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빙하 속의 사투
「이제 개척단의 기반이 잡힌 모양이다.」
강회장이 주름진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그렇게 애를 먹이던 러시아 병사들을 주무르게 되어서 잘 됐어.」
근대그룹의 회장실 안이다. 강회장과 마주 보고 앉은 이남호 실장은 모처럼 회장의 밝은 표정을 보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이토록 기쁘게 만들어준 개척단의 신입사원 김상철이 고마웠다.
회장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쟁반 위에 찻잔을 받쳐 든 여직원이 들어섰다. 긴장한 얼굴의 그녀는 박미정이다.
「유 상무는 이것이 모두 김상철의 공로라고 했습니다.」
이남호가 입을 열었다.
「신입사원이지만 열 사람의 몫을 해내고 있다는 군요.」
박미정은 회장 앞에 쌍화차를, 이남호 앞에는 인삼차를 내려놓았다.
「김상철이 그놈, 내가 알지.」
회장이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놈 아버지가 작년에 세금 횡령 사건으로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어. 지금은 교도소에 있지.」
「면접에서 떨어뜨리려는 것을 유상무가 뽑았다고 들었습니다.」
「유장석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박미정이 조심스럽게 걸어 문을 닫고 나가자 그녀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던 강회장이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누구야? 참한데, 신입사원인가?」
「예, 회장님. 개척단 일도 있고 해서 비서실 인원을 늘렸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강회장이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1시 5분 전이었다.
「지금 와 있나?」
「예. 11시 10분 전에 도착해서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가 보자.」
강회장이 나이답지 않게 사뿐한 몸놀림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접견실은 우중충한 회장실과는 달리 환한 분위기에 방 안의 장식이 고급스러우면서 품위가 있었다. 강회장이 앞장서서 접견실로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 있던 두 사내가 일어섰다. 안기부장 권준규와 특별보좌관 이해수였다.
「아이구, 권 부장님. 이렇게 오셨는데 마중도 나가지 못해서.」
얼굴에 웃음을 띠운 강 회장이 다가가자 권준규도 따라 웃었다·
「아닙니다. 바쁘신데 갑자기 찾아와서 방해나 안 했는지.」
이남호와 이해수까지 악수를 나눈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권준규는 두 시간 전인 9시경에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해왔으므로 접견실에서 5분쯤 기다린 것에 자존심을 다칠 이유도 없다. 강 회장을 만나려면 최소한 일주일 전에 연락을 해야 시간이 난다는 것을 그도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부장께서 여기는 처음 오시지요?」
강회장이 묻자 권준규가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예, 처음입니다. 여긴 청와대 접견실보다 낫군요.」
「그럴 리가.」
강회장이 다시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하긴 각하께선 사치를 싫어하셔서, 나같이 돈만 아는 장사꾼이야 돈으로 위세를 보이려고 하니까요.」
권준규가 쓴웃음을 지었고 이해수는 딱딱한 얼굴을 풀지 않았는데 문이 열리더니 여직원이 차 쟁반을 들고 들어섰다. 잠시 어색했던 참이라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였는데 조금 전에 회장실에 왔던 여직원은 아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여직원을 바라보던 이남호는 문득 조금 전의 여직원의 운세가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회장이 밝은 기분일 때 들어와 밝은 인상을 심어줬지만 지금 이 여직원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은 권준규가 강 회장을 바라보았다.
「북경에서 지금 남북한 경제협력 실무자급 회담이 열리고 있는 것을 아시지요?」
「예….」
대답을 해놓고서 강회장이 이남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남호가 허리를 폈다.
「지금 8차 회담이 열리고 있습니다, 회장님.」
권준규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5차 때부터 북한이 트집을 잡기 시작하더니 8차 회담에서는 근대그룹이 시베리아 임차를 포기하면 모든 것이 풀릴 것이라고 노골적인 표현을 해왔습니다.」
「허어,」
강회장이 우선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얼굴을 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면 경제협력 회담을 순조롭게 진행시킨단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납북된 어선과 선원, 그리고 납치된 종교인 송환 문제까지 연계시킨다는 것입니다.」
「선원과 종교인까지.」
「그렇습니다.」
강회장이 이남호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얼굴을 굳힌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으나 강회장이 그것을 깨었다.
「그 경제협력 실무자 회담이라는 것, 정부에서 주도하는 거지요?」
잠시 말을 끊고 권준규와 이해수를 일별한 강회장이 단호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우리 근대그룹은 거기에 참여할 의사가 없습니다.」
권준규와 이해수가 얼굴을 굳혔다. 정부에서 교섭은 하더라도 북한에 진출하는 것은 민간 기업들이다. 그런데 한국의 최대 그룹이 불참 의사를 밝힌 것이다.
「정부에서 우리한테 상의해온 적도 없고 회담 과정을 설명해 준 적도 없지요. 따라서 나는 상관 안 하겠습니다. 회담 결과가 어떻든, 무슨 조건이 나오건 간에.」
강회장이 말을 마치고 입을 꽉 다물었다. 그때 '회장님'하고 격한 목소리를 낸 것은 특별보좌관 이해수이다. 그는 대통령 측근 그룹의 일원인데 국회의원에 세 번 낙선하여 직업을 정당인으로만 사용하고 다니다가 작년에 대망의 관직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가 강 회장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정부의 방침에 따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선원들의 생명이 걸려 있는 일인데.」
이해수가 눈을 부릅뜨고 그렇게 말하자 강회장이 미소를 머금으며 가소롭다는 듯 이해수를 바라보았다. 이남호가 머리를 들었다.
「이보쇼, 당신 어디서 굴러먹다 기어들어 온 개뼈다귀야?」
이남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너 어느 앞이라고 건방지게 주둥아리를 놀리고 있어? 이 개자식아.」
입술은 웃었으나 두 눈을 찢어질 듯 치켜뜬 이남호가 말을 이었다.
「러시아 대통령도 중국의 주석도 회장님을 공경해서 예의를 갖춘다. 회장님이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해서 너 같은 새끼한테까지 모욕을 받을 수는 없으시다.」
「아, 잠깐만, 이 실장님.」
권준규가 웃음 띤 얼굴로 손을 저었다.
「이제 진정합시다. 이 보좌관은 아직 물정에 익숙하지 못해서.」
그러자 머리를 끄덕인 이남호가 다시 이해수를 바라보았다.
「너는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대로 옷을 벗게 될 것이야. 1년 후에 말이다. 앞날을 생각해서 조심해야 될 거야.」
말을 마친 이남호가 권준규에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그만 제가 경망해서 부장님의 귀를 더럽혀 드렸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입맛을 다신 권준규가 잠자코 앉아 있는 강 회장을 바라보았다.
「어떻습니까? 회장님. 다시 한번 고려해 보시는 것이.」
강회장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권 부장께서도 정부에서 우리 그룹에 오만가지 압력을 넣고 있는 것을 아실 거요. 세무사찰 받는 곳이 다섯 군데, 해외차관 허가는 우리만 나지 않았고 공장증축 허가도 미뤄지는 데다가 거래 은행 두 곳에서는 대출이 정지되었고 중역들의 재산을 국세청에서 비밀리에 조사 중이오.」
그는 찻잔을 들어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지금쯤은 정부 고위층에서도 그런 방법으로는 근대그룹을 꺾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될 거요.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도 지난달 매출이 계획보다 10% 초과했소. 사원들이 분발한 덕분이죠.」
「부장께서도 내가 시베리아 지역을 임차해서 조선족과 한국인들을 대거 이끌고 그곳에 공장과 도시를 세운다면 그 효과가 어떨 것인지는 잘 아실 거요, 그리고 북한이 그토록 반대를 하고 있는 이유도 말이오.」
「난 계속 추진하겠소. 그러니 부장께서도 대국적으로 생각하고 도와주시오. 그래야 역사에 오명을 남기지 않으실 테니까요.」
길게 숨을 내쉰 권준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덩이처럼 굳어져 있던 이해수도 따라 일어섰는데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 볼의 근육에 나타나 있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권준규의 표정과 목소리는 부드러워서 마치 한담을 나누고 떠나는 사람처럼 보였다.
「김상철 씨는 지금 시베리아 동남단에 있어.」
박미정이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아주 위험한 곳이야. 춥고.」
그들은 회사 식당에서 점심을 마치고 휴게실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박미정이 점심을 같이 하자면서 안인석을 끈 것인데 김상철의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놈은 언제 돌아오는 거야?」
안인석이 묻자 박미정은 머리를 저었다.
「그건 모르겠어. 3월이 될지, 아니면‥‥‥‥」
「아니면 뭐?」
「그곳에 눌러있을지도 몰라.」
「그놈은 곧 돌아온다고 했는데.」
「김상철 씨 아버지가 교도소에 있다며?」
그러자 안인석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건 누가 그래?」
「그냥 들었어.」
「어떤 개자식이 그따위 나발을 불고 다니는지 모르겠군.」
「누구한테 욕하는 거야? 우연히 듣게 되었을 뿐이라니까.」
「글쎄, 누가 그랬냔 말이야.」
「비밀이야.」
안인석이 혀를 찼다.
「넌 비서실로 가더니 비밀도 많다. 상철이가 개척단 업무를 하고 있다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단 말이야?」
「솔직히 알고는 있지만 말할 수 없어.」
「이런 젠장.」
안인석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구기더니 휴지통에 넣었다.
「그럼 상철이가 있는 곳이 춥고, 위험하고, 아버지가 교도소에 있고,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이야기 해주려고 날 불렀어? 누구 약 올리는 거야?」
「김상철 씨는 지금 주목을 받고 있어.」
「주목을 받아? 어디서?」
「개척단에서.」
「글쎄, 어떻게?」
「그건 나도 자세히 몰라.」
「이런 젠장.」
「그 사람 성격이 어때?」
그러자 안인석이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제야 마각이 드러났어. 너, 상철이한테 관심이 있구나.」
「그냥 호기심이야. 오해하지 마.」
「네가 잘 알 텐데, 왜 나한테 물어?」
「글쎄 장난하지 말고.」
박미정이 정색을 하자 안인석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의지가 대단한 놈이지. 사내답고.」
「아버지의 사건 이후로 철저하게 주변이 부서져 내렸어. 가정, 인간관계 등이.」
「‥‥‥」
「그런데도 그놈은 내색하지 않고 기운을 차렸지. 그래, 시베리아에 벌거벗긴 채 버려져도 살아남을 놈이야.」
그는 다시 박미정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알아? 그놈은 몇 달 전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놈이야. 아마 나만큼 그놈을 아는 놈도 없지.」
「왜 안 울었는데?」
그러자 안인석이 입맛을 다셨다.
「그 자식한테는 눈물 같은 거 없어.」
「닷새 일정으로 LA를 다 볼 수는 없어. 그저 코리아타운 한 바퀴 둘러보고 할리우드 구경이나 해.」
박정남이 서랍에서 책 한 권을 꺼내더니 이유미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미국 서해안 관광 안내서야. 비행기 타고 가면서 이 책이나 읽어.」
「고맙습니다, 박 대리님.」
「나 없을 때 발대리라고 하지나 말아라.」
이유미는 5박 6일 일정으로 LA에 있는 현지 대리점에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신입사원들에게 담당지역을 익히고 현지 대리점의 업무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회사방침이었다. 박정남에게서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듣고 난 이유미가 자리로 돌아오자 이제는 미스 양이 다가왔다.
「내일 몇 시 비행기야?」
「오전 11시 30분 KLM이야.」
미스 양이 옆자리의 의자를 끌어당겨 다가앉았다. 점심시간이 지난 지 얼마 안 된 때라 다소 업무태도가 느슨해진 시간이다.
「저 발정남 자식, 어젯밤 외박을 했어.」
낮은 목소리로 미스 양이 말했다.
「저 셔츠에 타이, 양말이 어제와 똑같아. 딴 데서 자고 나온 거야.」
「언니도 참.」
이유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고 있어? 그럼 어때? 아직 미혼인걸.」
「나한테는 아버지 제사라 일찍 들어가야 된다고 했단 말이야.」
「그럼 그렇겠지 뭐.」
「네 남자가 그랬다고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봐, 그냥 지나갈 수 있겠니?」
그러자 이유미가 웃었다.
「난 이렇게 다른 사람한테 상의 안 해.」
「그럴 만한 가치도 없거든, 안 그래?」
「얘 좀 봐.」
얼굴이 굳어진 미스 양이 이유미를 쏘아보았다.
「그건 네 성격이지, 난 달라.」
「언니, 도대체 박 대리하고는 어떤 사이야? 서로 무슨 약속이라도 했어?」
잠자코 있던 미스 양을 바라보던 이유미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것도 내 성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저런 남자는 잊어. 싹수가 없으니까.」
「‥‥‥」
「한마디로 가능성이 없어. 내가 보기에는.」
그러자 미스 양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몸을 돌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유미가 풀석 웃고는 전화기를 들었다. 안인석에게 미국 출장 이야기를 해주려는 것이다. 번호판을 누르던 그녀는 문득 김상철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시선 끝이 멀어졌다. 그의 주변 환경과 차가운 표정이 뒤섞였고 그러자 혹한의 시베리아가 그에게 어울리는 곳처럼 느껴졌다.
한낮이었지만 눈보라가 휘날리고 있어서 주위는 어두웠다. 평원 쪽에서 휘몰아친 바람이 기지의 벽. 역할을 하는 트럭의 대열에 부딪히면서 갖가지 소리를 냈다. 마치 넓고 긴 바람의 원형이 가닥으로 찢겨지면서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반월형 기지의 안쪽에서는 바람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눈보라를 위쪽으로 뿜어냈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림스키의 지휘로 병사들이 바깥 줄의 연료 트럭에서 드럼통을 굴러 내리는 중이었고 일부 병사들은 트럭 사이의 공간을 텐트용 천을 사용해서 막고 있다.
방한모에 방풍 안경까지 쓰고 있어서 우주인처럼 보이는 유장석이 부속품 트럭으로 다가갔다.
「이봐, 눈보라는 사흘쯤 계속될 모양이야. 조금 전에 연락이 왔어.」
그가 소리쳐 말하자 트럭 안으로 상반신을 넣고 있던 이대각이 몸을 폈다.
「우리야 눈보라가 멎기만 기다리면 되지만 시추공 기지는 야단났는데요. 이동 중이라.」
「목표지점 30킬로 아래에서 정지했다니 그들도 눈을 피할 준비를 하고 있겠지.」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두 시간쯤 전이었다. 시추공 기지는 시도한 지역에서 유정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중에 눈보라를 만난 것이다. 그들은 무거운 공구 박스를 함께 들고 안쪽의 박스 트럭을 향해 다가갔다. 트럭 뒤로 들어서자 바람의 기세가 뚝 떨어졌으므로 유장석은 방풍 안경을 벗었다.
「김상철이는 지질 탐사기지 5킬로 앞이라고 연락해 왔어. 그쪽은 바람만 셀 뿐 눈보라는 없다는 거야.」
지질탐사기지는 이틀 작업하고 사흘째 되는 날 옮겨가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벌써 8번째 이동에 있었다. 탐사자료를 체크한 김진모 교수의 시추공 팀이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기지를 옮기는 순서로 작업을 하는 것이다.
「사흘간 눈보라가 계속된다면 보급 헬기가 사흘 후에 도착할 텐데 늦어지겠는데요.」
상자를 내려놓은 이대각이 말했다.
그들은 옷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는 박스 트럭 안으로 들어갔다. 뒤쪽에 배치된 트럭의 중간에 자리 잡은 이곳은 통신실이다. 최신형 위성통신 시스템 장비를 갖춘 통신실에는 두 명의 직원이 24시간 교대근무를 했다. 그러나 통신지역은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근대그룹의 연락사무소까지가 한계였고 서울까지는 러시아군 당국이 허가하지 않았다.
「시추공 기지의 최 과장을 불러라.」
유장석의 말에 직원이 스위치를 켜고 주파수를 맞췄다. 시추공 기지의 최 과장이 가지고 있는 소형 무전기의 통신거리는 150킬로여서 지금까지는 문제가 없었으나 다음 주에는 기지본부를 동쪽으로 이동해야만 할 것이다. 유장석은 직원이 건네주는 무전기를 받았다.
「최 과장이야? 그곳 어때?」
대뜸 소리쳐 물었으나 그쪽 목소리는 가물거렸다.
「골짜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상무님.」
깊숙한 골짜기로 이동해 있기 때문에 목소리가 가물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눈이 엄청나게 내립니다. 그래서 방풍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골짜기라면 어떤 지형이야? 혹시 눈사태 만나는 것 아니야?」
「아닙니다. 구릉 사이의 꽤 넓은 골짜기여서 그런 염려는 없습니다. 구릉도 5, 60미터 높이로 나무가 빽빽해서 ‥‥‥」
가물거리다가 말이 끊겼으므로 유장석이 손에 든 무전기를 내려다보았다.
「이것, 우리 근대 제품을 써야지 미제는 아무래도‥‥‥‥」
무전기를 건네준 유장석이 벽에 걸려 있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최 과장의 위치는 이미 파악해 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김상철이다.
「이봐, 김상철한테 연락을 해. 그놈은 아마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김상철은 수화기를 귀에 댔다.
「예, 김상철입니다.」
「도착했나?」
유장석이 소리치듯 물었으므로 그는 앞쪽을 바라보았다.
「기지가 1킬로 전방에 보입니다, 상무님.」
「그곳은 어때? 기상이.」
「바람이 셉니다만 운행하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이곳하고 시추공 기지는 눈보라가 심해서 움직이지도 못한다. 시추공 기지는 이동하다가 대피했어. 그러니 너도 그곳에서 쉬어.」
「알겠습니다, 상무님.」
수화기를 무전기에 걸어 놓자 이바노프가 그를 바라보았다.
「김, 무슨 일이요?」
「서쪽 지역에 눈보라가 심해서 여기서 쉬라는 거야.」
「잘 됐군.」
탐사기지는 툰드라 지역을 벗어나 내륙의 평원 지역에 진출해 있었다. 시추공 기지보다 북방으로 50킬로쯤 떨어진 위치였고 본부로부터는 직선거리로 130킬로가 된다.
그들이 기지에 도착하자 전 과장이 강풍에 머리를 숙이며 다가왔다.
「잘 왔어, 김상철 씨.」
그는 30대 중반으로 마른 몸매의 사내였는데 원자력 발전소 시설 전문가였다. 유장석이 믿을 만한 부하만을 뽑다 보니 그도 걸려들었는데 이곳의 상황이 아무리 험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전 과장은 김상철의 팔을 끌고는 비어 있는 박스 트럭 안으로 들어섰다.
「문제가 있어, 김상철 씨.」
방한모를 벗으며 전 과장이 말했다.
「탐사기가 아침부터 작동하지 않아. 그래서 메뉴얼을 달랬더니 여자가 버렸다는 거야.」
「서은영이가 말입니까?」
「조금 전에 이윤제가 말해주었어. 그 여자가 오는 도중에 버렸다고.」
김상철이 잠자코 전 과장을 바라보았다.
본부에 사흘간 잡아두었던 서은영을 감시 직원 하나를 딸려 이곳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말썽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고하셨습니까?」
김상철이 묻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그리고 날이 개면 서은영을 자네가 데리고 돌아오라는 지시였어.」
「또 말입니까?」
「이윤제가 조금 전에 실토했는데 서은영이 협박을 했다는 거야. 이번에 그자가 받은 사례금을 반분하지 않으면 탐사기 작동법을 알려주지 않겠다고. 그래서 할 수 없이 허락했다는데.」
「그럴 리가, 그 여자는 이윤제의 정부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글쎄, 나도 이 부장한테서 들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했어. 둘은 서로 거의 말도 하지 않았고 물론 잠자리도 따로였거든.」
「시베리아까지 와서도 여자가 말썽이야.」
「어쨌든 서은영이 탐사기를 고장 낸 것이 틀림없군요. 과장님.」
「틀림없어. 나하고 오상원 씨가 하루 종일 매달려서 조사해 보았더니 결국 컴퓨터 칩 두 개가 없어졌고 작동선이 끊겨져 있더군. 선은 이으면 되겠지만 칩이 없으면 저 기계는 버려야 돼.」
전 과장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여자에게 다그쳤더니 본부로 보내 달라는 거야. 거기서 유 상무와 이야기를 하겠다고. 내 말에는 꿈쩍도 안 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벗어들고 있던 방한모를 머리에 썼다.
「이거 왜 이래!」
김상철에게 잡힌 팔을 뿌리치려고 애를 쓰면서 서은영이 소리쳤다.
「놔! 이 자식아!」
바람은 세었지만 아직 한낮이다. 러시아 병사들이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김상철은 서은영을 끌고 자신의 트럭 앞으로 다가갔다. 옆쪽의 랜드로버에 기대서 있던 이윤제가 그들이 다가오자 머리를 돌렸다.
「이바노프!」
러시아어를 익히기 위해서 한쪽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트럭의 운전석 문을 열면서 김상철이 소리쳐 부르자 이바노프가 달려왔다.
「이 년을 차 안으로 밀어 넣어!」
「옛 써.」
이바노프가 서은영을 뒤에서 번쩍 안아 들었다. 운전석에 오른 김상철은 서은영과 이바노프를 싣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이제 바람 끝에 눈발이 실려 있었다. 와이퍼를 작동시킨 김상철이 차에 속력을 내자 이바노프에게 안겨 몸부림을 치던 서은영이 소리쳤다.
「이것 놔! 따라갈 테니까.」
한국말이었으므로 이바노프는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 반응이 없다.
「이바노프, 그만 풀어 줘.」
김상철의 말에 이바노프가 떨어졌다. 트럭을 스치고 지나는 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고 몰아치는 눈발도 점점 굵어져서 시야가 좁혀지고 있었다. 서은영이 머리를 들고 김상철을 쏘아보았다.
「왜 폭력을 써서 끌고 가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날 본부로 보내 달라고 했는데 말로 하면 될 것 아냐!」
앞쪽은 직선 코스로 횐 눈에 덮인 평원을 10킬로쯤 달리면 울창한 삼림에 덮인 구릉지대가 나온다. 서은영이 말을 이었다.
「난 돌아가겠어. 보내주지 않으면 너희들 회사를 고발할 거야. 모조리.」
「‥‥」
「내가 근대그룹의 조사단원으로 시베리아로 떠난 건 모두 다 알아. 너희들은 날 어떻게 하지 못해.」
트럭은 이미 나 있는 바퀴 자국을 따라 제법 속력을 냈지만 눈발이 세지면 자국을 찾기 힘들어질 것이었다. 시간은 오후 3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바노프가 힐끗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속력을 내 달리던 트럭이 가끔씩 바위나 웅덩이를 지나면서 기우뚱거렸으므로 이제 이바노프는 그녀의 몸에 닿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20분쯤 달려갔을 때 김상철은 눈보라 속에 희미하게 나타난 숲을 보았다. 이제부터 구릉 지역이었고 끝없이 숲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구릉 지역을 다시 10분쯤 달려간 김상철이 차를 멈추자 서은영과 이바노프가 동시에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너, 여기서 내려!」
김상철의 목소리가 차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어서! 끌어내기 전에.」
「날 어떻게 하려는 거야!」
목소리는 높았지만 그녀의 두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곧 이리떼들이 네 냄새를 맡고 몰려 을 것이다. 네 시체는 흔적도 없이 찢겨질 것이고. 그러면 아무도 못 찾지.」
서은영이 이를 악물었다.
「고발할 거다.」
「고발 못 하도록 없앤다는 거야.」
김상철의 시선이 이바노프에게로 옮겨졌다.
「이바노프, 이 년을 끌어내.」
둘이 주고받는 한국말에 잔뜩 귀를 기울였지만 답답하기만 했던 이바노프였다. 그는 서은영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놔!」
이제 서은영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놓지 못해!」
그러나 이바노프의 힘에 끌려 서은영은 차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밖은 이제 곧 영하 30도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김상철이 핸들을 틀어 트럭의 앞머리를 지질 탐사기지 쪽으로 옮겼을 때 서은영이 운전석의 문을 두드렸다. 트럭이 10여 미터를 달려 나가는 동안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트럭과 함께 달렸다. 트럭을 멈춘 김상철이 유리창을 내리고는 그녀를 바라다보았다. 넘어져서 이미 머리와 얼굴이 눈 범벅이 된 서은영이 흐느껴 울었다.
「한마디만 묻겠다. 컴퓨터 칩을 어디에 두었어?」
김상철이 소리쳐 묻자 서은영이 울음을 그쳤다.
「트럭 안에. 크림 통 속에.」
무전기를 꺼내면서 김상철이 서은영을 향해 다시 소리쳤다.
「기지에 연락해서 찾을 때까지 거기서 기다려.」
밤이 되자 눈발은 조금 기세를 잃었지만 바람은 점점 더 거세졌다. 본부 경비책임자인 림스키 상사는 트럭 밖으로 나와 좌우를 둘러보았다. 일주일 전부터 그의 제의에 따라 기지를 환하게 비추던 야외등을 모두 꺼 놓았으므로 밖은 먹물을 씌운 것처럼 어두웠다.
11시 30분이 되었지만 아직도 주위의 트럭에서는 희미한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들이 술을 마시며 떠드는 소리였다. 병사들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이곳의 분위기가 자유로운 데다가, 수당을 달러로 받게 될 희망 때문이었다. 술과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병사들의 사기를 한껏 높여주는 이유였다. 부대에서 가져온 식량과 부식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림스키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앞쪽의 화장실로 다가갔다. 병사들은 근대 직원들과 똑같은 식사를 제공받았다. 계약에는 없는 사항이었지만 유장석은 병사들 몫까지 식량을 보급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며칠 전에 세 대의 헬리콥터가 싣고 온 보급품 중에 보드카가 백 병이나 들어 있었는데 유장석은 그중 50병을 병사들 몫으로 나눠주었다.
화장실로 들어간 림스키는 트림을 하고는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는 버릇처럼 목을 뽑고는 눈높이에 있는 환풍기 구멍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화장실용 트럭과 맞닿아 있는 러시아군 트럭의 운전석이었다.
「망할 놈들 같으니.」
오줌 줄기를 내뿜으면서 림스키가 투덜거렸다. 운전석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이 개자식들이 어디로 갔지?」
투덜거리던 림스키의 눈이 커졌다. 운전석의 바깥쪽 문이 반쯤 열려져 있었던 것이다. 림스키는 아직도 오줌 줄기를 뿜는 자신의 물건을 서둘러 바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곧 다리가 뜨뜻해졌으나 그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벨트에 차고 있던 루가를 뽑아든 그는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 총은 스리코프가 차고 다니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화장실의 문고리를 움켜쥔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운전석에는 안드레이와 티코프 두 명이 보초 근무로 나와 있었다. 영하 40도가 되는 이런 상황에서 운전석이 비어 있는 데다가 문까지 열려있다면‥‥‥ 뻔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윽고 림스키는 어금니를 물고는 화장실의 문을 걷어차듯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허공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요란한 총성이 기지를 울리는 순간 림스키는 땅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비상! 비상이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면서 다시 몸을 굴렸을 때 옆쪽의 트럭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물체가 보였다.
「탕! 탕!」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며 림스키는 다시 몸을 한 바퀴 굴렸다.
「타타타타타.」
정확히 겨냥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총구는 모두 림스키를 향하고 있었다. 림스키는 둔중한 몸을 굴려 트럭 밑으로 들어갔다. 식은땀이 흘렸다. 연속적으로 들려오는 총성은 모두 트럭 바깥쪽에서 안쪽을 향한 것이다. 림스키는 식은땀을 흘리며 루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적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려고 눈을 번뜩였다. 술에 취하긴 했지만 그는 군인이었다.
총소리에 제일 먼저 뛰쳐 일어난 것은 이대각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따라 일어선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상무님은 여기 계십시오.」
아직 잠을 자지 않고 있던 같은 박스 안의 직원들도 서둘러 일어섰다. 밖에서는 이제 요란한 기관총 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터질 듯한 러시아어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박스 안을 두리번거리던 이대각이 급히 집어 든 것은 얼음을 깨는 조그만 손도끼였다. 총알이 박스의 철판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대각을 선두로 직원들이 구르듯 밖으로 나가자 유장석도 방한복의 지퍼를 올리지도 못한 채 밖으로 뛰어내렸다. 이미 무장을 갖춘 러시아 병사들도 대부분 바깥으로 뛰쳐나와 요란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전실로 달려가던 유장석이 무엇인가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는데 감촉으로 보아 사람 같았다.
「이 부장! 이 부장 어디 있나!」
엎드린 채 그가 소리치자 총성 속에서 이대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깁니다! 무전실 앞입니다!」
그 순간 요란한 폭음과 함께 수류탄이 터지면서 트럭 한 대가 기우뚱거리며 옆으로 넘어졌다.
「이 부장! 불을 켜라!」
무전실 안에는 기지의 안팎에 세워진 전등의 스위치가 있다.
유장석은 눈바닥을 더듬거리며 발에 걸렸던 물체 쪽으로 다가갔다.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인지 구분할 수는 없다 그의 더듬는 손끝에 차갑고 딱딱한 물체가 잡혀졌으므로 그는 서둘러 움켜쥐었다. 그가 찾고 있던 총이었다. 그 순간 사방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갑작스런 불빛에 유장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대각이 전등을 켠 것이다. 유장석은 바깥의 트럭 대열 사이에서 엎드리거나 서 있는 사내들을 보았다
「쏘아라!」
목이 터져라고 이쪽에서 외치는 사람은 림스키일 것이다. 이쪽에서 빗발처럼 총탄을 쏘아대자 저쪽은 순식간에 네댓 명 쓰러지더니 트럭의 바깥쪽으로 몸을 숨겼다.
「쫓아라!」
림스키가 권총을 휘두르며 달려 나갔고 부하들이 뒤를 따랐다.
「상무님!」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이대각이 그의 옆에 눈보라를 일으키며 엎드렸다. 그의 손에도 어디서 주웠는지 칼라시니코프 소총이 쥐어져 있었다. 전등이 켜지면서 쌍방이 노출된 상황 하에 총격을 주고받자 습격자들은 곧 어둠 속으로 물러갔다. 습격자의 정체는 예상했던 대로 그레고리 소령의 무리라는 것이 포로로 잡힌 부상자의 입을 통해 밝혀졌다. 그들은 10여 일 전부터 기지를 염탐했다는 것이다. 김상철과 이바노프가 보았던 불빛도 결국은 그들의 차량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모두 20명이 기지를 습격했다가 일곱 구의 시체와 두 명의 포로를 남기고 도망쳤는데 이쪽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20여 명 병사 중에서 네 명이 죽고 여덟 명의 부상자가 생긴 것이다. 그중 두 사람의 부상자가 근대그룹 직원이었다.
아침이 되자 간밤을 꼬박 새운 사람들은 이곳저곳에 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지친 몸을 쉬었다. 다행히 무전기는 파괴되지 않아서 유장석과 림스키는 제각기 상황을 보고할 수 있었다. 유장석이 부상당한 주방장 양씨와 장대리를 살펴보고 있는데 트럭 안으로 림스키가 들어섰다.
「유상무, 그레고리는 이곳에서 200킬로 남서쪽의 주그주르 산맥 중간 부근에 있다는 거요.」
림스키가 벽에 붙여 놓은 시베리아 지도의 한 곳을 손끝으로 짚었다.
「본래 그레고리가 지휘해서 습격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정찰을 하던 놈들이 제멋대로 쳐들어온 겁니다.」
「상사, 당신이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몰살당할 뻔했습니다. 고맙소.」
「천만에, 난 내 임무를 다했을 뿐이오.」
「도망친 놈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그 인원으로는 힘들 거요. 그레고리에게 돌아가서 전 병력을 끌고 올 가능성은 있지만.」
「그레고리의 무리는 몇 명이나 됩니까?」
「약 백 명. 대부분이 러시아군을 탈영한 놈들이오.」
「도대체 목적이 뭐요? 돈인가요?」
유장석이 묻자 림스키가 당연한 일이 아니냐는 듯 눈을 크게 떠 보였다.
「물론이오. 당신들은 달러를 엄청나게 갖고 있다고 소문이 난데다가 이곳 장비들을 탐내고 있소.」
「그렇다면 그레고리가 다시 습격해올지도 모르겠군. 물론 당신은 사령관에게 보고를 했겠지요? 상사.」
「했소. 하지만‥‥‥‥」
「하지만 뭐요?」
유장석의 시선을 받은 림스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헬리콥터가 투입되어야 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큰 작전이니까요.」
「러시아 정부는 우리를 보호해줄 책임이 있어, 상사. 우리가 죽고 난 후에 작전이 시작되면 소용없는 일이오.」
「글쎄, 나는 상부에서 하는 일은 모릅니다. 나는 상사일 뿐이오.」
유장석이 그를 향해 섰다.
「림스키, 우리도 무장해야겠소. 내 부하들은 모두 군 경력자들이니까 총기는 문제없이 다룰 수가 있어.」
「나는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는데.」
림스키의 말에 유장석이 눈을 부릅떴다.
「노획한 총과 전사자들의 총을 버려둘 생각이요? 우린 20명 가까운 인원이란 말이야. 놈들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숨어 있기만 하란 말인가?」
한동안 유장석의 시선을 받던 림스키가 이윽고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서로 돕도록 합시다. 하지만 이곳을 떠날 때는 무기를 모두 회수하겠소.」
「줘도 가져가지 않을 거요, 상사.」
흐린 하늘에서 눈발이 드문드문 떨어졌다. 바람도 불지 않는 이런 날씨에는 대개 폭설이 내린다. 지질 탐사기지의 러시아군 책임자인 에프게이 상사가 병사들에게 소리치며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본부가 습격당했다는 연락을 받고는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김상철은 방한복에 묻은 눈을 털며 트럭 안으로 들어섰다. 무전실 겸용으로 전 과장과 두 명의 직원이 숙소로 쓰고 있는 곳인데 트럭 안에는 전 과장과 이윤제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김상철 씨, 조금 전에 상무님한테서 연락이 왔어. 자넨 눈이 멎을 때까지 이곳에 남으라는 지시였어.」
전 과장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서은영이 문제, 잘 처리 했다고 하셨어. 그 여자는 자네가 떠날 때 데리고 오라는 거야.」
서은영은 숨겨 놓았던 컴퓨터 칩을 내놓고 기지로 돌아와서는 트럭 안에 박혀서 얼굴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어떡할 거요? 전 과장.」
이윤제가 찌푸린 얼굴로 전 과장을 바라보았다.
「우릴 이대로 잡고 있을 거요? 계약이고 뭐고 돈 도로 돌려줄 테니까 나도 본부로 가야겠소. 거기서 보급 헬리콥터를 타고 돌아가겠어.」
입맛을 다신 전 과장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이윤제는 어젯밤의 사건을 알고 있는 것이다. 숨길 이유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으므로 습격 사건을 말해주었는데 그때부터 이윤제는 돌아가겠다면서 고집을 부렸다.
「이렇게 위험한 지역이라고 말해주지 않은 것은 당신네 회사가 날 속인 거야. 나는 당신들을 위해 목숨을 걸 이유도 책임도 없단 말이오‥‥‥‥)
「글쎄, 이 교수님.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 어때서? 내가 유 상무한테 이야기를 해보겠다는데 왜 그것도 못 하게 하는 거요?」
김상철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전 과장이 머리를 들었다. 전 과장을 향해 입술만을 움직여 웃어 보인 김상철이 밖으로 나왔다.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눈발이 곧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무겁게 보이는 눈송이는 밤알만 했는데 마치 하늘의 깨어진 조각들이 흩어져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플라스틱 식판 위에 다른 식판을 뒤집어씌운 다음 모포로 감아 들어 온기가 식지 않게 만든 김상철은 트럭 안으로 들어섰다.
「식사 가져왔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서은영의 시선이 모포 뭉치로 옮겨졌다. 부속품 창고와 숙소의 겸용으로 쓰이는 이곳에서 이윤제와 서은영, 그리고 두 명의 근대 직원이 생활하고 있었다. 모포를 벗긴 김상철은 식판을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서은영은 어제 저녁부터 오늘 저녁까지 만 하루 동안 트럭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근대 직원 한 명이 점심때 그녀에게 빵과 우유를 가져다주었지만 손도 대지 않고 밀어놓았으므로 무안해진 그는 더 이상 상관하려고 하지 않았다. 김상철이 그녀 앞에 섰다.
「서은영 씨, 눈밭에서 죽지 못한 것이 분해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네 죄상이 폭로되어서 부끄럽기 때문이야?」
틱을 무릎 위에 대고 구부린 다리를 두 팔로 안은 채 서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상철은 그녀의 앞쪽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사람은 여러 가지야. 네가 이 교수의 정부라는 것은 러시아로 출발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우린 상관하지 않았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는 게 사람이니까.」
「‥‥‥」
「우리는 이 교수와 배까지 맞춘 사이니까 손발 맞추는 것은 더 수월하리라고 생각했었어.」
서은영의 퍼뜩이는 시선이 김상철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김상철이 상체를 숙여 서은영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는 네 주변의 사람들을 차례로 배신하면서 실속을 차리려고 했지만 내 눈을 피할 수는 없지. 나는 너 같은 계집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야.」
「‥‥‥」
「지금 무장 강도단들이 본부를 습격해서 10여 명의 사상자가 났고 이곳도 언제 습격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야. 네가 굶어 죽건 강도단에게 끌려가건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는데 우리 상관들은 심성이 착해. 밥을 먹이라고 나를 보낸단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도 말이다.」
「‥‥‥」
「눈이 그치면 본부로 간다. 널 데리고.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같이 갈 것이고 죽으면 그만이지, 나는.」
「‥‥‥」
「그리고 또 있어. 본부까지 100킬로가 넘는 거리인데 도중에서 네가 무장 강도의 습격을 받아 납치될 수도 있단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상철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넌 구역질 나는 년이야. 하지만 한 시간 후에 돌아와 그 개밥 그릇을 보겠다.」
병사들이 철조빔의 한쪽에 매단 줄을 당기자 탑형의 빔은 땅바닥에 밑 부분이 겨우 고정되었다. 제일 힘든 작업이었으므로 김진모는 숨을 내쉬었다. 이제 탑의 꼭대기로 올라가 시추공과의 연결 부위를 맞추고 트럭에 실린 모터와 전선을 배합시켜야 한다.
「이봐, 바닥 받침대를 단단히 고정시켜.」
조교에게 이르고 난 김진모는 트럭 쪽으로 다가갔다. 근대의 직원들이나 병사들도 기계 설치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작업 진행 속도가 빠르다.
「교수님, 괜찮을까요?」
박동원 대리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방한모와 방한복의 어깨에는 횐 눈이 가득 덮여 있었다. 그들은 대형 모터가 실린 트럭 위로 올라갔다. 5,000마력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근대그룹 제품이었다.
「솔직히 그 지질탐사는 믿을 수가 없어 그 최신형 기계라는 이상하게 생긴 것도 의심이 가고.」
전선을 꺼내 구분하면서 김진모가 말했다.
「이쪽 지역은 지각변동을 심하게 겪은 곳이야. 이론만 가지고 땅 표면을 긁어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어.」
「그래도 자료를 토대로 분석하는 과학적인 탐사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글쎄, 그 확률이 문제란 말이야. 저 작자들 꽁무니만 따라다니기 싫었는데 잘 됐어.」
본래 시추기지가 이동하려던 곳은 30킬로 동쪽의 삼림지대였다. 이윤제의 팀은 그곳의 암반과 지층을 분석하여 유전의 가능성이 있다고 컴퓨터 자료를 내놓았는데 확률은 3%였다. 김진모가 전선을 이으면서 옆에 선 박동원을 향해 웃었다.
「이곳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로 하지, 박 대리.」
그는 눈보라로 이동이 멈추자 아예 그곳을 파 내려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러시아 놈들에게 경비나 잘 서라고 해. 난 마누라를 머리맡에 앉혀두고 죽고 싶단 말이네.」
「눈만 그치면 군 병력이 헬리콥터에 실려 오기로 했습니다. 그 산적들 소굴도 곧 소탕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야지.」
머리를 끄덕인 김진모가 박동원을 올려다보았다.
「난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하루하루가 나에게 소중한 날이야.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나날이지. 보게.」
김진모가 눈발이 흩날리고 있는 옆쪽의 평원과 삼림을 손으로 주욱 가리켰다.
「이 거대한 땅,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던 이 땅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이제까지 아무도 몰랐어, 그런데 내가 처음 손을 댄단 말이야. 이건 숫처녀 옷을 벗기는 것보다 백배나 더 나를 감동시키고 있는 거야.」
그레고리는 검고 짙은 콧수염을 기른 40대 초반의 사내였다. 본래 그는 구소련 시대에 소령 계급의 부대 지휘자였는데 소련의 연방제국이 붕괴되고 러시아 체제의 군으로 개편되자 무리들을 이끌고 탈영, 강도단의 수괴가 되었다. 따라서 그는 부대이동과 공격, 방어 등 러시아군 전술에 통달해 있는 사람이었다.
주그주르 산맥 안쪽의 깊숙한 삼림 지역을 본거지로 삼고 있던 그레고리가 부대이동을 시작한 것은 그의 부하 바토프가 반 이상의 부하를 잃고 도망쳐 온 다음 날이다. 바토프는 한국인들의 기지를 정찰하는 임무를 띠고 22명의 부하를 이끌고 떠났는데 트럭 한 대의 엔진이 고장이 난데다가 식량도 바닥이 난 바람에 기지를 습격했다는 것이다.
기지에 주욱 늘어서 있는 신형 트럭들과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냄새의 유혹을 참기 힘들었고 더욱이 기지의 경비가 허술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레고리는 부하들이 모인 가운데 바토프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는 웃는 얼굴로 권총을 꺼내 바토프의 이마를 향해 한 발을 쏘았다. 바토프는 12명 전원이 죽었다고 말했지만 부상당한 몇 명은 포로로 잡혔을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리고 포로로 잡힌 부하가 이쪽의 본거지를 자백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이다.
이동 이틀째 되는 날, 눈보라 때문에 10미터 전방도 보이지 않는 오후였다. 선두에 서서 길을 만들며 나아가던 장갑 트럭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대장님, 전방에 표시판이 보입니다.」
「그럼, 다 왔군.」
그레고리가 옆자리에 앉은 부관 바야킨을 바라보았다
「예정보다 다섯 시간이 늦었다.」
「이런 폭설에 그만큼 늦은 것도 다행입니다, 대장님.」
장갑차를 선두로 16대의 차량이 줄을 이어 눈 속을 전진하고 있었는데 눈보라가 아니었다면 정찰기에 의해 금방 발견되었을 것이다. 이윽고 그가 탄 차는 옆쪽에 세워진 커다란 나무 간판을 스치고 지나갔다. 글씨는 눈에 덮여 보이지 않았으나 붉은 깃발이 눈에 띄었다.
한동안 벌거벗은 구릉 사이를 달리던 차량의 대열이 멈춘 것은 꽤 넓은 평지에서였다. 그레고리가 차에서 내리자 동양인 한 명이 다가왔다. 그의 뒤쪽에는 수십 명의 동양인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레고리 동지, 잘 오셨소.」
유창한 러시아어로 말하며 손을 내민 것은 북한의 시베리아 지역 벌목사업소장인 홍기표이다. 차량의 주위로 북한의 경비병들이 떼지어 몰려들었고 안면이 있는 몇 명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레고리는 간부급 부하들과 함께 홍기표를 따라 통나무로 만든 그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페치카에서 굵은 장작이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는 집 안은 따뜻했다. 홍기표는 시베리아에 흩어져 있는 네 곳의 벌목사업장을 총괄하는 사내로 당의 직급도 부부장급이었다. 곰가죽을 깐 의자에 앉은 그레고리에게 사내 한 명이 다가와 김이 오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넓은 통나무집 안에는 페치카가 반대쪽에도 하나 더 있었으므로 부하들은 모두 그쪽으로 몰려가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2년 가깝게 거래를 해왔으니 간부급들은 서로 이름을 외울 정도가 되었지만 누구 하나 죽었다고 해도 상대방은 눈 한번 깜짝해 주지도 않는다. 북한의 벌목공이나 고용된 사냥꾼들이 잡은 짐승의 가죽을 그레고리가 사 가는 것이 그들의 거래관계였는데 이번에도 흥기표가 만나자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그레고리가 입을 열었다.
「요즘, 많이 잡았습니까? 홍동무.」
그는 아직도 동무 칭호를 쓰고 있었는데 그렇게 부르면 흥기표가 친밀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별로. 그나저나 동무가 이쪽으로 무사히 오셔서 다행이오. 눈보라가 도와준 것이지만,」
홍기표의 말에 그레고리가 눈썹을 모으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게 무슨 말이요?」
「눈이 그치면 러시아 정찰기가 주그주르 산맥을 샅샅이 훑어갈 테니까요. 하지만 이곳은 마음을 놓으셔도 됩니다. 러시아군도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고 의심도 안 할 테니까.」
「‥‥‥‥」
「며칠 전에 한국 놈들 기지를 습격했다가 실패한 것을 압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눈보라가 그치면 동무의 본거지를 소탕하기로 했다는 것도. 무전이 내 머리 위를 지나가거든·」
그는 손을 들어 위쪽을 가리켰다.
「그래서 동무한테 급하게 만나자고 한 겁니다. 혹시나 몇 명만 오면 어쩌나 했지만 동무라면 이 기회에 모두 데려올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예민하신 분이니까.」
「허어, 이런 고마울 데가.」
그레고리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나와 내 부하들을 위험에서 구해주려고 연락을 해주셨군. 동무가.」
「그런 셈이지요.」
홍기표가 붉은 얼굴을 부풀리며 웃었다. 50대 중반의 나이였으나 어깨가 넓고 움직임이 빠르다. 그리고 성격이 잔인해서 2천 명 가까운 벌목공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었다.
「우리는 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레고리 동무.」
「러시아 영토 안에서 불법행위를 하는 것 말이요?」
웃음 띤 얼굴로 그레고리가 묻자 홍기표는 정색을 하고 머리를 저었다.
「그까짓 밀렵이나 마약 밀매는 러시아 정부 놈들이 우리보다 더하지요. 그런 건 불법도 아니오.」
「그럼 공통점이 무어요?.
「한국 놈들 기지를 불바다로 만들고 한국 놈들을 몰살시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오.」
「‥‥‥」
「서로 힘을 합치면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소. 그레고리 동무.」
「그렇다면 같이 습격해서 전리품을 나누자는 말인가?」
그러자 홍기표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니오. 전리품은 모두 동무가 가지시오. 우린 구두 한 켤레 가져가지 않겠소.」
「‥‥‥」
「이제 짐작하시겠지만 우리가 바라는 건 위쪽에 있는 한국 놈들을 몰살시키는 것뿐이오.」
그레고리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그 일을 저지른 것이 이 그레고리 파트킨이라고 알려져야겠지. 당신들은 배후에 숨고.」
「당연하지. 어쨌든 동무는 한번 실패해서 놈들에게 이름이 알려졌으니까.」
그러자 그레고리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협상을 다시 해야겠는데. 당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당하는 대신 보상을 받아야겠군. 그 기지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재물은 빼고.」
6. 유혹
「그 망할 놈들, 눈이 그쳤으면 당장에 군인들을 올려보내야 할 것 아냐!」
강회장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안 되겠다. 내가 모스크바에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해서 결판을 내야겠다.」
강회장이 당장에 모스크바로 달려갈 기세였으므로 이남호가 질색을 했다.
「진정하십시오, 회장님.」
「진정할 일이냐? 이게?」
「정찰기가 하루에 다섯 차례씩 기지 상공을 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정찰만 하면 뭘 해? 그놈들, 또 돈타령인가? 이 마당에.」
무장 강도단의 습격을 받아 사상자가 생겼다는 것은 강 회장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쪽의 치안 상태가 좋지 못하고 산적이 출몰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군대가 경비하고 있는 기지를 습격해 올 정도로 심각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남호가 강 회장을 바라보았다.
「회장님, 안팎으로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어제 중공업의 차관도입 건도 재경원에서 보류되었습니다.」
「알고 있어.」
「이제는 청와대에서 직접 나서는 모양인지 정부 측에선 근대의 일에는 손을 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 년이야, 일 년만 참아라.」
강회장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내가 몇 배로 해서 이 밎을 갚을 테니까. 이놈들, 권불십년이 아니라 권불일년이다. 그동안 근대는 망하지 않는다.」
「회장님.」
「쓸데없는 소리 하려거든 나가.」
「개척단을 귀국시키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당분간만 말입니다.」
강회장이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너, 나가!」
「회장님.」
「이 망할 놈아. 그게 고작 네 머리에서 생각해낸 방법이냐!」
눈을 부릅뜬 강회장이 버럭 소리 질렀다.
「내가 만들어 낸 마지막 꿈이 그것이다, 이놈아.」
「‥‥‥‥」
「난 포기 못 한다. 절대로.」
강회장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두 손으로 팔걸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대통령 면담을 신청해, 당장.」
「예, 회장님.」
이남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통령 면담이야 신청하겠지만 저쪽에서는 들은 척도 안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회장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시원하게 대답이나 한 것이었다. 주춤거리며 서 있던 이남호가 결심한 듯 강 회장을 바라보았다.
「부상자 두 명은 어제 헬기 편으로 하바로프스크의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지질탐사단의 그 문제 된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교수도 돌아가겠다고 항의를 하는 모양입니다.」
「그럴 순 없어. 그 년놈들을 잡아놓으라고 해,」
「예, 회장님.」
「내가 곧 그곳에 가겠어. 목숨을 걸고 있는 내 직원들을 만나보고, 그곳 땅도 밟아보고 올 테니까.」
「아니, 제가 가지요, 회장님은 이곳에서‥‥‥‥」
질색을 한 이남호가 한 걸음 다가섰으나 강 회장은 어서 나가라는 듯 머리를 돌렸다. 자리에 앉은 이남호는 전화를 끌어당기고는 번호판을 눌렀다.
그룹 회장실이 부동산 중개소 사무실보다 나을 것이 없었으니 비서실장 방이 따로 있을 리가 없다. 비서실 안쪽에 테이블을 놓고 옆에 소파를 가져다 놓는 것으로 대신했으므로 그의 기색이 심상치 않은 것이 모두에게 드러났다.
「여보세요.」
직통전화였으므로 총리실의 비서실장 안영복이 전화를 받는다.
「아, 안 실장님, 나 이남호요.」
이남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아니, 이 실장님이 웬일이시오?」
안영복과는 몇 번 술자리를 같이한 적이 있는 사이였다.
「바쁘신데, 다름이 아니라 우리 영감님께서 각하를 만나시겠다는데, 지금이라도 당장 청와대로 가시려고 해서 내가 겨우 말렸단 말입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로.」
안영복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무슨 일 있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그 차관 문제로, 재경원에서 보류시킨 중공업 차관 말이오.」
「아아‥‥‥‥」
「영감님 성격이 흥분하시면 물불을 안 가리시니까. 재경원이 오버 액션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재경원에 연락을 할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안 실장께 말씀드리는 거요. 영감님이 그 일 때문에 각하 면담을 하려고 하신다고.」
「알겠습니다.」
「총리께 놀라지 마시라고 미리 말씀드리라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남호가 한동안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이남호는 다시 전화기의 번호판을 눌렀다. 청와대 총무수석실이다. 그가 이름을 대자 총무수석 최영석이 아는 체를 했다. 그는 호인으로 권모술수에 능해야 하는 정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실장께서 웬일이십니까?」
「수석님, 다름이 아니라 저희 회장께서 각하 면담을 원하고 계셔서요, 그저 인사나 드리겠다고 하시는데.」
「그냥 인사차 말씀입니까?」
「예,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이유 없이 강 회장을 만나줄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시베리아 지역 임차 문제로 만나고 싶다고 한다면 더욱 감정만 사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말씀드려 보지요.」
최영석이 정중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대통령이 그대로 전해 듣는다면 애가 타는 모양이라고 예상할 것이지만 감정이 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남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총리실과의 분위기는 손톱만큼이나마 나아지게 되었고 재경원에는 압박을 가한 셈이었다. 이남호는 그냥 해본 소리였으나 재경원이 오버액션을 했다면 어떤 반응이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남호는 머리를 들었다.
이쪽의 문제는 시베리아인 것이다. 영감은 차관 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고 오직 시베리아 개발이 관심의 전부였다.
「이봐, 한 이사 어디 갔나?」
앞쪽을 지나는 여직원에게 묻자 그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사님은 통상 산업부에 가셨습니다.」
한일만 이사는 시베리아 건의 담당 이사로 그룹 내의 실무책임자였다.
「그렇다면 그쪽 부서 사람 하나 이리 오라고 해.」
「제가 한 이사님 소속인데요.」
그러고 보니 조금 낯이 익은 얼굴의 여직원이다. 이남호가 머리를 끄덕였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무슨 연락 왔는지 알아보고 와.」
「예, 실장님.」
잠시 후에 그녀가 서류철을 손에 들고 다가와 섰다.
「여기 있습니다, 실장님,」
그녀의 산뜻한 외모와 빠른 동작에 마음이 풀린 이남호가 머리를 끄덕이며 서류를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에 붙은 이름을 읽었다. 박미정이었다.
저녁 8시. 회사 앞의 카페에는 간단히 한잔하려는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박미정이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안쪽에 앉아 있던 안인석이 손을 들었다.
「기다렸어?」
테이블 위에 놓인 두어 개의 맥주병을 보며 묻자 안인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30분쯤.」
「일찍 끝나네? 요즘은.」
「그런 셈이지.」
「피곤해 보여, 안인석 씨.」
「그래?」
안인석이 손바닥으로 볼을 쓸었다.
「아닌 게 아니라 좀 지쳤어.」
「입사 2개월이 조금 넘었는데 그런 소리를 하다니 군기가 빠졌어.」
「그런가 봐.」
농담처럼 말했는데도 정색을 하고 대답하는 안인석을 보자 박미정도 얼굴 표정을 바꿨다.
「어떤 스트레스야?」
그녀가 묻자 안인석이 술잔을 쥐었다.
「없어, 그런 건. 다만 치열한 분위기가 연속되니까 지칠 뿐이야.」
거품이 빠져나간 맥주를 벌컥이며 마신 안인석이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가 술 한잔하자면서 그녀를 불러낸 것이다.
「사생결단을 하는 것처럼 일에 매달리는 그들에게 적응이 안 된다고 할까?」
낮은 목소리로 안인석이 말을 이었다.
「목표, 실적, 평가, 개발. 그런 구호들이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야.」
「신입 하나가 내 자리로 들어왔다며?」
「왔지. 천방지축 뛰면서 튀려는 놈이야. 도무지 나하고는‥‥‥‥」
「야단났네.」
웃음 띤 얼굴로 박미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
「그건 아냐. 내 자신의 문제지,」
「오기 같은 거, 경쟁자에게 지지 않겠다는 그런 자세, 그것이 도움이 안 될까?」
「경쟁자라니? 우리 조에 들어온 미스터 차 같은 놈? 말도 안 돼.」
안인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하기는 그 경쟁심이 원동력이 되겠지.」
「김상철 씨는 지금 시베리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 매일 그 사람 이름이 팩스에 적혀져 오고 실장과 회장에게 보고가 돼, 그건 김상철 씨가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되었을까?」
「경쟁자를 가지라는 말이 상철이를 두고 한 말이었어?」
「자극을 받으라고.」
「그래, 자극을 받지, 기쁘다는, 그 자식이 인정을 받아서 기쁘다고 말이야.」
「대단한 친구군.」
그러자 안인석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넌 만날 때마다 상철이 얘기를 꺼내는데, 내가 소개시켜 주지 않아도 네가 찾아갈 것 같은데, 맞아?」
「그럴 리가.」
술잔을 든 박미정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누가 소개시켜 주지 않아도 우리는 만나게 되어 있어.」
「그것 참, 조금 있으면 운명이 어쩌구 할 것 같은데.」
안인석의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미정이, 넌 참 밝고 깨끗해서 좋아.」
「참, 내.」
박미정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칭찬, 어설프네. 그건 그렇고 인석 씨 애인은 어디에 두었어? 어디에 두고 딴 여자한테 아부야?」
「LA에 갔어.」
잔에 술을 채우면서 안인석이 말했다.
「사원 연수로, 닷새간.」
코리아타운에서 점심을 마친 이유미가 호텔에 돌아왔을 때는 오후 3시 30분이었다. 저녁에는 현지 대리점의 김 대리와 약속이 있었으므로 두 시간쯤 쉴 생각이었다. 프런트로 다가간 그녀가 키를 받아들었을 때 직원이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
「미스 리, 손님이 와 계십니다. 오시는 대로 바(bar)로 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기다린다고.」
「누군데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밝히지 않으셨군요.」
대리점의 직원이 본사의 연락을 받고 왔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붉은색 카펫이 깔린 계단을 올라 2층의 바로 들어섰다. 한낮인데도 어둡고 붉은색 조명이 비치는 조용한 장소였다. 멈춰 선 그녀가 실내를 둘러보았을 때 벽 쪽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그쪽으로 두어 걸음 다가간 이유미가 주춤 발을 멈췄다. 홍만규였다.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운 흥만규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이유미의 앞에 와 섰다.
「사장님께서 여긴 웬일이세요?」
「LA에 볼일이 있어서 들렸다가 신입사원 연수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나서.」
그들은 조그만 스탠드가 켜진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놀랐어요. 사장님이 여기 오실 줄은‥‥‥」
긴장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이유미가 주저하며 말했다.
「글쎄, 나도 어색합니다. 이렇게 여사원을 만나는 것도 처음이어서.」
「LA에는 언제 오셨는데요?」
「어제 아침에. 이유미 씨보다 하루 늦게 출발한 셈이지요.」
홍만규가 부드럽게 웃었다.
「어때요? 구경 많이 했습니까?」
「구경은요, 교육받으러 온 것인데.」
「이런 데까지 와서 교육은 뭘. 도시 구경하고, 에이전시가 어디서 무얼 하는가 정도만 알고 돌아오면 되는 거지요.」
홍만규가 다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미끈한 용모에 맞춤 양복이 흠잡을 곳 하나 없이 말쑥한 홍만규의 특징은 자주 웃는 것이었다. 이유미의 가슴은 아까부터 세차게 두근대고 있었다.
「나는 신입사원들에 대한 보너스로 관광여행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간부들이 목적을 바꾸더군요. 사원연수, 대리점 업무 파악 등으로.」
칵테일 잔을 쥔 흥만규의 손톱은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왼쪽 셋째 손가락에 끼워진 가느다란 금반지가 길고 횐 손가락과 잘 어울렸다.
「어때요? 오늘부터 나하고 관광을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가이드가 되지요.」
홍만규가 이유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입술에 웃음을 띠었으나 시선은 흔들리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지요. 나는 이유미 씨와 둘이 있고 싶어서 LA에 온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나에게 처음입니다.」
「‥‥‥‥」
「이유미 씨를 처음 보았을 때, 입사 인사를 하려고 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흥적인 일이 아닙니다.」
「저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 아세요?」
「‥‥‥‥」
「설령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제가 사장님을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이런 상황은 싫어요. 직장을 담보로 하는 거래같이 느껴지니까요.」
흥만규가 정색을 했다.
「난 나를 알려드릴 시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서울에서는 힘이 들었어요. 이유미 씨에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보겠어요.」
이유미가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오늘 저녁 때까지만이라도요.」
호텔로 들어선 흥만규는 곧장 프런트 옆쪽의 구내전화 박스로 다가갔다. 번호판을 누르면서 힐끗 시계를 보았다. 저녁 7시 5분이다. 약속 시간보다 5분이 지난 것이다. 신호가 갔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으므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로비 안을 둘러보았다. 저녁 7시면 손님들로 붐비는 시간이다. 로비에 가득 찬 사람들을 한동안 둘러보던 그는 프런트로 다가가 직원에게 말했다.
「1425호실에서 메모를 남겼나 봐줘요.」
프런트 직원이 컴퓨터를 두드리더니 머리를 들었다.
「1425호 손님, 체크아웃하셨습니다.」
「아니, 언제?」
「오후 4시 30분에 나가셨군요.」
얼굴을 굳힌 흥만규에게 금발의 여직원이 웃어 보였다.
「미안합니다. 메모 남긴 것도 없군요.」
그 시간에 이유미는 공항의 대합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대한항공의 LA발 서울행 824편의 출발시간은 밤 10시였지만 시내에서 어물거리며 남은 시간을 보내기 싫었던 것이다. 대합실에는 한국인 승객들이 많았으므로 떠들썩한 한국말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아이들이 그녀의 앞을 뛰어 지나갔다가 이제는 좌석을 중심으로 정신없이 뛰어 돌았다. 예닐곱 살짜리의 한국 아이들이었는데 주위에 앉은 사람들은 좋은 기색이 아니면서도 아이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유미는 책을 덮었다.
「그만해!」
이유미가 소리치고는 앞을 지나는 비대한 체격의 사내아이를 잡았다.
「뛰지 마, 여긴 네 집이 아니야, 알았어?」
그녀의 쨍쨍한 목소리가 주위를 울리자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내아이가 이유미의 손을 뿌리치고 주춤거리며 물러났는데 잔뜩 볼이 부은 얼굴이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회사에 사표를 낼 생각이었다. 회사에 들어갈 필요도 없다. 오 과장이나 박 대리에게 전화를 해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만 말하면 된다. 다시 책을 읽던 이유미는 책을 편 채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귀에는 탑승 안내방송과 주변의 이야기 소리, 은은히 울리는 비행기의 폭음이 모두 들렸다.
얼마쯤 선잠에 빠져 있던 이유미는 탑승 방송과 함께 주변의 수선대는 기척에 눈을 떴다. 바로 앞에 누군가가 이유미를 가로 막고 서 있었다.
「왜 이럽니까?」
굳어진 얼굴로 홍만규가 물었다.
「나는 좋아하는 여자한테 마음을 드러내면 안 됩니까?」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만 아니었다면 저도 조금 여유 있게 생각할 수도 있었어요,」
가방을 쥔 이유미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깜박 잠이 든 줄 알았는데 두 시간 가깝게 졸았던 것이다. 안내판에는 탑승 신호등이 켜져 있었다.
「이유미 씨, 모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택을 강요받은 것 같은 느낌까지도. 하지만 나 또한 이유미 씨의 선입견에 기회를 잃고 있습니다.」
홍만규가 이유미의 가방을 잡았다.
「나에게 기회를 주세요. 이유미 씨, 홍만규를 알려드릴 며칠간 만 기회를 주십시오. 난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한동안 홍만규를 바라보던 이유미가 어깨의 힘을 풀었다.
「사장님 소리는 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눈을 깜박이며 이유미의 말뜻을 잠시 생각하던 홍만규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어느 사이에 활짝 웃고 있었다.
「물론이오. 나도 그걸 바랍니다.」
행방불명이 된 스리코프 대위의 후임으로 알렉세이 대위가 온 것은 눈보라가 멈춘 사흘 후였다. 모처럼 착륙한 헬리콥터에서 알렉세이 대위는 거드름을 피우며 내렸는데 그의 뒤로는 부관과 세 명의 병사가 따르고 있었다. 트럭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선 채 알렉세이를 바라보던 유장석이 혼잣말을 했다.
「저 자식이 얼마나 오래 살지 궁금하군.」
「글쎄요. 부관까지 데려왔는데요, 저놈은.」
이렇게 말하며 이대각이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프로펠러가 일으킨 눈보라가 아직도 휘날리는 착륙장 안이었다. 알렉세이에게 다가간 림스키가 경례를 했는데 절도가 있었다. 알렉세이도 멋진 동작으로 경례를 받았다.
「자, 우리도 가볼까.」
유장석이 앞장을 서자 이대각이 뒤를 따랐다. 횐 눈 위를 걸어 이쪽으로 다가오는 알렉세이는 긴 코트에 방한모를 단정하게 쓰고 넓은 벨트에 권총을 비스듬히 찬 빈틈없는 차림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마주 섰다.
「사령관으로부터 당신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대위.」
유장석이 손을 내밀자 알렉세이가 빙긋 웃었다. 푸른 눈에 엷은 콧수염이 난 그는 많아야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레고리 일당은 곧 토벌될 겁니다.」
유장석과 함께 기지 쪽으로 걷던 알렉세이가 말했다.
「곧 주그주르 산맥에 공정대가 투입될 거요.」
「그것도 사령관에게서 들었어, 대위.」
유장석이 알렉세이의 어깨를 쳤다.
「대위, 내 트럭으로 들어가 보드카를 한잔합시다. 여기서는 보드카를 얼마든지 마실 수가 있소.」
알렉세이가 힐끗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근무시간에는 마실 수가 없습니다. 사양하겠소.」
「저런,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유장석이 발을 멈추자 알렉세이와 일행들은 곧장 병사들의 트럭 쪽으로 다가갔다.
「이 부장, 림스키에게 오늘 저녁부터 우리 막사로 식사하러 오지 말라고 전해.」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장석이 말하자 이대각이 눈을 치켜떴다.
「아니, 왜요?」
「림스키는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을 것이다. 난 저런 애송이들을 더 이상 우대하지 않겠어. 저희들끼리 처먹으라고 해.」
「그렇다면‥‥‥‥」
「림스키는 물론 장교들도 마찬가지란 말이다. 장교들이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면 림스키는 빠지게 돼, 지난번처럼.」
「아아, 예.」
「시간이 지나서 살아남은 놈이 있다면 초대를 하자. 지금은 식탁에 앉아서 어느 놈이 먼저 죽을 것인가 관상을 보기도 거북하니까.」
지질 탐사기지는 그동안 동쪽으로 30킬로를 이동해 있었지만 이윤제가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애를 먹는 중이었다. 그는 서은영과는 상황이 달라서, 계약조건을 위반한 것은 근대 그룹이니 당장에 계약을 취소하고 돌아가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시추공 팀의 김진모 교수는 이윤제를 책상물림의 샌님이라고 무시하고 있었지만 이윤제도 지질학에 대해서는 국내에 몇 안 되는 권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탐사자료는 임차지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될 것이었으므로 연락을 받은 유장석도 대책이 없어 난감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만 하루 동안 이윤제가 작업을 사보타주 하고 났을 때 서은영이 나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일을 맡겠다면서 이동을 서둘렀고 연락을 받은 유장석도 승낙을 했다. 그렇다고 이윤제를 돌려보낸다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이윤제는 새 이동기지에서 일손을 놓고 있었다. 물론 불만과 항의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전 과장과 언쟁을 했고 무전실에 들어가려는 그와 직원들은 몸싸움을 했다.
저녁을 마치고 김상철이 트럭을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저를 놓은 이윤제가 전 과장에게 내일은 혼자서라도 차를 몰고 본부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말다툼을 하는 그들을 남겨두고 밖으로 나온 김상철은 방한모를 단단히 조여 썼다. 바람이 셌다. 옆쪽의 러시아군 트럭 안에서는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는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세워둔 자신의 트럭으로 다가갔다. 보급품 운반 트럭이었지만 운전석 뒷자리는 훌륭한 침실이었고 히터를 켜놓으면 훈훈했다. 눈보라가 그치면 본부로 돌아가려던 그가 이곳에 닷새 동안 머물게 된 것은 유상무의 지시 때문이었다. 이윤제를 감시하라는 특명이 떨어진 것이다.
김상철은 트럭으로 다가가 운전석에 올랐다. 이윤제를 감시하라는 유상무의 지시는 모종의 암시를 포함하고 있었다. 지난번 서은영 사건의 처리를 유상무는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상무의 그런 생각은 어느 정도 효과를 얻고 있었다. 이윤제는 전 과장에게는 거품을 물고 대들었지만 김상철과 마주칠 때는 기세를 잃었던 것이다. 이윤제도 눈치가 빤한 사람이었으므로 서은영의 컴퓨터 칩 사건 때 김상철이 서은영에게 어떻게 했다는 것쯤은 소문을 통해서라도 알고 있을 터였다.
히터를 틀어놓은 트럭은 훈훈했다. 김상철은 방한모를 벗고는 캐비닛 위에 놓인 담배를 집어 들었다.
「저도 한 대 줘요.」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 놀란 김상철이 몸을 돌렸다. 서은영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는 왜?」
거칠게 그가 물었으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엔진만 켜놓은 트럭 안은 어두워서 그녀의 얼굴 표정은 살필 수가 없다.
「이봐, 왜 여기 온 거야?」
담배를 피워 문 김상철이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화를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이윤제 대신 탐사업무를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아마 이윤제에 대한 반발심이겠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놀랐잖아, 갑자기 뒤에서.」
「김상철 씨는 나이가 몇이에요?」
김상철이 담뱃갑과 라이터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스물여섯.」
「나하고 동갑이네. 난 서른쯤 된 줄 알았는데.」
「여자 있어요?」
「이봐, 쓸데없는 수작 그만해. 어서 용건을 얘기하고 나가.」
담배에 불을 붙여 문 서은영이 연기를 그에게로 내뿜었다.
「당신을 며칠간 관찰했어. 난 관찰력이 예민하거든.」
「‥‥‥」
「당신은 미친놈이야. 여기에 온 놈들도 모두 미친놈이지만 당신만큼 철저하게 미친놈은 없어. 더구나 신입사원 주제에.」
「높은 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살인까지 서슴없이 할 놈이야, 당신은.」
비스듬히 의자에 기댄 김상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체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오고 있었다.
「나도 강사 자리를 얻기 위해 몇 놈한테 달라는 것 다 주었어. 받는 놈이나 주는 년이나 당연한 거래라고 생각했지, 물론 후회는 없어. 거래였으니까.」
「‥‥‥」
「처음부터 이 일은 내키지 않았어. 이윤제가 고집하는 바람에 따라왔지만 계약을 하고 돈을 받은 것은 이윤제지 내가 아니야.」
「그런 말로 네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아.」
「알고 있어.」
서은영이 이쪽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내가 주도해서 일을 할 거야. 이윤제 대신으로.」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으므로 서은영의 눈이 보였다.
「당신, 설마 이윤제를 한국으로 돌려보내지는 않겠지? 돌려보냈을 때 어떤 부작용이 오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서은영이 손을 뻗어 김상철의 볼을 어루만졌다.
「당신한테는 털어놓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왔어. 나하고 거래를 하는 대신 저 쓸모없는 작자, 화근덩어리가 되어 있는 이윤제를 잡아둬 줘. 그자가 돌아가면 당신들뿐만 아니라 나까지 파멸하게 돼.」
이제 서은영은 두 팔로 김상철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야. 아마 당신 상관들도 묵인해 줄 것이고.」
「날 과대평가하고 있군.」
김상철이 서은영의 팔을 두 손으로 쥐었다.
「미친 놈하고 거래를 하자는 너도 온전한 여자는 아니야, 알아?」
사무실에 들어선 장국진은 방한모를 벗어들고 옷에 묻은 눈을 털었다. 칼끝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불고 있는 밖의 온도는 영하 25도였으나 사무실 안은 후끈한 열기에 덮여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위 동지,」
흥기표의 부하로 벌목사업소 경비책임자인 이호근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40대 중반의 이호근은 호위총국의 상사로 제대한 뒤 손을 써서 벌목사업소에 파견된 사내였다.
「내일 아침에 출발할 수 있을까요? 안개가 심한데.」
장국진이 페치카 옆의 나무 의자에 앉자 다가온 이호근이 그의 옆에 섰다.
「상관없소. 출발할 거요.」
자르듯 말한 장국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동무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거요. 내일 아침부터는 강행군일 테니까.」
장국진은 평양에서 파견된 대외정보국 요원으로 이번 작전의 실질적인 감독관이다. 그는 그레고리 일행과 함께 내일 아침 일찍 북쪽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벌목소에서는 이호근과 다섯 명의 경비원들이 차출되었다.
「우리야 시베리아 날씨에 익숙해 있지만 대위 동지가 걱정이오.」
이호근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장국진은 이제까지 중국과 러시아로 탈출하는 자들을 체포하는 임무를 맡아왔다. 따라서 국경선 부근의 지리에는 익숙했지만 이쪽은 처음인 것이다.
「남조선 아이들의 장비가 쓸 만하다니 나도 구경이나 좀 해야겠소.」
「모두 우리 물건이 아니니까 욕심낼 것 없소. 동무는.」
그러자 이호근의 번들거리는 시선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무실의 문이 열리더니 일군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눈바람이 휘몰려 들어왔으므로 페치카의 장작불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홍기표와 사업소의 직원들이었다. 의자에서 일어선 장국진을 향해 홍기표가 다가왔다. 눈가가 불그스름한 걸 보면 대낮부터 보드카를 마신 모양이었다.
「장 동무, 러시아 공수부대가 주그주르 산맥의 그레고리 본거지를 쳤어. 물론 빈 곳을 쳤지만 말이야.」
의자에 앉은 그가 옷에 묻은 눈을 떨었다. 그는 흩어져 있는 다른 벌목사업소와 정보원들로부터 정보를 받고 또한 평양과도 끊임없이 교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남조선 놈들의 기지에는 새로운 부대장과 부관이 부임해 갔을 뿐 증원 병력은 아직 가지 않았어.」
흥기표가 장국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증원부대가 편성이 될 거야. 동무, 그러니 서둘러야 돼.」
「사흘 후면 남조선 놈들의 기지는 없어지게 될 겁니다, 동지.」
장국진이 흥기표의 옆쪽에 있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철저하게 없앨 테니까요.」
「그레고리는 일을 마치면 레나 강 쪽으로 올라갈 작정이야. 그곳에서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릴 모양인데.」
꼬챙이로 장작을 쑤셔 불꽃을 만들면서 흥기표가 옆쪽의 장국진과 이호근을 돌아보았다.
「남조선 놈들은 월동 장비도 최신형으로 갖추고 있지만 달러도 많이 갖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그레고리는 꿩 먹고 알 먹는 셈이지,」
「그렇습니다, 소장 동지.」
장국진이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한테 5만 달러까지 받게 될 테니까요. 단숨에 팔자가 늘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뜬 김진모 교수는 모터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머리맡에 벗어둔 방한복을 입었다. 이제는 모터 소리만 들어도 이상 유무를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쪽은 부정합 상태의 지층으로 연속되었던 퇴적 현상이 멈췄다가 일단 육화하여 침식을 받은 후 다시 육지가 수면 아래로 침몰하면서 퇴적이 시작되었던 곳이다. 따라서 비틀린 지층이 뒤섞여 있어서 시추공은 사암을 뚫고 내려갔다가 다시 사암을 만나 하루를 소비하고는 곧장 파 들어가는 중이었다.
「교수님 일어나셨습니까?」
옆자리의 안조교가 모포를 젖히면서 일어섰다. 시베리아에 온 후로 면도를 하지 않아서 그의 코와 턱은 짙은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쪽 지반은 특수합니다. 뒤틀렸다면 화강암을 스치기라도 해야 하는데 곧장 정판암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방한복을 입으면서 그가 말하자 김진모가 빙긋 웃었다.
「그래 저 옛날 금꾼들은 운수소관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리 최신 기계를 갖다 대도 운수 좋은 놈을 못 따라간단 말이야.」
구석에 누워 있던 곽 조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 김진모의 열정에 이끌려 두 달 가까운 시베리아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지친 모습들이다.
「내일까지는 결과를 알 수 있겠지. 충분히 파고 들어가게 될 테니까.」
방한모를 뒤집어쓴 김진모가 앞장을 서서 막사를 나왔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대기가 마치 투명한 얼음덩이처럼 굳어져 있어서 마스크 밖으로 내어 뿜은 횐 입김이 금방 딱딱한 결정체가 된다.
러시아군 막사는 아래쪽에 있었으나 아직 불빛이 켜지지 않았고 옆쪽의 근대직원들 막사에서 인기척이 났다. 지난번 본부기지를 습격당한 이후로 유장석은 오히려 이쪽에 직원을 충원시켜 주었으므로 직원 수는 6명이 되었는데 놀랍게도 3명이 무장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으로부터 무기를 빌린 것이다.
그는 막사를 지나 시추작업장으로 다가갔다. 대형 트럭에 실린 모터는 육중한 엔진 소리를 내며 캐터필러를 돌렸고 캐터필러는 시추공의 벨트를 회전시키며 아래쪽으로 밀어 넣는다. 시추장비만 해도 트럭 7대분이었으므로 트럭들은 높이 20미터 정도의 시추탑 주위에 바람막이 벽 모양으로 둘러 세워져 있었다. 김진모가 트럭의 뒷부분으로 올라가자 엔진실 옆의 간이침대에 누워 있던 박기사가 눈을 떴다. 그는 장비 기사로 근대건설 직원이다.
「압력이 느껴지지 않아요. 이번도 맹탕인 것 같습니다.」
상반신을 일으킨 박기사가 눈으로 옆쪽의 계기판을 가리켰다.
「내일 오전까지는 파이프가 다 풀립니다, 교수님.」
「알고 있어, 박형.」
엔진실은 더웠으므로 김진모는 방한모를 벗었다.
「이봐, 나올 때보다 나오기 전의 긴장감이나 기대감이 더 좋은 거라네. 여자하고 그것 할 때와 마찬가지야. 싸버리면 끝이거든.」
「나아 참. 별소리를.」
그러면서도 40대의 박기사가 빙글 웃었다.
「우리 직원들끼리 얘긴데 교수님은 우리 쟁이들과 죽이 맞는다는 거요. 교수 그만두고 근대로 옮겨오시는 게 어떠쇼?」
「글쎄, 강 회장한테 말해볼까?」
「이사 자리는 주겠지 뭐.」
손바닥만 한 유리창 밖으로 시베리아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오늘은 해가 보일 모양인지 밝아지는 속도가 빠른 아침이었다. 차창 밖이 밝아오자 김상철은 서은영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어서. 늦었어.」
눈을 뜬 서은영이 모포를 젖히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반신은 내복을 걸쳤으나 하반신은 알몸이다.
「왜 일찍 깨우지 않고.」
내복을 찾아 다리를 펴면서 서은영이 그를 흘겨보았다. 사흘 전 김상철의 트럭에 들어온 후로 오늘이 두 번째였는데 정사가 끝나고 나서 깊은 잠에 빠졌던 것이다.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어.」
이미 김상철은 방한복 차림으로 의자를 넘어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희끄무레하게 동녘이 밝아오고는 있었지만 아직 주위는 어두웠다.
「난 오늘 본부기지에 가야 돼. 다시 보급 일을 맡게 될 모양이야.」
김상철의 말에 서은영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럼 이곳엔 그전처럼 사흘이나 나흘에 한 번씩 들리게 되는 거야?」
그녀는 언젠가부터 말을 놓았으나 김상철은 상관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쪽도 반말이다.
「아마 그렇게 될 거야.」
「이윤제는 어떻게 할 작정이야?」
「내가 데려가기로 했어」
김상철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서은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하지만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건 아니지?」
「그건 나 같은 말단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방한복의 지퍼를 올린 서은영이 의자를 넘어 조수석으로 내려와 앉았다. 바깥의 어둠은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 윤곽은 뚜렷하게 보였다.
「난 적응력이 강해. 홀어머니 밑에서 아르바이트로 두 동생 학비를 대며 대학을 마쳤어.」
그녀는 방한화를 찾아 신었다.
「날 경멸하는 거 알아, 지금 당장 이윤제 대신으로 날 이용하고 있지만 날 불신하고 있다는 것도.」
「‥‥‥」
「적응해 갈 테니까 날 도와줘.」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김상철이 잠자코 차의 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휘몰려 들어 왔으므로 금방 몸서리가 쳐졌다.
「어서 돌아가, 늦었어.」
시선을 뗀 서은영이 몸을 움츠리더니 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가 탐사기지를 출발했을 때는 오전 11시 30분이었다. 모처럼 개인 날이어서 횐 태양이 중천에 떠 있었고 바람은 없다. 본부기지까지는 140킬로가 넘었으므로 눈길에서 시속 30킬로 미만의 속력으로 달리는 트럭으로서는 저녁때에야 도착할 것이다. 물론 이바노프가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가운데에 끼어 앉은 것은 이윤제이다.
트럭은 눈에 덮인 평원을 기운차게 달려 나갔다. 태양이 보이는 한낮의 시베리아는 차장을 열어 놓아도 좋을 만큼 날씨가 풀려 있었다. 기지가 뒤쪽으로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자 이윤제가 김상철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김 형, 본부에서는 헬기가 며칠에 한 번씩 뜹니까?」
「글쎄요, 날씨가 개었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이었는데.」
김상철이 힐끗 이윤제를 바라보았다
「급한 일이 있을 땐 본부에서 연락을 하면 다음 날에 오기도 하지요.」
「본부에서 갑자기 날 데려오라는 것은 날 보내주려는 것일까?」
「본부에 러시아군이 증원되지도 않았다면서요? 에프게이 상사한테서 들었소.」
「아마 그런 모양입니다. 」
이윤제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트럭은 툰드라 지대로 들어서서 속력을 늦추었다. 얼음의 표면이 미끄러워져 있었던 것이다. 창밖으로 이바노프가 상반신을 내놓자 머리칼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김, 우측이 늪지야.」
눈에 덮여 있어서 늪지인지 평지인지 얼핏 보면 구분할 수 없었지만 매끈한 표면 위에 드문드문 솟아난 마른 풀잎으로 알아낸 것이다. 김상철은 트럭을 좌측으로 꺾어 달렸다. 트럭에 부착된 방향지시기의 붉은 바늘이 조금 좌측으로 흔들렸다가 다시 정상이 되었다.
「김 형, 서은영을 조심하시오.」
갑자기 이윤제가 이렇게 말했으므로 김상철이 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년은 뱀이요, 지능지수가 높은 독사라고 할까? 약점을 보였거나, 이용 가치가 없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당신을 물 거요.」
「‥‥‥」
「시베리아에서 내 약점을 보이게 될 줄은 뜻밖이었어. 내가 방심했던 거야.」
「서은영이 당신을 유혹했을 거요, 오늘 아침에 당신 트럭에서 나오는 걸 보았어.」
「‥‥‥」
「내가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텐데, 그 여자는.」
「그래서 무슨 대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자 이윤제가 머리를 저었다.
「없소. 나는 우선 저 기지를 떠나고 싶었어. 그다음이 한국이지. 어쨌든 이곳은 나한테 맞지 않는 곳이니까.」
트럭의 바퀴 하나가 찢어진 것은 기지를 20킬로쯤 남겨 놓은 삼림이 우거진 능선 밑에서였다. 바퀴가 쓰러진 나무둥치를 넘다가 뻗어 나온 잔가지에 찍혀 옆 부분이 길게 찢어진 것이다.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며 해가 서쪽으로 떨어져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아직 대기에는 태양의 잔명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들은 얼어붙은 볼트를 풀고는 찢어진 타이어를 끄집어냈다. 이제 곧 수은주가 무섭게 떨어져 내려가는 추위가 다가올 것이다. 서두르는 그들의 주위로 어둠은 점점 짙게 드리워졌다.
차량의 엔진 소리를 제일 먼저 들은 것은 기지에서 200미터쯤 앞쪽의 초소에 있던 미하일 상병이다. 그는 동료와 함께 바토프의 습격 때 부서진 트럭의 박스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눈 속을 파고 묻어놓은 데다가 안에는 석유스토브를 켜놓아서 근사한 참호용 거주지가 되어 있었다. 더구나 전방에 직사각형의 구멍을 뚫어놓고 비닐로 막아 놓아서 안에서 밖을 관측할 수도 있다.
「이봐, 저건 무슨 소리야?」
미하일이 소총을 움켜쥐며 말하자 긴장한 동료도 다가왔다. 이제 땅을 울리는 진동음도 느껴졌다.
「그렇군, 김과 이바노프가 온다고 그랬어.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
미하일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얼굴을 폈다. 오후에 근무교대를 할 적에 림스키에게서 들었던 것이다. 동료가 다시 스토브 위에 올려놓은 감자 스튜 냄비로 다가갔고 미하일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는 이바노프와 친했으므로 그에게서 몇 번 한국산 담배를 얻은 적도 있었다. 참호용 박스는 지면에서 10센티 높이 밖에 나와 있지 않아서 외부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눈에 덮인 조금 불룩한 땅처럼 보이는 참호용 박스는 앞쪽에 두 개의 감시창이 있었지만 가끔 기지 사람들도 몰라보고 차를 몰고 다가오는 경우도 있었다.
미하일은 담배를 입에서 뗐다. 밖에 나가서 김에게 신호라도 해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방한복을 입고 플래시를 집으며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기랄 자식, 오려면 조금 일찍 올 것이지 밤에 와서 귀찮게 하고 있어.」
엔진소리는 더욱 가까워져 있었는데 땅을 울리는 진동음으로 벽에 걸어놓은 소총이 흔들리고 있었다. 미하일은 소총을 집어 들고는 옆으로 나 있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에 덮여 있어서 10미터 전방도 보이지 않는다. 밖으로 나오자 엔진의 소음은 더욱 크게 들렸다. 앞쪽으로 두어 걸음 나가면서 주머니에 든 플래시를 꺼내던 미하일이 걸음을 멈추었다.
앞에 오는 차의 전조등이 켜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플래시를 땅바닥에 떨군 미하일이 소총을 손에 쥐었을 때 어둠 속에서 차량의 윤곽이 드러났다. 불을 켜지 않고 달려온 차량은 차체가 높고 바퀴가 큰 러시아의 설상용 트럭이었다. 김상철의 트럭이 아니다. 그가 총구를 그쪽으로 겨누었을 때 먼저 트럭의 앞부분에서 횐 불꽃이 번쩍였다.
「타타타타!」
요란한 총성이 밤하늘을 울렸고 온몸에 총격을 받은 미하일이 눈 위로 쓰러졌다.
「총소리다.」
사람들은 식당차에 모여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소리치자 차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요란한 총소리가 났다. 그에 대응해서 쏘아대는 총소리가 울리면서 바깥에서 러시아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났다.
「습격이다!」
이대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상무님.」
「무기를 나눠줘라. 어서.」
그 순간 식당차의 문이 열리면서 림스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습격이야! 어서 피해. 뒤쪽 벙커로.」
총소리는 더욱 요란해져 있었는데 이제 이쪽에서도 응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총탄이 날아와 식당차의 벽에 맞고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난 무전실로 간다.」
밖으로 구르듯 뛰쳐나온 유장석이 소리쳤다.
「본사에 알려야겠어!」
습격자들은 구경이 큰 기관총을 쏘아댔으므로 총탄에 맞은 트럭의 알루미늄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이쪽에서도 치열하게 응사하고 있었으나 습격자는 사방에서 쏘아오고 있다 허리를 숙인 유장석이 무전차로 달려가자 조명탄 한 발이 어둠 속으로 쏘아 올려졌다. 그 순간 사방에서 차량들의 엔진소리가 났다.
「상무님!」
이대각이 미친 사람처럼 그에게로 달려갔다. 한 손에는 소총을 움켜쥐고 있다. 조명탄이 내려오면서 기지 주위가 환해지자 사방에서 달려오는 차량들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쪽과의 거리는 이제 100미터도 되지 않는다.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졌으므로 그들은 트럭의 바퀴 뒤로 몸을 붙였다. 순간 달려오는 트럭 한 대가 폭발하면서 붉은 화염과 파편들이 하늘을 치솟았다. 이쪽에서 쏜 대전차 포탄이 명중한 것이다. 그러나 곧 앞쪽에 세워두었던 이쪽의 차량 한 대가 폭발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났다. 유장석은 무전차 안으로 뛰어 들어가 스위치를 켰다. 차체에 총알이 뚫고 들어와 방 안에 튀었다.
「상무님, 놈들이 진입해 왔습니다.」
문 앞에 지켜선 이대각이 소리쳤다.
「저 개새끼들이 이쪽으로 옵니다!」
「여기는 기지, 여기는 기지, 하바로프스크 기지 나와라.」
유장석이 무전기에 대고 소리치자 잡음이 들리던 무전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하바로프스크.」
한국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빗발처럼 총탄이 무전차를 뚫고 들어오면서 무전기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런 빌어먹을!」
끊어진 무전기를 내동댕이친 유장석이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동안 기지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러시아 병사들을 향해 진입해 온 차량들이 총탄을 쏟아부었고 차량 한 대는 이쪽의 수류탄 공격을 받아 차체를 치솟아 올리며 폭발했다.
「상무님! 튑시다!」
바퀴 밑에 엎드려 있던 이대각이 고함을 치며 유장석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러시아 놈들이 도망치고 있단 말입니다.」
그 순간 총탄이 그들에게로 쏟아졌다. 이대각이 총을 떨어뜨리며 주저앉았다.
「야, 이 부장!」
유장석이 그를 부둥켜안았다.
「야, 이 부장 !」
「어깨를 맞았어요. 젠장.」
진입한 트럭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총성이 뜸해지면서 사람들의 고함 소리만 이곳저곳에서 크게 들렸다. 진지가 점령당한 것이다.
「손을 들어라!」
뒤쪽에서 누군가가 고함을 쳤으므로 유장석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었다.
「일어 서!」
몸을 돌리자 두 사내가 그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털 코트를 아무렇게나 걸친 모습들이 영락없는 산적이었다.
7. 기지 탈출
그레고리가 다가가자 부하들이 좌우로 갈라섰다. 그들은 불타오르고 있는 트럭 옆 기지 한복판의 맨땅 위에 부상자와 포로를 모아놓고 있었다. 부관 바야킨이 소총의 총구로 그들을 가리켰다.
「대장, 포로 열다섯 명 중 부상자는 여덟 명입니다. 그리고 확인된 전사자는 열한 명이오.」
그레고리 쪽은 전사 7명에 부상 9명이었으므로 썩 좋은 전과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레고리는 눈 위에 앉아 있는 그들은 훑어보았다. 대부분이 그의 시선을 피해 머리를 떨구었지만 번쩍 머리를 치켜들고 앉아 있는 한국인 한 명이 있다.
「저놈은 누구야?」
턱으로 그를 가리키자 바야킨이 말했다.
「한국인 보스요, 기지 책임잡니다.」
「한국인 포로는 몇이야?」
「포로는 모두 네 명인데 그중 두 명이 부상입니다. 한국인 사망자는 셋입니다.」
어둠을 뚫고 서너 발의 총소리가 났다. 기지를 도망친 자들을 추격하는 이쪽의 사격 소리였다. 그러나 이 추위에 도망친다고 해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들을 차로 쫓는 이쪽은 될 수 있는 한 그들을 멀리 내쫓는 것만으로도 족한 것이다. 한동안 포로들을 내려다보던 그레고리가 결심한 듯 바야킨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한국인 부상자와 포로만 막사 안으로 집어넣어라. 나머지는 그대로 둔다.」
그러자 포로로 잡힌 병사들 서너 명이 일제히 아우성을 쳤다 그것은 곧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인 것이다. 영하 40도가 넘는 혹한 상황에서 방치된다면 한 시간도 못 되어 모두 동사하게 된다. 병사 한 명이 일어났다. 병사 한 명이 그레고리에게 매달려 애원할 작정인 모양으로 무릎걸음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바로 그때 바야킨의 소총이 마른 소리를 내며 발사되었다. 병사가 뒤로 넘어지면서 숨이 끊어지자 더 이상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유장석을 포함한 네 명의 한국인이 끌려 들어간 곳은 식당차 안이었다. 벽에 총탄 구멍이 나 있었지만 히터는 작동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온몸을 늘어뜨리고 벽에 기대앉았다. 식탁에서는 그들이 먹다 만 음식들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고 바닥에도 흩어져 냄새를 풍겼다.
이윽고 그레고리가 서너 명의 부하들을 대동하고 식당차에 오르자 차 안의 공기는 긴장감으로 싸늘해졌다. 그레고리가 방한모를 벗자 짙은 콧수염이 드러났다. 검은 눈동자가 짐승의 그것처럼 번들거리고 있다. 그는 의자를 돌려놓고 그들을 향해 앉았다.
「책임자가 누구냐?」
그가 영어로 묻자 모스크바 지사에 근무한 적이 있는 유장석이 러시아어로 대답하며 머리를 들었다.
「나다.」
「한국에서의 직급은?」
「근대그룹의 기지 책임자로 직급은 상무다.」
「한국 정부에서의 네 직급은?」
그러자 유장석이 머리를 저었다.
「그런 것 없다. 난 회사원이야.」
「넌 우리가 누군지 아는가?」
「산적이지. 무장 강도단 아닌가?」
「그렇지.」
그레고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희들 차 안에서 미화 4만 달러가량을 찾아냈어. 거기에다 장비까지 합하면 상당한 전과를 올린 셈인데.」
「그렇다면 우릴 해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리를 놓아주기 바란다. 더 이상의 인명피해는 너희들에게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그것이 내 뜻대로 안 된단 말이야.」
그레고리가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우선 너희들의 탐사기지 위치를 밝혀라. 두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곳의 정확한 위치를 대.」
「네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다른 놈에게 물을 수도 있어.」
「도대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돈이 필요하다면 나에게 말해라, 우리 회사가 네 요구를 받아들일 테니까.」
유장석이 상체를 세우고 그를 쏘아보았다.
「탐사기지에는 돈이 나갈 만한 물품들이 없어. 너에게 필요한 장비들도 아니다. 」
「그건 네 생각이지.」
그레고리가 시계를 보았다.
「한 시간 후에 다시 올 테니까 위치를 그린 지도를 내놓도록. 더 이상 너와 입씨름 하지는 않을 테니까,」
의자에게 일어선 그레고리가 앞장을 서자 부하들이 따라 나갔다. 식당차의 문이 밖에서 거칠게 닫혔고 차 안에는 살아남은 한국인 네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차 안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3번 트럭이 불타버리는 통에 놈들이 탐사기지의 위치를 모르게 된 겁니다. 차라리 잘됐지.」
이대각이 어깨에 댄 헝겊 뭉치를 누르며 말했다. 어설프게 누르고 있어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유장석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절체절명의 궁지에 몰린 것은 처음인 것이다. 이대각이 다시 말했다.
「우리가 말해줘도 죽일 겁니다. 상무님, 우리를 인질로 해서 돈을 요구할 만큼 놈들은 한가하지 않습니다.」
어느덧 한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본부기지에 남아 있던 일곱 명의 직원 중 남은 인원은 식당차에 끌려온 넷이었지만 행정업무를 맡고 있던 장 과장은 중상이었다. 그는 배에 총알을 맞아 응급치료도 하지 못한 채 가늘게 숨만 몰아쉬며 누워 있었다.
「야, 장 과장.」
이대각이 어깨를 흔들자 장과장이 눈을 떴다.
「정신 차려라, 장과장.」
장과장이 다시 눈을 감자 이대각이 이를 악물고는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상무님, 분합니다. 」
「이렇게 죽어야만 하다니, 정말 억울합니다.」
유장석이 머리를 돌려 벽에 기대 서 있는 임 대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화염에 머리칼이 조금 그을렸을 뿐 다친 곳은 없다.
「조 대리가 기름 체크하러 간다고 나갔었다. 자네 조 대리 못 보았나?」
「예, 상무님.」
임 대리가 늘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조 대리가 총에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쪽으로 뛰어오다가.」
「총에 맞지 않았어도 밖에 있다면 지금쯤 얼어붙어 있을 겁니다.」
이대각이 자르듯 말하고는 머리를 들었다.
「상무님, 가스라도 틀어서 자폭합시다.」
「닥쳐!」
유장석이 짧게 소리치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나로서는 그렇게 간단히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
「김상철, 그놈은 이쪽에 거의 다 왔다가 우리가 습격당한 것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모두 잊고 있었던 듯 머리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놈이 이제 나의 희망이다. 설령 우리는 죽게 되더라도 탐사기지에 그가 연락해 주기를 바랄 뿐이야.」
바로 가까운 곳에까지 접근해 왔던 트럭이 옆쪽으로 비껴가자 김상철은 이바노프를 바라보았다.
「이바노프, 넌 여기서 기다려라. 난 기지에 들어갔다 올 테니까.」
「나도 가겠어.」
이바노프가 방한모를 쓰면서 말했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나아.」
그들의 트럭이 멈춰 선 곳은 기지로부터 400미터쯤 왼쪽으로 벗어난 곳으로 밋밋한 구릉이 이어진 사이였다. 전방의 기지에서는 아직 서너 대의 트럭이 화염에 싸여 있었고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기지는 함락된 것이다. 김상철은 트럭의 의자 밑에서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꺼내 익숙한 손놀림으로 탄창을 끼워 넣었다.
기지에서 들리는 요란한 총성과 폭발음을 듣고 그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습격자들이 기지로 진입한 후였다. 화염에 휩싸인 기지에서 일어나는 살육전을 바라보면서 그는 발을 굴렀지만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그는 따라나설 채비를 하는 이바노프를 말리지 않았다.
「그럼 난 여기서 기다린단 말이요?」
이제까지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던 이윤제가 김상철에게 물었다.
「기다려요.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김형, 내 말을 들어보시오. 도대체 저곳에는 왜? 모두 끝났을 텐데.」
이윤제가 김상철의 소매를 잡았다.
「돌아갑시다. 탐사기지든, 시추기지든.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요.」
「이것 놔.」
팔을 뿌리치는 대신 김상철은 손을 벌려 이윤제의 얼굴을 덮고 밀었다.
「난 당신하고는 사는 방식이 틀리단 말이야.」
얼굴이 젖혀진 이윤제가 간단히 떨어져 물러나 앉았다.
「지금 시간이 아홉 시 이십 분이니까 열한 시 이십 분까지 두 시간만 여기서 기다려. 그 안에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당신 혼자 떠나. 어디로든지.」
차에서 내린 그들은 전방의 불빛을 향해 한 걸음씩 발을 뗐다. 얼어붙은 발밑의 눈이 바삭거리며 부서졌지만 단단해서 발을 옮기는 데 지장은 없다.
어둠 속을 울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라이트를 켠 차량 한 대가 그들의 왼쪽에서 기지 쪽으로 달려갔다. 도망자를 추격하고 돌아오는 차량인 모양이었다. 기지 근처의 지형은 익숙한데다가 불타오르는 트럭들이 주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어서 그들이 기지 끝 쪽의 눈밭에 엎드린 것은 그로부터 20분쯤 후였다.
「저기 ‥‥‥‥」
이바노프가 손을 들어 앞쪽을 가리켰으므로 김상철이 머리를 들었다.
트럭 사이로 앞쪽 마당에 모여 앉은 10여 명의 사내들이 보였다. 옷차림으로 보아 러시아 병사들 같았는데 부상자들도 있는 모양인지 대여섯 명은 맨땅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내들은 일어서거나 앉아 있었지만 모두 두 손과 발이 묶여져 있다. 포로인 것이다. 불타오르는 트럭 주위와 땅바닥에 널려 있는 시체들도 보였다. 러시아 병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막사 옆에 푸른색 방한복을 입고 쓰러진 사내들은 아무래도 한국인들 같았다.
김상철이 이바노프를 바라보았다.
「이바노프, 난 안쪽으로 들어가겠다. 넌 여기서 기다려.」
시끄럽게 떠들면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앞쪽을 지나갔으므로 김상철은 땅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본래 가로로 두 줄로 늘어세워졌던 트럭의 대열은 중간에서 갈라졌고 불타는 차량과 갖가지 종류의 습격자들의 차량들까지 어지럽게 뒤섞여 기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사내들은 기지의 트럭을 뒤지면서 약탈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총을 쥐고는 조금씩 앞으로 미끄러져 다가갔다. 기지의 전등은 대부분 꺼져 화염이 치솟는 곳 몇 군데는 대낮같이 밝았지만 기지의 다른 곳들은 어둠에 덮여 있었다. 부서진 막사의 벽 사이로 몸을 집어넣는데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무, 뭐 좀 집었소?」
「집긴 뭘, 모두 로스궤 놈이 털어 갔는데.」
바삭거리며 얼음을 깨는 발자국 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면서 두 사내가 그가 몸을 숨긴 벽 앞을 지나갔다.
「그, 간나새끼가 눈을 부라리고 있어서 말이야. 보고도 손을 못 댔다니까.」
「어쨌든 남조선 새끼들 호강하며 사누만, 이곳을 보니.」
김상철은 숨을 죽이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북한인들이 습격자들 속에 끼어 있는 것이다. 이윽고 어금니를 문 그는 벽에서 몸을 뺐다. 그는 트럭 사이로 몸을 숨기면서 조금씩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습격자들은 줄잡아서 4, 50명이 넘어 보였는데 외치는 소리와 부르는 소리로 기지 안은 떠들썩했다. 트럭 밑으로 기어서 통신 차량 쪽으로 다가가던 김상철은 눈 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하반신 하나를 보았다. 두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져 있는 것을 보니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된 듯한 러시아 병사였다.
이윽고 통신 차량 밑으로 기어간 김상철은 방한모 속으로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기온은 갈수록 떨어져 가고 있었지만 긴장으로 온몸에 땀이 배어 나온 것이다. 아직 유장석과 이대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시체가 되어서 버려져 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마당에 잡힌 포로와 부상자들은 모두 러시아 병사들이었다. 그것이 김상철에게 유장석과 이대각 등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고 있었다. 그들을 찾는 것이 그가 목숨을 걸고 기지로 돌아온 이유였다. 죽었든 살았든 유장석을 확인해야만 한다. 한동안 통신 차량의 바닥에 귀를 기울이던 김상철은 다시 앞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바야킨이 들어선 것은 장과장의 숨이 끊어진 직후여서 세 사내가 모두 그를 둘러싸고 있을 때였다.
「뭐야? 하나가 죽었나?」
장 과장을 굽어본 그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밖에다 버려.」
부하 두 명이 장과장의 팔 하나씩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유장석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당신들의 우두머리를 만나고 싶다.」
「이제 너와 이야기할 것이 없어. 네놈들 기지는 포로로 잡힌 러시아군 통신병한테서 들었으니까.」
바야킨이 금이빨을 번쩍이며 웃었다.
「놈은 정확한 좌표는 물론 각 기지의 무선통신 주파수까지 알려주었어.」
유장석이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네 우두머리를 만나려는 것이 아니다. 부탁한다. 네 우두머리를 만나게 해다오.」
「우두머리는 나야, 한국인. 넌 지금 우두머리와 이야기하고 있는 거다.」
바야킨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부하들이 웃었다. 유장석이 다시 말했다.
「이봐, 중요한 일이야. 난 네 우두머리와 거래를 하려는 거야.」
「거래 말인가?」
바야킨은 좌우에 벌려 선 부하들을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한국 장사꾼들이 수완에 뛰어나다더니 과연 그렇군. 이런 상황에서도 거래할 것이 있다니.」
「너희들에게 손해될 것이 없는 거래야. 산적생활을 청산하고 떼돈을 벌 수 있는 기회란 말이다.」
「그런가? 그것이 무엇인데? 나에게 말해 봐, 한국 친구.」
「네 우두머리에게 전해. 백만 달러를 주겠다고, 여기 있는 두 사람을 살려주고 날 인질로 잡으면 이 사람들이 돌아가서 돈을 만들어 올 것이다.」
이대각이 퍼뜩 머리를 들었다. 유장석과 바야킨이 주고받는 러시아어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그가 낮은 목소리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상무님, 저는 상무님을 남겨두고 떠날 사람이 아닙니다.」
「조용히 해!」
짧게 소리치고 난 유장석이 바야킨을 바라보았다.
「물론 소련 정부에서도 비밀로 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도 많이 필요하지 않아. 열흘, 아니 일주일이면 될 거야.」
한동안 유장석을 바라보던 바야킨이 머리를 돌려 부하들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부하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방한모를 뒤집어쓴 부하 하나가 들어왔다 아마도 장과장의 시체를 끌고 나간 둘 중의 하나일 터였다. 그는 바야킨의 옆에 섰다.
「내 부하들에게 물었더니 그럴듯하다고 말하지만‥‥ 유감이다. 우린 그럴 만한 시간이 없어.」
바야킨이 허리에 찬 권총을 꺼내 들었다.
「아마 네 동료들은 백만 달러와 함께 군대를 끌고 올지도 모르지. 여긴 시베리아야. 돈을 받고 사라질 택시도 없고 거리도 없어.」
총구가 가슴에 겨누어지자 유장석은 턱을 내밀고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총소리가 막사를 울렸다.
「탕!」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뜬 유장석은 머리에 구멍이 뚫린 바야킨이 옆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탕, 탕, 탕!」
연달아서 권총을 난사한 사람은 조금 전 들어 온 러시아 병사였다. 바야킨의 부하 두 명이 모두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유장석과 이대각은 입만 딱 벌리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병사가 눈만을 내놓았던 방한모를 벗었다.
「아니, 김상철 ‥‥‥‥」
숨을 들여 마신 유장석이 소리치자 김상철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이놈들 외투를 입으십시오. 어서.」
튕기듯이 다가온 것은 이대각이다. 그의 부릅뜬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상철이, 네가‥‥‥」
「어서 옷을 입어요, 방한모를 쓰고.」
문을 조금 열고는 밖을 살피면서 김상철이 명령하듯 말하자 그들은 서둘러 시체의 방한복을 벗겼다. 곰 가죽과 담비 목도리로 치장을 한 그들의 방한복에 방한 안경까지 끼고 나면 누구도 알아보기 힘들 것이었다.
그레고리 일당은 총소리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다. 바야킨이 유장석 일당을 처치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두르는 바람에 임대리가 방한 안경을 잃고 잠시 허둥댔으나 유장석이 찾아 주어 그들은 완벽한 복장을 갖췄다.
「날 따라오십시오. 곧장 뜰을 건너가서 부서진 6번 트럭 옆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이바노프가 그곳에 있을 테니까 그를 불러요.」
그들에게 주의를 주고 난 김상철이 앞장서서 트럭에서 내렸다. 바야킨의 방한복을 입은 유장석이 뒤를 따랐고 맨 끝에 차에서 나온 이대각이 식당차의 문을 닫았다. 바깥은 이제 영하 40도 가까이 내려가 있었다. 차량들을 뒤지고 다니던 무리들이 줄어든 대신 바깥 경계선에 차량들이 배치되어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포로와 부상자들의 옆을 지날 때 앉아 있던 포로 중 한 명이 신음소리를 냈다. 그들은 이제 움직이지 않았고 천천히 죽어가는 중이었다.
식당차에서 뒤쪽 열의 트럭까지 직선거리로는 30미터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김상철의 뒤를 따라 걷는 유장석은 그 거리가 30킬로도 더 넘어 보였다. 그들이 포로의 옆을 지나갈 때 바쁜 걸음으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세 명의 사내들과 마주쳤다. 그중 한 명이 방한모 사이로 무언가 말을 했으나 김상철이 손을 들어 보이자 잠자코 그들 곁을 지나갔다. 그들이 6번 트럭의 뒤쪽으로 들어서자 짙은 어둠이 깔려 있는 벌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바노프.」
방한모 사이로 김상철이 소리죽여 부르자 앞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구, 김이야?」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온몸이 긴장된 이바노프였다.
「그래, 가자.」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어둠 속을 달렸다 앞장을 선 것은 이바노프였다. 그의 뒤를 놓칠세라 일렬로 선 일행은 가쁜 숨을 헐떡이며 얼어붙은 벌판 위를 달려 나갔다. 그때 뒤쪽에서 요란한 총성과 함께 사내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이쪽을 겨냥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놈들의 시체가 발견된 모양이었다.
밤새도록 얼어붙은 늪지와 구릉 지역을 달려 시추기지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동녘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아침 7시경이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기지는 즉각 비상이 걸렸고 근대직원들과 러시아군 분견대 측은 제각기 무전기에 매달렸다. 그러나 양쪽 모두 보유하고 있는 무전기는 통신거리가 150킬로 미만인 포터블 세트여서 본부기지와의 교신용으로만 사용되던 것이었다. 러시아 측은 남쪽의 오호츠크해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부대로 주파수를 맞추었지만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옆쪽에 있는 지질 탐사기지의 모든 인원이 중요한 장비만을 챙겨서 이쪽으로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오전 9시.
유장석은 그제야 막사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러나 벽을 통해 울리는 진동음이 느껴졌다. 밖에서는 시추계가 아직도 힘차게 지층을 뚫고 내려가고 있었다. 막사의 문이 열리면서 김상철이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보온병이 들려져 있었다.
「상무님, 뜨거운 커피 한 잔 드시지요.」
다가온 그가 말하자 유장석은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막사 안에는 상처의 치료를 막 끝낸 이대각이 반대쪽 벽에 붙어 누워 있을 뿐 비어 있었다.
「그래, 고맙다.」
커피잔을 받으면서 유장석이 입을 열었다.
「이제야 산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그러자 누워 있던 이대각이 눈을 떴다.
「야, 인사가 늦었다.」
이대각이 열에 뜬 눈으로 김상철을 올려다보았다.
「구해줘서 고맙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요.」
멋쩍은 듯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런데 놈들이 이곳으로 몰려온다면 야단입니다, 상무님. 탐사기지의 러시아 병력이 합류한다고 해도 이곳의 러시아 병사는 20명도 안 됩니다.」
그러자 유장석이 머리를 떨궜다.
「나도 이미 네 명의 식구를 잃었어. 그 일만으로도 나는 회장님을 뵐 면목이 없다.」
「‥‥‥」
「또 죽은 네 명에게 그리고 그 가족들에게 어떻게 사죄를 해야 한단 말인가.」
「상무님.」
김상철이 그에게 다가앉았다.
「경황 중에 말씀을 못 드렸는데 기지 안에서 북한인들을 보았습니다. 그자들은 습격자들과 같은 일행이었습니다.」
놀라 머리를 든 그들에게 김상철은 북한인들이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을 말해주었다.
「습격자들은 북한인들의 조종을 받거나 협력관계에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군. 그래서 놈들이 아예 우리의 씨를 말릴 듯이 굴었군.」
말을 받은 것은 이대각이다.
「강도단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습격한 이유를 이제 알았다.」
유장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북한 정부가 우리의 시베리아 임차를 반대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나설 줄은 몰랐다.」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상무님.」
김상철이 유장석을 향해 말을 이었다.
「본부의 무전기가 파괴되었으니 하바로프스크에서는 곧 헬기를 보낼 것입니다. 며칠 안에 사태를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 며칠이 문제야. 놈들은 오늘 밤 당장 이곳을 칠 눈치였어.」
「막아야지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저는 밖에 나가보겠습니다.」
유장석이 손을 뻗어 김상철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넌 마치 이곳 시베리아를 위해 우리에게 보내진 놈 같구나.」
장문의 팩스 통신을 읽어 내려가던 박미정이 통신문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개척단과의 연락 담당이어서 하바로프스크에서 보내온 전문이나 연락을 직접 이남호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 입술 주위가 벌게진 사원들이 막 업무를 시작하는 때였다.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서류를 읽고 있던 이남호가 머리를 들었다.
「전문인가?」
이남호는 가끔씩 박미정을 불러 업무를 지시하기도 했지만 박미정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었다. 이남호는 박미정에게 한 번도 부드러운 얼굴을 보인 적이 없다.
전문을 받아 읽어가던 이남호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지더니 이윽고 머리를 들었다.
「어젯밤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통신이 두절되었단 말인데, 러시아 파견부대도 그렇고.」
이남호는 앞에 서 있는 박미정을 향해 말했다.
「하바로프스크에서는 무슨 사고가 났다고 믿는 모양이군.」
「통신이 두절될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실장님.」
박미정이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러시아 파견부대까지 함께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이남호가 전문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하바로프스크에서는 내일 아침에 헬기를 보낸다는데, 군도 정찰기를 띄우고.」
혼잣말처럼 그가 말을 이었다.
「기상 상태가 나쁠 때는 가끔 그랬지만 어쩐지 불안하군.」
전문 용지를 접어 든 이남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회장실로 들어서자 신문을 읽고 있던 강 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그와는 모처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칼이 하고 올라온 참이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온 전문입니다.」
이남호가 전문의 내용을 요약해서 보고하자 강회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러시아 쪽에서 증원부대를 언제 파견한다고 했지?」
「편성이 되는 대로 곧 보낸다고 했습니다.」
「또 사례금인가?」
「아직 로스토프 사령관은 구체적인 언질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망할 놈들.」
강회장이 손바닥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이렇게 세월만 보내면 안 되겠다. 내가 당장 러시아로 가야겠어.」
「회장님, 조금 기다리셨다가, 아직 ‥‥‥‥」
「도대체 뭘 기다린단 말이야?」
눈을 치켜뜬 강회장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내가 로스토프인지 도롭프스인지 그놈을 만나야겠어. 애송이 같은 놈, 제 놈 목을 죄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간단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줘야겠다.」
이남호는 회장의 결심을 바꾸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회장의 러시아 출장 계획은 지난주부터 잡혀 있었다.
「그러시다면 회장님, 체르넨코 국방장관을 하바로프스크로 부르시는 것이 ‥‥」
이남호가 수첩을 꺼내 들며 말했다.
「우선 체르넨코와 만나시고 나서 로스토프를 부르시는 게 낫겠습니다.」
「그렇지, 극동에서 저보다 높은 놈이 없는 것처럼 으스대고 있는 놈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필요가 있다.」
강회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모스크바의 강 이사를 당장 체르넨코에게 보내, 내가 하바로프스크에서 만나잔다고, 내일모레 사이에.」
「예, 회장님. 하지만 내일모레는 좀‥‥‥」
「서두르란 말이다. 난 이번엔 도쿄로 해서 하바로프스크로 들어간다. 쉬는 시간 포함해서 다섯 시간이면 도착할 테니까.」
이것은 정부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었다. 그가 하바로프스크로 날아가는 이유는 시베리아 임차지 문제 외에는 없다는 것을 정부가 모를 리 없다. 이남호는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정부에서 난리가 나겠지, 그렇지 않나?」
「그릴 것입니다, 회장님.」
「빨리 터뜨리는 것이 낫다. 이왕 터뜨릴 바에는.」
강회장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 어떤 방법으로 압력을 넣을지 궁금해지는군,」
다가온 안인석에게 강형문이 책상 위로 서류 봉투를 던졌다.
「계약서류에 보험료 계산이 잘못돼 있어. 이봐, 안인석 씨. 그것도 맥밀란 씨가 지적해 주어서 알게 되었단 말이야.」
안인석이 봉투 속의 서류를 꺼냈다.
「제가 계산을 잘못했단 말씀입니까?」
「조건에 맞춰보면 알 것 아닌가?」
강형문이 입맛을 다셨다. 그는 그랜드 호텔에 묵고 있는 영국 도매상 맥밀란을 만나고 온 길이다. 옆자리의 직원들이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었으므로 안인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죄송합니다, 대리님. 제가 서류를 다시 만들겠습니다.」
「검토도 하지 않고 가져간 내 잘못도 있어. 하지만 바쁠 땐 손발이 맞아야‥‥‥」
강대리가 혀를 끌끌 찼다. 엄기호 과장이 다가왔다. 강형문의 바로 뒷자리가 그의 책상이어서 모두 들었을 것이다.
「이봐, 강 대리. 그건 그렇고, 내일 회의 자료는 다 됐나?」
「한 시간쯤 후에 됩니다.」
아직도 강형문은 찡그린 표정이었다. 그는 엄기호가 자신의 조원인 안인석을 궁지에서 빼내려고 나선 것을 안다.
「좋아, 그러면 오후 다섯 시에 조장들과 미팅을 하자구. 미리 리허설을 해야지.」
월말이 다가왔으므로 부장 주재로 간부급 회의가 열리는 것이다.
사무실을 나온 엄기호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붉은 카펫이 깔린 아래층 전체는 쇼룸과 상담실로만 사용되고 있었다. 빈방에 들어간 엄기호는 구내전화기를 들었다. 안인석이 그가 있는 방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5분 후였다.
「거기 앉아, 안인석 씨.」
엄기호가 앞자리를 턱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나하고 주스나 한잔해.」
그는 구석에 놓인 냉장고에서 캔으로 된 오렌지 주스를 꺼내더니 안인석에게 건네주었다.
「강 대리는 내년에 팀장이 될 거야. 실적도 뛰어나고 능력도 인정을 받고 있지.」
「재작년만 해도 나도 강 대리 같은 상황이었지. 초조했고, 조원들을 몰아붙였어.」
「누가 실수를 했을 땐 내 진급을 방해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라고까지 생각했다니까.」
한 모금 주스를 삼킨 그가 말을 이었다.
「모두 거치는 거야. 나, 강 대리도 안인석 씨 같은 시기가 있었어. 그 시기를 거치고 살아남았지.」
「염려하지 마십시오, 팀장님.」
안인석이 입을 열었다.
「저, 도태되지 않을 겁니다.」
「알고 있어, 자네 실력을. 하지만 요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나?」
시선이 마주치자 엄기호가 웃음을 띠었다.
「내가 보기에 자네가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말해줘.」
「없습니다.」
시선을 내린 안인석이 머리를 저었다.
그러나 오늘뿐만이 아니다. 요즘 며칠 동안 서류를 잊고, 보고서 기안이 늦는 데다, 공항에 바이어를 마중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바이어가 택시를 타고 회사에 들어 온 적도 있었던 것이다.
「없다면 다행인데.」
이제 엄기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중요한 것은 자네 조장인 강 대리와 손발을 맞추는 거야. 바로 팀워크지. 그것이 흐트러지면 아무도 도와줄 수가 없어.」
「어제도 일찍 퇴근했다던데? 조원들은 남아 있었는데도 말이야.」
「제 할 일이 없었습니다, 과장님.」
안인석이 굳어진 얼굴로 엄기호를 바라보았다.
「강 대리를 도와드릴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치 보며 앉아 있기가 멋쩍기도 해서 먼저 간다고 나온 겁니다.」
「이해할 수 있어.」
엄기호가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 내 윗사람은 서운했다고 하더구만. 나중에 들은 얘긴데 팀워크 정신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거야,」
「………」
「공동체야, 강 대리에게 맞춰보도록 하게. 악의가 없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일에 집중하도록 해 봐.」
「알겠습니다, 과장님.」
「정말 다른 문제는 없는 거지?」
「없습니다.」
이유미는 미국 출장을 간 후 LA에 도착한 날 딱 한 번 전화를 주고는 사흘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다.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과장이 몇 번이나 묻는 통에 안인석은 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는 자신을 느꼈다.
샌프란시스코의 페어몬트 호텔.
이유미는 레스토랑 크라운 룸에서 홍만규와 마주 앉아 술잔을 들고 있었다. LA에서 라스베이거스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오늘 아침이다.
「쫓기듯 옮겨 다니기만 해서 유미 씨가 안정이 되지 않아 보이는데.」
흥만규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밤바다의 휘황한 불을 내려다보고 있던 이유미가 머리를 저었다.
「오히려 더 나았어요. 시간이 많았다면 긴장이 풀렸을 테니까. 그리고 우린 아직 여유 있게 여행을 즐길 사이도 아니고.」
「그럴 법하군.」
이유미의 빈 잔에 샴페인을 채우면서 흥만규가 웃었다.
「어느 정도 긴장감이 있는 것이 낫지, 남녀 사이에.」
「내일이면 따로 출발해서 모레아침에는 사장과 사원으로 갈라서야 하는 사이니까요.」
「그건 유미 씨가 주장하는 관계지, 난 바란 적 없어.」
흥만규가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정색을 했다.
「당신은 내 이상형이야. 그 미모, 그 당당함, 그리고 그 수준까지. 이제까지 당신만큼 나를 매료시킨 여자는 없어.」
「나흘 동안 같이 있으면서 다른 방을 쓰도록 나를 위축시킨 여자도 당신이 처음이고.」
「난 처녀가 아녜요. 이상하게 들려서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
「알고 있어. 애인이 있다는 것도. 서울에 있을 때 대강 조사를 시켰지.」
그러자 한동안 홍만규를 바라보던 이유미가 입을 열었다.
「나흘 동안 전화도 못 했어요, 미안해서.」
「미안하긴 왜?」
「아무 일이 없다고 스스로 자위는 했지만 이미 죄책감이 생겨난 모양이에요.」
「고맙군. 그만큼 내 무게가 있었다니.」
홍만규가 손을 들어 종 원을 부르고는 샴페인 한 병과 캐비어를 더 시켰다.
「오늘이 우리 짧은 여정의 마지막 밤이야. 난 유미 씨와 같이 있는 나흘 동안 행복했어,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요즘처럼 일찍 일어나 본 적이 없거든.」
이유미가 소리 죽여 웃었다.
「달콤하군요. 영화 대본 같기는 하지만.」
샤워를 마친 홍만규는 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전화기를 귀에 댔다. 번호판을 누르자 곧 신호가 갔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그가 영어로 물었는데도 저쪽에서는 대답이 없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가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요?」
「저예요.」
이유미의 목소리였다. 숨을 들이마신 그는 자신의 가운을 내려다보고는 문을 열었다. 조금 전 헤어질 때 옷차림 그대로 이유미가 서 있었다.
「기대하고 있었어요?」
「매일 밤.」
흥만규가 비껴선 사이로 이유미가 방으로 들어섰다. 술기운 때문인지 눈가가 달아올라 있었고 물기를 띤 두 눈이 빛을 받아 생기가 났다.
「어때? 술 한잔할까? 위스키? 꼬냑?」
흥만규의 들뜬 목소리는 메마르게 방 안을 울렸다.
「이거, 우선 앉기나 해야‥‥내가 정신이 없어.」
아직 방 가운데 서 있는 이유미에게 다가간 그가 창가의 의자로 이유미를 안내했다. 자리에 앉은 이유미가 발을 흔들어 구두를 벗었다. 그리고는 앞에 서 있는 홍만규를 바라보았다.
「목욕하고 싶어요.」
「내가 물 받아 놓지.」
「먼저 위스키 한 잔 주세요, 물 타서.」
「나도 한잔해야겠군.」
술에 물을 타 가져 온 흥만규가 잔을 건네주면서 허리를 굽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와줘서 정말 고마워,」
「내가 좋아서 온 거예요. 부담 느끼실 것 없어요,」
이유미는 다시 부딪쳐 오는 홍만규의 입술을 보며 눈을 감았다. 이제는 입술이다.
흥만규는 여유가 있었고 이유미 또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술잔을 내려놓은 그들이 서로 엉키듯 쓰러지자 방 안을 떠다녔던 단어들은 스탠드의 붉은 불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져버렸다.
아무르 강 근처의 인투리스트 호텔 로비에는 동양인들이 가끔 눈에 띄었는데 대개가 러시아 국적의 조선족이다. 오성그룹 최선호 전무가 앉아 있는 옆쪽 자리에도 세 명의 조선족 사내들이 앉아 거친 북쪽 사투리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아침 10시 30분이었다. 식사를 마친 최선호와 고정문이 로비로 내려온 지도 30분이 지났다.
하바로프스크는 러시아 극동 지역의 중심지로서 시베리아의 관문이다. 우수리강과 아무르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이곳을 처음 찾은 탐험가 엘로페이 하바로프의 이름을 따서 하바로프스크라고 명명된 것은 1858년이었지만 이곳은 이미 16세기 중엽부터 극동의 중심지였다.
최선호가 고정문을 바라보았다.
「약속은 분명 열 시였어?」
「예, 전무님. 열 시였습니다.」
고정문이 입구 쪽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아마 사정이 생겨서 늦는 모양입니다.」
입맛을 다신 최선호가 커피잔을 쥐었을 때 로비 입구로 동양인 한 명이 들어섰다 슈바에 가죽 부츠를 신은 건장한 사내로 금방 이쪽을 알아보고는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거 늦어서 미안합니다. 」
앞자리에 앉은 그가 넓은 얼굴을 펴며 웃었다. 피부가 거칠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억센 인상의 30대 사내였는데 조선족으로 일본 정보국의 정보원이었다. 최선호는 일본 정보국과 끈이 닿아 있었으므로 그들에게서 지금 앞에 앉은 박대용을 소개받았던 것이다.
「정찰기가 돌아왔습니다. 헬기는 가는 도중에 돌아와 버렸고.」
허리를 숙인 박대용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찰기에서 찍은 사진을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한국인들의 본부기지가 습격을 당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사령부에 비상이 걸렸어요.」
「습격을 당했다면‥‥ 그림 기지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소?」
긴장한 최선호가 묻자 박대용이 머리를 저었다.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비행기에서 본 것이라 자세히는 볼 수가 없었겠지만, 어쨌든 기지는 불타고, 수라장이 되어 있다는 거요.」
「‥‥‥‥」
「그래서 사령관은 보급 헬기도 도중에 불러들였소. 놈들이 어디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오.」
「누가 습격을 한 거요? 그레고리 일당인가?」
「아마 그들이겠지. 공정대가 며칠 동안 훑었지만, 놈들의 빈 막사만 찾아냈다니까.」
「강 회장한테 보고가 됐겠군.」
「당연하지요. 아마 지금쯤 숙소에서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을 거요.」
고정문이 최선호를 바라보았다.
「전무님, 실장님한테 보고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대책도 없이 보고는 무슨.」
이맛살을 찌푸린 최선호가 다시 박대용에게 물었다.
「로스토프 사령관은 곧 증원군을 파견하겠군, 그렇지 않소?」
「아마 내일 오전에 공정대가 한국인들 기지에 도착할 겁니다. 로스토프는 당황하고 있다는 거요. 지난번 습격이 있고 나서 한국 측에서 증원부대를 요구했지만 지휘관만 파견해 주었거든요,」
「본부기지가 습격당했다면 나머지 기지들은 어떻게 되었소?」
「그건 모릅니다. 이쪽과 연락도 안 되는 상황이라서. 정찰기는 그들 기지까지는 살펴보지 못한 모양이오.」
말을 마친 박대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강회장의 동향을 알아보러 가야 합니다. 사령부 쪽이야 훤하게 알아볼 수 있지만 그쪽은 끈이 닿지 않아서.」
「우리한테도 바로 연락을 주시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여부 있습니까? 난 받은 만큼은 일하는 사람이오.」
강 회장의 숙소는 마르크스 대로 끝 쪽에 콤소몰 광장이 바로 보이는 3층 양옥집이었다. 제정러시아 시대에 귀족이 살던 웅장한 건물로 고풍스런 대리석 장식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건물 중의 하나였는데 근대그룹이 구입하여 사무실 겸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2층의 회의실은 서재로 쓰였던 곳이어서 벽에 붙여진 서가에는 작은 책들이 빽빽이 꽂혀져 있다.
강회장이 원탁의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러시아 정부는 이 사실을 비밀로 덮어두기로 했어. 로스토프가 약속을 했다.」
그는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한국 정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으로 시베리아 개발 계획은 끝장이다. 그들은 나를 무고한 사원들을 희생시킨 악덕 기업주라고 여론을 끌고 갈 테니까.」
「러시아 쪽에서 정보가 나갈 염려는 없습니다, 회장님.」
피로한 듯 이남호가 머리를 쓸며 말했다.
「문제는 일본 정보원들과 특히 인투리스트 호텔에 진을 치고 있는 오성그룹 비서실 직원들입니다.」
「안기부 직원들은 이곳에 없나?」
강 회장은 이곳의 책임자인 김영규 부장에게 물었다. 긴장한 표정의 그가 입을 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두 명이 와 있습니다. 기업가로 위장하고 지금 인투리스트 호텔에 투숙하고 있습니다.」
「군에서 정보가 새나가면 안 되는데.」
입맛을 다신 강 회장이 이남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체르넨코는 언제 이곳에 온다는 거야?」
「내일 오전에 도착하는 대로 곧장 회장님을 뵈러 온다고 했습니다.」
「로스토프는 공정대를 내일 오전에 보낸다고?」
「예, 1개 대대 병력을 파견한다고 합니다. 모두 헬기로 실어 나를 모양입니다. 」
「망할 놈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난리를 치는 것은 어느 나라건 똑같군.」
아랫입술을 문 강회장이 한동안 물잔을 내려다보았으므로 회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은 모두 다섯이다. 강회장의 좌우로 이남호와 김영규가 앉고 앞쪽에 앉은 것은 모스크바에서 날아온 강 이사와 서울에서 따라온 한일만 이사였다. 이윽고 강 회장이 머리를 들었다.
「유 상무하고 이 부장은 본부기지에 있었겠지?」
이제까지 본부기지가 습격당해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강 회장은 한 번도 그들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남호가 헛기침을 했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회장님.」
「본부기지에는 인원이 몇 명 있었나?」
「7, 8명 정도, 아마 그보다 한두 명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내일 나도 그곳으로 가겠다.」
강회장의 말에 모두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보았다.
「회장님, 안 됩니다.」
나선 것은 물론 이남호였다.
「내일은 체르넨코를 만나셔야 합니다. 이곳에서 그와 함께 상황을 보고받으시면 됩니다.」
「멍청한 놈 같으니.」
강 회장이 혀를 찼다.
「비서실장이라는 놈의 머리가 그렇게밖에 돌아가지 못하다니.」
「제 머리야 어쨌든 상관없지만 회장님은 가시면 안 됩니다.」
「내가 시베리아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러시아 정부 쪽에 보이려는 것이야.」
「여기 계셔서 보이실 수도 있습니다. 」
「내 부하의 시체는 내 손으로 걷어야겠다.」
「유상무도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죽은 놈이 뭘 바란단 말이냐?」
눈을 부릅뜬 강회장이 손가락 끝으로 이남호를 가리켰다
「입 닥쳐, 이제.」
유장석이 다가가자 김진모가 허리를 폈다. 방한복은 기름투성이였고 얼굴에도 기름이 묻어 있었다.
「이곳에서 유정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건 없어요, 유 상무. 난 꼭 찾아내고 말 테니까.」
그는 손으로 각종 계기판이 부착된 조종실의 알루미늄 덮개를 소리 나게 쳤다.
「이 빌어먹을 기계가 비싼 값을 해야 되는데, 우리나라엔 이것 가진 놈이 없어?」
「글쎄, 있어야 파내는 것 아니요? 없다면 기계가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지.」
유장석이 이제 파 들어가기를 멈추고 부드럽게 공회전을 하고 있는 엔진의 소음을 들으며 말했다. 이제 곧 시추 파이프는 걷어 올려지게 될 것이다. 파이프에서 토해낸 분비물이 산더미처럼 쌓여져 있었지만 이곳에서도 유정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김진모가 손에 묻은 기름을 걸레로 닦으며 유장석을 바라보았다.
「철수할 작정이요? 유 상무.」
「아니, 아직은. 하지만 당분간 기지를 옮기지는 않습니다.」
「본부가 습격당한 지 오늘로 이틀짼데, 하바로프스크에서는 어떤 조처가 있을 것 아니요? 러시아군도 그렇고.」
「아마 그럴 겁니다.」
「쉬운 일은 없지. 하지만 무장 강도단이 습격해 오리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했겠소?」
김진모가 입맛을 다셨다. 그는 천성이 느긋한데다 뱃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역경에 처할수록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나는데 유장석은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탐사기지의 인원들이 도착하고 병사들과 직원들이 방어선을 구축하느라 분주한데도 그는 계기판을 보며 시추공 근처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허탕이다.
「나는 이 근처를 다시 한번 파 보고 싶은데 ‥‥‥」
김진모가 계기판을 손바닥으로 쳤다.
「딱 1킬로만 북쪽으로 옮겨서 말이오. 그쪽 지층에서 승부를 걸어 보고 싶은데.」
바깥에서 러시아 병사들이 힘을 합쳐 무엇인가를 끌어가고 있었다. 본부에 부임한 지 며칠 되지 알았던 알렉세이 대위와 림스키 상사는 부하들과 함께 전사했으므로 이쪽은 보리스와 에프게이 두 상사가 지휘하고 있다.
「이 망할 바늘이 왜 이래?」
김진모가 다시 손바닥으로 계기판의 유리판을 쳤다. 유장석이 들어가 있는 엔진실 밑에 서 있던 김상철에게 스웨터 차림의 서은영이 다가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횐 태양이 떠 있는 맑은 날씨여서 에프게이의 지휘로 철판을 옳기는 병사들도 내복 차림이었다.
「그자들이 여기까지 오리라고 생각해?」
트럭에 등을 대고 나란히 선 그녀가 물었다. 병사들이 그녀를 힐끗거리고 지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들 그래?」
김상철이 되묻자 서은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관심 없어. 난 상철 씨 생각을 듣고 싶은 거야.」
「을 거야. 아마 지금쯤 이 부근의 구릉이나 삼림 속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
서은영의 시선이 김상철을 따라 기지 주위를 돌았다.
「겁주고 있어.」
「넌 그놈들이 한 짓을 못 봐서 그래.」
김상철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트럭의 앞부분으로 데려갔다. 그쪽에서는 탁 트인 기지의 앞쪽 벌판이 보였다. 그레고리 일당이 습격해 올 길은 양쪽의 삼림 지역보다 차가 달릴 수 있는 전방이다. 삼림 속으로 들어오려면 거대한 능선을 넘어야 하는데 전인미답의 삼림지대는 함정이나 다름없었다. 10미터도 가지 못하고 길을 잃게 될 것이다.
「놈들은 포로로 잡은 사람들도 살려두지 않았어. 모조리 죽인 거야.」
앞쪽을 바라보며 김상철이 말했다.
러시아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벌판에는 서너 개의 참호가 만들어져 있었다. 서은영이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이윤제 씨의 말이 맞은 것 같은데.」
「뭐가?」
「우리가 사지에 던져졌다고 했지 않아? 그 사람은.」
「사지 생지가 따로 있는 건가? 멀쩡한 대낮에 서울 시내에서 차에 치어 죽을 수도 있고 이런 데서 살아남을 수도 있는 거야.」
김상철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하긴 나 같은 자가 먼저 죽을 수도 있을 것이고 이윤제 같은 자가 살아 돌아갈 수도 있지. 모르는 일이야, 생과 사는.」
8. 폭발하는 대지
「이런 빌어먹을!」
김진모는 압력계기를 다시 손바닥으로 두드리고는 허리를 폈다. 파이프는 걷어 올려지고 있는데 압력기의 바늘은 붉은 선 위에 걸쳐져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압력이 어디가 높다는 거야?」
압력기는 파이프 내부의 압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가스가 차 있을 때에만 올라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시추 구멍은 막혀 있는 상태로 파이프가 올려지는 상황이어서 압력기는 멈춰 서 있어야 했다. 조정실의 문이 열리더니 안조교가 들어섰다.
「교수님, 이제 좀 쉬시지요. 제가 여기 있겠습니다.」
「이것 좀 봐.」
김진모가 압력기의 바늘을 턱으로 가리켰다.
「파이프가 막혀 있는데 압력이 이렇게 높은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고장 아닙니까? 점심 때 제가 봤을 때에도 내려갔다 올라갔다 했습니다.」
「혹시 가스가 차 있다는 표시 아닐까? 막힌 파이프 밑에.」
그러자 안조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교수님도 참, 가스가 있었다면 파이프가 열렸을 때 바늘이 움직여야지 닫힌 상태에서, 그것도 작동이 멈춘 지 오래인 지금 그럴 리가 있습니까?」
「만에 하나, 우리가 시추공을 닫고 나서 가스가 치고 올라온 것 아닐까?」
다시 웃기가 미안했던지 안조교가 압력기의 계기판을 손바닥으로 쳤다.
「이 압력기는 파이프 내부 압력을 측정하는 것인데 뚜껑이 닫힌 파이프에 압력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교수님.」
「굴착 프로펠러의 주위에 네 개의 구멍이 있어. 위에서 회전율을 증가시키기 위한 분사용 장치로.」
「그 구멍으로 가스가 올라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작업을 멈추고 파이프를 끌어올리기 시작했을 때 가스가 터졌단 말씀입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 파이프가 닫혀서 가스가 분출하지 못하고.」
「교수님은 정말 낙관적이시군요.」
「매사에 긍정적이지.」
「그때마다 실망이 크실 텐데요.」
김진모가 방한모를 집어 들었다.
「자네는 계기판을 봐. 난 나가서 파이프의 뚜껑을 열어볼 테니까. 그때까지 파이프를 끌어 올리는 건 멈춰 둬.」
「예, 교수님.」
「비웃지 마라, 아무 일 없더라도 난 실망하지 않을 테니까.」
밖으로 나온 김진모는 50미터쯤 떨어진 시추공구 쪽으로 다가갔다. 높이가 20미터에 3면의 길이가 5미터가량으로 꼭대기의 중심 부근에는 직경 50센티 가량의 기둥이 박혀져 있다.
그가 다가가는 동안에 시추공 옆에 붙어 있던 모터가 요란한 엔진소리를 멈추었다. 안조교가 모터를 끈 것이다.
그가 산더미처럼 쌓여진 지층의 잔해를 지나 원통형의 시추공 옆에 다가섰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 몇 번째인지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파이프를 끌어 올리는 도중에 시추공과 파이프에 이물질이 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뚜껑을 여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원통의 옆쪽에 붙여진 둥근 손잡이를 잡아 힘껏 오른쪽으로 틀었다. 그러나 워낙 뻑뻑해서 1센티쯤 움직이고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
「교수님, 도와드릴까요?」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김진모가 머리를 들었다. 최 과장이다. 다가와 손잡이를 쥐었다.
「왜 뚜껑을 여시려고 합니까?」
그는 이제까지 김진모와 행동을 같이 해왔으므로 제법 구조를 알고 있었다.
「가스를 체크하려는 거요,」
「뚜껑을 열면 체크가 됩니까?」
이마에 힘줄을 뻗치도록 최 과장이 손잡이를 돌리자 다시 2센티쯤 비틀어졌다.
「이거, 너무 뻑뻑한데요. 지난번엔 잘 되더니만.」
김진모가 손잡이를 잡아 그와 힘을 합쳤다.
「자, 하나, 둘, 셋!)
둘이서 다시 힘을 쓰자 손잡이가 10센티쯤 비틀어졌다. 그들은 잠시 숨을 돌렸다. 그 순간 그들은 원통 안에서 무엇인가 울리는 진동음을 들었다
「이거 뭐야.」
덜컥 겁이 난 최과장이 한 걸음 물러서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지주가 허물어지는 것처럼 느낀 것이다. 그러나 눈을 부릅뜬 김진모는 손잡이를 잡은 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울림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원추 기둥이 흔들리는 것도 느껴졌다. 지하 1킬로에서부터 무엇인가 치솟아 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땅이 울리는 진동이 부근까지 울렸고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려서 부근을 지나던 러시아 병사들이 멈춰 서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하나님.」
손잡이를 쥔 채 김진모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나님. 아이고, 하나님. 이것이 ‥‥‥‥」
진동과 울림소리가 더 커졌으므로 먼 쪽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이쪽을 바라보았다. 조종실에 있던 안조교가 문을 열고 뛰어나와 무언가를 소리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계기는 아마 부서질 지경이 되어 있을 것이다.
김진모가 이제는 악을 쓰듯 외쳤다.
「아이고! 이제 나온다!」
입을 쩍 벌린 최과장이 김진모의 팔을 잡았다.
「교수님, 이게 도대체‥‥‥」
그 순간 시추공 맨 윗부분에서 검은 기름 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기름 줄기는 50미터도 넘게 하늘 위로 뿜어져 올라가더니 곧 주위에 검은 물벼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기름이다!」
김진모가 목이 터질 듯이 외치며 두 손을 하늘로 뻗었다.
「나왔다!」
그는 두 손을 든 채로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기름비가 삽시간에 그의 몸을 검게 물들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자 최 과장도 두 손을 치켜올리고는 그를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기름 줄기를 막았을 때는 저녁 무렵이 되어 있었다. 김진모는 말할 것도 없고 유장석도 반쯤 실성한 사람이 되어 있었으므로 직원들은 물론 러시아 병사들까지 몸이 허공에 뜬 자세로 파이프를 다시 막았고 주변을 정리했다.
주위가 어두워지자 유장석이 막사로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아직도 얼굴에 묻은 기름이 지워지지 않아서 마치 야간 정찰을 나가는 군인의 얼굴 같았다.
「기름이 나왔다는 사실은 비밀이다. 회장님께 보고를 하고 별도 지시를 받을 때까지 철저히 비밀로 해야 한다.」
유장석이 좁은 막사 안에 둘러서 있는 20명 가까운 한국인들을 둘러보았다. 거기에는 김진모의 일행은 물론 이윤제와 서은영까지 끼어 서 있었다.
「러시아 정부와 회장님이 정식 계약을 맺을 때까지 비밀로 해야 할 거야. 기름이 나온 줄 알면 러시아 정부는 이 땅을 임차지로 내놓을 리가 없다.」
「우린 걱정 없습니다, 상무님. 문제는 러시아 병사들이지요.」
이대각이 대뜸 말했다.
「이곳에 있는 한국인들 중에 그럴 사람은 없어요. 그런 놈이 있다면 매국노나 다를 바 없습니다.」
「러시아 병사들은 내가 처리하지.」
유장석이 말을 이었다.
「20명 정도니까 지휘관으로부터 사병까지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거액을 주겠다고 할 생각이야.」
그러자 김진모가 입을 열었다.
「유정은 파이프로 막고 있지만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언제 다시 분출할지 모릅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회장님께 연락을 할 작정이오.」
유장석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남쪽의 넬칸까지는 700킬로. 그곳에는 러시아 산악부대의 파견대가 있다. 그들의 무전기로 하바로프스크에 연락을 해야겠다.」
기침소리 하나 없이 막사 안은 조용해졌다. 넬칸은 주그주르 산맥 서쪽의 레나강 최상류에 위치한 조그만 마을이다. 모두 유장석의 말뜻을 알고 있었으므로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유장석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오늘 밤 우리는 습격을 당해 모두 희생될지도 모르지만 이 사실을 알려야만 한다. 누구, 넬칸까지 갈 사람 있는가? 가서 회장님께 연락을 할 사람이.」
「내가 가지요.」
최과장이 손을 들었다. 전과장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가 가겠습니다.」
그러자 대부분의 근대 직원들이 손을 들어 앞으로 나서려 했다. 유장석이 머리를 저었다.
「잠을 자지 않고 차를 달려도 아마 이틀은 꼬박 걸릴 것이다. 그것도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경우에 말이야.」
넬칸에서 이곳까지 올 때에는 장비를 싣고 이동하긴 했지만 열흘이 걸린 여정이었다. 유장석의 시선이 김상철에게서 멎었다.
「상철이, 너는 왜 지원하지 않는 거지?」
유장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몸이 좋지 않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으므로 김상철이 벽에 몸을 붙였다.
「몸이 아프다면 할 수 없지. 야간에 운전을 해야 할 테니까,」
유장석이 직원들에게 몸을 돌렸다.
「그렇다면 최과장과 박대리, 안대리 셋이서 간다. 준비를 하고 한 시간 안에 출발하도록.」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이다. 최과장 일행이 탄 트럭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몰려 서 있던 직원들이 제각기 흩어졌다. 막사 쪽으로 걷던 김상철은 뒤에서 들리는 눈 밟히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서은영이다.
「몸이 아파?」
입에서 횐 김을 내뿜으며 그녀가 물었다.
「내 생각엔 일부러 남은 것 같은데. 유상무는 거기를 보내려고 했고.」
김상철은 어깨에 메고 있던 소총을 손에 쥐었다. 이제 근대 직원들도 무장하고 있었고 러시아 병사들과 함께 초소 근무를 선다. 그들은 식량 트럭의 뒤쪽에서 멈춰 섰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습격해 을 놈들은 강도단이 아니야. 북한 놈들이 섞여 있는데 아무래도 놈들과 연합해 있는 것 같아.」
「북한 사람들?」
서은영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자들이 왜?」
「한국의 시베리아 지역 임차를 방해하려는 거지. 북한의 위아래에 한국이 있게 될 테니까.」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었네.」
이맛살을 찌푸린 서은영이 혀를 찼다.
「근대그룹의 방해 세력이 한국 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구만.」
「너만 알고 있어. 이건 유상무와 이부장하고 나만 알고 있는 일이니까.」
주위를 둘러본 서은영이 바짝 다가섰다. 그들의 앞쪽에 서너 명의 러시아 병사가 모여 있을 뿐 이쪽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오늘 밤 습격당하는 것은 확실해?」
「놈들이 이곳을 찾고 있었어. 어제 하루 동안 아마 이 근처로 이동해 와 있을 거야.」
「그걸 알고 있었다면 왜 떠나지 않았어? 아까 유상무는 거길 보낼려고 하는 것 같던데.」
「개죽음 당하기 싫어서.」
얼굴에 웃음을 띤 김상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스 있는 곳에 머물러 있어야 돼. 죽든 살든 말이야. 그래야 빛을 본다구.」
「대단하구만, 출세하겠다.」
주위가 어두워지면서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바람 끝이 매서워지는 것을 보면 오늘 밤은 강풍과 눈보라가 휘몰아칠 모양이었다.
「근무하러 가야 돼.」
김상철이 타이어에 기대 놓았던 소총을 집어 들자 서은영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오늘 밤, 트럭으로 가도 돼?」
「안 돼, 이 부장하고 같이 쓰기로 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윗사람 눈치 보기도 싫어. 너 때문에.」
「우리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러시아 놈들도 모두 알고 있는데.」
「글쎄 그것이 거북하단 말이야, 나는.」
방한모를 눌러쓴 김상철은 트럭을 나와 앞쪽의 벌판을 향해 걸었다. 눈 속에 설치해 놓은 참호로 근무 나갈 시간인 것이다.
하바로프스크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콤소몰 광장은 이미 인기척이 끊긴 지 오래여서 눈발에 가린 가로등 몇 개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창밖을 바라보고 선 강 회장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모직으로 만든 두툼한 가운의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턱을 세워둔 자세였다. 밤 11시가 되어가고 있어서 직원들 모두 방으로 돌아갔고 위쪽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이남호 혼자였다.
「열흘 후에는 계약을 할 작정이야. 그러고 나서 사원을 다시 파견하겠다.」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면서 강회장이 입을 열었다.
「분하다. 유장석이 그놈, 이대각이라는 놈하고. 이곳 개발에 적격인 놈들이었는데.」
「회장님. 아직 상황은 모릅니다. 내일 군대가 투입되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이남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때로는 격정적으로 폭발하다가도 아주 드물게 강 회장은 감상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그것도 이남호 앞에서 만이었다.
「그리고 두 곳의 파견기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니까요, 생존자가 있을 겁니다.」
강회장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체르넨코에게 무기 사용 허가를 받아내서 자위 수단을 가져야 돼. 계약에 명기시켜야 한다.」
「물론입니다. 그자들이 거부할 이유도 명분도 없습니다.」
「근대사원을 중심으로 시베리아와 연해주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을 모아서 무장시키면 이 빌어먹을 극동군 놈들에게 매달리지 않아도 되겠지.」
다시 강회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졌다.
「이 일은 내 인생의 마지막 사업이다. 아니 사업이라기보다는 사명이지. 광활한 시베리아 땅을 한국인이 경영하는 것, 이보다 큰 보람이 어디 있단 말이냐?」
「저도 사명을 다해서 보필하겠습니다, 회장님.」
「아서라, 유장석과 이대각의 목숨으로 충분해. 더 이상 내 심복의 희생이 있으면 안 된다.」
강회장이 입맛을 다셨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박미정이 들어섰다. 밤이 깊었는데도 단정한 모직 슈트 차림이다.
「회장님, 약 가져왔습니다.」
「어어, 그렇구나.」
강회장이 머리를 끄덕이며 박미정이 내미는 대접을 받아들었다.
「자네가 따라와 고생이 많구만.」
「아닙니다.」
짧게 대답한 박미정이 다소곳이 서서 그가 한약을 마시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회장을 수행한 유일한 여직원으로 이남호에 의해 선발되었다. 비서실에서의 업무는 시베리아와의 연락이었지만 지금은 회장의 개인비서로 잔시중을 드는 것이다. 출장 직전에 회장댁에 불려가 사모님한테서 한약 드시게 하는 요령과 식사에 대한 주의까지 받은 터였다.
「자, 수고했어.」
빈 대접을 건네주며 회장이 박미정을 바라보았다.
「네가 까다로운 이실장의 눈에 들었다면 곧 좋은 신랑감을 만날 수 있을 게다. 이실장이 중매한 비서실 여직원이 여럿이야.」
방 안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것이 기쁜 이남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저보다 회장님 눈이 높으시지요. 회장님께서 중매를 하셔서 문제를 일으킨 쌍이 없지만 저는 두어 쌍이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아마 내 눈치를 보기 때문일 거야. 내가 무서워서 못 갈라서는 거지.」
그들의 말소리를 들으며 박미정은 방을 나왔다. 대리석이 깔린 복도에 구두창이 닿으면 맑은 소리가 울려 나온다. 복도 옆 유리창 밖으로 낮에는 얼어붙은 아무르강이 보였지만 지금은 짙은 어둠에 묻혀 있을 뿐이다.
아무르강의 중국 이름은 흑룡강이다. 중국의 동북부에서 오호츠크해로 흘러 들어가는 아무르 강가, 하바로프스크 교외에 세워진 2층 통나무집에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눈발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지만 아래층 거실에서 타오르는 페치카의 장작불에 방 안은 후끈거렸고 앞에 앉은 두 사내의 얼굴도 열기에 달아서 붉다.
「오성그룹 사랑들은 개척단에 관한 정보라면 돈을 아끼지 않아요. 그자들은 아마 나 외에도 다른 정보망을 갖고 있을 겁니다.」
박대용이 말하자 옆에 앉은 40대의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 극동군 사령부의 장교들을 매수했겠지. 놈들은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니까.」
가죽조끼를 걸친 그는 살찐 얼굴에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 단정히 넘겼고 무거워 보이는 금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는 북한 외화벌이 사업단 소속의 대좌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올라온 이금철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 망할 놈이 우리 경제특구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고 로스케 놈들에게 아부만 하고 있단 말이야.」
「러시아 대통령과 국방장관은 한국 대통령보다 강 회장을 믿습니다. 내일 체르넨코가 이곳으로 온다는 걸 보시오.」
「체르넨코뿐인가? 한국의 안기부 놈들도 인투리스트에 와 있고 일본 정보국의 가네야마도 와 있는데.」
박대용이 탁자 위에 놓인 잔을 들어 보드카를 한 모금 마셨다.
「내일 1개 대대의 공정대가 증파되고 수색작업이 시작될 거요. 극동군 사령부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기지에 있던 사람들이 몰살당한 것이 확인되면 대규모의 병력이 움직일 거요.」
「몰살당하지는 않았어. 간부급 놈들이 탈출해 버렸거든.」
이금철의 말에 박대용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압니까?」
「다 아는 수가 있지.」
「그럼 간부급은 어디로 갔습니까?」
「글쎄, 다른 기지로 옮겼든지 했겠지. 탐사기지로 말이야,」
「오성그룹 사람들에게 넘길 만한 정보는 못 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자네가 그레고리 일당과 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될 테니까.」
「무슨 말씀을, 3년이 넘도록 쥐어본 나를 아직도 모르십니까?」
「동무가 우리 공화국에 충성하고 있다는 건 당에서도 인정하고 있어. 그래서 이번에는 동무에게 큰 과업을 맡길 작정이야.」
이금철이 나무 의자를 뒤쪽으로 조금 물리고는 박대용을 바라보았다.
「근대그룹의 시베리아 지역 임차를 반기는 것은 러시아 정부뿐이야. 동무에게 정보비를 지급하는 일본도, 한국 정부도, 그리고 우리 공화국도 모두 반대를 하고 있지. 거기에다 자네가 사례금을 받는 근대그룹의 경쟁자인 오성그룹까지 말이야.」
「‥‥‥」
「그래서 말인데, 강회장이 이곳에서 사고를 당했다면 여럿이 좋아할 것 같지 않나? 설령 사고가 아니라고 판명이 나더라도 누가 그랬는지 찾기 힘들 것 같지 않아? 원체 적이 많은 놈이니까 말이야.」
이금철이 술잔에 보드카를 채우면서 웃었으나 박대용은 그를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시간에 한일만 이사와 김영규 부장은 레닌 대로변에 있는 카페에 들어서고 있었다. 말이 카페이지 안은 어두운데다 소음과 담배연기로 가득 찬 선술집이었다. 나무 탁자가 무질서하게 놓여진 카페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서 빈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소매를 걷어붙인 남자 종업원들이 입구 근처에 서 있는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집 맞아?」
이맛살을 찌푸린 한일만이 소리쳐 묻자 김영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런 데서 어떻게 ‥‥」
투덜거리는 한일만 앞으로 건장한 사내 한 명이 다가왔다.
「당신들, 근대사람 들인가?」
「그래, 맞다.」
김영규가 대답하자 사내가 턱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곧장 안으로 들어가. 문을 열면 사람이 있을 테니.」
사람들을 헤치고 어두운 벽 쪽으로 다가가자 사내의 말대로 문이 나왔다.
문을 열자 사내 세 명이 서 있었다. 모두 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두 명은 기관총을 세워 들고 있다. 사내 한 명이 손으로 좁은 복도 끝 쪽의 방을 가리켰다.
「저 방이야.」
한일만과 김영규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두 사내가 일어섰다.
「어서 오시오.」
그렇게 말한 사내는 김영규와 안면이 있는 그라노프였다. 그가 옆의 사내를 가리켰다.
「이분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오신 파벨 씨.」
파벨은 검은 머리에 눈동자도 검은 40대 정도의 사내로 단정한 양복 차림이었다. 인사를 나눈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자, 한잔하실까?」
그라노프가 보드카 병을 들어 한일만과 김영규의 잔에 술을 따랐다.
「스카치를 원하신다면 가져올까요?」
「아니, 됐습니다.」
술잔을 든 김영규가 힐끗 파벨을 바라보았다. 그라노프는 하바로프스크의 마피아 간부였으니 분위기로 보아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왔다는 파벨이 그보다 상급자인 것 같았던 것이다.
「이거 갑자기 뵙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그라노프가 입을 열었다.
「파벨 씨가 당신들께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해서요.」
한일만과 김영규의 시선을 받은 파벨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근대그룹이 그라노프와 좋은 관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라노프한테서 매일 보고를 받고 있으니까요.」
김영규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러시아의 사정에 익숙한 그는 하바로프스크에 자리를 잡자 마피아 보스인 그라노프에게 인사치레로 5만 달러를 건네주었다. 마피아는 정부 측과 결탁하고 있어서 경찰력만 믿다가는 도무지 일이 되지 않는다. 러시아에 진출한 거의 대부분의 외국상사는 마피아에게 매출액의 일정부분을 주든지 사례금을 주어야만 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사업에 윤활유 역할을 할 때도 있다.
파벨이 말을 이었다.
「난 블라디보스토크의 보스 파리야킨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파리야킨은 러시아 극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마피아의 보스였고 그라노프는 그의 간부급 부하에 불과했다. 긴장해 있는 한국인들을 향해 파벨이 다시 웃었다.
「이왕 우리와 손을 잡고 일하게 되었는데 도와드려야지요. 당신들이 지금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으니까요.」
「기지가 습격당한 것 말입니까?」
한일만이 묻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놈들의 습격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당신들을 습격한 것은 그레고리 일당뿐만이 아니오, 북한 공작원들이 섞여 있습니다.」
놀란 한일만과 김영규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북한 공작원들이라니, 그게 사실이요?」
한일만이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사실이오. 벌목사업소에서 무장 경호병들이 그레고리 일당과 합류해서 올라간 거요. 북한 측의 지휘자는 장국진이라는 대외정보국 소속 대위이고.」
「‥‥‥」
「북한의 벌목사업소는 우리 없이는 외화벌이를 못 합니다. 따라서 그자들은 우리 눈을 피할 수가 없소.」
「‥‥‥」
「그리고 지금 하바로프스크에는 온갖 놈들이 몰려와 있소. 일본과 한국, 그리고 북한의 기관원들과 정보원들이 말이오.」
「정보, 고맙습니다, 파벨 씨. 파리야킨 씨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그러자 파벨이 헛기침을 했다.
「잠깐만, 난 아직 보스의 용건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테이블에 상체를 붙이고 다가앉았다.
「보스는 강회장과 비서실장이 하바로프스크에 오신 김에 만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앞으로 러시아에서 서로 공존해 가기를 바란다면서, 나에게 가부간 답을 듣고 오라고 했습니다.」
12시가 지나자 바람이 그치더니 주위는 미세하게 사각거리는 소리로 덮여가기 시작했다. 대기가 얼어가는 것이다. 그 속을 사람이 걸으면 얼음장을 헤치고 나가는 것처럼 몸에 얼음가루가 묻어나온다. 장국진은 희미하게 보이는 전방의 빛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주위로 그레고리의 부하들이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가끔씩 발에 밟힌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기지까지는 이제 200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짙은 어둠 속이어서 10미터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기지의 막사 한쪽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목표가 되었으므로 전진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
기지의 불을 모두 꺼놓고 있는 것을 보면 놈들도 단단히 경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옆으로 사내 한 명이 다가왔다. 방한모로 얼굴을 덮고 방한 안경까지 쓰고 있었지만 벌목 사업소에서 따라온 이호근임을 알 수 있다.
「대위 동지, 이곳에 다 모여 있다니 다행이오. 이번 일로 끝낼 수 있어서.」
말소리가 웅얼거리며 나왔지만 장국진은 알아들었다. 그들은 30미터쯤 앞으로 전진해나갔다가 눈 위에 엎드렸다. 영하 40도가 넘는 추위여서 방한복으로 보온을 했더라도 금방 냉기가 전해져 왔다. 이렇게 30분만 있다가는 몸이 굳어 버릴 것이다.
장국진은 앞쪽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막사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었는데 그 주변은 짙은 어둠에 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낮에 기지 전방 1킬로 지점까지 접근해서 모두 살펴 놓았으니 접근하기만 하면 반은 성공한 셈이다. 옆쪽에서 눈을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여섯 명이 앞으로 나아갔다 앞쪽 3, 40미터 전방에 러시아군의 참호가 있는 것이다. 그들을 따라 다시 몸을 일으키던 장국진은 총성과 함께 밤하늘 위로 뻗어 올라가는 빛줄기를 보았다. 조명탄이다.
「엎드려!」
장국진이 소리치며 엎드렸을 때 요란한 총성과 함께 총탄이 쏟아져 왔다. 이미 놈들에게 발각된 것이다. 이쪽도 응사하기 시작했으므로 벌판은 금방 땅이 울리는 총성으로 덮여졌다. 저쪽에서 쏘아대는 기관총탄이 날카롭게 대기를 찢으며 스쳐 지나갔고 간간이 비명소리도 났다. 이쪽에서 대전차 척탄 발사관을 쏘아 전방의 트럭 한 대가 화염을 일으키며 폭발했다.
「이런 망할.」
다시 조명탄 한 발이 쏘아 올려지자 장국진이 혀를 찼다. 그레고리의 습격조는 두 부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는 전방을 맡은 그레고리 부하들과 동행이었다. 그러나 30미터도 전진하지 못한 채 벌써 여러 명의 희생자가 났다.
「참호 모두가 비어 있어요. 놈들은 우릴 기다리고 있었어.」
옆에 엎드려 총을 쏘아대던 이호근이 소리치듯 말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리더니 뒤쪽에서 포탄이 폭발했다. 저쪽에서도 척탄통을 발사한 것이다. 낮에 정찰했을 때, 기지 앞쪽으로 서너 개의 참호가 설치되는 것을 보았으므로 조심해서 전진했던 것인데 그곳은 이미 비어 있었던 것이다.
「쏘지 마라.」
보리스 상사가 소리치자 조명탄을 발사하려던 병사가 움직임을 멈췄다.
「자, 준비해라.」
조명탄의 불빛이 가장 환해진 시간이다. 기지의 이쪽저쪽에서는 아직도 전방을 향해 요란하게 총을 난사하는 중이었고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김상철은 소총을 움켜쥐고 트럭의 타이어에 등을 기대었다. 조명탄의 불빛이 낮아지면서 주위에 짙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폭파된 트럭에서 어른거리는 불빛이 옆쪽을 비췄지만 그 반경은 10미터 정도여서 이쪽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다. 순간 조명탄이 꺼지면서 주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가자!」
보리스가 짧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자 7, 8명의 부하들이 땅바닥에서 몸을 솟구쳐 일으켰다. 김상철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돌격조로 어둠을 이용하여 적 안으로 돌격해 들어가는 것이다. 총탄이 쏟아져 오고 있었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이쪽이 맹렬하게 지원사격을 하고 있는 터여서 저쪽의 화력도 총구의 불빛이 번쩍이는 그곳에 집중되어 있다. 허덕이며 달리던 김상철은 문득 자신이 최선두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리를 이룬 이쪽의 돌격조는 소리를 지르지도 그렇다고 총을 쏘지도 않았다. 어둠 속을 전력 질주하여 습격자들에게 바짝 다가서는 것이 1차 목표인 것이다. 입에서 쇳소리를 내며 달리던 김상철의 머리에 얼핏 안인석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이유미의 얼굴도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순간 어두운 하늘 위로 빛줄기 한 개가 포물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조명탄이다. 그러자 돌격조는 일제히 눈밭 위로 몸을 던져 엎드렸다. 엎드린 김상철은 방한 마스크 앞부분에 붙어 있는 얼음덩이를 내었다. 조명탄의 불빛이 번쩍 켜지면서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으므로 김상철은 소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불빛이 내려오면서 주위가 대낮같이 밝아졌다. 그러자 그는 바로 10미터쯤 앞쪽으로, 옆으로 길게 엎드려 있는 습격자들을 보았다.
벌떡 일어선 그가 그들을 향해 소총을 난사하자 주위에서도 그들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습격자들은 당장에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들도 조명탄이 꺼진 틈을 타서 착실하게 2, 30미터쯤 전진해온 터였다. 그러다가 조명탄이 올라가자 납작 엎드려 있었는데 날벼락 같은 기습을 받은 것이다. 30발들이 탄창 하나를 다 비우는 동안 김상철은 적어도 다섯 명은 쏘아 넘어뜨렸을 것이다. 보리스 상사가 인솔해온 7, 8명의 돌격조도 각각 비슷한 상과를 거두었다. 물론 이쪽도 피해를 봤다. 조명탄의 불빛이 꺼졌을 때 살아남아 다시 엎드린 병사들은 반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습격자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김상철은 눈발 위를 엎드려 전진해 나갔다. 한 손에 총을 쥔 채 눈 위를 제치고 나갔으므로 온몸은 금방 눈투성이가 되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금 전부터 이호근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당한 모양이었다. 주위가 다시 어두워졌으므로 장국진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기지와의 거리는 100미터도 되지 않았으므로 이제 단숨에 진입할 수가 있는 것이다.
「크라우스!」
장국진이 소리 쳤다. 기회는 지금인 것이다.
「크라우스! 앞으로 나가자!」
그레고리의 심복으로 전면의 공격을 맡고 있는 크라우스의 대답이 없다.
「크라우스!」
그가 다시 소리치자 옆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무의식중에 총구를 돌린 장국진이 눈을 부릅떠 옆을 바라보는 순간이다. 그는 이마에 거센 총격을 받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두 눈에서 무수한 별이 반짝였을 때 그는 다시 뒤통수를 강타당하고는 앞으로 쓰러졌다. 크라우스는 그로부터 20미터쯤 뒤쪽의 눈 위에 엎드려서 무전기를 귀에 대고 있었으니 앞쪽의 상황을 알 리 없다.
「대장, 반수 이상이 당했습니다. 농들의 기습을 받았어요.」
총성 때문에 그는 소리치듯 말했다. 이제 피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서로 옆을 향해 쏘아대고 있는 것이다.
「대장! 놈들이 섞여 있어서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 우리도 돌아간다.」
그레고리가 자르듯 말하고 무전을 끊었으므로 크라우스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옆쪽에 내려놓았던 소총을 들다가 두꺼운 장갑 때문에 눈 속으로 소총을 떨어뜨렸다.
「빌어먹을, 후퇴다!」
그가 옆에 엎드린 무전병의 어깨를 세게 쳤다.
「후퇴야! 돌아가!」
무전병이 방한 마스크를 벗고 소리쳤다.
「돌아가! 후퇴다!」
삼림을 빠져나와 기지를 향해 엎드려 있던 참이어서 그레고리의 후퇴 명령에 대부분의 부하들은 맥이 빠진 것 같았다.
「크라우스는 기습을 받아 반 정도 병력을 잃었단 말이다. 기를 쓰고 쳐들어갈 필요는 없어.」
소리치듯 말한 그레고리가 다시 온 길을 되짚어 앞장을 섰다. 플래시로 땅을 비추며 전진했다. 주춤거리던 부하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제 이곳 일은 끝났어. 아르카로 가서 몇 달간 푹 쉬기로 하자.」
그레고리의 말에 부하들의 분위기가 금방 밝아졌다. 아르카에는 백러시아 여자들이 가득했고 대부분이 미인인데다가 남자에 굶주려 있다. 남자들이 대부분 하바로프스크나 블라디보스토크, 니호트카 등으로 돈을 벌러 나갔기 때문이다.
「대장, 그렇다면 북한 놈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하 하나가 물었으므로 그는 방한모의 마스크를 올렸다.
「그건 모른다. 하지만 죽든 살든 상관없어. 이제 그자들과 거래는 끝났으니까.」
그가 삼림을 뚫고 기지의 측면을 치는 부대를 맡은 것도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어차피 전면을 습격하는 부대가 선수를 치게 되어 있었으므로 상황을 보아 가며 진퇴를 결정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크라우스에게 병력의 반을 쪼개주면서 북한인들을 합류케 했고 이쪽은 심복 부하들만 추려놓았었다. 그는 나뭇가지에 발이 걸려 겨우 중심을 잡고는 앞장서 걸어 나갔다. 병력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산간 마을에는 탈주병들이 얼마든지 있었고 퇴역 군인들도 지원자로 줄을 서 있는 형편이었다.
아침이 되자 기지는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활기를 띄고 있었다. 밤을 꼬박 새운 사람들이 부상자와 전사자를 따로 모았고 습격자들의 시체와 부상자들도 구분해 정리를 했다. 이쪽은 보리스 상사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 전사를 했고 일곱 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한국인들은 세 명이 부상자에 포함되었을 뿐 죽은 사람은 없었다. 습격자들은 8명이 죽었고 14명이 부상을 당했으므로 기지는 부상자들로 만원이었다. 이것은 러시아 병사들에게는 대단한 전공이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유일한 상사인 에프게이는 부하들에게 소리쳐 지시를 하면서도 전방을 불안스럽게 힐끗거렸다. 이제 싸울 수 있는 병력은 6명밖에 남지 않았고 한국인들을 합해도 모두 15명이었다. 다시 습격을 받는다면 이쪽은 전멸하게 될 것이었다.
유장석과 김상철이 트럭 안으로 들어서자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사내가 머리를 들었다. 이마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고 콧등 위에는 넓은 반창고를 붙인데다 얼굴에 엉겨 붙은 피를 닦지 않아 패잔병의 모습 그대로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로운 이 사내는 어젯밤 김상철에게 맞아 기절했다가 포로로 잡힌 장국진이다. 유장석이 부상자 그룹에서 빼내 막사에 따로 집어넣은 것이다.
「네가 북한군 대위라는데. 그레고리의 부하한테서 들었다.」
유장석이 플라스틱 의자를 들어 그의 앞에 내려놓고 물었다.
「네놈들의 사주로 나는 네 명의 부하직원을 잃었다. 네놈들은 동족이 아니다. 저 강도단보다도 더 악랄한 놈들이야.」
장국진이 퍼뜩 시선을 들었다.
「쓸데없는 수작 그만하고 죽여라.」
「죽이다니, 너 같은 값진 물건을 그렇게 간단히 처리할 수가 있나? 넌 우리가 아니더라도 러시아군을 공격한 죄로 처형당하게 될 테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러시아군에 날 넘겨라. 이 새끼들아, 잔소리 듣기 싫으니까.」
「글쎄, 그것이 네 뜻대로 안 될 것 같은데,」
유장석이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잘 감시해, 네가 잡은 놈이니까.」
유장석이 일어나 트럭 밖으로 나가자 김상철과 장국진의 시선이 마주쳤다. 트럭 안은 한동안 정적이 흘렀고 밖에서는 병사들의 떠드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들 목소리에 섞여 한국말도 들린다. 이윽고 김상철이 두어 걸음 다가가 장국진 앞에 섰다. 장국진의 두 손은 등 뒤로 돌려져 묶여 있다. 두 발목도 마찬가지여서 움직일 수가 없다. 김상철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소주병을 꺼냈다.
「이봐, 술 한 모금 할래? 한국산 소주야.」
장국진이 올려다본 채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병마개를 뽑은 김상철이 두어 모금을 삼켰다.
「사회생활을 하려니까 별 이상한 곳에서 별일도 많고 별놈을 다 만나는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김상철이 유장석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그는 병 채 술을 삼켰다.
「네가 나를 만난 것이 악연이야, 대위. 내가 악운에 더 강할 테니까 말이다.」
술병을 든 김상철이 장국진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남쪽 하늘에 헬리콥터의 편대가 나타난 것은 그날 오후 3시경이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근대 직원 모두도 뛰어나와 손을 흔들었다. 헬리콥터 편대가 자욱한 눈보라를 일으키며 착륙한 앞쪽 벌판이 공정 대원으로 금방 까맣게 뒤덮이는 것은 장관이었다. 그들은 곧 대열을 지어 기지 쪽으로 행진해 왔는데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유장석이 눈을 크게 떴다. 병사들이 2열로 좌우로 벌려서 다가오는 중간 부근에 한 무리의 민간인들이 있었다. 두툼한 슈바 차림과 원색의 파카를 걸친 그들은 아무래도 한국인들이었다.
「저기…. 직원들 같은데요.」
옆에 서 있던 이대각도 그들을 보았는지 소리치듯 말했다.
「하바로프스크의 김 부장인 모양이오.」
반가웠으므로 기지의 한국인들은 우르르 그들을 향해 몰려갔다. 유장석이 앞장을 섰다. 어젯밤 격전을 치른 벌판이어서 곳곳에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하늘은 맑고 바람 한 점 없다
그 순간 누군가가 소리쳤다.
「아이고, 회장님이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은 유장석이 눈을 부릅떠 앞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에 가려 있었지만 뒤쪽에 서 있는 검정색 모피 옷을 입은 사내는 강 회장이었다. 유장석은 눈 속에 발이 빠져 비틀거리면서 정신없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강 회장 옆에 이남호 실장도 보였고 한 이사도 있다. 저쪽도 그를 알아보았는지 몇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강회장의 웃는 모습이 보였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달려간 유장석을 보면서 강회장이 두 손을 벌렸다.
「이놈아, 살았구나.」
유장석을 텁석 끌어안은 강회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잘했다, 이놈아.」
「회장님.」
목이 메인 유장석이 아랫입술을 물었으나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회장님, 저회는….」
「살아서 다행이다. 더 바랄 것이 없다.」
「회장님, 석유가 나왔습니다.」
몸을 뗀 유장석이 고함치듯 말했으므로 강회장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봐, 유 상무. 무슨 말이야.」
모두 발을 멈추고 유장석을 둘러쌌을 때 이대각과 김진모 등이 다가왔다.
「회장님, 저는 자원탐사반의 김진모올시다.」
김진모가 강 회장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우린 유정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회장님이 서 계신 땅에는 유정이 묻혀 있습니다. 」
「자아, 들어갑시다. 가서 천천히,」
강회장이 유장석과 김진모의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 안았다.
「나는 그보다도 여러분이 무사해서 기쁩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그는 자주 눈을 들어 전방의 시추탑을 보았다가 다시 땅 밑을 살폈다.
이남호는 직원 한 명을 옆으로 끌고 가더니 정신없이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큰 무리를 짓고 기지로 들어가는 대열의 뒤쪽에서 박미정은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아는 사람도 없거니와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없다. 방한복의 후드를 올려 쓰고 있었으므로 이쪽이 여자라는 것이 쉽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병사들은 병사들대로 서로 껴안고 함성을 질러 댔으므로 기지 안은 축제 분위기였다. 기지 안으로 들어서던 박미정은 문득 시선을 멈추었다.
안쪽의 트럭 옆에 서 있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회장의 환영대열에 끼지 않았던 모양으로 짙은 색 스웨터 차림으로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바라보다가 문득 박미정과 시선이 마주쳤다. 몇 초쯤 시간이 지나자 그는 머리를 돌리고는 트럭 뒤쪽으로 사라져버렸다.
김상철이다. 박미정은 그렇게 단정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안인석에게 들은 김상철의 인상이나 분위기를 생각할 때 틀림없었다. 다시 회장 일행을 따르면서 박미정은 그제야 가슴이 거칠게 뛰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었고 또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커피숍으로 들어선 이유미는 안인석의 앞자리에 앉으면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후 2시에 회의가 있어. 바로 올라가 봐야 돼.」
점심시간이어서 회사 빌딩의 지하 커피숍에는 아는 얼굴이 많았다. 그들을 힐끗거리며 구주과 직원들이 옆을 지나갔다.
「미국 출장 다녀온 후로 꽤 바쁘구나, 저녁에도 시간이 없다니.」
안인석이 이유미를 바라보았다
「네 얼굴이나 보려고 점심시간에 찾아왔는데 회의 타령이고, 이제는 직장인의 틀이 잡혔나?」
「지금이 그런 때 아냐? 업무도 모르면서 정신없이 바쁜 때 말이야. 선배들이 그러던데, 인석 씨는 안 그래?」
「그런가?」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그렇게 보여?」
「얼굴도 말랐고.」
어제 오후에 이유미가 출장에서 돌아왔으니 거의 일주일 만에 만나는 것이다. 오전에 안인석이 회사로 전화를 했을 때 이유미는 저녁에는 시간이 없다고 했다. 과 회식이 있다는 것이다.
「참, 내 정신 좀 봐.」
이유미가 들고 온 봉투에서 포장된 상자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인석 씨 선물이야. 공항에서 샀어.」
「그래? 이걸 받으러 온 것 같구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안인석의 얼굴이 풀렸다. 포장지를 찢자 단단한 모양의 라이터가 나왔다. 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꽤 고급이네, 신경 좀 쓰셨는데.」
「어때? 회사 생활은? 이제 조금 안정이 되었어?」
이유미가 말머리를 돌리자 안인석이 담배를 빼 물고는 선물 받은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안정은 무슨, 그냥 그렇지.」
「‥‥‥‥」
「과장은 팀워크가 우선이라고 하는데, 나는 도무지 실감이 안 나. 이건 조장 한 놈을 진급시키기 위해서 팀이 희생하는 것 같단 말이야.」
「그리고 솔직히 눈에 불을 켜고 일하는 놈들을 보면 웃음이 나와. 실력으로 승부하라면 얼마든지 하겠는데 처신과 융통성, 그리고 충성도로 점수가 매겨지고 있는 것에 반발심이 일어나고.」
「그것이 경쟁사회의 진면목이야. 인석 씨는 그걸 몰랐어?」
이유미가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적응을 안 해? 능력 있는 남자가? 왜 겉으로만 돌면서 비판을 해?」
「아마 내가 있는 집 자식이어서 그런가 봐.」
그러면서 안인석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저 남들 하는 대로 입사하는 것만 생각했지 목적 의식이 없었어. 사원에서 대리, 조장, 과장, 부장. 이렇게 올라가는 과정이 아득하게 보였고.」
시계를 내려다본 이유미가 입을 열었다
「회의에 가봐야 돼. 같이 있고 싶지만.」
「넌 내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는구나.」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해. 인석 씨가 그러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냐.」
「내가 평범한 신입사원, 직장인으로 만족한 일상을 보낸다면 만족하겠니?」
이유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야. 갈등을 느끼는 사람들도 곧 익숙해진다니까.」
「‥‥‥‥」
「내일 내가 전화할게.」
몸을 돌린 이유미가 카운터로 다가가 찻값을 치르고는 안인석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안인석은 손에 쥐고 있던 라이터를 눌러 여러 차례 불꽃을 일으키며 앉아 있었다.
장충동의 노바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는 서울 시내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녁 식사를 마친 이유미와 흥만규는 라운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맛있는 저녁을 먹은 데다 곁들여서 마신 알코올 기운이 알맞게 퍼져 있는 상태여서 아늑하고 편안한 상태였다.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아담하고 조금 어두운 장식의 라운지에는 낮은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 대리는 성격이 자고 붙임성이 있는 것 같지만 여자 문제가 복잡해.」
위스키 잔을 든 홍만규가 말했다.
「작년에도 여자 고객과 문제가 생겼었는데 겨우 합의를 본 것 같더군.」
「그것도 조사시킨 거예요?」
「조사시키다니, 기획실에서 보고를 받았을 뿐이야.」
홍만규가 빙그레 웃었다.
「난 누굴 찍어서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없어. 기획실 업무는 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것이어서.」
「하지만 기분이 꺼림직해.」
「필요한 거야, 외부 정보도 필요하지만 회사 내부의 분위기가 어떻게 돌아가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이유미가 위스키를 한 모금 삼켰다. 앞에 앉은 홍만규는 언제나처럼 단정한 차림으로 자운 색 슈트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었는데 짙은 색 넥타이가 잘 어울렸다.
「박 대리는 올해 안에 진급을 바라는 것 같던데, 실적도 뛰어나니까 말예요.」
「글쎄, 그렇다면 과를 나눠야겠지.」
「미주는 매출이 많으니까 2개 과로 나눌 수도 있지 않아요?」
「그건 박 대리 생각인가?」
「그렇게 소문이 났어요.」
「그 친구, 입이 가볍군.」
「‥‥‥‥」
「오과장 생각도 해 줘야지. 자기 몫을 뺏기면 서운해할 텐데, 그렇지 않아?」
「윗선에서도 이야기가 되었다고 하던데요. 이것도 소문이지만.」
이유미는 짜릿한 긴장감에 빠져 있었다. 박대리와 오과장 등 사무실 내에서는 내노라고 군림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장기판의 졸처럼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글쎄, 영업부장이 박대리를 밀어주는 모양인데, 김상무하고. 사무실 분위기도 그렇지?」
홍만규가 묻자 이유미가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 그런 것 같아요,」
「김상무는 한미 여행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있어. 부사장으로.」
「‥‥‥‥」
「여행사라는 업종이 원래 경쟁이 심해서. 그러다 보니 직원들의 이직률도 높고, 회사에 대한 애착도 약해.」
「그래서 박대리를 잡아둘 생각이세요?」
「유미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신입사원한테,」
「유미는 내 유일한 대화상대야, 회사 내에서.」
그러자 이유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회사 밖에서는 신명인 씬가요?」
「이런, 유미도 정보망이 있는 모양이군.」
눈을 크게 뜬 흥만규가 물었다.
「회사 안에 소문이 났나?」
「안 날 리가 있나요? 여직원들의 관심이 온통 쏠려 있는 참인데.」
「그런데 왜 이제야 이야기를 하지?」
「아까 물으신 말에 대답을 할 게요. 박대리의 업무는 조수로 있는 미스터 김이 모두 파악하고 있어요. 최부장의 업무는 잘 모르지만요.」
「최부장 업무는 오과장이 모두 파악하고 있을 거야. 그들 둘이 없으면 김상무는 허수아비지.」
흥만규가 활짝 웃었다.
「나하고 해답이 같군, 그리고 말 나온 김에 말해 줄게. 신망인과는 곧 정리할 거야. 나하고는 성격이 안 맞아서.」
「부담 갖지 마세요. 그냥 한 말이니까.」
「서운한 소리. 유미나 그 신입사원 마무리 잘해 어려운 상황에서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니까.」
머리를 돌린 이유미가 잠자코 술잔을 손에 쥐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네 이야기는 모두 들었다',」
강회장이 다가와 김상철의 어깨 위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기지의 중심 부근에 설치된 대형 텐트 안이다. 두꺼운 방수천으로 만들어진 텐트는 사방 10미터 정도로 컸고 한가운데에는 러시아군이 제공한 대형 난로가 후끈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좌우 벌려 서 있는 이남호와 유장석, 한일만, 이대각 등이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회장이 다시 말했다.
「너는 우리 회사의 보배다, 정말 고맙다.」
아끼던 유장석과 이대각 등이 살아남아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유정을 발견했다는 흥분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강회장은 김상철을 와락 당겨 안았다가 떼어놓고는 이남호를 바라보았다.
「이 실장, 개척단 전원을 승진시켜라, 유상무에서부터 여기 있는 김상철까지.」
「예, 회장님.」
이남호도 밝은 얼굴이었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모두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금일봉을 주도록. 특히 탐사반원들한테는 각별하게 신경을 써야 될 거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희생자 유족에게도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이지.」
회장이 다시 김상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유상무한테 여기 남아 있겠다고 했다는데 안 된다, 나와 함께 돌아갔다가 다시 오도록 해라.」
그는 김상철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사람은 긴장을 풀고 쉴 때도 있어야 되는 법이야. 이곳은 내일 아침에 깨끗하게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자 이남호가 한 걸음 다가와 섰다.
「러시아 병사들도 모두 철수할 거야. 우리가 떠나면 그들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차라리 비워 놓는 것이 유정을 감추기 쉽기 때문이야.」
「알겠습니다.」
김상철이 머리를 숙이자 회장이 웃음 띤 얼굴로 머리를 끄떡였다
「우리의 새로운 미래가 이곳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네가 필요하고.」
텐트를 나온 김상철의 뒤를 이대각이 따라왔다.
「이봐, 김상철. 아니, 김 대리.」
이대각이 그의 어깨를 쳤다
「에프게이가 부하들하고 식당 트럭에서 기다리고 있다, 같이 가자.」
그는 손에 꽤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깊은 밤이어서 정연하게 설치된 러시아군의 텐트에서 밝은 불이 비치고 있었지만 나다니는 병사는 없다. 그들은 끝 쪽의 식당 트럭을 향해 걸었다.
「전사자의 몫도 줍니까?」
김상철이 묻자 이대각이 방한 안경 속의 눈으로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부상자 몫은 있어도 전사자 몫은 없어.」
「모두 이해할 거다.」
이실장은 20만 달러 가까운 현금을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공정부 대장과 장교들에게 사례비로 나눠줄 요량이었다. 그 돈을 기지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에게 약속대로 나눠주려는 것인데 유정에 대한 입막이용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모두 보는 앞에서 돈을 나눠주고 각자 영수증을 받을 작정이야. 그래야 다른 소리를 못 하지.」
「회장님이 계약을 마치실 때까지만 입을 닫고 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아마 돈 먹은 놈들은 그 이후로도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한 명이라도 입을 열어서 유정 발견 사실이 노출된다면 영수증 모두를 공개할 터이니 서로를 감시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에프게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식당 트럭으로 다가갔다. 그들이 일을 마친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에프게이는 만 달러를 받고 사병들은 부상자까지 포함해서 5천 달러씩 배당되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네 명의 부상자 둘은 에프게이에게 건네고 나눠주라고 했다. 그리고 참석한 여섯 명 모두에게서 영수증을 받고는 서로 껴안고 내일 아침에 헤어지는 인사들을 미리 마쳤다. 에프게이는 꼭 다시 만나자면서 이대각과 김상철을 각각 두 번씩이나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김상철은 허리에 총상을 입은 이바노프를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는 부상자들과 함께 오후에 헬기에 실려 하바로프스크로 떠나갔던 것이다. 병사들이 식당 트럭을 나가자 이대각이 길게 숨을 내쉬면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시베리아에 온 지 얼마나 되었지?」
「오늘이 2월 25일이니까 석 달이 조금 못 되었습니다.」
「3년쯤 되는 것 같다, 나한테는.」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부장님.」
「이 자식아, 이사 되었지 않아? 그것도 회장의 직접 지시로. 이사라고 불러.」
「예, 이사님.」
「네 덕분에 살아서 이사 소리도 들어본다.」
이대각이 자리애서 일어섰다.
「난 보고하러 가야겠다.」
「전 여기서 커피 한 잔 타 마시고 트럭으로 가겠습니다.」
이대각이 식당 트럭을 나가자 김상철은 커피포트를 스토브 위에 올려놓았다. 트럭의 벽에 10여 발의 총탄 구멍이 뚫어져, 테이프로 붙여 놓았지만 히터 장치는 온전했다.
시간은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뜨거워진 커피를 잔에 따르는데 문이 열렸다. 방한복과 방한모 차림으로 들어선 낯선 차림이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는 안경과 방한모를 차례로 벗는데 여자다. 오후에 시선을 두어 번 마주쳤던, 회장을 수행해온 여자다.
「김상철 씨.」
박미정이 웃음 떤 얼굴로 그를 불렀다.
「만나서 반가워요.」
다가온 그녀가 장갑을 벗더니 손을 내밀었다.
「전 박미정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비서실에 있어요.」
「그런 것 같더군요.」
「신입사원이에요, 저도.」
「그렇습니까?」
「안인석 씨와 같이 전자 영업부에 있었어요.」
그러자 김상철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인석이하고 말입니까?」
이제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전자에 같이 있었다구요?」
「안인석 씨 이름이 나오니까 사람이 달라진 것 같네요.」
「그놈, 잘 있습니까? 여기선 통 연락할 수가 없어서.」
「잘 있을 거예요, 아마.」
박미정이 방한복 주머니에서 보온 통을 꺼내더니 스토브로 다가갔다. 그녀는 보온 통에 담긴 검은 액체를 빈 그릇에 쏟더니 스토브 위에 올려놓았다.
「회장님의 한약이에요, 사모님께서 꼭 빼놓지 말고 드시게 하라고 해서.」
혼잣말처림 말한 박미정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안인석 씨한테서 들었던 김상철 씨 인상과 비슷했어요. 오후에 처음 봤을 때 알아봤어요.」
「‥‥‥」
「그리고 참, 진급하신 거 축하드려요.」
박미정이 그를 향해 다시 웃어 보였다.
「근대그룹 역사상 입사 석 달 만에 진급한 건 김상철 씨가 처음일걸요?」
김상철도 멋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