를 들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외박을 한 남편이 아침에라도 전화를 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화를 건 사람은 남편이 아니었다.

"김석호 선배 댁이죠?"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

미경은 잠에서 덜깬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는 회사입니다."

회사는 남편이 다니는 신문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김 선배 안 들어 오셨죠?"

"."

"죄송합니다만 부인되십니까?"

"."

미경은 불길한 예감이 뒤통수로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침대 맞은편에 있는 화장대의 거울에 젊은 여자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저는 이 기자입니다. 일전에 결혼 피로연에서 뵈었습니다만...."

"안녕하세요?"

미경은 그때서야 알은 체를 했다.

"실은 방금 전에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김 선배께서 댁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

"교통사고요. 교통사고가 난 자리가 김 선배 아파트 앞이라니까 서둘러 나가 보십시요. 저희도 곧 가겠습니다."

"그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많이 다쳤나요?"

미경은 온몸을 떨며 자신도 모르게 뾰족한 비명소리를 질렀다.

"저희도 지금 연락을 받아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김 선배가 신분증을 기자 패스만 가지고 있어서 회사로 연락을 했다고 하더군요."

"알겠습니다."

미경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정신이 얼떨떨했으나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틀림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미경은 정신없이 침실을 왔다갔다 했다.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미경은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김석호씨 댁입니까?"

전화의 목소리는 이번에도 남자의 것이었다.

"."

"경찰입니다. 실례지만 김석호씨와 어떻게 되시죠?"

"김석호씨의 부인예요."

미경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김석호씨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아파트단지로 들어가는 진입로 중간쯤입니다."

", 그이가 많이 다쳤나요?"

미경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죄송합니다. 돌아가셨습니다."

"...."

미경은 갑자기 가슴이 컥 하고 막히는 것 같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이가 죽다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이건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었거나 꿈일 거야.... 수화기를 든 채 미경은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필이면 왜 내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는가. 결혼식을 올린 지 이제 불과 보름밖에 되지 않았는데.... 미경은 소리를 내어 울었다. 자신이 들은 말이 모두 거짓인 것 같았다. 그러다가 미경은 남편의 죽음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뜻 뇌리를 스쳤다.

(그래. 어쩌면 착오일 수도 있어!)

미경은 허겁지겁 옷을 입고 아파트를 뛰어나갔다. 날씨는 뜻밖에 쾌청했다. 지난밤에 그토록 세차게 불던 바람도 자고 비까지 그쳐 투명한 아침 햇살이 아파트단지에 부채살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바람이 할퀴고 간 자국은 여기저기 어지럽게 남아있었다. 뚝길에는 군데군데 웅덩이가 패어 있고 부러진 나무가지들이 뒹굴고 있었다.

(하느님. 저를 도와주세요. )

미경은 뚝길을 달리며 간절히 기도를 했다. 아파트단지로 들어오는 뚝길 중간에는 벌써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 웅성거리고 있었다. 미경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은 가마니에 덮여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입고 있는 옷은 그녀에게 낯익은 쥐색 양복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검은 안경을 쓴 경찰이 미경에게 무뚝뚝한 얼굴로 물었다. 미경은 길바닥 곳곳에 뿌려져 있는 핏자국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전화를 받고 왔어요."

미경은 숨이 차서 간신히 대답했다.

"그럼 김석호씨 부인되십니까?"

"."

"우선 좀 진정하시죠. 숨을 크게 들이쉬세요."

경찰이 안경을 벗고 말했다. 미경은 경찰이 시키는 대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럼 확인하시죠."

경찰이 가마니를 들추었다.

"!"

미경은 다시 가슴이 컥 하고 막혀 왔다. 가마니 속에 있는 사람은 분명히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했다.

""천천히 숨을 쉬세요."

경찰이 말했다. 미경은 경찰이 시키는 대로 천천히 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도 침착해야 한다고 속으로 무수히 타일렀다. 그러자 조금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남편의 흰 와이셔스가 온통 피에 젖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은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옆구리가 터져 찢어진 와이셔츠 사이로 무엇인가 하얀 것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것은 내장이었다.

"남편이 맞습니까?"

경찰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미경을 살폈다.

"...."

미경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경찰이 미경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미경은 숨을 쉴 수가 없어 가슴을 주먹으로 다시 두드렸다.

"사고를 당한 분이 남편이세요?"

경찰이 다시 물었다.

"."

미경은 간신히 대답했다. 그리고는 발밑이 천길 벼랑으로 꺼지는 듯한 아득한 추락감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구의동 텍사스촌은 매우 특이한 지역이었다. 미아리 텍사스촌이 직장인들이나 중년 남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면 구의동은 젊은 세대가 즐겨 찾았다. 미경은 그곳에서 세 달을 지냈다. 그것은 마치 마네킹처럼 생명이 없는 삶이었다.

 

4

미경이 세 번째로 옮긴 곳은 천호동이었다. 천호동은 한때 미아리를 능가할 정도로 세간에 알려졌으나 점점 그 명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미경은 그곳에서 세 달을 지낸 뒤 자취를 감추었다.

 

악몽 같은 나날이었다. 미경은 남편이 죽은 뒤의 며칠을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 보냈다. 남편의 장례와 교통사고에 대한 뒷처리는 친척이며 가족들이 몰려와 모두 치루었으나 그녀의 슬픔은 가슴을 저며 내듯 처절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울 수 있는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 일주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혼자 남겨져 오열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남편의 사고 경위를 차분하게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남편은 그날 신문사에서 작가 정주연을 만나 문화부의 부장, 차장 그리고 출판 담당 기자와 함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신 뒤 9시쯤에 먼저 일어났다고 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어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남편은 10시쯤 아파트 진입로가 가까운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그는 거기서 곧바로 뚝길 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거기서부터는 막연히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부터는 목격자도 증인도 없었다. 그러나 남편이 뚝길로 향하는 진입로로 들어서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분명했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한 자리에 핏자국이 낭자했기 때문에 경찰은 그곳이 교통사고 지점이라고 단정했다. 게다가 그곳에서 남편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시계가 망가진 채 발견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남편에게 준 결혼 예물시계였다. 그러나 남편의 시체는 거기서 아파트 쪽으로 50보쯤 떨어진 뚝길 밑에 버려져 있었다. 경찰은 남편이 사고를 당한 후 아파트를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가다가 하천으로 굴러떨어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곳에도 핏자국이 낭자해 남편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알 수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비가 왔어도 씻겨 내려가지 않은 거야.... )

미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간밤의 비가 남편의 핏자국을 모두 씻어가 버리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한편으로는 남편이 그 많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을 때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 그 신음소리가 남편의 신음소리였어.... )

그날 밤 남편을 마중 갔다가 돌아올 때 하천에서 들리던 신음소리를 생각하자 미경은 꿈 같기만 했다. 마치 악몽을 꾼 것 같았다. 사고를 낸 운전기사가 뺑소니를 쳤기 때문에 사고의 경위도 분명하지 않았고 차종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엄청난 사실뿐이었다. 미경은 두문불출했다. 문을 완전히 걸어 잠그지는 않았으나 남편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마음도 정리해야 했고 앞으로의 일도 생각해야 했다. 미경은 자신이 결혼한 지 보름 만에 남편 없는 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과부라니. 그녀는 과부라는 말이 그토록 생경할 수가 없었다.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그녀에게 딸린 식구는 없었다. 남편은 시댁의 막내라 부모님을 모시지도 않았고 그녀는 아직 임신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재혼을 하려면 홀가분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혼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아직 남편과 결혼을 올리던 광경이 눈에 밟힐 듯이 선했다. 어디 그것뿐인가. 남편과 함께 보낸 신혼초야가 어제 일인 듯 선명했다. 그녀가 남자를 자신의 몸속으로 받아들인 것은 남편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스물다섯 해 동안 곱게 간직해 온 순결을 남편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것은 황홀한 경험이었다. 스물다섯이나 된 그녀의 육체는 이미 남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농익은 과일처럼 단내를 풍기고 있었고, 남자를 받아들이자 무르익어 터졌던 것이다. 고통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까무러치는 듯한 절정감을 느끼며 남편의 품에서 흐느껴 울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미경은 생각했다. 남편의 죽음은 그녀의 행복까지도 송두리째 빼앗아 가고 만 것이다. 미경은 그 엄연한 사실을 밤이면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미경은 아파트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녀가 외출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 대신 그녀는 하루 한 번씩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한 지점을 꼬박꼬박 찾아갔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어쩐 일인지 남편이 자신을 자꾸 부르는 것 같았다.

(이게 왜 여기 떨어져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곳에서 라이터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화인]이라는 술집 이름과 여자의 나체가 입체로 도안되어 있는 1회용 라이터였다. 남편이 사용하던 라이터가 아니었으나 그녀는 그것을 주워서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으로 어찌해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좋을지도 알 수 없었다.

 

미경이 다시 경찰의 전화를 받은 것은 2개월쯤 뒤의 일이었다.

"무슨 일이예요?"

"뺑소니차를 찾기 위해 두 달 동안이나 수사를 했지만 별 소득이 없습니다. 사고가 있던 날 워낙 바람이 많이 불어서 목격자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사건을 종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겠어요."

미경은 허탈하여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혹시 손수 뺑소니차를 찾으시려는 것은 아니죠?"

"?"

"별다른 뜻은 없구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공연히 시간과 돈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죠."

"네에."

미경은 전화를 건 경찰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 일은 너무나 많았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목격자를 찾습니다!'라는 현수막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럼 수고하십시요."

"안녕히 계세요."

미경은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기분이 이상했다. 왜 경찰은 이런 전화를 걸어준 것일까. 내가 뺑소니차를 찾던지 찾지 않던지 경찰이 무슨 상관인가.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의 가족들이 뺑소니차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닌가.... 문득 미경은 죽은 남편을 위해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고지식할 정도로 경찰의 말만 듣고 있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운전기사가 뺑소니를 쳤는데도 뺑소니차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경은 남편의 교통사고를 처리한 김포경찰서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담당자를 바꾸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편의 교통사고를 처리한 담당 경찰은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갔다는 대답이었다.

"그럼 조금 전에 우리 집에 전화를 건 분을 바꿔 주세요?"

"전화요?"

"."

"글쎄요. 누가 전화를 걸었을까.... ?"

"한번 사무실에 계신 분들께 물어봐 주세요."

"잠깐 기다리세요."

경찰이 수화기를 책상에 얹어 놓는 소리가 탁하고 들렸다. 이어서 경찰서의 왁자한 소음이 들렸다. 그러나 무슨 소리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에 교통계의 경찰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여보세요."

"."

"우리 교통계에서는 전화를 건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실례지만 어떻게 되시죠?"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의 부인예요."

"그럼 김석호 기자의 부인이십니까?"

"."

"그 사건 수사계로 넘어갔습니다."

"수사계요?"

미경은 어리둥절했다.

"뺑소니 사건이라 수사계에서 조사를 수사계로 돌려 드릴까요?"

"."

"잠시 기다리십시요."

수화기에서 다시 왁자한 소음이 들려왔다. 그리고는 두 번의 벨소리에 이어 굵은 목소리가 미경의 귓전을 울렸다.

". 수사계 서 형사입니다."

".... 김석호 기자의 부인되는 사람인데요. 그 사건 담당하고 있는 분 좀 바꿔 주세요."

"제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혹시 조금 전에 저희 집에 전화를 거셨나요?"

"전화요? 아니 걸지 않았습니다."

"그럼 제 남편 사건 수사는 어떻게 하고 계세요?"

"진전은 없지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건을 종결하지 않았나요?"

"종결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조금 전에 어떤 사람이 전화를 걸어서 경찰이라고 말하며 사건이 종결되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손수 뺑소니차를 찾으려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구 했어요."

"우린 그런 전화를 드린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신문사에서도 관심이 많은 사건이라 함부로 종결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장난 전화를 한 것 같습니다."

"그래요?"

미경은 어리둥절했다. 누가 이런 사건을 가지고 장난을 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문제는 우리 쪽에서 한번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그럼 조사를 하고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 수고하세요."

미경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미경은 침대에 걸터앉아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기분이 야릇했다. 내가 어떻게 남편의 죽음에 이토록 무관심했던 것일까. 남편을 죽이고 달아난 뺑소니 기사는 누구일까.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뺑소니 운전기사를 잡아 볼까....

미경은 온갖 생각을 했다. 그러나 뺑소니 기사를 잡기 위해 선뜻 행동에 나설 수가 없었다. 뺑소니 기사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알 수 없었지만 뺑소니 기사가 고의적으로 남편을 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뺑소니 기사도 남편을 죽게 한 것을 후회할 것이고 그에게도 가족이 있을 것이었다. 뺑소니 기사가 잡히면 그 가족들도 슬픔에 잠길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남편이 어떻게 죽었는 지는 알아야 해!)

미경은 다부지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튿날부터 미경은 뺑소니차 운전기사를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음모에 휘말리는 계기가 되었다.

 

미경이 천호동을 떠난 것은 11월이었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 지고 있었다. 미경이 떠난 지 두 달쯤 되어 검은 안경을 쓰고 잠바를 입은 두 사내가 천호동 텍사스촌 일대를 기웃거리며 미경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짭새야."

"그 새침한 계집애가 무슨 일을 저지른 모양이지?"

"남편을 죽인 여자래."

"남편을 죽여?"

"짭새들이 그러는데 정부와 짜고 남편한테 청산가리를 먹여 죽였대."

"독한 년이네."

검은 잠바를 입은 사내들은 미경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까닭을 미경이 남편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자들은 혀를 차며 수군거렸으나 미경의 행방을 알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말이야?"

"흑산도로 가겠다고 그랬어요."

"나한테는 부산으로 간다고 그랬는데....."

"왜 여기를 떠난다고 그러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서울에 아는 사람이 많아 이런 짓 하기가 껄끄럽다고 그랬어요. 아는 사람이 왔다고 당황해하는 것도 몇 번 봤어요."

여자들의 대답은 약속이나 한 듯이 신통치 않았다.

"계집이 우리가 감시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것이 아닐까?"

"눈치챘으면 경찰에게 달려갔겠지...."

"그럼 여기서 계집에 대한 일은 매듭을 지을까?"

"그게 좋겠어. 일은 바쁜데 몸뚱이 파는 계집을 감시하고 있을 새가 어디 있어? 차라리 제거해 버리면 모를까...."

"이젠 무작정 제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야. 요지 음에는 의문사에 대한 사회적 높아져 처신을 잘해야 돼."

사내들은 천호동의 텍사스 골목을 빠져 나오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3장 내 안의 푸른 영혼

 

1

청량한 가을 아침이었다. 하늘이 높고 맑았다. 미경은 2층의 창으로 뜨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뜨락에 붉은 사루비아가 농염하게 피어 요염한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어느덧 가을이 깊어 가고 있었다. 바람이 일 때마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진저리를 치며 떨어지고,떨어진 잎사귀들이 비명을 지르며 담벽 밑으로 쓸려다녔다. 아침마다 나뭇잎을 쓸어서 불에 태워도 자고 일어나면 나뭇잎이 수북이 떨어져 쌓이곤 했다. 미경은 바람에 뒹구는 나뭇잎을 보면서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나뭇잎이 저렇게 떨어지고 차가운 빗발이 뿌리면 춥디 추운 겨울이 닥칠 거였다. 미경은 겨울이 오는 것이 싫었다. 겨울은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에게는 잔인한 계절이었다. 얼어붙은 하늘, 유리창에 낀 성에, 연탄재가 잔뜩 쌓인 더러운 골목, 빈민굴의 헐벗은 아이들.... 겨울이면 유리알처럼 매끄러운 하늘조차 쩡쩡 소리를 내며 갈라지곤 했다. 해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가에 시름없이 서서 마당을 내다보고 있으면 어느덧 점심때고 점심때가 지나면 금세 짧은 가을 해가 설핏이 기울었다. 밤에는 달빛이 부옇게 흐르는 하늘에 철새가 떼를 지어 날고 밑에서 풀벌레가 울었다.

미경은 그해 가을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을 이룰려고 하면 악몽을 꾸었고 악몽 때문에 식은땀을 흥건히 흘리며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나면 간장을 끊을 듯이 애절한 풀벌레 울음소리가 베갯머리를 적시게 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미경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의 삶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이토록 기구한 삶이 있는 것일까, 무엇으로 인해 불과 몇 년 사이에 한 평범한 젊은 여자가 지옥으로 전락하게 된 것일까,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 과거를 추적하려는 시도는 무망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때때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둡고 축축한 바람이 불어온다. 저 깊고 어두운 땅속에는 우리의 운명을 조종하고 희롱하는 어두운 존재가 도사리고 있다. 까뮈가 이방인에서 갈파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한낱 부질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스름하게 해가 기울 때 하루살이가 아무리 지는 해를 붙잡으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듯이 우리의 몸부림도 공연한 짓거리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어!)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미경은 반발을 하듯이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눈을 부릅떴다.

(나는 변할 거야. 나는 이제 옛날의 안미경이 아니야!)

미경은 밤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몸부림을 쳤다. 미경이 소위 텍사스촌이라는 사창가에서 빠져나온 것은 교도소에서 출감한 지 거의 9개월이 되었을 때였다. 미경은 교도소에서 출감했을 때부터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따돌리기 위해서 마산댁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내들은 미아리까지 들락거리며 미경을 감시하고 있었다. 미경은 감시의 눈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 자청하여 홀에 나갔다. 어차피 망가진 몸이었다.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었고 텍사스촌에서 몸을 판다고 해도 양심에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으나 그들은 강원도 속초에 살고 있었다. 미경이 텍사스촌에서 무슨 짓을 해도 그들은 알 길이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미경이 구의동 텍사스촌으로 옮겼을 때 감시의 눈길이 한결 느슨해졌다. 미경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미경은 감시자들이 조만간 미경을 감시 대상자에서 제외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감시자들은 미경을 타락한 창녀로 여기고 있었다. 한번 그런 시궁창에 빠지면 다시는 헤쳐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경은 빠져나왔다. 감시자들에게는 그 세계의 여자들처럼 술집을 전전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준 채. 그 까닭으로 미경은 1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세 번이나 술집을 옮긴 것이었다. 미경은 천호동을 나오자 택시를 타고 청량리역으로 가서 무작정 중앙선 열차를 탔다. 그리고 열차가 제천에 도착하자 승객들을 따라 내렸다. 제천은 처음 와 보는 곳이었으나 미경은 복덕방에 부탁해 허름한 집 한 채를 얻어 세를 들었다. 제천 시내에서도 버스로 20분이나 떨어진 거리에 있는 변두리여서 월세는 얼마 되지 않았다. 집주인은 서울 사람이어서 집을 지켜 주는 것도 감지덕지하고 있었다. 미경은 감시자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시자들이 어떤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여자 혼자서 싸우려면 그들에게 방심하도록 만들도록 해야 했다.

 

창밖에는 눈발이 자욱하게 날리고 있었다. 미경은 함박눈이 쏟아지는 거리를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12월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있었으나 날씨가 계속해서 포근하더니 마침내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미경이 다방에서 20분 남짓하게 앉아 있었을 때야 서 형사가 나타났다.

"아녜요."

미경은 재빨리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연말연시라 비상이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서 형사가 피곤한 기색으로 미경의 앞에 앉았다. 미경은 약간 긴장이 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동안 서 형사를 몇 번 만났으나 선입관 때문인지 매번 긴장이 되곤 했다. 그러나 애써 서 형사와 약속을 한 것이므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되었어요?"

"발신자 조사를 했습니다만 공중전화를 사용해서 추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경은 얼굴을 찌푸렸다. 경찰인 서 형사가 수사를 했는데도 진척이 없어 저으기 실망이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죠?"

"협박을 받지 않으려면 전화를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전화를요?"

미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이사를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서 형사가 오히려 반문을 했다. 미경은 서 형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서 형사는 키가 크고 몸이 마른 편이었다. 그러나 눈빛이 면도칼처럼 날카로웠다.

"이사를 갈 수는 없어요."

미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계속 범인의 협박에 시달리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경찰은 개인의 신변 경호를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사를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알았어요."

그러나 미경은 이사를 하지 않았다. 미경이 이사를 해버리면 이상한 전화는 받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남편의 교통사고에 대한 실마리가 끊어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미경에게 경찰을 사칭한 이상한 사내들에게서 협박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 것은 미경이 남편의 교통사고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처음엔 경찰이라면서 새삼스럽게 뺑소니 기사를 잡아서 무얼 하느냐고 회유하더니 미경이 응하지 않자 노골적으로 욕설을 뱉고 협박을 해왔다. 미경은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머리끝이 곧추 서는 것 같았으나 남편의 교통사고에 대한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실 회사에서도 의혹을 가지고 있던 참이고 뺑소니에 대한 사회적인 경각심도 높일 겸 신문에서 한번 때리겠습니다. 그럼 협박자로부터 어떤 반응이 있을 것입니다."

미경이 남편이 다니던 신문사를 찾아간 것은 이듬해 늦은 봄의 일이었다. 남편이 다니던 신문사의 문화부 차장은 미경의 얘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더니 사회부 기자를 소개해 주었다. 사회부 기자는 사려 깊은 눈매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름이 오승만이었다. 그는 미경을 신문사 지하 커피숍에서 만나 주었다.

"그 뒤엔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한다기보다 우선 목격자가 나타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목격자만 나타나면 협박자의 신원을 밝힐 수가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방송국에 친구가 있습니다. 우리 신문에서 먼저 때린 후 방송에서도 요청하겠습니다. 방송의 효과는 상상외로 높습니다. 다만 부인께서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요?"

"먼저 뺑소니차를 찾기 위해 부인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요?"

"교통사고가 난 곳에 다른 사람들처럼 목격자를 찾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붙이고 전화기에 녹음 시설을 설치하십시요."

"녹음 시설이요?"

"협박 전화가 걸려오면 자동으로 녹음이 되게 하십시요. 중요한 증거가 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미경은 사회부 기자와 헤어져 김포로 돌아오자 즉각 간판 만드는 집에 부탁하여 '목격자를 찾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한 지점에 붙였다. 밑에는 전화번호와 사례금 5백만원이라고 써넣었다. 전화기에는 심부름 센타에 부탁하여 녹음장치를 설치했다. 그러나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뺑소니에 대한 특집기사가 실린 것은 보름쯤 지났을 때였다. 사회부는 5회 특집으로 뺑소니 기사를 내보내면서 미경의 남편 사건도 큼직하게 다루었다. 그러자 금방 협박전화가 왔다.

". 이년아!"

상대방은 다짜고짜 전화기에 대고 욕설부터 내뱉았다.

"누구세요?"

상대방이 다짜고짜 욕설부터 뱉았으므로 미경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신문에 내면 죽은 니 남편이 살아서 돌아올 줄 알아?"

"뺑소니 기사인가요? 댁한테는 아무 감정이 없어요. 다만 저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을 뿐예요."

"닥쳐!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지 않으면 잠자코 있어!"

협박 전화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왔다. 미경은 진저리를 치다가 경찰에 신고하고 신문사에 알렸다. 그러나 경찰은 녹음테이프까지 갖고 갔으면서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 신문사에서도 마땅한 대책이 없다고 말했다. 미경은 실망했다.

(이젠 나 혼자 나설 수밖에 없어!)

미경은 그 후 혼자서 남편을 죽인 뺑소니차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막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기껏해야 신문사 동료 기자들의 협조를 얻어 남편의 최근 행적을 조사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행적은 특별히 수상한 구석이 없었다. 남편은 시곗바늘처럼 신문사와 아파트를 오갔고 신문사에서 하던 일도 '사라진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실종자들 얘기를 시리즈로 다루고 있었을 뿐이었다. 미경이 뱀눈의 사내와 짧은 머리의 사내에게 납치를 당한 것은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들이 단순한 납치범이나 인신매매단이 아니라는 것은 미경의 아파트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었다.

 

밤이 왔다. 깊고 푸른 밤이었다. 미경은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얹어 놓았다. 어찌된 일인지 동생 미숙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미경은 창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미숙을 기다리는 일이 지루하고 조바심이 났다. 바람이 이따금 뒷곁의 나뭇잎을 쓸고 다닐 뿐 밤이 깊어질수록 사위가 깊은 적막 속에 가라앉고 있었다. 하늘은 부옇게 흐르는 달빛의 광망 때문에 점점 신비스럽게 투명해져 가고 있었다. 미숙이 온 것은 자정이 가까웠을 때였다.

"언니!"

미숙은 미경을 보자 눈물부터 글썽거렸다.

"미숙아!"

미경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두 자매는 대문 앞에서 부둥켜안고 한동안 소리 죽여 울었다.

"언니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나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묻지 마. 그동안 나는 지옥에 다녀왔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은 모두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무슨 일인데?"

"그냥 그렇게 알아."

"대체 무슨 일을 겪었어?"

"난 술집에서 몸을 팔기도 했고 교도소에도 다녀왔어."

"설마!"

미숙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나 내 몸을 봐."

미경은 동생 미숙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옷을 모두 벗었다. 그리고 미숙에게 자세히 보라고 허벅지를 벌렸다.

"언니. 그 상처는.... ?"

미숙이 입을 벌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경의 오른쪽 허벅지에 검푸른 흉터가 세 개나 보기 흉하게 찍혀 있었다.

"담뱃불로 지진 흉터야!"

미경의 눈에서 파란 살기가 뿜어졌다.

"언니.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어?"

미숙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 졌다.

"나도 모르는 놈들이야. 그러나 이 흉터를 남긴 놈이 문제가 아니야. 나는 형부를 죽인 놈과 나를 이렇게 만들라고 지시한 놈을 찾으려는 거야."

"언니 경찰에 신고해!"

"안돼. 이 일은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할 거야. 누군가 배후에 있어. 그 배후를 추적하고 밝힐 거야. 니가 조금만 도와줘."

"내가 어떻게 도와?"

"집에서는 내가 어떻게 된 줄 알아?"

"아빠가 실종자 신고를 냈어. 언니가 갑자기 실종된 이후 아빠가 얼마나 언니를 찾아 헤맸는지 언니는 모를 거야. 1년 동안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포기하고 마셨지만...."

"내가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일 거야."

미숙이 손등으로 눈물을 씻었다.

"내가 어떻게 언니를 도와야 해?"

"간단해. 주민등록만 빌려줘."

"주민등록?"

"내가 니 행세를 할 거야. 그리고 돈이 좀 필요한데 아파트는 어떻게 했니?"

"아파트는 팔아서 내가 오피스텔을 하나 얻었어. 언니 나 결혼했어. 신랑과 그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어."

"잘했구나."

미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숙이 아파트를 팔아서 오피스텔을 얻은 것은 서운했으나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금방 오피스텔 빼서 언니에게 돌려 줄께."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그들이 눈치를 챌 거야."

"그럼 어떻게 해?"

"통장이 있었는데 그건 어떻게 했니? 형부 퇴직금이 약간 있었어."

"투자신탁에 맡겼어. 언니의 패물도 모두 내가 갖고 있어"

"그럼 그거라도 나에게 갖다 줘."

"."

미경은 미숙을 새벽에 떠나보냈다. 미숙이 미경의 남편이 남긴 퇴직금을 그대로 금융기관에 예치해 놓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2

미숙이 미경을 다시 찾아온 것은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미경은 미숙이 오는 것을 언덕에 숨어서 살폈다. 행여나 미행자가 있나 우려해서였다. 그러나 미숙을 미행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미경은 미숙이 집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 시간 동안이나 주위를 살핀 뒤에야 집으로 들어갔다.

"통장을 모두 가져 왔어."

미숙은 미경의 이름으로 되어있는 꺼내 놓았다. 통장엔 모두 천칠백만 원이 들어있었다.

"집에 누구 찾아온 사람 없든?"

"형사가 한번 왔었어."

"형사?"

". 언니에게서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느냐고 묻고 갔어."

미숙의 말에 미경은 눈쌀을 잔뜩 찌푸렸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신분증을 봤어?"

"아니. 형사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그래?"

"형사라는 사람이 뭐라고 그래?"

"언니 소식을 물었어."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모른다고 그랬어."

"눈치채지 않았을까?"

"눈치채지는 못했을 거야."

미숙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미경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올 때 누가 따라오는 것 같지는 않든?"

"나도 형사라는 사람이 찾아와 걱정이 되었어. 그래서 그 사람이 가자마자 언니에게 온 거야."

"할 수 없지 뭐."

미경은 미숙을 돌려보낸 뒤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사내들이 미숙을 미행했다면 지금까지 미경이 해온 일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눈치를 채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미경은 이튿날 제천의 한 직업소개소를 찾아갔다. 그리고 다방에 레지로 취직을 했다. 다방에서는 언제나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었기 때문에 취업이 쉬웠다. 미경은 제천의 그 다방에서 두 달을 보냈다. 다방에서 차를 배달하면서도 미행자가 있는지 조심스럽게 살폈으나 미행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미경은 두 달 후에 충주로 다방을 옮겼다. 그러나 다방을 옮기기 전에 천호동으로 전화를 걸어 그곳 아가씨들에게 제천에 놀러 오라고 말했다. 감시자들에게 미경이 아직도 유흥가를 전전하고 있다고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것은 미경이 감시자들을 따돌리기 위한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감시자들이 천호동에 나타난 것은 미경의 전화가 온 지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그들은 천호동 아가씨들에게 미경의 연락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제천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미경은 이미 제천을 떠난 뒤였다. 그들은 미경과 가까이 지냈던 다방 아가씨와 손님들을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러나 아가씨들이나 손님들은 미경의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미경이 울산으로 갔을 것이라는 막연한 대답만 들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돌아가야지...."

"이 계집이 정말 유흥가를 전전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몸을 망쳤는데 온전한 여자로 살아갈 수 있겠어? 평생 이런 데나 돌아다니다가 종내는 몹쓸 병에 걸려 죽는 거지...."

"난 어쩐지 기분이 꺼림칙해."

"이젠 이 계집은 감시 대상에서 제외시키자구. 지나치게 감시를 하는 것도 우리 정체를 드러내는데 안성맞춤이야."

"한 번만 더 두고 보자구. 또 연락이 있을 거야."

그들의 예상대로 미경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 것은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그러나 미경은 여자들에게 어디 있는지 위치를 말하지 않아 감시자들을 조바심 나게 했다. 여자들이 위치가 어디냐고 물으면 미경은 듣지 못했는지 엉뚱하게 사귀는 남자 얘기만 주절주절 떠들어대다가 전화를 끊었다. 감시자들은 여자들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전화에 녹음장치를 설치했다. 미경의 전화가 다시 걸려온 것은 보름이 지났을 때였다. 감시자들은 미경의 목소리를 녹음기를 통해서나마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송화 있어요?"

"누구시죠?"

"도화예요. 홍도화."

미경은 천호동 텍사스촌에서 홍도화라는 이름을 사용했었다. 그곳에서는 여자들 이름을 모두 꽃으로 사용했다.

"어머! 너로구나. 그래 거기 어디니?"

"채송화 좀 바꿔 주세요."

"그래. 송화야 전화 받아라! 지금 일하는데 어디야?"

"다방이요. 차 배달하고 있어요."

"차 배달? 그런 데서 목돈 만질 수 있어?"

"하기 나름이죠. 티켓다방이니까 나가서 술도 마시고 남자들도 만나고 그래요."

"심심하면 재미를 본다는 말이지?"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이어서 전화를 바꾼 듯이 목소리가 달라졌다.

"언니?"

"송화니?"

". 송화야. 어디 있어?"

"나 다방에서 일해. 여관에 차 배달 나왔다가 전화를 하는 거야."

"여관으로 차 배달을 해?"

"그럼."

"그럼 재미도 보겠네?"

"재미도 보지. 거기처럼 하루에 두 사람을 상대할 때는 없지만 다방도 지낼 만해. 말이 두 사람이지 텍사스가 어디 사람이 있을 곳이니? 지금 생각하면 그런 데서 어떻게 지냈는지 진저리가 나. 매일 밤 술에 절어 살아야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나체로 술 시중을 들어야지.... 또 즉석 불고기를 구워 주어야지.... 난 거기 있을 때 아랫도리가 헐어 버리는 줄 알았어."

"언니. 거기 한번 놀러 갈까? 지금 있는 곳이 어디야?"

"다방이라니까. 얘 전화가 끊어 질려고 그런다. 다음에 내가 또 연락할께."

찰칵 하고 전화 끊어지는 소리가 녹음기에서 들렸다. 감시자들은 기분이 묘했다. 여자는 결정적인 순간에 답변을 회피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여자가 의도적으로 위치를 밝히지 않는 것이 아닐까?"

"여자가 그 정도로 교활할까?"

"그렇지 않으면 교묘할 정도로 답변을 회피할 리가 없잖아?"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럼 한 번만 더 기다려 보자구."

미경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열흘 뒤였다. 그들은 전화기의 녹음 테이프를 수거하다가 다시 틀었다.

"잘 있었어?"

"거기 어디야?"

"여기는 의정부야."

"그럼 서울 위네."

"그래."

"그럼 서울 지날 때 들리지 그랬어?"

"직업소개소 차를 타고 가는 바람에 들릴 수가 있어야지... 그래 어떻게 지내니?"

"텍사스 꽃순이 생활이 그렇지 뭐."

"아직도 거기로 병마개 따니?"

"병마개뿐이야? 요즈음은 탁구공을 넣었다가 쏘는 쇼를 해. 손님들이 점점 .자극적인 것을 원하고 있어."

"그러다가 몸 망칠라."

"어차피 망가진 걸 뭐.... 집에는 들렸어?"

"내 주제에 어떻게 집에 들리니? 이젠 집이랑 완전히 인연을 끊었어."

"집에 가고 싶지 않아?"

"집은 깨끗하게 잊었어. 이렇게 평생 살다가 때 되면 끝내는 거지 뭐."

"언니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 원망스럽겠다...."

"후훗.... 원래 팔자가 그랬던 모양이야. 그들이 아니면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으니 과부로 살다가 재혼을 했겠지. 하지만 재혼을 했다고 행복해지란 보장은 없잖아? 처음에가 좀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어. 난 완전히 내가 마음에 드는 남자와 잘 수도 있고 술도 마실 수 있어. 여자로 태어나서 이렇게 즐기며 사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야."

"언니는 그럼 그 사람들이 고맙다는 얘기야?"

"! 그렇다고 그치들이 고마울 게 뭐 있어? 그건 그렇고 한번 놀러 와라."

"거기가 어딘지 가르쳐 주어야지."

"의정부라니까. 의정부 가능동에 '미추'라는 다방이 있어."

"그럼 한번 놀러 갈께."

"꼭 와?"

"."

그리고는 잘 있으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감시자들은 그 전화를 받고 의정부로 달려갔다. 미경은 전화의 내용대로 의정부 가능동에 있는 다방에서 차를 배달하고 있었다. 감시자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녀는 허벅지가 죄드러난 짧은 치마를 입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하루종일 차를 배달하고 있었다. 낮에는 중년 남자들과 노인들의 무릎팍에 앉아 웃음을 팔고 밤이면 술집으로 여관으로 출장을 다녔다. 여자는 그들이 의도한대로 사창가의 생활이 몸에 젖어 버린 듯했다. 감시자들은 만족했다. 그들은 서울로 돌아오자 그 여자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감시를 할 필요가 없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3

미경이 의정부를 떠난 것은 이듬해 초봄의 일이었다. 미경은 의정부에서 떠나자 두 번 다시 사창가를 전전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서울로 돌아와 성형외과의 문을 두드렸다.

"어떻게 오셨어요?"

미경이 찾아간 곳은 영동에 있는 성형외과였다. 미경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간호사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수술을 받고 싶어 왔어요."

"어디를 수술하시게요?"

"의사 선생님을 뵙고 말씀 드릴께요."

"들어오세요."

간호사가 미경을 진찰실로 안내했다. 진찰실에는 40대의 중년 의사가 앉아 있었다. 미경은 의사에게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의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미경의 인사를 받았다. 조금 거만한 인상을 풍기는 퓨눼 그는 고급스러운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수술을 하신다고요?"

의사의 목소리는 의외로 가늘었다. 탤런트들과 스캔들이 파다한 의사였다.

"."

"어디를 하시렵니까? 제가 보기엔 수술할 곳이 전혀 없으신 것 같은데요."

"얼굴 전체를 수술했으면 싶어요."

"얼굴 전체를요?"

의사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얼굴 전체를 어떻게 수술하고 싶으십니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요. 외국 영화에서 보니까 얼굴을 완전히 뜯어고쳐 남편까지도 몰라보던데 그 정도 수술이 가능하다던데요."

의사가 안락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웃으세요?"

"그런 수술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돈도 많이 들구요."

"전혀 불가능한가요?"

의사가 미경의 얼굴을 조용히 쏘아보았다. 마치 미경의 진의가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렇다고 봐야죠."

"그럼 지금의 제 얼굴과 어느 정도 다르게 할 수 있죠?"

"글쎄요."

의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가능한 한 다르게만 해주세요."

"무슨 까닭인지 알려 주십시요. 이런 부탁은 처음이라 까닭을 알기 전에는 대답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좋아요. 허지만 제 사연을 다 들으시려면 하루가 걸릴 거예요. 시간을 내실 수 있겠어요?"

"내지요."

미경은 의사와 퇴근 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장소는 호텔 커피숍이었다. 의사는 약속 시간이 30분이나 지난 저녁 7시에야 커피숍에 도착했다. 미경은 미리 예약한 호텔 객실로 의사를 이끌었다. 의사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미경을 따라 객실로 들어왔다. 미경은 의사 앞에서 옷을 모두 벗고 자신의 알몸을 낱낱이 보여 주었다. 그리고 미경이 지금까지 겪은 얘기를 모두 했다. 의사는 미경의 얘기를 들으며 몇 번이나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해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미경이 수술대에 올라간 것은 그로부터 닷새 후였다.

3월이었다. 날씨가 화창했다. 창으로는 봄바람이 불어오고 봄볕이 나른했다. 미경은 두 번에 걸쳐 대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그녀 엉덩이의 살을 잘라 얼굴에 붙이는 등 정성을 다해서 수술에 임했다. 얼굴이 갸름한 편이었으나 복스럽게 바뀌었고 양볼엔 보조개까지 넣었다. 눈에는 쌍꺼풀을 지웠다. 눈매를 약간 찢어 날카로운 인상을 만들고 코도 높였다. 전체적으로는 상당히 부조화를 이루는 얼굴이었으나 전의 얼굴이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다.

미경은 4월에 퇴원했다. 봄이 완연한 때였다. 주택가의 골목에는 라일락의 독한 꽃향기가 날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라일락의 흰 꽃잎이 분분히 날렸다. 미경은 길바닥에 사금파리 조각처럼 하얗게 깔린 라일락 꽃잎을 밟고 퇴원했다. 그러나 얼굴의 흉터를 제거하는 수술을 다시 한번 해야 했기 때문에 미경이 성형수술을 완전히 끝낸 것은 늦은 5월의 일이었다.

(이젠 됐어!)

미경은 거울을 보고 만족했다. 거울엔 전혀 다른 여자가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니야..... )

미경은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맹세했다.

 

 

4장 밤으로의 길고 어두운 여로

 

1

부우우웅.

부우우웅.

멀리서 공기를 진동하며 뱃고동 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미경은 우울한 눈빛으로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먼바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빗발이라도 뿌리려는 것일까. 하늘이 잿빛으로 잔뜩 흐려 있었다. 미경은 잿빛의 우중충한 하늘과 망망한 바다를 응시하며 무겁게 한숨을 토해 냈다.

(목포에 올 때마다 날씨가 잿빛이군. )

미경은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목포경찰서 수사계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아직도 한 시간이 더 남아있었다. 그러나 형사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낼 곳이 마땅치

않았다. 목포는 초행이 아니었다. 1년 전쯤 소설가 최종열을 만나러 온 것이 처음이었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런 까닭으로 미경은 목포 지리를 거의 알지 못했다.

미경은 여객선 터미널 쪽을 향해 걸으면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젊은 여자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망설여지긴 했으나 목포는 낯선 곳이었다. 직장의 동료들을 만날 일도 없고 아는 사람을 만날 우려도 없었다. 이렇게 낯선 곳이라면 젊은 여자가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자유쯤은 누려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경은 핸드백에서 조그만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기다리는 시간이 초조하고 불안했다. 미경은 담배 연기를 가슴 속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뱉고 문득 옆을 힐끗 쏘아보았다. 지나가던 30대의 남자가 미경을 아니꼬운 눈빛으로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미경은 자신을 기분 나쁘게 힐끔거리는 남자의 시선을 쌀쌀한 눈빛으로 퉁겨 버렸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대부분의 남자들이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미경은 남자들의 그런 시각이 싫었다. 미경은 잿빛 하늘에 아득하게 솟아 있는 유달산을 쳐다보았다.

미경이 변신을 한지 어느덧 1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잡지사 여기자로서의 변신이었다. 성형수술을 한 미경은 곧바로 남편이 다니던 신문사를 찾아갔었다. 사회부 기자 오승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마침 회사에서 여성지를 창간하게 되어 경력 기자를 뽑으려던 참입니다. 제가 힘은 없지만 밀어드리겠습니다."

오승만은 미경이 잡지사에 취직을 하겠다고 하자 기꺼이 도와주었다. 물론 미경이 겪은 일을 모두 털어놓은 뒤의 일이었다. 오승만의 말대로 그 신문사는 얼마 후에 여성지를 창간했고, 미경에게 이력서를 가지고 오라고 하더니 여성지 기자로 발령을 냈다. 1년 반 전의 일이었다. 미경의 동생 미숙이 결혼하기 전에 여성잡지에 근무한 경력이 큰 보탬이 되었다. 미숙은 대학을 졸업하자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하는 '마이홈'이라는 여성지에 기자로 근무했었다. 미경은 미숙의 이름으로 취직을 했던 것이고 미경도 결혼 전에 사보 편집을 했기 때문에 기자 생활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미경이 목포경찰서 수사계 박윤수 형사의 전화를 받은 것은 오늘 아침 8시경의 일이었다.

"거기 안미숙씨 댁이죠?"

미경이 침실 문갑에서 울리는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수화기를 들자 호남 악센트가 강한 사내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런데요?"

미경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반문했다. 아직도 안미숙이라는 이름이 귀에 설었다. 미경이 성형수술을 한 뒤에 동생의 이름으로 잡지사에 기자로 취직을 한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안미숙이라는 귓전을 때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던 것이다.

"여기는 목포경찰서입니다. 수사계 박윤수 형사입니다."

"경찰서요?"

미경은 경찰서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지애씨 알지요?"

"이지애요?"

미경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그럼 소설가 최종열씨는 아십니까?"

"."

미경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른 새벽부터 경찰에서 전화를 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언젠가 경찰이라는 사람의 전화를 받고 납치되었던 것을 생각하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이지애는 최종열의 정부입니다."

"정부?"

"내연의 여자 말입니다. 목포에서 카페를 경영하고 있었죠."

"!"

미경은 그때서야 자신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내뱉았다.

"이제야 기억이 납니까?"

형사는 약간 비웃는 듯한 말투가 되었다.

"."

"어떤 사이입니까?"

박윤수 형사는 다짜고짜 미경에게 취조하듯이 묻고 있었다.

"누구 하고요?"

"이지애."

"잘 모르는 사이예요. 1년 전에 한 번 만났을 뿐에요."

"최종열과는 어떤 사이죠?"

"우리 잡지에 소설을 쓰기로 한 작가입니다."

"그것뿐입니까?"

"."

"최근에 만난 것이 언제죠?"

미경은 옆에서 자고 있는 양윤석을 힐끗 쳐다보았다. 양윤석은 새벽의 전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단한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미경은 양윤석이 지난밤에 새벽까지 술을 마신 것이 다행이지 싶었다. 최종열을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은 3개월 전의 일이었다.

"3개월쯤 되었을 거예요. 그런데 무슨 일이죠?"

미경은 조금 쌀쌀맞게 내쏘았다.

"미안합니다. 실은 이지애씨가 죽었습니다."

"죽어요?"

"."

"왜요?"

"아직 그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안미숙씨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어떻게 죽었죠?"

"자세한 것은 목포에 와서 말씀을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를 소환하는 건가요?"

미경은 바짝 긴장했다.

"아닙니다. 신분도 확실하고, 또 기자 신분이니 참고인 진술을 받으려는 것뿐입니다."

"....."

"오늘 내려오실 수 있겠죠?"

"."

"좋습니다. 그럼 목포에 와서 전화 주십시오. 전화번호는 목포경찰서 수사계로 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미경은 맥없이 수화기를 놓았다. 날은 이미 훤하게 밝아 있었다. 아침 햇살이 은은한 핑크빛 커텐 사이로 틈입해 들어오고 아파트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아침 운동을 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미경은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으로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소설가 최종열의 정부 이지애가 죽다니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인가. 미경은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어 세탁기에 넣고 샤워기로 온수를 틀었다. 이지애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최종열은 왜 행방불명이 된 것일까?)

미경은 문득 최종열의 행방불명에 의구심이 일어났다. 최종열은 2개월 전부터 갑자기 소식이 끊겨 있었다.

(혹시 우리 잡지에 연재하기로 한 소설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닐까?)

최종열은 미경이 근무하는 여성잡지에 10. 26에서 12.12 사태와 5.18 광주항쟁을 거치며 한국의 민주주의가 거대하게 파도치던 80년대 이야기를 연재하기 위해 소설을 쓰고 있었다. 이미 자료 수집이 모두 끝나 작품이 완성 단계에 들어갔다는 말이 들리고 있었다. 최종열이 그 소설을 쓰게 된 것은 12.12 사태 때 신군부에 반대하다가 합수부에 연행되었던 전 수경사 정병주 소장이 893월 서울 근교의 야산에서 의문의 자살체로 발견되고, 신군부가 그를 연행할 때 그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이 권총으로 신군부 측에 저항을 하다가 총격전에 의해 사망했는데 916, 김오랑 소령의 부인이 그 충격으로 실명을 하고 신경안정제를 과다복용한 채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세간에는 그 사건으로 유언비어가 분분하게 나돌았고 김오랑 소령의 부인의 죽음에 흑막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모두들 그 불행한 여인을 동정하고 있었다. 미경이 다니는 잡지사에서도 김오랑 소령 부인의 자살 사건이 터지자 곧바로 취재를 하여 특집으로 다루었다. 그러자 좀 더 자세한 사실을 알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잡지사에서는 독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 사건을 소설로 연재하기로 했는데 그떠 선정된 작가가 80년대에 정치부 기자로 활동을 하다가 해직되어 작가 활동을 하고 있는 최종열이었다. 문체가 다이나믹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제 와서 그들이 작가를 살해할 리가 없는데.... )

미경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이지애의 죽음은 의문스럽기 짝이 없었고 최종열의 행방불명은 미경의 머릿속을 혼란하게 하고 있었다. 미경이 최종열과 불륜의 관계를 갖게 된 것은,갖게 되었다기보다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지만 1년 전 유달산에서였다. 미경은 최종열이 요구하는 소설의 자료를 잡지사 자료실에서 뽑아가지고 바람이나 쐬려고 목포로 최종열을 찾아갔었다. 잡지사에서 최종열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은 편집부 차장이었으나 미경이 자청했던 것이다.

최종열은 목포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무슨 연유인지 최종열은 결혼도 하지 않고 목포에서도 변두리에 속하는 여객선 터미널 근처의 브록크 기와집에 방 한 칸을 월세로 얻어 집필 생활을 하고 있었다. 미경이 목포에 도착하여 최종열에게 자료를 건네주자 최종열은 이왕 목포에 왔으니 유달산이나 구경하라며 미경을 이끌었다. 그러나 최종열이 미경을 이끌고 간 곳은 유달산이 아니라 시내의 한 카페였다. 미경은 최종열에게 자료를 전해 주는 것보다 바람을 쐬기 위해 목포까지 내려온 것이므로 혼쾌히 최종열을 따라갔다. 최종열의 자료는 우편을 이용해 보내 주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내 애인이요."

카페로 들어가자 최종열은 나이 지긋한 여자를 불러 미경에게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이지애가 미경에게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경은 황급히 허리를 숙여 답례를 했다. 이지애가 미경보다 훨씬 나이가 더 들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지애는 그 카페의 주인이었다. 머리가 길고 숱이 풍성해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세파에 찌든 듯한 인상도 함께 풍기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가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죠."

최종열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미경은 어쩐지 최종열의 말이 가슴을 공허하게 울리는 기분이었다. 최종열의 말은 땅속 깊은 곳에서 들리는 말처럼 이상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여자는 나의 정부와 같은 여자입니다."

미경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최 선생님이 필요할 때만 정부죠."

이지애가 눈을 샐쭉하게 흘기며 말했다. 그러나 그다지 고까워하는 눈빛이 아닌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는 이미 그런 대화가 예사롭게 오가는 눈치였다.

"내가 필요할 때는 최 선생님이 반대하죠?"

이지애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미경은 어리둥절했다.

"?"

"정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요?"

최종열이 미경에게 의미심장한 얼굴로 물었다. 최종열은 대낮인데도 얼굴이 불콰해 있었다.

"글쎄요...."

미경은 당황하여 말끝을 흐렸다.

"정부란 추악한 욕망을 배설하는 도구요."

"....."

"인간은 온갖 욕망을 갖고 살지요, 권력에 대한 욕심, 식욕, 성욕.... 이 여자는 그 많은 욕망 중에 내 성욕을 받아 주는 여자란 뜻이요."

미경은 얼굴이 붉어졌다. 최종열은 지독한 독설을 술기운을 빌어 마구 뱉어내고 있었다.

"어디 최 선생님만 성욕을 가지고 있는 줄 아세요? 여자도 그런 욕망을 갖고 있어요."

이지애가 지지 않고 최종열의 말을 받아넘겼다.

"안 기자님 그렇지 않아요?"

"그렇죠."

미경은 억지웃음을 얼굴에 띄우며 대꾸했다. 대화가 껄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가?"

최종열이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이지애와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갑자기 카페로 젊은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와 이지애가 그쪽으로 가버리자 최종열이 미경을 끌고 카페를 나왔던 것이다.

"지금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 아니면 유달산이나 올라갑시다."

최종열이 옆눈질로 미경을 보며 우울하게 내뱉었다. 미경은 잠시 망설였다. 유달산은 바로 눈

앞에 있었으나 산에 오르려면 한참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러나 잡지사의 일이 크게 바쁜 것도 없고 지금 당장 서울로 올라가고 싶지도 않았다. 미경은 이 기회에 예향 목포의 명산 유달산을 보아 두자고 생각했다.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끈적대는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것 같은 최종열의 이상한 분위기도 미경을 잡아끌고 있었다. 날씨는 우중충했다. 유달산 봉우리 먹구름이 밀려들고 있었으나 미경은 최종열을 따라 유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쉬었다가 갈까요?"

유달산을 중턱쯤 올랐을 때 최종열이 미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미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처럼 산에 오르기 때문인지 숨이 찼다.

"남녘 풍광이 괜찮지요?"

최종열이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곳에서는 목포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

"술 한 잔 할래요?"

유달산 중턱의 오솔길에는 허름한 옷차림의 시골 아주머니가 동동주와 간단한 안주를 팔고 있었다.

"."

미경은 웃으며 대답했다. 시장기가 돌았다. 플래스틱 용기에 담은 동동주와 도토리묵을 시켜놓고 술을 함께 마신 뒤 미경은 최종열을 따라 다시 유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유달산은 오르막길이 가파랐다. 쉬엄쉬엄 산을 올라 정상에 이르자 먹구름이 몰려들어 잿빛 하늘에서 성긴 빗발이 날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비가 오는데요?"

최종열이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

미경은 망망한 바다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가을비야 맞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유달산 정상에 올라 금세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먹구름 때문에 하늘과 바다가 온통 잿빛으로 보이고 임진왜란의 전설이 깃든 노적봉조차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기분은 상쾌했다. 중턱에서 조그만 사발로 두 잔이나 마신 동동주 때문인지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도 시원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관광객이 많다는 유달산은 날씨 탓에 인적이 끊어져 고즈넉했다. 이따금 마른 나뭇잎을 때리는 빗소리만 스산하게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그만 내려갈까요?"

최종열이 담배를 피우며 미경에게 물었다. 미경도 담배를 피우고 싶었으나 최종열이 옆에 있어 참았다.

"조금만 더 쉬었다가 가요."

미경은 최종열에게 눈웃음을 쳤다. 빗발이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부지런히 산을 내려간다고 해도 이제는 산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비를 흠뻑 맞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비를 맞을 바에야 쉬엄쉬엄 내려가는 것이 편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죠."

최종열이 선선히 대답했다. 미경은 최종열을 피해 숲으로 들어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빗발이 점점 굵어져 옷을 후줄근하게 적시고 있었다. 미경은 그때서야 비로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멀리서 천둥이 우는 소리까지 우르르 우르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예사로운 가을비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비를 좀 긋고 산을 내려가야 할 것 같군요."

미경이 담배를 피우고 숲에서 나오자 최종열이 미경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미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빗발이 푸슷하게 얼굴을 때리고 오솔길을 축축하게 적셨다. 하늘과 바다는 온통 우중충한 잿빛이었다.

"여기서라도 쉬어 가야 하겠습니다."

최종열이 눈짓으로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며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유달산의 정상 주위에 커다란 바위가 몇 개 뒹굴고 있었고, 그 바위들 중에 틈서리가 벌어진 곳이 있어서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미경은 최종열이 가리키는 바위 틈서리로 들어갔다. 최종열도 미경의 옆에 와 섰다. 그러나 그 바위는 두 사람이 함께 비를 피할만한 곳은 못 되었다. 미경과 최종열이 부딪칠 듯이 비비고 들어섰으나 빗발은 사정없이 두 사람에게 들이치고 있었다. 미경은 고개를 들고 어둠컴컴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빗발이 쉬이 그칠 기색이 아니었다.

"피우겠어요?"

최종열이 담배를 꺼내 미경에게 내밀었다.

"."

미경은 사양하지 않고 최종열의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아까 솔숲에서 미경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최종열이 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시늉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 때문인지 몸이 으실으실 떨렸다. 최종열이 라이터를 켰다. 미경은 머리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우르르.

멀리서 다시 천둥이 울었다. 미경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미경은 그때 갑자기 최종열의 눈빛이 자신의 몸을 더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경은 기분이 야릇해졌다. 징그럽다거나 불유쾌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도 한낱 사내였던가, 이 사람은 명색이 지식인이라는 소설가인데도 여자의 몸을 음흉한 눈빛으로 더듬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빠르게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그러나 미경은 최종열의 뜨거운 눈빛을 튕겨 버리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였다. 남자가 여자의 몸을 눈으로 더듬는 것은 본능적인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남자의 눈길을 의식하는 것도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는가. 미경은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다.

비는 점점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미경의 옷은 이미 흠뻑 젖어서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최종열을 자극할 것 같아 미경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안 기자."

그때 최종열이 미경을 불렀다.

"?"

미경은 몸을 떨며 대답했다. 옷이 비에 젖어 몸까지 축축하게 젖고 있었다.

"어때요? 비 오는 유달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까 기분이 묘하지 않아요?"

최종열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말했다.

"."

미경은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득 자신이 경솔한 짓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바다는 여자요."

"....."

"나는 이따금 바다에 안기듯 여자에게 안기지요."

최종열이 불이라도 내뿜을 듯 강렬한 눈빛으로 미경을 응시했다. 미경은 최종열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슬그머니 외면했다. 그러자 최종열이 갑자기 미경을 와락 끌어안았다. 미경은 깜짝 놀라 최종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최종열이 재빨리 미경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딪쳐 왔다. 미경은 그때서야 황급히 최종열을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최종열은 미경의 반발을 예상하고 있기라도 했듯이 비에 젖은 미경의 원피스 자락을 가볍게 들추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

미경은 짜릿한 전율이 전신으로 퍼지며 온몸이 나른하게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최종열은 미경이 미처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한 손으로는 치마 속을 유린하고 한 손으로는 미경의 앞가슴을 움켜쥐고 바위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최 선생님!"

미경은 바둥거리면서 간신히 부르짖었다. 그러자 또다시 최종열의 두툼한 입술이 미경의 입술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미경은 황당했다. 최종열의 손이 자신의 치마 속에서 빠르게 은밀한 곳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미경은 온몸에 기운이 빠지면서 눈앞이 아득해 왔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미경은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렸다. 그러나 그녀의 내부에서는 상반된 두 개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하나는 쾌락을 거부하려는 반응이었고 다른 하나는 최종열의 손이 좀 더 깊숙하고 은밀한 곳을 애무해 주었으면 하는 반응이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미경은 고개를 흔들며 저항의 몸짓을 했다. 그러나 최종열의 손길이 자신의 몸을 마구 유린하는 것을 방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최종열의 손이 그녀의 깊숙한 곳으로 접근하자 미경은 고통인지 희열인지 알 수 없는 신음을 토해내기까지 했다. 그때 최종열이 미경을 안아서 바위 위에 눕혔다. 미경은 다시 한번 저항하기 위해 몸을 바둥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소용없는 몸짓이었다. 바위 위에 쓰러진 미경을 최종열이 덮치듯이 누르면서 미경의 원피스 자락을 성급히 위로 들추었다.

(, 이럴 수가.... )

미경은 저항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차가운 빗발이 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삼각형의 얇은 천 조각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녀의 몸으로 세찬 빗줄기가 장대질을 하듯이 퍼붓고 있었다. 미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녀의 몸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꽃은 빠르게 전신으로 번졌다. 최종열은 미경이 저항을 포기하자 비로소 자유로운 상태가 되어 미경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1년 전의 일이었다. 산속에서, 그것도 차가운 가을비가 쏟아지는 산상의 바위에서 지식인이라는 소설가에게 겁탈을 당한 미경은 한동안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최종열에게 폭행을 당한 것도 아니면서 저항을 하지 않은 자신이 역겹기까지 했다.

(사창가 생활을 했던 것이 내 정조 관념을 무너뜨렸어. 처음 본 남자에게까지 함부로 옷을 벗기게 했으니..... )

미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창가를 전전하며 몸을 팔던 일을 생각하자 소름이 닭살처럼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허지만 어차피 버린 몸이야. )

미경은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미경은 사창가를 빠져 나오고서도 사내들과 빈번하게 관계를 가졌다. 처음엔 죽은 남편에게 죄의식을 느끼기까지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죄의식은 사라지고 욕망만이 거품처럼 남았다. 최종열에 대한 것도 시간이 흐르자 오히려 그날 산상에서의 쎈스가 그리워지고 있었다. 이왕 그렇게 되었을 바에야 좀 더 적극적으로 최종열에게 호응할 걸 그랬다는 생각에서부터 발가벗은 나신 위에 차갑게 쏟아지던 소나기까지 그리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변하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되풀이되는 자신의 생활에 있어서는 충격적이고 신선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최종열이 서울에 올라온 것은 그 후 5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최종열은 자료조사차 서울에 올라왔다고 했으나 미경을 만나기 위해서 서울에 올라온 것이 분명했다. 미경은 그날 서울 교외의 허름한 여관에서 최종열과 격렬하게 살을 섞었다. 최종열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으나 미경은 거리낌 없이 옷을 벗었다. 그것은 최종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최종열은 미경이 오히려 격렬한 행위를 요구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미경은 최종열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마음껏 분출했다. 그러나 물거품 같은 욕망을 배설하고 나면 허망하고 쓸쓸하기만 했다.

(최종열이 행방불명인데 이지애까지 죽다니 믿을 수 없어. )

미경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최종열의 행방불명이 더욱 의심스러워지고 있었다.

부우우웅.

다시 뱃고동이 구슬프게 울었다. 미경이 뱃고동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자 어느 사이에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뿌리고 있었다. 미경은 얼굴에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을 느끼며 유달산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1년 전, 저 유달산의 산정상에 있는 바위 위에서 세찬 빗줄기를 맞으며 최종열을 자신의 몸속 깊이 받아들이던 생각이 났다. 그러자 아랫배를 격렬하게 압박하던 최종열의 어두운 얼굴이 떠올라 왔다. 미경은 다리 사이에서 나른한 감각을 느끼며 몸을 세차게 떨었다.

 

2

미경이 목포경찰서 수사계의 박윤수 형사를 만난 것은 오후 4시가 훨씬 지났을 때였다. 박윤수 형사는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늦게 터미널 다방에 나타났다. 미경의 생각과 달리 박윤수 형사는 말끔한 신사복 차림이었고 형사답지 않게 인상이 깔끔했다.

"멀리까지 내려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목포가 초행은 아니죠?"

박윤수 형사는 30대 후반으로 보였다. 키는 중키고 몸이 호리호리했다.

"."

미경은 긴장하면서 대답했다. 형사와의 대화를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최종열씨가 여성지 <늘푸른 여성>에 소설을 연재할 예정이었습니까?"

"."

미경은 짤막하게 끊어서 대답했다.

"긴장하지 마십시요."

박윤수 형사가 미소를 지었다. 미경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박윤수 형사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재빨리 자신의 표정을 수습하고 라이터를 꺼내 미경에게 불을 붙여주었다. 미경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죽은 사람은 이지애씨인데 왜 최종열 선생님에 대해서 묻죠?"

미경은 최종열에게 깍듯이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쓰기로 했다. 박윤수 형사에게 최종열과의 관계를 눈치 채이고 싶지 않았고, 형사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에 말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최종열씨는 행방불명입니다."

"."

"알고 있었습니까?"

"얼마 전부터 연락이 끊겨서 우리 잡지사도 찾고있는 중이었어요. 이지애씨는 어떻게 죽었어요?"

"자살했습니다."

"자살이요?"

"바위에서 굴러떨어진 채 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세상에!"

"저기 보이는 유달산 뒤쪽에 사체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박윤수 형사가 턱짓으로 창밖의 유달산을 가리켰다. 미경은 그 순간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지애는 왜 하필 유달산에서 죽은 것일까. 이지애도 최종열과 유달산에서 관계를 맺었다는 말인가. 미경은 자신도 모르게 유달산쪽을 쳐다보며 씁쓸해졌다.

"벌써 한 달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목포 지역에선 알려진 사람이라 우리 나름대로 수사를 열심히 했습니다만 특별히 살해되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건을 종결하려고 합니다."

"다른 상처는 없었나요?"

미경은 어리둥절했다.

"위에서는 실족사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실족사요?"

미경은 얼굴을 찌푸렸다.

"바위에서 구른 흔적이 있습니다. 몸 여기저기에 바위에 부딪힌 상처와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가 있었지요."

"그렇다고 실족이라고 볼 수 있나요?"

"그래서 자살이라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특별히 살해당할 만한 동기도 없고 젊은 여자가 바위에서 실족한다는 것도 별로 타당하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어떻게 자살이라고 보죠?"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지애씨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우울증이요?"

"우울증이 심해지면 자살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럼 이지애씨가 그토록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는 말인가요? 믿어지지 않는 일이네요."

"최종열씨와 가까운 사이인가요?"

"왜요?"

"이지애씨의 가장 가까운 사람은 최종열씨인데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혹시 알고 있나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글쎄요...."

미경은 박윤수 형사를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박윤수 형사의 '가까운 사이'라는 말이 마치 육체관계를 의미하는 것처럼 미경에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종열과 서너 번의 육체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진정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최종열에게 처음 겁탈을 당하듯이 관계를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관계를 하기 전이나 관계를 한 뒤에나 한 번도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한 일이 없었다. 최종열은 술을 마실 때 외에는 거의 말이 없는 사내였고 미경도 허기진 것처럼 허겁지겁 욕망을 채우고 나면 서둘러 헤어지곤 했던 것이다.

"이지애씨는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까?"

"."

"정신과 의사들과 얘기를 해보니까 우울증이 심해지면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미경은 입을 다물었다. 경찰에서 이지애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했다면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지애가 어찌하여 우울증을 앓게 된 것이고 자살까지 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최종열의 행방불명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미경은 머릿속이 어수선했다.

"그런데 왜 저를 목포까지 부르셨어요?"

"이지애씨 사건을 종결하게 되었으니까 의혹을 남기지 말아야지요. 혹시라도 타살되었으면 다시 수사를 해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이지애씨와 친하지 않았습니까?"

"전혀요."

"정말입니까?"

"."

"거짓 진술하면 의심을 받는다는 거 알지요?"

박윤수 형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경을 쏘아보았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미경은 강하게 고개를 흔든 뒤에 이지애를 만난 일을 박윤수 형사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박윤수 형사는 미경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지애씨와 친한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 있습니까?"

"몰라요."

미경은 쌀쌀맞게 내뱉았다.

"잘 생각해 봐요."

"이지애씨를 만난 일이 그때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이지애씨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요."

"그런데 왜 이지애씨의 수첩에 안미숙씨 이름이 있었죠?"

"모르겠어요."

미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지애의 수첩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이거 알아보겠어요?"

박윤수 형사가 두툼한 서류 봉투를 미경을 향해 내밀었다. 미경이 서류 봉투의 내용물을 꺼내자 뜻밖에 최종열의 육필 원고가 들어있었다.

"이건 최 선생님의 원고 같은데요?"

"이걸 이지애씨가 갖고 있었습니다."

"이걸 왜 이지애씨가 갖고 있죠?"

"모르지요. 최종열씨가 맡겼겠죠."

"이게 전부인가요?"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럼 나머지는 어디 있어요?"

"모릅니다."

"내용을 읽어보셨나요?"

"아니요. 소설인 것 같아서 조금 읽다가 그만두었어요. 사건과 직접 관련도 없는 같구..... 최종열씨는 이 소설을 완성한 뒤에 행방불명이 되었다더군요. 그런데 행방불명이 되기 전에 누구한테 소설 원고를 맡겼다는 거예요."

"누구에게요?"

"모르지요. 우린 안미숙씨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전 아직까지 최 선생님 원고를 구경조차 못했어요."

"그래요? 그럼 누구에게 맡겼을까.... ?"

"목포의 친구에게 맡겼겠죠."

"그런 얘기 전혀 못 들었습니까?"

"."

"최종열씨가 원고를 맡길만한 사람이 목포에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실은 최종열씨가 누구와 친한지도 몰라요."

박윤수 형사의 얼굴에 언뜻 실망하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미경은 원고를 천천히 살피다가 박윤수 형사를 쳐다보았다.

"이 원고 제가 가져도 될까요?"

미경은 최종열의 원고 일부나마 찾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잡지사에서는 자료비 명목으로 최종열에게 적지 않은 고료까지 지급한 처지라 최종열의 행방불명에 담당자들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원고를 가지고 돌아가면 잡지사의 담당자들은 물론 간부들까지 반색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시죠."

박윤수 형사가 선선히 승락했다.

"이건 우리 잡지에 연재할 소설이니까요."

원고는 미경이 예상했던대로 70년대 말의 우울한 정치 상황이 첫 장부터 전개되고 있었다.

"요즈음은 이런 소설을 써도 당국의 조사를 받지 않는 모양이지요?"

박윤수 형사가 미경을 살피며 넌지시 물었다.

"세상이 달라졌잖아요."

미경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이 가볍게 대꾸했다. 이제는 신문사들이 앞을 다투어 5공 시대의 정치 비화를 다루고 있었다. 5공이 6공으로 바뀌고, 6공이 문민정부로 바뀌자 정치판도는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긴 하지요."

박윤수 형사가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경은 박윤수 형사가 왜 그런 짓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굳이 그 문제에 집착하고 싶지는 않았다.

 

3

날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미경은 착잡한 기분으로 항구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창밖의 거리를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거리는 어둠이 내리면서 빗발이 더욱 굵어지고 바람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이따금 찬바람에 유리창이 덜컹대고 빗발이 날아와 창에 달라붙고 있었다. 미경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지애의 죽음과 최종열의 행방불명이 아직도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미경은 최근에 이르러 실종자와 의문사를 당한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남편의 죽음 또한 뺑소니차에 의한 단순한 교통사고일 수도 있지만 의문사에 가까웠다. 그것은 남편의 교통사고 이후 자신에게 닥친 일을 생각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 미경은 최종열의 행방불명과 이지애의 의문사에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박윤수 형사와 헤어지고 나서 미경은 의문사와 실종에 대한 압박감을 처리할 수 없어서 부둣가를 방황하다가 최종열의 원고를 읽어 볼 셈으로 목포에 주저앉아 낯선 여관을 찾아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머릿속만 심란했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그때 창문을 흔들며 뱃고동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한겨울에 문풍지가 우는 것 같은 삭막한 소리였다. 미경은 최종열의 원고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최종열은 행동이 기괴하기는 해도 문체가 다이나믹하고 생동감이 넘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최종열 소설의 특징인 비극적인 장중미가 이 소설에서도 가슴 뻐근한 감동을 자아내고 있었다. 제목은 '영혼 마차'였다. 10. 26이나 12.12, 5.18 광주항쟁을 다룬 소설로는 어딘지 모르게 연애 소설적인 냄새가 느껴지는 제목이었다. 미경은 담배를 피워 물고 최종열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여자는 흔들의자에 앉아있었다. 가을볕이 나른한 오후였다. 주택가 어느 집에선가 피아노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들려오고 있었다. 여자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잠이라도 든 것이 아닐까. 정 여인은 보라색의 드레스를 입고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젊은 여자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풍만하고 육감적인 모습이었다. 여자의 남편은 어느 정보기관의 기관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남편이 어떤 기관에 근무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자의 남편은 항상 검은 찦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고 이웃 사람들과는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이따금 길에서 여자의 남편을 만나기는 했으나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 때문에 정 여인은 한 번도 말을 건넨 일이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붙임성이 좋고 나긋나긋했다. 여자의 이름은 이정란, 32세였다. 그녀의 남편은 한경호, 38세로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동네에서는 여자의 남편이 기관원이라는 사실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꺼렸다. 여자의 남편 쪽에서도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지 동네의 크고 작은 행사나 잔치에 참석하지 않을 뿐더러 반상회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동네에서는 여자의 남편이 과묵한 탓에 여자가 재취거나 첩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게다가 두 사람에게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처음부터 아이가 정신 질환자는 아니었으나 그 아이로 인해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소문일 뿐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 아이를 본 일도 없었다. 여자가 앉아있는 잔디밭 앞에는 붉은 깨꽃이 한 무더기 농염하게 피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오수를 즐길 만큼 청명한 날씨였다.

"주무시나?"

정 여인은 얕은 기침을 하면서 이정란에게 가까이 갔다.

"아녜요."

정란이 재빨리 흔들의자에서 일어나며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공연히 낮잠을 방해한 것이 아닌지 몰라."

정 여인이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할 일이 없어서 앉아있는걸요. ...."

정란이 말끝을 흐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정 여인은 발견할 수 있었다.

"이사 준비는 다 하구?"

정란의 남편 한경호는 서울로 전출 지시를 받고 있었다. 한경호의 상관인 기관의 책임자가 서울로 영전되어 부하 직원인 한경호도 따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삿짐이 뭐 있어야죠."

"점심은 어떻게 했어?"

"생각이 없어서 아직 안 먹었어요."

"그럼 점심이나 같이 할까?"

"글쎄요. 혼자서 먹는 점심이라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하던 참예요."

정란이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 그늘이 지고 있는 음울한 미소였다.

"어쩐 일이세요?"

정란이 정 여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정 여인은 동네에서 평판이 나쁜 여자였다. 군인 남편들의 잦은 전출로 우울증에 빠져있는 군인 부인들을 유혹해 계를 한다던가 비싼 외제 물건을 팔기도 했고, 춤을 가르치기도 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곤 했었다. 군인 부인들이 전방으로 전출된 남편을 따라 이사를 오게 되면 한동안 낯선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해 우울해하는데, 그럴 때면 정 여인이 어김없이 나타나 부인들을 유혹했다. 처음엔 낯선 곳에 이사를 와서 얼마나 적적하느냐, 여기 사정을 잘 모를 테니 내가 안내를 해주마 하고 친절하게 접근을 했다. 그리고는 시장도 같이 가주고 하여 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 외제 물건을 사라느니,계를 들라느니, 이렇게 살 바에야 좋은 곳에 가서 춤이나 한번 추자고 유혹하는 것이었다. 정란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정 여인의 유혹에 말려들어 춤바람이 날 뻔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까지 한 일이었으나 당시엔 낯선 남자의 품에 안겨 지루박이니, 부르스니 하는 춤을 추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저 아래 마을에 잔치가 있는데 국수나 먹으러 가자구."

정 여인이 추근거리기 시작했다. 잔칫집에서 국수를 먹은 뒤에 이왕 나왔으니 스텝이나 밟자고 유혹할 것이 뻔했다.

"전 집에 있을래요."

정란은 정 여인의 유혹을 거절했다. 정란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남편 몰래 사귀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 하나만으로도 정란은 남편의 눈을 속이기에 벅찼다. 정란이 한때나마 춤바람에 빠졌던 것은 사귀는 남자가 갑자기 연락을 끊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2년 만에 다시 나타났고 정란은 그와 다시 밀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

정 여인이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었다.

", 윤 선생이 한번 만나고 싶어 하는 눈치던데?"

정 여인이 지나가는 말투로 한 마디 던지고 정란의 눈치를 살폈다. 정란은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윤 선생이란 정란에게 춤을 가르치던 춤 선생이었다.

"전 이제 춤 같은 것은 추지 않아요."

정란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하긴 스텝 밟아 본지 오래되었을 거야."

정란은 대꾸하지 않았다. 비로소 정 여인이 찾아온 음흉한 속셈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점심이나 같이 하자구 그러더라구. 서울로 이사를 가면 다시 만날 수 없을 테니.... 윤 선생 말이 사모님처럼 앉은 자리가 깔끔한 여자는 처음 보았다는 거야. 미모며 몸매도 자기가 만난 여자들 중에 캡이라고 그러대."

정란은 얼굴이 붉어졌다. 윤 선생이라는 제비족에게 자신의 미모나 몸매에 대한 찬사를 듣는 것이 역겨우면서도 가슴이 떨렸다. 정란의 머릿속으로 문득 딱 한 번만 그를 만날까 하는 생각이 빠르게 스쳤다. 서울로 이사를 가면 그만이니까 춤 한번 춘다고 어떻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 아닌가.

"생각 없어요."

그러나 정란은 쌀쌀맞게 잘라서 거절했다.

"잘 생각해 봐. 서울로 이사를 가면 두번 다시 만날 일이 있겠어?"

정 여인이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정란은 정 여인에게 뚜쟁이 같은 짓은 작작하라며 되알지게 내쏘고 싶었으나 참았다. 정 여인이 무슨 짓을 하던 자신이 바른 행실을 보이면 그만인 것이다. 정 여인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입술을 삐쭉 내밀고 마당을 있었다. 정란은 정 여인의 펑퍼짐한 엉덩이가 유난스럽게 실룩거리는 것을 보면서 쓴웃음이 나왔다.

(저런 사람이 없어야 할텐데.... )

정란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 여인 외에도 군인들을 상대로 소소한 사기 행각을 벌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군인부대 주변에는 군수물자를 사고파는 장사꾼들이 적지 않았고, 그 전통이 아직까지 끈끈하게 이어져 부대에서 세금이 없는 전자제품들을 사서 장사꾼들에게 넘겨주는 사람이 있었고, 반대로 시중의 물건을 감언이설로 속여 순진한 군인들이나 군인 가족들에게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행히 최근 들어 그러한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정란은 정 여인이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느덧 시장기가 돌고 있었다. 라면을 끓이기 위해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를 켠 뒤 식탁에 앉자 남편이 보던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정란은 물이 끓는 동안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정부 여당 김영삼 총재

제명방침! 정국 초긴장!

 

신문의 큰 활자는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 총재의 의원 자격을 제명한다는 기사를 전면 톱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정란도 신문과 TV 뉴스를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기사였으나 여당과 야당의 대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19791013일의 신문기사였다.

 

미경은 최종열의 원고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한경호와 이정란이 등장하는 장면은 거기서 그치고 소설은 갑자기 엉뚱한 장면으로 바뀌고 있었다.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에 등장하는 한경호와 이정란이 누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미경은 창밖으로 우울한 시선을 던졌다. 밖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어둠이 만또자락처럼 펄럭거리는 시가지에는 차가운 빗방울만이 희끗희끗 날리고 있었다. 남녘 항구의 밤은 점점 조용하게 깊어 가고 있었다. 미경은 어두운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최종열이 쓴 소설의 도입부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4

아스팔트는 빗물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미경은 1년 전 최종열과 함께 들렸던 카페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카페 골목을 오가는 행인들이 그녀의 행색을 수상스러운 듯이 살피고 있었다. 미경의 모습이 우산을 쓰지 않아 얼굴과 머리가 비에 흠뻑 젖어 볼상 사나운 모양이었다. 미경은 망설였다. 이런 행색으로 카페에 들어가는 것이 괜찮은 일인지 언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미경은 고개를 세차게 젓고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목포에 내려오기로 결정했을 때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는 상황이 다른 만큼 직접 부딪쳐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박윤수 형사를 만나고 난 뒤에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지 않은 것도 그 이면에는 이러한 행위를 하리라는 결심이 자신의 마음속에 서려 있다고 보아야 했다. 카페 안은 어둠스레했다.

"어머! 비를 맞으셨네요."

미경이 비에 흠뻑 젖은 차림으로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수건을 건네주었다. 미경은 젊은 여자가 건네주는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의 빗물을 대충 훔쳤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여자가 빈자리로 미경을 안내했다. 미경은 자리에 앉자 저녁으로 카페 정식을 주문했다. 생각 같아서는 위스키를 몇 잔 마시고 싶었으나 여자 혼자서 위스키를 마시는 것이 꼴볼견일 것 같아 참았다. 카페 안에는 손님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주인이세요?"

미경은 저녁을 마친 뒤 위스키를 주문하고 카운터의 젊은 여자를 불렀다.

"."

여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술 한잔 마실래요?"

"일행 없으세요?"

여자가 반문했다. 여자의 나이는 얼추 서른이 채 못되어 보였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여자의 얼굴이 이지애를 닮은 것 같았다.

"없으니까 혼자서 저녁을 먹죠."

미경은 눈웃음을 쳤다. 여자가 생긋 웃으며 미경의 앞자리에 앉았다.

"타지에서 오셨죠?"

미경이 위스키를 따르자 여자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탁자 위에 놓았다.

"."

"취직하러 오셨어요?"

"취직이요?"

"가끔 취직하러 오는 여자분들이 있어요. 목포가 항구도시라 큰돈이 잘 돌거든요."

"아녜요."

미경은 쓴웃음이 나왔다. 여자는 미경이 술집에 취직을 하러 온 접대부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럼?"

"잡지사 기자예요. 최종열 선생님을 만나러 왔는데 행방불명이라는군요."

미경은 거짓말을 했다.

"어머!"

여자가 가볍게 놀란 표정을 했다.

"오해를 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최종열 선생님은 여기 잘 들리셨죠?"

". 우리 언니와 친했어요."

"이지애씨가 언니예요?"

". 우리 언니를 아세요?"

"언니를 1년 전에 여기서 한번 만난 일이 있어요."

"언니는 죽었어요."

여자가 갑자기 쓸쓸한 표정을 꾸미며 말했다.

"왜요?"

미경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시늉을 했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하지만..... 살해된 것 같아요."

여자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핀 뒤 미경에게 소근거렸다.

"살해?"

"우리 언니는 자살할 이유가 없어요."

"그럼 살해당할 만한 이유는 있나요?"

미경은 젊은 여자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아무래도 최 선생님 원고 때문인 것 같아요. 최 선생님은 협박을 당하고 있었대요."

"그렇다고 이지애씨가 살해당할 이유는 없잖아요?"

"우리 언니가 최 선생님 원고를 가지고 있었대요."

"그럼 이지애씨가 최 선생님 원고 때문에 살해당했다는 뜻인가요?"

", 그 원고가 공개되면 정치적으로 매장을 당할 위험에 처한 사람들 짓이라는 거죠. 최 선생님 행방불명도 단순한 행방불명이 아닐 가능성이 많아요."

"행방불명이 아니라면..... ?"

"실종이죠."

미경은 카페 주인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카페 주인의 말이 얼마나 사실에 근접한 것인지 내막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이지애씨가 가지고 있던 원고를 내가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 원고는 최 선생님 원고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최 선생님은 원고를 완성하기 직전에 행방불명이 되셨어요."

"그럼 그 나머지 원고는 어디 있죠?"

"모르겠어요. 경찰도 그 원고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원고를 찾을 방법이 전혀 없나요?"

"현재로는 없어요. 하지만 최 선생님은 그 원고를 친한 분들에게 골고루 분배해서 숨겨 놓았다는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최 선생님과 친한 분들만 찾으면 원고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미경은 천천히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기울였다. 최종열의 소설은 뜻밖에 수많은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미경은 박윤수 형사와 헤어진 뒤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박윤수 형사와 헤어져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면 이러한 내막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페의 여주인에게서는 더 이상 최종열의 소설과 실종에 관해서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지애의 죽음이 의문사란 말인가?)

미경은 카페를 나와 여관을 향해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놓았다. 비는 아직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카페 주인과 마신 술 때문에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항구도시 목포는 인적이 끊어져 조용했다. 미경은 빗물에 번들거리는 아스팔트를 또박또박 걸으며 최종열의 생각에 골몰했다. 최종열이 행방불명이 되었는지 실종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최종열이 쓴 소설의 내용이 더욱 궁금해졌다. 소설의 내용이 얼마나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지애가 살해되고 최종열이 행방불명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져 왔다. 미경은 여관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최종열이 만약에 실종되었다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게 되면 최종열도 살해당한 것이었다.

 

5

샤워를 하고 침실로 나온 미경은 담배부터 한 대 피워 물었다. 시간은 벌써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미경은 창가에 서서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여관이 즐비한 골목에 전봇대가 하나 서 있고 그 전봇대 밑에 가죽 잠바를 입은 사내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미경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잠바를 입은 사내들에게서 수없이 감시와 미행을 당한 미경으로서는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다.

(뭘 하는 사내일까?)

미경은 사내를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사내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계속 서성거리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지 이따금 어둠 속에서 빨갛게 불빛이 반짝거리곤 했다.

(바람난 여편네를 미행이라도 하는 것일까?)

미경은 쓴웃음이 나왔다. 미경은 담배를 다 피우자 침대에 엎드려 최종열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최종열의 소설은 70년대에서 90년대로 건너뛰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첫 장면에 나온 이정란은 간 곳이 없고 엉뚱한 여자가 등장하고 있었다.

 

바람은 그날 밤 밤새도록 세차게 불었다. 허공을 달리는 음산한 바람소리가 귀곡성처럼 아우성을 치고 벌판 끝에서 목을 매듯 비명을 질러댔다.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 황사리. 누런 모래

마을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는데도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황사리, 속칭 뱀골이라고 부르는 마을의 주민들은 밤새도록 불어대는 바람 소리때문에 모두 선잠을 잤다. 나중에 주고받은 얘기이기는 하지만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기이할 정도로 한결같았다. 뱀골의 가장 후미진 곳에 사는 박봉호 노인도 꿈자리가 사나워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불어대는 바람소리, 먼 골짜기에서 피에 굶주려 울고 있는 듯한 개 짖는 소리,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머리맡을 서늘하게 하는 공포....

박 노인은 그런 것들 때문에 잠이 들었다가는 깨고 잠이 들었다가는 깨곤 하였다. 기묘한 일이었다. 박 노인은 눈을 뜨자 우두커니 천정부터 쳐다보았다. 날은 이제서야 겨우 동녘이 희끄므레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그러나 바람은 아직도 누그러지지 않고 세차게 불고 있었다. 뒷곁의 나뭇잎들이 우수수 찬 바람에 쓸려다니고 문풍지가 펄럭거렸다. 박 노인은 등짝으로 차가운 냉기를 느꼈다. 간밤에 군불을 지폈으나 방바닥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박 노인은 몸이 으실으실 떨리는 것을 느끼며 손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었다. 옆에서 자고 있을 설희의 풍만한 여체에 몸을 가까이하여 따뜻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박 노인의 옆자리는 이미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역시!)

박 노인은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가슴 속이 허전해 왔다. 설희가 없는 것이다. 설희가 밤 외출을 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설희가 박 노인의 집에 온 것은 불과 두 달 전인 지난 겨울의 일이었으나 그동안 한 번도 밤 외출을 거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출신을 알 수 없는 계집이라고는 하지만.... )

박 노인은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매일 같이 되풀이되는 설희의 밤 외출에 박 노인은 부아가 치밀었다. 물론 설희가 박 노인의 아낙도 아니고 첩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시쳇말로 정부는 더더욱 아니었다. 설희는 그야말로 박 노인이 주워 온 여자인 것이다. 나이도 알지 못하고 이름도 알지 못했다. 설희라는 이름조차 박 노인이 눈 속에서 주웠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어느 날 박 노인은 땔감으로 쓸 삭정이를 주우러 산에 올라갔다가 눈 속에 쓰러져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는 눈 속에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박 노인이 아무리 어깨를 흔들어도 요지부동이었다. 박 노인은 여자가 혹시 죽은 것이 아닐까 하여 여자의 코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댔다. 그러자 여자의 숨결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박 노인은 이번엔 여자의 손을 만져보았다. 눈 속에 쓰러져 있어서 그런지 여자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 이런 낭패가 있나?)

박 노인은 몹시 난처했다. 여자는 옷이 너덜너덜 헤어져 있었고 얼굴은 흙먼지가 묻어 더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얼굴을 살피자 상당한 미인이었다. 나이는 알 수 없었으나 묵직해 보일 정도로 커다란 가슴과 풍만한 둔부가 알맞게 균형이 잡혀 있었다. 박 노인은 여자를 들쳐 엎고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날도 하늘에서는 눈발이 하얗게 날리고 있었다. 멀고 가까운 산들이 자욱하게 날리는 하얀 눈발로 잿빛 천지가 되고 길바닥에 쌓인 눈으로 발목이 푹푹 파묻혔으나 박 노인은 개의치 않았다. 박 노인은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행히 눈이 자욱하게 내리고 있어서인지 길에는 행인이 없었다. 박 노인은 여자를 안방에 눕혔다. 새벽에 군불을 지폈기 때문에 방바닥에는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박 노인은 여자를 눕힌 뒤 부엌으로 나가 또 군불을 지폈다. 여자가 눈 속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몸이 잔뜩 얼어 있었다. 여자를 소생시키려면 몸을 따뜻하게 해주어야 했다. 물론 얼어 죽어 가는 여자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은 남자와 동침을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기는 했다. 그런 것은 어릴 적에 동네 어른들한테서도 수없이 들었고, 독 짓는 늙은인가 뭔가 하는 영화도 그렇게 해서 여자를 살리고 여자와 함께 살림을 차렸던 것이다. 박 노인은 아직도 그 영화가 잊혀지지 않았다. 늙수그레한 황혼에 찾아온 젊은 여인, 그 여인과의 애욕, 젊은 남자, 보리밭, 철부지 아들..... 영화의 끝부분은 기억나지 않았으나 젊은 여인이 떠나간 뒤 노인이 혼자 남아 독을 짓는 모습은 박 노인에게도 눈물을 글썽거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박 노인은 여자의 몸에 손을 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여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우선 여자를 먼저 살려야 했던 것이다. 박 노인이 아궁이에 불을 잔뜩 지피고 방으로 들어오자 여자는 그때까지도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박 노인은 여자 옆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얼굴은 아직도 창백했다. 박 노인은 입가에 슬그머니 흥건한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여자와 살을 섞는 생각을 하자 늙은 그의 아랫도리가 묵직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거 내가 공연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박 노인은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깨어나면 무슨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엄습해 왔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면 보따리를 내놓으란다는 속담이 있듯이 여자도 무슨 요구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박 노인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엉뚱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다시 뇌리를 엄습해 왔다.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보다 병원으로 데리고 갔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여자의 행색을 자세히 살피자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여자는 행색이 남루하기 짝이 없어서 무슨 사연이 있어서 집을 나왔다기 보다는 거렁뱅이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여자가 분명해 보였던 것이다. 여자는 박 노인이 집으로 데리고 온 지 거의 하루가 다 되어서야 깨어났다. 그러나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고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가족들이 있는지 없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자신의 과거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여자가 스스로 옷을 갈아입는다던가 밥을 먹는 일 따위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뿐 아니라 여자는 손수 밥까지 짓고 빨래도 하였다. 박 노인은 여자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흐뭇했다. 여자의 과거를 알지 못해 한 가닥의 불안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젊은 여자의 희고 매끄러운 몸이 그것을 잊게 했다. 옷을 갈아 입히자 여자는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중국 동양화의 미인도처럼 갸름한 얼굴이며 뽀얗게 흰 살결, 반달 같은 눈썹과 검은 머리, 우뚝 선 콧날, 그리고 앵두처럼 붉은 입술.... 박 노인은 여자를 볼 때마다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야. )

박 노인은 그런 생각을 했다. 여자는 박 노인과의 잠자리도 거부하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이기나 하듯이 다소곳이 박 노인을 자신의 몸속으로 받아들였다. 박 노인에게서 노추가 느껴질만도 한데 도무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자는 요즈음의 젊은 여자답지 않게 머리를 곱게 빗어 가르마를 탄 다음 비녀를 꼽아 신비스러운 분위기까지 풍기고 있었다. 옷도 언제나 눈처럼 흰 저고리와 소복 같은 치마만 입었다. 박 노인이 여자의 밤 외출을 알게 된 것은 여자가 박 노인의 집에 온 지 보름쯤 지났을 때였다. 박 노인이 새벽에 소피를 보기 위해 눈을 뜨자 옆자리가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박 노인은 여자가 뒷간이라도 갔으려니 했으나 한참을 기다려도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박 노인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자가 늙은이와 살기가 싫어서 야반도주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박 노인은 반 시간이 지나도록 여자가 돌아오지 않자 마당으로 나섰다.

한겨울이었다. 기온은 영하로 떨어져 날씨가 살을 에일 듯이 추웠다. 박 노인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집안을 살핀 뒤 바깥 마당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나 여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박 노인은 허전했다. 박 노인은 밖으로 나가 마을의 고샅과 벌판, 농수로까지 살폈다. 그러나 마을 어디에서도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샛서방질을 하나?)

박 노인은 언뜻 그런 의심이 들었다. 여자가 돌아온 것은 얼추 날이 훤하게 밝아 오고 있을 때였다. 박 노인은 자리에 누워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자 재빨리 잠을 자는 체했다. 여자가 어디에 갔다가 왔는지 물어보기가 겁이 났다. 여자를 다그치다 보면 샛서방질 일까지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여자가 떠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여자가 방으로 들어오자 찬바람이 휘익 불어 들어왔다. 박 노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방에는 불이 꺼져 있어서 여자는 박 노인이 잠이 깬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는 익숙한 몸짓으로 옷을 훌훌 벗고 자리에 누웠다. 박 노인은 끙,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옷을 벗은 여자가 이불 속으로 들어오자 살이 닿았고, 살이 닿자 여자의 몸이 꽁꽁 얼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자는 몸이 꽁꽁 얼도록 어딘가 다녀왔던 것이다. 여자는 그날 이후에도 거의 매일 같이 밤 외출을 했다. 박 노인은 여자가 밤 외출을 할 때마다 가슴을 졸였다. 여자가 자신을 배신하고 달아날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박 노인은 마침내 여자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밤외출을 알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야행증인가?)

박 노인은 여자를 미행하다가 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자는 밤 외출을 하여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을과 뒷산을 미친 듯이 쏘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박 노인은 여자가 샛서방질을 하지 않는 것이 다행스러웠으나 궁금증이 일어났다. 여자가 야행증이나 몽유병이 아니라면 밤중에 자다 말고 일어나서 돌아다닐 리가 없는 것이다. 박 노인은 그 후부터 설희를 미행하지 않았다. 설희가 샛서방질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닌 이상 굳이 뒤를 밟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밤에 혹시 꿈을 꾸나?"

언젠가 박 노인이 설희에게 넌지시 물어본 일이 있었다.

"."

설희가 몽롱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설희의 눈빛은 꿈을 꾸듯 먼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무슨 꿈?"

"영혼 마차."

설희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을과 야산을 헤매고 다녀 지친 기색이었다.

"영혼 마차?"

박 노인은 어리둥절했다.

"."

"영혼 마차가 뭔데?"

"영혼을 싣고 다니는 마차예요."

"영혼을 싣고 다니는 마차? 그런 마차가 어디 있어?"

"난 가지고 있었어요! 그건 제 남편 거예요."

뜻밖에 설희가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박 노인은 설희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설희의 얼굴이 전에 없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게다가 영혼 마차라는 말도 생소하기 짝이 없어서 그런 이상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박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아직도 미명의 새벽이었다. 이제서야 겨우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 오고 있을 뿐 벌판과 마을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바람이 차군. )

박 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바람이 불면 자꾸 눈물이 비어져 나와서 여간 주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설희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박 노인은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아침이 이른 집은 소 여물을 쑤는지 푸른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들은 불이 꺼진 채 조용했다.

(이 애가 산에 올라갔나?)

마을을 한 바퀴 돌아도 설희가 보이지 않자 박 노인은 뒷곁의 야산을 휘적휘적 오르기 시작했다. 설희를 처음 발견한 산이었다. 집 바로 뒤의 산은 낮으막했으나 그 뒤로는 험준한 산들이 첩첩으로 이어져 있었다.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의 지맥이었다. 설희는 집 바로 뒤의 산골짜기에 쓰러져 있었다.

(저것이 뭘까?)

박 노인이 산중턱에 이르자 저만치 앞에 있는 나뭇가지에 희끗희끗한 옷가지가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낯익은 여자의 옷이었다. 박 노인은 눈이 커지면서 가슴이 터질 듯이 방망이질을 치는 것을 느꼈다. 그 옷은 설희의 옷이 분명했다. 박 노인은 달음질을 치듯이 허겁지겁 산을 올라갔다. ..... 박 노인은 나뭇가지에 대롱거리고 있는 옷가지가 시야에 뚜렷이 들어오자 가슴이 철렁했다. 설희가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상수리나무 가지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설희가 목을 맨 것이었다. 박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그러나 박 노인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설희에게 다가갔다. 설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된 모양으로 사지가 축 늘어져 있었다.

(이럴 수가 없어.... )

박 노인은 비통했다. 지난밤에도 설희는 박 노인의 옆에 누워 아기처럼 편안하게 잠을 잤었다. 그런데 그 설희가 죽은 것이다. 박 노인은 설희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휘청대는 걸음으로 설희에게 다가가서 발목을 잡아 보았다. 그러나 설희의 발목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미경은 최종열의 원고에서 시선을 떼었지만 최종열이 무엇 때문에 박 노인과 설희라는 여자를 소설 속에 등장시켰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6

미경은 우두커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시간은 이제 새벽 1시가 지나 있었다. 그러나 창밖에는 줄기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소설은 아직 10. 26이나 12. 12는 언급도 하지 않고 있는데 왜 그런 것일까?)

미경은 최종열의 작품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설희라는 여자의 죽음이 기묘한 느낌으로 가슴에 젖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경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서 다시 최종열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침대에 엎드려 원고를 읽은 탓에 팔이 아팠다. 그러나 원고는 계속 읽어야 했다.

 

박 노인은 멀뚱멀뚱 형사를 쳐다보았다. 형사는 박 노인의 대답이 마땅치 않은지 짜증을 부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할아버지. 알만한 분이 왜 이러세요? 할아버지가 죽은 여자 신원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나도 딱합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어떻게 하겠소?"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죽은 여자를 어떻게 만났어요?"

"눈 속에 쓰러져 있는 것을 데려 왔소."

"눈 속에요?"

"그렇소."

"죽은 여자는 무엇 때문에 눈 속에 쓰러져 있었습니까?"

박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것은 박 노인도 몹시 궁금해하던 일이었다.

"모르오."

"여자의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모르오."

"여자가 말하지 않던가요?"

"전혀 말하지 않았소. 여자는 무엇을 하는 여자인지, 어디에 사는 여자인지 한 번도 말하지 않았소. 심지어 여자는 자신의 이름조차 말하지 않았소. 여자가 기껏 말한 것은 영혼 마차라는 말뿐이었소."

"영혼 마차가 무엇입니까?"

"영혼이 타고 다닌다는 마차요."

박 노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박 노인도 영혼 마차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만 했다. 형사는 박 노인을 의뭉스러운 눈으로 살피며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 밖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까?"

"안 했소. 내 생각엔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 같았소."

"처음 그 여자를 보았을 때의 옷차림, 그러니까 눈 속에 쓰러져 있었을 때의 행색은 어땠습니까?"

"거지꼴이었소. 그래서 집으로 업고 와 방에 눕히고 불을 때서 몸을 따뜻하게 해주었소."

"그 뒤에 같이 살았습니까?"

"그렇소."

"여자가 눈 속에 쓰러져 있었던 것은 언제입니까?"

"지난 12월이요."

"작년이요?"

"그렇소."

박 노인은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아 물었다. 그러자 형사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사건이 나던 날 밤 여자와 같이 주무셨습니까?"

"같이 잤소."

"그런데 새벽에 나갔다는 말씀이죠?"

"새벽인지 밤인지는 모르겠소. 나는 잠을 자고 있었으니까.... 새벽에 깨어나 보니 여자가 없었소."

"그래서 찾아 나섰다는 말씀이죠?"

"그렇소."

박 노인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 노인은 아직도 설희의 죽음이 실감되지 않고 있었다.

"동침도 하셨습니까?"

형사가 박 노인을 우두커니 째려보다가 퉁명스럽게 말질을 했다.

"그렇소."

"아무튼 좋습니다. 여자의 신원이야 지문 조회를 하면 금방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죽은 여자가 그 높은 상수리나무 가지에 올라가서 목을 맬 수 있을까요?"

"모르겠소. 내 생각엔 그 나무에는 올라가지 못할 거 같소."

"그렇다면 살해되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나도 살해되었다고 생각하오. 이래뵈두 나도 경찰에서 늙은 몸이오. 자신의 과거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가 어떻게 자살할 생각을 하겠소? 게다가 목을 맨 나이롱 줄은 우리 집에 없는 거요."

"그럼 그 나이롱 줄을 마을에서 본 일이 있습니까?"

"없소."

박 노인은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살인자가 왔다는 얘기 아닙니까?"

"모르겠소."

"아무튼 좋습니다. 여자가 살해된 것은 분명하고 현재는 목격자도 없고 뚜렷한 용의자도 없습니다. 물론 수사는 우리가 하겠지만 영감님도 집에 조용히 계십시오. 영감님이 경찰에서 청춘을 보낸 분이라 일단 댁으로 보내 드리는 겁니다."

"알겠소."

박 노인은 젊은 형사의 훈계조 얘기를 듣고서야 수사계를 나왔다. 젊은 형사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박 노인이 경찰관으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을 하지 않았더라면 젊은 형사는 구속부터 하고 조사를 했을 것이 분명했다. 경찰서를 나오자 벌써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리고 있었다. 박 노인은 경찰서 골목을 느릿느릿 걷다가 순댓국집에 들어가 국말이 한 그릇을 시켜놓고 소주 한 병을 비운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썰렁한 냉기가 돌고 있었다. 박 노인은 군불도 지피지 않고 이불을 깔고 누웠다. 술기운이 돌기도 했으나 몹시 피로했다. 오늘 하루의 일이 모두 거짓말 같고 여전히 꿈을 꾼 기분이었다. 박 노인은 그날 밤 선잠을 잤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머리맡이 어수선하고 잠자리가 뒤숭숭했다. 눈을 감으면 설희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떠오르고 눈을 뜨면 사라지곤 했다.

이튿날 박 노인은 새벽에 눈을 떴다. 온몸이 으실으실 떨리고 있었다. 불을 때지 않은 방바닥이 새벽이 되자 얼음장처럼 냉골로 변해 있었다. 박 노인은 부엌에 나가 군불부터 지폈다. 연탄을 피우는 방이 있었으나 연탄을 갈기가 싫어서 항상 군불을 지피고 살았었다. 마른 장작에 불이 붙자 박 노인은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비로소 몸이 따뜻해지면서 한껏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느 놈이 설희를 죽였을까?)

박 노인은 설희의 하얀 얼굴을 생각하며 두 눈을 훔쳤다. 설희의 죽음 때문에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괴고 있었다.

(설희가 죽다니.... )

박 노인은 허망했다. 설희가 무엇을 하던 여자인지, 어디에 살던 여자인지 알 수 없었으나 박 노인은 설희로 인해 잠깐 동안 이나마 쓸쓸한 노후를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분에 넘치는 행복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설희가 죽었다고 생각하자 앞으로의 여생이 적막하게만 생각되었다. 날이 밝자 박 노인은 읍내로 나가서 해장국 한 그릇을 먹고 돌아왔다. 읍내 경찰서에서 형사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겨울 해가 설핏이 기울고 있을 때였다. 형사는 설희의 신원이 밝혀졌는데 이름은 채은숙이고, 나이는 36세이며, 전 중원일보 정치부 기자 강한섭의 부인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설희의 죽음을 수사하기 위해 수사본부가 설치될 것이며 서울에서 기자들이 몰려와 취재 경쟁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 노인은 형사의 전화를 받고 난감했다. 가슴이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설희의 죽음조차 황망하기 짝이 없는데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기자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설희의 죽음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형사의 말대로 마장면 지서에 수사본부가 설치된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그러나 수사본부가 설치되기에 앞서 서울에서 기자들이 몰려와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다. 형사들은 어찌된 일인지 건성건성 수사를 하고 있었다. 경찰 생활을 오랫동안 한 박 노인은 경찰이 수사에 열의가 없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기자들도 설희의 죽음을 사회면에 일제히 보도했으나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던 것과는 달리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보도하고 말았다.

(하기야 여자 한 사람 죽었다고 신문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할 리가 없지. )

박 노인은 신문이 설희의 죽음을 대서특필하지 않은 것을 이해했다. 설희의 죽음은 비록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해도 단순하게 목을 매어 죽은 것이다. 엽기적인 살인이 아닌 만큼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사본부는 사흘 동안 형식적인 수사를 한 뒤에 사건을 자살로 매듭짓고 말았다. 신문도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보도했다.

(설희는 자살한 것이 아니야!)

박 노인은 경찰의 발표와 신문의 보도에 강한 불만을 느꼈다. 신문은 경찰의 발표를 짤막하게 인용하여 보도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설희의 남편인 전 중원일보 기자 강한섭이 남한강 상류의 야산에서 목을 매어 죽은 시체로 발견된 뒤 설희가 그 충격으로 정신이상을 일으켰다는 토막 기사 하나는 박 노인에게 더욱 커다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공교롭게도 남편과 부인이 모두 목을 매어 죽은 것이다. 그러나 박 노인이 사건을 수사할 수는 없었다. 다만 남편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비통해하는 설희, 그리고 그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신이상을 일으켜 거리를 방황하는 설희의 애처로운 모습을 생각하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미경이 잠자리에 든 것은 새벽 3시가 5분이나 지났을 때였다. 최종열의 소설에 등장하는 채은숙과 강한섭이 누구인지 미경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비통하게 죽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강한섭은 민족지 중원일보의 정치부 기자로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쟁쟁한 이름을 날렸었다.

(최종열은 실명으로 소설을 이끌어 가고 있어!)

미경은 눈을 감은 채 최종열이 소설 속에서 주장하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최종열의 작품 의도가 무엇인지 아직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미경은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최종열과 이지애, 그리고 최종열의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자꾸 미경의 꿈속에 나타나고 있었다.

미경은 아침 8시에 일어났다. 서울발 새마을호 열차가 840분에 출발하기 때문이었다. 날씨는 쾌청했다. 새벽까지 내리던 비는 언제 그쳤는지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게 개어 있었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새마을호 열차가 지나는 들은 황금빛으로 출렁거리고 있었고 먼 산은 붉게 단풍이 들어 추색이 짙었다. 미경은 열차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차창에 기대어 가고 오는 들판을 내다보았다. 차창을 스치는 가을 풍경은 풍요롭다 못해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미경이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가 지났을 때였다. 미경은 샤워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잠을 설쳤기 때문에 금방 잠이 오리라고 생각했으나 기이할 정도로 잠이 오지 않았다. 미경이 침대에 누웠는데도 그때까지도 덜컹대는 열차의 굉음이 귓전에 이명처럼 쟁쟁하게 남아 있었다. 미경은 잠이 오지 않자 침실에서 나와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최종열의 소설을 다시 읽을 생각이었다.

(소설의 구성을 절묘하게 짜고 있어. )

미경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동작대교 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집에 돌아오자 안온한 기분과 함께 허전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안온한 느낌은 낯선 곳에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편안함이었고, 허전한 것은 최종열의 실종과 이지애의 죽음을 확인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이었다. 미경은 입언저리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낯선 곳, 모르는 남자, 뱃고동 소리가 은은한 부두, 그리고 처량하게 내리는 가을비.... 한 작가의 실종과 그의 정부인 여자의 의문사.... 미경은 가슴 속으로 여러 가지 의문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최종열의 원고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최종열이 중원일보의 정치부 기자를 동원한 것은 소설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한경호와 이정란이라는 인물이 무엇 때문에 등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강한섭 기자의 부인이 등장하는 것은 7, 80년대의 정치 상황이 암울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장치로 생각되었다.

 

박 노인은 명치 끝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며칠째 가슴이 꽉 막혀 있는 기분이었다. 설희가 죽은 뒤의 일주일이 박 노인에게는 세상이 무너진 듯 참담하기만 했다. 경찰의 조사나 기자들의 취재는 형식적인 것이어서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으나 설희의 죽음은 박 노인의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10년 전 늙은 아내가 병으로 죽었을 때도 박 노인은 이처럼 커다란 슬픔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아내가 위장암으로 거의 6년이라는 긴 세월을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탓도 있겠으나 박 노인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설희의 죽음은 견딜 수 없도록 비통하고 쓸쓸했다. 설희가 채은숙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고, 강한섭이라는 남편까지 있었으나 박 노인은 그런 것들이 모두 거짓 같았다. 설희는 오로지 박 노인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다가 죽은 여인으로만 여겨지고 있었다.

(그렇게 죽으려면 무엇하러 이곳까지 왔을까?)

박 노인은 설희가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박 노인은 매일 같이 설희의 환영을 그리며 살았다. 설희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밤이면 옆에서 자고 있는 듯했고 낮에는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설희가 하얗게 웃으며 들어올 것만 같았다.

(참한 여자였어. )

박 노인은 설희를 생각하면서 산을 향해 비칠비칠 걸음을 옮겼다. 석양 무렵이었다. 짧은 겨울 해가 서산으로 기울면서 찬바람이 일고 있었다. 날씨는 차가웠다. 어제 밤부터 기온이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해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늘은 얼음 조각처럼 투명했다. 그러나 이따금 쩡쩡거리며 언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산을 오르는 황토 길바닥도 잔뜩 얼어붙어 있었다. 박 노인은 몸을 바짝 웅크리고 걸었다. 어쩌자고 산을 오르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설희를 처음 발견한 곳, 그리고 설희가 죽음을 당한 상수리나무를 귀신 들린 듯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이 박 노인의 요즈음 일과였다. 박 노인은 설희를 처음 발견한 곳부터 찾아갔다. 그곳은 산의 중턱쯤 되는 골짜기였다. 장마철에는 물이 흐르기도 했으나 평소에는 칡넝쿨만 잔뜩 우거진 쓸모없는 골짜기였다. 그래도 골짜기가 깊어서 가을과 겨울에는 마른 나뭇잎이 수북이 쌓이곤 했다. 설희가 그곳을 찾아와 쓰러진 것은 골짜기가 바람막이가 되어 주고 나뭇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설희는 나뭇잎을 쓸어 모아 깔고 밤을 지새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설희는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잠이 들었고 설희가 잠이 든 뒤에 눈이 내려 얼어 죽을 뻔했던 것이다.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찾아와 얼어 죽을 뻔했을까?)

박 노인은 골짜기에 도착하자 가슴이 저려 왔다. 설희가 인가를 찾지 않고 산을 찾은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박 노인은 눈을 부비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또 눈물이 그렁그렁 괴고 있었다.

(말년에 내가 분에 넘치는 복을 누린 거야.... )

박 노인은 죽은 설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설희가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런 산골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신처럼 늙은 노인에게 몸을 유린당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설희는 가족이 있는 여자였다. 남편은 죽었으나 자녀들도 있을 것이고 시집 식구들이나 친정 식구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늙은이가 설희의 몸을 유린한 것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할 것인가. 설희 역시 싸늘한 시체가 되기는 했지만 영혼이 있다면 저승에서라도 자신을 증오할 것이다. 박 노인은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저렸다.

박 노인은 설희가 쓰러져 있던 골짜기에서 한참동안이나 서 있다가 죽은 장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벌써 해가 떨어져 가고 있어서 산은 땅 그림자가 길게 깔리고 있었다. 이제 곧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덮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어느 골짜기에서 늑대의 울음소리 같은 음산한 여우 울음 소리가 들릴 터였다. 박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날씨가 차갑기도 했지만 산의 분위기가 으스스했다. 박 노인은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발밑에서 나뭇잎이 밟히는 바스락 소리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바람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을씨년스럽게 흔들고 있었다.

이내 박 노인은 설희가 죽은 상수리나무 밑에 이르렀다. 가슴이 뻐근해 왔다. 한때 살을 섞고 살던 여자였다. 그 여자가 있었기에 박 노인은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박 노인은 설희가 눈 속에 쓰러져 있고, 자신과 함께 두 달 남짓 살을 섞으며 함께 살고, 갑자기 죽은 시체로 발견된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설희의 죽음을 조사하는 경찰의 수사도 싱겁기 짝이 없었다. 경찰은 의도적으로 자살로 매듭을 지은 것이 분명했다.

(내가 정녕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꿈이 아닐 터였다. 집에는 설희가 입던 옷가지와 소지품들이 그대로 있었다. 옷가지는 모두 박 노인이 설희에게 사 준 것들이었다. 설희는 눈 속에 쓰러져 있었을 때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얇은 여름옷 차림이었다. 박 노인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설희를 목욕시켜 주고 옷을 갈아 입히던 일이 생각났다.

(살결이 무척 고운 여자였는데.... )

박 노인은 그 생각을 하자 쓸쓸해졌다. 설희의 희고 매끄러운 몸뚱이, 농익은 과일처럼 단내가 풍기던 몸뚱이를 생각하자 가슴이 묵직하게 저렸다. 지난 두 달 동안 설희의 육체는 완벽하게 그의 소유였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처녀의 살결처럼 뽀얗게 윤기가 흐르던 나신.... 박 노인은 그 신비스러운 여체를 서러워하며 깊이 탐험했었다. 박 노인은 정년 퇴직을 한 후 남자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었다. 특별히 남자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대상도 없었고 굳이 거리의 여자를 찾아가 관계를 맺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기능이 상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희는 그에게 남자의 기능을 회복시켰을 뿐 아니라 삶의 의미까지 찾아주었던 것이다.

(, 소지품 중에 서류 봉투가 있었지?)

박 노인은 문득 설희의 소지품 생각이 났다. 설희의 소지품은 박 노인이 장롱 속 깊이 넣어 두었었다.

(그래.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봐야겠어. )

박 노인은 몸을 돌려 집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설희에게는 그 봉투를 박 노인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었다. 혹시라도 설희가 그 봉투를 찾게 되면 박 노인을 떠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마을로 내려오자 사방이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박 노인은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 장롱 속을 뒤졌다. 다행히 설희의 서류 봉투는 그대로 있었다. 박 노인은 불을 켜고 서류 봉투를 꺼냈다. 서류 봉투엔 두툼한 노트가 들어있었다. 박 노인은 노트의 첫 장을 펼쳤다.

 

영혼 마차

 

노트의 첫 장엔 뜻밖에도 '영혼 마차'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씌어 있었다.

(설희가 찾던 것이 이 노트였던가?)

박 노인은 커다란 흉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정신이 번쩍 났다. 박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영혼 마차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설희의 노트를 읽기 시작했다.

 

 

5장 떠나가는 영혼들

 

1

미경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최종열의 소설은 액자소설 얼개로 전개되고 있었다. 설희와 박 노인이 등장하는 부분은 거기서 끝이 나고 소설은 다시 이정란이라는 여자로 시작되고 있었다. 소설은 두 여자의 삶을 번갈아 교차시키며 전개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설의 도입부가 모두

의문의 죽음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미경은 차창 밖을 우두커니 내다보았다. 박 노인이 설희와 육체 관계를 맺은 생각을 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미경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최종열이 무엇 때문에 민족지 중원일보의 기자인 강한섭의 부인 채은숙을 박 노인의 정부로 격하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설이 끝을 맺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죽은 강한섭 기자나 그 부인을 욕되게 하는 일이 분명했다.

(혹시 이것은 실화가 아닐까?)

미경은 거기까지 생각하자 가슴이 뻐근해 왔다. 중원일보의 기자 강한섭의 죽음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경찰이 자살로 단정을 내렸으나 세간에서는 타살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미경은 다시 최종열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최종열의 소설이 어느덧 미경을 사로잡고 있었다.

 

날씨는 가을답지 않게 후덥지근했다. 거리는 어둠이 칠흑처럼 덮여 있었으나 군데군데 들어차 있는 숙박업소의 불빛으로 인해 빛과 어둠의 경계가 뚜렷했다. 비가 오려는 것일까. 이따금 축축한 물기가 묻어 있는 바람이 보도에 서 있는 가로수들의 무성한 잎사귀를 검푸르게 흔들고 지나갔다.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남한강의 지류를 따라 강변도로가 동서로 길게 뻗어 있고, 경관이 수려한 강변으로 여관과 모텔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숙박업소지대에 <아리랑파크>는 서 있었다. 읍내 번화가에서는 불과 5,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그러나 별장지대처럼 이곳은 언제나 조용했다. 이따금 강 파도 소리만 바람 소리에 섞여 한가롭게 들려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1989109. 여주 군민의 날인 이날 아리랑파크의 주인 강인숙은 전날과 다름없이 내실에 앉아서 운수떼기 화투를 치고 있었다. 모텔은 조용했다. 룸은 아직도 비어 있는 곳이 많았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12시가 되기 전에 모두 찰 것이고, 그 무렵이면 손님들의 시중도 오군 혼자서 충분히 감당할 것이다. 강인숙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일까. 날씨가 후덥지근한데도 아까부터 전신에 오한이 일어나고 있었다.

(쌍화탕이라도 하나 마시던가 해야지..... )

강인숙은 화투장을 쓸어서 화투곽에 담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멀리서 불꽃놀이를 하는 듯 함성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강인숙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10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강변도로는 여전히 조용했다. 이따금 아베크족들과 술에 취한 젊은이들이 오가는 소리가 조용조용 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인터폰의 벨이 삐리리 울렸다. 강인숙은 인터폰의 송수화기를 들었다. 508호에서 울리는 인터폰이었다. 508호엔 뚱뚱한 여자와 키가 멀쑥하게 큰 사내가 들어있었다. 둘 다 30대 후반으로 보였으나 여자는 장님이었다. 그러나 특별히 수상한 구석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508호입니다. 술 좀 갖다가 주실래요?"

송수화기의 목소리는 기분 나쁘게 음침한 사내의 것이었다.

"무슨 술이요?"

"맥주요. 맥주 세 병 하고 마른안주 좀 갖다 줘요."

"알았어요."

강인숙이 대답을 하자 찰칵, 하고 인터폰이 끊겼다. 강인숙은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밖을 내다보았다.

"오군아!"

"....."

"오군아!"

강인숙은 복도를 내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오군은 어디로 갔는지 대답이 없었다.

"얜 또 어디를 갔어?"

강인숙은 짜증을 부리며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고 비닐랴으로 포장을 한 마른 안주를 꺼내 컵과 함께 쟁반에 담았다. 오군이 보이지 않으므로 508호까지 손수 가져가야 했다. 그것은 어쩐지 꺼림칙하고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강인숙은 내키지 않았으나 쟁반과 맥주병을 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걸음이 무거웠다. 그것은 계단을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심해져 4층에 이를 땐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리기까지 했다.

(몸살이야. )

강인숙은 머릿속의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강인숙이 508호의 문을 두드리자 사내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때 강인숙은 방 안에서 찬 바람이 휘익하고 불어오는 기분을 느꼈다. 강인숙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맥주와 안주쟁반을 사내에게 넘겨주었다.

"고마워요."

사내가 맥주와 쟁반을 받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강인숙은 사내의 미소가 자신의 몸을 벌레처럼 징그럽게 더듬고 있는 것 같아 얼굴을 찡그렸다.

"얼마지요?"

사내가 맥주와 쟁반을 들여놓고 강인숙에게 물었다.

"6천 원예요."

강인숙은 사내의 어깨너머로 힐끗 방안을 살폈다. 갑자기 여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방 내부의 문이 반쯤 닫혀 있어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사내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열어놓은 채였다. 강인숙은 그때서야 벽에 등을 기대고 침대에 앉아 있는 여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여자는 눈처럼 하얀 속옷 차림이었고, 그래서 거대해 보이기까지 하는 여자의 젖무덤이 유(U)자로 깊숙이 파인 속옷 밖으로 풍만하게 드러나 있었다.

(몸이 뚱뚱하니 가슴까지도 저렇게 크군.)

강인숙은 야릇한 질투심을 느끼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의 희고 뽀얀 가슴에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여자는 밤인데도 검은색의 선글라스를 쓴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 있어요."

사내가 만 원권 한 장을 강인숙에게 내밀었다.

"거스름돈을 안 가져 왔어요. 곧 갖다가 드릴께요."

강인숙은 재빨리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강인숙은 사내의 미소가 어쩐지 차갑게 느껴졌다.

"됐어요."

"?"

"나머지는 아주머니 심부름 값입니다."

사내가 필요 없다는 뜻으로 손사래짓을 했다.

"고맙습니다."

강인숙은 약간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며 사내에게서 돈을 받았다. 자신이 모텔의 주인이 분명한데도 이따금 손님들로부터 종업원 취급을 받을 때가 있었다. 심지어는 돈을 주면서 동침을 요구하는 손님까지 있었다. 508호의 문이 딸칵하고 닫혔다. 강인숙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잠시 서 있었다. 붉은 카피트가 깔린 복도 저 켠에서 축축하고 어두운 바람이 불어오고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니 개 짖는 소리가 아니라 저 먼 골짜기에서 피에 굶주린 늑대가 울고 있는 듯한 소리였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강인숙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공연한 생각이었다. 강인숙은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1층 현관에 도착하자 오군이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다.

"어디 갔었니?"

강인숙은 내실로 들어가며 오군에게 눈을 오군이 담배를 피우는 태도에 불량끼가 느껴졌다.

"밖에서 불꽃놀이 하는 걸 봤어요."

오군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까짓 불꽃놀이를 뭘 볼 게 있다구....."

"군민의 날이잖아요? 공설운동장에서는 노래자랑도 한대요."

"그런 거 백날 하면 뭘해? 약방에 가서 쌍화탕이나 하나 사와."

강인숙은 오군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었다.

"쌍화탕이요?"

"그래!"

"어느 손님이 감기 걸렸어요?"

"손님이 아니라 내가 걸렸어."

강인숙이 짜증스럽게 내뱉았다.

"알았어요."

오군이 천 원짜리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강인숙은 내실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복도로 나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들이 508호에 들어온 것은 이틀 전의 일이었다. 날이 어둑어둑 저물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은 택시에서 내리자 강이 내려다보이는 방을 요구했고, 그 방에 투숙한 뒤로는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갈 때 외에는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소란을 피우는 일도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손님이었다. 다만 사내가 이상하리만치 기분 나쁜 인상이었고 그가 옆을 지날 때면 찬바람이 이는 것 같은 서늘한 느낌이 들곤 했다. 여자도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인상을 풍겼다. 물론 여자는 장님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언제나 말이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사내에 비해 부유해 보였다. 몸이 뚱뚱하긴 했으나 살결은 희고 매끄러웠고 옷은 고급스러웠다. 그러나 검은 안경은 그녀의 얼굴을 전체적으로 어두워 보이게 했다. 마치 죽음의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었다. 강인숙은 내실을 나와 모텔 앞 큰길로 나섰다. 어둠이 삼단 같은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는 강변도로로 물기 묻은 축축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강인숙은 하늘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멀리서 군민의 날을 축하하는 폭죽이 터지고 불꽃이 어두운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리고 탄성이 쏟아졌다. 사람들이 불꽃을 바라보며 환성을 지르고. 강인숙은 그 환성을 꿈결인 듯 들었다. 몸이 좋지 않아서인지 환성이 날벌레들의 날개짓 같았다.

(비야!)

강인숙은 얼굴을 들고 낮게 중얼거렸다. 얼굴로 푸슷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도 일고 있는지 숙박업소들 앞에 조경용으로 심어 놓은 관상수의 잎사귀들이 검푸른 빛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2

김순영은 차 보따리를 들고 천천히 다방을 나섰다. 또 여관 배달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김순영은 걸음을 서둘렀다.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나마 티켓을 끊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여주 일대는 티켓다방이 성업 중이었다. 물론 모든 다방이 티켓을 위주로 영업을 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적지 않은 다방들이 티켓을 위주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김순영이 있는 다방도 티켓다방이었다. 아가씨들이 다방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아홉이나 되는 것도 티켓 때문이었다. 티켓을 끊지 않아도 여관이나 술집으로 배달이 많았다. 김순영은 군청 건물 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청사 뒤편이 오대산 어딘가에 원천이 있다는 남한강의 지류였고,그 강의 뚝을 따라 강변도로가 길게 뻗어 있었다. 그리고 강변도로와 인접하여 숙박업소들이 즐비했다.

(비가 오나?)

김순영은 군청의 담모퉁이를 돌다 말고 컴컴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두운 하늘에서 성긴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뿌리고 있었다.

(이 가을에 무슨 비람!)

김순영은 얼굴을 찡그렸다. 바람까지 일고 있는지 빗방울이 차갑게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김순영은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차를 배달시킨 것은 <녹원장> 여관이었다. 이름은 장급 여관이었으나 내부는 여인숙처럼 보잘것없었다. 녹원장은 신축건물인 아리랑파크 바로 옆에 있었다. 김순영은 종종걸음으로 골목길로 꺽어들었다. 담뱃가게 바로 옆으로 강변도로로 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이 하나 있었고, 그 골목을 지나서 50미터쯤 가면 아리랑파크가 있었다. 골목은 조용했다. 군민의 날이기 때문에 곳곳에서 여러 가지 행사가 있었으나 이제는 모두 집으로 돌아갔는지 거리엔 인적이 끊기고 차량도 드물었다. 골목을 나서자 강변도로가 나타났다. 강변도로도 이미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도로 밑의 강물은 소리 없이 서쪽으로 흐르고 도로엔 지나는 차량이 없었다. 숙박업소들이 줄지어 서 있는 도로의 인도엔 오늘따라 아베크족도 보이지 않았다.

김순영은 인도를 따라 또박또박 걷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보도블록을 때리는 하이힐의 굽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그녀는 흡족했다. 비록 차 배달을 하고 있었으나 새로 산 하이힐이 마음에 들었다. 스커트는 짧았다. 스커트 자락이 무릎에서 20센티나 올라가 겨우 둔부를 가리고 있을 정도였다. 위에는 타이즈처럼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색의 울 셔츠였다. 머리는 얼굴이 앳되어 보이면서도 요염해 보이게 뒤로 묶어 틀어 올려 빗을 꼽았다. 다방에서 아가씨들과 노닥거리며 차를 마시는 손님들은 아가씨가 어리면서도 퇴폐적인 냄새를 풍기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티켓을 위주로 영업을 하는 다방은 아가씨들의 옷차림이 허벅지가 죄 드러나도록 짧은 미니스커트나 반바지를 입어야 했다. 그런 차림을 해야만 손님들이 잘 찾았고 그와 비례해서 아가씨들의 수입이 늘어나는 것이다. 김순영은 이미 티켓다방의 그런 생리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왕에 티켓다방에서 일을 할 바에야 체면 차리지 말고 돈을 벌자는 생각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김순영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찬바람이 휘익하고 불어오면서 가슴이 철렁하고 등줄기가 서늘했다. 아리랑파크 모텔 앞이었다. 김순영은 까닭을 알 수 없는 공포로 가슴이 격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왜 이러지?)

김순영은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어떤 공포로 인해 머리끝이 곧추서고 있는 기분이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김순영은 아리랑 파크의 붉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착각이었을까. 그때 갑자기 아리랑파크의 어느 방에서 여자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일까?)

김순영은 얼굴을 찡그렸다. 언뜻 아리랑파크의 어느 방에서 불량배가 여자를 겁탈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나쁜 일이었다. 김순영도 다방에서 차를 나르기 전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겁탈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비명소리는 두 번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김순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리랑파크의 방들은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었으나 조용했다. 김순영은 녹원장을 향해 걸음을 재게 놀렸다. 녹원장에서 차를 시킨 사람은 뜻밖에 40대의 남자 혼자였다. 김순영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사내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차 보따리를 풀렀다.

"밤인데 커피를 드세요?"

김순영은 프림과 설탕을 타면서 셈에 없는 얘기를 건넸다.

"잠이 오지 않아서...."

사내가 담배를 물면서 말끝을 얼버무렸다. 사내는 파자마 차림이었다. 머리가 단정한 것으로 보아 출장을 나온 회사원 같았다. 김순영은 스커트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사내에게 불을 붙여주었다.

"그럼 술을 드시죠."

김순영은 애교스럽게 눈웃음을 쳤다.

"혼자서 무슨 기분으로 술을 마셔?"

"여기 혼자 오셨어요?"

"."

"그럼 밖에 나가서 술도 마시고 그러세요."

"아가씨하고 같이 마시면 모를까 무슨 재미로 혼자 술을 마셔?"

"저두 사 주실래요?"

"마실래?"

"사 주시면 마시죠."

김순영이 살갑게 눈웃음을 쳤다. 어차피 사내가 여관으로 차를 주문한 것은 꿍꿍이 속이 있었기 때문일 거였다.

"티켓을 끊어야 하나?"

사내도 티켓다방에 대해서는 들은 풍월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요새 남자들 중에 티켓다방을 모른다면 숙맥일 것이다.

". 두 시간만 끊으세요."

김순영은 기분이 좋아졌다. 아리랑파크 앞에서 느끼던 이상한 공포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지."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김순영은 다방에 전화를 걸어 티켓 두 시간이라고 통고했다. 사내는 인터폰으로 여관 카운터에 맥주를 주문했다. 김순영이 녹원장 여관을 나온 것은 얼추 한 시간 반이 지났을 때였다. 약속 시간은 두 시간이었으나 사내가 목적한 바를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었다. 사내는 맥주 두 잔을 마시자 김순영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졌고 김순영은 사내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던 것이다. 티켓 요금은 다방의 수입이었으나 손님에게서 받는 화대는 김순영의 수입이었다. 현관으로 내려오자 비바람이 쏴아 하고 몰아쳐 왔다. 김순영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빗방울은 어느덧 아스팔트 바닥을 적실 정도로 굵어져 있었다.

(재수 없게 왠 비가 이렇게 쏟아져?)

김순영은 차 보따리를 들고 망연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가 오고 있어서인지 바람이 차가웠다. 김순영은 여관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차가운 빗줄기가 김순영의 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김순영은 뛰듯이 빠르게 걸었다. 허벅지가 드러날 정도의 짧은 미니 스커트와 하이힐 때문에 달음질을 치기가 여의치 않았다. 도로는 이미 인적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밤이 깊은 탓인지 차량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김순영은 머리 위에서 창문이 드르륵하고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리랑파크 모텔 앞이었다. 김순영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뭘 하려는 거야?)

김순영은 걸음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리랑파크 모텔의 창에 한 여자가 상체를 반쯤 내밀고 있었다. 불빛이 희미하여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여자는 거꾸로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

김순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재빨리 눈을 떴다. ...... 그러나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김순영이 눈을 뜨자 여자는 마치 텔레비젼의 슬로우모션 화면처럼 느리게 창을 빠져나와 추락하고 있었다. 순간적이긴 했으나 여자가 입고 있는 하얀 내의 때문에 김순영은 커다란 빨래가 펄럭거리며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김순영은 눈을 꽉 감았다. 이내 퍽, 하는 소리가 김순영의 바로 앞에서 들렸다. 김순영은 눈을 번쩍 떴다. 빨래가 펄럭거리는 것 같은 하얀 물체,그 여자가 김순영의 바로 앞에 쓰러져 있었다. 비명소리조차 없었다. 김순영은 자신의 눈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김순영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었다. 김순영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여 하얀 물체를 살피자 몸집이 유난히 큰 여자였다. 으깨진 여자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사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경련이었다. 김순영은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쓰러진 여자에게서 벌써 피비린내가 역하게 풍기고 있었다.

 

3

빗발은 더욱 굵어져 있었다. 여주경찰서 민 형사 일행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여자는 이미 숨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민 형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여자의 사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요?"

김 형사가 박쥐우산을 뒤로 젖히며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민 형사에게 물었다. 민 형사는 여자의 사체로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여자는 얇은 네글리제 속옷 차림이었으나 흩날리는 빗발에 옷자락이 젖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꽤 선정적이군.... )

민 형사는 죽은 여인의 우람한 몸집을 내려다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현장을 보존해야겠지요?"

김 형사가 다시 물었다.

"살인이래?"

민 형사는 그때서야 죽은 여자의 사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자살이랍니다. 허지만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보존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보존을 해?"

"비라도 맞지 않게 비닐이라도 씌워야죠."

"그래. 사체에 뭘 갖다가 덮고 그 위에 비닐을 덮어."

민 형사는 다시 사체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자의 시체는 참혹했다. 머리와 어깨는 으깨져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살을 해도 하필이면 왜 이런 방법으로 자살을 했을까?)

민 형사는 기분이 착잡했다. 여자가 속옷인 얇은 네글리제 차림으로 자살을 한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비록 죽은 사체라고 해도 살결이 내비치는 속옷으로 인해 몸은 도발적이었다.

"김 형사. 가까운 데서 공의를 불러."

"?"

김 형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검안이라도 해야지...."

민 형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검안은 육안으로 사인을 찾는 것이었다.

"."

김 형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 형사는 파출소의 순경들에게 현장보존 지시를 했다. 이제는 사건조사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고를 한 사람이 누굽니까?"

민 형사는 사체를 둘러싸고 웅성거리는 구경꾼들을 향해 물었다.

"전데요."

그러자 스물 안팎의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 쭈빗거리는 몸짓으로 민 형사의 앞으로 나섰다. 키가 작고 광대뼈가 툭 불거진 청년이었다.

"자네가 제일 먼저 발견했나?"

민 형사는 청년을 아래위로 훑어 보았다. 오랜 형사 생활에 몸에 밴 습관이었다.

"아녜요. 제가 아니고 저기 있는 아가씨예요."

청년이 재빨리 고개를 흔들고 턱짓으로 구경꾼들 틈에 섞여 있는 다방 아가씨를 가리켰다. 민 형사는 다방 아가씨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아가씨는 비를 흠뻑 맞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리와 봐요."

민 형사는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아가씨의 옷차림을 살피며 말했다. 아가씨는 차 보따리까지 들고 있었다. 아가씨가 엉거주춤 민 형사에게 다가왔다.

"아가씨가 맨 처음 발견했나?"

"."

아가씨가 턱을 달달 떨며 대답했다. 허벅지가 죄 드러난 아가씨의 미니스커트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어떻게 해서 발견했어?"

"차 배달을 하고 나오는데 저기서 떨어졌어요."

아가씨가 아리랑파크의 모텔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민 형사는 자신도 모르게 모텔의 방을 올려다보았다. 모텔의 4층 어느 방에서 커텐이 비바람에 음산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민 형사는 공연히 몸이 떨리는 듯한 으스스한 기분을 느꼈다.

"떨어져?"

"."

"뛰어내린 것이 아니고?"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떨어지는 것을 봤어?"

"."

민 형사는 다시 한번 모텔의 창을 올려다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어느 다방에 있지?"

"은성이요."

"은성?"

"."

"이름은?"

"김순영예요."

"나이는?"

"스물한 살에요."

김순영이 망설이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비가 오니까 일단 안에 들어가 있어."

민 형사는 김순영을 모텔 현관으로 들여보냈다. 그동안 김 형사는 파출소의 순경들과 함께 여자의 사체에 담요를 덮고 비닐을 갖다가 씌우느라고 분주했다.

"어떻게 해서 신고를 하게 되었어?"

민 형사는 청년을 보고 물었다.

"다방 아가씨가 사람이 떨어졌다고 알려 주었어요."

"그래서?"

"밖에 나와 봤더니 이 분이 쓰러져 있었어요."

"병원엔 연락했어?"

"그땐 이미 죽어 있었어요."

"자넨 이름이 뭐야?"

"오지호입니다."

"이 여관의 종업원인가?"

"."

"이 여자는 여기 손님이야?"

"."

"언제 투숙했어?"

"이틀 전에요."

"혼자?"

"아닙니다. 남자분하고 같이 투숙했어요."

"그 남자는 어디 있어?"

"저기요."

오지호가 턱짓으로 키가 멀쑥하게 큰 사내를 가리켰다. 민 형사는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사내에게 가까이 갔다. 사내는 창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여자와 일행이라는데 맞습니까?"

"."

"부인되십니까?"

"아닙니다."

"그럼 어떤 사이입니까?"

"그냥 아는 사이입니다."

사내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민 형사는 사내를 아래위로 째려보았다. 죽은 여자가 부인이 아니라면 불륜 관계일 것이고, 죽은 여자와 불륜 관계라면 사내가 제비족일 것이라는 생각이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그냥 어떻게?"

"그냥 아는 사이입니다."

사내가 난처한 듯이 대꾸했다.

"당신 이름이 뭐야?"

"조대현입니다."

"직업은?"

"없습니다."

"없어? 그럼 어떻게 먹고 살아?"

"....."

사내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외로 꼬았다. 대답하기 싫어하는 기색이었다.

"여자의 이름은 뭐야?"

민 형사는 질문을 바꾸었다.

"이정란입니다."

"남편이 있어?"

"죽었습니다."

"?"

"모르겠습니다. 물에 빠진 시체로 발견되었으니까요."

"언제?"

"몇 년 되었습니다."

민 형사는 입을 다물었다. 조대현의 대답은 두리뭉실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가 쏟아지는 길바닥에서 조대현을 마냥 다그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여자가 뛰어내렸습니다."

"여자가 뛰어내리는 걸 봤어?"

"못 봤습니다. 전 초저녁에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었습니다. 여관에서 일하는 청년이 문을 두드려서야 겨우 알았습니다."

"뒤에서 민 거 아니야?"

"제가 왜 이 여자를 뒤에서 밀겠습니까? 전 이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이 여자가 왜 창에서 뛰어내려?"

"모릅니다. 변덕이 심한 여자였으니까요."

"방이 어디야?"

"508호입니다."

"가보자구."

민 형사는 김 형사에게 여자의 사체를 비를 맞지 않도록 여관 복도로 옮기라고 지시한 뒤 조대현을 따라 아리랑파크로 들어갔다. 여관 복도엔 투숙하고 있는 손님들이 모두 나와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508호는 4층이었다. 바깥문은 열려 있었으나 침실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싸운 흔적도 없고 수상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민 형사는 침실과 욕실까지 샅샅이 살펴보았다. 침대 앞에 있는 문갑에 빈 맥주병과 맥주잔이 놓여 있는 쟁반이 있었으나 그것도 어지러져 있지 않았다. 창만이 활짝 열려 있어 빗발이 사납게 들이치고 커텐이 음산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그것만 아니면 지극히 평범한 여관방이었다.

"저 창으로 뛰어내렸나?"

민 형사는 창 가까이 가서 아래를 내다보니 사람들이 아직도 시체 주위에 몰려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김 형사가 파출소의 순경들과 함께 여자의 시체를 옮기려 하자 재빨리 길을 터주었다.

"."

"창이 그다지 크지도 않은데?"

"....."

"유서 같은 것은 없어?"

"없는 것 같습니다."

"방에 한 번 찾아봐."

"."

그러나 민 형사가 조대현과 함께 방을 샅샅이 뒤져도 유서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민 형사는 실망하여 여관 1층으로 내려왔다. 여관의 1층엔 이미 김 형사가 이정란의 사체를 옮겨 놓고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어때?"

"다른 외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김 형사가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다가 말고 민 형사를 쳐다보았다.

"외상?"

"제가 보기엔 뛰어내릴 때 생긴 상처로 인해 사망한 것 같습니다. 어깨와 머리가 아스팔트와 부딪쳤습니다."

"으깨졌나?"

"."

김 형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사체는 참혹했다. 머리와 어깨에서 아직도 검붉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내리고 있었다. 민 형사는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이정란의 사체를 천천히 살폈다. 이정란은 상당히 덩치가 큰 여자였다.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인데도 커다란 가슴과 허벅지는 풍만했다. 게다가 살빛도 투명했다. 민 형사는 또다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김 형사의 말대로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사체는 머리와 어깨 외에는 깨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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