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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6-2

4. 대가를 받는다

자카르타를 떠난 DC-10은 발리의 덴파사 공항에 가까워지자 주날개의 보조익을 움직이면서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저 푸른 땅처럼 보였던 바다가 차츰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느껴지면서 잠시 짜릿한 현기증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바다는 끝없이 긴 주름을 만들며 움직이고 있었다. 가끔 주름 끝의 파도가 흰 거품을 일으켰고 이제 소형 어선도 시야에 들어왔다. 비행기가 한없이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으므로 강미현은 위쪽의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바다색보다 연하고 더 밝은 하늘이었다. 서울은 지금 영하의 기온에 구름이 잔뜩 낀 날씨였다. 진눈깨비가 올 듯 말 듯한 상태가 사흘이나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틀 후면 크리스마스였고 일주일 후면 신년이다. 경고등이 켜지면서 착륙을 알리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항의 대합실로 들어선 강미현은 금방 이쪽으로 다가오는 한민수를 알아보았다. 화려한 무늬의 남방셔츠에 흰 바지를 입은 그는 선글라스를 벗으면서 활짝 웃었다. 그의 밝은 웃음을 보자 강미현의 가슴도 활짝 개었다. 그는 싱가포르의 일을 마치고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민수에게 팔짱 낀 강미현은 공항을 나왔다.

발리는 여러 번 와보았지만 남자와 단둘이서는 처음이다.

가까운 쿠타에도 좋은 곳이 꽤 있지만 메템 근처에 리조트 한 채를 빌려 놓았습니다.

렌터카인 무개 지프에 오르면서 한민수가 말했다.

혼자 준비하려니까 서툴러서 잘 안 되더군요. 내가 너무 나태해진 모양입니다.

대동그룹의 차남이자 유력한 후계자인 그로서는 호텔을 직접 예약할 기회도 제대로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솔직한 표현도 마음에 들었으므로 강미현은 밝게 웃었다. 지프는 곧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민수가 뒷좌석에서 밀짚모자를 집더니 건네주었다.

호텔에서 가져왔습니다. 햇볕이 따가울 것 같아서.

강미현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위에 밀짚모자를 눌러 쓰고는 끈을 맸다. 핸드백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자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았다.

강회장의 승인을 받아 대동그룹은 내년 1월부터 근대리아에 진출하게 되었다. 근대시에 3개의 호텔과 카지노를 건설하고 근대시 서쪽의 구릉 지역 800만 평에 거대한 리조트시티를 건설한다는 계획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대동은 처음부터 국내의 자본을 근대리아로 옮기는 식의 투자 방법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한국 정부와 운영위원회의 제재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들은 해외의 현지 법인이 대리인을 내세우는 방법으로 근대리아에 투자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제3국 기업이 되고 한국 정부나 운영위원회의 영향력은 반감될 것이었다.

지프가 바닷가의 리조트에 도착하자 강미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연회색 모래사장 끝에 세워진 외딴 방갈로는 풀장과 야외 바, 식당까지 붙어 있는 그들 둘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베란다로 나와 드넓은 모래사장과 바다를 바라보는 강미현의 옆으로 한민수가 다가와 섰다. 그가 잠자코 팔을 들어 어깨를 안자 강미현은 그에게로 상반신을 기대었다. 바닷바람이 부드럽게 그들을 스치고는 침실의 커튼 자락을 흔들어놓고 사라졌다.

 

신정 연휴가 끝난 다음 날 근대리아의 근대 공항에 서울발 아에로플로트가 착륙하자 두툼한 코트 차림의 탑승객들이 몰려나왔다. 입국 수속과 세관 검사는 세계 어느 공항보다도 빠르고 친절하다는 소문답게 탑승객들은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곧장 대합실로 내려섰다. 대합실 안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옷 가방 한 개만 지닌 간편한 차림의 이유미가 막 대합실에 발을 딛었을 때 사람들을 헤치고 박기동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이사장님.

이유미는 그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전에는 곁눈질을 자주하는 구부정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옷차림은 물론이고 세련된 인상까지 주고 있었다. 그의 부하 직원으로 보이는 사내 한 명이 이유미의 가방을 받아들었고 다른 남자는 앞장을 서서 길을 안내했다. 공항 밖에는 검정색 벤츠가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이유미는 힐끗 박기동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았으나 바람은 거세다. 고속도로 양편의 눈 덮인 평원 위에는 눈가루가 어지럽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우선 일본 여행사의 대리인을 만나보셔야지요. 그 사람이 일본 여행사와의 관계를 설명해 드릴 겁니다.

뒷좌석에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던 박기동이 말했다. 벤츠는 근대리아가 자랑하는 상하행선 넓이가 200미터인 고속도로를 무제한 속도로 마음 놓고 달려가는 중이다.

이곳은 노다지가 나오는 땅이오. 라스베이거스보다 몇 십 배 성장할 겁니다, 두고 보시오.

숙박 시설은 충분할까요?

지금도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시멘트 양생이 안 되기 때문에 미리 여름에 판을 짜서 시멘트 골조를 산더미처럼 만들어놓았지요. 지금은 붙이기만 하면 됩니다.

박기동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건설 시장이 개방되었지만 대부분의 공사는 근대가 맡아하지요. 이 추위에 근대의 공법을 따라갈 회사는 없으니까요. 근대는 자신들의 땅에서도 공사판을 벌려 공사를 따냅니다.

이유미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박기동으로부터 받은 제의는 가뜩이나 매출 감소에다 적자에 허덕이던 그녀에게 복음처럼 들렸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불안하기도 했다. 정부와 근대사이에 알력이 생긴 후부터 근대리아 방문은 통제가 심해졌다. 그래서 경찰청에 여권을 맡기면 사흘쯤 후에야 안기부의 확인을 거쳐 상용인 경우에만 허가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정부는 아직도 근대리아를 적성국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년쯤이면 한국 정부도 근대리아의 여행 규제를 풀 것입니다.

그녀의 불안한 기분을 알아챘는지 박기동이 부드럽게 말했다.

물론 그때는 운영위원회가 완전히 근대리아를 장악하고 있겠지요. 물론 지금도 그러고는 있지만 말입니다.

고속도로가 끝나자 벤츠는 곧장 근대시로 들어섰다. 길가에 고층 건물이 즐비한 근대시는 불과 및 달 사이에 다른 도시처럼 변모되어 있었다. 박기동의 말대로 노다지가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도시였다. 나카무라는 표정 없는 얼굴로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마카오나 라스베이거스, 또는 모나코, 너스 등에서 돈 꽤나 뿌렸던 한국인의 명단을 드리지요. 대략 5천 명 정도인데 우선 그들을 일차 고객으로 확보해야 할 거요.

오리엔트 호텔의 라운지 안이다. 이유미는 객실에 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올라온 참이었다. 나카무라가 말을 이었다.

그들이 근대리아가 도박의 천국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어요. 다만 입국하는 데 불편하고 뒤탈이 불안해서 오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그렇다고 신문광고도 낼 수 없지 않겠어요? 당장에 문제가 될 텐데.

물론 그건 그렇지.

표정 없는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안내서는 보낼 수가 있을 거요. 일본 여행사의 이름으로‥‥그리고 밑에 당신네 여행사가 대리점이라는 문구를 넣고.

「‥‥‥‥」

안내서도 직접 일본에서 보내겠소. 만일 문제가 된다면 당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든지 약을 먹이든지 그건 알아서 하셔야지,

「‥‥‥‥」

한국 관광객은 일본으로 와서 곧장 근대리아로 갑니다. 비자도 필요 없고 여권에 도장도 찍히지 않아요. 근대리아에서 실컷 놀고 일본을 거쳐서 돌아가면 되는 거요.

물론 일본 측의 호텔과 카지노 등 시설을 이용해야 되겠지요?

당연하지요. 우리 시설의 수준은 최고요.

그들이 이곳에서 사용한 총경비의 5퍼센트를 드리지요. 아마 대단한 금액이 될 거요.

그는 잠자코 앉아 있는 박기동을 힐끗 바라보았다.

여기 계신 박사장이 당신 대신 계산을 할 테니까 믿을 만하지 않겠소?

관광객이 근대리아의 카지노에서 만 달러를 잃었다면 5백 달러가 자기 몫으로 돌아온다. 룸서비스까지 포함한 호텔 경비가 3천 달러였다면 150달러가 다시 이쪽 몫이다. 이유미가 머리를 저었다.

위험부담을 안는 마당에 5퍼센트는 너무 적어요. 10퍼센트를 주세요.

나카무라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7퍼센트, 이것이 한계요.

좋아요.

시원스럽게 대답한 이유미를 향해 나카무라가 일본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한국이 근대리아를 개방하게 되면 당신은 이런 수익을 올리지 못할 거요. 규제가 심해지기 전에 당신이 근대리아에 들어와 박사장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쨌든 당신은 남보다 한 발쯤 앞서가는 사업가인 셈입니다.

 

경비본부 보안과장 오세영은 전임 장동택과는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그도 안기부에서 파견된 사내였지만 부드러운 인상에 성격도 온화해서 부하나 윗사람 모두에게서 호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보안과장의 업무는 표현 그대로 근대리아의 보안에 관한 모든 업무를 장악하는 것이다. 근대리아의 모든 정보는 일단 그에게로 모아졌고 보안에 관한 정책의 실무 집행 책임자는 그였다.

오세영이 근대시 상가에 있는 나타샤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730분이었다. 현관에서 기다리던 사내의 안내를 받은 그는 곧장 안쪽의 밀실로 다가갔다. 나타샤 레스토랑은 이나카와회가 투자한 사업장의 하나로 500석 규모의 대형 음식점 겸 유흥업체이다. 그가 밀실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사내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오과장님.

주인 격인 시바다가 그를 맞았고 그의 옆쪽에 선 우재환도 아는 체를 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술과 안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자리로 오늘은 시바다가 초대한 것이다. 날씨와 사업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분위기는 밝았다. 이제는 서로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지난번에 타운에서 즐긴 여자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

술을 한 잔씩 마시고 났을 때 오세영이 입을 열었다. 시바다를 의식해서 일본어를 썼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김상철이 한 달 가깝게 보이지 않아요. 장인규의 장례식 이후로 한 번도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약간은 경직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송길수나 하바로프스크의 그레고리는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자는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던 갈보집에도 발을 뚝 끊었단 말입니다.

집안에만 있단 말입니까? 아니면 잠적을 했다는 거요?

시바다가 묻자 그는 머리를 저었다.

아직은 알 수가 없소. 하지만 마음이 놓이지가 않아서‥‥‥」

불칸 역의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경비대는 아직 단서 하나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오세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래에 들어와 북한과 삼합회, 마피아의 관계가 밀착되어 가고 있어요. 그자들은 당신들에 대한 공동 대응 전선을 만들어가는 것 같소.

글쎄, 그거야 어쩔 수 없지요. 우리도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니까.

술잔을 든 우재환이 말했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부딪치면 다시 조각조각 찢어질 거요. 고금의 역사를 봐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만일 김상철이 그들 세 조직의 비호를 받을 가능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불쪽 오세영이 묻자 우재환과 시바다는 제각기 긴장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시바다였다.

그는 얼굴에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장인규를 습격한 것이 그들 세 조직의 짓이 아니라는 확신이 섰을 때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마피아의 짓은 확실히 아니라고 해도 북한과 삼합회에 대해서도 그럴까요?

오세영이 잠자코 있었으므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세 조직 모두 막대한 자금을 근대시의 유흥업체 건설에 투자해 놓고 있는 상황이오. 그들이 김상철이라는 불덩어리를 안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그럴 모험을 할 만한 가치가 없단 말이오.

시바다 씨, 당신은 꽤 현실적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오과장님, 내가 일본에서 정치인들과 오랫동안 교제를 해온 덕분이지요. 어차피 이곳도 다섯 나라의 대리전 형식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그들이 김상철을 받아들일 명분도, 의리도 없을뿐더러 현실적으로도 가능성이 없는 일입니다.

술잔을 든 오세영이 술을 약간 삼키고는 우재환을 바라보았다.

우사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시바다 씨와 동감이오. 이건 너무 비약적인 것 같지만 김상철과 손을 잡은 조직이 하나쯤 있었으면 해요. 오과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쯤 해서 어느 조직 하나의 세력을 반감시킬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요? 김상철과 싸잡아서 말입니다.

오세영이 잠자코 술잔을 들었다. 그들의 배후 세력은 각각 CIA와 일본 정보국이었다. 한국 정부는 근대리아 운영에 대하여 그들과 협력관계에 있었고 정보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 우리 술이나 듭시다.

시바다의 제의에 셋은 술잔을 들었다. , , 3국의 건배였다.

 

근대타운은 인구 10만의 도시가 되어 있었는데 밀입국자까지 포함한다면 실제 인구는 15만 명이 넘었다. 조선족과 중국계, 러시아계로 대별한다면 그 비율은 거의 비슷해서 각각 3분의 1 비율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동족으로 형성된 주거지역에 모여 살았고 그것이 차이나타운과 러시아타운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족과 고려인은 아무도 자신들의 주거지역을 코리아타운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타운 전체는 물론 근대리아가 그들 땅이라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타운에는 학교와 병원 등 각종 공공기관이 고루 갖춰졌고 위성중계로 러시아와 일본, 한국의 TV까지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근대시에 고급 유흥가가 생겨났지만 타운의 유흥지역은 지금도 번성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인구와 소비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타운 서쪽의 엘로즈 클럽이다. 전에는 나파스 클럽이었으나 주인이 바뀌고 나서 이름도 그렇게 바뀌었다. 12시가 넘었으므로 출입구로 한두 명씩 취객들이 빠져나오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클럽 안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보통 새벽 4시까지 영업을 하는 것이다. 취객들은 클럽을 나오자마자 영하 40도에 정신이 번쩍 든 듯이 재빠르게 옆쪽의 버스정류장으로 다가가 버스를 탄다.

박기동의 부하인 양동구가 클럽을 나온 것은 1230분이었다. 그는 카자흐스탄 태생의 고려인으로 타운 호텔에서 객실 당번을 하던 사내였다. 그러나 지금은 박기동의 경호원이 되어 있었는데 호텔의 장기 투숙객이었던 그에게 잘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모처럼 예전의 호텔 동료들과 만나 호기를 부리며 마신 참이라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 있었다. 그는 동료 두 명과 함께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모두가 단단한 방한복 차림이다. 버스는 새벽 2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정류장에 도착하는데 정류장에는 버스 도착시간이 5분 남았다는 전광표시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봐, , 소변 좀 보고.

동료 하나가 정류장 앞쪽의 화장실로 다가가자 양동구도 뒤를 따랐다. 큰 체격에 두툼한 파카를 걸친 그의 상체는 드럼통만 했다. 그들은 난방장치가 되어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모두 고려인인 그들에게 근대는 꿈의 땅이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이제 막 꿈을 잡게 된 양동구였는데 그는 동료들보다 세 배의 월급을 받고 있는 데다가 가끔씩 금일봉을 받는다는 것이다. 양동구는 돈을 모으면 엘로즈 클럽 같은 사업장을 하나 짓겠다고 했다. 흑인까지 데려와 나체 쇼를 별이겠다는 그의 말이 동료들에게는 빈말로 들리지 않았다.

이거, 버스 오겠는데. 이 친구 길구먼.

화장실에서 먼저 나온 동료가 전광판과 화장실 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1분 전이었다.

내가 불러오지.

동료 하나가 서두르며 화장실로 다가갔다.

이봐, 버스 오겠어.

대답이 없었으므로 그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양동구는 소변기 앞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는데 뒷머리가 깨진 모양으로 머리 뒤쪽에 질펀하게 피가 고여 있었다.

 

테이블로 안인석이 다가오자 이유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인석의 얼굴에는 희미하게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

또 만나게 되는군.

앞자리에 털썩 앉으며 그가 던지듯이 말했다. 그가 근대리아의 관광과장이 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미였다.

오랜만이야. 그리고 반가워, 다시 만나게 되어서.

이유미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축하도 해야겠네. 영전된 것.

네가 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행정청 근처의 커피숍 안이었다. 유리창 밖으로 눈발이 휘날리는 넓은 도로 위를 차량들이 질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 점심시간 전이어서 커피숍 안에는 손님들이 드물었다. 종업원에게 커피를 시킨 이유미가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난 여기 와서 들었는데‥‥ 인석 씨는 내가 온다는 것을 알고 어떤 생각이 들었어?

을 것이 온다는 생각이었지.

정색한 얼굴로 안인석이 이유미의 시선을 받았다.

내가 관광과장이 된 것은 너와의 이런 우연을 위해서가 아니야. 내가 적임자로 선택되었기 때문이야.

글쎄, 누가 뭐래?

이유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렇게 말하려고 준비해 두었어?

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커피잔을 든 안인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유미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자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위험한 여자였다.

안인석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난 별로 문제가 없지만 넌 조심해야 될 거야. 한국에서는 아직도 근대리아 입국을 제한하고 있으니까.

「‥‥‥‥」

네 기분을 깨려고 하는 소리가 아냐. 넌 상당히 위험한 일에 끼어들었다는 충고를 해주려는 거다.

충고, 고마워.

내가 너하고 직접 연결될 일은 없어. 난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한국 관광객을 받아들이면 되니까.

알고 있어.

이유미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차분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박미정 씨 소식 들었어?

궁금해 할 것 같아서 묻는 거야,

궁금하지 않아.

서울에서 회사에 다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고 들었어.

그런가? 잘됐네.

김상철은 어떻게 되었어?

너도 들었을 텐데. 그 박기동 씨한테서. 그 사람은 나보다 잘 알 거야.

이제는 완전히 이곳을 떠났다며?

그러자 안인석이 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했다.

난 사무실로 들어가 봐야 돼. 일하다가 나와서.

내가 아직도 미워?

쓸데없는 소리.

내가 사랑했던 남자는 인석 씨뿐이었어.

「‥‥‥‥」

인석 씨도 알고 있을 거야.

난 정말 들어가 봐야 돼.

그럼 저녁에 다시 만나.

저녁에는 직원들과 약속이 있어,

자리에서 일어선 안인석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야, 약속이.

그날 저녁 나카무라가 찾아왔을 때 이유미는 외출복 차림이었다.

약속이 있습니까?

방 안에 들어선 그가 묻자 이유미는 머리를 저었다

아녜요. 식사나 하러 가려고.

잘되었습니다. 우리 보스이신 시바다 선생께서 저녁 초대를 하셨습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으므로 이유미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시바다 선생이라니요?

근대리아의 총책임자이신 분입니다. 이사장도 그분을 알아두시는 것이 좋을 거요.

나카무라는 선 채로 계속 말을 이었다.

위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준비되실 때까지 제가 밖에서 기다리지요.

그와 함께 이유미가 20충에 있는 시바다의 방 앞에 섰을 때는 30분쯤 후였다. 스위트룸의 넓고 호화로운 응접실에 앉아 있던 시바다가 들어서는 그녀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람과 찬탄으로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이사장.

시바다는 정장 차림이었다. 올백 머리에 웃음을 머금은 그의 태도는 부드러웠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밝은 표정으로 그녀가 말하자 시바다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내가 영광이오. 이런 미인을 모시게 되다니.

나카무라는 어느 틈엔지 사라졌고 그들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종업원이 다가와 그들 앞에 잔을 놓고 물러갔다.

호텔 식당에 캄차카 타바라를 주문했는데 괜찮겠지요?

게다리 요리는 먹어본 적이 있는 데다가 사양할 상황도 아니어서 이유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근대리아의 일본 사업장과 관광 사업에 야쿠자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야쿠자의 최고 실력자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시바다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어갔다. 그는 한국통이기도 해서 한국의 경제와 사회 상황에도 말이 막히지 않았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야기해요. 근대리아나 한국 내의 일이라도 내가 도와주겠소.

포도주를 한 모금 삼키고 난 그가 말을 이었다.

한국이 근대리아 관광을 개방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숙박난이 벌어질 거요. 그땐 이곳에 기반을 가진 이사장이 절대로 유리한 사업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사장이 보낸 관광객은 방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가 테이블 위로 상반신을 굽히고는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이사장, 행정청의 안인석 과장과도 친분이 있지요?

, 대학 다닐 때 친구였어요.

여러 가지로 조건이 좋군요.

요리 접시를 밀어놓으면서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우리가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압니까?

, 관광과 도박, 유흥사업을‥‥ 맞나요?

포도주를 서너 잔 마신 이유미가 조금 달아오른 얼굴로 되묻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대충은 맞소. 그리고 우리가 야쿠자의 이나카와회라는 것도 알지요?

, 그것도 대충.

우리는 올해 안에 다섯 개의 호텔과 네 개의 유흥사업장을 더 지을 거요, 이곳만큼 안전하고 확실하게 사업성을 보이는 지역이 없습니다.

, 한잔 하실까?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시바다가 잔을 들었다.

그리고 미인과의 이 즐거운 시간을 위해서.

이유미는 그의 시선이 뜨거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눈치챘다. 술잔을 든 이유미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시선을 받자 예상했던 대로 시바다의 눈빛은 더욱 뜨거워졌다. 시바다도 능숙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유미의 몸짓도 자연스러웠다. 테이블에서 일어난 그들은 소파에 앉아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손을 잡거나 어깨를 안고 부드럽게 입술을 대었다. 시바다는 서두르지 않았다. 잘 익은 과일을 아끼며 맛보는 것처럼 그는 이유미의 옷을 조심스럽게 벗겨내더니 안아 들고 침실로 들어섰다. 침대 위에 누여진 이유미 앞에 서서 거리낌 없는 태도로 나체가 된 그의 상반신은 온통 문신으로 덮여 있었다.

정말 황홀한 여자야, 당신은.

이미 거대해진 남성을 보이고 선 채 그는 이유미의 알몸을 내려다보았다.

난 당신 같은 여자는 본 적이 없어,

침대에 반듯이 누운 이유미는 그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몸을 가리려는 아무런 몸짓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거래라는 것을 서로가 잘 알았으므로 가식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저 주고받는다는 무미한 감정으로 상대할 만큼 그들은 단순하지도 않다. 이유미는 시바다의 뜨거운 남성이 진입해 오자 금방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녀는 자신의 본능이 강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 구태여 필요 없는 몸짓도 하지 않았다. 시바다는 갖가지로 체위를 바꾸면서 그녀를 이끌었는데 그도 절제력이 대단한 사내였다. 이유미를 몇 번이나 절정으로 끌어갔다가도 자신의 절정의 순간에는 숨을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할 정도였다. 이유미는 땀에 젖은 온몸을 환희로 떨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며 매달렸다.

근대리아는 일본과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어, 한국 정부는 우리의 대리인이나 마찬가지일 뿐이오.

행위를 마친 다음 기진해서 엎드려 있는 이유미를 시바다가 끌어당겨 안았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이유미가 눈을 떴다

그럼 근대그룹은 뭐가 되지요?

근대그룹 이전에 그들은 한국 국민이지, 땅을 빌리고 개척을 했다고 해서 한국 정부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어요.

시바다가 이유미의 젖가슴을 손바닥으로 움켜 쥐었다

한국 정부만이라면 강회장이 한판 승부를 벌릴 만도 했지. 하지만 배후의 일본과 미국까지 당해낼 수는 없소.

「‥‥‥‥」

공산화는 물론이고 독자 세력으로 번성한다는 것도 큰 위협이 될 테니까.

이유미의 젖꼭지에 입술을 가져다 댄 그가 얼굴을 들고 웃었다.

이만하면 내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아시겠지? 유미.

머리를 끄덕인 이유미가 손을 뻗어 그의 팽창 되어가는 남성을 쥐었다.

나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만족해요, 시바다.

 

이곳은 엘로즈 클럽 뒤채의 사무실 안이다. 소파에 앉아 있던 이종남이 사무실로 들어서는 박기동을 맞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경비대는 다녀왔소?

청와대 경호원 출신인 그는 이제 엘로즈 클럽의 사장이다. 박기동은 슈바를 옷걸이에 걸고는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경비대에서는 술 먹고 자빠졌다고 합디다. 시멘트 바닥에 뒷머리가 깨졌다고.

그 친구, 재수 더럽군. 하필이면 화장실에서.

화장실에서 자빠지면 죽는다고 경비대 어떤 놈이 그러더군요.

그는 죽은 양동구의 고용주였으므로 오후에 경비대에 다녀왔던 것이다. 양동구의 사인은 과음한 상태에서 미끄러져 뒷머리가 깨진 것으로 처리가 되었다.

어쨌든 안 되었수다. 박사장이 아끼는 부하였는데.

그 자식, 분수 모르고 술 퍼먹고 다니다가 잘되었지, . 그런 놈이야 타운에 얼마든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은 찌푸려져 있었다. 이종남이 탁자 위에 놓인 보드카 병을 들어 잔을 건네자 그는 주저 없이 받는다.

사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근대시에. 오늘은 운영위원장님과 저녁 약속이 있으셔서.

단숨에 술을 삼킨 박기동이 그를 바라보았다.

미국 기업이 들어온다면서요?

이종남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왜 이러십니까? 다른 조직들은 모두 눈 가리고 귀 막은 줄 아십니까? 그들의 정보는 국가 차원의 정보란 말입니다.

글쎄, 나는 모르는 일인데.

술잔을 든 이종남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박사장한테 정보를 흘린 게 북한 아니면 일본이겠군. 그래서 그것을 확인해 오라고 합디까?

확인은 무슨‥‥‥‥」

이번에는 박기동이 얼굴을 찌푸렸다.

다 알고 있습니다. 미국의 자본이 투입되는데 관리는 우사장님이 맡으실 거라고. 운영위원회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말이오. 이건 애초부터 예상되었던 일 아닙니까?

이종남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으므로 박기동이 대신 말을 이었다.

그동안의 관계를 보아서라도 이 박기동이한테 일거리나 조금 떼어달라고 말씀드리려는 거요. 내가 미국 자본이건 멕시코 자금이건 상관할 사람입니까?

일본 여행사의 일이 있을 텐데. 한국 관광객을 우회 입국시키는 일 말이오. 더구나 한국 여행사의 여사장까지 지금 데려다 놓은 상황 아니오?

그 일은 서류나 챙기는 일밖에 안 됩니다.

이종남이 반쯤 시인했다고 믿은 박기동이 바짝 다가앉았다. 조금 전의 늘어진 태도와는 전혀 딴판인 모습이다.

다른 건설회사가 모두 자빠졌으니 미국 기업의 공사는 근대가 하겠지만 장식이나 비품 구입은 나한테 맡겨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

구입비의 총액으로 계산해서 5퍼센트 드리지요.

그게 무슨 소리요?

눈을 치켜뜬 이종남이 목소리를 높였다.

여보, 당신 날 매수하려는 거요?

어차피 우리 돈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불량 비품을 들여오는 건 아닙니다. 솔직히 이럴 때 한몫을 잡아야지요.

나아, ,

이사장님이 밀어만 주시면 됩니다. 미국 기업은 물주 노릇만 할 테니까요.

불쾌한 표정으로 이종남이 술잔을 쥐었는데 애써 참는 것처럼 보였다.

 

톰프슨 그룹의 자금은 오성그룹에서 나오는 거야. 결국 오성 그룹이 미국 기업의 실체다.

전창남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우재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오성이 안전한 배경을 갖게 되었군요. 오성그룹답습니다.

올해에 3억 달러를 투자하여 호텔과 리조트를 건설할 예정이다. 행정위원회에서도 투자는 적극 환영하는 입장이니까 문제는 없다. 적합한 장소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고.

3억 달러면 대단하군요,

근대 직영의 사업장보다 뒤떨어지지 않아,

근대시 외곽의 해산물 요리점에서 저녁을 마친 그들은 후식을 먹는 중이었다. 전창남이 버릇처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밀실 안이어서 넓은 방 안에는 그들 두 사람뿐이다

물론 고용인들은 미국의 톰프슨 그룹에서 오겠지만 핵심 간부 몇 명은 오성그룹 직원이겠지. 하지만 자네의 직책은 톰프슨 그룹의 근대리아 대리인이야. 경영은 그자들이 하겠지만 전체 관리는 자네 책임이란 말이다.

말을 그친 전창남이 식후의 포만감을 느낀 듯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았다.

이나카와회가 자금을 집중 투입하고 있지만 기업 경영이나 자금 면으로 오성을 당해내지 못해. 결국 일본 세는 미국에 밀리게 된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계의 삼합회나 러시아의 마피아는 기세를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우재환이 머리를 들었다. 재미동포로만 알려진 그는 현직 CIA 요원이었다. 미합중국 국민과 대통령을 위해 충성을 바치기로 이미 10여 년 전에 선서를 한 고참 요원이다.

시바다가 한국 관광객 유치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한국의 여행사 사장을 불러왔는데 계약을 끝냈다고 합니다.

쓴웃음을 지은 전창남이 머리를 끄덕였다.

올해에 열심히 선전해 놓으라고 해. 내년에 개방이 될 때까지 말이야,

올해 수입만 해도 막대할 텐데요.

어차피 올해는 일본을 거쳐야 근대리아에 올 수 있다. 그리고 일본 측과는 당분간 협조체제로 나가라는 지시야.

그래서 관광과장을 일본 측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전창남이 의자에서 등을 떼고는 고쳐 앉았다.

강회장, 그 영감탱이와 김상철의 동향이 걸리는군. 두 놈 모두 어느 구멍인지 틀어박혀서 독같이 한 달이 넘도록 자취를 보이지 않으니 말야,

강회장은 가끔씩 유장석에게 연락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암호를 써. 아주 유치한 방법이라 컴퓨터가 손을 든다니까.

이야기를 마친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의 눈을 의식한 듯 전창남이 먼저 나갔고 5분쯤 후에 우재환은 경호원과 함께 뒷문으로 나왔다. 검정색 벤츠가 시동을 켠 채로 앞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음식점에서 흘러나온 빛이 주위를 비치고 있을 뿐 뒤쪽 길은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고 인적도 없다. 앞장선 경호원이 승용차의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

경호원과 함께 차에 오르려던 우재환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고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물러섰다. 경호원 한 명이 뒷좌석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머리를 의자에 기댄 모습으로 편하게 앉아 있었는데 관자놀이에 총알 자국이 선명했다. 시체였다. 경호원과 우재환은 일제히 권총을 뽑아 들고는 승용차를 방패물로 삼아 몸을 숙였다. 그때 우재환은 운전석에 앉아 있는 부하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재환은 근대리아에 발을 디딘 후 처음으로 온몸을 훑고 지나는 서늘한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회의 끝내고 곧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나카무라이다. 새벽 2. 투돌레프 클럽의 2층 사무실에서 나카무라는 지금 오리엔트 호텔의 시바다와 통화 중이었다. 그의 주위에 둘러선 사이토, 이와구치 등 부하들은 긴장한 채 숨을 죽이고 있다.

, 보스, 이쪽은 이상이 없습니다. 세 시간쯤 전부터 경비대의 순찰이 강화된 것 이외에는 타운은 정상입니다.

알았다. 그럼 호텔에서 보자,

시바다가 전화를 끊자 수화기를 내려놓은 나카무라가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우재환이 부하들에게 비상을 걸었으니 조심해라, 그놈들, 겁나는 김에 아무에게나 총질을 해댈지도 모르니까.

부하들 사이에 낮은 웃음소리가 났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쪽 사업장에는 가까이 안 가는 것이 낫겠군요, 당분간은.

경비대나 우재환은 김상철의 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웃어넘길 일이 아니야.

나카무라가 꾸짖듯 말하자 사내들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틀 전에 박기동의 부하가 화장실에서 죽은 것도 마음에 걸린다. 사고사로 처리되있지만 타살일 가능성도 있어.

부하의 대부분이 요근래 반년 사이에 근대리아에 들어온데다가 풍파 없는 세월을 보낸 때문인지 조금씩 풀린 분위기였다. 그러나 모두가 일본의 암흑세계에서 처절한 사투를 숱하게 겪어온 사무라이급 사내들이다.

보스, 그렇다면 김상철이 우재환을 상대한다는 것입니까?

유도선수 출신인 이와구치가 묻자 나카무라는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그건 모른다. 아마 그쪽에 대한 원한이 제일 깊을지도 모르지, 사업장을 거의 빼앗겼으니까.

보스, 북한 측에서 습격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한 것은 사이토였다. 20대 후반으로 영화배우 못지않은 미남이다.

오카다가 북한 측 사업장 주변에서 듣고 온 소문입니다.

어쨌든 지금부터 두 명 이상씩 조를 지어 행동한다. 개별행동은 금지다.

나카무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이토, 각 간부들에게 조를 만들라고 일러라. 개별행동을 하는 자는 처벌한다.

, 보스.

이와구치, 너는 나하고 오리엔트로 간다. 차를 준비하도록.

, 보스.

사내들이 뿔뿔이 방을 나가자 나카무라는 소파의 끝 쪽에 잠자코 앉아 있는 가와베를 바라보았다.

가와베 씨, 그것이 만일 김상철의 짓이라면 왜 부하들만 건드렸을까요? 그곳 위치나 조건으로 보면 우재환을 처치하기는 간단했습니다.

가와베가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그 생각을 했어. 그래서 우선 거꾸로 생각을 해보았는데, 우재환을 쏘아죽인 경우로 말이야.

그는 앞에 앉은 나카무라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게 별 의미가 없더란 말이야. 우재환이 죽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이 조금도 없을 테니까. 보다 강하고 질긴 다른 놈이 올 것이고, 경비대가 더욱 강화될 테니까 말이야.

가와베는 이나카와회의 건설 책임자인 동시에 시바다의 고문이다. 사려 깊은 사내여서 나카무라는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나카무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그렇군요, 꼭두각시일 뿐이니까.

어쨌든 보스한테 가자. 아마 지금쯤 여자는 돌려보냈을 테니까.

가와베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아래쪽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났다. 액자가 떨어지고 바닥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다. 곧 사내의 외치는 소리와 여자들의 비명이 들려왔는데 클럽의 옆쪽이다. 무의식중에 허리에 찬 권총에 손을 대었던 나카무라가 가와베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가와베가 찌푸린 얼굴로 짧게 입맛을 다셨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가?

곧 복도를 달려오는 어지러운 발소리가 났고 문이 열리면서 부하들이 쏟아져 들어 왔다,

보스.

얼굴이 하얗게 된 사이토가 소리치듯 말했다.

이와구치가 당했습니다.

차에 타고 있다가 어느 놈이 수류탄을 던져서, 운전사와 함께 ……」

나카무라와 가와베가 다시 얼굴을 마주보았으나 양쪽 모두 입은 열지 않았다.

 

커다란 플라스틱 그릇에 밥과 찬을 섞어들고 젓가락으로만 떠먹으려니 밥알을 홀리기도 했지만 입 주위에도 들러붙었다. 김상철은 이한과 마주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침 8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다. 창밖의 흐린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져 내릴 것같이 보였다. 집 안은 조음했다. 차이나타운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단층 벽돌집 안이다. 집주인은 차이나타운의 상가에서 구두가게를 하는 동씨라는 노인으로 조금 전에 가게로 나갔으니 집 안에는 그의 부인과 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한이 그릇을 내려놓고 입가에 붙은 밥알을 떼었다. 거칠게 수염이 자란 얼굴에 중국식 겹옷 차림이었다.

아마 오늘부터 몇 걸음마다 한 번씩 검문을 하겠지요. 러시아 타운은 가택수색을 할지도 모릅니다.

이한이 말을 이었다.

요즘은 사복 경비원과 정보원들이 많아서 예전하고 다릅니다.

밥그릇을 내려놓은 김상철이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도 이한과 비슷한 모습이어서 흡사 중국에서 넘어온 지 얼마 안 되는 노동자 같다.

오늘 밤은 경비소를 친다.

김상철이 말하자 이한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근대시의 상가 경비소를 치는 것이 적당하겠다. 로켓포 두어 발이면 되겠지.

꽤 죽을 겁니다.

그런 놈들이야 얼마든지 충원될 데니까.

그릇들을 대충 주워담은 이한이 방을 나가자 김상철은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근대리아는 이미 거대한 조직으로 짜여져 있었고 각 조직들도 기반을 단단히 굳힌 상태여서 비집고 들어설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이곳에 온 목적이 있다면 오직 하나, 이 땅에서 죽는 것뿐이다. 우선 철저하게 짓밟힌 장인규와 그의 식구들, 장국진의 아내와 딸의 빚을 갚아야 한다. 그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제는 근대리아가 부담이 되지도 않는다. 개척단의 일원으로 시작하여 인생 전부를 걸었던 근대리아는 이미 주인이 바뀌어 있는 것이다.

문이 열리더니 동씨의 딸이 들어섰다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갸름한 얼굴에 몸매도 가는 여자였다. 그녀는 방바닥에 차주전자와 찻잔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고는 눈을 내리깐 채 소리 없이 방을 나갔다.

동씨는 삼합회의 흥기천이 소개해준 사람이었다. 근대리아에 잠입한 김상철이 은신처를 부탁하자 홍기천이 놀라면서도 선뜻 마련해 준 곳이 동씨의 집이었다. 김상철은 북한과 마피아 쪽에는 연락도 하지 많았으므로 그의 은신처를 알고 있는 것은 삼합회의 홍기천과 양필성 두 사람뿐이다.

점심 무렵이 되어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을 때 양필성이 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는 동씨 부인과 시끄럽게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곧 김상철의 방으로 들어섰다.

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그는 인제나 깍듯하게 예의를 갖춘다.

없습니다, 폐를 오래 끼치고 있어서 ‥‥‥」

아니, 무슨 말씀을. 대형께서도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책상다리를 하고 마주앉았다.

시내에 경비대가 쫙 깔려 있습니다. 러시아타운은 경비대로 봉쇄해 놓고 지금 일일이 가택수색을 하고 있지요.

양필성이 부드럽게 말했다.

저희한테 오신 것은 잘 생각하신 겁니다. 마파척과의 사건 때문에 저희와 김대형 사이는 아주 고약한 것으로들 믿고 있지요.

저 때문에 고생들이 많겠군요,

무슨 말씀을, 마피아나 북한 측도 김대형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어제 폭탄 사건이 나자 북한 측 사람들은 건배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불칸 역 사건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까?

그것은 아직 ‥‥」

입맛을 다신 양필성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살아남은 여자가 보았다는 10여 명의 동양 남자라는 말만 가지고는 도무지 ‥‥‥」

경비대는 이미 사건을 포기한 지 오래였고 누구 하나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할 연고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12시였으나 근대시의 상가도 타운과 마찬가지로 불야성을 이룬 채 흥청거리고 있었다. 호텔과 대형 클럽의 네온사인이 휘황하게 반짝이는 거리에는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 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저녁 무렵부터 눈이 그친 대신 바람이 강해졌지만 추위와 눈, 바람에는 이골이 난 근대리아인들이다. 오히려 기후가 나쁠수록 술 매상량이 오르고 색시방을 찾는 빈도가 높은 것이다.

붉은색 번호판을 단 볼가 승용차가 상가로 진입하는 대로에 들어선 때는 1210분이었다. 붉은색 번호판은 행정청의 관용차라는 표시였고 앞쪽 번호는 소속국을 나타내는데 볼가의 앞번호는 13이다. 경비본부의 보안과 전용차인 것이다. 한 방향 10차선의 대로에는 아직도 질주하는 차량들이 많았다. 볼가는 인도 쪽으로 다가가면서 속력을 줄이더니 곧 차도에 주차되어 있는 다른 승용차 뒤쪽에 멈춰 섰다.

사람이 꽤 있는데요, 형님.

볼가의 운전석에 앉은 이한이 조심스럽게 말했으나 김상철은 잠자코 RPG-7D의 후부를 끼웠다. RPG-7D는 러시아 공수부대용으로 개발되어서 후부를 분리하면 가방에 넣고 다닐 수도 있는 대전차척탄발사관이다. 발사관을 조작하고 난 그는 PG7 HEAT탄의 탄두와 부스터를 꺼내 나사로 결합을 했다. 그들이 정지해 있는 곳에서 대각선으로 50미터쯤 앞쪽에 불을 환하게 밝힌 2층 건물이 경비소인 것이다. 유리창 안으로 경비대원 대여섯 명의 모습이 보였고 순찰차에서 내린 두 명이 경비소로 들어서고 있었다. 김상철은 다른 한 개의 탄두와 부스터도 결합시키고 나서 이한에게 건네주었다.

가자.

그들은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바깥으로 나와 볼가의 뒤쪽에 웅크리고 섰다. 그들의 뒤쪽으로 차량들이 스치고 지나갔고 인도에도 바쁜 걸음을 옮기는 서너 명의 행인이 있다. 김상철은 탄두를 발사통에 장진하고는 곧 탄두 끝의 안전 캡을 벗기고 안전핀을 빼었다. 이한이 탄두 한 개를 든 채 초조하게 그와 주위를 살피면서 웅크리고 있다.

김상철은 볼가의 트렁크에 상반신을 엎드리고는 어깨에 발사통을 댔다. 오른손으로 피스틀 그립을 잡은 그는 경비소 아래층의 불빛이 환한 유리창을 겨누었다. 조준구 안에 유리창 안의 경비대원들이 모두 들어왔다. 그는 숨을 멈추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날개가 펴진 탄두가 날아갔다.

탄두가 날아가 박힌 곳은 불이 꺼진 2층이다. 밤하늘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경비소의 2충은 불덩이를 이루며 산산조각이 났다.

.

김상철이 소리치자 이한이 탄두를 넘겨주었다. 다시 장전을 하고 안전 캡과 핀을 빼 던진 김상철은 앞쪽의 순찰차를 겨누어 쏘았다. HEAT탄에 중심 부분이 명중된 순찰차는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떨어지면서 불길에 휩싸였다. 이한이 운전석에 뛰어올랐고 김상철은 발사관을 든 채 뒷좌석에 들어섰다. 볼가는 곧 요란한 마찰음을 내면서 차도로 들어서더니 어둠 속을 달려 나갔다.

 

김상철이 틀림없어요.

행정청으로 향하는 차 안이다. 그렇게 말하는 이대각의 얼굴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유장석은 입맛을 다셨다.

상철이가 차례로 저지른 일입니다. 박기동이 부하, 우재환이 부하, 시바다의 부하에다가 어젯밤은 경비소요.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오늘은 이대각이 유장석의 숙소로 찾아와 같이 출근하는 길이었는데 둘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에는 가끔 이 방법을 썼다.

난 시바다 부하가 폭사했을 때까지도 설마 했어요. 그런데 어젯밤 사건을 듣고 확신했습니다.

이대각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경비소에 두 발의 로켓탄을 쏘았지만 죽은 놈은 한 놈도 없습니다. 두 놈이 파편을 맞아 다쳤을 뿐이오. 5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말이오, 사람 없는 곳만 골라서 쏘았단 말입니다.

김상철이오. 김상철이는 경비대가 미웠지만 쏘아죽일 수는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할 놈은 상철이밖에 없습니다.

김상철이가 했다면 그것은 우리한테도 도전한 거야, 이 사람아,

찌푸린 얼굴의 유장석이 그를 흘겨보았다.

운영위 놈들은 우리한테 책임을 뒤집어씌울 거란 말이야. 그런데도 그놈이 했기를 바라나?

이대각이 눈빛을 번쩍이며 머리를 치켜들었다.

그렇습니다. 바랍니다.

허어 참.

행정청만 빼고 다 부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부위원장이라니.

제가 무슨 부위원장‥‥ 예전의 근대건설 시절만도 못한 꼭두각시 신세인데,

혼잣말처럼 앞쪽을 바라보고 말했지만 들으라고 한 소리다. 그러나 유장석은 못 들은 척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승용차는 도로를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오늘은 바람도 없는 맑은 날씨였지만 바깥 기온은 영하 30였다.

이윽고 유장석이 입을 열었다.

오늘 새벽에 회장님께 연락을 했어. 어젯밤 사건까지 보고를 했는데 ‥‥‥」

처음에는 아무 말도 안하시더군. 그러더니만 그놈이 자포자기한 것 같다고 하셨어. 이젠 근대리아에 미련이 없는 모양이라고.

그거야 당연하지요,

어쩔 수 없다고 하셨어. 김상철을 잡는 데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시더군.

「‥‥‥‥」

그것이 김상철을 위하는 길이라고 하셨다. 잡고 나면 최선을 다하시겠다는 거야. 극형은 책임지고 면하게 하겠다고.

이대각이 머리를 흔들었다.

30년쯤 교도소에 들어가 있겠군요. 아무리 약을 써도 그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을 테니까.

30년이면 요즘 세상이 3년에 한 번씩 변하는 판이니 강산이 열 번은 변한 다음이군.

이봐, 부위원장.

그럴 요량으로 강미현을 대동그룹의 둘째 새끼한테 붙여주었군,

이봐, 이대각이.

김상철이가 잡힐 것 같습니까?

「‥‥‥‥」

잡히기 전에 죽을 거요. 아마 형님이나 내가 저를 잡으려는 줄 안다면 피눈물을 흘리고 죽을 겁니다.

, 이 지랄 같은 꼭두각시 생활은 그만두겠소, 사표 내겠단 말이오.

이대각이 큰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어깨를 폈다.

상철이가 내 눈앞에서 죽는 꼴은 안 보겠수다. 그전에 이 염병을 할 땅을 떠나겠단 말이오.

 

리모컨으로 TV의 스위치를 끈 이유미는 한동안 빈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침 뉴스에 김상철의 얼굴이 비쳤고 그가 어젯밤 경비소 폭파 사건의 용의자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세 건의 살인 혐의를 받고 있었는데 모두 다섯 명을 살해한데다가 지난번에 경비요원을 사살한 것까지 포함하면 열 명을 살해한 희대의 살인범이었다. 러시아 땅 어디엔가에 숨어 있을 줄로만 알았던 김상철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유미는 창가로 다가가 섰다. 어젯밤의 쾌락이 남긴 여운이 아직도 온몸에 남아 있어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짜릿한 자극이 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사업에 대한 축복처럼 보였다. 야쿠자의 실력자인 시바다는 이제 자신의 보증인이 된 것이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녀는 탁자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

안인석의 목소리를 듣자 이유미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 웬일이야?

어젯밤에 어떻게 된 거야?

전화했었어?

「‥‥‥‥」

갑자기 일이 생겨서 늦게 들어왔어. 일본 사람들과 계약서를 다시 조정하느라고.

그런데 참, 금방 뉴스를 봤는데, 인석 씨도 보았지? 김상철이 사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래도 경비소까지 폭파했는데 괜찮을까?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안인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자식이 뭘 어떻게 하겠다고? 경비대가 총동원되었으니 며칠 내로 잡혀.

「‥‥‥‥」

사업장을 빼앗긴 분풀이를 하는 것뿐이야. 이놈 저놈한테 닥치는 대로.

그래도 하필이면 내가 와 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어, 정말.

그 자식은 이곳에 숨어든 지 꽤 오래된 모양이야, 경비대에서 들었어.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 와 있는 줄도 알겠네.

그러자 송화기를 통해 안인석이 가볍게 코웃음 소리를 내었다.

우리한테까지 신경을 쓸 정도로 그 자식은 한가하지 않아.

그럼 오늘 저녁에는 시간 있는 거냐? 내가 네 방으로 가도 돼?

오늘 저녁에도 약속이 있어, 어제 계약건이 덜 끝났거든.

「‥‥‥‥」

생각했던 것보다 일본 사람들이 까다로워서. 하지만 숙소 전화번호를 알려줘. 끝나는 대로 내가 연락을 할 테니까,

이유미가 앉은 채로 두 다리를 길게 뻗고는 발가락을 안쪽으로 굽혔다. 하체의 깊은 곳에서 다시 어젯밤의 여운이 전해져 왔으므로 그녀는 만족한 듯 가늘게 숨을 뱉았다.

그날 밤, 경비대가 거리의 곳곳에 깔려 있었지만 근대타운의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거리에는 여전히 행인이 들끓었고 사업장은 여전히 호황을 누리고 있다. 북한 측의 사업장인 코즈모프 바도 예외가 아니어서 초저녁부터 몰려든 손님들로 테이블은 거의 빈 곳이 없었다. 2주일쯤 전부터 북한이 자랑하는 곡예단이 홀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온 손님도 꽤 있었다. 조직 간의 전쟁을 수없이 겪어온 주민들이다. 그들에게 김상철 사건은 잠시 흥미를 유발시켰을 뿐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일인 것이다.

10시가 되자 무대 위의 곡예는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만든 소녀들이 무대 위를 굴러가기 시작했으므로 관객들은 탄성을 지르며 열띤 박수를 쳤다. 쟁반 위에 빈 술병을 얹어놓고 테이블 사이를 빠져나가던 정금희는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가 허리를 찔렀기 때문이다. 눈을 치켜뜬 정금희가 사내를 쏘아보았다. 혼자 앉아 있던 사내였는데 주위의 손님들은 무대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그들에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내가 잠깐 뿔테 안경을 내리자 정금희는 숨을 멈추었다. 이한이었던 것이다.

조용히 이야기할 것이 있는데 -

이한이 낮게 말하자 정금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한 시간 후에, 서울극장 옆쪽 골목에서. 골목 안에 순대국집이 있어요,

그녀는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동강 집이라고. 그 집 아주머니가 고향 사람이에요.

주위에서 다시 탄성과 박수가 터졌다. 정금희가 돌아서 가자 이한은 잔에 남은 술을 입 안으로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금희가 골목 안으로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 조금 지난 밤 1시경이었다. 2미터도 안 되어서 사람만 겨우 다닐 수 있게 만든 어두운 골목길을 걷던 그녀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극장의 담장에서 사람 하나가 떨어져 나왔던 것이다.

이한 씨인가요?

정금희도 현채옥과 마찬가지로 북한군 출신이다. 놀란 기색도 없이 그렇게 묻자 사내가 바짝 다가와 섰다.

한이는 골목 앞에 있어. 망을 보느라고.

정금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김상철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장사장을 따라가려고 애를 썼다는 이야기도.

「‥‥‥‥」

안 따라간 게 다행이었어. 현채옥 한 명만 살아남았으니까.

살아 있나요?

놀란 표정으로 그녀가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살아 있어. 그런데 내가 부탁할 일이 있어서 만나자고 했는데 ‥‥‥」

말씀하세요. 돕겠어요.

정금희가 바짝 그에게로 다가섰다. 장인규를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운 대가로 그녀는 조직으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체 감사가 끝나면 사상 불순자에 포함되어 곧 평양으로 소환당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다.

이금철의 자금 사정이 갑자기 좋아졌어, 근대시에 호텔을 두 곳이나 짓고 ·그 자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아야겠는데.

골목 입구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떠들썩한 한국말이 들려왔다. 서너 명의 사내가 골목 안으로 들어서더니 벽 쪽으로 비켜선 그들을 힐끗거리면서 순대국집으로 다가갔다.

전 장사장님을 따라가겠다고 한 이후로 감시를 받고 있어요. 간부급과는 접촉하는 기회도 드물어서 ‥‥‥」

정금회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제가 듣기로는, 이건 소문이지만 일본의 조총련에서 돈을 보내온다고 하던데요.

조총련 돈은 아냐. 나도 알아보았어.

김상철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불칸 역에서 없어진 돈이 5억 엔이 넘어. 그 돈이면 호텔 한 개를 지을 수 있단 말이다. 모두 현찰이야.

「‥‥‥‥」

정금희 씨도 받아보았지? 만 엔권으로 현찰이었다는 거야. 현채옥이 말해주었어.

저는 받지 않았어요.

정금희가 머리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장사장님이 골고루 나눠주셨지만 저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기 때문에‥‥저는 돈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채옥이와 같이‥‥」

불칸에서 사고 나기 직전에 서규환이 역무원에게 부탁했다는데 · 300만 엔을 정금회 씨에게 보냈다는 거야. 현채옥도 제 눈으로 보았다는데.

정금희를 내려다본 김상철은 머리를 끄덕였다.

역무원에게 확인하면 되겠지. 그 돈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고 있어.

그럴 수밖에 없는걸요, .

내가 부탁한 북한 쪽 자금 말인데, 힘닿는 데까지 알아봐주고.

노력하겠습니다.

정금희의 동그란 눈이 흐린 별빛을 받아 조그맣게 반짝였다.

저는 이미 공화국 사람이 아닙니다. 일을 끝내고 절 이곳에서 벗어나게만 해주세요. 곧 평양으로 소환당하게 될 것 같으니까요.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은 내가 해줄 수 있어. 걱정 말고.

 

걱정할 것 없습니다. 곧 잡힐 테니까.

오세영이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놈은 타운에 있어요. 다른 곳은 숨을 데가 마땅치 않아요.

테이블 좌우에 앉은 사람은 시바다와 우재환이다. 그들은 오리엔트 호텔의 스위트룸에 모여 앉아 있었는데 주로 입을 여는 쪽은 오세영이다.

내일은 한인 거주지를 수색할 작정이오. 3개 중대를 투입할 예정이니 있다면 잡힙니다.

내 생각엔 그놈을 누가 지원해 주는 것 같은데.

입을 연 것은 우재환이었다.

그놈이 부하들을 끌어모을 가능성이 있어요. 타운에 남아 있는 그놈 부하만 해도 백 명이 넘는단 말입니다.

모두 이금철과 페로프의 수하로 들어갔고 일부는 빈둥거리고 있지만 모두 우리가 장악하고 있어요. 현재까지 그들과 접촉한 기미는 없습니다.

오세영이 허리를 세우고는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오늘 행정위원장이 불러서 갔는데, 그도 잡는 데 협력하겠다고 합니다. 근대리아에서 난동을 부리는 건 결국 근대를 배신한 것이라고.

잠자코 있던 시바다가 머리를 들었다

협조를 하겠다고? 어떻게 말이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괜한 말입니다. 그자는 속으로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을 것이 뻔한데.

근대도 본격적으로 사업장 건설에 나설 작정이라서 김상철이 방해가 되는 거요.

시바다가 힐끗 우재환에게로 시선을 주고는 다시 물었다.

근대 직할 사업장 말이오?

근대와 대동그룹의 합작사업이오.

시바다는 일본 정보국에서 정보를 받지만 아무래도 근대 내부와 한국 사정에 대해서는 경비대와 우재환 등보다 정보력이 약한 것이 사실이다. 오세영이 말을 이었다.

대동은 영국 계열사를 간판으로 내세우고 근대리아에 들어옵니다. 다음 주 중에 영국 계열사 간부들과 대동그룹의 차남이 근대리아에 입국할 예정이오. 이미 투자 승인이 났습니다.

시바다가 다시 우재환을 바라보았다.

우사장은 알고 있었소?

조금은. 하지만 확실한 내막은 몰랐습니다.

헛기침을 한 시바다가 찌푸린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어쨌든 좋소. 그렇다면 근대와 대동이 연합한 모양이군. 대동은 영국 간판을 내세워 한국 정부의 간섭을 피할 계획이고.

그런 상황이니 김상철이 방해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오세영이 테이블 위에 놓인 술잔을 들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유장석 씨는 자신의 숙소는 물론이고 이대각의 사무실과 숙소에까지 도청장치를 설치하라고까지 말해주었소. 전화가 걸려올지도 모른다고.

그만하면 믿을 만하지 않습니까?

하긴.

우재환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만합니다. 김상철의 효웅가치는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는데다 지금은 방해만 될 테니까 말이오.

 

 

 

5. 열강의 지배

서재로 들어선 강미현이 소파로 다가가자 강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거기 앉아라.

읽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은 그가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근래에 들어 그가 부쩍 늙어 보이는 것은 자주 만날 기회가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아침 식탁에서 강회장을 만나는 것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인 것이다. 1월도 벌써 중순에 접어드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 근대리아 소식 들었냐?

강회장이 똑바로 시선을 주자 강미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 할아버지.

김상철이, 그놈. 어젯밤에는 운영위원장 전창남이의 숙소에 로켓포를 쏘아서 현관이 가루가 되었다.

찌푸린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전창남이는 놀라서 지금 경비본부 안에 들어가 앉아 있다는 거다. 못난 놈이지,

예전 같으면 꽤 흥이 날 법한 일인데도 그의 말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물론 그 이유를 강미현이 모르는 것이 아니다. 김상철은 며칠 동안 잠잠해 있다가 어젯밤 다시 일을 벌인 모양이었다. 자포자기한 상태인 것이다. 그는 닥치는 대로 부수고 죽이다가 결국은 비참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 이제 그에 대해서는 그 길밖에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경비대가 전() 병력을 투입해서 뒤지고 다니지만 도무지 그놈을 찾을 수가 없단 말이다.

그래도 한민수 씨는 다음 주에 근대리아로 떠날 모양이던데요.

알고 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계획을 연기할 수는 없지. 그래, 한사장도 물론 근대리아의 사정을 알고 있겠지?

제가 이야기해 주기도 했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김상철이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더냐?

강미현이 힐끗 강회장을 바라보았다.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깨를 잠깐 들씩인 강회장이 머리를 돌렸으나 강미현은 말을 이었다.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도 하더군요. 방법을 같이 연구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방법이 있다면 벌써 내가 했지.

「‥‥‥‥」

쓸데없는 짓은 말라고 일러줘야겠군. 그 애가 아무래도 너를 의식하고 그딴 소리를 하는 모양인데.

저도 그랬어요,

그랬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던데요, 자기는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강회장이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어때? 이제 어울리는 상대를 만난 것 같으냐?

시선을 내린 강미현을 바라보며 강회장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감정은 바람이다. 바람 지나고 먼지 걷히면 물건이 제대로 보이는 법이지,

 

박미정이 근무하는 회사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여의도 끝쪽의 15층 빌딩에 있었다. 12층의 사무실 안에는 여직원 한 명과 그녀, 두 명밖에 없었는데 사무실 직원이래야 사장이자 박미정의 선배인 조경숙까지 합해 세 명이다. 오늘은 조경숙이 출장을 갔으므로 둘만 남은 것이다.

언니, 금화실업이 자료는 내일까지 보내달라는데요.

미스 안의 목소리에 박미정은 머리를 들었다. 고가품의 외국 의류를 들여와 판매하려는 회사가 소비자의 반응과 취향 등을 조사해 달라고 의뢰한 일이었다.

오늘 밤이면 끝나. 시간 맞출 수 있을 거야.

컴퓨터로 돌아앉은 박미정이 말했다. 비상근 직원인 백여 명의 프리랜서들에게 이미 의뢰해 놓았으니 그들이 모은 자료를 입력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1월 중순으로 밖은 영하의 날씨였지만 창문으로 환한 햇살이 들어와 사무실 안은 따뜻했다. 20평 규모의 조그만 사무실이었으나 여자 셋이 근무하기에는 적당한 공간이었다.

11시가 되어갈 쯤에 전화벨이 울렸고 전화를 받은 미스 안이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언니, 전화요.

박미정이 앞에 놓인 수화기를 들었다.

박미정입니다.

, 이대각이오. 근대리아의.

머리를 잠깐 기울였던 박미정의 표정이 다음 순간에 굳어졌다.

그럼, 부위원장님.

염병할 부위원장은 무슨.

그래 놓고서 이대각이 숨돌릴 사이 없이 말을 이었다.

, 아래층 피자집에 있소. 잠깐 내려오실 수 없겠소?

갈게요.

그가 자신을 찾아오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으므로 박미정은 허둥댔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와서 잠깐 서성대는 그녀를 미스 안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언니, 누구?

그냥 아는 사람.

사무실을 나온 박미정이 피자집에 들어서자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이대각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아직 점심 전이어서 손님은 그들 둘뿐이었다. 이대각은 단정한 양복 차림이었지만 넥타이 색깔도 옷과 맞지 않았는 데다 어딘지 딱딱한 표정이었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박미정의 공손한 인사를 받은 이대각이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 나는 그저, 그냥.

자리에 앉은 그들은 종업원이 다가오자 콜라만 두 잔 시켰다. 그의 분위기가 불편했으므로 박미정은 잠자코 테이블 위로 시선을 주었다. 이대각의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김상철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테이블 위로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흘렀고 그것을 이대각이 깨었다.

, 어젯밤에 근대리아에서 날아왔소, 그래서 아직 회사에도 들리지 않은 상황이야.

그는 경어와 반말을 번갈아 썼다.

박미정 씨는 지금 근대리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지?

, 저는‥‥‥」

개판이야. 우리는 꼭두각시이고. 그건 들었지요?

, 대충.

김상철이 세력이 모두 근대리아에서 쫓겨난 건 알겠구먼, 신문에도 났으니.

「‥‥‥」

불칸 역에서 상철이 부하들이 몰사한 것은 모르고 있겠지. 그건 우리가 언론 통제를 했으니.

시선을 든 박미정을 향해 이대각이 저 혼자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상철이가 요즘 근대리아에 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것도. 엊그제는 운영위원장의 숙소를 로켓포로 박살을 냈어. 아주 신나는 일이었지.

저어, 왜 그분이 그렇게‥‥‥」

박미정이 조그맣게 묻자 이대각은 들이마셨던 숨을 코로 세게 뿜어냈다.

복수여,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위원장님은 자포자기해서 그런다고 하더구먼, 하지만 죽으려고 작정하고 있다는 점에는 생각이 같소.

「‥‥‥‥」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안 것이지. 한국과 일본, 거기에다 미국 정부의 연합세력이니 말이야. 이미 근대리아도, 자신의 인생도 끝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오.

, 강미현씨는요? 어떻게 .

용빼는 재주라도 있나? 그 여자가.

대뜸 그렇게 말했던 이대각이 서너 번 입맛을 다시고 나서 말을 이었다.

상철이는 모르고 있지만 그 여자, 대동그룹의 차남하고 밀접한 관계인 모양이오. 그래서 대동이 근대리아로 진출합니다. 근대와 대동이 연합하게 되는 거지.

「‥‥‥‥」

이건 회장 가족과 이실장 정도만 아는 비밀이야. 근대리아에서는 나하고 위원장님만 알고, 다 그렇고 그런 거지. 강미현이도 할 만큼 했으니 그 여자 이야기할 건 없어요.

난 하도 답답해서 뛰쳐나왔어. 위원장님한데 말도 안하고 나왔으니 지금쯤 난리가 났을 거요,

이대각이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올려놓고는 눈을 껌벅이며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할 것 같기도 한 애매한 표정이었다. 박미정이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그놈을 근대리아에서 끌어내었으면 해서. 근대리아 밖으로.

이대각이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내 생각에는 박미정 씨가 그놈의 유일한 인연이야. 아버님 빼고.

저는 그럴 자격이 없어요, 그리고 우린 홍콩에서 이미 헤어졌습니다.

헤어지면 또 만나는 거야.

부위원장님은 모르세요.

이런 제기랄.

이대각이 세차게 혀를 찼다.

목숨을 걸고 박미정 씨를 구했다는 걸 알면 되었지, 뭘 또?

「‥‥‥‥」

난 그놈이 내 눈앞에서 죽어 자빠지는 꼴은 못 보겠어. 그렇다고 내가 할 일도, 내 말을 들을 리도 없고, 그래서.

이대각이 주머니에서 더럽고 구겨진 손수건을 꺼내더니 얼굴을 닦고 나서 코까지 풀고는 다시 집어넣었다.

 

타운 북쪽의 조선족 거주지에는 주로 북한 측 조직원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최태호의 숙소도 그곳이었다. 그의 숙소는 붉은 벽돌로 지은 2층집으로 그 근처에서 붉은 벽돌집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새벽 530. 그 시각이면 보통 사람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거나 부지런한 사람 같으면 막 침대에서 일어날 시각이다. 그러나 최태호는 그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갔다. 새벽 4시경에 사업장이 끝나면 대충 결산을 하고 집에 돌아오기 때문이다.

방이 다섯 개에 응접실과 두 개의 화장실이 딸린 그의 숙소는 북한 수준으로 본다면 부부장급 정도였다. 최태호는 2층의 침실에서 그의 정부인 배옥화와 나란히 누워 있었다. 20대 후반으로 북한에서 무용수로 있다가 근대리아로 파견된 그녀는 잘 빠진 몸매의 미인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근대시 일만 해야 할 것 같다. 타운 일은 조덕산에게 맡기고.

팔베개를 한 채 최태호가 말하자 배옥화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올해 안에 두 개가 더 완공되면 매출액은 타운의 사업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아.

북한은 이미 근대시에 두 개의 나이트클럽을 지어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쪽의 수입이 타운에 있는 사업장 12개의 절반에 육박한 상태였다. 최태호가 팔을 돌려 배옥화의 엉덩이를 쓸었다.

위원장 동지가 유정선한테 푹 빠진 것 같더구먼.

그런 모양이에요. 유정선이 어제는 금목걸이를 하고 나왔어요.

최태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 이금철이나 북한에 처자식이 있었지만 근대리아 생활 3년에 평양을 다녀온 것은 두 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2년 전부터 배옥화를 틈틈이 집으로 불러들여 회포를 풀었다가 지난가을부터는 아예 집 안에 들어앉힌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이금철을 보기가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에 대해서 비교적 담백한 이금철이어서 가끔 무용수나 평양에서 공연차 온 가무단원과 놀기는 했지만 단골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태호가 상납한 여자가 유정선이다. 작년 말에 가무단의 일원으로 근대리아에 왔던 그녀는 빼어난 미인이었고 결국 이금철의 정부가 되어 가끔 선물까지 받게 되었다.

유정선이 팔자 고쳤지요,

배옥화가 제 주제는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새벽 540분이다. 이맛살을 찌푸린 최태호는 누운 채로 수화기를 귀에 대었다.

여보시오.

최태호 씨?

낮선 목소리에 최태호는 퍼뜩 눈을 치켜떴다.

누구요? 당신?

, 김상철이오.

아아.

최태호가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배옥화도 엉거주춤 일어나 않았다.

김사장님, 이것, 정말 오랜만‥‥」

잔소리 말고.

김상철이 그의 말을 매섭게 끊었다.

정금희 한테 서규환이 300만 엔을 보냈는데, 불칸 역에서 사고나기 전에 말이오.

낮으나 또렷한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철도본부에서는 그 돈을 분명히 당신한테 전달했더군. 당신 부하로 택상이라는 자가 서명을 했소.

정금희한테 돈을 전해주지 않은 이유는 뭔가? 5억 엔을 갖고도 모자라서인가?

이것 보시오, 김사장.

이제 침대에서 내려선 최태호가 목청을 높였다.

그게 무슨 말이오? 5억 엔을 갖고도 모자라다니?

정금희가 엔화를 갖고 있으면 당신들이 갖고 있는 거금과 연관되리라고 생각했겠지, 그렇지 않소?

무슨 쓸데없는 , 이봐요, 우린 그런‥‥‥」

오해받을 일을 했어 .

오해 받지 않으려고 한 일이야. 그것뿐이오.

얼굴을 굳힌 최태호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코즈모프 바의 사무실 안이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 히터를 켠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무실은 썰렁했다. 한숨도 자지 못해 두 눈이 충혈된 최태호가 입을 열었다.

정금희는 숙소에 없습니다. 아마 그년이 김상철과 내통한 모양입니다.

정금희는 일을 마친 다음 숙소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이금철이 찌푸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금희를 찾을 상황이 아냐, 지금은.

, 하긴 그렇습니다.

김상철이 그렇게 오해할 만도 하단 말이야, 내 말은.

아니, 도대체.

최태호가 말을 이으려다가 이금철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닫았다. 경비대에서 서규환이 정금희에게 보낸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은 금방이었다. 그들이 물건을 찾아간 김택상을 찾아왔을 때 그는 봉투 안에 들어 있었다면서 책 두 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불칸 역의 역무원이나 철도본부의 사무원 등 아무도 봉투 안에 300만 엔이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모두 죽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주는 수밖에 없다. 현채옥이가 증인으로 나섰으니 안 받았다고 고집한다면 꼼짝없이 우리가 뒤집어쓴다.

김상철이는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입맛을 다신 이금철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눈이 뒤집혀 있어, 그놈은. 보이는 게 없는 놈이란 말이야.

김상철이가 언제 연락을 한다고 했지?

다시 한다고 했습니다만 시간은‥‥‥」

내가 만나겠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겠어. 그 방법 밖에 없다.

이금철이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이거, 장인규의 귀신이 우릴 잡고 있는 것 같아서 꺼림칙하군.

김상철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점심시간이 될 무렵이었다. 일을 하면서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이금철은 전화기를 움켜쥐었다.

김사장, 할 이야기가 있소.

그는 대뜸 말했다.

이 나라는 도청방지법이고 뭐고 없어서 아마 이 전화도 도청되고 있을 거요.

그것을 김상철이 모를 리가 없다. 이금철이 말을 이었다.

나에게 서신 연락을 주시오. 하자는 대로 할 테니까.

알았소.

짤막하게 대답한 그가 전화를 끊자 이금철이 최태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경비대는 곧 비상이 걸릴 것이다. 나한테 오는 모든 사람들을 감시할 거야.

당연하지요. 오늘 새벽에 저한테 걸려온 전화도 들었을 데니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겁니다.

기다려보자.

이금철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경비대뿐만 아니다. 시바다와 우재환, 어쩌면 홍기천도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 긴박감이 있군 그래.

보안과장 오세영은 벽에 걸린 지도의 한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두 번 다 한인 거주지의 공중전화 박스에서 했습니다만 같은 장소는 아닙니다.

그는 경비본부장 소명일과 운영위원장 전창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곧 김상철은 이금철에게 서신 연락을 할 겁니다. 전화는 모두 감청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전창남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새벽에 최태호한테 했던 이야기는 우리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감춰둘 필요도 없는 일이지요. 저희가 확인했을 때 그자들은 책 두 권을 보여주었습니다.

쓸데없는 오해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돈을 감췄다구?

, 그렇게 말하더군요. 굉장히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 사건을 저지른 것은 북한 놈들이군, 그렇지 않소?

전창남이 소명일을 바라보았다.

실마리가 잡힌 것은 북한 놈들뿐이야. 김상철이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고.

글쎄요.

소명일의 대답에 그가 이맛살을 찌푸했다.

글쎄요라니?

그것이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김상철이 전화를 했을 겁니다.

그것이 증거가 되었다면 김상철이 전화 따위나 하면서 시간을 끌 리가 있겠습니까? 대뜸 로켓포를 쓰거나 죽이거나 했겠지요.

입맛을 다신 전창남이 다시 오세영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이금철이를 감시하면 김상철이를 잡을 수도 있겠군, 그렇지?

, 하지만,

하지만이라니, 그 한 놈 때문에 근대리아 주민이 얼마나 불안에 떨고 있는지 알 것 아닌가? 기회가 왔으니 잡아.

알겠습니다, 위원장님.

전창남의 방을 나온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행정청의 복도를 걸었다.

김상철과 이금철이 만나는 현장을 덮친다면 이금철도 체포할 수가 있습니다.

문득 오세영이 말하자 소명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북한 측의 기를 꺾을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직 그런 상황은 아냐.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조직을 완전히 소탕할 수는 없는 상황이니까. 지금의 세력 균형이 적당해.

근대리아는 북한과 중국, 러시아계를 합한 주민이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김상철의 세력이 기반을 잃고 난 지금 득세하고 있는 것은 우재환과 시바다의 미국, 일본인 것이다. 그들은 운영위와 경비본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근대리아의 지배 세력이 되어가고 있었다.

 

근대타운에서 길도 없는 대평원을 동북쪽으로 150킬로미터쯤 달려 올라가면 완만한 경사를 이룬 구릉지대가 나타난다. 원시림에 덮인 타이가 지역으로 가끔씩 이리떼가 출몰할 뿐 사람의 혼적을 찾아볼 수 없는 무인지대였다. 새벽녘, 초저녁부터 눈발이 흩날리더니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

가끔씩 나무 위에 쌓인 눈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렀던 골짜기에 발짝 소리가 났다. 슈바에 방한모를 눌러쓴 두 사내가 빠른 걸음으로 골짜기를 들어서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눈에 덮여 겨우 문짝만 드러나 있는 막사로 들어섰다.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것으로 근대의 석유 시추단이 버리고 간 막사였다. 제각기 들고 온 짐들을 내려놓은 것은 김상철과 이한이다.

어제 동씨의 집도 수색을 당했다는데요, 그곳에 있었다면 위험할 뻔했습니다.

석유스토브에 불을 붙이면서 이한이 말했다. 동씨 집을 떠나 이곳으로 옮긴 지 닷새째였다.

경비대가 북한 측 사업장을 감시하고 있는 바람에 영업에 지장이 많다고 합니다.

스토브가 금방 달아오르자 그들은 슈바를 벗었다. 이금철은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만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정금희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장인규의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도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이한이 짐가방을 열고 식료품 꾸러미와 술병들을 꺼냈다. 그는 눈이 내리자 지프를 몰고 타운에 다녀온 것이다. 지금도 내리는 눈은 곧 지프의 타이어 자국을 덮어줄 것이다.

오리엔트 호텔에 톰프슨 회사인가 뭔가 하는 미국 사람들이 와 있답니다. 근대시에 투자를 한다는데요.

이한이 보드카의 병마개를 따고는 그에게로 건네주었다

양필성은 그들이 우재환의 배후세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것이다.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우재환이는 CIA의 조종을 받고 있을 것이다. 운영위원장 전창남이도.

그리고 근대 호텔에 영국의 투자단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술병을 기울여 서너 모금을 삼킨 김상철이 이한에게 병을 건네주었다.

오리엔트 호텔에 있던 서울 여자는 떠났다더냐?

, 형님. 시바다가 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답니다. 그놈의 정부가 된 것 같다고 하던데요.

벽에 등을 기대면서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안인석이 이유미의 방을 찾아왔다가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간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밖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쿵 하고 났으므로 이한이 튕기듯 일어섰다. 벽에 세워놓은 AK소총을 움켜쥔 그가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한참 만에 눈을 뒤집어쓰고 돌아왔다.

나무에서 눈이 떨어진 모양입니다.

이곳까지 오려면 걸어서는 안 돼. 엔진 소리부터 들리는 게 순서야.

술병을 들어 몇 모금을 삼킨 이한이 입을 벌리고 더운 숨을 뱉았다.

형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김상철의 시선을 받은 이한이 머리를 숙였다.

저야 상관없지만 형님이 고생하시고 계셔서.

시바다와 우재환을 없앨 거야.

다시 벽에 기대면서 김상철이 말했다.

가능하다면 그의 부하들까지, 거기에다 운영위원회 놈들도 포함해서,

「‥‥‥‥」

내 생각엔 시바다와 우재환 둘 중의 하나다. 장사장을 습격한 것은.

그러고 나서 죽는다.

그는 막사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데서나 죽어도 상관없다. 일만 마친다면.

죽는 건 겁나지 않습니다.

술기운에 얼굴이 달아오른 이한이 그를 바라보았다.

저도 이제 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형님.

그들은 침낭을 펴고 스토브 양쪽에 나란히 누웠다.

정금희는 지금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겠군.

팔베개를 하고 누운 김상철이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 잊었습니다.

이한이 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어제 최태호의 부하가 양필성의 부하에게 300만 엔을 돌려주었답니다. 돈은 지금 양필성이 갖고 있습니다.

 

300만 엔이다.

양필성이 탁자 위를 턱으로 가리켰다.

사연이 많은 돈이다. 그 돈이. 시바다 겐지의 손을 떠나 장인규, 이금철이를 거쳐 이곳까지 왔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어서 아침 시간이었지만 창밖은 어둑했다. 삼합회가 타운에 세운 북경 클럽의 사무실 안이다. 앞자리에 않아 있던 비연이 돈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는 양필성의 심복으로 마약방의 회계를 맡은 40대의 사내였다.

그렇다면 이 돈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내져야 한단 말씀이지요?

그렇다. 장인규가 죽기 직전에 제가 데리고 있던 계집한테 전별금으로 내린 돈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금철이가 떼어먹으려다가 이번에 앗 뜨거, 하고 토해놓은 것이다.

장인규가 손이 크군요.

그렇지. 죽은 사람한테는 덕담을 하는 법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송길수한테 보내면 되겠지요? 정금희 앞으로.

양필성이 머리를 끄덕이자 돈뭉치를 든 비연이 일어셨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소전한테 연락을 하겠습니다. 아마 오늘 오후에는 그 여자가 돈을 받을 수가 있을 겁니다.

될 수 있는 한 엔화로 주라고 해라. 실감이 나도록. 그것이 장인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비연이 방을 나가자 양필성은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아침 10시였다. 비연이 블라디보스토크의 회원인 소전에게 전화를 하면 소전이 돈을 들고 송길수를 찾아갈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사무실을 나와 2층의 홍기천의 방으로 들어섰다. 홍기천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대형, 블라디보스토크의 소전한테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앞자리에 앉으며 그가 말하자 홍기천이 혀를 찼다.

, 평양 사람들. 왜 그리 망신스런 짓을 하딘 말이야.

글쎄 말입니다.

어젯밤에 김상철의 부하를 만났다며?

, 식량을 싸주었습니다.

그냥 숨어 있겠다는 거야?

그건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오래 숨어 있지는 않을 것 같던데요.

흥기천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연륜이 있는데다 처신이 공평해서 부하들이 잘 따랐고 양필성과도 손발이 맞는다.

행정위원회에서도 난감한 모양이야. 이번에 투자단들이 한꺼번에 몰려온 상황이라서 사건이 일어나면 안 되거든.

당연하지요. 그들도 이젠 어쩔 수가 없을 겁니다. 김상철이 어서 잡히기를 기다리는 수밖에요.

김상철이 다음에 어떻게 나올 것인가가 궁금하군.

홍기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은 간사한 거야. 자신에게 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너그러워질 수도 있다니까,

갑자기 문이 열렸으므로 그들은 머리를 돌렸다. 비연이 서둘러 들어섰고 그의 뒤를 부하 한명이 따르고 있다.

대형, 양형.

눈을 치켜뜬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세 뭉치의 돈을 탁자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이 돈, 위페올시다. 위조지폐란 말씀입니다.

당황한 그들의 시선을 받자 비연이 지폐 한 장을 뽑아 들었다.

돈을 세던 보성이 발견했습니다. 아주 정교하게 제작되어서 전문가가 아니면 알아낼 수도 없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더니 새 지폐와 나란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 보성이 설명해 드릴 겁니다. 형님들도 아시다시피 보성이 위폐감식 전문가 아닙니까?

 

그날 밤, 눈은 그쳤지만 칼끝 같은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어 밤거리의 기온은 영하 45도였다. 아무리 방한 장비를 갖춰 입었다 하더라도 한자리에 3분 이상 서 있으면 온몸이 얼어붙을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근대리아 북쪽의 한인 거주지로 검정색 승용차가 진입했을 때는 바람끝이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게다가 폭풍 같은 바람으로 상점의 간판이 어지럽게 흔들렸고 길가에 쌓여 있던 눈더미가 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승용차는 천천히 보도로 다가가더니 이윽고 조그만 음식점 앞에서 멈춰 섰다. 썰렁한 거리였다. 행인도 드물었고 가끔씩 한두 대의 차가 달려갈 뿐이었다. 이곳은 주택가로 지정된 곳이어서 유흥업소가 들어설 수 없다. 차에서 내린 두 사내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는 뛰듯이 음식점 안으로 들어서자 차 안에 남은 두 사내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거리는 바람소리만 가득할 뿐이었다. 방으로 안내된 양필성과 비연은 최테호와 조덕산의 앞자리에 앉았다. 최태호는 갑작스런 면담 요청에 짜증이 났는지 찌푸린 얼굴이었다. 대충 인사가 끝나자 최태호가 중국어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양필성이 잠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최 선생, 도대체 우리를 뭘로 보는 거요?

말소리는 낮았지만 최태호를 쏘아보는 시선은 날카로웠다.

뭘로 보다니? 아니, 무슨 말을.

이것 보시오, 얻다 대고 하는 수작이냔 말이오.

그는 주머니에서 한 뭉치의 엔화를 꺼내어 탁자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당신이 준 이 돈은 모두 위폐요.

뭐라고 !

얼굴이 금방 하얗게 굳어진 최태호가 돈을 바라보았다. 옆에 앉은 조덕산도 비슷한 표정이다. 양필성이 비연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비연, 네가 이분들에게 우리가 위폐를 구분한 경위를 설명해 드려라. 물론 이분들은 알고 계시겠지만.

커다랗게 헛기침을 한 비연이 주머니에서 만 엔권 한 장을 꺼내더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볼펜 끝으로 양쪽 지폐를 가리키면서 조목조목 설명해 가는 동안 최태호와 조덕산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말을 마친 비연이 허리를 펴자 최태호도 머리를 들었다. 이제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우리는 이 돈을 건드리지도 않았소. 철도본부에서 받은 그대로 금고에 넣어 두었단 말이오.

양필성은 틱을 치켜든 자세였고 비연은 머리를 돌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엔화 위폐를 사용한 적도 없소, 이것은 모략이오.

양필성이 퍼뜩 눈썹을 세웠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신들한테 장난을 친 것이란 말이오?

아니오, 우리는 위폐를 받은 겁니다. 서규환이 정금희에게 보낸 돈이 위폐였단 말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장인규가 제 부하에게 위폐를 주었단 말이오?

장인규가 위폐를 받았을 수도 있지 않소?

양필성이 다시 비연을 돌아보았으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건 심각한 일이오.

눈을 부릅뜬 최태호가 목소리를 낮췄다.

시바다와 관계된 일인 것 같습니다.

시바다는 사업장 매각 대금으로 장인규에게 위페를 주었을 가능성이 있소.

당신이 그러지 않았다면,

의자에 등을 기댄 양필성이 팔짱을 끼었다.

그랬을 가능성도 있지요.

김상철에게 그런 수모를 당한 우리가 다시 위폐를 보낸단 말이오? 우리는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려고만 했을 뿐이었소. 그러다가 보관하고 있던 이 돈을 조사하지도 않고 그대로 돌려준 거요.

최태호의 얼굴을 바라보던 양필성이 가늘게 숨을 내리쉬었다.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당신 말이 정말이라면 이건 심각한 문제요.

심각하다마다. 시바다가 장인규에게 위폐를 주었을 것이 틀림없소.

그러다가 최태호가 말을 뚝 그치고는 입을 벌린 채 양필성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다면.

양필성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위폐를 감추려고 장인규와 일행들을 몰사시켰을지도 모르지. 불칸 역에서 5억 몇천만 엔이 증발해 버린 것이 그 때문인지도.

방 안에 한동안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고 그것을 다시 양필성이 깼다

미진하긴 하지만 당신 해명을 대형한테 전하겠소, 그리고 김상철 씨한테도.

좋습니다, 나도 위원장께 보고하겠소. 김상철 씨한테 우리와 위폐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전해주시오.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그들이었지만 얼굴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싸움터에 많이 나가본 전마는 전쟁터가 가까워지면 본능적으로 몸을 떨고 코를 벌름거린다. 그들은 모두 그런 느낌이었다.

 

유장석은 한민수가 마음에 들었다. 재벌 2세쯤 되면 아무리 겸손한 시늉을 하더라도 티가 나는 법인데 그는 열심히 설명을 듣고 모르는 것을 아는 척 넘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행동 또한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근대호텔 25층의 스카이라운지에 앉아 보드카를 마시는 중이었다. 11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평원 위에 펼쳐진 근대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던 한민수가 입을 열었다.

운영위원회하고는 요즘 어떠세요? 일하시는 데 지장은 없습니까?

지장이야, .

유장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뻔한 일을 묻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서는 그쪽도 필요한 조직이니까요.

근대리아를 위해서도 그럴까요?

그러자 유장석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라운지에는 대여섯 팀의 손님들이 있었지만 이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난 될 수 있는 한 그쪽 이야기는 안 하는 입장입니다.

유장석이 술잔을 들었다.

대동그룹과의 협상은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단 듯 진행되고 있었다. 대동이 내세운 영국의 월슨 사는 이름만 빌렸을 뿐으로 실제 투자는 근대와 대동이었고 지분은 5050이다.

저쪽, 미국의 톰프슨 그룹은 3억 달러를 계획하고 있다면서요?

한민수가 물었다. 오리엔트 호텔에 진을 치고 있는 톰프슨 그룹의 투자단은 지금쯤 운영위원장 전창남과 자리를 같이하고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행정, 운영위원장이 투자단을 나눠 효을적으로 상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극명한 편 가르기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유장석은 물론 한민수도 톰프슨 그룹의 배후에 미국 정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잔에 다시 술을 채운 유장석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경쟁 상대가 있어야 발전합니다. 이것은 회장님이 가르쳐주신 교훈이지요.

물론입니다.

건배를 하듯 따라서 술잔을 든 한민수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목표를 세우고 기다리라는 것은 제 아버님의 교훈입니다, 위원장님.

유장석은 그의 웃음을 보자 갑자기 가슴이 뻐근해지는 느낌이 왔다. 대동그룹과 손을 잡았다는 현실감이 다가온 것이다. 그것은 한민수와 강미현의 결합으로 더욱 확고해진다. 한민수가 입을 열었다.

김상철 씨 이야기는 대충 들었습니다만, 괴로우시겠어요.

어른께서는 저더러 나서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습니다만 모른 척하기가 어렵군요.

어른이라면 강회장이다. 술잔을 내려놓은 유장석이 굳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른 말씀대로 나서지 마십시오. 저희들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예의가 아닙니다. 그 사람을 보아서라도.

그 사람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유장석이 잠자코 시선만 건네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 대신으로라도 도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강미현이다. 유장석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어렵습니다, 이젠 도저히,

모험을 하자는 건 아니지요.

다시 술잔을 든 한민수가 부드럽게 웃었다.

최선을 다해서 방법을 찾아야지요. 그리고 그쪽에도 알린다면 양쪽 모두 어느 정도는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최소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라도 말입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커피숍에는 손님이 서너 명밖에 없었으나 박기동은 몇 번이나 주위를 둘러본 다음 구석자리에 앉았다. 오리엔트 호텔의 커피숍이었다. 요즘 들어 잔뜩 위축된 그는 거의 사무실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를 따라온 세 명의 경호원이 커피숍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커피를 시켜놓고 초조한 듯 자주 손목시계와 입구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구로 이종남이 사내 한 명과 함께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곧장 박기동에게로 다가왔다.

조금 늦었소.

이종남이 던지듯 말하고는 옆에 선 사내를 소개했다.

이분은 톰프슨 그룹의 행정고문이신 이재환 씨요, 박사장. 인사하시오.

아이구, , 박기동이올시다.

박기동이 반색을 하며 그보다 대여섯 살쯤 손아래로 보이는 이재환에게 악수를 청했다. 자리에 앉자 이종남이 서두르듯 말했다.

톰프슨 그룹에서는 자체 조달본부를 운영할 생각이지만 주방기구와 화장실용품은 박사장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건 운영위원장께서 특별히 박사장을 위해 부탁하신 덕분이오.

아아, .

박기동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여러 가지로.

시계를 내려다본 이종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두 분은 말씀을 나누시지요. 저는 약속이 있어서 이만.

이종남이 커피숍을 나가자 이재환이 입을 열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근대리아의 토박이나 다름없으시다고 하더군요.

, 오래되었지요. 아마 한국인 기업가로는 제가 처음 왔을 겁니다.

박기동이 어깨를 폈다.

솔직히 근대리아에서 저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일본과 북한의 조직들과도 상당히 긴밀한 관계라고 들었습니다만.

아아, .

퍼뜩 시선을 올린 박기동은 그가 이종남으로부터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약점이 아니다.

오래 있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한테도 필요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지요. 주방기구나 화장실용품 구입 건을 떼어드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

일본과 관련된 여행사 대리점 업무도 맡으셨지요?

아아, .

얼굴을 굳힌 박기동을 향해 이재환이 빙그레 웃었다.

그 전에는 김상철과 북한 조직의 일로 북한 사람들을 들여오는 일을 맡으셨고.

그렇습니다.

뛰어난 분이십니다, 박사장님은.

웃음 띤 그의 얼굴에 시선을 주던 박기동이 이윽고 따라 웃었다.

다 알고 계시니 일하기가 수월해지겠습니다.

공사가 꽤 큽니다. 우리가 산출한 예상 견적으로 보더라도 박 사장님은 1,500만 달러의 오더를 가져가시게 되지요.

10퍼센트 마진만 계산해도 150만 달러가 됩니다. 한마디로 한밑천 잡게 되는 거죠.

저는 그런 ‥‥‥」

말을 이으려는 박기동에게 이재환이 손을 들어 보였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박사장님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거야 이해를 합니다만 저는.

대가에 상응하는 노력만 해주시면 됩니다. 우리는 먼저 대가를 제공하는 호의를 보여드렸으니까요. 아시겠지요?

어깨를 늘어뜨린 박기동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절대로 나쁜 기분은 아니다. 장사꾼은 이런 대화가 성미에 맞는 것이다.

물론이오, 대가는 충분히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장사꾼 체질이오. 주고받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란 말입니다.

박기동과 헤어진 이재환이 행정청에 들어선 것은 점심시간이 되기 조금 전이다. 그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곧장 행정청 3층으로 올라가서는 복도 양쪽의 팻말을 살펴보았다. 관광과 사무실은 오른쪽에서 두 번째였고 사람들이 제일 들끓고 있는 곳이었다. 이재환은 사무실로 들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체류허가를 갱신하려는 관광객들이 대기실에 가득 차 있는 것은 곧 그만큼 근대리아의 관광 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윽고 그는 사무실의 맨 뒤쪽 자리에 앉아 있는 안인석을 찾아내었다. 그는 이제 수십 명의 직원을 거느린 근대리아 환경국 관광과장이었다.

직원들의 테이블 사이를 지나 이재환이 다가가자 안인석이 머리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재환은 얼굴에 웃음을 띠었으나 안인석의 반응은 조금 늦었다. 낯선 사람을 본 듯 한동안 표정이 없던 안인석이 이윽고 눈을 크게 뜨면서 입을 열었다.

아니, 댁은.

잠깐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과장님.

자리에서 일어난 안인석이 굳어진 얼굴로 앞장을 섰다. 그들은 따로 마련된 회의실로 들어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자 이재환이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꽤 놀라시는군요. 과장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인석이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이곳은 근대리아이고 근대그룹의 모체인 행정청이다. 오성그룹의 비서실 직원인 이재환이 활보할 곳이 아닌 것이다.

사업 관계로 왔어요. 잘 알고 계실 텐데. 미국의 톰프슨 그룹 사람들과 같이 왔으니까.

이재환이 담배를 꺼내어 물고는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출세하셨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톰프슨 그룹으로.

그래요, 우리는 곧 근대리아에 대규모 투자를 합니다.

나도 실은 안형이 관광과장으로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내뿜은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운영위원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는 건 알고 계시지요? 그리고 우재환씨가 우리의 관리인이 된다는 것도.

압니다.

안인석이 가볍게 잔기침을 하고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면 이과장께서는 오성을 그만두고 톰프슨 그룹으로 옮기신 것인가요?

아닙니다.

톰프슨 그룹은 오성의 간판 기업이지요. 곧 오성은 톰프슨의 이름을 빌어 근대리아에 진출한 것이란 말이오. 이건 정부 고위층과 운영위원장, 그리고 우재환 씨 등 극히 제한된 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는 안형한테까지 비밀로 해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지 않습니까?

안인석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새로운 일은 아닌 것이다. 운영위나 우재환 등은 행정위의 유장석 등과 대립하는 입장이었고 그들과 오성이 연합했다고 해서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도 변할 것이 없다.

어쨌든 반갑습니다, 이과장님. 근대리아에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말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그 말씀을 드리려고 찾아뵌 거요.

알겠습니다.

나도 힘껏 밀어 드리지요. 우리는 지난번처럼 잘할 수 있을 겁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재환이 밝은 얼굴로 방을 나갔다.

변한 것이 없다. 자리에 돌아와 앉은 안인석은 다시 그렇게 생각했다. 오히려 든든한 배경이 하나 더 늘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타샤 레스토랑에 들어선 나카무라는 곧장 안쪽으로 다가갔다. 오후 4시여서 레스토랑은 아직 저녁 영업을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종업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를 지나 주방 옆쪽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테이블에 두 손을 얹고 않아 있던 이종남이 그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셨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앞에 앉으며 묻자 이종남이 머리만 끄덕였다. 딱딱한 표정이다.

요즘 바쁘시겠습니다. 미국 손님들도 와 계시고 해서.

이종남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카무라 씨, 김상철이 최태호와 통화를 했다고 합니다. 이건 경비대에서 나온 정보요.

잠자코 시선을 든 나카무라를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장인규가 죽기 전에 북한 측으로 돌아간 어떤 여자한테 전별금을 주었다는데, 최태호가 그 돈을 가로챘던 모양이오.

「‥‥‥‥」

김상철은 북한 측이 습격한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는 거요. 돈을 가로챈 것은 의심을 받지 않으려는 방법이었다고.

그래, 최태호는 뭐라고 했답디까?

표정 없는 얼굴로 나카무라가 묻자 이종남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펄쩍 뛰었다더군.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라고.

「‥‥‥‥」

그 후로 김상철은 두 번 다시 최태호나 이금철에게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잠적해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그 돈은, 최태호가 가로챘다는 돈 말인데, 돌려주었답니까?

그건 모릅니다.

이종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것 같소.그래서 미리 알려드리는 거요.

고맙소, 이 선생.

따라 일어선 나카무라가 그의 손을 잡았다.

신세 잊지 않겠소.

 

그날 밤, 최태호는 코즈모프 바의 사무실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검정색 벤츠에 올랐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그에게는 한창 바쁜 시간으로 지금은 근대시의 나이트클럽에 가려는 것이다. 근대시에는 이미 두 개의 대형 나이트클럽이 영업 중이었고 호텔 두 개는 올해 상반기에 문을 연다. 차가 근대시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그는 옆자리의 부하에게 머리를 돌렸다.

김상철이 한동안 나타나지 않으니까 분위기가 더 고약하군. 가끔씩 사건을 일으킬 때보다 더 긴장이 되는 모양이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그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제일 느긋한 쪽은 김상철과 연락이 닿고 있는 삼합회와 마피아일 것이다. 옆자리에 앉은 사내는 그의 심복인 강성룡으로 인민군 특수부대 장교 출신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시바다와 우재환은 거의 외출을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같은 시기에 외국 투자가들이 와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경비를 하고 있지요.

최태호가 코웃음을 쳤다.

그런다고 죽을 놈이 살아날까? 아무리 둘러쌓아도 로켓포 한 방이면 끝장이다.

두 대의 승용차는 짙은 어둠에 덮인 고속도로를 맹렬한 속도로 달려 나갔다. 김상철은 삼합회를 통해 위폐사건을 전해 들었을 것임에도 아직 반응이 없는 것이다 앞장서서 달리던 경호용 볼가가 속력을 뚝 떨어뜨렸으므로 벤츠를 몰던 부하가 혀를 찼다. 밝은 볼가는 고속으로 달리다가 가끔씩 저럴 때가 있는 것이다.

앞장서라, 뒤에서 따라오도록 놔둬.

최태호가 말하자 벤츠는 쑥 튀어 나가 볼가 앞에 섰다.

시바다가 위폐를 감추기 위해서 장인규를 친 것이다.

의자에 등을 기댄 최태호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답답해. 경비대에 신고할 입장도 안 되고 그렇다고 나서서 해결할 수도 없으니.

김상철은 알고 있을 겁니다. 머리가 나쁜 놈은 아니니까요.

밤이어서 고속도로를 지나는 차량은 많지 않았다. 뒤쪽에서 불빛이 다가왔으므로 강성룡은 머리를 돌렸다. 라이트가 비추고 있어서 뒤쪽 차는 몸체도 보이지 않았다.

이봐, 뒤차에 연락해 봐, 따라오는가.

강성룡이 말하자 조수석에 앉은 사내가 무전기를 들었다.

2호차, 지금 어디야?

뒤를 따르고 있어.

휴대용 무전기지만 사내의 말소리가 차 안에 가득 울렸다.

이 똥차가 이젠 제대로 달려.

그 순간이다.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는 섬광이 번쩍이더니 귀가 먹먹할 정도의 폭음이 났다. 그러자 운전사가 무의식중에 브레이크를 밟았고 그 반동으로 최태호는 머리를 앞좌석의 등받이에 부딪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볼가는 불길에 싸여 길가로 미끄러지는 중이었다.

달려! 달리란 말이다!

상체를 세운 최태호가 악을 썼다.

전속력으로 달리란 말이다! 이 새끼야!

벤츠는 타이어가 튕겨나갈 것 같은 마찰음을 내면서 속력을 냈다. 불덩이와의 거리가 100미터, 150미터가 되었을 때 고속도로가의 어둠 속에서 플래시가 터지는 것처럼 번쩍 불빛이 났다.

달려!

최태호가 다시 악을 썼고 액셀러레이터가 바닥까지 밟힌 벤츠는 최고속력을 내었다. 불덩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거리는 100미터가 되었다가 금방 50미터로 가까워졌는데 최태호와 강성룡이 로켓탄의 탄두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달려!

강성룡이 고함을 쳤고 벤츠는 총알처럼 어둠 속을 달려 나갔다.

탄두의 힘이 떨어지면서 벤츠와의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탄두가 도로의 중앙 분리대 근처에 떨어지면서 폭발했을 때 그들과의 거리는 80미터 정도가 되어 있었다.

 

한인 거주지 안의 음식점으로 양필성이 들어섰을 때는 새벽 3시였다. 오늘은 단신이었지만 안쪽의 방에서 그를 맞는 것은 지난번처럼 최태호와 조덕산이다. 최태호는 술을 몇 잔 마신 듯 눈가가 달아올라 있었다.

그놈이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가만있을 수는 없소, 당신들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양필성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최태호가 대뜸 말했다

이젠 해명을 할 필요도 없소. 오늘 죽은 내 부하 네 명의 목숨 값을 받아내야겠으니까.

글쎄, 나도 뜻밖이라.

양필성이 찌푸린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나도 요즘 며칠간은 김상철과 연락이 닿지 않아서 말이오.

그렇다면 더욱 잘되었소. 김상철의 일에 당신들은 나서지 마시오. 우리와 그놈과의 일이니까.

최태호가 양필성에게로 바짝 다가앉았다.

당신을 보자고 한 것도 그것 때문이오. 더 이상 그놈을 감싸지 말아주시오. 우리와의 관계가 악화될 테니까.

우리는 모르는 일이오, 최 선생.

양필성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김상철이 우리와 연락을 끊은 이유를 알 것 같은데, 우리는 빠질 테니 당신들이 알아서 해결하시오.

며칠간 잠잠했던 근대리아가 다시 술렁이고 있었다. 경비대 병력이 타운과 근대시의 곳곳에서 검문을 강화했고 호텔 앞에는 무장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최태호가 입을 열었다.

개 같은 놈, 앞뒤 분간도 못하는 놈이니 이번에 아예 숨을 끊어놓겠어. 그놈을 죽이기 위해서는 일본 놈이나 미국 놈과도 손을 잡을 생각이오.

알아서 하시도록,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양필성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방문이 열리더니 사내 한 명이 들어섰다. 그는 곧장 최태호에게로 다가가더니 그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몸을 돌린 양필성이 막 문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였다.

양선생.

최태호의 소리에 멈취 선 양필성은 머리만 돌렸다.

잠깐만.

자리에서 일어선 최태호는 눈을 치켜뜨고 몸을 꼿꼿하게 굳힌 모습이었다.

김상철이 이번에는 시바다 부하들의 숙소를 쳤소. 기관총을 난사하여 여섯 명을 죽이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는 거요.

그는 양필성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그리고 우리 위원장께 직접 전화를 해왔다는군요. 시바다의 숙소는 자신이 쳤지만 고속도로 사건은 그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양필성이 입을 열었다.

나는 김상철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당신들과 적이 되는 것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이거든.

당신을 고속도로에서 공격한 것은 김상철이 아니오, 나는 그의 말을 믿소.

 

시바다를 없애야 한다.

빠른 걸음으로 골목길을 걸으면서 김상철이 말했다. 두터운 슈바 차림에 털모자를 눌러썼고 눈만 내놓는 방한 두건을 썼으므로 말소리는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이한은 반걸음쯤 뒤에서 김상철을 따르고 있다.

부하들은 소모품일 뿐이야. 얼마든지 충원이 된다.

새벽 4시여서 아직 주위는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은 한인 거주지의 미로같이 얽힌 골목 안을 익숙하게 걸어갔다. 곧 날이 밝아올 것이므로 타운 외곽에 숨겨둔 지프를 타고 구릉지대의 막사로 갈 수는 없다. 은폐물도 없는 평원 위를 달리다가는 경비대의 헬기에 금방 발견될 것이었다.

이윽고 성씨의 집 앞에 도착한 그들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조심스럽게 대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성씨의 집에 묵게 된 것은 나흘 전부터였다. 양필성으로부터 위폐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 날 타운으로 들어온 것이다.

성씨는 50대 중반으로 타운 중심부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사내였다. 절도죄로 형을 살고 나와 오갈 데 없던 그는 근대리아로 밀입국한 다음 공사장의 잡부로 일했었다. 그러다가 동향 사람인 송길수의 도움으로 세탁소를 차리게 되었고 지금은 다섯 명의 가족을 모두 데려와 산다. 집은 벽돌을 쌓아 만든 러시아식 단층 구조였다.

안으로 들어선 그들이 응접실 겸 식당을 지나는데 조심스런 헛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인기척이 났다. 집주인인 성씨였다. 그는 자지 않고 어두운 응접실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돌아오십니까?

흰머리가 반쯤은 섞였지만 다부진 얼굴에 체격도 켰다. 그가 구부정하게 어깨를 굽히고는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걱정이 되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오늘밤에는 떠나도록 하지요.

아니, 그러실 필요는.

성씨가 당황한 듯 손을 저었다. 고속도로의 사건을 알려준 사람도 그들에게 정보를 수집해 주던 성씨였던 것이다. 그들은 안쪽 끝의 방으로 들어섰다. 김상철과 이한이 슈바를 벗고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자동소총을 벗어 탄띠를 끄르는 동안 성씨는 불안한 시선으로 두리번거렸다. 김상철이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시바다 부하들의 숙소를 습격하고 오는 길이오.

그들은 따뜻한 온돌바닥에 마주 보고 맞았다.

일을 끝내고 곧장 타운을 빠져나가려다가 시간이 너무 늦어서 돌아온 겁니다.

이곳은 안전합니다. 지난번의 가택수색 때도 경비대는 집 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밖에만 있다가.

김상철이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우리 때문에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어요. 며칠 동안 도와주신 것만 해도 고마운데.

며칠 동안 시바다를 노렸으나 그는 좀체로 오리엔트 호텔을 벗어나지 않았다. 근대시의 상가에 자리 잡은 오리엔트 호텔은 그야말로 철벽의 요새였다. 수십 명의 경호원이 몇 겹의 방어벽을 치고 있어서 호텔을 송두리째 폭파해 버리지 않는 한 침투해서 처치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씨가 방을 나가자 김상철이 이한을 돌아보았다.

잠을 자두거라, 날이 밝으면 타운이 시끄러워져서 잘 수도 없을 것이다.

아침이 되자 타운으로 몰려온 경비대 병력은 20개 중대도 넘어보였다. 3천 명이 넘는 경비대가 타운에 깔린 것이다. 검문과 가택 수색에 이골이 난 경비대원들이어서 그들은 타운의 통로부터 빠짐없이 차단하고는 곧 지역을 나눠 수색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수색 위주의 작전이었다. 아침에 세탁소로 나갔던 성씨가 허둥대며 집으로 돌아온 것은 한 시간 만인 아침 10시경이었다. 그는 응접실에 나와 있던 이한과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거리 입구에서부터 샅샅이 가택 수색을 하고 있습니다. 이거, 전에 하던 것과는 다릅니다.

그의 얼굴은 노랗게 질려 있었다.

주택가를 삥 둘러싸고 있어서 마치 그물 안의 고기를 잡는 것 같습니다.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오면서 보았는데 이쪽 골목은 입구만 막고 있었지만 건너편이 언제 끝나느냐에 달렸지요. 이쪽을 시작하면 여기까지 오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김상철이 이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준비해라, 나가자.

지금 말씀입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잠자코 탄띠를 집어드는 것을 본 이한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성씨가 서두르며 방을 나가더니 소리쳐 부인을 불렀다. 며칠 묵는 동안 정성을 다해 시중을 들어주던 여자였다. 모피 슈바는 활동하기에 무겁고 불편했으므로 파카로 갈아입은 후 안에는 접는식 개머리판의 AKMS카빈총을 걸고 주머니에 수류탄 대여섯 개를 넣어 준비를 마쳤다. 이한도 비슷한 차림이었다. 성씨와 둥근 얼굴의 부인이 방으로 들어섰다. 성씨는 손에 한 다발의 지폐를 쥐고 있었다.

이것, 보태 쓰시라고‥‥ 저회들은 조금 모아둔 돈이 있으니 걱정 마시고.

김상철이 돈을 바라보았다. 달러에 루불, 한국 원화에 모서리마다 많은 엔화까지 뒤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나가시면 돈이 필요하실 것 같아서,

김상철이 방바닥에 벗어놓은 슈바를 가리켰다.

저 옷을 옷장에 걸어놓으시지요.

, 그거야 제가 잘 보관했다가.

성씨가 그렇게 말하자 부인은 허리를 굽혀 슈바를 집어 들었다.

성 선생님이 입으세요.

아니, 저는.

슈바 호주머니에 제가 쓰고 남은 돈이 3만 달러쯤 있습니다. 그 돈은 생활에 보태 쓰시고.

김상철은 방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았다.

고맙습니다, 성선생. 그리고 부인도.

성씨의 집을 나온 그들은 골목의 입구와는 반대쪽으로 서둘러 걸어 나갔다. 그러나 그쪽도 경비대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 골목 양쪽의 주택은 조용했고 가끔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흐린 하늘에서는 곧 눈이 쏟아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 기온은 영하 30도 정도였지만 바람은 없다. 앞장서 가던 김상철이 이한을 돌아보았다.

한아,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너는 곧장 가거라,

, 형님.

이한이 선뜻 대답했으므로 김상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 옆에서 어물거렸다가는 쏘아 죽일 테다.

, 형님.

갑자기 앞쪽으로 여자 두 명이 다가왔으므로 그들은 긴장했다. 한인 여자들로 모두 중년이었다. 손에 보따리를 든 그녀들이 스치고 지나가자 곧 두 갈래로 갈라진 골목길이 나왔다. 그리고 차도를 달리는 차량과 거리의 소음이 함께 들려왔다. 입구가 가까워진 것이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는 골목의 양쪽 벽에 등을 붙이고 섰다. 아직 오전이었다.

이한이 머리를 들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내릴 것 같은데요, 형님.

 

 

 

6. 오는 자와 가는 자

보안과장 오세영이 총성을 들은 것은 그가 길가에 세워둔 지프에서 간부들과 함께 지도를 보고 있을 때였다. 총성은 거리 아래쪽에서 울렸는데 한두 정의 발사음이 아니었다. 주위에서는 행인들이 제각기 건물 안으로 뛰어들거나 무작정 이리저리 내닫는 소동이 일어났고 차도에서는 차가 연쇄 충돌하면서 멈춰 섰다.

순식간에 일어난 혼란이었다. 그의 주위에 서 있던 간부들 중 하나는 소리쳐서 근처의 경비대원을 모았고 다른 하나는 무전기를 들고 악을 썼으며 평소에 신중한 사람으로 알려졌던 한 사람은 권총을 빼들더니 얼굴을 굳힌 채 오세영만 바라보았다.

오세영이 근처의 부하들을 인솔하고 현장으로 달려간 것은 그로부터 5분 쯤 후였다. 한인 거주지의 뒤쪽으로 주택가가 끝나는 지점이었는데 그곳은 이미 개 한 마리 다니지 않는 텅 빈 거리가 되어 있었다. 차도에는 어지럽게 차량들이 뒤엉켜 있었고 경비대원 세 명이 보도에 쓰러져 있다. 나머지 경비대원들은 모두 벽에 몸을 붙이고 서서 앞쪽의 빌딩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1개 중대가 넘는 200명가량의 부하들을 이끌고 온 오세영을 보자 경비대원 하나가 서둘러 다가왔다. 총알이 스쳤는지 한쪽 뺨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두 놈이 저 빌딩 안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과장님.

김상철이냐?

그가 다그치듯 묻자 사내는 당혹한 표정이 되었다.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다. 그놈들은 저쪽 골목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대원들을 향해 무조건 쏘아대면서 튀어나왔다니까요.

오세영은 빌딩으로 시선을 돌렸다. 6층 건물로 1층은 슈퍼였고 2층은 직업소개소, 3층부터는 여러 간판이 어지럽게 붙어 있다. 간부 한 명이 서둘러 다가왔다.

건물은 완전히 포위되었습니다, 과장님.

김상철과 그 부하로 추정되는 두 명의 사내가 숨어들었다는 건물의 길 건너편에 오세영은 순찰차를 방패 삼아 진을 쳤다. 건물의 현관으로 진입하려던 경비대원들이 안쪽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세 명이 부상당한 후부터 양쪽은 이제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건물 안에는 도대체 몇 명이나 있는 거야?

오세영이 묻자 옆에 선 부하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건 아직, 아래층 슈퍼에선 사람들이 모두 빠져 나왔습니다만 2층부터는.

2층부터 6층까지 모두 사무실이었으니 어림잡아 백 명은 될 것이다. 그들은 모두 무장한 두 괴한에게 볼모로 잡힌 듯 아직 한 사람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혀를 찬 오세영이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저 건물에 들어 있는 회사에 모두 전화를 걸어. 혹시 전화를 받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두 명이 건물 전체를 장악하기는 힘들 테니까.

그는 부하가 들고 있는 마이크를 건네받아 입에 대었다.

들어라, 난 경비대 보안과장이다. 안에 있는 두 사람은 들어라.

조용한 거리에 오세영의 목소리가 찌렁찌렁 울려 퍼졌다. 거리의 구석마다 순찰차나 엄폐물을 의지한 경비대원들의 총구가 건물로 겨누어져 있었다. 행인들은 모두 근처의 건물 안으로 대피한 상태여서 가끔 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가 경비대원의 주의를 받고 다시 들어간다. 오세영이 말을 이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목숨은 보장하겠다.

그 순간 건물의 6층 창문에서 섬광이 번쩍이더니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마이크를 쥔 채 오세영이 순찰차의 문짝을 방패 삼아 엎드리자 날아온 총탄이 순찰차의 유리창과 경고등을 산산조각 내었다. 6층은 60, 70평쯤 되는 층 전체를 수입상 사무실이 차지하고 있었다. 사무실 한쪽에 갖가지의 통조림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식품 수입상이다. 방 안에는 백 명 가까운 남녀가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이 한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김상철을 알고 있었다. 그 중에는 김상철과 시선이 마주치자 눈인사를 하는 사내도 있었다. 이한은 2층의 계단 입구를 지키고 있었으므로 김상철은 혼자서 백여 명의 인질을 잡고 있는 셈이었다. 아래쪽 거리로 자동소총을 쏘아댄 김상철은 벽에 등을 기대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제각기 앉거나 서서 김상철을 바라보고 있던 인질들이다. 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인 방 안에는 잠시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생을 시켜드려서 미안합니다.

김상철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었다.

여러분을 해치지는 않습니다. 고생이 되시겠지만 조금 참아 주십시오.

그러나 안쪽에서 사내 하나가 나섰다. 40대쯤으로 보이는 양복 차림의 사내였다.

김사장님. , 아시지요? 유리 수입상인 황덕규올시다. 이 건물 4층에 사무실이 있지요.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출신 조선족으로 1년쯤 전에 근대리아에 들어온 사내였다. 러시아에 있을 때부터 유리사업을 했던 그는 근대리아에 들어와 크게 사업을 늘렸는데 장인규가 밀어준 때문이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성의껏.

몸이 아프거나 나이드신 분, 또는 어린아이를 한쪽으로 모아 주시오, 황사장.

총을 세워 든 김상철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드릴 수 있지만 내 눈을 속인다면 용서하지 않겠소. , 황사장. 꼭 내보낼 사람을 골라보시오.

몸을 돌린 김상철은 유리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경비대는 더욱 증강되어 있었고 이제는 순찰차 대신으로 철판이 두꺼운 호송버스가 세 대나 가로로 놓여 있어서 그 너머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얼굴이 어른거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마이크가 다시 울렸다.

김상철, 들어라. 넌 포위되었다. 인질을 풀어주고 자수해라.

순간 아래층에서 폭음이 울리면서 현관의 문짝이 차도까지 날아갔고 유리 파편과 나무 조각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이한이 수류탄을 던진 모양이었다. 김상철이 방을 가로질러 문을 열고는 복도를 향해 소리쳤다.

한아? 무슨 일이냐!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이어서 복도 아래쪽은 계단이다.

별일 아닙니다! 누가 현관 앞을 어른거려서.

이한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올라왔다. 몸을 돌린 김상철의 앞으로 황덕규가 다가와 섰다.

김사장님. 다섯 명을 골랐습니다. 환자가 둘, 노인이 둘, 집에 급한 일이 있다는 사람이 하납니다.

유리의 품질검사를 하듯 판판하게 추려낸 모양이었다.

 

타운 외곽의 헬기장에 헬기가 착륙하자마자 유장석과 이대각은 얼른 안전벨트를 풀었다. 두 사람 모두 굳어진 얼굴이어서 수행해 온 보좌관은 입도 열지 못하고 있다.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오르자 유장석이 문득 머리를 돌려 옆자리의 이대각을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짓을 했어, 당신은. 경솔했단 말이야.

이대각이 턱을 든 채 대꾸하지 않았으므로 유장석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당신이 책임지고 다시 돌려보내. 그 여자를 끌어들이지 말란 말이야.

이대각이 창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며칠 전부터 박미정은 하바로프스크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그레고리를 통하여 김상철에게 박미정이 와 있다는 연락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레고리로부터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김상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이 사건이 터진 것이다. 찌푸린 얼굴의 유장석이 다시 말을 이었다.

파리에서 인질로 잡혀 홍콩까지 끌려갔다가 나온 여자야. 김상철이 겨우 구해냈지만 죽을 고생을 했을 거다. 그런데 또 그런 짓을 하게 하다니. 당신은 지독한 사람이야.

아니 내가 어쨌다고 그러십니까?

이대각이 턱을 치켜들었다. 두 눈은 똑바로 유장석을 향해 있다.

난 부탁을 했단 말입니다. 하바로프스크로 상철이를 데려와야 한다는데 그 여자도 동의를 했단 말이오.

이번에도 인질 노릇이란 말인가?

뭐가 인질입니까? 자원한 일인데.

그러자 유장석이 어금니를 물고는 눈을 부라렸다.

그렇다고 김상철이가 졸졸 따라 나올 것 같았단 말이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되든 안 되든 행동으로 옮겨봐야 할 것 아니오?

이대각도 지지 않는다.

말로만 생색내는 것보다 백번 낫습니다.

그 여자가 노출된다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이 멍청아.

그레고리가 철통같이 지키고 있소.

이제 끝났어. 상철이를 남자답게 죽게 두는 것이 최선이다.

상대를 하지 않겠다는 듯이 유장석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이대각이 머리를 저었다.

난 끝까지 해볼 거요,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넌 제정신이 아니다. 회사를 망칠 놈이야.

이대각이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조금 전에 회장님께 보고하니까 그냥 쏴 죽이도록 놔두라고 합디까?

유장석은 이제 입을 다물고는 머리까지 돌렸다. 우재환은 이종남과 함께 모처럼 타운에 나와 있었다. 그들은 한인 거주지가 비스듬히 내려다보이는 서울 호텔의 1층 객실 안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직선거리는 200미터도 되지 않았으므로 김상철이 들어가 있는 건물과 그 주변이 환히 보였는데도 그는 손에 망원경까지 쥐고 있었다.

꽤 길어질 것 같은데요. 조금 전에 백 명분의 침구가 올라갔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종남이 말했다. 그는 현장 근처에 있는 부하로부터 수시로 보고를 받고 있는 것이다. 우재환이 쓴웃음을 지었다. 1시간 전에는 백 명분의 저녁식사가 올라갔던 것이다. 김상철이 인질을 잡은 지 8시간째로 오후 7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긴 급할 것 없지. 여유 있게 저놈이 지칠 때를 기다리는 거야. 서두르다가는 인질이 다친다.

망원경을 내려놓은 우재환은 창틀에 내려놓은 보드카 병을 집어 들었다.

백 명이나 되는 인질을 두 놈이 감시하기에는 벅찰 것이다. 아마 오늘밤 아니면 늦어도 내일이면 상황이 끝날 거야.

이미 밖은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지만 건물은 사방에서 비추는 서치라이트로 그림자도 생기지 않는 상황이다. 이종남이 입을 열었다.

유장석과 이대각이 지금도 경비대와 같이 있습니다. 아마 김상철이를 설득하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요.

머리를 끄덕인 우재환이 술병을 이종남에게 건네주었다.

김상철이가 순순히 손들고 나을 것 같았으면 아예 이런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어젯밤 북한의 최태호를 습격한 것은 시바다의 부하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알고 있어.

다리를 창틀에 걸쳐놓은 우재환이 팔장을 꼈다.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다. 시바다는 그 일을 김상철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했어.

나도 김상철이 그렇게 빨리 반응할 줄은 몰랐다. 곧바로 시바다 부하들의 숙소를 습격하는 바람에 북한이 함정을 찾은 거야.

우재환이 술병을 건네받고는 이제 병째로 두어 모금을 삼켰다.

바로 저것이 배경 없는 약자의 말로야, 자네도 잘 기억해 둬.

턱으로 앞쪽의 건물을 가리킨 우재환이 말을 이었다.

저 건물 속의 인간 김상철이 제거되는 순간부터 근대리아는 열강의 구획정리가 정착되어 갈 것이다. 저놈은 현대판 돈키호테였다. 아니, 강회장이 그 원조이고 저놈은 산초이지.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강회장은 근대리아를 임차할 때 오호츠크 해협만 건너면 일본이고 캄차카 반도 건너편이 미국이라는 것을 신중히 고려했어야 했어. 지근거리에 첨단산업이 발달된 단일민족의 거대한 지역이 생성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대단한 위협이란 말이야.

이종남이 머리를 끄덕였다. 우재환은 미국 태생으로 미국 시민권을 가진 CIA 요원이다. 그가 미국 입장으로 근대리아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과는 대조적인 입장이다. 그들은 동북아에 일본과 미국을 가로막는 러시아령 견제지역이 생긴다는 것에 호의적일 것이다. 우재환이 망원경을 다시 눈에 대었다.

가만, 근처에 시바다나 일본 측 무리들이 있을 텐데 말이야.

그는 이제 같은 입장의 구경꾼이 되어 있을 시바다 일행을 찾고 있었다. 10시가 넘자 대치하고 있던 양쪽의 분위기는 소강상태가 되어 있었다. 인질들은 대부분 사무실 바닥에 침낭을 깔고 누워 있었고 방안은 조용했다. 사무실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는 문 옆의 복도에 기대앉은 김상철은 피우고 있던 담배를 복도 바닥에 비벼 껐다. 복도의 옆쪽은. 바로 벽이었고 세 개의 유리창이 나란히 있었는데 아래층도 모두 같은 구조였다. 경비대가 뒤쪽으로 기어올 수도 있는 것이다. 김상철은 무를 위에 올려놓은 AKS-74U 자동소총을 쥐고는 안쪽의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깨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와 시선을 맞추고 있다. 처음보다는 불안감이 가신 얼굴들이었다. 잠시 후 안쪽에서 수선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황덕규가 대여섯 명의 남녀를 인솔하고 다가왔다.

김사장님, 화장실에 가는 사람들입니다.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들은 복도 끝의 화장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한아, 화장실 가는 사람들이다.

아래층에 있는 이한에게 그가 소리쳤다. 이한은 지금 그와는 반대편인 현관 쪽을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다행히 건물은 좌우가 막힌 구조여서 둘이서 전후를 나누어 맡고 있었지만 허점이 많다. 황덕규가 주춤거리더니 바닥에 앉았다. 그와 이야기를 하려고 나온 모양이었다.

김사장님,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외람됩니다만 무슨 방법을 쓰셔야 .

말을 멈춘 그가 조심스럽게 김상철의 눈치를 살폈다.

사람들은 지금 김사장님보다 경비대를 더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무작정 쳐들어온 그들이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대는 것이 두려운 것이지요. 그래서 김사장님이 무슨 방법을 내시면 아마 적극적으로 협조할 텐데요.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김상철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이곳에서 개죽음당하지는 않을 거요.

그렇다면 하는 얼굴로 황덕규가 시선을 주었으나 김상철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시간에 도로 건너편의 상황차에서 경비본부장 소명일과 오세영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김상철도 이대로 버티고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아마 곧 움직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세영이 손바닥만한 차창을 통해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놈이 아직 어떤 요구조건도 내놓지 않는 것이 그 증거지요. 놈은 지금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첫째로 인질들을 한꺼번에 내몰고 섞여 뛰어나오는 방법이지요. 밤인데다 겁을 먹은 인질들이 무작정 달려 나오면 쉽게 제지하지를 못합니다. 그것에 대비해서 모든 길에 차단막을 쳤고 세 겹의 경비망을 만들어놓았지요. 인질들이 쏟아져 나오면 엎드리라고 할 겁니다. 김상철이 위협을 하겠지만 곧 엎드리게 되는 것이 보통이지요.

「………」

몇 사람의 희생은 감수해야 할 겁니다.

다른 방법은?

보통 하는 방법으로 차량편이나 항공기를 요구하고 인질들과 함께 탈출하는 방법이 있지요.

그러자 소명일이 머리를 저었다.

그것은 들어줄 수가 없어.

놈도 우리 입장을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요구가 없지요.

소명일이 머리를 돌려 건물을 바라보았다. 건물에 진입하려고 세 번 시도를 했다가 다시 경비대원 한 명이 죽고 일곱 명의 부상자를 냈던 것이다. 소명일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본국으로부터도 지시를 받았어, 사건을 끝내라고, 방법은 나에게 일임을 했다.

「‥‥‥‥」

오늘밤은 기다렸다가 내일 날이 밝으면 공격하기로 한다. 인질 희생도 각오하고 말이야.

차의 뒤쪽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그들은 머리를 돌렸다. 차의 문이 열리면서 행정위원회 부위원장 이대각이 안으로 들어섰다.

본부장, 내가 김상철이를 만나겠소.

그가 대뜸 말하자 소명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작자는 까다로운 사내인 것이다.

안 됩니다, 위험해요.

방송이나 해주시오. 이대각이가 들어간다고, 나 혼자 말이오.

그가 흘겨보는 바람에 오세영은 벌렸던 입을 다시 닫았다.

본부장, 당신이 직접 방송을 해주시오. 내가 들어가서 설득할 테니.

그로부터 10분 후, 소명일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자 건물을 포위하고 있던 수백 명의 경비대는 일제히 긴장을 했다. 다시 한 번 행정위 부위원장 이대각이 단독으로 건물로 들어갈 것이라는 말이 끝나자 이대각이 선뜻 거리로 나섰다. 서치라이트가 대낮같이 비치는 거리에 선 그는 힐끗 건물을 올려다보고는 휘적이며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가 20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걷는 동안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고는 숨을 죽였다. 이대각은 수백 명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정문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이대각이 처음 만난 사람은 2층의 계단에서 기다리던 이한이다. 자동소총을 겨눈 채 다가온 이한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6층으로 올라가세요.

그가 턱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잠시 후에 이대각은 6층의 복도에서 김상철을 만났다. 인사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의 표정은 딱딱했다.

투항해라. 개죽음당할 필요가 없지 않아?

이대각이 머리 하나 정도가 큰 김상철을 올려다보았다.

우선 살고 보자, ? 저런 개자식들 손에 죽느니 참고 살아야지. 안 그러냐?

어떻게든 빠져나갈 겁니다.

힐끗 사무실 안쪽에 시선을 주었던 김상철이 소리 죽여 말했다.

앉아서 죽지는 않을 겁니다.

글쎄, 내 말은 그것이 위험하단 말이여. 저놈들도 허수아비가 아니란 말이다.

이대각이 혀를 찼다.

골목에는 트릭이나 차단막을 쳐서 빠져나갈 길을 막았고 건물마다 경비대가 들어 있어, 너희 둘이서는 도저히 도망쳐 나갈 수가 없다.

투항하지는 않습니다, 부위원장님.

이대각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가 생각난 듯 그에게도 권했다. 그들은 제각기 한숨처럼 연기를 쏟아내었다.

, , 박미정 씨 말인데.

이대각이 힐끗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내가 서울 가서 만났거든, 사정 이야기를 하고 도와달라고. 그랬더니 널 찾아서 지금 하바로프스크에 와 있어.

「‥‥‥‥」

그레고리가 지금 보호하고 있어.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요즘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않습니다.

내가 부탁한 거야. 어떻게든 이곳에서 끌어내려고. , 박미정 씨도 도움이 되겠다면 오겠다고 해서.

그럴 필요는 없다고 전해주십시오.

낮은 목소리로 김상철이 말했다.

그 여자는 어쩔 수 없이 따라왔을 겁니다. 내일이라도 돌려보내세요. 그곳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곳이니까.

글쎄, 그거야.

이대각이 길게 한숨을 내리쉬었다.

네 코가 석자인데 지금 누구 걱정하게 되었어? 어때? 날 따라 나가지 않을 거냐?

안 나갑니다.

내가 도와줄 일은 없어? 그레고리나 송길수한데 연락이라도 할까?

내버려 두십시오.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요.

제기랄 놈의 인생.

담배를 복도 바닥에 내던진 이대각이 구듯발로 비벼 끄더니 손을 내밀었다.

악수나 한번 하자.

김상철의 손을 움켜쥔 이대각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침만 삼키고는 손을 떼었다.

, 간다. 다른 걱정 말고.

어깨를 늘어뜨린 이대각이 복도의 끝쪽으로 다가가자 김상철은 몸을 돌렸다. 김상철의 설득에 실패한 이대각은 건물을 나오는 길로 경비대의 간부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러나 그들은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은 이대각의 표정에서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이대각은 그때까지 차 안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유장석에게로 가더니 잠시 후에 그들이 탄 승용차는 현장을 떠났다. 다시 긴장 속의 대치 상태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리에는 찬바람만 휘몰고 지나갈 뿐 깊은 정적에 묻혀 있었다. 수은주는 영하 40도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칼날 같은 바람으로 인한 체감온도는 아마 10도쯤 더 아래일 것이다.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방으로부터 조명을 받고 있는 6층 건물을 조용했고 그 주위를 둘러싼 수십 대의 차량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순찰차마다 경비대원이 들어차 있었고 건너편 건물의 창문 안에도 사람들의 머리가 보인다. 순찰차 24호는 6층 건물의 현관과 정면으로 세워져 있었는데 이것은 우연이었다. 현장에 늦게 도착한 24호는 배열하는 과정에서 정문과 정면이 된 것이다. 차창에서 도로만 건너면 정문이었고 직선거리는 35미터 정도이다. 이문재는 M-16의 총신을 바꿔 쥐고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차는 가로로 세워져 있어서 조수석에 앉아 정문을 바라보고 있는 박기주와 나란히 있는 셈이었다.

어이, 히터를 조금 줄여.

이문재가 말했으나 박기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숨이 막힌단 말이야.

다시 그가 소리치듯 말하자 박기주가 힐끗 시선을 주었다.

난 다리가 시리단 말이다.

그 순간이다. 이문재는 문짝이 떨어져 나간 건물의 현관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탈출이다. 예상했던 일이었으나 그는 벌떡 몸을 세우다가 머리로 차의 지붕을 박았다.

비상! 비상!

오세영이 마이크에 대고 고함을 쳤을 때는 인질들이 이미 도로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밤거리에 찌렁찌렁한 마이크 소리가 다시 울렸다.

엎드려! 모두 길에 엎드려!

그리고는 곧 공포탄이 발사되었다. 순찰차에서, 주위의 건물에서 쏟아져 나온 경비대원들이 모두 그들을 겨누고 있다.

엎드려라! 엎드리지 않으면 사살한다!

오세영이 악을 썼고 이제는 십여 정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그러나 이제 백 명 가까운 인질들은 한 무리가 되어 곧장 도로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뒷모습에 총을 겨누고 있던 이문재는 다시 총구를 하늘에 대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요란한 총성이 귀를 때렸고 그 순간 그는 인질 서너 명이 길 위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눈을 치켜뜬 이문재는 총구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오발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인질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일부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됐다!

그것을 본 오세영이 소리쳤다. 인질들이 흩어진 장소는 아직도 포위망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서치라이트는 거리를 대낮같이 밝히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사살한다!

오세영이 악을 쓰듯 소리치자 산산히 흩어졌던 인질들의 일부가 포위망 바로 앞까지 다가갔지만 움직임을 멈추었다. 오세영은 다시 마이크를 입에 대었다. 그때 어디선가 폭음이 났다. 소리가 난 쪽으로 머리를 돌렸던 그는 눈앞의 순찰차 한 대가 밤하늘을 진동시키면서 폭발하는 것을 보았다. 무의식중에 순찰차를 방패 삼아 엎드린 그는 다시 연속적으로 들려오는 폭음과 고함소리, 비명을 들었다. 폭음이 들려오자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김상철이 번쩍 머리를 들었다. 그들은 아직 건물의 2충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애초부터 인질들 틈에 끼어서 거리로 뛰쳐나갈 생각은 없었던 김상철이다. 그러나 인질들은 그가 자신들 사이에 끼어 있는지 안다. 그 인질들은 김상철이 협박한 대로 한 무리가 되어서 도로를 곧장 돌파하려고 했다.

가자!

김상철이 소리치며 계단을 뛰어내리자 이한도 뒤를 따랐다. 거리는 폭음과 총성으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아직도 순찰차나 경비대를 향해 수류탄이 던져지고 있었는데 뒤쪽의 어둠 속이다. 그리고 한두 곳이 아닌 여러 군데에서 경비대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앞쪽만 경비하고 있었던 경비대가 극도의 혼란 상태가 된 것은 당연했다. 엎드려 있거나 멈춰 섰던 인질들이 아우성을 치며 흩어지고 있었다. 김상철은 단숨에 거리를 가로질러 불타는 순찰차의 잔해를 뛰어넘었다. 그 뒤쪽의 골목을 가로막은 트럭 한 대도 화염을 품고 있었다. 그들이 트럭의 뒷부분을 돌았을 때 가까운 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거리는 폭음과 총성으로 떠나갈 듯했으므로 내처 골목 안으로 뛰어든 이한은 앞장서 가던 김상철이 휘청이는 것을 보았다.

형님!

소리치며 다가온 이한이 팔을 쥐었으나 김상철은 다시 발을 떼었다.

나는 괜찮다.

그 순간 앞쪽에서 인기척이 났으므로 이한이 총을 겨누었다. 그가 미처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다급한 러시아어가 들렸다.

쏘지 마시오, 우리요!

그리고는 사내 세 명이 불쪽 앞으로 다가왔다.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하바로프스크에 있던 그레고리의 부하들이었다. 사내 한 명이 주머니에서 신호탄을 꺼내들더니 밤하늘을 향해 쏘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발사된 신호탄이 거리의 상공으로 솟아오르자 그 순간 폭음이 뚝 그쳤다. 그레고리가 부하들을 이끌고 타운에 도착한 때는 밤 9시였다. 하바로프스크에서 김상철의 소식을 들은 것이 1230분경이어서 그가 점심을 시작할 때였다. 김상철이 인질을 잡고 농성을 하고 있다는 페로프의 연락은 충격이었다. 마피아의 근대리아 책임자인 페로프는 김상철을 도와줄 만한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마르첸코의 파트너가 되어 있는 그레고리에게 수시로 김상철의 동향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연락을 받자마자 그레고리는 서둘렀다. 육로로 가는 사이에 상황이 끝날지도 몰랐고 국경의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 그가 열두 명의 부하와 함께 러시아 극동군 소속의 헬기에 오른 것은 오후 330분이었다. 헬기가 출발하자 근대리아 경비대는 러시아 극동군 소속 헬기 두 대가 근대리아 상공을 지나 오호츠크해 연안의 민스크로 간다는 전문을 극동군 사령부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사령부의 참모 볼코프 소장이 협조해 준 일이었다. 타운을 빠져나온 세 대의 지프는 맹렬한 속도로 평원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곳이어서 차체가 덜컹이며 튀어 올랐고 때로는 좌우로 요동을 쳤다.

속력을 줄여라!

그레고리가 고함을 쳤으므로 지프는 속력을 뚝 떨어뜨렸다. 그러자 뒤쪽의 지프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는 이쪽의 뒷부분을 가볍게 들이받았다. 타운을 빠져나온 지 아직 10여 분밖에 되지 않았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옆에 앉은 이한이 김상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나 머리를 숙인 김상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 안은 불빛이 없어 어두웠고 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다. 헬기에서 내린 그레고리가 타운에 들어온 것은 11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페로프가 차량을 대기시켜 두고 있었고 경비대는 김상철에게만 온 신경을 쏟고 있어 잠입하기가 수월했다. 그러나 막상 포위된 상황을 보자 그레고리는 난감해졌다. 이쪽의 인원으로 경비대를 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짓이었고 그렇다고 뚫고 들어갈 방법도 없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근대리아에 기반을 둔 페로프는 돌려보낸 처지였던 것이다. 결국 그레고리가 생각해 낸 방법이 경비대의 뒤쪽을 공격하여 혼란에 빠뜨린다는 것이었다. 김상철과 연락을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고 시간이 흘러 날이 밝아오면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건물에서 인질들이 쏟아져 나왔다. 예상 밖의 일이라 잠시 당황했던 그레고리는 인질들이 멈춰 서자 공격을 했던 것이다. 이한이 다급하게 장갑의 내피를 뽑아내더니 김상철의 아랫배에 가져다 대었다. 이맛살을 찡그린 채 이를 악물고 있던 김상철이 그레고리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고맙다, 그레고리.

반대쪽에 앉은 그레고리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더니 불을 켰다.

형님.

이한이 김상철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차가 아직도 진동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얼굴도 따라 흔들리기는 했지만 두 눈은 감겼고 입가에 피가 흘렀다.

이거, 야단났다.

아래쪽으로 라이터를 가져다 댄 그레고리가 낮게 외쳤다. 아랫배를 누르고 있는 김상철의 한쪽 손은 피에 흠뻑 젖어 있었던 것이다.

형님.

이한이 다시 다급하게 부르자 김상철이 눈을 떴다. 아랫배에 총을 맞은 것이다. 골목을 빠져나와 세 구역을 달려 차에 오를 때까지 김상철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었다.

괜찮아, 참을 만해,

헬리콥터에 응급 장비가 있을 겁니다.

그레고리가 소리치듯 말하고는 운전사의 어깨를 쳤다.

달려라! 시간이 없다.

김상철을 부축한 그들은 초조한 듯 앞쪽을 바라보았다. 지프는 짙은 어둠에 덮인 평원 위를 요동을 치며 달려가는 중이었다.

 

거리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6층 건물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건물은 물론 자동차, 도로까지 파괴되었고 아직도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는 건물도 있다. 마치 전쟁을 치르고 난 것처럼 보였는데 그곳에서 몇 걸음만 비껴나면 멀쩡한 거리가 나타난다. 차도에는 자동차 대열이 줄을 이었고 인도의 행인들은 제각기 바쁜 듯한 모습이어서 한민수는 잠시 양쪽을 번갈아 보며 서 있었다. 밝은 햇살이 비치는 아침 930분경이었다.

피해가 대단하군요.

한민수가 말하자 유장석이 딸려보낸 행정청 간부가 한걸음 나섰다.

이쯤은 일주일이면 복구됩니다.

근대건설에 근무했다는 40대 초반의 사내였다.

작년 폭동 때는 이보다 더 했지요. 그때도 열흘 안에 복구했습니다.

어젯밤 인명 피해는 얼마나 됩니까?

예 그것이 …….

사내가 망설이듯 여러 번 눈을 깜박였다. 아침 뉴스에는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만 보도되었던 것이다. 언론도 장악하고 있는 운영위원회의 규제였다.

경비대원이 10여 명 죽고 그 이상으로 부상당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뒤에서 공격해 온 김상철의 부하들은 세 명이 죽었습니다.

사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거기에다 인질로 잡혔던 사람들도 두 명이 죽고 세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한민수가 눈을 크게 떴다.

희생자가 엄청난데요.

햇살은 밝았지만 아직 영하 20도에 가까운 기온이다. 사건 현장은 경비대원에 의해서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바깥쪽만 돌다가 차에 올랐다. 차 안은 따뜻했으므로 한민수는 어깨를 폈다.

김상철의 행방은 찾지 못했습니까?

, 못 찾았습니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는데.

한민수가 혼잣소리처럼 말하자 사내는 정색을 했다.

김상철의 상대는 우리가 아닙니다, 사장님. 그러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상대가 누구란 말입니까?

다른 조직들이지요.

그렇다고 해도 이런 전쟁판이 계속되면 경기에 영향이 있지 않겠습니까?

, 하지만 .

사내가 말을 멈추고는 헛기침을 했다. 근대와 대동이 근대리아 개발에 동업관계가 되었다고 해도 그는 아직 경계심을 풀지 않는 눈치였다. 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으므로 한민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근대리아의 관리들은 대부분 김상철에 대해서 호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차가 근대시의 행정청에 도착한 것은 11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으므로 사내와 헤어진 한민수는 곧장 유장석의 방으로 들어섰다. 유장석은 이대각과 함께 있었다.

사건을 여러 번 겪은 탓인지 타운은 놀랍도록 정상적입니다. 감탄했습니다.

자리에 앉은 한민수가 말하자 그들은 금방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한민수에 대한 호의가 웃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닷새면 복구될 거요. 지난번 폭동 때는 그보다 몇 배나 더 심했지만 일주일 만에 복구했지요.

한민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 서울에 돌아가면 곧 손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그들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성급한 이대각이 입을 열었다가는 겨우 참고 닫는다. 한민수가 말을 이었다.

김상철의 구명이 불가능하다면 제3국에서라도 마음 놓고 살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

김상철이 북한과 밀접한 관계라는 것이 본래 사건의 시발이었지만 이제는 살인 혐의뿐이지 않습니까? 그가 희생자라는 증거지요.

한민수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왕 근대와 대동이 동업 관계가 된 상황이니 저도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전면에 나서지는 않겠습니다. 조금 미묘한 관계가 있어 놔서 쓸데없는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마침내 참다못한 이대각의 입이 열렸다.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동안의 사연을 말하자면 책 몇 권을 쓸 정도인데. , 김상철이는 본래가 .

유장석이 헛기침을 했으나 말을 그칠 이대각이 아니다.

그놈한테 우리는 빚을 졌지요. 그리고 솔직히 처음 살인 혐의를 받은 것도 김상철이가 한 것이 아니라 이한이라는 부하가 저지른 짓이오. 우리는 자백까지 받아놓았습니다.

다시 유장석이 입맛을 다셨지만 이대각은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일이 벌어질 대로 벌어져서 그놈도 자포자기를 한 모양이오, 그래서 내가 그놈을 끌어내려고 서울에 있는 옛날 애인까지 하바로프스크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제길, 상황이 이렇게 되는 바람에.

 

러시아 극동군 사령관 로스토프 대장이 오호츠크 해안의 해군기지인 마가단 기지 사령부에 전화를 건 것은 오후 2시였다. 기지 사령관 보로진 대령이 전화를 받았다.

어때?

로스토프가 대들 묻자 보로진의 목소리가 송화기를 타고 커다랗게 울려 나왔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수술 중입니다. 사령관 각하.

아직도 끝나지 않았단 말인가?

, 각하. 너무 위험한 상태라서.

상황을 계속 보고하도록, 알았나?

, 각하.

전화기를 내려놓은 로스토프가 의자를 돌려 볼코프를 바라보았다.

미국이 아마 내 통화를 들었겠지?

일본 정보국도 들었을 것입니다, 각하.

그렇다면 근대리아 경비대도 들었을 가능성이 있군.

점심을 먹으면서 보드카를 서너 잔 마신 참이라 로스토프는 적당히 기분 좋은 상태였다.

그들이 아직 눈치채지는 않았겠지만 앞으로는 암호 전문을 쓴다. 기지에 연락을 하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볼코프가 옆에 놓인 전화기를 들더니 짧게 지시하고는 내려놓았다. 근대리아가 위쪽에 자리 잡은 후부터 미국과 일본의 정보 위성이 좌표를 수정해 시베리아 상공을 돌고 있었고 근대리아를 중심으로 오가는 비밀 통신량이 부쩍 늘어나 있었다.

상태가 나아지면 하바로프스크로 이송해 오도록 해. 그놈은 우리에게 중요한 인물이다.

로스토프가 붉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물론 그놈은 선택할 여지가 없지만 말이야.

그레고리가 김상철을 싣고 날아간 곳은 오호츠크 해안의 마가단 기지였다. 그곳이 병원이 있는 제일 가까운 곳이었지만 근대타운에서는 동쪽으로 700킬로미터의 거리였다. 마가단 해군 기지는 블라디보스토크 같은 부동항이 아니라 일 년 중 8개월이 얼음에 덮이는 곳이어서 미사일 부대와 해안경비를 맡은 1개 부대만이 있는 전술기지였다. 그곳에 중상을 입은 김상철과 그레고리의 일행이 극동군 소속의 헬기로 나타나자 기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도 기지 사령관 보로진은 사령부가 김상철을 특별 취급하는 이유를 궁금해 하고 있을 것이다

코마노프가 근대리아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하면 남은 2년 임기를 다 채우지도 못할 것이다.

의자에 등을 기댄 로스토프가 넓은 어깨를 폈다.

다음 달 초에 열리는 중앙회의에서 근대리아 문제가 결정이 된다.

근대리아 문제는 곧 극동군 사령관인 로스토프의 몫이었다. 이제까지 모스크바 정부에서 정책적인 방법으로만 근대리아를 운용해 온 결과가 이미 중앙위원회에 보고되어 있었고 그것을 증빙할 자료는 모두 로스토프가 갖고 있는 것이다

 

하바로프스크의 인투리스트 호텔 안, 커피숍에 들어선 이대각은 곧 창가의 자리에 앉아 있는 박미정을 찾아냈다. 이대각이 다가가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셨다. 스웨터에 바지 차림으로 화장기가 없는 파리한 얼굴이었고 시선은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길이 미끄러워서 조금 늦었습니다.

이대각의 목소리는 컸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그녀의 방에 전화를 했던 것이다. 자리에 앉은 그가 기다랗게 숨을 뱉아냈으므로 박미정은 몸을 굳혔다.

근대리아 사건이 이곳 뉴스에 났다니, 대충은 알고 계시지요?

박미정이 머리를 끄덕였다.

,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

김상철이는 다시 종적을 감췄습니다.

경비대는 아직 그의 행적을 모릅니다. 지금 타운과 근대시를 샅샅이 뒤지고 있지만 이미 근대리아를 떠났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는 의자를 당겨 테이블에 다가앉았다.

인질을 잡고 있는 그놈한테 내가 설득하러 갔었지요. 바보 같은 짓이었어요. 날 따라 나왔다면 큰일 날 뻔했다니까. 박미정 씨 이야기도 했습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기다린다고, 그랬더니 이곳은 위험하니 서울로 돌아가라고 합디다. 그 상황에서도 그놈이 날 나무라더라니까. 박미정 씨가 억지로 끌려왔다는 거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말도 맞는 것 같고.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머리를 든 박미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그 사람한테서 뭘 기대하고 온 것이 아니었어요. 저를 어떻게 이용하시든 그 사람을 구해내는 데 도움이 된다면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젊은 놈들 중에는 그런 놈이 간혹 있지.

불쑥 머리를 든 이대각이 말했다.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 것이 진짜 사나이라는 의식 말이야. 아직 덜 떨어진 놈일수록 증상이 심한데, 김상철이가 그런 놈이오. 하지만 분명히 가슴 한구석이 든든할 거요, 박미정 씨가 찾아왔다는 것이 말이지. 그래서 난 그 이야기를 해준 것을 지금도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위원장님은 참 좋은 분이세요.

박미정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저한테는 신경 쓰시지 않아도 돼요. 그럼 저는 그만 서울로 돌아가겠어요. 그 사람 말대로.

지난번 파리 사건도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되는 모양입디다.

「‥‥‥‥」

난 솔직히 박미정 씨의 안위 걱정까지는 못했소. 그저 움직이고 보는 성격이어서,

박미정은 그의 말을 들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흐린 날씨여서 아직 이른 오후였지만 거리는 그늘에 덮여 있었고 인도를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두터운 방한복 차림으로 움츠린 모습들이었다. 머리를 돌린 박미정이 이대각을 바라보았다.

, 그에게 어떤 희망이 있을까요? 말하자면 저어 .

있어요.

이대각이 대뜸 말을 받았다.

지금 추진 중이오. 한국은 솔직히 어렵고, 근대리아도 곤란한 입장이니 제3국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마침 발 벗고 나서준다는 든든한 배경도 생겼고.

그러나 그 주인공인 김상철의 행방도 아직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 일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의 말소리가 조금씩 낮아져 갔다.

그놈이 해결해야 될 일이 조금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상대가 원체 덩치가 커 놔서.

 

시바다는 위조지폐를 회수할 목적으로 장인규를 친 것이다. 그리고 놈들은 그것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이금철이 앞에 앉은 최태호와 조덕산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고속도로에서 우리를 습격한 것도 사건의 초점을 흐리게 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던 위폐가 언제 탄로가 날지 불안했을 테니까.

그날 밤, 김상철이 최태호에게 300만 엔의 행방을 추궁했던 전화의 내용은 이미 경비대의 감청반을 통해 우재환의 조직과 시바다에게까지 전해졌을 터였다. 그래서 불안해진 시바다는 김상철의 북한에 대한 의혹을 계산에 넣고 최태호를 습격했던 것이라고 이제 그들은 추론하고 있었다. 신흥세력인 우재환과 시바다가 경비대의 지원과 막대한 자금으로 정보를 얻는다면 이쪽은 그들보다 몇십 배나 많은 인력자원이 있다. 고속도로 사건이 일어난 날 밤에 시바다의 부하 사이토가 부하들과 함께 움직인 정보도 그들은 확보하고 있었다.

최태호가 입을 열었다.

시바다는 김상철이 다시 잠적한 후로 거의 외출하지도 않습니다. 일본에 갔다는 소문도 있습니다만.

인질 사건이 끝나자 근대리아는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갔지만 그것은 겉모습뿐이다. 이나카와회의 시바다나, 미국계의 우재환, 그리고 북한계의 세 조직은 제각기 상처를 입었고 서로 불신감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상태에서 제일 피해를 받는 조직은 러시아의 마피아였다. 인질 사건 때 경비대를 배후에서 공격한 그레고리가 마피아의 간부가 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레고리의 부하들은 스무 명이 넘는 경비대원을 살상했으며 그들도 세 명의 시체를 현장에 남겨두고 도주했던 것이다.

얼은 막처럼 하늘을 덮은 회색 구름이 점점 밝아지는 아침이었다. 이런 날씨는 한낮에도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가 온다. 사무실에 모여 앉은 세 사내는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근대시의 사업장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상황에서 근대리아를 주도하는 운영위원회나 경비대와의 마찰을 가능한 한 피해온 그들이었다. 우재환이나 시바다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조덕산이 입을 열었다.

마피아의 사업장 다섯 개가 아마 오늘 중으로 영업정지 처분을 받을 것 같습니다. 엊그제 근대시의 사업장까지 합하면 여덟 개가 되는 셈이지요.

러시아타운의 수색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나?

물론입니다. 오늘로 일주일째 계속되는 겁니다.

경비대가 이를 갈고 있습니다.

최태호가 그의 말을 받았다.

이 기회에 본때를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마피아는 예전에 파벨이 제거된 후로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의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진 상황이다. 따라서 정부와 군과의 관계가 전처럼 밀착되지 못한데다가 근대리아 정부는 코마노프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어서 마피아의 위상이 약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조직은 근대리아에서 도태되는 것이 정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김상철이 그 첫 번째였고 이번 사건에 말려든 마피아가 다음 순서가 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하바로프스크 공항에 도착한 페로프가 차를 달려 레닌 대로에 있는 10층 빌딩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가 막 지날 때였다. 40대 초반의 페로프는 마르첸코의 경호원 출신이었지만 마르첸코를 만나기 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밀수를 생업으로 삼았던 사내였다. 충성심이 강한 성격에다 머리 회전이 빨랐으므로 마르첸코에 의해 근대리아의 책임자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그는 곧장 5층에 있는 마르첸코의 방으로 들어섰다.

보스, 그레고리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인사를 마치자마자 대뜸 페로프가 물었으므로 마르친코는 입맛을 다셨다.

그건 나도 아직 모른다.

아니, 보스가 모르시다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페로프가 눈을 치켜떴다. 전화는 대부분 도청이 되는 관계로 근대리아에서 직접 날아온 참이다.

그럼 이곳에 없단 말입니까?

그것도 모른다.

마르친코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테이블 위에 놓인 보드카 병을 쥐었다.

근대리아로 떠나기 전에 나한테 연락을 한 번 해준 것이 마지막이야.

제가 그놈한테 차 세 대를 제공해 준 대가를 지금 어떻게 치르고 있는지 아십니까?

알고 있어.

근대리아에서는 김상철의 조직 다음으로 우리가 제거될 것이라는 소문까지 퍼져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대로 가다가는 그렇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지는 않아, 페로프.

마르친코가 정색을 했다.

러시아 땅에 둘러싸인 근대리아야. 러시아 이주민도 30만이 나 된단 말이다. 우리를 내몰지는 못한다.

하지만‥‥‥」

페로프는 곧 입을 다물었다. 러시아 정부와 군과의 관계가 파벨 시대보다 매끄럽지 못하다는 이야기는 곧 마르첸코에 대한 모욕인 것이다.

곧 괜찮아질 것이다, 페로프. 너는 돌아가서 잠자코 기다리면 돼.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페로프가 말머리를 돌렸다.

그럼 지금 그레고리는 김상철과 같이 있겠지요?

그렇겠지. 그리고 아마 극동군 사령부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 같다. 극동군 소속 헬기 두 대를 빌려 타고 간 후에 종적이 사라졌어. 이번에는 철저히 보안 유지를 시켜서 알아낼 수가 없어. 볼로프도 모른다면서 시치미를 떼었지만 아마 그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페로프가 눈을 깜박이며 시선을 주자 마르첸코가 천친히 머리를 끄덕였다.

어쨌든 극동군은 우리에게 호의적이다. 그들은 아마 헬기를 빌려준 일 같은 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USSR) 시절에는 크렘린 궁전의 2층 소회의실에서 정치국 상임위원회가 열렸지만 러시아 공화국이 된 지금은 대통령이 주재하는 중앙회의가 열렸다. 강추위가 계속되는 2월이지만 방 안은 따뜻했다. 천장의 호화스러운 샹들리에와 중후한 느낌을 주는 19세기의 가구가 조화를 이루었고 바닥에는 섬세한 무늬의 페르시아 양탄자가 깔린 방이다. 코마노프 대통령은 타원형 테이블의 위쪽에 앉아 있었는데 웃음 띤 얼굴이었다. 오늘의 회의는 일 년에 한 차례 열리는 중앙회의 전에 특별 사안을 먼저 다루는 특별회의였다. 따라서 해당 중앙위원만 참석해 있었으므로 방 안에 모인 사람은 대통령을 포함하여 다섯 명이다. 코마노프가 앞에 놓인 잔을 들더니 투명한 액체를 단숨에 삼켰다. 그것을 본 로스토프가 보드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로스토프 대장.

코마노프가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웃음 띤 얼굴이다.

극동지역의 안보에 관한 안건은 잘 읽어보았소. 미하일과도 상의를 했지.

그는 옆쪽에 앉은 국방장관 미하일 체르넨코를 턱으로 가리켰다.

일본의 해군력이 증강된 것과 베링해에 미국 잠수함의 훈련이 많아진 것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겁니다. 통신량 증가도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정보국의 판단이 나왔소.

로스토프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저도 들었습니다. 대통령 각하. 하지만 본인이 말씀드리려는 내용은 근대리아에 관한 문제인데요.

근대리아라, 그건 특별한 내응이 없는데. 경비대가 증강되고 마피아와 삼합회, 야쿠자에 북한과 미국 배경의 한인 조직, 이렇게 다섯 조직이 분할되어 있다는 것 외에는,

코마노프가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다.

투자 유치를 위해서 우리도 예상하고 있었던 일 아니오?

그렇습니다, 각하.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요?

둘이서 발을 주고받는 동안에 나머지 세 명의 남자는 잠자코 있었는데 체르넨코 외의 두 사내는 정보국장인 모노소프 육군대장과 경찰총장 마슈크이다. 로스토프가 어깨를 펴고는 헛기침을 했다.

근대리아 관리에 대한 우리 러시아 정부의 기본정책이 이미 깨져 있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자 코마노프의 안색이 달라졌고 방 안의 분위기가 굳어졌다. 이것은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이다. 로스토프가 말을 이었다.

근대리아에 여러 번 유혈사태가 있었고 지난번에는 마피아가 수송로를 차단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었는데 정부는 거의 방관만 하다가 마피아를 견제하여 수송로를 뚫어 주는 것으로 사건을 수습했지요.

가만.

코마노프가 커다란 물잔을 다시 들더니 한 모금을 삼켰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조치였소.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근대리아는 붕괴되었을 테니까. 그때 당신도 동의했었지 않소?

그 대신에 마피아의 세력이 약화되었지요. 그들은 근대리아에서의 위치마저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각하.

잠깐만, 로스토프 대장.

로스토프의 말을 가로챈 사람은 정보국장 모노소프였다.

마피아의 세력이 약해진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요. 조세프 파벨의 우유부단에다 김상철의 습격과 마르첸코의 배반이 호흡을 맞추었기 때문이오.

로스토프가 어깨를 펴고 그를 쏘아보았다.

모노소프 동지, 극동군 사령부에서는 세 번이나 근대리아 내의 CIA와 일본 정보국에 대한 동향을 중앙회의와 대통령 각하께 보고했었소, 알고 계시지요?

압니다. 로스토프 대장.

현재 근대리아는 미국과 일본의 세력으로 완전히 장악되었소. 나는 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코마노프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으나 로스토프는 내처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근대리아의 우리 러시아 동포는 탄압을 받고 있소. 러시아 계열의 사업장은 태반이 영업정지와 환경개선 명령을 받아 영업활동이 중지된데다가 경비대는 러시아인 거주지를 수시로 수색하여 주민을 불안에 빠뜨리고 있단 말이오.

그는 코마노프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결론적으로 우리 러시아 정부는 근대리아에 미국과 일본 세력이 기반을 굳히도록 방관했습니다. 그들은 근대리아가 독자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에 친미, 친일의 위성 지역을 건설하게 된 거요.

로스토프 대장.

코마노프가 그를 쏘아보았다.

비약이 심하지 않소? 우리 러시아 정부는 대국적인 상황 판단을 하고 있어요, 근대리아 설립 이후로 극동 지역의 경제 성장은 3년간 연평균 23퍼센트로 세계 제일이오. 앞으로도 우리는 일본과 미국의 투자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본과 미국의 투자가 아닙니다. 모두 한국 자본입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체르넨코였다. 놀란 코마노프가 반쯤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았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체르넨코가 주름진 얼굴을 치켜들었다.

우리 정부는 미국과 일본의 유화 전술에 넘어가 극동군 사령부의 우려를 무시했습니다. 근대리아는 현재 한국 정부의 조종을 받는 운영위원회에 의해서 운영이 되고 운영위원회 위원장과 그 하수인들은 모두 친미주의자에 CIA 요원이오. 정보국장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모노소프를 흘겨본 체르넨코가 다시 말을 이었다.

미국 자본이라고 들어오는 것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오성그룹이고 일본 자금은 일본 정보국이 그 배경에 있습니다. 이것을 정보국장이 모르고 있었다면 직무태만이고 알고도 방관했다면 국가에 대한 중대한 범죄행위를 한 것이오.

모노소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50대 초반으로 코마노프의 경호실장 출신이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모략이오!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친 모노소프가 체르넨코를 쏘아보았다. 그는 군 서열이 2위로 체르넨코 다음이었지만 군의 정보, 감찰 업무를 통괄하고 있었으므로 제일의 실력자인 것이다.

장관은 말에 책임을 져야할 거요.

나는 내일 중앙회의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겠습니다.

로스토프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책임 소재를 분명히 가려낼 거요,

찬성이오.

한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코마노프가 번쩍 머리를 들었다. 경찰총장인 마슈크였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코마노프의 시선을 받았다.

각하, 각하께서는 내일 중앙회의 석상에서 탄핵을 받으실 우려가 있습니다. 각하께서 극동군 사령부와 체르넨코 동지의 보고를 무시한 것은 명백한 과오이고 정보국장은 책임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마슈크는 KGB 최고간부 출신으로 코마노프가 직접 영입해 온 인물이다. 코마노프는 이제 뻣뻣하게 굳어진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렸고 모노소프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회의는 끝난 것이다.

 

3월 하순,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바라크 지붕 위에는 아직도 눈이 남아 있었고 나뭇가지도 앙상했지만 햇살은 부드럽게 느껴졌다. 군용 비행장이 바로 옆에 있어서 이제는 비행기의 엔진소리만 들으면 기종을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지금 떠오른 것은 동체의 양쪽 옆 부분에 직사각형의 엔진을 붙인 전투기로 MIG-25였다. 간호장교한테서 들은 지식이다. 날카로운 피토판을 앞부분에 꽂고 삼각형의 주익과 뒤쪽에 두 게의 수직 안정판을 세운 요격 전투기였다. 베개를 고쳐 벤 김상철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후 240분이었다. 마가단 해군 기지에서 하바로프스크 북방의 극동군 직할 병원인 이곳에 옮겨진 지 이제 두 달째가 되어간다. 두 번의 대수술을 마친 복부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이제 하루에 두 시간씩 가벼운 산책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문에서 노크 소러가 들리더니 이한과 함께 볼코프 소장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이제 찾아오는 횟수가 이틀에 한 번으로 늘었다.

, 다음 주부터는 운동 시간을 하루에 네 시간으로 늘린다던데요.

침대 옆으로 의자를 당겨 앉은 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땐 각하가 한잔하시자고 합디다.

좋습니다. 언제든지,

김상철도 밝은 얼굴이다.

술보다도 다른 것이 급합니다.

간호장교가 반반하던데, 아직 그대로 두었단 말이오?

볼코프는 40대 중반으로 체격은 보통이었지만 눈매가 또렷했고 각진 턱에 언제나 입술이 꾹 닫혀 있어서 날카롭게 보이는 인상이다.

이한이 음료수 잔을 그들에게 나눠주고는 침대 끝쪽에 앉았다.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볼코프가 정색을 했다.

이나카와회가 한국계 회원을 계속 충원시킨 데다가 근대리아 내에서도 준회원을 모집하고 있어요. 현재 그들의 조직원 수는 천 명 가깝게 되었소.

우재환의 조직원 수는 천 5백으로 근대리아 제일의 조직이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팔짱을 끼었다.

오성그룹은 지난주부터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총투자 금액은 32천만 달러이고 이나카와회는 이미 5개의 호텔과 4개의 유흥장 공사를 진행 중이오.

근대와 대동은 얼마나 됩니까?

그쪽도 벌써 공사를 시작했는데 규모가 제일 크지, 4억 달러의 공사요.

한꺼번에 10억 달러가 넘는 공사가 시작되는 판이니 지금도 중국과 러시아의 이주민이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갑니다. 현재만 해도 근대리아의 인구가 130만인데 올 상반기에는 200만이 될 거요,

근대의 계획보다 6개월이 빠르군요.

한국의 근대 직원 가족의 이주도 지난주부터 규제가 풀렸습니다. 정보에 의하면 근대 직원 가족만 해도 20만이 넘는다는 거요.

근대리아는 운영위원회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다. 15천 명에 달하는 경비대는 운영위원회와 함께 근대리아를 통치하는 양극이 되었고 행정청 대부분의 요직과 언론, 통신도 그들이 통제하고 있다. 더구나 미국과 일본의 세력이 기반을 굳힌 상황이다. 한국 정부는 마음 놓고 규제를 풀었을 것이다.

김상철이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근대는 근대리아를 포기한 모양이군요.

그럴 수밖에.

볼코프가 쓴웃음을 지었다.

대그룹이라지만 1개 기업이 국가를 상대할 수는 없지. 더구나 상대는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3국 연합이오.

근대는 대동과 동업관계가 되어서 자금이나 운영 면에서 도움을 받을 계획인가 본데 우리 정보국의 의견으로는 거기에도 허점이 있어.

허점이 뭡니까?

대동은 영국의 월슨이라는 간판 기업을 내세워 투자를 하는데 오성이 미국의 톰프슨이라는 너절한 회사를 내세운 것과 같은 방법이지. 그런데 오성은 한국 정부의 허가를 받았지만 대동은 공식적인 허가가 없소. 그러고도 엄청난 돈을 들여온단 말이오.

정보국의 의견은 대동도 한국 정부의 묵인이 있다는 거요. 한국 정부가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는 거지.

시계를 내려다본 볼코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강의는 이만해야겠군.

그는 손을 뻗어 김상철의 손을 쥐었다.

앞으로는 강의 내용이 점점 치밀해질 거요. .

그는 호주머니에서 검정색 수첩 하나를 꺼내어 김상철에게로 내밀었다.

여기 당신의 새 신분증이 있소, 러시아 여권이지.

김상철이 말없이 여권을 받자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름은 내가 지었소. 드리트리, 내 동생의 이름인데 부르기 좋은 이름이오.

문으로 다가간 그가 손잡이를 잡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제부터 러시아 시민이오. 따라서 러시아 정부의 보호를 받습니다.

 

 

 

7. 드미트리 김

근대 리조트시티는 800만 평의 대지 위에 세우고 있는 종합 동계 리조트 지역이다. 동계올림픽을 리조트시티 안에서 치러낼 수 있을 정도로 각종 시설물이 한창 만들어지는 중이었고 이미 완공된 스키타운의 면적만 해도 200만 평이 넘는다. 호텔과 빌라, 방갈로 등의 숙박시설이 한꺼번에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거대한 관광지였다. 그러나 아직 공사가 완공되지 않아서 스키타운과 일부 시설만 가동되었는데도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었다. 근대시에서 서쪽으로 5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근대리조트는 근대와 대동그룹의 합작품이다. 근대리아의 10월은 두 달 간의 짧은 여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깊어가는 시기이다. 리조트시티의 스키타운은 완만한 구릉지역 전체에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스키어들에게는 스키와 자연의 경관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곳이었다.

한낮의 태양이 밝게 빛나는 오후였다. 눈보라를 일으키며 구릉에서 질주해 내려온 강미현은 몸을 틀어 왼쪽의 골짜기로 들어섰다. 가속이 아직도 붙어 있었으므로 홀을 겨드랑이에 편 채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녀는 문득 이쪽으로 달려오는 스키어를 보았다. 한낮이라 해도 영하 20도였으므로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털모자를 눌러쓰고 고글로 눈을 가린 차림이었다. 달려오는 속도가 빨랐으므로 강미현은 옆쪽으로 조금 비켜났다. 익숙한 솜씨의 사내였다. 그가 옆쪽을 한순간에 스치고 지나자 강미현은 부연 눈보라를 한바탕 뒤집어썼다가 벗어났다. 상쾌한 기분이었다. 눈보라를 맞는 그 순간에는 마치 그와 같은 속도감대에 있는 것 같은 짜릿한 느낌이 왔던 것이다. 그대로 골짜기를 벗어나자 드문드문 스키어들이 보였다. 이제 흰 눈에 덮인 끝없는 대평원이었다. 그녀가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구릉 위의 방갈로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였다. 스웨터 차림으로 전화를 걸고 있던 한민수가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그녀를 향해 웃었다.

빠르군. A코스를 두 시간 만에 다녀오다니.

가다가 돌아왔어요.

파카를 벗은 강미현이 스웨터 차림으로 소파에 앉았다. 응접실에 앉은 그들의 앞쪽으로 눈에 덮인 대평원이 흰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고 푸른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유장석 씨가 저녁 초대를 했어. 갈 수 있겠지?

그럼요, 장소는 어딘데요?

7시에 근대 호텔 라운지. 6시에 헬기가 도착할 거야.

그들은 지금 신혼여행 중이었다. 닷새 전에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신혼 여행지로 근대리아를 택한 것이다. 강미현이 무언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대각 씨도 참석하나요?

그 사람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하지만 전창남 씨는 올 모양이야.

강미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결혼 축하를 위해 운영위원장이 참석해 준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근대리아는 이제 인구 200만의 자치지역이었고 근대시의 인구는 50만에 가까웠다. 근대시 남부의 거대한 공업지역은 이미 활발한 생산 활동이 본궤도에 올라 비록 완제품 생산이긴 하지만 올해 수출목표인 15억 달러를 충분히 달성할 것이다. 이것은 얼마든지 노동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근대리아의 전략사업 중의 하나인 관광사업이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10월 현재까지 관광객 수는 이미 목표량인 50만을 넘었고 근대리아에 건설된 호텔의 수는 벌써 30여 개가 되어 있는 것이다. 강미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외출준비를 하려는 것이다.

 

25층 높이의 스카이라운지에서는 근대시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평원 위로 도시의 불빛이 지평선과 닿은 것처럼 펼쳐져 있었다. 라운지의 밀실에서 저녁을 마친 그들은 가볍게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전창남은 결혼식에 축전을 보내주었고 어제는 사람을 시켜 선물까지 보냈던 것이다. 그로써는 대단한 호의였다.

창밖을 바라보던 강미현이 시선을 느끼고는 머리를 들었다. 전창남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님께서는 건강하십니까?

, 덕분에.

그랬다가 너무 의례적이라고 느낀 강미현이 말을 이었다.

요즘은 산에 자주 가세요. 일주일에 한 번쯤.

등산은 전신운동입니다. 온몸의 관절과 근육을 모두 움직이게 하지요.

그가 술잔을 들어 보였다.

이 망할 놈의 술하고는 반댑니다.

강회장은 근대리아의 일에 거의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관심을 잃은 것은 아니다. 이남호를 통해 끊임없이 근대리아와 연락을 취하는 모양이었지만 일 년 가깝게 한 번도 근대리아에 대한 공식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시선을 돌린 강미현은 유장석과 이야기를 나누는 한민수를 바라보았다. 강회장의 꿈은 어쩌면 자신과 한민수에게 이미 넘어와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강회장은 결혼 전에도 한민수를 자주 불러 밀담을 나누었던 것이다. 언젠가 강회장은 한민수가 돌아간 후에 혼잣소리처럼 말했었다.

'대한민국의 강씨 기반은 대한민국 국민의 도움으로 이뤄진 것이다. 4천만 국민이 이 땅에 남아 있는 이상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으나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빙긋 웃는 것을 보면 둘 사이는 무언가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고려인은 어쩔 수 없지만 중국의 조선족은 곤란합니다.

전창남이 유장석과 한민수의 이야기에 끼어들었으므로 강미현은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가 말을 이었다.

물론 행정위에서는 얼마든지 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지만 그 인력은 러시아나 중국계로 채우면 됩니다.

그건 누구 생각이오?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는 듯 유장석이 부드럽게 물었으나 표정은 밝지가 않다.

그리고 어떤 근거로 조선족이 안 된다는 거요?

잘 아시면서 그러시오.

쓴웃음을 지은 전창남이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모두 근대리아를 이끌어 가시는 분들이니 알고들 계실 텐데. 그것은 미국과 일본의 압력 때문이지요.

전창남 스스로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는지 유장석이 멍한 표정이 되었다. 전창남이 말을 이었다.

그들은 근대리아가 한민족이 주도하는 국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남북한이 대치 상태에 있는 한국에도 이롭지 않습니다.

그럼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단 말이오?

유위원장은 꼭 흑백논리로 생각을 하신단 말이야.

전창남이 가늘게 눈을 뜨며 웃었다.

이곳이 그들에게 전략적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오. 그들은 이곳을 동북 러시아의 발전된 지역으로 남아 있기 만을 바랄 뿐이오.

미국과 일본이 그렇게만 바란다고 믿어줄까? 러시아가 말이오.

물론 러시아는 현 상태의 근대리아 운영이 불쾌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근대리아 덕분에 극동지역 경제성장이 연평균 25퍼센트가 되었어요. 러시아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큽니다. 코마노프의 제일 큰 업적이 되었지요. 그들은 당장 어쩌지는 못합니다.

잠자코 있던 한민수가 입을 열었다

. 이제 술이나 한잔 드시지요. 이렇게 모처럼 근대리아의 최고 운영자 두 분이 자리를 같이하셨는데.

그는 먼저 술잔을 들었다.

우선 건배나 해주시겠습니까? 저와 제 아내의 결혼을 축하해 주시는 의미로.

유장석과 전창남이 제각기 싱거운 웃음을 짓고는 술잔을 따라 들었다.

당신도.

한민수가 강미현의 앞에 놓인 술잔을 눈으로 가리켰다. 강미현이 술잔을 들었고 그들은 일제히 잔을 들었다.

 

근대타운의 인구는 20만 명이 넘는 데다가 명실공히 근대리아 제2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근대시가 고층빌딩과 호텔, 카지노 등 관광객과 고급 소비자를 위한 도시라면 근대타운은 서민들의 도시였다. 아직도 거리 뒤쪽의 골목에서는 주정뱅이와 마약 거래자들이 자주 보였고 강도와 폭행 등 사건이 끊이지 않았지만 근대리아 주민들은 여전히 이곳을 사랑했다. 3년 전만 해도 2천 명이 안 되는 부랑자와 도망자, 낙오자들이 모여든 황량한 눈밭 위의 마을에서는 매일 수십 명씩 총에 맞거나 칼에 찔렸고, 아니면 얼어 죽어 나가던 곳으로 지구 최후의 마을이라고도 불렸던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잘 정비된 도로와 반듯한 건물이 늘어선 인구 20만의 도시였다. 도로는 차량으로 가득 메워졌으며 유흥가는 언제나 손님으로 만원이었다. 근대타운의 주민들은 근대시가 동양의 라스베이거스라면 근대타운은 동북아시아의 홍콩이라고 자칭했는데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타운에는 홍콩 이상으로 세계의 여러 인종이 모여들고 있는데다가 활발한 상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근대리아는 마약과 총기류를 제외한 모든 물품의 입출 제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관세도 부과하지 않았다. 또한 세계 어느 국가의 시민에게도 입국을 허용하고 있었으므로 조직 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때에도 타운의 경기는 위축되지 않았던 것이다. 타운의 민족 비율은 러시아와, 중국, 한민족이 각각 30퍼센트 정도였고 나머지 10퍼센트가 아시아와 아메리카, 아프리카 민족이었다. 그러나 마피아와 삼합회는 각각 동족인 러시아와 중국계 주민들을 기반으로 뿌리를 내린 상황이었으나 한민족은 아니었다. 중국과 러시아 등에서 이주해 온 조선족과 고려인들은 한국과 북한계로 나뉘어졌고 이나카와회의 시바다가 야쿠자의 조선인 부하들을 몰고 온 후로는 야쿠자계 조선인까지 포함하면 한민족은 세 조각으로 나뉜 셈이다. 미국계와 북한계, 그리고 야쿠자계의 세 조직이 생긴 것이다. 김상철의 친한(親韓) 세력이 몰락한 후로 미국계 한인 조직이 우재환을 중심으로 급성장을 했고 시바다의 이나카와회가 그의 뒤를 이었는데 마피아와 삼합회, 북한계 조직은 두드러진 성장은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깊은 밤. 근대타운의 중국인 거리는 활기에 차 있었다. 건물 사이의 네온사인이 휘황하게 번쩍이면서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낮보다 부쩍 늘어난 행인들이 거리를 메웠고 소음으로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김상철이 환전소 옆에 자리 잡은 구두가게에 들어선 것은 밤 1030분이다. 진열대를 바라보고 있던 동씨가 돌아섰다.

이제 오십니까?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김상철이 뒤따라 들어선 이한을 힐끗 바라보고는 가게 안쪽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쪽은 창고였지만 깨끗이 치워져 있었고 들어서는 그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은 삼합회의 홍기천과 양필성이다.

이렇게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이한에게서 배운 김상철의 중국어는 유창하지 않았지만 의사소통에 지장은 없다. 홍기천이 부드럽게 말했다.

천만에요. 김선생.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들은 조그만 탁자를 사이에 놓고 둘러앉았다.

김상철은 양필성과는 여러 번 만났지만 홍기천은 초면이었다.

그동안 전혀 소식을 듣지 못해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흥기천이 다시 말했다.

근대리아에는 언제 오신 겁니까?

사흘 전입니다. 그동안 러시아에 있었지요.

10개월이 가까운 기간이었지만 근대리아의 10개월은 다른 곳의 몇 년의 세월보다 변화가 빠른 것이다.

몰라보도록 변했군요. 저는 오후에 근대 리조트시티를 다녀오는 길입니다.

아아.

홍기천이 힐끗 양필성을 바라보았다.

훌륭한 리조트시티지요. 아마 완공되면 세계 제일이 될 겁니다.

스키장이 좋았습니다. 관광객을 얼마든지 모을 수가 있겠더군요.

어제는 페로프와 합의를 했지요. 내가 데려온 러시아인 부하 몇 명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주기로 했습니다.

홍기천과 양필성이 얼굴이 차츰 굳어졌다. 무슨 일인가 예상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김 선생.

홍기천이 김상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다시 세력을 일으킬 계획입니까?

그렇습니다.

10개월 동안 절치부심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마침 기회가 왔습니다.

어떤 기회 말이오?

내가 이 땅에 다시 자리 잡을 기회입니다.

그러자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양필성이 김상철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김선생. 우리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삼합회의 입장에서 김상철은 적이 아니다. 김상철은 분명히 시바다와 우재환을 노릴 것이고 기반 없는 그가 홀가분하게 치고받았던 것에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있습니다. 나를 포함한 조선족 부하들의 은신처를 구해주십시오.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서 사흘 동안 페로프가 제공한 주택에서 합숙을 했습니다.

해 드리지요.

홍기천이 선뜻 대답했다.

몇 명이나 됩니까?

모두 열다섯이오. 대부분이 알려진 얼굴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일자리가 필요합니까?

그렇게 오래 끌지는 않을 테니 은신처만 있으면 됩니다.

좋습니다. 아주 안전한 곳이 있으니 염려 마시고 .

홍기천과 헤어진 김상철은 이한과 함께 중국인 거주 지역으로 들어섰다. 낯익은 길이었으므로 그들은 거침없이 어두운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깊은 밤이어서 주택가의 골목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였지만 대기까지 얼어붙은 강추위여서 그들은 방한모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옆을 따라 걷던 이한이 문득 머리를 들었다.

형님, 스키장에서 그분 만나셨습니까?

입김이 마스크에서 금방 얼어붙었으므로 이한은 장갑 낀 손으로 마스크를 두드렸다. 김상철은 잠자코 앞장을 섰다. 이한은 스키장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한민수와 강미현 부부가 리조트시티의 스키장에 딸린 방갈로에 묵고 있다는 것은 안다.

걱정했습니다, 형님. 그곳에 경호원이 일곱이나 있었습니다.

바짝 붙어선 이한이 말을 이었다.

모두 기관총을 휴대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경호를 받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한이 다시 마스크를 두드리자 김상철이 힐끗 시선을 주었다.

작별한 것이다. 한아. 그 여자를 스치고 지나면서 작별했다. 앞으로 볼 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얼굴만 한번 보고 싶었다.

그도 마스크를 두드려 얼음을 떼어내었다. 그들은 다시 골목길로 들어섰다. 미로같이 엉킨 길이었지만 옆으로 삐져나온 굴뚝이나 낮은 유리창 등이 표적이 되어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김상철이 조금 걸음을 늦추었다.

내가 괜한 짓을 했을까?

아닙니다. 형님.

내가 마음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보고 싶으면 보는 거지요, .

저는 형님이 그 여자를 죽이지나 않나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경호원 걱정을 했었는데.

죽이다니?

결혼까지 하려다가 말고 다른 남자 찾아간 여자 아닙니까? 그동안 한 번도 형님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지요.

「…………」

형님이 블라디보스토크에 계실 때 저는 몇 번이나 그 여자한테 연락을 하려다가 말았습니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마스크를 두들겨 얼음을 털어 내었다.

그 여자는 부위원장님한테서라도 형님 계신 곳을 알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바보 같은 짓을 안 해서 다행이다.

나중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이한은 그림자처럼 같이 지내 온 그의 분신이다. 그래서 김상철은 때로는 그의 표현으로 자신의 감정을 돌이켜볼 때가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에게 자신의 감춰진 부분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윽고 그들은 벽돌집 앞에서 멈춰 섰다. 구두 가게의 동씨 집으로, 지난번에도 피신했던 곳이었다.

 

이대각이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유장석이 머리를 들었다.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와는 10년이 넘게 한솥밥을 먹어온 처지였다. 그의 앞자리에 털썩 앉은 이대각이 물었다.

또 무슨 일입니까? 나쁜 소식이라면 제가 기쁜 소식을 먼저 전해드리지. 김 빼기 작전이오.

그는 소파에 엉덩이 끝만 걸치고는 다가앉았다.

김박사의 개발팀이 북쪽에서 유정 줄기를 찾았다는 거요. 오늘 아침부터 매장량을 측정한답니다.

「‥‥‥‥」

저 빌어먹을 놈들이 설치고 있지만 유정을 빼앗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건 그대로 러시아와 근대가 반분하게 되어 있으니까.

이대각이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 어떻습니까? 당장에 서울로 전화를 해야 정상 아닙니까?

입맛을 다신 유장석이 시선을 돌리자 이대각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무슨 일입니까?

이제 그의 목소리도 가라앉아 있었다.

, 왜 이러시는 거요? 도대체.

인사발령이 났어.

, 쿠웨이트의 현장소장으로 발령 났다.

이미 얼굴이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이대각은 유장석을 쏘아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유장석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닦았다.

큰 공사야. 자네도 알지? 4억 달러짜리

아침에 이실장한테 악을 썼어. 나도 이 꼭두각시 같은 위원장 그만두겠다고 하고 전화 끊었는데.

「‥‥‥‥」

회장님이 전화를 걸어왔어. 당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저쪽에서 강력히 나왔던 모양이야.

이대각은 억누르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깨를 늘어뜨린 그는 물끄러미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그만두겠다고 유장석에게 수백 번 투정을 부렸지만 진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유장석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유장석과 마찬가지로 근대리아는 그의 미래였고 목숨을 걸고 일해 온 땅이었으며 뼈를 묻을 곳이었다. 유장석의 시선이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그는 머리를 떨구었다.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운영위원회와 수시로 마찰을 일으켰으며 전창남이나 경비본부장 소명일을 원수 대하듯 하면서 사사건건 방해를 했다. 강회장도 방패막이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입을 열었다.

쿠웨이트라, 영하 40도에서 영상 40도로 가는구나.

유장석이 문득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돌리자 그가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눈밭에서 사막으로, 개척자에서 월급쟁이로, 희망에서 절망으로.

이봐, 이대각이.

참다못한 유장석이 입을 열자 이대각이 어깨를 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고. 그래, 내 대타는 누굽니까?

아직 미정이오?

한민수야.

한민수라니?

모르고 되물은 것이 아니라 엉겁결에 튀어나온 말이다.

그자가 부위원장이 된단 말이오?

이제 근대 식구나 마찬가지니까. 회장의 손녀사위야.

더구나 회장님이 고집을 부려서 한민수는 운영위원회의 부위원장을 겸하게 됐어. 정부 쪽에 로비를 했던 모양이야.

전창남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잘 되었군.

한민수가 조정역할을 하게 될 거야. 그래서 회장님도 기대를 걸고 있어. 앞으로는.

알겠수다.

이대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게 늘어놓지 마시오. 내 신세만 불쌍해지니까,

아니. 내 말은 .

당황한 유장석이 따라 일어서자 이대각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한테 근대리아의 미래를 위해 이번 인사가 잘되었다는 말을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요?

이봐, 이대각이. 그것이 아니라.

솔직히 배가 아픕니다. 구역질도 나고, 하지만 참아야지 별수 있습니까?

문으로 다가간 이대각이 손잡이를 잡고는 유장석을 돌아보았다.

그 자식도 마음에 안 들고, 꼭 호모 같았어.

어렵게 성사된 일이야.

 

강회장은 이미 색이 바래 우중충해진 단풍나무 밑에 앉았다. 설악산 한 자락의 계곡 안이었다. 별장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발아래에는 한 발짝밖에 안 되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이남호가 박정규를 세 번이나 찾아가 만났다. 박정규도 결국 타협을 하게 된 것이지,

아래쪽의 바위 위에 앉은 강용식이 가볍게 허리를 끄덕였다. 11월 초순이지만 설악산은 이미 초겨울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준비해 온 파카를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님, 한민수는 아직.

말을 멈춘 강용식이 강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이미 끝난 일이었지만 모르는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한민수는 자신의 사위인 것이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단 말이렷다?

등산복 차림의 강회장이 팔짱을 끼고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준비시킬 시간이 어디 있다고? 그리고 난 그놈을 틈틈이 가르쳤다. 결혼 전에 말이다.

대동그룹과의 관계는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어차피 민수가 시작한 일이니까 대동의 일도 맡아야지. 일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

내가 바라는 것은 운영위원회와의 조정역할이야. 대동 한회장의 인맥이 정계에 조금 있으니 그것도 도움이 될 것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수의 친화력으로 운영위원회와의 관계를 개선시키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야.

유장석은 뭐라고 하던가요?

이남호한테 쌍소리까지 했다더군. 하지만 내가 알아듣게 이야기를 했더니 금방 받아들였어.

금방이라는 말은 지어낸 것 같았지만 유장석은 신중한 사람이다. 흥분은 했겠지만 결국 받아들였을 것이다. 강용식은 아버지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검버섯이 피부의 이곳저곳에 검은 얼룩을 만들었고 굵고 깊은 주름살이 파인 노인의 얼굴이었다. 아버지는 서둘고 있는 것이다. 예전의 아버지는 이렇게 서두르지 않았다. 특히 가족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해서 바닥부터 차근차근 기어오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민수가 대동그룹의 사장 타이틀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었다. 강용식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시선을 돌렸다.

이제까지 근대리아만큼 아버지가 열정을 쏟는 대상을 본 적이 없다. 근대리아는 그의 꿈이었고 마지막 과업이었다. 그리고 근대리아 문제만큼 아버지를 절망에 빠뜨리고 무기력하게 만든 일도 없었다. 강용식은 바위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시지요. 아버님. 날씨가 꽤 쌀쌀합니다.

강용식은 앞장서 걷는 강회장의 굽은 어깨를 보면서 소리죽여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이제 아버지가 한민수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에게 이대각은 잊혀진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이대각의 이야기를 아직까지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 있었다.

 

이대각이 부위원장에서 물러나고 한민수가 그 자리에 앉았다는 소식은 그날로 근대리아에 알려져서 북쪽의 시추단부터 남쪽 국경검문소 직원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이대각이 사흘 밤낮을 타운에 박혀서 북한의 모란봉 클럽부터 마피아가 경영하는 소냐 클럽, 삼합회의 상하이 클럽 등을 휘젓고 다니면서 송별주를 마셔댔던 것이다. 물론 그는 공짜로 술을 마셨다. 최태호나 폐로프, 홍기천 등은 직접 나타나지 않았지만 부하들에게 그를 극진히 모시라는 지시를 내렸으므로 그는 밤을 같이 보낸 여자에게도 돈을 지불할 수 없었다. 그가 시바다나 우재환 조직의 유흥장에 가지 않았던 것은 일종의 시위였다. 시바다와 우재환이 붉은 얼굴을 했고 최태호 등이 호의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 밤이었다. 내일이면 근대리아를 떠나야 했다. 수염을 깎지 않은 텁수룩한 몰골로 삼합회의 란구에이 클럽에 앉아 보드카 잔을 쥐고 있던 이대각은 머리를 들었다. 그는 VIP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이미 보드카를 한 병쯤 마시고 난 후여서 눈의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뭐야?

그는 서툰 중국어로 그렇게 물었다.

넌 뭐냔 말이야?

소리도 없이 테이블 앞에 다가온 여자에게 묻는 말이다. 겨우 초점을 잡은 이대각은 여자가 늘씬한 미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정신이 조금 들었다. 어젯밤 소냐 클럽에서처럼 사장이 보낸 선물인지도 모른다.

이봐. 오늘밤 나하고 같이 잘까?

여자가 테이블 옆으로 바짝 다가와 섰다.

김상철 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국말이었으므로 이대각은 번쩍 정신이 들었으나 분명하게 듣지는 못했다.

뭐라고?

김상철 씨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자는 이대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10분 후에 뒷문으로 나오시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김상철이가 말이야?

이제 이대각의 목소리는 또렷했고 상체는 똑바로 세우고 있었다. 여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돌아서 가는 여자를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대각이 반쯤 엉덩이를 일으켰다가 다시 앉았다. 10분 후라는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클럽 뒷문 앞에는 이미 검정색 한국산 차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대각이 나오자 안에서 문이 열렸다. 주춤거리며 다가간 이대각이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운전사와 뒷자리에 앉은 조금 전의 여자뿐이다

타세요.

여자가 말했으나 이대각이 선 채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김사장님 심부름으로 온 사람입니다.

뭘 하는 여자냔 말이야?

현채옥이라고 지난번 불칸 역 사건 때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을 둥그렇게 뜬 이대각이 황급히 차에 올랐다. 승용차가 기다렸다는 듯이 튕기듯이 달려 나가자 이대각이 다시 물었다.

당신이 그러면 그때 장사장하고.

. 저만 살았습니다.

그럼 김사장은 지금.

지금 가시는 중입니다.

승용차는 같은 길을 두 번쯤 돌기도 하고 멀리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더니 이대각을 러시아 주거지역 깊숙한 곳에 내려놓았다. 그가 현채옥을 따라 다가간 곳은 표도르 클럽이었다. 이곳은 러시아인 전용 클럽으로 알려진 곳이다. 현채옥이 문을 두드리자 지름 5센티미터 정도의 구멍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이쪽을 내다보는 눈치더니 곧 문이 열렸다.

들어가시지요.

현채옥이 이대각을 바라보았다.

안에 계십니다.

그녀는 따라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대각이 안으로 들어서자 거구의 러시아인이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앞장을 섰다. 복도 끝방으로 다가간 그가 방문을 열고는 이대각에게 들어가라는 턱짓을 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이대각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김상철을 보았다

부위원장님.

그의 말을 들은 이대각이 긴장을 풀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 부위원장 아냐. 이제.

 

카지노에서 돌아온 이유미는 핸드백을 소파 위에 던지고는 화장실로 들어섰다. 오늘은 블랙잭에서 5천 달러 정도를 잃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다. 어제는 시바다와 함께 를렛을 해서 2만 달러 넘게 땄던 것이다. 손을 씻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고 그녀는 화장실에 걸린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벌써 들어와 있었군, 난 슬롯머신에 간 줄만 알고.

시바다였다. 그의 목소리는 밝았다.

이봐, 내 방으로 와. 나도 곧 올라갈 테니까.

캠블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를 두고 먼저 올라왔던 것이다

당신도 잃었어요?

그러자 시바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칩을 잃은 것뿐이지 돈을 잃은 건 아니야.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유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카지노에서 샴페인을 서너 잔 마셨지만 그쯤으로는 말짱한 체질이다. 거울에는 자신의 모습이 비춰져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화사한 모습이었다. 검고 또렷한 눈동자, 콧날은 곧았고 입술의 선은 매끈했다. 귀가 뒤쪽으로 약간 접힌 것이 제일 불만이었지만 언제나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어 섹스할 때나 드러났다. 시바다의 방에는 마쓰노와 가와베가 함께 있었다. 마쓰노는 근대리아의 이나카와회가 증강되면서 파견된 간부로 제2인자였다.

유미, 마쓰노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데. 심각한 이야기야.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 마쓰노. 말해라.

마쓰노는 시바다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지만 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대한 사내였다. 그가 눈을 치켜뜨고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이사장, 며칠 전에 박기동한테서 얼마를 받았습니까?

이유미가 힐끗 시바다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

3백만 엔 정도. 그런데 그건 왜 묻죠?

마쓰노가 입술을 부풀리며 웃었다.

우리 회계 담당은 5백만 엔이 넘는 돈을 지불했소. 그런데 박기동이 50만 엔을 주면서 서류를 고쳐달라고 했다는 거요.

아마 이사장이 받은 서류는 이중으로 만든 서류일 겁니다.

소파에 기대앉은 시바다가 낮은 웃음소리를 띤다. 가와베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이다. 이유미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박기동이 돈을 횡령했단 말인가요?

그렇소, 그것도 매번.

횡령 액수는 3천만 엔이 넘습니다. 다행히 우리 회계담당자가 이중장부의 사본을 갖고 있었소.

근대리아 관광단 모집은 이유미의 그랜드 여행사를 기사회생시켜주었다. 시간이 갈수록 관광객이 급증했고 지난 6월부터는 관광객으로부터 받는 수수료만으로도 회사는 적자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유미가 아직도 웃음을 머금고 있는 시바다를 바라보았다. 근대리아에서 받는 수수료는 이나카와회의 대리 회사인 센트럴 통상으로부터 계산이 된다. 이제까지 박기동을 통해 자신이 받은 수수료는 천만 엔 정도였으니 박기동은 40퍼센트를 횡령한 것이다.

그놈은 사기에 익숙한 놈이오. 내가 알기로는 톰프슨 그룹의 공사에서도 크게 한몫을 챙긴 것 같습니다.

마쓰노가 조금 목소리를 낮추었다.

물론 거기에도 우리처럼 불쌍한 놈이 끼어 있을 것이고.

, 유미.

시바다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

조센진 출신의 우리 회계는 이제까지 박기동으로부터 5백만 엔을 받았다고 자백을 했어. 우리 자체 감사에서 발각이 된 것이지. 그 사람은 우리 식구니까 우리가 처리를 한다.

「‥‥‥‥‥」

그러면 박기동은 어떻게 하지? 유미 생각은 어때?

이유미는 시바다를 바라본 채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박기동은 술잔을 들었다가 내려놓고는 물컵을 들어 서너 모금을 마셨다. 술 마실 기분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시바다나 마쓰노 등이 알고 있다는 건가?

이종남이 물었다. 잔뜩 이맛살을 찌푸린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당신, 돈에 미친 사람이야? 아니면 천성적인 사기꾼이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솔직히 드릴 말씀 없습니다.

박기동이 머리를 숙이자 이종남이 술잔을 들었다.

날 왜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난 안 들은 것으로 하겠어.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니고.

사장님.

마침 여행사 사장도 와 있다니까 당신이 직접 만나든지 해서 해결해.

사장님, 여행사보다도.

글쎄, 내가 시바다하고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야?

이종남이 버럭 소리를 쳤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당신을 봐달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날 어떻게 보고 하는 수작이야?

「‥‥‥‥」

그자도 지금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을 거란 말이야. 당신이 부하를 꼬여내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

더구나 시바다와 여행사 사장이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닌가? 당신이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어.

박기동이 이제는 술잔을 들더니 단숨에 삼켰다가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이종남이 혀를 찼다.

도대체 얼마나 먹었어?

, 한 천만 엔 정도.

많이도 처먹었군.

그리고는 이종남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빠져나가려는 몸짓이다. 박기동이 센트럴 통상의 회계원 스노베가 실종된 사실을 안 것은 오늘 아침이다. 그는 숙소에도 없었고 회사에도 출근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박기동은 그가 어젯밤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는 타운에 사는 애인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스노베가 댄 자금으로 조선족 애인은 옷가게를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쪽도 전화를 받지 않았으므로 부쩍 의심이 간 박기동이 서둘러 부하를 보낸 것이 점심때가 지난 후였다. 저녁 무렵에 부하에게서 전화가 왔다. 스노베의 애인은 오후에 옷가게로 찾아온 사내 세 명과 함께 나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집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다고 했다. 결정적인 것은 다시 센트럴 통상에 전화를 했을 때였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스노베가 오늘 아침에 일본으로 귀국했다고 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난 박기동은 온몸이 굳어져서 한동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스노베의 여권은 체류 기간 연장을 위해 관광과에 접수되어 있었던 것이다.

,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겠어.

이종남이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박기동과 시선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군. 도와주지 못해서.

엘로즈 클럽을 나온 박기동이 코즈모프 바에 들어선 것은 밤 12시가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도중에 연락을 했기 때문에 최태호가 사무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최태호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탐색했다. 반백의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밝은색 셔츠에 조끼를 걸친 그는 이제 서울의 일류호텔에 데려다 놓아도 손색이 없을 차림이다. 박기동은 우선 길게 한숨부터 내리쉬었다.

일본 놈한테 당했습니다.

그는 궁금한 듯 눈을 깜박이는 최태호를 바라보았다.

시바다의 센트럴 통상 회계원 놈이 돈을 횡령하고는 나한테 뒤집어씌웠습니다.

우재환이나 이종남은 시바다와 자주 만나는 밀접한 관계지만 이쪽은 아니다. 박기동은 그들과 이쪽 사이를 오가는 통로 역할을 해왔는데 뒤집어 말하면 그들 모두가 박기동을 이용해 의사전달을 하고 반응을 알아왔던 것이다. 박기동은 간간이 한숨을 섞으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이유미와의 계약, 수수료의 배분, 그리고 센트럴 통상의 스노베가 돈을 횡령해서 정부에게 옷가게를 차려주고는 탄로가 나자 모두 자신에게 뒤집어씌웠다는 대목에서는 얼굴을 붉히고는 언성을 높였다. 시바다와 이종남까지 그것을 믿는 모양이라고 탄식하면서. 그가 말을 마치자 최태호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 공화국으로 가시겠소? 박사장은 열렬한 환영을 받을 거요.

, 아니, 그것은.

우리 공화국은 박사장 같은 유능한 실업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가신다면 내가 직접 평양까지 수행하지요.

박기동이 머리부터 저었다. 낭패한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저는 아직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영웅 칭호도 받으실 수 있을 거요.

글쎄, 그것은 .

다시 머리를 흔든 박기동이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았다.

도와주신다면 신세를 잊지 않겠습니다.

글쎄 그것이 제일 나은 방법 같은데 말이오, 시바다하고는 직접 거래한 일도 없고. 그리고 내가 나설 일이 아닌 것 같소.

제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해주십시오.

박기동이 바짝 다가앉았다.

일본과 북한의 관계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제가 우재환 씨 조직은 물론 근대리아 내부에 관한 모든 정보를 드리지요.

물론 일본 조직은 더 이상 절 믿지 않을 테니 그쪽 정보를 드리기는 힘들 테지만.

한국 조직은 물론이고 근대리아 행정청 관리들의 약점을 나만큼 많이 쥐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번에 저를 도와주신다면 제가 모두 털어놓지요. 아니, 그것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약점 잡힌 자들을 늘려갈 수가 있지요.

최태호가 손끝으로 탁자 위를 빠르게 두드리다가 멈췄다.

도대체 얼마나 횡령한 거요?

아니, 그것은 모두 스노베라는 회계원이…….

얼마나 돼요?

그리고 그 돈은 시바다 몫이 아니라 한국 여행사에 지급할 돈인데 .

글쎄, 얼마나 떼내셨냐니까, 지금 이 상황에 나한테까지 숨기려는 거요?

오륙백 만 엔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 정도인데 이런 소동이오?

스노베가 더 해먹었을 겁니다.

최태호가 말을 멈추었으므로 방 안에 정적이 깔렸다. 탁자 위에 보드카 병이 놓여 있었지만 아무도 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이윽고 최태호가 머리를 들었다.

위원장과 의논을 해보겠소. 결정이 되면 우리가 시바다한테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박기동이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습니다, 최사장님,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후회라니, 분명한 성과가 있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후회할 시간도 없게 될 거요.

압니다.

최태호도 이종남처럼 팔을 들어 시계를 보았는데 분위기는 다르다.

그럼 어떡하시겠소? 숙소로 가실 거요?

아니, 지금은.

쓴웃음을 지은 박기동이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간 만 은신처를 구해주십시오.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만.

만일 내가 거절했다면 어쩔 생각이었소?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때에는 근대리아를 떠날 요량으로 차 트렁크에 네 개의 가방을 실어놓고 있었다. 부하 세 명은 지금 영문도 모른 채 밖에서 떨고 있었지만 이미 헬기가 예약되어있는 것이다.

, 그럼 갑시다.

최태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적당한 곳이 있어요.

 

강미현과 한민수가 살고 있는 저택은 본래 강회장이 살려던 곳으로 다분히 근대리아 통치자의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도 의식한 모양이어서 저택 본관에서 5킬로미터나 떨어진 경비원과 사무 요원의 숙소가 청와대 본관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천만 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통치자의 저택이다. 구릉과 평원이 포함되어 있는데다 얼어붙은 강줄기가 평원을 세로로 갈라놓으면서 저택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웅대한 본관의 공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본관 옆의 부속실 건물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곳도 방과 홀이 70여 개가 되는 대형 건물이었다. 그들 부부가 근대시에도 한참 떨어진 이곳에 오게 된 것은 강회장이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근대시에서 고속도로로 한 시간 거리였지만 한민수는 아침저녁으로 헬기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했다. 운영위원회와 행정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근대리아 임차 주인 강회장의 손녀사위이다. 그는 명실공히 근대리아의 최고 실력자의 위치에 앉아 있었다.

한민수가 행정청에서 돌아온 것은 저녁 7. 오늘은 모임이 없는 날이어서 강미현은 식사 준비를 마쳐두고 있었다. 식탁에 앉은 한민수가 냅킨을 펴면서 웃었다.

이대각 씨가 타운에 직업소개소를 차렸어. 어제부터 영업을 시작했다는군.

가정부와 함께 반찬 그릇을 나르던 강미현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래요? 잘 되었네. 일을 한다니.

쿠웨이트 전출을 거부한 이대각이 회사에 사표를 낸 것은 일주일 전이다. 며칠 동안 밤낮으로 술을 퍼마시고 나서는 갑자기 짐가방을 다시 풀고 주저앉았으므로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글쎄, 일이 잘될까? 직업소개소가 한둘이어야지.

그들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오랜만에 집에서 갖는 둘만의 식사였다. 짙은 어둠에 덮인 창밖에서는 건물에 부딪히는 바람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오고 있었다.

어쨌든 그 사람은 회사뿐만 아니라 회장님의 지시를 어겼어,

한민수가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근대리아에 대한 애착은 이해가 가지만 이건 도무지 내가 밀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말이야,

민수 씨도 참.

강미현이 살짝 웃었다.

이대각 씨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경비본부장한테 도와줄 일을 찾아보라고 했어.

잘하셨어요.

유전이 또 나왔으니 근대리아의 경제자립은 문제가 없어,

한민수가 밝은 얼굴로 포도주잔을 들었다.

할아버지는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모양이야. 근대리아의 자립에 대한.

한민족의 자립이죠.

그렇지, 한민족의.

식사를 마친 그들은 창가의 의자로 다가가 나란히 않았다. 이쪽은 저택의 정문과 정면으로 위치하고 있었다. 4차선의 도로가에 설치된 두 줄기의 가로등이 창날처럼 어둠 속으로 뻗어나갔고 끝부분이 한 움큼의 불덩이로 맺어 있다. 그곳이 정문의 경비원 숙소였다. 강미현의 잔에 포도주를 따라준 한민수가 문득 물었다.

, 할아버지가 모스크바에 가신다던데, 무슨 일이지?

글쎄, 난 처음 듣는 말인데.

강미현이 머리를 조금 기울였다

누가 그래요?

유위원장이. 그런데 그도 잘 모르는 모양이야.

내가 알아볼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일이 있으면 할아버지께서 직접 알려주시겠지.

술잔을 내려놓은 그가 강미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눈이 웃고 있었다.

내 어렸을 때 꿈이 무엇이었는지 알아?

뭔데요? 대통령?

아니, 그런 것 말고, 직업이 아니라.

그는 질문을 단념한 듯 강미현의 귀에 입술을 대었다

운동장 한복판에서 섹스를 하고 싶었어.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가슴 속으로 파 들어온 그의 손을 그녀는 손바닥으로 눌렀다.

한낮에?

그래, 밝은 대낮에.

지금은 그것을 이룬 기분이야. 이 땅, 그리고 당신.

 

밥이 담긴 공기를 내려놓은 동연교가 이제는 닭튀김과 야채조림 접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지난번과는 달리 오래 묵고 있었으므로 동연교의 부끄러움은 많이 가셔져 있었다. 8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동씨는 구두가게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이한은 밖에 나가 있어서 집 안에 남은 사랑은 동씨 모녀와 김상철 셋이었다. 동연교가 다가와 그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긴장한 모양으로 움직임이 딱딱했는데 꽉 다문 입술은 붉었고 곧은 콧등 위에서 반짝이는 것은 조그만 땀방울들이었다. 그녀에게 김상철은 무서운 살인자에다 인질범인 것이다. 지난번 인질 사건은 물론 자신에 대한 과장된 이야기가 주민들 사이로 무수히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김상철은 알고 있었다.

연교, 냉수를 한잔 다오.

김상철이 말하자 연교는 놀란 듯 몸을 돌리더니 곧 물잔을 앞에 내려놓았다. 밥그릇에 물을 부어 젓가락으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던 김상철이 문득 머리를 들었다.

시내에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떠돈다면서?

, 지난번 사건 때.

연교의 목소리는 가늘고 맑다. 그러나 남자들 앞에서는 겨우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먼저 입을 여는 경우는 없었다. 벽 쪽에 붙어선 연교가 말을 이었다.

경비대가 쏜 총에 맞았다고, 그래서.

그래서?

사람들이 벌판에 눈을 파고 묻었다고.

김상철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소문뿐이야?

아니에요.

연교가 머리를 젓자 말꼬리처럼 묶어놓은 뒷머리가 출렁이며 흔들렸다.

원수를 갚으려고 온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누구한테 말이야?

이렇게 오래 이야기하기는 처음이었는데 연교가 선뜻선뜻 말을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연교가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본 사람들, 한국 사람들.

그리고 근대리아의 관리들도.

 

다음 날 아침. 행정청에 출근한 한민수는 곧 운영위원장 전창남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전창남은 방금 전화기를 내려놓는 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인사도 생략한 채 한민수가 묻자 전창남은 눈으로 앞쪽의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본 정보국에서 보낸 정보인데,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송길수가 10여 명의 부하와 함께 행방을 감추었다는 거요,

송길수라면.

김상철의 심복이오. 고향인 유지노사할린스크로 떠난다고 소문을 내었지만 고향에는 가지 않았고 아마 근대리아에 들어온 것 같다는 거요.

이곳에 말입니까?

그렇소. 아마 마피아 간부급들은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송길수도 마피아의 간부급 행세를 했으니까.

한민수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나 불을 붙이지는 않는다. 전창남이 말했다.

우려되는 것은 김상철이오. 소문만 무성하고 일 년이 가깝도록 행적이 드러나지 않아요.

죽었다는 소문도 있고 근대리아에 와 있다고도 하더군요. 러시아인 거주 지역을 수색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근대리아에 와 있다면 아마 그쪽일 텐데.

그럴 생각이오. 지난번처럼 떠들썩하면 실속이 없으니 은밀하고 기습적으로 해야지요.

머리를 끄덕인 한민수가 입에서 빈 담배를 떼 내어 재떨이에 넣었다.

, 이대각 씨 말인데. 어떤 수를 쓰더라도 내보내도록 하십시다. 안에서 구정물을 만들면 곤란해요,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 경비본부장과 상의했어요. 곧 나가게 될 겁니다. 이젠 근대직원도 아니니까 어려울 것 없어요.

한민수가 머리를 끄덕이고는 아직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강회장은 코마노프의 초청을 받았답니다. 양국관계를 개선한 공로로 훈장을 받는다는 거요. 어젯밤 와이프를 시켜 알아보았습니다.

그렇군. 그런데 그 망할 놈들은 박수석의 비서관한테 그냥 모스크바에 쉬러 간다고만 하다니.

망할 놈들이라니요? 내 가족입니까? 아니면 .

근대 놈들이오.

그리고는 전창남이 빙긋 웃었다.

가족이 앞에 계신데 내가 욕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어쨌든 훈장을 받을 정도니 강회장과 러시아 관계는 밀접합니다. 쓸데없는 말씀은 안 하셨으면 좋겠는데. 코마노프한테,

손녀사위가 근대리아에 있으니 과격한 발언은 못할 거요.

그리자 한민수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 죄책감이 듭니다. 근대리아에 대한 그분의 꿈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놔서.

그것이 현실적이어야지, 만일 당신마저 없었다면 근대리아는 곧 정부의 공동관리가 될 거요. 강회장은 오히려 감사해야 돼.

난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으로만 지내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근대리아 때문에 결혼한 것은 결코 아니오.

압니다.

듣기 거북하다는 듯이 전창남이 쓴웃음을 지었다.

강회장의 꿈을 이어받은 것은 손녀사위인 당신이오. 거기에다 당신은 한국은 물론 일본과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 강회장은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겁니다. 비록 그 엉뚱한 꿈이 모두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말이오.

 

코마노프는 소회의실의 상석에 앉아 있었는데 조금 피로한 얼굴이었다. 훈장 수여식은 5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사진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해주고 인사말을 하는 데 30분이 넘게 걸렸던 것이다. 코마노프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강회장은 아직도 훈장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옆자리에 있는 이남호도 잠자코 있었고 강회장 자신도 달고 있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코마노프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옆에 앉은 체르넨코를 바라보았다. 체르넨코는 그의 시선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똑바로 앞쪽만 바라보고 있다. 체르넨코 옆에는 처음 보는 대머리 사내가 있었는데 올 3월의 증앙회의가 개최되기 직전에 교체된 새로운 정보국장 타시르 대장이다. 그리고 체르넨코의 반대쪽으로 극동군 사령관 로스토프가 앉아 있었다. 코마노프가 다시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강회장, 극동의 미개척지인 근대리아를 개발해 주신 것에 대해서 러시아를 대표하여 감사드립니다.

훈장 수여식 때와 똑같은 말이었으므로 이남호가 빠르게 통역을 했다.

극동지역의 경제 성장이 러시아 전체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켰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기대가 큽니다.

고맙습니다.

이남호의 통역을 듣고 난 강회장이 짧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현재의 근대리아 정세는 러시아를 지극히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 세력의 로봇이 된 한국 정부가 운영위원회와 경비본부를 장악하여 근대리아는 현재 미국과 일본의 위성국가가 되었습니다.

단숨에 말을 뱉은 코마노프의 말은 짧았지만 중대한 발언이다. 이남호는 진땀을 흘리며 강회장에게 통역을 해나갔다. 통역이 끝나자 강회장의 얼굴을 확인하듯 들여다본 코마노프가 말을 이었다.

이것은 결국 미국과 일본이 러시아 극동지역에 새로운 교두보를 설치하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CIA 요원들을 근대리아 행정부의 요직에 앉혔으며 일본 정보국의 정보원 수백 명이 근대리아를 중심으로 전 러시아로 확산되는 실정입니다.

통역을 들은 강회장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결국 근대리아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우리 러시아는 이제 이 상황을 좌시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이남호가 허둥대며 통역을 마치자 강회장이 번쩍 머리를 들었다.

각하, 조금 두고 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로서도 계획이. 나는 내 손주사위를 근대리아의 부위원장에 앉혔습니다.

그러자 코마노프의 뒤쪽에 앉아 있던 고려인 통역이 유창한 러시아어로 방 안의 사내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한 반응 없이 코마노프가 다시 말했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근대리아의 현 정부를 전복시키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우리는 근대리아에서 미국과 일본의 세력들을 몰아낼 거요.

어떻게 말입니까?

강회장이 묻자 코마노프가 체르넨코에게 무언가를 물었고 체르넨코는 타시르에게서 종이쪽지를 건네받아 코마노프에게 주었다. 코마노프가 그것을 읽었다.

극동군은 근대리아 국경에 대기시켜서 최악의 상황에만 투입시킬 계획이오. 우리는 이미 사전 준비를 해두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강회장을 이번에 모스크바로 모신 이유도 이것 때문이고 당신도 적극 환영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근대리아를 해방시켜 다시 근대그룹에 넘겨드릴 예정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이제는 코마노프의 말에 이남호가 먼저 그렇게 묻고 강회장에게 한국어로 불러주었다.

코마노프가 다시 종이쪽지를 내려다보았다.

드미트리 김,

이남호가 그의 말을 따라 했다.

드미트리 김.

사람 이름이었으므로 통역도 필요 없이 강회장이 눈을 치켜떴을 때 코마노프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주도하여 근대리아 정부를 전복시킵니다. 그의 지원군은 여기 계신 극동군 사령관 로스토프 대장이 이끄는 러시아 극동군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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