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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1879~1944)

가지 마셔요

거문고 탈 때

거짓 이별

견민(遣悶) - 번민을 풀어보며

견앵화유감(見櫻花有感) - 벚꽃을 보며 느낌이 있어

견월(見月)

계월향에게

고대(苦待)

고유(孤遊)

고의(古意) - 옛 뜻을 생각하며

고적한 밤

과구곡령(過九曲嶺) - 구곡령을 지나며

관락매유감(觀落梅有感)

구암사초추(龜岩寺初秋) - 구암사 초겨울의 단상(斷想)

군말

귀암폭(龜岩瀑)

그를 보내며

금강산

기러기 노래(獄中作)

기학생(寄學生) - 어느 학생에게 부탁하며

길이 막혀

꽃싸움

꽃이 먼저 알아

꿈과 근심

꿈 깨고서

꿈이라면

나는 잊고저

나룻배와 행인

나의 길

나의 꿈

나의 노래

낙원은 가시덤불에서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눈물

님의 손길

님의 얼굴

님의 침묵

달을 보며

당신 가신 때

당신은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마음

당신의 편지

당신이 아니더면

대만화 화상만림향장(代萬化 和尙挽林鄕長)

독야(獨夜)

독자에게

독좌(獨坐)

독창풍우(獨窓風雨) - 창가에 스치는 비바람

독풍아주자용동파운부매화용기운부매화(讀風雅朱子用東坡韻賦梅花用其韻賦梅花)

동경려관청선(東京旅館聽蟬)

두견새

등고(登高)

등불 그림자를 보며(燈影)

등선방후원(登禪房後園) - 선방 뒤뜰에 오르면서

떠날 때의 님의 얼굴

마관주중(馬關舟中)

만족

명상

무제(無題)

반비례

밤은 고요하고

방백화암(訪白華庵)

버리지 아니하면

별완호학사(別玩豪學士)

병감후원(病監後園)

병수(病愁)

복종

비밀

비방

사랑

‘사랑’을 사랑하여요

사랑의 끝판

사랑의 불

사랑의 존재

사랑의 측량

사랑하는 까닭

사향(思鄕) - 고향을 생각하며

사향고(思鄕苦) - 고향을 생각하는 괴로움이 깊어

산가효월(山家曉月)

산주(山晝) - 대낮에 산속에 들어가서

생명

생의 예술

선사의 설법

설야(雪夜) - 눈 오는 밤인데도

설효(雪曉)

설후만음(雪後漫吟)

세한의불도희작(歲寒衣不到戲作) - 추운 겨울에도 옷은 없는데

수(繡)의 비밀

술회(述懷) - 지나온 세월! 회포 속에 담고

슬픔의 삼매(三昧)

신청(新晴) - 선(禪)에 드니 새롭게 개다

심우장(尋牛莊)

심은 버들

안해주(安海州)

알 수 없어요

야행(野行)

약사암도중(藥師庵途中) - 약사암 가는 길에

양진암(養眞庵)

어느 것이 참이냐

어디라도

어적(漁笛) - 어부의 피리 소리

여금봉백야금(與錦峰伯夜唫) - 금봉 선사 백야와 같이 읊다

여름밤이 길어요

영등영(咏燈影) - 등(燈) 그림자를 읊으며

영산포주중(榮山浦舟中) - 영산포 배에서

예술가

오도송(悟道頌) - 의심이 씻은 듯 풀리다

오셔요

옥중감회(獄中感懷) - 옥중 감회는 남다른데

옥중음(獄中吟) - 옥중에서 자유를 원하며

완월(玩月)

요술

우고인매제하부작오고여유호기심시(又古人梅題下不作五古余有好奇心試)

우는 때

우중독(雨中獨)

月方中(월방중) - 달이 한가운데 오를 때

월욕락(月欲落)

월욕생(月欲生)

월초생(月初生)

음청(唫晴) - 맑게 갠 어느 날에

의심하지 마셔요

이별

이별은 미의 창조

인과율

일광남호(日光南湖)

자경귀오세암증박한영(自京歸五歲庵贈朴漢永)

자민(自悶) - 번민

자락(自樂) - 스스로 즐거워하며

자소시벽(自笑詩癖) - 시 쓰는 버릇을 비웃다

자유 정조(自由 貞操)

잠꼬대

잠 없는 꿈

정부원(征婦怨)

정천한해(情天恨海)

중양(重陽)

즉사(卽事)

증별(贈別) - 이별하면서 주었던 시

증영호화상술미상견(贈映湖和尙述未嘗見) - 영호 화상을 만나보지 못한 안타까움을 말함

지는 해

진주

차라리

차영호화상향적운(次映湖和尙香積韻) - 영호 화상 향적봉 운에 차운하여 읊다

착인(錯認)

찬송(讚頌)

참말인가요

참아주셔요

첫 키쓰

청한(淸寒) - 상큼한 추위인데도

청효(淸曉)

최초의 님

추야우(秋夜雨)

추우(秋雨) -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네

추효(秋曉)

추회(秋懷) - 어느 가을날의 심회(心懷)

춘규원(春閨怨) - 규방의 한은 쌓이는데

춘몽(春夢)

칠석

칠월 칠석날에 견우직녀 그려 보며

침성(砧聲) - 다듬이 소리를 들으며

쾌락

타골의 시(詩, GARDENSTO)를 읽고

포도주

하나가 되어 주셔요

한강(漢江) - 한강을 다시 보니

해당화

행복

향로암야금(香爐庵夜唫)

향로암즉사(香爐庵卽事) - 향로암에서 짓다

호접(蝴蝶)

황매천(黃梅泉) - 매천 황현을 기리며

회음(懷吟)

후회

?

 

 

 

가지 마셔요

한용운

 

그것은 어머니의 가슴에 머리를 숙이고 자기자기한 사랑을 받으려고 삐죽거리는 입술로 표정하는 어여쁜 아기를 싸안으려는 사랑의 날개가 아니라, 적의 깃발입니다.

그것은 자비의 백호(白毫) 광명(光明)이 아니라, 번득거리는 악마의 눈빛입니다.

그것은 면류관과 황금의 누리와 죽음과를 본 체도 아니하고, 몸과 마음을 돌돌 뭉쳐서 사랑의 바다에 퐁당 넣려는 사랑의 여신이 아니라, 칼의 웃음입니다.

아아 님이여, 위안에 목마른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대지의 음악은 무궁화 그늘에 잠들었습니다.

광명의 꿈은 검은 바다에서 잠약질합니다.

무서운 침묵은 만상(萬像)의 속살거림에 서슬이 푸른 교훈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아 님이여, 새 생명의 꽃에 취하려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거룩한 천사의 세례를 받은 순결한 청춘을 똑 따서 그 속에 자기의 생명을 넣서, 그것을 사랑의 제단(祭壇)에 제물로 드리는 어여쁜 처녀가 어디 있어요.

달금하고 맑은 향기를 꿀벌에게 주고, 다른 꿀벌에게 주지 않는 이상한 백합꽃이 어디 있어요.

자신의 전체를 죽음의 청산에 장사지내고, 흐르는 빛으로 밤을 두 쪼각에 베히는 반딧불이 어디 있어요.

아아 님이여, 정에 순사(殉死)하려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그 나라에는 허공이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그림자 없는 사람들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는 우주만상의 모든 생명의 쇳대를 가지고, 척도를 초월한 삼엄한 궤율로 진행하는 위대한 시간이 정지되었습니다.

아아 님이여, 죽음을 방향(芳香)이라고 하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거문고 탈 때

한용운

 

달 아래에서 거문고를 타기는 근심을 잊을까 함이러니, 춤 곡조가 끝나기 전에 눈물이 앞을 가려서, 밤은 바다가 되고 거문고 줄은 무지개가 됩니다.

거문고 소리가 높았다가 가늘고 가늘다가 높을 때에, 당신은 거문고 줄에서 그네를 뜁니다.

마지막 소리가 바람을 따라서 느티나무 그늘로 사라질 때에, 당신은 나를 힘없이 보면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아아 당신은 사라지는 거문고 소리를 따라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거짓 이별

한용운

 

당신과 나와 이별한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가령 우리가 좋을 대로 말하는 것과 같이, 거짓 이별이라 할지라도 나의 입술이 당신의 입술에 닿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거짓 이별은 언제나 우리에게서 떠날 것인가요.

한 해 두 해 가는 것이 얼마 아니 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시들어가는 두 볼의 도화(桃花)가 무정한 봄바람에 몇 번이나 스쳐서 낙화가 될까요.

회색이 되어가는 두 귀 밑의 푸른 구름이, 쪼이는 가을 볕에 얼마나 바래서 백설(白雪)이 될까요.

 

머리는 희어 가도 마음은 붉어 갑니다.

피는 식어 가도 눈물은 더워 갑니다.

사랑의 언덕엔 사태가 나도 희망의 바다엔 물결이 뛰놀아요.

 

이른바 거짓 이별이 언제든지 우리에게서 떠날 줄만은 알아요.

그러나 한 손으로 이별을 가지고 가는 날[日]은 또 한 손으로 죽음을 가지고 와요.

 

 

 

견민(遣悶)

한용운

 

春愁春雨不勝寒(춘수춘우부승한)

春酒一壺排萬難(춘주일호배만난)

一杯春酒作春夢(일배춘주작춘몽)

須彌納芥亦復寬(수미납개역부관)

                     -

봄 시름에 봄비는 마냥 추워서

봄술 한 병으로 만난을 물리치네.

실컷 마신 봄술에 봄꿈을 꾸니

수미산을 개자씨에 넣고도 남네.

 

주:만해는 유달리 추위를 많이 탄 것 같다. 일신을 돌볼 겨를 없이 국가 민족을 위하여 분골쇄신 투쟁하였고 불경 번역과 나름대로의 열과 성을 다한 유신 불사에 일말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로 하여 몸은 약해지고 간호할 마땅한 사람도 없이 동분서주하였으니, 금기로 여기는 술에 자연 가깝게 되어 그것으로 단견의 해결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진다. 봄 추위를 술로 데우고 호방한 기질에 번민을 잊으려고 애쓴 모습인 것 같다.

 

 

 

견앵화유감(見櫻花有感)

한용운

 

昨冬雪如花(작동설여화)

今春花如雪(금춘화여설)

雪花共非眞(설화공비진)

如何心欲裂(여하심욕열)

 

지난겨울엔 눈이 꽃과 같더니

올봄에는 꽃이 눈 같구나

눈이나 꽃이 다 참이 아닌데

어째서 마음이 찢어지려느냐.

 

 

 

견월(見月)

한용운

 

幽人見月色(유인견월색) 

一夜總佳期(일야총가기) 

聊到無聲處(료도무성처) 

也尋有意詩(야심유의시)

 

외로운 사람 달빛을 바라보니

한밤이 모두 아름다운 시기이네

애오라지 소리 없는 곳에서

짐짓 의미 있는 시를 찾네

 

 

 

계월향(桂月香)에게

한용운

 

계월향이여, 그대는 아리따웁고 무서운 최후의 미소를 거두지 아니한 채로 대지의 침대에 잠들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다정(多情)을 슬퍼하고, 그대의 무정(無情)을 사랑합니다.

 

대동강에 낚시질하는 사람은 그대의 노래를 듣고, 모란봉에 밤놀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을 봅니다.

아이들은 그대의 산 이름을 외우고, 시인은 그대의 죽은 그림자를 노래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다하지 못한 한(恨)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남은 한(恨)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한(恨)은 무엇인가.

그대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대의 붉은 한(恨)은 현란(絢爛)한 저녁놀이 되어서, 하늘길을 가로막고 황량한 떨어지는 날을 돌이키고자 합니다.

그대의 푸른 근심은 드리고 드린 버들실이 되어서, 꽃다운 무리를 뒤에 두고 운명의 길을 떠나는 저문 봄을 잡아 매려 합니다.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 볕을 받치고 매화 가지에 새봄을 걸어서, 그대의 잠자는 곁에 가만히 놓아드리겠습니다.

자 그러면 속하면 하룻밤, 더디면 한겨울, 사랑하는 계월향(桂月香)이여.

 

 

 

고대(苦待)

한용운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날마다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게 합니다.

해가 저물어 산 그림자가 촌 집을 덮을 때에 나는 기약 없는 기대를 가지고 마을 숲 밖에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를 몰고 오는 아이들의 풀잎 피리는 제 소리에 목마칩니다.

먼 나무로 돌아가는 새들은 저녁 연기에 헤엄칩니다.

숲들은 바람과의 유희를 그치고 잠잠히 섰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동정하는 표상입니다.

시내를 따라 굽이친 모랫길이 어둠의 품에 안겨서 잠들 때에, 나는 고요하고 아득한 하늘에 긴 한숨의 사라진 자취를 남기고, 게으른 걸음으로 돌아옵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날마다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게 합니다.

어둠의 입이 황혼의 엷은 빛을 삼킬 때에, 나는 시름 없이 문 밖에 서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다시 오는 별들은 고운 눈으로 반가운 표정을 빛내면서, 머리를 조아 다투어 인사합니다.

풀 사이의 벌레들은 이상한 노래로, 백주(白晝)의 모든 생명의 전쟁을 쉬게 하는 평화의 밤을 공양합니다.

네모진 적은 못의 연잎 위에 발자취 소리를 내는 실없는 바람이 나를 조롱할 때에 나는 아득한 생각이 날카로운 원망으로 화(化)합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날마다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게 합니다.

일정한 보조로 걸어가는 사정(私情) 없는 시간이, 모든 희망을 채찍질하여 밤과 함께 몰아 갈 때에, 나는 쓸쓸한 잠자리에 누워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가슴 가운데의 저기압은 인생의 해안에 폭풍우를 지어서, 삼천세계(三千世界)는 유실(流失)되었습니다.

벗을 잃고 견디지 못하는 가엾은 잔나비는 정(情)의 삼림에서 저의 숨에 질식되었습니다.

우주와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대철학(大哲學)은 눈물의 삼매(三昧)에 입정(入定)되었습니다.

나의 `기다림'은 나를 찾다가 못 찾고, 저의 자신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고유(孤遊)

한용운

 

半生遇歷落(반생우력락) 

窮北寂寥遊(궁북적요유). 

冷宵說風雨(냉소설풍우) 

晝回髮髮秋(주회발발추)

 

반평생 지나친 기구한 일들

궁박한 북녘으로 쓸쓸히 떠돌아 왔네.

차가운 밤, 비바람 걱정하노니

날 새면 머리칼에 가을 짙으리.

 

 

 

고의(古意)

한용운

 

淸宵依劒立(청소의검립)

霜雪千秋空(상설천추공)

恐傷花柳意(공상화유의) 

回看迎春風(회간영춘풍) 

 

맑은 밤에 칼을 짚고 서보았더니

서리와 눈에는 천추(千秋)엔들 안중에도 없었네

꽃이라 버들이라 혹시 상할까 염려가 되었는데

머리 돌려서 저 멀리 봄바람을 한껏 불러 오느니

 

 

 

고적한 밤

한용운

 

하늘에는 달이 없고, 땅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가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주는 죽음인가요.

인생은 잠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적은 별에 걸쳤던 님 생각의 금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황금의 칼을 들고, 한 손으로 천국의 꽃을 꺾던 환상의 여왕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금실과 환상의 여왕이 두 손을 마주잡고, 눈물의 속에서 정사(情死)한 줄이야 누가 알아요.

 

우주는 죽음인가요

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과구곡령(過九曲嶺)

한용운

 

過盡臘雪千里客(과진랍설천리객) 

智異山裡趁春陽(지리산리진춘양)

去天無尺九曲路(거천무척구곡로) 

轉回不及我心長(전회불급아심장)

 

천리 밖 손객이 섣달 눈을 다 보내고서

지리산 깊은 골짝 봄볕에 길을 걸었네

하늘에 닿을 듯한 굽이굽이 구곡령 길엔

뒤틀린 내 마음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리

 

 

 

관락매유감 (觀落梅有感)

한용운

 

宇宙百年大活計(우주백년대활계) 

寒梅依舊滿禪家(한매의구만선가) 

回頭欲問三生事(회두욕문삼생사) 

一秩維摩半落花(일질유마반락화)

 

한평생 우주를 펄펄 살게 하려는데

찬 매화 옛같이 절에 가득 피네.

머리 돌려 삼생일 묻고자 하니

한 질 유마경에 반 떨어진 꽃일러라.

 

 

 

구암사초추(龜岩寺初秋)

한용운

  

古寺秋來人自空(고사추래인자공)

匏花高發月明中(포화고발월명중)

霜前南峽楓林語(상전남협풍림어)

纔見三枝數葉紅(재견삼지수엽홍)

 

옛 절에 가을 들자 사람들 절로 마음 비우고

박꽃은 높이높이 밝은 달 아래에 피었다

서리 오기 전 남쪽 언덕 단풍의 속삭임은

겨우 서너 가지 두어 잎의 진홍 빛 보이네.

 

 

 

군말

한용운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귀암폭(龜岩瀑)

한용운

 

秋山瀑布急(추산폭포급)

浮世愧殘春(부세괴잔춘) 

日夜欲何往(일야욕하왕) 

回看千古人(회간천고인)

 

가을 산 폭포 소리 성급히 쏟아지니

뜬 세상 늙은 몸 부끄러워라.

밤낮 어디로 헤매이는가

머리 돌려 옛 분들 그려 보느니.

 

 

 

그를 보내며

한용운

 

그는 간다, 그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도 아니요, 내가 보내고 싶어서 보내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간다.

그의 붉은 입술, 흰 이, 가는 눈썹이 어여쁜 줄만 알았더니, 구름 같은 뒷머리, 실버들 같은 허리, 구슬 같은 발꿈치가 보다도 아름답습니다.

 

걸음이 걸음보다 멀어지더니, 보이려다 말고, 말려다 보인다.

사람이 멀어질수록 마음은 가까워지고, 마음이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멀어진다.

보이는 듯한 것이 그의 흔드는 수건인가 하였더니, 갈매기보다도 적은 쪼각 구름이 난다.

 

 

 

금강산

한용운

 

만이천봉(萬二千峰)! 무양(無恙)하냐. 금강산아.

너는 너의 님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아느냐.

너의 님은 너 때문에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온갖 종교, 철학, 명예, 재산, 그 외에도 있으면 있는 대로 태워 버리는 줄을 너는 모르리라.

 

너는 꽃에 붉은 것이 너냐.

너는 잎에 푸른 것이 너냐.

너는 단풍에 취한 것이 너냐.

너는 백설에 깨인 것이 너냐.

 

나는 너의 침묵을 잘 안다.

너는 철모르는 아이들에게 종작없는 찬미를 받으면서, 시쁜 웃음을 참고 고요히 있는 줄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너는 천당이나 지옥이나 하나만 가지고 있으려무나.

꿈 없는 잠처럼 깨끗하고 단순하란 말이다.

나도 짧은 갈궁이로 강 건너의 꽃을 꺾는다고, 큰 말하는 미친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침착하고 단순하려고 한다.

나는 너의 입김에 불려오는 쪼각 구름에 키쓰한다.

 

만이천봉(萬二千峰)! 무양(無恙)하냐, 금강산아.

너는 너의 님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

 

 

 

기러기 노래(獄中作)

한용운

 

一雁秋聲遠(일안추성원) 

數星夜色多(수성야색다) 

燈深猶未宿(등심유미숙) 

獄吏問歸家(옥리문귀가) 

天涯一雁叫(천애일안규) 

滿獄秋聲長(만옥추성장) 

道破蘆月外(도파노월외) 

有何圓舌椎(유하원설추)

 

가을 기러기 한 마리 멀리서 울고

밤에 헤아리는 별 색도 다양하네

등불 짙어지니 잠도 오지 않는데

옥리는 집에 가고 싶지 않는가 묻는다.

하늘 끝 기러기 한 마리 울며 지나가니

감옥에도 가득히 가을 바람소리 뻗치는구나

갈대가 쓰러지는 길 저 밖의 달이여

어찌하여 너는 둥근 쇠몽치 혀를 내미는 거냐.

 

 

 

기학생(寄學生)

한용운

 

瓦全生爲恥(와전생위치) 

玉碎死亦佳(옥쇄사역가)

滿天斬荊棘(만천참형극) 

長嘯月明多(장소월명다)

 

기왓장 같은 내 삶이 이리도 부끄러운데

옥같이 부서지는 죽음은 아름답구나

하늘 가득한 마음을 찌르는 가시들이 있는데

소리 내어 읊어보니 달빛만 밝아지는구나

 

 

 

길이 막혀

한용운

 

당신의 얼굴은 달도 아니언만

산 넘고 물 넘어 나의 마음을 비춥니다.

 

나의 손길은 왜 그리 짧아서

눈 앞에 보이는 당신의 가슴을 못 만지나요.

 

당신이 오기로 못 올 것이 무엇이며

내가 가기로 못 갈 것이 없지마는

산에는 사다리가 없고

물에는 배가 없어요.

 

뉘라서 사다리를 떼고 배를 깨뜨렸습니까.

나는 보석으로 사다리 놓고 진주로 배 모아요.

오시려도 길이 막혀서 못 오시는 당신이 기루어요.

 

 

 

꽃싸움

한용운

 

당신은 두견화를 심으실 때에, `꽃이 피거든 꽃싸움하자.'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서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나는 한 손에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한 손에 흰 꽃수염을 가지고, 꽃싸움을 하여서 이기는 것은 당신이라 하고, 지는 것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당신은 흰 꽃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이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번번이 이긴 나는 당신에게 우승의 상을 달라고 조르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빙긋이 웃으며, 나의 뺨에 입맞추겠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서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꽃이 먼저 알아

한용운

 

옛집을 떠나서 다른 시골에 봄을 만났습니다.

꿈은 이따금 봄바람을 따라서 아득한 옛 터에 이릅니다.

지팡이는 푸르고 푸른 풀빛에 묻혀서, 그림자와 서로 따릅니다.

 

길가에서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고서, 행여 근심을 잊을까 하고 앉았습니다.

꽃송이에는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아니한가 하였더니, 아아 나의 눈물이 떨어진 줄이야 꽃이 먼저 알았습니다.

 

 

 

꿈과 근심

한용운

 

밤 근심이 하 길기에

꿈도 길 줄 알았더니

님을 보러 가는 길에

반도 못 가서 깨었고나.

 

새벽 꿈이 하 짜릅기에

근심도 짧을 줄 알았더니

근심에서 근심으로

끝간 데를 모르겠다.

 

만일 님에게도

꿈과 근심이 있거든

차라리

근심이 꿈 되고 꿈이 근심 되어라.

 

 

 

꿈 깨고서

한용운

 

님이면은 나를 사랑하련마는, 밤마다 문 밖에 와서 발자취 소리만 내이고, 한 번도 들어오지 아니하고 도로 가니, 그것이 사랑인가요.

그러나 나는 발자취나마 님의 문 밖에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사랑은 님에게만 있나 봐요.

 

아아 발자취 소리나 아니더면, 꿈이나 아니 깨었으련마는

꿈은 님을 찾아가려고 구름을 탔었어요.

 

 

 

꿈이라면

한용운

 

사랑의 속박이 꿈이라면

출세(出世)의 해탈도 꿈입니다.

웃음과 눈물이 꿈이라면

무심(無心)의 광명도 꿈입니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꿈이라면

사랑의 꿈에서 불멸(不滅)을 얻겠습니다.

 

 

 

나는 잊고저

한용운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저 하여요

잊고저 할수록 생각히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히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아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 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 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저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나의 길

한용운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

산에는 돌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습니다. 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

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발자취를 내입니다. 들에서 나물 캐는 여자는 방초(芳草)를 밟습니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아갑니다.

의(義) 있는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하여는 칼날을 밟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놀을 밟습니다.

봄 아침의 맑은 이슬은 꽃머리에서 미끄럼 탑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습니까.

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내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길을 님이 내었으면, 죽음의 길은 왜 내셨을까요.

 

 

 

나의 꿈

한용운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적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똘귀똘' 울겠습니다.

 

 

 

나의 노래

한용운

 

나의 노랫가락의 고저 장단은 대중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속의 노래 곡조와는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노래가 세속 곡조에 맞지 않는 것을 조금도 애닯아하지 않습니다.

나의 노래는 세속의 노래와 다르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까닭입니다.

곡조는 노래의 결함을 억지로 조절하려는 것입니다.

곡조는 부자연한 노래를 사람의 망상으로 도막쳐 놓는 것입니다.

참된 노래에 곡조를 붙이는 것은 노래의 자연에 치욕입니다.

님의 얼굴에 단장을 하는 것이 도리어 험이 되는 것과 같이, 나의 노래에 곡조를 붙이면 도리어 결점이 됩니다.

나의 노래는 사랑의 신(神)을 울립니다.

나의 노래는 처녀의 청춘을 쥡짜서, 보기도 어려운 맑은 물을 만듭니다.

나의 노래는 님의 귀에 들어가서는 천국의 음악이 되고, 님의 꿈에 들어가서는 눈물이 됩니다.

 

나의 노래가 산과 들을 지나서, 멀리 계신 님에게 들리는 줄을 나는 압니다.

나의 노랫가락이 바르르 떨다가 소리를 이루지 못할 때에 나의 노래가 님의 눈물겨운 고요한 환상으로 들어가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압니다.

나는 나의 노래가 님에게 들리는 것을 생각할 때에, 광영(光榮)에 넘치는 나의 적은 가슴은 발발발 떨면서 침묵의 음보(音譜)를 그립니다.

 

 

 

낙원은 가시덤불에서

한용운

 

죽은 줄 알았던 매화 나무 가지에, 구슬 같은 꽃방울을 맺혀 주는 쇠잔한 눈 위에, 가만히 오는 봄 기운은 아름답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밖에 다른 하늘에서 오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모든 꽃의 죽음을 가지고 다니는 쇠잔한 눈이 주는 줄을 아십니까.

 

구름은 가늘고 시냇물은 옅고 가을 산은 비었는데, 파리한 바위 사이에 실컷 붉은 단풍은 곱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풍은 노래도 부르고 울음도 웁니다. 그러한 `자연의 인생'은 가을 바람의 꿈을 따라 사라지고 기억에만 남아 있는, 지난 여름의 무르녹은 녹음이 주는 줄을 아십니까.

 

일경초(一莖草)가 장육금신(丈六金身)이 되고, 장육금신(丈六金身)이 일경초(一莖草)가 됩니다.

천지는 한 보금자리요, 만유(萬有)는 같은 소도(小島)입니다.

나는 자연의 거울에 인생을 비춰 보았습니다.

고통의 가시덤불 뒤에, 환희의 낙원을 건설하기 위하여 님을 떠난, 나는 아아 행복입니다.

 

 

 

논개(論介)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廟)에

한용운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南江)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논개(論介)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論介)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혀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當年)을 회상한다.

술 향기에 목마친 고요한 노래는 옥(獄)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귀신 나라의 꽃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가날픈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였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무독(無毒)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게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조운(朝雲)이냐, 울음의 모우(暮雨)이냐, 새벽달의 비밀이냐, 이슬꽃의 상징이냐.

빠비 같은 그대의 손에 꺾이우지 못한 낙화대(落花臺)의 남은 꽃은 부끄럼에 취하여 얼굴이 붉었다.

옥 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밟히운, 강 언덕의 목은 이끼는 교긍(驕矜)에 넘쳐서 푸른 사롱(紗籠)으로 자기의 제명(題名)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만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볼러 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으려면, 나의 창자가 먼저 꺾어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論介)여, 금석(金石) 같은 굳은 언약을 저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論介)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恨)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祠堂)에 기념비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노래에 `눈물'의 곡조를 낙인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祠堂)에 제종(祭鍾)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서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論介)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는 신에게 참회를 아니한대도 사라지겠습니다.

 

천추(千秋)에 죽지 않는 논개(論介)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論介)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論介)여.

 

 

 

눈물

한용운

 

내가 본 사람 가운데는, 눈물을 진주라고 하는 사람처럼 미친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람은 피를 홍보석(紅寶石)이라고 하는 사람보다도, 더 미친 사람입니다.

그것은 연애에 실패하고 흑암(黑闇)의 기로에서 헤매는 늙은 처녀가 아니면, 신경이 기형적으로 된 시인의 말입니다.

만일 눈물이 진주라면 님이 신물(信物)로 주신 반지를 내놓고는, 세상의 진주라는 진주는 다 티끌 속에 묻어 버리겠습니다.

 

나는 눈물로 장식한 옥패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평화의 잔치에 눈물의 술을 마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본 사람 가운데는, 눈물을 진주라고 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어요, 님의 주신 눈물은 진주 눈물이어요.

나는 나의 그림자가 나의 몸을 떠날 때까지, 님을 위하여 진주 눈물을 흘리겠습니다.

아아 나는 날마다 날마다 눈물의 선경(仙境)에서 한숨의 옥적(玉笛)을 듣습니다.

나의 눈물은 백천(百千) 줄기라도, 방울방울이 창조입니다.

 

눈물의 구슬이여, 한숨의 봄바람이여, 사랑의 성전(聖殿)을 장엄하는 무등등(無等等)의 보물이여.

아아 언제나 공간과 시간을 눈물로 채워서 사랑의 세계를 완성할까요.

 

 

 

님의 손길

한용운

 

님의 사랑은 강철을 녹이는 불보다도 뜨거운데, 님의 손길은 너무 차서 한도가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서늘한 것도 보고, 찬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님의 손길같이 찬 것은 볼 수가 없습니다.

 

국화 핀 서리 아침에 떨어진 잎새를 울리고 오는, 가을 바람도 님의 손길보다는 차지 못합니다.

달이 적고 별에 뿔 나는 겨울밤에, 얼음 위에 쌓인 눈도 님의 손길보다는 차지 못합니다.

감로와 같이 청량한 선사(禪師)의 설법도 님의 손길보다는 차지 못합니다.

 

나의 적은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은 님의 손길이 아니고는 끄는 수가 없습니다.

님의 손길의 온도를 측량할 만한 한난계(寒暖計)는 나의 가슴 밖에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님의 사랑은 불보다도 뜨거워서, 근심 산(山)을 태우고 한(恨) 바다를 말리는데, 님의 손길은 너무도 차서 한도가 없습니다.

 

 

 

님의 얼굴

한용운

 

님의 얼굴을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적당한 말이 아닙니다.

어여쁘다는 말은 인간 사람의 얼굴에 대한 말이요, 님은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을 만치 어여쁜 까닭입니다.

 

자연은 어찌하여 그렇게 어여쁜 님을 인간으로 보냈는지,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자연의 가운데에는 님의 짝이 될 만한 무엇이 없는 까닭입니다.

 

님의 입술 같은 연꽃이 어디 있어요. 님의 살빛 같은 백옥(白玉)이 어디 있어요.

봄 호수에서 님의 눈결 같은 잔물결을 보았습니까. 아침 볕에서 님의 미소 같은 방향(芳香)을 들었습니까.

천국의 음악은 님의 노래의 반향(反響)입니다. 아름다운 별들은 님의 눈빛의 화현(化現)입니다.

 

아아 나는 님의 그림자여요.

님은 님의 그림자 밖에는 비길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님의 얼굴을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적당한 말이 아닙니다.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달을 보며

한용운

 

달은 밝고 당신이 하도 기루었습니다.

자던 옷을 고쳐 입고, 뜰에 나와 퍼지르고 앉아서, 달을 한참 보았습니다.

 

달은 차차차 당신의 얼굴이 되더니 넓은 이마, 둥근 코, 아름다운 수염이 역력히 보입니다.

간 해에는 당신의 얼굴이 달로 보이더니, 오늘 밤에는 달이 당신의 얼굴이 됩니다.

 

당신의 얼굴이 달이기에 나의 얼굴도 달이 되었습니다.

나의 얼굴은 그믐달이 된 줄을 당신이 아십니까.

아아 당신의 얼굴이 달이기에 나의 얼굴도 달이 되었습니다.

 

 

 

당신 가신 때

한용운

 

당신이 가실 때에 나는 다른 시골에 병들어 누워서 이별의 키쓰도 못하였습니다.

그때는 가을바람이 첨으로 나서 단풍이 한 가지에 두서너 잎이 붉었습니다.

 

나는 영원의 시간에서 당신 가신 때를 끊어 내겠습니다. 그러면 시간은 두 도막이 납니다.

시간의 한끝은 당신이 가지고, 한끝은 내가 가졌다가 당신의 손과 나의 손과 마주잡을 때에 가만히 이어 놓겠습니다.

 

그러면 붓대를 잡고 나의 불행한 일만을 쓰려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당신의 가신 때는 쓰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영원의 시간에서 당신 가신 때를 끊어 내겠습니다.

 

 

 

당신은

한용운

 

당신은 나를 보면 왜 늘 웃기만 하셔요. 당신의 찡그리는 얼굴을 좀 보고 싶은데.

나는 당신을 보고 찡그리기는 싫어요. 당신은 찡그리는 얼굴을 보기 싫어하실 줄을 압니다.

그러나 떨어진 도화가 날아서 당신의 입술을 스칠 때에, 나는 이마가 찡그려지는 줄도 모르고 울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금실로 수놓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民籍)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마음

한용운

 

나는 당신의 눈썹이 검고, 귀가 갸름한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이 사과를 따서 나를 주려고, 크고 붉은 사과를 따로 쌀 때에, 당신의 마음이 그 사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둥근 배와 잔나비 같은 허리와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이 나의 사진과 어떤 여자의 사진을 같이 들고 볼 때에, 당신의 마음이 두 사진의 사이에서 초록빛이 되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발톱이 희고, 발꿈치가 둥근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이 떠나시려고, 나의 큰 보석 반지를 주머니에 넣실 때에, 당신의 마음이 보석 반지 너머로 얼굴을 가리고 숨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당신의 편지

한용운

 

당신의 편지가 왔다기에, 꽃밭 매던 호미를 놓고 떼어 보았습니다.

그 편지는 글씨는 가늘고 글줄은 많으나, 사연은 간단합니다.

만일 님이 쓰신 편지이면, 글은 짧을지라도 사연은 길 터인데,

 

당신의 편지가 왔다기에 바느질 그릇을 치워 놓고 떼어 보았습니다.

그 편지는 나에게 잘 있느냐고만 묻고, 언제 오신다는 말은 조금도 없습니다.

만일 님이 쓰신 편지이면 나의 일은 묻지 않더래도, 언제 오신다는 말을 먼저 썼을 터인데.

 

당신의 편지가 왔다기에, 약을 달이다 말고 떼어 보았습니다.

그 편지는 당신의 주소는 다른 나라의 군함입니다.

만일 님이 쓰신 편지이면 남의 군함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편지에는 군함에서 떠났다고 하였을 터인데.

 

 

 

당신이 아니더면

한용운

 

당신이 아니더면 포시럽고 매끄럽던 얼굴이 왜 주름살이 잡혀요.

당신이 기룹지만 않다면, 언제까지라도 나는 늙지 아니할 테여요.

맨 첨에 당신에게 안기던 그때대로 있을 테여요.

 

그러나 늙고 병들고 죽기까지라도, 당신 때문이라면 나는 싫지 안하여요.

나에게 생명을 주든지 죽음을 주든지, 당신의 뜻대로만 하셔요.

나는 곧 당신이어요.

 

 

 

대만화 화상만림향장(代萬化 和尙挽林鄕長)

한용운 

 

君棄人間天上去(군기인간천상거)

人間猶有自心傷(인간유유자심상) 

世情白髮不禁淚(세정백발부금루) 

歲事黃花正斷腸(세사황화정단장) 

哀詞落木寒鴉在(애사낙목한아재) 

痛哭殘山剩水長(통곡잔산잉수장) 

公道斜陽莫可追(공도사양막가추) 

秋風秋雨滿衣裳(추풍추우만의상)

 

그대 이 세상 버리고 천상으로 가느니

남은 우리들만 슬퍼하노라.

세상살이 백발엔 눈물이 나고

철 돌아 국화 피어 애를 끊노나.

애달퍼라 마른 나무엔 차갑게 까마귀 내리고

버려진 산천에 통곡은 끝이 없네.

뉘라서 지는 해 막는다 하리

가을바람 찬비만 옷 흠뻑 적시네.

 

 

 

독야(獨夜)

한용운

 

1

天末無塵明月去(천말무진명월거) 

孤枕長夜聽松琴(고침장야청송금) 

一念不出洞門外(일념부출동문외) 

惟有千山萬水心(유유천산만수심) 

 

맑디맑은 하늘 끝 밝은 달 가고

홀로 누운 긴 밤 솔 소릴 듣는다.

마음은 동문 밖 나가지 않고

오직 산수와 더불어 살고 있네.

 

 

2

玉林垂露月如霰(옥림수로월여산)

隔水砧聲江女寒(격수침성강녀한)

雨岸靑山皆萬古(우안청산개만고)

梅花初發定僧還(매화초발정승환)

 

고운 숲 이슬은 바로 맺히고 달빛 부스러져

물 건너 다듬이 소리에 여심은 차가웁다.

양 언덕 푸른 산천 옛모습 그대로인데

매화꽃 필 적이면 고향 정녕 찾으리.

 

 

3

天末無塵明月去(천말무진명월거) 

孤枕長夜聽松聲(고침장야청송성) 

一念不出洞門外(일념부출동문외) 

惟有千山萬水心(유유천산만수심)

 

하늘 끝 먼지 없어 밝은 달이 가고

외로운 베개 밤도 길어 소나무 소리 듣다

한 생각에도 동구 문 밖 나간 적 없이

오직 일천일만 물의 마음만 있네.

 

 

 

독자에게

한용운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이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 갑니다.

새벽 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을축(乙丑) 팔월 이십구일 밤 끝)

 

 

 

독좌(獨坐)

한용운

 

朔風吹斷侵長夜(삭풍취단침장야) 

隔樹鍾聲獨閉門(격수종성독폐문) 

靑燈聞雪寒生火(청등문설한생화) 

紅帖剪梅香在文(홍첩전매향재문) 

三尺新琴伴以鶴(삼척신금반이학) 

一間明月與之雲(일간명월여지운) 

偶然思得六朝事(우연사득육조사) 

欲說轉頭未見君(욕설전두미견군)

 

삭풍 불어 이다지도 긴긴밤에

나무 건너 종소리 울리면 홀로 문을 닫는다.

푸른 등은 눈 소리 듣곤 차가운 불 피우고

붉은 매화꽃 오려 붙인 무늬엔 향기가 나네.

석 자의 거문고엔 학을 짝지우고

한 칸에 달과 구름 더불어 사누나.

우연히 육조의 일 생각 나서

말하고자 고개 돌리니 그대가 안 계시는구려.

 

 

 

독창풍우(獨窓風雨)

한용운

 

四千里外獨傷情(사천리외독상정) 

日日秋風白髮生(일일추풍백발생) 

驚罷晝眠人不見(경파주면인부견) 

滿庭風雨作秋聲(만정풍우작추성)

 

4천 리 밖에서 홀로 상심하니

가을바람 불 적마다 흰머리 생기네.

낮잠을 놀라 깨니 사람이 없고

뜰 가득 비바람 소리 가을을 몰아오네.

 

 

 

독풍아주자용동파운부매화용기운부매화(讀風雅朱子用東坡韻賦梅花用其韻賦梅花)

한용운

 

江南暮雪有孤村(강남모설유고촌) 

玉樹層層降詩魂(옥수층층강시혼) 

枝枝散入塞外笛(지지산입새외적) 

纖月蒼凉不染昏(섬월창량부염혼) 

夜香連娟歸夢寂(야향련연귀몽적) 

十年虛盟負故園(십년허맹부고원) 

却恥春風多榮辱(각치춘풍다영욕) 

千寒萬寒不事溫(천한만한부사온) 

嬌態不勝帶晩雨(교태부승대만우) 

新意那堪向朝暾(신의나감향조돈) 

左有左松右有竹(좌유좌송우유죽) 

一世相守不掩門(일세상수부엄문) 

雖愛高名易成句(수애고명이성구) 

深看佳處還無言(심간가처환무언) 

君我俱是厭世者(군아구시염세자) 

芳年未蘭共對尊(방년미란공대존)

 

강남땅 외딴 마을 저문 눈 내려

구슬 나무 층층에 시혼 쌓이네.

변방 먼 피리 소리 가지가지 들어 피고

저녁 찬 하늘에 고운 달 어리우네.

밤 향기 아리따워 향기가 번지고

십 년 헛맹세에 고향만 등졌구나.

분별없는 봄바람은 영욕만 많아

천만 추위 닥쳐도 마다하지 않는다.

늦은 비에 교태부릴 수 없듯이

아침 햇살엔들 마음을 빼앗기랴.

이쪽저쪽 어디에나 솔과 대 있거니

한평생 서로 지켜 막을 일 없어라.

누구라도 높은 이름 말하기는 쉽지만

정말로 아름다움 형언할 길 없어라.

그대 나 다 함께 세상을 싫어하니

향기 방창할 때 술 한잔 기울이세.

 

 

 

동경려관청선(東京旅館聽蟬)

한용운

 

佳木淸於水(가목청어수) 

蟬聲似楚歌(선성사초가) 

莫論此外事(막론차외사)

偏入客愁多(편입객수다)

 

아름다운 나무 물보다 맑고

사방의 매미소리 초가 같아라.

이 밖에 아무 일도 말하지 말라

나그네의 시름만 더할 뿐이니

 

 

두견새

한용운

 

두견새는 실컷 운다.

울다가 못 다 울면

피를 흘려 운다.

 

이별한 한(恨)이야 너뿐이랴마는

울래야 울지도 못하는 나는

두견새 못 된 한(恨)을 또다시 어찌하리.

 

야속한 두견새는

돌아갈 곳도 없는 나를 보고도

`불여귀(不如歸) 불여귀(不如歸)’

 

 

 

등고(登高)

한용운

 

偶思一極目(우사일극목) 

東彼危岑峰(동피위잠봉) 

人去靑山外(인거청산외) 

舟行白雨中(주행백우중) 

長河遇酒少(장하우주소) 

大雪入詩空(대설입시공) 

風落枯桐急(풍락고동급) 

殘陽映髮紅(잔양영발홍)

 

문득 멀리 바라보고 싶어

위태로운 동쪽 묏부리 오르니

인적은 청산 밖으로 사라지고

배는 소나기 속을 가누나.

긴 강엔 술 만나기 어렵고

펑펑 쏟아지는 눈은 시의 진경에 드네.

바람은 마른 오동에 쏟아지고

볕은 뉘엿뉘엿 내 머릴 붉히네.

 

 

 

등불 그림자를 보며(燈影)

한용운

 

夜冷窓如水(야냉창여수) 

臥看第二燈(와간제이등) 

雙光不到處(쌍광부도처) 

依舊愧禪僧(의구괴선승)

 

추운 밤 창에 물이 어리면

두 개의 등불 누워서 보게 되지

두 불빛 못 미치는 이 자리에 있으니

선승인 것 못내 부끄럽기만 하다.

 

 

 

등선방후원(登禪房後園)

한용운

 

兩岸寥寥萬事稀(양안요요만사희) 

幽人自賞未輕歸(유인자상미경귀) 

院裡微風日欲煮(원리미풍일욕자) 

秋香無數撲禪衣(추향무수박선의)

 

양 언덕 고요하여 만단사가 쉬는 듯

숨어 살아 스스로 즐기니 돌아가지 않네.

절 안에 미풍 일고 햇살은 따가워

가을 향기 셀 수 없이 옷을 휘감네

 

 

떠날 때의 님의 얼굴

한용운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목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떠나신 뒤에 나의 환상의 눈에 비치는 님의 얼굴은 눈물이 없는 눈으로는 바라볼 수가 없을 만치 어여쁠 것입니다.

님의 떠날 때의 어여쁜 얼굴을 나의 눈에 새기겠습니다.

님의 얼굴은 나를 울리기에는 너무도 야속한 듯하지마는, 님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나의 마음을 즐거웁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 어여쁜 얼굴이 영원히 나의 눈을 떠난다면, 그때의 슬픔은 우는 것보다도 아프겠습니다.

 

 

 

마관주중(馬關舟中)

한용운

 

長風吹盡侵輕夕(장풍취진침경석) 

萬水爭飛落日圓(만수쟁비락일원) 

遠客孤舟烟雨裡(원객고주연우리) 

一壺春酒到天邊(일호춘주도천변)

 

그칠 줄 모르는 바람에 저녁이 내리고

다투어 나는 물결에 가득 내리는 낙일이여.

이역 나그네 안개비 속 외로운 배 띄워

한 병 봄술로 하늘가에 이르렀네.

 

 

 

만족

한용운

 

세상에 만족이 있느냐, 인생에게 만족이 있느냐.

있다면 나에게도 있으리라.

 

세상에 만족이 있기는 있지마는, 사람의 앞에만 있다.

거리는 사람의 팔 길이와 같고, 속력은 사람의 걸음과 비례가 된다.

만족은 잡을래야 잡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다.

만족을 얻고 보면 얻은 것은 불만족이요, 만족은 의연히 앞에 있다.

만족은 우자(愚者)나 성자(聖者)의 주관적 소유가 아니면, 약자의 기대뿐이다.

만족은 언제든지 인생과 수적(竪的) 평행(平行)이다.

나는 차라리 발꿈치를 돌려서 만족의 묵은 자취를 밟을까 하노라.

 

아아 나는 만족을 얻었노라.

아지랑이 같은 꿈과 금(金)실 같은 환상이 님 계신 꽃동산에 둘릴 때에, 아아 나는 만족을 얻었노라.

 

 

 

명상

한용운

 

아득한 명상의 적은 배는 가이없이 출렁거리는 달빛의 물결에 표류되어 멀고 먼 별나라를 넘고 또 넘어서,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 이르렀습니다.

이 나라에는 어린 아기의 미소와 봄 아침과 바다 소리가 합하여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 사람은 옥새(玉璽)의 귀한 줄도 모르고, 황금을 밟고 다니고, 미인의 청춘을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이 나라 사람은 웃음을 좋아하고, 푸른 하늘을 좋아합니다.

 

명상의 배를 이 나라의 궁전에 매었더니, 이 나라 사람들은 나의 손을 잡고 같이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님이 오시면, 그의 가슴에 천국을 꾸미려고 돌아왔습니다.

달빛의 물결은 흰 구슬은 머리에 이고, 춤추는 어린 풀의 장단을 맞추어 우줄거립니다.

 

 

 

무제(無題)

한용운

 

1

桑楡髮已短(상유발이단) 

葵藿心猶長(규곽심유장) 

山家雪未消(산가설미소)

梅發春宵香(매발춘소향)

 

늙은 나이라 머리칼 짧아지고 

해바라기 닮아서 마음은 장하다.

산집엔 눈이 아직 녹지 않았는데

매화꽃 피어 봄밤이 향기롭다.

 

 

2

壟山鸚鵡能言語(농산앵무능언어) 

愧我不及彼鳥多(괴아부급피조다)

雄辯銀兮沈默金(웅변은혜침묵김)

此金買盡自由花(차김매진자유화)

 

농산의 앵무새는 말을 잘할 수가 있는데

나는 저 새만큼도 잘하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 하지마는

나는 이 금으로 자유의 꽃을 다 사고 싶다.

 

 

3

庭樹落陰梅雨晴(정수낙음매우청)

半簾秋氣和禪生(반렴추기화선생) 

故國靑山夢一髮(고국청산몽일발) 

落花深晝渾無聲(락화심주혼무성)

 

뜰 나무 그늘에 장마 그치니

발에 스미는 가을 기운 선에 어울지네.

고국산천은 꿈 한 겹 차인데

꽃 지는 대낮이 소리 죽이네.

 

 

4

黃河濁水日滔滔(황하탁수일도도)

千載俟淸難一遭(천재사청난일조) 

豈獨摩尼源可照(기독마니원가조) 

中流砥柱屹然高(중류지주흘연고)

 

황하의 흐린 물은 날마다 넘실거려

천년을 맑기 기다려도 한 번 만나기 어려운데

어찌 홀로 마니주를 가지고 원천만 비추었나

중류의 흐름에 기둥으로 버텨 우뚝 높았네

 

 

5

愁來厭夜靜(수래염야정)

酒盡怯寒生(주진겁한생)

千里懷人急(천리회인급)    

心隨未到情(심수미도정)

 

시름으로 하여금 고요한 밤이 싫고,   

술도 다 마셔 추울까 겁이 난다. 

천 리 밖 그 사람이 하도 그리워,    

마음은 그곳으로 달려가 서성거린다.

 

 

6

中歲知空劫(중세지공겁) 

依山別置家(의산별치가) 

經臘題殘雪(경랍제잔설) 

迎春論百花(영춘론백화) 

借來十石少(차래십석소) 

除去一雲多(제거일운다) 

將心半化鶴(장심반화학) 

此外又婆娑(차외우파사).

 

중년에 만사 헛것임을 알아

산을 기대어 외딴집 얽었다.

섣달 지나 남은 눈을 읊조리고

봄 맞아 온갖 꽃을 맞는다.

변함없는 돌이사 열 개 빌려 와도 많지 않지만

무상한 구름은 하나가 지나도 적지 않구나.

마음은 거의 학이 되었는데

이 밖에 모든 것 아무 소용 없어라.

 

 

7

此地雁群少(차지안군소) 

鄕音夜夜稀(향음야야희) 

空林月影寂(공림월영적) 

寒戌角聲飛(한술각성비) 

寒柳思春酒(한류사춘주) 

殘砧悲舊衣(잔침비구의) 

歲色落萍水(세색락평수) 

浮生半翠微(부생반취미)

 

이곳엔 기러기도 적어

밤마다 기다려도 고향 소식 드물다.

빈 숲에 달그림자 적적하고

찬 수루엔 피리 소리 나르네.

싸늘한 버들가지 봄술을 생각하고

자지러지는 다듬이 소리 낡은 옷에 서러워.

한 해 빛이 부평초 떨어져 나간 물 같은데

뜨내기 삶은 이미 반 중턱에 닿았네.

 

 

 

반비례

한용운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랫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어요.

 

당신의 얼굴은 `흑암(黑闇)'인가요.

내가 눈을 감은 때에, 당신의 얼굴은 분명히 보입니다그려.

당신의 얼굴은 흑암(黑闇)이어요.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인가요.

당신의 그림자는 달이 넘어간 뒤에, 어두운 창에 비칩니다그려.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이어요.

 

 

 

밤은 고요하고

한용운

 

밤은 고요하고 방은 물로 시친 듯합니다.

이불은 개인 채로 옆에 놓아 두고, 화롯불을 다듬거리고 앉았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화롯불은 꺼져서 찬 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오히려 식지 아니하였습니다.

닭의 소리가 채 나기 전에 그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하였는데, 꿈조차 분명치 않습니다그려.

 

 

 

방백화암(訪白華庵)

한용운

 

春日尋幽逕(춘일심유경) 

風光散四林(풍광산사림)

窮途高興發(궁도고흥발) 

一望極淸眼(일망극청안) 

 

봄날에 그윽한 오솔길 찾아 드니

숲 가득 풍광이 펼쳐지네.

막다른 길에 흥은 일어나

맑은 시정 눈에 어리네.

 

 

 

버리지 아니하면

한용운

 

나는 잠자리에 누워서 자다가 깨고 깨다가 잘 때에, 외로운 등잔불은 각근(恪勤)한 파수꾼처럼 온 밤을 지킵니다.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면, 나는 일생의 등잔불이 되어서, 당신의 백년을 지키겠습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여러 가지 글을 볼 때에, 내가 요구만 하면, 글은 좋은 이야기도 하고, 맑은 노래도 부르고, 엄숙한 교훈도 줍니다.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면, 나는 복종의 백과전서가 되어서, 당신의 요구를 순응하겠습니다.

 

나는 거울을 대하여 당신의 키쓰를 기다리는 입술을 볼 때에, 속임 없는 거울은 내가 웃으면 거울도 웃고, 내가 찡그리면 거울도 찡그립니다.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면, 나는 마음의 거울이 되어서, 속임 없이 당신의 고락을 같이하겠습니다.

 

 

 

별완호학사(別玩豪學士)

한용운

 

萍水蕭蕭不禁別(평수소소부금별) 

送君今日又黃花(송군금일우황화) 

依舊驛亭惆悵在(의구역정조장재)

天涯秋聲自相多(천애추성자상다)

 

부평초 같은 인생 이별이 설어워

그대 보내는 오늘 국화 피었네.

옛 역사엔 슬픔만 차올라

하늘가 가을 소리 내게 몰리네.

 

 

 

병감후원(病監後園)

한용운

 

談禪人亦俗(담선인역속) 

結網我何僧(결망아하승) 

最憐黃葉落(최련황엽락) 

繫秋原無繩(계추원무승)

 

선을 말함은 속된 일이지만

인연을 지어 대는 내가 어찌 중이랴.

안타까운 일은 낙엽지는 일이지만

가을을 매어 둘 노끈이 없구나.

 

 

 

병수(病愁)

한용운

 

靑山一白屋(청산일백옥) 

人少病何多(인소병하다) 

浩愁不可極(호수부가극) 

白日生秋花(백일생추화)

 

푸른 산속 외로운 오막살이

젊은 몸 어이하여 병은 이리 많은지.

온갖 시름 끝없는 날

가을꽃도 피어나네.

 

 

 

복종

한용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금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비는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가장 좋은 기회를 줍니다.

비는 해를 가리고, 세상 사람의 눈을 가립니다.

그러나 비는 번개와 무지개를 가리지 않습니다.

 

나는 번개가 되어 무지개를 타고, 당신에게 가서 사랑의 팔에 감기고자 합니다.

비 오는 날, 가만히 가서 당신의 침묵을 가져온대도, 당신의 주인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비 오는 날에 오신다면, 나는 연잎으로 윗옷을 지어서 보내겠습니다.

당신 비 오는 날에 연잎 옷을 입고 오시면 이 세상에는 알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이 비 가운데로 가만히 오셔서, 나의 눈물을 가져가신대도, 영원한 비밀이 될 것입니다.

비는 가장 큰 권위를 가지고, 가장 좋은 기회를 줍니다.

 

 

 

비밀

한용운

 

비밀입니까, 비밀이라니요, 나에게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대하여 비밀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마는, 비밀은 야속히도 지켜지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의 비밀은 눈물을 거쳐서 당신의 시각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한숨을 거쳐서 당신의 청각으로 들어갔습니다.

나의 비밀은 떨리는 가슴을 거쳐서 당신의 촉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밖의 비밀은 한 쪼각 붉은 마음이 되어서 당신의 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고 마지막 비밀은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은 소리 없는 메아리와 같아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비방

한용운

 

세상은 비방도 많고 시기도 많습니다.

당신에게 비방과 시기가 있을지라도 관심치 마셔요.

비방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태양에 흑점이 있는 것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대하여는 비방할 것이 없는 그것을 비방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조는 사자를 죽은 양이라고 할지언정, 당신이 시련을 받기 위하여 도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고 그것을 비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달빛을 갈꽃으로 알고 흰 모래 위에서 갈매기를 이웃하여 잠자는 기러기를 음란하다고 할지언정, 정직한 당신이 교활한 유혹에 속혀서 청루(靑樓)에 들어갔다고, 당신을 지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에게 비방과 시기가 있을지라도 관심치 마셔요.

 

 

 

사랑

한용운

 

봄물보다 깊으니라

갈(秋)산보다 높으니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만 말하리

 

 

 

`사랑'을 사랑하여요

한용운

 

당신의 얼굴은 봄 하늘의 고요한 별이어요.

그러나 찢어진 구름 사이로 돋아 오는, 반달 같은 얼굴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어여쁜 얼굴만을 사랑한다면, 왜 나의 베갯모에 달을 수놓지 않고 별을 수놓아요.

 

당신의 마음은 티 없는 숫옥(玉)이어요. 그러나 곱기도 밝기도 굳기도, 보석 같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아름다운 마음만을 사랑한다면, 왜 나의 반지를 보석으로 아니하고, 옥으로 만들어요.

 

당신의 시(詩)는 봄비에 새로 눈 트는 금결 같은 버들이어요.

그러나 기름 같은 바다에 피어오르는, 백합꽃 같은 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좋은 문장만을 사랑한다면, 왜 내가 꽃을 노래하지 않고, 버들을 찬미하여요.

 

온 세상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아니할 때에, 당신만이 나를 사랑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여요.

 

 

 

사랑의 끝판

한용운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려다가 초를 거꾸로 꽂았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숭보겠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겠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 줄이 완급을 잃을까 저퍼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어 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사랑의 불

한용운

 

산천초목에 붙는 불은 수인씨(燧人氏)가 내셨습니다.

청춘의 음악에 무도하는 나의 가슴을 태우는 불은 가는 님이 내셨습니다.

 

촉석루를 안고 돌며, 푸른 물결의 그윽한 품에, 논개(論介)의 청춘을 잠재우는 남강(南江)의 흐르는 물아.

모란봉의 키쓰를 받고 계월향(桂月香)의 무정(無情)을 저주하면서 능라도를 감돌아 흐르는 실연자(失戀者)인 대동강아.

그대들의 권위로도 애태우는 불은 끄지 못할 줄을 번연히 아지마는, 입버릇으로 불러 보았다.

만일 그대네가 쓰리고 아픈 슬픔으로 졸이다가, 폭발되는 가슴 가운데의 불을 끌 수가 있다면, 그대들이 님 그리운 사람을 위하여 노래를 부를 때에, 이따금, 이따금 목이 메어 소리를 이루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남들이 볼 수 없는 그대네의 가슴 속에도, 애태우는 불꽃 거꾸로 타들어가는 것을 나는 본다.

 

오오 님의 정열의 눈물과 나의 감격의 눈물이 마주 다시 합류가 되는 때에, 그 눈물의 첫 방울로 나의 가슴의 불을 끄고, 그 다음 방울을 그대네의 가슴에 뿌려 주리라.

 

 

 

사랑의 존재

한용운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을 이름 지을만한 말이나 글이 어디 있습니까.

미소에 눌려서 괴로운 듯한 장미빛 입술인들, 그것을 스칠 수가 있습니까.

눈물의 뒤에 숨어서 슬픔의 흑암면(黑闇面)을 반사하는 가을 물결의 눈인들, 그것을 비출 수가 있습니까.

그림자 없는 구름을 거쳐서, 메아리 없는 절벽을 거쳐서, 마음이 갈 수 없는 바다를 거쳐서, 존재? 존재입니다.

그 나라는 국경이 없습니다. 수명(壽命)은 시간이 아닙니다.

사랑의 존재는 님의 눈과 님의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비밀은 다만 님의 수건에 수놓는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압니다.

 

 

 

사랑의 측량

한용운

 

즐겁고 아름다운 일은 양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사랑은 양이 적을수록 좋은가 봐요.

당신의 사랑은 당신과 나와 두 사람의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양을 알려면, 당신과 나의 거리를 측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사랑의 양이 많고, 거리가 가까우면 사랑의 양이 적을 것입니다.

그런데 적은 사랑은 나를 웃기더니, 많은 사랑은 나를 울립니다.

 

뉘라서 사람이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고 하여요.

당신이 가신 뒤로 사랑이 멀어졌으면, 날마다 날마다 나를 울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어요.

 

 

 

사랑하는 까닭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白髮)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루어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사향(思鄕)

한용운

 

江國一千里(강국일천리) 

文章三十年(문장삼십년) 

心長髮已短(심장발이단) 

風雪到天邊(풍설도천변)

 

물나라는 일천 리이고

문장으로는 삼십 년일세

마음만 길고 머리 이미 짧아져

눈바람은 벌써 하늘가에 있네

 

 

 

사향고(思鄕苦)

한용운

 

寒燈未剔紅連結(한등미척홍연결)

百髓低低未見魂(백수저저미견혼)

梅花入夢化新鶴(매화입몽화신학)

引把衣裳說故園(인파의상설고원) 

 

심지를 따지 않아도 등잔불은 타고 있는 밤에

온몸이 자지러지고 넋 또한 나가고 없네

꿈을 꾸니 매화가 학이 되어 나타나고

옷자락을 끌어당기면서 고향 소식 얘기하네

 

 

 

산가효월(山家曉月)

한용운

 

山窓睡起雪初下(산창수기설초하) 

況復千林欲曙時(황부천림욕서시) 

漁家野戶皆圖畵(어가야호개도화)

疾裡尋詩情亦奇(질리심시정역기)

 

산 창에 잠 깨니 눈 내리기 시작하고

때마침 아득한 수풀에도 새벽이 깃드네

오손도손 마을 집 모다 그림인데

시정에 병든 마음에야 신바람인걸.

 

 

 

 

산주(山晝) - 산의 대낮

한용운

  

群峰蝟集到窓中(군봉위집도창중) 

風雪凄然去歲同(풍설처연거세동)

人境寥寥晝氣冷(인경요요주기냉) 

梅花落處三生空(매화락처삼생공)

 

봉우리 창에 모여 그림인 양하고

눈바람은 몰아쳐 지난해인 듯.

인경(人境)이 고요하고 낮 기운찬 날 

매화꽃 지는 곳에 삼생(三生)이 공(空)이어라.

 

 

 

생명

한용운

 

닻과 치를 잃고 거친 바다에 표류된 적은 생명의 배는, 아직 발견도 아니 된 황금의 나라를 꿈꾸는 한 줄기 희망의 나침반이 되고 항로가 되고 순풍이 되어서, 물결의 한끝은 하늘을 치고, 다른 물결의 한끝은 땅을 치는 무서운 바다에 배질합니다.

님이여, 님에게 바치는 이 적은 생명을 힘껏 껴안아 주셔요.

이 적은 생명이 님의 품에서 으서진다 하여도, 환희의 영지(靈地)에서 순정(殉情)한 생명의 파편은, 최귀(最貴)한 보석이 되어서 쪼각 쪼각이 적당히 이어져서, 님의 가슴에 사랑의 휘장을 걸겠습니다.

님이여 끝없는 사막에 한 가지의 깃들일 나무도 없는 적은 새인 나의 생명을 님의 가슴에 으서지도록 껴안아 주셔요.

그러고 부서진 생명의 쪼각 쪼각에 입맞춰 주셔요.

 

 

 

생의 예술

한용운

 

모르는 결에 쉬어지는 한숨은 봄바람이 되어서, 야윈 얼굴을 비치는 거울에 이슬꽃을 핍니다.

나의 주위에는 화기(和氣)라고는 한숨의 봄바람 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수정이 되어서, 깨끗한 슬픔의 성경(聖境)을 비춥니다.

나는 눈물의 수정이 아니면, 이 세상이 보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한숨의 봄바람과 눈물의 수정은, 떠난 님을 그리워하는 정의 추수입니다.

저리고 쓰린 슬픔은 힘이 되고 열이 되어서, 어린 양과 같은 적은 목숨을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님이 주시는 한숨과 눈물은 아름다운 생의 예술입니다.

 

 

 

선사(禪師)의 설법(說法)

한용운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고.

그 선사는 어지간히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이운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해탈(大解脫)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 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들였습니다.

 

 

 

설야(雪夜)

한용운

 

四山圍獄雪如海(사산위옥설여해) 

衾寒如鐵夢如灰(금한여철몽여회)

鐵窓猶有鎖不得(철창유유쇄부득)

夜聞鐘聲何處來(야문종성하처래)

 

감옥을 에워싼 사면의 산, 눈은 바다 같고

쇠처럼 싸늘한 이불, 꿈도 재처럼 식었으나

쇠 철창으로도 오히려 가두지 못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 오나, 한밤에 들리는 종소리.

 

 

 

설효(雪曉)

한용운

 

曉色通板屋(효색통판옥)

忽忽不可遊(홀홀부가유) 

層郭孤雲去(층곽고운거) 

亂峰殘月收(난봉잔월수) 

寒情키玉樹(한정키옥수) 

新夢過滄洲(신몽과창주) 

風起鍾聲急(풍기종성급) 

乾坤歷歷浮(건곤역력부) 

 

새벽빛이 판잣집에 들어오니

황홀해 어쩔 길 없네.

층층 성곽 위엔 외로운 구름 가고

아찔한 봉우리는 달을 품는다.

차가운 정경은 구슬같이 단장한 나무를 싸돌고

싱그러운 꿈결에 신선마을 지나네.

바람 일어 급해진 종소리에

하늘과 땅이 역역하게 떠 있네.

 

 

 

설후만음(雪後漫吟)

한용운

 

幽人寂寂每縱觀(유인적적매종관) 

眼欲靑時意不輕(안욕청시의불경)

大雪初晴塵世遠(대설초청진세원) 

萬山欲暮壯心生(만산욕모장심생)

經歲漁樵皆入夢(경세어초개입몽) 

忍冬梅竹亦關情(인동매죽역관정) 

萬古英雄一評後(만고영웅일평후) 

更聽四海動春聲(경청사해동춘성)

 

가만히 있던 이도 적적하면 들 구경을 나가니 

푸른 들판 보고픈 뜻을 가볍게 볼 것이 아닐세.

큰 눈이 오고 나면 티끌 세상 사라질까

모든 산이 저물려 하니 장한 마음이 일어나네

지난 세월 고기 잡고 나무하던 시절 꿈에 보이고 

겨울을 견디는 매죽 또한 마음에 끌리는데 

오랜 역사의 영웅들을 훑어본 뒤에

세계에서 일어나는 봄소식을 듣는다.

 

 

 

세한의불도희작(歲寒衣不到戲作)

한용운

 

歲新無舊着(세신무구착)

自覺一身多(자각일신다)

少人知此意(소인지차의) 

范叔近如何(범숙근여하)

 

해는 바뀌어도 옷은 오지 않으니

몸 하나도 주체하기 어려운 줄 비로소 알았네

이런 마음 아는 사람이 많지 않거니

범숙(范叔)은 요사이 그 어떠한지 궁금하여라

 

 

 

수(繡)의 비밀

한용운

 

나는 당신의 옷을 다시 지어 놓았습니다.

심의도 짓고, 도포도 짓고, 자리옷도 지었습니다.

짓지 아니한 것은 적은 주머니에 수놓는 것뿐입니다.

 

그 주머니는 나의 손때가 많이 묻었습니다.

짓다가 놓아두고 짓다가 놓아두고 한 까닭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바느질 솜씨가 없는 줄로 알지마는, 그러한 비밀은 나밖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마음이 아프고 쓰린 때에 주머니에 수를 놓으려면, 나의 마음은 수놓은 금실을 따라서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고, 주머니 속에서 맑은 노래가 나와서, 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러고 아직 이 세상에는, 그 주머니에 널 만한 무슨 보물이 없습니다.

이 적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는 것입니다.

 

 

 

술회(述懷)

한용운

 

心如疎屋不關扉(심여소옥부관비)

萬事曾無入微妙(만사증무입미묘) 

千里今宵無一夢(천리금소무일몽) 

月明秋樹夜紛飛(월명추수야분비)

 

마음이 빗장 없는 집과 같아서

미묘한 무엇 하나 없어라.

천 리에 한 오라기 꿈도 없는 밤

밝은 달에 가을 잎만 우수수 지네.

 

 

 

슬픔의 삼매(三昧)

한용운

 

하늘의 푸른 빛과 같이 깨끗한 죽음은 군동(群動)을 정화(淨化)합니다.

허무의 빛인 고요한 밤은 대지에 군림하였습니다.

힘없는 촛불 아래에 사리뜨리고 외로이 누워 있는 오오 님이여.

눈물의 바다에 꽃배를 띄웠습니다.

꽃배는 님을 싣고 소리도 없이 가라앉았습니다.

나는 슬픔의 삼매(三昧)에 `아공(我空)'이 되었습니다.

 

꽃향기의 무르녹은 안개에 취하여 청춘의 황야에 비틀 걸음치는 미인이여.

죽음을 기러기 털보다도 가벼웁게 여기고,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얼음처럼 마시는 사랑의 광인(狂人)이여.

아아 사랑에 병들어, 자기의 사랑에게 자살을 권고하는 사랑의 실패자여.

그대는 만족한 사랑을 받기 위하여 나의 팔에 안겨요.

나의 팔은 그대의 사랑의 분신인 줄을 그대는 왜 모르셔요.

 

 

 

신청(新晴)

한용운

 

禽聲隔夢冷(금성격몽냉) 

花氣入禪無(화기입선무)

禪夢復相忘(선몽부상망) 

窓前一碧梧(창전일벽오)

 

새 소리의 꿈 저쪽에선 차가움이 감돌고

꽃 내음 무선(無禪)에 들어와 그냥 스러지고 마는구나

선과 꿈을 다시 잊은 곳이 있다면

창 앞의 한 그루 벽오동나무뿐이려니

 

 

 

심우장(尋牛莊)

한용운 

 

1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소냐

또 잃지나 않으리라

 

 

2

선(禪)은 선(禪)이라고 하면 선(禪)이 아니다

그러나 선(禪)이라고 하는 것을 떠나서

별로히 선(禪)이 없는 것이다

선(禪)이 아니면서도 선(禪)인 것이 이른바 선(禪)이다

...... 달빛이냐?

갈꽃이냐? 

흰모래 위에 갈매기냐?

 

 

3

소 찾기 몇 해런가

풀기이 어지럽구야

북이산 기슭 안고

 

해와 달로 감돈다네

이 마음 가시잖으면

정녕코 만나오리

 

찾는 마음 숨는 마음

서로 숨박꼭질 할제

골 아래 흐르는 물

돌길을 뚫고 넘네

말 없이 웃어내거든

소 잡은 줄 아옵소라.

 

 

 

심은 버들

한용운

 

뜰 앞에 버들을 심어

님의 말을 매렸더니

님은 가실 때에

버들을 꺾어 말 채찍을 하였습니다.

 

버들마다 채찍이 되어서

님을 따르는 나의 말도 채 칠까 하였더니

남은 가지 천만사(千萬絲)는

해마다 해마다 보낸 한(恨)을 잡아맵니다.

 

 

 

안해주(安海州)

한용운

 

萬斛熱血十斗膽(만곡열혈십두담) 

淬盡一劍霜有韜(쉬진일검상유도)

霹靂忽破夜寂寞(벽력홀파야적막) 

鐵花亂飛秋色高(철화난비추색고)

 

만 가마의 뜨거운 피와 한 섬의 담력으로

한칼을 달궈 내니 서릿발이 날렸구나

청천의 벽력이 밤의 적막을 격파하니

무쇠 꽃 어지러이 날려 가을빛 드높다.

 

* 안중근 선생의 의거 소식을 듣고 지은 시

 

 

 

알 수 없어요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야행(野行)

한용운

 

1

匹馬蕭蕭渡夕陽(필마소소도석양) 

江堤楊柳變新黃(강제양류변신황)

回頭不見關山路(회두부견관산로) 

萬里秋風憶故鄕(만리추풍억고향) 

 

쓸쓸히 말 몰아 석양을 지나면

강언덕 버드나무 샛노랗게 물들었다.

머리 돌려도 고국 길 안 보이고

만 리라 가을바람 고향 생각뿐.

 

 

尋趣偶過古渡頭(심취우과고도두) 

盈盈一水小魚遊(영영일수소어유)

汀雲已逐西風去(정운이축서풍거)

獨立斜陽見素秋(독립사양견소추)

 

우연히 만나 옛 나루터 지나니

찰랑찰랑 물 속에 어린 고기 놀고

구름은 서풍 쫓아 떠나는데

석양에 홀로 서서 가을을 본다.

 

 

 

약사암도중(藥師庵途中)

한용운

 

十里猶堪半日行(십리유감반일행) 

白雲有路何幽長(백운유로하유장) 

緣溪轉入水窮處(연계전입수궁처) 

深樹無花山自香(심수무화산자향)

 

십 리에서 오히려 반나절의 걸음 견뎌 내니

흰 구름에 길이 있어 어찌 이리 먼가

시내 따라 점점 물길이 끊겼으니

깊은 나무꽃 없이 산은 절로 향기로워.

 

 

 

양진암(養眞庵)

한용운

 

深深別有地(심심별유지)

寂寂若無家(적적약무가) 

花落人如夢(화락인여몽) 

古鍾白日斜(고종백일사)

 

깊디깊은 별유천지

고요하여 집도 없는 듯.

꽃 지는 것이 사람의 꿈과 같아

오래된 종에 석양이 기우네.

 

 

 

어느 것이 참이냐

한용운

 

엷은 사(紗)의 장막이 적은 바람에 휘둘려서 처녀의 꿈을 휩싸듯이, 자취도 없는 당신의 사랑은 나의 청춘을 휘감습니다.

발딱거리는 어린 피는 고요하고 맑은 천국의 음악에 춤을 추고 헐떡이는 적은 영(靈)은 소리없이 떨어지는 천화(天花)의 그늘에 잠이 듭니다.

 

가는 봄비가 드린 버들에 둘려서 푸른 연기가 되듯이, 끝도 없는 당신의 청(淸)실이 나의 잠을 얽습니다.

바람을 따라가려는 짧은 꿈은 이불 안에서 몸부림치고, 강 건너 사람을 부르는 바쁜 잠꼬대는 목 안에서 그네를 뜁니다.

비낀 달빛이 이슬에 젖은 꽃수술을 싸라기처럼 부시듯이 당신의 떠난 한(恨)은 드는 칼이 되어서, 나의 애를 도막 도막 끊어 놓았습니다.

 

문 밖의 시냇물은 물결을 보태려고, 나의 눈물을 받으면서 흐르지 않습니다.

봄 동산의 미친 바람은 꽃 떨어뜨리는 힘을 더하려고, 나의 한숨을 기다리고 섰습니다.

 

 

 

어디라도

한용운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려고 대야에 물을 떠다 놓으면, 당신은 대야 안의 가는 물결이 되어서, 나의 얼굴 그림자를 불쌍한 아기처럼 얼러 줍니다.

근심을 잊을까 하고 꽃동산에 거닐 때에, 당신은 꽃 사이를 스쳐 오는 봄바람이 되어서, 시름 없는 나의 마음에 꽃향기를 묻혀 주고 갑니다.

당신을 기다리다 못하여 잠자리에 누웠더니, 당신은 고요한 어둔 빛이 되어서, 나의 잔 부끄럼을 살뜰히도 덮어줍니다.

 

어디라도 눈에 보이는 데마다 당신이 계시기에, 눈을 감고 구름 위와 바다 밑을 찾아 보았습니다.

당신은 미소가 되어서 나의 마음에 숨었다가, 나의 감은 눈에 입맞추고 `네가 나를 보느냐.'고 조롱합니다.

 

 

 

어적(漁笛)

한용운

 

孤帆風烟一竹秋(고범풍연일죽추)

數聲暗逐荻花流(수성암축적화류)

晩江落照隔紅樹(만강락조격홍수)

半世知音問白鷗(반세지음문백구) 

 

韻絶何堪遯世夢(운절하감둔세몽) 

曲終虛負斷腸愁(곡종허부단장수) 

飄掩律呂撲人冷(표엄률여박인냉) 

滿地蕭蕭散不收(만지소소산부수)

 

외로운 돛배에 안개 낀 가을

은근한 노랫소리 갈대꽃 따라 흐르네.

단풍 너머 강물엔 해가 기울어

반평생 내 노래는 백구가 알리.

 

기막힌 가락에 둔세의 꿈 못 버리고

노래 끝나도 애끊는 시름 견디지 못하네.

떠도는 그 가락 내 가슴에 서늘하여

천지에 차오른 쓸쓸함 거둘 길 없네.

 

 

 

여금봉백야금(與錦峰伯夜唫)

한용운

 

詩酒相逢天一方(시주상봉천일방) 

蕭蕭夜色思何長(소소야색사하장) 

黃花明月若無夢(황화명월약무몽) 

古寺荒秋亦故鄕(고사황추역고향)

 

시와 술이 하늘 한 모퉁이에 만나

소슬한 밤 모습에 생각은 길다.

국화와 밝은 달은 꿈도 없는 듯

옛 절 거친 가을이 바로 고향일세.

 

 

 

여름밤이 길어요

한용운

 

당신이 계실 때에는 겨울밤이 짜릅더니, 당신이 가신 뒤에는 여름밤이 길어요.

책력의 내용이 그릇되었나 하였더니, 개똥불이 흐르고 벌레가 웁니다.

긴 밤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긴 밤은 근심 바다의 첫 물결에서 나와서, 슬픈 음악이 되고 아득한 사막이 되더니, 필경 절망의 성(城) 너머로 가서, 악마의 웃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당신이 오시면, 나는 사랑의 칼을 가지고 긴 밤을 베어서, 일천 도막을 내겠습니다.

당신이 계실 때는 겨울밤이 짜릅더니, 당신이 가신 뒤는 여름밤이 길어요.

 

 

 

영등영(咏燈影)

한용운

 

夜冷窓如水(야랭창여수)

臥看第二燈(와간제이등)

雙光不到處(쌍광불도처)

依舊愧禪僧(의구괴선승)

 

밤이 차서 창문도 물과 같은 밤에

등 그림자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 있었네

두 눈은 아무래도 잘 보이지 않고 희미한데

선승(禪僧)입네, 소리쳤던 내가 되려 부끄럽구나

 

 

 

영산포주중(榮山浦舟中)

한용운

 

漁笛一江月(어적일강월)

酒燈兩岸秋(주등양안추) 

孤帆天似水(고범천사수)

人逐荻花流(인축적화류)

 

어부의 피리 소리, 강과 달이 하나 되고

주막집 등불, 두 언덕 가을빛에 어리네.

돛배는 외로워 하늘도 물 같은데

사람 따라 갈꽃 따라 흘러만 가네.

 

 

 

예술가

한용운

 

나는 서투른 화가여요.

잠 아니 오는 잠자리에 누워서 손가락을 가슴에 대이고, 당신의 코와 입과 두 볼에 새암 파지는 것까지 그렸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적은 웃음이 떠도는 당신의 눈자위는, 그리다가 백 번이나 지웠습니다.

 

나는 파겁 못한 성악가여요.

이웃 사람도 돌아가고 버러지 소리도 그쳤는데, 당신의 가르쳐 주시던 노래를 부르려다가 조는 고양이가 부끄러워서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는 바람이 문풍지를 스칠 때에, 가만히 합창하였습니다.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

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와를 그대로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집과 침대와 꽃밭에 있는 적은 돌도 쓰겠습니다.

 

 

 

오도송(悟道頌)

한용운

 

男兒到處是故鄕(남아도처시고향) 

幾人長在客愁中(기인장재객수중)

一聲喝破三千界(일성갈파삼천계) 

雪裡桃花片片紅(설리도화편편홍)

 

남아가 가는 곳은 어디나 고향인 것을

그 몇 사람들 객수(客愁) 속에 길이 갇혔나

한 마디 버럭 질러 삼천세계(三千世界) 뒤흔드니

눈 속에 점점이 복사꽃만 붉게 지네

 

 

 

오셔요

한용운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당신은 나의 꽃밭에로 오셔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 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오.

나는 나비가 되어서 당신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겠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당신은 나의 품에로 오셔요, 나의 품에는 보드러운 가슴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머리를 숙여서 나의 가슴에 대입시오.

나의 가슴은 당신이 만질 때에는 물같이 보드러웁지마는, 당신의 위험을 위하여는 황금의 칼도 되고, 강철의 방패도 됩니다.

나의 가슴은 말굽에 밟힌 낙화(落花)가 될지언정, 당신의 머리가 나의 가슴에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에게 손을 대일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의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죽음의 허무와 만능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사랑은 무한인 동시에 무궁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함과 포대가 티끌이 됩니다.

죽음의 앞에는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옥중감회(獄中感懷)

한용운

 

一念但覺淨無塵(일념단각정무진)

鐵窓明月自生新(철창명월자생신)

憂樂本空唯心在(우락본공유심재) 

釋迦原來尋常人(석가원래심상인)

 

한 생각에 다만 티끌 없는 청정함 깨달으니

쇠창살에도 밝은 달은 저절로 새롭구나

근심 즐거움 본래 공한것, 오직 마음만 있어

석가모니도 원래가 보통 사람이었어.

 

 

 

옥중음(獄中吟)

한용운

 

壟山鸚鵡能言語(농산앵무능언어) 

愧我不及彼鳥多(괴아부급피조다) 

雄辯銀兮沈默金(웅변은혜침묵김) 

此金買盡自由花(차김매진자유화)

 

농산의 앵무새는 언변도 좋네그려

내 그 새에 못 미치는 걸 많이 부끄러워했지

웅변은 은이라지만 침묵은 금이다

이 금이라야 자유의 꽃 다 살 수 있네.

 

 

 

완월(玩月)

한용운​

 

空山多月色(공산다월색)

孤往極淸遊(고왕극청유)​

情緖爲誰遠(정서위수원)​

夜闌杳不收(야란묘부수)

 

텅 빈 산에 저 많은 달빛이여​

홀로(달이) 가면서도 자극히 맑게 노니네​

정취는 누구를 위해 멀어지는가​

밤이 깊고 아득하니 붙잡을 수 없네

 

 

 

요술

한용운

 

가을 홍수가 적은 시내의 쌓인 낙엽을 휩쓸어 가듯이, 당신은 나의 환락의 마음을 빼앗아 갔습니다. 나에게 남은 마음은 고통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가기 전에 나의 고통의 마음을 빼앗아간 까닭입니다.

만일 당신이 환락의 마음과 고통의 마음을 동시에 빼앗아 간다 하면, 나에게는 아무 마음도 없겠습니다.

 

나는 하늘의 별이 되어서, 구름의 면사(面紗)로 낯을 가리고 숨어 있겠습니다.

나는 바다의 진주가 되었다가, 당신의 구두에 단추가 되겠습니다.

당신이 만일 별과 진주를 따서 게다가 마음을 넣서, 다시 당신의 님을 만든다면, 그때에는 환락의 마음을 넣주셔요.

부득이 고통의 마음도 넣야 하겠거든, 당신의 고통을 빼어다가 넣주셔요.

그리고 마음을 빼앗아 가는 요술은 나에게는 가르쳐 주지 마셔요.

그러면 지금의 이별이 사랑의 최후는 아닙니다.

 

 

 

우고인매제하부작오고여유호기심시(又古人梅題下不作五古余有好奇心試) 

한용운

 

梅花何處在(매화하처재)

雪裡多江村(설리다강촌)

今生寒氷骨(금생한빙골) 

前身白玉魂(전신백옥혼)

形容晝亦奇(형용주역기)

精神夜不昏(정신야부혼) 

長風散鐵笛(장풍산철적) 

暖日入禪園(난일입선원) 

三春詩句冷(삼춘시구냉)

遙夜酒盃溫(요야주배온)

白何帶夜月(백하대야월)

紅堪對朝暾(홍감대조돈) 

幽人抱孤賞(유인포고상)

耐寒不掩門(내한부엄문) 

江南事蒼黃(강남사창황) 

莫向梅友言(막향매우언)

人間知己少(인간지기소)

相對倒深尊(상대도심존)

 

매화꽃 있는 곳이 어디이던가

눈 덮인 강촌일세그려.

이생에 얼음 같은 풍골

전생엔 백옥의 넋 아니었을까.

그 모습 낮에도 기이하고

밤이라 그 정신 밝기만 하네.

바람은 피리 소리 멀리 흐트리고

따스한 해는 선방에 드네.

봄 석 달 시구는 차갑고

밤새워 다사로운 술잔 비우네.

하얀 그 모습 달빛을 데불고

붉은 자태 아침 햇살 보는 듯.

숨어 살아 외로이 칭찬하노니

차다고 너를 두고 문을 닫으랴.

강남의 일 뒤숭숭하다고

매화에겐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인간사에 지기는 흔치 않은 것

너를 바라 깊이 취하리.

 

 

 

우는 때

한용운

 

꽃 핀 아침, 달 밝은 저녁, 비 오는 밤, 그때가 가장 님 그리운 때라고 남들은 말합니다.

나도 같은 고요한 때로는, 그때에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말하고 노는 때에, 더 울게 됩니다.

님 있는 여러 사람들은 나를 위로하여 좋은 말을 합니다마는, 나는 그들의 위로하는 말을 조소로 듣습니다.

그때에는 울음을 삼켜서, 눈물을 속으로 창자를 향하여 흘립니다.

 

 

 

우중독(雨中獨)

한용운

 

海國多風雨 高堂五月寒(해국다풍우 고당오월한)

有心萬里客 無語對靑巒(유심만리객 무어대청만)

 

일본 땅 섬나라는 비바람이 자주 있어

내 머무는 높다란 집 오월에도 아직 춥다

만 리의 나그넨 말 잃고 푸른 산만 바라보네

 

 

 

월방중(月方中)

한용운

 

萬國皆同觀(만국개동관)

千人各自遊(천인각자유)

皇皇不可取(황황불가취)

迢迢那堪收(초초나감수)

 

온갖 나라 다 함께 우러러보고

모든 사람 제각기 즐기며 노네

너무나 빛나기에 가질 수 없고

먼 하늘 걸렸거니 어찌 손대리

 

 

 

월욕락(月欲落)

한용운

 

松下蒼煙歇(송하창연헐) 

鶴邊淸夢遊(학변청몽유) 

山橫鼓角罷(산횡고각파) 

寒色盡情收(한색진정수)

 

소나무 밑 파란 연기 멈추고

학의 주변엔 맑은 꿈이 노닌다

산허리에 나팔 소리도 멎어

싸늘한 빛이 정을 다해 거둔다.

 

 

 

월욕생(月欲生)

한용운

 

衆星方奪照(중성방탈조)

百鬼皆停遊(백귀개정유)

夜色漸墜地(야색점추지)

千林各自收(천림각자수) 

 

뭇 별이 막 빛을 빼앗기니

온갖 귀신도 놀이를 멈추다

밤 색깔 점점 땅에 떨어져

모든 숲은 제각기 거둬들이네.

 

 

 

월초생(月初生)

한용운

 

蒼岡白玉出(창강백옥출)

碧澗黃金遊(벽간황김유)

山家貧莫恨(산가빈막한) 

天寶不勝收(천보부승수)

 

검푸른 산에 흰 옥돌이 솟고

파란 시내엔 황금이 노닌다

산집이여 가난을 한탄 말라

하늘 보배를 다 거두지 못해.

 

 

 

음청(唫晴)

한용운

 

庭樹落陰梅雨晴(정수낙음매우청) 

半簾秋氣和禪生(반렴추기화선생)

故國靑山夢一髮(고국청산몽일발) 

落花深晝渾無聲(낙화심주혼무성)

 

나무들은 뜰에 그림자 떨구고 장맛비 개더니

발로 스미는 가을 기운 선(禪)인 양 화한 기운 도네

고국산천 꿈속이면 바로 거기가 거긴데

대낮에 꽃지는 소리도 없어 희미해지네

 

 

 

의심하지 마셔요

한용운

 

의심하지 마셔요. 당신과 떨어져 있는 나에게 조금도 의심을 두지 마셔요.

의심을 둔대야 나에게는 별로 관계가 없으나, 부질없이 당신에게 고통의 숫자만 더할 뿐입니다.

나는 당신의 첫사랑의 팔에 안길 때에, 온갖 거짓의 옷을 다 벗고, 세상에 나온 그대로의 발가벗은 몸을 당신의 앞에 놓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당신의 앞에는 그때에 놓아둔 몸을 그대로 받들고 있습니다.

 

만일 인위(人爲)가 있다면, `어찌하여야 첨 마음을 변치 않고 끝끝내 거짓 없는 몸을 님에게 바칠고.' 하는 마음뿐입니다.

당신의 명령이라면, 생명의 옷까지도 벗겠습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당신을 그리워하는 나의 `슬픔'입니다.

당신이 가실 때에 나의 입술에 수가 없이 입맞추고, `부디 나에게 대하여 슬퍼하지 말고 잘 있으라.'고 한, 당신의 간절한 부탁에 위반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용서하여 주셔요.

당신을 그리워하는 슬픔은 곧 나의 생명인 까닭입니다.

만일 용서하지 아니하면, 후일에 그에 대한 벌을 풍우(風雨)의 봄 새벽의 낙화(落花)의 수만치라도 받겠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동앗줄에 휘감기는 체형도 사양치 않겠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혹법(酷法) 아래에 일만 가지로 복종하는 자유형(自由刑)도 받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에게 의심을 두시면, 당신의 의심의 허물과 나의 슬픔의 죄를 맞비기고 말겠습니다.

당신에게 떨어져 있는 나에게 의심을 두지 마셔요. 부질없이 당신에게 고통의 숫자를 더하지 마셔요.

 

 

 

이별

한용운

 

아아 사람은 약한 것이다, 여린 것이다, 간사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사랑의 이별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음으로 사랑을 바꾸는 님과 님에게야, 무슨 이별이 있으랴.

이별의 눈물은 물거품의 꽃이요, 도금한 금방울이다.

 

칼로 베힌 이별의 `키쓰'가 어디 있느냐.

생명의 꽃으로 빚은 이별의 두견주(杜鵑酒)가 어디 있느냐.

피의 홍보석(紅寶石)으로 만든 이별의 기념 반지가 어디 있느냐.

이별의 눈물은 저주의 마니주(摩尼珠)요, 거짓의 수정이다.

 

사랑의 이별은 이별의 반면에, 반드시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있는 것이다.

혹은 직접의 사랑은 아닐지라도, 간접의 사랑이라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별하는 애인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애인을 자기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면, 무궁을 회전하는 시간의 수레바퀴에 이끼가 끼도록 사랑의 이별은 없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참'보다도 참인 님의 사랑엔, 죽음보다도 이별이 훨씬 위대하다.

죽음이 한 방울의 찬 이슬이라면, 이별은 일천 줄기의 꽃비다.

죽음이 밝은 별이라면, 이별은 거룩한 태양이다.

 

생명보다 사랑하는 애인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는, 괴롭게 사는 것이 죽음보다도 더 큰 희생이다.

이별은 사랑을 위하여 죽지 못하는 가장 큰 고통이요, 보은이다.

애인은 이별보다 애인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까닭이다.

사랑은 붉은 촛불이나 푸른 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 마음을 서로 비치는 무형(無形)에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애인을 죽음에서 잊지 못하고, 이별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애인을 죽음에서 웃지 못하고, 이별에서 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인을 위하여는 이별의 원한을 죽음의 유쾌로 갚지 못하고, 슬픔의 고통으로 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차마 죽지 못하고, 차마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는 것이다.

 

그러고 진정한 사랑은 곳이 없다.

진정한 사랑은 애인의 포옹만 사랑할 뿐 아니라, 애인의 이별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고 진정한 사랑은 때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간단(間斷)이 없어서 이별은 애인의 육(肉)뿐이요, 사랑은 무궁이다.

아아 진정한 애인을 사랑함에는 죽음의 칼을 주는 것이요, 이별은 꽃을 주는 것이다.

아아 이별의 눈물은 진이요 선이요 미다.

아아 이별의 눈물은 석가요 모세요 잔다크다.

 

 

 

이별은 미의 창조

한용운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系]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인과율(因果律)

한용운

 

당신은 옛 맹서를 깨치고 가십니다.

당신의 맹서는 얼마나 참되었습니까. 그 맹서를 깨치고 가는 이별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참 맹서를 깨치고 가는 이별은 옛 맹서로 돌아올 줄을 압니다. 그것은 엄숙한 인과율(因果律)입니다.

나는 당신과 떠날 때에 입맞춘 입술이 마르기 전에, 당신이 돌아와서 다시 입맞추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당신의 가시는 것은 옛 맹서를 깨치려는 고의가 아닌 줄을 나는 압니다.

비겨 당신이 지금의 이별을 영원히 깨치지 않는다 하여도, 당신의 최후의 접촉을 받은 나의 입술을 다른 남자의 입술에 대일 수는 없습니다.

 

 

 

일광남호(日光南湖)

한용운

 

神拖山中湖水開(신타산중호수개) 

山光水色共徘徊(산광수색공배회) 

十數小船一兩笛(십수소선일양적) 

夕陽唱倒漁歌來(석양창도어가래)

 

신타 산중에 호수가 열려

산 모습 물빛이 함께 맴도네.

여러 척의 작은 배에 몇 가닥 피리 소리

석양 기울면서 뱃노래 돌아오네.

 

 

 

자경귀오세암증박한영(自京歸五歲庵贈朴漢永)

한용운

 

一天明月君何在(일천명월군하재)

滿地丹楓我獨來(만지단풍아독래) 

明月丹楓共相忘(명월단풍공상망)

唯有我心共徘徊(유유아심공배회)

 

하늘 가득 달 밝은데 그대 어디 계신지

온 세상 단풍에 묻혀 홀로 왔어요.

밝은 달 단풍은 함께 잊어도

내 마음 오직 그대 함께 헤매오.

 

 

 

자민(自悶)

한용운

 

枕上夢何苦(침상몽하고)

月中思亦長(월중사역장)

一身受二敵(일신수이적)

朝來鬢髮蒼(조래빈발창)

 

잠들면 잠든 대로 꿈은 괴롭고

깨면 달빛 속에 끝없는 생각.

한 몸으로 이 두 적(敵) 어이 견디랴.

아침 되니 어느덧 백발 되었네.

 

 

 

자락(自樂)

한용운

 

佳辰傾白酒(가진경백주) 

良夜賦新詩(양야부신시)

身世兩忘去(신세량망거) 

人間自四時(인간자사시)

 

철이 마침 좋은지라 막걸리 한 잔 기울이고

이 좋은 밤 어찌 시 한 수가 없을 수 있겠는가

나와 세상 둘이 같이 아울러 세사를 잊었으니

사람은 저절로 네 계절이 돌아가는 것 맞네

 

 

 

자소시벽(自笑詩癖)

한용운

 

詩瘦太酣反奪人(시수태감반탈인) 

紅顔減肉口無珍(홍안감육구무진)

白說吾輩出世俗(백설오배출세속) 

可憐聲病失靑春(가련성병실청춘)

 

시를 너무 즐겨 야위었으니 사람을 탈진하게 했고

얼굴에 살 빠지고 입맛도 잃고 말았네

친구들은 세속을 떠난 양 말을 하지만

가련하구려, 청춘을 삼켜버린 병이라고 소리하네

 

 

 

자유 정조(自由 貞操)

한용운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다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정조보다도 사랑입니다.

 

남들은 나더러 시대에 뒤진 낡은 여성이라고 삐죽거립니다. 구구한 정조를 지킨다고.

그러나 나는 시대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과 정조의 심각한 비탄을 하여 보기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자유 연애의 신성(神聖)(?)을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자연(大自然)을 따라서 초연 생활(超然生活)을 할 생각도 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구경(究竟), 만사가 다 저의 좋아하는 대로 말한 것이요, 행한 것입니다.

나는 님을 기다리면서 괴로움을 먹고 살이 찝니다. 어려움을 입고 키가 큽니다.

나의 정조는 `자유 정조(自由貞操)'입니다.

 

 

 

잠꼬대

한용운

 

사랑이라는 것은 다 무엇이냐, 진정한 사람에게는 눈물도 없고 웃음도 없는 것이다.

사랑의 뒤웅박을 발길로 차서 깨뜨려 버리고, 눈물과 웃음을 티끌 속에 합장(合葬)을 하여라.

이지(理智)와 감정(感情)을 두드려 깨쳐서 가루를 만들어 버려라.

그러고 허무의 절정에 올라가서 어지럽게 춤추고 미치게 노래하여라.

그러고 애인과 악마를 똑같이 술을 먹여라.

그러고 천치가 되든지 미치광이가 되든지 산 송장이 되든지 하여 버려라.

 

그래 너는 죽어도 사랑이라는 것은 버릴 수가 없단 말이냐.

그렇거든 사랑의 꽁무니에 도룽태를 달아라.

그래서 네 멋대로 끌고 돌아다니다가, 쉬고 싶으거든 쉬고, 자고 싶으거든 자고, 살고 싶으거든 살고, 죽고 싶으거든 죽어라.

사랑의 발바닥에 말목을 쳐 놓고, 붙들고 서서 엉엉 우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 세상에는 이마빡에다 `님'이라고 새기고 다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연애는 절대 자유요, 정조는 유동(流動)이요, 결혼식장은 임간(林間)이다.'

나는 잠결에 큰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아아 혹성(惑星)같이 빛나는 님의 미소는 흑암(黑闇)의 광선에서 채 사라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잠의 나라에서 몸부림치던 사랑의 눈물은 어느덧 베개를 적셨습니다.

용서하셔요, 님이여, 아무리 잠이 지은 허물이라도, 님이 벌을 주신다면, 그 벌을 잠을 주기는 싫습니다.

 

 

 

잠 없는 꿈

한용운

 

나는 어느 날 밤에 잠 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나의 님은 어디 있어요, 나는 님을 보러 가겠습니다. 님에게 가는 길을 가져다가 나에게 주셔요, 검이여'

`너의 가려는 길은 너의 님이 오려는 길이다. 그 길을 가져다 너에게 주면, 너의 님은 올 수가 없다.'

`내가 가기만 하면, 님은 아니 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너의 님의 오려는 길을 너에게 갖다 주면, 너의 님은 다른 길로 오게 된다. 네가 간대도 너의 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면 그 길을 가져다가 나의 님에게 주셔요.'

`너의 님에게 주는 것이 너에게 주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저의 길이 각각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야 이별한 님을 만나 보겠습니까.'

`네가 너를 가져다가 너의 가려는 길에 주어라. 그러하고 쉬지 말고 가거라.'

`그리 할 마음은 있지마는, 그 길에는 고개도 많고 물도 많습니다. 갈 수가 없습니다.'

검은 `그러면 너의 님을 가슴에 안겨주마.' 하고 나의 님을 나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나는 나의 님을 힘껏 껴안았습니다.

나의 팔이 나의 가슴을 아프도록 다칠 때에, 나의 두 팔에 베어진 허공은 나의 팔을 뒤에 두고 이어졌습니다.

 

 

 

정부원(征婦怨)

한용운

 

妾本無愁郞有愁(첩본무수랑유수)

年年無日不三秋(연년무일부삼추)

紅顔憔悴亦何傷(홍안초췌역하상) 

只恐阿郞又白頭(지공아랑우백두) 

昨夜江南採蓮去(작야강남채련거)

淚水一夜添江流(루수일야첨강류) 

雲乎無雁水無魚(운호무안수무어) 

雲水水雲共不看(운수수운공부간)

心如落花謝春風(심여락화사춘풍)

夢隨飛月渡玉關(몽수비월도옥관)

雙手慇懃敬天祝(쌍수은근경천축) 

郎與春色一馬還(낭여춘색일마환)

阿郞不到春已暮(아랑부도춘이모)

風雨無數打花林(풍우무수타화림) 

妾愁不必問多少(첩수부필문다소) 

春江夜湖不言深(춘강야호부언심)

一層有心一層愁(일층유심일층수)

賣花賣月學無心(매화매월학무심)

 

첩은 원래 시름없고, 낭군은 수심 있기에

해마다 하루가 3년 같지 않은 날 없어서

혈색 좋은 얼굴 여위어도 무엇이 마음 상하랴만

다만 낭군께서 흰머리 되어 감이 두렵기만 하오

지난밤엔 강남으로 연꽃 캐러 갔다가

밤새 흘린 눈물을 흐르는 강물에 보태 놓았소

구름에는 기러기 없고 물엔 고기도 없으니

구름과 물, 물과 구름을 다 바라보지도 않소

마음은 지는 꽃이 봄바람을 여의고 가듯 하고

꿈은 달을 따라 날아 옥문관(玉門關)을 건너네

두 손 모아 은근히 하늘 받들어 축원함은

낭군이 봄빛과 함께 말 타고 오기 바람인데

낭군은 오지 않고 봄은 이미 저물었으니

비바람 셀 수 없이 꽃 숲을 휘저 놓네

첩의 시름 얼마나 되나 물을 필요 없으니

봄의 강물 밤 호수도 깊단 말 못 하오

마음 한층 깊을수록 시름도 한층 높으니

꽃도 팔고 달도 팔아 무심을 배우리라.

 

 

 

정천한해(情天恨海)

한용운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 하늘을 따를소냐.

봄 바다가 깊다기로

한(恨) 바다만 못하리라.

 

높고 높은 정(情) 하늘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

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恨) 바다가

병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다면

정(情) 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으면

한(恨)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

 

아아 정(情) 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恨)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는 옅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짜릅던지

정(情) 하늘에 오르고 한(恨) 바다를 건너려면

님에게만 안기리라.

 

 

 

중양(重陽)

한용운

 

九月九日百潭寺(구월구일백담사) 

萬樹歸根病離身(만수귀근병리신) 

閒雲不定孰非客(한운부정숙비객) 

黃花已發我何人(황화이발아하인) 

溪磵水落晴有玉(계간수락청유옥) 

鴻雁秋高逈無塵(홍안추고형무진) 

午來更起蒲團上(오래갱기포단상)

千峰入戶碧嶙峋(천봉입호벽린순)

 

구월 초아흐래 중양절의 백담사

온갖 나뭇잎이 떨어지니 병도 내 몸 떠나

한가한 구름 정처 없이 누구나 나그네 아니며

누런 국화꽃 이미 피었으니 나는 또 누구

시내에는 물이 잦아 옥돌이 드러나고

기러기 가을 하늘 높아 아득히 먼지 없다

낮 되자 다시 부들방석 위로 일어나니

일천 봉우리 방에 들어 푸른 빛으로 솟네.

 

 

 

즉사(卽事)

한용운

 

1

一庵何寂寞(일암하적막)

塊坐依欄干(괴좌의란간) 

枯葉作聲惡(고엽작성악)

飢鳥爲影寒(기조위영한) 

歸雲斷古木(귀운단고목)

落日半空山(낙일반공산) 

獨對千峯雪(독대천봉설)

淑光天地還(숙광천지환)

 

암자에 쌓인 적막 속에

흙무더기처럼 난간에 기대 앉으니

마른 나뭇잎 괴로운 소리를 내고

배 주린 새 그림자는 차갑기만 하다.

돌아가던 구름 고목에 걸리고

지는 해는 절반이 빈 산에 걸린다.

홀로 하 많은 눈 봉우리 대해 앉으니

봄빛은 천지에 돌아오네.

  

 

2

北風雁影絶(북풍안영절) 

白日客愁寒(백일객수한) 

冷眼觀天地(냉안관천지) 

一雲萬古閒(일운만고한)

 

북녘 바람이 기러기 자취를 끊어 버린

한낮에도 나그네 시름이 차갑네,

싸늘한 눈길 하늘 땅 바라보니

한 떨기 구름만 만고한에 두둥실.

 

 

3

鳥雲散盡孤月樓(조운산진고월루) 

遠樹寒光歷歷生(원수한광역력생) 

空山雁去今無夢(공산안거금무몽)

殘雪人歸夜有聲(잔설인귀야유성) 

紅梅開處禪初合(홍매개처선초합)

白雨過時茶半淸(백우과시다반청) 

虛設虎溪亦自笑(허설호계역자소) 

停思還憶陶淵明(정사환억도연명)

 

먹구름 흩어진 곳 달 혼자 놓이니

먼 나무에 찬 빛이 역력하네.

빈 산에는 기러기도 가고 잠도 오지 않는데

잔설 밟아 밤길 가는 발자국 소리.

홍매 피는 곳에 삼매에 비롯 들어

소나기 지날 때 차맛도 맑네.

담소하다 호계를 지나 버린 일 우스워

가만히 도연명을 생각해 보네

 

 

4

殘雪日光動(잔설일광동) 

遠林春意過(원림춘의과)

山屋病初起(산옥병초기)

新情不奈何(신정부내하)

 

눈은 자지러져 가고 햇빛 춤을 추어

먼 숲에 봄뜻 스치네.

산집에 병이 떠나고

새 움트는 정 어쩔 수 없어라.  

 

 

5

朔風吹白日(삭풍취백일)

獨立對江城(독립대강성) 

孤煙接樹直(고연접수직)

輕夕落庭橫(경석낙정횡)

千里山客滴(천리산객적)

一方雪意生(일방설의생)

詩思動邊塞(시사동변새)

侶鴻過太淸(려홍과태청)

 

삭풍 해를 몰아치는 날

홀로 강성을 대해 섰다.

외로운 연기 나무를 더듬어 솟고

저녁은 사뿐이 뜰을 가로지른다.

천 리에 산 모습 스며 내리는데

어디에 눈이라도 내릴 듯.

시정이 변방을 움직이는데

짝지은 기러기 맑은 하늘 지나가네.

 

6

紅梅開處禪初合(홍매개처선초합)

白雨過時茶半淸(백우과시다반청)

虛設虎溪亦自笑(허설호계역자소) 

停思還憶陶淵明(정사환억도연명) 

 

홍매(紅梅)꽃이 벌어지니 중은 삼매에 들고

소낙비 지나가매 차도 한결 맛이 맑아

호계(虎溪)까지 전송하고 크게 웃다니!

잠시 도연명의 인품 그리어 보네.

 

 

7

鶴守梅花月(학수매화월)

玉流松柏風(옥류송백풍)

堪憐心學竹(감련심학죽)

得眞失之空(득진실지공)

 

학은 달밤에 매화를 지키고

옥같은 시냇물에 솔바람 소리

가련한 맘 감내함을 대나무에 배우니

버리고 비워서 진리를 얻어라 하네

 

 

 

증별(贈別)

한용운

 

天下逢未易(천하봉미이)

獄中別亦奇(옥중별역기)

舊盟猶未冷(구맹유미랭)

莫負黃花期(막부황화기)

 

천하에서 만나기도 쉽지 않을 일인데

감옥 안에서의 이별은 역시 기이하다

옛 맹세 오히려 식기 전에

국화꽃 시기를 저버리지 말자.

 

 

 

증영호화상술미상견(贈映湖和尙述未嘗見)

한용운

 

玉女彈琴楊柳屋(옥녀탄금양유옥) 

鳳凰起舞下神仙(봉황기무하신선)

竹外短壇人不見(죽외단장인부견) 

隔窓秋思杳如年(격창추사묘여년)

 

버드나무집 고운님의 거문고 타는 소리에

봉황은 춤을 추고 신선이 내려오네

대밭 건너 담 안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는데

창밖엔 가을 시름으로 세월만 아득해라

 

 

 

지는 해

한용운

 

지는 해는

성공한 영웅의 말로(末路) 같이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창창한 남은 빛이

높은 산과 먼 강을 비치어서

현란한 최후를 장식하더니

홀연히 엷은 구름의 붉은 소매로

뚜렷한 얼굴을 슬쩍 가리며

결별의 미소를 띄운다

 

큰 강의 급한 물결은 만가(輓歌)를 부르고

뭇산의 비낀 그림자는 임종의 역사를 쓴다

 

 

 

진주

한용운

 

언제인지 내가 바닷가에 가서 조개를 주웠지요. 당신은 나의 치마를 걷어 주셨어요. 진흙 묻는다고.

집에 와서는 나를 어린 아기 같다고 하셨지요, 조개를 주워다가 장난한다고, 그러고 나가시더니, 금강석을 사다 주셨습니다, 당신이.

 

나는 그때에 조개 속에서 진주를 얻어서, 당신의 적은 주머니에 넣드렸습니다.

당신이 어디 그 진주를 가지고 계셔요, 잠시라도 왜 남을 빌려 주셔요.

 

 

 

차라리

한용운

 

님이여 오셔요. 오시지 아니하려면 차라리 가셔요. 가려다 오고, 오려다 가는 것은 나에게 목숨을 빼앗고, 죽음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책망하려거든, 차라리 큰 소리로 말씀하여 주셔요.

침묵으로 책망하지 말고, 침묵으로 책망하는 것은 아픈 마음을 얼음 바늘로 찌르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아니 보려거든, 차라리 눈을 돌려서 감으셔요. 흐르는 곁눈으로 흘겨보지 마셔요. 곁눈으로 흘겨보는 것은 사랑의 보(褓)에 가시의 선물을 싸서 주는 것입니다.

 

 

 

차영호화상향적운(次映湖和尙香積韻)

한용운

  

萬木森凉孤月明(만목삼량고월명) 

碧雲層雪夜生溟(벽운층설야생명) 

十萬株玉收不得(십만주옥수불득) 

不知是鬼是丹靑(불지시귀시단청).

 

숲은 썰렁한데 외로운 달빛이

구름과 눈 비추니 완연한 바다.

십만 그루 그 구슬 하도 고와서

조화인 줄 모르고 그림인가고.

 

 

 

착인(錯認)

한용운

 

내려오셔요, 나의 마음이 자릿자릿하여요, 곧 내려오셔요.

사랑하는 님이여, 어찌 그렇게 높고 가는 나뭇가지 위에서 춤을 추셔요.

두 손으로 나뭇가지를 단단히 붙들고 고이고이 내려오셔요.

에그 저 나무 잎새가 연꽃 봉오리 같은 입술을 스치겠네, 어서 내려오셔요.

 

`네네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잠자거나 죽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나는 아시는 바와 같이 여러 사람의 님인 때문이어요. 향기로운 부르심을 거스르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고 버들가지에 걸린 반달은 해쭉해쭉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였습니다.

나는 적은 풀잎만치도 가림이 없는 발가벗은 부끄럼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빠른 걸음으로 잠자리에 들어가서 눈을 감고 누웠습니다.

내려오지 않는다던 반달이 사뿐사뿐 걸어와서, 창 밖에 숨어서 나의 눈을 엿봅니다.

부끄럽던 마음이 갑자기 무서워서 떨려집니다.

 

 

 

찬송(讚頌)

한용운

 

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金)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천국의 사랑의 받읍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 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십니다.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의 보살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에 봄바람이여.

 

 

 

참말인가요

한용운

 

그것이 참말인가요, 님이여, 속임 없이 말씀하여 주셔요.

당신을 나에게서 빼앗아 간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그대는 님이 없다.'고 하였다지요.

그래서 당신은 남 모르는 곳에서 울다가, 남이 보면 울음을 웃음으로 변한다지요.

사람의 우는 것은 견딜 수가 없는 것인데, 울기조차 마음대로 못하고 웃음으로 변하는 것은 죽음의 맛보다도 더 쓴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변명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명의 꽃가지를 있는 대로 꺾어서, 화환을 만들어 당신의 몸에 걸고, `이것이 님의 님이라.'고 소리쳐 말하겠습니다.

 

그것이 참말인가요, 님이여, 속임 없이 말씀하여 주셔요.

당신을 나에게서 빼앗아 간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그대의 님은 우리가 구하여 준다.'고 하였다지요.

그래서 당신은, `독신 생활을 하겠다.'고 하였다지요.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분풀이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많지 않은 나의 피를 더운 눈물에 섞어서, 피에 목마른 그들의 칼에 뿌리고, `이것이 님의 님이라.'고 울음 섞어서 말하겠습니다.

 

 

 

참아주셔요

한용운

 

나는 당신을 이별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님이여, 나의 이별을 참아 주셔요.

당신은 고개를 넘어갈 때에, 나를 돌아보지 마셔요. 나의 몸은 한 적은 모래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님이여, 이별을 참을 수가 없거든, 나의 죽음을 참아 주셔요.

나의 생명의 배는 부끄럼의 땀의 바다에서, 스스로 폭침(爆沈)하려 합니다. 님이여, 님의 입김으로 그것을 불어서, 속히 잠기게 하여 주셔요. 그리고 그것을 웃어 주셔요.

 

님이여, 나의 죽음을 참을 수가 없거든, 나를 사랑하지 말아 주셔요. 그리하고 나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할 수 없도록 하여 주셔요.

나의 몸은 터럭 하나도 빼지 아니한 채로, 당신의 품에 사라지겠습니다.

님이여, 당신과 내가 사랑의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참아 주셔요. 그리하여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말고, 나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할 수가 없도록 하여 주셔요. 오오 님이여.

 

 

 

첫 키쓰

한용운

 

마셔요 제발 마셔요

보면서 못 보는 체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입술을 다물고 눈으로 말하지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뜨거운 사랑에 웃으면서 차디 찬 잔 부끄럼에 울지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세계의 꽃을 혼자 따면서 항구(亢舊)에 넘쳐서 떨지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미소는 나의 운명의 가슴에서 춤을 춥니다. 새삼스럽게 스스러워 마셔요

 

 

 

청한(淸寒)

한용운

 

待月梅何鶴(대월매하학) 

依梧人亦鳳(의오인역봉) 

通宵寒不盡(통소한불진) 

遶屋雪爲峰(요옥설위봉)

 

달을 기다려 매화는 학인 양 서 있고

오동에 기대니 사람 또한 봉황일세.

밤새워 추위는 그치지 않고

눈은 온통 집을 둘러싸 봉우리를 이룩했네

 

 

 

청효(淸曉) - 맑은 새벽

한용운

 

高樓獨坐絶群情(고루독좌절군정)

庭樹寒從曉月生(정수한종효월생)

一堂如水收人氣(일당여수수인기)

詩思有無和笛聲(시사유무화적성)

 

다락에 앉으니 뭇 생각 끊이는데

새벽달 따라 추위가 생겨나...

물을 끼얹은 듯 인기척 없는 곳

어렴풋한 시상 피리에 화답하느니!

 

 

 

최초의 님

한용운

 

맨 첨에 만난 님과 님은 누구이며 어느 때인가요.

맨 첨에 이별한 님과 님은 누구이며 어느 때인가요.

맨 첨에 만난 님과 님이 맨 첨으로 이별하였습니까, 다른 님과 님이 맨 첨으로 이별하였습니까.

 

나는 맨 첨에 만난 님과 님이 맨 첨으로 이별한 줄로 압니다.

만나고 이별이 없는 것은 님이 아니라 나입니다.

이별하고 만나지 않는 것은 님이 아니라 길 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님에 대하여 만날 때에 이별을 염려하고, 이별할 때에 만남을 기약합니다.

그것은 맨 첨에 만난 님과 님이 다시 이별한 유전성의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만나지 않는 것도 님이 아니요, 이별이 없는 것도 님이 아닙니다.

님은 만날 때에 웃음을 주고, 떠날 때에 눈물을 줍니다.

만날 때의 웃음보다 떠날 때의 눈물이 좋고, 떠날 때의 눈물보다 다시 만나는 웃음이 좋습니다.

아아 님이여, 우리의 다시 만나는 웃음은 어늬 때에 있습니까.

 

 

 

추야우(秋夜雨) - 가을 밤비

한용운

 

床頭禪味澹如水(상두선미담여수)

吹起香灰夜欲闌(취기향회야욕란)

萬葉梧桐秋雨急(만엽오동추우급) 

虛窓殘夢不勝寒(허창잔몽불승한)

 

정(定)에 드니 담담하기 물 같은 심경

향불 다시 피어나고 밤도 깊은 듯.

문득 오동잎 두들기는 가을비 소리 

으스스 새삼스레 밤이 차구나.

 

 

 

추우(秋雨)

한용운 

 

秋雨何蕭瑟(추우하소슬) 

微寒空自驚(미한공자경)

有思如飛鶴(유사여비학) 

隨雲入帝京(수운입제경)

 

왜 이리도 쓸쓸한 거문고처럼 내리는 가을비런가

갑자기 으스스해져서 새삼 절로 놀라네

나의 생각은 하늘을 나는 학(鶴)인 양하면서

떠도는 구름 따라 서울에 들어가느니

 

 

 

추효(秋曉)

한용운

 

虛室何生白(허실하생백) 

星河傾入樓(성하경입루) 

 

秋風吹舊夢(추풍취구몽) 

曉月照新愁(효월조신수) 

落木孤燈見(낙목고등견) 

古塘寒水流(고당한수류) 

遙憶未歸客(요억미귀객) 

明朝應白頭(명조응백두)

 

빈방 희끗해지며

은하는 다락에 기울어 든다.

 

가을바람 지난 꿈을 불고

새벽달 새 근심 비춘다.

벗은 나무 건너 등불 하나 걸렸고

옛 못으로 찬 물길 흐른다.

돌아오지 않는 나그네 생각다가

내일 아침이면 머리칼 희어지리

 

 

 

추회(秋懷)

한용운

 

十年報國劒全空(십년보국검전공)

只許一身在獄中(지허일신재옥중) 

捷使不來蟲語急(첩사부래충어급) 

數莖白髮又秋風(수경백발우추풍)

 

나라 위한 십 년 허사가 되고

겨우 한 몸 옥 속에 갇혔네.

전승 기별 아니 오고 벌레만 저리 울어

몇 오라기 흰 머리칼에 또 가을바람 부네.

 

 

 

춘규원(春閨怨)

한용운

 

一幅鴛鴦繡未了(일폭원앙수미료) 

隔窓微語雜春愁(격창미어잡춘수)

夜來刀尺成孤夢(야래도척성고몽) 

行到江南不復收(행도강남불부수) 

 

원앙새 수놓다가 미처 끝내지도 못하고

창 건너 속삭임에 봄 수심 더욱 애태워라

밤이 되면 의복 재봉하는 일로 외로운 꿈만 이루고

강남으로 가더니만 돌아올 줄을 모르네

 

 

 

춘몽(春夢)

한용운

 

夢似落花花似夢(몽사락화화사몽)

人何胡蝶蝶何人(인하호접접하인)

蝶花人夢同心事(접화인몽동심사)

往訴東君留一春(왕소동군류일춘)

 

꿈은 낙화 같고 꽃은 꿈 같은데

사람은 왜 또 나비 되고 나비 어찌 사람 되나.

나비 꽃 사람 꿈이 마음의 일이니

봄의 신 찾아가 이 한 봄 못 가게 하자.

 

 

 

칠석(七夕)

한용운

 

`차라리 님이 없이 스스로 님이 되고 살지언정, 하늘 위의 직녀성은 되지 않겠어요, 네 네.' 나는 언제인지 님의 눈을 쳐다보며, 조금 아양스런 소리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견우의 님을 그리우는 직녀가 일년에 한 번씩 만나는 칠석을 어찌 기다리나 하는, 동정의 저주였습니다.

이 말에는 나는 모란꽃에 취한 나비처럼, 일생을 님의 키쓰에 바쁘게 지나겠다는, 교만한 맹서가 숨어 있습니다.

 

아아 알 수 없는 것은 운명이요, 지키기 어려운 것은 맹서입니다.

나의 머리가 당신의 팔 위에 도리질을 한 지가, 칠석(七夕)을 열 번이나 지나고 또 몇 번을 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용서하고 불쌍히 여길 뿐이요, 무슨 복수적 저주를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밤마다 밤마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마주 건너다보며 이야기하고 놉니다.

그들은 해쭉해쭉 웃는 은하수의 강안(江岸)에서, 물을 한 줌씩 쥐어서 서로 던지고 다시 뉘우쳐합니다.

그들은 물에다 발을 잠그고 반비식이 누워서, 서로 안 보는 체하고 무슨 노래를 부릅니다.

그들은 갈잎으로 배를 만들고, 그 배에다 무슨 글을 써서 물에 띄우고 입김으로 불어서 서로 보냅니다. 그러고 서로 글을 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잠자코 있습니다.

그들은 돌아갈 때에는 서로 보고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아니합니다.

 

지금은 칠월 칠석(七月七夕)날 밤입니다.

그들은 난초 실로 주름을 접은 연꽃의 윗옷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한 구슬에 일곱 빛 나는 계수나무 열매의 노리개를 찼습니다.

키쓰의 술에 취할 것을 상상하는 그들의 빰은, 먼저 기쁨을 못 이기는 자기의 열정에 취하여, 반이나 붉었습니다.

그들은 오작교를 건너갈 때에 걸음을 멈추고 윗옷의 뒷자락을 검사합니다.

그들은 오작교를 건너서 서로 포옹하는 동안에, 눈물과 웃음이 순서를 잃더니, 다시금 공경하는 얼굴을 보입니다.

아아 알 수 없는 것은 운명이요, 지키기 어려운 것은 맹서입니다.

 

나는 그들의 사랑이 표현인 것을 보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나의 사랑을 볼 수는 없습니다.

사랑의 신성(神聖)은 표현에 있지 않고 비밀에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하늘로 오라고 손짓을 한대도, 나는 가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칠월 칠석(七月七夕)날 밤입니다.

 

 

 

칠월 칠석날에 견우 직녀 그려 보며

한용운

 

머나먼 견우성

밝디 밝은 직녀성,

섬섬 옥수에

베틀도 정이 있네.

하루종일 베를 짜도

눈물만 억수로,

은하수 물 맑고 옅어도

어쩌면 이다지도 멀건가.

물은 은하에 넘치고

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네.

 

옛날 어느 어르신님이

쓴 견우직녀 사랑을 노래한 시런가.

이제 몇일 지나

7월 31일이면 또 해마다 오는 칠월칠석이다.

동방식의 사랑과 낭만이 넘치는,

그러나 쓸쓸하고 외로운

연인절이다.

 

견우는 직녀를 사랑했을 진대

어쩐고로 하늘나라로 보내지 않고

옷을 숨겨 두었으며

직녀가 견우를 사랑했을 진대

어쩌자고 하늘나라로 갔던고!

 

사랑이란 원래

이처럼 자기를 위한

자사자리한 낭만이었던가!

 

은하수 사이 두고

견우와 직녀 멀리 떨어져 있으되

마음이 하나로

그리움만 더구나 출렁대니

또한 만족도 해야 하리로다.

 

어쩌면

머리털이 다 빠지도록

오작교에 돌을 나른

까막까치가 가엾기도 하다만

그들도 그런 사랑을 갈망했던 것이나 아닌지.

 

몸은 멀리 떨어졌으되

사랑은 하나로 매양 같으니,

사랑이라면

애타도 좋다

슬퍼도 좋다

외로와도 좋다,

그렇게 기다림도

어쩌면 행복이라 해야 하리.

 

 

 

침성(砧聲) - 다듬이 소리

한용운

 

何處砧聲至(하처침성지)

滿獄自生寒(만옥자생한)

莫道天衣煖(막도천의난) 

孰如徹骨寒(숙여철골한)

 

어디서 나는 다듬이 소리인가

감옥 속을 냉기로 가득 채우네

천자의 옷 따뜻하다 하나 도가 아니다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것을.

 

 

 

쾌락

한용운

 

님이여, 당신은 나를 당신 계신 때처럼 잘 있는 줄로 아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나를 아신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두고 멀리 가신 뒤로는, 나는 기쁨이라고는 달도 없는 가을 하늘에 외기러기의 발자취만치도 없습니다.

 

거울을 볼 때에 절로 오던 웃음도 오지 않습니다.

꽃나무를 심으고 물 주고 복돋우던 일도 아니합니다.

고요한 달 그림자가 소리 없이 걸어와서, 엷은 창에 소근거리는 소리도 듣기 싫습니다.

가물고 더운 여름 하늘에 소낙비가 지나간 뒤에, 산모롱이의 적은 숲에서 나는 서늘한 맛도 달지 않습니다.

동무도 없고 노리개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 가신 뒤에, 이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쾌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따금 실컷 우는 것입니다.

 

 

 

타골의 시(詩)(GARDENISTO)를 읽고

한용운

 

벗이여, 나의 벗이여, 애인의 무덤 위의 피어 있는 꽃처럼 나를 울리는 벗이여.

적은 새의 자취도 없는 사막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까지 사모치는 백골의 향기입니다.

그대는 화환을 만들려고 떨어진 꽃을 줍다가, 다른 가지에 걸려서 주운 꽃을 헤치고 부르는 절망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벗이여, 깨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이 능히 떨어진 꽃을 옛 가지에 도로 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눈물을 떨어진 꽃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셔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백골의 입술에 입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 치지 마셔요. 무덤 위에 피 묻은 깃대를 세우셔요.

그러나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는 것을 봄바람은 말합니다.

 

벗이여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의 노래를 들을 때에, 어떻게 부끄럽고 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님을 떠나서,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까닭입니다.

 

 

 

포도주

한용운

 

가을 바람과 아침 볕에 마치 맞게 익은 향기로운 포도를 따서 술을 빚었습니다. 그 술 고이는 향기는 가을 하늘을 물들입니다.

님이여, 그 술을 연잎 잔에 가득히 부어서 남에게 드리겠습니다.

님이여, 떨리는 손을 거쳐서 타오르는 입술을 축이셔요.

 

님이여, 그 술은 한밤을 지나면 눈물이 됩니다.

아아 한밤을 지나면 포도주가 눈물이 되지마는, 또 한밤을 지나면 나의 눈물이 다른 포도주가 됩니다. 오오 님이여.

 

 

 

하나가 되어 주셔요

한용운

 

님이여, 나의 마음을 가져가려거든 마음을 가진 나한지 가져가셔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님에게서 하나가 되게 하셔요.

그렇지 아니하거든 나에게 고통만을 주지 마시고, 님의 마음을 다 주시오. 그리고 마음을 가진 님한지 나에게 주셔요. 그래서 님으로 하여금 나에게서 하나가 되게 하셔요.

그러면 나는 나의 마음을 가지고, 님의 주시는 고통을 사랑하겠습니다.

 

 

 

한강(漢江)

한용운

 

行到漢江江水長(행도한강강수장) 

深深無語見秋光(심심무어견추광)

野菊不知何處在(야국불지하처재) 

西風時有暗傳香(서풍시유암전향)

 

한강에 와서 보니 강물은 깊고,

깊은 물결 말 없는데 가을빛 어리네.

모르겠네, 들국화는 어디 피었는지,

때로 서풍 타고 향기 풍기네.

 

 

 

향로암즉사(香爐庵卽事)

한용운

 

僧去秋山逈(승거추산형)

鷺飛野水明(로비야수명)

樹凉一笛散(수량일적산)

不復夢三淸(부부몽삼청)

 

중이 떠나가니 가을 산 멀고

백로 나는 곳 들물 맑아라.

나무는 서늘한데 피리 소리 흩어지네.

신선 사는 곳 꿈꾸어 무엇하리.

 

 

 

향로암야금(香爐庵夜唫)

한용운

 

南國黃花早未開(남국황화조미개) 

江湖薄夢入樓臺(강호박몽입누대) 

雁影山河人似楚(안영산하인사초)

無邊秋樹月初來(무변추수월초래)

 

남국에도 철 일러 국화 안 피고

눈에 선한 누각 그리운 강호여.

산천에 나는 기러기 사람을 가두고

끝없는 가을 숲에 달이 솟는다.

 

 

 

해당화

한용운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 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기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이고, `너는 언제 피었니.' 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행복

한용운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생에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여 나를 미워한다면, 나의 행복은 더 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나를 미워하는 원한의 두만강이 깊을수록, 나의 당신을 사랑하는 행복의 백두산이 높아지는 까닭입니다.

 

 

 

호접(蝴蝶)

한용운

 

東風事在百花頭(동풍사재백화두)

恐是人間蕩子流(공시인간탕자류)

可憐添做浮生夢(가련첨주부생몽)

消了當年第幾愁(소료당년제기수)

 

봄바람에 온갖 꽃 바삐 찾아다니니

마치 방탕한 인간 같구나.

가련타, 뜬세상에 헛꿈 더하니

당년에 몇 번이나 근심을 풀었더냐?

 

 

 

황매천(黃梅泉)

한용운

 

就義從客永報國(취의종객영보국)

一瞋萬古큖花新(一瞋萬古큖화신) 

莫留不盡泉坮恨(막류부진천대한) 

大慰苦忠自有人(대위고충자유인)

 

의로운 그대 나라 위해 영면했으나

눈 부릅떠 억겁 세월 새 꽃으로 피어나리

황매천 엄청난 한을 다하지 말고 남겨둡시다

사람됨을 스스로 괴로워했던 것 크게 위로하고프니.

 

 

 

회음(懷吟)

한용운

 

此地群雁少(차지군안소) 

鄕音夜夜稀(향음야야희)

空林月影寂(공림월영적)

寒戍角聲飛(한수각성비)

衰柳思春酒(쇠류사춘주) 

殘砧悲舊衣(잔침비구의)

歲色落萍水(세색낙평수) 

浮生半翠微(부생반취미).

 

이 땅에는 기러기도 없으니

고향 소식 밤마다 드물구나

빈 숲에는 달그림자 고요하고

추운 변방에 나팔 소리 날리네

쇠잔한 버들에도 봄 술 생각나고

잦아지는 다듬이 해진 옷 서럽다

한 해 색깔 마름 풀처럼 지고 있어

뜬 인생살이 반은 산속이었네.

 

 

 

후회

한용운

 

당신이 계실 때에 알뜰한 사랑을 못하였습니다.

사랑보다 믿음이 많고, 즐거움보다 조심이 더하였습니다.

게다가 나의 성격이 냉담하고 더구나 가난에 쫓겨서, 병들어 누운 당신에게 도리어 소활(疎闊)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가신 뒤에, 떠난 근심보다 뉘우치는 눈물이 많습니다.

 

 

 

`?'

한용운

 

희미한 졸음이 활발한 님의 발자취 소리에 놀라 깨어, 무거운 눈썹을 이기지 못하면서 창을 열고 내다보았습니다.

동풍에 몰리는 소낙비는 산모롱이를 지나가고, 뜰 앞의 파초잎 위에 빗소리의 남은 음파가 그네를 뜁니다.

감정과 이지가 마주치는 찰나에, 인면(人面)의 악마와 수심(獸心)의 천사가 보이려다 사라집니다.

 

흔들어 빼는 님의 노랫가락에, 첫 잠든 어린 잔나비의 애처로운 꿈이, 꽃 떨어지는 소리에 깨었습니다.

죽은 밤을 지키는 외로운 등잔불의 구슬꽃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고요히 떨어집니다.

미친 불에 타오르는 불쌍한 영(靈)은 절망의 북극에서 신세계를 탐험합니다.

 

사막의 꽃이여 그믐밤의 만월이여 님의 얼굴이여.

피려는 장미화(薔薇花)는 아니라도, 갈지 않은 백옥(白玉)인 순결한 나의 입술은, 미소에 목욕 감는 그 입술에 채 닿지 못하였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달빛에 눌리운 창에는, 저의 털을 가다듬는 고양이의 그림자가 오르락 내리락합니다.

 

아아 불(佛)이냐 마(魔)냐 인생이 티끌이냐 꿈이 황금이냐.

적은 새여, 바람에 흔들리는 약한 가지에서 잠자는 적은 새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