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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 소리 2

3. 집을 버리다

이신통이 얘기책을 보게 된 것이 언제였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그가 배다른 형과 다투게 되었던 날을 송생은 기억하고 있었다. 송 초시가 독선생으로 이 의원 댁 형제가 어렸을 적에는 친히 집으로 가서 가르치다가, 그들이 열 살을 넘기면서는 아침 일찍 책보를 끼고 와서 글을 배우고 돌아가곤 했다. 송생이 기억하기로는 그가 여덟 살 때에 이준이 열세 살로 가장 위였고 이신이 열 살이었다. 경서와 사서를 읽고 뜻을 새기고 다시 베껴 쓰면서 암기하는 공부였는데, 훈장께서 <중용>의 한 대목에 이르러 "군자가 중용을 따름은 군자로서 그때에 맞게 구는 것이며, 소인이 중용을 어김은 소인으로서 기탄없이 구는 것이다"라는 뜻을 물었다. 준이는 지나치지 않게 타협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고, 신이는 일에 맞게 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일에 있어서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가장 적합하게 대처해나간다는 뜻이라면서, 이 방 안에서 저 끝과 이 끝의 중간이 아니라 둥근 공과 같은 것의 중심을 꿰는 것이라 대답했다. 송 초시가 핵심을 꿴다며 신이의 말에 무릎을 치면서 칭찬했고, 준이는 치우치지 않는 중간이란 자기 의견은 어째서 틀리느냐고 반발했다. 스승이 이르기를, 치우치지 않는 것은 타협과 평균이 아니라 그때마다 알맞은 일의 핵심이니, 이에 어긋난다면 타협을 하거나, 이것저것 취합하여 적당히 가려 쓰는 일이 오히려 치우친다는 뜻이라고 스승이 말했다. 준이 책을 덮으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러한 경서를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

송 초시가 얼굴에 노기를 띠고 물으니 준이는 입가에 비웃음을 잔뜩 떠올리며 말했다.

"어차피 초시에 들지도 못할 텐데 이런 공부는 해서 무엇에 씁니까? 저희 집안은 서류인데요. 요즘은 잡과 따위 거치지 않아도 글 좀 알면 의원은 누구나 하지 않습니까?"

"네 이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너희 부친께서 벼슬할 수 없어서 의원을 택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이풍덕 나리의 대를 이은 어엿한 장자이셨느니라. 그리고 설사 네가 문과를 치를 수 없다 할지라도, 사람이 태어나 살아갈 본분을 가르치는 것이 성인의 도요, 이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잡직도 행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 얘는요? 얘는 동생이긴 하지만 저희 어머니 자식이 아니라는데요."

"허허, 몹쓸 놈이로다!"

송 초시가 매를 때리려고 두리번거리는데, 준이는 책보를 집어들고 마당으로 달아나며 말했다.

"저놈하구 다시는 이런 공부 안 할 테요."

그때에 신이가 별로 놀라지 않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으니 평소에 그런 소리를 형으로부터 익숙하게 듣고 있었던 듯싶었다.

이지언은 하루 중에 아침 점심상을 사랑에서 받았으나 저녁만은 안채로 건너와서 아내의 시중을 받으며 두 아들을 데리고 교자상을 받아먹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형제는 따로 밥을 먹게 되었는데, 이지언이 저녁상을 받고 앉으니 신이 보이지 않았다.

"신이는 어디 갔느냐?"

아버지가 물으니 준이는 제 어머니 유 씨를 힐끔 돌아보았다.

"동이 어멈이 저희끼리 먹겠다구 합디다."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러면 행랑에서 먹는단 말이오?"

아내의 말에 이 의원은 화도 못 내고 떨떠름하게 물었고 유 씨도 조금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희끼리 편하게 지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겠나요? 신이도 이제는 그럴 만한 나이도 되었고……."

이 의원은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아무 말이 없었고, 유 씨는 가장의 밥상이 물릴 때쯤 되어 다짐 주듯이 한 마디 더했다.

"언제는 아랫것들이 모르고 있는 줄 아셨습니까? 공연히 가리고 숨기고 할 것이 없지요. 얼 자녀 있는 집이 어디 우리집뿐이랍디까. 저도 동이 어멈을 친동기간처럼 아는 바이오니 그저 팔자거니 여기고 사는 게라오."

신이는 따로 겹집 뒷방의 작은사랑채에서 형과 아래 윗방을 쓰며 지냈다. 아직도 동이 어멈을 유모로 알고 있는 누이동생 덕이는 행랑의 제일 큰방을 같이 쓰고 있었는데, 신이는 그들에게로 가서 함께 밥을 먹었고 동이 어멈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어쨌든 집안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갈 무렵에 서당에서 준이의 저러한 되바라진 말대꾸가 나왔던 셈이었는데, 송 초시는 적당한 날을 잡아 약방에 마실을 나왔고 평소처럼 이 의원과 둘이서 약주를 나누었다. 술이 몇 잔 오간 뒤에 초시가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의원에게 조심스럽게 귀뜸해주었다. 그날 이지언은 훈장이 돌아가자마자 격노하여 준이를 사랑에 불러다가 손수 매를 들었다. 그는 장죽을 거꾸로 잡아 매를 삼았는데 아들을 목침 위에 세워놓고 담뱃대가 부러지도록 때렸다.

"지금 나라에서도 공노비를 속량하고 서얼허통을 공론 삼는 것은, 뒤늦게나마 양반부터 하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같은 백성이라는 천하의 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네 이 고얀 놈, 내가 너에게 글을 배우고 읽으라는 것은 사람의 도리를 배우라는 것이었거늘, 누가 벼슬하는 글을 배우라더냐? 이 못된 놈, 하물며 피를 나눈 아우를 남들 앞에서 능멸했다지?"

그리고 이튿날 유 씨 부인은 아들 준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서 몇 달 만에 돌아오기도 했다. 이 의원은 그 뒤부터 맏아들 준에게 별로 눈길을 주지 않으려 했고, 그와는 달리 둘째 신은 약방 사랑으로 불러다 책을 읽게 하거나 사서의 독후감을 묻기도 했다. 송 초시의 말에 의하면, 이 의원이 신의 재주가 아까우니 무과라도 치르게 하면 어떤가를 물었고 송 초시는 답했다고 한다. 그냥 초야의 선비로 공부하고 글 읽게 하면 나중에 자신이 알아서 살아갈 길을 찾게 될 것이라 우리가 따로 염려할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신이는 송생과 장날에 나갔다가 책전이 벌어진 것을 보게 되었다. 고리 함에 천 멜빵을 걸어 짊어지고 온 장사꾼이 자리를 펴고는 함에서 책을 꺼내어 늘어놓고 있었다. 방각본이었는데 <만세력> <당사주> <오륜행실도> 그리고 이야기책들이 있었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배비장전> <옹고집전> <장끼전> <토끼전> <변강쇠전> <두껍전> <이춘풍전> <장화홍련전> <콩쥐팥쥐전> 등은 가끔씩 지나가던 소리꾼들의 아니리와 소리에서 듣던 것들도 있었고, 나중에 도방 대처로 나가서 <박씨전> <임경업전> <유충렬전> <홍길동전> <전우치전> 그리고 <창선감의록> <숙향전> <숙영낭자전> <옥단춘전> 등도 읽게 되었는데, 그날은 떡 본 김에 제지낸다고 주머니를 털어내어 <춘향전> <심청전> <콩쥐팥쥐전> <장화홍련전>을 샀다. 얼른 몇 장을 들춰보니 동이 어멈이 좋아할 것 같다고 신이가 송생에게 말했다는 거였다.

그날부터 행랑채 동이 어멈 방에서 신이가 이야기책을 읽기 시작했고 하인들도 하나둘 모여들어 함께 들었다. 약방 곁꾼은 아예 약초와 작두를 가지고 와서 방문 앞에 주저앉아 일하면서 들었고, 동이 어멈 또래의 부엌댁과 하녀와 사랑채의 마당쇠까지 모여 앉게 되었다. 신이는 책을 펴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나갔다.

"서문 밖, 삼십 리쯤 되는 곳에 한 퇴리가 있었으니 성명은 최만춘이라 하며, 아내 조 씨와 더불어 이십여 년을 같이 살아왔건만 슬하에는 일점혈육이 없더니 최만춘 내외는 이로 말미암아 근심을 마지아니하여 명산대찰에 기도와 불공도 하고, 곤궁한 사람을 살려주는 적선도 하여, 한편으로는 의약을 써 몸을 보하기도 하여 그러구러 하는 사이에 신명이 감응하였든지, 그러하지 아니하면 정성이 지극하였든지, 부부가 한 가지로 신기한 꿈을 얻더니 이내, 부인에게 태기가 있더라.

열 달이 차매 하루는 조 씨 부인이 신기가 불편하므로 자리에 누워 있었더니, 갑자기 그윽한 향내가 방 안에 감돌며 문득 한 옥녀를 낳더라. 만춘의 기뻐 날뛰는 양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거니와, 다못 딸아이를 낳게 됨을 섭섭히 생각하고 내외가 서로 위로하며 재미롭게 키워내더라.

딸아이의 이름을 콩쥐라고 지어 손바닥의 보옥같이 애지중지 사랑하여 남의 귀공자를 부러워하지 아니하며,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하고, 어서 바삐 자라기를 주야로 바라더라.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요. 그 모친의 천명이 그만이든지 조물이 시기함인지 콩쥐가 태어난 지 겨우 백일 만에 조 씨 부인이 세상을 영영 하직한 바 되니, 최만춘은 뜻하지 않게 중년에 홀아비 신세가 되어 버리더라. 만춘은 몸이 외롭고 쓸쓸할 적이면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어린 콩쥐를 안고 다니면서 동리 아낙네들의 젖을 얻어 먹이니, 하루이틀도 아니요 일 년 이년을 그리하였으니, 그 고생이 어떠하였으리요. 철모르는 콩쥐가 젖 찾는 소리는 죽은 어미의 혼이 가령 있을진대 눈물이 변하여 비라도 되었으리라."

최 씨가 과부 배씨와 재혼하고, 데리고 온 딸 팥쥐와 함께 모녀가 콩쥐를 부려먹고 구박하는 대목에는 모두들 한숨을 쉬거나, 저런 몹쓸 년! 어허 저런 불여우 같은 것들이 있나? 하다가도 나무 호미를 부러뜨리고 밭두렁에 앉아 우는 콩쥐 앞에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나 대신 밭 갈아주는 대목에는, 에그 불쌍한 것, 하늘이 도와주는구나! 하면서 제 일인 듯 손뼉을 치고 기뻐했다. 신이는 이러한 좌중의 기쁨과 슬픔과 분노와 감동의 느낌이 책을 읽고 있는 자신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마치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온몸이 달아올랐다.

약방 사랑에서 이 의원이 가만히 듣자 하니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리고 제각기 두런거리는 소리도 들려와서 처음에는 행랑것들이 모여 앉아 도토리 윷이라도 노는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개는 모두 조용한 가운데 누군가 두런두런하며 혼자서 애기를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와 귀를 기울이니 신이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이 의원이 일어나 설렁줄을 당기자 방울이 떨렁거렸고 행랑에서 넋을 잃고 앉았던 마당쇠가 벌떡 일어나 득달같이 달려갔다.

"찾아 계시옵니까?"

"너희들 게서 뭣들 하고 있느냐?"

의원이 물으니 마당쇠는 신이 나서 자랑처럼 말했다.

"지금 작은도련님이 얘기책을 읽어주고 있습니다."

"그 얘기책 가지고 내게 오라 일러라."

마당쇠가 행랑으로 돌아와 좌중에 알리자 모두 찔끔하여 자라목이 되어 흩어졌고, 신이는 책을 들고 약방으로 가는데, 동이 어멈은 걱정이 되어 툇마루까지 쫓아나와 눈 바라기를 했다.

"역정 내시면 다시는 않겠다고 그러세요."

신이 약방 사랑에 들자 의원은 얘기책을 받아 몇 장 들춰보았다.

"이게 웬 거냐?"

"네 장터에 책전이 섰기로 몇 권 샀습니다."

의원이 보아하니 언문 방각본이거늘 알은체하기도 쑥스러운 바이어서 얼른 되돌려주며 말했다.

"이런 것은 부녀자들이나 읽는 것인데, 요새 글공부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게냐?"

", 시부(詩賦)를 익히는 중입니다."

"너도 몇 년 뒤에는 향시를 볼 자격이 있다. 공부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

신이는 잠시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도 문과 향시를 볼 수가 있습니까?"

의원은 맏아들 준이와의 일이 떠올랐지만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내가 서자이기는 하되, 홍패를 받고 관직에 나아가신 선친의 유일 장자로서 본가에 적자로 올라 있으니 하자가 있을 리 없다. 준이는 물론이려니와 너의 경우에도 너는 나와 준이 어미의 차자로 올라있으니 무슨 흠이 있겠느냐. 내가 네게 향시를 보라는 것은 벼슬을 해보라는 얘기가 아니라, 네 실력을 한번 가늠해보라는 말이니라. 네가 의원이 싫다면 요즈음 시속에 무슨 일인들 못 하겠느냐. 제일 좋기로는 한 식구 갈아먹을 만큼의 땅마지기를 장만하여 힘써 일하고 독서하며 사는 청복(淸福)의 삶도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의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얘기책을 아들에게 내주며 말하였다.

"사람들이 좋아한다면 이 또한 나쁠 게 있겠느냐, 다만 학문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신이의 얘기책 읽기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처음에는 자기 집 행랑채에서만 읽더니 밖으로 소문이 나면서 일테면 농군 두레패들의 사랑에도 불려갔는데, 모두가 상민들이라 남녀노소가 어울려 한쪽에서 새끼 꼬고, 짚신 삼고, 자리 짜면서, 또는 물레 잦고, 바느질하면서 신이의 낭독을 들었다.

노비 쟁송이 일어난 뒤에 이신은 마음이 떴는지 집에 붙어 있지 않고 속리산 법주사의 사자암에 틀어박혀 있었다. 혼자 글을 읽겠다고 했지만 이지언은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혼인을 시키기로 결정하고는 송생을 산으로 올려 보냈다. 그는 신이를 막무가내로 끌고 내려올 수도 없어서 사실대로 얘기해주고야 말았다.

"형님의 혼처를 정한 모양입디다. 금산 처자라구 하는데 나두 먼발치서 본 적이 있소."

신이는 픽 웃더니 말했다.

"내가 장가를 든다고 달라질 일이 무에 있겠니? 인연이란 모두 맺고 끊어지고 부질없는 짓인데."

"마치 출가한 중처럼 말하는구려."

"꼭 중이 되어야 그런 소리를 하는 것두 아니다. 머리 깎고 승복 입고 그것두 행색에 지나지 않으니. 아무튼 어느 가엾은 처자가 이 그물에 걸렸는지 봐두어야겠네."

금산에 초행을 갈 적에는 송생이 함잡이를 섰고 상객으로는 그의 아버지 송 초시가 나섰다. 가마꾼은 집안 하인들이었지만 짐꾼이며 후행은 안면 있는 동네 젊은이들이 따라갔다. 이신은 대례를 치르고 첫날밤을 맞기 전에 좌중이 권하는 술 이외에도 스스로 줄기차게 술을 마셨고 나중에는 항아리를 옆구리에 끌어다놓고 조롱박으로 떠서 벌컥대며 마셨다. 신부는 먼저 신방에 가서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족두리 쓴 채로 벌을 서고 앉았는데 신랑은 대취하여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고, 송생이나 동네 젊은이들은 함께 술 마신 것이 면구스러울 정도였다. 술상머리의 멍석에 널브러진 신을 동무들이 떠메어 억지로 신방에 밀어넣었는데 곧이어 그의 드높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에 이미 그 혼인의 불안한 결말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고 송생은 아내에게 말하곤 했다. 덕이는 올케가 참으로 무던한 이였다고 회고했다. 이신이 장가들고 나서 다시 절집으로 올라가버린 뒤에 그녀의 처신은 집안 식구들이 말하지 않았어도 서로가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금산댁은 아침에 일어나면 사랑채의 이지언에게 먼저 문안 인사를 올리고, 행랑채에서 이제는 겹집의 뒷방으로 옮겨온 동이 어멈에게 가서 인사를 올렸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는 집에서 인도하는 대로 시어머니 없는 집안의 안방에 들어앉았다가 남편에게 방을 바꾸자고 말을 꺼내 보았지만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금산댁은 남편의 밥상을 들여보내고 동이 어멈과 시누이 덕이와 자신의 밥을 차려 뒷방에 가서 꼭 함께 아침을 먹었다. 신이 산사로 올라간 뒤에도 금산댁의 행동은 늘 똑같았다. 동이 어멈을 위하여 누비옷도 해드렸고 친정에서 가져온 산토끼 털을 댄 배자도 해 올렸다.

봄이 되었을 때, 불쑥 산에서 내려온 이신은 부친 이지언에게 한양에 올라간다는 말을 꺼냈다. 뭣 하러 가느냐니까 전에 아버님이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과거 공부를 해보라지 않으셨느냐, 그냥 치러보고 벼슬길에만 나가지 않는다면 별로 실망할 것도 없지 않느냐고도 말했다. 이 의원은 아무 말도 없었다고 한다. 신이 집을 떠난 두 해 뒤에 동이 어멈은 세상을 떠났고, 이지언은 천지도인들의 삼례대집회가 있던 그해에 돌아갔다. 이신이 길 떠날 차비를 하자 아내 금산댁은 말없이 버선을 여러 켤레 만들었고 새 옷 한 벌과 두루마기를 장만했으며 길양식으로 미숫가루와 인절미를 준비했다. 떠나기 전날 밤에 이신은 아내에게 꼭 한마디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뜬금없이 처갓집 마당의 석류나무가 참 좋더라고 했다. 그가 혼인차 초행을 갔던 것이 가을이었으니 석류가 벌어져 있을 즈음이었고, 그 얘기를 들으니 금산댁은 갑자기 입안에 침이 고이고 느닷없이 친정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고 하였다.

신이는 어머니 동이 어멈의 방에 찾아가서는 얘기책 읽어드릴까를 물었고 그녀도 아들이 이튿날 한양에 올라간다는 말은 듣고 있어서 이렇게 말했다.

"도련님 내일 길 떠난다는데 일찍 쉬시지요."

"어머니, 이젠 그 도련님 소리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큰어머니도 안 계신데 누가 뭐랄 사람도 없습니다."

"아닙니다. 그래도 세상 법도가……"

"저도 덕이도 어머니 젖 먹고 이만큼 컸습니다. 어머니 오늘은 얘기책 한번 읽어드릴랍니다. 무엇이 듣고 싶으세요?"

"책은 말고 그냥 도련님 이야기나 해요."

"그럼 제가 옛말이나 하나 해드리지요."

하고는 스스로 이야기를 엮어서 하기 시작했다.

"저어 경상도 합천에 해인사라구 큰 절이 있는데요. 그 절의 공양주 스님이 주지 스님의 명을 받고 돈 백오십 냥을 가지고 남쪽 바닷가로 미역을 사러 갔답니다. 그는 길에서 한 초라한 양반이 어린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붙잡아가는 것을 보았답니다. 아이들은 고만고만한 연년생으로 보였는데 노끈으로 손목이 엮인 채 양반에게 끌려가고 있었지요. 스님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양반에게 물어보았지요."

"저 아이들은 어떠한 애들입니까?"

"내가 서울서 이 고을까지 노비들 신공을 독촉하러 왔더니 노비들은 모두 죽고 아이 둘만 남았데. 그래서 장차 부려먹을까 하고 서울로 끌고 가는 길이네."

"바닷가의 어린 것들이 갑자기 서울로 가서 사고무친한데, 의복과 음식을 상전댁에만 의존하자면 장차 그 배고픔과 추위를 어찌 견디오리까. 소승의 돈을 받으시고 팔고 가소서."

"스님은 두 어린애를 사다가 장차 무엇에 쓰려는가?"

"소승은 애들을 사서 놓아주려 하옵니다. 저희들 좋을 대로 일가친척이 사는 고향에서 품이라도 팔면서 살아갈 터이지요."

"스님이 돈은 얼마나 가졌는고?"

"모두 백오십 냥입니다."

"돈은 약소하지만 뜻이 갸륵하므로 내 거절하지 못하겠네."

양반은 돈을 받고 문서를 작성한 다음 두 아이를 스님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스님은 곧 속량한다는 증서를 써서 두 아이에게 쥐어주고는 놓아주었습니다.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좋아서 토끼처럼 뛰어 달아났지요. 스님은 오던 길을 빈손으로 되돌아가 주지스님에게는 중도에 돈을 잃고 돌아왔다고 했지요.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두 아이는 자라나서 각각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더랍니다. 둘 다 부지런하여 제법 근검하여 먹고살 만한 일가를 이룬 것이지요. 그들은 언제나 스님의 은혜를 꼭 갚아야 한다며 다짐을 해오곤 하였답니다. 둘이는 여장을 꾸려서 스님을 뵙자고 해인사를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말 걸음으로 이틀을 가서 새벽길을 걷는데 발에 무엇이 걸리더랍니다. 자세히 보니 글쎄 자물쇠가 채워진 궤짝이었지요.

"우리가 스님께 은혜를 갚으러 가는 길에 이런 것을 얻었으니,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하늘이 우리에게 주셔서 스님의 은혜를 갚으라는 것임에 틀림없구나!"

하고는 궤짝을 열어보지도 않고 말 등에 실었습니다. 해인사에 당도하여 스님의 아무개 법명을 대고 찾으니 그이가 나와서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더랍니다.

"웬 사람들이 무슨 일로 나를 찾으오?"

"저희는 바닷가 아무 고을에 사는 사람입니다. 바로 스님이 길에서 사 가지고 속량시켜준 그 애들이랍니다."

"너희들이 벌써 이렇게 장성하였단 말이냐?"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노스님은 비로소 그 일을 알고 예전에 백오십 냥을 잃었다면서 여태껏 아무 말도 없던 스님의 착함에 더욱 기뻐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여장을 풀고 스님에게 가져온 음식을 드리고 또 궤짝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길에서 주운 것이올시다.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오나 생각건대 하늘이 스님께 특별히 내린 것이라 자물쇠를 따보지도 않고 삼가 스님께 바치옵니다."

"너희가 길에서 주운 것이니 너희 재물이다. 내가 무슨 상관이냐?"

"스님께 은혜를 갚고자 길을 나섰다가 이틀째 되는 날에 이 궤짝을 얻었으니 하늘의 뜻임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원컨대 스님은 거절하지 마옵소서."

절집의 사람들 모두, 저들의 말이 그럴듯하다며 스님이 받아야 된다고들 했다지요. 스님이 받아서 궤짝을 열었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그 속엔 황금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스님은 반으로 나누어 절반은 옥토를 사서 두 사람에게 나누어주어 부자가 되게 하고 절반은 해인사에 큰 불사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이신이 이야기를 끝내자 동이 어멈은 옷고름으로 눈시울을 씻으며 말했다.

"그 아이들은 은혜를 갚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래요? 저는 주인어른께 심려만 끼치고 이제 또 도련님까지 한양으로 떠나신다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부모님이 누구신지 아시나요?"

동이 어멈은 희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유 생원 댁에 제가 여섯 살쯤에 들어갔어요. 듣기로는 흉년에 인근을 지나던 유랑민이 돈 열 냥을 받고 저를 남기고 갔다고 합니다."

"그럼 그때부터 큰어머니 몸종을 하셨어요?"

"그 댁 막내 도련님이 갓난애여서 아기를 돌보는 업저지를 했습니다."

동이 어멈은 거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아버님께는 집 떠날 말씀을 올렸습니까?"

", 과거를 보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제가 소과도 치르지 않은 터에 어찌 대과를 치르겠으며, 소과에 붙는다 할지라도 곧 관향이며 집안에 대한 조회가 따를 터인데 다 부질없는 짓이지요."

동이 어멈은 어려운 이야기임에도 주인의 사정을 젊어서부터 잘 알고 있어서 곧 눈치를 챘다.

"도련님은 그냥 집을 떠나실 작정이구려. 모두 이 어미의 죄입니다. 주인어른께도 평생 짐만 되었지요. 이제 금산댁이 아기를 낳을 텐데 굳이 나가야 되겠습니까?"

이신은 동이 어멈과 오래 이야기할수록 그녀를 괴롭히는 것만 같아서 한마디만 하고 일어날 태세였다.

"곧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니 너무 노심초사하지 마세요."

동이 어멈은 장롱을 열더니 무엇인가 수건에 꽁꽁 싸맨 것을 풀어헤쳤다.

"도련님이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나 나는 아마 못 보고 죽을지도 모르오. 이걸 저라고 생각하고 꼭 간직해주어요."

동이 어멈이 내민 손수건 안에는 똑같은 모양의 향목 염주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제가 도련님을 낳고 다시 덕이 아씨를 낳았을 때 아씨마님 상심이 크셔서 매를 때리고 저를 내쫓았던 적이 있습니다. 주인어른께서 하인에게 안내하도록 하여 속리산 경업대 관음암에서 한 철을 보냈지요. 아씨마님의 노여움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자 했던 것이랍니다. 어느 날, 암자 아래 골짜기에서 맞춤한 향목 등걸을 보았기에 자기를 달랠 겸하여 이것을 깎았습니다. 꼭 석 달 열흘이 걸렸어요.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것은 없으나 이것만은 내 자식들에게 꼭 주고 싶었지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신이의 손목에 염주를 채워주었다. 나중에 덕이도 동이 어멈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같은 염주를 받았다. 이신은 일어나기 전에 동이 어멈에게 말했다.

"어머니, 제 이름을 한번 불러주십시오."

"어찌 제가 감히……."

동이 어멈은 침묵했고 그는 기다리다가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이신이 돌아서서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문지방에 팔을 얹은 채로 그녀가 흐느끼듯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신아, 내 새끼야!"

이신은 날밤을 새우고 멀리서 산사의 범종 소리가 들릴 무렵에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지고 집을 나섰다. 금산댁은 식구들 누구도 깨우지 못하고 미투리를 끌며 오리정 부근까지 남편을 배웅했고 이신도 그의 아내도 서로 작별의 말조차 없었다. 그냥 신이 잠깐 멈춰서 어둠 속에 서 있는 금산댁의 희부연한 자취만 잠깐 바라보고는 돌아섰다.

 

이신이 한양에 당도한 것은 삼월 초닷새 즈음이었다. 그는 숭례문으로 들어가 먼발치에서 왕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육조 거리도 넌짓 살피고, 종루 시전을 돌아다니며 전의 갖가지 물건 구경도 하고, 아무래도 숙식비도 싸고 객점도 즐비한 숭례문 바깥 칠패의 주막거리로 나아가 주인을 정하였다. 숭례문 안쪽 수표교 부근은 주로 채소며 청과를 파는 새벽 장이 섰는데, 바깥쪽은 칠패에서 청파와 만리재, 애오개 등지의 저잣거리가 이어져 주막이며 객점이 많았고 지방에서 올라온 장사치나 여행객들이 봉놋방의 형편은 문안보다 낫다고 모여드는 곳이었다.

물론 지방 관아치들이나 양반들의 경주인을 하는 물상객주는 번듯한 기와집이 많은 종루 육의전 행랑의 뒷동네라든가 배오개 인근으로 숙소를 정하였다. 숭례문 안쪽에 있는 선혜청에 쌀과 무명과 봉물을 납품하러 올라온 지방 관속들도 이곳을 찾았다. 서울의 사대문은 이경 무렵에 종이 울리면 모두 닫고 통행금지했다가 새벽 오경 무렵에 파루를 쳐서 문을 열었다. 권세가에 줄을 댄 양반들은 밤늦게까지 사대부가의 사랑이나 색주가 출입으로 통금을 불편해하였으므로 사대문 밖에 사처를 정하지 않으니, 저녁녘의 남문 밖은 상민들의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신이 시내 구경을 마치고 숭례문 부근으로 되돌아오는데, 성문 앞에 늘어선 중노미 아이들이 제각기 자기집으로 가자고 팔을 끌었고 그는 가격을 일일이 따져 묻고는 중간쯤 부르는 아이를 따라갔다. 남문 앞 대로 양쪽으로 초가집이 빽빽이 늘어섰고 남지(南池)를 돌아 이문골로 들어서니 골목 안쪽에 토담을 올린 초가지붕의 객점이 있었다. 벌써 마당에는 묵고 있는 길손들이 세수도 하고 평상에 앉아 술도 나누는 것이었다. 주인이 그를 맞으며 물었다.

"얼마나 묵으시려오?"

대개 한양에 올라온 이들은 수백릿길을 왕래하여 이삼일 묵었다 가는 이는 없어서 아무리 바빠도 닷새 이상 요량하고 오기 마련이었다.

"글쎄요, 한번 지내보십시다."

"그러슈, 봉놋방 쓰시겠지. 사흘치 미리 줘야 하우."

최소한 사흘 숙박비는 미리 받아두겠다는 소리였다. 이신으로서는 이 집 형편도 아직 모르니 머물고 보다가 불편한 점이 없고 식사도 괜찮으면 그때 가서 장기 숙박을 할 예정이던 것이다.

"아침 자시면 닷 푼, 저녁도 드시려면 일곱 푼 내야 되오."

신이 괴나리봇짐에서 엽전을 내어주니 주인은 제법 의관을 차려입은 그의 아래위를 쓱 훑고는 물었다.

", 식년시 보러 왔소?"

", 과장이 열리긴 열립니까?"

"이번 열 사흗날이랍디다. 좀 이르게 오셨군. 한 사날 지나야 몰려들 텐데."

봉놋방에는 매끈하게 깎은 장침이 벽 쪽에 일렬로 놓였고 한쪽 벽에는 횃대를 매달아 옷이나 갓을 걸도록 했다. 제 집이라면 베개나 목침이 놓여야 할 테지만, 봉놋방이란 여럿이 묵는 곳이라 술 먹고 싸움이 벌어지고 자다가 코를 곤다며 목침을 집어던지는 일이 많기 마련이었다. 아예 그럴 일이 없도록 맞춤한 굵기의 통나무를 매끈하게 다듬고 머리를 댈 자리마다 움푹하게 깎은 장침을 늘어놓은 거였다. 방안에는 서너 사람이 먼저 와서 눕거나 돌아앉아 제 볼일을 보고 있었다. 맨 안쪽의 북쪽 미닫이창 옆에 누군가 먼저 와서 장침 한 켠을 베고 누워 있었다. 신은 두리번거리다가 안쪽이 그래도 나을성싶어 먼저 온 사람 옆에 가서 의관을 벗어 걸고 봇짐은 머리맡에 놓았다. 우두커니 앉았으니 겸상이 차례로 들어오는데 밥과 국 한 사발에 찬이 세 가지 놓였다. 중노미가 신의 자리 앞에다 밥상을 들여놓으며 말했다.

"옆 손님과 같이 드시우. 다 자시건 툇마루에 내놓으슈."

밥상 앞에 앉고 보니 옆 사람은 잠이 들었는지 나직하게 코까지 골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이신은 그의 팔 한쪽을 잡아 흔들었다. 그는 먼저 신이에게 눈을 맞추었다가 옆의 밥상을 힐끗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은 수저를 들기 전에 잠깐 마주 보았다. 이신이 먼저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보은 사는 이 서방이라구 합니다."

"장수에서 온 서 가요."

그들은 말없이 저녁밥을 먹었다. 반찬 그릇에 서로의 젓가락이 엉키는 순간을 피하여 멈추기도 하면서 눈을 아래로 깔고 먹다가 밥이 절반쯤 줄었을 때에 서 가란 사람이 말을 걸었다.

"좀 전에 듣자 허니 식년시 보러 오셨다면서?"

"? 아 뭐 그냥 구경 삼아 왔지요."

"초시는 하셨나?"

"향시를 안 거쳤으나 한양에서는 복시에 응할 수 있다더군요."

서 씨가 빙긋이 웃더니 말했다.

"초시고 복시고 그냥 들어가 시지에 써서 내는 거요. 그걸 모입(冒入)이라구 하는데 누가 막을 사람도 없지요."

서 씨는 밥그릇을 모두 비우고 대접에 내온 숭늉을 빈 그릇에 따라 쭈욱 마시고는 말했다.

"요즈음 과거란 게 아예 난장판이오. 벼슬을 사고 파는데 글이고 과거가 무슨 소용이 있겠소? 급제자는 저희끼리 뒤에서 다 정해놓고 형식으로만 치르니 철모르는 촌 선비들은 일생을 허비하는 게지."

신이는 자신의 처지를 말할 수도 없었고 내심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공손히 말했다.

"무슨 벼슬을 바라는 게 아니라, 글 읽는 사람으로 스스로의 기량을 가늠해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내가 틈나면 과장에 안내해줄 수도 있소."

"한양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신이 물으니 그가 껄껄 웃고는 대답했다.

"돈 벌러 왔지. 내가 장수에서 왔다고 하지 않습디까? 담배는 북으로는 성천초요, 남에선 장수초라구 하오. 내 담뱃짐을 잔뜩 해가지고 올라왔구려."

신이가 그의 사람됨을 살펴보니 벽의 횃대에 걸린 두루마기며 흑립으로 보아 의관이 점잖고 주름살이나 수염의 풍모로 보더라도 자기보다 연배도 훨씬 위인 것 같았다. 저녁은 먹었으나 아직 잘 시간도 멀었고 방안의 다른 일행들과 섞여서 마음 놓고 웃고 떠들 수도 없어서 그들은 자연이 마당의 평상으로 나와 탁주 두어 되를 나누어 마시게 되었다. 서로 간에 정식으로 통성명을 하니 그의 이름은 서일수(徐一壽)라 하였는데 나이는 서른다섯이었고, 신이가 그와 얘기를 나누어본즉 전국을 돌아다녀 견문이 넓었고 박식하였다.

또한 하룻밤을 나란히 자고 일어나니 어쩐지 더욱 가까운 사이로 여겨진데다 아무리 타관 벗 십 년 차이라 하나 동무를 삼을 수는 없는지라, 신이는 그를 자연스럽게 아저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이 어제처럼 겸상하여 아침을 먹고는 느지막이 남문 안으로 들어갔더니 새벽 장은 벌써 파장이 되어 한산했다. 명례방, 태평방 지나 청계천 광통교를 건너 종루에 들어서자, 육의전 행랑이 시작되는 거리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보은 시골서 온 신이의 눈에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온 것 같았다. 일대의 가게가 삼천이 넘는다 하였으니 모두 둘러보자면 하루에 절반도 못 본다고 그랬다. 앞서서 인파를 헤치고 성큼성큼 걷는 서일수를 놓치지 않으려다 뭐라고 외치며 오는 행상꾼들과 부딪쳐 작은 시비가 일어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사대문의 동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 못 미쳐서 배오개(梨峴)에 이르렀고 건어물이며 약재와 버섯 등속의 전들 사이에 있는 한 연초전(煙草廛)에 들어섰다. 연초전의 앞 좌판에는 각종 썬 담배와 잎담배며, 곰방대, 장죽, 담배통, 재떨이, 장죽꽂이 등이 있고 은, 놋쇠, 물소뿔 등으로 담뱃대의 장식이 다양한데 돈피 쌈지, 수달피 쌈지, 비단 쌈지 등에다 단방 부시와 석유황, 일본 수입품인 갑성냥도 있었다. 천장에는 잘 마른 담뱃잎이 줄줄이 걸렸고 마치 약방처럼 너른 방안에 손님들이 무슨 집회나 하듯이 빙 둘러 앉았는데 맨 안쪽 가운데에서 주인은 작두에 담뱃잎을 썰고 있었다.

"주인장 평안하시우?"

서일수가 들어서며 한마디 하자 그가 돋보기 너머로 낯선 이신을 빼꼼이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목례를 하고는 손님들 사이에 끼어 앉자 그들은 하던 얘기를 다시 계속하는 것이었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서초가 부드럽고 향기가 납디다."

"나는 서초 중에 성천초는 너무 순한 것 같아. 오히려 해서의 신계초가 너무 탁하거나 맑지 않고 구수하더만."

서일수가 나중에 들어왔음에도 질세라 끼어들었다.

"허허, 담배 맛을 모르시는 말씀이외다. 역시 담배란 남방초요, 남초라면 진안 장수 것을 으뜸으로 칩니다. 투박한 듯하나 깊은 향이 있고 목구멍을 넘어가며 탁 걸리는 맛이 남초의 제맛이지요."

주인이 웃으면서 좌중에 대고 고자질을 한다.

"저 사람이 담배 장사요. 장수초를 가져와 내게 주인을 댔는데 지금 자기 물건 안 팔릴까 하여 광을 치는 것이라오."

서초의 부드러움을 칭송하던 이가 서일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수초는 그게 골초 용골대나 피우는 연초라오, 삼등 성천 연초는 잎이 노랗고 얇아서 금비단이라 부르는데 연경 사행에도 가져가는 주요 물목이외다."

"진안 장수초는 잎이 두껍고 쪄서 말리면 황토색이 나는 것이 담뱃대에 담아 불을 붙이면 그 연기의 향이 군밤 냄새처럼 풍기지요."

서일수가 그럴듯이 자기 물건 자랑을 했고 길 가던 손님들이 찾아와 자신이 원하는 연초를 저울에 달아서 사갔다. 누군가가 바깥을 기웃거리면서 말했다.

"헌데 오늘은 장풍운이 좀 늦네그려."

"글쎄 말여, 고뿔 들었나? 저어 첫다리에서 내려오다가 이맘때에는 종각 앞에 가 있을지도 모르지."

여러 말이 설왕설래하니 주인이 한마디로 잘랐다.

"장풍운이 평양 갔다네. 벌써 열흘 넘었나. 서도 패거리들과 작당하여 놀러갔으니 추워지기 전에는 안 올게요."

"이거 낭팰세. 나는 그 언패고담(諺稗古談) 듣는 재미로 왔건마는."

주인이 뒤편의 탁자장 아래 칸에 쌓아둔 대여섯 권의 책을 들춰보이며 말했다.

"방각본 책은 우리 집에도 몇 권 있는데, 누가 읽을 사람이 있어야지요."

그러나 손님들은 시큰둥했고 장 아무개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자못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언문이야 누군들 못 읽겠소? 알아주는 전기수(傳奇叟)란 목청도 좋아야 하고, 발성이 또렷하여 듣기 편해야 하며, 이야기의 희로애락을 거기 나오는 인물의 느낌과 감정대로 전해주어야 하며, 강약 고저장단이 물 흐르듯 해야 하는 거라오."

"아예 임자가 연희물주를 하여 어디서 하나 구해 오시구려."

좌중에서 제각각 떠드는데 서일수 옆에 잠자코 앉았던 이신이 슬그머니 일어나 무릎걸음으로 주인의 뒤로 돌아가더니 탁자장 아래 칸을 살피는 것이었다.

", 어떤 책들이 있나 좀 보겠습니다. 여기 임경업전이 있고……"

"그건 일전에 장풍운이가 이 대목, 조 대목 다섯 차례나 끊어서 다 읽어 치웠다네."

한 손님이 일러주었고,

"전우치전이라……"

중얼거리자 또 한 손님이 재빨리 끼어든다.

"오래전에 읽었으나 가물가물하니 다시 읽어도 좋겠네."

"장끼전이 있는데요?"

하니까 주인도 그렇고 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책장수가 왔기에 두 권을 샀으니 장끼전은 새 책이오."

"그 뭐신가 별주부처럼 짐승 얘기가 재미있겠군."

주인이 서일수를 돌아보고는 마음이 안 놓였는지 이신에게 물었다.

"헌데 더러 언패는 읽어보았소?"

", 시골에서 사람들이 좋아하기로 종종 읽어주었지요."

"허 그러신가? 이거 초면에 예가 아니지만 나는 이 집 주인이고 윤 가요, 손님 성명이 어찌 되우?"

"이신이라 합니다."

"보은 산다네요."

곁에서 서일수가 거들었고,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빙긋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그 차라리 이신통이라구 허우. 전기수 이름은 듣자 마자 마빡에 알밤 맞은드키 딱! 하고 기억나야 되는 법이여."

"신통이, 이신통이라."

"거 참 이름 한번 야무지고 기묘허다!"

좌중이 제각기 감탄하며 떠들었다. 이신은 졸지에 신통이가 되어 장끼전의 책장을 여는데, 어쩐지 자기도 모르게 들뜨고 신이 나서 절로 말이 나온다.

"자아, 그럼 이신통이가 장끼전한 대목을 읽어보는데, 꿩의 화상을 볼작시면 의관은 오색이요 별호는 화충이라. 산짐승 들짐승의 천성으로 울울창창 숲속에서 낙락장송 정자 삼고, 상하평전 들 가운데 퍼진 곡식 주워먹어 임자 없는 몸이로다!"

수꿩 장끼와 암꿩 까투리 부부가 어느 맑은 날 나들이를 나왔다가, 콩을 발견하고 먹는다 거니 안 된다 거니 입씨름하는 것이 첫 장면이었다.

"평생 숨은 자취 좋은 경치 보려 하고 백운상봉에 허위허위 올라가니, 몸 가벼운 보라매는 예서 떨렁, 제서 떨렁, 몽치 든 몰이꾼은 예서 위여, 제서 위여, 냄새 잘 맡는 사냥개는 이리 웡웡, 저리 웡웡, 억새 포기 떡갈잎을 뒤적뒤적 찾아드니 살아날 길 바이없네. 사잇길로 가자 하니 부지기여 포수들이 총을 메고 둘러섰네. 엄동설한 주린 몸이 어데로 가잔 말가. 종일 청산 더운 볕에 상하 평전 너른 들에 콩낱 혹시 있겠으니 주우러 가자 세라.

이때에 장끼 치장 볼작시면, 당홍 대단에 곁마기에 초록 궁초 깃을 달아 백능 동정 시쳐 입고 주먹벼슬 옥관자에 열두 장목 만신풍채 장부 기상 좋을시고.

까투리 치장 볼작시면 잔누비, 속저고리 폭폭이 잘게 누벼 상하의복 갖추 입고, 아홉 아들 열두 딸년 앞세우고 어서 가자, 바삐 가자, 평원광야 너른 들에 줄줄이 퍼져가며 널랑 저 골 줍고, 우릴랑 이 골 줍자, 알알이 두태를 주을세면 사람의 공양은 부러워 무엇하리.

천생만물 제마다 녹이 있으니 일 포식도 재수라고 점점 주워들어갈 제, 난데없는 붉은 콩 한 낱 덩그렇게 놓였거늘 장끼란 놈 하는 말이, 어화 그 콩 소담하다. 하늘이 주신 복을 내 어이 마다하리. 내 복이니 먹어 보자. 까투리 하는 말이, 아직 그 콩 먹지 마소. 설상에 인적은 수상한 자취로다. 다시금 살펴보니 입으로 훌훌 불고 비로 싹싹 쓴 자취 괴이하매, 제발 덕분 그 콩 먹지 마소. 장끼란 놈 하는 말, 네 말이 미련하다. 이때를 의논컨대 동지섣달 설한이라, 첩첩이 쌓인 눈이 곳곳에 덮였으니, 천산에 나는 새 그쳐 있고, 만경에 발길이 막혔거늘, 사람 자취 있을쏘냐."

까투리와 장끼 부부의 간밤 꿈 얘기가 나오면서 다툼이 계속되다가 기어이 수꿩은 콩을 집어먹기로 작심을 끝내는데 다음과 같이 이신통의 낭독이 계속되었다.

"장끼란 놈 거동 보소, 콩 먹으러 들어갈 제, 열두 장목 펼쳐 들고 꾸벅꾸벅 고개 조아 조촘조촘 들어가서 반달 같은 혀뿌리로 들입다 콱 찍으니, 두 고패 둥글어지며 머리 위에 치는 소리, 박랑사중(博浪沙中)에 저격시황(狙擊始皇)하다가 버금 수레 마치는 듯 와지끈 뚝딱 푸드득, 변통 없이 치었구나. 까투리 하는 말이, 저런 광경 당할 줄 몰랐던가, 남자라고 여자의 말 잘 들어도 패가하고, 기집의 말 안 들어도 망신하네.

까투리 거동 볼작시면, 상하평전 자갈밭에 자락머리 풀어놓고 당굴당굴 궁글면서 가슴 치고 일어앉아 잔디풀을 쥐어뜯어 애통하며 두 발로 땅땅 구르면서 붕성지통 극진하니, 아홉 아들 열두 딸과 친구 벗님네들도 불쌍타 의논하며 조문 애곡하니 가련 공산 낙목천에 울음소리뿐이로다.

솔개, 갈가마귀, 부엉이, 외기러기, 물오리, 호반새 등등이 조문을 왔다가 차례로 과부 까투리를 후리려 하지만 드디어는 어디선가 날아온 장끼에게 개가하기로 결정이 난다."

잠시 숨 돌리는 참이 되어 담배 한 죽씩 태우고는 주인이 내온 차를 한 잔씩 마시는데 어느 틈에 가게 앞에는 지나던 사람들이 둘러서서 언패 낭독을 듣고 있던 모양이었다. 주인이 시키지 않았어도 점원 아이가 바구니 하나를 좌중이 둘러앉은 방 가운데 놓았고, 손님들은 저마다 주머니를 열어 엽전 한두 푼씩을 던져 넣었다. 다시 아이가 문 앞으로 나아가 바구니를 내밀자 그들도 엽전을 던졌다.

"조상 왔던 장끼란 놈, 썩 나서며 하는 말이, 이내 몸 한거한 지 삼 년이나 되었으되 마땅한 혼처 없더니, 오늘 그대 과부되자 내 조상 와서 천정배필을 천우신조 하였으니 우리들이 짝을 지어 유자생녀하고 남혼여가 시켜서 백년해로하리로다. 까투리 하는 말이, 죽은 낭군 생각하면 개가하기 박절하나, 내 나이를 꼽아보면 불로불소 중늙은이라, 숫맛 알고 살림할 나이로다. 오늘 그대 풍신 보아하니 수절할 맘 전혀 없고 음란지심 발동하네. 허한한 홀아비가 예서제서 통혼하나, 옛말에 이르기를 유유상종이라 하였으니, 까투리가 장끼 신랑 따라감이 의당당한 상사로다. 아모커나 살아보세.

장끼란 놈, 꺽꺽 푸드득하더니 벌써 이성지합 되었거늘, 통혼하던 까마귀, 부엉이, 오리, 무안에 취하여 훨훨 날아갈 제, 각색 소임 다 날아간다. 감정새 호로록, 호반새 주르륵, 방울새 딸랑, 앵무, 공작, 기러기, 왜가리, 황새, 뱁새, 다 돌아가니라."

낭독을 마치자 손님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고는 감탄을 했다.

"아니, 오늘 서울 장안에 전기수 하나 새로 났네!"

"장풍운이나 박업복이와 견주어도 앞뒤 다툼이 만만치 않을 듯하이."

연초전 주인 윤 씨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가지고 엽전이 가득한 바구니를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오늘부터 이 서방 이름은 이신통이여. 날마다 오는 건 무리겠으나 하루걸러 한 번이라도 우리 가게에 들러주면 서로 간에 좋은 일이 되겠구먼."

서일수도 이신통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호탕하게 웃었다.

"장군 나면 용마 나고, 문장 나면 명필 난다고, 이제 신통이란 이름까지 얻었으니 한양 초행길의 조짐이 좋구먼."

신통이 바구니의 엽전을 거두어 보니 열세 푼이나 되었는데 관례에 따라 가게 점원 아이에게 세 푼을 떼어주고도 열 푼의 돈이 생겼다. 아침밥 겸한 하룻밤 숙식비가 닷 푼이니 한양에서도 먹고 자고 할 방편이 생긴 셈이었다.

과거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도성 안팎은 가는 곳마다 서로의 어깨를 스칠 만큼 붐비기 시작했다. 이신통이 머물고 있는 봉놋방도 손님이 많이 들어야 칠팔 명이면 족할 방에 열둘이나 묵고 있었다. 하루 숙박과 아침 밥값으로 닷 푼이던 것이 어느새 열 푼으로 올라버렸다. 일하는 중노미 아이가 저녁밥을 먹자마자 다른 말이 나올 수 없도록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사라졌던 터였다. 즉 과거 당일 닷새 전부터 시험이 끝난 뒤 닷새까지 그러니까 열흘 동안은 열 푼으로 올려 받겠다면서, 거시(擧市) 기간에는 어쩔 수 없다는 거였다. 신통이 마당으로 쫓아나가 중노미를 찾아 따지니 어느 틈에 나타난 주인이 공손하게 대꾸하였다.

"그러기에 오래 묵는 이들은 보통 열흘치 보름치를 미리 냅니다. 거시가 끝난 뒤에는 다시 예전 가격이 될 터이니 그때 다시 계산하시지요. 여기뿐만 아니라 한양 도성 인근의 모든 객점 주막이 같습니다."

이신통이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하며 돌아오자 서일수가 껄껄 웃으며 그를 달래주었다.

"온 백성이 양반이 되자는 일이니 너무 성내지 말게나."

"아저씨, 거자(擧子)가 서울사람 보다 더 많은 듯합니다."

"봉놋방에 찾아든 촌 선비들은 그래도 우리와 견줄 만한 이들이고, 방구깨나 뀌고 밥술이나 먹는 자들은 모두 문안의 그럴듯한 여각이나, 아니면 경주인 집이든가, 저희 친척 집으로든 갔을 걸세."

"그러니 과거를 보러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한양 사는 사람보다 많기야 하겠나마는 아마 절반은 될걸. 헌데 저 사람들 모두가 이를테면 들러리일세."

"조선의 권문세가라 해봤자 십여 가문에서 스물이 채 못 되는 터에 그들이 돌아가며 차지하도록 정해져 있지 않은가. 하찮은 무과라도 그들 집안에 줄이 닿지 않으면 뽑힐 수가 없다네."

서일수는 이제는 웃지 않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신통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글 읽은 선비로 실력을 가늠해보고 싶다고 하였겠다?"

이신통은 집에서 나올 적의 마음 그대로라 다른 생각 없이 순진하게 대꾸했다.

"시부와 책문에 대한 예습은 소싯적부터 해오던 공부라 한번 시험해보고자 하였지요."

"그저 고향 사람들에게 과거를 보러 서울에 다녀왔노라 체면이나 세우자는 게 아니면, 문과를 치를 신분이 못되거나 둘 중에 하나가 아니던가?"

이신통은 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저절로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 묵묵히 앉았다가 신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칠패로 나가 탁주라도 한 잔 하십시다."

서일수는 신통의 제안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지 눈을 크게 뜨고 자기들 처소를 두리번거리다가 앞서 나가는 그를 따라나섰다. 신통이 칠패로 들어서는 초입에 이르러 아무 집이나 목로에 들어서니 저녁밥 참이라 한산했다. 좌판 앞에 서서 술 두 사발 시켜놓고 신통은 단숨에 쭉 들이켰고 서일수는 한 모금 마시고는 기다리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서얼(庶孼)입니다."

서일수는 놀라지 않고 말없이 술을 비울 뿐이었다. 신통이 한 잔씩 더 시키고는 말했다.

"달리 공명심은 없으나, 제가 그런 신분으로 태어난 줄 모르던 때부터 글공부를 하였으니 과장에라도 한번 참례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서일수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는 눈치더니 말을 꺼냈다.

"나는 하천(下賤)인 불승이었네. 중 행색이었다면 도성에도 들어오지 못했을 걸세. 나중에 언제 내 얘기를 해주겠지만 선대에 사정이 있어서 구몰된 집안 사람일세. 나도 진작부터 벼슬을 하자고 글을 읽은 사람은 아니라서 그냥 세상사를 구경꾼처럼 스쳐가며 살아왔다네. 내가 옛 동무의 도움으로 노자 대신 담배 두 짐을 얻어 한양에 올라온 것은 장차 도모할 일이 있어서라네."

서일수가 안색을 바꾸더니 술잔을 쳐들어 보였다.

"자아, 술이나 한 잔 더 드세. 뜻있는 선비들은 아예 과거를 집어치운 지 오래되었네. 중인이나 서얼은 요행 합격하여 이름이 방목에 실리더라도 그 밑에 중인(中人)또는 서()라고 꼭 병기되니 오히려 제 신분을 드러내게 되는 셈이라, 동접도 외면하게 되고 위에서는 관직에서 제외시킨다네. 그뿐인가, 아무리 양반의 집안에 태어나 실력을 갖춘 선비라 하여도 세도가의 집안이 아니면 관직을 받기란 어려운 일이지. 한 세대가 삼십 년이라면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오백 군데가 채 못 되는데 그 기간 동안에 나오는 합격자 모두를 합치면 이천여 명 되겠지. 나머지 천오백여 명은 평생 벼슬을 바라다가 말라죽거나, 고향에 내려가 향교 서원을 드나들며 공연히 약한 백성이나 괴롭히며 일생을 마치겠지."

서일수는 자신이 읽은 뜻있는 선비의 세평을 아무런 비분강개의 빛도 보이지 않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권세 가문에 아들 하나 낳았으니 그 할아비와 아비를 본받아 양민에게 사납고 교만하기가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데, 다만 글 읽기를 쓴 약보다도 싫어하였다. 손님이 왔다가 짐짓 조소하여 말하기를, 걱정 마라 너의 집은 하늘이 복을 내린 집안이라, 네 관직은 하늘이 정해놓은 것이니라. 청관 요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힘들여 애쓸 것 없고 매일같이 글 읽을 필요 없네. 때가 되면 저절로 좋은 자리 생기는데 편지 한 장 쓸 줄 알면 그로 족하리, 그랬다는 것이다. 아이는 이 말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다시는 서책을 보지도 않았다고. 가보잡기, 강패 놀이, 장기두기, 쌍륙 치기에 허랑 방탕하여 재목감도 못되지만 높은 벼슬 차례로 밟아 오를 수 있었다.

 

과거 시험 과목에는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이 있으니, 제술 과목은 시(), (), (), ()이 있어 나라를 경영하는 현실에 비겨서 자신의 생각을 논하는 책()이 중요했건만 통상 과거 출제는 언제나 시부(詩賦)였고 그것도 스스로의 창작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고전의 틀에 얽매인 낡은 것들이었다. 과거에서는 기예를 통하여 인재를 시험하나 그 문장이란 것이 위로는 조정의 관각(館閣)에도 쓸 수 없고, 임금의 자문에도 응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래로는 사실을 기록하거나 인간의 성정을 표현하는 데에도 불가능한 문체였다. 어린아이 때부터 과거 문장을 공부하여 머리가 허옇게 된 때에 과거에 급제하면 그날로 그 문장을 팽개쳐버렸다. 한평생의 정기와 알맹이를 과거 문장 익히는 데 전부 소진하였으나 정작 나라에서는 그 재주를 쓸 곳이 없다고 하였다. 서일수가 이러한 제도의 부패한 폐단에 대하여는 내일 직접 보라고 하면서 신통에게 일렀다.

"내가 과장을 직접 경험하도록 해줄 테니 이번에 조카는 깊이 생각하기 바라네."

어쨌든 이신통은 서일수와 속내를 털어놓고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눈 뒤에 더욱 가까워졌다. 식년시 개시 하루 전날인 삼월 열이틀 날에 이신통은 서일수가 이끄는 대로 오후 느지막이 배오개로 나갔다. 오늘은 윤 씨네 연초전에 가는 길이 아니었고 그동안 두 차례나 언패 낭독을 했었다. 배오개에서 누렁다리(黃橋) 쪽으로 가는 방향에 지전(紙廛)이 줄지어 있었으니 종루의 육조 부근을 빼고는 제일 많이 모인 곳이었다. 벌써 일대는 의관이 번듯한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 있었고 보통 때에는 행상꾼이 종루 큰길에만 보였는데 입전처럼 호객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그들이 지전 앞길로 들어서니 떠꺼머리총각 녀석이 서성거리다가 먼저 나이 지긋한 서일수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시지(試紙) 보러 나오셨지요? 저희가 서수(書手)며 거벽(巨擘)을 다 붙여 드리구요 접도 꾸려 드립니다."

신통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서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총각에게 말했다.

", 우리가 바로 거벽이오, 서수다. 누구 마땅한 거자를 소개해주겠느냐?"

"그러세요? 저희 주인께 물으시면 잘 조처를 해드릴 겁니다."

그들이 지전 안으로 들어가니 각종 종이와 문방구가 진열되어 있고 주인은 점방 안쪽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던 중이었다.

"시지 찾으시죠? 영남지와 완산지, 남원지가 다 있구요. 정지, 간지, 주지, 유둔지, 백로지, 죽청지, 특히 시지로 쓸 아주 좋은 장지로 경면지가 있습니다."

"여기 서수와 대작(代作)을 쓴다구 해서 들여다보았소."

"처음 뵙는데 누구 소개이온지……"

"주인장이 알아서 하시구료."

지전 주인은 서일수와 신통에게는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상대하던 선비들에게 돌아앉았다.

"자아 그러니까, 서수가 두 사람 필요하구요, 접도 두 접이 필요하시다니 구종배가 적어도 여섯은 있어야 되겠습죠. 잘 알았습니다. 내일 새벽 인시 초에 여기루 오시면 준비가 다 되어 있을 겁니다."

선비들 셋이 뒤도 안 보고 나간 다음에야 주인은 다시 두 사람을 상대했다. 우선 두껍고 질이 낮은 종이 한 장을 펼쳐내더니 먹을 갈았다. 벼루에 먹물이 고이자 필통을 집어다 옆에 놓고는 다소곳이 기다렸다. 서일수가 붓을 들고 잠시 생각하다가 일필휘지로 내려썼다.

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隨風潛入夜 潤物細無聲

"계절을 아는 좋은 비라한 봄을 맞아 내리는구나!바람 타고 남몰래 야밤에 오는 봄비세상 만물 적셔도 소리는 전혀 없네"

두보의 '춘야희우(春夜喜雨)' 첫 구절이었다. 서일수가 그만 붓을 내려놓고 신통을 돌아보니 그가 붓을 잡아 찬찬히 써내려 간다.

壬戌之秋 七月旣望 蘇子與客泛舟 遊於赤壁之下 淸風徐來 水波不興 擧酒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

임술년 가을 칠월 열엿새 날에 소자는 손과 더불어 배를 띄우고 적벽 아래 노닐다. 맑은 바람 서서히 불어오고 물결 일지 않으니 술을 들어 손에게 권하며, 밝은 달의 시를 외우고 깊고 그윽한 문장을 노래한다.

소동파 '적벽부(赤壁賦)'의 시작하는 대목이다. 신통이도 붓을 놓으니 지전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일수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얼마나 원하시는지?"

"요즈음 과장의 시세가 어떠하오?"

"그야 임자를 만나기 나름이지요. 서울에도 유명짜한 거벽 서수가 많습니다."

서일수는 픽 웃으며 말했다.

"과시가 바로 코앞인데 지금쯤이면 명문가의 자제들에게 다들 팔렸을 테고 우리야 시골 부가옹을 만나게 되기를 원하오."

"그렇잖아도 때맞추어 잘 찾아오셨소이다. 작년 증광시에 생원을 급제시킨 거벽 대작(代作)이 있으나 이미 다른 이에게 발탁되어 낭패를 보게 되었던 차입니다. 우선 앞돈은 백 냥씩입니다. 물론 소과에 생원 진사만 급제시키면 그 위에 이백 냥 더 드립니다. 저에게는 소개료 이십 냥씩을 떼어주시구요. 소과 급제 하고 나서 사십 냥 더 주시면 되겠지요."

서일수는 주인의 솔직한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큰소리로 웃어댔다.

"허허 설마 우리 솜씨로 소과 급제를 시키겠소? 아무튼 그 과객은 언제 만나게 되우?"

"지금 요 근방 사처에 있으니 이따가 저녁참에나 나와 보시우."

두 사람은 지전을 나와 배오개 윤 씨네 연초천에 들렀는데, 딱히 갈 데도 없었고 서일수가 맡긴 담배의 대금을 혹시 오늘 중에는 받을 수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모여든 손님의 얼굴은 항상 다르기 마련이었으니, 담배를 사러 왔다가 담화에 팔려서 장시간 죽치는 이도 있었고 서일수처럼 지방에서 담뱃짐을 메고 올라온 이도 있었으며 부근 전의 차인이나 주인으로 사나흘에 한 번씩 마실을 오는 이들도 있었다. 주인은 좌판이 내다뵈는 퇴청의 늘 같은 자리에 방석을 깔고 앉아서 들고나는 손님들 응대를 하였고, 점원 둘은 교대로 좌판 앞을 서성이며 여리꾼 노릇을 했다. 전방이 하도 많으니 물건을 사자는 손님이나 이쪽에서 원하는 물건을 넘기려는 손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 외치고 끌어들이고 하는 게 여리꾼의 몫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안에서 주인을 도와 잔심부름을 하거나, 뒤편의 창고에 짐을 들이고 내는 일을 하고, 담배를 찌고 말리고 썰고 각종 재료들과 엽연초를 섞어 고급품으로 조제하는 일도 했다. 그들이 들어서자 주인이 반기는 얼굴로 외쳤다.

"전기수 행차가 왜 이리 늦었는고?"

"둘 중에 누가 이신통이여?"

"젊은 사람이 신통이라네."

그들은 무료하게 앉았다가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에게서 새로 나타난 전기수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었다.

"오늘은 언패 읽을 시간이 없쇠다."

서일수가 말했고 주인이 볼멘소리로 받았다.

"아니 당신이 저 사람 연희물주요? 본인은 암 말도 않는데 왜 나서구 그러우."

", 오늘은 내 물건값이나 주슈."

"다 팔리면 주려고 했더니 어찌. 어음으로? 아니면 돈으로 드릴까?"

"어음은 지방 도가에선 바꿔주는 데도 있고 바꿔주지 않는 고장이 더 많습디다."

"한양 육의전 임방 어음을 어느 놈이 겁도 없이 안 바꿔줍디까?"

"하여튼 자모전(子母錢)을 너무 떼더군."

서일수와 주인이 수작을 나누다가 그가 말했다.

"이신통이 오늘 책을 읽고 나면 당장 결산해드리지."

이렇게 되어 하는 수 없이 이신통은 그날도 책을 읽었는데 이전에 못 들은 이가 많다 하여 '전우치전'을 읽었다. 대개 신통의 경험에 의하면 여염에서 보더라도 안채에서는 규방일화나 염정담을 좋아하는 데 비하여 사랑채의 남정네들은 군담 기담 역사물을 좋아하던 것이다.

신통이 읽기 시작하는데, 도술을 잘 부리는 전우치가 사대부가의 잔치 말석에 앉게 되었는데 그들이 자못 교만하여 스스로 부자로 잘살고 있음을 자랑하니, 수박 포도 복숭아 등의 과일이 빠진 것을 지적하자 때가 바야흐로 여름철이 아니거늘 그런 것이 어찌 잔칫상에 오를 수 있느냐고 오히려 비웃었다. 전우치가 하늘로 올라가 선경에 이르러 온갖 과일을 따다가 잔치 자리에 던지자 모두 놀라며 상찬하는데, 전우치가 때는 이미 늦었다며 꾸짖는다.

이제도 사람을 업수이 여기겠소? 그대들이 이미 사람을 경모한 죄로 천벌을 입었을지라. 최 씨 박 씨 양인이 입으로는 비록 손사(遜謝)하는 체하나 속으로는 종시 믿지 아니 하더니, 최생이 마침 소피하려고 바지를 끄르고 본즉 하문이 편편하여 아무것도 없거늘 크게 놀라서, 이 어이한 연고로 졸지에 하문이 떨어졌는고? 하며 어찌할 줄 모르거늘 모두 놀라서 본즉 과연 민숭민숭한지라 크게 놀라, 소변을 어디로 보리요, 할 즈음 박생 또한 자기의 아래쪽을 만져 보니 역시 편편한지라. 두 사람이 경황하여 서로 의논하며, 전생이 아까 우리를 기롱하더니 이러한 변괴가 났구려, 장차 이 일을 어찌할 것이오, 하는데 창기 중 제일 고운 계집의 음문이 간데없고 문득 배우에 구멍이 났는지라 망극하여 어찌할 줄 몰라 하더라.

이 대목에 이르러 좌중은 참지 못하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는다. 장면이 바뀌고 전우치의 휘황한 도술이 몇 차례 더 거듭된 뒤에 낭독이 모두 끝나니 주위에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여 어둑어둑해졌다. 저절로 자리가 파하는데 역시 점원 아이가 바구니를 돌려 엽전을 모아다 주었다. 연초전 주인은 서일수에게 물건값을 지불했는데 엽전꿰미가 제법 구렁이 사린 듯하였다. 서일수는 전대에 넣어 둘둘 말아서 허리에 차고는 기분이 양양하여 전방을 나섰다. 두 사람은 이제 저녁참이라 출출하기도 하고 목이 컬컬하기도 하여 바로 뒷골목의 피맛골로 들어섰다. 첫 다리에서 종루에 이르기까지 시전의 큰길 양쪽에 가마 한 채 엇갈릴 만한 골목이 있으니 고관대작의 행차가 뜨면 하정배 드리기 귀찮은 백성들이 슬쩍 뒷길로 피하기 알맞은 길이라 그렇게 불렀다. 피맛골은 저자 상인들이며 왈짜 오입쟁이 술꾼들이 저녁만 되면 몰려나오는지라 목로술집, 모줏집, 내외술집, 색주가 그리고 설렁탕, 추어탕, 고음탕, 개장, 황태탕, 선지탕 등속의 온갖 장국밥과 상밥을 파는 탕반 집과 철물교에서 파자교에 이르는 골목은 색주가들이 몰려 있었다. 서일수가 피맛골로 들어서며 호기 있게 말했다.

"얼른 요기나 하구 일어서지. 술이야 나중에 지전의 흥정이 잘 되구 나면 모줏집에 가서 인정 칠 때까지 내가 냄세."

이신통과 서일수가 설렁탕 한 그릇씩 얼른 먹고 지전으로 찾아가니 주인이 어느 손님과 함께 기다리고 있다가 반색을 하였다. 손님이란 오십은 넘어 뵈는 머리와 수염이 희끗한 중늙은이로 의관이 멀끔하고 안색도 좋아 보였다. 그의 옆에 부담을 놓고 무릎 꿇어앉은 자는 아마 가노(家奴)인 듯하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지전 주인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이제는 염려 놓으십시오. 이분들은 지난번 과거 때에도 복시 급제를 따낸 실력이 있어서 내가 특별히 청하여 왔습니다."

주인이 허풍을 떨어 이야기하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들은 쑥스러워져서 슬며시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하였다.

"서수 대작도 이제 구하셨고 접은 모두 네 명이면 될 듯합니다. 지금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지요."

"백 냥씩이라고 했던가?"

시골 사람이 물으니 주인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염라국에서 미륵부처 만난 격이지요. 지금 몇백 냥 소리도 우습고 이름난 거벽 서수를 사려면 천 냥 돈이 들어간다는 말을 못 들으셨습니까?"

그도 처소에서 얻어들은 소문이 있었던지 옆자리를 돌아보는데 하인이 얼른 부담을 선비의 무릎 아래로 밀어드린다.

그가 부담을 열고 조심스럽게 백 냥 꿰미 세 줄을 꺼내어 지전 주인과 두 사람에게 내밀었고, 주인이 먼저 돈 꿰미를 거두자 서일수도 얼른 받아서 꿰미를 풀어서는 지전 주인의 거간료 두 사람 몫으로 사십 냥을 헤아려 내주며 말했다.

"이 집에 쓰시던 행담이라도 있으면 하나 파시구려."

주인이 두리번거리더니 안으로 들어갔다가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 쓴 행담을 가지고 나왔다.

"한 닷 냥 받아야겠지만 거저 쓰시우."

서일수가 전대에 말아서 차고 있던 것과 돈 두 꿰미를 행담에 넣고 노끈으로 둘둘 감아 질끈 동이고는 그제야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행담에 헝겊 멜빵도 달렸으니 맞춤하게 짊어질 수 있을 터였다. 시골 선비는 자신이 돈을 내주고도 어쩐지 멋쩍었던지 슬며시 말을 꺼냈다.

"내가 상주 사는 사람으로 본래 큰 벼슬을 한 집안은 아니지만 혈족 중에 군수 현감 지낸 어른도 계시고 생원 진사한 이도 몇이 되신다오. 이제 내 나이 환갑을 바라보는 터에 평생 글을 읽었고 나이 사십에 이르도록 열 차례 가까이 과거에 응시하였건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소그려. 다행이 물려받은 전장과 선산도 있고 처첩이 낳은 아들이 그득하건만 오로지 한이 되는 바는 생원은커녕 초시도 붙지 못하였다는 게요. 영남이 원래 조선 제일의 반향이라 도처에 거유 석학이 많으니 이번에 내가 빈손으로 돌아가면 위로는 조상님께 불효요, 아래로는 처자식과 인근 상민들에게도 면목이 없는 일이외다. 저로서는 이번이 마지막 과거인 셈입니다."

"우리가 힘써 도와드릴 테니 샌님은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서일수는 그렇게 말하고 지전 주인께 물었다.

"그런데 여기 참고할 만한 협서(挾書)는 준비되어 있겠지요?"

"있다마다요. 시부(詩賦)와 책()이 중점이니 족집게처럼 모아놓은 해제가 여러 권입니다."

돌아보고 이르니 점원 총각이 손때가 반질한 붓, , 벼루, 종이 등의 문방사우 일습과 책자가 들어있는 싸리 행담을 내주었다. 이신통과 서일수가 행담을 열어 책을 차례로 들춰보고 내심 만족하였다. 시골 선비가 여러 가지로 마음이 놓였는지 감탄하여 말했다.

"허어, 이런 과거가 다 있나."

"자아, 그러면 샌님은 안에 들어가 좀 쉬십시오. 당신들은 전방에서 대충 눈 붙이며 기다렸다가 샌님 모시고 과장으로 들어가면 되오."

두 사람은 갓과 웃옷을 벗어 걸고 전방에서 모로 쓰러져 새우잠이 들었는데 시각이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판자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윗목에서 자고 있던 총각이 부스스 일어나 가게의 판자문을 밖으로 밀어내자 장정들이 쏟아져 들어섰다.

"어서들 나오쇼, 거자는 어디 계시우?"

그들은 길건 쓰고 포졸처럼 검정색 무릎치기 걸치고 텁석부리 수염에 인상이 사나워 보여서 한눈에도 도성의 왈짜패거리인줄 알아볼 만하였다. 물론 왈짜도 있겠지만 접꾼으로 풀려나온 젊은 것들이 수천 명이라 많은 숫자가 각 군영의 군졸들이었다. 이를테면 번이 끝난 시각에 하루 품을 내어 돈을 벌어 보자는 셈이었다. 물론 한양의 권문은 물론이요 지방의 세도가에서도 힘꼴깨나 쓰는 혈기 방장한 가노들을 동원하였던 것이다. 서일수가 하품을 하고는 말했다.

"아니, 파루도 안 쳤는데 벌써 나간단 말이오? 그러다 순라에 걸리면 공연히 포청에 끌려가 매나 벌 텐데."

콧수염을 보기 좋게 기른 장정이 껄껄 웃으며 한마디 했다.

"이 양반이 도무지 물정을 모르는군. 우리가 순라의 아재비쯤 되는 사람들이우."

시끌벅적한 소리에 잠이 깬 지전 주인이 선비를 깨워 가지고 전방으로 나왔다.

"좀 이르긴 하지만 남보다 먼저 입장하려면 앞줄에 서야 되오. 잠시만 기다려주오. 동접 사람들이 올 테니."

의관 정제하고 소지품을 챙겨 기다리는데 함께 갈 다른 두 선비의 일행이 아직 당도하지 않았다.

 

이신통은 꾸벅이며 졸고 있었고 서일수는 곰방대를 내어 담배 한 죽 피우고 있었다. 그가 보아하니 콧수염을 기른 자가 접의 우두머리인 듯 보였는데 두리번거리더니 일행의 망태기에 손을 넣어 호리병을 꺼내더니 꿀꺽이며 몇 모금 마셨다. 서일수가 놓치지 않고 보고 있다가 말을 걸었다.

"여보, 어찌 그 좋은 걸 혼자만 자신단 말요?"

"일 끝나고 열 잔 내신다면 드리리다."

그가 씩 웃으며 호리병을 내미는데 서일수가 받아 냄새를 맡아보니 이강주가 틀림없었다.

"허어 이게 얼마만인가, 입 부르트겠군!"

"그게 바로 이강주라오."

서일수도 호리병째로 들어 몇 모금을 꿀꺽이며 마셨다. 삼월 중순이라 하나 새벽이라 제법 한기가 느껴지더니 독주가 넘어가자 아랫배에 뜨끈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마시다가 통성명을 하는데 역시 그는 훈련도감의 포수 별장이었다. 장교는 못 되어도 그를 보좌하여 병졸 수십 명을 통솔하니 콧수염을 장하게 기를 만했던 것이다. 흥인지문 밖 왕십리에 산다는데 나이는 서른이고 이름이 김만복이라 했다. 서일수도 옆에서 지켜보던 신통이도 그의 호탕함이 마음에 들었다. 뒤늦게 다른 선비 두 사람이 자신의 접꾼들 여섯 명과 당도하니 이제 접꾼만 열 명에 서수 대작도 네 사람이나 되었다. 일행은 지전을 나와 누렁다리를 건너 함춘원과 창덕궁의 돌담 사이로 뚫린 길로 들어섰는데 접꾼을 거느린 거자들이 새벽의 어둠 속에서 꾸역꾸역 몰려가고 있었다. 어둠 가운데 접꾼들이 밝힌 사초롱과 조족등 불빛이 사방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이 가까워질수록 행렬은 더욱 빽빽해져서 길 양쪽 창경궁과 함춘원의 담장에 어깨가 닿을 정도로 군중이 몰려 있었다. 앞장섰던 만복이 일행을 함춘원 담장 아래로 이끌더니 그의 수하에게 조용히 일렀다.

"길을 열어라."

어깨가 떡 벌어진 두 사람이 앞에 나서더니 다짜고짜 담장의 왼쪽으로 작대기를 휘두르면서 외쳤다.

"나으리 행차시다. 썩 물렀거라!"

사람들이 별수 없이 길 가운데 쪽으로 밀려나면서 담 옆으로 길이 생겼고 우락부락한 그들의 서슬에 뭐라고 나서는 자들이 없었다. 홍화문 가까이에 이르자 대문 앞은 그래도 너른 공터여서 낫겠거니 했지만 밀고 당기고 하면서 줄지은 사람들이 앞뒤로 몸을 붙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들이 헤치고 나가려는데 앞에서 누군가 험상궂은 자들이 오히려 가로막으며 나섰다.

"나으리란 봄철 지난 개나리냐?"

이쪽도 저쪽도 모두 사초롱을 들고 있어 서로 비춰 보며 고함을 지르는 판이더니 만복이가 상대방의 얼굴을 살피고는 외쳤다.

"나여 나. 이 사람들 장사 첨 해봤나? 곁문으로 가야지."

", 자네여? 홍화문은 틀린 것 같으이. 그리로 감세."

하더니 이들은 평소에 안면이 있던지 다른 접꾼 패와 합대하여 인파를 헤치고 홍화문 앞을 지났다. 그쯤부터는 왼쪽이 여전히 창경궁 담이었지만 오른쪽은 경모궁이었는데 두 담장 사이의 거리가 다소 한산해졌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중이었다. 홍화문 북쪽 방향으로 곁문이 셋이나 더 있었는데 맨 끝의 문묘 앞의 곁문인 통화문은 담장이 휘돌아간 끝이라서 물정 모르는 이들은 거기에 문이 있는지조차 모를 곳이었다. 전수사 물건들을 궁에 들이거나 민가의 반빗아치들이 드나드는 문이었는데 거기까지 이 같은 날은 거자의 통행을 허락하고 있었다. 기역자로 꺾인 모퉁이에 당도하니 그들 접이 합한 이십여 명 외에 한 패거리가 더 있을 뿐이었다. 활짝 열린 문 옆에 수직 군사 한 쌍이 물러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자아, 다들 좀 뛰십시다!"

만복이 구보하면서 앞장서 나아갔고 선비들은 허우적거리며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이 과장인 영화당 너른 마당에 당도하자, 이미 새끼줄 그물을 쳐둔 앞자리에는 많은 패가 들어와 담장 같은 장막을 치고 자기 패거리와 임의로 약속된 접의 이름을 크게 먹으로 쓴 사초롱을 세웠다.

먼저 시험 문제가 내걸리는 현제판(懸題板)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으려 하는데 문제가 내걸리자 마자 혼잡이 심하여 제목만 베끼려 하여도 자기 차례가 오도록 기다려야 하니 헛된 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이었다. 만복이가 두둔해야 할 접의 물주들은 선비 세 사람이었는데 접꾼이 모두 열 명이었으니 세도가들을 제외한다면 시골 선비들로서는 체면이 서는 편이었다. 자리다툼이 벌어지는데 너무 좋은 자리에는 처지와 형편을 살펴가며 자리를 잡아야 했으니 먼저 차지했다 할지라도, 어느 댁 도련님이 행차하시면 위세당당한 가노들이 불문곡직 세워둔 장막을 찢고 말뚝을 뽑아 던지며 위아래 할 것 없이 두들겨 패서 쫓아버리는 것이다. 김만복이가 두리번거리며 뛰다가 마당 두번째 줄의 안쪽에 빈 공간이 있는 것을 보고 나아가서 사초롱 등을 장대에 달아 올렸다. 득달같이 달려온 접꾼 패거리들이 일제히 가져온 말뚝을 박고 베를 둘러 장막을 치니 앉으면 안 보이고 일어서면 배에 닿을 만한 높이였다. 또한 가져온 돗자리를 깔고 거자가 앉을 자리 앞에 지전에서 가져온 두툼한 종이 서판을 놓으니 준비가 모두 끝났다. 서일수가 어둠 속의 너른 마당이 등불과 장막으로 거의 들어차고 있는 것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어째, 좀 구석진 것 같은데……"

"이쯤이 좋소이다. 공연히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가 해 뜨고 나서 세도가 행차라도 뜨면 사정없이 쫓겨나오. 그러면 그때쯤엔 저어기 담장 밖의 채마밭으로 가서 과장 안으로 다시는 못 들어오게 되지요."

"어떻게 이리도 형편을 꿰고 계시우?"

서일수가 묻자 김만복은 아직 얼이 빠진 채 숨을 고르고 앉아 있는 선비들 쪽을 힐끗 쳐다보고는 싱긋 웃고 말했다.

"과시야말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 큰돈을 만져볼 대목 중의 대목입니다. 시골 양반들 한을 풀어주니 우리도 좋은 일 하는 셈이지요."

"그리도 물정을 잘 아는 사람이 그래 무과라도 한번 해보지 그랬소?"

서일수는 일부러 말을 시키듯 한번 까짜올려 보는 것이었는데 만복이 그를 바라보며 역시 어르는 듯 되받았다.

"배오개 지전에서 서수 거벽으로 내세웠다면 한번 응시해볼 만한 분은 왜 이러고 있나요?"

"그야…… 쓰러질 나무에 새둥지 틀 일 있소?"

"날지 못할 새는 아니시구?"

두 사람은 서로를 희롱하다 껄껄 웃어버렸다. 유산을 펴고 앉은 선비들은 피곤에 겨워 앉은 채로 졸고 있고 접꾼들도 돗자리 귀퉁이에 앉아 있거나 다른 자리의 안면 있는 자들과 어울려 시끌벅적 떠들어대는데 장터와 다를 바 없었다. 해가 뜨고 새끼 그물로 막아놓은 안쪽에는 높다란 삼층 단이 차려 있고 그 위에 거대한 차일이 펼쳐졌는데 아래로는 시관들이 앉을 자리와 책상이 가지런히 놓였다. 먼저 수직 군사들이 들어와 열을 지어 벌여서는 품이 곧 시작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졸고 있던 선비가 일어나 두리번거리며 접꾼들을 향하여 물었다.

"오늘 임금님께서 친림하는가?"

"아니외다. 식년시라 삼정승 중의 한 분이 나오십니다."

이신통이 모두 처음 겪는 일이라 장막 위로 고개를 빼고 사방을 둘러보고는 물었다.

"곧 시작하는 거요?"

"아직 멀었소. 아침 요기라도 해야지요."

좌중의 사람들은 접꾼들의 말에 어쩐지 잊고 있다가 더욱 시장기가 돌면서 속으로 그렇지 아침은 먹어야지 하고들 생각하였다. 신통이 더욱 궁금하여 다시 묻는다.

"헌데 예서 무슨 수로 아침을 먹는단 말요?"

"기다려 보십시오. 다 수가 나게 되어 있습죠."

또한 한참을 기다려서 해가 높직이 뜬 시각에 수십 명의 남녀가 머리에 광주리 이고 등에 지게를 지고서 홍화문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혼잡을 피하기 위해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장막과 장막 사이를 돌아다니며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접꾼들은 그들을 부르고 여기 먼저 오라고 외치고 그런 소란이 없었다. 그들 대부분이 누렁다리며 배오개 인근에서 온 장사치들이었다.

김만복 일행의 접 근처에도 장사치가 들어서는데 아낙네가 내려놓은 광주리에는 인절미에 절편이며 시루떡이 그득하고 남정네의 지게에는 잘 익은 탁주가 찰랑찰랑 채워진 술동이가 놓였다. 사내는 또한 지게 꼭대기 세장 목에 조롱박을 네댓 개 매달아 두었다. 접꾼이 열이요 대작 서수가 넷에 선비가 세 사람이니 대식구를 만난 셈이고, 바로 한 발짝 옆과 앞뒤에 어슷비슷한 장막들이 있으니 커다란 주막에 손님 가득한 형국이 되었다. 모두들 조롱박에 탁주를 퍼마시고 한편으로는 떡으로 요기를 하는데, 그들 부부도 대목이라 술과 떡을 저자보다 훨씬 비싸게 팔아치운다. 과장이 어디라고 감히 장사꾼이 들어올 수 있겠냐마는 수문장 이하 수직 군사들도 인정전깨나 받아먹었고 모두 한통속인데다 세시풍속이 되어버렸으니 모른 척하는 셈이었다.

수만 명이 과장에 간신히 들어온 셈이고, 다시 수만 명은 입장도 못 하여 함춘원이나 경모궁 앞에서 떼를 지어 혹시 과장에 남는 자리나 없을까 요행수를 바라거나, 아직도 별다른 묘책을 찾지 못하고 도성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 판이었다. 장중한 징소리가 울리자 그물망 너머 단 위에 사모관대 차림의 정승이 들어서고 역시 관복을 입은 시관들이 들어와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다시 한 번 징이 울리고 시제(試題)가 현제판에 내걸리자 일시에 앞줄에서부터 소란이 일어나며, 복만이 다짜고짜 이신통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자아, 얼른 따라오우."

신통이 얼결에 일어서니 복만의 선도에 따라 접꾼 둘이 뒤로 호위하고 따라나섰다. 둘째 줄이었으니 구석이라 하여도 제법 빨리 나섰는데도 현제판 부근이 벌써 모여든 사람들로 버글거렸다. 그들은 사람들 틈에 끼어 밀치고 헤집으며 앞으로 나아갔고, 신통이 시제를 읽는데 문장이 제법 길었다. 만복이가 품에서 작은 병에 담아온 먹물을 세필에 찍어서 종이쪽지와 함께 신통에게 건넨다. 장정 셋이 팔을 쳐들어 신통을 옹위하는 동안 그는 몇 줄의 시제를 초서로 휘갈겨 베낀다. 시제를 옮겨 적은 신통이 붓을 떼자 그들은 다시 그를 둘러싸고 인파를 빠져나온다. 나오면서 보니 이미 드넓은 과장 전체가 솥단지의 끓는 물처럼 출렁대고 있었다. 이들 모두가 같은 순간에 시제를 적어 오려는 것이었다.

자기네 접의 장막 안으로 돌아와 이신통은 선비들과 옆의 대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적어 왔던 시제를 간필로 다시 깨끗하게 정리하였다. 이제부터 접꾼들은 장막 안에 잡인이 얼씬대지 못하도록 둘러싸고 지키는 한편, 서수와 대작들은 행담에 지녀온 참고서적들을 꺼내어 시와 부를 지어내고 책문(策問)을 써낸다. 서일수가 먼저 시를 읊고 시지에 적었고 신통은 부를 적어 나갔으며, 가장 중요하다는 책문이란 국가의 정책을 논설로 써내야 하는지라 시간이 제법 걸리게 되어 있었다. 서일수와 신통은 주제를 놓고 속삭이는 소리로 잠시 논의하니 허두, 중두, 축조를 어떻게 열어 나갈지 그리고 설폐와 구폐에서 비판을 하고는 편종으로 결론을 내어 마무리하기까지 큰 구성이 완료되었다. 이신통으로서는 공부하면서 골백번 써본 적이 있었으며, 옆에 고증과 참고할 책까지 구비되어 있어 줄줄 써나가다 막히거나 미흡하면 선인의 문장과 논점을 확인하니 그야말로 용이 날개를 단 격이었다. 한 식경이 지나서 그들이 맡았던 선비의 시지가 모두 완성이 되었고 시골 선비는 시지를 들고 읽어보며 새삼 탄복하였다.

"어허, 글에 법도가 정연하고 문사도 화려하니, 실로 웅문거필이요!"

옆자리의 이웃 접에서는 서수와 대작 한 쌍이 두 사람의 거자를 맡았으니 아직도 끙끙대며 반도 끝내지 못했는데, 이쪽이 벌써 끝나자 만복이는 흔쾌하여 그들에게 재촉했다.

", 얼른 조정(早呈)해야 하오. 우리가 앞자리를 차지한 것은 시제를 남보다 먼저 보는 것과, 시지를 빨리 내기 위함이라오."

거자의 호패에 적힌 성명과 거주지를 적은 시지를 이신통의 손에 들려 아까처럼 접꾼들이 둘러싸고 그물망 앞으로 달려가 시지를 받는 관원에게 내밀자, 그는 백 장이 될 때까지 모으고 기다렸다가 뒷전에 기다리고 있는 시관 앞에 바쳤다. 질세라 늦을세라 구름같이 모여든 거자들이 그물망 앞에서 내미는 시지가 그야말로 눈처럼 날렸다.

 

즉일방방(卽日放榜)이라, 과거를 본 당일 퇴청 시간 직전에 장원과 급제자의 이름을 궁문 앞에 방으로 내걸어 발표하게 되어있어, 시관들이 삼사만 장의 시지를 일일이 읽어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시지를 먼저 내야 유리하고 적어도 오백 장 안에는 들어야 작대기 비점이라도 받아본다는 형편이었다. 시관들은 먼저 글씨를 보아 서투르면 읽어볼 필요도 없이 작대기를 주욱 그어 버리거나 엇갈려서 가위를 긋고 비점을 주어 밀쳐 버리는데, 그렇게 쌓인 것이 수백 장이 되면 담당 관원이 짐 치우듯 내갔다. 몇 문장 읽었는데 또한 오자가 보이고 격식에 어긋나면 다시 작대기나 가위요, 좀 잘된 것은 동그라미로 관주를 치고, 그중 잘된 것은 겹동그라미 두 개로 알관주를 쳐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와 부와 책에 알관주 세 개만 받으면 합격인 셈이었다. 장원급제는 이들 알관주 세 개를 골고루 받은 자 중에서 다시 시관 모두의 알관주 셋이 겹친 여섯을 받아야 했고 최종적으로 정승의 낙점을 얻어야 했다.

문과에서 서른세 명을 뽑고, 생원 백 명, 진사 백 명을 뽑던 것이다. 대개 이들 서른세 명의 문과 합격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들 가운데서 장원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생원 진사도 양반의 반열에 오르는 확실한 직위라서 연줄이 좋으면 실직을 간혹 얻기도 하지만, 향리에 내려가면 지방 수령의 보좌역이나 자문 노릇을 할 수가 있었으며, 향소의 어른으로 또는 향교의 책임자로 행세할 수가 있었다. 소과의 초시만 하여도 군역이 면제되고 양반 대접을 받는데 하물며 진사 생원이면 하늘의 별을 따는 것이나 한가지였다.

일행은 아직도 사람으로 가득한 홍화문 앞을 빠져나와 누렁다리를 건너 지전이 늘어선 길로 내려왔고 때는 바야흐로 중화참이었다. 지전으로 들어서니 전방에 앉았던 주인이 일행을 맞았다.

"그래, 샌님, 어떻습디까? 우리 접의 준비가 앞뒤 물샐틈없이 잘 되었겠지요?"

"하이고, 나 혼자 갔더라면 과장에 입장도 못 했을 거요. 소문은 들었지만 이런 난리굿일 줄이야."

김만복이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진사는 따 놓은 당상이외다. 이분들의 실력과 솜씨라면 장원급제인들 왜 못 하겠소? 자아, 우리는 퇴청 시각까지 기다렸다가 방 붙은 연후에 다시 오지요."

만복의 말인즉슨 합격된 뒤의 뒷돈 사례를 잊지 말라는 다짐이기도 했을 것이다. 서일수도 만복이와 한잔 생각이 있었는지 일어났다.

"우리도 그때쯤 오겠소이다."

신통은 어젯밤부터 겪은 일을 돌이켜볼수록 엄청난 일인데도, 분노라든가 슬픈 감정은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무엇인가 마음을 지탱하고 있던 것들이 일시에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는 일행들을 따라 배오개의 뒷골목 피맛골로 걸어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허허 하면서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과시가 파장이 되자 한양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고 그렇게 들끓던 사람들도 모두 각자의 고장으로 흩어져 갔다. 서일수와 신통은 제법 큰돈이 생겼는데, 이번에 상주서 왔다는 시골 선비가 진사에 합격되어 가문의 한을 풀었고 약속한 뒷돈도 주었던 터였다. 지전 주인에게 소개료로 각자 사십 냥 씩을 떼어주고도 백육십 냥이 생긴 셈이었다. 아마도 선비는 지전 소개료에 서수 대작과 접꾼들 동원 비용을 합하여 칠팔백 냥을 썼을 거였다. 그러나 수천 냥을 써도 운이 없으면 초시도 못 한다는 사례에 비하면 그는 그래도 천운을 만난 격이었다. 이신통은 그 하루 동안에 과거라든가 벼슬이라든가 하는 짓에 대하여 원래부터 마음에 없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포한과 원망의 뿌리가 남아 있었건만, 하루아침에 웃음거리가 되면서 시원하게 날려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서일수의 언제나 유쾌하고 한 발 비켜서 있는 듯한 태도를 닮아가고 있었다. 서 씨는 세태에 대하여 비분강개하거나 정면으로 맞서려 하지 않고, 오히려 시정 왈짜와 다름없이 아랫것들과 한통속이 되어 풍도 치고 능청스럽게 덜미도 잡으면서 휘돌아 나아갔다. 과시가 끝난 며칠 후에 신통은 서일수와 술을 마시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번 크게 웃고 나니 세상사가 바뀌어버렸네요!"

"자네, 동작나루 아나?"

", 과천 지나 서울 올 적에 거기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지요."

"옛적 야담에 보니 재미있는 얘기가 있더구먼. 노량진에는 무당이 많고 동작나루와 사당골에는 연희광대패가 많이 산다네. 동작나루에 탈광대 놀음으로 먹고사는 부부가 있었지. 때는 이른 봄이었는데 광대 부부가 살얼음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고 있었네. 남편과 아내는 탈을 벗지 않고 서로 희롱하며 가다가 갑자기 아내가 얼음이 꺼지면서 빠져버렸다네. 광대는 탈을 벗을 겨를도 없이 발을 동동 구르며 얼음 위에서 통곡하였겠다. 웃는 탈을 쓴 광대가 울며불며 두 팔을 허우적거리고 강변으로 나오는데, 구경하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숨막히도록 웃었다지. 탈은 웃고 그 속에선 우는데 얼굴이 둘이로다, 뭐 그런 이야기라네."

서일수와 신통은 함께 의논하여 처소를 바꾸기로 작정했다. 돈냥도 있겠다, 낯선 사람들과 뒤섞여 잠자고 먹고 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려니와, 며칠도 아니고 오래 머물 바에는 도성 안에 방을 얻자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김 별장에게 부탁하면 도깨비 기왓장 엎듯이 해치울 텐데."

서일수가 말했고 신통이도 맞장구를 친다.

"만복이 형님이라면 도성 안을 참빗 새새처럼 훤히 알 테죠."

두 사람은 오후 느지막이 종루로 나와서 초교를 지나 이간수문 못 미쳐서 있는 하도감으로 찾아갔다. 예전 훈련도감 이하 다섯 군영제를 폐지하고 무위영과 장용영의 두 군영으로 개편한 것이 한 해 전의 일이었다. 무위영이 왕궁을 지키는 군대였다면 장용영은 도성을 지키는 군대였는데 무위영이 하도감에 있었다. 하도감의 삼문 앞에 이르니 대문 양쪽에 털벙거지 쓰고 검은 더그레를 입은 차림새는 옛날의 복색인데 긴 창날 꽂은 양총을 거총한 자세로 군인 두 사람이 지키고 서 있었다. 서일수가 접근하여 군인에게 물었다.

"사람 좀 만나러 왔소."

"누구요?"

"김만복 별장이오."

"안에 작청(作廳)으로 가보시오."

그들이 옆문으로 들어가 긴 행랑을 지나니 작청이 나오는데 군교 별장인 듯한 사람과 군졸 둘이 근무 중이었다. 김만복의 이름을 대자 근무 중이던 군교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방금 우리와 교대하고 들어갔습니다. 곧 불러 드리지요. 누구시라고 전할까요?"

"서일수라고 합니다."

그가 눈짓을 하자 군졸이 더그레 자락을 날리며 달려갔고 잠시 후에 군영의 문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김만복이 보였다. 그래도 궁성의 수직 군사라 복장은 깨끗하여 바지에 행전 치고, 미투리가 아닌 검정 갖신 신고, 군졸의 더그레 대신 무릎치기 걸치고, 붉은 띠와 병부를 달았는데 붉은 상모 달린 전립을 썼다.

"허어, 아우님이 군복을 입으니 이렇게 풍채가 나는구려."

"놀리지 마시우."

세 사람은 그대로 하도감 삼문 밖으로 나오는데 신통이 물었다.

"형님, 이대루 퇴청하는 거요?"

"그럼 어째, 까짓 급료도 안 나오는 판에 퇴청 시각 지킬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만복은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서일수가 말했다."

"어디 좋은 데 있으면 앞장서시게."

"제미럴, 좋은 데야 형님이 알겠지. 우리 같은 미관말직이야 탁배기 한 동이에 도야지 수육이면 평안감사 따로 없수."

"거 좋지."

두 사람이 걸음을 늦추니 저절로 김만복이 앞장을 서게 되고 그는 청계천을 따라서 마전교 쪽으로 향하였다. 원래 다리 아래쪽에 말과 소나 돼지 같은 덩치 큰 가축들을 팔고 사는 장이 서는지라, 인근에는 육것을 안주로 하여 술을 파는 모주집이 줄지어 있었다. 그가 납죽 엎드린 것 같은 초가집의 삽작을 밀고 들어가며 걸걸한 목소리로 외친다.

"주모, 나 왔소."

부엌에서 몸집이 절집 배흘림기둥 같은 중늙은이 아낙이 상반신을 내밀더니 그를 보고는 픽 웃으며 대꾸했다.

"아이구, 젖 강아지 뒤축 문다구 어린 것이 주모가 뭐냐? 고모 이모 숙모 다 빼놓구. 그러구 성이 나 씨여? 턱없이 나라구 들이대니, 뭣 모르는 사람은 재작년 그러께 바람나서 집 나갔던 서방인줄 알겠다 이눔아."

"아휴, 저 여편네, 죽지두 않구 입담이 펄펄 나네 날어."

서일수와 신통은 그들의 던지고 받는 수작을 재미있게 듣고 서 있었다.

"뭘 그리 말뚝마냥 우두커니 서 있어? 오줌 누려고 저어 뒷간 장군에다 갈겨야지, 여기서 쌌다간 단칼에 쳐서 안주로 상에 내갈 거여, 깔깔깔."

"온 제미랄, 더 이상 얼쩡거리면 송이고 탱자고 사정없이 떼이겠군. 어서 어서 들어가우."

김만복은 질렸다는 듯이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초가삼간 방 두 칸인데 봉당 건너 방에 들어가 앉으니 그래도 정갈하고 뽀송뽀송 마른 삿자리가 깔렸다. 아예 상 두개를 방 가운데 펴 두었는데 틈이 보일 정도로 대충 널판자를 대어 맞춘 간이 술상이었다. 우선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내어 한 대씩 붙여 무는데 만복이가 서울 왈짜답게 성냥을 꺼내어 시척 하고 불을 붙여주었다. 이신통이도 연초전의 전기수로 드나드는 동안에 담배를 배워서 무료할 때마다 봉노에서 한 죽씩 태우더니 그예 입에 붙고 말았다. 김만복이 서울의 알짜배기 경아리라 눈치 빠르게 그들의 느닷없는 훈련도감 방문을 짚었다.

"헌데 과시도 끝났겠다 무슨 접을 꾸리자는 일도 아니겠고…… 공연히 술 먹자고 무싯날에 찾아올 리도 없으니, 내게 부탁할 일이 대체 무엇이오?"

"아따 눈치하고는, 술이 몇 순배 돌아간 뒤에 슬슬 꺼내려고 했더니 과연 서울 왈짜가 빠르군. 그냥 놀러오기 멋쩍어서 일거리를 가져왔는데, 우리 방이나 좀 얻어 주소."

서일수가 말하자 만복은 신통을 슬쩍 돌아보고 나서 농을 던진다.

"둘이 신접살림 차리시게?"

"지금 여덟 놈이 살림 차리고 있수. 내가 기중 연하라서 왕십리를 어느 쪽으로 돌릴까 밤마다 걱정이라오."

신통이 봉놋방 신세를 빗대어 무덤덤하게 대꾸하니 두 사람이 어이없다는 듯 천장을 바라보며 웃었다.

"어럽쇼, 성균관 개구리는 면했네."

서일수가 신통의 곁말 대꾸를 은근히 칭찬했고 김만복이도 한통속으로 거들었다.

"파리 위에 날라리가 있고, 소리 없는 방귀가 훨씬 쎄다구 하든데. 이 사람을 성님이 잘 훈도하면 운종가에 거치적거릴 상대가 없을 듯하오만."

무엇인가 못된 장난을 함께 벌이고 나면 은연중에 짝패가 되는 법이라 주고받는 곁말도 손발이 척척 맞아 돌아갔다. 만복은 우선 말발을 맞춰보고 나더니 그제야 본론으로 들어간다.

"좋기는 도성 안이 여러모로 편리하고, 얌전하고 조용하기로는 남산골이지만, 두 양반이 한양에서 무슨 놀음을 하려는지 내가 알 수 있소?"

"그 어디 서린방 가까운 쪽은 어떠우?"

"에그, 거긴 못쓰우. 서슬 퍼런 의금부며 전옥서가 있는 곳인데 괜히 목자 불량한 옥리 나장들과 시비 붙었다가 경치기 십상이우."

하더니 잠깐 대꾸가 없는 서일수를 찬찬히 살피며 만복이 던져본다.

"거 혹시 누군가 경치고 있는감?"

서일수는 빙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김만복보다도 신통이 더욱 놀랬다. 그가 한양에 와서 도모할 일이 있다더니 이제 속내가 나오는 모양이라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내가 의리상 옥바라지할 사람이 있어서…… 혹시 서린 전옥서 옥사정 중에 아는 이라도 있소?"

"그야 옥리도 여러 놈 되고 옥사정도 두어 놈 알지요. 헌데 염라국 귀졸 야차도 돈에는 보살로 변한다는 소리 못 들었소? 인정전을 좀 쓰면 면회에 사식 바라지에 술과 고기며 별의별 것을 다 들이고 낼 수 있다오."

김만복이 자신 있게 돌아가는 물정을 말하더니 제안을 하였다.

"운종가나 종루 배오개나 모두 복잡한 저잣거리라 사람이 많으니 좋을 것 같지만, 보는 눈도 그만큼 많고 기찰도 심한 곳이지요."

"사람이 먹고 잠자고 사는 데에는 세도가도 없고 가난한 선비가 많이 사는 남부 목멱산 아랫동네들이 좋으나 그 또한 타지 사람은 눈에 띄기 쉽소이다. 내 보기엔 중부에 있지만 태평방 어름이 적당할 듯하오. 거기 구리개 약전 거리도 있고 혜민서가 있으니 도성 밖에서도 아픈 백성들이 몰려오는 곳이며, 악공들의 장악원도 있고 선혜청이 가까워 지방 사람들도 볼일 보러 많이 오는 곳이라, 중인과 상민들에 하천들까지 잡색이 섞여 있는 동네라오. 내가 태평방에 아늑한 방 한 칸을 마련해 드리리다."

담배 한 죽 태우는 사이에 서일수의 입 떼기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방 구하기와 지인의 옥바라지 할 일 등도 자연스럽게 풀려서,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은 셈이 되었다.

"아따, 너구리 피물 돈으루 술값 내려나? 연기 좀 고만 피워라 이놈들아."

주모는 삶은 돼지 뒷다리를 두툼한 나무 도마 위에 얹어서 소금과 함께 들여놓았고 칼이며 술잔이며를 던져 주고는 맨 나중에 잎사귀가 시퍼런 김치 한 사발을 상 위에 콱 내려놓으며 만복이에게 일렀다.

"느이 애비 누이가 이렇게 늙마에 힘쓰는데 젊은 놈이 퍼질러 앉아서 받아처먹기만 하겠느냐? 술동이 좀 들구 와봐라."

"고모 삼지 말구 장모 삼아야겠네. 그래야 술두 먹구 딸년두 먹지."

"니가 제법 별장이랍시고 붉은 상모 전립 쓰고 으스대지만, 급료도 못 받는 터수에 누굴 먹겠다고? 이놈아, 밥심이 없으면 좆심도 가는 거여!"

"그래, 내 이 집구석에 외상 그은 적 있나?"

"계집질은 거저가 있어도 사내가 술로 빈대 잡으면 패가망신이지."

주모 아낙네가 엄지손가락으로 주욱 내리긋는 시늉을 하고는 돌아섰고, 김만복이는 한강 물 거슬러 떠먹으며 자랐다지만 입심에 당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술동이를 들고 왔다. 두툼한 비계와 살코기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식칼로 듬성듬성 베어 소금에 찍어서는 시퍼런 김치 잎에 싸서 먹고 마시는데 그런 호협(豪俠)이 따로 없었다.

며칠 뒤에 김만복이 남대문 밖 주막거리로 나와 그들을 데리고 태평방으로 갔는데 약방이 몰려 있는 구리개 뒷골목이었다. 바로 지척에 숭례문 쪽으로 선혜청이 있었고 광통교를 건너면 서린 전옥서였다. 뒷골목은 약전의 살림집과 창고가 많은 곳으로 김만복이 안내한 집은 창고에 붙은 수직 방이었다. 커다란 자물통이 달린 나무 문짝 옆에 툇마루가 달린 방 한 칸이 달렸는데 약전의 곁꾼이 와서 판자 덧문을 열고 띠살문을 열자 제법 널찍한 방이 보였다. 비록 초가였지만 전체를 창고로 쓰는 곳이라 살림집이 아니라서 주인이나 안방에 내외를 가릴 필요도 없었으니 두 홀아비가 기거하며 드나들기에 편해 보였다. 김만복이가 어련히 잘 알아서 구했을까마는 위치도 적당했는데 다만 마땅히 취사를 할 데가 없는 것이 흠이었다. 그런 눈치를 알아챘는지 만복이가 방을 살피고 돌아서다가 말했다.

"사내들이 찬거리 사들여다 밥 짓고 물 긷고 빨래하느니, 기생 서방이 되거나 주인을 정하는 것이 백번 옳지요."

늙수그레한 과수댁이 저녁에만 내외술집을 하는 곳이 명례방에 있었는데 김만복이 모셨던 선전관의 집이었다. 남편은 죽고 딸을 여윈 뒤에 과수댁은 자기 또래의 하녀와 함께 생계로 내외술집을 하는 한편 남별영의 군교들에게서 미포를 받고 밥을 붙여주고 있었다. 조촐한 기와집에 문간방이 두 칸 있어서 저녁에는 그야말로 팔뚝으로 통영반 술상을 들여주고 내가는 내외술집을 했고, 아침 점심으로 여염집 상밥을 팔았다. 서일수와 이신통은 한 달치로 미리 밥값을 내고 그 집에서 하루 두 끼를 대어 먹기로 하였으며 빨래도 맡기기로 정하였다.

거처할 집을 정하고 며칠 후에 서일수와 이신통은 피맛골의 한 주점에서 김만복과 그가 데려온 전옥서의 옥사정을 만났다. 옥사정은 검은 더그레를 벗고 테 좁은 흑립에 덧저고리를 걸치고 있어서 관원이 아니라 시정의 장사꾼처럼 보였다. 수염에 희끗희끗 흰 털이 보이는 것으로 그가 김만복보다는 나이가 십 년은 더 들어 보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술잔을 돌린 뒤에 서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친척뻘 되는 아우가 지금 경치고 있어서 뵙자고 하였소만……"

"본향이 어디고 이름은 무엇이며 지은 죄는 뭐랍디까?"

옥사정은 이런 자리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머리꼬리 자르고 대뜸 물었고 서일수도 일단 마음이 편해져서 말한다.

"이름은 박도희라 하고 본향은 충청도 덕산이며 사문난적 죄에 연루되었다오."

옥사정이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이 있지요. 동범으로 잡힌 자가 몇 사람 더 되는 것 같소만. 한 달 전에 의금부에서 넘어온 건인데 그 수괴는 곧 참형 효수될 거외다. 박 아무개란 사람은 우연히 모임에 갔다가 섞여서 체포되었을 뿐 자기는 죄가 없다고 지금도 주장하고 있지요. 다만, 십여 명의 사람들 중에 글을 아는 자가 수괴 이외에 두어 명인데 박 씨는 경서를 두루 읽은 자라 금부에서도 의심하고 있다고 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김만복이 끼어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박 아무가 지금 어떤 형을 받았느냐 이거지. 무슨 콩이네 팥이네 하구 있나?"

"자네두 잘 알지 않나? 원래 그런 죄란 혹세무민한 수괴는 엄형에 처하고, 동조하여 부화뇌동한 자들은 태형 이후에 대개는 유배 보내는 걸로 끝난다네. 임술 난리 이후로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전국 팔도에서 민란과 화적 출몰이 그치지 않는 터에 지난 오 년간은 난민의 출몰이 더 극성해지구 있다네. 좌우 포도청 옥은 이미 죄수로 가득 찼고, 서린 전옥서에도 작년부터 지연된 송사로 옥내가 터져나갈 지경이지. 그래서 이미 지방 관아에다 역적죄라도 양반이 아니면 민란 부류는 압송하지 말고 현지에서 처결하도록 하명이 있었다네."

만복이 이번에는 서일수에게 물었다.

"그 사람이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요?"

"글쎄 나야 자세한 건 모르고, 정감록인가 뭔가 잘 안다는 사람이 있어서 쟁론하러 갔다는 모양이든데. 아무튼 공것 바라면 탈이 나는 게지."

서일수의 말에 만복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 정감록이 언제 적 얘긴가. 뒤집어진다구 백 년을 떠들어도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디다. 형님 염려 놓으슈, 그런 정도의 죄라면 유언비어로 관가에서 곤장 맞고 나온 놈들이 쌔고 깔렸소."

만복의 말에 옥사정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마 변방 유배 정도로 처결될 걸세."

"그 사람 고향에서 변방이라면 가까이는 남도 바닷가요 멀어봤자 제주쯤 떨어지겠네. 그냥 두었다가 유배 길에 나장에게 돈 좀 주고 빼내면 되겠군."

그 자리에서 당장 내일이라도 우선 전옥서에 면회를 가기로 하고 옥사정과 관문 앞에서 만나기로 약조가 되었다. 서일수가 만복의 충고대로 수십 냥의 인정전을 옥사정에게 건넨 것은 물론이었다. 이튿날 일수와 신통이 아침 먹고 서린방 전옥서로 찾아가니 관문 앞에 죄수들의 바라지를 하려는 가족들이 하얗게 늘어섰다. 두 사람이 두리번거리는데 어느 틈에 그들 곁으로 다가온 옥사정이 가만히 말했다.

"날 따라오슈."

관문 앞에 버티고 섰던 옥졸은 저희 상관과 함께 들어가는 두 사람을 곁눈질로 바라볼 뿐 말도 걸지 않는다. 정대문의 왼편에는 사령청(使令廳)이 여염의 행랑처럼 담에 잇대어 있고 오른쪽에 또한 담이 막아섰는데 옆으로 작은 쪽문이 있었다. 마당 건너 정면에 일직선으로 담이 가로막혔고 가운데 정문이 있고 왼편은 서리방(書吏房)과 그 옆의 중문 안으로는 주부방(主簿房)이 있었다. 담장의 오른쪽 끝에는 옥리들이 감옥 안으로 드나드는 쪽문이 있었다. 옥사정은 두 사람을 데리고 대문 옆의 쪽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바깥담에 잇대어진 칸막이가 여러 칸 있으니 죄수의 식구들이 사식을 넣어주는 곳이었다. 담의 끝에는 따로 양반들이나 벼슬 살던 죄인들이 가족과 만나는 제법 널찍한 방과 대청이 있었다. 옥사정은 서일수와 이신통을 대청에 올라앉게 하고는 은근하게 말했다.

"내가 이미 위에 다 말해 두었으니 염려 마시오. 내 얼른 가서 박 서방을 데리고 나오리다."

두 사람이 앉은 대청 앞으로 마당 건너편에 하루 두 끼의 밥을 지급하는 감옥의 주방이 보였다. 주방채 옆의 쪽문을 열자마자 바로 앞에 옥리들의 수직소가 있고 너른 안마당을 담장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왼편이 남옥이오 오른편이 여옥이었다. 원옥(圓獄)이라 하여 옥사 주위에 다시 두 길이 넘는 담을 둥글게 쳐놓았으니 관문에서부터 겹겹이 담으로 둘러쳐진 셈이었다. 옥사정이 남옥의 문에 이르자 지켜 섰던 옥리가 문을 열어주었고 둥근 담 안에 들어서니 길게 일자로 지어진 옥사 네 채가 둥근 담을 등지고 두 팔을 벌린 듯 늘어서 있었다. 그 모두가 소수의 인원으로 많은 죄수들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도록 지은 것이었다. 규모가 지방 관아의 옥이나 감영 옥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중하고 컸다. 옥사의 하반(下半)은 두꺼운 판벽이고 상반(上半)은 한줌 굵기의 통나무 간살을 끼워 통기도 되고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죄수들 쪽에서는 겨울철에 좀 춥기는 하겠으나 누워서도 하늘의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죄수들은 목에 칼을 쓰고 발에는 차꼬(足枷)를 차고 느지막한 아침 겸 점심을 먹고는 정오경에는 순서에 따라 원옥의 마당에 나와 햇볕을 쬘 수 있었다. 죄목에 따라 옥사를 달리 하였는데 강절도나 살인 등 흉악범의 옥사가 가운데 있고, 좌측에는 뇌물 받고 포흠 진 관리나 빚쟁이 좀도둑 등 각종 이재범(利財犯) 등이 있으며, 우측에는 역적(逆賊) 죄인이나 사학(邪學) 등 강상범(綱常犯)들의 옥사였고 그 옆의 맨 끝 칸은 사형수와 교수(絞首) 칸이 나뉘어 있었고 징벌 칸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재범 옥사는 돈이 돌고 가족들과의 면회도 잦아서 죄수들 행색도 깨끗하고 얼굴에 윤기가 돌았건만, 흉악범 옥사는 악형을 받고 들어와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상처가 썩는데다 굶주림까지 겹쳐서 살아 있는 시체들 같다고 하였다. 눈을 번히 뜨고 있건만 기동을 못하게 되면 병사했다 보고하고 그대로 맨 끝 옥사의 징벌방이자 시체방 칸에 던져 넣어버렸다. 방치해 두었다가 죽으면 한밤중에 쓰레기장에서 소각시켜버린다. 다만 강상범 옥사는 차꼬만 채우지 않았을 뿐 흉악범의 옥사처럼 규율이 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옥사정은 수직하던 옥졸과 함께 역적 강상범 옥사로 다가가서 갇힌 죄수들을 둘러보았다.

"박도희가 누군가?"

칼을 쓰고 앉았던 자들 중에 누군가가 제 얼굴 옆까지 간신히 손을 올려 보였다. 옥사정이 눈짓하니 옥리가 간살 문을 열고 그의 칼을 풀어준 다음에 부축하여 데리고 나왔다. 상투는 이미 풀어져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어깨를 덮었는데 세수도 못한 채 새카만 얼굴 가운데서 눈만 반짝였다. 그는 마당으로 나서자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옥사정이 죄수를 데리고 원옥을 나와 다시 감옥 안담의 쪽문을 열고 면회소로 나오자 대청에 앉았던 서일수와 이신통은 얼결에 일어서서 그들을 맞았다. 서일수가 신발도 채 신지 못한 채 섬돌 아래로 뛰어 내려가 죄수의 두 손을 잡았다.

"박 서방, 이게 무슨 횡액인고."

"형님이 여긴 어찌 오셨소?"

죄수도 그의 손을 마주 잡더니 잠시 우는 모양이었다. 옥사정은 마루 끝에 묵묵히 앉아있었고 서일수는 박도희를 이끌고 대청에 올라가 그의 손을 잡은 채 잠시 말을 잊었고 이신통은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서일수가 그에게 물었다.

"처결은 어찌 나왔나?"

"삼복(三覆) 중에 두 번 받았으니 이제 마지막 처결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잘 되겠지요."

이신통이 그를 바라보니 비록 피골이 상접하였으나 눈빛이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 쉽게 아프거나 죽지는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신통을 향하여 슬쩍 고갯짓으로 인사를 전하였다.

"여러 말 할 거 없이 우선 옷부터 좀 갈아입고 뭘 좀 먹어야지."

이신통은 서일수의 보퉁이를 풀어서 무명 저고리와 바지며 속곳을 내주었고, 박도희는 서슴치 않고 여러 군데 찢어지고 옷고름도 떨어져나간 저고리와, 가랑이에 검은 피딱지가 말라붙은 바지도 벗고, 알몸이 되었다가 속곳 걸치고 새 옷을 입었다.

서일수가 옥사정을 향하여 말했다.

"여보게, 뭐 음식이라두 시켜야겠네."

"지금은 낮이라 술은 안 되우."

"허어, 육것을 좀 먹여야 하겠는데 술 없이 넘어가겠나."

옥사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고는 그들에게 말했다.

"방으루 들어가시우. 양반네들이 이용하는 면회처지만 뭐 어떡하겠수? 아무튼 옥사를 옮겨야 할 거요."

전옥서 앞의 밥집에서 닭백숙 한 마리와 막걸리를 시켜다 박도희를 먹이는데 한 달이 넘도록 전옥서의 소금 주먹밥으로 연명했던 그는 닭 한 마리에 죽 두어 그릇에 막걸리 한 병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서일수가 자모전가에서 바꿔온 백 냥짜리 어음을 옥사정에게 내주며 말했다.

"전옥 이하 다른 옥사정들과 나누어 쓰게나. 오늘 당장 옥사를 이재범 칸으로 옮기고 내가 밥집을 정하여 돈을 주고 갈 터이니 사식을 넣도록 해주소."

옥사정은 어음을 접어 얼른 소매 자락 안에 감추어 넣고는 연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만복이 얼굴을 봐서라도 내가 이 돈을 받아서는 안 되겠으나, 위아래로 보는 눈이 많아 입막음하려면 하는 수 없소이다. 오늘 당장에 옥사를 옮기고 칼도 차꼬도 채우지 않게 하겠으니 염려 놓으십시오."

그들이 원옥으로 돌아가기 전에 서일수는 박도희의 팔을 잡아당겨 귓속말로 일러주었다.

"육신은 일단 편해지겠으니 건강이나 잘 챙기도록 하게. 이제 결심(結審)이 떨어지면 모두들 유배형이라 하는데 나중 일은 그때 가서 걱정하도록 하지."

"형님이 밖에서 해주셨으면 하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게 또 뭔가?"

"애오개 주막거리에 쌍버드나무집이라고 있는데 거기 제 앞으로 짐을 맡겨 두었을 것입니다. 그 집 주인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합디다."

"압송당해왔을 텐데 그건 누가 맡겨두었다든가?"

"나중 잡혀 온 자들이 일러주어 그렇게 알 뿐이외다. 단양에서 도인을 보냈다고 합니다. 저와 만나려다 어긋난 것이겠지요."

서일수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박도희는 옥사정을 따라 감옥 안으로 되돌아갔다. 그를 입감시키고 되돌아온 옥사정과 함께 서일수와 이신통은 전옥서에서 나왔고 정문 앞에서 작별하기 전에 일수는 옥사정에게 말했다.

"내가 날마다 올 수는 없겠지만 사나흘에 한 번씩은 와볼 작정일세. 어려운 살림에 큰돈을 들였으니 결심될 때까지 잘 부탁하네."

"여부가 있겠소? 이제 탈옥이야 어렵겠지만 제 집같이 지낼 수는 있을 겁니다."

그들은 전옥서 앞에 즐비한 주막이며 밥집을 둘러보고는 그중 한 집에 사식을 당부하니 이미 삼십여 명의 죄수들이 밥을 붙여먹고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옥의 규칙대로 하루 두 끼니를 넣어주기로 하고 한 달치를 미리 지불해주었다. 쇠뿔은 단김에 뽑으랬다고 서린방에서 돈의문 지나 애오개로 나아가 쌍버드나무집을 찾으니 행인이 가리키는 마포나루 방향의 비탈길 어구에 수양버드나무 둘이 사립문 밖으로 늘어져 있는 주막이 보였다. 때마침 오후 나절이라 묵고 있던 행객들도 모두 나가고 중노미 아이만 기역자로 꺾인 초가의 대청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중노미 아이가 먼저 얼른 마루에서 내려서며 외쳤다.

"어서 오십쇼. 술도 있고 방도 있습니다."

"이 집 주인장 뵈러 왔다마는……"

안방격인 부엌 달린 방에 앉았던 주인이 쪽문을 열고 내다보더니 안방의 미닫이를 열고 대청마루로 나왔다.

"좀 올라오시지요."

서일수와 이신통은 대청에 올라앉았다.

"박희도의 언니뻘 되는 사람인데 여기 뭔가 맡겨둔 게 있다고 하여 왔소이다."

서일수가 말하자 주인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두 사람의 행색을 살피는 것이었다.

"방금 서린 전옥서에서 그를 만나고 오는 길이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맡겨둔 물건을 어찌 알겠소? 결심이 가까웠으니 어떻게 빼낼 도리가 없나 궁리 중이라오."

서일수는 주인의 의심이 당연하리라 여기고는 자세히 덧붙였고 그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돌아보고는 나직하게 물었다.

"도인이십니까?"

"나는 아직 입도하지 않았소만."

대답하면서 서일수는 주막집 주인이 천지도인이라는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단양에서 온 물건이라고 알고 있소이다."

", 그만……. 좀 들어오시지요."

주인이 황망한 얼굴로 두 손을 저어 서일수의 말을 막고는 먼저 안방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은 다시 방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큰 스승님께서 단양 제천 간에 계시답니다. 박 도인이 보낸 분이시라니 저야 믿을 밖에요."

그가 안방 다락을 열고 고리로 짠 부담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종이에 싼 책이 두 권 있었고 다시 그 아래 대나무로 엮은 합이 들어 있었다. 종이를 풀어헤치자 한 권은 목판본으로 찍은 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누군가 정성스럽게 필사한 것으로 아직 인쇄된 것은 아니었다. 천지도경(天地道經)이라고 박힌 책이 인쇄된 책이고 천지인가(天地人歌)라고 장지에 쓴 것이 필사한 것이었다.

"그 책갈피에 편지가 들어 있으니 살펴보시랍니다."

주인이 말했고 서일수가 그에게 되물었다.

"주인장은 읽어보지 않으셨소?"

", 저는 아직 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서일수가 다시 맨 아래 놓인 합을 꺼내어 뚜껑을 열었고 다져놓은 이끼 가운데 뭔가 들어 있었다.

"허어, 이건 산삼이 아닌가?"

그는 뿌리 위에 두텁게 덮인 이끼를 조심스럽게 걷어내다가 냄새를 맡아보고는 탄성을 내지른다.

"이것이 언제쯤 왔소?"

"박 도인이 압송되고 보름쯤 지나서였으니 한 달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봄철이라 날이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다행이로군. 그러나 하루를 다투는 때요. 약으로 쓴다고 하여도 그렇고 팔려면 지금을 넘기면 제값을 못 받을 거요."

주막집 주인이 드디어 실토를 하였다.

"박 도인의 언니뻘이 된다니 제가 감히 이런 말을 합니다. 사실 고향에 계신 형님 때문에 제가 도에 들었고, 우리 주막은 천지도의 경주인(京主人)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근년에 서학은 서양 나라들의 압력으로 침학이 풀린 데 비하여, 저희 천지도는 교주 신원운동 이래 민란이 일어났다 하여 기찰도 심해지고, 지방 관아에서도 도인이라 알려지면 즉시 가산은 적몰되고 처형해버린다지요."

"이것을 내가 가지고 가도 되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박도인 앞으로 보내온 물건이고 그이가 언니에게 당부했다니 저야 손님께 처분을 맡기면 되는 것입지요. 다만, 수결하신 각서를 언문으로 한 장 남겨주십시오."

주인의 청대로 처리를 해주고는 며칠 뒤에 다시 오마고 약조한 두 사람은 애오개 쌍버드나무집을 나섰다. 숙소로 돌아온 두 사람이 책과 필사본을 꺼내어 살펴보고 또한 속장에 들어 있는 편지를 보니, 일필휘지 초서로 급히 쓴 내용은 박희도의 체포를 안타까워한다는 점, 포교를 너무 서두른 것 같다는 질책과 함께 그러나 지혜롭게 모면할 것임을 믿으며, 소식에 의하면 조사를 잘 받으면 유언비어나 부화뇌동 죄로 가벼이 처리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일단 애오개 주막에 맡겨 놓으니 천종급 산삼 세 뿌리와 책을 수습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끝에는 만약 시일이 오래 걸리거든 방도를 강구하여 대신할 자를 정하라는 것이며, 한양에서 방각본의 책점이 많으니 경()과 가사(歌詞)를 더불어 간행하되 각각 일천 부를 찍을 수 있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등잔불을 돋우어 밝히고 각자 돌아앉아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천지인가는 언문으로 지은 가사로 몇 장이 안 되는 것이라 잠시 동안에 읽었지만 도경은 한 대장부의 평생의 뜻을 밝힌 것이어서 곱씹어 읽어야만 하였다.

당시 그들이 읽은 내용을 모두 따라 밝힐 수는 없으나 서일수와 이신통이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서일수가 그해 겨울이 오기 전에 먼저 한양을 떠났고 큰스승을 만나면서 즉시 입도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이신통의 입도가 늦었던 것은 서일수와 사전에 아무런 논의가 없었던 까닭도 있었다. 또한 그때에 이신통은 경난처세(經難處世)를 공부한답시고 방랑의 길에 나섰던 기간이었다.

그날 밤 서일수는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더니 이른 아침에 약재를 내러 창고에 들른 곁꾼과 함께 그 댁 의원을 만나러 갔다. 조수와 더불어 약재를 협도로 썰고 약연으로 갈고 분주하게 일하던 의원에게 서일수가 인사를 하고는 뒷골목 창고의 수직 방을 얻어 사는 촌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를 가만히 살피던 의원이 웃음을 지으며 먼저 말했다.

"아니, 댁은 전기수 물주 하던 담배장수 아니오?"

서일수가 눈치 빠른 사람이라 얼른 알아채고 대꾸한다.

"허어, 서울 도성이 언내 복주머니 안이라더니 좁아터진 데가 맞구려. 저어 배오개 연초전에 마실 나오시던 분이군."

"오늘 전기수 아우는 어디 떼놓고 혼자요?"

"녀석이 아침잠이 많아서요.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거 참 잘됐군. 원래 구리개 약전 거리는 볼거리와 놀거리가 많은 곳이라오. 나야 어눌해서 그러하지만 이 동네 의원들은 입담 자랑으로 한 세월을 보낸다오. 그 신통방통이에게 우리 가게 출입을 시켜야 되겠구먼. 행하도 연초전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을 텐데."

의원이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는 듯이 길게 늘어놓으니 서일수가 얼른 거두절미하며 말을 돌렸다.

"실은 좋은 물건이 있기에 감정이나 받아볼까 하구 왔소이다."

그가 가져온 합을 열어 보이자 그는 조심스럽게 이끼를 걷어내고는 두리번거리다가 대나무 젓가락을 찾아들고 산삼의 뇌두를 집어 올렸다. 머리카락 같은 잔뿌리들이 사방으로 뻗쳐 있는 것을 의원은 세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그는 차례로 나머지 두 개의 산삼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뇌두의 마디를 보아하니 하나는 너끈히 백 년이 된 것 같소. 나머지 둘은 못돼도 칠팔십 년 근은 되어 보이고, 각각 가락지와 대추 모양의 구슬이 몸체에 있으니 약이 제대로 찬 것이오. 다리도 두 개 세 개로 잘 뻗었고, 색깔도 진한 황토색이니 이만하면 상등품이외다."

"팔면 값이 얼마나 되겠소?"

"허허 서두르기는…… 이런 물건은 하늘이 내는 것이라 심마니들도 평생에 한 번 얻어걸릴까 말까 하는 것이라오. 우리 같은 의원들끼리 사고팔아서는 제값을 받을 수 없지요. 결국 임자를 만나야 한다는 얘기인데…… 문제는 산삼이란 생삼이 가장 으뜸이나 지금 말라가고 있으니, 즉시 팔지 못하면 약효는 좀 떨어지지만 쪄서 말리는 수밖에 없소. 물론 가격은 절반 이하로 떨어집니다."

서일수는 잠잠히 앉았고 의원도 곰곰 생각하다가 연상을 끌어다 백지 한 장을 서판 위에 올리고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곁에서 협도로 약재를 썰고 있던 조수를 돌아보더니 편지를 접어 내밀었다.

"가회방 판서 대감 댁에 얼른 전하고 오너라."

조수가 의관정제하고 나간 뒤에 의원은 서일수에게 다시 말했다.

"저것이 임자를 만나면 누천 냥을 받겠지만 아무리 못 받아도 천 냥까지는 헐값이오. 내게도 구전은 쳐줘야 되겠시다."

"얼마나 드릴까? 나도 남의 심부름을 하는 짓이라……"

"천 냥이면 일 할, 천오백 냥이 넘으면 이 할 쳐주면 되겠군."

각서 두 장을 쓰고 의원과 서일수는 함께 수결을 한다. 서일수가 산삼이 담긴 합을 맡겨두고 각서는 품에 넣고 일어나려니 의원이 말했다.

"뭘 그리 바삐 나가려 하시오. 오전에 손님도 없을 터인데, 낮것이나 함께 드십시다."

서일수는 안 그래도 편지 들고 나간 조수가 가져올 소식이 궁금하여 오후에 다시 들를 생각이었던 것이다. 의원은 놋재떨이를 가판 위에 놓고는 담배를 내어 권한다. 서일수는 자기 것을 가져오지 않아 망설이는데 의원이 담뱃대꽂이에서 한 대를 뽑아 그에게 내밀어주었다. 서로 권하면서 성천초를 담고 성냥으로 불을 댕겨 몇 모금 빨아대니 대번 방안에 구수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우리 집에 줄 대놓고 약을 갖다 쓰시는 대감이 몇몇 계시는데, 그 판서 댁은 연로한 어머님이 기력이 떨어져서 늘 걱정이었소. 대보탕도 열심히 해드리고 하였으나, 뭐니 뭐니 하여도 산삼은 죽어가는 사람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명약이라 이 같은 천종삼은 나랏님이나 간간이 쓰시는 것이라오."

하고는 누구 없느냐 외치니 곁꾼이 달려왔고 의원이 일렀다.

"자네, 그 창고 방에 이신통이 오라 하고 칼국수 네 그릇 시켜오게."

기다리는 동안 의원이 서일수에게 슬슬 말을 시켰다.

"담배 장수인가 했더니 산삼도 팔고, 그러다 한양 와서 대금 쥐고 가겠소."

"아니, 나도 누구 부탁을 받고 하는 일이외다. 산삼이 그리 큰돈이 되는 줄도 몰랐고 하여튼 소리 소문없이 처리해주오."

"의원을 하려면 환자의 병환에 관하여는 물론이고 사고 파는 약재에 관해서도 입을 다물어야 합네다. 우리가 약방에 모여 손님들과 흰소리나 지껄이는 것도 안 할 소리를 속에 담아 놓기 위함이니 그리 알아주면 좋겠소."

이신통이 약방에 들어와 합석하고 곧 이어 칼국수가 도착을 하였다. 국수집 하녀가 모판에 대접 넷을 얹어 머리에 이고 와서 전방에 부려 놓았다. 평소에 준비가 되어 있었던 듯, 개다리소반 둘을 놓고 낮것상을 차렸다. 기방의 냉면이나 골동면이 아니라 온면인데 고기 국물에 칼로 썬 메밀국수였다. 낮것을 먹고도 한참이나 지나서 조수가 돌아왔고 의관이 멀끔한 중년 사내가 따라왔다.

"어이구 모처럼 걸음 하셨네."

의원이 알은체를 하는데 그는 대감 댁의 집사인 듯하였다. 서일수가 신통에게 눈짓하여 함께 일어서니 의원이 그들을 향하여 외쳤다.

"이따가 저녁참에나 다시 들르소. 그리고 이 서방은 낼부터 우리 약방에 와서 책 좀 읽어주시고."

시일이 걸릴 것 같았는데 역시 한양 사대부 댁은 권세와 재력이 겸비되어 있는지 백 년 삼은 천 냥에, 나머지 두 개의 산삼은 각각 오백 냥씩, 도합 이천 냥에 낙착이 되었고, 사흘 만에 어음으로 지불이 되었다. 각서대로 이 할의 소개비 사백 냥을 의원에게 떼어주고 천육백 냥이 서일수의 손에 들어왔다. 아무리 경복궁 공사로 나라 재정이 피폐해지고 당백전이 나돌고 했다지만 천 냥은 아직도 큰돈이었다. 서일수는 이신통에게 허탈하게 말하던 것이었다.

"허허, 공연히 세상을 바꾼다고 나댈 것이 아니라, 돈 벌어 자기 팔자나 고치는 게 빠르겠군!"

두 사람은 도성 안에 책전이 모여 있는 곳을 두루 다녀 보았다. 의금부와 안국방 주변과 종루의 남쪽 광통교에서 수표교 부근까지 책전과 서화전이 있었다. 의금부와 안국방 주변은 관과 궁의 활자본이나 중국 책이 많았고, 방각본은 광통교 일대와 태평방 일대에 많았으며 그들 책전에 책을 대는 방각소도 있었다. 역시 여러 모로 따져보니 태평방 일대는 혜민서와 구리개 약전 거리가 있고 장악원도 있는 데라 의서에서부터 각종 양생술법서, 건강에 관한 비방서, 무예, 연희, 잡서와 소설책도 많았다. 방각본 소설책의 종류가 많기로는 광통교 부근이었는데 방각소도 여러 집이었지만 책의 내용이 이곳과는 어딘가 동떨어져 보였다. 역시 잡술서가 많이 나오는 태평방 쪽에서 방각소를 찾기로 했고 그들의 거처와도 한 동네나 마찬가지라 여러모로 편리할 듯했다.

이신통이 태평방의 책전을 돌아다니다가 방각소 몇 군데를 찾아내고 그중에 잡술서를 찍어낸 곳을 찾아갔다. 지붕 낮은 초가에 방 한 칸과 널찍한 봉당이 있는 공방이었는데 방각수(坊刻手) 세 사람이 일하고 있었다. 이신통이 공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책을 좀 찍어낼까 하여 왔소이다."

맨상투에 탕건을 두른 사십 대의 남자가 일손을 멈췄다. 그는 앞치마를 두르고 한 손에는 조각칼을 쥔 채로 일어섰다.

"무슨 책이오?"

"하나는 수양도서며 또 하나는 노래 가사집이라오."

"원본을 가져오셨나요?"

"약계가 이루어지면 가져오리다."

"몇 부나 찍으렵니까?"

"각각 천 부씩이오."

방각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종이는 그쪽에서 대시렵니까?"

"어떤 종이를 쓰는 게 좋겠소?"

"그야 보통은 백지, 창지를 쓰구요. 장지가 제일 좋지요. 족보나 가내 문집을 장지로 찍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일수가 말했다.

"그럼 종이는 우리 쪽에서 대리다. 헌데 이 집 주인이신가요?"

". 보잘것없습니다만. 원본을 가져오셔야 경비를 산정할 수가 있겠군요."

하더니 주인 방각수는 책 한 권을 내밀어 보였는데 '고금소총(古今笑叢)'이라고 겉장에 찍혀 있었다.

"이거 저희 집에서 찍었습니다만, 이 정도의 책이라면 저희 품삯만 사십 냥이 나오겠습니다. 두 가지라니 도합 팔십 냥입니다. 물론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처럼 그림이 들어간다면 공임도 더 올라가겠습죠."

"허어, 품삯이 만만치 않구려. 그림은 없겠으니 염려 마오."

"활자판을 짜고 장마다 찍어내어 제책까지 하는 일이라 여간 번거롭지 않습니다."

그날로 두 사람은 누렁다리 지전에 들러 종이를 사고 책의 원본과 함께 방각소에 갖다 주고 약계를 하였다. 서일수는 주인에게 약조금으로 사십 냥을 내어주며 은근히 말하였다.

"이것은 우리 계원들끼리만 나누어 읽을 책이라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게 단속을 좀 해주어야겠소. 이달 안으로 모두 끝내주면 팔십 냥 외에 이십 냥을 수고비로 더 쳐드리리다."

주인은 서울 사람이라 이내 알아들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만……"

몇 장을 들춰 본 그가 빙긋이 웃으면서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이었다.

"내용이 난삽하면 좀 더 쓰셔야 할 겁니다."

"그야 인쇄만 차질 없이 해준다면 어찌 인정전이 없겠소? 그리고 저와 이 사람이 번갈아 드나들 터인즉 괜찮겠지요?"

"그러문입쇼, 물주이신데 오셔서 좀 도와주시면 저희야 좋지요."

서일수는 전옥서에 박도희의 면회도 다니고 이신통은 전기수질도 했지만, 오전에는 명례방의 밥 붙여먹는 내외주점으로 가서 느지막이 아침을 얻어먹고는 곧장 방각소에서 책 찍는 일을 지켜보았다. 절이나 민간에서는 분량이 적은 책은 매 장을 일일이 나무판에 새로 새겨서 찍기도 하는데, 금속 활자의 작업을 본받아 목각 활자로 인판을 조립하여 찍는 것이 시간과 공력을 줄이는 일이 되었다. 목각의 높이와 같은 테두리를 친 사각형의 틀에 문장의 줄에 맞추어 칸막이 계선을 끼워놓고 수장인 주인이 책의 본문을 불러주면 수하 방각수가 활자를 찾아내어 벌여놓았다. 일수와 신통이 방문했을 때, 대개는 그들이 원문을 읽어주었다. 골라놓은 활자가 한 장 분량이 되면 그것들을 틀에 맞추어 넣었다. 활자 배열이 끝나면 헐거운 곳은 대나무 조각을 끼워 움직이지 않게 하고는 나무망치로 가볍게 두드려서 수평이 되게 하고 다지개로 단단히 다졌다. 먹솔로 먹을 찍어 활자 면에 골고루 칠하고, 인쇄할 종이에 말총에 밀랍을 묻혀 골고루 문질러준다. 초벌을 인쇄하고 본문과 대조하여 오자와 탈자를 바로잡고는 천 장의 종이에 찍어내는 것이었다. 천지도경은 한문이었고 천지인가는 우리 글 가사이고 길이도 짧아서 그냥 목판에 붓으로 써서 조각도로 양각을 새기도록 하였다. 먼저 경을 찍어내는 동안에 가사의 목판을 새겨나갔다.

그 무렵에 이신통은 다시 구리개의 약방과 배오개의 연초전으로 번갈아 찾아가 이틀에 한 번씩 소설책을 읽었고, 김만복의 충고에 따라 상순에는 종각 앞에서부터 흥인문 안 첫다리까지 오르내리다가 하순이 되면 장악원, 혜민서 등이 있는 태평방의 천변과 소설 책전이 많은 광통교 남측 등으로 옮겨 다니며 읽었다.

그가 늘 같은 장소에 며칠마다 한 번씩 나타나니 사람들이 짐작하여 전기수를 찾아 따라다니기도 하였다. 관중들은 그가 뻔히 듣는 데서도 마음놓고 신통이 방통이 하며 즐거워하는 거였다.

밤부터 비가 내리더니 날이 밝은 뒤에도 그치지 않고 줄기차게 내리던 어느 날 서일수와 이신통은 내외주점에 아침을 먹으러 가지도 않고 방에서 빈둥거렸다. 출출하기도 하고 날이 궂으니 을씨년스러워서 이신통이 유삼(油衫)을 둘러쓰고 빗속을 뛰어가서 구리개 약전 거리의 주막에 달려가 술과 안줏거리를 시켜왔다. 그를 따라 중노미가 모판에 부침개와 자반구이에 술국을 얹어 가져왔고 이신통은 거위병 두 개를 양손에 거머쥐고 돌아왔다. 서일수가 병을 받아 냄새를 맡아보고 소주임을 알고는 반가워하였다. 첫 잔은 아랫사람이 먼저 따르고 권하면서 마시고, 둘째 잔은 윗사람이 응대하여 따라주고 마신 연후에, 서로 안주로 입과 속을 달래고 세번째의 잔을 나누면서 비로소 각자의 주량과 흥에 따라 연거푸 마시거나 몇 차례에 나누어 마시거나 하는 것이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고 가끔씩은 천둥과 번개도 지나갔다. 서일수는 그동안 꺼내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이신통에게 술술 풀어내는 것이었다.

"내가 자네와 나이 차이도 많고 알게 된 지도 몇 달에 불과하나, 이렇게 함께 자고 먹기를 혈육과 같이 하였으니 실로 인연이 기이하다 할 것이네. 이제는 서로의 성정도 알고 세상에 대한 생각도 충분히 알게 되었으니 내 더 이상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내 선대가 원래 양반이었으나 조부 때에 괘서(掛書) 사건에 연루되어 집안이 적몰되고 나는 어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동승이 되어 덕산과 진천 일대의 산사에서 스님으로 성장하였네. 내가 글을 배워 불경과 유학을 공부한 것은 속세로 치면 아버지나 다름없는 월명 큰스님의 가르침 덕분이었지.

내가 절에서도 온전히 숨어 살 수 없었던 것은 임술 난리 이래로 봉기꾼이 되어 떠돌던 임효(林曉)라는 자 때문이었네. 그는 영남 사람으로 일찍이 현감의 토색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촌민들과 더불어 수령을 쳐죽이고 몇몇이 도망하여 화적처럼 떠돌았다네. 그리고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거기서도 대두가 되어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고 관군 여럿을 상해하고는 난이 진압된 뒤에 충청도로 흘러 들어왔다네.

내가 진천 태령산의 보적사 암자에 있을 적이었는데 두 눈에 불꽃을 붙인 듯한 사십 대의 사내가 불목하니를 자원하여 찾아왔다네. 암자의 지킴이에 지나지 않는 나와 수행승 두엇이 있는 작은 절에 양식도 없거늘 불목하니든 공양주든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며칠을 드나들더니 야밤에 내 방으로 불문곡직하고 찾아와서는 자신의 쫓기는 처지를 발설하는 것이었네. 그러니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는가. 어찌 보면 나와도 신세가 비슷하여 그를 거두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네. 우리는 큰절에서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인근 고을로 나다니며 시주를 받아다 근근이 양식을 빌어먹곤 하였다네.

그가 천지도에 들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거기서도 수년 전에 이미 위험한 짓을 자초하여, 그렇지 않아도 신도들은커녕 식구들조차 보살필 수 없던 신사(神師) 어른을 도피의 막바지까지 몰아넣고 말았다네. 그 뒤로도 임효라는 자는 계속해서 자신과 뜻을 같이할 동지들을 모으러 하산하여 돌아다니다 오곤 했지. 그가 일 년 반쯤 산사에 거처하는 동안에 아마 백여 인쯤 모은 것 같았지. 박도희도 덕산 사는 유생으로 그때에 연이 닿았네. 사실 박인희 박도희 형제는 내가 잘 알던 사람들이었네. 내가 수덕사 큰스님 밑에서 수행하고 있을 적에 심부름으로 박 씨 댁에도 드나들었고 그 댁의 노모가 신실한 신도여서 철마다 재도 올리고 했거든.

임효라는 자는 자기 뒤에는 수십만의 도인들이 있으며 일단 봉기하여 산간의 군현을 점령하고 나면 사방에서 백성들이 호응하여 올 것이라며 그러면 단번에 충청도 감영까지 떨어질 것이라며 큰소리를 쳤다네. 박 씨 형제가 아직 젊었고 나라의 제도와 정치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였음을 알아서 의기에 불타고 있던 무렵이라 그를 따라나섰던 모양일세. 박도희가 나를 만나러 진천의 보적사에 찾아왔다가 임 씨를 만나고는 그만 넘어가고 말았던 게지.

임효는 덕산 예산 일대에 나아가 사람을 모았고 충주 보은에서도 사람을 모았다고 하는데 문경 상주를 친다고 약조한 날짜와 시각에 새재의 집결지에 갔더니 백여 인은커녕 겨우 오십여 명이 모였다대. 그의 흰소리를 듣고 넌지시 관가에 발고한 자가 있었다네. 그런 엄청난 계획을 듣고 모두 입 다물고 결의를 굳게 지킬 거라고 믿는 게 우선 어리석은 노릇이지. 관군이 약속 장소를 포위하고 있다가 일시에 병장기를 겨누며 이들을 덮쳤지. 그 아수라장에서 칠팔 명이 빠져나왔다는데 박도희는 가파른 절벽을 굴러내려 개울에 처박혔다가 몇 날 몇 밤을 숨고 걷고 하면서 거의 초죽음이 되어 진천 보적사로 나를 찾아왔지. 나는 직감으로 며칠 못 가서 임효의 행적을 더듬어 암자로 관군이 몰려들 것을 짐작하고 박 서방과 함께 봇짐을 꾸려 도망쳤네. 내가 아는 곳이라곤 절집밖에 없어서 공주 갑사로 가서 은신했고 박 서방은 형의 도움으로 예산 지척인 대흥현의 친척 집에 가서 숨어 있었다지. 임 가는 애초부터 내가 보기에도 성급하고 즉흥적이라 한번 마음먹은 제 생각에만 외곬으로 사로잡혀 있는 그런 사람이었네. 내가 천지도에 대하여 좋지 않은 견해를 갖게 된 것도 그가 내게 보여준 조급함 때문이었던 것 같어. 그러나 그 직심, 이놈의 세상! 뒤엎고야 말리라 하던 그 줄기찬 분노는 내가 지금도 가슴 서늘하게 잊지 못하고 있다네. 그는 참형을 받고 장대 끝에 그 모가지가 허공중 드높이 효수되었네. 나는 몇 달 만에 절을 나와 강원도 산간을 떠돌다가 머리를 기르고 속세로 나와 버렸지. 그게 벌써 십 년이 넘었구먼. 그간에 어떻게 호구하였냐고? 허허 이러한 난세에 밥술깨나 먹거나 양반붙이라도 되는 것들이 얼마나 허약한지 아는가. 제 할아비 애비의 묘 자리를 명당에 잡겠다고 천금을 아끼지 않는단 말일세. 내가 겨울이 끝나고 아지랑이가 피기 시작하는 봄철이나 여름 폭염이 지나 선선한 바람 불고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환절기가 되면 죽장망혜에 삿갓 쓰고 산을 보아준다며 한 바퀴 돈다네. 일 년에 한 두어 자리씩 얻어걸리면 한 해 농사가 되는 셈이었지. 겨울과 여름에는 한양이나 감영이 있는 도방대처에서 보내고 마음이 동하면 떠돌기를 십여 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 사귀었다네. 이번에 서울에 올라온 것은 구사일생으로 모면한 박도희 형제가 여전히 천지도를 숭신하고 있으며 이번에 계룡산의 정감록을 읽는 모임에 가서 도인을 끌어모으려던 것을 알게 되었지. 다행히 그가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고 사나흘간을 참례만 했던 모양이더군. 그래서 그 형인 박인희가 전주에 내려가 있던 나를 수소문하여 왔기에 스스로 한양에 가서 기미를 살피고 어찌되었든 그를 구명할 길을 찾으려 했던 것일세. 노자로 담뱃짐을 싣고 오긴 하였으나 내가 워낙에 재물을 티끌처럼 아는 터에 어찌된 일인지 이리저리 돈 되는 일들이 잘 보이더군. 이번 과시가 열린 것도 앞뒤 아귀가 맞는 일이오, 자네를 만난 것도 참으로 기묘한 일일세. 내 이번에 천지도를 다시 보게 되었더니, 대신사(大神師)의 행적을 읽어본즉 이것이 그저 그러루한 술사의 생각이 아닌 걸세.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들 도인이 미미한 일로 잡혀 있는 와중에 이리저리 사람을 보내고, 경주인까지 정하여 산삼과 함께 책의 인쇄를 당부하는 것은 보통의 경륜이 아니고는 도모하지 못할 일이 아닌가.

그때에 두 사람이 천지도에 대하여 각자의 생각을 나누었는지 어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신통이 서일수에게 천지도에 입도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하여 물었을 것만은 인지상정으로 짐작할 수는 있겠다. 서일수가 다음 교주인 신사를 만나고 천지도에 입도한 것은 그 이듬해의 일로서 당시 주요 인물들이 모두 같은 무렵에 입도하게 된다. 그러나 직전까지만 하여도 서일수의 천지도에 대한 생각은 이러했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냥 세상을 뒤집어엎는다고 백성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을 보아라. 아편전쟁 이래로 서양 세력이 벼락 맞은 쇠고기가 땅에 떨어진 듯이 저희 마음대로 이리 찢어먹고 저리 찢어먹으며 노쇠한 청()나라를 우롱하고 있잖은가. 조선으로서는 바로 얼굴 앞에까지 들이닥친 왜()의 세력이 큰 우환이 될 것이다.

밑바닥 백성들뿐 아니라 조정의 권신 아래서 손발 노릇을 하는 하급 관리들과 뜻있는 양반들까지 합세하여 몇 차례에 걸쳐서 변혁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세상의 열망이 차올라 터질 때까지 바닥부터 다지며 세월을 견디고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이신통과 서일수는 함께 차탄하기를, '천지개벽'이란 그야말로 얼마나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더냐! 했다는 것이었다.

책의 인쇄가 모두 완료된 것은 오월 하순경이었다. 서일수는 전옥서에 갇혀 있는 박도희를 면회하고 일의 경과를 알려주면서 책을 어찌할 것인지 논의했다. 우선 애오개의 경주인과 논의하되 가사각각 이백 부는 한양에 남겨두고 근기(近畿) 지방과 해서(海西) 지방에 전파하고, 나머지는 단양에 옮겨두었다가 각 지방의 도인 조직에 붙여 퍼트리는 것이 가하다고 의논이 끝났다. 이신통과 서일수는 방각소에서 책들을 나를 적에 고리 부담에 나누어 몇 차례를 왕복하였다.

서일수는 이미 십여 년을 겪은 세월이었건만, 이신통에게는 이제 막 시골집을 떠나서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흔들리는 세상을 만나게 되었으니 옛말에 갑자기 철든다는 소리가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유월 초닷새인가 무더운 날 저물녘에 서일수와 이신통은 여느 때처럼 내외주점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아침나절에 가면 수직에 나갔던 군교와 별장 등이 문간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모여 앉아 밥을 먹었고, 저녁참에는 그들 두 사람 외에는 손님이 별로 보이지 않거나 있다 해도 두셋이 조촐한 술상에 안주 한 접시 놓고 앉아 있고는 하였다. 그날따라 칠팔 명의 군인이 작은 통영반 둘을 겹쳐놓고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가 건성으로 평안들 하쇼? 인사를 건네면서 대문 좌우에 붙은 문간방의 왼편으로 올라섰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인사를 던졌는데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이신통이 뒤처져서 발이 늘어진 안마당 쪽을 기웃거리며 외쳤다.

"이리 오너라."

곧 기척이 들리더니 늙수그레한 하녀가 고개를 내밀고 내다보고는 얼른 사라졌다. 그들이 잠시 앉아서 기다리는데 어느새 차린 밥상을 발아래 내려놓고 다시 사라진다. 신통이 밥상을 들여다 놓고 국을 한 숟갈 떠 마시고 밥주발 뚜껑을 여는데, 서일수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었다.

"어째…… 저 사람들 초상이라두 났나? 찍짹 소리가 없네그려."

신통이 힐끗 건너다보니 정말 모두가 소리 없이 술만 벌컥대며 마시고 있는 꼴이 침통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였다. 밥을 다 먹고는 이신통이 다시 밥상을 들어다 안마당 켠으로 내려놓고는 이리 오너라, 한소리 해주고 건너편 문간방을 기웃하여 넘겨다보았다. 맨 안쪽 구석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잔뜩 움츠린 채 벽에 기대어 자고 있는 듯한 군인은 다름 아닌 김만복이었다.

"어라, 만복이 형님 오셨네."

이신통이 얼결에 큰소리로 외치자 서일수도 다가와서 방 안을 넘겨다보았다. 김만복은 술에 곯아떨어졌는지 고개를 박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좌중의 군인들 중에 그들과 안면이 있던 자도 있어서 만복을 흔들어 깨우는 시늉을 했지만 그는 오히려 중심을 잃고 모로 쓰러져버렸다. 서일수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니, 그 사람 참, 웬 술을 그리 많이 드셨는고?"

군인들 중에 하나가 불콰한 얼굴을 들어 두 사람을 살피더니 한마디 했다.

"오늘 우리가 좋지 않은 일을 당하여 그러니 양해하시오."

"아니, 예서 집도 먼데 아무래두 안 되겠군. 우리가 데리구 가야겠소."

군인들이 서로 돌아보는데 별다른 의견은 없고 말을 건넨 자가 다시 대답을 한다.

"평소에 잘 아는 분들 같으니 저희야 그래 주시면 마음이 놓이지요."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가 김만복을 좌우에서 부축하여 거의 떠메다시피 하여 나왔다. 두 사람이 만복을 데리고 구리개 약전 뒷길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다리쉬임을 해가면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를 방에 눕히니 사내자식이 오죽했으면 키득키득하면서 울기 시작하는 거였다.

신통이 말이라도 걸어보려고 만복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데 서일수가 가만히 그의 소매를 잡으며 한마디 했다.

"그냥 놔두지."

"에이 드런 놈들……"

몇 번이나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뒤치락대던 만복이 잠시 후에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자 서일수는 그에게 다가앉아 목침을 머리 아래 괴어주고는 물러났다.

신통이 얼핏 눈을 뜨니 날이 샜는지 만복은 일어나 앉아서 밝아진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통이 일어나 앉자 옆에 누웠던 서일수도 슬그머니 일어났다. 만복이 고개를 돌리며 서일수에게 말했다.

"내가 간밤에 주접을 떤 모양이군."

"무슨 술을 그리 험하게 마셨나?"

"조정이 기둥뿌리까지 썩었으니 아예 허물어버리든가 할 작정이우."

김만복은 어제 있었던 일을 찬찬히 꺼내놓기 시작했다.

"하도감에 나갔더니 전라도 조운선이 들어와 미곡이 입고되었다면서 급료가 나온다구 하더라구. 잘 알다시피 오영(五營)이 폐지된 이후에 무위영 장어영은 지금까지 일 년 하고도 한 달이 넘도록 쌀 한 톨, 베 한 장 받지 못하였소. 새 병조판서가 들어선 이래 양반 자제나 친인척들로 별기군을 창설하여 신식 군대를 만든다며 우리는 의붓자식 취급을 했지. 일본에서 무라다 소총을 이만 정이나 구입하고 저들은 새 군복에 일본 교관이 사격과 제식 교련을 시키면서 우리에게는 급료도 안 주면서 성벽의 보수다 고관들의 행차 수행이다 성 안팎 초소의 야간 수직 같은 고된 임무만 주는 거요. 그에 비하면 별기군 놈들은 작년부터 저희끼리 몰려다니며 주막이나 시정에서 만나게 된다 치면 우리를 오합지졸이니, 대원의 대감의 발가락 때니, 드러내놓고 멸시하는 거요. 그래서 우리도 그놈들이 조선 군사가 아니라 왜별기(倭別技)라고 돌아서서 침 뱉는 시늉도 하다가 싸움박질이 벌어져 영창에 갇히기도 하는 형편이었지.

아무튼 그렇기로 지금은 모든 제도가 바뀌고 있는 중이니 우리 차례도 오고 대우도 나아지겠거니 하며 참고 있었소. 형님 아우님이 보았던 것처럼 우리가 오죽하면 시정에 나와 장사 농간도 부리고 과시에 나가 접꾼 일도 하며 왈짜배처럼 살아가겠수? 나야 시정에서 자라나 눈치도 있고 기력도 남아 있어서 이럭저럭 처자식 굶기지 않고 근근이 살아오는 바이지만, 다른 별장 포수 사수 하사관들은 왕십리에서 별의별 짓을 다하여 살아간다오. 소 닭 개도 잡아다 내고, 미나리 배추 푸성귀 농사에, 인분도 퍼 나르고, 원산 철원 거쳐오는 다락원에 나아가 북어를 떼어다 행상질까지 하오. 그것도 재주가 남다른 자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일반 병졸들은 제 입에 겨우 풀칠하기도 어려워 다리 밑 빈민들이나 매한가지라오.

나도 병영에서 나와 동료 별장들과 병졸들 인솔하여 숭인문 쪽으로 나갔지. 벌써 하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기별을 알아차린 군교 병졸들이 무리를 지어 선혜청 앞마당에 모여 있었는데 배급이 시작되어 장교와 별장들이 나서서 장사진을 만들어 질서 있게 받도록 했지요. 헌데 앞줄에서 먼저 급료 배급을 받은 병사들이 몰려서서 떠드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소. 내가 몰려선 이들을 헤치고 들어가본즉 낯익은 별장 하나가 제 배낭의 급료미를 들추다가 한 줌 쥐어서 날려보더란 말요. 그리고는 대번에 뒤집어서 땅바닥에 줄줄 쏟아보이는 게요. 살펴보니 쌀은 절반이오 모래와 쌀겨가 푸실푸실 날리더란 말이지. 이것을 사람 먹으라고 주는 거냐? 일 년이 넘도록 곡식 한 톨 주지 않다가 식구들의 굶주림을 애걸하였더니 겨우 한 달 급료를 이제 주면서 그것을 또한 도적질하였으니 이런 군대가 있느냐? 위로는 영장과 병조판서 선혜청 당상부터 모조리 쳐 죽여야 될 놈들이다. 제각기 떠들기 시작했고 나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터져 올라옵디다. 여기저기서 자기의 급료미도 확인하여 보고 쏟아버리기도 하면서 배급하는 도봉소(都捧所) 앞으로 몰려가 우선 선혜청 서리들을 두들겨 패고 책임자로 나와 있던 선혜청 당상과 병조판서 겸직인 민겸호의 청지기와 그 수하 하인들을 거의 죽도록 때려주었소.

창고의 안쪽으로 들어가니 상등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걸 보고 우리는 병사들에게 그것을 알아서 나누어가도록 했소. 이때에 급보가 갔던지 포도청 아이들이 창칼에 총포를 겨누고 선혜청 도봉소를 포위합디다. 우리는 번이 끝나 퇴청한 처지라 무기는커녕 군복조차 벗어버린 이가 태반이라 무력하게 보고만 있는데, 포도종사관이 지휘하는 군사들이 군중 속으로 들어와서는 주동자가 누구냐고 외치니 피투성이의 민 씨네 청지기와 하인들이 별장이며 포수 몇몇을 지목했지. 종사관이 모두들 흩어지지 않으면 모조리 포박하겠다고 을러대어서 비칠거리며 물러날밖에. 더구나 저녁이 되자 우리의 지휘관인 김춘영(金春永) 영장(營將)을 체포해갔다는 소식이 나돌았지요. 나도 지목을 받지는 않았지만 잡혀간 동무들과 똑같은 처지요 입장이고 보니, 그들이 오라에 묶여 잡혀가는 꼴을 지켜보고 나서 어찌나 창피하고 분했던지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만 폭음을 하고 말았소이다."

서일수가 침통하게 만복의 이야기를 듣고 앉았다가 말을 꺼냈다.

"나도 한양에 와서 들은 얘기가 많았고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구먼. 이미 수년 전에 강화도조약으로 일본에게 부산 원산 인천의 항구를 열어주고, 그들 돈을 마음대로 통용시켜주고, 배와 화물의 관세를 면제해주기로 하였다더군.

지금 임금 십삼 년이었으니 이미 육 년 전 얘기올시다. 대원의 대감이 물러나고 민씨 집안의 외척 세도 정치가 시작된 뒤부터였지요.

그러니 바깥 사정을 보아가며 대문도 열어놓아야 할 텐데 집 안은 개판 쳐놓은 채로 열어놓았으니 온갖 깍쟁이 무뢰배가 기웃거릴 것은 당연한 노릇이지.

그게 모두 일본이 서양 것들에게 당했던 그대로를 우리에게 덤터기 씌운 게랍니다. 다섯 영을 부활시키고 별기군을 폐지할 것과 왜적은 물론 서양 제국과의 수호조약을 폐기할 것을 좌의정 등이 상소를 올렸지만, 척사척왜(斥邪斥倭)를 주장하던 선비들까지 하옥시켰지요. 지난봄부터 석 달 동안에 조정은 미국, 영국, 독일과 차례로 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답니다."

"그래, 이제부터 어쩔 작정인가?"

서일수가 물으니 김만복이 저고리 위에 군복 더그레를 걸치고 전립을 쓰면서 대답했다.

"시정에 나아가 새로운 소식을 들어보고 영의 군교들과도 의논할 작정이우."

"같이 나가세. 요기라도 해야지."

세 사람은 집을 나와 밥 대어 먹던 내외주점으로 가지 않고 청계천을 건너 종루 쪽으로 올라갔다. 배오개 뒤편 피맛골에 들어서니 언뜻 보기에도 대번에 알아볼 정도로 군복 무릎치기 상의나 흑립 쓰고 덧저고리 걸친 가뿐한 차림의 상민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개가 군인들로 보였다. 그들이 국밥집으로 들어가 앉으려는데 저쪽에서 장정 두엇이 만복을 알아보고 얼른 상머리로 다가왔다. 그들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서일수와 이신통을 훑어보았고 김만복이 먼저 한마디 던졌다.

"염려 놓게, 내 동무들이니……"

하나는 만복이처럼 군복 차림이고 다른 하나는 덧저고리에 패랭이 쓴 장사치 복색이었다. 그들은 상머리에 둘러앉더니 차례로 말했다.

"좌포청이 지척이라 포교 아이들에게 알아보았더니 이제 국문이 시작되는 모양일세."

"영장 어른이 체포되었다면서?"

만복의 물음에 패랭이가 말했다.

"병판 대감이 직접 영을 내렸다네. 군문에 작변한 자는 역적이니 모두 잡아 본보기로 사형시키라고 했다네. 영장 어른 말고도 우리 군영의 별장 포수가 셋에다 병졸이 둘일세. 병졸은 이미 초죽음이 되었다는데……"

배오개 피맛골에서 좌포청까지는 가운데 동별영을 끼고 그야말로 한 골목 사이라, 군교들이 각자의 안면을 통하여 포도청 군교들에게서 국문의 진행 과정을 옆에서 듣는 것처럼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주 높은 사람을 빼고 일반 군교들은 어제 선혜청의 소란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어서 누가 나쁜 놈들인지 판단을 내린 뒤였다. 그래서 포도청 형리들도 태형의 영이 떨어지면 알아서 슬슬 때리고 급소를 피해준다는 소문이었다.

"자아, 이제부터 각자 소임을 나누세. 왕십리와 이태원에 통문을 돌려 영군들을 모으는 한편, 위로 당상에 직소하고 안 되면 무기를 들고 일어나 파옥을 할 수밖에 더 있겠나?"

아침을 먹고 나서 서일수 이신통과 김만복은 피맛골 골목으로 나왔고 서일수가 물었다.

"자아, 아우님은 이제 집 동네로 가봐야겠군."

"뭐 아직 도성 안에서 볼일이 좀 있소. 다들 동네로 모이려면 저녁이 되어야 할 테니까."

"내일 오후에 우리는 배오개 연초전에 있을 걸세."

그날 김만복은 왕십리의 집으로 돌아갔고 그의 아내는 두 아이와 함께 동네 어귀에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배추밭 고랑과 군데군데 농막이 서 있는 벌판에 바람막이 겸하여 수양버들과 큰 회나무가 있는 데서 동네가 시작되고 있었다. 집의 거의가 낮은 초가지붕에 토담이나 싸리 울바자를 두른 두세 칸짜리의 작은 집이었고 골목이 구불거리며 사방으로 뻗어나가 외부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오면 동서남북을 모를 정도라고 하였다. 푸성귀와 배추며 무를 농사 지어 도성 안에 팔아서 생계를 잇는 군인 가족들이 많이 살았다. 땅거미 질 무렵의 벌판 위로는 해 진 뒤의 컴컴한 하늘과 남은 노을이 비껴 있고 회나무 아래는 아낙네들이 아이를 업거나 손목 잡고 서서 문안에서 돌아올 남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아직도 도성 안에서 돌아오지 않은 병사들도 많았고, 일 년 만에 급료가 나온다고 기다렸건만 모래와 쭉정이 겨가 반나마 섞인 쌀을 배낭 자루에 지고 돌아온 남편은 풀이 죽어 출청도 않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기도 했다. 동네에는 상부의 영에 거역하는 자는 군율로 엄히 다스릴 것이며 체포된 자들은 사형에 처해질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여보, 얼마나 걱정했는지……"

만복의 아내가 딸은 걸리고 아들은 업고 동구 앞까지 나와서 서성거리다 남편의 귀가를 반기며 소매를 부여잡는다. 그래도 별장들 중에 만복은 식구들 먹여 살리는 일에는 재간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졌고 그와 한양 도성에 근무 나가서 요령을 배운 별장 군졸도 여럿이라 모두들 그를 따르는 터였다. 누군가 어느 아낙이 조심스럽게 만복에게 물었다.

"우리 집 주인 못 보셨나요?"

", 박 포수? 어제 저녁 참에 술 한잔 했던 거 같은데. 아직 운종가 곳곳에 많이 퍼져 있습디다."

"어째 뒤숭숭한데 곧장 들어오잖구 그러구들 있대요?"

"분이 안 풀려 그런 모양이우."

만복은 집에 들어가 아내가 차려주는 저녁을 아이들과 함께 먹고는 얼른 집을 나섰다. 하급 군교나 별장 포수 등 하사관들이 집에 돌아오자 누가 모으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동계(洞契)의 사랑에 모여들었다. 우선 앞마당이 넓어서 김장배추 수확 철에는 문안에서 나온 장사치들이 떼로 몰려와서 거래하는 곳이었고, 동계의 사랑은 오십여 명이 들어가 앉을 만한 큰방과 대청마루가 있었으며 부엌이 달린 작은 방도 두 칸이나 있었다. 김만복이 들어서자 몇몇 군교 하사관들이 반색을 하였다. 만복의 오랜 동료인 별장 김장석이 종이쪽지를 앞에 놓고 다른 별장 포수 등이 둘러앉았다.

"이게 좌포청에 갇혀 있는 사람들일세."

만복이 넘겨다보니 영장 김춘영과, 별장 유춘길, 별장 정의준, 포수 강명진, 그리고 병졸 이일석, 장판술 등의 계급 성명이 적혀 있었다. 김만복이 그들의 이름을 소리 내어 읽고는 말했다.

"이 사람들이 고초를 겪는 것은 물론 처형되도록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조선의 무관이 아닐세. 이번 사태는 민 씨측 친위대인 왜별기에게만 대우를 해주고 구식 군대라 하여 무위영 장어영의 군병에게는 일 년이 넘도록 급료조차 주지 않은 선혜청 당상 병조판서 민겸호에 그 책임이 있으며, 그와 함께 우리의 급료를 착복해온 전 호조판서 현 경기도 관찰사인 김보현에게도 그 책임을 물어야 하네. 이들 모두가 민비의 외척 세력으로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네."

마당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방안 가득 앉아 있는 군병들 사이로 성큼성큼 뛰어 들어왔다.

모두들 돌아보니 그는 별장 유춘길의 아우인 사수 유영길이었다.

"내일 당장 포도청을 들이치고 모두 구원해내야지 무슨 논의가 이리 구구하단 말요?"

그는 어디서 홧술이라도 먹었는지 눈자위가 불콰했고 목소리도 보통 때보다 훨씬 격앙되어 있었다. 모두들 면목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잠잠히 앉았는데 김만복이 나섰다.

", 들이쳐야지! 그러나 대를 나누어 일시에 여러 곳을 쳐야 하네. 그리고 대의명분을 얻으려면 지휘 계통을 밟아 직소도 올려야 하네. 문안에서 의논하기를 이태원과 왕십리에서 동시에 통문을 돌리기로 하였네."

논의하기를, 사건이 일어난 과정과 영장 이하 군인 다섯 명이 체포되어 억울한 국문을 받고 있는 사정을 밝히고, 이번 일의 책임은 오히려 선혜청과 병조에 있다는 것을 알리면서, 명일 오전에 운종가의 좌포도청 앞으로 모일 것과 무위영 장어영의 군병들은 끝까지 행동을 함께할 것을 다짐한다는 내용의 통문을 쓰기로 했다. 별장 김만복이 장지에 위의 내용을 쓰고 김만복, 김장석, 유영길을 위시한 그 자리의 장병들이 모두 제 이름을 올렸고 군사 두 사람이 통문을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모든 이에게 알리고 이름을 받아 적도록 하였다.

이튿날 오전 사시 무렵에 파자교 근방의 좌포청 앞에는 쾌자나 무릎치기를 걸치고 전립 쓴 군인들이 인근 사방을 온통 메울 정도로 모여들었다. 당시에는 수백여 명이었지만 정오가 되면서 파자교 철물교 일대는 물론 배오개 근방에 모여든 군인들까지 합치면 천오백여 명이 되는 듯했다. 이들의 앞에 몇 사람의 장교와 하사관들은 대표로 관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뒷전에서는 어깨가 벌어지고 힘깨나 쓸 것 같은 장정들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줄지어 서 있었다. 포청 군사들도 서로 넘나들이로 직임이 갈리기도 하고 훈련이며 진법도 함께 받던 동료들이라 오히려 안의 동정을 알려주는 판이었다. 서일수와 이신통은 그 시각에 배오개의 연초전에 있다가 찾아온 김만복과 만나게 되었다. 세 사람은 피맛골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요기 겸하여 탁주를 들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만복이 어제 돌렸던 통문을 보여 주고 나서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쳐죽일 놈들! 이최응이가 별파진을 동원하여 우리를 진압하라고 했다오."

이최응은 민비가 왕의 섭정이었던 시아버지 대원군 이하응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의정까지 시켰던 무능한 사람이었다. 아우인 대원군은 원래부터 허우대만 멀끔한 자신의 형을 소신이 없는 나약한 이로 알고 있다가 근년에 민 씨 외척 세력의 앞잡이가 된 것에 분개하고 있었다. 서일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빙긋이 웃으며 한마디 해주었다.

"기왕 뒤집어엎을 바에는 아예 조정의 정국을 바꿔버려야지. 조정 안에 자네들 편을 들어줄 사람을 잡을 수는 없는가?"

김만복이 눈을 빛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원의 대감은 운현궁에서 은인자중하고 있지만."

"그렇지, 아마 지금쯤 사람을 풀어 수소문하면서 자네들을 기다리구 있지 않을까?"

서일수의 확신에 찬 말을 듣고 김만복이 하급 군인답게 어딘가 불안한 얼굴로 되물었다.

"설마 그이가 우릴 만나주겠소?"

"지금 불만 당기면 화약통이 터질 판이고, 패는 일삼오 갑오일세. 덥석 손을 내밀게야. 이따가 날이 저물고 어두워지면 그때에 가보게나. 통문 앞자리에 기명한 사람들이 주동인 셈이라 함께 가야 할 걸세."

저녁녘에 김만복은 군병의 중심이 될 만한 별장과 포수 사수 등 하급 군교들을 만나 내일 다시 철물교 앞에 모이기로 하고는 약속대로 서일수와 구속된 유춘길의 아우 유영길을 데리고 운현궁으로 갔다. 궁궐처럼 높다란 대문 양쪽으로 줄행랑이 잇달았는데 날이 저물어서인지 수직하는 자도 없이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서일수가 서슴지 않고 이리 오너라, 외치니 하인이 득달같이 달려와 문을 조금 열고 내다보았다.

"무슨 일이오?"

"대원의 대감을 뵈러 온 사람들이오."

다른 정승의 집 같으면 약조도 없이 찾아간 이들에게 하인조차 냉소를 날릴 법도 하건만 다시 묻는 것이었다.

"무엇 하는 분들이슈?"

"우리는 군영의 군교들인데 대원의 대감께 아뢸 말씀이 있어 왔소."

하인은 잠깐 기다려 보라며 안으로 들어갔다가 그들을 헐숙청으로 안내했다. 청지기가 그들의 접견 목적을 자세히 따져 물었고, 김만복은 작금의 선혜청 소란 사건에 대하여 말하고는 통문을 꺼내어 그에게 내보였다.

"우리는 거사를 하기 전에 대원의 대감께 하소코자 합니다."

"한번 아뢰어는 보겠소."

그가 한참 뒤에 나타나 안으로 들이라는 분부가 있어 세 사람은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에 올라갔다. 청지기가 사랑방 문을 열면서 마루에 올라섰던 그들에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얼른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 알현하시오."

그들은 방문 안으로 들어섰고 아랫목 보료 위에 장침에 기대어 앉은 노인이 보였다. 세 사람은 일제히 부복하였고 대감이 말했다.

"고개를 들고 편히들 앉게. 누가 구속된 자의 식구인가?"

사수 영길이 허리를 폈다가 얼른 다시 상체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인입니다, 대감."

"허허, 급료를 달라고 항의하였다고 잡아 가두는 것은 인사불성(人事不省)의 짓이다. 내가 저들에게 알아듣도록 타일러서 우선 밀린 급료를 지불토록 할 것이며, 시시비비는 군율에 맞게 가릴 것이지만 억울한 사람은 곧 풀어줘야 한다. 부정을 저지른 관리가 있다면 국법으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대원군이 다시 묻는다.

"통문의 책임을 진 사람은 누군가?"

", 저는 별장 김만복입니다."

"날이 밝는 대로 선처를 내릴 것이니 자네들은 돌아가서 군사들에게 알리고 곧 해산하도록 하라."

대감은 그렇게 말하고는 두루마기에 갓을 쓴 민간복 차림의 서일수에게 시선이 머물더니 잠깐 바라보다가 물었다.

"자네도 군교인가?"

서일수는 미리 약속한 바가 있어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올시다. 저는 이 사람 김만복의 언니 되는 사람으로 저희가 겪은 사연이 너무도 안타까워서 대감께 알현하고 한 말씀 올리고자 감히 따라왔습니다."

대원군은 그의 말을 기다린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일수를 바라보았다.

"지금 전 조선의 식자들이 척사척왜(斥邪斥倭)를 주장하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찌 이러한 정국을 그대로 보고만 계시렵니까?"

대원군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호통을 쳤다.

"네 이놈, 위로 주상전하께서 계시고 조정에 삼정승 육판서 이하 현량한 신하들이 나라를 위하여 노심초사하고 있거늘, 네깟 놈이 무슨 경륜으로 정국 운운하는가? 네가 지금 역적질을 하려느냐?"

"황공하옵니다."

서일수와 나머지 두 사람도 부복하고 있더니 대감은 다시 잔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돌아갔다.

"내 너희들의 충정을 모두 알았으니 돌아가 처결을 기다리라."

세 사람이 약간의 진땀을 빼고 노안당을 나오는데 배석했던 청지기가 뒤따라오더니 그들에게 말했다.

"잠깐, 대감마님께서 약주라도 대접해드리라 하셨으니 이리 오시오."

그는 세 사람을 아랫사랑으로 안내했는데 방문을 여니 군복 차림의 무관 한 사람이 앉아 있다가 그들을 맞았다. 서로 이름을 대며 수인사를 나누는데 무관이 말했다.

"허민(許旻)이라 하오. 대전(大殿)별감이었으나 지금은 운현궁의 호종무사로 지내고 있소."

다담상이 들어오고 서일수 김만복 유영길 등은 호종무사 허민과 더불어 한잔 마시면서 친숙해지고 다음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논을 하였다. 허민 또한 훈련도감의 군교 출신이라 신분도 서로 간에 얼추 비슷한데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거사에 의기투합하고 있었다. 그가 왕궁의 지리와 요소를 자세히 알고 있어 대원군이 어떤 생각으로 그를 난군의 주동자들과 만나게 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유월 아흐레 아침이 밝았다. 별장 김장석과 사수 유영길은 구속 군병의 혈속임을 내세우고 여전히 파자교 앞에 모여든 군인들 중에 군교급으로 이십여 명을 모아 무위영의 무위대장이던 이경하(李景夏)의 집으로 몰려갔다. 우선 지휘 계통을 밟아 직소하는 명분을 쌓기 위함이었다. 이경하는 대표자만 들어오라고 하여 김장석 유영길이 들어가니 관아에서 죄인 다루듯 마당에 꿇려 놓고 당상에 앉아 부장과 더불어 그들을 만났다.

"너희들의 억울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원래 급료의 관할권은 선혜청에 있다. 내가 당상이신 병판 대감에게 선처해주시라는 편지를 써줄 것이니 그쪽에 가서 직소해 보아라."

그럴 줄을 모르던 바는 아니었으나 직속상관인 이경하의 비겁한 책임 회피에 동행했던 군교들은 더욱 분노했다. 그들은 파자교 앞으로 돌아와 민겸호의 집으로 가자고 외쳤고 군병들 수백여 명이 수진방의 민겸호네 집으로 몰려갔다. 하인들이 대문을 굳게 닫아걸고 행랑채며 사랑채의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뜯어 부수어 그 조각들을 팔매질하니 몇몇 군병이 머리에 맞아 피를 흘렸다. 군병들은 선혜청에서 그들에게 부정한 쌀을 배급하던 자들의 얼굴을 알아보자, 대문을 부시고 들어가자고 외쳤다. 어느 집 기둥인지 뽑아온 통나무를 여럿이 옆구리에 끼고 대문을 몇 차례 들이박으니 빗장이 우지끈 부러져나가며 활짝 열리고 말았다. 민겸호는 미리 소문을 듣고 집안 식구들을 친척집으로 피난시켜두었고 자신은 창덕궁에 입궐해 있었다고 하였다. 지붕에 올랐던 자들 중에 동작이 잽싼 자들은 뒷담을 넘어 달아나고 일부는 잡혀서 군중에게 살해당했다. 그들은 일단 일을 저지르자 더욱 분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굶어 죽든 처형당하든 매한가지다. 마땅히 죽일 놈들을 죽여서 우리의 원한을 풀어야겠다."

아직 그들의 손에 창칼이나 총포 같은 무기가 있을 리 없었다. 대부분 맨손이었고 근처 민가에서 아무렇게나 집어온 몽둥이나 낫, 식칼 등을 가진 자들이 몇몇 있었을 뿐이다. 군병들은 병조판서의 집안 곳곳을 뒤져 그가 모은 재물을 마당에 쌓았다.

"누구든 돈 한 푼, 물건 하나, 가져가는 자는 죽인다!"

하고는 무더기로 쌓아 올린 재물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렀다. 목격한 자들에 의하면 비단 주옥 패물 농 등 호화로운 가장집물이 타오르는 불꽃에서는 오색이 영롱했고 인삼 녹용 사향이 타면서 풍기는 향기는 수 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한편 허민, 김만복 등은 군병의 한 무리가 민겸호의 집을 들이칠 때에 노리고 있던 동별영 안으로 쳐들어갔다. 이미 운종가 일대는 군병들뿐만 아니라 행상 열립군이며 평소에 불만이 많던 성 내외의 가난한 백성들도 합세하여 누구도 그들을 제압할 병력이 없었다. 운현궁의 호종무사 허민은 군복을 입었지만 오래 전부터 시정 왈짜패들은 대원군 이하응의 낙백 시절부터 잘 알던 자들이 많았는데 백성들의 틈에 끼어 있었다. 군중은 동별영의 무기고에서 창과 환도와 쇠도리깨며 화승총과 양총까지 찾아내어 무장했다.

"좌포청과 의금부 전옥서를 쳐라!"

"모든 죄수들을 석방시켜라!"

동별영에서 무기를 갖추어 바로 지척에 있는 철물교를 향하여 내달으니 포도청 관문을 지키고 섰던 포졸들은 달아나고 안에서 수직하고 있던 포교들은 순순히 무기를 내던지고 난군이 시키는 대로 옥문을 열었다. 영장 김영춘, 별장 유춘길, 정의준 등 다섯 사람을 구출했고 옥문을 열어 모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난군 중에는 옥에 갇혔던 죄수들의 가족들도 많이 끼어 있었다. 서일수 이신통도 그들 민간인 사이에 끼어 있었고 만일을 위하여 환도 한 자루씩 쥐고 있었던 것이다. 영장 김영춘은 옥에서 나오자 포도청 군관의 복장을 벗겨 전립과 전복을 걸치고 양총을 손에 쥐었다. 그는 김만복에게 명했다.

"하도감을 치러 가자!"

"먼저 의금부와 전옥서를 깨야 합니다."

 

하도감은 별기군 병영이 있는 곳이었고 전옥서에는 그들의 편이 되어줄 척사파를 비롯한 선비들이 갇힌 곳이었다. 그들은 길 건너 서린방으로 몰려가 의금부를 점령했고 연이어 전옥서를 활짝 열어젖혔다. 여기서도 모든 죄수들이 풀려났다. 서일수와 이신통은 박도희를 옥에서 꺼내어 난군들 틈에 섞였다. 서일수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우선 구리개 집으로 가 있게. 나는 만복이 옆에서 사태를 좀더 지켜볼 터이니."

"어둡기 전에는 돌아오셔야 하우."

이신통이 걱정스럽게 말하고는 박도희를 데리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영장 김영춘이 옥에서 나오자마자 하도감을 치러 가자고 했으니, 그곳은 원래부터 그들 자신의 부대가 있는 곳이었지만 눈에 가시 같았던 신식 군대 별기군의 막사가 있었다. 군병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처우가 달라지고 오영이 통폐합된 원인이 왜별기에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운현궁 호종무사 허민은 일단의 시정배들과 함께 별장 김장석 등과 돈의문 밖의 경기감영으로 향했는데 그곳에 일본 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도감과 경기감영은 종루에서 보자면 양쪽 다 비슷한 거리여서 어느 쪽이든 깨트리고 나서 한 곳으로 합세하기로 하였다.

영장 김영춘과 별장 김만복이 이끄는 무장 병력은 종루에서 배오개를 지나 청계천 마전교를 건너 하도감 쪽으로 육박했다. 하도감 관문이 보이는 곳에서 일단 행군을 멈춘 군병들은 대문이 굳게 닫혀있고 인기척이 보이지 않는 것에 긴장하게 되었다. 뭔가 낌새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오백여 명의 군병들 중에 화승총과 양총을 가진 자는 이백여 명쯤 되었고 나머지는 거의가 장창과 환도로 무장했다. 양총은 무라다 소총에 길고 뾰족한 총창을 꽂은 것들이었다. 김만복이 그중 장창과 환도로 무장한 자들 십여 명을 이끌고 먼저 정찰하러 관문 쪽으로 달려가는데 누군가 개천 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군병들을 향하여 팔을 휘저었고 언뜻 살피니 일대의 다리 밑에 사는 깍정이들이었다.

"담 뒤에 포수들이 숨어 있소!"

아니나 다를까, 총성이 울리면서 탄환이 빗발치듯 날아왔고 두엇이 맞아 쓰러졌다. 그들은 개천 아래로 뛰어 내려가 몸을 숨겼다. 김만복이 위로 다시 기어올라가 하도감 관문 쪽을 살피니 담 너머에서 흑립을 쓴 군사의 머리가 올라왔다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영장이 거느린 본대의 군병들도 그들을 따라 개천 아래로 내려왔다. 오간수교에서 마전교에 이르는 일대의 깍정이 꼭지딴이 영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꾀를 알려준다.

"저희가 인근에서 사다리를 가져오겠습니다. 담을 넘어 들어가기만 하면 일시에 무너질 거외다."

마침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밤이 되면 이쪽에 더욱 유리해질 것이었다. 사다리 두 틀을 가져왔는데 모두가 지붕 잇는 데 쓰일 만한 팔구 척의 맞춤한 것들이었다. 양총을 가진 병사들을 뽑아 대를 나누어 한 편은 관문 오른쪽 담 모퉁이를 돌아 적당한 곳에 대어놓고 오르기로 하고, 다른 한 쪽은 왼편 담이 꺾어진 곳으로 돌아 나아가게 하였다. 모두들 담 안의 어느 방향에 무엇이 있고 어느 쪽이 유리하겠는지 제 손바닥처럼 알던 군병들은 알아서 사다리를 들고 뛰어가 각각 유리한 지점에 걸치고 올랐다. 기와를 올린 관가의 담이라고 해봤자 한 길이 좀 넘는 편이라 일단 오르면 가뿐하게 뛰어내릴 수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작청과 행랑이 시작되는 부근이었고 왼쪽은 바로 창고의 지붕 위였다. 그들이 보니 관문 양쪽의 담에 널판자와 통나무 등을 걸쳐놓고 포수들이 총을 바깥으로 겨누고 있었다. 오른쪽에서는 관문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총을 놓았고, 왼편의 지붕 위에 엎드린 군병들도 일제히 사격하니 관문을 지키던 병력이 이리저리 맞고는 떨어져버린다. 나머지는 제각기 담에서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와 총을 던지고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두 손을 들었다. 관문이 열리자 수백 명의 병력이 와아 하는 함성을 지르며 하도감 뜰로 돌입했고 그들은 누가 지휘할 것도 없이 각개 약진하여 작청을 지나 군영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때 일본군 교관 호리모토는 통역 다케다와 교관 보조 순사 몇 사람과 함께 별기군 막사 앞에서 달구지와 짚더미 등속으로 엄폐물을 만들어 기다렸고 조선인 별기군들도 열을 지어 사격 자세로 기다렸다. 무위영 군병들은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이 특히 강했는데 원래 자기네 집이나 한가지이던 하도감을 갑자기 나타난 왜인이 접수하고 별기군을 조련한다며 툭하면 귀빈이 참관하러 오니 외곽 경비나 하라든가 부대의 대청소나 시키던 것이었다. 민 씨 혈족들이 병조와 별기군의 당상을 모두 맡았으니 별기군에 들지 못한 모든 군교는 이미 군대가 아니었다. 호리모토는 대신들 앞에서 제식 훈련을 보여주기 전에 칼솜씨를 자랑하기도 했는데, 고양이 한 마리를 단칼에 다섯 토막으로 베어버리고는 고기를 훔쳐간 도둑을 처벌했노라고 우스갯소리까지 했다. 군율의 엄정함을 보이기보다는 조선 사람의 감정과는 차이가 있는 잔인성으로 보였다고 한다. 군병들은 별기군 막사로 돌입하면서 누가 호리모토를 잡아죽이느냐가 모두의 관심사였다. 처음에 별기군 막사 쪽으로 몰려가던 군병들을 향해 사격이 시작되어 수인이 살상당했지만, 난군 측은 정면에서 양총 가진 군병들이 응사하며 전진하고, 창과 칼을 든 군사들은 좌우로 나뉘어 그들의 측면으로 돌아 총탄을 무릅쓰고 돌격하여 함부로 찌르고 베니 별기군 측 전열은 일시에 무너져버렸다. 호리모토와 일본인들은 난전 중에 찔리고 베어져 참혹하게 살해당했고 일부 별기군도 죽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무기를 버렸다.

군병들은 무기고를 열어 탄약과 양총을 모조리 꺼내어 스스로 무장했고 영장 김영춘의 명령에 따라 항복한 별기군은 더 이상 살상하지 않고 무장해제시킨 다음에 각자 귀가하도록 놓아주었다. 이미 초저녁이 되었건만 그들은 쉴 틈도 없이 열을 지어 서쪽 돈의문을 향하여 구보로 행군했다. 총창을 꽂은 양총을 앞에총 자세로 치켜든 수백 명의 군병들은 질풍처럼 돈의문을 지나 모화관 방면의 기영(畿營) 사거리 쪽으로 나아갔다. 돈의문 밖을 나서자 마자 경기감영이 있었고 그 안의 청수관(淸水館)을 일본 영사관으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감영에는 군영과 경기 관찰사의 선화당이 있었다.

 

허민을 비롯한 도성 안의 난민들과 별장 김장석이 이끄는 군병들이 먼저 쳐들어왔지만 기영의 당직병들 오십여 명과 청수관을 지키는 영사관 호위를 맡은 일본 순사 십여 명이 양총을 쏘면서 버티고 있어 진입하지 못하고 주춤하고 있던 참이었다. 여섯 해 전에 강화도 조약으로 입국하게 된 일본 공사 하나부사는 원래 도성 안에 공관을 둘 셈이었지만 뒤늦게 눈치를 챈 조선 조정은 부득이 상주 공관을 허용하더라도 성 안에 들여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도성 안은 아니었지만 서대문인 돈의문을 나서자 마자 있던 경기감영 경내의 청수관은 일본이 임시 숙소로 쓰다가 주저앉은 곳이어서 우물쭈물 허락을 해주었던 것이다. 공관원은 조선 주재 대리공사 하나부사와 수행원 호위 순사 하인 등 삼십여 명이었다. 도성 안에서 군란이 일어나자 일본 공사는 먼저 수행원들과 함께 인천을 향하여 탈출한 뒤였다.

먼저 와서 각자 담장과 건물 벽 등에 몸을 숨기고 가끔씩 방포를 하고 있던 난군은 하도감을 점령한 뒤 양총으로 무장하고 도착한 오백여 명의 원군이 도착하자 용기백배했다. 영장 김영춘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한 쪽은 중영 뒤로 돌아가 공격하게 하고 나머지는 정면을 맡게 하여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구식 군대의 사수들 중에 활을 메고 온 자들로 하여금 화전(火箭)을 쏘게 하였다. 불화살이 빗발치듯 날아가 목조건물의 창이며 기둥이며 문짝에 꽂혀 연기를 피우며 타오르기 시작했고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나자 난군들은 중영의 전면과 후면 양쪽에서 앞에총 자세로 돌격했다. 감영의 당직병들은 이미 전투의 초기에 많이 달아났고 버티고 있던 장교들도 건물이 불붙기 시작하자 총을 버리고 뒷담을 넘어 달아났고 청수장으로 난군이 뛰어들었다. 근병 접전이 시작되자 마자 난군들은 일본인들을 총창으로 찔러 죽였다. 군병들은 전 호조판서이자 경기도 관찰사인 김보현을 찾았으나 그는 민겸호처럼 입궁해 있어서 그날은 일단 모면했다. 군병들은 김보현 역시 일 년 이상이나 급료를 주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 여기고 민겸호와 함께 처단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일본 영사관과 기영은 밤새도록 연기와 불길에 휩싸여 타올랐다. 서일수는 난군에 섞여서 이 모든 것들을 목격하고 새벽녘에야 구리개의 숙소로 돌아갔다. 변이 일어난 지 닷새째인 유월 열흘에 군사 천오백여 명과 시정의 백성들도 천여 명이 가담하여 모두 삼천 명 가까운 병력이 되었다. 궁궐을 지키는 장어영의 군사들도 비번 군사들은 거의 모두 난군에 참가해 있었고 수직하고 있는 자들도 모두 한편이었다. 허민이 이끄는 수백 명의 난군들이 새벽부터 흥인군 이최응의 집과 호군 민창식의 집을 급습하여 살해하고 창덕궁 돈화문으로 짓쳐들어갔다. 수문장 이하 군졸들은 궁궐 문을 활짝 열었고 난군 병력은 거침없이 궁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그들은 중전 민 씨를 찾아 대조전으로 몰려갔지만 왕비는 궁녀의 옷을 바꿔 입고 무예별감의 등에 업혀 궁궐을 빠져나갔다.

조정은 뒤늦게 책임도 지지 않고 진무에 실패한 무위대장 이경하 등 무관들을 파직하고 병조판서 민겸호도 파직했으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왕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대원군의 입궐을 명했고 그는 부인과 후임 무위대장으로 임명된 장자 이재면을 데리고 궁에 들어갔다. 허민은 무위영 장어영의 구 훈련도감 군교 이백여 명의 무위대를 조직하여 대원군을 호위했다. 대원군은 왕명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왕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는 교지를 내려 군변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민겸호는 동별영과 하도감이 난군에 점령되고 무기까지 탈취되는 등 소란이 커지자 좌우 포도청 군사를 움직여보려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난군이 궁궐로 진입하여 대조전까지 범하게 되고 믿고 있던 중전이 달아나자, 민겸호는 호종하는 측근도 없이 궁을 빠져나왔다가 안국방 부근에서 그의 얼굴을 알아본 난군들에게 붙잡혔다. 결국 민겸호는 전임 호조판서 현임 경기관찰사인 김보현과 함께 오라에 묶여 궁중에 끌려갔다. 중희당(重熙堂) 높은 계단 위 당상에 올라앉은 대원군에게 민겸호가 애걸하며 소리쳤다.

"대감, 제발 날 좀 살려주시오."

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간단히 대답했다.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

대원군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군병들은 그를 계단 아래로 끌어내려 사정없이 총창으로 찌르고 환도로 베었다. 김보현 역시 대원군에게 살려 달라고 하소했으나 그에게는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돌렸다고 한다. 김보현도 민겸호가 죽은 잠시 후에 같은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난군은 민겸호의 시체를 총칼로 난도질했고 김보현의 시체를 발로 짓밟고 입을 찢어 엽전을 쳐넣고 총의 개머리판으로 마구 쑤셔넣으니 돈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왔다고 한다. 그들의 시체는 삼청동에서 흐른 물이 청계천과 만나는 혜정교 부근 개천에 버려졌다. 그 무렵에 장맛비가 계속되어 개천에 물이 가득찼고 날씨까지 흐리고 더웠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시기에 시신들이 누구 하나 거두어주는 자가 없이 개천에 오래 버려져 있었는데 부패한 살이 물에 불어서 흐느적거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탐욕한 자의 말로라며 조롱했고 시정의 어린아이들까지 시신을 쳐다보며 비웃었다. 시신은 지나는 사람들이 그러려니 하고 잊을 만하던 한참 뒤에야 수습되었다. 대원군은 반대파에 의해 소외되었던 반외척 세력을 기용하고 그동안 투옥되었거나 정배당했던 죄수들을 사면했다. 변을 일으킨 군병들이 왕후 민 씨의 처단을 주장하며 해산을 거부하자 대원군은 그녀의 실종을 사망으로 단정하고 중전의 상()을 공표하였다. 그러나 장호원의 친척집에 피난 가서 숨어 있던 민비가 개화파인 김윤식 등을 청나라로 보내어 원조를 요청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서일수 이신통은 태평방 구리개 부근에서 파옥의 덕으로 풀려난 박도희와 함께 며칠을 보냈으나, 아무래도 도성 안은 난리 뒤끝이라 뒤숭숭하고 정국이 바뀌어서 인정 이후에는 기찰까지 심해져서 처소를 옮기기로 하였다. 세 사람은 돈의문 밖 애오개의 쌍버드나무집으로 갔고, 책 짐은 애오개에서 곁꾼 둘을 사서 지게에 지워 옮겼다.

박도희가 자신이 서울로 압송된 뒤에 집안일도 걱정이고 인쇄한 책의 처리도 급하다 하여 일단 충청도 예산의 형님 집으로 내려갈 작정을 하게 되었다. 서로 결산을 하는데 산삼 팔았던 돈이 천육백 냥 있었으며 책의 방각 인쇄와 옥바라지 비용 등으로 얼추 오백 냥쯤 들었어도 천 냥 돈이나 남아 있었다. 주인 없는 거금이 들어온 것 같았지만 이는 애초부터 천지도를 위하여 쓸 돈이라 박도희는 돈을 수습하여 가면서 은공을 갚겠다며 서일수에게 이백 냥을 노자로 떼어주었다. 박도희는 난이 끝나고 열흘쯤 지나서 경주인의 주선으로 마포 나루로 나아가 충청도로 내려가는 조운선을 타고 낙향했다. 그가 책을 배에 싣고 간 것은 물론이었다. 서일수는 가을로 접어들던 무렵에 박도희를 만나러 충청도로 내려갔고, 이듬해에 그의 안내로 이대 교주인 명월신사(明月神師)를 만나 천지도에 입도하게 된다.

유월 말에 청의 마건충(馬建忠)이 이끄는 병력 사천오백 명이 인천에 상륙하고 연이어 칠월 초에 김윤식, 정여창 등의 조선 사신을 대동한 청의 해군제독 오장경(吳長慶)이 남양만에 상륙했다. 일본군도 거의 동시에 군함 네 척과 일개 대대 병력을 조선에 파견했다. 청은 종주국으로서 속방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이었으나 이 기회에 일본에 선수를 빼앗겼던 조선에 대한 기득권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청군이 먼저 궁궐을 수비하며 도성 요소마다 군대를 배치하였으나, 일본 측으로서는 조선과 보다 이로운 협정을 맺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보았으며 청과는 상륙 병력의 차이가 있어 감히 분쟁을 일으키려 하지는 않았다. 이제 조선 조정은 청과 일본 양국에 모두 빚을 지게 되었으며 나라의 자주권은 더욱 축소되고 말았다.

청의 오장경, 마건충은 대원군을 진중에서 협의하자고 불러서는 텐진에 가서 황제의 교유를 받아오자고 강압하여 청국에 데려다 억류시켰다. 조선 조정은 다시 청국의 보호 아래 민 씨 척족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조선과 청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 특권을 인정했고, 동시에 조선과 일본은 군란의 책임자 처벌과 피해 배상을 내용으로 한 제물포조약과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의 조선에서의 이익을 더욱 확장시켜 주었다. 이것이 칠월 한 달 사이에 그야말로 폭풍이 몰아치듯 급박하게 일어난 급변이었다. 일본은 조선 조정을 통하여 남산 일대에 새로운 공사관을 받고는 일본인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주둔시켰다. 청은 마건충의 병력이 동대문인 흥인지문 밖에 있는 숭인방 동관묘 앞에 주둔했고 오장경의 병력은 임진왜란 이후 중국군의 전통적 주둔지였던 용산 이태원에 주둔했다. 이들은 칠월 십육일 밤에서 이튿날 새벽에 걸쳐서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의 조선군인 거주지에서 난군의 색출 토벌 작전을 개시했다.

이에 앞서 어느 날 서일수와 이신통은 애오개 쌍버드나무 객점에서 칩거해 있었는데 바깥이 떠들썩하여 길가로 나가보았다. 기영 사거리 방향으로 가는 대로변에 사람들이 하얗게 몰려서서 무슨 큰 구경이 난 듯하였다. 앞에 붉은 원을 그린 깃발을 쳐든 자와 금줄에 검을 찬 장교가 말을 타고 앞장섰고 뒤로는 일단의 군대가 삼열 종대로 행군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군대의 모습이었지만 사람들은 모두가 첫눈에 저들이 일본군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검은색 군복에 군모를 쓰고 군화 위로 각반을 두르고 허리에 가죽 탄대를 찼으며 어깨에는 총검 꽂은 소총을 메고 있었다. 그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똑같은 보조로 행진해 나아가는 모습에 사람들은 모두 말 한마디 없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다시 한참 뒤에는 청군의 행군도 구경하게 되었는데 짧은 웃옷에 칼을 차고 머리에는 붉은 수술을 드리운 테두리가 작은 삿갓 같은 관모를 쓴 장수가 말을 타고 지나갔고 뒤로 역시 같은 모양의 군모에 총창 꽂은 총을 멘 군대가 열을 지어 지나갔다. 맨 뒤에는 말이 끄는 야포 십여 대가 따라갔고 청국 군대는 끝도 없이 행군하여 지나갔다. 일본과 청의 군대 행렬을 구경한 서일수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한마디 했다.

"이제 나라가 다시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네."

"그럼 망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우?"

이신통이 묻자 서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은 저희끼리 권세를 다투다가 모두 망하게 될걸세. 우리 백성들이라두 달리 살길을 찾아야 할 판이여."

칠월 열엿새 날에 이신통은 보통 때처럼 연초전이나 구리개 약방에서 전기수질을 하고 있었다. 운종가에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장꾼과 전이 벌어져 있었으며 사람들은 지난 한 달 동안의 벼락 치듯 하던 시국의 변화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신통은 배오개 연초전에서 책을 읽고 나와서 간단히 낮것 요기를 하고는 흥인문 못 미쳐 첫다리에서 임경업전을 읽고 있었다. 청중들도 시국의 분위기 영향을 받는지 청에 대적했다가 끌려가서는 세자를 구해내고 오히려 역적으로 몰렸던 임경업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임 장군이 김자점의 모함으로 죽게 되자 흥분한 청중들은 간신을 죽여라! 외치며 장 보고 와서 들고 있던 빗자루, 호미, 마른 생선 등속을 내키는 대로 던져서 이신통은 이마에 멍이 들기도 하였다. 한참 읽다가 임경업이 압송되어 처형되기 직전에서 끊고는 열립군 총각을 시켜 바구니에 엽전을 거두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김만복 별장을 아시우?"

", 잘 알다뿐이오?"

"그 사람이 오늘 저녁에 마전교 모줏집에 온답디다."

"아 그 고깃집 말이죠?"

"내야 어딘지 알우? 김 별장이 전하라구 해서 당신을 찾아다녔소."

이신통은 광통교 부근을 돌아 그날은 구리개 약방에 들르지 않고 늘 도성에 나왔다가 귀가할 때에 서일수와 만나던 연초전으로 다시 돌아갔더니 그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침울하게 종루를 행군하는 청군과 남산 아래 곳곳에 보이는 일본군에 대하여 볼멘소리로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신통은 서일수의 소매를 잡아 끌고나가 김만복이 만나자던 얘기를 해주었고 그들은 즉시 종루 거리를 벗어나 청계천변을 따라 마전교 쪽으로 올라갔다. 하도감이 난리를 겪은 이후에 아직도 수습이 안 되어 군인 손님들이 드나들던 욕쟁이 주모네 모줏집은 어쩐지 휴업 중인 것처럼 한산했다. 두 사람이 삽작 안으로 들어서니 주모가 그날따라 얌전한 음성으로 그들을 맞았다.

"어서 방에 들어가 보우."

방문을 열자 김만복은 혼자 빈 상을 마주하고 쪼그려 앉아있었고 서일수가 말했다.

"무사했구먼, 그동안 어디서 뭘 하구 있던 겐가?"

"아유, 여태 기다리느라구 목말라 혼났소."

언젠가 그날처럼 돼지 뒷다리 삶은 것과 술 한 동이를 시키고는 몇 순배 마시고 나서 김만복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허민이 조직했던 대원군의 무위대에 들었고 대궐과 운현궁을 오가며 호종했다. 며칠 전에 대원군이 중국으로 끌려가고 정국이 급변하면서 허민은 그들에게 소임이 끝났으니 무위대를 해산한다며 각자 도생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바로 어제 김춘영 영장이 삼청동 자택에서 청군에 의해 체포되었으니 주동했던 자기네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는 것이다. 만복의 이야기를 듣고 서일수가 말했다.

"어서 식구들 데리구 근기 지방을 벗어나지 그러나? 까짓 청군이 도성에 있어 봤자 제 나라 일도 아닌 터에 한두 달 지나면 돌아가겠지. 소나기는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일세."

"안 그래두 처가가 강원도라 그리로 들어가볼까 생각 중이우."

"자아, 오늘은 아무 걱정 말구 한잔 하세나."

그들은 이러저러한 시국담을 나누며 전처럼 흥이 나지는 않았으나 오랜만에 밀린 회포를 나누었고 서일수는 김만복에게 내일이라도 왕십리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그는 만복이 식구가 떠나는 길에 노자라도 보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밤 초경 무렵에 술집을 나왔고 마전교 위에서 헤어졌다.

그날 해시 무렵에 흥인문도 이미 닫혔고 숭례문도 닫힌 시각에 동관묘의 청군 진영에서는 마건충이 이끄는 병력이 조용히 장막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행군을 시작했고, 용산에 있던 오장경 부대도 지척에 있는 이태원의 군인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미 민 씨 조정의 요청으로 군란에 가담했던 주동자를 모조리 체포하라는 군령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청군은 먼저 정찰대를 앞세우고 동묘에서 출발하여 청계천의 영도교를 건너 왕십리 벌에 이르렀다. 정찰대는 한 식경 전쯤에 미리 도착하였는데 조선 측 역관과 별감 서너 명이 그들을 안내했다. 자시가 가까울 무렵이면 동네 사람들이 이미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을 시각이었다. 정찰대의 군관이 마건충에게 보고하기를 사방이 배추밭이라 마을을 포위하면 빠져나갈 곳은 너른 들판뿐이라고 하였다. 마건충은 병력을 삼 대로 나누어 마을의 좌우 측과 배후를 둘러싸고 중군이 마을 안으로 진격한다는 영을 내렸다. 병력 배치가 끝나자 군대는 총검을 치켜들고 마을 안으로 쳐들어갔고 우선 중앙에 동계 사랑이 있는 마당을 점령하고 십여 명씩 패를 나누어 집집마다 수색을 벌였다. 그들은 집 안에 들어가서 사내가 보이면 무조건 우격다짐으로 끌어내어 동계 사랑 앞으로 몰아왔다. 그들은 곤히 자다가 난데없는 청군의 급습에 혼비백산하여 담을 넘어 달아나다가 미리 포위하고 있던 군사들에게 잡혀 죽거나 총탄에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어느 집에서는 미리 낌새를 알아차린 조선 군병들이 서로 연락하여 저항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모두 맨손이거나 농기구뿐이었다. 퇴청 시에 어느 누구도 무기를 지니고 관문을 나설 수 없고 더구나 도성 밖으로 나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저항하는 자는 즉시 총이나 칼로 진압되었다. 마당에는 곳곳에 횃불이 밝혀져 있었고 마건충은 수하 장교들과 더불어 마당으로 끌려오는 마을 남자들을 내다보았다. 몇 차례나 집집을 훑고 돌아온 군사들이 마당을 둘러싸고 늘어서자 마의 부장이 앞에 나와 연설을 했고 역관이 조선어로 통역했다.

우리는 조선 국왕의 요청으로 이번에 군란을 일으킨 주동자를 색출하려고 한다. 양민은 보호받을 것이며 죄 없는 자는 심사가 끝난 다음에 모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만약 심사 도중에 소란을 일으키거나 반항하면 즉시 처결한다. 주동자 이외에도 군인인 자는 스스로 소속과 직책을 말하면 죄의 경중에 따라 너그럽게 조치할 것이다.

청군의 부장이 물러서자 이번에는 무예별감이 나와 조선말로 외쳤다.

"이제부터 우리가 찾고 있는 자들의 이름을 부르겠다. 호명된 자는 이쪽으로 나와 대기하기 바란다. 스스로 숨기려 하거나 옆에서 숨겨주려 한다면 가족들까지 처벌 받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그가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거사 전에 그들이 돌렸던 통문에 적힌 순서 그대로였다. 별장 김장석의 이름을 부르자 쭈그리고 앉았던 사내들 틈에서 그가 걸어 나와 마당 한쪽에 섰고 군사들이 그의 어깨를 개머리판으로 쳐서 꿇어 앉혔다. 김만복의 이름을 불렀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별감은 종이에서 얼굴을 들고 몇 번 더 부르면서 둘러보다가 군사들에게 한 사람을 지목하며 말했다.

"저놈을 끌고 가서 김만복이네 가족을 끌고 오라.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군율에 따라 처치하라."

군사들이 지목받은 자를 데리고 마당 밖으로 사라졌다. 별장 유춘길, 유영길 형제의 이름을 부르자 유춘길이 다리를 절며 걸어나왔다. 그는 이미 선혜청 소요 사건이 일어났을 때 포도청에 끌려가 국문을 받았던 터였고 난군의 파옥으로 풀려났던 것이다. 유영길은 요행히 피했는지 잡히지 않았다. 연이어 통문에 적힌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고 그들은 순순히 걸어나와 한쪽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십여 명의 이름 부르기가 끝나자 청군은 그들을 결박하여 마을 밖으로 압송했고 나머지 마을 사람들에 대한 심사가 계속되었다. 그들은 나이와 신체로 어림짐작하여 군인으로 보이는 사내들을 다시 가려냈고 군인으로서 요패(腰牌)를 차고 있던 자는 스스로 자복하지 않았다 하여 뭇매를 때리고는 포박했다. 마당의 바깥쪽에서는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동정만 살피던 가족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군사들은 허공으로 몇 발 위협 사격을 해 보였고 겁에 질린 가족들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김만복의 집에 갔던 군사들이 그의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오자 별감은 그들을 사정없이 묶어서 압송 대열에 합류시켰다. 부대가 철수하기 전에 별감이 마당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말했다.

"김만복과 유영길은 명일 아침까지 자수해야 할 것이다. 만약 영에 따르지 않는다면 김만복의 가족과 유영길의 형은 대신 처벌을 받을 것이다."

청군은 이날 왕십리 일대에서 백오십여 명을 체포하고 이태원에서 이십여 명을 체포했다. 이날 군대의 진입을 눈치챘던 김만복은 배추 밭고랑까지 기어나가 거름 구덩이에 짚을 깔고 엎드려서 발각되지 않았지만, 날이 새고 군대가 물러간 다음에 식구들이 끌려간 사실을 알게 되자 도망을 포기했다. 그는 동관묘의 청군 군영으로 찾아가 자수했다. 운현궁 호종무사 허민과 유영길은 각각 어디로 달아났는지 끝내 잡히지 않았다. 허민은 아마도 그의 주인 이재면이 척족의 반대파에 들었으나 왕의 친형이고 보니 시국이 바뀐 뒤에 흐지부지되었을 터였다. 유영길 역시 이미 그의 형이 잡혔고 군직도 사수에 지나지 않았으니 수년 만에 잊혔을 것이다.

서일수와 이신통은 이튿날 도성 안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으로 청군의 왕십리와 이태원에 대한 야간급습 작전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일단 배오개에 나아가 더욱 정확한 소문을 듣고자 하였더니 김만복이 청군 진영에 잡혀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흥인문을 나서서 동관묘 부근까지 나가 보았지만 삼거리의 북편에서 건너다보기만 했을 뿐 경계가 엄중하여 통행할 수가 없었다.

사흘이 지나서 대문 밖 소문이 가장 먼저 모이는 배오개에는 체포된 군인들이 효수되었더라는 말이 돌았다. 그것은 전 보러 들어온 장꾼들이 방금 구경하고 왔다는 소문이었다. 서일수와 이신통은 흥인문을 나가 동관묘 쪽으로 내려갔고 삼거리에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원래가 효수란 산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는 처분인지라 동관묘 정문 앞의 공터에 말뚝 박고 새끼줄을 매어 놓고 그 앞을 조선군 한 명이 총검을 옆에 끼고 지켜 서 있었다. 새끼줄 울타리 앞에 군란을 일으킨 자에 대한 처형을 알리는 방문이 붙었고 기다란 장목 위에는 상투를 풀어 묶어 놓은 목이 매달려 있었다. 매달린 목 아래 죄목과 이름이 붙은 종이쪽이 바람에 팔락대고 있었으며 장목의 대열 뒤에는 아무렇게나 던져진 목 없는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 김만복의 얼굴을 찾아낸 두 사람은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만복의 얼굴은 이미 거멓게 죽은 흑색이었고 두 눈의 한쪽은 퀭하니 부릅떴으나 다른 한쪽은 반쯤 감겨 있었다. 서일수가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이신통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제 그만 가지."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도성으로 들어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맛골로 들어섰으며 주점에 들어가 탁주를 벌컥대며 마시고 나서야 말문이 열렸다. 이신통이 훌쩍이며 울음을 터뜨리자 서일수가 말했다.

"우리 저 사람 수습을 해주어야 하지 않겠나?"

"어떻게요?"

"저 시신들은 어쨌든 가족과 동활인서의 일이 될 걸세."

서일수의 의견으로는 그들이 살던 약재 창고의 주인 의원은 잡과 출신이라 혜민서나 활인서의 의원들과도 서로 연줄이 닿을 것이니 동활인서의 의원을 통해 보자는 거였다.

"그런 수가 있군요. 제가 의원님과는 식구 같은 처지니 한번 부탁해 보십시다."

이신통이 구리개 약방으로 가서 늘 하던 대로 전기수 노릇을 하고는 주인 의원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김만복이를 사귀게 된 사연과 그가 사내로서 의협심으로 동료 군인들의 소요에 앞장섰던 것을 말하고, 다만 자신은 그의 시신을 수습해주고 싶다는 사연을 앞뒤 조리에 맞게 얘기했다. 의원은 빙그레 웃으며 신통의 얘기를 듣고 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 참 신통방통한 생각이로다! 마땅히 그래야겠지. 지금 때가 마침 복더위 철이니 시신을 방치하는 것은 역병을 불러들이는 짓이지."

"지금 때가 마침 복더위 철이니 시신을 방치하는 것은 역병을 불러들이는 짓이지." 하더니 모레쯤 다시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서일수와 이신통이 다시 찾아가니 주인 의원이 그들을 반기며 말했다.

"동활인서로 가보시게. 아마 지금쯤 처결이 내렸을 걸세."

그들이 오간수문 지나 동활인서에 가서 만나려는 의원의 이름을 대니 서리가 얼른 알아듣고 시원시원 대꾸했다.

", 그 일이라면 이미 깍정이들 시켜서 영도교 건너편에 내다 버렸소. 식구들이 수습하여 매장을 하든지 시일이 지나도 연고자가 없으면 화장을 하게 될 거라오."

두 사람이 부지런히 왕십리 군병 마을로 찾아가 동계 사랑에 들렀더니 노인들만 몇 사람 보였다. 김만복의 집을 묻자 노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우물쭈물 대답하려 하지 않거늘, 서일수가 얼른 말해주었다.

"염려 마십시오. 저는 만복이 동무되는 사람입니다."

"지금 처형된 이들의 시신을 영도교 아래 내놓았으니 식구들이 가서 수습해올 수 있답니다."

노인들은 목소리를 합쳐서 고마운 일이라고 그들에게 치하하고 헤어져 가더니 잠시 후에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다. 각자 의논이 되었는지 가마니와 멍석에 문안을 오가던 소달구지까지 동원 되었다. 김만복의 처는 아이들을 옆집에 맡겨두고 달려왔다는데 몰골이 초췌하고 의복도 남루하여 마치 흉년의 유랑 백성 같았다. 서일수와 이신통은 그들을 이끌고 영도교로 가서 둑에 일렬로 늘어선 목 없는 시신을 거두었다. 이미 주검의 부패가 심했지만 그 손발이며 몸매의 특징으로 가족들은 제 혈속을 대번에 알아보았고, 한꺼번에 짚 섬에 싸서 내다버린 머리도 대부분 가족들이 거두었다. 두어 사람이 서로 자기 식구의 머리라고 실랑이를 하는 일은 있었지만 곧 수습이 되었다. 달구지에 열한 구의 주검들을 싣고 마을 동계 사랑으로 돌아오니 노인들이 벌써 장례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장지는 마을에서 멀지 않은 청량사 야산에 묻기로 했고 이튿날 선선한 새벽 나절에 명정도 상여도 없이 출발했다. 관이며 수의도 없어 그냥 방에 깔았던 멍석으로 말아 마을 청년들이 지게에 지고 들길을 걸어갔다. 산역을 마치고 돌아와 서일수와 이신통은 김만복이 남겨 놓은 처자녀를 대하고 보니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의 아내는 이제 기력도 없어 벽에 기대어 앉았고 아이들은 제각기 훌쩍이며 울고 있다. 서일수가 준비해왔던 백 냥짜리 어음을 내어 만복이 처에게 내밀었다.

"계수씨, 이 동네서 사는 것도 좋겠지만 문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아무래도 도방 대처가 먹고살기에는 여러 가지로 유리할 것입니다. 이 돈이면 자그마한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하여 밥집이나 모줏집을 열 수도 있을 거외다."

"이런 태산 같은 은혜를 입었으니 주인도 저승에서 편히 눈을 감을 것입니다."

그들은 왕십리를 떠나면서 만복의 효수된 머리를 보던 때의 자책감이 한결 덜해진 듯하였다. 다시 무심한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고 그렇게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한풀 꺾여서 저녁 바람이 서늘해지더니 날짜를 약속해놓았던 것처럼 느닷없이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녁을 먹고 애오개 주막 마루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어허, 입추로구나!"

서일수가 중얼거리고는 남은 노을이 번진 초저녁 하늘가를 올려다보았다. 귀심(歸心)은 화살과 같다 했던가. 서일수의 마음은 먼 삼남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고향이 따로 있을 리가 없었고 다만 눈에 익은 산천만이 기억 속에 삼삼할 뿐이었다. 서일수가 잠잠히 앉았다가 신통에게 말했다.

"낼이나 모레나 나는 떠나야겠네."

"어디루요?"

이신통이 전 같으면 왜 가느냐, 좀 더 머물지 그러느냐, 대꾸가 많았을 테지만 그도 겪은 바가 많아서 별로 놀라지 않고 한마디 물었을 뿐이었다.

"글쎄……. 박 서방도 만나야겠고 이제 풍수질 다닐 철도 돌아왔으니……."

"저는 전기수로 밥벌이도 되는 셈이니 좀 더 머물다 가렵니다."

서일수는 그가 말한대로 이틀 뒤에 한양을 떠났다. 그는 헤어지기 전에 해마다 추석 전후에 전주에 머물 것이니 향청에 와서 이방에게 자신의 행방을 물으라고 일러주었다. 다시 세월은 물처럼 흘러 가을이 지나가더니 동지 무렵의 초겨울이 다가왔다. 신통이 여느 때처럼 오후에 구리개 약방에 책 읽으러 들렀더니 주인이 말했다.

"자네 매제인가 하는 사람이 찾아왔더군."

신통은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하고 고기 눈이 벙벙해져서 주인 의원을 바라보기만 했다. 매제라면 하나밖에 없는 누이 덕이의 남편이라는 말일 터인즉 집안 소식에 전혀 깜깜하던 신통으로서는 그가 누구인지 알 턱이 없었다. 손님들이 모이고 신통이 최근에 새로 사들인 언패소설책 박씨전을 읽는데 시대 배경이 임진왜란 때의 일이라 모두들 재미가 진진하여 숨을 죽이고 들었다. 그는 책을 읽어나가면서도 한 장면이 끝나면 몇 호흡을 쉬었다가 청중의 기미를 한 번씩 주욱 살피던 것이었는데, 방금 누군가 미닫이를 열고 들어와 문가에 살그머니 앉는 걸 보았다. 그는 아버지 이지언 의원의 조수인 송 생이었다. 서당에서 신통과 그의 형 준과 더불어 셋이서 무릎을 맞대고 공부하면서도 늘 송 생이라고만 불러서 그의 이름을 막상 생각해보면 가물가물하였다. 그는 훈장인 송 초시의 아들로 아버지 이지언은 신통이 아니라 그에게 의업을 넘겨줄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경이 송 생의 이름이었다는 게 생각났다. 신통은 그가 나타난 뒤로 엄벙덤벙 읽어치우고는 불평하는 손님들을 뒤로 하고 약방을 나섰다. 그는 우경이를 데리고 구리개 부근 주점으로 가서 함께 술과 밥을 먹었다. 신통은 두 살 아래인 송 생을 늘 막내둥이처럼 대하는데 먼저 궁금한 점을 물었다.

"나 있는 델 어찌 찾아냈니?"

"보은 집에 들르는 약재상이 한양에 올라갔다가 언니를 보았다구 그럽디다. 구리개 수세보원 약방에서 신통방통이란 별호를 내세워 전기수질을 하구 있다구요."

신통이 잠깐 생각해보니 지난가을엔가 그가 책읽기를 마치고 나서자 손님 중에 누군가가 따라나오며 말을 걸었던 게 생각났다. 그가 보은 사람이라고 하여 그러려니 했을 뿐 신통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였다. 그 사람은 읍내에서 신통이 소년 시절에 책을 낭독하던 자리에 몇 번이나 참례하였노라고 말했고 그에게 술까지 사고 헤어진 적이 있었다.

"헌데 니가 언제 내 매제가 되었단 말이냐?"

"헤헤, 그건……"

우경이는 뒤통수를 득득 긁더니 덧붙였다.

"의원님이 명년에는 덕이와 혼인시켜준다구 해서요."

"그래? 참 별일이로구나. 지금 그 상투는 분명히 가짜인 셈이구."

신통이 슬슬 건드려 먹는데도 우경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솔직하게 말했다.

"한양 먼길을 오는데 아무래두 떠꺼머리를 해가지고는 얘, 쟤 하며 하대나 받기 십상이지요. 미리 외상으루 장가를 들었다 칩시다."

"그래, 한양에는 무슨 일로 왔니?"

"언니를 잡으러 왔지요. 헌데 아무리 집에 정이 없단들 가내 두루 평안하신가, 한마디를 못 한단 말요?"

신통은 할 말이 없어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할 뿐이었고 우경이는 농담조를 싹 거두고 정색을 하고 말했다.

"어머님이 앓으시구, 형수도 산달이 가까웠지요. 이제 해를 넘기기 전에 저하구 같이 내려가십시다."

이신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내는 혼인하고 이내 애가 들어선 모양이지만 지금 와서는 얼굴도 뚜렷하지 않을 만큼 기억이 희미했다. 그가 떠나기 전에 할말이 없어 생뚱맞게 그녀의 친정집 마당에 섰던 석류나무가 좋아 보였다고 말했던 것과, 자신을 배웅해주던 금산댁의 희부연한 자태만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의원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니 언니를 보았다는 소문을 들으시자 마자 절더러 당장 서울 가서 끌고 내려오라 하셨지요."

전에는 식구들이 동이 어멈 또는 기껏해야 작은어머니라고 부르더니 이제 어머니라고 마음 놓고 부르니 그 또한 가슴 저리는 노릇이었다.

"어머니는 어디가 아프시냐?"

"옹저증(癰疽症)이 심해져 미음도 간신히 넘기시니 얼마 못 사실 겁니다. 저하고 집에 가십시다. 형수도 곧 출산이 낼모레요."

"내가 기왕에 세상의 경난(經難)을 배우려고 집을 떠났으니 어찌 일 년도 못 되어 돌아가겠느냐?"

이신통은 송우경을 데리고 애오개 주막으로 가서 함께 지냈다. 그는 아우나 다름없는 우경에게 자기가 한양에서 보냈던 저간의 일들을 차근차근 일러주었던 것이다. 송 생은 일단 그와 동행하여 낙향하는 것은 포기하고 다시 찾으리라 작정하고는 열흘 만에 보은으로 돌아갔다. 이신통은 이듬해 봄이 오기까지 한양에 있었으나 그 이후에 송우경이 다시 찾아왔을 때에는 이미 행방이 묘연했다.

 

 

 

4. 부평초 하얀 꽃

나는 무주를 거쳐 신통의 고향인 보은에 다녀온 뒤에 엄마에게는 그가 훨씬 전에 혼인을 하여 딸까지 낳았더라는 말을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그 말까지 했더라면 엄마는 나도 시집갔다가 스스로 소박을 자청하여 파경한 전말은 잊고서 이 서방을 두고두고 원망하겠기 때문이었다. 그냥 엄마 마음 편하게 해드리려고 그의 누이를 만난 일과 제사 때마다 친정으로 생각하고 오라고 했던 말만 전해 드렸다. 엄마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면서 중얼거렸다.

"이 서방은 못 만났지만 너를 그 집 식구로 받아들인 셈이니 조금 마음이 놓이는구나. 그래 이제 그 녀석이 제 발로 기어들어 올 때까지 기다려두 되겠다."

엄마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그것만은 순순히 넘어갈 수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소식이 있으면 어디로든 찾아가볼 생각이우. 길에서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팔월 말에 돌아온 뒤 시월 입동이 금방 찾아와서 어염 장사는 이때가 가장 좋은 시기였고 안 서방은 강경의 상단 사람들과 대를 묶어 행상을 떠났다. 그가 이번에는 남도 쪽으로 향하였는데 첫눈 내린 날에 전주 거쳐서 돌아왔다. 그는 며칠 동안은 입을 닫고 있다가 내가 앞채 부엌방에서 찬모와 푸성귀를 다듬고 있는데 툇마루에 앉더니 슬쩍 말을 꺼냈다.

"이번에 장사 나갔다가 우연히 박돌이란 사람과 부딪치게 되었구먼요."

"요즈음도 광대 물주로 나다닙디까?"

", 여전하더군요. 잠깐 저 좀 보시지요."

나는 눈치를 채고 그를 따라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는 마당을 돌아 광 앞에 서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내게 말했다.

"박 서방이 사실은 아씨가 마음 상할까 하여 말하지 않고 있었으나 신통이 서방님께 여인이 있었다구 합디다. 그것두 한양에서부터 알던 여인이라는데 지금은 유명 짜한 소리꾼이 되었다지요."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송 의원에게서 그가 애오개 주점에 있을 때에 보니 애오개와 칠패의 놀이패들과 어울렸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고, 아마도 이신통이 광대들과 어울려 한양을 떠난 것도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 여인이 지금 어디 사는데요?"

"이름이 백화(白花)라고 하는데 전라도 부안에 살 거라구 합디다."

아직은 엄동설한도 아니고 동지 전까지는 나들이하기에 좋은 철이라 나는 안 서방의 말을 듣자 마자 대번에 길을 떠날 생각으로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먼 길을 다녀온 막음이 아부지한테는 미안한 소리지만 한번 다녀오는 게 어떨까요?"

"저야 아씨께서 가보시겠다면 내일 당장이라두 좋습니다. 다만 주인마님께서 걱정하실까 염려될 뿐입니다."

"전주에 아직두 박돌 아저씨가 있을라나?"

"모르죠. 하두 천지사방으로 싸돌아댕기는 위인인지라."

나는 잠깐 생각해보고 안 서방에게 말했다.

"전주 가서 박돌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든 앞세워서 부안까지 가볼 참이에요. 그러면 막음이 아부지는 부안까지 가실 필요가 없고."

시월 말 대설(大雪) 지나서 나는 안 서방과 함께 집을 나섰다. 새벽에 세마를 내어 안 서방이 견마 잡고 타고 갔는데 전주까지 하룻길에 당도했다. 어릴 적에 자란 곳이라 성문과 거리 곳곳마다 옛날 생각이 나서 자꾸만 두리번거리며 둘러보았다. 남문 안 주막거리로 들어가니 안 서방이 늘 다니던 길처럼 곧장 토담을 두른 널찍한 주막집으로 들어갔다. 중노미 아이가 우리를 맞았고 방을 정하기 전에 주인을 불러 박돌의 행방을 묻자 주인이 말했다.

"지금 박돌네 패거리가 남원에 나가 있을걸."

"며칠이나 되었소?"

"들락날락하면서 인근 고을을 돌아다니며 놀더니, 엊그제 하룻밤 묵고는 남원에 약계가 되어 있다며 떠났소. 아무튼 다시 돌아오기는 하겠지요."

낭패가 되었지만 그래도 전주서 남원까지가 지척이라 그 주막에서 하루 자고 이튿날 바삐 쫓아가기로 하였다. 말을 타고 왔는지라 그리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꿈은 왜 그리 많던지 밤새 잠자리가 뒤숭숭하였다. 기중 가장 선명한 꿈이 있었다. 모처럼 이신통이 보여서 이게 꿈이지 싶으면서도 어찌나 반가웠던지 깨고 나서도 한동안 눈을 뜨지 않고 기다렸다. 그가 어둠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랜 후에 딱딱한 목침 위에서 고개를 돌리니 뺨에 번진 눈물이 저고리 깃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우리 집에 처음 왔던 때의 그 모습대로 패랭이에 검정 덧저고리 걸치고 다리에 행전 치고 등에는 괴나리봇짐 지고 휘적휘적 걸어오는 것이었다. 내가 제자리에 오금이 저려서 오도 가도 못하고 바라보노라니 신통은 미끄러지듯이 내 옆을 스윽 지나쳐가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

"서방님, 어디 가시오?"

그의 소매라도 잡을 양으로 손을 뻗쳤지만 그는 바람결같이 내 곁을 빠져나갔다. 내가 돌아서서 그를 향하여 걸음을 떼려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신통은 어느 틈에 저만치 멀어져서 햇볕을 바라고 가는데 이쪽에서는 검은 그림자만 보일 뿐이었다.

"서방님!"

언덕을 허위허위 넘어가니 내리막길 저 앞에 개천이 보이고 외나무다리가 걸쳐 있다. 그는 성큼성큼 다리를 건너갔고 나는 뒤늦게 언덕을 내려가 다리 앞에 이르렀는데 저 맞은편에서 그가 나를 향하여 돌아서는 것이었다.

"왜 나를 찾소?"

그의 물음에 나는 꿈속에서도 그게 무슨 말인가 떡인가 원망하는 마음이 들어서 냅다 소리 질렀다.

"그걸 왜 나에게 묻는 거야, 몰라서 묻는 거야?"

신통은 다리 앞에 서서 잠시 대답이 없더니 내 곁을 떠나며 그랬던 것처럼 단정한 자세로 두 손을 모으더니 그대로 주저앉으며 무릎을 꺾고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등을 돌리는데 곁을 보니 웬 여인이 따르고 있었다. 쪽진 머리에 옥비녀 꽂고 남치마에 흰 저고리 입은 여인이었는데 이쪽에서는 등만 보일 뿐이라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시샘에 분이 치올라서 바삐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헛딛고 아래로 떨어지는데 한 키도 못 되던 개천이 얼마나 먼지 한참을 허공중에 떠 있는 듯했다. 드디어 물에 닿아 첨벙하며 빠지자 마자 잠이 깼던 터였다.

창문이 부옇게 날이 샜는데 나는 더 이상 잠이 들지 않아서 전전반측 돌아누우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해보았다. , 시샘하지 않으련다. 신통이 이미 전생이라 할 초년에 장가들어 어엿한 조강지처가 있었고 그에게 지선이라는 딸까지 있건만, 백화는 또 웬 인연이란 말인가. 그들 모두 자신이 그를 만나기 이전의 인연이었으니 그것도 자신의 일부분이 될 수 있으리라. 내게 그들 모두의 기억이 머리카락과 손톱처럼 내 육신과 마음의 한 부분이 되어지이다.

새벽에 주막에서 국밥 먹고 얼른 출발하여 정오 지나 임실에서 다리쉬임 겸하여 메기 어죽으로 요기하고, 다시 부지런히 교룡산성 밤고개를 넘으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는 남원부의 성내에 당도했다. 안 서방이 상단을 따라다닌 경험이 많으니 우선 남원에서도 행객이 많이 모이는 광한루 건너편 주막거리로 말을 이끌었다. 한 주막에 들어가 말을 묻더니 대번에 광대패가 묵는다는 객점을 찾아냈고 요천이 내다뵈는 길가에 있는 집으로 찾아들었다. 어둑어둑한데 마당에 멍석 깔고 저녁을 먹던 이들이 상을 물리는 판이었다. 제각기 마루로 올라가거나 방문을 열어젖히고 방문턱에 앉아 있기도 했다. 상을 치우며 오가던 여자가 말을 끌고 문으로 들어서는 그들에게 대뜸 말했다.

"방 없어요."

"아니, 봉노도 없단 말요?"

안 서방이 물으니 뒷전에서 사내가 대신 말한다.

"봉노야 있지만 부인 손님을 재울 수야 없지 않겠소?"

듣고 보니 딴은 그러하였다. 안 서방은 그가 주인인가 싶어서 다시 묻는다.

"이 집에 박돌이란 손님이 들었소?"

주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마루에 앉은 사람들 틈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 마당을 내다보았다.

"아니, 일전에 우리가 전주서 부딪치지 않았나? 왜 자꾸 따라댕기며 안달이여?"

그는 껄껄 웃으며 안 서방을 반기더니 이내 뒤에 섰던 연옥을 알아보자 눈치를 채는 거였다.

"아이구, 내 주둥이가 오두방정이로다! 연옥이 자네가 여긴 또 무슨 일여?"

연옥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안 서방이 말했다.

"이 집에 방이 없다니 우린 쫓겨나게 생겼소."

"괜찮우, 어서 올라오셔. 우리 방이 있으니 같이 쓰면 되지."

남도 일자집의 부엌 앞방을 광대물주인 박돌이가 패거리의 모갑이와 함께 쓰고 있던 참이라 낭패는 면하게 되었다. 그를 일행들의 봉놋방으로 보내고 마주앉으니 주인이 와서 저녁밥을 주문받아갔다. 남원이 워낙에 산과 들의 진미가 나는 곳이라 저녁밥상도 칠첩이나 되게 반찬이 많았다. 등잔불 아래 저녁을 먹고 나자 사내들은 곰방대를 내어 피우고 연옥은 뒤뜰로 나가 세수하고 발 씻고 돌아오니 이미 그 사이에 안 서방의 말이 있었던지 박돌이 수걱수걱 시키지도 않은 말을 먼저 꺼낸다.

"참으로 내가 지난번에는 구례댁과 연옥이 낯을 보아 차마 얘기를 꺼낼 수가 없더구먼. 내야 깊은 사연은 잘 모르지. 내가 천안에서 신통이를 만날 때부터 일행이 있었거든. 단가와 가곡에 능한 소리꾼이 그들 패거리에 있었는데 나중에 그가 남장 여광대 백화라는 걸 알았지. 신통이 애오개 패거리와 헤어지고 우리와 합대할 적에 백화도 그를 따라 한 식구가 되었네. 두 사람은 우리 패와 일 년 넘게 남도를 돌아다니다 헤어졌지. 부부 광대로 알려졌는데 신통이 명고수라면 백화는 참으로 여명창이었다네. 광대들의 스승이고 귀명창인 부안의 손동리 선생이 있잖은가. 그분이 세상 떠나시기 두 해 전에 백화의 재간을 보고 소리를 가르쳤다는 소문이 들리더군. 이신통이가 그분께 맡기고 떠났다는 얘기도 있고 백화가 신통이를 버렸다는 말도 들리고, 어느 것이 정말인지 나두 모르지. 내 알기로는 백화가 사대부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명창 노릇을 하며 떠돌다 갑오년 이후로 스승의 위패를 모시련다고 부안에 다시 내려온 모양일세."

"그 뒤에 우리 서방님이 그 여자를 만난 적이 있나요?"

내가 묻자 박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야 알 수 없지만 아마 못 만났을 걸세. 그런 난리통에 식구들도 뿔뿔이 흩어진 집이 한둘이 아닌 터에 아무리 신통방통하다 하여도 경황이 없었을 테니까."

안 서방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말했다.

"이 서방이 아씨를 만나기 전의 일이고, 이제 헤어진 지 십 년이 넘었거늘 그 여자를 만나본들 뭐하시렵니까?"

"혹시 서방님이 잘 다니던 곳이나 친한 사람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박돌 아저씨, 저를 부안 그 여자에게 좀 데려다주시지요. 사례는 후하게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박돌은 펄쩍 뛰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여? 지금 우리 놀이패는 농한기가 대목인데 내가 약계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닐세."

"부안에도 갈 작정이겠지요?"

"그야, 동지 무렵에나 가볼까 하는데…… 정월대보름 놀이는 물론 갱갱이에서 놀겠지만."

"한 사흘만 저를 위해 내주셔요. 하루 열 냥씩 삼십 냥 드릴게요."

박돌은 내 제안을 듣고는 눈을 감고 상반신을 좌우로 흔들며 생각해보는 척하다가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아따, 어쩔 수가 없구먼. 낼 놀이판이 인월장인데 모갑이한테 맡기고 다녀오도록 함세."

남원서 부안까지는 어차피 하루 반이나 넉넉잡고 이틀길이 되는 셈이었다. 내가 안 서방에게 임실에서 강경으로 돌아가라 했건만 그는 끝내 부안 들렀다가 강경에까지 모시고 가련다고 우겨서 동행하게 되었다. 우리는 태안에서 민가의 방 한 칸을 빌어 숙식하고는 다음날 점심 무렵에 부안에 당도했다. 소싯적부터 이곳을 드나들어 잘 알고 있는 박돌이 있어서 우리는 느긋하게 현의 읍내로 들어섰다. 상소산 아랫녘 소나무 숲속에 토담이 둘려 있는 일자의 기와집 한 채에 초가지붕을 얹은 제법 큰 별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있는 곳이 손동리 선생의 유택이었고 소리꾼 백화는 그 댁을 지키고 있었다. 솟을대문 앞에 이르러 나는 하마했고 앞장서 찾아간 박돌이 사람을 부르니 하녀가 나와서 대문을 열어주며 그들을 맞았다. 안으로 들어갔던 하녀가 다시 나와서 세 사람을 별채로 안내했는데 집 앞으로 달린 긴 툇마루에 여인이 나와서 내다보고 있었다.

"저 박돌이외다. 그간 평안하신지요?"

"이게 웬일이오? 여기는 어이 알고 찾아오셨소?"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나는 여인을 살펴보며 속으로 깜짝 놀랐다. 얼굴 모습은 몰라도 입고 있는 옷차림이 꿈에서 본 것처럼 남치마에 흰 저고리였고 쪽진 머리의 비녀도 푸른 옥비녀였다. 백화는 박돌 아저씨의 기억에 의하면 이신통보다 두 살이 위였다고 하니 지금 서른여섯일 것이다. 그의 출신이 원래 기녀였다지만 지금 보니 어느 양반댁 부인처럼 기품이 있어 보였다. 얼굴은 볼이 통통하고 둥근 형이고 가느다란 쌍꺼풀눈은 길고 입술은 도톰하며 조그맣다. 그녀도 나를 잠깐 바라보았다.

"어서들 올라오시지요."

모두 방에 들어가 앉으니 병풍이 쳐진 방 뒤에 장지문이 보였는데 그 뒤에 연달은 방이 있는 것 같았다. 방 안에 화로가 있고 작은 탁자와 한쪽에는 가야금과 장구와 북이 놓였다. 백화는 웃음을 머금고 우리를 차분하게 둘러보았다. 박돌이 얘기를 꺼냈다.

"이신통이를 기억하지요?"

백화는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만 끄덕여 보였고 박돌이 연이어 말했다.

"이 사람은 신통이의 내자입니다."

나는 박돌 아저씨가 소개를 하자 마자 앉은 채로 두 팔을 방바닥에 짚고 상반신을 숙여 반절을 올렸다.

"박연옥이라 합니다."

그녀는 당황했는지 뒤늦게 자세를 바로 하고 맞절하며 중얼거렸다.

"심백화요."

하고는 잠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웃음을 머금은 처음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 댁 서방님은 별 무고하신지요?"

박돌 아저씨가 이제는 서슴치 않고 내지른다.

"별 무고가 다 무어요? 그 사람 갑오년 난리 때에 공주 우금치에서 다 죽게 된 것을 살려 놓았더니, 어디로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가서 소식이 끊긴 지 두 해가 지났다는구려. 내 하도 사정이 딱하여 이리저리 함께 찾아다닌다오."

"저도 그이를 본 것이 십 년 전의 일입니다. 다만 그이의 소식을 들은 적은 있지요."

"그게 언제죠?"

"갑오 난리 전해인가 우리 집 가장이 그를 잘 안다는 지사를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그이가 서일수라는 분인가요?"

"서 풍수라구 그랬으니 맞겠지요. 그분은 천지도의 대두 중 한 분일 거예요."

하고는 백화는 어쩐지 쓸쓸하게 나를 향하여 한마디 덧붙였다.

"내버려두고 그냥 사시지…… 그 사람 아마 안 돌아올 거예요."

우리 셋은 모두 말이 없었는데 그녀가 현재의 자기 신세를 짧게 줄여서 말했다.

"내가 이 댁을 떠났다가 서른한 살에 되돌아왔습니다. 선생님이 늘 눈에 밟혀서…… 이 집에는 아들 하나 딸 하나 남기고 가셨더니, 가장 노릇을 해야 할 아드님은 갑오 난리 때에 어디서 흉한 일을 당했는지 돌아오지 않았지요. 저는 이 댁 딸을 친동생 삼아 제부도 보고 식구가 되었구요. 다행이 선생님께서 전장을 남기고 돌아가셨으니 얹혀서 밥술깨나 먹으며 살아가고 있답니다."

"서 지사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 알구 있나요?"

내가 참다못해 백화에게 물었고 그녀가 말했다.

"수십만 명이 죽은 난리를 겪고 살아남은 이들이 모두 숨죽이고 엎드렸는데, 어찌 그걸 물으시오?"

그녀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나를 꾸짖는 듯한 어조여서 그만 고개를 숙이고 앉았는데 눈물이 방바닥에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백화가 내 손을 끌더니 두 손으로 잡고는 토닥이며 말했다.

"그이들과 연결이 됨직한 이를 내 동생이 알지도 몰라요. 더듬어 가노라면 신통이 그 사람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소?"

백화는 처음부터 말을 아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양에서 그가 이신통을 알게 되었던 사연부터 꺼내놓기 시작했다. 저녁참이 되어 박돌 아저씨와 안 서방은 눈치도 빠르게 부안 읍내에 사처를 정한다고 나갔고 나는 백화가 끝내 만류하여 그 댁에서 함께 유숙하기로 하였다. 그 긴 밤 내내 그녀와 나는 단 둘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의자매가 된 손 선생의 따님이 하녀와 함께 술상을 보아 왔기에 여자들 셋이서 좀 취하도록 마셨다. 백화가 흥이 일어나 스스로 곡을 부쳐 불러준 기녀 이매창(李梅窓)의 시 몇 구절이 오랫동안 가슴 깊은 곳에 고여 있었다.

매창에 눈보라 쳐 몹시도 쓸쓸하니 원한과 수심이 이 밤 따라 각별하다 다시 태어난 저승의 밝은 달 아래 바람소리 따라 영롱한 구름 속 님을 뵈올까 독수공방 외로워 병든 이 몸이 굶고 떨며 사십 년 길기도 하지 인생을 살아야 얼마나 사는가 가슴 서글퍼 하루도 안 운 적이 없다네

부안에서 선비의 서녀(庶女)로 태어나 나라를 등지고 뜻을 펴지 못한 사내들 몇을 겪고는, 죽어서도 오래도록 시인 묵객들은 물론 소리꾼 광대패들의 문안을 받고 매창이 뜸에 묻혔다는 그 백골의 슬픔을 내 어찌 알았으랴.

부안 손 선생 댁에서 이틀을 묵고는 이내 안 서방과 함께 강경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검은 구름이 오락가락하더니 가을걷이가 끝난 쓸쓸한 들판 위로 흰 눈이 간간이 내렸고 오리들은 열을 지어 날아갔다. 집에 돌아와 다시 그 이야기들을 잊기 전에 적어 나갔다.

서일수가 느닷없이 사라진 뒤에 이신통은 여전히 전기수로 문안을 드나들며 애오개 주막집에서 혼자 기거를 했다. 그가 애오개 놀이패의 모갑이 박삼쇠와 만나게 된 것이 군란 나던 이듬해 정월이었다. 박삼쇠는 원래가 방짜 유기공이었는데 어려서부터 제 집을 드나들며 방짜 징과 꽹과리를 맞추어 가던 놀이패들과 어울렸다. 그는 처음에는 선대로부터의 천직이었던 유기장이를 본업으로 하고 겨울철에만 사계축 놀이에 나서더니 흥이 과했던지 아예 놀이패 상쇠로 나섰고 잡가를 배웠다. 이신통이 그를 만났을 때 이미 그의 나이가 마흔 가까웠으니, 기량이 한양 도성 밖 놀이패들을 모두 묶어서 일컫는 사계축패에서 몇 손가락에 드는 소리꾼이었던 것이다. 때는 눈보라 치고 매섭게 추운 겨울이라 신통은 도심의 거리에서 책을 읽는 일은 작파하고 따뜻한 봄날이 되기를 기다리던 처지였다.

사계축이란 돈의문 밖 경기감영 부근의 애오개에서 서소문 일대와 만리재를 거쳐서 배다리의 청파에 이르는 지역을 말하는데, 이들 언저리의 수공업자들이며 장사치들 그리고 성 밖에서 채마밭을 일구어 문 안에 들이는 농민들이 절기마다 패를 모아 놀던 데서 사계축패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각 동네마다 재간이 뛰어나고 흥이 과한 자들이 있기 마련이라 서로 이름을 걸고 기량을 다투었다. 특히 청파는 그중에 으뜸이던 것이 용산 삼개와 마포 동막에서 들어오는 삼남의 물산을 거래하여 부자가 된 이들이 많아서 북촌처럼 기와집이 빼곡 들어차 있을 정도였다. 이들은 인왕산 아랫녘의 아전 출신 중인들처럼 시 서화를 들추며 양반 흉내를 내려 하지 않았고 가곡 가사 시조에다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각종 흥겨운 잡가를 즐겨하여 저들의 윗대와 구별하여 아랫대라고 불렸다.

아무튼 이신통이 서소문 근처 칠패가 시작되는 언저리의 어느 선술집에서 박삼쇠를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박은 만리재 아래에 있던 공청으로 쓰는 파 움막에서 정월대보름 놀이에 선보일 소리와 마당 판을 연습하고 뒤풀이 겸하여 패거리 몇 사람과 술 한잔 걸치려던 참이었다. 이신통이 먼저 와서 혼자 화로 앞에 서서 청어 비웃구이를 안주로 잔술을 사 먹고 있었다. 이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신통의 양옆으로 비집고 들어서더니 제각기 술을 시키고 너비아니요, 저냐요, 하면서 소란을 떨었다. 바로 그의 옆에 들어선 이가 박삼쇠였는데 그래도 나잇값을 한다고 먼저 온 이신통을 밀어내는 양이 되자 미안했던지 일행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 이 사람들아 먼저 오신 손님도 기신데 이 무슨 소동이여?"

선술집이라 하는 것이 길 밖으로 낸 방 안쪽에 화덕을 세우고 바깥에는 좌판을 늘어놓고 즉석에서 안줏거리를 요리하여 잔술과 내는 법이라 화덕 앞에 서서 먹어야 제 맛인 셈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많아지면 자연이 먼저 온 사람들은 안주와 술을 챙겨서 곁의 툇마루나 평상으로 후퇴하거나 다시 안주를 시키며 앞자리에서 버티는 것이다. 신통이 안주 얹은 접시와 막걸리 담긴 대접을 들고 뒤로 물러서려는데, 박이 그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 술잔이야 한 손으로 받아 마실 수 있으니 모로 서서 마십시다. 날씨두 춘데 잘됐지 뭐요?"

이신통은 그 말이 재미있어서 얼결에 모로 서서 술잔을 들어 마셨고, 박삼쇠가 그를 지켜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다.

"어라 낯이 익은데…… 내가 어디서 봤더라? 여보 댁은 날 본 적 없우?"

신통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센둥이가 검둥이요, 검둥이가 센둥이올시다."

"상여 메는 놈이 가마 메는 놈이다, 그럼 댁두 놀량패여?"

하다가 박은 자기 이마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리고는 말했다.

"당신 광통교서 얘기책 읽는 이 아녀?"

", 이곳저곳 싸다니며 읽었지요."

그는 반가웠는지 신통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일행을 향하여 떠들었다.

"장풍운이 사라진 뒤에 신통방통이란 말이 운종가에 돌았다네. 그게 이 사람이여!"

"이름 팔짜가 있나 보이. 풍운이는 주독에 풍 맞고 과천으루 내려갔다지."

"그 자식이 색향이라 평양 가서 과하게 오입했든 게지."

애오개 놀량패들은 한마디씩 아는 체를 하는데 박삼쇠가 신통에 물었다.

"나 박삼쇠라구 하는데…… 이녁은 성명이 어찌 되오?"

"저는 이신통입니다."

주위에서 왁짜하는 웃음소리가 일어나며 모두들 한마디씩 거들었다.

"거 이름 자두 아주 맘 먹구 지었네!"

"합죽이 오물음은 우리 할애비 시절이고……"

"신통방통 이신통, 장단 좋고!"

박삼쇠가 얼른 술 한 잔씩 시켜서 신통에게 내밀어주며 말했다.

"우리 패에 재담꾼이 없어서 말 대가리에 쇠뿔이더니, 이제야 판이 걸찍하겠구먼. 이 동네 살우?"

"예 저어기 쌍버드낭구 집이우."

박삼쇠는 신통이 깜짝 놀랄 정도로 등판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잘되었다! 보아허니 상투는 틀었으되 수염이 검숭드뭇하니 미삼십이 분명한즉, 우리 막내로 쳐줌세."

"이제 설 쇠고 스물하나요."

"하아, 좋은 때다."

바로 코 밑이 정월대보름이라 곧 사계축놀이가 열릴 판이라서 애오개패도 만사 제치고 습련에 들어갔다. 단오에는 산대놀이를 하기 마련이더니 녹번리산대, 애오개산대, 노량진산대, 퇴계원산대, 송파산대, 사직골 딱딱이패 등이 있었으니 모두가 탈을 쓰고 재담사설에 춤과 잡가로 연행되는 상민들의 놀이였다. 보통 해시 무렵에 시작하여 밤을 꼴딱 새우고 새벽까지 계속되는 큰판이라 단오나 추석 이외에는 감히 열지 못할 판이었다. 사계축놀이는 산대놀이처럼 밤새 노는 판은 아니었지만 주로 굿거리의 재담사설에 잡가 소리로 이어지는 식이라서 여러 패거리가 함께 모여 대경연을 벌이기에 적합했던 것이다.

역시 근기 지방이라 농투성이든 공장이든 어깨너머로 보고들은 문물이 많아 제각기 악기를 다룰 줄도 알았고 동네 굿판에서 놀며 거들어본 자들도 많았다. 피리, 젓대, 해금, 장구와 북에 꽹과리를 보통 삼현육각(三絃六角)으로 치는데 이와 구분하여 장구, , 꽹과리, , 새납 또는 날라리로 부르는 태평소를 합하여 풍물이라 부르고 길놀이나 농악이나 탈놀이를 놀 때에 서로 앞뒤로 넘나들며 합세하고 빠지기도 한다. 여기에 거문고, 가야금이 들어가면 그야말로 시나위 향악을 본격적으로 연주하게 되는 판이었다. 풍물이야 시골서 농악깨나 좀 놀아본 사람이면 제법 잡힐 줄 알고 피리 젓대와 해금은 음률을 익히면 한두 해에 맞출 수 있으며 거문고 가야금은 선생을 모셔두고 몇 해는 배워야 하는 법이었다. 아무튼 사계축놀이의 기본 기량은 가곡, 가사, 시조에 잡가가 기본이며 경쟁에 나서는 패는 열 명 이내였다. 선소리꾼이 모갑이가 되어 패를 이끌었다. 이들 중 흥이 과한 자들이 본래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재간이 뛰어난 자들을 묶어 이십여 명의 패를 이루어 지방 공연을 하며 떠돌기 마련이었다. 아무튼 박삼쇠네 놀이패에 들게 된 이신통은 처음에는 시골서 눈치로 익힌 대로 북이나 장구를 잡고 소리에 간간히 재담과 곁말로 대꾸해주는 잽이 노릇으로 시작했다. 재담의 흐름은 박삼쇠가 이끌어갔지만 뒷말은 이신통이 몇 번 맞춰보고는 이내 제 흥에 따라 즉석에서 지어내어 대꾸하니 습련 중인 놀이패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박삼쇠가 몇 번 맞춰보다가 신통에게 의견을 물었다.

"원래 사설은 강담사 재담꾼이 잽이와 더불어 허튼소리로 주고받게 되지마는 산대놀이는 얘기 줄거리도 있고 여럿이 춤추고 노래하고 사설을 풀면서 놀지 않나? 창우도 남녀노소가 있어야 하고 악사도 희로애락에 따라 삼현육각은 필요하여 큰 명절에나 놀 수 있다네. 어찌 간단히 줄여서 한둘이 놀게 할 수는 없을까?"

"그래서 사당패의 꼭두각시가 있지 않소?"

"그야 인형 괴뢰를 놀리는 짓이라 탈판보다야 쉽겠지만 간단치는 않지."

"혼자서 탈만 바꿔 쓰면 어떻겠소?"

"손발을 다 놀린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낸 것이 두 발에다 탈을 씌워 놀리고 양팔은 댓가지와 노끈으로 움직여 동작을 해보기로 하였다. 박삼쇠와 다른 놀이꾼이 나란히 판자로 엮은 의자에 누워 장막 밖으로 탈 씌운 발을 내밀고 움직이며 댓가지에 연결된 두 팔을 움직이니 놀이꾼이 직접 나가서 혼자 떠들고 동작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가 있었다. 이신통이 전기수 노릇하며 이야기 풀어내던 경험을 살려 사설 대본을 썼는데 중간에 잡가와 노래를 넣은 것은 박삼쇠의 의견이었다.

정월대보름에 사계축의 경연 놀이터는 청파 배다리 부근 덩굴내 모래밭에서 벌어졌고 석양 무렵에 아이들의 불놀이부터 시작하여 마른 볏짚을 장작 위에 더미로 얹어 달집을 태우면서 풍물패의 길놀이가 시작되었다. 마당 주위 곳곳마다 장대 끝에 횃불을 달아올리고 구경꾼들은 놀이판 주위에 둥글게 깔아둔 멍석 위에 자리잡고 앉았으며 미쳐 자리를 못 잡은 이들은 뒷전에 울을 치듯이 빽빽이 둘러서 있었다.

먼저 청파놀이패의 재담꾼이 나와서 마당 씻는 사설을 풀고 나서 선소리꾼이 몇 마디 주고받은 뒤에 산타령으로 판을 열었다.

나니나 산아지로구나 어뒤여나에 나나지루 산이로구나

오수산 십일봉은 은자봉이 둘러 있고

도령청대 거자봉은 옥계수가 둘러 있다

수락산 폭포수요 동구재 만리재라

약잠재 누에머리 용산삼개가 둘러 있다

동소문을 내달아 문 넘어 얼른 지나

다락원서 돌쳐보니 도봉망월에 천축사라

동불암 서진관 남삼막 북승가요

우연히 잠두에 올라 한양성내 굽어보니

인왕삼각은 용반호거세로 북국을 고여 있고

한강종남은 여천지무궁이라

이어서 만리재 놀이꾼이 나와서 산타령을 받는다.

오봉산 꼭대기 에루화 돌배나무는

가지가지 꺾어도 에루화 모양만 나누나

에헤요 어허야 영산홍록의 봄바람

도봉산 만경봉에 백학이 춤추고

단풍진 숲속엔 새 울음도 처량타

그윽한 준봉에 한 떨기 핀 꽃은

바람에 휘날려 에루화 간들거리네

삼각산 꼭대기 채색구름이 뭉게뭉게

만학의 연무는 에루화 아롱아롱

백운대 암벽에 홀로 섰는 노송나무

광풍을 못 이겨서 에루화 반춤만 춘다

인왕산 마루다 국사당 짓고

임 생겨지라고 노구메 정성을 드리네

삼청동 골짜기 졸졸 흐르는 시냇물

꽃 피고 새 울어 심신이 쇄락해지노라

에헤요 어허야 영산홍록의 봄바람

사설시조에 가곡에 이르기까지 내로라하는 소리꾼들이 나와 기량을 다투었으며 각 패가 준비한 재간들을 한 가지씩 선보이는 자리가 되었는데, 애오개패가 처음으로 발탈을 준비하니 모두들 신기하여 바라본다. 먼저 검은 장막을 치고 뒷전에는 발탈 놀이꾼으로 박삼쇠와 조대추가 긴 널판 의자를 비스듬히 놓고 두 발에 탈을 씌워 내밀었고 악사들 앞에는 이신통이 장구를 잡고 맞대거리 잽이 노릇을 맡았다.

"어흠, 어흠, 여기 사람이 많이 모였군. 여기 누가 주인이오?"

"내가 주인이요. 당신은 웬 사람이오?"

"왼 사람이라니, 아니 내가 조그마하니까 토막을 낸 줄 아슈? 왼 사람이냐구 묻게."

"당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나는 팔도강산 유람차 다니는 사람이오. 우리 인사나 합시다."

"당신 보자허니 멋깨나 들었겠구려. 나는 이 마포 강변 사는 어물도가 주인이오."

"멋도 들었지만 모르는 거 빼곤 다 잘 알지."

"모르는 거 빼곤 다 잘 안다. 그럼 강산 유람을 다녔으면 시조장이나 알겠군."

"시조장이라니, 시조가 무슨 물건인가? 장에 있게. 시조 마디지."

"하하 이 사람, 그럼 시조 한 마디 해보구려."

"하라면 못 할 줄 알고?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허니 쉬어간들 어떠리"

"허허, 거 시조 하는 걸 보니 춤마디나 추겠는데?"

"허허, 이것 좀 보게. 춤이 마디가 어디 있어? 가락이지."

"오라, 춤은 가락이지. 그럼 춤 한 가락 보여주지."

"아따, 그 사람 거 골고루 보자네 그려. 만장단을 쳐라!"

"허허, 거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더니 생긴 꼴보다는 소리도 좋고 춤도 제법일세. 거 이제부터 우리 말을 놓고 하세."

"? 말을 놓고 해?"

"그래. 놓고 하자구."

"미친 시러배 아들 녀석 좀 보게. 이 녀석아, 언젠 말을 붙들어 매고 했니? 놓고 하게."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 친구로 지내자 그 말일세."

", 그래 그것두 좋지. 헌데 여보게 여기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나?"

이 대목이 잽이가 탈의 재담을 이끌어내며 좌중에 소개하는 장면이고 탈의 얼굴을 가지고 놀려 먹다가, 다시 청중이 가보지 못한 다른 고장의 산천과 인심을 소개한다.

"그래, 너는 정말 유람을 다녔냐?"

"다녔지. 이래 뵈두 팔도강산을 무른 메주 밟듯 하고 다닌 사람이다."

"건건이 발로?"

"건건이 발이라니? 건건이는 느이 애비 밥상에 놓는 게 건건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맨발로 말이다."

"맨발은 점잖지 못하게 왜 맨발로 다녀? 의관정제를 하고 다니지."

"? 의관 정제를 해? 아니, 그럼 너도 욕심쟁이 고리타분 양반 샌님이냐?"

"네 눈엔 내 이 수염도 안 보이냐?"

"뭐 수염? 아 돼지꼬리 같은 털 말이지?"

"이놈아, 그게 느이 할애비 수염이다."

"예끼, 이놈아! 그래 어디를 갔다 왔니?"

"제일 먼저 동대문 밖을 썩 나서 망우재를 넘어 떡수에 가서 떡 사먹고, 국수리에 가서 국수 먹구, 양수리에 가서 물 마시고, 양평서 개평 뛰고."

"뭐 개평? 너는 노름도 좋아하는구나."

"예끼, 이 녀석 노름은커녕 엿방맹이도 못한다."

"아니, 그러면서 개평은 떼어?"

"이 바보 같은 놈아, 양평서 경기 개평으로 갔다 이 말이여."

"오라, 양평에서 가평으로 뛰었다 그 말이지?"

"아따, 그놈 새김질 한번 잘한다. 거기서 다시 두 내외만 사는 동네를 찾아갔지."

"이번엔 양주로 갔다 이 말이지? 그래, 그 담엔 또 어디로 갔나?"

"이번엔 양주 땅에서 가마골을 넘어 파주 고랑포에 가서 나루를 탔는데."

"고랑포에서 배를 탔겠지."

"맞았다. 배를 탔지. 타고 보니 사공이 여자데 그려."

"사공이 여자라면 네가 여자 배를 탔단 말이지?"

"이런 숭헌 놈, 그럼 너는 남자에 배만 타냐? 여자에 배는 싫어하고?"

"에라, 이 흉측헌 녀석. 한 대 맞아라! 그래, 배를 타고 어디로 갔단 말이냐?"

"그 배를 타고 임진강을 건너 개풍동을 지나 개성으로 들어섰지."

"개성. 그래, 개성엔 명승고적두 많다는데 너도 그걸 봤겠구나."

"보다 뿐이냐?"

"그래, 무엇 무엇을 보고 왔는지 어서 냉큼 빨리 얘기해봐라."

"아따, 그 녀석 성질도 급하긴. 그러다간 산 놈에 돼지 꼬랑지 붙들고 순댓국 달라겠네."

"그래, 뭘 그렇게 많이 봤나?"

"저 남문 밖 떡전에 들어가서 송기떡, 수리떡, 빈대떡두 보구, 술청거리에 가서 약주, 탁주, 인삼주에, 돼지새끼 삶아 놓은 애저에다 곁들여 먹기 좋은 보쌈김치, 잣김치, 나박김치도 보구 왔다."

"이런 처먹다 망할 놈을 봤나? 아니 그래, 그게 겨우 명승고적이냐?"

"이놈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면서?"

아무튼 밤이 이슥하도록 애오개 놀이패의 발탈 마당이 계속되었고, 이어서 다른 패거리들이 잡가의 신곡을 불렀지만 관객들에게 흥취는 별로 주지 못한 것 같았다. 이신통은 대번에 발탈의 사설을 직접 만든 재담꾼으로 한양 일대의 광대들에게 소문이 나게 되었다. 대보름 사계축놀이가 끝나고 일대의 장사꾼 공쟁이들의 계에서 걷어준 놀이 행하를 받아 뒤풀이 겸하여 문안으로 놀러가기로 하였다. 박삼쇠가 자기 단골집이라면서 수표교 일대의 색주가로 패거리를 데려갔는데, 이번에 발탈을 함께 놀았던 조대추와 잽이 역할의 이신통이며 칠패와 애오개 토박이 소리꾼 두 사람이었으니 그만하면 교자상 한 상 차려놓고 조촐하게 마실 만하였던 것이다.

색주가는 원래 무악재 아랫녘 홍제원에 모여 있더니 운종가에 시전이 번성하고 도성 안팎에 난전이 벌어지면서 문안으로 들어와 종루 뒷길인 피맛골에 자리를 잡았고, 가장 번성한 곳이 좌포청 부근과 태평방 다동 일대와 서린방 부근이었다. 북부에는 주로 아전 군교들이 주요 단골손님이 되고 서린방 일대에 역시 아전과 장사치들이 뒤섞이더니 청계천 건너 남부 수표교 일대에 돈냥깨나 모았다는 중인 장사치들의 술집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예전에는 궁중 연회에 참예하는 기생이 일패(一牌), 재예가 출중하건만 궁중에 들지 않은 기녀로 사대부들과 교유하며 음률은 물론 시 서화를 배웠던 부류가 이패(二牌)라 하고 아무나 상대하지 않는다 하여 은군자(隱君子)라고 하였다. 그다음이 상민이나 천민의 자녀로 팔려오든가 또는 주점의 포주가 어려서부터 양딸로 키워오든가 하면서 기녀로 삼았는데, 술도 팔고 몸도 판다고 하여 가장 낮은 계급의 창기로써 몸값을 대납하지 않으면 풀려날 수가 없었다. 이들을 삼패라고 하는데 이들 중에는 간혹 재예가 뛰어나 춤이며 소리를 잘하는 자가 있어 광대물주가 몸값을 물어주고 연행패에 넣기도 하였다.

박삼쇠가 요즈음 잘 가는 색주가라 하여 모두들 따라나섰는데 조대추는 가끔씩 들렀던지 창기들의 이름도 들추면서, 어느 집 누구는 인물이 어떻고, 또 누구는 소리보다는 몸매가 좋다든지 하면서 개천을 따라 걷는 내내 떠들었다. 그들이 장독교 지나 수표교에 이르러 뒷골목으로 들어서니 고만고만한 기와집들이 처마를 잇대고 있는데 한 두어 집 건너 장대 끝에 대나무 용수를 거꾸로 씌우고 그 아래 사초롱(紗燭籠)을 달아놓은 게 보였다. 창기들이 집 앞에 나와 섰다가 사내들이 골목 안으로 들어서니 제각기 나와서 소매도 잡고 옷자락도 당기면서, 서방님 날 두고 어디 가시오, 잠깐 들러서 소리라도 한번 들으시구려, 교태가 낭자하였다.

"어허, 지금 추월이네 맞추어 놓고 가는 길이다."

그래도 홍등의 법도가 있어 약조된 집이 있다 하니 이죽삐죽하면서도 뒤로 순순히 물러난다. 박삼쇠의 단골집이었든지 계집 두엇이 나와 섰다가 얼른 대문을 활짝 열고 먼저 한 걸음 내딛으며 외친다.

"한양 제일 명창 박 서방 드십니다."

들어서니 중인의 살림집에 마당이 자그마한데 오종종한 장독간이 보이고 맞은편 마루에서 주모가 버선발로 뛰어 내려와 반겼다.

"아이고, 오늘 우리 집 문 닫아야겠네."

하고는 창기들에게 외쳤다.

"얘들아 이제 손님 받지 마라!"

그 집에서 귀한 손님 방이란 부엌 안방 건너편 상하 방이 연달아 달린 방이었다. 이러한 놀이 손님이 들면 가운데의 장지문을 열어젖히고 위는 술판이오 아래는 놀이판이 되는 거였다. 추월이 오늘 박삼쇠가 물주인 줄을 뻔히 알고 물었다.

"술은 무얼로 가져올갑쇼?"

"말해 뭘 하나, 당연히 공덕리 소주지."

그들이 둘러앉자마자 주모 추월이가 가운데의 장지문 열어젖히고 교자상을 들여온다 초벌안주를 들인다 분주한데 이신통이 건너다보니 아랫방 윗목에 가야금 해금 젓대와 장구가 가지런히 놓였다. 술이 다음 차로 이어지고 진안주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자 창기 둘이 가운데 끼어 앉았다가 스스럼없이 나아가 하나는 장구를 잡고 다른 하나는 잡가를 불렀다. 박삼쇠가 대견하다는 듯이 듣고 나서 잘못된 가사와 음정을 지적해주었고 추월이가 나서며 가야금을 잡더니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명창이시지만 아이들 기죽어 어찌 소리 한 판을 마음 놓고 하겠소?"

그리고는 낭랑하게 새타령을 부르는데 제법 높낮이의 청과 음률이 맞아 떨어지고 신명이 실려 있다. 좌중이 모두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라 절로 무릎을 치며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좋지, 잘한다, 얼쑤! 술이 몇 순배 더 돌아간 뒤에 주모 추월이가 미닫이 너머로 고개를 쭉 빼며 외쳤다.

"그믐아, 와서 놀자!"

추월의 말이 떨어진 잠시 후에 방문이 살며시 열리며 기녀가 들어와 문가에서 살포시 절을 하고는 아뢴다.

"그믐(琴音)이가 손님들께 뵙겠습니다."

하고는 아래로 내려가 한쪽 무릎을 세워 그 위에 두 손을 모으고는 정면을 바라보는데 박삼쇠가 얼른 알고 장구를 끌어다 놓고 채를 잡는다. 청아하고 높은 소리로 올랐다가 차츰 평온함을 회복하는 지름조로 소리가 나온다.

산촌에 밤이 드니 먼데 개 짖어 운다

시비를 열고 보니 하늘이 차고 달이로다

저 개야 공산 잠든 달을 짖어 무삼하리오

천금 산촌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묻혔세라

시비를 여지 마라 날 찾을 이 뉘 있으리

밤중만 일편명월이 긔 벗인가 하노라

구름이 무심하단 말이 이리도 허랑하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가려 무삼하리

이러나저러나 이 초옥 편코 좋다

청풍은 오락가락 명월은 들락날락

이 중에 병 없는 이 몸이 자락 깰락 하여라

그야말로 심신이 한가한 가운데 잔잔한 흥이 일어나는데 연못에 잔바람이 스치는 듯 물결이 수면 위로 번져가는 것 같았다. 연이어 그녀는 가야금을 무릎 위에 얹고 몇 번 튕겨보고는 잡가의 정요(情謠) 한 대목을 부른다.

갈까 보다 임 가신 데로

첩 살러 갈까 보다

미투리신짝을 타달탈 끌면서

임을 따라 갈까 보다

어찌 살가나 정든 임 그리워

임이 괄시하더라도

불원천리 갈까 보다

아무래도 임을 위하여

병이 나리외다

앞의 시조창과는 달리 간드러진 가야금과 어울린 소리의 높낮이와 떨림이 가냘프면서도 힘이 있었다. 슬프지만 어떠냐고 항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신통이 소리는 많이 듣지 않았으나 목청이 뛰어난 것쯤은 가슴속에 전해오는 느낌으로 짐작할 수가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박삼쇠가 한마디 하였다.

"네 어디에서 그 좋은 소리를 배웠는고?"

그믐이는 그냥 미소 짓고 고개를 숙이는데 조대추도 한마디 거들었다.

"경서도 소리에 판소리 청을 곁들었구나. 그러니 슬프고 씩씩하네."

추월이 우쭐하여 나섰다.

"그믐이가 우리 집에 나온 지 이제 겨우 보름도 못 되었소. 은군자로 서방님 모시다가 저와 동업하자고 꾀어냈지요."

좌중은 모두 풍류를 아는 놀량패들이라 더 이상 지지재재 사연을 묻지 않고 흥이 오른 박삼쇠가 수심가 엮음 가락으로 앞서나간다. 몇 대목씩 부르면서 서로 넘기고 받으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광풍아 불지 마라 송풍낙엽이 다 떨어진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잎이 진다 설워 말며

꽃 진다고 설워 마라

하는데 그믐이가 받아 차고 나선다.

인생 한 번 죽어지면 다시 올 길 만무로구나

황천이라 하는 곳은 사람 사는 인품 범절이

정 좋은가 보더라만

조대추도 얼른 받는다.

악공 불러 노래도 시키며 미동 데려다 다리도 치고

미색 불러 술 부어 마시며 노루장화가 막 많은 곳인지

한 번 가면 영결이로구나

한참을 놀고 마른 목도 적시고 이야기도 나눌 겸하여 술상 앞으로 둘러앉아 술을 마실 제, 갑자기 밖에서 요란하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오너라."

모두 두리번거리며 서로를 바라보는데 다시 대문을 발로 차는지 빗장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주모 추월이 치맛귀를 싹 돌려 잡고는 마당 지나 문간에 달려가 냉랭하게 외쳤다.

"오늘 장사 안 허우."

"무슨 소리냐? 너희들 노랫소리가 저 수표교까지 들리더라."

"아무튼 오늘 손님 안 받아요."

하고 돌아서려는데 누군가 걸걸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을러댔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친군영의 무예별감이다. 내일도 장사하고 싶거든 어서 문을 열어라!"

추월은 돌아서려다가 그 소리에 짐작이 가는지 맥없이 대문 빗장을 열고 만다. 빼꼼히 내다보니 화려한 홍의 걸치고 초립에 호수(虎鬚) 장식 꽂은 대전별감이 분명했고, 그 옆에는 까치 등거리 더그레에 검은 깔때기 쓴 의금부 나장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밤의 색주가에서 그들을 괄시했다가는 그야말로 장사를 폐업해야 될 정도였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별감배와 나장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색주가며 투전판을 돌아다녔는데 성내 왈짜들도 그들과 손잡지 않고는 구역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들도 네댓 명 되었는데 서슴없이 마루로 올라오더니 술판이 벌어진 건넌방 문을 벌컥 열었다. 이쪽에서도 대강 분위기를 눈치채고 무덤덤하게 올려다보는데 얼른 문을 닫지 않고 쓱 훑어보더니 나장짜리가 한마디 했다.

"개 대가리에 정자관 쓴다더니…… 요샌 뭐 시정잡배들도 색주가 출입일세."

빗대놓고 욕을 내뱉은 자는 열었던 문을 닫지도 않고 돌아섰다. 추월이 부엌 달린 안방으로 그들을 안내하여 들이니 잠시 마루가 조용해졌다. 술상을 들인다, 건넌방에 앉았던 창기들을 불러들인다, 하며 부산을 떨다가 저들도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지 왁자하는 웃음소리도 들렸다. 박삼쇠 일행은 이미 파흥이 되어 조용히 남은 술을 마시고 있는데 추월이 건너와 방문을 열고는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믐이 곁에 주저앉아 속삭였다.

"이걸 어쩌냐? 별감 어른이 널 찾는구나."

"나 그 자리에 못가우."

"지난번에야 술이 취해서 그랬던 일이구, 오늘은 제법 점잖게들 왔으니 잠깐 앉았다가 오자꾸나."

"싫우, 형님이나 가요. 저는 돌아가신 영장님 의리로 보더라도 저것들과는 동석 못 허우."

추월은 그제야 박삼쇠 일행에게 고개 숙여 죄송하다는 시늉을 해보이며 황급히 안방으로 건너갔고 뭐야? 하고 고함을 버럭 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루를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미닫이문이 벌컥 열리며 홍철릭 입은 별감짜리가 뛰어들었다. 그는 다짜고짜 그믐이의 머리채를 잡더니 끌고 가려는 것처럼 잡아 당겼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자기 머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그자의 팔을 잡은 채로 맥없이 끌려 나갈 판이었다. 이신통이 갑자기 달려들어 무엇인가로 별감의 뒤통수를 내려쳤고 그는 앞으로 죽 뻗어버렸다. 신통이 엉겁결에 소주를 담아온 거위병을 들어 힘껏 내려친 것이었다. 박삼쇠가 대번에 사태를 알아채고 신통과 그믐이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도망쳐!"

신통이 그믐의 손을 잡고 마당에 내려서는데 안방 문이 열리면서 한 사내가 고개를 내밀었고 박삼쇠와 조대추 등도 마루로 나서는 참이었다. 둘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는데 수표교 쪽으로 향하는 신통의 손목을 그믐이가 휙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뒷골목으로……"

신통은 일단 태평방 쪽으로 휘어진 샛길에 들어서니 수표교에서 좌포청 방향으로 뚫린 훤한 대로를 향했다가는 뒤쫓는 자들에게 영락없이 잡혔을 게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을 한참 걸어서 소광교를 건너자 신통이 한걸음 뒤에 따라오던 그믐이에게 물었다.

"이녁은 사는 곳이 어디요?"

"지금 거기 못 가요. 추월이 형님이 알고 있으니 저들에게 시달리면 대줄 거예요. 그나저나 서방님 거처는 어디요?"

"나는 애오개 주막거리에 사오."

"아직 인정 전이라 성문이 열려 있을 테니 그리로 갑시다."

두 사람이 간신히 해시 무렵에 돈화문을 빠져나가 애오개 주막에 이를 즈음에 문안에서 인경 치는 종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방마다 불이 꺼져 있어 가지를 늘어뜨린 수양버드나무는 어둠 속에 흉물처럼 서 있었다. 신통은 익숙하게 캄캄한 마당을 돌아 뒤채의 구석방으로 그믐이를 데려갔다. 그는 먼저 들어가 등잔에 불을 붙였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시오."

그믐이는 방 안에 들어와 윗목에 쪼그리고 앉아 시렁에 얹힌 이부자리와 고리짝이며 벽에 걸린 옷걸이 횃대며 작은 책상 등속을 둘러보았다.

"여기 혼자 사세요?"

그믐의 질문에 대답은 않고 신통이 되물었다.

"집이 따루 있다면 어디 살우?"

"야주개 앞동네인데 세 살다 내주게 생겼어요."

"그럼 살림하셨소?"

그믐은 고개를 희미하게 까딱거렸고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다. 이신통이 먼저 두루마기와 갓을 벗어 횃대에 걸고는 이부자리를 요와 이불로 나누어 자신은 요를 들고 윗목으로 올라가며 그녀에게 이불을 내주고는 말했다.

"나는 여기 누울 테니 이녁은 조 아래서 이불 덮고 눈 좀 붙이슈."

이신통이 문 앞에 눕고 그믐이가 문을 머리 쪽에 두고 아랫목에 누우니 그들은 기역자로 엇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머리는 서로 지척이라 불을 끄고 나서도 잠이 들지 않았던지 그믐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고, 신통은 듣던 중에 다시 묻고 하면서 날을 밝히게 되었다.

"저는 강화에서 태어났고요 부모님은 무당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부모가 일찍 죽어 김포에서 유명하던 작두만신의 양아들로 자라나 굿을 할 때에 제상 차리기 같은 잔심부름을 하면서 곁눈으로 무악과 춤을 보고 잽이가 되었답니다. 어머니 어린년(於仁蓮)은 열일곱에 시집을 갔는데 신랑이 너무 징그럽고 무서운데다 어찌된 노릇인지 온몸이 빼빼 마르고 뼈마디마다 쑤시면서 밥도 못 먹는 중병에 걸렸다지요. 시어머니와 밭에 김을 매러 나가서도 갑자기 팔다리가 땅에 닿지를 않고 허공중에 뜨는 것 같고 가슴이 답답하여 손뼉 치고 춤을 추면 온몸이 날아갈 듯 가뿐해졌답니다. 남이 보면 영락없는 미친년이겠지요. 나무하러 가는 남편을 따라가면 어느 길 모퉁이선가 꼭 헛것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들이 서로 소곤대는 소리까지 다 들리고 보이더랍니다. 그러니 불쑥불쑥 혼잣말로 대꾸하게 되겠지요.

집안에서는 미친병이 들었다고 아예 골방에 넣고 상대를 않는데, 어느 날 꿈에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 지금 이 길로 집을 나가 어느 동네 어느 골을 찾아가면 우물이 있는 앞집에 이러저러한 생김새의 만신이 있을 터이니 그게 너의 새어머니라고 알려주더랍니다. 그래서 앓고 누워 있던 우리 엄마 어린년이가 벌떡 일어나 훨훨 춤을 추며 몇 십리를 달려가 그 집을 찾았고 만난 이가 바로 작두만신이었답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작두만신 할머니도 신딸이 될 여자가 찾아오는 꿈을 꾸고는 우물가에 나와 기다리던 참이었답니다. 엄마는 그 집의 일을 돌보며 신내림 굿을 하고 무업을 전수받았고 만신의 양아들로 잽이가 된 아버지와 부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부모는 김포에서 제금 나와 강화 성내로 들어가 무업을 차렸답니다. 제가 거기서 태어나 열두 살까지 살았습니다. 새로 온 강화유수가 정자 수리를 구실로 고을 당나무를 베어버린다는 역을 일으키기 전까지 우리 부모는 강화 일대에서 영험한 무당으로 철철이 동제에서 사삿집 무꾸리에 이르기까지 밥 먹고살 만했던 것이지요. 강화유수가 당나무를 베어버린다니 동네 사람들이야 사또 나리의 엄명이라 속앓이만 하고 있을 뿐이었지요.

아버지는 나무를 베러 나온 일꾼들에게 이제 나무를 베면 모두 동티를 입으리라 엄포하고는 그 자리에서 비나리를 하고 부적을 나무 밑동에 붙여두었습니다. 아버지는 이튿날 나졸들에게 끌려가서 격노하신 유수 나으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장형 일백 도를 받고 돌아와 시름시름 앓던 중에 장독으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도 무업을 잃고 고을에서 쫓겨나게 되었구요.

어머니는 근기에서 우리들에게는 영험이 있다는 파주 감악산에 기도하러 간다며 길가 주막에다 저를 맡겨두고 떠나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저는 주막에서 애 보는 업저지 노릇도 하고 부엌 심부름도 하며 밥 얻어먹고 얹혀 있다가 신병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밥과 국에서 이상한 노린내가 진동하고 반찬마다 벌레가 가득하여 하루에 물 한 그릇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지요. 머릿속이 흔들리고 깨어질 것처럼 아파서 수건으로 동여매지 않고서는 잠시도 서 있거나 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툭하면 물동이를 깨먹고 나르던 밥상도 깻박을 쳐버리니 주막에서는 몹쓸 것이 들어와 장사 망하게 생겼다고 저를 내쫓을 판이었어요. 때마침 장사치가 지나다 저를 보고는 엽전 닷 푼에 사서 홍제원 삼패 색주가에 열 냥 받고 팔아넘겼답니다. 저는 봄가을로 찾아오는 환절기만 되면 시름시름 며칠 앓아눕기는 했어도 홍제원에 간 뒤로는 머리 아픈 것이 거짓말처럼 나아버렸습니다. 무엇보다도 풍악 소리만 나면 절로 온몸에 힘이 나는 것이었지요. 저희 집 주모는 원래 송도 관기였던 이로 가무에 일가를 이룬 예기라고 이름이 자자하던 사람이었는데 제가 온몸에 음률을 지니고 태어난 아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시조나 잡가든 한 번 들으면 가사와 곡을 외워버렸고 장구에 해금 가야금도 귀로 듣고 따라 하면 열흘이 못 가서 모두 익혀버렸습니다. 제 기명인 그믐(琴音)이는 주모 춘앵(春鶯)이 지어준 이름입니다만. 저희는 일 년에 수차례나 내왕하는 청국 가는 사행의 역관 군관 상단을 맡아놓고 접대하는 집이어서 저는 한양 성내 중인 아전붙이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루는 주모 춘앵이 저에게 은근히 이르더군요.

작년에 우리 집에 들러서 연행에 따라갔던 장교가 이번에 호군(護軍)이 되었다는데 너를 들여앉히고 싶다는구나. 네가 내 딸이 된 지 벌써 다섯 해가 되어 가는데 이제 너두 기녀로서는 절정이로구나. 스무 살이 낼 모레라 기예가 아깝지 않으냐? 한양에 들어가 은군자로 풍류남아들을 뒤흔들어볼 때가 되었다구 생각한다.

주모가 말하여 그가 누군지를 생각해보려 애썼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구군복을 입은 장교가 부하 군병 두엇과 사인교를 거느리고 왔을 때에야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김춘영이란 무관으로 이전에 홍제원에서 정사 부사의 행차를 기다리며 우리 집에서 나흘쯤 묵었습니다. 그이는 사행의 호종무관이었는데 군병들에게는 엄했고 국경까지 따라가는 관노들에게는 자애로운 사람이었지요. 언제나 노비들의 저녁밥을 챙겨준 뒤에야 병졸들과 더불어 식사를 들곤 했습니다. 저희 집에서 두 번인가 연회를 열었는데 모두 한양 시전의 상단 사람들이 비용을 댔던 자리였지요. 마지막 날 밤에 상단에서 행하를 내어 제가 그이의 수청을 들게 되었고 그는 뿌리치지 않고 당신 처소에 저를 들였습니다만, 부친의 삼년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저를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이가 새삼 저를 기억하고 첩실로 들이겠다니 조금은 놀랐습니다. 물론 저는 소싯적부터 홍제원 삼패에 들어가 창기 노릇을 했으므로 여염집 아기씨들처럼 처녀는 아니었지요. 머리얹기는 이미 십육 세에 치루었구요, 그 뒤로도 사행이 있을 때면 서너 차례 수청을 들긴 했습니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역관이나 상인들이었을 겝니다. 어쨌든 저는 김춘영 호군을 따라 한양 성내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얻어준 집이 구리개 장악원 근방에 있었는데 방 세 칸에 문간방까지 딸린 아담한 기와집이었어요. 김 호군은 궁의 수문장직으로 야근하는 날이 많았고 본가는 삼청동에 있어서 제 집에는 사나흘에 한 번 들를까 말까 했지요.

무관은 장래의 전정이나 환로를 열고 나아가려면 상급자들과 두루 사귀어야 하고 젊은 선비들이며 우대의 실력 있는 아전들과도 교분이 두터워야 합니다. 저희 집에 그런 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저도 장악원의 악공 기녀들을 몇 사람 초치하여 자리를 마련하곤 했어요. 제 주인께서는 호군을 거쳐 상호군(上護軍) 아홉 사람 중에 들었다가 몇 년 전에 무위영 영장이 되셨습니다. 본댁에는 한 번도 가뵙지 못하다가 그분이 영장되신 후에 인사를 올리러 가서 얌전하신 부인과 아들 하나 딸 둘의 자식들도 보았답니다. 그러고 왠지 마음이 쓸쓸하여 하루 온종일 가야금을 뜯으며 혼자서 소주 한 병을 홀짝홀짝 비웠지요.

지난번 군란 때에 주인께서 소요의 책임을 지고 의금부 전옥서에 갇혔다가 난리 중에 풀려나 하도감 별기군영과 일본 영사관을 쳐부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지요. 그이는 대원위 대감이 끌려가고 정국이 바뀐 뒤에 난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민 씨 일족들에게 갖은 추국(推鞫)과 악형을 당하고 한 달 뒤에 군기시(軍器寺) 앞 천변에서 처형당하셨습니다. 며칠 동안 개천가에 버려져 있던 시신을 제가 일꾼을 사서 수습하여 삼청동 본가에 모셨고 부인과 자녀들을 모시고 장의도 치렀습니다. 반란의 수괴로 처형되었으니 옛날 같으면 처자녀와 삼족 모두가 노비로 떨어질 판이었지만 개화된 세상이라고 혈족은 처벌하지 않는 대신 가산 몰수령이 떨어졌지요. 저는 장악원 부근에 있던 집을 부인과 아이들께 내드렸고, 야주개에 방 한 칸을 세내어 혼자 살면서 홍제원 시절부터 알던 추월의 색주가에 나가 연명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이신통은 그믐의 기나긴 신세타령을 들으면서 서일수와 함께 겪었던 군란 당시의 일들이 생각났고, 김만복의 서글서글한 얼굴이 떠올라 새삼 눈물을 글썽였던 것이다. 그들은 쪽잠을 잠깐 자고 아침 느지막이 일어났고, 신통이 어젯밤의 일을 대충 주막 주인에게 말하니 그는 대번에 안색이 변하였다.

"거 참, 불길한 일을 저질렀네 그려. 난리 이후로 애오개와 칠패 일대에 기찰이 날마다 뜨는 판인데 그놈들이 그냥 넘어갈까 모르지. 아무튼 저녁때쯤에나 소리꾼 동무들이 어찌되었는지 수소문을 해보게."

신통은 그믐이와 함께 방 안에 틀어박혀 낮잠도 자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하루를 보냈다. 신통이 고향 이야기를 대충 해주었고 한양에 올라와서 겪은 사연을 말하던 중에 김만복의 이름이 나왔고, 그믐이가 자기도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하여 서로 놀랐다. 그믐이는 주인의 수하 군병들이 동관묘와 이태원에서 효수당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더니, 이제 김만복 별장의 죽음에 대하여 자세히 알게 되었다면서 그들 사이에 묘한 인연이 얽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신통은 그믐에게 쉬라 이르고는 혼자서 서소문 밖의 칠패 초입으로 슬슬 내려가 보았다. 신통이 가끔 들르던 선술집을 슬쩍 훑어보고는 그냥 지나치려니 주인이 손을 흔들며 그를 불렀다.

"자네 혹시 박 서방 찾는 거 아닌가?"

"그래 오늘 안 나왔우?"

"안 나오는 게 다 뭐야? 아까 오후에 홍철릭 입은 별감짜리가 직접 기찰포교들 데리구 왔다 갔다네. 그치들 박삼쇠 이름만 알더라구."

선술집 주인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그의 귓가에 얼굴을 들이대며 속삭였다.

"만리재 아랫녘 공청으루 가 보아. 삼쇠가 거기 있을 테니……"

그들이 소리 연습하던 장소가 어디인가는 소리패 이외에는 어딘지 모를 것이라 신통은 박삼쇠가 그쯤에 숨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던 터였다. 과연 천변의 밭두렁 사이에 있는 움막 부근에 다가가니 입구의 거적문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신통이 거적 앞에서 헛기침을 해보이자 두런대던 목소리들이 대뜸 잠잠해진다. 그가 거적을 들치고 얼굴을 들이밀자 안에 있던 세 사내가 제각기 눈은 부릅뜨고 두 주먹은 불끈 쥐고서, 박삼쇠는 파 움에서 쓰던 호미까지 번쩍 치켜들고는 내려칠 기세였다.

"어어, 나 우리 편이우!"

신통이 두 팔을 올려 막는 시늉을 하며 급히 외치니 모두들 맥이 빠졌는지 한숨을 내쉬고 주저앉아 버렸고 박삼쇠도 호미를 내던졌다.

"이러니 죄짓고 못 살아. 이 사람아, 자네 때문에 우리는 집에두 못 가게 생겼네."

서로가 어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는 중에 신통이 그믐이를 데리고 애오개 쌍버드나무집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박삼쇠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자들이 이대로 잠자코 얼렁뚱땅 넘어갈 리는 만무한데, 참 걱정일세."

그들은 신통과 그믐이 먼저 달아날 때에 뒤미쳐서 마루로 나왔고 안방 쪽에서 나장 복색을 한 놈과 두루마기 차림의 사내가 뛰쳐나오자 조대추가 앞서 나오는 자의 가슴을 돌려차기로 질러버렸다고 하였다. 두 녀석은 서로 붙안고 안방 미닫이를 부수며 나가떨어졌다는 거였다. 그들이 대문을 나와 수표교 쪽으로 뛰는데 이쪽도 네 사람이라 감히 뒤따를 생각은 못하고 한 녀석이 개천가에 서서 나중에 으름장만 놓았다고 한다. 신통이 조대추에게 물었다.

"아니 그런데 발길질은 또 언제 배웠우?"

"우리가 그래두 칠패 왈짜들인데 태껸을 모를 리가 있겠나?"

"뭐라구 을러댑디까?"

"뭐 나중에 잡아 족치겠다구 그랬든가?"

모두들 나중에 보자는 놈치고 변변한 놈이 없다거니 하면서 웃어대는데 삼쇠는 웃지 않았다.

"그자들이 누군가? 하나는 대전별감이고 또 한 놈은 의금부 나장이라구. 일대가 녀석들의 밥벌이 터나 매한가지 아니던가. 그믐이와 자네를 꼭 잡아 족치려 할 걸세."

조대추가 턱을 치켜들고 다리를 건들거리며 명랑하게 받았다.

"까짓것, 잘되었네. 이참에 외방 유람이나 떠났다가 춘삼월 다 보내고 돌아오면 세월에 장사 있다든가."

"하여튼 떠나기는 해야겠지만 경조(京兆) 유람은 빼고 막바로 도계를 넘어가야겠네."

의논이 되어 신통과 그믐이 먼저 길을 떠나 과천 어름에서 기다리고 박삼쇠와 조대추가 패거리를 모아 뒤따라오기로 하였다. 이튿날 신통은 그믐이와 함께 낮 동안은 객점 뒷방에 처박혀 있다가 날이 어두워진 뒤에 얼른 문안으로 들어가 돈의문에서 지척인 야주개 그녀의 셋집으로 찾아갔다. 신통은 골목 어귀의 어둠 속에서 잠시 기다렸고 그믐이 초가삼간 집에 들어가 옷가지 등속을 꾸려 작은 고리짝에 멜빵 걸어 짊어지고 나왔다.

그들은 곧장 쌍버드나무집으로 돌아와 그 밤을 지내고 이튿날 이른 새벽에 길을 떠났다. 애오개에서 곧장 청파 배다리를 지나고 동작나루에 당도하니 동녘에서 해가 떠올랐다. 이른 아침에 한양 도성으로 들어가려는 행객들이 몰려서 배들이 연이어 닿았고 남쪽 나루로 건너는 이들은 많지 않아 그들은 이내 강을 건넜고 나루터에서 아침 요기를 하였다. 남태령을 넘어 과천에 당도하니 늦은 오후였고 그들은 술막거리에서 숙소를 얻어들었다.

박삼쇠는 애오개와 칠패 그리고 청파 배다리 이외에도 용산 삼개와 마포 동막과 노량진 패거리들 가운데 연희 이외에는 별다른 업이 없어 제각기 현지에서 광대노름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들을 수소문하여 이십 여명의 연희단을 모았다. 이들은 소리와 잡가에서부터 풍물과 삼현 육각을 연주할 수 있는 기량을 가진 자들로 계절마다 사계축놀이에 참가했던 터여서 서로 어느 동네 누구라고 알 만한 사람들이었다. 농사나 수공업을 하면서 식구를 먹여 살리는 이들은 집과 동네를 벗어날 수 없었지만, 처자식이 없거나 가족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과 머물러 있어봤자 저자의 열립꾼이며 행상으로 연명해야 하는 자들은 제각기 농한기에 지방으로 놀이를 팔러 나다니기 마련이었다. 광대물주들이 그러한 놀이패를 모으러 다녔지만 같은 놀이꾼인 박삼쇠가 기별하자 모두들 제 악기 한두 가지씩 집어 들고 모여들었다. 약속 장소인 동작나루에 이르니 지역마다 삼삼오오 모여든 것이 스무 명이 넘었다. 박삼쇠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이 정도의 실력과 인원이면 온갖 잡기를 화려하게 보여주는 남사당패에 견줄 만했던 것이다.

이신통과 그믐이는 박삼쇠 연희패와 과천에서 만나 천안에 당도했다. 한양에서 삼남 길을 따라 내려오자면 천안 삼거리가 나오는데, 동쪽으로 목천 지나 충주로 빠져서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영남 길과, 남쪽으로는 공주 논산 거쳐서 전주로 가는 호남 길로 갈라지며, 서쪽으로 내포평야가 시작되는 아산 면천과 예산 덕산 홍성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해마다 유람을 나와서 천안을 근거지로 하여 충청도 일대를 놀고 다니다가 보리 수확이 시작될 즈음에 한양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찾는 고을이 많아지면 아예 단오놀이 때까지 머물기도 하였다. 박삼쇠네 패가 해마다 머무는 삼거리 장터의 단우물 주막에 들었다. 그곳은 바로 남쪽에 공주 길로 넘어가는 도리재(道里峙)가 보이고 아산 쪽에서 흘러들어온 바닷물이 개천을 따라 역류해 들어오는 곳인데도 그 집 우물은 다른 데와 달리 물이 짜지 않고 시원해서 단우물 집이라고 이름이 붙은 곳이었다. 삼쇠네 놀이패는 먼저 아산 면천 당진 서산 길을 돌아다니기로 하였는데 이 지역의 크고 작은 포구마다 고깃배가 몰려들어 봄철 파시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산 온양 신창 면천이 모두 한나절 거리여서 광대물주 노릇을 맡은 박삼쇠가 한 바퀴 돌며 어계나 동계의 향임들과 교섭을 하기가 수월했던 것이다. 박삼쇠는 놀이를 나가기 전에 조대추 이신통을 불러 의논했다.

"이번에 그믐이를 우리 놀이패에 데려온 것은 세상 풍속으로 보자면 놀랄 만한 일일세. 예전에 사당패라 하여 여사당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그때에는 재간을 파는 것은 뒷전이고 몸을 팔고 다녔다네. 풍속을 어지럽힌다 하여 나라에서 금한 뒤로는 남자들만 광대로 놀게 하였으니 남사당이 된 게 아닌가. 탈춤이 되었거나 사당놀이가 되었거나 여자 역은 모두 남자나 어린 무동이 놀게 되어 있다네. 계집의 소리나 재간을 보자면 기방을 찾아가야 하지. 헌데 우리 패에 그믐이 같은 여명창이 들어왔으니 아마도 대번에 소문이 날 게여. 서북 지방에서는 간혹 놀이패에 기녀들이 동행을 한다 하였으니 남장을 입힐까 하네. 그것도 상민의 복색이 아니라 의관정제한 선비의 차림새가 어떠할지."

조대추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의견을 말하였다.

"우리가 장사치나 뱃사람들을 상대한다 하여도 고을마다 아전붙이나 돈냥깨나 있다는 고을 토호들이 있는데 저들이 반반한 그믐이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있나. 분명히 온갖 트집과 구실을 대어 그믐이에게 집적댈 걸세. 기왕에 이리 되었으니 이 서방과 부부가 되면 어떻겠나? 부부 광대라 이 말이지. 지아비가 있다면 내외가 엄정한데 욕심이 생겨도 감히 어쩌지는 못할 게 아닌가."

"자넨 어찌 생각하나?"

박삼쇠가 당사자인 이신통에게 물었고 그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야…… 저보다는…… 그믐이에게 물어봐야지요."

"아니, 그럼 자네는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야?"

조대추가 말하고는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애오개 주막집에서 이틀 잤고, 과천에서 하루 잤고, 여기 천안 와서 봉놋방에서 이틀 잤으니 벌써 만리장성을 다섯 번이나 쌓았겠구먼."

"봉노에서야 우리하구 다 같이 잤으니……"

박삼쇠가 그렇게 말했지만 조대추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그건 말이 안 되지. 그믐이가 벽 쪽에 붙어 자구 바로 그 옆에서 이 서방이 잤는데, 내 소싯적 같았으면 진작 요절을 냈을 걸세."

박삼쇠가 주먹을 쥐어 조대추의 상투머리를 호되게 쥐어박았다.

"이 자식아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요절이 뭐야? 밥식구끼리……"

하고 나서 박삼쇠는 이신통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자네 상투 꼴로 보아서는 장가를 든 모양인데, 고향에 마누라가 있는 겐가?"

신통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니 삼쇠가 말했다.

"까짓 유랑하는 신세에 그냥 데리구 살지. 자넨 그믐이가 별로 내키질 않는 모양이군."

어쨌든 그믐이에게 남장을 입혀 공연하게 하는 것과 이신통과 부부로 내세우자는 것으로 의논이 끝났고 이를 물주인 박삼쇠가 그믐에게 알려주었다. 그믐이도 반대를 하지는 않았고 나아가서 자기의 이름도 놀이패에 걸맞게 바꾸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믐은 잠깐 생각해보더니 아무렇게나 스스로 지은 이름을 말해 보였다.

"백화가 어떨까요?"

"꽃이 백송이란 얘기여, 하얗다는 얘기여?"

"하얀 쪽이 낫겠네요."

박삼쇠는 그믐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니 좀 섭섭했는지 캐물었다.

"어찌 그런 생각이 들었는고?"

"이 집 담장에 올라간 박꽃이 소담스러워요."

"박꽃보단 부평초 백화가 낫겠군."

이렇게 되어 여성 명창 백화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박삼쇠 연희패는 본래가 소리꾼들이라 사당패처럼 줄타기라든가 땅재주나 꼭두각시놀음 같은 다채로운 재간을 팔지는 못했지만 음률 장단이 한양서 놀던 기량이라 멋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삼현육각의 어우러진 연주와 광대들의 한량 춤은 세련되었다. 거기에 마당 사이를 잇는 재담과 발탈은 놀이판의 흥을 더욱 돋웠다. 맨 끝 순서로 구름 같은 갓을 쓰고 요즈음은 없어진 옛날식의 소매 넓은 도포를 입은 백화가 나와서 가곡과 잡가를 부르니 놀이판의 흥취와 풍류가 절정에 이르렀다. 시골 어촌이나 갯가 마당에서 여창을 듣는 일이 흔치 않거니와 비록 남장은 했을망정 한양 도성의 우대에서 놀던 물색이 맞아 떨어지는지라 어쩐지 함부로 할 수 없는 기품이 엿보였다.

백화의 이름과 재간이며 자태에 대한 소문이 한 달 사이에 일대로 퍼져 삼월 초에 내포 지경의 온양 예산 덕산 홍성 등으로 내려가니 일대의 군교 아전들은 물론이요 양반들까지 놀이판에 구경을 나왔다. 양반들은 체면 때문에 상민들의 놀이판에 내놓고 끼어들 수는 없어서 멀찍이 자리 잡고 앉아서 귀동냥을 하는 신세였다. 그들은 나중에 하인이나 아전들을 보내어 시회를 열고자 하는데 심백화 여창을 초치하려 한다고 놀이 행하의 액수를 미리 알려주기도 하며 점잖게 청하는 것이었다. 박삼쇠는 약조된 놀이판이 많아서 일일이 응하지 못한다고 사과의 말을 늘어놓아야 했다. 간혹 어느 양반 서방님은 부친의 환갑잔치에 백화를 비롯한 한양 소리꾼들을 불렀는데 이러한 자리에는 마지못해 참석을 하였다.

삼월 말이 되어 박삼쇠 패거리는 서울로 돌아갔지만 이신통과 백화는 천안 단우물 집에서 당분간 머물러 있었다. 신통이 저녁 먹고 나서 술추렴이나 하고 지내기는 뭣하여 봉노에 나아가 강담사도 하고 전기수 노릇도 하더니, 하루는 열 명이 채 못 되는 소리꾼들과 함께 객점에 들었던 호남 광대 박돌이란 이와 사귀게 되었다. 신통이 언패를 읽고 물러나 막걸리 잔을 들고 있는데 그가 슬며시 다가앉으며 말을 걸었던 것이다.

"여보쇼 그 좋은 재간들을 그냥 묵히고 있을 셈이우?"

신통이 돌아보니 검은 더그레에 패랭이 쓴 차림새가 편안하여 얼른 대꾸했다.

"책이나 읽은 게 무슨 재간이랄 수 있겠소?"

"내가 홍성 조양문 앞 장 거리에서 댁들이 노는 걸 슬쩍 넘겨다 본 적이 있우. 저 거시기 댁네 아낙이라 하든가, 머시기 백화라 하든가? 소리가 썩 좋습디다. 목청은 남도 청인데 아쉽더구먼."

"뭐가 아쉬워요?"

"음률과 가락을 타고 넘어가는 솜씨가 필시 명창인데, 노는 게 우리와 달라서. 경서도 소리는 간드러지고 흥은 있지만 깊이가 없어서 몇 번 들으면 심심하지요."

"어디서 오셨는지?"

우리야 완주에서 왔지요. 호남은 들판이 장대하고 물산이 풍부한 데다 인심과 정이 넘치는 고장이우. 뼈 빠지게 일하고 징허게 놀 줄 알지요."

"그 깊이란 게 무슨 말이오?"

"사는 게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즐겁고 날씨 바뀌듯 하지 않습디까? 일테면 기쁨과 즐거움은 새벽이슬처럼 덧없이 스러지고 슬픔은 상여 타고 북망으로 갈 때까지 길게 이어진다오. 인생이 고해라고 하지 않소? 살며 겪은 것들이 녹아들어야 그늘이 생긴다고 하지요. 남도의 소리는 그늘에서 시작되오."

그날 밤 이신통은 박돌이와 늦도록 술을 마셨고 나중에는 뒷방으로 가서 백화도 어울려 나직하게 단가도 읊조리면서 새벽녘에야 마무리가 되었다. 그들은 금강을 건너 남도 쪽으로 함께 내려가기로 했다.

이신통과 백화가 언제쯤 한 몸이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대개 한양 연희패와 헤어져 천안 객점에 머물던 시기였을 것이다. 주변 고을에 살면서 그들의 공연을 구경했던 사람들은 모두 백화가 발탈놀음 재담꾼 신통이의 아내라고 알고 있었다. 박돌의 기억에 의하면 이신통이 그 무렵에 심한 고뿔에 걸려 인사불성이 되었을 적에 백화는 놀이판에도 나오지 않고 읍내 의원에서 약을 지어다 달여 먹이며 정성껏 보살펴주었는데 그 뒤부터 정말 부부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들은 전주에 거처를 정해 놓고 박돌이가 모아온 악사 소리꾼들과 함께 남도지방을 돌아다녔다. 박돌이 남도에서는 못 보던 발탈놀음을 놀아보자 하여 이신통이 잽이를 하고 박돌과 젊은 광대가 발탈을 놀면서 서로 맞추어 보았다. 재담을 주고받는 중에 나오는 고을의 풍속이며 지리는 모두 남도 색으로 바꿨고 중간에 끼어드는 잡가 타령들도 거의 판소리 단가나 남도 민요를 끼워 넣었다. 백화는 여전히 경서도 소리를 고집했지만 한양에서도 부르던 남도 단가들을 호남 소리꾼들과 함께 연습하며 차츰 판소리에 젖어들게 되었다. 그 무렵에 이신통은 기왕에 전해오던 해서지방의 민담과 놀이를 엮어서 노중 객사한 유랑민의 주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과부의 장례놀이를 소리 대본으로 만들었고, 수원 지방에서 전해 오는 고집쟁이 부자의 변신 설화를 엮어냈지만 거기에 소리를 붙여내지는 못했다.

신통과 백화는 박돌이네 패거리와 일 년여를 호남 지역을 떠돌아다니는 중에 신통은 가락과 장단에 귀가 틔었고 백화는 이전에 판소리의 단가를 몇 구절씩 부르다가 춘향가와 심청가를 완창하게 되고 사설을 풀어 전하는 아니리에서 등장인물의 성격에 맞는 몸짓인 발림에 이르기까지 습득할 수 있었다. 박돌은 자기 연희패와 동행했던 수많은 소리꾼들과 공연하는 사이에 차츰 그들의 재간을 자기 것으로 새롭게 만들었던 백화의 자질을 보고 비단에 쪽물 들이는 것과 같았다고 회상했다. 이미 호남지방에서 시작된 판소리가 산과 물을 건너 영남으로 건너가고 호서지방으로 그리고 한양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판소리는 상민에서 양반에 이르기까지 즐기는 이들이 많아서 사대부의 잔치 자리에도 불려갔다. 지방 관아에서 정월대보름 단오 백중 한가위 동지 등의 축제나 행사를 기획하는 것은 거의가 아전들이었는데, 이들은 모시고 있는 사또 수령들의 은근한 요청에 따라 명창으로 이름난 이들을 불러다 치르기 마련이었다.

해마다 동지 무렵에 전주 관아를 중심으로 열리는 대사습(大私習)놀이는 해마다 소리꾼들이 기량을 뽐내는 자리가 되었는데 이들을 모으는 일은 감영(監營)과 부()의 아전들이 맡았고 수리인 이방이 총괄했다. 관찰사가 있는 감영이 상급 관아였으나 전주 부는 향소의 일을 더욱 자세히 꿰고 있어 역시 부에서 모아온 소리꾼들이 경연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백화가 몇 차례 아전들 자리에 나아가 시연을 하고서 놀이에 참여할 수가 있었고 박돌의 권유로 이신통이 고수를 잡았다. 백화는 여느 때처럼 갓 쓰고 도포 입은 남장 차림으로 마당에 나아가 춘향가 중의 몇 대목을 불렀는데 청중은 처음 대하는 여창에 모두들 놀라고 신기하게 여기던 것이었다. 백화가 제아무리 타고난 소리꾼이오 한양에서 갈고 닦은 재간이 있다하나 경연의 본선에 참가한 이들은 수십 년 동안 소리를 연마한 중년의 예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남자들이었고 예선에서 시연한 여창 백화는 청중들에게 신선하고 묘한 여운을 남겼다. 이때에 심사를 보았던 선생들 가운데 부안 손동리 귀명창이 있었고, 그는 나중에 사람을 숙소로 보내어 소리꾼 심백화와 고수 이신통 그리고 패거리의 물주였던 박돌을 저녁 술자리에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손 선생이 백화의 소리에 대하여 자신의 느낌을 말하였다.

"경서도 소리를 해왔으면서도 목청이 수리성으로 간드러지지 않고 힘이 있으며 애잔하다. 그렇지만 아직은 소리에 그늘이 없고 깨벗어서 지나치게 맑고 아름답구나. 뭔가 꼭 집어낼 수는 없으나 애잔함이 있으니 거기에 깊이를 터득해야 득음(得音)을 하게 된다. 깊은 가슴 속, 저 아래 잠긴 물을 길어 올리는 것과 같을 게다."

그리고 손 선생은 이제 여명창이 나올 때가 되었으니 그대가 평생을 바쳐서 이루어냈으면 어떠냐 하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그는 다시 창법의 네 가지에 대하여 쉽게 풀어서 말했다.

"평조(平調)가 소리의 기본이니라. 한 밤중에 달이 중천 하늘에 높이 떠있는 것처럼, 또는 한들바람이 잔잔한 수면을 스쳐가듯이 맑고도 시원한 소리다. 우조(羽調)는 맑고 격하고 장하고 거세며 엄한 가락이니라. 사납게 들어올리기 때문에 맑고 장하고 격동하여 한 말이나 되는 옥이 부딪쳐서 깨어질 때에 옥 부스러기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것과 같도다. 계면조(界面調)는 처절하고 슬픈 소리니 아득하게 멀고 숙연한 가락이다. 다만 계면조는 다시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으니 평계면은 평조에 가까운 잔잔한 애조로, 단계면은 슬픔이 아직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가슴 속에 쌓여있는 울적함으로, 진계면은 슬픔이 북바쳐 통곡으로 터져 나온 소리니라. 그리고 여향(餘響)이 있으니 들보 위의 티끌이 떨리고 흘러가는 흰 구름을 멈추게 하는 가락이다. 새벽의 먼 산사에서 마지막 타종 소리가 끊길 때와 같도다. 이는 다만 소리꾼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득음과 더불어 터득해야 할 것이오 누가 누구를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니다."

손동리 선생은 백화 일행에게 부안의 자택을 알려주면서 뜻이 있으면 들러보라고 권했다. 이신통과 백화는 떠돌아 다닌지 두 해 만에 박돌의 놀이패와 헤어져 부안 상소산 아랫녘으로 손 선생을 찾아갔다. 손선생은 부안 고을에서 선대로부터 이어온 아전 집안으로 그 자신도 이방을 지냈다. 그는 중인이었지만 어려서부터 독선생을 들여 글을 배웠고 경서를 두루 읽었으며 이재 능력도 있어서 고을의 경주인 노릇으로 한양을 오르내리며 장사도 하여 가산을 늘려 놓았다. 이방을 하면서 동제며 절기에 따른 고을 행사를 주관하던 중에 풍류에 눈이 틔었고 스스로 연희패들과 교유하며 소리의 맛을 알게 되었다. 한 때 그는 두 번이나 상처를 하고 여염 살림에 뜻이 없어 연희패를 따라 삼남 각처를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는 경사서(經史書)를 읽은 비가비 광대를 자처했던 터였다. 관아에서 직임을 물리고 나와서는 상소산 아래에 터를 잡아 살림집과 함께 소리꾼들이 와서 서로 연습하고 배울 수 있도록 공청을 지어 언제나 몇 사람의 광대들이 와서 머물게 하고 있었다. 이신통은 그 집에 가자마자 솜씨를 보였으니 광대들의 소리와 사설들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잘못된 부분은 고치고 지루한 대목은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백화는 함께 기거하는 소리꾼 선배들에게서 판소리의 가락과 청조며 기교와 사설을 배웠고 귀명창인 선생의 지적으로 다듬어 나갔다.

이신통이 손 선생과 의견이 다른 점이 있었다는데 그것이 떠나게 되었던 원인이었는지 아니면 백화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이신통이 직접 말한 바 없으니 남들은 그저 짐작하여 그러려니 할 뿐인 것이다. 하루는 신통이 정리한 소리 대본을 살피던 손 선생이 장지에 간필로 까맣게 써서 내밀며 말하였다.

"내가 갈피에 끼운 대목에 집어넣도록 하게."

신통은 선생이 내준 글을 읽어보고는 말했다.

"이것은 전부 중국 사서와 경전에 나오는 글들이 아닙니까?"

"왜 어디 모르는 게 있나, 자네는 글을 배운 사람이 아니던가?"

신통이 머쓱하여 선생을 바라본다.

"저야 알지만 소리꾼들은 물론이오 백성들이 어찌 알아먹겠습니까?"

"소리꾼들은 가르치고, 백성들이야 모르고 넘어가도 이야기 맥락에 큰 지장은 없을걸세."

"구경꾼의 대부분이 진서는커녕 언문도 모르는 이가 태반이올시다."

"귀동냥이라는 말도 있잖은가. 풍류란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라네. 양반 사대부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천대를 받게 될 게야."

신통은 고분고분 대본을 들고 나와 선생이 끼워둔 대목을 다시 정성껏 필기하여 올렸다. 그리고 며칠 후 백화에게 길을 떠나겠노라고 말을 꺼냈다.

"뭘 하구 사시려우?"

백화가 걱정스럽게 물으니 신통은 그냥 편안히 대답했다.

"금강산이 좋다 하니 유람이나 가보려고……"

"무슨 미역 사러 나간 정수동이두 아니구 갑자기 왜 그러우?"

이신통은 백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을 듯 말 듯 하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꼭 득음을 할 거요."

이신통이 떠나겠다는 작별 인사에 손 선생이 물으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여향(餘響)을 찾아볼까 합니다."

이신통이 부안을 떠난 뒤에 고향을 찾았는지 어쨌는지 백화는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백화는 손 선생의 공청에서 몇 해 머물며 기량을 닦았고 그녀가 연행 유람을 떠난 뒤에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죽기 전에 그녀를 찾았다고 한다. 백화가 십여 년 세월이 지나 부안에 들렀을 때 선생의 자식들인 남매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그녀를 식구로 받아들였다. 백화는 한양에서도 알려진 최초의 여명창이 되었건만 공연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즈음에는 간혹 한두 사람의 여명창이 남성 예인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백화의 명성을 따르지는 못하였다. 백화가 이신통과 손 선생의 사이에서 어떤 심경을 겪었는지 겉으로 드러내고 말하지 않았으니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는 헤어지는 자리에서 연옥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나게 되면 내 말이나 좀 전해주세요. 이제는 여향을 알게 되었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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