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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도시 2-2

5. 두 여인

어젯밤 폭음을 한 터라 천하일미가 입 안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썼을 것인데 맛없기로 소문이 난 경찰서 구내식당의 장국이다. 백선규는 세 숟가락쯤 장국을 떠 넣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점심때였으나 식당은 한산했다. 끝발 좋은 놈들은 모두 밖으로 나갔고 형사계 직원 몇 명이 바쁜 듯 백반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플라스틱 컵에 담긴 생수를 한 모금씩 마시며 앉아 있던 백선규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1시였으니 두 시간쯤 시간이 있다. 그는 경찰서 로터리의 사우나에 갔다가 회사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니, 백기자, 여기서 먹어?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수사과의 김반장이다. 단정한 양복 차림에 금테 안경을 끼고 있어서 인상이 은행원이나 회사의 중역 같았지만 끈질기고 독한 수사관이었다. 그러나 백선규와는 제법 말이 통했고 술좌석도 몇 번 같이 한 적이 있다.

이런 세상에, 점심 사주는 간부 놈들도 없단 말이야? 쯧쯧.

앞자리에 앉은 김반장은 박카스 한 병을 시켜 마셨다.

난 요즘 장이 안 좋아서 점심을 거르기로 했어.

점심 거르고 저녁에 술 마시면 장이 낫는답디까?

이거 왜 이래? 건수 없어서 심사가 뒤틀린 거야?

김반장이 손끝으로 안경을 치켜올렸다.

, 내가 건수 하나 주지, 조금 전에 고발장 하나가 접수되었는데 3주 진단서가 첨부된 폭행 사건이야.

그런데 피해자가 그랜드 여행사 사장이고 가해자가 근대그룹 사원이야. 어때? 건수 되었어?

물컵을 내려놓은 백선규가 바짝 다가앉았다. 흐리멍텅했던 두 눈에 초점이 반듯하게 잡혀 있었다.

조금 전에 접수되었다면 오후에 잡으러 갈 거요?

글쎄, 두고 봐야지.

앗따, 이왕 건수 주려면 반나절만 나한테 시간을 주쇼. 내일 아침으로 밀고.

그러자 김 반장이 빙글 웃었다.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이야. 그것만 잊지 말고 잘해 봐.

강미현이 대한일보 사회부 기자 백선규가 알려준 사건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였다. 근대기획은 사업상 각 언론사 기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백선규도 그중 하나였던 것이다.

연간 몇천 억에 이르는 근대의 광고 예산이 근대기획을 통해 배분되므로 광고비로 수익을 올리는 언론사들이 상부상조해주는 것은 당연했다. 백선규의 전화를 받은 홍보실의 한대리가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백기자가 손을 써서 오늘까지는 사건을 덮어둘 수 있답니다. 하지만 내일은 장담할 수 없다는데요.

그룹 비서실의 대리라고 했어요?

강미현이 묻자 한대리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30대 초반으로 강미현보다 나이가 7, 8년 연상이었지만 언제나 예의 바르게 처신하고 있었다.

, 그런데 알아보니까 작년 12월에 입사한 신입입니다. 이번에 시베리아에 갔다가 특진한 개척단 소속입니다.

아직 비서실에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협박을 했다고 해요? 구타하면서?

그랬다는군요. 그랜드 여행사 사장의 약혼자하고 아는 사이였답니다. 그래서 그들이 호텔 방에서 나오는 것을 밀어 넣고 마구 때렸다는 겁니다. 남자가 3, 여자가 2주 진단이 나왔다는데.

「………」

이대로 두면 구속감입니다, 과장님. 더군다나 그랜드 여행사는 국내 굴지의 여행사이고 집안 재산이 많습니다. 돈으로 합의 보는 것도 어렵겠고.

강미현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내가 비서실에 알리든지 해서 처리하겠어요. 한대리는 백기자한테 고소장 카피를 팩스로 받아보도록 하세요. 사례하겠다고,

한대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강미현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후 330분이 되어 있었다.

430분 정각에 김상철은 본사 빌딩 옆에 세워진 그룹 홍보관의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그룹의 각종 생산품이 전시되어있는 초대형 전시장이다. 그는 외국인들에게 유창한 영어로 전시물을 소개해주고 있는 여직원에게로 다가갔다.

비서실의 김대리인데, 근대기획에서 날 기다리는 사람이‥‥‥」

5번 상담실입니다.

낮게 대답한 그녀가 외국인에게로 몸을 돌렸다. 5번 상담실은 안쪽에 있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방 안에 설치된 전시물 TV를 보고 있던 강미현이 머리를 들었다.

비서실 김대리세요?

, 그럼 그쪽은 근대기획에서 오신 ‥‥」

한대리 대신으로 제가 왔어요, 전 홍보실에 근무하는 미스 박입니다.

그들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유리창 너머로 근대그룹 본관의 거대한 빌딩이 보였다. 강미현이 입을 열었다.

아까 잠깐 말씀드렸는데, 그 폭행 사건, 내일 오전에는 경찰이 수사를 시작할 거예요. 그렇게·되면 당장에 구속이 됩니다.

「………」

우리가 손을 써서 고소장 카피를 받았어요. 확인해 보세요.

강미현이 앞에 놓인 팩스 용지를 그에게로 밀어주었다. 김상철이 그것을 읽는 동안 상담실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충 맞는데.

죽인다고 협박한 것도 사실인가요?

그랬어요.

강미현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런다고 해결될 일로 보였나요? 남녀관계가 주먹으로, 더욱이 협박으로.

「………」

제가 이런 말 한다고 고깝게 생각하지 마세요. 근대기획은 근대그룹의 언론관계도 책임지고 있는 회사니까, 김대리 때문에 회사의 명예가 깎일 수도 있어요.

미스 박이라고 했나요?

그래요.

날 보자고 했던 건 사정을 알아보려고 했던 것, 맞지요?

그래요.

그럼 알아보셨으니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강미현이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김대리가 시베리아로 곧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상황을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우리는 혹시 김대리가 항변할 내용이 있나 하고 기대했는데, 이제는 방법이 없어요, 비서실장께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리는 수밖에.

경찰이 내일 아침에 김대리한테 갈 테니까요.

미스 박, 당신의 말하는 태도가 아까부터 거슬리는데.

김상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령 고소장 내용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남녀관계가 어쩌구 하는 것도 가소롭고, 회사의 명예가 어쩌구 하는 것도 우스웠어.

강미현이 숨을 죽였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 김상철이 턱으로 고소장 카피를 가리켰다.

저 여자는 내 유일한 친구의 여자였어. 곧 결혼할 여자였지. 그런데 내 친구를 배신한 거요, 저렇게.

「………」

호텔 방에서 나오는 걸 도로 잡아넣고 두들겨 패고. 그래, 협박을 했어. 죽이겠다고, 물론 두드리고 협박한다고 돌아올 년이 아니지,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될 것 같았어. 내 친구를 대신해서라도.

미스 박의 전화를 받고 여기 오기 전에 내가 조처를 했으니까 내일 경찰이 날 잡으러 오지는 않을 거요.

화해했단 말인가요? 저쪽이 취하한다고 합의를 했어요?

아마 그럴 거요, 그럴 가능성이 많아요.

그것이 확실하다면 비서실에 보고하는 건 늦출 수가 있어요. 물론 내일 경찰서에 확인을 해보겠지만.

나를 봐주는 거요?

아니, 고소가 취하되면 문제가 될 것이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지요,

바쁘실 텐데 신경 쓰게 해드려서 미안합니다.

아니, 회사 일이니까요, 그런데 친구와의 우정이 꽤 두터운 모양이네요.

이제 강미현의 목소리도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 친구분은 이 일을 알고 있어요?

안다면 그놈은 수치심으로 약을 먹을지도 모릅니다.

「………」

나는 일에 억눌려 있다가 친구가 당하는 걸 보면 그것이 함께 폭발하는 모양이오. 미스 박은 잘 모르겠지만.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강미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말 맺음이나 인상이 산뜻한 여자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미스 박.

저도 반가웠어요.

악수를 나눈 김상철이 먼저 방을 나갔고 강미현은 테이블 위를 정리했다.

오후 5시가 넘어 있었다. 입원실에 들어선 사내들 중 나이가 적어 보이는 사내가 홍만규의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잠깐 자리를 피해주시겠습니까? 홍사장과 따로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 그럽니다.

경찰에서 오셨어요?

어머니는 불안한 표정이었다.

, 조사할 것이 남아 있어서.

어머니, 잠깐만 나가 계세요.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킨 홍만규가 말하자 어머니는 방을 나갔다. 사내들은 둘 다 단정한 양복 차림이었다. 의자를 당겨 침대가에 앉은 그들 중 나이 들어 보이는 사내가 호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우린 경찰이 아닙니다. 안기부 직원이오. 난 오명환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입니까?

홍만규가 다소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녁 8시가 다 된 이 시간에 안기부 과장이 왜 찾아왔을까. 이 사건이 안기부 과장이 나설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닐 텐데.

물론 이번 사건 때문이지요, 고소 사건.

오명환이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많이 다치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아래턱을 온통 붕대로 감고 있어서 말소리도 어눌하게 들리고 있다. 그의 턱을 살펴본 오명환이 머리를 끄덕였다.

여기 오기 전에 담당 의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엑스레이를 가지고 장난을 쳤더군요. 턱뼈에 금이 간 것도 아닌데 3주 진단서를 떼었단 말이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홍만규가 눈을 치켜떴다.

병원 진단서가 가짜란 말이요?

그러자 오명환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홍사장, 당신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깨달으셔야겠는데.

그는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홍만규의 얼굴을 향해 연기를 뿜었다.

당신은 진단서를 조작해서 공갈을 치고 있는 거야. 말을 못 알아들었어?

이제 오명환의 말투가 강경해졌다.

김상철인가 그 친구가 우리 안기부에 당신을 고발해왔어. 정치권을 움직인 모양인지, 우리도 윗사람의 지시를 받고 이러는 거야. 그래서 조사해 보니까 오히려 당신이 걸려들게 되겠어.

「………」

담당 의사 이야기는 당신이 3주쯤 떼어 달라고 했다는데, 그리고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도 2주 진단서를 달라고 했고.

돈을 백만 원 받았다고 자백하더구만. 시인서도 받아놓았단 말이야.

입맛을 다신 오명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아침 일찍 당신 부친과 함께 안기부 조사실로 와줘야겠어. 이곳 병원장하고 담당 의사도 같이 올 거야.

그는 손을 뻗어 홍만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침 여덟 시야, 물론 강남경찰서의 담당 수사관도 오라고 했으니까 당신과 병원, 그리고 경찰과의 공모가 있었는지 어쩐지를 알 수 있겠지.

아니, 우리 아버님은 왜.

홍만규가 겨우 입을 열어 묻자 오명환이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 우리도 모르겠어. 진정이 함께 들어 온 모양이야.

 

저녁 식사가 끝나갈 무렵 강회장이 강용식에게 말했다.

어제 안기부장하고 안보수석 이렇게 셋이서 점심을 했는데 하바로프스크에 북한 공작원이 부쩍 늘었다고 권부장이 그러더구나, 지난번엔 소탕당하다시피 했지만 원체 기반이 굳은 데여서 러시아 정부도 이제는 방관하고 있다는 거다.

임차지가 눈에 가시일 테니까요. 끝까지 방해 공작을 할 겁니다.

수저를 내려놓은 강용식이 말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지요. 아버님한테 한 짓을 보십시오,

권부장은 은근히 개척단 조직에 간섭하려는 눈치를 보였어. 그런 이유를 대고 말이야.

유전무가 거절한 건 잘한 일입니다. 처음부터 안기부가 손을 대게 했다가는 조직관리가 안 됩니다. 러시아 문제도 있고.

식탁에 둘러앉은 다른 사람들은 윗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자코 식사를 했다. 강회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협조 안 할라구? 그래서 서두르지 말라고 했다.

개척단 경비는 그, 김대리인가 하는 젊은 친구한테 맡겼다지요.

그래, 유장석이 하고 이남호까지 그놈을 신임하고 있어서.

아직 신입인데, 나이도 어리고. 큰일을 맡기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그 일에는 나이가 필요 없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까.

그놈 애비가 작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세금 도둑이라는 이야기 들었느냐?

대충 들었습니다.

정상적인 근무는 할 수 없는 놈이야. 본인도 그것을 잘 알고. 내가 특채한 이유도 잘 알고 있어, 그놈은. 목숨을 걸고 일할 것이다. 그놈한테는 그곳이 기회의 땅이니까.

강미현은 잠자코 죽을 떠 입에 넣었다. 김상철에 대한 화제가 저녁 식탁에서 나누어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 내용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강용식이 문득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미현이, , 아까 개척단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지?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물론 강회장까지 강미현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강미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머리를 저었다.

아녜요, 아무것도. 그냥 그쪽을 배경으로 홍보물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는데.

그것 괜찮을 거다.

대뜸 강회장이 나섰으므로 놀란 강미현이 숨을 멈추었다.

끝없는 벌판, 물론 눈에 덮였지만, 그런 곳을 보여주면 우리 근대직원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강회장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대통령이 시베리아에 가고 싶다고 했어. 다른 건 몰라도 그런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돌아가는 사람이지, 시베리아 대륙에 선 당신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이고 싶었던 거야. 미안한 일이지만 그 양반 생색내게 해줄 수는 없어.

본래 김상철의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다가 말을 바꾼 참이라 강미현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준비된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이어를 엘리베이터까지 전송하고 돌아온 그들은 상담실로 돌아왔다. 일찍 시작한 상담이어서 아직 시간은 11시 전이었다.

서류는 오늘 중으로 만들어 놓도록 해. 내일 아침에 계약할 테니까.

테이블 위를 정리하던 강형문이 말하자 안인석이 허리를 폈다.

오후에 끝내놓겠습니다.

계약금액이 모두 얼마지?

5백만 달러 가깝게 됩니다.

전에는 백만 달러 실적만 올려도 파티를 했었는데, 그것이 불과 5년 전이야.

테이블 정리를 마친 그들은 다소 느긋한 기분이 되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방금 상담을 마친 바이어는 스웨덴의 도매상으로 작년 실적이 4백만 달러가 조금 넘었다. 작년과 비교하면 20%가 넘는 성장이었지만 그것은 회사의 기준 성장목표인 40%에는 미만인 것이다. 목표는 끊임없이 상향 조정되었고 그것은 항상 최대치를 기준으로 한다.

강형문이 입을 열었다.

오사카 지사에는 박대리 조의 미스터 리와 함대리 조의 미스터 홍이 가기로 되었어. 그 친구들은 자원했다는군.

「………」

나는 도쿄에 1년 있어 보았지만 그땐 괜찮았어. 지금은 어쩐지 모르지만.

고마쓰 지사에는 누구 결정되었나요?

글쎄,

그러면서 강형문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이 친구야, 그걸 오픈시키면 되겠어? 당장에 문제가 될 텐데,

그렇군요. 제가 깜박 잊었습니다.

아직 경계심이 다 가신 건 아니었지만 이제 안인석의 태도도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강형문은 지난 일을 새까맣게 잊은 것처럼 그를 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꾸민 것 같지도 않은 것이다.

이봐, 안인석 씨, 이건 우리 둘만의 이야긴데,

강형문이 테이블 위로 두 팔굽을 짚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내가 채상무님한테 불려갔다 온 건 알고 있지?

채상무님 말씀입니까?

그래.

모르고 있었는데요.

영업부를 총괄하고 있는 채동석 상무는 근대전자의 창립 공신이었다. 그가 총회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중역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직원은 없다. 어쨌든 강대리가 채상무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사건이었다. 그가 대리급 조장을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데요?

안인석이 묻자 강형문이 씨익 웃었다.

이 사람아, 난 불려갔다 와서 정말 부끄러워 혼났어. 그래서 과장한테도 아무 소리 안 했단 말이야.

「………」

딱 몇 마디만 하시더군 조직 일에 상관해서 미안한데 안인석이를 잘 부탁한다구.

「………」

에이, 그때 일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나. 자리에 돌아와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고.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대리님.

내 말 안 끝났어.

강형문이 말을 이었다.

채상무님 말씀이 있어서 내가 변했다고 생각해도 할 수 없어. 하지만 그 이후로 나도 깨우친 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털어놓는 거야. 그리고 이 이야기는 앞으로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 거야, 누구한테도. 알겠나.

잠시 강형문을 바라보던 안인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됐어.

강형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젠 조금 후련한 것 같구만.

 

점심시간이 되어서 사무실을 마악 나서는 김상철을 여직원이 불렀다.

김대리님, 전화 왔는데요.

사무실로 들어선 김상철이 수화기를 귀에 대었다.

김상철입니다.

, 기획 홍보실의 미스 박이에요.

아아.

저쪽에서 고소를 취하했더군요. 조금 전에 알아보니까.

그렇습니까.

어쨌든 다행이네요. 일이 잘 끝나서.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술 한잔 사실래요? 오늘 저녁에 어때요? 퇴근 후에.

좋습니다. 한잔합시다.

전화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고태성이 다가왔다.

대리님, 이건 제 추측입니다만 휴가 후에 서너 명의 지원 취소자가 생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하의 구내식당으로 들어섰다. 식당 안은 수백 명의 직원들로 들끓고 있었는데 모두 시베리아로 파견될 사람들이다. 길게 늘어선 줄 끝에 서자 고태성이 소리를 죽여 다시 말했다.

물론 원 부서로 복귀를 하면 불이익이야 조금 받겠지만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할 수 없는 일이오.

식당 안의 분위기가 밝은 것은 내일부터 모두 사흘간의 휴가를 가게 되기 때문이다. 개척단의 근무 기간은 일 년을 기준으로 본인의 의사에 따라 연장할 수 있었지만 휴가는 6개월에 15일이다. 따라서 6개월간 가족들과 떨어지게 될 직원들에게 출발 전 3일간의 휴가는 귀중한 것이었다.

 

3일간 무얼 하실 계획이세요?

타운 호텔의 라운지 안이다. 칵테일 잔을 든 강미현이 의자에 등을 기댄 느긋한 자세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저녁 830분이 되어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저녁 생각이 없었으므로 라운지에 그대로 앉아 술을 마시기로 한 것이다.

글쎄, 우선 부모님을 뵈어야겠고.

김상철이 힐끗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별다른 일은 없어요, 그밖에는.

시베리아 이야기 좀 해주세요.

홍보용 기사로 쓸 겁니까?

오프 더 레코드로 약속할게요.

대답 대신 김상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른 시간이어서 라운지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타운 호텔은 시내 복판에 있는 일급 호텔로 프레스센터가 옆에 있어서 언론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양주를 반병쯤 마시자 온몸에 알맞게 취기가 오른 김상철은 눈과 추위와 바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툰드라에서 보았던 순록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녀가 말했다.

지원자 중 10%가 돌아갔다면서요?

그건 누구한테서 들었습니까?

그룹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김상철 씨는 그곳에 계속 계실 건가요?

아마, 그럴 겁니다.

회사가 김상철 씨를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

했지요.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니까.

무슨 말예요?

시베리아가 내 체질에 맞다는 말입니다.

박미진 씨는 일이 마음에 듭니까?

그래요, 마음에 들어요.

전공도 그쪽이요?

강미현이 머리를 끄덕이자 김상철이 잔에 남은 위스키를 삼켰다.

입사한 지 몇 년 됐지요?

2.

2년쯤 더 있어야 대리 달겠구만.

「………」

입사 4개월에 대리 진급한 놈은 회사 역사상 없을 거요. 그렇지, 회장의 혈육은 빼놓고.

두고 봐요. 난 올해 안에 과장 진급을 할 테니까. 물론 그때까지 살아 있을 거요.

병을 기울여 술을 따른 김상철이 잔을 들었다.

난 목숨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머지 인생까지 걸고 있는 상황이라 쉽게 죽을 수가 없거든.

술 더 하실래요?

강미현이 빈 위스키병을 눈으로 가리키자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아니, 이젠 그만. 약속이 있어서.

이 시간에 말예요?

9시가 넘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강미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이번일 고맙습니다. 날 믿고 기다려 주셔서.

아니, ‥‥‥」

강미현이 내민 손을 그가 가볍게 흔들었다.

솔직히 신경이 조금 쓰였어요. 혹시 그대로 보고하지나 않나 해서.

 

상철 씨.

나무라는 듯한 박미정의 목소리에 김상철이 눈을 떴다. 어린이 놀이터의 나무 벤치에 앉아 졸고 있었던 것이다. 1030분이 넘어 있어서 아파트 단지 안은 통행인이 적었고 놀이터에는 그들 둘뿐이었다.

미안합니다. 술 한잔하고 집에 들어간다는 것이.

박미정이 그의 옆에 앉았다. 금방 전화를 받고 나온 참이다. 스웨터와 바지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술 많이 드셨어요?

박미정에게서 엷은 비누 향이 섞인 살냄새가 맡아졌다.

조금. 빈속에 마셔서.

허리를 편 김상철이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퇴근 무렵에 전화했더니 일찍 나갔다고 하던데.

안인석 씨가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요.

안인석 씨가 찾던데요. 아마 그 일 때문인 것 같았어요.

그 일이라니?

오늘 강대리가 채상무하고 아는 사이냐고 묻더래요. 채상무가 잘 부탁한다고 했다고.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하더군요. 상철 씨한테 물어보고 싶어 해요.

내가 뭘 아나?

저도 그렇게 말했어요. 아마 안인석 씨도 모르는 인과관계가 있는 모양이라고.

서늘한 밤바람이 놀이터를 휩쓸고 지나가자 늘어져 있던 그네가 흔들거렸다. 박미정이 어깨를 움츠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늦었어요.

그러자 김상철이 팔을 들어 박미정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상반신이 기울어진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든 김상철이 입술을 댔다. 박미정의 입술에서 상큼한 과일 맛이 났고 부드러운 숨결에서는 깊은 살냄새가 맡아졌다. 두 팔로 김상철의 목을 감아 안은 그녀는 이제 눈을 감고 있었다. 김상철은 확인하듯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열었다. 물기가 가득 찬 입 안은 뜨거웠다. 한없이 연하면서도 탄력이 있는 그녀의 혀가 매끄럽게 입 안으로 흡인되자 김상철의 온몸에 전류가 흘러갔다. 밤바람에 앞쪽의 그네가 다시 흔들거렸다.

 

본관 빌딩의 아래층 로비에 서 있던 안인석이 서둘러 현관으로 들어서는 김상철을 향해 손을 들었다.

여기다, 여기.

토요일의 점심시간이어서 로비에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은 구석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너 어제 나 찾았다면서?

그래, 박미정이한테서 들었구나.

안인석이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 혹시.

미정이한테 들었는데 넌 신경쇠약인 것 같아. 그러다간 병원 가겠어.

, 나는 도무지‥‥」

이 새끼야, 내가 무슨 끝발로 너희 상무를 움직인단 말이냐? 비서실 중역들이 얼마나 철저한지 넌 모른다.

「………」

아마 너희 과장이나 아니면 다른 간부들한테서 네 이야기를 듣고 강대리한테 주의를 준 것 일거야. 내가 미정이한테 그 말 듣고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랬을 확률이 제일 커.

하긴 나도 그런 생각은 했는데.

그건 그렇고, 유미는 떠났어?

, 어제 오후에 떠났더라.

김상철이 잠자코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한 달 예정인 모양이야.

떠나기 전에 통화도 못 했단 말이냐?

, 그만해, 이젠.

안인석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까짓 기집애한테 신경 쓸 시간 없다.

하긴 그래.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그의 어깨를 세게 쳤다.

우선 회사 일이 잘 풀렸으니까 됐고, 여자는 2차다. 천천히 다시 시작해 봐.

넌 휴가라면서?

안인석이 말머리를 바꾸었다.

나 만나려고 일부러 온 거냐?

그래, 네 오해도 풀어줄 겸 해서.

시계를 내려다본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내일까지 조용한 곳에서 쉬었다가 올 테다.

어딜 가는데?

따라 일어선 안인석이 묻자 김상철이 빙긋 웃었다.

바닷가,

 

짙은 어둠에 덮여 있어서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눈앞은 그저 검은 공간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비린내와 소금기가 섞인 바다 냄새가 맡아졌고 방파제를 거칠게 때리며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귀를 울렸다. 바다에서 곧바로 부딪쳐오는 바람에는 습기가 배어져 있다. 베란다에 나온 그들은 플라스틱 의자를 나란히 놓고는 바다를 향해 앉았다. 속초의 바닷가에 세워진 콘도에 도착한 것은 저녁 8, 저녁을 먹고 난 지금은 밤 10시가 되어 있었다.

김상철이 들고 있던 캔맥주를 몇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민희가 안정이 되어 보여서 마음이 놓여.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그놈은 지금 남자친구를 사귀는 모양이야.

그가 밝은 얼굴로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그 자식, 오빠보다 제 남자를 더 생각하는 것 같아서 조금 서운하기도 하고.

다행이네요, 어쨌든.

박미정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홀가분하게 떠나게 되어서.

제가 가끔 민희 만나볼게요.

그러지 않아도 돼. 인석이도 자주 민희를 찾아주었던 모양인데.

김상철이 건네준 캔맥주를 받아들고 박미정이 두어 모금을 마셨다. 바닷바람이 간이 탁자 위에 놓인 과자봉지를 밑으로 떨어뜨렸다.

다 제각기 살기 마련인 모양이야, 잃고 만나고 그러면서.

김상철이 팔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내 미련이야, 미정 씨는. 희망이기도 하고.

어깨 위에 놓인 그의 손을 끌어 뺨에 댄 박미정이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구태여 말을 만들어 하지 않아도 그는 이해할 것이었고 또한 몇 마디의 말로 그것을 표현하기도 싫었으므로 그녀는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바람이 세졌다. 방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서로의 옷을 벗겼다. 김상철은 서두르지 않았고 불을 환히 켠 방 안이었지만 박미정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알몸이 된 박미정을 안아 든 김상철이 침대 위에 그녀를 눕혔다. 반듯이 누운 그녀는 눈을 감았고 곧 팔을 뻗어 그의 상반신을 끌어안았다.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박미정은 뜨거운 숨결을 뱉으며 자신의 온몸에 부딪혀오는 김상철의 입술과 혀를 받아들였다. 온몸이 꿈틀거렸고 하체의 깊은 곳에서는 어느덧 체액이 솟아 흘렀다. 갑자기 온갖 감정의 뭉쳐진 덩어리가 가슴을 쳤으므로 박미정은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고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배어져 나온다. 소중한 듯이 부드럽게 그러나 때로는 거칠게 자신의 몸을 입술과 혀로 부딪혀오던 김상철이 이윽고 상반신을 들어 올렸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시선이라 그의 영상은 흐리다. 조바심이 난 그녀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을 때였다· 박미정은 하반신을 꿰뚫는 듯한 뜨거운 통증에 입을 벌렸다. 그러자 그것은 곧 반복되며 증폭되는 쾌감으로 바뀌어졌다. 그의 동작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박미정은 허리를 들어 올리며 신음소리를 뱉아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던 열락의 끝이 다가왔다. 온몸이 오그라질 것 같은 충격으로 그녀는 한껏 턱을 뒤로 젖혔다. 돌처럼 굳어진 자신의 몸은 한 치의 틈도 없이 그에게 밀착되어 있었고 세포 하나하나가 곤두서서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다. 이윽고 그녀는 뜨거운 용암이 자신의 하체 깊숙한 곳에서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6개월에 한 번씩 휴가가 있으니까요. 올해 말쯤 찾아뵐게요, 아버지.

김상철의 말에 아버지가 머리를 끄덕였다. 출발일이 내일로 다가왔으므로 교도소에 면회를 온 것이다.

민희한테 전세 보증금하고 제가 회사에서 받은 돈을 모두 주었어요. 저는 그곳에서 돈 쓸 데가 없으니까 월급도 민희 앞으로 보내도록 했어요, 아버지.

잘했구나.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버지가 말했다.

몸조심하거라.

아버지, 지낼 만하세요?

그럼, 지낼 만해. 요즘은 책을 많이 읽는다. 요령이 생겼어. 시간 보내는 요령 말이다.

, 네 어머니 산소는 다녀왔니?

, 아버지. 산지기 아저씨한테 부탁도 드려 놓았어요.

옆자리에서는 면회 온 여자가 떠들썩하게 소리를 지르며 우는 바람에 잠시 말이 끊겼다. 여자는 수인이 된 남편에게 신세 한탄을 했고 남편도 울상이다. 교도관이 다가가 여자를 진정시키자 다시 면회실은 가라앉은 분위기가 되었다.

아버지, 나가시면 뭘 하실 생각이세요?

김상철이 묻자 김영환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건 왜 묻느냐?

그저 알고 싶어서요.

시골에 가서 가축이나 기르려고 한다. 돼지도 좋고, 닭도 괜찮지. 목장은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도시 생활은 안 하실 건가요?

글쎄, 5년 후에는 내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가 없다. 선배들 말을 들으면 시간이 지나면 자꾸 바뀐다고 하니까.

「………」

지금 생각은 그렇단 말이다. 그러니 그건 그때 가서 봐야겠지.

김영환이 얼굴을 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집안을 거덜내고 들어온 놈이다, 나는. 남아 있는 너희들 두 남매가 잘되기나 바랄 작정이야. 그 이상은 솔직히 염치가 없다, 너희들한테.

기운을 내셔야 해요, 아버지.

오냐, 너희들이 나 때문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하마. 걱정시키지 않을 게다.

가축 기르실 연구도 해보세요.

그러마.

목장도 가능할 텐데요.

그런 걱정 그만하고 몸이나 조심하거라.

김영환이 말을 바꾸었다.

애비를 생각해서라도. 너에게 무슨 일 있으면 나도 더 이상 안 산다. 아마 민희도.

 

출발하는 날 아침 9.

전세 비행기는 낮 12시에 출발할 예정이었으므로 연수원 마당에는 이미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휴가를 마치고도 귀소하지 않은 세 명의 대원을 제외하자 출발 인원은 이제 47명이다.

고태성이 장비를 싣고 반수 가량의 인원을 인솔하고 떠난 경비대 사무실은 어수선했다. 남은 인원을 정비하여 30분 후에는 공항으로 출발해야만 한다. 유전무와 이번에 기를 써서 동행하게 된 이대각 이사는 본사에서 직접 공항으로 올 것이었다. 가방을 챙겨 든 김상철은 휴지와 박스가 흩어진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이봐, 박형. 대원들 승차시켜.

연수원의 직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직원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옆에서 여직원이 다가왔다.

대리님, 전화 왔는데요.

그는 서둘러 수화기를 귀에 댔다

김상철입니다.

, 기획 홍보실의 미스 박입니다.

, 안녕하십니까.

지금 출발 준비를 하고 계시겠네요.

마악 공항으로 출발하려는 참입니다.

그러자 저쪽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을 했다.

휴가 잘 보내셨어요?

, 잘 쉬었습니다.

댁으로 전화했더니 아무도 받지 않으시더군요, 어제도.

이모댁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녜요.

김상철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시간은 넉넉했다.

이거 바빠서 인사도 못 드리고 갈 뻔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미스 박.

다시 뵙게 되기를 바라겠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상철이 옆모습을 보이고 서 있는 여직원에게 말했다.

인사를 하려면 한이 없어. 이것으로 사무실 전화는 끝이야.

안녕히 가세요, 대리님.

다시 보게 되기를 바라겠어.

강미현이 했던 말을 그가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여직원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저두요, 대리님 .

공항에는 이남호 실장이 배웅차 나와 있었고 그의 뒤쪽에 서 있는 것은 박미정이다. 출국장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이남호가 김대리에게로 다가와 섰다.

이봐, 김대리. 무리는 하지 마라.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서둘지 말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잘 압니다, 실장님.

자넨 중요한 사람이야, 우리에겐.

그가 내민 손을 잡고 김상철이 몸을 돌리자 박미정이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가시면서 읽으세요.

고맙습니다.

유장석과 이대각의 뒤를 따라 출국장 안으로 들어서던 김상철이 머리를 돌렸다. 배웅 나온 직원들 사이에 선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출국장 안으로 들어서고 길게 늘어선 세관 앞의 대열에 끼어 섰을 때에야 김상철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다보았다. 공항에서 산 듯한 신간 소설이었다. 책장을 펼친 그는 곧 명함판의 사진을 찾아내고는 그것을 손에 꼭 쥐었다. 활짝 웃는 모습의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 사진을 끼워 넣던 그는 뒷면에 적힌 글씨를 보았다.

당신을 사랑해요.

 

 

 

6. 격동하는 대지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한 날 저녁.

서울은 화창한 하늘 아래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어나는 계절이었지만 이곳은 아직 굵은 눈이 무겁게 떨어지는 겨울이다. 저녁이 되자 급격히 기온이 떨어져 영하 20도가 되었으므로 거리에는 행인이 드물었고 차량의 통행도 뜸했다.

레닌 대로의 남쪽, 오케안 어시장 부근의 낡은 빌딩 앞에 검정색 볼가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을 때에는 함박눈이 눈바람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거리와 건물에 덮여 있던 눈들이 바람결에 흩날렸으므로 차에서 내린 김상철이 슈바의 깃을 올리며 장국진을 바라보았다.

어느 집이야?

왼쪽.

그가 눈으로 가리키는 길가의 2층 건물에는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돌계단을 올라 육중한 나무문 앞에 섰다. 장국진이 주먹으로 나무 문을 두드리자 곧 철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사내 두 명이 잠자코 옆으로 비켜섰으므로 그들은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밖에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대리석 바닥은 천장의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반들거리며 빛났고 넓은 홀의 구석구석은 값진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들은 사내 한 명의 안내를 받아 홀 끝 쪽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여어, 미스터 김, 잘 오셨어.

이렇게 말하면서 안쪽의 소파에서 일어서는 것은 하바로프스크의 마피아 보스인 그라노프이다. 그의 앞자리에 앉아 있던 40대쯤의 사내도 따라 일어섰다.

, 이쪽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오신 파벨 씨. 당신네 한이사와 김부장은 본 적이 있지.

파벨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소, 미스터 김.

장국진과도 인사를 나눈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그라노프는 김상철과 전에 박대용의 처리 문제로 만난 적이 있지만 장국진은 처음이다. 보드카를 한 잔씩 권하고 난 그라노프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미스터 김이 우리의 창구 역할을 하게 되었다니 협조가 잘 되기를 바라겠소.

힐끗 파벨에게 시선을 주고 난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오늘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파벨 씨가 온 겁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소.

그러자 파벨이 김상철에게 머리를 돌렸다.

우리 보스는 당신들과 계약을 다시 맺고 싶어 합니다. 지난번에 만든 계약서는 성의 있게 만들어지지 않았소.

성의가 없다니요? 파벨 씨, 그것은 당신과 우리 측 대표가 여러 번 검토해서 만든 것 아닙니까?

임차지에서 유전을 발견했다는 것은 비밀로 하고 말해주지 않았소.

그 사실이 언제까지 감춰질 것 같았소? 보스는 대단히 화를 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에게 사업 내용이나 진행 과정까지 알려줘야 한단 말이요?

그렇소, 그래야만 보호를 받을 수가 있어요.

유전을 발견했다는 것은 축하할 일이지요. 당신들이 뽑아낸 기름은 곧 돈이니까. 엄청난 돈이지요.

아직 얼마나 묻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현장에 있었던 러시아 병사들 이야기를 들으면 검은 기름이 수백 미터나 치솟았다고 했어요. 당신들은 입막음으로 그들에게 거금을 주었고.

유전이 나왔건 금광을 발견했건 우리를 통하지 않으면 사업은커녕 다시는 캐낼 수가 없을 거요.

파벨의 번들거리는 눈이 똑바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들이 오기를 기다렸던 거요. 가서 당신의 보스 미스터 강한테 전해요. 다시 계약을 하자고.

계약조건이 뭡니까?

생산량의 10%, 즉 매출액의 10%. 그것은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외국의 모든 기업들에게 적용되는 기준이오.

「………」

이미 발견된 곳뿐만이 아니라 만일 다른 곳에서도 발견이 되면 그것도 마찬가지요. 우리는 임차지 내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의 10%를 원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필요 없소.

임차지는 하나의 독립된 지역이오. 우리는 러시아 정부와 조약을 맺었습니다. 당신들이 거래하는 기업체들이 아니오.

그러자 파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미스터 김, 그래서 걱정이 되는 거요. 그 거대한 땅을 어떻게 지킬 작정이요? 북한이 당신들을 내버려둘 것 같습니까? 러시아군이 제대로 당신들을 보호해줄 것 같소? 아마 그들에게 쏟아붓는 돈이 우리한테 주는 물보다 많을 거요.

그 반대로, 우리가 방해를 하면 당신들은 일주일도 못 가 러시아에서 사라지게 될 거요, 냉정히 생각해봐요, .

김상철이 장국진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군, 나로서는.

장국진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고하겠소, 파벨 씨.

일주일 내에 계약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시오.

술잔을 든 채로 파벨이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나서 한잔합시다, .

돌아오는 차 안이다.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장국진이 입을 열었다.

유전이 나왔다는 걸 나만 모르고 있었군.

조금 섭섭한 듯한 말투였다

이제야 근대 쪽이 서둘러 계약을 체결하려고 했던 이유를 알겠다.

유전이 나오지 않았어도 했어.

김상철이 그의 말을 자르고는 입맛을 다셨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방법이 없어. 상대는 거대한 조직이야. 러시아를 움직이는 3대 세력은 군대와 관리, 그리고 마피아야.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다가 특히 마피아는 은행이나 국영기업들까지 장악하고 있어.

지난번 극동지역의 마피아인 파리야킨 조직과 맺은 계약은 보호제 명목으로 1년에 백만 달러를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때는 시베리아 임차조약을 맺기 전이었지만 근대 쪽은 그것으로 마피아와의 거래가 끝난 것으로 생각했었던 것이다.

김상철이 장국진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러시아 마피아 조직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도 드물 것이다. · 러 국경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탈북자 체포가 주 임무였던 대외정보국의 해외 공작반 소속이다.

파리야킨의 세력은 어느 정도야?

직할로 거느린 상비 부하만 천 명 정도.

본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고 극동지역의 모든 운송 수단을 장악하고 있지. 파리야킨이 마음만 먹으면 철도파업을 일으켜 시베리아 철도로 운송되는 모든 물품 공급을 중단시킬 수 있어. 그렇게 사흘만 지나면 시베리아 전역, 이르쿠츠크, 노보시비르스크, 옴스크 등 러시아 대부분의 지역이 극심한 타격을 입어. 몇 년 전에는 이틀간 철도파업을 시켜서 이르쿠츠크의 휴지 값이 열 배나 폭등한 적도 있었어.

정부는 무얼 하나?

정부가 무슨 힘이 있어? 철도기관사가 정부 명령을 따를 것 같아? 파업 지시가 나오면 숨어버리는 거야. 만일 정부 측에 끌려서 열차를 운행했다고 하더라도 곧 살해될 테니까.

「………」

마피아와 손을 잡지 않으면 배겨날 기업이 없어. 요즘은 국영기업체도 마피아의 보호를 받는 형편이야.

「………」

군대도 마찬가지지. 마피아에게 정보를 팔거나 제휴해서 무역을 하고, 또는 무기를 팔아먹는 거야.

장국진이 얼굴에 쓴웃음을 띠었다.

더구나 일반 서민들 대부분이 마피아에게는 호의적이야. 그들에게는 해를 끼치는 일이 없으니까. 오히려 젊은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지.

볼가 승용차는 이제 환하게 불을 밝힌 숙소로 들어서고 있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식구는 대강 10여 명이 넘었다. 식사 준비에 가정부 두 명이 동원되는 강회장의 아침 식사 시간이다. 3대가 한집에 살고 있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침 식사 때는 모두 모여서 어른께 인사하고 같이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강회장의 가정교육 제1 조항이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의 식탁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제일 막내여서 강회장의 귀여움을 받는 강미현의 남동생 강성우도 오늘은 조심스럽게 행동했는데 그것은 강회장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식탁에 앉아 있으면서도 손자들의 인사에 눈길도 주지 않았고 입도 열지 않았다. 잠자코 밥과 국에 수저를 놀리면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 식탁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다. 이윽고 참다못한 강용식이 입을 열었다.

아버님, 어디 편찮으세요?

강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아니다.

그림 무슨 문제라도 ‥‥‥」

그러자 강회장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 빌어먹을 마피아 놈들이 매출액의 10%를 내라는 거다.

「………」

그놈들이 우리 땅에서 기름이 나오는 것을 알아냈어.

식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회장이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 이실장하고 상의를 했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어.

언제 마피아가 그런 제의를 했습니까?

그제 밤이야. 유전무가 도착한 날, 만나자고 해서 김상철이가 찾아갔더니 그러더라는 거야.

앞으로 닷새 내에 계약을 맺자고 했다는데 말이야.

마피아가 외국 기업체들에게 보호비를 받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매출액의 10%라니요? 전체 매출액에서 말입니까?

강용식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 머리를 끄덕인 강회장이 입맛을 다셨다.

연간 계약으로 백만 달러를 주기로 했었는데 이놈들이 우리가 러시아 정부와 조약을 맺고 나니까 마음 놓고 협박을 하는 거다.

러시아 정부나 군대를 통해 해결할 수는 없을까요?

여러 경로로 알아도 봤고 상의도 했지만 불가능해.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진다.

10%라니, 이 도적놈들.

강회장이 찌푸린 얼굴로 식탁에 둘러앉은 자손들을 쏘아보았다.

죽 쑤어서 개 준다더니, 딱 그 꼴이 되게 생겼다.

그의 시선이 부딪혀왔으므로 강미현은 머리를 숙였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격분해 있는 것을 처음 보는 것이다.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한 지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숙소 2층의 회의실에 모인 간부들의 표정이 어둡다. 유장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간부들이 단단한 방한복 차림을 한 것은 회의를 마치고 곧장 임차지로 떠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복도를 분주히 오가는 직원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헬기 편으로 떠나는 인원까지 합하면 이제 임차지에는 300명이 넘는 개척단이 활동하게 된다. 유장석이 간부들을 둘러보았다.

회장님이 곧 지시를 내려주시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어. 다시 오는 한이 있더라도 난 임차지로 간다.

파리야킨이 정해준 기간은 이제 나흘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강회장으로부터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다. 아마 매일 이남호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강구하고 있을 것이다. 유장석의 시선이 김상철에게서 멈추었다.

그렇다고 그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야. 김대리가 수시로 접촉하도록 해.

알고 있습니다, 전무님.

솔직히 나는 회장님이 어떤 방법을 쓰실까 그것이 걱정된다.

둘러앉은 간부들 중 몇 명이 머리를 끄덕였을 때 한일만이 머리를 들었다. 그는 하바로프스크에 남게 된 직원들의 책임자였다.

조선족 모집은 예정대로 진행시키겠습니다.

물론이야.

내일부터 신문광고를 통해 조선족 노동자를 모집하기로 했던 것이다. 건설장비와 갖가지 건축 재료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수송되는 중이었고 일부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이제 그것이 열차를 이용하여 하바로프스크로 운반되면 다시 헬기나 트럭을 통해 임차지로 보내지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했고 또 임차지로도 수천 명이 공급되어야 하는 것이다. 회의를 마친 유장석은 직원들과 함께 교외의 헬기장으로 떠났다.

숙소 정문에서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김상철은 아래층의 사무실로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와 함께 일하게 된 직원들은 장국진과 고태성 그리고 현지에서 채용한 조선족 신해복이다. 김상철의 업무는 마피아 관계뿐이 아니다. 회사의 물자수송에 대한 책임도 그의 몫이었다. 임차지 내에서의 경비도 중요했지만 물자가 수송되는 블라디보스토크나 하바로프스크 등에서 방해 공작을 받는다면 건설에 막대한 지장이 온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사흘 후에 건설장비를 실은 배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하게 되어 있어. 그런데 하역하려면 한 달은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그가 신해복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마피아를 통해야 할 것 같다. 그라노프에게 오늘 밤에 만나자고 해,

알았습니다.

20대 후반의 신해복은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으로 김영규 부장의 러시아어 통역자로 채용이 되었다가 이번에 김상철의 팀이 된 것이다.

김상철이 얼굴을 찌푸렸다.

마피아가 안 걸리는 데가 없어.

그자들이 있어서 편리할 때도 많습니다.

개새끼들, 그렇다고 매출액의 10%를 달라는 것은 강도 심보야.

그렇게 말한 것은 고태성이다.

이건 러시아 정부가 책임지고 처리해야 돼,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은 그 자신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둘러보던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상황이 고약하게 되었어. 그리고 그 일의 최선두에 나와 있는 것은 우리야. 유전무님도 그렇게 지시하고 가셨어. 우리가 그들과의 관계를 잇는 끈이라고.

그러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들의 제의를 거부한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이제 선뜻 입을 여는 사람도 없다.

김상철이 아무르 호텔의 라운지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인 12시경이었다. 벽 쪽의 자리에 앉아 있던 동양인 한 명이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김형, 어서 오시오.

그는 안기부 요원 심재택이다. 안기부는 이번에 하바로프스크 주재원을 대폭 증원했는데 그가 책임자였다. 앞자리에 앉은 김상철을 향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김형, 요즘 골치 아프시다며.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이 바닥에 소문이 쫘악 깔려있어요. 파리야킨이 매출액의 10%를 요구했다고 말이오. 임차지에서 유전이 나왔다는 소문도 있던데.

김상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이어서 주위는 손님들로 떠들썩했지만 이쪽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다.

날 만나자고 한 용건이나 들읍시다.

허어, 김형도, 서두르기는.

심재택이 웃는 얼굴로 의자를 당겨 다가앉았다.

김형, 앞으로 자주 만날 텐데 서로 잘해봅시다. 나한테 거부감을 가지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오.

당신이 부를 때마다 내가 나와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그건 김형이 잘 생각하시고 결정을 해야지.

심재택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선 유전이 나온 것이 사실인가부터 말해주시오. 이건 중대한 정보거든.

사실이오.

그러자 심재택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역시 소문이 맞았군. 매장량은 얼마나 됩니까?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았지만 상당한 양이오,

강회장은 파리야킨의 제의를 수락할 것 같습니까?

그건 내가 알 수 없는 일이지.

김형이 그들과의 대화 창구 아니요?

난 시킨 일만 합니다.

심재택이 혀를 찼다.

그럼 그 지시 받은 일이라도 말해주시오.

없어요, 아무것도. 기다리라는 것밖에.

김형 기분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이왕 마음을 먹었으면 협조해 주시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고.

내가 알고 있는 건 다 말했어요.

한동안 김상철을 바라보던 심재택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오늘은 이만합시다. 처음이어서 조금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이건 내 경험으로 말씀드리는 거요.

근대의 임차지에서 유전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이제 하바로프스크 전역에 퍼져 있었다. 그 소문의 진원지는 물론 시추기지에 있던 러시아 병사들이다. 돈 먹은 값을 하느라고 그랬는지 입을 다물고 있던 그들은 조약이 체결되자 경쟁하듯 상대를 가리지 않고 정보를 팔았던 것이다.

인투리스트에 묵고 있던 오성그룹의 최선호가 그것을 놓칠 인물이 아니다. 객실의 의자에 앉은 그가 꺼칠하게 자란 턱수염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엄청난 양의 유전이라는 거야. 아마 마피아뿐만 아니라 러시아 정부 쪽에서도 곧 움직일 것 같아.

그는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한 지 사흘째였다. 앞자리에 앉은 고정문이 머리를 끄덕였다.

러시아 정부는 이미 조약이 체결된 이상 확인하는 이외의 다른 방법을 취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하자원의 생산량은 근대와 반분하기로 이미 계약이 되어 있으니까요.

근대가 그토록 조약을 서두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어.

최선호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기름이 생산되면 근대는 원유 생산에서 정유, 판매까지 독점하게 된다. 한국경제는 그것으로 5%쯤의 성장 효과를 일시에 갖게 될 거야.

「………」

본사에서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 근대의 석유생산이 현실화된다면 근대와의 석유화학 관련 제품의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게 될 테니까.

방 안에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근대가 조약을 체결할 때만 해도 그 성공 가능성에 반신반의하면서도 견제심리를 보이던 오성의 사령탑에서는 이제 대응 태세가 구체적으로 갖춰지고 있는 것이다.

최선호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박대용이 같은 정보원을 써서 북한 쪽과 연결되는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돼.

그렇습니다, 전무님. 박대용을 노출시켜 버린 것은 잘하신 일입니다.

글쎄, 자네는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최선호가 말끝을 흐렸다.

이제는 안기부 쪽과도 협조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안기부 책임자인 심재택이 이곳에 와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다. 정부는 이제 공식적으로 근대의 시베리아 경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심재택이는 지금도 아무르 호텔에 있나?

최선호가 묻자 고정문이 머리를 끄덕였다.

, 근대의 김상철이와 헤어지고는 바로 방으로 올라갔답니다.

근대가 안기부에 꽤 협조적이구만,

김상철이가 그들 담당인 모양입니다.

그놈 애비가 재작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세금 도둑이었지?

, 지금 대전 교도소에 있습니다.

한동안 고정문을 바라보던 최선호가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김상철이 술잔을 내려놓자 그라노프가 빈 잔에 보드카를 채워주었다. 이곳은 그라노프가 운영하는 카페의 2층 응접실 안이다.

, 조선족 모집도, 하역작업도 우리와의 계약만 끝나면 문제 될 것이 없어. 그러니 계약부터 끝내란 말이야.

그라노프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그는 털투성이의 손으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

, 건배나 하지, 우리 사업을 위해서.

그라노프, 그렇다면 계약될 때까지 조선족 모집도 방해하고, 하역작업도 늦춘다는 말이요?

그러자 그라노프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그런 식으로 말하면 싸움이 나겠어.

난 돌려서 하는 말은 질색이오.

김상철이 옆에 앉은 장국진을 바라보았다.

이놈은 실권이 없어. 모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키는 일이야.

한국말이어서 그라노프가 잠자코 그들을 바라보았다. 장국진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쪽에 가도 마찬가지야. 계약이 되기까지는.

오늘 오후에 면접 약속이 되어 있던 150명의 조선족 중 숙소로 찾아온 것은 10여 명뿐이었다. 숙소의 입구 앞쪽 거리에서 마피아들이 조선족들을 위협하여 되돌려 보낸 것이다.

, 내가 정보를 주겠는데.

그라노프가 육중한 상체를 그에게로 숙였다.

시간이 지나면 퍼센트가 올라갈지도 몰라. 예를 들면 15%20%, 그땐 후회해도 소용없어.

「………」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강회장의 승낙을 받아오도록 해. 그 길밖에 없어.

어쨌든 곧 결정이 내려질 거요.

그림 그때까지 이 상태로 기다리는 수밖에.

그라노프가 보드카 병을 쥐고는 다시 웃었다. 밖은 이제 영하 20도의 추위였지만 응접실 안은 페치카의 장작불과 알코올의 열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장국진이 김상철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김대리, 지난번 강회장을 습격한 이금철 대좌가 이곳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

조선족 거주지에 숨어 있다는 거야. 부하들을 데리고.

임차지로 올라가려는 건가?

그건 알 수 없어. 와 있다는 소문만 들었으니까.

엎친 데 덮치는군. 그놈들까지 방해 공작을 한다면.

나쁜 일은 겹치는 법이야,

김상철이 운전석에 앉은 신해복의 어깨를 쳤다.

신형, 이금철의 소문을 들었나?

요즘은 별 소문이 다 떠돕니다, 대리님. 북한 사람들뿐만 아니고 미국 CIA도 깔려 있다고 합니다.

신해복이 핸들을 잡은 채 말했다.

한국 대통령이 온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이금철이 여기서 방해 공작을 한다면 임차지는 며칠 못 가서 건설이고 뭐고 모두 중지해야 될 거야.

찾아보겠습니다. 달러가 필요할 텐데요. 사람들을 시키려면.

달라는 대로 주겠어.

도대체 강회장은 무얼 하고 있는 거야

장국진이 눈썹을 모으고는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계약을 하든지 말든지 하루라도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할 것 아냐?

 

강회장의 시선이 테이블 주위에 앉은 중역들의 얼굴에 한순간씩 멈추었다가 지나갔다. 그동안 회의실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아침 10. 8시에 시작한 회의가 이제 두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이윽고 강회장이 입을 열었다

러시아 정부나 군을 의지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결론이 났다. 그러면 마피아와 절충하는 수밖에 없구만그래.

벌써 나흘째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러시아 정부와 군의 동향, 마피아와의 관계, 그리고 그들을 이용했을 때의 이익과 손해를 검토해온 것이다.

처음 시베리아 임차를 계획했을 때 마피아의 영향력과 그 해결 방법을 검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임차조약을 맺기도 전에 연간 백만 달러의 협조비를 지불하기로 계약했던 것이다.

강회장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좋아, 놈들이 10%를 불렀으니 최악의 경우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하고 가서 절충한다.

그의 시선이 이남호에게서 멈추었다.

이실장, 자네가 가줘야겠어.

, 회장님.

당연한 지시라는 듯 이남호가 대답했다. 그러나 긴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져 있다.

내일 일찍 출발하겠습니다.

파리야킨인가 파리약인가 하는 놈을 직접·만나서 담판을 내. 두 번 다시 다른 소리를 안 한다는 약속을 받고.

, 회장님.

그 계약의 상대는 다름 아닌 마피아 조직이다. 그들은 이제까지 계약한 것은 그것이 설령 구두계약이라고 하더라도 철저히 지킨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지만 이번처럼 제 마음대로 조건을 바꾼다 해도 어디에다 하소연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존재이다. 강회장도 답답한 김에 그렇게 말했으나 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눈썹을 치켜올린 그가 중역들을 노려보았다.

그동안에 우리가 힘을 길러서 놈들을 밀어내 버리는 수밖에 없다. 난 나한테 해코지 한 놈한테는 꼭 빚을 갚는 성격이니까.

회장님, 하한선을 정해주십시오‥‥‥」

이남호가 그의 말을 잘랐다. 회장이 열받기 시작하면 쌍소리도 나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린 회장이 이남호에게 말했다.

하한선이라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근대 밥을 먹는 자가.

적을수록 좋아. 하한선은 제로에서 시작하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유전무는 우리 땅에 들어가 있다니까 구태여 부를 필요 없고, 담판에 필요한 중역들을 여기서 데려가.

, 회장님.

그러자 근대전자의 사장인 이형근이 입을 열었다.

회장님, 어젯밤에 연락을 받았습니다만.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아졌다.

워싱턴의 제 대학 동기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연방정부 하원의원으로 있는 친구인데요. 하원 에너지관리 소위원회 소속입니다. 그 친구가 우리 임차지에서 유전이 발견되었느냐고 묻더군요.

강회장이 잠자코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난 모르는 일이라고 했더니 이미 그쪽으로 정보가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석유 메이저들의 정보원들이 하바로프스크로 몰려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곧 이쪽에서도 난리가 나겠구만.

강회장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대통령이 기름병을 들고 우는 모습이 TV에 나오겠어.

 

유정을 중심으로 건설되는 공사는 우선 저장탱크와 송유관 시설, 그리고 유정의 암반 위에 굵은 파이프를 고정시키는 굴착공사로 나뉘어졌다.

1차 공사는 유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수백 명의 직원들이 눈보라 속에서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수십 대의 트럭과 지반을 고르는 불도저, 흙을 파는 포클레인 등이 일으키는 소음과 진동으로 분지는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자재와 장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하루에 한 차례씩 다섯 대의 헬기가 급한 부품을 날랐지만 무겁고 큰 자재는 육로를 통해서 온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직선거리로 1200여 킬로 떨어진 이곳까지 트럭은 꼬박 열흘이 걸렸는데 개척단이 처음 올 때보다는 일주일 정도 빨라진 셈이다. 우선 도로공사가 아래쪽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기지 북방 10킬로 지점의 벌판에서는 활주로 공사를 하고 있었다.

유장석이 자리 잡고 있는 본부는 유정의 남쪽 3킬로쯤 떨어진 낮은 구릉지대였다. 구릉 위에 세워진 시멘트 브로크로 만든 임시본부에서는 사방이 환히 보인다. 랜드로버 한 대가 눈보라를 뒤로 뿜으며 달려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 위에 미끄러지며 멈춰선 차에서 내린 것은 이대각 이사다. 본부 안으로 들어선 그가 유장석에게로 다가왔다.

조금 전에 코데코 직원의 측정 결과가 나왔습니다, 전무님.

방한모를 벗어 던진 그가 앞자리에 앉았다.

예상 매장량은 8억 배럴입니다. 대단한 양입니다.

대한민국의 3대 정유사의 원유정제 능력은 하루 170만 배럴쯤 되었고 근대그룹 계열인 근대 정유의 하루 능력은 최대 30만 배럴이다. 모두 외국산 원유를 들여다가 정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석유 소비량은 세계 10대 소비국 안에 들어서 1993년 기준으로 보면 하루 160만 배럴로 영국, 캐나다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매장량이 8억 배럴이면 하루 생산량을 10만 배럴로 계산해도 20년이 넘게 생산할 수 있는 양이고 하루 20만 배럴이면 10년이 넘는다. 한국 석유 소비량의 10%10년 동안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좋아. 실장께 보고를 하지.

그러는 유장석의 기색을 살핀 이대각이 물었다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없어. 대신 러시아 정부에서 연락이 왔어. 부총리가 내일 방문하겠다는 거야.

아니, 무슨 일로.

유전 문제겠지. 소문도 소문이지만 위성사진이 이미 수백 장 찍혔을 테니까.

유장석이 엄지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이제는 하루에 세 번씩 위성이 임차지 위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그자들이 오는 건 예상하고 있었던 일 아닙니까?

유전은 본격적인 생산이 되려면 최소한 6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퍼 올리기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저장탱크와 원유의 수송로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이미 가까운 오호츠크 해협과 시베리아 철도까지의 파이프라인 공사 가능성을 조사하려고 두 팀의 조사단이 떠나 있었다

미리 유전을 발견해 놓고 조약을 서둘렀다는 의심은 받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결국은 그자들이 생산량의 반을 가져가게 될 테니까.

생산설비 비용은 모두 우리 부담으로 되어 있으니 놈들은 앉아서 돈을 벌게 되는 겁니다.

유장석이 시계를 올려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실장께 보고할 시간이다. 그쪽도 마피아와의 계약 건 때문에 골치가 아플 텐데 이것으로 기분전환이 될지 모르겠군.

 

이남호에게 전화를 연결시켜 준 박미정이 자료를 정리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의 책상 위에 놓여진 세 대의 전화 중 일반선의 빨간 등이 깜박이고 있었다. 수화기를 귀에 대자 곧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안인석이다.

점심이나 같이 하자구, 내가 살 테니까.

그의 목소리가 밝았으므로 박미정의 기분도 따라서 가벼워졌다. 김상철이 떠난 후로는 만나보지 못했던 것이다.

점심시간에 그들이 들어선 곳은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스테이크 집이었다. 꽤 이름난 집이어서 겨우 자리를 잡고 앉은 박미정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름값이 더해졌는지 가격이 다른 음식점에 비해 두 배가량 비싼데도 빈자리가 없다. 주문을 마치자 안인석이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도 처음엔 이 집에 와서 사람들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어. 도대체 음식 맛이나 알고 온 것일까 하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아?

넌 아니지만 이름난 집이라면 무조건 찾는 사람들이 많거든. 제 입맛에 맞아야 맛있는 건데 말이야.

인석 씬 요즘 어때? 강대리하고는 좀 나아졌어?

분위기가 밝은 김에 박미정이 부담 없이 물었다.

이젠 내가 우리 조의 서류작성을 맡았어. 계약서류뿐만이 아니라 사장한테 올리는 시장동향과 대책 작성도 이 몸이 하신단 말이야.

하긴 안인석 씨는 빈틈이 없는 데다가 문장력도 괜찮았지.

수프가 놓여졌으므로 그들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수프 맛을 보려는 듯 입 안에 넣고 몇 번 입맛을 다시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한번 손발을 맞추니까 호흡도 맞춰가게 되더구만, 솔직히 강대리가 변한 동기를 생각하면 비위가 상하지만 말이야.

인석 씨도 적응을 못 한 잘못이 있었어. 나도 지금 이야기하지만.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강대리도 나름대로 답답했을 거야.

이제는 이해가 돼, 강대리 입장이.

잘 돼서 기뻐.

배가 고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스테이크는 맛이 있었다.

어때? 상철이한테서는 연락이 자주 와?

안인석이 묻자 박미정이 머리를 저었다.

바쁜가 봐.

지금 시베리아로 들어가 있는 거야?

아니, 하바로프스크에.

그 자식은 성공할 거야, 나는 믿어.

그러자 박미정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뭘 믿어?

그 자식의 집념, 패기, 그런 것.

대학 생활을 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그 자식한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지. 물질적인 것이었지만 말이야. 그래서 그땐 이런 감정을 느끼지를 못했는데.

말을 끊은 안인석을 박미정이 빤히 바라보았다.

어떤 감정 말이야?

열등감. 네 말대로 적응 못 하고 쉽게 좌절하는 내 의지, 그런 것.

지금 잘하고 있지 않아?

잘하기는, 기집애도 떨어져 나간 판인데.

나이프를 내려놓은 안인석이 물잔을 쥐었다.

여자란 친구하고 다르겠지, 계산부터 하고 볼 테니까.

나 같은 여자 친구도 있지 않아?

그런가?

떨어져 나갔다니, 어떻게 된 일인데?

LA로 갔어, 한 달 동안 파견근무라나.

그게 왜 ‥‥‥‥」

창피한 일이지만 사람을 시켜서 그쪽을 알아봤더니 회사에 퍼져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더구만. 사장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야.

「………」

사장은 부동산 재벌 2세야. 지난번에 LA에 갔을 때부터 그렇게 되었다는데 상황이 딱 들어맞아.

안인석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하나도 놀랍지도 않아. 주변에서 이런 일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인지 말이야.

주변에 그런 일이 많았어?

박미정이 묻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흔한 일 아니야? 이런 배신은.

 

신해복이 드라마 극장 뒤쪽의 디나모 공원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210분 전이었다. 하늘은 흐렸지만 오랜만에 푸근한 날씨여서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무 벤치는 젊은 남녀와 터줏대감들인 노인그룹에 의해서 거의 점령당해 있었으므로 그는 느린 걸음으로 어린이 공원 쪽을 향해 걸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이후로 눈에 띄게 달라진 것 중의 하나가 젊은이들의 생활양식이다.

그의 앞쪽으로 다가오는 일단의 젊은이들도 진바지에 영문 이니셜이 붙여진 재킷에다 야구 모자를 돌려 쓴 녀석도 있었다. 이들은 말보로 담배를 피우고 랩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러시아판 아메리칸이다. 그들을 스치고 지나자 동양인 여자가 다가왔다. 고급 털코트에 털모자를 쓴 젊은 여자였다. 여자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신해복 씨 맞나요?

다가선 그녀가 말하자 신해복이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한국어를 하는 것이다.

, 그럼, 당신이 ‥‥‥‥」

우리, 저쪽으로 가요.

그들은 공원 끝에 놓여진 빈 벤치에 다가가 앉았다. 길 건너편의 어린이 공원이 바라보이는 위치였다. 여자는 가죽 부츠를 신은 한쪽 다리를 꼬아 앉았다.

북조선 사람을 찾으신다면서요?

머리를 끄덕이며 신해복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먼 친척뻘 되는 아저씨를 통해 이금철의 소재를 알려주면 500달러를 주겠다는 소문을 내달라고 한 것이 어젯밤이다. 하루가 안 되어서 만나자는 사람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나온 것이다.

우선 어떻게 연락을 받고 나오신 건지 그걸 말해주시오.

그가 말하자 여자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신 친척 신동기 씨가 말해주지 않던가요? 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요.

그럼 당신이 장인규 씨?

그래요. 남자 이름 같아서 가끔 그렇게들 착각하는 모양입니다.

장인규가 코트 주머니에서 일제 담배를 꺼내 물고는 금장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런데 이금철 대좌를 찾아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앞쪽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은 그녀가 신해복을 바라보았다. 거무스름한 얼굴의 피부에 윤기가 났고 검은 두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향해 있었다.

그건 나도 모릅니다. 내 상관이 그자를 찾아보라고 해서 돈을 걸어 놓은 것이니까.

마피아의 정보망을 통하면 훨씬 빠르고 쉬울지도 모르는데 그들에게 비밀로 하는 이유도 궁금해요.

계약 문제로 그들에게 뭘 부탁할 형편이 아닙니다.

어차피 계약을 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리고 당신들한테는 북조선이 적이고.

난 러시아 시민이오. 조선족일 뿐이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장인규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럼 우리는 조선족으로 양쪽 입장을 대변하고 있나요?

당신은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난 이 일에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아요. 우리 아저씨에게 이야기한 것도 그런 이유요. 우리가 이 대좌를 찾고 있다는 정보가 아마 아저씨를 통해 그에게 전달되었을 거요.

장인규가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당신은 당신과 아저씨의 목숨을 걸고 장난을 칠 만할 바보는 아닌 것 같네요.

우리 상관은 이대좌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소, 잘은 모르지만.

그건 근대그룹의 뜻이겠지요.

그것도 잘 모릅니다. 윗사람들 일이어서.

이유도 모릅니까?

그것도, 그리고 우린 마피아나 러시아 정부 쪽에 아직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고 있어요. 그건 내가 보장합니다.

장인규가 손끝으로 담배를 튕겨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연락을 드리지요, 선생님.

 

다음날 오전, 이남호가 10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했다. 가라앉아 있던 숙소의 분위기는 그들의 도착으로 갑자기 활기를 띠었다.

오후 3시 정각이 되자 대여섯 대의 검정색 벤츠가 숙소의 현관 앞에 멈춰 서더니 수십 명의 러시아인들이 내렸다. 그들 모두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무리를 지어 현관으로 들어섰는데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인물이 바로 파리야킨이다.

로비에 서 있던 김상철의 눈에 비친 파리야킨은 학자풍의 평범한 사내였다. 선입견 때문인지 늘어진 눈시울 속의 눈빛이 조금 날카롭게 보였지만 조금 벌려진 입술과 창백한 피부는 책에 찌든 50대의 교수를 연상시켰다.

이남호의 안내를 받아 그들 일행이 2층의 회의실로 들어가자 곧 양쪽 수뇌들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아래층 로비에 서 있는 김상철에게 신해복이 다가왔다.

대리님, 연락이 왔습니다. 오후 일곱 시에 아무르강 하류에 있는 선착장에서 만나잡니다.

소곤거리듯 말한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비에는 이쪽의 직원들보다 파리야킨의 경호원 숫자가 더 많았다. 그러나 이쪽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쪽도 혼자 나을 테니 대리님도 혼자 나와 달라고 하는데요.

어떤 선착장이야?

시내에서 5킬로쯤 떨어진 교외에 있습니다. 강변도로를 따라 5킬로쯤 가시면 왼쪽에 선착장이 보입니다.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가 바짝 다가섰다.

혼자 가시겠습니까?

그쪽도 혼자 온다면서.

대리님, 이 일은 한이사님도 알고 계시는 겁니까?

불안한 표정이었다.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아무도 몰라, 우리들 외에는.

 

저녁 7시면 이미 어둠에 덮여진 시간이다. 지프를 운전하여 그가 아무르강 하류의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는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선착장은 어두웠고 인기척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는 잠시 차 안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물선 서너 척이 강가에 매어져 있었지만 폐선인 것 같았다.

전등도 켜있지 않고 문이 반쯤 열려진 사무실을 보면 폐쇄된 선착장인지도 모른다. 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75분이었다. 그 순간 그는 뒤쪽에서 비치는 불빛에 머리를 들었다. 백미러를 올려다보자 승용차 한 대가 그의 차가 세워진 선착장의 앞마당으로 꺾어져 들어오고 있었다. 검정색의 러시아제 볼가 승용차였다. 그의 뒤쪽으로 10미터쯤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선 차에서 곧 코트로 몸을 감싼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이쪽은 전조등의 불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어서 사내의 윤곽만 보일 뿐이다.

김상철이 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곧 사내가 그의 앞에 다가와 섰다.

김상철 씨요?

사내는 살진 얼굴이었고 체격도 컸다. 40대 중반쯤의 나이로 보였는데 김상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당신이 이금철 대좌입니까?

그렇소, 날 보자고 했다면서요.

김상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쪽 도로에 간간이 차량들이 지나갈 뿐 선착장에는 두 대의 차량뿐이다.

용건을 들읍시다.

어깨에 쌓인 눈가루를 털면서 그가 말했다. 볼가 승용차의 엔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 숙소에서 파리야킨과 협상을 하고 있어요. 당신도 잘 아시다시피 계약조건을 결정하려는 것이지요.

아마 곧 결정이 날 겁니다. 몇 퍼센트건 간에.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이금철은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이건 내 혼자 생각이지만 당신들이 우리들이 도와줬으면 해서.

우리를 도와준다면 우리도 당신들에게 협력할 용의가 있습니다.

당신,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금철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날카로웠다.

어처구니가 없군, 우리가 왜?

지금 이 상태로는 당신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와 손을 잡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한편으로는 마피아와 협상을 하면서 말인가?

그런 셈이지요,

그것도 당신 개인 생각으로 말이야?

회사는 아직 당신을 만나는 걸 모릅니다.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오. 하지만 당신이 동의한다면 윗사람의 허락을 받을 자신이 있습니다.

만일 문제가 생기면 회사는 몰랐던 일이라고 할 작정이겠군. 책임을 당신이 뒤집어쓰고 말이야.

당신들한테는 해 될 것이 없어요. 이대좌, 어차피 당신들은 이 상태에서 나아질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가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물벼락을 맞은 기분인데,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올 줄은 몰랐어. 요즘 당신들이 마피아한테 몰리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럼 우리가 얻는 것은 뭐야? 만약 당신들과 협력을 한다면 말이야.

놀랄 만한 성과가 될지 모르지요. 조금만 생각해보시오. 시베리아 임차지에 대해서 말이오.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말해봐요, 김 선생.

이제 이금철은 어깨 위에 쌓인 눈 같은 건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바짝 댔다.

우리에게 어떤 성과가 있다는 거요? 임차지에 대해서.

우린 임차지에 조선족 노동자들을 받아들일 작정이오. 물론 한국에서도 오겠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들과 협상할 여지가 많단 말입니다. 이미 러시아 정부와 임차지 계약이 끝난 이상 당신들이 방해를 한다고 해도 계획대로 진행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러시아 군경과 마피아에 의해 쫓겨 다녀야겠지요. 지금처럼 말입니다. 당신 말대로 현실적으로 방해 공작은 쓸데없는 소모요. 당신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와 타협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내가 돕겠습니다.

당신, 혁명가 기질이 있어.

이금철이 처음으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수다, 김선생.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그리고 회사에서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도.

「………」

그리고 지난번에 박대용이를 처치한 것도 당신이고 우리 아지트를 밀고해서 내 부하들을 몰살시키게 한 장본인이 당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요.

곧 연락을 드리리다.

이금철이 코트 주머니에서 빼낸 손을 내밀었다.

이 정도의 대답을 받았으니 김선생도 윗사람한테 우리 이야기를 해두는 게 나을 거요. 이것이 정말 당신 혼자의 생각이라는 게 난 지금도 믿어지지 않지만 말이오.

 

회의실을 나온 이남호가 복도 끝 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서자 책상 앞에 서 있던 김상철이 머리를 숙였다.

그래, 무슨 일이야?

회의에 지친 그의 얼굴은 10년도 더 넘게 늙어 보였다. 벌써 다섯 시간째 갑론을박을 하고 있었지만 저쪽은 자료와 이론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쪽에서 가져간 통계와 브리핑 자료, 심지어는 비디오테이프를 보려는 성의도 없었다. 이남호를 불러낸 한일만이 따라 들어왔으므로 그들은 소파에 앉았다. 아직 한일만도 내막을 모른다. 김상철이 실장께 급히 전해 드릴 말이 있다고 해서 회의 도중 나오게 한 것이다.

, 조금 전에 제가 북한의 이금철을 만났습니다.

김상철의 첫마디에 지쳐 있던 두 중역도 물벼락을 맞은 듯 정신을 차렸다. 그들에게 김상철은 이금철을 만난 이야기를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중간에 이남호가 되풀이해 묻는 것을 제외하고 김상철의 이야기는 곧 끝이 났다. 이야기를 듣고 난 이남호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러나 시선은 김상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이놈아, 너는 시키지도 않는 일을.

그렇게 입을 열었다가 말을 멈추고는 한일만을 바라보았다.

회의는 내일로 미루는 게 좋겠는데, 그렇지 않아?

그렇습니다, 실장님.

생각에서 깨어난 듯 한일만이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가 직접 파리야킨에게 말해야겠군.

자리에서 일어선 이남호가 김상철을 내려다보았다.

김대리, 넌 꼼짝 말고 여기에 있어.

그들이 방을 나가자 한동안 앞쪽을 바라보던 김상철이 가슴 호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펼치자 박미정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곧 그녀의 목소리와 뜨거운 숨결, 감촉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강회장이 사건을 알게 된 것은 이남호와 통화를 끝낸 30분 후인 930분경이었다. 이남호의 대화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를 활자화하는 작업은 집 안에 설치된 컴퓨터가 수행했지만 그것을 암호 숫자에 맞춰 말을 만드는 작업은 강미현의 몫이다. 러시아는 도청이나 암호해독의 기술로는 세계 제일인데다가 북한과 일본, 한국 정부의 기관들 모두가 이쪽에 안테나를 맞추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쪽은 도청 방지 장치나 암호해독기 등 첨단장비를 쓰지 않기로 했다 기밀 보고를 할 경우에 이남호는 전화의 첫마디에 '저 이남호입니다' 하는 인사를 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말에 암호 번역이 필요하다는 뜻이었고 보통 때에는 자신의 직책을 뒤에 붙였다. 활자화된 대화를 미리 정한 일련번호에 의해서 말을 만들었는데 그 작업을 맡은 것이 이쪽은 강미현이었다.

서재에서 강용식과 마주 앉아 있던 강회장이 내용을 읽는 동안 방 안은 조용했다. 이윽고 내용이 찍힌 종이를 강용식에게 넘겨준 강회장이 강미현을 바라보았다.

너도 읽었지?

, 할아버지.

강회장이 굳어진 표정을 본 강미현이 몸을 굳혔다. 이제까지 한 번도 어리광을 부려본 적이 없는 엄하기만 한 할아버지인 것이다.

그놈,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

혼잣말처럼 강회장이 말했다.

북한군 대좌를 만나 손을 잡자고 제의를 하다니, 잘못하다간 한순간에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

한국에 있는 근대그룹, 내가 내 자식들, 그리고 수십만 명의 직원들과 함께 일으킨 한국 제일의 기업이 한순간에 엎어질 수가 있단 말이다.

내용을 읽은 강용식이 머리를 들었다.

아버님, 이것은.

잠자코 내 말을 들어.

강회장이 눈을 부릅뜨자 강용식은 입을 다물었다.

그놈은 위험한 놈이야. 아주 위험하다.

그의 시선이 부딪혀왔으므로 강미현은 머리를 숙였다.

미현이, 네가 이실장한테 보낼 작문을 써라, 곧 통화를 할 테니까.

, 할아버지.

강미현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노트를 들고는 아버지 옆에 앉았다

협상은 될 수 있는 한 늦출 것.

강회장이 앞쪽의 벽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김상철에게 직원들의 입막음을 철저히 시키도록 할 것, 일이 새어나가면 파멸이다. 그것도 써라.

그렇지, 그놈에게 일이 끝나면 과장 진급을 시키겠다고도 써.

힐끗 강회장을 바라본 강미현이 잠자코 메모를 했다. 강용식이 헛기침을 했다.

아버님, 그러면 그대로 진행시키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

강회장의 말투는 이제 단호해져 있었다.

몸을 내던지고 일을 하면 그런 방법도 만들어지는 법이야. 그놈은 내 가슴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일을 한다. 조선족 대부분이 북한계이고 북한이 주민을 받아들일 땅이란 말이다. 그런데도 북한 놈들에게 협조하라고 나선 놈이 없었어. 이제까지 그 미국 박사들 수백 명이 며칠 동안 머리를 짜고 나서 나온 것이 무엇이냐? 그 빌어먹을 통계자료, 브리핑 자료들뿐이었다.

그래도 그자들은 얼마 전만 해도 아버님을 습격한 무리들입니다.

그래서 그 생각을 못 한 거야. 이제 러시아와 조약은 맺어졌으니 그런 식으로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놈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위험하지 않습니까?

김상철 책임으로 한다. 우리는 모르는 일이고.

강회장의 시선이 강미현에게로 돌려졌다.

그것도 써라. 김상철이가 혼자 생각해낸 일이다. 회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라고 말이다.

물론 북한 쪽은 믿지 않겠지. 그들에게는 이실장이 나설 것이다.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놈이 책임을 질 것이다.

 

 

 

7. 적과의 동침

배가 도착했지만 하역은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관계자 이야기로는 한 달쯤 후에야 순서가 돌아올 것 같다고 하는데요.

수저를 내려놓은 한일만이 이남호에게 말했다. 아침 식사 시간이어서 아래층 식당에는 중역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어제 도착한 미쓰비시의 컨테이너는 오늘 아침부터 하역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한일만이 다시 말하자 중역들의 시선이 모두 이남호에게로·모아졌다.

파리야킨이 우리에게 시위를 하는군.

반찬을 씹으면서 이남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본사에서 데려온 중역 일곱 명 중 넷은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대학교수나 권위 있는 연구소에서 10여 년을 보낸 두뇌들이다. 그리고 셋은 러시아 전문가와 기획, 상담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인 파리야킨은 어떤가. 이쪽 숫자에 맞추려는 듯 간부급 부하들을 수행했지만 모두 한결같이 인상이 거친데다가 체격이 컸다. 그리고 그 전력(前歷)이란, 그가 대충 알아본 바에 의하면 KGB 장교 출신과 군인, 기관차 노조원 등이었다. 파리야킨은 과거가 베일에 싸여 있지만 이르쿠츠크의 경찰 간부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그들은 도무지 대화나 설득이 통하지 않는 상대들인 것이다.

어쨌든 협상은 오늘 오후에 다시 시작합시다.

수저를 내려놓은 이남호가 식탁을 둘러보았다.

저쪽이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끈기 있게 밀고 갑시다.

수저와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날 뿐 식당 안은 조용했다. 파리야킨은 예상외로 완강했던 것이다. 그는 이쪽에서 내미는 자료는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임차지 전역에 대한 마피아의 보호와 보호세로 매출액의 10%를 내라는 것뿐이었다. 러시아에 진출해온 기업들에게서 10%를 받는 것과 임차지에서 산업을 일으키는 근대와의 차이점을 중역들이 열성적으로 설명을 해도 딴전을 피울 뿐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이다.

식사를 마친 이남호는 한일만과 함께 2층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뾰족한 방법이 없어. 회장님 말씀대로 수백 명의 박사가 있으면 뭘 해? 놈들한테 질질 끌려다니기만 하고 말이야.

소파에 앉은 이남호가 입맛을 다셨다.

난 회장님이 김상철이의 방법을 받아들일 줄 예상했었어.

북한 측은 아직 확실한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김상철이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 거기 앉아.

김상철이 앞자리에 앉자 이남호가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이봐, 김대리. 진행시키도록 해.

, 실장님. 그렇지 않아도 낮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연락은 누구를 통해서 오나?

신해복이라고 여기에서 고용한 조선족입니다.

그자는 이 일의 내용을 아나?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때?

제가 이금철을 만났다는 것은 알지만 내용은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적대행위를 중지해 달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믿을까? 그들이.

그건 모르지만 믿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절대로 입을 열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이 일은 내 선에서 끝나는 거야.

문제가 생기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자 이남호가 혀를 찼다.

유장석이도 자네한테 신세를 입었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는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 그따위 건방진 소리는 말아.

만일 당국에서 알면 위험한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해도 북한 쪽이 네 독단으로 진행한다면 믿어줄 것 같으냐? 적어도 내가 최전선에 나서야 한다. 그들에게 내가 허락했다고 해. 회장님은 모르시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유전무께 보고드리려고 했습니다만.

뭔가?

안기부 요원들이 이곳에 와 있습니다. 그들이 연락을 해 와서 한번 만났습니다. 심재택이라고, 지난번에 여길 찾아온 자인데요.

서울에 있을 때에 안기부 요원들이 절 찾아왔더군요. 저에게 제의를 했습니다. 일에 협조해주면 아버지를 올 크리스마스 때에 성탄 특사로 가석방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저한테서 임차지 내의 정보를 얻을 생각입니다. 며칠 전에 만났을 때도 유전 관계, 조직 관계 등을 묻길래 보편적인 것만 말해주었습니다.

이남호와 한일만이 몸을 굳힌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북한 측과 협조하게 되면 제일 부담이 되는 것이 그들입니다, 실장님.

맞는 말이야.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남호가 말했다.

그런데 김대리, 그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는 알겠는데, 그건 정말 나로서도…」

아버지는 남은 형기를 그대로 마치시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회사를 배신하면서까지 형기를 줄인 것을 아신다면 절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머지않아 안기부도 제가 자신들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테니까요. 그래서 실장님께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머리를 숙인 김상철이 방을 나가자 한일만이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이남호는 앞쪽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제법 괜찮은 여자들도 있군.

라운지를 둘러보던 심재택이 혼잣말처럼 말하자 고정문이 머리를 끄덕였다.

백계 러시아 여자들의 피부는 끝내주지요. 혼혈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시선이 두 테이블 건너편에 마악 앉는 동양 여자에게 멈추었다.

한족인지 조선족인지는 모르지만 저 여자도 괜찮군요.

도시의 중심인 레닌 광장 건너편에 자리 잡은 센트랄리나야 호텔 안이다. 심재택이 담배를 빼어 물었다.

고부장, 쉘사 사람들도 지금 바쁘겠지요?

커피잔을 내려놓은 고정문이 머리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어젯밤에 그 사람들이 아무르 호텔에 투숙했던데‥‥ 석유 메이저들 말입니다.

오성그룹의 거래선들 아닙니까?

글쎄요. 나는 아직.

유전 소식을 듣고 석유 메이저들이 달려드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

근대 쪽의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우리보다 심과장께서 더 잘 아실 것 아닙니까? 우리야 시중에 나도는 소문이나 듣는 것 외에는 직접 걷어오는 정보가 없어요.

누구는 직접 걷어온답디까? 다 마찬가지요.

좁은 바닥이어서 그들은 하루에 한 번꼴로 만나고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예전과 달라서 한물간 정보나 서로 주고받고 헤어지곤 했는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음날에는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근대는 결국 마피아에게 매출액의 10%를 내놓게 되겠더군.

심재택이 말을 이었다.

파리야킨이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모양이오. 하긴 마피아가 틀면 개발이고 건설이고 끝장이니까.

다 아는 소리였으므로 고정문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3시에 약속이 있어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아, 벌써 2시가 넘었군. 나는 잠시 여기에서 눈요기나 하고 갈랍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고정문이 라운지를 나가자 심재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요깃감을 찾는 것이다.

 

페치카에 장작을 집어넣은 이금철이 몸을 돌려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파리야킨은 정부 관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군의 고위층과도 끈이 닿아 있소. 김선생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러시아 마피아는 미국 마피아나 일본의 야쿠자 등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들은 러시아 개방과 함께 급격한 성장을 해서 그 뿌리를 굳혀버렸단 말이오. 마피아를 소탕한다면 이제 막 기반이 굳기 시작한 자본주의 체제가 흔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는 김상철의 앞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지금 상황으로는 마피아가 필요악이오. 모스크바 정부가 내버려 두고 있는 것도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염려하기 때문이요.

벽시계가 오후 4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은 교외에 있는 조선족의 거주지로 창밖으로 10여 호의 흰색 벽돌집이 드문드문 세워져 있었다. 그들이 들어와 있는 집의 주인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아마 뒤채에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평양에서 이렇게 빨리 지시가 내려올 줄은 몰랐소.

나도 마찬가집니다. 이실장께선 책임을 지시겠다고 합니다.

이금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남호 실장이 근대그룹의 제2인자라는 것은 우리도 잘 압니다.

이번 일의 최종 결정권자이십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압니다. 일이 잘못되면 이실장이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지요. 강회장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말이오.

이런 일을 강회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결정할 리가 없지요, 대단히 위험한 일인데 말이오.

그런 건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나무 문이 소리 나게 열리더니 털코트를 벗어든 여자 한 명이 들어섰다.

늦었습니다.

방 안을 향해 머리를 까닥여 보인 그녀가 다가와서는 김상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선생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나에 대해서 말입니까?

그녀의 손을 잡은 김상철이 묻자 이금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김선생은 제거 대상 1호였소. 지금 센트랄리나야 호텔에 있는 안기부 요원보다도 순서가 빨랐단 말이오.

이금철이 옆자리에 앉는 장인규를 바라보았다.

그럼 장선생이 말씀하시오.

그리고는 김상철을 향해 웃었다.

장선생은 조선족 여성 동맹 위원장이오. 나도 때로는 장선생의 지시를 받습니다.

장인규가 표정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조건을 짚고 넘어갑시다.

김상철에게 하는 말이다.

첫째로 근대는 우리가 추천한 조선족 동포들을 모두 일꾼으로 뽑아야 합니다. 그건 할 수 있지요?

내 생각이지만 가능할 거요.

둘째로 상호 협조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협의체를 만들도록 요구합니다. 근대 쪽의 대표는 김선생으로도 만족합니다.

그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도움을 받게 되었으니까.

우리 요구는 그것뿐입니다, 김선생.

장인규가 처음으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그러면 내일 협상은 어디에서 열리지요?

그건 아직 모릅니다. 어제도 끝날 쯤에야 협상 장소가 결정이 되어서.

그렇다면 내일 협상 장소는 오늘 늦게야 결정이 되겠구만.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앞쪽을 바라보며 이금철이 말했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7시가 되어 있었다. 그라노프의 저택에서 이실장과 일행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그곳에서 저녁 식사까지 하고 올 모양이었다. 아래층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신문을 읽고 있던 장국진이 머리를 들었다.

어디 다녀오는 거야?

시내에.

짧게 대답한 김상철이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모두 어디 갔지?

저녁 먹으러.

그러면서 장국진이 신문을 내려놓았다.

이금철 만난 이야기를 자세히 해 봐.

? 불안한 거야?

웃음 띤 얼굴로 김상철이 묻자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그는 북한군 대위 출신인 것이다.

방해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고 만났다는 건 믿을 수가 없어.

이금철은 곧 장군이 될 놈이야. 이쪽 조선족들을 휘어잡고 있으면서 러시아로 넘어오는 공화국 인민들을 거의 빠짐없이 잡아갔어. 그런 놈한테 그 말이 먹힐 것 같아?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고태성과 신해복이 들어섰다. 저녁을 먹고 온 모양으로 입술에 윤기가 흘렀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우리 넷이 해야 할 일이 있어. 이건 회사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까 잘들 들어,

방 안이 순식간에 긴장감에 덮였다. 세 사내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이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야. 물론 그 대가야 있겠지만 내키지 않는 사람은 지금 말해줘. 업무를 바꿔줄 테니까.

한동안 정적이 흐른 후에 장국진이 풀썩 웃었다.

난 아냐, 갈 데도 없는 걸 뻔히 알면서.

저도 아닙니다.

다음은 고태성이다. 마지막으로 신해복이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근대직원이 죽었을 때 3억 원씩 주었다던데, 그렇게만 준다면.

5억이야, 이 사람아.

고태성이 정정해주면서 분위기가 잠깐 밝아졌다. 김상철이 헛기침을 하자 다시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이제 곧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내용은 작전 직전까지 비밀이다.

「………」

지금으로써는 그렇게밖에 말해줄 수 없어, 그리고 행동하기 쉽도록 둘씩 팀으로 나눈다.

그의 시선이 사내들을 하나씩 찍고 지나갔다.

장형은 나하고, 그리고 고형과 신형이 한 팀이다.

전쟁이 일어나다니.

혼잣말처럼 장국진이 중얼거리더니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회사를 잘못 들어온 것 같군.

 

10시 가깝게 되어서야 숙소에 돌아온 이남호는 지친 표정이었다. 그는 현관에서 기다리고 선 김상철과 시선이 마주치자 따라오라는 눈짓을 하고는 2층의 응접실로 올라갔다. 수행한 중역들의 어깨도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면 회담의 결과는 물어보나 마나일 것이다. 김상철이 응접실로 들어서니 이남호가 한일만과 마주 앉아 있었다.

더 이상 끌 수가 없을 것 같다, 김대리.

이남호가 손으로 앞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오늘 그놈들한테서 최후통첩을 받았어. 모레까지 결정을 하라는 거야.

모레 몇 시에 어디서 만나시기로 했습니까?

그건 내일 그놈들이 알려주기로 했다.

오늘 북한 쪽이 조건을 내놓았습니다.

김상철의 말에 이남호와 한일만이 긴장한 듯 얼굴을 굳혔다. 장인규가 제시한 조건을 들은 이남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임차지에서 노동자 혁명을 일으킬 심보로군, 그자들이.

개 쫓다가 늑대 들여놓는 것 아닙니까?

한일만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차라리 마피아한테 돈 떼어주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는데요.

어차피 조선족을 들여놓아야만 해. 그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제 사람들을 임차지로 보낼 수 있어.

이남호가 김상철에게 물었다.

인원은 몇 명이라고 하던가?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그럴 것이다. 그쪽은 아직 우리의 사업 규모를 모를 테니까.

그쪽 숫자 개념보다 우리는 아마 동그라미가 두 개쯤 많을 것이다. 몇백 명 추천해 주겠지만 우리가 뽑는 몇만 명에 비하면 한 줌이야.

그렇지만 실장님.

한일만이 나섰다.

그 몇백 명이 선동하면 문제가 커질 수도‥‥‥」

그 몇백 명의 리스트를 이미 알고 있게 될 테니까 차라리 잘 되었지, 관리하기도 쉬워질 테니까.

「………」

내 책임으로 그걸 받아들인다. 협의체도. 김대리 네가 창구가 되는 것도 말이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나는 그쪽이 어떤 방법을 쓸 것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틀 후에는 어쩔 수 없이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돼. 그렇게 되면 제휴고 추천이고 모두 필요 없어지는 거야.

잘 알고 있습니다, 실장님.

방을 나온 김상철은 무거운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모두 자신의 입장이 있는 것이다. 하다못해 죽은 후의 보상금이라도 계산해 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상황이었다.

 

안드레이 파리야킨은 소파에 몸을 길게 뻗고 앉아 있었다. 양탄자 위로 뻗어 나온 가죽 장화가 샹들리에 불빛에 윤기를 내고 있었으나 창백한 얼굴은 푸른빛이 돌았다. 날카로웠던 검은 눈빛도 이제 반쯤 감춰진 상태여서 그는 마치 병든 사내처럼 보였다.

방 안은 조용했고 뒤쪽의 페치카에서 장작 불꽃이 튀어 오르는 소리만 들렸다. 방 안에 모여 앉은 사내들도 술잔을 든 채, 혹은 시가를 입에 문 채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침묵은 한동안 더 계속되었다. 이윽고 파리야킨이 눈시울을 치켜올렸다.

그라노프, 이제까지 근대가 모은 노동자는 모두 몇 명이나 되나?

서류를 낸 것은 1,500명가량 되었는데 실제 면접을 본 숫자는 백 명도 안 됩니다.

술잔을 들고 있던 그라노프가 말했다.

내일 그자들에게 고용계약을 할 모양이지만 그것도 힘들 겁니다, 안드레이.

시간을 끌면서 정부 쪽에 공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파리야킨이 주위의 사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체르넨코나 로스토프, 아마 대통령한테까지 매달리고 있을 거야,

아직 그쪽에서는 연락이 없습니다, 안드레이.

파벨이 말하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어차피 10%도 러시아로 흘러 들어오는 돈이니까, 그 돈의 몇 퍼센트는 제 주머니에 들어오게 되어 있단 말이야.

응접실에 모인 사내들은 마피아의 간부들로 모두 그의 심복들이다. 그들은 파리야킨이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경쟁자를 어떻게 처단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조직에는 2인자가 없다. 작년까지만 해도 2인자 노릇을 하던 파리야킨의 친구 카자코프가 술에 취해 동사한 이후부터는 모두 2인자를 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드레이, 근대 직원들이 조선족들을 만나고 다닌다는 보고를 들으셨습니까?

파벨이 묻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들었어. 놈들이 바쁘게 움직인다는 것도.

영국 쉘사의 정보원들도 와 있고, 오성그룹의 직원들, 한국 안기부 직원에다가 북한 공작원들까지 섞여져서 하바로프스크는 정보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자 그라노프가 입을 열었다.

그들 대부분이 유전 소문 때문에 그런 거요. 우리가 그들 때문에 행동의 제약을 받지는 않습니다.

북한 공작원들이 다시 무리로 몰려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라노프의 말을 반박하듯이 파벨이 다시 나섰다.

그자들은 어떻게든 근대의 사업을 방해하려고 들 겁니다. 조선족 모집을 방해한 것은 우리들만이 아닙니다. 북한 공작원들도 조직적으로 방해를 한 겁니다.

회담이 끝나면 소탕해 버리기로 하지,

파리야킨이 머리를 들고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몽땅 말이야, 물론 이틀 후에 근대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난 다음이지.

 

논현동 유흥가의 밤 11시는 가장 활발한 영업시간이다. 타운 호텔 건너편 골목 안에 있는 카페에도 손님이 많았는데 대부분이 20대 초반의 젊은 층이었다.

잘못 들어왔나 봐.

박미정이 그렇게 말했지만 안인석이 주문을 끝낸 후이다. 회사 근처에서 1차를 하고 헤어지기 전에 한잔 더하자는 안인석의 제의에 차에서 내려 우연히 들린 곳이 이곳이다.

때로는 시끄러운 분위기가 편안해질 때도 있어. 특히 어색한 사이일 때에는.

안인석이 박미정을 바라보며 웃었다.

물론 지금 우리 사이를 말하는 것은 아냐. 난 너하고 있으면 어디서든 편안하니까.

다행이야, 어쨌든 간에 요즘 편안하고 안정이 된 것 같이 보여서.

맥주를 세 병쯤 마신 참이라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 박미정이 손바닥을 볼에 대었다. 그러고 보니 카페 안의 분위기는 밝고 건강했는데 조명이나 장식도 밝은색을 써서 그들의 분위기에 어울렸다.

그나저나 상철이 그놈, 연락도 없었다니 너무한데.

박미정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안인석이 말했다.

간 지가 며칠이야? 열흘도 넘었지 않아.

바빠서 그럴 거야.

아무리 바쁘다고 하더라도.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그러자 안인석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놈의 약점이 있지. 내가 알려줄까.

「………」

어때? 알고 싶지 않아?

이윽고 그에게서 시선을 뗀 박미정이 머리를 저었다.

알고 싶지 않아.

이 여자, 깊게 빠져들었는데.

잠자코 웃는 박미정을 바라보던 안인석이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상철이가 부럽다. 내가 그 자식이 진정으로 부럽다고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야.

그럼 이제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단 말이야?

없었어. 전혀,

그럼 상철 씨가 인석 씨를 부러워할 것이라는 생각은?

있었지, 여러 번.

그렇지만 그 자식은 내색을 하지 않았어. 물론 나도 티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상철 씨는 걱정을 많이 했어, 떠나기 전까지도. 인석 씨 소식을 전해달라고 나한테도 부탁을 했고.

이맛살을 찌푸린 안인석이 술잔에 술을 채웠다.

자식, 내가 어린앤가.

우정이야. 난 둘의 사이가 부러워.

이렇게 인석 씨와 같이 있으면 상철 씨 흔적이 가끔 보이는 것도 기쁘고.

젠장.

투덜거리던 안인석이 금방 얼굴을 펴면서 웃었다.

그래, 내가 그놈 약점을 알려주지. 네가 듣고 싶지 않다고 해도 말해야겠다.

「………」

그 자식은 제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해. 그놈한테 나는 죽을 때까지 착한 사람이고 또 다른 사람은 악당이란 말이야. 난 그것이 부담스럽고 지겨워.

우스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박미정은 웃지 않았다.

사람마다 다 자기 기준이 있어. 그것이 무슨 약점이야?

스스로 매어 산단 말이야, 그 자식은. 설령 제 기준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것을 고치지 않아. 환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

아무래도 난 자신이 없어.

안인석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그녀는 머리를 들었다.

사생활이, 인과관계가 말이야. 열심히 일하다가도 가끔 깜짝 놀랄 때가 많아.

「‥‥‥」

솔직히 네가 없었다면 난 방황했을 거야. 너에 대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상철 씨한테는 지겹고.

그러자 안인석이 쓴웃음을 짓고는 술잔을 들이켰다.

 

이슬에 젖은 잔디밭에서 매운 풀냄새가 맡아졌다. 성큼성큼 발을 떼는 사이에 맑고 신선한 아침 공기가 마셔졌다가 뿜어져 나왔다. 2백 평쯤 되는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동안 구두와 발목이 이슬에 젖었지만 상쾌한 아침이었다. 잔디밭을 건넌 강미현이 대문으로 다가가는데 옆쪽에서 검정색 세단이 다가왔다. 할아버지의 승용차였다. 걸음을 멈춘 강미현이 옆으로 비껴서면서 뒷좌석에 대고 머리를 숙였을 때 차가 멈춰 섰다. 뒤쪽 창문이 내려지더니 강회장의 얼굴이 드러났다.

여기 타거라.

문까지 열렸으므로 가타부타 말할 처지가 아니다. 세단은 조부와 손녀를 싣고 대문을 나섰다.

네 차는 어디 고장 났느냐?

강회장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아녜요, 할아버지. 전철이 편해서요,

지금도 회사에서 네가 내 손주인지 몰라?

아녜요. 대부분 다 알아요.

무슨, 연속극같이 일부러 감출 필요는 없다.

「………」

네 나이가 몇이더라?

올해 들어서 아마 다섯 번쯤은 물어보았을 것이지만 강미현은 다소곳이 대답했다.

스물다섯요, 할아버지.

작년까지만 해도 일 년에 세 번쯤 물어보았는데 빈도가 잦은 것을 보면 결혼 때문인 것이리라.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어서 도로는 막히지 않았다. 세단은 속력을 내어 달리고 있었다. 한동안 앞쪽을 바라보던 강회장이 입을 열었다.

네 애비를 우리 땅으로 보낼 작정인데, 너도 알고 있지?

, 할아버지.

부자가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은 것이다. 강회장은 시베리아 임차지를 이제 우리 땅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곳에 우선 경공업을 일으킬 것이다. 경공업으로 기반을 다지고, 인력을 모아야 돼. 물론 유전을 중심으로 중화학공업도 같이 일으킨다.

강회장이 학생을 가르치는 늙은 선생처럼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사양 산업이 되어 있는 경공업이야. 그룹 내의 일부 경공업체들도 그쪽으로 옮겨야 될 것이다.

「‥‥‥‥」

네 오빠는 올해 안에 미국 지사장 일을 그만두게 하고 네 애비 일을 돕게 할 거야. 당분간 네 애비는 서울과 우리 땅 일을 같이하다가 네 오빠에게 넘기게 될 것이다.

오빠는 잘할 거예요.

그래, 아직 나이도 있으니까.

강미현의 오빠 강재원은 근대상사의 미국 지사장으로 뉴욕에 살고 있었다. 프린스턴을 졸업한 강재원은 두 강회장으로부터 엄격한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룹 비서실 근무부터 시작한 그가 뉴욕에 부임한 것은 작년 초였고 꽤 좋은 실적을 올려 할아버지를 만족시켜 주고 있었다.

그 땅은 너희들 것이다.

강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우리 땅을 고르다 죽을 것이다. 그래, 뼈대는 세우겠지. 그다음에 네 애비가 도시를 만들 것이고, 그리고 너희들 대에 와서는 나라가 되어야 해.

강회장이 손가락으로 강미현의 얼굴을 서너 번 가리켰다.

50년 후에 살아남을 녀석들은 너희들, 그리고 너희들 후손뿐이니까 명심하란 말이다.

, 할아버지.

너 남자 있느냐?

없어요, 할아버지.

사내를 잘 만나야 좋은 자손이 나온다. 그것도 명심해라.

노는 건 괜찮지만 결혼은 이 할애비가 알아서 하도록 해줄 테니까.

그러더니 갑자기 운전사를 바라보았다.

이봐, 속력을 줄여라. 오늘은 조금 늦게 들어가도 괜찮아.

말을 돌리는 것은 특히 가족들에게 다른 말 듣지 않으려는 강회장의 버릇이었다.

 

하바로프스크의 아침 .

그라노프의 부하로 별명이 '오리'인 우다트는 자신의 가게인 환전소로 들어섰다. 10평 정도의 대기실은 이미 깨끗이 청소가 되었고 철장 안의 사무실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던 직원들이 그를 보더니 인사를 했다.

이봐, 세프첸코. 낮에 3천 달러 정도는 내가 가져갈 수 있겠지?

철창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선 그가 묻자 머리를 짧게 깎은 사내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 우다트. 지금 잔고가 2천 달러 정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머코스키도 올 것이고.

환전소라고 해도 요즘 들어 늘어난 여행객들로부터 달러를 받고 루블을 바꿔주는 일뿐으로, 루블을 받고 달러를 내주지는 않는다. 자리에 앉은 우다트는 책상 위에 꽂힌 메모지를 집어 들고 저었다.

첸트랄, 일본 15, 머코스키.

그것은 근처에 있는 첸트랄리나야 호텔에 일본 관광객 15명이 어젯밤 들어왔으며 안내인인 머코스키가 그들을 인솔하고 환전하러 온다는 내용이다.

물론 호텔 내에 환전소가 있고 길 건너편에 은행도 있지만 관광객들은 루블이 부족하거나 담당자가 없다는 설명을 듣고 머코스키와 함께 이쪽으로 오곤 했다. 아침에는 대개 호텔 종업원이나 택시 운전사들, 또는 어젯밤 시달린 값을 달러로 받은 창녀들이 주요 고객이었다. 그들은 대개 1, 20달러 많아야 100달러 미만이었는데 가끔 돈 많은 한국인의 등을 쳐서 4, 5백 달러를 가져오는 사람들도 있다. 환전 창구에 사람들이 들고 있었으므로 사무실은 떠들썩해졌다.

의자를 뒤로 제낀 우다트는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신문을 펼쳤다. 그는 활기찬 사무소의 소음 속에서 아침 커피를 마시는 것이 즐거웠다. 소음이 곧 돈인 것이다. 그는 구형이지만 벤츠가 있었고 환전사업 2년 만에 시내에 주택을 얻은 데다 이제 마누라는 가로수 길에 있는 베료스카가 아니면 물건을 사지 않는다. 개혁 이전에 그라노프와 함께 KGB 정보원 노릇을 할 때에는 고기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먹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까지도 고기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미제 통조림에다 그 비싼 한국산 라면을 간식으로 먹는 것이다.

매장이 시끄러워졌으므로 우다트는 머리를 들었다. 동양인 서너 명이 세프첸코와 말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더듬거리는 러시아어를 들으니 그자들은 중국계 동양인들인 것 같았다.

이봐, 네가 준 돈은 225달러야. 288달러가 아니란 말이다!

세프첸코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으로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중국 놈들이 어디 와서 사기를 치려고 그래!

, 우리를 뭘로 보고 그래.

그중 한 사내가 나섰는데 제법 익숙한 러시아어를 썼다. 그는 세프첸코가 빠르게 지껄인 말을 알아들은 것이다. 제법 값진 슈바 차림에 모자를 쓴 그는 손가락으로 세프첸코를 가리켰다.

이 새끼들, 돈 계산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이미 손님들은 세 명의 동양인 주위에서 떨어져 구경을 하는 판이었고 이쪽 사무실도 모두 일손을 놓고 있었다.

이봐요, 잠깐만.

이렇게 말하면서 일어서던 우다트는 사내가 슈바를 젖히면서 기관총의 손잡이를 잡는 것을 보았다.

.

일순간 몸을 굳혔던 우다트가 무의식 상태에서 책상 밑으로 몸을 숨기려고 허리를 굽혔을 때 사무실에 터져 나갈 듯한 총성이 울렸다.

타타타타타타.

몸통에 여러 발 총탄을 맞은 우다트가 벽에 등을 부딪치며 놀란 표정을 지우지도 못한 채 숨이 끊겼고 세프첸코는 도망치려고 등을 돌렸다가 사내들이 어지럽게 쏜 총을 등에 맞고 엎어졌다. 사무실의 나머지 직원들 중 성한 사람은 여직원 한 명과 어깨에 총을 맞고 주저앉아 있는 젊은 직원뿐이었다. 손님들이 아우성을 치며 뛰쳐나갔으므로 대기실에는 동양인 네 사람뿐이다. 사내 한 명이 철장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우다트의 책상 위에 놓여진 소형 금고에서 달러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그들이 밖으로 달려 나간 것은 그로부터 30초도 되지 않았다.

 

털린 돈은 2천 달러 정도 됩니다. 하지만 우다트를 포함해서 세 명이 죽었습니다.

부하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라노프를 바라보았다.

놈들은 모두 네 명으로 중국계입니다. 여직원이 그들끼리 중국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침 10시였다. 막 아침 식사를 끝낸 그라노프는 속이 거북해졌으므로 허리를 폈다.

경찰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어?

중국 갱의 소행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요즘 국경을 넘어온 놈들이 부쩍 늘어난데다가‥‥‥」

빌어먹을.

그라노프가 혀를 찼다. 우다트는 그의 친구이자 믿을 만한 심복이었던 것이다.

경찰한테 맡길 수는 없어. 강 상류의 중국인 거주지하고 시내에 정보원을 풀어라. 이번 기회에 아주 뿌리를 뽑을 테니까.

부하들을 총동원시켜 범인들을 찾게 하고 그라노프는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곧 빅토르 서장이 전화를 받았다.

그라노프, 그렇지 않아도 내가 전화하려고 했어.

서장이 대뜸 말했다.

정보가 들어왔는데 중국에서 넘어온 갱단이라는 거야. 마약 조직인 것 같아.

그것이 정보라는 거야?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난 그라노프가 말을 이었다.

아직 한 시간도 안 되었으니 그놈들은 국경을 넘지 못했어. 이미 내 부하들이 그쪽에도 깔려있으니까 빅토르, 자네는 나한테 정보나 넘겨줘.

알겠어, 그라노프. 그나저나 우다트가 안 됐구만. 며칠 전에도 술 한잔했는데. 이봐, 그라노프. 그 환전소 말인데, 전에 내가 부탁했던 내 처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고 있지?

지금 그런 이야기할 때가 아니란 말이야, 빅토르. 이 망할.

알겠네, 그라노프. 내가 다시 연락하지.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라노프는 길게 숨을 내려쉬고는 의자에 등을 붙였다. 우다트는 이익금의 반을 상납해 왔는데 그것은 그와의 친분 관계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환전소의 경영을 맡기면 20%만 가져가게 하더라도 춤을 추며 고마워할 것이었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표드르는 지친 몸으로 카페에 들어섰다. 역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길가에 위치한 이곳은 값싼 밀주를 마실 수 있어서 언제나 주정뱅이가 들끓었고 싸움이 일어나곤 했다. 돈 몇 루블과 술 한 잔에도 온갖 정보가 교환되는 곳이었지만 대개가 쓰레기 같은 소문뿐으로 그도 몇 번 돈만 날린 경험이 있다. 안으로 들어선 그가 자욱한 담배 연기를 헤치며 안쪽의 빈자리에 앉자 아니나 다를까 셔츠 깃을 풀어 제친 바실리가 다가왔다. 대머리에 배가 튀어나온 상체에 비해 하체가 빈약한 50대의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는 하루 종일 이곳에서 지내면서 온갖 이야기를 귀담아듣고는 그 이야기들을 상대방에게 술 몇 잔 값을 받고 팔았다. 그 정보에는 상대방이 고의로 흘린 고깃값에 관한 것도 있고 빚을 갚지 않으면 죽인다는 위협도 있다.

표드르, 정보가 있어, 이건 보드카 한 병으로는 안 돼.

역한 술 냄새를 풍기며 그가 말했다. 어두운 실내였고 술꾼들이 내지르는 소음 때문에 그는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다. 표드르가 손바닥으로 바실리의 얼굴을 덮고는 밀어젖혔다.

이 개자식, 얼굴을 치워. 떨어지란 말이다.

표드르, 중국인에 대한 정보가 있단 말이야.

난 그 개같은 정보를 오늘 열 번도 더 들었다. 허탕만 열 번도 더 쳤단 말이야.

이건 진짜야.

종업원이 보드카 한 잔을 표드르 앞에 내려놓고 돌아갔다. 그것은 밀주가 아니었다. 향이 그럴듯한, 모스크바산으로 그라노프의 정보원인 표드르 같은 특별손님 외에는 내놓지 않는 술이다. 바실리가 술잔을 내려다보았으므로 표드르는 술잔을 손으로 쥐었다.

중국인이 어쨌단 말이야? 바실리,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가는 아예 술을 입에도 못 대게 할 테니까.

표드르가 눈을 부릅떴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당장에 널 죽여서 아무르강 속에 던져 버릴 수도 있어.

이건 진짜야. 내가 내 귀로 똑똑히 들었어.

바실리가 손으로 제 귀를 가리켰다

그놈들한테 20달러짜리 지폐를 받았다는 놈이 조금 전에 이곳에 왔다 갔단 말이야. 내 말을 못 믿으면 그놈 말은 믿을 수 있겠지?

그놈이 누구야?

그러자 바실리가 잠자코 시선을 술잔으로 내렸다. 표드르가 술잔을 그의 앞으로 밀었다.

바실리, 이 개 같은 놈, 거짓말이면 넌 죽는다.

술잔을 두 손으로 움켜쥔 바실리가 한입에 입 안으로 털어 넣더니 입맛을 다셨다.

표드르, 넌 운이 좋은 거야. 네가 제일 먼저 나타났으니까.

어서 말해. 그놈이 누군지.

표드르, 내 소원은 별거 아니야, 바로 이 술을 한 병만 병 채로 마셔보는 거야.

바실리가 빈 잔을 들어 보이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내 말이 거짓말이면 날 죽여도 좋아. 그러니 표드르‥‥」

표드르가 손을 들자 종업원이 다가왔다.

보드카 한 병 가져와, 내가 먹는 걸로.

그리고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 바실리. 말해라.

 

이반 마코비치가 표드르의 일행에게 잡힌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후인 630분경이었다.

쟈파린 거리 모퉁이에 있는 기간트 극장에서 청소원으로 일하다가 알코올 중독으로 해직당한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아무르강 상류의 빈민촌이다.

당신들 누구요?

문을 열자마자 집 안으로 몰려 들어온 사내들에게 질린 듯 마코비치의 목소리는 굳어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콧등이 붉어져 있는 것을 보면 보드카를 꽤나 마신 모양이었다.

마코비치, 자리에 앉아.

일행을 이끌고 온 것은 그라노프의 심복으로 간부급인 트레빈이다. 그가 턱으로 마코비치를 가리키자 부하 한 명이 그를 밀어 나무 의자에 앉혔고 두 명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2칸짜리 셋집에 혼자 살고 있는 신세라 그들은 곧 마코비치를 빙 둘러싸고 섰다.

마코비치, 20달러를 받은 놈들에 대해서 물을 것이 있다.

트레빈이 내던지듯 말했다.

사실대로 대답하면 20달러를 더 줄 것이고 거짓말이면 널 죽인다.

, 그저, 심부름만 했을 뿐이오.

마코비치는 이미 사태를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가 트레빈을 올려다보았다. 60대인지 70대인지 나이를 분간할 수 없었는데 크게 겁을 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 중국 놈에게 무슨 심부름을 했어? 그리고 그놈들은 지금 어디에 있어?

트레빈이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그놈들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를 말해.

오전에 강가에서 만났소.

마코비치가 탁자 위에 놓인 보드카 병을 쥐었다. 그리고는 병 채로 두어 모금을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한테 빵과 소시지를 사다 줄 수 없느냐고 합디다. 그들은 강가의 쿠스코 카페에 모여앉아 있었는데 노동자 무리로 보였습니다.

몇 명이나 되었어?

열 명도 넘었소.

쿠스코 카페라면 시장이 바로 옆인데, 너한테 부탁한 거야?

사람 많은 것을 피하는 눈치였소. 그리고 또‥‥‥‥」

마코비치가 다시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는 동안 사내들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자들은 루블이 없었소. 돈을 꺼내는 것을 보니 모두 달러더라니까. 아무래도 그래서 나한테 부탁한 모양이오.

달러가 많았나?

많은 것 같았소.

빵과 소시지는 얼마나 샀어?

백 달러치를 샀더니 한 짐이 되었소.

물론 내가 돈 가지고 도망칠까 봐 중국인 한 놈이 옆에 붙어 다녔소.

그놈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나?

그래서 내가 역 근처의 카페에 들른 거요. 그곳에서 정보를 판다고 해서.

그러자 트레빈이 표드르를 바라보았다. 한 방 맞은 얼굴이었다. 마코비치가 말을 이었다.

그자들한테 심부름 값으로 20달러를 받고 환전을 하려고 시내로 나왔더니 그 사건 이야기를 합디다. 그래서 술꾼들한테 들은 기억도 나고 해서 그곳에 들른 거요,

그자들이 환전소를 턴 놈들이라고 믿나?

그건 잘 모르지만 수상했소.

, 그럼 그놈들이 있는 곳을 대.

그러자 마코비치가 다시 술병을 쥐었다.

백 달러를 주시오.

이런 빌어먹을.

표드르가 한 걸음 나섰다가 트레빈의 눈짓을 받고 물러섰다.

난 중국어를 조금 합니다. 옛날에 중국 여자하고 사귄 적이 있어서, 그들 말을 들었지요, 그자들은 마약 밀매자들 같았소. 조직을 갖춘 자들로 제법 질서가 있습디다.

좋아, 백 달러 주지.

트레빈이 지갑을 열어 20달러 지폐 다섯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 말해라. 이 망할 영감 놈아.

교외의 강가에 있는 수블라야 모텔이오. 그자들이 중국어로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소. 그곳에서 일행을 기다린다고.

수블라야 모텔.

트레빈이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중국 쪽이 아니고 강 상류로 한참 올라간 하급 모텔이었는데,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위한 임시 숙박소였다. 그래서 강이 얼어있는 동안은 폐업을 한다.

빌어먹을.

짧게 외친 트레빈이 몸을 돌리자 사내들은 썰물이 물러가듯 방을 나갔다. 강이 풀려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개업을 하고 있는 것을 잊고 그쪽에는 사람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시내에서 돌아온 신해복이 사무실로 들어서서 곧장 김상철에게로 다가와 섰다.

어젯밤 교외의 수블라야 모텔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답니다. 그곳에 있던 중국인 다섯 명인가가 총에 맞아 죽은 모양이오. 경찰은 개입하지 않아서 그저 소문만 나 있습니다.

옆쪽에 있던 장국진과 고태성이 그들에게로 다가와 섰다.

중국 갱들이야. 마약 밀매업자들이 그곳에 자주 모여들어.

그렇게 말한 것은 장국진이다.

중국인들이 애꿎은 수난을 당하는군.

잠자코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왔다. 환전소에 들어가 중국인 행세를 하며 우다트와 부하들을 죽인 것은 그들이었다. 기관총을 난사한 것은 장국진이었고 중국어로 더듬거린 것은 신해복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환전소를 뛰쳐나와 둘씩 짝을 지어 흩어져서는 곧장 콤소몰 광장 근처에 있는 숙소로 돌아와 박혀 있었다.

2층의 사무실에서 중역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이남호가 들어서는 김상철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사람들과 떨어진 창가로 다가가 마주 보고 섰다.

회담을 제의하시지요. 시간은 저녁때가 좋습니다, 실장님.

김상철이 말하자 이남호가 찬찬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자들과 회담을 하란 말이냐?

, 그라노프의 저택에서 만나자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라노프의 저택에서?

, 파리야킨이 그곳에 있어야 됩니다.

지난번에도 그쪽에서 열렸는데. 그리고 장소를 정하는 것은 그쪽이고.

이곳에서 열리지 못할 사정이 생기면 그쪽이 되지 않겠습니까?

잠깐 회의실을 비워주시면 제가 불을 조금만 지르겠습니다.

얼굴을 굳힌 이남호가 그를 바라본 채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아마 실장님이 그곳에 도착하시기 전에 일이 끝나 있을 겁니다.

이번에 네가 할 일은 무엇이야?

그러자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그건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 실장님.

이남호는 그들이 환전소를 습격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다.

답답하군.

힐끗 뒤쪽의 중역들을 바라본 이남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난 이제까지 회장님의 수족으로 궂은일을 도맡아왔다. 내막을 모르고 따라간 일이 한 번도 없다.

네가 혼자 책임을 지려는 의도는 알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놈 따위가 책임을 질 사건이 아니란 말이다. , 자세한 내막을 말해라.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저하고 제 조원 세 명이 그라노프의 부하가 운영하는 환전소를 습격했습니다. 중국인 행세를 하고 그라노프의 부하 두 명을 죽였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이금철이 다시 중국인 행세를 하고는 강가의 모텔로 그라노프를 유인했습니다. 어젯밤 그라노프가 강가의 모텔을 습격해 중국인 여럿이 죽었는데 그들은 중국인 마약 밀수자들이었습니다. 그자들은 영문도 모르고 당한 것이지요.

이제 이금철이 다시 중국인 갱단이 되어 그라노프에게 보복을 할 겁니다. 그때 파리야킨이 함께 있다가 당해야 됩니다.

이남호가 가늘게 긴 숨을 내려쉬었다.

그렇다면 회의실부터 비워야겠구나.

그렇습니다, 실장님.

이 일은 네 조원들도 다 알고 있어?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이금철과 제가 손발을 맞추고 있다는 것은 아직 모릅니다.

그건 잘했다.

머리를 끄덕인 이남호가 몸을 돌렸다.

 

파리야킨의 저택 응접실에서는 수천 평이 되는 넓은 잔디밭과 그 너머의 호수까지가 한눈에 바라보인다. 검은 침엽수 숲으로 양면이 둘러싸인 호수는 햇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였고 위쪽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른색이었다.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자신의 장대한 영지를 바라보는 파리야킨의 가슴은 언제나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전에는 '잘도 여기까지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곧 그것은 이긴 자만이 갖는 당연한 결과라는 마음으로 바뀌어졌다. 오늘도 그는 그런 충만감으로 가라앉은 가슴이 되어 있는 것이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곧 우바로프가 들어섰다. 40대 중반으로 전직 KGB 간부였던 사내이다.

안드레이, 회담 장소는 그라노프의 저택으로 하라고 전했습니다. 오후 일곱 시니까 여기서 다섯 시에는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는 파리야킨 앞에 공손한 자세로 섰다.

파벨은 조금 전에 헬기로 먼저 떠났습니다.

파리야킨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중국 갱들 사건은 이미 보고가 되어 있었다. 매사에 세심한 파벨은 미리 부하들을 데리고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먼저 떠났다.

아마 근대 쪽은 오늘 계약을 체결할 것 같습니다, 안드레이.

그럴 수밖에, 강회장 그 영감, 이제 우리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겠지.

입술 끝으로 희미한 웃음을 띠운 파리야킨이 말했다.

장사꾼은 장사꾼을 상대로 해야 제 힘을 발휘하는 법이야. 그자는 상대를 잘못 만났어.

임차지에 들어간 정부 조사단은 석유 매장량이 약 10억 배럴이라고 추정한 모양입니다.

유전은 그곳 한 곳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놈들은 우리한테 10%를 내놓는다 해도 절대로 손해가 아니야.

그렇지요, 안드레이, 엄청난 이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후 3시가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파리야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낮잠을 잘 시간이다.

그라노프에게 파티 준비를 시켜라. 근대 놈들과 기념 파티를 할 테니까. 물론 계약을 끝내고 나서 말이야.

 

베료스카 앞에 차가 멈추자 고태성이 신해복을 바라보았다.

신발 가게가 어디에 있지?

안쪽 끝의 왼쪽이오, 고형. 검정색 구두는 사지 말아요. 가짜 가죽이 많으니까.

알겠어, 그럼 10분만 기다려.

아무르 가로수길에 있는 베료스카 앞에는 쇼핑을 하는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거린다. 차에서 내린 고태성은 사람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후 330분이어서 상점에 손님이 모일 시간이었지만 겨우 짬을 내어 신해복과 함께 나온 것이다. 그는 안쪽으로 들어가 끝에서 곧장 오른쪽으로 꺾어져 들어갔다. 그러자 비상구의 표시가 보였다. 그 안으로 들어서자 한쪽은 흡연실이었고 다른 쪽은 비상구였다. 그는 비상구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곳은 상점의 뒤쪽 공간으로 나무 궤짝과 상품의 포장 박스가 어지럽게 쌓여진 곳이었다. 칸막이 옆쪽으로 하물을 운반하는 사람들의 소리만 들릴 뿐 이쪽은 인적이 없다.

이 봐, 30분이나 늦었어.

옆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고태성은 몸을 굳혔다. 나무 궤짝 위에 걸터앉아 있던 심재택이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왔다.

도대체 어쩔 작정이야? 이남호는 김상철을 시켜서 마피아를 치려는 건가?

주위를 둘러본 고태성이 말했다.

모든 것은 김상철이가 알고 있어요. 그 친구는 이실장의 방에 자주 들락거립니다.

그놈은 내 연락을 무시하고 있어.

그는 피우던 담배를 던지고는 구두로 짓이겨 껐다.

이놈의 새끼, 제 애비는 고사하고 한국에 돌아가면 10년은 교도소에서 썩게 해주겠어.

난 지금 바쁩니다. 밖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서.

힐끗 비상구 쪽을 바라본 고태성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오후 다섯 시에 출동하기로 되어 있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모릅니다. 지난번처럼 어딜 습격하는지 어쩔지를 아직‥‥」

그놈, 철저하게 움직이는군.

혹시 날 의심하는 건 아닐까요?

그렇지 않아.그건 정보가 새나가지 않도록 하는 작전의 기본이야.

오늘 오후 여덟 시에 회담이 열립니다.

그러자 심재택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오늘 저녁 여덟 시에? 어디서?

그라노프의 저택에서. 순서대로 한다면 우리 숙소에서 열려야 하는데 회의실 페치카가 과열되어서 불이 났거든요. 금방 꺼졌지만.

「‥‥‥」

다섯 시 출동이 그것과 연관된 것 아닐까요?

심재택이 잠자코 있자 고태성이 한 걸음 다가섰다.

난 운동화를 사려고 나왔단 말입니다. 곧 들어가서 총기 점검을 해야 됩니다.

본부에서는 아직 별다른 지시는 없다 그러니 그들을 따라 행동해.

심재택이 고태성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려놓았다

어차피 나랏일로 너나 나나 목숨을 걸고 있는 셈이야. 기운을 내라.

어쨌든 나도 서약을 한 몸이니까요.

고태성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럼 내일 다시 뵙지요. 심과장님.

그 순간 비상구의 문이 열리면서 신해복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해지더니 곧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아니, 고형. 거기서 뭘 하고 계신 거요?

, 잠깐 친구를 만나서.

고태성이 당황한 얼굴로 대답하자 심재택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안녕하시오.

그는 밖으로 나온 신해복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난 서울에서 온 심재택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신해복은 그의 손을 잡았으나 시선은 고태성에게로 향해져 있다.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순간이다. 쥐고 있던 신해복의 손을 와락 잡아당긴 심재택이 왼쪽 주먹으로 그의 턱을 쳤다. 그리고는 엎어지는 신해복의 배를 구두 끝으로 올려 찼다. 신음소리를 내며 신해복이 시멘트 바닥 위에 엎어져 몸을 웅크렸다.

할 수 없다.

낮게 말한 심재택이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한쪽으로 힘껏 틀자 뼈가 부러지는 무딘 소리가 났다.

 

 

 

8. 살육의 끝

헤어진 곳이 어디야?

김상철이 묻자 이맛살을 찌푸린 고태성이 말했다.

중앙백화점 앞이었습니다. 백화점에 볼일이 있다고 10분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30분을 기다리다가 신발도 사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시계를 내려다본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후 450분이 되어 있었다.

출발 준비를 해. 마냥 기다릴 순 없으니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

고태성이 묻자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있더라도 지금은 어쩔 수 없어.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가보면 알아.

그러자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장국진이 입을 열었다.

이거,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은데.

그들 세 명이 탄 랜드로버가 황량한 강가에 도착했을 때는 520분이었다. 강 건너편 민가의 불빛 두어 점만 보일 뿐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는데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장국진이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저기, 사람들이 있어.

김상철의 눈에도 갈대숲 위로 희끗하게 드러난 차량들의 윗부분과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차에서 내린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이금철과 서너 명의 사내들이었는데 그중에는 장인규도 끼어 있었다.

동무가 장국진이지?

그가 대뜸 묻자 장국진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렇습니다.

난 이금철 대좌야.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이금철이 김상철에게로 몸을 돌렸다.

파리야킨이 예상보다 빨리 출발해서 서둘러야겠소. 놈은 지금 부하들과 함께 헬기 두 대에 나눠 타고 날아오는 중인데 한 시간 후면 도착할 거요.

그들은 이금철의 차량들이 주차된 강가로 가서 차를 등에 두고 둘러앉았다. 이금철의 부하들은 모두 열 명이 넘어 보였지만 입을 여는 사내는 없다.

이금철이 말을 이었다.

파리야킨을 기습할 곳은 두 군데뿐이오. 그 첫 번째가 강 아래쪽의 헬기장인데 보통 이곳에서 내립니다. 그런데 이곳은 군대가 경비를 서고 있는 공용 착륙장이라 접근하기가 쉽지가 않아.

어둠 속에서 이금철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두 번째 장소는 만일의 경우이지만, 헬기가 그라노프 저택 근처의 공터에 착륙할 수도 있소. 헬기가 시내에 접근할 수 없도록 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한낮에 그곳에 내린 적도 있었소.

바람이 갈대숲을 쓸고 지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바람결에 섞인 비리고 짠 물냄새가 맡아졌다.

이 두 곳은 너무 떨어져 있어서 병력을 둘로 나눕니다. 공용 착륙장은 내가 맡고 그라노프 저택 근처의 공터는 장선생이 맡으시오. 김선생은 장선생과 같이 행동하시도록.

김상철의 시선이 옆쪽의 장인규에게로 돌려졌다. 그러자 장인규의 목소리가 강가를 울렸다.

,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일어납시다.

그 시간에 이남호는 마악 통화를 끝낸 수화기를 내려놓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는 것은 한일만이다.

실장님, 그라노프는 파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전화가 왔는데 우리 쪽 참석인원이 몇 명이냐고 묻더군요.

한일만의 표정은 어두웠다.

만일 일이 잘못되면 우리 목숨이야 이미 내놓고 있으니 상관없습니다만 임차지가‥‥‥」

이미 시작된 일이야.

자리에서 일어선 이남호가 찬장으로 다가가 위스키병을 집어 들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우리는 오늘 그라노프의 집에 들어갈 수는 없을 거다. 술이나 한 잔씩 하자.

잔 두 개에 술을 채운 그가 한잔을 한일만에게 건네주었다.

중국 갱들이 그라노프에게 보복하는 거다. 그렇게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어,

한일만은 더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술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시베리아 건설의 제일 큰 난관을 바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거야.

술병을 든 이남호가 앞자리에 앉았다.

실패해서 만일 우리 짓으로 탄로가 난다면 내가 책임을 지겠어.

저도 마찬가집니다, 실장님.

그들은 다시 술잔을 들었다. 탄로가 난다면 목숨이 붙어 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와 맺은 임차지 계약은 유효한 상태이므로 다른 책임자를 내세워 파리야킨과 접촉하게 해야만 한다. 물론 그때에는 그들의 조건 10%를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고 더 나쁜 조건이 첨부될지도 몰랐다.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은 이남호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610분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회장에게 조금 전에 암호 보고를 했으니 지금쯤 회장은 내용을 읽고 있을 것이었다.

다 해독했어요, 할아버지.

서둘러 응접실로 들어선 강미현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그녀는 손에 두어 장의 종이를 들고 강회장을 바라보았다. 회사에 있다가 집에 가서 기다리라는 강회장의 연락을 받고 오늘은 일찍 퇴근한 것이다.

읽어 드려요?

강회장이 끄덕이자 그녀는 강회장의 앞자리에 앉았다.

오늘 중으로 일이 끝날 것이라는 내용이에요. 이실장님이 처음 이야기하신 부분이에요.

「………」

그다음엔 만일 일이 잘못되면 이실장님이 책임지실 것이라고, 그것에 대한 대책을 세워두시는 것이 낫겠다는 내용이구요.

강회장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금 김대리가 두 명을 데리고 나갔다고 했어요. 다시 연락드린다고.

종이를 내려놓은 강미현이 강회장을 바라보았다

회신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없다.

그림 마실 것 가져다드려요?

그러자 강회장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주고받는 내용이 모두 너를 거쳤으니 넌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알겠구나.

, 할아버지.

만일 실패한다면, 그래서 우리와 북한이 주도했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넌 어떻게 하는 것이 낫겠느냐?

러시아 정부와 군 쪽에다 강력하게 협조를 요구하셨으면 해요. 이런 상황에서는 임차지를 개발할 수 없다구요.

「‥‥‥‥」

그리고 이실장님 말씀대로 이 일은 본사에서는 몰랐던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임차지에 있는 4백여 명의 직원들은 멀리 있으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50여 명의 직원들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난 하라고 했다. 왜 그랬는지 넌 아느냐?

어쨌든 임차지는 우리 근대그룹의 소유지로 마피아가 러시아 정부를 전복시키지 않는 한 그것은 변함이 없으니까요.

「‥‥‥」

개발이 조금 늦어진다고 해도 마피아에게 그런 식으로 끌려다닐 수는 없어요, 어떤 시도도 없이 무조건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피아와 이런 식으로 싸우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정부나 군의 협조를 받아 마피아와 타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후에 다시 시도를 하더라도 지금은‥‥‥‥」

강회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네가 지금 나이가 몇이더라?

스물다섯이에요, 할아버지.

다시 머리를 끄덕이는 강회장을 보면서 강미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라노프의 저택에서 직선거리로 3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옛 소련 시대의 군대시설로 쓰이던 작은 3층 건물이 있다. 군 정치장교 교육기관으로 쓰이던 이 건물은 소련이 붕괴하자 제대군인의 직업훈련원으로 바뀌었는데 그것도 1년 만에 문을 닫아서 지금은 빈 건물이다.

장인규와 김상철 일행이 건물의 허물어진 시멘트 담장 사이로 들어선 것은 저녁 610분이었다. 담장 안쪽은 넓은 공터였고 그 건너편으로 어둠에 덮인 3층 건물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들은 공터를 가로질러 건물 쪽으로 달렸다. 낮에는 축구장으로도 사용될 만큼 공터는 넓었으므로 건물에 도착하자 모두들 가쁘게 숨을 쉬었다.

2층으로.

장인규가 가쁜 숨을 억누르며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빨리!

한적한 곳을 찾아 차를 세우고 이곳까지 오는데 예상외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파리야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시간으로 계산하면 도착할 시간은 1, 20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은 계단을 뛰어올라 공터가 내려다보이는 2층의 한쪽 방으로 몰려 들어갔다.

이곳이 좋겠어.

장인규가 가리킨 자리에 사내들이 제각기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둘러 꺼내놓는 것은 RPG-7의 부속들이다. 대전차척탄 발사관으로 구조가 간단한데다 야간용 패시브식 조준경을 부착하면 유효사격 거리 100미터 안에서는 거의 백발백중이었고 무게도 10킬로 미만이어서 이동에도 편리했다. 재빨리 발사관을 조립한 사내 한 명이 조준경으로 공터를 조준하자 다른 사내는 탄두가 긴 노즈형의 HEAT탄을 두 개 꺼냈다. 탄두와 부스터를 연결하여 발사통에 넣기만 하면 된다. 장인규가 데려온 다섯 명의 사내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두 명이 발사관에 붙어 있는 동안 나머지 세 명은 각기 유리창을 열고 소총의 받침대를 찾거나 사격 자세를 굳히고 있다.

장인규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헬기를 공격하기 전에 움직이면 안 됩니다. 그라노프만 먼저 칠 수는 없어요.

건물의 정문은 그들의 뒤쪽이어서 공터에 가려면 건물의 옆을 지나야 한다.

헬기를 부수고 나서 위아래층에서 그라노프를 공격하면 됩니다.

알았습니다.

파리야킨이 이곳에 내린다면 아마 그전에 그라노프가 부하들을 데리고 와서 이 건물을 수색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때는 요령껏 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장인규의 말소리는 딱딱했다.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팔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야광시계의 바늘이 6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래층의 계단 입구로 내려온 그들은 출입구의 양쪽 벽에 붙어 섰다. 계단 사이로 정문과 공터가 바라보이는 위치였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건물이어서 냉기가 온몸으로 전해져왔고 자신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주위는 짙은 정적에 묻혀 있었다. 김상철은 손에 쥐고 있던 중국제 56식 소총의 접는 그립을 펴고 30발들이 탄창을 끼웠다. 통로 건너편의 기둥에 붙어 서 있던 장국진 쪽에서도 쇳소리가 났다. 탄알을 장진하는 소리였다.

이쪽으로 올 것 같지는 않아. 제 아무리 파리야킨이라고 하더라도 헬기로 시내에 들어오려면 공군 사령부의 허락을 받아야 할 테니까.

장국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공기가 진동을 했다.

낮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밤이야. 잘못하면 대공포를 맞아 비명횡사를 할 수가 있어.

그래서 이금철이 강가의 착륙장을 맡은 것이다.

그나저나 저 여자를 여기서 보다니.

혼잣말처럼 말한 장국진을 향해 김상철이 낮게 물었다.

저 여자를 아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역업을 하는 조선족이야. 조선족 여성 동맹 위원장이지. 모스크바 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제 아버지의 유산을 꽤 많이 물려받았어.

「‥‥‥」

저 여자는 외화사업단의 이금철 소속도 아니고 내가 있었던 대외정보국 요원도 아니야. 그렇다면 32호실 소속이 틀림없는 것 같아.

32호실이라니?

김정일 직속의 해외 특수사업반이야. 김정일의 직접 명령을 받는 곳이지.

이것, 묘하군. 공화국을 떠난 줄 알았더니 다시 그쪽 일꾼들하고 같이 일하게 될 줄이야.

그때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장국진도 그 소리를 들은 모양으로 말을 멈추었다. 그 순간 밝은 불빛이 이쪽을 비추었으므로 그들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량들이 정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차가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그라노프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635분이었다. 이제 10분 후면 헬기가 도착할 것이다.

이봐, 근대 쪽에서는 출발했나?

그가 묻자 앞자리에 앉은 트레빈이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아마 출발했을 겁니다.

몇 명이 온다고 했지?

열다섯 명쯤 되겠다고 하더군요.

공터의 한쪽에 차를 세운 그라노프는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량 세 대가 나란히 세워져 전조등으로 공터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으므로 헬기는 곧 이곳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저 건물은 헐어버리고 저기에다 호텔이나 지으면 좋을 텐데.

그라노프가 턱으로 검은 몸체만을 드러낸 옆쪽의 건물을 가리켰다.

로스토프한테 불하 계획이 없느냐고 물어봐야겠군.

변두리에 있었지만 곧 이쪽도 개발될 것이니 일본이나 한국의 기업과 공동으로 호텔을 세운다면 괜찮을 것이었다. 그라노프는 생각난 김에 곧 극동군 사령관인 로스토프에게 흥정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잘만 하면 거저나 다름없는 값으로 불하를 받고, 이쪽은 토지를 제공하는 대신 외국 기업에 호텔 건설을 맡겨 반반씩의 지분을 갖는 것이다.

그때 밤하늘을 울리며 헬기의 폭음이 들려왔다.

이제 오는군.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그가 말했다. 그의 주위에 둘러선 7, 8명의 부하들도 그의 흉내를 내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좋구나.

파리야킨과 그의 부하들이 탄 헬기는 두 대였다. 공군용 수송 헬기인 TU-33형을 불하받아 내부를 개조한 것으로 탑승 인원은 두 명의 조종사를 포함하여 8명이다. 1번기에 타고 있던 파리야킨은 아래쪽 공터에서 비치는 자동차의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그라노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우바로프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십 분 전 일곱 시입니다. 안드레이, 강쪽 착륙장에 내렸다면 조금 늦을 뻔했습니다.

조금 늦더라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근대 쪽과 계약을 하는 날이다. 파리야킨이 기수를 이쪽으로 돌려 시간 안에 대라고 지시를 하자 조종사는 땀을 뺐다. 방공사령부의 당직장교는 신참이어서 파리야킨을 잘 몰랐던 모양이었다. 안 된다고 고집을 피우던 그 장교는 부사령관의 지시를 받고서야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헬기는 이제 공터의 허공 10미터쯤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는 차츰 고도를 낮추어 내려간다. 파리야킨이 머리를 돌려 우바로프를 바라보았다.

우바로프, 네가 하바로프스크를 맡아라.

그러자 우바로프가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알아듣긴 했지만 놀란 얼굴이었다.

제가 이곳을 말입니까?

그렇다. 그라노프는 니호트카로 보내겠다.

한곳에 오래 두면 문제가 많아. 며칠 전 환전소 사건도 긴장이 풀린 때문이야.

우바로프는 어깨를 굳힌 채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대단한 영전이다.

하바로프스크를 장악한다는 것은 곧 조직의 2인자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안드레이, 이 은혜는‥‥‥」

헬기는 이제 바짝 땅 위로 내려와 있어서 앞쪽의 자동차가 비치는 라이트 빛이 수평으로 보였다.

잊지 않겠습니다, 안드레이.

그 순간 우바로프는 가슴에 격심한 충격을 받고 입을 쩍 벌렸다. 눈을 다시 뜬 그는 파리야킨이 머리가 반쯤 날아간 채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다음 순간 기체는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땅 위로 떨어져 내렸고 곧 화염에 쌓였다. 우바로프는 그것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라노프는 오른쪽에서 내리는 헬기 한 대가 폭파되는 순간까지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가 다시 쉬익 소리가 들려오자 저도 모르게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미사일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화염을 하늘로 내뿜으며 두 번째 헬기가 폭발했다.

아아, 빌어먹을.

엎드린 채 고함을 친 그라노프는 그제야 자신의 몸이 뒤쪽의 차량의 불빛에 완전히 노출되어있는 것을 알았다. 앞쪽은 이제 불덩어리가 된 두 대의 헬기가 어둠을 대낮같이 밝히고 있다.

죽여라!

그렇게 소리친 것은 공포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리치는 반동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때 밤하늘을 울리는 총소리가 울렸다. 옆쪽 건물에서 번쩍이는 여러 개의 섬광을 보는 순간 그는 다시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대여섯 발의 총탄을 맞은 몸이어서 두어 번 몸을 뒤튼 그는 곧 사지를 늘어뜨렸다.

자동차 안에서도 폭발음과 총성이 똑똑히 들렸으므로 옆자리에 앉은 한일만이 몸을 굳히고는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그라노프의 저택이 한 블록 앞으로 다가온 위치였다.

실장님.

그러자 이남호가 자르듯 말했다.

그대로 간다.

총성은 더욱 요란해졌지만 어느 쪽에서 울려 나오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들 일행이 탄 네 대의 승용차가 그라노프의 저택 앞에서 멈춰 섰을 때 총성은 그쳐져 있었다. 저택의 철문 앞에 서 있던 사내들이 그들을 안으로 들어가게 했지만 불안한 표정들이었다. 차가 현관 앞에 멈추자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밖으로 몰려나왔다. 그중에서 낯익은 얼굴은 파벨이다. 차에서 내린 이남호 앞으로 파벨이 다가왔다.

미스터 리, 오늘 회담은 연기하도록 합시다. 우리 쪽에 사고가 생겨서.

파벨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돌아가시면 우리가 다시 연락을 드리도록 하지요.

오는 중에 총소리를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파벨이 부하들을 이끌고 옆쪽에 세워진 차로 뛰듯이 다가갔으므로 이남호가 한일만을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도 돌아가자.

그들이 다시 차에 타는 동안에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서너 대의 승용차가 정문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일이 벌어졌구나.

무섭게 딱딱해진 얼굴로 이남호가 한일만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차를 스치고 다시 승용차 두 대가 맹렬한 속력을 내며 지나갔다. 차 안에는 사내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럼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다려야지.

승용차가 대로로 나와 차량의 행렬에 끼자 이남호가 다시 말했다.

모른 척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남호가 앉은 채로 상반신을 옆으로 기울였다. 앞자리의 운전사와 기획실의 상무를 의식한 몸짓이었다.

나와 당신, 그리고 김상철뿐이니까.

이 방법밖에 없었어, 난 결과가 어떻게 되건 책임을 질 테니까 당신도 각오하고 있어.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제 네 대의 승용차는 마르크스 대로를 곧장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시간에 김상철은 퇴역군인 직업 양성소에서 5킬로쯤 떨어진 도로를 남하해 가고 있었다. 교외로 접어들었으므로 가끔씩 한두 대의 차량이 스쳐 지나갈 뿐 주위는 짙은 어둠에 덮인 황야이다.

뒷자리에 앉은 김상철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720분이었다. 건물을 빠져나와 차를 세워둔 곳까지 달려왔을 때까지도 그라노프의 부하들이 응원해 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라노프의 부하 한두 명이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있다손 치더라도 헬기 두 대는 불덩어리가 되었고 그라노프가 쓰러지는 것도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앞쪽을 달리던 승용차가 오른쪽 신호등을 켜더니 속력을 줄이고 있었다. 짙은 어둠에 덮인 황야에 서너 채의 주택이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다. 운전사는 라이트를 끄고 좁은 길을 천천히 달려 나갔다. 차가 2층 통나무집 앞의 마당에 멈추자 먼저 도착해 있던 장인규가 다가왔다.

안에서 이대좌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지요.

이금철은 착륙장에 헬기가 내리지 않는 것을 알고는 곧장 이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그들 일행이 통나무집의 아래층으로 들어서자 환하게 불을 밝힌 넓은 홀에 서너 명의 사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금철이 머리를 들었다.

수고들 했습니다. 파리야킨은 심복 부하들과 함께 몰살을 당했소.

웃음 떤 얼굴로 그는 김상철의 손을 잡았다

이제 블라디보스토크 마피아의 체제 개편이 있을 거요.

그들은 둥그렇게 놓여진 의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벽 쪽의 페치카에서 장작불이 세차게 타오르고 있었다.

김선생은 숙소로 돌아가 결정하고 있는 윗분들께 보고를 해야겠지요. 하지만 정리해야 할 것이 있소.

이금철의 시선이 김상철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장국진에게 멈추었다.

북쪽에서는 저 사람이 죽은 줄 알고 있소. 나도 그랬고.

이 사람은 이제 우리 직원입니다.

김상철이 그의 말을 잘랐다.

내가 포로로 잡아서 데리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국진 씨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글쎄, 난 이미 평양에 보고를 해놓아서. 죽은 줄 알았던 우리 공화국 장교가 남조선 기업의 일꾼이 되어 있다는 것을 들은 윗사람들의 기분이 어떻겠소?

그 윗분들께 다시 말씀해주시지요. 근대는 장국진 씨의 제의를 받아 북한과의 협동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내가 당신들을 찾을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그러자 주위에 둘러앉은 사내들이 제각기 눈을 맞추었다. 장인규가 입을 열었다.

이 일은 다시 검토가 되어야 할 것 같군요, 대좌 동지. 저도 평양에 보고를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만이라도.

살찐 얼굴의 근육을 굳히고 있던 이금철이 이윽고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그림 장선생 ‥‥‥‥」

그의 시선을 받은 장인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김상철 앞으로 다가와 섰다.

김선생, 우리 관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김선생께 몇 가지 확인해 둘 일이 있습니다.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로 모아지자 김상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북한에서 하는 비판 시간입니까? 난 어색한데요.

김선생이 한국 안기부 요원과 만나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근대그룹 내부의 정보가 그쪽으로 흘러갔겠지요. 그렇다면 우리와의 이 일도 안기부가 압니까?

얼굴을 굳힌 김상철이 머리를 저었다

그건 모릅니다.

솔직히 말해주세요. 김선생은 안기부의 정보원 아닙니까?

장인규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김상철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제의를 받았었지요, 아버지의 형기를 감해준다고. 하지만 난 그것을 이실장께 보고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대로 형을 사시는 게 낫다고.

말을 멈춘 김상철이 장인규를 올려다보면서 웃었다.

날 여기에 두고 사람을 보내든지 해서 확인을 해요.

한동안 마주치고 있던 둘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비껴났다. 장인규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자가 안기부의 정보원인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 것은 고태성이다. 고태성의 얼굴빛이 금방 하얗게 되었다. 김상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건 무슨 말이요?

김선생 대답하세요. 이자가 심재택이를 이틀에 한 번씩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압니까?

난 몰랐소.

이자와 심재택이는 오늘 오후에 베료스카에 있었어요. 그러다가 신해복이에게 만나는 것을 들키자 목을 꺾어 죽였지요. 신해복의 시체는 지금도 베료스카의 뒷마당 박스 속에 있습니다.

김상철이 고태성을 바라보았다.

정말이냐?

난 모르는 일입니다. 난 베료스카엔 가지도 않았어요. 중앙백화점에서‥‥」

심재택을 만난 것도 말이야?

나도 그자한테 협박을 받았던 거요.

그러자 장인규가 그들에게 한 걸음 다가와 섰다.

, 김선생. 어떻게 하시겠소? 이자의 거짓말을 우리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소.

당신들에게 맡기지요.

고태성이 벌떡 일어났으나 어느 사이에 뒤에서 다가온 두 사내에게 어깨를 눌려 주저앉았다. 그는 사내들의 손을 뿌리치려고 상반신을 뒤틀며 소리쳤다.

날 어떻게 하면 모두에게 좋지 않을 거다. 시베리아 계획도 하루아침에 사라진단 말이다.

끌고 나가.

장인규가 말하자 사내들이 고태성을 잡아 일으켰다.

이봐, 김상철! 너는 나를‥‥‥‥」

악을 쓰던 고태성은 사내가 내리친 주먹에 배를 맞고는 허리를 꺾었다. 사내들이 그를 끌고 나가자 방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김상철이 장국진의 어깨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가봐야겠습니다.

그러자 이금철이 따라 일어섰다.

저 친구 걱정은 하지 마시오. 우리가 이미 계획을 세워두었으니까. 아마 오늘 밤에 시내를 돌아다닐 것 같습니다. 저 친구는.

이튿날 아침 10시경, 그라노프의 저택 회의실에는 20여 명의 사내들이 모여앉아 있었다. 파리야킨을 비롯한 간부급 보스 6명이 몰살을 당한데다가 경호원과 그라노프의 부하들까지 포함하면 20명 가까운 인원이 죽은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니호트카 등 시베리아 각지에서 몰려 온 보스들은 우선 그들을 습격한 중국계 갱단의 소탕에 대한 열띤 토론을 했다. 어젯밤 사건이 중국인들의 복수극이라는 것이 건물 안에 흘리고 간 증거물로 입증이 된 것이다.

사건 직후에 제일 먼저 달려간 것은 파벨이었는데 그와 부하들은 현장에서 중국제 낡은 가방 속에 든 마약 몇 뭉치와 척탄발사기 부속품, 그리고 고장 난 중국산 56식 소총을 찾아냈다.

이윽고 파벨이 주위를 둘러보며 손을 흔들자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나도 이 일에 대한 책임이 있소. 여러분, 그라노프가 중국 갱들하고 죽고 죽이는 게임을 벌였을 때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이 일을 막을 수도 있었을 거요.

파벨이 붉어진 두 눈 사이를 손끝으로 눌렀다.

난 그라노프가 중국 갱들을 완전히 소탕했다는 말만을 믿고 경계를 게을리했소. 그냥 집 안에서 기다리기만 했단 말입니다.

그러자 사내들 가운데에서 누군가가 혀를 찼다. 검은 머리칼에 육중한 체격의 50대 사내였다.

파벨, 하바로프스크 경비는 그라노프 소관이오. 당신이 나설 일이 못 돼. 따라서 당신이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그는 니콜라이 마르첸코로 파리야킨의 동료였으나 지금은 니호트카의 한쪽 부분을 관리하고 있다.

우선 시급한 것은 그 중국갱단 놈들이 국경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거요. 부하들을 총동원해서 중국 놈들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체면이 설 거요.

그러자 다시 회의실이 떠들썩해졌다. 두어 명은 자리를 차고 일어서서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고 몇 명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잠깐만!

마르첸코가 소리치자 모두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비록 파리야킨에 의해서 니호트카의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지만 파리야킨의 동료였다. 마르첸코가 입을 열었다.

경찰과 군이 개입할 거요. 파리야킨이 죽은 줄 알면 우리를 압박해 올 것이 뻔한데, 그들과는 수십 가지 문제가 걸려 있단 말이오.

그가 주위를 둘러보자 모두들 조용해졌다. 그들 대부분은 파리야킨의 우산 아래서 제각기 지역과 영업장을 배분받고 거드름을 피우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까지 직접 군과 경찰의 고위충과 협상을 해본 적은 없다.

마르첸코가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래서 중국 갱들을 소탕하기 전에 간부 전원이 모인 지금 파리야킨을 대신하고 군과 경찰, 그리고 관리들에게 얼굴을 보일 보스를 선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에게 제일 시급한 일이오.

그러자 사내 한 명이 손으로 그를 가리켰다.

마르첸코, 당신이 하시오.

좋소.

서너 명이 따라 소리치자 마르첸코가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난 블라디보스토크 시청 간부 한 놈을 쏜 일 때문에 니호트카의 구석으로 쫓겨난 사람이야. 난 도무지 그런 일에는 어울리지 않아.

그는 머리를 돌려 파벨을 바라보았다.

파벨, 당신이 적임자요. 당신은 지역도 없는 데다 언제나 중립 역할로 우리 간부들의 불화를 해결해 주었소, 그리고 당신만큼 정부와 군, 경찰에 발이 넓은 사람도 없소. 당신은 파리야킨보다도 그들과 더 밀접한 관계요.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파벨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니콜라이, 난 이 일을 해결하고 나면 은퇴할 생각이오. 파리야킨이 없는 이 조직에 몸담고 있을 생각이 없습니다.

무슨 그따위 무책임한 소리를 하는 거요?

마르첸코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며 소리쳤다.

조직을 떠나다니? 우릴 배신할 작정이요? 파리야킨을 생각해서라도 조직을 맡아 봉사해야 할 것 아니오!

그러자 모두들 입을 열어 떠들기 시작했다. 몇 명은 파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어라고 소리치고 있다.

 

그러자 다시 마르첸코가 손을 들어 주위를 진정시켰다. 그는 파리야킨의 간부들 중에서 세력으로 친다면 대여섯 번째 서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파리야킨을 비롯해서 우바로프, 그라노프 등 고위 서열의 간부가 대부분 폭사해 버렸으므로 이제 그가 선임이 되어 있었다.

파벨, 다시 한번 말합니다. 당신이 조직을 맡아줘야겠소.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소. 근대와도 협상을 마무리해야 할 텐데 당신이 없으면 그것도 힘들 거요.

파벨, 맡으시오!

여럿이 이렇게 소리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계산이 작용한 까닭이다. 마르첸코가 상기시켜 준 대로 파벨은 독자 세력이 없다. 이제까지 파리야킨의 보좌관으로 그림자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지역을 맡아 세력을 키우지 못했던 것이다. 파리야킨은 독재자였다.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지역을 뺏고 추방시켜버렸던 것이다. 파벨이 보스 자리에 앉게 되면 지역 보스들의 세력과 이득이 커질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이제 일제히 파벨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파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로한 듯 두 눈 사이를 손끝으로 누른 그가 주위를 둘러보자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좋소, 맡겠습니다. 파리야킨 동지를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의 우정을 위해서라도.

그러자 회의장을 메우는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전 11시 가깝게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온 김영규 부장과 김상철은 곧장 2층 이남호의 방으로 들어섰다. 중역들과 앉아 있던 이남호가 머리를 들었다

그래, 어떻게 되었어?

그가 다그치듯 묻자 모두 그들을 바라보았다. 김영규가 한 걸음 다가섰다.

파리야킨과 간부급 보스 여섯 명이 죽었습니다, 실장님.

그의 말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지금 시내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군과 경찰이 확 깔려 있어서 저희들이 숙소로 오는 데에도 네 번이나 검문을 받았습니다.

그거 확실한가?

메마른 소리로 이남호가 묻자 김영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경찰 간부한테서 들었으니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눈을 치켜뜬 이남호가 중역들을 둘러보았다. 뻣뻣하게 굳어진 얼굴이었다.

이것, 야단났군. 회담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마피아 질서가 엉망이 되면 우리도 피해를 볼 것 아닌가.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남호가 길게 숨을 내려쉬고는 다시 물었다.

그래, 확인했나?

, 고태성 씨 맞습니다.

그들은 경찰서에 불려가 시체 확인을 하고 온 것이다. 김영규가 말을 이었다.

사고를 낸 러시아인 트럭 운전사는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답니다. 운전사는 고태성 씨가 차도 보지 않고 길로 나왔다고 한다는군요.

「‥‥」

고태성 씨는 술에 취해 있었답니다. 옷에서도 술냄새가 났습니다.

앉아 있던 중역 중 누군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남호가 김상철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조사는 끝났나?

, 경찰은 신해복 씨는 강도에게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지갑과 시계가 없어지고 신발도 누가 벗겨 갔더군요.

이것, 하룻밤 사이에 우리도 두 명이 죽다니, 그런데 두 명 모두가 자네 소속 직원이야.

면목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해서는 어디 직원이 남아나겠어!

술 취해 교통사고를 당하고, 강도를 만났다고 하지만 모두 피할 수 있는 사고야.

자리에서 일어선 이남호가 중역들을 둘러보았다.

, 그럼 이만 끝냅시다.

중역들을 따라 나가던 김상철의 어깨를 한일만이 가볍게 쳤다.

잠깐 남아.

그가 낮게 말하고는 돌아서자 김상철은 주춤거리다가 방의 문을 닫았다. 이제 방에는 그들 셋만이 남았다. 이남호가 손을 들어 김상철에게 앞자리를 가리켰다.

파리야킨과 간부급들이 죽었다고 해도 아직은 우리에게 이롭다는 보장이 없어. 북한은 어떤 계획이 있나?

그건 아직 모릅니다, 실장님.

그럼 회담이 연기된 것이 우리가 지금 얻은 이득인가?

제가 그라노프의 저택에 가볼까 합니다만, 아직 누가 죽고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는 얼굴을 만날지도 모르겠습니다.

회담 개최 문제도 물어보고 분위기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이남호가 입맛을 다셨다.

고태성이 안기부 끄나풀이었다니,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북한 쪽은 저뿐만 아니라 고태성이나 심재택 모두를 감시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자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한일만이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아무려나 그래도 같이 일하던 동료를 죽이다니 그놈은 도대체‥‥」

고태성은 우리 동료가 아닙니다, 이사님. 안기부원이라고 봐도 됩니다.

김상철이 말하자 이남호가 담배를 빼내 입에 물었다.

그나저나 안기부 쪽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거야, 트럭에 치여 죽은 것처럼 만들기는 했지만 그냥 넘어갈 놈들이 아냐.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어뿜었다.

이건 전쟁보다 지독한 상황이로군. 적도 동지도 분간할 수 없는 난장판이 되었어.

 

대기실에서 20분쯤을 기다리게 한 후에야 사내 한 명이 들어서더니 김상철에게 말했다.

당신만 날 따라오시오.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장국진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만나주니 다행이군.

사내를 따라 2층의 계단을 오르면서 그는 집 안의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 2층 합해서 5백 평이 넘을 것 같은 대저택 안에 사내들이 가득 차 있었지만 말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는 사내들의 시선은 부드럽지가 않았다. 앞장서서 가던 사내가 2층의 한쪽 방 앞에 멈춰 서더니 김상철을 돌아보았다.

들어가시오.

김상철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창가에 서 있던 파벨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검은 눈이 유리구슬처럼 눈에 박혀 깜박이지도 않는다.

책임자를 찾은 걸 보면 누가 파리야킨의 후계자가 되었나를 알려고 온 것 같은데.

무표정한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간에 내가 보스가 된 것을 외부에 처음으로 밝히는 셈이군. 당신에게 말이야.

김상철이 머리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파벨 씨.

그전에 죽은 파리야킨과 그라노프, 그리고 다른 간부들의 명복을 빌어주시오.

대단히 유감입니다, 파벨 씨. 저희 이실장께서도 이번 사건에 대해서 깊은 유감의 뜻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넓은 응접실 안에서 마주 보고 서 있었으나 파벨은 자리를 권하지도 않았다.

우린 내일 아침에 파리야킨의 시체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송해 장례식을 치릅니다. 아마 고위 관리들이 대거 참석하게 될 거요.

저희 이실장께서도 참석하시기를 바라셨습니다.

창틀에서 허리를 뗀 파벨이 두어 걸음 그에게로 다가와 섰다.

이 일을 제의한 사람이 당신이라고 하던데, 맞소?

숨을 멈춘 김상철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말씀입니까?

파리야킨을 치자는 제의 말이오.

이대좌한테서 들었지. 나와 그는 조금 알고 지내는 사이거든.

「‥‥‥」

어젯밤 당신도 직업 양성소 건물에 있었다면서요.

그러면서 파벨이 처음으로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멋진 솜씨였소. , 장이라는 여자, 동양 여자치고는 쓸 만하더군

, 당신도 쓸 만한 남자요.

고맙습니다, 파벨 씨.

내가 왜 당신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지 알겠소?

아직 모릅니다, 파벨 씨.

제의는 당신네가 했지만 행동을 한 것은 북한이야. 그들은 곧 당신들과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소?

알겠습니다, 파벨 씨.

당신들은 보호세를 줄이려고 북한을 끌어들였지만 머지않아 그들과의 싸움이 시작될 거요. 임차지 안에서의 주도권 다툼 말이요. 또한 북한은 나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들 것이고, 내 약점을 잡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이제 바짝 다가온 파벨이 다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요컨대 우리 셋이 지금은 뜻을 합했지만 공존할 수는 없는 사이란 말이오. 그래서 내가 미리 이야기해 주는 거요.

「‥‥」

나는 그들이 영향력을 피우는 것을 원하지 않아. 나는 물론이고 당신들한테도. 그러면 우리 몫이 적어지거든. 그리고 당신들도 마찬가지일 거요. 그들에게 주도권을 뺏기면 임차지 건설은 헛일이 되지.

잘 알겠습니다, 파벨 씨.

그것을 우리가 돕겠소. 우리는 당신들이 발견한 자원을 북한 쪽과 나눠서 갖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면 이번 회담에서는 어떻게 해주시렵니까? 그것이 우선 우리를 도와주시는 길입니다.

파리야킨은 생각이 너무 짧았어,

파벨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렇게 성급하게 굴지 말아야 했어. 그래서 머리가 없어졌지만. 난 현실적으로 하겠어. 아마 임차지의 매출이 생기는 것은 3년쯤 후가 될 테니 첫해부터는 매년 2백만 달러, 그리고 3년 후에 다시 협상을 하도록 합시다.

파리야킨은 첫해부터 매년 1천만 달러에 매출이 생기면 10%였으니 놀랄 만한 조건이었다.

전 잘 모르지만 실장께서도 생각하시는 조건이 있을 겁니다.

김상철이 말하자 파벨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그쪽 조건에 될 수 있는 한 맞춰보도록 하지요. 그렇게 전하시오.

고맙습니다, 파벨 씨.

내 말을 기억하시오. 그리고 당신들이 어디에 있는가를 돌아보시오.

이곳은 러시아 땅이고 임차지는 러시아 영토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피아는 러시아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돌아가는 차 안이다. 파벨의 호의로 그의 부하가 운전하는 승용차의 뒷자리에 앉은 김상철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검문을 가볍게 통과한 차가 시내로 들어섰을 때 장국진이 김상철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미처 인사를 못했는데‥‥어젯밤에 날 구해준 일 말이야.

널 구해주다니? 난 그런 적 없어.

김상철이 말하자 장국진이 혀를 찼다.

어쨌든 김대리 덕분에 내가 살았어. 어젯밤 분위기로 보면 날 데려갈 작정이었어, 그렇게 되면 난 죽는다.

너하고 같이 있다 보니까 이번 일의 계획이 떠올랐던 거야. 그러니 오히려 네 도움을 받은 거지.

그런가?

앞으로도 네 도움이 필요해.

어쨌든 신세를 갚아야지, 하지만 김대리가 한 번 더 말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 장인규한테.

잠자코 바라보는 김상철을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내 가족 말이야. 평양에 보고를 했다면 내 처자식이 위험해, 그래서 ‥‥」

「‥‥‥‥」

처자식한테 무슨 일이 없도록 김대리가 한 번만 더 이야기해 줬으면 해서.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돈이라도 써보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쓰던가. 그냥 들어줄 위인들은 아닌 것 같으니까 말이야.

숙소에 도착한 김상철은 곧장 이남호의 사무실로 들어가 보고를 했다. 한일만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이남호는 그의 보고가 끝나자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파벨이었군. 그리고 이금철과 미리 손발을 맞춘 작업이었어.

한일만이 입을 열었다.

교활한 사내군요. 파리야킨이 제거되자 금방 이금철과 거리를 두려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자 말마따나 현실적인 것이지. 그는 지금부터 우리의 가장 큰 문제가 북한이라는 것을 잘 지적해 주었어. 북한에게 임차지의 주도권을 뺏기면 마피아 쪽에서도 좋을 일이 없다.

이남호가 한일만과 김상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늑대를 피하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간 모양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제는 파벨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될 것 같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한일만이 머리를 끄덕였다.

양쪽의 힘을 적당히 조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장은 북한 쪽과 가계약을 맺은 것에 우리 쪽도 이의가 없어, 인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긴 하지만 내부 단속은 철저히 한다.

그러자 한일만이 웃었다.

그자들 생각대로는 안 될 겁니다, 실장님. 팔십 년 전 레닌 혁명시의 상황도 아니고 우리 근대 노조는 아마 그들보다 더 조직력과 결속력이 강할 테니까요.

이남호가 길게 숨을 내려쉬었다.

3년 동안 연 200만 달러 조건은 그야말로 파격적이다. 다만 3년 후에 다시 계약을 하자는 것이 조금 걸리지만.

하지만 그것도 우리 쪽의 조건이 있다면 될 수 있는 한 맞춰본다고 했습니다.

회장님이 기뻐하시겠다. 난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그러면서 이남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수고했다, 김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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