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물 가을 불 - 진주말로 혹은 내 말로
가을 벌초
가을 저녁과 밤 사이
갈꽃, 여름
가짓빛 추억, 고아
강
거름비
거짓말의 기록
겨울 병원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고향
골목길
공터의 사랑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국립 경상대학교
그 그림 속에서
그날의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네
그래, 그래, 그 잎 -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그러나 어느 날 날아가는 나무도
그렇게 웃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 밤에 붉은 꽃이
그해 사라진 여자들이 있었다
글로벌 유령
기쁨이여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기차가 들어오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11월
기차는 간다
기차역에 서서
꽃은
꽃핀 나무 아래
나는 춤추는 중
나를 당신 것이라
나비 그늘 라디오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나의 고아들은
나의 저녁
난 존재를 안고 있는 허당이었어요
남강 시편
남해 섬에서 여러 날 밤
낯익은 당신
내 속으로
내 손을 잡아줄래요?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너무 일찍 온 저녁
너, 없이 희망과 함께
너의 눈 속에 나는 있다
네 말속
네 잠의 눈썹
농담 한 송이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눈
늙은 가수
늙은 들개 같은 외투를 입고
다음의 메모가 쓰인 때
단칸방
달빛
달이 걸어오는 밤
대구 저녁국
도시의 등불
독일 남쪽 마을에서 쓰는 꿈
돌이킬 수 없었다
동백 여관
동천으로
둥글레꽃
딸기
땡볕
라일락
레몬
루마니아어로 욕 얻어먹는 날에
마치 꿈꾸는 것처럼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맑은 전등
매캐한 자욱함
머리에 흰 꽃을 단 여자아이들은
먹고 싶다
모랫빛
목련
몽골리안 텐트
무심한 구름
문득
물빛
물 좀 가져다주어요
미안해 오랫동안 소식을 전해주지 못해서
바다가
바다 탄광
발이 부은 가을 저녁
밤 소나기
밥빛
방향
백수 광부
베낀
별 노래
별을 별이
병풍
봄꿈
봄날은 간다
봄 오후
부풀어 오르는 어머니
불우한 악기
불취불귀(不醉不歸)
붉은 조개를 단 거북
붉은 후추나무
비행장을 떠나면서
빈 얼굴만 지닌 노인들만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빙하기의 역
빛 속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사랑의 불선(不善)
사식을 먹
사진 속의 달
산수화
상여길
설탕길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세월아 네월아
소풍 갑시다
수박
수수께끼
수육 한 점
숨
숨은 사랑
쉬고 있는 사람
스승의 구두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슬픔의 난민
시(詩)
시간 언덕
씁쓸한 여관방
아버지,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아버지의 유작 노트 중에서
아사(餓死)
아이가 달아난다
아직도 나는 졸면서
아침 식사 됩니다
아픔은 아픔을 몰아내고 기쁨은 기쁨을 몰아내지만
안는다는 것
어느 날 애인들은
어느 날 눈송이까지 막힌 사진이
어느 눈 덮인 마을에 추운 아이 하나가
언제나 그러했듯 잠 속에서
엄마와 나의 간격
여기에서
여름의 장례식
연등 아래
연필 한 자루
오래된 시간
오래된 일
오래전에 잊은 이의 눈썹
오렌지
오이
오후 두 시경
온몸 도장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같은 지붕 아래 사는가
우리들의 저녁 식사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우연한 감염
우연한 나의
운수 좋은 여름
울고 있는 가수
원폭수첩
유령들
유리걸식
유배 일기
음악선생님 또랑또랑
이 가을의 무늬
이국(異國)의 호텔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입맞춤
입술
잎새라는 이름
자두
자서
저 나비
저녁 스며드네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
저녁의 미래
저녁 직전
저 산수(山水)가
저 잣숲
정든 병
정처없는 건들거림이여
조선식 회상
조카 이름 같은 꽃이
죽음의 관광객
지구는 고아원
지리산 감나무
지하철 입구에서
진주 아리랑
진주 저물녘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
청년과 함게 이 저녁
청동 염소
청아한 가을
카프카 날씨
탈상
폐병장이 내 사내
포도
포도나무를 태우며
포도메기
푸른 계절이 왔네
푸른 들판에서 살고 있는 푸른 작은 벌레
하루종일 기다린다
한 그루와 자전거
한식
해는 우리를 향하여
호두
혼자 가는 먼 집
환한 배나무
흑백사진 한 장
흰 꿈 한 꿈
흰 호텔 2016년
가을 물 가을 불
허수경
그 강
내가 자란 마을 강 천지로 불 일듯,
그때 그 강가에 서서
아마도 누군가 기다리는 뱃사공 본 듯.
그 뱃사공이 마시던 주발에
붉은 잎 떨어지는 것 본 듯,
검은 이불 속을 뒤척이며
서리서리 퍼런 물,
퍼런 물속 순한 물이
되는 불 만난 듯,
기다린 듯,
거친 손을 뱃사공이 내밀며
가자, 가자, 할 때,
그때 어디로,
라고 묻지 못하는 길
오랫동안 걸은 듯,
고개 숙이고
강 저쪽을 바라보던 이
실은 뱃사공 무심하게 노를 그은 듯.
가을 물 가을 불 -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허수경
그 가람
내 생기난 말 가람 천지방지로 불 일듯,
불근 이파리 떨어질 적
그때 그 가람가녁 서서
아무래나 뉘 기다리는 뱃사공 눈에 넣은 듯,
뱃사공네 들이시던 주발에
불근 이파리 녹들 듯한 거 본 듯,
검당한 이부자리 뒤덕이메
서리서리 퍼런 물,
퍼런 물 안 순더분한 물
되는 불 걱정이 든 듯,
다분히 돋아든 듯,
거더벙한 손 사공네 내밀며
가입시더, 가예, 할 적,
그녁 어데로,
라 청하지 못다한 길
오래 하등히 걸은 듯,
가슬 물 가슬 불 검덩한 이부자리 내,
순더벙 자무락한 꿈든 듯
고개 가당 저히고
가람 저녘 두리번 하던 네
실은 사공님 맘 없이 노, 근 듯.
가을 벌초
허수경
도라지꽃 푸른보라 입술의 바람이 사뭇 낙낙한 햇볕으로 고이는 때 어스름이구요 막내의 쉰내나는 겨드랑이 사이로 길가마귀 홍시 같은 넌출등불이 가까운 마을마다 켜지는데요 다 저녁때사 산은 머리를 풀며 안개의 자궁 속에 숨고 그 자궁 속에서 막내는 벌초를 합니다
아버지 올해는 우리 둘만 모냈군요 오누이가 절을 하는 쓸쓸한 뒷모습 더운 청주 한잔으로 눈가에 차올라 이승의 마지막 잔인 듯 당신 절로 멀리 있는 무덤이 되어 그리운 산 오누이의 가슴에 담겨드는 것을 막내는 막내라 그리운 산이구요 나는 누이인지라 그리운 산 가슴 아픈 자궁인데요
딸의 자궁으로 들어와 한줌의 풀무더기 가엾은 벌초가 되어 어린 아들의 붉은 손가락에 잡혀 넘어가시는군요 괜찮타 괜찮타
헉헉거리는 입김이 당신의 마른 가슴에 닿아 저리도 막막해져 켜켜로 쌓이는데요 진설하고 난 사과를 뚝뚝 분질러 흩어버리던 나는 산도 무덤도 아무것도 아닌 이승에서의 세 식구가 초승달이 감추어둔 길을 걸어 진설 음식이 내어놓은 새 길을 걸어 그리운 눈물로 고이는 것을 보았는데요
가을 저녁과 밤 사이
허수경
옥수수밭으로 해는 졌네 불그스레한 공기 속에 스며든 그 무엇, 그러나 예기치 않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네 노을 속에서 나무는 붉은 운명의 운동을 멈추었네 사기당한 사람의 통장 속 날아가는 마지막 지폐 흐린 손수건을 흔들며 이 세계 흐르지 않는 물속으로 빈 통장은 가라앉았네
돌이킬 수 없는 짠 사랑의 보리굴비를 가을 물에 밥 말아 먹다가 한 사람 울었네 눈물 많은 이의 지문 너무 자주 들여다본 편지는 사라지네 골목에는 아무 일 없어 언제나 같은 노래만 흘러나왔네 모두들 오늘 하루를 사랑하며 잠이라는 짐승의 숨 속으로 들어갔네
그 숨 속에서 누군가 너를 구워 먹었네 맛이 짜다, 하여 서기는 요리서에다 갈빛 가을 음식으로 너, 라는 고기를 적었네 먼 강물에서 흙맛이 나는 물고기는 피리를 불다가 돌 속으로 숨었네 어떤 이는 날 사랑하냐고 물었고 누군가는 그런 걸 믿느냐고 물었네
사랑이 무어냐?
당신을 두고 가는 거라고 대답했을 때 아, 우리는 멍들었네 이런 간단한 답은 이 가을을 매장한 삽만이 알 수 있었네 시체를 부검하는 칼은 초승달처럼 섬뜩하게도 가늘었네
가짓빛 추억, 고아
허수경
관이 나가는 날, 할머니가 눈감을 때까지 불렀던 사위, 이모부는 돌아왔다 할머니가 사주었다던 바지, 일찍 온 저녁처럼 무릎께가 너덜거리는 그 바지를 입고 오른팔을 잃은 이모부는 밭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보랏빛 뭉치를 하나 다서는 우적우적 씹었지
거리에서 잃은 팔을 먹어치우는 것처럼 빛은 세월의 칼로 철없이 우리의 혀를 동강 내었다
어느 날 슬플 때 빛은 무자비했으나 어느 날 욕정에 잡힐 때 빛은 아련했나 어느 날 기쁠 때 가지는 사라져서 빛은 뼈 속으로 혼곤하게 스며들었나 그 뒤에 돋아나는 빛은 자지러지게 우는 갓 태어난 아이를 닮으며 사무치게 널 안았나
도둑질을 하듯 몰래 살았다는 느낌이 목구멍까지 꽉 차오를 때 가지로만 입속에 머물던 빛, 그 빛의 혀를 지금 내가 적는다면
가지라는 불투명한 평화
보랏빛이라는 폭력
어떤 삶이라도 단 한 빛으로 모둘 수 없어서 투명해진 날개
이모부는 빛 속에서 사라지고 그 여름, 침묵하는 빛의 혀만 나부끼는 그림 속, 가짓빛은 텅 비었네 가짓빛 추억은 고아가 되었네
갈꽃, 여름
허수경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 했거늘, 했거늘
민족문학작가회의 농성장에서
김사인은 나를 때렸다
혹독한 매질이었다고..
나는 기억하지만 그것이 저녁밥 뜸들이는
내 고향의 누옥처럼 아련했다
갈꽃이 한 시야를 메우고
저 창창한 여름이 몸을 건너올 때
마음의 꿈,마음의 집
나는 서울의 한 횡단보도에서 비명횡사하고
싶어질 때마다 김사인의 매를 생각했다
이 화상아 정을 주었다 하면 어째 그러냐
혈친 같은 정을 꾸벅이면서 주고는
어깨를 경사지게 하고는
물 건너듯 무심하게 가버리느냐
김사인을 만나고 난 뒤
다방에 가서 꼭 그런다
커피를 마시고 보리차에다 설탕을
통째로 부어 설탕물을 한 그릇하고
티를 낸다 쯔쯧 저 티, 어떻게든
벗어던질 수 없는 업 같은 저 못 먹고 자란 티를!
그리고 낡은 가죽 소파에 한 시절을 기대고
내 시야를 가득 메워오던 갈꽃
빗자루 구슬 꿰며 어머니,
여름의 창창한 속으로 기어오르던
뜨거운 해 속에
설탕물을 부시던 갈꽃가루 환한 부신 눈에
김사인의 매질
그 또한 그를 때리던 서울의 한 농성
먹지도 먹히지도 않은 기차의 시절
손을 흔들며 아련하게 나는 앉아 있다
강
허수경
강은 꿈이었다
너무 먼 저편
탯줄은 강에 띄워 보내고
간간이 강풍에 진저리 치며
나는 자랐다
내가 자라 강을 건너게 되었을 때
강 저편보다 더 먼 나를
건너온 쪽에 남겨두었다
어느 하구 모래톱에 묻힌 나의
배냇 기억처럼
거름 비
허수경
들리나요 소문 없이
가고 노래도 없이
가고 들리나요
퍼질러 앉아 온몸 살구덩이
흙창으로 주저앉아
들리나요 해어진 옷 사이로
벌건 어둠이 박혀
들리나요
벌겋게 그리움 내 자취는
그리움 들리나요
기어오르다
노래
내리다
노래
시커멓게 박혀
박혀 진저리
박혀 눈 부릅뜨다
아무것도 뵈지 않아 진저리
산천은 입을 벌리고
받아내네요 들리나요
갤 것 같지 않는
막막한
막막한 너머의 주저앚은 것들
거짓말의 기록
허수경
나, 태어났어
추워, 라고 말하면 정말 추워서 이 세상을 떠도는 모든 먼지들을 모아 옷을 만들어 입고 싶었지
태어났을 뿐이었어, 누군가 나를 자라게 했어
아직 꽃술을 열어보지 못한 꽃들이 성교를 하느라 바쁜 들판에 누워
아직 단 한 번도 새끼를 낳아보지 않은 새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며
나비에게도 잠자리에게도 덜 익은 빛을 보여줘, 라고 공기에게 말했던 적도 있었어
나와 자연은 사실혼 관계
법정에서는 서로에 대해 아무 권리가 없다는 걸 늦게사 알았지
나에게 말을 거는 저 암소가 일찍이 나에게 수유를 한 어머니라는 걸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어.
매일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하늘에 있는 공들에게도 내 수유의 어머니,
그 고깃덩어리가 걸린 정육점을 단 한 번이라도 보여주었으면 했어.
공들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알까? 인간을 수유하는 암소들을 생산하는
더러운 거리 구석에 있는 도살장을 알까,
저것 봐, 아이가 불어대는 풍선 어떤 포유류의 방광이 하늘로 가서
먼 들판을 은은하게 비추어대는 하늘의 공이 되네
시간을 잘라 만든 혁대를 목에 감고 죽은 테러리스트가 살던 감방 안에서 자라던 작은 백합의 뿌리는 세계를 버티는 나무처럼 테러의 주검을 견뎌내고 있었어
아주 어린 중세가 대륙 저편에서 현대처럼 활개를 치고 있네, 그 말을 듣기 위해 춤을 추러 가는 아이들에게
나 태어났어, 라고 말해봐, 말해봐,
아이들이 당나귀처럼 웃으며 내 얼굴에다 총을 들이댈 거야
피가 솟구치는 숨겨진 샘이 있다라거나
죽을 수 없는 인간들이 매일매일 전쟁을 한다거나
그리고 당신이 날 사랑한다거나
그리고 그리고 그 말을 내가 믿는다거나 하는
엄숙하게 웃기는 나날 동안
나, 태어났어
아퍼, 라고 말하면 너무나 아파서 이 세상의 밤을 떠도는 모든 안개를 엮어 붕대를 만들고 싶었지
안개 붕대를 감고 누워 컴컴하게 웃고 있었으면 했어
겨울 병원
허수경
겨울 병원은 영원한 얼음처럼 지워져 갔다
그걸 보면서 눈은 생각한다
인간은 없다, 아니 인간을 달리 부를 단어가 없다
(겨울 병원의 밤은 혈관에 피를 실어 나르는 나뭇가지, 붉고도 검은 길 현관을 다 내놓고 물구나무로 서 있던 옛날의 우리같이, 혈관이 이렇게 황폐되기 전 우리는 사랑의 모든 몸을 안고 싶었다, 나무들의 물구나무선 혈관, 그 굶주린 석양을 양말로 신으려고)
옆 병실에서 누군가 온 힘을 다하여 비명을 내지를 때
간호사의 급한 발걸음은 지는 꽃처럼 소리 없이 운다
눈의 울음은 단어인가
언어의 비명 끝에 불러보는 이름인가
누군가 울 때
그건 물음일까 답일까
영원 빙벽을 무너뜨리는 인간의 자동차
미세먼지 필터
아하! 그 더러운 손수건, 그건 호흡일까
사랑이여 더러운 손수건을 흔들며
겨울이 사라질 때
빙벽이 갇혀 있던 억만년의 바이러스는 네게로 온다
북극은 사라지며 말하네,
죽음은 멀고 입술은 너무 가까워서
인간을 달리 부를 병을 나는 배우지 못했다
언 구름의 눈물로 엮은 한 장의 천처럼
하늘이 팔랑거리는 겨울 병원
북극곰은 눈 터널 속에서 아기를 낳으면서 눈을 감는데
산란의 고통 속 이빨이 빠지듯 빙하는 무너지고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허수경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고향
허수경
시간의 물웅덩이에 잠자리가 잠깐 앉았다
시간의 가슴 깊이에서 동그라미가 생겨났다
아직 집으로 가지 못한 사람들이 물웅덩이에 서서
가녀린 동그라미를 들여다보았다
고향에 어린아이가 태어났다
다들 아는 그 아이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아 잎 냄새가 났다
천년고도의 몸 냄새였다 해골의 노래였으며
몸의 춤이었고 숨이었다
내가 생애 동안 해온 모든 배반의 시작이었고
거짓의 모태였고 그리고 아직도 내가 알 수 없는 먼 죽음의 시작이었다
이 천년의 지루한 탱고를 위하여
비 내리는 작은 오후를 영광처럼 바라노니
아, 고향에는 백석 풍으로 국 끓이는 호박 얼굴을 한 여자가 살고 있을 터이다
골목길
허수경
→ 따라가다가 막다른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나오는 퉁 불거진 사내를 만나거나 하얀 모시를 처맨 다 시어 빠진 여편네를 만난다
삶에게 묻는다 그런 것이냐
보양의 탕 속에서 녹작지근해지거나 혹 천기누설의 값을 치르고 몇 가지 길흉을 얻어내는 게
너냐?
어쩌자고 고여 있는 것들은 뚱뚱해지거나 비썩 마르게 되는가
마음에게 묻는다 그런 것이냐
그 골목길 쓰레기통 옆에서 몸은 마른 쥐껍데기 사라진 몸은 이빨 자국만 남긴다 버려진 욕망 같은 저 수박 껍데기
→ 따라가다가 막다른 곳에서 두 다리를 오므리고 소리죽여 오줌 누는 계집애를 만나다
오줌 줄기가 내어놓은 → 의 아련함, 무심함으로 슈퍼 라디오는 노래한다 라디오는 흐른다
그런 것이냐, 견딜 수 없는 저열과 함께 → 쭉 따라, 가는 게 너냐 그런 것이냐
공터의 사랑
허수경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허수경
구름은 썩어가는 검은 건물 위에 우연히 멈추고
건물 안에는 오래된 편지,
저 편지를 아직 아무도 읽지 않았다.
누구도 읽지 않은 편지 위로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곧 건물은 사라지고 읽지 않은 편지 속에 든 상징도
사라져갈 것이다
누구든 사라지는 상징을 앓고 싶었겠는가
마치 촛불 속을 걸어갔다가 나온 영혼처럼
국립 경상대학교
허수경
철길 위로 남도발(南道發) 완행열차가 떠가는 곳
나는 이 천국에서 사년을 살았네 실은
사십 년 사백년을 살았네
천 년 동안 농부인 아버지
만 년 동안 농부의 아낙인 어머니
한 번도 나를 원망하지 않았네
보리금에서 환전된 등록금
영농자금에서 살을 발겨낸 자취비
이 신성한 땅에 꼬박꼬박 챙겨 넣으며
댓가 없는 땀과 역사 속에
댓가 있는 철창과 현실 속에
취직은 진리보다 멀고 진리는
내 살붙이들의 뼈를 갈았네
나도
그들도
국립 경상대학교도
한반도 현대사 아픔의 한 귀퉁이에 따로 서서
때로는 지리산처럼 눈물로 지워지고
산월 임박한 달이 되어
남해 파도로 무성해졌네
논도 되고 밭도 되는 진리는 없을꺼나
그것이 우리들의 상처가 되었네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거네
그 그림 속에서
허수경
빛과 공기의 틈에서 꽃이 태어날 때 그때마다 당신은 없었겠죠 그랬겠죠, 그곳은 허공이었을 테니
태어나는 꽃은 그래서 무서웠죠 당신은 없었죠, 다만 새소리가 꽃의 어린 몸을 만져주었죠
그 그림 속에서 나는 당신 없는 허공이 되었죠 순간은 구름의 틈으로 들어간 나비처럼 훅, 사라졌는데 그 뒤에 찾아온 고요 안에서 꽃과 당신을 생각했죠
무엇이었어요, 당신?
아마도 내가 이 세상을 떠날 적 가장 마지막까지 반짝거릴 삶의 신호를 보다가 꺼져가는 걸 보다가 미소 짓다가 이건 무었이었을까 나였을까 당신이었을까 아니면 꽃이었을까 고여드는 어둠과 갑자기 하나가 될 때
혀 지층 사이에는 납작한 화석의 시간만 남겠죠 날개와 다리 사이에서 진화를 멈추어버린 어떤 기관만이 남겠죠
이건 우리가 사랑하던 모든 악기의 저편이라 어떤 노래의 자취도 없어요
생각해보니 꽃이나 당신이나 모두 노래의 그림자였군요 치료되지 않는 노래의 그림자 속에 결국 우리 셋은 들어와 있었군요
생각해보니 우리 셋은 연인이라는 자연의 고아였던 거예요 울지 못하는 눈동자에 갇힌 눈물이었던 거예요
그날의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네
허수경
고향 언저리에서 나지 않는 열매들이 추억을 채우네
이국의 푸성귀들이 내 살을 어루네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입술은 사랑의 노래로 헤어졌네
과거는 소멸되지 않았으나 우리는 소멸했네
오 오 나는 추억을 수치처럼 버리네
내 추억에서 나는 공중변소 냄새
그래, 그래, 그 잎
허수경
그 잎 여릴 적, 우리 만나 잎 따서 삶아 밥해주던 할머니집에 앉아 여린 잎에 하얀 밥 싸 먹으며 벙그러지는 입술 오무리며 깔깔거리다가 어머 어머 할머니 설겆이 많겠네, 어쩌나, 그때 그 잎 여려 할머니의 아가 같은 손힘으로도 뚝 뚝 꺾이는 것을,
그 잎 커다랗게 자라 그늘 만들고 그늘 아래 비 그으며 수박 오이가 익는 것 들을 때까지 기다리자, 하며 할머니가 떠 오는 설거지물에 마치 오랜 시간 씻듯 양은 밥주발 씻으며 할머니가 잎 옆에 달린 꽃 머리에 꽂으며 벙그렇게 웃는 것 보며 그래, 그래 저 잎 더 무성해져서
산 덮고 그 산, 잎그늘 아래 축축한 땅의 수줍은 곳 열어 버섯 돋아오르면 그때 또 할머니가 지어주는 버섯밥 먹자, 좋겠네, 저 잎 여릴 때 만나 무성하게 산그늘 될 때까지 붙어 있다가 그래 그래 할머니 머리에 꽂힌 저 붉은 꽃 좀 봐, 무슨 열대 섬 사는 아씨 같은 할머니 좀 봐, 그때까지 설거지 물에 담긴 양은 주발 새로운 시간처럼 씻으며, 그래 그래, 저 잎
그래 그래 그 이파리 ―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허수경
그 이파리 아가 적, 우리 보굴랑 이파리 따 삼군 밥 더머기던 할매 저방에 앉아 아가잎에 흰 밥 싸 무그며 벙그러지는 입술랑 오무리메 깔깔대메 어마시야 할매 설것방 많이나 되것네, 어쩔꼬, 그녘 그 잎 아가여서 할매 아그머치한 손뚝심으로 뚝 뚝 건기는 거슬,
그 이파리 커당게 자라 그늘 맹글고 그늘 비님 그브며 수박 오이 등거는 거 들을 때꺼지 기다리제, 하며 할매 떠오는 설것당물 오랜 시월 씨그듯 양은 밥주발 씨그며 할매 잎 곁에 달린 꽃 머리에 접히며 벙그럽세 웃는 거 볼 새 그래, 그래 저 이파리 무덩허덩허정해져
산메 더푸고 그 산메 잎그늘 메에 처처한 따의 수지븐 데 열어 버섯제기 도다오르메 그녘 또 할매 지어데 주는 버섯제기밥 먹자야 좋것네, 그 잎 아가 적 만나 무덩허덩해져 산메그늘 될 녘까지 어깨 두다가 그래 그래 할매 머리 녘 접한 저 불근 꽃 녘 좀 볼거나 어디 열대 섬 사는 아그 같은 할매 좀 보아, 그때꺼지 설것방 물 담긴 양은 주발 신상신시처럼 씨그며 그래 그래 저 이파리
그러나 어느 날 날아가는 나무도
허수경
뿌리를 뽑고 날아가는 나무도
공중에서 자라나는 뿌리마저
제 손으로 자르며 날아가는 나무도
별 달을 거쳐 수직도 수평도 아닌 채
날아가는 나무도
공중에 집을 이루고
또 금방,
집 아닌 줄 알고 날아가리라
그렇게 웃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허수경
그렇게 웃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낯선 이들이 이곳으로 들어와서 퍼런 큰 새를 타고 다니는 동안, 아이들은 폭탄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 나귀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검은 기름이 솟아났다. 검은 기름 속에서는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사람들이 끈적거리면서 나타나 오래전에 헐린 집에 대해서 물었다. 그때마다, 그 강변이 꽃이 피었다, 붉거나 흰 꽃들이었다, 바람이 불면 꽃은 지고, 꽃 진 자리에서 열매가 돋아났다, 돋아난 열매는 우는 여자의 눈동자 모양을 하고 있다. 열매를 먹으면 갑자기 마음속에 쟁여둔 슬픔으로 가는 마음이 사라졌다, 자리러지게 웃고 싶어서 강변으로 나가서 그렇게 웃었다, 아이들의 주머니 속에서 든 폭탄이 터져 아이들이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런데 그렇게 웃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우는 여자의 눈동자 같은 열매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밤에 붉은 꽃에
허수경
그 밤에 붉은 꽃에 밤에 붉은 꽃에 눈알 뽑힌 사람들은 머리를 박네
새들은 아직 심장을 가지고 있나,
날아오르는 것들의 존재를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붉은 꽃은 피고
원숭이들은 더 이상 사람이 될 수 없나,
내 영혼은 더 이상 원숭이의 영혼을 해독하지 못하고
불길한 문서처럼 그렇게 붉은 꽃은 피고
밤에 붉은 꽃에 눈알 뽑힌 사람들은 골수까지 뽑히네
그러나, 너의 몸은 아직 따뜻한가, 내 혀는 아직 따뜻하다
그해 사라진 여자들이 있었다
허수경
그해 들판에는 꽃이 유난히도 많이 피고 꽃 진 자리에서는 잎도 무성하게 돋아나오다 잎은 오랫동안 가지에 달려 있고 그 아래에서 소들은 잘 쉬다 염소에게 말을 걸고 장난을 치던 토끼는 연둣빛 풀을 배불리 먹고 작은 토끼를 낳고 들판을 아가 토끼와 걸어다니다 여자들은 아가 토끼를 사랑하여 그 옆에서 책을 읽고 수를 놓다 가지고 온 점심 도시락을 열어 까르르거리며 맑은 장아찌를 흰 밥에 올려 먹다 그리고 그해 들판에는 해도 자주 나와서 여자들의 등을 만져주다 여자들은 해를 껴안고 깊이 잠이 들기도 하다 바람이 지나갈 때 잠깐 깨어나서 눈을 부비다 구름은 나즉하고 하늘은 깊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른 이 세상 소리가 아닌 것처럼 맑다 여자들은 다시 눈을 감으며 멀리 잠이 들다 그해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그해 들판에서 많은 짐승들이 평안할 동안 멀리 잠이 든 것처럼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글로벌 유령
허수경
아침에 커피를 마시다
커피 한잔을 마시는 데도
도덕이 필요한 세상의 책임은
글로벌이라는 이 유령이 져야
한다고 중얼거린다
누군가는 무언가를 판다 그건 나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산다 그건 나다
비는 온 바람을 데리고 오는데
잔에 든 커피는 잔잔하다
내가 샀던 비는 나를 젖게 한다
내가 샀던 너의 시간은
나를 흐느끼게 한다
웃음이나 즐거움도
살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나를 절망으로 들어가게 한다
낮섦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아
병원엘 가면 얼마나
아픈 사람이 많은지 글로벌하고
거리에 있으면 얼마나
걷는 사람이 많은지 글로벌하고
전쟁터를 가면 얼마나
전쟁 중인 사람이 많은지 글로벌하고
죽는 사람 사는 사람 그리워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 글로벌하고
저 형사는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살해된 사람을 보았을까 글로벌하게
저 쫓겨가는 노루는 오늘
얼마나 많은 사냥꾼을 보았을까 글로벌하게
글로벌 글로벌 유령이 쏘는 저 총은
얼마나 좋아,바다를 건너온 글로벌 심장이라서
적당한 도덕적인 금언이 든 가짜 문장을 쓰고
커피잔 씻으러 개수대로 가면
오늘의 태양은 기름진 하루를 데리고 오지요
글로벌 글로벌의 빛으로
코스모폴리탄적인 우주의 유령 한 마리를
수도꼭지로 실어나르지요
물이란 원래 글로벌한 것이었지요
기쁨이여
허수경
슬픔이여,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물은 적 없었던
슬픔이여
찬물에 밥 말아 먹고 온 아직 밥풀을 입가에 단
기쁨이여
이렇게 앉아서
내 앉은 곳은 달 건너 있는 여울가
내가 너를 기다린다면
너는 믿겠는가, 그러나
그런 것 따위도 물은 적이 없던
찬 여울목 같은 슬픔이여,
나 속지 않으리,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을 맞이하는데
나 주저하지 않으리
불러본다, 기쁨이여,
너 그곳에서 그렇게 오래
날 기다리고 있었는가,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나는 바라본다, 마치,
잘 차린 식사가 끝나고
웃으면서 제사를 지내는 가족 같은
기쁨이여
기억하는가 기억하는가
허수경
못에 연분홍 푸른 빛 연밥이 열린 거,
연밥 따던 아씨들이 그 못가에 있던 거
못 위를 지나가던 바람이
붉은빛이거나 누런빛이거나 하던 거
그 위를 검거나 퍼렇거나
한 입성을 걸치고 죽은 이들이 걸어 다니던 거
걸어 다니면서 연밥 따던 아씨들을 안으려다가
허연 물빛에 스려지던 거
그래서 물이 검거나 푸르거나 허옇거나 하던 거
그 물 위를 불을 인 잠자리들이 날아다니며
갈 그림자 던지곤 하던 거
기차가 들어오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11월
허수경
집시들은 아직 떠나지 않았고
텐트 바깥에 걸어 놓은 빨래가 안개에 젖는데
기차는 들어오고
다리를 다친 새는 날아가지 못한다
두 손안에 다친 새를 넣고
기차가 들어오던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11월
이 철길에 며칠 전에 아주 젊은 청년이 몸을 던졌다
아내와 딸이 있는 청년이었다
기차를 몰고 가던 사람은 마치 커다란 검은 새가 창에 부딪힌 것 같았다고 울었다
기차가 길게 지나가는 길에는 우울증에 걸린 고양이와 개, 산돼지와 청년 실업자와
창녀와 단 한 번도 해외여행을 해보지 못한 가장이 있었지
그들의 영혼이 이렇게 안개의 옷을 입고 조용히 조용히
한 번도 추어 보지 못한 춤을 추는 것 같은 11월의 오후
마지막 순간에 텅 빈 항아리를 보는 것 같은 깊고도 깊은
검은 겨울을 바라보는 것 같은 11월의 오후
집시들은 아직 머물러 있고
새는 손안에서 따뜻한데
빨래는 흐느끼며 11월의 안개,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안개의 공기 속에서는 땅에서 썩고 있는 사과 냄새가 나고
새가 파닥이는데 기차는 떠나는데
어서 집으로 가야 한다
새를 치료하러
작은 종소리가 나오는 은은한 심장을 치료하러
기차는 간다
허수경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닮아 있었구나
기차역에 서서
허수경
어쩌면 당신은 그날 기찻길에 놓여 있던 시체였는지도
어쩌면 달빛이 내려앉는 가을 어느 밤에
속으로만 붉은 입술을 벌리던 무화과였는지도
어쩌면 당신은 막 태어난 저 강아지처럼 추웠는지도
어쩌면 아직 어미의 자궁 안에 들어 있던 새끼를 꺼내어서 탕을 끓이던 손길이었는지도
지극하게 달에게 한 사발 냉수를 바치던 성전환자였는지도
어쩌면 이렇게 빗길을 달리고 달려서 고대왕궁의 무너진 성벽을 보러 가던
문화시민이었는지도 당신은
나는 먼바다 해안에 있는 젓갈 시장에 삭은 새우젓을 사러 갔던 젊은 부부였는지도
그 해안, 회를 뜨고 있던 환갑 넘은 남자의 지문 없는 손가락이었는지도
어쩌면 당신은 그날 그 여인숙이었는지도 세상 끝에는 여인숙이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멀리멀리 끝까지 갔다가 결국 절벽에서 뛰어내린 실업의 세월이었는지도
무심한 소나무였는지도 아직 흐르지 못한 음악이 살얼음처럼 끼어 있는 시간
설레며 음악의 심장을 열어 핏줄을 들여다보던 어린 별이었는지도
당신은 그랬는지도 우리가 멀리서 보이지 않는 서로의 몸을 향하여
입을 맞추려고 할 때마다 사라지는 정신이었는지도
꽃은
허수경
어찔거리는 한나절
꽃은
왜 피나 토하듯 꽃은
왜 줄을 짓지 않고 피나
여러 겹으로 앉지도
서지도 않고 엉거주춤 피나
한가운데서 피지 않고 저희들끼리
엉기듯 피고 있나 왜 변방에서만
피고 있나 꽃은
시든 풀로 꺾어진 봄날의 기침과 가래로
꽃 아닌 것처럼 피고 있나
일찍 지는 불같은 꽃
늦게 살아나 지천으로 불타는 꽃
나비야 날지 말고 걸어서 오렴
꽃핀 나무 아래
허수경
한때 연분홍의 시절
시절을 기억하는 고약함이여
저 나무 아래 내 마음을 기댄다네
마음을 다 놓고 갔던 길은 일테면
길이 아니고 꿈이었을 터 아련함으로 연명해온
생애는 쓰리더라
나는 비애로 가는 차 그러나 나아감을 믿는 바퀴
살아온 길이 일테면 자궁 하나
어느 범벅한 무덤 하나 찾는 거라면
이게 꿈 아닌가,
더러 돌아오겠다 했네 어느 해 질 녘엔
언덕에도 올라가고 야산에도 가고
눈 쓰린 햇살 마지막 햇살의 가시에 찔려
그게 날 피 흘리게 했겠는가
다만 쓰리게 했을 뿐
했을 뿐, 그러나 한때 연분홍의 시절
꿈 아닌 길로 가리라 했던 시절
나는 춤추는 중
허수경
기쁨은 흐릿하게 오고
슬픔은 명랑하게 온다
바람의 혀가 투명한 빛 속에
산다, 산다, 산다, 할 때
나 혼자 노는 날
나의 머리칼과 숨이
온 담장을 허물면서 세계에 다가왔다
나는 춤추는 중
얼굴을 어느 낯선 들판의 어깨에 기대고
낯선 별에 유괴당한 것처럼
나를 당신 것이라
허수경
나를 당신 것이라 부르지 말아요
술국을 푸던 손이 내 탯줄을 끊었죠
낯선 남자 살을 헤비던 손이
나의 배내피를 딱았어요
어제 죽은 이도 마시던 물
저자 뒤란 개철쭉 흐드러진 우물이
난생처음 저의 비린 몸을
헹구었어요
처음 울 때부터
저잣거리 술 쩔어
속은 데 많은 바람 시퍼런 손아귀가
온몸 핏줄 바람살 드난살이
골을 새겼죠
저문 산길 채이는 밤서리 밟으며
저자 천덕꾸러기 재실이가
내 탯줄을 묻었는데요
내 탯줄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여도가 꽃종이 접던
도가꾼 오줌 기운에
썩고
또 썩어 있지요
나비 그늘 라디오
허수경
햇살 속 흰 나비는 날개를 펼쳤다
날개의 어진 그늘은 검었다
마주 선 두 사람
마음 물결 사이로 펼럭이는 넝마 두 장
한 장의 넝마는 죽을 만큼 나비를 내쳤다
다른 한 장의 넝마는 내쳐진 나비를 안고 갔다
넝마 같은 세월을 햇빛에 말리며
라디오 속 노래들이 기절한다면
난 무얼 할까
바짝 마른 빨래 없는 계절이 지나가는데
울었던 흔적을 지워줄 내일은 없는데
나는 무얼 할까
바람은 꽃술을 안고
아둔하게 허공에서 자부라지는데
저 꽃술에 묻어온 빛의 손을 기어이
주먹으로 만들며 어둠 속으로 활보하는 라디오
안녕하세요, 오늘 전해드릴 곡은 내 우산, 입니다 사연은 이십 년 전 헤어진 연인이 폐암을 앓으면서 쓴 편지네요, 사랑은 이렇게 한 도시를, 물바다로 만듭니다 을숙아, 미안하다, 너 사랑해서
이런 천년의 고독을 쓴 마르케스 씨가 언젠가 천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날개 없는 나비들이 이 천년의 연못에 아주 붉은 그림자를 던질 즈음,
목포산 주꾸미, 고추장 양념을 넣고요 한 숨 끓어오르면 돌미나리를 넣고 향이 달아나지 않게 잽싸게 볶으세요, 아침의 셰프인 태양이 보내온 레시피입니다
서울 25도, 북풍이 분다고 일기예보는 말하네요 북방한계선에는 아무 일 없습니다 아이들은 북이나 남이나 죽어갑니다 내일은 오늘처럼 불명확한 바람이 부니 주의하세요!
빛을 돼지 떼처럼 몰면서
해는 천천히 어떤 날로 가는구나
펄럭이는 넝마 두 장은
누런 배로 접혀서
푸름이 기도하는 밤으로 가네
이별 없이
나비그늘마저 없이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허수경
잘 있니?
환각의 리사이클장에서 폐기되던 전생과 이생의 우리
그리고 미래의 오염된 희망으로 살아가다가 결국 낙엽이 된 우리
우리는 함께 철새들을 보냈네
죽음 어린 날개로 대륙을 횡단하던 여행자
먼 곳으로 떠나가는 모든 것들에게 입맞춤을 하면
우리의 낡은 몸에는 총살당한 입김만이 어렸네
잘 있니?
우리는 낙과들이 곪아가던 가을 풀밭에서
뭉그러지는 육체 속으로 기어들어가
술 취하던 바람을 들었네
먼 시간 속에 시커멓게 앉아 있는 아버지
살해당한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이들을
고요하게 매장했던 바다의 안개 소리도 들었네
총소리였니?
아니, 돌고래가 새벽의 태양을 바라보며 출산과 죽음을 준비하던 순간이었니?
잘 있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
춥겠다 덥겠다 아프겠다 배고프겠다
그들은 없는 이들 보이지 않는 자연의 천사
나뭇잎이 떨어진다
눈썹 없이 의지 없이 기억 없이
사각의 틀에 갇혀버린 옆 마을의 나치 할아버지, 두줄무늬 늙은 나비, 지던 페르시아 퀸 장미, 위대한 가을의 국화, 휠체어에 앉아 있던 아이패드 5의 햇살 욕설, 오던 구급차와 가던 장의차, 토해놓은 사랑과 죽음으로도 돌이킬 수 없던 나날들, 고양이가 마시던 오후의 커피, 고요히 돌아와 창백한 별의 심장을 안아주던 어둠조차 시각의 관 속에 든 정물화가 되어가던 시간을 함께 보내던 나의 헌 창문
잘 있니?
환각의 리사이클장에서
영원히 폐기될 우리 사각의 영혼
밤거리를 걷다가 모르는 이들에게 얻어맞고도
울지 못해서 사각의 틀에서 튕겨져 나온 우리 영혼
산산이 부서진 영원의 사금파리 그 곤충의 눈
잘 있니?
나의 고아들은
허수경
고아들이 몰려 있는 해변
목련꽃불을 인 봄이 해변에 도착하면
나의 고아들은 따스한 물이불을 덮고 잠이 들 것이다
나의 저녁
허수경
스며든다, 당신, 이 저녁 창에 앉아 길을 보는 나에게, 먼 햇살, 가까운 햇살, 당신의 온 생애를 다하여, 지금, 나에게 스며든다, 그리움과의 거친 전쟁을 멈추고 스며드는 당신에게 나 또한, 스며든다. 스며드는가, 다 저녁때, 나의 생애가 당신에게 스며드는가, 어느 절명의 그리움, 그리움 속에나, 순하게 깃들어, 어느 스러지는 저녁에 태어나는 아가들, 그 착한 울음 가득하다, 내 저녁
난 존재를 안고 있는 허당이었어요
허수경
너는 중얼거렸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차 소리가 났다 잎새들이 바깥에서 지고 있었다
너는 중얼거렸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난 존재를 안고 있는 허당이었어요
단 한 번도 뿌리와 소통을 해보지 않은 나뭇잎
울 수도 없었다 울기에는 너무 낡은 정열이었다
뿌리에서 떠나 다시 뿌리를 덮어주는 나뭇잎
웃을 수도 없었다 웃기에는 너무 오랜 정열이었다
남강 시편
허수경
1
내가 나이를 먹고 또 먹고 진 날 마른 날
나이를 곱절씩 먹어도 나는 계집애이고
뒷산 벌거숭이 고향산은 내 동무일뿐
세상은 꿈이 아니고 세상은 뻘밭 구덩이
임을 진즉 알았어야 할 터이지만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니도다
나는 계집애일뿐
뒷산은 어릴 때 만물또랑에 빠져 죽은 내 동무일 뿐
계해년 물난리에 집도 절도 다 떠나보낸
진주의 오래되지 않은 날 뒷산일 뿐
2
눈물 저편에 해맑게 떠오르는
새벽달을 산마다 잉태하고
우리네 산천만 목이 쉬도록 푸르던가
물소리는 공동묘지를 낮게 흐르다 돌아와
구정가리로 마른 목젖 적시는가
싸움 많아 고된 땅들아
살아 있음으로만 증거할 줄 알아
3
사내들의 영광은 아낙들의 눈물
영광은 자궁 속에 깊이 감추어 두고
늦은 빨래를 하러 나옵니다
물살에 내맡긴 사내들의 빨래에는
땀자욱 핏자욱 황토훍도 쩔어 있고
북만주 흩날리는 아득한 눈발
원망과 갈망과 목놓아 소리하던
꿈도 묻어 나오지만
눈부시게 헹구고 나면
오직 그리운 눈매 유순한 눈매
이 눈매를 가지고 사내들은 칵잽이 되고
글쟁이도 되어 외진 곳에 갇히기도 하고
살아 욕됨을 뼈속에 묻어
죽어 영광되기도 하지만
심줄 굵은 아낙들의 팔목에는
개화 이후 이 나라 온갖 수난사가
강물 탯줄 실려 흘러가고 있을 뿐입니다
참아 더 이상 못 참는 날에도
소리 죽여 흐느끼며 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 눈물 속에
개화기 이후 이 나라 굵은 산맥들이
아늑하게 깃을 치며 살아갑니다
4
땡감나무에 땡감 열리고
유자 가지에 못생긴 유자알이
한 입 그득 제 몸내 감추지 못하는
조선땅엔 대물림 되지 않는 것 없으이
할배가 나랏님 덕에 살지 않았고
아비는 나으리 믿고 일하지 않았듯
배운 자식 독감방에서 단식깨나 하는
이 천지 대물림 내력이사 연원이 깊제
아비야, 내일 쑥떡 좀 해라 그놈 속이 허하면
싸우지도 못한다.
참 아버지도, 손주 닮아가나 싸움은 뭔 싸움.
떡봇짐 하나 쥐고 늙은 부자가
강을 건너면
어려운 굽이 휘돌아 넘어가던 물결 속엔
토실한 햇살이 몸을 섞고 있어
이것도 내력이제
힘들수록 팽팽하게 당겨지는
맑은 강의 정수리여
살아온 사람의 내력이 되는 거제
5
보소 어매 이제는 가야 할랑갑다
야야 내는 못가것다 내 가면
나락 아침가리 뉘가 하고 남새밭
지랑풀은 어느 손이 뽑노
니 애비 무덤은 누가 돌보고
초가 노래기는 뉘 쓸랑고
반타작 보상금 괴춤에 지니고 낡은 전대에 곡식씨앗 챙기고
근대화에 밀려 윗대 어른 누운 터도 건사 못한 죄인들이 새벽참 저분대며 쑥대머리 길갈이 하고 난 뒤
귀곡동은 잠기고 남강댐이 솟아올랐습니다
남강 들머리는 사백 육십 리라지요
죄인들은 천리길을 걸어 어느 도시 변두리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남해 섬에서 여러 날 밤
허수경
육지의 불빛이 꺼져가는 아궁이 쑥냄새 같은 저녁이었고 모래 구멍엔 낙지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수만의 다리로 머리를 감추고 또한 머리와 다리가 무슨 兩性처럼 엉기면서 먼 저녁의 구멍을 지탱하고 있었는데요 그 구멍마다 저 또한 어둠이겠지만 엉겨붙어 살아 남는 것들이여 멀리 무덤 같은 인가에도 엉겨붙는 저녁과 밤과 새벽이 있을 거구요 이리 어둑하게 서 있는 나는 저 미역 저 파래 저 엉겨붙는 그리움으로 육지를 내치고 싶었습니다 진저리치는 저 파도 저 바위 저 굴딱지처럼 엉겨붙어 엉겨붙어,
낯익은 당신
허수경
빛인가, 당신, 저 손등 아래 지는 당신, 봄빛인가
당신, 그래, 한 상징이었을지도 모를 당신, 뭉큰, 손에 잡히는 600그램 돼지고기 같은, 시간, 저 육빛인 당신, 혹, 당신은 빛 아닌, 물인가, 저 발 아래 일렁이는 당신, 물 냄샌가 당신, 그래, 한 기호였는지도 모를 당신, 덜컹, 발에 잡히는 영상 25도 물 온도 같은,
시간, 저 온탕한 당신, 혹 당신은 물 아닌 흙인가, 저 땅 아래 싫은 끓고 있는 바위 같은 당신, 아직 형태를 결정하지 못한, 망설이는, 바위인가, 사방 100킬로 용암의 얼굴 같은, 저 낯익은 당신
내 속으로
허수경
불망천지 아득한
벼랑
천지간에
문 열리는 소리
오 내 몸 속의
나여
거름 밭 햇살
붉은 연기요
내 손을 잡아줄래요?
허수경
어느 날 보았습니다
먼 나라의 실험실에서 생의학자가 내가 가진 인간에 대한 기억을 쥐가 가진 쥐의 기억 안에 집어넣는 것을
나와 쥐는 이제 기억의 공동체입니다 하긴 쥐와 나는 같은 별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사랑을 할 때 어떤 손금으로 상대방을 안는지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지요 쥐의 당신과 나의 당신은 어쩌면 같은 물음을 우리에게 던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그냥 아무 말 없이 잡아주시면 됩니다
쥐의 당신이 언젠가 떠났다가 불쑥 돌아와서는 먼대륙에서 거대한 목재처럼 번식하는 고사리에 대해서 말을 할 때
나의 당신은 시간이 사라져버린 그리고 재즈의 흐느낌만 남은 박물관에 대해서 말할지도 모릅니다
쥐의 당신이 이제 아무도 부르지 않는 유행가를 부르며 가을 강가를 서성일 때
나의 당신은 이 계절, 어떤 독약을 먹으며 시간을 완성할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푸른 별에는 당신의 눈동자를 가지 누지가 산다고 나는 말했지요, 당신, 나와 쥐의 공동체를, 신화는 실험실에서 완성되는 이 불우한 사정을 말할 때
내 손을 잡아줄래요?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내가 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그 막연함도 들어보실래요?
이건 불행이라고, 중얼거리면
모든 음악이 전쟁의 손으로 우리를 안아주는 그런 슬픈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사랑이라고, 중얼거리면
모든 음악이 검은빛으로 변하는 그런 처첨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다만 손을 잡아달라는 간절한 몸의 부탁일 뿐입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내 기억을 가진 쥐가 당신에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허수경
아이들은 장갑차를 타고 국경을 지나 천막 수용소로 들어가고
할미는 손자의 손을 잡고 노천 화장실로 들어간다
할미의 엉덩이를 빛은 어루만진다 죽은 아들을 낳을 때처럼
할미는 몽롱해지고 손자는 문 바깥에 서 있다 빛 너머로
바람이 일어난다
늙은 가수는 자선공연을 열고 무대에서 하모니카를 부른다
둥근 나귀의 눈망을 같은 아이의 영혼은
하모니카 위로 날아다닌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빛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아이의 영혼에 엉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기다리는 영혼처럼 허덩거리며 하모니카의
빠각이는 이빨에 실핏줄을 끼워넣는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장갑차에 아이들의 썩어가는 시체를
싣고 가는 군인의 나날에도 춤을 춘다 그러니까 내 영혼은
내 것이고 아이의 것이고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너무 일찍 온 저녁
허수경
누군가 이 시간에 자리를 내주고 떠났다
아무도 세속의 옷을 갈아입지 못한 시간
태양은 한 알 사과가 된다
사과와 사과
뉘우치지 못해 어떤 이는 깊게 울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검은 물ㅇ르 길어 창문을 넘어오기 전
누군가는 태양을 과도로 깎았다
태양 한 조각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방 안에 같이 사는 거미에게
태양 한 조각 거미줄에 걸어주며
점점 컴컴해지는 내장을 태양 조각으로 밝히고 있다
내장의 구멍은 후세로 난 길
안이 밝아지고 바깥이 어두어질 때
태양을 대신할 천체의 둥근 공들은
태양 한 점씩 먹고 거미줄에 걸려 환하다
그 저녁, 너무 빨리 와서
나를 집어먹은 짐승은 나다.
태양의 마지막 조각을 구멍 뚫린 하늘에 올렸네
젖은 내장도 어둠 속에 걸어두었네
그렇게 한 저녁은 모래뻘 속 바지락처럼 오고
바지락껍데리를 뭉개고 가는
트럭의 둥근 바퀴 밑 어둠 속
쓰게 쓰게 그렇게
조개들은 먼 무덤을 부르다가 잠든다
너, 없이 희망과 함께
허수경
너는 왔고 이 세기의 어느 비닐영혼인 나는 말한다, 빌딩 유리 벽면은 낮이면 소금사막처럼 희고 밤이면 소금이 든 입처럼 침묵했다 심장의 지도로 위장한 스카이라인 위로 식욕을 잃어버린 바람은 날아갔다
너는 왔고 이 세기의 모든 비닐영혼은 말한다, 너, 없이 나는 찻집에 앉아 일금 삼 유로 이십 센트의 희망 한 잔을 마셨다, 구겨진 비닐영혼은 나부꼈다, 축축한 반쯤의 태양 속으로
너는 왔는데도 없구나, 새롭고도 낡은 세계 속으로 나는 이미 잃어버린 것을 다시 잃었고 아버지의 기일에 돋는 태양은 너무나 무서웠다
너는 왔고 이 세기의 비닐영혼은 말한다, 네 손에서는 손금이 비처럼 내렸지 네가 왔을 때 왜 나는 그때 주먹을 쥐지 않았을까, 손가락 관절 마디마다 돋아드는 그림자로 저 완강한 손금비를 후려치지 않았을까
너는 왔고 이 세기의 생존한 비닐영혼은 손금에서 내리는 비를 피하려 우산을 편다 너, 없이 희망이여 몇 백 년 동안 되풀이된 항의였던 희망이여 비닐영혼은 억울하다,
너, 없이 희망과 함께
너의 눈 속에 나는 있다
허수경
나는 그렇게 있다 너의 눈 속에
꽃이여, 네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너를 바라보던 내 눈 속에
너는 있다
다람쥐여, 연인이여 네가 바삐 겨울 양식을 위하여 도심의 찻길을 건너다 차에 치일 때
바라보던 내 눈 안에 경악하던 내 눈 안에
너는 있다
저녁 퇴근길 밀려오던 차 안에서 고래고래 혼자 고함을 치던 너의 입안에서
피던 꽃들이 고개를 낮추고 죽어갈 때
고속도로를 달려가다 달려가다 싣고 가던
얼어붙은 명태들을 다 쏟아내고 나자빠져 있던 대형 화물차의
하늘로 향한 바퀴 속에 명태의 눈 안에
나는 있다
나는 그렇게 있다 미친 듯 타들어가던 도시 주변의 산림 속에
오래된 과거의 마을을 살아가던 내일이면 도살될 돼지의 검은 털 속에
바다를 건너오던 열대과일과 바다 저편에 아직도 푸르고도 너른 잎을 가진
과일의 어미들 그 흔들거리던 혈관 속에
나는 있다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리며 뻘게를 찾는 바닷가
작은 남자와 그 아이들의 눈 속에 나는 있다 해마다
오는 해일과 홍수 속에 뻘밭과 파괴 속에
검은 물소가 건너가는 수렁 속에
과거에도 내 눈은 그곳에 있었고
과거에도 너의 눈은 내 눈 속에 있어서
우리의 여관인 자연은 우리들의 눈으로
땅 밑에 물 밑에 어두운 등불을 켜두었다
컴컴한 곳에서 아주 작은 빛이 나올 때
너의 눈빛 그 속에 나는 있다
미약한 약속의 생이었다
실핏줄처럼 가는 약속의 등불이었다
네 말 속
허수경
네 말 속에 배반이 있었다
네 말 속에 집이 곰팡이가 기어오르는 벽이
그 벽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네 말 속에 방이 있었다
방 속에는 대포가 총이 있었다
만년설을 지나가던 하늘이
총구 속에 파랗게 질려 있었다
면도칼을 들어 네 말을 잘근잘근 자르는
네 말도 있었다
네 말 속에 네 말 속에
현관에서 울고 있는 내 목도리가 있었다
네 말은 내 신발 속에서 잘려가며 젖는다
네 말 속에는 박히지 못하는 못이 철넝쿨이 되어
내 입을 점령하고 있었다
네 잠의 눈썹
허수경
네 얼굴
아릿하네, 미안하다
네 얼굴의 눈썹은 밀물과 썰물 무늬,
하릴없이 달은 몸자국을 안았구나
달눈썹에 얽힌 거미는
어스름한 잎맥을 그냥, 세월이라고 했다
어설픈 연인아
얼마나 오랫동안 이 달, 이 어린 비, 이 어린 밤 동안
어제의 흉터 같은 당신은 이불을 폈는지
어미별의 손은 너를 배웅했다
그 저녁, 울던 태양은 깊었네
그 마음에 맺힌 한 모금 속
한 사람의 꽃흉터에 비추어진 편지는
오래된 잠의눈썹
시작 없어 끝없던 다정한 사람아
네가 나에게는 울 일이었나 나는 물었다
아니, 라고 그대 눈썹이 떨렸다
네 눈썹의 사람아,
아어릿하네, 미안하다
농담 한 송이
허수경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럽고 싶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눈
허수경
얼마나 오래
이 안을 걸어 다녀야
이 흰빛의 마라톤을 무심히 지켜보아야
나는 없어지고
시인은 탄생하는가
늙은 가수 - "뽕짝의 꿈"
허수경
나 오래 전 병아리를 키웠다네
이 놈이 닭이 되면 내버리려고
다 되면 버리는 재미
그게 바로 남창 아닌가,
아무데서나 무너져내리는 거
반짝이는 거
반짝이면서 슬픈 거
현 없이도 우는 거
인생을 너무 일찍 누설하여 시시쿠나
그게 바로 창녀 아닌가,
제 갈 길 너무 빤해 우는 거
닭은 왜 키우나 내버리려고
꽃은 피면 왜 다리를 벌리나 꽃에겐 씨앗의
꿈이란 없다네 아름다움에
뭐, 꿈이 있을 턱이
돌아오고 싶니? 내 노래야
내 목젖이 꽃잎 열 듯 발개지던 그 시절
노래야, 시간 있니? 다시 돌아올 시간,
나 어느 모퉁이에서 운다네
나 버려진 거 같아 나한테마저도......
내일의 노래란 있는 것인가
정처없이 물으며 나 운다네
늙은 들 개 같은 외투를 입고
허수경
자전하는 지구에서 태어난 나,
비행기를 타고 가서 당신을 만난다
하늘에서 어느 순간 사라질 수도 있는 나,
아무도 기록하지 않을 나,
그러나 영혼을 믿는 나,
기억들이 섬광처럼 사라지는 것을
늑대 같은 외투를 입고 내영혼은
멍하게 지켜보리라
다음의 메모가 쓰인 때
허수경
오후였다
햇살 속의 나비였다
두 장의 작은 손수건
두 장의 백지
마주선 두 사람의 마음
골목 속 펄럭이는 두 장의 넝마
누군가 죽을 만큼
저 흰빛의 나비를 내쳤더라면
그때 오후는
나비에게서 벗어나서
해의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흰빛은 바닥으로 구겨짐
해가 막 낳은 비린
어둔 시간을
안아주지 않았을까
어둠 속으로 몰락하는 푸름은
차가운 잠으로 들어와
두 장의 펄렁이는
꿈이 되지 않았을까
빛을 돼지떼처럼 몰면서
해는 천천히 내일로 오지 않을까
이별 없이
이별마저 없이
단칸방
허수경
신혼이라 첫날밤에도
내줄 방이 없어
어머니는 모른 척 밤마실을 가고
붉은 살집 아들과 속살 고분 며느리가
살 쉬다 살 섞다
굽이굽이야 눈물 거느릴 때
한 짐 무거운 짐
벗은 듯 하냥 없다는 듯
어머니는 밤별무리 속을 걸어
신혼부부 꿈길
알토란 같은 손자 되어 돌아올거나
곱다란 회장 저고리 손녀 되어
풀각시 꽃각시 매끄러진 댕기 달고
신혼 며느리보다
살갑게 돌아올거나
달빛
허수경
부르는 소리로 저리도 청량하게 흐를 수 있는 세상은
두렵습니다 아름다워진 것이 겁나고 오밀조밀하게 색칠
한 것이 화정독 오른 계집 아침 분세수 세모시 옷깃 새
로 페니실린 냄새가 납니다
물결같이 이를 악물고 바스라지기도 하지만 아래에
서면 빛나고 싶어 두려워집니다
희끗희끗 칼금 그으며 지나는 바람이 나뭇잎 수척한
얼굴에 계절 굽이지는 길을 만들고 그 길 위에 내려앉아
우수수 몸을 떨지만 거미줄은 은빛으로 빛나도 나비는
거미에게 먹히고 불러세워 뒤돌아보아도 나는
몇 광년 후에야 보는 별빛으로 먼데요
달이 걸어오는 밤
허수경
저 달이 걸어오는 밤이 있다
달은 아스피린 같다
꿀꺽 삼키면 속이 다 환해질 것 같다
내 속이 전구 알이 달린
크리스마스 무렵의 전나무같이 환해지고
그 전나무 밑에는
암소 한 마리
나는 암소를 이끌고 해변으로 간다
그 해변에 전구를 단 전나무처럼 앉아
다시 달을 바라보면
오 오, 달은 내 속에 든 통증을 다 삼키고
저 혼자 붉어져 있는데. 통증도 없이 살수는 없잖아,
다시 그 달을 꿀꺽 삼키면
암소는 달과 함께 내 속으로 들어간다
온 세상을 다 먹일 젖을 생산할 것처럼
통증이 오고 통증은 빛 같다 그 빛은 아스피린 가루 같다
이렇게 기쁜 적이 없었다
대구 저녁국
허수경
대구를 덤벙덤벙 썰어 끓이는 저녁이면 움파 조곤조곤
무 승덩숭덩
붉은 고춧가루 마늘이 국에서 노닥거리는 저녁이면
어디 먼데 가고 싶었다
먼 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벚나무 가지에 쪼그리고 앉아
국 냄새 감나무 가지에 오그리고 앉아
그 먼데 대구국 끓는 저녁
마흔 살 넘은 계집아이 하나
저녁 무렵 도닥도닥 밥한다
그 흔한 영혼이라는 거 멀리도 길을 걸어 타박타박
나비도 달도 나무도 다 마다하고 걸어오는 이 저녁이
대구국 끓는 저녁인 셈인데
어디 또 먼 데 가고 싶었다
먼 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없는 벚나무 가지에 눈님 들고
국 냄새 가신 감나무 가지에 어둔님 자물고
도시의 등불
허수경
헤이, 아가씨, 오늘 나랑 같이 갈까
고향 오래비처럼 안아줄게 꽃 한 송이
사줄까 밥 한끼 먹여줄까 겁내지 마
그리고 제발 울지 마
기차가 지나가는 어디쯤 방을 잡을까
이틀쯤 잠잘 곳이었음......
살 속에 환한 배추꽃 무꽃 이대로
아편같이 시름 없이 아편같이 꿈 없이
아흐,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아가씨, 돌곱창이라도 구울까
내 손수건이라도 줄까
손수건은 너무 더러워, 아흐 어쩌다가
아가씨 울지 마, 고향 오래비처럼 안아줄게
볼에 따스한 입술을 대어줄게 그 브래지어 끈 좀
안으로 집어넣어 그 슈미즈도 치마 속으로 넣고
날 울리지 마 제발, 철새 같은 이놈의 경부선 같은 날 울리지 마
제발 다리를 오므리고 울어 오줌 눌래?
자 이리 와 여기쯤 와서 내가 지켜줄게
그러고 어디 기차가 지나는 곳쯤 방을 잡고 나는 너를
재우고, 고향 오래비처럼 오줌을 누고 싶어
오줌 줄기의 포물선, 포물선의 고요함, 그리고
쓰러져 잠 속의 시름
눈꼬리에 눈물을 담고 고요함 속에 잠겨
뿌리로 돌아가는 이 고요함 히힛, 고향의
누이처럼 코를 고는 너 곁에서
독일 남쪽 마을에서 쓰는 꿈
허수경
포도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언덕을 넘어가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태양이 저 너머로 무한의 순간을 내미는 7월의 저녁이었다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
그리고 말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아, 말의 귀에는 여름 들판의 늦은 야생 양귀비꽃이 꽂혀 있었다
말 위에 앉아 있는 사춘기에 막 접어든 소녀에게 길을 물었다
여기, 저 검은 숲으로 둘러싼 마을이 있다는데요. 어디인지요?
소녀는 양귀비꽃이 꽂혀 있는 말의 귀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오래전에 사라진 마을이에요
마을 학교도 교회도 시청도 시민회관도 여관도 도서관도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마을이에요
숲도 사라졌고요
소녀와 말이 사라지는데 태양이 거느리던 새 떼가
붉은 바람을 몰고 날아올랐다
포도나무 사이로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번엔 노인에게 물었다
양귀비꽃을 꽂은 말과 소녀를 아세요?
노인은 포도가지를 자르는 전지가위를 손에 들고 있었다
아, 그 아이가 땅으로 들어간 건 아주 오래된 일이랍니다
말에 밟혀 죽었지요
그럼, 검은 숲으로 둘러 있다는 마을은요?
아, 내가 사는 마을입니다. 그 마을 여관에다 미리 예약을 해둔 분이지요?
제가 그 여관 주인입니다
양귀비꽃을 단 말, 이라는 이름을 가진
베란다가 거의 포도넝쿨에 덮힌 여관에서 잠을 잤다
누가 우는지 밤은 길고도 습했고 깨어나니
방에도 포도넝쿨이 들어차서 나갈 수가 없었다
돌이킬 수 없었다
허수경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치욕스럽다, 할 것 까지는 아니었으나
쉽게 잊힐 일도 아니었다
흐느끼면서
혼자 떠나 버린 나의 가방은
돌아오지 않았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머리칼은 젖어서
감기가 든 영혼은 자주 콜록거렸다
누런 아이를 손마디에 달고 흔들거리던 은행나무가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첼로의 아픈 손가락을 쓸어주던 바람이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무대 뒤편에서 조용히 의상을 갈아입던 중년 가수가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누구 때문도 아니었다
말 못 할 일이었으므로
고개를 흔들며 그들을 보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터미널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가방을 기다렸다
술냄새가 나는 오래된 날씨를 누군가
매일매일 택배로 보내왔다
마침내 터미널에서
불가능과 비슷한 온도를 가진
우동 국물을 넘겼다
가방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 예감은 참, 무참히 돌이킬 수 없었다
동백 여관
허수경
눈이 왔다
울음 귀신이
동백처럼 붉은 전화를
길게 걸어왔다
절(寺)은
눈처럼 흩날렸고
산은
눈처럼 흐느꼈고
아무도 잠들지 못하던 방은
눈처럼 떠나갔다
동천으로
허수경
그 꿈에서 깨어날 수 없네 낯선 기차에서 내리듯 그 꿈에서 내려올 수 없네 내가 내린다면 넌 혼자 그곳에 있을 것이므로
고름진 달과 허더벙한 갈빛이 일렁이는 꿈, 누군가 도시 해변에 앉아 둔벙살이 돋은 발뒤꿈치를 씻는 꿈
어제 막 태어난 별빛이 사금파리에 찔리는 꿈, 동천으로 동천으로 안개가 자망자망 걸어가는 꿈
둥글레꽃
허수경
우리 동네 이 서방네 소가 한 마리 살았는데예
그놈에 볼기짝은 칠팔월 신작로 애기똥 말라붙듯 비썩치만
눈 하나는 둥글레꽃 모양 벙그러졌지예
이 서방네 거덜난 살림
그놈 하나가 벙구굿 메장고인지라
아껴 일 데려가도 팍팍한 뒤평밭 쟁이다보모
둥글레꽃 눈에 백태 끼이기 예사였지예
미안타 미안타 내 속에 젖 담기가 백 번 낫제
니놈 눈에 백태 끼이는 거
못 보것다 못 보것다
느티나무 쉴참에 기대 쇠파리 쫓다
털 헐 헐 빠져나간 꼬랑지 곳추세우며
으음메 긴 소리 한마디 할 즈음엔
그놈 언저리에 순하디 순한 둥글레꽃이
바람이란 바람 다 뭉게며
몸내를 피워대는데
와 그리 눈물바람으로 나자빠질꼬
이서방아
딸기
허수경
당신이 나에게 왔을 때 그때는 딸기의 계절
딸기들을 훔친 환한 봄빛 속에 든 잠이
익어갈 때 당신은 왔네
미안해요, 기다린 제 기척이 너무 시끄러웠지요?
제가 너무 살아 있는 척 했지요?
이 봄, 핀 꽃이 너무나 오랫동안
당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어요
우리 아주 오래전부터
미끄러운 나비의 날개짓에 익어가던 딸기처럼 살았지요
아주 영영 익어버린 봄빛처럼 살았지요
당신이 나에게로 왔을 때
시고도 달콤한 딸기의 계절
바람이 지나가다가 붉은 그늘에 앉아 잠시 쉬던 시절
손 좀 내밀어
저 좀 받아주세요
푸른 잎 사이에서 땅으로 기어가며 익던 열매 같은
시간처럼 받아주세요
당신이 왔네
가방을 내려놓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네
저 수건, 태양이 짠 목화의 숨
작은 수건에 딸기물이 들 만한 저녁 하늘처럼
웃으며 당신이 딸기의 수줍은 방으로 들어와
불그스레해지네 저 날숨만 한 마음속에 지던
붉은 발걸음 하나
미안해, 이렇게 오라고 해서요
미안해, 제가 좀 늦었어요
한 소쿠리 가득한 딸기 속에 든
붉은 비운을 뒤적이는 빛의 손가락 같은 간지러움
당신이 오는 계절,
딸기들은 당신의 품에 얼굴을 묻고
영영 오지 않을 꿈의 입구를 그리워하는 계절
땡볕
허수경
소나무는 제 사투리로 말하고
콩밭 콩꽃 제 사투리로 흔드는 대궁이
김 매는 울 엄니 무슨 사투리로 일하나
김 매는 울 올케 사투리로 몸을 터는 흙덩이
울 엄니 지고 가는 소쿠리에
출렁출렁 사투리 넌출
울 올케 사투리 정갈함이란
갈천 조약돌 이빨 같아야
라일락
허수경
라일락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
공중에서는 향기의 나비들이 와서
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처럼 웃네
라일락, 웃다가 지네
나의 라일락
레몬
허수경
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
당신이 있던 그 봄 가을 겨울,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우리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내 이마를 짓이겼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잠을 포옹하지 못했다 다만 더운 김을 뿜으며 비가 지나가고 천둥도 가끔 와서 냇물은 사랑니 나던 청춘처럼 앓았다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을 점심 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
불우해도 우리의 식사는 언제나 가득했다 예언은 개나 물어가라지,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큼 아름다웠다
레몬이 태양 아래 푸르른 잎 사이에서 익어가던 여름은 아주 짧았다 나는 당신의 연인이 아니다, 생각하던 무참한 때였다, 짧았다, 는 내 진술은 순간의 의심에 불과했다 길어서 우리는 충분히 울었다
마음속을 걸어가던 달이었을까, 구름 속에 마음을 다 내주던 새의 한 철을 보내던 달이었을가, 대답하지 않는 달은더 빛난다 즐겁다
숨죽인 밤구름 바깥으로 상쾌한 달빛이 나들이를 나온다 그 빛은 당신이 나에게 보내는 휘파람 같다 그때면 춤추던 마을 아가씨들이 얼굴을 멈추고 레몬의 아린 살을 입안에서 굴리며 잠잘 방으로 들어온다
저 여름이 손바닥처럼 구겨지며 몰락해갈 때 아, 당신의 먼 풀의 영혼처럼 보인다 빛의 휘파람이 내 눈썹을 스쳐서 나는 아리다 이제 의심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의 어깨가 나에게 기대오는 밤이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세상을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 온 여름에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수줍어서 그 어깨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후회한다
지난여름 속 당신의 눈, 그 깊은 어느 모서리에서 자란 달에 레몬 냄새가 나서 내 볼은 떨린다, 레몬꽃이 바람 속에 흥얼거리던 멜로디처럼 눈물 같은 흰 빛 뒤안에서 작은 레몬 멍울이 열리던 것처럼 내 볼은 떨린다
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 당신 보고 싶다, 라는 아주 짤막한 생애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루마니아어로 욕 얻어먹는 날에
허수경
비는 오고
광장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여자 거지
루마니아에서 왔네
아침에 나와 다섯 시간 동안 구걸을 하다가
그녀는 번 돈을 들고 조직의 대장에게 간다
대장은 여자에게 돈을 받고
여자의 아들을 돌려주네
동전을 주려다 나는 멈칫하네
그녀를 감시하는 대장의 눈길이 여자의 어깨에 있어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나치에게 부모를 잃고
오스트리아를 거쳐 파리로 갔다가
마침내 파리에서 자살한 시인을
아느냐고 나는 물어볼 수가 없었네
내가 멈칫하자 여자는 나를 향해서 욕을 하기 시작하네
비는 오고
나는 여자의 욕설을 맞네
여자의 욕을 알아들을 수 없네
루마니아어로 하는 욕은 비만큼 낯설어
칠십 년 전 이 광장에서
히틀러 만세를 외치던 사람들만큼 낯설어
그 와중에 죽은 시인을 떠올리는 나도 낯설어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낯선 역사적인 존재들
비는 오고
우리는 젖고 욕도 젖고
마치 꿈꾸는 것처럼
허수경
너의 마음 곁에 나의 마음이 눕는다
만일 병가를 낼 수 있다면
인생이 아무려나 병가를 낼 수 있으려고......,
그러나 바퀴마저 그러나 너에게 나를
그러나 어리숙함이여
햇살은 술이었는가
대마잎을 말아 피던 기억이 왠지 봄햇살 속엔 있어
내 마음 곁에 누운 너의 마음도 내게 묻는다
무엇 때문에 넌 내 곁에 누웠지? 네가 좋으니까, 믿겠니?
믿다니!
내 마음아 이제 갈 때가 되었다네
마음끼리 살 섞는 방법은 없을까
조사는 쌀 구하러 저자로 내려오고 루핑집 낮잠자는 여자여
마침 봄이라서 화월지풍에 여자는 아픈데
조사야 쌀 한줌 줄 테니 내게 그 몸을 내줄라우
네 마음은 이미 떠났니?
내 마음아, 너도 진정 가는 거니?
돌아가 밥을 한솥 해놓고 솥을 허벅지에 끼고 먹고 싶다
마치 꿈처럼
잠드는 것처럼
죽는다는 것처럼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허수경
가끔 생각하지,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나는 구십이 넘어 연가 한 편을 꼭 쓸거라고
글쎄, 그 하루하루
그대와의 시간을 어떻게 나는 시로 쓸 수 있을까
눈부시게 담담하게 지워져간 그 시간
낡은 일기를 들여다보며
하루 먹어야 할 통증의 알약을 넘기며
아마도 기억나는 만큼만
잊힘에 새겨진 일렁이는 무늬만큼만
나는 쓸 수 있겠지
나를 일으켜주던 간병인은 말할지도 몰라
오늘 얼굴 환하세요 꼭 새색시, 같으세요
나는 웃으며 대답하겠지
오늘은 구십 년 동안 기다려온 연가를 쓰는 날이라오
언젠가 그대가 그대의 가난 속에 있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나에게 보여주었을 때
혹은 가난의 굴욕을 보여주며 슬몃, 짧게,
미안해요,라고 했을 때
낯선 도시 좁은 골목에서 여관에 갈 돈이 없어
껴안고 최소한만 서로를 만지고 있었던
부끄러움을 알던 연인들
그들을 안아주었던 눈
그때 그 눈, 마치 그 연인들만을 위해서 내리는 것 같다고 내가 말할 때
우리 더 불우해지지는 말자, 고 그대가 어깨를 내어주던 순간이 있었다고
계절이 지나가면서 색깔이 나에게 가르쳐줄 때
그대는 하얀빛이었다가 푸른빛이었다가 붉은빛이었다가
아니면 그 모든 색깔을 사유하던 시간의 첫머리였다고
내가 지워지면서 그대가 스며들어오고
그대가 지워지면서 내가 스며들던 그 시간동안
우리가 같이 올라갔던 산과 같이 서 있던 정거장과 먼 사원이
전쟁터였다고 아니면 별이 탄생하던 산부인과였다고
해가 지던 풍경이 우리 발을 건드려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살 수 없이 만들었다고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구십 살이 된 연가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 있을 수도 있을 거야
우리는 끌려간 시인을 위해 술을 마셨어요
우리는 굶어 죽은 소들을 떠올렸어요
감옥과 철거된 옛집 수돗물이 들어오지 않던 고지대와
전기가 끊긴 문명의 골목을 안으며
우리는 삶의 주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지 모르지만
그대가 내 옆에 있을 때
길거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이방의 건축가가 건설한 도시가 보고 싶어서
우리는 자주 그곳 날씨를 그리워했다고
그대가 내 옆에 있을 때
우리가 했던 모든 착각 그리고 착란만은
우리의 것이었다고
인간이 만든 제도 속에 살아낼 수 없었던 우리와
배가 고픈 생활인인 우리가
태양 속에서 방랑을 계속하는 중이어서
밥벌이의 골목에서 만난 시든 채소들은 아렸다고
고요하게 썩어가던 조개에서 나던 냄새는
상주 없는 제사처럼 쓸쓸했다고
늦은 밤까지 불을 밝힌 과일가게 앞에서
백 년 전에 사랑에 빠졌던 어느 시인의 시를 생각하며
우리는 장님이 되었노라고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아직 뭔가를 쓸 수 있는 구십이라는 나이가 나에게 있다면
나는 그대의 무엇을 가장 마지막까지 쓸까
어느 순간에는 영원 같은 어긋남의 빛이 있어
그림들 속에 숨겨진 웃음과 울음은 서로 안아주었다고
헐거운 노래를 허밍하며 이 정거장에서 저 정거장으로
우리는 우리의 심장을 보낸 적도 있었다고
나는 나의 늙은 안경을 벗으면서 바깥을 바라볼 거다
천천히 멈추었던 가을의 탱고가 눈이 되어 흩날리면서
내 늙은 이마에도 떨어질 때
감상적이어서
너무나 감상적이어서
오늘 적었던 연가를 내일 읽으면
얼굴은 붉어지겠지
그러니 아주 마지막 날에 이 연가를 써야겠다
쉿, 아직 봄이 오지 않았어요 깨어나지 마세요 이 세기에 한 사람
이 한 사람을 사랑할 때 사랑을 지켜주던 신은 도둑을 지켜주던 신이라는 거, 잊지마세요
아, 나는 모르겠네
구십이 되어 나는 그대가 먼저 간 길을 아주 오래 보다가
이렇게 쓸지도 몰라
저녁은 갑자기 오더니 어둠은 천천히 오시네, 라고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는데 세월은 이만큼 가서
뒤돌아보니 갑자기 저녁은 도착했고 밤은 그대의 고요한 손처럼 그렇게 천천히
오늘의 바람은 그다지 거칠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 이라는 단수가 되고 싶었으나
우리는 사람들, 이라는 복수였다고
그리고 끝내 사람, 이라는 단수 유랑자였다고
그 시간동안 나의 개, 천년이는 배가 고팠다, 그리고 나는
떠난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착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라고
맑은 전등
허수경
바다 마을
집 한 채
다리를 오므리고 실파를 다듬는 계집아이
튼 손등에 오그리고 앉은 실파 냄새
아이의 손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먼 검바다 뜬 배
닻에 붉은 오징어 다리가 감겼다
힘찬 오징어 다리
파뿌리처럼 오그리고 있다
매캐한 자욱함
허수경
팔을 잃은 남자는 마을 묘지에서 일했다
새벽 산책길에는 그가 밤에 했던 질문들이 나뭇잎처럼 뒹굴고 있었다
그 질문들을 주워서 읽었다
팔을 잃어버리고도 안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흙은 인간의 팔이 해주는 포옹을 기억하는지
삽으로 흙을 파는 건지 땅에 상처를 주는 건지
해 질 무렵 묘지에서 그 남자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나는 그 이름이 산 자의 것인지 죽은 자의 것인지 몰랐다
남자의 목소리가 거의 죽음에 임박한 짐승 소리와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다만 매캐하고 자욱했다
낙엽을 모아 태우던 시간은 불꽃을 삼키며 허기를 채우는데
나도 오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나도 몇 장의 허기처럼 뒹굴 나뭇잎들을 산책길에 떨구었다
그도 멀리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아플까
내 목소리도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그런 목소리가 되는가
그리고 그런, 이름들은 무엇이었는가
가을이었다 매캐한 것들이 눈가로 모여드는 계절이었다
가을이었다 매캐한 것들이 눈가로 모여들어 자욱해지는 계절이었다
머리에 흰 꽃을 단 여자이이들은
허수경
그날의 일기 속에는
불안 같은 흰 꽃을 단 여자아이들
너의 품을 빠져나온 오랫동안
잠을 잔 혀는
아이들의 머리에 매달린 흰꽃에
입을 맞추고 흐르는 불처럼
창밖 너머 펼쳐진 숲을 건넌다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너의 품속에서 새로운 생을
끄집어내듯 나는 아프다
새로운 지문의 날들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때 너는 일기를 다시 쓰고
일기장 속에서 오래된 시간은 잠든다
오래된 시간은
얼마나 고요히 우리를 예언했던가
머리에 흰 꽃을 단 여자아이들이
순한 시간 속에서 사라질 것을
오래된 시간은
얼마나 고요히 예언하고 있었던가
먹고 싶다
허수경
서울 처음 와서 처음 뵙고 이태 만에 다시 뵙게 된 어른이
이런 말을 하셨다 자네 얼굴, 못 알아볼 만큼 변했어
나는 이 말을 듣고
광화문, 어느 이층 카페 구석 자리에 가서 울었다
서울 와서 내가 제일 많이 중얼거린 말
먹고 싶다......,
살아내려는 비통과 어쨌든 잘 살아 남겠다는 욕망이
뒤엉킨 말, 먹고 싶다
한 말의 감옥이 내 얼둘을 변하게 한 공포가
삼류인 나를 마침내 울게 했다
그러나 마침내 반성하게 할까!
나는 드디어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렸다 서울에 와서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리고
조균의 어리석음, 발바닥의 들큰한 뿌리
그러나 사랑이여, 히죽거리며 내가 너의 등을
찾아 종알거릴 때 막막한 나날들을
함께 무너져주겠는가, 이것의 먹고 싶음,
그리고 나는 내 얼굴을 버리고
길을 따라 생긴 여관에 내 마음초자 버리고
안녕이라 말하지 마 나는, 먹고 싶다......,
오오, 날 집어치우고......
모랫빛
허수경
그 먼 어느 날, 어느 날, 내가 당신을 알아보았을 때, 그 무슨 폐허 같은 당신을 내가 알아보았을 때, 무덤덤한 그 빛, 모래빛, 아스라한 떨림의 빛……, 어느 빛이 서로를 은애했는지, 당신 혹은 나의
빛……, 먼 어느 날, 당신의 얼굴 위로 무덤덤한 빛, 그 모래빛……, 그 무슨 폐허 같은 당신을 내가 스쳐지나가거더라도…….
목련
허수경
뭐 해요?
없는 걸 보고 있어요
그럼 눈이 많이 시리겠어요
예, 눈이 시려설랑 없는 세계가 보일 지경이에요
없는 세계는 없고 그 뒤안에는
나비들이 장만한 한 보따리 날개의 안개만 남았네요
예, 여적 그러고 있어요
길도 나비 날개의 안개 속으로 그 보따리 속으로 사라져버렸네요
한데
낮달의 말은 마음에 걸려 있어요
흰 손 위로 고여든 분홍의 고요 같아요
하냥
당신이 지면서 보낸 편지를 읽고 있어요
짧네요 편지, 그래서 섭섭하네요
예, 하지만 아직 본 적 없는 눈동자 같아서
이 절정의 오후는 떨리면서 칼이 되어가네요
뭐 해요?
예, 여적 그러고 있어요
목련, 가네요
몽골리안 텐트
허수정
숨 죽여 기다린다
숨죽여,
이제 너에게마저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척을 내지 않을 것이다
버림받은 마음으로 흐느끼던 날들이 지나가고
겹겹한 산에 물 흐른다
그 안에 한사람,
정막처럼 앉아 붉은 텔레비전을 본다
무심한 구름
허수경
한--, 청평쯤 가서 매운 생선국에 밥 말아먹는다
내가 술을 마셨나 아무 마음도 없이 몸이 변하는 구름
늙은 여자 몇이 젊은 사내 하나 데리고 와 노다
젊은 놈은 그늘에서 장고만 치는데
여자는 뙤약볕에서 울면서 논다
이룰 수 없는 그대와의 사랑이라는 게지!
시들한 인생의 살찐 배가 출렁인다
저기도 세월이 있다네 일테면 마음의 기름 같은 거
천변만화의 무심이 나에게 있다면
상처받은 마음이 몸을 치유시킬 수 있을랑가
그때도 그랬죠 뿔이 있으니 소라는 걸 알았죠
갈기가 있으니 말이란 걸 알았죠
그렇다면 몸이 있으니 마음이라는 걸 알았나
생선죽에 풀죽은 쑥갓을 건져내며
눈가에 차오른 술을 거둬내며 본다
무심하게 건너가버린 시절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었던 시절
문득,
허수경
새싹은 어린 새의 부리처럼 보였다
지난 초봄이었다
그리고 겨울은 왔다
억겁 동안 새들과 여행하면서
씨앗은 새똥을 닮아갔다
새똥도 씨앗을 닮아갔다
붉어져 술을 머금은 겨울 열매를 쪼면서
아직, 이라는 시간 속에 걸린 잎사귀를 보면서
문득,
새들은 제 깃털을 잎사귀 모양으로 바꾸었다
그 일이 억겁의 어디쯤에서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얼음 눈빛으로 하얗게 뜨겁던
겨울 숲을 걷던 어느 날
그 열매의 이름을
문득,
알고 싶었다
새들이 잎사귀를 아리게 쪼다가
잎사귀 모양을 한 깃털을 떨구고 날아간 문득,
숱이 두터운 눈바람 속, 새이던 당신에게
날개의 탄생을 붉게 알려준
그 나무 열매의 이름이 알고 싶었다
물빛
허수경
아주 어린 날
세숫대에
물 떠놓고
물빛하고
논다
어른거린다
물빛
날빛
낯빛
날아간다 그림자
덮친다 날아가는 그림자위를
다른 빛 하나가
그리고 물빛
내 낯을 어루는 물빛
바라본다
설렁대는 빛
일렁이는 저 너머
불안한 맑은 빛
서성이는 이미 물빛이 된
내 어린 지친 얼굴
물빛
빛
물 좀 가져다주어요
허수경
아이들 자라는 시간 청동으로 된 시간
차가운 시간 속 뜨겁게 자라는 군인들
아이들이 앉아 있는 땅속에서 감자는
아직 감자의 시간을 사네
다행이군요,
땅속에서 땅사과가 아직도 열리는 것은
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아 땀을 역청처럼 흘리네
물 좀 가져다주어요
물은 별보다 멀리 있으므로
별보다 먼 곳에 도달해서
물을 마시기에는
아이들의 다리는 아직 작아요
언젠가 군인이 될 아이들은 스무 해 정도만 살 수 있는 고대인이지요, 옥수수를 심을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아이들이 그 잎 아래로 절 숨길 수 있을 것을 아이들을 잡아먹느라
매일매일 부지런한 태양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을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는
저 푸른 마스크를 쓴 이는 누구의 어머니인가,
저 어머니들의 얼굴에 찍혀 있는 청동의 총,
저 아이를 끌고 가는 피곤한 얼굴의 사람들은
아이들의 어머니인가
원숭이 고기를 끓여 아이에게 주는 푸른 마스크의
어머니에게 제발 아이들의 안부 좀 전해주어요
아이들이 자라는 그 청동의 시간도, 그 뜨거운 군인이 될 시간도
미안해 오랫동안 소식을 전해주지 못해서
허수경
나의 나날은 꽃이 피거나 모르게 시들거나 했고
다만 비가 내리고 햇빛도 있고
낯선 만남,느닷없는 사랑,호수의 물결
조깅하는 여자들의 다리도 있었다
너만 없었네
언제나 그랬듯
그래 그렇게 그리워하는 것도
발이 닳을 때까지 걸어가는 것도 좋아서
나는 지구의 작은 모퉁이에 앉아 적는다
유월이라 장미는 피었고
유월이라 꽃무늬 박힌 치마도 있다고
바깥에 앉아 도시로 떠오르는 해를 보며
네 생각하기 참 좋은 시간이라고
유모차에 앉은 아기도 나를 향해 웃어주고
휠체어를 타고 산책 나온 노인도
나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상냥한 시간 속에 나 있다고
웃어주렴 이 편지를 받으면
그리고 만일 네게로 저녁이 오고 있다면
그럴듯한 주점에 앉아
내게도 잔을 한번 권해주렴
부재를 위해 드는 잔만큼 넘실거리는
잔은 없다고 가만히 생각하면서
바다가
허수경
깊은 바다가 걸어왔네?
나는 바다를 맞아 가득 잡으려 하네
손이 없네 손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손이 없어서 잡지 못하고 울려고 하네?
눈이 없네?
눈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고 싶다
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다 두고 왔다
글썽이고 싶네 검게 반짝이고 싶었네
그러나 아는 사람 집에 다, 다,
두고 왔네
바다 탄광
허수경
1940년댄가 50년댄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부길부길 show라는 게 있었다 가수와 만담 아니 창가쟁이와 이바구꾼 운다고 옛사랑이 예엣사랑이 설까치 노을에 기대 울던 눈냄로 밤에는 몸팔던 논다니가 낮에 가수로 울던 show
양금쟁이 색소폰쟁이 폐병과 삶의 나병을 전염시키며 다니던 그렇지, 본디 show라는 게 나병이 전염되듯 은밀한 천역이 있는 게지 글쎄 그렇다니까!
마작을 하던 여관의 등불 아래 새벽 홰에 끓인 술을 돌려 마시며 우억거리며 간밤 재게 먹은 술을 다 토해낼 때 그 어떤 표정! 러시안 룰렛은 삶의 여유일까? 죽음의 여유일까? show라는 게 예술이라는 게 바다같이 기대지는 걸까 탄광같은 것일까
노역을 해도해도 버려지는 삶, 먹어도먹어도 배가 고픈 저 천역 노름쟁이와 논다니는 노래한다 내 인생은 외상 없는 길 내 인생은 막장 하지만 내 노래는 누굴 위한 걸까* 하지만 내 영혼은 버려졌을까 하지만 내 인생은 바다탄광 저 어쩌지도 못하고 기대고 버려지고 가고 하지만 내 노래는......
* 신해철 작사 작곡 「Jazz Cafe」중에서
발이 부은 가을 저녁
허수경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오래 걸었습니다
저녁을 말아먹고 검어지는 수제비마당에
대야를 내놓고 발을 담급니다
걷다가 아주 많은 발을 보았습니다
말, 양과 돼지 오리와 토끼의 발 자전거 자동차의 발도
빌딩이라는 황무지를 걷다가
김밥을 넘기며 잠시 멈춘 발도
지금쯤 그들의 발도 퉁퉁 불어 있을 겁니다
모두들 걷고 있었으니까요
심지어 낙엽도 온몸으로 걷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파스를 붙인 어깨로
늙은 호박의 가장자리를 말리고
마당 그늘에서 고사리는 갈빛의 우산을 펴네요
여름길 걷느라 지쳐서 낡은 구두는
늙은 소처럼 어둠 속에 웅크립니다
앞으로 걸으려던 발자국들이 미숙한 아이로 남은 이 저녁
별들에게는 빛이 발이었나 봅니다
대야는 별빛으로 가득합니다
퉁퉁 부은 발에 시퍼렇게 청태가 끼어
빛이 되는 건 천체의 일이겠지요
별빛의 퉁퉁 부은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직도 걷고 있는 이 세계의 많은 발들을 생각합니다
바다를 걷다 걷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 발들에게는
차마 안부를 묻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사무칩니다
바닷속의 발들을 기다리는 해안의 발들이
퉁퉁 부어 있는 가을 저녁입니다
밤 소나기
허수경
재실댁은 아파트 파출부 그 집 아재 김또돌씨는 하수구 치는 일을 했제 야반도주 고향을 베린 지 어언 십여 년 하루떼기 벌이에 이골은 났지만 날이 갈수록 왜 이리 쪼그라만 드는 살림 단칸 월세방에 내외간이 딴이불 거처를 하는데 김또돌씨 술이라도 한잔 들이키는 날에는 이불 싸가지고 마루에 누웠제 옌장 마누라쟁이라고 암만 고달파도 할 일은 해야제 맨날 돌아누우니 살맛이 나 살맛이
쓴 담배만 뻑뻑 빨다 잠이 들었는데 이쿠 소나이야 마루까지 치받고 후둑거리는 소나기 피해 우당탕탕 챙겨 방으로 들어왔는데 소나기 핑계로 들어와 누웠는데
웬일로 재실댁이 먼저 안겨오지 않나 소나기 한번 장하데이 이녁도 장하게 한번 들어오소 김또돌씨 소나기처럼 황소처럼 달려들었제 임자요 섭했지예 몸이 천근 같으니 내사 우찌 살 붙일 정이 나것소
재실댁 마른 가슴 더듬다 잠이 든 김또돌씨는 빚에 몰려 쫓겨 온 고향 쩬한 고향 보리밭에 또 한 번 재실댁을 넘어뜨리는 꿈을 꾸었지러 별 숭 숭 말짱한데 도시의 산동네 하루벌이 부부
밥 빛
허수경
너에게 쓰는 편지 속 말들이
점점 줄어들더니 기어이 잦아들었네
어떤 지상의 날
봄 햇살이
두통의 두릅이 돋는 순간을
다스리는 때,
나는 머리를 숙였네
지난 계절
밥알마다 네 얼굴이 어려 있어
그 밥,
차마 먹지 못해
편지를 접었는지도
여름 밥 빛은
네 얼굴을 지웠다
가을 단풍이 진하게 달인
붉은 간장의 저녁을
기름 오른 새들이 지나갔을 때
겨울 숭늉의 잔웃음 곁으로
무말랭이의 고드름이 열려도 괜찮아서
담담함은 밥상을 편다
볼이 미어지도록
밥 한 그릇 다 먹고
달고도 쓴 시래기국밥 잠 길게 잤다
아, 우리 코 골며 이 갈며 잘살고 있었네
이 세상, 천국이어서 살찐 허벅다리 사이
봄 멸치는 구름의 골목을 떠돌다가 잠들었네
이 골목의 부자들은 낯설디낯선 모국어로
우리의 가난을 경멸했고
아, 이 천국, 너의 눈동자를
나는 내 살의 가장 깊숙한 영혼 소금으로 절인다
이 천국, 초승달 길 파랑은 영혼의 젓갈로 사무치네
방향
허수경
검푸른 비닐장갑을 낀 손이었다
저기에서 굴이 자란다고 하던 반백의 한 사람 손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태어난 남자였다
그는 방향을 가리키는 모든 손가락을 숨긴다고 했다
어머니가 그랬어요, 우리 병원 갈까, 네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병이 아니라 자연이었어요, 라고 말할 때 아버지는 가죽 채찍으로 내 엉덩이를 쳤어요 굶을 걱정 없으니 엉덩이가 잘못 된 거래요 나는 말했어요,
아버지, 뭘 아세요! 나는 아버지의 채찍을 잡으며 당신이 내 유사자연이라고 울부짖었어요, 당신은 당신 말고 믿는 빛이 있었나요? 당신의 족보에서 달달 떨던 발가락을 도려내며 당신이 내 자연을 관리하려고 할 때, 내 엉덩이는 얼음바람 속에서 관 없는 무덤을 찾아요 아무런 번식이 일어나지 않는 밥맛없는 계절은 오고 엉덩이는 당신의 2014년 생산적인 체계 안 생식불능의 박스 안에 있었네 나, 생식 못하는 자, 그의
장갑 속, 손가락은 보이지 않았고 부표는 흔들렸다 산란기였다
수컷인 굴이 암컷으로 변할 때
물결은 숨을 죽이면서 전환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오가는 우체부여서 물결의 발자국은 부어올랐다
껍데기를 열던 칼에 도려진 바람과
저녁의 허기를 잦아드는 빛으로 채운 수평선, 굴은 아렸네
아림 속으로 돋아나는 살의 적막한 빛에 침묵하는 철망을 바라보다가 그는 장화를 벗으며 물에 튼 손가락을 만졌다 그리고 그가 바닷바람에 모든 방향을 보냈을 때 굴이 제 껍데기에 아주 도착하는 시간이 왔다
백수 광부
허수경
다 저녁
환한 저녁
문자(文字)도 없이
문서(文書)도 없이
멸(滅)조차
적적한 곳으로
화엄도 도솔도 없이
문명의 바깥으로
무망(無望) 속으로
환하게
베낀
허수경
구름을 베낀 달
달을 베낀 과일
과일을 베낀 아릿한 태양
태양을 베껴 뜨겁게 저물어가던 저녁의 여린 날개
그 날개를 베끼며 날아가던 새들
어제의 옥수수는 오늘의 옥수수를 베꼈다
초록은 그늘을 베껴 어두운 부룩음 속으로 들어갔다
내일의 호박은 작년, 호박잎을 따던 사람의 손을 베꼈다
별은 사랑을 베끼고
별에 대한 이미지는 나의 어린 시절을 베꼈다
어제는 헤어지는 역에서 한없이 흔들던 그의 손이
영원한 이별을 베꼈고
오늘 아침 국 속에서 붉은 혁명의 역사는
인간을 베끼면서 초라해졌다
눈동자를 베낀 깊은 물
물에 든 고요를 베낀 밤하늘
밤하늘을 베낀
박쥐는 가을의 잠에 들어와 꿈을 베꼈고
꿈은 빛을 베껴서 가을 장미의 말들을 가둬두었다
그 안에 서서 너를 자꾸 베끼던 사랑은 누구인가
그 안에 서서 나를 자꾸 베끼는 불가능은 누구인가
별 노래
허수경
작은 사과나무를 돌보는 아버지 옆에 서면 사과나무 꽃입술이 흙 가장 보드라운 살에 떨어져 분홍 웃음소리.
아버지는 꺼멓게 말라가는 속잎을 따내면서 "얘야 일찍 들어온나 처녀애들 밤길은 위험하니라" 전지가위에 잘려 나간 곁가지를 주워 담을 때 본 근육통으로 부어오던 아버지의 손등."밤길 어둡다고 바래다 주는 사람이 있는 걸요" 물뿌리개에서 햇살이 번져 올랐습니다
별을 별이
허수경
별을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고 칼로 별을 도려낸
흔적을 가진 이도 있고 그 흔적을 개조해서 무덤으로
만든 이도 있고 공중에 별을 걸어놓고 벌집을 만든 이
도 있지만
별로 밥을 먹거나 별을 살 속으로 깊이 집어넣고 우
는 이도 있고 진저리를 치며 가까운 별을 괴롭히거나
별을 구우려고 불을 피우거나 하는 이도 있지만
별을 사막에서 바라보면 별을 사막의 바람이 자고
난 뒤 바라보면 사실 별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고 별
이 우리를 가지고 있지만
병풍
허수경
병풍 속에는 눈 분분한데 매화가 깨어났네
옹이 많은 가지를 잡고 꽃들은 다시 잠이 들었네
꽃 사이를 산보하던 검은 새들은 눈을 안고 자는 꽃잎 속으로 들어갔네
병풍 뒤에는
아직 눈을 감지 못한 한 사람 누워 있었네
가지 못했던 길 같은 손을 가슴 위에 모으고
병풍 속에는 난초 옆에서 봄바라기를 하는 개 한 마리 누워 있었네
훈풍이 불어 꽃의 가장자리는 따뜻하고도 그리웠네
화반에는 보라색 안개 같은 꽃들이 멍울처럼 돋아났네
병풍 뒤에는
아직 눈을 감지 못한 사람의 눈물이 얼어 있었네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은 다시는 못 만날 눈물의 얼음이었네
병풍 속의 아픈 감들은 공중에서 붉은 등을 켰네
어부 하나 가을 물고기를 연잎에 싸서 집으로 가고 있었네
달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는 사람은 귀양지에서 울었네
병풍 속의 대나무밭에는 첫눈이 내렸네
토끼를 입에 문 늑대가 눈 위를 걸어가는 사람의 뒤를 따라갔네
그 사람 등 뒤에도 죽은 꿩 하나 매달려 있었네
병풍 뒤에는 그 눈밭을 걸어갈 사람 하나
멍 든 발을 모으고 자고 있었네
병풍 앞에서는 곡비(哭婢)가 울 때
가지 말라고 붙잡는 사람도 원 없이 잘 가시오, 보내는 사람도
그 사람이 두고 간 신발이 되었네
더 이상 같이 나서지 못하는 신발이 되어 가지런히 병풍 앞에 놓여 있었네
봄 꿈
허수경
꽃무늬 바지를 입고 노인은 절집으로 향하는 수유꽃 노란 길을 걸으신다 뼈가 가벼운 새들이 나무 위에서 잠에 겨운 꽃잎을 한장씩 개키고 있다 절집에는 소풍을 가지 못한 얼굴들이 고기반찬 없는 상을 차리다가 병든 자목련을 바라본다 극락까지 가서 밥을 먹고 지옥으로 돌아오면 마을의 몇 안되는 염소들은 실개울 곁에 앉아 간첩이 내려왔다는 뉴스가 박힌 신문을 우물거리고 있다 근처 큰 도시에 있는 술집에서 일하던 아가씨 셋이 개여울에서 변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뉴스는 이미 염소의 위장 안에 있다
봄날은 간다
허수경
사카린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박분의 햇살아
연분홍 졸음 같은 낮술
마음 졸이던 소풍아
안타까움보다 더 광포한 세월아
순교의 순정아
나 이제 시시껄렁으로 가려고 하네
시시껄렁이 나를 먹여살릴 때까지.
봄 오후
허수경
구름이 지나가는 속도가 빠른 봄 오후
핀 꽃들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는 봄 오후
멀리 있는 당신은 나를 잊었네
그런 생각을 하는 봄 오후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일을 다 잊고
훌훌 털고 갔음 싶은 봄 오후
나를 놓고 그냥 사라지고 싶은 봄 오후
그래도 아무 미련 없어 참 난감한 봄 오후
나의 신조는 혼자서 말라가지 않는 거예요
슬픔도 지그시 누르는 거예요
부어오른 뺨처럼 누르는 거예요
당신이 나를 도통 잊은 것 같은 봄 오후
부치지 못한 편지만 가득한 봄 오후
먼 바람에 오이가 꽃을 뚫고
돋아드는 봄 오후
우는 세월은 아무 소용없는 봄 오후
다만 그대가 돌아설 때
이 물기 많은 태양의 달인
어린 오이를 주지 못해
맘에 걸린 봄 오후
당신은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의 봄 오후
우린 이렇게 사라질 거라는
불안의 봄 오후
저 시퍼런 오이의 피부를 뚫고
태양 속으로 들어가는 봄 오후
차마 보내지 못한다
편지의 눈이 오이 속에서 글썽거린다
햇빛만 가까스로 무사한 봄 오후
마음은 없고 당신만이 들어와
꽉 찬 봄 오후
그 팔 ,다리,눈,입,귀
당신이 누군가를 껴안고 그리고
그 모든 육체의 편지를 껴안고
일렁거리는 봄 오후
누군가의 그림자가
구름 밑에 돋아나는 봄 오후
중독자의 봄 오후
버린 자의 봄 오후
버림받은 자의 봄 오후
참고로 말한다면
이렇게 오래 엎드려 있다가
일어날 수도 없는 봄 오후
하지만 나의 것인 봄 오후
당신이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봄 오후
하지만 내가 이렇게 뜨거워서
실제 당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나의 당신만이 겨우
존재할 수 있는 봄 오후
온몸의 피가 불귀를 사랑하는 봄 오후
참고로 말한다면
사실은 겨울이었던
이 무시무시한 봄 오후
섬득섬득 사라지는 빛의 봄 오후
북풍의 봄 오후
정말 당신 때문일까
이렇게 저녁을 준비할 자격이 있을까
햇살아?
당신에게 부치지 못하는 편지들을
곱게 접는 봄 오후
부풀어 오르는 어머니
허수경
나이 어린 어미들이 해변가를 달린다
물새들이 달리는 어린 어미들을 들어 올린다
부풀어 오르는 영혼의 어머니
불우한 악기
허수경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
초라한 남녀는
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
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
일금 이천 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은 있다네
왕릉 어느 한 켠에 그래, 저 초라를 벗은
젖은 알몸들이
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엉켜붙어 무너지다가
문득 불쌍한 눈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굴곡진 몸의 능선이 마음의 능선이 되어
왕릉 너머 어디 먼데를 먼저 가서
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악기여
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
또 좀 불우해서
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
어디 먼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불취불귀(不醉不歸)
허수경
어느 해 봄 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 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 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붉은 조개를 단 거북
허수경
짐승의 마을에서 사람과의 사랑을 한 호랑이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나 미루나무만한 고사리가 우거진 숲속에서 잠을 잔다 발자국에 세 발이 넘는 거인이 왕이 되는 도성에는 변소가 넘쳐나고 아이의 잠속에서는 거북이 기어나온다 눈가에 붉은 조개를 단 거북이다 달 속으로 걸어간다 달 속으로 붉은 흙 속으로 붉은 바위 속으로
붉은 후추나무
허수경
유프라테스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 구워 파는 식당
식당 뜨락에 서 있는 붉은 후추나무
구운 물고기 위에 있는 후추알
영상 46도
물고기 눈은 이미 검은데
아직 불에 구워지지 않은
붉은 후추알
사막의 바람이 지는 자리
이 지나간 자리에
얼굴에 칼자욱이 선명한 노인이
아직도 불을 지피고 물고기를 굽는 식당 뜨락
붉은 후추알 달고 나무 하나 저무는데
그 너머 망한 도시 하나 모래 속에 있는데
비행장을 떠나면서
허수경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는 무표정했어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커피를 마시며 우울한 신문들을 읽었고
참한 소설 속을 걸어다니며 수음을 했지
사랑이 떠나갔다는 걸 알았을 때 우리들의 가슴에서는 사막이 튀어나왔는데
사막에 저리도 붉은 꽃이 핀다는 건 아무도 몰라서 꽃은 외로웠지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테러리스트들을 향해 인사를 했고
비행장을 떠나면서 지상에 쌓아놓은 모든 신문들에게 불안한 악수를 청했어
울지 마, 라고 누군가 희망의 말을 하면
웃기지 마, 라고 누군가 침을 뱉었어
21세기의 새들은 대륙을 건너다가 선술집에 들러 한잔 했지
21세기의 모래들은 대륙과 대륙 사이에
천만 년의 세월을 살던 바다를 메워 새 집을 짓다가 초밥집에 들러
차가운 생선의 심장을 먹었어
21세기의 꽃게들은 21세기의 송충이들은 21세기의 은행나무들은
인사를 하지 않는 막막한 시간을 위해 오랫동안 제사를 지냈지
21세기 남자들은 21세기의 여자들은 아이들은 소년과 소녀들은
비행장을 떠나면서 사랑이 오래전에 떠난 사막에 핀 붉은 꽃을 기어이
보지 못했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꽃이 질 때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새 여행에 가슴이 부풀어
헌 여행을 잊어버렸지, 지겨운 연인을 지상의 거리, 어딘가에 세워두고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슬프면서도 즐거워서
20세기의 노래를 부르며 짐짓 모른 척했어, 당신의 얼굴 위를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난다는 것을
빈 얼굴만 지닌 노인들만
허수경
빈 얼굴을 지민 노인들만 지나다니는 길옆에
그 극장이 있었다. 흰 수건을 쓴 처녀들이
소리없이 극장 옆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처 녀들은 가슴에 달을 달았다.
처녀들은 달을 안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달이 품안에서 깨기도 전에 극장 안에 있는
환풍기는 붉은 햇빛을 끌고 들어왔다
처녀들은 누런 달을 품고 잠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무에는 달 같은 얼굴이 열렸다
그 얼굴은 너무나 낡아
나무는 그만 얼굴을 놓아버리고 싶다
그해 나무들이 그렇게 불편해하는 것도 모르고
도시락과 물병을 들고 우리는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꼭 그 극장 같았다.
몇백 년 전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매일 매일 무대에 올리던 그 극장, 살해된 자가
매일 매일 그렇게 다시 살해되던 그 극장,
그 숲에서 아이 들이 자지러지게 노는 것을 보았다.
물병에 붉은 햇빛이 고이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그렇게 빨리 자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빈 얼굴을 지닌 노인들이 배우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처녀들은 슬금슬금 잠에서 깨어나서는
머리수건을 벗었다. 처녀들은 매일 매일 무대에서
살해 되는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이름 없는 것들이죠?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
아님, 말 못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 입구의 세월 속에
당신, 아직도 울고 있나요?
오늘도 콜레라가 창궐하는 도읍을 지나
신시(新市)를 짓는 장군들을 보았어요
나는 그 장군들이 이 지상에 올 때
신시의 해안에 살던
도롱뇽 새끼가 저문 눈을 껌벅거리며
달의 운석처럼 낯선 시간처럼
날 바라보는 것을 보았어요
그때면 나는 당신이 바라보던 달걀 프라이였어요
내가 태어나 당신이 죽고
죽은 당신의 단백질과 기름으로
말하는 짐승인 내가 자라는 거지요
이거 긴 세기의 이야기지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지요
빙하기의 역
허수경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 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내 속의 아가씨가 물었다.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기도 했었어?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그는 대답했다. 노래하던 것들이 떠났어
그것들 철새였거든 그 노래가 철새였거든
그러자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졌고
하하하, 붉은 십자가를 가진 차 한대가 왔어
소년처럼 갈 곳이 없었어
병원 뜰 앞에 앉아 낡은 뼈를 핥던
개의 고요한 눈을 바라 보았어
간호사는 천진하게 말했지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죽은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있던 손들이 더 많대요. 뼈만 남은 손을
감싸며 흐느끼던 손을
?
왜 나는 너에게 아무 기별도 넣지 못했을까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서
누구에게든
누구를 위해서든
하지만
무언가, 언젠가, 있던 자리라는 건, 정말 고요한 연
같구나 중얼거리는 말을 다 들어주니
빙하기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내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 질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가
빛 속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허수경
빛 속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를 테면 시간을 거슬러 가는 일, 시간을 거슬러 가서 평행의 우주까지 가는 일
그곳에서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는다
나는 다른 부모를 가지고 다른 이름을 가지고
내 육체는 내가 가진 다른 이름을 이루어내고
그곳에서 흰빛의 남자들은 검은 빛의 여자들에게 먹히고
(그러니까 내가 살던 다른 평행에서는 거꾸로였어요. 검은빛의 여자를 먹는
흰빛의 거룩한 남자들이 두고 온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자주 꾸며 우는 곳이었지요)
나는 내가 버렸던 헌 고무신 안에
지붕 없는 집을 짓고 무력한 그리움과 동거하며
또 평행의 우주를 꿈꾸는데
그러나 그때마다 저 너머 다른 평행에 살던 당신을 다시 만나는 건 왜일까,
그건 좌절인데 이룬 사랑만큼 좌절인데
하,하 우주의 성긴 구멍들이
다 나를 담은 평행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면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를테면 시간을 거슬러 가서 아무것도 만나지 못하던 일, 평행의 우주를 단 한번도 확인할 수 없던 일
사랑의 불선(不善)
허수경
너는 왜 胃가 아프니 마음이 아프지 않고
그래서 이렇게 묻잖아 약은 먹니 술은 안 마시니
지워진 길도 길이니 얼굴이 아플 때도 있니
너 누구에게 맞았니!
그래서 돌아본다 조용필이나 고르며
일테면 나는 물고기 비늘 많은 물고기
가시 많은 물고기 가거도에 가면 멸치를
잡을 수 있을까요
마음끼리 헤어지기 싫어할 때 견딜 수 없는 몸은
마음으 로 들어온다 에이 바보같이 에이,
마음의 두께 마음의 다리
마음의 팔이 몸을 안는다
약은 먹니 그래그래 너는 아가리의 심연을 아니
근데 왜 바보같이 맞기만 했을까
몸의 마음이 너를 때렸니 가기 위해
돌아오기 위해?
허랑허랑......
사식을 먹으며
허수경
그리 모질게 매질을 당하고도 솟증이 돋아 입탐을 하네 돼지비계 두둥실 떠 있는 순대국이나 한 사발 가슴 녹여내며 들이키고 싶으이 방아냄새 상긋한 개장국에 밥을 말며 장정들 틈에 끼여 앉아 주는 대로 탁주도 뿌리치지 않고 싶으이 제 아무리 매질 오질토록 닥쳐봐라 내 입맛 하나 온전히 다칠 수 있으랴 두레마을의 아낙으로 살점 일구어내고 연애도 달덩이 같은 아들도 낳아
이 보시게 아들도 이녁들에게 매질당하게 키우것네
사진 속의 달
허수경
이것은 슈퍼문이다
이것은 언젠가 슈퍼문이 있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이것은 네가 내 옆에서
달을 보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왜 얼굴 없는 바람은 저렇게 많은 손가락을 가져
네가 떠난 자리를 수천의 장소로 만드는지
왜 네가 떠났는지 말해줄 수도 없다
다만 사진 속의 달이다
달을 기다리며 저 언덕에서 서 있다가
우리가 나누어 마셨던 녹차의 흔적도 없다
술 대신 마셨다
네 건강의 슈퍼문이 다쳤다고 했다
군 고기도 짠 김치도 없는 지병이어서
지난밤 베개에 옴폭 패인 홈처럼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지병의 기원을 슈퍼문 사진 한 장이
알려줄 리 없다
산수화
허수경
그 어디멘가 마을 복사꽃들 사이
저 포크레인 가네
꽃들 연한 살을 순하게 따먹는
저 포크레인
마치 봄두렁에 황소 한 마리
노랑나비 달고 다복다복 가드끼..
강을 넘어
산을 넘어
경계를 허무니 저 또한 건달 아닌가
그 어디멘가 포크레인 진경을 그리며
산수의 담담함 속을
담담히 허물어지는 저 진경!
살을 이겨져 냄새만 독헌디
저 또한 건달 아닌가 별것 아닌 것거치
마치 환한 노랑나비달고
싸묵거리는 황소거치..
상여길
허수경
옆집 앉은뱅이 총각 밤 몰래 끌려가
앉은뱅이 되어 돌아오더니
담 둘이 포개앉은 이웃집 처자
내게 고데 말없이 소월 노래깨나 적어 보냈지
심심한 한낮 배고픈 햇발을 이고
살그머니 담장으로 전해지던 소월 노래는
이른 봄 아린 입술 들이밀던 개나리 되어
옆집 앉은뱅이 총각 상여에 가서 피었네
내 무슨 황진이라고 속곳 벗어
시린 상여 위에 얹어두고 싶었네
진눈깨비 내리던 상여길
남몰래 눈물 흘리며 따라가며
설탕 길
허수경
늙은 아내를 치매 요양원으로 보내고
발자국을 깊이 묻으며 노인은 노상에서 울고 있다
발자국에 오목하게 고인 것은
여름을 먹어치우고
잠이 든 초록
가지 못하는 길은
사레가 들려
노인의 목덜미를 잡고 있다
내가 너를 밀어내었느냐,
아니면 네가 나를 집어삼켰느냐
아무도 모르게 스윽 나가서
저렇게 설설 끓고 있는 설탕길을 걷느냐
노인은 알 수 없는 나날들 속에서는
늙은 아내가 널려 있는 빨랫줄 위로 눈이 내린다고 했다
당신의 해골 위에 걸어둔 순금의 눈들이
휘날리는 나라에서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이상하지만은 않아서
오래된 신발을 벗으며
여름에 깃든 어둠은 오한에 떨며 운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허수경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지만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 섬으로 들어갈 때 그대들이 챙긴 물건은
그 섬으로 들어갈 때 내가 챙긴 물건과 비슷하겠지만
단 하나 다른 것쯤은 있을 것이다
내가 챙긴 사랑의 편지지가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
이것이 고독이다
섬에서 그대들은 나에게 아무 기별도 넣지 않을 것이며
섬에서 나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속에는 눈물이 없다
다만 짤막한 안부 인사만, 이렇게
잘 지내시길,
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
고독에게 악수를 청한 잊혀갈 손이여
별의 창백한 빛이여
세월아 네월아
허수경
세월아 네월아
시정의 아픈 사내가
시정의 아픈 여자를 데리고
여자는 아가를
누런 아가를 데리고
하염없이 염없이
고구마를 튀겨 파는데
섬섬 바리시고 네여 도 닦듯
하염없이 튀김 그릇 끓는 열반 속에
하얀 수련 열 듯 고구마는 솟아오르고
누런 아가는 양털 보풀이는
싸묵눈길을 간다네
마징가나 은하철도 기름 열반 속
고구마 꽃잎에
뚝뚝 떨어지는 기름처럼
눈 발은 잠 속을 녹아
세월아 네월아
하염없이 염없이
네 가면 병 낫더냐
나을 병 없이도 아픈 시정들이
꺼먹꺼먹 튀겨내는 세월아 네월아
아마 너라고 기름 열반을
바라겠냐만은
소풍 갑시다
허수경
그대가 나의 오라비일 때,
혹은 그대가 나의 누이일 때
그때 우리 함께 닭다리가 든 도시락을 들고
소풍을 갑시다,
아직 우리는 소풍을 가는 나날을
이 지상에서 가질 수가 있어요,
우리는 그 권리가 있어요,
소풍을 가는 날,
가만히 옷장을 보면
아직 개키지 않은 옷들이 들어 있어도
그냥 둡시다, 갈잎 듣는 그 천변에서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므로,
돌아올 것이므로,
그날 그 소풍에 가지고 갈 닭다리를 잘 싸고
포도주 두어 병도 준비하고,
그대가 내 오라비로만 이 지상에서
그대가 나의 누이로만 이 지상에서
살아갈 것을 서약은 할 수 없을지라도
오래 뒤에 내가 그대를 발굴할 때,
그대의 뼈들이 있을 자리에 다 붙어 있었으면 합니다,
그 이름 없는 집단무덤에서
우리는 얼마나 머리 없는 뼈들을 보았던가요
울지 맙시다,
작은 소녀가 웅크린 그 부엌 안에 작은 불을 켜며
라디오를 켜며 서약한
많은 나날들이 연빛 웃음처럼,
소녀 또한 연등빛 웃음처럼
저 폭약 많은 오후에 사라져갈지라도
우리들이 먹은 닭다리가
저 천변에 해빛에서 아득해질지라도
오 오 소풍을 갑시다,
울지맙시다
수박
허수경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오다 길 잃은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 한 땅의 열매
저물어 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 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나,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내가 어떻게 보았을까요, 기적처럼 이제 곧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재와 붕장어의 시간이 온다는 걸
선잠과 어린 새벽의 손이 포플러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물고 가는 시간이 온다는 걸
수수께끼
허수경
극장을 나와 우리는 밥집으로 갔네 고개를 숙이고 메이는 목으로 밥을 넘겼네 밥집을 나와 우리는 걸었네 서점은 다 문을 닫았고 맥줏집은 사람들로 가득해서 들어갈 수 없었네
안녕, 이제 우리 헤어져 바람처럼 그렇게 없어지자 먼 곳에서 누군가가 북극곰을 도살하고 있는 것 같아.
차비 있어? 차비는 없었지 이별 있어? 이별만 있었지
나는 그 후로 우리 가운데 하나를 다시 만나지 못했네 사랑했던 순간들의 영화와 밥은 기억나는데 그 얼굴은 봄 무우순이 잊어버린 눈물처럼 기억나지 않았네
얼음의 벽 속으로 들어와 기억이 집을 짓기 전에 얼른 지워버렸지 뒷모습이 기억나면 얼른 눈 위로 떨어지던 빛처럼 잠을 청했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당신이 만년 동안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네 내가 만년 동안 당신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붙들고 있었네 먼 여행 도중에 죽을 수도 있을 거야 나와 당신은 어린 꽃을 단 눈먼 동백처럼 중얼거렸네
노점에 나와 있던 강아지들이 낑낑거리는 세월이었네 폐지를 팔던 노인이 리어카를 끌고 지하도를 건너가고 있는 세월이었네 왜 그때 헤어졌지, 라고 우리는 만년 동안 물었던 것 같네 아직 실감나지 않는 이별이었으나 이별은 이미 만년 전이었어
그때마다 별을 생각했네 그때마다 아침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던 다리 밑에 사는 거지를 생각했네 수수께끼였어, 당신이라는 수수께끼, 그 살[肉] 밑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진 대륙들은 회빛 산맥을 어린 안개처럼 안고 잠을 잤을까?
수육 한 점
허수경
이 한 점 속, 무엇이 떠나갔나
네 영혼
새우젓에 찍어서
허겁지겁 삼킨다
배고픈 우리를 사해주려무나
네 영혼이 남긴 수육 한 점이여
숨
허수경
검은 녹빛
산숲 아래 마을
사냥꾼의 집
집 뒤
죽은 나무를 얼러 만든
검은 창고
걸려 있는
아직은 살아 있는
산돼지
붉고도 검은 숨
그 옆에 산딸기 술 한동이 있어
땅은 술을
구멍난 동이에서 새어나온 술을
고요히 받아들인다
컴컴한 숨
숨은 사랑
허수경
토끼에게는 옛사랑이 있어 토끼는 가끔 지그시 누르며 노래를 듣기도 한다 토끼가 듣는 노래를 나는 같이 듣는다
"돼지가 날아가는 밤하늘 융숭하다 돼지야, 새가 날지 않는 하늘은 복되다 이젠 까마귀 따위에게 하늘을 맡기지 않겠노라", 그리고,
튀긴 토끼고기를 파는 음식점이 길가에 있다 누군가의 식칼에 잘린 머리가 식당 부엌에 뒹굴고 있다 머리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버려진다 어느 벌판에 그리하여 옥수수가 익고 옥수수 머리 위로 들까마귀가 날아간다
썩어가는 토끼머리에 달린 입에는 아주 오래된 옛날 노래들이 옛님의 졸음겨운 눈처럼 어려 있고 썩어가는 눈은 날아가는 까마귀를 보고 있다
쉬고 있는 사람
허수경
환멸아, 네가 내 몸을 빠져나가 술을 사왔니?
이런 손가락 끝으로 개나리가 피는구나
나, 세간의 블록담에 기대 존다
나, 술 마신다
이런 말을 듣는 이 없이 했었다
나, 취했다, 에이 거지같이
한 채의 묘옥과
한 칸의 누울 자리
비천함!
아가들은 거짓말같이 큰 운동화를 사신었도다
누군가 노래한다
날 데려가다오, 비빌 곳 없는 살 속에
해 저문 터진 자리마다 심란을 묻고
그럴 수 있을까,
날 데려가다오
내 얼굴은 나를 울게 한다
아팠겠구나, 에이, 거지같이
나 말짱해, 세간의 블록담 위로
구름이 흩어진다 실밥같이 흩어진
미싱 바늘같이 촘촘한
집집마다 걸어놓은 홍등의 불빛, 누이여
어머니,
이 세간 혼몽에 잘 먹고 갑니다
스승의 구두
허수경
구두는 쉴새없이 낡아가고
장대동 중앙시장에는 새 상가가 들어섰다
어깨에 묻어오는 오늘의 피곤이
이십 년은 족히 넘은 스승의 서재에서
먼지로 앉고
스승은 넥타이를 푼다
새로 산 책을 넘긴다
스승은 새로운 학문을 수용하고 도시를 다스리는
정 의론과
인권론과 형평론을 안경 너머로 바라본다
눈을 부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스승은 낡아가고
구두는 현관에서 낡아가지만
내일도 장대동 중앙시장
새로 선 상가를 지나
하룻밤새 또 건물을 지은
도시의 길을 밟을 것이다
스승은 낡은 구두처럼
새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하는 것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스승이 낡아가는 것인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휠씬은 더 먼저 낡아갈 것인가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허수경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 모를 흔들 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썪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천천히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슬픔의 난민
허수경
가녀린 손가락을 가진 별 같은 독서의 시절은 왔다 세계를 읽다보면 이건 슬픔으로 가득 찬 배고픔으로 억울한 난민의 역사 같아서 빛 속에서 나던 냄새를 맡으며 세계를 여행하는 저 어린 새들에게 아버지 아버지 날 버리세요 하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아직 죽지 않은 신들 가운데 제일로 다정하던 노을이라는 신이 나에게 달력을 내밀었을 때 달력에는 술잔만 가득했고 아프리카를 떠나서 막 유럽의 해변으로 들어오던 작은 배의 난간을 붙들고 어떤 남자가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데리고 가달라고 가달라고 울부짖었다
저 지중해에 비명이 없었다면 대륙의 살갗에 거친 몸을 들이대는 배들은 아마도 지중해에서 영혼을 팔았을 터, 저 남해에 소금처럼 아스라하게 널려 있는 섬이 없었다면 우리는 울음을 몰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슬픔은 언제나 가늘게 떨린다 늙은 슬픔만큼이나 가늘게 떨면서 삭아내리는 것도 없다 아주 젊은 슬픔은 격렬하나 가늘게 떨리면서 새벽에 엎드려 있다가 해가 나오면 말라 죽는다 아주 오랫동안 슬픔은 가을의 바다 장미처럼 오랫동안 말라가는 하늘 아래 서 있다 팔랑거리는 잠자리의 날개가 가늘게 공기의 핏줄을 건드리고 갈 때 지는 장미의 그늘 아래 그렇게 조금은 나이가 더 든 슬픔이 쪼그려 있다가 밥하러 들어갔다 남자의 비명이 아프리카에서 넘어들어왔다 해맑은 밤에 따뜻한 눈물 한 방울 어려 있다 누군가 나에게 건네주는 난민의 일기장 같다
시(詩)
허수경
낫을 가져다
내 허리를 찍어라
찍힌 허리로
이만큼 왔다
낫을 가져다
내 허리를 또 찍어라
또 찍힌 허리로
밥상을 챙긴다
비린 생피처럼
노을이 오는데
밥을 먹고
하늘을 보고
또 물을 먹고
드러눕고
시간 언덕
허수경
에이디 2002년 팔월 새벽 여섯 시 삽으로 정방형으로 땅을 자른다, 비씨 2000년경 토기 파편들, 돼지뼈, 염소뼈가 나오고 진흙으로 만든 개가 나오고 바퀴가 나오고 드디어는 한 모퉁이만 남은 다진 바닥이 나온다 발굴은 중단되고 청소가 시작된다 그 바닥은 얼마나 남았을까, 이 미터 곱하기 일 미터? 높이를 재고 방위를 재고 바닥을 모눈종이에 그려 넣는다 이 미터 곱하기 일 미터의 비씨 2000년경, 사진을 찍고 난 뒤 바닥을 다시 삽으로 판다 한 삼십 센티 정도 밑으로 내려가자, 다시 토기 파편들, 돼지뼈, 소뼈, 진흙개, 바퀴, 이번에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곡식알도 나온다, 비씨 2100년경의 무너진 담이 나온다 담 높이는 이십 센티, 다시 밑으로 밑으로 합쳐서 일 미터를 더 판다 체로 흙을 쳐서 흙 안에 든 토기 파편까지 다 건져낸다
일 미터를 지나왔는데 내가 파낸 세월은 한 오백 년, 내가 서 있는 곳은 비씨 2500년, 압둘라가 아침밥을 먹으러 간 사이 난, 참치 캔을 딴다, 누군가 이 참치 캔을 한 오백 년 뒤에 발굴하면 이 뒤엉킨 시간의 순서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이 시간언덕을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
씁쓸한 여관방
허수경
꿈에도 길이 있으랴 울 수 없는 마음이여
그러나 흘러감이여
제일 아픈 건 나였어 그래? 그랬니, 아팠겠구나
누군가 꿈꾸고 간 배개에 기대 꿈을 꾼다
꽃을 잡고 우는 마음의 무덤아 몸의 무덤 옆에서
울 때 봄 같은 초경의 계집애들이 천리향 속으로
들어와 이 처 저 처로 헤매인 마음이 되어
나부낀다, 그렇구나! 그렇지만 아닐 수는 없을까
한철 따숩게 쉬긴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몸은 쉬고 간다만 마음은? 마음은 흐리고 간다만 몸은?
네 품의 꿈. 곧 시간이 되리니 그 품의 문을
누군가 두드린다, 나갈 시간이 되었다고?
오오, 네 품에도 시간이 있어
한 날 낙낙할 때 같이 쓰던 수건이나 챙겨
어느 무덤들 곁에 버려진 꿈처럼 길을 찾아
낙낙한 햇살 아래 꾸벅꾸벅
졸며 있으리라
아버지,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허수경
당신은 당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돌아갈 집이 없는 나는
모두의 집을 찾아 나섭니다
밤별에는 집이 없어요
구름 무지개 꽃잎에는 우리의
집이 없어요 나는 아버지가 돌아간
집에는 살 수 없는 것
세월이 가슴에 깊은 웅덩이로 엉겨 있듯
당연한 것입니다
전쟁을 겪어 불행한 세대가
전쟁을 겪지 않아 불행한 세대가
세월의 깃을 재우는 일조차 다른 것
그래서 나는 돌아갈 집이 없어요
배고픈 어미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땅을 가로질러
함께 일을 하고 밥을 먹고 함께 노래를 하고 꿈을 꾸
고
아버지 나는 갑니다
모두의 집을 찾아 칼을 들고
눈물 재우며
아버지의 유작 노트 중에서
허수경
여행을 한다
겨울 속으로 눈은 끝없이 내리고
새는 후두둑 ..
인적의 바퀴는 눈에 쓸려가고
우렁 우렁..雪山이 대답하는 고요
나는 발견한다
대숲..
너무 좋아서 맨발의 아가처럼
연록의 저 천진
천진은 애리다
며칠을 서성인다
들어가 보지 못하고
저 숲의 속은 자궁처럼 고요하리라
탯줄처럼 황홀의 타원
쭈글쭈글한 주름벽의 황홀
정말 가지고 싶은 것은
가져서는 안 된다
인적의 바퀴처럼 지나온 것들은
마땅히 묻을 것을 묻어준다
가져서는 안된다
이것이 나의 일생이었도다
그러나 끝내 비틈한 어께여
쓰러지고 싶지는 않았으나
끝내 쓰러지리라
쓰러진 위에..위에 발자국을 지우며
하얀 녹음 밑의 시커먼 개골창..
나의 돌아감을 나여 허락하라
나는 나에게 밖에
허락을 간구할 때가 없나니
아사(餓死)
허수경
마지막 남은 것은 생후 4개월의 소였다
씨앗을 뿌리지 못한 밭은 미래의 지평선처럼 멀었고
지평선 뒤로 새로 시작되는 세계처럼 거짓이었다
아이는 겨우 소를 몰았다
소는 자꾸만 주저앉았다
아이의 얼굴이 태양 아래에서 검은 비닐처럼 구겨졌다
소의 다리가 태양 아래에서 삼각형으로 고꾸라졌다
인간의 눈은 태양신전이 점령한 전쟁터 임시병원이었고
짐승의 눈은 지옥신전에 갇힌 포로였다
아이는 두 팔로 소를 밀었다
소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아이는 윗몸을 다 기대며 소를 밀었다
소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아이도 주저앉아 소를 밀었다
소는 빛 속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아이는 소를 제 품에 안았다
둘은 진흙으로 만든 좌상이 되어간다
빛의 섬이 되어간다
파리 떼가 몰려온다
파리의 날개들이 빛의 섬 위에서
은철빛 폭풍으로 좌상을 파먹는다
하얗게 남은 인간과 짐승의 뼈가 널린 황무지
자연을 잡아먹는 것은 자연뿐이다
아이가 달아난다
허수경
아직 해가 넘어가지 않은
거리 한 모퉁이
유리창 깨지는 소리
아이가 달아나고 있다
아이의 손에는 긴 막대기가 있고
얼굴은 시퍼러둥둥하다
불쑥 아이 앞으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선다
아직도 나는 졸면서
허수경
철물점 모퉁이에 자귀나무 연자꽃이 붉어갑니다
제 몸보다 더 큰 배터리를 동쳐맨 라디오에서
운다고 옛사랑이 흘러나오면 꾸깃꾸깃한 치마를
뒤뚱이며 역전다방 미스 김이 커피 배달 가는,
길을 가로질러 어느 문으로 사라지는 미스 김
마치 꿈의 문을 통과해서 당도하는 거대한 무의식의 아가리 같은
저 문
자귀나무 연자꽃이 봉긋한 반달의 옆구리를 털어
수염꽃을 피우고, 라디오는 제 몸보다 더 큰 동력으로
운다고 옛사랑이, 과격해진다고 옛사랑이
머리칼을 쥐어뜯고 앞가슴을 풀어헤치며, 그러나
졸면서 한낮의 햇살 아지랑이를 피워내는
철물점의 쇠사슬, 대못, 가시 철망 그러나
풀붓이며 대싸리 빗자루며
가두려는 억센 것이 풀려는 순한 것 사이에서 고대로 정돈되어 있는 저 무의식의 무심함!
미스 김은 나올 줄 모르고 채권 가방을 든
한 사내가 지나갑니다
전화 채권이나 수도 채권 사압니다
사압니다
운다고 옛사랑이 미친다고
옛사랑의 그림자가……
아침 식사 됩니다
허수경
프랑스의 어느 협곡에서 발견된 매머드의 이름을
2012년 우리는 지어준다
오십만 년 전에 죽었다는 그 매머드를
이제 우리는 헬무트라고 부른다
물론 아직 매머드의 성별이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앨리스라는 이름을 주자는 의견도 있었다
아침 식사 됩니다, 라는 현수막이 걸린 인간의 해변까지 헬무트씨를 데리고 왔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붉은 플라스틱 슬리퍼 한 짝이 보인다 해물된장찌개 속 딱딱한 꽃게 다리를 젓가락으로 건드린다 꼴뚜기의 다리도 환각처럼 찾아오는 발도 환각처럼 사라져가는 발도 건드린다 몸통을 날개처럼 팔랑거리며 바닷속으로 날아가는 미역의 영혼도 건드린다
헬무트 씨는 길게 한번 운다
현수막 밑 고무 다라이에는 낙지 두 마리 꾸물거린다 그렇게 다리를 꾸물거리면서 아직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와서 밥을 먹고 간 흔적도 고춧물이 든 플라스틱 용기들도 지옥으로 가든 천국으로 가든 아침 식사 되는 해변 식당에서 밥 먹고 가고 싶다는 마음도 어디로든 가지 못한다
낚시꾼들은 가까운 바다로 나간다 우럭을 잡아서 그 자리에서 회 친다 우리의 가장 다정한 조상 네안데르탈인들이 헬무트 씨의 고기를 구울 때, 그 표정으로 낚시꾼들은 우럭의 투명한 살을 저민다 인간의 문명에서 시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양념이다 그때에는 빨간 초장 푸른 와사비는 없었다 시간을 달이며 고독해지던 간장도
헬무트 씨는 길게 한번 운다
신문지를 깔아놓고 손가락이 아홉뿐인 내 또래의 남자가 부추를 다듬는다. 주방에서 여자가 나온다 남자가 다듬어놓은 부추를 한 움큼 집어가서는 젓갈에다 고춧가루로 금방 버무려 내게 가져온다 밥냄새와 해물된장찌개 사이에 계란프라이가 겨울달처럼 떠 있다
헬무트 씨는 길게 한번 운다
더 달라고 하세요, 모자라면
남자는 나를 흘깃거리며 바라보다가 기어이 묻는다
그 나이에 혼자 여행 왔습니까?
나는 망설이다 간신히 말한다
바로 그 나이라서요, 혼자 여행을 하다 어떤 사랑의 말도 폐기할 수 있는 그 나이라서요
이 나이가 되도록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 민폐가 되지 않게 고개를 숙인다 버려둔 어머니를 얼굴에 달고 다니는 사람처럼 나는 국에 얼굴을 박는다
국의 입김은 가냘프다 마치 발이 잘린 조개처럼 세계를 오므린다
헬무트 씨는 길게 운다 오십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에게 잡혀 먹힌 그는 이 해변에서 길게 운다
아침 식사 됩니다, 라고
아픔은 아픔을 몰아내고 기쁨은 기쁨을 몰아내지만
허수경
장님인 시절 장님의 시절 술 마시는 곳 기웃거리며 술병깨고 손에 피를 흘리며 여관에서 혼자 잠, 여관 들어선 자리 밑 옛 미나리꽝 맑은 미나리순이 걸어들어와 저의 손으로 내 이마를 만지다. 아픔은 아픔을 몰아내고 기쁨은 기쁨을 몰아내고 장님인 시절 장님의 시절은 그렇게 가고......
안는다는 것
허수경
너를 사라지게 하고
나를 사라지게 하고
둘이 없어진 그 자리에
하나가 된 것도 아닌 그 자리에
이상한 존재가 있다
서로의 물이 되어
서로를 건너가다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종이배처럼
어느 날 애인들은
허수경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고
내 영혼은 우는 아이 같은 나를 달랜다
그때 나는 갑자기 나이가 들어 지나간 시간이
어린 무우잎처럼 아리다
그때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든 별들은
기억을 빠져나가 제 별자리로 올라가고
하늘은 천천히 별자리를 돌린다
어느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쓰러지고
바람이 불어오는 사이에 귀를 들이민다 그리고
어느날 눈송이까지 박힌 사진이
허수경
간곡한 기계가 있었다
우리 앞에
우린 그 기계 앞에 서 있었다
기계는 우리를 온 힘으로 찍었다
시계탑 앞에 서 있는 너를
동물원에 앉아 있는 나를
돼지우리 앞에 앉아 있는 이종사촌과
나를 찍었다
머리칼을 짤라 팔던 날
우연히 지나가던 사진사가
날 찍었다
어느날 눈송이까지 박힌 사진이
나에게로 왔다
어느 눈 덮인 마을에 추운 아이 하나가
허수경
아이의 동무는 작은 모닥불이다 바람이 아주 센 날 아이는 자꾸 모닥불로 다가가 손을 벌린다 손을 불 속으로 집어넣는다
다리
머리
가슴
그 다음 해 이 마을에 눈이 왔는지 모닥불이 다시 피워올랐는지 아무도 모른다
곰이 반짝이는 혀로 아이의 뼈를 어루다가 입 안이 헐었고 곰의 뱃속에 다시 눈이 내렸고 그것만을 이 눈 오는 밤에 상상할 수 있을 뿐
언제나 그러했듯 잠 속에서
허수경
모르는 이가 나를 안는다
모르는 이의 잠을 나는 잔다
나는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는 수십 년 전부터 불렀는데도
부를 때마다 아프다
아파서 그만두고 싶은데
모르는 이가 자꾸 시킨다
불러, 그 노래를
잠의 가장 시끄러운 곳 속에서
떨어진 노래를 줍는다
그 너머에는 네가 있다
나보다 더 오래된 지구의 생물 하나인 너는
날개를 받고 있었지
이제 서로 안으며 세월을 먹어치우자
잠이 든 환한 네 웃음을 쓴 약밥처럼 삼킨다
겨울뜰에는 이곳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꽃이 피었고
나는 말 잃은 채 꿈의 얼음 이불이 된다
엄마와 나의 간격
허수경
엄마의 자궁 안에서
나는 엄마, 속의
섬이었다
섬은 엄마에게서
몸의 식량 공급을 받았다
영혼도 넙죽 식량 공급을 받았겠지
날을 채우고
섬은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엄마를 알아보았다
엄마와 나의 간격이라는
원초 비극을 바라보았다
그때
내 영혼의 모어가 생겼다
엄마 말이 아닌 내 말로
그 생각을 하니 웃기고도 서글프다
겨울 숲에서 혼자 병들어 죽어
풍장되는 늑대의 아가리처럼
여기에서
허수경
언어
자연
과거
여기에서 놀았다
놀았다
더러는 햇빛처럼
더러는 빗물처럼
그 사이사이
그대도 있다가 없다가
그랬다
옷을 다 벗고 욕탕에 들어가기 직전
몸 계곡 들판 등성이 수풀
한때 그대도 여기에 있었으나
그러나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이 자연은 과거가 되었고
지금 그대 없는 자연은
언어가 되었다
놀았다
더운 물속에 쓰라린 상처처럼
바람 앞에 얼굴을 가리는 새처럼
결국은 아팠다
놀았으므로 지극히 쓰라렸다
여름의 장례식
허수경
우리의 팔이 우리에게 닿는다면
둥글어진다는 걸
나는 묘지 근처
교회당에서 흘러나오던
종소리를 들으며 알았네
한 무리의 사람이
서로 포옹을 하며
서 있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그들이 같은 장례식에
참여하는지를 몰랐네
그들의 검은 팔이 안던 둥근 시간
그들의 검은 다리가 안던
푸른 나뭇가지를
나는 알아보지 못했네
당신의 입술은 황금빛 구름의 가장자리
나는 삶의 노래가 흘러나오던 곳에서
붉은 자두의 살 같은 시간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네
당신 우리의 살점 속에서 살아갔던
모든 우주인을 기억해야 해
우리 삶의 감각이 이토록 그들과 달라서
우리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순간 기억해야 해
잘가,라고 말하는 순간
얼마나 깊숙한 고요가 당신을 안아서
빛의 아기를 낳고 싶어하는지
침묵의 아이
혹은
우리가 가보지 못했던 먼 화성의
사막을 걸어가던
붉은 코끼리 같은 농담 같은
거친 피부를 향하여
내 모든 꿈속에서 하하,웃던 사람
연등 아래
허수경
밤이었구요 공중에서 흐르는 것들은 아팠는데요
쓸쓸함을 붙잡고
한세상 흐르기로는
아무려나
흐를 수 없음을 이겨내려구요
고운 것을 바라보는
당신의 마음빛이
저 불빛을 상하게 하네요 당신이 불쌍해
이 命을 다하면 어떻게 하려구요
나무 한 그루를 심고 기다리는 이
또 한 그루를 마음속에 옮겨놓고 기다리는 이
그러나 여전히 설레이는 命은 아파요
命의 갈 길은 어쨌든 움직이는 거지요
움직임 당신의 움직임 당신이 불쌍해
밤이었구요
흐르는 것의 몸이 흐르지 못한
마음을 흘러 저 燈이 나그네 하나쯤 거느릴 수 있으려면
아무려나 당신 마음의 나그네가 내 마음의 나그네를 어디
먼빛으로나마 바래줄 수 있으려구요
밤이었구요
연필 한 자루
허수경
그렸다
꿈꾸던 돌의 얼굴을 그렸다
하수구에 머리를 박고 거꾸로 서 있던 백양목
부서진 벽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어깨
붉게 울면서 태양과 결별하던 자두를 그렸다
칼에 목을 내밀며 검은 중심을 숲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다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순간을 내미는 거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멸종해가던 거대 짐승의 목
먹다 남은 생선 머리 뼈 꼬리 마침내 차가운 눈
열대림이 눈을 감으며 아무도 모르는 부족의 노래를 듣는 거
태양이 들판에 정주하던 안개를 밀어내던 거
천천히 몸을 낮추며 쓰러지는 너를 바라보던 오래된 노래
눈물 머금은 플라스틱 봉지도 그 봉지의 아들들이
화염병의 신음으로 만든 반지를 끼는 거
어둠에 매장당하는 나무를 보는 거
사랑을 배반하던 순간, 섬득섬득 위장으로 들어가던 찬물
늦여름의 만남, 그 상처의 얼굴을 닮아가면서 익는 오렌지를 그렸다
마침내 필통도 그를 매장할 때쯤
이 세계 전체가 관이 되는 연필이었다, 우리는
점점 짧아지면서 떠나온 어머니를 생각했으나
영영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단독자, 연필 한 자루였다
헤어질 사람들이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물속에서
영원한 목욕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한 자루였다
당신이여, 그것뿐이었다
오래된 시간
허수경
내가 너를 바라보자 너는
고개를 숙였네
떨어지는 꽃처럼
아주 오래된 일
비단 구겨지듯 봄 저녁
분홍 구름은 가더라
주소도 없이
꽃 엽서들은
어디론가로 가더라
이제 별이 와서
꽃 없는 자리를 채울 시간
네 눈이 내 가슴의 불편한 거울을
바라보는 시간
물처럼 투명한 바람
노을이 든 물
오래된 일
허수경
네가 나를 슬몃 바라보자
나는 떨면서 고개를 수그렸다
어린 연두 물빛이 네 마음의 가녘에서
숨을 가두며 살랑거렸는지도
오래된 일
봄저녁 어두컴컴해서
주소 없는 꽃엽서들은 가버리고
벗 없이 마신 술은
눈썹에 든 애먼 꽃술에 어려
네 눈이 바라보던
내 눈의 뿌연 거울은
하냥 먼 너머로 사라졌네
눈동자의 시절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하던
지독한 봄날의 일
그리고 오래된 일
오래전에 잊은 이의 눈썹
허수경
푸른 안개의 품 안에 배나무가 떨고 있다오
가지에는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은 배 하나가 달려 있다오
안개가 걷히면서 바람 부는데
농익은 배 향기는 은은하게 울려온다오
종소리를 듣는 것 같아
배나무의 영혼은 먼소리처럼 떤다오
오래전에 잊은 어떤 이의
눈썹 같은 게 차올라왔다오
오렌지
허수경
우리의 팔은 서로에게 닿으면서 둥글어졌다 묘지 근처 교회당에서 울리던 종소리처럼 그곳에서 우리는 서로 안았다 우리의 검고도 둥근 시간, 그리고 그 옆에서 오렌지 나무 하나가 흔들거렸다
누가 오렌지 화분을 들고 왔어! 장례식에 이토록 잔인한 황금빛 우물을? 우리는 항의했다
너는 말했다,
"나는 오렌지를 좋아했으니까 오렌지 열리는 더운나라로 가서 하얀 집의 창문가에 앉아 달이 떠오르는 바다를 깨물고 싶었으니까"
오렌지 나무는 아무 말 없이 녹빛 그늘의 눈을 우리에게 주었다 단단한 잎은 번쩍거렸다 나는 너에게 둥글게, 임신 말기의 여름에 열리던 아주 둥근 열매처럼 단 한 번만 더 와달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잘 가, 라고 말하는 순간 깊숙한 고요는 얼마나 너를 안고 빛의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가 나는 모른 체했다 그것이 오렌지가 열리는 여름에 대한 예의였다 오렌지 안으로 천천히 감기고 있는 너의 눈꺼풀을 나는 보았다
우리의 몸은 추상화가 아니었다 우리는 내일이라도 이 삶을 집어치우면 먼바다로 가서 검은 그늘로 살 수도 있었다 언제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몸은커녕 삶도 추상화가 아니어서
몸속 황금빛 동굴에는 반달 같은 오렌지 조각이 깨어져 있다 여린 껍질 속, 타원형 눈물들이 촘촘히 박혀 시간의 마지막 빛 아래에서 글썽거렸다 우리는 여름 속에 들어온 푸름이 아니라 푸름의 울음이었다
잘 가,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난다면 어떤 춤을 추면서 너와 나는 둥글어질까, 여름의 장례식, 우리는 오래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우리는 오렌지의 영혼을 팔에 안으며 혼자서 둥글어졌다 잘 가, 원점으로 어두워가던 너의 발이여, 오렌지빛의 소풍이여
오이
허수경
어라,
아직 여름길은 제대로 나지 않았는데
오이넝쿨의 손은 하늘을 더듬더라
그때 노란 꽃이 후두둑 피기 시작하더라
아직 여름길은 나지 않았는데
바다로 산책을 나간 새들은
오이 향을 데리고 저녁이 닫히기 전 마을로 돌아오더라
오이꽃에서는 바다의 향기가 나더라
바다에 빠진 태양빛 같은 새들의 수다 속에서
꽃은 지고 오이 멍울이 화반에서 돋아나더라
여름길이 열리고 그 노란 꽃 가녘에
흰 나비는 스르르 속옷을 열더니 쪼그리고 앉더라
먼 사랑처럼 기어이 휘어지면서 오이가 열리든 말든
오후 두 시경
허수경
영상 15도
바람은 서북, 구름
아침에 잠깐 안개구름이 지나가고 난 뒤
맑은 하늘
오후 두시경
문 앞에 하얀 병원차가 서고 들것을 들고
하얀 남자들이 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다
배달한 음식의 빈 식기를 가져나오듯 무념한 얼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거미줄, 정원, 그림 같은 꽃, 구두 한짝,
그리고 반쯤 열린 문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허수경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꿈 같은가 현세의 거친 들에서 그리 예쁜 일이라니
나 돌이켜 가고 싶진 않았다네 진저리 치며 악을 쓰며 가라 아주 가버리라 바둥거리며 그러나 다정의 화냥을 다해 온전히 미쳐 날뛰었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 등꽃 재재거리던 그 밤 폭풍우의 밤을 향해
나 시간과 몸을 다해 기어가네 왜 지나간 일은 지나갈 일을 고행케 하는가 왜 암암절벽 시커먼 바위 그늘 예쁜 건 당신인가 당신뿐인가
인왕제색커든 아주 가버려 꿈 같지도 않게 가버릴 수 있을까,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내 몸이 마음처럼 아픈가
온몸 도장
허수경
꽝!
그리고 저 온몸 도장
부딪힌 쪽이 더 선명하고 부딪힐 때 머리를 돌린 흔적까지 있는
유리창에 찍힌 새의 온몸 도장
새는 뇌진탕으로 추락했을까,
마당에 나가본다
없다, 새는. 고양이가 금방 다녀갔나
없다, 온몸 도장은 있다
없다, 유리창 이쪽과 저쪽 사이에는 제 삼의 세계가 존재하나
그 세계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새는 온몸 도장을 찍었나
마당에는 빛만 가득하다
빛 속으로 온몸 도장마저 끔찍하게 사라진다
유리창에는 내 그림자만
검은 온몸 도장 같은 내 그림자만
사라지자!
끔찍하게 저 도장 너머로
그런 다음 무얼하지?
아직 마당엔
빛의 연기가 하얀데
빛의 향기만이 멈추어 섰는데
우리는 같은 지붕 아래 사는가
허수경
2
귀가길 골목길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나도 아버지도 술에 취해 있다
아버지 미국이 우리의 숨통을 조여요
얘야 월급을 다 못 타왔다
아버지 군부독재가 우리의 먹을 양식을 빼앗아가요
얘야 너의 어머니 관절염은 어쩌지
아버지 분노가 눈앞을 막아요
그들이 몰려와 동료들을 개처럼 끌고 갔어요
얘야 숱한 동료들이 사라져간다
나는 쓸쓸하다 다만
무력할 뿐 무력한 세계에서
건강할 뿐
대문을 연다
다녀왔습니다
골목길에 그림자를 남겨두고
아버지는 장년의 그림자를
나는 청년의 그림자를
그리하여 우리는 불안하다
집으로 돌아왔음에도 자꾸
3
아버지는 불심검문을 당하지 않는다
나는 속주머니까지 거리에서 공개 당한다
사복형사가 이정표처럼 거리에 박혀 있을 때
아버지는 나를 걱정한다
우리의 걱정은 사복들의 뒷주머니 무전기에서 만난다
무전기에서 우리의 불안이 왱왱거린다
불안이 무전기를 노려본다
무전기 공화국의 신민인 아버지는
좌경용공신고 계몽포스터 앞에 선다
아버지 칼 맑스와 레닌을 알고 있는 아버지
맑스와 레닌이 아버지의 신경을 깨문다
아버지 러시아 혁명과 남로당사를 은근히
은근히 뒤져여 보는 아버지
아버지, 저를 신고하지 마세요
흔하디흔한 집에서조차
우리가 분단되어 버린다면
4
조선 산천이 궁기로 허덕였을 때에도
어머니는 아리따운 처녀 아버지는
어머니의 젊음 속에 당신의 젊음을 더해
피로 엉긴 나를 세웠으나
발바닥까지 시대의 통증을 아로새겨 놓고
그녀의 아랫도리 삭신을 갉아먹은
아버지와 나는 공범자이다.
- 당신과 딸한테는 언제나 최루탄 냄새가 나오 최루탄 냄새 거두어 빨래를 하고 나면 행굼물 속에는 나의 눈물이 첨벙거려 오 오 제발 밥상에는 시대의 뒷모습이 제발 우리의 양식으로 들어오지 말게 우리의 반찬 양념으로 달라붙지 말게 그리고 안녕히. 대문 밖에서 안녕히. 건강하게.
우리들의 저녁식사
허수경
토끼를 불러놓고 저녁을 먹었네
아둔한 내가 마련한 찬을 토끼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 요리는 토끼고기
토끼도 토끼를 먹고 나도 토끼를 먹는다
이건 토끼가 아니야, 토끼고기라니까!
토끼고기를 먹고 있는 토끼는 나와 수준이 똑같다
이 세계에 있는 어떤 식사가 그렇지 않을까요
풀을 불러놓고 풀을 먹고
추억을 불러놓고 추억을 같이 먹고
미움을 불러놓고 미움을 같이 먹었더랬지요
우리는 언제나 그랬지요
이 세계에 있는 공허한 모든 식사가 그랬지요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허수경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죽음을 당하기 전에
브레멘으로 가면 뭐가 있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곳에 가면 음악대에 들어갈 수는 있다고
늙은 나귀가 말했지
브레멘이라고 들어봤어?
그곳은 어디에 있나?
그곳이 있기나 하나?
더 이상 죽음 없이 견딜 수 있는 흰 시간은 오지 못할걸
이 세계에서 가장 빛이 많은 곳에
가장 차가운 햇빛은 떨어지고
죽음보다 조금은 나은 일들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네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이 세계에는 없는 곳으로 가는 거야
나귀와 개, 고양이와 수탉이 되어
주야장천 붉은 음악에 몸을 흔들면서
없는 곳을 찾아가는 여행을 하다가
도둑의 집 그 심장 속에서
음악을 허겁지겁 집어 먹으며
물어보는 거야
아니, 브레멘이라는 곳은 도대체
있는 거요, 없는 거요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허수경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삶과 연애 중이라고 생각하라고 심리상담사는 말했다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나가볼까 생각한다 생계를 위해서라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먹는 것보다 자는 것이 중요하다고 심리상담사는 말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더라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가끔 심리상담사를 죽이는 꿈을 꾸다가 그가 내 얼굴을 달고 있는 장면에서 꼭 잠을 깬다 내 얼굴을 향하여 내가 칼을 들이밀고 있었으므로
그때 그 어느 날 심리상담사에게 죽은 허 씨에게, 라고 시작되는 편지를 보여주지 말아야 했다 얼어죽은 국회에게, 라는 편지도 맞아 죽은 은행에게, 우주로 납치된 악몽에게, 달에 있는 나의 거대한 저택에게, 라고 시작되는 편지도 어떤 편지도, 아니 내가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식물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나는 동물의 말을 하는 식물입니다
나는 희망의 말을 하는 신입니다
나는 유곽의 말을 하는 관공서입니다
나는 시계의 말을 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개가 꾸는 꿈입니다
등등의 고백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고백하고 말았다(물론 나는 그걸 강제된 고백이라고 부르고 싶기는 하다) 나라는 나쁜 인간을 방어할 무기가 나에게는 필요하다 나를 공허하게 버려줄 무기가 너에게는 필요하다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오늘 오후에 있는 그와의 약속을 생각한다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진 대기실도 대기실에 붙여둔 자살 위험이 있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특징에 대해서도 내가 읽어보면 그들은 다 살지 못해서 안달한 사람인데 심리상담사의 꼬임 혹은 그의 인턴이 건네주던 하얀 줄이 박힌 푸른 사탕 때문에 나처럼 고백을 한 사람들일 뿐인데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웃는다 울 일이 없어서 심란한 아이 같다
우연한 감염
허수경
만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몰랐을까 나의 출생지는 우연한 감염이었네 사랑이나 폭력을 그렇게 불러볼 수도 있다면
폭력에서 혹은 사랑에서 어디에서 내가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지금 보고 있는 이 세계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에게는 없는 것일까
태어나지 못한 태아라고 고독이 없는 것은 아냐 사랑의 태아 폭력의 태아 태어나지 못한 태아들은 어쩌면 고독의 무시무시함을 안고 태어나지 못한 별에서 긴 산책을 하는지도 몰라
태어난 시간 59분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0시 사이, 미쳐버릴 것 같은 망설임으로 가득 찬 60초 속에는 태어나기 직전의 태아와 사라지기 직전의 태아가 서성거리네
태어나게 해, 태어나게 하지 마, 폭력이든 사랑이든 이건 조바심과 실망의 모래사막에 건설된 오아시스인데 나의 망설임은 당신을 향한 사랑인지 아니면 나를 향한 폭력인지
우연한 감염 끝에 존재가 발생하다가 갑자기 뚝 끊겨버리는 적막의 1초
어디론가 가버린 태아들은 태어나지 않은 오후 5시에 흘러나올 검은 비 같은 뉴스를 들으며 구약을 읽을 거야 그 뒤에 흘러나올 빗물 같은 레게 음악을 들으며 바빌론 점성가들에게 문자를 보낼 거야
모든 우울한 점성의 별들을 태아 상태로 머물게 해요, 얼굴 없는 타락들로 가득 찬 계절이 오고 있어요, 라고
우연한 나의
허수경
내 마을은 우연한 나의 자연
내 말은 우연한 나의 자연
고속도로 위에 새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새의 살을 들고 가서 누구도 삶지 않았다
우연히 죽은 새는 아무도 먹지 않네
살해당한 새만 먹을 수 있네
운수 좋은 여름
허수경
테러리스트가 내일 지날 길을 오늘 걸어서 납치당하지는 않았다 지진이 난 도시의 여관에 한 달 후에 자지 않아서 내가 잠잔 여관이 폭삭 내려앉는 것을 텔레비젼으로 볼 수도 있었다
하염없이 걷다가 아, 이대로 이 금빛 들판, 떠나도 괜찮겠다 했다 어디 다시 도착해도 좋겠다 했다 천지간, 그 사이에서 실종되어도 그만 그러려니 했다 그래서 내 여름의 신발은 닳았다
시간의 가슴에서 또 하나의 시간이 나와 태양을 가두었다 세상은 컴컴해졌다 비가 왔다 그 비를 맞으며 바위들은 어둑어둑 가슴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바위에다 자신의 영혼을 나누어 주었던 독수리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흙은, 이제 막 우리가 깨워낸 흙은 가슴에 묻어둔 토기를 보여주며 침묵했다
토기는 발을 잃은 채 하늘의 서재에 꽂혀 있고 별들은 하늘의 서재에 가득 찬 책장을 넘겼다 밤의 벌들은 꿀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꽃의 잠을 모았다 그 잠 속에서 나는 이렇게도 하릴없이 중얼거렸다
당신 참 나쁘다 당신 참 이쁘다 운수 좋은 여름이라서 당신과 아주 조금만 헤어졌다 떨리던 여름은 고요한 몸이 되어 멀리 있는 당신을 안았다
울고 있는 가수
허수경
가수는 노래하고 세월은 흐른다
사랑아, 가끔 날 위해 울 수 있었니
그러나 울 수 있었던 날들의 따뜻함
나도 한때 하릴없이 죽지는 않겠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돌담에 기대
햇살처럼 번진 적도 있었다네
맹세는 따뜻함처럼 우리를 배반했으나
우는 철새의 애처러움
우우 애처러움을 타는 마음들
우우 마음들이 가여워라
마음을 빠져나온 마음이 마음에게로 가기 위해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은 나를 울게 한다
울 수 있음의 따뜻했음
사랑아, 너도 젖었니
감추어두었던 단 하나, 그리움의 입구도 젖었니
잃어버린 사랑조차 나를 떠난다
무정하니 세월아,
저 사랑의 찬가
원폭 수첩
허수경
1
버섯처럼 달아오르는 죽음의 잠 속으로 다시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다면
달아오르는 아득한 저 꽃떼 사이
은밀한 자리 있어
썩어가는 이 육신 눕힐 수 있다면
그러나 지금은
히로시마 지하부품공장
쇳가루로 날리는 식민지 백성 천대에 묻혀
조국도 동포도 외면했던 내 썩은 삭신 사이 사이
더럽게 진물 이는 고름 흐르네
죽음조차 고통스러워 고통스러워
삶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워
아 죽을 때라도 아련히 취하여
양귀비 먹고 아련히 취하여
다시 태어나면 돌아오지 않으리
사람으로 돌아오지 않으리
식민지 백성으론 돌아오지 않으리
2
밀려오는 복통으로 잠 못 이뤄 퉁 퉁
부은 두 다리 주무르는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원폭의 밤
칠흑 같은 어둠 저 너머
소녀는 실려가고 있었습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사십만 목숨이
일거에 도륙되던 그날
번적이는 섬광 눈부신 불길이 오르고
그것으로 그만이었습니다
미치게 살 타는 비릿내
구역질나는 거리
폐허의 거리를 트럭은 시체를 싣고
미처 숨 놓지 못한 목숨들도
마구 싣고
바다에 버리고 불로 태우고 구덩이에 묻던
원폭의 도륙보다 더 짐승 같은
도륙 속에
트럭 꽁무니에 매달려 애원하던 소녀
온몸에 불을 뒤집어쓰고
남은 숨 모두어
통곡하던 소녀
살려주세요 난 아직 안 죽었어요
학도보국대 미쓰비시 군수공장 잡역부
검은 몸뻬 목노발
검은 밥에 소금국
눈부신 꽃세월 마른 버짐으로 피어나던
조선 소녀여
3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김씨는
외상 없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고
외면했던 소녀는 히로시마에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 후 칠년 뒤 원폭의 자죽은
김씨를 덮쳐
아, 김씨도 트럭 꽁무니에 매달려 버려지고 있었습니다
조국처럼
살려주세요 난 아직 안 죽었어요
죽을 것 같은 고통으로 몇 번을 까무라치고 배를
움켜쥐고 마루로 기어나오면
칠흑 같은 어둠 저 너머
그 소녀가 실려가고 있었습니다
치료 한 번 못 받고 버림당한 김씨의
느티나무 건너 천수답 나락처럼
꺼멓게 말라가며 외치고 있었습니다
살려주세요 난 아직 안 죽었어요
조국처럼
4
피로 이어지는 천역의 삶
더 이상은
남기지 말자
두번째 유산을 하고 쓰러질 듯 돌아오는
최여인은 원폭 캘로이더로
사지 무기력증에 빠진 조국의 개망초 둑길을 걸어오는
최여인은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남기지 말자
설핏 노을이 지고
어느새 만월
한번도 온전하게 채워보지 못한
거덜난 원폭의 자궁
태어나면 천역을 온 몸에 이고
서럽게 살아야 할 아기는
에미 칼에 찔려 피투성이로 뒹굽니다
남기지 말자
용서해라
나의 자궁은 저 만월만큼 꽉 차보지 못할지니
조국이여
빼앗기기만 했던 원통한 에미의 삶과
에미한테 죽은 아기의 태어나지 않은 꿈과
6
오늘도 날품을 팔고
기진한 어미가 사천군 곤양면
슬레이트 지붕 아래 들어선다
원자병 치레로 남편도 몸서리치며
떠난 집
스물이 지새도록 제 이름 하나
가리지 못한 원폭 배냇병신 딸은
오줌똥 범벅이 된 채 잠이 들었다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다
썩어가는 손으로 우물물을 길러
더럽혀진 속곳을 씻는다
썩어 잘려나간 손가락으로 씻는다
심십 년 넘도록 회신이 없는 진료비 청구서처럼
무심히 떠오르는
악성종양, 달.
사천군 곤양면 슬레이트 지붕 아래
원폭모녀는
방사능 화상반흔으로 박혀 있다
유령들
허수경
유모차 느리게 지나가는 지팡이 짚은 노인 자전거를 타고 가는 젊은 학생들 쿨럭거리는 기침소리 비둘기들 최루탄 죽어서 해안으로 밀려온 밍크고래 백일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날아서 대양을 건넌다는 새들 사기꾼의 얼굴 선의와 악의가 겹치는 회색의 지점에 비는 내리고 지중해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이 이 독일의 도시를 걸어다녔지 저 상당 앞에서 죽은 채 뻗어 있는 지빠귀 좀 봐. 그 옆에서는 이봄의 매발톱꽃이 피어나는데 국회에서는 난민 때문에 드는 돈은 누가 부담할 거냐고 묻는다
그러니까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꾸다가 물에 빠져 죽는 것이 21세기의 일입니다
가축을 실어나르는 배로도 쓰이지 못하는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다가
울었던 울음은 에볼라의 열로 죽었습니다
왜 밍크고래는 해안으로 죽은 채 걸어왔을까요
사천여만 원에 낙찰되어 대한민국 국고에 귀속되었을가요
밍크고래는 대한민국과는 아무 상관 없이 살다가 죽었다는데요
빛을 집어먹는 무언가가 봄저녁에 꽃잎을 지게 하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운다
그래서 하는 일이기도 하지
우리가 함께 살았던 별은 그때 폭발해버렸다고
가끔 바람이 심어놓은 씨앗에서
우리 별에 살던 매발톱꽃이 피어나기도 하지
그러다 봄 어둠 속에서 별들이 지네
별들이 많다고 쓰다가 이생에 다시 만날 사람들의 숫자가 자꾸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더러 만나보지도 못했던 유령들도 있어서 누군가 영혼의 물을 따라주자 나는 그걸 눈물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네
새벽이면 내게서 나간 새들은 울었고
새 없는 내 속에는 공허를 집어 먹는 괴물이 새들의 날갯짓을 울음으로 들었다
유리걸식
허수경
이 지상에서
가난뱅이의 속량은 꿈 같은 것
그래서 장엄한 해를 뒤로하고
밤섬엘 간다
새랑 살기는 어디 쉬운 일인가
새 사이를 다니며 새에게
유리걸식해야 하는데
일이 이쯤 되면 차라리
새의 먹이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내 몸 구석구석 쪼아대며
나를 무참하게 유리걸식한 새떼가
어서 어서 자 그리고
거대하게 이 지상에서 속량되도록
자 그리고 어서 어서 속량되면서
이 지상이 끝나도록
유배 일기
허수경
안개의 쓸쓸한 살 속에 어깨를 담그네
유배지의 등불 젖은 가슴에 기대면
젊은 새벽은 이다지도 불편하고
뿌리 뽑힌 꿈의 신경이
막막한 어둠 속에서 부서지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장 그리워
쫓아낸 자의 어머니가 될 때까지
이 목숨 빨아 희게 입을 때까지
음악 선생님 또랑또랑
허수경
또랑또랑 걷던 여자
구두 뒤축이 닳아도 또랑또랑 걷던 여자
장딴지에 끓는 물에 덴 자국이 있어
스타킹을 신어야 했던 여자
언제나 치마를 입고 싶었던 여자
그 여자가 들고 가는 가방 속에는
릴케의 시집이 있고
포도줏빛 루즈가 들어 있고
주소록과 지갑이 있고
멀리 두고 온 아이 사진 한 장 있고
혼자 점심 먹으러 나온 여자
또랑또랑 김밥 먹으러
학교 뒷문을 빠져나오던 여자
불길한 골목을 걸으면서
찢긴 치마를 여미던 여자
이 가을의 무늬
허수경
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지난여름을 촘촘히 짜내렸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리기 시작했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
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한다 낡은 외투를 그의 등에 슬쩍 올려준다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 챘을까? 그랬을 거야, 그랬을 거야 저렇게 툭툭, 털고 다시 가네
오므려진 손금처럼 어스름한 가냘픈 길, 그 길이 부셔서 마침내 사윌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이국(異國)의 호텔
허수경
휘파람, 이 명랑한 악기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 속에 날아온 철새들이 발명했다 이 발명품에는 그닥 복잡한 사용법이 없다 다만 꼭 다문 입술로 꽃을 피우는 무화과나 당신 생의 어떤 시간 앞에서 울었던 누군가를 생각하면 된다
호텔 건너편 발코니에는 빨래가 노을을 흠뻑 머금고 붉은 종잇장처럼 흔들리고 르누아르를 흉내 낸 그림 속에는 소녀가 발레복을 입고 백합처럼 죽어가는데
호텔 앞에는 병이 들고도 꽃을 피우는 장미가 서 있으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장미의 몸에 든 병의 향기가 저녁의 공기를 앓게 하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자연을 과거시제로 노래하고 당신을 미래시제로 잠재우며 이곳까지 왔네 이국의 호텔에 방을 정하고 밤새 꾼 꿈속에서 잃어버린 얼굴을 낯선 침대에 눕힌다 그리고 얼굴 안에 켜지는 가로등을 다시 꺼내보는 저녁 무렵
슬픔이라는 조금은 슬픈 단어는 호텔 방 서랍 안에 든 성경 밑에 숨겨둔다
저녁의 가장 두터운 속살을 주문하는 아코디언 소리가 들리는 골목 토마토를 싣고 가는 자전거는 넘어지고 붉은 노을의 살점으로 만든 칵테일, 딱 한 잔 비우면서 휘파람이라는 명랑한 악기를 사랑하면 이국의 거리는 작은 술잔처럼 둥글어 지면서 아프다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울울해도 좋아 그러니 오늘은 조금 우울해도 좋아, 라는 말을 계속해도 좋아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허수경
감꽃이 질 무렵 봄비는 적막처럼 내렸다
감꽃 천지
군화 발자욱이 그 위를 덮친다
집집마다 아픈 아이들
가위 눌린 잠 속으로 감꽃은
폭풍처럼 휩쓸고 다닌다
여러 살 속에 시린 날을 세우고
발진처럼 불거져 내리는 감꽃
대문 두드리는 소리
비명소리
미친 듯 떨어지는 감꽃 꼭지
그 위에 적막처럼 봄비가 내린다
날이 밝으면
왜 이리 조용하지 이상하다
아버지는 쓴 입 속으로 물을 넘긴다
먼 둔덕 애장터
오지 사금파리가 아리게 반짝이고
어른들은 화전을 부친다
오미자 물을 우려낸다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입맞춤
허수경
그 양반 생각만 하모 지금도 오만간장이 다 오그라붙제
무정한 양반 아니여 유정한 시절 꽃 분분 가슴살에 꽂힌
바람 된통부를 꽃물 듣는 아린 날 눈뜨면 멀어질새
눈감으면 흩어질새 부러 감은 듯 마는 듯 다소곳 숨죽인 듯
화들짝 불에 데인 듯 떨며 떨며 천지간에 둘도 없이
초승달 떼구름 흰 옷고름 개켜 넣으며 설핏허니
굴참남게로 넘어가면 이년 눈이 뒤집혀 병든 애비 버려두고
꺼짐부리 살림 접어두고 고만 밤도망질 치고 말았제 무정한 양반
대처살이 모질새 애먼년 눈 맞춰 나 버려두고 간 뒤
그 밤만 생각하모 불쌍한 울 아버지 쿵쿵 가래 기침에 엎어지며
끓여 먹을 냄비밥 간장종지가 더 애닯데이 더 목매인데이
입술
허수경
너의 입술이 나에게로 왔다
너는 세기말이라고, 했다
나의 입술이 네 볼 언저리를 지나갔다
나는 세기초라고 했다
그때 우리의 입김이 우리를 흐렸다
너의 입술이 내 눈썹을 지나가자
하얀 당나귀 한 마리가 설원을 걷고 있었다
나의 입술이 너의 귀 언저리를 지나가자
검은 당나귀 한 마리가 석유밭을 걷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거리의 모든 쓰레기를 몰고 가는 바람
너의 입술이 내 가슴에서 멈추었다
나의 입술이 네 심장에서 멈추었다
너의 입술이 내 여성을 지나갔다
나의 입술이 네 남성을 지나갔다
그때 우리의 성은 얼어붙었다
말하지 않았다
입술만 있었다
잎새라는 이름
허수경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새가 있다면
아주 조금 먹고 길게 우는 새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바람이 있다면
그 바람 속에서 날려가는 우산은 가볍겠지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눈이 있다면
따뜻하고 보드라운 깃털일 거야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폭풍이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사막이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심해가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탱크가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테러리스트가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전쟁이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군인이 있다면
내가 기다리는 곳까지 와서
맑은 차를 마시다 잠이 들 거야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잘 차려진 저녁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잘 저문 저녁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잘 여문 밤
별이 새처럼 지저귀는 언덕에서
잠드는 해도 잎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면
잠든 해 별의 먼지 아래
잎새라는 이름을 가진 당신이 있다면
얼마나 순한 눈썹을 당신은 가지고 있을까
잎새라는 이름은 가진
이미 뭉개진 꽃의 세월이 있다면
잎새라는 이름의 자전거를 타고
우주를 달리면서 세월은
잎새, 잎새라고 속삭이지 않을까
자두
허수경
익은 속살에 어린 단맛은 꿈을 꾼다 어제 나는 너의 마음에 다녀왔다 너는 울다가 벽에 기대면서 어두운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너의 얼굴에는 여름이 무참하게 익고 있었다 이렇게 사라져갈 여름은 해독할 수 없는 손금만큼 아렸다 쓰고도 아린 것들이 익어가면서 나오는 저 가루는 눈처럼 자두 속에서 내린다 자두 속에서 단 빙하기가 시작된다 한입 깨물었을 때 빙하기 한가운데에 꿈꾸는 여름이 잇속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말 이전에 시작된 여름이었다 여름의 영혼이었다 설탕으로 이루어진 영혼이라는 거울, 혹은 이름이었다 너를 실핏줄의 메일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다시 자두나무를 바라보았다 여름 저녁은 상형문자처럼 컴컴해졌다 울었다, 나는 너의 무덤이 내 가슴속에 돋아나는 걸 보며 어둑해졌다 그 뒤의 울음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자두뿐이었다
자서(自序)
허수경
스승은 병중이시고 시절은 봄이다.
속수무책의 봄을 맞고 보내며 시집을 묶는다.
사랑은 나를 회전시킬까, 나는 사랑을 회전시킬 수 있을까, 회전은 무엇인가, 사랑인가.
나는 이제 떨쳐 떠나려 한다.
1992년 4월
허수경
저 나비
허수경
때로 버려지는 아픔이여 때로 노래하는 즐거움이여
때로 오오하는 것들이여 아아 우우 하는 것들이여
한 세계를 짊어진 여린 것들의 기쁨이여
그 기쁨의 몸이 경계를 허물며 너울거릴 때 때로 버려지는
아픔과 때로 노래하는 즐거움의 환호 그 환호의 여림
때로 아아 우우 오오 그런 비명들이 짊어진 세계여
때로 아련함이여 때로 꽃이나 뿌리는 마음된 몸이여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
허수경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 나비를 보았네
저녁에 흙을 부드럽게 만져
막 나오는 달리아를 편하게 하려다가
나비를 보았네
나비가 날아가는 곳을 멍하니 보는데
턱 허니 의젓하게 차오르는 눈물
언제부터인가
야간등을 단 밤하늘의 비행기를 보면
무슨 이 지상에서 살아남을 권리이듯
눈물이 의젓하게 차올랐네
저 안에 마늘쪽같이 아린 집이 있어
야간등을 달고 나비들은 그 곁을 지나는지도 모른다
나비가 저녁 햇살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잠자리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네
여린 빛마저
울음 오므리듯 투과하는 날개를 가져서
어떡할 것인가
저녁의 미래
허수경
밤에 장미가 지는 것을 보고
아름다운 편지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공간
저녁의 미래, 지구의 밤
편지에는 시계가 없었지
별 같아서
언제나 과거에서 오는 별빛이어서
과거 없이 미래만 반복되는 지구여
그러길래 편지를 쓰던 우주의 빛이
이젠 내 과거가 되어
무한히 반복되는 저녁의 미래,
장미가 지는 공간 안에서 편지를 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저 별은
우주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르지만
와 다오 와 다오 과거인 별들이여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링거병을 주렁주렁 달고서라도
별들이여 먼 과거의 미래를
네 눈 속에 안약처럼 날 넣어 다오
저녁 직전
허수경
집으로 선뜻 들어설 수 없는 마음
강으로 간다
강가에 서서 먼 날을 되돌려
오늘인 듯 내일인 듯
목숨을 걸고 꽃피웠던
어제인 듯 추억한다
우리 그날 비닐우산으로 노을을 가려 쓰고
그 안에서 웃었지?
레이스 달린 양말을 신고 학예회에 나온
우리들의 영혼이
비닐우산 아래 그리고 우산을 감싸 안고 있었던 노을처럼 다사로웠지?
아아, 얼마나 우리는 웃겼니?
삶으로 머리칼을 묶고 죽음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도 모자라
세기 밑을 흐르고 있는 물 아래 잔돌처럼 힘차게 다시 엎드리고 있자, 했지?
잔잔한 물꽃들을 열어보자, 했지?
그러지 않았니? 연인아,
내 장년의 팔이 너의 존재를 살짝 건드리자
아아, 먼 고양이 소리를 내며 붉게 오므라드는 연인아
어이 어이 하고 바람 온다
거 섰지 말고 여로 오지 하고
바람이 태양에게 말 건다
나의 멍든 작은 피리들아
저 강 안에서
헤엄치는 노래 직전의 것들아
다 보내고도 아직 내 마음에 차 있는
정다운 쓰림아
저녁 오지 않는다
저 멀리서 바람이 태양과 함께
노닥이느라 저녁은 하늘솥에 아직 갇혀 있다
나의 옛 수다스러운 새들아
저 강 안에서
톡 톡 물을 쪼고 있는 시린 부리들아
파드득 날아오르는 저녁 직전의 것들아
저 산수(山水)가
허수경
저 山水가 날 기댈 데 없이 만드네 저 유정한 山水가
저 혼자 무정한 시절을 거느리려고 하는가
나 돌아갈 곳 저곳뿐 저곳뿐 생각나면 언제나,
비린 찬 올라오는 아침 밥상처럼 아늑한가
저건 처녀의 무릎, 저건 지옥
그야 뭐 다 놓아버리면 그만이지요
담담한 수채의 지옥, 그러나 저곳마저 기대지지 못한다
면 나 도시의 뒷골목에서 죽어야 하나
죽어 발목에 명찰을 달고 저 山水 속에 버려져야 하는
가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생각하며 가버려야 하는가
저 잣숲
허수경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린 푸른 가시들은
햇빛으로 나를 향해 저의 침을 겨누고 있었지요
나는 일종의 포획된 짐승 같은 거였는데
그러니까 저 수성의 내가 느끼는 건 뭐였겠습니까
나는 저 여린 가시들 속에 그러나 혼곤해 있었는데
가시들이 몸을 뚫고 들어와 나는 꿈틀거리며
가시를 바투어내느라 팥죽같이 끓어올랐는데요
그러나 그렇게 약든 마음은
푸른 여린 가시만이 보였을 터지요
일종의 포획된 짐승이었던 나는
실히 기린이나 한 마리 되어 이 세계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지금은 잣이나 쏟아내는 거였는데......
정든 병
허수경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등불의 세상은 어둑어둑 대책없습니다
정처없는 건들거림이여
허수경
저 풀들이 저 나무잎들이 건들거린다
더불어 바람도
바람도 건들거리며 정처없이
또 어디론가를......
넌 이미 봄을 살았더냐
다 받아내며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난 이미 불량해서 휘파람 휘익 까딱거리며
내 접면인 세계도 이미 불량해서 휘이익
미간을 오므려 가늘게 저 해는 가늘고
비춰내는 것들도 이미 둥글게 가늘어져
둥글게 휜 길에서 불량하게
아픈 저 정처없는 건들거림
더불어 바람도
또 어디론가를......
조선식 회상
허수경
1
목도군 칠팔이 목청 맞추어 내 양식 내 어깨로 식민지 기차에 실어 보내는 해 어스름 어기야 여차 목도셰랴 네게 가면 순사새끼 제게 오면 자식새끼 어기야 여차 목도셰라
낮술에 불큰해진 산미증산 깃발 펄럭이며 기차는 가고 먼발치로 심심파적타가 철길을 따라 호두 알 굴리며 돌아오는 맥고모자 아버지의 아버지
2
그를 아는가
진주 옥봉골 한량에다 독립투사 군자금을 대주던
그를.
낮에는 일인의 등을 쳐서 지전을 부리고
밤에는 남몰래 밤손님을 맞아 지전꾸러미를 건네주던
그를.
낮에는 일인들과 어불려
조선사람 마빡을 쥐어박고
밤에는 북간도 잔설 묻혀 오던
남루한 조선사람 등을 감싸 쥐던
그를.
그를 아는가 아버지여
서로 아랫도리가 묶여져
백 번을 도리질해도 남이 아닌
그를.
10
?아버지는 부산 제일(第一) 부두
일당 칠백 환 가대기로 등줄기가
피 터져 흐른다
흑인 병사의 채찍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 죄라고 한다
사형이 집행되던 날
산청에서 잡혀온 빨치 한 명
웃도리 나눠 입던 급우 한 명
럭키 스트라익 한 개피
깨닫지 않으리라
우리들의 불행한 전쟁 후를
조카 이름 같은 꽃이
허수경
백일을 갓 지난 조카의 이름 같은 꽃 잔설이 선밥처럼 쭈빗거리는 야산 둔덕에 피었습니다
제 어미 빈 젖같이 아직 찬 햇살을 받고 일찍 피어 있었습니다
혈육 같은 꽃속으로 들어가
얼른 봄이 되고 싶었습니다
꽉 찬 젖을 맘껏 빨리고 싶었습니다
죽음의 관광객
허수경
한여름에 들른 도시에는 장례 행렬이 도자기를 굽는 집들이 있는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하늘로는 도자기를 굽는 연기가 사막 쪽으로 울었다 동쪽으로 넘어가려다 총 맞은 스물한 살 청년이라고 했다
동쪽에는 지나가지 못하는 나라가 있고
이 도시 사람들은 동쪽을 바라보며 희망은 맨 마지막에 죽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이라는 것이 너무나 뜨거워 잡을 수가 없을 때 희망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희망을 신뢰한 적은 없었으나 흠모하며 희망의 관광객으로 걸은 적은 있었지 별이 인간의 말인 희망을 긴 어둠의 터널 안에 가두고 먼지로 마셔버리는 것을 본 적도 있었지
눈동자 색깔이 다른 고양이의 고향이라는 도시에서 택시기사에게 그 고양이를 본 적이 있느냐, 물어보았으나 그는 미쳤소, 하는 표정으로 숯불에 구운 닭이나 먹다 가시오, 라고만 하더라
그러다가 고양이 고기를 먹게 되는 건 아닐까, 만화 캐릭터처럼 웃기게 생긴 고양이 기념물 앞에서 저건 사람이 그린 동물일까 동물이 개어놓은 사람의 표정일까를 망설이는 동안 태양이 제 몸을 다 벗다가 슬그머니 우두운 옷을 집어 입으며 사라지는데
장례 행렬이 지나갈 때 남자들은 울면서 밤하늘을 향하여 총을 쏘았고 하늘에 구멍이 뚫릴 때 청년이 아직 가슴에 피를 흘리며 우주의 난민이 되어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네
동쪽에는 지나가지 못하는 나라가 있고
지구는 고아원
허수경
태양은 나를 오늘도 고아로 남겨두었다
노을로 부풀어 오르는 저녁을 던져주고
태양은 떠나가고
고아였네, 우리는
반나절의 그리고 영원의 고아
시간의 실을 양 떼의 무심한 먹이와 바꾸던 고아
감자의 껍질을 벗기면서
고아는 무심하게 말한다
이 감자는 이집트산 오가닉 고아
슈퍼마켓 비닐망 안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렸던 황갈빛 감자 피라미드, 그 문명도 오가닉 고아
고아는 태양이 보고 싶다만
우리를 남겨두는 것이 당신의 모성이어서
냄비에서 오가닉 고아들은 끓는다
고아들은 말없이 울부짖으며 저녁을 끓인다
어느 날 우리 모두는 태양을 고아로 남겨둘 것이다
지구는 매일매일의 고아원,
진주시 배고픈 신안동에 살던 영덕이, 내 여덟의 늦가을, 주린 눈으로 마지막 밤 한 톨을 던져주던 영덕이 수경아! 밤이 꿀맛이여! 맞아라, 이 꿀밤을!
어미의 다리 사이에서 평화를 발견한 모든 이들에게
저녁이 축복을 보낼 때
영덕이의 눈빛에는 어미가 없었다
그리고 영덕이는 떠나갔다 나는 모른다,
네가 어디에 있는지
쉰 살이 되어가는 내 꿈의 낯선 입은 묻는다네,
지구여 네 바깥에는 태양 및 별들이
고아로 남겨져 있는가?
지리산 감나무
허수경
늦가을 바람녘
비 맞은 감이 지네
남정들 썩은 삭신을 덮고
허옇게 허옇게 지리산 청마루도 흐려지는데
지리산 감나무 맨 윗가지
무신 날이 저리 붉은가
얼어붙은 하늘에 꽉 백혀 진저리 치고 있는가
된 똥 누다누다
눈꼬리에 마른 눈물 달은 자식들처럼
감씨 퉤 퉤 뱉다 기러기떼
선연한 노을 끝으로 숨어버린 남정들처럼
잘못도 용서도 구할 수 없는
한반도 근대사 속을
사람 지나간 자취마다 하얗게 쏟아지는
감꽃폭풍.
지하철 입구에서
허수경
오늘도 영락없이 나는 이곳에 있다
나는 이제 이 안에서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지하철에서 내려 긴 통로를 걸을 때
계단을 올라가면 입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입구를 지나 새로 열리는 세계가 아니라
다시 반복되는 영원의 길들이었다
나는 오래된 바다나 산맥이 표시된 지도를 잃어버렸고
새로 구입한 기계 지도 안으로 익명이 되어 숨죽이네
먼 곳에서 구급차 사이렌이 울릴 때마다
종이처럼 구겨지며 하늘을 날아가던 새 떼
얼어붙은 길을 갈아서 빙수를 만드는
모퉁이의 작은 카페도 문을 닫았네
오, 익숙한 이여 애인처럼
나를 떠나지 마라
슬며시 누르는 슬픔이
영혼 속의 몰곰치 한 마리로 헤엄친다
진주 아리랑
허수경
오고 있네 오고 있네
불씨 빼앗긴 마음에도 그리븐 청청한 눈물
대가야적 말발굽 소리로 오고 있네
인두질로 꼭꼭 다진 금관가야
깨어진 흙그릇에 사금지는 달빛으로 오고 있네
고령가야 벗은 산맥마다
본가야 소가야적 여울물 젖살로 오고 있네
아리랑 참빛결대로
스리랑 옷고름 무너지는 기척
비때죽꽃 서리 내려
가야아낙 아라리요
남정 뼈끝에서 새살 돋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남정 비켜 찬 허리춤치 칼집에선
신라의 호적이 우는데
아낙 은장도는 떨려 떨려 우는데
아리랑 산고개마다 불씨 지키던
스리랑 숨살로 뻗어오던 바람이
못 살아 못 살아 타령으로 젖다가
남정 윗저고리 땀내
그리븐 불씨로 포개져서 빛나네
어쩔거나
가야아낙 인두 끝으로
꼭 꼭 눌러 삭히는 옛사랑 아리랑은
어쩔거나 어쩔거나
사람이여
진주 저물녘
허수경
기다림이사 천년 같제
날이 저물셰라 강바람 눈에 그리메지며
귓불 불콰하게 망경산 오르면 잇몸 드러내고
휘모리로 감겨가는 물결아 지겹도록
정이 든 고향 찾아올 이 없는 고향
문디 같아 반푼이 같아서
기다림으로 너른 강에 불씨 재우는 남녘 가시나
주막이라도 차릴거나
승냥이와 싸우다 온 이녁들
살붙이보다 헌칠한 이녁들 거두어나지고
밤꽃처럼 후두둑 피어나지고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
허수경
문득 나는 한 공원에 들어서는 것이다
도심의 가을 공원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저녁에 지는 잎들은 얼마나 가벼운지
한 장의 몸으로 땅 위에 눕고
술병을 들고 앉아 있는 늙은 남자의 얼굴이 술에 짙어져 갈 때
그 옆에 앉아 상처 난 세상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며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얼마나 다른 이름으로 나, 오래 살았던가
여기에 없는 나를 그리워하며
지금 나는 땅에 떨어진 잎들을 오지 않아도 좋았을
운명의 손금처럼 들여다보는데
몰랐네
저기 공원 뒤편의 수도원에는 침묵만 남은 그림자가 지고
저기 공원 뒤편 병원에는 물기 없는 울음이 수술대에 놓여 있는 것을
나는 몰라서
차가운 해는 뜨거운 발을 굴리고
지상에 내려놓은 붉은 먼지가 내 유목의 상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술 취해 잠든 늙은 남자를 남기고
나는 가을 공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청년과 함께 이 저녁
허수경
가지에 깃드는 이 저녁
고요한 색시 같은 잎새는 바람이 몸이 됩니다.
살금살금, 바람이 짚어내는 저 잎맥도
시간을 견뎌내느라 한 잎새에 여러 그늘을 만드는데
그러나 여러 그늘이 다시 한 잎새 되어
저녁의 그물 위로 순하게 몸을 주네요.
나무 아래 멈춰 서서 바라보면
어느새 제 속의 그대는 청년이 되어
늙은 마음의 애달픈 물음 속으로 들어와
황혼의 손으로 악수를 청하는데요.
한 사람이 한 사랑을 스칠 때
한 사랑이 또 한 사람을 흔들고 갈 때
터진 곳 꿰맨 자리가 아무리 순해도 속으로
상처는 해마다 겉잎과 속잎을 번갈아내며
울울한 나무 그늘이 될 만큼
깊이 아팠는데요.
그러나 그럴 연해서 서로에게 기대면서 견디어내면서
둘 사이의 고요로만 수수로울 수 없는 것을,
한 떨림으로 한 세월 버티어내고 버티어낸 한세월이
무장무장 큰 떨림으로 저녁을 부려놓고 갈 때
멀리 집 잃은 개의 짖는 소리조차 마음의 집 뒤란에
머위잎을 자라게 하거늘
나 또한
애처로운 저 개를 데리고 한때의 저녁 속으로 당신을 남겨두고 그대,
내 늙음 속으로 슬픈 악수를 청하던 그때를 남겨두고 사라지려 합니다,
청년과 함께 이 저녁 슬금슬금 산책이 오래 아프게 할 이 저녁
청동 염소
허수경
은행 앞에 청동 염소가 서 있다 엉덩이가 푸른, 생식기마
저 푸른 염소, 아무것도 생식하지 않을 이 염소는 불멸이다
청아한 가을
허수경
허연 새가 말라가는 병원 잔디밭을 서성인다
영원한 이별이 도둑처럼 노상강도처럼
스친자리
카프카 날씨
허수경
1
이 거리를 처음 본다
이 건물들 본 적 없다
이 사람들 모른다
그들은 내가 여기에서 이십여 년째
살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곳을 처음 방문한 것 같다
국경을 넘어서 들어오는 사람들 속에
강도들과 테러리스트들이 끼어 있다고 했다
그들은 천 년 전에 지어진 수도원을
내가 어제 폭파했다고 했다
그 수도원에는 이 지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방언들을 모은 자료실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 말들을 함께 폭파한 거라고 했다
나는 어제 집에만 있었는데!
천년을 살아도 낯선 내 그림자가 발목을 잡고 놓아 주지 않았는데!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잠 속에서 깨어나면
투명한 벌레 한 마리가 될 날씨다
종소리는 공중에서 유리 조각으로 흩어지고
잠이 덜 깬 잘 아는 얼굴은 황망히 도시를 떠난다
가방을 끄는 소리도 시끄러웠지
누군가 끌고 가는 바퀴가 달린 가방만큼
어릿하게 슬픈 세계는 없었다
2
발신자 : 고대의 여름
수신자 : 현대의 겨울
안녕,
다시 가보지 못할 폐허여
경적을 울려대며 사방팔방에서 밀려 나오던 낡은 차들이여
소리소리 지르며 혁대를 팔던 소녀들이여
양의 피가 바닥에 흐르던 시장이여
초와 비누 대추야자와 강황 가루를 팔던 거리여
날아가던 총알에 아이의 심장이 거꾸러져도
아무도 그 심장을 거두지 않던 오후여
얼굴에 먼지와 피를 뒤집어쓰고
총 쏘기를 멈추지 않던 노인이여
붉은 양귀비꽃이 뒤덮인 드넓은 들판이여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터지던 지뢰여
종으로 팔려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던 소녀들이여
이 이상하게 빠른
이 가벼워 낯설디낯선 시간이여
3
지난 15일에는 파리에서 테러가 있었다. 옛 시청 앞에는 사람들이 켜둔 촛불, 그들이 가져온 꽃들이 있다. 여기저기 아직은 누워 있는 크리스마스 나무들. 이들은 오늘 저녁이면 다 서 있을 것이다. 뿌리도 없이 가지에 불을 켠 채, 거리에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테러리스트들이 있다고 했지만 그들에게 눈을 돌리는 이 아무도 없다. 내가 너를 의식하면 나는 오늘을 살 수 없으므로. 불안의 물결 속을 걷는다.
어떤 이는 이 물결 속으로 기차를 타고, 또 다른 이는 비행기를 타고 우는 사람이 없는 별에게로 간다고 했다. 어젯밤 꿈속 작은 개 한 마리가 텅 빈 집에서 혼자 낑낑거리다가 나를 따라왔다. 이 개를 안고 죽은 이들이 아직 떠나지 못하는 한 장소를 방문한다. 그곳에 작은 크리스마스 나무 한 그루를 심어 두고 나온다.
너를 가슴에 품고 다니는 사람들의 나무를, 나무에는 이제 네 얼굴만 있을 것이다. 언젠가 나무의 가장 깊숙한 뿌리가 땅 위로 나오면 그게 네 얼굴일 것이다 그 얼굴만이 불투명한 깃발로 나부낄 것이다. 지난 15일에는 파리에서 테러가 있었고 어두운 저녁이면 눈 대신 뜨거운 비라 내리는데 개를 꿈속에 다시 데려다놓고 나는 형체 없는 거리를 걷는다.
탈상
허수경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 모를 흔들 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폐병장이 내 사내
허수경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 주고 싶었네
산 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 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 뿐이랴.
포도
허수경
너를 잊는 꿈을 꾼 날은
새벽에 꼭 잠을 깬다
어떤 틈이 밤과 새벽 사이에 있다
오늘은 무엇일까
저 열매들의 얼굴에 어린 빛이
너무 짧다, 싶을 만큼 지독한 날이다
너를 잊다가 안는 꿈을 꾼다
그 새벽에 깬다
잎의 손금을 부시도록 비추던 빛이
공중에서 짐짓 길을 잃는 척할 때
열매들이 올 거다
네가 잊힌 빛을 몰고 먼 처음처럼 올 거다
그래서 깬다
너를 잊고 세계가 다 저물어버린 꿈여관,
여기는 포도가 익어가는
밤과 새벽의 틈새
포도나무를 태우며
허수경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사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살았습니다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이 늙었습니다
너덜너덜 목 없는 빨래처럼 말라갔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까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아 있습니까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가을달이 지고 있습니다
포도메기* - 시인에게
허수경
네가 가져다 준 책 속에서 이름을 읽었네
애우치 민어 조기 숭어 강항어 게상어 망치어 날치 노래미
이런 이름은 유배된 이가 먹을 갈면서
물고기 길이를 재는 저녁에 떠올리던
얼굴이었는지도
얼굴은 바닷길에 흩어졌고
어떤 이들은 봄날 흑산이 되었네
잘 가, 라고 했는데 꼭 잘 자, 라고 한 것 같다
아주 보내지 못할 편지 속 파랑 울음은
손톱 속에 든 전어 비늘 같은 초승달 되어
오한처럼 떠오른다
네가 이별처럼 꽁꽁 비닐테이프로 접어둔
봉지 속에 든 마른 파래를 물에 불린다
이별에 대한 항의는 마음속 찾지 못할 곳에
이런 비닐의 침묵을 붙여놓는지도
그리고 불어나는 파래는 푸르고 검다
바다의 베틀이 짜낸 흔들거리는 피륙
봉해놓은 자리는 아주 봉해지지 않아서
저녁쯤 이런 흑산에서 머물렀는데
이것도 네가 가져다주었지
네가 떠난 자리는 사리 때에 들어 가파르고
네가 다녀간 길에는 풍랑주의보가 내렸다
흑산이 자산이어도 삼백 년 자물린 마음은 검분홍 공포
독 든 우뭇가사리의 봄빛으로 떠올랐네
먹가슴 안고 자잘한 무늬 많은 잠에 들었더니
우리가 보낸 이들이 잴 수 없는 꿈의 깊은 곳에서 떠다닌다
삼백 년 전 어떤 잠 속에서도 나는 이들을 보았네
* 포도메기 큰 놈은 한 자 남짓 모양은 홍달어를 닮았다. 눈알은 튀어나오고 빛깔은 검다. 얕은 녹두와 같은데, 수없이 모여서 어울어진 모양이 마치 닭이 알을 품은 것과 같다. 나중이 서로 안고 돌 틈에 엎드려 새끼를 낳는다. 침 흘리는 어린애에게 구워서 먹이면 약효가 있다. - 정약전, '포도메기' 편에서([자산어보], 정문기 옮김)
푸른 계절이 왔네
허수경
지난 해 사과나무는 휴식을 취했네
그리고 올해
저렇게 많은 아이들이 사과나무에게로 왔네
가지에다 저렇게 수많은 방을 걸어두고
나무는 아이들을 기다렸었지
푸른 계절이 시작될 무렵, 나무는 나에게 말했어
방을 보았니?
텅 빈 햇살 안에 열린 잠든 방을 보았니?
그 방 안에 푸른 우물이 하나 있지?
그게 너야
손톱을 깎아줄 아이 하나 없는 너를 위하여
계절은 딱딱한 아이 하나를 데려왔어
사과나무 밑에 서면 먼 노래가 들리는 듯
아직 누구도 듣지 못한 노래가 이 지상에 남아 있다는 듯
푸른 아이들이 부르는 즐거운 노래
푸른 아이들이 즐기는 그리운 시절
스물에 버린 조갑지 같은 화장품갑에도
이런 냄새가 났으면 했어
푸른 머리칼을 가진 저 잎새들의 저녁이면
어둠도 푸른 물에 들었네
입술을 열면 당신의 혀가 내 입 안에 든 것 같아
사랑노래를 부르며 랄랄라
나는 딱딱한 아이를 위해 여린 손톱을 자를 준비를 했네
휴식을 취하고도 손톱에 분홍물 들여줄
아이 하나 없던 나에게도
방 하나 주시는 계절이 왔네
사랑이 먼 휴식을 취할 때 고단했던 몸도 푸르러져
만취의 햇살이 사과나무의 방을 빼곡히 채울 계절 뒤에
저 아이를 깨물면 나를 깨무는 거라서 거나하게
나의 몸으로 취할 계절이 오고 있네
푸른 들판에서 살고 있는 푸른 작은 벌레
허수경
바지에 묻어온 벌레를 털어내었다
언젠가 누군가를 이렇게 털어낸 적이 있었다
털리면서도 나의 바짓단을 누군가는 무작정 붙잡았다
나는 더 모질게 털어내었다
서늘하고 아팠다
벌레여 이 바지까지 온 네 삶은 외로웠나
이렇게 말하는 건 나, 중심적임을 안다네,
사라져가는 생물들이 쉬는 마지막 숨을
적어본 적이 없고
모든 살았던 것들의 눈동자 역사를
적어본 적도 나는 없었으므로
벌레가 떨어져나간 자책의 자리
오늘은 뭘 먹을까
흰밥에 붉은 기러기발 같은
무말랭이의 오후를 먹을까
내 바지에서 떨어져나간 날개 달린 벌레가
아직 날지 못할 때
내가 한사코 털어내던
그날의 발길을 잡던 당신과 한 상 같이 먹고 싶다
푸른 벌레가 점심 걱정을 하는 오후가 되어
들판이 점심 걱정을 하면서 푸르러지는 오후가 되어
벌레가 나를 벌레적으로 생각하며 푸르러지는 오후가 되어
하루종일 기다린다
허수경
아무 생각 없이 하루종일 기다린다
감기 없는 세상을
독재자 없는 세상을
몸 없는 세상을
약이 나를 기다리게 했다
나른한 신경이 나를 기다리게 했다
저녁이 오는 것을
밤이 오는 것을
밤에 창밖에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라일락 곁에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그들은 포옹을 기다리고 있거나
입맞춤을 기다리고 있거나
정말 기다리는 게 무언지
알게 될 때까지
약은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하루종일 하는 일이라는 게 그렇다
별로 쓸모 없는 일만 하고 있는 것이다
한 그루와 자전거
허수경
저 나무는 한번도 멈추지 않았네
저 자전거도 멈추지 않았네
사람들의 마을은 멈춰진 나무로 집을 짓고
집 속에서 잎새와 같은 식구들이 걸어나오네
멈추지 않는 자전거들의 동심원들은 자주 일그러지며
땅위에 쌓여갔네 나무의 거름 같은
동심원들 안에서 사람의 마을은 천천히 돌아가네
차륜의 부챗살에 한 그루의 그림자를 끼워 넣으며
자전거는 중얼거리네
멈춘 나무 사이에서 멈추지 않는 자전거가 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한 그루와 자전거가 똑같이 멈추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천천히 멈추면서 한 그루가 되는 것은 얼마나 아려운가
한 달
허수경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가 만났을 때 나는 물었지
아주 작은 소녀처럼 재잘거리며
어디에 있었어?
병원에
다시 내 속의 어린아이가 물었지
어디 슬펐니?
계절은 대답했어
내 소리를 다 지저귀어주던 새들이 떠났다
그 새들,철새였거든
내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젔고
병원
그곳에만 가면 사춘기가 된다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었던 세월이었지
간호사는 걱정 어린 눈으로 말했다
어느 철학자가 쓴 [병원의 고고학]이라는
책을 읽은 적 있어요
그곳에서는 죽어가는 사람만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손들이 더 많아서 발굴을 하면
장갑만이 나온대요
뼈만 남은 손을
가난하게 감싸고 있던 세월요
왜 나는 너에게 그 한 달 사이에
아무 기별을 넣지 못했지?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야
누구에게든
누구를 위해서든
병원의 고고학이라는 책을 쓴
그 사람도
그걸 알았을까
오늘은 정말 고요한 연 같네
내 말을 다 들어주고
달아나야겠다
그리고 말하자면 너는 철새들을 품느라
시간이 없어서
달이 떠난 자리에 가만 서서 병원을 보네
병원에만 있어서
그리 오래된 선사의 기별을
보내오는구나
석기 시대의 역에 서서
아주 오래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매일의 예언
오늘 나는 망할 것이다
망하지 않을 것이다
바람이 불것이다
말 것이다
한식
허수경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안부를 묻습니다.
살아 세운 허술한 집보다
단정한 햇살이 결 고운
식솔 거느리고 먼저 앉았는데
먼 산 가차운 산
무더기째 가슴을 포개고 앉은
무심한 산만큼도 벗하고 싶지 않아
우리보다 무덤이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승사람일 적
우리만큼 미련퉁이었을
그가요 살아 세운 허술한
집에서 여즉
그와 삶을 나누고 있는
우리에게요
점심밥만큼 서늘한 설움이
장한 바람에 키를 낮추는데
낫을 겨누어 베허버리는 건
누워 앉은 무덤입니다.
해는 우리를 향하여
허수경
까마귀 걸어간다
노을녘
해를 향하여
우리도 걸어간다
노을녘
까마귀를 따라
결국 우리는 해를 향하여,
해 질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해 뜰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갔던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나이 어려 죽은
손발 없는 속수무책의 신들이 지키는 담장 아래 살았던 아이들
단 한 번도 죄지을 기회를 갖지 않았던
아이들의 염소처럼 그렇게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가 날아가던
해 뜰 무렵
아이와 엉겨 있던 염소가
툭 툭 자리를 털면서
배고파, 배고파, 할 때
눈 부비며 염소를 안던
아이가 염소에게 주던 마른 풀처럼
마른 풀에 맺힌 첫날 같은 햇빛처럼
호두
허수경
숲속에 떨어진 호두
한 알 주워서 반쪽으로 갈랐다
구글맵조차 상상 못한 길이 그 안에 있었다
아, 이 길은 이름도 마음도 없었다
다만 두 심방, 두 귀
반쪽으로 잘린 뇌의 신경선,
다만 그뿐이었다
지도에 있는 지명이
욕망의 표현이
가고 싶다거나 안고 싶다거나 울고 싶다거나, 하는
꿈의 욕망이
영혼을 욕망하는 속삭임이
안쓰러워
내가 그대 영혼 족으로 가는 기차를 그토록 타고
싶어 했던 것만은 울적하다오
욕망하면 가질 수 있는 욕망을 익히는 가을은 이 세계에 존재한 적이 없었을 게요 그런데도 그 기차만 생각하면 설레다가 아득해져서 울적했다오 미안하오
호두 속에 난 길을 깨뭅니다 오랫동안 입안에는 기름의 가을빛이 머뭅니다
내 혀는 가을의 살빛을 모두어 들이면서 말하네,
꼭 그대를 만나려고 호두 속을 들여다본 건 아니었다고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함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환한 배나무
허수경
나는 그 배나무 앞에 서 있었다
환한 봄빛이 배나무 꽃 사이를 지나갈 때
나 역시 빛을 환히 받고 서 있었다
당신을 보내고 난 뒤였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곳에 있었다
막 이제 보낸 당신이 돌아오는 것처럼
환한 저 나무 앞에서
감히 물어보고 싶은 것
너처럼 나도 환하니?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건 환하다
환하고 꽉 차서 저 혼자 반짝인다
배가 익으면
배가 익어가는 계절에
나는 당신을 기다린다
흑백사진 한 장
허수경
도시 거리에는 때때로 장이 선다 수박을 실은 수레가 있고 수레를 끄는 나귀는 똥을 누느라 고요하다 닭과 소와 돼지의 피냄새는 신선하고 짐승의 창자를 들여다보는 백정의 눈은 고요하다 해가 뜨고 달이 지고 별을 도시의 이마를 스치고 하얀 국수는 무쇠솥에서 더운 춤을 추고 대사리에는 넓적한 물고기들이 마르고 있다 누가 이 시장 한가운데 눈이 맑고 다리를 저는 소년을 세워두었는가 어미와 누이를 한없이 기다리는 소년을 세워두었는가
흰 꿈 한 꿈
허수경
혼자 대낮 공원에 간다
술병을 감추고 마시며 기어코 말하려고
말하기 위해 가려고, 그냥 가는 바람아, 내가 가엾니?
삭신은 발을 뗄 때마다 만든다, 내가 남긴 발자국,
저건 옴팍한 속이었을까, 검은 무덤이었을까,
취중두통의 길이여
고장난 차는 불쌍해, 왜?
걷지를 못하잖아, 통과해내지를 못하잖아,
저러다 차는 썩어버릴까요
저 뱀도 맘이 아파, 왜?
몸이 다리잖아요 자궁까지 다리잖아요 그럼,
얼굴은 뭘까?
사랑이었을까요------
아하 사랑!
마음이 빗장을 거는 그 소리, 사랑!
부리 붉은 새,
울기를 좋아하던 그 새는 어디로 갔나요?
그런데 왜 바보같이
벌건 얼굴을 하고
남몰래 걸어다닐 수 있는 곳만 찾아다녔지?
그 손, 기억하니?
결국 마음이 먹은 술은 손을 아프게 한다
이 바람------
내 마음의 결이 쓸려가요
대패밥 먹듯 깔깔하게 곳간마다 손가락,
지문, 소용돌이, 혼자 대낮의 공원
햇살은 기어코 내 마음을 쓰러뜨리네
당신------
흰 호텔 2016년
허수경
12층 호텔이 숲 옆에 있었다 숲 안에는 거대한 무대가 있고 오늘 저녁엔 유명한 가수가 공연을 한다고 했다 일 층부터 삼 층까지는 난민들의 집이고 사 층부터가 호텔인데 나는 팔 층에 방을 얻었다
밤에 누군가의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들 수가 없었다 처음엔 울음인 줄 알았는데 욕설이었다가 그러다가 죽은 가수가 먼 고향을 그리워하다 체념하는 노래 같았다 이를 닦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를 닦으며 흐린 태양도 닦았다
지난해 겨울 난민 청년들은 인근 지하철역에서 칼부림을 했고 지나가는 여자들의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총을 들고 도심을 누비며 사람들을 쏘았던 남자아이는 총에 맞아 죽었다 이렇게 미쳐가도 되나요 장미는 피고 있었다 더 이상 피지 못할 잎 사이로도 꽃이 올라왔고 사람들은 그 주위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며 치매로 요양원에 들어간 동료에 대해서 말했다 사람들의 잠 속으로 지난해 죽었던 장미 그늘이 들어왔다
전갈 붉은 전갈 사막 누런 사막 전갈같이 기어다니는 검은 전쟁 누군가 총을 쏘면 하늘에서는 투명한 폭탄이 이 모든 풍경을 집어삼켰는데
난민 아이들은 오전에 독일어를 배우러 갔다가 돌아와 호텔 앞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흰 호텔을 올려다보았다 호텔은 흰 벽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흰 벽 한 칸을 얻어 잠을 자다가 뜨지도 지지도 않은 태양을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