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함민복(1962~ )

가난을 추억함

가을

가을꽃 가을 나비

가을 소묘

가을이 오면

가을 하늘

갈대

감나무

감촉 여행

같은 자궁 속에 살면서

개 도살장에서

개 밥그릇

거대한 입

검은 역삼각형

게를 먹다

경로당

고추밭 블루스

고향

공터의 마음

광고의 나라

구름의 주차장

구멍

구상나무 화살표

구혼

굵은 소금

귀향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그녀가 울었다

그늘 학습

그릇

그리운 나무 십자가

그리움

그림자

그 샘

근황

금호동의 봄

긍정적인 밥

기록, 어설픈 하나님

기호 108번

길의 길

김포평야

까치집

꽃게

꽃봇대

꽃 피는 경마장

나는

나를 위로하며

나마자기

나무, 용서할 수 없는 더러운 욕망의 막대그라프

나사못

나이에 대하여

낚시터에서 생긴 일

내가 잃어버린 안경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내 귀가 섹스 쪽으로 타락하고 있다

내 온몸 그대가 되어

논 속의 산 그림자

농약상회에서

농촌 노총각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눈물이 왜 짠가

뉴스에 중독된 사내

늙은 개

늦은 봄나들이

다리의 사랑

단풍

달과 설중매

달의 눈물

달의 소리

달의 후회

달, 향수의 포석

당신도 고전적인 섹스를 즐길 수 있다

대나무

대운하 망상

대전 엑스포

도라지밭에서

독(毒)은 아름답다

돋보기

돌에

동막리 161번지 양철집

동운암(東雲庵)

동자승(東子僧)

동지(冬至)

득도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뜰 앞에 고욤나무

라면을 먹는 아침

마당

마무리에서

마지막 희망

마흔 번째 봄

막걸리

만찬(晩餐)

말세

망치 소리

매미

먹보 분식

명함

모(母)

모델 하우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목재소에서

몸이 많이 아픈 밤

무서운 은유

무신론자

묵상

물고기

물어볼까

민들레 꽃대궁은 왜 속이 비었는가

박수 소리

반성

발록구니, 세밑, 1992

방울

방점 찍기

백목련

백신의 도시, 백신의 서울

밴댕이

버드나무

버스에서

보따리

보문사

봄꽃

봄바람 불어오면

봄비

부러운 울음소리

부부

불탄 산

붉은 겨울, 1986

비빔밥

빨래집게

뻐꾸기

뻘밭

뻘에 말뚝 박는 법

사계

사과를 먹으며

사랑 혹은 죄인이 따로 있는 벌

사십 세가 되어 새를 보다

사연

산(産)

산속에서 버터플라이 수영하는 아버지

산이 난다

살구골 저수지의 봄

상계동 시절

샐러리맨 예찬

서그럭서그럭

서울역 그 식당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석월(石月)

선문(禪問)

선천성 그리움

섣달그믐

설중매

성선설

세월

소리의 길

소스라치다

손바닥을 남긴 사람들

송홧가루 날리는, 아버지 사진 한 장

수박

수음을 하는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시(詩)

시인(詩人)

쑥부쟁이

쓸쓸한 거울

씨네마 천국

씨앗

아, 구름 선생

아남 내셔널 텔레비전

아버지의 묘비명

아침 햇살에 앉아 술을 깨며

악기

악행을 위한 발라드

안개

앉은뱅이저울

암자에서 종이 운다

액셀런트 시네마 티브이

양팔 저울

어느 여름날

어떤 부엌

어떤 상담

어머니

어머니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

어머니의 의술

어민 후계자 함현수

여름, 그 무덥던 어느 날

여름의 가르침

여행에 대한 비관론

열쇠왕

염소

오래된 잠버릇

오우가

옥탑방

욕망의 망각 곡선

욕망의 연애론

우리들의 노예들에게

우리 시대의 벽화

우산 속으로 빗소리는 내린다

우울씨(氏)의 일일(一日)

우표

운주사

움직이는 십자가

원을 태우며

위험한 수업

유덕 아범

유리

이북 5도민 회관에서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듣다

인공수정

일기

일식

있음에 대하여

자(子)

자본주의의 게임

자본주의의 메뉴

자본주의의 사랑

자본주의 사연

자본주의의 약속

자석

자위

잠자리는 죽어서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

저 달장아찌 누가 박아 놓았나

전구를 갈며

종돈

종이상자 시론(詩論)

중앙선

쥐가 갉아먹은 비누로 머리를 감으며

지구의 근황

지하 생활 3주년에 즈음하여

질긴 그림자

짝사랑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참새우

참 힘

천둥소리

초승달

초지

촌수(寸數)

최제우

출하

춤추는 만득이

취객 어록

칠석(七夕)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할아버지

탑골공원에서

태양

태양, 그 제국주의자의 잔인한 빛살

텃밭

텔레비전

토문강에서

파고다 공원에서

펭귄

폐가

폐타이어

폭포의 사랑

푸르고 짠 길

푸르른 나무숲은 더러운 산소 똥을 싸고

푸른 산(山)

하늘길

하늘을 나는 아라비아 숫자

한강

한강 유람선

한겨울의 노래

합장의 힘

해외로 팔려가는 이 나라의 검은 돌들에게

허공의 손

호박

화살표를 위하여

화창한 봄날이 그녀에게 톱날을

환한 그림자

환향

후보 선수

흐린 날의 연서

흑백 텔레비전을 보는 저녁

흑백 텔레비전 혹은 비전 또는 개안

흙 속으로 떠나는 전지훈련

흥왕리 방앗간

희망

희망을 흡수한 거울

DOG재자

KTX 역방향을 타고 가며

1988, 우리가 남긴 벽화에 대하여

1990, 고요한 동방의

 

 

 

가난을 추억함

함민복

 

이 시장바닥이 끝나는 저편에

아버지 사진 한 장 걸어놓고

제사라도 한번 올리고 싶구랴

 

 

 

가을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빗소리가 귓가에 들리던 날

잠가놓은 심장 안으로 당신이 다가섰습니다

 

빗속으로

당신을 보내고 싶었지만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걸 어찌하나요

 

빗방울 소리 흘러내리던 밤

당신은 개천 되어

당신의 마음이 흘러

들었습니다

 

어둠 속으로

당신의 마음을

떠나보내고 싶었지만

 

떠나지 않고

자꾸만 자꾸만

내 옆을 서성거리고

 

그래서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힘들게 잠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잠든 사이에

꿈속에라도

다녀는 가셨나요?

 

당신 생각에

켜 둔 촛불이

가을바람에 흔들리곤 합니다

 

오늘도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 것 같습니다

 

 

 

가을꽃 가을 나비

함민복

 

너무도 오래 당신을 찾아 날고 날았지요

견디고 견디다 나도 모르는 사이 꽃이 되고 말았네요

모든 게 깊어진 가을, 하오나

하직하면 저승의 봄 잔치 푸르겠지요

 

 

 

가을 소묘

함민복

 

고추씨 흔들리는 소리

한참 만에

에취!

바싹 마른 고추가

바싹 마른 할머니를 움켜쥐는 소리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마당가 개도

취이!

마주 보는 주름살

다듬는

세월

 

 

 

가을이 오면

함민복

 

1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2

우울해하지 마세요...

 

문 닫힌 밤의 상가 주위를 함께 돌아요....

 

 

 

가을 하늘

함민복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을 수 없다네

어머니 가슴에서 못을 뽑을 수도 없다네

지지리 못나게 살아온 세월로도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을 수도 없다네

어머니 가슴 저리 깊고 푸르러

 

 

 

갈대

함민복

 

머리에 씨앗을 이고 있는 한

죽어서도 허리 꺾지 않는

에미들

여기 또 있구나

 

 

 

감나무

함민복

 

참 늙어 보인다

하늘 길을 가면서도 무슨 생각 그리 많았던지

함부로 곧게 뻗어 올린 가지 하나 없다

멈칫멈칫 구불구불

태양에 대한 치열한 사유에 온몸이 부르터

늙수그레하나 열매는 애초부터 단단하다

떫다

풋생각을 남에게 건네지 않으려는 마음 다짐

독하게 꽃을, 땡감을, 떨구며

지나는 바람에 허튼 말 내지 않고

아니다 싶은 가지는 툭 분질러 버린다

단호한 결단으로 가지를 다스려

영혼이 가벼운 새들마저 둥지를 잘 틀지 못하고

앉아 깃을 쪼며 미련 떨치는 법을 배운다

보라

가을 머리에 인 밝은 열매들

늙은 몸뚱이로 어찌 그리 예쁜 열매를 매다는지

그뿐

눈바람 치면 다시 알몸으로

죽어 버린 듯 묵묵부답 동안거에 드는

 

 

 

감촉 여행

함민복

 

도시는 딱딱하다

점점 더 딱딱해진다

뜨거워진다

 

땅 아래서

딱딱한 것을 깨 오고

뜨거운 것을 깨 와

도시는 살아간다

 

딱딱한 것들을 부수고

더운 곳에 물을 대며

살아가던 농촌에도

딱딱한 건물들이 들어선다

 

뭐 좀 말랑말랑한 게 없을까

 

길이 길을 넘어가는 육교 바닥도

척척 접히는 계단 길 에스컬레이터도

아파트 난간도, 버스 손잡이도, 컴퓨터 자판도

빵을 찍는 포크처럼 딱딱하다

 

메주 띄울 못 하나 박을 수 없는

쇠기둥 콘크리트 벽 안에서

딱딱하고 뜨거워지는 공기를

사람들이 가쁜 호흡으로 주무르고 있다

 

 

 

같은 자궁 속에서 살면서

함민복

 

집채만 한 폭탄

폭탄에 어머니라 부르는

폭탄에도 어머니가 있다니

어머니란 말을 폭탄에도 붙이다니

충격과 공포스런 그들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문명의 발상지를 폭격하는

잔혹함 쪽으로만 진화한,

폭력의 극점인,

무기들을 신봉하는

 

악의, 페스티발

저 섬광만 버린다면

우주는 평화로운 자궁

악동이 태어나 혼자 포식하려고

지어미 자궁 속에서 포크질만 하지 않는다면

 

물어뜯는다

입을 틀어막는

모래바람의 경고

질겅질겅 씹어

너덜거리는 자궁에 뱉으며

 

양팔 잘린, 두개골이 함몰된, 어린 생명들의

눈물, 성공적으로 빨고 있다고 자찬하는

경박하고 소갈딱지 없어 보이는 눈빛

주둥이에 묻은 핏방울 쓱쓱 닦는

부시시한 고양이 한 마리

 

 

 

함민복

 

망둥이를 낚으려고

노을 첨벙거리다 돌아오는 길

 

어둠 속에서도 개는 내 수상함을 간파하고

나를 겁주며 짖는다

내가 여기 더 오래 살았어

네가 더 수상해

나는 최선을 다해 개를 무시하다

시끄러워

걸음 멈추고 개와 눈싸움을 한다

사십여 년 산 눈빛으로

초저녁 여둠도 못 뚫고

똥개 하나 제압 못하니

짖어라

나도 내가 수상타

서녘 하늘에

낚시바늘 같은 달 떠 있고

풀꿰기에 낀 망둥이 댓 마리

푸덕거린다

 

 

 

개 도살장에서

함민복

 

마취제를 맞은 개가 하품을 한다

트럭 짐칸에 푸석 주저앉는다

쇠 철망 위에 던져진다

토치램프가 퍼런 불을 내뿜는다

목살이 벗은 누린내가 사방으로 날뛴다

거죽이 오무라들고 살이 튼다

개는 눈동자만 간신히 움직인다

믹서기에 대가리를 갈아도

동동 뜨던 수백 개의 닭 눈동자들

그 눈동자들만은 남기지 않고 먹던 힘이었을까

눈꺼풀을 닫지 못한 눈빛이 익는다

담배를 물며 약수터로 눈을 돌린다

이십 리터에 오백 원 자동 펌프 장치 안내판

담배 한 개비 다 피우기도 전에

개는 내장을 비우고 육실한다

만오천 원 도살비를 지불한다

그때서야 근육마취가 풀렸는지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여섯 조각이 생선처럼 푸덕푸덕거린다

 

 

 

개밥그릇

함민복

 

사월 초파일

전등사(傳燈寺)에서 정수사(淨水寺)까지

공양드리러 가는 보살님 차를 얻어 탔다

토마토 가지 호박 늦은 모종을 안고

 

십 리를 더 걸어와

흙 파고 물 붓고

뿌리에 마지막 햇살 넣고 흙 덮고

해도 燈처럼 물(水)처럼 날이 맑아

 

개밥그릇을 말갛게 닦아주고 싶었다

부처님 오신 날인데 나도

수돗가에 앉아 도(陶)를 닦았다

고개 갸웃갸웃 쳐다보던 흰 개

 

없다니까!

그 그림자가 그릇의 맛이야

수백 번 혓바닥으로 핥아도 아직 지울 수

햇살이 담길수록 그릇이 가벼웠다

 

 

 

거대한 입

함민복

 

한겨울 푸른 쑥갓 보고

피마미드처럼 잘 굄질된 귤이

짬짝 놀라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아

겨울 시장은 불안하다

 

자신의 유전인자를 의심하며

노란 귤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푸른 쑥갓이 어질어질

싱싱하다

잘못 태어난 것 같군

순리를 파괴한 것만큼이

나의 생이구나

나의 가치구나

 

언젠가 욕망의 비닐하우스 자궁이

거대한 입이 되어

시장 전체를, 시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을

와삭, 한입에 먹어 치울 날이 올 테지

 

 

 

검은 역삼각형

함민복

 

신이 만든 피라미드

욕망의 샘

저 작은

거웃

 

만나고 싶은

 

거웃

이리 큰

욕망의 샘

신이 만든 피라미드

 

 

 

게를 먹다

함민복 

 

잘해보자고

잘 할 수 있다고

앞뒤로의 생활이 딸리면

좌우 옆으로라도 빨리 움직여야

먹고 살 수 있음을 가훈으로 한,

축구 골키퍼 같은, 게를 먹는 새벽

 

뼛속에 살을 숨기고 살아가는 게를

뼈에 살을 붙이고 살아가는 내가

파먹는다

뼛속에 살을 숨기고 살아가는 족속들은

왠지 슬프다는 생각에 젖어

그 슬픈 족속을 안주로

뼈에 쌀 한 가마니 무게의 살을 단

생활이 소주에 젖는다

 

살만 있는 공기여 물이여

뼈만 남아 있는 역사여

뼈가 없어 홀로 일어설 수 없으면 수목의 등줄기라도

잡고 일어서는 칡넝쿨이여

살의 분노 태풍이여

마음의 뼈를 발라낸 광란이여

허무에 독이 오른 물렁가재여

성기 끝을 벗어나는 뼈도 살도 아닌 정액의 두근거림이여

 

가위에 잘린 가벼운 게 다리들

 

빨며, 소주를 마신다

 

슬프게 살아 간이 저절로 배어 있는

 

 

 

경로당

함민복

 

나는 경로당 집 아들이었다

봉당에 즐비한 흰 고무신

떠다니던 해수 기침 소리

아버지는 텃밭에 명아주대를 길렀다

내기 장기를 두고 훈수 소리 웃음소리

어머니는 골패묵을 만들어 팔았다

구성지게 들리던 시조음이 뚝 끊어지면

괘종시계 종소리에서 죽음의 냄새가 났다

 

경로당에 모여 문상을 떠나는 노인들

아지랑이 피는 느티나무 돌아 떠나가는 꽃상여

명아주대 가벼운 지팡이 들고 뒤따르던 노인들

봄 풀밭에 앉아, 가물가물 사라지면

아버지의 내세인 나는 굴렁쇠를 굴리고

집으로 돌아와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이제서야 이해할 수 없는, 경로당에 붙어 있던

간판 하나 외 인 출 입 금 지

 

 

 

고추밭 블루스

함민복

 

허리가 낫처럼 휜

할아버지 지팡이는 바퀴가 두 개

할머니 지팡이는 바퀴가 네 개

자전거와 유모차가 밭둑에 놓이고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도

밭고랑에 숨어드는 노부부

꼿꼿하게 서 있는 말뚝

바람에 흔들리던 고추대궁

블루스 끝에 얻은 붉은 고추

탱탱한 것 가려 따는 쭈그럭 손

 

지팡이에 푸대를 싣고

지팡이도 일꾼이었으니

휜 허리로

지팡이 굴리며

갓길 나란히 집으로 돌아가는

할아버지 지팡이는 바퀴가 두 개

할머니 지팡이는 바퀴가 네 개

 

 

 

고향

함민복

 

개구리 울음소리가 쏟아진다

고향 개구리 울음소리는 다르다

산등의 생김새가

들꽃의 향기가

논배미 물고의 깊이가

미루나무 잎새 떨림이 달라

기우는 달빛도 다르니

한창 즐기는

개구리 울음소리 저리 다르다

 

스피커가 달라

 

변한 귀가

변하지 않은 소리를 기억하는

 

 

 

공터의 마음

함민복 

 

내 살고 있는 곳에 공터가 있어

비가 오고, 토마토가 왔다 가고

서리가 오고, 고등어가 왔다 가고

눈이 오고, 번개탄이 왔다 가고

꽃소식이 오고, 물미역이 왔다 가고

 

당신이 살고 있는 내 마음에도 공터가 있어

 

당신 눈동자가 되어 바라보던 서해바다가 출렁이고

당신에게 이름 일러주던 명아주, 개여뀌, 가막사리, 들풀이 푸르고

수목원, 도봉산이 간간이 마음에 단풍들어

아직은 만선 된 당신 그리움에 그래도 살 만하니

 

세월아 지금 이 공터의 마음 헐지 말아다오

 

 

 

광고의 나라

함민복

 

  광고의 나라에 살고 싶다

  사랑하는 여자와 더불어

  아름답고 좋은 것만 가득 찬

  저기 자본의 에덴동산, 자본의 무릉도원,

  자본의 서방정토, 자본의 개벽 세상--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휴먼테크의 아침 역사를 듣는다. 르네상스 리모컨을 누르고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휴먼퍼니처 라자 침대에서 일어나 우라늄으로 안전 에너지를 공급하는 에너토피아의 전등을 켜고 21세기 인간과 기술의 만남 테크노피아의 냉장고를 열어 장수의 나라 유산균 불가리 ~ 스를 마신다 인생은 한 편의 연극,누군들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을까 사랑하는 여자는, 드봉 아르드포 메이컵을 하고 함께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 꼼빠니아패션을 입는다 간단한 식사 우유에 켈로그콘프레이크를 먹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는 명작커피를 마시며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할말은 하고 쓸말은 쓰겠다는 신문을 뒤적인다 호레이 호레이 투우의 나라 쓸기담과  비가 와도 젖지 않는 협립우산을 챙기며 정통의 길을 걸어온 남자에게는 향기가 있다는 리갈을 트럼펫 소리에 맞춰 신을 때 사랑하는 여자는 세련된 도시감각 영에이지 심플리트를 신는다 재미로 먹는 과자 비틀즈와 고래밥 겉은 부드럽고 속은 질긴 크리넥스 티슈가 놓여 있는, 승객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제3세대 승용차 엑셀을 타고 보람차고 알찬 주말을 함께하자는 방송을 들으며 출근한다.

 

제1의 더톰보이가 질주하오

천만번을 변해도 나는 나

제2의 아모래 마몽드가 질주하오

나의 삶은 나의 것

제3의 비제바노가 거리를 질주하오

그 소리가 내 마음을 두드린다

제4의 비비안 팜팜브라가 거리를 질주하오

매력적인 바스트, 살아나는 실루엣

제5의 캐리어쉬크 우바가 거리를 질주하오

오늘 봄바람의 이미지를 입는다

제6의 미스 빅맨이 거리를 질주하오

보여주고 싶다 새로운 느낌 새로운 경험

제7의 라무르 메이크업이 거리를 질주하오

사랑은 연두빛 유혹

제8의 쥬단학 세렉션이 거리를 질주하오

나의 색은 내가 선택한다

제9의 캐리어가 거리를 질주하오

남자의 가슴보다 넓은 바다는 없다

제10의 마리떼프랑소와저버가 거리를 질주하오

거침없는 변혁의 몸짓

제11의 파드리느가 거리를 질주하오

지금 그 남자의 지배가 시작된다

제12의 르노와르 돈나가 거리를 질주하오

오늘, 이 도시가 그녀로 하여 흔들린다

제13의 피어리스 오베론이 거리를 질주하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자연은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이 아니라 후손에게 차용한 것이라고 말하는 공익광고협의회의 저녁 빰에서 헹굼까지 사랑이란 이름의 히트 세탁기를 돌리고 누가 끓여도 맛있는 오뚜기 라면을 끓이려다가 지방은 적고 단백질이 많은 로하이 참치를 끓인다 그리운 사람에게 사랑이란 말은 더 잘들리는 하이폰 전화 몇 통 식후 은행잎에서 추출한 혈액순환제 징코민 한 알 미련하게 생긴 사람들이 광고하는 소화제 베아제 광고가 나오는 대우 프로비젼 티브이를 끄고 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의 고민을 하는 중생들이 우습다는 소설 김삿갓 고려원을 읽다가 많은 분들께 공급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썸씽스페샬을 한잔하고 그의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가 패션의 시작 빅맨을 벗고 코스모스표 특수형 콘돔을 끼고 잠자리에 든다

 

아아 광고의 나라에 살고 싶다

사랑하는 여자와 더불어

행복과 희망만 가득 찬

절망이 꽃피는, 광고의 나라

 

 

 

구름의 주차장

함민복

 

구름의 주차장에서

구름을 기다렸네

구름은 오다

구름을 버리고 흩어졌네

눈알을 달래

눈알과 마음을 믿은 죄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어

구름이 되어가고 있네

나는

나를 타고 움직이고 있었네

 

 

 

구멍 

함민복

 

수돗물 들어온다고 신바람 나서 때려메운

서울 시내 우물은 얼마나 많을까

 

임진강물 그대로 먹는 문산

잦은, 설사,

쫙쫙 발비 내리는 장마

 

인간이 드디어 물을 중계방송하는구나

인간이 드디어 자연을 생중계하는구나

 

혼자 사는 주인집 할멈

부로크 담장 밑에서 젓가락과 비닐봉지 들고

물 새는 구멍 막는다고 왔다 갔다

집 뒤로 돌아가 꽝 꿇린 물구멍 막아주는데

돌출되게 막으면 자기네 축대 무너진다고

윗집 아줌마가 개굴개굴

물은 자기네 넓은 집터에서 다 내려오는 건데

역시 밑에 사는 놈만 죽어나는구나

가슴에 무서운 구멍 하나 뚫리고

보온덮개와 비닐로 물구멍 막아주니

고맙다고, 담장 옆방 김씨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계란 열 개 삶아 입을 틀어막는 할멈

큰 구멍 막아주고 큰 계란 값 받은 놈들

판치는 세상

소수의 입을 틀어막으면 다수의 귓구멍을

막을 수 있던 시대

한 구멍 수돗물로 여러 개 우물을 막았던

세월의 무서움

폭군의, 장마비는 자취생을 눈뜨게 하고*

 

* 정화진 시집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를 변형함.

 

 

 

구상나무 화살표

함민복

 

촉과 살대를 늘려

전진하는

화살

 

방향을 일러준

화살표

무엇인가

 

몸속

나이테로

과녁 새기며

 

깨쳐

스스로

푸른 화살표 되어

 

표표히

추운 겨울을 뚫는

구상나무 한 촉

 

 

 

구혼

함민복

 

불알이 멈춰 있어도 시간이 가는 괘종시계처럼

하체엔 봄이 오지 않고 지난한 세월을 출근하는 얼굴

 

장미꽃이 그 사내를 비웃었다

너는 만개하지 못할 거야

 

그 후, 시든 장미꽃이 다시 그 사내를 비웃었다

그래도 나는 만개했었어

 

 

 

굵은 소금

함민복

 

물푸레나무 도끼 자루가 휘청

돼지골이 푹 꺼진다

자작나무 손잡이 창칼로 멱을 딴다

콸콸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피

끓는 물을 쫙쫙 들이붓고

칼날로 피 엉긴 털을 벗긴다

목살 다치지 않게 바삭 자른 대가리

귀를 거머잡고 골을 빨아 먹는다

가슴뼈를 도려내고

뱃가죽을 똥구멍까지 가른다

식도를 잡고 내장을 내리 훑는다

백돼지 속이 무당옷처럼 울긋불긋

척추 양곁에 칼집을 내리긋고

갈비를 가오리처럼 벌린다

사지를 자르고

좌우 갈비를 뜨고 척추를 동강 낸다

김나는 내장 중 간을 도려

굵은 소금에 꾹꾹 찍어먹는다

비린내 맡고 찾아온 개에겐

심장을 도려 던져준다

지라와 갈매기살을 불에 올린다

쓸개는 날 것으로 꿀꺽

 

피 묻은 칼을 씻듯

마음 씻으러 교회 가는 길

별이 밝다

 

 

 

귀향

함민복

 

낯설지 않던 도시를 떠돌다

낯선 고향에 돌아왔네

 

이 땅에 이쯤 살았다면

같이 살던 동네 사람들

내 나이 수만큼은

흙 속에 묻어주었을 텐데

 

문이 사람을 열어주는 빌딩을 기웃거리고

들이 아닌 강이 아닌 산이 아닌

식당에서나 음식물을 만나

죽은 고기를 씹고

풀 냄새라곤 담배 냄새나 맡다가

 

여자 몸속에 아이 하나 못 심고

사십이 다 되어 홀로 돌아와

살아온 길 잠시 벗어보네

낯선 고향에서 쉬이 잠 오지 않네

 

 

 

함민복

 

눈 내린 거름더미

귤껍질 소복

 

멀리 제주도에서

뭍을 향해

우르르 던진

반달 꽉 찬 공들

방방곡곡

수천수만의 입에서 터지는

오, 향기의 파편

 

스트라이크!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함민복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세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 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자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짜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물배가 부른데도 짜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 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그녀가 울었다

함민복

 

청바지 입고 미국에서 돌아온

주인집 할멈의 딸

옥상에 군복이 펄렁이고

시외전화기 앞에 외출 병들이 줄을 서는

문산, 달려오던 경의선 열차가

쓸쓸하게 기적을 울리며 돌아서는 곳

그녀의 고향

그녀는 옛일을 만났는지

술 취해 돌아오곤 했다

맘- 맘- 마미-마미-

가을벌레처럼 돌아와 울고 있는 그녀의

남편은 미군이라고만 할멈이 말했다

총성과 포성에 문짝이 간간이 흔들리는

문산, 할멈은 이북 실향민이다

물비린내 나는 임진강물 먹는 수돗가에서

신문을 읽고 있으면 통일이 된대요

배운 양반, 고향 땅문서도 있는데,

씁쓸한 웃음 접던 할멈은 별말을 않고

마미를 부르며 그녀가 운다

입에서 튀어나오는 마미란 말에서

자기 자식들이 자기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그녀가 새벽까지 울며 옛노래를 불렀다

이튿날, 할멈의 눈 움푹 들어가고

그녀는 며칠 후면 떠나야 할 고향

도토리나무 아래서 도토리만 주웠다

그녀에게 문산은, 조국은 가슴 무거운

앙금의 땅일 것이다

 

 

 

그늘 학습

함민복

 

뒷산에서 뻐꾸기가 울고

옆산에서 꾀꼬리가 운다

새소리 서로 부딪히지 않는데

마음은 내 마음끼리도 이리 부딪히니

나무 그늘에 좀더 앉아 있어야겠다

 

 

 

그릇

함민복

 

집 안에 머물다 집 떠나니

집이 내 안에 와 머무네

 

집은 내 속에 담겨

나를 또 담고 있고

 

지상에서 가장 큰 그릇인 길은

길 밖에다 모든 것을 담고 있네

 

 

 

그리운 나무 십자가

함민복

 

하나님 말씀 듣는

안테나가 모조리 붉다

첫째 날 나눈 낮과 밤

지켰으면 좋겠는데

 

부엉이들 앉아

야광 눈들 모여

부흥 부흥

밤새 부흥회라도 열었으면 좋겠는데

 

못도 박을 수 없는

네온사인이니

예수님 피 흘려도 보이지 않을

네온사인이니

 

빛으로 거기 항상 있지 않고

보고 싶은 마음에 보여

무거운 죄

메주 덩어리처럼 매달 수도 있게

 

새똥 덕지덕지

나무였으면

비바람에 썩는

나무였으면

 

 

 

그리움

함민복

 

천만 결 물살에도 배 그림자 지워지지 않는다

 

 

 

그림자

함민복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휜 그림자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뜻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그 샘

함민복

 

네 집에서 그 샘으로 가는 길은 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물 길러 가는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지요.

서로 짠 일도 아닌데

새벽 제일 맑게 고인 물은

네 집이 돌아가며 길어 먹었지요.

순번이 된 집에서 물 길어 간 후에야

똬리 끈 입에 물고 삽짝 들어서시는 어머니나

물지게 진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었지요.

집안에 일이 있으면 그 순번이 자연스럽게 양보되기도 했었구요.

넉넉하지 못한 물로 사람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던

그 샘가

미나리꽝에서는 미나리가 푸르고

앙금 내리는 감자는 잘도 썩어

구린내 훅 풍겼지요.

 

 

 

근황

함민복

 

타자기는 벽보다 약했다

밥을 먹되 글로 가지 않고 살로 가는 생활이

술을 먹되 글로 가지 않고 골로 가는 생활이

타자기를 벽에 집어 던졌다

맨날 티격태격 소리 내면서

다른 낱말을 찍던, 언행일치가 안 되는

내 생활을 집어던졌다

누이가 사준 사벌식 중고 타자기

만두 먹으면서 좋은 글 써보겠다고 울던 세운상가

기억이 울컥 급정거하며 타자기를 집어 던졌다

세상과 마주 앉아 혹은 얼굴 붉히며

사람살이에 대한 조서를 꾸미던

타자기가 무슨 죄가 있길래

김유신처럼 타자기의 목을 잘랐나

틀니처럼 부서진 낱말

문장처럼 흩어진 먹테이프

타자기가 없으니 책상이 스님 죽은 암자다

집 나올 때마다 꼭 챙겨 나오던 서러운 타자기

검고 딱딱한 케이스 속에 들어 있던

행운의 클로바 타자기

벽보다 강한 정신을 꿈꿔오던

 

 

 

금호동의 봄

함민복

 

똥차가 오니 골목에

생기가 확, 돕니다

비닐 봉지에 담겨

골목길 올라왔던 갖가지 먹을 것들의 냄새가

시공을 초월 한통속이 되어 하산길 오르니

 

마냥 무료하던 길에

냄새의 끝, 구린내 가득하여

 

대파 단을 든 아줌마가 코를 움켜잡고 뜁니다

숨 참은 아이가 숨차게 달려 내려갑니다

부르르 몸 떨며 식사중인 똥차의 긴 호스 입 터질까

조심, 목욕하고 올라오던 처녀가 전봇대와 몸 부딪쳐

비눗갑 줍느라 허둥대는

살내음

 

라일락꽃에 걸쳐있던 코들도 우르르 쏟아지고 말아

 

 

 

긍정적인 밥

함민복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기록, 어설픈 하나님

함민복

 

아침 일찍 돼지를 읽으러 내려갔습니다. 사료를 발러 돼지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돼지들이 우르르 조용해졌습니다. 4백여 마리의 돼지똥을 치우며 마음은 한없이 겸손해집니다. 돈사 밖에는 눈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내리고 있습니다. 형수는 개죽이 탈 것 같다며 자리를 피하고 형과 나는 돼지 종부를 시킵니다. 눈발 속에서 거구의 수퇘지가 암퇘지 등에 올라탑니다. 수퇘지 앞발톱에 암퇘지 등짝이 찍혀 피가 흐릅니다. 형의 머리에도 내 머리에도 가벼운 눈 모자가 씌여집니다. 눈발 속에서 돼지종부를 시키고 있는 형제의 모습이 한 번 여행으로 일생을 마감하는 우표 같은 쓸쓸함에  젖어듭니다.

이곳은 잘못 걸려온 전화도 반가운 산속입니다. 이곳은 날새가 던져주고 가는 그림자도 반가운 산속입니다. 이곳은 식물에게도 말을 건네보는 쓸쓸한 산골입니다.

암퇘지가 앙버티고 있는 정강이 힘으로 수퇘지가 씩씩 거리며 내뿜는 거품의 힘으로 조카는 체르니를 치고 도락산 산신령, 형은 술 한잔하고 어머니는 보청기 건전지를 갈고 나는 항우울제를 사러 병원에 갑니다 갑자기 개가 짖고 차소리가 들려옵니다. 웬 눈을 방만한 크기로 실은 차가 낑낑대며 올라옵니다.

 

    까치가 죽은 나무에 집을 짓지 않듯

    어머니 늘 자식 걱정이시다

 

여기까지 써놓고 막힌 시를 쓰게 한 장본인 까치가 쌔액 -- 소리를 내며 날아가 꼬리를 촐삭거리며 돼지똥 버린 밭에 내려앉습니다 발 모퉁이를 돌아 냉동차가 올라왔습니다 냉동차에서 내린 목장갑 낀 아저씨는 급히 고사드릴 일이 있어서 돼지를 사러왔다고 합니다 돼지를 한 마리씩은 잘 안팔지만 팔기로 마음먹습니다 기독교인인 형이 종교를 초월합니다 눈이 마음속에도 하얗게 내린 탓일 것입니다 아저씨는 규격돈보다 작은 돼지를 원했습니다 형과 나는 원하는 돼지를 찍으라고 합니다 한꺼번에 여러 마리 돼지를 팔 때보다 한 마리를 지정해 팔 때 생명체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짙습니다  해서 아저씨가 원하는 돼지를 끌어냅니다 우리에서 통로로 나온 돼지는 멋도 모르고 한번 들고 뛰어봅니다 아하, 이때 돼지가 사람 띠로 태어났음을 절감합니다 곧 죽으러 갈지도 모르고 뛰노는 돼지를 잡아 차에 싣습니다 눈 위에 찍히던 돼지 발자국이 뚝 끊어지고 비명소리로 이어집니다 성긴 눈발 속으로 냉동차가 내려갑니다 체인 철렁이는 소리가 귓전을 때립니다 탁본처럼 배여드는 죄스럽고 허한 마음으로 설경에 지워지는 냉동차를 바라보고 있을 때 심경을 간파했는지 형이 우스갯소리를 던집니다 <얘, 그래도 저 돼지 팔자 좋은 돼지다!! 사람들에게 수십 번 절도 받아보고.>

형과 나는 파란 플라스틱 빗자루를 들고 눈을 쓸었습니다 눈은 사심 없이 길을 돌려줍니다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이편입니다 오늘 아침식사는 내린 눈만큼 늦었습니다 터미네이터 어머니가 틀니, 보청기, 돋보기를 부착하고 성경책을 읽다가 티브이를 켜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이 얼마나 더 오나 일기예보를 들어볼 심산인 것 같습니다 <얘, 저 사람도 나처럼 귀가 잘 안 들리나보다 안 됐구나 인물도 좋은데> 아나운서의 이어폰을 보청기로 오인하는 어머니 말을 듣자 서러운 웃음이 툭, 불거집니다. 天動說 어머니 가벼운 박가슴 쪼개어 눈물 한 바가지 퍼주시던 그 긴 겨울밤 어머니 가슴 겨울 호박처럼 썩고, 나 그 고통 따스함으로 살아왔습니다

바같에서 개가 짖고 왁자지껄합니다 토끼몰이 왔던 아랫마을 청년들이 눈에 바지만 적시고 와 형을 부릅니다 형은 어 - 이 들어와 몸 녹이라고 합니다 형의 명을 받고 철사 올가미를 만들어 운동장이 딸린 제법 큰 토끼장으로 갑니다 토끼는 먹을 것을 주는 줄 알고 휙 덤벼듭니다 순간 토끼목을 낚아챕니다 토끼가 철사 올가미에 대롱대롱 매달립니다 토끼를 포도나무 섶에 붙들어맵니다 그리고 토끼 뒷다리를 아래로 잡아당깁니다 짐승을 죽일 때는 단명시켜야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토끼는 참 조용합니다 식물처럼 조용합니다 그렇다고 죽을 때까지 이렇게 조용해서야, 지금 이 외딴 집에서 한 생명이 떠나고 있습니다 재토끼 눈은 흰토끼 눈처럼 붉지 않고 사람 눈동자를 닮은 갈색이라서 잡을 때마다 더 잔혹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칡넝쿨, 씀바귀, 쐐통 등쓴 것을 좋아하던 한 생명이 사라졌습니다 대가로 마을 청년들은 산토끼 대신 집토끼 잔치를 벌였습니다 나는 소금으로 이빨을 닦고 방으로 들어와 덮치기로 잡아놓은 새를 박카스 곽에서 꺼냅니다 손바닥에서 새의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마치 새 전체가 조그만 심장처럼 느껴집니다 창문을 열고 심장을 던집니다 죽은 토끼의 영혼처럼 팔려 간 돼지의 영혼처럼 잿빛 하늘로 새는 푸드득 날아오릅니다 이곳에서 형은 신처럼 가축들의 생명을 다스립니다 이 점이 형을 종교인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은유와 같이 더 큰 존재가 사람들의 명을 다스릴 것이라는 생각에서인 것 같습니다 밤 눈길을 삼십 분 걸어 교회로 내려가는 어설픈 하나님, 형의 모습이 선연해집니다 눈발이 더 굵어집니다

 

 

 

기호 108번

함민복

 

국민들을 위한다면

국민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말을 팔았으면

아무리 최선을 다해 일을 하셨어도

진정 국민들을 위하였다면

자신이 부족하였음을 느끼셨을 텐데

부족하여

미안하여

재산을 다 헌납하시거나

아무도 모르게 선행으로 다 쓰셨어야 옳았을 텐데

재산이 늘었다니요!

잘못 전달된 거겠지요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 재산을 늘린 분들이 계신다면

대통령님이시거나, 국회의원님이시거나, 검사님이시거나,

도지사님이시거나, 시의원님이시거나, 농협장님이시거나,

다 개새끼님들 아니십니까

국민들을 위하여 일하겠다고

말을 파신 분이나

말을 파실 분은

중생들이 다 극락왕생할 때까지

성불하시지 않겠다는

기호 108번

지장보살님 꼭 한 번 생각해주세요

 

 

 

함민복

 

식물들은 실아온 몸뚱이가 가본 길이다

그도 죽어 길이 되었는지

골목길에 검은 화살표로 이정표를 남겼다

 

 

 

길의 길

함민복

 

길 위에 길이 가득 고여 있다

지나간 사람들이

놓고 간 길들

그 길에 젖어 또 한 사람 지나간다

 

길도 길을 간다

제자리걸음으로

제 몸길을 통해

더 넓고 탄탄한 길로

길이 아니었던 시절로

 

가다가

 

문득

터널 귓바퀴 세우고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의 소리 듣는다

 

소낙비 쏟아진다

이렇게 엄청난 수직을 경험해 보셨으니

 

몸 낮추어

 

수평으로 흐르실 수 있는 게지요

수평선에 태양을 걸 수도 있는 게지요

 

 

 

김포평야

함민복 

 

김포평야에 아파트들이 잘 자라고 있다

논과 밭을 일군다는 일은

가능한 한 땅에 수평을 잡는 일

바다에서의 삶은 말 그대로 수평에서의 삶

수천 년 걸쳐 만들어진 농토에

수직의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농촌을 모방하는 도시의 문명

엘리베이터와 계단 통로, 그 수직의 골목

잊었는가 바벨탑

보라 한 건물을 쌓아 올린 언어의 벽돌

만리장성, 파리 크라상, 던킨 도너츠

차이코프스키, 노바다야끼......

기와불사 하듯 세계 도처에서 쌓아 올리고 있는

이진법 언어로 이룩된

컴퓨터 데스크탑

이제 농촌이 도시를 베끼리라

아파트 논이 생겨

엘리베이터 타고 고층 논을 오르내리게 되리라

바다가 층층이 나누어지리라

그렇게 수평이 수직을 다 모방하게 되는 날

온 세상은 거대한 하나의 탑이 되고 말리라

김포평야 물 괸 논에 아파트 그림자 빼곡하다

 

 

 

까치집

함민복

 

여름 나무 푸른 가지에 까치가 살지 않는 까치집이 있다

마치

나무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맺혀 있다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꽃게

함민복

  

돌게끼리 만나

길을 가게 비키라고

다투다가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하기로 합니다

 

가위, 바위,

가위.

가위, 바위,

가위.

가위, 바위,

가위.

 

자꾸 가위만 내

승부가 나지 않는데도

서로 이겼다고

양손으로 V자를 만들어 치켜듭니다

 

옆으로 가기 때문에 그냥 가도 부딪히지 않는다고

바위, 모양 불가사리 기죽어 중얼거립니다

 

 

 

꽃봇대

함민복

 

전등 밝히는 전깃줄은 땅속으로 묻고

저 전봇대와 전깃줄에

나팔꽃, 메꽃, 등꽃, 박꽃 ․․․․․․ 올렸으면

꽃향기, 꽃빛, 나비 날갯짓, 벌 소리

집집으로 이어지며 피어나는

꽃봇대, 꽃줄을 만들었으면

 

 

 

꽃 피는 경마장

함민복

 

경마장으로 건너가는 애마교 입구

비상하는 청동마상 두필

앞발이 허공을 힘차게 딛고 있는

  

그림자 밟으며

모든 비상의 첫발은 허공을 짚는 것이라고

희망에 중독된 사람들 우르르 몰려간다

  

정보지를 뒤적이며

지갑을 점검하며

걸인의 바구니에 반짝 동전을 떨구며

 

주차장 사이사이

한 나무가 수백 나무 꿈꾸는

고배당 노리는 벚꽃 화사하다

 

 

 

나는 여대생의 가방과 카섹스를 즐겨보려 한 적이 있다 ......

함민복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울산 근처에서 일터에 다니고 있을 때였지 서울에 올라간 날, 그날은 운수 좋은 날이었어 창밖엔 무드 있게 비가 내리고 어느 여대 앞 정거장에서 그녀의 가방이 올라탄 거야 나는 빗방울의 애무에 축축히 젖은 그녀의 가방을 내 성기 위에 올려놓았어 그녀는 고맙다는 말 대신 씨익 웃었어 환장하게 예쁜 여자였지 차체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귓볼에선 참외씨만 한 보석이 반짝이고, 그래 나는 그녀의 성감대는 책가방일 거라고 생각했어 생각해 봐 학생들의 성감대가 책가방이란 내 말이 틀렸는지, 몰라 내가 배우지 못한 열등감 하여간 그녀의 가방을 상위 체위로 카섹스를 시작했어 성욕의 나무가 그녀의 가방을 뚫고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가, 젊은 여자의 유방처럼 탄력 있는 열매를 주렁주렁 맺고 있을 때  갑자기 공사 현장의 망치 소리가 들려왔어 그 망치 소리가 자꾸 성욕의 나무 밑둥치를 치는 거야 어느새 밤송이가 된 열매가 우수수, 올라가지 못할 나무 쳐다도 보지 말라고 내 성기 위에 떨어지는 거야 나는 마님을 겁탈하다 들킨 하인의 심정이 되고, 이상했어 망치 소리에 내 성기가 그렇게 힘없이 죽을 줄이야 망치 소리, 책가방, 공돌이, 여대생, 그녀의 책가방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어 맷돌짝에라도 눌린 듯 빈대떡처럼 납짝해진 성욕이 압사의 신음을 토했어 오르가즘까지 생각했던 내 성욕은 더럭 겁을 먹었어 그녀의 가방이 작두날이 되어 숭덩숭덩 내 성기를 자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견딜 수 없었어 다음 정거장에서 폭행하다만 그녀의 가방을 내팽개치듯 의자에 내려놓고 버스에서 내리고 말았어 비가 내리고 있었어 운수 좋은 날처럼, 구질구질한

 

 

 

나를 위로하며

함민복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나마지기

함민복

 

어찌 멸망의 빛이 이리 아름답다냐

뻘이 돋아지며 죽어가고 있다는

환경지표식물이라 했던가

뭍 쪽 붉음에서 바다 쪽 푸르름까지

색 경계 허물어 무지개밭이로구나

조금발에 뻘물 뒤집어쓰지 않아

빛깔 더 고운 나마자기야

너는 왜 해 질 녘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냐

채송화 잎처럼 도톰한 네 잎 따 씹으면

눈물처럼 짭조름하다

뻘에 박혀 있던 둥근 바위 그림자

해 떨어지는 순간 너희들 위로

무게 버리고 길게 몸 펴며 달린다

바위 그림자 달리는 속도라니

소멸이 이리 경쾌해도 되는 것인가

깨줄래기 떼 그림자 투하하며 날자

칠게들 일제히 뻘구멍 속에 숨는다

얄리얄리 얄라셩 망조 든 나라 슬퍼

굴조개랑 너를 먹고 산다 했던가

나마자기야

나마자기야

어찌 유서가 이리 아름답다냐

 

 

 

나무, 용서할 수 없는 더러운 욕망의 막대그래프

함민복 

 

허옇게 눈 쳐내리는 대관령에서 나무를 보면

이내 죽어버리고 싶은 맘 간절히 드네

눈 비바람에 제 가지 쫙쫙 찢으며

저렇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저렇게 찌든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번개처럼 갈라진 뿌리 언 땅에 묻고

 

광합성에 지친 날들, 일조권 싸움을 위해

쭉쭉 길게 뻗어 올라간 더러운 욕망의 막대그래프

딱딱한 흙을 따뜻한 흙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늙은 침엽수들이 왜 산을 닮아가는지 알 것 같고

나무가 단지 태양이 배설한 빛의 똥임을 알것네

 

 

 

나사못

함민복

 

조임과 풀림이 한 길이라니!

같은 길이라도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결합의 길과 해체의 길로 나눠지는구나.

풀림과 조임이 한 길이라니!

만남과 이별이 한 길이라니!

 

 

 

나이에 대하여

함민복

 

십 년쯤 된 가지에 까치집을 얹고 있는

삼백 년 된 느티나무의 가지 끝은

바람에 흔들리는

한 살이고 새순이고

나이 먹지 않은 지금이다

 

삼백 년 된 느티나무는

밑둥치를 기단으로 삼아

줄기 쪽과 뿌리 쪽으로

삼백 개의 원에서 한 개의 원까지

나이테 탑을 쌓고 있다

 

위로

아래로

 

상승의 욕망과 하강의 욕망이 맞부딪치는 부분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당기는 힘에 끊어질 것 같고 서로 박차는 힘에 다져져 단단할 것 같기도 한

 

삼백 년 묵은 느티나무 나이는 삼백 살이고

한 살이고 새순이고

실뿌리 한 가닥 막 습기에 젖는 순간이다

 

 

 

낚시터에서 생긴 일

함민복

 

댐에 도착한 변경철씨는 작은 목선을 하나 빌렸다

달빛 출렁이는 수면을 가르며 노를 젓는 변경철씨

곁에는 등산복 차림의 누이가 낚시 가방을 껴안고 있고

어머니는 흔들리는 달그림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배를 멈추어라 여기쯤 될 것 같다 어머니가

닻을 내리자 배는 스르르 멈추었다 누이가 삼키고 있던

울음이 수면에 잔잔하게 깔리고 어머니가 누이를 보듬었다

변경철씨는 낚시 가방에서 각진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흰 장갑을 끼며 누이에게도 장갑을 끼워주었다

잠시 후 달빛을 받으며 변경철씨 매형의 뼛가루는

싱싱한 물비린내 가득한 강물 위에 흩어졌다

 

관리인에게 들키면 큰일난다고, 서울 낚시꾼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수몰민인 매형의 유언에 따라, 고향 마을 깊은 하늘 위에,

 

 

 

내가 잃어버린 안경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함민복

 

불현듯 추억이 나를 찾아와

기억의 길을 걸으면

고향과 

어머니와

한 여자가

눈물로 만든 안경이 되네

 

아직 기억 속에 살고 있는

고향집 대추나무야

작고 비린 네 녹색 꽃이 보고 싶구나

나를 버리고 시집간 그 여자처럼

그 여자의 눈동자가 되어 바라다보던 서해처럼

 

뭉클 엉덩이의 감촉을 이고 있는 너바위야

학털구름도 두둥실 떠가며

계곡 흐르던 옛일 더듬는지

헤어져 살고 있는 어머니는

지금 무슨 밭을 매고 있는지

못난 자식 생각에 시름겨워

일순 호밋날에 감자가 찍혔는지

 

아카시아꽃 향기에 피를 적시고

어머니 눈물 한 방울에

내가 젖고

온 세상이 젖던 어느 날

 

시집가버린 여자야

그 바닷가에

혼자 나가 당신과 함께 걸어보다

엉망으로 취해

고향 같던 어머니 같던 당신 같던 풀섶에

아!

내가 잃어버린 안경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내 탯줄은 썩어 무슨 풀꽃을 피웠는지

 

 

 

내 귀가 섹스 쪽으로 타락하고 있다

함민복

 

잘 벗겨지지 않아요

---제비(?)표 페인트

알아서 빨아줘요

---대우 봉(?) 세탁기

구석구석 빨아줘요

---삼성(?) 세탁기

빨아주고 비벼주고 말려주고

---금성(?) 세탁기

우리는 그이가 다 빨아줘요

잘 빨아주니 새댁은 좋겠네

---럭키 슈퍼타이

 

무엇이, 무엇을 의도적으로 빼는 이 광고에

우리는 무엇을 꼭 집어넣으라고 욕해야 할지

 

 

 

내 온몸 그대가 되어

함민복

 

이제 나는 그대를 기다리지 않겠네

온통 그대가 되어 있는 내 가슴

내가 되어 다가오는 그대를 기다릴 뿐

 

전봇대는 다음 전봇대가 보이는 곳에 서 있고

전깃줄로 흐르는 보이지 않는 빛나는 그리움

푸른 강을 건너고 푸른 산을 넘어 넘고 말어

따뜻한 알전구로 그대 꽃피울 내 마음

 

이제 그대도 나를 기다리지 마라

온통 내가 되어 있는 그대 가슴으로

그대가 되어 다가가는 나를 기다려다오

 

 

 

논 속의 산 그림자

함민복

 

물 잡아 논 논배미에 산 그림자 드리워져

낮은 물 깊어지네

 

산 그림자 산 높이의 열 배쯤

한 십여 리

어떻게 와서 저리 몸 담그고 있는지

 

거꾸로 박힌 산 그림자 속

바위는 굴러떨어지지 않고

나무는 움트네

 

개구리 울음소리 산 그림자

깜깜하게 풀어놓던 며칠 밤 지나

 

흙을 향해 허리 굽히는 게 모든 일의 시작인

농부들 푸른 모춤을 지고

산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네

뒷걸음치며 산에 모를 심네

바위 위에도 모를 꽂아 놓았네

 

산 그림자 속에서 백로 한 마리 날아 나와

편 목 다시 구부리며

젖지 않은 발 적시며

산 그림자 위로 내려앉네

 

 

 

농약 상회에서

함민복

 

치마 아욱

마니따 고추

장한 열무

 

제초대첩 제초제

부메랑 살충제

아리랑 쥐약

 

먹을 것 생산해줄 씨앗들과

먹을 것 먹어 치우는 것들 죽일 약들

극명하게 갈라놓았다

 

향기롭던 음식도 먹을 수 없게 되면

역한 냄새로 판별하는 내 감각

반성해보다

 

슈퍼 옥수수

슈퍼 콩

슈퍼 소

 

꼭 그리해야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사람들이 작아지는 방법을 연구해보면 어떨까

 

앙증맞을 집, 인공의 날개, 꼬막 밥그릇

나뭇가지 위에서의 잠, 하늘에서의 사랑

무엇보다도 풀, 새, 물고기들에게도 겸손해질 수 있겠지

 

계산대 앞에서

푸른빛 쏟아질 듯

흔들리는 아욱 씨앗 소리

 

 

 

농촌 노총각 

함민복

 

달빛 찬 들국화길

가슴 물컹한 처녀 등에 업고

한 백리 걸어보고 싶구랴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 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 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함민복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순간순간을 사랑하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딴전

딴전이 있어

세상이 윤활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초승달로 눈물을 끊어보기도 하지만

늘 딴전이어서

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가는가

죽음이 앞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그래도 세계는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단호하고 깊고

뜨겁게

나를 낳아주고 있으니

 

 

 

뉴스에 중독된 사내 

함민복

 

도대체 사내의 생활에는 별 변화가 없다 사내는 단지 사회 상황의 변화를 통해 자신의 위치가 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내의 머리통에는 뉴스의 내성이 생겨 매일 좀 더 많은 양의 뉴스를 원한다 뉴스가 없는 날 아아 사내는 미칠 것 같다 사내는 전쟁이든 최첨단의 정보든 유언비어든 스캔들이든 뭐든지 새로운 것을 원한다 좀 더 새로운 것 좀 더 새로운 것에 미쳐가고 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내는 라디오 이어폰을 뇌에 박고 뉴스를 기다리며 잠자리에 든다

 

 

 

늙은 개

함민복

 

눈발이 날렸다

세월이 바위처럼 지나가며

 

새끼들이 팔려가고

새끼들을 죽인만큼 연장된 命

 

얼마나 더 모질어야 하나

얼마나 더 비겁해야 하나

 

눈시울에 매달려 버둥대는 새끼들

짚불에 까맣게 끄슬려지는 하늘

 

지랄같이 또 봄이 오려나

늙은 개는 쓱쓱 씹두덩을 핥아본다

 

 

 

늦은 봄나들이

함민복

 

산의 능선은 더 높은 산 혹은 하늘을 베고

가벼운 유행주의자 나무들은 멍청 다 푸르고

낮은 곳 찾아 무릎꿇는 겁쟁이 물소리

무당벌레처럼 알록달록 기어오르는 인파 고작

이것을 보자고 길의 포로 가로수 권태롭게

지나고 이 시대의 부레 비닐하우스를 지나고

줏대 없이 불어오는 봄바람에 숨 막히며 와, 온,

배운 만큼 슬픈 여자와 마주 앉아 참았던

숨 팩 토하고 입 굳은 캔맥주를 마신다

(노모께 글을 가르쳐 준다니까 한참 망설이다

여탕 어떻게 쓰노 하시는 거에요) 사슴,

당신 별명처럼 내 상상력이 깜짝 놀라고

어떻게 물고기를 공중에 매달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물고기를 새처럼 울게 했을까

물고기와 새의 가지를 헐어버리는 윤회의

소리, 저 풍경 소리.

(언제 삶의 무게 다 버리고 공중에 매달려

비린내 나지 않는 청아한 울음 한번 울어 볼런지)

이곳을 담박 깊은 수중으로 만들고

당신은 李箱 말처럼 과자처럼

가벼워 보이는 女人 그런데 꽃이라는 게

식물들의 성기 아닙니까 저렇게

지천으로. 벌들의 활주로, 바람의 혓바닥, 꽃잎 벌리고.

식물들의 섹스는 참 조용하지요

식물들의 포르노가 끝나기 전에 나온 늦은 봄

나들이 자, 꽃을 배경으로, 찰칵 나는 당신을

가슴에 물고기처럼 매달고 싶어 당신 가슴에

물고기처럼 매달리고 싶어 당신 눈동자 깊이

내 눈동자를 찌르고 또 찌르고

 

 

 

다리의 사랑

함민복

 

1

서로 자기 쪽으로 당기는 힘이 아니라

서로 연결하려는 의지로 다리는 존재한다

 

 

3

물 위에 다리가 있지요

다리 아내 물도 다리랍니다

물은 생명과 생명ㅇ르 연결하는 다리지요

세상에서 가장 큰 접속사지요

사랑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다리지요

접속사로 연결되는 끝나지 않는 문장이지요

그래서

사랑은 물처럼 흐르지요

 

 

6

다리야 힘들다고

절벽과 강을 너무 미워하지 마라

그것들이 아니었던들 네가 존재하기나 했었겠냐

그것들이 있어 너는 존재한다

 

 

7

다리의 자존심을 접기하는 잠수교야

네가 건너던 물을 건너 줌은 어떠냐?

네가 건너던 부드러움 실컷 만났으니

너는 너를 위해 더 견고해질 수 있겠느냐

 

 

8

한 호흡 한 호흡

숨을 쉴 때마다

숨 개통식을 하며

수십 년 숨을 연결하여 온

긴긴숨 다리인

당신은

소중한 몸

 

당신을 아끼며 건너고 싶다

 

 

9

눈물 못 박히지 않은 사랑은 없다

사이가 있어 다리가 있고

눈물은 뜨겁다

 

 

10

길을 걸으면

살아온 길도 함께 걷는다

살아갈 길도 함께 걷는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부축하여 주는

과거와 미래를 껴안고 나아가야 하는

끝나지 않는 다리다

 

 

11

그리워 그리워 하도 그리워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어

더 이상 그리워할 수도 없을 때

 

그때서야 열릴

같은 몸 같은 맘

7월 7일

칠월 칠석

오작교

 

 

 

단풍

함민복

 

역시!

역시!

나무는

단풍!

우러르며

노인들

자화자찬

즐겁다

 

그제야

산이 붓을 놓는다

 

 

 

함민복

  

보름달 보면 맘 금세 둥그러지고

그믐달과 상담하면 움푹 비워진다

 

달은

마음의 숫돌

 

모난 맘

환하고 서럽게 다스려주는

 

 

그림자 내가 만난

서정성이 가장 짙은 거울

 

 

 

달과 설중매

함민복

 

당신 그리는 마음 그림자

아무 곳에나 내릴 수 없어

눈 위에 피었습니다

 

꽃피라고

마음 흔들어 주었으니

당신인가요

 

흔들리는

마음마저 보여주었으니

사랑인가요

 

보세요

제 향기도 당신 닳아

동그랗게 휘었습니다

 

 

 

달의 눈물

함민복

 

금호동 산동네의 밤이 깊다

고단한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노루들의 잠자리나 되었을 법한

산속으로 머리를 눕히러 찾아드는 곳

힘들여 올라왔던 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몸 더럽히고

흘러내리는 하수도 물소리

 

숨 찬 산중턱에 살고 있는 나보다

더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많아

아직 잠 못 이룬 사람들 많아

하수도 물소리

골목길 따라 흘러내린다

 

전봇대 굵기만 한 도랑을 덮은

쇠철망 틈새로 들려오는

하수도 물소리

누가 때늦은 목욕을 했는지

제법 소리가 커지기도 하며

       

산동네의 삶처럼 경사가 져

썩은 내 풍길 새도 없이 흘러내리는

하수도 물소리

       

또 비린내가 좀 나면 어떠랴

그게 사람 살아가는 증표일진대

이곳 삶의 동맥처럼

새벽까지 끊기지 않고

흐르는 

하수도 물소리

물소리 듣는 것은 즐겁다

       

쇠철망 앞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물면

달의 눈물

하수도 물소리에 가슴이 젖는다

 

 

 

달의 소리

함민복

 

달의 소리 들으러

서해바다에 가면

 

말렸다 풀리는

달이 짠 비단 자락

 

밀물 소리 썰물 소리

갯벌 위에 가득

 

수만 년 여인의 자궁에

아이의 심장을 직조한

 

 

 

달의 후회

함민복

 

달과 나 사이에

사이가 가득하여

풍요롭다 가도

 

달에

꽂혀 있을

성조기

생각하면

 

달과 나 사이가

폭삭 시든다

 

달이 빚어준 신화와 전설과

무엇보다도 소원 빌어 올려놓는 마음 쟁반

그냥 남겨두었더라면

신령스러움 살려두었더라면

 

달은 뉘우친다

깃발 꽂을 생각을 하다니

깃발 뽑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니

다 내가 잘 못 빛났기 때문이다

 

 

 

달, 향수의 포석 - 약초 캐며 살던 시절을 추억함

함민복

 

국망산 비둘기 바위

너덜겅 오르내리며

구절초를 뜯고 하산하다가

더덕밭을 만났다

약초 푸대를 맨 나도

도시락을 든 아버지도

밥상 대하듯 정신 팔려

아버지 얼굴이 지워지고

어둠이 산 담는 것도 모르고

신바람 나던

가난의 더덕밭 더덕밭

내려가기 위해 내려가려 했으나

골짜기를 거슬러올라

능선 타던 아버지의 굽은 어깨

더덕과 구절초를 메고

산의 정적에 떡갈나무 잎새

발자국 소리 찍으며

산길 내려오던 약초 향기

어느새 덩그런 달 뜨고

내 가슴에서 환해지던

아버지 마음

아아 어머니가 끌어올렸을

구월의 달빛달빛

 

 

 

당신도 고전적인 섹스를 즐길 수 있다

함민복

 

아다지오(아주 천천히)->아모로소(사랑스럽게)->스모르짠도(천천히 약하고 느리게)->비바체(생기있게)->글리산도(미끄러지듯이)->그라찌우(우아하게)->인템포(정확한 속도로)->칸타빌레(노래하듯이)->아르리비툼(자유롭게)->알레그레토(정열적인)->콘아니마(기운차게)->그라배(중후하게)->포르차포(세게)->카텐자(즉흥적으로)->내추럴(제자리로)->타카포(처음부터)->나란테(낭독하듯이)->데치소(결연히)->마르카토(강조하여)->세리오소(진지하게)->아지타토(흥분된)->비브라토(떤다)->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엇모리->휘모리.......

 

 

 

함민복

 

파도가 없는 날

배는 닻의 존재를 잊기도 하지만

 

배가 흔들릴수록 깊이 박히는 닻

배가 흔들릴수록 꽉 잡아주는 닻밥

 

상처의 힘

상처의 사랑

 

물 위에서 사는 뱃사람의 닻

 

저 작은 마을

저 작은 집

 

 

 

대나무

함민복

 

나는 테러리스트올시다

광합성 작용을 위해

잎새를 넓적하게 포진하는 치밀함도

바위 절벽에 뿌리내리는 소나무의 비장함도

피침형 잎새로 베어 날리는

나는 테러리스트

 

마디마디 사이에 공기를 볼모로 잡아놓고

그 공기를 구출하러 오는 공기를

잡아먹으며 하늘을 점거해 나아가는

나는 테러리스트

 

나의 건축술을 비웃지 말게

나는 나로서만 나를 짓지 않는다네

자유롭고 싶은 공기의 욕망과

나를 죽여버리고 싶은 공기의 살의와

포로로 잡힌 공기의 치욕으로

빚어진 아,

공기, 그 만져지지 않는

허무가 나의 중심 뼈대

나는 결코 나로서만 나를 짓지 않는다네

그래야 비곗살을 버릴 수 있는 법

 

나는 테러리스트

내 나이를 묻지 말게

뒤돌아 나이테를 헤아리는 그런 감상은

바람처럼 서걱서걱 베어먹은 지 오래

행여 내 죽어 창과 활이 되지 못하고

변절처럼 노래하는 악기가 되어도

한 가슴 후벼파고 마는 피리가 될지니

그래, 이 독한 마음으로

한평생 머리 굽히지 않고 살다가

황갈색 꽃을 머리에 이고

한 족속 일제히 자폭하고야 말

나는 테러리스트

 

 

 

대운하 망상

함민복

 

물이 법이었는데  

 

법이 물이라 하네   

  

물을 보고 삶을 배워왔거늘   

티끌 중생이 물을 가르치려 하네   

   

흐르는 물의 힘을 빌리는 것과

물을 가둬 실용하려는 것은 사뭇 다르네   

   

무용(無用)의 용(用)을 모르고   

괴물 강산 만든다 하니   

   

물소리 어찌 들을 건가 

새봄의 피 흐려지겠네 

 

 

 

대전 엑스포

함민복

 

자연에서 가장 멀리

도망친 것들의 잔치

이(利)의 극점

 

햇살 맑은 아침

소귀에 경을 읽고 싶다

利를 향해서만 밥을 먹을 수는 없다

 

 

 

도라지밭에서

함민복

 

길을 가다가 도라지

밭에 올라가 보았지요

꽃 들여다보고 있으면

주인도 혼내지 못할 것 같았고

혼내도 혼나지 않을 것 같았지요

 

고향집 장독대 뒤에 피어 있던

도라지꽃도 까마득 진 줄 모르고 피어났지요

 

도라지 대궁 도라지 잎들은 무뚝뚝한데요

하얀색 보라색 꽃들은 새색시 같았지요

백도라지도 보라색 도라지도

꽃봉오리 맺힌 것들은 다 하늘 향해 있고요

핀 꽃들은 벌들 들락거리기 좋게 목 숙이고 있데요

 

보라색 꽃잎에 들어갔다가

금방 흰 꽃잎에 들어가는 벌

어지럽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고요

세상에서 가장 환하고 아름다운

식탁을, 직장을 가진 벌들이 부럽기도 했지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던 도라지들

세상에, 벌이 꽃에 앉으면

무게중심 착 잡으며 흔들리지 않는 거 있죠

지두 절정의 순간이라 어쩔 수 없는지

하얗게 아리게 질린 낯빛인데요

 

옛날에 장독대에서 각진 꽃봉오리 터뜨리던

폭폭소리 사방에 들려오는 거 있지요

 

 

 

독은 아름답다

함민복

 

은행나무 열매에서 구린내가 난다

주의해 주세요 구린내가 향기롭다

 

밤톨이 여물면서 밤송이가 따가워진다

날카롭게 찌르는 가시가 너그럽다

 

복어알을 먹으면 죽는다

복어의 독이 복어의 사랑이다

 

자식을 낳고 술을 끊은 친구가 있다

친구의 독한 마음이 아름답다

 

 

 

돋보기

함민복

 

작년부터 사전을 찾아보려면

돋보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아리송하거나 낯선 만남이니

도움을 청함 또한 마땅하다

 

돋보기 선생은 겸손하여

늘 상대를 크게 보신다

 

한발 물러서면 한결 크게 보인다는

투명한 말씀 둥글게 받들어 본다

 

 

 

돌에

함민복

 

송덕문도

아름다운 시구절도

전원가든이란 간판도

묘비명도

부처님도

파지 말자

 

돌에는

세필 가랑비

바람의 획

육필의 눈보라

세월 친 청이끼

 

덧씌운 문장 없다

돌엔

부드러운 것들이 이미 써놓은

탄탄한 문장 가득하니

 

돌엔

돌은

읽기만 하고

뽀족한 쇠끝 대지 말자

 

 

 

동막리 161번지 양철집

함민복 

 

바다가 보이는 그 집에 사내가 산다

어제 사내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오늘은 내리는 눈을 보았다

 

사내는 개를 기른다

개는 외로움을 컹컹 달래준다

사내와 개는 같은 밥을 따로 먹는다

 

개는 쇠줄에 묶여 있고

사내는 전화기줄에 묶여 있다

사내가 전화기줄에 당겨져 외출하면

개는 쇠줄을 풀고 사내 생각에 매인다

 

집은 기다림

개의 기다림이 집을 지킨다

 

고드름 끝에 달이 맺히고

추척,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에 개가 찬 귀를 세운다

 

날 

 

전화기 속 세상을 떠돌다 온 사내가 놀란다

기다림에 지친 개가 제 밥을 놓아

새를 기르고 있는 게 아닌가

 

이제

바다가 보이는 그 집의 주인은 사내가 아니다

 

 

 

동운암(東雲庵)

함민복

 

1

바위 그릇에 물 받아 놓고

스님 옷을 공양주 보살이 빤다

 

마음에 묻은 때야

염불과 경(經)으로 씻지만

옷에 묻은 때는

물(水) 보살의 힘을 비는 수밖에 없나 보다

 

목탁 소리

빨랫방망이 소리

 

저렇게 때려대서야

겁나,

도망가지 않을 때가 어디 있겠나

 

뒷산 푸른 나무, 흙탕물 나도록 몸 씻는

장마철 낙뢰 소리 서늘하다

 

 

2

비 굿고

달 뜨자

 

할머니, 처녀, 애송이 계집

민망하게 불룩한 배마다

 

환한 달 산파(産婆)의 눈길

 

임산부만 모여 섰는

장독대

 

* 동운암(東雲庵) : 고창군 선운사에 있는 비구니 암자 이름

 

 

 

동자승(東子僧)

함민복

 

깔고 앉은 연꽃에

미안하단 말 대신

살가운 미소 이천오백 년

 

얼굴엔 누런 범벅

달빛만 잡수네

 

부처님

이빨 없죠

하하하 웃어보세요

 

 

 

동지(冬志)

함민복

 

한석봉 어머니 깜박 책을 써는 사이

한석봉이 꾸뻑 떡을 읽는 사이

 

 

 

득도

함민복

 

허옇게 눈 나려

가지런히 책 펼쳐진

기와지붕

야~ 옹

고양이 한 마리

단숨에

오거서(五車書) 갈파하는

겨울

달밤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함민복

 

거대한 반죽 뻘은 큰 말씀이다

쉽게 만들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물컹물컹한 말씀이다

수천수만 년 밤낮으로

조금 무쉬 한물 두물 사리

소금물 다시 잡으며

반죽을 개고 또 개는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

물컹물컹 깊은 말씀이다

 

 

 

함민복

 

똥, 똥, 하고 노크를 하면

똥, 똥, 하고 노크를 받아주며

수세식 변기에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누면

내 똥이 불쌍하다

내가 뼈대 있는 것을 먹지 못해

나오자마자 주저앉는 무척추

푸른 채소를 먹어보아도

매번 단벌만 입히는 무능력

더욱 미안한 것은 내 똥에게 주는 외로움

수세식 변기는 내 똥의 연애를 질투한다

먼저 태어난 똥들이 환영하는 냄새 나는 곳으로

헹가래로 들어 올려졌다 떨어지듯

척, 소리 내며 떨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추락의 전율에 똥이 똥을 쌀 수도 있을 텐데

그리고 처녀 똥과 만나 너의 과거는 어떠했어

인연이란 묘해 그 여자 똥이었니

그 여자 만나는 그 남자 똥이었어

이런 식으로 이야기도 하고 또

똥끼리 올라타고 옆똥과 바람도 피워

스물스물거리는 구데기를 낳아

사람 목숨 같은 파리를 날려야

파리약 장사도 먹고 살고

장사 안되는 구멍가게 아저씨도 심심치 않을 건데

떨어져 보지도 못하고 구겨지는

똥으로서 살아갈 똥의 일생에 대해

물어볼 똥도 없는 외로운 내 똥

쏴와--물에 쓸려 내려간다

 

 

 

뜰 앞에 고욤나무

함민복

 

간밤

고욤나무에 달이 얹혔더니

무슨 큰 희롱이 있었던가

발자국 소리에 막 멈춘 듯

다시 구를 듯

마당 가에 고욤 알이 쏟아져 있네

마치

파계승이 염주 알 땅바닥에

내팽개치듯

 

손도 안 대고 달을 베어 무는 세월

 

 

 

라면을 먹는 아침

함민복

 

프로 가난자인 거지 앞에서

나의 가난을 자랑하기엔

나의 가난이 너무 가난하지만

신문지를 쫙 펼쳐놓고

더 많은 국물을 위해 소금을 풀어

라면을 먹는 아침

반찬이 노란 단무지 하나인 것 같지만

나의 식탁은 풍성하다

두루치기 일색인 정치면의 양념으로

팔팔 끓인 스포츠면 찌개에

밑반찬으로

씀바귀 맛 나는 상계동 철거 주민들의

눈물로 즉석 동치미를 담그면

매운 고추가 동동 뜬다 거기다가

똥 누고 나니까 날아갈 것 같다는

변비약 아락실 아침 광고하는 여자의

젓가락처럼 쫙 벌린 허벅지를

자린고비로 쳐다보기까지 하면

나의 반찬은 너무 풍성해

신문지를 깔고 라면을 먹는 아침이면

매일 상다리가 부러진다.

 

 

 

마당

함민복

 

고추씨 흔들리는 소리

한참 만에

에취!

바싹 마른 고추가

바싹 마른 할머니를 움켜쥐는 소리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마당가 개도

취이!

마주 보는 주름살

다듬는

세월

 

 

 

마두리에서

함민복

 

마두리, 그곳에 그들이 산다. 조상들의 뼈 파내 어디로 어디로 이사를 가란 말인가. 내 태를 묻은 땅에 뼈도 묻고 말 테다. 블록 담장에 래커칠된 구호가 퇴색되어가는 그곳에 그들이 모여 산다. 집 있는 자들 보상금 챙겨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싼 방세 때문에 마두리에 그들이 모여 산다. 안개 뚫고 달리는 경의선 열차를 타고 사당동 인력시장에 나가 하루품을 팔고 몸이 팔리지 않는 날은 신문쪼가리처럼 돌아와 글을 읽으며, 쓰며 그들이 모여 산다.경의선 주말마다 연인들이 화사하게 널리는, 분단의 철길, 욕지거리를 해주기도 하며 그들이 산다 가끔은 스스로의 생활에 어깃장을 놓듯 막걸리 한잔 기울이며 우리도 영화나 한 편 찍어보자고 <초근목피> 제목까지 지어보며 그들이 산다. 일 나가지 않은 날 떠나보는 새벽 산책길, 앞으로 갈수록 안개는 지워지고 또 뒤돌아보면 자욱이 내려앉아 있는 아득한 세월,  속을 지나며 그들이 고단한 인사를 나누는 사이 태양은 붉게 떠오르고 어둠 대신 안개를 덮고 늦잠 들었던, 이름만 고운 술집 마을도 깨어나는 아침 작은 소돔성이 멸하고 더 큰 소돔성이 들어설 땅에서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꿈꾸는가. 기차 바퀴 소리에 가슴 덜컹거리며 어디로 끌려가고 싶은 것일까. 오 오, 땀 흘리지 않는 노동 지겨운 원고지 칸과 땀만 흘리는 노가다판 사이를 오가며. 개 짖는 소리가 고요의 목탁을 두드리는 밤과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새소리의 아침, 모두 견디기 힘든 그 리우의 채찍, 그들이 마두리 그곳에 산다. 안개 면사포 쓴 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꿈꾸며.

 

 

 

마지막 희망

함민복

 

그것이 꿈이라서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이것이 삶이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마흔 번째 봄

함민복

 

꽃 피기 전 봄 산처럼

꽃 핀 봄 산처럼

꽃 지는 봄 산처럼

꽃 진 봄 산처럼

 

나도 누군가의 가슴

한번 울렁여보았으면

 

 

 

막걸리

함민복

 

윗물을 맑은데

아랫물이 맑지 않다니

이건 아니지

이건 절대 아니라고

거꾸로 뒤집어 보기도 하며

마구 흔들어 마시는

서민의 술

막걸리

 

 

 

만찬(晩餐)

함민복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반찬이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김치보다 먼저 익은

당신 마음

한 상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말세

함민복

 

   소인의 말장난을 귀하는

   눈 장난삼아 읽어 주십시오

 

말세는 전화요금이다

말세라고 말 많이 하는 목사님네 집

말세는 얼마나 나올까

말세 바가지를 한 번 씌워보면

말세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고 믿겠지

말세는 한 달에 한 번씩 다가온다 누가

말세가 다가오는 걸 모르나 자기만 아는 척

말세다라고 말장난하는 시대는

말세다 전화요금이 많이 나오는 시대다

 

 

 

망치 소리

함민복

 

방 밖에서 망치 소리가 들려온다

망치는 자기보다 약한 물건을 두드리고 있나 보다

망치에 저항하는 물건의 소리만큼

망치 소리가 들려온다

방 안으로 들어온 망치 소리도

방 안의 사물들 소리를 두드린다

방 안의 소리와 망치 소리 머리 부분이 마모된다

방 밖에서 망치 소리가 점점 세게 들려올수록

방 안의 소리들은 한소리로 뭉쳐진다

방 안의 소리가

방 바깥의 소리와 맞선다

방 안의 소리 중 망치 소리 편이 되는 소리도 있다

방 안에서 망치 소리가 난다

 

 

 

매미

함민복

 

고작 칠 일 울려고

땅속에서 칠 년을 견딘다고

더 이상 말하지 말자

 

매미의 땅속 삶을

사람 눈으로

어둡게만 보지 말자

 

고작 칠십 년을 살려고

우리는

없던 우리를 얼마나 살아왔던가

 

환한 땅속이여

환한 없음이여

 

긴긴 없었음의 있음 앞에

있음이라는 이 작은 파편이여

 

 

 

먹보 분식

함민복

 

출근의 아침 먹보 분식이 나를 괴롭힌다

신사역에서부터 두리번두리번

플라스틱 마릴린먼로 입상이 조개처럼

들쳐지는 치마를 두 손으로 누르며 웃고 있는

그랑프리극장에서 직장까지는 십 분 거리

그녀의 발뒤꿈치가 들려있는 왼발 쪽으로

걸어가며 나는 두리면거린다

먹보 분식은 어디에 있는가

전화를 걸면 순두부, 콩국수를 배달해주는

먹보 분식을 찾고 싶어 매일 골목길을 바꿔가며

두리번거려도 먹보 분식은 보이지 않는다

목련꽃이 피고 개 울음소리가 옥상에서 떨어지고

가을맞이 세일이 시작되었건만

먹보 분식은 자태를 보이지 않고

그렇다면 천상에서 내려온 식사인가

천상에서 내려오지 않은 식사가 어디 있겠냐만

태양을 보면, 먹보분식이

어디 있는지 몰라도 될 것 같다마는

혹, 먹보 분식은 밥을 먹는 사무실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허탕의 마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서서

자동전화기 재생버튼을 눌렀을 때

욕망을 주문해온 사내가 사무실을

먹보 분식으로 만들어 놓는다

 

나는 네가 정말 좋아 네 목소리만 들어도 흥분돼

네 목소리는 정말 섹시해 나는 지금 옷을 벗고 있어

내가 네 XX XX 줄께 너도 내 XX XX 줘......!

 

부재중을 알리던 여직원 목소리를 지우고

남자 목소리로 녹음을 하면서

먹보 분식에 중독된 변태 사내를 혐오하면서

나는 병이 더 깊어지기 전에 빨리

먹보 분식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먹보 분식은 이 세상 어디에 있는가

부처처럼 내 마음 속에 있는가

레미콘처럼 비대해진 위장 속에 있는가

먹보 분식은

 

 

 

명함

함민복

 

새들의 명함은 울음소리다

경계의 명함은 군인이다

길의 명함은 이정표다

돌의 명함은 침묵이다

꽃의 명함은 향기다

자본주의의 명함은 지폐다

 

명함의 명함은 존재의 외로움이다

 

 

 

모(母) 

함민복

 

까치가 곁가지에 집을 짓지 않듯

어머니 마음 중심(中心)에 내가 있네

 

땅에 떨어진 삭정이 다시 끌어올려

상처로 가슴을 짓는

 

저 깊은 나무의 마음

저 깊은 풍장(風葬)의 뜻

 

새끼들 울음소리 더 잘 들으려

얼기설기 지은 에미 가슴

 

환한 살구꽃 속 까치집 하나

서러운 봄날

 

 

 

모델 하우스 

함민복

 

 

모델 하우스에는 모델이 살지 않는다

슬레이트 지붕 낮은 골목을 지나

세입자인 남 형과 모델 하우스 구경을 간다

임대 아파트 보며 호연지기나 길러보자고

의식주 중 의식이 해결되어 주가 주가 된 사람들

몰려오는 자가용 먼지 뒤집어쓰며

삼십 분을 걸어 당도한 모델 하우스

우리들의 꿈을 현실로 사는 사람들이 살 집

정부시책의 모델 중산층이 살 집

조화가 조화롭게 피어 있고

잘 정돈된 세간에 어지러워지는 정신 바짝 차리며

뒷물할 수 있는 변기를 섹시하게 바라보며

모델 하우스에서 살아보는 불경스러운 상상도 해본다

감히 방 주제에 집에 대한 집념에 사로잡히다니

세입자인 우리들에게 모든 집은 모델 하우스

당첨 야시장에서 들려오는 노래소리에 등 떠밀리는

우리들이 그들의 십 년 전 모델이었을지도 모를

우리들과 점점 멀어져 가는,

모델 하우스에는 우리들의 모델이 산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목재소에서

함민복

 

배때기에 나이테 남기며

나무가 기계대패에 켜지고 있다

나무를 켜는 기계 소리뿐

기계에 깎이는 나무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나무는 지독하다

생명을 천시하는

자기 생명마저 경시하는

나무는 자기 학대증 환자다

(자기 학대는 자기 확대로부터)

제 살점 깎이면서도 향기 풍기는

나무는

가구가 되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교만하다

 

 

 

몸이 많이 아픈 밤

함민복

 

하늘에 신세 많이 지고 살았습니다

푸른 바다는 상한 눈동자 쾌히 담가 주었습니다

산이 늘 정신을 기대주었습니다

태양은 낙타가 되어 몸을 옮겨 주었습니다

흙은 갖은 음식을 차려 주었습니다

바람은 귓 속 산에 나무를 식목하여 주었습니다

달은 늘 가슴에 어미 피를 순환시켜 주었습니다

 

 

무서운 은유

함민복

 

이불 뗏목 타고 떠나는 꿈의 세계

파란만장 파란만장

인연 있는 사람 낮선 사람 죽은 사람

관계의 사슬 물처럼 흐르다가

아침 햇귀에 눈뜨면

언제나 혼자일세

어두운 죽음이

나를 그렇게 데리러 올걸세

 

 

 

무신론자

함민복

 

사람들은 다 죽는다

 

죽음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가능한 한 죽음과의

약속 시간을 늦추고 싶어

간헐적 다이어트를 하고

대장내시경을 하고

태반주사를 맞고

뒤로 걷고

곰쓸개를 먹고

위장전입을 하고

부동산투기를 하고

강을 파헤치고

원자력발전소를 만들고

부정선거를 하고

독재를 하고

무기를 팔아먹고

전쟁을 하고

난리를 치다가

약속을 어기고 싶어

약속은 없었다고

죽음은 없고

천국과 극락은 있다고

'고'들을 끼고

영혼을 달래러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은 약속을 지킨다

 

 

 

묵상

함민복

 

삼백 년 묵은 느티나무에서

하루가 맑았다고

까치가 운다

 

잡것

 

 

 

함민복

 

소낙비 쏟아진다

이렇게 엄청난 수직을 경험해 보셨으니

 

몸 낮추어

 

수평으로 흐르실 수 있는 게지요

수평선에 태양을 걸 수도 있는 게지요

 

 

 

물고기

함민복

 

부드러운 물

딱딱한 뼈

어찌

옆으로 누운 나무를

몸 속에 키우느냐

뼈나무가 네 모양이구나

비늘 잎새 참 가지런하다.

물살에 흔들리는

네 몸 전체가

물 속

또 하나의 잎새구나.

 

 

 

물어볼까

함민복

 

인삼

인어

눈사람

원숭이

풀각시

허수아비

마네킹에게

 

사람닮아

 

자랑스러운 날이 더 많았니?

부끄러운 날이 더 많았니?

 

 

 

민들레 꽃대궁은 왜 속이 비었는가

함민복

 

민들레꽃 지켜보았네

수정이 끝나면

꽃대궁 더 높이 자라네

바람에 잘 흔들리려고

꽃대궁 얇아지네

살 수만 있다면

먼 곳까지 씨앗 날려주려는

여린 마음의 탄력

 

멀리 강화도까지 날아 온 꽃씨가 되어

민들레꽃 민들레꽃 지켜보았네

 

 

 

박수 소리

함민복

 

1

박수 소리. 나는 박수 소리에 등 떠밀려 조회단 앞에 선다. 운동화 발로 차며 나온 시선, 눈이 많아 어지러운 잠자리 머리. 나를 옭아매는 박수의 낙하산 그물, 그 탄력을, 튕, 끊어버리고 싶지만, 아랫배에서 악식으로 부글거리는 어머니. 오오 전투 같은, 늘 새마을기와 동향으로 나부끼던 국기마저 미동도 않는, 등 뒤에 아이들의 눈동자가, 검은 교복에 돋보기처럼 열을 가한다. 천여 개의 돋보기 조명. 불개미 떼가 스물스물 빈혈의 육체를 버리고 피난한다. 몸에서 팽그르 파르란 연기가 피어난다. 패이, 내려서고 싶어요. 둥그런 현기증이, 사람멀미가, 전교생 대표가, 절도 있게 불우이웃에게로, 다가와, 살푸대를 배경으로, 라면박스를, 나는, 라면박스를, 그 가난의 징표를, 햇살을 등지고 사진 찍는 선생님에게, 노출된, 나는, 비지처럼, 푸석푸석, 어지러워요 햇볕, 햇볕의 설사, 박수 소리가, 늘어지며, 라면박스를 껴안은 채, 슬로비디오로 쓰러진, 오, 나의 유년!! 그 구겨진 정신에 유리 조각으로 박혀 빛나던 박수 소리, 박수 소리.

 

 

2

박수 소리. 떠나간다. 달빛, 배꽃 사각사각 밟던 밤의 기억 두고. 개포동, 눅눅한 빨래처럼 보낸 공업고등학교 기숙사. 우리들이 연삭기로 깎은 쇠밥만큼 가난은 절삭될 수 있을까. 기름밴 작업복을 입은 채 집단으로 식사를 하면, 멀건 된장국 얼굴. 액체의 거울, 내 고통을 한 숟가락씩 떠먹던 날들, (정신이여 육체를 그만 패러디하라. 육체여 정신을 풍자하지 마라.) 여름날의 선풍기처럼 부정의 고갯짓만 하고 있을 건가 바람 불면 바람 반대 방향의 뿌리가 힘을 주는 나무를 생각하라 밤비 내리면 가는 귀 점점 굵게 먹어가는 네 고향의 어미를 생각하라. 하지만 선생님 이곳은 너무나 깊은 늪이여요 향기가 없어 시들어버릴 수도 없는 조화 같은 몸뚱어리여요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한 게 공평해요 죽 먹은 날 아침 도시락 없이 등교하던 걸음 속도를 생각하면 금팔찌는 허영의 수갑이여요 이놈, 각설하라. 너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다. 공업 국가의 견장이다. 불온한 생각을 소각하라. 그렇지만 대학 진학하는 친구가 우표처럼 부러워요. 한 달에 한 번씩 외출 나아가면 여고생들의 화사한 웃음에 빈혈 들어요. 발생 정지란 색깔의 공업고등학교 제복. 그래요, 학벌은 좋은 옷인가 봐요 사춘기가 바람에 펄렁이는 너하고는 카운셀링을 할 필요도 없다. 너는 패배자다. 기상, 점호, 구보, 내무 사열, 취침의 시조체 생활. 꿈만이라도 자유스러운 꿈을 꾸고 싶었다. 봄비에 깃털 적시며 알을 품고 있다가 새의 영혼은 몸집보다 커다란 날개라고 푸드득 날아오르던 고향의 강새, 가을하늘 아래서 꽁지를 땅에 묻고 알을 까며 죽어간 풀무치. 그러나 고름 같은 절삭유에 빠져 허덕이는 꿈을 꾸곤 했다. 그러한 날들이 흘러가고, 이제 졸업장 앞에 선 자여, 19세, 이 황량한 솟수의 나이에 패배자여. 언 땅 속 살아서 뛰고 있을 개구리의 작은 심장 2 심방 1 심실, 희망을 간직하라고, 기능사 2급 자격증을 품고 떠나는 그대에게 후배들이 쳐주던 박수 소리, 박수 소리.

 

 

3

도대체 박수칠 일이 없는 나는 어둠 속에서 박수를 친다

덥다 귀찮다 불을 켠다 내 피를 빨아 내 피의 힘으로 날며

내 피를 계속 노리는 모기, 피비린내 묻은 박수 소리.

 

                짝

 

미. 소 수뇌들이 악수를 나누고 박수를 보내는 측근

그 작은 손바닥, 박수 소리에 약소민족의 운명이

아, 국제, 제국적 박수 소리, 가득한 티브이를, 그냥, 확

 

 

10

그레고르 잠자처럼 문득 의식이 들었을 때 놀랐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멘트에 굳어 있는 온몸

생명의 시계 심장 부위만 약간의 틈이 있을 뿐

육신 전체가 옥죄여와 저리고 내 몸 같지가 않았다

머리도 거지반 시멘트에 묻혀 있었다

다행히도 눈에는 시멘트가 묻혀 있지 않아

고정된 시야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추락한 것이다

고정된 시야에 엎질러진 페인트통이 들어온다

그것도 다만 어둡게 보일 뿐이다

나는 발가락에 신경을 보내본다

쥐가 났을 때처럼 감각이 전해지지 않는다

나는 잠시 생각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시멘트에 묻힌 심장 뛰는 소리가

시멘트에 묻힌 귀로 아득하게 들려온다

 

시멘트가 지각을 단단하게 만들어 지각이 약해진다

시멘트가 세상을 평탄하게 만들어 세상에 층이 생긴다

시멘트가 사물을 각지게 만들어 사물이 삐뚤어진다

시멘트가 풍경을 밋밋하게 만들어 풍경이 거대해진다

나는 공포에 떤다 소리치고 싶어진다 그러나 소리쳐서는 안 된다

소금기둥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생좌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바람이 생각을 면도질하며 지나간다 눈을 감는다

시멘트의 완충 때문에 살아 있구나

조생 시멘트, 포틀랜드 시멘트, 그 부드러운 함정

나는 내 생처럼 단조로운 페인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자전하며 전진하는 레미콘이 시멘트를 붓고 철수하고

어둑신함 속에서, 서두르다, 그만, 나는,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몸

쥐 한 마리 다가와 내 코를 다 갉아먹어도, 꿈쩍도,

오, 드디어 자유로워지는 영혼의 거푸집

 

시멘트가 길의 바통을 이어받고 길 위를 질주한다

시멘트가 벽이 벽을 넘을 수 없도록 벽을 쌓는다

시멘트가 도미노 이론으로 무장을 하고 사막주의를 선포한다

 

회중전등을 든 야방꾼이 콧노래를 부르며

불빛으로 현장을 훑는다 사람살려,

나는 소리치지 않는다 무엇인가,

내 영혼을 이렇게 견고하게 묶어놓은 것은

나는 나직이 어머니를 불러본다

내가 연 어머니는 판도라의 상자

내 죄가 드디어 별빛으로 빛난다, 흐려진다

제발 나를 발견치 마라 야방꾼이여

내 영혼의 야방꾼 어머니여!

눈동자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눈물

가장 편안한 하늘을 볼 수 있는 수평의 자세

오오 나는 세월로 나를 칭칭 감아왔구나

나를 결박하여 왔구나 발설하라

내 몸이 내 영혼을 식민지화하고 있었음을

그렇다면 내 몸과 영혼의 식민주는 누구였던가

 

법의 시멘트, 어머니의 시멘트, 가난의 시멘트,

언어의 시멘트, 관념의 시멘트, 투쟁의 시멘트,

희망의 시멘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시멘트,

 

너는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고

그것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전사하겠다고

강령을 선포하라 용서해다구

파프카도 스티븐 디덜러스도 모두 버리고

너는 이제 장자의 마을로 들어가볼거나

오, 나는 장자 같은 위대한 정신병자가 되고 싶네

무엇이 나를 옥죄는가 옥죄인 것이 과연 옥죄인 것인가

장자로부터 또한 장자하여지자

멀리 새벽 자동차 달리는 소리가 들리기 전에

너는 네 생을 세 번 부인하리라

 

나는 시멘트 위에 살았네

나는 시멘트 속에 살았네

나는 시멘트였었네

 

머릿속에 꿈도 칠하지 않으며

캄캄하게 밀려오는 잠

 

살았다, 살았어 살점이 묻어날지도 모르니까

우선 시멘트째 잘라서 병원으로 옮기지

내 눈이 가리워지고 시멘트 자르는 그라인더 소리,

가끔 얼굴에 묻은 시멘트 가루를 닸아주는 목장갑,

현장 차가 오기 전에 목도를 준비하라

나는 발굴단에 의해 발굴되는 유품처럼

조심성 있게 사각으로 전달된다

각이 떠지자 인부들은 근육의 지렛대로

힘모아 나를 일세운다 나는 미라처럼,

시멘트관에 박힌 부조처럼 벌떡 직각으로 일어선다

강시, 오, 이 찬란한 기립. 웅성거림 속,

직립원인이 되어, 나는 슬며시 눈을 뜬다

와--살았다, 살았어 눈을 떴다

햇살, 저 동살, 볕뉘, 나는 부처처럼

살며시 미소를 띄운다 아, 해탈의 순간,

맞은편 공사장 유리에 비친 나의 모습,

날으는 형상으로 굳어진 나의 자태

으흑, 저, 저주의 욕망, 추락하면서도

날갯짓의 포즈를 취한, 떨쳐버려야 할,

나는 다시 한번 씨익 웃는다

인부들이 일제히 박수를 친다

기억하고 있는 세상 모든 사물들의 소리가

박수소리화되며 나를 묶고 있는 시멘트

정질을 시작한다 나의 내부에서도

여린 박수소리 한 가락 피어나 동조되기 시작한다

 

 

 

반성

함민복

 

강아지 만지고

손을 씻었다

 

내일부터는

손을 씻고

강아지를 만져야지

 

 

 

발록구니, 세밑, 1992

함민복

 

귤껍질처럼 알맹이 쉽게 배반하는

채널시대, 티브이 채널을 돌리며

밤새워 티브이를 보았다

대통령 선거 발표를 보는 것인지

컴퓨터의 놀라운 위력을 보는 것인지

아무튼

지방의회선거 국회의원선거를 거친

지역감정의 결승전을 보는 듯 했다

정신의, 

신토불이(身土不二)!

 

핸드마이크는 한 해를 자선남비로

설거지하자고 하고. 걸었다

붉고 푸른 광고 줄에 굴비처럼 엮인 빌딩들

산타크로스 복장의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할아버지,

거, 선물 보따리는 어디 있는 거요

브랜드를 챙기러 온 분신술의 손오공, MONKEY.가

계유년, 치킨의 해 맞을 준비, 설거지나 하자며

터벅터벅 걸어와 악수를 청할 것 같아

눈길 돌릴 때 캐럴과 노란 알전구꽃이

파편으로 날아와 가슴에 또 한 살을 쑤셔넣으며

서른둘, 중년, 비구니를 바라다보는 나이나

뽀득뽀득 설거지하라고 지하철로 등 떠밀어

 

광릉 내, 맹인 식물원 나무 색깔처럼 쓸쓸하게

친구의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

청량리 오,팔팔 나는 보았다

창녀들이 은빤짝이로 크리스마스트리 만드는 것을

누이들이 기다리는 구주는 누구

잠시 스란치마 시절을 추억했을 누이들

그러나 성냥팔이 소녀시대는 거하고

X지팔이 소녀들이 흔건한 이 땅

불을 지펴라 불을 지펴라

기쁘다 구주불로 심판하러 오실지니

불로 설거지하러 오실지니 이 세상 확,

 

수돗물을 틀고 설거지를 한다

깨끗한 그릇부터 지저분한 차례로

빨리 몸 더럽히고 싶은 강물줄기

수압만큼이나 손이 시리다

마음 먼저 씻고 눈 씻는데

설거지가 잘 안되는 이 겨울

 

 

 

함민복

 

밥상을 대한다

햐 --

우리들의 먹이사슬에 걸린 것들

비름나물, 멸치, 콩장......

너희들은 우리들의 식민지다

(어, 이것들이 겁을 먹지 않네)

그럼, 우리들이 너희들의 식민지냐(?)

 

신은 사람의 영혼을 재배한다

신은 사람의 영혼을 먹고 산다

 

신은 어린 새순 같은 영혼을 먹는다

      사색에 찌든 시인의 영혼을 먹는다

      스캔들로 가득찬 여배우의 영혼을 정력제로 먹는다

      한 많은 노동자의 근육질 영혼을 먹는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영혼을 먹는다

      병마에 시달려 고통에 절은 영혼을 먹는다

      싱싱한 회를 먹듯 심장마비 영혼을 먹는다

      씀바귀 먹듯 독재자나 죄인의 영혼을 먹는다

      요즘 새로운 입맛으로 에이즈 영혼을 먹는다

      전쟁을 일으켜 영혼의 뷔페를 즐기기도 한다

  신은

  .

  .

  .

 

  신을 섬긴 자의 영혼을 먹는다 

  보라, 우리들의 영혼을 골고루(희, 노, 애, 락의 영양소) 섭취해

  우리들이 볼 수 없을 만큼 비대해진 신의 몸집

  신의 밥이 되기 위해 밥을 먹는

  신의 먹이사슬에 걸린 우리들의 영혼이여

 

 

함민복

 

오늘을 살아내기 위하여

창신동의 좁고 긴 방

머리와 다리를 남북으로 갈라놓아야

누울 수 있는 방

잠을 뒤척였다

남쪽을 먼저 알아야 북쪽을 알 수 있고

잔 방향을 추궁당하는 시대의 알레르기

동이나 서로 머리를 두고 꿈꿀 수 없는 방

더러 동서를 그리워하는 변절의 세월

가벙 속 싸움에 찌든 몇 권의 책

나침반처럼 고지식한 남북 사고에 지쳐

동서를 넘보는 눈빛

거역하며 성냥불 당겨 무는 입술 쓰거운 담배여

자동차 경적 소리 길게 울리며 지나가고

붉은 담뱃불에 생각 타들어 가는 소리

남쪽은 더 남쪽의 북쪽이고

북쪽은 더 북쪽의 남쪽이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작은 방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쉽게 잠들 수 없어

 

 

 

방울

함민복

 

수도꼭지를 조였다 풀었다

물줄기를 풀었다 조였다

수도 꼭지 네개에 물방울을 떨군다

(한파가 아니었다면 어찌 물방울을 만들어보았을까)

 

똑.

똑.

똑.

똑.

 

마음에 여린 길 잊지 않으려

눈물방울 있었던가

 

전태일

김남주

리영희

김근태

 

사람 길 지키려 치열했던 방울들

작아 큰 울림

(한파가 아니었다면 어찌 사람방울을 생각해보았을까)

 

 

 

방점 찍기

함민복

 

오자를 찾기 위한 은밀한 집중

원고지 칸 그물에 발 걸리는 눈빛

와와 시대의 오타마저 바로잡던 그해 6월의 함성 소리

흙피 묻은 동학군의 따옴표로 들불처럼 번지고

문법에 어긋난 정치면 숫자 옳게 쓰며

붙어 있는 외세 글자에 띄어쓰기 표시로 숨구멍 트기

밤이 오면 저마다 삶의 교정부호 찾아

가슴속으로 라단조의 느낌표 달고 하강하기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이웃과 붙임표를 이끌어내

情 삽입하기 삶의 문맥 고치기 평화와 희망의

단락 합치기 분단 조국 휴전선 탈락 부호의

그날을 위해 애국심에 방점 찍기여

틀린 것을 바로잡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마치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고 있는 듯한 마음에

잠시 교정지 위에 정의의 신처럼 빛살 내리고

하여 물음표 던지기

나는 얼마나 더 나를 틀려야 내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얼마나 더 우리를 맞춰야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질문의 장대비에 흠뻑 젖은 몸으로

生의 만능 교정부호 사랑 만들며 살아가기

그리고 부끄럽지 않은 마침표 하나 준비하기

 

 

 

백목련

함민복

 

어쩌자고 백목련은 항복의 白旗로

한 해를 시작하는가

한 생을 해탈한 자의 눈부신 파멸이여

 

 

 

백신의 도시, 백신의 서울

함민복

 

가로수가 더 이상 전원에 부착된

안전벨트로 보이지 않는 도시

서울의 클리토리스 남산

거대한 주사위처럼 스포이트처럼

발광하며 문명을 주사하는 타워

어둠이 내리면 연꽃처럼 피어나는 광고

여관 개업식날 만국기를 다는 곳

서서히 사람들을 처형하는 독가스

합법적으로 내뿜으며 질주하는 자동차

현재의 인구와, 작금의 교통사고 현황과,

환경 오염도와, 일기예보와, 활자뉴스와......,

순간적 인식과 찰나적 망각을 종용하는

슬픔과 아픔이 숙성될 수 없는

정서의 겉절이 시대

적당량의 희망과 고통과 죽음을 투여받아

전신이 무감각화된 서울,

출판 최대의 폭력물, 역사책에

대환란을 기록할 기술지상주의자들

텔레비전에 스티로폴 눈이 내리며 주는 예시

머지않아 진짜 스티로폴이 눈처럼 내릴

단테가 이 도시에 태어났더라면

일상의 모작으로 충분했을 신곡, 지옥편

가로수가 시멘트에 질식사한 흙의 상주처럼

새끼줄로 복대하고 머리 풀어헤친 오, 서울

 

 

 

밴댕이

함민복

 

팥알만 한 속으로도

바다를 이해하고 사셨으니

 

자, 인사드려야지

 

이 분이

우리 선생님이셔!

 

 

 

버드나무

함민복

 

버드나무는 붉은 태양과 푸른 하늘 향해

한 생을, 가지를 뻗어 올리지 않는다

더 높은 곳에 희망을 두고

살아간다는 허망함에

반(反) 가지를 치렁치렁 당당히 내린다

버드나무는 향일성 세계의 이단아다

 

버드나무는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어

세파를 이기려 하지 않는다

근육에 힘 빼고 목소리 낮춘 부드러운 힘으로

버드나무는 자신을 사랑한다

사색의 가지 늘어뜨려 자신의 몸을 더듬기도 한다

나는 정말 존재하는가

 

그러나 버드나무는

가시로 온몸을 무장하는 가시나무처럼

광신적으로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흙으로 다시 돌아갈 육신

흙에서 멀리 도망쳐 보았자 무엇하나

정말 나는 흙이 아닌 나로 존재하는가

버드나무는 삶의 회의주의자다

 

버드나무는 무엇이 그립는지

지난 세월 살았던 기억 속으로

가지를 차르르 늘어뜨려

살아온 공간을 반추하며

흙이었던 시절, 육신의 고행을 향해

이른 봄 버들개지를 피운다

버드나무는 지독한 향수병자다

 

 

 

버스에서

함민복

 

임산부와 함께 앉게 되었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와 동행하게 되었네

 

아이와의 인연으로

내 인생이 길어지자

나는 무상으로 어려지네

 

버스가 조금만 덜컹거려도

미안한 마음 일고

따갑게 창문 통과하는 햇살

밉다가

길가에 핀 환한 코스모스

고마워지네

 

아이가 나보다 선한 나를

내 맘에 낳아 주네

나는 염치도 없이 순산이라네

 

 

 

보따리

함민복

 

한 시간 걸려 버스가 읍네에 도착하면

저것 내 것! 저것 내 것!!

보따리 들고 내리는 할머니들보다

좀더 젊은 할머니들

보따리를 향해 버스 문을 후벼 판다

 

휜 허리로 짐보따리를 내리는

몸집보다 큰 익모초 단을 내리는

할머니들의 쪼그락

 

저 작은 보자기

수만 번 꾸렸다 폈다 했을

저 작은 보따리

 

어느 겨울밤

눈물

한 줌

꾸렸을

저 보따리가

 

 

 

보문사

함민복

 

삼산면 낙가산

보문사에 가시면

돌계단 힘들더라도

눈썹바위 한번 만나보셔요

 

눈썹바위 아래

부처님 한 분 계시지요

눈썹바위 밑은

눈동자 바위라

 

내 모습이 비쳐야 할 눈동자 바위에

내 모습 아닌 부처가

 

아,

처*

 

수천수만 중생이

다 부처라는

말씀

꽝! 들어보셔요

 

* 눈동자에 비쳐 나타난 사람의 형상.

 

 

 

함민복

 

밥을 머리에 이고

어머니 들판 건너오신다

아지랑이 아지랑이

 

 

 

봄꽃

함민복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봄바람 불어오면

함민복

  

금호동 달맞이봉

개나리꽃이나 보러 갈거나

온통 노랗고 혼자 노랗지 못하다가

간이정자에서

달빛에 잠까지 적시다가

새벽

한강에 피어나는 안개나 볼거나

아픈 몸으로 이불 끌어당기며

나는 괜찮다 하시는

어머니 같은 안개 낀 강이나 바라다 볼거나

내친김에 강을 거슬러 올라가

달래강으로 어머니 만나러 갈거나

어머니 잔소리처럼 부는 봄바람에

움트는 새순 피어나는 꽃들에 취해

여린 꽃잎이 새순이 되어 볼거나

 

 

 

봄비

함민복

 

양철 지붕이 소리 내어 읽는다

 

씨앗은 약속

씨앗 같은 약속 참 많았구나

 

그리운 사람

내리는 봄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가

가죽 비틀어 빗방울을 턴다

 

마른 풀잎 이제 마음 놓고 썩게

풀씨들은 단단해졌다

 

봄비야

택시! 하고 너를 먼저 부른 씨앗 누구냐

 

꽃 피는 것 보면 알지

그리운 얼굴 먼저 떠오르지

 

 

 

부러운 울음소리

함민복

 

비행기가 이룩하자

애기들이 운다

 

울음소리

 

세상에 태어나며

한 생애를 이륙하며

 

터트렸던

울음엔진 소리

 

아직

싱싱 남았어라

 

 

 

부부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불탄 산

함민복

 

나무와 나무 사이

청설모 길도 붉게 타올랐다

꽃핀 진달래가 지글지글 끓었다

솔방울이 불방울이 되어 굴렀다

불꽃의 산이었다

 

검은 그림자들이 빽빽이 서 있었다

 

아흐레 지난 새벽,

재 냄새가 마을 가득하다

한 몸이 된 나무들 내음

 

봄비다

 

 

 

붉은 겨울, 1986

함민복

 

1

부엌칼로 손가락을 내리쳤다

잘린 손가락을 집어 아버지 얼굴을 그렸다

붉은 핏물이 눈물에 씻겨내리고

해골만 그려졌다

어머니가 내 손을 붙들었다

하얗게 눈이 내렸다

 

2

단지.

손에 손가락을 내리친 가난이 들려 있었다

가난은 시련이 아니라 분위기다

어머니가 삐끄덕 문을 열었다

핏방울이 부엌에 뚝뚝 차올랐다

애고고,

어머니가 수건을 벗어 떨어진 손가락을 붙여주며

이웃으로 소리를 질렀다

흰 머리카락 위로 철렁 검댕이 그물이 쏟아졌다

 

3

아버지가 죽었다

황토흙을 파고 나의 전생(前生)을 묻었다

 

4

트럭이 눈 위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업혀 나온 내 발에 어머니의 작은 버선이 꼬여져 있고

트럭을 밀고 들어올 때마다 어머니 맨발이 붉었다

미친년처럼 눈이 내렸다

 

5

아버지 나를 낳고 출생 신고하러 가시던 길

숨으로 우는 목관악기 되어

아버지 사망 신고하러 가는 길

수리산 봉우리 툭 터져 붉게 번진 저녁노을

 

6

그래도 일단 붙여놓기로 했다

한 해를 살며 다친 세상의 모든 상처를 감싸는

흰 붕대로 눈은 내리고

나는 어머니의 깨물지 않아도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7

매형들이 내려왔다

바깥마당 대추나무에 기르던 개를 매달았다

가마때기가 개를 감싸고 불이 당겨졌다

매형들의 이빨 사이에 어머니와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셋방살이가 끼였다

붉은 개 울음소리가 집안 가득 찼다

 

다시 부엌에 들어가 보았다

바뀐 칼과 도마가 다른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9

어머니가 나무를 해 날랐다

따뜻한 방보다 병원에 아버지를 입원시키고 싶었다

글을 썼다 지방신문에도 당선되지 못한

습작시를 태우며

불의 즙 기름 같은 붉은 눈물을 흘렸다

 

10

빚쟁이들이 트럭을 붙들어 늦고 지친 이사

비 온 다음 날의 참깨꽃처럼 힘없이 떠나는

고향

붉은 슬레이트 지붕이 눈물에 잠겨

눈꺼풀처럼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비빔밥

함민복

 

제품명: 야채고추장비빔밥 ․식품유형:즉석조리식품 ․내용량:123g ․원재료 및 함량: 건조밥(국내산) 46.5%,야채건더기 17.5%건양배추칩33%(중국산),건당근칩15%(중국산),건양파칩23%(중국산),조미맛단백29%(식물성단백후레이크 54.63%){탈지대두분75%(인도산),산분해간장원액20.16%(소맥글루텐72.86(밀-태국,호주산),조미돈지{돈지71.43%(국내산),조미비프분말(엘-글루타민산나트륨35%정제염18.75%,발효간장분말NS},이온물엿), 맛있는 비빔장32%[고추장 80%{물엿,소백분(밀:수입산),혼합양념,밀쌀(밀:미국산),L-글루타민산나트륨(향미증진제)},전제수, 냉면육수(대두,밀), 흑설탕, 마늘(국내산),하얀설탕, 대두유, 참진한기름, 식초, 핵산(향미증진제),파프리카추출색소],참기름4%(중국산)

 

뜨거운 물 붓고 8~10분 후

스프만 넣고 비벼 먹으면 된다는

즉석 비빔밥 내용물을 보며

중국산 배추. 양파, 당근에게

태국, 호주산 밀에게

인도산 탈지대두유에게

미국산 밀쌀에게

 

먼먼 곳에서 와 그저 감사하다고

지구를 커다란 콩 한 알로 보면 별일 아니라고

겡제 글로벌화를 외친 대도무문 대통령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를 설한 무위당의

얼이 두루 흐르는 나라라고

건성으로 말을 건네 보다

 

오, 이 글로벌한 즉석 비빔밥이여

123g 속의 세계여

비빔밥 속의 비빔밥이여

비빔밥 아닌 밥은 없다는 일갈이여

비벼지지 않는 시공도 비벼내고 있는

외로운 그림자의 화장(化粧)술 같은

문명의 신에게 바칠 한 봉지 메여

 

 

 

빨래집게

함민복

 

옷을 집고 있지 않을 때

내 몸을 매달아본다

몸뚱이가 되어 허공을 입고

허공을 걷던 옷가지들

떨어지던 물방울의 시간

입아귀 근력이 떨어진

입 다무는 일이 일생인

나를 물고 있는 허공

물 수 없는

시간을 깨물다

철사 근육이 삭아 끊어지면

툭, 그 한마디 내지르고

훑어지고 말

온몸이 입인

 

 

 

뻐꾸기

함민복

 

저 목소리 들어봐선

아닌 것 같다

 

저리 곱고

깊은 소리

 

눈빛처럼 다급하게

알을 낳았으리라

 

염치머리 없다고

미안 미안하다고

 

울어 울어도

죄 가시지 않는다고

 

이 산 저 산에

무릎 꿇는 울음 메아리

 

 

 

함민복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뻘밭

함민복

 

부드러움 속엔 집들이 참 많기도 하지

집들이 다 구멍이네

구멍에서 태어난 물들

모여 만든 집들도 다 구멍이네

딱딱한 모시조개 구멍 옆 게 구멍 낙지 구멍

갯지렁이 구멍 그 옆에도 또 구멍구멍구멍

딱딱한 놈들도 부드러운 놈들도

제 몸보다 높은 곳에 집을 지은 놈 하나 없네

 

 

 

뻘에 말뚝 박는 법

함민복

 

뻘에 말뚝을 박으려면

긴 정치망 말이나 김 말도

 

짧은 새우 그물말이나 큰 말 잡아줄 써개말도

말뚝을 잡고 손으로 또는 발로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어야 한다

힘으로 내박는 것이 아니라

흔들다보면 뻘이 물러지고 물기에 젖어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으로 빨아들일 때까지

좌우로 또는 앞뒤로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

뻘이 말뚝을 빨아들여 점점점 빨리 깊이 빨아주어

정말 외설스럽다는 느낌이 올 때까지

흔들어 주어야 한다

 

수평이 수직을 세워

 

그물 넝쿨을 걸고

물고기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 상상을 하며

좌우로 또는 앞뒤로

흔들며 지그시 눌러주기만 하면 된다

 

 

 

사계

함민복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검은 자동차가 뒷걸음질치며

병아리 소리로 울었다

희망에 또 속아 봄이 왔다

 

냉장고가 내장을 확 꺼내보이고 을곤 했다

야광신발 신은 조카가 반딧불로

어둠 속을 질주 했다

삶은 늘 제자리 걸음이었다

 

귀뚜라미 보일러가 울며 새벽 잠을 깨웠다

베고 자던 담요를 펴 가슴을 덮었다

허름한 따뜻함을 주는 여자를 찾아

사랑은 허방다리를 짚곤 했다

 

방패연의 뚫린 가슴을 통과하는

찬바람 같은 세월이 흘러갔다

욕망은 바퀴에 쇠사슬을 감고

자신의 살점을 후려치며 울고 있었다

 

또 한 해를 죽 울어온 것이다

 

 

 

사과를 먹으며

함민복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마비를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나무 집 딸을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를 지탱해 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 보려다

흙으로 돌아가고마는

사과를 먹는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

 

 

 

사랑 혹은 죄인이 따로 있는 벌

함민복

 

어머니 칠십 평생 쭈그려 앉아

긴 이랑

밭을 매시네

오리걸음이 따로 없네

 

 

 

사십 세가 되어 새를 보다

함민복

 

새가 앉자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새도

흔들린다

 

새들에게

하늘로 날 꿈을 준

 

나무는

새들의 긴 다리다

 

새들은

나무의 그림자다

 

 

 

사연

함민복

 

비 오는 날

자전거 타고

고갯길 넘던

우체부

낭떠러지로

미끄러져

죽었다지

호박떡 하,

먹고 싶으니

내일 올 때

호박오가리

꼭 챙기란

죽음 목전

늙은이가

친척에게 친

전보 한 통

돌리러 가는

길이었다지.

 

 

 

산(産)

함민복

 

1

돼지가 돼지들을 낳았다

들이란

여성의 평균 수명이 긴 것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분만틀에 앉아 돼지를 받았다

향긋한 톱밥으로 핏기를 닦아주면

보송보송한 돼지털

모든 비린내는 생명이었구나

탯줄을 끊고

보온등 아래로 몸을 옮겨주면

맑은 발톱, 선연한 귓바퀴로

어미를 찾는 새끼돼지들

함부로 눈뜰 수 없는 세상

함부로 눈 뜨지 않을 수 없는 세상

돈사의 보온을 위해

석유난로의 심지를 돋우는 새벽

지펴 오르는 생각들

불빛에 젖은 모돈이 흘리는 금빛 눈물

오, 이 세상 모든 눈물 속에는 그 에미가 있었구나

(어머니와나의교집합가슴에눈물로빗금그어온가난한날들,

어머니눈물속에들어가세상을바라다보면

먼저내눈물속에들어와세상을바라다보고계시는어머니)

눈물 속을 흐르는 혈이여

목숨이 목숨을 낳는 비린내여

어찌 저 생명을 사료가 빚었다 할 수 있으랴

이제 돼지를 대쥐라 부르지 않으리

돼지꿈을 귀찮아하지도 않으리

끝물을 받고, 돈사의 와풍을 단속하고

겨울 새벽 산 물에 손을 씻으며

겨울 새벽 산 눈 위를 걸으며

아이를 낳고 싶었다

남자인 나는

 

 

2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소리로 길을 열며

사람들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겨보지요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산속에서 버터플라이 수영하는 아버지

함민복

 

아버지 무덤가에 향나무 한 그루 있네

아버지가 죽기 전에 꺾꽂이해놓은 향나무

봄 햇살에 심어놓고 고향을 떠났네

이젠 나보다 키가 훨씬 큰 향나무

자주 고향에 들르지 않는 나보다 효자네

 

향나무 기르기는 아버지의 주특기

경로당에도 초등학교에도 면사무소에도

우리 밭둑에서 캐어간 향나무가 자라고 있었네

그러나 지금 그 향나무들 없네

그냥 그 나무들 자라던 자리만

내 마음속에 단정히 서 있을 뿐

 

산속에서 머리를 땅에 박고 양팔 벌려

버터플라이 수영 포즈를 취한 아버지 산소에서

향나무 열매를 하나 따 보았네

향나무 열매에서 향나무 향기가 나네

향나무 열매 속에 향나무의 來世가,

향나무에 대한 기억이 가득 차 있네

 

산에서 흙 속을 수영하며

아버지 어디로 나아가는 걸까 배영으로

누워서도 힘찬 버터플라이 자세를 보여주시며

너도 消滅로 수영해 나아가려면

아버지가 되어보라고

향나무 열매 많이 매달아놓으셨네

아버지 죽어서도 나를 키우시네

 

 

 

산이 난다

함민복

 

큰 새들의 날개는 산을 닮았다

기러기가 날아올 때 선(線)으로 된 산도 함께 날아온다

갈매기가 머리 위를 지날 때 면(面)으로 된 산도 지난다

 

산이 운다

울며 날아가는 산(山)아!

 

사람들이 서로 껴안을 때

사람들의 팔도 산모양인 것 너희들도 보았느냐

 

 

 

살구골 저수지의 봄

함민복

 

살구골 저수지에 살구꽃 피지 않는다

물 흐려져 초등학생들 봄소풍 나오지 않고

낚시꾼들 휘두르는 카본대 끝에서 야광찌만 반딧불로 날아

 

살구골 사람들

 

살구골 저수지가 더 빨리 오염되길 바란다

살구골 저수지 오염되어 농업용수로 쓸 수 없어야

절대농지 풀리고 땅 팔려

도회지로 떠날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만 붉다

 

 

 

상계동 시절

함민복

 

이웃집 하수구 비린내 쉽게 넘나들고

봄바람에 애기 기저귀 펄렁이던 그 집

 

다듬던 아욱 한움큼 집어주던 병든 주인집 할멈

움푹 패인 눈에서 서글픔 솟아나던 그 집

 

밤이면 바퀴벌레, 사각사각, 타이어표 검정고무신

귀에 대면, 소와 알 수 없는 소리, 고향 생각에 잠이 헛돌던 그 집

 

공중변소에 가 바지 까내리면 낮에도 모기가 엉덩이 물고

그래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이웃집 처녀 똥에 내 똥 몸섞던 그 집

 

새벽이면 불암산 약수터에서 산을 한초롱 짊어지고

안개 속에서 어머니 걸어나오시던 그 집

 

튼튼한 갈비뼈 좀 보라고 철골 세워지더니 아, 아파트

아파트족들이 쳐들어와요 아파카트 맞고 배山진친 그 집

 

지금 그 집은 헐어졌어도 내 가슴속으로 이사온 그 집

가끔 그 집 속으로 들어가 그 집을 생각하면 눈물겹고

 

 

 

샐러리맨 예찬

함민복

 

쥐가 꼬리로 계란을 끌고 갑니다

쥐가 꼬리로 병 속에 든 들기름을 빨아먹습니다

쥐가 꼬리로 유격 훈련처럼 전깃줄에 매달려 횡단합니다

쥐가 꼬리의 탄력으로 점프하여 선반에 뛰어 오릅니다

쥐가 꼬리로 해안가 조개에 물려 아픔을 끌고 산에 올라가 조갯살을 먹습니다

쥐가 물동이에 빠져 수영할 힘이 떨어지면 꼬리로 바닥을 짚고 견딥니다

30분 60분 90분 - 쥐독합니다

그래서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살아가는 삶은 눈동자가 산초 열매처럼 까맣고 슬프게 빛납니다

 

 

 

서그럭서그럭

함민복

 

텃밭에

햇살과 바람에 걸리는 그물

 

수직의 꽃밭에

오이꽃이 피고 지고

 

그물에

오이덩굴이 걸렸더니

 

오이덩굴에

그물이 걸렸더니

 

죽어서도 그물 놓지 못하는

오이덩굴에

 

햇살과

바람이 걸려

 

서그럭

서그럭

 

 

 

서울역 그 식당

함민복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 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 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함민복

 

1

열차가 도착한 것 같아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스크린도어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민망하여 별로 놀라지 않은 척 주위를 무마했다

스크린도어에, 옛날처럼 시 주련(柱聯)이 있었다

문 맞았다

 

 

2

전철 안에 의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두 귀에 청진기를 끼고 있었다

위장을 눌러보고 갈빗대를 두드려보고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옛 의술을 접고

가운을 입지 않은 젊은 의사들은

손가락 두 개로 스마트하게

전파 그물을 기우며

세상을 진찰 진단하고 있었다

수평의 깊이를 넓히고 있었다

 

 

 

석월(石月)

함민복

 

몸 뒤척이는 바닷가 검은 돌

돌 속에 달

초승 반월 보름

살점 깎으며

달을 닮으려

스르륵

스르륵

經을 외며

달이 이끌어주는 그리움

밀물 썰물에

가슴 다 헐어내고

모래가 되어도

훠이--휘영청, 빛날

 

 

 

선문(禪問)

함민복

 

위에서 아래로 따르는

물을 받을 수 있는 종이컵에

아래서 위로 초를 꽂아

불을 담아 들고 있네

 

 

 

선천성 그리움

함민복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 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섣달그믐

함민복

 

어머니를 다려 먹었습니다

맛이 없었습니다

 

 

 

설중매

함민복

 

당신 그리는 마음 그림자

아무 곳에나 내릴 수 없어

눈 위에 피었습니다

 

꽃 피라고

마음 흔들어 주었으니

당신인가요

 

보세요

내 향기도 당신 닮아

둥그렇게 휘었습니다

 

 

 

함민복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성선설

함민복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님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胎兒)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세월

함민복

 

1

문에 창호지를 발라보았지요

창호지를 겹쳐 바르며

코스모스 꽃무늬도 넣었지요

 

서툰 솜씨에

울어 주름질 것같던 창호지

햇살에 말리면

팽팽하게 펴졌지요

 

손바닥으로 두들겨보면

탱 탱 탱 덩 덩 덩

맑은 북소리가 났지요

 

죽고싶도록 속 상하던 마음도

세월이 지나면

마음결 평평하게 펴져

미소 한 자락으로 떠오르기도 하지요

 

 

2

땅을 파 보니

똥이 아닌

똥닦은 휴지가

하수도 파이프를 막고 있었네

 

사람 몸을 통과한 똥이

무엇인가를 통과한 무엇이

중심이

길을 막겠는가

물고기가 물길을 막던가

 

낙화

허공을 통과하는 꽃잎

설봐

마음 다치지 말게

 

질긴 꽃잎은 없다네

 

 

 

소리의 길

함민복

 

잠결에 더듬거린다

없는 기억의 벽

어둠이 손을 끌고 다닌다

 

잠자는 동안 꿈은

부지런히 기억을 지운

부드럽거나 거친 지우개

 

소리 기구가 손에 잡힌다

손을 떼었다가 소리를 누른다

소리가 기억의 길을 연다

소리도 기억의 길을 가지고 있었구나

 

어둠 속에서 손을 쓰윽 뽑아 소리 장갑을 낀다

소리를 중심으로 사물의 위치가 펼쳐진다

소리가 손을 이끌고 벽으로 간다

딸칵

빛이 들어오며 소리의 길을 흐트러놓는다

소리의 길에서 장님이 된 손에서

푸드덕, 박쥐 몇 마리 날아간다

 

 

 

소스라치다

함민복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뭇 생명들

소스라치다

 

 

 

손바닥을 남긴 사람들

함민복

 

  턱, 하니

  빛나는 동(銅)으로

  손바닥을 남긴 사람들

 

  피카디리 극장 앞

 

  거대한 별

 

  (반짝이지 않는, 펄럭이지 않는, 딱딱한 벽돌로 된)

  속과

  주위에

  싸인과 함께 이름을 남긴

 

  그들의 이름을 보려면 누구나 고개를 숙여야 한다

  스캔들과 이혼과 개런티와 스폰서와 문제, 문제를 딛고 일어선 별들

 

  별 하나의 이미숙과

  별 하나의 강수연과

  별 하나의 장미희와

  그외, 별 35명을 호명해 보면 머리가 어질어질

 

  혹, 언젠가 이곳에 별똥별이 떨어졌고 그를 증언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아닐까 또는 별을 연구한 혹은 별을 보며 굳은 맹세를 하고 문화적 독립운동을 한, 반증적으로 문화식민지 상태를 인정한, 아니면 대중의 발바닥까지 손바닥으로 핥아주어야 스타가 된다는 상징의, 별 미친 생각이 다 드는데

 

  안중근의사처럼

  안중근의사보다 빛나는

  빛나게 하는 시대에

  좌우당간 손바닥을 남긴 사람들

  무엇을 달라고 손바닥을 쩍쩍 벌리고 있는지

  화두에 발목 잡힌 중생

  

  뗑그렁!

  동전 한 닢, 가섭처럼 미소짓고 말았네

 

 

 

송홧가루 날리는, 아버지 사진 한 장

함민복

 

선녀가 하늘나라로 데리고 올라간 자식들

나무꾼 아버지 그리워

햇살 편지

저리 붉게 꽃피는 봄

 

내게도 기적처럼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네 초등학교 다니는 누이 둘과 어린 내가 깔깔대며 산길을 오르고 있네  대나무 바지랑대 어깨에 걸쳐 맨 아버지와 함지박 머리에 인 어머니가 뒤따라오시며 길이 갈라질 때마다 손사래와 고갯짓으로 길을 이끌어주시네 아랫녘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속으로 동네 초가집들이 아른아른 멀어지네 산등성이를 다 오르자 불꽃처럼 푸른 강물처럼 푸른 소나무밭이 펼쳐지네 어머니는 함지박을 내려놓고 양은 이남박을 꺼내 누이들에게 주네 누이들은 햇살 퉁기는 이남박을 머리 높이께까지 들고 작은 소나무 가지를 톡톡 터네 노란 송홧가루가 폴폴 나네 아버지 어머니는 더 커다란 소나무 가지 휘어놓고 힘을 합해 송홧가루를 터시네 나는 아직 덜 성숙해 꽃이 피지 않은 송화 꽃송이를 따먹네 살이 통통 오른, 대추씨만 한 송화에서 나는 소나무 향내, 달착지근한 즙에. 잠시 눈을 감고. 아버지가 송홧가루 털러 가기로 점지한 날은 부지런한 봄바람도 낮잠을 자 송홧가루 날리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고마워 신바람 나시네 우뚝. 커다란 소나무에 송화가 만발하여, 태양이 꽃들을 호명하듯 아버지가 가족을 불러 모으시네 어머니와 누이들이 준비해 간 이불 홑청으로 소나무를 에워싸고 아버지는 바지랑대로 소나무 가지를 터억-터억-, 치시네 이불 홑청에 내리는, 노란 안개, 송홧가루, 송홧가루. 송홧가루 쏟아지는 재미에 몰두하다 보면 아버지 어머니 머리에도 누이들 단발머리에도 내 상고머리에도 온통 노란 물감이 드네 그 모습이 우스워 서로를 보고 웃는 웃음소리가 소나무밭을 송홧가루처럼 환하게 들어올리네

 

 

 

수박

함민복

 

어디론가 떠나가는구나

뿌리가 더 괴로웠으리

나는 씨 없는 수박

태양에 대한 상상력으로

철없이 붉게 익은 속

희망아, 이 창녀야

잘 있거라 흐린 날만 들리던

기적소리로 아아, 떠나간다

삶이란 삶을 꾸려 죽음

속으로 떠나는 전지훈련

피할 수가 없구나

저 시퍼런 칼

 

 

 

수음을 하는 사내

함민복

 

     이때 대지 위를 흐르는 강물이 정액 같았다

     태양에 강간당한 꽃들이 피어난다

 

사내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감각이 오직 여자만을 향해 발동한다

미리 준비된 매체 속의 여인들이 사내의 욕망만큼 살아난다

티브이 속의 여인 목소리를 잡지 속의 여인의 입을 통해 듣는다

사내는 보다 입체적인 여인을 원한다

기억의 창고에 입력되어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끄집어내

복합된 여인을 만든다

집적된 이미지로 창조된 여인

생각의 놀림이 빨라진다

이제 여인들을 버리기 시작한다

서양 여자를 버린다

알지 못하는 여자의 잘 빠진 육체를 버린다

아, 유명세의 여인을 택한다

유명세의 여인을 버린다

사내의 삶에 삽입되어 있는, 사내가 좀더 잘 알고 있는

구체적인 여인을 떠올린다

이미 사내의 손은 욕망의 심복

사내는 이제 한 여인과의 절정을 향하여

오, 여인의 몸집 속으로 성기를 삽입시킨다

사내의 손은 그녀의 성기 혹은 입이 된다

사내는 그녀의 몸 속에 입술과 성기를 삽입시킨다

사내는 온몸을 그녀의 몸 속에 집어넣는다

사내는 그녀가 되고 싶다

사내는 속으로 여인의 이름을 부른다

숙아! 숙아!

사내의 사고는 단일화된다

오직 한 여자와의 아,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사내는 약간 주의한다)

사내는 휴지를 준비한다

사내의 감각 놀림이 욕망지수와 일치한다

숙아! 숙아!

사내는 몸짓을 멈춘다

정액 렌즈를 낀 여인이 사내의 게슴츠레한 눈동자를

기억하려 쏘아본다

사내 머릿속에 만들어졌던 여인이 해체된다

사내의 온몸을 열고 한꺼번에 빠져나간다

사내는 휴지로 찔꺽 성기를 닦는다

전자파와 물감과 잔상과의 섹스를 끝낸다

사내의 모든 감각기관이 되살아난다

욕망의 고개가 뚝 부러진다

 

     이때 대지 위를 흐르는 강물이 세월 같았다

     태양이 지고 꽃이 시든다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함민복

 

배가 더 기울까 봐 끝까지

솟아오르는 쪽을 누르고 있으려

옷장에 매달려서도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믿으며

나 혼자를 버리고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갈등을 물리쳤을, 공포를 견디었을

바보같이 착한 생명들아!

이학년들아!

  

그대들 앞에

이런 어처구니없음을 가능케 한

우리 모두는…

우리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세월은

침묵도, 반성도 부끄러운

죄다

  

쏟아져 들어오는 깜깜한 물을 밀어냈을

가녀린 손가락들

나는 괜찮다고 바깥세상을 안심시켜주던,

가족들 목소리가 여운으로 남은

핸드폰을 다급히 품고

물속에서 마지막으로 불러보았을

공기 방울 글씨

엄마,

아빠,

사랑해!

  

아, 이 공기.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시(詩)

함민복

 

아무리 하찮게 산

사람의 생(生)과 견주어 보아도

시(詩)는 삶의 사족에 불과하네

허나, 

뱀의 발로 사람의 마음을 그리니

시(詩)는 사족인 만큼 아름답네

 

 

 

시인(詩人)

함민복

 

1

새조롱 속에 새 울음소리 고여 있지 않다네

울음소리 조롱을 흘러넘쳐

 

햇살에 

젖은 길 나고

 

새는 날개의 길을

울음소리로 가 본다네

 

그렇게 한 生을 이울이면

눈동자가 염전이 될 수 있을까

 

태양을 흘러넘친 햇살이여

라일락꽃 향기가 되어 흩날리는

 

 

2

암자에서 종이 운다

 

종소리가 멀리 울려 퍼지는 것은

종이 속으로 울기 때문이라네

외부의 충격에 겉으로 맞서는 소리라면

그것은 종소리가 아닌 쇳소리일 뿐

 

종은 문득 가슴으로 깨어나

내부로 향하는 소리로 가슴소리를 내고

그 소리로 다시 가슴을 쳐 울음을 낸다네

 

그렇게 종이 울면

큰 산도

따라 울어

큰 산도

종이 되어주어

 

종소리는 멀리 퍼져 나아간다네

 

 

 

식목일

함민복

 

사람들이 공간에 미래를 그려보는 날

나무들이 누운 채 거리를 질주하고

 

도살장으로 가는 한 트럭 돼지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벌이는 죽음의 카퍼레이드

 

어려서 가출하다가 꺾꽂이 해놓은 미루나무 뽑아

길바닥에 써보았던 그 여자애 이름

 

심어지는 것들

심어지는 것들

 

길 위에 서서

뿌리 열 개를 꼼지락거려보는

 

 

 

쑥부쟁이 - 추석

함민복

 

지난 일 생각 좀 해보라고 덜컹덜컹 온몸 흔들어주누나

비포장도로, 흙먼지 날리며 고향에 갔었나니

 

아버님 묘보다 잔디 무성한 형의 묘에서 쑥부쟁이 뽑아낼

제 실핏줄 같은 가난의 뿌리 자꾸 끊어지더이다

 

왜가리 떼처럼 떠나고 싶어 떠난 것이 아닌 살붙이들 모여

버짐 피던 이야기, 검정 고무신 하나로 술을 따라 마셨지요

 

여선생 호루라기 소리에 앞으로 나란히 피어난 코스모스

밤길 밤엔 향기로운 아름다운 꽃들아, 너희들도 고향으로 돌아갈지니

 

바람 불 때마다 스스로의 가시에 찔리며 붉게 익은 대추, 나무에

아버지 얼굴로 걸린 달, 그림자로 길게 다리 펴보았던 영혼아

 

그날 밤 내가 흘린 눈물에 흙가슴 다 적셔주던 고향을 보았는감

그날 밤 내가 눈물 추스를 때 굽은 어깨 등 품어주던 산 그림자 보았는감

 

  쑥부쟁이야

  쑥부쟁이야

 

 

 

쓸쓸한 거울

함민복

 

거울 속에서 일생을 사는

이발사의 바쁜 손놀림

 

거울을 벗고

세월을 닦아내는 사람들

 

구석에 쭈그려 앉아

깊은 눈 가득 괸 겁을 퍼 샤워하는 파키스탄 사내

 

중동 갔다 온 사촌 형은 잃은 계절만큼 빨리 늙고

계절을 얻은 저 사내 또한 쉽게 늙어가리라

 

거울아 국제적인 쓸쓸함을 내 앞에 던지는

 

 

 

씨네마 천국

함민복

 

큰집에 산 적이 있지요

장날이면 바깥마당에 약장수 오고

가을이면 옹기장수 찾아와 집안 가득 옹기 쌓이고

인삼 장수, 명태 장수, 재봉틀 수리공, 도박꾼들,

우리 집에 철새처럼 찾아 들었지요.

우리 집은 크고 넓어

가설극장 패들 와 대문 닫고 쪽문 열면

안마당이 극장이 되었지요

영화 볼 돈 없는 애들 오동나무 타고

행랑채 넘어오고

그러다가 들키면 심통난 아이들

두꺼비집을 내리기도 했지요

나는 제일 좋은 자리 마당에 있는

우물에 기대 앉아

신영균의 칼쌈 솜씨를 보았지요

지금 그 집터엔 붉은 벽돌 복지회관이 들어서

청년회 사무실도 있고 노인정도 있고

마을문고도 간판을 펼쳐놓았지요

나는 오랜만에 고향에 들러

매일 보며 살아 보이지 않던 고향 산봉우리들

그윽이 바라다보았지요

없어진 우리집 담장을 보듯 지붕을 보듯

 

 

 

씨앗

함민복

 

씨앗 하나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포동포동 부끄럽다

씨앗 하나의 단호함

씨앗 한톨의 폭발성

씨앗은 작지만

씨앗의 씨앗인 희망은 커

아직 뜨거운 내 손바닥도

껍질로 받아주는

씨앗은 우주를 이해한

마음 한점

마음껏 키운 살

버려

우주가 다 살이 되는구나

저처럼

나의 씨앗이 죽음임 깨달으면

죽지 않겠구나

우주의 중심에도 설 수 있겠구나

씨앗을 먹고 살면서도

씨앗을 보지 못했었구나

씨앗 너는 마침표가 아니라

모든 문의 문이었구나

 

 

 

아, 구름 선생

함민복

 

떠나는 것 별일 아니라고

구름 그림자는 가파르게

단풍 든 산도 쉽게 지나는데

국화 향기에 발걸음 멈춘

무거운 마음

 

나무 위로 쫓기고

나무 위로 쫓아 올라가

싸우던 간밤 고양이 울음소리

 

공기에 소리 풀리듯

소리에 구부러졌던 공기 펴지듯

사라질, 없는

마음에 허부적대

떨굴 마음도 하나 없으니

 

 

 

아남 내셔널 텔레비전

함민복 

 

티브이 속에 티브이가 있다 티브이 속의 티브이에 카멜레온이 출현한다 티브이 속의 티브이에서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을 향해 카멜레온이 걸어나온다.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의 색조 변화에 따라 티브이 속의 티브이 속 카멜레온이 빠르게 변화된다 (좌우 따로따로 움직이는 카멜레온의 눈동자, 좁살 모양의 돌기, 불규칙한 반점, 카멜레온은 순간순간 몸을 변화시키며 무엇인가를 향해 집요하게 걸어나온다) 그러다가 티브이 속의 티브이 속 카멜레온의 몸놀림에 긴장감이 감돈다 티브이 속 티브이 바깥에서 풀잎새에 늘어붙어 응애 또는 진딧물을 빨고 있는지 칠점박이무당벌레는 방심한다(칠점박이 무당벌레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인지도 모른다) 아주 놀랍게 빠른 순간. 티브이 속의 티브이 속에서 카멜레온은 긴 혓바닥을 내뻗어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에 있는 반구형의 무당벌레를 물고 티브이 속의 티브이 속으로 들어간다(이때 무당벌레는 어이가 없다)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에 있다가 티브이 속의 티브이 속에서 나온 카멜레온의 혓바닥에 무당벌레가 봉변을 당할 때 티브이 바같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는 내 머리통도 카멜레온의 점액질 혓바닥에 끌려 들어간다 그러자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듯, 선명화질이란 멘트와 함께 카멜레온의 목울대가 꿀떡인다

 

죽어서도 주위 환경에 따라 색깔이 변한다는

카멜레온의 묵시록을 본다

정직할 수 있을 만큼 당당한 저 폭력성

티브이는 티브이 밖 시청자들의

욕망에 맞춰 색조를 바꾸며 다가와

우리 무당벌레 같은 영혼을 삽시간에

삼켜 먹으며 한 세계를 이루고

결국엔 확, 무서운 혓바닥.

 

 

 

아버지의 묘비명

함민복

 

자식새끼들 싸리윷처럼 널브러져

잠꼬대 같은 바지를 입고 횟배 앓는 새벽

오줌장군 지고 헛기침 소리로 삽짝문 열어

호박구덩이 있는 밭두렁으로 향하던 농부의 묘

 

 

 

아침 햇살에 앉아 술을 깨며

함민복

 

아아 기억난다 헛소리하던 그 그 술자리

필름 끊긴 후후......는 도저히, 책임,

아,

자잘못을 뉘우치기에도 부끄러운

 

이제 돌아가려나보다

 

하얀 해골에 붙어 있는 검은 머리카락 풀어놓고

병에 누렇게 찌든 살덩이 썩어썩어 흙으로 살아날

아아 그 깨끗한 세상으로 돌아가려나보다

눈물로 해골이나 맑게 닦아두자, 햇살 아래 앉아

 

 

 

악기

함민복

                 

방아깨비 목을 따 잡아당기면 내장이 따라 나왔지

몸통 무늬대로 마디마디 잡아당겨 늘이고

알이 밀려나오는 꽁지를 따 버렸지

날개를 잡고 목구멍을 불면

몸통이 춤을 추며 후르륵 후르륵 소리를 냈지

입이 짭조름 해지고

방아깨비 몸에서 배롱나무 꽃 냄새가 났지

 

미루나무 껍질 두 장 사이에 풀잎을 끼워 불고

물오른 버드나무 껍질을 뽑아 불고

보릿대 꺾어 불고

아무까리 대구멍 사탕 쌌던 비닐로 막아 불고

병뚜껑을 불고

동전을 불고

양손으로 움켜진 공기를 불고

아 그때는 왜 그렇게 불고 싶은 게 많았던 것일까

 

소리들이 없어

소리를 내고 싶었던 것일까

소리들이 많아

소리들을 흉내 내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것 불지 않아도

구르는 것들 돌아가는 것들

소리 가득한 이 세상

 

 

 

악행(惡行)을 위한 발라드

함민복

 

월남전을 위해 급진화된 냉장고는 썩었다

썩어야 할 것을 썩지 못하게 감금하고 있는

냉장고는 싱싱푸르게 썩었다

중얼거리다가

내가 죽어버린다면

악(惡)이여 너는 얼마나 고마운가

나의 죽음 이후

내가 행한 惡行이

타인 속에서 나를 지워버리는 부드러운 지우개가 되리라

선행(善行)이 망자를 기억 솟게 한다면

기억이 죽음의 공포의 가지를 키워 올린다면

악이여 너는 얼마나 단호한가 --

망각의 평화를 꽃피우는가

적당한 악행(惡行)의 삶을 위해

삶에 독기 오른 푸른 나무숲 아래로

나를 질질 끌고 들어가는 여름

 

 

 

안개

함민복

  

안개는 풍경을 지우며

풍경을 그린다

 

안개는 건물을 지워

건물이 없던 시절을 그려놓는다

 

안개는 나무를 지워

무심히 지나 보지 못하던 나무를 그려보게 한다

 

안개는 사방 숨은 거미줄을 색출한다

부드러운 감옥 안개에 갇히면 보임의 세계에서 해방된다

 

시선의 밀어냄 흡수로 맞서며

눈동자에 겸손 축여주는 안개의 벽

 

안개는 물의 침묵이다

안개는 침묵의 꽃이다

 

 

 

앉은뱅이저울

함민복

 

물고기 잡는 집에서 버려진 저울 하나를 얻어왔다

 

저울도 자신의 무게를 달아보고 싶지 않았을까

양 옆구리 삭은 저울을 조심 뒤집는다

 

삼 점 칠 킬로그램

무한천공 우주의 무게는

0이더니

거뜬히 저울판에 지구를 담은

네 무게가 지구의 무게냐

뱃장 크다

지구에 대한 이해 담백하다

 

몸집 커 토막 낸 물고기 달 때보다

한 마을 바지락들 단체로 달 때 더 서러웠더냐

목숨의 증발 비린내의 처소

검사필증, 정밀계기 딱지 붙은 기계밀정아

생명을 파는 자와 사는 자

시선의 무게에서도 비린내가 계량되더냐

 

어머, 저 물고기는 물 속에서 부레 속에

공기를 품고 그 공기로 제 무게를 달더니

이제 공기 속에 제 몸을 담고 공기 무게를 달아보네

봐요, 물이 좀 갔잖아요

푸덕거림 버둥댐 오역하던 이도 지금은 없고

옅은 비린내만 녹슨 페인트 껍질처럼 부러진다

 

저울은 반성인가

 

늘 눌릴 준비가 된,

바다 것들 반성의 시간 먹고 살아 온

간기에 녹슨 앉은뱅이저울은

바다의 욕망을 저울질해주는

배 한 척과 같은 것이냐

 

닻 같은

바늘을 놓아버릴 때까지 저울은 저울이다

 

 

 

암자에서 종이 운다

함민복

 

종소리가 멀리 울려 퍼지는 것은

종이 속으로 울기 때문이라네

외부의 충격에 겉으로 맞서는 소리라면

그것은 종소리가 아니라 쇳소리일 뿐

 

종은 문득 가슴으로 깨어나

내부로 향하는 소리로 가슴소리를 내고

그 소리로 다시 가슴을 쳐 울음을 낸다네

 

그렇게 종이 울면

큰 산도 따라 울어

큰 산도 종이 되어 주어

 

종소리는 멀리 퍼져 나아간다네

 

 

 

엑셀런트 시네마 티브이

함민복

 

1

자막, 제1회 에스 비 에스 광고 대상작 / 티브이 속에 티브이가 있다

티브이 속의 티브이 속에 앵무새가 있다

티브이 속의 티브이 속의 앵무새의 현란한 색조와 몸놀림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의 앵무새를 보며 발광하는 독수리 눈빛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의 독수리가 티브이 속의 티브이 속의 앵무새를 나꿔채기 위하여 발톱을 앞세우고 날아든다

벽(차원)을 상징하는 화면이 생성 모태인 액체처럼 출렁이고

티브이 속의 티브이 속의 앵무새는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으로 난다

이제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에 있던 독수리가 티브이 속의 티브이 속에 있고

티브이 속의 티브이 속에 있던 앵무새는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에 있다

다시 티브이 속의 티브이 속에 있는 독수리가 분결 섞인 몸짓으로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의 앵무새를 향해 날개를 펼 때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의 앵무새는 티브이 속의 티브이 Power를 OFF시키고

여유 있게 머리를 갸웃거리며

시네마 시네마를 뇌까린다

 

그렇다 매스컴의 화려한 유혹은 시청자인 나를 티브이 속의 세계로 유혹한다 하여 내가 매스컴 속에 깊이 빨려 들어갔을 때 매스컴 속에 깊이 잠식되었음을 깨닫고 바깥으로 나오려고 할 때 매스컴은 나를 가둔 채 OFF 할 것이다

 

 

2

티브이 속에 티브이가 있다

티브이 속의 티브이는 이중화면 티브이다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에서 티브이 속의 티브이를 보고 있는 여인(女人. 엄마?)과 아해(아들?)

티브이 속의 티브이 이중화면 중 큰 화면으로 발레 장면을 보고있을 때 좌측 하단 작은 화면에 헬기 편대가 출현한다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의 아해는 급히 리모컨을 작동시켜 발레 화면을 지우고 헬기 화면을 확대시킨다

티브이 속의 티브이 속 헬기 편대가 요란한 소리로 날아오며 자동화기를 난사한다

(순간 티브이 속의 티브이 세계와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의 공간개념이 해체된다)

티브이 속의 티브이 속 헬기가 난사한 총탄이 티브이속의 티브이 바깥의 책꽂이에 박히고 실내등을 부수고 유리창을 깬다

그러자,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에서 티브이 속의 티브이를 보고 있던 아해는 깜짝 놀라 소파 뒤에 몸을 숨긴다

잠시 후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 풍경과 티브이 속의 티브이 풍경이 분리되고 겁에 질렸던 아해(아이들 눈은 못 속인다 아이들 눈은 진실되다라는 숨은 의도로서의 아이인 듯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을 한번 휘둘러 본다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의 책장도, 실내등도, 유리창도 모두 멀쩡하다  이때 티브이 속의 티브이 바깥에서 아해 동정을 주시한 듯 여인(女人)이 실감 나게 웃어제낄 때 기다렸다는 듯 자막과 함께 깔리는 멘트

대형 티브이의 명작, 엑셀런트 씨네마 티브이 --

 

실감한다, 허구의 세계가 또 하나의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두 세계의 벅 허물기를 통해

허구와 실제의 벽 허물기 체험을 무의식에

강요하고 있는 산업사회의 무서운 꽃 광고를, 나는

보기 싫어 리모컨을 누르다 경악한다, 이미 허물어진 벽.

티브이가 리모컨이 되어 내 머리통을 작동시키고 있었구나.

 

 

 

양팔 저울

함민복

 

1

나는 나를 보태기도 하고 덜기도 하며

당신을 읽어 나갑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나를 읽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당신 쪽으로 기울었다가 내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

 

상대를 향한 집중, 끝에, 평형,

실제 던 짐은 없으나 서로 짐 덜어 가벼워지는

 

 

2

입과 항문

구멍 뚫린

접시 두 개

먼 길

누구나

파란만장

거기

우리

수평의 깊이

 

 

 

어느 여름날

함민복

 

댓돌에 제비 똥 허옇다

 

저, 똥꽃,

치우지 말자

어미 날개에 힘 붙게

새끼들

눈빛 처마에 꽂고 떠나게

 

 

 

어떤 부엌

함민복

 

방안에 부엌이 있다니

 

조개껍질 열 듯

전기밥솥 뚜껑을 열고

밥을 짓는다

 

동거자 金은 남가좌동으로 책 만들러 가고

남가좌동에 사는 詩人 함성호가

먹이 물러 양재동까지 지하 땅굴을 날으는 시각

 

김이 나고

쌀 익는 냄새가 방 안 가득하다

방 안에 있는 냉장고의 내장을 꺼내놓고

간장에 날김밥을 먹는 아침

 

서른넷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친구 방에 머물러 있는 지방간

그래도 방 안에 있지만 부엌이 있고

그 부엌은 밤새도록 노란 불 켜고

보온이라고 따뜻한 말 잊지 않으니

 

저 작고 소꿉장난 같은 부엌이

나의 어머니다

따뜻한 눈물이다

 

 

 

어떤 상담

함민복

 

서울 가면 키를 팔 수 있다고 하던데

한 이 센티미터만 팔면 얼마나 받겠냐고

어려서 머리를 다친 키 큰 친구가 묻는다

 

팔수만 있다면 비싸겠지만

법적인 문제도 그렇고

아직 기술적인 문제도 멀다고 답해주다가

 

양심은 팔 수 있지만 팔고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고

양심은 팔아도 팔아도 동이 나지 않아

차례가 쉬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그냥 비싼 키를 많이 샀다고 여기고

그냥 팔지 않은 양심이 가득하다고 여기고

그냥 저냥 살라고 장사를 말린다

 

 

 

어머니

함민복

 

1 - 묵시록

의자에 앉는다

쪼그려 앉으신다

머리카락이 검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시다

가위를 고른다

칫솔을 손질하신다

머리카락을 자른다

머리카락을 염색하신다

잘려 나가며 통증을 주지 않는 머리카락을 욕한다

염색되며 아픔 주지 않는 머리카락에 아픔을 느끼시는 것 같다

머리카락 되어 살아온 날들을 반성한다

머리카락 되어 침묵하신다

밥상을 대한다

밥상을 대하신다

밥을 먹는다

밥을 드신다

밥 속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 골라낸다

넌지시 바라보신다

앗, 염색

(네 흰밥 속에 내 흰 머리카락 들어가면 네 목구멍 멜까봐)

 

 

2 - 읍천항에서

눈물로 맑게 닦은 아침

겨울비에 몸 씻은 보리밭이랑

푸른 바람에 댓잎처럼 마음 뒤집어

푸른 생명 칠하며 바다에 나갔지요

아침 햇살 눈물처럼 맑고

맑은 것은 서럽다고 파도 노니는

바다는 속으로 푸르른 산

긴 세월 지나 바다에 몸푼 당신이 흘린 눈물

미역으로 자주 흔들리는 나를 보듬고

작아서 건반 타고 내가 한 줌 뼛가루로 흩어질 때

아, 어머니 우주의 헌법이 있다면 사랑이라고

철새들 푸드득 다시 만날 기약으로 날아올라요

 

 

3

나무는

강풍에

땡볕에

저리

보이지 않게

그늘을

들고

있었구나

 

 

4 - 지하 생활 3주년에 즈음하여

빛으로 짠 커튼을 치고 싶습니다

불을 켜야 불을 켜지 않은 방보다 어두운 방은 좁고, 나이가 들어, 어머니 등이 따뜻합니다

우러러 들리는 하늘에는 정육점이 삽니다 메주처럼 조용한 어머니는 가는 귀가 먹어 하늘에서 들리는 삼겹살 써는 소리는 못 먹고 갈비 자르는 소리만 먹습니다

어머니 귀가 통이 커졌습니다

동태 궤짝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늘에서 누군가 화장실을 다녀갔다는 대변자(者) 펌프 돌아가는 소리도 들립니다

그래도 저 지겹게 정들은 소리들이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숟가락입니다

동거자 어둠은 자신을 색득하게 보려고 점점 어두워지고 세상은 젖은 성냥갑인가 봅니다

평지에 살고 싶은 만큼 대가리를 날려 부딪쳐보고 살점이 뭉청 떨어지도록 머리 비벼 보아도 빛은 못 벌고 골만 부러집니다

부러진 골은, 멀지 않아 영원히 지하 생활자가 될 어머니를 3년 동안 전지훈련 시켜드렸습니다

노상, 밤이 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빛은 빼앗는 것처럼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답안을 검산합니다

그러다 벽시계로 날이 훤하게 밝아오면 나는 또 눈부신 빛의 계단을 오릅니다

겨울 잠바와 여름 바지로 쫙 빼입은 가을옷을 입고 발자국 소리가 저벅저벅 어머니 가슴을 밟습니다

빛으로 짠 커튼을 치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

함민복

 

여보시오―누구시유―

예, 저예요―

누구시유, 누구시유―

아들, 막내아들―

잘 안 들려유―잘.

저라구요, 민보기―

예, 잘 안 들려유―

몸은 좀 괜찮으세요―

당최 안 들려서―

어머니―

예, 애비가 동네 볼일 보러 갔어유―

두 내우 다 그러니까 이따 다시 걸어유―

예, 죄송합니다. 안 들려서 털컥.

 

어머니 저예요―

전화 끊지 마세요―

예. 애비가 동네 볼일 보러 갔어유―

두 내우 다 예, 저라니까요! 그러니까

이따 다시 걸어유 어머니. 예,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안어들머려니서 털컥.

 

달포 만에 집에 전화를 걸었네

어머니가 자동응답기처럼 전화를 받았네

전화를 받으시며

쇠귀에 경을 읽어주시네

내 슬픔이 맑게 깨어나네

 

 

 

어머니의 의술

함민복

 

어머니는 지붕에서 썩은새 뽑아

부엌 바닥에 불을 피우고

 

두더러기 돋아 온몸 가려운

나를 발가벗겼다

 

맨살에 소금을 뿌리며

빗자루로 짚 연기를 찍어 바르며

 

중도 고기 먹나

중도 고기 먹나

 

어디서 배웠는지

주술을 외셨다

 

수수빗자루

까끌까끌

 

내 몸이 기억하는 최고의 감촉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어민 후계자 함현수

함민복

 

형님 내가 고기 잡는 것도 시로 한번 써보시겨

콤바인 타고 안개 속 달려가 숭어 잡아오는 얘기

재미있지 않으시껴 형님도 내가 태워주지 않았으껴

그러나저러나 그물에 고기가 들지 않아 큰일났시다

조금때 어부네 개새끼 살 빠지듯 해마다 잡히는

고기 수가 쭉쭉 빠지니 정말 큰일났시다 복사꽃 필 때가

숭어는 제철인데 맛 좋고 가격 좋아 상품도 되고……

옛날에 아버지는 숭어가 많이 잡혀

일꾼 얻어 밤새 지게로 져 날랐다는데 아무 물때나

물이 빠져 그물만 나면 고기가 멍석처럼 많이 잡혀

질 수 있는 데까지 아주, 한 지게 잔뜩 짊어지고

나오다 보면 힘이 들어 쉬면서 비늘 벗겨진 놈

먼저 버리고 또 힘이 들면 물 한 모금 마시면서

참숭어만 냉겨놓고 언지, 형님도 가숭어 알지 아느시껴

언지는 버리고 그래도 힘이 들면 중뻘에 지게 받쳐놓고

죽을 것 같은 놈 골라 버리고 그렇게 푸덕푸덕대는

숭어를 지고 뻘길 십 리 길 걸어나와

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 곶뿌리 끝에 서서

담배 한 대 물고 걸어나온 길 쳐다보면서

더 지고 나오지 못한 것을 후회도 했다는데

뻘길 십 리 길 가물가물 멀기는 멀지 아느껴 힘들더라도

나도 그렇게 숭어 타작 좀 한번 해보았으면 좋겠시다

현수 씨 콤바인 타고 들어가 고기 싣고 나오는 얘기는

여차리* 일부 뻘 얘기지만 뻘이 딱딱해진다는

너무 슬픈 얘기라 함부로 글을 쓸 수 없고

아버지 얘기는 그냥 시인데 뭘 제목만

'인생'이라고 붙이면 되지 않겠어

 

형님, 한잔 드시겨

 

*여차리: 강화도에 있는 마을 이름

 

 

 

여름, 그 무덥던 어느 날   

함민복

 

하루 여섯 마리 개를 잡으면서

어머니인 대지의 여신 가슴에

상처를 낼 수 없어 사냥만 하며

산다는 인디언을 생각하면서

비굴하게 생활을 변명하면서

개는 여름에 겨울옷을 입고 헉헉대면서

겨울을 산다고 생각하면서

지금 이 생활이 개의 여름살이가 될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

 

하루 여섯 마리 개를 잡으면서

잔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잔인함을 주지 않는 식물을 죽이는 것보다

잔인함을 주는 이 작업은 얼마나

잔인하지 않은 일인가라는 역설을 떠올리면서

산골로 들어와 개기르기와 잡아주기가

생업이 된 가게를 생각하면서

순간적으로 칼끝을 돌려 거머잡을 수도 있다는

충동을 느끼면서

 

하루 여섯 마리 개을 잡으면서

여섯 번 개를 목매달면서

주인님 장난이 지나치군요

이제 놓아주시죠라고 말하듯

꼬리를 흔들며 죽어가는 개를 들여다보면서

다 죽었나 톡톡 눈동자를 찔러보면서

여섯번 지푸라기 볼에 개를 그슬리면서

거의 같은 포즈로 죽은 개를 뒤적이면서

여섯번 배때기를 가르면서

내장을 훑어내리면서

 

하루 여섯 마리 개를 잡으면서

인생의 비린 맛 신맛을 알아야

참 사람살이를 알 수 있다는 말놀이를 떠올리면서

이 정도 비린내 나는 삶이라면

한번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호언하면서

한 달에 개 두 마리씩 먹지 않고는

화물기차에서 시멘트 하역잡업을 할 수 없다는

노무자들의 말을 들으면서

 

개 쓸개 여섯개를 지푸라기끈으로

포도나무 섶에 종자주머니처럼 매달면서

 

하루 여섯 마리 개를 죽이면서

하루 여섯번 나를 죽이면서

 

 

 

여름의 가르침

함민복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렸다

쓰름매미가 울음을 멈춘다

나비가 새소리 반대 방향으로 몸을 튼다

일순 배추꽃 노란색이 옅어진다

새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잔인함이여

 

 

 

여행에 대한 비관론 

함민복

 

세속도시란 테이프를 탁, 뽑아내고

들뜬 공테이프로 기차가 출발하면

지나간다 푸른 들판 푸른 나무

푸른 산 푸른 강물

길게 연결된

녹색 헤드 크리너 테이프

아프지 않게 머리를 닦으며

눈 푸른 맑은 바람 지나간다

가끔 부스럼 같은 문명을 만나면

멈추었다가 다시 투명한 필름,

스르르르

현란한 간판과 시멘트와

잡음으로 덧칠된

기억에 녹색물감 흩뿌리는

풍경 풍경

아, 전원이 일상이었던 한때의 추억

더 선명한 세속 도시를 보기 위해

살기 위해 바람 작동버튼을 꺼도

돌아가는 선풍기 타이머처럼

무의식에 헤드 크리너가 돌아갈 것을 믿으며

떠나보는 녹색 여행 녹색 여행

언젠가 완전히 소멸되고 말

하나뿐이 없는 헤드크리너, 자연

 

 

 

열쇠왕

함민복

 

머리에 종이 금관

금관에 열쇠왕이란 글자

주먹코안경

열쇠 자물쇠 주렁주렁 달린 조끼 벗고

겨울바람 피해 농협현금자동지급기 코너에서

콜라에 빵을 먹고 있는 할아버지

온수리 장날은 헐겁고

할아버지는 수많은 열쇠를 깍아 무엇을 열었을까

현금지급기 거울 속을 들여다보다

압축된 내 삶 같은 직불카드를 들이밀면

내 몸뚱이는 무슨 열쇠일까

무엇을 열겠다고 세상을 떠돌아 왔는가

하 많은 자물쇠를 만났는가

혼자여서 쩔렁거리지도 못하는

울며 웃는

내 몸은 무슨 열쇠인가

꿈에는 가끔 무엇을 열어 보았던가

탈칵 열리는 게 뭐 있었던가

열리지 않음만 실컷 열다가

상처로 파인 열쇠가 되어

결국

이 악물고 호흡 끊으며

죽음만 비틀어 열고 말 존재인가

찌개용 돼지고기를 사려고 돈을 찾고 있는

잔금에 신경 쓰는

나는

아직 내 몸이 무거운, 열쇠가 되지 못한

철편 하나

 

 

 

염소

함민복

 

흰 눈 위

뿔 달린

검은 가마니

 

앵두나무 껍질

궁핍

다 벗겨 먹어

 

봄 

붉은 동그라미

꽃등

 

못 밝혀 든 땅 위

조문객

까만 염소똥

 

 

 

오래된 잠버릇

함민복

 

파리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날개 휘젓던 공간밖에 믿을게 없어

날개의 길밖에 믿을 게 없어

천장에 매달려 잠자는 파리는 슬프다

추락하다 잠이 깨면 곧 비행할 포즈

헬리콥터처럼 활주로 없이 이착륙하는 파리

구더기를 본 사람은 알리라

왜 파리가 높은 곳에서 잠드는가를

 

저 사내는 내가 덮고 자는 공간을 깔고 잔다

지구의 밑 부분에 집이 매달리는 시간

나는 바닥에 엎드려 자는데

저 사내는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잔다

발 붙이고 사는 땅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중력밖에 믿을 게 없다는 듯

천장에 등을 붙이고 잠드는 저 사내는 슬프다

어떤 날은 저 사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늦게 거꾸로 쭈그려 앉아 전화를 걸기도 한다

저 사내처럼 외로운 사람이 어디 또 있나 보다

 

 

 

오우가 - 텔레비전

함민복

 

텔레비전을 아버지라 부르고 싶다

(한 때 테레비가 부의 상징이기도 했었다)

테레비가 가족을 침묵시키고 둘러앉게 한다

가족 중 테레비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테레비는 아버지처럼 맘도 넓다

말씀 좀 크게 하시죠

리모컨으로 삿대질을 하면 -오냐- >> →>>>.

또 말씀의 자장가를 베고 잠들 때도 있지만

자상하여라 오늘은 우산을 가지고 나가거라

남북통일 문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죠

통일전망대와 난폭운전 365일 보면 안다

가장, 우리 생활의 통솔자 테레비는

일 안하고 앉아서 돈 벌려고 하는 시대에

두 발로 뛰어 돈 번 황영조 선수의 감동과

때론 익은 범죄자가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자유만 가지고 못 살겠다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는 모스크바 시민들과

국회, 어른들 싸움이 애들 싸움 되는 것도 보여주고

대통령 선거의 당락을 결정하기도 하니

칭송 받아 마땅한 테레비의 빛나는 위력으로

저를 이렇게까지 길러주신 테레비님께 감사하며

어머니 테레비를 갖다가 버릴까요

독서가 잘 안되서 그러는데요

나는 요따위로 싸가지 없이 불효막심하게

말할 수도 없다 테레비가 정말 나의 아버지인가

그렇다면 나는 꼭 테레비를 모시고 있어야 한다

이 테레비 없는 후레자식

네 테레비가 널 그렇게 가르치디

요딴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성의 시대는 끝났다 잡성의 시대에

테레비가 없다면, 끔찍한 상상이지만

나는 무엇을 스승으로 삼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간지러움, 강제의 웃음이라도 웃을 수 있겠는가

강시처럼 뛰어가는 캥거루를 어떻게 볼 것이며

사이다처럼 시원한 장백폭포를 어떻게 느낄 것인가

내 대신 춤추고 내 대신 노래하고 내 대신

절망하는 슬프기까지 한 브라운관이 없다면

공동화제의 빈곤으로 다른 사람들을

어찌 만날 것이며

이 산골에서 어떻게 계절에 맞춰 외출복을 입고

시내에 나갈 수 있을까

뉴스 끝에 보여주는 고궁을 거니는 연인들의 옷을 보고

아아 무엇보다도

지상 최대의 투기꾼들, 한평생으로 영생을 얻으려는

도박다운 도박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

교회로 몰려가는 일요일 나는 무슨 재미로

휴식의 하루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아, 고마워라 고마운 테레비

엑셀런트, 미라클, 임팩트, 내쇼날,

이제 나는 어버이날 테레비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련다

아흔아홉 마리의 사면발이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사면발이를 구해줄 테레비여

창녀촌의 의자가 길을 향해 가지런히 있듯

내 의식을 심플하게 정리해줄

아버지처럼 소중한 나의 친구 테레비여

 

 

 

옥탑방

함민복

 

눈이 내렸다

건물 옥상을 쓸었다

아파트 벼랑에 몸 던진 어느 실직 가장이 떠올랐다

 

결국

도시에서의 삶이란 벼랑을 쌓아올리는 일

24평 벼랑의 집에 살기 위해

42층 벼랑의 직장으로 출근하고

좀더 튼튼한 벼랑에 취직하기 위해

새벽부터 도서관에 가고 가다가

속도의 벼랑인 길 위에서 굴러 떨어져 죽기도 하며

입지적으로 벼랑을 일으켜 세운

몇몇 사람들이 희망이 되기도 하는

 

이 도시의 건물들은 지붕이 없다

사각 단면으로 잘려 나간 것 같은

머리가 없는

벼랑으로 완성된

옥상에서

초혼(招魂)하듯

흔들리는 언 빨래 소리

덜그럭 덜그럭

들린다

 

 

 

욕망의 망각 곡선

함민복

 

토르소처럼 가지 잘렸던 가로수가

푸르른 잎새 가지를 게워내고 있다

뿌리와 몸통이 기억하고 있을 아픈

추억의 공간을 향해 욕망의 구차한

푸르름으로 다시 한번 가내수공업

이산화탄소 그물을 짜아올리고 있다

 

 

 

욕망의 연애론

함민복

 

나는 조선 시대에 살았다

고려왕족을 멸하여 개국공신이 되었고

서울 사대문 안에서 무당을 몰아내기도 하고

아악을 정리하는데 공헌 하기도 했다

 

나는 고려시대에 살았다

예성강 벽란도에서 국밥장사를 했으며

몽고족의 침입 때 아내를 뒷산에 감추었고

청자 가마에 장작불을 지피기도 했다

 

나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살았다

중원땅 정씨 집안의 머슴으로 살았고

밤새워 가마니를 치며 보릿고개를 넘다가

새경을 받아 데릴사위로 장가를 갔다

 

나는 육이오 전쟁 때 보국대로 끌려갔고

판셈을 두 번씩이나 벌렸으며

향나무를 길러 관공서와 학교에 갖다주었고

영세민 취로 사업에 나가 쌀을 타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6년 전생의 나를 버리고

나의 아들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나는 25년간 아들이란 이름의 나를 만들었다

전생의 나를 내세의 나로 인계하는 공존 세월

 

부자지간, 새로 태어나기 위한, 뱀의 허물 벗기

나는 살아 있기 위하여

나는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한 여자를 사랑한다

 

 

 

우리들의 노예들에게

함민복

 

부지런한 하인을 둔 나는 행복하다

해뜨기 전 우리들에게 문안을 드리고

꽥, 꽥, 호령에 사료를 갖다바치며

수도꼭지를 점검하는 그 머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 걸까

나를 비육돈이라고 부르는 그는,

돈분차를 밀고 다니고 긴 호수 끌어

우리들 샤워와 소독시켜주기로 나날을

보내는 그는 무슨 낙으로 사는 걸까

나를 장자돼지 혹은 소크라테스돼지라

부르며 시를 쓰려 궁리하는 그의 동생놈

또한 마찬가지

(호흡기 질환에 걸려 꿀럭이는 저 돼지

무슨 사색 저리 깊나 살은 안 찌고 뼈만 굵어

정육점 주인들의 칼눈, 죽음의 길 막아주고

제망매가나 부르며 초연히 늙어가는 저 돼지)

쓸데없는 글을 쓰는 동생놈은 내가

눈씨만 그윽히 주어도 윤회사상을 떠올리며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는 섬약한 우울증

환자(장자, 잡편, 우울증을 들어 천하를 거절하는

자주지보 얘기로 자신의 생활을 합리화하는)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지가 땀을 흘린 만큼

지 살이 빠지고--그의 조카는 그를 돼지라 부른다--

우리들이 살찐다고 노동이 어쩌구 저쩌구

노동자의 반지는 손가락에 난 상처 어쩌구 저쩌구

이 산골까지 들어와 우리 족속 먹여 살리기에 바쁜

저 형편없는 집안의 내력, 어찌된 것인고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꿀럭인다네

나는 인간 해방에 앞장서는 돼지가 되고 싶어진다네

우리의 우리에 들어와 똥을 긁어내는 형제의 모삽소리

연민의 발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네

긴 장화를 주둥이로 밀면서 내 얘기를 들려주려고 끙끙거리네

해방, 그 순간 뒷발질로 내 턱주가리를 갈기는 중생!

 

 

 

우리 시대의 벽화

함민복

 

바빌론에 공중정원이 있었다지요

그리스인이 손꼽았던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

연와궁륭과 층층의 노대 위에 꾸며진 공원

수목이 드문 지방이라서

멀리서 보면 높은 곳에 녹음이 떠 있는 것처럼 보여

일명 매달린 정원이라고도 불렸다는

공중의 푸른 동산

신바빌로니아왕 느브갓 네살 2세가

왕비 아미티스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건축한 것이라고 전해진다는

왕비가 고향 생각하기에 알맞게 만들어졌다는

왕비의 고향은 산이 많은

바빌로니아에 정복당한 메디아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입구를 지나다가

동양증권 건물의 벽화를 본다

한국의 민화 - <추수>

나락 터는 사내

나락을 곳간에 쌓는 사내

웃통 풀어제낀 토속의 사내들

불온하여라 산업사회의 심장부에 펼쳐진

원시 농경사회

게젤 샤프트가 게마인 샤프트를 추억한,

다산성과 영원불멸의 기원이 아닌

(당대의 기록이나 죽음 이후의 미래에 대한 기록이 아닌)

추억으로서의 벽화, 향수 자극제로서의 벽화를

바빌로니아의 왕비 아미티스가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쓸쓸히 쳐다보듯

바라다보는

한국의 민화 - <추수>

 

 

 

우산 속으로 빗소리는 내린다

함민복

 

우산은 말라가는 가슴 접고 얼마나 비를 기다렸을까

비는, 또 오는 게 아니라 비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내린다는 생각을 위하여, 혼자 마신 술에 넘쳐

거리로 토해지면 우산 속으로도 비소리는 내린다

 

정작 술 취하고 싶은 건 내가 아닌 나의 생활인데

비가 와 더 선명해진 원고지 칸 같은 보도블록 위를

타인에 떠밀린 닷보단 스스로의 잘못된 보행으로

비틀비틀 내 잘못 써온 생애가

 

비가 오면 우산처럼 가슴 확 펼쳐

사랑 한번 못해본 쓴 기억을 끌며

나는 얼마나 더 가슴을 말려야 우산이 될 수 있나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를 질문의 소낙비에 가슴을 적신다

 

우산처럼 가슴 한번 확 펼쳐보지 못한 생활이

우산처럼 가슴 한 번 확 펼쳐보는 사랑을 꿈꾸며

비 내리는 날 낮술에 취해 젖어오는 생각의 발목으로

비가 싫어 우산을 쓴 것이 아닌 사람들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면 우산 속으로도 비소리는 내린다

 

 

 

우울씨(氏)의 일일(一日)

함민복

 

1

약이 떨어지고 이틀을 술로 견디다 일금 만오천 원을 구해 그곳을 향해 출발한다. 오늘은 토요일 서둘러야 한다. 우울씨는 지하철 1호선을 택한다. 지하철을 타면 가속도병을 느끼는 우울씨가 지하철을 택한 것을 보면 긴장감이 어지간한 상태다. 물론 버스를 타는 데도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울씨는 종각에서 쌍문동까지 노변의 장의사 간판 위치를 기억하고 있다. 그때마다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잔상효과가 우울씨 머리를 그냥 두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마주 보고 앉게 하다니. 전철은 서로의 삶을 점쳐보고 자신의 삶을 확인해보려는 자리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울씨는 앞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대충 훑어보다가 흠칫 놀란다. 백발의 노인. 그 노인을 보자 그림 그리는 친구의 화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그리빠의 머리를 깨뜨리고 안개꽃을 한 다발 꽂아둔. 노인이 우울씨에게 시선을 주는 바람에 우울씨는 늘 저 잘났다고 소리치는 광고에 시선을 둔다. 월간 신부, 별자리로 보는 당신의 섹스타입, 섹스 70문 70답. 그렇다. 우울씨는 심하게 긴장되어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엄습해올 때 그것을 잊는 처방으로 여자와의 성적인 잡념에 들곤 한다. 우울씨는 동대문에서 4호선 땅굴로 노선을 바꿔 탄다. 4호 땅굴을 지나는 전철은 1호 땅굴의 전철보다 쾌적하고 승객들도 격조가 있어 보인다. 3호 땅굴, 2호 땅굴(문명의 도시 지하를 강강수월래 하는) 역시 그 땅굴에 어울리는 사람끼리 타는 것 같다. 우울씨는 지하철을 탈 때 대개 중간 칸을 피한다. 누군가 지하철을 폭파시킨다면 중간 칸에 폭약이 든 가방을 두고 내릴 것이라는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또 우울씨는 비 오는 날 어스가 되어 치지직 불꽃이 튀는 것을 본 기억을 상기해보며 갑자기 고전류가 전철에 통하면 어떻게 행동을 취할까도 생각해본다. 옆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고 부도체인 의자에 앉아 다리를 번쩍 든다면--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웅성거림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전동차에 아이를 먼저 태우고 뒤이어 타려는 찰나 전동차의 문이 닫히고 어머니는 문밖에서 안타까워하는데 전동차가 출발한 것이다. 문명의 길로틴. 우울씨는 출근 시간 복잡한 전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수를 떠올린다. 여성과 남성이 타는 칸을 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복잡한 전철을 탈 수 있을까. 오해마시길. 우울씨가 성도착증 환자는 아니다. 남녀의 구별도 없이 익명의 육체들이 포개지는 아침 8, 9시. 우울씨는 전에 써보았던 다소 이분법적인 시구절을 떠올려본다.

 

서민들도 카섹스를 즐긴다

그분들은 으슥한 곳으로 자가용을 몰고 가

달빛 축축한 카섹스를 즐긴다고 한다

그러나 보라 우리 대담한 서민들의 카섹스

햇살로 눈 비비비자마자 지하 계단을 내려서는 출근의 아침

콩나물시루는 옛말, 두부가 되어 유리창에 얼굴 눌린 채

도시의 자궁 터널을 숨 몰아쉬며 정력적으로 달리는 지하철 속

덜컹덜컹, 옷도 안 벗고, 선 채로, 성도 모르는 심지어 동성연애,

아, 강제로 카섹스를 즐겨야 하는 서민들의 상쾌한 출근

사정하지 않으려고 사정없이 나대보다 실패도 하는

한국은 교통지옥, 그 지옥 속에 있는 카섹스 천국

으으으, 서민들이 토하는 신음소리 차마 눈뜨고 들을 수 없다고

자가용 뒷좌석에서 눈감고 출근하는 그분들은

서민들도 카섹스를 즐겨보라고 고맙게 지하철로 몰아넣고

  

쌍문역에서 하차한 우울씨는 지하 계단을 빠져나온다. 지하 계단을 오르며 네 칸 앞에 오르는 여인의 히프에 눈씨를 준다. 드러나는 팬티자국. 우울씨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그가 긴장되었을 때 그는 성적으로 긴장을 극복한다. 우울씨는 병원으로 들어가며 정원의 잔디밭에 놓여 있는 푯말에 관심을 가진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그래, 아예 <잔디 속에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써놓으면 어떨까. 잔디 속에 들어가기 싫어 기를 쓰고 모여드는 곳이 병원 아닌가. 우울씨는 문을 열고 병원 건물로 들어선다. 공중에 매달린 붉은 글씨의 시계를 본다. 5분 전. 우울씨는 능숙하게 서두른다./여보, 하고 부르면 나는 왜 눈물이 날까요 오--딘, 우리의 사랑을 지켜주세요 오--딘./ 약 지급 대기실에서 티브이 광고가 들려온다. 저 광고는 왜 저 모양일까. 시계와 눈물이 무슨 관계란 말인가. 혹시 사랑의 시계는 눈물. 우울씨는 아픔 뒤에 아픔을 줄세워 접수증을 끊고 그 아픔을 다시 신경정신과에 접수시킨다. 신경정신과 간호사가 당황한다. 좀 일찍 오시지 않고, 곧 우울씨의 아픔이 호명되어 우울씨는 의사 최진숙 선생님 앞에 공손히 앉는다. 최의사는 퇴근준비를 하고 있었던지 흰 가운 대신 노란색 풀무늬가 들어간 원피스를 입고 앉아 있다. 좀 일찍 오셔야죠. 네, 죄송합니다. 우울씨의 아픔과 최진숙 의사의 지식이 맞선을 보듯 나란히 앉는다.

 

우울씨는 약 받을 수 있는 번호표를 받고

병원의 정원을 산책한다 마치,

병이 우울씨의 영혼을 산책하듯

깊은 사색에 잠긴 바윗돌에 걸터앉는다

참으로 오래 앓아왔구나

정신과를 출입한 지 3년

올 때마다 옛친구들 많이 만나고

그들 병이 내 병을 더 깊게 하듯

내 병의 그들 병을 더 깊게 할지도 모르지

원자력발전소에서 보낸 4년

지금도 원자력발전소에서 보내고 있는 친구들

어머니도 만져보지 못한 뇌세포를

방사선이 스치고 지나간 것은 아닐까

친구들 중 정신과를 출입하는 친구들 많고

자살한 친구, 후배,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네

실제 피폭도 받지만 매스컴의 방사능 피폭

친구들 이중으로 괴롭다고 믿네

친구들아 노래할 수 없구나 너희들이

정신적 압박 속에서 만드는 불빛

정전이 되면 더 밝게 떠오르는 너희들 모습

차마 부르고 싶은 노래 부를 수가 없구나.

 

우울씨는 감상에서 빠져나와 퇴직직원 우대 카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15% 보험 혜택을 위해 한국전력 부속병원에 다니고 있는 우울씨는 정말 퇴직한 것일까, 건강 전선에서 영구히. 이 끝없는 병고에 얼마나 더 시달려야 하는가. 우울씨는 이 병원이 서소문에 있을 때부터 다녔다. 우울씨가 첫 번째 입원하였을 때의 일이다. 옥상에 올라갔다. 옥상에는 정형외과 환자들이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들은 군상처럼 기괴한 풍경을 연출하였다. 전기에 감전이 되어 팔과 다리를 잘린 사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가끔 양팔 잘린 사내에게 담배를 물려주기도 하고. 후광으로 석양이 물들어 있었다. 양팔 잘린 사내가 쪼그려뛰기로 다리운동을 하기에 우울씨도 운동을 하다가 미안한 마음이 잠시 들었다. 그 사내는 이제 손 대신 다리로만 살아가기 위하여 하는 운동인데, 그런 생각도 잠시뿐. 우울씨도 이제 정신의 불구자가 아닌가. 우울씨는 그들 모습이 맞은편 대한항공 빌딩 유리에 비친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다보았었다. 사념을 떨고 우울씨는 약을 타러 들어간다. 뼈만 남은 손이 담뱃값과 악수를 하는 AFKN에서 많이 본 금연 포스터를 보며 약을 타 가지고 뱡원문을나서는 우울씨. 약봉지를 가방에 챙기고 4호선 땅굴을 향해 서서히 걷는 우울씨의 발목을 붙잡는 생각. 괜스레 친구들 생각을 했구나. 우울씨는 지하 계단을 내려와서 전동차에 오른다. 역으로 출발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우울씨, 눈에 들어온 원피스 차림의 최의사. 그녀는 우울씨가 같은 칸에 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우울씨는 한 손 들고 동료와 얘기하고 있는 그녀가 웃을 때마다 어쩌면 죽음에 대한 콤플렉스에 걸린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우울씨는 그녀의 행동과 입 모양에 깊이 빠진다. 우울씨 역시 하루의 일과에 질문이 있다는 듯 한 손 들고 여의사를 주시하다가 그만 1호선 땅굴로 갈아타야 할 정차역을 지나치고 만다.

 

2

잡념, 우울씨는 잡념에 대한 잡념에 빠진다

(순환논리, 혹은 말장난을 경계하면서)

잡념은 진행성을 띤 념에 브레이크를 거는,

념의 휴식, 또는 숨구멍이다

잡념은 념의 탕아인가 잡념은 념의 사생아인가

그렇지 않다. 잡념은 사회의 념들이 어우러지면서

창출해낸 거세되지 않은 사회상의 직관, 혹은

념들의 융합체, 그 대변자이다

잡념은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정신적 유희이며

논리성을 띤 상상력의 극치다

논리성 문제에서 꿈은 잡념에서 제외될 수 있다

잡념엔 살만 풍성한 분위기적인 것과

뼈대만 왕성한 스토리적인 것이 있다

후자가 강한 우울씨는 잡념이 념을 초극하면서

우울증이란 병을 얻게 되었다

우울씨는 자신이 갖는 잡념을 기록해봄으로써

잡념에 대한 위의 정의를 대변할 수 있을까

하는 잡념에 깊이 빠져 있다

 

 

3

안경은 맥주와 마른안주를 시키고 목재 의자에 앉아 있다 우울씨는 카운터에서 돈의 기상도를 관측한다  바람에 흔들려보고 싶은 음지식물의  잎새 끝이 고사한다 우울씨는 전화를 받으며 손님들에게 과장된 인사를 투자한다 우울씨는 전표 개수를 확인하며 둘레둘레 홀 안을 살핀다  안경이 신문을 치켜든다 우울씨와 눈이 마주친다 안경의 맥주컵에 거품이 넘는다 안경은 맥주잔을 들어 재떨이 위에 댄다

석유난로 위에서 보리차가 끓고 있다 우울씨는 실내장식으로 매단 종을 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종, 친다 우울씨의 기억 속에서 여선생님이 상반신만 유리창으로 내밀고, 먼지가 뽀얗다 스피커에서 출발하여 종일 때리고 지나가는 소리의 부스러기처럼. 아메리카 여가수의 노랫소리를 타고 우울씨의 귓속으로 들어와 부글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융합음들. 우울씨는 쟁반에게 시켜 전표 없이 커피를 한 잔 든다

화장을 짙게 한 가죽치마가 안경 앞을 지난다. 일순 안경이 벌떡 일어난다 맥주잔이 쓰러진다 안경 허겁지겁 지갑에서 만원짜리를 꺼내 가죽치마에게 준다 가죽치마 당황한다 사이, 안경 우울씨를 지나 출입문으로 빠져 나간다 손님, 잔돈, 가죽치마 뒤따르다 만다 가죽치마 만원짜리를 우울씨에게 준다 우울씨 가산된 돈을 어찌 처리할까 궁리한다 가죽치마 안경이 놓고 간 신문을 우울씨에게 준다 주방, 아르바이트, 안경이 남기고 간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먹는다 신문을 뒤적이던 우울씨 경악한다 우울씨 급히 가죽치마를 부른다 무조건 컵과 안경이 남긴 안주를 버리라고 한다 가죽치마 의아해한다 가죽치마 우울씨의 긴장된 모습에 압도되어 변명 없이 시행한다 우울씨 다시 신문에 눈씨를 준다. 에이즈 보균자 23명 더 밝혀져. 헤드라인 기사만 있고 사설면 기사의 크기는 찢겨져 없다 당일 산 깨끗한 신문이다 우울씨 휴지로 신문을 싸들어 휴지통에 버린다 때마침 아메리카 여가수의 목소리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우울씨 급히 주머니를 뒤져 바륨이 함유된 향정신성 약품을 입 속에 털어넣는다 궁금한 가죽치마에게 신문얘기를 한다 아르바이트와 가죽치마 멸치를 먹어서 그런지 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다고 한다 --성행위만 안하면--

우울씨는 총을 메고 있다 근무를 끝내고 낮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우울씨에게로 다가오는 김이병. 담배를 권하는 우울씨 김이병의 어깨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준다 우울씨의 손에는 상황판과 구리스펜이 있다 심한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우일병님도, 고생을, 많이,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창피하지만, 김이병 사제 수첩을 우울씨에게 보여준다 이들이 제 친구입니다 티틀리, 힉스,페리오......실은 이태원 정류소에서 근무할 때 사귄 친구들인데 에이즈에 걸린 것 같고 겁이 나요 우울씨와 김이병은 길게 담배를 빨아댕긴다 그들이 서서 등뒤의 불빛을 먹은 만큼, 유리문에 그림자가 생기고 그 기림자 속으로 눈발이 날린다 후방의 막사 -- 에이즈 공포증 환자.

안경이 가죽치마를 보며 벌떡 일어났던 이유는 무엇일까 안경의 기억 속에 가죽치마 여인이 ...... 야한 화장의,

우울씨는 인근 가판대를 향해 걷는다 신문을 확인하러 출발한다 건물마다 술을 깨느랃고 낮잠을 자는 간판들, 다시 벌겋게 살아날 환락의 이마 핏빛 징표, 우울씨는 카운터에서 본 남녀의 진한 신들을 떠올린다. 지하철의 공기가 순환되는 철망 위를 걷자 번들거리는 햇볕. 어지럽다. 우울씨의 시선과 부딪치는 딱딱하게 발기한 현대식 건물들, 사람멀미, 어지러움증, 긴장 혹시, 찢어진 신문의 이면에 안경이 필요한 다른 기사가, 우울씨 인근 화장실로 들어가 오줌을 갈긴다. 그리고 얼굴에 물기를 축이고 어울을 본다, 으악, 우울씨의 얼굴 대신 안경의 얼굴이. 우울씨비틀거리며 뒤돌아 뛴다 에이즈 공포증 환자는 바로 나아다, 나.

 

 

4

- 한 알의 밀알이 닭을 속여 알을 낳게 하듯 무엇이

  우울씨를 속여 이 땅에 살아 있게 하나 희망아 이 창녀야

 

한강이 흐른다

강남과 강북의 비무장지대

떠나볼 거나 유람선

여의도에서 물살을 역류하며

저기 법을 두드려패는 곳

풀뿌리 민주주의에 제초제를 뿌린 곳

칼뿌리 민주주의라는 말이 선뜻 떠오르는

저 사당에서는 눈을 떼라고

유람선 떠나간다

잠수함은 물을 거역하면서도 물을 이용해 움직인다는

뒷말을 경계하자

복병처럼 물살에 납작 엎드린 63빌딩 그림자

자본의 거짓 빨래판

낙도 어린이가 서울 나들이 오면 꼭 보여주는 곳

바다와 벗하여 사는 어린이에게 수족관을 보여주는 발상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서점을 보여주면 안 되나

63빌딩은 5공화국의 송덕비라고 말한 한 시인의 말처럼

거기 참배시키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가

씨앗을 남기고 싶은 욕망만큼 미련한 토마토 가지가 찢어지듯

우뚝우뚝 발기한 빌딩들

움푹움푹 패인 하수구들

뒤틀어 짠 문명의 즙 콸콸 쏟아붓는

한강위로 유람선 잘도 달려간다

강남과 강북을 지키고 있는 평화유지군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자본의 위인

MONEY!

유능하여라 전능하여라 그를 대통령으로

그의 이름 아래 안 되는 일 없다 이 땅에서

그의 이름으로 척살하라 불가능이란 말을

하면 된다

강물도 직각으로 군기 잡아논---헛소문이 아니었구나

물가를 잡아놓긴 잡아놓았구나 시멘트로---5공화국의

물줄기 따라

떠나간다 유람선

한강철교 아래를 지나가다 보면

민족의 비극 6.25때처럼

8학군 강남으로 도강하기 힘들고

강남의 아파트 장벽과 강북의 꼬막집들

명명되지 않은 전쟁이 여기 벌어지고 있구나

자본은 은밀하고 자유로운 전쟁을 양성화한다

물은 흐를 곳을 정하고 흘러가지 않는다

이치에 닿으면 그저 흐를 뿐

이것은 한 편의 영화다

영상이 펼쳐있고 움직이는 유람선에서 보는

영화 장면은 잔혹극이다

간간이 비명처럼 날아오르는 새 떼

워크맨 이어링 꽂고 롯데리아 빨대 입에 물고

시원하게 허벅지 드러낸 저 젊은 처자가 바라본다

다시 감상적으로 날아오르는 새 떼

무엇을 유람하란 말인가

이곳을 떠다니던 새우젓 배와 벌목군들의 뗏목에 대한 기억을

역사적 의미에서 한강 나룻배의 복원, 어쩌구

그 속에 숨은 암수, 그때보다 살기 좋아졌다는

그대 위정자들이 말하는 문명의 발달을

그러나 이 유람은 반교사적 이왼 없다

썩고 썩어 문드러진 민족의 젖줄 한강

아황산가스와 스모그의 하늘

시멘트의 식민지가 된 사방의 흙들

유람선은 우울하게 물결을 가른다

문명의 발달이 물가에서 시작되었듯

문명의 종말은 깨끗한 물을 찾아 멸절될 것이다

저것은 다방에서 많이 본 건물 아닌가

88 메인스타디움, 재떨이에 담뱃재를 떨듯

우리가 그곳에 심각하게 투자했던 재원은 과소비의

단초가 아니었을까

빨리 치솟는 물가와의 전쟁을 선포하라

하면 군인 출신의 대통령을 둔 우린 미생지신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안전벨트는 돈과 권력이 아니다

인류를 지켜온 최대의 부적 양심이다

자본주의의 구명정은 호화 주택이 아니다

분배의 조촐한 집이다

지금은 자본주의 만세를 부를 때가 아니다

자본, 그대의 적은 그대

소리낼 곳에서는 반드시 수리내며 흐르는 물

죽음마저 정직히 보여주는 물소리로

자본, 스스로의 귀를 쳐라

온몸이 올곧게 살아날 그때까지

강남과 강북의 비무장지대에

썩은 물이 흐른다

그 위에 썩은 시대의 유해를 뿌리는

유람선 떠나간다

 

불감찬일사! 

 

 

5

목조의 홀 안에서 하루종일 삐꺾이는

우울씨는 요즘 새가 된 기분

운동 부족으로 물찌똥을 찌익 싸며

돈 액수와 인사말을 지저귀는 앵무새

한가한 시간에 날개를 접고

외국산 나무열매 주스를 부리로 빨며

대들보와 서까래의 과거에 대해 명상에 드는 우울씨

    부드러움 속에서 살기 위해 어둠 속을 헤매는 뿌리

    그 중간, 어느 한 부분, 나무의 중심, 끝내 변하지 않는,

    그게 나무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라면, 무섭다

창가로 다가가 가슴을 열어제끼는 우울씨

아찔한 햇살

(세상이 우울씨를 보지 않겠다고 눈을 감는다)

커튼으로 날개를 달고 빌딩숲을 날아가는 우울씨

가로막는 것만 보는 시선

아, 우울씨는 정말 새가 되려는가 보다

--앉기 위해 날아가는--

세상이 언제 우울씨를 향해 눈을 떠줄 것인가

딸랑, 문 열리는 소리에 졸음에서 깨어나는 우울씨의 오후

 

 

6

장사를 끝내고 청소를 한다

의자가 탁자 위에 올라설 수 있는 기회를 주며

창문을 열고 청소를 한다

아무리 높아도 바닥인 바닥 위의

팝콘과 담배 꽁초

머릿속에서도 하루의 일과가 빗질된다

깔깔거리며 한구석으로 쓸려가는 젊은 남녀

우울씨는 더 세차게 빗질을 한다

홀 안을 지저분하게 하던

한 줌도 안 되는 쓰레기들. 세상도

쓰레받기 위에 올라앉아 깔깔대는 젊은 남녀

(나는 홍단풍, 푸른 시절 없이 보낸 세월)

쓰레기통에 툭, 털어넣을 때

우울씨의 머리 한쪽이 툭 터진다

 

 

7

출입문 쪽에 꽃병이 있다

문을 열 때마다 꽃향기가 커피향을 밀어낸다

우울씨에게 다가서는 샴푸 냄새

눈길로 전화기를 가리킨다

통화료는 백원입니다

예--

지폐를 내는 미모의 여인

서랍을 열어 동전을 바꾸는 사이

--저 죽고 싶어요

--어딘지 알아서 무엇하게요

--그냥

(아, 죽고 싶다는 전화를 거는 사람에게 100원을......)

 

우울씨 심장이 동전처럼

가볍고 납작하게 되어

시계추처럼

뎅--

뎅--

 

우울씨가 면구스럽게 거슬러준 동전에

눈물을 떨구는 여인

 

 

8

저 잘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아, 반성하는 자 고통으로 가득 찬 날들

차라리 지옥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9

우울씨는 빛바랜 사진을 주시하고 있다

초가지붕과 호리병의 조화를 살린 전원적인 작품

 

우울씨는 한 작가를 떠올린다

이발소를 경영하던 -- 사진작가 -- 사람의 --

죽어가는 -- 모습을 찍어보려고 -- 여자를

유인 -- 나체로 죽어가는 -- 찍고 -- 암매장한 --

 

우울씨의 작품세계는 삶을 향한 강렬함의 포착

점점 더 다이나믹하고 강렬한 작품을 찍기 위해

전국을 누비는 우울씨. 금강촌 발파조의 눈동자,

살점이 낀 채 고통을 호소하는 교통 현장 --

그러나 좀더 -- 강렬한 것 -- 좀더 -- 강렬 --

우울씨는 사진계에서 인정을 받고 사진계에서는

우울씨가 좀더 -- 강렬한 -- 작품을 --

기대 -- 점점 -- 더 -- 강렬한 -- 강렬 --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나니 우울씨는 마음이 가벼웠다

뭉크의 그림 절규를 확대해 찍은 사진을 뒷배경으로 하고

사지를 자동으로 채워질 수 있게 만든 쇠사슬에 묶인 자물통

여러 각도, 필터를 끼운 자동 사진기와 무비카메라

전라의 우울씨(작가, 기록병에 걸린)는

청산가리를 먹고 사지를 쇠사슬에 건다

카메라 작동되는 소리, 예술이란, 착각, 착각 --

 

그러자, 앞에 놓인 그림이 공포스럽게 살아난다

우울씨는 항우울제를 입 속에 털어넣는다

 

 

10

우울씨는 힘껏 밀고 들어가도

힘없이 흘려내려 귀두를 덮는 포경

국부를 가리고 사우나탕에 들어선다

일 센티도 안되는 천 속에서

음흉하던 성기들이 덜렁거리며

수증기 속을 오간다

우울씨는 우선 샤워를 한다

표피에 덮여 있던 귀두 부분이 붉게 상기된다

우울씨는 냉탕과 온탕을 들락거린다

한증탕에 들어가 모래시계도 한번 뒤집어본다

우울씨는 깔판을 깔고 앉아 거울을 대한다

김서린 거울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거울 속에는 무게가 없는 것 같다

여러 풍경을 못 하나로 들고 있는 거울

우울씨는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육감 중 오감이 살해되는

시각만의 세계

몸이 가볍게 떠오른다

물의 영혼처럼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끓는 물 속에서 뒤척이는 몸뚱어리들

우울씨는 지금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지옥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김서린 거울 속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찬물을 거울에 쫘악 뿌린다

빨리 때를 밀고 사우나탕을 빠져 나아가야겠다고

혼자 중얼거리며

이태리타월에 힘을 주는 우울씨

 

 

11

성욕의 나무에 올라가 목을 맸네

성욕의 나뭇가지 부러지고

 

성기를 잘라 그녀의 품에 던졌네

잘린 성기 펄쩍 튀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성욕의 나무에 올라가 목을 맸네

성욕의 나뭇가지 부러지고 

 

 

14

가을 산사의 작은 방

우울씨의 잠을 깨운 것은 만성 설사

두루마리 화장지를 드르륵 끌고 방문을 나서는 우울씨

(비가 오는군,  풍경 소리,  자꾸 절을 끌고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것 같은)

법당에 딸린 화장실 사용은 곤란한 시간

개똥벌레처럼 라이터불 튀기며

산자락으로 들어가는 우울씨

덩굴손에 슬리퍼만 신은 맨발이 껄끄럽고

뱀은 없을까 급히 혁대를 풀자마자

쏟아지는 설사 우울씨는 쭈그려앉으며

두손으로 불알을 감싼다. 뱀에 물릴지도 모른다

어제 눈 밤똥을 파리가 먹고

파리 잡아먹으러 개구리가 오고

개구리 잡아먹으러 왔던 뱀이

엉덩이를 팍 물어버린다면, 서울시내처럼.

우울씨는 긴장한다 언젠가 어둠 속에서 오줌을 갈길 때

어둠 덩어리가 되어 잠자던 개가 오줌줄기를 따라

주둥이를 앞세우고 튀어오르던 아,

독사가 오줌줄기를 공격으로 오인하고 성기를 물어버린다면

우울씨는 다시 긴장, 술취했던 그날 밤 그 담벼락

거대하게 그려진 가위, 가위가 여자의

가랑이처럼 보이고 끼득끼득 가위 사타구니에

오줌을 갈기며 통계를, 아니 기억을, 떠올려 볼

필요도 없는 간단한 섹스 경험의 30대

헤아릴 수 없는 수음의 날들, 30대의 수음 뒤에,

모멸감 뒤에, 술취한 뒤에,

성기를 잘라버릴지도 모른다는

거센 컴플렉스에 앗질 놀라던 날들,

되도록 행동을 자제하며 조심성 있게

일을 마치고 풀숲을 걸어나온, 우울씨는

몽정의 축축한 아침이 두려워

밤늦게 수음을 하는 30대의 사내

가위처럼 생긴 여자의 가랑이를 얼마나 더

상상 속으로만 사랑하여야 성기를 잘라버릴 수 있을까

뿌리 없는 머리카락처럼

우울씨의 머리 속으로 가을비 소리 쏟어진다

 

 

 

우표

함민복

 

판셈하고 고향 떠나던 날

마음 무거워 버스는 빨리 오지 않고

집으로 향하는 길만 자꾸 눈에서 흘려내려

두부처럼 마음 눌리고 있을 때

다가온 우편배달부 아저씨

또 무슨 빚 때문일까 턱, 숨 막히는 날

다방으로 데려가 차 한 잔 시켜주고

 

우리가 하는 일에도 기쁘고 슬픈 일이 있다면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

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라고

손목 잡아주던

자전거처럼 깡마른 우편배달부 아저씨

낮달이 되어 쓸쓸하게 고향 떠나던 마음에

따뜻한 우표 한 장 붙여주던

 

 

 

원(圓)을 태우며

함민복

 

불타는 나무토막이

불꽃으로

푸르던 시절 제 모습을 그려 본다

불꽃으로

뿌리내렸던 산세를 떠올려 본다

 

살며 쪼였던 태양빛을 토하며

조밀한 음반

기억의 춤 나이테를 푼다

 

새의 날갯짓 활활

눈비바람 꺼내 불바람

흔들림에 대한 기억으로 흔들리며

불꽃은 타오른다

 

출렁출렁

빛 그림자

달빛도 풀린다

 

젖은 나무는

연기도 피워 보지만

 

재가

가볍다

 

 

 

움직이는 십자가

함민복

 

1

모든 차들이 십자가의 신세를 질 수 있다는

모든 차들은 십자가의 보살핌 속에 있다는

경고와 위로를 노골적으로 뽐내는

십자가를 등에 진 견인차들

어디 또 사고가 났는지

곡진하게 울며 과속 질주한다

 

십자가가 십자가를 끌고 가기도 한다

 

 

2

가슴골에 걸려 출렁이는 금빛 십자가

십자가를 등에 지지 않고

목에 예쁘게 걸고 살아가는

이 시대에

십자가는 키가 작아

사람에 매달려 흔들흔들

 

차라리 사람에 못 박히고 싶지 않을까

 

 

3

천장에 십자형 실링팬이 있다

빨리 돌아 자신이 지워질수록

더 시원한 바람을 낸다

 

무상보시가 따로 없다

 

 

 

위험한 수업

함민복

 

아래층 산부인과 병동의 갓난아기 울음소리

척추 다친 어머니 화장실 가실 때

포도당 높이 쳐들고, 링거 줄 신경 쓰며.

뒤따른다. 소를 몰고 가듯.

지순한 소가 서툰 일꾼의 쟁기질을 이끌 듯.

이상한 고삐. 링거 줄은

나를 이끌고 가는 힘이 있다

죽은 아버지는 무엇인가

어떻게 죽어서도 고향으로 나를 부르고

명절. 고향 가지 않은 나를 죄스럽게 만드는가

어릴 적 생각이 살던 곳. 고향.

문 안에서 소변 소리 안 들려주시려고

줄 당기고. 내 그 길 나선지

삼십여 년. 그곳 어디 폐가처럼 애기집이.

어머니. 가는 귀먹어. 부엌문 여는 것도 모르고.

놋세숫대야. 내 커서야 안 뒷물.

얼마나 당혹스러우셨을까. 마음도 여린 분이.

어쩌다가 종합병원처럼

한쪽 귀먹고 한쪽 눈멀어 척추까지 다쳐

맹모(孟母)처럼 나를 깨우친다. 육체의 설법.

어머니 고통만큼 나는 어머니가 되고

당신 눈동자 파먹으며 살아온 세월

당신 귀 때려 막으며 살아온 세월

당신 척추 시큰 매달려 살아온 세월

당신 더 뜯어먹고 싶어 당신 살리고 싶은 밤

당신 죽으면 당신 속의 내가 죽고

외롭게. 내 속의 당신만 살아.

물 소리. 문이 열리고.

 

 

 

유덕아범

함민복

 

그는 씨갑시장수였다

 

장날마다 씨갑시 옹기종기 거닐고

쭈그려 앉아

 

들판의 

여름을 봄에 팔고

가을을 여름에 팔던

씨갑시장수 유덕아범

장터 후미진 곳에 앉아서도

한 고을 들판을 훤히 외고

자신이 판 씨앗 튼실한 곡식 되어

장에 나는 것 보고 환히 웃던

 

그가 떠나갔다

시내버스 생기고 장날이 썰렁해지자

몰골이 꾀죄죄하던 유덕아범

 

 

 

유리

함민복

 

유리가 흐려지면 풍경도 흐려지네

유리에 금이 가면 풍경에도 금이 가네

유리가 깨져 없어져도 풍경은 멀쩡하네

 

내용이 없어 튜명한 유리야

다 담을 수 있어 아픈 마음아

 

가자

상처가 몸뚱이다

 

 

 

이북 5도민 회관에서 

함민복

 

여기는 망명정부인가

낡은 시멘트 건물이 곧 떠나야 할 텐트 같다

가야 할 북녘땅, 대형 걸괘지도와

조선 평양 대평공장의, 륭성 맥주, 불로술,

홍초, 은방울 담배

그리움의 전리품이 현관에 진열 되어 있고

평안도 신문을 발간하고

황해도 도민 업무를 보고

함경도 도민 간부가 선출되는

여기는 망명정부인가

 

미국과 소련 사이에

섬이 있었다

나도 그 섬에서 태어났다

북한과 남조선 사이에 섬이 있다

나도 그 섬에 가보았다

 

천국에 살기 위해 잠시 지상에 머물고 있는 예수교들도,

PLO도, 이북 5도민 회관도, 겨울을 나는 씨감자도,

망명성을 띤 지상의 모든 서러운 것들이여

 

기실 우리 모두 꿈이란 망명정부를 갖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 이북 5도민 회관을 갖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늘 가깝고도 멀리서 빛나는 망명성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듣다

함민복

 

목탑 아닌 석탑을 최초로 만들어봅시다

자- 자-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돌을 나무라 생각하면 됩니다

돌쟁이 나무쟁이 서로 배우며

다들 석목공, 목석공이 되어 봅시다

 

우리 돌에도 결이 있죠

옹이도 박혔는걸요

돌 쪼는 정질 소리에 나무 깎는 끌 소리가 배었네요

이참에 판석 끝을 들어 올려 돌송판도 만들어보지요

야- 이건 완전 배흘림기둥이네요

 

시력 나쁜 바람이 탑에 부딪히며

이 낯선 모양의 돌은 뭐지, 어리둥절

날던 매 잠시 탑에 앉아 톡톡 부리 다듬다가

자존심에 아프단 말은 못 하고 날아가며

발이 차, 절이당께!

 

딱따구리 스승 삼지 않고

낙수 물방울 스승 삼아

삼십 년 긴긴 세월

낮에는 돌먼지

밤에는 도깨비불 잔치였다니까

 

봐-

돌이 나무가 되고

목탑이 석탑이 되는데

머지않아 미륵님도 오시겠지

틀림없이 백제 땅에 미륵 세상 여실거여

 

 

 

인공수정

함민복

 

해 질 무렵이었습죠

코란도 지프차 타고 인공수정사가 온 것은

진달래 붉은 도락산 기슭

처음 길러보는 젖소라 화냥년처럼

그분을 맞았습죠

세수대야와 비누를 대령차

그분은 찬송가 테이프를 끄고 하차

고삐를 바싹 붙잡아맨 소가

내뿜는 콧김, 지푸라기 단내

비닐장갑 낀 그분의 팔뚝이

자궁 속으로 어깨까지 들어가자

소는 어금니에 침을 물고

당구공만 한 눈동자를 꿈벅꿈벅

자궁 속에 넣은 손을 움쩍거리던

그분은 라디오 안테나 같은 기구를 삽입했습죠

  숫놈의 눈동자도 모르는 채

  숫놈의 채취도 못 느껴본 채

  숫놈의 몸무게도 견뎌보지 못한 채

  ...쓸 쓸 하 게...

  숫놈에 대한 그리움이 희석되며

소는 성스러운 섹스를 마칩니다

 

자 우리들의 성스러운 생일날

쇠고기 미역국이나 끓여먹읍세다

 

 

 

일기

함민복

 

철벅철벅 동떨어져 웁니다

이끼처럼 몸이 파래집니다

자신을 가릴 그늘도 못 만들었어!

역사처럼 뒷걸음쳐 봅니다

빈 공간을 쌓아놓은 사다리가 날아갑니다

운동장에 선을 그었던 푹신한 백회 가루

맨발

시간은 맨발

 

 

 

일식

함민복

 

햇살 아래서

 

눈물을

한두 번 찍었을

 

여인(女人)의 가녀린

반지 낀 손가락

끌어 입술에 대보고 싶은

 

그래

그림자도 빛반지를 저리 껴 보는구나

 

 

 

있음에 대하여

함민복

 

꽃빛 아름답고

새는 울어

 

없음의 견고함 앞에

나무는 멈추어 있으며

바위는 무르고

산의 침묵은 깊다

 

없음의 바다에

생명도

생명 아님도

다 섬이어서

 

평등하거늘

잠시뿐이거늘

별빛이 한 점으로 빛나거늘

눈 감아봤자 없음의 품안이거늘

 

대관절

있음이란 무엇인가

 

위태로워 아름다운 있음이여

없음의 각양의 언어여

없음의 명함이여

없음으로 가는 작은 문짝들이여

 

 

 

자(子)

함민복

 

섣달 눈바람에 깨인 새벽

백발 어머니 머리맡

찬물 바가지 속 틀니

팔만대장경 예 있구나

 

 

 

자본주의의 게임

함민복

 

BYC로 시작된다는 지구촌의 아침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르는 주부들

맛배기 문제 네 문제를 풀고

자 예술과 동화와 무엇과 장소와

화제에 대해 내리쳐라

남보다 빨리

당신의 지식과

당신의 눈치 통박이 즉시 물건화 되는

자본주의의 게임

일단의 문제풀이가 진정되면

남이 가져간 물건을 빼앗는 본격 게임이 시작된다

자본의 게임은 냉정하다

빼앗기지 않기 위해

빼앗아 오기 위해

도깨비방망이를 더 빨리 휘둘러라

공격은 최대의 방어

돌고돌고에서 받아서 좋고 나누어서 좋고로

여기서 다시 일등을 잡아라로 명칭을 완곡하여 바꾼

물건 빼앗아 오는 화살표 소리 들린다

뚜뚜뚜뚜 빼앗겼던 물건 되찾아오는 소리도 들린다

(시청자들 그냥 볼게 아니라 나의 상식과 순발력은

얼마만큼 물질화가 가능한가 견주어 보면 한결 재미있다

만점을 넘어서면 금도깨비를 선물로 받을 수 있고

잠깐 소개되는 자랑스러운 남편들

마지막 승자는 행운의 보너스 게임

설악산 제주도 태국을 향하여

주사위를 던진다 꽝을 피하기 위하요 조심조심

자본주의의 위대한 아침을 여는 sbs 알뜰살림 장난퀴즈

 

 

 

자본주의의 메뉴

함민복

 

제주도           감귤 아가씨

대구             능금 아가씨

금산             인삼 아가씨

영양             고추 아가씨

단양             마늘 아가씨

영덕             꽃게 아가씨

울릉도           오징어 아가씨

춘천             막국수 아가씨

이천             쌀 아가씨

파주             참다래 아가씨

진부             산채나물 아가씨

영광             굴비 아가씨

 .                    .

안면도           피조개 아가씨

 

다 먹고 싶다, 이 맛깔스러운 광고

그러나 인간과 상품이 합일된 놀라운 극치의,

처녀 귀신처럼 무서운,

 

 

 

자본주의 사연

함민복

 

성동구 금호 4가 282번지

네 가구가 사는 우편함

 

서울특별시의료보험조합

한국전기통신공사전화국장

신세계통신판매프라자장우빌딩

비씨카드주식회사

전화요금납부통지서

자동차세영수증

통합공과금

대한보증보험주식회사

중계유선방송공청료

호텔소피텔엠베서더

통합공과금독촉장

대우전자할부납입통지서

94토지등급정기조정결과통지서

 

이 시대에는 왜 사연은 없고

납부통지서만 날아오는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절실한 사연 아닌가

 

 

 

자본주의의 사랑

함민복

 

친구네 집에 갔었지요

친구는 없고 친구 티브이만 있었습니다

들고 간 비닐봉지를 풀고

요플레를 먹으며 리모컨을 눌렀지요

티브이를 가리켰으면 티브이를 봐야하는 건데

리모컨 끝을 보며

그런데 놀라워라

티브이 속에서도 앙징맞게 생긴 여자가

요플레를 먹고 있는 거였습니다

이 범상치 않은 정황, 전생의 인연을 들먹이고 싶은

친구의 방에서 아주 우연히 그녀와 함께

요플레를 먹게 된 것은 너무나 큰 행운이었습니다

시금털털하면서 새콤달콤한 요플레를 먹으며

그녀에게 무엇인가 인정 받는 느낌이 들었지요

당신이 좋다는 걸 저는 이렇게 먹고 있어요

기분 좋은 이 들킴, 이 들뜬 기분.

(이제 나는 그녀의 사랑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아는 그녀는 온통 허구뿐

몇 편의 드라마와 광고와 영화 속에서

그녀가 살아가는 허구를 보았을 뿐

허구의 융합체인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허구인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큰

그녀의 사랑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광고하는 비싼 침대에 누워

침대 광고하는 그녀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또 그녀가 광고하는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에 비하면 나는 그녀의 아주 작은 사랑밖에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당당하게 그녀의 사랑을 받고 싶어

그녀와 잠시 같은 삶을 살고 싶어

내일 이 시간 요플레를 준비하고

그녀와 또 한 번 같은 음식을 먹자고

빨리 생각을 진전시킬 때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그녀도 자신의 어머니께

딱 하나만 더 먹고 싶다고

엄지손가락 세우며 간절히 부탁해 보지만

시간도 매춘을 하는 자본주의 치하의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아쉽게

나는 다 먹은 요플레 용기를 들고

쓰레기통을 향한다

도시의 음식들은 비닐봉지에 싸여 집으로 들어와

더 큰 검은 비닐봉지에 싸여 관짝처럼

뒷골목을 뒹굴고

티브이 모든 프로그램이 애국가로 시작

애국가로 끝나는 애국가 포장이 되어 있듯

도시에서의 삶이란

산부인과 병동에서 태어나 몇몇 병동을 거쳐

영안실로 완성 포장 되는 것

이런 쓸쓸한 곳에서 이런 엄청난 소외 소에서

내가 꿈꾸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우리 시대 유일한 대화 창구인 미디어.

속의 요플레를 먹는 그녀 생각으로

대문을 다시 들어서며 나는 약속해 봅니다

내일 꼭 당신과 요플레를 같이 할께요

이제 그녀는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약속

함민복

 

혜화동 대학로로 나와요 장미빛 인생 알아요 왜 학림 다방 쪽 몰라요 그럼 어디 알아요 파랑새 극장 거기 말고 바탕골 소극장 거기는 길바닥에서 기다려야 하니까 들어가서 기다릴 수 있는 곳 아 바로 그 앞 알파포스타 칼라나 그 옆 버드하우스 몰라 그럼 대체 어딜 아는 거요 거 간판 좀 보고다니쇼 할 수 없지 그렇다면 오감도 위 옥스포드와 슈만과 클라라 사이 골목에 있는 소금창고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라는 카페 생긴 골목 그러니까 소리창고 쪽으로 샹베르샤유 스카이파크 밑 파리 크라상과 호프 시티 건너편요 또 모른다고  어떻게 다 몰라요 반체제인산가 그럼 지난번 만났던 성대 앞 포토폴리오 어디요 비어 시티 거긴 또 어떻게 알아 좋아요 그럼 비어 시티 OK 비어 시티 --

 

 

 

자석

함민복

 

꽃들은 자석인가 봐요

나를 끌어당겨요

꽃에게 끌리는 것 보면

나는 꽃과 다른 극인가 봐요

고운 빛깔 만져보고

향긋한 향기 맡다 보면

나도 조금은 꽃과 같은 극이 되는지

꽃 떠날 때 마음이 밝아져요

 

 

 

자위

함민복

 

성기는 족보 쓰는 신성한 필기구다

낙서하지 말자, 다시는

 

 

 

함민복

 

고향 집 떠날 때

이불 보따리에 챙겨온 왕겨베개

하나 

베고 잠드신 어머니

 

누런 벼 이삭 출렁이던 남의 들녘

땅 한 뙈기 없는 품팔이 가슴으로

풍요롭게 불어오던 서글픈 바람

그래도 꿈속에서 만나 그립는지

 

서울하고도 창고에 딸린 지하실 방

고달픈 생활의 일기 쓰듯, 잠꼬대에, 코 고는 소리

아득하여라

아버지 무덤가로 합장하러 달려가는 치마 소리

어머니의 세월이여

 

 

 

잠자리는 죽어서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

함민복

 

살다가 힘이 들고 지칠 때면

 

'잠자리는 죽어서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

'잠자리는 죽어서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

 

되뇌어보지요

 

그러면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처진 어깨에 힘이 붙기도 하지요

 

* 조선족 시인 리삼월(1933~2009)이 쓴 <잠자리>란 시의 시구를 조금 변형해서 인용

 

 

 

저 달장아찌 누가 박아 놓았나

함민복

 

마음 마중 나오는 달정거장

길이 있어

어머니도 혼자 살고 나도 혼자 산다

혼자 사는 달

시린 바다

저 달장아찌 누가 박아 놓았나

 

 

 

전구를 갈며

함민복

 

잠시 빛을 뽑고 다섯 손가락으로 어둠을 돌려

삼십 촉 전국를 육십 촉으로 갈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는 더 밝게 못 박히고

십자가는 삼십 촉만큼 더 확실히 벽에 못 박힌다

시계는 더 잘 보이나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고

의자는 그대로 선 채 앉아 있으며

침대는 더 분명하게 누워 있다

방안의 그림자는 더 색득해지고

창 밖 어둠은 삼십 촉만큼 뒤로 물러선다

 

도대체 삼십 촉만큼의 어둠은 어디로 갔는가

내 마음으로 스며 마음이 어두워져

풍경이 밝아져 보이는가

내 마음의 어둠도 삼십 촉 소멸되어 마음이 밝아져

풍경도 밝아져 보이는가

 

어둠이 빛에 쫓겨 어둠의 진영으로 도망쳤다면

빛이 어둠을 옮겨주는 발이란 말인가

십자가에 못 박혀 벽에 못 박혀 있는 깡마른 예수여

연꽃에 앉아 법당에 앉아 있을 뚱뚱한 부처여

죽음을 돌려 삶을 밝힐 수밖에 없단 말인가

 

잠시 다섯 손가락으로 빛을 돌려 어둠을 켜고

삼십 촉 전구를 육십 촉으로 갈면

 

 

 

함민복

  

잘못 찍힌 ●을 지운다.

●은 빈틈이 없다.

●을 지우고 있는 나의 빈틈.

●이 죽음의 열쇠를 보여준다.

교집합인 줄 알았는데

여집합이 나란 말인가.

●을 지우자 여백도 지워진다

 

 

 

종돈 - 돼지의 일생

함민복

 

불알이 심장보다 커지면서

나는 섹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루에 한 번씩 모돈들의 돈사로 갑니다

모돈들은 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일제히 일어나 오줌을 쌉니다

 

주인은 모돈의 엉덩이를 손호미로 눌러보고

뒷다리에 힘주는 놈을 케이지에서 꺼내 놓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 짓을, 지긋지긋한, 생명부지를 위해

 

나는 매일 운동을 합니다 다이어트에 실패하여

모돈이 내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나의 생은 끝

 

내 옆 케이지에서 나와 같은 생을 살아야 할

어린 종돈이 철없이 욕망을 키우고 있습니다

언젠가 나는 그분을 위해 묵은 자지를 물려줄 것입니다

 

불알이 심장보다 커지면서

나는 내 운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종이상자 시론(詩論)

함민복

 

종이상자가 납작하게 접혀 있다

종이상자는 겸손하다

물건을 담기 전 자신의 모습을 내세우지 않는다

 

종이상자에도 글씨가 있다

글씨가 내용이 되지 않고

내용물을 대변한다

 

주로 질 낮은 종이로 만든다지만

파도 모양 골판지로 음양의 힘을 깨치며

중심에 어깨 맞댄 비움의 뼈대를 촘촘히 채운다

 

종이상자는

나란히 연대하고

차곡차곡 공간을 절제한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담아내는

시(詩)가 더 깊은 시라면

 

종이상자는

과묵한 시집이다

나무처럼 우직한 시인이다

 

 

 

함민복

 

오염시키지 말자

죄란 말

칼날처럼

섬뜩 빛나야 한다

건성으로 느껴

죄의 날 무뎌질 때

삶은 흔들린다

날을 세워

등이 아닌 날을 대면하여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구분하며 살 수 있게

마음아

무뎌지지 말자

여림만으로 세울 수 있는

강함만으로 지킬 수 있는

죄의 날

빛나게

푸르게

말로만 죄를 느끼지 말자

겁처럼 신성한

죄란 말

오염시키지 말자

 

 

 

중앙선 

함민복

 

햇살이 맑은 가을 아침

잎 떨구는 나무에 기대어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아, 그때였지요

길 위에 흰 말줄임표 길게 남기며

장의사 차가 꽃향기를 끌고 지나간 것은

 

손을 흔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손을 흔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쥐가 갉아먹은 비누로 머리를 감으며

함민복

 

쥐가 갉아먹은 비누로 머리를 감는 아침

쥐의 도회적 식성(食性)이 실업자인 나를 갉아댄다.

그래 머리나 감아라. 밝음을 지향하는 너의 삶

가식으로 더렵혀진 네 머리통 바깥이나 씻어라.

나의 길은 어둠 속. 가끔 생활고 해결을 위해

빛의 공간으로 외도도 하지만, 어둠이 나의 길

나의 정도(正道).

솔직히 나는, 내장이 나의 살아가는 길이야.

내장의 평화가 나의 희망이고

그 어두운 내장(內臟)길을 나는 맑게 닦고 싶었던 게지,

향기로운 비누로. 너의 곤궁한 정신이 없는,

내장을 위해 쫒기고 위협을 무릅쓰지 않아

비장미 나지 않는, 작금의 네 시(詩) 나부랭이로는

어림없지.

더 진지하게, 生을 비누에게 물어보라고.

쥐가 이빨도 아닌 이빨 자국으로 까칠까칠

머리를 감겨주는 아침

쥐 선사(禪師)가 비누경(經)으로 나를 깨우는 아침

 

 

 

지구의 근황

함민복

 

나무를 기억한다, 사람들 가슴에 늘 푸른 붓이 되던

나무를 사랑한다, 어디서 보나 등은 없고 가슴만 가진

나무를 추억한다, 바람 불 때마다 여린 식물의 뿌리를 잡아주던

나무를 애도한다, 꿈의 하늘을 향해 서서히 솟아오르던 녹색 분수

 

나무가 산다 사람들 마울에 사람들처럼

줄을 맞추고 그 길 그 공원의 격조에 맞춰

나무가 산다 아황산가스가 질주하는, 꽥꽥, 나무가 산다

 

기름진 시멘트산에 잡초처럼 나무가 산다 성장력 왕성한

시멘트국에 볼모로 잡혀온 자연국의 사신처럼 나무가 산다

시멘트가 나무로 더러 푸른 문신을 새긴다 시멘트가

나무 반지 나무 목걸이를 하고 뽐낸다 시멘트가 나무를 다스린다

 

가로수 혹은 담장, 그 푸른 시멘트의 넥타이

철커덕

가로수 혹은 담장, 시멘트가 자신의 목을 처단하는 푸른 오랏줄

지구의 사지가 뻣뻣이 굳어진다

 

 

 

지하생활 3주년에 즈음하여

함민복

   

빛으로 잔 커튼을 치고 싶습니다

불을 켜야 불을 켜지 않은 방보다 어두운 방은

좁고, 나이가 들어, 어머니 등이 따뜻합니다

우러러 들리는 위층 하늘에는 정육점이 삽니다.

메주처럼 조용한 어머니는 가는 귀가 먹어

하늘에서 들리는 삼겹살 써는 소리는 못 먹고

갈비 자르는 소리만 먹습니다

어머니 귀가 통이 커졌습니다

동태 궤짝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늘에서 누군가 화장실을 다녀갔다는 대변者

펌프 돌아가는 소리도 들립니다

그래도 저 지겹게 정들은 소리들이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숟가락입니다

동거자 어둠은 자신을 색득하게 보려고

점점 어두워지고 세상은 젖은 성냥갑인가 봅니다

평지에 살고 싶은 만큼 대가리를 날려 부딪쳐보고

살점이 뭉청 떨어지도록 머리 비벼 보아도

빛은 못 벌고 골만 부러집니다

부러진 골은, 머지않아 영원히 지하 생활자가 될

어머니를 3년 동안 전지훈련시켜 드렸습니다

노상 밤이 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빛은

빼앗는 것처럼 나누어가져야 한다는 답안을 검산합니다

그러다 벽시계로 날이 훤하게 밝아오면

나는 또 눈부신 빛의 계단을 오릅니다

겨울 잠바와 여름 바지로 쫙 빼입은 가을옷을 입고

발자국소리가 저벅저벅 어머니 가슴을 밟습니다

빛으로 짠 커튼을 치고 싶습니다

 

 

 

질긴 그림자

함민복

 

태양이 어서 일터로 나가라고

넥타이를 매주듯 그림자를 매주었다

그림자를 지워버리려고 그림자와 같은 색칠을 했다

농부도 들판에서 그림자를 파내고 있다

달이 뒤에서 앞에서 자신의 포즈까지 바꾸며

뒷모습만 나오는 흑백 그림자를 찍어주었다

그림자를 지워버리려고 그림자와 다른 색을 지웠다

올빼미가 제 그림자가 되어줄 들쥐를 내리 쪼았다

 

 

 

짝사랑

함민복

 

반딧불은 얼마나 별을 사모하였기에

저리 별빛에 사무쳐

저리 별빛이 되어

스-윽, 스-윽,

어둠 속을 나는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함민복

 

살며 풀어 놓았던 말

연기라

거두어들이는가

입가 쪼글쪼글한

주름의 힘으로

눈 지그시 감고

영혼에 뜸을 뜨고 있는

노파에게

거기는 금연구역이라고

 

 

 

참새우

함민복

 

통으로

망둥이를

구워 먹는데

뱃속에 든

수염도 삭지 않은

참새우

한 마리

망둥이가

잡아먹으며

느꼈을

포만감에

 

쭈빛

 

 

 

참 힘

함민복

 

국어사전의 맨 뒷장에서

전 모국어를 떠받치고 있는 힘

 

 

 

천둥소리

함민복

 

소리에 어른이신 저 큰 말씀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초승달

함민복

 

배고픈 소가

스윽

혓바닥을 휘어

서걱서걱

옥수수 대궁을 씹어 먹을 듯

 

 

 

초지

함민복

 

파리 떼가 몰고온 농장의 봄

지푸라기 단내 쇠똥을 편다

허리 굽혔다 펴며

먹이사슬의 윤회를 구부리며

척박한 땅엔 한 삽 더 뿌리는

순리의 고개 들어 하늘 우러르며

소들의 양식 옥수수밭에 거름 펴며

먹은 만큼 환원한 질박한 세금

소들의 똥 앞에 고개 숙이며

푸른 옥수수밭 정치를 배운다

 

 

 

촌수(寸數)

함민복

 

식당의 숟가락은 몇 사람의 입을 들락거렸을까

이 공기는 몇 만의 이파리들을 지났을까

저 교회에서 뉘우침 당한 죄들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내 눈동자가 담았던 눈동자들

귓속을 지나간 바람 소리

나를 태워준 바퀴들의 회전수

 

내가 살아오며 만난 것들이

나와 무관하게 만났을 모든 것들이

나를 담고 있는 침묵의 그릇 아닐까

 

태양과 촌수가 같은 우리들은

저기 풀숲에 허물을 벗어 놓은

뱀과도 촌수가 같은 것 아닐까

 

 

 

최제우*

함민복

 

하늘에서 나무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어디로 가는가 기러기 떼

팔(八)자 대형으로,

인(人)자 대형으로

동학군의 혼령인 듯,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 인자 쓰며

인내천(人乃天)

하늘을 자습(自習)하며 날아가는

기러기

저리 살아 우는 글자가 어디 또 있으랴

목을 턱 내밀고 날아가는 모습이 서늘하다

 

* 최제우 : 동학 1대 교주. 칼로 목을 내리쳤으나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고 함.

 

 

 

출하

함민복

 

전자봉을 든 거래꾼들이 트럭에서 내렸다

돈사를 짓누르는 아침 안개

무게가 다 되었음으로 생을 마감해야 할

돼지들이 선발된다

자, 떠나자

사료로 살아온 생애 사람들의 사료나 되자꾸나

 

저울은 돼지의 유언장.

퍽, 발길질에 돼지가 저울로 뛰어오른다

네다섯 마리씩 운명을 섞어 달리는 돼지

돈사 밖 안개는 걷혔을까

무게에 관심이 끌리는 거래꾼들

무게의 계측이 끝나면

돼지 등에 정육점 상호가 낙인된다, 사형.

 

아뿔사.

자, 들어,들어.

땀흘리며 자기의 일생을 트럭에 싣는 거래꾼들

돼지 똥 한 덩어리 무게도 안되는 돈뭉치로 환전되는 노동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엔진소리

 

 

 

춤추는 만득이

함민복

 

우리들 애칭은 춤추는 고무풍선이야

우리들은 바람을 일으키려

개업하는 곳에서 자주 판을 벌이지

살도 뼈도 근육도 다 바람이고

바람이 없으면 일어서지도 못하는

우리들은 순수한 바람의 자식들이야

엉덩이 허리 가슴의 곡선도 지웠어

오직 바람이 통하기 편한 몸매지

내부의 바람이 우리들 신명이야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바람으로

팔을 흔들고 목을 돌리고 허리를 꺾지

외부의 바람과 어우러지는

나무들의 춤과는 격이 다르지

외부의 바람이 심한 날은 오히려

춤사위가 흐트러질까 싶어 아예 쉬지

스텝은 없어 스텝은 파멸이야

음악도 상대도 필요 없어

가급적 곡선을 버리고 직선을 택하며

혼자 즐기면 되는 거지

바람 춤을 출 때만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어

동작이 단순하다고 흉보지 마

앞뒤 양면의 얼굴로 보고 있으니까

이건 수직으로만 솟아오르는 춤이야

잘 봐

우리들 춤이 무엇을 닮았는지

 

 

 

취객어록

함민복

 

1 - 공중전화 부스에서

뛰 -- 뛰 -- 뛰 --, 흐르고 싶은 말, 막힌 말, 탈칵. 나와라. 술 한 잔 무겁게 하자. 그래, 나 술 취했다. 생활이 그년을 속이지 않는다고 기뻐하거나 평온해하지 마라. 나더러 미쳤다고, 나는 아직 미치는 단계까지 못 미쳤다. 개말씀 듣고 등단주나 사라고, 좋아 나한테 시인이라고 부르지만 마. 빌어먹을.  그렇다고 부인해줄 여자도 없고. 그래, 나와, 간판 좀 보며 말하자. 찰크닥. 공중전화기는 말의 섬이다. 오! 언어와 짝사랑에 빠진 기게다, 나는 2, 30분 후 보통(보통이라는 말을 보통 이해할 수 없는 시대지만) 생맥주집

밤바디, 밤바디, 밤바디, 노가리에 생맥주 천씩, 예. 잠자지, 잠자지, 수고했다. 건배, 건배, 건배하느라고 수고했으니까 또 건배. 술 취한 대화는 여자의 유방에서 미끄러져 거기를 지나 정치로 텀부덩! 우리나라 국시는 올림픽이다. 올림픽. 쉿 --,  말 한번 잘했다가 귀싸대기 맞을라, 아냐, 체포다 체포. 낄낄낄. 야 씹할놈아. 언성이 높아진 뒷자석, 작업복 차림의 쳥년 셋.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나보고 동료를 배신하라고, 원하는 건, 좆 깨물고 죽어라. 순간, 병이 날아가고 피하는 작업복, 뒷 뒷자리에 앉아 있는 두 남녀의 사랑타령 뒤통수에서, 쨍그렁. 피가 흐르고. 연애하는 놈은 앉아서도 뒤통수를 깨는구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리는 노사분규. 주인 달려와 집기류 파손여부 확인에 급급. 피 흘리는 사랑타령 노사분규로 끌고 나감. 아! 우리 대한민국, 손님 죄송합니다. 잠시 고자누룩함. 씹할 술이나 마시자. 시팔놈아, 좋아, 시 판 놈이 술 한 잔 사지. 아줌마 밤바지 한 번 더 틀어줘요. 보청기. 안경. 감각기관을 빼놓고 잠들어 계실 어머니, 잠자리, 잠자리, 잔이 비어 있음으로 넘칠 수 있는 것처럼 아파해야 할 내 감각이 무뎌지므로 나는 즐거워요. 어머니, 밤바지, 밤바지, 야, 시 노점상 개업한 놈아,너도 시노조를 꾸리든지, 빨리 술이나 처먹어라. 술자리, 술자리, 술술술 --,  어머니 시 마수한 돈으로 보청기 건전지 하나 못 사드린 제가 효자지요, 답답한 세상 이야기 속 시원히 들어 무엇하겠어요. 어머니, 친척집 지하창고 생활을 치욕이라 생각 마세요. 더이상 내려갈 곳도 없고 우린 민방위훈련처럼 안전하게 대피해 살고 있잖아요. 치욕은 요강에 있어요. 어머니의 힘없는 오줌 소리 술술술술술-

 

 

 

칠석(七夕)

함민복

 

달빛 내리고

장독대

정안수 한 사발

어머니

아, 저것이 미신(美信)이다

 

 

 

캔터키 후라이드 치킨 할아버지 

함민복

 

그는 음식의 영웅

세계적인 주방장

기름 닭 타고 한국을 상륙한 맥아더

 

열한 가지 특제 양념과

정성으로 여러분을 요리하겠다고

티브이 광고까지 하는

지팡이 들고, 안경 쓰고, 가늘고 긴 검은 넥타이 MAN

 

그는 FBI 요원인지도 모른다

지령 : 한국 맛의 문화를 정복하라. 조선 닭 - 토종이 별로 없고 외국 국적을 갖고 있는 닭이므로 별 죄의식 가질 필요 없음 -의 목을 미국식으로 비틀어라 그래야 미국 자본의 아침이 밝아올 것이다 조선의 영계들, 영계들을 공략하라 외가로 유전하던 맛을 끊어라 그리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외가에서 외국으로 맛이 유전하는 시대라는 달착지근한 양념을 처발라라 만국의 켄터키후라이드 치킨 식도락가여 단결하라

 

그 누구의 전신상도 조선팔도에

저리 번식력 있게 세워지지는 않았다

저렇게 높은 빌딩을 횃대로, 밤마다,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닭벼슬 쓴,

저 노인의 교묘한 웃음띤 얼굴

 

쳐라

치지 못하면 우리가 닭대가리다

 

 

 

탑골공원에서

함민복

 

나무가 되어 한껏 바람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네

가축의 피가 되어 욕망을 으으렁거리기도 했네

정액이 되어 번식의 황홀경에 도취되기도 했네

눈물이 되어 타령으로 한 세상 쓴 살이도 했네

자학의 세월 돌부리에 몸 부딪치며

계곡을 뒤흔들기도 했네

아으, 구름이 되어 한량처럼

한세상 두둥실 떠돌기도 했건만

이제 모든 소리를 탕진하고 늙어

침묵으로 흐르는 강물이 되고 말았네

저기 죽음의 바다가 넘실거리네

 

 

 

태양

함민복

 

 

식물의 열매도

동물의 눈동자도

자동차의 바퀴도

둥글다

둥글지 않으면

미래로

갈 수 없다

오, 놀라운

태양의

긍정의

둥근

최면술이여!

 

 

 

태양, 그 제국주의자의 잔인한 빛살

함민복

 

같은 행보로 매일 지구나 산책하는

태양은 권태의 제왕, 바코드 판독기

밤이 태양의 눈꺼풀인 줄 모르고

혁명처럼 쏟아지는 별빛

물리치고 코페르니쿠스처럼 떠오르며

자구 위의 물, 욕망의 정액 덩어리를

햇살로 비를 만들어 내리기도 하고

슬쩍 뒤로 물러선 공치사의 한파

얼어붙은 강물, 정액의 흐름 속도마저

간섭하며, 생명을 흩뿌려,

고통의 빛을 주어, 살아야 하는

지상 모든 눈동자.의 아버지 태양은

 

자신을 향해 자라던 누리의 곡식들

열매로 자신에게 고개 숙이게 만들고야 마는

생명의 제국주의자

자폐증 환자 같은 반복된 공전 요구에

최면 걸린 모든 생명을 식민지화하고

스스로 소멸해 가며, 소멸의 두려움의 힘으로

태양을 살아야 하는 생명체를 유복자처럼 낳으니

생명체란 태양의 겁의 쓸쓸한 변주

가을 벌레의 스잔한 노랫소리도

밤마다 남녀를 성교로 몰고 가는 힘도

노동의 채찍으로 눈퉁이를 내리치는 아침 햇살도

노을, 내일 다시 뜨마 하는 핏대의 협박장도

 

 

 

텃밭

함민복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눈길 손길 맘길

온통 받는

아, 자식은

어머니의 영원한 텃밭인가

 

 

 

텔레비전

함민복

 

텔레비전을 아버지라 부르고 싶다

(한때 테레비가 부의 상징이기도 했었다)

테레비가 가족을 침묵시키고 둘러앉게 한다

가족 중 테레비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테레비는 아버지처럼 맘도 넓다

말씀 좀 크게 하시죠

리모컨으로 삿대질을 하면 -오냐->>→>>>.

또 말씀의 자장가를 베고 잠들 때도 있지만

자상하여라 오늘은 우산을 가지고 나가거라

남북통일 문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죠

통일절망대와 난폭운전 365일 보면 안다

가장, 우리 생활의 통솔자 테레비는

일 안하고 앉아서 돈 벌려고 하는 시대에

두 발로 뛰어 돈 번 황영조 선수의 감동과

때론 익은 범죄자가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자유만 가지고 못 살겠다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는 모스크바 시민들과

국회, 어른들 싸움이 애들 싸움되는 것도 보여주고

대통령 선거의 당락을 결정하기도 하니

칭송받아 마땅한 테레비의 빛나는 위력으로

저를 이렇게까지 길러주신 테레비님께 감사하며

어머니 테레비를 갖다가 버릴까요

독서가 잘 안되서 그러는데요

나는 요따위로 싸가지 없이 불효막심하게

말할 수도 없다 테레비가 정말 나의 아버지인가

그렇다면 나는 꼭 테레비를 모시고 있어야 한다

이 테레비 없는 후레자식

네 테레비가 널 그렇게 가르치디

요딴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성의 시대는 끝났다 잡성의 시대에

테레비가 없다면, 끔찍한 상상이지만

나는 무엇을 스승으로 삼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간지러움, 강제의 웃음이라도 웃을 수 있겠는가

강시처럼 뛰어가는 캥거루를 어떻게 볼 것이며

사이다처럼 시원한 장백폭포를 어떻게 느낄 것인가

내 대신 춤추고 내 대신 노래하고 내 대신

절망하는 슬프기까지 한 브라운관이 없다면

공동화제의 빈곤으로 다른 사람들을

어찌 만날 것이며

이 산골에서 어떻게 계절에 맞춰 외출복을 입고

시내에 나갈 수 있을까

뉴스 끝에 보여주는 고궁을 거니는 연인들의 옷을 보고

아아 무엇보다도

지상 최대의 투기꾼들, 한평생으로 영생을 얻으려는

도박다운 도박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

교회로 몰려가는 일요일 나는 무슨 재미로

휴식의 하루를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아, 고마워라 고마운 테레비

엑셀런트, 미라클, 임팩트, 내쇼날,

이제 나는 어버이날 테레비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련다

아흔아홉 마리의 사면발이보다 길 잃은

한 마리 사면발이를 구해줄 테레비여

창녀촌의 의자가 길을 향해 가지런히 있듯

내 의식을 심플하게 정리해줄

아버지처럼 소중한 나의 친구 테레비여

 

 

 

토문강에서

함민복

 

하루의 생각을 눕히는 고단한 자정

라디오를 틀다가 멀리 떨어져

그리움에 우는 소리를 들었다

 

저는 토문강에 사는 맹동진입니다

간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동생 맹동연을 찾습니다

봄이 오면 찔레 꺾어 여린 대궁 상큼하게 씹고

뱀딸기 찾아 헤매던 내 고향 구릉진 산마루

 

어머니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부끄럽게 성도 기억나지 않는

금방앗간 물레방아 틀틀 돌아가던 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갈 수만 있다면

눈물 모양의 당신 무덤에

푸른 잔디로 잔뿌리 내리고 싶습니다

이곳 토문강에 애수의 밤이 깊어옵니다

 

다시 흑룡강에서 또 사할린에서

망향의 서신들이 계속되며

역사의 찬물 한동이를 내 잠에 껸진다

 

 

 

파고다 공원에서

함민복

 

철쭉꽃이 붉다

무슨 마술에 속아 저리 꽃피었는지

마술사에겐 속아야 한다

속아도 된통 속아야 재미가 있다

누군가 뿌려준 먹이, 금빛 고추씨

식물로서의 인연 끝내고

그 질겼던 인연 잡아먹기 위해

비둘기 먹이가 되는

 

세월의 놀라운 마술

저승쪽으로 끌어당겨진

노인들의,

봄.

느티나무 푸른 잎새

 

 

 

펭귄

함민복

 

추억 속에 펭귄이 있다

남해 바다 푸른 물결 등지고

태종대 산책로를 따라

양철 몸에 검은 날개 접고

배때기에 자연보호란 문신 파고

쓰레기를 먹으며

주기적으로 쓰레기를 오바이트하며

남극의 추억의 힘으로,

자연보호 운동을 위해

자연의 목구멍 속으로 쓰레기를 집어넣는

사람들의 모순적 발상에도

부처처럼 묵묵부답

불볕 더위를 이기고 직립한

남극의 신사

지구를 지키는 우리시대의 장승

 

 

 

폐가

함민복

 

세월은 문짝을 싫어하는 게지

문짝을 먼저 떼어갔네

세월은 문짝을 좋아하는 게지

 

세월의 문짝

저 집에 살던 사람들

지고 피던 꽃

 

서럽다고

혼자

핀 복사꽃

 

이마로 지붕을 짚고

손으로 지붕처럼

기운 세월을 짚고

 

 

 

폐타이어

함민복

 

1

구르기 위해 태어난 타이어

급히 굽은 길가에 박혀 있다

 

아직 가 보고 싶은 길 더 있어

길 벗어나기도 하는 바퀴들 이탈 막아주려

 

몸 속 탱탱히 품었던 공기 바람에 풀고

움직이지 않는 길의 바퀴가 되어

 

움직이는 것들의 바퀴인

길은 달빛의 바퀴라고

 

길에 닳아버린 살거죽

모여모여

 

몸 반 묻고

드디어 길이 되었구나

 

 

2

길 건너편에서 가위질 소리가 들린다

빈 종이 상자 실은 리어카가 지나간다

찰강찰강

웃자란 햇살이 경쾌하게 깎인다

내리막길 과속 막으려

리어카 뒤에 매단 타이어 끌리는 소리

부-욱 부-욱

바리톤이다

구르는 바퀴를 굴러 본 바퀴가 붙잡는 봄

 

어미 가슴팍 또 한 겹 얇아진다

 

 

3

사과처럼 돌려 깎여

고무밧줄이 되었네

 

뱃전에 묶여 배 충격 완화시키며

해풍에 몸 삭여도 좋았으련만

 

바퀴에 더 많은 짐 얹게 하는

무뚝뚝한 탄력의 신세가 되었네

 

아, 타래박 줄이 되어

먼 길 걸어온 사람들 목을 축여줄 수 있었다면

 

허나 바퀴의 운명이

짐을 싣고 달리는 것이라면

 

다른 바퀴가 짊어진

짐 꽉 묶어주는 일은 또 어떤가

 

원형의 나를 풀고 모든 형태가 될 수 있는

나는 아직 탄력이 남아 있다네

 

 

 

폭포의 사랑

함민복

 

물이 별소리 다하며 흐릅니다

무릎 베고 누워 폭포수에 귀를 연 그대

눈동자에, 사랑에, 빠진, 눈부처, 나는

 

폭포는 분수, 더는 못 견디게 그리워

푸른 하늘로 솟아올랐던, 물방울,

산에, 내려, 모여, 저리 쏟아지는

 

내 마음, 언제 당신 마음 이리 많이 뿜어올렸던가

뿜어올렸던 당신 마음, 내 마음 되어

당신에게 쏟아지던 마음의 폭포,

 

사랑, 다시 쏟아지고 싶어

쏟아지다 

되돌아 피어나는 물보라

 

내 눈동자 속의 당신, 당신 눈동자 속의 나

눈길 폭포에, 아카시아,

가시나무도 부드럽고 환한 그림자를 드리운

 

 

 

푸르고 짠 길

함민복

 

이 길은 푸르고 짜다

길 속에서 먹을 것을 잡아올린다

이 길엔 깊이가 있어

길에 빠져 죽기도 한다

길 위에서 밥을 몇 번 해 먹으면

두려움이 가시기도 하는

 

길과 같이 흔들리며 낚시를 한다

옴 힘을 다해 살아온 지혜를 다 짜

배와 줄다리기하던 망둥이가 뽑힌다

얽히고설켰던 길의 가닥 중

망둥이 길 하나가 튿어져 나온다

 

길의 배를 따고

물에 길을 넣고 불로 길을 끓인다

길의 살점을 발라 먹는다

먹는 것은 길의 살점뿐인데

살점들은 먹지 못하는 길의 뼈에 붙었으니

 

길을 먹은 힘으로 길을 또 가야 하는

길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길 위에서 길은 더 흔들린다

이 길은 늘 프르고 짜다

 

 

 

푸르른 나무숲은 더러운 산소똥을 싸고

함민복

 

봉고차로 교회 사람들이 올라와 안방에서 구역예배를 보고 있다. 건넌방에서 불을 끈 채 드러누워 있는 내게 목사님과 풀벌레가 동시에 설교를 한다. 나는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휴거는 벌써 시작되었다구요 제일 선하게 산, 멸종 식물 ․동물들이 이미 하늘나라로 올라갔잖아요 - 찌르르. 찌르르. 오늘 무슨 일을 하셨죠 늙은 호박을 하루 종일 따 날랐다구요 늙은 호박이라뇨 다 익은 호박이지요 사람들은 철저히 사람들 위주로 사고한다니까요 -찌르르. 찌르르.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교리에서 당신은 몹시 절망하는군요. 사람의 아들은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을까?

자! 화제를 바꿔보지요. 생명체라는 게 무엇 같아요. 어떻게 무우는 흙 속에서 그렇게 빨리 자기 몸을 성장시키죠? 또 흙은 어떻게 그리 빨리 무우로 변하는가요. 모든 생명체는 흙의 욕망의 산물 같잖아요. 흙에서 어떤 성분을 취하느냐 (흙이 주입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생명체가 되는.

-찌르르. 찌르르. 지구는 참 무책임하죠. 저 혼자 문명이라는 환각제를 혈관에 찌르고 쾌감의 진저리를 치며 죽어가고 있으니 그렇다고 지구를 권태의 세계로 돌리자니 문명의 가속이 너무 빠르고 브레이크가 파열된 지도 오래고. 어쩌지요. 어쩌지요. 영생이라니 이 한평생도 지긋지긋한 데라고 노래하던 당신도 그녀를 만나고서는 죽어서 환생하면 그리움 없게 그녀와 한몸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뇌까리기도 하니 흙의 욕망의 늪이 교묘하긴 교묘하죠. 사랑, 희망, 이런 것들이 모두 흙의 욕망의 물래타죠. 오직, 악(惡)! -찌르르. 찌르르.

 

 

 

푸른 산(山)

함민복

 

푸른 산(山)은 말이 없네

머리로 얹었던 붉은 태양

빛 힘줄 길게 늘이며

지구를 칭칭 감아 도는

난봉의 머리, 그래도 그리워

찬 달은 거울로 띄워 볼 뿐

습관처럼 없는 머리에

흰 구름 두건 무심히 썼다 벗고도

푸른 산(山)으로 말이 없네

 

푸른 산(山)에서 자란 나무들도

한때 입과 눈이었던

바람과 새와, 별과 이슬을

인연의 강(江)에 풀어놓고

푸른 산(山)으로 말이 없네

 

그 푸른 산(山)에 목잘린 부처가 사네

머리통이 떨어져 나간 돌부처는 머리 위로

무한 천공을 펼쳐 이네*

모자를 눌러 쓴 촌로의 얼굴이기도 하고

장난을 치다 안경알이 깨진 사진 객

소풍 나온 학동의 몸이 되어 주기도 하네

소나무가 되었다가 바람의 길이 되었다가

목 잘린 부처는 부처가 되길 원하는

세상 만물을 부처로 만들어 주네

제 목을 댕강 날려

망상을 아(我)로 하고

모든 아(我)를 타(他)로도 하는

서늘한 설법

푸른

산(山)

 

 

 

하늘길

함민복

 

비행기를 타고 날며

마음이 착해지는 것이었다

 

저 아랜

구름도 멈춰 얌전

 

손을 쓰윽 새 가슴에 들이밀며

이렇게 말해보고 싶었다

 

놀랄 것 없어 늘 하늘 날아 순할

너의 마음 한번 만져보고 싶어

 

새들도 먹이를 먹지 않는 하늘길에서

음식을 먹으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까운 나라 가는 길이라

차마, 하늘에서, 불경스러워, 소변이나 참아 보았다

 

 

 

하늘을 나는 아라비아 숫자

함민복

 

계좌번호 012-24-0406-782

비밀번호 3322

호출번호 96

대기인원 12

자본주의의 심장 은행을 나와

한일병원을 향한다

3호선을 타고 가다 <423> 충무로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413> 쌍문동에 하차한다

한일병원 접수번호 300

대기인원 112

차트번호 88871

간이계산서 공급처 210-82-03667

약지급번호349

티브이 체널 4 유선방송을 보다

전화번호 299-0446에 전화 걸다

약을 지급 받고

택시 서울1바 4320을 타고

지하철로 돌아온다

삐삐삐......

하늘을 날아온 아라비아 숫자가

청바지 입은 여자의 허리춤에서 울고

핸드폰으로 날려보내는 아라비아 숫자들

공중에서 부글거리는 숫자들

대통령도 기호로 뽑는 시대

법 조항이 세상을 통치한다

숫자에 주눅이 들어 담배를 물면

88 EIGHTY EIGHT 바코드 88003559

숫자 하나만 틀렸어도 일과가 어긋났을

국제질병번호 300인 사내는

숫자들 간의 인연으로 하루를 살아냈다

숫자에서 해방되기 위해 잠자리에 든

사내의 밥을 지키는 붉은 불빛

전기장판번호

3.

 

 

 

한강

함민복

 

1

동호대교에서 청계천 하구로 들어간다

부드러운 파도 푸른 보리밭 생각하며

물비린내 잊은 강이 흐르고

기름에 뜬 개미 같은 철새 몇 마리뿐

미끈매끈 세월의 자식 강돌맹이 하나 없어

뒹구는 플라스틱 바구니와 비닐봉지

정월 보름 방생된 북어 대가리

각진 큰크리트 벽에 목뼈만 부러진 음치 바람

물살 결도 잃어 출렁이지 않는 이 강에

달은 더 이상 어부를 방생하지 않고

 

 

2

물을 길어 먹던 겸허한 세월은 가고

물을 끌어다가 먹는 시절이 와

저 강물에 빠지면 익사하기 전에

오염되어 죽을지도 모를 세월이지만

 

수도 파이프는 사람들의 입이다

강심까지 길게 잡아늘인

변기의 하수구는 사람들의 내장이다

강물이 깊게 잡아당겨

강심에 입을 묻고

강심에 내장을 담갔으니

사람은 강이다

순환의 물살에 살 섞으며 흐르는

우리는 그래도 한 물결이다

 

 

 

한강유람선

함민복

 

한강이 흐른다

강북과 강남의 비무장지대

떠나볼거나 유람선

여의도에서 물살을 역류하며

저기 법을 두드려패는 곳

풀뿌리 민주주의에 제초제를 뿌린 곳

칼뿌리 민주주의란 말이 선뜻 떠오르는

저 사당에서는 눈을 떼라고

유람선 떠나간다

잠수함은 물을 거역하면서도, 물을 이용해 움직인다는

뒷말을 경계하자

복병처럼 물살에 납작 엎드린 63빌딩 그림자

자본의 거짓 빨래판

낙도 어린이가 서울 나들이 오면 꼭 보여주는 곳

바다와 벗하여 사는 어린이에게 수족관을 보여주는 발상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서점을 보여주면 안 되나

63빌딩은 5공화국의 송덕비라고 명명한 함성호 시처럼

거기 참배시키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가

씨앗을 남기고 싶은 욕망만큼 미련한 토마토 가지가 찢어지듯

우뚝우뚝 발기한 빌딩들

움푹움푹 패인 하수구들

뒤틀어 짠 문명의 즙 콸콸 쏟아붓는

한강 위로 유람선 잘도 달려간다

강북과 강남을 지키고 있는 평화유지군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자본의 위인

Money!

유능하여라 전능하여라 그를 대통령으로

그의 이름 아래 안 되는 이 없다 이 땅에서

그의 이름으로 척살하라 불가능이란 말을 하면 안 된다

강물도 직각으로 군기 잡아논?헛소문이 아니었구나

물가를 잡아놓긴 잡아놓았구나, 시멘트로?5공화국의 물줄기 따라

떠나간다 유람선

한강철교 아래를 지나가다 보면

민족의 비극 6?25때처럼

8학군 강남으로 도강하기 힘들고

강남의 아파트 장벽과 강북의 꼬막집들

명명되지 않은 전쟁이 여기 벌어지고 있구나

자본은 은밀하고 자유로운 전쟁을 양성화한다

물은 흐를 곳을 정하고 흘러가지 않는다

이치에 닿으면 그저 흐를 뿐

이것은 한편의 영화다

영상이 펼쳐 있고 움직이는 객석, 유람선에서 보는

영화 장면은 잔혹극이다

간간이 비명처럼 날아오르는 새떼

워크맨 이어링 꽂고 롯데리아 빨대 입에 물고

시원하게 허벅지 드러낸 저 젊은 처자가 바라본다

다시 감상적으로 날아오르는 새떼

무엇을 유람하란 말인가

이곳을 떠나니던 새우젓 배와 벌목군들의 뗏목에 대한 기억을

역사적 의미에서 한강 나룻배의 복원, 어쩌구

그 속에 숨은 암수, 그때보다 살기 좋아졌다는

그대 위정자들이 말하는 문명의 발달을

그러나 이 유럄선은 반교사적 교훈 이왼 없다

썩고 썩어 문드러진 민족의 젖줄 한강

아황산가스와 스모그의 하늘

시멘트의 식민지가 된 사방의 흙들

유람선은 우울하게 물결을 가른다

문명의 발달이 물가에서 시작되었듯

문명의 종말은 깨끗한 물을 찾아 멸절될 것이다

저것은 다방에서 많이 본 건물 아닌가

88메인스타디움, 재떨이에 담배를 떨듯

우리가 그곳에서 심각하게 투자했던 재원은 과소비의

단초가 아니었을까

빨리 치솟는 물가와의 전쟁을 선포하라

하면 군인 출신의 대통령을 둔 우린 미생지신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안전벨트는 돈과 권력이 아니다

인류를 지켜온 최대의 부적 양심이다

자본주의의 구명정은 호화주택이 아니다

분배의 조촐한 집이다

지금은 자본주의 만세를 부를 때가 아니다

자본, 그대의 적은 그대

소리낼 곳에서는 반드시 소리내며 흐르는 물

죽음마저 정직히 보여주는 물소리로

자본, 스스로의 귀를 쳐라

온몸이 올곧게 살아날 그때까지

강남과 강북의 비무장지대에

썩은 물이 흐른다

그 위에 유람선 떠나간다

 

불감찬일사!

 

 

 

한겨울의 노래

함민복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개울물 따라

꽃상여 떠나가네 아버지

눈 내려 세상도 하얗게

소복한 날, 살아서 거닐던 길

만가에 발맞추며 서로를 점검해보는

사람들의 어깨에 들린 채

떠나가네 아버지 떠나지 못한

침엽수 그리움에 짙푸른 한겨울

오기만 하는 성긴 눈발에 오고가는

생애 젖고 동네 어귀 삶 때묻은

옷가지 태우는 화톳불 축축히 타오르며

가가호호 슬픈 인사를 나누는 연기,

당신의 영혼, 대나무 지팡이 마디마디를 울리는

울음소리, 척추로 스며들며 피를 덥혀오는

문바위 고개 넘어 들판으로 접어들면

당신이 보여주던 손가락처럼 굴곡진 논두렁

까악까악 조가를 부르며 날아오르는 까마귀떼,

요령소리로 산천에 부음을 알리며 가는 길

귓불 시린 북풍에 더욱 뜨거워진 눈물, 베옷이 얼고

노제를, 마을이 보이는 마지막 산모퉁이에서

술 한 사발에 상여소리 더 구성진 상여꾼의 발자국도

뒤돌아보면 눈 덮여 우리는 어디서 떨어졌는지

또, 눈송이처럼 어디로 쓸려가야 하는지

의문의 광목줄에 엮여 떠나가는 행렬

아, 꽃상여 위에도 하얗게 눈 내려

아버지 떠나가네, 당신이 그래왔었듯이

언젠가 당신처럼 떠나야 할 사람들의 어깨에 들린 채

하늘 아래서 물이 흙을 대하듯

당신이 가는 마지막 길을 대신 걸어주는 사람들

문상객도, 꽃상여도 꿈속같이 아득한데

단풍으로 유서를 쓰고 떠나간 나뭇잎,

눈 내리는, 앙상한 겨울숲, 황토 속으로

아버지 떠나가네 살아서 거닐던 길

만가에 발맞추며 서로의 생애 점검해보는

동네사람들의 어깨를 껴안은 채

떠나가네 아버지 떠나지 못한

침엽수 그리움에 짙푸른 한겨울

 

 

 

합장의 힘

함민복

 

밤에 왜 마당에서 불을 피워요

어, 이거 절 보수할 때 나온 나무토막

나무 보일러에 넣을 수도 없고

해서 깨끗한 데서 태워주는 거야

향나무도 아닌데 향내가 이렇게 나

천년도 넘게 향이 배서인가봐요

불도 지켜야 하고 술이나 한잔 먹지

 

도대체 몇시간을 타는 거지

천년도 넘게 향을 태워서 그런가봐요

사람들 맘이 배서 그렇다고

연기가 절 쪽으로 올라가네요

 

 

 

해외로 팔려 가는 이 나라의 검은 돌들에게

함민복

 

공고: 오석 자갈 정부미 한 부대에 3만원, 수출용임.

      외화 획득에 적극 참여합시다

 

갑자기 달려온 추위가 네 편임을

이별가를 부르는 소금기 바람은

안다 알면서도 저 달그락거리는

손가락으로 며칠 째 검은 돌을 찾는

저 차가운 눈동자들은

돌들이 말이 없길래 말이지

돌들보다 더 차가워진 가슴으로

돌들보다 더 무거워진 삶을 위해

해안가 아낙네 백여 명이 주워 모으는 저

돌들은 부대에 몸을 웅크리고

석기시대 조상들의 손때 묻은 사랑

겨울, 등을 따뜻하게 데워주던

아, 너는 그리워

어찌 타국 땅의 유흥지에서

술 냄새에 코를 절이며

그래 너희를 팔아먹는 우리의 가난은 잊어도

잊지 말거라 이 나라 해안가 파도 소리를

어찌 잊겠느냐고

너희들이 자발적으로 떠나는 것 같아

더욱 철석이는 파도 소리

힘 빠진 미역의 어깨뼈와 삿갓조개의 단식

적고 있다, 눈물만 솟아 남을, 12월 초순은

 

 

 

허공의 손

함민복

 

하루 먹는 소금의 양을 쉽게 알 수 있고

더 오래 혼자 밥을 먹으면

나무가 될 것 같은

 

혼자 사는

나의 죽음은

어느 날

우편배달부에 의해 발견되리라

 

죽을 때

나는

어머니를 떠올렸던 허공의

손을 잡고

쓰러지리라

 

그러면

내가 죽여 내 몸을 만들어 온

닭이

토끼가

오이가

쌀이

상추가

움켜쥐었던

 

허공이

어머니의 손이 되어,

되어주어

내 손을 잡아주리라

 

 

 

호박

함민복

 

호박 한 덩이 머리맡에 두고 바라다보면

방은 추워도 마음은 따뜻하네

최선을 다해 딴딴해진 호박

속 가득 차 있을 씨앗

가족사진 한장 찍어 본 적 없는 나(我)라

소박네 마을 벌소리 붕붕

후드득 빗소리 들려

 

품으로 호박을 꼬옥 안아 본 밤

호박은 방안 가득 넝쿨을 뻗고

코끼리 귀만한 잎사귀 꺼끌꺼끌

호박 한 덩이 속에 든 호박들

그새 한 마을 이루더니

 

봄이라고 호박이 썩네

흰곰팡이 피우며

최선을 다해 물컹쿨컹 썩어 들어가네

비도 내려 흙내 그리워 못 견디겠다고

썩는 내로 먼저 문을 열고 걸어나가네

 

 

 

화살표를 위하여

함민복

 

1 - 만남

어느 날

일터를 향해 달리다 멈춘 차에서

여기까지 오며 몇 개의 화살표를 만났을까

몇 번 화살표의 지시를 따랐을까

한두 번만 지시를 어겼어도

여기에 다다르지 못했을

어쩌면 치명적인 결과에 놓였을지도 모를

 

이 세계는 화살표의 숲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지 않는 곳은 없네

화살표가 또 다른 화살표로 배턴을 넘기고 있는

이 세계는 방향의 숲

 

시간마저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살표는, 시간의 낭비를 단출할 수 있는

시간을 사냥할 수 있는 화살

속도를 섬기는 신앙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으뜸가는 것을 신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는 것들을 돕고 있는

화살표의 정체는 무엇일까

혹 우리 시대에 여러 모습으로 현현한 '가라' 메시아는 아닐까

 

문명에서

갑자기 모든 화살표가 사라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초침 분침 시침이 모두 화살표로 되어 있던

꼬리가 원점에 잡혀 회전하며

방향을 시간으로 전환해 주던

촌각이 방향 속에 있음 일러주던

옛 괘종시계에서

뎅 뎅 뎅

화살표의 울음소리가

시간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조수석에 눈을 감고

차는 화살표 방향으로 다시 출발한다

화살표의 뾰족한 배웅에 찔려

등이 뻐근해지고

화살표의 영혼인 방향과

동행 길에 오른다

  

* 아리스토텔레스, 김진성 역, 『형이상학』, 이제이북스

 

 

4 - 커서

컴퓨터를 켜는 순간 궁수가 된다

사냥터에 전자화살 한 촉이 준비되어 있다

목표물에 화살촉을 접촉하고 발사하므로

백발백중

여분의 화살은 필요 없다

 

화면에 대기 중인 화살 한 촉

짧은 살대는 마우스와

마우스는 뇌와 연결되어 있다

 

움직임이 준비된 화살표

움직이는 화살표

방향 지시를 포기하고

현 위치만 알려주고 있다가

나의 의도대로 움직여준다

가라 하지 않고 간다

나는 간다, 화살표가 되어

시시각각 방향을 전환하며

 

화살표는 세상을 항해할 수 있는 열쇠다

만능키다

있으라 하매 모든 것이 있어지는

신神처럼 화살표는 강력하다

역방향 화살표를 화살표로 공격해

전 공간으로 회군할 수도 있는

열리라 하매 모든 것이 열리는

화살표는 무섭기도 하다

 

화살표 하나로

뉴스와 가십과 날씨와 스포츠 중계와 청원의 숲을 펼쳐볼 수 있고

쇼핑과 노래와 증시와 맛집과 인문학 강의와 편지를 만날 수 있는

누릴 수 있는

사냥할 수 있는

이 작은 화살표

 

결국 인류를 멸절시킬 핵폭탄도

화살표 하나의 움직임에 달려 있다

화살표의 위치가 결정되고

손가락 끝이 움직이면

명령이 내려지면

그렇다면

화살표를 향한 절제력이

화살표의 잠재 폭력성이

아, 지구의 생명줄이란 말인가

 

 

 

화창한 봄날이 그녀*에게 톱날을

함민복 

 

그녀는 간질을 한다

그녀가 경련을 일으키며 거품을 물고 쓰러질 땐

신앙심 깊은 누이마저 신을 찾을 정황도 없다고 한다

오늘 그녀가 톱을 들었다

화창한 봄날이 그녀에게 톱날을 집어주었다

그녀의 발작이 잦고 깊어질수록 식구들은

전생의 죄, 애물단지라고 탄식을 연발하였다

그녀는 민간요법을 당했다

그녀의 몸 속으로 고양이 고기가 들어갔다

새앙쥐로 담근 술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도립병원에서 타온 알약들이 그녀를 끌고

수면의 늪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자꾸 부어올랐고 푸르딩딩해졌다

그녀가 톱을 들고 벌레들 붕붕거리는 그늘 속으로 들

어갔다 

죽은 그녀의 애비가 신음을 토했다

그녀가 살구나무에 칭칭 매여져 있다

귀신과 싸우는,복숭아나무 회초리를 든 그녀의 애비가

기억속으로 짤려나간다

 

그녀는 톱질을 한다

그녀의 애비는 그 살구나무 그늘 아래 놓여 있던

널평상에서 깡소주를 먹고 잠을 자다  그늘(그는

그늘진 생활을 하면서도 그늘을 믿었다) 이 이동

일사로 죽었다

그녀의 애비 시신이 나갈 때 그녀의 할미는

그녀의 병도 데려가라고 구들장을 쓸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병은 끄덕도 않았고

나무는 톱밥을 날린다

그녀는 연탄을 갈다 발작하여 지글지글 타버린

화상투성이의 종아리를 걷어붙이고 톱질을 한다

드디어 나무가 쓰러진다

수직의 세월 버리고, 단면으로, 한줌의 톱밥만 남기고,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이 쓰러진다

놀란 벌떼들이 늙은 살구나무의 혼백처럼 달아난다

그늘을 베어넘기고 까르르 웃는 그녀를 보고

화창한 봄이 붉은 꽃을 뚝뚝 흘리며 도망한다

 

 

 

환한 그림자

함민복

 

반쪽 달이 떴다

달무리가 둥글다

 

 

 

환향

함민복

 

달무리를 끌어올려 목을 맸다

둥글고 부드러운 밧줄

 

태양을 훔친 범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둥글게 익어가는 과일들

 

갈림길에서 길을 물었다

지나온 길이 길을 열어주었다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내

자전거에 끌려가는 사내

 

밤송이가 화두처럼 툭, 떨어졌다

자궁에 목을 매달다니

 

 

 

후보 선수

함민복

 

인구탑 그림자 아래서 소주를 마신다

건달처럼 광장을 배회하는 비둘기 몇 마리

청량리 극장에서는 매춘이 장기 상영중

허리 흰 껌이 다가와 할머니를 이백원에 팔고 감

택시들도 승객을 잡느라고 느긋이 붐빔

 

어린 창녀가 노숙하게 워카에 발을 맞춤

햇볕을 오바이트하는 아스팔트 위로 쓰러지는 취객

미니스커트 입고 지나가는 여대생에게 성고문당함

휴지통 주위에 구겨진 예수의 명함을 뒹굴리는 바람

객들이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내 눈이 넘치나이다.

 

수박으로 물담을 쌓고 장사하는 저 아줌마 좀 봐! 땀.

삶의 홍수 사람들의 바다에 물방울 하나로 존재한다, 나는

사천이백만 대 인구탑 그림자 속에서 수치의 증가를

막아보려고 이 악물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후보선수로

 

 

 

흐린 날의 연서

함민복

 

까마귀산에 그녀가 산다

비는 내리고 까마귀산자락에서 서성거렸다

백번 그녀를 만나고 한번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였다

예술의 전당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고

먼저 전화 걸던 사람이

그래도 당신

검은 빗방울이 머리통을 두드리고

내부로만 점층법처럼 커지는 소리

당신이 가지고 다니던 가죽가방 그 가죽의 주인

어느 동물과의 인연 같은 인연이라면

내 당신을 잊겠다는 말을 전하려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독해지는 마음만

까마귀산자락 여인숙으로 들어가

빗소리보다 더 가늘고 슬프게 울었다

모기가 내 눈동자의 피를 빨게 될지라도

내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리라

그래도 당신

 

 

 

흑백 텔레비전을 보는 저녁

함민복

 

이제부터 네 스스로 음식을 섭취해라

어머님이 여며주신 생명의 단추

굶주린 배꼽을 움켜잡고

아직도 흑백 주제에 무엇을 이겼다고

V자 안테나를 머리에 이고 있는

흑백 텔레비전을 철커덕 틀면

돈까스를 먹을까, 아냐. 설렁탕을 먹을까,

아냐. 아냐. 소화가 안되니 굶지뭐.

(이때 모델은 회전의자를 휙, 돌려 등을 보인다

그리고 텔레비전 화면에 가득 차는 음식들)

꼴깍.

굶주린 나에겐 좀처럼 소화가 안되는

88올림픽 공식 소화제 선전을 보고 있노라면

내 속에서 김동인이 꿈틀거린다.

 

숟가락이 닮았다.

 

 

 

흙 속으로 떠나는 전지훈련

함민복

 

까칠한 지식 나부랭이 다 버리고

내 머릿속에 흙 한 삽

비가 오면 거짓 없이 젖는

풀 몇 포기 자라

바람 불면 바람소리 일게

내 머리 속에 흙 한 삽

일개미들 하얀 알 물고 이사 오렴

봄 햇살 타고 까치 똥

울음소리로 떨어질 때

손 부르튼 시골 아이들 손등이

머리 속으로 쓰윽 들어와

주물럭, 주물럭 꿈의 공작시간,

공작된 시간,

그러한 세월이 흘러

뼈란 뼈 다 버릴 수 있게 되는 날

물에 서서히 풀려

나의 관짝인 강산

흙으로 살아날 수 있도록

내 머릿속에 흙 한 삽

 

 

 

흥왕리 방앗간

함민복

 

비곗살은 없고

뼈와 살가죽만 남은

 

관전 마디가 둥글고

심줄이 질긴

 

동네에서 힘이 제일 셀 것 같은

방앗간 집

 

설희 씨 아버지와 설희 씨

피댓줄 와당탕탕 돌아가는 곳에서

쌀겨 뒤집어쓰면서 일해

목소리 크다

괄괄하다

흥왕리, 동막리, 여차리 번단

벼 낱알 도맡아 찧어왔는데

방앗간 세운다 하니

방앗간 참새들은 어디로 떠날까

방앗간 참새들도 다른 참새들보다

울음소리 클까

 

 

 

희망

함민복

 

옷걸이에 멱살이나 허리춤 잡힌 옷들

그 중에 나는 잠옷

그를 닮은 창녀같은 몸뚱어리

그와 나는 동침만 한다

그는 나를 버리고 도망쳤다가

나 없이 못 살겠지 하며 또 나타나고

나는 될 수 있는 한 자존심 죽이고

부드럽게 그의 몸을 감싸고

혁대도 없이 줏대도 없는 고무줄로

그의 허리에 맞춰

그와의 잠에 빠져드는 나는

허접스런 꿈, 그를 담는 푸대

그의 잠꼬대가 삐죽삐죽 삐져나오는

나는 잠을 입는 옷인가

잠만 자는 옷인가, 나는

몸이 더럽혀져야 햇살을 볼 수 있는

이상한 정조, 나는

인공의 불빛 아래서

이불 속에서

단조로운 생

빨리 닳아 해졌으면

검고 딱, 딱한 나무옷에게

잠을 인계하고

그를 인계할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

 

 

 

희망을 흡수한 거울

함민복

 

내 잘못만 같아

내가 틀린 것만 같아

다시 나를 만들고

또 나를 만들고

둥글게 

둥글게

긍정의 암시를 하며

바깥으로만 바깥으로만

살아왔네

 

껍질을 입고 또 입어보아도

바깥 세상은 바깥 세상

끝끝내 내가 되지 않는,

바깥 세상을 향한 욕망만큼

아아 나만 아득히 갇혔구나

 

양파여

희망을 흡수한 거울이여

 

 

 

흑백 텔레비전 혹은 비전 또는 개안

함민복

 

흑백 텔레비전 속에서 색상이 선명하다는 컬러텔레비전 광고를 한다

흑백 텔레비전 속에서 선명 야당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하는 늙은 정치인(선명하냐 안 하냐라는 논리 자체가 흑백논리 속에 갇힌다.)

흑백 텔레비전에는 흑백의 정도를 조정할수 있는 장치가 부착되어 있다(밝은색 쪽으로는 끝까지 돌려도 화면이 없어지지 않는다.)

흑백 텔레비전으로 색의 독재는 가능하나, 소리를 구속할 수는 없다(소리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소리와 침묵뿐이다.)

흑백 텔레비전을 끄면 방안의 풍경이 흑백 텔레비전 속에 컬러로 비친다

 

 

 

DOG재자

함민복

 

저 개들은 이름이 없다

단체로 사육되는 개

숫자로서의 개

개별성이 없는 개일 뿐

정을 주지 않는 사육자

잡아먹거나 사육을 위한

비정함을 통한 유정함의 표시

......평등하게 사랑하기 위하여

라는 명분까지 달 수 있다면

그대는 출중한 DOG재자

 

개들은 늘 지랄들이다

복종하고 싶어 죽겠어요

동료들보다 더 큰 충성을 맹세하듯

꼬리에 엉덩일 매달아 흔드는 놈

긴 혓바닥 넥타이처럼 뽑아매는 놈

주인의 냄새만 맡아도 황송하다고

윤기 흐르는 코를 벌름거리는 놈

DOG재자는 흠흠한 웃음을 처발라준다

머리통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노예근성

 

단체로 사육되는 개들에게

사육자는 모듬식사를 준비한다

개들은 욕망을 으르렁거리며

서로 많이 먹으려다가 빨리 자라고 만다

맞아떨어지는 사육자의 정책

더 많은 개들을 원하는 DOG재자

 

  --주인님께 받치는 개들의 노래

  그분은 우리들의 신이시라네

  철망으로 보호해 주시고

  밧줄로 멱살 묶지 않고

  운동할 수 있는 공간 주셨네

  우리를 식용으로 사용치 말라는

  외세 압력 멸퇴하시며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만

  우리를 최소한도로 희생시키는

  아아 우리를 위한 그분의 배려

  어찌어찌 다 칭송하리

  그분을 위해 컹컹컹 노래부르세

  

  --개들의 노래에 대한 주인의 답가

  나는 너희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너희들을 다스릴 뿐

  나를 위해 너희들 다스린 적 없다네

  보라 내 결단 나는 너희들에게

  집을 지켜야 한다는 이념도 전가한 적 없네

  알라 나는 너희들의 순수한 똥개

  길들여지지 않은 순수함 그 자체라고

  노래부르는 광고자

  너희들을 지켜주는 파수꾼, 슈바이처

  몰라 몰라 주어도

  나는 너희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만

  너희들을 다스릴 뿐

  나를 위해 너희들을 다스리지 않겠네

  

이쯤 

개들의 눈동자가 늘 눈물에

젖어 있는 까닭을 알 것 같다고

문득 사육자가 우러러본 정오의 태양,

생명을 독재해 온 세월

에 비하면 사육자의 독재란 얼마나 미약한가

아아 사육자는 개들을 위하여

단호히 감개를 토한다

 

국민 여러분!

 

 

 

KTX 역방향을 타고 가며

함민복

 

 

1.

목적지를 등지고 앉아 보오

풍경과 멀어질 뿐 이별은 없소

죽음 같소

등지고 살아보나

결국 등지고 달려가는

아하, 내가 아닌

풍경이 이제 나를 밀어내오

그동안 순방향에 퍽 섭섭했나 보오

등지고 가면 등 뒤 사람이 내 앞

내 앞사람이 내 뒤

역방향이 운명인 백미러여

너의 추억은 앞에 있구나

 

 

2.

건강을 위해 뒤로 걷는 것처럼

이것도 무슨 운동이 좀 될 성도 싶소

여보, 당신들이 내 뒤

아니 내 앞에 있었던 풍경들이요

내 그대들 맞아주지 않았어도

나를 향해 달려왔구나

멈춰 서서 달려오는구랴

기실 우리 삶도 등의 힘으로

앞으로 가는 것 아니요

연필처럼 뒷걸음치며

살아내는

아하, 뒤 꽁지에 달린

죽음이라는 지우개는 참 유효하오

열차여 목적지는 아직 멀었는가

 

 

3.

순방향에 비해 요금이 저렴한 까닭은 무엇이오

풍경을 가불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오

뒤로 달려가던 풍경들이

냅다 앞으로 물러나는구랴

출발지를 앞에다 두고 멀어짐에도 묘한 매력이 있소

어쨌든 승객들 반반이 마주 보고 앉은 정면에

데칼코마니 같은 박수를 보내보오

아하, 우리를 위해

달도 태양도

밝은 얼굴 우리 쪽 향하려

순방향과 역방향을 반복하며

긴긴 주행을 하고 있었구랴

 

 

 

1988, 우리가 남긴 벽화에 대하여

함민복

 

지금부터 천 년 전 컴퓨터 시대라는 미개한 시대에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 모양을 한 호랑이 벽화가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었다.

 

* 이 벽화에 관한 학설

1. 사람이 동물화되어가고 있음을 경고하던 그림이라고 보는 이(당시 동물과 같은 자유스러운 성생활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고 성관계로 감염되는 에이즈라는 병이 유행하였으며, 물질보다 인간성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미개 의식이 남아 있던 시대임을 감안한)의 학설

2. 웃고 있는 호랑이 모습을 들어 이는 오히려 인간이 동물화되고 싶은 욕망, 즉 그 내면 의식의 표출이라고 보는 이의 학설.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이론의 근거로 스포츠라는 인간의 놀이를 들고 있다--지금은 믿을 수 없지만--당시 인간들은 성교행위를 쾌락의 목적 이외 종족 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하였음을 볼 때 스포츠(성교행위를 본뜬 놀이로 원, 틀, 구멍에 공을 집어넣고 못 집어넣게 말리는 것을 즐기던 구기가 주가 된 놀이)를 즐기고 있는 동물의 벽화는 필시 인간이 동물처럼 성생활을 하며 살고 싶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학설    

 

 

 

1990, 고요한 동방의

함민복

 

아시안게임 성화대 불꽃에 담배불을 붙이며

TV 채널을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중국 무술 영화의 밝은 앞날을 보여준 마스게임

잡아 가두었다가 날려 보내는 평화, 비둘기 떼

우리나라 선수들은 부채 국가답게 부채를 들고 입장함

여의주를 먹다가 입에 걸린 용 두 마리 두둥실

그러다가 1990년 10월 3일

 

분단 45년 만에 독일이 통일된 날

제국의회 앞에 통독기가 게양되고

게네베르크 구청의 자유의 종소리

브란덴부르크 門에서의 맥주 거품

베토벤의 합창 전원 교향곡이 울려 퍼지고,

정말 울려

 

당케 게르만족 당케 고르비

배달민족의 긍지를 느끼게 해준

천상천하유분단코리아독존

당케 당케쉔 웅녀(熊女)

당신의 인내심이 우리를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전 인류적 차원에서 보존되어야할 우리의 분단

1989년휴전선에철책을한겹더치는작업목표조기달성으로

특휴나온후배와생맥주를마시던기억소롬소롬솟고

 

자, 독일의 철조망 걷어다가 더 견고하게 휴전선 철책치고

시멘트가 부족하다는 데 콘크리트 장벽 헐값으로 사다가

고층 아파트 짓고

살으리럿다 살으리럿다

여의도란 섬에서는 법을 폭행하는지

삼당합당의 삼겹살과 야당의 단식이

투닥투닥 투닥거리는

분단 국가에 살으리럿다

 

고요한 동방의 태권도의 나라

위증즐가 태평성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