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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6-1

6

 

1. 홍콩에서 헤어지다

955분이 되었을 때 탁자 위에 놓인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귀에 댄 그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부하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세 놈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

사내가 말을 이었다.

어디에 숨겨둔 거냐? 분명히 네 주변 어딘가에 엎드려 있을 테지만 말이야.

잘 들어, 이 자식아!

수화기를 고쳐 쥔 김상철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여기까지 내가 왔으니 여자는 풀어주고 얼굴을 보여라. 상대해 줄 테니까.

사내가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네 마음대로 될 일이 아니야, 이 일은.

어디 어떻게 되나 볼까?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네놈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어. 알아들었어? 여자는 네 마음대로 처리해.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곧장 호텔 복도로 나왔다. 덜커덩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로비에 내린 그는 호텔 후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는 인파가 들끓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건넌 그는 중국행 버스 정류장 앞쪽에 서 있는 택시의 뒷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택시가 튕기듯이 앞으로 달려 나가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한이 입을 열었다.

경찰에 신고가 되어 있습니다. 채담이 확인해 보았답니다.

놈은 우리가 러시아 여권을 사용하고 있는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택시는 네이단 로드로 들어서더니 곧장 위쪽으로 달렸다. 잠자코 앞쪽을 바라보던 김상철이 이한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결국 그놈이 우리를 찾게 될 것이다.

택시는 요우마디를 지나 왕지아오로 들어서고 있었다. 인구 밀도가 홍콩 제일인 거리로 온통 사람과 차의 물결에 휩싸인 지독하게 혼잡한 거리였다.

후문으로 나와서 버스 정류장 앞에서 택시를 탔습니다. 갑자기 내려오는 바람에 저회들은 미처‥‥」

부하 한 명이 더듬거리며 마파척의 눈치를 살폈다.

미리 택시를 대기시켜 두고 있었습니다. 택시는 미들로드 쪽으로 갔습니다만‥‥‥」

마파척은 흐린 눈으로 앞에 선 부하들을 번갈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성화 호텔에서 두 블록밖에 떨어지지 않은 베이징로드의 마우저 호텔 안이다. 시계는 1150분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김상철이 행방을 감출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마파척으로서도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어서 부하들만 다그칠 수는 없다.

놈이 섬 쪽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놈은 아마 우리를 역추적하려고 이 부근에 있을지도 모른다.

담배를 빼어 문 마파척이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박미정은 내 마음대로 처리하라는 뜻이로군, 교활한 놈, 방에서 기다리는 것처럼 해놓고 곧장 도망치다니‥‥‥」

그는 성화 호텔의 건너편에 위치한 쉐라들 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김상철을 기다렸던 것이다. 망원렌즈가 부착된 79식 저격보총은 구소련의 SVD 드라그노프 저격 라이플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유효 사정거리가 800미터나 된다. 170센티미터의 신장을 가진 사람 머리를 맞추려고 조절된 망원조준경 안으로 김상철은 들어오지 않았다.

앞쪽 택시에 탄 두 사내는 놓쳐서는 안 될 유일한 실마리였다. 김상철이 성화 호텔을 빠져나왔을 때 로비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두 사내가 그를 쫓았고 최복수와 정기만이 그들을 미행했던 것이다.

두 사내는 김상철을 놓치자 택시를 잡아타고 한참이나 네이단 로드를 따라 올라가더니 단념한 듯 다시 내려와 마우저 호텔로 들어갔던 것이다. 운전사는 이제 그들이 탄 택시와 거의 나란히 서서 달리고 있었다. 최복수와 정기만은 좌석에 등을 깊숙이 밀착시켰다. 최복수가 힐끗 옆쪽을 바라보자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내들의 옆얼굴이 보였다.

, 꽉 잡으시오.

광동어로 소리친 운전사가 핸들을 와락 꺾자 그들이 탄 택시는 옆쪽 택시의 왼쪽 뒷부분을 세차게 들이받았다. 요란한 충돌음과 함께 몸이 왈칵 앞으로 쏠리는 충격이 왔다. 그때 그들의 뒤쪽에서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가 잇달아 들리면서 다시 충격이 가해졌고 저쪽 택시도 뒤따라오던 차량에 의해 다시 부딪혔다. 최복수와 정기만은 거의 동시에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저쪽 택시도 뒷좌석의 문이 열리면서 사내들이 서두르며 나오는 중이다.

도로는 금방 수라장이 되었다. 이쪽 운전사는 받은 주제에 냅다 고함을 질러대는 중이었고 차량들은 길을 가득히 메우며 멈춰 선 상태였다. 최복수와 정기만이 바짝 다가서자 사내들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것 봐, 당신들.

정기만이 고함과 동시에 주먹을 휘둘러 사내 한 명의 턱을 쳤고 최복수는 발을 날려 다른 사내의 사타구니를 올려 찼다. 사내들이 제각기 비틀거리는 순간 다시 주먹을 휘둘러 사내의 얼굴을 쳐올리던 최복수가 주춤 몸을 굳히더니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다음 순간 정기만도 택시의 몸체에 등을 부딪치면서 입을 벌렸다. 흰색 셔츠의 가슴 한복판에 동전만한 핏자국이 보이더니 금방 손바닥만 하게 커졌다. 최복수가 땅바닥에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더니 머리를 숙였다. 입에서는 핏덩어리가 울컥울컥 땅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등과 가슴을 관통당해 이미 온몸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정기만은 아직 정신이 흐려지지 않았으므로 기를 써서 몸을 세우고는 최복수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제서야 주위에서 째지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났다. 여자들이 내지르는 놀람과 공포의 비명이다. 그 소리가 신호가 된 듯이 사람들이 놀란 고기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고 정기만은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최복수는 땅바닥에 엎어졌고 정기만도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총을 맞은 것이다. 택시에 타고 있던 두 놈은 미끼였고 그들은 이미 사람들과 함께 도망쳐서 보이지 않았다. 최복수의 몸 위로 엎어지면서 정기만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쏜 사내를 찾으려는 듯 앞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양필성이 방으로 들어서자 이금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 6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어서 안쪽의 홀에서는 이미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양선생.

이금철의 중국어는 유창했다. 악수를 나눈 그들은 술과 안주가 준비되어있는 탁자에 마주 앉았다. 양필성이 다소 서먹한 얼굴인 이유는 이금철과의 첫 대면인 까닭도 있지만 근대리아에서 북한과 중국계와의 결코 우호적이라고 볼 수 없는 관계 때문이기도 했다. 지난번의 폭동 때 북한계는 김상철과 연합으로 이쪽을 쳤다. 물론 그전에는 진대원이 남북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양쪽을 살상하기도 했으므로 이쪽도 피를 나눈 형제 운운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무슨 용건입니까?

이금철이 따라준 보드카 잔을 본 척도 하지 않고 양필성이 물었다.

오늘의 만남은 이금철의 요청으로, 홍기천 대신 양필성이 참석하여 북한 측의 코즈모프 바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신들이 잘 알고 있는 일 때문이오.

술잔을 손에 든 이금철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홍콩의 김상철이 때문이지.

우리가 잘 알고 있다니, 당치 않소.

양필성이 정색을 하고 머리를 저었다.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오.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소? 지금 장인규는 전쟁 준비를 하고 있어요.

이금철이 탁자 위로 상체를 숙이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만만하게 보면 안 될 거요. 김상철이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 잡은 부하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는 소문도 있으니까. 홍콩에서 김상철의 부하 두 명이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지?

글세, 그 일도 우리하고는…….

그러다가 양필성이 술잔을 쥐고는 단숨에 술을 삼켰다.

우리는 상관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했단 말이오? 아니면 마피아가? 아직 뿌리도 내리지 못한 야쿠자가 했다고 할 참이오?

이금철이 상체를 세우고는 어깨를 폈다.

솔직히 전쟁이 터진다면 나도 김상철의 손을 잡게 될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당신들은 고립무원이야,

「‥‥‥‥」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소. 김상철의 옛날 여자까지 인질로 삼아 그를 없애려고 하는 당신들의 저의를 말이오.

글쎄,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고 했지 않소?

얼굴을 붉힌 양필성이 소리치듯 말하자 이금철도 눈을 부릅떴다.

정말 끝까지 시치미를 뗄 작정이라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시오. 나도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을 테니까.

「‥‥‥‥」

난 쓸데없는 전쟁을 막아볼 생각이었소. 지금 부하 두 명을 잃은 김상철은 눈이 뒤집혀 있단 말이오. 곧 무슨 일이 일어날 테니까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으라구.

자리에서 일어난 양필성이 이금철을 내려다보았다.

대형하고 상의해 보겠소.

전쟁 준비나 잘해두시오.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경우가 다를 테니까.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양필성이 방을 나가자 이금철은 다시 술잔을 쥐었다.

 

사건 현장은 공교롭게도 네이단로드의 요우마디 북쪽으로 장의사가 밀집되어있는 지점이었다. 이미 현장 정리는 끝난 지 오래였고 두 구의 시체는 곧장 장의사에게 보내진 것이 아니라 경시청의 시체보관소에 안치되었다.

경시청의 진위 경위는 현장 검증을 마치고는 찌푸린 얼굴로 사복 차림의 부하를 바라보았다.

이봐, 그렇다면 이놈들을 쏜 것은 누구일 것 같나? 삼합회가 움직인 것이 아닐까?

머리를 갸우뚱 기울인 부하가 자신 없는 얼굴을 했다.

정보원의 말을 들으면 삼합회는 관계하지 않은 것 같은데,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원체 조직원이 많아서‥‥」

빌어먹을.

길가의 빌딩 앞에 선 진위는 팔짱을 낀 자세로 앞쪽 도로를 바라보았다. 러시아워여서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은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다.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에는 제법 차량의 흐름이 빨랐는데 피살자들은 택시운전사를 위협하여 앞쪽의 택시를 들이받게 한 다음 뛰쳐나갔다고 했다. 그러고는 상대방 남자들을 폭행하는 도중에 총을 맞았는데 증인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다른 곳에서 총알이 날아온 모양이었다.

김상철과 이한, 이제는 두 놈만 남았군.

담배를 꺼내 입에 문 진위가 부하를 돌아보았다

메리디안에 그놈이 투숙했다는 신고가 들어온 것을 보면 그놈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든지 아니면 꼬리를 잡히고 있어.

그렇다면 김상철과 이한, 그리고 여자까지 해서 세 명이 남은 것 아닙니까?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길가에 세워둔 그들의 경찰차 뒤쪽에 택시 한 대가 멈춰서더니 사내 두 명이 내렸다. 그들을 본 진위가 입맛을 다셨다. 한국에서 온 안기부 요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진위에게로 곧장 다가와 섰다. 경시청 본부에서 오전에 인사를 나누었다고 스스럼없는 태도였다.

경위님, 본부에서 들었는데 피살자들도 총기를 휴대하고 있었다면서요?

그 중 나이 든 사내가 유창한 영어로 물었다. 그가 서두르듯 말을 이었다.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없어요, 아직은‥‥‥」

우리도 본부에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더구나 여자 한 명까지 납치되어있는 상황이라‥‥」

그러자 진위가 턱으로 앞쪽 거리를 가리켰다.

저것 보시오. 저 자리에서 몇 시간 전에 두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흔적이 있습니까? 우리도 수사를 하겠지만 아침 같은 신고가 들어오기 전에는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사내가 무엇인가를 다시 물을 것 같았으므로 진위는 발을 떼어 도로로 나섰다. 김상철이 홍콩에 와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었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왕지아오의 허름한 게스트하우스 안이다. 밝은 가구에다 햇볕이 들지 않은 방이어서 습기가 밴 방 안에서는 지린내마저 났다. TV의 스위치를 끈 김상철이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는 이한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놈들을 가볍게 생각한 내 실수다.

저녁 7시가 되었는데도 불을 켜지 않아 실내는 어두웠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방 안을 울렸다.

이곳에 온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그놈들의 조건을 무시해 버렸어야만 했어. 내 치졸한 객기가 최복수와 정기만이를 죽였다.

바깥의 불빛을 받아 희뿌연 형체만 보이는 이한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포기하고 돌아가자, 더 이상 놈들의 노리개가 되지는 않겠다.

형님.

이한이 입을 열었다.

이제는 이대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왕 그럴 작정을 하셨다면 놈들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이 ‥‥」

그놈들이 누군지도 아직 우리는 모르고 있어. 더구나 놈들은 우리가 홍콩에 있다는 것을 경시청에 신고까지 해놓았다. 우리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분합니다.

손을 뻗어 전등의 스위치를 켜려던 김상철이 다시 등을 의자에 기대고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내려가자. 전화를 걸 시간이다.

게스트하우스를 나온 그들은 거리 모퉁이에 세워진 공중전화 부스로 다가갔다. 부스 안에 들어간 김상철은 전화기를 쥐었다. 거리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고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소음이 심했으므로 그는 수화기를 귀에 바짝 대었다.

여보세요.

기다리고 있었던 듯 송길수가 대뜸 한국어로 전화를 받는다.

나다. 무슨 연락 없었나?

있었습니다, 형님.

송길수가 소리치듯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장사장한테서 연락을 받고는 형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양필성이 털어놓았습니다. 그놈은 마파척이라는 청부살인업자가 틀림없는 것 같답니다. 동기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놈이 박미정 씨를 납치하고 지금 홍콩에서 형님을 노리는 것 같다고 합니다.

「‥‥‥‥」

그놈은 찬드라라는 이름으로 타운 호텔에 장기투숙을 했고 박기동과는 친하게 지냈었다고 하는군요. 양필성도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김상철이 초조한 표정으로 뒤쪽에 서 있는 이한을 바라보았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그는 오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다가 가끔씩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면 삼합회하고는 관계가 없단 말이냐?

, 형님, 이금철이 양필성에게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더니 저회들끼리 상의를 한 모양입니다. 그놈들은 알고는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겁니다.

타운 호텔에서 박기동과 친하게 지냈다면 조직의 내부사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형님, 듣고 계십니까?

이쪽이 잠자코 있자 송길수가 소리를 쳤다.

그래, 듣고 있어.

경비대의 도청을 피하려고 장사장이 헬기로 테르시 마을까지 내려와 무전기로 그레고리에게 연락한 것을 제가 중계받았습니다. 제가 내일 아침에 부하들을 데리고 홍콩에 갈 작정입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김상철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보다도 마파척에 대해서 들은 대로 말해라, 어서.

마파척의 가족 관계를 아는 사람은 본인 외에는 아무도 없다. 언제나 일정한 거주지도 없이 일이 생기면 나타났다가 끝나면 자취를 감추는 그는 신비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홍콩에서 그의 비밀은 조금 벗겨졌는데 요우마디에 있는 클럽 델저인 소기에 의해서였다. 그가 소기를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기가 그의 정부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었다. 실제로 삼합회 간부들이 소기에게 연락을 해서 마파척을 찾은 적도 있었다.

 

요우마디의 조단로드에 있는 라이온 클럽 안이다. 20평 규모의 작은 클럽이었지만 내부 장식은 화려했고 밤 11시가 되자 홀 안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 홀 중앙에 원통형으로 세워진 무대 위에는 빠른 타악기의 음악에 맞추어 흑인 남녀가 선정적으로 몸을 비틀며 춤을 추고 있었다. 지금이 가장 손님이 많은 시간으로 소기의 순서는 그다음이다.

주방 옆쪽에 3평쯤의 규모로 만들어진 대기실에 앉아 소기는 다리에 크림을 바르고 있었다. 곧게 뻗은 다리의 선이 대리석 조각처럼 매끈했고 샌들 앞쪽으로 튀어나온 발톱에는 붉은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그녀는 스물다섯 살로 홍콩의 여배우 진진과 닮은 미인이었다. 몸매도 빼어났으므로 내막을 모르는 손님들이 기를 쓰고 추파를 던지는 것도 당연했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지배인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 10분 후야. 준비해.

알았으니까 어서 문 닫고 꺼져.

40대 중반으로 비대한 체격의 지배인이 눈만을 굴리다가 문을 닫았다.

소기는 라이온 클럽의 지분을 반이나 갖고 있는 실질적인 소유주였으므로 지배인 목을 자르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 그녀는 무대에 서서 뭇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에 받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마파척에게는 비밀로 했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섹스 스타일은 혼음이었다. 아니면 구경꾼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흥분이 된다.

다시 문이 열렸으므로 소기는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낮선 사내가 거침없이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당신 누구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한 그녀가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고 엉덩이를 들었을 때 다가선 사내가 주먹을 휘둘렀다.

턱이 부서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소기가 눈앞에 무수한 흰 점을 보면서 옆으로 쓰러지자 이한은 그녀의 허리를 안아 들었다. 뒷문은 바로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고리를 푼 그가 밖으로 나가자, 택시의 뒷문이 열렸다. 김상철이 두 손을 벌리고 소기의 상반신을 받아 안자 택시는 날카롭게 타이어로 바닥을 긁으면서 달려 나갔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박미정은 자신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면서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아직도 건물 안에서는 갖가지 소음이 들려왔지만 강도는 낮다. 이제는 낮시간에 들리지 않던 물 버리는 소리, 어린아이가 우는 것 같은 고양이 소리도 들려왔다. 두 손이 묶여 있었으므로 그녀는 허리를 겨우 움직여 몸을 모로 눕혔다. 옆방의 마른 사내는 잠이 들었는지 이제 기척이 없다. 베개에 머리를 다시 고정시키려고 몸을 뒤척이는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옆방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났다. 한두 사람이 아닌 서너 명의 기척이었다. 긴장한 박미정이 어둠 속에서 눈을 크게 떴을 때, 이쪽의 방문이 열리면서 불이 환하게 켜졌다. 놀라 몸을 일으킨 그녀 앞으로 다가온 사내는 마파척이다.

깨어 있었던 모양이군.

그가 던지듯이 말하자 박미정은 서둘러 일어나 신발을 발에 꿰었다. 두 눈이 불안감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 옆방에서 가구를 뒤지는 듯한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김상철이가 내 정체를 알아낸 모양이야. 놈은 요우마디에 있는 어떤 계집을 납치해 갔어.

마파척의 입가에 웃음기가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내 여자라고 소문을 내고 다닌 년인데 이제 그 대가를 치를 때가 되었지.

「‥‥‥‥」

여자를 하나씩 꿰차고 일하게 되었으니 공평하게 되었다.

시계를 내려다본 마파척이 몸을 돌리더니 옆방의 문을 열고는 무어라고 짧게 지시하고 돌아왔다.

시간은 충분해.

그는 앞에 버티고 선 채로 벨트를 풀었다. 지퍼를 내리고 바지를 벗어 던지는 동안 박미정은 온몸을 굳힌 채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마파척의 팬티가 바로 눈앞에 보였고 팬티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돌출해 있는 것은 그의 성기였다. 상의를 벗어 팽개친 마파척이 이제 팬티를 끌어 내리자 그의 검은 성기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마파척은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쥐는가 싶더니 와락 침대 위로 밀었다.

넌 영리한 년이니까 쓸데없는 반항은 하지 않을 것이다.

박미정은 그의 손이 자신의 바지를 벗겨내는 동안 누운 채로 저항하지 않았다. 바지가 벗겨지자 곧 팬티가 거칠게 벗겨졌다.

아름다운 몸매로군.

자신의 하반신에 꽂힌 그의 시선을 의식한 박미정이 무의식중에 다리를 오무렸다가 우악스런 손길에 의해 다시 벌려졌다. 마파척의 몸이 곧 박미정 위로 겹쳐졌다. 눈을 크게 뜬 채로 이를 악문 그녀의 얼굴 위로 마파척의 얼굴이 부딪쳐 왔다. 그 순간 하반신에 뜨거운 통증을 느낀 박미정은 눈을 감았다. 마파척의 거친 숨결이 귓가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의 거칠고 힘찬 허리의 움직임에 전신을 맡기고 있던 박미정은 어느덧 자신의 하체가 젖어가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몸이 그를 받아들이면서 호흡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마파척의 움직임은 거칠었지만 잘 절제되어 있었다. 자신이 뜨거워져 가는 것을 느끼고는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다리를 들어.

헐떡이면서 마파척이 말하자 박미정은 두 다리를 들어 그를 더욱 깊게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위쪽으로 치켜들고 있던 묶인 두 팔을 내려 그의 목을 안았다. 마파척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지자 박미정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뱉아내었다. 그와 움직임을 맞춰 허리를 흔들던 그녀는 크게 입을 벌려 그의 어깨를 물었다. 마파척이 신음소리를 내었다. 박미정이 눈을 부릅뜨고는 어금니에 힘을 주자 마파척의 신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러나 허리 운동은 절정에 이른 듯 거칠고 빨라졌다. 입안 가득히 고인 피가 목구멍으로 흘러내려 갔고 나머지는 숨결에 튀어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그의 어깨에서 입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자 한입 가득히 마파척의 어깨살이 떨어지면서 그가 커다랗게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박미정은 그가 자신에게 뜨거운 것을 분출하는 것을 느끼면서 입에 물고 있던 그의 살점을 뱉아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터져 나오는 자신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안기부 요원인 양인수와 고병택은 다른 날과 같이 9시 정각에 경시청 진 경위의 방으로 들어섰다.

여어, 어서 오시오.

오늘따라 진위의 표정은 밝다. 30대 후반으로 수사관 생활 12년째인 그는 마른 몸매에 용모가 수려한 미남이다.

오늘은 이것저것 정보가 많습니다.

그러자 양인수와 고병택이 동시에 긴장을 하더니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김상철에 관한 정보인가요?

선임인 양인수가 묻자 진위가 머리를 끄덕였다.

모두 그자와 관계가 있는 정보요. 우선 어제 네이단로드의 사건은 삼합회의 살인 전문가인 마파척이란 자의 소행이라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꽤 정확한 정보원이 보내온 정보여서 믿을 만해요.

잠자코 있는 그들을 향해 진위가 말을 이었다.

두 번째로 파리에서 온 한국 여자, 그 박미정인가 하는 여자를 납치하고 당신 동료들을 살해한 것도 마파척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이것도 믿을 만한 것이오,

가만‥‥」

양인수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정보원의 정보라고 하셨는데, 무슨 증거라도‥‥ 아니면 증인이 있습니까?

당신은 증인과 증거에 입각한 수사를 하셔서 이런 정보가 양에 안 차시는가 본데 나는 이것만이라도 춤을 추고 싶은 심정이오.

「‥‥‥‥」

어젯밤에 요우마디의 라이온 클럽에서 소기라는 고급 창녀가 납치를 당했소. 그런데 그 여자가 누군고 하니 바로 마파척의 정부라는 소문이 나 있던 년이오. , 그년을 채간 것이 누군 것 같습니까?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고병택이 머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김상철이?

진위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김상철이 마파척의 정부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 아니오? 정보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김상철에게도 보내진 겁니다.

이제 김상철과 마파척은 상대방의 여자를 끼고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정보 소스를 알 수는 없습니까?

고병택이 묻자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진위가 머리를 끄덕였다.

말씀드리지요‥‥ 바로 삼합회요.

마파척은 지금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거요. 그래서 삼합회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

그래서 우리도 조금 신경을 써서 행동해야 될 것 같습니다. 무조건 김상철만 잡으려고 하면 안 될 것 같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마파척은 지금까지 여섯 건의 사건과 연루되어 있어요. 살해당한 사람만 해도 열네 명이오. 이것도 확실한 소스가 제공해 준 정보라 단숨에 미제사건 여섯 개가 해결될지 모릅니다.

진위의 방을 나온 양인수와 고병택은 경시청의 복도에서 마주 보고 섰다. 두 사람 모두 당혹스러운 표정이다.

계장님, 어떡하실 겁니까?

고병택이 입을 열었다.

보고해야 하지 않습니까?

해야지.

입맛을 다신 양인수가 지나가는 홍콩 경찰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마파척인지 마파두부인지는 모르지만 저놈한테 들은 그대로 보고하는 수밖에 없다. 당분간 홍콩 경찰은 김상철을 잡을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말이야.

 

형님, 마파척의 어머니가 시궁에 살고 있답니다. 3년 전에 중국에서 데려왔다는데요.

이한의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김상철의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해안가에서 해물 요리점을 하고 있어서 찾기 쉽습니다.

왕지아오의 게스트하우스 안이다. 어제 있던 곳과는 달리 방이 두 개나 되는 넓고 깨끗한 곳이었다. 마파척의 어머니에 대한 것은 이한이 밤새도록 소기를 닥달한 끝에 얻어낸 정보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옆방으로 들어서자 방바닥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있던 소기가 눈을 들었다. 코와 입에서 흘러내린 피로 상반신 여기저기가 거무튀튀했고 머리칼이 헝클어져 있었지만 빼어난 미인이었다. 밤새도록 이한에게 시달린 때문인지 그녀의 시선은 불안한 듯 흔들리고 있었다.

꽤 고집을 부리더니 죽기는 싫었던 모양이군. 마파척에 대해서 털어놓은 걸 보면.

김상철이 영어로 말하자 소기가 힐끗 이한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얼굴을 칼로 긋는다니까 불더군요. 죽인다는 말보다 그것이 더 무서웠던 모양입니다.

이한이 한국어로 말했다.

형님, 이년과 애미를 함께 잡아놓으면 그놈은 꼼짝하지 못할 겁니다.

김상철이 소기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시궁에 마파척의 에미가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냐?

소기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김상철은 한 걸음 다가가 섰다.

마파척의 인상을 말해라. 특징이나 성격, 네가 알고 있는 모든 버릇을.

김상철과 이한이 방을 나온 것은 그로부터 1시간쯤 지난 후였다. 그들은 제각기 관광객 차림으로 배낭까지 메었고 이한은 목에 싸구려 카메라까지 건 모습이었다. 거리는 행인들로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갖가지의 소음을 헤치고 걸어가는 것은 마치 전쟁터를 헤쳐가는 느낌이었다.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가던 김상철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건물 앞쪽에 붙은 공중전화를 바라보았다.

여보세요.

진위는 상대방이 영어를 쓰자 자신도 영어로 말을 바꾸었다.

내가 진위올시다.

난 김상철입니다.

순간 숨을 멈춘 진위가 허리를 세우고는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김상철 씨, 당신이 어떻게 나를‥‥‥」

당신이 이번 사건의 담당자라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꽤 먼 곳에서 전해져 오지만 정확한 정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진위는 선수를 빼앗긴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김상철 씨, 어젯밤에 요우마디의 라이온 클럽에서 소기라는 여자를 납치해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

그랬습니다. 마파척의 소재를 알아내기 위해서 데려갔지요, 오늘 밤 안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드리지요.

상대방이 대뜸 시인하고 약속해 오는 데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김상철의 말이 이어졌다.

마파척의 소재는 모르는지 그자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시궁이라는 바닷가로 베이징 반점이라는 해산물 요리점인데 ‥‥‥」

진위는 부리나케 서류 위에 시궁의 베이징 반점이라고 흘려 썼다.

공원 옆의 승선장 쪽으로 있다니까 찾기 쉬울 겁니다.

그것을 나한테 알려주는 이유는 뭐요?

서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혼자 힘으로는 벅차기도 하고.

알겠소.

그놈이 그곳에 한국 여자를 숨겨두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겠소.

그럼 움직여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오. 그런데 여자는 무사하지요?

가볍게 헛기침을 한 진위가 말을 이었다.

약속은 꼭 지켜줘야 합니다.

알겠소. 그런데 나도 부탁이 있습니다.

송화기를 통해 소음이 심하게 들리는 걸 보면 길가의 공중전화 부스인 모양이었다. 김상철이 소리치듯 말했다.

내 부하 두 명이 지금 경찰병원 영안실에 누워 있소. 그놈들은 러시아 여권을 갖고 있지만 본적이 근대리아요. 내일 중으로 20만 달러를 당신 앞으로 보내드릴 테니 그들의 시체를 좋은 관에 넣어서 근대리아로 보내주시오.

「‥‥‥‥」

근대리아의 행정위원장에게도 연락을 할 테니 보내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수취인은 장인규·. 장인규로 적어주시오.

전화가 끊겼으므로 진위는 및 번 소리치다가 서류 위에 '근대리아, 행정위원장, 장인규'라고 써 갈겼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눈을 껌벅이며 한동안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놀란 듯 일어서서 옷걸이에 걸린 상의를 집어 들었다.

 

시궁은 해안선이 아름다운데다가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수려한 경관 때문에 주말에는 사람들이 들끓는 곳이다. 아직 조그만 마을이었지만 홍콩의 중심부에서 1시간 안의 거리에 이렇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곳이 드물었으므로 내지 손님들이 많았다. 특히 해물 요리가 유명했는데 버스 터미널에서 해안까지 해물 요릿집들이 늘어서 있어서 즉석요리를 구경하고 맛볼 수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자 요릿집의 손님이 뜸해졌고 거리의 행인들도 줄어들었으므로 마파척은 의자에서 등을 떼고는 눈을 PSO-1 망원조준경에 댔다. 3층의 창에서 해물 요릿집의 현관을 겨냥해 고정시켜 놓은 저격보총에 장착된 망원렌즈였다. 4배 배율로 사정거리가 800미터지만 해물 요릿집과의 직선거리는 100미터 정도였으니 얼굴의 점이라도 맞출 수가 있다. 아래쪽의 길로 소학교 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지나고 있었다. 건물의 옆쪽에 있는 소학교 수업이 끝난 모양이었다. 뒤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형님, 집주인 아들놈이 방금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다가온 부하가 마파척의 옆에 앉아 앞쪽의 해물 요릿집을 바라보았다.

동천이 잡았는데 울길래 입에다 테이프를 붙여놓았습니다.

이 집은 3층짜리 저택으로 주인 식구와 하녀까지 합하여 7명을 잡아서 묶어놓았는데 소학생 하나가 더 늘었으니 8명이 된 셈이다.

마파척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430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소기는 아마 몇 시간이 못 되어서 해물집의 위치를 불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김상철은 틀림없이 이곳으로 온다. 그가 다시 망원렌즈에 눈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대여섯 대의 승용차가 속력을 내어 바닷가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승용차들은 일제히 요릿집이 늘어선 길가에 멈춰서더니 경찰들이 쏟아져 내렸다.

이런 빌어먹을.

번쩍 머리를 든 마파척의 얼굴은 찌푸려져 있었다. 그는 상처 난 어깨를 조심스럽게 펴며 일어셨다.

놈이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는 저격보총을 삼각대에서 떼어 냈다.

돌아간다.

이미 어머니는 리우푸샨으로 옮겨갔고 요릿집은 종업원들만이 지키고 있을 뿐이다. 부하가 문을 열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알루미늄 가방에 총을 분해해 넣으면서 마파척은 어금니를 물었다. 자신이 그랬듯이 놈도 적절하게 경찰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상황이 급박하게 반전되어 가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삼합회 측에서 정보를 흘려준 것이다. 책임을 뒤집어쓸 상황이 되자 그들은 자신의 의심 가는 행적을 김상철 측과 경찰에게 알려주었을 것이다.

 

퇴근 시간이 지났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진위는 의자에 온몸을 구겨 넣은 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기동타격대를 이끌고 기세 좋게 시궁에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온 것이 30분 전이다. 직속상관인 호경감은 오늘은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언젠가는 이 일로 꼬투리를 잡을 것이다. 김상철은 자신에게 거짓 정보를 주었던 것이다. 시궁 바닷가의 베이징 반점 주인은 40대의 홍콩 토박이로 3대에 걸쳐 요릿집을 하고 있는 사내였다. 시궁의 해물 요릿집은 줄잡아서 백여 개가 넘는다. 베이징 반점에서 기운이 빠져버린 진위는 기동대를 사방에 배치해 놓은 채 몇 집을 수소문하다가 돌아왔던 것이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는 손을 들어 수화기를 잡았다.

여보세요, 진 경위올시다.

경위님, 저 시궁에 남은 교경사입니다.

소리치듯 말한 사내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경위님, 10분쯤 전에 중산 반점에서 폭발이 일어나 완전히 전소되었습니다.

무슨 폭발이야?

택시를 타고 온 놈들이 폭탄을 던지고 도망쳤다는데 아무래도 수류탄 같습니다.

「‥‥‥‥」

그것도 한 개가 아니고 대여섯 개나 되어서 요릿집이 완전히 가루가 되었는데‥‥‥」

인명 피해는?

그것이 ‥‥」

저쪽이 잠깐 숨을 돌리려는 듯 말을 멈췄다.

그것이 수류탄을 던지기 5분쯤 천에 전화가 와서는 대피하라고 했답니다. 주방장 한 사람만 장난 전화인 줄 알고 남아 있다가 화상을 약간 입었습니다.

중산반점이라구?

, 경위님.

주인이 누구야?

이곳 서류에는 지엔사쥐에 살고 있는 탁정 씨라고 되어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운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만, 오늘은 보이지 않았답니다.

「‥‥‥‥」

경위님, 혹시 그곳이‥‥ 경위님이 찾으셨던 곳이 아닌가 해서,

진위는 입맛을 다셨다. 마파척의 어머니는 중산 반점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택시를 타고 수류탄을 던진 놈들은 김상철과 이한이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가 조금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앉아 있는데 다시 벨소리가 울렸다. 그는 서둘러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김상철입니다.

당신, 장난하는 거야?

진위가 버럭 고함을 쳤다.

베이징 반점이라구? 중산 반점이 아니었어?

그렇소. 중산 반점이오.

그의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에 진위의 화가 더욱 북받쳐 올랐다.

그렇다면 왜 거짓말을 해!

당신이 곧장 중산 반점으로 갔어도 마파척은 물론이고 그놈의 어미도 만날 수 없었을 거요. 그놈은 소기가 납치된 것을 알자마자 빼돌렸을 테니까.

그쯤은 나도 짐작하고 있었소.

마파척 그놈이 내가 오기를 기다릴 것이라는 것도 예상하셨겠지요?

「‥‥‥‥」

경찰이 들이닥치는 것을 보고는 철수했을 겁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경찰도 물러갈 것이고.

「‥‥‥‥」

내가 노렸던 것은 그것이오. 난 그놈의 가게를 산산조각 낼 작정이었소. 노친네를 어떻게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당신, 도대체 어쩌려고‥‥ 인질로 잡혀 있는 여자는‥‥‥」

내가 여자 때문에 끌려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그놈도 알게 되었을 거요.

내가 당한 만큼 빚을 갚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소기는‥‥‥」

조금 전에 보냈습니다. 코피가 조금 났고 입안이 터졌지만 며칠 쉬고 나면 다시 엉덩이를 흔들 수 있을 거요. 마파척이 어떻게 할지는 알 수 없지만.

「‥‥‥‥」

최소한 그놈과는 동격으로 취급받기 싫으니까. 오늘 정말 미안합니다, 진경위.

전화가 끊기자 진위는 목을 좌우로 흔들어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보다는 조금 기운이 났고 기분도 나아진 느낌이었다.

 

왕지아오의 네이단로드를 따라 곧장 올라가다가 아크릴로드로 휘어져 한 블록이 끝나는 곳에 에드워드 클럽이라는 조그만 술집이 있었다. 길모퉁이에 세워져 있었지만 간판도 없고 육중한 나무 문 위에 문패처럼 상호만 붙어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게다가 회원제 클럽으로 회원만을 입장시켰고 회원과 동행한 비회원도 받지 않는다. 클럽 안은 넓었다. 150평쯤 되는 넓은 공간에 어두운 색깔의 가죽 의자가 서너 개씩 모여 있었고 그 사이로 잎이 무성한 화초를 놓아 구분해 놓았다. 바닥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어서 발짝 소리도 없고 더구나 음악도 없다. 천장의 거대한 샹들리에가 희미한 빛을 발하고는 있었지만 실내는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절대로 밝고 가벼운 분위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곳이었다.

10시가 되었지만 클립에는 손님이 서너 테이블뿐이었다. 안쪽의 주방 입구에 도열해 있는 웨이터들이 가끔씩 소리 없이 오가며 시중을 들 뿐 클럽 안은 조용했다. 마파척은 벽 쪽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그와 마주 보고 앉은 사내는 장영국으로 삼합회의 홍콩지회 자문이었다. 자문역이면 지회장 다음가는 지위로 회주의 직명을 받아 움직이는 요직이다. 50대 후반으로 백발에 코밑수염도 하얀 장영국은 마파척과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는 사이였다. 한동안 그들 사이에 흐르던 정적을 장영국이 먼저 깼다.

러시아에서 곧 수십 명의 고려인이 몰려온다는 정보가 있어. 그자들이 홍콩을 휘젓고 다닌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얼굴의 표정도 부드러웠지만 마파척은 몸을 굳히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검찰 당국은 아마 이 소동을 기회로 삼아 몇 개 조직을 분쇄시킬 것이 틀림없어. 요우마디와 통루어완에서 몇 놈이 마약 거래로 꼬리를 잡혔거든.

「………」

그리고 근대리아의 흥기천 입장이 난처해진단 말일세. 상황이 묘하게도 남북한 세력이 연합해 있는 데다 마피아에까지 김상철은 뿌리를 박고 있단 말이야. 삼면에 적을 두고는 불편해진단 말이지.

장영국이 물잔을 손에 쥐고는 한 모금 마셨다. 가느다란 목과 튀어나온 울대를 보면 한 손에 조를 수 있을 것같이 가냘파 보이지만 장영국은 별명이 처형수로 20년 전만 해도 한 달에 서너 명은 꼭 죽였다는 삼합회의 감찰관 출신이다.

물잔을 내려놓은 장영국이 마파척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대원과의 약속은 이제 잊어버려. 그만하면 충분히 의리를 세웠고 신의도 지켰다. 그것은 내가 인정해 주마.

이미 늦은 감이 있습니다, 장대형.

마파척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김상철과 저와는 이제 씻을 수 없는 원한이 쌓였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 천의(天意)를 거역하지 마라.

몸을 반듯이 세운 장영국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희미한 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는 마파척을 쏘아보았다.

김상철은 여자를 풀어주면 이곳을 떠날 위인이다. 그는 소인배가 아니다.

그러자 번쩍 머리를 든 마파척의 시선이 그와 잠시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자네 또한 우리한테 유용한 인재야. 이런 의미 없는 싸움에서 희생시키고 싶지가 않아. 내 말 알겠는가?

, 장대형.

마침내 길게 한숨을 내리쉰 마파척이 말을 이었다.

내일 오전 안에 여자를 보내지요.

넌 당분간 중국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낫겠다. 어머니를 모시고.

알겠습니다.

뒷일은 모두 나에게 맡기고‥‥ 아마 네 명성은 크게 떨치게 될 것이다.

 

경위님, 특별우편으로 보내온 서류가 있는데요.

진위 앞에 선 부하가 편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한국의 안기부 요원 양인수와 고병택과 함께 있는 자리였다. 인수증에 사인을 받은 부하가 방을 나가자 진위는 봉투를 뜯고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수표 한 장이었다. 한동안 수표를 내려다보던 진위는 이윽고 지갑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안에 집어넣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인질로 잡혀 있는 한국 여자의 구출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갑을 넣으면서 진위가 앞쪽에 앉은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말을 받은 것은 양인수였다.

그러고 그다음 순서는 김상철을 체포하는 겁니다.

머리를 끄덕인 진위는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고는 다이얼을 눌렀다.

새벽 5시쯤 소기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김상철의 말대로 코피가 났고 입 안이 조금 터진 것 외에는 멀쩡한 모습이어서 당장에 오늘 밤부터라도 무대에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야, 시체실의 채 주임을 바꿔.

진위가 의자에 등을 기대더니 말을 이었다.

채주임? , 진경위다. , 워털루로드 아래쪽에 관 파는 집 있지? 그곳에다 관 두 개만 좋은 걸로 주문해 줘. 단단하고 값진 걸로. 돈 걱정은 말고.

그는 힐끗 양인수와 고병택을 바라보았다.

호화스러울 필요는 없다니까, 이 멍청아. 단단하고 품위 있는 걸로. 그래, 얼마 정도라구? 그까짓, 상관없어. 당장 주문해. 네가 잘 아는 데가 있을 테니 생색을 내란 말이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진위가 의자에서 등을 떼었다.

한국 여자가 풀려난다면 파리 사건에 대한 김상철의 혐의는 풀리겠군요.

글쎄요. 하지만 다른 사건도 있어서 ‥‥」

양인수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근대리아에서 그는 우리 요원 다섯 명을 사살한데다가 그전에도 다른 한 명을 살해한 혐의가 있습니다.

그렇군요.

김상철이 마파척의 어머니가 운영했던 가게까지 잿더미로 만들어 놓은 마당인데 인질을 풀어줄까요?

진위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글쎄, 기다려봅시다. 우리가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오, 이 일은.

 

채담이 운전하는 승용차는 이번에는 신형 벤츠였다. 차 안의 가죽 냄새도 아직 가시지 않은 신형이었고 숨소리도 들릴 만큼 방음 장치가 잘돼 있었다. 아침 1015분이었다. 러시아워가 지난 시간이었지만 차량의 소통이 많았으므로 채담은 자주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뒷자리에 깊숙이 앉은 김상철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벤츠는 바다를 왼쪽으로 끼고는 구룡반도의 신계를 달리는 중이었다. 허리춤에 찔러 넣은 권총이 허벅지를 찔렀으므로 그는 권총을 등 쪽으로 밀어 넣었다.

다 왔습니다.

채담이 속력을 내며 말했다. 차량의 통행이 뜸한 길을 지나자 앞쪽으로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새하얀 고층 아파트들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차가 멈춰 선 곳은 바닷가 외진 곳에 외따로 서 있는 흰색의 2층 벽돌집 정문 앞이다. 정문에 서 있던 두 사내가 잠자코 비켜서자 차는 현관 앞으로 굴러가 멈춰 섰다. 현관 앞에도 정장 차림의 두 사내가 서 있었는데 차에서 내리는 김상철과 채담을 보더니 허리를 굽혔다.

이쪽으로.

그들의 안내를 받아 현관으로 들어선 김상철은 마른 몸매의 사내를 보았다. 백발의 장영국이었다.

잘 오셨습니다.

온 얼굴을 주름살투성이로 만들며 장영국이 손을 내밀어 김상철의 손을 잡았다. 그가 김상철을 이끌고 간 곳은 로비 옆의 응접실이다. 이한은 시위하듯 기관총을 양복 안에 걸고 허리춤에 권총 두 개를 꽂은데다 바지 주머니에 수류탄을 넣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응접실로 따라오지 않고 로비에 남았다.

대형 유리창을 통해 푸른 바다와 어선들이 내려다보이는 응접실에 그들은 마주 앉았다. 앳된 얼굴의 소녀가 옆쪽 문을 열고 소리 없이 들어오더니 그들 앞에 김이 오르는 찻잔을 내려놓고 물러갔다.

김 선생을 뵙자고 한 것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우의를 맺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선생의 명성을 듣고 있었지요.

장영국의 표정은 온화했고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또한 이번 사건에 본회가 난데없는 오명을 쓰게 된 것에 대해서도 어쨌든 해명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영어는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표현이 정확했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번 일에 삼합회가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진대원이 죽기 전에 계약을 했던 모양이오. 마파척은 약속을 지키려고 했다는 겁니다.

장영국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겠지요. 본회의 내부에서도 지금 그자의 행동에 대해서 호의를 보이는 간부진이 있는 형편이니까.

장영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내가 너무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나는 이만 가겠습니다.

따라 일어선 김상철을 향해 그가 다시 얼굴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파척은 지금 중국에 들어가 있습니다. 일단 내가 그곳으로 보냈지요.

집 안에 하녀 두 사람만 남겨두고 비워둘 테니 쓰고 싶을 때까지 쓰시지요. 그 한국 여자분은 곧 들여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김상철에게 남아 있으라는 듯 손을 들어 보이고는 방을 나갔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박미정은 똑바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는데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화장기가 없는 데다가 긴머리를 뒤로 모아 묶은 탓인지 얼굴은 야위어 보였다. 그녀에게로 다가간 김상철이 반걸음쯤의 사이를 두고 멈춰 섰다.

고생 많았지?

시선을 내린 박미정이 그를 스치고 지나 응접실의 소파에 앉았다.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눈가가 조금 붉어져 있다. 집 안은 조용했다. 장영국의 말대로 모두 나간 모양이었다.

운이 좋았어.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김상철이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이곳에서 쉬어도 돼. 집주인이 우리를 위해서 빌려주겠다니까.

퍼뜩 시선을 들었던 박미정이 머리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한낮의 태양이 내려쪼이는 바다 색깔은 짙은 남색이었다.

나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게 돼서 미안해. 정말 면목이 없어.

그러자 박미정이 머리를 들었다.

난 끌려올 적에 당신을 만나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

찾아와 주신 것만 해도 기뻐요.

눈가가 더욱 붉어진 박미정이 다시 머리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만 나하고 같이 있어 줘요.

그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서두르듯 말을 이었다.

오늘 하루만‥‥ 여기서 나하고.

밤이다. 창밖은 이미 짙은 어둠에 덮여 있어서 지나는 배의 불빛으로 바다를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집 안은 조용했지만 1층은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어서 아래쪽의 벼랑까지 비추고 있었다. 이한이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외딴집에 노출된 채 남겨져 있다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불을 켜지 않은 2층 방 안은 어두웠지만 어둠에 익숙해지자 사물의 윤곽은 뚜렷해졌다.

이윽고 방 안의 정적을 깨고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는 김상철에게 박미정이 다가왔다. 그녀에게서 비누 냄새가 풍겨왔다. 김상철의 어깨에 몸을 기댄 박미정이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쓸었다.

한때는 당신을 잊었는데 ‥‥‥」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잊고 행복한 적도 있었어요.

김상철이 그녀의 허리를 한팔로 끌어안았다. 그녀가 지난 일을 끄집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자신도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왔다. 현실에 적응하여 잊고, 만나는 생활을 해온 것이다.

박미정이 그의 무릎 위에 앉더니 두 팔로 목을 감싸 안았다. 곧 둘의 입술이 부딪쳤고 김상철의 입안으로 그녀의 뜨겁고 매끄러운 혀가 빨려 들어왔다. 박미정의 한 손이 어느 사이에 그의 바지 벨트를 풀어 내리고 있었다. 김상철은 그녀의 스커트를 걷어 올리고는 서둘러 팬티를 끌어 내렸다. 서로 몸이 맞닿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불편한 자세였지만 곧 박미정은 그의 남성을 찾아 자신의 몸속으로 끌어넣었다. 그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오면서 그의 목을 힘차게 감아 안았다. 박미정은 하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칠고 끓은 숨을 토해내던 그녀는 신음소리를 내었고 그것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그녀를 두 팔로 감아 안은 김상철이 그 자세 그대로 일어났다. 침대로 가려는 몸짓이다. 그러자 박미정이 가쁜 숨을 뱉으며 말했다.

그냥 이대로‥‥‥」

다시 김상철이 의자에 몸을 내리자 박미정은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쫓기는 사람처럼 서두르고 있었다. 어둠 속이어서 윤곽만 보일 뿐이었지만 신음소리를 내는 그녀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그 자세 그대로 한 덩어리가 된 채 앉아 있었다. 집 안은 조용했고 이제까지는 들리지 않던 바닷가를 두드리는 물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내일 서울로 가겠어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박미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

앞으로는 방해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적어도 나로 인해서는‥‥‥」

김상철이 박미정의 허리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마지막 단계에서 나는 미정 씨를 포기했었어. 나는 그런 놈이야.

들었어요.

얼굴을 김상철의 가슴에 기댄 박미정이 더운 숨을 길게 뱉아냈다.

그놈한테서 ·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예요. 나도 현실과 타협을 해요.

 

 

 

2. 조직의 몰락

11월이면 근대리아는 벌써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겨울이다. 사흘 걸러 한 번씩 눈보라가 날리는데 어떤 때는 그것이 폭설로 변해 도로가 끊기고 비행장이 패쇄 된다. 그러나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보이는 밝은 날씨였다. 수은주는 영하 20도를 가리키고 있었으나 밝은 햇살에 바람도 없다.

날씨가 좋습니다.

담배에 불을 붙여 문 우재환이 테이블 너머로 길게 연기를 뿜어내었다. 그는 30대 후반으로 당당한 체격에 이목구비가 반듯한 호남이었다. 앞에 앉은 이대각은 어깨를 펴고 있었지만 그에게 비교하면 어린아이 같은 몸집이다. 우재환이 말을 이었다.

처음 여기 왔을 때는 못살 것 같더니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런대로 지낼 만하더군요. 보드카 맛도 괜찮고.

그는 운영위원장 전창남이 정책적으로 들여온 어용 조직의 우두머리였는데 근대리아에 온 지 한 달이 되어가는 중이다. 이대각이 그를 쏘아보았다.

고춘식이 소유했던 업소들은 서류상으로 완전히 김상철의 소유로 되어 있어요. 당신들이 무슨 수단을 쓴다고 해도 어려울 겁니다.

그렇습니까?

우재환이 상관없다는 듯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고춘식으로부터 업체를 인수할 때 강제성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고춘식은 근대타운의 초대 경비소장으로 타운이 개발을 시작하는 어수선한 때를 이용하여 갖가지 수단으로 거금을 착복했던 사내였다. 결국 그는 배후의 인물이었던 관리 담당 중역 조성욱과 함께 파면되었고 다섯 개의 사업장은 몰수되어 김상철이 관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대각은 말하기도 귀찮은 듯 머리를 돌리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근대리아에 오고 나서 10여 일간 우재환은 현지상황을 파악하는 듯 행정부에 나타나지 않았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이틀에 한 번꼴로 이대각을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운영위원장의 특별보좌관이라는 직책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함부로 내몰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부위원장님.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우재환이 정색을 했다.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모두 근대리아의 안정을 위해서 이러는 것 아닙니까? 지금 장인규의 능력이나 조건으로는 앞으로 쏟아져 들어올 한국계 이주민도 관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더구나 장인규는 북한계 출신이고 지금도 북한 쪽과 밀접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될 것이 뻔합니다.

나도 당신을 믿지 않소. 운영위원회 놈들도, 경비대도,

이대각이 머리를 가로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당신들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생각의 차이가 있소. 근대리아 건국이념의 차이라고 할까? 그것을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그 잘난 한민족의 새로운 자치 국가가 빨갱이 세상이 되어도 좋단 말이오?

우재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생각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당신들이 고춘식과 조성욱이를 꼬드겨서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이미 알고 있소,

소송 따위는 필요 없어요. 강제로 빼앗은 것이니 같은 방법으로 되찾는 수밖에,

눈썹을 치켜올린 우재환이 이대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경비본부에서 곧 다섯 개의 영업장에 어떤 조처를 내릴 거요. 내가 이렇게 미리 예고해 드리는 것은 쓸데없는 충돌을 피하자는 뜻이오. 부위원장께서 장인규에게 경고해 두시는 게 나을 겁니다.

어금니를 악문 이대각은 그를 노려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타운에는 갖가지 소문이 퍼져 있었고 우재환은 새로 생긴 서울 호텔에 대한실업이라는 이름의 사무실까지 설립해 둔 상황이다. 고개를 돌린 이대각은 소리 죽여 숨을 내쉬었다. 근대리아는 지금 안팎으로 숨통이 조여지고 있는 것이다.

 

근대시의 상가는 반 이상이 외부 공사까지 끝난 상태여서 입주한 업체만 해도 20퍼센트 가까이 되었다. 끝없이 몰려드는 이주민으로 근대리아의 인구는 벌써 백만 명이 넘었고 근대시는 35만 명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근대시의 주민은 대부분이 근대 직원이나 근대에 고용된 조선족 가족이었지만 외국인도 늘어나고 있다. 근대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20차선의 도로를 달리면서 시바다 겐지는 자신도 모르게 여러 차례 탄성을 질렀다. 그는 근대리아가 처음이었고 이렇게 거대한 도시를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거창하군, 가와베. 그렇지 않나?

시바다 겐지가 옆자리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나도 외국을 꽤 다녀보았지만 이런 도시는 처음이다.

그렇습니다, 보스. 규모뿐만 아니라 시설 면에 있어서도 세계 제일입니다.

가와베 미노루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현재는 아직 백만 명 정도지만 5년 후의 근대리아 인구는 5백만 명이 될 것으로 행정위원회가 계획하고 있습니다. 10년 후의 계획은 1천만 명입니다.

근대리아 행정부는 외화의 입출을 제한하지 않았으므로 이미 작년 말부터 세계 각국의 은행이 근대시에 지점을 개설하여 은행의 숫자만 해도 백 개가 넘었다. 외화의 입출 제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세금도 없는데다 고객의 비밀을 정부 차원에서 철저히 보호해 주었으니 검은돈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처음에 근대리아 내부의 불안정한 분위기 때문에 망설이던 고객들은 올 하반기부터 거액을 예금하기 시작했는데 러시아 마피아와 중국 삼합회의 자금이 제일 먼저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근대리아 내부에 기반을 굳히고 있었으므로 치안상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붓물 터지듯이 세계 각국에서 거금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미국 마피아는 물론 일본 야쿠자의 자금이 쏟아졌고 중국과 아프리카의 검은 돈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승용차는 속력을 늦추더니 도롯가에 세워진 호텔의 정문으로 꺾어져 들어섰다. 영업을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호텔로 20층 높이에 객실이 2천 개나 되는 대형 건물이다. 차에서 내린 그들이 로비에 들어서자 사람들을 헤치고 나카무라가 다가왔다. 본명이 김봉만으로 한국계 일본인이다.

보스, 다녀오셨습니까?

40대 초반의 시바다 겐지는 일본 야쿠자의 2대 조직인 이나카와회(稻川會)의 간부로 이번에 근대리아의 책임자로 임명된 사내였다. 1949년에 이나카와 카쿠지에 의해 결성된 이나카와회는 재일교포 출신의 2대 회장 이시이 스스무가 사가와 류빈 기업들과 유착하여 기업 이름을 앞세우고 한국 진출을 시도했다가 물러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객실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나카와회는 작년 말부터 근대리아에 집중적인 투자를 해왔던 것이다. 그들은 이제 근대시에 카지노가 포함된 특급 호텔과 세 개의 나이트클럽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지금 앉아 있는 오리엔트 호텔이 바로 그들의 소유였다 시바다 겐지는 검은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단정한 용모의 사내였다. 이나카와회에서의 그의 지위는 서열 4위였으니 근대리아가 그들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는 셈이 되었다.

가와베, 공사 감독하느라고 수고 많이 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보스. 솔직히 공사는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지금부터지요.

가와베는 30대 후반으로 작년부터 근대시에 상주하면서 공사를 맡아왔던 실무 책임자였다. 따라서 근대리아의 사정에 매우 밝은 편이었다.

근대타운이 저소득층의 소비 도시라면 근대시는 고소득층과 관광객의 도시가 됩니다. 이제 이곳에서도 주도권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카무라가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한국 측이 분열을 일으키고 있어서 북한과 삼합회, 마피아 세력이 급신장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사이좋게 근대시로 진출해 있지만 이권 문제로 언제 등을 돌릴지 알 수 없지요.

그는 주로 근대타운에 머물면서 상황을 파악해 왔던 것이다.

보통 체격에 뿔테 안경을 끼고 있는 나카무라는 평범한 샐러리맨처럼 보였지만 시바다가 아끼는 일급 부하였다. 더구나 성격이 매섭고 끈기가 있는 데다 한국어에도 능통한 재일한국인인 것이다. 근대리아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 우재환인가 하는 자가 장인규를 밀어낼 것 같으냐?

시바다가 묻자 나카무라는 머리를 저었다.

쉽지가 않을 겁니다, 보스. 장인규의 세력이 약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마피아의 응원을 받고 있는 데다가 북한 세력도 동조하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결정적인 상황이 되었을 때 그들이 등을 돌릴 가능성은 있습니다. 근대리아 경비대와 맞서서 싸우려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물론 그것은 최악의 상황이다. 경비대까지 동원해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근대리아 위원회 쪽에도 막대한 손실이 따를 것이다. 애써 조성해 놓은 투자와 고객유치의 분위기도 깨어져 다시 몇 년을 기다려야만 한다.

자중지란이로군, 조센진들이란.

혼잣소리처럼 시바다가 말하자 나카무라가 빙긋 웃었다. 천진하게 보이는 웃음이다.

보스, 저도 조센진입니다.

알고 있어. 우리의 2대 회장께서도 조센진이셨다.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다.

시바다도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아무래도 자라난 땅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들은 반도에서 자라났거든. 대륙의 끝에 혹처럼 붙은 반도에서 말이다.

 

유장석은 뒷짐을 지고 서서 벽에 걸린 대형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대리아의 지도로 며칠 전에 만들어 붙인 것이다. 오른쪽으로 오호츠크 해협을 두고 베르호얀스크, 체르스키 산맥이 위쪽으로 비스듬히 놓인 거대한 영토가 붉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남북한과 사할린까지 포함한 일본을 합친 면적보다도 넓다. 근대시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도로와 철도 송유관을 나타내는 색색의 선이 길게 뻗은 사이로 새롭게 태어난 수십 개의 도시와 마을에는 제각기 이름들이 붙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이윽고 한곳에 머물렀다. 주그주르 산맥 모퉁이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올해 여름부터 철광석을 캐내기 시작한 곳이었는데 마을 이름이 장석이었다. 파견된 직원들이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곳으로 북쪽에는 두 곳의 유전과 세 곳의 천연가스 유정이 있었고 10여 군데의 광산이 발굴되는 중이었다.

그러나 강회장의 명령으로 거대한 원목림은 자연 그대로 보호되었고 순록 떼의 이동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도로를 50킬로미터나 우회시켜 건설한 곳도 있었다. 이곳은 분명히 한민족 희망의 땅이었다. 이곳에서 일하다가 죽는다면 남자로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믿어왔던 것이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대각이 들어왔다.

위원장님, 또 지도를 보십니까?

그렇게 묻는 이대각은 지친 표정이었다. 둘이 있을 적에는 스스럼없이 구는 이 대각이다.

경비본부에서 곧 다섯 개 영업장에 영업정지 명령을 내릴 겁니다. 내일부터 환경심사를 하는데 아마 경비본부에서 꼬투리를 잡아내겠지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대각이 말했다.

나이 탓인지 이젠 반사작용도 늦고 쉽게 지치는 것 같아요, 운영위원회 놈들과의 싸움에도 무기력해지고 있단 말입니다.

네 나이가 몇이라고 그따위 소리를 해? 회장님이 들으시면 귀싸대기감이다.

유장석이 눈을 치켜떴다.

장인규를 우선 달래는 수밖에 없어. 그 여자, 전쟁이라도 하겼다고 했다면서?

당연하지요, 나라도 그랬을 텐데.

그랬다가는 나머지 사업장도 모두 날아가. 전창남이가 노리는 것이 그것이야.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바탕 전쟁이 일어나도록 말입니다.

이 자식이 정말 미쳤나?

저도 계산을 조금 해보고 하는 소립니다. 이왕 당할 바에는 차라리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단 말입니다.

「‥‥‥‥」

북한 조직이 장인규를 도울 겁니다. 운영위원회가 우재환을 시켜 자신들을 매장하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마피아에 가 있는 김상철의 부하들이 합세할 것이고.

유장석이 혀를 찼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돼.

복잡한 것이 뭐가 있다고‥‥‥」

경비대를 상대해서 이길 것 같으냐?

이기진 못해도 오래 갈 겁니다.

타운의 사업장뿐만 아니라 근대시에 진출한 사업장까지 폐쇄시킬 거란 말이다. 제각기 막대한 자금을 들여 근대시에 기반을 닦아가는 마당에 그런 손해를 보려고 할까?

북한은 근대시에 세 곳의 사업장을 건설해 놓았고 마피아는 다섯 곳이다. 모두 3천만 달러 이상의 투자를 해놓고 있는 것이다. 유장석이 말을 이었다.

잘못 생각한 거야. 북한도, 마피아도 장인규를 돕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장인규나 우재환이나 마찬가지야. 우재환이 조금 껄끄러운 상대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당장에 자신들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들은 내버려 둘 것이다.

「‥‥‥‥」

더구나 이젠 야쿠자까지 진출해 왔어. 북한, 마피아, 삼합회, 거기에다 야쿠자까지 가세했으니 동양의 여러 나라가 모두 모인 셈이지. 그들은 제각기 제 나라의 배경을 뒤에 업고 있어. 돌출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경비본부도 함부로 나설 수가 없단 말이다.

이대각은 찌푸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도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근대리아는 이념에 관계없이 러시아의 고려인이나 중국의 조선족 등 한민족이면 모두 다 받아들이는 정책을 폈고 그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러시아인과 중국인들의 이주도 받아들였는데 아직까지는 크게 제한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근대리아 주민의 원적은 러시아, 중국이 대부분이었지만 민족으로 본다면 한민족이 반수 이상이었다. 그러나 지난번 삼합회의 소탕 후에 중국 정부가 강력한 항의를 한 것처럼 주민의 연고권을 주장하는 중국과 러시아, 북한 등이 자국민의 보호 등의 이유로 나서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가 뒤를 받쳐주는 세력이 있어야 했고 그것이 바로 우재환이다. 장인규는 도태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유장석이 말소리를 낮추었다.

다른 소식 없나? 장인규한테서 말이야.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이젠 나한테 말해줄 상황이 아니지요.

김상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박미정이 서울로 돌아와 파리 사건에 대한 누명은 풀렸지만 아직 김상철에게는 안기부 요원 다섯 명을 살해한 혐의가 있다. 붙잡히게 되면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회장님도 걱정하고 계셨어, 소식 없느냐고.

방법도 없지 않습니까? 현재로선 무소식이 희소식이지요.

홍콩에 나타났던 김상철은 박미정이 나타나자 다시 잠적해 버린 것이다. 그의 부하 두 명의 시체가 비싼 관에 넣어져 근대리아에 보내졌을 때의 연락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그가 장인규와 수시로 연락을 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장인규는 그의 원격조종을 받는 것이다. 이대각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간다면 근대리아는 사분오열입니다. 그것이 미국과 일본이 바라는 것이겠지만.

 

그날 저녁, 장인규가 식탁에 앉자 이인숙이 수저를 들며 말했다.

오늘 오후에 박기동 씨한테서 전화가 왔어, 그 사람, 실없는 사람이야.

장인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해요?

글쎄, 만나서 차나 한잔하자나. 내가 바쁘다고 했는데도 이것저것 말하면서 전화를 끊지도 않아.

박기동은 한 달쯤 전부터 다시 근대리아에 돌아와 있었는데 오히려 전보다 더 활기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근대시의 상가에 사무실을 두고 자주 타운에 나타나 사람들을 만나거나 술을 마셨으므로 장인규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박기동의 배후에 운영위원회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자가 언니한테 마음이 있는 모양이야. 싫다는 데도 치근덕거리는 것을 보면.

장인규의 말에 이인숙이 눈을 흘겼다.

차라리 로스케가 났겠다, 그자보다는.

입맛이 달아난 장인규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박기동이 전화질을 해댄다는 것은 그만큼 이쪽을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운영위원회에서 데려온 우재환의 무리들이 타운을 휘젓고 다니면서 곧 이쪽의 조직을 접수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식당을 나온 장인규는 2층의 서재로 올라갔다. 김상철이 떠난 이후로 살고 있는 저택이었는데 요즘 들어 집안 분위기가 더욱 황량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는 곧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들어선 사람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따라온 그녀의 충실한 경호원 서규환이다. 그는 장인규의 앞자리에 앉았다.

사장님, 이금철은 인수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오후에 본국에서 지시를 받았다고‥‥‥」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유감이라고 하더군요.

예상하고 있었어.

장인규가 쓰게 웃었다. 며칠 전에 그녀는 이금철에게 다섯 개 영업장의 소유권을 이전시켜 주겠다는 제의를 했던 것이다. 이금철에게 매각하는 것으로 하되 돈은 물론 받지 않고 그 대신 영업장의 이익금을 반분하자는 파격적인 제의였다.

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한 거야.

사장님, 페로프한데 다시 이야기해보시는 것이 · 차라리 그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페로프는 그루진스키 대신으로 근대리아에 들어온 마피아 측 책임자였다. 그는 하바로프스크에 근거를 둔 니콜라이 마르첸코의 심복이었는데 장인규는 이미 똑같은 제의를 했다가 거절당한 것이다. 장인규가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마르첸코도 모험을 할 생각이 없어. 그레고리가 설득해 보았지만 소용없었어.

다섯 개 사업장을 넘기지 않으려는 장인규의 속셈을 운영위원회가 모를 리 없다. 그들은 공권력을 이용하여 사업장을 압박할 것이 뻔했고 마피아나 북한 측은 근대리아 경비대와 정면 대결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장인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운영위원회의 각본으로 사업장이 강탈되기도 전에 이미 결말이 보이는 것이다. 마피아와 북한은 도와주지 않는다. 이쪽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태인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국영 금 백화점 앞을 지난 택시는 모퉁이를 돌아 우중충한 석조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무겁게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는 밤이었다. 희미한 가로등 빛이 비치는 보도에는 이미 두텁게 눈이 쌓여 있었고 추위에 움츠린 행인들의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차에서 내린 김상철이 건물의 현관으로 다가가자 슈바 차림의 사내가 한쪽으로 비켜섰다. 얼굴이 수염투성이인 러시아인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은 바깥과는 딴 세상으로 밝고 화려했다. 천장의 샹들리에가 휘황하게 빛났고 양탄자가 깔린 실내 곳곳에는 고급 가구가 놓여 있다. 그리고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십여 명의 여자들은 모두 늘씬한 몸매의 미인들이다. 번쩍이는 장신구로 뒤덮인 나이 든 여자가 다가왔다. 주인 마담이다.

오늘도 카트린을 불러드릴까?

주위의 여자들이 모두 그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 김상철이 가까이 서 있는 여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붉은 머리였다.

저 여자로 하겠어.

머리를 끄덕인 마담이 미처 부르기도 전에 붉은 머리가 다가와 그의 팔짱을 끼었다. 여자들이 다시 얼굴을 돌렸고 그는 붉은 머리를 따라 2층으로 올랐다. 방에 들어서자 여자는 김상철의 슈바를 벗겼다. 가깝게 선 그녀의 얼굴에는 화장으로도 감추지 못한 주근깨가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갈색 눈동자에 평원의 눈처럼 흰 피부를 가진 미인이다.

술 드시겠어요?

그녀가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가져 와.

제 이름은 도냐예요.

보드카 병을 든 그녀가 다가와 소파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직 앳된 티도 벗지 못한 얼굴이었다. 방 안은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더블베드 위에는 핑크색 망사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벽에는 대형 TV와 오디오 시스템까지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블라디보스토크 최고의 클럽으로 하룻밤의 화대만 해도 2천 달러가 넘는다.

카트린한테 싫증 났어요?

술을 단숨에 삼키고 난 김상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카트린을 데려와.

여자의 표정이 금방 굳어졌다.

제가 싫으세요?

오늘은 두 여자를 데리고 놀겠다는 말이야.

머리를 끄덕인 여자가 고분고분 방을 나갔다. 술잔을 채우기가 귀찮아진 김상철은 병을 기울여 벌컥거리며 술을 삼켰다. 이곳에 단골로 드나든 지 벌써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흘 걸러 한 번씩 찾아오는 그는 이제 타냐 클럽의 VIP였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머리에 눈동자도 검게 빛나는 여자와 함께 도냐가 들어왔다. 카트린이다. 그녀는 김상철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에 웃음을 띠었으나 그리 밝은 표정은 아니다.

안드레이, 난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 앉은 카트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도냐의 방인 것이다.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화대는 정확하게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카트린.

송길수가 타냐 클럽을 찾아온 것은 다음날 오전이었다. 아래층 대기실에 앉아 있던 그는 계단을 내려오는 김상철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도 두 눈이 충혈되었고 머리가 헝클어진 김상철을 카트린과 도냐가 좌우에서 부축하고 있다.

웬일이야?

찌푸린 얼굴로 그가 묻자 송길수가 다가와 섰다.

차 안에서 말씀드리지요.

대기실의 한쪽 구석에 마담 타냐가 경직되어 서 있는 걸 보면 무엇엔가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송길수가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처음이다. 그들은 현관 앞에 대기하고 있는 검정색 신형 벤츠에 올랐다. 값비싼 신형차는 수백 종류가 있었지만 마피아는 유난히 벤츠를 선호했는데 이제 송길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벤츠는 간밤에 내린 눈으로 빙판이 되어버린 거리를 달려 나갔다.

장 사장한테서 조금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금 백화점 앞을 지날 때 송길수가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 환경국과 경비대가 검열을 나왔는데 열한 개 사업장이 무기한 영업정지를 당했습니다. 북한과 마피아, 삼합회 쪽도 검열을 했지만 영업정지를 당한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아주 노골적입니다.

주머니를 뒤진 김상철이 담배를 꺼내 물자 송길수가 라이터를 켰다.

형님.

송길수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장사장은 더 이상 근대리아에 남아 있을 자신이 없답니다. 부하들의 사기도 떨어져 있어서 벌써 삼분의 일 가량이 이금철에게로 흡수되었습니다.

「‥‥‥‥」

나머지 사업장을 정리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겠다는 대요.

담배 연기를 뱉아낸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안돼. 그럴 수는 없어.

이대로 두었다가는 앉아서 망합니다. 열한 개 사업장이 영업정지를 당했으니 남은 건 여섯 개뿐입니다.

다섯 개를 돌려주면 나머지는 풀어줄 거야.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놈들이 노린 것은 다섯 개가 아니었어요. 우리의 모든 사업장이었습니다.

송길수가 김상철의 의중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 장인규를 부추겨 전쟁을 일으킨다면 김상철은 근대리아에 영영 발을 디딜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근대리아에 대한 반역으로 이제까지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치명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김상철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난 반란을 일으킬 수는 없다. 내 모든 것을 잃더라도.

「‥‥‥‥」

내가 나서면 근대리아 행정부는 더욱 어려워진다. 내가 차라리 희생양이 되더라도‥‥‥」

그럼 이렇게 기다리고만 계실 겁니까?

송길수의 목소리도 가라앉아 있었다.

장사장한데 끝까지 참고 기다리라고 할까요?

꺼칠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본 채 김상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 못지않은 기질을 가진 장인규가 이제까지 참아온 것은 김상철을 믿고 그 지시를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눈에 거슬리는 우재환이나 그의 무리들을 당장에 쏘아죽였을지도 몰랐다.

형님.

송길수가 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근대리아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요. 제가 생각해도 가능성이 없는 일입니다.

형님의 상대는 한국 정부입니다. 근대리아 행정부나 강회장도 어쩔 수가 없는 상대란 말입니다.

「‥‥‥‥」

차라리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떠나버리시는 것이 나을 것도 같습니다만 형님이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장인규를 가볍게 보면 안 돼요, 우선생, 그 여자는 이금철이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경비본부장 소명일이 앞에 앉은 우재환에게 말했다. 눈발이 거칠게 흩날리는 흐린 오후였다. 그러나 경비본부장실에 찾아온 우재환은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글쎄, 대단한 여자라고 들었습니다만 꽤 미인이기도 하더군요.

충분히 김상철의 대리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자요. 통솔력도 있고.

소명일이 우재환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우재환은 미국 태생의 재미동포로 미국에서 자랐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는 사내였다.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운영위원장 전창남과 그의 심복인 기획실장 박찬홍쯤이 될 것이다.

이제 나흘이 지났으니 내일쯤 그 여자한테 사람을 보내 협상하도록 설득해 봅시다.

소명일이 말하자 우재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일단은 본부장께서 주관하시는 일이니까 그렇게 하시지요. 그런데 협상 조건은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처음 이야기했던 대로 고춘식과 조성욱이 투자했던 다섯 개 사업장을 되찾는 것으로 합시다. 나머지는 영업정지를 풀고.

「‥‥‥‥」

그래도 장인규의 조직이 근대리아에서 가장 우파 성향을 띠고 있어요. 내 생각이지만 이용 가치가 있어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우재환이 정색을 했다.

그 조직이 가장 위험한 조직이오. 차라리 이금철처럼 붉다면 구분하기가 쉬운데 이것은 카멜레온처럼 파랬다 붉었다 한단 말입니다. 제일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조직입니다.

우선생,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오.

소명일이 그의 말을 잘랐다. 예비역 장군 출신답게 그는 다부진 얼굴로 우재환을 바라보았다.

흑백 논리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우선 나는 다섯 개 사업장을 양도받아 우선생의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이번 사건을 마무리 짓겠소.

그와 시선이 마주친 우재환이 이윽고 얼굴에 천천히 웃음을 띠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경비본부장실을 나온 우재환이 타운에 돌아왔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오후 5시였지만 주위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어서 벌써 타운의 유흥가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가 서울 호텔 3충에 있는 사무실에 들어서자 대기실에 앉아 있던 박기동이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이제 오십니까?

내가 조금 늦었습니다.

그들은 안쪽에 있는 우재환의 방으로 들어섰다.

타운의 분위기가 뒤숭숭합니다. 모두 긴장하고 있어서 요즘 며칠 동안은 손님들도 많이 줄었습니다.

박기동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그는 거의 매일 우재환과 만나고 있었다. 우재환이 보드카 병을 들고 와서는 앞에 앉은 박기동의 잔에 술을 따랐다.

, 박 사장, 한잔하시오.

고맙습니다.

아마 내일 중으로 협상을 할 것 같은데, 경비본부 측에서 나서서 말이오.

보드카를 한 모금 삼킨 우재환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첫 잔 마실 때가 까다롭단 말이야, 이놈은.

협상은 어떤 내용입니까?

다섯 개를 되찾는 것.

그렇군요.

나머지는 영업정지를 풀고.

이금철 씨도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박기동은 잔을 들어 입술만 축였다. 그는 자유롭게 이금철과 왕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를 통해서 우재환과 이금철은 상대방의 입장을 알 수 있었고 우재환으로서는 북한 측이 장인규를 거들지 못하도록 경고를 보내는 데도 적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인규가 예민해서, 제 생각입니다만 내일 협상이 받아들여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술잔을 내려놓은 박기동이 말을 이었다.

부하들한테 모두 정리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겠다고 한다니까요.

그것 잘되었군,

그런데 그냥 돌아가겠습니까? 겪어보지 않으셔서 그년 성격을 모르십니다.

「‥‥‥‥」

게다가 김상철이의 조종을 받고 있어서 김상철이의 허락이 있어야 받아들일 겁니다. 그 여자 독단으로 결정할 일도 아닙니다.

김상철이는 받아들일 거요.

잔에 술을 채운 우재환이 입가에 비웃음을 물었다.

이제 이야기하지만 그놈은 전쟁을 일으킬 뱃심은 없는 놈이오.

「‥‥‥‥」

위험한 놈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곳의 모든 사업장을 몰수한다고 해도 그자는 움직이지 못해요. 나는 이미 그자에 대해서 완전히 파악했습니다.

술을 조금씩 삼키던 우재환이 이제는 제대로 술맛이 나는지 입맛을 다셨다.

 

다음날 오후, 인투리스트 호텔 근처에 있는 2충 저택으로 송길수가 찾아왔을 때 김상철은 응접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형님, 한이는 심부름 보내셨습니까?

슈바를 벗어 옷걸이에 건 송길수가 그의 앞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아니, 어디 잠깐 바람 쐬러 갔겠지.

김상철이 수염이 텁수룩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래, 가져온 소식을 듣자.

경비본부에서 협상을 해왔습니다. 다섯 곳을 넘겨주면 나머지는 풀어주겠다고.

장 사장은 승낙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조금 뜻밖입니다만 야쿠자 이나카와회의 나카무라라는 자가 찾아와 장사장한테 나머지 사업장을 넘길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답니다.

고개를 든 김상철의 시선을 받은 송길수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부르는 가격대로 원하는 장소에서 현찰로 주겠답니다.

형님, 장 사장은 형님 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나카와회라고?

, 형님. 그들은 이미 근대시에 ‥‥‥」

알고 있어.

형님, 이 기회에 넘겨 버리시는 것이‥‥ 어차피 나머지 사업장도 오래 못 갈 것이 뻔한 마당에.

김상철이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보드카 병을 쥐었다. 그가 벌컥이며 병째로 술을 마시는 동안 이맛살을 찌푸린 송길수는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김상철은 무기력해져 있었던 것이다. 근대타운이 황량한 벌판 위에 몇 채의 목조 클럽으로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 일해 왔지만 이렇게 약한 모습의 김상철은 처음이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근대리아와의 인연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방법이 있다면 그곳을 떠나 새 인생을 사는 것뿐이었다. 술병을 내려놓은 김상철이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술 방울을 훔쳤다.

, 타냐 클럽에 함께 가지 않을 테냐?

 

12시 가 넘었으므로 저택의 불은 대부분 꺼졌지만 2층 응접실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페치카에서는 마른 장작이 기세 좋게 타오르면서 가끔씩 불꽃이 탁탁 튀어 올랐다. 이한은 보드카를 들이키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하바로프스크, 근대리아의 테르시를 거쳐 타운에 도착하는데, 여객기와 헬기를 번갈아 타고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해 15시간이 걸린 강행군이었던 것이다. 그를 바라보고 앉은 장인규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생생한 얼굴이었다. 깊은 밤에 단신으로 숨어 들어온 이한과 만났으니 그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이한은 경비대에게 발각되면 당장에 끌려갈 처지였다. 그가 다시 보드카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참다못한 장인규가 입을 열었다.

웬일이야? 김 사장님은 어디에 계시고? 무슨 일이야?

술잔을 내려놓은 이한이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형님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계시오.

말을 계속하라는 듯 장인규가 그를 바라보았다.

난 형님 모르게 아침에 떠났수다.

누님, 난 내일 아침 경비대에 자수할 생각이오, 경비대 새끼들은 모두 내가 쏘아죽였거든. 형님은 총 한 방 쏘지 않았소.

「‥‥‥‥」

내가 자수를 하면 형님은 이곳으로 돌아오실 수 있을 거요, 그렇게 되면 누님 사정도 괜찮아질 것이고, 그리고 ‥‥‥」

「‥‥‥‥」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형님은 소용없는 짓이라고 하셨소. 하지만 난 이대로 있을 수가 없었소. 형님을 그대로 둘 수가 도저히‥‥‥」

장인규가 자신의 잔에 천천히 술을 따르더니 한 모금 삼켰다.

네 말을 믿어줄까?

그때 헬리콥터에서 살아난 놈이 증인이오. 그놈은 형님 덕분에 내 손에 안 죽었으니까.

장인규가 머리를 저었다.

그놈은 이곳에 없다. 그리고 그놈은 김 사장이 살해했다고 증언을 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죽였는데 왜?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워준 장인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 사장님이 걱정하실 테니 내가 송길수한테 연락은 해야겠다.

난 안 돌아갑니다.

따라 일어선 이한이 장인규를 노려보았다.

되건 안 되건, 믿건 안 믿건 간에 난 내일 아침에 경비대로 갈 거요. 누님은 날 말리지 못합니다. 아시겠소?

알아. 그러니까 아래층으로 내려가 쉬어.

눈을 치켜뜬 장인규가 매섭게 말했다.

여기 일은 나한테 맡기고.

아래층의 침실로 들어선 이한이 미처 상의를 벗기도 전에 방문이 열리더니 황윤이 들어섰다. 그녀는 장인규와 함께 저택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잠자코 양복 상의를 받아든 그녀는 이한이 침대에 걸터앉자 신발을 벗겼다.

연락을 안 한다고 내가 잊을 줄 알아요?

목덜미만 보인 채 그녀는 중국어로 말했다.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나도 따라 죽으려고 했어요.

이한이 발을 휘둘러 그녀의 손을 떼어내었다. 놀란 황윤이 그대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망할 중국 년 같으니.

한국말이었지만 황윤은 알아듣는다. 금방 눈에 가득 눈물이 고인 그녀가 그를 노려본 채로 어금니를 물었다.

네년이 뭔데 날 붙잡는 거야?

난 당신의 아내예요.

갈보년이.

황윤이 일어나면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러더니 어깨를 두어 번 들썩이다가 다시 이를 악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식사했어요?

완탕을 가져올게요.

그만둬.

이한이 소리쳤으나 몸을 돌린 황윤은 방을 나갔다. 침대에 멍한 얼굴로 앉아 있던 이한이 갑자기 딸꾹질을 하듯이 두어 번 숨을 들이마시고는 목구멍으로 앓는 소리를 벨아냈다.

이한이 눈을 떴을 때는 아침 6시였다. 근대리아를 떠나기 전과 똑같은 분위기에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황윤도 그대로여서 그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황윤의 따뜻한 숨결이 여느 때처럼 가슴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이곳까지 숨어들어 오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황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때마다 기를 쓰고 그것을 지워왔다. 황윤을 만나려고 온 것은 절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이대로 있고 싶은 욕심에 그는 숨소리도 죽였다. 그러나 복도를 오가는 발짝 소리에 황윤이 눈을 떴다. 이한이 급히 눈을 감았지만 그녀는 그가 잠이 깬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벌써 됐어요?

몸을 더욱 바싹 붙여 오면서 그녀가 물었다.

아직 6신데 30분쯤 시간이 있어.

그녀가 다시 얼굴을 가슴에 묻자 이한은 결심을 했다. 30분 동안 그냥 황윤을 이대로 안고 있다가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가 2층의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는 730분이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이어서 더욱 야위어 보이는 장인규가 머리를 끄덕이며 그를 맞았다.

김 사장님은 널 당장 보내라고 하셨어. 화가 단단히 나신 모양이다.

그녀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나로서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네가 나선다고 해서 금방 김 사장님의 혐의가 풀어질 것도 아니고.

글쎄, 내가 가서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순서 아뇨? 이렇게 시간 버릴 것 없습니다.

이한이 그때까지도 허리춤에 찔러넣고 있던 콜트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 염과장인가 하는 놈이 증인이오. 그놈은 벌벌 떨면서 내가 하는 짓을 모두 보았소.

장인규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서둘 것 없다. 내가 이대각 부위원장을 만나자고 했으니 곧 헬기로 날아올 거야. 그분과 상의한 다음에 결정하기로 하자.

이대각이라면 하는 얼굴로 이한이 잠자코 있었으므로 장인규도 마음을 놓는 눈치였다. 문이 열리면서 밝은 얼굴로 황윤이 들어왔으므로 방 안의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고 찻잔이 놓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것이 밝혀진다면 김 사장에게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상체를 숙인 이대각이 이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염태식은 유일한 증인이야. 그놈은 김사장이 쏘았다고 이미 증언을 했어. 그리고 자넨 현장에 있었지만 김 사장의 심복 부하이고.

이대각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김사장을 옭아 넣으려는 그들의 공작이었다. 그들은 자네 자백을 무시해 버릴 것이다. 따라서 지금 자네가 자수한다고 해도 전혀 도움이 안 돼.

 

식전에 헬기로 날아온 이대각은 꺼칠한 얼굴이었다. 그는 머리를 돌려 옆에 앉은 장인규를 바라보았다.

내가 요란하게 이쪽으로 날아왔으니 경비대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거야. 이 친구가 꼬리를 잡힐지도 몰라.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장인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한이 번쩍 머리를 들었다.

저는 이대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되든 저는 자수를 하겠습니다.

그 정도의 각오를 하고 있다면 적절한 시기에 나서게 해줄 테니까‥‥‥」

부드러운 표정으로 이대각이 말을 이었다.

우선 자네의 증언을 녹음해서 가져가기로 하지. 그것을 본국의 수사기관과 안기부에 보내어서 염태식에게 확인시키도록 하잔 말이야.

「‥‥‥‥」

정확하게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게. 총을 쏜 위치와 그때 상황을 말이야. 한국 수사기관도 바보가 아니니까 우선 그들에게 자네 자백을 보내자구. 그래서 기회가 됐다고 생각하면 그때 자수를 하게. 그래야 김 사장을 실질적으로 돕게 될 거야. 지금 나서는 것은 무리야. 오히려 자네만 희생당하고 말아.

이한이 잠자코 있었으므로 장인규가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중으로 녹음을 하겠습니다.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우리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도와주지도 못하고. 이번에 협상에 응해준 것도 고맙게 생각하네.

이대각이 식어버린 즉차를 들어 조금씩 마셨다.

우리 입장을 생각해서 참아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이나카와회에서 나머지 사업장을 인수하겠다고 제의해 왔습니다.

장인규의 말에 이대각이 눈을 껌벅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나카와회가?

. 우리가 부르는 가격대로, 원하는 장소에서 지불하겠다고.

김 사장은 뭐라고 하던가?

아직 대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어 ‥‥‥」

입을 연 것은 이한이다. 그는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이대각을 바라보았다.

형님께서는 요즘 술만 마십니다.

이대각과 장인규의 시선을 받은 그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거의 식사도 안 하시고, 말도‥‥‥」

이대로 가다가는 도저히 ‥‥‥」

이대각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한숨을 쏟아냈다.

이곳 소식을 들으면 오장이 뒤집히겠지.

그는 장인규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이나카와회에 대해서는 당분간 보류시켜 놓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파고들어 온다는 것이 심상치가 않단 말이야.

어깨를 치켜올린 그가 다시 녹차 잔을 들었다.

정말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러나 그 대상이 무엇인지 이대각은 말하지 않았다.

 

시바다는 오리엔트 호텔의 특실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흰 눈에 덮인 근대시와 끝없는 대평원이 바라보이는 20충의 스위트룸 안이다.

현재로서는 하루 100명 정도지만 내년에는 매일 500명을 기준으로 잡아 약 20만의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습니다.

소파에 앉은 가와베가 서류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우리 일본이 20, 미국과 유럽, 기타 아시아 국가를 합하면 내년에 근대리아를 방문할 관광객이 50만 명은 되리라고 예상합니다.

한국인은 얼마나 되리라고 예상하나?

우유 잔을 든 시바다가 묻자 가와베가 서류로 시선을 주었다.

정부의 규제가 언제 풀릴지가 문제지만 지금 수준으로 보면 약 2만 명 정도입니다.'

아직도 한국 정부는 근대리아를 북한 다음으로 위험한 적성 국가 취급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압력이었다. 비록 운영위원회와 경비대 등으로 근대리아의 대외관계 및 행정 부분을 장악하고는 있지만 내부경제 부분에 대해서는 간여할 수도 없으려니와 공과를 따질 위치도 아니었다. 근대리아에 북한계 주민이 많은데다 그들의 사업장까지 있다는 것이 운영위원회의 한국 관광객 규제 이유였는데 만일 그 규제를 푼다면 내년 한 해 동안만의 50만 명 유치는 문제도 아니었다.

우유 잔을 내려놓은 시바다가 얼굴 가득 웃음을 띠었다.

조젠징들이란 어쩔 수가 없어. 앞을 내다보는 정치인이 없다. 만일 이 근대리아를 일본 상사가 운용한다면 아마 정부의 대폭적인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강회장의 운용 방법이 정부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지요.

한국 정부가 아니야. 미국과 우리 일본 정부의 눈 밖에 난 것이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일본과 미국은 지근거리에 또 하나의 한국을 두게 되어 있었거든. 첨단시설과 문화, 거기에다 병력까지 갖추게 된다면 대단히 위험한 존재가 된단 말이다.

그렇군요. 러시아와 중국의 조선족이 지금 모두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다. 남북한의 조선족이 대거 이주해 오면 몇천만 인구는 금방이야. 이곳에 오기 전에 정보국의 아베 국장을 만났다. 우리에게 자금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지원을 하겠다고 했어.

기운이 납니다, 보스.

일본 관광단은 모두 우리가 소화해야 할 것이다. 다른 놈들에게 빼앗기면 안 돼.

물론입니다, 보스.

관광객 1인당 500달러씩만 계산해도 20만 명이면, 여행경비만 해도 1억 달러가 떨어지는 것이다.

식탁에서 일어선 시바다가 가와베의 앞자리에 앉았다.

장인규가 나머지 사업장을 넘기면 우리의 기반은 일시에 굳어진다. 본국에 있는 조센진 회원만 해도 천 명이야, 우리는 금방 근대리아에 적응할 수 있게 돼.

나카무라는 며칠 안에 결정이 날 것 같다고 했습니다.

북한이나 삼합회, 마피아는 감히 손을 내밀 엄두도 못낼 테니까.

담배를 꺼내 문 시바다가 소파에 등을 기했다. 가와베가 재빠르게 라이터를 갖다 댔다.

 

장인규가 북한과 마피아에게 다섯 개 사업장에 대한 제의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삼합회는 아예 대상에 들어있지도 않았다. 운영위원회와의 마찰을 꺼린 그들이 그것마저 거절한 마당에 나머지 사업장에 대한 욕심을 낼 리가 없다.

보스, 어젯밤에 아오모리에서 센가주마루가 떠났습니다.

가와베가 말하자 시바다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센가쿠마루가 실린 컨테이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근대 부두에 내려질 것이고 그곳에서 곧장 철도를 이용해 하바로프스크로 보내진다. 전에는 하바로프스크에서 근대 운송의 트럭이 근대리아로 운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모두 합해 일주일이었다. 그러나 근대리아와 하바로프스크 간의 철도가 완공된 후에는 그것이 하루로 단축되었다.

현금은 모두 얼마야?

현금은 엔화로 20억 엔, 달러가 250만입니다.

부피가 꽤 크겠다.

소액환도 있어서 컨테이너 하나에 넣었습니다.

시바다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제 돈세탁할 염려가 없어진 것이다. 돈은 현금 그대로 일본만 빠져나오면 된다. 근대리아 당국은 전혀 제한하지 않았으므로 돈이 실린 컨테이너를 근대시의 거래 은행에 넣으면 그 순간부터 돈은 새롭게 태어난다.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은행 지점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9시가 되자 타운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낮보다 통행인이 곱절이나 많아지면서 휘황한 네온사인이 번쩍였고 상점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 소리로 타운은 열기에 휩싸이는 것이다 근대시나 타운 근처에 형성된 근로자 숙소, 집단 거주지 등에서 몰려나온 사람들 외에도 이제는 관광객들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이 일본과 미주, 또는 유럽 등에서 온 사람들로 그들을 위한 갖가지의 향락시설이 준비되어있었다.

박기동이 나파스 클럽에 들어서자 무대에서는 요즘 인기 있는 러시아 댄서의 누드 쇼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거침없이 들어서는 그를 향해 종업원이 허리를 굽히며 다가왔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깨를 펴고 으쓱거리며 걷는 박기동의 뒤로 세 명의 사내가 따르고 있었는데 그의 경호원들이다. 안쪽 깊숙이 자리한 밀실로 다가간 그는 경호원들을 남겨두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내는 나카무라였다.

이거 기다리게 했습니다, 나카무라씨.

아니 천만에요. 저도 방금 왔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처음 만나는 사이도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미리 준비해 둔 술과 안주를 집었다.

아직 반응이 없습니까?

박기동이 묻자 나카무라가 머리를 저었다.

없습니다. 하지만 곧 연락이 오겠지요.

장인규의 나머지 업체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들이 앉아 있는 나파스 클럽도 그중의 하나인 것이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여러 가지 형태로 압박을 가할 테니까요. 종업원들의 사기도 떨어져 있어서 이젠 껍질만 남아 있는 상태지요.

술잔을 든 박기동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나파스 클럽 주위에는 얼씬거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장인규는 어딘가에서 움츠리고 있는지 나타나지도 않는데다 눈에 띄게 분위기가 위축되어 있다.

우사장은 근대시에는 어떻게 진출할 예정입니까?

글쎄요,

박기동은 얼굴에 애매한 웃음을 띠었다. 우재환은 운영위원회의 도움으로 근대 타운에 서서히 기반을 굳히게 되었지만 근대시에는 진출할 기회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사방 4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상가지구에 이미 마피아와 삼합회, 야쿠자와 북한까지 자금을 투자하여 제각기 호텔과 카지노 등 온갖 유흥업체를 건설하는 중이었고 일부는 이미 개업을 했다. 그러나 한국 측의 대표주자라고 볼 수 있는 우재환은 아직 한 평의 가게도 소유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근대 측은 노른자위 땅에 직영 호텔과 카지노 등 다섯 곳을 건설해 놓았지만 그것은 운영위원회가 상관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우재환은 더욱 그랬다. 근대타운에는 이제 기반이 생겼지만 근대시의 경우에 있어서 우재환은 아직도 떠돌이 신세인 것이다.

, 한잔합시다.

오늘은 나카무라가 마련한 자리였다. 박기동의 잔에 술을 채운 그가 검은 눈썹 아래로 날카로운 시선을 들었다.

우리야 우사장과 손잡고 있는 상황이라 조금 걱정을 한 겁니다. 타운만 가지고는 어렵소. 근대시는 라스베이거스보다 몇 배 더 성장해 나갈 도시 아닙니까?

글쎄, 그거야 나는 알 수 없는 일이오. 난 단지 양쪽의 연락 정도나 맡고 있어서 ‥‥‥」

양쪽이 아니라 세 곳 아닙니까?

웃음 띤 얼굴로 나카무라가 묻자 박기동도 따라 웃었다.

그거야 그쪽은 전부터 안면이 있던 사람들이라‥‥‥」

어쨌든 박 사장은 뛰어난 분이십니다.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을 보면 말이오.

그런 말씀 마시오. 나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요.

술기운에 눈가가 불그스레해진 박기동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을 뿐이오. 내가 뛰어난 것이 있다면 생명력이지요. 빌어먹을, 어느 곳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그 외에는 없소.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나카무라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한국인은 개개인으로 보면 세계 제일이오. 난 그것을 잘 압니다.

아니, 한국인보다도‥‥ J

나는 오늘 박 사장님과 사업 이야기를 하려고 만나자고 한 겁니다.

정색한 얼굴로 나카무라가 말을 이었다.

내년에 근대리아를 찾을 일본 관광객은 약 20만 정도요. 근대리아 행정부에서도 그렇게 예상하고 있지요. 내년의 전체 관광객 예상수는 50만으로 관광 수입만 25천만 달러가 될 겁니다.

어느덧 박기동의 얼굴에서 술기운이 가셨다.

나도 압니다. 관광 수입은 근대리아의 중요한 재원이 될 거요.

그렇지요. 3년 후의 관광 수입은 15억 달러를 예상하고 있더군요.

그것까지는 알고 있지 못했는지 박기동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115억 달러는 외형으로 나타난 돈이고 다른 부분에 떨어질 돈은 그 이상이 될 거요. 알고 계시지요?

알고 있어요.

카지노나 갖가지의 도박, 그리고 마약 등이다. 나카무라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이미 일본 굴지의 10여 개 여행사의 대리인 자격을 갖고 있어요, 근대리아에 들어오는 일본 관광객의 대부분은 우리가 관리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여행사가 보낸 관광객들은 근대리아에서 큰 고생을 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한국은 근대리아의 여행 규제로 올해에 상용 출장자까지 포함해서 2만 명 수준이었고 내년도 비슷할 것 같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

나카무라가 뜸을 들이듯이 잔에 술을 채우더니 한 모금 마셨다.

한국 관광객이 일본을 거쳐 근대리아에 오게 되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여행사를 통하면 여권에 도장도 찍지 않고 근대리아에서 지내다가 일본을 통해 귀국하면 됩니다.

「‥‥‥‥」

홍콩은 이제 끝났고 마카오보다도 더 자유롭게 카지노와 도박을 즐길 수 있는 곳이오, 이곳은.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나더러 ‥‥‥」

전에 한국 여행사의 대리인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만 상황이 험악해져서 연락이‥‥‥‥」

연락해 봐요. 그곳이 아니더라도 달려올 여행사가 많을 겁니다. 그들이 이곳의 잠재력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어요. 길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막대한 수입을 올릴 수가 있을 거요. 박 사장님은 물론이고 그 여행사도.

셈속으로 따지면 누구 못지않은 박기동이다. 그는 술잔을 든 채 한동안 나카무라를 바라보았다. 그 자신이 손해 볼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유미에게 연락하여 관광객을 모집하면 처리는 이나카와회가 맡는다. 그리고 자신은 다시 이유미 회사의 현지 대리인이 되어 이익금을 분배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눈보라 속으로 뛰어 들어간 이한은 헬기에 잽싸게 올랐다. 헬기는 근대리아 건설단 소속의 OH-6형으로 4인승의 경량급이었지만 빠른데다 전천후 운행이 가능한 최신형이다. 문을 닫고 이한이 안전 벨트를 매자 헬기는 가볍게 동체를 들어 올리면서 비스듬히 상승했다. 깊은 밤이었다. 오른쪽으로 불야성을 이룬 타운이 잠깐 보이는가 싶더니 헬기는 곧장 짙은 어둠 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이한의 옆자리에 앉은 이대각은 굳게 입을 다물고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간이 평원 위에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는데 자동차의 전조등이다. 헬기는 기수를 남으로 잡고는 천 피트의 고도를 유지한 채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시속이 300킬로미터인 OH-6는 하바로프스크까지 가는 동안 중간에서 급유를 받아야 했는데 비행시간만 다섯 시간이다. 하바로프스크에서는 민간 헬기로 갈아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날아갈 계획이었다.

이대각이 한밤중에 주그주르 산맥 아래쪽의 아연 광산 시찰을 핑계 삼아 헬기를 띄운 것은 이한을 안전하게 돌려보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김상철을 만나려는 것이다. 유장석의 허락은 받았으나 이것은 모험이다. 도처에 깔려 있는 운영위원회의 정보원이나 각 조직의 감시자들, 거기에다 경비대의 경계망도 피해야 하는 것이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앞쪽에 앉은 조종사가 위에 걸린 무전기를 떼어 냈다.

여긴 KC-01, 좌표는 237, 143이다. 난기류가 심해서 고도를 500피트로 낮춘다.

무전기를 끈 조종사는 헬기를 급강하시켰다.

근대 건설 때부터 같이 일해 온 조종사여서 이대각의 심복이나 다름없는 사내였다. 헬기를 다시 수평으로 유지한 조종사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금부터 경비대의 레이더에 헬기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동그란 동체의 OH-6는 짙은 어둠 속을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깊은 밤이어서 집 안은 발짝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짙은 색 커튼이 내려진 응접실 안은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어두웠다. 장인규가 입을 열었다.

언니, 아무래도 타운의 사업장을 정리하고 떠나야 될 것 같아.

앞자리에 앉은 이인숙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잠자코 시선만 주었다.

마침 인수하겠다는 사람도 나섰고, 아마 가격도 꽤 받을 수 있을 거야.

김 사장님은 뭐라고 하셔?

아무 말도.

머리를 돌린 장인규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나로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어. 벌써 식구들이 삼분의 일 이상 빠져나간 데다 앞으로도 희망이 보이지 않아.

분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장인규가 상체를 세우더니 이인숙을 바라보았다.

언니, 경희 아빠가 어떻게 해서 돌아가신지 알고 있지?

새삼스럽게 그 얘기는 왜?

그 일은 나하고도 관계가 있었어. 나도 그 계획을 만든 사람 중의 하나였으니까.

이맛살을 찌푸린 이인숙이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다 끝난 이야기야. 그리고 지금 내가 의지하고 믿고 있는 사람은 김상철 씨와 너밖에 없어.

「‥‥‥‥」

내 남편이나 너나 열심히 살려다가 일어난 일이야. 난 이미 잊었어.

언니, 나하고 같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자. 그곳에서는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가 있어.

이대각이 이한과 함께 김상철에게로 떠난 것도 어떤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고 무기력해진 그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김상철의 동향을 듣고 난 장인규는 마음을 정하게 되었다. 근대리아에 대한 김상철의 집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악화될 뿐이다. 자신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 그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인숙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알아서 결정해. 난 따라갈 테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3. 밤에 떠난 수송열차

방에 들어선 이대각이 다가오는 김상철을 보고는 얼굴 가득 웃음을 띠었다.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김상철은 셔츠 위에 스웨터를 걸친 가벼운 차림이었다. 그는 이대각의 슈바를 받아 걸었다. 이한과 함께 이대각을 안내해 온 송길수는 옆방에 있는지 들어오지 않았다.

늦은 오후였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전세낸 헬리콥터가 도증에서 세 시간쯤 엔진을 고쳤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죽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집 안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가구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난방장치가 잘 되어 있어서 훈훈했다. 이대각은 김상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었다. 반년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상당히 여위어 있었다. 면도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으로 코밑과 턱은 매끈했지만 광대뼈의 윤곽이 드러났고 물기를 머금은 두 눈은 충혈된 상태였다. 술기운에 젖어 있는 것이다.

이한한테서 이야기를 들었다.

이대각이 불쪽 말했다. 큰 머리를 뒤로 젖히듯이 세워든 그는 마치 성난 것처럼 보였다.

그놈은 널 위해 목숨을 내놓을 작정이더군.

그런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질 리 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벽에 붙은 장식장으로 다가가 술병과 잔을 들고 왔다

먼 곳으로 가서 근대리아를 잊으려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래도 지켜봐야 할 것 같아서.

술을 채운 그는 이대각의 앞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어머니의 임종이나 지키는 무능한 자식처럼 말입니다.

년 아직도 갈 길이 먼 놈이야. 넌 지금 가다가 말고 주저앉아 있다.

제가 갈 곳은 한 곳뿐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막혀 있지요.

술잔을 들어 단숨에 술을 삼킨 김상철이 다시 잔을 채웠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보아하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까요.

「‥‥‥‥」

조금 전에 장 사장한테서 나머지를 이나카와회에게 넘기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모두 매각하고 이곳으로 오겠다고.

「‥‥‥‥」

마침 잘 됐습니다. 앞으로 만나뵐 기회도 없을 텐데. 오늘은 저하고 한잔하시지요. 여자들이 괜찮은 곳이 있습니다.

이대각이 술을 입 안에 털어 넣더니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녹음테이프를 한국의 수사기관과 안기부에 보내 정황을 설명한다 해도 가능성이 희박한 싸움이다. 염태식이 증언을 번복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이미 음모는 단단하게 짜여 있어서 수렁에 빠진 김상철이 헤치고 나을 가능성은 없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잔을 들었다.

그렇다면 러시아에 정착할 생각이냐?

낮은 목소리로 이대각이 묻자 김상철이 시선을 들었다. 눈의 핏발이 더욱 붉어져 있었다.

아직은 모릅니다. 우선 식구들이 이곳으로 모여야 할 테니까요. 그런 다음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저 대신 장사장이 결정을 했지요.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후련합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이대각은 술잔을 들었다. 이제 김상철의 앞에서 울분을 터뜨리는 것도 우스운 모양이 될 것이고 그렇다고 한탄을 할 수도 없다.

언젠가는 꼭 기회가 올 것이다.

입가에 묻은 술을 손등으로 쓱 닦으면서 이대각이 말했다.

그때까지 내가 버티고 있을 테다. 온갖 수모를 겪더라도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너도‥‥‥」

말끝이 흐려진 것은 자신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운영위원회의 권한은 강화되는 중이었고 행정위원회의 업무는 제한을 받는 상황이다. 그는 김상철이 채워준 잔을 들고는 큰 머리를 젖히며 술을 삼켰다.

거기에다 서울의 강회장은 근래에 들어 건강이 좋지 않았다. 한 달이 넘도록 강회장은 공식회의는 물론 외출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중병이라는 소문이었다. 술잔을 내려놓은 이대각이 길게 한숨을 물아 쉬었다. 강회장은 김상철의 마지막 보루였던 것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도심에도 이렇게 한적한 길이 있나 싶도록 깨끗한 사잇길이 나온다. 승용차 한 대가 길가에 서 있는 전경들을 스치고 지나 사잇길 옆쪽의 공터에 멈춘 것은 오후 5. 11월 하순이어서 다소 쌀쌀한 날씨의 늦은 오후였다. 차에서 내린 박정규가 앞쪽에 난 조그만 창문으로 다가가자 곧 안에서 문이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

검은색 양복 차림의 사내가 그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그들은 노랗게 말라버린 잔디밭 위를 지나 한옥 안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해방 이후로 미 대사관의 파티장으로 사용되어 온 덕수궁 별채였다. 응접실에는 주한 미국대사 제임스 터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신으로 회색 머리칼을 단정히 빗어넘긴 그는 웃음 띤 얼굴로 박정규의 손을 잡았다.

난 네바다 출신이라 아직도 한국의 가을, 겨울엔 익숙치가 않아요.

그들이 자리 잡고 앉았을 때 남자 직원이 들어와 커피잔을 내려놓고 나갔다.

날씨가 추워지면 관절이 쑤신단 말이야.

신경통이오, 제임스. 한국의 온천욕을 하면 나을 거요.

글쎄, 난 대중탕에 가려면 멋쩍어서.

인사말은 이쯤 해두자는 듯이 박정규가 정색을 했다.

김상철의 나머지 사업장이 곧 이나카와회에 넘어갈 겁니다. 오늘 아침에 연락이 온 모양이오.

나도 들었습니다. 이제 균형이 잡혔으니 일본 측에서도 마음을 놓을 거요.

커피잔을 든 제임스가 맛있게 한 모금을 삼켰다.

일본의 정보국장 아베가 이만저만 신경을 쓰는 게 아니어서 …」

박정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일본 정부는 근대리아가 미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일본의 지근거리에 있는 근대리아가 미국의 조정을 받는 위성 지역이 된다면 그것은 커다란 위협이다. 소파에 등을 기댄 제임스가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이제 근대리아는 미국과 일본이 공동 조정하는 제2의 한국이 되었소? 어떻소? 내 표현이 맞습니까?

글쎄, 그건 제임스, 당신들 입장이고.

박정규가 잠시 생각하는 얼굴을 지었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로서는 한국 경제의 10퍼센트를 투자한 땅이 적화될 뻔했던 참이어서 당신들처럼 공을 내세울 형편이 아니오.

그렇겠군. 강회장은 한국 속담처럼 죽 쑤어서 개 먹이로 줄 뻔했지.

미국과 일본은 근대리아가 적화가 되건 독자적으로 발전하건 간에 위험한 세력으로 보았고 박정규는 적화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박정규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기업가는 위험한 부류요. 그들은 국가의 이익이나 안보보다는 자신과 기업의 이익부터 챙긴다니까.

위험한 발상이었소. 강회장은 그곳에 강씨 제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오. 북한계를 들여와 순화시키면 될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만 갖고 있었소.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분위기는 가벼웠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여겨졌던 김상철의 세력이 근대리아를 떠나면 남은 삼합회나 마피아, 북한계는 한국과 미국 정부의 대리인인 우재환과 일본의 지원을 받는 이나카와회의 양대 세력으로 충분히 견제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일임과 동시에 근대리아의 주민과 근대 그룹을 위한 일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근대리아가 많이 발전했더군요.

한민수는 익숙하게 바닷가재의 껍질을 벗기더니 포크로 살점을 찍어 입에 넣었다. 서초동의 바닷가재 요리 전문점 안이다. 맛으로 소문난 집이어서 식당 안은 빈 테이블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동양의 라스베이거스, 사막과는 정반대인 눈에 덮인 대평원 한복판의 라스베이거스.

한민수가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기막힌 대조 아닙니까? 도박꾼의 호기심이 일어날 만합니다.

식당의 분위기는 밝았다. 곳곳에서 웃음소리와 가벼운 말소리가 들려왔고 조명과 장식도 밝다. 포크를 내려놓은 강미현은 물 잔을 들었다.

근대리아는 이제 한국 정부가 관리해요. 근대는 운영권이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관리들의 단견이 나라를 망친다고 아버님도 늘 말씀하십니다.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

하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죠. 관리나 정치인의 수명은 그리 길지 못하니까요.

강미현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지난달 한민수에게 불쑥 연락을 하자 그는 놀라면서도 반겨주었다. 김상철과의 관계를 모를 리가 없는 그였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았고 이제 일주일에 두 번 정도로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한민수가 강미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직 우리나라 대기업 중에서 근대리아에 투자 진출을 한 회사는 없어요. 그래서 우리 대동그룹이 하면 어떨까 하고.

「‥‥‥‥」

물론 아버님의 허락을 받을 자신이 있어서 하는 소립니다. 유망한 사업에 투자하는 데야 반대하실 리가 없지요.

이제까지 근대리아에는 소규모 중소기업 몇 개가 진출해 있을 뿐으로 대기업은커녕 중견기업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첫째로 근대리아는 근대 그룹의 영역이라는 의식이 있는데다 실제로 근대리아 쪽에서도 그것을 고려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정부의 규제였다. 정부는 근대 그룹의 투자마저도 제한해 왔던 것이다.

한민수가 말을 이었다.

분위기로는 곧 근대리아에 대한 규제가 풀리게 될 것 같은데요. 정부에서는 근대리아가 저희들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어떤 사업에 투자하실 건데요?

관광사업과 유흥업이 나을 것 같은데 . 호텔도 몇 개 짓고.

근대시에 이미 호텔이 여러 개 생겼지만 아마 절대적으로 부족할 겁니다. 내년부터는 관광객이 몰려들 테니까.

강미현을 바라본 그가 냅킨을 식탁 위로 올려놓았다.

밖으로 나가실까요? 가재 냄새가 몸에 밸 것 같군요,

한민수의 벤츠는 중부고속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려가는 중이었다. 깊은 밤이어서 가끔 상행차의 불빛이 그들을 스치고 지날 뿐 주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었다.

정부는 근대리아를 미국과 일본 손에 넘겨주려고 합니다.

한민수의 말이 차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정부가 근대에 강력하게 제재를 가했던 것은 미국과 일본의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들의 주장이 국민들에게 설득력이 있었기도 했고.

강미현이 힐끗 그의 옆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미국과 일본이 근대리아에 개입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소문으로만 떠돌다가 가라앉았을 뿐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일본은 이미 상당히 기반을 굳히고 있더군요. 야쿠자 세력을 앞세워서 말입니다.

김상철 씨의 기반은 당연히 운영위원회의 어용 조직이 인수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잘 아시네요.

저도 조사를 조금 했습니다. 우재환이라고 하던가요? 그자는 한미 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근대시에 대해서는 투자할 자금도, 명분도 없습니다. 정부에서 호텔이나 유흥업체를 만들 수가 없으니까.

차는 속력을 늦추더니 길가의 휴게소로 꺾어 들어갔다. 한민수는 어두운 휴게소의 주차장에 차를 세줬다.

아마 일본의 야쿠자는 자체 자금으로 근대시에 진출했지만 일본 정부가 뒤에서 지원하는 형식입니다. 그러나 우재환은 지원해 줄 스폰서가 없습니다. 한국이나 미국 정부가 호텔을 지어 그 자에게 맡기겠습니까? 어림없는 수작이지요.

몸을 돌린 한민수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결론이 나옵니다. 한미 양국정부는 적당한 대기업을 스폰서로 잡아 근대에 진출시키고 그 관리를 우재환에게 맡기는 것이지요. 그 기업은 정부의 보호를 받는 데다 관리까지 맡아주고 막대한 이득을 올릴 테니 이런 제의를 반대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거부하면 진출할 수 없어요.

강미현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그럴 힘은 있어요.

한민수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땐 다시 길고 어려운 싸움이 시작되겠지요. 정부는 갖가지 규제를 하고 근대는 반발하고 소모전이지만 결국 피해를 입는 것은 근대가 됩니다.

「‥‥‥‥」

우리 대동 그룹이 나선다면 우선 근대와의 친분 관계를 체크할 겁니다. 나와 미현 씨의 사이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알려졌다고 해도 내가 차인 사이라는 것밖에.

그는 어둠 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우리가 진출하면 우재환은 개입하지 못할 것이고 머지않아 도태될 겁니다. 왜냐하면 대동 그룹과 근대 그룹이 연합해서 그자를 몰아낼 테니까. 나아가서 정부의 간섭도 배제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그는 손을 뻗어 강미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건 추측이 섞인 예상 계획이지요. 하지만 가능성은 미현 씨 자신이 계산하실 수 있을 것이고 신뢰성도 미현 씨한테 달려 있다고 봅니다만.

그가 팔을 가볍게 당겼으므로 강미현의 머리가 그의 어깨에 닿았다.

근대시에 기반을 굳히고 나서 우리는 결혼을 하는 겁니다. 그만하면 신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음날은 일요일이어서 강미현은 늦은 아침을 먹고 2층의 응접실로 들어갔다. 신문을 읽고 있던 강용식이 머리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 나갔었니?

,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요.

강미현은 앞쪽 의자에 앉았다. 요즘 들어 강용식은 몹시 지쳐 보였는데 그것은 강회장 때문이었다. 강회장은 한 달이 넘도록 계속 칩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회장은 일절 외부 출입을 삼가하고 이틀에 한 번꼴로 찾아오는 이남호를 만나는 것이 유일한 외부 접촉이었다. 따라서 근대 그룹 전체에 대한 책임감이 강용식을 누르고 있는 것이다.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강미현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한민수의 제의를 전하는 동안 차츰 강용식의 표정이 긴장되어 갔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방 안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강용식은 강회장과는 달리 격한 성격이 아니다. 강회장은 우선 내딛고 보는 성격인데 반하여 강용식은 손을 대기 전에 치밀한 연구를 한다.

대동 그룹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른 곳은 쉬고 있을 것 같니? 오성이나 한일이나 또는 국제 그룹 같은 곳이 말이다.

하지만 내 딸은 하나뿐이니까 대동의 제의는 그중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군.

그렇다면 아버지, 다른 곳에서도 그런 제의가 있다는 말씀이세요?

강용식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직접은 아니야. 간접적으로 여러 경로를 통해서.

하지만 우재환을 도태시키고 한국 정부를 근대리아에서 몰아내자는 제의는 대동이 처음이다.

얼굴에 웃음을 띠운 그가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우선 들어야겠다.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면에서?

계산이 분명하고 경영 능력도 있어 보였어요.

제 생각이지만 다른 기업보다는 대동과 손을 잡는 것이 유리할 것 같은데요.

아마 그 사람은 너와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 그렇지 않니?

강미현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한민수의 제의를 전하면서 그녀는 마지막 부분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용식이 말을 이었다.

그런 전제 없이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할 리가 없을 텐데. 사돈 기업끼리 손을 잡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까.

그랬어요.

네 생각은 어떠냐니까?

근대리아를 위해서라면 하겠어요.

쓴웃음을 지은 강용식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우리가 너무 삭막하게 살아오긴 했다. 집안일보다 회사 일이 우선이었어, 사생활이나 감정은 자주 무시를 했지.

「‥‥‥‥」

이 상황에서 그에 대한 네 감정을 묻는 내가 난데없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편안해요. 신뢰감도 있고.

잘 견디어내는 네가 자랑스럽다.

아마 할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 거다.

몸을 세운 강용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회장에게 갈 모양이었다.

 

일본 돈으로 계산하면 52천만 엔이오.

서류에서 시선을 뗀 나카무라가 서규환을 바라보았다. 거침없는 표정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전액 현금으로 지불해 드리지요.

나파스 클럽 뒤채의 사무실 안이다. 서규환이 들고 있던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돈은 언제까지 준비될 수 있습니까?

내일 당장이라도.

나카무라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돈은 이미 준비해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돈을 지불하고 명의이전을 하는 일만 남은 셈이군요.

그가 잠자코 있자 나카무라는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을 집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협상이 간단치가 않았는데 이제 겨우 술맛이 나겠습니다.

나머지 사업장을 팔기로 결정을 하고 나서 오늘이 열흘째였다. 그동안 서규환과 나카무라는 매일 머리를 맞대고 가격 절충을 해온 것이다. 장인규가 장악하고 있던 타운의 나머지 11개 사업장을 인수해갈 업체는 일본의 대국통상이었다. 이나카와회가 근대리아 진출을 위해 만든 프런트 기업이다. 술을 한 모금에 삼킨 나카무라가 시선을 들었다.

현금 52천만 엔이면 큰 분량이오. 트렁크 서너 개에 넣어야 하는데 괜찮겠지요?

상관없어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실 계획입니까?

나카무라는 내내 부드러운 표정이었지만 서규환은 딱딱한 얼굴로 대답하지 않았다. 술잔을 내려놓은 나카무라가 서류를 챙겨 들었다.

그럼 시간을 정합시다. 언제가 좋겠소?

내일 오후 3, 장소는 행정청 사무실에서.

머리를 끄덕인 나카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이것으로 계약은 끝난 것이다. 사무실을 나온 서규환은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는 거리를 달려 저택으로 들어섰다. 저택 안은 수선거리는 분위기였는데 이곳저곳에 쌓아놓은 짐들로 어수선했다. 이삿짐을 꾸리는 것이다. 모두 바쁘게들 움직이고는 있었으나 어깨를 늘어뜨린 활기 잃은 모습이다. 그가 응접실로 들어서자 창가에 서 있던 장인규가 몸을 돌렸다.

내일 오후 3시에 현금을 받기로 했습니다.

수고했어.

창틀에 등을 기대고 선 그녀가 팔짱을 끼었다

지금 남아 있는 인원이 몇 명이나 되지?

정금희가 어제 이금철한테 돌아갔으니 남은 여자는 이여사님과 따님, 그리고 황윤과 현채옥뿐입니다.

장인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현채옥은 송길수의 시중을 들던 북한계 종업원이다. 여자들이 북한 인민군에서 차출되어 근대리아에 보내졌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고 이번에 장인규가 사업장을 정리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금철은 그녀들을 빠짐없이 불러들였다. 그러나 현채옥과 그녀의 친구인 정금희는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결국 현채옥만이 남게 된 것이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장인규가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없지. 그럼 남자는?

저까지 포함해서 일곱 명입니다.

장인규를 따라 근대리아를 떠날 인원이었다. 처음에는 남자들만 50여 명이 되었는데 장인규가 그들을 설득해서 갖고 있던 현금을 모두 나눠주고는 제 갈 길을 찾아가게 했다. 그들에게는 거금이었으므로 일부는 이미 근대리아를 떠난 사람도 있다. 종업원까지 포함하여 사업장을 매각한 것이어서 종업원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출발은 내일 저녁이야.

장인규가 머리를 돌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친 눈보라였다.

 

폭설이 내릴 모양인데.

창밖을 내다보던 우재환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지독한 눈이로군, 이런 날씨라면 비행장이 폐쇄되겠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저녁 비행 스케줄은 취소되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이종남이 말했다. 지프는 행정청에서 오리엔트 호텔로 향하는 대로를 달려가는 중이었지만 속력을 잔뜩 낮추고 있었다. 근대리아에서 처음 겨울을 맞는 우재환인지라 굵은 눈발에 기가 질린 모양이었다. 저녁 무렵이어서 진회색 하늘에 흰 눈송이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내일 오후에 양도가 끝납니다.

이종남이 말했다.

현금으로 지불하기로 했다는군요.

이나카와회는 본격적으로 근대리아에서 돈세탁을 하고 있어. 그 정도의 현금을 내놓는 것은 문제가 아니야.

창에서 머리를 돌린 우재환이 이종남을 바라보았다.

장인규가 부하들한테 돈을 나눠주었다면서?

, 50명 가까운 놈들에게 일인당 2만 달러씩을 나눠준 모양입니다.

「‥‥‥‥」

김상철의 전별금이라고 했다는군요.

이종남은 우재환의 행동대장격으로 전직이 청와대 경호원이었다는 사내였다. 다부진 체격에다 출신 성분과 어울리게 예의도 바른데다 통솔력이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머지 인원은 남녀 합해서 10여 명 정도인데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고 합니다.

김상철 그놈, 치부를 했군. 2년 동안에 50억 가까운 돈을 모으다니.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마피아와 손을 잡은 그놈 부하들이 있을 테니 그곳에서 다시 기반을 굳힐 것이다.

지프는 겨우 오리엔트 호텔의 현관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우재환은 곧장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그들이 멈춰 선 곳은 20층의 스위트룸 앞이었다. 부하들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서자 시바다와 가와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러 번 만난 사이였으므로 그들은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는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축하합니다, 시바다 씨. 좋은 가격에 결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우재환이 일본어로 말하자 시바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꽤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인수해서 다행입니다. 이제 김상철의 사업장은 양분이 된 셈이군요.

우리보다 당신네가 두 배나 더 많지요. 우린 다섯 개 사업장밖에 안 됩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돈 한 푼 들지 않았으니 더 이익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재환이 쓴웃음을 짓자 시바다가 술잔을 내밀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행동이다.

, 한잔! 일한(日韓) 양국의 우의를 위해서.

오늘은 시바다가 양국의 우의를 다지자는 이유로 우재환을 초청한 것이다. 그들은 제각기 보드카 잔을 들고는 건배했다.

 

행정청 3층에 있는 환경국 사무실 옆에는 민원인의 대기실이 있다. 오후 3, 대기실의 테이블 위에는 트렁크 세 개가 열려 있었고 주위에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몰려서서 트렁크에 가득 든 엔화 뭉치를 세는 중이었다. 이윽고 셈이 끝났는지 사내 하나가 서규환을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서규환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테이블 건너편에 서 있는 나카무라에게 서류 봉투를 넘겨주었다. 서류를 훑어본 나카무라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그의 부하들이 뒤를 따랐다. 서규환은 손을 뻗어 엔화 뭉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만엔 권으로 백만 엔 다발이었는데 모서리가 칼끝처럼 날카로웠고 지폐 특유의 잉크 냄새가 풍겼다. 돈을 던진 그는 부하들을 남겨두고는 방을 나와 옆쪽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서류는 넘겨주었으니 환경국에 신고할 일만 남은 것이다. 서규환이 부하들과 함께 저택에 돌아온 것은 오후 5시경으로 사방이 어두워졌을 때였다. 눈보라는 사흘째 계속되고 있어서 공항은 어제저녁부터 비행이 통제된 상황이다. 장인규는 어제처럼 응접실의 창가에 서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내고 왔습니다.

그가 말하자 장인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 부위원장이 철도국에 이야기해서 수송 열차에 객차 한 대를 연결시켜 주기로 했어. 10시 발 수송 열차야.

근대시에서 하바로프스크까지 철도가 개설되어있는 것이다. 눈이 심할 때는 비행기는 물론이고 도로도 끊겨 수송 트럭의 운행도 중지되었지만 제설차를 앞에 매단 열차는 눈을 뚫고 달릴 수 있었다.

10시발이면 시간이 있군요. 그럼 나머지 짐을 철도국으로 날라야겠습니다.

짐이라야 이제 가방 몇 개뿐이다. 이미 아침의 수송열차편으로 남아 있던 짐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냈다. 그러나 서규환은 바쁜 척 서두르며 응접실을 나갔다. 한동안 창가에 서 있던 장인규는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자 곧 신호음이 떨어지더니 사내의 응답 소리가 들렸다. 이한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상철에게 연락을 할 때는 송길수를 거쳤지만 요즘은 직접 전화를 한다. 경비대가 그쪽 전화를 추적할 가능성도 있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김상철을 어찌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님, 그쪽 눈이 심하다는데.

이한이 걱정부터 했다.

비행기는 뜨는 거요?

우린 열차로 간다. 오늘 밤 10시 출발이니까 하바로프스크에는 내일 오후에야 도착할 거야.

그레고리한테 연락을 해두겠소. 비행기 편을 알아보라고 해야겠군요.

김사장님은 계시냐?

잠깐 나가셨소.

이한이 서두르듯 말머리를 돌렸다.

먼저 도착한 짐은 교외의 집으로 옮겨놓았소. 방이 스무 개나 되는 데다가 경관도 좋소. 누님이 오시면 우리도 그곳으로 옮길 작정이오.

장인규가 잠자코 있자 이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님, 듣고 있소?

듣고 있어. 전화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다시 연락하겠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장인규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이미 어두워진 창밖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박기동은 오리엔트 호텔 2층에 있는 바에 들어서자 곧장 안쪽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허리 높이의 칸막이를 세워 마치 방처럼 꾸며놓은 곳이었다. 그가 테이블로 다가가자 자리에 앉아 있던 안인석이 일어섰다.

눈보라가 심해서 좀 늦었습니다.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바 안은 미주나 유럽 쪽에서 온 듯한 손님이 두 명 있을 뿐 조용했다. 먼저 마시고 있던 참이라 안인석은 보드카 병을 들어 박기동의 잔에 채워주었다. 그는 종합기획실의 박찬홍 실장을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몇 명 안 되는 민간인 중의 하나인 것이다. 한 잔씩 같이 마시고 나자 박기동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조금 놀라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 것 없습니다. 더구나 박실장님도 아시고 있는 일이니까요.

그렇군요. 하긴 박실장님이야 종합적인 일을 통괄하는 분이니까요. 일은 실무자한테 맡기는 게 정상이지요.

그는 안인석이 따라놓은 술잔을 다시 들었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박실장님은 나와 같이 일할 사람으로 안형을 추천하셨습니다. 하지만 같이 일하고 안하고는 안형이 결정할 문젭니다. 그래서 만나자고 한 것인데,

박기동이 어깨를 펴고는 곧은 시선으로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당당한 태도였다.

내년부터 근대리아에서는 본격적으로 관광사업이 시작된다고 봐도 될 거요. 일본과 유럽, 미주 관광객이 50만 정도 되리라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안인석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국 관광객도, 우리 예상은 5만 명 정도가 될 것 같소. 올해보다는 두 배 이상 늘어난 숫자지요.

그러면 정부에서 규제를 푼단 말입니까?

규제를 푼다면 아마 50만은 될 거요. 세계에서 이곳만큼 카지노와 도박, 유흥이 자유로운 지역이 없으니까.

박기동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우리는 한국 관광객을 일본을 통해 받을 겁니다. 선정된 여행사를 통해서 말이오. 그들은 일본을 거쳐 근대리아에 오게 되는 거지요.

「‥‥‥‥」

나갈 때도 마찬가집니다. 여권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아요. 물론 박실장님이나 운영위원장님이 정부를 움직여 규제를 풀면 되겠지만 이건 조금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요. 그래서 이런 편법을 쓰는 겁니다.

행정위원회에는 비밀로 말입니까?

행정위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오. 근대리아에 해를 끼치는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실무를 우리가 장악하고 있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지요. 그래서 ‥‥‥」

박기동이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으로 안형이 추천되었소.

안형이 승낙한다면 내년 11일자로 안형은 환경국의 관광과장이 될 겁니다. 근대리아의 관광을 장악하는 실무 책임자가 되는 것이지요. 물론 나하고 손발을 맞춰야 할 겁니다. 이런 말은 지금 하기에는 멋쩍지만 아마 엄청난 이권과 함께 운영위원장님의 신뢰를 받을 수가 있을 거요, 미래가 열리는 거지.

그가 안인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때요? 대충 윤곽이 잡힙니까?

안인석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가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해보겠소?

해보지요.

어차피 빠져나갈 길도 없는 데다 바라고 있던 기회이다. 박기동이 빈 잔을 내밀었다.

그러리라고 믿고 있었어, , 내 잔을 받으시오.

잔에 술을 채워준 그가 웃음 띤 얼굴로 안인석을 바라보았다.

안형에 대해서는 대충 들었어. 그러고 보면 내가 당신들과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 김상철이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이제 그는 자연스럽게 반말투로 얘기하고 있었다.

 

술잔을 쥔 김상철은 흐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에 털을 댄 가죽 재킷을 입었지만 셔츠의 단추는 풀어졌고 헝클어진 머리칼이 이마를 덮은 모습이었다. 타냐 클럽 1층에 위치한 바 안에는 10여 명의 손님에 그 숫자만큼의 여자들로 시끄러웠다. 호화로운 장식에 가구도 최고급이었고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인들이다. 술기운이 번진 남자들의 호탕한 웃음과 여자들의 교태 섞인 목소리가 곁들여져서 바 안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김상철은 술병을 들고는 잔에 술을 채줬다. 그러나 병 끝에 걸린 잔이 넘어지는 바람에 탁자 위로 술이 흘렀다. 다시 여자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났고 사내들의 거친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머리를 든 김상철은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남녀 네 쌍이 모여 앉은 뒤쪽의 테이블이었는데 저희들끼리 웃음을 주고받느라 김상철에게 시선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이윽고 김상철은 끝 쪽에 앉아 있는 카트린을 알아보았다. 머리를 뒤를 젖히고는 흰 이를 드러내며 웃던 그녀는 그의 시선과 마주쳤으나 매끄럽게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남자들은 모두 체격이 육중한 러시아인들로 세련된 차림새들이었다. 넘어진 잔을 세운 김상철은 눈의 초점부터 맞추고는 술을 채웠다. 잔을 들어 한 모금에 술을 삼킨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흔들렸으므로 잠시 서서 균형을 잡은 그는 뒤쪽의 카트린에게로 다가갔다. 남녀의 말소리가 뚝 그치더니 8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모아졌다. 그는 카트린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카트린, 2층으로 가자.

얼굴을 굳힌 카트린이 어깨를 틀어 피했으므로 중심을 잃은 그는 비틀거렸다. 카트린의 옆에 앉은 거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짙은 콧수염을 기른 그가 눈을 부릅뜨고 김상철을 노려보았다.

이봐, 당신. 꺼지지 못해!

낮으나 끓은 목소리에 바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종업원들이 벽 쪽에 서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김상철은 이제 카트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카트린, 오늘은 뒷구멍으로 할 순서야.

그 순간 사내의 주먹이 날아와 김상철의 관자놀이를 쳤다. 의자와 함께 바닥으로 넘어진 김상철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봐, 이 갈보는 오늘 내 차례라구.

그때 주먹이 또 한 번 김상철의 배를 쳤고 허리가 꺾인 그의 옆구리를 찬 것은 다른 사내였다. 바닥에 끊어 앉은 김상철은 위에 가득 차 있던 액체를 입으로 토해내었다. 다시 구둣발에 얼굴을 차인 그는 옆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종업원들이 다가와 김상철과 사내들을 떼어놓았다. 마담의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에게 해명하는 여자들의 시끄러운 말소리가 겹쳐졌다. 김상철은 종업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입과 코에서 흘러나온 피가 얼굴뿐만이 아니라 셔츠까지 흠뻑 적시고 있다. 마담이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은 짜증스러움으로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괜찮아요?

송길수가 온 적도 있었으므로 눈치 빠른 그녀는 김상철이 마피아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김상철은 머리를 돌려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자리에 다시 앉아 있었는데 마담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온몸을 굳히고 있다. 김상철은 피범벅이 된 입을 벌리며 웃었다. 처음에는 소리 없이 입술만 일그러뜨렸다가 곧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웃음을 그치더니 똑바른 걸음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옷에 피칠을 하고 얼굴이 부어터진 김상철이 돌아왔을 때 이한은 눈을 치켜뜨고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러나 김상철이 잠자코 그를 스쳐 지나가자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는 뒤를 따랐다. 그는 계단을 따라 오르면서 무엇부터 물을 것인가로 정신이 혼란했다.

형님.

우선 그렇게 불러놓고 나자 봇물 터지듯이 질문이 쏟아졌다.

무슨 일입니까? 어디에서 그렇게 되셨는데요? 길수한테 연락을 할까요?

술 먹고 다쳤다.

방으로 들어서면서 그가 짧게 말하자 이한은 숨을 몰아쉬었다. 옷을 갈아입은 김상철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 2시가 되어 있었다. 그가 침대에 눕자마자 방문이 열리더니 약상자를 든 이한이 들어섰다. 그는 침대가의 의자에 앉아 김상철의 얼굴을 소독제로 닦아냈다.

형님, 장누님한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눈 때문에 열차로 출발한다고. 10시 출발이라고 했습니다. 알아봤더니 하바로프스크에는 내일 오후 6시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짐은 그대로 열차로 보내고 사람들은 비행기로 올 예정입니다. 9시에 도착하는 비행깁니다.

한아.

김상철이 눈을 뜨고는 이한을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시작할 테다.

그러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형님.

나는 이제 근대리아를 버렸다.

당연하지요, .

빚진 것도 없어.

빚지다니요? 손해가 얼마라고.

이제 후련하다.

주무십시오, 형님.

약상자의 뚜껑을 덮은 이한이 시트를 끌어당겨 주었다. 김상철은 눈을 감았고 이한은 아까보다는 힘 있는 발소리를 내면서 방을 나갔다.

 

수송 열차는 단조롭고 규칙적인 진동과 함께 어둠에 잠긴 평원을 달려가고 있었다. 아직 눈보라가 그치지 않아 제설차를 앞에 매단 채 달리고 있어 속도는 느리다. 새벽 3시였다. 밖은 영하 30여 도의 추위였지만 객차 안은 두 개의 기름 난로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어서 따뜻했다. 뿐만 아니라 한쪽 구석에는 음료수와 여행자용 도시락, 과일 등이 쌓여 있었는데 모두 이대각이 마련해 준 것이다. 객차는 일등칸으로 의자를 침대로 개조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일행 대부분은 의자를 젖히고는 누워 있었다. 겉으로만 본다면 호화로운 여행이지만 분위기는 무겁다. 의자에 누워 바퀴가 레일의 이음 부분을 지나는 단조롭고도 규칙적인 마찰 소리를 듣던 장인규는 팔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덜컹이는 소리가 차츰 느려지는 것이 수송 열차의 정류장인 불칸에 다가온 모양이었다. 불칸은 국경에서 5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근대리아의 마지막 역이다. 그녀의 예상대로 열차는 높고도 긴 경적을 울렸다. 발짝 소리와 함께 서규환이 앞에 와 섰으므로 장인규는 일어나 앉았다.

눈이 그쳤습니다.

그는 꺼칠해진 얼굴로 장인규를 내려다보았다.

불칸에서 30분을 쉽니다.

잊고 온 것이 있어.

장인규의 말에 그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뭘 말입니까?

정금희한테 돈을 준다는 것을 잊었어,

서규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고용인들은 빠짐없이 2만 달러씩의 전별금을 주었지만 정금회는 마지막까지 고집을 피우며 남는 바람에 그도 잊었던 것이다.

불칸 역에 도착하면 그곳 사람들한테 부탁할 수 없을까? 마음에 걸려서 그래.

할 수 있을 겁니다. 곧 올라가는 열차도 있을 테니까 근대 직원한테 부탁하지요.

달러가 없으니까 엔화로 줘야겠어. 20만 엔쯤 주면 되겠지?

알겠습니다. 제가 그럼 가방에서 ‥‥‥」

열차가 다시 길고 높은 경적을 울리기 시작하면서 속력이 더욱 느려졌다. 불칸에 도착하려는 모양이었다. 불칸 역은 수송 열차 전용역으로 하바로프스크를 떠나 시베리아를 북행해 온 수송열차가 근대리아의 국경을 넘고 나서 재정비, 급유, 편성되는 거점이었다. 마찬가지로 남하하는 열차는 국경 근처의 불칸 역에서 러시아로 들어설 준비를 한다. 따라서 거대한 차량 수리소와 창고가 세워져 있었고 근무자도 백여 명이 넘었다. 열차가 도착하자 찬바람만 매섭게 몰아치던 플랫폼에 드문드문 역무원이 나타났다.

아직도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덮여 있었고 기온은 영하 30도가 넘는다. 다섯 시간이 넘도록 객차 안에만 있었던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어나 수선거리기 시작했다. 새벽 330분이었다. 서규환이 밖으로 나가자 밝은 공기를 마시려는 듯 대여섯 명의 남녀가 따라나섰다. 장인규에게로 황윤이 다가오더니 옆자리에 앉았다.

근대리아에 처음 올 적에는 트럭을 타고 왔었어요. 일주일도 넘게 걸렸는데‥‥‥」

제법 익숙한 한국어로 그녀가 말했다.

김사장님과 이한 씨도 같이 있었어요.

자신이 근대리아에 들어올 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막상 근대리아를 떠난다고 생각하자 지난 일이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황윤은 붙임성도 있는데다 당돌한 성격이다. 장인규는 자신을 따르는 그녀가 싫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면 이한과 결혼하도록 해라, 내가 주선해 줄 테니까.

그러자 황윤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덧난 송곳니가 유난히 드러나 보이는 밝은 웃음이다.

언니도 김사장님과 결혼하시는 게 어때요?

장인규가 정색을 했지만 황윤은 상관하지 않았다.

난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만해.

마침 객차의 옆쪽으로 서규환이 들어섰으므로 그들은 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코끝이 발개진 서규환이 다가와 섰다.

보냈습니다, 사장님. 오늘 아침 9시에 도착한다는 열차 편으로 올려 보내준답니다.

머리를 끄덕인 장인규는 객차 안으로 들어서는 서너 명의 사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두 동양인으로 두꺼운 슈바 차림이었다. 그 순간 장인규는 퍼뜩 눈을 치켜떴다.

습격이다!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서규환이 앞으로 휘청이며 쓰러졌다. 연속적인 총성과 함께 수십 발의 총탄이 주변에 쏟아졌고 객차 안은 금방 총성과 비명으로 수라장이 되었다. 의자 밑으로 몸을 구겨 넣은 장인규는 손을 뻗어 가방을 집었다. 가방에서 리볼버를 꺼내든 그녀가 상체를 세웠을 때 황윤의 몸이 어깨 위로 넘어져 왔다. 눈을 크게 뜬 황윤의 입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총탄은 아직도 빗발처럼 쏟아지고 있었으나 이젠 간간이 신음소리만 들릴 뿐이다. 이를 악문 장인규는 번쩍 상반신을 일으켰다. 창문을 등에 대고 선 상태였으므로 좌우에 벌려선 사내들이 시선 끝에 들어왔다.

, , !

장인규는 좌측의 사내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객차 안에서 터진 처음의 총성이다. 좌측의 사내 두 명이 벌떡 넘어지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장인규는 가슴에 뜨거운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다시 소음기를 장착한 기관총의 발사음이 객차 안을 가득 채웠고 장인규는 의자의 팔걸이에 머리를 부딪치며 옆으로 쓰러졌다.

드르륵, 드르륵.

객차의 이곳저곳에서 간간이 총성이 울리고 있었다. 확인 사살을 하는 것이다. 장인규는 객차의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의자 위에 엎드려 있었다. 아직도 손에는 권총을 쥐고 있었지만 총구는 바닥을 향해 있었고 이미 그것을 들어 올릴 기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문득 총성이 그쳐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습격해 온 사내들이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인규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곧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게 되었다.

 

사건을 제일 먼저 보고받은 사람은 근대시의 수송사업본부에서 당직을 맡고 있던 정일구 대리였다. 시간은 새벽 445, 그는 불칸 역장의 횡설수설에 정신이 번쩍 들어 정확한 사건 정황을 캐묻고 확인하는 데 시간을 꽤 소비했다. 대략 상황을 정리한 다음 그는 전화기를 손에 쥐고는 재빨리 다이얼을 눌렀다. 비상시에 연락해야 할 곳은 경비본부와 행정위원회였지만 그는 근대건설 출신이다. 그가 누른 것은 이대각의 숙소 전화번호였다. 전화벨이 다섯 번이나 울린 다음에야 이대각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당직자의 버릇이다.

부위원장님, 불칸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그는 소리치듯 말했다.

어젯밤 10시에 출발했던 제28 수송 열차에서 사고가‥‥ 객차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뭐라고?

이대각이 버럭 소리치듯 되묻자 정일구는 당황하여 침을 삼켰다.

, 객차의 승객이 모두 총에 맞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남자 일곱에 여자는 넷으로 아이까지 있습니다.

그가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이대각은 온몸을 떨었다.

그렇다면 총격전이 있었단 말이냐?

아닙니다. 총성도 듣지 못했답니다. 불칸의 역무원이 출발 전에 객차 점검을 하러 갔다가 발견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모두 죽어 있었답니다.

남자 일곱, 여자 넷이라고 했나?

, 부위원장님.

내가 알기로는 여자가 다섯이었다. 모두 열두 명이었어.

하지만 현장 주위에는 더 이상‥‥‥」

도대체 어느 놈이.

경비본부에 연락을 할까요?

당장 하도록 해.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대각은 잠시 현기증으로 비틀거렸다. 그는 서둘러 바지를 입고 양말을 신으면서도 줄곧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보라를 무릅쓰고 헬기를 띄운 그가 불칸에 도착한 것은 아침 7시였다. 이곳은 바람도 그친 맑은 날씨였지만 역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수송 열차는 이미 출발했으므로 그는 곧장 철길 위에 버려진 듯 세워진 객차로 다가갔다. 동행한 경비본부장 소명일도 굳은 표정이었다. 시체들은 흰 천에 덮여 철길 가에 나란히 누여 있었는데 이미 근무자에 의해서 신원이 확인되어 있었다. 장인규의 시체가 맨 처음이었다. 두 눈을 감고 입을 꾹 다문 채 누운 그녀의 입가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다. 시선을 옮긴 이대각이 이인숙과 황윤, 그리고 사내들과 끝쪽에 있는 아이의 시체까지 차례로 출어보고는 몸을 돌렸다. 옆에 선 소명일이 입맛을 다시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리쉬었다

본부장, 각오하고 있어야 할 거요.

이대각의 목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깼다.

이런 짓을 한 놈은 물론이고 그 일당, 그리고 비호세력까지도 앙갚음을 당할 테니까.

소명일이 힐끗 시선을 주었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아침 햇살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중이었다. 영하 30도의 날씨였지만 하늘은 맑았다. 소명일에게로 경비대 간부 한 명이 다가오자 시체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본부장님, 실종된 여자는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북한계로 현채옥이라는 여잡니다.

그의 말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깼다.

근대시에서 출발할 때 분명히 같이 탑승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찾아라.

소명일의 목소리가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근대리아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내.

그는 이대각에게로 몸을 돌렸다.

국경을 봉쇄해서라도 찾아낼 테요, 부위원장님.

블라디보스토크의 김상철은 아침 8시경에야 이대각의 연락을 받고 사건을 알게 되었다. 송길수가 찾아온 것은 830, 그들은 응접실에 마주 앉았다. 이한은 눈을 잔뜩 치켜뜨고 있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사건을 전해 들은 송길수도 아연실색한 얼굴이었다.

돈을 강탈할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송길수가 방 안의 정적을 깨었다. 가라앉다 못해 쉬어버린 목소리였다.

조금 전에 북한의 이금철이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페로프에게 연락을 해왔다고 합니다만.

현채옥의 실종은 경비대의 의욕을 부추길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였다. 그들이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펼치기 시작하자 그녀와 연관이 있는 이금철이 나선 것이다.

불칸에서 동쪽으로 120킬로미터 떨어진 러시아 영토에 북한의 벌목사업소가 있습니다.

송길수의 목소리가 다시 방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불칸 서쪽으로 20킬로미터 거리에는 중국의 개척마을도 있습니다. 장사장이 5억 엔이 넘는 돈을 갖고 출발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 .

김상철이 머리를 들었다.

시체는 내일 이곳으로 도착하기로 되어 있다. 장례식 준비부터 해야겠다.

김상철은 어젯밤의 사건으로 인해 입술은 부르튼데다가 관자놀이에 반창고까지 붙인 흉한 모습이다. 그러자 이한이 머리를 돌린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현채옥이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형님.

탁자 위로 시선을 내린 송길수가 말했다. 그는 이한 앞에서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것이다. 황윤뿐만 아니라 이한이 누님처럼 따르던 장인규까지 살해당한 상황이다.

물론 관계가 있다면 내 손으로 죽이지요. 저는 그년이 따라오는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허탈감과 알 수 없는 분노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김상철이다. 사업장을 모두 처분하고 장인규가 근대리아를 떠나는 시점에서 그는 모든 미련을 버리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잔인한 놈들이다.

김상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송길수는 알아들었다.

모든 것을 내놓고 물러가는 우리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고 믿었겠지. 그래서 그런 짓을 했을 것이다.

잔인한 세계였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철저히 지켜지며 약점을 보인다는 것은 곧 상대방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의미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쪽은 약점투성이의 조직이었던 셈이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앉은 김상철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비현실적인 근대에 대한 미련이 결국 그들을 허무한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행정위원장 유장석은 자리에서 일어선 채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몸을 똑바로 세우고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다. 그의 앞에 엉거주춤 서 있는 사내는 방금 불칸에서 돌아온 이대각이다.

, 회장님. 지금 경비대가 대대적인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유장석이 소리치듯 말했다. 전화 상대는 서울의 강회장이었고 사건을 보고받은 그는 거의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전화를 해온 것이다.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어린애까지 살해하다니 잔인무도한 놈들이야.

강회장은 병석에 누워 있다는 사람 같지 않게 찌렁찌렁한 목소리였다.

더구나 근대리아를 떠나는 사람들한테 말이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떠나고 있었을 것 아닌가?

, 회장님.

그놈들은 내막을 잘 아는 놈들이다. 북한 놈들이 아닐 수도 있단 말이다.

, 회장님.

이놈아, 맹꽁이처럼 대답만 하지 말아! 주관을 가지고 해결하란 말이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유장석이 앞에 선 이대각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점점 벌겋게 되어가는 중이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김상철이가 어떻게 나을 것 같으냐?

, 그것은, 이대각이 ‥‥‥」

전화는 이곳의 경비대에서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감청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대각이 김상철에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면 문제가 된다. 강회장도 눈치를 봤는지 말을 바꾸었다.

천인공노할 짓이다.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짓이야.

상황을 수시로 보고하도록. 집으로 말이다. 알아들었느냐?

, 회장님.

전화가 끊기는 소리에 놀란 듯 유장석이 힐끔 수화기를 귀에서 떼었다.

뭐라고 하십디까?

이대각이 묻자 그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길게 숨을 내리쉬었다. 늘어진 동작으로 소파에 마주 앉자 유장석이 이대각을 바라보았다.

용납할 수 없는 짓이라고, 천인공노할 놈들이고, 김상철이가 어떻게 나을 것인가를 물으셨어. 댁으로 전화를 하라는데‥‥‥」

집으로 전화를 하라는 것은 예전처럼 암호 전화를 하라는 뜻이다. 이대각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이대각의 전화를 받은 김상철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지만 그가 어떤 감정 상태에 빠져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었다.

용납할 수 없는 짓이라고 하셨단 말이지요?

이대각이 되묻자 유장석이 힐끗 시선을 주었다.

격분하고 계셨어.

타운의 각 조직들이 긴장하고 있습니다. 혹시 불똥이 튀지나 않을까 하고.

「‥‥‥‥」

물론 김상철이 근대리아에 풍파를 일으킬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요. 그래서 그의 식구들을 몰살시켰겠지만 말입니다.

머리를 돌린 유장석이 입맛을 다셨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김상철은 근대리아를 세웠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품었던 사내였다. 그러나 근대리아는 그에게 너무 많은 희생만을 요구해 왔던 것이다.

다음 날 저녁, 이금철이 저녁 식사를 마쳤을 때, 최태호가 들어섰다. 코즈모프 바 뒤채의 사무실 안이다.

위원장님, 정금희 앞으로 물건이 왔는데요.

최태호는 찌푸린 얼굴로 이금철 앞에 앉더니 두툼한 봉투 하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어제 새벽 불칸에서 보내진 것입니다. 발신인은 장인규로 되어 있는 봉투인데, 돈이 300만 엔이나 들어 있습니다.

놀란 이금철이 얼른 봉투를 바라보았다.

300만 엔? 그 돈이 왜?

장인규는 5억 엔이 넘는 현금을 강탈당하고 죽은 것이다.

그건 아직 정금회한테 물어보지 않아서 아직 모릅니다. 불칸 역무원이 수송본부로 보낸 것을 우리가 대신 찾아왔기 때문에, 그들도 안에 현금이 들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입니다.

최태호가 봉투 안에 든 세 뭉치의 돈을 꺼내 놓았다.

위원장님, 이것 어떻게 할까요?

이런 빌어먹을.

이금철이 최태호를 쏘아보았다.

이건 함정인지 모른다.

함정이라니요?

우리가 이 돈을 갖고 있게 된다면 말이야.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 돈은 불칸 역무원을 통해서 엄연히 공식적으로 전달된 것인데.

장인규가 보냈다는 증거가 있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보냈는지 후에 보냈는지 확인했느냐 말이야.

그것은 아직 ‥‥‥‥」

후에 보냈다면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그럴 리가요.

처박아 둬라. 봉투째 그대로. 정금희에게 준다면 금방 소문이 나버릴 것이고, 태워버린다면 나중에 탄로 났을 때 빠져나갈 길도 없어진다.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얼굴을 굳힌 최태호가 봉투에 돈을 다시 담았다.

그 망할 장인규 년이 죽어서도 우리를 잡고 늘어지는군요. 독한 년입니다.

장인규가 남긴 마지막 돈이야, 그 돈은.

봉투를 챙긴 최태호가 서둘러 사무실을 나가자 이금철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겨울 날씨답지 않게 하늘은 파랗게 개어 있는 데다 바람도 없는 화창한 날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교외의 작은 능선 앞에는 30, 40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날씨는 맑았지만 영하 20도에 가까운 추위여서 모두 슈바나 파카 차림으로 모여 서서 장례식을 치르는 중이다. 나란히 파인 11개의 구덩이 옆에는 제각기 관이 놓여 있었는데 그중 유난히 작은 관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인숙의 딸 명희의 관이었는데 이제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장인규는 종교를 믿지 않았지만 이한이 고집을 부려 시내에서 목사 한 사람을 데려왔기 때문에 장례식은 기독교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기도가 끝나고 하관이 시작될 때는 한낮의 태양이 조금 기울어질 무렵이었다. 장례식에는 송길수와 함께 지난번 마피아와의 전쟁 때 근대부두로 파견되었다가 이제는 마피아의 일원이 된 사내들과 하바로프스크에서 날아온 그레고리와 그의 부하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이 없거나 있다고 해도 찾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참석한 유가족은 서너 명밖에 되지 않았다. 쓸쓸한 장례식이었다. 장례식을 마친 김상철이 저택에 돌아왔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그레고리의 부하가 말했다.

하바로프스크의 주코프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급한 일이라고, 돌아오시는 대로 연락을 해달라고 합니다.

김상철의 뒤를 따라 들어서던 그레고리가 곧장 전화기로 다가갔다. 주코프는 그레고리의 부관으로 하바로프스크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김상철이 응접실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레고리가 들어섰다. 긴장한 표정이었으므로 방 안에 있던 송길수와 이한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아졌다.

보스, 현채옥을 주코프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반쯤 얼어붙어 있어서 지금 병원에 데려다 놓았답니다.

그가 서두르듯 말을 이었다.

한 시간쯤 전에 현채옥이 찾아왔다는 겁니다. 수송 열차의 화물칸에 숨어 시베리아를 횡단했다는군요.

그렇다면 습격자들을 피해서 ‥‥‥」

긴장한 김상철이 묻자 그레고리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플랫폼의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에 객차가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숨어서 습격자 10여 명을 보았지만 얼굴은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

화물칸에 숨어서 국경을 통과했는데 주코프가 연락을 받고 갔을 때는 거의 의식을 잃고 있었다는군요.

그레고리는 힐끗 송길수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송길수를 자꾸 찾다가 지금은 잠이 들었다고 합니다.

헛기침을 한 송길수가 그의 시선을 피하자 이한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김상철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현채옥이 관계된 것 같지는 않군.

그렇습니다, 보스. 경비대는 현채옥과 북한 측에 혐의를 두고 있습니다만.

그레고리가 말하자 이한이 김상철을 향해 돌아앉았다.

형님.

그의 시선을 받은 김상철이 꺼칠한 얼굴을 들었다

난 근대리아로 간다. 우선 이한과 둘이서.

이한은 당연한 말이라는 듯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었으나 그레고리와 송길수는 긴장한 표정이다.

이젠 나에게 근대리아는 인연 내세울 것도, 기반도 없는 땅이야. 나는 다시 홀가분하게 들어가 가차 없이 일을 할 것이다. 미련이 없으니 목숨 아까울 것도 부담 느낄 것도 없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그들은 방을 나가는 그를 향해 입을 열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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