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폭풍처럼 밀려오는 격정
호손 공작 문장이 들어간 깃발을 들고 제복을 입은 수행원 여덟 명이 앞장서고 그 뒤로 조르단과 알렉산드라가 탄 호화찬란한 마차와 하인과 짐을 실은 세 대의 마차가, 또 그 뒤에는 무장한 수사관 여덟 명이 따라갔다. 마차 행렬이 위엄 있게 시골길을 지나는 동안, 나부끼는 깃발과 딸랑이는 은제 마구와 암갈색과 황금색의 제복을 입은 수행원과 황금 문장이 새겨진 번쩍번쩍 광이 나는 호손 공작의 검정색 마차를 구경하기 위해 농부들이 길가로 모여들었다.
일행은 토니의 집 진입로를 지나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토니의 어머니와 동생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고대했다. 그들은 아주 다정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집은 지나치게 위풍당당한 호손 저택과 비교해 아주 아늑하고 포근했다.
호손 영지가 있는 윈슬로 마을이 가까워지자 알렉산드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이 탄 마차 행렬은 지나는 곳마다 마을 사람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어디도 윈슬로만큼 센세이션을 일으키진 못할 것이다. 벌써부터 윈슬로 마을 사람 전부 길거리에 나와 줄을 서서 알록달록한 스카프와 손수건을 흔들며 호소 공작의 귀향을 환영하고 있었다. 사람을 보내 호손 저택의 하인들에게 공작이 온다는 것을 미리 알리고 또 그 소문이 삽시간에 온 마을로 퍼진 게 분명했다.
1년 전에 토니가 왔을 때, 길가에 줄지어 서 새로운 호손 공작으로 그를 환영하면서 마지못해하던 마을 사람들의 인사와, 지금 조르단의 귀향을 환영하는 축제 분위기의 열렬한 인사와는 얼마나 다른가!
“뭐 재미있는 일 있어?”
조르단이 물었다.
알렉산드라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향해 활짝 미소 지어 보였다.
“전 행진을 좋아해요.”
그녀는 약간 장난스럽게 웃으며 솔직히 말했다.
“제 안에는 어린애가 들어 있나 봐요.”
불과 몇 분전에 그녀 안에 자기 아기를 심어 줄, 그것도 어쩌면 당장 오늘밤에 그렇게 할 생각을 하고 있던 조르단은 그녀의 말이 불러일으킨 뜨거운 정염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오늘아침 마지못해 내기를 승낙했던 그녀였기에 조르단은 그녀가 여행 내내 뾰로통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런던을 떠나는 순간부터 알렉산드라는 수줍은 기색이 있기는 했지만 아주 정중하게 그를 대했다. 그녀가 왜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어 조르단은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물어보았다.
알렉산드라는 그의 질문에 놀라며 창문에서 고개를 돌려 수줍게 자기 손을 들여다보더니 천천히 그 아름다운 청록색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당신이 제시한 내기는 공평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났어요. 우리가 결혼한 것은 당신의 실수이기도 하지만 저의 실수이기도 해요.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맞지 않다고 해서 당신만을 비난할 수는 없어요. 당신은 제게 도저히 구제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구제책을 제시해 주셨어요. 보통 당신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죠. 그러므로 앞으로 세 달 동안 제가 당신에게 못되게 군다면 그건 제 잘못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솔직히 그녀는 이 내기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장갑을 낀 우아한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친구?”
그녀가 악수를 신청했다.
조르단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민감한 손바닥을 살짝 간질렀다.
“친구.”
“집에 다 왔나 봐요.”
마차 행렬이 호손 문장이 새겨진 검은 철제 대문 앞에 멈추자 알렉산드라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다 왔어.”
조르단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문지기가 그의 마차를 향해 경례를 한 다음 재빨리 뛰어나와 대문을 활짝 열었다.
조르단은 자기 <집>의 웅장함을 쳐다보았지만 궁전 같은 집에 아무런 자부심도 또 집으로 왔다는 따스한 느낌도 가질 수 없었다. 호손 저택은 황폐하기 그지없었던 부모님의 결혼 생활과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징했다.
“지난 1년 동안 웅장한 집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 호손이야말로 영국에서 제일 화려한 집이라고 생각해요.”
알렉산드라는 예쁘게 한숨을 내쉬며 우아하고 거대한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호손 공작이 현재 저택에 거주중임을 알리기 위해 지붕 위에는 벌써 깃발이 계양되어 있었다.
“조상님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 좋아하시겠군.”
조르단은 어슴푸레한 황혼을 배경으로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호손 저택을 쳐다보면서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들은 국왕이 사는 궁궐 못지 않은 집을 짓겠다고 호손을 지었지. 사람들을 위협하고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당신은..... 당신은 호손을 좋아하지 않아요?”
“별로. 너무 위압적이라고 생각해. 이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드는 집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 이 집만큼 편하진 않지만.”
“호손보다 더 아름다운 집이 있단 말이에요?”
“더 아늑하지.”
“호손은 사실 경외감을 줘요. 이 집은 너무 ...... 너무 조용해요.”
알렉산드라가 솔직히 말했다.
마차가 현관 앞에 멈추자, 하녀와 동물 사육사, 심부름꾼, 하인 등을 포함해 이백여 명에 이르는 식솔들이 정복 유니폼을 입고 테라스 계단에 서있었다. 그들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인이 재빨리 발판을 가지고 왔으나 조르단은 손수 알렉산드라를 마차에서 내려 주겠다고 말했다. 그녀를 마차에서 내려놓은 다음에도 그의 손은 한참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집에 온 것을 환영해.”
그는 다정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우리 방도 준비되어 있고 근사한 저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너무 피곤해서 먹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알렉산드라는 그와의 잠자리를 내일로 미루고 싶은 생각에 서둘러 말했다.
“목욕이나 하고 곧장 쉬었으면 좋겠어요.”
조르단은 그녀의 계획을 곧장 눈치챘다.
“그렇다면 우리 둘 다 저녁은 생략하고 곧 바로 잠자리에 들기로 하지.”
“전 당신이 이렇게 긴 여행 뒤에 하룻밤쯤은 휴식을 허락하실 줄 알았어요!”
“약속을 지켜야지, 나의 사랑.”
“제발 저를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공작님.”
“조르단.”
“오시는군.”
기봉은 시야를 막고 있는 마구간지기 스마스의 등 너머로 앞을 보며 말했다.
“이제 주인님이 돌아오셨으니 마님께서 어떤 얼굴을 하실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그의 말은 호손 저택 전 하인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조르단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알렉산드라가 보여 준 조르단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좋아서 어쩔 줄 모르실 거예요.”
가정부 브림리 부인이 목을 길게 빼면서 말했다.
“아마 행복감으로 반짝반짝 빛날거야. 마치......”
알렉산드라가 화났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그들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기봉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
그는 놀란 얼굴로 스마스를 그리고는 브림리 부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알렉산드라는 촛불이 밝혀진 식탁에서 조르단과 마주앉아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했다.
“포도주가 맛없어?”
알렉산드라는 그의 그윽한 목소리에 놀라 하마터면 스푼을 떨어뜨릴 뻔했다.
“전...... 전 술을 좋아하지 않아요, 공작님.”
“조르단.”
그가 상기시켜 주었다.
알렉산드라는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없어 침을 삼켰다. 그녀는 딸기 접시를 보면서 스푼을 내려놓았다. 앞으로 한 시간후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생각하니 너무 긴장되어 배가 아팠다.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는군.”
조르단은 그윽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알렉산드라는 그가 일부러 자기의 환심을 사고 긴장을 풀려는 속셈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요.”
그가 냅킨을 옆에 놓으며 말했다.
“그러면 식사를 그만할까?”
하인이 앞으로 나와 그의 의자를 빼려고 했다. 알렉산드라는 부리나케 포크를 잡았다.
“저 꿩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조르단은 정중하게 냅킨을 다시 무릎에 깔았다. 그의 눈은 분명히 웃고있었다.
알렉산드라는 꿩고기를 먹기 좋게 몇 개의 조각으로 나눈 뒤 고기가 거의 물이 되도록 한점한점 꼭꼭 씹으면서 오래오래 시간을 끌었다. 그녀가 마지막 한 점을 입에 넣고 포크를 내려놓자 조르단은 이제 끝났냐고 묻기라도 하듯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알렉산드라는 놀란 눈으로 제일 가까이에 서 있던 하인에게 눈을 돌렸다.
“저, 저 아스파라거스를 좀 먹고 싶어요.”
이번에도 조르단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아스파라거스를 완두콩과 함께 크림 소스를 발라먹고 그 다음에는 사과를 넣은 돼지고기 요리, 바닷가재 요리, 그리고 페이스트리와 블루베리를 먹어 치웠다.
그녀가 블루베리를 먹고 싶다고 청했을 때 조르단은 굳이 웃음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아 그녀가 블루베리를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억지로 먹어 치우려는 것을 구경했다. 그의 육감적인 입술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그의 눈길을 피하며 알렉산드라는 블루베리를 다 먹어 치웠다. 그러자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음식을 감당하지 못한 위가 요동하기 시작했다.
“힘을 내려면 뭘 좀 더 먹어야겠지? 초콜릿 케이크는 어때?”
디저트를 더 먹으라는 말에 그녀는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포도주 소스를 곁들인 소고기?”
“아니오, 됐어요.”
“좀 더 먹지?”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그녀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는 조심스럽게 냅킨을 옆에 놓고 그녀가 일어서는 걸 도와주기 위해 테이블을 돌아왔다.
구불구불한 긴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먹다간 너무 뚱뚱해져서 이 계단도 올라가지 못할 거야. 이 계단 아래와 발코니에 그물을 쳐둬야겠군.”
다른 때 같으면 알렉산드라는 그의 농담에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밤은 너무 긴장하는 바람에 유머감각도 잃어버렸다. 그가 긴장을 풀어 주려고 애쓰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녀를 이렇게 불편하게 만든 것이 그의 잘못인 이상 그의 노력이 전혀 고맙지 않았다. 더구나 앞으로 자기들이 할 행위에 대해 그가 어쩌면 그렇게 조금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순간 그녀는 바람둥이로서의 그의 명성이 생각나며 수십 명의 여자와 수백 번도 더 한 짓을 한다고 해서 그가 당황할 이유도 불편해할 이유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 시간 후 조르단은 두 사람의 침실을 연결하는 문을 열고 그녀의 침실로 갔다. 그러나 침대를 보자 부아가 치밀어 오르며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커튼은 얌전히 내려져 있었고 유혹하듯이 새틴 침대보도 얌전히 제쳐져 크림 색 시트를 내보이고 있었지만 알렉산드라는 거기에 없었다.
그는 몸을 홱 돌리며 오늘밤에는 호손 저택의 구석구석을 다 뒤져서라도 꼭 그녀를 찾아내고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는 커다란 방 한쪽 구석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추운 듯이 양팔로 허리를 껴안고 있었다. 아니면 두려워서였을까?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두터운 카펫에 묻혔다. 그의 눈은 그녀의 유혹적인 자태를 보고 있었다. 어깨 위의 곱슬곱슬한 검은머리, 가슴이 깊게 파진 흰색 새틴 잠옷위로 드러난 그녀의 피부는 촛불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유리창에 그의 그림자가 비치자 알렉산드라는 뒤돌아보았다. 조르단은 손을 내밀어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눈은 성내고 있었지만 그녀는 몸을 빼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결은 비단 같았다.
그는 그녀의 성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고보니 나의 작은 참새가 이제 아름다운 백조로 변했군.”
“입에 발린 칭찬....... ”
“진심이야.”
조르단이 싱긋 웃었다.
그녀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조르단이 그녀를 안았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그가 침대로 향하자 그녀가 물었다.
“내 침대로.”
그는 그녀의 목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거기가 더 커.”
조르단은 그의 침대를 받치고 있는 커다란 발판 위로 올라가 천천히 알렉산드라를 내려놓으며 그녀의 다리가 자기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절묘한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녀의 커다란 청록색 눈에서 뭔가를 보았다. 아니 그녀의 눈이 아니라 나지막하게 가쁘게 몰아쉬는 그녀의 숨결에서였던가? 그것은 알렉산드라가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알렉산드라?”
그는 새틴과 레이스로 된 그녀의 잠옷 아래로 드러난 팔을 어루만지며 그녀가 떨고 있다는 걸 알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 떨고 있군. 겁나?”
너무 긴장해 말도 못하고 알렉산드라는 그녀의 발가벗은 육체에 지금부터 온갖 은밀한 행위를 다 할 큰 기의 건장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아프게 하지 않을게, 약속해.”
“그게 아니에요!”
리본을 풀려고 그의 손이 가슴위로 오자 그녀가 벌컥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손가락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당신은 저를 이해하지 못해요! 나는 당신을 잘 알지도 못해요.”
“당신은 나를 잘 알고 있어, 내 사랑.”
조르단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오래 됐어요...... ”
조르단은 고개를 번쩍 들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반가움과 안도감에 온몸이 전율했다.
지난 세 달 동안 그녀의 행동에 관한 소문과 또 자기가 익히 알고 있는 귀족사회 유부녀들의 느슨한 윤리관에 근거해 그는 감히 그녀가 자기 이외의 다른 남자를 모른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또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 해도 싫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로 했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눈에 비치는 당황스러움은 그녀가 다른 남자를 모른다는 것을 확실히 말해 주고 있었다. 매혹적이고 사랑스러운 알렉산드라가 아직도 전적으로 자기만의 여자라는 사실에 조르단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우리 둘 다 너무 오랜만이군.”
그는 그렇게 속삭이며 그녀의 귀에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제발 그만두세요!”
조르단은 그녀의 목소리가 진짜 공포에 질려 있는데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 두려워요.”
지난 사흘 동안 자기의 명령에 반항하며 맞서 싸우던 용감한 여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얼마나 힘이 들면 그럴까.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두렵다는 그녀의 말을 비웃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그는 그녀가 비웃도록 만들었다.
“사실 나도 두려워.”
조르단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신...... 당신도요? 왜죠?”
그는 알렉산드라의 속옷 리본을 풀면서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봉긋한 젖가슴이 드러났다.
“당신이 말했듯이 너무 오랜만이기 때문이야.”
그는 그녀의 젖가슴에서 눈을 떼어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잠옷을 어깨 위에서 쓸어내렸다.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린 것 같아.”
그는 짐짓 겁에 질린 표정을 했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침대에 들었으니, 어떻게 하는지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당신 친구 팬로즈를 불러 충고를 구해 볼 수도 있겠지만 내 말이 들리게 하려면 우리 문제를 고함질러야 할거야. 그렇게 하면 다른 하인들이 모두 놀라 일어나서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알아보려고 이곳으로 우르르 몰려올 테고......”
비참한 심정임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라는 가슴속에서 슬금슬금 올라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조르단의 손가락이 그녀의 잠옷을 완전히 벗기고 잠옷이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좀 낫군.”
그는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의 벗은 몸을 애써 외면하고 계속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녀를 더욱 꼭 안았다.
“난 당신의 웃는 모습을 좋아해, 그것 알아?”
그는 옷을 벗으면서 계속 수줍어하는 그녀를 달랬다.
“당신은 웃을 때 두 눈이 반짝이지.”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자신도 따라서 누웠다.
알렉산드라는 최면을 거는 듯한 그의 회색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며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횡격막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그녀의 젖가슴에 손을 갖다 대고 천천히 고개 숙여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녀는 숨 막힐 듯한 키스에 정신이 아찔했다.
조르단은 그녀를 안고 몸을 굴려 그녀를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비단 같은 살결을 더듬는 그의 손길이 점점 긴박해졌으며 그녀의 다리와 엉켜 붙은 그의 다리 사이로 그의 남성이 그녀의 히프를 찌르며 무엇을 원하는지를 말하고 있었다.
조르단은 황홀한 격정에 휩싸인 가운데서도 자신을 좀 억제하고 싶었다. 그러나 1년 이상 그녀를 갈망해 온 그의 육체는 그의 의지가 내리는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특히 알렉산드라가 혀로 민감한 귓불을 키스할 때면 더욱 참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참기를 거부하는 욕구에 진저리 치며 조르단은 몸을 굴려 그녀를 다시 아래로 눕히고, 손을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가져갔다. 따스하게 촉촉이 젖은 그곳은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미안해, 내 사랑.”
조르단은 그녀가 자기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녀의 히프를 들어 올렸다.
“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조르단은 숨을 죽이고 알렉산드라가 아프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한 그녀의 몸속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그녀의 긴 속눈썹 위에 두 개의 영롱한 눈물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고 그는 놀라 동작을 멈췄다.
“알렉산드라.”
그녀의 몸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싶은 터질 듯한 욕망을 참느라 조르단의 팔과 어깨가 딱딱해졌다. 조르단은 한 팔로 몸을 지탱하고 엄지와 검지로 그녀의 턱을 잡아 고개를 돌렸다.
“눈을 뜨고 날 봐.”
눈물방울이 맺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물이 흥건히 괸 청록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내가 아프게 했어?”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알렉산드라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조르단에게 온몸과 마음을 다해 자기를 사랑해 줄 것을 애원하고 간청하고 싶은 충동과 싸우고 있었다. 조르단이 옆에 누워 그녀를 안는 순간부터 그녀는 그가 그렇게 해주길 갈망했다.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불과 몇 분도 되지 않아서 그의 사랑행위는 그녀가 애써 쌓아올린 증오의 장벽을 허물어 버렸으며 그녀의 수비벽을 뚫고 순진한 소녀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무기력하게 그에 대한 갈망으로 들뜨게 만들었다.
“알렉산드라, 왜 그래?”
조르단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키스를 했다.
“날 원하지 않아?”
그는 소년처럼 순진하게 물어 보았다.
“아니에요.”
알렉산드라는 그의 눈에서 그가 격정을 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왜 눈물을 흘려?”
“왜냐면요.”
그녀는 목이 메었다.
“당신을 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반은 신음에 반은 웃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조르단은 그녀의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파묻고 그녀의 몸 안 깊숙한 곳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격정에 휩싸인 알렉산드라가 자기도 모르게 히프를 들어 올리자 조르단은 완전히 통제력을 잃고 말았다.
“당신을 원해.”
조르단은 거친 신음을 토해내며 점점 깊숙이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알렉산드라가 양팔로 그의 어깨에 매달려 오며 폭풍 같은 그의 격정에 완전히 압도당해 오는 것을 느끼며 그는 황홀감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당신을 너무 원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
알렉산드라의 손톱이 그의 등을 파고들며 그녀의 히프가 올라가는 순간 조르단은 격정으로 터질 듯한 가슴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 안에서 절정을 맛보았다.
조르단은 여전히 알렉산드라를 품에 안은 채 옆으로 누워 거친 호흡을 가라앉혔다. 촛불로 어슴푸레한 방을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천천히 이성이 돌아왔다. 이성이 돌아오는 것과 동시에 조르단은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 첫째는 그가 사랑을 애원하는 철부지 소년처럼 아내에게 자기를 원하는지 물어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여자에게도 자기를 원하는지 물어 보지 않았다. 더구나 오늘밤 알렉산드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떤 여자도 그렇게 서둘러 침대로 데리고 가지 않았으며, 또 그렇게 빨리 일을 끝내지도 않았다. 조르단은 오늘밤 침대에서 그렇게 쉽게 통제력을 잃어버린데 자존심이 상했다.
조르단의 품에 안겨 있던 알렉산드라는 그의 얼굴을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베개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생각에 잠겨 멍하니 앞만 쳐다보고 있는 그의 턱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화나셨어요?”
알렉산드라가 실망과 불안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조르단이 턱을 내리며 빙긋 웃었다.
“당신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왜요?”
“왜냐면....... ”
그는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왜냐면 당신을 너무 원하기 때문이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냐면 오늘밤 통제력을 잃었기 때문이지. 왜냐면 당신이 그저 내 몸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욕망으로 이성을 잃기 때문이지. 왜냐면 당신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나를 화나게 만들고 또 격노한 나를 웃게 만들기 때문이지. 왜냐면 당신만 보면 나는 약해지기 때문이지. 부드러운........
조르단의 머릿속에서 아버지의 꾸짖는 음성이 들렸다.
‘조르단, 부드러워서는 절대로 남자가 될 수 없다. 남자란 단단하고 거칠고 강해야 해.....남자란 자기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믿어선 안돼..... 우리는 쾌락을 위해 여자를 이용할 수 있지만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아.... 남자란 아무도 필요하지 않아.’
조르단은 머리를 흔들어 아버지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아버지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던가를 기억하려 했다. 그는 알렉산드라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다. 호손과 이곳과 관련된 기억들은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알렉산드라의 부드러운 음성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제 방으로 갈까요? 제가 당신을 불쾌하게 만든 것 같군요.”
엉뚱하게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그는 가슴이 아팠다.
“정 반대야. 당신은 나를 너무 즐겁게 해주고 있어.
그는 그 말이 거짓말인 것처럼 일부러 웃어 보였다.
그녀가 너무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는 바람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침대에만 들면 당신은 나를 너무 즐겁게 해.”
조르단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놀리듯이 말했다.
“그런데 침대 밖에만 나오면 당신은 나를 화나게 만든단 말이야. 그러니까 유일한 해결책은 당신을 침대에 붙들어 두는 거야.”
조르단은 욕망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끼며 목이 잠겼다.
그는 그녀의 달콤한 입술에 입술을 갖다 대어 깊숙이 키스하며 폭풍처럼 밀려오는 격정을 달랬다. 그는 오늘밤 모든 면에서 너무 지나쳤다. 그러나 1년은 말할 것도 없고 단 한 달도 여자 없이 밤을 지낸 것이 열 네 살 이후 처음이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그렇게 격정적이고 감정적인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다시 사랑의 행위가 이어졌을 때 조르단은 이번에는 자신을 억제하며 몇 시간이고 알렉산드라 위에 머물면서 그녀를 몇 번이나 떨리는 황홀경으로 이끌며 거기에서 자신도 황홀감을 맛보았다.
조르단이 알렉산드라와 마지막 사랑의 행위를 마치고 마침내 깊은 잠에 빠졌을 때는 벌써 새벽이 보랏빛 하늘을 핑크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자기의 허리를 안고 잠든 조르단의 팔을 조심스럽게 풀고 살그머니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격렬한 사랑의 행위에 익숙치 못한 그녀의 몸이 힘없이 휘청거렸다. 그녀는 온몸으로 달콤한 노곤함을 느끼며 살금살금 잠옷을 집어 들었다.
잠옷을 입으며 소맷자락에 팔을 넣다가 그녀는 문득 조르단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베갯잇을 배경으로 그의 검은머리는 잉크 빛을 띄우고 있었다. 검게 탄 얼굴의 우락부락한 윤곽이 잠 때문에 부드러워 보였다. 그의 잠든 모습은 마치 소년 같았다. 침대보가 히프까지 미끄러져 내려가 그의 우람한 근육질의 팔과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의 팔과 가슴도 검게 탔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는 밤에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조르단은 영국으로 향해해 오면서 분명히 셔츠를 벗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감금생활을 하느라 살도 많이 빠졌다. 너무 많이.
그녀의 시선은 그의 신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녀는 처음으로 실컷 그를 쳐다볼 수 있는 자유를 만끽했다. 그는 정말 찬란했다. 예전에 그녀가 그를 미켈란젤로의 데이비드 상에 비유한 것이 어리석거나 순진한 생각만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라는 몸을 숙여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위로 침대보를 당겨주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장 방을 나갈 수 없었다. 그녀는 <나를 원하지 않아?>라던 그의 말이 생각나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멍하니 팔을 문질렀다.
오늘밤 첫 번째 사랑의 행위 때 그는 그 많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다급하고 절실했었다. 왜냐면 그때 유일하게 그는 자제심을 잃었던 것처럼 보였다. 조르단이 무력하게 <미안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라고 사과하던 걸 생각하자 알렉산드라는 기분이 좋았다. 조르단이 그녀의 몸에 불을 붙이는 동안 자기도 그의 몸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 즐겁고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그는 날이 샐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사랑해 주었다. 그러나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하며 바이올린의 거장 같은 기술과 솜씨로 그녀를 애무하고 키스했다. 그는 그녀를 즐기기는 했지만 첫 번째처럼 그렇게 달콤하게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르단은 이번에는 역으로 그녀가 자제심을 잃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알렉산드라는 이제 더 이상 한 번의 키스 혹은 하룻밤의 폭풍 같은 사랑으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철부지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두 눈이 별처럼 반짝이는 순진한 소녀도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그때보다 훨씬 더 성숙했다.
알렉산드라는 수수께끼 같은 남편의 예기치 못한 약한 모습에 위험하게 매혹되어 가는 자신을 느끼며 황급히 그의 잠든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25. 그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아침 느지막하게 일어난 알렉산드라는 마리의 간섭에 짜증이 났다. 마리는 그녀의 머리가 반질반질 윤이 날 때까지 계속 머리를 빗어 댔으며, 나중에는 모슬린 드레스를 입을지 주름이 들어간 장미색 드레스를 입을지를 놓고 또 한바탕 연설을 늘어놓았다.
알렉산드라는 오늘 아침 조르단이 자기를 어떻게 대하나 빨리 보고 싶은 호기심을 참아가며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우연을 가장해서 조르단의 서재 옆을 지나갔다. 열린 문을 통해 조르단이 토지 관리인 한 사람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지나갈 때 마침 그가 고개를 드는 바람에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조르단은 인사조로 그녀에게 잠깐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어딘지 모르게 불쾌한 표정이었다.
그의 예상치 못한 태도에 알렉산드라는 어리둥절해서 정중하게 목례로 그의 인사에 답하고는 서재를 지나 조찬실로 갔다. 그녀가 낙담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말없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팬로즈와 필버트가 그녀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서로 호기심과 걱정 어린 시선을 주고받았다.
바쁘게 지내다 보면 세 달이 후딱 지나갈 것이라는 생각에 알렉산드라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하러 다니거나 런던으로 떠나기 전에 하인들에게 가르쳤던 읽기와 쓰기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헨리와 장난하기 위해 마구간에 들렀다. 헨리는 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조용한 집 안 보다는 분주한 마구간을 더 좋아했다. 그녀가 돌아온 것은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조르단 소유의 방대한 영지를 마차를 몰고 시원스럽게 한바퀴 돌고 나니 한결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집을 지나 마구간으로 곧장 경쾌하게 마차를 몰고 갔다.
그녀에게서 말고삐를 받아 쥐기 위해 스마스가 뛰어나왔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알렉산드라와 남편이 원만한 부부관계를 이룩해 가도록 도와주려는 열의에서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공작님께서 벌써 한 시간 전부터 마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님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싶어서 가만히 계시지 못하고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말입니다.”
알렉산드라는 수줍게 기뻐하면서 마구간에서 걸어 나오는 조르단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조르단의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것을 보고 이내 미소를 거두었다.
“앞으로 외출할 때는 반드시 어디로 가는지 또 언제 돌아오는지 정확하게 알려주고 나가도록 해.”
조르단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마차에서 내려주었다.
“더구나 시종을 동반하지 않고 이 영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선 안 돼. 오늘부터 저기 있는 올슨이 당신 전속 시종이야.”
조르단은 마구간 문간에 서있는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남자를 가리켰다.
조르단이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또 왜 그렇게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리는지, 간밤의 부드러운 태도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그의 태도에 너무 놀라 알렉산드라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스마스는 재빠르게 멀찌감치 사라져 버렸다.
“할 말 다하셨어요?”
알렉산드라는 날카롭게 쏘아붙이고는 그를 그곳에 혼자 놔두고 집 쪽으로 가려고 했다.
“아니.”
조르단은 좀 전보다 더 화가 난 듯했다.
“한 가지 더 있어. 다시는 내가 잠든 동안 한밤중에 내 침대에서 빠져나가지 마! 매춘굴로 들어가는 매춘부처럼!”
알렉산드라는 너무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그를 한 대 갈겨 줄 양으로 손을 들었다.
조르단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는 그녀의 연약한 손목이 부서지도록 꽉 잡고 얼음같이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순간 알렉산드라는 그가 정말 자기를 한 대 치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목을 놓고 돌아서서 집 쪽으로 걸어갔다.
“마님.”
스마스가 옆으로 와 그녀를 달랬다.
“공작님이 오늘 무척 기분이 나쁜 듯합니다. 지금까지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건 처음 보았어요.”
스마스의 목소리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침착했지만 집으로 향하는 조르단의 등을 쳐다보는 그의 얼굴은 당혹스러움과 걱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돌려 아무 말 없이 당황하고 성난 눈으로 옛 친구인 스마스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저는 공작님이 화를 내시는 걸 보지 못했어요. 더구나 지금처럼 저렇게 화를 내는건요. 저는 공작님에게 제일 처음 말을 태워 주었으며 그분을 어릴 때부터 알았지요. 이 세상에 그분보다 용감하고 멋진..... ”
“그만!”
알렉산드라는 더 이상 그를 찬미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제 거짓말은 그만하세요! 그 사람이 살아 있는 한 그 사람을 용감하고 멋진 사람으로 만들 수 없을 거예요. 전 똑똑히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이 얼마나 괴팍하고 몰인정한 괴물인가를요!”
“아닙니다, 마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전 그분을 어릴 때부터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분 전에는 그분의 아버님을 알았었고....... ”
“틀림없이 그 사람의 아버지도 괴물이었을 거예요!”
알렉산드라는 너무 화가 나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틀림없이 똑같은 인간일 거예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아닙니다. 마님이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거죠!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스마스가 워낙 강력하게 반대하는데 놀라 알렉산드라는 이성을 되찾고 그에게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저희 외할아버지께서 늘 한 남자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알고 싶으면 그의 아버지를 보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조르단 님과 그분의 아버님에 관한 한 마님의 외할아버님이 틀리셨습니다.”
알렉산드라는 스마스에게 조르단에 관해 사실대로 말해 달라고 조르면 사실대로 말해 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임시 남편에 대해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다고 자신을 타이르며, 약간 화난 듯한 얼굴로 과장해 말했다.
“보초 없이는 아무데도 가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저기서 날뛰는 숫망아지를 구경할 수 있도록 나하고 같이 울타리 쪽으로 가주시겠어요?”
스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울타리에 도착하자 느닷없이 그가 말했다.
“이런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공작님을 놓고 그런 내기를 하시는 게 아니었습니다, 마님.”
“내기 건을 어떻게 아시죠?”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어요. 마부 존이 마님이 화이트 클럽의 장부에 내기를 기입하는 날 그날 오후 핵슨 경의 마부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죠.”
“그렇군요.”
“마님이 공작님을 좋아하지 않고 또 좋아할 의사도 없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공포한 것은 큰 실수였어요. 그런데도 공작님이 그 문제를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걸 보면 얼마나 마님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어요. 글쎄, 공작님의 어머님도 감히 그런 일은......”
스마스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말을 중단하고 물끄러미 발꿈치만 쳐다보았다.
“여러 사람 앞에서 내기할 생각은 없었어요.”
알렉산드라는 별로 흥미없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공작님의 어머니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요, 그분은 어떤 분이셨어요?”
스마스는 불편한 듯 몸무게 중심을 이쪽 발에서 저쪽 발로 옮겼다.
“아름다우셨죠,. 물론. 파티를 좋아하셨고.....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늘 이곳에 불러 모으셨죠.”
“아주 명랑하고 상냥한 분이셨던 것 같군요.”
“마님과는 아주 다른 분이셨어요!”
알렉산드라는 스마스가 갑자기 격렬하게 화를 내는 데 놀라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그분은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을 전혀 생각해 주지 않았어요.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죠.”
“어떻게 그런 말을!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일하러 가 봐야겠습니다, 마님.”
그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공작님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오세요. 얼마든지 이야기해 드릴테니.”
더 이상 스마스를 졸라봤자 소용없으리란 걸 알고 알렉산드라는 그가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조르단의 어머니에 대한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문짝에 기름을 칠해야 된다는 구실로 알렉산드라는 기봉을 불렀다. 스마스 못지않게 조르단에게 충실한 하인인 기봉은 그녀가 호손에 묵는 동안 그녀의 친구이기도 했었다. 스마스가 그랬던 것처럼 기봉도 그녀를 보자 기뻐했고 또 열렬히 조르단의 소년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가 그의 부모님에 관해 물어보자 기봉은 문짝에 망치질을 하더니 갑자기 급한 일이 있다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복숭아 색 실크 가운을 입고 머리는 어깨위로 느슨하게 풀어 내리고 알렉산드라는 저녁식사 시간으로 약속된 아홉 시에 방을 나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마구간에서 성난 모습을 대한 후 처음으로 조르단과 마주치게 된 지금 그가 어떤 표정일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좀 전의 부아가 다시 치밀어 오르며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식당으로 향해 가는 알렉산드라를 보고 히긴스가 앞으로 나와 재빨리 응접실 문을 열었다. 알렉산드라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머뭇거렸다.
“공작님께선 저녁식사 전에 늘 응접실에서 셰리주를 한잔 드십니다.”
알렉산드라가 들어오는걸 보고 조르단은 벽에 붙은 탁자로 가서 그녀가 마실 셰리주를 한잔 따랐다. 알렉산드라는 잔을 채우는 그의 민첩한 동작을 보았다. 널찍한 어깨를 감싸고 있는 포도주 색 코트와 근육질의 긴 다리를 강조해 주는 회색 바지를 입은 그는 정말 미남이었다. 눈처럼 흰 목도리에 꽂힌 빨간 루비 장식이 햇빛에 검게 탄 그의 얼굴과 멋진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셰리주 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가 어떤 기분일까 불안해하면서 알렉산드라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그의 손에서 술잔을 받아 쥐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에 그녀는 셰리주를 그의 머리에 쏟아 버리고 싶었다.
그는 아둔한 학생을 질책하는 교사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접실에서 여덟 시 반에 셰리주를 마시고 아홉 시에 저녁식사를 하는 게 내 습관이야. 앞으로는 여덟 시 반 정각에 이곳으로 와,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라는 눈에서 불꽃이 튀었지만 가까스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님께선 이미 제가 잠은 어디에서 자야 하고, 어디를 갈 수 있고, 또 누가 나를 따라다녀야 하고, 언제 식사를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어요. 그러면 죄송하지만 제가 언제 숨을 쉬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조르단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짜증스럽고 불안할 때 그러듯이 팔을 들어 뻐근해진 목을 주무르고는 팔을 내렸다.
“알렉산드라, 오늘 마구간에서 당신에게 한 행동을 사과하겠어. 당신이 한 시간이나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우리의 저녁을 당신을 질책하거나 이런 저런 규칙으로 당신을 질식시키는 말로 시작하고 싶지 않아. 난...... ”
히긴스가 문 밖에서 조심스럽게 노크하는 소리에 조르단은 말을 중단했다. 그는 은쟁반에 쪽지를 하나 가지고 들어왔다.
조르단의 사과에 약간 마음이 누그러진 알렉산드라는 벨벳의자에 앉아 가만히 화려한 응접실 내부를 돌아보았다.
조르단은 쟁반에서 쪽지를 집어 들고 알렉산드라의 맞은편에 앉아 봉인을 뜯었다. 쪽지를 읽는 그의 표정이 호기심에서 놀람으로 그러다가 분노로 바뀌었다.
“토니가 보내 거야.”
조르단의 회색 눈이 갑자기 냉혹해지며 광대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턱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는 친구가 그렇게 가깝게 온다는 사실에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그녀는 기쁨에 들뜬 얼굴로 말했다.
“내일 토니의 어머니와 동생을 방문할 작정...... ”
“거긴 못 가!”
조르단이 쌀쌀하게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토니에게 쪽지를 보내 앞으로 몇 주 동안 우리 단둘만의 시간을 보내겠다고 전하겠어.”
알렉산드라가 금방 항의할 듯한 표정을 짓자 조르단은 잘라 말했다.
“내 말 알아듣겠어, 알렉산드라? 거긴 못 가.”
알렉산드라가 천천히 일어섰다. 조르단도 따라 일어섰다.
그녀는 정신병자 쳐다보듯이 그를 쳐다보면서 분노를 억누른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당신을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아세요?”
뜻밖에도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럴만하지.”
그는 토니가 이곳으로 왔다는 사실은 사실상 포키스의 의혹을 재확인한 셈이며, 그렇다고 호손의 후계자를 수태하고 있을 지도 모를 알렉산드라의 생명도 역시 위험하다는 걸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난 당신이 내 명령에 따르리라고 기대해.”
알렉산드라는 그가 정한 엉터리 규칙을 따를 의사가 전혀 없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
그의 미소가 더 커졌다.
“알렉산드라, 내기를 기억해. 당신은 고분고분한 아내가 되겠다고 약속했어. 이렇게 일찍 게임에 패하고 싶진 않겠지, 그래?”
알렉산드라는 경멸을 가득 담은 눈으로 조르단을 쳐다보았다.
“절대로 제가 게임에서 질 위험은 없어요. 당신이 벌써 게임에서 졌어요.”
그녀는 술잔을 들고 벽난로 쪽으로 걸어가 14세기 유물인 꽃병을 구경하는 척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조르단이 말없이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알렉산드라는 손가락으로 귀한 꽃병을 어루만졌다.
“내기의 내용 가운데는 당신이 내게 어울리도록 노력해서 내가 당신과 함께 있고 싶게 만들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이 거만하게 자기 말을 무시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그는 진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좀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군, 그렇지?”
뜻밖에 조르단이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데 놀라 알렉산드라는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키스를 허락했다. 그녀는 조르단이 강인한 팔로 자기를 끌어당기고 고개 숙여 키스하는 동안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정말 음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랫동안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한참 뒤에 조르단이 팔을 풀었을 때 알렉산드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경이감을 가지고 최면을 거는 듯한 그의 회색 눈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는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냉정하고 독선적인 사람으로 돌변할 수 있을까? 알렉산드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음속에 있는 말을 했다.
“진심으로 당신을 이해하고 싶어요.”
“이해하지 못할 게 뭐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르단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오늘 마구간에서 왜 그렇게 제게 화를 냈는지 알고 싶어요.”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이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넘기거나 아니면 어깨를 한 번 으쓱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당신에게 내가 화난 진짜 이유를 말해줬었어, 하지만 그걸 제일 나중에 말했었지.”
“그게 뭐였죠?”
“밤중에 당신이 내 곁을 떠나 자존심이 상했어.”
“자존심이 상했다구요? 그래서 나를 매춘부라고 욕했어요?”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의 눈이 한순간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그녀가 아니라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데 잠깐 시간이 걸렸다.
“당연히 그렇게 했지. 당신은 설마 이 개국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른 용감하고 똑똑한 성인 남자가,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며 조용하고 이성적인 목소리로 왜 나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냐고 물어 볼 용기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겠지?”
“왜 안돼요?”
그녀는 당황해서 아무렇게나 말을 뱉어 놓고는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깨닫고 소리내어 웃었다.
“남자의 자존심이라는 거지. 남자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는 입을 비스듬하게 하여 싱긋 웃어 보였다.
“사실대로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게 내가 화를 낸 주된 이유야. 하지만 이 집의 뭔가가 항상 우울하게 만든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야.”
“당신은 이곳에서 성장했잖아요!”
“아마 그것 때문에 이 집을 좋아하지 않는지 모르지.”
조르단은 살짝 그녀의 팔을 잡아 응접실로 인도해 갔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조르단은 그녀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오래 전에 우리 할머님의 정원에서 당신은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말해 달라고 했었지. 난 지금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어. 하지만 아직 내 영혼을 벌거벗겨 보여 주는 데는 익숙치 않아. 언젠가는 익숙해지겠지. 그때가 되면 당신의 질문에 답해 줄 수 있을 거야.”
조르단은 <좀 더 어울릴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함께 식사하는 동안 그는 그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으며 그것은 알렉산드라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결혼 직후에도 그는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러나 그때의 노력은 지금의 노력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식사를 하는 두 시간동안 조르단은 그녀에게 자신의 매력을 한껏 발휘하며 눈부신 하얀 미소로 그녀를 놀리고 런던에서 사귄 사람들에 대한 재미있는 소문으로 그녀를 즐겁게 해주었다.
식사를 끝낸 뒤 조르단은 그녀를 침실로 데리고 가 그들의 몸과 영혼을 하나로 묶어주는 뜨거운 열정으로 열렬히 그녀를 사랑해 주었다. 그리고 밤새도록 그녀를 가슴에 포근히 안아주었다.
그 다음날 아침 알렉산드라는 요리사에게 부탁해 둔 쿠키와 캔디 바구니를 들고 마차에 올랐다. 감히 조르단의 명령을 무시하고 토니를 찾아갈 작정이었다. 그녀는 조르단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그저 조르단의 부모님에게 호기심이 있을 뿐이라고 변명해 보았지만 그게 진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위험하게도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기 일보 직전이었으며 수수께끼 같은 강압적인 그 남자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토니는 지금 그녀가 찾고 있는 대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배정된 <전속 시종> 올슨에게 윌킨슨 댁을 방문하니까 따라올 필요 없다고 통보한 뒤 알렉산드라는 윌킨슨 댁의 오두막을 향해 출발했다. 그녀는 잠깐 그곳에 들렀다가 곧 말을 토니의 집으로 몰았다. 올슨이 나무 사이에 숨어 몰래 뒤따라온다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말을 타고 터벅터벅 시골길을 지나갔다.
“알렉산드라!”
토니는 나지막한 계단에서 좁은 진입로로 달려 나오며 싱긋 웃으면서 알렉산드라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오늘아침 조르단이 보낸 쪽지를 보고 앞으로 몇 주 동안 조르단 혼자 당신을 독점하려는 줄 알았소.”
“그는 제가 이곳에 온 걸 모르고 있어요.”
알렉산드라는 따뜻하게 토니를 안았다.
“제가 온 걸 비밀로 해주시겠어요?”
“물론이오. 약속하겠오.”
토니는 엄숙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약속했다.
“어서 들어가 어머니와 버티를 만나봐요. 당신을 보면 무척 반가워할 거요. 그들도 당신의 방문을 절대 입밖에 내지 않을 거요.”
토니는 주저하는 알렉산드라를 안심시켰다.
“그분들을 만나 본 다음에 잠깐 같이 산책할 수 있을까요? 당신에게 물어 볼 말이 있어요.”
“물론이요.”
알렉산드라는 토니의 팔짱을 끼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들을 둘러싼 소문 때문에 런던을 떠나셨겠군요.”
알렉산드라가 사과조로 말했다.
“그것도 이유중 하나요. 하지만 당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싶어 죽을 지경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소. 그것 말고도 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소.”
그는 싱긋 웃어 보였다.
“샐리 팬스워드가 어제 런던에서 나를 만나자고 쪽지를 보냈더군.
언젠가 토니가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여자의 이름이 금방 생각났다.
“그녀가 당신을 만나러 왔었나요?”
알렉산드라는 잘생긴 토니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왔었소.”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녀는 뭐라고 하던가요?”
“그녀가 청혼했소.”
알렉산드라는 너무 반가워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요?”
“지금 고려중이오.”
그것은 농담이었다.
“아니, 사실은 그녀가 다음 주에 이곳으로 올 거요. 난 그녀가 내가 어떤 집에서 어떤 가족과 사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를 원했소. 잘 알겠지만 난 이제 더 이상 공작이 아니니까. 내가 공작이었을 땐 그녀가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날 원한다고 생각했었소. 그러나 이제 내가 공작도 아니고 별로 가진 것 없어도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게되었소. 그런데 이일을 어머님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말아요. 기회를 봐서 조용히 샐리의 방문소식을 알려 드릴 작정이니까. 어머님은 옛날일 때문에 그녀를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아요.”
알렉산드라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 세상에, 만나서 정말 반갑구나!”
알렉산드라가 토니의 에스코트를 받아 포근한 분위기의 조그만 살롱으로 들어가자 타운센드 부인이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타운센드 부인은 토니의 동생인 버티와 함께 살롱에 앉아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조르단이 살아 돌아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단다.”
알렉산드라는 토니 어머니의 인사에 답해 그 동안 그녀가 너무 창백해지고 살이 빠졌다는 걱저의 말을 했다. 죽었다고 믿었던 조르단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은 몸이 약한 토니 어머니에게 충격을 준 게 틀림없었다.
타운센드 부인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문간을 쳐다보았다.
“조르단이 함께 오지 않았니?”
그녀는 조르단이 함께 오지 않아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오, 죄송해요. 그는 오지 않았어요. 그는....... ”
“늘 그렇듯이 일하느라 정신이 없겠죠, 틀림없을 거예요.”
버티가 싱긋 웃으면서 못 쓰는 왼쪽 다리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사용하는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절룩거리며 알렉산드라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당신을 혼자 차지할 작정이구요. 그래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서먹해진 관계도 회복하구요.”
“그는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알렉산드라는 버티가 변명을 제공해 주어서 고맙기 짝이 없었다. 버티는 토니보다 약간 큰 키에 머리카락은 모래색, 눈동자는 암갈색이었다. 그 역시 어느 모로 보나 타운센드 가의 매력을 고루 갖추고 있는 미남자였지만 선천적으로 타고 난 뒤틀린 다리가 주는 끊임없는 고통으로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입가에 깊게 팬 주름은 그의 얼굴을 우울하게 보이게 했다. 그러나 다행히 성격은 아주 명랑했다.
“조르단은 알렉산드라에게 혼자 우리 집을 방문하지 말고 기다렸다가 같이 가자고 했다는군요.”
토니가 그의 어머니와 동생에게 설명하고 나섰다.
“그래서 알렉산드라에게 나중에 조르단이 방문했을 때 그녀가 벌써 우리를 찾아왔었으며 또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주었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래 조르단은 어떻게 지내니?”
타운센드 부인이 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연극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알렉산드라는 십여 분 동안 조르단이 어떻게 포로가 되었으며 또 어떻게 감금 생활을 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조르단의 건강을 염려하는 타운센드 부인의 질문에 알렉산드라가 마침내 대답을 다 끝내자 토니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알렉산드라에게 잔디밭이나 산책하자고 권했다.
“당신의 예쁜 이마에 조그만 주름이 있는 걸로 봐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군. 그게 뭐요?”
정원을 향해 작지만 깔끔하게 손질된 잔디밭을 걸어가면서 토니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호손 저택이 눈에 들어오자 어딘지 모르게 조르단이 달라보였어요. 어젯밤에 그는 자기는 호손에서 자랐으며 그 때문에 호손이 자기를 우울하게 만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이유를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어제는 스마스가 조르단의 부모님에 대해 이상한 말을 했어요.”
알렉산드라는 남편이 돌아온 뒤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사용하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녀는 불쑥 토니를 쳐다보고 물었다.
“그의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어요? 그리고 그의 어린 시절은 어땠구요?”
토니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어딘지 불편해 보였다.
“그게 무슨 상관이오?”
“제가 그 질문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이상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 상관도 없겠죠.”
“누구에게 물어 보았소?”
“기봉과 스마스에게요.”
“세상에!“
토니는 걸음을 딱 멈추고 웃으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조르단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는 하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걸 싫어하오. 그건 우리 가문의 금기사항이지. 우리 가족은 별로 그렇지 않지만 말이오. 우리 집에는 하인이라고 해봤자 여섯 명밖에 없으니 한가족처럼 대하지 않을 수 없지.”
토니는 슬쩍 몸을 숙여 정원에서 장미 한 송이를 꺾었다.
“그건 조르단에게 직접 물어봐야 할 질문이오.”
“대답해 주지 않을 거예요. 예전에 그 사람에게 진부한 말보다는 진실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죠. 어젯밤에 왜 호손을 싫어하느냐고 물어보니까 그는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남에게 말하는 걸 배우기 위해 노력중이라고 하면서 아직은 자기 영혼을 발가벗겨 보이는 일에 익숙치 못하다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차츰 익숙해질 거라는 말도 했구요.”
알렉산드라는 장난치는 듯한 그의 어조를 회상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언젠가는 내 질문에 답해 줄 거라고 약속했어요.”
“세상에, 조르단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이오? 정말 언젠가는 당신에게 자기 영혼을 발가벗겨 보이겠다고 했단 말이오? 그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당신을 훨씬 더 좋아하고 있군.”
토니는 알렉산드라의 귀 뒤에 장미를 꽂아주며 장난스럽게 그녀의 턱을 톡 건드렸다.
“조르단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호기심 때문이죠.”
토니가 다시 입을 다물 것처럼 보이자 그녀는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게 두려워요. 그런데 그는 전혀 말해 줄 기미를 보이지 않아요.”
토니는 잠시 주저하다가 그녀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좋아. 당신의 호기심은 공연한 것이 아니니까 질문에 답해 주겠소. 뭘 알고 싶소?”
알렉산드라는 귀 뒤에서 장미를 빼서 장미 줄기를 손가락에 감았다.
“우선, 그가 성장하는 동안 호손에서 무슨 잘못된 일이 있었나요? 그의 소년 시절은 어땟어요?”
“귀족 가운데도 <후계자>는 대체로 부모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받게 마련이오. 그런데 조르단의 경우는 그 정도가 좀 심했지. 그는 외아들이었으니까. 나는 마음대로 나무에 기어올라갈 수도 있고 흙먼지 속에 뒹굴 수도 있었지만, 조르단은 항상 자신의 지위를 기억하고 행동하도록 요구되었소. 그래서 늘 깨끗하고, 말끔하고, 정확하고, 엄숙하고, 항상 자기가 얼마나 귀하신 몸인가를 의식하며 살아야 했소. 그의 부모님이 의견일치를 본 한 가지 사항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들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거였소. 다른 귀족의 자제들은 영지 안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그게 혹시 마부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그 아이들과 어울려 놀 수 있었지만 우리 백부님과 백모님은 조르단이 비슷한 신분의 사람 아니면 절대 어울리지 못하도록 하셨소. 그런데 그렇게 지체 높은 공작이나 백작이 어디 그리 흔해요? 더구나 이 시골에? 그래서 조르단은 이곳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자랐지.”
토니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무 꼭대기를 쳐다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난 조르단이 어떻게 그 고독을 이겨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소.”
“하지만 조르단의 부모님이 당신과 어울리는 건 반대하지 않으셨겠죠?”
“그렇지는 않았소. 하지만 백부님과 백모님이 계실 때는 거의 호손을 방문하지 않았소. 그분들이 계실 때면 난 그 집의 숨 막히는 듯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소. 그 분위기는.....
뭐랄까...... 소름끼친다고나 할까. 더구나 백부님은 나와 내 부모님께 내가 호손을 자주 찾아오는 게 반갑지 않다는 걸 분명히 해두셨소. 그분은 내가 조르단의 공부를 방해하고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고 생각하셨지. 내가 호손을 찾아가는 것보다 조르단은 시간이 나면 자기가 우리 집에 찾아오는 걸 더 좋아했소. 왜냐면 그는 우리 어머니를 좋아했고 또 우리와 같이 있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토니는 약간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쳤다.
“조르단이 여덟 살 때 그는 자기의 상속권을 내게 넘겨주려고 했소. 그는 내가 호손에 가서 살아준다면 나를 후작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딴판의 인생이었군요.”
토니가 말을 마치고 침묵을 지키자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전 어렸을 때 돈이 많으면 천국 같을 줄 알았어요.”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친구들과 즐겁게 뛰어 놀던 시절. 걱정 근심 없던 시절. 메리 엘렌과 그녀의 가족들과의 따스한 우정. 그런데 안타깝게도 조르단은 어린 시절에 그런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귀족의 자제라고 해서 모두들 그렇게 엄격하게 자라진 않아요.”
“그의 부모님은 어땠어요. 그분들은 어떤 분들이셨나요?”
그녀가 너무 적극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는 바람에 토니는 위로와 항복의 뜻으로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간단하게 말해서, 조르단의 어머니는 아주 악명 높은 바람둥이었소. 하지만 백부님은 그 점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소. 그분은 여자란 나약하고 자신의 열정을 억제할 수 없는 비도덕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 같소. 아니 그분이 직접 그렇게 말했었소. 사실 그분 역시 백모님 못지 않은 바람둥이셨소. 하지만 조르단에 관한 한 무척 엄격하셔서 한시도 조르단이 타운센드가의 후계자이며 차기 호손 공작이라는 사실을 잊지 못하게 만드셨소. 조르단에 대해서는 가혹하기까지 했지. 늘 조르단에게 더 똑똑하고 또 용감하고, 더 위엄 있고, 타운센드 가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타운센드의 이름에 어울릴 만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소. 조르단이 자기 아버지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분의 요구는 점점 더 심해졌소. 조르단이 성적이 떨어지면 그의 가정교사에게 그에게 매질하라고 지시했소. 그리고 정각 아홉 시, 단 일분도 더 빨라서도 안 되고 더 늦어서도 안 되는 정각 아홉 시에 저녁 식사하러 나타나지 않으면 조르단은 그 다음날 저녁까지 굶어야 했소. 조르단은 여덟 살 혹은 아홉 살 때 이미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말을 탈 수 있었소. 하지만 언젠가 여러 사람이 함께 사냥 나간 날 조르단의 말이 점프를 거부했지. 그 이유는 조르단이 말을 부리기에 너무 어렸던 탓이었는지, 조르단이 점프하는 게 겁이 났었던 때문인지는 모르겠소. 어쨌든 난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소. 조르단뿐만 아니라 그날 일행 중 건너편에 개울이 있는 그 울타리를 감히 넘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소. 그런데 백부님이 일행을 모두 제자리에 서라고 명령하셨소. 그리고 모두 있는 데서 조르단을 겁쟁이라고 조롱하셨소. 그러면서 조르단에게 그 울타리를 넘어가 보라고 말씀하셨지.”
알렉산드라는 숨이 막혔다.
“전 어렸을 때 아버지와 같이 사는 아이들은 저보다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그가...... 울타리를 넘었나요?”
“세 번이나 넘었소. 그러나 네 번째 넘을 때 말이 실수로 넘어지는 바람에 조르단은 팔을 다치고 말았소.”
알렉산드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토니는 이야기에 몰입해 있어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론 조르단은 울지 않았소. 그는 어릴 때부터 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니까. 백부님 말씀에 따르면 눈물은 남자답지 못하다나. 그분은 그런 식으로 아주 엄격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셨소.”
“어떤 사고방식요?”
“백부님은 남자란 강해야 하며 진정한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립심을 가져야 한다고 철저히 믿으셨소. 조르단은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강요당하며 자랐소. <부드러운> 감정은 남자답지 못하다, 그러므로 혐오스럽다. 감상주의는 부드럽다, 그러므로 남자답지 못하다. 사랑이나 진정한 애정도 마찬가지고. 남자를 <나약하게> 보이게 하는 것은 뭐든 남자답지 못한 거였소. 백부님은 경박한 행동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지. 그러나 여자들과 노닥거리는 것은 예외였소. 그분은 그것을 남성다움의 전형으로 보셨으니까. 난 한 번도 그분이 소리 내어 웃는 걸 보지 못했소. 조소가 아니라 진정한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웃음 말이오. 그건 조르단도 마찬가지오. 난 그가 웃는 모습도 거의 보지 못했소. 열심히 일하고 남보다 앞서가는 것, 백부님에게는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지. 이제 알겠지만 귀족치곤 아주 특별한 생각을 가진 분이셨소.”
“난 그를 웃게 만들어요.”
알렉산드라는 자랑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토니가 싱긋 웃었다.
“당신의 그 미소는 어떤 남자의 마음이라고 밝혀 줄 거요.”
“그가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도 당연하군요.”
“무슨 일에든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우리 백부님의 결심 덕분에 조르단이 덕을 본 것도 있긴 있었지.”
“그게 뭔데요?”
“음, 예를 들자면 조르단은 학업에 있어서도 남보다 앞서가야 했소. 그래서 대학에 들어갔을 때 조르단은 이미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앞서 있어서 다른 사람은 접근도 할 수 없는 과목을 개인지도 받았지.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을 실용화하는데도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소. 조르단은 백부님이 돌아가셨을 때 겨우 스무 살이었소. 그는 공작 작위와 더불어 열 한 개의 영지를 물려받았지. 하지만 그 당시 타운센드 금고는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소. 그 많은 영지 중에 제대로 관리되고 있던 것은 호손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조르단이 작위를 물려받은 삼 년 뒤에 열한 개 영지가 모두 윤택해졌소. 그리고 그는 유럽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으로 성장했고, 스물 세 살의 젊은이치곤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었지. 그것 말고는 조르단에 대해 더 이상 해줄 말이 없군요.”
알렉산드라는 토니의 설명이 너무도 고마워 가볍게 토니를 포옹했다. 포옹을 풀며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그녀의 눈은 애정으로 반짝였다. 그런 다음 그녀는 걱정스럽게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한 시간만 외출하고 오겠다고 했는데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아요.”
“당신이 늦게 가면 무슨 일이 생길까?”
“들키고 말 거예요.”
“그리고 조르단과의 내기에서 지게 될 거예요.”
“무슨 내기?”
알렉산드라는 그녀가 호손에 오기로 합의한 것은 사실 조르단이 그녀에게 뇌물을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라 설명를 하려다가 도도하고 독선적인 남편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에서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우리 두 사람만 아는 장난 내기에요.”
알렉산드라는 토니에게 어물어물 대답했다.
알렉산드라는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말고삐를 잡으려고 나온 하인을 지나 저택 뒤쪽에 있는 마구간으로 계속 달려갔다. 토니에게 조르단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가 측은했다. 어제 호손에 도착한 뒤 조르단이 보여 준 미묘한 변화를 포함해 그 동안 그녀를 화나게 하고 또 마음의 상처를 주고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조르단에 관해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행복이란 부모님과 한집에서 사는 것이라고 믿었다. 역시 외할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 외할아버지는 몇 번이나 누구나 실제 모습은 겉보기와는 다르다고 말씀하셨다.
그녀는 너무도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마구간으로 오는 그녀를 보고 스마스가 달려 나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마스라는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그냥 한 번 그를 쳐다보고는 곧장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스마스는 어제 공작의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해 달라는 그녀의 요청을 거절해 그녀가 화난 것으로 착각했다.
“마님!”
스마스는 그녀의 무관심한 태도에 상처를 받기고 했고 또 그녀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알렉산드라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한 번도 소년이기를 허용 받지 못한 소년 조르단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마님 제발, 그런 얼굴로 절 보지 마세요.”
스마스는 애원하는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며 턱으로 망아지 두 마리가 서로 발꿈치를 차면서 놀고 있는 울타리를 가리켰다.
“저기 울타리로 가시면 제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 드리죠.”
알렉산드라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울상을 짓고 있는 하인을 쳐다보며 그가 하라는 대로 했다.
망아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스마스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기봉과 의논해 봤어요. 그리고 마님께서 주인님이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알 권리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마님, 주인님은 절대 가혹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인님이 돌아오신 뒤 두 분 사이에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님으로선 주인님이 바위처럼 냉혹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도 하더군요.”
알렉산드라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스마스에게 아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러나 스마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마님께 이야기 드리기로 결정한 이유는 마님께서 세 달간만 그분의 아내로 호손에 살 작정이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런 소문이?”
“하인들의 입을 통해서 나온 이야기죠. 맹세하지만 호손의 하인은 영국 최고 수준들입니다. 이곳 하인들은 무슨 일이 생겼다 하면 이십 분내로 다 알게되죠. 물론 히긴스와 저택 관리를 맡은 브림리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면 예외가 되겠지만요. 그들은 입이 무거워요. 무슨 일이든 절대 발설하지 않죠.”
“당신으로선 아주 짜증스럽겠군요.”
스마스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다시 빼고는 절망스러운 얼굴로 알렉산드라를 쳐다보았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걱정으로 더욱 주름져 보였다.
“마님께서 공작님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셨죠. 기봉과 저는 마님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고 합의했습니다. 더구나 마님께서는 아실 권리가 있습니다.”
스마스는 아주 나지막하고 불편한 목소리로 조금 전에 토니가 그녀에게 해준 것과 거의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제 마님께서 그 동안 호손이 어떤 곳이었는지 아셨을 겁니다. 기봉과 저는 마님께서 이곳에 오래오래 사시면서 이전에 그러셨듯이 웃음꽃을 피워 주시길 간절히 희망합니다. 입발린 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 말입니다. 이전에 마님께서 그러셨듯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웃음 말입니다. 주인님께서는 호손에서 그런 웃음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없어요. 그렇게 된다면 주인님도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시게 될 거예요. 특히 마님께서 주인님도 같이 웃게 만드신다면 말입니다.”
알렉산드라의 머릿속에서 오늘 들은 이야기가 만화경처럼 빙글빙글 돌아갔다. 조르단이 그날 저녁에도 그녀를 안고 잠에 빠진 훨씬 뒤에까지 그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벌써 날이 새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뜬눈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또 다시 조르단에게 마음을 주게될 것 같아 두려웠다. 지금까지 그녀는 이곳을 떠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그 목표를 위해 모든 감정과 행동을 조심스럽게 자제해왔다.
그녀는 조르단 쪽으로 돌아누웠다. 조르단이 그녀를 가슴팍으로 끌어당기며 그녀의 다리에 자기 다리를 감고 그녀의 머릿속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잠결에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다. 알렉산드라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알렉산드라는 그를 원하는 자기 자신을 원망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르단이 아무리 방탕하고 무심한 바람둥이라 해도 또 마지못해 자기와 결혼한 사람이라 해도 그녀는 그를 원했다. 그녀는 마침내 인정하기로 했다. 조르단은 그저 방탕하고 제멋대로인 귀족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녀는 그의 사랑과 그의 신뢰와 그의 아이를 원했다. 그녀는 그를 위해 호손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고 싶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호손을 아름다운 곳으로 보게 만들고 싶었다. 호손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아름다운 곳으로 보게 만들고 싶었다.
토니와 노부인 그리고 멜라니까지도 모두 그녀가 조르단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노력해 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다는 걸 그녀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러나 만약 실패한다면 그 고통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
26. 맨발의 공작부인
“공작님?”
알렉산드라는 다음날 새벽 가만히 조르단을 불렀다.
조르단은 잠에 취해 한쪽 눈을 뜨고 아내가 말짱한 얼굴로 침대 한쪽 편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잘 잤어?”
그는 웅얼거리면서 몸에 꽉 끼는 실크 잠옷 위로 드러나 그녀의 젖가슴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 시지?”
그의 목소리는 잠에 취해 있었다. 조르단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새벽하늘이 연분홍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조르단과는 달리 알렉산드라는 간밤에 한잠도 자지 않았지만 잠에 취해 멍한 상태가 아니었다.
“여섯 시예요.”
“놀리는 거야!”
조르단은 그렇게 이른 시간이라는데 놀라 다시 눈을 감으며 왜 새벽에 사람을 깨웠는지 설명을 요구했다.
“누가 아파?”
“아뇨.”
“죽었어?”
“아뇨.”
그는 눈가에 잔주름을 만들며 희미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깨어나야 할 이유는 병과 죽음밖에는 없어. 자, 다시 침대로 들어와.”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이 졸면서 던지는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눈을 감고 있고 또 확실히 잠이 쏟아져 왔지만 조르단은 아내가 전에 없이 활짝 웃고 있다는 것과 히프를 그의 허벅지에 살짝 붙여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보통 알렉산드라는 자연스럽게 웃지 않고 웃음을 참으려 했으며 사랑의 행위를 할 때 이외에는 가능하면 그이 몸에 닿지 않으려 했다.
새벽부터 그녀가 별난 행동을 하고 또 기분이 좋은 이유가 뭔지 궁금해 조르단은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깨 위로 늘어뜨린 긴 머리와 건강하게 반짝이는 피부를 가진 그녀는 감미로워 보였다. 또한 무슨 할 말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그는 그녀를 자기위로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참고 가볍게 말했다.
“그럼 보다시피 이렇게 깼어.”
“좋아요.”
그녀는 환한 미소 뒤에 불안감을 감추었다.
“오늘 아침엔 뭔가 특별한 일을 하고 싶어요.”
“지금 이 시간에? 거리로 나가 조심성 없는 여행자를 덮쳐 지갑이나 훔치는 것 말고 뭘 하겠다는 거야? 지금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도둑이나 하인밖에 없어.”
“아직 나갈 필요까지는 없어요.”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이 거절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용기가 사그라들면서 주춤주춤 말했다.
“그리고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당신이 내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보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하고 싶다는 게 뭐야?”
조르단은 속으로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같이 하자고 조를 만한 일이 뭔가를 생각하면서 한숨을 쉬며 물었다.
“맞춰 보세요.”
“새 모자를 사러 읍내에 나가잔 말이야?”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긴 머리가 찰랑찰랑 흔들렸다.
“일찍 말을 타고 언덕으로 나가 해돋이를 구경하며 그 광경을 스케치하겠다는 말이야?”
“난 그림이라곤 선도 그을 줄 몰라요.”
알렉산드라는 용기를 내기 위해 한숨을 들이쉬었다.
“낚시가고 싶단 말이에요!”
“낚시?”
조르단은 그녀가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 이 시간에 나보고 낚시를 가잔 말이야?”
그녀가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조르단은 베개 속 깊이 머리를 묻고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는 들어 줄 수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먹을 양식도 한 톨도 없고 우리 둘 다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라면 몰라도.”
그의 어조에 용기를 얻어 알렉산드라는 계속 졸랐다.
“저에게 어떻게 낚시하는지 가르치느라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어요. 전 이미 낚시를 할 줄 알아요.”
그는 한쪽 눈을 뜨고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왜 내가 낚시할 줄 안다고 생각하지?”
“낚시하실 줄 모르면 제가 가르쳐 드릴 게요.”
“고마워. 하지만 나도 할 수 있어.”
조르단은 그녀를 뻔히 쳐다보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잘됐어요. 저도 할 수 있어요. 저도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바늘에 지렁이도 끼울 수 있고..... ”
“좋았어. 내 낚싯바늘에도 지렁이를 좀 끼워 줘. 지금 이 시각에 죄 없는 지렁이를 깨워 그들을 고문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의 농담에 알렉산드라는 쿡쿡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실크 잠옷의 허리띠를 죄었다.
“제가 만반의 준비를 해놓을 게요.”
그녀는 웃으면서 그녀의 침실로 향했다.
베개에 기대앉아 조르단은 그녀가 무의식중에 유혹하듯이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는 걸 보면서 그녀를 다시 침대로 불러들여 한 시간 동안 후계자의 씨를 뿌리는 일에 몰두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눌렀다. 그는 낚시를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왜 낚시를 가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도 몰랐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그것이 뭔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시원스럽게 물이 흐르는 넓은 시냇가에 이르렀다. 그제서야 조르단은 알렉산드라가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언덕발치에 있는 나무에 말을 묶어 두고 그는 알렉산드라와 나란히 잡초가 무성한 시냇가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벌써 누군가가 커다란 오크나무 아래 청색 담요를 깔아 놓았다.
“저것들은 또 뭐야?”
조르단은 담요 옆에 있는 커다란 바구니 두 개와 조그만 바구니 하나를 가리켰다.
“아침 식사예요.”
알렉산드라는 웃으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모양새로 봐서는 저녁까지 먹어도 되겠어요. 아마 조리사가 공작님의 낚시 실력을 믿지 못하나 보죠.”
“어쨌든 한 시간 이상은 더 있을 수 없어.”
알렉산드라는 낚싯대를 집으려다 말고 실망한 얼굴을 했다.
“한 시간요?”
“오늘 할 일이 많아.”
조르단은 웅크리고 앉아 일찌감치 하인들이 갖다 둔 낚싯대 중에 하나를 골라 들고 낚싯대를 구부려 유연성을 시험했다.
“알렉산드라, 난 몹시 바쁜 사람이야.”
그는 설명조로 말했다.
“또한 부자이기도 하잖아요.”
알렉산드라도 낚싯대를 시험해 보면서 금방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왜 늘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야 하죠?”
조르단은 잠깐 생각하더니 허허 웃었다.
“계속 부자로 남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 편안하게 쉬면서 인생을 즐길 권리까지 포기해야 한다면 그 대가가 너무 비싸군요.”
알렉산드라는 발뒤꿈치를 딛고 한바퀴 빙돌아 그를 마주 보았다.
조르단은 그 말을 한 철학자가 누군가 생각해 보려고 눈썹을 모았지만 잘 생각나지 않았다.
“누가 한 말이지?”
알렉산드라가 활짝 웃었다.
“제가요.”
조르단은 그녀의 재치에 놀라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낚싯바늘에 지렁이를 끼우고 둑으로 내려갔다. 물위로 가지를 뻗고 쓰러져 있는 커다란 고목 옆에 앉아 그는 낚싯줄을 던졌다.
“거긴 큰 고기를 낚을 만한 자리가 못돼요.”
알렉산드라가 그의 뒤로 다가오며 자기가 더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충고했다.
“제 낚싯대 좀 잡아 주시겠어요?”
“당신은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한 것 같은데.”
조르단은 그녀가 부츠와 스타킹을 벗는 것을 보며 놀렸다.
그녀는 뭘 하려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알렉산드라는 치마를 걷어 올리고 날씬한 종아리와 발목과 조그만 맨발을 드러내며 영양처럼 민첩하고 우아하게 쓰러진 고목 둥치위로 폴짝 뛰어올라갔다.
“고마워요.”
그녀는 낚싯대를 받아 쥐며 말했다.
조르단은 낚싯대를 건네주면서 알렉산드라가 그 자리에 앉으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거센 물살 위에 걸쳐져 있는 굵직한 나뭇가지를 따라 곡예사처럼 몸의 균형을 잡아가며 걸어가고 있었다.
“이리로 와 ! 빠지겠어.”
조르단은 놀라서 목청을 높여 날카롭게 외쳤다.
“괜찮아요. 물고기처럼 헤엄도 잘 치니까요.”
그녀는 어깨너머로 생긋 웃어 보이고는 가지 위에 앉았다.
물위로 날씬한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며 머리위로 햇빛을 받고 앉아 있는 공작부인.
“전 어릴 때부터 낚시를 좋아했어요.”
그녀는 낚싯줄을 던지며 말했다.
조르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팬로즈가 가르쳐 줬겠지.”
조르단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가 가르치긴 제대로 가르쳐 줬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녀는 자랑하던 대로 바구니에서 지렁이를 꺼내 용감하게 낚싯바늘 끝에 지렁이를 끼웠다.
두 사람은 분명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잠시 후 알렉산드라는 높다란 가지 위에서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낚싯대에 지렁이를 끼우지 않겠다고 까탈을 부리지 않아서 기뻐요.”
“난 까탈부린 적 없어.”
조르단은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항의했다.
“난 그저 지렁이를 끼울 때 지렁이가 내는 소리가 싫을 뿐이야. 보통 우리는 미끼로 쓰기 전에 미끼감을 죽이잖아. 그게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지 않아?”
“소리는 무슨 소리가 난단 말이에요?”
알렉산드라는 열을 내서 반박했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나 확신에 차 있어 자신도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청각이 발달한 사람들만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지. 하지만 어쨌든 분명히 소리가 나긴 나.”
조르단이 정색을 하며 반박했다.
“팬로즈는 그렇게 해도 지렁이는 아프지 않다고 말했어요.”
그녀가 자신 없게 이야기했다.
“팬로즈는 귀가 어두워. 그는 지렁이들이 비명을 질러도 아마 못 들을 거야.”
손에 든 낚싯대를 쳐다보는 알렉산드라의 얼굴이 걱정스러움으로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조르단이 웃음을 감추려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마침내 그가 농담을 한 걸 알고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한 웅큼 쥐어 조르단에게 던졌다.
“악당!”
조르단은 소맷자락에 묻은 나뭇잎과 가지를 털어 내며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바보같은 내 사랑하는 아내여, 만약 내가 지금 당신처럼 그렇게 위태롭게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면, 난 좀 더 고분고분하고 얌전하게 행동할 거야.”
그는 약올려 주려고 그녀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를 살짝 흔들었다.
알렉산드라는 예쁜 눈썹을 치켜들었다.
“바보 같은 나의 남편이여.”
그녀가 자기를 남편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조르단은 순간 온몸으로 희열을 느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물에 빠지게 한다면 그건 큰 실수이며 당신도 흠뻑 젖고 말 걸요.”
“내가?”
그는 농담을 즐기며 물어 보았다.
“왜?”
“왜냐면, 난 헤엄을 못치니까요.”
조르단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맙소사, 꼼짝 말고 거기 있어. 지금 당신 아래 물이 얼마나 깊은지 나도 몰라. 하지만 분명히 머리끝까지 잠길 만큼 깊을 거야. 게다가 물에 빠지면 사람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수면도 맑지 못하다구. 내가 갈 때까지 거기에 꼼짝 말고 있어.”
조르단은 운동선수처럼 날쌔게 나무 둥치로 뛰어올라 팔만 내밀면 그녀를 잡을 수 있는 지점까지 조심조심 나뭇가지 위로 걸어왔다.
“알렉산드라, 내가 좀 더 가까이 가면 내 몸무게 때문에 나뭇가지가 부러지거나 휘어져서 물에 빠지게 될지 몰라.”
그는 침착하게 그녀를 안심시키듯이 말했다.
그는 그녀를 향해 조금 더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앉아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겁내지 마. 그냥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아.”
그녀가 아무 저항도 하지 않자 조르단은 안심했다. 그녀는 왼손을 들어 머리 위의 잔 나뭇가지를 잡고 오른손으로 그의 손목을 꽉 잡았다. 순간 조르단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자 가지 위에 발을 올려놓고 일어서 봐. 내 손목에 힘을 의지하고.”
“그렇게 못하겠어요.”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이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협박했다.
“전 차라리 헤엄을 치겠어요. 당신도 같이 하시지 않을래요?”
“그렇게 하지 마.”
조르단은 손목을 잡힌 채 심각하게 경고했다.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한 손을 알렉산드라에게 잡힌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있는 그의 운명은 완전히 그녀의 변덕에 달려 있었다.
“수영을 못하신다면 제가 구해 드리죠.”
“알렉산드라.”
그는 다분히 위협조로 말했다.
“만약 나를 저 차가운 물속으로 던진다면, 살고 싶으면 반대 방향으로 헤엄쳐 가는 게 나을걸.”
그는 그게 진심이었고 그녀도 알고 있었다.
“네 알아모시죠, 주인님.”
그녀는 웃으면서 순순히 그의 팔목을 놓아주었다.
조르단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 일어나 분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단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처럼 고약하고....... ”
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 때문에 말을 마칠 수 없었다.
“고마워요. 예측할 수 있는 일만 생기면 재미없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녀는 돌아서서 나뭇가지를 걸어가 풀밭 위로 훌쩍 뛰어 내리는 조르단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
조르단은 풀밭 위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가 낚싯대를 집어 들며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을 만나 이후 단 한순간도 앞일을 예측할 수 없으니.”
그 후 세 시간이 단 몇 분이 지난 것처럼 간단히 지나갔다. 조르단은 마침내 알렉산드라가 낚시에도 뛰어날뿐더러 아주 유쾌하고 위트 있고 똑똑한 인생의 동반자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저길 봐요! 고기가 물렸어요.”
조르단의 낚싯대가 반쯤 휘는걸 보고 알렉산드라가 외쳤다.
낚싯대를 들어 올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 오 분이나 씨름을 벌였지만 갑자기 낚싯대가 느슨해졌다. 그때까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나뭇가지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알렉산드라는 그가 낚싯대와 씨름을 하는 것을 구경하면서 충고와 격려를 하기도 하고 원통하다는 듯 신음을 내며 두 손을 들어 보이기도 했다.
“고기를 놓쳤잖아요!”
“단순한 고기가 아니야. 그건 커다란 이빨을 가진 고래였어.”
조르단은 그녀를 쳐다보며 반박했다.
“놓치고 나니까.”
그녀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그 열정 못지않게 전염성이 있었다. 조르단은 심각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제발 고래를 과소평가하는 이야기는 그만두고 이제 바구니를 열어봐. 배고파 죽겠어.”
그는 뒤로 물러서서 알렉산드라가 사뿐사뿐 나뭇가지를 내려오는 모습을 구경했다. 그녀가 가지에서 내려오기 위해 낚싯대를 건네주자, 그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내려 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이 그에게 스치자 그녀는 뻣뻣해졌다. 그는 얼른 그녀의 허리를 놓아주었다.
그와 닿을 때 그녀가 보여 준 반응 때문에 조르단은 아침 내내 상쾌했던 기분이 약간 상했다. 담요 위 그녀 맞은편에 앉아 그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그녀가 음식 바구니를 풀어놓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이 낚시를 계획한 이유가 뭘까? 분명히 <낭만적인 전주곡>으로 낚시를 계획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아침이군요.”
알렉산드라는 잠시 아침 햇살이 바로 눈앞의 수면에서 춤추는 것을 구경했다.
가슴 앞으로 한쪽 무릎을 세워 한 팔로 감싸 안으며 조르단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제 낚시가 끝났으니 왜 이런 일을 꾸몄는지 말할 때가 됐겠지.”
알렉산드라는 수면에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이죠?”
“내 말은 왜 오늘 아침을 이런 식으로 보내고 싶었느냐는 말이야.”
그녀는 조르단이 궁금해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올 줄은 몰랐다. 전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진심으로 살고 싶은 삶이 어떤 건지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의 입술이 조소를 띠었다.
“그래서 이제 당신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세련되지도 우아하지도 못한 여자란 걸 보여줬으니 나더러 당신을 혐오하고 모샴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거야, 그래?”
너무나 자기의 진심을 몰라주는 그의 말에 알렉산드라는 웃음이 나왔다.
“전 그런 멋진 계략은 꿈에도 생각 못해 봤어요. 전 그렇게 창의적이지 못하거든요.”
순간 알렉산드라는 그의 회색 눈동자가 안도의 빛을 띠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좀 전에 낚시할 때의 편안하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되살리고 싶었다.
“제 말을 못 믿으시겠어요?”
“잘 모르겠어.”
“제가 언제 거짓말을 했던가요?”
“당신네 여자들은 솔직한 것과는 거리가 멀잖아.”
“그건 남자들 잘못이죠.”
그녀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 새하얀 뭉개구름이 떠다니는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우리 여자들이 솔직하면 남자들이 참을 수 없을 걸요.”
“그래”
조르단은 한 팔로 머리를 받치고 그녀 옆에 누웠다.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돌아보았다.
“만약 여자들이 솔직하다면 남자들은 우리보다 더 똑똑하고, 더 현명하고 더 용감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걸요. 사실 남자들은 때때로 아주 무거운 물건이나 들어 올릴 때 필요한 짐승 같은 힘에 있어서나 우리 여자들보다 우월하지만요.”
“알렉산드라, 남자들의 자아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 그렇게 했다간 고전적인 방법으로 우월성을 보이려 할 테니까.”
조르단은 그녀의 입술을 향해 천천히 입술을 가져갔다.
매혹적인 회색 눈과 더불어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에 알렉산드라는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넓은 어깨를 안으며 그를 자기에게로 가까이 끌어당기고 싶었다.
“제가 당신의 자아를 건드렸나요?”
“건드렸어.”
“여자가 남자보다 더 똑똑하고, 더 현명하고 더 용감하다고 해서요?”
“아니.”
그의 미소 짓는 입술이 거의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당신이 나보다 고기를 더 많이 잡아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갑자기 조르단이 입술로 막아 버렸다.
온몸으로 나른함과 충만함을 느끼며 조르단은 사랑의 행위는 잠시 보류하기로 하고 굶주린 듯이 오랫동안 키스만 하고는 그녀 옆에 누웠다.
그녀는 그가 계속하지 않은 것에 약간 놀라고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나중에.”
그가 싱긋 웃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미소를 지으며 살짝 그이 시선을 피했다. 잠시 후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가 뭔가에 매료된 듯했다.
“뭘 보고 있는거야?”
“용.”
조르단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알렉산드라는 손을 들어 동남쪽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저 구름 말이에요...... 저걸 보면 무슨 생각이 나죠?”
“통통한 구름.”
알렉산드라가 그에게 눈을 흘겨 보였다.
“그것말구요?”
그는 잠시 아물 말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통통한 구름 다섯 개와 가느다란 구름 세 개.”
알렉산드라가 웃음을 터뜨리며 옆으로 돌아누워 그의 입에 흠뻑 키스를 했다. 그러나 조르단이 사랑의 행위에 돌입할 듯이 그녀를 바짝 껴안으려 하자 알렉산드라는 몸을 빼며 계속 하늘을 쳐다보기를 고집했다.
“상상력이 그렇게 없으세요? 저기 하늘의 구름을 보세요. 분명히 뭔가가 연상될 것 아니에요. 추상적인 것이든 사실적인 것이든요.”
상상력이 없다는 알렉산드라의 비난에 자극 받은 조르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열심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마침내 뭔가가 연상되었다. 저기 오른쪽 하늘에 여자의 젖가슴과 똑같이 생긴 구름이 있다. 그가 뭔가 보인다는 표정을 짓자 알렉산드라가 흥분하며 물었다.
“뭐가 보여요?”
조르단이 소리 없이 온몸을 흔들며 웃었다.
“생각중이야.”
그는 서둘러 그녀에게 말할 만한 형태를 찾다가 마침내 발견했다.
“백조.”
그는 거의 경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백조가 보여.”
조르단은 구름 구경이 뜻밖에 아주 재미있는 소일거리란 걸 알았다. 특히 알렉산드라가 그의 손을 꼭 잡고 그에게 몸을 밀착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녀가 그렇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과 그녀가 사용한 향수의 유혹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조르단은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하고 다른 한 팔로 알렉산드라의 허리를 안으며 천천히 입술을 알렉산드라의 입술로 가지고 갔다. 그의 키스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너무도 따스하고 너무도 적극적이어서 조르단은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입술을 떼어내며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부드러움과 따스함에 겸허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들은 한낮이 되어서야 마구간으로 돌아왔다. 스마스와 이십 명의 마구간지기와 마부들은 그들의 아침 낚시 결과가 궁금해 몰래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알렉산드라는 그의 넓은 어깨에 손을 얹고 그의 눈을 향해 미소 지으며 그의 부축을 받고 말에서 내렸다.
“덕분에 즐거웠어요.”
그녀는 자기를 천천히 땅에 내려놓는 조르단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천만에.”
그는 계속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자기 곁에 꼭 붙여 두었다.
“또 하고 싶으세요?”
그녀는 낚시를 염두에 두고 물어 보았다.
“또 하고 싶어.”
그는 사랑의 행위를 생각하며 잠긴 소리로 말했다.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
알렉산드라의 뺨이 장미색으로 변했다.
“낚시를 또 하고 싶냐는 뜻이에요?”
“다음번에는 내가 제일 큰 고기를 낚도록 해주겠지?”
“그렇게 안 되죠. 하지만 사람들에게 오늘 잡다가 놓친 고래 이야기를 하신다면 그건 제가 증인이 되어 주요.”
조르단이 고개를 젖히고 큰소리로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마구간에 울려 퍼졌다. 창가에 숨어 공작과 젊은 공작부인을 훔쳐보고 있던 스마스와 마부들의 귀에도 그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말했지. 마님은 해낼 수 있다고!”
스마스는 옆에 서 있던 마부를 쿡 찌르며 윙크를 보냈다.
“내가 말했잖아. 마님은 틀림없이 공작님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분이라고.”
스마스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솔로 밤색 종마의 털을 빗질하기 시작했다.
마부 존도 말안장을 닦다가 일손을 멈추고 두 연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일을 시작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마구간지기도 쇠스랑을 놓고 공작과 공작부인을 구경하다가 그 역시 휘파람을 불며 다시 건초를 모으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라의 허리를 잡고 집으로 에스코트해 가던 조르단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마구간이 활짝 핀 얼굴로 분주히 일손을 놀리는 하인들의 휘파람과 콧노래로 술렁이고 있었다.
“뭐가 잘못됐어요?”
알렉산드라가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는 그의 관심을 끈 게 뭔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어 아리송하단 듯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거의 한나절을 빈둥대며 보냈으니 그 보상을 하려면 지금부터 내일까지 두 배로 열심히 일해야겠군.”
알렉산드라는 실망하면서 그러나 굳은 결심을 가지고 명랑하게 말했다.
“그러시다면 모래까지는 재미있는 오락으로 당신을 방해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어요.”
“어떤 재미있는 오락을 생각중인데?”
“소풍요.”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앉으시오, 포키스. 잠깐이면 되오.”
조르단은 그날 오후 늦게 런던의 사업 대리인이 보낸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포키스 수사관에게 말했다.
포키스는 공작이 자기의 수사를 필요로 할만큼 성가신 일에 시달리고 있어 짜증스러워 자기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다고 이해하고 조르단의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호손에 있는 동안 토지 부관리인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잠시 후 공작은 펜을 놓고 의자 뒤로 몸을 기대며 물었다.
“자, 무슨 일입니까?”
“공작님, 어젯밤 제게 안토니 경에게 쪽지를 갖다 주라고 하실 때 부인께도 그를 방문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소.”
“부인이 공작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이행했다고 확신하십니까?”
“확신하오.”
“분명히 해두셨습니까?”
조르단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았다.
“아주 분명히 해뒀소.”
걱정스럽게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던 포키스는 잠깐 얼굴을 찌푸렸다가 표정을 풀고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어제 오후 늦게 부인께서 마구간으로 가셔서 마차를 요구하셨습니다. 부인은 저희 요원인 올슨에게 영지 내의 어떤 집을 방문할 계획이므로 그가 수행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젯밤에 안토니 경이 갑자기 윈슬로로 돌아오기로 한 것이 수상쩍다고 이야기한 것도 있고 해서 올슨은 부인을 뒤따라갔습니다. 물론 부인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서 보호해 드리기 위해 몸을 숨기고 말입니다.”
포키스는 잠시 말을 중단하더니 의미 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어떤 집에 잠깐 들린 다음 부인께서는 곧장 안토니경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부인이 거기 있는 동안의 분위기로 미루어 저는 부인의 방문건이 신경 쓰이며 심지어 의심스럽기까지 합니다.”
조르단이 회색 눈 위로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그것이 당신의 신경을 건드리는지 이해할 수 없군. 그녀는 내 명령을 무시했소. 그건 내 문제지 당신 문제가 아니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의심한다는 것은......”
“공범자로 말입니까? 아마 아닐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닙니다. 안토니 경의 집에 수상한 사람이 드나드는지 감시하기 위해 그곳에 배치된 저의 요원들의 말에 따르면 안토니 경의 동생과 어머니도 모두 집안에 있었다고 합니다. 부인께서는 잠깐 집안으로 들어가 그분들을 만나 보셨습니다. 그리고 약 십 오 분 뒤에 안토니 경과 부인께서는 같이 집을 나와 집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집 옆의 정원으로 들어갔다는군요. 그리고 거기서 사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이야기 내용은 올슨이 잘 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이나 태도로 봐서 아주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포키스 수사관은 뭐라고 해석하기 힘든 조르단의 얼굴에서 눈을 떼어 멀리 벽을 보았다.
“정원에 있는 동안 두 사람은 포옹하고 또 키스를 했답니다. 두 번.”
난데없이 망치에 한 대 맞은 것처럼 고통과 의혹과 의심이 한꺼번에 조르단의 뇌리를 스쳤다. 토니가 알렉산드라를 포옹하고...... 키스하고...... 손은......
“하지만 오랫동안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르단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잠깐 눈을 감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조용하고 냉정하고 딱딱했다.
“내 아내와 사촌은 친척지간이오. 더구나 친구이기도 하고. 그가 나를 살해하려 하고 또 그녀 자신의 목숨도 위험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는 걸 모르는 그녀는 틀림없이 내 사촌을 찾아가지 말라는 내 명령을 부당하고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거요. 그래서 내 명령을 무시하고 그들을 찾아갔을 거요.”
“부인께서 감히 공작님의 명령을 거역했는데, 그래도 공작님은 부인이.....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아니 적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화는 나지만 의심스럽지는 않소.”
조르단은 냉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상하지도 않소. 내 아내는 어릴 때부터 자기가 하고싶은 일은 하는 사람이오. 그건 좋지 못한 버릇이고 또 그 버릇을 고쳐놓을 생각이오. 그렇다고 해서 내 아내를 암살에 공모했다고 의심할 수는 없소.”
더 이상 그 문제를 이야기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키스는 정중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방을 나가려고 돌아서다가 공작의 얼음 같은 목소리에 돌아섰다.
“포키스, 당신 요원들에게 앞으로 내 아내와 내가 외출할 때는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으라고 일러두시오. 당신들은 살해범을 찾으려고 있는 것이지 우리를 엿보려고 있는 건 아니오.”
“공작님을 엿본다구요?”
포키스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집으로 돌아오다가 숲에서 당신 요원 두 사람을 봤소. 그들은 살해범을 찾는게 아니라 내 아내를 쳐다보고 있었소. 그들을 철수시켜 주시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각하. 저희 요원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로....”
“그들을 철수시키시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포키스는 고개를 숙였다.
“또한, 내가 아내와 같이 있을 때면 요원들에게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라고 지시하시오. 그들이 제대로 할 일을 수행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위험을 염려하지 않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을 거요. 나는 내 사생활을 침해받고 싶지 않으며 또한 밤이고 낮이고 집안에만 숨어 살고 싶지도 않소. 내 아내는 내가 직접 돌보도록 하겠소.”
포키스는 화해의 제스처로 손을 내밀었다.
“공작님, 저는 수년간의 경험으로 이런 상황이 아주 힘들다는 걸 잘 압니다. 특히 공작님 같은 지체 높으신 분에게는요. 하지만 시즌중에 타운센드 경이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기에 그분이 제일 의심스럽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건 직무유기가 아닙니다. 또한 저희 요원이나 저는 그저 부인을 보호해 드리기 위해..... ”
“그 때문에 당신에게 막대한 돈을 지불하는 게 아니오!”
조르단이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귀족들이 부당한 요구를 하는 데 이골이 날만큼 난 포키스는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작님.”
“앞으로 더 이상 근거 없이 내 아내를 의심하는 짓은 삼가 주시오.”
포키스는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서재 문이 닫히는 순간 조르단의 딱딱한 얼굴에서 확신과 결의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포키스가 한 말을 떨쳐버리려 했지만 그것은 수천 개의 망치가 되어 그의 머리를 때렸다.
타운센드 경이 느닷없이 돌아온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부인과 타운센드 경은 산책을 나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포옹을 하고 키스했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포키스의 말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미쳤어! 친형제처럼 생각하고 사랑해 온 토니가 그를 죽이려 했다는 건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알렉산드라가 그를 배반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자기와 함께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던 순수하고 매혹적인 알렉산드라가, 사랑의 행위를 하는 동안 자기에게 꼭 매달려 오던 알렉산드라가 몰래 토니를 사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있을 수 없는 미친 생각이야! 불결해!
그는 포키스의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조르단은 현재 자기의 입장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알렉산드라는 그의 인생에 처음 나타나는 순간부터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작은 소녀는 그를 매혹시켰으며 그에게 웃음을 주었다. 그리고 그를 즐겁게 하고, 화나게 하고, 교묘하게 호기심을 자아내며 유혹했다.
그녀가 어떻게 하든 그녀가 미소 지으면 그는 마음이 따스했다. 그녀의 손길은 그의 피를 뜨겁게 하고 그녀의 노랫소리 같은 웃음소리는 그에게 생기를 주었다.
심지어 질투와 의혹에 사로잡혀 괴로운 이 순간에도 오늘아침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미소가 나온다. 머리 위로 햇살을 이고 맨발의 긴 다리를 내놓고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그녀.
무도회 가운을 입으면 그녀는 여신처럼 우아하고 기품이 있다. 침대에서 이 세상 그 어떤 여자보다도 도발적인 여자가 된다. 긴 머리를 바람에 흩날리며 담요 위에 맨발로 얌전히 앉아있는 그녀는 영락없는 공작부인이다.
맨발의 공작부인. 내 여자. 조르단은 소유욕이 일었다. 그녀는 하느님과 인간의 법에 의한 그의 여자이다.
조르단을 펜을 들고 일에 몰두하려 했다. 그러나 평생 처음으로 일에 완전히 몰두할 수 없었다.
또한 알렉산드라가 어제 자신의 행방에 관해 거짓말했다는 사실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27. 평화로운 오후
예전에 조르단이 매를 맞으며 공부하던 음산한 방의 높다란 창문으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쪽지은 머리에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알렉산드라는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 속에서 책제목들을 훑어보았다. 그녀는 잠시 후 사냥터 관리인의 집에 모일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기초 읽기 교재로 사용할 초심자용 독서 교본을 찾고 있었다.
책제목을 읽어 본 그녀는 조르단이 얼마나 방대하고 깊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지 새삼 놀랐다. 책장에는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플루타르크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라가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철학자의 저서까지 수십 권도 넘는 가죽 표지 장서가 꽂혀 있었다. 건축과 유럽의 역사, 각 유럽 통치자의 생애와 치적에 관한 전집도 있었다. 영어로 된 책도 있었지만 어떤 책은 라틴어, 그리스어 또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다. 특히 수학에 관한 책이 많은 걸로 보아 조르단은 수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았다. 알렉산드라로서는 제목만 봐도 너무 복잡해 내용을 알 수 없는 책들도 많았다. 지리책도 있고 탐험가가 쓴 책도 있었으며 또 고대 문화에 관한 책도 있었다. 외할아버지에게 말로만 듣던 책들이 그곳에 모두 모여 있었다.
어떻게 그는 이 음침한 곳에서 몇 년씩이나 공부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햇살이 가득한 방 아니면 햇살을 받으며 실외에서 공부했었다. 그녀는 외할아버지에게 공부를 배우던 그 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그분은 지식에서 평화와 즐거움을 찾았으며 공부를 통해 그녀에게도 똑같은 즐거움을 가르쳐 주었다.
알렉산드라는 커다란 가정교사용 책상과 마주보는 책상 앞에 멈춰섰다. 책상 위에 조르단의 이름 첫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사랑스럽게 그의 이름을 만져보았다.
제일 처음 그 책상에서 조르단의 이름을 보았을 때는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날 그리고 그 후 몇 달 동안 자기가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는 아래층 서재에서 일하고 있다. 건강하게 살아서 여전히 미남인 모습으로. 차가운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조르단은 검게 탄 얼굴에 잘 어울리는 눈처럼 흰 셔츠와 근육질의 긴 다리를 강조해 주는 승마바지를 입고 아래층에 앉아 있다.
그가 살아서 건강하게 여기에 그녀와 함께 있다. 예전에 그녀가 기도하고 꿈꾸어 왔던 그대로. 하느님은 그녀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그녀는 갑자기 모든 것이 감사했다. 하느님은 그녀에게 그를 돌려보내 주셨고, 귀족적이며 부드럽고 환한 그를 이해하게 만드셨다.
알렉산드라는 생각에 잠겨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살며시 문을 닫으려는 순간 뭔가 쿵하고 바닥에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알렉산드라는 뒤돌아 바닥을 살펴보았다. 순간 반짝반짝 윤이 나는 굵직한 회초리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은 모르겠지만 조르단의 가정교사가 조르단에게 사용하라고 지시받았던 회초리. 그녀는 놀라움과 증오에 찬 눈으로 그 회초리를 노려보았다.
회초리를 노려보는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튀면서 그녀는 그것을 사용했던 이름 모를 가정교사를 때려주고 싶었다. 그녀는 방문을 꽝 닫았다. 홀에서 하인을 만나자 그녀는 회초리를 건네주며 말했다.
“태워 없애 버려요.”
서재 창가에 서있던 조르단은 알렉산드라가 팔에 책 몇 권을 끼고 마구간으로 가늘 것을 보았다.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당장 그녀를 불러 세우고 싶은 충동이 너무도 간절했다. 그는 벌써 그녀가 그리웠다.
두 시간 뒤, 오후에 늘 그렇듯이 편지를 받아쓰기 위해서 서재로 불려온 조르단의 비서 아담스는 펜을 들고 편지를 받아쓸 준비를 하고 있다가 당황했다. 조르단은 조지 벤틀리 경에게 보낼 편지를 부르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오후 내내 공작이 전에 없이 정신이 산만한데 난처해진 아담스는 공작의 침묵이 나가라는 뜻인지 몰라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파란 하늘에 떠다니는 뭉게구름을 꿈꾸듯 바라보던 조르단은 번쩍 정신을 차리며 비서를 돌아보았다.
“어디까지 했나?”
“조지 경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시타델> 호가 지난번 항해에서 벌어들인 수익금의 투자방법에 대해 지시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알았네.”
조르단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륜마차처럼 생긴 구름이 다른 구름과 합쳐 커다란 갈매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에게 당장 <갈매기> 아니 <발키리> 호를 채비시키라고 일러.”
“<발키리> 호라구요?”
아담스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공작은 마지못해 창문에서 눈을 떼어 어리둥절해하는 아담스를 쳐다보았다.
“내가 방금 그랬지 않아?”
“네, 맞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 앞 단락에서는 조지 경에게 <포윈스> 호를 채비시키길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스는 공작의 당황한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조르단은 곧 손에 들었던 서류를 옆에 내려놓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늘은 그만하세, 아담스. 내일 오후에 계속하도록 하지.”
아담스는 속으로 공작이 무엇 때문에 팔 년만에 두 번째로 오후의 일과를 연기하는지 궁금했다. 지금까지 공작은 삼촌 장례식을 제외하고 한 번도 오후의 일과를 거른 적이 없었다.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여 말했다.
“아니, 내일 오후도 안 되겠어.”
아담스는 놀란 얼굴로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기라도 하듯이 공작을 쳐다보았다. 급하게 답장할 편지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내일도 일을 하지 않겠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 오후에 약속이 있어. 소풍가기로.”
아담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를 했다. 그러나 돌아서 나가려다 의자에 발이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조르단은 실내에 갇혀 너무 쉬지 않고 일만 한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집을 나가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러나 스마스가 급히 쫓아 나와 말을 타시려냐고 묻자 조르단은 마음을 바꿔 마구간 너머에 있는 사냥 관리인의 집으로 통하는 길로 걸어가 보기로 했다. 알렉산드라는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친다고 했다.
잠시 후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관리인 집의 나무계단을 두 개 올라갔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노랫소리를 듣고 처음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알렉산드라는 알파벳 각 글자의 이름이 들어간 재미있는 노래를 이용해 학생들에게 알파벳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눈에 띄지 않게 문간에 숨어 그녀의 예쁜 노랫소리를 속으로 감탄하며 들으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룻바닥에 앉아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학생들은 어린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도 몇 명 끼어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중 여자 두 명은 소작인의 아내였고 또 한 사람 나이 많은 노인은 토지 관리인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밖에 어른들은 누군지 또 아이들은 누구 집 아이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르단을 알아보았다. 나이든 아이들이 그를 알아보고 노래를 멈추며 동생들에게 입을 다물라고 다그쳐서 노랫소리가 어색한 멜로디를 이루며 중단되었다. 조르단 오른쪽으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알렉산드라는 이상하단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학생들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오늘은 그만할까요?”
그녀는 학생들이 갑자기 주의가 산만해지자 공부에 싫증이 나서 그런다고 오해하고 상냥하게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금요일 다시 만날 때까지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금언을 말씀드리겠어요. <인간은 동등하다.>”
그녀는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학생들을 전송하려고 조르단이 서있는 문간으로 걸어갔다.
“중요한 건 출신이 아니라 덕성이에요.”
그녀의 왼쪽어깨가 조르단의 어깨와 부딪쳤다. 그녀가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가르치는 거야.”
조르단이 부드럽게 농담을 던졌다. 학생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경외심을 가지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말을 자꾸 인용하다간 폭동이 일어날지 몰라.”
그가 문간에서 비켜섰다. 사람들은 그의 제스처가 곧 물러가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줄줄이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당신에겐 한마디도 않는군요.”
알렉산드라는 명랑하고 다정한 학생들이 한마디 말없이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통나무집 옆의 숲으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내가 그들에게 한마디도 안했기 때문이지.”
조르단은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러셨어요?”
알렉산드라는 정말 알 수 없었다. 그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인해 즐거움이 혼란으로 바뀌고 있었다.
“다른 지주들과는 달리 우리 조상들은 한 번도 소작인들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은 일이 없지.”
조르단이 무관심하게 설명했다.
이 넓고 사람 많은 영지에서 그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선 안 된다고 명령받은 외로운 소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알렉산드라는 애정을 듬뿍 담은 눈으로 조르단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모든 사랑을 그에게 쏟아 붓기를 열망하며 그녀는 그의 팔짱을 꼈다.
“오늘 오후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서 너무 기뻐요. 무슨 일로 여기 오셨죠?”
당신이 보고 싶어서..... 그러나 그는 거짓말을 했다.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나서.”
그녀의 손을 잡고 조르단은 연못 끝에 있는 정자까지 잔디밭을 거닐었다.
“여긴 호손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지.”
조르단은 정자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하얀 기둥에 어깨를 기댔다. 그리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말없이 숲과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옆 빈터에 그녀가 꽃을 심어 둔 줄은 모르고 있었다.
“내가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에 이곳에서 보낸 시간을 모두 합치면 아마 몇 년은 될 거야.”
자기와 결혼한 수수께끼 같은 미남 공작이 마침내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데 감격해서 알렉산드라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전에 호손에 있을 때 저도 이곳을 좋아했어요. 당신은 여기서 무얼 하셨나요?"
알렉산드라는 정자의 쿠션에 기대며, 예전에 조르단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곳에서 맥없이 백일몽을 꾸던 일을 회상했다.
"공부했지. 난 교실이 싫었어. 싫기로 말하자면 가정교사도 싫었구."
모든 일에 남보다 앞서야 한다고 아버지에게 몰리는 잘생기고 고독한 소년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남과 동시에 알렉산드라의 미소가 흔들렸다.
조르단은 알렉산드라의 눈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고 그녀의 태도가 왜 포근해졌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당신은 여기서 뭘 했어?”
알렉산드라는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주로 몽상을 했죠.”
“무엇에 대해?”
“그저 그런 거요.”
대답할 필요가 없어졌다. 조르단이 빈터 쪽을 보다가 갑자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게 뭐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대리석 묘비 쪽으로 걸어갔다. 묘비에 쓰인 글씨를 읽으며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르단 매튜 에디슨 타운센드
제 12대 호손 공작
1786년 6월 27일 출생
1814년 4월 16일 사망
우스워보일 정도로 잔뜩 혐오스런 얼굴로 그는 알렉산드라를 쳐다보았다.
“안토니가 나를 이렇게 숲에다 처박아 뒀단 말이야? 그가 보기엔 내가 가족 묘지에 묻힐 가치가 없었단 말이야?”
알렉산드라는 대리석 묘비에 자기가 죽었다고 쓰인 것을 보고 조르단이 뜻밖에 우스꽝스러운 반응을 보이자 웃음이 나왔다.
“저기 당신을 위한 기념비도 있어요. 전..... 우리는 당신을 추억하는 묘비를 세우기에 아주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이 숲 속 텃밭이 좀 넓어지고 또 꽃이 심어져 있는 것을 알아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가 아무 말도 없자 그녀가 가볍게 채근했다.
“이곳에 뭐 달라진 것 없어요?”
조르단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일구어 낸 산뜻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다.
“아니, 뭐가 달라졌어?”
그녀는 원망스럽다는 듯이 눈을 굴렸다.
“어떻게 꽃밭을 못 보실 수 있어요?”
“꽃? 아, 맞아, 꽃이 보이는군.”
그는 관심 없다는 듯 꽃밭에서 몸을 돌렸다.
“정말 보셨어요?”
알렉산드라는 농담처럼 물어 보았지만 한편으론 심각했다.
“그러면 고개를 돌리지 마시고 꽃이 무슨 무슨 색이었는지 말해 보세요.”
조르단은 왜 그러냐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는 그녀의 팔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노란색?”
잠시 후 그가 짐작해 보았다.
“분홍과 흰색이에요.”
“비슷하잖아.”
조르단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집 옆 화단에 풍성하게 피어있는 장미의 색깔이 서로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어 심어져 있는 것을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그중 핑크 색 장미는 그녀의 입술을 연상시켰다. 지금까지 한 번도 감상에 빠져 본 적이 없었는데 알렉산드라 때문에 감상에 빠졌다는데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들며 조르단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알렉산드라를 쳐다보았다. 그때 조금 전보다 더 쇼킹하게 감상적인 생각이 났다. 닷새 후면 그의 생일이었다. 그는 조금 전 묘비에 새겨진 날짜를 읽어 볼 때 그녀가 그 사실을 알아챘을까 궁금했다.
알렉산드라가 아침에 눈을 뜬 그에게 키스하며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해 줄 걸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갑자기 그는 그녀가 꼭 자기의 생일을 기억해 주고 그녀에게 그가 소중한 존재란 걸 믿게 해주는 어떤 표식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나도 나이를 먹나 봐.”
그는 조심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말했다.
“글쎄요.”
알렉산드라는 생각해 보는 표정을 지었다.
조르단은 그녀가 자기 생일이 다가왔다는 것도 모르고 심지어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실망스러웠다. 더구나 그녀에게 힌트까지 주면서 자기 생일을 알아주길 바라는 자기자신을 생각해 보니 마치 사랑하는 여자에게 특별한 애정 표시를 받고 싶어 안달이 난 사춘기 소년 같아 한숨이 나왔다.
홀에 들어서자 조르단은 토지 관리인을 찾으며 그녀 곁을 떠났다. 그러나 알렉산드라의 목소리가 그를 멈추게 했다.
“공작님.”
“조르단!”
“조르단.”
그녀는 그의 눈을 보고 미소 지었다. 그는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내일 시냇가로 소풍 가실 수 있으세요?”
조르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오전에 몇 군데 들릴 데가 있어요. 사냥터 관리인의 아내인 리틀 부인이 얼마 전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집에 선물을 갖다 줘야 해요. 그리고 그 집 말고도 몇 군데 들릴 데가 있어요. 그러면 시냇가에서 만나 뵐까요?”
“좋아.”
점점 더 그녀와 떨어지기 싫어지는 자기 자신이 놀랍기도 하고 짜증스럽기도 해서 조르단은 고의적으로 그날 저녁 그녀와 함께 식사도 하지 않고 또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았다. 그는 커다란 침대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뜬눈으로 천장만 멀뚱멀뚱 쳐다보며 그녀의 방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새벽까지도 그는 잠을 못 이루고 머릿속으로 알렉산드라의 침실을 재구상하고 있었다. 그녀의 방에도 자기 방과 똑같은 커다란 대리석 목욕실을 만들고 또 지금보다 훨씬 큰 드레스 룸을 만들어야겠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그녀의 침실에 침대를 놓을 자리가 없겠지.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며 그는 마침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너그럽게 그녀를 자기 침대에 재워 주겠다고 결심했다.
현대화를 위해선 그까짓 희생쯤이야 감수할 수 있지.
28. 사랑을 부른 마녀
알렉산드라는 오전 내내 그 동안 계획해 왔던 일을 실천하면서 신바람이 났다. 그녀는 숲 속 빈터까지 말을 타고가 말에서 내렸다. 조르단이 늠름한 어깨를 뒤로 젖히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시냇가에 서 있었다. 그녀는 오늘 몰래 토니를 방문했지만 조금도 죄스럽다거나 걱정스럽지 않았다. 그녀가 왜 그를 찾아갔던가 그 이유를 알게 되면 그가 절대로 화내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라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무성한 잡초가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삼켰다. 그녀는 어젯밤에 그가 함께 식사도 하지 않고 또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아 불안하면서도 그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기쁘기도 했다. 그의 태도는 어제 정자에서 돌아갈 때부터 냉랭해졌다. 그 생각을 하면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그녀는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에게 꼭 사랑하고 웃는 법을 가르칠 결심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조르단의 뒤로 다가가 뒤꿈치를 들고 두 손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움찔한다거나 근육 하나 까닥하지 않는 걸로 보아 그는 분명히 그녀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늦었군.”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에 눈을 가리운 채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말해 보세요. 당신이 보고 있던 언덕의 꽃들이 무슨 색이었어요?”
“노란색.”
“흰색.”
그녀는 손을 풀면서 한숨을 쉬었다.
조르단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계속 노란색이라고 하면 언젠가 한 번은 맞겠지.”
알렉산드라는 절망이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조르단이 둑에 펼쳐 둔 담요 쪽으로 갔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심하고 비감상적인 사람이에요.”
그녀는 어깨 너머로 말했다.
“그래?”
그는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그의 숨결에 그녀의 관자놀이 위로 흘러내리 잔머리가 흔들렸다.
“내가 정말 무심하다고 생각해?”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의 강인한 몸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성적매력을 생생히 느끼며 침을 삼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심한 것은 아니죠.”
그녀는 부끄럽게도 그이 품을 파고들며 왜 어젯밤에는 자기를 원하지 않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향한 충동을 애써 참으며 담요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바구니에서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배가 고파?”
조르단이 그녀 옆에 앉으며 놀렸다.
“배고파 죽겠어요.”
알렉산드라는 그가 곧 키스해 오리란 걸 직감하며 절대 정신을 잃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일종의 친밀감을 조성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가 키스하려고만 하면 즉각 그의 품에 뛰어 들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나 어젯밤에는 그녀를 무시한 상황에서 . 접시와 크리스털 잔을 챙기는 일에 목숨이 달려 있기라고 한 듯이 그녀는 계속 무릎을 꿇고 앉아 그에게 옆모습만 보였다.
눈처럼 새하얀 냅킨을 펼치려고 몸을 앞으로 굽히는 순간 조르단이 손을 들어 그녀의 뺨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당신 머리는 정말 멋져.”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그녀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햇빛을 받은 당신의 머리는 벌꿀처럼 반짝이고 살결은 복숭아처럼 부드러워.”
알렉산드라는 가벼운 농담으로 피해 보려 했다.
“배고픈 사람은 저만이 아닌 것 같군요.”
그녀의 농담에 그는 쿡쿡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손은 육감적으로 그녀의 뺨에서 맨살을 드러내놓고 있는 팔로 내려가고 있었다.
“소작인들 중 아무도 당신에게 먹을 걸 주지 않았어?”
“스코스워드 부인이 줬어요. 하지만 그녀의 언니인 티베리 부인이 부엌에 있어 먹지 못했어요.”
알렉산드라는 자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며느리에게 마구 잔소리를 퍼붓던 티베리 부인을 생각하며 코를 찡긋해 보였다.
조르단은 알렉산드라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냅킨을 놓고 고개를 들어 그의 뚱한 시선을 마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티베리 부인이 스코스워드의 부엌에서 뭘 하고 있었지?”
그는 육감적인 입술을 그녀에게로 가져오고 있었다.
“주문을 외면서 막대기로 단지를 젓고 있었어요.”
조르단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녀를 눕히고 그 위로 다가왔다.
“주문을 외는 마녀가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이야.”
그의 은빛 눈길에 최면 걸린 듯이 알렉산드라는 그에게 키스하고 싶었다. 그가 원하면 늘 그렇게 쉽게 정복되고 마는 자신이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가 키스하려고 고개를 내리자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조르단의 입술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그러나 조르단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뺨을 따라 입술을 그녀의 민감한 귓불로 가져갔다. 그의 혀가 불쑥 그녀의 귀로 들어왔다. 알렉산드라는 자동적으로 꿈틀했다.
“저..... 전 배가 고파요.”
“나도 그래.”
그는 그녀의 귀에 대고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알렉산드라의 가슴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조르단은 고개를 들어 최면에 걸린 그녀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다.
“당신 팔로 날 안아 줘.”
“식사후에..... 힘이 생긴 뒤에 하면 어떨까요?”
조르단의 남성적인 입술이 단호하게 단 한마디 명령을 내렸다.
“지금.”
알렉산드라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조르단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그녀는 조르단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온몸으로 퍼지는 욕망에 두려움을 느끼며 그녀는 동작을 멈췄다.
“지금.”
조르단이 쉰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입술이 곧 그녀의 입술에 닿을 것 같았다.
“저..... 저 먼저 와인 한잔 하시겠어요?”
“지금.”
절망과 항복의 소리 없는 신음을 내며 알렉산드라는 그이 목을 잡고 열정적으로 키스했다. 처음에는 키스가 연인들의 가볍고 은근한 인사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키스가 계속될수록 두 사람은 상대를 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며 더욱 서로에게 엉켜 붙었다. 조르단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그 안으로 들어와 한 번 달콤하게 그녀의 혀를 맛보고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허기진 듯 급하게 다시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오며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갈망을 폭발시켰다.
조르단의 손이 그녀의 겉옷과 속치마를 벗겼다. 조르단은 뜨거운 눈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손으로 받쳐들었고 엄지손가락으로 젖꼭지를 빙빙 돌리자 분홍빛 젖꼭지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조르단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격정을 참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젖꼭지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리고 입술과 혀로 부드럽게 그녀의 발기된 젖꼭지를 애무했다. 마침내 그녀가 희열의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자 조르단은 다른 젖꼭지로 옮아가 똑같은 키스를 해주었다.
마침내 조르단이 옷을 벗고 옆에 누워 그녀에게 다가오자 그녀의 신경 마디마디에 격정이 넘쳐흘렀다.
“아무리 해도 당신을 충분히 가질 수 없어.”
조르단은 욕망으로 타오르는 눈으로 그녀를 보며 손으로 그녀의 다리 사이의 삼각지대를 찾았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벌려 촉촉한 음부에 손가락을 넣었다. 알렉산드라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뒤틀며 그의 손바닥 가까이로 히프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뜨거운 물결이 발작적으로 그녀의 전신에 밀려 들어왔다. 알렉산드라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정신없이 위 아래로 그의 근육질의 팔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꼭 안으며 그에게 바짝 매달렸다. 그의 노련한 손가락이 더욱 빨리 움직였다. 알렉산드라의 입에서 또 한차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알았어, 내 사랑. 나도 당신을 원해.”
그도 격정을 참느라 힘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함께 절정의 순간을 맞이하기 전에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한 번 더 절정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뜨거운 입술에서 입술을 떼어내며 알렉산드라는 그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는 싫어요. 당신이 내 안에 깊이 들어오지 않고.....”
조르단이 갈라진 신음을 내며 그녀가 원하고 자기도 간절히 원하는 것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를 안고 옆으로 누운 자세에서 그는 단 한 번의 확실하고도 강력한 돌격으로 그녀 안으로 들어갔다. 알렉산드라가 그의 허벅지로 히프를 바짝 갖다 붙였다. 조르단은 양손으로 그녀의 히프를 받쳐들어 그녀와 결합하며 연인을 위한 사랑의 행위를 했다. 천천히 그리고 리드미컬하게 그녀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한 번씩 돌진할 때마다 그녀에게 쾌감을 주려 했다. 그녀 역시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간절한 요구에 따라 그의 움직임에 탄성으로 답했다.
그는 한 번 돌진할 때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심장 역시 한 번씩 발동을 할 때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외쳤다. 알렉산드라가 경련을 일으키며 죄어올 때마다 그의 영혼도 외쳤다. 당신을 사랑해.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돌진하며 그의 생명과 그의 미래와 과거의 모든 망상을 그녀 안에 쏟아내는 순간 그의 존재 밑바닥에서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행위가 끝났을 때도 조르단은 희열에 들떠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는 파란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에게 구름 하나하나가 모두 모양과 의미를 지니 것처럼 보였다. 또한 그이 인생 모두가 모양과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황홀경에서 서서히 깨어나면서 자기가 발가벗고 조르단의 몸에 몸을 밀착시키고 옆으로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르단의 한 손은 그녀의 머리 위에 또 다른 한 손은 그녀의 벌거벗은 등에 올려놓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간신히 고개를 들고 나른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그이 회색 눈과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조르단의 입술 한쪽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기가 방탕한 여자처럼 행동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환한 대낮에! 그녀는 자기의 모든 방어력을 마비시킬 수 있는 그의 능력이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녀는 몸을 빼고 힘없이 말했다.
“배고파요.”
“힘이 생기면.”
그는 그녀가 배고프다는 말을 고의적으로 곡해하면서 그녀를 눌렀다.
“배가 고프단 말이에요!”
“아, 그래?”
그는 순순히 몸을 굴려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가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정중하게 등을 돌렸다.
“머리카락에 풀잎 묻었어.”
조르단은 풍성하게 묶은 그녀의 머리에서 풀잎 몇 개를 떼내며 웃었다.
알렉산드라는 그에게 농담이나 미소로 답하지 않고 입술을 깨물며 그의 시선을 피해 도시락을 풀기 시작했다.
그녀가 잠시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차리고 조르단은 시냇가로 걸어가 한동안 둑 위에 서 있었다. 그때 문득 그는 정말 언덕 위에 핀 꽃들이 흰색이란 걸 깨달았다.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색 꽃들이 카펫처럼 환하게 펼쳐져 있었다.
담요 쪽으로 돌아왔을 때 알렉산드라는 크리스털 술병을 들고 있었다.
“와인 한잔 드시겠어요?”
알렉산드라는 불편한 관계의 사람에게 하듯 아주 깎듯이 예의를 차려 물었다.
“이건 ..... 이건 아주 특별한 와인인 것 같군요. 술병을 보니 알겠어요.”
조르단은 자리에 앉아 그녀에게서 술잔을 받아 들었다. 그러나 술잔은 옆에 치워 두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알렉스, 방금 우리가 한 일은 부도덕한 것도 부끄러운 것도 또한 잘못된 것도 아니야.”
그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알렉산드라는 침을 삼키고 어색한 듯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환한 대낮이잖아요.”
“오늘 오후에 우리끼리 조용히 있고 싶다고 마구간에 미리 일러뒀어.”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모두들 왜 그러는지 잘 알겠군요.”
그는 달래듯이 알렉산드라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물론 알겠지.”
그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어쨌든 후계자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니까.”
그 말에 알렉산드라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가냘픈 어깨를 흔들며 쿡쿡 웃기 시작했다.
“내가 뭐 웃기는 말을 했어.”
조르단은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턱을 낮췄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그이 셔츠에 묻혔다.
“아니에요, 그냥..... 그냥 오래 전에 메리 엘렌이 아기를 어떻게 만드는가 설명하던 게 생각나서요. 그땐 너무 이상해서 믿을 수가 없었어요.”
“뭐라고 했는데?”
알렉산드라는 웃는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보며 간신히 웃음을 그쳤다.
“사실 그대로요!”
그들의 웃음소리가 골짜기로 퍼져 나갔다. 나무 위의 새들이 깜짝 놀랐다.
“와인은 그만둘까요, 아니면 한잔 하시겠어요?”
식사를 마친 뒤 알렉산드라가 물었다.
조르단은 손을 뒤로 해 좀 전의 실수로 엎질렀던 빈 술잔을 들어 올렸다.
“됐어. 하지만 이렇게 당신이 시중을 들어주니 기분이 좋군.”
그는 느긋하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렉산드라는 수줍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저도 당신 시중 드는 게 좋아요.”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에서 알렉산드라는 줄곧 조금 전의 격정적인 사랑의 행위와 그 후 함께 식사할 때 느꼈던 아늑한 기분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날 만져 줘. 난 당신이 만져 주면 좋아.”
조르단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지 않을 때도 자기를 만져 달라는 뜻이었을까? 몇몇 귀족 부인들이 종종 대화 중에 남편의 소매를 만지듯이? 그를 만지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남의 눈에 어린애처럼 매달리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알렉산드라는 곁눈으로 살짝 조르단을 쳐다보며 만약 자기가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해 보았다. 조는 척하면서 기대볼 수도 있겠지. 속으로 어떻게 해볼까 생각하다가 그녀는 마침내 실제로 한 번 그렇게 해보기로 결심했다. 알렉산드라는 두근대는 가슴을 달래며 반쯤 눈을 감고 살짝 조르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그의 몸에 접촉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머리를 갖다 대는 순간 조르단이 얼른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는 것으로 보아 그는 그녀의 태도에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 와?”
알렉산드라가 체면 유지를 위해 그렇다고 답을 하려고 입을 여는데 조르단이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아니에요.”
그녀가 간접적으로 그와 가까이 있고 싶다고 말하는데 놀라 조르단의 몸이 약간 굳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그가 다음에는 어떤 행동을 할까 기대하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조르단의 손이 곧 그녀의 어깨에서 그녀의 얼굴로 내려왔다. 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다독거려 주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마차는 어느덧 마구간에 도착해 있었다. 조르단이 가볍게 그녀를 들어 마차에서 내려 주었다. 마구간 하인들이 호기심에서 은밀히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조르단은 그녀를 땅에 내려놓으며 빙긋 웃었다.
“내가 당신을 너무 피곤하게 만들었나?”
그녀가 얼굴을 붉히자 조르단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집으로 향했다. 그들의 등 뒤에서 한 마부가 콧노래를 불렀다. 또 다른 마부는 휘파람을 불렀다. 스마스가 노골적으로 음탕한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조르단은 그의 노랫소리를 알아들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하인들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사나운 눈초리에 갑자기 휘파람 소리가 끊어지고 콧노래도 뚝 그쳤다. 스마스가 재빨리 조르단의 말고삐를 잡고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마부가 쇠스랑을 잡으며 열심히 건초를 파기 시작했다.
“뭐가 잘못됐어요?‘
“내가 보수를 너무 후하게 주는 것 같아. 하인들이 너무 기분 좋게 일한단 말이야.”
조르단이 농담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 허공 가운데에 노랫소리가 있다는 건 알아볼 수 있게 됐잖아요.”
알렉산드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리해.”
그가 그윽하게 웃어 보였다. 알렉산드라의 예쁜 얼굴을 쳐다보며 당신을 사랑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웃음을 거두었다.
당신을 사랑해. 그 말이 그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막 터져 나오려 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싶어 한다. 조르단은 자기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듯한 그녀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오늘밤 그녀에게 말해 주리라. 침대에 단둘이만 있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었던 그 말을 해주리라. 그리고 내기에서 그녀를 해방시켜 주고 진지하게 그녀에게 같이 있어 달라고 부탁하리라. 그녀도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그는 이 사랑스럽고 매혹적이고 명랑한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으며 또한 자기와 같이 있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오늘밤 이야기해 줄게.”
조르단은 목이 메었다. 그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그녀를 바짝 당겨 안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집으로 걸어갔다. 평화롭고 아늑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다정한 연인들처럼.
정식 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표시하는 커다란 장미 아치를 지나가면서 조르단은 자조의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생 처음 아치 위에 매달린 장미가 빨간색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풍요롭고 활기찬 빨간색.
29. 의혹
알렉산드라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조르단은 그녀와 함께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다.
“오늘 오후 재미있었어, 공주?”
조르단의 애정 어린 말에 아쿠아마린 같은 알렉산드라의 두 눈이 청록색으로 반짝였다.
“아주 재미있었어요.”
그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그녀의 방에 좀 더 오래 있을 구실을 찾으며 천천히 옆문으로 걸어갔다. 화장대를 지나려는 데 벨벳 통에 든 그녀 외할아버지의 시계가 눈에 띄었다. 조르단은 걸음을 멈추고 그 묵직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외할아버지 초상화를 가지고 있어?”
그는 시계를 집어 손바닥에 놓고 뒤집어 보며 물었다.
“아뇨. 외할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는 건 그 시계밖에 없어요.”
“아주 좋은 시계야.”
“외할아버지는 아주 좋은 분이셨어요.”
알렉산드라는 대답은 정중히 했지만 조르단의 옆얼굴을 보고 비밀스럽게 혼자 미소 지었다.
그녀가 웃고 있다는 것도 또 자기를 자세히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조르단은 시계만 보고 있었다. 1년 반전에 그는 마지못해 의무감에서 그 시계를 받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지금까지 가지고 싶었던 그 어떤 물건보다 그 시계를 더 갖고 싶었다. 알렉산드라는 그 시계를 차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는 그녀가 예전처럼 두 눈에 사랑과 찬미를 가득 담고 자기를 쳐다보며 그 시계를 자기에게 주기를 원했다.
“그 시계는 어떤 스코틀랜드 백작께서 외할아버지의 철학 지식에 감동해 선물로 주신 거래요.”
조르단은 시계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녀의 신뢰를 얻으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거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녀가 나를, 그 시계를 차지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다. 아니 어쩌면 나흘 후 내 생일날 선물로 그것을 줄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당연히 자기 생일이 나흘 후란 걸 그녀가 알고 있으리라 믿으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좋은 시계야. 시간은 저절로 흘러가게 되어 있어. 자기도 모르게 한해가 저물고 EH 새로운 한해가 온단 말이야. 저녁 식사 전에 응접실에서 만나지.”
조르단은 면도가 깨끗이 되었나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면 응접실에서 알렉산드라와 만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져 거울 속에 비친 시종을 보고 싱긋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마티슨,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내 이 얼굴이 숙녀의 식욕을 망칠까?”
조르단이 소매에 팔을 끼도록 정중히 검정색 이브닝 코트를 받쳐들고 있던 마티슨은 늘 말이 없던 주인이 갑자기 다정하게 말을 붙이는 데 감격해 목이 메었다. 그는 두 번이나 목청을 가다듬은 후에 더듬더듬 대답했다.
“마님께서도 취향이 까다롭긴 하지만 오늘 공작님의 모습을 보면 틀림없이 좋아하실 겁니다.”
조르단은 알렉산드라가 손에 낚싯대를 들고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던 모습을 생각하고 미소 지었다.
“이보게, 마티슨.”
조르단은 검정색 코트에 팔을 넣으며 말했다.
“정원 아치 위에 있는 장미가 무슨 색인지 아나?”
갑자기 화제가 바뀌며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데 놀라 마티슨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장미라구요, 공작님? 무슨 장미 말씀입니까?”
“자네도 아내가 있어야겠군.”
조르단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는 하인의 어깨를 다정하게 톡톡 치며 활짝 웃었다.
“자네는 나보다 더 심하군. 난 적어도 거기에 장미가 있다는 건 알았네.”
그는 히긴스가 전에 없이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말을 멈췄다.
“공작님...... 공작님!”
조르단은 마티슨에게 비키라는 신호를 보낸 뒤 문간으로 가 성난 얼굴로 벌컥 문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수선이지?”
“노드스트롬이 ..... 하인 말입니다, 공작님!”
히긴스는 너무 다급한 나머지 조르단의 소매를 잡고 복도로 끌어당기며 숨넘어가는 소리로 설명했다.
“공작님께서 무슨 이상한 일이 생기면 포키스 씨에게 알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당장 포키스 씨에게 알렸습니다. 포키스 씨가 지금 곧 서재에서 공작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지금 당장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해서 주방에 있는 진과 저만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진정해!”
조르단은 벌써 빨간 카펫이 깔린 계단을 내려가며 쏘아붙였다.
“이게 무슨 일이오, 포키스?”
조르단은 책상 뒤에 앉으며 포키스가 맞은편에 앉기를 기다렸다.
포키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명을 드리기 전에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공작님. 오늘 마차에 소풍 바구니를 싣고 집을 나선 이후 그 바구니에 들어 있던 술병에 손을 댄 사람이 누굽니까?”
“술병?”
사고를 당했다는 하인 이야기가 아니라 느닷없이 술병 이야기가 나오자 조르단은 어리둥절했다.
“아내가 술병에서 술을 따라 내게 줬지.”
포키스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술을 조금이라도 마시셨습니까?”
“아니오. 풀밭에 술잔을 엎질렀소.”
“그렇군요. 물론 부인께서도 전혀 마시지 않으셨겠죠?”
“아니, 그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거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어디에 들러 바구니를 방치해 두신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자면 마구간이나 산지기 집에?”
“아무데도 안 갔소.”
조르단은 한시 빨리 알렉산드라를 보고 싶은데 자꾸만 시간이 지체되자 짜증이 났다.
“도대체 그런 질문은 왜 하시오? 난 노드스트롬이란 하인 문제로 날 만나자고 하는 줄 알았소.”
“노드스트롬이 죽었습니다. 독살 당했어요. 히긴스가 저를 데리러 왔을 때 저는 그의 사망 원인이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 의사인 덴버 박사가 그것을 확인해 줬습니다.”
“독살?”
조르단은 자기 집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내 집에서 일어났지?”
“우연히 그 사람이 희생되었을 뿐입니다. 사실 그 독약은 공작님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전 살인자가 공작님의 집 내부에서 음로를 꾸밀지 모른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습니다. 어쨌든 하인의 죽음에 책임을 느낍니다.”
그 말에 조르단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포키스에 대해 자기가 잘못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포키스가 돈에만 관심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는 정말 자기를 고용한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헌신적이었다. 그 다음 그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그의 집안에 있는 누군가가 분명히 그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근거로 그것이 사실은 나를 죽이려 했던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간단히 말씀드리면, 그 독약은 공작님이 특별히 즐겨 마시는 술병에 들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공작님이 소풍에서 돌아오신 뒤 주방에 있는 진이라는 하인이 그 바구니를 풀었죠. 그때 히긴스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술병 바깥쪽에 풀잎이 몇 개 붙어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히긴스는 술병을 검사해 보고 다른 미세한 먼지나 풀이 술에 들어갔으리라고 생각하고 그 술은 공작님께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호손 저택도 귀족사회의 관습에 따라, 주인이 식사 때 마시고 난 술은 집사가 마시거나 아니면 집사가 지정하는 사람이 마시기로 되어있죠?”
“그렇소.”
조르단은 차분하게 경감의 설명을 들었다.
포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공작님께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관례에 따라 마시고 남은 술은 히긴스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작님이 특별히 좋아하는 그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걸 어제 손주를 본 노드스트롬에게 축하선물로 주었습니다. 노드스트롬은 오후 네 시에 그 술을 자기 방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일곱 시에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몸에는 체온이 남아 있었고 옆에는 술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접시닦이 하녀의 말에 따르면 오늘 아침 혹시 술이 상하지 않았나 확인해 보느라 노드스트롬이 직접 그 병을 따서 맛을 보고 술병에 채워 넣었다고 합니다. 오후에 술병이 든 바구니를 마차에 가지고 간 사람도 노드스트롬이었습니다. 히긴스의 말로는 공작님께서 서둘러 가시느라고 일이 분 뒤에 곧 노드스트롬을 따라 마차로 가셨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그때 마부가 내 말을 쥐고 있었소. 하지만 하인은 보지 못했소.”
“그 마부는 술병에 독을 타지 않았습니다.”
포키스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는 바로 저희 요원입니다. 히긴스를 의심해 보기도 했지만...... ”
“히긴스!”
너무도 터무니없는 생각이어서 조르단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습니다. 히긴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히긴스는 그럴 만한 동기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는 기질적으로도 살인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노드스트롬이 죽었다는 걸 알고 그는 흥분해서 접시닦이 하녀보다 더 안절부절못했습니다. 그 사람을 진정시키느라 그 사람 코밑에 녹각정을 흔들어야 했습니다.”
다른때 같으면 늘 절도 있고 침착한 히긴스가 흥분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웃음이 나왔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계속 해보시오.”
“공작님의 마차에서 짐을 내려 부엌으로 바구니를 가지고 온 사람도 노드스트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소풍 전이나 후에 술과 술병을 만진 사람은 노드스트롬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확실히 거기에 독을 타지 않았습니다. 접시닦이 하인 진이 아무도 그 술병을 만지 않았다고 제게 다짐을 줬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술병에 독을 탔단 말이오?”
조르단은 곧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 될 것도 모르고 물었다.
“우리는 소풍 전이나 후에 독이 들어갔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기 때문에 소풍 중에 독이 들어갔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말도 안 돼! 거긴 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소. 내 아내와 나.”
포키스는 공작의 얼굴에서 슬쩍 눈을 돌렸다.
“그렇습니다. 공작님께서는 절대 그러시지 않으셨을 테니, 나머지는 ..... 부인밖에 없습니다.”
“나가시오! 당신과 같이 일하는 그 바보들도 다 데리고. 앞으로 십 오 분내로 내 집에서 나가지 않으면 내가 쫓아내겠소. 그리고 근거 없이 내 아내를 모략하는 말을 한마디라고 발설했다간 내 이 두 손으로 당신을 죽이고 말겠소.”
포키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이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성난 조르단이 한 대 후려칠 것을 염려해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면서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이건 근거 없는 모략이 아닙니다.”
그가 둑에서 돌아왔을 때 술병을 들고 있던 알렉산드라가 생각나면서 조르단은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포도주 한잔 드시겠어요? 당신이 특별히 좋아하시는 포도주인데.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부인께서는 오늘 아침 공작님의 사촌을 또 방문하셨습니다.”
조르단은 의혹을 떨쳐 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고통과 충격과 분노가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포키스는 공작이 자기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부인과 사촌은 공작님이 돌아오셨을 때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부인을 그렇게 쉽게 포기했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분노와 고통으로 더욱 차가워진 회색 눈으로 포키스를 노려보았다. 조르단은 아무 말 없이 테이블로 가 잔이 찰찰 넘치도록 브랜디를 한잔 따랐다. 그리고 두 모금 마셨다.
조르단의 등을 향해 포키스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조르단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살인 음모에는 반드시 동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경우에는 개인적 이익이 가장 그럴 듯한 동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작님의 사촌동생인 타운센드 경은 공작님이 돌아가심으로 해서 가장 득을 많이 볼 사람임으로 자연히 첫 번째 용의자가 됩니다. 그를 의심하게 하는 다른 증거를 제외하고도 말입니다.
“다른 증거라니?”
“잠시 후 말씀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이 년 전에 모샴 근처에서 공작님을 습격했던 강도가 단순히 금품을 노리고 우연히 공작님을 기습한 게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바로 공작님의 목숨을 노린 첫 번째 살해 시도였습니다. 물론 두 번째 시도는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공작님을 부두에서 납치한 때입니다. 그때까지 타운센드 경이 공작님을 없애려고 한 이유는 공작님의 작위와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생겼습니다.”
포키스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조르단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조르단은 여전히 그에게 등을 돌리고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추가된 그 한 가지 이유는 한때 결혼하려 했었고 지금도 몰래 계속 만나고 있는 공작님의 부인을 차지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부인이 그를 만나러 가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저는 부인도 그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고 추측됩니다. 그것은 공작님이 살아 있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렇다면 그건 곧 타운센드 경이 이제 그녀를 공범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키스는 길게 한숨을 들이마셨다.
“공작님의 협조를 구하고 또 공작님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이제부터 노골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르단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포키스는 그가 못마땅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좋습니다. 저의 요원들이 하인들에게서 들은 말에 따르면 공작님이 런던에서 습격을 당하던 날 밤 부인께서 그 다음날 아침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으셔서 모두들 놀란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때 부인이 어디 계셨는지 아십니까?”
조르단은 여전히 포키스에게 등을 보이고 서서 브랜디를 몇 모금 더 마셨다.
“하인들이 쓰는 층의 빈방에서 잤다고 했소.”
“공작님, 그날 밤 공작님을 쐈던 마부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내 아내는 명사수요. 만약 그녀가 나를 쏘려 했다면 절대 실수하지 않았을 거요.”
조르단이 조소했다.
“깜깜한 밤인데다 범인은 말을 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부인이 총을 쏠 때 말이 움직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부인이 직접 살해를 시도했다는 의심이 듭니다. 아주 위험한 일이긴 하죠. 하지만 옛날에는 살인을 청부했었지만 지금은 당사자가 직접 나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공작님은 훨씬 위험한 상태에 있고 제 임무는 열 배는 더 힘들게 되죠. 그런 이유 때문에 저는 공작님께 하인 노드스트롬이 왜 독살되었는지 모르는 척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인과 사촌께 살해 음모를 모르는 척해 주십시오. 덴버 박사에게는 노드스트롬이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말해달라고 지시해 뒀습니다. 그리고 주방 하인에게 노드스트롬의 행적에 관해 질문할 때 와인 병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으려고 신경썼습니다. 그러니 하인들은 우리가 뭔가를 의심한다고 생각할 리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부인과 타운센드 경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다면 반드시 다음에는 그 징후를 알아차릴 수 있을 테고 그러면 현장에서 그들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포키스는 결론을 내렸다.
“제 생각으로 그들이 한차례 더 독살을 시도할 것 같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눈치 채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만약 또 한 번 더 독살을 시도한다면 다른 사람이 먹을 수도 있는 것에 독약을 넣지는 않을 겁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씩이나 그렇게 죽으면 분명히 의심을 살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예를 들자면 브랜디 같은 것은 안전할 겁니다. 왜냐면 손님 접대용이니까요. 하지만 부인께서 권하는 음식은 주의하십시오. 공작님이 보시지 않을 때 부인이 음식에 손을 댈 수 있을 테니까요. 그 외에는 감시하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포키스는 말을 마치고 조르단의 대답을 기다리며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공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포키스는 머뭇거리다가 공작의 딱딱한 등 뒤에 대고 인사를 하며 부드럽게 그리고 진짜 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공작님.”
포키스가 서재 문을 닫자마자 갑자기 서재 안에서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포키스는 누군가가 창문으로 총을 쏘았다고 생각하고 서재로 뛰어 들어가다가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예전에 프랑스 국왕이 하사했다던 커다란 황금색 크리스털 술병이 마룻바닥에 깨져 있었다. 포키스가 설명하는 동안 아무 감정도 나타내지 않았던 공작은 벽난로를 짚고 서 있었고 그의 넓은 어깨가 고뇌로 흔들리고 있었다.
조르단이 응접실로 들어오는 소리에 초록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던 알렉산드라가 얼른 뒤돌아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조르단의 굳게 다문 턱과 차가운 눈을 보는 순간 미소는 서서히 사라졌다.
“뭐가 ..... 뭐가 잘못되었나요, 조르단?”
그녀가 친밀하게 자기의 이름을 부르자 조르단의 얼굴근육이 굳어지면서 뺨의 실핏줄이 뛰기 시작했다.
“잘못됐냐구?”
그는 조소하면서 그녀의 가슴과 허리, 히르, 그리고 얼굴을 모욕적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난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그는 관심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알렉산드라는 그의 돌변한 모습에 입술이 말랐다. 조금 전 소풍지에서 함께 나눴던 다정함과 웃음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조르단이 서먹하게 굴자 겁이 나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떨리는 가슴을 누르고 테이블 위의 셰리주 병을 잡았다. 조르단은 그녀가 시중 들어 주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셰리 잔에 술을 가득 따라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셰리주 좀 드시겠어요?”
그녀가 내민 잔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이 찌를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그의 뺨의 실핏줄이 더욱 세게 뛰었다. 조르단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알렉산드라는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조르단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그녀의 손에서 잔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조르단이 잔을 받아 들다가 카펫 위에 잔을 떨어뜨렸다.
알렉산드라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값비싼 카펫을 버리지 않도록 셰리주 얼룩을 닦을 만한 것을 찾았다.
“그럴 필요 없어.”
조르단이 그녀의 팔목을 잡아 거칠게 돌려세웠다.
“상관없어.”
“상관없다뇨?”
알렉산드라가 당황해서 말했다.
부드럽지만 아무 감정도 없이 조르단이 말했다.
“중요치 않아.”
“하지만..... ”
“식사할까, 내 사랑?”
알렉산드라는 두려운 가슴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의 어조가 너무 딱딱했다.
“아니, 잠깐만요!”
그녀는 수줍은 듯이 말했다.
“당신께 드릴 게 있어요.”
독약? 조르단은 그녀를 보고 속으로 조소했다.
“이것요.”
그녀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외할아버지가 쓰시던 금시계가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타는 듯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이..... 이걸 당신이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잠깐 조르단이 시계를 거절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르단은 시계를 받아 코트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었다.
“고마워.”
조르단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 시계가 정확하다면 식사시간이 삼십 분이나 지났군.”
조르단에게서 뺨을 맞았다 해도 그렇게 마음이 상하고 당황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가 내민 팔에 팔짱을 끼고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하는 내내 알렉산드라는 그의 태도가 돌변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날 밤 조르단이 그녀를 침실로 데리고 가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자 알렉산드라는 뜬눈으로 침대에 누워 자기가 뭘 잘못했길래 그가 그렇게 혐오스러운 눈으로 자기를 쳐다본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다음날에도 조르단은 식사 때 꼭 필요한 경우만 제외하곤 한마디고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라는 하루종일 꾹 참았다가 마침내 자존심을 죽이고 자기가 뭘 잘못했느냐고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책상에서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고 서있는 그녀를 왜 이렇게 방해하느냐는 듯이 화를 냈다.
“잘못해?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알렉산드라. 문제가 있다면 시간이지. 지금 아담스와 난 보다시피 일을 하고 있잖아.”
창문 옆 조그만 책상에 아담스가 앉아있던 걸 몰랐던 알렉산드라는 당황해서 돌아섰다.
“저...... 죄송합니다.”
조르단은 턱으로 문쪽을 가리켰다.
“그러시다면..... ”
알렉산드라는 방을 나가달라는 그의 신호에 따라 방을 나왔다. 그리고 밤에 그가 침실에 드는 소리가 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옷 차림의 그녀는 용기를 총동원해 옆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르단은 셔츠를 벗다가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무슨 일이야?”
“조르단, 제발.”
알렉산드라가 어깨 위로 긴 머리를 출렁이며 순진하고 매혹적인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제발 왜 하가 나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조르단은 그녀의 푸른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자기를 배신한 그녀를 목조르고 싶은 충동과 그보다 더 강하게 꼭 한 시간만 그녀를 예전과 다름없이 발랄하고 매혹적인 맨발의 공작부인이라 생각하고 침대로 데리고 가고 싶다는 충동과 싸웠다. 근 그녀를 안고 키스하고 싶었다. 그녀를 꼭 껴안고 그녀 안에서 자신을 잊고 싶었다. 자신의 의혹을 떨쳐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알렉산드라와 토니가 서로 껴안고 자기를 살해할 계획을 꾸미는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단 한 시간도 안 된다. 아니 단 일 분도 그래선 안 된다.
“나 화나지 않았어, 알렉산드라.”
그는 딱딱하게 말했다.
“자, 이 방에서 나가 줘. 내가 같이 있고 싶을 때 알려 줄테니.”
“알겠어요.”
알렉산드라는 눈물을 머금고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30. 생일 파티
알렉산드라는 멍하니 무릎 위의 수틀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가슴은 응접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마냥 황량했다. 지난 사흘 동안 조르단은 전혀 딴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녀를 쳐다보려 하지도 않았지만 어쩌다 가끔 마주칠 때면 얼음처럼 차가운 눈에 경멸을 가득 담고 있었다. 마치 그의 몸 안에 그녀가 모르는 낯선 누군가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낯설기만 한 그의 냉담한 눈을 마주할 때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뜻밖에 그녀를 찾아온 몬티 아저씨의 방문도 그의 허풍스러운 태도도 호손 저택의 무거운 분위기를 가볍게 하는 데는 효과가 없었다. 어제 위층에 짐을 풀면서 침대를 정리하는 하녀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요모조모 뜯어보면서 아저씨는, 알렉산드라가 화이트 클럽에서 내기를 했다는 걸 알고 조르단이 불같이 화를 냈다는 소문을 뒤늦게 듣고 그녀를 구하러 달려왔노라고 은밀하게 말했다.
조르단을 다정한 대화에 합류시키려는 아저씨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르단은 그저 정중하고 극도로 짤막한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의 그런 태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려 했다. 그리고 하인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부부인 척하려 했지만 아무도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집사인 히긴스에서부터 강아지 헨리에 이르기까지 온 집안 식구들이 그들 사이에 흐르는 냉랭한 분위기로 인해 불안해했다.
응접실의 위압적인 침묵을 깨는 몬티 아저씨의 활기찬 목소리에 알렉산드라는 깜짝 놀랐다.
“호손, 날씨가 참 좋군!”
아저씨는 조르단이 대화를 이어갈 답변을 해주길 기대하면서 질문조로 눈썹을 치켜 올리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조르단이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그렇군요.”
“너무 습하지도 않고.”
포도주에 취해 몬티 아저씨의 뺨은 벌써 장미빛 이었다.
“전혀 건조하지도 않구요.”
조르단의 얼굴과 목소리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따스하기도 하고, 곡식들이 자라기 좋은 날씨지.”
“그래요?”
조르단의 말투는 더 이상 말을 붙이기 힘들게 만들었다.
“어..... 그래.”
아저씨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낭패한 눈으로 알렉산드라를 쳐다보았다.
“시계 있으세요?”
알렉산드라는 방에서 나가고 싶어 물어 보았다.
조르단이 그녀를 쳐다보고 일부러 쌀쌀하게 말했다.
“없어.”
“호손, 자네도 시계가 있어야겠군.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시계를 가지고 다녀야지.”
알렉산드라는 마음의 상처를 감추기 위해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조르단은 두 번이나 외할아버지의 시계를 받고도 그것을 외면했다.
“열 한 시야.”
몬티 아저씨가 시계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난 항상 시계를 가지고 다녀. 그러니 몇 신가 시간이 궁금해할 필요가 없지. 시계란 참 신기한 물건이야. 시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신기하단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
조르단이 책을 꽝 덮었다.
“아뇨, 신기하지 않아요.”
아저씨는 시계 제작에 대해 조르단과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눠 보려다 실패하고 또 다시 낭패한 눈으로 알렉산드라를 쳐다보았다. 커다란 영국 양치기 개 헨리가 아저씨의 시선에 대답했다. 헨리는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양치기 개 본래의 의무는 전혀 모르는 대신에 사람을 위로해 주고 사랑해 줄 의무는 잘 알고 있었다. 몬티 아저씨의 슬픈 표정을 보고 헨리는 난로가에서 일어나 아저씨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손등을 축축한 혀로 두 번 핥았다.
“아니 이 개가!”
몬티 아저씨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며 손등을 거칠게 바지에 닦았다.
“이 녀석 혓바닥이 꼭 젖은 걸레 같아!”
헨리는 화난 아저씨의 얼굴을 측은하단 듯이 쳐다보고는 다시 벽난로 옆으로 가 앉았다.
“괜찮으시다면 전 이만 제 방으로 가고 싶어요.”
알렉산드라는 더 이상 무거운 방안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다.
“필버트, 과수원에 모두 다 준비되어 있겠죠?”
그 다음날 오후 알렉산드라는 하인에게 물었다.
“예, 준비됐습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남편이 생일파티를 받을 자격이 있나요? 요즘 아가씨를 대하는 태도로 봐서는 엉덩이를 한 방 갈겨주고 싶습니다요!”
필버트는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알렉산드라는 하늘색 모자 챙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르단과 정자로 산책 나갔던 날 그의 생일을 기념해 깜짝 파티를 열 계획을 세웠다. 그날은 며칠되지 않은 행복한 날 중에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며칠 동안 조르단의 쌀쌀하고 냉담한 태도를 참다 보니 그녀의 얼굴은 창백할 대로 창백해졌으며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참느라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조르단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유를 몰라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깜짝 파티의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토니와 멜라니의 도움을 받아 그녀가 뭘 준비했는가를 조르단이 보면 예전에 시냇가에서 함께 있을 때의 다정한 모습으로 돌아오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를 괴롭히는 이유가 뭔지 말해 줄 수 있으리란 희망이 솟았다.
“하인들 모두 그분이 아가씨를 대하는 태도를 놓고 수군거리고 있어요. 아가씨께는 말도 안하고 밤낮 서재에만 틀어박혀 있고, 남편으로서 의무도..... ”
필버트가 계속 화를 내며 말했다.
“필버트 제발! 그런 말로 오늘 내 기분을 망치지 말아줘요.”
필버트는 조금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알렉산드라의 눈에 어두운 그늘을 만든 남자에 대한 분을 이기지 못했다.
“제가 아가씨 기분을 망치지 않아도 그분이 망칠 겁니다. 아가씨가 보여 줄 게 있다고 과수원으로 같이 가자고 하셨을 때 같이 가겠다고 동의한 것만도 놀랍습니다.”
“나도 놀랐어요.”
알렉산드라는 웃어 보이려 했지만 오히려 어색하게 찡그리는 형상이 되었다. 오늘아침 서재에서 새로 온 토지 부관리인 포키스와 이야기하고 있는 조르단을 만났다. 그녀는 같이 마차를 타고 나가자고 그를 설득하려면 상당히 힘들 것으로 예상했었다. 조르단은 처음에는 그녀의 청을 거절하려고 하다가 잠시 망설이며 포키스를 한 번 보더니 같이 가겠다고 동의했다.
“모두 다 준비됐습니다. 과수원 주위는 물론이고 과수원으로 가는 길에도 나무 뒤에 저희 요원들을 배치했습니다. 요원들은 부인께서 함께 소풍 나가자고 말한 이십 분 뒤부터 벌써 세 시간째 그곳에서 감시하고 있습니다. 범인이 나타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나무 뒤에 잘 숨어 있으라고 지시해 뒀습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고는 각자 배치된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상황을 제게 보고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뭘 보는지 저는 모릅니다. 공작님의 사촌동생이 왜 산지기 집 같은 보다 은밀한 곳이 아니라 과수원을 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니 믿을 수가 없소.”
조르단은 새 셔츠로 갈아입으며 이를 갈았다. 그러다가 아내가 자기를 죽이려는 함정으로 이끌고 가는 자리에 잘 보이려고 새 셔츠로 갈아입고 있는 부조리에 놀라 잠시 동작을 멈췄다.
“있을 수 있습니다.
포키스는 노련한 수사관답게 아주 침착했다.
“이건 함정입니다. 전 오늘 오후에 함께 소풍을 나가자는 부인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그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안해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눈을 봤습니다. 눈은 거짓말을 못하죠.”
조르단은 예전에 알렉산드라의 눈을 얼마나 순진하게 생각했던가를 상기하며 잔뜩 조소 띤 얼굴로 포키스를 쳐다보았다.
“예전엔 그녀의 눈이 신비롭다고 생각했었지.”
“한 시간 전 타운센드 경이 보낸 쪽지는 전혀 신비롭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자신하는지 주의를 게을리 했습니다.”
토니의 쪽지 이야기가 나오자 조르단의 얼굴이 석고처럼 굳어졌다. 미리 일러 둔 대로 히긴스는 토니가 보낸 쪽지를 알렉산드라가 아니라 조르단에게 먼저 가져왔다. 쪽지에 씌어진 말들이 조르단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과수원에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소. 당신은 그저 그를 그곳으로 데리고 오기만 하면 되오.
한 시간 전에 그 쪽지를 처음 읽었을 때는 무릎에 힘이 빠져 쓰러질 것 같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랑하는 살해자와 마주할 준비를 하고 보니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배신감이라든가 두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이제 모든 것을 다 끝내고 그의 가슴과 마음에서 알렉산드라를 지우는 일만 남았다.
어젯밤 그는 그녀의 방으로 가 그녀를 안고 그녀에게 돈을 주며 도망가라고 말해주고 싶은 어리석은 충동과 싸우며 뜬눈으로 지냈다. 알렉산드라와 토니가 오늘 그를 살해하는 데 성공하든 아니든 나머지 인생은 지하감옥에서 보내야 할 만큼 포키스는 벌써 그들에 대한 증거를 충분히 확보해 두었다. 쥐가 득실대는 어두운 지하 감방에서 더러운 옷을 입고 지낼 알렉산드라의 모습을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심지어 지금 그녀의 목표물이 되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순간에도.
알렉산드라는 복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란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봄날씨처럼 환하고 순진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계단을 내려오는 그를 보고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조르단은 알렉산드라가 자기의 손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되어 반가워서 웃는다고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준비되셨어요?”
그녀가 명랑하게 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진입로에 기다리고 있는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마차가 양쪽 길가에 늘어선 나무를 따라 흔들흔들 거리며 달렸다. 이제 곧 탁 트인 풍요로운 들판을 지나 과수원에 도착할 것이다. 알렉산드라는 속눈썹 아래로 살짝 눈을 돌려 조르단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조르단은 가볍게 말고삐를 잡고 있어 곁으로는 편안해 보였지만 마치 뭘 찾는 사람처럼, 뭘 기다리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양쪽 길가에 늘어선 나무 뒤를 살피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혹시 조르단이 깜짝 파티를 눈치챈 게 아닐까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마차가 과수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나무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축하객들을 보고 그가 놀라는 것으로 보아 미리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은 아닌 듯했다.
“저게 뭐지?”
조르단은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라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알록달록한 깃발이 미풍에 날리고 있었으며, 제일 좋은 옷을 차려입은 소작인들이 모두 아이들까지 데리고 나와 그를 향해 싱긋 웃고 있었다. 왼쪽에는 토니와 그의 어머니와 그의 동생이 할머니와 함께 서 있었다. 멜라니와 존 캠던도 로디 카스테어즈를 비롯한 조르단의 런던 친구 대여섯 명과 기다리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빈터 저쪽 끝에 커다란 연단이 세워져 있고 연단에는 화려한 의자 두 개와 그보다 좀 수수한 의자 대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연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천막이 처져 있었다. 천막 꼭대기에는 호손의 문장인 날개를 활짝 핀 매 그림이 들어간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조르단의 마차가 과수원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예정대로 네 명의 트럼펫 연주자가 공작의 도착을 알렸다. 이어 사람들의 환호가 뒤따랐다.
조르단은 말을 세우고 알렉산드라를 쳐다보았다.
“왜들 이러는 거지?”
그를 향하는 그녀의 눈에 사랑과 불안과 희망이 가득했다.
“생일 축하해요.”
조르단은 그저 입을 굳게 다물고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알렉산드라가 불안하게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모샴 식 생일 축하 파티에요. 우리가 하던 것보다 조금 더 화려할 뿐이에요.”
조르단이 계속 쳐다보고만 있자 그녀는 그의 팔에 손을 놓으며 더욱 열심히 설명했다.
“마상 시합과 시골 잔치를 혼합한 거예요. 공작님의 생일도 축하드리고 또 소작인들과 좀 더 친해지실 수 있도록요.”
조르단은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이런 잔치 분위기가 정말 살인의 무대가 될 수 있을까? 알렉산드라는 천사인가 악마인가?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알게 되겠지. 조르단은 마차에서 그녀를 부축해 내렸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두고 보시면 알아요.”
알렉산드라는 자기가 얼마나 바보처럼 느껴지는지 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가 숨기려 애쓰며 환하게 웃었다.
“저기 우리 안에 가축들이 보이죠?”
과수원 주변에 대여섯 군데 가축우리가 보였다.
“그래.”
“저 가축은 소작인들의 것이에요. 당신은 각 우리에서 제일 좋은 가축을 골라 주인에게 상을 주시면 되요. 상품은 제가 미리 사두었어요. 그리고 저기 밧줄로 선을 그은 곳에서는 말 타기 시합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리고 저기 과녁이 있는 곳 말이에요. 그곳에서는 활쏘기 시합이 벌어지고 있고. 또 저기...... ”
“알만하군.”
조르단이 말허리를 잘랐다.
“당신도 시합에 참가하면 더 좋을 거예요.”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이 아랫사람들과 어디까지 어울리고 싶어 할지 자신이 없어 주저하면서 말했다.
“알았어.”
그는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고 그녀를 연단 위의 의자로 에스코트해 갔다. 런던에서 온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 뒤 그는 캠던 경과 토니와 어울려 맥주를 마시고는 파티장을 돌아다니며 지주의 열 네 살짜리 아들이 보여주는 아마추어 마술을 구경하기도 했다.
로디 카스테어즈가 그녀에게 인사했다.
“조르단이 아직 그대와 사랑에 푹 빠져 있나요? 내가 내기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로디, 처신 잘하세요.”
알렉산드라 옆에 있던 멜라니가 핀잔을 주었다.
“내 앞에서 다시는 그 내기 이야기 꺼내지 말게!”
노부인이 따끔하게 말했다.
조르단을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알렉산드라는 의자에서 일어나 연단의 계단을 내려갔다. 멜라니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 사람을 만나기 싫다는 것은 아니지만 로디는 왜 데리고 왔어?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왜 왔고?”
멜라니가 깔깔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로디와 같은 이유로 왔지. 너와 공작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직접 눈으로 확인할 작정으로 모두 어제 도착했어. 너도 로디를 잘 알잖아. 그는 다른 사람보다 한발 앞서 가십을 아는 걸 자랑으로 알잖아. 그건 그렇고 그 동안 보고 싶었어.”
멜라니는 갑자기 알렉산드라를 포옹했다. 그러나 곧 몸을 바로 하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너 지금 그 사람과 행복해?”
“나...... 그래.”
“그럴 줄 알았지!”
멜라니는 자기의 예언이 맞았다는 데 너무 기뻐하며 알렉산드라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알렉산드라는 도무지 기분을 예측할 수 없는 남자와 사느라고 때로는 미칠 것 같다는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미소 지으며 멜라니의 손을 잡고 가축 울타리를 돌아보고 있는 조르단을 쳐다보았다. 그는 뒷집을 지고 심각한 얼굴로 제일 통통하게 살이 오른 닭과 오리, 제일 새끼를 잘 낳을 것 같은 돼지, 제일 잘 훈련된 개를 골라 그들의 주인에게 상으로 주었다.
나뭇가지 너머로 해가 기울고 횃불을 밝힐 무렵에는 소작인과 귀족들이 한데 어울려 한층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그들은 함께 웃고 술을 마시고 진지한 것에서부터 웃기는 것까지 갖가지 시합을 즐겼다. 조르단과 캠던 경 그리고 로디 카스테어즈까지도 활쏘기, 말 타기, 펜싱 그리고 사격 대회에 어울렸다. 사격 대회에서 소작인의 열 세 살짜리 아들이 이길 수 있도록 조르단이 일부러 마지막 한발을 실수해 주는 걸 보면서 알렉산드라는 뭉클한 감동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당연히 일등 사수에게 상을 줘야지.”
조르단은 그렇게 말하며 황송해하는 소년에게 금화 한 닢을 주었다. 그런 다음 그는 모든 위엄에서 벗어나 거북이 경주 시합장으로 가 바구니에서 거북이 하나를 골라 들며 친구들에게도 해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에게는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자기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온 손님들에게만 신경 쓰는 것 같았다. 런던 최고의 귀족 세 명이 코흘리개 어린애들과 나란히 출발선에 서서 거북이를 응원하며 거북이들이 그들의 명을 어기고 껍질 속으로 움츠러들 때면 추상같은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난 수프로 나오는 거북이 말고 거북이를 좋아한 적 없어.”
토니가 존 캠던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내가 고른 저 거북이 녀석은 보통내기가 아니야. 자네 거북이가 내 거북이보다 껍질 속에 오래 숨어 있을 거란데 내 일 파운드 걸지.”
“좋았어!”
존 캠던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내기에 합의하고 그의 거북이에게 껍질에서 머리를 빼라고 응원하기 시작했다.
조르단은 무표정하게 두 사람을 구경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주방 하녀가 시중드는 맥주 테이블로 걸어갔다.
“자네 사촌형이 어떻게 된 거 아닌가?”
로디 카스테어즈가 토니에게 물었다.
“자네 두 사람이 펜싱할 때 보니 조르단이 자네를 죽일 것 같더군. 그의 부인이 자네와 결혼할 뻔했다고 아직 자네를 질투하고 있는 건가?”
토니는 일부러 거북이에 관심을 집중시키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왜 호크가 질투한다고 생각하지?”
“여보게, 조르단이 린드워디 경네 무도회장에 복수의 화신처럼 나타나 알렉스에게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던 날 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자네가 그녀를 부추겨 내기를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지.”
토니가 한마디 쏘아붙이고 다시 거북이에게 관심을 돌렸다.
조르단은 맥주를 한잔 더 마시면서 숲 가장자리 나무에 어깨를 기대고 서서 알렉산드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사람들 틈에서 그를 찾고 있었다. 조르단은 그녀가 줄곧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토니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그가 생일 축하 파티에 더욱 기뻐해 주기를 바랐던 것처럼 똑같이 실망하고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다시 알렉산드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노부인의 말에 웃고 있었다. 그녀의 노랫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둠이 깔리는 시각이었음에도 그녀가 웃을 때마다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의 아내. 살인마.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어!”
이런 파티를 계획한 여자가 살인을 계획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밤에 그에게 매달려 오던 여자가, 함께 시냇가에서 낚시하면서 장난치던 여자가, 자기 외할아버지가 아끼던 시계를 수줍게 선물하던 여자가 그를 죽이려 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공작님?”
포키스의 다급한 목소리에 조르단은 발길을 멈췄다. 그는 막 사격장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이제 맥주로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참가자들의 눈에 나무에 매단 목표물이 왔다갔다하고 있어 사격 대회장의 분위기는 긴장감보다는 웃음이 판을 치고 있었다.
“여길 곧 떠나셔야 합니다.”
포키스가 옆으로 바짝 다가와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마시오!”
조르단은 더 이상 포키스의 가설을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내 사촌이 보낸 쪽지의 뜻은 분명해졌소. 그들은 나를 위해 이 파티를 계획했던 거요. 또 그 때문에 두 번이나 비밀리에 만난거구.”
“지금은 말싸움할 때가 아닙니다. 조금만 있으면 날이 어두워질 겁니다. 저희 용원들은 올빼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두워지면 감시할 수가 없습니다. 벌써 요원들을 미리 보내 공작님이 돌아가시는 길에 배치시켰습니다.”
“어둡기 전에 집에 도착하기는 이미 늦었는데 좀 더 있다가 간다고 해서 뭐가 다르겠나.”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저는 책임질 수 없습니다.”
포키스는 경고를 하고는 돌아서서 갔다.
“저렇게 다 큰 남자들이 자기 거북이가 이기라고 응원하는걸 믿을 수 있겠니?”
멜라니가 토니와 남편을 쳐다보면서 깔깔 웃었다.
“가서 신분에 맞게 좀 품위 있게 행동하라고 일러 줘야겠어.”
멜라니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사실, 나도 어떤 거북이가 우승하는지 보고 싶어.”
그녀는 살짝 윙크하며 고백했다.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작인들의 흥겨운 얼굴을 둘러보았다. 순간 그녀의 시선이 전혀 흥겨워 보이지 않는 한 낯익은 얼굴에 멈췄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갑자기 조르단을 처음 만나던 날 밤이 생각났다. 그때도 이렇게 향기로운 밤이었다. 괴한 두 명이 조르단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그녀는 노부인을 향해 말했다.
“할머님, 저기 까만 셔츠를 입은 키 작은 남자가 누구죠? 목에 빨간 수건을 두른 사람 말이에요.”
노부인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세, 누군지 전혀 모르겠구나. 난 오늘 내가 호손 저택에 살던 삼십 년 동안 만났던 소작인들보다 더 많은 소작인을 만났어. 그렇다고 네가 계획한 이 파티가 멋지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최근에 영국도 많이 변했어. 우리를 위해 일해 주는 소작인들의 비위를 일일이 다 맞춰 줘야 한다는 건 반대지만 그래도 요즘 세상엔 주인이 소작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소문에 들으니 소작인들이 자꾸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과격해지는.... ”
귀로는 할머니의 말을 들으면서도 알렉산드라의 머릿속은 조르단을 처음 만나던 날 밤에 대한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들판을 둘러보았다. 까만 셔츠의 사나이를 찾아보았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무사히 잘 있는지 하나하나 눈으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토니를 찾아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순간 알렉산드라는 걱정스럽게 조르단을 찾았다. 그는 나무에 어깨를 기대고 숲 가장자리에 서서 맥주를 마시며 축제를 구경하고 있었다.
조르단은 그녀가 자기를 쳐다보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불안감과 동시에 후회로 가슴이 아팠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향해 잔을 들었다. 순간 그의 어둠 속에서 약간 귀에 익은 듯한 음성이 들려 오며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권총이 네 머리를 겨냥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저기 네 아내를 겨냥하고 있다. 내 목소리를 따라 숲 속으로 들어와!”
조르단은 바짝 긴장하며 천천히 맥주잔을 내렸다.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는 그의 온몸으로 두려움보다는 안도감이 펴져 나왔다. 그는 오랫동안 미지의 적과의 대면을 기다려 왔다. 아니 열망해 왔다. 그러나 단 한순간도 알렉산드라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적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발자국 걸어가자 깜깜한 숲이 나왔다. 또 한 발자국 더 가니 눈앞에 권총이 나타났다.
“어디로 가는 거요?”
조르단은 권총을 쥐고 있는 그림자를 향해 물었다.
“이 길 밑에 있는 조그만 오두막으로. 자, 이제 내 앞으로 와서 걸어가시지.”
조르단은 한 발자국 더 떼어놓으며 무거운 맥주잔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이건 어떻게 할까?”
그는 일부러 어색하게 묻고는 살짝 몸을 돌려 오른손을 들었다.
괴한은 조르단의 손에 든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조르단은 괴한의 눈에 맥주를 쏟아 부으며 무거운 술잔으로 그의 턱과 관자놀이를 세게 내리쳤다. 삽시간에 역공격을 당한 괴한은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았다. 조르단은 땅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 들고 괴한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자, 앞장서, 이 개자식! 네가 가자던 대로 가보자구.”
괴한은 약간 휘청거렸다. 조르단이 권총으로 등을 찌르자 그는 휘청휘청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조르단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영국에 돌아온 뒤 늘 몸에 지니고 있던 조그만 권총을 찾았다. 그러나 괴한을 공격할 때 흘렸는지 호주머니에 권총이 없었다. 그는 괴한에게서 뺏은 권총을 더욱 힘을 주어 잡았다.
오 분쯤 걸어가니 길 끝에 낡은 오두막 한 채가 나타났다.
“안에는 몇 명이 있나?”
문틈으로 아무 불빛도 새어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습니다.”
괴한은 뒷통수를 찌르는 권총의 섬뜩한 촉감에 숨을 멈췄다.
“한 명, 아니면 두 명일 겁니다.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조르단이 얼음처럼 차갑게 말했다.
“문을 열면, 나를 잡아왔으니 램프 불을 켜라고 말해. 다른 말을 했다간 골통을 날려 버리겠어.”
그는 강조하듯이 괴한의 뒤통수를 찌르고 있는 권총에 힘을 주었다.
“알았어요!”
그는 숨을 헐떡이며 총구를 피해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잡아왔어!”
그는 놀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외치며 발로 문을 걷어찼다.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램프 불을 켜. 시궁창보다 더 캄캄하잖아.”
그는 문간에 서서 시키는 대로 외쳤다.
부싯돌 켜는 소리가 나고 한 그림자가 랜턴으로 향하더니 불이 들어왔다. 조르단은 재빨리 총자루로 괴한의 머리를 쳐서 기절시키고 랜턴에 몸을 숙인 채 놀란 공범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램프 불에 비친 공범의 얼굴을 보는 순간 조르단은 충격과 고통으로 주저앉을 뻔했다
“조르단!”
그의 숙모가 놀라 외쳤다.
조르단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이고 구석쪽을 향해 총을 쏘았다. 숙모가 고용한 또 다른 괴한의 가슴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괴한의 손에서 총이 떨어졌다.
조르단은 괴한이 즉사했다는 걸 알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일분 전까지 자기의 친어머니보다 더 사랑했던 숙모를 쳐다보았다. 아무 느낌도 없었다. 가슴속에서 차갑고 딱딱한 응어리가 올라오며 다른 모든 감정을 막아 버렸다.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분노를 제외하고는. 그는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물어 보았다.
“왜죠?”
그의 정중하고 침착한 태도에 숙모는 불안해서 말을 더듬었다.
“왜..... 왜 우리가 널 죽이려 하냐고, 그런 뜻이야?”
<우리>라는 말에 조르단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재빨리 죽은 괴한에게로 가 그의 손에서 총을 뺏어 들고 손에 들고 있던 빈총을 내던졌다. 조르단은 한때 사랑하고 존경했던 숙모에게 장전된 권총을 겨누고 그들이 서 있던 방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처럼 보이는 조그만 방이 나왔다. 방은 비어 있었다. 그러나 숙모는 아직도 그가 죽을 것이라 믿고 있는 것 같았고 더구나 <우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때 조르단은 숙모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그의 사촌과 어쩌면 그의 아내가 지금쯤 모든 일이 끝나 그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리로 오고 있을 것이다.
침실로 걸어 들어가면서 그는 차갑게 말했다.
“증원군을 기다리시는 것 같은데 앉아서 같이 기다리도록 합시다.”
그녀의 눈이 의심과 공포로 반짝였다. 그녀는 천천히 테이블 옆의 나무 의자에 앉았다. 조르단은 정중하게 그녀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테이블 위에 걸터앉으며 닫힌 문을 노려보며 공범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자, 이제 제 질문에 간단히 그리고 빨리 대답해 보시죠. 제가 모샴에서 습격 당한 것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죠?”
“난...... 난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조르단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괴한의 낯익은 얼굴을 한 번보고 숙모를 쳐다보았다. 그는 묵묵히 총을 들어 겁에 질린 여자에게 겨누었다.
“사실대로 말해요.”
“그건 사고가 아니었어!”
여자의 눈은 권총에 고정되어 있었다.
총부리가 낮아졌다.
“계속하시오.”
“배로 끌려간 것도 마찬가지였고. 사실 배로 보낼 것이 아니라 죽였어야 했지만. 그런데 넌.... 넌 죽이기 너무 힘들어!”
그녀는 고뇌와 비난이 뒤섞인 어조로 말했다.
“넌 항상 운이 좋아. 돈도, 지위도 그리고 건강한 다리도 다 가지고 있어. 하지만 가엾게도 우리 버티는 다리 불구인데다 형인 토니는 사실상 거렁뱅이나 다름없어!”
숙모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넌 모든 것을 다 가졌어. 행운까지도. 넌 감옥에 가둬 둘 수도 없었어.”
숙모의 어깨가 흔들렸다.
“하지만 우리는 널 죽이는데 좀 더 유능한 사람을 쓸 만한 형편도 못됐지. 왜냐면 돈은 모두 네가 다 차지했기 때문에.”
“제가 정말 무심했었군요.”
조르단이 조소했다.
“왜 제게 돈을 부탁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게 돈이 절실한 줄 알았더라면 돈을 드렸을 거예요. 물론 절 죽이기 위해 필요한 돈이 아니었다면요.”
“할머님.”
알렉산드라가 초조하게 말했다.
“조르단을 보셨어요? 아니면...... 아니면 까만 셔츠에 빨간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있던 사람은요?”
“알렉산드라, 제발. 왜 그렇게 안달복달하면서 자꾸 사람을 찾아? 조르단은 틀림없이 이 근처 어디에 있을 게다. 조금 전에 저기 나무 옆에서 맥주 마시고 있더라.”
노부인이 성가시단 듯이 말했다.
알렉산드라는 사과를 하고 침착하게 가만히 앉아 있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몇 분도 안 되어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불안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어딜 가니, 얘야?”
알렉산드라가 갑자기 일어나 스커트를 잡고 자리를 뜨려 하자 노부인이 물었다.
“조르단을 찾으려구요,”
알렉산드라는 살짝 미소 지어 보이며 솔직하게 말했다.
“그가 또 다시 실종될까 봐 겁나요. 이 년 전에 그랬듯이 말이에요. 제가 바보 같다는 건 알아요.”
“그렇다면 너 조르단을 사랑하는구나, 그렇지?”
노부인이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알렉산드라는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어물쩡 대답하기엔 그의 행방이 너무 걱정되어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스커트를 들고 눈으로는 끊임없이 사람들 틈에서 조르단을 찾으며 그를 마지막으로 본 곳으로 걸어갔다. 토니도 보이지 않았다. 멜라니와 존 캠던이 팔짱을 끼고 그녀 쪽으로 오고 있었다.
“멋진 파티에요, 알렉산드라. 런던 최고의 파티도 이렇게 재미있지는 못했소.”
존 캠던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 혹시 제 남편을 못 보셨어요? 아니면 토니라도?”
“그러고 보니 한 십 오 분 동안 못 본 것 같은데. 제가 찾아볼까요?”
“네, 좀 부탁해요.”
알렉산드라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오늘밤에는 이상하게 불안해요.”
그녀는 솔직히 말했다.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조금 전에 저기 숲 속에 수상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조르단이 사라졌어요.”
존 캠던은 미소를 지으며 응석이 지나친 아이를 달랠 때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몇 분 전 까지도 모두들 같이 있었어요. 제가 두 사람을 찾아 당신께 보내 드리겠어요.”
알렉산드라는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서둘러 맥주를 서비스하던 테이블 쪽으로 갔다. 테이블을 지나가면서 그녀는 주방 하녀에게 고개 인사를 하고 조르단이 서 있던 나무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깜깜한 숲 속을 보고 잠시 주저하다가 좁은 길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공연히 어리석은 망상을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몇 발자국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며 가만히 귀기울여 보았다. 파티장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바이올린 소리 이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소리만 있고 생명은 없는 이상한 허공 중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조르단?”
그녀는 불러보았다. 아무 대답이 없자 그녀는 걱정으로 이마를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파티장으로 다시 돌아갈 작정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땅바닥에 맥주잔이 나뒹구는 게 눈에 띄었다.
“오, 맙소사!”
그녀는 맥주잔을 들어 뒤집어 보았다. 맥주 몇 방울이 떨어졌다. 그녀는 황망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몬티 아저씨가 가끔 그랬듯이 과음으로 조르단이 길가에 쓰러져 있기를 기대하며, 아니 희망하며. 조르단 대신 권총 한 자루가 반짝 눈에 띄었다.
알렉산드라는 권총을 집어 들고 몸을 돌렸다. 순간 딱딱한 근육질의 몸과 부딪치면서 비명을 질렀다.
“토니! 당신이었군요.”
“뭐가 잘못됐소?”
토니는 걱정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진정시켰다.
“캠던이 조르단이 사라졌고 당신이 숲 속에서 어떤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고 말하더군요.”
“여기서 조르단이 마시던 맥주잔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그 부근에 권총이 떨어져 있었구요.”
공포로 그녀의 목소리와 몸이 떨렸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그 수상한 사람은 조르단과 제가 처음 만나던 날 조르단을 죽이려던 바로 그 사람이었어요.”
“어서 환한 파티장으로 가 있어요!”
토니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녀의 손에서 권총을 받아 들고 그는 숲 속 깊숙한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움을 청하기 위해 서둘러 파티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정신없이 로디나 존 캠던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도 눈에 띄지 않자 사격 시합을 잠깐 쉬면서 맥주 테이블로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는 소작인 한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마님!”
그는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려 했다.
“그 총 이리 주세요!”
알렉산드라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하고 그가 총을 건네주기도 전에 총을 나꿔챘다.
“장전되어 있어요?”
그녀는 숲 속으로 달려가면서 어깨 너머로 물어 보았다.
“물론입니다.”
숲 속 오두막까지 달려오느라고 토니는 숨을 헐떡이며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나 문간에 귀를 대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조심스럽게 빗장을 벗겨 보았다. 그러나 빗장이 벗겨지지 않자 그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서 어깨로 세차게 문을 밀었다. 문이 너무도 쉽게 열리는 바람에 그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놀라 입을 벌린 채 제자리에 딱 멈춰 섰다. 그의 어머니가 의자에 딱딱하게 앉아 있었고 어머니 옆 테이블 위에 조르단이 앉아 있었다. 조르단은 손에 권총을 쥐고 있었다.
그것은 정화하게 토니의 심장을 겨냥하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야?”
토니가 놀라 외쳤다.
토니의 출현으로 알렉산드라와 토니가 이 파티에서 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란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 조르단은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파티에 참석해 줘서 고맙군, 토니. 완전한 파티가 되기 위해선 오늘밤 손님이 한 분 더 오셔야겠지, 그렇지, 토니? 내 아내?”
토니가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조르단이 말했다.
“초조해하지 마. 그녀가 널 찾으러 올 테니. 내가 네게 완전히 제거됐으리라고 믿고 말이야, 안 그래? 틀림없이 올 거야. 네 주머니에 불룩 튀어나온 게 있는데 보아하니 권총 같군. 코트를 벗어 바닥에 던져.”
“조르단.....”
“시키는 대로 해!”
토니가 천천히 그의 명령에 따랐다.
토니가 코트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자 조르단이 총구를 약간 왼쪽으로 돌리며 창가의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거기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쏘아 버릴 테야.”
조르단은 침착하게 말했다.
“미쳤어! 조르단, 제발 왜 이러는지 말해 줘.”
“입 닥쳐!”
조르단이 매섭게 외쳤다. 그는 오두막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누구보다도 1년 이상이나 빠져 있었던 아내에 대한 분노가 더 강렬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 사기꾼이었으며, 자신의 품에 안겨 열정적으로 몸을 맡기던 창부에다, 소풍용 담요가 있는 시냇가야말로 천국이라고 믿게 만든 웃음기 머금은 아름다운 맨발의 공작부인! 이제 드디어 그녀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끼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눈에 익은 까만 머리가 보이더니 놀라 쟁반처럼 커진 그녀의 청녹색 눈이 나타났다. 그녀는 그의 손에 든 권총에 시선을 고정했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다알링.”
조르단의 목소리는 너무 낮아 속삭임 같았다.
“들어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
알렉산드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다가 문간에 쓰러져 있는 괴한을 보고 조르단 쪽으로 뛰어왔다. 조르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손에 총을 들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 사람인 줄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그녀는 조르단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뒤로 젖히는데 놀라 비명을 질렀다. 조르단은 알렉산드라에게 바짝 얼굴을 갖다 대고 이를 갈았다.
“당연히 그자가 그자인 줄 알고 있었겠지. 이 살인마 같은 창녀!”
그는 잔인하게 팔을 비틀며 그녀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알렉산드라는 들고 있던 총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알렉산드라는 잠시 주저앉아 두려움으로 더욱 커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으나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겁나?”
조르단이 슬글슬금 조롱했다.
“당연하겠지. 앞으로 넌 창문도 없고 멋진 옷도 없고 남자도 없는 곳에서 평생을 보내게 될 거야. 물론 간수들이 너의 몸뚱이를 탐내겠지. 축 늘어져서 더 이상 흥미가 없어질 때까지 말이야. 제발 네 몸에 대한 그들의 흥미가 나보다 오래갔으면 좋겠군.”
그는 고의적으로 잔인한 말만 골라했다.
“그렇게 놀라는 척하지 마.”
그는 그녀가 놀라는 이유를 오해했다.
“내가 너와 잠자리를 같이 한 것을 널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널 의심하지 않는 척하기 위해서였어.”
자기를 배신한 그녀를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그는 거짓말을 했다.
“조르단, 왜 이러시는 거에요?”
알렉산드라가 외쳤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보고 공포로 움찔했다.
“난 질문이 아니라 답을 원해.”
앞으로 십 분 후면 그가 없어졌다는 걸 알고 포키스가 달려올 것으로 계산하고 조르단은 테이블에 편안히 앉아 한쪽 다리를 흔들며 토니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기다리는 동안 자세한 이야기나 좀 들려주지. 내 집 또 어디에 독약을 넣었어?”
토니의 시선이 조르단의 손에 든 권총에서 가혹하기 짝이 없는 그의 얼굴로 옮겨갔다.
“조르단, 미쳤군.”
“널 죽일 수도 있어.”
조르단은 정말 그렇게 하려는 듯이 총을 높이 들었다.
“잠깐!”
그의 숙모가 외쳤다. 그녀는 절박한 눈으로 텅 빈 문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토니를 다치게 하지 마! 그는..... 그는 독약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니까 대답을 할 수 없어.”
“그렇다면 내 아내도 아무 것도 모르겠군요.”
조르단이 조롱했다.
“그래?”
조르단이 총구를 알렉산드라 쪽으로 돌렸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분노하며 알렉산드라는 천천히 일어서 치마폭에서 권총을 집어 들었다.
“우리가 당신을 독살하려 했다고 생각하세요?”
그녀는 조르단이 배를 한방 차기라고 한 것처럼 그를 노려보았다.
“너희들이 그랬다는 걸 알고 있어.”
그는 알렉산드라의 눈에 비친 고뇌를 즐겼다.
“사실은..... ”
버티 타운센드가 정확히 조르단의 머리를 겨냥하며 말했다.
“당신이 틀렸어. 그렇잖아도 광란상태에 빠진 어머니가 모두 다 말하려 했지만, 이 모든 것을 계획한 것은 바로 나야. 토니형은 누구를 죽일 만한 배짱이 없지. 하지만 난 비록 다리는 없지만 우리 집안 특유의 머리는 있어 당신을 죽일 구체적인 계획들을 내가 다 짰지. 놀라시는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다리 병신은 누구를 해치지 못한다고 생각했겠지? 조르단, 총을 내려 놔. 결국 당신을 죽이게 되겠지만 만약 그 총을 내려놓지 않으면 당신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매력적인 부인부터 먼저 죽이겠어.”
조르단은 움찔하며 총을 던지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알렉산드라가 그곳이 제일 안전한 곳으로 착각한 사람처럼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비켜!”
그러나 그녀는 겉으로는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재빠르게 조르단의 손바닥에 권총을 올려놓았다.
“버티, 죽일려면 나까지 죽여야 해.”
토니가 일어서서 앞으로 나가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아.”
버티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결국은 그렇게 할거야.”
“버티! 안 돼! 그건 우리의 계획이 아니야.”
알렉산드라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괴한에게 고정되었다. 그녀는 그가 천천히 토니의 코트 쪽으로 팔을 뻗는 걸 보았다. 그리고 그 괴한 뒤에 또 다른 한 남자가 문간으로 들어오며 천천히 권총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조르단!”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세 명의 가해자를 달리 피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알렉산드라는 몸으로 조르단을 막았다. 동시에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조르단의 팔이 자동적으로 알렉산드라를 잡았다. 버티 타운센드가 문간에 서있던 포키스의 총에 맞고 쓰러졌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괴한이 조르단의 총에 맞은 상처를 움켜쥐고 뒹굴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조르단은 잠시 후에야 알렉산드라가 아주 무겁게 죽은 듯이 자기 팔에 축 늘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팔에 힘을 주면서 그는 기절한 척하는 그녀를 놀려 줄 생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축 늘어져 있는 그녀의 관자놀이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의사를 불러 와!”
그는 토니에게 외치고 그녀를 바닥에 눕혔다.
그는 가슴이 두려움으로 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셔츠를 찢어 머리를 감았다. 그러나 채 반도 감기 전에 흰 셔츠가 피로 흠뻑 젖었다. 알렉산드라의 안색이 순식간에 회색으로 변했다.
“오 하느님!, 오 하느님!”
그는 전쟁터에서 수없이 죽어 가는 사람을 보았다. 그러므로 치명적인 상처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도저히 살 가망이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는 그녀를 안았다. 그녀를 가슴에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도 미친 듯이 뛰었다. 알렉산드라, 죽지마.... 죽지마..... 죽으면 안 돼.
조르단은 축 늘어진 알렉산드라를 안고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 숲 속 빈터의 파티장으로 달려왔다. 소작인들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르단은 토니가 숲가에 대기시켜 둔 마차에 그녀를 살며시 눕혔다.
한 나이 많은 산파가 알렉산드라의 머리에 감은 피묻은 붕대를 보고 그녀의 잿빛 얼굴을 보더니 조르단이 말에 올라타는 동안 재빨리 그녀의 맥을 짚어 보았다. 산파는 마차 부근에 모여선 소작인들을 향해 돌아서면서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마을 여자들이 1년 반 전 친구처럼 자기들을 도와주던 알렉산드라가 죽은 듯이 마차에 누워 있는 모습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르단이 마차를 출발시키자 소리 죽여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숲 속 빈터를 채웠다. 불과 십 분 전만 하더라도 그곳은 그녀가 마련한 잔치로 흥겹게 떠들썩했었다.
31. 내 안의 여자
알렉산드라의 침실을 나오는 덴버 박사의 침통한 얼굴을 보고 조르단은 속으로 고통의 신음을 토해 냈다.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해 봤습니다만 저로선 어쩔 수가 없군요. 제가 도착했을 때 부인은 이미 가망이 없었습니다.”
덴버 박사는 복도에 모여서 있던 사람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노부인이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토니의 팔에 의지해 눈물을 흘렸다. 멜라니도 어쩔 줄 몰라하며 남편에게 안겼다. 존 캠던이 조르단의 어깨를 다독거려 위로한 뒤 아내를 데리고 로디 카스테어즈가 기다리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조르단을 향해 덴버 박사가 말했다.
“이제 들어가셔셔 작별 인사를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부인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을 겁니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으니까요. 몇 분 후나 잘하면 몇 시간 후에 조용히 떠나실 겁니다.”
공작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덴버 박사가 조용히 덧붙였다.
“고통은 없을 겁니다.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조르단의 목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성난 얼굴로 죄 없는 의사를 노려보고는 알렉산드라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침대 옆에 촛불이 타고 있었다. 그녀는 죽은 듯이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로 조용히 누워 있었다. 숨소리가 들리 듯 말 듯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뜨거운 응어리를 삼키며 조르단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그녀의 사랑스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얼굴 구석구석을 다 기억해 두고 싶었다. 그녀의 피부는 정말 부드럽다. 그리고 또 속눈썹은 얼마나 긴가. 숱이 무성한 까만 부채 같다..... 숨을 쉬지 않는다!
“안 돼, 죽지 마!”
조르단은 축 늘어진 알렉산드라의 손을 잡고 미친 듯이 맥박을 짚어 보았다.
“죽으면 안 돼!”
그는 목이 메어 외쳤다. 맥박이 뛴다. 아주 희미하지만 뛰기는 뛴다. 조르단은 갑자기 말을 멈출 수 없었다.
“날 버리지마, 알렉스.”
그는 알렉산드라를 꼭 껴안으며 애원했다.
“제발 날 버리지 마!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보여주고 싶은 곳도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알렉스, 당신이 가버리면 그렇게 할 수 없잖아, 제발, 알렉스..... 제발 가지 마.”
“내 말 들어봐.”
조르단은 그녀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의미가 되었던가를 알면 틀림없이 살아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간절히 애원했다.
“당신이 그 갑옷을 입고 내 인생에 뛰어 들기 전에 내 인생이 어땠는지 들어 봐. 그때까지 내 인생은 텅 비었어. 아무 색깔도 없이. 그런데 당신이 내게 왔어. 그때부터 갑자기 그전에는 존재한다고 믿지도 않았던 감정을 느끼고 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어. 내 말 못 믿겠지, 알렉스? 하지만 이건 진심이야. 내 증명해 보일 수 있어.”
그이 목소리는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느라 흔들리고 있었다.
“초원에 있는 꽃은 청색이야. 그리고 시냇가에 있는 꽃들은 흰색이고. 그리고 관목 숲 옆에 있는 아치 위에 핀 장미는 빨간색이야.”
알렉산드라의 손에 뺨을 갖다 대고 조르단은 그녀의 손에 뺨을 부비기 시작했다.
“내가 알게 된 것은 그것만이 아니야. 정자 옆에 있는 빈터, 그러니까 내 비석이 있는 곳 말이야. 그 빈터가 1년 반전에 우리가 펜싱 시합을 했던 그 숲 속의 빈터와 꼭 닮았다는 것을 알았어. 오, 내 사랑, 그것 말고도 당신에게 꼭 할 말이 있어. 사랑해, 알렉스.”
그는 눈물로 목이 메었다.
“사랑해. 그런데 당신이 죽으면 사랑한다는 말을 해줄 수 없잖아.”
조르단은 절망과 분노에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갑자기 애원조에서 위협조로 말투를 바꾸었다.
“알렉스, 감히 날 버리고 떠나지 마! 만약 그랬다간 당장 팬로즈를 내쫓아 버릴 거야! 틀림없이 그렇게 할거야. 그것도 추천장 한 장 없이 말이야. 당장 내쫓아 버리겠다구, 내 말 알아들어? 필버트도 물론 당장 쫓아낼 거야. 그리고 엘리자베스 그랭거필드를 다시 정부로 삼을 테야. 그녀는 기꺼이 당신 대신에 호손 부인이 되고 싶어 할 거야...... ”
몇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고 또 한 시간이 지났다. 조르단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정신없이 애원하다가 위협하다가 그러다가 마침내 완전히 희망이 사라지자 애걸하기 시작했다.
“여보, 내 영혼을 좀 생각해 줘. 내 영혼은 어둡기만 해. 당신이 날 고쳐 주지 않으면 난 틀림없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말 거야.”
조르단은 기다렸다. 행여 그녀가 무슨 반응을 보일까 귀를 기울이며 지켜보면서. 그는 자기의 생명을 그녀에게 불어넣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녀의 생기 없는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녀에게 쉴새없이 말을 퍼붓게 했던 결의와 희망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절망이 그의 가슴을 죄어오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축 늘어진 그녀를 더욱 꼭 껴안으며 조르단은 그녀의 뺨에 자기 뺨을 갖다 댔다. 흐느낌으로 그의 어깨가 흔들렸다.
“오, 알렉스.”
그는 아기를 달래듯이 품에 안은 알렉산드라를 흔들며 흐느꼈다.
“당신 없이 어떻게 살란 말이야? 나도 데리고 가 줘. 나도 당신과 같이 가고 싶어......”
그때 어떤 느낌이 전해졌다. 그의 뺨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
조르단은 숨을 멈추고 얼른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알렉산드라를 베개 위에 내려놓으며 미친 듯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알렉스?”
그는 그녀에게 귀를 갖다대고 애원했다. 그녀의 속눈썹이 희미하게 깜빡인다고 착각했거니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의 창백한 입술이 벌어지며 말을 하려 했다.
“여보, 말해 봐.”
조르단은 필사적으로 그녀에게 귀를 갖다댔다.
“말해 봐. 제발, 내 사랑.”
알렉산드라가 침을 삼키고 뭐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소리는 너무도 희미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 여보?”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라 간절히 애원했다.
그녀가 다시 속삭였다. 마침내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조르단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자기의 손을 꼭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웃음으로 그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 천천히 올라온 웃음은 폭소가 되어 터져 나왔다. 발코니를 따라 복도에까지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노부인과 의사와 토니는 조르단이 너무 슬퍼서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생각하고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토니.”
아직 입가에 웃음기가 남아 있는 조르단이 알렉산드라의 손을 잡고 환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엘리자베스 그랭거필드의 발이 너무 크다고 생각한대.”
그이 어깨가 다시 웃음과 함께 요동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라는 그녀의 방과 그의 방을 연결해 주는 문 쪽으로 걸어가는 조르단을 향해 베개 위에서 고개를 돌렸다. 사고가 난 지 이틀이 지났다. 그녀는 이틀 낮과 밤 동안 의식과 무의식 세계를 오락가락했다. 무의식에서 깨어날 때마다 그녀의 침대 옆에는 항상 조르단이 앉아서 따스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피로에 젖은 그의 얼굴에는 행여 그녀가 다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깊은 두려움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 의식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녀는 지난 이틀 동안 그랬던 것처럼 조르단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랑에 불타는 눈으로 그녀를 들여다봐 주길 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 아침에는 조르단의 얼굴이 완전히 무표정하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져 알렉산드라는 자기가 죽는다고 믿었을 때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여 주던 사랑의 말들이 환상이 아니었을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기분이 어때?”
그녀의 침대 곁에 서서 안부를 묻는 그이 그윽한 음성에는 예의바른 인사치레의 관심밖에는 없었다.
“아주 좋아요, 고마워요. 조금 피곤할 뿐이에요.”
그녀도 똑같이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내게 묻고 싶은 말이 있을 테지..... 이틀 전에 생긴 일에 대해서 말이야.”
알렉산드라는 그가 그녀를 안아주고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길 원했다.
“물론이죠.”
그녀는 그의 기분을 알 수 없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간단히 설명하면 1년 반 전에 버티가 주방 하녀로 일하던 진이란 아가씨가 지갑에서 돈을 훔치는 걸 봤어. 그녀는 그 돈을 훔쳐 집 뒤 숲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빠들에게 갖다 주려고 했다고 순순히 자백을 했지. 버티와 숙모는 벌써부터 나를 죽일 계획을 짜고 있었어.
하지만 그때까지 그들은 그 일을 해줄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었지. 그래서 그 하녀를 절도죄로 고발하는 대신에 버티는 그녀에게 절도를 시인하는 자백서를 쓰게 했어. 그리고 그녀의 오빠들에게 돈을 주고 당신을 처음 만나던 날 밤 나를 제거하라고 명령했지. 하녀를 함구시키고 그녀의 오빠들로부터 협조를 얻기 위해 자백서를 보관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그날 밤 당신이 그 갑옷을 입고 날 구하러 달려오는 바람에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 내가 당신을 여인숙으로 데리고 가는 동안 그중 한 명, 내게 총을 맞은 녀석이 용케도 살아나 도망갔어. 버티는 우리가 결혼하고 나흘 뒤 또 나를 죽이려 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고용한 살해범들이 나를 죽이는 대신에 그의 돈만 착복하고 이중으로 돈을 벌기 위해 나를 불량배 조직에 팔아 버렸지. 숙모님이 지적하셨듯이 돈이 없으면 유능한 하수인을 구하기 힘들지.”
조르단은 조소하면서 마지막 말을 덧붙이고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일주일 전 내가 사지에서 탈출해 나왔을 때 버티는 그 하녀에게 아직 자백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그녀의 오빠에게 다시 나를 죽이도록 말하라고 협박했지. 그래서 이번에는 그자가 나를 브룩 가에서, 그러니까 당신이 가정교사 방에서 잤다는 그날 밤에, 나를 쏘았지.”
알렉산드라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날 밤에 총격을 당할 뻔했다는 이야기는 없었잖아요.”
“당신을 놀라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조르단은 고개를 저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사실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어. 사실 난 마음 한구석으로 혹시 당신이 나를 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저격범의 체격이 당신과 비슷했거든. 게다가 당신은 그날 우리의 결혼을 청산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말했잖아.”
알렉산드라는 입술을 깨물며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 고통과 비난이 어렸다. 조르단은 손을 더욱 호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고 설명을 계속했다.
“사흘 전 노드스트롬이란 하인이 우리가 소풍 때 썼던 술병의 술을 마시고 죽었어. 당신이 몇 번이나 내게 마시라고 권하던 그 술을 마시고.”
그녀의 시선이 다시 그의 얼굴을 향했다. 조르단은 자신을 질책하는 목소리로 설명을 계속했다.
“사실 포키스는 토지 부관리인이 아니고 수사관이야. 우리가 호손에 온 뒤 그의 요원들이 집안 곳곳에 배치되었지. 그는 술병 사건을 조사한 결과 그 술에 독약을 탈 만한 사람이 당신밖에 없다고 말했어.”
“제가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포키스가 증인으로 내세운 사람은 지난 1년 반 동안 우리 집에서 수시로 접시닦이 하녀로 일하던 여자였는데, 그녀의 이름이 진이야. 또 다시 버티의 지시에 따라 그녀가 술병에 독약을 탔지. 그리고 그 후에 생긴 일들은 당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야.”
알렉산드라가 힘겹게 침을 삼켰다.
“당신은 그처럼 희박한 증거에 근거해 속으로 제가 당신을 죽이려 한다고 믿고 욕했겠군요? 브룩 가에서 당신을 총격한 사람과 체격이 비슷하다고 해서, 그리고 제가 당신의 술에 독을 탔을 거라고 접시닦이 하녀가 말했다고 해서 저를 의심하셨어요?”
조르단은 그녀의 말에 찔리는 데가 있었다.
“난 당신이 두 번이나 몰래 토니의 집에 가는 걸 따라갔었다는 올슨의 말을 믿고 그렇게 생각했어. 올슨도 포키스의 요원이야. 난 당신이 몰래 토니를 만났다는 걸 알고 있었는 데다 모든 상황이 다 당신을 의심하게 만들었어.”
“알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알렉산드라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조르단은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너무 잘 이해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녀를 믿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그녀가 베푼 사랑을 몇 번이나 저버린 자신을 아주 똑똑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두 번이나 목숨을 걸고 자기를 구해 주려 했건만 자기는 그 대가로 그녀를 불신하고 냉담하게 대했다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로부터 미움과 경멸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조르단은 알렉산드라의 창백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그녀는 그가 얼마나 무정하고 어리석은 사람인가를 충분히 알았을 터이므로 그는 그녀가 자기 인생에서 그를 추방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당신에 대한 내 행동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아.”
조르단이 너무 긴장해서 말하는 바람에 알렉산드라는 겁이 덜컥 났다.
“당연히 당신은 나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싶지 않겠지. 여기를 나갈 만큼 몸이 회복되면 당신에게 오십 만 파운드 짜리 은행 수표를 주겠어. 돈이 더 필요하다면...... ”
그는 목이 멘 듯 잠시 말을 그쳤다.
“돈이 더 필요하면 이야기해. 내가 가진 것은 언제든 당신 것이기도 하니까.”
그의 목소리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으로 떨렸다.
알렉산드라는 정겨움과 분노와 불신 속에 그의 말을 들었다. 그녀가 뭐라고 답을 하려는데 그가 다시 목청을 가다듬고 말을 시작했다.
“당신에게 꼭 할 말이 있어...... 우리가 런던을 떠나기 전에, 필버트가 내가 죽은 줄 알았을 때 당신이 어떤 기분이었으며, 또 런던에서 환상이 산산조각 났을 때 당신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다 말해주더군. 나에 관한 소문은 대부분 사실이야. 하지만 그날 내가 런던에서 엘리제 그랜도를 만났을 때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당신이 알아줬으면 좋겠어.”
조르단은 잠시 말을 중단하고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선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기억해 두고 있었다. 그 기억으로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날들을 지탱하기라고 할 것처럼. 그는 연민으로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이 가슴속에 있는 모든 희망과 모든 꿈을 상징했다. 알렉산드라는 선과 온화함과 믿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사랑도. 그녀는 언덕에 활짝 핀 꽃이었으며 집안을 감싸는 화사한 웃음이었다.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을 마치고 그녀의 인생에서 영원히 없어져 줘야겠다고 다짐하며 조르단은 길게 한숨을 들이쉬었다.
“필버트가 당신 아버지와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의 이야기도 해줬어. 당신 아버지가 당신에게 준 상처를 지울 수는 없겠지만 이걸 당신에게 주고 싶어...... ”
조르단은 손을 내밀었다. 길쭉하고 납작한 벨벳 상자가 나타났다. 알렉산드라는 그에게서 상자를 받아 떨리는 손가락으로 고리를 풀었다.
새하얀 공단 위에 큼직한 루비가 놓여 있었다. 가느다란 금줄에 매달려 있는 하트 모양의 그 루비는 그녀가 지금까지 본 어떤 루비보다 큰 것이었다. 그 옆에는 가장자리에 다이아몬드를 박은 에메랄드가 있었다. 그것 역시 하트 모양이었다. 그리고 에메랄드 옆에는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번쩍이고 있었다.
다이아몬드는 눈물방울 모양이었다.
떨리는 턱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알렉산드라는 그를 향해 눈을 들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려 애쓰며 속삭였다.
“여왕배 승마 대회 날 이 루비 목걸이를 하고 나가겠어요. 그래서 제가 당신의 소매에 리본을 묶을 때..... ”
조르단이 신음 비슷한 소리를 내며 그녀를 포옹했다.
한참 뒤에 마침내 조르단이 그녀의 입술에서 입술을 뗐을 때 알렉산드라가 속삭였다.
“이제 다른 말을 다 하셨으니 제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전 벌써부터 그 말을 기다려 왔어요. 그리고...... ”
“사랑해.”
조르단이 힘주어 말했다.
“사랑해, 알렉스.”
그는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사랑해.”
그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사랑해, 사랑해, 당신을 사랑해...... ”
32 사랑은 근사한 것
조르단은 아들을 가슴에 안고, 자기를 빤히 쳐다보는 아기의 조그만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아기를 안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그는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약간의 충고를 해주기로 했다.
“아들아, 언젠가 너도 아내를 고르게 될 거야.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두는 게 참 중요하단다. 그래서 이 아빠가 이야기를 해줄게.”
“옛날 옛적에 , 아주 거만하고 냉소적인 한 남자가 살았어. 그 사람의 이름은..... ”
조르단은 생각하느라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 그 사람의 이름은 호손 공작이었어.”
알렉산드라는 조르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문가에 숨어 서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그 공작은 아주 마음씨가 나쁜 사람이었단다. 그는 이 세상 그 누구도 특히 자기 자신까지도 좋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러던 어느 날 밤, 운명의 그날 밤에 공작은 강도를 만났지. 공작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려는 순간 갑자기 낡은 갑옷을 입은 한 기사가 말을 타고 나타났어. 그 기사의 도움으로 공작은 간신히 강도들을 물리칠 수 있었어. 그런데 그 싸움에서 그만 기사가 부상을 입고 말았지.
그래서 그 마음씨 나쁜 공작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기사를 도와주러 갔어.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그 기사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어. 그녀는 조그만 키에 깡마르고, 곱슬머리에 그때까지 공작이 본 어떤 속눈썹보다도 긴 속눈썹을 가지고 있었어.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은 아쿠아마린 같은 청록색이었어. 텅 빈 가슴의 마음씨 나쁜 공작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어. 그녀의 눈에 나타난 표정을 본 공작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어.....“
아기가 황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뭘 보았는데요?”
문간에 서있던 알렉산드라가 기쁨에 목이 메어 물었다.
조르단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눈빛이었다.
그는 다정하면서도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뭔가 근사한 것을 보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