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새로운 출발
이남호가 근대리아에 도착한 것은 그다음 날 저녁때였다. 수십 동의 건물이 폭파되고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난데다가 나중에는 러시아 공수여단이 전격 투입된 지역치고는 의외라고 느껴질 정도로 공항의 분위기는 평온했다. 물론 러시아군이 공항의 이곳저곳에 드문드문 서 있었지만 한가로운 태도였다. 무혈입성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남호를 마중 나온 것은 진주군의 참모로 대령 계급장을 붙인 사내였는데 곧장 대기시켜 놓은 차로 안내했다.
그가 탄 차가 공항을 빠져나와 고속도로에 접어들었을 때 옆자리에 앉은 대령이 입을 열었다.
「오늘 오후부터 일부 수사대상자를 제외하고는 입출국을 허용했습니다.」
로스토프는 이남호의 연락을 받자 극동군 소속의 공군기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사상자가 정확히 얼마나 됩니까?」
이남호가 묻자 대령이 쓴웃음을 지었다
「러시아군 사상자는 다섯입니다. 둘이 죽고 셋이 부상당했는데 모두 낙하시에 생긴 사고지요.」
「‥‥‥‥‥」
「이틀간 경비대를 포함한 야쿠자, 또는 한국계 조직의 사망자는 148명, 부상자는 241명입니다.」
「‥‥‥‥‥」
「민간인 사망자는 7명, 부상이 15명인데 현장 근처에 있다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김상철의 조직은?」
「사망 54명, 부상 62명입니다.」
「하룻밤의 시가전에 200이 넘는 전사자와 300이 넘는 부상자를 냈어요. 이건 어지간한 전쟁보다 더 심했습니다.」
러시아군 진입으로 그것이 딱 그쳤으니 그것만으로도 근대리아나 세계 언론을 상대로 군대를 투입한 명분이 설 것이다.
「한국 쪽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대령이 물었으므로 이남호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글쎄, 좋은 것은 아니오. 언론이 그렇게 유도한 점도 있지만.」
「근대리아는 미 · 일의 식민지가 될 뻔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 겁니다.」
「‥‥‥‥‥」
고속도로를 벗어난 차는 곧 근대시로 들어섰는데 이미 주위에 어둠이 깔려 있어서 도시가 파괴된 흔적은 잘 보이지 않았다. 행정청에 도착하자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주군 사령관 볼코프 소장이 다가왔다. 이남호와는 초면이다. 볼코프가 경례를 올려붙였다.
「실장 각하, 잘 오셨습니다.」
좌우로 고급 장교들을 도열시켰고 통로에는 붉은색 양탄자를 깔아놓은 최상급 예의를 차리고 있다. 이남호는 도열해 서 있는 장교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면서 문득 좌우를 둘러보았다. 김상철이 그들 속 어딘가에 끼어 있는 듯한 생각이 든 것이다.
잠시 후에 이남호는 볼코프의 2층 집무실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내일 체르넨코 국방장관과 로스토프 극동군 사령관께서 오십니다.」
볼코프의 말에 이남호가 머리를 끄덕였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만큼 수습이 빨리 이루어져야겠지요,」
「톰프슨 그룹의 배후는 오성이고 월슨의 배후는 대동입니다. 알고 계시지요?」
「알고 있어요.」
「오성은 북한 쪽에도 자금을 대었습니다. 아마 북한 진출의 대가로 자금을 제공한 것 같습니다.」
이남호가 퍼뜩 시선을 들었다. 그렇다면 오성은 미국과 한국, 거기에다 북한 정부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윽고 이남호의 얼굴에 웃음기가 띠어졌다.
「오성그룹다운 처세로군요. 그자들이 러시아 정부에는 로비를 못한 것이 다행이오.」
볼코프가 따라 웃었다.
「시간만 더 있었다면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실장 각하.」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방으로 들어선 것은 김상철이다. 볼코프가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가 불렀습니다. 앞으로 서로 동반자 입장이 되실 사이고 해서.」
이남호를 향해 김상철이 머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실장님.」
「이 사람아!」
자리에서 일어선 이남호가 김상철의 손을 잡았다. 김상철은 말쑥한 파카 차림이었지만 이마는 온통 붕대에 싸여져 있다.
「그동안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천만의 말씀입니다, 실장님.」
그들이 다시 자리에 앉자 볼코프가 탁자 위에 놓인 보드카 병을 쥐고는 앞에 놓인 잔에 술을 채웠다.
「내일 러시아 정부와 근대그룹의 정식 협상이 열리겠지만 그것은 협상이 의례이 그렇듯이 형식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근대리아 내부의 정리를 결정짓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술잔을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오성과 대동의 껍질은 벗겨졌지만 그들이 투자한 사업은 보호됩니다. 물론 CIA 요원인 우재환이나 그의 간부들, 그리고 일본 정보국의 요원들은 추방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스크바에서 실장 각하께서도 합의하신 사항이지요.」
술잔을 들어 한 모금에 삼킨 그가 말을 이었다.
「한민수는 CIA와 한국 정부 양쪽에 다리를 걸친 놈이지요. 그놈은 제일 죄질이 나쁜 놈이지만 역시 추방시킵니다. 그것으로 되겠지요?」
볼코프가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한민수는 근대그룹의 사위였으므로 이남호의 입장을 묻는 것이다. 이남호가 머리를 들었다.
「대동이 투자한 사업장은 몰수시켜 주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한민수를 잡아두는 것이 낫겠는데‥‥ 대동에서 협상해오도록 말이오.」
볼코프가 긴장을 했다. 근대 쪽의 반응이 이토록 격할 줄은 뜻밖인 모양이었다.
「한민수를 풀어 주는 조건으로 사업장을 포기하도록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근대가 그럴 생각이시라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머리를 끄덕인 그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오성그룹의 사업장은 물론이고 대동의 사업장 관리까지를 여기 있는 드미트리가 맡게 되겠지요. 드미트리는 우리 러시아 정부와 근대그룹 간의 가교역할을 층분히 해낼 사람입니다, 실장 각하.」
감금당한 상황이었지만 하루 세끼 배달되는 것은 호텔 주방에서 만든 일급 요리였다. 저녁으로 나온 식사는 잘 익혀진 스테이크와 팔밥이었다.
「할아버지가 오실지도 모르겠는데.」
포크를 내려놓은 한민수가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스테이크를 세 조각쯤 먹었을 뿐이다.
「러시아 정부가 근대와의 계약을 준수한다니 근대 쪽으로 당연히 연락했을 거야.」
역시 식욕이 떨어진 강미현도 포크를 내려놓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민수는 눈에 띄게 초조해하고 있었다. 만 이틀간을 방에만 갇혀 있은 채 외부와 단절되어있는 상황이다. TV를 통해 관광객들의 출국 장면과 평온을 되찾아가는 근대시의 모습이 보였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연락도 없는 것이다.
「추방시키려면 시키라고 해, 까짓것.」
혼잣소리처럼 그가 말하자 강미현이 머리를 들었다.
「당신이 왜요?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잘하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사건이.」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으므로 그들은 몸을 굳혔다. 문이 열리면서 들어선 것은 두 명의 러시아군 장교와 한국인 한 명이었다. 앞장선 장교가 빠른 러시아어로 말하자 한국인이 통역을 했다.
「한민수, 옷을 입어라. 조사할 것이 있다.」
한민수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무슨 조사 말인가?」
한국인의 통역을 들은 장교가 쓴웃음을 짓더니 짧게 말했다.
「일급 스파이 혐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통역의 말에 대뜸 소리친 것은 강미현이다.
「너희들 책임자를 만나게 해 줘. 내가 해명하겠다.」
「빨리 입어, 이 새끼야.」
아예 강미현의 말은 무시한 채 한국인이 눈을 부릅떴다.
「여편네 치맛자락에 숨을 작정이냐? 이 개자식아.」
장교 한 명이 다가오더니 한민수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이제 한민수는 눈만 굴릴 뿐 제대로 입도 열지 못한다. 한민수가 그들에게 끌려 밖으로 나가자 강미현은 잠시 가쁜 숨을 뱉으며 방 안에 서 있었다. 이윽고 몸을 돌린 그녀가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을 때 방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이남호가 유장석과 함께 들어서고 있었다.
「놀랐겠군.」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강미현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강미현이 이를 악물었으나 어깨가 두어 번 들썩였다. 이남호와 유장석이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할 수 없는 일이야. 한민수는 전창남과 맥을 통한 놈이었어. 근대리아에 오기 전부터 한국 정부와 밀약을 맺은 놈이야.」
이남호가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충격이 크겠지만 사실이야. 할아버지와 나는 작년에 모스크바에 갔을 때 그 사실을 들었지만 긴가민가했었어. 하지만 곧 확실하게 알게 되었지. 그놈은 우리는 물론 미현이도 철저하게 속이고 근대리아를 장악하려고 했어.」
얼굴에서 손을 뗀 강미현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물기가 베인 눈이었다. 이것은 또 다른 층격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한민수에 대한 연민은 최소한 가셔지리라고 이남호는 계산한 것이다.
「사실이오.」
이제는 유장석이 입을 열었다.
「이미 전창남과 그의 부하들이 자백을 했습니다. 한민수는 근대리아에서 근대를 배제시키려고 철저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강미현은 아직 충격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어느덧 눈의 물기는 말라져 가고 있었다.
경비대는 무장해제를 당하고 간부들이 연금상태에 있었지만 기능을 정지당한 상태는 아니었다. 경비본부를 장악한 러시아군은 각 초소나 경비, 행정 관계의 경비부서는 그대로 업무를 계속하게 한 대신 기동대의 주 병력은 숙소에 대기시켰다. 철저한 계획하에 진입한 러시아군이어서 일사불란한 행동이었고 작전에 차질도 없었던 것이다.
오세영이 근대 호텔의 방에서 자신이 군림하던 경비본부로 끌려간 것은 저녁 8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경비본부에는 1개 대대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행정업무를 맡은 경비대원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가 들어선 방은 2층의 회의실이었다. 가끔 그가 회의를 주재하던 방이었지만 지금은 포로의 신분으로 끌려온 것이다. 넓은 회의실에는 서너 명의 러시아군 장교가 앉아 있었는데 들어서는 그를 보자 일제히 말을 멈추었다. 오세영을 데려온 병사들이 그를 앞쪽으로 밀었다.
「여기 앉으시오.」
상석에 앉은 대령이 턱으로 옆쪽 의자를 가리켰다.
「당신이 근대리아 경비대의 최고 실력자라고 들었소.」
그는 능숙한 영어를 썼는데 오세영이 러시아어는 서툴지만 영어에 유창하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자, 같은 정보 책임자끼리 터놓고 이야기합시다, 보안국장.」
「뭘 말이오?」
「당신이 쥐고 있던 고급정보, 한국과 미국의 근대리아 관련 정책과 그 책임자들을 말해주시오.」
「우리가 조사한 내용에 당신의 확인이 필요해요. 새로운 정보라면 더 좋고.」
「내가 말할 것 같소?」
「물론.」
대령이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는 술병을 눈으로 가리켰다. 옆쪽에 앉은 장교가 대령과 오세영의 앞에 술을 채운 술잔을 내려놓았다.
「당신은 근대리아 북쪽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20년을 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거요. 특히 미국과 일본을 위해서 기밀을 지켜주려고 그랬다면 자던 개도 웃을 노릇이지, 그렇지 않소?」
「‥‥‥‥」
「조금 전에 CIA 요원이었던 밀턴과 브라운, 우재환까지 낱낱이 자백하고 돌아갔단 말이오.」
대령이 술잔을 들고는 오세영의 앞에 놓인 잔을 눈으로 가리켰다.
「자 마십시다, 보안국장. 당신이 해줘야 할 일이 많소.」
그 시각에 서울 청진동의 조용한 한옥의 방 안에 청와대 안보수석 박정규는 오성그룹의 비서실장 조영규와 요리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사람을 물리친 채 독대한 그들의 얼굴은 굳었고 요리접시에는 젓가락 흔적도 없다.
「강회장이 재산을 모두 빼돌린 것을 보면 미리 크렘린과 사전 교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박정규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정부가 근대에 어떤 압력을 넣을 상황도 아니고.」
「역효과가 날 거요. 그런 단순한 방법을 쓰다가는.」
조영규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남호 씨가 들어갔으니 곧 어떤 결과가 발표되겠지. 그때까지는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여론이 좋지 않아요. 언론사가 흔들리고 있어서.」
주요 일간지에 대학교수와 평론가 몇 명을 내세워서 근대리아의 혼란한 상황을 비판하도록 한 것이 역효과를 낸 것이다. 그들의 논조는 근대그룹의 무모한 투자는 결국 한국의 경제에 도움이 되지 못했고 열강의 압력만 늘렸다는 것으로 일관되었는데 독자들의 강한 반발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언론사 노조가 들썩였고 일부 야당지에서는 정부의 식민지 근성을 매도하고 있었다.
「크렘린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박정규가 묻자 조영규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한국 정부는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가 국방장관, 외무장관 등 러시아 정부의 주요 인사를 만나려고 시도했다가 모두 하나같이 거절당했던 것이다. 한국주재 러시아 대사는 본국으로 소환된 처지였고 외무부에서는 부대사를 불러 항의했는데 그것은 국민에 대한 선전용이다. 부대사가 와준 것 만해도 성과라는 외무부 실무자들의 평이었다. 그러나 오성은 다르다. 그들은 러시아에 10억 달러가 넘는 투자를 해 왔는 데다가 인맥이 있는 것이다. 박정규가 조영규를 만나자고 한 것도 이것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모스크바의 오성 현지법인 사장이 크렘린에 들어가 국방위원이자 중앙회의 부의장인 나신스키를 만난 것이다.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나신스키는 실세가 아니어서.」
「실세가 아니라니? 중앙회의 부의장이면 행정부에서는 2인자인데.」
「그래도 이번 근대리아 사태에 대해서는 한발 물러난 입장인 것 같습니다.」
박정규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힐끗 그를 바라본 조영규가 입을 열었다.
「미국이나 일본은 이미 물러난 모양인데, 우리 정부가 나선다면 여론만 악화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까?」
「아마 그들은 크렘린과 타협을 한 것 같습니다.」
박정규가 이미 식어버린 정종 잔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미국과 일본은 근대리아 사태가 유감이라는 미지근한 성명 한 번을 낸 것이 끝이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주겠다는 약속을 깨고 한국 정부에 책임을 씌우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그들과 약속이나 한 듯이 계속해서 한국 정부를 비난하는 성명을 쏟아내는 중이다.
이윽고 박정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남호가 어떻게 하는가 두고 봅시다. 근대리아가 근대의 임차지인 것은 분명하니까.」
「‥‥‥‥‥」
「정부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지. 국익에 크게 위배된다면 몰라도.」
박정규와의 회합을 마친 조영규는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골목길을 빠져나간 차가 큰길에 들어서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최선호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박수석한테 뭐라고 하셨습니까?」
「모른다고 했어.」
등받이에 등을 기댄 조영규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놈이 제아무리 임기응변과 책임회피에 능하다고 해도 곧 목이 잘릴 것이다. 대통령도 바보가 아니니까.」
나신스키는 현지법인 사장에게 오성그룹의 모든 투자 사업은 보호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오성과 근대와의 회합과 근대리아의 공동진출을 제의했는데 그것은 오성 측으로서도 얼마든지 대환영이다. 이제 조영규에게 박정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였고 그를 위해 정보를 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안기부장 권준규는 청와대 본관 1층에 있는 비서실장 이태준의 방에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던 이태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시계를 보았다.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보회의입니까?」
「아니, 그저 기밀회의라고 해둡시다.」
이태준이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들이 2층의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서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대통령이 눈으로 앞쪽 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시오.」
세 사람만의 회의인 것이다. 긴장한 권준규가 힐끗 이태준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이번 근대리아 사태 때문에 보자고 했는데.」
대통령이 선뜻 본론을 꺼냈으므로 권준규는 들고 온 가죽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이미 준비를 해온 것이다.
「상황은 여기 있는 이실장이나 박수석한테 들었는데 내가 권부장을 보자고 한 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대통령이 똑바로 권준규를 바라보았다.
「박수석은 우리 정부가 나설 필요는 없다면서 근대그룹과 러시아가 결정하도록 놔두자는데, 이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오. 이제까지 정부가 근대리아 정책에 깊이 간여한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이제 와서 모른 척한다는 건 책임만 떠넘기려는 짓이야, 그 사람, 지금 이리 닫고 저리 뛰면서 하는 짓을 보니 모두 제 책임만 모면하려는 짓이고 나라를 위해서 제 한 몸 바친다는 생각은 없어.」
대통령의 늘어진 눈시울이 조금 떨렸으므로 권준규는 시선을 내렸다. 임기가 1년여밖에 남지 않은 대통령이다. 정치공작의 달인이며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서 피가 없는 사내라고까지 불리웠던 사내인 것이다. 대통령은 당연히 박정규의 제안을 따라야 정상이다. 권준규가 입을 열었다.
「결론적으로 미국과 일본이 소극적인 자세로 대응하면서 책임을 한국 정부에 넘긴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각하.」
「그, 박정규는 미국 측과 어떤 관계인가? CIA 요원이 아닌가?」
문득 대통령이 그렇게 묻자 당황한 권준규가 이태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태준은 대통령의 가슴께만 바라볼 뿐 잠자코 있다.
「권부장, 말해 봐요.」
대통령이 재촉했다.
「각하, 그것은‥‥ 박수석이 미 국무성과 인연은 꽤 있습니다. 자문관 역할도 했고 한국에 오기 전에는 정책기관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만 확실한 증거는‥‥‥」
「한국 정부는 배신을 당한 거야. 미국 정부와 그 하수인 한 놈에게, 그렇게 생각지 않소? 물론 사람을 잘못 기용하고 일방적으로 대미 관계 정책을 맡긴 책임은 나한테 있어. 하지만 나는 근대리아 문제보다도 땅에 떨어진 국가 위상이 걱정이 돼요.」
대통령이 이태준에게 머리를 돌렸다.
「이실장, 당신이 권부장한테 말해줘.」
「예, 각하.」
이태준이 권준규를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조성호 대사가 귀국했어요.」
조성호는 러시아 주재 한국대사이다. 그가 귀국한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권준규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러시아 외무장관과 약속을 하고 크렘린에 들어갔던 조성호는 두 시간이나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만나지도 못하고 되돌아왔다. 국제적인 망신을 당한 사건이다.
「조대사는 코마노프를 만났습니다.」
이태준의 말에 권준규가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본래 신중한 성격이다. 잠자코 있는 그를 향해 이태준이 말을 이었다.
「코마노프는 각하께 친서를 보냈습니다. 조대사는 친서를 갖고 온 겁니다.」
「‥‥‥‥‥」
「내용은 양국관계의 정상화요. 러시아는 한국이 미 · 일의 압력을 받아 근대리아를 관리한 상황을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내일 근대리아에서의 협상부터 러시아는 더 이상 한국을 비난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근대리아의 미 · 일 세력을 추방할 것이고 한국 정부 쪽에서도 미국 추종 세력을 축출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어요.」
권준규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대통령이 자신을 부른 이유도,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알게 된 것이다. 한쪽이 가면 다른 한쪽이 온다. 이것이 동서 냉전 시대에 단련되었던 권준규의 철학이다. 그것을 어떻게 잘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약소국은 위상이 변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각하.」
권준규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방을 울렸다.
오후 4시. 근대시의 행정청에서 외신기자 수백 명이 운집한 가운데 러시아를 대표한 체르넨코 국방장관과 근대그룹의 대표인 비서실장 겸 관리회장 이남호의 협정서가 발표되었다. 먼저 체르넨코가 사건 경위를 발표했는데 근대리아의 자주권 보호를 위해서 러시아군을 투입시킨 것에 대한 유감 표명이었다. 그는 이제 한국은 물론, 미국이나 일본의 국가 명을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러시아군은 2개월 후에 철수한다고 선언했다.
그다음 순서는 이남호였다. 그는 전 세계로 생중계된 TV 화면을 쏘아보며 짧게 말했다.
「운영위원회를 해산한다.」
「경비대를 해산, 재편성한다.」
「투자기업은 보호되나 일부 문제기업은 정리한다.」
「주민의 생활에는 최대한 권리를 보장한다.」
그가 말을 마쳤을 때 기자들이 새 떼처럼 일어섰다. 영국 BBC 기자가 큰소리로 물었다.
「미국 스파이로 체포된 사람은 몇 명이고 그 처리는?」
그러자 체르넨코가 웃었다.
「용의자일 뿐이오. 하지만 본인들이 귀국을 원하고 있어서 내일 전원 출국시킬 계획이오.」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TV 화면에 나온 그들의 표정에는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미국 CNN 기자가 물었다.
「한국 정부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을 말해주시오. 운영위원회를 없앤다면 한국 정부는 근대리아에 손을 뗀 겁니까?」
「양국의 우호관계에는 변함이 없소. 그리고 운영위원회 문제는 내가 답변할 성질이 아니오.」
그러자 이남호가 나섰다.
「이제까지 한국 정부는 기업 활동에 간섭한 적이 없습니다. 운영위원회 해산은 근대그룹 내의 조직개편일 뿐이오.」
체르넨코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한국 기자 하나가 일어섰다.
「이번 사건의 기폭제가 된 폭동의 주모자가 김상철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은 살인 혐의로 기소된 한국인이오. 그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
체르넨코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것은 금시초문이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모릅니다. 폭동에 대해서는 경비본부 측에서 곧 수사 발표를 할 겁니다.」
한국 기자가 다시 일어섰다가 주위 기자들의 눈총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 웃음을 띠거나 저희끼리 수군대면서 그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가 잠자코 자리에 앉자 단상의 끝 쪽에 앉아 있던 볼코프 소장이 옆자리에 앉은 스크라빈 소장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놈은 자다 일어난 모양이군, 스크라빈.」
스크라빈이 따라 웃었다.
「한번은 짚고 넘어갈 일인데 잘 되었소, 볼코프. 저런 놈도 있어야 실감이 나지,」
「저런 병신 같은.」
하고 박기동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김사장이 드미트리 김으로 러시아 국적을 갖게 된 것을 모르는군, 저놈은.」
「러시아 국적이라니요?」
이유미가 묻자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한국에서는 손을 못 대게 되었단 말입니다. 김사장은 이제 명예회복을 했지요.」
이유미의 방 안이다. 오후에 찾아온 박기동과의 상담 도중에 그들은 TV의 기자회견을 본 것이다.
「김사장이 한국 세력을 모을 겁니다. 아마 근대리아 제일의 조직이 될 거요.」
박기동이 자기 일이나 되는 것처럼 말했다.
「우재환이 관리했던 사업장을 송두리째 가져올 것이고 시바다한테 팔았던 타운의 사업장도 다시 회수할 거요.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그는 의자를 당겨 앉고는 정색을 했다.
「러시아계 고려인, 중국계 조선족, 그리고 일본의 조선인, 거기에다 한국과 북한의 한국인을 망라한 조직을 만들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나만큼 김사장을 잘 아는 사람도 없지요. 나는 한때 그 양반의 대리인으로 북한까지 들어가 인력을 공급시켰던 사람이오.」
「각지에 흩어진 한국인을 망라한 범한국계 조직, 이것이 근대리아의 한국인을 통일시키는 시발이 됩니다.」
「‥‥‥‥‥」
「그것이 본래 근대의 왕회장 뜻이었소. 김사장은 그것에 심취된 사람이었고.」
헛기침을 한 박기동이 탁자 위의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자, 그렇다면 남은 건 수수료 배분인데, 이제 내가 총경비의 7퍼센트를 받는 것이 합리적이겠는데, 어떠시오?」
「5퍼센트로 해요. 7퍼센트는 너무 높아요.」
「안 됩니다. 난 다른 여행사와는 10퍼센트로 계약할 작정이오.」
이유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른 여행사와도 계약을 해요?」
「그럼 안 됩니까?」
쓴웃음을 지은 박기동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바다나 우재환이 관리했던 호텔이나 사업장들과 제일 잘 통하는 게 누구겠습니까? 다른 놈들은 이 땅에서 여행사 대리점 간판을 걸 수 없어요. 이번에 이 몸이 총을 들고 싸우지 않았지만 한몫을 했단 말이오. 어제 TV에 괜히 나온 줄 아시오?」
이유미가 가볍게 한숨을 내려쉬었다.
「좋아요, 7퍼센트.」
「옛날 인연이 있어서 봐 드린 겁니다.」
그 인연이라는 것이 결코 좋은 기억들이 아니었으므로 이유미가 힐끗 시선을 주었으나 박기동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 계약서에 사인을 합시다.」
이유미의 방을 나온 박기동이 근대 호텔에 들어섰을 때는 저녁 6시가 되어있었다. 근대 호텔은 이른바 고급 포로수용소가 되어있어서 정문에서부터 경비가 삼엄했지만 사령부에서 발급받은 통행증을 가슴에 붙인 박기동을 제지하는 병사는 없다. 그는 로비 끝 쪽에 테이블을 가져다 놓고 앉아 있는 장교에게로 곧장 다가갔다. 장교의 뒤쪽으로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있었으므로 그가 출입 통제의 책임자일 것이다. 박기동이 테이블 앞에 서자 장교가 머리를 들었다. 체격이 거대한 푸른 눈의 대위였다.
「대위, 난 드미트리 김의 부하로 박기동이라고 합니다.」
대위가 그의 허가증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 TV에 나왔던 사람이군. 기억나. 그런데 여긴 웬일이오?」
「사람을 만나려고. 여기로 왔는데…….」
「사령부의 허가는 받았소?」
「받지 않았소.」
대위가 머리를 저었다.
「안 돼요. 허가를 받아와요.」
「드미트리 김의 심부름이요, 대위.」
바짝 다가선 박기동이 그를 쏘아보았다.
「여기 끌려온 사람은 드미트리 김의 친구요. 그래서 잠깐 면회하고 가려는 거요.」
「드미트리 김의 친구가 이곳에 있다고?」
「그렇소. 행정청의 관광과장 안인석이야. 확인해 봐요.」
찌푸린 얼굴로 박기동을 바라보던 대위가 손을 뻗어 전화기를 쥐었다. 사령부에 보고부터 하는 것이다. 박기동은 잠자코 서서 대위가 보고하는 내용을 들었다. 그의 상대는 중령이었다. 이윽고 대위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허락합니다.」
그는 앞에 놓인 서류를 한참이나 뒤적이더니 머리를 들었다.
「414호실이오. 시간은 30분이고.」
「충분해, 대위. 고맙소.」
박기동이 방에 들어서자 안인석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다른 한 명의 한국인과 같이 있었는데 모르는 얼굴이었다.
「안형, 오랜만이오.」
「웬일입니까? 여긴.」
박기동이 웃어 보였으나 안인석은 아직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썩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잠깐 나 좀 봅시다.」
박기동은 그를 끌고 복도로 나와 섰다. 복도의 양쪽 끝에 서 있던 경비병이 이쪽을 바라보았지만 제지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창가에 마주 보고 섰다.
「안형, 어떻게 하실 거요? 그냥 추방당하시고 말 겁니까?」
「그럼 어떻게 합니까?」
안인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기회에 정리하는 수밖에.」
「돌아가서 뭐 하시려고? 근대에서 받아줄 것 같습니까?」
「그런 기대를 할 것 같소? 박사장은 날 어린애로 보시는 모양인데, 난 근대고 근대리아고 이젠 떠날 생각이오.」
「이제까지의 고생을 수포로 돌리고 말이오?」
박기동이 말소리를 낮추었다.
「김상철 씨가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딱 한 마디만. 그러면 이곳에서 나와 행정청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있어요.」
「‥‥‥‥」
「내가 안형과 이유미 씨, 그리고 김사장과의 관계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요. 그래서 말인데, 안형이 김사장께 도와달라고 부탁만 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친구 사이 아니었습니까? 이제 서로 고통을 받았으니 잊어버릴 만도 하지요. 난 김사장을 잘 압니다. 안형이 부탁한다면 들어줄 사람이오.」
「도대체 누구한테 들었소?」
「운영위 간부들한테서. 그놈들은 안형과 김사장과의 관계를 샅샅이 압니다.」
「어때요? 내가 김사장께 말씀드릴까?」
머리를 든 안인석이 그를 쏘아보았다.
「나한테 바라는 건 뭐요?」
「허허, 이거야 원.」
「소득 없는 일에 당신이 나설 리는 없고. 솔직히 말해 봐요. 그래야 나도 결정을 할 테니까.」
「언젠가 때가 오겠지요. 지금은 없어요.」
「꼭 끄집어낸다면 안형과 김사장을 다시 만나게 해서 김사장한테 신임을 조금 받을 수 있지나 않을까 하고. 결코 손해 볼 일은 없을 테니까,」
「‥‥‥‥‥」
「실컷 이용만 당하고 있다가 스파이 혐의를 받고 쫓겨나는데도 정부는 외면하고 근대에서는 철저히 배척당할 입장 아니요? 도대체 뭘 망설이시오?」
경비본부 보안국장 오세영이 차분한 목소리로 폭동의 원인과 주모자, 그리고 피해 상황을 발표하고 있었다. 폭동의 원인은 위조지폐에 피해를 본 한국계와 러시아계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위조지폐를 뿌린 시바다 겐지를 습격하다가 근대시와 타운으로 범위가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폭동의 주모자 대부분은 사살되었는데 인적사항이 TV의 화면에 사진과 함께 비쳐졌다. 모두 낯선 얼굴에 어떤 사진은 시체를 찍은 것이 그대로 드러났으므로 강미현은 머리를 돌렸다.
「이봐, TV 끄지.」
이남호가 말하자 유장석이 TV의 스위치를 껐다. 이남호의 숙소인 파라다이스 호텔의 객실 안이다. 저녁 식사를 마친 그들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머리를 돌린 이남호가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피곤해?」
「아뇨, 괜찮아요.」
강미현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를 뒤로 묶어 올린 때문인지 조금 여위어 보였다.
「하나씩 정리가 되어가는군.」
이남호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그런데 시바다의 무리는 재빠르기 짝이 없군. 놈들은 국경을 벗어난 것 아닌가?」
「김상철이 부하들을 총동원해서 그놈을 찾고 있는 모양입니다.」
「다시는 근대리아에 발을 붙이지 못할 놈들이야. 애써 쫓을 필요는 없어.」
「불칸 역에서 10여 명의 부하가 몰살당했습니다. 그것이 시바다의 짓이었다는군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강미현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근대호텔에서 이남호의 옆방으로 숙소를 옮긴데다가 그들이 이렇게 붙잡고 있는 이유는 알고 있었지만 혼자 있고 싶은 것이다. 잠자코 있는 그녀에게로 이남호가 머리를 돌렸다.
「대동그룹 문제는 러시아가 나서서 해결해 주기로 양해가 되었어. 내일 사업장에 배치되었던 대동의 직원들은 모두 추방될 거야.」
「‥‥‥‥‥」
「한민수는 당분간 러시아 정부가 잡아둘 생각이고, 아마 대동이 근대리아에 투자한 사업장을 포기한다는 합의를 하면 풀려날 거야.」
「내가 미현이를 어렸을 떼부터 봐 왔지만 다부지고 영리했지, 상처가 클 줄 알아. 하지만 얼른 마음을 잡아야 해. 그래서 일부러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 사람을 만나게 해주세요.」
그러자 이남호와 유장석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글쎄, 그거야 만나게 할 수는 있지만 …,」
이남호가 입맛을 다셨다.
「물론 부부 사이였고, 배신감도 크겠지. 하지만‥‥‥」
「김상철 씨 말예요, 실장님.」
「김상철이?」
엉겁결에 이남호가 묻자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한민수를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그리고 그런 감정, 금방 정리할 수 있어요,」
「‥‥‥‥‥」
「하지만 이렇게 쫓겨나듯 근대리아를 떠나기는 싫어요. 너무 비참해요.」
헛기침을 한 유장석이 나섰다.
「이건 내 생각입니다만 그것이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은데요.」
「맞아.」
이남호가 말을 받았다.
「그리고 쫓겨나다니, 그것은 미현이의 자격지심이야. 도대체 누구한테 ‥‥」
「내가 그 사람을 피할 이유가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왜.」
이남호와 유장석이 다시 마주 보았는데 모두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니, 누가 피한다고.」
그렇게 묻던 이남호가 입맛을 다시더니 말을 멈추었다. 사정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한민수와의 결혼생활은 파탄상태가 되었고 그것은 김상철이 주도한 폭동이 원인이다. 한민수가 무슨 짓을 했느냐는 것보다 강미현은 그것이 김상철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것이 견디기 힘든 것이다.
유장석이 다시 헛기침을 했다.
「아가씨, 김상철이는 그런 사내가 아닙니다. 잘 아실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가씨에 대한 무슨 감정 같은 것은 전혀 ‥‥‥」
말을 도중에서 멈춘 유장석이 힐끗 강미현의 눈치를 보았다. 이제 이남호는 벽을 바라보는 시늉을 했고 강미현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방 안에 억눌린 듯한 정적이 덮이고 있었다.
여전히 화려하고 소란스런 타운의 밤이다. 러시아군이 낙하해서 근대리아의 정권을 뒤덮은 상황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타운의 분위기는 활기를 띠고 있었다. 거리는 관광객과 주민으로 메워졌고 각종 유흥업소는 손님으로 만원이다. 저녁때까지만 해도 거리에 드문드문 서 있던 러시아군은 인파에 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김상철이 이한과 함께 코즈모프 클럽에 들어서자 계산대 옆에 서 있던 조덕산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김사장님.」
그는 반쯤 허리를 꺾었는데 정중한 태도였다 그의 안내를 받은 그들은 곧장 안쪽의 밀실로 들어섰다. 이미 술과 안주를 벌려놓고 기다리고 있던 이금철과 최태호가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김사장님,」
이금철이 김상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인사를 나눈 그들은 마주 보고 앉았다. 오늘은 이금철이 초대한 자리로 명분은 근대리아의 평화와 우의를 다지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위조지폐 문제 등으로 크게 체면을 깎인 데다가 시바다의 공격으로 최태호는 구사일생의 위기를 겪은 몸이다. 이번 사태가 미국과 일본 세의 몰락으로 결정이 되자 그들은 서둘러 김상철을 초대한 것이다. 송길수와 부하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 그들은 번갈아서 시바다와 우재환을 성토했는데 평양에서도 김상철을 적극 지지한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보드카를 대여섯 잔씩 마시고 난 다음이다. 이금철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배후의 실체가 오성으로 드러난 톰프슨 그룹의 사업장은 김 사장님이 관리하게 되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이틀 동안에 흩어져 있던 조직원 100여 명이 빠짐없이 모였고 그들이 추천해 데려온 사람만 해도 300명이 넘는다. 오성의 사업장이나 이나카와회, 대동의 사업장들 모두는 지금도 운영을 하고 있었지만 주인이 없는 상태였다.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지금도 일부는 오성이나 대동의 사업장에 보냈고 며칠 안에는 모두 장악하게 될 겁니다.」
「이나카와회의 사업장은 어떻습니까?」
「위조지폐로 값을 치른 내 사업장 11개는 환수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금철이 부드럽게 웃었다.
「곤란하시면 말씀 안 해주셔도 좋습니다. 궁금해서 여쭤본 것이라.」
「아마 이나카와회에서 다른 관리인을 임명할 겁니다. 그것은 이미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와 일본 양국 정부가 합의를 한 것 같습니다.」
「그렇군.」
이금철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일본 놈들의 반응이 흉년에 풀죽도 못 먹은 놈들처럼 느실느실했군.」
「지금 잡혀 있는 마쓰노나 가와베가 임명될 수도 있겠지요. 그자들은 시바다의 위조 지폐 사용에 관련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니까.」
김상철의 앞에 놓인 잔에 이금철이 술을 채웠다.
「김사장님, 톰프슨 그룹의 자문관으로 이경복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오성그룹의 비서실 중역이지요.」
「‥‥‥‥‥」
「지금 근대 호텔에 수용되어 있는데 내일 추방될 것이라고 하더군요,」
「‥‥‥‥‥」
「김사장께서 오성그룹의 사업장들을 관리하시려면 그자가 필요하실 겁니다. 실무책임자였으니 내막도 쉽게 파악하실 수 있을 것이고.」
「오성에서 부탁하던가요?」
김상철이 묻자 이금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얽히고설킨 관계지요. 이경복은 우재환에게 협조했지만 김 사장께도 적극 협조할 것이라고 오성에서 연락해 왔습니다.」
「‥‥‥‥‥」
「나는 그저 오성의 부탁을 전달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김상철이 머리를 돌려 잠자코 앉은 이한을 바라보았다. 깊게 빠져들수록 적도 없고 우군도 없는 상황이 되어간다. 이해와 타산으로 붙었다 떨어지는 것은 국가관계뿐만이 아니라 기업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들이 임시 본부로 삼고 있는 근대시 중심부의 5층 빌딩에 들어섰을 때 로비에 서 있던 박기동이 다가왔다.
「이제 오십니까?」
「당신 바쁜 모양이오? 하루 종일 보이지 않더니.」
김상철의 말에 그가 눈꼬리에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예, 조금 바빴습니다.」
그는 계단을 오르는 김상철의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
「사장님,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이한이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이 새끼야, 나한테 얘기해.」
계단에 발이 걸린 박기동이 비틀거리며 멈춰 섰고 이한이 코가 닿을 듯이 바짝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 건방지게 네가 뭔데 함부로‥‥‥」
얼굴이 하얗게 된 박기동이 한 계단을 내려섰을 때 김상철이 다가와 섰다.
「무슨 이야기요?」
「예, 다름이 아니고 안인석 씨 문제로 …….」
「제가 저녁에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요.」
「따라와요.」
이한의 시선을 피하며 박기동은 김상철의 사무실에 따라 들어갔다. 자리 잡고 앉은 김상철이 말을 계속하라는 듯 박기동을 바라보았다.
「예, 전부터 안인석 씨를 조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근대호텔에 면회를 갔던 것입니다.」
박기동이 열심히 말했다.
「그랬더니 안인석 씨가 김 사장님께 부탁을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패배자가 될 수는 없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두 분이 친구 사이신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은 들었지만 일부러 찾아갔습니다.」
방문이 열리더니 이한이 들어섰다. 김상철의 옆에 선 그가 팔짱을 끼고 노려보았으므로 박기동은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사장님께선 원체 바쁘셔서 그쪽을 잊으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저로서는 듣기만 했을 뿐입니다.」
「패배자가 될 수는 없다고?」
혼잣소리처럼 김상철이 말하자 그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질긴 사람이야.」
김상철이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볼 때마다 나는 질긴 생명력을 느껴. 당신 같은 사람들이 모여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룩했을 거야. 모두 당신 같지는 않겠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체면이나 지조도 없는 데다 배신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지만 시장을 보는 눈은 뛰어나지. 돈을 모을 기회가 있다면 목숨을 걸 만한 용기도 있고.」
「…………」
「난 당신한테서도 배우고 있어.」
침을 삼킨 박기동이 시선을 올렸다가 내리고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닦았다.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라는 표시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을 경우가 올 거야. 조심해야 돼, 당신은.」
근대리아 동쪽은 오호츠크해의 위쪽 기지가 만과 맞닿아 있었으므로 캄차카반도만 건너면 미국령의 제도들이 베링해에 떠 있다. 알래스카에서 뻗어 나온 제도들인 것이다. 시바다 겐지가 나카무라 이하 1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얼음에 덮인 기지가 만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다. 한밤중이지만 이곳은 태양이 지지 않고 지평선 위에 붉은 빛덩어리로 펼쳐져 있는 북극지방이었다. 만 사흘간을 달려온 끝이라 그들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근대시에서 1,100킬로를 달려온 것이다. 2킬로쯤 앞쪽에 4,50채의 민가가 모여 있었는데 이곳은 러시아 영토였다. 근대리아 국경은 겨우 30킬로쯤 북쪽이었으니 사흘 만에 근대리아를 벗어난 것이다.
시바다가 몬도에게로 다가갔다. 설상 트럭 옆에 선 몬도는 망원경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몬도 씨, 여기까지는 운이 좋았는데 앞으로가 걱정이오.」
그는 턱으로 앞쪽의 마을을 가리켰다.
「저곳에 묵을 수는 없소. 오늘은 이 근처에서 야영하고 다시 남하하는 수밖에. 도시로 들어가야 합니다.」
근대시를 탈출한 것은 러시아의 공군기들이 발진한 다음이다. 수십 대의 수송기가 떠올랐다는 연락을 받은 즉시 몬도는 시바다에게만 그것을 알린 다음 같이 빠져나온 것이다.
몬도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밤 11시였으나 주위는 그저 흐린 한낮처럼 밝았다.
「남쪽으로 2백 킬로쯤 내려가면 람스크라는 항구가 있소. 인구가 5천 명 정도의 도시인데 그곳에 가면 일본 배를 탈 수 있을 거요.」
몬도가 말하자 시바다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제야 말씀하시는군. 당신은 무작정하고 이곳까지 올 사람이 아니오.」
「어업 조사선이오.」
「200킬로라면 다섯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요. 아침 여섯 시까지만 쉬고 떠납시다.」
시바다가 소리쳐 나카무라를 불러 이야기를 하자 부하들은 금방 생기가 살아났다. 제각기 야영 준비와 늦은 저녁 식사 준비로 부산한 무리에서 빠져나온 몬도는 만이 내려다보이는 조그만 언덕으로 올라갔다. 얼어붙은 바다에는 흰 눈이 덮여서 마치 평원처럼 보였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곧 사내 한 명이 다가왔다. 그의 부하인 죠오베였다.
「과장님, 연락이 되었습니다.」
몬도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이 타고 온 트럭에는 위성통신시스템(SATCOM)이 실려 있었으므로 일본 정보국과도 직접 교신이 가능한 것이다.
영하 30도였지만 바람 한 점 없는 밤이었다. 통조림을 익혀 간단한 저녁을 마친 부하들은 곧 트럭 안에 들어가 잠에 떨어졌다. 모처럼의 안정된 분위기였다. 내일이면 일본 배에 올라 귀국하게 되는 것이다. 피우던 담배를 버리고 마악 트럭에 오르려던 몬도는 옆쪽으로 다가오는 시바다를 보았다.
「몬도 씨, 잠깐 나하고 이야기를 합시다.」
시바다가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밤낮으로 달려왔던 사흘간이었고 그동안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기도 했다. 그들은 만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자리 잡고 앉았다.
「몬도 씨도 잘 알겠지만 내 입장이 고약해서 말이오.」
시선이 마주치자 시바다가 빙긋 웃었다.
「오는 도중에 틈틈이 근대리아 방송을 들었는데 위조지폐 문제가 크게 터졌더군. 당신도 알고 계시지요?」
「나도 방송은 들었소.」
「정보국과 통신할 때 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나에 관한 이야기 말이오.」
몬도가 피우던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끄고는 정색을 했다.
「무슨 뜻이오? 당신 이야기를 우리가 왜?」
「난 이미 조직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소. 아마 받아주지도 않을 것이지만.」
「‥‥‥‥‥」
「조직은 근대리아에 투자한 사업체를 살리기 위해서나 명예 회복을 위해서라도 날 제거하려고 할 겁니다.」
이번에는 시바다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는 불을 붙인 담배 연기를 길게 내어 뿜었다.
「지금 여기 데려온 열두 명은 내 심복들이지. 저놈들이 불칸 역에서 공을 세운 영웅들이오.」
「‥‥‥‥‥」
「정보국의 입장도 생각해 보았소. 당신이 날 데리고 도망친 이유도. 만일 내가 마쓰노나 가와베처럼 앉아 있다가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면 아마 꼼짝없이 위조지폐 사건을 자백하게 되었을 거요.」
몬도가 몸을 굳히고는 그를 쏘아보았다
「이봐, 시바다 씨, 당신은‥‥‥」
「잠자코 내 말을 들어.」
시바다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힘이 실려 있었다.
「난 네 놈이 내 약점을 쥔 것처럼 으스대고 있을 적에 꼭 이런 상황이 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한번 당한 수모는 잊지 않는 사람이다.」
「‥‥‥‥」
「넌 아마 정보국과 통신하면서 나를 언제 제거할 것인가까지 이야기해 두었을 것이다. 이 시바다 겐지는 없어져야 할 사람이라고 정보국이나 우리 이나카와회가 합의를 했겠지.」
이제 몬도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졌다. 기세를 잃은 것이다. 한 번 잃은 기세는 다시 세우기 힘든 법이다. 시바다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어업 조사선이라, 그건 내가 조사를 해볼 생각이다. 너는 이곳에 남고.」
그 순간 시바다가 몸을 비틀면서 그의 오른손이 몬도의 목 밑을 스쳤다. 나란히 앉아 있던 몬도가 뒤로 목을 벌컥 젖혔는데 몸은 그대로이다. 베어 젖혀진 목에서 핏줄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으므로 시바다의 얼굴은 금방 피투성이가 되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나카무라가 다가왔다.
「보스, 두 놈은 해치웠습니다.」
시바다는 잠자코 몬도의 저고리에 칼날을 닦고는 호주머니에 있는 그의 한쪽 손을 떼 내었다. 이미 시체가 되었으나 몬도의 손은 권총의 손잡이를 굳게 움켜쥐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근대시에 있는 김상철의 사무실로 이대각이 서두르며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찌푸려져 있었다. 아침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타운에 있는 그의 숙소에서 이곳까지는 한 시간은 족히 걸렸으니 이대각은 일찍부터 서둘렀을 것이었다. 김상철이 앞에 앉은 이대각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있어.」
이대각이 큰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나, 다시 부위원장이 되었다.」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잘 되었습니다, 부위원장님.」
「경비본부장도 겸하게 되었어.」
「더 잘 되었습니다.」
몸을 뒤로 젖힌 이대각이 비스름한 시선으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부위원장만 맡으라면 거절할 작정이었어. 그런데 경비본부장까지 겸하라는 거야. 그래서 승낙했다.」
「당연히 그러셔야‥‥‥」
「이제야 제대로 근대리아가 돌아가는 것 같다. 위원장이 아침에 전화로 이야기해 주더구만. 지금 위원장과 볼코프를 만나러 가는 길에 너한테 먼저 들린 거야.」
「그럼 어서 가보셔야 …….」
「기다리라고 하지 뭘.」
이대각이 이제는 다리까지 꼬아 있었다.
「머리가 크다는 것은 뇌의 용량이 크다는 것이고 그것은 뇌를 잘 활용만 하면 머리 작은 놈들보다 얼마든지 생각이나 계산을 빨리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는 정신을 집중시키려는 듯 김상철을 쏘아본 채 정색을 했다.
「그래서 오는 도중에 곰곰이 생각했는데 경비본부장 자리는 서울의 노회장도 당신 뜻대로 결정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었다. 한국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
「러시아 정부가 추천했을 확률이 높아. 그런데 그놈들이 이대각이라는 대가리 큰 인물이 타운에서 직업소개소를 하고 있다는 것까지를 알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상체를 세우고는 다리를 내렸다.
「네가 추천했지? 볼코프한테?」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노회장이나 유위원장이실 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코웃음을 친 이대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감은 내가 쿠웨이트로 가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고 있을 것이다. 유위원장은 영감의 말에는 절대로 복종하는 사람이고.」
「부위원장님만 한 적격의 인물이 없습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과연 그렇군. 넌 알고 있었어.」
소리 내어 혀를 찬 이대각이 몸을 돌렸다.
「결국 내 생각이 맞은 거야.」
이대각을 배웅하고 돌아온 김상철이 자리에 앉았을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며 이한이 들어섰고 뒤를 따르는 것은 강미현이다.
「형님, 이분이 뵙자고 하셔서.」
이한의 얼굴은 찌푸려져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앞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 앉아요.」
방에 들어설 때부터 강미현은 곧장 시선을 주고 있었는데 이쪽의 반응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분위기가 눈빛에 나타나 있다. 강하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였다. 못마땅한 표정의 이한이 방을 나가자 방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날 찾아올 줄은 전혀 뜻밖인데.」
먼저 입을 연 것은 김상철이다.
「어쨌든 살아 있다 보니까 다시 만나게 되는군.」
그를 바라보던 강미현이 시선을 조금 내렸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문득 김상철이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그, 한민수라는 자, 내 주관으로 말한다면 개자식이었어.」
「그리고 솔직히 당신들 결혼생활의 파탄도 예상했지만 조금도 부담이 되지 않았어, 당신의 불행은 내 책임이 아냐.」
「‥‥‥‥‥」
「한마디만 더 하지. 난 당신으로부터 상처받지 않았어. 그러면 이해가 되겠지?」
「됐어요. 이젠.」
강미현의 목소리가 밝았으므로 김상철이 오히려 조금 긴장을 했다. 그녀의 시선에는 이미 아까의 분위기가 섞여 있지 않다.
「실컷 얻어맞은 것 같은데 기분이 후련해요.」
이번에는 김상철이 입을 다물었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번 사건은 유감이지만 난 후회하지는 않아요,」
시선이 마주치자 강미현이 입술과 눈끝으로만 웃었다.
「고마워요, 어쨌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것은 쫓겨나는 것 같았던 맹랑한 기분이 사라졌다는 것에 대한 치하였다. 근대리아에 대한 감사의 인사는 이미 그가 층분히 들었을 테니 더할 필요는 없다.
「언제 식사나 같이해요.」
「그러지.」
둘이는 마주 보며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강미현이 방을 나가자 곧 이한이 들어섰다. 그는 한동안 눈을 껌벅이며 김상철을 관찰하다가 반응이 없자 입맛을 다셨다. 서류를 뒤적이던 김상철이 머리를 들었다.
「안인석은 풀려났나?」
「예, 형님.」
다시 입맛을 다신 이한은 몸을 돌리더니 방을 나갔다.
5. 대의의 희생자
강회장이 근대리아에 온 것은 5월 초순이었다. 강추위는 가셨지만 근대리아의 5월은 아직도 영하의 기온이었고 가끔은 눈보라가 휘날리기도 한다. 준비해온 슈바에 털모자를 눌러쓴 강회장의 표정은 밝았다. 영접 나온 유장석과 이대각의 안내를 받으며 붉은 양탄자가 깔린 공항의 로비를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은 활기에 차 있었다.
관리들과 경비대가 좌우에 도열해 서 있는 광경은 마치 국가원수를 맞는 행사처럼 보였는데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년 만의 방문이었고 강회장의 표현으로는 귀국이었는데 그 동안의 곡절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그는 양탄자 위를 걸어 공항 건물의 현관 바로 앞에 대기시킨 검정색 캐딜락에 올랐다. 국빈용으로 주문해 놓은 품위 있고 호화로운 차였다. 10여 대의 경비대 호위차와 관리들이 탄 수십 대가 섞인 차량 행렬이 곧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근대리아가 태어난 후로 처음 갖는 성대한 영접 행사였다. 강회장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않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자리에는 수행해온 이남호가 앉아 있었고 마주 보는 앞쪽에 앉은 것은 유장석과 이대각이다.
근대리아는 이제 인구 350만에 연평균 관광객이 100만 명가량으로 예상되는 신흥국가였고 근대시의 인구는 70만에 타운의 인구는 40만 명이 넘는다. 이 양대 도시 외에도 10여 개의 소도시가 생겨나는 중이었는데 발전 속도는 눈이 부실 지경이다. 행정청에서 예상한 올해의 1인당 국민소득은 12,000달러로 주변 지역의 3배에서 4배의 수준이었다.
강회장이 입을 열었다.
「인구 비례는 어떻게 되지?」
수시로 보고하고 있었으므로 유장석이 금방 보고했다.
「예, 대별해서 말씀드리면 한국계가 약 30퍼센트로 100만 명, 중국계가 역시 30퍼센트로 I00만, 러시아계가 35퍼센트인 130만, 나머지 민족이 20만입니다.」
「러시아나 중국의 한인들 이주 실적은 어때?」
「극동지역의 러시아 땅에 있던 고려인들은 거의 대부분 이주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원동지역의 고려인이나 중국 땅의 조선족이 옮겨오는 상황입니다.」
「중국 국경 검문소에서 지금도 검문을 심하게 하나?」
「아닙니다, 저희 행정청 직원들을 중국 국경까지 파견해서 돕도록 했기 때문에 이주 희망자가 돌아간 적은 없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강회장이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쪽, 북한은 어때?」
「아직 소수입니다, 회장님.」
대답한 것은 이대각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국경 통제가 심하고 더욱이 러시아 대륙을 횡단해야 근대리아에 도착합니다. 얼마 전에는 근대부두를 출발했던 화물열차 안에서 일가족 세 명이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어디에서 말이야?」
「근대리아 영내의 간이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저런 끔찍한 일이 있나?」
강회장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방법을 강구하도록.」
「예, 회장님,」
「지난번에 김상철이 북한 노동자들을 끌어오려다가 그만두었는데 ……,」
유장석과 이대각이 긴장을 했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김상철은 살인범이 되었고 근대리아는 갖은 압력을 당한 끝에 운영위원회가 설치되고 미, 일의 세력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수백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마침내는 러시아군이 진입을 했다. 강회장이 그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김상철이는 잘 있나? 왜 오늘 공항에 나오지 않았지?」
유장석이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공식 행사여서. 그래서 따로 인사를 드리게끔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만.」
지어낸 말이다. 그나 이대각은 강회장이 김상철을 만날지 자신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차는 근대시로 들어서고 있었다. 본래 강회장이 설계를 꼼꼼히 검토한 도시였지만 그가 떠났던 2년 전에는 겨우 뼈대만 세워졌을 뿐이었다. 강회장이 눈을 치켜뜨고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특급호텔이 40여 개에 상가와 빌딩이 들어섰고 외국 은행의 지점만 해도 몇십 개가 넘는 웅장한 도시가 되어있는 것이다.
「훌륭하다.」
강회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바로 한국인이 살 땅이야.」
그는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이봐, 문을 조금만 열라구. 도시 냄새 좀 맡아보자.」
고구려 호텔은 27층 높이에 객실 수만 6,400개에 이르는 대형 호텔이었는데 27층 높이에서 그친 것은 고구려가 27대 영류왕 때에 멸망 당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고구려 호텔은 근대에서 세운 근대리아의 최대 호텔이다. 27층의 스카이라운지에서는 근대시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평원 끝 쪽의 근대타운도 한 줌의 불덩이처럼 시야에 들어왔다.
호텔 주위로도 크고 작은 빌딩과 호텔들이 세워져 있었지만 전망에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근대 측 건물의 특권이다. 행정청은 앞으로도 고구려 호텔의 시야를 가리거나 더 높이 솟아오르고 싶어 하는 건물들을 통제할 것이었다.
강회장은 스카이라운지의 특실에 앉아 있었는데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가 즐기는 녹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사내들은 이남호와 유장석, 이대각과 김상철이다. 볼코프가 지휘하는 러시아 진주군은 지난 4월에 약속대로 철군을 했고 근대리아는 하루가 다르게 번창하고 있는 중이다.
식사에 곁들여 포도주를 두어 잔 마신 강회장의 분위기는 밝았다.
「박정규와 전창남이가 미국으로 들어갔어. 가족을 끌고 갔다니 아마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야.」
강회장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런 놈에게 정책을 맡긴 대통령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그만해도 잘한 셈이다.」
「우재환도 미국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말을 받은 것은 이대각이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지요.」
그러나 시바다와 나카무라 등 도망친 이나카와회의 간부들은 아직도 행방이 묘연했고 일본 정보국 요원 세 명도 귀환하지 않았다. 근대리아에 남은 마쓰노와 가와에는 일본 정보국도 시바다가 그들을 처치했다고 믿고 있었다.
강회장이 김상철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네 조직원은 몇 명이나 되느냐?」
「3천 명이 조금 넘습니다.」
「허어.」
강회장이 감탄을 했다.
「먹여 살리려면 비용이 꽤 들겠구나.」
「제각기 직장이 있으니 따로 비용 나갈 것은 없습니다.」
대부분의 부하들은 사업장에 고용되어 있어서 월급을 받는 것이다. 거기에다 김상철은 보호세 명목으로 오성으로부터는 이익금의 10퍼센트를, 대동의 사업장에서는 20퍼센트를 따로 받는다.
대동은 한민수를 석방시키는 조건으로 근대리아에 투자한 모든 사업장을 포기했는데 그것을 인수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상철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형식일 뿐 대동이 투자한 사업장의 이익금 80퍼센트는 이대각한테 전달되어서 근대와 러시아가 반분하고 있었다. 김상철은 관리만 책임질 뿐인 것이다. 이대각이 입을 열었다.
「근대리아 제일의 조직이지요. 경비대 다음가는 세력입니다.」
강회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본래부터 조직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던 그였다. 삼합회와 마피아가 제각기 그들 민족에 기반을 두고 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한민족을 상대로 적극적인 포섭 공작을 해온 북한 측에 대항할 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행정청이나 경비대의 통제만으로는 생활 깊숙이 파고드는 조직의 침투에 대항할 수가 없다. 잘못하다가는 외양은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근대리아지만 내부의 한민족은 모조리 북한 측에 흡수될 위험한 상황이었다.
「요즘 오성그룹이 우리한테 상당히 호의적이야. 아니, 마찰을 피한다고 할까?」
강회장이 말머리를 바꾸었다.
「반도체 경쟁에서도 그것이 드러나. 아마 근대리아 문제 때문에 그런 것 같아.」
이남호가 쓴웃음을 지었으나 나머지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오성이 나진 선봉 지역에 투자를 계속해 왔지만 곧 손을 뗄 것이다. 이곳 눈벌판에서 시작한 우리보다 몇 배나 더 어려운 조건이야, 그곳은, 전력과 통신, 항구시설에다 관련산업 모두를 신설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이곳보다 몇 배는 든다. 거기에다 자유무역 지대라지만 통제와 감시가 심하고 생산량도 낮단 말이야.」
강회장이 김상철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년 북한에서 넘어온 부하들도 있다면서?」
「예, 조금 있습니다.」
「그 사람들한테서 들었겠지?」
「들었습니다.」
「생산량이 안 나오는 이유는?」
「예, 능력에 따른 성과급을 지급해도 자유무역 지대 밖으로의 통행이 금지된 상태여서 돈 가치를 발휘할 기회가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
강회장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근대시보다 적은 자유무역 지대야. 그곳에는 나이트클럽도, 오입할 곳도, 카지노도 없어. 북한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지. 돈 쓸 곳이 없는데 돈 벌어서 뭐해? 그러니 생산량이 올라가겠나?」
「‥‥‥‥‥」
「그, 북한 사람들을 네가 데려와라.」
그러자 테이블의 분위기가 일시에 긴장되었다. 이 말을 꺼내려고 강회장이 분위기를 만든 것이다
「지난번에 네가 시도했다가 일이 터졌는데, 지금은 상황이 나아졌다. 북쪽 지방에 인력이 얼마든지 필요하고 이곳은 돈 쓸 곳도 많다. 네가 길만 열어놓으면 아마 붓물 터지듯이 쏟아져 올 것이다.」
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김상철을 쏘아보았다.
「북한은 위원장인가 원가 하는 놈을 이곳에 앉혀놓고 근대리아를 흡수하려고 할 것이다. 이제 미국과 일본의 세력이 제거되었으니 아주 적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것을 이용해야 돼, 그리고 이 일을 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
「‥‥‥‥‥」
「행정청에서 움직인다면 한국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북한도 경계하게 될 테니까.」
「북한 인구가 2,700만이여. 얼마든지 끌어와도 상관이 없어.」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이제는 제가 회장님의 지시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퍼뜩 눈시울을 올린 강회장이 김상철을 쏘아보았다. 이남호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김상철을 바라보았고 유장석은 소리죽여 숨을 내려쉬었다. 그러나 이대각은 조금 다르다. 어깨를 편 그는 큰 머리를 조금 뒤로 젖히고는 강회장을 바라보았다. 도전적인 자세라고 봐도 될 것이다. 이윽고 강회장의 굳어졌던 어깨가 먼저 풀렸다. 그리고 입가에 웃음기가 띠어지면서 눈시울이 내려졌다.
「하긴 그렇다. 년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는 데다가 그들의 대리인이기도 하니까.」
「그들한테도 이용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한테 유감이 있구나.」
「버림받았었고 근대리아가 제 땅이라는 생각도 잊었었지요. 솔직히 회장님과 근대의 대의를 위해 일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강회장이 길게 숨을 내려쉬더니 번쩍 머리를 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나도 정부와 타협을 하고 비루하게 살았으니까. 조급한 김에 실수도 했어. 미현이를 그 쓰레기 같은 놈과 결혼시켜서 하마터면 모든 일을 그르칠 뻔했다.」
그러자 이남호가 테이블 위로 시선을 내렸고 유장석은 머리를 옆쪽으로 돌렸으며 이대각은 헛기침을 했다. 김상철을 쏘아본 강회장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 나도 솔직히 말한다면 네가 재기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었지. 어쨌든 너는 승자다. 승자의 권리가 있어.」
「‥‥‥‥‥」
「미현이도 근대리아를 위해 이 할애비의 뜻에 따를 것이다. 나는 이제 다시 너희 둘에게 기대를 걸고 있어.」
스카이라운지를 나왔을 때는 밤 10시가 넘어 있었다. 현관 앞으로 나온 김상철이 마악 차에 오르려는데 뒤쪽에서 이대각이 다가왔다.
「김사장, 가는 길에 날 내려줘.」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차가 호텔의 정문을 나서자 이대각이 입을 열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을 거다. 영감도 놀란 모양이야.」
「‥‥‥‥‥」
「하지만 강미현의 이야기는 즉흥적이 아닌 것 같아. 기회가 좋지 않았을 뿐이지.」
그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어때? 기분이?」
「섬찟했습니다. 하지만 이해는 했어요.」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강미현 씨가 회장님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자신이 승자의 몫으로 내놓아졌다는 걸 알면 말입니다.」
「강미현이 입장을 생각하는 걸 보면 가능성이 있는 거냐?」
「그 여자한테 감정이 있는 건 아닙니다.」
「강미현은 받아들일 것이다. 그 피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여.」
그들은 한동안 창밖의 시가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차는 곧장 도로를 동진하고 있었는데 타운으로 가는 것이다
「난 하겠습니다.」
불쑥 김상철이 입을 열자 이대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 영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희생을 감수할 만한 일이었지요, 근대리아 건설은.」
「영감은 너한테 기대를 걸고 있어.」
「난 이제 근대 직원이 아닙니다. 아까 회장님께 그것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불쑥 강미현의 이야기를 꺼냈을 거야, 회장이. 그리고 네가 당신의 대의에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
이대각이 손을 뻗어 김상철의 어깨를 쳤다.
「네가 하겠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여기서 내려줘.」
차가 길가에 멈춰서자 이대각이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나는 곧장 이실장한테 보고를 할 것이다. 물론 예상들은 하고 있겠지만 확실한 게 좋거든. 물론 내 점수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말이야.」
뒤쪽으로 승용차 한 대가 다가와 섰는데 이대각의 전용차이다.
「이게 월급쟁이하고 사장하고 다른 점이지. 윗사람 챙기는 것 말이다.」
변순태는 하바로프스크 태생의 고려인으로 전직이 시계수리공이었다. 오케안 시장 근처의 시계점에서 4년을 일하다가 근대리아의 초창기에 수송 트럭을 타고 들어온 개척민 중의 하나인 것이다. 타운의 인구가 2, 3천 명이었던 시절이다. 대망을 품고 근대리아에 왔지만 하루 벌어 하루 마시는 생활로 몇 달을 지내다가 송길수의 부하가 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바뀌어졌다. 사람은 한평생을 살면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회의 틀에 의해서 정해진 순서를 따라 생활하다 보면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는 경우도 흔한 것이다.
변순태는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한번 듣거나 익힌 기술은 잊지 않아서 시계점의 견습공 딱지도 남보다 2년이나 빨리 떼었던 경력이 있다. 그는 송길수에게서 관리의 요령을 배웠고 갖가지 고초를 겪으면서 자신의 성격이 대담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눈도 한번 깜박이지 않고 살인을 했으며 극한 상황이 되면 정신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다. 그러나 송길수가 죽은 이후로 그는 의기소침해 있었다. 지금은 이한의 부하가 되어있는 그가 어깨를 구부정하게 숙이고는 김상철의 근대시 사무실에 들어선 것은 아침 9시 30분경이었다. 김상철이 개인적으로 부른 것은 처음이어서 그는 잔뜩 긴장해 있었지만 그를 맞는 김상철은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네 이야기는 송사장한테서 많이 들었다.」
마주 앉은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송사장은 나와 형제 같은 사람이었다. 나도 가슴이 아프다. 우리는 동북아시아에 한민족의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려고 했어. 그것은 본래 근대의 강회장이 구상한 계획이었지만 우리는 그 대의에 공감했던 것이지. 그래서 사내로서 목숨을 걸고 일할 만한 명분을 갖게 된 것이다.」
방음장치가 잘 되어있는 사무실 안이어서 김상철의 말소리만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김상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근대리아는 남북한과 일본을 합한 면적보다도 넓다. 생각해 봐라. 이 땅에 한민족이 모여서 또 하나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을. 그것을 견제하려고 미국과 일본이 한국 정부를 움직여 근대리아를 관리했고 우리가 그들을 쳤다.」
「‥‥‥‥」
「네가 대의와 명분을 갖도록 말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한테 앞으로 큰일을 맡길 생각이니까. 너는 지금부터 타운의 일을 맡게 된다.」
변순태가 눈을 치켜떴다. 타운에는 직할 사업장만 해도 24개가 있는 것이다. 그의 표정을 본 김상철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한과 그레고리는 근대시의 일을 맡게 될 것이다. 이제는 조직이 커졌으니 제각기 맡은 역할이나 책임도 커져야 할 테니까.」
아침 시간이어서 근대시 외곽에 자리 잡은 러시아 식당 소피아는 한산했다. 창가에 앉아 있는 두 테이블의 손님뿐이었는데 동남아 쪽 관광객이었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최태호가 시선을 들었다.
「정치적인 문제는 난 모릅니다. 그리고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니지요. 나는 오성이 약속한 돈만 받으면 그만이요, 이선생.」
앞자리에 앉은 사내는 오성의 관리자인 이경복이다. 그는 찌푸린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글쎄, 나도 실무자 입장이어서 말입니다. 서울에서 돈이 내려와야 드릴 것 아닙니까? 지금 본사에서 평양 쪽과 절충하고 있다니 곧 결과가 나오겠지요.」
「평양에서는 날더러 빨리 받으라고 하는데 무슨 절충을 한단 말이오?」
최태호가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우린 공사가 예정보다 2개월이나 늦어졌소. 책임추궁을 당할 형편이란 말입니다.」
오성과 북한이 근대시에 합작 사업장을 건설하기로 합의한 것은 6개월 전이었으니 김상철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다. 오성은 자금을 대고 북한은 관리를 맡으며 이익금은 반분한다는 조건이었고 이경복은 사업장의 감리 감독을 한다는 세부사항까지 결정되었던 것이다. 오성의 입장으로 보면 미국계의 우재환에게만 사업장을 맡기는 것보다 북한 측에도 투자하여 균형을 이루는 것이 안정성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북한에게는 이미 북한에 진출한 사업장의 특혜를 조건으로 거금을 투자한 전례가 있다. 그러나 김상철의 사건으로 러시아군이 투입되고 근대리아의 판도가 일시에 뒤집혀졌다. 오성의 사업장은 김상철이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금철의 부탁으로 이경복이 근대리아에 남게 되었지만 오성은 북한과의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 최태호가 말을 이었다.
「이미 근대의 강회장이나 김상철이도 우리와 오성과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을 거요. 그들은 우리 사업을 반대하지도 않을 겁니다. 나는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소.」
「나는 이번 일로 우리 공화국과 오성과의 관계가 불편해질 것이 염려됩니다. 이선생이 서울에 연락을 해주시오.」
최태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주일 후에 확답을 해주시오. 약속한 돈을 보내든가 아니면 합의를 깨겠다든가 둘 중의 하나를 말이오.」
거친 발걸음으로 최태호가 음식점을 나가자 이규환이 들어섰다. 그는 이경복의 찌푸려진 표정을 보더니 분위기를 짐작한 모양으로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일주일 여유를 주는군. 가부 간을 결정하라고.」
이경복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위에서부터 아래 놈들까지 공갈치는 것이 익숙하단 말이야.」
「우리가 나진 선봉에 막대한 투자를 해놓았으니 약점을 쥐었다고 믿는 겁니다.」
「그나저나 야단났다. 합의를 깨었다고 나진 선봉에 갖가지 압력을 가할 것이 뻔한데.」
이경복이 입맛을 다셨다.
「본사에서도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모양이야.」
이미 근대리아에서의 북한과의 합작사업은 포기하기로 결정이 난 것이다. 미국의 배경을 업고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시작했던 근대리아의 투자 사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껍질이 모두 벗겨져 오성의 실체가 드러나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껍질을 쓰고 투자를 다시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계를 내려다본 이경복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본사에 보고를 해야겠다. 대안도 없이 보고만 하고 있으니 기운이 빠지는구만 그래,」
이금철은 스스로 천성적인 육감이 뛰어나다고 믿는 사내였다. 그리고 그것이 번번이 적중되었기 때문에 인상이 나쁜 자는 절대로 중용하지 않았고 예감이 좋지 않으면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예감이 틀린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변수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갖다 맞추는 형편이다. 그렇다고 그가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니다. 분석력과 재치가 뛰어난 탓에 생겨난 일종의 자기 확신 현상이었다. 그런 그가 요즘의 근대리아 상황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미국과 일본 세를 몰아내는 것에는 동조하였음에도 근대리아 내부에 김상철의 세력이 급격히 확장되자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다른 세력들도 그것을 느꼈겠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은 그들하고는 유형이 다르다. 어쨌든 김상철과 근대는 한국에 뿌리를 두었고 남북한이 대립한 이런 상황에서 그들과의 공존은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 그의 위기의식은 타운에 시계수리공 출신인 변순태가 책임자로 부임해오면서 증폭되었다. 그는 기계 같은 사내였다. 그런 자를 타운의 책임자로 임명한 김상철의 의도가 꺼림칙한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김상철의 명성과 그의 부하들에 대한 배려가 근대리아에 퍼져 있는 상황이어서 변순태가 조직원을 모집하자 조선족과 고려인을 불문하고 떼를 지어 사내들이 모여들었다. 심지어는 전에 고용되었다가 이금철에게로 복귀했던 북한군 출신들까지도 돌아간 것이다.
이금철은 보드카 잔을 내려놓고 최태호를 바라보았다.
「김상철과 마찰을 일으킬 필요는 없어. 지금은 상황이 좋지가 않아. 기세를 타고 있는 놈들에겐 부딪치지 않는 것이 낫다.」
말은 가볍게 했지만 그의 얼굴은 찌푸려져 있었다.
「하지만 위원장님, 문제는 남아 있는 놈들도 흔들리고 있다는 겁니다. 조선인은 결국 김상철과 우리들의 나눠 갖기 싸움이 됩니다.」
최태호가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면 근대리아는 남조선과 우리 공화국과의 결전장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있었던 것 아닌가? 그러다가 미국과 일본이 끼어들었지. 결국은 마피아와 삼합회가 남았지만 말이야.」
그는 보드카 잔에 술을 채워 들었다.
「지금 당면문제는 오성의 투자금을 받는 일이야. 평양에서 오성의 비서실장을 만나려고 여러 번 연락을 했는데도 아직 반응이 없는 모양이야.」
실권이 없는 중역들과의 회합은 시간만 낭비한다고 생각한 평양에서는 비서실장 조영규와의 협상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금철이 술잔을 들어 한 모금에 술을 삼켰다.
「결국은 자본력 싸움이다. 이 망할 놈의 땅에서는 말이야.」
「우리가 전쟁을 치를 때 모두 눈치만 보고 엎드려 있었다. 아마 곧 경비대한테 몰살당할 것이라고 믿었겠지.」
변순태가 앞에 선 세 명의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져서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타운의 나파스 클럽 안이었는데 엘로즈에서 다시 원래의 상호로 바꾼 것이다. 변순태가 말을 이었다.
「특히 네놈들은 그것을 바랐을 것이다. 우리가 다시 힘을 얻으면 살아나기 힘들었을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변순태가 사내들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그들은 송길수의 부하였다가 그가 타운을 떠나자 나카무라의 휘하로 들어갔던 사내들이다. 방 안에 모여선 사내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세 사내는 나카무라가 도망치자 이제까지 중국인 거리에서 숨어 지내다가 오늘 아침 붙잡혀온 것이다. 변순태가 왼쪽에 선 사내에게로 몸을 돌렸다.
「김덕표, 네가 이곳에 왔을 적에 잠잘 곳과 먹을 것을 마련해 준 사람이 누구냐?」
대답을 했지만 사래가 걸린 사내가 딸꾹질을 했다.
「송사장님입니다.」
「그 송사장님이 일본 놈들을 치다가 경비대 총에 맞아 죽었다.」
그는 허리춤에 꽂아둔 콜트 45구경을 빼어 들었다.
「너희 세 놈은 쏘아죽여서 제사를 지내야 된다.」
이미 각오를 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세 사내는 눈알만 굴릴 뿐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네놈들은 우리를 염탐해서 다녔고 맞아 싸우려고도 했겠지.」
「아닙니다, 저회들은‥‥‥」
가운데에 선 사내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들은 우리한테 중요한 일은 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변순태가 권총을 든 손을 휘둘러 그 사내의 옆얼굴을 쳤다. 손잡이에 맞은 사내가 바닥에 쓰러지자 변순태는 권총을 옆에 선 사내의 머리에 갖다 대었다. 무표정한 얼굴이다.
「네놈들은 매국노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죽어야 돼,」
사내가 온몸을 굳힌 채 멍한 시선으로 앞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방아쇠가 당겨지고 총성이 울리려는 긴장된 순간이다. 권총을 내린 변순태가 부드득 이를 갈더니 몸을 돌렸다.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앉은 그가 머리를 들었다.
「사장님은 지난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셨다. 아직 너희들이 준비가 덜 되었다고.」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너희들이 원한다면 다시 예전 일자리도 주라고 하셨으니 생각이 있다면 말해라.」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이윽고 그것은 소리 죽인 울음소리로 깨어졌다. 세 사내가 우는 것이다. 변순태가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놈들을 데리고 나가라, 어서,」
변순태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한은 혀를 찼다.
「그건 형님 모르게 쏘아죽이든 목을 졸라 죽이든 했어야 되는 일이야. 넌 융통성이 없다.」
이한이 문 쪽을 자꾸 보는 것이 세 사내를 쫓아가려는 시늉이었다. 그는 타운에 들린 길에 변순태를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버릇을 들였다가는 남아 있을 놈이 없다. 모두 배신할 것이다.」
「저는 사장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변순태의 말에 이한이 핏발 선 눈을 치켜떴다.
「시계 고치던 놈이 뭘 안다고? 무엇을 공감한단 말이냐?」
나이는 엇비슷했지만 이한은 죽은 송길수와 더불어 김상철의 형제나 마찬가지의 신분이다. 이제 조직에서 김상철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한 한 명뿐인 것이다. 변순태가 입을 열었다.
「저, 그놈들이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말씀이, 그것은 근대리아가 우리 땅이라는 생각이지요. 저도 요즘에야 그것을 깨우쳤습니다. 사장님한테서 들었지요.」
「근대리아가 우리 땅이라고 말이냐?」
「예, 한민족의 새로운 영토라고.」
「난 중국에서 온 조선족은 싫어. 그놈들한테서는 돼지기름 냄새가 나.」
이한은 카자흐스탄 출신의 고아이다. 그가 요즘 들어 더욱 창백해져서 실핏줄이 보이는 얼굴을 들었다.
「현채옥이 서울 호텔 근처에 있다고 해서 갔다가 허탕을 쳤다. 도대체 그 여자가 어디에 박혔는지 모르겠다.」
변순태가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타운에만 있다면 제가 찾아내겠습니다, 형님,」
송길수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에 현채옥은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변순태가 송길수의 여자였던 현채옥을 모를 리가 없다. 그날 이후로 현채옥을 찾아온 이한이 머리를 끄덕였다.
「살아남은 사람이 더 아프다. 내가 그걸 잘 알아.」
「너도 나하고 친하지 않는 게 낫다. 난 귀신이 씌웠는지 나하고 친한 것들은 모조리 죽는다.」
그가 붉은 입술을 벌리며 웃었다.
「아니면 이 땅이 귀신 볼은 땅이든가.」
「그럴 리가요, 형님.」
「송길수도 형님한테 물이 들어서 이 얼음덩이 땅을 고향이라면서 뼈를 묻겠느니 어쩌느니 하고 유식한 소리를 하더니만 이젠 형님이 너한테로 옮겼군.」
이한의 핏발 선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죽으면 소용없다. 고향이건 타향이건 죽고 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채옥을 찾아. 샅샅이 뒤져서라도.」
「알겠습니다, 형님.」
문으로 다가간 이한이 문득 머리를 돌려 뒤를 따르는 변순태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그놈들은 죽였어야 했어.」
오성그룹의 회장실은 광화문 본사 빌딩 33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채광이 잘 되는 데다가 전망이 탁 트인 방 안에서는 서울의 도심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생각에 잠겨 있던 김호경 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60대 초반이었지만 검은 머리에 혈색이 좋아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얼굴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진 선봉 지역이나 근대리아 양쪽으로부터 끌려다닐 수는 없어. 그리고 사업 이전에 이런 식의 관계는 불쾌하다. 애초부터 그자들한테서 정상적인 사업관계를 기대한 것이 무리였는지도 모르지.」
회장이 입술 한쪽만을 비틀어 웃자 조영규는 긴장을 했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회장의 컨디션이 최악의 상황일 때 저렇게 웃는 것이다. 회장은 화가 날수록 목소리가 가라앉고 마지막엔 웃는다. 근대의 강회장과는 정반대의 스타일이었다.
「나진 선봉에 더 이상의 투자는 없다. 재고는 말레이시아 사업장으로 옮기고 생산계획도 줄이도록.」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뿐만 아니라 이미 들여오기로 잔금까지 치른 항만 시설도 독일의 항구에 보류시켜둘 것이다. 생산계획을 줄이는 것은 생산량만큼만 생산하겠다는 뜻이므로 북한 당국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남아도는 기계는 말레이시아 사업장으로 옮길 것이고 피해를 극소화시킨 시점에서 나진 선봉에서 철수할 예정이었다. 그 시점은 3년 후가 될 것이다. 이것은 어젯밤의 그룹장 회의에서 결정된 극비사항이다.
「사흘 후에는 어떤 내용이든 통보를 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자들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회장님.」
조영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근대리아의 사업장은 별문제가 없습니다. 김상철이 관리하고 있으니까요.」
회장이 보일 듯 말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 대신으로 나진 선봉 지역의 투자 사업장에 갖은 압력을 가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워서 근대리아의 북한 측에 투자를 할 수는 없다. 다시 투자를 해야 한다면 차라리 이경복에게 맡겨 김상철의 관리를 받게 하는 것이 나은 것이다. 이미 근대 측에 알려진 이상 북한과의 합작은 위험천만한 작업이다.
「방법이 없어, 북한 측에 통보하는 수밖에, 나진 선봉의 불이익은 감수한다.」
회장이 자르듯 말했다.
「관계가 나빠지더라도 끌려다닐 수만은 없어.」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 김상철이 말인데, 지금은 강회장과의 관계가 다시 좋아졌겠지?」
문득 회장이 말을 바꾸었으므로 조영규가 다시 긴장을 했다.
「예, 어쨌든 다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있습니다만.」
「러시아 국적을 갖게 된데다 근대의 도움 없이 일어선 상황 아닌가? 더구나 손녀까지 엉뚱한 놈한테로 주었다가 망신을 당했지 않아?」
「배신감을 느꼈겠지요. 말씀대로 근대 쪽에서도 김상철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젠 러시아의 배경이 있고 자체 세력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나 근대나 김상철에 대한 입장은 비슷하지 않을까? 서로 사업장을 맡긴 지분도 비슷하고 말이야.」
조영규가 눈을 껌벅이며 회장을 바라보았다. 거느리고 있는 수백 명의 두뇌집단이 만들어내는 계획을 최종선택만 하는 입장인 회장이다. 그러나 두뇌집단이 하지 못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발상이다. 그들은 주어진 일밖에 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 창조는 최고경영자의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조영규는 긴장감을 느꼈다. 선대로부터 오성을 물려받아 10년 만에 오성의 규모를 세 배로 확장시킨 회장이다. 치밀하고 절대로 모험을 하지 않지만 계획한 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장님. 그는 대동의 사업장에 대한 지분도 20퍼센트나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다 자신의 조직에다 근대와 오성의 사업장을 합하면‥‥」
「근대는 어떻게든 그를 자신의 가족으로 끌어들이려고 할 것이다. 아마 강회장 성격으로는 그 이혼한 손녀를 다시 주려고 할걸? 김상철을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 돼. 그것이 근대리아 사업의 열쇠가 될 것이다. 집중하도록.」
머리를 든 회장이 조영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결국 경제력이 지배의 관건이야. 근대리아에서도 그 원칙이 통하지 않을 리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
박기동이 옆자리에 않은 이판석에게 훈계하듯 말했다.
「물론 그 돈이 권력과 합해진다면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지. 이것이 철학이다.」
그의 승용차 마틴은 근대리아의 최고급 차종으로 근대리아 국장급 이상의 간부가 되어야 탈 수가 있다. 마틴은 마악 근대시로 들어서서 대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또한 경쟁의 사회다. 같은 조건, 같은 상황에서라도 우열이 가려지고 승패가 꼭 일어난다. 너는 네 동료를 경쟁자로 생각해야만 될 것이다.」
이판석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하얼빈 태생의 조선족으로 북경 대학을 나온 사내였다. 1년 전에 근대리아에 들어와 여행사의 안내원이 되었다가 두 달 전에 박기동의 비서이자 회계원으로 채용이 되었다. 말수가 적은데다가 수줍음을 잘 타는 스물일곱의 사내였는데 러시아어와 중국어, 일본어에다 영어에 능통한데다 치밀해서 일에 실수가 없었다.
박기동은 여행사 대리점에다 수입상 사무실, 거기에다 타운에 두 곳의 클럽을 소유한 사업가이다. 거기에다 타운에 사설 금융회사를 차려 은밀하게 사채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형편이었다.
박기동이 가죽 시트에 등을 기대고는 만족한 듯 숨을 내려쉬었다.
「하긴 운이 조금쯤 따르기는 해야지. 갖출 건 다 갖추었다고 해도 운이 따르지 않아서 망한 경우도 있으니까.」
차가 시내 중심부로 들어서자 박기동은 말수가 적어지더니 이윽고 대리석으로 지은 10층 건물로 다가가자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김상철의 본부 사무실 빌딩인 것이다. 이곳은 사업장을 통치하는 곳이다. 더욱이 행정청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여서 그 힘은 절대적인 곳이었다.
박기동과 이판석이 10층의 대기실로 들어서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내가 그들을 굽어보았다.
「박 사장, 같이 온 사람은 누구요?」
「내 비서올시다, 조형.」
박기동이 상냥하게 말하고는 이판석을 돌아보았다.
「인사해라, 실장님이시다.」
「이판석입니다.」
허리를 90도가 되게 굽힌 이판석을 향해 사내가 턱만 조금 까닥여 보였다. 그도 같은 조선족이거나 고려인 출신일 것이다.
「두 분이 같이 들어가시오.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사내가 말하자 박기동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의가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이 방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김상철의 시선이 박기동을 지나 이판석에게로 향해졌다. 그러자 이판석이 우선 커다랗게 절부터 했다.
「당신 비서라는 사람인가?」
「예, 사장님. 이판석이라고.」
김상철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박기동이다. 그는 불안한 얼굴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사장님.」
「거기들 앉아.」
이판석과 함께였지만 박기동은 엉덩이 끝만 소파에 걸치고는 반듯한 자세로 앉았고 이판석도 마찬가지였다. 김상철이 이판석에게 말했다.
「자네가 유능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박사장과 함께 보자고 했어.」
그러자 얼굴이 금방 달아오른 이판석이 머리를 숙였다.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나도 사람을 모으고 있어서 네가 탐이 났지만 어차피 박사장도 내 사람이다. 박사장한테서 배울 점도 많을 것이고.」
숨을 들이마신 박기동이 눈을 깜박이다가 가만히 뱉아냈다.
김상철이 박기동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자네 둘이한테 맡길 일이 있어,」
「예, 말씀하십시오, 사장님.」
박기동이 선뜻 대답했지만 둘한테 맡긴다는 말이 조금 걸렸다.
「이금철을 만나 지난번에 중지되었던 인력공급 건을 상의해 봐. 인력은 5천 명 정도. 이것은 1차분의 숫자야.」
「예, 5천 명, 1차분으로,」
「1차분 공급이 성공적이면 곧 숫자를 늘려 다시 공급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말해주도록.」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기운차게 대답한 박기동이 물었다.
「물론 이것도 사장님의 사업장에 필요한 인원으로 비공식이겠지요?」
「물론 내가 주도한 사업이다.」
시선을 든 김상철이 박기동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예전보다 상황이 많이 좋아졌으니 입국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다.」
인력은 얼마든지 필요한 상황이었고 지난번에 성사 직전까지 갔다가 좌절된 일이다. 박기동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군인은 안 된다. 일반인으로 가족 단위의 노동력이면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계산할 테니까 가족을 중심으로 보낼 것, 그다음이 미혼 남녀, 기혼 남녀의 순서다.」
「예, 사장님.」
어느 사이에 수첩을 꺼내 열심히 적고 있는 이판석에게로 김상철이 머리를 돌렸다.
「이판석이, 가족 단위를 중심으로 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겠나?」
「예, 사장님.」
몸을 굳힌 이판석이 얼굴을 들었는데 다시 붉어져 있다.
「근대리아에 정착시키기 위해서입니다.」
「‥‥‥‥」
「또 가족이 오게 되면 북한의 공작이나 위협의 효과가 떨어질 것입니다. 거기에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생산량이 늘어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근대리아를 고향으로 생각하며 자라날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고향 말이야. 그래서 진정한 근대리아인으로 성장할 테지.」
「‥‥‥‥」
「이번에는 1인당 500달러씩을 기준으로 협상해 보도록. 두 달 급료를 선불해 주는 셈이야. 박사장, 알겠나?」
「알겠습니다, 사장님.」
「우선 수용소 수감자들을 보내라고 해보도록. 이것은 미끼야. 아마 그들은 절대로 보내지 않을 것이다.」
「예, 사장님.」
머리를 끄덕이던 박기동이 소리 죽여 숨을 내리쉬었다. 이인숙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불칸 역에서 일본인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 김상철이 다시 이판석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어차피 너도 박사장을 따라갈 것일 테니 너한테도 직접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이제 근대리아에 왜 그들을 데려오는가는 알 수 있겠지?」
「예, 사장님.」
이판석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알 수 있습니다, 사장님.」
콘티넨탈 호텔은 본래 우재환이 숙소로 쓰던 곳으로 지난번 사건 때 로켓포 공격을 받았었지만 지금은 말끔히 단장되어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김상철이 이한과 함께 호텔에 들어섰을 때는 밤 2시가 되어있었다. 로비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는데 지하 1층에 카지노와 클럽 때문이다. 그들은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사내 한 명이 서 있다가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조태광이 인솔해온 경호원만 다섯 명이 넘었으므로 그들은 복도를 메우다시피 하고는 끝 쪽의 객실로 다가갔다.
「이 방입니다, 사장님.」
방 앞에 선 사내가 말하자 조태광이 와락 문을 열더니 부하들과 함께 몰려 들어갔다. 그는 중국계 조선인으로 상해 시장의 경호 부책임자를 지낸 사람이다. 30대 중반으로 온갖 중국무술에 뛰어났던 그는 조선족으로는 출세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곧 경호책임자에 대령으로 진급할 예정이었던 그가 근대리아로 들어온 것은 작년 말이다. 그는 그의 중국인 부인과 백화점의 지배인을 간통 현장에서 잡아 때려죽이고는 그것을 방조한 장모와 처남을 총으로 쏘아죽인 다음 집에 불을 지르고 근대리아로 도망쳐 왔다. 그는 이한에게 찾아가 부하가 되기를 청하였는데 사연을 들은 이한이 김상철의 경호대장으로 적극 추천해준 것이다. 조태광이 방을 나왔다.
「들어가시지요.」
김상철과 이한이 방으로 들어서자 두 사내가 그들을 맞았다. 이경복의 옆에는 50대 후반쯤으로 테 없는 안경을 낀 사내가 서 있었는데 들어서는 그들을 향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경복이 그를 소개했다.
「그룹 비서실장인 조영규 사장이십니다. 이분이 김상철 사장이시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조영규가 김상철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폐를 끼칩니다.」
「아닙니다.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김상철이 조금 놀라는 기색이었다. 오성의 비서실장이면 근대의 이남호에 못지않은 실권을 가진 최고경영진의 한 사람이다. 더구나 비서실의 체제는 근대에 비하여 오성이 몇 배나 더 강력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경복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을 때 조영규와 함께 기다리고 있을 줄은 뜻밖이었던 것이다. 자리를 잡고 앉자 조영규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근대리아를 본 내 첫인상은 과연 근대에 어울리는 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거칠고 큰데다가 힘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이곳은.」
낮고 금은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는 이제 우리 오성도 사고의 전환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사업장의 전환이나 이익, 그리고 미래의 사업성을 계산하는 것에서 떠나 근대와 동반자의 입장에서 일해야겠다는 것을.」
김상철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몇 년 전인가 근대와 오성이 연합하여 통신 시장에 진출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으로 목적이 달성되자 각기 획득한 통신 시장의 지분을 나눠 갖고 다시 경쟁상대가 되었다.
「그렇게 되려면 근대의 대의를 따라야 하겠지요. 경쟁자의 입장을 떠나 한민족의 새로운 정착지를 만든다는 대의에 공조해야 할 것입니다.」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근대 측도 반대할 이유가 없겠지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울에 돌아가면 곧 보고를 드릴 작정입니다.」
이제 그는 정색을 했다.
「내가 근대리아에 온 것은 지역 상황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김 사장님을 만나려고 온 겁니다. 그래서 가명 여권으로 홍콩을 거쳐서 왔습니다.」
「우리가 투자한 사업장을 관리해 주시는 김사장께 인사도 드릴 겸 해서.」
분위기에 눌려 있던 이한이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을 집더니 벌컥이며 마신다. 조영규가 김상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린 지금 난관에 처해 있습니다. 북한 측과 이곳에 투자를 하기로 했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금은 우리가 대고 관리는 그들이 하는 조건이었는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체제가 변한 상황입니다. 그들에게 투자하느니 이젠 우리 이름으로 투자하고 김 사장께 관리를 맡기는 것이 훨씬 안정성이 있습니다. 이곳 북한의 책임자는 여기 있는 이상무한테 내일까지 연락이 없으면 각오하라고 했다는군요. 서울의 판단 착오로 근대리아의 실무자들이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김상철의 거사만 없었다면 체제가 바뀌지도 않았고 북한과의 합작사업 포기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만남이 만들어질 리도 없다.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북한이 이곳의 오성 사업장에 위해를 가할 리는 없습니다.」
「물론입니다. 김 사장님이 계시는데 …· 하지만 나진선봉의 자유무역 지대에 우리는 발목이 붙잡혀 있어서 …….」
말을 멈춘 조영규가 물잔을 들더니 두어 모금을 삼키고는 내려놓았다.
「나는 오성과 북한과의 관계를 말씀드리려고 온 겁니다. 말씀드리고 나니 가슴이 후련하군요. 이제 한시름은 덜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후련한 표정이 아니었다.
다음날은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청명한 날씨였다. 북한이 근대시에 지은 몇 채 안 되는 사업장의 하나로 창광 클럽이 있다. 시내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10킬로 지점에 위치한 5층 빌딩이었는데 나이트클럽과 바, 빠징코에 카지노까지 들어찬 건물이었다.
5층의 사무실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던 이금철이 몸을 돌렸다.
「병 주고 약 주는군, 우리 조직원을 빼가면서 이제는 우리 인민들을 고용하겠다고?」
그는 방 안의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수용소 수감자들을 데려와도 좋다니, 그건 무슨 수작이야?」
주위의 고층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햇살이 잘 들지 않았으므로 빌딩은 그늘이 져 있었다. 자금이 부족해서 5층까지만 지은 것이다. 창문을 등지고 선 그가 말을 이었다.
「아이들의 머릿수도 계산해 준다구? 아예 노동자 공급이라는 말은 빼고 이주민 공급이라고 하지 그래.」
「그건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박기동의 말투는 가벼웠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그의 태도도 여유가 있다.
「노인이건 병신이건 머릿수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두당 500달러의 계약금이니 5,000명이면 250만 달러요. 이건 창광 클럽 두 개를 지을 수 있는 돈입니다.」
「우리가 사람 장사를 하는 줄 알아? 당신, 말조심 하라우.」
이금철이 눈을 부릅떴다.
「평양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받아들일 것 같아?」
「안 되면 할 수 없지요, 노동력은 동남아에 얼마든지 있는데다가 한국에서의 이주민도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니까.」
박기동이 입맛을 다셨다.
「현역 군인이나 제대자를 모아 보내서 어떡하실 작정입니까? 금방 근대 쪽의 속셈이 보인다고 하셨는데 그건 북한의 속셈이 보이는 일 아닙니까?」
「당신 거만해졌어, 요즘.」
「위원장님을 위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이지 금방 되는 일이 아닙니다. 현재의 근대리아 상황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수용소 수감자는 안 돼.」
「그렇다면 당원 가족을 보내시든가. 김 사장도 군인이나 제대자를 받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건 공공연한 도전입니다.」
「지난번에는 보냈지 않았나?」
「이번은 물량이 큽니다. 근대리아는 인민군 대부대를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평양과 상의를 해보겠어, 아무래도 내가 가야 할 것 같은데.」
「저도 따라가지요.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러자 이금철이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이젠 근대리아에 북한 주민을 끌어들이기로 했나? 고려인과 조선족 다음 순서로 말이야.」
「글쎄요. 땅도 넓고 일자리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다른 민족보다는 한민족이 모이는 것이 낫겠지요.」
「근대리아에 온 놈들의 대부분이 자본주의의 썩은 물이 드는 걸 보고 자신이 생겼나 보지?」
「김 사장이 고용하는 겁니다. 저는 김 사장의 심부름을 할 뿐이고. 그런 건 모르는 일입니다.」
「누굴 바보로 아나? 행정청의 허가가 없으면 5,000명이나 되는 인원을 어떻게 받아? 더구나 우리 공화국 인민을?」
이금철이 지쳤다는 듯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좌우간 알았어. 조만간 내가 평양에 갈 테니까. 이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박기동이 방을 나가자 이제까지 한쪽에 잠자코 앉아 있던 최태호가 입을 열었다.
「근대에서 본격적으로 우리 공화국의 인민을 끌어들일 모양입니다, 위원장 동지.」
「수용소 수감자들을 보내라니, 그놈들이 이곳에서 반동 세력을 키우도록 만들겠단 말이지.」
이금철이 어깨를 들썩이며 헛웃음을 쳤다.
「그 말이 진심이었다면 다행이다. 그 정도로밖에 근대리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니.」
「가족 단위로 이주민을 보낸다면 금방 소문이 퍼져서 탈북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평양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
「그건 그렇습니다.」
「평양에서는 이번 제의를 받아들일 거야. 우리에게 인력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금철이 자신 있게 말했다.
「박기동이 말대로 서둘 필요는 없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최태호가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위원장님, 계십니까? 나 이경복입니다.」
「아, 난 최태호올시다.」
최태호가 힐끗 이금철에게 시선을 주고는 내처 말했다.
「바꿔드릴까요?」
「아니 됐습니다. 최 사장님한테 전해도 상관없겠지요.」
「말씀하세요, 이 선생.」
「저, 지난번에 합의한 사항을 이행하지 못할 것 같아서. 본사에서 그렇게 연락이 왔습니다. 자금 사정이 악화되어서.」
「잠깐만.」
얼굴색이 변한 최태호가 송화구를 막더니 이금철을 바라보았다.
「합의를 이행하지 못하겠답니다.」
이금철이 전화기를 빼앗듯이 받아 쥐었다.
「이 선생, 뭐라고 하셨소?」
「면목 없습니다, 위원장님. 저야 본사의 연락을 받기만 해서 자세한 내응은‥‥‥」
「당신들, 이런 식으로 우리를 모욕해서 온전할 것 같소?」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위원장님.」
「당신, 나하고 당장 만납시다.」
「글쎄, 그것이 ‥‥‥」
이경복의 조금 느린 듯한 말소리가 이어졌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근대리아의 오성그룹 관리는 김상철 사장이 맡고 계셔서요. 김 사장님도 알고 계시는 일이니만치 김 사장님과 만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
「저로서는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 그저 자금 사정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밖에는.」
「이런 비열한 놈.」
눈을 부릅뜬 이금철이 으르렁대듯 말하자 전화가 끊어졌다. 천천히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금철이 최태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부릅뜬 시선은 초점이 잡혀지지 않았으므로 최태호는 머리를 돌렸다.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서울로의 잠행
「드미트리 김입니까?」
세관원이 여권과 김상철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김상철의 한국어를 들은 그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러시아 교포시군요.」
그는 힘 있게 스탬프를 찍더니 여권을 내어 밀었다.
「즐거운 여행이 되십시요.」
2년 만의 귀향이다. 그러나 이젠 러시아 여권을 든 드미트리 김이 되어서 한국 땅을 밟은 것이다. 그의 옆에 붙어선 조태광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한국이 처음인데다 중국에서의 범죄 사실이 있다. 러시아 여권으로 세관을 통과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곧장 대합실을 가로질러 공항 건물의 밖으로 나왔다.
6월 초의 밝은 날씨였다. 한낮의 햇별이 반사되는 대지에 눈이 부신 듯 김상철은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는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그들은 몸을 돌렸다.
「오랜만입니다, 김 사장님,」
다가온 사내는 안기부의 심재택 과장이다. 그는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귀찮게 생각하실 줄 알았지만 할 수 없었지요.」
「천만에요. 반갑습니다, 심 과장님.」
그의 손을 잡은 김상철이 따라 웃었다. 근대 측에도 비밀로 하고 서울행 비행기를 탔던 것이다.
「심 과장님은 만나 뵐 줄 알았지요.」
「아버님 뵈려고 오셨군요?」
「네, 오래 못 뵈어서.」
심재택이 손을 흔들자 검정색 대형 승용차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제가 시내까지 모셔다드리지요.」
김상철이 조태광을 소개했다.
「저와 함께 일하는 직원입니다.」
「잘 오셨소.」
조태광의 인사를 받은 심재택이 빙긋 웃었다.
「마음 놓고 한국 구경을 해두시오.」
공항을 나온 승용차는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좌측은 한강이다. 백로 떼가 날아오르는 금빛 강물 위에는 서너 척의 작은 배가 한가롭게 떠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던 심재택이 입을 열었다.
「부장께서 만났으면 하십니다.」
「근대리아 사건으로 한국에서도 몇 가지 변화가 있었지요. 안보수석 박정규의 독단과 전횡은 결국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니까 …….」
「‥‥‥‥」
「각하께서도 타격이 크셨습니다.」
「별로 말씀드릴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잘 아시다시피 제 입장이 묘해서요.」
김상철이 부드럽게 말했다.
「저한테 어떤 정보를 얻으실 수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젠 강요하실 상황도 아니고.」
「알고 있어요. 김 사장님의 입장, 한국 정부에 대한 불신감도.」
담배를 꺼내 문 심재택이 창문을 조금 내렸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정치 권력을 제어할 수단이나 방법이 약합니다. 박정규의 경우가 그 좋은 예지요.」
「‥‥‥‥」
「각하의 임기가 1년밖에 남지 않았어요. 내년 말이면 대통령 선거란 말입니다.」
심재택이 입을 다물었으므로 김상철이 창 쪽으로 다시 머리를 돌렸다. 갑자기 대통령 선거 이야기를 꺼낸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김상철은 곧 잊었다. 상관할 일이 아닌 것이다. 아직도 이중국적이 되어있겠지만 대통령 선거에 투표를 할 생각은 없다.
「넌 파란이 많은 놈이다.」
아버지가 김상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게 탄 얼굴에는 주름살이 깊게 패였고 머리는 백발로 덮였지만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산비탈에 세워진 2층 양옥의 마루에 앉아 있었다. 저녁 무렵이어서 아래쪽의 축사는 소떼의 울음소리로 소란했다. 김영환 씨는 젖소와 사습을 각각 백여 두씩을 사육하는 목장주인 것이다.
「한때 일 년이 넘도록 신문과 TV를 보지 않고 살았었다. 그러다가 연초에 다시 보았는데 …….」
소주잔을 든 김영환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모두 너 때문이다, 이놈아.」
「걱정만 끼쳐 드렸습니다, 아버지.」
「잡히면 당장에라도 최고형을 받을 것 같던 네가 대명천지를 활보하다니 신통한 노릇이다.」
잔을 비운 김영환이 빈 잔을 내어 들었다. 상황을 대충 설명했어도 그는 아직 미진한 구석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너도 나이가 삼십이다. 자식을 봐야 할 나이인데.」
잔에 술을 채워준 그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그는 강미현은 물론 박미정과의 파탄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저 네가 가정을 갖고 처자식 거느린 것을 보고 싶다.」
「‥‥‥‥」
「가족은 네 인생의 뿌리다. 가정을 갖는다는 것은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다. 비록 네 몸이 떠다닌다고 하더라도 뿌리가 있으면 든든한 법인데.」
꿀처럼 단 소주를 한 모음에 털어 넣은 김상철이 웃었다.
「제 뿌리는 아버진데요, 뭘. 저는‥‥‥」
「야 이놈아, 그래서 네 대에 뿌리가 끊긴단 말이냐?」
「기회가 오겠지요, 아버지.」
「돌아간 네 어미가 있었다면 아마 몇 번 쓰러졌을 것이다. 일찍 가기 다행이었지.」
김영환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는 술기운이 번져 붉어진 눈으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부자간이 대를 이어서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니 말이여.」
양쪽으로 산에 둘러싸인 골짜기여서 어둠은 빠르게 덮여져 왔다. 아래쪽 축사 주위로 전등이 켜지면서 소 떼들의 울음소리가 그쳐졌다.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는 아주머니들이 무엇이 우스운지 떠들썩하게 웃었고 집에서 기르는 개 한 마리가 부엌 안을 바라보며 꼬리를 치고 있었다.
「내 걱정은 할 것 없다.」
김영환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봐라. 공기도 맑고 사람들도 순박한데다 소들도 병 없이 잘 자란다. 나는 이만하면 되었다.」
「‥‥‥‥」
「너한테 부담을 주기 싫단 말이다, 이제는. 알았느냐?」
「압니다, 아버지.」
그의 잔에 술을 채운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저도 걱정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버지.」
축사 위쪽의 풀밭에 앉아 있던 조태광이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끄면서 일어섰다. 승용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축사의 정문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곳은 산골이어서 국도와도 5킬로 정도나 떨어져 있다. 목장의 고용원은 10명 가깝게 되었지만 모두 축사 근처의 인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아침 식사를 마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오전 8시경이었다. 차에서 내린 신사복 차림의 사내 두 명이 고용원에게 무언가를 묻는 눈치더니 곧장 그를 향해 다가왔다.
「선생님, 김상철 사장님 집에 계시지요?」
그의 앞에 멈춰선 사내 한 명이 물었다.
「댁은 누구시요?」
「우린 오성그룹 비서실 직원입니다.」
「용건은 뭐요?」
「뵙고 직접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나, 원, 참.」
조태광이 사내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여기가 한국이라고 당신들 마음대로 하려는 거요?」
그러자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나이 든 사내가 나섰다.
「미안합니다. 그럼 오성의 비서실 직원이 뵙고 싶다고만 전해 주시겠습니까?」
「여기서 기다리시오.」
조태광이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가리켰다.
「당신들 회장이 와도 마찬가지요, 건방지게 어디서 함부로.」
북한 사투리가 섞인 격렬한 말투로 말하고 난 그는 몸을 돌렸다. 상해 시장의 경호원 출신인 조태광이다. 시장을 만나려는 수많은 관광객을 겪은 경험이 있는 데다가 보스의 위신을 세우는 것도 경호원 임무라고 배웠다. 더구나 새로운 보스인 김상철의 위력은 상해 시장 곡대청 이상인 것이다. 어깨를 흔들며 집 안으로 들어갔던 조태광이 곧 나왔다.
「들어가 보시오.」
사내들이 그의 옆을 지나려는 순간 조태광이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
「잠깐만 실례하겠소.」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사내들의 전신을 검사했다. 몸수색이다. 쓴 약을 삼킨 표정으로 집 안에 들어선 그들은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는 김상철을 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성 비서실의 안재기 이사올시다.」
나이 든 사내가 정중하게 말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당의 끝에는 아래쪽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평상이 놓여 있다. 평상에 걸터앉은 김상철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오성은 국가기관에 버금가는 정보력이 있다. 자신의 한국 방문을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희 실장님께서 뵙자고 하셔서. 지금 서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난 실장님 만나려고 한국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안재기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실장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청하라고 하셨습니다만 제가 주변머리가 부족해서.」
「내가 비밀리에 귀국했다는 걸 알 텐데 이러는 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골짜기에서 서늘한 바람이 몰려오고 있었는데도 안재기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어제 도쿄 지사장인 고선규 사장이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 일 때문에 …. 일본 언론은 물론 경찰이나 회사 직원들한테는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북한 측의 소행인 것 같아서.」
「‥‥‥‥‥」
「고사장은 오성의 일본지역 총책임자로 지난번 북한과의 투자 회담 때 오성 측 대표였던 분입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설령 북한 측이 납치를 했다 하더라도 말이오.」
가라앉은 목소리로 김상철이 말하자 안재기가 바짝 다가앉았다.
「지금 오성은 북한과의 대화 채널이 모두 끊겨진 상황입니다. 북경의 북한 무역부는 갑자기 우리 측과의 아연 수출 협상을 중지하고 철수했는 데다 나진 선봉지역의 북한 측 고위 감독관도 평양으로 떠난 상황입니다. 근대리아의 투자 합의를 취소시킨 복수인 것 같습니다.」
셰퍼드 잡종인 개가 김상철의 옆으로 다가와서는 꼬리를 열심히 흔들다가 반응이 없자 물러갔다. 머리를 돌린 김상철은 아버지가 아래쪽의 축사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서울로 올라온 김상철이 투숙한 곳은 영동의 홀리데이 인 호텔이다. 방에 짐을 내려놓은 그는 조태광과 함께 호텔을 나왔다. 오후 5시가 지나있었지만 아직도 반팔 셔츠 차림의 남녀가 많았다. 한국은 이제 여름이다. 1년이 거의 석 달 간격의 사계절로 나뉘어져서 봄이 되면 꽃과 잎사귀가 피어나며 석 달의 겨울을 맞기 위한 석 달간의 수확과 준비기간이 있다. 눈과 얼음에 덮인 근대리아의 기후에 비교하면 천혜의 땅인 것이다.
그가 여의도의 이튼 호텔에 도착한 것은 6시가 거의 되어갈 무렵이다. 로비에 들어선 그는 곧장 안쪽의 공중 전화박스로 다가가 전화기를 들었다. 조태광이 벽에 붙어서더니 그를 바라보았다. 다이얼을 누르자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다음 수화기가 들렸다.
「여보세요.」
낮선 목소리의 여자였다.
「거기 박미정 씨 계십니까?」
「누구시라고 전할까요?」
「김상철입니다.」
힘주어 말한 그가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녁 시간이어서 로비는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여보세요.」
조금은 낮고 그러나 서두는 것처럼 박미정이 말하자 김상철이 조그맣게 숨을 내려쉬었다.
「나, 김상철이오. 지금 여의도 이튼 호텔에 와 있는데.」
「‥‥‥‥」
「만납시다.」
30분쯤 후에 박미정은 호텔 맨 위층의 라운지에 들어섰다. 출입구를 향해 앉아 있는 김상철은 금방 눈에 띄었다. 그는 박미정이 다가오자 예의 바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예전에 하지 않던 행동이다.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그렇군요.」
박미정이 따라 웃었다.
「근대리아 소식을 듣고 기뻤어요.」
「하바로프스크까지 와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생각해 줘서 고마워.」
박미정이 조금 머리를 숙인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얼굴에는 밝게 웃음기가 배어져 있다.
「여긴 웬일이세요? 한국에.」
「아버지를 뵈러, 그리구 미정 씨도 만날 겸해서, 다른 목적은 없어.」
「잘 지내?」
「일이 재미있어요.」
박미정이 짧게 커트한 머리를 쓸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귀걸이가 조금 흔들리면서 반짝였다.
「선배가 그만둔다고 해서 저 혼자 운영해 보려고 해요. 직원도 한두 명 더 쓰고.」
종업원이 다가왔으므로 그들은 오렌지주스를 시켰다. 모두 저녁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테이블 위의 물잔을 바라보는 박미정의 얼굴에는 이미 웃음기가 가셔져 있었다. 숨도 멈춘 듯이 꼿꼿이 앉아 움직이지 않는다. 그녀의 물잔을 함께 바라보던 김상철이 시선을 들었다.
「강미현과 결혼할 계획이었지. 어려울 때 날 생각해 주었고, 그 여자의 개성에 끌렸어. 근대리아를 강미현과 함께 경영하겠다는 욕심도 있었거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겨 와서 그런지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익숙해진 모양이야. 인생이 결국은 산 자의 무대이고 승패가 갈린다는 것에 말이지. 잊었거나 가슴속에 있었다거나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더라니까. 그저 살아서, 또는 이겨내고 갖는 것이 고마울 뿐이야.」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찾아온 것도 아마 그런 의식 때문이겠지.」
「파리에 있을 적에, 저는 납치당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 사람이, 당신이 기다린다고 하길래 따라나섰던 거죠.」
낮았으나 또렷한 목소리로 박미정이 말했다.
「그저 기뻤어요. 당신을 만난다는 생각에. 홍콩에서, 그 사람한테 강간을 당했지요.」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두 눈은 똑바로 그에게 향해져 있다.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꼭 이야기하려고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 그런데 저는 그 남자를 받아들였어요. 저주하고 저항했지만 그것은 잠깐이었고 곧 쾌락에 모든 것을 잊게 되더군요.」
김상철이 주스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표정 없는 얼굴로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안인석 씨와의 생활에서도 당신을 잊었어요,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박미정이 조그맣게 머리를 옆으로 두어 번 저었다.
「자신이 없어요, 저는,」
「살아 있는 나를 잊을 자신은 있어?」
「몸의 기능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졌을 뿐인데 웬 난데없는 이야기야? 안인석과의 이야기도 당연한 일이고.」
「지난 일이야. 이제까지 미정 씨는 피해만 입고 있었어. 이제 매일 내 얼굴을 보게 되면 그 멍청이 같은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을 거야. 그래, 다시 잊었을 테니까.」
정종 잔을 내려놓은 권준규가 육회 안주를 집어 맛있게 먹었다. 장층동 골목의 조그만 한식집 안이었는데 손님은 이쪽 한 방뿐이어서 집 안은 조용했다. 권준규가 안가(安家)로 쓰는 집이었다.
「북한의 조직력을 얕보아서는 안 됩니다. 50년 동안 만들어온 조직이오. 체제가 다르다고 쉽게 흔들리지 않아요.」
잔에 술을 채운 권준규가 말을 이었다.
「더구나 어느 민족입니까? 적응력이 뛰어난 한민족이오. 곧 근대리아의 체제를 흡수해서는 개량된 사회주의 조직으로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심재택이 힐끗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정종 한 주전자가 거의 비워질 때까지 권준규는 아직 본론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화제는 주로 북한이다.
「북한 주민을 유입한다는 강회장의 발상은 너무 위험하단 말입니다. 김 사장, 미국과 일본, 거기에다 한국 정부까지 밀려난 상황에 근대리아의 행정부가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오.」
안기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중국의 조선족은 중부와 동남부의 7, 80만을 남기고 거의 근대리아로 이주해왔고 러시아에 남은 고려인은 1, 20만밖에 없습니다. 근대리아의 인구가 ~만이 가깝게 되는데 한인은 110만이 조금 넘을 뿐입니다.」
「인구 비율로 따질 건 없어요. 경제와 행정, 치안을 장악하고 있으면 지배 세력이 됩니다.」
권준규가 김상철에게 잔을 건네주었다.
「서둘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김 사장, 이번에 5천 명의 북한 주민 이주를 진행하고 계시다길래 말씀드리는 거요.」
그가 심재택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심 과장이 말해 보게.」
허리를 편 심재택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북한은 함흥과 청진 두 곳의 기술 양성소에서 집중적으로 이주민 교육을 시키고 있어요. 이주민 교육기관이 되어 버린 셈이지요. 그곳에서는 근대리아에 이주한 후에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를 교육시킵니다. 조직 체계와 상하관계는 이미 그곳에서 정해졌고 개개인에게 행정청의 각 기관이나 사업장에 취업할 목표까지 세워져 있습니다. 대량으로 그들을 받아들인다면 근대리아의 내부는 위험해집니다. 러시아도 그때에는 손을 쓰지 못하지요. 북한과의 관계도 있는 데다 다수의 주민에 의해 근대리아가 장악되어 있을 테니.」
권준규가 맡을 이었다.
「북한은 경제와 사회불안 현상의 해결책으로 근대리아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단 말이요, 김 사장.」
「강 회장께 말씀드리겠습니까?」
쓴웃음을 지은 권준규가 머리를 저었다.
「다시 정부의 압력으로 보일 수도 있는 데다가 솔직히 열쇠를 쥐고 있는 분은 김 사장이시기 때문에.」
「‥‥‥‥‥」
「그럴 만도 하시지만 강 회장은 한국 정부에 대한 반감이 큽니다.」
「저는 이미 저쪽에 이야기를 해놓은 상태입니다만.」
이미 노출된 일인데다가 그리고 강회장도 아무리 다급하더라도 그런 이주민은 받아들일 리가 없을 것이었다.
「가족 단위로 요구했습니다. 아이까지 포함해서 계약하겠다고.」
심재택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 가족 단위로 교육시킬 겁니다. 그쯤은 아무 일도 아니오.」
「첩보에 의하면 근대리아에 부장급 간부가 부임한다고 해요. 한국의 장관급인데, 그만큼 근대리아를 중요시한다는 증거도 되겠지요.」
술잔을 들어 식은 술을 삼킨 김상철이 숨을 길게 뱉았다.
「어렵군요. 한민족이 모인다는 것이, 언제까지 이래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쪽도 문제요, 김 사장. 더 언짢아지시겠지만 말이 나온 김에 ……」
권준규가 김상철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일 년 후에 대통령 선거가 있게 돼요. 그땐 여, 야가 다투어서 근대리아를 선거 쟁점으로 내세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 대부분이 강회장만 한 웅지(熊志)도 없고 김형 같은 패기도 없소. 다만 능란한 권모술수와 재치뿐인데, 곧 어느 쪽에서든 강 회장께 손을 뻗치게 될 겁니다. 근대리아만 한 선거용 재료가 없는 상황이니까.」
잠자코 바라보는 김상철을 향해 권준규가 쓰게 웃었다.
「김 사장, 최소한 나는 중립이오. 그것은 안기부 책임자로서 근대리아 개척의 순수한 의지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만나자고 한 것은 이 말도 전해드리고 싶어서요.」
방 안을 둘러본 조태광은 다시 한번 어깨를 들썩여 보았다. 그러자 양복 가슴 안 호주머니에 넣은 지폐 두 뭉치의 무게가 어깨로 전해졌다. 만 원권으로 2백만 원이었다 서울의 술값이 제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이 돈이면 쓰고 남을 것이다. 상해에서 잘나가던 시절의 20개월 월급인 것이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더니 지배인이 술과 안주 접시를 받쳐 든 종업원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방안의 장식과 어울리게 고급 집기였다. 이곳은 모범택시 운전사가 안내해준 영동의 일급 룸살롱이었다. 박미정과 헤어져 호텔로 돌아온 김상철이 나가 놀다 오라면서 내몰듯이 하는 바람에 호텔 현관에서 어물거리다가 결국은 룸살롱을 택했던 것이다. 그는 수표는 사용하기 힘들 것이라면서 지폐를 주었는데 난생처음 만져보는 거금이다. 술상을 차려놓은 종업원들이 방을 나갔고 곧 세 명의 아가씨가 들어왔는데 두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인들이다. 둘은 서시와 양귀비 같고 가운데 선 여자는 오천런과 비슷하다.
「한국에 처음 오셨다구요?」
오천련과 비슷한 마담이 물었다. 서시와 양귀비는 이미 조태광의 양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오신 길에 룸살롱을 찾으셨다니, 사장님은 멋쟁이셔.」
앞쪽에 앉은 마담은 말 상대가 되어 주려는 모양이었다.
「고향이 어디세요?」
「근대리아.」
마담이 웃었다.
「그런 말이 어딨어요? 근대리아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어요.」
「상하이.」
「그럼 중국 교포시네?」
「그런 셈이오.」
양주를 대여섯 잔 거푸 마시고 나자 조태광의 긴장이 슬슬 풀렸다. 좋은 술과 안주, 거기에다 그림 같은 미인들이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근대리아에서 무슨 사업을 하세요?」
마담이 궁금한 듯 물었으므로 그는 정신이 들었다.
「사업은 무슨, 그냥 놀고먹는 게지.」
「그곳이 놀기에도 좋아요?」
「그럼, 없는 게 없어, 그곳에도.」
「하긴, 요즘 근대리아로 나가는 애들도 있더라구요,」
그녀가 서시를 바라보았다.
「민지 그년도 그곳에 있다며?」
「근대의 무슨 클럽엔가 있다고 했어요.」
서시가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 나가나 봐요.」
근대리아에서 한국 출신의 아가씨들은 1등급 대우를 받는다. 그들은 주로 일본의 카지노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데 주로 일본에서 흘러들어간 아가씨들이었다. 한국에서 직접 옮겨가는 경우는 드물었으므로 조태광이 서시의 어깨를 안았다.
「이봐, 너도 가고 싶어?」
「제가 왜요? 전 싫어요.」
서시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 애는 도망친 건데, 뭘, 일수 때문에.」
「일수 아줌마가 여행사에 가서 떠들다가 며칠 살고 나왔어요.」
다소곳이 앉아 있던 양귀비가 아는 척을 했다.
「속이 시원해, 그 예편네.」
「계약금은 얼마나 받았다던?」
마담이 서시한테 물었다. 이제 그들은 저희들끼리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2천만 원을 받았다나 봐요.」
「계약금을 누가 주는데?」
조태광이 묻자 서시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한 얼굴을 했다.
「계약만 하면 여행사에서 계약금에 비행기표까지 금방 만들어줘요. 도망치기 딱 좋아요.」
서시가 이제 고르지 못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랜드 여행사라고?」
커피잔을 든 김상철이 조태광을 쏘아보더니 이윽고 천천히 입술을 비틀면서 웃었다.
「물론 근대리아에서는 박기동이 포주 노릇을 하겠군, 그렇지?」
「예, 사장님, 틀림없습니다.」
한 모금 커피를 삼킨 김상철이 잔을 내려놓았다. 햇살이 환한 아침 시간이다. 창밖으로 영동의 고층 빌딩군이 펼쳐져 있었고 멀리 남산 타워가 흐리게 보이는 것은 매연 때문일 것이다.
「그자다운 짓이야. 돈이 되는 일에는 무엇이건 달려든다.」
「위험한 자라고 들었습니다.」
「누구한테서 말이냐?」
「이한 형님한테서 들었습니다.」
김상철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차는 기다리고 있나?」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지하 3층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그들은 대기하고 있던 검정색 국산 승용차에 올랐다. 차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사내는 오성의 안재기 이사였다. 호텔을 빠져나온 승용차가 속력을 내자 안재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회장님께서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김호경 회장은 공식 행사는 물론 전경련 회의에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실장님께서 김 사장님께 미리 양해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일본지사장은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
「저는 자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승용차는 한남대교를 건너더니 곧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30분쯤 후에 승용차는 옥수동의 주택가로 들어섰고 곧 성곽처럼 높게 담장을 세운 저택 안에서 멈춰 섰다. 현관 앞에서는 조영규가 나와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김 사장. 자, 어서 안으로.」
조영규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김호경 회장은 정장 차림으로 그를 맞았다. 인사를 나누고 응접실에 앉는 동안 그는 줄곧 부드러운 시선으로 김상철을 바라보았고 입가의 미소도 지워지지 않았다. 마실 것이 날라져 왔고 날씨 이야기가 조금 이어진 다음 김 회장이 물었다.
「이번에 북한에서 이주민을 받을 계획이라고 들었는데 북한 측 반응은 어떻습니까?」
김상철이 긴장을 했다.
「그건 아직 모릅니다, 회장님.」
「비공식적으로 진행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물어서 미안합니다.」
「근대리아에는 이미 소문으로 퍼져 있어서요. 큰 비밀도 아닙니다. 그리고 어차피 알려질 일이고.」
그러나 안기부에 이어 오성으로부터도 이런 질문을 받는 그의 심사가 편할 리가 없다.
「우리는 나진 선봉에 이제까지 5억 달러를 투자했지요. 그 돈을 동남아나 남미에 투자했다면 이미 사업은 궤도에 올라섰을 겁니다.」
낮은 목소리로 김 회장이 말을 이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북한의 경직된 체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북한은 체제가 붕괴되면 곧 망한다는 의식이 있고 그건 사실이오. 아래쪽에 한국이 있으니까. 하지만 중국은 다르지요. 체제를 시험할 여유는 있었습니다. 국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오.」
그는 정색을 한 얼굴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가 근대의 전철을 밟게 되었소. 지난번에는 근대라는 일개 기업이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싸웠는데 지금은 오성이 북한을 상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참, 딱한 일이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정부가 나선다고 해결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 정부와의 공식접촉을 거부해온 북한은 민간경제 부분의 협력관계에 있어서도 조선무역이라는 어용 민간단체를 만들어 조종해왔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면 한국기업은 북한 정부를 상대해야만 한다.
김 회장이 조영규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조 실장, 당신이 설명해 드리지.」
머리를 숙여 보인 조영규가 김상철에게로 돌아섰다.
「어제 나진 선봉의 오성 사업장 14개 모두에서 노동자들이 작업 거부를 하고 있어요. 그들은 관리자가 횡포를 부리고 노력에 비해 대가가 적다는 당치도 않는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모두 당국에서 사주를 한 겁니다.」
「‥‥‥‥‥」
「그리고 선적하려고 쌓아둔 컨테이너 160여 개를 당국이 압류했습니다. 컨테이너 안에 금괴를 넣었다는 정보가 있다는 거요.」
「모두 근대리아의 투자 합의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김상철이 묻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유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조총련에서 흘러나온 정보에 의하면 고 사장은 곧 살해될 것이라고 해요. 이건 북한 당국이 일부러 흘렸을 가능성도 있어요.」
응접실에서 잔디에 덮인 넓은 정원이 바라보였다. 그러나 앞쪽이 붉고 높은 벽돌담에 가로막혀 답답해 보였다. 김 회장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자유무역 지대나 이주민 문제를 총괄하는 사람은 부총리 겸 외교부장 김영남이오. 그는 서열이 13위지만 경제나 외교, 특히 남북한 관계에 있어서는 최고 책임자라고 합니다.」
「‥‥‥‥」
「지금 그를 가장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김 사장이십니다. 아마 환영을 받을지도 모르지요.」
「‥‥‥‥」
「그를 만나 우리의 제의를 전해 주셨으면 해서. 지금 사태는 군부와 일부 경쟁 세력이 주도해서 일으킨 것 같습니다. 따라서 김영남이 오성 측 사람을 만날 분위기가 아닙니다.」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오성의 직원도 아닐뿐더러 이젠 러시아 국적의 드미트리올시다.」
「압니다. 그래서 우리도 김 사장께 먼저 제의를 드리려고, 북한의 김영남을 만나기 전에 말이지요.」
부드럽게 말한 김 회장이 조영규를 바라보았다. 조영규가 다시 헛기침을 했다.
「오성이 근대리아에 투자하기로 북한과 합의한 금액은 2억 6천만 달러였습니다. 오성은 근대리아에 그 금액을 투자합니다. 하지만 동업자는 김사장님이 되시는 겁니다. 다른 조건은 북한과 합의한 내용대로 김사장님은 관리를 맡으시는 조건으로 이익금의 35퍼센트를 배당받을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조영규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명분을 내세울 일이 아니지요. 기업 활동에 관한 일이니 우리 제의를 부담 없이 들으셨을 줄 믿습니다.」
김상철은 로비 옆쪽의 창틀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창틀이 낮았기 때문에 땅바닥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점심시간이어서 빌딩의 로비에는 오가는 사람이 꽤 있었지만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지나치던 남녀들이 힐끗거렸고 마음 가벼운 여자들은 웃기도 했지만 그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더구나 한쪽 다리를 꼬아 앉아서 들린 무릎이 바로 턱 밑에까지 올라온 형상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 박미정은 우선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가 몰아쉬는 숨결 때문에 턱 숨이 막혔다. 그리고는 우뚝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김상철은 진즉부터 그녀를 보고 있었던 모양으로 시선을 받자 천천히 다리를 내리고 오그렸다가 허리를 펴면서 일어섰다. 그리고 전혀 주위 사람을 개의치 않고 다가왔으므로 질러가던 남자와 어깨를 부딪쳤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가자, 같이.」
발끝이 닿을 만큼 가깝게 멈춰 서서 그가 말했는데 점심 먹으러 가자는 소리 같았다.
「난 내일 떠나.」
「같이 가.」
가깝게 서 있어서 박미정의 시선은 그의 입술과 직선이다. 입술이 떨리더니 그가 다시 말했다.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가는 집어던져 버릴 테니까.」
「어떻게 내일 당장 떠나요?」
박미정이 반걸음쯤 물러서서 얼굴의 윤곽을 한눈에 잡자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얼마나 걸리겠어?」
「그렇다면 부친과 그 여자를 만나러 온 셈이로군.」
나무 그늘로 다가간 강회장은 벤치에 앉았다.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분지여서 공기는 맑았지만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였다.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은 이남호가 벤치 옆에 섰다.
「하지만 대여섯 시간씩 호텔을 비운 적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아마 누군가를 만난 모양인데 감시를 철저히 따돌려서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머리를 든 강회장이 앞쪽의 숲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용인의 별장으로 그가 가끔 밝은 공기를 마시러 내려오는 곳이다.
「그 여자, 박모라는 여자 말인데, 김상철이가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지?」
「그런 것 같습니다.」
「이혼해서 혼자 산다며?」
「예, 회장님.」
「경우도 비슷하구만 그래.」
「비서실에서 자네가 데리고 있었다구?」
「예, 회장님.」
「그럼 똑똑하겠군.」
「아마 회장님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첫 유정 발굴 현장에 가실 때 수행했었습니다.」
「아, 그래.」
강회장이 가볍게 숨을 내려쉬었다.
「김상철이, 그놈과 나의 운세의 싸움인 모양이다, 근대리아가.」
「‥‥‥‥」
「그놈은 최악의 상대가 될 것이야. 만일 적이 된다면 말이지.」
다시 이마와 목덜미의 땀을 밖은 이남호가 조심스럽게 벤치의 끝 쪽에 앉았다.
「한번 부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비밀 귀국이지만 우리가 모르리라고 생각할 리는 없습니다.」
「인연은 인력으로 안 되는 것이여.」
「‥‥‥‥」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이렇게 초조하지는 않았을 텐데, 분하다.」
이남호가 헛기침을 했다. 자신이나 강회장도 김상철이 배신을 할 사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는 강회장의 대의에 목숨을 걸고 일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강회장은 근대리아의 지배를 생각하고 있었다. 강미현을 내세워서 한때 김상철을 염두에 두었다가 한민수로 바꾸었으며 지금은 공석이 되어 버린 차기의 지배자를 염려하는 것이었다. 강용식 회장은 근대리아를 제외한 근대그룹을 맡고 있었는데 그의 대는 강재원이이어야만 했다. 한민수의 배신 이후로 강회장은 손자인 강재원을 심각하게 고려했지만 본인이 극력 사양했을 뿐만 아니라 천성이 약했다. 자질만으로 근대리아의 지배자가 될 수는 없다.
이윽고 강회장이 늘어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번번이 그런 느낌이 드는데, 오랑캐한테 공주를 인질로 보내는 기분이여.」
시청 앞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한국 빌딩의 라운지 안이다. 분수대에서 뿜어나오는 흰 물줄기를 바라보던 강미현이 머리를 돌렸다. 크림색의 투피스 차림이었는데 화장이 짙은 편이었다. 흰 얼굴에 진홍빛 루즈를 바르고 손톱에도 같은 색의 매니큐어를 했다.
「왜 연락도 없었고 왜 기다리지 못했느냐고 아무도 묻지 않았어. 우리는 그저 서로 부담 없었고 후련하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후회 없다고만 하면서 헤어졌단다. 어떠니? 멋있지?」
표현과는 달리 과히 재미없는 얼굴로 그녀가 그렇게 묻자 같은 표정인 최희은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멋있고 산뜻하고 상쾌하다.」
「둘이 똑같구만, 내가 보기에는.」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강미현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나는 처음부터 재목이 아니었어.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에 그 사람한테 집중했던 것 같아.」
「그 사람도 너한테 정책적으로 접근했겠다, 그렇지?」
「처음은 아닐 거야. 하지만 나중에는 당연히 의식하게 되었겠지.」
그러자 최희은이 노골적으로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만 끝내. 네 말대로 후련하게. 자꾸만 나한테 말 시키지 말고.」
그녀는 강미현에게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러나 오늘의 강도는 여느 때보다 강하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도대체 왜 자꾸 미련을 갖느냔 말이야.」
「‥‥‥‥‥」
「말들은 산뜻하게 주고받았는지는 몰라도 너희들 사이에는 불신과 반감이 남아 있어. 사람인 이상 그건 당연해.」
창 쪽으로 담배 연기를 내어 뿜은 강미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알면서 그렇게 꼬집지 마, 이것아.」
그녀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강한 사람한테 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고 우린 다시 조건이 갖춰졌다고 생각할 뿐이니까.」
머리를 든 강미현이 최희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도 상처를 입었어. 그 여자를 홍콩에서 구해낸 이후로 그는 나한테 전화 한 통 주지 않았어.」
최희은이 문득 머리를 들었다.
「그러고 보면 두 여자가 비슷한 입장이네, 한 남자를 두고.」
「전혀 다르지. 결혼한 상황에서부터 이혼한 이유까지. 그리고 환경이나 성격도.」
「‥‥‥‥」
「난 다시 집중할 거야.」
쓴웃음을 지은 최희은이 찻잔을 들었다.
「한때는 내가 네 일기장 대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것도 아냐. 넌 일기장도 거짓으로 쓰는 것 같아.」
「차라리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면서 눈물 좀 찔끔대고 내가 다시 결합할 수 있을까? 그 남자가 염치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게 묻는다면 나도 힘껏 머리를 굴려줄 텐데.」
「너무 삭막해, 세상이. 그래서 내 그림도 요즘 더 거칠어지는 것 같아.」
놀이터의 나무 벤치에 앉은 김상철이 더운 듯이 셔츠의 윗단추를 풀었다. 늦은 밤이어서 아파트 단지 안은 인적이 드물었고 놀이터에는 그들 두 사람뿐이다. 빗발이라도 금방 뿌려질 것 같이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양주 한 병을 거의 다 마신 참이라 김상철의 몸은 술기운으로도 뜨거웠다. 지난 날, 그것이 몇 년 전인지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밤에 이곳에 같이 있었던 적이 있다. 김상철이 양복저고리와 셔츠를 한참이나 뒤적이더니 담배를 꺼내고는 다시 부시럭대고나서 라이터를 찾아내었다. 흐트러진 모습이다. 불을 붙이는 짧은 순간에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좁혀진 눈썹, 초점이 모아진 눈이 보였다가 다시 어둠 속에 잠겨졌다.
「배에 총을 맞았었어.」
문득 김상철이 생각난 것처럼 말했는데 목소리가 컸다.
「총알이 창자를 한바탕 휘젓고 등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창자를 1미터나 잘라냈다구.」
그는 손을 뻗어 박미정의 손을 잡더니 다른 손으로는 셔츠를 걷어 올렸다.
「만져봐, 흉터가 만져질 테니.」
박미정이 손을 잡아떼었으나 그의 힘을 당할 수는 없다. 손바닥이 그의 배에 닿았고 투들투들한 자국이 만져지자 얼른 손을 비틀며 빼었다.
「구사일생이라는군, 여덟 시간 동안이나 수술을 했어.」
그는 알코올 기운이 가득 섞인 숨을 뱉아내었다.
「그땐 아무것도 없었어. 다 잃었다고 생각했었지.」
「‥‥‥‥」
「그리고 지금은 찾아가는 중이야, 어, 이것, 더럽게 덥군. 한국 날씨는 왜 이래?」
바람 한 줄기가 놀이터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더운 바람이었다. 김상철이 담배를 한 모금 빨더니 모래밭에 던졌다. 그리고는 박미정의 어깨를 안더니 와락 당겨 안았다. 자신의 한쪽 귀가 그의 입술에 닿았으므로 박미정은 몸을 굳혔다.
「애를 여섯만 낳자. 근대리아에 한민족의 비율이 낮아서 야단이야.」
더운 입김을 거침없이 귀에 받은 박미정이 몸을 비틀었으나 김상철은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공평하게 딸 셋에 아들 셋,」
그리고는 그가 귀를 물었으므로 낮게 신음소리를 뱉은 박미정이 팔을 들어 그의 등을 안았다. 그리고는 혀를 들고 그의 입술을 기다렸는데 이제는 거침없는 모습이었다.
다음 날 아침, 전화벨 소리에 김상철은 잠에서 깨어났다. 전화기를 들면서 올려다본 벽시계는 8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근대 비서실의 박과장입니다.」
사내가 빠르게 말했다.
「김사장님 계십니까?」
「제가 김상철인데요.」
「안녕하세요? 저희 실장님께서 통화를 원하셔서.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비밀방문이었지만 이제 만날 사람은 다 만나는 것이다. 곧 이남호로 통화자가 바뀌었다.
「김사장, 미안한데, 번거롭게 해서.」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 점심이나 같이 하시자는데, 회장님께 말이오.」
「좋습니다. 뵙지요.」
출발시간은 오후 5시였으니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비공식 방문자를 찾아내어 만나자고 하는 저쪽이 결례를 하는 것이지 연락을 안 한 이쪽은 아니다.
오전 12시 20분에 김상철은 남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한정식집 앞에서 차를 내렸다. 기다리고 서 있던 사내의 안내로 그는 안채로 들어섰다. 겉보기보다 꽤 큰 요릿집이었고 바깥채는 보통 한정식집이었는데 화초가 만발한 넓은 정원 건너편의 안채는 일반 한옥의 분위기였다. 앞뒤가 탁 트인 마루방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강회장이 앉아 있었다. 와이셔츠 차림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그의 모습은 분위기 때문인지 한가한 시골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다가선 김상철의 인사를 받은 그가 낮게 말했다.
「불러서 미안하구만, 귀찮게 했다.」
「아닙니다, 회장님.」
「이렇게 단둘이 있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실장도 뺏어.」
인기척이 조금도 없던 집의 옆쪽에서 조심스런 기척이 들리더니 여자 두 명이 교자상을 나눠 들고 다가왔다.
「이 집이 음식 맛이 일등이야. 한국 전통 음식이지.」
강회장이 상에 놓인 갖가지 음식을 눈으로 가리켰다.
「난 입맛이 없을 때는 꼭 이 집에 온다.」
바깥채의 소음도 차단된 한옥 안은 다시 정적에 싸였다. 마루 양쪽이 방인 모양이었지만 비어 있는 모양이었다. 반주로 매실주가 나왔으므로 김상철이 잔을 따라 올렸다. 회장은 맛있게 반찬을 씹고 입맛을 다시며 된장찌개를 떠 넣는다. 그의 콧등에서는 땀방울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근대그룹은 이제 강용식의 체제가 되었다.」
문득 머리를 든 강회장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강용식과 강재원의 부자로 이어지게 되어있지. 난 지분도 없고 이제 소유 부동산도 없다. 지난주의 그룹장 회의에서도 손을 떼었다고 선포했다.」
그는 입가심을 하듯 열무김치의 국물을 서너 번쯤 떠 마셨다.
「난 다음 달에 근대리아에 들어가 영주할 생각이야. 그래서 근대리아의 행정 체제를 조금 변경시켰는데 행정청은 그대로 두고 조직만 변경을 시키도록 했지. 그, 빌어먹을 위원장 자리는 없애고 청장과 부청장 체제로 했다. 유장석이와 이대각이가 그 자리에 앉는 게야. 지금까지는 변형된 기업형태로 근대리아를 운영했지만 앞으로는 국가 형태의 조직과 관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일단 내가 총독으로 기틀을 잡기로 했다.」
김상철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총독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홍콩의 총독과 같은 경우가 될 것이다. 수저를 내려놓은 강회장이 허리를 폈다.
「내가 1대 총독이 되는 게다. 이건 모스크바에서도 이의가 없다고 하더군. 하긴 이의가 있을 리가 없지.」
「당연하지요, 회장님.」
「홍콩은 영국령이어서 총독이 영국에서 보내졌지만 근대리아는 다르다.」
「‥‥‥‥」
「총독은 종신제로 강씨 가문에서 임명될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합법적인 절차가 있어야겠고 근대리아의 법체계도 세워야 할 테지만.」
물수건을 집어 얼굴의 땀을 닦은 강회장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날 보좌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뜻을 함께 하는 사람으로, 그래서 내 뒤를 이을 사람 말이야. 그런데 그것이 뜻대로 안 되는구나.」
「‥‥‥‥」
「내가 초조했다. 그래서 경솔했고, 상처들을 입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머리를 든 그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내 말은 너에게 큰 길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난 너를 받아들이려고 이렇게 사정을 한다. 내 뒤를 잇게 하려고 말이다.」
「저는 결혼할 여자가 있습니다, 회장님,」
김상철이 말하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서울에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저는 총독이 될 생각도 없습니다.」
「본인이 되겠다고 되는 것이 아니야. 자격과 조건이 구비된 자가 선출되는 것이다.」
「저는 회장님과 뜻을 같이하고 근대리아를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자 강회장이 쓰게 웃었다.
「너는 네 개인의 행복을 위해 큰 것을 버리는 것이다.」
「미현이가 곧 근대리아라는 생각은 안 해보았느냐? 나도 사람이다. 내 모든 것을 바쳐 근대리아를 이루어 놓았다면 내 후계자가 내 핏줄이 되기를 바라고 또 그럴 만한 자격도 있어.」
「후계자가 누가 되든 돕겠습니다.」
강회장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내 아들과 손자는 근대그룹을 이끌고 가야 한다. 그리고 근대리아는 그놈들에게 맞지가 않아,」
「‥‥‥‥」
「근대리아에 미현이와 함께 들어갈 예정이야. 그 애는 부담 없이 너를 받아들일 것이다.」
「미현 씨를 돕지요, 회장님. 미현 씨가 결혼한다면 그 남편도 돕겠습니다.」
한동안 김상철을 바라보던 강회장이 상 위의 숭늉 그릇을 들었다. 두어 모금 숭늉을 마시고 난 그가 긴 숨과 함께 그릇을 내려놓았다.
「서두르지 말고 생각해 보도록 해라. 넌 아직 젊으니 서둘 필요가 없어.」
머리를 돌린 강회장이 정원을 바라보았다. 늘어진 볼의 근육과 검버섯이 돋아난 옆얼굴이 지쳐 보였으므로 김상철이 시선을 떼었다.
박기동이 창광 클럽에 들어섰을 때 마침 최태호는 로비에서 부하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창광 클럽은 근대시에 있는 북한의 몇 개 안 되는 사업장 중 하나였지만 호화로운 시내의 사업장에 비교하면 하급이다.
이야기를 마친 최태호가 다가왔다.
「아직 연락이 없소?」
인사도 생략하고 대뜸 묻는다.
「오늘 밤에 도착하신답니다.」
그들은 2층의 사무실에 들어가 마주 앉았다. 저녁 8시는 바쁜 시간이다. 그들이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두 차례나 전화가 왔고 부하가 한 번 들어와서 지시를 받고 나갔다. 이윽고 조금 한가해지자 최태호가 혀를 찼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가 있는데 말이야.」
「최사장님도 돈이 중요한 것을 아시는 모양이오.」
「누구 바본지 아시요?」
박기동의 농담에 최태호는 버럭 화를 내었다
「도대체 출발을 연기한 이유가 뭐요? 우린 겨우 평양을 설득해서 만나게 해놓았는데 말이오.」
「글쎄, 그걸 내가 압니까? 갑자기 김사장님 지시를 받았을 뿐인데, 그것도 내가 직접 받은 것이 아니어서,」
이금철과 함께 평양으로 출발할 계획이 연기된 것에 대한 불평이다. 그러나 시바다에게 들켜 목숨을 구걸했던 예전의 박기동이 아니다. 소파에 등을 기댄 그는 담배를 빼어 입에 물었다.
「날 보자고 한 건 그 일 때문입니까?」
「우선 한잔합시다.」
자리에서 일어선 최태호가 벽 쪽으로 다가가더니 백두산 술을 들고 왔다. 북한산의 최고급 술로 알코올 농도가 70도짜리였다. 서너 잔씩을 마시고 조금 술기운이 배어졌을 때였다. 최태호가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어떻소? 이한과 그레고리와의 관계가 말이오? 괜찮소?」
「괜찮고 자시고 할 것이 없지요. 모두 김사장님의 지시를 받는 입장이고 나하고는 수직관계가 아니오.」
박기동이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로 웃었다.
「소문을 들은 모양이신데, 각자 맡은 일이 있으니까 상관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박사장은 대단한 일꾼이야. 박사장 수단은 아마 근대리아에서 따를 사내가 없을 거요.」
잔에 술을 따르며 최태호가 따라 웃었다.
「돈도 꽤 모으셨다던데, 알부자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박기동이 정색을 했다.
「변죽만 올리지 마시고 용건이 뭔지 말씀해 주세요. 최 사장님답지 않게 왜 이러십니까?」
「여자들 사업 때문이오.」
술잔을 내려놓은 최태호는 정색을 했다.
「여자들을 쓰시지 않겠소? 인원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일은 이주민 관계와는 별도요. 우리와 박사장과의 별도 계약으로.」
「날더러 북한 여자들을 쓰라는 겁니까?」
박기동이 눈을 크게 뜨고는 입술을 벌렸다.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더구나 별도 계약으로 말이오?」
「한국에서 비싼 돈 주고서 한물간 여자들을 데려오지 않소? 형편없습니다. 더구나 옛부터 남남북녀라고 했소. 우리 공화국 여자들은 모두 날씬하고 미인이오. 거기에다 값도 싸고.」
「그렇다면 이주민에 포함시키면 되겠습니다. 일할 자리는 내가 맡아서 만들어 줄 테니까.」
「그 일등 미인들을 두당 500달러의 계약금을 주고 데려오겠다고?」
이제는 최태호가 같은 표정을 했다.
「당신은 두당 2만 달러가 넘는 돈을 치르고 데려오지 않소?」
「그 여자들과는 경우가‥‥‥」
「다를 것이 뭐가 있어? 하긴 우리 여자들이 더 깨끗하고 수준이 높지. 그것들보다는.」
술잔을 들어 백두산 술을 한 모금에 삼킨 최태호가 바짝 다가앉았다
「이미 삼합회와 마피아, 그리고 이나카와회까지 우리와 계약을 했소. 당신한테만 이러는 게 아니란 말이오.」
「당신이 안 하겠다면 할 수 없지. 수요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근대리아는 여자 물량이 모자라서 난리인 곳이니까 말이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박기동이 옆에 앉은 이판석에게 물었다.
「이봐, 삼합회나 마피아 쪽에서 북한 여자들을 쓰고 있나 알아봐,」
「북한말입니까?」
이판석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조선족이나 고려인 여자들이 아니구요?」
「그래, 공화국에서 온 여자들 말이야.」
「전에 들어왔던 여자들은 얼마 안 되는 데다가 대부분이 북한 쪽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김상철이 전에 데려왔던 북한의 근로자들은 대부분이 군에서 차출된 사람들이었고 지금 그들 대부분은 각 사업장에 흩어져 있다. 그중 여자들도 끼어 있었는데 유흥업소로 빠진 숫자는 몇 명 안 된다.
「북한이 유흥업소에 여자를 공급시키려고 한단 말이다. 전문적으로 말이야.」
찌푸린 얼굴로 박기동이 말했다. 최태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서울에서 데려온 여자들의 희소가치는 폭락이다.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넘어온 조선족이나 고려인 출신 교포 여자들은 대부분 가족 단위로 이주해 와서 유흥업소로 빠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근대리아는 여자의 품귀 현상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자들의 대부분은 동남아나 러시아인이 대부분이었다.
「그 빌어먹을 자식들이 누구 장사를 망치려고.」
사태를 짐작한 이판석이 입을 다물었으므로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타운의 동쪽 변두리에는 밀입국자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이 중국과 러시아계였다. 그러나 밀입국자의 거주지라고 해서 당국으로부터 외면받는 것이 아니다. 거주지에는 무료 합숙소와 급식소, 무료병원이 세워져 있는 데다 아침마다 근대리아의 각 사업장에서 보낸 버스가 잡역부를 모집해서 싣고 나간다. 따라서 동쪽 타운이라고 불리우는 밀입국자 거주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히 팽창되어서 이제는 영주권을 얻고 나서도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꽤 되었다. 영주권을 얻으려면 근대리아의 사업장에서 6개월 이상 일했다는 중명서와 사업장 책임자의 확인서, 거기에다 근대리아 주민 두 명의 보증이 필요했다. 따라서 일자리는 얼마든지 있었으니 게으름만 피우지 않으면 6개월 후에는 동쪽 타운을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근대리아의 영주권을 얻어 주민이 되면 즉시 직장 가까운 곳의 아파트를 제공받는다. 10평형에서 100평이 넘는 다양한 규모의 아파트 중에서 본인의 수입에 맞는 형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아파트값은 매달 봉급의 10퍼센트를 제하는 것으로 치러졌고 월수입이 나아지거나 직장을 옮겼을 때 큰 평수나 다른 형의 아파트로 얼마든지 옮겨 갈 수가 있다. 물론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였고 단독주택을 제공받는 경우도 있다. 주택구역으로 지정된 시의 땅을 무료로 제공받아서 자기 돈을 들여 집을 지어 사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은 초창기의 이민들이거나 돈을 모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동쪽 타운이 팽창되면서 그곳을 근거지로 사는 주민도 늘어나게 되었다. 영주권을 얻고 나서도 그대로 주저앉은 그들의 대부분은 물론 중국계와 러시아계 주민이다.
깊은 밤, 동쪽 타운의 무료급식소 옆골목이다. 급식소는 이미 문을 닫았고 현관의 불도 꺼져 있어서 골목은 그저 동굴처럼 깊은 구멍으로만 보였는데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급식소의 벽에 두 사내가 붙어 서 있는 것이다.
「이거 늦지 않아? 벌써 열두 시 십 분이야.」
사내 한 명이 투덜거리듯 말했는데 한국어였다. 6월이었지만 아직 영하의 날씨이다. 안쪽에 서 있던 사내가 커다랗게 가래침을 뱉았을 때 골목의 입구로 사내 한 명이 들어섰다. 건너편 길에 세워진 가로등 빛을 등에 받고 있어서 형체만 보이는 사내였다.
거침없이 안쪽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곧 사내들의 앞에 섰다.
「이제 오십니까?」
사내들의 인사를 받은 그는 잠자코 손에 들고 있던 비닐백을 내밀었다.
「100g이야. Is 봉지로 500개가 들어 있다.」
비닐백을 받은 사내 한 명이 땅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건네주었는데 꽤 묵직해 보였다.
「저, 이번에는 식권까지 받았습니다. 그래서 …」
가방을 받은 사내가 입맛을 다셨다.
「다 팔았나?」
「아직 150개 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가방에 든 건 얼마야?」
「달러하고 루블, 엔화와 원화는 지금 가져왔는데 달러로 환산하면 3만 4친 달러 정도 됩니다. 중국 원화는 몇백 원밖에 안 되어서 재고로 남겨두었습니다.」
「중국 놈들하고는 거래하면 안 돼.」
「알고 있습니다.」
두 사내를 상대로 번갈아 이야기하던 사내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일주일에 3만 달러면 계획보다 실적이 떨어진다. 더 적극적으로 수요자를 늘려야겠어.」
「수요는 늘고 있습니다.」
다시 머리를 끄덕인 사내가 몸을 돌리고는 이제 등만 보인 채 골목을 빠져나갔다.
경비대원 오탁규와 김동환이 급식소 옆 골목에서 두 사내가 나오는 것을 본 것은 우연이었다. 그들은 순찰차를 타고 마악 건너편 사거리를 건너가는 중이었는데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인데다가 급식소 옆 골목은 지금 공사 중인 병원 건물과 통해져 있을 뿐 사람이 오갈 곳이 아니었다.
핸들을 잡은 오탁규가 사거리에서 순찰차를 왼쪽으로 회전시켰고 급식소 앞을 지나는 그들에게로 속력을 내어 다가갔다. 사내들이 엔진 소리를 듣고 순찰차를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50미터쯤의 거리밖에 남지 않았다.
「저놈들, 틀림없이 영주권 미취득자다.」
오탁규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부산 출신으로 육군에서 제대한 직후 근대리아로 가기 위해서 근대에 지원했다. 그리고는 희망대로 경비대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이제 경력 5개월로 물정을 제법 알고 있는 것이다. 순찰차는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사내들 옆에서 멈춰 섰고 오탁규와 김동환은 제각기 양쪽 문으로 뛰어내렸다. 사내들은 미처 달아날 생각도 하지 못한 듯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오탁규는 가슴이 뛰었다. 얼굴의 골격으로 보아 사내들은 한민족이다. 그는 중국계나 러시아계보다 한민족을 검문할 때 흥분감을 느꼈는데 내색은 하지 않았다. 동료인 김동환은 근대리아 근무 2개월의 신입으로 그의 조수였다.
「당신들, 영주증 좀 봅시다.」
사내들을 가로막고 선 오탁규가 그렇게 말하고는 왼손을 내어밀었다. 물론 오른손은 그가 틈만 나면 닦는 베레타 위에 얹혀져 있다. 김동환이 비스름한 위치에서 사내들을 바라보고 섰는데 교육받은 대로였다. 사내들이 주머니를 뒤져 제각기 영주증을 내었으므로 오탁규는 조금 실망을 했다. 그러나 플래시로 잠깐 영주증을 비춰본 그는 와락 긴장을 했다.
「당신들, 북한에서 왔어?」
「그렇수다.」
사내 하나가 투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나 당신이나 모두 근대리아 주민이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이야기하러 나온 거요.」
「이야기하러?」
오탁규의 시선이 사내가 쥔 비닐 가방으로 옮겨졌다.
「가방에 든 건 뭐야?」
「술이오.」
「열어 봐.」
사내가 비닐 가방의 지퍼를 잡아 내리고는 술병을 집어내려는 듯이 가방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어서 오탁규가 미처 말릴 수도 없었지만 긴장은 했다. 그가 권총의 손잡이를 움켜쥐었을 때 이미 사내는 가방 속의 권총을 꺼내 들고 있었다. 그리고는 오탁규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요란한 총성과 함께 2미터쯤의 거리에서 가슴을 관통당한 오탁규가 벌떡 뒤로 넘어졌고 당황한 김동환이 겨우 권총을 빼들었으나 다시 한 발의 총성이 울리면서 그도 쓰러졌다.
「병신 같은 남조선 새끼들.」
권총을 손에 쥔 사내가 씹어뱉듯 말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요란하게 총성이 울렸지만 인적은 없다. 사내 한 명이 이미 숨이 끊어진 오탁규의 손에서 영주증을 빼 들더니 그들은 곧 어둠 속을 달려 사라졌다.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일어난 사건이다.
장인규가 떠난 후로 한때 빈집으로 버려졌던 타운 외곽의 저택에 김상철이 다시 이주한 것은 두 달쯤 전이다. 서울에서 돌아온 사흘째 되던 날 아침, 김상철은 응접실에서 이한과 변순태와 마주 앉아 있었다.
「강회장도 북한 이주민을 받으면 행정청과 경비대의 교육이나 감시체제를 강화한다는 계획을 세워 두고 있어. 각 사업장의 관리도 강화시키고.」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 북한계 조선족이나 고려인들이 근대리아에 동화되어가는 것에 자신을 얻은 것이지. 하지만 이번의 북한 이주민은 지난번과도 다른 것 같다.」
이한과 변순태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러시아계 고려인 출신이었던 그들은 남북한 간의 대립의식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피부색이 노란 러시아인으로 살아왔고 뿌리를 그리워했던 이민 1, 2세대도 아니다
「근대리아를 흡수하려고 오랫동안 집단 교육을 받고 있다는 거야. 그자들의 목표는 근대리아 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된다. 북한의 현재 체제로서는 우리도 공존할 수가 없어.」
「그렇다면 취소하면 될 것 아닙니까?」
불쑥 이한이 말하자 변순태도 머리를 끄덕였다.
「강회장께 말씀드려서 보류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현재 상황이 그렇다는 거야. 강회장한테 아직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도 있어. 그래서 내가 북한에 들어가려고 한다. 가서 해야 할 일도 있고, 다녀와서 강회장을 만날 작정이야.」
이한과 변순태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시다면 박기동을 데리고.」
그렇게 물은 것은 이한이다.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아니, 나 혼자. 이번에는 조태광이도 데려가지 않는다. 한 명이나 백 명이나 그곳에서는 마찬가지 상황이 될 테니까.」
점심시간에 저택으로 불려온 박기동은 김상철의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사장님께서 직접 가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건 제가 이미‥‥‥」
「앞으로의 이주민 문제도 상의해야 될 것이고, 그러려면 북한 당국의 책임자도 만나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알겠습니다, 사장님.」
이윽고 박기동이 머리를 끄덕였다.
「북한 측에서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제가 이금철한테 전하지요.」
「이금철에게 북한 당국의 책임자와 만나도록 해달라고 전해.」
「당연히 그래야지요.」
「될 수 있는 한 빨리 출발하는 것이 좋겠어.」
「예, 사장님.」
자리에서 일어선 박기동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저도 오늘 아침에 들었습니다만 강회장님이 다음 달에 근대리아에 정착하신다던데요, 사실입니까?」
「사실이야.」
「이제 본격적으로 근대리아가 발전하게 되었군요, 사장님.」
박기동이 방을 나가자 김상철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박기동은 필요한 인간이었다. 특히 근대리아처럼 여러 민족과 조직이 섞여 치열한 세(勢) 경쟁을 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전달자를 통해 서로 의사를 주고받을 뿐만 아니라 모략을 한다. 곧 전달자인 박기동 자신이 전장(戰場)인 것이다.
「좋아, 어려운 일이 아니야.」
김상철의 전갈을 들은 이금철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김사장이 온다면 평양에서도 환영할 거야. 잘 되었어.」
박기동이 입맛을 다셨다.
「직접 가시려고 내가 가려는 걸 보류시켰던 모양이오. 이것, 나만 괜히 가운데 끼여서 시달렸잖아.」
창광 클럽의 사무실 안이었다. 소파에 등을 깊숙이 묻은 박기동이 혼잣말을 했다.
「그렇게 되었으니 내가 이곳에서 받을 수밖에 없겠는데, 실물을 보고 데려와야 정상인데 말이야.」
「홍기천과 페로프도 그렇게 했어.」
이금철이 말하자 박기동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삼합회나 마피아가 데려온 여자들 수준이면 곤란합니다. 나이가 많거나 몸매가 쳐지는 여자들도 꽤 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주의를 하지. 박사장이 실망하지 않을 거요.」
박기동은 이금철과 여자 한 명 당 12,000달러로 20명을 계약했던 것이다. 이주민 문제로 북한에 들어가는 길에 그는 여자들을 제 눈으로 확인해서 데려올 계획이었다. 아직 초저녁이었지만 이금철은 백두산 술병을 내놓았다.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있었다.
「어차피 밀입국시켜야 하니까 박사장이 데려올 수는 없어요. 우리를 믿고 기다려요.」
「이번이 괜찮으면 추가 주문이 있을 겁니다. 수요는 많으니까」
「염려 마시오.」
삼합회와 마피아에 공급한 여자들은 모두 합쳐서 20명 정도였다. 그들은 주로 동족인 중국계와 러시아계의 여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다 북한 측 말대로 두당 2만 달러를 주었다면 너무 비싸다. 그들은 아마 더 이상 주문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번에 김사장은 평양에서 환영을 받을 거요. 물론 박사장도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들어가 보시오, 아마 훈장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훈장은 무슨‥‥‥」
술잔을 든 박기동이 머리를 저었다.
「김사장이야 러시아 국적이 되었으니 괜찮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도 한국 국적이오. 큰일 납니다.」
「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시요?」
「모두 빠져나오는 마당인데 내가 왜 들어갑니까? 강회장도 다음 달부터 이곳에 영주한다는데.」
「결국은 들어오는군.」
「체제 개편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 대대적으로.」
「아마 그러겠지.」
이금철이 박기동의 빈잔에 술을 채웠다.
「자, 술이나 한잔 더 합시다.」
7. 평양 협상
경비대는 아직도 1만 5천 명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연초의 사건 이후 러시아군이 주둔했던 3개월 동안 대대적인 숙정이 이루어졌다. 경비본부장 이하 대부분의 간부진, 또한 그들이 영입했던 대원들을 귀국시켰는데 그 숫자가 2천 명 가깝게 되었던 것이다. 경비본부장이 된 이대각은 부족한 인원을 한국에서 데려오지 않고 조선족과 고려인으로 채웠다. 근대리아는 근대리아인을 교육시켜 맡긴다는 강회장의 의지인 것이다. 따라서 지난달부터는 근대시 외곽에 경비대원 양성소가 1기 훈련생을 입소시켰다. 석 달 훈련을 받고 경비대원이 되는 양성소에는 현재 500명의 예비대원이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고려인과 조선족으로 5 대 1의 경쟁을 뚫고 입소한 청년들이다. 적극적이고 저돌적인 성격만으로 따지자면 이대각도 강회장 못지 않는다. 그는 경비대원 양성소에 대단한 열성을 쏟아붓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도 양성소에 들렀다가 행정청에 돌아온 그는 보안국장 장동택을 불러들였다. 장동백은 근대리아의 보안과장을 지내다가 안기부로 돌아갔던 사람이다. 지난번의 사태로 경비대의 간부가 대부분 추방당하게 되자 그는 안기부에 사표를 내고 유장석에게 근대리아 근무를 자원했다. 강회장이 그를 선뜻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다.
이대각의 앞에 선 장동택이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며 말했다
「동쪽 타운 사건은 아직 단서가 없습니다, 본부장님. 목격자도 증거물도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에 ‥‥‥」
힐끗 이대각의 눈치를 살핀 그가 말을 이었다
「전담반 세 명을 밀입국자 사이로 잠입시켜 놓았습니다.」
「경비대원을 사살한 것은 가장 죄질이 나쁜 경우다. 틀림없이 범죄 현장을 목격당하자 살해한 거야.」
이대각이 턱으로 앞쪽 의자를 가리키자 장동택이 자리에 앉았다.
「김사장이 서울 다녀오더니 마음을 바꾼 모양이야. 박기동 대신으로 직접 북한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회장님을 만났다는군. 그래서 재촉을 받은 것 같은데.」
「제가 보고드린 대로 북한 정권은 이주를 대비해서 주민들을 철저히 교육시켜 왔습니다.」
장동택이 이대각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고려인과 조선족과는 전혀 유형이 다릅니다. 근대리아를 흡수시키려는 조직 집단이 몰려 들어오는 겁니다.」
「동화운동에 적응이 된다고 믿고 있어, 회장님은.」
이대각이 입맛을 다셨다. 북한 이주민을 대상으로 한 동화운동의 책임자도 이대각인 것이다. 그들에게 근대리아의 체제와 이념을 주입시키고 감시 감독하는 체계는 이미 세워두었기는 했다.
「영감님이 내일모레가 80이어서 그런지 정신없이 서두른단 말이야.」
「김사장도 사정을 알고 있을 텐데 직접 북한에 들어가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대각은 물론 강회장도 장동택의 철저한 반공의식을 믿는다. 더욱이 그는 근대리아의 이념에 심취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장동택이 말소리를 낮추었다.
「서울에서 안기부장이 김사장에게 북한 이주민 문제에 대해서 층고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이건 안기부의 심재택 씨한테서 들었으니 정확한 정보지요.」
「‥‥‥‥)
「안기부장과 심재택 씨는 사심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회장님께 직접 이야기하면 오해를 받을까 봐 김사장을 만났는데 효과가 없군요. 아마 회장님의 의지가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이대각이 이제는 혀를 찼다.
「결과가 어떻게 되건 동화계획이나 단단히 준비해 두는 수밖에 없어, 지금은.」
그레고리 파트킨은 근대리아의 오성 사업장을 통괄하고 있다. 그는 시베리아 강도단 두목이었지만 구 소련군의 소령 출신으로 행정력도 있는 사람이다. 김상철과의 기이한 인연으로 한때는 마피아에도 몸담았다가 다시 근대리아로 돌아와 있었으니 참으로 곡절이 많은 인생이었다.
그가 콘티넨탈 호텔의 지하 4층 창고에 들어서자 부하들이 좌우로 비켜섰다. 지하 4층은 전체가 호텔 필수품의 창고로 쓰였는데 그가 들어선 방에는 쌀자루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쌀자루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러시아인이 머리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두 눈의 초점을 잡는데 조금 시간이 걸렀고 그동안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레고리.」
초점을 잡고 그레고리를 알아본 사내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날 살려 주시오, 그레고리.」
그레고리가 옆에 선 주코프를 돌아보았다.
「자백했나?」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미화로 2만 5천 달러입니다.」
사내가 다시 소리쳤다.
「그레고리, 5천 달러는 집에 있습니다. 나머지는 내 봉급에서 …….」
머리를 돌린 그레고리가 주위에 둘러선 부하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모두 7, 8명 쯤 되는 그들은 시베리아 강도단 시절부터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사내들이었고 의자에 앉아 있는 사하로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하로프에게로 두어 걸음 다가가 섰다.
「사하로프, 우리가 강도단 시절에는 빼앗은 것은 모두 나눠가졌다, 그렇지?」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사하로프가 눈을 꿈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얻어맞아 입술이 터졌고 한쪽 눈이 부어 있는데다 머리칼이 헝클어진 험한 모습이었다. 그레고리가 말을 이었다.
「기억이 난다. 우리가 알단의 가게들을 털었을 때 네가 쓸모도 없는 은주전자를 갖고 나와 웃음거리가 되었지.」
「그레고리, 나도 모르게 어쩔 수가 없었소.」
사하로프가 이제는 흐느껴 울었다.
「마약을 맞게 된 것이 잘못이요, 그레고리.」
「넌 이곳에서 제대로 살 수가 있었어. 한 달에 2천 달러나 받게 되었으니 곧 여자도 얻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레고리, 살려주시오.」
그레고리가 허리춤에 꽂힌 권총을 빼들었다.
「치타에 있는 네 부모한테는 여생을 편히 지낼만한 돈을 보내드리겠다. 그것은 약속한다.」
리볼버의 총구가 이마에 겨누어지자 갑자기 사하로프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똑바로 그레고리를 바라보았다.
「사하로프, 하지만 너하고도 끝이다.」
「준비가 되었느냐?」
방 안의 사내들은 사하로프의 머리가 희미하게 위아래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총성이 울렸고 이마를 뚫린 사하로프가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허리춤에 권총을 꽂은 그레고리가 몸을 돌리자 주코프가 뒤를 따랐다.
「마약은 타운의 비버 클럽에서 샀다는데 하루분에 3백 달러 주었답니다. 그 개자식은 최고급 아편만을 먹었습니다.」
복도를 걸으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사하로프 외에는 간부급에서 아편 먹는 놈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급 부하들은 있을 겁니다. 페로프의 부하들도 꽤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그레고리가 조금 걸음을 늦추었다
「누구한테서 구입했다구?」
「중국계 여자랍니다. 몸 파는 여자처럼 보이는데 가끔 비버 클럽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중국인들은 근대리아 초기부터 마약을 들여왔다. 지금도 중국인 거리 안에는 마약방이 있어.」
그레고리의 보고를 들은 김상철이 말했다.
「이제는 마약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모양이군.」
「홍기천에게 경고를 해야 합니다. 저희들끼리 먹든 마시든 해야지 밖으로 내놓으면 요절을 내겠다고 말입니다.」
「우선 증거를 잡은 후에.」
비버 클럽은 러시아 마피아와 줄이 닿아 있는 곳이다. 마피아가 중국계 여자를 고용하여 마약을 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레고리가 방을 나가자 김상철은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벽시계는 오후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6시에 약속이 있는 것이다. 그가 오리엔트 호텔의 라운지로 들어섰을 때는 6시 5분이었다.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던 안인석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를 맞았다. 일본에서 만나고 나서의 첫 대면이다. 그에게로 다가간 김상철이 손을 내밀며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응, 오랜만이야.」
안인석이 따라 웃었지만 굳어진 표정이 잘 펴지지가 않는다. 그는 지금도 관광국의 과장으로 관광업무의 실무책임자였다.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았는데 둘 다 저녁 생각이 없었으므로 술을 시켰다. 오리엔트 호텔은 이나카와회 소속의 사업장으로 지금은 새로운 책임자인 죠오베가 관리하는 곳이다. 주방 앞에 서 있는 지배인이 잔뜩 긴장한 태도로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네 이야기는 박기동씨한테서 가끔 들어,」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박기동은 언제나 지나가는 말처럼 안인석의 이야기를 했는데 결코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동향만 전해주는 식인 것이다. 둘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는 박기동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안인석을 비난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김상철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서울을 다녀왔어, 그래서 너한테도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나, 미정 씨를 데려오기로 했다.」
안인석이 시선을 들었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자, 술이나 한잔 들자.」
김상철이 술잔을 들었다. 따라 술잔을 든 안인석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 이야기하려고 날 부른 거냐?」
「그런 셈이지.」
「아무 말 안 해도 될 텐데, 난 상관없는 사람인데 뭘. 어쨌든 축하한다. 잘 됐어.」
한 모금에 술을 삼킨 안인석이 잔을 권했다.
「항상 빚진 기분이었는데 이제는 나아질지도 모르겠다.」
「고맙다.」
잔을 받은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내가 말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잘못한 건 알아. 대학 때는 같다고 생각했는데 뛰어오르는 너를 보면 견딜 수가 없었어. 그러다 보니 사리분별을 못했던 거야.」
「‥‥‥‥」
「말해줘서 고맙다.」
다시 술을 채운 그들은 같이 잔을 들어 올렸다. 주방 쪽에서 긴장하고 있던 지배인의 자세도 조금 풀어져 있었다.
박미정과 강미현은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때는 박미정이 강미현을 찾아갔었지만 오늘은 그 반대였다. 강미현이 만나자고 했던 것이다.
초여름의 햇살이 눈부시게 반사되는 한낮이다. 논현로에 위치한 조그만 커피숍 안에는 손님이 그들 둘뿐이었고 커피잔을 내려놓고 난 종업원도 어디론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마치 두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처럼 보였으므로 박미정은 다시 한번 커피숍 안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뒤쪽 구석 자리에 앉아 잡지를 읽고 있는 종업원을 발견한 그녀는 가만히 숨을 내려쉬었다. 강미현은 쥐색의 반팔 티셔츠에 상아색 바지 차림이었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에 단순한 형태의 귀걸이만 걸었다. 강미현이 부드럽게 말했다.
「사무실로 연락했더니 정리하신다고 해서. 곧 결혼하신다고.」
머리를 끄덕이는 박미정을 향해 그녀가 말을 이었다.
「상대는 김상철 씨, 맞죠?」
「그래요.」
박미정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정말 어색해요. 이런 분위기, 이런 내용의 이야기.」
「미안해요. 하지만 한번 꼭 만나고 싶었어요.」
강미현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가 떼었다.
「담배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담배가 늘었어요, 요즘.」
「그 사람, 할아버지 말씀대로라면 운이 강한 남자, 난세에 필요한 남자일 뿐인데.」
담배 연기를 길게 내어 뿜은 강미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피아, 삼합회, 북한계의 조직을 상대하려면 한국도 조직으로 맞서야 했는데, 이젠 그것이 암적 요소가 되었어요,」
시선을 든 박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가요? 누가 암적 요소예요?」
「김상철 씨.」
「이용할 땐 언제고, 그리고 근대리아가 겨우 정상을 찾은 건 누구 덕분인데요?」
얼굴이 하얗게 된 박미정이 강미현을 쏘아보았다.
「왜 이러시죠? 도대체.」
「난 솔직히 말씀드린 건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강미현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할아버지의 표현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에요.」
「‥‥‥‥‥」
「추잡한 주도권 싸움이죠. 하긴 역사를 봐도 이긴 자가 제왕이 되었고 경쟁자는 제거되더군요,」
「‥‥‥‥‥」
「할아버지와 김상철 씨는 공존할 수 없어요. 가족이 되기 전에는」
「자꾸 할아버지 얘기만 꺼내시는데.」
박미정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강미현 씨답지 않아요.」
그러자 강미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나 근대라는 짐이 없었다면 내가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어서 그래요.」
「그렇다면 강미현씨는 뭐죠?」
「인질이나 미끼, 그런 것.」
「김상철 씨에 대한 감정은 아무것도 없구요?」
「자존심 상해서 그러세요?」
박미정의 말에 퍼뜩 시선을 들었던 강미현이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녀가 다시 길게 연기를 뱉아내고 박미정은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남녀 한 쌍의 손님이 커피숍 안으로 들어섰다가 분위기에 질색을 하고는 돌아나갔다. 이윽고 강미현이 입을 열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없어요, 나는. 근대리아와 가족이 우선이니까 그런 감정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난 물러나지 않아요.」
박미정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내세울 것이 없어서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난 다시 놓치지 않겠어요.」
「‥‥‥‥‥」
「도대체 근대리아가 뭔데? 그곳 왕이 되면 백만 년쯤 사나요? 사람 사는 곳은 얼마든지 있어요, 난 그 사람하고 아프리카 사막에 가서라도 살겠어요.」
박미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택은 그 사람이 이미 했어요. 난 따른다고 약속을 했고.」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난 이번에는 속지 않아요, 절대로.」
하바로프스크를 떠난 아에로플로트기가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였다. 고공에 떠 있을 때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만 보였었는데 공항의 하늘은 비가 올 것처럼 잔뜩 흐렸다. 비행기의 트랩을 내려 선 김상철과 이금철은 곧 대기하고 있던 벤츠에 올랐다. 여권 심사와 세관검사를 무시한 절차였다.
공항을 빠져나온 벤츠는 곧 순안 평양 간의 고속도로를 맹렬한 속도로 달려 나갔다. 차량의 통행이 드문 때문인지 속도제한을 무시한 것 같은 거친 운전이었다. 앞자리에 앉은 운전사와 검정색 양복의 사내는 긴장한 듯 몸이 굳어져 있다.
「평양까지 몇 킬로나 됩니까?」
답답한 정적을 깨려는 듯 김상철이 묻자 앞쪽의 사내가 몸을 돌렸다. 30대 후반쯤의 단정한 용모의 사내였다.
「20킬로입니다, 김선생님. 10분이면 도착합니다.」
그는 눈을 깜박이더니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긴장을 풀려는 모양이다.
「김 선생님은 창광 거리의 평양고려 호텔에 묵게 되십니다.」
창광 거리는 평양의 번화가이다. 장국진은 가끔 평양 이야기를 해주었으므로 김상철은 그쯤은 알고 있었다.
「내가 만날 사람은 누굽니까?」
그것은 이금철도 아직 모르고 있다. 박인수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사내가 다시 웃었다.
「도착하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오늘 저녁에 김영남 부총리 겸 외교부장 동지를 만나게 되십니다.」
「‥‥‥‥」
「그동안은 방에서 쉬시지요. 저는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김선생님.」
창광 거리에 세워진 평양고려 호텔의 객실에서 대동강이 내려다보였다. 강 건너편에 솟아 있는 것은 주체사상탑이었다. 김상철은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밖에 나가 있다가 조금 전에 들어온 이금철의 가라앉은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박인수가 잠깐 자리를 비운 때이다.
「위원장님, 걱정거리라도 있습니까?」
그가 묻자 이금철이 놀란 듯 머리를 들었다.
「걱정거리는 무슨, 조금 피곤할 뿐이오.」
문이 열리더니 박인수가 들어섰다.
「가시지요. 지금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2층 식당의 밀실에 들어서자 두 사내가 그들을 맞았다. 박인수는 밀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이금철이 소개를 했다.
「김사장님, 부총리이신 김영남 동지십니다.」
김영남은 70대 초반쯤으로 얼굴의 혈색이 좋았고 짙은 테 안경을 끼었다.
「이분은 대외정보 조사부장인 서일 동집니다.」
서일은 60대쯤의 나이로 마른 체격이었다. 대외정보 조사부는 당소속의 해외 공작과 첩보 수집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 곧 방문이 열리면서 음식이 날라져 왔다. 김영남은 시종 웃음 띤 얼굴로 분위기를 이끌었는데 서일과 이금철은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강회장, 그분, 큰 인물이야. 근대리아를 조선 사람의 땅으로 만든다는 발상은 위대합니다. 영웅이오.」
김영남이 말했다.
「이미 인구가 350만이 되는 데다가 소득이 만 달러가 넘었다니, 훌륭해요.」
그는 외교의 베테랑인데다가 노동당 정치국 위원이기도 하다. 서열이 한창이나 아래인 서일과 이금철이 몸을 사리는 것은 당연했다.
음식은 맛이 있었으므로 긴장된 분위기였는데도 김상철은 제대로 식사를 했다. 강회장의 칭찬과 근대리아의 발전상에 대한 찬사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가운데 식사가 마쳐지자 테이블은 곧 술상으로 바꿔졌다. 인삼주가 두 잔쯤 돌려졌을 때였다. 김영남이 입을 열었다.
「김사장, 이번에 협상할 이주민이 몇 명입니까?」
「5천입니다. 그런데 근대리아는 가족 단위의 이주민을 필요로 합니다, 부총리님.」
「추가 계획은 어떻습니까?」
「회장님은 순차적으로 진행시키겠다고 하셨습니다.」
김영남이 머리를 끄덕였다.
「내 경험에 의하면 협상은 서로 주는 분위기가 되어야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건 협상이 아니지. 이렇게 앉아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성실한 노동력이오. 둘째로는 자손을 퍼뜨려 근대리아의 한민족 기반을 굳히는 것이 되겠지.」
「‥‥‥‥‥」
「그렇다면 그쪽은 우리에게 무엇을 줍니까? 난 이주할 우리 인민을 대표해서 묻는 겁니다.」
김상철이 소리 없이 입맛을 다시고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김영남에게 말재간을 부려 봐야 원숭이 앞에서 나무타기다.
「집과 일자리, 그리고 계약금을 줍니다. 다른 것은 모릅니다. 그것은 각자가 알아서 느끼게 되겠지요.」
「공화국 인민 중에 집이 없는 사람은 없소. 남조선처럼 삭월세 사는 사람이 없단 말이오. 따라서 이주해 가면 당연히 집이 제공되어야 하고 일자리도 마찬가지요. 그리고 계약금 문제인데‥‥‥」
김영남이 술잔을 들어 한 모금을 삼켰다.
「1인당 500달러라고 들었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근대리아를 개척해갈 순수한 영웅들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검토해 주시오, 최소한 2천 달러는 되어야 그들이 공화국에 남긴 친척이나 가족들에게 선물이라도 사줄 수 있을 겁니다.」
머리를 든 김상철이 그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안경테 속의 두 눈이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을 뿐 표정은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문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문을 연 김상철의 앞에 서 있는 것은 어제저녁에 만났던 대외정보 조사부장 서일과 다른 한 사람의 사내였다. 아침 8시 10분이었으니 그들은 약속 시간보다 10분 빨리 온 셈이었다. 방은 응접실까지 딸린 특실이다. 그들은 응접실의 소파에 마주 앉았다. 서일이 데려온 사내는 한철호라는 부부장이었다.
「연락은 받으셨습니까?」
서일이 물었다. 계약금 문제에 대한 회신을 받았느냐는 말이었다.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너무 차이가 커서 쉽게 결정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연락도 쉽지 않아서 평양에서 근대리아의 유장석에게 통화를 하면 그가 서울로 암호 전화를 해야만 하는 형편이다. 머리를 끄덕인 서일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아버님이 강원도에서 목장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잘 됩니까?」
「네, 제법 잘 됩니다.」
김상철이 바짝 긴장을 했다. 어제저녁에는 몇 마디밖에 하지 않던 서일이다. 그가 오늘은 그의 전공을 풀어 보일 모양이었다.
「감옥에 오래 갇혀 계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건강은 어떻습니까?」
「건강하세요,」
그러자 서일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대외정보 조사부장인 내가 김사장과의 면담기록이 없다면 큰일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김상철이 따라 웃었다.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셨으니 한국과는 조금 벌어진 것 같지 않습니까?」
「글쎄요.」
「한국 정부와도 관계가 매끄럽지 못하셨고.」
「그랬지요.」
「살인 혐의는 아직 벗겨지지 않았지요?」
「아시다시피 얼마 전에 한국에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왔습니다.」
「하지만 아직 한국 국적도 갖고 계시니 그쪽에서 마음먹기에 따라서 상황이 달라질 겁니다.」
「근대리아가 어떤 유형의 국가가 될 것 같습니까? 이를테면 홍콩이나 혹은 ….」
김상철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가 될 겁니다.」
「‥‥‥‥‥」
「50년 후에는 아마 러시아도 돌려 달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때까지 러시아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근대리아의 한민족은 뿌리를 박고 있겠지요,」
그는 서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직접 평양에 온 건 이주민 협상 문제 외에 다른 일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말씀을 못 드렸는데 ….」
「뭡니까?」
와락 긴장을 한 서일이 묻자 김상철이 힐끗 옆에 앉은 부부장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꼭 둘씩 다니는데 어제 서일이 김영남 앞에서 했던 것처럼 이 사내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부총리와 같이 계실 때 말씀드리지요.」
서일은 이미 더 이상 질문을 할 의욕을 잃었는지 머리를 끄덕이고 있었다.
「김상철이 어제 평양에 들어갔습니다.」
심재택이 말하자 권준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강회장한테 설득을 당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우리들한테는 불신감을 갖고 있겠지,」
창밖으로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먼지가 씻겨 내린 나뭇잎이 생기 있게 흔들렸고 청사 앞마당의 넓은 잔디밭은 이미 물기에 흠뻑 젖어 있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였다. 권준규가 앞에 앉은 심재택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대각과 장동택이 강성(强性)이 있는 데다 손발이 맞아. 최악의 경우에는 그들에게 기대하는 수밖에 없어.」
「줄곧 강회장에게 끌려다니는 상황입니다. 이제까지는 그 양반의 무리수가 그런대로 먹혔지만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심재택이 펼쳐놓았던 서류를 접었다.
「이미 계획적으로 모든 재산을 빼돌린 상황이어서 그 양반은 이제 정부의 어떤 간섭도 거부할 것입니다.」
「다음 달에 근대리아로 옮길 계획이지?」
「그곳에 영주한다고 합니다. 근대리아로 옮겨진 계열사 직원들의 가족도 올해 안에 모두 이주할 계획입니다.」
이미 근대의 사원가족 15만 명이 이주를 마쳤고 남아 있는 10만여 명도 매일 전세기 편으로 근대리아를 향해 떠난다. 언젠가 매스컴에서 한국판 엑소더스(exodus)라면서 새 땅을 찾아 떠나는 그들을 특집 취재한 적도 있다.
「차라리 한국에서 이주민 억제정책을 완화시킨다면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심재택이 말하자 권준규가 쓴웃음을 지었다. 정부는 석 달 전에야 겨우 근대 직원 가족의 이주를 허용했던 것이다. 박정규는 밀려났지만 아직도 대통령이나 안보회의 구성원의 다수는 근대리아의 장래에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근대리아를 지원했다가 적화라도 되었을 때는 책임을 뒤집어쓰게 될 것이고 그렇다고 이제는 반대만을 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래서 근대 가족의 이주만은 허용했지만 이주민 모집은 요원한 일이었다.
심재택이 머리를 들었다.
「부장님, 문제는 근대리아 내부에서도 생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만.」
잠자코 바라보는 권준규를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강회장과 김상철과의 관계 말씀입니다. 지금은 별문제가 없습니다만 시일이 지나면 아무래도‥‥」
그는 옆에 두었던 검정색 가방을 뒤져 소형 녹음기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들어보시겠습니까? 이건 며칠 전에 강미현과 박미정의 대화를 녹음한 것입니다.」
「‥‥‥‥‥」
「적나라합니다. 강회장과 김상철과의 관계도 극명하게 나타나 있고.」
「순전히 도둑놈들이구먼.」
강회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이건 마치 제 국민을 무슨 개나 돼지처럼 팔아먹을 작정인 모양이다. 뭐? 계약금으로 가족 선물을 사준다고? 모두 가로채 갈 놈들이.」
그는 손바닥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이놈들이 새파란 김상철이를 붙잡고 노는 모양이여.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자네나 협상에 능한 그룹 사장을 골라 보내는 건데.」
물론 그럴 만한 형편이 아니다. 비공식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이므로 이남호나 그룹 사장이 간다면 한국 정부가 잠자코 있을 리가 없다. 전처럼 강한 제재는 못하더라도 여러 가지 방법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남호가 입을 열었다.
「김상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회장님, 결정을 해주셔야.」
「도적놈들, 아쉬운 주제에 이쪽에서 서두니까 배짱을 내밀고 있어.」
「이제까지 계약금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는 것처럼 아무 소리 않다가 말이야.」
강회장이 이남호를 쏘아보았다.
「김상철이한테 돌아오라고 전해. 회담은 결렬이다.」
「예, 회장님.」
「이런 식으로 끌려가면서 거래를 할 수는 없다. 그놈들, 한국 정부와 회담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미친놈들, 사람 잘못 보았어.」
「만일 그자들이 처음에 제시했던 1인당 500달러를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할까요? 물론 우리가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겠습니다만.」
「그것도 못 해.」
「예, 그럼 무조건 결렬이 되겠습니다.」
「그렇다. 김영남이 그놈한테 본때를 보여주는 것이야. 그놈이 협상의 일인자라지만 아마 벼락 맞은 꼴이 될 것이다.」
「예, 그럼,」
이남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강회장이 다짐하듯 말했다.
「이제 다시 연락할 필요도 없다고 김상철한테 전해, 그냥 돌아오라고.」
「예, 회장님.」
「도청해 들을 테니 긴 이야기도 할 것 없다.」
이남호가 방을 나가자 강회장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약간 흥분만 해도 몸이 지치는 것이다.
김영남이 호텔에 찾아온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서일이 금방이라도 김영남을 데려올 것처럼 나갔기 때문에 김상철은 꼬박 하루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번에도 김영남은 서일과 함께였고 어제 아침부터 이금철은 나타나지 않았다. 응접실에 앉은 김영남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서울에서 연락은 받으셨습니까?」
그가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어제 오후에 유장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호텔 방의 전화가 도청되는 것은 기본이다.
「계약을 보류하고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가격 때문입니까?」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김영남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는데 낯익은 미제 상표였다.
「그리고 어제 나한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다는데, 무슨 이야기지요?」
「오성그룹 문제인데요.」
「그 사람들은 다시 협상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서로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길게 연기를 뱉아낸 김영남이 입술 끝만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합의한 내용만 지키면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전해 주세요. 우린 다시 협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위약금을 낼 용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 먼저 나진 선봉 지역의 규제를 풀어 정상화시켜 주고 동경 지사장을 돌려보내 달라고 하더군요.」
그러자 얼굴을 굳힌 김영남이 김상철을 쏘아보았다. 이윽고 시선을 뗀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동경 지사장을 돌려보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그렇지 않소?」
그가 묻자 서일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부총리 동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저한테 연락을 해주시면 됩니다. 근대리아에서 북한 사람들 만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김상철이 내쳐 말했다.
「제가 근대리아의 오성 사업장을 관리하는 인연으로 어쩔 수 없이 중계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근대와 오성 양대 그룹의 대리인인 셈이었다. 잠시 김상철을 바라보던 김영남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찌푸려진 얼굴이었다.
「김사장 생각은 어떠시오? 강우진 회장의 성격이 빡빡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회담을 결렬시키는 건 무례한 것 아닙니까?」
「그분은 자존심이 상하거나 기분이 틀어졌을 때 몇억 달러 손해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
「타협이나 협상 같은 것을 싫어하는 분이지요. 기분파지요. 아마 계약금 문제로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런 기업을 운영하다니.」
「‥‥‥‥」
「도대체 우리 공화국을 뭘로 보고.」
말을 멈춘 그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서울에 다시 연락할 수 없겠습니까? 가격 문제를 다시 절충하자고 말이오.」
「안 됩니다.」
머리부터 젖고 난 김상철도 이맛살을 찌푸렸다.
「연락할 필요도 없다고 하는 판이니 제가 할 일이 이제 없습니다.」
김영남과 함께 방을 나갔던 서일이 잠시 후에 혼자 들어섰다.
「야단이오. 협상이 이렇게 틀어져 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자리에 앉으며 서일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그는 이번 협상의 주역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다. 담배를 피워 문 그는 답답하다는 듯 여러 번 입맛을 다셨다.
「부총리 동지의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실은 오늘 저녁에 김사장께서는 주석궁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하기로 예정이 잡혀 있었는데 그것도 취소될 것 같습니다.」
바랐던 일도 아니었으므로 김상철이 잠자코 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김영남이 실수를 한 것이다.
「나는 김사장의 의견을 듣고 싶은데, 그래서 이렇게 다시 왔습니다.」
「한국 정부에서는 근대리아의 북한 이주민에 대해서 아직도 거부감을 갖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비공식으로 제가 온 것인데.」
「‥‥‥‥」
「가격이 어떠니 하는 소리를 듣고 강회장이 폭발한 것 같아요. 애를 써서 추진시키려는데 손발을 맞출 생각은 않고 돈이나 더 내라니 화가 날 만도 하지요, 아마 두 번 다시 이주민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 동지께서 너무 쉽게 생각하셔서.」
서일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는데 그 동지란 김영남인 것 같았다.
「외교 협상만을 전문으로 하시던 분이라.」
「김사장께서 돌아가 절충해 주시겠습니까?」
「글쎄요 제가 그럴 만한 입장이 아니어서.」
「손주 사위가 되실 분 아닙니까? 너무 겸손하실 것 없습니다. 오성 문제도 곧 연락을 드리지요. 동경 지사장을 돌려보내라는 이야기가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서일이 그에게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자주 뵙시다, 김사장님. 나도 근대리아에 갈 기회가 있을 겁니다.」
「언제든지 환영하겠습니다.」
서일이 문 앞에서 몸을 돌렸다.
「그러고 보면 근대리아는 멋진 곳이오. 우리도 별 부담 없이 들어갈 수가 있고. 강회장은 참으로 큰일을 해냈습니다.」
그를 배웅하고 난 김상철은 창가의 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우중충했던 날씨가 개여 밝은 햇살이 평양시를 덮고 있었다. 그러나 사흘이 되도록 호텔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북한 쪽도 계획하지 않은 것 같았고 그도 나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주석궁 안의 소회의실에는 다섯 명의 사내가 둘러앉아 있었다. 소회의실이라지만 50평도 넘는 규모의 방 안에는 타원형의 테이블과 20여 개의 의자가 놓여져 있어서 정치위원회가 열리기도 하는 곳이다. 물론 상석에 않은 사내는 국가주석이며 당 총서기장인 김정일이었고 그의 좌우에 무력부장 최광과 연초에 총리로 승진한 하준일, 그리고 앞쪽에 김영남과 서일이 앉아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연회장과 식당이 있는 안채를 마다하고 바깥의 소회의실로 장소를 잡은 것은 함께 식사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회의실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는데 그것은 물론 김영남의 경솔함 때문이다. 그는 미국과의 핵 협상에서 단련된 배짱으로 근대의 강회장과 상대했다가 노인의 크로스 편치 한 방에 다운된 꼴이었다. 이윽고 김정일이 입을 열었다.
「그 노인, 성격이 까다롭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구먼.」
몸을 굳히고 있는 사내들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할 수 없는 일 아니갔소?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지.」
하준일이 헛기침을 했다.
「그 사람,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남조선 제일의 부자가 된 사람이오. 코마노프를 아무 때고 만날 수 있는 데다 중국 주석하고도 친합니다. 수단도 보통내기가 아닌데다 자존심이 강하리라는 건 뻔한 이치요. 부총리 동무가 경솔했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김영남이 머리를 숙였다.
「제 과오였습니다. 비판하고 있습니다.」
다시 회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김영남이 이런 식으로 비판받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김일성을 수행하여 동유럽을 방문한 직후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미국과의 핵 협상을 막후에서 지휘하여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수십 년 경력의 외교와 협상의 전문가인 것이다.
김정일이 정적을 깼다.
「근대리아를 유지, 성장시키려면 러시아나 중국에 흩어진 고려인과 조선족만으로는 부족해. 그렇다고 타민족을 유입시킬 수도 없을 것이고, 어차피 우리 공화국 인민을 필요로 할 거요.」
이것은 이미 논의되었던 근대리아 상황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서둘 것 없소. 기다립시다. 우리가 서두는 것처럼 보이면 놈들은 뒤로 뺄 거요, 지금처럼.」
최광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주석 동지 말씀이 옳습니다. 강우진의 나이가 나하고 같은 77세요. 오래 못 삽니다. 그러면 다음 대가 올 것이고 그때는 얼마든지 ‥‥‥」
「그만해 두시요, 무력부장 동지.」
쓴웃음을 지은 김정일이 그의 말을 막았다.
「나이 타령은 왜 자꾸 하시요? 부장 동지는 강우진보다 오래 삽니다.」
분위기가 풀렸다고 생각한 서일이 조금 어깨를 내렸을 때 김정일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해졌다. 어느새 차가워진 시선이다.
「서동무가 근대리아에 가줘야겠소. 가서 오성 문제와 이주민 문제를 해결하시오.」
「예, 주석 동지.」
「32호실 동무 몇 명을 데려가시오.」
「예, 주석 동지.」
김정일이 하준일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남조선 정부의 압력보다 강우진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소. 그자도 우릴 경계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김영남은 잠자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까지 김정일은 한 번도 직접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고 나머지 세 사람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겨우 손을 올려 이마의 땀방울을 훔쳐내었다.
밤이 되자 비버 클립은 이미 러시아인 술꾼으로 가득 차 있어서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손님들의 대부분은 러시아 주민으로 노동자들이거나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아직 영주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거친 목소리의 술꾼들이 내지르는 소리로 클럽 안은 떠들썩했다. 사내들 사이에 끼어 앉은 서너 명의 러시아 여자들은 클럽에서 고용한 창녀들이었는데 문 옆에 앉아 있는 지배인에게 돈만 치르면 2층에 가서 일을 치를 수 있다. 비쇼프가 잔에 남은 보드카를 입 안에 털어놓고 마악 술병을 집어 들었을 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건드렸다. 머리를 돌리자 클럽 여자인 마그리트였다. 그녀가 입에서 독한 술 냄새를 뱉으며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이봐, 안드레이, 그 여자가 왔어.」
비쇼프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눈에 띄는 얼굴은 없다. 마그리트가 커다란 손바닥을 그의 코앞에 펼쳤다.
「내놔, 말해줄 테니.」
주머니에서 100달러짜리 지폐를 꺼낸 그가 그녀의 손 위에 올려놓자 손이 순식간에 치워졌다.
「밖에, 자동차 수리점 옆골목이야.」
밖으로 나온 비쇼프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제 근대리아도 여름이었지만 밤의 기온은 아직도 영하였다. 그러나 거리를 걷는 사람 중에 슈바나 방한복 차림은 볼 수가 없다. 이윽고 그는 클럽에서 30미터쯤 옆쪽의 자동차 수리점으로 다가갔다. 이미 문이 닫힌 수리점 옆골목으로 들어서자 안쪽의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났다. 걸음을 멈춘 비쇼프의 앞에 다가선 것은 동양여자였다. 미인이다. 밖에서 흘러든 빛을 받아 얼굴의 윤곽이 드러났는데 또렷한 눈과 날이 선 콧날이 균형 잡혀 있었다.
「당신이 사하로프가 보낸 사람인가요?」
여자가 유창한 러시아어로 묻자 비쇼프는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소, 사하로프의 심부름을 왔습니다.」
「그는 지금 어디 있지요?」
「일 때문에 아트카에 가 있어요. 나도 내일 그곳으로 갑니다.」
아트카는 근대리아 북방의 마을로 천연가스 유정이 근처에 있다. 여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10일분 가져왔어요. 돈은 준비했지요?」
「물론이오.」
비쇼프는 여자가 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여자가 놀란 듯 뒤로 몸을 젖혔을 때 그는 주먹을 날렸다.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여자가 옆으로 쓰러지면서 벽에 몸을 기대자 그는 다시 사정없이 발길질을 했다. 허리를 채인 여자가 신음소리를 뱉으며 땅바닥에 엎어졌다. 그는 다시 발길로 여자의 배를 찼다.
「이 xx년.」
여자를 패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비쇼프는 흥분하고 있었다. 골목 입구에서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사내 두 명이 서둘러 다가왔다. 그들은 곧장 여자를 양쪽에서 부축해 일으켰다.
「자, 가자.」
이미 골목 입구에는 승용차 한 대가 멎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한이 그레고리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는 새벽 2시가 넘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버릇처럼 조금 찡그린 표정으로 이한이 자리에 앉자 그레고리가 보드카 병을 들었다.
「어젯밤에 사하로프한테 마약을 판 계집년을 잡았어.」
그는 이한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년이 처음에는 중국년 행세를 했는데 애들이 몇 대 주어 패니까 실토를 했어. 고려인이라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북한에서 온 여자야.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년이 누군지 알아? 최태호의 정부야. 그년은 최태호가 가지고 있던 마약을 몰래 빼내서 장사를 했다는데 최태호와 짜고 했을 가능성도 있어.」
술잔을 든 이한이 한 모금에 술을 삼켰다. 북한 조직이 마약 거래를 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거기에다 최태호는 북한 조직의 2인자이다.
「이봐, 한, 어떻게 하지? 보스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지?」
이한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년은 어디 있어?」
「지하실 창고에, 어차피 돌려보낼 수가 없어, 그년은.」
그레고리가 술잔이 귀찮은지 병을 들어 몇 모금을 삼켰다.
「한 달에 세 등급의 마약을 2킬로쯤 가져온다는 거야. 그것을 1회용 분말로 다시 나누는데 대략 5천 개쯤이 만들어진다는군. 소매가로 계산해 보니까 한 달에 25만에서 30만 달러야. 그년은 단골 몇 명한테만 팔았다는데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놈들은 없어. 다행이야. 내 부하가 있었다면 또 죽였을 테니까.」
술병을 내려놓은 그레고리가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술 방울을 털어내었다.
「이놈들을 내버려 두면 안 돼. 장사를 하려면 삼합회처럼 제 구역 안에서 저희들끼리 해 먹을 것이지 이놈들은 근대리아 전역에 퍼뜨리고 있어. 병균 같은 놈들이야.」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최태호는 배옥화의 실종을 확신하게 되었다. 새벽에 집으로 돌아온 그는 배옥화가 집을 비우고 나갔어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가끔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금철의 정부인 유정선과 같이 있을 때가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금철은 김상철과 평양에 갔으므로 두 여자가 수다를 떨기에는 안성맞춤일 것이었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서도 연락이 없자 짜증이 난 그는 이금철의 집에 전화를 했던 것이다. 유정선으로부터 배옥화를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는 긴장이 되었다. 아침도 거른 채 그는 부하들을 시켜 찾게 했지만 배옥화는 종적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
「개 같은 년, 할 수 없다. 내버려 둬라.」
응접실에 모인 심복 부하들을 향해 그가 말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정리하려고 하던 참이었어,」
부하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배옥화는 최태호의 부인 행세를 했던 것이다. 부하들이 밖으로 나가자 최태호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썰렁한 느낌이 들었으므로 그는 배옥화의 옷장을 열어보았다. 아침에도 열어 본 터였으므로 잠시 옷걸이에 걸린 그녀의 옷을 바라보던 그는 다시 문을 닫았다.
유정선과 같이 있지 않았었다는 말을 듣고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자신의 금고였다. 금고 안에는 아직 분배해 주기 전의 마약 뭉치와 현금이 그대로 있었으므로 다음에는 배옥화의 옷장을 확인했던 것이다. 몸을 돌리려던 그는 다시 옷장 문을 열고 서랍까지 열어 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그녀의 옷장 문을 열어 본 적도 없었던 터였다. 서랍 안에는 그녀의 내복이 쌓여져 있었다. 건성으로 내복을 들치던 그는 문득 옷을 들어 제꼈다. 그리고는 내복에 싸인 두툼한 뭉치를 집어내었다. 서둘러 내복을 풀어 제친 그는 숨을 멈추고는 눈을 부릅떴다. 내복 안에는 달러와 엔, 루블의 뭉치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몇만 달러쯤은 되는 거액이다. 그리고 한쪽에 그의 금고에 들어 있어야 할 10여 개의 마약 봉투가 끼워져 있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그는 서둘러 내복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김상철이 이한과 함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5시가 되어있었다. 행정청에 들러 유장석과 이대각을 만나고 온 것이다. 사무실에는 그레고리와 변순태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테이블 위에 놓여진 술병과 안주가 보였다.
「다녀오신 축하주를 마시려고.」
그레고리가 말했다. 그들은 술병을 중심으로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았다. 잔에 술이 채워지고 한 잔씩을 마시고 나자 김상철이 그레고리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걸리적거려서 없앴습니다. 구릉지대에 묻었지요.」
그레고리가 힐끗 이한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공항에서부터 오는 길에 그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냐는 몸짓 같았다.
「오면서 한으로부터 이야기 들었다.」
그레고리는 이제 한국어에 익숙해서 한국인이나 다름없이 말하고 듣는다. 김상철이 말을 이었다.
「당분간 그 일은 묻어둔다. 곧 그놈들하고 협상이 있을 것이고 다른 일도 있어.」
김상철은 그들에게 서울에서 있었던 오성과의 접촉을 털어놓았다.
「이주민 문제도 그렇지만 오성 문제로 그자들과 내가 만나야 될 것 같다.」
그가 말을 마치자 그레고리가 머리를 끄덕였다
「오성과의 관계는 근대가 아직 모릅니까?」
「모른다.」
「알게 된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되겠지. 하지만 이미 오성그룹의 사업장 관리를 맡고 있는 입장이야.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
그러자 변순태가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장님, 오성은 믿을 만한 회사입니까?」
「근대그룹만 한 회사야.」
「그럼 그들도 우리를 이용하는 것입니까?」
김상철이 눈을 껌벅이며 변순태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는 근대와 김상철과의 관계를 지켜봐 온 사람 중의 하나였다. 결론적으로 근대는 필요하면 이용했고 상황이 불리하면 버렸던 것이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이제는 우리도 아니다.」
서로 이용하는 관계가 오래 지속된다는 표현을 쓸 필요는 없다. 이미 그들은 수많은 곡절을 겪어오면서 피부로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이금철도 창광 클럽의 사무실 안에서 최태호와 마주 앉아 있었다.
「곧 근대리아에서 재협상이 열리기로 했어.」
피로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댄 이금철이 말했다.
「그리고 이번 협상 대표는 다른 동지가 될 거야. 김영남 동지는 비판 당했어.」
「근대리아측 대표는 김상철입니까?」
「그렇겠지.」
이금철이 최태호를 바라보았다.
「다음 달부터 아편의 물량을 늘리기로 했다. 32호실 동무들이 직접 근대리아에 와서 관리할 거야.」
「‥‥‥‥」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32호실에 불려가 비판을 받았어. 과업을 소극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근대리아에 부장급 책임자가 온다. 그러니 알아서 주변을 정리하도록 해.」
그러자 숨을 들이마신 최태호가 머리를 들었다.
「위원장 동지, 배옥화가 실종되었습니다. 사흘 전에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금철이 그를 쏘아보았다.
「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 일도 없습니다, 위원장 동지.」
「실종된 이유는 뭐야?」
「밤에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거나 아니면 도망쳤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아편이나 현금관리는 잘해 두었나?」
「그건 염려하실 건 없습니다. 이상 없습니다.」
한동안 최태호를 바라보던 이금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박기동의 여자가 온다. 내가 먼저 검사를 했는데 대단해. 이 일 가지고도 싸게 단가를 정했다고 32호실에서 비판을 받았어.」
길게 숨을 내려쉰 그는 탁자 위의 보드카 병을 쥐었다.
「앞으로 단단히 조심해야 될 거야, 최동무.」
다음 날 오전, 김상철은 콘티넨탈 호텔의 지하 사무실에서 심재택을 맞았다. 이틀 전에 입국한 심재택은 콘티넨탈 호텔에 묵으면서 김상철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는 안기부의 현역 고참 과장으로 근대리아의 보안국장 장동택이 안기부 시절에 상관으로 모셨던 사람이다. 그리고 근대리아 개척 당시부터 김상철과의 인연이 있다.
둘이서 사무실에 마주 앉았을 때 심재택이 대뜸 본론을 꺼내었다.
「우린 김사장이 곧장 평양으로 들어가실 줄은 뜻밖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해는 했습니다.」
김상철이 가볍게 웃었다.
「난 솔직히 북한인 5천이 들어와서 큰일이 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지만 이쪽은 전혀 다른 세상이고, 그리고 일단 겪어봐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강회장과 비슷한 생각이시군.」
심재택이 입맛을 다셨다.
「장동택 국장한테서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재협상이 있습니까?」
「곧 이곳에서 열릴 겁니다.」
「오성그룹 문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성그룹 문제라니요?」
「나진 선봉 지역 문제, 그리고 일본 지사장 실종 문제 말입니다.」
「김사장은 근대리아의 오성 사업장 관리잡니다. 그런 김사장이 평양에 들어가는데 내버려 둘 오성이 아니지요.」
「그래서 추측한 겁니까?」
「사실 아닙니까? 근대 측에는 비밀로 해드릴 테니 말씀해 주세요.」
의자에 등을 기댄 김상철이 그를 바라보았다.
「나에 대한 약점을 잡을 생각입니까? 다시 전처럼 살인 혐의를 씌울 수는 없으니 오성 문제로 약점을 잡을 생각이오?」
심재택이 당황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김사장,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건 아니오.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묻지도 않았습니다.」
「수많은 목숨값을 치르고 내가 깨우친 것이 뭔지 아십니까? 상황에 따라 적도 되고 동지도 된다는 거요. 말이 나왔으니 말씀드리지. 근대에 오성과의 이야기를 비밀로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난 근대는 물론 오성그룹이 투자한 기업의 관리인이오. 또한 대리인 역할도 합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어 뿜은 심재택이 쓴웃음을 지었다.
「신경이 예민해지셨어요. 김사장, 오성의 조실장으로부터 사건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도 협조를 요청해 왔습니다.」
「‥‥‥‥」
「근대리아에 북한과 함께 투자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보복이라고도 하더군요. 그들이 우리에게 상황을 설명해준 것은 당연한 일이오.」
김상철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오성 문제도 이곳에서 협상을 합니다. 곧 북한 측 대표가 올 겁니다. 북한은 근대리아를 공략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할 겁니다. 그들에게 근대리아는 체제나 경제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수단입니다.」
「‥‥‥‥」
「우리의 예측은 틀리지 않아요. 근대리아를 장악하게 되면 그들은 단숨에 모든 것을 해결하게 됩니다. 거기에다 러시아와 중국의 거부반응이 적어요. 조건이 맞아떨어진단 말입니다.」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 순간의 심재택은 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오직 근대리아의 북한화이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근대리아는 어떤 체제나 이념을 지키기 위한 땅이 아니오. 어떤 개인을 위한 영토도 아니고.」
그는 힐끗 심재택을 바라보았다.
「한민족을 위한 땅입니다, 근대리아는.」
대외정보 조사부장 서일이 근대리아 책임자로 부임한 것은 이금철이 평양에서 돌아온 지 닷새째 되는 날이다. 그는 40대의 두 사내를 보좌관으로 대동하고 도착했는데 그들은 32호실 소속이었다. 32호실은 북한의 재정경리부 산하로 되어 있으나 김정일의 직속부서로 해외 영업활동은 물론 각 기관이 운영하고 있는 모든 무역상사를 장악하는 부서였다. 따라서 김정일에게 직보체제를 갖춘 32호실 요원의 위세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여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60대 초반의 서일은 현역 인민군 중장으로 해외공작 업무만 30년 가깝게 해온 인물이다. 장관급인 대외정보 조사부장에서 근대리아의 자치위원장으로 전보되면서 그는 서열 22위의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35위에서 무려 13계단의 승진이다. 그러나 그 뛰어오른 숫자만중이나 어려운 과업에 싸여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금철로부터 브리핑을 받는 자리에서도 내내 굳은 표정을 풀지 않는다. 이금철이 근대리아의 현황과 사업장, 매출과 이익 등 경제부분의 브리핑을 끝내갈 때였다. 서일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멈추게 했다.
「이동무, 현재 근대리아의 우리 조선족 동포는 모두 몇 명이오?」
이금철이 서류를 들췄다.
「남조선 이주민이 28만 명, 중국과 러시아에서 들어온 동포가 79만 명 정도로 합계 107만 명 가깝게 됩니다.」
「남조선 이주민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79만 동포 중에서 우리 공화국 계는 얼마나 되오?」
「약 32만입니다, 부장 동지.」
「그 32만 명은 어떤 방법으로 분류한 거요?」
「예, 근대리아에 들어올 때 충성서약서를 쓴 동무와 가족, 공화국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동무와 가족, 그리고 학습과 모임에 참석하는 동무들의 숫자를 합한 것입니다.」
서일이 손으로 턱을 쓸면서 잠자코 이금철을 바라보았으므로 회의장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정면의 브리핑대에 선 이금철의 시선이 우연히 옆쪽에 앉은 최태호에게 옮겨지자 그들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근대리아의 북한 측 고위 간부들로서 서일과 32호실 소속의 장호성, 박대일, 그리고 이금철과 최태호, 조덕산의 여섯 명이다. 이윽고 서일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충성서약서를 쓴 동무들은 이미 그 종이가 휴지가 되었다는 걸 알 거요. 초창기에 근대 측 사업장에 몇 번 시위를 일으켰다가 지금은 근대노조에 철저히 장악당하고 있소. 아니 장악당했다기보다 자본주의에 흡수되었겠지. 또한 우리 사업장에 근무한다거나 모임과 학습에 참가한다고 해서 우리와 뜻을 같이한다고 장담할 수 없소.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됩니다.」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는 그들을 향해서 서일의 말소리가 이어졌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로 나아가면 곤란해요. 근대리아는 아시아 최대의 자본주의 지역으로 성장하고 있소. 우리도 이 분위기에 동화되어야 합니다.」
「‥‥‥‥」
「이것은 주석님의 교시요. 근대리아에 맞는 체제로 과업을 추진해야 합니다. 시대 상황에 맞지 않는 사상학습과 교양은 인민들의 반감만 살 뿐이오.」
그는 주위의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차가운 시선이어서 32호실의 두 동무도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도 허점이 있습니다. 이제 골 청진과 함흥에서 교육받은 동무들이 오면 양상이 달라질 거요. 그들은 철저히 자본주의 교육을 받고 있소. 근대리아에 동화되려고 말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위에 떠 있는 것만 같았던 비행기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도를 조금씩 낮추는 것이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누워 있던 강회장이 상체를 들었으므로 강미현은 의자의 레버를 움직여 그의 허리에 맞추었다.
「미국과 일본 세가 물러가면 당연히 남북한의 대결이다.」
강회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민족의 업보여, 지난 일로 누구 탓할 것도 없는.」
서울을 떠나 하바로프스크를 통과하여 날아오는 동안에 강회장은 주로 혼자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지치면 누웠고 생각난 듯 다시 일어난다.
「다 알고 있었어. 공산당 놈들이 어떻게 나올 줄도, 우리 박사들이 스물 몇 가지나 되는 가능성과 결과를 만들었다. 책 한 권이 되었다. 난 안 읽었다. 저기 이실장이 읽었지.」
그는 턱으로 통로 건너편에 앉아 있는 이남호를 가리켰다.
「지금 상황이 다섯 번째와 여덟 번째 가능성을 섞은 것 같단다.」
강회장이 배를 한번 들썩이며 웃었다.
「근대리아를 흡수하려고 안달이겠지. 이주민도 철저히 교육시키고 나중에는 별별 수단을 다 할 것이다.」
「‥‥‥‥‥」
「다시 미국과 러시아가 끼어들지도 모른다. 그건 열 몇 번째 가능성이라고 하더구먼.」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곧 근대공항에 착륙한다는 것이다. 강미현이 강회장의 몸에 좌석벨트를 채우자 그가 낮게 말했다.
「얘야, 마지막 가능성과 결과를 볼 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 것 같으냐?」
시선을 든 강미현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요, 할아버지.」
「시작도 안 하면 가능성도 없다.」
「이미 시작을 했으니 최악의 경우도 반타작이여.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강미현이 머리를 젓자 그가 짧게 숨을 내려쉬었다.
「어느 놈이 지배하건 한민족의 대륙은 되는 셈이여.」
비행기의 동체에서 덜컹이는 소리가 나더니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창밖으로 푸른 평원과 지평선의 한쪽을 메우고 있는 근대시가 보였다. 이제 근대리아에 도착한 것이다.
공항에는 근대리아의 통치자를 맞을 준비가 갖춰져 있었다. 비행기의 문이 열리고 강회장의 모습이 나타나자 경비대의 밴드가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트랩 밑에서부터 일직선으로 깔린 붉은색 양탄자 주위에는 행정청장 유장석과 부청장 이대각을 위시한 행정청의 간부들과 근대리아에 연락사무소를 둔 20여 개국의 외교관, 그리고 근대리아의 각계 유지들이 운집해 있다. 여유 있는 자세로 트랩을 내려간 강회장은 유장석의 인사를 받은 다음 곧 환영 나온 인사들의 소개를 받았다
「대단합니다.」
아직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기다리고 서 있던 서일이 옆에 선 김상철에게 말했다. 그의 얼굴은 웃음을 띠우고 있었는데 진심으로 감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대외 직함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연락사무소장이다.
이윽고 강회장이 다가왔다. 유장석이 소개를 하자 가볍게 머리를 끄덕여 보인 강회장이 서일의 손을 잡았다.
「나와줘서 고맙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손을 뗀 강회장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김상철의 앞에 섰다. 유장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김상철은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머리를 끄덕인 강회장이 잠자코 손을 내밀었고 악수를 마친 그는 곧 다음 사람에게로 옮겨갔다. 그다음 순서는 강미현이다. 김상철의 앞에 선 그녀가 손을 내밀며 웃었다. 흰 이를 드러내는 밝은 웃음이었다.
「뵙고 싶었어요.」
목소리가 컸으므로 서일이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고 유장석도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김상철은 그녀의 부드러운 손에 힘이 가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눈동자도 똑바로 그를 향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