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위대한 잉그마르
전도관과 예루살렘
80년대 초엽, 옛 잉그마르손 집안이 살고 있던 마을에서는 새로운 종교를 갖거나 새로운 형식의 예배를 보는 일이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종파가 달레카를리아 주의 다른 마을에서는 여기저기에 일어나, 새로운 의식에 따라 사람들은 온몸을 물에 담그러 강이나 호수를 찾아 나섰지만, 잉그마르손 마을의 사람들은 침례교로 알려진 새로운 종파에 대해 "저런 일은 아콜레보나 가그네프에 사는 자들에겐 알맞을지 모르나 우리 마을 사람들에겐 조금도 반가운 게 못 돼" 하며 비웃음을 던졌다.
이곳의 사람들은 옛 풍습이나 습관에 집착하고 있었으며, 일요일에 반드시 교회에 나가는 것도 그런 사고방식 탓이었다. 아무리 혹독한 추위가 닥쳐도 마을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 나갔다. 어쩌면 그럴수록 교회에 나가야 했는지도 몰랐다. 영하 20도까지 기온이 뚝 떨어지는 겨울날에 불을 피우지 않은 교회에서, 문간까지 가득 사람이 들어차지 않고서는 도저히 예배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도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드는 것은 뛰어난 목사나 기막힌 설교자 때문은 아니었다. 그 무렵 사람들은 설교를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교회에 나갔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황량한 벌판의 시골길에서 살을 에는 듯한 바람과 싸우며 사람들은 생각했다.
'주님께선 내가 이 시리고 추운 아침에도 어김없이 교회에 나가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주실 게야.'
이것만이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설교자가 목사직에 임명되고부터 일요일마다 신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말 이외에는 한 마디도 지껄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탓할 바가 아니었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현재 얻을 수 있는 것만큼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듯했다. 그들은 목사가 읽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고 있어서, 자연히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다만 학교의 교장이나 의식있는 한두 사람의 농부들만이 이따금 자기들끼리 이런 말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목사님은 설교 자료가 한 가지밖에 안 되는 것 같군. 하나님의 지혜라든가 하나님의 지배라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이야기하질 않아, 이교도가 밀려들기 전까지는 그것도 괜찮겠지. 하지만 이렇게 허술해서야 첫 공격만으로도 대번에 그냥 허물어지겠는걸."
마을 사람들이 속되다고 하는 타 종파의 설교자들은 대개가 이 마을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 "거긴 가서 뭘 해? 그곳 사람들은 깨우침을 싫어하는데"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설교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이웃 마을의 이른바 <선각자>들도 모두 잉그마르손 마을의 교인들을 죄인으로 여겼고, 그들의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 종은 '너희들의 죄에 감싸여서 잠들지어다, 너희들의 죄에 감싸여서 잠들지어다!'하고 울린다고까지 말했다.
잉그마르손 마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교회 종이 그런 식으로 모독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늙은이고 젊은이고 할 것 없이 모두 격분했다. 그들은 종이 울릴 때마다 어김없이 기도를 올렸고, 밤마다 참회의 기도 시간이 되면 남자는 모자를 벗어들고 여자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여 '주기도문'을 외는 동안 줄곧 서 있기도 했다.
여름날의 해 질 무렵엔, 첫 번째 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움직이던 낫과 쟁기가 멎었고, 경운기도 짐을 잔뜩 실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순간만큼 하나님이 위대하며 거룩하게 여겨지는 때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예수가 종소리를 통해 모든 신도들의 머리에 축복을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교구에 가르침을 주는 사람으로 대학 과정을 마친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 교장은 신분이 낮은구식 농부로, 독학으로 공부한 스톰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스톰은 백 명의 아이들 정도는 혼자서 다룰 수 있다고 자부하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30년 이상이나 이 마을에 머문 단 한 사람의 교사였으며,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스톰은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인 행복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겼으므로, 사람들이 설교사답지 못한 목사를 찾을 때면 몹시 신경이 쓰였다.
목사가 뜻하지 않게 신식 세례방식을 채택하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지만, 한술 더 떠서 성찬식까지도 새로운 방식을 채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스톰 교장은 자기는 가난했으므로 마을의 유지들은 찾아다니며 설득을 하여 전도관을 세우기로 작정했다.
"아시다시피 나는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앙대로, 마을 사람들을 강하게 하기 위한 설교를 원합니다. 만일 다른 설교자들이 나타나서 새로운 세례 방법이나 성탄을 들고 들어온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요? 또한 무엇이 진짜 교리이며 무엇이 가짜 교리인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은 어찌 되겠습니까?"
마을의 목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스톰을 좋아했다. 사람들은 목사와 교장이 학교와 목사관 사잇길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마치 이야기할 게 끝이 없다는 듯이 나란히 거니는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목사는 또한 저녁 무렵에 어슬렁어슬렁 교장댁에 들러서 장작이 타고 있는 따스한 주방에 앉아 스톰의 부인 스티나와 한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어떤 때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그 집을 찾았다. 아내가 늘 앓고 있어서 집안에선 단란함이나 즐거움을 찾을 수가 없어 쓸쓸하고 적적했던 것이다.
어느 겨울밤, 스톰과 스티나는 부엌의 난로가에 앉아 낮은 음성으로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선 열두 살 난 계집애가 혼자 놀고 있었는데, 이 소녀는 그들의 딸로서 이름은 게르트루드였다. 소녀는 연한 황갈색 머리와 토실토실한 장밋빛 볼을 가진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흔히 학교 교사의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약삭빠르거나 능청스러운 티는 조금도 없었다.
방 모퉁이는 게르트루드의 놀이터였다. 거기에다 그녀는 색유리 조각이나 부서진 찻잔과 쟁반, 냇가에서 주워 온 돌멩이, 네모난 나무토막 따위의 잡동사니를 가득 모아 놓고 있었다.
부모들은 그날 밤 게르트루드가 마음껏 놀도록 내버려 두었다. 누구 하나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놀이 이외에 공부를 해야 한다든가 어떤 다른 일을 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밤엔 아버지를 돕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애.'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게르트루드는 방 한쪽에서 아주 큰 일에 착수하고 있었다. 마을을 만들어 볼 작정이었던 것이다. 강과 다리, 교회와 학교가 있는 교구 전체를 만들 생각이었다. 물론 모든 것이 완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을 모형은 이제 거의 완성되어 갔다. 마을을 에워싼 나직한 산들은 크고 작은 돌맹이로 만들었다. 틈새마다 자그마한 소나무 가지를 빽빽하게 심고, 뾰쪽하게 모가 난 돌 두 개로 강 양쪽에다 크라크 산과 오르프의 봉우리를 똑바로 세웠다. 산 사이에 있는 길다란 골짜기는 어머니의 화분에서 퍼 온 흙으로 덮었다. 여기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한 가지 골짜기의 꽃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꽃이나 보리가 눈에 띄지 않는 이른 봄이라는 점을 구실로 위안을 삼았다.
골짜기를 흐르는 넓고 아름다운 강은 길쭉한 유리 조각으로 근사하게 꾸밀 수 있었다. 마을의 양쪽을 연결하는 다리는 물 위에서 쉴 새 없이 흔들거렸다. 꽤나 멀리 위치한 농장이나 곡간을 붉은 벽돌 조각으로 표시했다. 제일 북쪽 끝에는 밭과 목장 사이에 잉그마르 농장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산기슭에 클레젠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남쪽 끝에는 폭포가 있는 물살 빠른 강이, 골짜기를 지나 산을 가로질러 가는 곳에는 베리소나 주물공장이 서 있었다. 강을 따라 만든 시골길에 모래와 자갈을 깔자 비로소 전경이 완성되었다. 평원 위나 오두막 근처에는 조그만 숲까지도 여기저기 만들어 놓았다. 게르트루드가 온 마을을 한눈에 바라보려면 그저 유리와 돌과 흙 또는 나뭇가지만으로 꾸며진 이 구조물들을 한번 쓱 훑어보기만 하면 되었다. 게르트루드는 그것을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나 그녀는 고개를 들고 어머니를 불러 이 완성된 마을을 구경시키려다가 그만두었다. 어머니로 하여금 자기에게 주의를 돌리도록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르트루드는 모형 마을을 만드는 데 가장 어려운 일을 착수해 들어갈 차례였다. 그것은 강 양쪽에다 도심 거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자면 돌과 유리 조각을 많이 움직여야만 했다. 주 장관의 집을 만들자니 상인의 가게를 밀어내야 했고, 의사의 집 옆에는 판사의 집을 만들 만한 여분이 없었다. 거기에는 교회와 목사관도 있었으며, 약국과 우체국, 헛간이나 창고과 딸린 농가, 여관, 전신국 등이 모두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런 것들을 빠짐없이 기억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내 흰 집과 붉은 벽돌집의 시가가 초록색 숲에 끼여 들어갔다. 이제 남아 있는것은 학교를 만드는 일뿐이었다. 게르트루드가 지금껏 무척 애를 쓴 것은 마지막에 가서 학교를 잘 세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학교는 넓은 공지가 필요했고, 거기에는 또 커다란 운동장과 한가운데엔 깃대를 세운 잔디밭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강가를 택했다.
게르트루드는 학교를 짓기 위해 특별히 좋은 나무토막과 돌조각을 남겨두었다. 이젠 어떻게 하면 훌륭하게 지을 것인가만이 문제인 것이다. 그녀는 아래층과 2층에 넓은 교실이 있고, 자신의 가족이 살고 있는 것처럼 큼직한 부엌과 방이 딸린, 사실과 똑같은 것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자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자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놀고 있도록 놔두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그때 문간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면서 누군가가 툭툭 눈을 터는 소리가 들렸다. 게르트루드는 다시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그녀는 목사님이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러 오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늘 밤엔 마음대로 놀 수 있겠어!'
그녀는 자신감을 가지고 마을의 절반은 될 커다란 학교를 만들기 시작했다.
스티나는 문간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얼른 일어나서 낡은 안락의자를 벽난로 옆에 끌어야 붙이며 남편을 향해 말했다.
"오늘 밤 그 말씀을 하실 생각이세요?"
"응"
스톰이 대답했다.
"분위기가 자연스러울 때 말하는 게 좋지."
이윽고 목사가 들어섰다. 추위로 몸이 거의 얼어붙은 터라, 난로가 있는 후끈후끈한 방에 들어서자 그는 기분이 좋아져서 언제나처럼 말이 많았다. 늘상 저녁때쯤이면 어슬렁어슬렁 나타나서 크고 작은 세상사를 지껄여댈 때의 목사만큼 사람 좋은 인물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우둔한 설교자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자신감 있게 청산유수로 세상일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간혹 영혼에 관한 것을 묻기라도 할라치면 그는 얼굴을 붉히고 더듬거리며 주의를 끌만한 얘기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하나님은 슬기롭게 지배하신다."는 정도의 말이 전부였다. 목사가 기분 좋은 듯 앉아 있을 때 스톰은 별안간 그를 바라보며 유쾌한 듯이 말했다.
"목사님께 얘기해야 할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전도관을 세울 생각입니다."
목사는 안색이 파리해지면서 힘없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뭐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스톰 선생?"
그가 신음하듯 말했다.
"이곳에다 전도관을 세울 작정이라구요? 그럼 나나 교회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겁니까?"
"아니요, 교회와 목사님은 여전히 필요하겠지요."
스톰이 확신 있는 태도로 말했다.
"내 목적은 전도관을 통하여 교회의 번영을 촉진하려는 겁니다. 너무나 많은 종파가 우리나라에 생겨났으나, 어떻게 하든 우리 교회도 새롭게 변모와 발전을 해야죠."
"나는 스톰 선생을 친구로 알고 있었는데."
목사가 슬픈 듯이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믿고 기꺼운 마음으로 찾아왔는데, 전도관 얘기로 단번에 맥이 풀리고 잔뜩 혼이라도 난 듯 멍멍한 느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스톰은 목사가 왜 이렇게 괴로워하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 한때 이 목사는 매우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학창시절 한때의 방종으로 오점을 남겼던 것이 오늘날까지 그에게 타격이 되어 오고 있었다. 목사는 그만 낙심하여 사고력이 마비된 모양으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목사님."
마침내 스톰이 낮은 음성으로 되도록 친근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스톰 선생, 나도 내 자신이 적절한 설교자는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이 나의 생계를 막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군요."
스톰이 부정적인 몸짓을 보였다. 그런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는 뜻이었지만 말로 표현하기가 묘연했다.
스톰은 육십의 나이에도 모든 책임 있는 직무를 도맡아 할 만큼 여간 정정하지 않았다. 그는 목사와는 아주 상반되는 모습으로, 달레카를리아 주의 남성 중에서도 가장 훤칠했으며 검은 머리칼에 구릿빛 살갗, 남자다운 용모에 체격도 튼튼했다. 목사는 가슴이 좁고 머리가 벗겨진 조그만 사나이였다.
스티나는 당당한 입장의 남편에게 그만두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남편의 태도에는 그럴 만한 기미가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스톰은 솔직하게 요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이 마을에 이단자가 침입할 게 틀림없으니 교회의 예배 이외에 다른 형식으로 신도들에게 설교할만한 집회소를 갖는 게 매우 절실하며, 거기서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부분을 고르거나 아니면 성서 전체를 해설할 수도 있고, 또 쉽사리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은 함께 의논해서 들려줄 수도 있도록 하려는 의도이지 다른 뜻은 없다는 게 스톰의 설명이었다.
스티나는 다시 남편에게 그만두라는 눈짓을 했다. 그녀는 남편이 이야기하는 동안 목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사람들에게 가르침이 될 만한 말을 제대로 해낸 적은 없지. 믿음을 갖기 위한 무엇 하나 가르쳐 준 것도 없고, 내가 무능력한 목사의 표본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아. 흥, 스톰 자신이 나보다 훌륭한 설교자라고 자부하는 것도 내가 모르진 않지.'
스톰은 계속하여 양떼를 이리로부터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까지 했다.
"이리가 어딨소?"
목사가 말했다.
"벌써 코앞에 닥쳤지요."
"그렇다면 스톰 선생. 당신이야말로 이리에게 문을 열어 주고 있는 겁니다."
벌떡 일어서며 목사가 말했다. 스톰의 말이 그를 격분시켰던 것이다. 흥분으로 지난날의 위엄이 되살아났다.
"스톰 선생, 전도관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맙시다."
목사는 스티나 쪽을 돌아보며 얼마 전, 그녀가 옷을 입혀 주었던 아름다운 신부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녀는 교구 내의 모든 신부에게 옷을 입혀 주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농가 출신의 여자임에도, 스티나는 목사가 자기의 남편에게 노골적으로 무능을 지적당한 기분이 어땠을까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목사에 대한 동정심으로 자꾸 눈물이 흘러내려 그의 말에 대꾸를 하지 못했다. 목사는 혼자서 많은 얘기들을 지껄여야 했다.
이야기 중에도 목사는 줄곧 생각에 잠겼다.
'아아, 만일 내게 젊은 날의 패기와 능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지금 스톰이 범하고 있는 과오를 쉽게 깨우쳐 줄 수 있을 텐데.'
목사는 스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돈은 어떻게 장만하셨소, 스톰 선생?"
"기성회가 하나 조직되었지요."
스톰이 찬조를 승락한 몇몇 사람을 들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들도 결코 목사님이나 교회를 불리하게 하려는 건 아닙니다."
"아니! 잉그마르 잉그마르손도 그 속에 끼였단 말이오?"
목사가 소리쳤다.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인 모양이었다.
"나는 잉그마르 잉그마르손도 스톰 선생만큼이나 믿었는데!"
목사는 전도관에 관한 말은 그 이상 꺼내지 않고, 단지 스티나를 상대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도 그냥 모르는척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다시 스톰에게 말을 건넸다.
"그 일을 중지해 주십시오."
그가 애원 조로 말했다.
"나를 위해서 중지해 주십시오. 만일 사람이 선생의 학교 옆에 또 다른 학교를 짓는다면, 아마 선생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스톰은 마룻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렇게는 안 되겠군요, 목사님."
꼬박 십 분간이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침묵 속에서 목사는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는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는 스톰이 이번 계획으로 목사를 몰아낼 뿐만 아니라, 교구마저 허물고 말 거라는 것을 증명할 만한 말을 찾으려고 했으나 온갖 생각과 말들이 뒤범벅된 채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파멸이구나'
문간으로 걸어가던 그는 문득 방 한쪽에서 게르트루트가 나무토막과 유리 조각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아이는 오늘 밤의 대화를 한 마디도 듣지 못한 듯했다. 눈은 기쁨으로 빛나고, 볼은 막 터져 오르는 장미처럼 붉고 생생해 보였다. 게르트루드는 목사의 가슴에 미묘한 충격을 주었다.
"뭘 하니?"
목사는 게르트루드에게로 다가서며 물었다.
소녀는 이미 완성 시킨 마을을 모두 쓰러뜨리고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좀 일찍 오시지 그랬어요."
게르트루드가 말했다.
"조금 아가 정말 예쁜 마을을 만들었었는데, 교회랑, 학교랑...."
"어디 좀 보자, 어디 있지?"
"으응, 벌써 부숴 버렸는 걸요.인제 예루살렘을 만들 거예요. 그래서...."
"뭐?"
목사가 말을 막으며 물었다.
"예루살렘을 만들려고 교구를 부쉈어?"
"그래요, 좀 전에 만든 마을은 정말 예뻤어요. 하지만 어제 학교에서 예루살렘 이야기를 읽었으니까 이번에는 교구를 부수고 예루살렘을 만들기로 한 거예요."
목사는 지그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손을 이마에 대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건 확실히 누군가 훌륭한 사람이 네 입을 빌어 이야기하고 있는 거다."
아이의 말이 무언가 암시적으로 들려서 그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보았다. 차츰 촉망되던 지난날의 능력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이 그 의지를 작용시키는 원칙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목사의 눈엔 새로운 빛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교장 앞으로 되돌아가, 여느 때처럼 쾌활한 음성으로 말했다.
"스톰 선생, 이젠 선생에게 화를 내지 않겠습니다. 선생이 옳았습니다. 나는 여태까지 줄곧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왔었지만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군요. 현재도 마찬가지겠지만 선생께서 하시려는 일은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일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겠습니다.“
잉그마르의 죽음
전도관이 완성된 해의 봄, 겨우내 엄청나게 쌓였던 눈이 녹아 강물이 놀랍도록 불어났다. 더구나 하늘에서는 폭우가 마구 쏟아져 그 빗물이 산 중턱에서부터는 화살 같은 물줄기가 되어 밀려 내려왔다. 모든 수레바퀴 자국이나 고랑마다 물이 넘쳐흘러 강에까지 이르렀고, 강은 거친 파도를 일으켰다. 거울같이 투명하던 강물은 흙탕물이 되어 우중충한 갈색으로 변했다. 거친 풍랑 위엔 통나무와 얼음덩어리가 함께 출렁거려 위협적인 느낌을 주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이 봄의 홍수가 위험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들만이 강으로 달려나가 발작적으로 솟구치는 물보라를 신이 나서 구경했다.
그러나 이제 떠내려오는 것은 나무와 얼음덩어리만이 아니었다. 세탁물이나 탈의장 같은 것이 휩쓸려 내려오더니 다음에는 보트와 부서진 다리까지도 떠내려왔다.
"우리 다리도 떠내려가겠는데!"
아이들이 소리쳤다. 아이들은 약간 불안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뭔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좋아하고 있었다. 별안간 뿌리째 뽑혀 휩쓸렸던 소나무가 물 위로 쑥 솟구치더니 잇달아 흰 백양나무가 떠올랐다. 그것들은 물 속에 오랫동안 잠겨있던 터라 가지마다 잔뜩 싹이 부풀어 있었다. 또한 나무에 끌려 조그만 건초 헛간이 뒤집힌 채 떠내려왔는데, 건초와 짚이 가득 차 있는 게 마치 용머리에 얹힌 배처럼 지붕 위에 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떠내려오면서부터 어른들은 매우 분주해졌다. 그들은 이제 북쪽의 여러 곳에서 둑이 넘친 것을 알고 건조물이나 가구 같은 것을 끌어올리려고 장대와 길다란 쇠갈고리를 들고 강가로 달려 나왔다.
마을의 북쪽 끝에는 집이 몇 채 안 되어서 사람들도 별로 없었으므로 잉그마르 잉그마르손만이 홀로 강둑에 올라서서 근심 어린 표정으로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육십이 다 되었고 얼굴은 주름이 깊었으며, 허리가 굽은 모습이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였다. 그는 졸린 듯이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묵직한 긴 쇠갈고리에 기대서서 강물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거품을 문 채 강가에서 약탈해 온 물건들을 이고 난폭하게 밀어부쳤다. 그것은 마치 잉그마르의 우둔함을 비웃는 것 같았다.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은 바로 둑 옆을 흘러가는 다리나 보트의 선체 같은 것들은 건지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저런 것은 모두 마을 사람들에게 건져 올려지겠지.'
그는 생각했다. 그는 잠시도 강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떠내려오는 모든 것을 그저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문득 저만치 먼 상류에서 무언가 노랗게 반짝이는 것이, 드문드문 못질한 판자 위에 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아, 이게 바로 내가 기다리던 거야'
처음에 잉그마르는 노란 것이 뭔지 똑똑하게 분간할 수 없었지만, 달레카를리아 주의 어린아이들이 어떤 옷을 입는가를 알고 있었으므로 곧 짐작이 됐다.
"저건 빨래터에 나가 놀던 아이들이 틀림없어."
그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노는 데 정신 팔려서 미처 육지에 올라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강물에 휩쓸렸던 게야."
곧 그는 자기의 추측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이제 아이 셋 다 손으로 짠 노란 웃도리에 황색 모자를 쓰고, 엉성하게 짠 뗏목 위에 달라붙어서 둥둥 떠내려오는 것을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뗏목은 거센 물결과 부딪쳐 오는 얼음덩어리들 때문에 자꾸 부숴지려 하고 있었다. 아이들과의 거리는 아직 꽤 멀었다. 잉그마르는 강과 육지가 닿는 지점에서 물줄기가 한 번 굽어 돌아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
'만일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 아이들을 태운 뗏목이 둑가로 오도록 해주신다면 곧 육지로 끌어올릴 수 있을 텐데'
잉그마르는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 슬며시 뗏목을 한 번 쿡 치는 것같이 보였다. 뗏목은 그대로 빙 돌더니 잉그마르를 향해 똑바로 움직여 왔다. 아이들은 더욱 가까워져서 겁에 질린 조그만 얼굴들을 정확히 볼 수 있었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잉그마르가 쇠갈고리를 갖다 대기에는 아직 거리가 있어서 그는 철벅철벅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 뭔가 그를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는 이제 젊지 않다, 잉그마르. 그런 짓을 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을 겪을 거다'하고 소리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잠깐 생각했다.
'목숨을 걸 권리가 내게 있는 걸까?'
잉그마르는 지난겨울 아내가 죽은 후로 하루빨리 아내의 뒤를 따르고 싶은 바람뿐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가 돌봐줘야 할 아들이 있었다. 아들 혼자서 농장을 돌보기에는 너무 일렀다.
"하나님의 뜻에 맡길 수밖에!"
그는 중얼거렸다.
이제 잉그마르는 어설프지도 우둔하지도 않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거센 물결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서, 쇠 갈고리 장대를 강바닥에 단단히 세워 물결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해놓고는, 얼음덩어리며 나무 같은 것을 조심스럽게 피해 아이들의 뗏목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는 발에 힘을 주어 몸을 가누며 쇠갈고리를 내밀었다.
"꼭 잡고 있거라!"
그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별안간 뗏목이 빙그르르 돌면서 판자가 삐걱거렸던 것이다. 그러나 뗏목은 부서지지 않았다. 잉그마르는 세찬 물결로부터 그것을 끌어냈다. 아이들을 구하자 그는 뗏목을 아무렇게나 흘려보냈다. 뗏목은 제멋대로 물결 위로 흘러갔다. 잉그마르가 쇠갈고리로 강바닥을 더듬으며 둑으로 나가려는 순간, 굵직한 통나무 하나가 그에게로 돌진해 왔다. 통나무는 그의 옆구리에 거칠게 부딪쳤고, 그 무서운 타격으로 잉그마르는 비틀대며 고꾸라질 뻔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장대를 움켜쥔 채 둑까지 걸어 나왔다. 둑 위로 나왔으나 그는 자기의 몸을 만져 보려 하지 않았다. 이미 가슴이 망가져 버린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그의 입안에 피가 가득 고였다.
'아, 나는 이제 틀렸어.'
그는 둑 위로 쓰러졌다. 이제는 더 이상 한 발자국도 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곧 마을 사람들에게 그 사고를 전했다. 사람들이 달려왔고 '위대한' 잉그마르는 그의 집으로 옮겨졌다.
목사가 불려와 오후 한나절을 줄곧 잉그마르 농장에서 머물렀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교장 집에 들렀다. 그날의 온갖 일들을 이해해 줄 만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스톰과 스티나는 깊은 슬픔에 잠겨있었다. 그들은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이 운명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목사는 의외로 빙글빙글 웃음 띤 얼굴로 그들의 부엌에 들어섰다.
"임종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까?"
스톰이 물었다.
"다행히도 늦지 않았지요."
목사가 대답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가지 않아도 될 뻔했소."
"무슨 말씀이죠?"
스티나가 묻자 목사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예, 내가 없어도 하등 지장이 없었겠어요. 때론 임종에 입회하기가 매우 난처할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요."
스톰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마을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일 때는 더욱 그렇지요."
"네, 그래요."
"그러나 세상엔 상상외의 것도 있습니다."
목사는 한동안 허공을 응시하고 앉아 있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도 맑고 진지했다.
"스톰 선생이나 스티나 부인께서는, 옛날 그분의 청년 시절에 일어난 신기한 사건을 들으신 적이 있읍니까?"
목사가 물었다.
"물론이지요."
"그런데 무엇보다 이상한 일은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잉그마르에겐 친구가 한사람 있었는데, 그 사람도 잉그마르라는 이름이었지요. 사람들은 그를 억센 잉그마르라고 구분해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잉그마르의 소작지에 있는 조그만 오두막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의 부친이 주인댁에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잉그마르라고 지었답니다. 어는 토요일, 대낮처럼 밝은 아름다운 한여름 밤에 잉그마르와 억센 잉그마르는그 날의 일을 다 마치자 나들이옷을 입고 마을로 놀러 나갔더랍니다."
목사는 잠깐 말을 끊고 생각했다.
"맑게 개어 온화하며, 하늘은 밝은 초록으로 물들고, 땅은 안개에 덮힌 듯 어스름한 빛으로 감기던 그날 밤.... 두 사람이 다리를 건너는데 '위를 보아라' 하는 말소리가 들리는듯했답니다. 그들이 위를 올려다보니 하늘이 마치 두 장의 커튼이 걷히듯 좌우로 활짝 열리더랍니다. 그들은 자리에 못박힌 듯 손을 맞잡고 서서 하늘의 영광을 보았지요. 스톰 선생과 부인께서도 일찍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목사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상 좀 해보십시오. 두 사람이 다리에 서서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모습을! 그런데두 사람은 그날의 일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그 환영은 그들의 기억 속에 가장 값진 보물로 깊숙이 살아 있었겠지요."
목사는 눈을 감고 가슴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여태까지 이런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나도 그들과 함께 다리 위에 서서 그 일을 체험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오늘 아침 잉그마르는 집으로 옮겨지기가 무섭게 억센 잉그마르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답니다. 곧 심부름꾼이 소작지로 달려갔으나 공교롭게도 억센 잉그마르는 집에 없더랍니다. 숲속에 장작을 패러 갔는데 찾기가 쉽지 않다나요. 사람들이 잇달아 찾으러 뛰어나갔습니다. 그러는 동안 잉그마르는 살아생전 그를 두 번 다시 못 볼 것 같아 무척 조바심을 내더군요. 제일 먼저 의사가 달려오고 다음으로 내가 갔는데 억센 잉그마르는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잉그마르는 우리에겐 관심조차 두지 않더군요. 그는 곧 운명할 것 같았습니다. 그가 나를 부르더니 '하나님이 나를 부르십니다. 가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억센 잉그마르를 만나보고 싶어요.' 하고 말하더군요. 그는 거실에 딸린 조그마한 방의 널찍한 침대 위에 누워 눈을 커다랗게 뜨고 멀고 먼 저쪽,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조용히 바라보는 듯했지요. 그가 구해낸 세 아이들은 심상치 않다는 낯빛으로 침대 아래쪽에 몰려 앉아 있었습니다. 잉그마르의 눈이 허공에 걸려 있다가 잠깐 다른 데로 옮겨질 때는 반드시 아이들에게서 멎었습니다. 그런 그의 얼굴엔 온통 미소가 번져 있었지요. 마침내 사람들은 억센 잉그마르를 찾아냈습니다. 잉그마르는 문간을 울리는 억센 잉그마르의 발소리를 듣더니 후-하고 안도의 숨을 쉬면서 아이들에게서 눈길을 거둡디다. 그가 침대 곁으로 다가선 억센 잉그마르의 손을 쥐고 손등을 가만히 토닥거리며 '하늘이 열리던 날 밤을 기억하고 있나?'라고 하자 '그날 밤 일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소.' 하고 억센 잉그마르가 대답하더군요. 그를 바라보는 잉그마르의 얼굴은 아주 즐거운 소식이 있다는 듯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나는 지금 거기로 가려는 걸세'라고 말했습니다. 억센 잉그마르는 잉그마르의 얼굴 위로 바짝 상반신을 굽히며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더니, '나도곧 뒤쫓아가겠소.'하고 말하더군요. 잉그마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아드님이 순례에서 돌아오기 전에 가셔서는 안 됩니다.'하고 억센 잉그마르가 덧붙여 말하자, 그는 '그래 그래, 알구 있어'하고 중얼거리더니 숨을 몇 번 가쁘게 들이쉬다간 이내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목사가 말을 마쳤다.
스톰 내외와 목사는 잉그마르의 죽음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생각했다. 세 사람은 오랫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억센 잉그마르가 말한 아드님의 순례라는 건 무슨 말일까요?"
갑자기 스티나가 물었다.
"말씀대로 정말 알 수 없는 말입니다, 부인."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목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런데, 억센 잉그마르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말은 목사님도 들어서 아시겠지요?"
스티나가 계속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목사는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열심히 이마를 문지르며 앉아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지력으론 알 수가 없어. 그러나 그것을 알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세상을 사는 가장 큰 보람일 거야.'
잉그마르의 딸 카린
가을이 오고 다시 학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스톰과 게르트루드는 아이들의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부엌에 앉아 스티나가 차려낸 커피를 기분 좋게 마시고 있었다. 그때 손님이 한 사람 들어왔다.
그는 할보르 할보르손이라는 젊은 농부로 최근에 이 마을에서 가게를 차린 사람이었다. 그는 팀즈 농장에서 왔으므로 팀즈 할보르로 통했는데, 훤칠한 키에 어딘지 약간 우울해 보이는 맵시있는 사나이였다. 스티나가 그에게 커피를 권하자 그는 식탁에 앉아 손수 커피를 따르면서 스톰에게 말을 건넸다.
스티나는 바깥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뜨개질을 했다. 그녀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상반신을 창 쪽으로 내밀었다.
"오늘은 별의별 사람이 다 나다니는구먼."
짐짓 태연하게 보이려 애를 쓰며 그녀가 말했다.
팀즈 할보르는 그녀의 태도가 뭔지 이상한 것 같아서 몸을 일으켜 바깥을 내다보았다. 큰 키에 등이 구부정한 여자와 성숙한 한 소년이 학교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 눈이 틀림없다면 저건 잉그마르의 딸 카린이야."
스티나가 말했다.
"틀림없이 카린입니다!"
팀즈 할보르가 확정 지었다. 그는 당황한 모습으로 아무 말도 없이 방을 휘둘러보다가, 곧 침착해져서는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작년 여름 아직 잉그마르가 살아 있을 때, 할보르는 카린 잉그마르손에게 청혼을 했었다. 그의 청혼은 꽤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잉그마르는 할보르의 아버지가 술주정뱅이이니 아들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르므로 카린과는 짝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결혼 날짜를 정하고 약혼식을 발표할 단계까지 이르렀다. 약혼 발표가 있기 전날 카린과 할보르는 결혼반지와 성경책을 사기 위해 파른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사흘 후, 여행에서 돌아온 카린은 느닷없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할보르와는 결혼하기 싫다고 말했다. 별로 이렇다 할 결점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으나 꼭 한번 과음한 일 때문에 그 역시 술주정꾼이 될까 봐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들은 파혼을 하고 말았다. 할보르는 그 일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이건 정말 견딜 수 없는 모욕이오. 대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소? 멀쩡한 사내에게 이런 봉변을 주다니."
그러나 카린은 동요하지 않았고 그 후로 할보르는 점점 침울해져 갔다. 그는 그때의 일들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할보르가 앉아 있는 곳을 향하여 카린이 오고 있는 것이다. 작년 가을 카린은 에로프 엘손이라는 사나이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잉그마르 농장에 살고 있으며, 잉그마르가 죽고 난 금년 봄부터는 농장을 관리하고 있었다. 잉그마르는 딸 다섯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아직 너무 어려서 소유권을 상속받지 못했다.
그럭저럭하는 동안 카린이 들어섰다. 그녀는 스물두 살이었으나 노숙한 타입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무척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부석부석한 눈두덩이에다 금빛 머리칼과 입 언저리의 선이 몹시 드세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장 부처는 그녀가 늙은 잉그마르와 아주 닮았기 때문에 여간 좋아하지 않았다.
카린은 할보르를 보고도 낯빛 한번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한 걸음걸이로 사람들과 차례차례 인사를 나눴다. 그녀가 할보르에게 손을 내밀었을 땐 그가 얼른 손을 비켰으므로 두 사람은 겨우 손가락이 스쳤을 뿐이었다. 평소에도약간 꾸부정한 평인 카린이 할보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자 여느 때보다 더 구부정해 보였다. 그러나 할보르 쪽은 더욱 훤칠하고 호리호리해 보였다.
"카린, 마침 잘 나왔어요."
스티나는 목사가 즐겨 앉는 의자를 그녀에게 권하며 말했다.
"예, 이슬이 내려서 걷기가 좋아졌어요."
"간밤엔 정말 이슬이 많이 내렸더군."
스톰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몇 분 동안 깊은 침묵이 흘렀다. 할보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모두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움찔했다.
"전 이만 가게에 가봐야겠습니다."
"왜, 갑자기?"
스티나가 물었다.
"제발 제게 마음을 쓰지 마세요, 할보르 씨"
상냥한 음성으로 카린이 말했다.
할보르가 나가자 분위기는 부드러워졌고, 스톰은 무슨 얘기가 필요한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카린이 데려온 소년을 보았다. 그때까지 아무도 그 소년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소년은 아직 어렸고 게르트루드보다도 그다지 나이 들어 보이지 않았다. 맑고 부드러운 앳된 얼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어딘가 나이와는 다른 무엇이 풍기는 아이였다. 그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에게 신입생을 데리고 오신 게로군."
"제 동생이에요. 오늘의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이지요."
"그 이름에는 아직 너무 어린데?"
"그렇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으니 도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왔어요. 선생님과 부인께서 이 애를 맡아 주셨으면 해서요."
카린의 말에 스톰과 스티나는 내심 놀라며 서로의 얼굴을 멀뚱이 쳐다보았다. 두 사람 다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면 집이 너무 좁은데...."
스톰이 간신히 말했다.
"저어, 우유와 버터와 달걀을 하숙비의 일부로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만...."
"그런 것까지 생각하실 건 없어요."
스티나가 말했다. 스티나는 카린이 이런 의문스런 부탁을 하는 데는 필경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카린, 더 이상 말씀 마세요. 잉그마르손 집안을 위해서라면 하는 데까지 해볼 테니까"
그녀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두 여자는 잉그마르의 행복을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의논했다. 그동안 스톰은 그를 교실로 데려가서 게르트루드의 옆자리에 앉혔다. 수업 첫날 잉그마르는 종일토록 입을 열지 않았다.
팀즈 할보르는 한 주일 이상 학교 근처에는 절대 가지 않았다. 거기서 다시 카린을 만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부터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할보르는 이런 날 물건을 사러 올 손님은 한 사람도 없을 것 같아 스티나 부인을 찾아가 가벼운 대화나 잠깐 나누고 돌아오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누구든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과 마음이 후련해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기분이 무척 우울했다.
'나는 살 가치가 없어. 누구 하나 날 존중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말야.'
이것은 카린에게 버림받은 후부터 비롯된 넋두리로, 그는 너무도 괴로워했다.
가게를 닫고 우비를 걸치고서 그는 바람과 비와 진흙 속을 걸어 학교로 갔다. 할보르는 학교의 분위기 속으로 돌아온 것이 즐거웠다. 그가 부엌에 앉아 있는데 쉬는 종이 울리고, 스톰 교장과 두 아이가 커피를 마시러 들어왔다. 세 사람은 그에게로 다가왔다. 스톰과 악수를 하고 소년 잉그마르가 손을 내밀었을 때 할보르는 짐짓 스티나와의 이야기에 열중하는 듯 모르는척했다. 잉그마르는 머뭇거리며 서 있다가 이윽고 식탁에 가서 앉았다. 그는 전날 카린이 그 자리에 앉아서 그랬듯이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다.
"할보르 씨가 새 시계를 보여 주러 오셨답니다."
스티나가 말했다.
할보르는 주머니를 뒤져 새 은시계를 꺼냈다. 자그마한 아름다운 시계로 뚜껑에는 꽃무늬가 새겨진 것이었다. 스톰은 교실에서 확대경을 들고 와서 뚜껑을 열고 시계의 부품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는 놀란 듯이 조그만 톱니바퀴의 정밀성을 살펴보더니, 여태까지 이렇듯 정교한 세공은 본 일이 없다며 감탄하였다. 할보르는 교장에게서 시계를 돌려받아 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자기 물건을 칭찬받았을 때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기뻐하거나 자랑스러운 기색을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잉그마르는 식사를 하는 동안 말 없이 있다가 커피를 마시고 나서 스톰에게 물었다.
"정말 시계에 관해 잘 아시나요?"
"알구말구. 뭐든 조금씩은 알고 있지."
잉그마르는 조끼 주머니에서 시계 하나를 꺼내 보였다. 큼직하고 둥근 은시계였는데, 할보르의 시계에 비하면 보잘 데가없는 것이었다. 시곗줄은 세공이 어설픈 데다가 뚜껑은 아무런 장식도 없이 이그러져 있었다. 유리는 깨어지고 문자판의 에나멜도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 고물에 지나지 않았다.
"시계가 안 가는데?"
시계를 귀에 갖다 대고는 스톰이 말했다.
"예, 아 안 가요."
소년은 더듬거렸다.
"고칠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스톰은 뚜껑을 열어 톱니바퀴가 모두 헐렁하게 흔들거리는 것을 보았다.
"너 이 시계로 못질이라도 했니? 이래 가지곤 손도 못 대겠는걸"
"시계방 에릭 씨는 고칠 수 있잖을까요?"
"아니야, 나나 다를 바 없어. 파른에 보내서 새 부속품을 넣는 게 좋을 거다."
"저도 그럴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잉그마르는 이렇게 말하고 시계를 받아들었다.
"대체 그걸로 무슨 짓을 했지?"
스톰이 소리쳤다.
"이건 아버지의 시계였어요. 지난번 홍수가 났을 때 아버지가 통나무에 부딪혔잖아요. 그때 이렇게 된 거예요."
잉그마르는 시계를 꼭쥐며 말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모두 시계에 흥미를 느꼈다. 잉그마르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애를 쓰면서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부활제 전주에 일어난 일로, 그때 저는 집에 있었지요. 아버지가 그렇게 되셨다는 소리를 듣고 저는 제일 먼저 강가에 달려갔어요. 아버지는 둑에 쓰러져 이 시계를 손에 쥐고 계셨어요. '오 잉그마르야, 난 이제 틀린 것 같다. 시계가 망가져 마음이 좋질 않구나. 내 너한테 이것을 부탁할 테니 아버지가 몹시 미안한 일을 했던 어떤 사람에게 용서해 달란다며 좀 전해다오'라고 말씀하시고는, 그 사람의 이름을 대면서 시계는 파른에 가지고 가서 고친 다음 그분에게 드리라시더군요. 그런데 저는 파른으로 갈 수 없게 됐으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스톰은 가까운 시일 내에 파른에 갈 사람이 있었던가를 생각했다. 그때 스티나가 잉그마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시계를 드릴 분이 누구지, 잉그마르?"
"저.... 말씀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어요."
잉그마르는 주저했다.
"팀즈 할보르 씨 아닌가? 지금 여기 앉아 계시는"
"그래요."
잉그마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할보르는 줄곧 무뚝뚝한 얼굴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시계를 그냥 할보르 씨에게 드리지 그래? 그러는 것이 이분을 더없이 기쁘게 하는 걸 거야."
잉그마르는 스티나의 말에 순순히 일어섰다. 그리곤 시계를 꺼내어 조금이라도 광을 내려는 듯이 옷소매에다 문질렀다. 그는 할보르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아버지가 용서해 달라시면서 이걸 드리라고 했어요."
그는 할보르에게로 시계를 내밀었다.
잉그마르가 옆으로 다가왔을 때 할보르는 상대를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손으로 눈을 가렸다. 잉그마르는 시계를 내민 채 그렇게 서 있다가 도움이라도 구하듯 스티나를 바라보았다.
"받아 주세요, 할보르 씨"
스티나가 말했다.
"할보르 씨, 이 이상의 보상은 바랄 수 없을 겁니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이 살아 계셨다면 좀 더 빨리 당신에게 응분의 보상을 했을 겁니다."
스톰이 끼어들며 말했다.
시계를 힐끗 바라본 할보르는 별로 내켜 하지 않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시계가 손에 닿기가 무섭게 얼른 조끼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무도 그 시계를 빼앗진 않을 거요."
할보르가 웃도리와 단추를 단단히 채워두는 모양을 바라보며 스톰이 웃으면서 말했다. 할보르도 웃어 보였다. 이윽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몸을 쭉 펴고 깊이 한숨을 들이마셨다. 얼굴은 생기가 돌고 눈은 방금 발견한 새로운 행복으로 빛났다.
"이제 할보르 씨는 새로 태어난 기분이겠네요."
스티나가 말했다.
할보르는 자기의 새 시계를 꺼냈다. 그는 잉그마르에게 다가서서 말했다.
"내가 너한테서 아버지의 시계를 받았으니, 너도 내 시계를 받는 것이 도리야."
할보르는 식탁 위에 시계를 올려놓고 인사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는 온종일 혼자서 터벅터벅 돌아다녔다. 할보르와 거래를 하기 위하여 멀리서부터 찾아온 농부 두 사람이 점심때부터 밤늦게까지 할보르의 가게 앞에서 서성거렸지만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카린 잉그마르손의 남편 에로프 엘손은 잔인하고 욕심 많은 농사꾼의 아들로 아버지의 학대를 받으며 자라왔다. 어릴 때는 늘 배를 곯았고 자라서도 아버지의 명령대로 움직여야 했다. 그는 아침부터 밤까지 노예처럼 일만 하며 낙이 없는 나날들을 보냈다. 다른 젊은이들처럼 함께 어울려 춤을 출 수도 없었고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
결혼 후에도 늘 마찬가지였다. 그는 잉그마르의 농장에서 장인의 지배 아래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죽도록 일하고 알뜰히 절약하는 것만이 그의 하루하루의 일과였다.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잉그마르 집안이 마음에 드는 사위를 제대로 골라잡았다고들 했다.
그런데 잉그마르가 죽고 나서부터 에로프는 폭음을 즐기기 시작했다. 더불어 마을의 건달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농장에 부르기도 하고, 함께 댄스 홀이나 선술집에 드나들기도 했다. 일체의 일손을 놓고 날마다 술로 지낸 그는 불과 두 달 만에 가련한 주정뱅이가 되어 버렸다.
카린은 곤드레만드레가 된 남편을 처음 보았을 때 암담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내가 할보르에게 한 모진 짓에 대해 하나님이 벌을 주시는 거야'
남편에게는 어떤 충고나 비난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병든 나무와도 같아서 결국은 말라서 썩고 말 것이 틀림없다. 살릴 수도 보호할 수도 없다.'라고 그녀는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린의 여동생들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에로프의 경우 없는 몸가짐에 화를 내기도 하고, 그의 천한 표정과 더러운 말버릇에 흥분하면서 으르다가 안 되면 달래기도 했다. 사람이 좋은 편인 에로프이지만 때론 화를 내며 처제들과 맞붙어 싸웠다.
카린은 마음 편치 않은 나날을 보냈다. 그저 어떻게 하면 동생들을 멀리 떠나보내어, 자기가 겪어야 하는 이 비참한 생활에서 빠져나가도록 할 수 있을까만을 궁리했다. 여름이 바뀌기 전에 그녀는 나이 많은 동생 둘을 시집보내고, 나머지 여동생 둘은 유복하게 살고 있는 미국의 친척 집으로 보내 버렸다. 그녀의 자매들은 모두 한 사람당 2만 크로네 이상의 유산을 분배받았다. 농장은 어린 잉그마르가 성년이 되었을 때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카린이 맡았다.
남 보기에 어설프고 얌전하기만 한 카린이 동생들을 결혼시키고 새 가정을 갖도록 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녀는 모든 일을 혼자서 결정해야 했다. 남편은 이제 무능력해져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어린 남동생, 그러니까 지금의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의 문제였다. 그의 행동은 누이들 이상으로 에로프를 노엽게 했다. 어떤 때는 에로프가 들고 온 옥수수 브랜디를 몽땅 쏟아버렸고, 또 어떤 때는 술에 물을 타다가 들키기도 했다.
가을이 되자 카린은 잉그마르를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파른의 중학교에 되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잉그마르의 보호자인 셈인 에로프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내 아버지처럼 농군이 되었듯이 잉그마르도 제 애비처럼 농군이 돼야 해. 학교엔 가서 뭘 해? 겨울이 오면 나하고 숲에 가서 숯굴이나 만들도록 하지. 그게 무엇보다 좋은 교육이 아니겠어? 저만한 나이에 나는 겨울 내내 숯굴에서 일만 했다구. 알겠어?"
카린은 도무지 남편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잉그마르에겐 적당히 얼버무려 당분간이라도 그럭저럭 집에 머물도록 해야 했다. 에로프는 잉그마르의 신용을 얻으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잉그마르를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잉그마르는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들떠서 돌아다니는 그를 따라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에로프는 일단 잉그마르를 마차에 태우기만 하면 멀리 베리소나의 대장간이나 카름순드의 주막까지 내려가곤 했던 것이다. 카린은 남편이 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내심 기뻤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카린은 나가서 다음 날 아침 여덟 시에 돌아온 에로프의 옆에 정신없이 잠들어 있는 잉그마르를 발견했다.
"이봐 카린, 나와서 이 꼬마 좀 봐줘!"
에로프가 소리쳤다.
"데리고 들어가라구! 이자식, 진드기처럼 처먹구선 취해 가지구 꼼짝도 못 한다니까"
카린은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그녀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지 않고선 동생을 안아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손이 잉그마르에게 닿는 순간 그녀는 동생이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추위에 얼어붙어 인사불성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동생을 안아다 침실에 눕히고 문을 잠갔다. 꽤 오랫동안 그녀는 잉그마르의 의식이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녀는 곧장 남편 앞으로 걸어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지금 실컷 먹어 뒤요. 만일 당신이 먹인 술로 인해 동생이 죽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지금껏 잉그마르 농장에서 먹던 것보다 더 나쁜 음식으로 견뎌야 할 테니까요."
"별소릴 다 듣는군. 브랜디 몇 방울 가지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투잖아."
"내 말을 잘 들어 둬요. 만일 잉그마르가 죽으면 당신은 형무소에서 이십 면은 살아야 돼요. 알겠어요. 에로프?"
카린이 침실로 돌아와보니 잉그마르는 이제 의식은 돌아왔으나 열에 들떠 있었고 팔다리는 움직이지 못했다.
"카린 누나, 나 죽으려는 거야?"
잉그마르가 괴로운 듯 신음하며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난 뭘 마시는지도 몰랐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카린이 진정으로 말했다.
"혹시 내가 죽거든, 누나들에게 술인 줄 모르고 마셨다고 편지해줘"
잉그마르는 슬프게 말했다.
"그래, 그러마"
"정말, 정말 난 몰랐어.... 맹세할 수 있어."
잉그마르는 종일토록 열에 들떠서 보챘다.
"제발 아버지한테는 말하지 마."
잉그마르가 정신없이 지껄여댔다.
"아버지는 괜찮아 모르실 거야. 잉그마르"
"하지만 내가 죽어 봐. 아버지는 틀림없이 알게 되잖아 아버지를 어떻게 보지?"
"잉그마르, 넌 조금도 잘못하지 않았어. 괜찮아."
"아버지는 아마 에로프가 주는 걸 먹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실 거야. 그치? 아....마을 사람들도 모두 내가 술에 취했었다는 걸 알고 있겠지. 안 그래, 누나?"
그는 계속 물어댔다.
"일꾼들은 뭐라고 그래? 리자 할멈은 뭐라고 하지? 그리구 억센 잉그마르는?"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누나는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되지 않아? 우린 카름순드의 주막에 갔었어. 거기서 에로프와 친구들이 밤새도록 술을 마신 거야. 나는 구석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에로프가 옆에 와서 깨웠어. '눈을 떠 잉그마르. 자, 몸이 훈훈해지도록 이걸 마셔' 그러면서 잔을 입에다 마구 갖다 대잖아. 뜨거운 물에 설탕을 탄 거라면서 말야. 나는 자다 깨서 몸이 춥고 떨리길래 받아마셨지 뭐. 그때는 그저 따끈하고 달다는 생각밖에 못했어. 그런데 거기에 뭔가 독한 것이 들어 있었던 거야. 아아, 아버지가 알면 뭐라고 하실까?"
카린은 거실로 통하는 문을열었다. 에로프는 아직도 지루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서도 이쪽의 이야기가 들리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좋았을걸. 누나,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살아 계셨으면 어떡하게, 잉그마르?"
"저 사람을 죽여버렸을 거야. 그랬을 것 같지 않아?"
에로프가 갑자기 큰소리로 웃어댔다. 잉그마르는 깜짝 놀라 새파랗게 질렸다. 카린은 다시 얼른 문을 닫았다.
어쨌든 이 사건은 에로프에게 큰 영향을 주어서, 카린이 동생을 스톰의 학교에 넣겠다고 하자 다시 반대하지는 않았다.
할보르가 시계를 받은 직후 그의 가게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을의 농부란 농부는 읍에 나가기만 하면 할보르의 가게에 들러서 '위대한' 잉그마르의 시계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다. 희고 길다란 털가죽 윗도리를 입은 농부들은 시간을 정해 놓고 계산대 위에 덮치듯 몸을 내밀면서 주름살로 덮인 그 소박하고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따금 할보르는 시계를 꺼내어 우묵하게 찌그러진 뚜껑이며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문자판 따위를 보여 주었다.
"아아 바로 거기에 탁 부딪힌 거로구나"
그들은 잉그마르가 다쳤을 때의 광경을 눈앞에 보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할보르, 당신이 그 시계를 갖구 있다니 정말 대단한 일일세."
할보르는 시계를 보여줄 때 언제나 누가 빼앗기라도 하듯 줄을 꼭 쥐고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날도 할보르는 역시 몇 사람의 농부들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한창 고비에 으르자 예의 그 시계가 나왔다. 할보르가 시곗줄을 쥔 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 주자 사람들은 모두 조용해졌다. 그사이에 에로프가 가게로 들어왔지만 온통 시계에만 정신을 쏟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깨닫지 못했다. 에로프는 장인의 시계 이야기를 듣고 있었으므로 금방 무슨 일인가를 알았다. 에로프는 할보르가 장인의 유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시기하진 않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다 찌그려진 고물 은시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에로프는 슬그머니 사람들 뒤에 다가가서 손을 뻗어 시계를 낚아챘다. 할보르에게서 시계를 뺏자는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니라 단순히 장난을 치려 했던 것이다. 할보르가 시계를 되빼앗으려 하자 그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시계를 높이 쳐들었다. 할보르는 사나운 얼굴로 계산대를 펄쩍 뛰어넘었다. 놀란 에로프는 시계를 돌려주는 대신 문간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문 앞에는 작은 나무로 만든 디딤 상자가 놓여있었다. 상자 구멍에 발이 빠져 버린 에로프는 그 자리에 나뒹굴고 말았다. 할보르는 그 위로 덮쳐 시계를 움켜쥐고는 몇 번인가 호되게 걷어찼다.
"이봐 이봐, 그만 차구 내 등이 어떻게 됐나 좀 봐줘."
에로프의 말에 할보르가 곧 발길질을 멈췄다.
"일으켜 줘."
일어나려고도 하지 않고 에로프가 다시 말했다.
"한숨 자구 술이 깨면 스스로 일어날 수 있을 게야."
"난 취하지 않았는걸."
에로프가 대꾸했다.
"실은 내가 디딤 상자를 뛰어내리려구 하는데 저쪽에서 죽은 잉그마르가 시계를 빼앗으려고 내게로 막 달려오는 것 같았어. 그래서 이렇듯 어이없게 넘어진 거야."
할보르는 허리를 굽혀 가련한 에로프를 끌어 일으켰다. 그는 수레에 실려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리가 못 쓰게 된 것 같았다. 그날부터 에로프는 처량한 앉은뱅이가 되어서 줄곧 자리에 누워 있게 되었다. 그는 종일 술타령만 해댔다. 그러나 의사는 술은 뭐든지 주면 안 된다고 카린에게 단단히 일러 놓았다. 한번 마시게 되면 죽도록 마시기 때문이었다. 에로프는 고함을 치고 괴성을 지르면서 술을 손에 넣으려고 안달이었다. 밤이면 특히 심했다. 그는 미치광이처럼 온 집안 사람들의 잠을 설쳐 놓았다.
카린은 너무도 쓰라린 나날을 보냈다. 남편은 이따금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녀를 괴롭혔다. 집안의 공기까지도 에로프의 천한 말투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들로 더렵혀져 마치 지옥과도 같았다. 카린은 스톰 교장에게 방학 동안에도 계속 잉그마르를 그들과 함께 지내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동생이 자기와 함께 단 하루도, 심지어 크리스마스 때조차 같이 있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잉그마르 농장의 하인들은 모두 먼 일가로 그들이 잉그마르손 집안에 속한다는 감정이 없었다면 그런 조건 아래서는 단 하루도 함께 살며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겐 편안히 잠드는 밤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로프는 카린과 하인들을 괴롭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내서 그들이 자기의 요구에 응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이렇듯 비참한 속에서 겨울이 가고 여름이 오고 또 겨울이 지났다.
카린은 한군데 피난처를 가지고 있어서 이따금 거기에 숨어 혼자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곳은 밀밭 뒤에 마련된 조그마한 자리로, 카린은 거기에 앉아 두 팔꿈치를 무릎 위에 세우고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똑바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녀 앞에는 탁 트인 밀밭이 펼쳐져 있고, 그 건너편에는 숲과 아득히 잇닿은 산봉우리와 크라크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사월의 어느 날 밤,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호프는 전나무 숲 그늘에서 아직도 잠이 깨지 않은 채 깔려있었고, 나직한 야산 앞은 눈 녹을 때 흔히 보게 되는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 있었다. 이제 봄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그녀로 하여금 한층 노곤한 피로를 느끼게 했다. 그녀는 올여름도 지난여름과 같다면 한시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앞에 가로놓인, 씨 뿌리기에다 건초 만들기, 베 짜기, 옷 깁기, 청소, 빵 굽기 등의 많은 일들도 걱정이었다.
"차라리 죽어버렸음...."
그녀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듯 중얼거렸다.
'에로프가 술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만이 내 유일한 희망일까?'
그녀는 문득 눈을 들었다. 누군가가 부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할보르 할보르손이 울타리에 기대어 똑바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꽤 오랫동안그 자리에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기로 오면 당신을 만날 줄 알았지."
할보르가 말했다.
"어머, 어째서요?"
"옛날에도 당신은 여기로 도망쳐 와선 혼자 생각에 잠기곤 했잖소?"
"지금에 비하면 그 시절엔 생각할 것도 없었어요."
"그 시절, 당신의 번민은 대개 공상적인 것이었지."
카린은 할보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이는 필경 나를 무척 어리석은 여자라고 생각할 거야. 자기같이 품위 있는 남자를 거절하고 되레 주정꾼과 결혼해선 이 모양이라구. 나를 조롱하러 온 게야.'
"방금 댁에서 에로프와 얘기를 나누고 온 길이오."
할보르는 힘주어 말했다.
"내가 만나고 싶은 것은 에로프였으니까."
카린은 차가운 태도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땅으로 내리깔고 두 손을 깍지낀 채 할보르가 언제 자기에게 퍼부을지 모를 온갖 모욕을 견디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다져 두었다.
"에로프에게 말했소."
할보르가 말을 이었다.
"그가 다친 것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이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러나 카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얼마 동안 나의 집에서 함께 있자고 했지. 하다못해 기분전환이라도 될 거고, 또 여기 있을 때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을 테고 해서."
카린은 눈을 들었다. 그러나 그 외에 자세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내일 아침 새 집으로 옮기기로 했소. 에로프는 응할 거요. 술을 마실 수 있을 줄로 알고 있으니까. 그건 물론 안 될 일이오. 나도 역시 절대 술을 내놓지 않을 테니까 말이오. 내일 집에서 기다리겠소. 가게 건너편의 작은방에서 지내도록 할 참인데,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왕래하는 사람들을 모두 볼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지요."
카린은 처음엔 그를 의심했으나 차츰 그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난 것임을 깨달았다. 카린은 할보르가 자기에게 청혼한 이유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녀에게 많은 재산과 훌륭한 친척이 있기 때문이라고 상상해 왔다. 그녀는 자신이 남자들로 하여금 매력을 느끼게끔 하는 그런 여자가 아님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도 할보르나 에로프에게 사랑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할보르가 곤란한 처지에 놓인 자기를 도우려 하고 있다. 그녀는 그가 이토록 친절하다는 점에 놀라고 있었다. 확실히 어느 정도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자기를 찾아와 도우려 할 까닭이 없으리란 생각이었다. 카린의 가슴이 야릇하게 몹시 두근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여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느낌으로, 불현듯 할보르의 친절이 자기의 얼어붙은 가슴을 녹여 사람이 온 몸에 타오르기 시작한 것을 깨달았다.
할보르는 계속하여 열심히 자기 계획을 늘어놓았다.
"에로프도 괴로울 거요. 장소를 바꿔 볼 필요가 있지. 그리고 나한테는 당신에게처럼 그렇게 애를 먹이진 않으리라 생각하오. 계산을 해봐야 할 인간을 상대로 할 경우엔 전혀 달라지는 법이니까."
카린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기가 할보르를 사랑한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고는 꼼짝도 할 수 없고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할보르는 이야기를 그치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린은 일어서서 비틀비틀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하나님의 은총이.... 당신에게 있으시길.... 바래요, 할보르!"
그녀는 더듬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하나님의 은총이 당신에게...."
갑자기 할보르가 그녀의 손을 잡아 낚아채듯 자기 앞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녀가 몹시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엇인가 눈치를 챘던 것이다.
"싫어! 싫어요!"
카린은 엉겁결에 소리치며 그를 뿌리쳤다. 그리고는 총총히 달아나 버렸다.
그해 여름 에로프는 할보르의 집에서, 가게 건너편의 침실에 누워 지냈다. 그러나 할보르는 그를 돌보는 데 더 이상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을이 되자 에로프는 덧없이 세상을 뜬 것이다.
에로프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서 스티나가 할보르에게 말했다.
"할보르, 나와 꼭 약속할 게 한 가지 있어요. 카린을 꾹 참고 기다리겠다고 약속하세요."
"물론 참고 기다릴 겁니다."
할보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설사 칠 년을 기다려야 한대도 나는 그녀를 기다릴 거예요."
그러나 이 참고 기다린다는 것이 할보르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얼마 안 가서 많은 사람들이 카린에게 청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에로프의 장례식이 있은 지 채 2주일도 안 되서부터였다.
일요일 오후, 할보르는 가게 앞 계단에 주저앉아 오고 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그는 여느 때와 달리 아름다운 마차 세 대가 잉그마르 농장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발견했다. 첫 번째 마차에는 베리소나 주물공장의 검사관이 앉아 있었고, 두 번째 마차에는 카름순드 여관 주인의 아들이 타고 있었다. 또한 세 번째 마차에는 장관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서부 달레카를리아에서 제일 가는 부자이며 사리에도 밝고 또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확실히 젊지는 않았다. 두 번 결혼해서 지금은 두 번째로 홀아비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보르는 베르게르스헨 페르손이 달려가는 것을 보자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한길로 뛰어나갔다. 어느새 그는 다리를 건너 강 저쪽의 잉그마르 농장이 있는 곳에 서 있었다.
'마차들이 과연 어디로 간걸까'
그는 거의 뛰다시피 수레바퀴 자국을 따라갔다. 갈수록 그 목적지는 뚜렷해 보였다.
'이런 짓을 하다니 나도 여간 미련한 게 아니군'
그는 스티나가 주었던 주의를 되새기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문 앞까지 가보는 거야 어떨라구. 사람들이 거기 있나만 확인할 건데.'
잉그마르손 집안의 제일 좋은 방에는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과 나머지 두 사나이들이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잉그마르는 아직도 학교에서 기숙하고 있었지만 그날은 일요일이라 집에 와 있었다. 그는 손님들과 식탁에 앉아 주인 노릇을 했다. 카린이, 하녀들이 스톰 교장의 설교를 들으러 전도관에 가고 없어서 부엌에 할 일이 많다며 자리를 떴기 때문이었다.
방 안의 공기는 매우 서먹했다. 모두 한 마디 말도 없이 커피만 홀짝대며 앉아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카린에게로 가서 은밀한 말 한마디라도 속삭일 수 있을까, 각기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며 다른 손님 한 사람이 들어섰다. 손님은 잉그마르의 안내를 받아 식탁에 와 앉았다.
"이분은 팀즈 할보르 할보르손 씨입니다."
잉그마르가 새로 온 손님을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에게 소개했다. 스헨 페르손은 자리에 앉은 채 손을 크게 흔들면서 할보르에게 놀리는 투로 말했다.
"그토록 유명한 분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소."
잉그마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의자를 할보르 옆으로 끌어당겼다. 할보르가 방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청혼자들은 갑자기 말이 많아지더니 기염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세 사람이 마음을 합쳐 할보르를 우선 탈락시키기로 작정이나 한 듯 서로를 차례로 추켜 올리며 옹호했다.
"장관께서는 오늘 보니 정말 훌륭한 말을 가지셨더군요."
검사관이 시작했다.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을 검사관이 지난겨울 곰을 잡은 얘기를 인사로 꺼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여관 주인 아들을 향해 그의 아버지가 지은 집이 어떻느니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점점 더 능변이 되어 갔으며 할보르로 하여금 그의 신분이 얼마나 낮으며 자기들과 대항할 인간이 도저히 못 된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려는 듯했다. 할보르는 자신이 몹시 비굴한 생각이 들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마침 카린이 금방 끊인 차를 들고 왔다. 할보르를 발견한 그녀의 마음은 금방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곧 남편이 죽은 지 얼마 안 되는데 찾아왔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조급히 찾아오면 사람들은 필경 그가 나와 결혼하기 위해 에로프를 제대로 돌봐주지 않았다든가, 없애버렸다고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여댈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할보르가 한 이삼 년 기다리다가 찾아주었으면 좋았으리라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조급한 것이었을까? 내가 자기 이외에 바라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을 텐데...."
카린이 나타나자마자 모두 일제히 일을 다물었다. 그들은 할보르와 카린이 어떻게 인사하는가를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를 했을 뿐이었다. 그것을 보고 장관을 휘파람을 불어 기쁨을 나타냈고, 검사관은 큰소리로 너털웃음을 웃었다. 할보르는 조용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뭐가 우습죠?"
검사관은 대답이 궁했다. 그는 카린이 노여워할 말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양반은 토끼를 몰아놓고 다른 사람에게 잡도록 하는 사냥개를 생각했던 겁니다."
여관 주인 아들이 비꼬아서 말했다.
카린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계속하여 찻잔에 커피를 채웠다.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 선생님도 그리고 다른 손님들도 커피만으로 만족하셔야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이 농장에서는 이제 어느 분에게도 술은 드리지 않기로 했답니다."
"나는 집에서도 술을 마시지 않지요."
장관은 매우 기분이 좋은 듯 대꾸했다.
검사관과 여관 주인 아들은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들은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이 아주 유리해졌다고 생각했다. 장관은 곧 금주와 그것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카린은 흥미롭게 귀를 기울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이것이 그녀를 움직일 수 있는 화제임을 알자 장관은 더욱 우쭐해져서 음주의 피해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카린은 이 문제에 관한 한 자기의 의견도 모두 같다면서 그 의견이 장관 같은 슬기로운 사람의 공명을 얻었다는 데 대해 기쁨을 표했다.
이렇게 화제를 독차지하여 혼자 지껄이던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은 흘깃 할보르 쪽을 바라보았다. 할보르는 불쾌한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앉아 커피잔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저 친구에겐 좀 너무했나? 더군다나 사람들 얘기대로 에로프가 저승에 가도록 다소나마 거들어 주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야. 아뭏든 카린에게는 그 끔찍한 주정뱅이가 없어졌으니 도움이 된 셈이야.'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은 이제 게임에서 승리했다는 생각으로 할보르에게는 오히려 친밀감조차 느꼈다. 커피잔을 쳐들며 그가 말했다.
"할보르 씨 당신을 위해 건배합니다. 당신이 카린으로부터 그 주정뱅이를 없애 줘서 확실히 좋은 방향 전환이 된 셈이니까."
할보르는 이 건배에 응할 수 없었다. 그는 똑바로 상대의 눈을 쏘아보고 앉아 저 사람이 자기의 이러한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했다.
검사관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정말 좋은 방향 전환이지."
여관 주인 아들도 맞장구를 치며 낄낄거렸다.
그들이 왁자하게 웃어대기 전 카린은 그림자처럼 부엌문으로 사라졌지만 그곳에서도 거실에서 주고받는 소리를 전부 들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시기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할보르의 방문이 안타까웠고 동시에 난처했다. 벌써 마을에 나쁜 소문이 돌아 할보르와 결혼할 수 없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저이를 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어'
거실에서는 잠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윽고 의자를 뒤로 미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일어서는 것 같았다.
"벌써 가세요, 할보르?"
잉그마르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응, 더 이상 있을 수가 없군. 카린에게 인사나 전해 주게."
할보르의 목소리였다.
"왜 부엌에 가서 직접 하시잖구요?"
"뭐, 우리 두 사람은 이제 별다른 할 말이 없는걸."
카린의 가슴은 마구 방망이질치고 온갖 생각이 날개가 돋힌 듯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지금 할보르는 그녀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 그녀는 그와 악수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때도 입을 열어 옹호하려고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살며시 나와 버리지 않았던가.
'지금 저이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줄로 알고 있을 거야. 이젠 다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어째서 자신이 그를 그토록 비굴하게 만들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토록 그를 사랑하는 자신이 말이다. 그러자 문득 옛날 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잉그마르손 집안사람들은 인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직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카린은 얼른 문을 열고, 막 방을 나서려는 할보르 앞을 막아 섰다.
"벌써 가세요, 할보르? 저녁을 드시고 가실 줄 알았는데."
할보르는 가만히 서서 카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전혀 달라진 듯이 보였다.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그 모습에는 무언가 부드러운, 도움을 구하는 듯한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가겠소. 그리고 이젠 오지 않겠소."
할보르는 말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 계시다 가세요. 커피도 좀 드시고."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다시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정숙한 그녀는 몇 번이나 용기를 잃을 뻔했으나 용감하게 밀고 나갔다.
'이젠 이이도 내가 자기를 원한다는 걸 알아주겠지.'
그녀는 손님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 선생님. 그리고 여러분! 할보르 씨와 저는 제가 상처한 지 얼마 되지않은 탓으로 이 일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읍니다만 지금 여러분께서 알아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할보르 씨와 결혼할 생각입니다."
그녀는 말을 끊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마지막으로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온갖 허황된 말들을 다 할 테지만, 할보르 씨나 저는 아무런 그릇된 일도 한 적이 없습니다."
카린은 말을 마치고 마치 장차 닥쳐올 온갖 참혹한 고난에 보호라도 구하듯이 할보르에게 바짝 붙어섰다. 사람들은 카린 잉그마르손이 일찌기본 적이 없을 만큼 젊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데 은근히 놀라면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할보르가 감동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린, 나는 당신 아버지의 시계를 받았을 때 그 이상 더 큰 일이 내게 일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당신이 한 말은 모든 고난을 초월하는구료."
이때 베르게르 스헨 페르손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모두 카린 부인과 할보르 씨를 축하합시다."
그가 시원스레 말했다.
"잉그마르의 따님 카린 부인이 고른 사람이 정말 정직한 분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테니까."
전도관에서 생긴 일
시골의 늙은 교장이 이따금 자기 자신을 과신했다고 해서 별로 놀랄 건 없다. 거의 한평생을 마을 사람들에게 지식을 주고 조언을 해온 그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농민들이 자기가 가르친 것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보았고, 어느 누구고 그가 이야기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은 본 일이 없었다. 그의 눈엔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어도 단순한 학생으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자신을 어느 누구보다도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눈에는 모두 볼에는 보조개가 오목하게 패인, 동그랗고 앳된 눈을 가진 철부지 어린아이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겨울의 어느 일요일, 예배가 끝난 직후 목사와 교장은 성의실에 서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화제가 구세군 이야기로 옮겨 갔다.
"이상한 것을 다 생각하셨군요. 살아생전 그런 것을 다 보아야 하다니, 나는 상상도 못한 일이군요."
목사가 말했다.
스톰은 눈을 굴려 목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목사의 비판이 전혀 겨냥을 빗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혁신이 그들의 교구에까지 들어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목사님이 그것을 보시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스톰은 힘주어 말했다.
목사는 자기가 무능력하고 쓸모도 없게 된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교장이 무엇을 하든 내버려 두었지만 때로는 좀 골려주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떻게 우리가 구세군을 피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소, 스톰 선생? 아시다시피 목사와 교장이 손을 잡고 선다면 그따위 방해물은 아무리 몰려와도 하등 두려워할 것이 없겠소만, 스톰 선생, 나는 선생이 내 편에 서리라는 건 조금도 기대할 수가 없군요. 선생은 전도관에서 마음대로, 편리할 대로 설교하고 계시니까요."
이 말에 스톰은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목사님은 한 번도 내 설교를 들으러 오시지 않더군요."
전도관이야말로 목사에겐 바위와도 같은 진짜 방해물이었다. 그는 그 안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화제에 올려놓고 그 두 사람은 서로 감정이 상할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다.
'아무래도 나는 스톰 선생에게 미안한 짓을 했어. 지난 4년 동안, 주일마다 스톰 선생은 오후에 성서 강의를 열어왔지만, 그러면서부터 교회의 아침 예배에는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예상과는 달리 교회 내에 분열의 조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어. 스톰 선생은 약속대로 나를 무너뜨리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았던 거지. 저 사람은 정말 성실한 벗이야. 내가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줘야지'
오전의 조그마한 알력이 원인이 되어 목사는 오후에 교장의 강의에 나가기로 했다.
'스톰 선생을 한번 기쁘게 놀래줘야지. 그 양반이 전도관에서 설교하는 것을 한번 들어 보자'
전도관으로 가면서 목사는 그것을 짓던 옛일들을 떠올렸다. 공기까지도 예언에 차 있었고 하나님이 무언가 위대한 존재가 되기 위하여 그런 것을 계획했다고 그는 얼마나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가! 그러나 그의 예감과는 달리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도관은 방이 넓고 벽이 희끄무레했다. 양쪽에는 털가죽으로 가장자리를 댄 외투를 입힌 루터와 란히톤의 목조상이걸려 있었다. 천정에 가까운 벽 둘레에는 꽃과 천국의 나팔과 그리고 저음 나팔 따위로 장식한 성서의 문구가 높다랗게 걸려 있었다. 방 정면의 연단 위에는 그리스도를 그린, 얼핏 보면 유화 같기도 한석 판화가 걸려 있었다.
넓은 방은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농부 옷을 걸쳤고, 빳빳하게 풀을 먹인 아낙네들의 머릿수건은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돌았다. 이야기를 진행 중이던 스톰은 목사가 한쪽 통로를 내려와서 앞줄에 앉는 것을 보았다.
'너는 특별한 인물이야, 스톰!'
스톰 교장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모든 것이 내게로 온다. 목사까지 나에게 경의를 표하러 오지 않았는가'
스톰은 이날 오후 묵시록에 나와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과 영원한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목사가 온 것이 무척 기뻐서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영원히 연단 위에 서서 아이들같이 선량하고 양순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 이외엔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거기다가 오늘 목사가 나의 설교를 들으러 왔듯이 이따금이라도 주께서 이곳을 찾아주신다면 하늘 위의 그 누구도 나만큼 기쁠 수 없을 거야'
스톰이 예루살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목사는 흥미를 느끼면서 동시에 먼 옛날 가졌던 의문이 되살아났다. 한창 예배가 무르익을 무렵 문이 열리면서 한 떼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기도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문 옆에 가만히 물러서 있었다.
'가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데'
목사는 생각했다.
스톰이 '아멘' 하고 말하기가 무섭게 문 옆에 물려 서 있던 사람들 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나와 방안에 가득 퍼졌다.
"제발 저에게도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건 분명 헤이크 마츠 에릭손이다!'
목사와 그곳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이 마을에 그토록 아름답고 어린아이처럼 낭랑한 음성을 가진 사람은 그 외에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유순한 얼굴의 작달막한 사나이가 연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갔고, 그 뒤에 그를 옹호하고 격려하기 위해 따라온 듯 한 스무 명 남짓한 남녀들이 따라나섰다. 목사를 비롯한 스톰, 그 밖의 회중들이 모두 자리에서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들었다. 그들은 헤이크 마츠가 필시 무슨 끔찍한 재난을 알리러 왔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왕이 돌아가셨거나 선전포고가 나붙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 물에 빠져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헤이크 마츠는 조금도 불길한 소식을 전하러 온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약간 흥분하고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또 매우 즐거워서 싱글싱글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저는 교장 선생님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 이렇게 왔습니다. 2주일 전, 저는 식구들과 집에 앉아 있다가 성령이 제게 강림하여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가족은 그날 심한 폭설 때문에 여기 와서 스톰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목말라 하고 있을 때 문득 저도 설교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저는 벌써 두 번이나 주일에 설교를 했답니다. 그 설교를 들은 집안 식구들과 이웃사람들이 저더러 전도관에 가서 여러분들께도 한번 들려 드려야 한다고 권하지 않겠습니까"
헤이그 마츠는 자기처럼 무식한 사람에게도 그런 재능이 주어진 데 놀라고 있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도 따지고 모면 한낱 농민이지 않았습니까?"
얼마간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이렇게 서두를 마친 헤이크 마츠는 두 손을 잡으며 당장 설교를 시작하려고 했다.
"헤이크 마츠,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이야기를 할 참인가?"
허를 찔린 놀라움에서 벗어나며 스톰이 소리쳤다.
그렇다고 확실하게 대답하려던 헤이크 마츠는 스톰이 눈을 부릅뜨자 어린아이처럼 움츠려 들었다.
"물론,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께 허락을 받아야 하지요."
그는 더듬거렸다.
"우리는 오늘 더 이상 설교가 필요치 않네."
스톰이 깎아 자르듯 말했다.
"제발 저에게 두어 마디만 지껄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저는 단지 밭을 갈 때와 숯굴에서 일하고 있을 때 제게 일어난 일들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그 말들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헤이크 마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에워했다.
스톰은 자신도 그러한 경험을 가졌었지만, 몸집이 작은 가련한 이 사나이에게 도무지 아무런 연민의 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자네는 왜 혼자 느낀 괴상한 생각을 가지고 여기 나타나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겨대는가?"
헤이크 마츠는 이제 감히 더는 항의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스톰은 찬송가 책을 폈다.
"자 여러분, 함께 부릅시다. 찬송가 187장을 펴십시오."
그는 커다란 목소리로 찬송가를 한 번 읽고는 힘껏 목청을 돋우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너의 창문은 예루살렘 쪽으로 열려 있는가-
그동안에 그는 생각에 잠겼다.
'역시 오늘 목사가 와 있어서 잘됐어. 내가 이 전도관에서 어떻게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가를 알았겠지'
찬송가가 끝나자마자 한 사나이가 벌떡 일어섰다. 의젓하고 위엄있는 륭 비오른오라프손이었다. 그는 잉그마르 딸과 결혼하여 마을의 중심에 있는 커다란 농장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끝나 버린 일이지만 교장 선생님께선 마츠 에릭손 문제를 처리하시기 전에 저희들의 의견도 물어 주셨어야 옳습니다."
그가 점잖게 항의했다.
"호- 그렇게 생각하는가, 오라프손?"
스톰은 건방진 아이들을 꾸짖을 때 늘 하던 투로 말했다.
"그럼 말하겠는데 나 이외엔 아무도 이곳에서 무슨 얘기든 할 수 없네."
륭 비오른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스톰에게 시비를 걸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헤이크 마츠가 입은 타격을 조금 덜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제 그는 자기가 받은 수모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응수할 만한 말을 채 마련하기도 전에 헤이크 마츠와 함께 들어온 한 사나이가 커다란 소리로 말했다.
"저는 헤이크 마츠의 설교를 두 번이나 들었는데, 저 사람은 정말 신기한 사람입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께서도 한 번 들어 보시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줄로 압니다."
스톰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교실에서 훈계하는 조로 말했다.
"이봐 크리스텔 랄손,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단 말이다. 알아듣겠나? 만일 오늘 헤이크 마츠에게 설교를 시켰다가는 다음 주일엔 크리스텔 자네가 설교하겠다고 나설 테고, 그다음 주일에는 륭 비오른이 덤벼들게야!"
이 말을 듣고 몇몇 사람이 웃음을 흘렸지만 륭 비오른은 얼른 그말에 부당함을 지적하고 있었다.
"어째서 저나 크리스텔이 교장 선생님처럼 설교를 해서는 안 됩니까? 그 까닭을 모르겠군요."
팀즈 할보르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사람들을 달래어 언쟁을 막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 전도관을 짓고 운영하는데 헌금을 한 우리들 입장에선 새로운 설교자가 이야기할 허락을 얻고자 할 때 마땅히 함께 의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텔 랄손도 기운을 되찾아 다시 일어서며 말했다.
"저 역시 기억하기론, 우리가 함께 이 전도관을 세울 때 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예배당이지 어는 한 사람만이 주관하는 곳은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던 걸로 압니다."
그가 이렇게 말을 맺자, 사람들은 모두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교장 이외의 다른 누구의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터인데, 이젠 무언가 새로운 설교를 듣는 다는 것이 아주 즐겁게 여겨졌다.
"뭐 좀 새로운 것을 듣고 싶어요. 연단 저편에 다른 사람이 서는 것을 봤으면...."
누군가가 수군거렸다.
그런데 만일 브레트 군네르가 이날 이 자리에 없었던들 아마 소동은 그 선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는 팀즈 할보르의 동서로, 후리후리한 키에 어딘가 쓸쓸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고 거무스름한 피부에 눈길이 매우 날카로운 사내였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교장을 좋아했으나 그날의 재치있는 싸움에서만은 물러설 수 없었다.
"우리들이 전도관을 짓기 시작할 때는 자유에 대해 퍽이나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습니다만, 문을 열고부터는 좀처럼 그런 류의 말을 듣지 못하게 된 것 같군요."
스톰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군네르의 말은 여지없는 적의, 다시 말해서 뚜렷한 반대의 첫 징조였다.
"아니, 잘 생각해 봐. 브레트 군네르, 자넨 여기서 루터가 가르친 것처럼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들었을 게야. 단지 여기서는 오늘 나타나서 내일 땅에 묻힐 그런 어쭙잖은 설교가 허락되지 않을 뿐이지."
"선생께선 무엇이든 기존의 교리에 저촉되는 새로운 것만 나타나면 우리로 하여금 당장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토록 하셨지요."
군네르는 유감스럽다는 듯이 그러나 부드럽게 대꾸했다.
"새로운 방법으로 소를 돌보거나 최신농기구를 사용하는 것은 희망하시면서도, 지금 하나님의 밭을 가는 데 사용할 새로운 말씀에 대해서는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하십니다."
스톰은 브레트 군네르가 제멋대로 짖도록 내버려 두느니 물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볍게 말했다.
"그럼 뭔가, 자네의 의견은 루터교도들과 다른 교리를 여기서 설교시켜야 한다 그 말인가?"
군네르가 소리쳤다.
"새로운 교리의 문제완 상관없습니다. 지금 여기선 설교하는 사람에 관해 얘기하는 중이지요. 제가 알기로, 마츠 에릭손은 교장 선생님이나 목사님과 다름없이 훌륭한 루터교도입니다."
이 순간, 목사의 존재를 잊고 있던 스톰은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목사는 지팡이 손잡이 위에 턱을 괸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눈은 호기심으로 빛나며 스톰을 응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전에도 경험한 일과 어딘가 비슷하다고 스톰은 생각했다. 화창하게 갠 어느 날 아침, 참새가 교실의 창문 바깥 문턱에 앉아 즐거운 듯이 재잘거리고 있을 때면 흔히 이러한 일들이 일어 별안간 아이들이 공부를 집어치우고 그만 쉬자고 졸라대면서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한다. 이것을 바로잡기란 여간 힘이 드는 일이 아니다. 그와 흡사한 일이 지금 헤이크 마츠가 나타나면서부터 마을 신도들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스톰은 목사나 그 밖
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가 이 폭동을 능히 진압하고도 남는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우선 저들이 사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둬야지. 주모자들이 목이 쉬도록 실컷 지껄이게 내버려 둬야 해'
스톰은 물병이 놓여 있는 테이블 저쪽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항의의 폭풍은 그칠 줄을 몰랐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도 교장과 다름없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에 기세가 등등해지고 있었기때문이다. 그것은 교장이 전도관을 세우며 평범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후부터 자연히 그들의 마음속에 싹터온 것이 분명했다.
'폭풍은 곧 가라앉을 게야. 이제는 이곳의 지도자가 누구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시켜야 해.'
스톰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탕탕 두드리며 소리쳤다.
"집어치워! 도대체 이 소동이 뭔가. 나는 이제 돌아가겠소. 여러분들도 돌아가시오. 불을 끄고, 문을 잠가야 하니까."
몇 사람이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들은 스톰의 학교에 다녔던 사람들로, 선생이 테이블을 칠 때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유있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교장은 지금, 우리들이 이미 성인이라는 것을 잊고 있어."
누군가가 말했다.
"테이블을 치기만 하면 우리가 여전히 당장 도망칠 줄로 알고 있다니까"
또 다른 사람이 맞장구쳤다.
그들은 새로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누구를 부르면 좋을까를 이야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는 곧 국립복음협회의 성서 판매원을 불러오면 어떨가 하는 문제로 왈가왈부 지껄여댔다.
스톰은 신도들을 노려보면서 있었다. 그의 기분은 마치 괴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하나하나의 얼굴에서 오직 어린아이를 느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동그란 어린아이의 뺨이나 부드러운 어린아이의 곱슬머리나 귀여운 눈동자는 모두 사라지고, 다만 억세고 뻔뻔스러운 얼굴을 한 어른의 집단만이 눈에 비쳤다. 그는 이제 도저히 그들을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동은 계속되고 목소리는 차츰 왁자하게 커져 갔다. 스톰은 꼼짝도 하지 않고, 거칠어지는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브레트 군네르, 륭 비오른 그리고 크리스텔 랄손이 앞장을 서고 있었다. 전혀 악의는 없었으나 이 난처한 사건의 원인이 된 헤이크 마츠는 이따금 일어서서 조용히 하라고 사정했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스톰은 다시금 목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목사는 여전히 꼼짝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고, 그의 눈 역시 똑같은 빛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스톰은 생각했다.
'저 사람은 아마 내가 전도관을 세우겠다고 주장하던 4년 전의 그날 밤 일을 회상하고 있을 거야. 역시 그가 옳았어. 만사가 목사의 말대로 되고 있으니 말야. 아, 이단과 반역과 분열.... 내가 이것을 짓겠다고 고집하지 않았던들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결론이 확실해지자 스톰은 고개를 쳐들고 등을 꼿꼿이 폈다. 그는 주머니에서 반짝거리는 조그마한 강철 열쇠를 꺼내 들었다. 바로 전도관의 열쇠였다. 그는 구석구석에서도 볼 수 있도록 열쇠를 불빛에 비추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자, 이 열쇠를 테이블 위에 놓아 두겠네. 나는 두번 다시 이 열쇠에 손을 대지 않을 게야. 그 까닭은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려던 모든 것에게 이것이 문을 열어 주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지"
스톰은 열쇠를 내려놓고 모자를 집어 들더니 곧장 목사에게로 걸어갔다.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만일 오늘 안 오셨으면 영원히 내 이야기를 듣지 못했겠지요.“
폭풍의 밤
사람들은 에로프 엘손이카린이나 어린 잉그마르에게 실컷 애를 먹였기 때문에 무덤 속에서도 편치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에로프 엘손이 죽고 카린은 정말 무던히 고생을 했다. 그가 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써버렸고 게다가 밭은 거금에 저당 잡혀 있었으므로 만일 할보르가 빚을 갚을 재력이 없었던들 그것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었을 정도였다. 잉그마르의 재산 2만크로네도 에로프에 의해 온데간데 없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가 어디엔가 돈을 묻어 놓았다느니, 남에게 주어 버렸다느니 수군대기도 했다. 아무튼 그것은 찾을 도리가 없었다.
잉그마르는 자신이 한 푼도 없는 신세가 된 것을 알고 카린에게 의논했다. 그는 우선 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고, 대학에 들어갈 나이가 될 때까지 그냥 스톰 교장댁에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마을에 있는 동안은 교장이나 목사에게 언제라도 책을 빌릴 수 있고 게다가 더 좋은 것은 학교에서 스톰 선생을 도와 아이들에게 책 읽히기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훌륭한 실습이 될 것이었다.
"그렇겠지. 집에 있기는 싫을 거야. 여기서는 주인이 될 수 없으니까, 그렇지?"
카린이 생각 끝에 말했다.
스톰의 딸은 잉그마르가 돌아온다는 소리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남자아이를 데리고 살 바엔 판사의 아들인 베르틸 쪽이나 헤르크 마츠 에릭손의 아들인 쾌활한 가브리엘 쪽이 낫다고 게르트루드는 생각했다. 게르트루드는 가브리엘과 베르틸은 좋아했지만, 잉그마르에 대한 감정은 분명치가 않았다.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하인처럼 잔심부름을 해주기도 해서 그 점은 마음에 들었지만, 어설프고 소심하여 놀 줄을 몰라 때로는 짜증스럽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부지런하고 공부를 좋아하는 데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겐 매우 둔한 면이 있어 게르트루드는 노골적으로 놀려대곤 했다.
게르트루드의 머릿속은 언제나 우스꽝스러운 공상과 꿈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그것을 잉그마르에게 털어놓게 되었다. 또한 어쩌다가 잉그마르가 사나흘 집을 비우게 되면 그녀는 초조해 했고 말벗이 없어진 사실을 절실하게 느꼈지만, 일단 그가 돌아오게 되면 무엇이 그렇게 그리웠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잉그마르를 하찮게 여겼다. 그러나 잉그마르가 예전과는 달리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녀는 그를 위해 울었고, 그가 다시 재산을 모을 생각은 하지 않고 교사가 될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너무나 흥분하여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켜야 했다.
'언젠가는 다시 회복될 거야'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스톰의 학교 학생들은 매우 엄한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엄격히 그 규율을 지켜야 했고 논다는 것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스톰이 설교를 그만둔 해의 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여보,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다워야 해요. 당신이나 저나 젊었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그 왜, 우리도 열일곱 살 때는 해가 질 때부터 해가 뜰 때까지, 며칠씩 꼬박 춤으로 지새잖았어요?"
스티나가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 후 어느 일요일 밤, 젊은 가브리엘과 시의원의 딸 군힐드가 스톰의 집에 찾아왔을 때 그들은 학교에서 한바탕 춤을 출 수 있었다. 춤을 추어도 괜찮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게르트루드는 미친 듯이 좋아했으나 잉그마르는 도무지 함께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책을 들고 창문 옆의 긴 의자에 가서 주저앉아 버렸다. 게르트루드가 몇 번이나 춤을 추게 하려고 시도했으나 그는 말없이 수줍은 듯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스티나는 그 모양을 지켜보다가 머리를 저었다.
'과연 전통 있는 집안의 태생답군. 하지만 젊은이답진 않아'
춤을 춘 세 사람은 너무나도 즐거웠다. 그들은 다음 토요일 밤에 정식으로 춤을 추러 가자고 말하면서 스톰과 스티나에게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억센 잉그마르의 집에서 춤을 춘다면 승낙하겠어요. 거기라면 훌륭한 사람들이 모이는 데니까."
스티나가 말했다.
스톰도 조건을 붙이기로 했다.
"나는 잉그마르가 함께 가지 않는다면 게르트루드를 춤추러 보낼 수 없다."
세 사람은 잉그마르에게 몰려들어 함께 가 달라고 부탁했다.
"내키지 않아."
그가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말했다.
"부탁해 봐야 소용없어!"
게르트루드가 거센 어조로 말했다.
잉그마르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방금 춤을 춘 끝이라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야릇한 조소를 띠고는 잉그마르를 날카롭게 쏘아 보더니 이내 외면해 버렸다. 그것은 마치 애늙은이 같은 그를 마음껏 경멸한다는 태도 같았다. 잉그마르는 하는 수 없이 마음을 돌려야 했다. 그 밖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스티나와 부엌에서 실을 감고 있던 게르트루드는 문득 어머니가 이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는 이따금 물레를 둘리다 말고 귀를 기울였다.
"저게 무슨 소릴까? 도무지 알 수가 없네. 게르트루드, 네 귀에도 들리니?"
"네, 들려요. 누가 2층 교실에 있나 본데요."
"이런 시간에 있긴 누가 있겠니? ....저것 봐, 들리지?.... 뭔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분명 무엇인가 쓱쓱쓱, 쿵쿵쿵 하고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긴장하여 소름이 돋았다.
"틀림없이 누군가 올라간 거예요."
게르트루드가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니까 저건 너희들이 춤을 춘 뒤로 밤마다 들려오는 소리야."
'어머니는 우리가 춤을 춘 뒤로 이 집에 귀신이 나오게 된 줄로 알고 있나 봐'
게르트루드가 생각했다. 만일 그 생각이 어머니의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게르트루드는 두 번 다시 춤을 출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제가 2층에 가서 뭔지 보고 올께요."
게르트루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티나는 황급히 딸의 스커트 자락을 붙잡았다.
"괜찮겠니?"
"아이 참, 엄마두! 뭔가 확인해 두는 것이 마음 편하잖아요."
"그럼 나도 같이 가자"
스티나는 결심한 듯이 말했다.
두 사람은 살며시 계단을 올라갔다. 문 앞까지 왔을 때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문을 열지 못한 채 망설이다가 스티나가 허리를 굽혀 열쇠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곧 그녀는 소리를 죽이고 킥킥거리고 웃었다.
"뭐가 우스워요, 엄마?"
게르트루드가 물었다.
"네 눈으로 한번 들여다봐라, 소리 내지 말고!"
이번엔 게르트루드가 열쇠구멍에 눈을 갖다 댔다. 안에서는 책상과 걸상을 한쪽 벽에 밀쳐 놓고 잉그마르가 교실 한복판 먼지 구덩이 속에서 의자 하나를 껴안고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잉그마르가 미쳤나 봐!"
게르트루드가 소리쳤다.
스티나는 딸을 문에서 떼어내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아마 혼자서 춤을 배우는 모양이다. 그걸 익혀두면 모임에서도 어울릴 수 있을 테니까"
스티나 부인은 몸을 흔들면서 웃어대기 시작했다.
"어떻게나 놀랐는지 정말 십년 감수할 뻔했다. 아무튼 다행한 일이다. 잉그마르도 한 번쯤은 젊어질 수 있으니!"
겨우 웃음을 진정시켰을 때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너 이 일을 아무한테도 얘기해선 안 된다. 알겠니?"
토요일 밤, 네 사람의 젊은이가 학교 계단에 서서 막 떠나려 하고 있었다. 스티나는 무척 만족스러운 듯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들은 노란 노루 가죽의 반바지에다 눈부시게 빨간 소매가 달린 초록색 수직 조끼를 입고 있었다. 군힐드와 게르트루드는 헐렁하게 소매를 부풀린 블라우스에 빨간 천으로 단을 두른 세로줄 무늬의 스커트를 받쳐입고, 꽃무늬가 있는 스카프를 둘러 가슴께에다 매었으며, 스카프와 똑같은 꽃무늬를 새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네 사람은 봄의 해거름에 깃든 어스름 속을 걸어갔다. 그들은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간혹 게르트루드만이 곁눈질로 잉그마르를 훔쳐보면서 그가 춤을 배우려고 애쓰던 모습을 떠올렸다. 이유야 어쨌든 그녀의 마음은 차츰 두둥실 가벼워졌다. 다른 사람들보다 좀 떨어져 걸으며 그녀는 아무런 방해 없이 명상에 잠기려 했다. 그녀는 나무가 새로운 나뭇잎을 가지게 된 조그마한 이야기를 꾸며 보았다.
나무가 한겨울 동안 조용히 푹 잠을 잔다. 별안간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은 한여름이었다. 들판은 풀잎과 파도를 이루는 곡물로 치장을 하고 아가위는 갓 핀 장미와 함께 반짝이고 있었다. 냇물과 못은 연꽃 잎으로 덮이고, 돌은 잔벌레가 기어 다니는 풀의 털수염에 덮여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숲의 양탄자는 잡초로 수북하게 덮여 있었다. 이렇듯 모든 것이 옷을 입고 치장을 하는 가운데 나무는 유독 자기들만이 여윈 몸으로 헐벗고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발가벗은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무는 모든 자연이 자기를 비웃는 것 같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호박벌이 윙윙거리며 날아와 놀려대고, 까치도 얕잡아 보고 웃었다. 다른 새들도 모두 업신여기듯 야유의 노래를 불러댔다.
"우리의 옷은 어디에 있지?"
나무들은 맥이 풀린 몰골로 서로에게 물었다. 잎사귀 하나 붙어 있지 않은 몸뚱이 때문에 그들은 점점 더 괴롭고 슬퍼졌다. 바로 그때 잠이 깼다. 그들은 아직도 잠이 가득 묻어 있는 눈길로 사방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아, 다행히도 꿈이었어! 분명 여름은 아직 이곳까지 오지 않았군. 알맞게 잠이 깨서 참 잘 됐어."
그런데 더 유심히 살펴보았을 때 그들은, 냇물에는 얼음이 녹고 풀잎과 크로커스는 잠자리인 흙 속에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으며, 자신들의 껍질 안에서도 이미 수액이 흐르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쨌든 봄은 이미 와 있었구나!"
나무는 중얼거렸다.
"올해는 꽤 오래 잤는데! 역시 눈 뜨길 잘했어. 몸치장을 하기엔 꼭 알맞은 시기야"
나무들은 부랴부랴 촉촉한 연둣빛 잎을 달고, 단풍은 몇 개의 초록 꽃을 달았다. 도장나무의 잎은 생기다 말고 쭈글쭈글하게 펼쳐 나와서 정말 팔푼이처럼 보인 데 반해, 수양버들은 매끈한 잎이 처음부터 반질반질하게 귀여운 눈을 떴다.
게르트루드는 이런 상상으로 걷다 말고 혼자 웃었다. 그녀는 지금 잉그마르와 단둘이 있었다면 이 이야기를 모두 들려줄 수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잉그마르의 농장에 도착하자면 꽤 멀어서 그들은 한 시간 이상이나 걸어야 했다. 그들은 강가를 따라 걸어갔다. 그러는 동안 내내 게르트루드는 다른 사람보다 약간 쳐져서 걸어갔다. 그녀의 공상은 벌겋게 지는 해의 가장자리를 맴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석양은 강물 위에서 타기도 하고 물가에서 불붙기도 했다. 잿빛 도장나무와 초록빛 자작나무는 반짝이는 빛에 싸여서 금방 빠알갛게 젖어 들다가는 다시 제 빛깔로 돌아가곤 했다.
갑자기 잉그마르가 걸음을 멈추며 그때까지 지껄이던 이야기를 뚝 그쳤다.
"왜 그래, 잉그마르?"
군힐드가 물었다.
잉그마르는 숨이 멎은 듯 새파랗게 질린 채 눈앞의 무엇인가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득한 밀밭과 야산에 둘러싸인 넓은 평야. 그리고 그 평야 한복판의 커다란 농장 건물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순간 붉은 지붕과 벽 언저리에는 불그스름한 빛이 황홀하게 감돌았다.
게르트루드는 잉그마르를 잠시 바라보더니 군힐드와 가브리엘을 한쪽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잉그마르에게 이 근처 이야기는 아무것도 묻지 마. 저기까지가 모두 잉그마르 농장이야. 벌써 2년이나 여기서 안 살았는데 돈이 다 없어졌기 때문이야. 그 때문에 아마 슬퍼진 모양이야."
숲 기슭에 있는 억센 잉그마르의 오두막으로 가려면 그 농장을 지나야 했다. 얼마 안 가서 그들을 부르며 잉그마르가 뒤쫓아 왔다.
"그쪽보다 이쪽 길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는 숲 기슭을 꾸불꾸불 돌아가는 옆길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길로 가면 농장을 가로지르지 않아도 억센 잉그마르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너 억센 잉그마르 알지?"
가브리엘이 물었다.
"응, 그전에 우린 좋은 친구였어."
"마술을 한다던데, 정말이야?"
"글쎄.... 그렇진 않을 걸, 아마."
잉그마르 자신도 절반은 믿고 있는 듯 약간 떠듬거리며 대답했다.
"얘기해 줘, 너는 알잖아."
군힐드가 고집했다.
"교장 선생님이 그런 건 믿지 않는 게 좋다고 그러셨어."
"교장 선생님도 사람들이 보이는 걸 보고, 아는 걸 믿는 데야 도리가 있겠어?"
가브리엘이 잘라 말했다.
잉그마르는 친구들에게 자기 집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어린시절의 기억이 농장을 보자 곧 되살아난 것이다.
"그럼, 내가 옛날에 본 걸 하나 얘기해 주도록 하지."
그가 입을 열었다.
"아주 추운 겨울이었어. 아버지는 억센 잉그마르와 숲에 틀어박혀 숯굴에서 일을 하고 있었지.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자 억센 잉그마르는 자기가 숯굴을 돌볼 테니 아버지더러 집에 가서 축제를 즐기도록 하라고 말했지. 크리스마스 전날 어머니는 억센 잉그마르에게 줄 음식을 바구니에 담아 나를 숲으로 보냈어. 아침 일찍 출발해서 점심 전에 도착할 수 있었지. 내가 도착해 보니 아버지와 억센 잉그마르는 마침 숯굴에 바람을 넣고는 막 구워진 숯을 모두 꺼내어 땅 위에 말리고 있었어. 아직도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이 두껍게 널린 곳에서는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듯했어. 그런데 다시 불이 붙어 마저 타버리면 안 되지. 그걸 막는 것이 숯을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아버지가 나를 보며 말했어. "아무래도 너 혼자서 돌아가야 되겠다. 잉그마르야.. 이 일을 모두 억센 잉그마르에게 시킬 순 없잖겠니?" 그러자 억센 잉그마르가 말하더군. "돌아가게. 위대한 잉그마르. 나는 이보다 훨씬 심한 일도 혼자서 해냈는걸." 조금 있자니 연기가 한결 약해졌어. "자, 그럼 브리타가 얼마나 맛있는 성탄 음식을 만들어 보냈나 구경 좀 해볼까?" 억센 잉그마르가 말했지. 그는 바구니를 받아들고 나를 불렀어. "우리가 얼마나 근사한 집에 살고 있나 보여줄게." 그는 아버지와 자기가 거처하는 오두막으로 나를 데리고 갔어. 오두막엔 자연석이 하나 그대로 놓여 있고, 벽은 가문비 가지 같은 것으로 엮었더군. "어떠냐 꼬마야, 아버지가 이렇게 훌륭한 성을 숲속에 가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지? 이 안엔 폭풍우와 이슬을 막아 주는 벽이 있지." 그가 웃으면서 주먹을 가문비 가지의 벽에다 한번 쓱 쑤셔 넣었어."
잉그마르는 잠깐 숨을 들이켰다.
"얼마 안 지나서 아버지가 웃으시며 들어오셨어. 두 분은 똑같이 새까맣게 그을고 매캐한 연기가 몸에 배어 냄새가 고약하더군. 하지만 나는 그토록 행복에 젖어 즐거워하는 아버지를 일찌기 본 적이 없었어. 오두막은 지붕이 낮아서 똑바로 설 수도 없거니와 납작한 돌이 두 개 있었을 뿐이었지만, 두 분은 정말 행복해 보였어. 침대에 나란히 앉아 바구니를 끄르면서 두 분은 이런 얘기를 주고 받더군. "아니, 브리타가나한테 보내준 크리스마스 성찬을 자네가 먹어
서야 쓰겠나?"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니까 나한테도 친절을 베풀어 줘야지" "맞아, 이럴 때일수록 가련한 숯장수 영감쟁이를 굶겨서는 안 되지." 두 분은 음식을 들기 시작했지. 어머니는 약간의 브랜디를 음식과 함께 보내셨는데, 나는 두 분을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즐거워하며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하고 정말 놀랬어. 그때 억센 잉그마르가 소리쳤어. "너 집에 가거든 어머니한테 음식을 아버지 혼자 다 자셨다구 말씀드려야 한다. 내일은 더 많이 보내주시라구 말이야, 알겠니?"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지 바로 그때였어. 내가 깜짝 놀라 귀를 기울이니, 갑자기 숯굴 속에서 따닥따닥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겠어? 누가 자갈을 한 주먹 집어 던지는 것 같았지.아직 아버지는 깨닫지 못했지만 억센 잉그마르가 혼자서 중얼거리더군. "저런, 벌써 왔나?" 그러고는 여전히 앉아서 먹고만 있었어. 그러자니 또 소리가 났는데 이번엔 먼저보다 훨씬 요란했지. 마치 돌을 한 삽 떠서 불에 집어던지는 것 같았으니까. "원 세상에 성급하기도 하지" 억센 잉그마르가 이렇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더군. "틀림없이 숯이 타는 게야!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요. 혼자 나갔다 올 테니까" 그는 혼자서 밖으로 나갔고 아버지와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지. 잠시 후, 억센 잉그마르가 돌아오고 두 분은 다시 새로운 농담을 시작했어. "나이를 먹고 나서는 이렇게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가져 본 적이 없구먼"하면서 억센 잉그마르가 웃었는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소리가 나지 않겠어? "뭐야 또 사람을 자꾸 놀래키는데!" 그는 곧 뛰어나갔어. 억센 잉그마르가 다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말씀하시더군. "정말 자넨 저렇게 좋은 조수가 있으니 혼자라도 문제없겠군." "그러니 잉그마르, 자네는 집에 돌아가서 크리스마스나 즐기도록 해요. 여긴 저것들이 나를 도와줄 테니까" 아버지와 나는 집으로 돌아왔고, 억센 잉그마르가 돌본 숯굴이 타버린 일은 그 전이고 후고 한 번도 없었어."
군힐드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잉그마르에게 고맙다고 했지만, 게르트루드는 두려워진 듯이 묵묵히 걸음을 옮겨 놓았다. 벌써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여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토록 아름답게 장밋빛으로 물들어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푸르스름한 회색조로 변해있었다. 숲의 여기저기엔 어슬푸레한 빛에 나뭇잎들이 마치 벌건 괴물의 눈알처럼 팔랑거렸다.
게르트두드는 잉그마르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데 놀랐다. 그는 고향의 흙을 밟고부터 마치 딴사람이 된 듯했다. 여느 때보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늠름한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게르트루드는 그의 이러한 변화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왠지 불안한 생각조차 들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춤추기 위해 자기 마을로 가고 있는 잉그마르를 이러쿵저러쿵 놀려대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들은 조그마한 회색 오두막에 다다랐다. 집안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창문이 작아 광선이 별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이올린 소리며, 춤을 추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춤을 춘다고? 장소가 너무 좁아서 한 쌍도 못 들어갈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자. 이 오두막은 보기보단 좁지 않아." 하고 가브리엘이 말했다.
활짝 열린 문밖으로 벌써 몸이 훈훈해지도록 춤을 춘 소년 소녀들이 나와서 몰려서 있었다. 소녀들은 어깨걸이로 너울너울 부채질을 했고, 소년들은 짤막한 검은 자켓을 벗어버린 채 빨간 소매가 달린 화려한 녹색 조끼 차림으로 있었다. 새로 온 젊은이들은 문밖에 서 있는 사람들을 뚫다시피 하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그들의 눈에 띈 것은 억센 잉그마르였다. 그는 땅딸막하니 살이 찐 사나이로, 커다란 머리에다 기다랗게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도깨비나 괴물의 친척인지도 몰라'라고 게르트루드는 생각했다.
그는 춤추는 사람들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난로 위에 올라서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오두막은 밖에서 보기보다는 크지만 빈약하고 너저분했다. 생나무 송판대기를 갖다 댄 벽은 벌레가 먹었고, 대들보는 연기에 꺼멓게 그을려 있었다. 창문에는 커튼도 없었고 탁자에는 테이블보도 덮여 있지 않았다. 억센 잉그마르가 홀아비 신세라는 것은 첫눈에도 알 수 있었다. 아들들은 모두 그와 떨어져 미국에 가서 살고 있었으므로 늙은 홀아비가 쓸쓸함을 달래는 길은 어떻게 토요일 밤마다 젊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기가 켜는 바이올린에 맞춰 춤을 추게 하는 것뿐이었다.
오두막 안은 어둠침침한 데다가 숨이 콱 막힐 듯이 답답했다. 게르트루드는 당장 질식할 것같아 얼른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문간을 단단하게 막아 서 있는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뚫고 나갈 도리가 없었다.
억센 잉그마르는 정확한 솜씨로 완벽한 음률을 켜고 있다가 잉그마르 잉그마르손이 방에 들어오는 순간 활을 옆으로 제껴 끽끽 쇳소리를 냈다. 춤추던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에 서버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춤을 계속해!"
그가 소리쳤다.
잉그마르는 팔을 게르트루드의 허리에 두르고 피규어를 추려고 했다. 게르트루드는 그런 그가 매우 놀랍게 여겨졌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쪽으로도 움직여 갈 수가 없었다.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잇달아 움직여 오는 바람에 처음부터 맞춰서 시작하지 않으면 도저히 그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억센 잉그마르는 팔의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활로 난로의 재받이를 탕탕 치면서 명령하듯 말했다.
"이 오두막에서는 누가 춤을 추든지 간에 위대한 잉그마르의 아들에게는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젊은이들은 일제히 잉그마르를 돌아보았다. 잉그마르는 겸연쩍어서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게르트루드는 그를 껴안듯이 하여 방을 마구 가로질러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춤이 끝나자 바이올린을 켜던 억센 잉그마르는 아래로 내려서서 잉그마르에게 다가갔다. 그는 잉그마르의 손을 자기 손으로 감싸듯 어루만지다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이내 놓아 버렸다.
"정신 차려야겠군. 그 따위 연약한 선생의 손이라니! 나 같은 늙은이가 잡아도 금방 부러지고 말겠다."
그는 젊은 잉그마르와 친구들을 테이블로 데리고 가서 거기 앉아 있던 몇 사람의 아낙네들을 쫓아버렸다. 그리고 찬장에서 빵과 버터와 맥주를 들고 나왔다.
"이런 때는 보통, 음식을 내놓지 않는 법이지. 하지만 여기 잉그마르 잉그마르손만큼은 오늘 내 지붕 밑에서 마땅히 뭔가 한술 대접받지 않으면 안 되지."
억센 잉그마르는 조그마한 삼발 의자를 끌어다가 잉그마르 앞에 앉아서는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학교 교사가 되겠단 말이지?"
그가 물었다.
잉그마르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입가엔 엷은 미소를 띠고 그러나 슬픈 듯이 대답했다.
"집에서는 불필요한 존잰걸요."
"필요 없다구, 네가? 곧 농장에서 살게 될 거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에로프는 불과 2년밖에 살지 못했어. 할보르인들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누가 알겠어."
"할보르는 건강하니 걱정 없어요."
"물론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할보르는 네가 들어오기만 한다면 농장을 언제든지 내놓을 게다."
"어리석은 일이죠 뭐, 한번 손에 넣은 잉그마르 농장을 다시 내놓는다는 건"
잉그마르는 하얀 송판 테이블의 끝을 잡고 앉아 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파사삭하는 소리가 났다. 잉그마르가 테이블귀퉁이를 쥐어뜯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네가 교사가 된다면, 할보르도 농장을 다시 내놓진 않을 거야."
"그럴까요?"
"그럴가요라니? 물론 그렇지. 우선은 네가 어떻게 자랐는가 하는 게 문제야. 잉그마르, 쟁기를 써 본 일이 있나?"
"아뇨."
"그럼 숯굴을 돌본 일은 있나? 커다란 소나무를 베어 본 일은?"
잉그마르는 아주 침착하게 조용히 앉아 있었으나 테이블은 그의 손아귀에서 잇달아 부서져 내리는 소리를 냈다. 마침내 억센 잉그마르도 그것을 눈치챘다.
"아니, 잉그마르! 한 번 더 혼내줘야겠군."
그는 테이블 조각을 조금 집어 제자리에 맞추어 보았다.
"개구장이 같으니! 이러려거든 장날에 돌아다니면서 요술쟁이 노릇이나 해서 돈을 모으는 게 차라리 낫겠구나."
그는 웃으면서 잉그마르의 어깨를 한번 툭 쳤다.
"음, 너는 과연 훌륭한 선생이 되겠다."
억센 잉그마르는 얼른 난로가로 되돌아가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그 연주는 이제 힘차고 활기가 넘쳤다. 그는 발장단을 맞추며 춤추는 사람들을 숨 가쁘게 몰아붙였다.
"이건 잉그마르의 폴카다! 이 자리의 모든 사람들은 잉그마르를 위해 춤을 추는 거다, 알겠나?"
게르트루드와 군힐드, 이아름다운 두 소녀는 물론 어느 춤이고 빠짐없이 추었다. 그러나 잉그마르는 별로 추지 않았다. 그는 방 한쪽 옆에 비켜서서 늙은이들 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춤을 추다가도 그를 보면 마치 무슨 신비한 힘에 끌리듯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곤 했다. 게르트루드는 잉그마르가 자기를 전혀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매우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
'지금 저 사람은 자기는 위대한 잉그마르의 아들이고 나는 한낱 교장의 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녀는 뾰로통해져서는 자신이 그만한 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이 납득이 안 갔다. 춤을 추는 동안에 젊은이 몇 사람이 바람을 쐬려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칠흙 같이 어두웠고, 밤공기는 폐부를 찌를 듯이 차가웠다.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말했다.
"좀 더 머무는 게 좋을거야. 달도 곧 뜰테고. 이렇게 어두워서야 어디 갈 수가 있겠어?"
잉그마르와 게르트루드도 문밖에 나와 서 있었다. 그때 억센 잉그마르가 나와서 잉그마르를 끌었다.
"가자, 보여줄 게 있다."
그는 잉그마르의 손을 잡고 집에서 약간 떨어진 숲으로 들어갔다.
"여기 가만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봐라."
순간 잉그마르는 자신이 갈라진 낭떠러지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밑에는 허연 무엇이 어렴풋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건 랑그홀스 폭포지요?"
잉그마르가 물었다. 억센 잉그마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런데 저런 폭포가 어떻게 이용되는지 아느냐?"
"물레방아를 돌리는 데 쓰이겠지요."
잠깐 생각 끝에 잉그마르가 대답했다.
억센 잉그마르는 혼자 웃었다. 그는 기특하다는 듯이 잉그마르의 등을 몇 차례 치곤 옆구리까지 쿡 찔러 하마터면 잉그마르를 급류속으로 떨어뜨릴 뻔했다.
"그래, 누가 어디다가 물레방아를 놓겠느냐? 누가 돈을 벌어 잉그마르 농장을 되찾겠느냔 말이다."
그는 연신 킥킥대며 웃었다.
"저도 알고 싶군요."
억센 잉그마르는 가슴에 품고 있던 커다란 계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잉그마르가 팀즈 할보르에게 권해서 이 폭포 밑에다 제재소를 짓도록 한 다음에 그것을 빌린다는 것이었다. 여러 해 전부터 품고 있던 억센 잉그마르의 생각은 어떻게 해서든지 잉그마르 아들이 다시 자기 집에 되돌아갈 방법을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잉그마르는 꼼짝도 하지 않고 허옇게 거품을 물고 흘러가는 거센 물결을 내려다보았다.
"자, 이제 집에 돌아가서 춤을 추자."
그러나 잉그마르는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얘가 정녕 잉그마르 집안의 사람이라면 당장 결론을 내리진 않을 게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잉그마르 혈통다운 행동이지.'
억센 잉그마르는 끈기 있게 기다리며 생각했다.
그들이 이렇게 한참을 서 있는데, 난데없이 날카롭고 거친 동물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개가 짖는 소리 같았다.
"저 소리가 들리냐, 잉그마르?"
"네, 들립니다. 개 짖는 소리 같군요."
그 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려왔다. 동물은 똑바로 오두막을 향해 달려오는 모양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다. 억센 잉그마르가 잉그마르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가자, 빨리! 되도록 빨리 집으로 들어가야 해."
"왜 그러세요."
놀란 잉그마르가 물었다.
"얼른 돌아가자니까!"
그들이 오두막을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을 때 그 울부짖는 소리가 바로 뒤에 달라붙듯 불안하게 들려왔다. 어떤 짐승이냐고 잉그마르가 몇 번이나 물었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 들어가기나 하라구!"
억센 잉그마르는 고함을 치면서 잉그마르를 좁은 오솔길로 마구 밀어댔다. 집에 들어서자 그는 바깥문을 닫기 전에 일단 소리쳤다.
"밖에 아무도 없나? 있거든 어서들 들어와!"
그가 문을 열고 기다리는 동안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빨리, 빨리!"
그는 발을 구르며 불안한 듯 안달을 했다.
오두막 안에 있던 사람들도 갑작스런 소동으로 차츰 두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무슨 영문인가를 알고 싶었다. 억센 잉그마르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나자 얼른 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모두들 미쳤나? 이리 소리를 듣고도 밖에서 어슬렁거리다니!"
이제 그 소리는 바로 오두막 문전에서 나는듯했다. 마치 개들이 괴성을 지르며 집 둘레를 빙빙 돌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냥 개가 아닙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그런 생각이 들거든 직접 나가서 한번 불러 보게, 닐슨 얀손"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쉴 새 없는 동물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시무시하고 기분 나쁜 그런 소리였다. 모두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간 듯 새파랗게 질린 사람도 있었다. 확실히 그건 보통 개가 아니라 지옥에서 쫓겨난 악마인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움직이고 있는 것은 다만 몸집이 작은 늙은이뿐이었다. 우선 그는 연기가 나가는 굴뚝 구멍을 막고 다음엔 하나하나 촛불을 꺼 나갔다.
"안 돼, 안 돼."
여자들이 소리쳤다.
"불을 끄지 마세요!"
"참아요,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한 소녀가 억센 잉그마르를 붙잡고 물었다.
"이리가 그렇게 위험해요?"
"아니, 저것보다 그 뒤에 오는 게 위험해."
"뒤에 오는 거라구요?"
억센 잉그마르는 다시 한참을 귀 기울이고 있다가 말했다.
"자, 모두 꼼짝도 하지 말구 가만히 있어야 해"
갑자기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이리 짖는 소리가 다시 오두막을 둘러싸는가 싶더니 차츰 사그라들면서 늪을 지나 골짜기의 저편 산 쪽으로 올라가는 듯했다. 그러자 불길한 정적이 덮쳐 왔다.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한 사나이가 말했다.
"이리들은 이제 사라졌어요."
억센 잉그마르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그 사나이의 입을 쳤다. 아득하게 먼 크라크 산꼭대기 쪽에서 찌르는 듯 날카로운 음향이 울려왔다. 바람 소리 같기도 했고, 뿔 나팔 소리 같기도 했다. 이따금 길게 꼬리를 물고 드높아지는가 하면 신음처럼 낮아지고 혹은 쿵쿵 걸음을 옮기듯, 아니면 콧김을 불듯 하는 다양한 소리를 냈다. 돌연, 그것은 끔찍한 신음 소리와 더불어 산을 돌진해 내려왔다. 얼마 만에 그것이 산밑에 다다랐는지는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얼마 만에 그것이 숲 기슭을 스쳐오고, 자신들의 머리 위로 밀려왔는가 그들은 생생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지구의 껍질을 잡아 흔들며 지나가는 우레 같기도 하고 온 산이 꺼지는 굉음 같기도 했다. 그들의 바로 위에까지 왔다고 느껴졌을 때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귀를 막으며 고개를 박았다.
'아.... 찌그러질 것 같아. 틀림없이, 우린 찌그러지고 있는 거야.'
그러나 그들이 느낀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악마의 대왕이 그의 권속을 이끌고 들이닥치지나 않았나 하는 공포감이었다. 무엇보다 소름 끼치는 것은 다른 소리 위에 들려오는 비명과 신음소리였다. 그 속에는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신음소리, 웃음소리와 부르짖음, 훌쩍거리는 소리와 꾸짖는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그들이 천둥 같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머리 위에 왔다고 느꼈을 때는 흐느낌과 노호, 신음소리와 질주하는 소리, 뿔나팔 소리와 불꽃 튀는 소리, 비운에 빠진 요정들의 탄식하는 소리와 악마들의 비웃음 소리, 거기에 퍼덕이는 거대한 날개소리 따위가 한데 엉긴 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들은 수많은 지옥의 망령들이 그날 밤 모조리 풀려 나와서 자기들을 깔아뭉갠다고 생각했다. 대지는 흔들리고 오두막은 당장 뒹굴듯이 들먹거렸다. 그것은 마치 야생의 말들이 지붕 위에서 날뛰는 것 같기도 하고, 신음하며 울부짖는 귀신이 창문 앞을 돌진해 가는 것 같기도 했으며, 부엉이나 박쥐 떼가 한꺼번에 날개를 굴뚝에 부딪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누군가가 팔을 게르트루드의 허리에 감아 그녀를 꿇어 앉혔다. 그리고 그녀는 잉그마르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게르트루드, 우리 함께 하나님께 기도해."
그때까지 게르트루드는 죽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토록 무서운 공포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난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아. 다만 악마들이 머리 위에 군림하는 게 무섭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떨고 있었다. 그러나 잉그마르의 팔을 몸에 느끼는 순간, 게르트루드의 심장은 다시 고동치고 다리의 무감각도 일시에 사라졌다. 그녀는 잉그마르에게 몸을 기댔다. 이제 조금도 두려운 게 없었다. 잉그마르 역시 공포를 느낀 것은 틀림없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믿음직한 위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 모든 소리들이 사라졌다. 그저 희미한 반향만이 멀리서 울려올 뿐이었다. 그것은 이리떼가 지나간 흔적을 따라 늪으로 내려가서 오르프 봉우리 저편에 있는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했다.
그러나 억센 잉그마르의 오두막 안에서는 여전히 정적이 흘렀다. 움직이는 사람도 없고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도 없어 마치 공포가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만 같았다. 간혹 죽음 같은 정적을 깨고 깊은 한숨 소리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오래, 아주 오랫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벽에 기댄 채 또 어떤 사람은 긴 의자에 엎드린 채 그대로 있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근심에 싸인 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모두 넋을 잃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방안의 많은 사람들은 회개를 하며 하나님에게 더욱 가까이 갈 것을 결심했다.
'무엇인가 내 죄로 인해 이런 일이 일어난 거다.'
그들은 제각기 느꼈던 것이다.
다만 게르트루드만이 '나는 잉그마르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늘 그의 곁에 있을 테야. 그는 나에게 신뢰감을 주었어.'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차츰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부옇게 트는 먼동의 빛이 오두막 안으로 스며들어 창백한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억센 잉그마르의 암소가 아침을 달라고 울기 시작하고 고양이가 문간에 와서 야옹거렸다.
해가 동쪽 산에서 고개를 내밀 때까지도 움직일 줄 모르던 사람들이 해의 몸통이 드러나자 아무런 말도 없이, 인사조차 하지 않고 한명 한명 오두막을 빠져나갔다. 집 밖에서 그들은 지난밤의 비참한 흔적을 발견했다. 문 옆에 서 있던 커다란 소나무가 뿌리째 뽑혀 뒹굴고, 나뭇가지와 울타리 기둥은 땅바닥으로 나가떨어졌으며, 부엉이와 박쥐들이 바람벽에 부딪쳐 찢겨져 있었다. 크라크 산꼭대기로 통하는 넓은 길 양쪽에는 나무란 나무가 모조리 넘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차마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서 참담한 기분으로 마을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그날은 일요일이었으므로 아직도 잠자리에 누워 있는 사람도 많았지만, 벌써 일어나서 소를 돌보는 사람이나 외출복을 집밖으로 들고 나와 바람에 말리며 손질을 하는 노인도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부부와 아이들이 모두 휴일의 외출복을 입고 문을 나서기도 했다. 간밤에 숲에서 일어난 무서운 사건은 조금도 모르고, 각기 차분하게 제 일을 보러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여간 큰 위안이 아니었다.
춤을 추러 갔다가 큰 재난을 당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은 이제 겨우 강가에 닿았다. 거기는 집이 몇 채 서 있지 않았다. 이윽고 마을에 들어서자 그들은 낯익은 교회와 그 밖의 모든 것을 보며 기뻐했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이 새삼 마음을 흡족케 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가게 앞의 간판, 우체국의 뿔나팔, 여관집 주인의 개, 그리고 자그마한 버드베리나무가 밤새 꽃이 활짝 핀 것을 보는 것도 그들에겐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목사관 화원의 푸른 잔디도 간밤 늦게 싹이 튼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집에 닿을 때까지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게르트루드가 학교 계단에 섰을 때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 다시는 춤을 추지 않을 테야, 잉그마르, 어젯밤으로 그건 마지막이야."
잉그마르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래, 너는 목사님이 돼야 해, 만일 목사님이 못 된다면 학교 선생님은 꼭 돼야 해. 이 세상엔 싸워야 할 악이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잉그마르는 똑바로 게르트루드를 쳐다보았다.
"그 소리가 게르트루드에겐 뭐라고 말했지?"
그가 물었다.
"내가 죄악의 덫에 걸렸다구, 춤을 좋아해서 악마가 달려들었다고 그랬어."
"나는.... 잉그마르손 집안의 조상들이 일제히 나를 윽박지르고 저주하는 것만 같았지. 그건 내가 뭔가 농부 이상의 것을 생각하고, 땅을 갈거나 숲속에서 일하는 것 대신 다른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
잉그마르는 침울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게르트루드가 안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어떤 기적
억센 잉그마르네 오두막에서 댄스파티가 있던 날밤, 팀즈 할보르는 집에 없었고 그의 아내 카린만이 거실 건너편의 조그마한 방에서 혼자 자고 있었다.
밤중에 카린은 무서운 꿈을 꾸었다. 에로프가 되살아나 어처구니없는 난동을 피워대는 꿈이었다. 그녀는 그가 옆방에서 술잔을 부딪치기도 하고, 커다랗게 웃어대면서 음탕한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녀는 꿈속에서 생각했다.
'에로프와 술친구들이 점점 더 왁자지껄하게 소란을 피우는걸 보니 조금 있으면 테이블이나 의자를 다 때려 부수겠구나. 아, 미칠 것만 같아'
카린의 귀엔 마구 요란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카린은 그 소리에 퍼뜩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눈을 뜬 뒤에도 그 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지축이 흔들리고, 창문은 신경질적으로 덜컹댔으며, 지붕의 기왓장이 들썩거리는가 하면 박공 옆에 있는 늙은 배나무는 그 굵은 가지로 집을 후려쳤다. 마치 지구의 종말이라도 온 듯했다. 소음이 막 절정에 달했을 때,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쨍그렁하고 들려왔다. 거센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방안으로 확 몰려들었다. 순간 카린의 귓전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꿈속에서 들은 것과 똑같은 웃음소리였다. 그녀는 이제 죽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무서운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심장은 멎고 사지는 감각을 잃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갑자기 소음이 멎었다. 몹시 차가운 밤바람이 방안으로 불어 들어오고 있었으므로 카린은 일어나서 깨진 창문에다 뭔가 갖다 대야만 했다. 그녀는 사람을 부르는 대신 다시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도저히 한 발자국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헝크러진 머리에 손을 얹었다.
'기분이 좀 가라앉으면 걸을 수 있을 거야'
잠시 후 그녀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그만 침대에서 마룻바닥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아침이 되어 집안의 사람들이 일어났고 곧 의사가 달려왔다. 의사는 진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무엇이 카린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병에 걸린 것 같지도 않았고 분명 사지가 마비된 것도 아니었다. 무슨 일에 몹시 놀라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밖에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었다.
"곧 괜찮아질 겁니다."
의사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카린은 의사의 말을 유심히 듣기는 했지만 아무 말도 꺼내진 않았다. 그녀는 그날 밤 분명히 에로프가 집안에 있었다는 것과 그녀가 받은 쇼크의 원인도 그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 충격에서 도저히 회복될 수 없으리라는 슬픈 예감을 갖게 되었다.
아침 한나절 그녀는 줄곧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하나님이 어째서 자기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그 까닭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 양심에 비추어 보아도 뚜렷한 까닭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건 너무 불공평한 처사야.'
오후에 그녀는 부축을 받으며 스톰 선생의 전도관으로갔다. 마침 다그손이라는 설교자가 사회를 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왜 이런 벌을 받게 되었는가를 듣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다그손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화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날 오후처럼 많은 청중들이 모인 적은 없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는 간밤에 억센 잉그마르의 오두막에서 일어난 일들을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공포에 빠져 있었으므로 그 공포를 물리쳐줄 만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꺼번에 몰려나온 것이었다. 청중의 4분의 1이 전도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열린 창문을 통해서나마 다그손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는 신도들이 자기에게 무슨 얘기를 원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먼저 간담이 서늘해지는 형용사를 써가며 지옥과 마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둠을 타고 사람들의 영혼을 움켜잡고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려 하는 악마의 형상을 청중들의 가슴속에 생생하게 상기시켰다. 사람들은 위협을 느껴 몸서리를 쳤다. 마치 그날 밤의 짐승들처럼 몰려 나와서괴로움에 시달리며 함정 속을 헤매는 기분이 되었다.
다그손의 목소리는 돌풍처럼 전도관 안을 휘몰아치며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그의 말은 혓바닥에서 불꽃을 뿜었다. 사람들은 악마와 불과 연기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장 지옥에라도 떨어진 듯 호흡이 가빠오고, 온몸이 뜨거워지는가 하면, 머리털이 불길에 깡그리 타버리는 것만 같았다. 다그손은 사람들을 지옥 같은 시간 속으로 몰아넣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암담한 불길과 피해갈 수 없는 파멸만을 볼 뿐이었다. 이렇게 절망감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다그손은 드디어 구원의 손길을 뻗어 숲속의 녹지대로 이끌어갔다. 거기는 평화롭고 시원하고 안전했으며, 꽃이 만발한 목장에는 쫓겨서 몰려오는 남녀들을 향해 예수가 양팔을 벌리고 앉아 있는 듯했다. 이제 모든 위험은 사라지고 그들은 영원히 아무런 고통도 박해도 받지 않을 것 같았다.
"만일 예수의 발아래 꿇어 엎드리기만 한다면 당신들의 마음속엔 커다란 평화와 안정이 찾아오고, 이제 세상의 함정 따위엔 위협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다그손이 설교를 마치자 전도관 안엔 커다란 감동이 일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앞으로 뛰어나와 얼굴을 눈물로 적시며 경의를 표했다. 또한 그의 말이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하여 참된 신앙의 길을 찾게 되었다고도 말했다. 카린은 줄곧 못 박힌 듯 앉아 자기에겐 아무런 감동의 여지를 주지 못한 그를 원망이라도 하는 양 꼿꼿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밖으로부터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빵 대신 돌을 주는 자에게 화 있으라! 빵 대신 돌을 주는 자에게 화 있으라!"
사람들이 우르르 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나갔다. 카린은 움직일 수가 없어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는데, 잠시 후 그녀의 집안사람들이 돌아와서 구체적인 상황을 얘기해 주었다. 고함의 주인공은 키가 훤칠하게 크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낯선 사나이로, 설교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과 마차를 타고 길을 달려오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들이 마차를 세워 놓고 설교 소리를 듣다가 자리를 뜨면서 사나이가 그렇게 외치고 갔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과거에 금발의 여자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남자는 분명 그녀의 남편인데, 어쩜 미국으로 건너가 결혼한 억센 잉그마르의 딸네 부부 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평범한 농부 옷차림을 한 젊은 아가씨의 모습만 보아왔던 사람이 도회에서 세련된 차림으로 성숙해서 돌아온 여자를 한눈에 알아보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그손의 설교에 관한 카린의 의견은 그 낯선 사나이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었다. 카린은 두번 다시 전도관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여름, 외부에서 침례교도가 들어오자 마을에서도 침례의식을 행하거나 개혁을 주장하는 모임이 있을때는 마찬가지였다. 마을은 이제 종교적 혁신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든 집회에 각성과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은 저마다 구하던 것을 찾은 것같이 보였으나 단 한 사람 카린만은 많은 설교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위안의 말을 듣지 못한 채였다.
빌게르 랄손이라는 대장장이가 한길 가에 대장간을 경영하고 있었다. 공장은 낮은 문이 하나에다 창문 대신의 개폐문이 하나 있을 뿐으로 매우 좁고 어두웠다. 그 안에서 칼을 만들거나 자물통을 고치고 썰매나 달구지 바퀴에 쇠테를 끼우는 것이 보통 빌게르 랄손의 일이었다. 달리 할 일이 없을 때는 못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저녁, 일이 한꺼번에 몰려 대장간이 무척 바빴다. 빌게르 랄손은모루 앞의 한쪽에 서서 못대가리를 납작하게 만들고 있었다. 맏아들은 다른 모루에다 쇠몽둥이를 달구어 두들기기도 하고 굵은 쇠못을 자르기도 했다. 둘째 아들은 풀무질을, 셋째 아들은 풀무에 석탄을 나르거나 쇠붙이를 뒤집는 일을 하다가 허옇게 변하면 아버지에게 가져다 놓기도 했다. 넷째아들은 아직 일곱 살이 채 안 되었지만 완성된 못을 모아 물통에 던져 넣었다가 나중에 꺼내어 한 다발씩 묶었다.
그들이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웬 낯선 사나이가 문 앞에 와서 섰다. 훤칠하게 큰 키에 까무잡잡한 얼굴을 한 그는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굽혀야 했다. 빌게르랄손은 일손을 멈추고 눈을 들어 무슨 볼일이 있냐는 듯 사내를 쳐다보았다.
"아니, 제가 들여다보더라도 개의치 마십시오, 특별한 볼일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저도 젊었을 때 대장장이였기 때문에 대장간 앞을 지나자면 저절로 걸음이 멈춰지고, 번번이 구경하고픈 충동을 느낀답니다."
빌게르 랄손은그가 진짜 대장장이다운 억센 손을 갖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곧 그의 이름과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사나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지만 그의 신분은 밝히지 않았다. 빌게르는 그가 총명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느껴져, 공장을 두루 구경시키고는 함께 밖으로 나가서 네 명의 아들들을 자랑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 일을 거들 수 없었을 때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요. 지금은 모두들 열심히 도와줘서 모든 일이 수월해졌답니다. 2년쯤 지나면 한밑천 모으게 될 것 같구료."
사나이는 엷은 미소를 띠며 빌게르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도울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억센 손을 발게르의 어깨에 얹고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자제분들한테서 그렇게 물질적인 면에서 도움을 얻고 계시다면 정신적인 것도 자제분들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빌게르는 이 말에 의아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 이 얘기가 당신에겐 좀 생소하게 들리는 모양이군요. 다음에 뵐 때까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사나이는 야릇한 웃음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가 가버리자 빌게르랄손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공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며칠 동안이나 낯선 사나이의 질문에 온통 정신을 뺏겨야 했다.
'무슨 연유로 그런 말을 했을까. 뭔가 내막이 있는 모양인데,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를 일이야.'
다음날 팀즈 할보르의 옛 가게에서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났다. 가게는 그가 결혼하면서 동서 브레트군네르에게 넘겨주었는데, 그날 군네르는 외출하고 아내 브리타 잉그마르손 혼자서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브리타는 그녀의 어머니인, '위대한' 잉그마르의 아름다운 아내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인데, 그녀는 어머니를 닮아 잉그마르 농장에서 가장 미인이라는 평판이 나 있었다. 게다가 건실하고 정직하기로도 가족의 그 누구 못지않았다.
군네르가 집에 없으면 브리타는 언제나 자기 방식대로 장사를 했다. 가령은 늙은 펠트 중사가 거나하게 취하여 비틀비틀 찾아와서 맥주를 한 병 달라고 한다면 그녀는 언제나 냉정하게 거절해 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콜뵤른의 레나가 찾아와서 고급 부로우치를 사려고 할 때는 부로우치 대신 몇 파운드의 귀리 가루를 사도록 했다. 농가의 아낙네가 싸구려 천이라도 사려고 할라치면 돌아가서 분에 맞게 베틀로 질긴 천을 짜 입으라며 타일러 보냈다. 브리타가 가게를 보고 있을 때만큼은 아이들조차 군것질을 하려고 가게를 찾는다는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일로 되어 버렸다.
아무튼 그날은 가게에 손님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몇 시간을 홀로 앉아 하릴없이 허공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눈동자에 어두운 절망을 가득 담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밧줄을 한 가닥 꺼내 조그만 발판과 함께 가게 뒷방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발판 위로 올라가 천장에 붙어 있는 고리에다 밧줄을 매고 한쪽 끝에 올가미를 만들고 나서 문득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면서 웬 사내가 불쑥 들어섰다. 그는 가게에 들어왔다가 아무도 없으므로 계산대 뒤로 와서 옆방의 문을 열어본 것이 분명했다. 막 발판에 올라섰던 브리타는 낭패한 얼굴로 천천히 발판으로부터 내려섰다. 사나이는 아무 말도 없이 물건이 진열되어있는 곳으로 걸어나갔다. 브리타도 느릿느릿 뒤를 따랐다. 브리타는 이 사이사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곱슬머리에 구레나룻을 기르고 날카로운 눈에 손이 크고 억새 보이는 그는 옷은 잘 차려입었지만 웬지 노동자 같은 느낌이었다. 문옆의 다 찌그러져 가는 의자에 앉아 그는 브리타를 그윽이 응시하기 시작했다. 브리타는 그에게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지도 못한 채 계산대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다만 그가 어서 조용히 나가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사나이는 그저 뚫어져라 그녀를 주시하고만 있었다. 브리타는 그의 시선에 묶여 버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쩌자는 건가요. 나를 구하려는 생각 때문이라면 거기 마음대로 앉아 계시지요. 하지만 난 이미 틀렸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동안에도 사나이는 눈길 한번 돌리지 않았다.
'아, 나는 정말 장사하는 게 싫단 말이야.'
브리타는 할보르에게서 가게를 물려 받을 때까지만 해도 군네르와 함께 너무도 행복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가게를 인수하기 전까지는 한 마디도 언짢은 말이 오간 적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가게를 맡으면서부터 모든 일들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브리타는 브리타대로 장사에 관한 자기 방식을 주장했고, 군네르는 그러한 브리타에게 불만을 품었다. 군네르가 물건을 파는 데만 급급한 데 반해 브리타는 양심적인 장사를 내세워 술 취한 사람에겐 더 이상 술을 내어주지 않는 등 어처구니없는 장사를 하기 때문이었다. 서로 양보할 낌새도 없이 싸움은 그칠 날이 없었다.
'그이는 이제 나를 좋아하지 않아'
브리타는 생각 끝에 눈을 크게 뜨고 낯선 사나이를 쏘아보았다.
'당신이 알는지 모르지만 나의 남편은 집달리를 시켜서 가난한 사람들의 집이며 땅이며 가재도구들을 차압하지요. 그들에게는 단 한 마리밖에 없는 황소와 양조차 빼앗아대는 남편 때문에 남 보기 부끄러워서 도저히 살아갈 양조차 빼앗아대는 남편 때문에 남 보기 부끄러워서 도저히 살아갈 재간이 없답니다. 이런 것이 좋은 결과는 아니겠지만.... 제발 가 주세요. 내가 모든 일을 다시 보지 않도록 어서 결말짓게 도와주세요.'
브리타는 차츰 마음이 가라앉았다. 평정을 되찾은 그녀는 돌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계속 자기를 지켜보며 죽을 수 없게 해준 낯선 사람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었다. 사나이는 브리타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되자 문간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녀를 돌아다보며 굵직한 소리로 말했다.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올바른 삶이 머지않았소."
그리고 그는 가게를 떠났다. 그의 묵직한 발자국 소리를 점점 멀어져갈 때 브리타는 얼른 방으로 뛰어들어가 밧줄을 끌러 발판과 함께 다시 들고 나왔다.
그녀는 꼬박 두 시간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동안은 모든 것들이 어둠이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그녀는 길을 잃고 방황하며 한 발자국 떼어 놓을 때마다 늪에 빠지면 어쩌나,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지면 어쩌나,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오랫동안 해매이던 그녀를 붙잡아 위험한 방황을 계속하지 않도록 일러준 것이다. 이제 브리타는 조용히 앉아 밤이 새기를, 밝은 아침이 오기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억센 잉그마르에게는 안나 리자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시카고에서 존헤르굼이라는 스웨덴사람과 결혼해 살고 있었다. 헤르굼은 특수한 신앙과 교리를 가진 소규모 광적 종교단체의 지도자였다. 억센 잉그마르의 집에서 댄스파티가 있던 다음날 헤르굼은 자기의 늙은 장인을 만나러 잉그마르의 오두막에 나타났다. 헤르굼은 마을을 오랫동안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길에서 만나는 어느 누구하고든 쉽게 친해졌는데, 처음엔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도 헤어질 때면 언제나 자신의 커다란 손을 상대의 어깨에 얹고 몇 마디씩 위로나 충고의 말을 지껄이는 탓이기도 했다.
억센 잉그마르는 좀처럼 사위와 만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해 여름, 다시 잉그마르 농장으로 돌아온 잉그마르와 함께 폭포의 급류 아래에다 제재소를 세우려고 거기서 일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제재소가 완성되고 통나무가 기계톱에 썰려 하얀 널판지로 변모하는 첫 순간이 무엇보다 기다려지는 대망의 날이었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일에서 돌아오던 억센 잉그마르는 딸 안나리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움찔 놀라면서 그를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을 눈치챈 억센 잉그마르는 필시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으리라는 생각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오두막에 다다랐을 때 그는 걸음을 멈추고 양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오랫동안 돌봐 왔던, 제 몸보다도 소중히 했던 장미 나무가 베어진 채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사위의 것이었다. 사위는 늘 그 나무를 못마땅해했었다.
억센 잉그마르는 들고 있던 도끼자루를 힘주어 움켜쥐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헤르굼이 성서를 펼쳐놓고 앉아 있는 게눈에 띄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길로 억센 잉그마르를 힐끗 넘겨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처박고 소리 높여 성격 책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너희들, 나무와 돌을 받들어 이방인 같이 되고 여러 나라의 종족처럼 되고자 한다면, 너희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은 반드시 이룩될 수 없느니라, 주 여호와 말씀하시기를, 나는 살리라, 반드시 억센 손을 가진 팔을 뻗어 노여움으로 더불어 너희를 다스리리라"
억센 잉그마르는 말없이 발길을 돌려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그는 그날 밤 헛간에서 잤다. 이튿날 그와 잉그마르는 숲으로 가서 숯을 굽고 나무를 베었다. 그들은 겨우내 숲에서 머물기로 했다.
헤르굼도 몇 번 기도회 같은 데서 설교를 하였다. 그는 자기가 말하려는 요점을 들어 번번이 그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교임을 주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그손처럼 화술이 좋지 못하여 그를 따라개종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바깥에서 그를 만나 몇 마디씩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다소 기대를 가졌지만 그의 긴 설교를 들을라치면 언제나 짜임새 없고 지리멸렬한 이야기임을 재확인하곤 했다.
여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카린은 자기의 건강상태에 대해 매우 절망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와도 얘기하길 싫어했다. 온종일 꼼짝 않고 의자에 앉아 있는 날들만 지겹도록 되풀이되었다. 이제는 설교를 들으러 나가는 일도 없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기만 하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아버지의 말에서도 더 이상 진리를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할보르는 그런 카린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방법이 없었다. 그는 아내에게 새로운 설교자와 이야기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넌지시 물어보았으나 그녀는 한 마디로 딱 잘라 거절했다.
어느 일요일, 카린은 거실의 창문 앞에 앉아 있었다. 안식일의 적막이 온 농장에 스며 있고 졸음에 겨워 자꾸만 눈이 감기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엷은 잠에 젖어 있던 그녀는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얼핏 눈을 떴다. 누구의 목소린지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힘차고 굵직한,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말소리였다.
"여태까지 많은 학자들도 실패를 했는데 무식하기 짝이 없는 나같은 대장장이가 진리를 발견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가당찮은 얘기라고 치부해 버리리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소."
그 목소리는 말했다.
"난 어째서 당신이 그것을 확신하고 있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군요."
할보르의 음성이었다.
'헤르굼과 할보르야'
그녀는 창문을 닫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당신도 아다시피"
헤르굼이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우리의 오른뺨을 친다면 왼쪽 뺨마저 대주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을 겁니다. 그런 별난 일을 모두 지킬 수는 없지요. 만일 당신이 방어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런 당신을 얕잡아보고 농장이건 식량이건 간에 모조리 빼앗으려 들 테니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서 내 생각으론 주께서 그 말씀에다 무슨 의미를 둔 것이 아니고 무심코 뱉은 말씀 같단 말이지요."
"글쎄요, 알 수가 없군요."
"그래서, 당신이 생각해 볼 일이 있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로 인해 거듭났다고들 생각하고 있지요. 요즘에는 그래요, 훔치는 자도 없고 살인하는 자도 없고 약한 자를 학대하는 자도 없습니다. 아무도 이웃을 미워하거나 박해하지도 않습니다. 참으로 신성한 종교 밑에서 어느 누구도 나쁜 짓을 하겠다는 생각이 일어날 리가 없겠지요."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점이 더 많지요."
할보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맥없이 말했다.
"지금 당신이 만약에 탈곡기가 고장이 있다면 그 원인을 찾아내려고 쉴 틈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데는 왜 어려움에 맞닥뜨리게 되는가에 대한 원인은 찾으려고 하지 않더군요. 그리스도교 그 자체에 무슨 결합이 있는지조차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결함이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물론 처음에는 신성했지요.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기계라도 톱니바퀴 하나만 어긋나 버리면 만사가 부질없게 됩니다."
말을 찾듯 잠시 입을 다물었던 헤르굼이 다시 계속했다.
"몇 해 전 일입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교리를 통해 참되게 살아 보려고 마음먹었지요. 나는 그때 공장에서 일을 했었는데 나를 파악한 동료 직공들은 모든 일을 나에게 떠맡기곤 했습니다. 저를 만만한 인간으로 보았던 거죠. 그런 데다가 나는 동료들 중 누군가의 죄를 뒤집어쓰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보답까지 받았습니다. 여지없는 감옥행이었지요."
"그렇게까지 나쁜 인간은 있을 수 없을텐데."
할보르는 여전히 심드렁하게 지껄였다.
"차라리 감옥에 있는 편이 제겐 즐거움이었답니다. 거기서는 아무런 방해나 귀찮은 일이 없었거든요. 나는 혼자서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지요. 그런데 며칠 안 가서 회의가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하나님이 세상에다 많은 사람을 둔 것은 서로 위로하며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자각이 생긴 겁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것은, 기독교를 멸망시키려고 마귀가 성경에서 무엇인가를 뽑아 없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어요."
"마귀가 어떻게 그런 일을...."
"마귀가 뽑아버린 귀절은 '너희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는 동포들에게 서로 도움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
할보르는 시덥잖다는 듯 대답이 없었다. 창문 앞에서 문을 닫으려다 말고 그들의 얘기를 계속 듣고 있던 카린은 헤르굼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감옥에서 풀려나오자 옛 친구 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내가 올바르게 살도록 도와달라고 했지요. 그래 둘이 마음을 모으니까 훨씬 수월해지더군요. 점점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불어나서 지금은 30명 남짓 되는데 모두 시카고의 한집에서 살고 있답니다. 우리는 모든 주어지는 것들을 똑같이 나누지요. 그리스도와 같이 서로를 아끼면서 남의 친절을 악용하거나 유순한 자라고 해서 짓밟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지요."
할보르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헤르굼은 납득이 갈 때까지 계속 지껄여댔다.
"무슨 큰일을 하려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과 손을 잡지요. 당신의 경우 이 큰 농장을 혼자서 돌볼 수 없을 테고, 또는 공장을 하나 시작한다고 해도 협력회사의 도움이나 많은 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하게 되겠지요. 하물며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기독교인다운 생활이 혼자서 가능할 것 같습니까? 당신은 지레 포기해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시카고의 친구들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조직한 조그마한 사회는 하늘에서 내려준 새로운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충분히 갖고 있지요. 하늘에서 성령의 힘이 우리 머리에 내려온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언하는 사람, 병자를 고치는 사람...."
"당신도 병자를 고칠 수 있습니까?"
할보르가 헤르굼의 말을 자르며 성급하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능하지요."
할보르는 잠깐 망설였다. 다른 무엇을 믿는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아무튼 나는 확신합니다. 할보르. 머지 않아 당신께선 우리 예루살렘의 번성을 적극 지지하게 될 겁니다."
갈등하고 있는 할보르를 주시하며 헤르굼이 그 특유의 묵중한 음성으로 단언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카린은 헤르굼이 작별 인사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 문이 열리며 할보르가 들어왔다. 할보르는 창문을 열어 놓고 그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카린을 바라보았다.
"헤르굼이 한 말 모두 들었소?"
"네."
"그 사람을 믿으면 병이 낫는다는 말도?"
카린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헤르굼의 말에 지금껏 들어왔던 그 누구의 말보다 진한 감동을 느꼈다. 그의 말엔 건전하고 실제적인 것이 있어서 이것이 그녀의 지식에 호소했으며, 거기에는 일과 봉사가 따랐다. 또한 그녀에게 있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주정주의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설교자와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신앙만으로 충분해요."
그녀가 무덤덤하게 중얼거렸다.
2주일쯤 지난 어느 날 카린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 집 둘레에는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일렁이고 난로에선 타닥타닥 장작이 타고 있었다. 방에는 그녀와 어린 계집아이만이 함께 있었는데 아이는 이제 막 돐이 지났고 겨우 걸음마를 할 정도였다. 어린아이는 카린의 발치에 앉아 놀고 있었다.
문득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키가 크고 얼굴이 검은 편인 웬 사나이가 들어왔다. 눈매가 날카롭고 손이 억세 보였다. 카린은 대 뜸 그가 헤르굼임을 알 수 있었다.
"할보르 씨를 뵈러 왔는데요."
귀 익은 음성으로 그가 말했다. 카린은 남편이 시내의 집회에 참석하러 갔으며 곧 올라올 거라고 대답했다. 헤르굼이 의자에 앉았다.
그는 힐끔힐끔 카린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벌써 반년째예요, 다리를 쓰지 못하지요."
"사실 부인을 위해 기도를 드릴 참으로 왔습니다만."
카린은 몸을 움츠렸다.
"주의 은혜로 제가 환자를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들으셨겠지요?"
카린이 그를 의심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저를 생각해 주시는 것은 참으로 감사하지만 그런 일은 믿어지지 않는군요. 저는 쉽게 신앙을 바꾸는 성격이 못 되거든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선 곧 부인을 구원하시리라 믿습니다. 부인께선 언제나 올바른 삶을 살아가길 원하시니까요."
"하나님은 저를 버리셨는걸요."
"카린 부인은 왜 이런 시련이 찾아왔는가 깊이 반성해 보신 일이있습니까?"
카린은 또한 번 몸을 움츠렸다. 헤르굼은 일어서서 카린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그 묵직한 손을 그녀의 머리에 얹고 물었다.
"부인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까?"
카린이 그를 뿌리쳤다. 헤르굼이야말로 자기 과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속을 뒤틀리게 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의 손길을 뿌리쳐선 안 됩니다. 감사하게 생각하셔야지요."
그가 문간 쪽으로 물러서서 큰소리와 말했다.
"그렇겠지요."
카린이 비양거렸다.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거라면 뭐든지 달게 받아야겠지요."
"명심하십시오. 오늘 구원의 손길이 당신에게 내려집니다."
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가 이런 병에 걸린 것이 헤르굼에게 기적을 행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처럼 느껴져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 구원을 받을 때 저를 기억하십시오!"
헤르굼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린은 꼿꼿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요즘엔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떠벌리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그때였다. 카린의 딸아이가 일어서서는 위태롭게 난로 쪽으로 걸어갔다. 벌겋게 피어오르는 불꽃이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이다. 아이는 즐거운 듯 소리를 내면서 아장아장 불을 향해 걸어나갔다. 카린은 아이를 불렀다.
"이리 와, 이리 오라니까!"
아이는 어느 새 난로가에 기어오르려 했다. 두 번이나 굴러떨어진 끝에 아이는 마침내 난로 가장자리에 올라섰다. 카린은 외마디비명을 지르며 사람을 불렀다. 그러나 집안엔 아무도 있을 턱이 없었다. 아이가 깔깔거리며 불 위로 몸을 숙였다. 그때 불붙은 장작개비 하나가 아이에게로 굴러왔다. 카린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아이를 안아 들고 옷에 붙은 불똥을 털어대며 다친 데가 없음을 확인할 때까지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는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
카린은 문득 자기의 다리를 내려다보곤 억제할 수 없는 환희에 휩싸였다. 일찌기 느껴 보지 못한 너무나 큰마음의 동요였다. 그녀는 눈물이 날 만큼 행복감에 잠겼다.
그해 가을, 헤르굼은 자주 억센 잉그마르의 오두막 문전에 서서 주위의 풍경에 넋을 빼앗기곤 했다. 마을은 나날이 아름다워져 갔고, 주변은 온통 황금빛에다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화려한 빨강이나 눈부신 노랑으로 옷을 바꿔입었다. 일대의 수풀 지대는 산들바람 속에서 갸냘프게 떨며 환상적으로 빛났다. 스웨덴의 소박한 농촌 풍경은 이렇듯 찬란한 광휘 속에서 몸을 사르고 있었다. 헤르굼은 경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때야,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내실.... 그동안 뿌린 진리의 씨앗을 거둬들일 때가 머지않았어. 오늘일지도 모르지.'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팀즈 할보르가 억센 잉그마르의 오두막을 찾아와 헤르굼 부처를 잉그마르 농장에 초대했다.
헤르굼과 안나리자가 도착했을 때 할보르의 집안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집 둘레에 떨어진 자작나무 고목의 낙엽은 한쪽으로 깨끗이 쓸어 모아져 있었고, 평상시엔 늘 마당에 널브러져 있던 달구지며 농기구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손님이 무척 많은가 본데?'
안나 리자는 생각했다.
거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엄숙하게 헤르굼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에서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헤르굼이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륭 비오른 오라프손과 그의 아내 말타 잉그마르손, 그리고 브레트 군네르와 그의 아내였다. 그다음으로 크리스텔 랄손과 이스라엘 토마손의 두 내외로, 이 모두가 잉그마르손 집안사람들이었다. 그는 또 헤이크 마츠 에릭손과 그 아들 가브리엘, 시의원의 딸 군힐드,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모두 20명 남짓했다.
파티가 끝나고 안나와 헤르굼이 돌아가려고 사람들과 인사를 마치자 팀즈 할보르가 입을 열었다.
"오늘 모인 사람들은 여름 내내 헤르굼 씨가 한 말들을 심각하게 생각해 봤습니다. 만일 헤르굼 씨가 우리를 도우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그 뒤를 기꺼이 따를 작정입니다."
다음날 하나의 새로운 종파가 잉그마르 농장에 생겨났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온 마을에 퍼졌다. 사람들에게 이 종파는 기독교의 원리를 구현하는 유일한 종교라고 그렇게 전해져 갔다.
봄이 되어 대지의 눈이 완전히 녹자, 겨우내 산속에서 나무를 베고 숯을 굽던 억센 잉그마르와 잉그마르는 마을로 내려와서 제재소를 시작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평지를 밟아 보는 잉그마르는 마치 굴에서 나온 곰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따가운 햇빛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거리의 소음과 사람들의 말소리도 견딜 수가 없었고, 어수선한 농장 분위기도 그의 귀를 피곤하게 했다. 그러나 동시에 즐거움도 있었다. 모처럼 푹신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그렇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신선한 기쁨이었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유쾌하게 해주려고 마음 써주는 카린과의 시간도 더할 수 없는 행복감을 자아내게 했다. 그녀는 동생을 위해 새 옷을 장만했으며, 대로는 부엌에 들어가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를 다루듯 맛있는 간식을 내다 주기도 했다. 잉그마르가 숲에 들어가 있는 동안 집안에선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고 카린과 할보르는 크나큰 행복에 젖어 있었다. 잉그마르는 헤르굼에 대한 막연한 소문이 이 집안에서 확실한 증거로 나타났음을 알았다.
"너도 우리 모임에 들어오리라 믿어."
카린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녀와 할보르는 친구들과 함께 하나님의 길을 걷기 위해 서로 돕고 애쓰며 나날을 보낸다고도 했다.
"겨울 내내 나는 네가 집에 돌아와 하루라도 빨리 이 기쁨을 나눌 수 있길 얼마나 기도했는지 아니?"
카린이 말을 이었다.
"요즘은 꼭 천국에라도 있는 기분이야."
잉그마르는 헤르굼이 아직도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기쁘다고 말했다. 지난여름, 헤르굼은 가끔 제재소에 들러 잉그마르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으므로 두 사람은 제법 친한 벗이 되어있었다. 잉그마르도 그를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멋진 사나이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사내답고 신념이 굳으며 의지가 강한 사람은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다. 이따금 제재소 일이 정신없이 바쁠 때면 헤르굼은 옷을 벗고 나서서 그를 도와주었다. 잉그마르는 헤르굼의 신속한 일솜씨에 놀랐다. 그처럼 거뜬하게 일을 처리해 내는 사람도 드물었다.
"너도 헤르굼 씨와 대화를 해봤으니까 당연히 우리 모임에 들어올 거라고 믿어."
다시 확인하듯 카린이 말했다.
헤르굼은 요 며칠 외부로 출타 중이었으나 머지않아 돌아올 예정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늘 하나님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아?"
카린이 주장했다.
잉그마르에겐 모든 것이 희망적이고 믿음직스럽게만 여겨졌다. 사람들 틈으로 되돌아온 것이 이토록 행복할 것이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단지 한 가지 섭섭한 게 있다면 게르트루드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 그가 가장 바라던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벌써 1년 동안이나 그녀를 만나보지 못했다. 여름 동안 그나마 들을 수 있었던 소식도 이젠 완전히 단절되어 누구에게도 선뜻 물어보지 못한 채 그는 답답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잉그마르가 사람들에게 마냥 행복하고 흡족하게만 보여질 때, 억센 잉그마르는 나날이 우울해지고 말수가 줄어들었으며 대하기가 무척 어려운 사람이 되어 갔다.
어느 날 오후 두 사람은 제재소의 통나무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숲이 그리우신 모양이에요?"
잉그마르가 말했다.
"그런 것 같아. 난 그곳에 남아 있는 게 좋았을 뻔했어."
"왜요? 뭐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어요?"
"말해서 뭐하나, 헤르굼이 소란을 피우는 건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
잉그마르는 그에게 헤르굼에 대한 주변 반응이 좋다는 걸 설명했다.
"그래, 분명히 훌륭하게도 됐고, 강하게도 됐지. 이 마을 전체를 거뜬히 뒤집어엎어 버렸으니"
억센 잉그마르가 한입 가득 샌드위치를 물고 볼멘소리로 비양거렸다. 잉그마르는 그가 자기 혈족의 그 누구에게도 애정 표시를 하지 않는 데 대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는 헤르굼 씨의 교리가 무척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뭐라구? 잉그마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억센 잉그마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흐린 눈을 치켜떴다.
"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으냐?"
잉그마르는 입을 다문 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결론을 얻었다는 듯이 확신에 찬 어조로 억센 잉그마르에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지지하실 겁니다."
"이런 빌어먹을! 그 '위대한' 잉그마르가 헤르굼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적이요 악마라고 부르기를 원하고 있단 말이냐? 옛 친구들이 오랜 신앙을 지키구 있는 것은 어떻게 생각할거구?"
"헤르굼을 추종한다고 해서 그런 나쁜 결과들만 생기는 건 아닙니다."
"그럼 한번 놈들에게 반대해 봐라,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잉그마르는 샌드위치 한 조각을 뜯어 입에 넣고 말 대신 그걸 씹었다. 흥분해 있는 억센 잉그마르를 보고 있자니 웬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젠장, 세상 돌아가는 꼴이라니!"
그가 탄식조로 떠들어댔다.
"그래, 헤르굼이 말하고 다니는 게 훌륭한 교리는 교리인 모양이지. 그러니까 마을 사람 대부분이 그 녀석에게 감화를 받았겠지. 억센 잉그마르인 나도 무색할 지경이니까. 그러니 점점 한다는 짓이, 자기 패가 된 사람들에게 죄인들과 접촉해선 안 된다고 설교를 해서 아이들까지도 부모와 떼어 놓고 있어. 그 녀석이 약간의 눈치만 보여도 형제는 동기간을 버리고 친구는 친구를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배신을 해.이 모든 불화의 근원이 되구 있는데, 그래 '위대한' 잉그마르가 그런 걸 지지한다구? 암, 그렇기도 하겠구나. 좋아하구 있을 그 양반 모습이 눈앞에 있는 것 같은데?"
잉그마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서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억센 잉그마르가 짐짓 되는 대로 지껄이는 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헤르굼이 신기한 일을 했다는 것은 나도 알지, 그 녀석이 사람들을 조종하는 거라든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친구로 여기도록 만들어 함께한다는 것은 사실 신기한 일이야. 부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수법도 그렇고, 사람들이 서로 아껴주고 도울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그래. 하지만 너는 생각도 못 할 일이겠지만, 자기와 같은 패거리가 안 된다고 해서 도외시하고 악마의 자식이라 부르는 건 한심하기 짝이 없어."
잉그마르는 정말 도저히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마을은 그 이상 평화로울 수가 없었지."
억센 잉그마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지껄였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은 흔적도 없어. 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모든 사람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있었는데 지금은 서로 배척하며, 천사니 악마니 하는 것들이 들끓는단 말이야."
'더는 못 참겠어!'
잉그마르는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듯 몸을 뒤채었다.
"너와 내가 끝장을 볼 날도 머지 않았을 게야. 네가 헤르굼의 천사들 패거리에 끼게 되면 녀석들은 분명 너와 나를 갈라놓고 말 테니까."
잉그마르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런 식으로 자꾸 말씀하신다면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몰라요. 우리 집안 사람들이나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헤르굼을 아무리 미워하도록 하려고 해도 말짱 헛일이라는 걸 분명히 아셔야 해요."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억센 잉그마르는 한참을 멍청히 앉아 있다가 펠트 중사를 만나러 가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사리가 분명한 사람과 얘기를 나눈 지가 무척 오래되었다고 그는 중얼거렸다.
잉그마르는 내심 속이 다 후련했다. 누구나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면 불쾌한 이야기는 듣기 싫고 주변의 모든 것이 평화롭고 활기차 보이기만을 원하는 법이다.
이튿날 아침 5시에 그는 제재소로 내려갔다. 억센 잉그마르는 벌써 와 있었다.
"오늘 헤르굼이 너를 찾아갈 게다. 그 녀석이 내 딸년하고 어젯밤 늦게 돌아왔지. 눈치를 보니 너를 개종시키려구 성찬순회를 집어치고 부랴부랴 돌아온 것 같았어."
"또 시작이에요?"
잉그마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젯밤 억센 잉그마르의 말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가치관에 혼란을 가져왔으므로, 또다시 종교에 관한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잠시 말을 끊고 앉아 있던 억센 잉그마르가 돌연 키들거리며 웃어댔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제재기를 작동시키려고 수문에 손을 갖다대며 잉그마르가 물었다.
"갑자기 스톰 선생 딸이 생각나서 그래. 게르트루드 말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킥킥, 내참 우스워서, 사람들이 말이야, 헤르굼을 움직일만한 사람은 그 아가씨밖에 없다고들 그러잖겠어?"
"게르트루드가요? 두 사람이 무슨 관계라도 있단 말에요?"
잉그마르는 아직 수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억센 잉그마르의 주름투성이의 얼굴에 가닥가닥 짓궂은 웃음기가 서려 있는 것을 보았다. 잉그마르도 약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언제나 할아범 편리한 대로 생각하시니까, 원"
"그런게 아냐. 이유는 그 시의원의 머저리 같은 딸 군힐드가 글쎄...."
"그 아가씨는 머저리가 아니에요!"
잉그마르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그래, 그야 아무래도 상관없지. 아뭏든 문제는 잉그마르 농장에서 새 종파가 번지려는 조짐을 보일 때 군힐드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게야. 그 애가 집에 가 양친한테 한 말이 가관이라니까. 자기는 이제 유일한 참신앙의 신도가 되었으니 부모를 떠나서 잉그마르 농장에 가서 살겠다고 말했다니 말야. 하지만 부모 맘이 어디 그렇겠어? 당치도 않은 일이지. 그래 자기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참다운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타일렀더니 군힐드가 펄쩍 뛰더라는 게야. 도무지 무슨 말을 해도 먹혀들지 않는 게바위에 대침 꽂는 경이었겠지. 다른 사람들은 온 집안 식구들이 참 기독교인다운 생활을 함께 해나가기 땜에 자기처럼 그럴 필요가 없다더라나. 클레멘트손은 그만 화가 나서 딸아이를 방에 가두어 버렸다는군."
"그게 게르트루드와 무슨 상관이죠?"
"참을성도 없긴. 계속 들어 봐. 그다음 날 아침이었지. 게르트루드와 스티나 부인이 부엌에 앉아 실을 감고 있는데 클레멘트손 부인이 찾아왔더래, 놀라운 건 평상시 그토록 쾌활하고 명랑하던 사람이 눈이 퉁퉁 부어 가지고 꼭 실컷 울고 나온 사람 같더라는 게야.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두 사람이 물었더니 가장 사랑하는 보배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그랬다잖겠니? 정말 이녀석들을 당장이라도 납작하게 두들겨 패줬으면 속이 다 후련하겠군."
"때려주다니. 누굴요?"
"빌어먹을! 헤르굼이랑 안나 말고 또 누가 있겠니? 그 녀석들이 밤중에 군힐드를 납치했다니, 내 참!"
"납치를 했다구요."
잉그마르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 강도는 같은 녀석에게 딸을 빼앗겼으니.... 밤중에 그 녀석들이 군힐드를 찾아가선 왜 잉그마르 농장에 오지 않았냐구 묻는 걸 군힐드의 양친이 옆방에서 다 엿들었대, 군힐드가 부모님이 자기를 가두었다고 대답하니까 헤르굼이 악마 같은 짓이라고 그랬던 모양이야. 그런 소리까지 조금 열려 있던 문틈으로 다 들려왔던 거지."
"아니, 그랬으면 뛰어나가 당장 돌려보냈으면 되잖아요."
"딸아이에게 스스로 결정하도록 기회를 주었던 거야. 설마 부모를 버리고 훌쩍 나가버리리라고 생각인들 했겠어. '늙으신 부모님을 남겨두고 나가버릴 순 없어요'라는 군힐드의 목소리를 기다리면서 침대에 그냥 누워 있었던 모양이야."
"그런데 기대완 달리 군힐드가 그들을 따라갔군요."
"흥, 다 헤르굼 녀석 때문이야. 그 녀석이 좀처럼 그냥 가려 들지 않으니까 군힐드도 결국 따라나섰다더군. 클레멘손 내외는 딸아이가 헤르굼에게 넘어갔음을 알곤 그냥 포기해 버렸다나? 세상에 그런 사람들도 다 있어. 하지만 아침이 되자 군힐드의 어머니는 후회가 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지 남편에게 농장에 가서 딸을 데려오라고 애원을 했다더군. 클레멘손은 '무슨그 따위 소릴! 그런 짓은 못해. 제 발로 걸어들어온다면 또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 내 그년을 두 번 다시 만나면 손가락에 장을 지지지'라며 화를 벌컥 내더라는 게야. 그래서 부인이 놀래가지고 학교로 찾아와서 게르트 루드에게 군힐드를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을 했던 거지."
"그래서 어떻게 됐답니까?"
"게르트루드가 군힐드를 찾아갔지. 역시 말이 먹히질 않더래."
잉그마르는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집에서 군힐드를 본 적이 없는데요."
"그야 그렇겠지. 지금은 제 집으로 돌아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게르트루드는 군힐드와 헤어져선 헤르굼을 만났던 거야. 모든 게 헤르굼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그 녀석의 뺨따귀라도 갈길 듯이 충고를 해댔던 게지."
"그래요, 게르트루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요. 게다가 여간 달변이 아니니까요."
"밤중에 그런 식으로 젊은 여자를 꾀어내는 건 이교도의 병정이나 하는 짓이지, 기독교의 설교자가 할 짓은 못 된다고 그랬다더군."
"헤르굼의 반응은요?"
"그 녀석이 할 말이 있겠어? 아무 소리도 못 하구 서 있다간 자기가 지나쳤다고 시인하고는, 그날 오후 군힐드를 부모에게 돌려보냈던 거지."
잉그마르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일었다.
"게르트루드는 역시 대단한 여자예요. 그리고 헤르굼도 좀 괴상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훌륭한 사람이구요."
"호, 네 생각은그 렇단 말이지? 그렇게 쉽사리 헤르굼이 게르트루드에게 설복당한 점은 눈꼽 만큼도 이상한 데가 없고?"
잉그마르는 대꾸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네가 어떤 태도를 취할 지 한결같이 궁금해하는 모양이던데."
"제가 어떻게 하든 뭐 그리 중요해요?"
"네가 꼭 명심해 둬야 할 일이 있다. 이 마을에서는 언제나 우러러 받들 만한 사람을 세워 놓는 관습이 있다.'위대한' 잉그마르는 별세했고 교장은 사람들을 조종할 만한 힘을 잃었고 목사도 역시 마찬가지니 자연히 사람들이 헤르굼을 추종할밖에, 네가 뒷짐 지고 물러서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러구 있을 때가 아니란 말야."
잉그마르는 팔을 축 늘어뜨렸다. 몹시 피곤했던 것이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군요. 그냥 혼란스럽기만 해요."
"사람들은 네가 헤르굼의 존재를 밀어내주길 원하고 있어. 우리는 겨우내 산에 틀어박혀 있어서 별 내용은 모르지만 처음에는 좀 끔찍한 일도 있었나보더라. 한동안 사람들은 개종의 들뜬 분위기에서 악마니, 마귀니 하는 소리쯤은 예사로 여겼던 모양인데, 결정적으로 충격을 준 건 개종한 어린애들이 설교를 시작했다는 게야."
잉그마르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어린애들이 무슨?"
"사실이 그렇다니까!"
억센 잉그마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
"헤르굼이 아이들에게 노는 대신 하느님께 봉사하라구 부추기는 바람에 아이들까지도 개종을 위해 꿈틀거리기 시작한 거야.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말야. 그 어린 녀석들이 글쎄 길가에 기다려 섰다가 누가 지나가는가 싶으면 불쑥 막아서선 '아저씨는 마귀와 맞서 싸우지 않을 거예요? 언제까지나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이실 텐가요?'라며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지껄인다는 게야."
잉그마르는 미심쩍은 듯 말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얘기는 모두 펠트 할아범한테서 들은 거죠?"
"아무려면 어때. 더 할 말이 있다. 펠트도 당했다구! 이런 일들이 모두 잉그마르 농장에서 비롯된 것을 생각하면 내가 다 민망하고 부끄러워진다."
"펠트 할아범이 무슨 일을 당했게요?"
"얄미운 조무라기들 같으니! 그 어린 꼬마 녀석들 말이다. 그 녀석들이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니까 어느 날 밤인가 펠트를 찾아가 그 사람을 엄청난 죄인인 양 대하며 개종을 시키려 들었지."
"아니, 애들은 전에 펠트를 도깨비나 마범사처럼 두려워했는걸요."
"물론 그랬지. 이번에도 겁이야 났겠지만 딴에는 뭔가 영웅심을 발휘해 볼 생각이었던 게지. 그날 밤 펠트가 저녁 스프를 휘젓고 있는데 녀석들이 밀어닥친 거야. 몇 놈은 펠트를 보자마자 기겁을 해서 도망을 쳤는데 나머지 놈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선 늙은이를 빙 에워싸고 앉더니 노래를 부른다, 기도를 한다 하구 소란을 떨었다는군."
"충분히 쫓아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요."
잉그마르가 말했다.
"그래, 그랬으면 좋았을걸. 그 영감이 무슨 꿍꿍이속이었는지 나도 모르겠단 말야. 아마 영감은 나이 탓으로 외롭고 허전해져서 맹꽁이처럼 멀뚱거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거기다가 찾아온 게 애들이라 펠트로 하여금 감상을 자아내게 만든 거지. 애들이 늘상 자기를 무서워했다는 게 그 영감태기한테는 하나의 슬픔이었을지 몰라. 그런데 그 어린 얼굴들이 자기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으니 맥이 탁 풀렸던 모양이야. 아이들은 행여나 늙은이한테 얻어맞기라도 할까 봐 잔뜩 몸을 사리고는 열심히 노래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언제라도 도망칠 태세를 갖추고 있더라나. 그런데 그중의 두 녀석이 노인의 얼굴에서 뭔가 동요의 빛을 발견했던 거야. 펠트 영감의 얼굴에는 눈물 한 방울이 주루룩 미끌어져 내린 거지. 아이들은 할렐루야를 외치고 영감태기는 아이들한테 완전히 나가떨어진 게야. 이젠 집회에 쫓아다니는 데만 온통 정신이 팔려서 다른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구 급기야는 하나님의 소리가 들린다구 헛소리까지 해대고 있으니"
"전혀 나쁜 것 같지 않은데요. 헤르굼 신도가 술독에 빠져 있을 펠트영감의 운명을 바꿔 놓은 셈이니까요."
"과연 그렇기도 하겠지. 넌 친구 하나 잃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애들이 교장을 개종시켰더라면 정말 좋았겠지!"
"상상도 못 할 일인데요! 아이들이 스톰 선생님한테까지 달려들었다구요?"
잉그마르가 놀랐다는 듯이 입을 딱 벌렸다. 마을이 엉망으로 뒤집혔다는 억센 잉그마르의 말엔 정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톰 선생이 교실에서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지, 아마, 그런데 갑자기 한 떼의 아이들이 몰려 들어와선 선생에게 설교를 시작하더라는 게야."
잉그마르가 생각해도 조금 어이가 없은 일이긴 했다.
"처음에 선생은 말도 못하고 얼떨떨해 있었다더군. 마침 헤르굼이 부엌에 와서 게르트루드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던데."
"게르트루드와 함께 있었다구요?"
"그래, 군힐드사건이 게르트루드의 충고로 매듭지어진 후부터 두 사람은 친구가 된 거지. 게르트루드는 교실에서 일어난 소동을 듣고서 헤르굼에게 이렇게 말했지. '헤르굼 씨, 마침 때맞춰 오셔서 재미있는 구경을 하시게 됐군요. 지금부터 애들이 교장 선생님을 가르친답니다.' 헤르굼은 그 어처구니없는 일에 난감해졌겠지. 그 녀석이 당장 아이들한테로 달려가서 얼른 쫓아버리는 통에 다행히도 교장은 귀찮은 일을 겪지 않아도 됐던 거지."
잉그마르는 억센 잉그마르가 묘한 눈빛으로 자기를 주시하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마치 사냥꾼이 상처 입은 곰을 바라보며 한 방 더 보아줄지 어쩔지를 궁리하는 것만 같은 태도였다.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내가 너한테 무얼 바라겠냐. 아직도 어리고 재산도 없고 있는 거라곤 그저 텅 빈 두 손뿐인데."
"헤르굼의 목을 조르길 바라시지요?"
"그건 마을 사람 모두의 바람이야. 네가 헤르굼을 쫓아냄과 동시에 당장 해결될 일이지."
"새로운 종파가 들어올 때면 언제나 싸움과 불화가 있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모든 게 마찬가지 아녜요?"
"하지만 네 가문과 명예를 나타내는 것도 너 자신을 위해선 필요한 일이지"
잉그마르는 고개를 딴 데로 향하고 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게르트루드의 구체적인 소식을 듣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어설프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체면을 깎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여덟 시쯤 되었을까. 잉그마르는 아침을 먹기 위해 집으로 되돌아갔다. 여느 때와 같이 식탁 위엔 음식들이 보기 좋게 잘 차려져 있었고 카린과 할보르는 유달리 상냥스러웠다. 친절한 그들을 보고 있자니 억센 잉그마르의 말들은 한마디도 믿어지지 않았다. 잉그마르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늙은이가 공연히 과장해서 지껄인 거야.'
잉그마르는 가벼운 마음으로 푸짐하나 아침 식사를 들기 시작했다. 문득 게르트루드가 생각났다. 그녀에 대한 생각은 다시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금세 식욕이 떨어져서 음식에는 더이상 손을 대는 것도 싫었다. 그는 카린을 향해 고개를 들며 느닷없이 물었다.
"요즘 스톰 선생님 댁은 어떻답니까?"
"글쎄! 난 그런 신앙심 없는 사람들과는 교제하고 싶지 않으니까"
카린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카린의 냉담한 태도에 잉그마르는 잠시 머쓱해서 앉아 있었다. 그는 이야기를 계속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를 망설였다. 이야기를 계속한다는 것은 다소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가족과의 인연이 끊길 수도 있다는 우려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잉그마르는 뭔가 잘못된 일일 경우, 그것을 알면서 안전만을 위하여 그들을 지지하는 비열한 태도를 취하기는 싫었다.
"교장 선생님 집안에 신앙심이 결여되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걸요. 나는 그분들과 4년 동안이나 함께 살았으니까요."
그가 반의를 제시했다.
이때 카린 역시 잉그마르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녀도 설혹 잉그마르의 기분을 상하게 할지라도 진리를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어떤 경우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 사람들은 신앙심이 없다고밖에 볼 수 없어."
"그렇지. 거기다가 애들 문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지. 애들에겐 올바른 교육이 필요해."
할보르가 끼어들며 말했다.
"스톰 선생님은 이 마을 모든 사람을 가르쳐 왔는걸요. 매형도 그중 한 사람이구요."
"하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은 제대로 가르쳐 준 게 없어."
카린이 말했다.
"누님이 말하는 올바른 삶이란 것이 무엇인지 납득이 안 가는군요."
"그럼 옛날에 가르침받은 올바른 삶이 어떤 것이었나 얘기하지. 그건 마치 둥근 대들보 위를 걷는 것 같은 불확실한 거였어. 올라가는가 싶으면 벌써 아래로 떨어져 있고 끊임없이 반복될 뿐이었지. 그러나 이번엔 만난 참 신앙은 온 몸을 그냥 맡겨두기만 해도 좁은 정의로운 길을 넘어지지 않고 걸어갈 수 있어."
잉그마르는 미소를 띠며 카린을 바라보았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너무 편리해 보이던데요."
"그렇지 않아. 지금은 가능하지만 처음엔 무척 어려웠어."
"그래, 스톰 선생님 댁은 어떻게 됐나요?"
"우리 신도들은 모두 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려오기로 했어. 한시라도 빨리 낡은 교육으로부터 구출해야 한다고 생각들 했으니까."
"교장 선생님은 뭐라시던가요?"
"학교에서 애들을 끌어내는 건 법률 위반이라더라. 이스라엘 토마손 댁이나 크리스텔 랄손댁에 당장 경찰을 보내서는 애들을 도로 데려가 버렸지."
"그래서 이젠 스톰 선생님과는 멀어지게 되었군요."
"우린 우리끼리만 사귄단다."
"그쪽 사람들은 다른 보통 사람들과는 아주 어긋나버린 모양이죠?"
"우릴 죄악으로 물들이려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뿐이야."
세 사람의 말 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저음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들 자신에게는 매우 무서운 것처럼 느껴졌다. 화제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한테 게르트루드의 안부를 전할 수는 있어."
짐짓 명랑한 투로 카린이 입을 열었다.
"헤그룸 씨와 지난 겨울 동안 여러 번 만났었지. 게르트루드도 오늘 밤 우리 모임에 들어올 거래. 헤르굼 씨가 그랬어."
잉그마르는 입술을 떨었다. 그는 마치 총에 맞을 것을 예측하고도 그 순간을 알지 못한 채 온종일 눈을 감고 돌아다니다가 드리어 총알에 심장이 뚫린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니까.... 그녀도 그렇게 돼 버렸단 말이군요."
잉그마르는 맥 풀린 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숲속의 어둠에 싸여 있는 동안에 여기서는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군요."
잉그마르는 헤르굼이 그동안 게르트루드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온갖 수법으로 덫을 놓아 그녀의 환심을 사게 된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거죠?"
잉그마르의 목소리는 묘한 불안을 호소하는 듯했다.
"자네도 우리를 따라야지."
할보르가 못 박듯 분명하게 말했다.
"...."
"헤르굼 씨가 지금 돌아와 있으니까 너도 그분 얘기를 들어보기만 한다면 곧 개종하게 될 거야."
"....나는, 개종하고 싶지 않아요."
할보르와 카린이 멍하니 잉그마르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버지의 신앙 이외의 신앙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요."
"아무말 말고 우선 헤르굼 씨의 설교부터 한번 들어 봐."
카린이 부탁했다.
"내가 만일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다면 나를 집에서 쫓아내 버리겠죠."
잉그마르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할보르와 카린 이 두 사람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족이라는 모든 끈으로부터 뚝 떨어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허전하게 비어만 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냉정을 되찾으려고 애써야 했다.
"그래, 제재소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참인가요."
그는 이 문제만큼은 정확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할보르와 카린은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은 어떻게든 언질이 잡히는 건 싫었던 것이다.
"이봐 처남, 우리가 자네를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으로 여긴다는 건 알아주겠지?"
할보르가 말했다.
"네, 네, 그런데 제재소는 어찌 되는 거지요?"
잉그마르는 계속 다그쳐댔다.
"중요한 건, 나무란 나무는 모두 제재해 버리는 일이야."
"저는 그 얘길 듣자는 게 아녜요."
"...."
"필경 헤르굼이 경영하게 되겠군요. 안 그런가요?"
잉그마르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카린과 할보르는 그의 돌발적인 태도에 놀라고 당황했다. 그는 게르트루드의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잉그마르, 한 번만이라도 헤르굼 씨의 얘길 들어볼 수 없겠니?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카린은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동생의 소맷부리를 잡고 애원조로 말했다.
"네, 네,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였는가를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겠어요."
"우린 진심으로네 행복을 바라고 있어, 잉그마르! 정말 진심이야."
"짐작대로군요. 헤르굼이 제재소를 경영하는 일이 두 분 마음속엔 이미 정해져 있었던 거예요."
"우린 뭐든 적당한 직업을 헤르굼에게 구해 줘서 그를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서 머물게 해줘야 해. 잉그마르 자네가 우리들의 유일한 참신앙을 영접해 들이기만 한다면 헤르굼과 함께 손을 잡고 사업을 잘 해나갈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헤르굼만큼 훌륭한 일꾼도 없을 거야."
할보르가 변명처럼 느릿하게 말했다.
"분명하게 말씀하십시오. 언제부터 그렇게 분명한 걸 두려워하시게 되었어요?....내가 알고 싶은 건 헤르굼이나 나, 둘 중에 누가 제재소를 갖게 되느냐는 문제예요."
"그건 처남에게 달렸어. 하나님에게 반항을 한다고 하면 헤르굼의 몫이 될 수도 있지."
"참으로 감사하군요. 내가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만큼의 이익을 건질 수 있는가를 깨우쳐 주셨으니까요."
잉그마르가 빈정거렸다.
"잉그마르!"
카린이 나무라듯 불렀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지금 몰라서 그러는 거니?"
"물론 잘 압니다. 그건 헤르굼의 신도가 되지 않으면 게르트루드고 집이고 간에 모두 잃을 수도 있다는 말 아닙니까?"
잉그마르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휙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하늘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잉그마르는 게르트루드와 함께 보내던 교장 선생댁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어중간한 상태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었다. 그가 막 교문을 들어설 때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교정에는 벌써 푸릇푸릇 싹이 돋아 붉은 흙을 초록으로 덮기 시작해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쪽에선 봉오리들이 고개를 쑥쑥 내미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잉그마르는 이곳의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답고 평온하게 느껴져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마음은 그새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었다.
게르트루드는 아직 잉그마르를 보지 못했다. 그는 살며시 문을 닫고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잉그마르는 걸음을 멈추고 황홀하게 그녀를 바라다보았다. 지난번 헤어질 무렵만해도 겨우 소녀티나 벗었을까 말까 했던 그녀가 1년도 채 안 된 지금은 성숙한, 품위 있고 아름다운 젊은 숙녀 같아 보였다. 키도 제법 크고 날씬한 몸매가, 완전한 여인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머리는 우아한 목덜미에 아름답게 드리워지고 살결은 우윳빛으로 부드러운데다가 볼 언저리는 싱싱한 복숭아 빛이었다. 깊숙한 눈은 지적으로 보이고 장난기가 다분해 보이던 입가엔 이제 진지함과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잉그마르는 혼이라도 빠져나간 듯했다. 가슴속에선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일렁였다. 평화로운 고요가 그의 온 몸에 스며들어서 무언가 위대하고 신성한 것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그저 즐겁기만 해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어졌다.
게르트루드가 잉그마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얼굴이 굳어지면서 양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잉그마르는 마음속을 파고드는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지금 게르트루드는 자기의 출현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여자를 놈들이 빼앗으려 하고 있어. 아니 이미 나는 놈들에게 게르트루드를 뺏긴 거야.'
안식일 같은 평화로운 감정은 사그라들고 공포와 격정이 다시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인사 따위는 제쳐 놓고 다짜고짜 싸움하는 사람처럼 언성을 높였다.
"게르트루드, 헤르굼 신도들과 한패가 된다는 게 사실이야?"
"그래요."
게르트루드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잉그마르는 화가 나서 물었다.
"헤르굼 신도들은 자기들과 생각이 틀린 사람들하곤 상대도 하지 않는다던데, 그 점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도 없나 보지?"
게르트루드는 자기도 충분히 생각해 보았다고 대꾸했다.
"그럼 부모님의 허락은?"
"아니요. 두 분은 아무것도 몰라요."
"무슨 소리야, 게르트루드!"
"그만둬요, 잉그마르! 어쩔 수가 없어요.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에요."
"말도 안 돼. 그런 걸 보구 하나님의 뜻이라니, 그건...."
게르트루드는 잉그마르의 말을 자르듯이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동조할 수 없어."
잉그마르는 게르트루드의 굳어진 표정을 무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만일 게르트루드가 그들 무리에 낀다면 우린 영원히 끝나버리고 말 거야."
게르트루드는 침착하게 그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그녀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제발 게르트루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잉그마르가 애원했다.
"제가 지각없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큰 오산이에요. 나는 나대로 오랫동안 진지하게 생각해 왔던 문제니까요."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도 있잖겠어?"
게르트루드는 그를 외면했다.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잉그마르는 드디어 화가 치밀었다.
"너는 헤르굼을 위해서라도 잘 생각해 봐야 할 거야!"
그녀의 팔을 거칠게 움켜잡으며 잉그마르가 소리쳤다. 게르트루드는 얼떨결에 그의 손을 뿌리쳤다.
"돌았어요, 잉그마르?"
그녀도 큰 소리로 말했다.
"흥, 그래, 헤그굼이 나를 미치게 했지. 그런 짓은 그만두게 해야 해!"
"뭘 그만두게 한다는 거예요?"
"머지않아 알게 될 거야."
게르트루드는 몸을 움츠렸다.
"잘 있어, 게르트루드!"
잉그마르는 목이 메었다.
"....내 말 잘 들어둬. 넌 절대 헤르굼의 신도가 될 수 없어, 절대로!"
"어떡하려는 거예요, 잉그마르? 왜 그러는 거죠?"
게르트루드는 불안해져서 그를 바라다보았다.
"잘 있으라구! 내가 한 말을 잘 기억해야 할 거야."
잉그마르는 자갈길을 뛰어가면서 앞으로서의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아버지처럼 현명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중요한 것들을 모두 잃기 직전이야. 그런데 나는 아무런 대책과, 방법도 찾지 못하고 있어.'
그러나 잉그마르가 확실히 다짐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만일 예측했던 모든 불행이 닥쳐온다면 헤르굼을 결코 그냥 두지는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잉그마르는 헤르굼을 만나볼 생각으로 억센 잉그마르의 집으로 찾아갔다. 입구가 가까워지자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 많은 모양이군.'
그는 발길을 돌렸다. 그때 한 사나이의 노기에 찬 소리가 잉그마르의 귓전에까지 들려왔다.
"우리는 3형제였소, 존 헤르굼. 동생의 신상을 알아보기 위해 예까지 찾아왔는데 동생은 2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당신의 패거리에 들어갔다는 소릴 들었소. 그동안 편지를 받아보니 동생은 당신이 지껄여대는 말에 너무 심취해 있었던 모양인데, 끝내는 정신 이상해졌다는 소식을 들었소. 당신에게 그 까닭을 좀 들어 봅시다."
잉그마르는 얼른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제재소로 갔다. 억센 잉그마르는 벌써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윙윙거리는 톱 소리와 사나운 물결 소리를 비집고 높은 고함소리가 여전히 그에게까지 들려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헤르굼이 자신에게서 빼앗으려 하는 모든 것들, 그러니까 가족이라든가 게르트루드라든가 집이라든가 하는 생각들이 마음속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다시 고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헤르굼과 그를 찾아온 사람들 사이에 드디어 싸움이 일어난 것 같았다.
'저 녀석, 반 골병이 들어도 싸지.'
그때였다. 사람 살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잉그마르는 일을 집어치우고 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오두막에 가까워지자 헤르굼의 처절한 고함소리가 더욱 확실하게 들렸다. 그가 문 앞에까지 당도했을 때 오두막 안에서 벌어지는 격투로 집 주변의 뜰까지도 온통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발뒤꿈치를 들어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헤르굼이 벽에 붙어서서 도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엔 세 사람의 낯선 도끼가 있었는데 그들은 저마다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총을 지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그저 헤르굼이 끝까지 굽히려 들지 않고 의외로 제법 잘 맞붙어 싸우며 화를 돋우자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그들은 잉그마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참 동안 잉그마르는 조용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꼭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꿈속에선 가끔 바라고 바라던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헤르굼은 간헐적으로 도움을 청하듯 소리쳤다.
'어림도 없어. 이게 얼마나 바라던 일인데. 내가 너를 도와줄 것 같애?'
잉그마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한 사나이가 헤르굼의 머리를 후려쳤다. 헤르굼은 그만 손에 쥐고 있던 도끼를 마룻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나머지 두 사나이가 칼을 꺼내 들고 덤벼들었다. 순간 잉그마르의 머릿속에서 세차게 일고 있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이 집안은 사람들이 생을 살아가다가 반드시 한 번은 비겁하고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한 것인가.'
그는 더 이상 그러고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별안간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억센 손에 잡히는가 싶더니 번쩍 들려서 집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나머지 두 사나이도 미쳐 깨닫기도 전에 같은 꼴을 당하여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잉그마르는 흥분하여 문간에 가서 섰다.
"어때, 덤빌 생각은 없나?"
그는 자기의 힘을 시험해볼 좋은 기회라는 생각으로 세 사내를 향하여 씨익 웃어 보였다. 세 사람은 공격태세를 갖췄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도망가자, 느릅나무 밑에 누가 오고 있어."
그들은 헤르굼은 해치우지 못한 것을 원통해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달아나려다 말고 몸을 휙 돌렸다. 갑작그런 그의 역습을 당한 잉그마르는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칼에 목을 찔린 채 맥없이 쓰러졌다.
"남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한 벌이다!"
사나이가 소리치며 달아났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곳에 카린이 나타났다. 잉그마르가 목에 상처를 입고 디딤돌에 앉아 있는 것을 본 카린은 소스라쳐 놀랐다. 또한 안쪽에는 헤르굼이 얼굴에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도끼자루를 쥐고 벽에 기대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카린은 사태를 나름대로 해석했다. 잉그마르가 헤르굼을 습격하여 이러한 싸움의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의 무릎이 덜덜 떨렸다.
'그럴 리가 없어. 아니야, 말도 안 돼. 우리 집안에 살인자라니, 정말 아니야!'
그녀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런데 문득 어머니의 이야기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래, 일이 이렇게 돼 버린 거야."
그녀는 서글프게 중얼거리며 잉그마르 앞을 가로질러 헤르굼에게로 달려갔다.
"잉그마르를 먼저!"
헤르굼이 신음하듯 소리쳤다.
"살인자를 먼저 구할 순 없어요."
카린이 냉담하게 말했다.
"잉그마르 잉그마르를 먼저 봐주라니까요!"
헤르굼은 몹시 흥분하여 카린을 향해 도끼를 쳐들어 보였다.
"잉그마르가 살인자들과 싸워서 내 목숨을 구했소!"
그제사 카린은 모든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잉그마르를 돌아보았으나 그는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그녀는 마당을 가로질러 비틀비틀 걸어가는 잉그마르를 발견했다.
"잉그마르! 기다려, 잉그마르!"
잉그마르는 돌아보지 않았다. 양 어깨가 고통과 슬픔으로 한없이 아래로 처지는 것만 같았다.
카린은 동생의 곁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잉그마르의 팔에 손을 얹었다.
"잠깐만, 잉그마르. 상처를 동여매야 해."
잉그마르는 카린의 손을 뿌리치고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아니 앞을 못 보는 장님처럼 큰 오솔길을 되는대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상처의 피가 옷 속을 타고 흘러 한쪽 구두 속으로 미끌어져 내려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 위에 붉은 선혈이 발자국으로 남겨졌다. 카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잉그마르 기다려줘. 어딜 가는 거니. 잉그마르, 제발...."
잉그마르는 계속 비틀거리며 숲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카린은 잉그마르의 구두만을 걱정스레 주시하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피는 끊임없이 넘쳐흐르고 발자국은 점점 더 붉고 진해졌다.
'숲에 가서 죽을 때까지 피를 흘리며 누워 있을 작정인가 봐'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소리쳤다.
"아아 잉그마르, 헤르굼을 살려 주었는데! 내가 잘못했어. 그러기엔 큰 용기와 힘이 필요했을 텐데."
잉그마르는 카린의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카린은 달려와서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비켜 갔다.
"가서 헤르굼이나 도와줘."
그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 말 좀 들어봐, 잉그마르. 네 매형과 나는 오늘 아침 네게 한 말을 무척 후회하고 있어. 그래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재소를 너한테 맡기기로 결정했다구. 그 얘기를 하려고 헤르굼을 찾아갔던 건데...."
"이젠, 헤르굼에게 줘도 상관없어."
그는 돌과 나뭇가지에 걸려 비틀대면서 계속 걸어나갔다. 카린은 그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가면서 열심히 동생을 달래 보려고 했다.
"용서해 주렴. 네가 헤르굼과 싸운 걸로 오해했던 거야. 그땐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 잉그마르"
"누나는 그렇게도 쉽게 자기 동생을 살인자로 취급했어."
잉그마르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는 계속하여 걸었다. 밟힌 풀잎들이 다시 일어서며 선혈을 뚝뚝 떨어뜨렸다. 카린은 지금 잉그마르가 얼마나 헤르굼을 증오하고 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헤르굼을 구해준 것이다.
"사람들이 오늘 네가 한 일을 안다면 모두들 감격할 거야. 그런데 네가 그냥 죽어버리면 어떡하겠니, 잉그마르"
잉그마르가 경멸하듯 웃었다. 그리고 파리해진 몰골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이러는 거야.난 지금 누나가 누굴 그토록 돌봐주고 싶은지 다 알고 있어."
그가 걸어온 땅 위에 핏자국이 길다란 손을 이루었다. 그의 걸음이 점점 위태로워졌다. 카린은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동생에 대한 사랑이 다시금 열정을 품고 끊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새삼 동생이 믿음직스럽고 자랑스러워 자신의 전통있는 집안의 튼튼한 거목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잉그마르, 네가 이렇게 계속 피를 흘리다 죽으면 내가 하나님과 조상들을 뵐 면목이 없잖니? 너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게. 그래 어떻게 해줬음 좋겠니?"
잉그마르는 걸음을 멈추고 나무를 의지해 몸을 지탱했다. 그는 얼굴을 이그러뜨리며 웃음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헤르굼을 미국으로 보내 버릴 수 있겠어?"
카린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순간 잉그마르의 발밑에 괴기 시작한 핏물이 그녀의 시선에 섬뜩하게 들어왔다. 그녀는 동생의 말을 곰곰이 새겨 보고 있었다. 동생은 지금 자기에게 그 아름다운 천국을 버리라고, 옛날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덕이던 지옥 같은 세계로 되돌아가라고 이렇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잉그마르는 똑바로 카린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얼굴이 파리해지고 관자놀이에는 힘줄이 솟아 있었으며, 코언저리는 송장처럼 거무스름하게 죽어있었다. 그의 아랫입술은 여느 때 같지 않게 툭 불거지고 꼭 다문 입가는 날카롭고 야무진 게 굳은 결의에 차 보였다.
"나는 헤르굼과 한 마을에서 살 수 없어. 그렇다면 내 쪽에서 길을 비켜줘야 하겠지."
"아니야!"
카린이 소리쳤다.
"만일 네가 내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생명을 구하도록 가만히 있어 준다면 헤르굼을 떠나보낼 것을 약속할게."
그녀는 말을 마치며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지도자를 보내주실 테니까. 지금은 잉그마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현명해.'
그녀는 상처를 봐주고 피를 멎게 한 후, 잉그마르를 집으로 데려가서 눕게 했다. 상처는 그다지 심한 편은 아니었다. 며칠 동안 안전케 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나 치료법인 것 같았다. 2층 방의 침대에 누워있는 잉그마르를 카린은 마치 어린애 돌보듯 간호했다. 잉그마르는 헛소리까지 했다. 카린은 그로 인해 헤르굼과 제재소만이 동생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얼마 후 잉그마르가다시 의식을 되찾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카린이 입을 열었다.
"널 찾아온 사람이 있단다."
잉그마르는 몹시 지치고 피로하였으므로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곧 게르트루드가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예의 바르게 그러나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잉그마르는 옛날 어릴 적에 게르트루드가 짓궂게 굴며 약을 올릴 때부터 그녀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뚜렷하진 않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에 뭔가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를 어떻게든 소유하고 싶은 욕망만이 그를 짓눌러댔다. 그녀에 대한 동경과 불안, 그리고 그리움으로 보낸 한 해가 그에게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준 것이었다. 게르트루드가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잉그마르는 괴로운 듯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제가 보기 싫은가요?"
게르트루드가 말했다. 잉그마르는 고개를 저었다. 어린아이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어, 할 얘기가 있어요."
"헤르굼의 신도가 되었다는 말?"
잉그마르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게르트루드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가린 그의 손을 떼 내었다.
"저, 잉그마르! 잉그마르가 모르는 게 있어요. 작년에 말이죠, 잉그마르가 우리 집을 나간다고 할 때 난 비로소 내가 잉그마르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잉그마르는 잠시 귓부리가 빨개지고 얼굴에는 환희의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는 금방 침울하고 미심쩍은 표정으로 안색이 변했다.
"여기 안 계셔서 정말 쓸쓸했어요."
잉그마르는 물끄러미 게르트루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감사하는 표시로 약간 웃어 보이곤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그런데 잉그마르는 한 번도 나를 만나러 와 준 적이 없었죠?"
그녀가 비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그때 당신에게 있어서 내가 얼마나 무의미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괴로웠어요."
"난 난, 내 환경이 좋아져서 능력이 있을 때까진 게르트루드를 만날 수 없었어. 그렇게 되고 나면 청혼을 하려고 했던 건데."
"하지만 전 당신이 저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겼어요."
게르트루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굴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억제하려고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말했다.
"잉그마르는 모르겠지만, 내게 그 1년은 고통의 나날이었어요. 헤르굼은 그런 저를 친절하게 위로해 줬던 거예요. 그는 내게 삶을 전부 하나님께 맡겨두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말했죠."
잉그마르의 두 눈은 이제 새 삶의 희망으로 빛났다. 그는 조용히 게르트루드를 응시할 뿐이었다.
"오늘 아침, 전 우리 집에 잉그마르가 나타난 걸 보고 정말 놀랬었어요. 난 지난날의 아픈 몸부림이 다시 시작되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괴로웠죠. 왠줄 아세요? 당신을 사랑하기 땜에 당신에 대한 나의 마음을 어쩔 수 없어서 그랬던 거예요."
잉그마르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그런데 오늘 밤 오두막에서 있었던 잉그마르의 소식을 듣고 전 도저히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어요. 결국 저는 당신에게 향하는 나의 마음을 거둬들일 수 없음을 깨달은 거죠."
그녀는 잉그마르에게 축제일의 커다란 종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마음속 가득 폭죽 같은 환희가 번지고 평화와 고요가, 달콤한 입술을 통해 닿아온 사랑이 그를 더할 수 없는 행복감으로 몰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