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사랑을 찾아서
류니베르 호의 침몰
교장의 전도관이 세워지고 헤르굼이 미국에서 돌아오기 약 2년 전, 그러니까 1880년 여름의 안개 짙은 어둠 속을 프랑스의 대형 정기 여객선 류니베르 호가 르아브르를 향해 대서양의 뱃길을 가르고 있었다.
새벽 4시쯤 되었을까. 근무자 외의 모든 선원들과 선객들은 아직 잠자리에 있었고, 넓은 갑판에는 그림자 하나 얼씬대지 않았다. 깊디깊은 정적만이 바다 한복판을 떠돌고 있었다. 그때 새벽잠에서 깨어난 늙은 프랑스인 선원 한 사람이 해먹 속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마침 부옇게 먼동이 트고 있었고 파도는 높았으며, 선체가 쉴 새 없이 삐걱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그가 단잠을 깬 것은 아니었다.
선원들은 갑판 사이의 크고 낮은 선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불빛 아래로 빈틈없이 매달려 있는진회색 해먹이 잠든 사람을 담은 채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따금 승강구 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드센 바람은 뼛속을 파고들만큼 차갑고 습기 차 있었다. 사방으로 넓게 펼쳐진 바다는 안개의 베일 속에서 회록색 파도를 출렁이며 생생하게 살아 꿈틀거렸다.
'바다만한 것도 없지.'
늙은 선원은 생각했다. 어렴풋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이상하리만큼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크루가 물을 휘젓는 소리도, 덜그럭거리던 키의 쇠사슬 소리도, 부딪치는 파도 소리나 휘몰아치던 바람소리도, 그 밖의 모든 소리들이 별안간 일제히 멎어 버린 것 같았다. 그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갑자기 배가 침몰해서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관속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진회색 해먹 속에 갇혀 바닷속을 마냥 떠돌아다닐 것만 같은 그런 예감이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전에는 언제나 자기의 무덤이 바다 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몹시 두려웠었는데, 자기를 덮을 것이 무겁고 숨 막히는 검은 흙이 아니라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투명한 물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왠지 기쁘기까지 했던 것이다.
'바다만한 것도 없다니까.'
그는 다시 생각했다. 이윽고 그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들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임종 시의 의식에서와 같이 기름을 바르지도 않고 바다 밑에 누워 있을 경우, 그것이 영혼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지, 그랬다가 영혼이 천국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지는 않을지 등등의 생각에 은근히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문득 앞갑판 밑쪽 선원실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불빛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상체를 들어 해먹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두 사람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엔 각기 촛불을 켜들고 있었다. 누군지를 몰라 그는 좀 더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해먹은 마룻바닥 위로 빈틈없이 매달려 있어서 그 밑을 엉금엉금 기어야만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밀치거나 부딪치지 않고 방을 지나올 수가 있었다. 늙은 선원은 이렇게 복잡한 곳을 지나온 사람들이 대체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는 곧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하얀 성의를 입은 두 꼬마가 양 손에 촛불을 한 개씩 들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선원은 놀라지 않았다. 저렇게 조그만 꼬마들이라면 불 켜진 초를 들고도 해먹 밑을 충분히 걸어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사제도 같이 올까?'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어디선가 작은 종소리가 쨍그랑쨍그랑 들려왔다. 꼬마들 뒤로 누군가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사제가 아닌 웬 노파로 아이들보다 별로 크지 않았다.
'어머닌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신의 어머니보다 작은 사람들 일찌기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아니라면 누가 저렇게 사람들을 깨우지 않고도 조용히 올 수 있었겠어?'
그는 어머니가 검은 옷 위에 사제가 입는 것 같은 레이스로 넓게 두른 흰 린넨 성의를 입고 있음을 깨달았다. 손에는 금 십자가가 박힌 큼직한 성경이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그가 고향의 제단 위에서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성경이었다. 꼬마들이 촛불을 그의 해먹 옆에 세웠다. 그리고는 꿇어앉아 향로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늙은 선원은 향로에 달린 쇠줄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향이 타는 그윽한 냄새에 취해 파란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동안에 어머니는 임종시에나 읽는 기도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그는 역시 무덤 속에 묻히는 것보다는 바다 밑에 누워 있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해먹 속에서 사지를 쭉 뻗었다. 한참을 라틴어로 중얼거리고 있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더불어 주위에서 떠돌고 있는 향연 속에서 단조롭고 절그렁거리는 향로의 소리도 들려왔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난 것 같았다. 꼬마들이 초를 들고 앞장서자 어머니도 책을 덮고는 그 뒤를 따라갔다. 선원은 세 사람이 진회색 해먹 밑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사라지자 정적도 끝이 난 듯했다. 동료들의 숨소리, 선체의 삐걱이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바람이 몰아치고 파도가 배에 부딪쳐 부서졌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는 인간들 속에서 넓은 바다 위에 떠 있음을 자각했다.
'오늘 새벽에 본 건 대체 무엇이지?'
십 분쯤 지나고 어떤 배 한 척이 류니베르 호의 허리에 충돌했다. 기선은 두 동강이 난 듯 요란한 굉음을 냈다.
'아, 짐작했던 대로야!'
무서운 혼란 속에서 그는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정성껏 차려입었다. 다른 선원들은 겨우 잠을 털며 해먹 속에서 굴러 나오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에 죽음이 달고 부드러울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터라 마치 바다가 제집인 양 자신을 부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충돌이 일어났을 때, 식당 옆 갑판실에는 사환 소년 하나가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심한 진동으로 깜짝 놀란 소년은 침대에서 일어나 무슨 일인가 멍하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머리 위의 조그마한 현창을 통해 그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안개와 그 속에서 뛰어나온 듯한 알 수 없는 흐릿한 회색물체뿐이었다. 그는 엄청나게 큰 회색 날개를 보는 듯했다. 거대한 새가 기선에 덤벼든 거라고 그는 나름대로 생각했다. 기선은 그 거대한 괴물의 부리와 퍼덕이는 날개에 습격이라도 당한 듯 옆으로 기울었다. 소년은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잠은 흔적도 없이 달아나 버렸고 이젠 죽는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커다란 범선이 자기가 탄 배와 충돌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큼직한 돛과 어수선한 갑판을 볼 수 있었다. 갑판 위엔 우의를 입은 사람들이 미친 듯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오자 돛이 북처럼 부풀어올랐다. 돛대는 앞으로 툭 튀어나오고 활대에서는 총소리 같은 폭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돛대가 세 개나 달린 커다란 범선이 짙은 안개 속을 달리다가 류니베르 호의 옆구리에 뱃머리를 축 처박고는 꼼짝도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선 쪽이 많이 기울긴 했어도 아직도 추진기가 돌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두 배가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아, 큰일이야!"
소년은 소리 지르며 갑판으로 뛰어 올라갔다.
"저걸 어쩌지? 저 배는 곧 가라앉을 것 같은데!"
소년은 자기가 탄 배는 크고 훌륭해서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판으로 뛰어 올라온 선원들도 자기들의 배에 충돌한 것이 한갓 범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안심을 하고 여유 있게 두 배를 떼어 놓는 작업에 착수했다.
소년은 맨발로 갑판에 서서 범선에 타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어서 기선으로 옮겨 타요! 그러지 않으면 배와 함께 가라앉을 거예요."
그의 셔츠가 바람에 휘날렸다.
"이리로 와!"
맞은편에서 붉은 구레나룻의 사나이가 소년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사나이는 뱃전으로 달려 나왔다.
"기선이 가라앉는다!"
소년은 범선으로 옮겨 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가 보기엔 범선이 위험해 보였고, 거기에 탄, 운명이 다 된 것 같은 사람들을 향해 기선으로 옮겨 타라고 계속 고함을 쳐댈 뿐이었다. 범선의 다른 사람들은 장대와 긴 갈고리로 자기들의 배를 기선에서 떼어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붉은 구렛나룻의 사나이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지금 저 앞에서 손짓하고 있는 소년을 어떻게 구해내야 할지 그것만이 문제였다. 그는 소년이 너무도 가엾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는 두 손을 입에 대고 나팔 모양을 만들어 소리쳤다.
"이리 와, 이리 오라니까!"
소년은 얇은 셔츠 바람으로 갑판에 서 있었으므로 몹시 춥고 안돼 보였다.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저쪽 배에 탄 사람들에게 주먹을 내둘렀다. 그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6백 명의 선객과 2백 명의 선원을 태운 류니베르 호 같은 커다란 대양 항해선이 가라앉으리라곤 소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선장과 선원들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침착해 보였던 것이다. 갑자기 붉은 구레나룻의 사나이가 긴 갈고리를 움켜잡더니 소년을 향해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는 갈고리가 소년의 셔츠에 걸리자 범선 쪽으로 잡아당겼다. 소년은 뱃전까지 끌려가다가 기를 써서 갈고리를 벗겼다. 그는 운명이 다한 남의 배에 끌려가지 않은 것이다. 그때 굉장한 소리가 울려왔다. 범선의 뱃머리에 튀어나온 나무가 뚝 부러지며 두 배가 떨어져 나갔다. 소년은 범선의 뱃머리에서 부러진 부분이 건들거리는 것을 보았다. 기선은 속력을 다해 진로를 잡아나갔고 범선은 곧 안개에 묻혀 버렸다. 소년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쓰러진 돛 뭉치 밑에서 기어 나오려고 꿈틀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범선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만 가라앉은 거야.'
소년은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그는 혹시라도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지 않을까 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때 옆에서 기선 쪽으로 발악하며 소리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선객을 살려라! 보트를 내려라!"
다시 조용해졌으므로 소년은 또 조난의 소리가 들리지 않나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아득한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나님께 기도해라, 모두 죽는다!"
그때 한 늙은 선원이 선장 앞에 다가섰다.
"배 중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습니다. 우린 지금 가라앉고 있어요."
그는 체념한 듯 조용하게 말했다.
사고 내용이 온통 배 안에 전해지자 작달막한 귀부인 한 사람이 갑판 위에 나타났다. 그녀는 일등선실에서 잽싼 걸음걸이로 걸어나왔다. 옷차림이 단정했고 동여맨 보닛의 끈이 화사했다. 곱슬머리에 부엉이 같은 동그란 눈을 가졌으며, 얼굴 혈색이 좋은 노부인이었다. 그녀는 항해가 계속되는 짧은 기간에 벌써 배 안의 모든 사람들과 친해져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미스 호그즈로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선원과 선객들에게도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죽어야 하는데, 그것이 언제 일어나든 자기에게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몇 번씩 되풀이해서 말하곤 했었다. 그녀가 갑판에 올라온 이유도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저 무슨 재미있는, 손에 땀을 쥘만한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았나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그녀의 눈에 띈 것은 질린 얼굴로 정신없이 뛰어가는 두 사람의 선원이었다. 취사 당번이 주방에서 반 벌거숭이로 뛰어나와 선객들을 깨워 갑판으로 올려보내려 했다. 또 한 사람의 늙은 선원은 구명대를 잔뜩 들고 와서 갑판 위에 내던졌다. 사환 소년은 얇은 셔츠만 걸친 채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공포에 떨며 울부짖고 있었다. 선장은 선교에 서서는 엔진을 죽이고 선객들을 구조 보트에 태우라고 명령하고 있었고, 기관사와 화부들은 기관실로 통하는 더러운 사닥다리를 달려 올라가 물이 벌써 아궁이까지 찼다고 소리쳤다. 미스 호그즈가 갑판에 나와 선 지 불과 몇 분, 그 자리는 순식간에 하등 선객들로 가득 찼다. 얼른 보트에 올라타지 않으면 일. 이등 선객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만다고 소리치며 그들은 무리를 지어 올라왔다.
흥분과 혼잡의 아수라장에서 미스 호그즈는 그제사 자기들이 절박한 위험에 직면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곳을 살짝 빠져 나와 상갑판으로 나갔다. 보트 몇 척이 뱃전에 높다랗게 걸려 있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스 호그즈는 슬그머니 뱃전에 기어 올라가서 바다 위의 허공에 덩그렇게 떠 있는 보트 한 채에 몰래 기어들어갔다. 무사히 보트 안에 들어간 그녀는 자기의 지혜와 선견지명을 기뻐했다. 이것은 명석하고 냉정한 두뇌를 가진 사람의 장점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한 채의 보트가 내려지자마자 순식간에 미친 듯한 쟁탈전이 일어날 것이며 갑판으로 나가는 문이나 뒷갑판 계단의 혼잡은 말할 수가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즈 호그즈는 보트 뒤쪽에 기대어 보트마다 선원이 배치되고 사람들이 올라타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별안간 무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흥분해서 배 밖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승객들은 왁자하니 문 쪽으로 몰려 배의 계단 쪽으로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엎치락뒤치락하기 시작했다. 그 소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배 바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계단에 이르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렵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이리저리 흩어지더니 바다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헤엄이라도 쳐서 보트에 가 닿을 생각들이었던 것이다. 보트는 인원이 차자 바다로 내려져 서서히 물살을 저어가기 시작했다. 보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칼을 빼들고 기어 올라오려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을 자르겠다며 위협했다. 잇달아 보트가 내려지는 광경을 바라보던 미스 호그즈는 자꾸만 달려드는 사람들의 무게 때문에 보트들이 뒤집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녀 가까이에 있던 보트도 모두 내려졌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그녀가 타고 있던 보트만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아, 다행이다. 이 보트는 위험이 사라질 때까지 그냥 놔둘 모양이야'
미스 호그즈는 계속하여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을 조망해야 했다. 그녀는 마치 지옥의 허공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또한 갑판은 보이지 않았으나 들려오는 소리로 봐서 무서운 싸움이 벌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총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파란 연기가 하늘로 번지며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주위가 고요해졌다.
'이번에는 내 보트를 내려 줄 거야.'
미스 호그즈는 태연하게 앉아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선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로소 류니베르 호가 가라앉고 있음과 동시에 자신의 보트가 잊혀진 채 버림받고 있다는 것도 깨달아야 했다. 기선에는 또 골든 부인이라는 젊은 미국인 여자가 타고 있었다. 몇 해 동안 파리에서 살고 있는 양친을 찾아서 유럽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녀에겐 어린 사내아이가 둘이 있었는데 사고가 났을 때 세 사람은 선실에서 자고 있었다. 잠이 깬 골든 부인은 아이들에게 서둘러서 옷을 입히고는 자기는 잠옷 위에다 망토를 걸친 채 선실 사이의 좁은 복도로 달려나갔다. 복도는 갑판으로 올라가기 위해 객실에서 뛰쳐나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정도까진 그래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승강구의 계단이 문제였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골든 부인은 두 아이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계단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은 서로 살겠다고 아우성이었고, 그녀의 가족을 거들떠봐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골든 부인은 근심 어린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이 하나쯤이야 자기가 데려갈 수 있지만 남은 한 아이는 누가 갑판까지 데리고
나갈지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녀 가까이로 와주는 사람은 없었고, 서로를 밀어제치며 몸부림치고 있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 그 모습들 또한 가지각색이라서 담요를 걸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골든 부인과 같이 긴 잠옷 위에 외투만 걸친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이런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한편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거칠진 않았지만 모두 정신이 없어 보였고, 역시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혹시나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하여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도저히 누군가를 붙잡고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포기하기 전에 청년한 사람을 불러 보려고 했다. 언젠가 식탁의 옆자리에 앉아 여러모로 친절하게 돌봐준 사람이었다.
"저, 마텐스씨!"
청년은 다른 사나이들의 눈빛과 똑같은 잔인하고 차가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위협적으로 지팡이를 치켜들면서 그녀가 만일 자기를 붙잡기라도 한다면 당장에 후려칠 기세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신음소리를 들었다. 갑자기 휘몰아치는 강풍이 좁은 통로에서 막혀 버렸을 때 일어나는 그런 소리로, 신음소리라기보다는 노여움이 절정에 다다른 소리 같았다. 그것은 꽉 막혀버린 승강구 계단 위의 군중들 속에서 일어난 소리였다. 한 사람의 앉은뱅이가 계단 중턱까지 업혀 올라가다 좁은 계단을 차지하고 앉아 통행을 막고 있었다. 그는 식탁에도 업혀서 오가곤 했는데, 그의 하인이 무거운 그를 업고 간신히 계단 중턱까지 올라갔다가 너무 숨이 차서 한숨 돌리느라고 멈추어 선 것이 갑자기 뒤로부터 밀리는 바람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던 것이다.
골든 부인은 몸집이 크고 난폭해 보이는 한 사나이가 앉은뱅이를 들어 뱃전으로 내던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치 길바닥의 돌멩이 하나를 집어 개골창에 던져 버리는 정도로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직 자기만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광경을 바라보는 골든 부인은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이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자신도 아이들도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음을 확실하게 느낀 것이다.
한편 신혼여행 중인 신랑 신부는 선체의 아랫쪽에 위치한 선실에서 배가 충돌한 것도 모른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배 상단에서 서로 보트를 타겠다고 아우성치고 있는 것도 그들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그들을 깨우러 오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갑자기 머리 위에서 밤새도록 돌고 있던 추진기가 멈추는 바람에 잠을 깼다. 신랑이 부랴부랴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삼 분 후 그는 다시 돌아왔는데 침울한 얼굴로 조용히 선실의 문을 닫으며 신부에게 말했
다.
"배가 가라앉고 있소."
신부는 신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사적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보트는 이미 떠나 버렸소."
두 팔로 신부를 막으며 신랑이 말했다.
"승객의 대부분은 물에 빠졌고 아직 배에 남은 사람들은 갑판 위에서 서로 나무토막이나 구명대를 빼앗느라고 무서우리만큼 결사적이오."
그는 문간에서 밟혀 죽은 여자의 시체를 타 넘어야 했던 일과 사방에서 들려오던 절규에 대해 이야기를 덧붙였다.
"모든 게 절망적이오. 밖으로 나가도 소용 없으니 여기서 함께 죽음을 기다리는 편히 훨씬 나을게요."
신부도 단념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곤 신랑 옆에 앉았다.
"사람들이 서로 살겠다고 악을 쓰고 다른 사람을 밀쳐 내는 비참한 꼴을 안 보느니만 못해요. 어차피 죽을 거라면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입시다."
신부는 자기들에게 남은 이 짧은 시간을 남편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바라고 있던 것은."
신랑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함께 오랜 세월을 살아간 다음 임종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내 곁에 앉아 있는 당신에게 지난날 길고 행복한 생의 동반자가 되어 준 데 대해 감사의 말을 하는 거였소."
신부는 순간 가느다란 물줄기가 문틈으로 꼬불꼬불 흘러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안 되겠어요!"
그녀가 절망적으로 손을 치켜 올리며 부르짖었다.
"절 보내주세요! 여기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다뇨. 네, 전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이러고 있을 순 없어요."
그녀는 밖으로 정신없이 뛰쳐나갔다. 배가 가라앉을 듯 옆으로 기우뚱하며 기울었다. 기선은 가라앉고, 아이들은 간 곳이 없고, 젊은 골든 부인은 물속에 떠 있었다. 세 번이나 물 위로 떠올랐었으나 다시 가라앉는 순간 그녀는 이제 드디어 죽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남편이나 아이들 혹은 그 밖의 세상사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오직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영혼은 마치 석방된 죄수처럼 뛰어 일어났다. 인간의 육신이라는 무거운 굴레를 벗어 던지게 된 것을 기뻐하며 영혼의 참된 고향을 찾아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죽을 수 있는 걸까?'
그녀는 생각했다. 순간 파도치는 소리, 바람의 속삭임, 물에 빠진 자의 울부짖음, 둥둥 떠다니는 물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 등 뒤범벅이 된 주위의 온갖 소음들이 마치 형태 없는 구름이 어울려 회화적인 정경을 자아내듯 그 어떤 언어가 되어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음에 비하면 사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지.... 아, 정말 그래!'
그녀는 생을 죽음처럼 어렵지 않게 가볍게 살아가려면 어찌해야 하는가를 더불어 생각했다. 주위에서는 물에 빠진 사람들이 난파한 화물이나 뒤집혀진 보트에 매달리려고 기를 쓰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 광적인 고함소리와 저주의 순간이 다시금 녹아들며 또렷하고 힘찬 언어가 되어 들려왔다.
'삶을 죽음보다 수월하게 하는 것은 협동하는 마음이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
그녀에게 이 소리는 온 세계의 잡음을 말하는 대롱으로 바꾸어 그것을 통해 몸소 자기에게 대답을 주는 것 같이 여겨졌다. 순간 그녀는 구조되었다. 그녀의 귓전에선 그때까지도 하나님의 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조그만 보트에 건져 올려졌는데 그녀 외에 제일 멋진 옷을 입었던 건장한 늙은 선원과 동그란 부엉이 눈을 한 늙은 부인, 찢어진 셔츠만 걸친 맥빠진 가련한 소년 등 세 사람만이 구조되었을 뿐이었다.
다음날 늦은 오후, 한 척의 노르웨이 범선이 뉴펀들랜드의 넓은 모래톱을 따라 항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으며 바다는 거울처럼 투명했다. 배는 아주 느리게 움직여 갔다. 돛은 모조리 내걸려 곧 사그라질 것만 같은 약한 바람의 숨결이라도 잡으려 하고 있었다. 바다는 푸른 거울처럼 맑고 잔잔해 보였다. 간혹 산들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잔물결을 일으키며 은빛으로 하얗게 반짝이는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오후의 정적이 한참 지나갔을 때 선원들은 얼핏 검은 물체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곧 그것이 사람의 시체임을 알았다. 시체는 배 옆에까지 흘러왔고 옷차림으로 보아 선원의 시체라는 것도 분간할 수 있었다. 시체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편안한 모습으로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그의 모습이 흉하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물속에서 오랫동안 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한 선원이 잔물결 치는 파도를 타고 있는 모습같이 보였다. 무심코 시선을 반대 방향으로 돌린 선원들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바다 위에 퉁퉁 불은 시체 하나가 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파도가 출렁하는 순간에 불쑥 솟구친 것이었다. 사람들은 뱃전으로 달려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름답게 차려입은 계집아이의 몸뚱아리가 거기 있었다.
"아, 아!"
선원들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둥둥 떠내려가는 계집아이의 시체가 그들을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눈동자엔 무척 얌전한 빛이 서려 있고 마치 무슨 바쁜 심부름이라도 나온 듯한 표정이었다. 한쪽에서 선원 한 사람이 소리를 쳤다. 또 하나의 시체가 발견된 것이었다. 다섯, 여섯, ....열....그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체가 자꾸만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배는 시체 사이로 바다를 가르며 느릿느릿 움직여 갔다. 시체가 배를 에워쌌다. 마치 무언가 구하는 것이 있기라도 한 듯, 그 가운데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떠내려오는 것도 있었는데 얼핏 유목같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한데 얽힌 시체의 집단이었다.
선원들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들은 자기들이 본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갑자기 또 하나의 물체가 바다 밑으로부터 불쑥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멀리서 봤을 때 섬 하나가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차츰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체가 한데 몰려 배를 사방에서 에워싸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시체는 배와 더불어 움직여 갔다. 마치 바다를 가로질러 함께 항해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선장은 키를 돌려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여 가려고 했다. 그러나 돛은 헐렁하게 처지고 시체는 여전히 배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선원들은 꼼짝도 못하고 서서 흑빛으로 변한 얼굴들을 서로 멍청이 바라보기만 했다. 배의 속도는 너무도 느렸다. 그래 가지고선 시체를 떼어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들은 밤새도록 이렇게 움직여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그때 스웨덴 선원 한 사람이 고물에 서서 기도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기도를 마치자 그는 찬송가를 불렀다. 그의 찬송가 소리와 함께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곧 어슴푸레한 어둠이 번지고 저녁 바람이 불어오면서 돛을 팽팽하게 부풀려 놓았다. 배도 이제 서서히 죽음의 나라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에바 군네르스투테르
숲속의 조그마한 통나무집에서 노파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평일이었는데도 마치 교회라도 가는 듯한 나들이옷 차림을 한 노파는 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입구 계단 밑에 늘 두는 곳에 넣어두었다. 노파는 몇 걸음 걸어가다가 오두막을 돌아보았다. 눈을 잔뜩 덮어쓰고 높다랗게 솟아 있는 전나무 그늘로 인해 오두막을 무척 작아 보이고 우중충해 보였다. 노파는 애정 어린 눈으로 그 초라한 집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행복한 많은 날들을 나는 저 조그만 오두막에서 보냈지! 아, 주님은 베푸시고 또 거두어 가시는구나.'
노파는 숲속의 오솔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이가 많은 탓으로 몹시 쇠약해 있었지만 몸을 꼿꼿이 지탱하는 성격이라 아직 허리는 굽지 않았다. 그녀는 몸가짐이 정숙하고 얼굴은 온화했으며 머리는 희고 부드러웠다. 그런 그녀의 온화한 모습과는 달리 늙은 복음 전도사처럼 거칠고 무거운 목소리로 지껄이는 것을 들을라치면 참으로 묘한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헤르굼 신도들의 모임에 나가기 위해 잉그마르 농장에 가는 길이었다. 노파는 헤르굼의 가르침에 따라 개종한 열렬한 신자의 한 사람으로 에바 군네르스투테르라 불리었다. 그녀는 타박타박 걸어가며 혼자서 웅얼거렸다.
'옛날엔 참 좋았어.... 교구의 절반이 헤르굼의 신도가 되었었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시 되돌아서 버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5년쯤 지났지, 아마? 이젠 겨우 스무 사람 남짓 남았나 몰라. 물론 어린애들은 끼워 넣지도 않았지만 말야.'
노파는 옛날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 무렵, 그러니까 에바 군네르스투테르 노파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채 오랜 세월을 홀로 숲속에서 지내고 있을 때 불쑥 많은 형제자매들이 그녀의 쓸쓸한 집으로 찾아들었다. 그들은 큰 눈이 내리고 나면 잊지 않고 꼭 오두막에 이르기까지의 눈을 치워 주기도 하고 바짝 마른 장작을 언제나 가득 채워 주기도 했다. 물론 노파가 부탁한 일은 아니었다. 또한 잉그마르의 딸 카린과 그 여동생들, 그리고 그 밖의 이렇다 할 사람들이 그녀의 조그마한 회색 통나무 집에 몰려와서 자주 모임을 갖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유일한 구원의 길을 저버리게 되다니!'
노파는 한숨을 쉬었다.
'벌이 내려질 거야. 불과 몇 사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그나마도 꿋꿋한 신앙을 지킨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이번 여름에 모두들 멸망하게 될 거야.'
노파는 문득 헤르굼의 편지를 떠올렸다. 그 편지를 헤르굼의 신도들은 마치 사도행전을 읽듯이 집회 때마다 소리 높여 낭독하곤 했다.
'우리에겐 마치 그가 꿀 같은 존재였지. 그 무렵 헤르굼은 우리들에게 개종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관대하게 친절을 베풀고 배반하는 사람들도 따뜻하게 용서하라고 가르쳤었는데, 요즘은 꼭 고뇌의 씨앗 같은 사람이 되어 버렸어. 보내오는 편지마다 시련과 벌에 관한 얘기뿐이구.'
노파는 숲을 거의 벗어났다. 멀리 아래로 마을이 내려다보았다. 상쾌한 2월의 하루였다. 눈은 새하얀 순결함을 드러내고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숲속의 나무들은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잠에서 나무들이 깨어날 때면 아름다운 풍경은 불과 유황의 비로 모두 사라지고 잿더미 속에 파묻혀 버릴 거라고 노파는 생각했다. 포근히 눈의 자락을 덮어쓴 일체의 것이 그녀에게는 불길에 휩싸일 듯한 암시적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헤르굼은 정확하겐 말하지 않았지만 밤낮 지독한 시련에 대해서만 적어 보내구 있어. 아아, 이 마을이 소돔과 고모라의 성처럼 아니면 바빌론처럼 재앙을 받는다 해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을 거야!'
에바 군네르스투테르는 마을을 지나면서 집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그것들이 장차 닥쳐올 재앙으로 뒤흔들리고 허물어져 먼지와 재로 되어 버리는 광경들이 끊이질 않았다. 간혹 길을 가다 사람들과 마주치기라도 할라치면 그녀는 그들이 머지 않아 지옥의 괴물들에게 몰리어 잡아먹힐 것이라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때 저만큼 앞에서 아름다운 처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건 교장댁 게르트루드 아냐!'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눈동자가 꼭 눈 위에 반사된 햇빛처럼 빛나네. 가을에는 잉그마르와 결혼한다구 그랬지, 한창 행복할 때야. 응? 옆구리에 끼고 있는 건 실뭉치인가? 혼숫감으로 테이블보나 침대 시트 같은 걸 짤 모양이구먼. 하지만 그것을 다 짜기 전에 파멸이 오고 말 거야.'
노파는 음험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을은 놀라우리만큼 아름답게 변모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허술한 회색 오두막과 마찬가지로 이처럼 멋을 부린 맞배지붕이나 큼직한 활 모양의 창문이 달린 희고 노란 훌륭한 가옥들도 머지않아 통나무 사이에는 이끼가 끼고 결국은 허물어지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마을의 한복판에 이른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별안간 분노의 감정이 복받쳐 지팡이로 길바닥을 탕탕 두들기며 소리쳤다.
"재앙이 내릴 것이야, 재앙이!"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이곳의 집들엔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이교의 가르침에 취한 인간들이 살고 있어. 왜 주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죄악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지 몰라. 그런 사람들 때문에 모두가 멸망해야 하다니! 하나님께선 올바르지 않은 자와 더불어 올바른 자에게도 무섭게 채찍을 휘두르실 게야."
에바 군네르스투테르가 강을 건넜을때 다른 헤르굼 신도들이 뒤를 따랐다. 그것은 펠트 중사, 브레트 군네르와 그의 아내 브리타, 또 그 뒤로는 헤이크 마츠에릭손과 그의 아들 가브리엘,시의원 클레멘손의 딸 군힐드가 뒤따르고 있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찬란한 민속적인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눈 위를 걸어가는 모습들이 참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에바 군네르스투테르의 눈에는 그저 이미 운명이 결정된 죄수나 도살당하기 위해 끌려가는 소와 같은 비참한 무리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절망이라는 무서운 짐에 짓눌린 듯 땅에 눈을 박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던 하늘의 왕국이나 새로운 예루살렘은 사라지고 이제는 신도들 수마저 줄어들어 앞날의 희망은 절단된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몸 안의 무엇인가가 뚝 떨어져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발을 질질 끌며 느릿느릿 나아갔다. 이따금 한숨 소리만이 새어 나올 뿐 서로에게 아무런 할 이야기도 없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들 낙담한 얼굴들이지?'
노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악의 날을 믿는 것 때문은 아닌 것 같구. 그렇다구 헤르굼의 편지 내용을 듣고 싶어하는 것도 아니구. 내가 그 사람의 말을 설명해 봤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말이야. 그런데 무얼 저렇게 근심하는 건지 원. 흥, 이 푸른 하늘 밑 낮은 곳에서 사는 인간들은 이제 무얼 두려워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야. 어두운 숲속에 사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도 생각해 낼 줄 몰라.'
그녀는 신도들이 수심에 찬 이유가 일요일도 아닌 평일에 할보르의 부름을 받은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할보르에게서 신도들 가운데 또 탈퇴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조차 할보르의 모임에 언제까지 머물러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자신들도 차라리 이 기회에 그만둬 버리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 그만둬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시들시들 죽어가는 것보다 급사하는 편이 나으니까. 모임은 해체 시켜 버리지 뭐. 이 조그만 평화의 복음을 지닌 사회가, 한마음 한뜻으로 형제애를 나눴던 즐거운 생활이 이렇게 파멸해야 하다니.'
그들은 저마다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렇게 농장을 향해 그들이 걸어가고 있을 때 반들거리는 겨울의 태양은 경쾌하게 푸른 하늘을 움직여 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잉그마르 농장에 다다랐다. 농장의 가옥 거실에는 천장 가까이에 한 폭의 낡은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그것은 약 백년 전에 시골의 어느 화가가 그린 것이었다. 높은 성벽을 둘러친 도시를 배경으로 성벽 위에는 지붕과 박공이 보였다. 어떤 집들은 잔디 흙으로 지붕을 얹은 붉은 농가였고, 어떤 집은 슬레이트로 지붕을 얹은 흰 저택이었다. 또 어떤 집은 파른의 커스티네 교회를 본떠 동판 지붕에 묵직한 탑을 올린 것이 보이기도 했다. 성벽 밖에는 한 신사가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반바지에다 버클이 달린 구두를 신고 손에는 벨가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한 대의 마차가 성문에서 달려 나오고 있는 것이 보이고, 그 안에는 머리 분을 바른 가발에다 외투 모자를 쓴 숙녀가 앉아 있었다. 성벽 저쪽에는 암록색 잎이 무성한 나무숲이 있었다. 또한 땅에는 키 큰 풀이 나부끼는 사이로 반짝이는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림 아래쪽에는 큼직한 장식 문자로 '하나님의 성도 예루살렘'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 해묵은 그림은 천장 가까이에 높다랗게 걸려 있어서 좀처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잉그마르 농장을 찾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곳에 그런 그림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푸른 월귤나무의 싸라 같은 가지로 가장자리가 둥그렇게 싸여 있어서 쉽사리 방문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에바군네르스투테르는 그것을 보자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구, 잉그마르 농장 사람들도 드디어 우리들이 멸망하게 된 것을 알았구나. 그러니까 천당의 도시 쪽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리게 하려는 거야.'
카린과 할보르가 그녀에게 인사하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다른 헤르굼 신도들보다 더 어둡고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도 세상의 종말을 예감하고 있는 거야.'
에바 군네르스투테르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모인 사람들 가운데 제일 연장자였으므로 긴 테이블의 상좌에 앉혀졌다. 그녀 앞에는 겉봉에 미국 소인이 찍혀진 한 통의 편지가 놓여져 있었다.
할보르가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형제 헤르굼한테서 또 편지가 왔습니다.....그래서 여러분을 오시라고 했지요."
"퍽 중요한 편지인 모양이군요, 할보르"
브레트 군네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헤르굼이 어떤 의미로 우리 신앙에 대시련이 닥쳤다고 말했었는지 여러분도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나는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을 위한 시련을 두려워할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군네르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들은 신도들이 아직 전부 모이지 않았으므로 마지막 한 사람이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에바 군네르스투테르 노파는 조용히 헤르굼의 편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묵시록에 있는 일곱 개의 봉인이 찍힌 편지를 생각하며 누군가의 손이 저 편지에 닿자마자 파멸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올지 모른다고 상상했다. 그녀는 눈을 들어 예루살렘의 그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구 말구. 아, 나도 저 도시에 가고 싶어. 황금으로 대문을 달고 성벽은 수정으로 쌓아 올린 저 도시에....'
그리고는 혼자서 무엇인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성곽의 기초석은 갖가지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며, 다섯째는 홍마노에다,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 아홉째는 당황옥, 열째는 비취옥, 열한째는 청옥이며, 열두째는 자옥이라'
노파는 묵시록에 넋을 잃고 있다가 편지를 놓아둔 테이블로 할보르가 다가서자 졸다가 들킨 사람처럼 움찔하며 놀랐다.
"그럼 시작하기 전에 찬송가를 하나 부르겠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내 복된 집'을 합창했다.
두려워하던 순간이 약간 지연되자 에바 군네르스투테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 딱도 하지. 나 같은 늙은이가 이토록 죽음을 두려워하다니.'
그녀는 자신의 심약함을 부끄러워하며 생각했다.
찬송가가 끝나자 할보르는 편지를 집어 펼쳐 들었다. 에바 군네르스투테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편지 안에 들어 있는 전갈을 올바른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해달라고 지리한 기도를 시작했다. 할보르는 편지를 든 채 기도가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그는 설교하는 어조로 편지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나의 형제자매여, 여러분의 안녕을 기도합니다. 지금껏 나는 나와 나의 교리를 믿으시는 여러분이 신앙적으로 고독하다는 생각을 해왔었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이곳 시카고에서 우리들의 동지를 발견했습니다. 그분은 교리대로 생각하고 또 행동하는 사람이지요. 먼저 여러분께 알리고 싶은 것은 오래전에 이 시카고에서 살았던 에드워드 골든이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골든이나 그 부인도 모두 신앙심이 두터운 분들로 세상에 너무도 고뇌가 많은 것을 보고 깊이 슬퍼하며 불행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도록 가호를 내려 주십사고 하나님께 빌었답니다. 마침 에드워드 골든 부인은 멀리 바다를 건너는 여행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데 그 항해 도중 배가 난파되는 불행을 당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는 위험에 처한 부인은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부인에게 온 인류가 한마음으로 협동하며 살도록 가르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위험을 겪고 되살아난 부인은 남편에게로 돌아오자 그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린 지상 명령이에요.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지극히 지엄해서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장소는 온 세계에 단 한 군데뿐이에요. 그러니까 동료들을 모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요. 시온의 산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해야죠.'
이윽고 골든 부처는 다른 30명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출발했습니다. 지금 그분들은 거기서 한 지붕 아래 협동. 단결하며 살고 있지요. 또한 금품의 보수는 일체 거부한 채 가난한 사람들의 자제를 맡아 기르거나 앓는 자들을 간호하며,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기꺼이 돕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교회나 길 모퉁에서 설교를 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그분들의 생각이지요. 그런 중에 유태인과 회교도들을 설교하고 가르쳐서 개종시키려고 팔레스티나에 와있던 기독교도들은 그분들을 소리높이 비방했습니다. '바보에다 광신자임이 틀림없다' '대체 어떤 인간들이지? 설교를 안 하다니 필경 이단자들 속에서 그릇된 생활을 하고 죄를 물들이려고 이곳에 온 걸 거야' 이렇게 떠들어댔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정착한 사람들 가운데 성장한 두 자식을 둔 돈 많은 과부가 있었습니다. 미국에 동생이 남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동생에게 이구동성으로 말하더랍니다. '어쩌자고 그렇게 무절제한 생활을 하고 있는 무리들 속에 누님을 그냥 살도록 가만있는 거요? 그자들은 게으름뱅이에다 누님의 돈으로 살고 있는데....' 동생은 누님에 대해 법률상의 수속을 밟아 아이들을 미국에 데려다 기르기로 했지요. 이 일로 인해 그 과부는 아이들과 함께 에드워드 골든 부처를 따라 시카고에 돌아왔습니다. 그때는 이미 예루살렘에 살기 시작한 지 14년이 지난 뒤였답니다. 그분들이 그 먼 나라에서 돌아오자 각 신문마다 가지각색의 보도가 살렸습니다. 그분들이 미쳤다는 사람도 있고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할보르는 읽던 것을 잠시 멈추고 지금까지 읽은 내용의 요점을 다시 되풀이해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읽어 나갔다.
"그런데 시카고에는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계시는 집이 한 채 있습니다. 이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봉사하고 싶어 하는 자들로서 일체의 것을 공동분배하며 서로 돌보며 살고 있지요. 우리들, 그러니까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이 '미치광이'들에 관한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는 '이분들은 우리들의 신앙과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다. 정의를위해 일하고 단결하는 것이 똑같다. 이분들을 한번 만나보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분들에게 우리를 만나러 와주십사고 편지를 쓰게 되었지요. 그분들은 그 초대에 응했습니다. 한자리에 모이자 우리는 서로의 교리를 비교해보았습니다. 신앙의 원리가 똑같다는 결론에 이른 우리는 서로를 발견할 수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무척 기뻐들 했지요.
그분들은 그 흰 산 위에 찬란히 빛나는 성도의 영광에 대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우리 형제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면 안 될까요?' 그분들이 대답했습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성도는 지금 투쟁과 압력, 결핍과 질병, 증오와 빈궁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그러자 또 다른 형제가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러분을 보낸 것은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그먼 나라에 가서 그런 것들과 싸우고 있는 여러분을 도와드리라는 뜻이 아닐까요?' 순간 우리는 모두 그렇다는 성령의 소리를 듣는 듯했습니다.
우리는 비록 가난하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분들 속에 우리도 넣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결국 그분들도 그러마고 승낙했지요. 그분들은 우리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우리도 그분들의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동안 성령이 우리들에게 강림하여 우리는 형용할 수 없는 기쁨에 가득 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일찌기 독생자를 보내신 땅에 우리를 보내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또 하나님이 그 거룩한 시온 산에서 우리의 교리를 펼 것을 바라신다는 생각에 우리의 교리를 올바르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스웨덴에 있는 다른 많은 형제자매도 함께 예루살렘에 데리고 가서 그 거룩한 임무에 참여시키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들도 예루살렘에 함께 가서 사이좋게 살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지요. 그런데 예기치 않은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훌륭한 농장과 직업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걱정에 대해 예루살렘에서 온 분들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논밭이나 목장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밟으신 길을 밟도록 해드릴 수는 있지요.' 우리는 그래도 미심쩍어서' 그분들은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는 나라에는 결코 가려 들지 않을 겁니다'라고 했더니, '하지만 그분들도 펠리스티나의 들에서 들려오는 구세주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알아들으실 겁니다.'라고 합디다. '그분들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재산을 나누고 거지처럼 가난해지는 건 결코 원치 않을 겁니다. 물론 자기들의 권력을 포기하려 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겠구요. 그분들은 지금껏 그 마을에선 이렇다 할 자리에 있어 왔으니까요'라고도 했지요. 그랬더니 '우리는 그분들께 드릴 재산도 권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세주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해드릴 수는 있지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비로소 여러분이 오셔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 편지를 다 읽고서 어떠한 논평을 하려고 들진 마십시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시고 성령이 여러분에게 명령하는 대로 따르십시오."
할보르는 편지 읽기를 마치고 그것을 접어 넣으며 말했다.
"자, 여러분 가만히 앉아서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는 헤르굼이 써 보낸 대로 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각기 눈을 감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에바 군네르스투테르 노파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묵묵히 자신에게 들려올 하나님의 소리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했다.
'말할 것도 없이, 헤르굼이 우리더러 예루살렘에 가라고 하는 것은 커다란 파멸을 면하도록 해주려는 거야. 하나님은 펄펄 끓는 지옥 불에서 우리들을 구해주시고, 비 오듯 쏟아지는 업화에서 우리를 구해주시겠지. 우리들은 내려질 벌책을 면하도록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거야'
노파는 이쯤 되면 누구에게든 집을 버리고 고국을 떠난다는 것이 희생적인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난 고향의 숲과 강과 기름진 밭을 버리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것인지 아닌지 그녀로선 의심해 볼 여지가 없었다. 신도들 가운데는 생활방식을 바꾸는 일과 조국, 부모, 친구, 친척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두려움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것들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하나님이 옛날 노아나 롯을 구하신 것처럼 자기들을 도우려 한다고만 생각되어질 뿐이었다. 그녀는 마치 헤르굼이 예언자 엘리아처럼 자기들이 몸뚱이째 하늘로 끌려 올라갈 것이라고 써 보내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계속 깊은 묵상에 잠겨 있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도 심한 정신적 괴로움으로 이마에 진땀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 이것이 언젠가 헤르굼이 말한 시련인가보다!'고 한숨을 쉬기도 했다.
지평에 걸린 태양이 그 날카로운 광선을 방안에 비추고 있었다. 저물어 가는 태양 빛에 많은 사람들의 창백하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륭 비오른오라프손의 아내 마르타 잉그마르손이 의자에서 내려와 방바닥에 풀썩 꿇어 앉았다. 그러자 한 사람 한 사람 연달아 꿇어앉았다. 별안간 몇 사람이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그들의 얼굴이 미소로 환하게 밝아졌다.
잉그마르의 딸 카린이 경탄하듯 소리쳤다.
"저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요!"
"저도 가겠어요, 하나님이 저를 부르고 계십니다!"
군힐드가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온통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외쳤다. 그때 동시에 크리스텔과 그의 아내도 외쳤다.
"저도 들려오, 가야 한다고. 저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잇달아 그들에게 들려오고, 동시에 그동안의 괴로움과 마음속의 미련들이 깡그리 사라졌다. 커다란 기쁨이 잉그마르 농장에 소용돌이쳤다. 그들은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들의 조그마한 새로운 보금자리가 어떻게 가지를 뻗고 어떻게 새로운 꽃을 피우게 될 것인가 하는 것과, 성령의 부름을 받은 놀라움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할보르만이 혼자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을 부르신 것처럼 왜 자기는 불러 주지 않는 것인지 괴로움에 잠겨 기도를 계속했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밭과 농장을 더 중시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야. 아, 내가 이처럼 쓸모없는 인간이라니!'
그런 그에게 카린이 다가왔다. 카린은 남편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가만히 계세요. 할보르. 침착하게 조용히 귀 기울여 보세요."
할보르는 힘껏 손을 쥐어 짰다. 손가락의 관절이 뿌드득하고 소리를 냈다.
"하나님께선 아마 나를 보내실만한 가치를 못 느끼시나 봐"
"그럴 리가 없어요. 할보르. 가만히 앉아 계세요. 당신은 꼭 가게 될 거예요."
카린이 그 옆에 꿇어앉아 남편의 목에 살며시 팔을 감았다.
"조용히 들어봐요. 할보르. 두려워하지 말고."
한참 후 할보르의 얼굴이 가볍게 개었다.
"아, 들려.... 뭔가, 멀리서, 아주 멀리서 들려오고 있어."
그가 쉰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사의 하프 소리예요. 성령이 강림하시는 것을 알려오는 거지요. 자, 좀 더 조용히 귀 기울여 봐요. 할보르"
카린은 몸을 남편에게로 바짝 갖다 댔다. 그것은 남들이 보는 앞에선 결코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아아!"
할보르가 손뼉을 쳤다.
"이제 들려, 정확하게, 아주 큰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천둥처럼 울렸어. '너는 우리의 성도 예루살렘으로 가거라!' 어때요, 여러분이 들은 것도 그랬습니까?"
"그렇습니다. 네, 그래요."
사람들이 소리쳤다.
"우리도 모두 그런 말씀을 들었어요."
이번엔 에바 군네르스투테르 노파가 한탄하기 시작했다.
"나한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나는 여러분과 못 가게 되나 봐, 아아, 나는 롯의 마누라 같은 사람이어서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지 못하고 뒤에 처지게 되었어. 나는 여기 남아서 소금기둥이 되어 버릴 거야."
그녀는 절망적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헤르굼 신도들이 그녀 가까이로 모여 앉아 함께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그녀에겐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의 절망은 공포로 변했다.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어!"
그녀는 신음했다.
"하지만 함께 데려가 주겠지, 응? 설마 나만 혼자 불의 호수 속에 파멸하도록 그냥 남겨두진 않겠지, 응?"
"기다려 보세요, 에바 할머니!"
신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오늘이나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 들려올 거예요."
"내 말에는 대답도 않는구먼!"
노파가 울부짖었다.
"지금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대답해 주지 않았어! 당신들은 내게 부르심이 오지 않으면 버려두고 갈 참이지?"
"부르심은 옵니다. 기다리세요. 조용히 귀 기울여 봐요!"
"내 말에나 대답해 줘,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구먼!"
노파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에바 할머니,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함께 갈 수가 없어요!"
신도들은 분명하게 잘라 말했다.
"하지만, 틀림없이 부르심이 올 겁니다."
노파는 꿇어앉았던 자세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흐늘흐늘해진 늙은 몸을 쭉 펴고는 지팡이로 방바닥을 두들기며 벌컥 소리를 질렀다.
"그래, 너희들은 날 버려두고 떠날 참이야, 저희들끼리만. 오냐 그래, 나 혼자만 멸망시킬 참이구나!"
그녀가 사납게 분노를 터뜨렸다.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에서 성급하고 거칠고 불같은 젊은 날의 에바 군네르스투테르를 보는 듯 했다.
"좋아, 나는 이제 아무것도 너희들과 같이하지 않아도 돼! 안 도와줘도 좋다구. 흥! 처자를 버리구 부모도 버리구 저희들만 살겠다니! 훌륭한 농장을 버리다니, 이 바보 멍청이들아! 가짜 예언자의 엉덩이나 따라다니는 미련한 것들, 이것이 너희들의 꼬락서니구나! 너희들 머리 위엔 진짜 지옥의 불이 쏟아질 게야. 멸망하는 건 이쪽에 남는 우리들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야!"
잉그마르와 게르트루드
사람들이 잉그마르의 집에 모여 헤르굼의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아름다운 2월의 태양 아래 두 사람의 젊은 남녀가 한길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청년은 방금 숲에서 커다란 통나무를 운반해왔는데 통나무가 어찌나 무거운지 말도 빠듯이 끌 수 있었다. 그렇게 무겁고 힘이든 중에도 청년은 일부러 길을 돌아 마을을 통해 흰 학교의문 앞으로 지나가기로 했다. 말이 학교 앞에서 멈추자 젊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게르트루드였다. 그녀는 무지막지하게 큰 통나무를 바라보곤 눈을 크게 떴다. 통나무는 참으로 굵고 곧은 데다가 황갈색 나무껍질이 무척 아름다웠으며 단단한 나무 질에 흠집 하나 없었다. 그녀는 이것을 칭찬하기 위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찬찬히 훑어보기만 했다. 청년은 그녀에게 그 나무가 오라프 산 북쪽 멀리 황야에서 자랐다는 것, 그리고 언제 베었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눕혀 놓고 말려야 했는가를 감동적으로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그는 또 둘레의 직경이 얼마인가를 정확하게 덧붙여 말하는 것 잊지 않았다.
"하지만 잉그마르, 이게 겨우 첫 번째예요."
잉그마르가 5년이나 걸려서 이제사 자기들의 집을 지을 첫 나무를 운반해 왔다고 생각하니 게르트루드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조금만 기다려. 길이 뚫려 있는 동안에만 재목을 운반해놓는다면 곧 집을 지을 수 있을 테니까."
잉그마르는 이제 앞으로의 모든 고난쯤이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지자 추워졌다. 말은 덜덜 떨면서 말굽을 차기도 하고 머리를 거칠게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갈기와 이마 털엔 하얗게 서리가 앉아 있었다. 그러나 잉그마르와 게르트루드는 추위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들은 지하실에서 다락방에 이르기까지 자기들의 집을 짓기 위해 열을 올렸다. 그들은 상상의 집이 완성되자 이번에는 가구를 들여놓기도 했다.
"이 긴 거실 벽 쪽에다 소파를 놔야겠어."
잉그마르가 말했다.
"하지만 소파를 살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해요."
게르트루드의 반문에 잉그마르는 아차 싶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가 가구점에서 소파를 사게 되어 있다는 것을 나중까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무심코 지껄이고 만 것이다. 잉그마르에게서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게르트루드는 자기도 5년 동안 감추어 온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장식으로 넣은 특이한 리본을 만들어 팔았으며, 그 돈으로 단지나 남비, 크고 작은 쟁반, 시트에다 베갯잇, 식탁보 등 갖가지 살림 도구를 장만해 두었던 것이다. 잉그마르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런 그녀에게 어떠한 칭찬을 해도 모자랄 것 같았다. 아낌없이 감격의 말을 쏟아놓던 그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아름답고 예쁜 처녀가 머지않아 자신의 아내가 된다는 사실이 도무지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세요?"
게르트루드가 민망한 듯 볼에 홍조를 띠며 말했다.
"난, 게르트루드가 나만의 여자가 된다는 게 너무 신기해. 내겐 과분한 것 같아."
게르트루드는 빨개진 얼굴을 숙이고 말없이 커다란 통나무만 쓰다듬듯이 계속 만졌다. 그녀에겐 사랑과 보호라는 것이 자기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것 같았다. 배후자로서 지금 앞에 있는 잉그마르가 선량하고 현명하며 또한 고상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점을 그녀는 마음속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그때 한 노파가 그들 앞을 지나갔다. 그녀는 무슨 일인가 몹시 화가 난 사람처럼 혼잣말을 툴툴거리며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 그래, 네놈들의 행복은 먼동이 틀 때부터 장미꽃 새벽까지 밖에는 계속되지 않을거야. 시련이 닥치면 이끼 낀 새끼줄처럼 흐트러져서 영원히 암흑 속에서 생을 보내야 할걸!"
"설마 우리들에게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게르트루드가 안색이 변하여 소근거렸다.
"당치도 않아, 우리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해!"
잉그마르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잉그마르 농장
토요일, 목사는 숲속의 북쪽 끝 고지대에 살고 있는 어떤 병자에게 불려갔다가 밤이 늦어서야 심한 어려움을 무릅쓰며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말은 바람에 날려 수북이 쌓인 눈구덩이에 자꾸 처박혔으며 썰매는 몇 번이나 뒤집힐 뻔했다. 목사와 마부는 줄곧 말을 멈추게 하고 길 위의 눈을 치워야 했다. 다행히도 심하게 어둡진 않았다. 큼직한 보름달이 눈구름 뒤에서 굴러 나와 은빛으로 땅 위를 비추고 있었다. 목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으는 눈송이가 빙그르 돌며 그에게로 떨어졌다.
어떤 곳은 그런대로 수월하게 지날 수 있었다. 눈이 쌓이지 않은 외길도 있었고 또 눈은 높이 쌓였더라도 경사가 느리고 평평한 곳도 있었다. 정말 힘든 것은 바람에 날려서 쌓인 눈이 나무 높아서 앞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곳을 지날 때였다. 그런 곳에서는 개골창에 빠지거나 울타리의 나무에 말이 부딪치는 위험을 감수하고 부득이 길을 벗어나 밭이나 울타리 같은 것을 마구 가로질러 가야 했다. 큰 눈이 올 때마다 목사와 마부는 잉그마르 농장 옆의 높다란 판자 울타리가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그것만 잘 넘으면 그 뒤는 별문제가 없는데'
목사는 잉그마르에게 유독 그 자리에 눈이 많이 쌓이도록 하는 높다란 판자 울타리를 치워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던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설령 잉그마르 농장의 모든 것이 개조된다 하더라도 그 묵은 판자 울타리만은 절대로 움직여질 리가 없음을 목사는 잘 알고 있었다.
가까스로 농장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예상대로 그곳은 눈이 날려서 벽처럼 높고 바위처럼 단단하게 쌓여 있었다. 여기서는 한쪽으로 비켜 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그 위를 곧장 뛰어넘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도 가능한 일은 아닌 것이다. 마부가 자기 혼자 농장에 내려가서 도움을 청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목사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카린과 할보르를 만난다는 것이 유쾌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벌써 5년 이상이나 그들과 교류를 끊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들은 눈 위로 그냥 말을 몰고 갔다. 약간 얼어붙은 눈은 말이 꼭대기에 올라갈 때까지 그런대로 지탱하다가 마침내 허물어져 내렸다. 말은 갑자기 무덤에라도 빠진 듯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기운이 쭉 빠져서 움직일 생각도 못한 채 멍청이 아래만 바라보았다. 한쪽 썰매 끈이 끊어진 게 눈에 띄었다. 이젠 구덩이 속에서 말을 끌어올린다 해도 더는 나아갈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목사는 잉그마르 농장으로 향했다. 거실의 난로에는 장작개비가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고, 카린이 그 한쪽 옆에 앉아 깨끗이 빗은 양털로 실을 잣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한 줄로 길게 앉아 아마를 잣고 있는 하녀들의 모습도 보였다. 남자들은 난로의 반대쪽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일에서 돌아온 참이라 쉬고 있거나 칼로 나무 막대기를 다듬는다거나 쇠스랑의 날을 세우는 간단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목사가 사정 얘기를 했다. 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남자들은 눈에서 말을 끌어내기 위해 밖으로 달려나갔다. 할보르는 목사를 식탁으로 안내하여 자리를 권했으며, 카린은 하녀들을 부엌으로 들여보내 커피를 새로 끓이게 하고 얼른 저녁을 준비하도록 일렀다. 또한 그녀는 목사의 커다란 털가죽 윗도리를 벗겨 불에 말리도록 지시하고 등잔에 불을 켜게 하며 남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물레를 식탁 가까이로 가져다 놓는 등 수선을 떨었다.
목사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위대한 잉그마르가 살아 있었다 해도 이 이상의 환영은 받지 못했을 거야.'
할보르는 날씨며 길은 어떤지를 묻고, 밭은 좋은 값으로 팔았는지, 오래전부터 미해결로 되어있던 집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등을 연달아 묻기도 했다. 카린은 목사 부인의 안부를 물으며 그녀의 건강이 좋아졌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그때 목사의 마부가 들어왔다. 그는 말을 끌어냈으며, 안장도 다시 이었고, 언제라도 출발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보고했다. 카린과 할보르는 저녁을 들고 가라며 목사를 붙잡았다.
커피가 나왔다. 쟁반에는 큼직한 은주전자와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특별한 의식 때가 아니고선 절대 사용하지 않는,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은으로 만든 오래된 설탕 단지, 그리고 갓 구운 러스크 과자와 비슷한 비스킷을 보기 좋게 담은 은그릇이 놓여져 있었다. 목사의 작은 눈이 놀라움으로 동그랗게 열렸다. 그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할보르가 잉그마르 농장의 숲에서 잡았다며 커다란 노루 가죽을 꺼내 보였다. 그는 가 가죽을 마룻바닥에 폈다.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가죽은 생전 처음 보겠군."
목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카린이 할보르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할보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사를 바라보았다.
"이 가죽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사양하지 말고 받아 주십시오."
카린은 식탁과 식기장 사이를 분주히 오고가면서 제일 좋은 옛 은식기를 꺼내왔다. 그녀는 또 만찬 때나 쓰려고 장만해두었던 가장자리를 예쁘게 꾸민 식탁보를 테이블 위에 펴놓았다. 그녀는 계속하여 우유나 생맥주 같은 것을 큼직한 은단지에 부어 차례대로 내왔다.
성대한 만찬이 끝났다. 목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할보르와 머슴 두 사람이 뒤따라 나와 눈을 치워주기도 하고 뒤집힐 듯한 썰매를 바로잡아 주기도 하면서 목사가 그의 집 현관에 무사히 도착하기까지 돌아가지 않고 전송해 주었다. 목사는 할보르에게 진정으로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 옛정을 다시 새롭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를 그는 새삼 깨달았다. 할보르가 선뜻 자리를 뜨지 않고 주머니를 뒤졌다. 뭔가 한참 부스럭거리다가 그는 조그맣게 접은 쪽지 하나를 꺼냈다.
'지금 목사께서 이걸 받아 줄까?'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아침 예배가 끝난 뒤에 읽어 주었으면 하고 전하려던 어떤 통지였다. 만일 목사가 쉽사리 받아 준다면 교회로 일부러 사람을 보낼 필요는 없어지는 것이다.
목사는 할보르가 건네준 쪽지를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등잔에 불을 켜고 앉아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 저희가 예루살렘으로 이주할 생각이어서 잉그마르 농장을 매도하려고...."
'음, 드디어 올 것이 왔군.'
그는 마치 태풍에 대한 예견이라도 하듯이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이야말로 오래전부터 기다려 왔던 거지.'
농 부
화창한 봄날이었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이 아들 가브리엘과 함께 마을의 남쪽 경계 가까이에 있는 철공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집은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철공장에 이르기까진 마을의 거의 전부를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새로 씨를 뿌린 밭에는 곡물이 막 싹을 트고 있었다. 그들은 파릇파릇한 귀리밭과 훌륭한 목장들을 보았다. 목장은 클로버로 뒤덮여 달콤한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은 밭을 갈고 파종을 한 채소밭을 지나서 새로 창문을 달거나 유리를 끼운, 혹은 베란다를 달거나 새로 칠을 하기도 한 집들을 지났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신발에는 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손에는 때가 낀 것이 모두들 들일과 채소밭 일로 찌들은 것 같았다. 밭에는 배추를 손질하는 사람, 고구마를 심는 사람, 양배추나 홍당무의 씨를 뿌리는 사람 등이 잔뜩 나와 있었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은 자주 걸음을 멈춰 서서 사람들에게 심고 있는 고구마의 종류를 묻거나 귀리는 언제 심었는가를 물어보기도 했다. 송아지나 망아지가 눈에 띄면 난 지 얼마나 되었는가를 셈하기도 했으며, 또한 이 망아지나 송아지가 젖을 뗄 때면 과연 값을 얼마나 부를 수 있을까 주먹 셈을 해보기도 했다. 거기다가 어느 농장이면 얼마만한 황소를 기를 수 있겠는가도 계산해 보았다. 가브리엘은 그런 아버지의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 보려고 입을열었다.
"아버지, 제 생각에는요, 아버지와 저는 머지않아 샤론은 평야나 유태의 사막을 걷고 있을 것 같아요."
아들의 말에 헤이크 마츠 에릭손은 얼굴을 빛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우리들이 주 예수께서 걸으신 길을 밟는다는 건 영광스런 일이지. 그 이상 감사할 것도 없고."
그때 한 내외가 달구지 가득 석회를 싣고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의 생각은 다시 금방 그쪽으로 쏠렸다.
"가브리엘, 저들이 누군지 알겠느냐? 석회를 비료로 쓴다면 수확이 많다는구나. 그렇게 되면 가을엔 네 눈이 무척 즐거워질 거야."
"가을이라구요, 아버지?"
가브리엘이 비난하듯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이번 가을까지는 야곱의 천막에 살면서 예수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해야지"
"아멘! 제발"
가브리엘이 큰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한동안 봄이 무르익은 경치만을 바라보며 걸었다. 도랑에는 물이 졸졸 흐르고 봄비로 길들이 몹시 허물어져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해야 할 일들 투성이였고, 사람들은 길을 지나다가 남의 밭일이라도 서로 돌봐 주려 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헤이크 마츠 에릭손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다, 나는 언제든지 일이 다 끝난 뒤의 가을에 집과 땅을 팔고 싶다. 정신없이 달려 들어 일을 해야 할 이 초봄에 그걸 모두 처분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
가브리엘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아버지가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하도록 가만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마을 북쪽에 조그마한 황무지를 산 건 꼭 30년 전이다. 내가 아직 젊었을 때였지. 절반은 늪이고 절반은 돌밭으로 쟁기질 한번 안 해본 그런 땅이었지. 아주 엉망이었어. 나는 그곳에서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노예처럼 일을 했다. 늪은 돌밭보다도 일하기가 훨씬 어려웠는데, 아뭏든 가까스로 물을 빼내고 메워버릴 수 있었지."
"그래요, 아버지는 정말 힘든 일을 해내셨어요. 그러길래 하나님이 특별히 아버지를 생각하셔서 성지로 불러들이시는 거예요."
"집도 처음엔 껍질도 벗기지 않은 통나무에 지붕은 잔디를 떠서 입힌 숲속의 움막보다 심하다 싶은 오두막에서 살았다. 비가 오면 물이 샜고, 사는 꼴이 소나 말과 다를 게 없었지. 첫해 겨울은 그렇게 컴컴한 토굴 같은 곳에서 지내야 했어."
"아버지, 그토록 모진 고생을 하신 곳에서 뭣 땜에 들러붙어 사셔야겠어요?"
"하지만 가축들을 넣을 커다란 외양간을 지을 수 있게 되었을 때나 해마다 소가 늘어서 외양간을 넓혀야 할 때의 기쁨을 생각해 봐라. 너는 상상도 안 될 게다. 만일 지금 그것들을 팔아야 하지 않는다면 외양간과 마굿간의 지붕을 잇기 꼭 알맞은 때야. 씨 뿌린 직후가 딱 좋지."
"아버지,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돌 많은 땅에, 또 어떤 씨는 길바닥에 떨어진답니다. 지금 우리는 기름진 땅에 떨어지는 씨를 뿌리게 된 거예요."
"....그리구 지금 사는 오두막은 먼저의 오두막이 있던 자리에 지은 것인데, 올해는 그걸 헐고 훌륭한 새집을 지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겨우내 날라다 놓은 나무도 이젠 쓸모없게 됐구나. 그걸 나를 때 말도 무척 고생을 시켰지만 우리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잖니."
가브리엘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지금 자기의 재산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바칠 생각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고, 웬지 아버지가 자기로부터 점차 멀어져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글쎄요, 하지만 아버지. 한마음 한뜻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신성하게 살 수 있는 복된 영광에 비한다면 새집이나 마굿간 따위가 무슨 소용입니까?"
"할렐루야!"
헤이크 마츠 에릭손이 소리쳤다.
"우리가 고마운 운명을 얻게 된 걸 모르는 게 아니다. 지금 재산을 팔러 가는 길이 아니냐? 난 그저 이 길을 되돌아올 때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이 내가 내 것이라구 부를 수 있는 것도 하나도 없으리란 생각 때문에 마음이 허전해서 그러는 거다."
가브리엘은 아무 말도 대꾸하지 않았으나 아직도 아버지가 결심을 버리지 않았다는데 기쁨을 느꼈다.
그들은 곧 언덕 위에 아름답게 자리 잡은 어느 농장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하얗게 칠한 발코니와 베란다가 딸린 집이 한 채 서 있었는데 집 둘레에는 후리후리한 포플러 나무가 수액으로 잔뜩 부푼 은빛 줄기를 늘어뜨리고 빽빽이 둘러서 있었다.
"저것 좀 보렴, 저런 것이 내가 세우고 싶었던 그런 집이야. 베란다에다 발코니도 달구, 나무 세공의 장식도 많구. 아, 앞에는 잘 손질된 잔디에다가.... 근사하잖아, 가브리엘?"
가브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헤이크 마츠에릭손은 아제 아들이 농장에 관한 이야기에 짜증이 났다고 생각하여, 아직도 다른 하고픈 말들이 많았으나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기의 말이 새 주인을 만나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해 보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다른 일들이 어떻게 되어 갈지를 생각했다.
'아아, 재산을 회사에 팔다니,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딨을까. 나무는 모두 베어지고 농장은 황폐할 대로 버려질 텐데. 자작나무 숲도 옛날처럼 벌판이 될 테구. 토지도 손대지 않아 높아질 거야. 회사 측에선 그럭하고도 남아.'
철공장에 도착하자 헤이크 마츠 에릭손의 흥미는 다시 살아났다. 거기서 최신식 쟁기, 쇠스랑 등을 보고 있자니 오래전부터 새로운 농기구를 사고 싶어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잘 생긴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마치 전쟁터에서 용사가 적을 무찌르듯 무성하게 나부끼는 곡물을 베어 나가는, 빨갛게 칠한 농기구에 올라앉은 모습을 그려 보았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은 곧장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의 귀에는 아직도 농기구의 덜덜거리는 소리, 곡물이 베어져 쓰러지는 소리, 그리고 놀란 새떼의 날갯짓 소리나 날카로운 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책상 위에는 증서가 놓여 있었다. 흥정은 끝나고 값도 정해져 있었으며, 이제 거래를 끝내는 데 필요한 절차로 그의 서명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증서가 낭독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러이러한 숲이 몇 정보, 이러이러한 토지와 목장이 몇 평, 가축이 몇 마리, 이러이러한 가구 집기가 몇 점, 이 일체의 것을 매도함. 증서가 낭독되어 가면서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 갔다. 그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아냐. 이런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돼.'
낭독이 끝난 뒤, 그가 생각이 달라졌다고 말하려는데 가브리엘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아버지, 저와 농장 둘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시렵니까? 결과야 어찌됐든 저는 떠날 결심입니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은 오로지 자기 농장에만 정신이 팔려 아들이 자기한테서 떨어져 나갈 것에 대한 생각은 미처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 가브리엘은 어쨌든 떠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아들이 그런 태도만 취해오지 않는다면 부득이 가산을 팔아넘기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엔 아들이 가는 곳으로 자신도 마땅히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책상으로 다가섰다. 그의 서명을 기다리는 한 장의 증서가 그 위에 활짝 펼쳐져 있었다. 지배인이 펜을 집어 헤이크 마츠 에릭손에게 건네면서 손가락으로 서명란을 가리켰다.
"여기에 이름을 적으십시오. 이름은 약자가 아닌 '헤이크 마츠 에릭손'이라고 적으셔야 합니다."
그가 펜을 받아 쥐었다. 문득 30년 전 얼마간의 황무지를 소유하기 위해 서명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그 황무지에서 평생을 땀의 보람으로 살아갈 것을 생각했었다.
지배인이 다시 손가락을 들어 서명란을 짚어 보였다. 그는 농부가 어물거리는 것이 이름 쓸 장소를 확실히 모르는 걸로 받아들인 것이다.
"여기에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이라고 쓰십시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은 펜을 종이 위에 갖다 대면서 생각했다.
'이것은 내 신앙과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야. 또한 헤르굼의 신도인 내 친한 친구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내가 그 사람들과 한마음 한뜻으로 살기 위함이지.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는데 나 혼자만 남아서는 안 될 일이지.'
그는 이름의 머리글자를 써넣었다.
'그리고 또 내가 이걸 쓰는 것은 내 아들 가브리엘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그러면 내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아들이었다는 것을 가브리엘에게 인식시켜주는 셈도 되고, 나에게 언제나 다정했던 사랑스런 아들을 잃지 않아도 되는 거지.'
그는 힘주어 이름의 가운뎃자를 써넣었다.
'그런데....'
펜을 움직이다 말고 생각했다.
'내가 왜 이걸 쓰는 거지?'
그의 손이 마치 저절로 움직이듯 느닷없이 아래위로 오르내리면서 증오의 증서 위에 굵직한 선을 두어 줄 남겨 놓았다.
'나는 늙었어. 이제 와서 내가 늘 노예처럼 일을 해온 곳을 버릴 순 없어 나는 언제까지나 이곳에서 밭을 갈고 있어야 해.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리고....'
헤이크 마츠 에릭손은 미안해하면서 지배인에게 서류를 보였다.
"이해해주시지요. 나는 정말 이 재산들을 매매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그렇게 하려니 마음이 영 내키질 않습니다."
배신
여름처럼 따뜻했던 5월 어느 날, 잉그마르의 농장에서 경매가 있었다. 여자들은 벌써 여름 옷에 가까운, 소매가 헐렁한 흰 블라우스 차림이었고, 남자들은 모두 긴 양피 웃도리 대신 짧은 쟈켓을 입고 있었다.
교장 부인도 경매에 나갈 준비를 했다. 남편 스톰은 학교 일로 바빴고, 게르트루드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기 때문에, 그녀밖에 나가 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준비가 끝나자 스티나는 교실 문을 열고, 남편을 향해 나갔다 오겠다는 인사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스톰은 그때 거대한 소돔과 고모라 도시가 멸망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엄숙하고 무서워서 가엾게도 아이들은 겁에 질려 다 죽어가는 얼굴들이었다.
잉그마르 농장으로 가는 길목엔 아가위 꽃이 무성했는데 스티나는 늘 하던 버릇대로 그곳에서 잠시동안이나마 걸음을 멈추었다. 향기로운 하얀 은방울꽃으로 장식된 자그마한 언덕에 올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예쁜 꽃들은 어디서도 본 일이 없어. 예루살렘같이 먼 곳에선 보기 힘들 거야'
그녀는 마음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스티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을 사랑했다. 헤르굼 신도들이 마을을 제2의 소돔이라 부르며 그녀에게 마을을 버리도록 권하면서부터는 더더욱 그랬다. 그녀는 길가에 피어 있는 들꽃 몇 송이를 꺾어 사랑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우리가 만일 그 사람들 말처럼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쯤은 힘들 게 하나도 없어. 가령 강추위가 계속되게 하고 영원히 눈으로 땅을 묻어 버린다든가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지. 하지만 하나님은 적어도 우리들을 살려둘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보셔. 그렇지 않으면 다시 봄이 오게 하고 꽃이 피어나게 하실 리는 없거든.'
이윽고 잉그마르 농장에 도착한 스티나는 걸음을 멈추고 낯설은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이 정든 집이 하나하나 팔려 나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진 못할 것 같아. 그냥 집으로 가버릴까?'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그녀로선 이 농장이 어떻게 처리되는가를 보지 않고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게 쉽지 않았다.
이 농장을 내놓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젊은 잉그마르가 즉각 값을 불렀다. 그러나 베리소나 제재소라든가 철공장의 간부들이 2만 5천 크로네를 부른 데 비해 잉그마르는 불과 6천 크로네밖에 갖고 있지 않아 농장을 사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그 만한 대금이라면 잉그마르도 곧 빌릴 수 있었다. 그러자 회사에서 는 3만 크로네로 올렸으며, 이것은 잉그마르가 감히 겨룰 수 없는 거액이었다. 그는 그렇게 엄청난 돈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이 농장은 이제 영원히 잉그마르 혈족들의 손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었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회사 측에선 일단이 농장을 차지하고 나면 무엇 하나 다시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랑그홀스 폭포의 제재소조차 잉그마르에게 경영토록 하지 않을 것이다. 잉그마르는 생계를 잃게되고 가을에 게르트루드와 결혼하려던 예정도 백지화될 것이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가서 직업을 구해야 할 지경에 놓일 것이 분명한 것이다. 스티나는 이런 생각들로 마음이 흐려졌다. 카린이나 할보르에게서 인간미를 느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제발 카린이 나한테 말을 걸지 않아야 할 텐데.'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만일 말을 걸어오기만 한다면 잉그마르에 대한 그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내 생각들을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어. 진작 농장이 잉그마르의 소유로 돼 있어야 하는 건데. 애시당초 큰 실수를 했어. 카린도 너무해. 물론 여행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든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황폐하게 돌보지 않고 나무도 모두 베어내 버릴 것이 뻔한 회사 같은 데다 농장을 팔아버릴 생각을 했을까.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단 말야.'
그녀는 나름대로 분석하며 생각해 보았다. 물론 회사가 아니더라도 농장을 사려는 사람은 있었다. 부유한 마을재판소 판사 베르게스 스헨 페르손이 바로 장본인인데. 스티나의 생각으론 만일 이 사람과 흥정이 이루어진다면 잉그마르손이 그런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스헨 페르손은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므로 잉그마르에게 제재소를 계속하도록 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스헨 페르손은 옛날 이 농장에서 거위지기를 했었어. 그가 설마하니 그때의 일들을 잊었을 리가 없지. 그 '위대한' 잉그마르가 그를 맡아 돌봐주고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해준 일도 물론 잊지 않았을 테구.'
스티나는 집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안마당에 쌓아 놓은 널판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경매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 틈에서 마치 정든 장소에 이별을 고하러 온 사람처럼 주위를 구석구석 둘러보고 있었다. 바깥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세 갈래로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 한가운데는 기둥을 세운 조그만 창고가 있었고, 두드러지게 이렇다 할 만큼 오래된 것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집 입구의 조각모양이 있는 포치는 오래된 것 같았다. 또 하나 그보다 더 해묵은 것으로 세탁실 입구의 굵은 기둥의 꾸불꾸불한 포치가 있었다. 스티나는 잉그마르손 집안의 조상들이 모두 이 마당을 밟았다는 것을 상기했다. 일을 마친 저녁 무렵 높다란 난로가에 둘러 앉은 모습이라든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자기들 분에 넘치는 것을 일체 받지 않으려던 그들의 몸가짐이 눈앞에 선연했다. 그녀는 또 이 농장에서 늘 실천되던 근면과 정직성을 생각했다.
'아, 이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어!'
스티나는 다시 경매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자기 집을 내놓은 것보다 더한 괴로움을 느꼈다.
'나랏님께 상소라도 해야 할 일이야.'
경매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무척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마당에서 전시해놓은 농기구를 구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가축을 보기 위해 축사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아니 저건 잉가 마누라와 스타바 마누라 아냐!'
스티나는 중얼거렸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안에 들어가서 소를 한 마리씩 골라 놓고 나오는가 보군. 흥, 이젠 잉그마르 농장에서 혈통 좋은 소를 샀다고 꽤나 재고 다니겠어.'
한쪽에선 크로프텔 닐스 영감이 쟁기 하나를 끌어내고 있었다.
'크로프넬 닐스도 '위대한' 잉그마르가 사용하던 쟁기를 쓰면 자기도 부자 농군이라도 된 듯 생각할 거야.'
그녀는 경멸의 웃음을 띠며 중얼거렸다.
갈수록 경매되는 물건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많은 농기구를 이상한 듯 살펴보았다. 그것들은 오래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엇에 사용된 것인지 짐작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구경꾼 몇 사람이 구닥다리 썰매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중에 가장 오래전부터 대대로 물려온 것으로 빨강과 초록색이 칠해진 썰매가 있었는데 하양 조개 껍질이 박혀있고 다양한 빛깔의 수술로 장식된 마구가 하나 딸려 있었다. 옛날 잉그마르손 집안사람들은 그 구닥다리 썰매를 타고 집회에 참석하거나 교회의 결혼식에서 신부를 태우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스티나 부인에겐 옛 잉그마르손 집안 사람들이 농구와 헌 달구지와 썰매 같은 것이 경매되고 있는 오늘날까지도 모두 지금의 농장에서 살고 있은 것 같이 여겨졌다.
'좋은 사람들이 다들 마을을 떠나 버리는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잉그마르는 어디갔지? 어떤 기분일지 몰라. 하긴 내가 이렇게 끔찍한 생각이 드는데 잉그마른들 오죽하겠어'
날씨가 무척 좋았으므로 경매인인 방안의 혼잡을 덜기 위해 경매에 붙일 만한 것들은 모두 밖으로 내놓고 있었다. 그중에는 몇 세기 동안이나 손도 대지 않고 방안에 간직해 둔 것도있었는데, 궤짝마다 한결같이 튤립과 장미꽃이 그려져 있었다. 은 항아리, 구식 구리 남비, 물레와 베틀, 그 밖의 온갖 집기류들이 계속하여 들려 나왔다. 농가의 아낙들은 물건 주위에 몰려들어 그것을 요모조모 뜯어보기도 했다.
스티나는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아주 고운 비단을 짜는 베틀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생각나서 그것을 찾아보러 나섰다. 그때 하녀 한 사람이 엄청나게 큰 성경책 한 권을 들고나왔다. 그것은 하녀가 겨우 들 정도로 무거운 책으로 가죽이 매우 두터우며 놋쇠고리와 장식이 붙어 있었다. 스티나는 누구에겐가 한방 얻어맞은 기분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카린이 그것마저 판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스티나 자신도 그렇게 낡은 고어로 쓰여진 케케묵은 성서를 이젠 누구도 읽으려 하지 않으리란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남편이 곰에 물려 죽었다고 사람들이 기별해 왔을 때, 젊은 잉그마르의 종조모가 읽고 있던 성경책이 바로 저걸 거야.'
스티나는 물건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그것에 얽힌 사연들을 떠올렸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죔쇠는 크라크 산의 괴물한테서 빼앗아 온 물건이라지? 저 흔들거리는 마차는 내가 어렸을 때 잉그마르손 집안사람이 교회에 타고 다니던 거야.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가다가 그가 옆을 지나치기라도 할라치면 어머니는 언제나 팔꿈치로 나를 쿡쿡 치시며, "자, 인사드려라, 스티나, 잉그마르 잉그마르손 어른이 오셔" 하셨었지'
스티나는 그때 어머니가 왜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에게 꼭 인사를 시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재판관이나 집달리를 만났을 때는 그렇게까지 별나게 주의를 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그녀는 어머니도 할머니한테서 번번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말을 들었다.
'아, 게르트루드가 머지않아 이 집 주부가 되기 때문에 내가 슬퍼하는 건 아냐. 마치 내겐 이 마을 전체가 허물어져 내리는 것 같아서지.'
목사가 그녀 앞에 엄숙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는 곧장 집안으로 들어갔다. 스티나는 그가 카린과 할보르와 맞서서 잉그마르의 입장을 설득시키려고 왔으리라 추측했다. 이어 베리소나 제재소의 지배인과 함께 판사 페르손이 도착했다. 회사를 대표해서 온 지배인은 집안으로 들어갔고, 스헨페르손은 잠시 마당에서 서성이며 여러가지 연장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곧 스티나 부인과 함께 판자더미 앉아 있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땅딸막한 노인 앞으로 다가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억센 잉그마르, 당신은 아실텐데.... 잉그마르가 내가 신청한 재목을 사겠다고 결정했습니까?"
"안 산다구 그럽디다. 마음이 또 변할지도 모르지만"
억센 잉그마르는 대답하면서 스헨 페르손에게 엄지손가락으로 스티나 부인을 가리키며 눈치를 주었다. 자기들의 말이 그녀에게 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주의였다.
"내 생각엔 잉그마르가 기꺼이 그 조건들을 받아들일 것 같은데"
페르손 판사가 말했다.
"이런 제안을 날마다 제시하진 않아요. '위대한' 잉그마르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지"
"그러믄요. 아주 좋은 제안이지요."
억센 잉그마르가 맞장구쳤다.
"그런데 다른 데서 이미 흥정을 했다는데요?"
"자기가 정작 잃고 있는 것은 생각도 못 하는 모양이군."
스헨 페르손은 이 말을 남기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동안 잉그마르손 집안사람들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는데 잉그마르가 한쪽 벽에 기대어 지그시 눈을 감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악수를 하려고 다가갔던 몇 사람이 바로 앞까지 갔다가는 되돌아오고 있었다. 잉그마르의 얼굴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창백해 보였다. 그의 괴로움을 짐작한 사람들은 누구 하나 감히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는 너무나 조용히 서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그 자리에 서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일단 그를 발견한 사람들의 머릿속엔 다른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경매에 따르기 마련인 소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머지않아 남의 손에 넘어가려 하는 옛집 벽에 기대어 묵묵히 서 있는 잉그마르를 앞에 두고 웃거나 농담할 기분은 아예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드디어 경매의 시간이 됐다.경매인이 의자에 올라섰다. 그는 첫 번째로 헌 쟁기를 값을 매기기 시작했다. 잉그마르는 마치 조각 같은 얼굴로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차라리 가버리는 게 나을 텐데 저러는군."
사람들이 숙덕거렸다.
"구태여 여기 머물면서 비참한 일을 겪을 필욘 또 뭐야? 하긴 잉그마르손 집안사람들의 유별난 행동은 알아줘야 해."
망치 소리가 울렸다. 최초의 경매 값의 결정을 알리는 소리였다. 잉그마르는 자기가 얻어맞기라도 한 듯 움찔하더니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망치 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는 몸을 떨었다.
농가의 아낙네 두 사람이 스티나 앞을 지나갔다. 그들은 잉그마르에 대해 지껄이고 있었다.
"생각 좀 해보세요. 돈 많은 농가의 딸에게 장가들기만 하면 이 농장을 사는 돈쯤은 문제도 아닐 텐데. 하필이면 교장 선생댁의 게르트루드한테 장가들겠다니, 원"
"소문을 듣자니까 어느 돈 많은 유지가 자기 딸하고 결혼한다면 선물로 잉그마르 농장을 사주겠다고 했다면서요? 원체 집안 좋은 집 아들이다 보니까 저 사람 재산 없는 건 신경도 안 쓰나 봐요."
"그렇지요. '위대한' 잉그마르의 아들로 태어나서 덕 보는 거죠. 뭐."
'정말 게르트루드가 가진 게 조금만 되었더라도 괜찮을 텐데. 그러면 잉그마르를 도울 수가 있을 테니까.'
스티나는 쓸쓸하게 생각했다.
농기구가 모두 팔리고 경매인은 마당의 다른 곳으로 위치를 옮겼다. 거기에는 가정용 린네르가 쌓여 있었다. 그는 식탁보, 시트, 그 밖의 수직물들을 경매하기 시작했다. 마당에서 경매인이 쳐드는 직물에 수 놓인 튤립 무늬나 여러 가지 다양한 모양들이 골고루 바라다보였다. 높이 쳐든 린네르가 가벼운 바람을 일으키며 펄럭이고 있었다. 잉그마르는 무심코 눈을 들어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피로하고 지친 눈이 잠시 동안 그 슬픈 경매의 현장에 꽂혀 있다가 이내 외면해 버렸다.
한 농가의 아가씨가 잉그마르를 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이런 일은 처음이야. 저 가엾은 남자는 다 죽어가는 것 같아. 여기 서서 가슴 아파하지 말고 어서 가버릴 일이지!"
스티나는 돌연 벌떡 일어서서 이 일을 당장 중지하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앉히며,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나는 한갖 가난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아.'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스티나는 무엇인가에 끌리듯이 얼굴을 들었다. 카린이 막 집안에서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가자 사람들은 모두 뒤로 물러섰다. 그녀에게 인사하려고 손을 내미는 사람도, 말을 건네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눈엔 비난과 적의, 경멸의 빛만이 가득 찼을 뿐이었다. 이것으로써 카린과 그녀의 거래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가는 분명해진 셈이었다. 여느 때보다 등이 꾸부정해 보이는 카린은 피로에 지쳐 있었고, 양쪽 볼에 빨간 점이 선명하게 두드러진 것이 마치 에로프와 고투하고 있던 때처럼 괴로워 보였다.
"여기 계실 줄은 몰랐어요, 아주머니."
그녀가 스티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그녀는 스티나 부인을 찾아서 안으로 안내하기 위해 나왔던 것이다. 스티나는 처음엔 극구 사양하다가 카린을 따라 일어섰다.
"저희들은 이제 떠나는 마당이에요. 묵은 갈등 같은 건 모두 정리하고 싶어요."
집 쪽을 향해 걸어가다가 스티나는 마음을 다져먹고 입을 열었다.
"오늘은 카린에게도 마음 편한 날은 아닐 거예요."
"...."
"어떻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물건들을 모두 팔아버릴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카린."
"그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께 바쳐야 하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납득할 수...."
"주의 이름으로 팔기 시작한 걸 다시 중지한다면 주님도 받아들이실 수 없을 거예요."
카린이 스티나의 말을 자르며 재빨리 대꾸했다.
스티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문이 막혀 카린에게 퍼부으려던 비난의 말들은 뱃속으로 꿀꺽 삼켜지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카린의 모습에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고고한 위엄이 감도는 것 같았다. 현관 앞의 넓은 단 위에 섰을 때 스티나가 카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쳤다.
"저기 서 있는 저 사람을 봤어요?"
그녀는 잉그마르를 가리키며 물었다. 카린이 움찔하며 짐짓 동생을 외면했다.
"잉그마르에겐 주께서 길을 찾아 주실 거예요, 틀림없이...."
그녀는 중얼거렸다.
얼핏 봐서 거실 안은 경매로 인해 변했다고 할 만한 게 별로 없었다. 그러나 벽을 장식하고 있던 구리 제구는 눈에 띄지 않았고, 요와 시트가 모두 벗겨져 벌거숭이가 된 침대 틀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늘 반쯤 열려져 있어 그 안에 가득 들어 있는 은항아리며 은쟁반을 볼 수 있던 파란 칠의 찬장은 문이 꼭 닫힌 채 볼 것이 하나도 없음을 경고해 주는 것 같았다. 이제 방에 남아 있는 볼품 있는 것이라곤 언젠가 월귤꽃 줄기가 테두리에 장식되어 있던 예루살렘의 그림뿐이었다.
넓은 방은 할보르와 카린의 친척, 그리고 같은 신도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음식이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에 차례대로 안내되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안방 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매매에 대한 의논이 아직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두드러지게 높은 목사의 음성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거실 안은 매우 조용했다. 얘기를 할 때면 한결같이 음성을 낮추어 소곤거리곤 했다. 그야말로 농장의 운명이 결정되는 그런 순간이었다. 스티나가 가브
리엘을 돌아보며 말했다.
"잉그마르가 농장을 손에 넣을 희망은 없을 것 같지요?"
"경매에 붙여진 값으로 봐선 그런 셈이죠. 그 정도의 금액이 잉그마르에겐 없으니까요. 카름순드에서 온 여관 주인이 3만2천 크로네를 부르는 바람에 회사에서 또 3만 5천으로 값을 올렸답니다. 지금 목사님께서는 그 문제로 카린과 할보르를 설득하는 중이에요. 회사에 주지 말고 여관 주인에게 주라고 말입니다."
"그럼 베르게스 스헨 페르손은 어떻게 됐죠?"
"그분은 오늘 입찰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목사는 아직도 큰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분명히 누군가를 설득하는 어조였다. 말하는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아직 이야기의 결말이 나지 않은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가 저토록 계속 떠들 리가 없는 것이다. 잠깐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여관 주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톤이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렇다면 3만 6천 크로네를 내겠소. 이 농장이 그만큼이나 값이 나간다고 보진 않지만 회사의 소유가 되도록 보고 있을 순 없군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왔다. 그리곤 곧 회사 지배인의 음성이 크게 들렸다.
"나는 4만 크로네 내겠소. 이건 카린이나 할보르가 생각도 못하는 엄청난 액수요. 자, 결정하시지요."
스티나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일어서서 비틀비틀 그곳을 빠져나왔다. 바깥은 황량하고 스산했지만 후끈한 방에 앉아 값을 다투는 실랑이를 듣느니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했다.
린네르의 경매는 이미 끝나 있었다. 경매인은 다시 장소를 옮겼고, 이 집의 해묵은 은식기류를 매매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거기엔 금화가 새겨진 묵직한 은항아리며 17세기에 만들었다는 명문이 들어 있는 큼직한 은그릇 같은 것들이 놓여져 있었다. 경매인이 첫 항아리를 들어 올리자 잉그마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중지시킬 생각으로 뛰어나가려 하다가 곧 마음을 억제하며 제자리에 멈춰섰다. 몇 분이 지났다. 웬 늙은 농부가 은항아리 하나를 들고 잉그마르에게로 걸어오더니 그의 발 앞에 공손히 내려놓았다.
"본시 모두 도련님의 것이어야 하지만 이것이라도 남아 있게끔 받아 주십시오."
다시 소름이 끼치듯 전율이 잉그마르의 온몸을 휘감았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그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아무 말씀도 마십시오. 이건 언제까지든 도련님의 것입니다."
농부가 서너 걸음 멀어지다가 다시 돌아왔다.
"사람들은 도련님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 농장을 차지할 수 있다고들 그럽디다. 그거야말로 도련님이 이 교구를 위해서 하실 수 있는 가장 큰 봉사일겝니다."
이 농장에는 늙은 머슴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젊었을 때부터 늙어서 기력이 없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잉그마르 농장이 경매에 붙여지면서 이들은 머리 위에 마치 죽음의 그림자와도 같은 불안감이 감돌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두려움은 새로운 주인한테 이 집에서 쫓겨나 거지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설령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어떤 낯선 사람이 현재의 주인 부부처럼 자기들을 돌봐줄 리 만무하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 가련한 사람들은 초조한 듯 온종일 마당에서 서성거렸다. 힘없는 눈엔 눈물이 맺혀 있었으며 희망도 없는 간절한 애원을가득 담고 있었다. 그들이 의지할 데 없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자면 측은한 생각을 갖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백살 남짓한 늙은이 하나가 잉그마르 앞으로 절뚝거리며 걸어왔다. 그는 잉그마르가 서 있는 옆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떨리는 손을 꼬부랑 지팡이의 손잡이에 얹은 채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몇몇 노인들에게 그곳이야말로 어떤 불안감도 떨쳐버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 꼬부랑 늙은이 벤크스가 근사한 자리를 찾아 앉은 것을 본 리자 노파와 말 타는 자기들도 비틀비틀 잉그마르의 발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은 막연하게나마 당대의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인 그가 자기들을 보호해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잉그마르는 이제 눈을 감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세 사람의 노인들을 내려다보며 그들이 자기 집안에 봉사하며 살아온 긴 세월과 그들이 겪어야 했던 온갖 역경을 헤아려 보았다. 순간 그는 자기의 첫 의무가 이 사람들을 잉그마르의 집에서 일생을 마치도록 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마당을 휘둘러 보았다. 한쪽에 남루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억센 잉그마르와 눈이 마주쳤다. 잉그마르는 그 초라한 늙은이를 향하여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억센 잉그마르는 무슨 소린가 알아들은 듯이 잠자코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거실을 지나 안방 옆에 서서 잉그마르의 뜻을 전할 기회를 기다렸다.
목사는 방 한가운데에 두 개의 미이라처럼 굳어져 꼼짝도 않는 카린과 할보르에게 한없이 지껄이고 있었다. 베리소나에서 온 지배인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자기가 누구도 맘먹을 수 없는 비싼 값을 불렀다는 데 우쭐해 있었던 것이다. 카름순드에서 온 여관 주인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흥분한 듯 이마에 구슬땀이 맺힌 몰골로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방 저쪽 끝엔 베르게스 스헨 페르손이 소파에 앉아 두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의 큼직한 얼굴은 위압하는 듯한 냉랭한 표정이었다.
목사의 이야기가 끝나자 할보르는 카린을 바라보며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진 듯이 멍하니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할보르가 목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린도 저도 여간 많은 생각을 가졌던 게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낯선 타국에 가서 우리의 형제들과 함께 이 농장을 처분한 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집도 구해야 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해야 하는데 돈의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거기다가 여비도 한 사람당 1만 5천 크로네나 든다니까요."
"그렇소, 회사에 넘겨주지 않으려고 카린과 할보르에게 헐값으로 이 농장을 팔도록 권유한다는 건 무리요. 더 이상 쓸데없는 논쟁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즉각 내 흥정을 따르는 게 현명한 처사일 거요."
지배인이 나섰다.
"그래요."
카린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제일 높은 값으로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
목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이제 설교자가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서 뭔가 정의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카린과 할보르가 이 전통 깊은 농장을 진심으로 사랑하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두 사람이 일이천 크로네에 좌지우지하리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농장을 영원히 유지해 나갈 만한 사람에게 팔기를 원한다고 저는 믿고 있지요."
목사는 확신에 찬 어조로 논리정연하게 말을 계속해나갔다. 특히 카린에게 들으라는 듯 회사의 손에 넘어가서 완전히 황폐해진 여러 농장들의 얘기를 본보기로 제시했다. 목사는 자기가 어떤 말을 해야 카린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자기가 전통 있는 농가의 주부라는 긍지가 아직은 다소 남아 있을 게야.'
카린은 간혹 가다 목사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목사는 당장이라도 망할 것같이 돼 버린 농가며 충분히 먹을 것을 먹지 못해 말라가는 가축들의 이야기를 계속하여 주워섬겼다.
"만일 회사가 굳이 잉그마르 농장을 사겠다고 나서면 농민들을 얼마든지 농락할 수 있는 입장입니다. 결국 농민들도 손을 드는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카린과 할보르가 이 유서 깊은 터전을 회사의 소유지로 만드는 것을 거부하고 농장을 보존할 마음만 갖고 있다면 먼저 값을 정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농민들도 어떻게 하면 결말을 지을 수 있는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언제까지 이렇게 무턱대고 값을 올려 나갈 순 없잖습니까?"
목사는 카린과 할보르를 날카롭게 주시하면서 말을 끝맺었다. 할보르는 난처한 얼굴로 카린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물론 저희들도 가능하면 우리와 같은 농민들에게 농장을 팔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예나 지금과 마찬가지로 지속되어 나갈 것이고, 또한 저희도 마음 놓고 이곳을 떠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만일 회사가 아닌 다른 분께서 이 농장에 대한 값으로 4만 크로네를 내신다면 저희들도 흡족한 마음으로 거래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할보르는 아내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감지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말이 떨어지자 억센 잉그마르는 스헨 페르손 앞으로 다가가서 무엇인가 빠르게 소곤거렸다. 판사 페르손이 일어서서 할보르에게로 걸어가더니 힘을 주어 말했다.
"4만 크로네라면이 농장을 기꺼이 내놓으시겠다구요? 내가 그 돈을 내겠소."
순간 할보르의 얼굴에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그는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을 눌러 삼키고는 간신히 떠듬거리며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판사님. ....저는....이런 훌륭한 분에게 농장을 넘길 수 있게 돼서 기쁩니다!"
페르손 판사는 카린의 손을 한번 힘있게 잡아주었다. 감격한 카린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안심하시오, 카린. 여기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할 겁니다."
"판사님께서 이 농장에 거처하실 건가요?"
"아니요."
판사가 엄숙하게 말했다.
"내 막내딸이 올 여름에 결혼하게 될 텐데 딸 내외에게 이 농장을 선물할 생각입니다."
판사는 목사를 바라보고 고맙다는 경의를 표했다.
"보십시오, 목사님이 생각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나는 한때 이 농장의 거위지기였지요. 그 시절엔 내가 내 힘으로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에게 이 농장을 찾아줄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었는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영문을 알 수 없어 그저 멍하니 판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카린은 곧 방에서 나왔다. 거실을 지나 마당으로 나가면서 그녀는 몸을 쭉 펴고 머릿수건을 고쳐 쓰기도 하고 앞치마를 다듬기도 했다. 그녀는 진지하고 떳떳한 걸음걸이로 곧장 잉그마르 앞으로 다가갔다.
"축하한다, 잉그마르."
그녀는 기쁨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와 나는 요즘 줄곧 신앙 문제로 대립해 왔지.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가 함께 살지 못하는 대신 너를 이 농장의 주인이 되도록 해주시는구나.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니."
잉그마르는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서 있었다. 카린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잉그마르는 여전히 불행한 모습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최종 결정이 내려지자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몰려나와 잉그마르를 에워쌌다.
"축하합니다. 잉그마르 농장의 잉그마르 잉그마르손"
잉그마르의 얼굴이 잠깐 밝아지는가 싶더니 그가 중얼거렸다.
"잉그마르 농장의 잉그마르 잉그마르손"
마치 오래전부터 갖고 싶어 하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와 같던 그가 금방 역겨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갖고 싶던 선물을 내동댕이친 어린아이의 그런 표정이었다.
순식간에 온 농장에 소식이 퍼졌다. 들뜬 목소리로 지껄이는 사람, 열심히 물어보는 사람, 어떤 사람은 기쁨으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제 경매인의 고함소리는 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이 허공으로 무의미하게 흩어졌다. 농부나 신사나 가까운 사람이나 낯선 사람 할 것 없이 잉그마르에게 몰려와서 기쁨을 함께 나눴다. 그들의 붕 뜬 분위기 속에서 잉그마르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좀 떨어진 곳에서 홀로 서 있는 스티나와 눈이 마주쳤다. 매우 창백한 낯빛에 늙고 남루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시선이 잉그마르와 부딪치자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잉그마르는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는 그녀에게 허리를 굽히고 얼굴의 근육에 경련을 일으키며 비통한 쉰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스티나 아주머니, 게르트루드에게 잉그마르가 배신을 했다고 전해 주십시오. 농장을 위해서 몸을 팔았다구, 저 같은 파렴치한 인간은 잊어달라고 일러주십시오."
그는 울고 있었다.
게르트루드의 사랑
몸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게르트루드는 그것을 막을 수도 누를 수도 없었다. 이상한 일은 점점 자라고 또 자라서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것은 잉그마르가 그녀를 버렸다는 것을 알면서부터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잉그마르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길거리나 혹은 교회, 아니면 그 밖의 다른 곳에서 별안간 마주치지나 않을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두려움이었다. 왜 그것이 그토록 무섭게 여겨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것만은 틀림없었다. 게르트루드는 잉그마르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는 집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어야 했으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정원을 돌봐야 했고 소젖을 짜기 위해 먼길을 지나 목장에도 가야 했다. 또한 갖가지 생활필수품을 사러 마을의 가게에도 나가야 했다. 그녀는 언제나 스카프를 푹 눌러쓰고 눈길은 아래로 둔 채 바람에 쫓기는 사람처럼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 또한 되도록 빨리 큰길을 벗어나 잉그마르와 부딪칠 가능성을 없을 만한 도랑이나 개울을 낀 샛길로 들어가곤 했다. 한시도 그녀는 공포감에서 해방될 수 없었다. 이 마을 안에서는 어느 곳이든 잉그마르와 부딪치지 않을 만한 데가 한 군데도 없었던 것이다. 배를 저어 강으로 나갈 경우 그가 재목을 띄우고 있을지도 몰랐고, 숲속 깊숙이 들어갈 경우엔 일하러 나가는 그와 오솔길에서 마주칠 확률이 높았다. 게르트루드는 마당에서 풀을 뜯다가도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얼른 피할 심산으로 시선을 줄곧 한길 쪽으로 향해 있었다. 공포는 나날이 더 커져서 게르트루드의 마음은 자꾸 쇠잔해져 갔다. 이제는 모든 슬픔까지도 공포로 변하는 것 같았다.
'미쳐 버리는 게 아닌가 몰라. 완전히 미치지는 않더라도 좀 이상해질 것 같거든. 그러면 정말밖엔 나다닐 수도 없겠지. 하나님 제발 저한테서 이 끔찍한 공포를 거둬 주소서.'
그녀는 소리쳤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제 장신이 이상해질 줄 알고 계셔요. 다른 사람들도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하나님, 저를 구원하소서, 제발!"
이 공포상태가 절정에 이르렀던 어느 날 밤, 게르트루드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었다. 우유통을 팔에 걸고 젖을 짜러 가는 꿈이었는데, 소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숲 기슭 울타리 안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그녀는 개울과 도랑을 낀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너무 피곤하고 쇠약해 있어서 걸음걸이가 무척 위태로웠다.
'대체 왜 이럴까.'
그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걷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 그래, 내가 피로한 것은 그 무거운 슬픔의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야.'
어렵게 목장에 도착하니 소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풀숲이라든가 냇물 저쪽이라든가 자작나무 아래 같은 곳을 뒤져 소를 찾기 시작했으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소를 찾던 그녀의 눈에 숲을 등지고 세워진 울타리의 갈라진 틈이 발견됐다. 불현듯 소가 이 틈을 이용해서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울타리 앞에 서서 양손을 마주 잡고 꾸욱 힘을 주었다.
'지치고 기운은 없지만 온 숲을 다 뒤져서라도 소를 찾아내야 해!'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곧장 숲속으로 들어가서 무성한 전나무며 가시가 돋힌 소나무를 헤치며 슬슬 앞으로 나아가던 그녀는 문득 자신이 평지를 걷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런 곳을 걷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길은 전나무의 갈색 바늘잎으로 덮여 부드럽고 윤기가 났다. 양쪽에 높다란 탑처럼 소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에는 이끼가 돋아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매우 아늑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이제까지 줄곧 지니고 있던 공포감은 그녀에게서 자취를 감췄다. 그녀는 뜻밖에도 한 노파가 나무 사이에서 얼씬거리는 걸 발견했다. 핀네 마리트라는 유명한 마녀였다.
'아, 무서워. 저 성깔 못된 늙은이가 아직도 살아 있어. 내게 다가오면 어떡하지? 이런 숲속에서 도망칠 수도 없을 텐데.'
그녀는 핀네 마리트가 눈치채지 않도록 살금살금 그곳을 빠져나오려 했다. 그러나 채 빠져나오기 전에 노파가 소리쳤다.
"이봐! 게 좀 서 있어. 보여줄 게 있으니까."
어느새 핀네마리트는 길로 나와서 게르트루드 바로 앞에 꿇어앉았다. 그녀는 첫째 손가락으로 융단처럼 깔려 있는 전나무 잎 위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는 그 가운데다 얕은 놋쇠 주발을 놓았다.
'무슨 마법을 쓸려고 저러나 보지? 그럼 이 늙은이가 마녀라는 게 사실이었잖아!'
"이 주발 속을 들여다봐. 보이는 게 있을 테니까"
핀네 마리트가 말했다.
게르트루드는 어색하게 주발 안을 들여다보고는 기겁을 하고 놀랬다. 주발 밑바닥에 잉그마르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춰있었던 것이다. 핀네 마리트가 그녀에게 길쭉한 바늘 하나를 건네주면서 낮게 소근거렸다.
"자, 이걸로 저 눈깔을 찔러 버려. 너를 배신한 놈이야. 어서!"
사실 게르트루드의 마음은 그러고 싶다는 생각으로 간절했다. 그녀가 주저하는 빛을 보이자 핀네 마리트가 부추기 시작했다.
"그놈은 유복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어. 너 따위는 까마득히 잊고 너무너무 맘 편하게 지내고 있지. 그런데 너만 왜 괴로워해야 하니."
게르트루드는 바늘을 쥔 손을 주발 밑바닥을 향하여 서서히 내리기 시작했다.
"자, 그래 똑바로 눈을 푹 찔러 버리는 거야!"
게르트루드는 바늘을 힘껏 내리 찔렀다. 처음에는 잉그마르의 한쪽 눈을, 나중에는 나머지 눈을 찌르면서 그녀는 바늘이 훨씬 아래까지 뚫고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단단히 금속에 부딪치지도 않고 무언가 연한 것을 뚫는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바늘을 뽑자 끝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게르트루드는 아찔했다. 바늘에 묻은 피를 보니 정말 잉그마르의 눈을 찌른 것 같았던 것이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으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상태에서 퍼뜩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게르트루드는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 떨며 흐느껴 울었다. 아무리 단순한 꿈에 지나지 않더라도 자신이 그런 독한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두려움을 느꼈다.
'제발 하나님 제발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게르트루드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곤 또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도 좁은 오솔길로 해서 목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또 소가 보이지 않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숲으로 들어갔다. 좀 전의 꿈과 같이 아름다운 길에 이르렀고, 그러자 그녀는 꿈속에서 일어난일들이 모두 생각나서 다시 그 늙은 마녀를 만나게 될까 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노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푹신한 이끼 아래의 지면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난데없이 사람의 머리가 불쑥 솟았다. 그녀는 질겁을 하여 주춤 뒤로 물러섰다. 머리에 이어 매우 작은 사나이의 몸뚱이가 땅속으로부터 서서히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조그마한 사나이에게선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게르트루드는 그 사나이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머리가 좀 돌았다고 해서 사람들이 윙윙페테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간혹 마을에서 묵을 때도 있었지만, 여름 동안에는 늘상 숲속의 진흙 굴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게르트루드는 문득 페테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고 싶을 때 페테만 시키면 발각될 염려가 없다.'
게르트루드는 페테가 남의 사주를 받고 몇 번이나 불을 질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는 점도 떠올렸다. 그녀는 그 사나이에게로 다가섰다. 잉그마르 농장에 불을 지를 생각이 없느냐고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그를 떠보았다. 그리곤 잉그마르가 자기보다 농장을 더 생각하고 있으니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다고도 말했다. 다음 순간 게르트루드는 움찔 놀랐다. 그가 벌써 그녀의 말을 실천에 옮기려 했기 때문이다. 윙윙페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느닷없이 신나게 농장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도 허둥지둥 뒤를 쫓았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옷은 풀섶에 걸리고 발은 늪에 빠졌으며 길에서는 돌멩이에 걸려 넘어졌다. 간신히 숲에서 빠져나가려던 그녀는 나무들 사이로 벌겋게 불길이 치솟는 잉그마르 농장을 발견했다.
"아아, 페테가 한 짓이야. 페테가, 윙윙페테가 농장에 불을 질렀어!"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게르트루드는 그 순간 무서운 꿈에서 깨어났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게르트루드의 양 볼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꿈이 계속하여 연장될까 무서워 다시는 잠자리에 들고 싶지 않았다.
"오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도움이 필요하옵니다."
그녀는 울부짖었다.
"제가 얼마나 약한 마음을 갖고있는 지는 몰라도 저는 지금까지 잉그마르에게 복수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가져 본 일이 없나이다. 제발 하나님, 이 죄의 유혹에서 구원하여 주소서!"
그녀는 절망에 못 이겨 두 손을 쥐어짜며 외쳤다.
"슬픔은 협박이야, 슬픔은 협박이야, 슬픔은 내게 위협해!"
게르트루드 자신 역시 분명한 뜻을 가지고 외친 것은 아니었지만 웬지 자기의 가련한 마음이 마치 폐허가 돼 버린 정원 같은 기분이었다. 꽃이란 꽃은 모조리 뿌리째 뽑혀지고 슬픔이 마치 정원사처럼 쓸고 다니며 엉겅퀴와 독초를 심고 있었다.
다음날 그녀는 여전히 꿈꾸는 듯한 기분으로 지냈다. 꿈이 너무도 생생하여 머릿속에서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얼마나 만족스런 마음으로 잉그마르의 눈을 찔렀던가를 생각하니 온몸에 몸서리가 쳐졌다.
'끔찍해!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니. 아, 이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애. 나는 정말 악녀가 되려는 것일까?'
식사가 끝나고 게르트루드는 소젖을 짜러 나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스카프를 얼굴 위까지 끌어내리고 눈은 아래로 내리깐 채였다. 꿈속에서 헤맨 길을 걸어가자니 길가의 꽃까지도 꿈에서 본 것 같았다. 비현실감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목장에 닿으니 소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그녀는 꿈속에서처럼 냇가라든가 자작나무 아래라든가 풀숲 뒤를 헤매며 찾아다녔다. 이윽고 울타리의 틈이 생긴 부근까지 걸어 나온 그녀는 소가 그리로 빠져나간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게르트루드는 숲속의 부드러운 흙 위에 찍힌 소의 발자국을 따라 계속 나아갔다. 멀리 사아텔로 통하는 한길 쪽으로 빠져나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 그래! 오늘 아침 행운농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사아텔 쪽으로 가축을 몰고 가던데 우리 소도 그 황소 떼의 목에 맨 방울 소리를 따라 함께 휩쓸려간 것이 분명해.'
게르트루드는 사아텔까지 가서 소를 찾아올 결심을 굳혔다. 그렇지 않으면 소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으므로 막연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험한 바윗길을 힘을 내어 걸어갔다. 한참 올라가던 비탈길이 급경사를 이루면서 갑자기 솔잎에 덮인 매끄러운 평지가 나타났다. 꿈에서 본 길과 흡사한 게 거기에는 탑처럼 솟은 소나무가 서 있었고, 이것 역시 노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게르트루드는 다시 비현실감 속에 빠져들었다. 무언가 이상한 일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혹시 숲속 깊이 돌아다니는 무슨 신비로운 것이 느닷없이 앞에 나타나지나 않을까 싶어 전나무 아래를 기웃거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타나는 건 없었다. 그녀의 가슴속엔 뜻하지 않은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잉그마르에게 복수를 한다면 어찌 될까? 내 공포가, 미쳐 버릴 것만 같은 그 공포감이 없어질까? 내가 괴로워하는 일을 그이가 괴로워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내가 편안해질 수 있을까?'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길을 꼬박 한 시간 남짓 걸었지만 그녀에겐 놀랄 만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길은 마침내 숲의 목장에서 끝이 났다. 목장은 신선한 수풀과 들꽃으로 우거진 아름다운 곳이었다. 한쪽에는 험한 산이 치솟아있고 다른 한쪽은 흰 꽃이 만발한 마가목과 여기저기 자작나무와 오리나무가 무리로 흩어져 있는, 키 큰 나무숲으로 가려져 있었다. 꽤 넓은 냇물이 산허리에서 흘러나와 목장을 굽이 돌아 나직한 나무며 풀숲에 덮인 골짜기로 힘차게 흘러들었다.
게르트루드는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금방 알 것 같았다. 냇물은 흑수천이라는 내로서 거기에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의 경우 이 냇물을 건너다가 다른 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환영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하는데, 한 소년은 이 냇물을 건너다가 마침 같은 시각에 먼 마을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결혼식 행렬을 보았고, 어떤 술장수는 말을 탄 임금님이 왕관과 홀을 들고 대관식에 나가는 광경을 보았다고도 했다.
게르트루드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나님, 제발 여기서 제게 무엇이든 볼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녀의 마음 한구석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그녀는 극구 애원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련하게 여겨지도록 했다.
'아, 비참하게도 나는 어찌됐든지 여길 건너지 않으면 안 돼. 여기를 건너가서 소를 데리구 와야 하니까'
그녀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으스러져라 힘을 주면서 공포에 사로잡혀 빌었다.
'주여, 제발 비나이다. 무서운 것이나 나쁜 것은 보여주지 마시고 저를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소서!'
그녀는 꼭 자기가 좋지 않은 것을 보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너무 강해서 냇물에 가로놓인 돌다리를 아예 건너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이 그녀를 건너도록 만들었다. 절반쯤 건너다가 그녀는 문득 냇물 저편의 나무 사이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조용히 목장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한 사나이의 모습이었다. 사나이는 키가 크고 젊어 보였으며, 발목까지 닿는 치렁치렁한 검은 웃옷을 걸치고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와 안으로 말려 있었고, 화사하며 무척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곧장 게르트루드를 향해 걸어왔다. 맑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신비로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의 눈이 그윽히 게르트루드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그가 자기의 온갖 슬픔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기의 마음이 속세의 공포에 부대끼고 영혼은 복수의 일념으로 그늘져서 가슴에 슬픔이라는 독을 품은 꽃과 엉겅퀴가 가득 심어져 있는 것을 측은하게 여긴 듯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게르트루드의 가슴속엔 안정과 평온이 피어나고 기쁨의 강물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쳐 가자 이제 그녀에게는 일말의 원한이나 공포감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사악한 감정들은 깨끗이 씻겨져서 게르트루드는 황홀한 기분이 되었다. 환영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게르트루드의 눈엔 아직도 그의 아름다운 모습이 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지금껏 지켜보던 낯선 사내의 모습이 가슴에 각인되어 박혔다.
"나는 그리스도를 보았어!"
그녀는 두 손을 치켜들며 탄성을 질렀다.
"아, 나는 그리스도를 보았어. 그는 나에게 슬픔을 거두어 가셨구나. 사랑해요. 주님. 당신을 사랑해요. 이제 이 세상의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세상으로부터 비롯된 슬픔은 이제 그녀에게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길게만 느껴졌던 세월의 시간은 거울에 투명된 일순간에 지나지 않은 듯 여겨졌으며, 세상에서 비롯된 기쁨이란 건 천박하고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지금까지의 모든 게 정리된 느낌이었다.
그녀는 헤르굼 신도들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의 생활에 있어 두 번 다시 비열한 생각과 암흑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가증스런 일에 대한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자신의 결심을 곧 수행하기로 했다. 그녀는 이 생각들이 방금 전에 지나간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것을 그리스도의 눈에서 읽었던 것이다.
잉그마르와 결혼식이 있는 아름다운 6월의 어느 날이었다. 키가 크고 몸매가 날씬한 젊은 여자가 아침 일찍 잉그마르 농장에 나타나서 신랑을 좀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얼굴은 끌어내려진 스카프로 인해 크림 빛 볼과 장밋빛 입술밖에 보이지 않았다. 팔에는 바구니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손으로 만든 장신구 묶음과 털로 꼰 실 몇 타래, 그리고 털을 엮어 만든 팔찌류가 들어 있었다.
마당의 중간쯤에서 그녀는 늙은 하녀를 만났다. 안내를 부탁하자 하녀는 안으로 들어가서 안주인에게 전했다. 안주인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은 지금 막 교회에 가려는 길이니까 만나서 얘기할 시간이 없다. 나가서 그 여자에게 이대로 전해라."
냉정하게 거절을 당한 젊은 여자는 곧 자리를 떠났다.
혼례의 행렬이 교회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다시 돌아와서 이번에는 외양간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머슴에게로 다가갔다.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을 좀 만나 뵈러 왔는데요.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머슴은 안으로 들어가서 주인에게 전했다.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은 지금 막 피로연에 참석하는 참이라 얘기할 틈이 없다고 그렇게 일러라."
주인이 대답했다.
그녀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해가 저물어 가는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이번에는 대문 가까이에서 그네를 타고 노는 아이에게 부탁했다. 아이는 곧장 집안으로 달려가서 신부에게 전했다. 신부가 대답했다.
"그 여자에게 말해.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은 지금 부인과 춤을 추고 있으니까 만날 수가 없다고 그래."
아이가 돌아왔다.
"아줌마에게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은 지금 부인과 춤을 추고 있기 땜에 만날 수가 없다고 그렇게 말하랬어요."
젊은 여자는 생긋 웃었다.
"그래, 네가 전한 말은 가짜야.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은 지금 신부와 춤을 추고 있지 않거든."
그녀는 떠나지 않고 문간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한편 신부는 속으로 생각했다.
'결혼식 날 거짓말을 하다니!'
그녀는 자책감에 빠져 잉그마르에게로 갔다. 그리곤 그와 얘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바깥에 와 있다고 말했다. 밖으로 나온 잉그마르는 대문간에 서 있는 게르트루드를 발견했다. 게르트루드는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한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잉그마르도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잉그마르는 지난 몇 주일의 짧은 동안에 사람들한테 무척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무언가 약삭빠른 경계의 빛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재산을 갖게 된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보다 태도가 훨씬 겸손해지고 성격도 온순해진 듯이 보였다.
사실 그는 게르트루드와 만난 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경매가 있고부터 날마다 그는 자기가 한 거래에 만족하고 있다는 신념을 확고히 굳히려고 애를 써 왔다.
'실상 우리 잉그마르손 집안사람들은 농장의 밭을 갈거나 씨를 뿌리거나 하는 것 이외의 일엔 별로 개의치를 않아'
그는 생각했다. 게르트루드를 잃은 것 이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배신을 했다는 점이었다. 그가 약속을 깨버린 한 여자가 지금 저 앞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게르트루드의 뒤를 약간 처져서 뒤따라가며 그녀가 지껄일 만한 일체의 경멸의 말들을 마음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이윽고 집에서 꽤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게르트루드가 길가의 돌 위에 앉아 바구니를 땅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스카프를 한층 더 얼굴 위로 끌어내렸다.
"앉으세요."
그녀는 잉그마르에게 다른 돌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해야 할 말들이 많아요."
'잉그마르가 생각만큼 힘들 것 같진 않군. 게르트루드를 만나서 얘기를 듣자면 괴로워서 못 견딜 줄 알았는데.... 이 사람에 대한 애정 때문에 스스로 질 줄 알았어.'
"결혼식 날 이렇게 찾아와서 방해하고 싶진 않았어요 하지만 제 사정이.... 전 곧 이곳을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실은 일주일 전에 떠날 예정이었는데 그때 생각잖은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걸 얘기하려고 미룬 거죠."
게르트루드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잉그마르는 마치 다가오는 폭풍우에라도 대비하듯 쪼그리고 앉아 어깨를 안으로 숙이고 목을 깊숙이 묻은 채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며 생각했다.
'게르트루드가 어찌 생각하든 내가 농장을 택한 것은 분명히 잘한 일이야. 농장이 없었다면 난 살아 있지도 못했을 테니까.'
"잉그마르"
이렇게 부르고 게르트루드는 얼굴을 붉혔다. 스카프 안쪽으로 들여다보이는 한쪽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5년 전 제가 헤르굼 신도들에게 가담하려던 일을 기억하시겠죠? 그때 저는 제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바쳤었지요. 그런데 그 마음을 거둬들여서 잉그마르에게 드렸던 거예요. 그것부터가 잘못이었어요. 그 일로 해서 제가 지독한 괴로움을 겪어야 했으니까요. 그때 제가 그리스도를 저버린 죄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을 받게 된 거죠."
잉그마르는 게르트루드가 헤르굼의 신도들과 함께 떠날 생각이라는 말을 하려 하자 곧 반대하는 기색을 나타냈다.
'게르트루드가 헤르굼 신도들과 섞여서 낯선 예루살렘에 가겠다니 그건 안 될 일이야.'
그가 아직도 그녀와 약혼한 사이였다면 별별 말을 다 주워섬겨서라도 적극적으로 그녀의 계획에 반론을 제시했을 것이다.
"그래선 안 돼, 게르트루드. 하나님은 절대 벌주시려고 그러신 게 아닐 거야."
잉그마르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했다.
"그럼요, 잉그마르. 벌주신 건 아녜요 다만 두 번째 선택의 경솔함을 제게 깨우쳐 주신 거죠. 이제 슬픔은 모두 기쁨이 됐어요. 주께서 저를 선택하시고 불러 주셨다면 잉그마르도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잉그마르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의 눈에 피로한 빛이 역력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타일렀다.
'쓸데없는 짓이야. 게르트루드를 붙잡아서 어쩌겠다는거야? 그래, 바다와 육지를 나와 게르트루드 사이에 둔다는 것 이상 좋은 일은 없어. 그래, 바다와 육지를 말이지.'
그러나 잉그마르의 마음속에선 무언가 게르트루드를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 강하게 고개를 들고 일어섰다.
"혼자서 떠나는 걸 양친께선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
"물론, 그래요. 그거야 뻔하니까 부탁하지도 않을 거예요. 아버지는 절대로 승낙하실 분이 아니구요. 저를 붙잡아두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폭력을 쓰실지도 모르죠. 그렇게 된다면 도망쳐서라도 가야죠. 그분들은 지금 제가 시골로 수공품을 팔러 다니는 줄 아세요. 결국 저는 고텐베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과 무사히 스웨덴을 빠져나갈 때까진 부모님께 알리지 않기로 했죠."
잉그마르는 마음이 아팠다. 게르트루드가 쓸데없는 억지를 부려 부모에게 모진 슬픔을 맛보게 하려는 거라고만 생각되진 않았다.
'게르트루드는 자신이 얼마나 독한 행동을 하려는 지나 알고 있을까 몰라.'
그는 그녀에게 충고를 하려다가 꾹 눌러 버렸다. 자신이 게르트루드가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을 책망할 권리가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어머니나 아버지를 얼마나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인지 모르는 건아녜요. 하지만 저는 예수님의 뜻을 다시 저버릴 순 없어요."
그녀가 살포시 웃어 보였다. 고른 치아가 슬프도록 희게 보였다.
"예수께선 저를 파멸의 길에서 구해주셨으니까요. 저의 병든 영혼을 깨끗이 고쳐 주셨어요."
그녀는 천천히 스카프를 걷어 올리고 새로운 용기를 되찾은 듯 잉그마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잉그마르는 그녀가 마음에 새기고 있는 존재와 자기를 비교하고 있음을 깨닫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조그마한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부모님께서 무척 괴로워하시겠죠."
그녀는 건조한 음성으로 되풀이했다.
"아버지는 이제 연세가 많으셔서 학교를 그만두실 때가 되었고, 그러면 여태까지보다 더 궁색한 생활을 하셔야 되겠지요. 무엇보다 아버지에겐 무언가 마음을 붙이실 일이 필요하게 될 거예요. 그렇잖으면 침착성을 잃고 성미가 급해져서 어머니도 아버지와 편안한 날들을 갖지 못하실 테고요. 두 분은 다 불행해질 거고.... 물론 제가 집에 있다면 그렇게는 되지 않을 테지만"
게르트루드는 말을 뚝 끊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켜버리는 듯한 태도였다. 잉그마르는 목이 막히고 눈자위가 뜨겁게 부풀었다. 그는 지금 게르트루드가 늙은 부모들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망설이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게르트루드가 욕설이나 퍼붓고 자극을 주려고 찾아온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마음이 활짝 열려 있었다니!'
"게르트루드"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돼. 아무튼 고마워. 그렇게까지 마음을 다치게 한 나를 믿고 찾아주다니. 부모님들은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돌봐 드릴 테니까"
잉그마르의 얼굴에서 경계의 빛이 사라졌다.
'이 여자는 나를 용서한다는 걸 보여 주려는 거야. 단지 부모님을 염려해서만은 아냐. 이렇게까지 마음이 풍요로울 수 있다니...'
"저도 잉그마르가 그럴 거라는 걸 믿고 있었어요."
그녀가 자신감 있게 한 옥타브 높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그것 말고도 다른 할 얘기가 있어요. 잉그마르는 생각지도 못할 얘기예요."
잉그마르에게 게르트루드의 모습은 마냥 신선하고 마냥 아름다우며 목소리는 마치 은쟁반을 구르는 듯 투명하게 느껴졌다.
"일주일쯤 전에 저는 집을 나왔었어요. 곧장 고텐베리로 가서는 헤르굼 신도들이 도착할 때까지 거기서 머무를 생각이었지요. 첫날 밤은 베리소나에 있는 마리 보빙이라는 가난한 과부댁에서 잤어요. 잉그마르, 이 마리 보빙이라는 이름을 잊지 마세요. 언제라도 이 마리 보빙이라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해서 당신을 찾아오며는 꼭 도와주시길 바래요."
잉그마르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에 새삼 가슴이 저려왔다.
'아! 나의 사랑, 게르트루드. 내가 잘못한 거야. 밭과 농장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야. 내가 가장 괴롭고 슬플 때 위안이 돼 줄 사람을 잃었으니. 이 여자가 이렇게 떠나 버리면, 아 이 허탈감을 어찌해야 할지....'
"그날 밤 저는 마리 보빙의 부엌에서 좀 떨어진 골방에서 잤지요. 그 여자가 '침대는 잉그마르 농장에서 경매하는 걸 사온 거랍니다. 잠이 잘 올 거예요. 아가씨'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자리에 누웠지요. 뭔가 머리 밑에 딱딱한 감촉을 느꼈지만 침구가 별로 좋지 않은 거라 그렇겠거니 생각했지요. 저는 너무 고단해서 쉽게 잠이 들었어요. 그런데 잠결에도 머리가 불편한 게 느껴져서 베개를 뒤집어 봤더니 베갯잇 한쪽에 잘랐다 꿰맨 자국이 있잖겠어요. 그 속에 뭔가 빳빳한 게 느껴져서 베갯잇을 뜯어 보니 조그마한 종이뭉치가 포장지에 싸여진 채 들어 있더군요. 사람이 돌 위에 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저는 종이뭉치를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었지요. 아침에 마리에게 줄 생각이었거든요."
게르트루드는 잠시 말을 끊고 잉그마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핏 보기에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잉그마르의 생각은 엉뚱한 데로 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손놀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기품있는 여자는 일찌기 본 일이 없어. ....하지만 난 처신을 잘못하진 않았어. 자기 자신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옛날도 있듯이 농장만이 나를 필요로 한 게 아니라 마을 전체가 내게 목을 매달고 있었단 말야.'
그러나 그는 마음이 영 좋지를 않았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게르트루드 이상으로 자기가 이 마을을 사랑했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날이 밝았지요. 마리에게 갖다 줄 양으로 종이뭉치를 집어 들었는데 글쎄 거기에 잉그마르의 이음이 써 있잖아요? 내용물을 살펴보고 나서 그걸 당신에게 가져다 주기로 결정했어요. 그 얘기는 물론 누구에게도 비밀로 했답니다."
그녀는 바구니를 뒤져 예의 그 종이뭉치를 꺼냈다.
"받으세요, 잉그마르. 제가 지금껏 말한 거예요. 잉그마르에게 물려진 유산이에요."
게르트루드는 잉그마르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그다지 기뻐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형식적으로 무관심하게 건네주는 것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차라리 내게 앙탈을 부리고 욕지거리나 퍼부을 일이지 꼭 나한테 버림받은 게 즐거운 것 같은 태도로군. 진작 이 여자의 매력이 더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잉그마르"
게르트루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대한 얘기를 하려는 듯 불렀다.
"에로프가 잉그마르 농장에 병이 나서 누워 있을 때, 그 베개를 베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그녀는 잉그마르의 손에서 종이뭉치를 집어 들곤 그것을 펼쳤다. 빳빳한 새 지폐가 그녀의 손에 잡혀져 나왔다. 모두 천 크로네짜리 지폐로서 스무 장이 들어 있었다.
"이게 에로프가 베개 속에 감춰 든 잉그마르의 재산이에요. 진작 물려받았어야 했던 거죠."
잉그마르는 게르트루드의 얼굴을, 다시 지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현기증이라도 일으킬 듯했다. 게르트루드가 돈뭉치를 그의 손에 올려놓았다. 지폐가 그의 손으로부터 힘없이 미끌어져 땅 위로 흩어져 내렸다. 그녀는 얼른 그것을 주워 잉그마르의 주머니에 집어넣어 주었다. 잉그마르의 몸이 취한 듯 휘청했다.
'아아, 하나님.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없어!'
잉그마르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다 마구 휘두르며 속으로 울부짖었다. 진작이 돈이 발견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지금은 이미 게르트루드를 잃었고 돈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다. 이제 그것이 나타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는 하나님께 묻고 싶었다. 잉그마르의 손이 무겁게 게르트루드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너는 복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어!"
"무슨 말이에요, 잉그마르?"
"그럼 뭐라고 해야 하지? 왜 발견하는 즉시 내게 가져다주지 않았지?"
"결혼식까지 기다리고 싶었던 거예요."
"바보, 바보 같으니! 진작 와 주었더라면 이렇게 돼 버리진 않았을 텐데. 나는 이 돈으로 스헨 페르손한테서 농장을 살 수도 있었잖아."
잉그마르는 양손을 머리카락 사이로 찔러 넣고 쥐어뜯으며 괴로운 듯 소리쳤다.
"그랬겠지요. 네, 그래요. 그걸 몰랐던 게 아니에요."
"그런데 무슨 심보야? 결혼식 날에 나를 찾아와서 이 돈을 건네줘서 무얼 어떡하겠어. 이젠 필요 없게 돼 버린 것을 가지구!"
"처음부터 틀린 거예요. 일주일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잉그마르는 맥없이 주저앉아 얼굴을 파묻고 처절하게 아주 처절하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 길밖에 없는 줄 알았어! 나는.... 나는 그렇게밖에는 별도리가 없는 줄만 알았다구! 그런데 이제 와서 그걸 변경시킬 수 있는 길을 발견하다니.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이 아니고 뭐야."
"내 말 좀 들어봐요. 잉그마르. 저도 그 돈을 처음 발견했을 땐 그것이 우리들에게 내려진 유일한 구원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분명히 알아두셔야 할 것은 전 이제 다른 분의 것이에요. 이젠 세상의 어떤 것에도 현혹되지 않을 거구요."
"그 돈은 게르트루드나 가져 버려! 어쩔 도리가 없다고 믿었을 땐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진 않았어. 그러나 지금은 달라. 우린 맺어질 가능성이 있었던 말야. 심장이 찢어 발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야. 견딜 수가 없다구!"
한편 잉그마르 농장에서는 모두들 신랑을 기다리다 못해 포오치에 나와서 그를 찾고 있었다.
"잉그마르! 잉그마르!"
잉그마르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잉그마르, 이러지 말아요. 저는 잉그마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생각으로 찾아왔던 거예요."
잉그마르가 슬픈 듯이 집 쪽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신부는 또 신부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군. ....일을 이렇게 만들어 놓다니. 게르트루드.... 그때 난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어서 그랬다지만, 너는 다만 나의 불행을 위한 양일을 꾸민 것 같구나. 이제 비로소 내 어머니가 첫아이를 죽여 버렸을 때 아버지의 기분이 얼마나 비통했을까를 알 수 있을 것 같군."
그는 다시 돌발적인 울음을 토해 놓았다.
"사랑해, 게르트루드! 지금까지 사랑한 그 이상으로, 아니, 여태껏 이렇게까지 게르트루드에게서 사랑을 느껴 본 적은 없었어. 사랑이 이렇게까지 지독한 괴로움인 줄도 몰랐어!"
"잉그마르"
게르트루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녀는 따뜻하게 잉그마르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며 말했다.
"당신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은 결코 가져본 적이 없었어요. 마음이 물질에 급급하면 언제나 슬픔도 뒤따르기 마련이에요."
잉그마르는 고개를 푹 꺽고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게르트루드는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집 쪽에서 사람들이 그를 찾으며 달려 나오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자기가 앉아 있는 돌을 내리쳤다.
"우린 기필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게르트루드"
그가 비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잉그마르손들은 한 번 마음 먹은 것은 반드시 손에 넣고 말지. 우리가 다시 만날 땐 사정이 달라져 있을 거야."
선임 목사 미망인의 충고
사람들은 모두 헤르굼 신도들의 예루살렘 순례를 만류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방의 유지들도, 집달리도, 재판관도, 시의원들도 온갖 힘을 기울여 그들의 생각을 단념토록 하려고 애를 썼다. 헤르굼 신도들은 자기들이 어떠한 사람들과 살게 될지조차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그 미국 사람들이 사기꾼은 아니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 먼 동방의 나라엔 법률도 질서도 없기 때문에 언제 도둑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다가 그 나라의 도로는 거칠어서 신도들의 짐은 모두 말에 실어 운반해야 했다. 의사는 그곳은 천연두나 악성 열병의 소굴로 그들이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도저히 그 풍토에서 견뎌 낼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헤르굼 신도들은 자신들도 다 알고 있는 일이여 그런 것들과 싸워서 도를 닦기 위해 가는 거라고 대꾸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그토록 황폐하게 방치해 둘 수 없으며, 자기들이 그곳을 낙원으로 가꾸어 놓을 참이라고도 말했다. 누구 하나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아랫마을에 선임 목사의 미망인인 한 노파가 살고 있었다. 꽤 나이가 든 늙은이로 남편이 세상을 뜨고부터 길 건너 교회 맞은편에 자리한 우체국 위층의 방을 빌어 살고 있었다. 웬만큼 산다 싶은 마을의 아낙네들은 이 노부인에게 문안드리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어서, 일요일이면 갓 구운 빵이나 버터 한 덩어리, 우유 한 병씩을 들고 오곤 했다. 노부인은 그네들이 찾아올 때마다 커피를 끊어 내어 얘기할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녀는 거의 귀가 들리지 않았으므로 여간 크게 말하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낙들은 그 주일에 일어난 일을 노파에게 모두 알려주려고 해도 얼마만큼이나 알아들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노파는 거의 방에서 나가는 일이 없었다. 때론 사람들이 그녀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그녀의 집 앞을 지나칠 때 창문에 드리워진 흰 커튼 사이로 그녀의 주름진 얼굴을 발견하게 되면 문득 생각하곤 했다.
'저토록 쓸쓸하게 살고 있는 노인을 잊어서야 안 되지. 뭐라도 잡술 만한 걸 가져다드려야겠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노파는 일에 점점 무관해져 갔고 흥미조차 잃어버린 듯해서, 사람들은 그녀가 마을의 일들을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항상 낡은 성서의 주석서나 읽고 앉아 있을 뿐으로 이제는 거의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녀에겐 함께 살며 돌봐주는 충실한 하녀 하나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성격이 비슷해서 도둑과 새앙쥐를 두려워하는 거며 불을 무서워하는 것, 불을 켜 두느니 차라리 어둠 속에 앉아 있는 편을 선택하는 것까지도 똑같았다.
최근 헤르굼 신도가 된 사람들 중에도 그녀를 찾아와 간단한 물건들을 놓고 가곤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을 달리하여 개종을 한 이후로는 이제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오지 않는 까닭을 노파도 알고 있는지 어떤지를 아는 사람도 물론 없었다. 또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이주한다는 말을 듣고 있는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노파는 산책을 하고픈 생각에 하녀에게 말 두 마리가 끄는 사륜마차를 준비하도록 시켰다. 하녀는 깜짝 놀라 이를 만류하려 했으나 노파는 못 들은 척 소리쳤다.
"사라레나, 산책을 좀 하고 싶다니까. 어서 마차를 부르도록 해!"
사라레나는 별수 없이 목사에게로 가서 마차를 빌렸다. 그것은 꽤 고풍스러운 마차였다. 사라레나는 마차를 부르고 깊숙이 처박혀 있던 헌 모피 망토와 낡은 빌로드 보닛을 꺼내어 솔질을 하여 바람에 말렸다. 준비가 다 끝나고 그녀는 노파를 부축해서 계단을 지나 마차에 올려 앉혔다. 그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노파는 나무나 노쇠해 있어 금방 쓰러질 것만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는 간신히 마차에 올라앉아 마부에게 곧 잉그마르 농장으로 가지고 일렀다.
잉그마르 농장 사람들은 노부인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를 부축해서 거실로 안내했다. 식탁에는 많은 헤르굼 신도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요즘 한자리에 모여 간소한 식사를 함께 들기로 되어있었다. 메뉴는 주로 쌀밥과 차와 그 밖의 간단한 음식들로, 이는 다가올 사막의 횡단 여행에 대비한 것이었다.
노파는 방안을 두루 훑어보았다. 몇 사람이 그녀에게 말을 건네려 했으나 그날따라 그녀는 아예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녀가 갑자기 손을 흔들며 귀먹은 사람이 흔히 그렇듯 메마르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여러분이 통 기다려도 오질 않길래 내가 직접 왔어요. 예루살렘아 가지 말라고 충고하러 온 거예요. 거긴 좋지 않은 데예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곳도 바로 그곳이라구요."
카린이 무엇인가 말하려 했으나 그녀는 못 본 척하며 막무가내로 지껄였다.
"아주 나쁜 곳입니다. 그리스도가 못 박힌 곳이 거기예요. 나쁜 사람들만 살구 있는 데지요. 오늘 내가 여기 온 것은 여기는 좋은 집안이기 때문입니다. 잉그마르손, 언제나 좋은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마을에 남아 있어야 해요."
말이 끝나자 그녀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그녀는 이제 자기 몫의 마지막 봉사를 마친 것이다.
노파가 떠난 뒤 카린은 울음을 터뜨렸다.
'아, 알 수가 없어. 그곳으로 가는 일이 정말 잘못된 것일까.'
카린은 아주 극히 잠깐, 자신의 계획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의구심은 쉽사리 사라졌으며 잠깐 가졌던 마음의 동요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드디어 헤르굼 신도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7월의 싱그러운 아침, 마차와 짐 마차의 긴 행렬이 잉그마르 농장을 출발했다. 그들은 일단 역으로 말을 몰고 갈 예정이었다. 마을을 벗어나자면, 일단 무크레미일레라고 일컫는 다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을 지나야 했다. 거기엔 소문이 지독히 나쁜 인간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그들을 하나님이 바빴거나 혹은 한눈을 팔고 있을 때 제멋대로 태어난, 그야말로 하나님의 실수로 태어난 인간들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곳에는 더러운 누더기를 걸친 한 무더기의 아이들이 하루 종일 빈들거리며 놀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마차가 한 대씩 지나갈 때마다 소리를 지르거나 그 안에 앉은 사람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게 유일한 놀이인 것 같았다. 또한 주름살 투성이의 노파가 술에 취해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는가 하면, 밤낮으로 말다툼을 하거나구타하는 것을 일삼는 한심한 부부도 있었다. 그들은 주로 훔치거나 동냥을 해서 생계를 이어 나갔으므로 어느 쪽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헤르굼 신도들이 오랜 세월을 비바람에 시달린 듯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앞에 이르렀을 때, 주름살 투성이의 한 늙은이가 맨정신으로 똑바로 서 있었다. 그녀는 리나라 불리는 사람으로 그 길 한복판에서 술에 곤드레 만드레로 취해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지껄이며 서 있어야 할 노인이었다. 네 명의 아이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여느 때 같지 않게 몸단장을 할 말끔한 행색이었다.
선두로 달리던 마차가 그들을 발견하곤 서서히 말의 속력을 늦추었다. 그들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을 낮추는 어른들 틈에서 아이들의 흐느낌은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거지 리나가 깨끗한 몸가짐으로 길가에 나와 서 있는 모습은 그들에게 무척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리나는 오늘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전송하기 위해 술도 먹지 않고 손자들까지도 머리를 빗겨 가지고 데리고 나와 진지한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헤르굼 신도들이 느릿느릿 그러나 금방 리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 사람들은 천당에 가는 거란다.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거야."
리나가 울음을 터뜨리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이 이 길바닥에서 있구나. 여전히 이러고만 있어."
마차와 짐 마차의 행렬이 마을을 절반쯤 지나오자 강 위에서 흔들거리고 있는 부교 앞에 다다랐다. 부교의 앞부분이 급경사가 져 물 가까이까지 늘어져 있었다. 두 군데의 약간 높은 부분의 밑으로는 작은 배나 뗏목이 지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아무튼 이 다리를 건너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심하게 경사진 부분들은 누구도 올라가기를 두려워했다. 더군다나 다리에 깐 널판지는 쉽게 썩어 버리기 때문에 자주 갈아주지 않으면 안 되어 사람들의 신경을 무던히도 쓰이게 했다. 해빙기가 되어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밤낮으로 떠내려오는 얼음으로 인해 부서져 버리지 않도록 늘 주의를 해야 했다. 비라도 쏟아질라치면 갑자기 불은 비로 다리 전체가 물살에 말려들어 떠내려가기 일쑤였으므로 단단한 방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그 부실하기 짝이 없는 다리를 사랑하고 있었고, 동시에 자랑으로 여겼다. 다리를 건널 때마다 그들은 늘 감사하는 마음이 용솟음쳤다.
마차가 지나가자 다리는 악을 쓰며 몸을 흔들어댔다. 널빤지의 벌어진 틈으로는 물이 솟아올랐고, 말은 다리털을 몽땅 적시는 봉변을 당해야 했다. 사람들은 자기들 공유의 재산인 정든 다리가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슬퍼졌다. 집이나 농장, 숲, 목장 등은 주인들이 모두 달랐지만 다리만큼은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닌 그들 모두의 재산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공유재산이 그것뿐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깨끗하게 흰 칠을 한 학교라든가, 전도관, 다리 건너편 자작나무 숲에 가려진 교회, 이 모두가 그들이 함께 누리던 것들이었다. 아니다. 그들은 더 많은 것들을 공유했었다. 다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정경들 - 삼림으로 우거진 제방 사이를 유유히 흐르며 수면 가득 눈부신 햇볕으로 반짝이던 여름의 강, 온통 푸르고 맑고 광활한 산협의 경치, 이 모든 것이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로부터 떠나는 것이었다. 정들었던 고향산천과의 영원한 결별의 순간에 그들은 서 있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고 있는 일행들은 다리 중간 지점에 이르자 찬송가 한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다시 만나리
저 하늘의 에덴동산에서 만나리
그들의 노래를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고향의 푸른 산과 산들거리는 나무를 향해 흐느낌과 눈물에 목이 메어 이별의 노래를 불렀다.
"아, 사랑하는 나의 고향, 내 나라여, 희고 붉은 집들이 나무 사이로 보이고 평화로운 농장이 있는, 기름진 밭과 푸른 목장, 과수원과 숲들....나의 산천이여, 갈라지는 긴 골짜기 끝에 닿은 강이여, 반짝이는 햇살이여, 우리 다시 만나길 기도하노라, 오 나의 사랑, 나의 고국이여!"
긴 마차의 행렬이 다리를 건너자 묘지 앞에 이르렀다. 긴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보이고 선 묘비에는 륭 집안의 조상의 뼈가 묻혀 있다는 말만 전해질 뿐 이름도 날짜도 새겨 있지 않았다.
예루살렘을 향한 무리에 섞인 륭 비오른 오라프손은 묘지를 바라보며 어린 날의 회상에 잠겨 있었다. 어린 날의 언젠가 그는 동생페르와 묘지 앞의 돌 위에서 놀다가 크게 싸운 일이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로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며 한바탕 크게 다퉜다는 것만은 아직도 기억할 수 있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다투고 있을 때 그들은 몇 번이고 돌 위를 차분히 두드려대는 이상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륭비오른과 동생 페르는 두려워 곧 싸움을 그치고 둘이 손을 꼭 붙잡고는 그곳을 살짝 도망쳐 나왔다. 그 두 사람은 그 후로 묘비를 볼 때마다 어릴 때 그 날의 일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 륭 비오른이 지금 묘지 앞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심코 그곳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머리를 감싸고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틀림없는 동생 페르였다. 륭 비오른은 얼른 말을 세웠다. 그는 일행들에게 기다려 달라는 손짓을 한 뒤 묘지 앞의 동생에게로 다가갔다. 페르 오라프손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농장을 파셨더군요, 형님"
"음, 그래. 내가 가진 것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기 위함이었지."
"농장이 어떻게 형님 겁니까?"
"아니 그럼, 내 것이 아니란 말이냐?"
"그래요. 그건 오라프손 집안 것이지 절대 형님 것만은 아닙니다."
륭 비오른은 아무런 대꾸 없이 동생의 다음 말들을 기다렸다. 무슨 말을 하든 두렵지는 않았다. 그는 동생이 돌에 앉아 있을 때는 뭔가 온화한 분위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란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는 농장을 다시 샀어요."
륭 비오른은 깜짝 놀랐다. 지금 동생은 자기가 판 것을 다시 샀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너는 오라프손 집안에서 농장이 사라지는 걸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구나."
"천만에요, 형님. 저는 그런 이유만으로 농장을 살 만큼 부자가 아녜요."
륭 비오른은 알 수 없다는 듯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농장을 다시 산 까닭은 형님이 다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였어요."
륭 비오른은 가슴이 꽉 막히는 듯했다.
"그리고 조카들이 돌아올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고요."
비오른은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며 두 팔로 동생의 목을 감싸 안았다.
"또.... 형수님을 위해섭니다.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형님. 언제든지요."
"오, 페르. 나보다는 네가 천당에 가야 할 것 같구나. 나는 집에 남아 있는 게 좋겠어. 네가 나 대신 예루살렘에 가려무나."
"아닙니다. 형님"
페르는 미소를 함빡 머금었다.
"제가 집에 있는 게 더 좋습니다."
"아니야, 너는 천당에 가야 해."
페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나를, 그동안의 모든 잘못들을 용서해 주렴."
륭 비오른은 동생의 어깨에 머리를 묻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일어서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은 소리가 나지 않는데요? 형님, 기억하시겠어요?"
"그럼, 그럼. 네가 여기 와 있으리라곤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우린 한동안 서먹했어요."
"오늘 나를 만나면 싸우게 될 거라고 생각했냐?"
"그렇진 않았어요. 하지만 형님이 떠나 버린다는 생각에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지요."
그들은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고 한길로 내려섰다. 페르는 곧장 형수에게로 가 따뜻하게 손을 잡았다.
"형수님, 륭 농장을 다시 샀습니다.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은 형수님께서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걸 알려드리려는 겁니다."
그는 다시 조카의 손을 잡아 쥐었다.
"꼭 잊지 말아라. 너에겐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는 집과 땅이 있단다."
그는 차례차례 조카들의 손을 잡아주면서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그는 두 살 난 어린 에릭에게 다가갔다. 에릭은 그를 쳐다보며 아무런 영문도 알지 못한 채 방긋방긋 웃어댔다.
"꼭 기억해 둬라. 너희들. 에릭이 자라서 이곳에 오고 싶어할 때면 언제든 돌아갈 집이 있다고 꼭 알려줘야 해."
이렇게 눈물겨운 이별의 순간이 지나갔다. 사람들은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의 길을 재촉했다.
묘지를 지나고 그들은 전송을 나온 많은 친척들과 벗들을 만났다. 모든 사람이 손을 잡아 보려 했고 한마디라도 이별의 말을 나누려 하는 탓으로 그들은 꽤 오래 시간을 지체했다. 마을을 지나니 길가에는 그들의 떠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집집마다 계단에 사람들이 서 있고, 거리가 먼 곳의 사람들은 제방이나 언덕에 올라서서 이별의 손들을 저었다.
긴 행렬은 느릿느릿 이들 앞을 지나 시의원 할스 클레멘손의 집앞에서 멈추었다. 군힐드가 가족들과 작별하기 위해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예루살렘에 가기로 결심하면서부터 잉그마르 농장에서 기거해 왔다. 부모의 반대로 늘 신경전을 벌이기보다는 그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차에서 내려서자 주위의 분위기가 무섭도록 스산하게 느껴졌다. 집 밖이나 창문에는 그림자 하나 얼씬대지 않았으며 대문은 자물쇠로 꼭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울타리를 넘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현관문도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향했다. 거기도 마찬가지였다.문이 안으로 걸려 있었으므로 그녀는 한참을 두들겨 보았다. 그녀는 문을 바깥쪽으로 잡아당겨 막대기를 집어넣었다. 간신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엌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실도 안방도 다 뒤져 보았으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군힐드는 부모님께 작별 인사도 없이 그냥 떠나 버리기는 싫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늘 필묵과 종이 따위를 넣어 두는 이중 책상으로 다가가 뚜껑을 들어 올렸다. 잉크를 찾기 위해 책상 서랍 속의 칸막이 된 선반 뚜껑을 뒤지다 보니 문득 눈에 익은 자그마한 상자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결혼 선물로 받은 것으로, 군힐드는 어릴 적에 어머니가 이따금 그것을 보여주던 생각을 떠올렸다. 하얗게 에나멜을 입혔으며 뚜껑에는 육필로 그린 꽃무늬가있는 예쁜 상자였다. 뚜껑 안쪽에는 목동이 한군데로 몰려 있는 어린 양떼들에게 피리를 불어 주고 있는 그림도 붙어 있었다. 군힐드는 상자를 집어넣으려다가 그 목동의 그림을 한 번 더 볼 생각으로 다시 뚜껑을 열었다.
군힐드의 어머니는 언제나 이 상자 안에 귀중한 물건들을 간직해두고 있었다. 가령 그녀가 늘 끼고 있던 낡아빠진 결혼반지라든가 아버지의 구식 회중시계, 그녀 자신의 황금 귀걸이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물건들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고 한 통의 편지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그것은 군힐드가 쓴 편지였다. 1, 2년 전에 그녀는 배편으로 시리안 호를 건너 모라에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배가 뒤집히게 되었고 같이 탄 사람들 몇 사람은 물에 빠져 죽었다. 그때 군힐드의 부모들은 딸아이도 죽었다는 통지를 받았었는데 나중에 군힐드로부터 살아 있다는 편지를 다시 받게 되었던 것이다.
군힐드는 가슴이 뭔가로 쿡 찔리는 듯했다. 지금이 상자에 있던 다른 물건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자신의 편지만이 들어 있는 까닭은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어머니는 딸이 무사하다는 편지 이상으로 귀중한 게 없을 만큼 군힐드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군힐드는 온몸의 피가 식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죄책감으로 죄어들었다.
'아, 나는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하려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녀는 인사말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접어두고 얼른 집에서 나왔다. 마차에 오르니 사람들은 부모님께 인사를 했냐는 둥 여러 가지 물어댔지만 그녀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마차가 움직여 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묵묵히 앞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줄곧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하려는 거야. 아, 어머니는 정말 돌아가실지도 몰라. 나는 영원히 불행해지고 말 거야. 이건 뭔가 모순이야.'
마차가 숲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면서 신도들은 문득 낯선 사람 두 명이 줄곧 자기들을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을에 있는 동안은 작별 인사를 하느라 모두들 정신이 없었으므로 전혀 몰랐는데 숲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마차는 줄곧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달리고 있었다. 마차들은 보통 흔한 짐 마차여서 어떤 게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수도 없었고, 설혹 다른 한 대의 마차가 낀다 해도 수를 헤아려 보지 않는 이상은 그 사실을 알 리가 만무했다.
그 낯선 마차는 흰 수염을 기른 늙은 할아버지가 모는 것이었는데, 노인은 꽤 허리가 굽었고 손은 주름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이 노인이 누군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 옆에 앉은 여인에겐 모두들 낯익은 느낌을 갖고 있었다. 여인은 검은 어깨걸이로 머리를 푹 감싸고 있어서 제각기 그녀의 몸매와 크기를 어림잡아 누구일거라는 추측들을 가져봤지만, 서로 일치됨 없이 빗나갈 뿐이었다. 한쪽에서 군힐드가 소리쳤다.
"우리 어머니예요!"
이스라엘 토마손의 아내는 맞받아 소리쳤다.
"아냐, 우리 언니 같아."
팀즈 할보르는 그녀가 에바 군네르스투테르 할머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상한 마차는 줄곧 그들을 따라왔고, 그 묘령의 여인은 한 번도 어깨걸이를 끌어 내리지 않았다. 헤르굼의 신도 가운데 어떤 이에게는 그녀가 사랑하던 여인이 되기도 했고, 어떤 이에게는 두려워 한 사람도 되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녀는 자기들이 버리고 온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길이 넓어져서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게 되자 그 이상한 마차는 행렬의 맨 앞까지 달려가서는 왼쪽으로 비켜서서 그들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묘령의 여인은 그들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으나 누구도 그녀를 파악하여 단정 지을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정거장까지 끈질기게 따라왔다. 그녀의 얼굴을 보겠다고 벼르고 있던 사람들이 우루루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마차의 행렬이 마을을 지나는 동안엔 누구 하나 일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외출복 차림으로 길가에 나와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떤 사람들은 몇 마일씩 따라 걷기도 했다. 그중 단 한 사람, 헤이크 마츠 에릭손만은 밭에 나와 일을 하고 있었다. 땅에서 돌을 들어내는 일이었는데, 그는 그 일이 어린아이 장난처럼 수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마차를 몰고 가다가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다. 헤이크 마츠 에릭손은 숲에서 쇠 지렛대로 돌을 파내어 돌담을 쌓고 있었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돌을 캐내어 무겁게 끌어내는 걸 되풀이했다. 멀리 있는 가브리엘의 눈으로도 그 돌의 무거움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헤이크마츠는 돌을 들어서 힘차게 돌담 위에 던져 올렸다. 그들은 서로 부딪쳐 불꽃이라도 튀길 것만 같았다. 헤이크 마츠는 아들 가브리엘이 어렸을 때 만큼이나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부림을 당하는 노예와 같았다. 슬픔이 그를 꼭 죄고 있었지만 그는 더 큰 돌을 파헤쳐 내어 다시 그것으로 돌담을 쌓는 일에만 몰두했다.
행렬이 지나가고 잠시 후 심한 뇌우가 일어났다. 모든 사람들이 피할 곳을 찾아 뛰었다. 헤이크 마츠도 뛰려다가 멈칫 멈춰 서서는 아랑곳 없이 일을 계속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딸아이가 문간에 나와 그를 불렀다. 그는 별로 시장기를 느끼지 않았고 뭐든 좀 먹어 두는 게 좋을 거라고는 생각하면서도 일을 중지하지는 않았다.
그의 아내는 가브리엘을 따라 정거장에 나갔다. 그녀는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에게 아들이 떠난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그는 귀 기울이지 않고 계속 일만 했다.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그는 그저 죽기 살기로 일하는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몰려 나와서 그를 바라보다가 제집으로 들어가서는 그가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고 쑥덕거렸다.
어스름한 밤이 되어서까지도 헤이크 마츠는 일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움직일 힘이 남아 있는 한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슬픔에 함락당할 것만 같은 지독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가 나와 서서 조용히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숲의 돌은 이제 거의 치워졌고 돌담도 높이 쌓여졌다. 그런데 저 작달막한 늙은이는 거인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돌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이웃 사람들이 나와 보곤했지만 그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드디어 캄캄한 어둠이 대지를 빈틈없이 채웠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헤이크마츠 에릭손은 일을 멈추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귀엔 그가 집어 올리는 돌과 돌이 서로 부딪치는 육중한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는 마침내 쇠 지렛대를 집어 올리려고 허리를 굽히다간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는 슬픔이고 뭐고 한 가지도 생각할 틈이 없이 잠 속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는 잠이 깨어 집으로 돌아와서도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나무의자에 몸을 내던지고는 다시 깊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할보르의 신도들이 도착한 역은 숲속의 넓은 개척지에 새로 세운 것이었다. 시가나 밭, 정원 따위는 없었지만 이 황야에 앞으로 철도 도시가 생길 거라는 추측으로 온갖 것들이 대규모로 설계되고 있었다.
역에는 널찍한 석조 플랫폼이 마련되어 있었고, 넓은 수화물 축적장과 자갈을 깐 긴 철길이 가로놓여 있었다. 매점 겸 공장 두 가구, 사진관 한 가구, 여관 한 가구만이 자갈이 깔린 사거리 넓은 광장 주변에 세워져 있을 뿐, 나머지 공지는 그루터기만 남아 있는 정지하지 않은 땅이 전부였다.
여기에도 달 강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어두운 숲으로부터 성난 급류가 되어 쏟아져 나와 포말을 터뜨리며 앞으로 돌진했다. 이것이 오늘 아침 신도들이 건너온 그 장엄한 강의 일부라고는 도무지 믿겨 지지 않았다. 밝고 휘황한 골짜기는 이미 없었고 어둠만이 전나무로 우거진 고지대에 올올이 스며 있을 뿐이었다.
성지로 가기 위해 부모들을 따라온 아이들은 이 황량하고 음습한 곳에서 마차를 멈추자 두려운 마음에 그만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떠나오기 전만 해도 예루살렘을 여행한다는 일을 매우 즐거워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집을 나설 때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막상 역에 도착하고 보니 떠난다는 게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른들은 마차에서 짐을 끌어내어 화차에 싣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누구 하나 쉬고 있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아이들을 돌봐줘야 한다던가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가 살펴본다든가 하는 생각을 갖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모여 앉아 앞으로의 일들을 궁리했다. 잠시 후 그 중 나이가 좀 든 아이들이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고 역으로 부터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로 짝을 이룬 이 행렬은 그들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넓은 모래밭을 넘었다. 아이들은 계속하여 걸었다. 그루터기의 땅을 지나고 강을 건너서 아이들은 어두운 숲속으로, 숲속으로 집을 향해 가는 것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던 한 아낙네가 문득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먹을 거라도 줘야겠다는 생각에 음식 바구니를 열고 아이들을 불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한 아이의 모습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 사람의 남자가 아이들을 찾으러 나섰다. 그들은 모래 위의 조그마한 발자국행렬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다. 저만큼 앞에 아이들의 뒷모습이 길다랗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소리쳐도 아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진, 전진하여 갔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어둠 속을 달렸다. 아이들도 내달리기 시작했다. 작은 몸들이 어찌할지 몰라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달려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발을 가누지 못하고 곤두박질쳤다. 계속 내닫던 아이들도 모두 우뚝 멈춰섰다. 비참하고 슬픈 아이들의 모습이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 조그마한 가슴들을 움켜쥐고 오열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너희들, 대체 어딜 가려는 거냐?"
한 어른이 물었다.
제일 나이 어린아이가 발작적으로 자지러질 듯 울어 젖혔다.
"우린 예루살렘에 가지 않을래요. 집에 가게 해주세요."
아이들은 어른들의 손에 끌려 역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기차에 올라탄 뒤에도 오래도록 소리 내어 울면서 훌쩍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가게 해주세요."
"우린 예루살렘에 가지 않을래요. 집에 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