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장례식은 간결하고 형식적이었으며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디나는 소박한 검정색 모직 드레스와 베일이 달린 검은색 모자를 썼다. 시어머니 역시 몸 전체를 검은 옷으로 감싸고 스타킹도 검은색으로 신었다. 마르크도 어두운색 양복과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이 장례식은 프랑스 제7구역 내의 작은 성당에서 가장 전통스런 격식에 맞추어 치뤄지는 것이었다. 교구 내 학교 성가대의 <아베 마리아>가 울려 퍼졌다. 그 어린이들의 음률이 울려 퍼짐에 따라 디나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전혀 피할 수가 없었다.
마르크는 이 모든 것을 프랑스식으로 하였다. 손님 접대, 음악, 송덕문, 그리고 또 한 명의 사제, 집으로 친구와 친척을 초대하는 일. 그것은 하루종일 지속되는 일과였다. 끝없이 돌아가는 악수와 애도의 말, 슬픔을 함께 하고 위로하는 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식의 애도가 마음을 가라앉혀줄지 모르지만 디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필라를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마지막 때가 온 것이다.
그녀는 겨우 벤에게 전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미안해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냥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어요. 난 시댁에 있어요."
"견딜 만해?"
"모르겠어요. 뭐가 뭔지 정신이 없어요. 모두 서커스 같아요. 맙소사, 난 관을 열어놓는 것에 대해서까지 그들과 싸워야 했어요. 최소한 그 싸움에서만은 내가 이겼다구요."
그는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흥분되어 있었고 피곤하고 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전혀 놀랄 것이 없었다. "언제 돌아올 거지, 디나?"
"제 생각 같아서는 이틀쯤 후가 될 것 같아요.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순 없어요. 오늘 밤에 그것에 대해 의논을 할 거예요."
"스케줄이 잡히면 꼭 전보를 해주기 바래."
디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럴게요. 이젠 그 귀신 딱지 같은 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사랑해, 디나!"
"저두요." 그녀는 그 말을 할 때 두려웠다.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오지 않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상황을 그도 이해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시어머님의 방에 몰려 있는 50명 내지 60명쯤 되는 조문객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은 필라에 대한 이야기로 잡담을 하며 마르크를 위로하고 있었다. 디나는 너무나도 마르크가 낯설게 느껴졌다. 몇 시간 동안 마르크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마르크는 문득 부엌에서 벽에 기대어 창문 밖을 보고 있는 디나를 발견했다.
"디나,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아무것도요."
디나의 크고 슬픈 눈이 마르크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꽤 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날이 안색이 나빠져갔다.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것을 마르크에게 말하지 않았고 지난 4일 동안 두 번이나 기절했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
"그냥 숨 좀 돌리려고 여기에 있는 거예요."
"미안해, 너무 오래 걸렸지?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하려고 했다면 우리 어머님이 이해하지 못했을 거야."
"알아요, 이해해요."
남편을 보면서 그녀는 문득 그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녀가 감내하는 희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르크, 언제 집으로 돌아갈 건가요."
"샌프란시스코로?" 그가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겠어. 그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 당신, 빨리 가야 해?"
"돌아가고 싶어요. 여기서는...... 견디기 힘들어요."
"좋아, 하지만 여기서 끝내야 할 일이 있어. 최소한 2주일은 걸릴거야."
이런 세상에, 그럴 순 없어! 디나는 시어머님과 함께, 벤과 떨어져서 앞으로 2주일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그렇잖은가요?"
"그게 무슨 말이야, 혼자서 집으로 가고 싶단 말인가?" 그가 괴로운 눈빛을 보였다. "당신이 그러지 않기를 바래. 나와 함께 가자구."
그는 이미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가 그 집에 혼자 있으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필라의 방에는 그녀의 물건으로 가득 차 있을 텐데....... 디나는 그가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난 2주일을 기다릴 순 없어요." 그녀는 그 생각에 필사적이었다.
그는 그녀가 얼마나 지치고 과로했는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좀 더 두고 생각해 보지."
"마르크, 집으로 가야 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떨렸다.
"알았어. 그러면 먼저 나를 위해 뭔가 해주겠어?"
"뭘요?" 디나가 의아하다는 듯 마르크를 쳐다봤다. 그는 무엇을 원하는 거지? 내가 원하는 것은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인데.
"이틀간 나와 함께 어디론가 떠나지 않겠어? 주말에 어디로든. 좀 조용한 곳, 우리가 쉴 수 있는 곳으로. 여기서는 쉴 수가 없어. 그리고 우리가 화해하지 않고 당신이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해. 조용히 단둘이서 떠나보자구.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겠어?"
디나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그를 바라보았다.
"모르겠어요."
"제발 부탁해!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야. 이틀뿐이라구. 그다음에는 집으로 가도 돼."
그녀는 돌아서서 다시 지붕 꼭대기를 응시했다. 그녀는 벤과 카멜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만 편하자고 그에게 급히 달려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비록 이틀간이라도 그들의 결혼생활에 대한 어떤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마르크를 향해 돌아서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20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는군. 나한테 도대체 뭘 기대하는 거지, 딸이 3일 전에 죽었는데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란 말이야? 좀 경솔한 것 같지 않아, 샹딸? 당신이 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불리한 상황을 이용한다면 어땠을 것 같아?"
마르크는 두 여인,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찢겨지고 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삼 그는 샹딸에게서 이상한 압박감을 느꼈다. 샹딸은 만일 자신이 손해 보면 비극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 같은 압박을 가해왔다. 두 여인이 그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고통스런 선택을. 이번 주에는 그것을 더 느끼고 있었다.
디나는 지금 자기 곁을 떠나면 무척 행복할 거라는 듯한 태도였다. 필라가 죽은 날 밤 공항에서 그녀가 본 것에 대해 아직도 그를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는 아내를 잃고 싶지 않았다. 디나는 그의 아내고, 그는 그녀를 필요로 하며 그녀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필라와 연관되는 마지막 끈이었다. 디나를 떠나는 것은 가정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샹딸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즐거움, 열정, 기쁨이었다. 그는 샹딸을 격한 감정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올렸다.
"이해해 줄 수 없어?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아!"
"5년이 됐어요. 그리고 이젠 그녀도 알게 되었구요. 성급한 것이 아니에요. 지금이 가장 적시일지도 모른다구요."
"누구를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이봐, 샹딸! 조금만 참으라구. 내가 생각 좀 할 수 있게 말이야."
"그러면 얼마나 걸린 것 같은가요, 또 5년간? 당신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살면서? 당신은 2주일이 지나면 돌아가기로 되어 있죠. 그런 다음에는 뭐죠, 나는 어떻하구요,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두 달간 기다리란 말인가요, 그다음에는? 우리가 만났을 때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어요. 지금은 서른 살이에요. 다음엔 서른다섯 살이 되겠죠. 그리고 서른일곱, 마흔다섯. 세월은 빨라요. 특히 나 같은 경우에는 너무너무 빨리 간다구요."
그는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저 그럴 기분이 아니다.
"자, 잠시동안 이 문제를 제쳐놓을 수 없을까? 약간의 예의상으로라도 딸을 잃은 그녀가 기운을 차릴 때까지는 그녀의 삶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
순간적으로 샹딸이 증오스러웠다. 그것은 그녀를 아끼고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녀가 우세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왜 당신은 그녀를 떠나는 것이 그녀의 삶을 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녀에게도 애인이 있을지 모르는데."
"디나에게? 웃기지 말라구. 사실 이 모든 문제에 대해 당신은 좀 정신이 없는 것 같군. 난 주말에 어디 좀 다녀올 거야. 그녀에게 말하지. 의논할 일이 많아.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자구. 그러는 동안에 적절한 대책이 나오겠지."
"어떤 대책이요?"
그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폭삭 늙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지경에까지 빠지다니.......
"당신의 뜻대로 되는 거지."
그러나, 두 시간 후에 디나가 기다리고 있는 그의 어머니의 아파트로 가기 위해 택시를 부르면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샹딸은 떼를 쓰는 건가? 처음에는 함께 어머니 집에 들리겠다는 고집을, 그다음에는 인슐린을 먹지 않은 그 끔찍한 밤, 그리고 이번의 일.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하필이면 왜 지금! 그는 도대체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디나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앞으로 잔인하게 변할 세상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고 싶었다.
그날 아침 그들은 도시를 떠났다. 도시를 빠져나올 때 디나는 이상하게 침묵을 지켰다. 그녀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디나를 마음이 평정되는 곳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필라에 대한 기억을 씻어낼 수 있는 곳으로. 그들 둘은 어머니의 집에서 그런 기억을 충분히 이겨냈다. 한 친구가 드류 근처의 그의 시골집을 제공해줬다.
마르크는 괴로운 심정으로 디나를 흘낏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시선을 도로 쪽으로 옮겼다. 하지만 자신이 다시 샹딸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떠나기 전, 그날 아침에 샹딸은 말했었다.
"이번 주말에 디나에게 말할 건가요?"
"모르겠어. 상황을 봐서 이야기하지. 내가 그녀를 정신적으로 파멸시키면 우리에게도 좋을 것이 없어." 하지만 샹딸은 성급하고 어리석게 말했다. 수년 동안을 참다가 갑자기 그녀도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지난 5년간 그녀는 그에게 의지처가 되어왔다.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디나를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그는 다시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눈을 감고 아무 말이 없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그는 그렇다고 생각했으나 샹딸과 이번 여름을 지낸 후에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을 가늠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샹딸이 그를 밀어 부치고 있는 것이다. 이틀 전만 해도 디나에게 약속했었다. 샹딸과의 관계를 청산하겠다고. 그런데 똑같은 약속을 정부에게도 한 것이다.
"먼가요?" 디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으나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며칠 동안 그녀를 짓눌렀던 똑같은 피로가 그녀를 지치게 했다.
"아냐, 한 시간쯤 걸릴 거야. 아주 멋진 곳이야. 어렸을 때 그곳에 가본 이후로는 가보지 못했는데, 늘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지." 그가 그녀에게 미소지었다. 그녀의 눈동자 밑에 둥그런 그늘이 생겼다.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군."
"그래요. 이번 주에는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어머니의 주치의한테 수면제 좀 받아오지 그랬어." 의사가 집에 왕진왔을 때 디나에게 수면제를 처방했었다. 디나가 고개를 저었다. "제힘으로 견뎌내겠어요." 오랜만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디나는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곳은 정말 아름다운 장소였다. 위풍당당하면서도 자연과 미묘한 조화를 이룬 석조 건물이었다. 거의 샤토 식이었다. 그곳은 훌륭하게 손질된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저 멀리에는 수 마일이나 뻗어 있는 과수원이 보였다.
"아름답지." 그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대단히요. 이런 배려, 고마워요." 그리고 그가 가방으로 손을 뻗칠 때 그녀가 들릴락말락하게 말했다. "오게 되어서 기뻐요."
"나도 그래." 마르크가 디나를 살피듯 뚫어지게 들여다보자 둘은 미소지었다.
마르크는 가방을 들어 커다란 홀에 들여다 놓았다. 가구는 대부분 영국제와 프랑스풍이었고 방안의 모든 것은 그 집을 지었을 당시의 17세기 풍에 충실했다. 디나는 긴 복도를 걸으며 아름답게 장식된 마루를 보았고 정원 쪽으로 눈을 돌려 큰 창문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마침내 복도의 끝에 멈춰서 일광욕실로 갔다. 그곳에는 꽃나무와 두 개의 안락의자가 있었다. 그녀는 그중의 하나에 앉아 조용히 뜰을 응시했다. 잠시 후 마르크의 발자국 소리가 울려왔다.
"디나?"
"이 안에 있어요."
그는 방 안에 들어와 잠시동안 문지방에 서 있었다. 밖을 내다보면서 슬쩍 그의 아내를 보기도 했다. "훌륭하지?" 그녀는 건성으로 말하는 그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아름다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겠어요, 마르크?" 그녀는 묻고 싶지 않았으나 물어야 했다. 그가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당신 친구는 어떻게 되었어요?"
오랫동안 그는 대답이 없었다. "무슨 뜻으로 묻는 건지 모르겠군."
"아니, 당신은 알아요." 디나는 그의 눈동자를 보고 메스꺼움을 느꼈다. "어떻게 처리하기로 했어요?"
"그것을 의논하기엔 너무 빠르지 않을까? 우린 이제 막 차에서 내렸잖아."
그녀가 그에게 미소를 보였다. "매우 프랑스식이군요. 주말을 산뜻하게 보내고 일요일 밤, 돌아가는 길에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그 의논을 하자고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것은 아니야. 우리 둘 다 빠져나와야 했어."
디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래요, 맞아요."
그녀의 마음은 곧 필라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도 함께 얘기해야 해요. 왜 우리가 결혼한 상태로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게 되었어요." 그녀가 다시 그를 올려다봤다. 그가 방으로 들어와 천천히 앉았다.
"여보,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
"어쩌면 그럴지도."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었다.
"디나, 제발......!" 그가 그녀를 흘낏 보면서 코를 풀었다.
"뭐라구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마르크? 우리는 그럴 수 없어요."
여름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녀는 벤과 함께 있었고 마르크에게도 정부가 있는 것이다. 마르크의 경우는 아마 수년 동안 진행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신이 걱정할 것이 못 돼."
"언제가 더 좋은 때죠? 우리는 이미 그 고통속으로 들어갔어요. 종기 전체를 잘라 내버려야 한다구요. 만일 그대로 두면 곪아서 영원히 상처가 될 거예요. 그 종기가 있다는 사실에 눈감아 버리려고 한다면 계속 상처가 커지게 될 거예요."
"그렇게 오랫동안 당신은 행복하지 않았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밖을 보았다. 그녀는 벤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여름이 되어서야 내가 그동안 얼마나 혹심하게 외로웠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어요. 얼마나 외로웠는지....... 우리는 거의 함께 할 시간이 없었고 이야기 한마디를 나눌 시간도 없었죠.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을 거의 알지 못했구요."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지?"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낮고 부드러웠다.
"당신의 시간, 애정, 웃음, 함께 해변가를 산책하는 것......." 그녀는 마지막 말을 생각 없이 내뱉았고 그를 보면서 스스로 놀라움을 억누를 수 없었다.
"당신이 나에 관해서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나에게는 매우 중요해요, 마르크. 이젠 필라도 없는데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몇 개월 동안 여행할 것이고 나는 그동안 혼자서 뭘 하죠, 거기에 앉아서 기다려요?" 그러한 존재에 대한 생각 때문에 그녀의 가슴이 오싹하게 떨려왔다. "더 이상 그렇게 살 수 없어요. 그럴 순 없다구요."
"그럼 어쩌자는 거요?" 그녀가 말하기를 원했다. 그녀가 이혼을 요구하기를 바랬다.
"글쎄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요. 결혼한 상태를 지속하려면 달라져야 할 것 같아요. 당장부터 말이에요." 맙소사,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그와 함께 있으면 벤과 함께 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사람은 남편이다. 18년간을 함께 산 남자이다.
"나와 함께 여행을 하겠단 말인가?" 그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왜 안돼죠, 그녀는 당신과 함께 여행하지 않았나요." 디나는 마침내 알게된 것이다.
"왜 나는 안돼죠?"
"왜냐하면...... 왜냐하면 타당하지 않고 비실질적이고, 그리고...... 그리고 비용이 많이 들고......." 그리고 샹딸을 데리고 다닐 수 없고.
"비용이 많이 든다구요?" 디나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빈정거리듯 웃었다.
"그래요?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비용을 부담하나요?"
"디나, 당신과 함께 이것을 의논하지 않겠어!"
"그러면 우리가 왜 여길 왔지요?" 그녀의 눈동자는 커다란 눈 속에서 사납게 변했다.
"우리는 쉬기 위해 여기 온 거야." 그것은 군주, 왕의 말이었다. 그 문제는 이것으로 일단락된 것이다.
"알았어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말을 쉬면서 보내는 거예요, 정중하게.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파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당신은 그 작은 친구에게 돌아가고 2주일 후 미국으로 향하며, 모든 일들은 예전처럼 진행되는 거죠. 이번에는 얼마 동안 머무를 건가요, 마르크? 3주, 한 달, 6주? 그다음 다시 당신은 떠나고 그동안 나는 우리가 사는 박물관에 처박혀서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다시 고독하고. 제기랄, 혼자서!"
"그렇지 않아."
"그래요, 당신도 알잖아요.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충분히 내가 겪었던 거예요. 이젠 끝났어요."
디나는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발을 옮기려고 할 때 심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대로 서서 밑을 본 채 의자를 잡았다. 그는 그녀를 지켜봤다. 처음에는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했으나 다음 순간 눈동자에 걱정이 서렸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녜요, 아무것도." 그녀는 몸을 추스리며 서 있던 곳에서 그를 노려봤다. "그냥 매우 피곤할 뿐이에요."
"그러면 가서 쉬어. 방으로 데려다 줄게." 그는 그녀가 똑바로 설 수 있을 때까지 그녀의 팔을 살짝 잡아줬다. 그들은 가장 큰 침실을 택했다. 침실 곁에 붙은 방은 나무딸기빛과 크림빛의 실크로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디나, 잠시 누워 봐." 그녀의 안색은 계속 나빠지기만 했다. "나는 잠시 산책하고 오겠어."
"그리고 그다음에는요?" 그녀는 침대에서 절망적인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그다음에 우리는 뭘 하죠? 난,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지는 못하겠어요. 마르크, 게임을 할 수는 없다구요."
그는 다급하게 되물었다. "게임이라구?" 모두를 부정하기 위해서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디나는 말하면서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난처해 보였고 너무 크게 보였다.
"당신이 어떤 것을 느끼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쩔 셈인지 알고 싶다구요. 나에게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이젠 우리에게 필라도 없으니, 당신이 계속 당신의 정부를 만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요. 당신이 말하기 싫어하는 모든 것들을 알고 싶다구요. 지금 말해줘요, 마르크. 알아야겠어요."
마르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창 쪽으로 걸어가 창밖의 언덕을 내다보았다. "그런 문제는 말하기가 쉽지 않아."
"알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매우 부드러웠다. "반편생을 우리는 같이 살았는데 당신이 나를 사랑했는지 모르겠군요."
"항상 그랬어." 그는 등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녀가 본 것은 그의 등뿐이었다. "항상 당신을 사랑해 왔어, 디나."
그녀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왜요?" 그녀는 간신히 그 말을 할 수 있었다. "왜 나를 사랑했나요? 당신의 아내이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아니면 정말 아끼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격심한 고통이 나타나 보였을 뿐이다.
"우리가 꼭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어야 하나? 지금...... 필라가 죽은 지도 얼마 안 된 지금......." 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르크가 필라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을 때 그의 온 얼굴에 경련이 일고 있었다.
"디나, 난...... 난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
더 이상 아무런 말 없이 그는 방을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그녀가 그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머리를 떨군 채 정원으로 향했다. 그를 지켜보며 그녀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고였다. 지난 며칠간은 그녀에게 있어서 인생의 끝인 것 같았다. 잠시동안 그녀는 벤까지 도 잊고 있었다. 마르크만을 생각했다.
그는 한 시간 동안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돌아왔을 때 디나는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눈 밑은 거무스름하니 아직도 피로의 기색이 남아 있었다. 수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화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은 나무딸기빛 실크 시트와 대조되어 거의 녹색으로 보였다. 그는 다시 중앙 홀의 복도로 나와 그 너머에 있는 서재로 갔다. 잠시 동안 거기에 앉아 전화기를 응시했다. 그리고 의무이기라도 한 듯 다이얼을 돌렸다.
세 번째 벨이 울렸을 때 샹딸은 전화를 받았다. "마르크예요?"
"응." 그가 침묵했다.
"어때요?" 디나가 깨면 어떻게 하지, 왜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당신 목소리가 이상해요. 뭐가 잘못됐어요?"
"아니야. 그냥 매우 피곤할 뿐이야, 우리 둘 다."
"그렇겠죠. 그녀에게 말했어요?" 그녀는 끈질겼다. 이것이 그가 전혀 모르는 샹딸의 다른 면이었다.
"전부는 아니고, 약간."
"쉽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그녀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냐, 그런 것이 아니야." 그는 멈칫했다. 홀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자, 다음에 걸게."
"언제요?"
"나중에, 당신을 사랑해."
"좋아요. 저도 그래요."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들리자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놓았다. 하지만 그는 관리인이었다. 아무 일 없는지 돌아보는 중이었다. 그 남자는 도와줄 일이 없다는 것을 알자 돌아갔다. 마르크는 천천히 의자 깊숙이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의 행동을 지속시킬 수는 없었다. 샹딸을 부르고 디나를 달래고 캘리포니아와 프랑스를 왔다 갔다 하고, 숨기고 변명하고 그 둘에게 죄책감때문에 선물을 퍼붓고. 디나가 옳았다. 수년 동안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는 물론 디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것이 그를 더욱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의 마음은 곧장 필라게게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 모습. 그들은 해변을 걷고 있었다. 필라가 그를 약 올리자 그가 웃었다. 그때 그녀에게 오토바이를 조심하라고 일렀다. 다시 그녀가 웃었다....... 눈물이 다시 목구멍까지 차올라 갑자기 그 방은 그의 흐느낌으로 가득찼다. 그는 디나가 들어왔는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흔들리는 어깨를 잡아줬다.
"괜찮아요, 마르크. 내가 여기 있어요." 그녀의 얼굴에도 눈물이 흘렀다. 그녀의 뺨을 그의 등에 대었을 때 따뜻하게 젖어옴을 느꼈다.
"괜찮아요."
"내가 필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기만 한다면....... 왜 내가 그랬지? 빌어먹을 오토바이를 사주다니, 내가 미친 짓을 했지!"
"이젠 문제가 되지 않아요. 과거에는 중요했죠. 당신 평생동안 그 생각을 하면서 살 수는 없어요."
"하지만 왜?" 그가 아내를 돌아보며 고통에 의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왜 그 애가, 왜 우리가? 우린 이미 두 아들을 잃었는데 이제 외동딸마저. 디나, 당신은 어떻게 이 고통을 참을 수 있는 거지?"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어요.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생각하기에 두 아이가 죽었을 때 나도 자살했어야 했는데....... 그땐 더 살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매일 포기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할 수 없었어요. 계속....... 여하튼 한편으로는 당신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나 때문에, 그다음 필라를 갖게 되자 그 고통을 잊었지요. 내 생각에는...... 내 생각에는 다시는 그런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은 당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러나 이제 그때의 고통이 어떠했는지 다시 기억이 났어요. 이번에는 너무 심해요." 디나가 머리를 떨구었고 그가 그녀를 팔 안으로 끌어당겼다.
"나도 잘 알아. 그 아들들이 지금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우리에게는...... 우리에게는 이젠 어떤 아이도 없구만." 디나는 조용히 끄덕였다. 그의 말로 인한 고통보다 더 많은 고통을 느끼면서.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 껴안고 앉아있었다. 마침내 둘은 산책하러 나갔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저녁 시간이었다. "마을로 내려가서 식사하지 않겠어." 그가 슬픔과 피로의 기색을 띄우며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내가 만들면 어떨까요, 뭐가 좀 있을까요?"
"관리인 말로는 그의 아내가 우리를 위해서 빵과 치즈, 달걀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더군."
"그걸로 때우면 어떨까요?" 그가 무관심하게 끄덕였다. 그녀가 산책할 때 입었던 스웨터를 벗어서 루이 14세 풍의 큰 의자에 걸쳐놓은 후 부엌으로 향했다.
그녀는 20분 후에 돌아왔다. 스크램블드 에그, 토스트, 브리이 치즈 그리고 두 컵의 뜨거운 블랙 커피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식사를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떤 변화가 생길까. 그 주간 내내 이 집 주인들은 그들이 싫다고 해도 먹기를 권했다. 그러나 그녀는 먹는 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마르크를 위해 저녁을 준비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일거리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할 말이 쌓였는데도 아무도 먼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그들은 먹었다. 식사 후에 그들은 따로따로 행동했다.
그녀는 긴 홀의 복도, 많은 그림들이 있는 화실 쪽으로 갔고 그는 서재로 향했다. 11시에 그들은 침묵 속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그녀가 뒤척이자 그도 침대에서 나왔다. 11시가 되어서야 한쪽에서 말을 꺼냈다. 디나는 방금 일어나서 탈의실 의자에 앉아 메스꺼움과 싸우고 있었다.
"기분이 나쁜가 보지?"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아뇨. 아뇨, 좋아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걸, 커피 좀 갖다 줄까?" 그 말에 그녀는 메스꺼워졌다. 그녀는 거의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정말 괜찮아요."
"어디가 이상한 것 같아. 요즘 늘 좋아 보이지 않는데?"
그녀는 웃으려 했지만 그것은 헛수고였다.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신도 마찬가지로 보여요."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당신 궤양인 것 같지 않아, 디나?" 그녀는 첫 아이가 죽었을 때 궤양이 있었으나 재발되지는 않았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고통이 없어요, 종일 피곤할 뿐이죠. 가끔씩 메스껍구요, 지쳐서 그런 것이겠죠." 그녀는 억지로 웃었다. "이상할 것 없어요. 우리 둘 다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 못했어요. 우리 둘 다 비틀거리며 시간의 변화에 대응해 왔고 건 여행길, 그리고 충격.......우리가 서 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러나 마르크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녀가 일어설 때 비틀거리는 것을 봤다.
디나가 샤워하러 가자 다시금 샹딸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고하기를 원하고 새로운 소식을 원했다. 그는 아무것도 전달할 것이 없었다. 주말을 그의 아내와 보내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그것도 둘 다 지옥처럼 보낸다는 것을.
샤워하면서 디나는 물이 얼굴 위로부터 등으로 쏟아지게 하였다. 그녀는 벤을 생각하고 있었다. 샌프라시스코는 지금 새벽 2시일 것이다. 그는 아직 자고 있겠지. 그녀는 잠자리 속의 그를 분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헝클어진 짙은 머리, 한 손은 그의 가슴에 또 한 손은 그녀 몸의 어떤 곳에....... 아니야, 그는 카멜에 있을지도 몰라. 그녀는 자신이 그곳에서의 둘만의 주말을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마르크와는 전혀 다른 생활이었다. 마르크와 그녀 간에는 이제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이 함께 한 것은 과거였다. 그녀는 마침내 샤워 꼭지를 잠그고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짙은 나무딸기빛 타월로 몸을 말리면서 열려진 창문으로 정원을 봤다.
이 집은 카멜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프랑스의 샤또, 카멜의 별장, 나무딸기빛의 실크, 포근하고 오래된 모직 타월. 그녀는 다른 방에 있는 주름 장식의, 실크를 흘끗 보다가 벤의 시골 침대에 있던 아늑한 격자무늬의 시트를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의 두 가지 삶을 대조시킨 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단순하고 편안함, 벤과의 실질적인 삶이 있었다. <민주적>이라면서 아침상을 번갈아 차렸고 쓰레기를 뒷문밖에 버렸는데, 여기서 마르크와 함께 하는 삶은 영원히 공허한 호사였다. 그녀는 황급히 머리를 빗질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침실 건너편에서 마르크는 얼굴을 찡그리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성당에 함께 가겠어?"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자 신문 너머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몸을 말리며 옷장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은색 스커트와 스웨터를 꺼냈다. 그들은 둘 다 정식 상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 상복을 입는 것은 프랑스에서는 아직도 지켜지고 있는 관습이었다. 그녀가 빠뜨린 유일한 것은 그녀의 시어머님도 신고 있었던 검은색 스타킹이었다.
디나는 온통 검은색으로 몸을 감싸고 목덜미께에 머리를 묶고 화장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소박해 보였다. 이젠 전혀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이 보였다.
"당신은 지독하게 창백해 보이는군."
"이 모든 검은색과 대조되어 보여서 그렇겠죠."
"그럴까?" 그들이 집을 떠나기 전 그가 잠시동안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죽을까 봐 걱정하는 체했다. 어쩌면 그는 그것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들 둘은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두 사람은 세인트 이사벨이라는 작은 시골 성당으로 아무 말 없이 들어갔다. 디나는 조용히 마르크 옆자리의 신도석에 앉았다. 그 성당은 작고 아담하며 따뜻했고 농부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들처럼 파리로부터 내려온 주말 관광객도 끼어 있었다.
디나는 갑자기 지금이 여름임을 기억해 냈다. 8월의 끝이 아니라 미국에서는 곧 노동절이 오고 그것은 가을을 알릴 것이다. 지난주부터 시간관념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녀는 미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는 카멜, 벤, 마르크, 그다음 필라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렸을 적 시골길을 걷던 것을 생각하며 어떤 사람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보았다. 이 작은 성당은 통풍이 나빴고 신부의 강론이 단조롭게 계속 윙윙거렸다. 그녀가 마르크의 팔을 살짝 쳤다. 그녀가 너무 덥다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얼굴이 그녀의 눈동자 앞에서 현기증을 일으켰고, 모든 것이 암흑 속으로 묻혀버렸다.
21
"마르크......." 마르크와 다른 남자가 그녀를 차에 싣자 디나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쉿!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여보." 그도 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내려놔요. 정말 난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 그는 그녀를 차에 싣는 것을 도와준 남자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가까운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실내가 너무 후덥지근 했을 뿐이라구요."
"후덥지근하지 않았어. 너무 서늘했소. 그리고 더 이상 얘기하지 말아." 그는 그녀 곁의 문을 쾅 닫고 옆 좌석에 올라탔다.
"마르크, 병원에 가지 않겠어요." 그녀가 그의 팔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그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불투명한 회색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당신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다시 병원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병원 특유의 그 냄새와 소리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결코...... 결코 다시는.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심각한 상태라면 어떻게 하나, 그녀가 중병이라면? 만일....... 그는 공포를 숨기면서 다시금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시골길을 보며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옆모습, 어깨, 손을 흘낏 봤다. 몸 전체가 검은색에 감싸여져 있었다. 준엄한 상황,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 그들이 말한 모든 것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왜 그들은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가, 왜 이것이 단순한 시골에서의 주말이 될 수는 없는가, 느긋하고 행복하게 돌아가면 필라가 눈부신 미소를 함빡 머금고 맞아줄 수는 없는가? 그는 다시 디나를 흘낏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마르크. 정말 난 괜찮아요."
"봅시다."
"차라리 파리로 가는 것이 어때요?" 그의 손을 붙잡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가 다시 날카롭게 그녀를 봤다. 파리-샹딸. 그래, 그는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디나가 괜찮은지 알아야했다.
"의사에게 한번 보이고 파리로 가지." 그녀가 다시 억지를 부리려고 했지만 다시금 강한 현기증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가 머리를 의자에 기댔다. 그가 초조하게 그녀를 보다가 속력을 냈다. 그녀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럴 힘이 없었다.
또 10분이 지난 후, 그들은 세인트 제럴드 병원이라고 씌여진 작은 건물에 도착했다. 그는 아무말 없이 차에서 내려 그녀 곁으로 급히 갔다. 문을 열었지만 디나는 나올 기력조차 없는 것 같아보였다.
"걸을 수 있겠어?" 다시 그의 눈동자에 공포가 서렸다. 이것이 발작의 시초라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는 마비가 될 것이고 그는 항상 그녀 곁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는 디나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던가? 그녀를 차에서 내려놓으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막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둘 다 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다. 그저 긴장했기 때문일 뿐인 것을. 잠시 병원으로 들어갈 때는 괜찮은 것 같았다. 왜 병원에 왔는지 잊어버릴 정도여서 평소와 같이 가볍고 편안하게 걸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마르크에게 그런 기분을 말하려고 할 때 한 늙은 남자가 그들 곁을 뛰어 지나갔다. 그는 늙었고 불결한 냄새가 났으며 얼굴의 주름살이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마르크에게로 쓰러졌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팔로 그녀를 휘감았다. 두 명의 간호사와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달려왔다. 1분이 채 못돼서 그들은 그녀를 작은 소독실로 옮겼다. 그녀는 다시 깨어나 당황해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르크를 봤다. 그가 구석에서 떨고 있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 남자가......."
"괜찮아. 그만!" 마르크가 한 손을 올리며 조용히 다가왔다. "그 남자때문이 아니야. 그 교회의 공기 때문도 아니고." 그가 그녀 곁에 서 있었다. 매우 크고 엄격해 보이는 그가 갑자기 늙어보였다.
"왜 그런지 진찰을 받아보자구. 원인이 무엇인지."
의사가 마르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는 침착성을 잃고 복도를 배회하면서 전화기를 힐끗 봤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도 될까, 왜 하면 안되지, 뭐가 문제인가, 누가 볼까? 그러나 지금은 그녀에게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의 관심은 디나에게 있었다. 그녀는 18년 동안 그의 아내였다. 얼마 전에 하나 있던 자식마저 잃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는 그 생각에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전화기를 지나쳤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몇 시간 후에야 젊은 여의사가 그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알게 되었다. 디나에게 어떤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매우 사소한 거짓말. 그러나 과연 그 사실을 그가 그녀에게 말해야 하는지 의문스러웠다. 그가 알았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반대로 디나가 그에게 뭔가를 고백해야 할까.
22
디나는 그녀의 머리 뒤에 있는 흰 벽보다 더 창백한 모습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짓말 말아요!" 마르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매우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너무도 차분하였다.
"결코 거짓말이 아니야. 지금부터 6개월 후면 당신은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느라 고생 깨나 하겠지."
"그렇지만 임신은 불가능해요."
"왜 못한단 말이야." 그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임신하기에는 너무 늙었어요."
"서른일곱 살이 늙었단 말이야? 당치도 않아. 앞으로 15년 동안은 언제라도 임신이 가능하다구."
"그렇지만 너무 나이가 많아요." 그녀는 그에게 악을 썼고 눈물이 금방 떨어져내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왜 사람들이 자신에게 먼저 말하여 그 충격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이곳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환자에게 맨나중에 알려주는 것이다.
디나는 마르크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부인의 상태를 최초로 알아야만 하는 중요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아내를 당황시킬 생각이 없었다. 두사람은 너무 많은 비극을 겪은 후였기 때문이었다.
"여보, 어리석은 생각하지 말아." 마르크가 말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자신의 손을 다정하게 아내의 머리에 얹은 후, 길고 비단같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당신은 전혀 늙지 않았어. 앉아도 되겠지?" 그가 물었다. 그녀가 머리를 끄덕이자 그는 침대 한 모퉁이에 앉았다.
"그런데......2개월 되었나요?" 그녀는 포기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이가 벤의 것이기를 원했다. 그녀는 잠들기 직전에 처음으로 임신에 대한 생각을 하였었다. 그런 생각이 그녀의 뇌리에 문득 떠올랐고 그녀는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했지만, 잠이 들 무렵 그녀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어지럽고 구역질이 나고 계속 잠자고 싶은 것을 보면 임신인 것 같았다.
벤의 아이가 분명했다. 그녀는 마르크의 아이가 아니기를 원했다. 그녀는 실망과 고통스런 마음으로 마르크를 보았다. 임신 2개월이라면 벤의 아이가 아니라 마르크의 아이인 것이다.
"내가 떠나기 전날 밤에 임신된 것이 분명해."
"좋아하실 것 없어요." 눈물이 그녀의 눈에 가득 찼다.
마르크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는 그녀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마르크는 자신의 아내에게, 단순한 남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잊을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몇 달 동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녀는 마르크에게 아들을 못 낳아 준 것이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여보, 고지식한 생각은 버려."
"수년 동안 임신을 하지 않다가 왜 이제와서야 임신이 되었죠."
"때때로 그런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 어쨌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가 온 거야. 새 아이와 새 가정을 꾸밀 기회가."
"이미 아이가 있었잖아요." 그녀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며 병원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는데 그런 그녀의 모습은 초조해 하는 작은 소녀 같았다.
"아이를 더 갖고 싶진 않아요." 당신의 아이가 아니라면 몰라도. 이제는 디나도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만일 그녀가 진실로 그를 사랑했다면 그의 아이를 원했을 것이다. 마르크는 기뻐 어쩔줄 모르면서도 꾹 눌러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겠지. 모든 여인이 다 그렇지. 하지만......필라 일이 생각나."
"그래요, 필라 생각이 나요. 다른 아이들도요. 마르크, 그런 일이 있었잖아요.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요. 무엇 때문에, 더 큰 충격과 고통을 받기 위해서요? 이 나이에 혼자 애를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반은 미국인이고 반은 프랑스인인 아이를 키울 셈이에요? 당신과 아이에 대한 사랑 문제로 다투면서 지내는 일을 다시 겪으란 말인가요, 싫어요!"
"당신은 분명히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였고 강철처럼 단호하였다.
"그럴 의무는 없어요!" 그녀는 이제 그에게 악을 썼다. "지금은 중세가 아니에요, 내가 원하면 유산시킬 수 있어요!"
"유산시키면 안 돼!"
"도대체 왜요!"
"디나! 당신과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어. 당신은 지금 흥분했어."
그녀는 베개를 껴안고 울면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흥분했다>라는 말은 그녀의 마음 상태에 관한 정확한 표현이 아니었다.
"당신은 곧 익숙해져서 기뻐하게 될 거야."
"당신의 말은 내게 아무 선택권이 없다는 얘기죠, 그렇죠."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유산시키면 저를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혼할 건가요?"
"쓸데없는 말 하지 말아."
"그렇다면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
"괴롭히는 것이 아니야. 난 행복해."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쳐 다보고 팔을 뻗었다. 그렇지만 그의 눈에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가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양손을 번갈아 자신의 입술에 대었다. "디나, 당신을 사랑해. 그리고 우리의 아이를 갖고 싶어. 당신과 나의 아이를 말이야."
그녀는 눈을 감고 몸을 움츠렸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일어서서 그녀를 안은 후 그녀의 머리를 잠시 어루만졌다. 그 후 그는 떠났다. 그녀는 슬프고 혼란한 모습으로 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둠 속에 혼자 남게 되자 디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흐느껴 울었다. 임신이 모든 일을 변화시켰다. 왜 그 사실을 몰랐을까,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자신이 사전에 알아챘어야만 했다. 그녀는 신경과민인 줄로만 알았다. 전시회 개막식이 있었고 벤과 끊임없이 사랑을 하였으며, 그 후 필라의 소식이 있었고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이 모든 일이 2주일 동안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벌써 2개월이 지났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녀가 벤과 함께 있는 동안에 마르크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것은 벤과의 모든 일을 부인하여야 함을 의미했다. 이 아이는 마르크와의 결혼을 확인시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밤새도록 침대에서 잠들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마르크는 그녀를 퇴원시켰다. 그가 아테네로 떠나기 전날, 두 사람은 곧바로 파리의 마르크의 어머니 댁으로 차를 몰고 있었다.
"닷새 혹은 엿새 동안 머물 예정이야. 그 후 그리스의 일을 정리해 버릴 작정이야. 일주일 후 파리를 떠나 집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겠어."
"그곳에 머문다는 것이 무슨 뜻이죠, 난 그곳에 있고 당신은 여행한다는 뜻인가요."
"아니야. 될 수 있는 한 그곳에 머물겠다는 뜻이야."
"한 달에 5일, 일 년에 5일, 그런 건가요?"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아내로서의 18년의 생활을 다시 하여야 한다는 선고를 받은 느낌이었다.
"언제 당신을 보게 되나요, 마르크?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는 한 달에 두 번씩 저녁을 같이 먹고, 다른 곳에 있으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건가요?"
"그렇게 하지 않을 생각이야, 디나, 약속할게."
"왜요? 언제나 그랬잖아요."
"이젠 달라. 이젠 무언가를 알게 되었어."
"정말이에요, 그게 뭔가요?" 도로만을 쳐다보며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애처롭게 들렸다.
"난 인생이 얼마나 짧으며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 것인가 하는 사실을 깨달았어. 우린 이전에 두 번이나 그런 사실을 깨달았지만 난 잊고 있었던 거야. 이제는 알겠어. 다시 깨우치게 되었다구."
디나는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필라도 없는데 정말 이 아이를 유산시킬 생각이야?"
그가 그녀의 생각을 알아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 그녀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요."
"난 확신할 수 있어. 유산은 당신을 망칠 거야." 그의 목소리의 억양이 그녀를 놀라게 하였다. "죄의식과 감정적 고통으로 인해 당신은 파멸하고 말 거야. 다시는 생각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 거라구, 분명히." 그 생각이 그녀에게 공포심을 주었다.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렇게 냉혹한 사람이 못돼."
"말을 바꾸자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로군요." 그녀가 한숨지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날 밤 9시 30분에 잠자리에 들었고 더 이상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남겨두고 떠나면서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하였다. 그는 공항까지 택시를 탈 예정이었다.
"매일 밤 전화할게." 그는 진지해 보였지만 기쁨을 숨길 수 없었다.
그의 눈에는 그 커다란 근심이 사라져 있었다. 단지 필라에 대한 슬픔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약속해, 여보. 매일 밤 전화할게."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그녀는 외면하고 말았다.
"그녀가 놓아 줄까요." 그는 그 말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침대에서 뚫어지게 그를 쳐다보았다. "내 말 들으세요, 마르크. 그녀가 당신과 동행할 거죠, 맞아요?"
"놀리지 말아. 이건 사업차 떠나는 여행이야."
"지난번의 여행은 업무상의 여행이 아니었던가요?"
"당신 흥분했군. 그만둡시다. 떠나기 전에 말다툼하기 싫으니까."
"왜요, 유산시킬까 봐요." 흥분한 김에 그 아이가 마르크의 아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임신 2개월이라면 어쩔 수 없이 그의 아이였던 것이다.
"디나, 내가 떠나 있는 동안 푹 쉬고 있어." 그는 아버지 같은 상냥함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키스를 한 후 부드럽게 문을 닫았다.
그녀는 잠시동안 누워 자신 시댁의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 아무도 그녀의 임신을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은 마르크의 말대로 두 사람만의 비밀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집안은 조용하였다. 그녀는 어떻게 할까 생각을 굴리면서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마르크가 그리스에 있는 동안 샌프란시스코로 갈 수도 있었고 아이를 유산시켜 자유로와질 수도 있었지만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유산은 마르크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만큼 파괴시킬 것이다. 이미 너무나 많은 손실을 경험하였다. 그의 말이 맞다면, 이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면, 만약...... 이 아이가 벤의 아이라면?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 반짝이다 사라졌다. 마르크의 말도 그렇고 젊고 수줍은 듯이 보이는 의사의 말도 그랬다. 벤의 아이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디나는 이 베이지색 비단 보호막 속에서, 마르크가 돌아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 다시 똑같은 생활을 시작하기를 기다리면서 일주일 동안 누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디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문득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현기증을 잠시 가라앉힌 후 조용히 옷을 입었다. 그녀는 밖에 나가 산책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거리로 나서니 그녀를 유쾌하게 해주는 정원과 광장과 공원이 있었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거리의 행인들과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있는 웃음이 나오도록 자그마한 나이든 숙녀들, 체스를 하고 있는 노인들, 친구들과 재잘거리는 아이들 그리고 이리저리로 유모차를 끌고 있는 한 소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 소녀는 스물한 살이나 스물두 살쯤으로 보였다. 디나는 쉬면서 지켜보았다. 의사는 그녀에게 마음을 편히 하고 산책을 하는 것이 좋은 휴식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외출을 하더라도 집에 돌아와 잠을 자고 식사를 거르지 말며, 밤늦도록 잠을 자지 않는 일이 없으면 몇 주일 내로 건강이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파리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벤에 관해서이다. 며칠 동안 그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녀가 마침내 우체국 앞에서 걸음을 멈춘 것은 오후 늦게였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여직원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었고, 놀라서 "미국이에요?" 라고 묻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무한한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사실은 1분도 되지 않았다. 벤이 있는 곳에서는 오전 8시였다.
"아직 자고 있었나 보죠?" 6천마일 떨어진 거리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힘이 있었다.
"그런 셈이지. 방금 깼어." 벤은 미소 지으며 침대로 다시 갔다. "언제 돌아올 예정이야?"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눈물을 삼켰다. "곧 가게 될 거예요." 마르크와 그의 아이와 함께 말이예요. 그녀는 목구멍에서 슬픔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눈물이 조용히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였다.
"난 당신보다 더 보고 싶어." 그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녀가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었다.
"괜찮아?" 그는 그녀가 여전히 필라때문에 상심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무언가 딴 일이 더 생긴 것 같았다. "괜찮으냐구? 대답해줘."
그녀는 전화박스 속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디나, 여보세요?" 그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녀가 아직 그곳에 있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다.
"저 듣고 있어요." 침울한 목소리로 그녀는 대답했다.
"오, 디나......."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리로 가면 어떨까, 그래도 될까."
"아니에요."
"다음 주말을 카멜에서 보내는 것이 어떻겠어? 노동절이 낀 주말이야. 돌아올 거야."
그것은 몇 광년쯤 떨어진 먼 곳에서 비춰오는 서광과도 같았다. 그는 가지 못한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멈췄다. 다음 주말을 카멜에서....... 못 갈 이유가 없었다. 오늘 밤 출발하면 일요일까지 같이 지내게 될 것이고 마르크가 돌아오기 전까지 하루 더 같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카멜에서. 두 사람이 알고 있듯이 두 사람의 관계는 그후 끝나는 것이다. 여름이 끝나는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내일 도착할게요."
"내일? 오, 내 사랑....... 몇 시에?"
그녀는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하였다. "당신 시간으로 내일 오전 6시쯤에요." 그녀는 갑자기 얼굴이 환해졌다.
"확실하지."
"그래요." 그녀는 그에게 항공편을 알려주었다. "그 비행기를 못 타게 되면 전화하겠어요. 전화가 없으면 그 비행기를 기다리세요." 그리고 그녀가 전화기에다 소리내어 웃을 때 다시 눈물이 자신의 눈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집으로 갈게요, 벤." 떠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얼마나 긴 시간처럼 느껴졌던가.
그날 밤 그녀는 시어머니에게 메모를 남겼다. 그녀는 단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라는 전화를 받았으며, 이렇게 갑자기 떠나게 되어 죄송하다고만 적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과 필라의 초상화를 돌려달라고 말해야 할 필요성을 강렬히 느꼈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이해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녀는 하녀에게 마르크에게서 전화가 오면 외출했다고 전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면 충분하였다. 그것으로 적어도 하루는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그리스의 일을 정리해야만 했던 것이다.
디나는 집으로 향하는 비행기 속에서 그 일을 생각하였다. 마르크는 그녀를 일주일 동안 혼자 있게 내버려두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는 그녀가 파리에서 집으로 갔다는 사실에 화를 낼 것이지만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자유로왔다. 일주일 동안. 그녀는 그 이상은 생각할 수 없었다.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 한 시간 동안 그녀는 좌석에 조용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매우 어린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때때로 일어나는 멀미도 그녀의 기분을 악화시키지 못했다. 잠시동안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으면 멀미가 사라지곤 하였다. 그녀는 벤 생각을 하였다.
비행기가 주위의 모든 것을 분홍색이나 금빛으로 만드는 태양과 경주하면서 구름을 뚫고 하강한 후 샌프란시스코에 착륙했을 때, 그녀는 먼저 비행기를 빠져나오는 사람들 틈에 끼었다. 아름다운 아침이었지만 그것조차도 그녀의 마음을 벤에게서 떼어놓지 못했다. 비행기가 출구에 정지했을 때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벤뿐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빨리 떠나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그녀가 흰색 바지와 흰색 실크 셔츠 위에 검은 벨벳 자켓을 입고 어깨를 추스릴 때, 얼굴에는 이미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녀의 상아빛 얼굴과 칠흑같은 머리가 흑백의 의상을 돋보이게 하였다. 그녀는 미국을 떠날 때보다 더욱 창백해 보였지만 그녀의 눈은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였고, 문으로 걸어가는 동안 두 눈은 춤추고 노래했다.
그 후 그녀는 벤이 팔에 상의를 걸치고 미소를 띤 채 오전 6시에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문을 통과하자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달려갔고 그녀는 곧 그의 팔에 안겼다. "오, 벤!" 그녀의 눈에는 웃음과 눈물이 어렸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단지 그녀를 꼭 안을 뿐이었다. 그가 팔을 풀기 전에는 그것이 영원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당신 걱정을 많이 했어, 디나. 당신이 돌아와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저도 그래요."
그는 그녀의 눈을 살폈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고통이 어려있다는 것뿐이었고, 그 이상의 것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단지 그에게 달려와 꼭 안겼을 뿐이었다.
"집으로 가겠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고였다. 일주일 동안을 위해 집으로 가는 것이다.
23
"괜찮아?" 디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감고 벤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집에 온 지 4시간이 지났고 내내 그와 함께 침대에 있었다. 오전 10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비행기 속에서 한잠도 자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모습이 긴 여행 때문인지 혹은 필라의 죽음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인지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짐을 풀어 그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었다.
"디나, 괜찮아."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벤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기분 좋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녀의 미소는 그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었다. "언제 카멜로 떠나죠?"
"내일이나 모레, 당신이 원하는 날에."
"오늘 떠날 수 있나요?"
그녀에게는 어딘가 숨겨져 있는 절망의 그림자가 있었지만 그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그럴 수도 있겠지. 샐리와 상의해 봐야겠어. 우리가 떠난 후 그녀가 혼자 화랑을 돌볼 수 있으면 떠날 수 있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어요." 나지막하지만 진지한 말이었다.
"그 정도로 몸이 안 좋아?" 그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만을 끄덕였지만 그는 이해하였다. 그는 식사를 준비하러 나갔다. "내일은 당신 차례야."
그는 부엌에서 그녀에게 말했고, 그녀는 벌거벗은 채로 방안을 가로질러 문에서 그를 보며 웃었다. 이제는 마르크의 아이를 임신한 채 사랑을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름 내내 사랑을 하였으면서도 그녀는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벤과 사랑하고 싶었다.
"디나!"
그녀는 미소지으며 머리를 들어올렸다. "왜요?"
"나쁜 일이 있었어? 필라 일 말고 또 다른 일. 그랬어?"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려고 하였으나 그에게 숨길 수가 없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요."
"내가 알아야 하는 건가?" 마르크처럼 그도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너무 연약해 보였던 것이다. 그는 선 채로 그녀를 면밀히 관찰하였다.
그녀는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 아이에 관하여 알 필요 는 없었다. 그 아이가 벤의 것이라면 달랐을 것이다.
"달걀을 어떻게 요리해 줄까? 프라이로 할까 아니면 스크램블로 할까." 그는 물으면서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스크램블드 에그로 해주세요." 프라이는 생각만 해도 신물이 올라올 것 같았지만 스크램블드 에그는 그럭저럭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달걀을 보자 속이 메스꺼웠지만 강한 커피 냄새를 맡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스크램블드 에그를 가까스로 먹어치웠다.
"커피는 먹지 않겠어요."
"웬일이지." 그는 놀란 듯이 보였다.
"사순절을 위해서 먹지 않기로 하였어요."
"6, 7개월 빠르군."
7개월...... 7개월. 그녀는 그 생각에서 빠져나와 그의 농담에 미소 지었다.
"그런가 봐요."
"그렇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저어...... 모르겠어요."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가 그를 감싸 안고 그의 등에 기대었다.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제 생활이 좀 더 단순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그것 뿐이라구." 그는 몸을 돌려 레인지 앞에 벌거벗은 채로 서서 그녀를 보았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것뿐이에요." 지금 이런 말을 해야 하나, 왜 이렇게 빨리 고백해야만 하는 건가? 그녀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찼지만 억지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건이 제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아요."
"그것이 쉬울 거라고 생각했었나." 그의 눈은 그녀의 눈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렇지만 이렇게 어렵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어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그를 떠날 수가 없어요, 벤." 마침내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말았다. 오, 하느님 맙소사! 그에게 말해버렸어. 그녀는 끝없이 그를 쳐다보았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왜, 이유가 뭐지?"
"떠날 수가 없어요. 지금은요."
그리고 그 후에도 안돼요, 벤. 그의 아이를 가진 한 그럴 수가 없어요. 또다시 여지껏 해 온 생활을 되풀이해야만 해요.
"남편을 사랑해, 디나?"
그녀는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어요. 지금은 한때 사랑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어떤 점에서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요. 그는 자기방식대로 18년 동안 내게 무언가를 주었어요. 그렇지만 그것은...... 그것은 수년 전에 끝났어요. 이번 여름까지도 몰랐어요. 지난 일주일을 보낸 후 더욱 선명히 깨달았어요." 그녀는 숨을 쉬기 위해 잠시 멈춘 후 말을 이었다.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마르크와 헤어져야 할지를 확신하지 못했어요. 내게 아무런 권리가 없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아직도 그를 조금은 사랑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구요."
"그렇다면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래요." 그녀는 목이 메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며칠 전에서야 겨우 깨달았어요. 어떤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깨닫게 되었어요." 내가 그의 아이를 원하지 않고 당신의 아이를 원했기 때문이에요! 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럼 왜 그와 함께 있는 거지, 필라때문에?" 그는 너무도 차분하게 아버지가 딸에게 말하듯이 물었다.
"필라 외에 다른 이유도 있어요.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요. 단지 떠나지 않을 뿐이에요." 그녀는 다시 고통스런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제가 떠나버리기를 원하세요."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조용히 방을 떠났다. 그녀는 그가 잠시 거실에 머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가 그가 갑자기 침실문을 힘껏 닫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잠시동안 놀라서 멍하니 부엌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제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카멜에는 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옷은 전부 그의 방에 그의 옷과 함께 잠겨 있었다. 그녀는 그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 후에 그가 나왔다. 그는 눈이 충혈된 채 슬픔에 잠겨 문가에 서 있었다. 잠시동안 그녀는 그가 화가 난 것인지 단순히 흥분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정확히 무슨 뜻이지, 디나? 끝났다는 얘기인가?"
"아니...... 아니예요, 아, 어쩌면 좋을까요!" 잠시 그녀는 자신의 의사가 분명치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깊은 숨을 두 번 쉬고는 길고 호리호리한 다리를 우아하게 바닥을 향해 늘어뜨리면서 소파에 앉았다. "아직 일주일은 시간이 남았어요."
"그 후에는 어떻게 할 거지."
"떠나야죠."
"그 삭막한 생활 속으로, 혼자만의 생활 속으로, 필라도 없는 그 무덤과도 같은 곳으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는 고통스러워보였다.
"달리 방법이 없어요, 벤."
"이해하지 못하겠군." 그는 침실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멈춰서 그녀를 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디나, 당신에게 우리의 사랑은 여름 동안만이라고 말을 했기 때문에......이해할 수는 있어. 그렇게 말을 했으니 이제 와서 변경시킬 권리가 내게는 없는 것이겠지."
"당신이 화를 내고 상심하는 것도 당연해요."
그녀는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았고 자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를 쳐다보는 그는 결코 동요하지 않았다.
"화도 나고 슬프기도 해. 그건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야."
디나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금 그의 품에 안겼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떨어졌다.
"오늘 카멜로 갈까."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엎드려 누워있었다. 그녀는 3시간 동안 잠을 잔 후 방금 깨어났고 시간은 거의 5시가 다 되었다. 벤은 한번도 화랑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일주일 내내 화랑을 비우는 동안 샐리가 관리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정말 어떻게 할 작정이지, 디나."
"당신과 함께 있겠어요."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지만 눈에는 잔잔한 행복이 어려있었다.
"어떤 곳이라도?"
"그래요."
"그렇다면 타히티로 갑시다."
"카멜로 가고 싶어요."
"진정으로?" 그는 손을 그녀의 허벅지에 얹어놓았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진정이에요."
"좋아, 그렇다면 카멜로 가지. 그곳에서 저녁을 먹지."
"그래요. 파리 시간으로는 오전 2시지요. 저녁을 먹을 즈음에 파리에 있었더라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겠네요."
"맙소사! 난 시차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어. 몹시 피곤하지?"
그녀는 매우 피곤해 보였지만 혈색은 더 좋아보였다.
"아니에요, 기분도 좋고 행복해요.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내 사랑의 절반도 안 될걸." 그는 그녀의 얼굴을 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었고 그녀를 안고 애무하고 싶었으며, 남은 며칠 동안 그녀의 모든 것을 갖고 싶었다. 문득 그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당신 작품은 어떻게 하지?"
"내 작품이라니요?"
"우리 여전히 동업자로 남는 건가." 그는 그녀가 <물론이에요>라고 대답하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이제 그는 알게 되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럼 서로 만나야 하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마르크의 아이때문에 배가 부를 텐데 어떻게 그를 만나러 화랑에 갈 수 있겠는가?
"그런가?" 그러면 하는 수 없지." 그가 말했다.
그의 눈에 어린 고통을 보는 것을 그녀로서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은 도가 지나칠 만큼 격해졌다.
"왜 이러는 거지."
"당신은 나를 옛날에 결혼했던 여자처럼 겉치레나 좋아하는 여자로 생각하는가 보군요."
그는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당신은 그런 여자가 아니야, 디나. 당신에게 그런 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 우린 어려운 약속을 하였고 이제 그 약속에 따라 행동해야만 하겠지. 쉽지는 않지만 그것이 공정한 거야.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그 사실을 항상 기억해 주기를 바래. 혹시라도 돌아오고 싶다면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어, 언제라도. 내 나이 아흔세 살이 되었을지라도." 그는 그녀를 미소짓게 만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제 새로운 계약을 맺지 않겠어?"
"무슨 계약을 말인가요." 디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마르크가 미웠고 자기 자신은 더 미웠다. 벤과 함께 있기 위해서는 유산을 시켜야만 했다. 그녀가 자초지종을 그에게 말한다면 그가 그 아이를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에게 결코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 새로운 계약을 맺자구. <일주일 동안 뿐>이라는 말을 하지 않기로 해. 단지 하루하루를 즐기고, 하루하루 사랑하며, 매순간을 즐기면서 그때를 맞이하는 거야. 그 말을 하게 된다면 우리의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될 거야. 약속할 수 있겠지?"
벤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얼굴 주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약속해."
"약속해요."
"좋아."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에게 다시 키스한 후 방을 떠났다.
두 사람은 한 시간 후에 카멜로 향했지만 어두운 그림자를 숨길 수없었다. 상황이 이전과는 달랐다. 이제 거의 끝난 것이며, 구태여 끝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 끝이 너무 가까워졌다. 여름은 가슴 아픈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24
"준비됐어?" 노동절인 월요일 밤이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인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거실을 둘러본 후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불들은 이미 꺼졌고 와이드의 작품 속에 있는 해변의 여인도 달빛 속으로 얼굴을 감췄다. 그녀는 그 집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그 여인을 쳐다보았다. 날씨는 차가웠지만 달이 밝았고 하늘에는 별이 총총 박혀 있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녀가 조용히 차 속으로 들어갈 때 속삭인 말이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고 키스하였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 두 사람은 웃었다. 갑자기 슬픈 분위기가 사라졌다. 두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도 기쁨과 평화와 사랑을 나누었고, 그것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것이었다. 평생 동안. "나만큼 행복해, 디나?" 그가 물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 이유는 당신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항상 나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야. 어떤 경우라도.“
"당신도 제게 그렇게 해주었잖아요." 그녀는 자기 생애의 긴 겨울밤에 대한 기억에 빠지곤 하였다. 그녀는 배 위에 손을 얹고 아이를 만질 때마다 마르크에 관하여 생각하곤 하였다. 그 아이가 벤의 아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벤의 아이였기를 바랐다. 갑자기 그러한 바램이 무엇보다 강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오전 2시까지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날은 늦도록 잠을 잔 후 아침 식사를 하고 그가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마르크와는 그날 오후로 약속되어 있었다. 화요일 3시로. 그의 전보 내용에는 그 말밖에 없었다. 그녀가 집 안의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전화했을 때 마가레트가 전화로 그 전보 내용을 그녀에게 읽어주었다. 화요일 3시라고 적혀 있다고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물었어."
"조금 전에 당신의 아들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어둠 속으로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내 딸도, 당신도 딸을 원해." 두 사람은 미소지었다.
"몇 명이나 생각하고 있나요?"
"마음에 드는 만큼. 한 다스 정도."
그녀가 소리내어 웃으며 운전하고 있는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녀는 그가 그런 말을 처음으로 한 전시회 후의 아침을 떠올렸다. 그날 아침과 같은 때가 또 있을까?
"전 둘만 낳고 싶어요."
그는 그녀가 사용한 시제가 증오스러웠다. 그녀의 말은 그가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언제부터 나이가 젊다고 생각하게 되었지."
"아직 그렇게 늙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꿈꾸는 것은 쉬운 일이잖아요."
"당신 마치 임신한 사람처럼 보이는군."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피곤해."
"약간요." 그녀는 일주일 내내 너무 자주 피곤했었다. 긴장때문이겠지만, 그는 그녀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어두운 안색과 눈밑의 기미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걱정해줄 수도 없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 기적적으로, 다음 날이면 그의 걱정도 끝나는 것이다.
"지금 무슨 생각하고 계세요?" 그녀는 진지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에 대해서."
"그것 뿐이에요?" 그녀는 그의 눈빛에 어려 있는 그 무엇을 알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물어보았으나 그가 받아주지 않았다.
"그것뿐이야."
"뭔데요?"
"난 내가 아이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있었어."
그녀는 슬픔으로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머리를 돌렸다.
"벤, 제발 그만둬요."
"미안해, 디나!" 그는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겨 한쪽 어깨에 기대게 하고서 계속 차를 몰았다.
"그게 무슨 뜻이죠?" 샹딸은 방 건너편에서 마르크를 쏘아보았다.
그는 여행가방을 잠그고 마루로 내던졌다.
"말 그대로야, 샹딸. 이제 장난은 그만둬. 이번 여름 3개월 가까이를 이곳에서 지냈으니 이젠 그곳에서 일을 해야 해."
"얼마 동안요." 창백해 보이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의 흔적이 있었다.
"잘 모른다고 말했잖아. 이제 고집 그만 부리고 떠나게 해줘."
"싫어요, 그러기 싫단 말예요. 당신이 비행기를 놓쳐도 할 수 없어요. 그런 식으로 저를 떼어놓을 생각일랑 마세요. 저를 어리석은 여자로 생각하세요? 당신은 그녀에게 돌아가려는 거예요. 딸을 잃어 상심하고 있는 가엾은 부인을 이제 사랑하는 남편이 위로하러 가는군요. 그것으로 그만이에요, 난 어떻게 하구요?" 그녀는 위협적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턱근육이 수축되었다.
"그녀가 아프다고 말했잖아."
"어디가 아파요?"
"어디가 아프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 샹딸. 그냥 많이 아프다구."
"그래서 지금은 그 여자하고 헤어질 수 없단 말이죠?" 그럼 언제 헤어질 수 있겠어요?"
"젠장, 일주일 내내 그 얘기로군. 비행기를 타러 가는 사람한테 꼭 그런 얘길 해야 되겠어."
"얼어죽을 비행기! 누가 당신을 보내기나 한대요?" 그녀는 격앙된 목소리로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보내줄 수 없어요. 절대로!" 그녀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는 한숨을 쉬며 주저 앉았다.
"샹딸, 제발!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말했잖아. 제발 울지 말아. 나를 좀 이해해줘. 전에는 안 그랬잖아. 꼭 그렇게 억지를 부려야 하는 거야."
"지쳤기 때문이에요! 어쨌든 당신은 그녀의 남편인 걸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이젠 지긋지긋해요, 지겹단 말이에요!"
"하필이면 지금 꼭 따지고 들어야 해?" 그는 초조하게 시계를 보았다. 어젯밤에 말했듯이 시간이 걸릴 것 같으면 당신을 그곳으로 부를게. 이제 됐어?"
"얼마나 오래 걸려요."
"오, 샹딸!" 그는 필라에게만 보였던 성난 모습을 하였다. "사태를 관망하자구. 샹딸이 미국에 오면 잠시 머무를 수 있을 거야."
"잠시라는 게 얼마 동안이냐니까요?" 이제 그녀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마르크는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고 눈을 부라려 보였다.
"내키는 대로야. 이제 됐어? 이제 그만 가겠어. 거의 매일 전화하지. 일주일 내에 돌아오도록 노력할께. 그게 안 되면 샹딸이 건너와. 만족해!"
"거의 만족해요."
"거의." 그는 그 말을 되뇌었다. 그녀는 얼굴을 들어 키스를 요구했다.
그는 그녀에게 키스하였고 두 사람은 서로 엉켜 침실쪽으로 가면서 소리내어 웃었다.
"비행기를 놓치겠어."
벤은 도중에 차를 세웠다. "여기요." 그녀는 마치 세상이 끝나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누군가 그들에게 요한계시록을 선포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날이 언제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벤 없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카멜에서 나누었던 순간들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침을 준비할 사람이 벤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생각하면서 침실에서 깨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
디나는 앉아서 생각에 잠겨 오랫동안 유심히 그를 쳐다보다가 그를 꼭 껴안았다. 누가 보더라도 상관없었다. 볼 테면 보라지. 사람들은 그녀가 그를 껴안는 것을 다시는 못 볼 것이다. 사람들은 신기루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몇 년 동안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것인가 잠시 생각하였다. 모든 것이 꿈처럼 사라질 것인가?
그녀의 말이 그에게는 속삭임이었다. "늘 건강하세요.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마침내 그는 그녀의 문을 열었다.
"보내고 싶지 않아, 디나. 그렇지만 더 지체하면 당신을...... 당신을 보내지 못하게 될 것 같군."
디나는 벤의 눈이 너무 밝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눈은 눈물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다가 곧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를 보아야만 했다. 그가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그녀는 다시 그를 껴안았다.
"벤, 사랑해요!" 그녀는 그에게 꼭 붙어 있다가 서서히 떨어져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이 여름의 몇 개월이 내 생애를 가치있게 만들었다고 말해도 될까요."
"그럼." 그는 미소 지으며 그녀의 콧방울에 키스했다.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내 차에서 빨리 내리라고 말해도 될까?" 그녀는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이내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지 못할 거예요."
"당신을 내리게 할 방법이 없으니 소리내어 웃기나 하자구." 그녀는 소리내어 웃다가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기분이 엉망진창이에요."
"그런 것 같군."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에 슬픈 빛을 띠웠다. "나도 그래. 솔직히 말해서 지옥을 헤매는 기분이야." 그는 씩 웃으면서 몸을 숙여 다시 그녀에게 키스한 후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가야지."
그녀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맡긴 채. 그녀는 차에서 내려 한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녀가 몸을 돌려 가방에서 열쇠를 찾는 동안 그가 사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마음 속에 묻어둘 뿐이었다. 그리고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제 그녀는 마르크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25
"안녕, 여보. 잘 잤어?" 마르크는 침대 속에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비행기를 놓치셨어요?" 지난 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녀가 파리에서 도망친 사실에 대해서는.
"그랬었어, 멍청하게도. 택시를 잡을 수가 있어야지, 작은 사고가 수천 개나 일어나서 길이 막히는 바람에 다음 번 비행기를 타는 데 6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구. 기분은 어때?"
"친절하시군요."
"그 말 말고는 없나?"
그녀는 어깨짓으로 대답했다. 그것이 지옥같이 느껴졌고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사람은 벤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꼴로는 그와 지낼 수가 없다. 마르크의 아기를 임신한 채로는.
"오늘 병원에 가보도록 하지." 마르크가 말했다. "도미니크 양에게 약속을 해놓으라고 할까, 아니면 당신이 직접 하겠어?"
"아무렇게나 하세요."
왜 이렇게 무기력할까? 그는 자기가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창백하고 수척해 보였고, 신경이 곤두서 있고 불쾌해 보였으며, 그의 말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 의사를 한번 만나보도록 하라구." 그는 되풀이하여 말했다.
"알았어요. 혼자 갈까요, 아니면 도미니크 양을 보내실 건가요?"
"그건 신경쓰지 말아. 오늘 가기는 갈 거지?"
"글쎄요. 그런데 당신은 오늘 어디로 가시죠. 아테네, 아니면 로마?" 그녀는 그를 지나쳐서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살며시 닫았다.
즐거운 8월이 될 것이라고 마르크는 생각했다. 디나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한 달 늦게 아이가 나온다면 그는 그저 시간이 더 걸렸을 뿐이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항상 그런 일은 있게 마련이고, 갓난아기들이 3주쯤 늦게 태어나는 것은 보통이라고. 그는 비행기 앞에서 줄곧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화장실로 가서 닫혀진 문에 대고 안을 향해 크게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사무실에 있겠어. 의사한테 가는 것을 잊지 말아, 오늘 말이야. 알았지?"
"네, 명심할게요." 그녀는 울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누르며 말했다. 이 상태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아기를 갖고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도나도 부담스러웠다. 벤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이 망할 아기가 있든 없든 간에 남편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생각이 있었다. 현관문이 꽝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화장실에서 나와 곧장 전화기 쪽으로 갔다. 간호사가 의사 선생님은 바쁘시다고 대답했지만 자기가 누구라고 밝히자 곧 의사가 전화를 받았다.
"디나예요." 그는 놀란 것 같았다. 그녀의 전화는 너무나 뜻밖이고 오랫만이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의 목소리를 듣자 그녀는 안심한 듯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는 자기를 도와줄 것이다. 그는 옛날에도 항상 그랬었다.
"문제가 생겼어요. 아주 커다란 문제가. 만나 뵈러 가도 될까요?"
그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일의 긴급성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거죠, 디나? 오늘 오겠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말한다면 나를 미워하실 건가요?"
"미워하지는 않겠지만 밀린 일을 급히 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그동안 기다릴 수 있겠어요?"
"안돼요. 미쳐버릴 것 같은 걸요."
"알겠어요. 그럼 한 시간 내로 이곳으로 오도록 해요."
한 시간 후에 그는 그녀가 그를 생각할 때면 항상 떠올렸던 그 커다란 가죽의 그이 몸을 깊숙이 틀어박고 앉아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임신을 했어요."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임신에 대해서 어떤 기분을 느끼십니까?"
"두려워요. 때가 안 좋아요....... 그리고 그에 관련된 모든 일들이 잘못 되었어요."
"마르크도 그런 기분을 갖고 있나요?" 그가 임신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무슨 상관이지? 하지만 그녀는 솔직하게 말해야만 했다.
"아뇨. 그는 기뻐하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천 가지 정도나 돼요. 내가 너무 늙었다는 것도 그 중 한 가지죠."
"기능적으로는 그렇지 않은데...... 하지만 당신은 작은 어린애를 기르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고 느끼나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하지만...... 또다시 출산 과정을 겪기에는 단지 나이가 너무 들었다는 말이죠. 만일 아기가 죽으면 어쩌죠, 만일 그와 같은 일이 또 생긴다면?"
"부인께서 걱정하시는 것이 그 점이라면 그럴 필요 없어요. 부인도 알고 있잖아요. 그 두 번의 사고는 전적으로 무관하고, 단지 비극적인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디나, 당신이 이 아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유들은 신경 쓰지 말아요. 혹시 나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는 건 아닌가요?"
"나는......예, 난......난, 마르크의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요."
그 마음씨 좋은 의사는 잠시 당혹감을 느껴 침묵을 지켰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요, 아니면 일순간의 변덕인가요?"
"변덕부리는 것이 아니에요. 여름 내내 그이를 떠나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알겠습니다. 남편도 알고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정말로 일이 복잡해지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기는 그의 아이입니까?"
10년 전이라면 그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일이 명백히 달랐고, 그는 그녀가 거북해 하지 않을 만큼이나 상냥하게 물어보았다.
"그이의 아기예요." 그녀는 망설이다가 계속하였다. "임신 2개월째이니까요. 달수가 적다면 그이의 아이가 아니겠지만요."
"임신 2개월이란 것을 어떻게 알았죠."
"프랑스에 있는 병원에서 말해주었어요."
"그들도 틀릴 수는 있지만 아마 그렇지 않겠죠. 어째서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거죠, 마르크의 아이이기 때문입니까?"
"일부는 그래요. 그리고 더 이상은 그에게 묶여있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에요. 아이가 있으면 쉽게 털어버리고 떠날 수는 없잖아요."
"쉽지는 않지만 그럴 수는 있죠. 하지만 어쩔 작정인지......."
"글쎄요, 마르크의 아기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남자에게 돌아갈 수는 없겠죠."
"그럴 수도 있죠."
"아녜요, 선생님. 그럴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의 아기를 갖고 있다고 해서 마르크에게 억지로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스스로 나을 수는 있는 거죠."
"어떻게요?"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길을 찾게 될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에요. 나는...... 난 뭔가 다른 것을 원해요."
그리고 나서야 그는 이해를 하였다.
"나에게 말하기 전에, 부인의 딸이 이런 경우에 어떤 처지가 될는지 생각해 보세요. 부인이 또 다른 아이를 갖는다면, 어찌됐든 간에 따님은 어떤 기분일까요." 그러나 디나는 우울하게 그녀의 무릎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건 더 이상 문젯거리가 안돼요. 딸애는 이주일 전에 프랑스에서 죽었거든요."
잠시동안 모든 것이 멈추어졌다. 그리고 나서 그가 몸을 앞쪽으로 숙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오, 이런! 디나, 미안해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그렇게 되었는데도 다른 아이를 원치 않는단 말입니까?"
"그럴 수가 없어요. 지금은 안 돼요. 그냥 그럴 수 없을 뿐이에요. 낙태수술을 받고 싶어요. 그것을 하려고 여기에 왔어요."
"그 수술을 받고 나서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잘 아시겠지만, 다시는 돌려받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그건 항상 비애와 죄책감과 후회를 갖게 만들죠. 매우 오랫동안 그런 감정을 갖게 될 겁니다."
"내 몸 속에서요?"
"부인의 가슴과...... 머릿속에서요. 수술을 받고난 후에 편안한 마음을 가지시려면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만일 프랑스 의료진들이 오진을 하였다면 어떻게 하죠, 그리고 이 아기가 다른 남자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낙태를 원하실 건가요?"
"가능성을 생각할 수는 없어요. 아이가 마르크의 것일 경우라면 지워버려야 해요. 게다가 그들이 오진을 했다고 생각할 이유도 전혀 없어요."
"사람들은 실수를 합니다. 나 자신도 때로는 실수를 하죠." 그는 자비로운 표정을 짓더니 다른 생각이 떠오르자 이맛살을 찌푸렸다. "단순히 필라에게 일어난 일을 생각하시더라도 지금 이 수술을 받으실 수 있으리라 느끼시나요?"
"해야만 해요. 그래 주시겠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하지만 먼저 진찰을 해 보고 나서 내가 동의를 해야만 합니다. 나 참, 때로는 임신을 하지 않은 경우도 있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임신으로 진단되었고 그도 동의를 하였다. 임신 초기 중에는 정확하게 진단을 내리기란 항상 힘든 일이었지만, 약 2개월가량으로 나왔다. 이제는 빨리 수술을 하는 일만 남았고 디나는 매우 결심이 굳은 듯이 보였다.
"내일요." 그가 물었다. "아침 7시에 오세요. 그러면 5시까지는 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남편에게 이야기할 건가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유산을 했다고 말하겠어요."
"그리고는요?"
"모르겠어요. 일을 풀어나가야 하겠죠."
"혹시 마르크에게 머물러서 또 다른 아이를 갖기로 결정한다면 어쩌죠, 그런데 이번 수술 때문에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다면? 그러면 어떻게 하겠어요, 디나? 스스로를 죄책감에 의해 파멸시키게 되고 말텐데?"
"아니에요. 그런 상상은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저 그렇게 살아야 하겠죠.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할 거예요."
"정말로 확신하십니까?"
"그래요." 그녀가 일어서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가 찾아가야 될 병원의 주소를 적어주었다.
"수술은 위험한가요?" 그녀는 그때까지 그 말을 물어볼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단지 지금 마르크의 아이를 낳게 된다면 죽어버릴 것 같은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죤스 의사는 고개를 저으면서 그녀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아뇨, 위험하지 않아요."
"이 시간에 어디를 가는 거지." 그녀가 침대를 미끄러져 나가자 마르크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잠에서 깨어난 것이 짜증스러운 듯이 보였다.
"작업실요.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요."
"침대에 누워있어야 해." 하지만 그의 눈은 이미 감겨져 있었다.
"오늘은 침대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거예요." 적어도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알았어."
하지만 그녀가 옷을 입기 전에 그는 다시 잠들어 있어서 그녀가 나가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그녀는 메모를 남겨두었다. 밖에 외출했다가 오후에 돌아오겠다고 적었다. 그가 귀찮아하겠지만 절대로 그 일을 알지 못할 것이고, 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어버리게 될 것이다. 자동차의 시동을 걸면서 그녀는 자신의 샌들과 진바지를 내려다보았다. 지난번 카멜에서 벤과 있을 때 입었던 옷이었다.
차가 시동이 걸리기를 기다리면서 그녀는 자기가 또다시 그의 생각에 잠겨 어슴푸레한 아침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하늘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녀는 벤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의사가 물어본 말이 기억에 떠올랐다. 아기가 벤의 아기라면?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겠는가? 2개월 전에 그녀는 마르크와 사랑을 나누었었다. 하지만 6월 말경에는 벤도 만났다. 벤의 아기일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이유로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던가, 2개월이 아니라 만 1개월 전에 임신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어쩌지!"
디나는 큰 소리로 한 마디를 내뱉고는 엑셀레이터를 밟고 후진을 해서 거리로 나섰다. 만일 그의 아이라면 어떡하지, 그래도 낙태수술을 원할 것인가? 그녀는 갑자기 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그건 미친 짓이었다. 그녀는 곧장 병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녀의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곳에 도착한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죤스 의사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늘 그렇듯이 침착하고 상냥하게 디나의 팔을 잡아주었다.
"마음의 준비는 되었나요." 그가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가 마음에 거리끼는 무언가가 있었다. "들어가서 얘기하죠."
"아니에요. 그냥 시술해 주세요."
"좋습니다." 그는 간호사에게 주의사항을 일러주었고, 디나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어져 환자복으로 갈아입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지하실로요. 하루종일 내려가 있을 겁니다. 낮 동안에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죠." 갑작스레 그녀는 공포심을 느꼈다. 만약 다치기라도 한다면, 만약에 죽는다면, 집으로 가는 길 위에서 하혈이라도 한다면? 만약에....... 간호사가 디나에게 계속해서 호흡요령을 설명해 주었고, 디나는 자기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아시겠죠?"
"예." 디나가 생각해 낼 수 있었던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절망적으로 벤이 보고 싶어졌다.
"겁이 나세요." 간호사는 상냥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는 표정이었다.
"약간요."
"두려워하실 것 없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세 번씩이나 했었는걸요." 맙소사! 놀랄만한 일이로군. 수술비 할인이라도 받았었나?
디나는 그 작은 방에 앉아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는 지하실로 안내되어져서 수술실로 들어가 살균된 수술대 위에 누워 등 뒤로 발이 묶여졌다. 방은 마치 그녀가 그 두 사내아기를 낳고, 마지막으로 필라를 낳을 때 있었던 분만실과 흡사했다. 그때는 분만실이었지 낙태실이 아니었다. 그녀는 땀에 흠뻑 젖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그녀를 반시간 가량이나 혼자 누워 있게 하였다.
디나는 거기 누워서 다리가 들어 올려진 채로 울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면서 금방 끝날 거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끝난다. 지워진다. 기계로 아기를 끄집어낼 것이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저 기계들 중에서 어떤 험악하게 생긴 것이 <그것>일까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모든 것들이 똑같이 끔찍스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가 떨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죤스 의사가 돌아오기까지는 몇 시간이나 지난 것 같았고, 그녀는 몸이 튕겨져 일어나려고 하는 것을 느꼈다.
"디나, 기분이 좀 편안해지고 아픔을 느끼지 않는 주사를 놔줄게요."
"저어,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똑바로 일어나 앉으려고 애를 쓰면서 허공에서 다리를 저었다.
"주사를 맞지 않겠단 말인가요? 하지만 맞고 나면 수술받기가 굉장히 편해질 텐데요. 나를 믿어요. 이런 수술은 무척 힘이 들어요." 그는 매우 사려 깊게 말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 않겠어요. 주사 말고요, 낙태수술 말이에요. 난 할 수 없어요. 혹시 벤의 아이라면 어떡해요?"
그 생각이 아까부터 그녀는 괴롭히고 있었다. 아니면 그것만이 아이를 가지겠다는 변명이었을까? 그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결심한 겁니까, 디나? 아니면 단지 두렵기 때문인가요."
"둘 다. 전부 다....... 난 모르겠어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만일 아이가 당신 자신만의 것이고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만일 관련된 남자가 아무도 없다면요. 만일 당신이 혼자서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아이를 가지시겠습니까?"
그녀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면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녀의 다리를 풀어주었다. "그렇다면 집에 가세요. 그리고 일을 풀어나가 보세요.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혼자서 그 아이를 가질 수 있어요. 아무도 당신에게서 아기를 앗아갈 수 없습니다. 아기는 전적으로 당신의 것이죠."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디나가 집에 도착했을 때 마르크는 샤워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 없이 작업실로 올라가서 문을 걸어 잠그었다. 그녀는 무슨 일을 하였던가? 그녀는 아기를 갖기로 결정을 내렸고, 의사가 해 준 말은 사실이다. 그녀는 혼자서 아기를 가질 수 있고 단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아니면 아이는 마르크의 것이 될 것인가? 필라가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그녀는 자기 절대로 도망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이는 마르크의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는 혼자서 아이를 가질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게 무슨 문젯거리인가? 그녀는 이미 벤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26
"안녕, 디나!" 마르크가 자기 의자에 앉으면서 그녀를 슬쩍 쳐다보았다. 신문은 보통 때와 마찬가지로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고, 커피는 뜨거웠고, 디나는 달걀을 먹고 있었다. "오늘 아침엔 배가 고픈가 보지." 그녀가 먹는 모습을 본 지가 몇 주는 된 것 같았다.
"많이 고프지는 않아요. 여기, 내 토스트 좀 드세요." 그녀가 레이스가 달린 푸른빛의 리모쥬 접시를 그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날 아침의 식탁보도 마찬가지로 섬세한 하늘색이었다. 그건 그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마르크는 그녀가 달걀을 뒤적이는 모습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아직도 아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잠시 후에 올려다보았다.
"아뇨."
"의사를 불러야 될 것 같은데."
"어쨌든 다음 주에 의사를 만나볼 예정이에요." 그녀가 의사를 마지막으로 본 지 3주가 지나갔다. 낙태수술을 할 수도 있었던 그날 아침에 도망쳐 나온 지 3주가 지나갔다. 그녀가 벤을 본 지 3주가 지나갔다. 그리고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다시는 소식을 못 듣게 되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언제, 어디, 어느 장소에서 그와 우연히 마주치게 될 것이고, 그들은 잠깐동안 오래된 친구처럼 말을 주고받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이 끝이다. 그들의 관계는 끝나버렸다. 그들 중의 어느 한편이 아무리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 생각을 하자 그녀는 몸 안의 기운이 전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단지 침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었다.
"오늘은 뭘 하고 지낼 거지?" 마르크는 건성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걱정의 빛을 보였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요. 아마도 잠시동안 작업실에서 일하겠죠."
하지만 그녀는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앉아서, 벤이 처음에 그렇게 항의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랑에서 되돌려 받은 산더미같이 쌓인 그림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로 하여금 그녀의 작품을 모두 팔게 하고 그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 자기가 임신한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샐리에게 자기 작품을 돌려달라고 간청했었다. 지금 그것들은 쓸쓸하게 얼굴을 돌리고 그녀의 작업실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그녀가 매일마다 몇 시간씩이나 쳐다보는 그녀와 필라의 초상화를 제외하고는.
"나와 함께 어디 가서 점심 식사라도 하지 않겠어." 그녀가 걸어나가다가 식당에 앉아 있는 그를 보려고 돌아서자 왕처럼 앉아 그가 말했다. 그는 지금 그녀의 왕이었고, 그녀는 노예였다. 이 모든 것이 그녀가 겁쟁이처럼 지워버리지 못한 뱃속의 아기 때문이었다.
디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나가지 않겠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지만 그것은 겨울철의 한줄기 햇살도 될 수 없었고, 눈 위에 희미하게 비추는 빛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와 함께 점심 식사하러 가기는 싫었다. 그와 함께 있는다거나 아니면 같이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벤이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그런 생각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머리를 세게 가로 젓고 그녀의 도피처인 작업실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서 무릎을 감싸 쥐었다.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화벨 소리를 들은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인 것처럼 느껴졌다.
"얘, 너니? 뭘 하고 있니?" 킴의 전화였다. 디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후에 미소를 끌어올려 억지로 웃어보려고 애썼다.
"아무것도. 작업실에 앉아서 은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야."
"지옥 같은 얘기군. 전시회를 열어 멋진 찬사를 받고난 후에는 그럴 수 없지. 벤은 어때, 네 작품 또 판 것 없대?"
"없어." 디나는 자기의 목소리가 그녀가 느낀 감정을 배반하지 않도록 애썼다. "그는 그는 정말이지 기회가 없었어."
"그렇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 사람이 런던에서 돌아오면 팔아줄 거야. 샐리 말로는 거기에 일주일 더 있을 예정이라던데."
"아, 나는 몰랐어. 마르크가 3주 전에 집에 와서 정신없이 바빴었어." 킴벌리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최근 필라가 죽은 후로 그들은 어디에도 가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디나의 말로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것이 그때였다고 했었다.
"점심 식사하러 작업실에서 나오라고 꼬셔볼까."
"안돼. 난...... 정말이지...... 난 그럴 수 없어."
갑자기 킴은 그 말을 듣고 꺼림칙해졌다. 그녀는 디나의 고통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겁이 났다. 그건 너무나도 생소하게 들렸다.
"디나?" 하지만 대답은 없었고 그녀가 울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집에 가 봐도 되겠니."
그녀는 안 된다고 대답하고 싶었고 그녀를 보기가 꺼려졌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디나, 내 말 들었어? 지금 그리로 갈께, 2분 후면 도착할 거야."
디나는 자기가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도 전에 킴이 작업실 계단을 밟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벽 쪽을 향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그림들을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킴은 노크를 한 번 하고서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는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뭔지 몰라서 경악스런 모습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스물 내지는 서른 점의 그림들이 벽에 줄지어 늘어져 있었을 것이다.
"이게 다 뭐니?"
신작들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가려져 있는 그림들을 들춰내면서 눈에 익은 제목들이 보이자 그녀는 놀란 눈을 하고 디나에게 돌아섰다.
"화랑에서 철수한 거니?" 그녀가 물었다. 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왜? 전시회도 훌륭하고 평가도 좋았잖아. 지난번에 내가 벤이랑 얘기할 때 네 작품 중의 절반 정도는 팔았었다고 말했었어. 왜 그런 거니?"
그리고 나서 그녀가 알겠다는 듯이 말을 했다. "남편 때문에 그랬어?"
디나는 한숨소리와 함께 주저앉았다. "그냥 철수해야만 했어."
킴은 걱정스럽게 눈살을 찌푸리며 마주앉았다. 디나의 얼굴은 창백하게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욱 안 좋은 것은 그녀의 눈 속에 감돌고 있는 비극적인 그 무엇이었다.
"디나, 난...... 난 네가 필라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어. 아니면 어떤지 실감할 수는 없다고 해도 추측은 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것으로 네 전 생애를 망쳐버릴 수는 없어. 네가 성공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는 분리되어져야 한다구."
"하지만 그건 그렇지가 않아. 왜냐하면...... 왜냐하면 벤 때문이야."
그녀의 얼굴을 가린 손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그 소리는 가냘프게 들렸다. 킴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팔을 굳게 쥐었다.
"그냥 실컷 울어."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디나는 그렇게 하였다. 그녀는 킴의 팔에 얼굴을 묻고 필라와 벤과 혹은 마르크까지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마르크를 그의 정부에게 빼앗긴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차지한 유일한 것은 그녀가 원하지 않았던 그 아기뿐이었다. 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자기 팔에서 눈물을 흘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녀가 마침내 눈물을 그치고 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 킴, 미안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르겠어. 난 그저......"
"이런 맙소사! 제발 사과하지 말아. 그걸 마음속에 꼭 붙잡아두고 있을 수는 없어. 정말 그럴 수는 없다구. 커피 한 잔 할래."
그녀는 머리를 내젖더니 갑자기 조금 밝아졌다. "차 한 잔 정도는."
킴은 수화기를 들어 주방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산책하러 나갈 수도 있을 거야. 그거 어떻겠어?"
"너는 어떻게 하고? 일을 포기한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오늘 하루 쉬기로 했어?" 디나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웃었다.
"제기랄! 네가 화랑에서 물러섰다면 난 그저 일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지. 그 정도는 말이 된다구."
"아냐, 네가 틀렸어. 내가 한 짓은 옳았다구."
"하지만 왜? 난 이해할 수가 없어."
디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무언가를 말해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그저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벤을 만나고 싶지 않아."
"벤하고는 끝장났단 말이야?"
그 두 여자가 서로의 눈 속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 방의 모든 시간이 오랫동안 멈추는 듯했다. 디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크에게 머물러 있을 생각이니?"
"그래야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마가레트가 문 밖에 내려놓은 접시를 들여왔다. 그녀는 킴에게 커피를 건네주고 찻잔을 들고 앉아서 한 모금 마신 후에 눈을 꼭 감고는 마침내 다시 말했다. "마르크와 나는 아이를 가질 예정이야."
"뭐라고, 농담하는 거니?"
디나는 다시 눈을 떴다. "나도 농담이었으면 좋겠어. 프랑스에 있을 때 알았어. 장례식이 끝난 후 며칠 시골에서 쉬는 동안 성당에 갔다가 쓰러졌지 뭐야. 마르크가 그 동네 병원으로 끌고 갔어. 내가 무슨 치명적인 병에라도 걸린 것으로 생각했던 거지. 우린 그때 둘 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었거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병원에서 진찰받은 결과 임신 2개월이라는 거야."
"그럼 지금 몇 개월째란 말이니?"
"정확히 3개월 되었지."
"그렇게 보이지가 않는데." 아직까지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킴은 시선을 내려서 진바지 밑으로 지퍼에 감추어진 밋밋한 그녀의 복부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 아기가 작은 것 같아. 게다가 요즘 너무나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체중도 많이 줄었고."
"맙소사! 벤이 알고 있니?"
디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해줄 수는 없었어.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그건 말이야....... 지워버리는 것이었어. 그리고 시도를 해 보았지. 모든 준비를 다 해놓고서는 수술대 위에 누웠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거야. 두 명의 아이가 죽고 필라까지도 그렇게 된 상태에서 말이야. 아무리 이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해도 그냥 그럴 수가 없었어."
"그리고 마르크는?"
"그 사람은 신바람이 났어. 마침내 아들을 갖게 될지도 모르니까. 아니면 필라 자리를 채워놓게 될 테니까."
"그럼 너는, 디나." 그녀의 목소리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내가 뭘 얻게 되냐구? 별로.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한 남자를 잃게 되고, 수년 동안 감옥과도 같았던 결혼생활에 다시 얽매이게 되고, 살지도 죽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아이를 갖게 되고....... 그리고 만일 살게 된다면 아이는 마르크의 것이 될 거고, 그 사람은 아이를 다시 한번 나에게서 멀어지게 해서 이천 퍼센트 프랑스 인으로 만들어놓고 말겠지. 하느님은 알고 계실 거야, 킴. 내가 그런 속에서 지내왔다는 것을. 하지만 내가 어떤 선택을,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니."
"넌 아이를 혼자서 키울 수도 있어, 네가 그 아이를 원한다면. 벤도 그것을 원할지 몰라, 비록 자기 아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마르크는 절대로 날 가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나를 가로막을 거야." 그건 애매한 협박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의 말에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킴은 자기 친구의 눈에 맺힌 고통을 지켜보았다.
"그 사람이 어떤 짓을 할 것 같은데."
"나도 몰라. 무슨 짓이든 하겠지. 난 절대로 피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내가 그걸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는 나를 멈추게 하려고 모든 짓을 다할 거야. 그리고 어쨌든 간에 그 사람은 내 자신감을 흔들어놓고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고 있어."
"말 좀 해봐, 디나." 킴은 오랫동안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요즘 그림은 그리고 있니."
디나는 머리를 저었다. "무슨 소용이 있겠니? 전시회도 못 갖는데." 그녀는 무기력하게 어깨를 추스렸다가 내렸다. "20년 동안 전시회를 갖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림은 그렸잖아. 왜 이제 와서 새삼 중단하는 거야?"
"모르겠어."
"마르크가 그만두라고 했기 때문이야? 그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고 너와 네 예술 작업을 하찮게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니?" 킴의 눈은 이제 불길을 뿜어내고 있었다.
"모르겠어, 아마도....... 그 사람이 그냥 모든 것들을 아주 하잘 데 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야."
"그럼, 벤은?"
디나의 목소리는 갑자가 아주 부드러워졌고 그녀의 눈에는 또다시 킴에게 너무나도 생소하게 보이는 그런 빛이 어렸다. "벤은 전혀 다르지."
"그 사람이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니?"
"나는 모르겠어." 디나는 현실로 돌아와 오랫동안 굳은 표정으로 킴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에게 물어볼 수가 없어. 내가 그 사람과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에 마르크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니?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생각해 보라구." 디나는 잠시동안 자신이 원망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제발 부탁인데 너무 그렇게 자신을 자책하지 말아. 넌 임신하고 있는 줄 몰랐잖아. 안 그러니?"
"몰랐어. 물론이지."
"알겠어? 이런 제길. 디나, 벤의 아기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디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1개월의 차이가 있단 말이야."
"그 사람들이 오진을 할 수도 있지 않니? 당사자인 네가 알 수 있잖아."
"그래. 내가 정확히 알 수 있어야 할 텐데 가려내기가 좀 힘들어. 나는 생리가 불규칙해. 그래서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다구. 내 짐작보다는 병원 사람들의 결론에 의존해야 돼. 그리고 그들 말로는 내가 6월 중순에서 말경에 임신했다는 거야. 그렇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벤의 아기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아."
킴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디나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하기 전에 그녀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모두 그렇게 중요한 질문들이 아니었다. "디나, 너는 아기를 원하니? 내 말은 말이야, 만일 이런 일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만일 그들 둘 다 이 일에 무관하고 단지 너 혼자만의 일이라면 넌 이 아기를 원하겠니? 대답하기 전에 잠시 생각해 봐."
하지만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죤스 의사가 똑같은 질문을 하였었다. 그녀는 작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킴을 올려다보았다. "대답은 예스야. 그래, 나는 원해. 내 아이이기를 원해. 내 아이 말이야." 그녀는 눈물이 고인 눈을 돌렸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아이는 벤의 것이라고 항상 말할 수 있어?"
킴은 한숨을 쉬고 컵을 내려놓았다. "그러면 말이야, 이런 제기랄. 디나! 아이를 낳아, 그리고 사랑을 퍼부어 주라구. 잘 기르라구....... 하지만 너 혼자서 말이야. 남편을 떠나. 적어도 네가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럴 수는 없어. 난 두려워."
"뭐가."
그녀는 수치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걸 나도 모르겠어."
27
"나는 모르겠소, 킴. 기획도 마음에 들지 않고 전체적으로 세련되어 보이지 않아요."
벤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멀리 떨어진 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오전 내내 일을 손에 잡을 수가 없었다. 킴은 그를 바라보는 동안에 무엇때문에 그가 정신집중을 시킬 수 없는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지난밤에 런던에서 날아온 다음에 잠을 좀 잤더라면 조금은 좋아보였을 텐데요." 킴은 애써 가볍게 말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사실 디나보다 더 절망적인 것처럼 보였다. 견뎌내기가 무척 어려운 듯해 보였다.
"그냥 얼버무리려고 들지 말아요. 내가 원하는 디자인을 잘 알고 있잖소."
"알았어요. 다시 노력해 보죠. 그걸 다시 검토해 보려면 이삼주일 걸릴 텐데, 그 정도로 오래 여기 있을 건가요? 아니면 또 도망쳐버릴 건가요?"
벤은 최근에 잦은 출장을 다니고 있었다.
"다음 주 화요일에 파리로 떠납니다. 하지만 이삼 주 내로 돌아올 거요. 집을 좀 처리해야 하거든요."
"다시 지으려구요?"
"이사를 가려구요."
"왜요?" 집을 좋아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몇 달 동안 킴이 계좌를 다루는 동안 그들은 친구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와 디나 사이의 관계는 그들 사이에 덤으로 유대 관계를 맺어주고 있었다.
"더 이상은 그 집에 있을 수가 없소." 갑자기 그의 눈이 킴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를 만난 적이 있소?" 킴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지내던가요?"
"잘 있어요." 당신처럼 애간장을 끓이며 가슴 아파하면서요."
"잘 됐군요. 나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킴, 난...... 나는 이 심정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난 미쳐버릴 것만 같소. 견뎌내기가 너무나 힘들다구요. 이런 감정은 처음이오. 내 아내가 나를 떠났을 적에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오. 정말 도저히 말이 안 되요. 우리 사이는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있었소. 디나에게 약속을 했었죠...... 단지 여름행이라고, 그녀에게 부담을 주지는 않겠다고. 하지만, 킴! 그녀는 자기 자신을 그 남자에게 매장시키고 있어요. 그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는지조차도 나는 알 수가 없소."
"내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도 마르크가 디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적은 결코 없어요."
"하지만 우리들의 착각일 거요. 그녀는 그래도 그 사람에게 머물기로 결심한 걸요. 당신과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입니다. 디나는 행복해 보이던가요? 그림은 그리고 있구요?"
킴은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뇨, 행복해 보이지도, 그림을 그리고 있지도 않았어요."
"그렇다면 왜 남편 곁에 있는 걸까요, 필라때문에?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녀가 나에게 머물러달라고 했다면, 나는 기꺼이 그녀를 받아들였을 텐데 말이오. 그녀는 잠시동안 남편과 지내다가 돌아올 수도 있었을 거요. 나는 절대로 부담을 주지 않았을 거요. 그 남자는 도대체 어떤 수단을 써서 디나를 붙잡고 있는 걸까요."
"사람들 사이의 관계란 그렇게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는 법이에요. 타인들로서는 알기가 힘들죠. 나는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50년 동안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어요."
"재미있는 이야기로군요." 그렇게 말하는 벤의 얼굴은 매우 배타적으로 보였다.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당신은 어때요, 벤.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고통으로 가라앉아 오히려 부드럽게 들렸다.
"바쁘게 일 속에 파묻혀 지내고 있죠.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요. 디나는 나한테 어떤 선택권도 남겨두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에게 그 일을 잊어버리게 될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인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디나를 납치하는 것을 도와줘요." 그는 다시 눈길을 돌렸다. "알다시피 나는 와이드의 그림까지도 더 이상 볼 수가 없소. 그 그림의 여인은 너무나도 디나를 닮았거든요." 벤은 자기 자신의 집착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긴 한숨을 지으며 일어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킴. 나는 정말 어떻게 할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나도 마찬가지예요. 도와줄 방도가 없어요. 우리 점심이나 함께 하러 나가기로 하죠."
킴은 서류 가방에 화랑 광고포스터를 집어넣고 다시 마루에 내려놓았다. 벤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킴에게는 차라리 고문과도 같았다.
"내 심정 알겠소? 나는 우연히 디나와 마주치기를 바라고 있어요. 내가 가는 모든 식당, 상점, 우체국에서조차도 두리번거리곤 하죠. 혹시나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지나 않을까 하고요."
"디나는 요즘 외출을 잘 하지 않아요."
"건강은 괜찮아요? 혹시 병이 난 건 아니겠죠, 그렇죠?" 킴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계속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계속해서 돌아다니며 여행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뿐이오."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잖아요." 킴이 일어서서 그의 뒤를 따라 문 앞으로 갔고, 벤은 자신의 개인 감옥과 같은 벽 뒤에서 그녀를 슬프게 쳐다보았다.
"노력은 해봐야겠죠."
28
"의사가 오늘 뭐라고 그랬어?" 마르크가 집에 왔을 때 디나는 벌써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정상이래?"
"4개월 치고 놀랄 정도로 아기가 작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건 단지 내가 신경쇠약이고 체중이 줄은 때문인 것 같대요. 이주일 후에 다시 오라더군요. 그러면 확실하게 아기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래요. 아기가 너무 작기는 하지만 오늘쯤은 아기 소리가 들려야 한다더군요. 아마 2주 후에는 들리겠죠." 하지만 마르크는 어떤 소식에도 걱정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당신은 어땠어요?"
"엄청나게 피곤해. 하지만 새로운 소송 건수가 들어왔어."
"어딘데요?"
"암스테르담이야. 하지만 짐 셜리반과 함께 가기로 했어."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에게 밖에 나가 있지는 않겠다고 말했었지. 어때, 내가 그 말을 지키고 있지."
"그렇군요." 이번에는 그녀도 미소를 지었다.
그는 두 달 동안 집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었다. 주말여행으로 파리에 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구제를 받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의 말로는 그 여자와의 관계를 청산하였다고 했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그 소송을 맡지 않을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요. 언제 법정에서 그 소송을 다루게 되는데요."
"글쎄...... 아기가 태어난 다음이 되겠지." 아기. 그건 아직까지도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아니었다. 오직 마르크에게만 현실인 것이다.
"뭐 먹을 것 좀 가져다줄까? 간식 좀 먹으려고 아래층에 내려갈 건데." 그가 방문 앞에서 뒤를 돌아다보며, 그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가 지금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들의 아기였고, 그들의 아들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건강을 염려했다. 때때로 그것은 그녀를 감동시켜 주었지만 거의 언제나 그녀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런 행동이 자기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친절한 마음은 아기 때문이었다. 그의 상속자인 아기.......
"뭘 드실 건데요. 피클이나 아이스크림?"
"당신은 어떤 게 좋아, 디나? 캐비아랑 샴페인? 그것도 준비해 줄 수 있어."
"크래커 몇 개면 돼요."
"입맛이 별로 없는 모양이군. 아기는 먹성이 좋은 놈이면 좋겠는데."
"그럴 거예요. 분명해요."
마르크는 몇 분 후에 그녀의 크래커와 자기가 먹을 샌드위치 한쪽을 들고 돌아왔다.
"딸기도 없고, 피자도 없고, 타코스도 없어요."
몇 달 만에 그는 그녀의 유머감각을 보게 되었다. 그날 그녀는 즐거운 하루를 보냈었다.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그녀는 킴과 점심을 먹으러갔었다. 킴은 그녀가 이렇게 낯설고 외로운 나날 속에서 정신건강을 지키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그리고 디나는 그녀에게 자기가 얼마나 벤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솔직히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 아픔의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누그러지는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마르크가 자기 샌드위치 한 입을 권하고 있을 때 그녀 옆에 있던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받을까요? 당신 전화 같은데."
"이 시간에?" 그가 자기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유럽에서는 지금 아침 8시였다. 그 전화는 정말이지 그에게 온 것 같았다. 그가 다시 침대로 올라가서 그녀 옆에 앉았다. 다시 한번 그녀에게 미소를 짓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해외에서 걸려온 전화에서 들리는 특이한 소음이 들리는 동안 그는 자기 고객들 중 누가 전화를 걸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마르크?" 절망에 빠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갑자기 자기 자신이 창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샹딸. 디나는 그의 등이 약간 뻣뻣해지는 것을 보았고,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디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응, 무슨 일이오." 왜 집으로 전화한 거지? 이미 이삼주 후면 유럽으로 돌아갈 거라고 그녀에게 약속했었다. 추수감사절 바로 다음에는 디나에게서 떨어질 수 있을 거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면 자기가 한 약속 기한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달 반 동안 미국에서 그녀 곁에 있기로 한 약속을. "뭐가 잘못됐나요?"
"그래요." 그녀가 길게 억눌려진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는 공포가 심장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난-난 다시 입원했어요."
"그랬습니까......?" 디나는 그가 눈을 감으며 이마를 찌푸리는 것을 보았다. "왜 이런 시간에, 똑같은 일입니까?"
"아뇨. 인슐린을 섞어버렸어요."
"결코 그걸 섞는 경우가 없잖아요." 마르크는 그녀가 일부러 그러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면서 병원에서의 그날 밤과 자기가 당황했던 일을 기억에 떠올렸다. 이렇게 세월이 지났으면 확실히 알고 있어야만 하잖아요......." 제기랄! 옆에서 디나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거기에 앉아서 그녀와 말한다는 것이 너무나 거북하였다. "하지만 괜찮겠지요?"
"모르겠어요." 그리고 나서 침묵이 흘렀다. "아, 마르크. 당신이 필요해요. 제발 집으로 돌아와 주세요!" 이런 제기랄, 어떻게 그 문제를 지금 여기서 얘기할 수 있겠는가?
"당신에게 그 상황을 통보할 정식 서류를 갖고 있지 않아요. 내일 내 사무실에서 얘기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는 전화를 들고 방을 가로질러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 디나는 다시 책을 읽고 있었다. 전화 내용은 지루하게 들렸고 마르크는 짜증을 내는 듯 보였다. 내일 그의 사무실에서 얘기하자고 한 그의 제안에 샹딸은 비명소리를 질러댔다.
"안돼요, 나를 계속 따돌리지는 못해요!"
"따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언제 할 수 있을지 스케줄을 잡을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당신한테로 가겠어요. 떠나기 전에 만일 당신이 올 수 없으면 내가 그리로 가도 좋다고 약속 했잖아요. 왜 그렇게 하면 안 되죠?"
"내일 서류철을 보면서 그 문제를 토론해야만 해요. 10분 있다가 내가 전화해도 되겠습니까." 그는 이제 강철같이 차갑게 말했다. "어디로 할까요?" 그녀가 개인병원의 이름을 대주었고, 그녀가 이번에는 적어도 미국인 병원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감사를 느꼈다. 그곳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해야만 했다면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무조건 다음 번 비행기를 타버릴 거예요."
그녀는 버릇없는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그리고 위험한 아이처럼. 그는 더 이상 디나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그리고 난 다음에는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국적 때문에 아이는 미국인은 물론이고 법적으로는 프랑스 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에 있을 때는 프랑스 법률의 지배를 받는다. 아이는 그의 것이 될 것이다. 만일 그가 그의 아이를 프랑스로 데려가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을 막기 위해서 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러한 생각은 다음 7개월 동안 그를 들뜨게 만들어줄 것이다. 아기가 생후 1개월이 되면 할머니에게 인사드리러 프랑스로 데려갈 것이다. 디나도 물론 가야겠지만, 그녀 자신이 선택할 것이다. 그녀는 갈 수도 있고 머무를 수도 있다. 하지만 갓난아기는 다시는 그 나라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만일 필요하다면 아기는 마르크의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될 것이고, 마르크는 더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도록 신경을 쓸 것이다. 그 아기는 그의 것이었다....... 필라가 전적으로 그렇게 되었을 뻔했던 것처럼....... 디나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날 아기에 대한 생각은 그의 마음을 필라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 아이는 완벽하게 그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러기위해 그는 디나가 필요하였다. 그녀가 아이를 분만하기 전까지는 그녀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녀와 계속 결혼한 상태로 있는 것이 아주 완벽하게 그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만일 그녀가 아기와 함께 프랑스에 머물기를 원한다면 그는 그 모든 일을 잘 풀어갈 수 있었다-모든 일을. 그리고 지금은 샹딸이 그 보트를 흔들어버릴 시기가 아니었다.
"마르크 에두아르, 내 말 들었어요? 당신이 건너오지 않는다면 난 무조건 다음 번 비행기를 타버릴 거라고 말했어요."
"어디로 말입니까?" 그의 말투는 얼음처럼 냉혹했다.
"물론 샌프란시스코죠. 당신은 어디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결정을 내리도록 해줘요. 그리고 내일 알려주겠소, 내일. 알겠소?"
"좋아요, 그리고 마르크."
"네?" 그는 약간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요."
"나도 그것이 절대적으로 상호동의라고 확신합니다." 잠시동안 그는 거의 미소를 지을 듯하였다. "몇 시간 있다가 다시 얘기합시다. 잘 자요."
마르크는 한숨 소리와 함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디나가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불만스러운 고객인가요."
"내가 해낼 수 없는 일이야."
"당신이 할 수 없는 일도 있나요?"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나도 그렇지 않기를 바래, 여보. 진심으로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구."
그는 반시간 후에 침대에 누웠다. 디나는 그의 곁에서 잠들지 않고 누워 있었다.
"여보."
"응?" 방 안은 어두웠다.
"뭐가 잘못됐어요?"
"아니, 물론 아냐. 잘못될 것이 뭐가 있겠어."
"몰라요. 그 전화...... 좀 더 돌아다녀야만 하는 건 아니예요?" 하지만 그녀는 그 질문의 대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잘 처리할 수 있어. 당신을 혼자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
"나는 괜찮을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디로든 꼭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떠나지 않겠어."
"그 말 고마워요."
그건 몇 달 만에 그녀가 그에게 던진 상냥함이었다. 그녀가 그의 손등을 어루만지는 동안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쥐고 키스를 하며 그녀를 <사랑하는 디나!>라고 불러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미 샹딸에 대한 생각으로 그의 마음은 꽉 들어차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 디나. 모든 일이 잘 될 거야." 그는 그녀의 손을 툭툭 두드리고는 침대 가장자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게 무슨 미친 짓이야, 한밤중에 집에다가 전화를 하다니?" 마르크는 대륙과 대양 너머 샹딸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만일 그녀가 전화를 받았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
"그래서요. 그래서 어쨌단 말예요! 웃기시네, 정말. 그녀도 알고 있잖아요!" 아니다. 그녀는 알았었다. 과거시제이지 현재시제 가 아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지만 당신은 그런 짓을 할 권리가 없어. 내가 그러지 말라고 말했잖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할 권리가 있어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그의 귀에 대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쩔 수가 없어요, 마르크. 계속 지탱해 나갈 수가 없어요. 두 달이나 지났잖아요. 제발, 마르크!"
"정확하게 두 달하고 이틀째야." 하지만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만약에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이번 겨울에는 두 여자 사이를 뛰어 다니면서 아주 힘들게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제발......." 그녀는 그에게 애걸하는 자신이 싫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너무나도 그가 필요했다.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또다시 그의 부인에게 그를 뺏기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일들이 항상 그녀를 상대로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다. 필라의 죽음까지도. 그와 디나를 좀 더 가깝게 해 준 일들, 그들이 서로를 필요로 한 순간들, 이제 그녀에겐 그가 더욱더 필요했다. 다시는 빼앗기지 않을 작정이었다. "마르크!" 그녀의 목소리 밑에는 협박이 깔려 있었다.
"내 사랑, 샹딸! 제발 조금만 더 기다려줘."
"안돼요. 그럴 수가 없어요. 만약 당신이 당장 어떻게 해주지 않으면 끝장이에요. 나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아나갈 수가 없단 말예요. 미쳐버리고 말 거라구요."
하느님 맙소사, 그녀를 어떻게 달래야 한담! "다음 주에 건너갈게."
"안돼요, 당신은 그러지 않을 거예요. 구실을 찾고 말 거예요." 갑자기 그녀의 말투가 굳어졌다. "내 친구가 병원에 데려다주었어요, 마르크. 남자친구가요. 이번 여름에 당신에게 말한 남자예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내가 당신에게 가지 못하도록 한다면, 나는-"
"나를 협박하지 말아, 샹딸!" 그녀의 말 속에는 그의 심장을 뒤집어놓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 남자와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러지 못할 게 뭐가 있어요, 당신도 기혼인데 나라고 그러지 못하라는 법이 있나요?"
맙소사! 진심이라면 어떡하지, 만약에 자살 시도처럼 정말로 일을 벌인다면? "당신이 이쪽으로 온다면" 마르크가 말했다. "마음대로 도시를 돌아다닐 수 없단 말야. 숨어서 다녀야 되고, 그러다보면 금방 싫증이 나고 말 걸."
"그 결정은 내가 내리도록 해주겠어요?" 샹딸은 그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을 끝낸 그녀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문제는 일으키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그러자 그도 겨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항상 잘 해왔지. 잘 하는 정도가 아니지, 비범하다구. 알았어. 당신 마음대로 해. 이 협잡꾼 아가씨야. 오늘 비행기 표를 예약해 놓지."
그녀는 승리와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언제 갈까요."
"언제 병원에서 퇴원할 수 있는데?"
"오늘밤에요."
"그러면 내일 와." 그들은 이제 둘다 활짝 웃고 있었다. 불만이 사라져버리자 갑자기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물밀듯 일어났다.
"저어, 샹딸!"
"네, 내 사랑?" 그녀는 힘과 순진함 그 자체였다. 마치 핑크빛 비단에 감싸인 핵미사일처럼.
"당신을 사랑해!"
29
샹딸은 전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여인이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샹딸의 모습을 지켜보는 마르크의 얼굴에는 함빡 웃음꽃이 번졌다.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녀는 엷은 샴페인 빛의 슈에드를 걸쳤고, 모자는 넓은 스라소니 모피 칼라와 썩 잘 어울렸다. 그녀의 적갈색 머리카락이 모자 밑에서 출렁이며 그에게 고갯짓 했으며, 그에게로 달려오는 그녀의 눈동자는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그에게 키스하려다가 뭔가를 생각해낸 듯 멈칫하더니 키스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휘파람을 불며, 웃으면서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키스하고 서로의 옷을 급히 벗겨나갈 것이다. 그들이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녀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특별한 여자인 것을 그는 거의 잊고 있었다. 전화로만 통화하며 지낼 때는 격식 없는 무분별함이 그녀의 큰 매력임을 거의 잊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빌린 리무진에 올라 탈 때에야 겨우 그녀로부터 손을 떼었다. 결국 그 안에서 다시 그의 손은 그녀의 몸과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를 꼭 안으면서 그녀의 입을 자신의 입 안으로 빨아들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은 나를 황홀하게 하는군." 마르크는 숨을 헐떡이며 샹딸을 안고 있었다. 샹딸이 미소 지었다. 이제 다시 그녀가 우세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그녀의 위력이 그를 미소로 휘어 감고 있었다.
"바보 같은 사람! 일 년 동안이나 나를 멀리 하다니요."
"아니야 나는....... 도저히 일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
그녀는 눈을 흘기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이렇게 함께 있잖아.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자구." 한순간 그는 그녀가 얼마 동안 머물 예정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그는 결코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녀를 안고서 남은 생애 동안 사랑하고 싶었다.
차가 헌팅톤 호텔 밖에 멈춰 섰다. 마르크가 그녀를 도와 차에서 내리도록 해줬다. 그가 이미 호텔을 10일 동안 머물 수 있도록 예약해 두었다. 그들은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는 사무실에 연락하여 하루종일 밖에 있을 것이라고 말해두었다.
"마르크?" 디나가 어둠 속에서 졸면서 미소 지었다. 새벽 2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그녀는 두 시간 동안 잠을 잔 것이다.
"아니, 군주야. 누군줄 알았지?"
"당신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그는 전화도 걸어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디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다른 고장에서 고객이 왔거든. 우리는 하루종일 비밀회의를 했지."
"매우 따분했겠군요." 그녀는 어둠 속에서 미소 지으며 침대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분은 어때." 그가 옷을 벗으면서 아내에게 등을 보였다. 이제 그녀가 있는 집으로 온 것이 이상했다. 그는 그날 밤 거의 밖에 있었는데 그것을 위해 무대를 준비해야 했다. 그는 주말을 낀 며칠 동안을 샹딸의 곁에 있어주기로 약속해 놓았던 것이다.
"졸려요, 고마워요."
"좋아. 나도 졸립군." 그는 침대로 미끄러져 들어가 그녀의 뺨을 만지며 머리 위의 어딘가에 키스를 했다. "잘 자요." 이것은 샹딸을 떠날 때 한 말이다. 하지만 샹딸에게는 "내 사랑"이라고 덧붙였었다.
"나는 상관하지 마세요." 샹딸이 말했다. "나는 떠나지 않겠어요. 만일 당신이 지불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호텔 비용을 치르든지 아파트를 찾겠어요. 내 비자를 보면 6개월간 머물 수 있던데요?"
"그건 말도 안 돼!" 마르크가 방 건너 쪽에서 그녀를 노려봤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이나 다투고 있었다. 그리고 샹딸의 가냘픈 턱이 성급하게 화를 내며 삐죽댔다. "당신에게 말했잖아. 2주 후에 파리로 돌아간다구."
"얼마 동안요? 5일, 1주, 그 다음은요? 다시 두 달간 당신을 못 본다구요. 안돼요, 안 돼, 안된단 말예요! 계속 함께 있든가 아예 끝장을 내든가 해야 돼요! 당신이 택하세요. 내가 여기에 머물까요, 아니면 여기서 꺼져 버릴까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란 말예욧!"
우아한 실내장식과 어울리지 않는 앙칼진 목소리였다. "내 쪽에서는 이런 게임을 더 이상 못하겠어요. 더 이상 안돼요! 내가 오기 전에 말했죠. 당신이 왜 그녀와 결혼한 상태로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이젠 변명거리였던 필라도 없어요. 하지만 난 상관없어요. 영원히 당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절대로 안돼요. 아니, 기다리겠어요. 아니면......."
샹딸은 섬짓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 영원히 이 세상에서 떠나버릴 거예요."
"당신의 비자 기간인 6개월 후는 어때? 그때까지는 당신을 이곳에 머무르게 할 수 있을 거야." 그는 마음을 졸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6개월이라.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샹딸이 집으로 갈 것이고 몇 주 후에 그가 뒤따라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디나와 아기는 프랑소아 1번가에 있는 어머님께 맡기고. 그렇게 되면 그는 거기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미국으로 왕래할 것이지만 가정의 터전은 파리가 될 것이다.
"저 말이야, 샹딸!" 그가 말을 꺼냈다. "일은 잘 풀려나갈 거야. 내년에는 생활 근거지를 파리로 옮길 생각이라구, 어때? 여기에 사무실을 계속 두고, 여행은 이곳에서 파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하는 거야. 파리에서 살겠단 말이야."
"당신의 아내와?" 그녀가 의심스럽게 노려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건 아니야, 샹딸. 절대로 그렇지 않아. 내년에는 많은 변화를 계획하고 있어." 그가 희미하게 미소를 띠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서는 뭔가가 빛났다. "파리로 가겠다구요? 왜죠." 그녀는 <나를 위해서?>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전혀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돌아가려는 거야. 하지만 최소한 그 이유 중에 당신이 끼지는 않아."
"정말이에요." 그녀는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그래."
"그러면 그 동안에는요?"
"당신을 여기에 머무르게 하는 거야." 그는 반쯤 웃어보였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는 방을 가로질러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정말이에요?"
"그래, 요 깍쟁이 아가씨야!"
30
마르크는 그의 재규어를 구석에 주차시켜 놓고 옆 좌석에서 평범하게 포장된 큰 상자를 끌어냈다. 꽃은 벌써 그녀에게 보냈다. 그 상자는 들기에 거북하게 포장되어 있어서 신중하게 들어야만 했다. 그는 놉힐에 있는 대저택들 사이에 불쑥 나와 있는 좁은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초인종을 눌렀다. 그 집은 여러 개의 얕은 계단 위에 있는 조용한 플래트식 공동주택이었다. 바닥은 흰색과 검은색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고 설비재는 전부 윤이 나는 황동이었다.
그녀가 문 쪽으로 달려 나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가구가 비치되어 있는 이 집을 11월부터 6월까지 전세 냈다. 집을 찾기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정확히 이틀 동안 이 집에서 지냈으나 그와 같이 저녁을 함께 하기는 오늘이 처음이 될 것이다.
그는 자기 쪽으로 향해 오는 급한 발자국 소리를 듣자 미소를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런 결정은 잘 한 것이었다. 비록 그녀가 강요하긴 했지만. 하지만 겨우 내내 그녀가 그곳에 있으면 좋을 텐데. 디나는 요즘 그와 함께 있지 않았다. 거의 스튜디오에 숨어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앉아 있는 것이다.
"빨리 열어줘!"
그가 초인종을 다시 눌렀다. 갑자기 문이 확 열리면서 그곳에 그녀가 나타났다. 하얀 모슬린으로 된 원피스와 은빛 샌들을 신은 모습은 너무나도 눈부셨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녀는 무릎을 낮춰 인사한 후 장난스럽게 생긋 웃어보였다. 아파트 안의 불빛은 희미했고 뒷방에 있는 작고 둥그런 식탁 위에는 꽃과 양초가 놓여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답군!"
마르크는 한쪽 팔로 그녀를 휘감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은제품들과 불 켜진 양초...... 모든 것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집은 작지만 아름다운 집이었다. 그 집의 소유주는 실내 장식가인데, 그 겨울을 프랑스에 있는 연인과 함께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완벽한 장식이었다. 그가 그녀를 가까이 끌어안았다.
"당신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샹딸! 게다가 당신에게선 천상의 향기가 나지." 그녀가 웃었다. 그 전날에 그가 커다란 죠이 향수를 선물했었다. 그녀가 가까이에 있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그는 점심때 사무실에서 달려올 수 있고 집으로 가는 길에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잠시 들러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아침에 키스할 수 있으며, 때때로 오후에도 사랑을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다.
"저 상자는 뭐예요?" 그녀는 호기심이 잔뜩 어린 즐거운 표정으로 커다랗게 포장된 상자를 보고 있었다. 그가 한 손을 천천히 그녀의 다리 위로 미끄러뜨렸다. "그만해요! 저 상자에 뭐가 있죠?" 그녀가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벗겨진 다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무슨 상자? 상자에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그가 그녀의 무릎 위에 입술을 갖다 대고 천천히 허벅지 안쪽으로 향했다.
"그 하찮은 상자보다 당신이 훨씬 흥미롭다는 것을 발견했는걸, 내 사랑!" 그녀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옷들은 잠시 후 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빌어먹을!" 갑자기 그녀가 그의 팔에서 뛰쳐 일어났다. 그들은 침대에서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그곳에서 거의 반시간 동안이나 누워있었던 것이다. 마르크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빌어먹을? 무슨 말이야?"
그가 자신의 긴 다리로 침대를 가로질러 뻗으며 불쾌한 표정을 지으려 했다. 그는 매우 길고 매우 핼쓱한 고양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방을 가로질러 절반쯤 가고 있었다. "칠면조, 그걸 잊고 있었지 뭐예요!" 그녀가 전속력으로 부엌으로 달려가자 그는 침대에 기대면서 씩 웃었다. 잠시 후 그녀가 안도하며 돌아왔다.
"괜찮아?"
"네, 네. 거의 6시간을 조리하고 있는데 아직도 괜찮아 보여요."
"그건 항상 그렇다구. 그저 스튜 같은 맛이야. 그런데 왜지? 미국에 체류한 지 3주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어느새 칠면조 요리를 시작한 거야?" 그가 일어나면서 그녀에게 웃었다. 그녀가 침대에서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왜냐하면 내일이 감사절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매우 감사함을 느끼고 있거든요."
"그래, 뭣 때문에?" 그가 그녀의 적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다시 누웠다. 그의 손이 이제는 그녀의 어깨와 섬세한 얼굴 윤곽에 닿았다. "무엇이 그토록 고맙지, 예쁜 아가씨?"
"당신이 여기서 사는 것이. 내가 미국에 온 것이.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에요, 내 사랑."
"그래?" 그러면 가서 상자를 열어봐." 그가 웃음을 숨기려고 애쓰며 말했다.
"오, 당신이. 오, 당신!" 그녀가 다른 방으로 달려 들어가 갈색의 종이로 포장된 상자를 들고 왔다. "이게 뭐죠?" 그녀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소녀처럼 보였다. 그는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뭐죠?"
"열어보라구!"
샹딸이 갈색 포장지를 찢을 때 그녀만큼이나 마르크도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책략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가 상자를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 그것을 열기를 주저하면서 아직도 그 놀람을 즐기고 있었다.
"집 안에서 필요한 거예요?"
그를 보는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그녀의 깊게 계곡이 진 가슴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큰 상자를 안고 침대 위에 벗은 채로 꿇어 앉아 있었다.
"어서 열어 봐."
그녀는 뚜껑을 열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포장지 속으로 손을 더듬거리며 넣었다. 그녀는 손을 불에 데인 것처럼 화들짝 놀라 뒤로 빼며 물러났다.
"아, 어머나! 마르크!"
"네, 아가씨?"
"오......."
"튼l 상자 안에 손을 넣어 그것을 천천히, 섬세하고 주의 깊게 펼쳐드는 그녀의 눈동자는 더욱더 휘둥그레졌다. 그것을 들어 올리는 그녀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다음, 손을 그 가죽옷의 위아래로 가볍게 쓸어보았다. 그것은 매우 아름답고 달콤한 초콜릿색의 러시아 제 검은 담비 코트였다.
"어머나, 세상에!"
"입어 봐."
마르크가 옷을 잡아 그녀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올려놓았다. 그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그 안으로 들어가 턱까지 단추를 잠궜다. 그것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와 앙증맞은 히프선으로 매끄럽게 흘러내려 매우 멋지게 보였다.
"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데, 샹딸!" 그녀가 발을 세우고 한 바퀴 돌자 코트 사이로 벗은 다리가 미묘하게 드러났다. 그는 놀라움과 즐거움이 섞인 감정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런 것은 가져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며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그리곤 그를 돌아보았다. "마르크, 이건-이건 믿을 수 없는 선물이에요!"
"당신도 그래."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방을 나가 샴페인 병을 들고 왔다. 그는 병과 두 개의 잔을 들고 와 그것을 내려놓고 그녀를 팔로 안았다.
"우리 축배할까, 달링?"
함빡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팔 안으로 다시 미끄러져 들어왔다.
"네 남편은 오늘밤 무슨 일이 있대?"
"항상 그렇지 뭐. 사업 모임이야." 디나가 킴에게 미소 지었다.
"요즘 유럽에서 온 고객을 만나고 있거든. 그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킴의 저녁 식사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필라가 죽고 임신을 하게 되면서 디나는 몇 개월 동안 아무 곳으로도 외출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소 때처럼 트레이더 빅스로 결정했다.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나오니까 기분이 좋구나." 그리고 여기에서는 벤에게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았다. 벤이 이런 장소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컨디션은 좀 어떠니?"
"그저 그래. 벌써 5개월이나 되어 간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아."
그러나 이젠 임신이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검정 모직 드레스의 앞이 약간 불록해졌다. 오늘밤에는 디나의 눈동자에 분노나 고통이 서려있지 않았다. 킴은 최근 일주일간 그녀가 이렇게 평화롭게 보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의 유머감각도 돌아오는 듯 했다. "그런데 감사절에는 뭘 할 거니,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어?"
"별로. 몇몇 친구들과 저녁 식사나 할까 하고 계획 중인데, 너는?"
"보통 때처럼 지낼 거야. 아무런 계획도 없어." 디나가 어깨를 으쓱대며 말했다. "마르크는 일이 있을 거야."
"나와 함께 식사에 가지 않을래?"
"아냐. 그를 억지로 끌어내서 어디 가서 저녁을 함께 할지도 몰라. 필라가 있을 때는 그 애와 함께 외식을 했었지.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너는 그런 것을 진정한 감사절이라고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괜찮아. 그리고 최소한 2주간씩이나 칠면조 샌드위치에 들러붙어 있진 않겠어."
그러다 갑자기 자신이 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카멜에 갔을까 아니면 아직도 동부에 있을까. 그러나 킴에게 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두 사람의 화제가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마침내 그들이 일어섰을 때는 10시 30분이었다. 그들은 느긋하게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한 잔 하러 가지 않겠니?" 킴이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서는 더 이상 저녁 시간을 밖에 있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엿보였다. 디나는 피곤했다.
"다음에 가면 어떨까? 인정하기는 싫지만 어쩔 수가 없어. 아직 도 하루종일 노곤해."
"언제 멈출까, 멈추기나 할까?"
"보통 정확히 4개월이면 끝나는데 이번에는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애. 지금 4개월 반인데 아직도 종일 피곤해."
"그럼 그것을 즐겨봐.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그러나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럴 수 있기를 바랬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는 동안 뭔가 생각할 것이 있을 텐데 아직도 자신의 일을 시작할 수 없었다. 뭔가 그녀를 자꾸 주저앉게 하였다. 디나의 마음은 문득 문득 필라나 벤을 향해 달려가곤 했다. 또는 뱃속의 아기의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품기도 하였다.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벽만 쳐다보고 있는 동안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킴의 작은 자동차가 문 앞에 대어져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디나가 차 안으로 들어갈 때 킴이 보이에게 팁을 건네주었다.
"두 달 동안은 네 차에 타는 걸 포기해야겠어." 그녀의 두 다리가 거의 턱까지 구부러졌다. 그 말을 하며 웃자 킴도 웃었다.
"그래. 그런 배를 갖고 이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고역일거야." 둘은 다시 웃었다.
킴벌리가 차를 출발시켰다. 코스모 플레이스의 좌측을 돌아서 다시 좌회전 했다. 그다음 거리를 차단하고 있는 어떤 건설 공사를 피하기 위해 존스에서 급히 우회전시켰다.
"놉 힐을 지나가는 것이 좋겠어." 킴이 미소를 지으며 디나를 힐끗 봤다. 두 사람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디나는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녀가 그들을 봤을 때, 차는 신호 정지 때문에 멈추어 있었다. 잠시 동안 그 남자가 너무 마르크와 닮은 것에 놀랐다. 그다음 바로 남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숨이 가빠옴을 느꼈다. 킴이 날카롭게 디나를 쳐다보곤 그녀가 응시하는 쪽을 직시했다. 디나가 응시하고 있는 것은 멋진 담비 코트를 걸친 우아한 여인과 걸어가는 마르크였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있을 때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그녀는 굉장히 아름다워 보였다. 숱이 많은 머리가 치렁치렁 늘어져 있고 코트 사이로 빨간 드레스가 살짝 살짝 드러났다. 그녀가 머리를 젖히며 웃고 있었다. 마르크가 그녀의 입에 깊은 키스를 하였다. 디나는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여인이 몸을 젖히자 디나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필라가 죽던 날 밤 공항에 마르크와 함께 있던 바로 그 여자였다.
디나는 갑자기 그녀 주변의 모든 공기가 혼탁해져서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헐떡이며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디나가 킴의 팔을 꽉 잡았다.
"시동을 걸어. 제발 빨리 가자구. 그가 우리를 보지 못하게 말이야."
디나는 창으로부터 머리를 돌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반사적으로 킴이 속력을 내었다. 차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달렸다. 디나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만으로 향했다. 이게 웬일이지, 왜 그 여자가 그곳에 있지? 그것이었구나...... 그랬었구나...... 그가 그랬었구나....... 곧 그녀는 모든 해답을 알게 되었다. 킴도 그랬다. 그들은 작은 자동차 속에서 5분 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처음 말을 꺼낸 것은 킴이었다.
"디나. 저어, 미안해. 뭐라고 말해야 할지." 킴은 디나를 힐끗 보았다. 디나는 어둠 속에서도 무섭게 창백해 보였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우리 집으로 가지 않겠니?"
"참 이상한 것 같지 않니?" 그녀가 그 크고 빛나는 초록빛 눈동자를 킴에게 돌렸다. "나는 침착해졌어. 모든 것이 갑자기 멈춘 기분이야. 모든 소용돌이, 혼란, 두려움, 절망이....... 모두 끝났어. 사라졌어." 디나는 차창 밖으로 안개가 자욱한 밤풍경을 응시했다. 그리고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 킴에게 말했다.
"이젠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단 말이야."
"뭐라구?" 킴은 친구가 걱정되었다. 이것은 또 한 번의 지독한 충격이었다. 그녀도 아직 떨고 있었다.
"남편을 떠나겠어. 킴."
잠깐동안 킴은 응답도 못하고 디나의 옆모습만 보고 있었다. 밤 불빛에 비친 디나의 표정은 날카로웠다.
"나머지 인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어. 이미 수년간을 이렇게 살아왔어. 그이가 그녀와 있는 것을 파리에서도 목격했었어...... 필라가 죽던 날 밤....... 그이와 함께 아테네에서 오던걸. 웃기는 것은 말이야, 9월에 집에 올 때는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사실이야."
"그 관계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니."
"모르겠어. 그게 문제가 아닐지도. 문제는......" 이윽고 그녀가 친구에게 얼굴을 돌렸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어쨌든 나는 항상 혼자였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함께 나누지 않았어. 이 아이도 그럴 거야. 그는 아이를 뺏아갈 거야. 필라를 그랬던 것처럼. 왜 내가 그와 함께 살아야 하지? 의무 때문에, 겁쟁이기 때문에, 또는 수년 동안 내가 끌려 다녔던 그 어리석은 충성심 때문에, 무엇때문에? 오늘밤 그의 모습 봤니? 행복해 보였지, 킴? 젊어보였어. 18년 동안 나와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그렇게 보이지 않았어. 그가 그런 면이 있었나 의심스러워. 아마 그녀가 그에게 마술을 걸었나 봐.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그녀는 주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게 뭣이건 그것은 그의 문제야. 나는 이제 빠져나오겠어."
"왜, 좀 더 생각해 보지 그러니." 킴이 조용히 말하며 디나를 보았다.
"지금은 시기가 나쁠지도 몰라. 아이가 태어난 후면 어떨까? 임신 중에 혼자 있으면 곤란하지 않을까."
"넌 눈치 채지 못했나 보구나. 나는 이미 혼자야."
킴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디나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표정이 두려웠다. 예전에는 한 번도 그렇게 불타는 결심에 내비친 눈동자를 본 적이 없었다. 두렵기조차 하였다. 이윽고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갈까." 마르크가 집에 없으리라는 것쯤은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디나가 머리를 저었다.
"아니, 혼자 있고 싶어. 생각 좀 해야겠어."
"오늘 밤 그에게 말할 거니." 그녀가 대답 없이 오랫동안 킴을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눈동자에 고통이 서려 있었다. 상처를 받은 것이다. 그녀의 내부 어느 곳에서는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지 못할 것 같아. 그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으니까."
31
침실에서 디나는 천천히 드레스를 벗은 다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며 어떤 점에 있어서는 아직도 젊었다. 얼굴의 피부는 나긋나긋하고 피곤했으며 목은 백조처럼 우아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커다란 눈, 바짝 치켜 올려진 눈썹, 늘어지지 않은 턱. 가슴은 여전히 탄탄하고 다리는 늘씬했으며 엉덩이도 작았다. 실제로 나이가 들었다는 표식은 없었지만 그래도 오늘밤 그녀는 그 여자보다 최소한 십 년은 늙은 느낌이었다. 그 여자는 미혼 여성의 홍조와 매력, 그리고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과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르크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었던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었던가, 아니면 무언가 다른 것 때문이었을까? 그 여자가 프랑스 인이라는 것, 그 여자가 그 자신의 소유 가운데 하나라는 것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마르크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디나는 의아스러워하며 화장옷을 입었다. 그녀는 그에게 그 모든 질문들을 하고 싶었고, 그에게서 그 모든 대답을 듣고 싶었다. 만일 그가 그녀에게 대답해 준다면 그리고 그가 집에 언제고 돌아온다면.
그러나 디나는 그것을 물어보기 위해 밤새도록 그를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지금 당장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와 그 여자가 시내로 외출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가 한없이 오래 끄는 협상에 관계했었으며 그래서 밤새 한잠도 못 잤다고 주장하면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동틀 무렵일 때가 많았다.
디나는 갑자기 그의 이야기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거짓말이었는지, 그리고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어져 왔는지 의심스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의자에 기대어 부드러운 조명을 뒤로 한 채 두 눈을 감았다. 필라가 죽었는데도 그는 왜 결혼생활을 계속했던 걸까? 파리에 있을 때 그는 그녀에게 그들의 관계가 끝났다고 말하고 그녀의 곁을 떠날 완벽한 기회를 가졌었다. 그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는 왜 그대로 남았었을까, 그는 왜 머물러 있고 싶어 했을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마르크가 원하는 것은 아기였다. 그의 아들!
그러자 그녀는 혼자 미소 지었다. 그것은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이 함께 살아온 지 거의 20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가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것 한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들, 필라가 가버렸으므로 딸이어도 좋을 것이다. 마르크는 그녀가 낳아줄 아기를 원했다. 정말로 미친 짓이었다. 그는 그 여자와도 살림을 차린 것 같았으므로 그 여자와의 사이에서도 아기를 낳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를 즐겁게 했다. 어떤 의미로는 그녀는 이제 그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목을 붙잡고 그녀는 그에게서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있었다.
그녀는 그도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에게 억지로라도 그 여자와의 관계를 청산해 버리도록 만드는 것까지도 가능할지 모른다. 아니면 그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적어도 그런 척하게 할 수는 있었다. 그는 연에 사건이 끝난 것처럼 그녀가 생각하도록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한숨을 쉬며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눈을 떴다. 그녀는 너무 오랜 세월을 두 눈을 감은 채 살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방에서 나와 어두워진 집 안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디나는 어두운 거실에 앉아 항구의 불빛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거기에 더 이상 머물지 않는다면, 이 집을 떠난다면...... 그를 떠난다면 그것은 이상할 것이다. 혼자가 된다는 것, 자신을 혹은 새로 태어날 아기를 돌봐줄 사람을 아무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모두가 끔찍하고 낯설 것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렇게 하는 편이 깨끗할 것이다. 그 편이 오히려...... 적어도 거짓된 생활은 아닐 테니까.
디나는 날이 밝을 때까지 거기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를 기다리면서. 디나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가 문을 여는 소리를 들은 것은 마악 5시가 지났을 때였다. 그녀는 가만히 거실 문으로 걸어가 새하얀 비단옷을 입은 환영처럼 거기 서 있었다.
"굿 이브닝!" 디나가 남편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니면 굿 모닝이라고 해야 할까요?" 새벽 미명이 항구 위의 하늘에 걸려 불연속적인 핑크와 오렌지색을 드리우고 있었다. 안개도 끼어 있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서 처음으로 본 것은 그가 취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역겨울 정도는 아니지만 꽤 취해 있었다.
"벌써 일어났어?" 그는 몸을 가누려고 노력했지만 조금 앞으로 비틀거리다가 의자의 등받이용을 의지해 섰다. 그는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 때문에 전혀 기분이 편안치 못한 것 같았다.
"꽤 이른 시간인데."
"아니면 지독하게 늦었거나요. 즐겁게 지냈나요."
"물론 그럴 리가 있나, 어리석게 굴지 말아요. 우린 새벽 4시까지 회의실에 앉아 있었어. 그리고 나서 술을 마셨지. 축배를 들었단 말이야."
"너무나 멋진 얘기처럼 들리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방 안에 얼음장같이 차갑게 퍼졌다. 그는 마치 열쇠를 찾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얼 축하하고 있었나요."
"새로운...... 거래를 축하했지." 그는 거의 <코트>라고 말했지만 제때에 걸맞은 변명을 둘러댔다. "소련과의 모피 무역협정 말이오." 그는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 같았고, 디나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디나는 따라 웃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조각상 같았다. "그건 굉장히 아름다운 코트더군요."
그 말이 그들 사이에 바윗덩이처럼 굴러 떨어졌다.
"무슨 뜻이지?"
"내 생각으로는 우리 둘 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완벽하게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 난 그것이 아름다운 코트였다고 말했어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러나 그의 두 눈은 그녀의 시선에 동요하고 있었다.
"난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믿어요. 오늘밤 당신이 친구와 함께 있는 걸 보았어요. 난 이것이 지속적인 연애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는 움직이지도 않고 붙박이 장식장처럼 서 있었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에 그가 디나에게서 몸을 돌려 항구 쪽을 내다보았다.
"그 여자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상대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 그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지는 않겠어. 요즘은 내게 있어서 어려운 시기였어. 필라 일이나......당신 걱정이나......."
"그 여자, 이젠 여기 사나요?" 디나는 그 커다란 푸른 눈을 치켜떴다. 그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야. 그 여자는 이삼주 동안 여기 왔을 뿐이야."
"오, 멋지군요. 내가 이 일을 나의 장래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아니면 당신이 결국 선택을 하시겠어요? 내 생각으로는 그 여자도 마찬가지 질문을 할 텐데요. 사실 지금 당장 난 그 선택이 내 쪽일 수도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어요."
"그럴 수 있겠지." 한동안 그는 동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등을 똑바로 펴고 섰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거야, 디나. 당신과 난 문제가 되는 것이 너무나 많아."
"정말인가요, 뭐가 그렇게 많아요?" 그러나 그녀는 그가 말하는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는 것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밤 이후로 아기는 그녀의 것이었다.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것이었다.
"당신이 정확히 알고 있잖아, 우리 아기 말이오." 그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노려보는 것 같을 뿐이었다. "그 아기는 나의 인생의 전부라는 의미야. 우리들에게."
"우리라구요? 당신도 알고 있을 거예요, 마르크. 난 <우리> 관계를 믿지 않아요. 당신이라는 사람이 있고 나라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는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이 <우리>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유일한 관계는 그 여자와의 관계뿐이에요. 난 오늘밤 당신 얼굴에서 그것을 알 수 있었어요."
"난 취해 있었어." 한동안 절망감이 그의 눈에 피어올랐다. 디나는 그것을 보았지만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신은 행복해 했어요. 당신과 나는 여러 해 동안 같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습관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의무감에서, 고통으로 서로에게 매달려 있는 거예요. 난 필라가 죽은 다음 주말에 당신을 떠나려고 했어요. 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이젠 분명하게 결정을 내렸어요."
"그렇게 하도록 당신을 내버려두지는 않겠어. 당신은 굶어죽을 거야!" 마르크는 이제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그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그가 관심을 쏟는 것 한 가지 즉, 아기를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었다.
"난 당신이 어떻게 살아가든, 죽든, 그런 것에는 관심 없어." 그것이 허세라는 것을 그들은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할 거지, 그림을 그릴 건가, 스케치 소품들을 거리에 내다 사람들에게 팔 건가, 아니면 당신의 애인에게로 돌아갈 건가?"
"어떤 애인 말인가요." 디나는 마치 따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당신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군. 이 독선적이고 앙큼한 암 여우 같으니라구! 기어코 나에게 말을 하게 만드는군......." 그 말들을 그녀의 머리에 내던지는 동안 그는 약간 동요했다.
"당신도 백합처럼 순결하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녀가 갑자기 창백해졌다. "무슨 뜻이에요?"
"당신이 내가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대로야. 내가 아테네로 떠났을 때 당신은 시시껄렁한 연애 소동을 벌였지. 누구와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건 관계없어. 왜냐하면 당신은 내 아내이고 그건 내 아이이기 때문이야. 난 당신을, 당신과 아이 둘 모두 를 소유하고 있어. 알겠어?"
그녀 내부의 모든 것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터져 나왔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내게 할 수 있는 거죠! 전에는 나를 소유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거예요. 당신은 절대로 이 아이를 소유할 수 없을 거구요. 난 당신이 필라에게 한 것과 똑같은 짓을 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겠어요."
그가 미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당신에게는 선택권이 없어, 여보. 그 아이는 내 것이니까...... 내 것이라구. 왜냐하면 내가 그 아이를 받아들이고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로 선택했고, 당신이 무슨 짓을 했건 상관없이 당신을 계속 아내로 두기로 결정했으니까 말이야.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라구. 당신이 아무리 순결한 척해도 나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어. 꼭 기억해 둬."
그가 잠시 휘청거렸다.
"당신 아이를 사생아 신세에서 구해줄 사람이 바로 나란 말이야. 그 아이에게 내 성을 붙여주겠어. 그 애가 내 아이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아이를 원하기 때문이야."
디나의 음성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서서 마르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 아이는 당신 아이가 아니군요, 마르크?"
그가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몸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분명하게."
"어떻게 알죠?"
"왜냐하면 당신이 지독하게 질투하고 있는 그 여자는 당뇨병 환자거든. 만일 내가 그 여자를 임신시킨다면 그 여자는 목숨이 위독해. 그래서 난 몇 년 전에 정관 절제 수술을 받았단 말이야."
그는 비밀을 털어놓은 것에 만족해서 디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디나는 그 충격으로 의자의 등받이에 의지해 몸을 가누었다.
"잘 알았어요." 그들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왜 이제 와서 이 이야기를 하나요?"
"왜냐하면 이제 당신의 가련하고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그 얼굴과 내게 강요된 당신 감정에 싫증이 났기 때문이지. 난 당신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어. 난 당신에게 친절을 베풀었지. 난 당신의 그 섬짓한 작태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당신 아이를 지켜왔어. 당신이 바람을 피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그리고 이제 그 녀석은 떠나버렸고 당신에게는 남편인 나 외에는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당신은 내 것이야."
"당신이 선택한 것을 참아내라 그 말인가요, 마르크." 그녀의 두 눈은 그를 증오하고 있었지만 그는 너무나 취해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확히 알아맞혔어. 그리고 이제 당신에게 내 아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라고 권하겠어. 그러면 나도 자러 갈 테니까. 내일 아침에 만나지."
그는 자신의 고백의 효과가 어떤지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엄숙하게 위층으로 행군해 갔다. 디나는 자유로와진 것이다.
32
부엌 뒤편으로 나 있는 뒷문은 잠겨 있었지만 디나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킴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에게 스테이션 왜건을 세내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식료품상에다 상자 열두 개를 주문했다. 그녀 스튜디오에 있던 장비들은 상자 세 개 안에 모두 들어갔다. 나머지 그녀의 사진들과 앨범들은 다섯 개의 상자에 넣기에 충분했다. 그림들은 모두 뒤 계단 옆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옷상자만 꾸려지면 되는 것이다. 디나는 수화기를 들어 마가레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 혼자서 일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더 이상 혼자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6시부터 시작한 일이 9시가 되도록 끝나질 않았다.
마르크는 벌써 집을 떠났을 것이다. 그녀가 그들의 방을 나온 뒤로 그는 그녀의 스튜디오까지 따라오지 않았다. 집 안에 떠도는 정적이 귀를 멍멍하게 만들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조용히 종말이 다가왔다. 이제는 열두 개의 상자와 가방 몇 개에 과거를 담아 내던져버릴 수가 있었다. 그녀는 그 밖의 다른 것은 모조리 그에게 남겨두기로 했다. 그것들은 전부 그의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가져온 가구들, 그림들, 카페트, 시어머니의 것이었던 은제품들. 거의 모두가 프랑스에서 부쳐진 것들이었다.
디나가 여러 해에 걸쳐 수집해 온 모든 것들은 그녀의 스튜디오에 있었다. 화첩과 붓, 물감, 두세 가지의 장신구. 그녀가 아끼는, 그러나 전혀 값어치가 없는 몇몇 단편과 조각들. 그리고 그녀는 옷과 보석들도 가질 것이다. 그녀는 직업을 구할 때까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그걸 팔기로 했다.
디나는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챙겼다. 그건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도 팔 수 있을 것이다. 그녀 자신과 필라를 그린 것 한 점만을 제외하고. 그것은 팔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의 보물이었다. 그 나머지는 남편에게 남겨둘 것이다. 그는 그것들을 전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스튜디오의 계단 아래쪽에 있는 문을 열고 주저하면서 집을 통과했다. 만일 그가 아직까지 거기에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가 만일 기다리고 있다면? 만일 그녀가 어떤 일을 얼마나 재빨리 처리하려고 하는지 그가 안다면?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제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전날 밤에 그녀가 알 필요가 있는 것들을 그녀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기는 그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벤의 것이었다. 그동안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이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마가레트......."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8시 30분에 사무실로 출발하셨어요." 마가레트의 눈이 눈물로 가득했다. "사모님....... 제발 우리에게서 떠나지 마세요, 나가지 마세요......."
그것은 마르크가 했어야 하는 이야기였지만 그는 이미 자신이 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젯밤에는 너무 취해 있어 완전히 끝을 맺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스튜디오에 숨도록 내버려둔 대신 멋진 보석과 사과의 말 그리고 거짓 핑계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올 것이고 모든 일이 다시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이번만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디나는 마가레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난 가야만 해. 마가레트가 나를 만나러 오면 되잖아."
"내가요?" 그 나이든 여인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디나가 울음을 그치고 그녀에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이제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울고 있었다.
그들이 두 번째의 수트케이스를 꾸렸을 때 현관의 벨이 울렸다. 디나는 놀라서 펄쩍 뛰어 일어났고, 잠깐동안 마가레트는 발작을 일으킨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디나가 재빨리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방문객은 킴이었다.
"난 제일 큰 스테이션 왜건을 가지고 왔어. 마치 보트 같다구."
킴은 웃으려고 애썼지만 디나가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 밑엔 짙은 빛깔의 원이 그려져 있고 두 눈은 가장자리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머리도 어깨 위에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다.
"대단한 밤이었던 게 틀림없는 것 같구나."
"아기는 그의 것이 아니야." 그것이 그녀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첫 번째 말이었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그녀는 킴에게 미소를 지었다.
"아기는 벤의 아이야. 그리고 난 몹시 기뻐."
"어머나 세상에!" 한동안 킴은 웃어야 할지 아니면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굉장한 안도감을 느꼈다. 디나는 홀가분했다.
"확실한 이야기야?"
"절대적으로."
"그래서 떠나려는 거야?"
"응, 당장."
"나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졌었어. 아이 때문이니?"
그들은 그때까지도 현관에 서 있었다. 디나가 천천히 계단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렇고, 다른 이유도 많아. 그 여자 그리고 아기. 이건 결혼생활이 아니야, 킴. 그리고 결혼생활이든 아니든 간에 이젠 끝났어. 난 어젯밤 그걸 확실히 알았어."
"벤에게 말할 거야?"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녀는 디나가 그러리라는 걸 알았다. 적어도 디나가 고개를 가로 저을 때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농담하는 거야, 왜 않겠다는 거야?"
"왜 내가 마르크의 집에서 곧장 벤의 집으로 달려갈 수 있다는 거니, 그래서 그가 나도 돌봐줄 수 있고? 난 그를 떠났어, 킴. 내가 걸어 나온 거라구. 난 내 발로 걸어서 마르크에게 돌아왔고, 그에게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어. 이제 와서 내가 무슨 권리로 그에게 전화를 걸겠니?"
그녀의 두 눈이 너무 커보였다. 킴은 지금 그들이 나누고 있는 이야기들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서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넌 그의 아기를 가졌어. 더 이상 무슨 권리가 필요하다는 거야?"
"나도 몰라.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전화하지 않겠다는 것뿐이야."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거야?"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하자 킴이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여기서 떠나는 것. 아파트를 하나 구해서 스스로 돌보며 살 거야."
"이런 세상에! 그렇게 고상하게 굴지 마. 도대체 생활비는 어떻게 조달하겠다는 거야?"
"그림을 그리고, 일하고, 내 보석을 팔겠어. 너도 보게 될 거야. 자아, 위층에서 할 일을 얼른 끝내야 해."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킴은 침울해 보였다. 디나가 마르크에게서 떠난다는 것은 그녀가 한 생각 중에서 가장 현명한 것이었지만 벤에게 전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옳지 않는 것 같았다.
마가레트는 막 마지막 가방을 꾸리는 일을 끝낸 참이었다. 마르크에 속하는 물건들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작은 장신구들과 사진들, 하잘 것 없는 기념품들, 보석상자, 그리고 책들....... 모든 것들이 꾸려졌다. 그녀는 문지방에서 잠시동안 멈추어 서 있다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킴이 무거운 가방들을 전부 차에 싣는 동안 마가레트는 끊임없이 훌쩍였다. 디나는 자신의 그림들만을 옮겼다. 그것들은 가벼웠던 것이다.
"그건 손대지 말앗!" 디나가 막 가방을 들려고 했을 때 킴이 디나에게 외쳤다. "넌 임신 5개월이야, 이 멍청아!" 디나가 미소 지었다.
"아냐, 그렇지 않아. 아마도 4개월 조금 넘었을 거야." 그러자 그들 두 사람은 싱끗 웃었다. 디나는 새벽에 그림붓들을 전부 씻어서 치우는 동안 그것을 대충 계산해 보았었다. 그는 그녀가 6월 말쯤에 임신을 했고, 그때는 자신이 집을 떠나 있었을 때였다고 그녀에게 말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7월말이었을 가능성이 더 많았다. 그때는 그녀가 벤과 함께 지내던 때였다. 그렇다면 의사가 당연히 들었어야 했다고 생각한 뒤로 1개월이 될 때까지 아기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듣지 못한 이유와 그녀가 그렇게 여위었던 이유도 설명이 가능했다. 또한 그녀가 아직까지도 그렇게 피곤한 이유까지. 그녀는 아마도 임신 4개월인 것이 확실했다.
"하느님 맙소사." 그녀가 갑자기 킴벌리를 바라보았다. "오늘이 추수감사절이지?"
"그래."
"왜 나한테 이야기하지 않았어?"
"네가 아는 줄 알았지."
"어디 가야 되는 것 아니야, 너?"
"늦게까지는 아니야. 우리가 너를 이사시키는 것이 먼저야. 넌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나서는 옷을 차려입고 칠면조 요리로 저녁 식사를 할 거구."
"미쳤구나! 넌 마치 나를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주일 동안 계획을 세워온 것처럼 구는구나." 두 여자는 마지막 그림을 차 뒤편에 실으면서 미소를 주고받았다. "너도 아다시피, 나는 호텔에 머무르려고 해." 차 안의 그림들과 짐꾸러미들을 바라보며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냐. 그러면 안 돼." 킴도 마찬가지로 단호했다. "넌 나랑 함께 있어야 된다구. 이사 나갈 준비가 될 때까지는 말이야."
"그 문제는 나중에 의논하기로 해. 잠깐 안으로 들어가서 둘러보고 싶어."
"마르크가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오늘은 어쨌든 공휴일이니까 말이야."
그러나 디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는 추수감사절에도 일을 한다구." 그리고 그때 그녀가 반쯤 웃어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프랑스식이 아니거든." 디나가 집 안으로 사라지자 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동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가레트가 주방에 있어서 한동안 디나는 혼자였다. <그녀의> 집이었던 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을 위해서-그러나 그곳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한 번도 그녀의 집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의 것이었으니까. 아마 모피 코트를 입은 그 작은 프랑스 여자라면 그 집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에게는 전부 의미가 있는 것일 테니까.
디나는 홀에 서서 거실을 뚫어보다가 마르크 에두아르의 조상들의 초상화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18년 동안 그 집에서 살았으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가져왔던 것만큼의 적은 물건들만을 가지고 떠나려 하는 것이다. 몇 개의 상자와 유화 몇 점, 옷들만을 가지고. 옷들은 이제 훨씬 고급이었다. 보석들은 그녀가 살아가는 것을 도울 것이었다. 그림들은 더 좋아졌고 미술재료 공급품들은 더 뛰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동차 한 대로 족했다.
18년의 세월이 그와 똑같은 수의 상자와 가방에 실려졌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은 웻지우드 도자기 같은 파란색에 흰색이 섞여 있었고, 편지지 우측 상단에는 마담 마르크 에두아르 듀라스라고 박혀 있었다. 그녀는 펜을 꺼내 한동안 생각한 다음 간단히 두세 마디 적었다.
여보, 당신을 사랑했었어요.
안녕히 계세요.
디나는 편지지를 접고,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 다음 그 쪽지를 홀 안에 있는 거울에 붙여두고 나왔다. 몸을 돌렸을 때 그녀는 마가레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눈물이 그녀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그녀에게로 가서 한참 동안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러자 또다시 디나 자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문으로 걸어갔다. 떠나면서 그녀는 오직 한 마디만을 했는데, 그것은 너무나 부드러운 목소리여서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문을 닫으며 미소 지었다.
"아듀!"
33
"왜 가지 않겠다는 거야?" 킴은 낭패한 것 같이 보였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이야, 난 너를 혼자 지내게 내버려둘 수가 없어."
"그래도 그렇게 하게 될 거야. 난 초대받지 않았을 뿐더러 아주 지쳐 있어. 정말로 난 지독하게 피곤한 것뿐이야. 날 여기에 내버려둬. 그러면 내일까지는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그것은 킴도 역시 확신할 수가 없었다. 지난 24시간은 그들에게 매우 힘들었다. 디나는 기진맥진하고 초라해 보였다. 킴은 디나에게 들리지 않는 부엌 전화로 죤스 박사에게 전화를 걸 정도로 걱정했었다. 그녀는 의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설명했다. 그의 충고는 디나를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것뿐이었다. 그녀 자신의 의사대로 원하는 것을 하게 내버려두라고. 그는 그녀가 괜찮아지리라고 확신했다. 의사의 조언대로 킴은 그녀를 그대로 두었다.
"좋아. 하지만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겠지?"
"전혀, 아마도 나는 곯아떨어질 거야." 그녀는 친구에게 피곤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하품을 참았다.
"난 올해의 추수감사절을 놓쳐버리고 싶지 않아 두 여자는 마주보고 웃었다. 디나는 킴이 떠나기도 전에 잠이 들어버렸다. 킴은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빠져나와 열쇠로 문을 잠궜다.
그날 밤 11시 경에 열쇠가 꽂혀졌고 한동안 마르크는 숨을 죽인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전화하지 않은 것이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그녀에게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이미 내뱉은 말을 어떻게 되돌릴 수가 있었을까? 그는 그녀에게 무언가 예쁘고, 그녀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을 사주고 싶었지만 상점들의 문이 모두 닫힌 뒤였다. 추수감사절. 그야말로 감사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는 그날의 반나절을 책상에서 일을 하며 보냈고 나머지 반은 샹딸과 조용히 지냈다. 샹딸은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것을 눈치 채기는 했지만 그것이 정작 어떤 일인지는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그는 아주 기괴한 방식으로 그녀와의 정사에 빠져 있었다.
마르크가 문을 열고 올려다보았다. 집 안에는 불빛도, 소리도 전혀 없었다. 디나는 분명히 잠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차는 차고에 있었다. 그는 홀 아래편에 있는 마가레트의 방에서조차 불빛을 볼 수 없었다. 집 안 전체가 정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작은 등불 하나만을 켜고 코트를 걸었다. 그러자 문 가까이에 있는 거울에 붙여놓은 종이쪽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디나가 외출한 것일까, 친구랑 어딘가로 가버린 것일까? 그가 그쪽으로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갑자기 그의 심장을 강타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마치 계단에서 나는 그녀의 목소리나 발걸음 소리를 들으려고 기다리는 것처럼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르크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들리는 것이라고는 침묵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 그것을 읽는 그의 시선은 물결쳤고 머리는 둔기에 두들겨 맞는 듯했다. <여보, 당신을 사랑했었어요. 안녕히 계세요.> 왜 <사랑했었다>고 했을까, 무슨 이유에서 과거시제로 썼던 것일까?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결코 알 수 없었던 일 하나를 이야기해 주었다.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이제 그가 아기에 관하여 그녀에게 거짓말을 해 왔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샹딸에 대해서도....... 그녀는 그의 다른 생활을 알았다. 그녀는 샹딸과 함께 있는 그를 파리에서 그리고 전날 밤에는 이곳에서 또다시 목격한 것이다. 그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려고 했지만 발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져서 그럴 수가 없었다. 위층에 디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그들의 침대 안에 잠들어 있을 것 같았다. 하루종일 그는 자신들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 그냥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시해 버렸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하면 곧바로 현실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았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침대로 달려가는 것뿐이었고, 그러면 그곳에 잠들어 있는 그녀를 발견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침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이 두려워했던 상태가 벌어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침실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버렸다. 디나는 떠나버렸던 것이다.
마르크 에두아르는 한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죽은 듯이 서있었다. 그리고는 울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전화기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에게는 그녀가 필요했다. 죽을 만큼, 절대적으로. 그녀는 이제 그를 위해서 거기에 있어야만 했다. 그는 그녀가 그러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나 샹딸이 대답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들렸다.
"샹딸...... 나는...... 난 당신을 만나야겠어. 곧 거기로 가겠어."
"무엇이 잘못됐어요?" 그녀는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 아니...... 그냥 그대로 거기에 있어. 지금 거기로 가는 중이니까."
샹딸은 그에게 서두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불과 몇 분 뒤에 그가 도착했을 때 샹딸은 그때까지도 혼돈에 빠져 당황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는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급하게 그녀를 품에 안았을 뿐이었다.
"당신, 무슨 일이에요? 아픈 것 같아 보여요."
"나는...... 나도 모르겠어....... 그녀가 가버렸어!"
가엾은 사람. 또다시 필라 때와 같은 일을 겪다니! 그는 아직까지도 그때의 충격에 그렇게 사로잡혀 있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 일을 그렇게 갑자기 터뜨리게 할 만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알았어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내가 있잖아요?" 샹딸은 그를 꼬옥 안아주었고, 그들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하지만 아기는......" 그리고 그때 그는 그 이야기를 불쑥 끄집어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기라니요." 그는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녀는 깜짝 놀란 것처럼 그에게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아니야...... 난 그냥 당황해서...... 디나 이야기야. 그녀가 가버렸어."
"아주 말인가요, 그녀가 당신을 떠나갔다구요?" 그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샹딸이 활짝 웃었다. "그건 절망할 일이 아니라 축하해야 할 일이 아닌가요?" 샹딸은 더 이상 생각하지도 않고 소파에서 일어나 불과 이삼일 전에 사놓은 샴페인 병 가운데 하나를 찾으러 주방으로 갔다. 그녀는 병과 두 개의 잔을 가지고 돌아와서는 마르크의 얼굴에 떠오른 고뇌의 표정을 보고 멈추어 섰다.
"그래서, 당신 그렇게 불행해요?"
"난 모르겠어. 난 몇 가지 일들을 이야기했었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난......나는 내 힘에 부치는 일을 한 거라구."
샹딸이 냉랭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난 당신이 그녀를 당신 곁에 붙들어두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노심초사하는 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어요. 이젠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녀를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싸우실 건가요?" 샹딸을 지켜보며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디나가 돌아오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를 영원히 그에게 묶어놓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기에게서 떠나버리게 하는 한 가지 사실을 그녀에게 말해버렸었다. 아기가 그의 아기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그건 그렇고." 샹딸은 잠깐동안 멈추었다. "당신이 방금 아기라고 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예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샹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응시할 뿐이었다. 사라져가는 희망을.
"그녀가 임신하고 있었나요, 마르크?" 그녀의 이야기는 마르크의 목에 걸린 조임쇠 같았으며,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것이 당신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나요."
"어젯밤까지는 아니었어."
"알겠어요.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이제까지 그녀 곁에 머물러 온 이유였군요. 당신 아이가 아닌 아이라도 얻고 싶어서요......."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멀리서 들리는 장례식 종소리처럼 떠돌았고, 실망감이 그 여자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아기가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어요."
"그건 그렇지 않아." 그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 여자를 품에 안으려고 했다.
"아녜요, 그래요." 샴페인 병은 마개가 열리지 않은 채로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절망에 휩싸여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사실. 분명히 그래요."
"우린 양자를 들일 수도 있어." 마르크가 말했다. 천천히 샹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만일 아기의 존재가 그에게 그토록 많은 의미를 갖는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아기가 필요치 않았다. 그녀는 한 번도 아기를 갖고 싶어 한 적이 없었다.
"그래요, 그렇게 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때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 때문에 그녀가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젠 뭘 하실 생각인가요?"
"당신과 결혼해야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음을 지어 보이려고 애썼지만 그 말은 그의 입 속에서 마치 납덩이처럼 느껴졌다. "당신도 원한다면."
"그래요." 그녀의 이야기는 엄숙하게 들렸지만 그녀의 눈 속에는 근심스러운 빛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내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난 오늘밤을 이야기한 거예요."
"모르겠어. 여기 있어도 될까." 그의 집으로 혼자 되돌아간다는 생각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고, 디나가 불과 하룻밤 전에 비워놓은 침대로 샹딸을 끌어들이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았다.
"저녁 식사하러 나가는 것이 어떻겠어요."
"지금?" 그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샹딸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지난 몇 시간 동안 내게는 아주 많은 일들이 벌어졌어. 그리고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와는 무관하게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구."
한동안 그에게는 자신이 충격을 채 흡수하기도 전에 샹딸에게 그렇게 급히 달려온 것이 실수가 아니었던가 하는 의혹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냥 여기서 먹을 수는 없을까?"
"안돼요. 외출하고 싶은 걸요." 여자는 마치 급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경질적으로 그렇게 말했고, 갑자기 그는 그녀가 이미 저녁 식사하러 나가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처럼 까만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전화했을 때 어디 나가는 길이었어?"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저 어딘가 저녁을 먹으러 나갔으면 하고 생각 했어요."
"혼자서?" 그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물론이죠." 샹딸이 깔깔대며 웃었지만 그것은 공허한 웃음소리였고 그 여자가 뭐라고 더 말하기도 전에 현관 벨이 울렸다. 샹딸은 재빨리 마르크를 바라보고 나서 서둘러 현관 쪽으로 갔다. "곧 돌아오겠어요."
그가 앉아 있는 소파에서는 현관을 잘 볼 수 없었지만, 그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한 걸음 비껴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그의 내부에서 무엇인가가 끓어올랐다. 그가 그녀의 뒤를 따라 방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어가서 거의 닫혀져 있는 현관문에 도착했을 때, 그 여자가 상대방에게 나긋나긋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르크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샹딸은 숨을 들이쉬며 펄쩍 뛰어 약간 옆으로 비켜섰다. 샹딸은 그의 동료인 짐 셜리반과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짐도 마르크와 얼굴이 마주치자 다소 놀란 것 같았다.
"내가 방해가 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안으로 들어오는 편이 좋겠나?" 그는 자신의 동료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에게 하는 것이었다. 아무 말 없이 세 명은 아파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샹딸이 현관문을 닫았다.
"이건 정말로...... 짐은 그저 내게 추수감사절 저녁 식사를 대접하면 내가 즐거워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뿐이에요. 내 생각에는 당신이...... 집에 있을 것 같았고......." 샹딸의 얼굴은 잔뜩
긴장되어 짐짓 명랑한 체해 보아도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알겠어. 매혹적인 일이로군.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내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할 뿐이지만."
"미안합니다. 마르크." 그들이 거실 중앙에 어중간하게 서 있는 동안 짐은 그를 침울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더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네." 마르크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짐은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을 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고, 잠시 후에 마르크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샹딸과 마주보았다.
"이것이 당신이 그동안 해 온 짓인가?"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짐과는 저녁 식사를 두 번쯤 한 것뿐이에요. 당신이 기분 나빠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그들 모두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내가 당신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나를 용서한다구요. 그러면 당신에게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 없을 거라고 말하겠어요."
샹딸이 가만히 그의 품 안으로 미끌어져 들어와 그를 꼬옥 끌어안았고,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그의 얼굴에 그녀의 비단 같은 머리결이 느껴졌다. 그가 그녀를 알았을 때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솟구쳐 흘렀다. 앞으로도 그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34
킴벌리는 싸우살리토의 비좁은 거리를 내려가서 만으로 향한 작은 샛길로 들어섰다. 그녀는 좌석 옆자리에 있는 종이로 힐끗 눈길을 준 다음, 자신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시 한번 회전을 하면 한쪽이 막힌 골목길이 나오고 거기에 그녀가 있었다. 작은 흰색 담장과 데이지꽃들로 뒤덮힌 넓은 숲, 그리고 그 위로 작은 집 한 채가 숨은 듯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집은 마치 보석과도 같다고 디나가 일전에 묘사했었는데 킴벌리도 그 집을 보자마자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는 팔에 꾸러미들을 잔뜩 안고 씨름하듯 간신히 초인종에 손을 뻗었다. 잠시 후 디나가 문을 열었다.
디나가 청바지와 밝은 미색 블라우스를 입고 그 위로 기다란 빨간 스웨터를 걸친 채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위로 묶여져 있었고 두 눈에는 친구를 맞는 따스한 미소가 담겨져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마담, 와주셔서 너무너무 기쁩니다." 그녀가 킴에게로 팔을 내밀어 끌어안았다. "겨우 두 주일 전에 너한테서 떠나왔는데도 난 벌써 향수병에 단단히 걸려 있어."
킴이 디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 실내를 둘러보았다. 디나는 부엌을 칠하고 마룻바닥을 닦아내는 중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은구슬과 반짝이 전구들이 달린 작은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져 있었다. 트리 밑에는 세 개의 꾸러미가 있었는데, 그것들에는 모두 <킴>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래, 정말 이 생활이 마음에 들어?" 씨익 웃는 디나의 모습은 마치 작은 소녀 같았다. 오랜만에 그녀는 행복하고 평온해 보였다. 겨우 이삼주일 만에 그녀는 스스로에게서 중요한 것을 발견했었다. 작고 밝은 방은 가구가 그다지 많지 않아도 안락하고 마음을 끄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새로 하얗게 칠을 한 버드나무 세공품과 그녀가 하늘색으로 바꾼 근사한 낡은 소파가 있었다. 그리고 사방에 꽃들로 가득한 낡은 병과 화분들이 있었다.
그녀가 아끼는 그림들 가운데 몇 점은 벽에 걸려 있고 바닥에는 근사한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벽난로 장식 위에는 구리 주전자가 있었고 꼭 두 사람이 앉을 만한 넓이의 나무로 된 작은 식탁 위에는 놋 촛대가 있었으며, 방에는 아담한 청동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디나는 트렁크에서 찾아낸 풀 먹인 레이스 천으로 커튼을 직접 만들었다. 그녀는 마치 몇 년 동안 그 집에서 살아온 것처럼 보였다. 온화한 회색 장미가 그려진 멋진 복고풍 벽지를 직접 바른 작은 침실이 하나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흔들 말 하나와 버드나무로 짜여진 요람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작은 침실이 있었다.
킴은 감상하듯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는 의자에 편안히 자리 잡았다.
"이 집이 마음에 드는 걸. 더 머물러 있어도 되겠니, 디나?"
"최소한 일 년쯤은.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네가 몇 가지 불편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 같은데. 뜨거운 물은 나왔다 안 나왔다 하고 오븐은 달구어지는 데 대략 일주일쯤은 걸리고, 창문은 열리지 않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고 말이야......." 그녀가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좋아. 이건 마치 작은 인형의 집 같지 않니."
"정말 그대로야. 난 여기가 우리 집보다도 훨씬 더 맘에 들어. 그 집은 매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까."
"네 집은 더 고급스럽잖아. 하지만 난 이곳으로 만족해." 한 달 전에는 그녀가 대저택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있는 곳에서 그럴 수 없이 행복해 보였다. "커피 줄까?" 그녀가 물었다. 킴은 고개를 끄덕였다. 디나가 사라졌다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커피 잔을 들고 돌아왔다.
"그래, 새 작품은 어떤 거니?"
부엌 한 구석에 세워놓은 이젤이 그녀가 궁금해 하던 것을 말해주었다. 디나는 어느새 일로 돌아가 있었다.
"다시 그리고 있어." 그녀는 행복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런 것 같구나. 그림들을 그려서 어떻게 하려는 거야?"
"팔아야겠지. 이미 두세 점 팔았으니까. 그 돈으로 가구랑 접시랑 침대보 같은 걸 샀어." 그림 석 점과 비취와 다이아몬드로 된 귀걸이를. 하지만 그녀는 킴에게 그것들을 다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제 아기를 빼놓고는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나머지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전혀.
"그림들을 어디에서 거래하고 있니?" 마음속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녀를 바라보는 킴의 마음을 디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일은 신경 쓰지 말아, 킴." 그녀가 활짝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왜 벤에게 네 그림들을 팔도록 해주지 않는 거야? 굳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될 텐데."
킴은 지난주에 벤을 만났었는데, 그는 마치 지옥에 있는 것처럼 끔찍해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 슬쩍 디나의 주소를 흘려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그런 일을 했다면....... 킴은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디나는 혼자만으로도 매우 행복해 보였다.
"벤에게 전화를 걸어서 작품 이야기라도 하지 그래?"
"바보같이 굴지 말아, 킴." 결과가 어떻겠어? 난 그럴 수 없어. 만일 내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내 작품을 파는 걸 주선해 달라고 하면 그는 아마도 내 얼굴에 침을 뱉을 거야."
"그럴 것 같지 않은데."
그러나 아마 그녀가 옳을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킴에게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묻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 사이의 암묵적인 동의였다. 아무도 디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킴은 이해했다.
"마르크에 대해서는 어때, 그에게서 무슨 소식 들었어?"
디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쪽 변호사에게 말한 다음에 한 번 그에게 전화했어. 그 사람은 이해하고 있어. 정말 아무런 논쟁도 벌이지 않았으니까."
"마르크가 그 여자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니."
디나가 한숨을 쉰 다음 미소를 띠우고 올려다보았다.
"아마 그럴 테지." 여자는 그 집에서 마르크와 같이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미소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내 생각에는 이번 일이 모두에게 일종의 충격이었던 것 같아. 올해엔 우리 둘 모두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거든."
한동안 킴에게는 디나가 그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일었다. 그녀는 그런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그건 단지 습관문제인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라고 해도 그녀는 분명히 머나먼 길을 떠나 온 것이다.
"그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니?" 그것은 마르크가 한 것 치고는 드물게 정직한 고백이었다.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려고 어느 날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마가레트가 말해주었어. 마가레트는 다음 달에 그만둘 것 같아. 당연한 일이지. 그 사람에게는 자기 주위에서 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우리 모두 산뜻하게 출발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게 네가 요즘 하고 있는 일이니?" 킴이 물었다. 디나가 또 다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니야. 하지만 내겐 쉬워. 집안 일 때문에 난 계속 바빠. 그리고 그림 작업도 그렇구. 다음 달에는 아기 방을 만들어놓고 싶어. 몇 가지 감탄할 만큼 멋진 천을 발견했거든. 그리고 벽에 걸어둘 몇 가지 우스꽝스런 동화 속 인형들을 만들고 싶어."
킴이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편안하게 앉아 수다를 떠들어대려고 다시 자리를 잡았다. 디나가 마침내 일어나 등불을 켠 것은 5시가 넘어서였다.
"세상에, 우리가 캄캄한 데서 여지껏 앉아 있었구나!"
"그리고 나는 이제 집에 가야만 돼. 난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거든. 그런데 크리스마스에 뭘 할 생각이니?" 그러나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킴은 확신할 수 있었다.
디나가 고개를 저었다. "올해는 정말로 아무것도....... 조용히 여기에서 즐겁게 지낼 생각이야." 고개를 끄덕이는 킴에게는 가책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스키를 타러 산에 올라갈 생각이야, 같이 가고 싶어?"
디나는 깔깔거리며 이젠 제법 불룩해진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그녀는 드디어 5개월째로 접어들었고, 이제 그 불룩해진 배가 날짜와 맞아떨어졌다. 그녀는 블라우스 밑으로 작고 둥그스런, 멋진 배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배를 가볍게 두드린 다음 킴을 바라보았다.
"올해에는 스키를 탈 형편이 아닌 것 같아."
"나도 알아, 하지만 어쨌든 갈 수는 있을 거야."
"그리고 얼어버리라구? 여기 있는 편이 훨씬 더 좋아."
"좋아. 하지만 전화번호를 남겨둘게. 내가 필요하면, 알고 있겠지만 내게 전화해."
"알아, 알았다구." 그녀는 킴의 선물들을 품에 안고서 킴이 그녀의 트리 밑에 남겨준 물건들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멋진 새해가 되기를 빌어줄게."
킴이 친구의 점점 불어나는 허리둘레를 내려다보며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될 거야."
35
크리스마스는 흥분됨이나 축하파티 하나 없이 그렇게 지나갔다. 필라의 선물, 그 아이가 골라 아버지의 구좌에서 값을 지불하게 했던 값비싼 실내복도 없었다. 크리스탈 병에 담긴 프랑스 제 향수도, 다이아몬드 귀걸이도, 모피도 없었다.
디나가 생전 처음으로 혼자 맞은 크리스마스 이브 자정에 개봉된 킴의 선물 네 상자뿐이었다. 디나도 처음에는 두려웠었다. 혼자라는 것이 주게 될 느낌, 그 고독과 고통을 견뎌내지 못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전혀 고독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저 약간 서글플 뿐이었다.
디나는 자신이 마르크와 필라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그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대한 파티, 그 소란스러움, 햄이나 거위나 칠면조 요리, 주방의 마가레트, 트리 밑에 쌓인 산더미 같은 선물 상자들. 그녀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풍요로움이 아니라 그런 행위들이었다. 그것은 늦은 밤 그녀가 그리워한 것들이었다. 필라의 빛나는 웃음, 그리고 오래전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마르크의 얼굴.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러나 마르크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충동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면서 트리 옆에 앉아 있었다. 문득 벤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그가 카멜에 있을 것 같았다. 벤도 나와 마찬가지로 혼자일까?
그녀는 사람들이 캐럴을 부르며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고요한 밤>을 허밍으로 쫓아 부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옷을 벗고 누웠다. 지난 수개월 동안보다 덜 피곤했고 기분은 지난 세월 동안 느껴왔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그러나 생활은 이제 훨씬 더 단순해졌다. 디나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재정적인 것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조차 잘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갈매기>라는 작은 화랑을 찾아내어 거기에 작품을 팔았다. 작품 당 고작 이삼백 달러밖에 받지 못했지만, 그 정도면 집세를 내고 그녀에게 필요한 다른 것들도 전부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했다. 그녀에게는 비취와 다이아몬드로 된 귀걸이를 팔아서 만든 돈이 약간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직 팔 수 있는 보석들이 가득 들어있는 금고도 있었다. 아기가 태어날 때쯤에는 더 내다 팔아야 할 것이고, 그들이 법정에 다녀온 뒤에는 마르크도 그녀에게 무엇이든 주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침대 속에서 혼자 미소를 지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가야.> 디나는 가만히 배를 쓰다듬고는 똑바로 누웠다. 한동안 필라를 생각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아마도 또 딸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다른 아이일 것이다.
36
2월의 어느 날 아침 9시였다. 벤은 자기 사무실에 앉아서 새로 제작한 광고물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는 책상 위의 벨을 누르고 샐리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들어왔을 때 그녀의 손에는 서류가 한아름 들려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았다.
"이 광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샐리? 효과가 있을 것 같아?"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녀는 약간 주저하였다. "그런데 너무 화려한 것 같지 않으세요."
벤은 고개에 힘을 주어 끄덕이면서 광고를 그의 책상 위로 던져놓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킴 휴튼에게 전화연락을 해줘. 나는 11시에 싸우살리토에서 화가를 만나야 하니까 12시15분경에 우르친 해변에서 나를 만날 수 있는지 알아봐줘."
"싸우살리토에서요?" 샐리가 물었다. 그가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사무실을 나갔다. 샐리가 사무실 문에 다시 고개를 내민 것은 거의 10시가 다 되어서였다.
"12시 30분에 우르친 해변에서 만나겠대요." 그리고 광고물들을 가져오겠다고 말하더군요. 선생님께 보여드릴 여러 가지 후보물들이 한아름 있는데 그것들을 전부 가져오겠다고 하더군요."
"좋았어." 벤이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샐리를 올려다보고는 책상 위의 광고물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때때로 그건 끝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벤은 그해 겨울에 4명의 신인 화가들을 명부에 올려놓았지만 정말로 그들의 작품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 작품들은 그가 본 것 중에서는 그래도 뛰어난 것들이었지만 독특한 맛은 없었다. 디나 듀라스의 작품 수준 정도의 것은 없었다.
고객들은 끊임없이 디나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고 그는 설명을 해주려고 애를 썼다. 그녀가 <은퇴>하였다. 일에 몰두하는 그에게서 또다시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디나를 잊기 위한 연습을 9월부터 시작했지만 거의 효과가 없었다. 거의 늦은 밤과 이른 아침을 제외하고는.
이제 그는 그녀에게 있어 필라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다시 만질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또한 말소리도 들을 수 없고, 그들과 더불어 웃을 수 없고, 그들에게 농담을 걸고 그들이 웃는 모습을 바라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벤은 잠시 일을 중단하고 그런 생각들을 쫓아버리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이제 이별에 능숙해져 있었다. 5개월 동안에 걸쳐 숙달된 것이다.
벤은 정확하게 10시 15분에 화랑을 떠났다. 그 시간이면 다리를 건너 싸우살리토로 차를 몰고가 주차를 시킬 수 있었다. 적어도 오늘 만나는 화가는 그가 좋아하는 화가였다. 그는 색채에 대한 놀라운 눈과 일종의 마법적인 재능을 지닌 젊은 청년이었다. 그의 작품은 디나의 것보다 훨씬 현대적이지만 수준은 조금 떨어지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에게 제의를 해 보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그의 그림을 사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지껏 그 젊은 화가는 그가 사는 곳 근처에 있는 화랑에서 작품을 선보였는데, 그곳은 다양한 작품들을 다루는 작고 안락한 싸우살리토에 있는 화랑이었다.
벤은 그곳에서 그 화가의 작품들이 어떤 것들은 좋고 어떤 것들은 나쁜 것들 사이에 매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작품들이 끔찍스런 값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175달러가 그의 작품의 최고가격이었다. 벤은 처음부터 2천 달러로 값을 올려주려고 하였다. 그는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화가는 감격하게 될 것이다.
그는 정말 감격해 했다.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메어리에게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그 화가는 활짝 핀 얼굴로 웃어보이면서 벤의 손을 잡아 마구 흔들어댔다. "이제서야 겨우 음식다운 음식을 사먹을 수 있게 되었군요."
벤은 기분이 유쾌해져서 함께 웃었다. 그들은 천천히 문가로 걸어갔다. 그것은 헛간으로 쓰여졌던 것 같은, 바람이 잘 통하는 작업실이었다. 지금은 주택들과 빅토리아풍의 대용물들로 둘러싸여졌지만 아직까지는 일하기에 근사한 장소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난 여름에 다루었던 그 여류 화가는 어떻게 된 거죠, 듀라스 부인이라든가?"
"다루었다고." 흥미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아무도 모른다. "더 이상 그녀의 작품은 전시하지 않아요." 벤은 매우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그 말을 백 번은 했었다.
"압니다. 하지만 누구 알고 있는 사람을 모르십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녀는 은퇴했거든요." 벤은 각본대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청년 화가가 머리를 저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확실한 이야기입니까?"
"거의. 그녀가 자기 작품을 철수시킬 때 은퇴하겠다고 말했거든요." 하지만 그 남자의 눈에는 그를 얼떨떨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겁니까?"
"갈매기 화랑에서 요 전날에 그녀의 작품들 중 하나를 보았습니다. 틀림없어요. 아시겠지만, 내 작품을 전시했던 그 장소 있잖아요? 확인해 볼 시간은 없었지만, 제가 보기에는 확실해 보였어요. 아름다운 나체화였죠, 그런데 터무니없는 가격을 받고 있더군요."
"얼마던가요?"
"어떤 사람이 160달러라고 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작품에 대한 그런 가격은 정말 범죄라고 해야 합니다. 당신이 한번 가서 그녀의 작품인지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떻겠어요?"
"그래야 할 것 같군요."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11시 30분밖에 안 되었다. 킴과의 점심 식사 약속까지는 시간이 충분했다.
두 남자는 다시 악수를 했다. 그는 감사하다는 말을 수 없이 하고 그곳을 떠났다. 벤은 그의 차로 미끌어져 들어가서 빠른 속력으로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갔다.
벤은 그 화랑이 있는 장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길모퉁이에 차를 주차시켰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문 근처에 걸려있는 그녀의 작품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는 길에 다리가 붙어버린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정말 디나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그 청년 화가의 눈은 정확했다.
벤은 잠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어떻게 할 바를 모른 채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돌아가려고 결정하는 순간, 무엇인가가 그를 화랑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그 자신의 삶이 정지된 것 같은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야만 했다. 그녀가 그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7월 초순에 테라스에서 그 그림을 그렸다. 갑자기 그는 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어서 오십시오, 뭘 도와드릴까요?" 샌들에 진바지를 입은 어여쁜 금발의 아가씨였다. 그녀는 평범한 유니폼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구멍이 뚫린 귀걸이를 하고 넓은 가죽끈으로 머리를 묶고 있었다.
"저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어요." 그는 디나의 작품을 가리켰다.
"160달러입니다. 이 고장 화가가 그린 작품이죠.“
"이 고장이라고요? 샌프란시스코겠죠, 당신이 말하는 건."
"아닙니다. 싸우살리토를 말하는 겁니다." 그녀는 틀림없이 착각을 하고 있었겠지만 따지고 들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 또 있습니까?" 그는 더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습니다. 두 점 정도 더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전부 네 점이나 있었다. 여름에 그린 작품 하나와 그녀가 초기에 그린 두 점의 작품이었는데, 그 어느 작품이나 이백 달러가 넘지 않았다.
"이 작품들을 어떻게 구입하셨죠?" 그는 자신이 그 작품들이 도난되어진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점밖에 없었다면 그에게서 작품을 산 누군가가 돈에 쪼달려 팔아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했겠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또한 그들이 디나의 작품을 여러 점 취급한 것처럼 보이므로 그런 경우는 거의 아닐 것이다.
그 작은 금발의 아가씨는 그의 질문에 놀란 것 같았다.
"저희는 화가로부터 위탁받아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번에는 벤이 어안이 벙벙해질 차례였다.
"왜죠?"
"죄송합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그녀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내 말은 왜 여기에 위탁을 했느냐는 말입니다."
"저희 화랑은 아주 명성 있는 화랑이랍니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녀는 그의 말에 심히 불쾌해 했다. 그는 애써 미소로써 그의 실수를 덮으려고 하였다.
"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없었습니다. 난 그저...... 난 저 화가를 알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녀의 작품을 보고 놀란 것뿐입니다. 난 그녀가 다른 데로 간 줄 알았거든요....... 해외로요."
그는 너무나 당황해서 뭐라고 사과를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내친 김에 그는 또다시 미소를 지으며 그 금발의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가져갈 테니까요."
"어떤 작품을 원하십니까?" 그는 틀림없이 미쳐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혼이 빠졌거나.
"전부 다 주세요."
"넉 점 다요."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라 미쳤다.
"네, 그래요."
"하지만 그러면 거의 800달러 정도나 될 텐데요."
"좋습니다. 수표를 써 드리죠." 그 금발의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어갔다. 지배인이 벤의 은행에 확인을 하였고, 그 결과는 좋았다. 10분 후에 그는 그 화랑을 걸어 나왔다. 디나와 화랑측은 각각 440달러의 득을 보았다.
자동차 안에다 그림들을 다 실을 때까지도 그는 자신이 그 그림을 구입한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이 그녀의 작품을 갖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는 것밖에 몰랐다. 그리고 가격들도 너무 터무니가 없었다. 그의 화랑에서 팔면 더 큰 이득을 디나에게 남겨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과연 무엇을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벤은 킴과 점심 식사를 하러 우르친 해변에 차를 세울 때 자기 자신에게 신경질이 났다. 그림 넉 점을 다 산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녀가 알면 아마도 몹시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 중에 무언가가 그를 질리게 만들었다. 그건 어떤 의미였을까, <이 고장> 싸우살리토의 화가라니?
킴은 창이 딸린 테이블에 앉아서 벤을 기다리며 부두 건너편의 도심전망을 즐기고 있었다. "앉아도 될까요?"
그녀가 그에게로 몸을 돌리며 웃었다. "잠시 당신을 난봉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씩 웃자 그도 따라 웃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멋져보였다. 짜임새 있는 몸매에 블레이저 코트와 헐거운 바지, 그리고 줄무늬 셔츠를 일고 있었지만 그녀가 생각하기로는 그의 눈가에 뭔가 고통스러운 것이 스며있는 듯했다.
"그런 운은 없습니다. 휴튼 양. 난봉꾼들은 유행에 앞서 가죠. 아니면 요즘에는 여자들이 전부 난봉꾼인지도 모르고."
"어머머."
"음료수 좀 드시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블러디 메어리 두 잔을 주문하였다. 잠시 그가 부두를 쳐다보았다.
"킴?"
"예, 알고 있어요. 광고가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시려는 거죠?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다른 아이디어들이 몇 가지 있어요."
벤은 고개를 젓고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건 신경 쓰지 말아요, 당신 말이 맞기는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면 되겠죠. 나는 좀 다른 것에 대해서 묻고 싶소." 오랫동안 말을 멈추고 있는 그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갑자기 이것이 자기가 그의 눈에서 보았던 것일까 하고 의아해하였다.
"무슨 일인데요?" 그는 너무나도 고민에 싸여보여서 손을 내밀어 잡아주고 싶었다.
"디나."
킴의 심장은 하마터면 멈출 뻔하였다. " 그녀를 만났어요?"
하지만 그는 또다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뇨, 당신은요?" 킴은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마을 화랑에서 그녀의 그림 넉 점을 발견했는데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왜 그녀가 그곳에다 그림을 팔아달라고 위탁했는지. 160달러, 175달러. 그건 자살 행위예요. 말도 안 된다구요. 그리고 그 화랑에서 그녀를 이 고장화가라고 말하더군요. 싸우살리토 마을의. 정말로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겁니까."
킴은 꼼짝 않고 앉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날 오후 점심 식사 바로 후에 디나와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그녀는 싸우살리토에서 점심을 들기로 한 약속에 기뻐했었다. 이렇게 하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디나에게 들려볼 수 있었다. 하지만 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을까?
"킴, 제발 말해줘요. 알고 있습니까?" 그녀에게 애원하는 그의 눈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서 그림을 산 후에 그 화랑에 되판 것은 아닐까요."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 전에 먼저 디나에게 물어보아야만 했다. 사실 그래야만 했지만 그녀로서는 차라리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닙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에요. 여자 말로는 분명히 위탁받아서 팔고 있다고 하더군요. 왜죠? 왜 그런 화랑에다, 그리고 왜 이런 곳에서, 남편 몰래 그림을 팔려고 하는 건가요? 곤경에라도 빠져 있습니까, 현금이 필요한 겁니까?" 그의 눈은 킴이 말해줄 것을 애원하였고, 그녀는 길게 고통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아, 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디나의 생활은 많이 변했어요."
"하지만 명백한 것은 나에게 전화를 할 만큼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겠죠."
"아마 전화를 할 거예요, 조만간에. 그녀는 아직까지도 필라 때문에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오늘은 사업적인 대화는 논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디나 뿐이었다. 그는 무언가 끔찍스러울 정도로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다시 킴을 올려다보았고, 그의 눈을 바라보아야 하는 그녀는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녀가 어떤 곤경에라도 처해 있는 겁니까?" 하지만 킴은 머리를 흔들어 아니라고 했다.
"그녀는 잘 있어요, 벤. 정말이에요. 어떤 면에 있어서는 난생처음으로 행복하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녀는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자기 혀를 자르고 싶었다. 디나는 지난 여름에 더욱 행복했다는 걸 알지만 킴은 자신이 방금 한 말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몰랐다.
"많은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그리고 행복하고." 그는 부둣가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킴에게로 향했다. "그 사람과 함께......." 하지만 킴은 갑자기 그 말을 참지 못하였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이죠?"
"그 사람은 프랑스로 돌아갔어요." 디나가 그녀에게 바로 한 달 전에 그 말을 했었다. 마르크는 마침내 자신의 집으로 돌아 가버렸다.
"영주 귀국인가요?" 벤은 멍하니 보았다. 킴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남고요?" 킴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그의 눈에는 절망이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마르크가 떠나 버렸는데도 전화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그의 잔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는 킴의 손이 부드럽게 자기 손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기회를 주세요, 벤.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어요. 그것들을 다 정리하자면 몇 개월은 더 걸릴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살고 있는 겁니까, 싸우살리토예요?" 그 어느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들의 집에서 살고 있지 않는 걸까, 그 사람이 가버리면서 그녀를 남겨둔 걸까?
"그들이 이혼 절차를 밟는 중이라고 말하려고 하는 겁니까?"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네, 맞아요."
"그 사람이 하자고 그런 겁니까, 아니면 그녀가? 킴, 말해줘야만 합니다. 나는 알 권리가 있어요."
"나는 전적으로 당신의 말에 동의해요, 벤. 하지만 그녀의...... 그녀가 이혼을 제기했고 마르크가 동의했어요. 그 사람은 정말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녀는 어때요? 적응은 하고 있습니까, 괜찮아요."
"그녀는 좋은 상태예요. 아담한 집에서 살면서 새로운 그림들을 준비하는 중이예요." 그리고 나서 그녀가 말을 멈췄다. 너무 많은 것들을 말했다.
"무슨 준비를 하고 있단 말입니까." 가뜩이나 혼란스러워진 그를 킴벌리는 더욱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킴. 그 인색한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려고 하는 겁니까."
벤은 몹시 성이 났다. 어떻게 감히 그들이? 갑자기 킴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녀는 밝은 빛을 띤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지 아세요? 이건 미친 짓이에요. 우린 여기 이렇게 앉아서 디나가 어떤지에 대해서 스무 고개를 하고 있어요. 그녀가 필요로 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오직 당신뿐인데요."
킴은 핸드백에서 펜을 하나 꺼내고는 광고 포스터들 중에서 종이 한 장을 손에 쥐었다. 그녀는 주소를 적고 그에게 건네주었다. "가세요, 그게 주소예요."
"지금요?" 그녀의 손에서 종이쪽지를 받아 쥐고는 어안이 벙벙한 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 그녀가 나를 보기를 원치 않는다면?"
"보고 싶어 할 거예요. 지금부터는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 그녀가 웃었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당신을 고민하게 만든다면 그냥 주먹으로 입을 한 방 먹여버리세요." 그는 웃어 보이면서도 혼란스러운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리 점심은 어떡하죠?" 그가 하고 싶은 것은 지금 당장에 그곳에서 나와 디나에게 가는 것이었다. 그는 정말이지 일 분도 더 킴과 같이 앉아 있을 수가 없었고, 그녀도 그의 마음을 짐작하고 미소를 지었다.
"없던 일로 하세요. 광고에 대해서는 다음번에도 얘기할 수 있잖아요. 가보세요." 그는 머리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를 해주고는 그녀의 어깨를 꽉 껴안았다.
"언젠가는, 킴. 꼭 한 턱 낼게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는 마침내 미소를 돌려주었다. "뛰어가야겠어요. 말해 봐요, 문을 부숴버릴까요, 아니면 그냥 굴뚝으로 기어 들어갈까요?"
"창문에다 의자를 집어던져요. 그건 항상 효과가 있으니까."
차에 올라타면서도 그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고, 킴을 떠난 지 5분 만에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다. 그는 다시 종이쪽지를 꺼내 그 집이 울창한 데이지 수풀에 가려져 있고, 작달막한 말뚝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는 디나가 지금 집에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혹시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겁이 나 있었다.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할까, 자기가 온 걸 보고 화를 내면 어떡하지? 그는 지금 그녀가 자기에게 화를 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긴 꿈의 세월이 지난 후에는.
그는 차에서 나와 천천히 문가로 걸어갔다. 집 안에서 누군가 움직이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라디오에서는 부드러운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는 벨을 울리고 나서 문을 두드렸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집 뒤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킴. 문 열렸어. 들어와!" 그는 입을 열어 자기는 킴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기가 집 안에 들어가서 직접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녀에게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벤은 한 손으로 문을 밀었다. 밝고 아담한 실내가 보였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왔어?" 그녀는 뒤쪽에서 크게 소리쳤다. "반대편 침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중이야. 금방 나갈게."
5개월 만에 처음으로 디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저 붙박힌 듯 서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무언가 그녀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온 몸에 힘이 다 빠져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이내 그녀가 다시 소리쳤다.
"킴, 너 맞니?"
이번에는 말을 해야만 했다.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냐, 디나. 아니야."
그리고 나서 침묵이 흘렀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조용히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가 집 뒤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몇 발자국을 옮기자 아담한 침실이 보였다.
"디나?" 그녀는 거기에 서서 한 손을 유모차 위에 올려놓은 채 마지막 남은, 칠이 덜 된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그녀의 눈을 찾는 그의 눈은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안해요, 난......."
그리고 나서 그는 보았다. 그녀의 눈이 커지면서 뺨이 떨리고 있는 것을.
"하느님 맙소사, 당신이...... 디나......."
그는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언제, 그리고 어떻게? 그리고 누구의 아기인지? 그러나 그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에게로 달려가 끌어안았다. 그녀가 그림을 팔고 혼자 지냈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우리 아기지,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눈물방울이 그의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그는 더욱 그녀를 껴안았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지, 왜 전화하지 않았지?"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몸을 떼었을 때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럴 수가 없었어요. 나는 당신에게서 떠났어요." 그런 식으로 다시 당신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어요. 나는 아마도...... 아기가 태어난 후에......."
"당신은 미쳤어. 하지만 당신을 사랑해. 왜 아기가 태어난 다음이지? 나는 당신과 함께 그곳에 있고 싶고. 나는...... 오, 디나. 우리 아기라구!" 온 세계를 다 얻은 듯한 기쁨에 넘쳐 그녀를 끌어당겼다. 웃음과 눈물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나를 찾아냈어요?" 그녀는 기쁨에 겨워 그를 꼭 껴안으면서 훌쩍거렸다.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는 알아챘다.
"킴?"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당신의 그림을 팔던 그 작은 화랑일 수도 있지. 디나, 도대체 어떻게......." 그가 말끝을 잇지 못하자 그녀는 씩 웃어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더는 그러지는 말아요."
"두고 봐야죠."
"나보다도 갈매기 화랑이 더 좋은가?" 그는 그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나왔고 그녀는 힘껏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나 혼자서 꾸려보고 싶었어요. 독립을 했다구요. 해낸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건 당신이 굉장하다는 거구 내가 당신을 흠모한다는 뜻이지. 이혼절차를 밟는 중이오?"
벤은 품 안에 그녀를 껴안고는 부드럽게 그녀의 복부를 어루만졌다. 아기가 발로 차자 그는 깜짝 놀라 물러났다. "우리 아기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일 때 눈물이 그의 눈에서 반짝거렸다. "예, 그리고 이혼수속 중이에요, 5월이면 끝날 거예요."
"그럼 아기는?"
"4월에 태어나고요."
"그럼, 그렇게 된다면, 이런 얼빠진, 정신없는 여자야. 우리도 5월이면 끝나게 되겠군."
"무슨 말이에요?" 하지만 지금 그녀는 웃고 있었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지. 그리고" 그는 야릇한 모습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짐을 싸시죠, 부인. 댁으로 모셔드리겠습니다."
"지금요, 난 아직 아기 방을 다 칠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그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부인, 집으로 모실 테니까."
"지금 당장요?" 그녀는 그림붓을 내려놓고 활짝 웃었다.
"지금 당장." 그는 또다시 그녀를 끌어안고 지난 5개월 동안의 갈망으로 가득 찬 입술로 그녀에게 키스했다.
"디나, 다시는 당신과 떨어지지 않겠어, 절대로. 알겠어?" 그의 손이 천천히 그들의 아기 쪽으로 움직일 때, 그녀는 다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