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四
일주일이 지나서 창하는 철수를 길거리에서 만나 철수에게 끌려 어떤 서양 요리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
철수는 창하를 속으로 몹시 원망하는고로, 만일 자기와 친 척 관계가 되지 않으면 당장에 절교라도 하고, 무슨 일이 났었을 것이나, 본래 일가와 친척이 많지 않은 그는 그리 쉽게 그를 떼버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친척이라 함보다도 다정한 친구 이상으로 할 말 못할 말 다하고, 지내던 터이요, 또한 영숙을 창하가 춘우에게 꾀어 보낸 것이 아니요, 다만 친구의 편의를 보아주었을 따름이므로, 철수 역시 일개 여자로 하여 친척 간에 서로 반목을 하는 것은 사내스럽지 못한 일이라 해서 모든 것을 너그럽게 생각하고 있는 터이다.
『여보게, 자네가 여태까지 영숙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네의 잘못으로 아네. 나는 자네나 영숙이나, 또는 춘우 세 사람 중 누구 한 사람을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지는 않네. 그러나,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본래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요, 또는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 자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여서든지 영숙을 도로 찾아오겠다고 하지만, 이왕 간 영숙을 자네가 찾아오면 무엇 하나? 자네는 돈 가진 사람이요, 그 두 사람은 물론 돈이 없어. 그러나 그 돈으로 자네가 영숙의 마음을 살 수가 있을 줄 아나? 하필 영숙의 마음뿐 아니라, 아마 자네가 이 세상 사람의 누구의 마음이든지 돈으로는 살 수가 없을 줄 아네. 설령 자네가 영숙을 다시 끌어 온다고 하세, 그 때에 자네는 영숙이란 사람의 몸뚱아리를 사온 것이지, 영숙의 마음까지는 사오지 못할 것이니, 그 점을 생각해야지. 영숙이의 몸뚱아리를 살 마음이 있으면 이 세상에는 영숙이 몸보다도 더 젊고, 어 예쁜 몸뚱아리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음식이 거의 끝나갈 때, 창하는 철수에게 충고 비슷하게 말을 하였다.
『아니지요. 그것은 너무 이상(理想)으로만 달아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태고적 사람으로 있었다 하면 기운 많은 사람이 그 기운으로 능히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얻을 수 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에는 돈을 가지면 능히 사람의 마음까지 살 수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구나 여자는 그의 손가락에 끼이는 금강석 반지 하나만 사주면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살 수가 있는 것얘요. 말씀하신 것과 같이 돈이든지 명예든지 아무것도 다 싫고 다만 사랑을 위하여 살겠다는 여자가 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영숙이도 지금은 자기가 멋모르고 일종의 호기심으로 저와 같이 지내겠지요마는, 내 생각 같아서는 단 일 년이 못 되어 내게로 다시 돌아올 것을 단언이라도 하라면 하겠습니다.』
『글세, 그거야 자네가 날더러 언제든지 하는 말이지만.』
하고, 창하는 접시의 고기를 입에다 넣으면서,
『그것이 자네가 언제든지 잘못하는 일이야. 일 년이 못되어 설령 자네에게 돌아온다 하여 보세. 그 사람의 마음까지 오는 것은 아니거든. 아까도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몸만 오면 무슨 일이 있나, 마음이 와야지. 그러니까 이 뒷일은 어떻게 될는지 나로서 단언은 못하겠네마는 자네는 모든 것을 단념하는 것이 좋을 듯이 하이. 나로서 이러한 권고를 하는 것은 말하는 나도 미안한 일이요, 듣는 자네도 괴로운 일이지만, 만일 자네가 기어코 영숙을 찾아온다 하면 그 결과로 남는 것이 무엇이겠나? 춘우나 영숙이나 자네 세 사람은 모두 불행해질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게, 자네 생각 같아서는 분한 마음에 원수라도 갚고 싶겠지만 그런 생각은 의리 있는 사람으로는 갖지 못할 것이니까.』
『아니죠. 누가 의리가 없을까요? 나는 어디까지 해볼 것 입니다. 영숙을 내가 못 뺏어온다 하면, 그 때에는 내가 나의 재산을 있는 대로 다 없애서라도 춘우와 싸워볼 것입니다. 지금에 나는 세상에서 조소를 받고, 집안에서 못난이 소리를 듣고, 모든 부끄러움-남자로서 당하지 못할 모든 모욕을 당하고 있읍니다. 나는 이 모욕을 씻어버리려고 그동안 두서너 달 두고 모든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자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을 해요.』
『허허, 그렇게 격분해 할 것이 아닌데 그러네 그려. 때가 무슨 땐가. 제삼자로서 냉정한 생각을 가지고 자네를 보고 나로서는 도리어 자네의 서두르는 것이 일을 그르치기 쉬울 줄 아네. 그러나 철수 자네는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네.』
『무엇이요?』
『자네가 만일 영숙이와 자네 사이를 다시 이으려 하면 거기에는 돈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요, 다만 자네의 딸 청아 밖에 없을 것이야. 나 역시 춘우와 영숙이 지금 저렇게 지나기는 지나나, 얼마 아니 가서 적지 않은 비극이 있을 것을 알지마는, 다 되는대로 내버려 두고 보기만 하지 어찌하나. 어떻든 자네네 세 사람은 한 사람도 행복스러운 사람이 없는 것을 나는 이제 단언할 수가 있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던 그날 저녁 때이다. 춘우는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서 나오는 길에 진고개를 들러서 아침에 나올 때 영숙에게 부탁을 받은 사기그릇 몇 개와 양철 냄비 한 개를 사가지고 다시 양말과 속적삼을 산 후에 과자가게 에 들러서 영숙이가 좋아하는 과자 몇 봉지를 사가지고 전차를 타고서 새로이 세를 얻은 선린상업학교 뒤 자기 집으로 향하여 갔다. 춘우는 지금처럼 자기가 행복을 느끼는 때가 없었다고 생각하였다. 전차 안에 탄 사람이 전에는 모두 다 시들어져 가는 것처럼 생기가 없어 보이는 것 같더니, 오늘에는 모두 생기가 있어 보이고, 혼인 잔치에 치하하러 가는 사람들처럼 즐거움으로 찬 듯하였다. 만일 세상에 불행한 사람이라고 자기 스스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오늘날에 춘우에게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할만치 춘우는 행복스러워졌다. 춘우의 마음은 어저께보다 오늘, 아까보다 지금이 다르게 그 마음이 가라앉아지기 시작한다. 공중에 뜬 것 같이 이리 불리고 저리 흔들리던 춘우의 마음이 점점 안정이 되어 갈수록 그는 더욱더욱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게 되고, 또는 그의 마음이 점점 냉정(冷靜)하여 질수록 그 가운데에서 무한한 흥취를 찾아 낼 수가 있었다. 그리하고 그의 머릿속에서 어수선 산란하게 돌아다니던 모든 죄악의 잡념이 구름 개이듯 사라지고, 청청한 하늘에 다만 해가 있고 달이 있는 것 같이 자기와 영숙이라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영숙과 자기는 한아(閒雅)하고 그의 피는 무슨 정혈제(淨血劑)로 씻어버린 듯이 깨끗하여진 것 같고, 다시 향수로 목욕을 한 것 같이, 자기는 남에게 가도 꺼리울 것이 없고 향내 나는 몸과 같다.
그에게는 질투라는 것이 없고 절망이라는 것이 없고 속임이 없고 또는 간음이 없게 되었다. 그는 다만 청정무구한 세상으로 돌아온 듯하였을 뿐이다. 저녁을 하여 놓고 자기를 기다리는 영숙을 생각만 하여 보아도 천사와 같이 아름다웠다.
아침이면 자기를 전송하고 낮이면 빨래라든지 바느질이라든지 뜰 앞 화원에 김매기라든지 양지 짝에서 병아리 모이주기라든지 이와 같이 한가하고 단아한 생활 가운데서 춘우와 영숙은 꿈같은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다.
춘우는 전차에서 내려 반찬 가게에서 쇠고기와 왜파와 다른 양념거리를 사서 들고 자기 집으로 향하여 갈 때, 자기의 팔이 조금 아프고, 또는 전 같으면 점잖은 사람이 창피해서 어떻게 무엇을 들고 다니노 하고 하였을 터이지만, 오늘에는 부끄러움도 잊어버려지고, 다만 영숙이 반갑게 맞아주는 웃음이 그에게는 모든 용기를 주고 말았다.
그는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영숙!』
하고 부르매, 부엌에서 숯불을 피우느라고 부채를 들고 눈물을 흘린 영숙이 툭 튀어나오며,
『에구 무엇을 그렇게 많이 사가지고 오시우.』
하고, 행주치마에 손을 씻고서 주섬주섬 받아 놓는다.
춘우는 받아 놓는 대로 가만히 서서
『울기는 왜 울어. 그래 한나절을 못 참아 그렇게 보고 싶드람.』
하고, 조롱을 하자, 영숙은
『울기는 누가 울어요. 불 피우느라고 내워서 그랬지.』
하며, 눈물을 씻고 빙긋 웃는다.
『그렇다면 모르거니와……자, 이것 좀 받으우.』
하며,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 주니까, 영숙은 그것을 받아서 펴 보더니, 제 입에 하나 넣고, 춘우 입에 하나 넣어주었다. 춘우는
『저만 알지 남편은 모르는군! 제 입에부터 집어넣으니.』
영숙은 무의식중에 한 일이라 잘못된 것을 깨닫고,
『그럼, 내 입에 넣은 것하고 당신의 입에 있는 것하고 바꿉시다 그려.』
춘우는 옷을 벗어 영숙에게 맡기고
『대관절 밥이 어떻게 되었소. 시장해 못 견디겠으니.』
『장작이 굵어서 뗄 수가 있어야지. 쌀은 앉혀놓고 여태까지 불을 지피지 못했어요.』
『그거 안 되었구려 내가 좀 패지.』
하더니, 동리 집으로 가서 도끼를 빌려가지고 오는데, 동리 떡거머리가 따라와서 춘우의 장작 패는 것을 신기한 듯이 들여다본다. 춘우는 도끼를 들고 장작을 팰 때, 도끼가 손에 붙지를 않고, 제 멋대로 여기가 놓이고 저기가 놓인다.
그는 두서너 번 도끼를 들었다 놓았다 하더니, 겨우 한 조각을 쪼갰는데, 장작이 젖어서 짓이겨 놓았다. 춘우는 그것을 손으로 쪼개느라고 얼굴에 핏대를 올려가며, 잡아다니어 겨우 반에 갈라 내던지다가,
『에쿠!』
소리를 지르고 엄지손가락을 입에다 대고 훅훅 부니까, 부엌에 있던 영숙이 달음질해 뛰어 나오다가, 화로에 놓았던 찌개를 발길로 질러서 재가 푸하고 일어났다. 이 소리를 들은 춘우도 화로로 뛰어가서 찌개 그릇을 바루 잡아 놓으려 다가, 뜨거워서 마당 한가운데다 내던져 뚝배기가 산산조각이 났다.
영숙은 기가 막히고 우습기도 하여 한참이나 깨어진 뚝배기만 내려다보더니, 허리가 부러지게 웃고만 있으니까, 춘우는 가시 백인 손이 또 찌개 그릇에 데어서 쓰라리고 아파서 못 견디겠는데, 영숙이가 자꾸 웃기만 하니까, 열얼 벌컥 내어
『압다, 남은 아파 죽겠는데 웃기는 왜 웃어.』
하며, 원망스럽게 흘겨본다.
영숙도 그제야 웃음을 그치더니,
『남이 애써 해놓은 찌개를 한꺼번에 태질을 치고 무슨 큰 소리요. 어디 손이나 좀 봅시다.』『고만두, 내가 태질을 치려해서 쳤소. 영숙이가 먼저 친 것을 바루 잡으려다 그리 하였지.』
『그것도 내가 치려해서 쳤소. 당신이 손 다친 것 보러 나오다 치마에 휩싸여 그렇게 되었지.』
이렇게 내외가 말다툼 시작하는 것을 보고 있던 총각 녀석이
『고만들 두십쇼. 대관절 손이나 많이 다치지 않으셨어요. 제가 장작을 패드리지요.』
하고, 장작을 툭툭 쪼갠다.
두 사람은 저녁상을 마주앉아 밥을 먹었다.
풍로에서는 고기가 익고 밥상 위에는 상긋한 나물이 놓였다. 전 같으면 한 두어 잔 술을 마셨으면 좋을 춘우는 오늘 와서는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였다.
『조금 싱겁지 않소.』
하고, 젓가락으로 이리 뒤적 저리 뒤적하니까, 숟가락을 입에서 떼는 영숙
『간장을 좀 더 칠까요.』
하며, 장병을 집는다.
『내일은 일요일이니, 전에 말한대로 인천을 가볼까.』
춘우가 영숙에게 의향을 묻자, 영숙은 어째 시원하지 않는 어조로,
『글쎄요.』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똥그란 눈을 아래로 깔고 끓는 고기만 내려다본다.
『왜 시원히 대답을 하지 않소.』
『아마 내일은 내가 어디를 좀 다녀와야 할까 보아요.』
이 소리를 듣고 춘우는 젓가락질을 딱 끄치며,
『어디를 가?』
『꼭 가봐야 할 데가 있는데, 당신이 허락을 하실지 몰라요.』
하고 영숙은 춘우의 기색을 살핀다.
『갈만한 곳이면 가지, 내 허락 여부가 어디 있단 말이요.』
『당신이 들으시면 당신이 좋아하지 않으실 곳얘요.』
『내가 좋아하지 않을 곳?』
하고, 고개를 기웃하고 생각을 하더니,
『내가 좋아하지 않을 곳이 어디 있나. 그럼 영숙이는 좋은 곳이요? 영숙이가 좋은 곳이면 어디든지 가보는 것이 좋지 않소.』
영숙은 잠간 주저하다가,
『저도 가기를 즐겨하는 곳이 아네요.』
『그럼?』
『다만 책임상 안 가볼 수가 없어요.』
『대관절 어디란 말이오.』
영숙은 입을 다물고 한참이나 말이 없이 가만히 있었다.
『어서 진지나 잡수셔요. 이따 이야기 하지요.』
『있다가 이야기할 것 지금 말 못할 것이 무엇 있단 말이 요. 말하구려 답답하우.』
『말해야 당신 마음이 아프실 것이니까요.』
『글쎄, 아프든지 제리든지 갑갑하구려.』
『공연히 그런 말을 했군.』
『말할 것은 해야지, 속에다가 혼자 넣어두면 못쓰지.』
영숙은
『그런 게 아니라요.』
하고, 벌떡 일어나 설합을 열더니 편지 한 장을 꺼내어 춘 우를 준다.
춘우는 편지 봉투를 보았다. 거기에는 서투르디 서투른 필적으로 영숙의 이름을 쓰고 그 뒤에는 영숙의 어머니 이름이 씌어 있었다.
『어머니께서 편지 하셨구려. 어머니께 가보겠단 말이지. 그것이 그렇게 쓰리니 아프니 할 것이 무엇 있소?』
『아네요. 속을 보셔요.』
춘우는 다시 속을 끄집어내어 본즉 그 사연에는 오래동안 너의 안부를 듣지 못하여 궁금하고 보고 싶은 마음이야 무엇이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일래 몸 성이 잘 있느냐. 늙고 불쌍한 너의 모는 죽지 못하여 모진 목숨을 그럭저럭 부지하여 간다. 그런데 다른 말이 아니라, 수일 전 부터 청아가 병이 들어 지금은 거의 위태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요사이는 헛소리마다 너를 부르니, 차마 옆에서 그 꼴은 그대로 보기가 어렵다. 어린 인생이 죄가 있으랴. 너도 어미된 인정을 저버리지 아니하려거든 한번 와서 보고라도 가기를 바란다. 아마 춘우도 그것은 용서할 줄 안다. 하루바삐 다녀가기를 바란다.
하였다. 춘우의 마음은 무슨 감격으로 떨리는 듯하였다.
편지를 척척 집어 영숙을 다시 주고는 국을 한 숟가락을 뜨더니 말이 없다. 영숙은 춘우의 입에서 어떠한 최후 명령이 내릴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말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춘우는 영숙을 보낼 의무는 자기에게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보았다. 지금에 완전한 영숙을 자기 것을 만들어 놓은 이상, 또 다시 철수의 딸인 청아의 병을 보러 보낼 필요는 없을 것이라 하여 보았다. 청아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으랴.
영숙이가 내어버린 청아를 지금에 다시 보게 한다는 것은 도리어 춘우에게 위태한 일일는지 모른다. 조금 몰인정한 일 같지만 잊어버린 것은 영원히 잊어버리고 내버린 것은 다시 돌아보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가고 싶소?』
춘우의 말에는 적지 않은 불평이 들어있었다. 그러고, 영숙을 보는 눈에는 시기의 빛이 보였다.
『가지 말라고 그러시면 저도 가지 않을 터얘요.』
영숙이가 대답은 이렇게 하기는 하였으나, 그 표정에는 숨기지 못할 괴로운 빛이 보였다.
『나는 가거라 말아라 할 수는 없소. 영숙이 마음대로 하구려 내가 여기에 간섭할 수는 없소.』
『그러면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시죠.』
『나는 좋다 싫다 말을 하지 않을 터이요. 내가 되어서 가지 말라 하면 너무 아량이 없는 사람이 될 터이요. 또 가라고 한다 하면 가지 말라는 말보다 좀 거북한 말이니까 ……』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가지 않지오.』
딱 잘라서 말을 하는 영숙의 얼굴은 새침하여졌다.
『공연히 그런 말씀을 해서 퍽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온 별말을 다하는구려. 숭늉이나 한 그릇 가져 오구려.』
숭늉을 가질러 간 뒤에 춘우는 혼자 앉아 생각을 했다. 공연히 말을 그렇게 했구나 하였다. 퍽 가지고 싶은 것을 내가 가지 말래서 못 간다 하면, 그것은 공연히 원망을 사는 것이요, 또 비록 지금은 남이지만 자기 자식을 보러간다는 것을 막는대서야 자기도 남의 자식이 된 이상에 너무나 몰인정한 일이 아닌가 하고 후회하는 생각이 났다.
숭늉을 들고 들어 온 영숙의 눈치만 살피는 춘우는 대접을 갖다가 밥상위에 놓을 때 밥그릇과 맞부딪치는 소리까지 심상히 보이지 않고, 영숙의 불평이 손끝에 까지 미치는 것 같아서 퍽 불쾌하였다.
밥상을 물린 후 전 같으면 서로 앉아서 이야기를 하든지 하다 못해 팔뚝맞기 화투라도 하였을 것이지마는 두 사람은 서로 말이 없이 앉아 있었다. 춘우는 잡짓장을 뒤적뒤적하고 영숙은 돌아앉아서 손에 잡히지 않는 바느질을 시작하였다. 웬일인지 두 사람은 서로 눈치만 보는 것 같애서 콧잔등이 간질간질하고 시선이 마주 칠 때마다 서로 피하느라고 애를 쓴다.
그와 같이 쓸쓸하고 부스러지는 것 같고 긴장하지 못한 공기 가운데 몇 십 분이 지나갔다. 춘우는 공연히 두 사람이 싸움이나 한 것처럼 이렇게 있는 것이 어째 싱겁기도 하고 또는 우습고 어리석은 듯하여 말을 꺼내려고,
『그 양말이나 좀 꾀매 주구려. 지금 신은 것이 벌써 구멍이 뚫리게 되었으이.』
하고, 제 발바닥을 만져서 영숙을 보이며 말을 하자, 두 눈썹만 깜박깜박하고 앉아있던 영숙은 보려고도 하지 않으며 여전히 바늘만 움직이며,
『아직 괜찮이 않아요. 내일이라도 꾀매죠. 그리 바쁘지 않은데.』
하고 불복이다. 춘우는 전 같으면 반드시 당장에 『네』 소리가 나왔을 터인데, 지금 이렇게 불복을 하는 것은 반드시 영숙의 가슴속에 못마땅한 것이 있어서 그리하는 것을 알고서 속으로 무안도 하고, 또는 분한 생각도 나서,
『지금 못 꾀맬 것이 무엇이란 말이요. 자, 보우.』
하고 조금 우락부락한 소리를 지르며 구멍이 뚫어지려고 빨간 발이 내다보이는 발뒤꿈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지금 꾀매면 지금 신고 어디를 가신단 말요. 내일 아침에 신고 나가시게만 하면 고만이지요.』
『그럼, 진작 그렇게 말을 하지. 당초에 꾀매 주지 않을 것 같이 말을 하니까 그렇지.』
『누가 안 꾀매드린댔어요?』
『아까 무엇이라고 했소. 그래 꾀매 주마고 했소.』
『눈으로 보시면서 그러시우. 지금 하는 것이 있으니까, 당장에는 해드릴 수가 없댔지. 누가 당초에 안 꾀매 드린댔어요.』
한참을 말다툼을 한 뒤에 두 사람은 모두 입들이 뾰죽해 앉아서 아무 말이 없다.
마음이 좁은 여자인 영숙이 도무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자, 춘우도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적다. 그뿐 아니라, 이 불쾌한 감정을 두 사람 마음 가운데 일으킨 자는 여기 있는 이 두 사람이 아니라, 저 멀리 있는 영숙의 전 남편의 딸인 청아라는 제삼자(第三者)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뭉친 감정을 풀기가 어렵다.
더구나 춘우에게는 이 뜻밖에 일어난 조그마한 감정 문제가 크게 확대되려던, 두 사람의 치명상(致命傷)이 될 가능성(可能性)을 충분히 가진 것이므로써 그는 그리 쉽게 지나가는 희롱으로는 생각되지 아니한다. 다른 때 같으면 두 사람 이 겨드랑이 한 번 간지리는 것으로 능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지마는 이번 일은 인륜(人倫)의 관계와 애정의 관계가 서로 세로 놓이고 가로 놓인 것이므로, 조금 냉정한 생각으로 해결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리에 누워서도 생각하매, 무슨 불행을 예약(豫約)하는 무슨 암시(暗示)가 그 가운데 있는 듯하였다.
자기는 아랫목 벽을 안고 누웠고 자기 아내인 영숙은 등을 꼬부리고 웃목을 향하여 누워있는 것을 보자, 한방에 누웠어도, 자기가 바라보는 방향과 영숙이 바라보는 방향이 서로 서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정반대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몸에 스며드는 듯한 쓸쓸함을 느끼었다.
그는 머리를 냉정히 하여보려고 애를 썼다. 될 수 있는 대로 자기 하는 것을 벗어버리고 제삼자가 되어 자기와 영숙과 또는 거기에 얽힌 사실을 멀리 놓고 관조(觀照)하리라 하였다.
부모나 자식 사이의 애정이라든지 정리와 남편과 아내 간의 사랑이나 의리가 어떠한 곳에서 일치하는 수는 있을는지 모르지만, 결코 똑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영숙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청아를 사랑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며, 내가 갖지 못한 그 어떠한 사랑을 영숙은 또 하나 더 가졌다. 세상에 가장 행복스러운 사람이 누구이냐 하면 그것은 남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 점에 들어서 영숙은 자기보다 하나 더 행복스러운 것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는 영숙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때에 비애를 느낄는지 알지 못하나, 영숙은 청아를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 하지 못하게 되면 그는 무한한 적막과 비애를 느끼는 것이다.
엘렌 케이 여사가 말하기를, 구주 전쟁 당시에 전선에 나가서 나라를 위하여 용감스럽게 싸우던 용감한 남아들이 불행히 몸에 부상을 당하여 야전병원 침대 위에서 조용히 최후를 마칠 때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어머니!』 라는 말이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절대(絶對)다. 상대(相對)가 아니다. 언제인가 춘우가 창하와 함께 처음으로 영숙을 찾아갔을 때, 이 세상 인류를 죄악의 구렁으로 쓸어 넣은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말대로 하면, 우리의 선조의 아내 되는 이브라 하면, 오늘에 다시 세상을 구해낼 자는 또 우리의 어머니가 되리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춘우와 창하는 무심한 가운데 그런 말을 하였지만, 오늘 춘우가 생각할 때, 그 때 그 말이 자기에게 무슨 암시를 준 것 같았다. 가장 약한 가운데 가장 큰 힘이 있는 것이다. 너는 약한 자이다, 너의 이름은 여자이다 하고, 옛날에 섹스피어가 함리트를 시켜서 자기 어머니를 꾸짖게 한 말이 있지마는, 그와 같이 약한 여자에게도 강하다고 거만한 체하는 남자를 정복하는 힘이 있는 동시에 그 반면에 또한 자기 어머니의 사랑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으랴! 누가 자기 어머니 앞에 고개를 숙여 그 무한히 인자하고 어머니로서의 고마움을 사례하지 않는 이가 있으랴! 어머니는 자식에게 들어서 천사이며 피란처이다.
이와같은 생각을 하는 춘우의 마음은 다시 자기의 몸으로 돌아왔다. 자기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돌아간 어머니의 애정을 생각하고, 자기와 인우를 생각하여보았다. 거룩한 어머니가 오늘에 계셨다면 하는 그리운 비애를 느낄 때, 그는 다시 영숙의 마음을 살필 수가 있었다. 자기의 어머니 가 자기를 사랑하여 준 것이나, 자기가 자기 어머니를 지금껏 그리워하는 것이나, 영숙이 자기 딸 청아를 생각하는 것이나, 청아가 자기 어머니인 영숙을 찾는 것이, 어머니와 어머니, 자식과 자식의 정리와 애정에 무엇이 다를 것이 있느냐.
자기의 어머니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그 어떠한 힘 이끌어가고 말았고, 영숙은 또한 자기와 자기 사이에 어떠한 힘으로 말미암아 청아에게서 영숙을 자기에게 뺐어온 것이다 하였다. 그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할 때, 두 눈에서는 가리울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었다. 그는, 나이가 이만큼 먹은 나로서도 돌아간 어머니의 환영(幻影)을 끄집어내어 그의 품안에 안기려 한다. 아마 이 생각은 내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터이지. 그런데, 청아가 살아 있는 어머니의 젖꼭지를 찾는 것이 어째 무리라 하랴. 여기에 만일 참으로 공정한 진리가 있다 하면, 청아는 반드시 영숙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춘우는 이렇게 생각하다가, 어느덧 잠이 든 영숙을 돌아다 보았다. 두 손을 가슴위에 가만이 놓고서, 잠이 든 그의 머릿속으로는 지금 반드시 청아의 꿈을 꿀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 나는 나의 사소한 질투심을 내버려, 큰 진리를 위해야 할 것이다. 영숙은 청아에게로 보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사람으로서 나의 의무가 있는 것이다.
어느덧 첫 닭이 울었다. 춘우도 그럭저럭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이 자리 속에 깨었을 때, 서로 반대 방향으로 누웠던 것이 서로 가슴을 향하여 따뜻하게 끼어 앉고 있는 것을 찾아내었을 때, 그의 가슴 속에 뭉쳐 있던 감정은 봄눈 녹듯 사라졌었다.
一五
아침볕이 머리맡 창에 금빛 같이 쬐었다. 춘우가 다시 눈을 뜰 때에는 벌써 마루위에 상보는 소리가 들리면서, 아침 공기를 울리는 신선한 소리로
『어서 일어나시우! 공일이라, 이렇게 늦도록 주무시우.』
하는 영숙의 깨우는 소리에 그는 비로소 기지개를 켰다.
『벌써 이렇게 들었나.』
하품을 한 뒤에 이불을 걷어 젖히고,
『세숫물 좀 놓우.』
두 팔을 걷은 후에 마루로 세수수건을 걷어들고 나왔다.
앞 뜰 푸른 풀 위에는 아침 이슬이 진주 같이 어리어 햇빛에 눈동자 같이 반짝거리다가. 다시 풀잎 한복판을 대구루 굴러서 땅 위에 떨어지기도 하고, 밤새도록 이슬에 젖은 흙의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모란과 작약은 죽었던 옛 가지와 옛뿌리에서 새로운 삯이 뾰루퉁하게 솟아나고, 채송화 꽃은 입을 벌인 듯이 노랗고 빨갛다.
멀리서 늦은 밭을 가는 소가 메인 쟁기 소리를 따라 늙은 농부의 어디엇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한다. 양지쪽인 마루에 놓여있는 세숫물은 햇빛에 비치어 오색 무지개가 서며, 그것이 또 다시 웅멍줄멍하여진다.
부엌에서는 뜸들이는 밥이 솥 속에서 소리 없이 김만 내고, 영숙은 부엌바닥을 수수비로 정성껏 쓸어서 아궁이에 넣는다.
춘우는 어제 저녁에 쓸쓸하던 마음은 어느덧 사라지고, 즐겁고 청신한 마음이 가슴에 찼다 넘치는 듯하였다.
『아까요?』
영숙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귀여운 웃음을 띠우고 춘우 앞으로 가까이 가며,
『나물장수가 들어왔길래 싱검초나물을 좀 샀더니 퍽 싸요.』
하며, 퍽도 신기한 것처럼 말을 하더니,
『그래서 그것을 조금 묻혔지요.』
춘우의 귀에는 그리 신기롭지 않지만, 영숙의 뜻을 받아주느라고,
『얼마나 샀는데, 그것 좋은 것 샀구려. 내가 퍽 좋아하는 것인데, 그러나 저러나 오늘 아침 반찬이 무엇이 좋은 것 있소?』
『어저께 사 오신 고기가 좀 남았길래, 그것을 지졌지요.』
『그것만 하면 고만이지, 더 잘 먹을 수 있소. 우리 살림에……』
하고 수건질을 하니까, 영숙은 대야의 물을 갖다가 내버리더니,
『오늘은 아무데도 가지 않으실 터이요?』
『글세, 나는 집이나 보지.』
『집이나 보시다뇨?』
하는 대답을 할 때 영숙의 마음은 기뻤다.
옳지, 날더러 청아를 보러 어머니에게로 가라는 말이로구나 할 때, 춘우가 고마운 동시에 미듬스럽고 또는 사랑스러운 동시 어젯저녁에 성미를 거스리는 것이 후회가 났다.
『오늘 어디를 가면서 그러우.』
하며, 춘우는 「가거라」 하고 직접 말을 하지 않지마는, 승낙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로 영숙에게 가라는 뜻을 보였다.
『그럼, 혼자 계시기 심심하지도 않으시겠어요?』
『무얼, 오늘이 일요일니까 창하도 나올 테니까, 같이 이야기나 하고 놀지. 점심이나 많이 만들어놓고 가구려.』
『점심야 염려 없어요. 그렇지만, 그 어른이 오시면 또 약주 잡숫자고 하시게.』
『내가 술 끊은 줄 아니까, 이제는 먹자고 그러지를 않아. 일전에도 같이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날더러 술을 먹지 말라고 제가 먼첨 그러던데……』
『그이는 사리를 짐작하고, 또 무던한이니까, 조금 믿을 수 가 있지만, 그래도 어떤 때 객증이나 나면…… 나는 사내들이 왜 술을 먹는지 아무리해도 모르겠어.』
『다 먹는 것도 까닭이 있어 먹는 것이겠지. 공연히 먹을라구.』
『까닭이 무슨 까닭이람.』
『영숙은 아직도 그 까닭을 몰라.』
아침밥을 두 사람은 재미있게 먹었다. 영숙이 상을 대강 대강 치워놓고 옷을 입고 나섰을 때 춘우를 향하여
『얼핏 다녀 올 것이니, 집 잘 보고 계셔요.』
하고 점심밥은 어디 있고 반찬은 어떻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일러주었다.
『몇 시쯤 해서 오료.』
춘우는 나가는 영숙을 보며 물어보았다.
『글세요. 저녁 안에 오지요. 와서 저녁을 해야 할 것이 아녜요.』
『그럼 얼핏 다녀오오.』
영숙은 다리가 땅에 닿지 않게 줄달음질을 하다시피 자기 어머니 집을 향하여간다. 전차 정류장까지 오는데 몇 번이나 발을 헛디디어 놓았는지도 몰랐다. 동대문을 향하여가는 전차를 바꾸어 타고 남대문을 지나갈 때, 그는 몹시 흥분이 되었었다.
몇 달 전에 자기 어머니에게 최후의 선고를 하고 나올 때에는, 당초에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않으리라 하였던 것이, 오늘에 자기 어머니를 보러 간다고 할 때, 그의 마음은 기쁘고 반가운 중에도 또는 부끄럽고 거북하였다.
『어머니를 만나뵈옵는다.』
얼마나 좋은 일이랴. 자기를 길러준 어머니, 자기의 모든 뒤치다꺼리를 하여주던 어머니 자기의 잘못을 모두 용서하고 가리워주던 어머니, 그리고 모든 화풀이와 핀잔을 달게 받던 어머니를 뵈오러가는 영숙은 또 다시 그의 혈맥에 윤기(倫紀)의 뜨거운 피가 흐르기를 시작하였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하셨으랴.』
이 소리를 혼자 속으로 중얼거릴 때, 그는 감격과 인정에 서 나오는 뜨거운 눈물이 두 눈에서 핑그르 돌았다. 그러고, 또 다시 철모르는 것이라고 그대로 떼버리고 온 청아를 생각하여 보았다. 그때 자기가 자기 품에 앉고서 젖을 먹일 때에는 귀찮은 생각도 많이 났었고, 또는 귀여운 생각도 적지 않아, 몹시 굴기도 하고, 울기도 많이 하였으며 어떤 때는 예쁘고 귀여운 김에 깨물어 먹고 싶을 만치 사랑스러운 때도 많아서, 모든 것이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요, 그러할 일이려니 하였던 것이, 지금 생각을 하니, 그 모든 것은 한낱 꿈으로 사라지고, 다만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없는 자식이 불쌍하다는 것뿐이었다.
전차가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 앞 정류장에 서자, 영숙은 전차에서 내려 연동 골목으로 들어 경신학교와 공업전문학교 의학전문학교를 다 지나서 골목 하나를 이리 돌고 저리 돌더니, 돌다리 건너 어떠한 초가집으로 들어섰다. 대문간 행랑에는 쟁가비와 대접, 숟가락 나부랭이가 어수선하게 허트러져 있고, 마당을 들어서 건너방을 보자, 옹숱 하나가 걸린 위에 바가지를 엎어 놓았는데, 뚫어진 창구멍으로다 눈 하나가 내다본다.
『청아 있니!』
부르는 말소리는 주저하는 중에도 반가움이 넘치었다.
『그 누구!』
하며 방 미닫이가 열리며, 안경 쓴 두 눈이 쑥 내다보더니,
『이게 누구냐?』
하며 영숙의 어머니는 곤두박질치듯 뛰어나왔다. 영숙도 따라서 달려들며,
『어머니!』
하고 모녀는 두 손을 맞잡고 어쩔 줄을 몰랐다.
『어서 오너라. 그러지 않아도 혹시 오지나 않나 하고 기다렸지, 이리 올라와.』
『청아가 앓는다죠?』
하고, 방으로 들어가니, 아랫목에 청아를 포대기로 덮어서 누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옛날의 청아같이 토실토실한 뺨이라든가 몽글몽글한 손, 나팔나팔하는 머리, 반짝반짝하는 눈, 새빨간 입술은 그 그림자도 볼 수 없고 가시덤불 같았다. 땀에 젖어 앙상한 이마에 달라붙어 있고, 두 뺨은 깎고 저며낸 듯이 수척하였으며, 입술은 지지리 타고 하다 못해 푸르며 눈은 죽은 사람처럼 쑥 들어갔는데, 다만 꽁꽁하고 안간힘을 쓰는 소리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좀 봐라, 그렇단다.』
영숙은
『청아야, 청아야, 엄마 왔다. 엄마, 응 청아야.』
하고 불러보았으나, 그는 들리지 않는 듯이 대답이 없이 다만 안간힘만 쓸 뿐이다.
『청아야, 엄마!』
또 다시 불러보다가, 대답을 하지 아니하자, 하는 수 없이 청아를 끌어 안아보니, 전에는 묵직하게 무슨 금덩어리나 안은 듯하던 것이 지금은 백지장을 드는 것보다 더 가볍다.
『며칠이나 되었어요.』
『며칠이 무엇이냐. 벌써 달포가 넘었는데, 처음에는 감기처럼 몸이 덥고 기침을 하길래 나는 그저 감기로 알았더니, 비찍 돋히는데, 하는 수가 있더냐. 약국에 가서 이 약 저 약 이야기만 하고 먹이니, 그것이 어디 맞아주어야지. 제 아비에게 편지를 해도 그저 오늘 올라간다 내일 올라간다 하는 것이 한 달을 넘어 끈더구나. 그래 며칠 전에 왔다고 하기에 찾아가보고 그런 말을 하니까, 돈 십 원을 주면서 약이나 지어다 먹이라고 하니, 약은 아무리 먹어도 조금도 풀리는 기색이 보이지 않고 그저 저 모양대로 있으니, 죽거나 살거나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고 앓을 적에는 들려다보지도 않다가,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청원은 나 혼자 들을 터이니, 너를 부른 것도 내 성미에 여간해서 안 부를 터이지만, 너도 생각을 해보아라. 네 자식 네가 죽이는 것은 아무 말도 안 하겠지만, 내가 애꿎은 소리를 들을 게 무어 있으랴 해서 너를 불러온 것이니까, 네 생각대로 해라. 죽이려거든 죽이고 살리려거든 살리고……』
한참 말을 하다가, 끝에는 화를 낸다. 영숙은 다만 다소곳이 듣고만 있다가
『죽기야 할려고요!』
하며, 다시 청아를 토닥토닥 두두려 주었을 때 청아는 다시 꼼지락꼼지락하더니,
『엄마! 엄마!』
하고 헛소리를 한다.
『왜! 엄마 여기 있다. 자 청아야, 엄마 엄마.』
하고 얼르고 불러보고 흔들어 보았으나, 여전히 말이 없다.
청아는 엄마가 자기를 안고 있는 줄도 알지 못하고, 참말로 부르는지 거짓말도 부르는지 엄마를 부르기는 하나 대답은 할 줄 모른다. 영숙의 가슴은 터지는 듯하였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하며,
『자 청아야, 너의 엄마가 여기 왔다. 』
하고 흐느끼어 가며 울 때, 청아는 너는 나를 내버린 어머니니까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듯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주었다. 영숙은 순결하고 흠 없는 어린 청아에게 무슨 죄나 지은 듯이 고개를 틀어박고 뺨을 대이고 입을 맞추고 미친 사람처럼 울었다. 뜨거운 눈물이 떨어져 어린애의 얼굴에 폭포같이 흐르도록 울었으나, 그 눈물만을 가지고, 자기 어머니가 자기를 내버린 허물은 용서할 수가 없다는 듯이 아무 말도 없이 안간힘만 쓰면서 자고 있을 뿐이다.
영숙의 어머니도 눈물을 떨어뜨리며 그 옆에 앉아서, 치마끈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씻고 있다. 조용한 방안은 슬픈 빛으로 가득하여 어두운 빛은 그 방을 휩싸고 도는 듯했다.
영숙은 속마음으로 청아에게
『모든 것을 용서하여다구. 내가 모두 잘못했다.』
하고 빌고 싶었다. 그리고,
『너만 몸이 다시 성하여 즐겁게, 아무 근심 없이 잘 자라는 것을 보기만 하면 나는 모든 것을 내버려서 네게 바치마.』
하고 싶었었다.
아주 순결하고 아주 정한 모녀의 애정이 그의 가슴에 찼다가 넘칠 때, 그는 눈물을 흘리는 그 가운데에 또 다시 없는 희열을 느끼었다.
『그렇다, 모든 것을 버리자. 나는 다만 청아 하나를 위하여 살아보자. 내가 청아를 위하여 없어져야 한다면 없어지기라도 하자.』
하는 것은 그때 영숙의 영혼 속에서 부르짖는 결심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는 춘우에게 대하여서도 이와 같은 절대의 결심을 하여본 일이 아직 없었다.
그는 눈물어린 눈을 바로 들고서 또 다시 생각하여 보았다.
그는 춘우와 정이 들자, 그에게는 아무것도 꺼리울 것이 없이 자유로운 생애를 일평생 누릴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한지가 몇 달이 지나지 못하여, 그에게는 또 다시 사람으로서는 참아 볼 수 없으며 참아 당할 수 없는 비참한 사실이 어느 덧 자기 몸에 얽히인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찾아내게 되어 의아하고 놀라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행복스러운 그 이면에는 그 행복스러운 것만치 불행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었다. 자기가 오늘에 모든 부자유한 것과 허위와 또는 매음적(賣淫的) 안일한 생활을 일조에 벗어던지고 자유롭고 깨끗하고 신선한 생활을 하여가는 줄 알았더니, 벌써 자기가 알지도 못하고, 의식(意識)하기 전에 자기 신변에는 장차 올 비극의 준비를 하고 있는 청아가 있었던 것이다.
춘우는 그리웠다. 잊을 수가 없었다. 잊는다고 하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영숙은 오늘 청아를 자기 무릎에 다시 안고 죽고 사는 지경에서 배회하는 것을 볼 때 청아를 자기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청아는 자기의 딸이 아니요 자기의 것이 아니다. 청아는 벌써 자기와 떨어진지가 오래이다. 자기가 스스로 청아를 내버린 지가 오래이다. 내버릴 때에도 어찌 섭섭함이 없었으랴 마는, 그래도 가장 큰 힘으로 자기를 잡아가는 힘 이 최고조(最高潮)에 이르렀을 그때에는 능히 청아를 버릴 수가 있었지만, 오늘의 청아는 다시 버릴 수가 없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 아래 섰을 때에, 모든 세상의 죄악은 사라지고, 신성한 인간의 본능과 양심이 동하는 것이다. 버림을 당한 청아가 자기를 내버린 어머니를 부르며 신음 할 때, 비로소 영숙의 피 속에서 꿈틀거리는 모성(母性)의 사랑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청아를 자기 가슴에다가 꼭 끼어 안아보았다. 조금 잠이 들어서 쌕쌕 콧소리를 하는 그의 작은 몸이 자기 흉곽(胸廓)을 누르고 그 속에서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누를 때,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을 한꺼번에 짜내여 절 대한 힘이 다시 나는 듯하였다. 마디마디와 끝과 끝에 그 힘이 차지 않는 곳이 없으며, 찌르지 않는 데가 없는 것 같았다.
눈물이 겨우 그치고, 영숙과 영숙 어머니가 서로 마주 앉을 때, 영숙의 어머니는,
『그런데, 애가 저 모양이 되었는데, 애아버지는 한번 들여다보지를 아니하니 어떻게 하니!』
영숙은 자기 전 남편 철수를 박정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못하였다. 그에게도 그만한 가슴 아픈 일과 또는 그만한 비애 번민이 있을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필 남을 청원할 것이 무엇이랴. 다만 몇 해라도 같이 살던 그를 원수로 알 것은 아니다.
『오지 않으면 어때요.』
『어떻다니, 의원 한 번도 보이지 아니하고 생사람을 고대 로 죽인단 말이냐?』
『저도 오고 싶지는 않겠지요.』
할 때, 영숙은 싱거운 웃음을 웃었다.
『글세, 오고 싶든 오고 싶지 않든 말이다. 사람이 죽고 산 다는데 모르는 체하니, 그런 일이 어디 있니.』
『저도 생각이 있으면 와보겠지요.』
『어느 천 년에 사람이 다 죽은 뒤에 말야. 대관절 내가 송구하고 맘이 조려서 못살겠다.』
『그러면 내가 갖다가 병구원을 할게. 어머니는 아주 염려 마시구려.』
『네가 갖다가? 얘, 말은 좋다마는 누가 남의 자식 좋다구 한다드냐. 더구나 다 죽어가는 것을!』
이 말에 영숙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당연한 말이다. 춘우가 비록 나는 사랑한다 할지라도 철수의 자식, 자기의 원수의 자식을 갖다가 같이 죽는 꼴이든지 사는 꼴이든지 보자고 할런지가 의문이었다. 춘우가 그렇게까지 성인은 아닐 것이다.
영숙 어머니는 또 다시
『그러고, 네가 왔다갔다는 말만 들어도 천길 만길 뛸 터인 데, 거기다가 딸을 찾아갔다고 해보아라. 당장에 무슨 변이 나고 말 것이니.』
『그러면, 아이가 죽어도 모르고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을 어떻게 해요. 죽으면 살려놓을 재주가 있답디까?』
『사람의 맘이 어디 그래야지. 제 고집만 세우고 제 욕심만 채우면 고만이지. 제 자식 제가 죽이든지 살리든지 맘대로 한다면 어떻게 하니?』
『무엇요?』
영숙은 소리를 질렀다 .그때 그 마음속에서는 불같은 덩어리가 올라오며,
『뉘 자식 애요? 저만 자식이고 내게는 자식이 못된답디까. 낳기는 누가 낳고 기르기는 누가 길렀는데요.』
하며 혼자 화가 나서 날뛴다.
『압다, 그렇게 소리 지를 것야 무엇 있니? 내가 무엇이라 고 했니? 서로 의론하는 말이지!』
영숙 어머니는 한참 생각을 하더니,
『그러나 저러나 저것을 살려놓고 보아야지, 잘 태어났든지 못 태어났든지 살은 인생을 죽으라고야 할 수 있니? 그러니, 좀 어려운 말이다만 네가 내 말을 좀 들어라.』
『무슨 말을요.』
『그래도, 몇 해간 살던 정리도 있고 또 그 사람이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니니, 네가 좀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해보아라. 내가 가는 것보다 네가 가면 들을 터이니……』
『내가 가요! 어머니는 나중에 별소리를 다하시는구려. 내가 또 애아버지를 만나 보아요! 나는 싫소.』
『싫으면 어떻게 하니? 내가 널더러 다시 살라는 것도 아니오, 가서 어린 것을 위하여 말을 좀 하라는데, 그렇게 못 가겠다고 잡아뗄게 뭐냐.』
『글쎄, 지금 무슨 낯으로 또 다시 본단 말이오? 더구나 내가 내 발로 먼저 찾아가는 것을.』
『그러면, 네가 가기 싫어서 가지를 않는다 하면 어린 것은 누가 구해줄 것 같으냐. 그야 당초에 보지도 않으랴 하던 사람을 또 다시 찾아가서 귀찮은 말하는 것이 누군들 하고 싶어 하는 것이겠니만, 그렇다고 잠깐 창피한 것--창피할 것도 없지마는--자기가 싫다고 가지 않으면 그 가기 싫은 것 까닭에 생목숨 하나를 끊게 한단 말이냐!』
영숙의 어머니는 영숙을 권고하기에 힘을 들인다. 혹은 위협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였다.
『자, 그러지 말고 가보아라. 네가 너 먹을 돈이나 양식을 다시 대달라는 것도 아니요, 제 자식 제가 약 쓰고 살리라는 말하러 가는 것이 무엇이 그리 싫단 말이냐? 이 악한 사람은 재판질까지 해서 자식을 찾느니 양육비를 청구하느니 한다더라.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가서 보고 사정의 이야기를 하여보아라.』
『그것야 그렇지만.』
『어쨌단 말이냐. 나는 고집할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없을 것 같다.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가보아라.』
『가서 무엇이라고 한단 말요?』
『무얼 무엇이라고 하니? 참 딱한 애도 많다. 어린애가 명재경각에 이르렀으니 어린애를 데려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의원을 대서 고치든지, 양단간에 어떻게든지 하라고 하지.』
『데려가라고요?』
영숙은 이 말을 하면서, 눈이 뚱그래지고, 어린애를 다시 더 힘껏 끼어 안았다. 마치 당장에 자기 품에서 어린애를 누가 빼앗아가려고 하는 것 같이 그리고 가슴을 무엇으로 꽉 찌리는 듯이 선듯하여지면서 죽어도 철수에게 청아는 주지 않겠다는 결심이 그 순간에 번갯불 같이 일어났다.
『줄 수는 없어요.』
하며 어머니를 쏘는 듯이 바라볼 때 어머니는 속마음으로 코웃음을 치며 무슨 승리의 만족을 느끼는 듯하였다. 네가 청아를 내버리고 간지가 단 몇 달이 못 되어, 또 다시 청아에게로 돌아올 줄은 나도 벌써 짐작해두었었지마는, 만일 네 가 청아에게로 돌아오려면은, 또 다시 철수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생각을 하고서, 시덥지 않는 콧대답으로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무얼 어떻게 해요. 청아는 내가 데러갈 테얘요.』
『무엇야! 네가 데려가?』
『예, 제가 갔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할 터에요.』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
이 말을 듣고서 영숙은 답답하였다.
『청아를 네가 데려가면 네가 나 먹을 것을 주어야 할것이요, 나 먹을 것을 주지 못할 것이요, 나 먹을 것을 주지 못할 것 같으면 청아는 데려가지를 못한다. 나도 몸이나 늙지 않았으면, 그것야 어떻게든지 남의 집 드나들어서라도 하루 밥 셋끼야 못 얻어먹겠니마는 지금 같아서는 나는 달리 무슨 도리가 없지 않으냐, 너도 어미를 어미로 생각을 하면, 그런 생각 저런 생각을 다 해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영숙의 어머니 마음속에서는 새로이 어떠한 계획의 싹이 솟아났다. 영숙이 청아를 참아 놓지 못하는 것을 볼 때, 그에 게서는 야심 하나가 생기기를 시작하였다. 영숙이 청아를 가운데에다 두고서 다시 철수에게로 돌아간다 하면, 옛날의 호화로움과 옛날의 안일한 생활이 다시 자기에게까지 돌아오리라. 그리하여 영영 춘우가 손을 다시 끊게 하는 무슨 계략을 생각하기 시작하였으니, 그것은 결코 자기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일도 아니었으나, 영숙의 행복과 청아의 행복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행복을 돈에다가 결착 시킬 줄밖에 모르는 그는 그것이 오히려 세상에 살아가는 첩경으로 생각함이다.
영숙은 한참동안 아무 말을 못하였다. 그에게는 만 가지 계교가 궁하였던 것이다. 어찌할 도리가 얼른 눈앞에 생각이 돌지 않았던 것이다.
영숙 어머니는 다시 말을 이어
『그리고, 네가 청아를 데리고 간다 하나, 너는 데려가고 싶어도 춘우가 너의 자식까지 받고 싶어할 리는 만무하지 아니 하냐? 설령 춘우가 너를 위하는 맘으로 청아를 받는다고 하자, 그러면 춘우나 네게 무슨 그리 넉넉한 돈이 있어서 어린 것을 구하겠니? 만일 청아가 무슨 불행한 일만 있을 것 같으면, 그때에 그 청원은 누구에게 돌아갈 듯싶으냐?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애아버지에게로 가서, 어떻게 처치를 하여달라고 하여 보아라. 그저 내 말이 옳으니라 범연할 말이 아니야.』
영숙의 마음은 괴로웠다. 이 갈래 저 갈래로 사방에서 자기 몸을 찢는 듯하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럴 수도 없었다.
영숙은 다시 춘우의 마음을 헤어보았다. 춘우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 그러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나의 딸을 자기도 또한 사랑하여주어야 할 것이다. 물론 사랑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청아를 춘우도 사랑하여 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생각해 보기도 하다가, 다시 어제 저녁에 자기가 어린애를 보러 가겠다고 할 때에 춘우의 기색이 좋지 못하던 것을 본 것을 생각하자 다시 낙망이 된다. 자기가 자기 마음을 헤어보든지 또는 세상 사람의 적지 않은 실례를 들어보더라도, 데리고 들어온 자식이나, 그렇지 않으면 전실 소생을 그렇게 사랑까지 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다만 의리로 하는 수 없이 부모니 자식이니 하고 지나기는 지나지마는, 항상 질투의 미워함이 가슴속에 있어서 그것을 제지하느라고 적지 않은 노심과 괴로운 마음으로 지나가게 되는 것이 사실인 것을 생각하면, 자기가 자기를 위하여 청아를 데려다가 춘우의 마음을 거북하고 괴롭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거의 죽음이 임박한 불쌍한 청아를 내버려두고, 그대로 일어서 늙은 어머니에게 무한한 신고를 남겨주는 것도 어머니와 자기, 자기와 청아의 관계를 보아서 인정상으로라도 차마 할 수는 없는 일이요, 그렇다고 다시 철수에게 내주기도 싫었다.
적지 않은 번민으로 얼마를 앉아 있다가 영숙의 마음속에서는 결심이 생기었다.
그래도, 나는 이것을 의논할 사람은 춘우밖에 없다. 가장 자기의 모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호의적으로 의논하고, 또는 지도하여 줄 사람은 춘우가 그 중에 제일 믿음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렇다, 춘우가 듣지를 않는다 하더라도 한번 의논은 하여 보리라. 그래서 안 들어주면은 그만이지, 만일 들어주지를 않는다 하면은 그때는 애아버지에게 담판을 가리라.』
이렇게 맘먹은 영숙은 어머니를 대하여
『그러면, 나는 우선 집에 가서 춘우에게 그 이야기를 하여줄 터이오. 그리하고 들으면 고만이지만, 만일 듣지 않거든 애아버지에게라도 가서!』
영숙 어머니는 코웃음을 치면서,
『흥, 어림없는 소리도 하고 앉았다. 내가 사내가 되어도 어붓자식은 안 데려들어 오겠다. 거기다가 성하지도 않고 저렇게 거의 죽게 된 것을 어디 가서 말을 얼마든지 해봐라마는, 될성스럽지 않다. 』
하고 빈정거리며,
『그럼, 저렇게 잊지 못할 자식을 왜 내버리고 갔더냐. 내 버리고 딴 서방 따라갈 적은 언제고, 지금 와서 못 놓겠다는 것은 언제야.』
영숙은 공연히 울분이 생기며, 속에서 반역할 마음이 일어났다.
『내가 딴 서방을 했거나 화냥년의 짓을 했거나 어머니가 지금 와서 자꾸 되거퍼 말할 것이 무엇이요. 그러고, 내 딸 내가 찾아간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요. 나는 죽어도 철수에게는.』
하고 얼굴이 파랬다 붉었다 하며, 톡톡 쏘는 포독한 소리로 말대꾸를 한다.
『네 자식이냐. 네가 데려간다구? 말은 좋다. 네가 아무리 내 자식 내 자식해도 아마 네 맘대로는 데려지를 못하리라. 어디 재주 이떻든 데려가보렴.』
『왜 못 대려가요. 누가 못 데려가게 해요. 못 데려가게 할 놈이 누구얘요.』
『얘, 이러다가는 욕하기 쉽겠다. 글쎄 생각을 해봐라. 그게 낳기는 네가 낳았더라도 씨는 누구집 씬데 그러니? 나중에 애아버지가 와서 자식을 내놓으라 하면, 네가 무엇이라고 할 터이냐? 그것을 생각해봐야지. 그래, 내버리는 것이나 데려가는 것이나 모두 네 맘대로 해? 얘 싹 상했다. 그렇게 세상 일이 쉬우면 나는 벌써 쌍가마라도 탔겠다. 공연히 용렬한 소리 말고 내 말대로 해.』
『다 듣기 싫어요.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터이니, 내가 청아를 못 데려가면 내가 죽고 제가 죽는 한이 있드라도 무슨 요정을 내고야 말 터이니……』
『말야 무슨 말을 못해! 어디 죽거나 살거나 네 맘대로 해 보기는 해라마는 좀 어려울라.』
하고, 담뱃대에 담배를 피어 뭘고 말이 없이 두 눈만 끔벅 한다.
영숙은 벌떡 일어나면서,
『자, 다녀올 터이니, 그런 줄 아시우. 있다래도 어린애를 데리러 올 터이니.』
하며 문을 연다. 영숙 어머니는 일어서려하지도 않고,
『흥, 허락을 맡으러 가는구나. 허락을 맡아오나 보자.』
하고, 영숙의 뒷그림자만 치어다본다. 영숙은 신을 신고 문 밖으로 나가버리었다. 벌써 세 시간 넘어 네 시가 되어간다.
그는 다시 전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여갔다.
영숙이가 자기 집에 돌아왔을 때는 춘우와 창하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벌써 다녀오?』
하고, 춘우는 이제는 영숙의 일이 끝났으려니 하는 듯이 말 한마디를 던지고 창하와 이야기를 하였다. 영숙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머뭇머뭇하여 마루에 앉으면서,
『언제 오셨어요.』
하고 창하에게 인사를 하니까, 창하는 그 인사를 받아서,
『예, 벌써 왔습니다. 그러나, 청아가 대단히 앓는대죠?』
이 말을 들을 때, 영숙의 심장은 공연히 울렁울렁하였다.
자기가 어머니 집에서 나올 때에는 춘우에게 청아를 데려오자고 눈 딱 감고 말을 하려던 것이, 지금 춘우를 앞에다 앉쳐놓고 보매, 어쩐지 춘우는 벌써 자기가 말하려는 것을 미리 알고 앉았는 것 같고, 또 그의 말이 없이 다문 입이 당초에 그런 말에 대답을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한 입 같았었다. 그는 가까스로
『대단하다 뿐얘요. 아마 죽을가봐요?』
하고, 까만 눈썹을 아래로 깔 적에는 애수(哀愁)의 빛이 온 얼굴에 가득히 찼다.
『어떻게 어디를 앓게.』
춘우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몰라요. 내가 가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자꾸 엄마만 부르고 안간힘만 쓰는데 참아 볼 수가 없게 되었어요.』
『의사가 무슨 병이라고 하지도 않는단 말이요.』
『의사요? 의사가 다 무엇이오. 여태까지 약 한번을 변변히 쓰지를 못하였다는데.』
창하가 이 말을 듣더니, 눈을 뚱그렇게 뜨며,
『그게 웬일일까요. 애아버지도 서울에 와있는데.』
『제가 압니까.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았다는데요.』
『그거 야단났군. 오늘이라도 가서 권고를 해야 하겠군.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는데 그게 무슨 짓이람.』
영숙은 기침을 한번 하고 온 전신에 힘을 주어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두 분께서 다 들어주셔요. 저는 청아를 이집으로 데려 오겠어요. 춘우씨는 물론 싫어하실 줄 알겠지마는, 청아를 데려다가 죽이든지 살리든지 결말을 내기는 제가 날 터얘요. 창하씨 생각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다고 생각 하십니까?』
『글세요. 내야 이러거나 저러거나 간섭할 일이 못되니까, 말하기가 거북합니다.』
영숙은 다시 춘우의 기색을 살피었다.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어요? 저는 참말이지 죽어도 애아버지에게로 어린 것을 돌려보낼 수는 없어요.』
춘우는 말이 없이 앉았었다. 어제 저녁에 자기 마음이 괴롭던 것을 자기가 생각해 보자 과연 청아에게 자기가 죄를 짓지 않고 자기 집에 두게 할는지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춘우는 또 다시 오늘 아침에 영숙이를 보낼 적에 자기의 결심을 생각할 때 그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의리 인정이 없는 사람 같기도 하였다.
그는 한참이나 궁리를 하다가,
『데려 오구료. 내게 물어봐서는 무엇 하오? 남의 자식도 불쌍하면 거두어 기르는 일이 있는데.』
하며 억지로 웃음을 띠웠다.
『정말요?』
영숙은 거짓말을 듣는 듯이 다시 다짐을 한다.
『언제 내가 거짓말을 합디까?』
『그러면, 오늘이라도 제가 데리러 갈 터얘요.』
『데려 와요. 데려다가 병이 나으면 우리들이 기릅시다 그려.』
영숙의 마음은 몹시 즐거워서 ,당장에 뛰어다니며 춤이라도 추고 싶은 그 반대로 춘우는 몹시 마음이 괴로운 것을 알아주는 이가 별로이 없었을 것이다.
두서너 시간이 지났다. 창하는 작별을 하고 춘우의 집에서 나와 전차를 타고 경성으로 들어와서 찾아가는 곳은 철수가 유숙하는 여관이었다.
창하는 철수와 영숙이와 춘우 세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사실을 냉정한 머리로 관찰하여 보매, 차차 그들에게는 참담한 비극의 막이 열리기 시작하는 듯하였다. 자기가 언제든지 생각하는 바나 일반으로 청아는 세 사람 사이에 있어,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서는 장해물이다. 그들에게는 청아가 있는 것이 도리어 불행한 것인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는 그는 속마음으로는 청아가 죽는 것이 오히려 다행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진 한 일이 있었다.
창하가 철수의 여관을 막 들어서려 할 때, 영숙의 어머니 가 나아가는 것과 마주치었다.
『아!』
하고 영숙의 어머니는 그대로 발을 멈추고 한참이나 놀란 사람처럼 말이 없이 서 있다가, 겨우 입을 열어서,
『오래간만이시구려.』
하고, 인사를 한다. 창하는 노파의 행동이 수상한 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예, 안녕하십니까?』
하고, 다시 한 번 아래 위를 보았다. 그러고,
『누구를 보고 가십니까?』
하고 재쳐 물으며, 황당한 꼴로 영숙 어머니는
『저 애아버지 좀 보고 가요.』
하고 그대로 꽁무니를 빼려 하매,
『청아가 대단히 앓는다지요? 청아는 어떻게 하고 오셨습니까?』
『예. 말 마시우. 여간 대단해야죠. 그래 애아버지에게 그 말을 이르러 왔다 가요.』
『철수가 안에 있어요.』
『예. 있어요.』
창하는 영숙 어머니가 자기를 몹시 미워하는 것을 알므로 그래서 이렇게 주저하는가 싶어서,
『어서 가 보시지요.』
하고 안으로 들어갈 때 마음속에는 어쩐지 영숙 어머니가 자기를 만난 것이 꺼리어 하는 듯하여 보였다.
철수의 방으로 들어가서 앉았다. 철수는 마침 어디를 가려는 것처럼 옷을 갈아입으면서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하고, 넥타이를 맨다.
『어디 좀 다녀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자네 좀 보려고 왔네. 할 말도 있고……』
『무슨 말씀얘요. 지금 어느 친구와 만나자고 해서 거기를 가는 길인데요.』
『뭐 길지 않은 이야기야. 대관절 청아가 대단히 앓는다네 그려.』
『예, 그렇대요. 나는 바빠서 가보지 못하였지만, 걔 외조모가 와서 그러는데요.』
『그러나 저러나 말을 들으면, 자네가 약 지어 먹일 돈도 주지 않고, 의사도 보이지 않는다니, 그 말이 정말인가?』
철수는 눈이 둥그래지며,
『무엇요? 그럴 리가 있나요, 지금도 돈을 무엇 한다 무엇 한다 하고 삼십 원이나 가져갔는데요.』
『삼십원?』
『네, 그 애 외조모가 와서 약값 줄 것이라고요.』
『그랬나. 어떻든 그러면 다행일세, 내가 잘못 들었나 보이, 그런데, 내가 하겠다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오늘 영숙이가 청아를 보고 왔다네 그려.』
『영숙이가요?』
하고 왈칵 흥분이 되며
『무엇하러 청아를 보고 왔어요?』
『무엇하러 간 것이랴 두 말할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와서 하는 말이 청아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철수는 소리를 높이어
『안될 말입니다. 왜 제 집으로 데려가요. 당당한 내 자식에요. 제가 내버리고 갈 적은 언제고 지금 또다시 찾아갈 적은 언젭니까? 모두 제 멋대로 저하고 싶은 대로만 하자는 말이지요.』
청하는 말을 더 느릿느릿이
『글쎄, 내 말을 좀 듣게, 자네가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야. 어린 것이 지금 당장에 죽네 사네 하는데, 어머니 품에서 병을 고치는 것도 어린애에게 좋은 일이요, 또는 어머니 된 사람으로 그러한 마음이 있는 것도 인정이니까, 이왕 춘우도 허락한 일이니, 앓는 동안만 갖다가 치료를 시켜서 낫거든 다시 찾아오기라도 하게 그려.』
『싫어요. 내가 내 자식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주지 않을 작정입니다.』
『압다 그렇게 고집할 것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려. 생사람 하나 죽이는 것보도 잠깐 권도도 쓰지 못한단 말인가.』
『나는 권도도 쓸줄 모르고, 이왕 어미 없는 자식 죽는다 하면 팔자 좋지요. 세상에 살아서 고생하는 이보다.』
『그저 속을 좀 펴지 못해. 왜 그렇게 마음이 좁은가. 좀 너그럽게 생각을 하여 보게.』
철수는 화가 나는 듯이 탁탁 털고 일어서며,
『저는 그 말 한마디는 결단코 들을 수가 없어요. 다시 제게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시우.』
하고 웃옷을 떼어 입고, 모자를 쓴다. 창하도 하는 수없이 따라 일어서며
『그럴 것이 아닌데 그러네 그려. 오늘 저녁에라도 혼자 조용히 생각을 해보게.』
두 사람은 똑 같이 마당에 내려서 문밖으로 나왔다.
그 날 저녁이었다. 춘우는 밤이 늦도록 영숙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었다. 그러나, 열한시가 넘도록 오지를 아니하였다. 초조한 마음에 일어나 앉았다 들어누웠다 담배도 피었다가 책도 보았다 하였다.
남산 등머리 소나무 수풀 사이로 살그머니 넘기어다보던 달이 어느 결에 공중에 불끈 솟아 백지로 바른 머리창에 처 마 그림자를 반쯤 비추어 놓은 것이 차츰차츰 위로 올라가서는 어느덧 방안까지 환하게 비추어 놓았다.
영숙을 기다리던 마음은 어느덧 변하여, 영숙을 의심하는 마음이 되었다. 의심하는 마음과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은 질투였다. 영숙이 청아를 데리러 갔다가, 철수를 만나지 아니하였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이 생길 때에 그는 몹시 불안한 생각이 나서, 문을 열고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달을 바라보고 담배만 피어물고 있었다. 저 건너 양철지붕이 이슬에 젖어서 달빛에 뻔지르 하게 빛이나 보고 동릿집 머슴이 아리랑 아리랑을 흥에 겨운 목소리로 길게 뽑으며 지나갔다.
화단에 심은 꽃이 촉촉하게 젖은 향기를 실바람에 옮겨다가 얼굴을 스치고 지내갈 때, 입속에서는 달리 단꿀 맛이 나는 듯하였다.
춘우는 이와 같이 한적한 달밤에 외로이 앉아 영숙을 기다릴 때, 그는 외국에 간 사람이 고향 생각하는 듯한 그리웁고 외로운 정조를 느끼는 듯하였다.
그는 혼자 콧소리도 하여 보고 또는 입속으로 노래도 불러 보았다. 하늘에는 누가 부르는 듯이 박쥐 한 마리가 이쪽으로 날아오려다가, 다시 저쪽으로 달아났다. 멀리서 신용산 행의 전차소리가 들리었다 사라졌다 하였다. 때로 뻐국새가 뒷산 소나무 새에서 구슬프게 울었다.
『어째 오지를 않나?』
혼자 중얼거리다가 문간을 내다볼 때, 누구인지 흰옷 입은 사람이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에 영숙이가 아닌가 하고, 자세히 보았으나 영숙은 아니요, 촌 여자였다.
그는 일이 있어도 늦게 오겠지 하고 관대한 생각을 먹어도 보고, 또 다시 철수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나보다 하고 의심도 하여 보았다. 그의 마음은 마치 용수철 모양으로 줄어들었다가 늘어졌다 하는 것같이 동요가 생겼었다.
그는 마당에 내려서서 팔짱을 끼고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다가, 문밖으로 나가서 영숙이 오는 것을 맞아주려 하였다.
그러나, 기다리는 영숙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그는 조금 높은 곳에 올라서서 멀리 달그림자로 영숙의 오는 것을 보리라 하였다. 그러나 오지 않았다. 저쪽 기찻길 넘어서 벌써 빨간 불을 단 전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는 덜컥 걱정이 생겼다.
『벌서 막차가 나가는데, 웬일고?』
하고 궁금증이 났다. 오다가 무슨 일이 났다? 그렇지 않으면 늦어서 자고 오나? 마중을 가자니 집이 비고 궁금해 못 견디겠네.
하는 생각이 나며, 집을 내려다보며, 갓 이은 초가집이 가라앉은 듯이 조용히 있다.
기다리던 마음이 화로 변하고, 화가 변하여 영숙을 책망하는 마음이 되었다.
『어린앤지 무엇인지 데려오려거든 얼른 데리고 오든지, 밤중이 되도록 오지를 않으니, 기다리는 사람 생각은 해주지를 않는단 말인가?』
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고 자기 집 모퉁이를 돌아설 때 영숙이 숨이 턱에 찬 것 같이 땀을 흘리며 문간으로 들어서려는 것과 마주쳤다.
『왜 인제 오?』
춘우는 책망하려던 생각이 영숙을 보자 풀어져버리고 반갑고 시원해서 부드럽게 물었다.
『에그, 나와 계셨어요. 나는 퍽 기다리실가 봐서 뛰어오느라고……』
하고는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갔다.
『그런데, 어린애는 왜 데리고 오지 아니하였소.』
하고 춘우는 방안으로 들어가, 전깃불에 비치니 얼굴을 보자, 눈가장자리에 분바른 것이 어룽이지고 눈물 자국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속으로 놀라는 동시의 의심이 생기었다.
『옳지, 철수 앞에서 울었구나.』
할 때 춘우의 마음은 쓰리었다.
『애요?』
영숙은 대답을 채 다하지 않고 옷을 화난 사람처럼 활활 벗을 때 그에게는 어쩐지 당황한 빛과 침착하지 못한 사람 같았다. 마치 죄지은 사람이 쫓겨온 것 같은 기색이 있었다.
옷을 벗고 앉은 영숙은 무엇이라 대답할는지 몰라서 한참 주저하다가,
『병이 너무 중해서 바람을 쏘이고 데려올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그대로 두고 왔어요.』
춘우는 곧이 들었다.
『그렇게 중하드란 말요.』
『아마 죽을가봐요.』
영숙은 『죽을가봐요.』 하는 말에 힘을 주었다.
춘우는 영숙이 청아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 속으로 다행 하였다. 그리고 무슨 사정이든지 생기어 영영 아니 데려오기를 가만히 기대하였다.
『그런데, 막차가 나가는데, 무슨 차를 타고 왔소?』
영숙은 조금 있다가,
『그 차를 타고 왔어요.』
하는 데는, 아무리 보아도 무슨 근심이 있거나 무슨 생각이 있어 보인다.
『왜 어디가 불편하우! 또 어머니허고 싸웠소?』
『아뇨!』
영숙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왜 그러고 앉았소?』
『무얼 누가 어째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하고 억지로 태연히 꾸미려하나, 그 꾸미려는 고통이 나타나 보인다.
영숙의 가슴에도 무슨 비밀이 감추어 두었는지 모르나, 춘우는 몹시 의심스럽고, 또는 갑갑한 동시에 불유쾌하였다.
『그럼, 어린애는 아주 데려오지 않으료?』
『글세요. 시방 형편 같애서는 데려올 수가 없어요.』
『무슨 형편이란 말요?』
영숙은 반짝반짝하는 눈으로 전기불만 들여다보더니,
『아니 별다른 형편이 아니라요.』
하고, 말을 늦추어 가며,
『애가 너무 심하게 앓으니까요, 하는 말얘요.』
『그렇다고 할머니한테만 혼자 내버려두면 어떻게 하우?』
영숙의 마음은 괴로웠다. 춘우가 제발 그런 말을 좀 물어 주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였다. 무슨 무거운 납덩이가 그 말 할 적마다 자기 가슴 위에 와서 부딪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오늘 지낸 일을 모조리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하였다. 나중에는 청아가 이 시간에 얼핏 죽어버려서 이 꼴 저 꼴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도리어 나을 것 같았다.
영숙은 춘우에게 오늘 지낸 이야기를 할까? 하지 말까? 하지 않자니 자기는 춘우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요, 하자니 춘우의 마음은 아플 것이다. 차라리 모든 비밀을 자기 입속에 삼키어 두고 춘우의 마음을 괴롭지 않게 할지언정, 그 말을 입 밖에 내어 자기가 정직한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영숙이가 날마다 가보아야 하겠구려.』
『글세요. 틈 있는 대로 가보지요.』
『그것 대단히 어려운 일이 생겼군. 그렇지만 아니 가볼 수는 없지.』
춘우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리었다 두 사람은 길게 말을 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서 잠이 들었었다. 달은 어느덧 넘어가 머리창에 검은 그림자가 덮히어 버리고, 돌 틈에서 벌레우는 소리만 고요하다.
춘우가 언제인지 불안한 꿈을 깨었을 때에 그의 귀에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었다. 그는 실눈을 뜨고서 가만이 방안을 살펴보자 껏던 전등이 다시 켜지고 누웠던 영숙이 일어나 앉아서의 장문을 열어젖히고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상자에서 끄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가? 춘우는 눈을 크게 뜨고 힘 있는 광채로 그것을 건너다보다가 다시 눈을 감은 체하였다. 그러고 코를 골고 자는 체하였다.
영숙은 이것저것 백지와 비단 헝겊으로 꽁꽁 뭉친 것을 하나씩 둘씩 펼 때, 적적한 방안 전기둥 밑에서는 금과 눈이 부딪치는 소리가 땡그렁 땡그렁 일종 신비의 소리를 내 인다.
춘우는 속으로 놀래이고 또는 신기하였다. 영숙은 두 손가락에서 그것 중에서 하나를 접어들 때, 별 같은 광채가 나며, 금강석을 박은 반지가 춘우의 눈에 띠었다.
영숙은 그것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춘우가 혹시 잠을 깨어 보지나 않는가 조심하듯이 살피더니, 그것을 자기 손에 끼고서, 아까운 듯이 물끄럼이 보더니, 또한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입속으로
『하는 수 없지.』
하며 한탄을 하였다.
춘우는 그것을 볼 때, 그는 모든 일을 알아 채렸다. 여기 자기가 있는 이 집 세전을 얻어낸 것도 저 상자 속이요, 여태까지 지내올 때 그리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하여 오게 한 것도 저 상자 속에서 나온 것이요, 오늘에 청아가 죽을 지경에 있어서 약을 쓰며 의원을 부르게 되기도 저 상자 속에서 나올 것이 있는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영숙의 저 상자 속에 있는 것은 그것이 영숙의 힘들여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철수의 주머니 밑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 자기가 지금 이 집 이 자리에 누워 있는 것도 던적스럽고, 부끄러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영숙이 저렇게 그것을 아까워하는 기색을 볼 때, 그에게서는 자기의 자부심이 얼마간 손상되는 듯하였다.
자기가 남의 남편이 되어서 그 아내가 존중히 여기는 패물 까지 남편 몰래 팔아서까지 자기를 위하고 자기 자식을 위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너무나 남의 남편 될 자격과 힘이 부치는 것 같이 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다. 그 때의 춘우의 가슴은 쓰리고 저리었다. 그러고 혼자 얼굴에 피가 끓어올라 오는 듯이 부끄러웠다.
영숙은 다시 그것을 종이에 똘똘 뭉치더니 상자를 장 속에 집어넣고 반지는 자기 손가방 속에 넣은 후에 자리로 다시 들어왔다. 춘우는 안 오는 잠을 자는 듯 눈을 감고 누워서 영숙의 거동만 살핀다.
불을 끄더니, 영숙은 잠이 오지 않는지 부스럭부스럭하며 몹시 번민하는 사람처럼 이리뒤쳐 누었다. 저리 뒤쳐 누웠다 한다.
영숙은 그러더니, 다시 느끼어가며 우는 소리가 나며, 고개를 벼개에 틀어박고, 춘우에게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기 에 몹시 애를 쓰는 듯하였다. 그러나 벅차서 나오는 울음은 점점 느끼는 소리를 높일 뿐이요, 나중에는 듣거나 말거나 울고 싶은 대로 운다는 듯이 소리까지 내어 울었다.
춘우는 이 우는 꼴을 보고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이상한 눈치를 발견한 그는 그 울음 속에 반드시 무슨 수수께끼가 포함되어 있으리라. 그러고 여태까지 우는 것은 고사하고 참새나 제비처럼 유쾌하고 즐겁게 행동을 갖고 얼굴에는 행복의 빛이 나던 영숙이가 무슨 까닭으로 저와 같이 울까, 청아가 죽게 되었다니까, 그것을 불쌍히 생각하여 우나! 어머니의 몸이 되어 자식을 내버리었다가, 그 자식이 지금 최후에 임하였다니까, 그것을 뉘우쳐서 우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슨 다른 사실이 그 속에 잠재하여 있는 것인가? 물어볼까 하다가, 춘우는 덮었던 이불을 제치고 팔을 내밀어 어깨를 흔들었다.
『여보, 여보.』
손이 어깨에 다을 때 영숙은 잠깐 놀라는 듯하더니, 대답이 없이 더 소리를 높여 울었다.
『영숙! 영숙! 왜 이래? 응.』
춘우는 더 가까이 가서, 영숙을 자기 팔위에 안고 얼굴을 들여다보려 하였으나, 창에 비추인 미약한 달빛의 반사로는 자세히 볼 수가 없어 불을 켰다.
『왜 그러우? 말을 해요.』
영숙은 고개를 내저으며,
『아네요. 아무것도 아네요.』
하고, 대답 없이 울기만 한다. 춘우는 답답하여 영숙의 몸 을 잡아흔들며,
『내게 말 못할 것이 무엇이오? 무슨 일요? 대관절 말이나 좀 해요. 갑갑하구려.』
목 메인 소리로 영숙은 대답을 하는 말이
『당신에게는 말씀 할 수 없는 일얘요. 그러니, 그저 그렇게 만 알아두셔요.』
하매, 춘우는 일부러 노한 목소리로
『그러면, 영숙이가 나를 전만큼 생각하여 주지 않는다는 말이로구려. 전에는 영숙이가 내게 하지 않은 말이 없었지? 무슨 일이든지 같이 의논하였지! 그러고, 무엇이든지 날더러 물어보고 하지 않았소. 그러던 영숙이가 지금 와서는 날더러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전처럼 나를 생각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요?』
『아네요.』
영숙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으면서
『내가 당신을 더 생각하는 까닭에 이 말을 못한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애요.』
『더 생각을 하면 무슨 말이든지 해주는 것이 좋지 않소. 영숙의 일어나 나의 일이면 죽어도 한다 하지 않았소. 이 일이 죽는 것보다 더 큰일이라 할지라도 내게 말을 해주어야 할 것이 아니오.』
『왜 그렇게 들으려고 그러셔요. 저의 마음이 괴로운 것을 당신은 몰라주십니까? 저를 믿지 못하십니까?』
『영숙을 못 믿는 것도 아니요, 의심하는 것도 아니요. 영숙이 괴로워할 때 나도 괴롭고, 영숙이 울고 있을 때 나도 눈물이 나는 것을 영숙은 알지 않소. 자 무슨 일인지 이야기나 하우.』
『이야기를 해요?』
눈물방울이 속눈썹에서 이슬 같이 반짝인다. 춘우는 수건을 들러서 그것을 씻어주며
『응? 말을 해!』
『말을 하기는 하지요.』
영숙은 결심한 듯이 눈에서 광채가 나더니, 한참 있다가,
『그렇지만 여보셔요. 먼저 말을 하여둘 것은 섭섭히 생각 하지 마십시오. 그러고 저를 책망하여 주지 마셔요.』
『글쎄, 그런 말은 하지 말라니까, 그러는구료. 어서 말을 들어봅시다.』
『그러면 말을 하지요.』
하고, 영숙은 입을 열어 말을 시작하였다. 춘우는 가만이 그 말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영숙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더니, 깊은 한숨을 한번 쉬었다.
『저는 춘우씨를 속이었어요. 속이었다고 하는 것보다 어느 정도까지는 배반하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춘우씨더러 언제인가 일평생 애아버지와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이 있지요. 그 맹세를 오늘 저는 저버리고 다시 애아버지를 만나보았어요.』
말소리가 점점 떨려 나오며 힘이 있어 간다. 춘우는 말이 꼬리를 이어서 엉크러진 실이 풀려나오는 것을 정성껏 듣고 있다가, 이 말 구절에 와서 눈동자가 영숙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의 가슴에는 의심과 불쾌스러운 생각이, 녹은 촛농이 편편한 대로 떨어지는 것처럼 슬그머니 일어났다.
영숙은 다시 침을 삼키고 말 꼬리를 이어
『애아버지를 만나보게 된 것은 내가 일부러 보고 싶어서 그리한 것도 아니요, 나의 정이 다시 그이에게로 가서 그리 한 것도 아니요. 다만 어린 것 하나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서 그리된 거얘요. 아까도 말하였거니와, 청아가 그렇게 앓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그 애를 데려오려고 어머니 집을 가지 않았어요. 가보니까, 어느 틈에 어머니는 애아버지에게 그 말을 가서 하지 않았겠습니까. 가보니까, 애아버지가 이 소리를 듣고서 노발대발하여 청아가 죽어도 내놓지 않겠다 하고 야단을 치지 않았겠어요.』
『누구를 제가 원망하겠습니까. 어머니 하나 잘못 만난 탓으로 이 모양이 되어서 남과 같이 사람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모두가 팔자라 하면 팔자일는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저는 맨 나중 결심으로 애아버지를 찾아가려 하였습니다. 제가 당신께 말씀한 것도 있지마는 그것을 저버리는 것인 줄은 알면서도 저는 애아버지를 찾아갔어요.』
할 때, 영숙의 눈에서는 새삼스러운 눈물이 흘리기 시작하였다. 목소리는 메어 나온다. 그러고 고개를 춘우 무릎 위에 숙이고,
『춘우씨 당신은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시겠지요? 제가 애아버지를 보러가려 할 때처럼 마음이 괴로워 보기는 처음이었어요. 저는 당신을 믿는 마음으로 당신에게 사죄를 하면 반드시 용서하여 주시리라는 마음으로 그리하였어요.』
춘우도 이 말을 들을 때 운모원반(雲母圓盤) 위에서 일어나는 감응전기가 자기 몸에 닿는 듯이 저린 듯하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영숙의 손을 잡았다. 그럴 때 그는 『마돈나』의 순결하고 성(聖)스런 손을 쥐인 것도 같았고, 예수가 물을 청하는 사마리아의 매음녀의 손을 쥔 듯도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막달레아마리아에게 향기로운 기름으로 발을 씻겨 받고 그 머리터럭으로 다시 훔침을 당하는 듯하였다.
가장 신성한 감정과 가장 죄악의 마음이 자기의 전령혼 속에서 움직이는 듯하였다.
영숙은 울어가면서 말을 계속하였다. 엄숙한 밤공기가 정적을 만들어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데 영숙의 울음 섞인 말소리가 그것을 바느질하듯 복판을 뚫고 나갈 뿐이다.
『그래서 애아버지에게로 갔지요. 간즉, 나를 보고 반기는지 마는지, 그것은 제가 알 바가 못 되지마는 어떻든 옛 정리를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 하면, 인사 한마디라도 해줄 것이 아네요. 본체만체 앉았다가, 제가 인사를 시작하니까, 마지못해 왔느냐는 말뿐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저를 보고 싶어 간 것도 아니겠고, 무엇을 얻으러 간 것도 아니겠는데, 그렇게까지 매정스럽게 하는 것을 볼 때 저는 참으로 원통하였어요. 』
『그것은 어찌 되었는지, 첫째 청아를 어째 못 주겠느냐 한즉, 내 자식 내가 내 맘대로 하는데 네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전 같으면 모르겠다마는, 오늘은 네가 청아의 어미가 아닌 이상에야 단연코 내줄 수가 없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나는 하는 수 없이 청도 해보고 간원도 해보고 또는 빌어도 보고 떼도 써보았으나, 그는 돌멩이처럼 까딱도 하지 않겠습니까. 』
『그러한 아비에게 어린 청아를 맡겨둘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요. 생각할 때마다 불쌍하고 속에서 피가 식는 듯해서, 못 견디겠어요.』
『그래, 거기서 싸움을 하다 못하여 다시 어머니께로 간즉, 어머니와 애아버지와 무슨 내통이 있었는지 어머니마저 청아는 데려가지 못한다고 놓고 내주지를 않읍니다그려. 그래 하는 수 없이 데리러 갔던 청아는 데려오지도 못하고, 당신에게 죄만 짓고 왔어요.』
느끼어가면서 영숙은 말을 끝내고 엎드려 운다. 춘우는 이 말을 다 듣고 나서, 무엇이라도 말할 수가 없었다. 다만 무엇이라고 꼭 집어내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이 그의 가슴 위를 지질러 놓았을 뿐이었다.
우리의 시조 때부터 몇 만 년을 통하여 내려왔고, 또 우리의 자손에게 몇 만 년을 이어서 내려갈 절대의 문제를 눈앞에 놓고 그것을 내다볼 때, 우리의 팔이나 손이나 몸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진리가 하나 있다.
그 자식이 있으면 그 어버이가 있는 것은 정한 이치니, 이것을 어떠한 자가 있어 그렇지 않게 만들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자식이 그 어버이를 저버리는 것은 있어도 어버이가 그 자식을 내버리지 않다는 옛말도 있지마는, 그것이 사실로 거꾸로 되는 때도 간혹 없는 바가 아주 아닌 것은 아니다. 앞의 말보다 뒤의 말이 더욱 진리에 가까운데야 어찌하랴 복잡하고 착종한 우리 인류사회에서 나서, 또한 복잡하고 다난한 생애를 보낼 때에 우리의 피란처와 우리의 낙 원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어머니 품속과 애인의 품속이다. 조물주가 춘우라는 인간과 영숙이라는 사람을 만일 숙명적(宿命的)으로 이렇게 얽어 놓았다 하면 그 허물은 단순하게 그리고 돌리어 보내겠지마는, 만일 그렇지 않다 하면, 그 허물은 어디로 돌아가랴.
여기에 우리가 풀려고 애써도 풀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 남아 있는 것이다. 영숙은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가진 동시에 또한 남의 애인으로서의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서로 뭉치고 반죽이 되고, 또는 순탄한 길로 평행이 된다 하면, 그리 어려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보다 임을 사랑한다는 가장 귀한 감정을 가진 자로서 즐거운 생애를 보낼 수 있겠지마는, 그것이 부스러지고 서로 떨어지지 않을 수가 없고, 또는 서로 얽히는 곳에 영숙에게는 고민이 있고 불행이 생기는 것이다.
마치 금광석을 치는 것과 같이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과 또는 남의 애인의 애정이라는 그 사랑은 다 아름다운 감정이지마는, 이것이 서로 부딪칠 때, 둘은 위대한 운명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어느 것이 완성하고, 또는 보전하려면 그 어느 것을 희생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춘우의 마음은 아직까지도 단순하였다. 너무 이상적이요. 너무 착하였다. 영숙의 이와 같은 말을 듣고서, 그는 조그마한 의심과 또는 생각이 없이 모든 것을 용서라는 것으로 해결하여 버리려고 하였다. 영숙의 마음에는 벌써 틈이 장차 벌어지게 하는 그윽한 그림자가 비친 것은 어찌 되었든지, 춘우는 영숙을 동정하고 전보다도 더 많이 사랑할 수만 있으면 있을만큼 사랑하여 주기를 노력하려 하였다.
『영숙! 고만 울우!』
타일러가며 위로하여 가며, 자기의 마음을 늦추어 가며, 이번에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해서든지 칠판에 그리어 놓았던 그림을 지워버리듯 지워버려 자기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고만 울우, 우지 말아요. 내가 영숙을 용서할 권리는 없지마는 나는 그것을 잊어버릴 터이오. 영숙도 이제는 잊어버리면 고만 아니요.』
영숙은 그래도 울음을 계속한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영숙의 눈 속에는 죽어가는 청아가 자기를 부르며 발버둥 치는 것이 보인다. 그것이 옆에 있어서 자기를 위로하는 것보다도 더 자세하게 보일 때가 오히려 많았다. 자기의 머릿속에 비추이는 환상(幻像)이 옆에 앉은 정체(正體)인 춘우보다도 더 분명하고 똑똑하게 보이고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이랴.
여기에 그 무겁고 가벼운 것을 알 수가 있다고 할까? 아니다. 마치 한옆에 무거운 것을 실어놓아서 그것이 가만이 기울어져 있을 때에 또 다른 옆에 갑자기 다른 그만한 것을 갖다 놓으면 그것이 그쪽으로 기우는 저울과 마찬가지로 영숙의 마음은 이제 적지 않은 동요가 생긴 것이다. 지금 어느 쪽이든지 한쪽에 약한 점만 보인다 하면 그것은 기울어지고 말 위태한 지경에 있는 것이었다.
영숙은 툭 터놓고 마음껏 울었다. 그 울음은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었다. 마치 상식을 지내는 며느리가 자기의 시아버지나 시어머니를 생각하여 우는 것보다도 자기가 시앗 본 것이 더 설어서 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울음의 동기는 청아의 앓는 데서 얻어가지고 그것이 변하여 자기의 신세타령과 또는 세상에 모든 울분이 울적하게 쌓였던 것을 자기 애인에게 말로는 못하는 울음으로 하소연하다시피 하는 것이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다시 잠이 들었다.
그 이튿날 영숙은 밥 지으러 나오는 시간이 전보다 많이 늦었었다.
일주일가량이 지나서 영숙과 춘우 사이의 화평과 행복은 다시 예전처럼 회복되었다. 흔들렸던 행복의 잔은 다시 가만이 고요하게 놓여있고, 그 위로는 사랑의 샘물이 한량없이 찼다가 넘쳐흐르게 되었다. 다시 웃음과 노래가 그의 가정을 둘러싸게 되었다.
그러나, 춘우가 알 수 없는 것이 한가지 있었다. 영숙의 눈에는 언제든지 수심이 가득한 것이었다. 자기를 보고, 웃고, 자기와 서로 이야기를 할 때에 모든 경쾌한 동작이든지 표정이 전과 틀림이 없지마는, 말이 없이 있을 때에 영숙은 몹시 수심에 쌓여 있어 보이었다. 혹간 영숙은 애조를 띠운 소리를 입속으로 혼자 군소리처럼 하는 때도 있고, 멀거니 먼 산을 바라볼 적이 있을 때 춘우는
『무슨 근심이 있소?』
하고 물어보면,
『아뇨.』
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유쾌한 얼굴을 지어 그 수심의 빛을 지워버린다.
춘우는 어디 가든지 이 문제를 풀기에 고심하였으나,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풀 수가 없었다. 어떠한 때에 춘우는 다시 영숙에게,
『청아 때문에 그러우?』
하고 위로하듯 물어본 때도 있었으나, 영숙은 역시 고개를 내저으며,
『청아요?』
하고 되집어 물으며,
『청아는 벌서 잊어버렸어요. 생각을 해보십시오. 다시금 청아를 생각하느니보다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는 아주 청아의 일은 단념하여 버렸어요. 저는 당신 한 분을 위한다 하면 무엇이든지……』
하고 채 말을 마치지 않던 일도 있었다. 이 말을 들을 때, 춘우는 다시 영숙을 권하였다.
『나를 위하여 청아를 내버릴 것이 무엇이오. 내가 혹시 영숙이가 철수와 가까이하는 것을 싫어할까 하여 그와 같은 일을 일부러 한다 하면 그것은 영숙이가 나를 사랑하면서 나를 몰라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오. 만일 참 정말 나를 안다 하면 영숙은 그렇게까지 청아를 단념할 것은 없는 것 같소.』
하고 여러 가지로 타일렀으며 나중에는
『영숙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영숙이 마음속에 있는 것을 모조리 말해주지 않는구려.』
하고 성까지 내보았다.
그러나 만일 다른 때 이러한 말을 하면은 원통히 여길 터인 영숙이가 이번에는 도리어 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그렇지 않다고 할 때 춘우의 마음은 그 울음으로써 원통함을 하소연할 때보다 그 웃음으로써 자기를 위로하려는 것이 몹시 싫었다. 그 가운데는 기만과 사흘이 섞이여 있는것 같아서 마음이 서운해지는 듯하였다.
그러자 하루는 춘우가 몸이 불편하여 전보다 서너 시간 일찍이 집에 돌아와 본즉, 영숙이가 보이지 않았다. 문을 밖으로 잠근 것을 보면 필연 멀리 간 것이 분명하였다.
『어디를 갔을가?』
춘우의 생각으로는 알 길이 없었다. 어찌하였든 자기가 가진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요를 내려깔고 누웠으려니까, 낮부터 신열이 나던 것이 더욱더 심하여지며 온 전신이 불덩이같이 더워 온다. 가뜩이나 오히려 몸이 괴로워서 편안히 누워 있으리라 하고서 집에 돌아온 것이 와서 본즉, 영숙이가 없자 마음이 불편하고 또는 화가 나서 공연히 몸이 더욱 불편해지는 것 같았다. 어찌하였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보기나 하리라 하고서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으나, 조금도 마음이 가라앉지를 아니하고 마음이 조이어 못 견디겠다.
한 시간이 지나갔다. 천정에 붙어있던 파리가 앵하고 날아오더니, 얼굴에 와서 앉는다. 춘우는 나련한 기운 속에 근지럽게 기어가는 파리를 쫓고 다시 몽롱한 가운데 잠이 들었다 말았다 하였다. 다시 목이 말라서 물을 먹어볼가 하고 눈을 떴을 때 벌써 시계는 다섯 시를 쳤다. 그러자, 문소리가 황망히 나면서 들어오는 이는 영숙이었다.
『누구요?』
다만 반갑기만한 마음에 춘우는 제 힘껏은 목소리를 높여 서 불렀다.
『나에요.』
마당에 들어선 영숙의 목소리는 풀이 죽었다.
『어디를 갔다오? 나는 몸이 좀 불편해서 일찍 왔지.』
『어디가 편하지 않으셔요?』
『저, 신열이 나고 두통이 나며 몹시 거북해서.』
영숙은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죄지은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춘우 앞에 와서 앉아 춘우의 머리를 짚어 보았다.
『에구 대단합니다.』
『글세 웬일인지 알 수가 없어. 그런데 어디를 갔었소?』
영숙은 이 말에 또 한 번 말이 없이 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무슨 생각인지 한참하고 있다가,
『저 그전에 학교에 다니던 동무가 찾아와서 놀러 갔다 와요.』
하며 또 그 언제든지 웃는 웃음으로 말끝을 마치며 웃었다.
『그러면 집을 잠그고 나간단 말요. 내가 온 뒤에 가도 좋지 않소. 이렇게 적적한 집을 비어 놓고 다니면 위험하지 않소.』
『글세, 그런 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자꾸 뒷솔밭에 놀러 가자고 재촉을 하는 것을 어떻게 해요.』
『그럼, 그이는 어디로 갔단 말요.』
『먼첨 들어갔어요.』
『왜 그렇게 총망하게.』
『집에 볼일이 있어서요.』
춘우는 웬일인지 영숙의 말 가운데는 구석이 지어보이고 또 그가 말을 채 끝내지도 않고 외면을 하며 말을 피하려는 기색이 있는 것을 보아서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정말 같이 보이지는 아니하였다. 그러고 그러한 생각을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러한 생각이 자연히 들어갈 때에는 자기가 자기를 책망하는 생각이 나며, 또는 양심상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영숙이가 비록 무슨 일이 있어서 자기를 속이고 어디를 갔다왔다 하드라도, 그것은 자기와 영숙의 두 사람을 위하려 함이요, 결코 자기에게 향하여 반기(反旗)를 들려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하고, 지금까지 영숙이 자기에게 하여 내려온 것을 보아서도 영숙을 의심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연히 자기감정 가운데서 솟아 일어나는 것이지마는, 그것을 부인하고 그것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마 때 흙 틈에서 새어 나오는 물처럼 막으려 하면 또다시 새어 나오고 막으려 하면 또다시 새어 나오는 그의 의심은 오늘에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요, 벌써 그 단서가 잡힌 지가 오랜 것이다. 춘우는 장래할 미래의 그것이 어느 한 모퉁이를 문지르고 나갈 때가 있을 것을 미리 생각할 때 그는 몹시 무서운 생각이 났다. 그는 그의 마음을 누르려는 노력과 또는 그 누르는 것을 억지로 터뜨리고 쏟아져 나오려는 그 무슨 미묘한 감정과 싸우기에 몹시 가슴이 괴로웠다.
춘우는 또다시 영숙에게 묻지를 아니하였다. 그러하나, 그가 일과나 마찬가지로 하루 한 번씩은 의레이 말을 하여두는 말이 있으니, 그것은 자기의 마음이 얼만큼 괴롭기는 하나, 자기가 자기의 의무로 아는 것이니,
『청아에게는 정말 가보지 아니하료?』
하고, 한 번씩 채쳐두는 것이다.
영숙은 이 말을 듣고서,
『청아요?』
하고, 무슨 죄악의 현장이나 발견된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반문을 하였다.
『청아에게는 무엇하러 가요? 당초에 가지 않겠어요.』
하는 말이나 얼굴이 몹시 냉담해 보였다.
춘우는 또다시 생각하였다. 영숙이 만일 나를 위하여 청아를 버린다 하면 그것은 나 한 사람만 위함이요,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보다 자기가 순교자(殉敎者)의 고행(苦行)과 같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터이니, 또한 나로서는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는 일이니, 그대로 내버려 둔다 하면 그것은 내가 영숙을 사랑하는 본의가 아닐 것이요, 그렇지 않고 영숙이 참으로 나라는 사람을 생각하여 아니라, 사랑이라는 그것보다도 색정에 취하여 청아라는 자식을 내버렸다 하면 그의 피는 뱀의 피와 같이 찬 여자이니, 어느 때든지 또한 나를 내버릴 날이 있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영숙을 쳐다볼 때 어쩐지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날은 그대로 지나갔다. 그 후 며칠 후에 춘우는 평양에 출장을 갈 일이 있어서 사흘 만에 돌아온 일이 있었다. 돌아와서 창하를 길거리에서 만났다.
『어디 갔다 오나?』
『평양 좀 다녀오네.』
『평양은 왜?』
『회사 일로.』
『그런데 나는 몰랐어. 그러지 않아도 내가 자네 집을 갔었지.』
『집에 왔다면서 내가 어디 간 줄을 모른단 말인가.』
『글쎄 그러게 말일세 내가 자네 보고서 할 말이 있으니까 말일세.』
『무슨 말을?』
『이리로 오게, 조용히 앉아서 말을 하세.』
어느 『카페』로 두 사람은 들어가 조용한 이층으로 올라갔다.
『무엇을 먹으려나?』
『나는 식당차에서 저녁을 먹어서 별로이 먹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그러면 술이나 한잔 들려나?』
『언제 내가 술 먹든가 미친 사람일세그려, 대관절 무슨 말이나 좀 하게.』
창하는 자기 먹을 음식을 시켜놓고 천천히 입을 열어
『이 말을 들었다고 조금이라도 어떻게 생각은 하지 말게. 그러나 내가 이 말을 자네에게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나는 자네의 친구된 의무로 말을 하는 것이야.』
이 말 한마디가 벌써 춘우의 머릿속에 암시를 주는지 알아낼 수가 있었다. 그의 마음은 무엇으로 찌르는듯하더니, 돌아서서 가는 영숙이가 눈앞에 보이는듯하였다.
『어서 말이나 하게.』
『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가 몹시 거북한 것처럼 맥주 한 컵을 마시고서,
『영숙씨 말일세.』
하는 소리에 춘우는 얼굴에 뜨거운 피가 올라오는 것을 깨달았다. 창하는 다시 말을 계속하여
『요사이 나의 눈으로 보아서는 퍽 무슨 고민이 계신 모양이야.』
하니까 춘우도
『글세 나도 그러한 생각을 가졌어. 지난번에 철수에게 다녀온 후부터는 웬일인지 기색이 좋지가 않아서 나도 퍽 의심을 하는 중이야. 이번 평양을 가서도 이삼 일간 더 묵어올 것이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속하게 왔는걸.』
『글세 나도 일전에 자네 집을 가지 않았겠나, 그러니까 문을 잠그고 아무도 없드란 말이야.』
이 말을 듣고 춘우는 고개를 끄떡하고,
『음!』
하고 무엇을 알아챘다는 듯이 가만이 창하의 계속하는 말만 듣고 있다.
『그러고 또 어저께는 내가 철수의 있는 여관에를 다녀오다가 힐끗 보니까 그녀가 그 여관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든가?』
춘우는 무의식적으로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탁 치며 벌떡 일어서며,
『응! 무엇야?』
하고 실신한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는 번갯불 같이 지나간 일이 연상되며,
『옳지, 알았다. 모든 것을 이제야 알았다.』
춘우는 흥분이 되어 먹지 않던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비록 독하지 않은 맥주라 할지라도 한동안 먹지를 않았던 까닭에 몹시 취해 왔다.
그리고, 춘우는 몹시 흥분이 되어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여러 생각을 할수록 그의 마음은 분하고도 또 한옆으로 생각하면 자기가 어느 점까지 부족한 점이 있는 까닭에 이러한 일이 생겼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지난번에 자기가 생각한 바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몹시 감정적인 것을 자기도 생각하였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아서, 그것을 천명(闡明)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고, 술잔을 거푸 들이키기 시작할수록 그의 마음은 자꾸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이번에 창하의 말을 듣고나서 지난번 자기가 생각한 마음을 어느 정도까지 믿기 시작하였다.
영숙이가 문을 닫고는 어디를 갔다는 것과 또는 철수를 만나 보았다는 것을 들을 때, 그의 마음이 찔리는 것은 더할 것도 없지마는, 또 한옆으로 생각하면 자기가 자기를 내버려서라도 영숙의 사랑을 완전히 하고 싶었다.
물론 영숙이가 자기를 내버리고 철수를 따라간다 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자기의 마음이 괴로울 뿐 아니라, 자기를 모욕하고 자기를 내버리는 그 울분한 감정을 억제하기도 어려웠지만, 또 한옆으로 생각할 때에 자기에게 그만한 부족이 있는 까닭에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한 것을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다.
춘우는 다시 말을 이어
『그와 같은 일은 벌써 알았네. 자네가 그런 말을 하지 않드라도 나는 벌써 알고 있으니까.』
사실로 말을 하면 진정한 사실을 자기가 인정하기는 오늘이 처음이지마는, 지금 춘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또한 춘우가 이 말을 듣고서, 자기의 감정 속에는 이러한 말이 있는 것을 미리 알고는 있었지마는, 그것이 입으로 나오는 말이나. 또는 그의 마음 깊이 그것을 느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춘우는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하여 생각할수록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 흥분이 되어오며, 한두 잔 입에 대이기 시작한 술이 자꾸자꾸 잔을 거푸하기 시작하였다.
『여보게.』
창하는 술이 조금 취하여 이 말을 듣고서는 자기가 이 사실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춘우에게 무조건으로 동정하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춘우가 한번 노하고 한번 성내는 것이 자기가 한번 노하고 한번 성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춘우에게 마음이 끌리어 이런 일을 자기가 당한 듯하였다.
물론 이런 일이 멀지 않은 장래에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오늘에 정말로 이 일을 당하고 보니, 그것이 정말 같지 않고 거짓말 같으며, 또는 이런 일이 이 세상에 정말로 있는지 의심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보게 내가 이러한 말을 한다고 어떻게 생각은 하지 말게. 내가 이 말하는 것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그것을 확실이 알기 전에는 자네나 나나 알 수가 없을 것이니까.』
『자네가 말하기 전에 나는 벌써 알고 있었네. 자네 말이 거짓말이 아닌 것은 나는 벌써부터 증명하지마는, 나 역시 이것을 생각할 때 어느 정도까지 짐작한 것이 있으니까.』
『글세 짐작을 하든지 마든지, 그것은 나는 모르겠네만, 그것이 정말이 아니기를 나는 바라네. 그것이 나의 눈으로 보아서 정말인 것을 어떻게 하나.』
창하는 어느 때까지든지 냉정한 생각으로 말을 하였다.
두 사람은 거기서 나왔다. 그러고, 전차를 타고서 춘우의 집으로 향하여 갔다. 춘우가 자기 집으로 갈 때에 지금같이 허무한 일을 당해본 일이 없었다. 허무할 뿐만 아니라, 이것이 거짓말 같아 보이기도 하고, 또는 이것이 거짓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까지 속으로 생각하였다. 자기가 여태까지 그러지 않아도 의심까지 하여보다가, 창하에게 그 말을 듣고서 신경이 착란하여지며, 머리가 혼탁하여져서 눈앞이 보이는 것이 바로 분명히 보이지 않고 흐릿하여 보이며, 모든 것이 꿈같이 보이었다.
영숙이가 자기를 생각하여 준 것이 각별하였기 때문에 지금 영숙이가 자기를 다시 내버리고 철수에게로 사실로 간다 하면 어찌하랴. 아니 간다 하는 이보다 사실로 갔다 하면 장차 자기에게 어떠한 운명이 닥쳐오랴?
그러고, 창하가 이런 말을 나에게 일러준 것이 친구의 도리로는 그러할는지 알 수 없지마는 이런 말을 하여 주어서, 자기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괴롭게 하여 주는 이보다 아무 말도 하여 주지 않아서 그것을 아지 못하는 가운데 영숙이에게 속아 지내는 것이 도리어 자기를 위하여서는 좋을 것 같았다.
그것을 생각하면, 창하가 어느 편으로는 고맙기도 하고, 또는 원망스러웁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창하가 말이 없이 가만이 앉아있는 것을 볼 때, 그의 가슴속에 무슨 계책을 품고서 그리 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나기를 하였으나, 그것은 곧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자기 집에 가서 영숙이가 없다 하면 어찌하랴. 그러다가, 내가 가서 한참 초초한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영숙이가 들어온다 하면, 속에 숨어있던 울분한 감정이 터져 나와서 어떠한 짓을 할는지 자기를 믿지 못하는 까닭에 지금 자기 집으로 가는 것이 위태한 것 같았다.
더구나 오래간만에 그쳤던 술을 먹은 까닭에 그것이 자꾸자꾸 올라와서 얼굴이 덥고, 또는 같이 타오르는 감정을 자기가 억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점에 들어서 자기가 혼자 자기 집으로 가는 것보다 창하를 데리고 가는 것이 퍽 필요하고 든든하였다.
사흘이라는 날짜를 서로 보지 못하였던 까닭에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닌 게 아니지마는, 만일 영숙이가 집에 있어 자기를 기다려 주지 않고 도리어 없는 것이 자기나 영숙 두 사람을 위해서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집에 왔다. 사흘 전에 나갈 적이나 별로이 다를 것이 없었다. 영숙은 무엇인지 마당에서 서성거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섬사하게 흐트러진 것을 아무렇게나 틀어 얹고 가므스름하기 때문에 저고리 치마가 아무러한 일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춘우의 돌아오는 것을 보고 영숙은 비둘기같이 반가워하였다. 그러고, 그 언제든지 웃는 웃음을 지어서 춘우를 맞아 주다가 춘우가 말이 없이 눈치만 살피며 또는 얼굴에 전에 보지 못하던 술기운이 있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늘이 무슨 간격이 생기는 것을 춘우가 먹지 않던 술을 먹은 것으로 영숙도 짐작하게 될 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렇게 속히 오실 줄은 몰랐어요.』
영숙이가 자기 남편이 속히 온 것이 좋아 그랬는지 꺼리는 일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마는, 춘우의 귀에는 모든 것이 의심쩍게만 들린다.
『왜 그러우? 내가 일찍 온 것이 영숙에게 방해되는 일이 있소?』
영숙은 춘우의 말을 듣고 속으로 에쿠하였다.
『왜 말씀을 그렇게 하셔요.』
영숙은 도리어 성내는 체하며 말을 하였다.
『전에 하시지 않던 말씀을 하시니, 그러고 약주가 웬일이 셔요.』
『나는 술 먹을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줄 알았더니, 다시 술 먹을 기회가 와서 좋게 되었소.』
『그게 무슨 좋은 기회입니까, 그러나저러나 어서 들어가서 진지나 잡수셔요.』
창하는 두 사람의 눈치만 보고 앉아서 아무 말이 없을 때 속으로는 영숙이가 얄미운 생각이 나서 자꾸 눈이 찡그러진다.
『밥 먹을 마음 없소. 그러나 요사이 소문을 들으니까, 영숙이가 대단히 바쁜 일이 많다고 합디다 그려.』
『일이 무슨 일얘요.』
하며, 영숙도 이제는 춘우가 그것을 알았구나 하며, 곁눈으로 창하를 보았다. 이 일을 만일 안다고 하면, 그것은 창하의 입에서 밖에 나올 데가 없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며, 창하가 몹시 미운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춘우와 자기 사이에 들어서 모든 것을 주선하여 주어서 창하같이 고마운 사실이 없더니, 지금 와서는 창하처럼 밉고 또는 무서운 사회가 없었다.
본시 마음이 굳지 못하여 남을 꼬집어 뜯고 싶어도, 그렇게 아프게 꼬집어 뜯지 못하고, 그렇다고 마음속으로 집어만 넣고 꿍꿍 앓기만 하는 춘우로서 비록 영숙이가 사실로 자기를 배반만 하였다 할지라도 상당한 증거가 없이는 그것을 책망할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어서 마음만 혼자 괴로웠다. 그러고 영숙이가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나 자기가 영숙을 알아준 것이 너무 완선완미한 편이 있으므로 그것의 반동적으로 일어나는 질투와 또는 미운 마음이 속에서 용솟음을 쳐서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춘우보다 창하가 더욱 면난한 점이 많고 또는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있기가 어려워서,
『자, 나는 그대로 집으로 가겠네.』
하며, 일어서려 한즉, 춘우도 갑갑한 생각에 그대로 있기가 거북하여
『그러면, 나하고 같이 가보세. 갑갑도 하고 그러니.』
하고, 모자를 떼어쓰려 한즉, 영숙이가 난처한 눈으로 춘우를 보며
『지금 또 나가시기는 어디를 나가셔요. 고단하신데, 그대로 주무시지.』
하며, 만류하기를 시작한다.
『아니 잠간만 다녀와야 하겠소.』
예전의 영숙의 말을 듣기 잘하는 춘우도 오늘에 와서는 어디까지 반항하기를 시작한다. 춘우는 다른 말이 그 자리에 서 일어나서 창하와 함께 문밖으로 나왔다.
一六
영숙은 혼자 자리에 눕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있어 전후 일을 생각하여 보았다. 자기가 자기 마음을 헤아려볼지라도, 아무 그른 것이 없고 또는 죄 될만한 것이 없는데, 오늘 창하나 춘우의 행동이든지 기색을 보면 자기를 몹시 의심하는 듯한 것이 야속하였다. 물론 속을 아지 못하는 춘우로서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도 그렇게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마는, 자기가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춘우가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 것도 또 한옆으로 서러운 생각이 났다.
자기는 입이 있다. 이 입을 가지고 춘우에게 무슨 말이든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여기에 고민이 있고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만일 영숙이 춘우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이런 말 저런 말을 하였을 것이지마는, 그 말을 하지 못하는 것도 영숙이가 춘우를 생각하는 까닭이요, 이 말을 들으면 춘우의 가슴이 아플가 하여 말을 하지 않는 것인데, 도리어 춘우가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지 아니하고, 그렇게 하기 시작을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자기의 머리를 자기가 쥐어뜯을 만큼 갑갑하였다.
그는 몹시 마음으로 방황하였다. 춘우에게 이 모든 사정의 말을 하여버릴까 그렇지 아니하면, 아주 비밀로 덮어버릴까, 말을 하자니, 자기의 처지가 곤난하여질 것이요, 말을 하지 않자니 춘우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자, 영숙은 복바쳐 올라오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혼자 그 자리에 쓰러져 자꾸 울었다. 운다 한들 속시원한 것은 없겠지마는, 자기는 춘우의 가슴에 안기어 우는 것이나 다름없는 감정으로 울어보기도 하였다가, 또는 모든 세상일을 단념하고, 춘우도 단념하고 청아도 단념하고, 모든 것을 단념하고 자기의 팔이나 다리에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것같이 훌훌 단신이 된 마음으로 혼자 나서려는 마음을 먹어보기도 하였다. 지금 영숙은 십자가 길거리에선 사람 모양으로 어느 길을 밟아야 옳을는지 알 수가 없었다. 춘우의 사랑이냐,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의 본분이냐, 여기에서 헤매일 때 그의 마음에는 허트러짐이 있고 또 얽혀지는 것이 있었다.
시계는 자꾸 가는데, 춘우는 돌아오지 않는다. 방안에 혼자 앉아 애끈이는 생각을 하는 영숙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춘우는 열두 시가 넘어도 돌아오지를 아니한다. 영숙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마음을 태우다가, 어느덧 잠이 들었다.
닭이 첫 번 울었다. 그러나, 춘우는 오지 않았다. 영숙은 여러 번 춘우가 집에 들어온 꿈을 꾸다가, 닭 우는 소리에 잠이 깨어 그것이 꿈인 것을 알 때 몹시 마음이 섭섭하였다. 그러다가, 눈꺼풀 위를 내리누르는 잠으로 말미암아 다시 혼몽히 잠이 들었다. 영숙의 꿈속에는 청아도 보였다가 어수선 산란하여 단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 며칠이라는 날짜가 지나갔다. 저녁때 일정한 시간에 자기 집으로 돌아오던 춘우는 날마다 술이 취하여 자정이나 새로 한 시에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전에는 당초에 말이 없던 사람이 날마다 잔말을 늘어가며 어떠한 때는 손으로 영숙을 때리기까지 하였다. 그리고는 공연히 트집을 잡아가며 영숙을 괴롭게 하기에 모든 수단을 다부렸다. 그럴 때마다 영숙은 춘우 앞에서 울었다. 그래서, 애원하는 목소리로
『여보셔요! 당신이 저를 그렇게 미워하시는 까닭을 말씀하여 주셔요, 저를 왜 그렇게 못 믿어주십니까, 당신의 행동을 보면 아마 내가 여자로서 하지 못할 짓을 하는 줄 아시는 것 같지마는, 그것은 결코 잘못 생각하시는 것이지요. 당신은 언제든지 서로 의심하지 말자, 영원히 믿자고 말씀하신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요사이는 이렇다 저렇다는 말씀 한마디 해주지 않으시고 날마다 약주만 잡수시니, 몸도 돌보셔야 할 것이 아네요. 저는 당신을 위한다 하면 무슨 짓이든지 하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당신은 저를 그렇게까지 알아주시지를 않으셔요.』
하면, 춘우는 다만
『나는 아무것도 몰라. 내게는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다. 내가 한번 사랑에 취하였을 적과 같이 술에 취해볼 터이야. 그 사랑이 오늘에 나를 파멸하는 구덩으로 끌어넣으려는 것이 되는 것이나, 일반으로 이 술이 또한 나를 파멸로 끌어넣을 것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야. 인생의 운명이란 하늘이 정한 것도 아닌 동시 또는 자기 일개인이 만드는 것도 아니다. 다만 흘러가는 물 위에 떠 있는 부유와 같아서, 힘 있게 누르는 운명의 힘은 조그마한 우리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어.』
할 뿐이었다. 이렇게 날이 갈수록 정신적으로 가정이 깨져 가는 것은 물론이요 물질적으로도 자꾸 부서져 가기를 시작하였다. 그리할 때마다 영숙은 설합을 열고 상자 속에 넣어 두었던 패물낱을 들고 나갔다. 하루는 춘우가 몹시 얼굴빛이 좋지 못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말 한마디 없이 혼자 꿍꿍거리고 있는 기색을 영숙이가 살피고서,
『왜 무슨 걱정이 계시우.』
하고, 다정히 물어주었다.
춘우는 말을 할 듯 할 듯하다가, 다시 딱 멈추며
『아니, 별로 큰일은 아니나.』
하며, 채 말끝을 다물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시 영숙은
『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말씀을 하셔요.』
춘우는 이 말을 듣고서 속으로 몹시 미안하나, 그렇게 지성으로 물어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생각이 우연히 생겨서 부끄러운 웃음을 한번 웃고 또는 미안한 걱정을 나타내며
『그런 게 아니라, 돈을 한 사십 원 갚아야 할 일이 있는데, 지금 같아서는 속수무책이야.』
『그것은 무엇에다 쓰신 것인데요?』
『무엇에 썼느냐구?』
『예.』
춘우는 이 말대답을 하기는 몹시 부끄러웠다. 실상은 그동안에 술 먹고 영숙을 괴롭게 하기에 소비하려고 남에게 얻어쓴 돈이었다.
『그것까지 말하기는 싫소.』
『왜 말씀을 못하셔요. 저는 벌써 짐작을 하였는데요.』
『무슨 짐작을 했단 말이요?』
『약주 잡숫고 계집의 집에 다니시느라고 쓰신 것이지요.』
할 때, 그는 보복을 하는 독부의 눈처럼 샐룩한 눈으로 춘우를 보았다. 그러고, 분풀이를 하는 쾌감을 느끼기까지 하였다.
『누가 술 먹느라고 빚을 졌단 말요? 아지도 못하는 소리를 하는구려.』
하고, 그것은 말로는 부인하려 하였으나, 어째 힘이 없고 싱거웠다.
『그러면, 그렇게 걱정만 하시면 어떻게 해요? 변통을 하실 도리를 생각해 보아야죠.』
『글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려. 이번 월급은 거의 다 갖다 썼구.』
영숙은 고개만 기웃하고 있다. 저녁을 치루고 춘우는 갑갑하다는 핑계로 다시 집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창하를 만나서 의논이라도 하여 보리라고 하고 그의 집을 갔었으나, 창하가 없으므로 하는 수없이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그는 우연히 황금정통에서 지나가는 전차를 치어다본즉, 분명히 자기 집에 있던 영숙이가 그 속에 탄 것을 보았다. 이상한 생각에 가슴이 선듯하여, 그대로 그 뒤를 따라서 가본 즉, 그는 철수가 묵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춘우는 문깐에 서서 영숙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이 되거나 두 시간이 되거나 어떻든지 만나보고야 말리라 하였다. 만일 이 세상 사람들 사이를 이상하게 가려놓은 장벽이 없다 하면, 그는 당장에 영숙의 뒤를 쫓아 들어가서, 철수와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눌러 죽여 버리거나, 영숙의 검은 머리를 한 팔에 휘휘 감아 들고 그대로 태질을 친다 하여도, 그의 울분한 마음은 풀릴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숙의 뒤를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불같이 타오르는 질투의 마음으로는 당장에 무슨 일이든지 내고야 말 것 같았다. 들어 갈까 하고 발길을 그쪽으로 향하였다가는 멈추고, 멈추었다가는 다시 들어가려 하였으나, 그 몹시 뜨거운 피가 조수 밀리듯이 밀렸다가 내렸다가, 더웠다가 식을 때마다 그의 발은 또한 앞으로 내놓아졌다가 다시 뒤로 물러섰다.
고요한 하늘에서 조그마한 별들이 작게 움직이고 시커먼 어둠이 춘우가 서 있는 골목을 휩싸고 있는데, 군데군데 둥그런 전깃불이 한 개 두 개 검은 포장에 누른 점을 찍은 듯 이 켜있을 뿐이다.
한 시간이 지났다. 그래도 영숙은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춘우는 지금 철수와 영숙이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것을 눈앞에 상상하여 볼 때, 그의 전신은 떨리었다. 그러고, 그것을 생각지 말아서 자기의 아픈 가슴을 진정하려 하였으나 그것을 생각지 말려고 하나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자기가 이곳에 서 있어서 영숙을 기다리는 것이 도리어 어리석지 아니할까. 영숙은 이미 자기를 떠나 옛날 그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면, 자기가 나를 버렸는데, 내가 그에게 더 무엇을 요구하려고 이 곳에 서 있는가! 내버리는 것이 누구에게든지 자유이면 내버림을 당하는 것도 그만큼 자유스러워야 할 것이다. 내가 영숙을 차지하였을 때, 영숙이 철수를 내 버리었고 철수가 영숙을 다시 차지하게 되자, 또한 나를 내버리는 것이 그 무슨 인과(因果)가 아닐까?
그러나, 철수나 나나 두 사람은 다 한 번씩 영숙에게 내버림을 당한 사람이다. 지금 내가 이 아픈 가슴을 움키어 잡을 때, 맛보던 감정을 전일에 철수도 맛보았을 것을 사실이다. 그때 내가 승리자(勝利者)의 자랑스러움을 느끼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로 지금에 철수도 또한 그러한 것을 느끼었을 것이다. 이 점에 들어서 철수나, 자기가 똑같을 것이요. 또는 동감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 이 모든 것의 책임을 만린 돌려보낸다 하면, 그것은 영숙에게 있는 것이요 철수나 자기에게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지금 이렇게 생각을 하기는 하면서, 불붙듯 타오르는 질투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내가 영숙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것이 있기에 이런 질투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고 하면 이런 질투가 있을 리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이리저리로 왔다 갔다 할 때 그의 마음은 조금 가라앉는 듯하였다.
『고만두고 가서 자자. 그러면, 자기도 돌아올 터이지.』
하고, 돌아섰다가도 그는 다시 발을 멈추고서,
『그래도, 다시 더 기다려보자.』
하고, 머뭇머뭇하는 동안에 어느덧 길거리가 조용하여지고 가끔가끔 전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그래도, 영숙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몇 시나 되었는지 신발 소리가 저벅저벅 나더니 누가 나왔다. 춘우는 적지 아니한 반가운 생각을 가지고서 그 나오는 사람을 맞으려 할 때, 그의 추측은 완전히 틀려버리고, 그 나오던 사람은 찌걱하는 문소리와 함께 대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었다. 그는 그 대문이 자기의 마음과 문을 틀어막는 듯이 답답하였다. 그 문을 자기의 손으로 열 수가 없었다. 그는 문을 닫는 사람이 영숙이가 아니요 철수가 아니지마는, 어쩐지 미운 사람은 영숙이와 철수같이 생각이 들었다. 그때 춘우의 마음을 슬그머니 복수(復讐)까지 할 마음으로 변하여지며, 어디까지든지 영숙이 나오기를 기다리리라 생각하였다.
먼 데서 닭이 운다. 옷이 이슬에 젖어서 축축하여지며 풀이 죽어온다. 그러나, 아직까지 영숙은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어데까지 나오기를 기다려 보리라고 결심까지 하였던 춘우는 시간이 갈수록 자기의 결심이 어리석은 것 같아서, 에, 고만두어라 하고 단연히 발길을 돌리었다.
여관 앞을 나와서 큰 길거리로 걸어올 때에 사람 하나 지나다니는 이 없고, 다만 길 양편에 켜있는 전등불만 졸린 듯이 죽 켜있을 뿐이다. 그러고, 먼 곳에서 울려오는 야경(夜警)의 딱딱하고 나무때기 두드리는 소리가 한층 더 세상에 적막한 느낌을 전해준다.
일종의 비애, 즉 가졌던 것을 잃어버린 듯한 슬픔과 자기를 내버린 원망과 또 질투의 마음을 분기도 하였다가, 또는 모든 것을 부셔버리고 싶은 생각이 났다. 울고 싶은 것은 자기가 얼마든지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것이지마는, 모든 것을 때려 붓는다는 것은 그리 쉽게 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반항이 있고 투쟁이 있는 것이다.
그 반항과 투쟁에서 능히 이길 수 있다 하면, 그는 굳센 사람이며 세상의 승리자라 할 수 있으나, 대개는 그것을 이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싸움도 하기 전에 자기가 자기 몸을 스스로 깨뜨리는 사람이 흔하다. 지금에 춘우도 그 모든 것을 부셔버리고 싶고 초인간적(超人間的)으로 살아보리라 하였으나, 자기가 거기에 손을 대기도 전에 벌써 자기는 자기가 약한 것을 깨달아 알았다. 그것이 자기의 힘으로 되지 않을 것을 짐작하였다. 그렇다고 그는 지나간 일을 한 번에 잊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길을 밟으려고 굳은 결심을 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마치 납(納)으로 만든 사람과 같아서 녹기 쉬운 성질을 가지었다.
『모든 것을 나는 모른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슨 행복이 있으랴. 행복은 차지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다.』
하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들 때, 그는 에이는 듯한 감정에서 샘같이 솟아나는 눈물을 금할 수가 있었다. 그는 길거리로 걸어가며 울고 싶은 대로 마음껏 울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자기 집 문 앞에 당도하였다. 닫혀있을 터인 대문이 방싯이 열리어 있고 방 안에는 불이 켜있다.
『에그, 이게 웬일인가?』
그는 마음이 두근거려지며 머릿속에는 도적이라는 것까지 연상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틈에 누가 들어와서 무엇을 가져가지나 아니하였나?』
다소간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소리가 삐걱 나자, 방문을 열며,
『이제 오시우?』
하는 사람은 분명한 영숙이다. 춘우는 꿈 같은, 생각 가운데 넋 잃은 사람처럼 멀거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영숙은
『왜 그렇게 서 계시우? 또 약주 잡수셨소?』
하며, 문을 열고 나올 때 춘우는 나오는 영숙을 똑바로 쳐다보며, 정말 이것이 영숙인가 나의 신경이 찬란하여져서 환상(幻像)이 나타난 것이나 아닌가 의심하는 생각까지 났다.
영숙이 가까이 와서 춘우의 입을 맡아보더니
『약주도 자시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정신 나간 이 같이 서 계시우?』
춘우는 영숙의 손도 쥐어보고, 목소리도 듣고, 그의 온 전신을 살핀 뒤에 그것이 정말 영숙인 것을 깨달아 알고 나서 그는 무엇이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냐 아냐.』
그대로 있자 하며 영숙은 춘우를 이끌어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며, 언듯 생각하기는 옳치 춘우가 어떠한 곳에 새로운 애인을 두고 그 집에를 갔다가 늦게 돌아오니까, 할 말이 없어서 주저 주저하고 말도 못하는구나? 하고, 가슴속에서는 또 맹렬한 질투의 생각이 불일 듯 일어났다. 웃던 얼굴은 성낸 얼굴로 변하고 따뜻하던 손은, 차디차 지며 목소리가 날카로워간다.
『대관절 어디를 갔다가 인제야 오셔요?』
『어디?』
『네, 어디 갔다 오신 것을 말씀하시지 못할 것이 무엇얘요?』
춘우는 괴롭고 답답하였다. 영숙에게 지금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좋으냐. 자기가 철수의 여관 앞에서 영숙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면, 그것은 자기가 영숙을 못 믿는다는 것을 증거함이요, 또 그렇지 않고 다른 말을 하면, 그것은 그 영숙을 속이는 것이며, 영숙은 속이지 아니하자니 영숙은 나를 의심할 것이다. 그는 다만 말 한마디 없이 앉아있을 뿐이다.
『왜 말씀을 못하셔요?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고 내가 그만한 것을 짐작하지 못할 것도 없겠구요. 또 그만한 것을 짐작해 안다 하여도 모두 저의 탓이지요. 당신을 원망할 것도 없겠지요. 그렇지만, 당신이 그렇게까지 하신다는 것은 저를 위해서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하여 걱정이 된다는 거얘요.』
『무슨 짐작을 하였단 말이오? 그 짐작이라는 것을 좀 알아봅시다.』
『생각해 보시면 알 것이지요.』
『생각이 무슨 생각이란 말요.』
『무슨 생각이 무엇얘요? 전에는 약주나 잡수신다고 핑계를 하고 늦게 다니셨지마는, 오늘은 약주도 잡숫지 않고 전보다도 훨신 늦어 들어오셔서 어디 갔다 오셨느냐고 여쭈어보아도 아무 대답도 못하시니, 그것이 무엇을 증명하는 말 얘요? 계집의 집에 갔다가 오셨거나 그렇지 않으면 나같이 다 썩은 년은 고만 쓸데가 없으니까 내버리시고 다른 여자를 생각하시는 것이겠지요.』
『글쎄 왜 그런 말을 하우. 무슨 일이 있어서든지 조금 늦게 돌아왔기로, 그렇게까지 말을 하면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요.』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씀얘요. 그만한 일을 저에게 속이셔요? 당신이 알 것이지요.』
『무엇을 내가 속이었단 말이요 내가 영숙을 속인 것이 무엇이요.』
『속이지 않으시고 무엇이얘요? 왜 오늘 밤에 어디 갔다 오신 것을 말해주지 않으셔요. 말씀하시는 것이 즉 속이는 것이지요.』
『내가 그 말은 참으로 영숙에게 할 수 없소. 영숙이가 어떠한 오해를 할지라도, 나는 그 말을 내 입으로 할 수 없다는 말이요.』
춘우는 간원하듯이 이 말을 하였으나, 영숙에게는 그 간원 하는 것이 도리어 거짓을 꾸미는 것처럼 밖에 보이지 아니하였다.
『고만두세요.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는데, 제가 더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읍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마음을 저는 믿지요. 무슨 거짓말을 하시더라도, 저는 당신의 말씀이라 하면 정말로 알 터입니다. 혹은 다른 사람이 이러한 말을 들으면 저를 어리석다 하겠지마는, 저는 지금껏 당신을 위하여 살아왔다고 생각조차 하니까요,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는 것도 다 사랑하여 드리는 것을 더 즐거움으로 생각하니까요.』
『물론 그런 말을 여기에서 새삼스럽게 다시 말할 것은 되지 못하지마는, 나도 영숙의 지금까지 얼마나 나를 위하여 힘써준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오. 그러나, 이번 일 하나는 나의 입으로 영숙의 앞에서 말할 수가 없소. 그것은 나를 용서하여 줄 수밖에 없소.』
이 말을 들은 영숙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해 드리지요. 모든 것을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 것은 잊어버리지 말아 주셔요.』
하고, 그대로 엎드려 느껴 운다.
『고맙소.』
춘우는 이 말 한마디를 입밖으로 내보낼 때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느끼었다. 그의 눈에도 은연히 눈물이 핑 돌았다.
『잊지 않지, 나는 영숙이 나를 믿어준다는 것과 같이 나도 영숙을 그렇게 믿어줄 터이요.』
이 「믿을 터이요」하는 소리가 영숙의 귀에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에는 무사히 잠이 들어 잘 자고 났다. 아침에 춘우는 어제저녁에 된 일을 생각하기에 몹시 머리를 썩히었다. 전차 속에서 본 것이 분명히 영숙이었고, 철수의 여관으로 들어간 것도 분명한 영숙이었으며, 내가 그 여관 앞에서 나오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남겨놓지 않고 모조리 보았으나, 문 닫힐 때까지 영숙이가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영숙이가 자기보다 먼저 자기 집에 와있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의문을 풀기도 전에 자기가 영숙의 앞에서 영숙을 믿겠다고 진정을 다해서 말을 하다시피 한 것으로 말을 하드라도, 지금 냉정한 머리로 생각하면 어리석고도 또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자기가 자기의 감각(感覺)을 전부 부인하기 전에는 어저께 일을 그대로 덮어버릴 수가 없으며, 또는 어제저녁의 자기가 영숙에게 취한 태도가 너무 약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자기의 허위(虛僞)를 비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밥은 먹을 때, 영숙의 거동이 전보다 더 친절하고 민첩하게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너무 꾸미고 거짓 같아서 도리어 불쾌함을 느끼게까지 하였다. 춘우가 마루에 내려설 때 영숙은
『잠깐만 기다리셔요.』
하고 방으로 뛰어들어가더니, 손에 무슨 종이쪽에 싼 것을 들고 나왔다.
『저.』
한참이나 말읠 못하고 있더니, 그것을 내밀면서,
『그것을 오늘 갖다 갚으셔요.』
춘우는 그것을 받아든 그 찰나에 그 속에 돈이 든 것을 알았다.
『이것이 웬 것이요.』
하고, 영숙을 보았다.
『글세 갖다 갚고 오셔요. 지금 장황히 어떻게 말씀을 합니까.』
『출처나 알아야 할 것 아니오.』
『글세 있다 저녁에 조용히 말씀하지요.』
『나 그러면 아니 가지고 가겠소.』
하며 도루 내미니까.
『글세 퍽도 그러시우. 벌써 시간도 다 되고 하였으니, 어서 가지고 가셔요.』
춘우도 얼덜김에 주머니에 그 돈을 받아 넣고 문밖으로 나 왔다. 나오면서 생각을 하매, 그 돈이 수상하기도 하고 의심쩍기도 하며, 또는 미안하기가 짝이 없다. 그러고, 또 한옆으로는 고마운 생각도 났다.
춘우는 그날 하루 종일 사십 원이라는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어 놓고 영숙이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 온 것을 연구해 내기에 몹시 고생을 하였다.
어제저녁에 자기가 영숙이 뒤를 분명히 따라가기는 갔었는데, 그것이 수수께기와 같이 풀기 어려운 것이 되버린 것과 아울러서 또 오늘 아침에 자기에게 내어준 사십 원 돈이라는 것도 알 수가 없다. 얼마 되지는 않는 돈이지마는, 만일 이것을 얻어온 수단이 자기를 위하여 상서롭지 못하며, 그것을 받는 것이 자기에게 혹시 부끄러운 일이나 아닌가 하고, 그는 그것을 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다시 그대로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까 그 돈이 어디에서 난 것이요.』
춘우는 들어가 옷을 벗고 앉아 영숙에게 물었다.
『빚은 갚으셨어요.』
하며 영숙은 되짚어 물었다.
『글세 돈의 출처나 좀 가르쳐주구려.』
『글세 갚으셨거든 갚았다고 그러시고, 아니 갚으셨거든 아니 갚으셨다고 그러셔요.』
『그것은 어떻든지 내 말대답부터 해줘요.』
『난 싫어요. 그 말씀을 해주셔야죠.』
춘우는 영숙의 말이 나오는 것을 듣기 위하여
『갚았어.』
하고 일부러 거짓 대답을 하였다. 그것은 그렇게 해야 그가 참말로 대답을 할 터임이었다. 대답을 들은 영숙은 말이 나오지 않는 듯이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것은 요담에 아실 날이 있어요.』
하고 춘우의 환심을 사려는 듯이 상긋 웃었다. 춘우는 이 말을 듣고 속에서 분이 치밀어 올라왔다. 아무리 여자는 요사하다 하지마는, 당장에 말을 하마 하고, 그것을 금시에 고치는 것은 너무나 간특해 보였다.
『무엇야? 어째서 이 당장에 말을 하지 못한단 말이오. 그럼, 진작 말할 수가 없다든지 그렇게 말을 할 것이지. 지금 말을 하였다가, 또 말을 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말할 수 없는 까닭이 있으니까 그렇지요.』
영숙도 약간 얼굴에 피가 올라오며 목소리가 올라간다.
『그 까닭이란 대관절 무엇이오. 그 까닭 좀 압시다.』
『까닭을 아르켜드릴 테면 말씀을 하는 것이 났지요. 그 까닭을 알으실 건 없어요.』
『그러면, 당초에 말을 못하겠단 말이오?』
『못해요. 어제저녁에 당신이 늦게 돌아오셔서 제게 그 까닭을 조금도 말씀하실 수 없다는 것이나 똑 마찬가지로 저는 그 말을 당신에게는 할 수 없습니다.』
춘우는 이 말에 입이 막히었다. 얼마간 입을 벌려 말을 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만일 그렇다 하면, 자 도루 가져가시오. 여기 있소.』
하고, 돈을 끄내서 영숙의 앞에다가 내던지며,
『나는 그렇게 까닭 모르는 돈을 쓰기가 싫소. 비록 영숙이가 주선하여 준 것이라 할지라도, 그 까닭 모르는 돈을 쓰기도 싫소.』
하고 그대로 옷을 띠어 입고 문밖으로 나왔다. 영숙은 아무 말 한마디 없이 앉아있는 체 가만이 있었다.
一八
근자에 춘우의 동료 사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아다니었다.
『춘우가 요사이는 퍽 침울하여졌어?』
『글세 나도 퍽 이상하게 보는 중야.』
『그 까닭을 자네들은 모르나?』
『모르지.』
『허허, 실련야, 실련.』
『조금 같이 지내는 여자가 있지 않은가?』
『그래, 그 영숙이 말이지?』
『옳지!』
『그것이 왜 그만 냄새가 난다고 한 모양일세그려.』
『어떻든 세상은 돈 있어야 하겠네. 사랑의 마지막 승리는 돈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고 말데.』
『그것을 인제야 알았나!』
『인제 안 것은 아니지마는, 언제든지 진리인 것을 어찌하나.』
『그럼, 그 승리자란 대관절 어떤 사람야.』
『그 승리자 말인가. 전라도 부자로 년전까지 같이 지내다가, 춘우에게 영숙을 빼앗겼었지 그러다가 다시 지금 얼려 붙기를 시작한 모양이야.』
『이름이 무엇이람?』
『압다 이 사람아, 일전에 내가 교동 모퉁이에서 자네더러 자세 봐두라고 그러지 않든가?』
『응응.』
『그 사람야 바로.』
『옳지, 윗수염 까맣고 얼굴이 둥근 그 사람 말이지.』
『그래.』
『그렇지만 춘우가 돈은 없어도 사람은 퍽 얌전하고 귀염성스러운데.』
『얌전하고 귀염성스러우면 무엇을 하나? 돈이 있어야지.』
이처럼 만나는 대로 춘우의 친구들은 춘우와 영숙의 소문으로 서로 찧고 까불제, 춘우는 벙어리 모양으로 말이 없이 자기가 일보는 회사 책상 앞에서 자기의 맡은 일반 볼 뿐이었다. 붓을 잡는 것도 시덥지 않고, 남과 이야기 하는 것도 귀찮아서, 다만 꿈꾸는 사람 모양으로 앞만 내다보고 앉아있을 뿐이다.
그는 몹시 고적함을 느끼었다. 자기의 주위에서 모든 것을 누가 빼앗아간 것 같이 그는 적적하였다. 그러할수록 그에게는 공포(恐怖)의 마음이 생기었다. 자기가 어떠한 깊은 산이나 넓은 들에서 혼자 지내가는 듯이 외롭고도 무서웠다.
그 무슨 무거운 것이 자기의 머리에서도 누르고 가슴에서도 누르는 듯하였다. 그러고, 미끄러지지 않으려 하나, 아니 미끄러지지 않을 수 없는 수렁 가장자리로 자기가 차차 들어가는 것을 느끼었다.
영숙과 자기의 힘으로는 헤쳐버릴 수 없는 구름을 만지려 하나 만질 수도 없고 보려 하나 분명히 볼 수도 없이 가리어 있는 것을 생각하자, 다만 안타까울 뿐이었다. 예전에 즐겁던 날을 생각하고, 오늘에 이것을 헤아리매, 알 수 없는 사람의 살림살이가 더 한번 알 수가 없었다.
한강이 뽀트놀이며 청량리에서 처음 만나 꿈 같은 사랑의 마음을 서로 속삭일 때와 효창원의 봄놀이, 짧으면 짧다 할 수 있으나 일생의 잊지 못할 새로운 살림살이의 즐겁던 것이 오늘에 거품을 쥐는 것이 사라지려 하는 것을 생각하며, 눈물까지 흘리지 않을 수 없이 감개가 무량하다.
나의 사랑이 엷어졌느냐! 영숙의 사랑이 식었느냐! 영숙을 잊어보려고 하여보기도 하였으나, 잊으려고 하면 더 생각이 나고, 보지 않으려면 할수록 더 보고 싶은 것은 사람의 힘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며, 밉고 질투스러울 때마다 더 마음이 어찌하여 타는지, 그것을 알려주는 열쇠를 아직 조물이 우리 사람에게 주지를 아니한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이러하고 저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저런 것 같은 것이 사랑이요, 믿으면 눈이 딱 감고 믿어지며,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카락 하나가 움직이는 것을 보아도 수상하여 보이는 것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사랑의 빛깔이다.
오늘에 춘우는 영숙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마는 속이 공연히 타고, 영숙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지마는 공연히 의심스럽다. 춘우는 혼자 생각하여 보았다. 내가 영숙을 의심하는 것이 사실이니, 영숙에게 그 모든 의심스럽게 여기고 믿고 하든 바를 모조리 이야기하여 버린 후, 모든 것을 잊어버려 버릴가! 그렇지 않으면, 영숙의 마음을 떠보고 모든 것을 탐지하여 볼가. 만일 내가 의심하는 바 또는 창하가 내게 일러준 것이 거짓말이라 하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고 그것이 사실이라 하면 어찌하랴. 그때 춘우는 남자의 자부심이 몹시 상하여지는 듯하였고, 또는 우열승패를 다투는 장사가 적에게 몹시 모욕을 당할 때 그 마음과 같이 분함을 느끼었다.
『옳다.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속에다 가만 넣고 우물쭈물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천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의 태도는 마치 채무나 채권을 가진 자들이 서로 앉아 청산을 하여 받으려면 받고 탕감하는 것이나 똑같은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피차의 권리 의무가 있는 부채인 까닭이다.』
하고는, 첫째로 영숙이가 철수나 청아를 다시 보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고서 어찌하여 철수에게 다니는 것, 둘째로 어찌하여 근자에 와서는 퍽 침울하여졌느냐 하는 것, 셋째로는 그 돈 사십 원의 출처를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 것, 이 세 가지이다. 그러면 나도 내가 생각하였던 것은 모조리 말을 하여버리리라 하였다.
그날 저녁때 춘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말썽꾼인 친구 몇 사람과 만났다. 그중에 나이 어리고 인물 예쁘장한 사람이 먼저 춘우의 손을 잡고
『어디 가나?』
하며 새브렁거리는 말소리로 묻는데, 입에서 술 냄새가 난다.
『집에 가네. 한잔들 했네그려.』
하며 침울한 웃음과 함께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바꾸었다. 그중에 몸짓이 뚱뚱하고 로이드 안경을 버틴 친구 하나가 배 창자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로
『집에 가서 와이프하고 재미있게 저녁을 먹는 것도 좋기는 좋은 일이지마는, 우리 같은 친구들하구 같이 먹는 것도 그리 무미할 것은 없겠지.』
『자, 가서 한 잔 내게.』
하며 그 말을 받아서 말썽을 끄내는 사람은 그중에 얼굴이 가장 까맣고 술을 그리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다. 춘우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사람들을 떼어 보내려고 나오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웃어가면서
『글쎄 좋기는 좋은 말이지만은, 돈이 있어야지.』
하며 두 손을 펴보았다.
『옳지, 핑계가 좋으니. 그렇지만, 자네가 정 사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 같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술 한 잔 내지 못하겠나.』
하는 사람은 로이드 안경 쓴 사람이다.
『암 그렇구 말구. 그렇지만, 그런 말 말게. 춘우가 그럴 사람이 아니니. 낼 마음이 있으면 우리가 내라고 하기 전에 먼저 내는 사람이니까.』
서로 찢고 까부는 사애에 서서, 춘우는 어쩔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애원이나 하는 듯이
『정말 돈이 없네. 돈만 있으면 자네들이 말하기 전에 내지.』
『거짓말 말게.』
『정말일세. 자, 보게.』
하고 지갑까지 끄내보였다. 사달라는 말을 먼저 끄낸 사람이
『정말가?』
하고 한참 섰더니, 머리에 얹었던 팔을 뚝 떼며,
『가세, 내가 한 잔 내지.』
하고 일행을 잡아끈다. 춘우는 돈 없는 핑계나 해서 거기에서 모면을 하려 하였으나, 이 경우를 당하여서는 조금 난처하였다. 그러나, 술 낸다는 친구가 술을 많이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인 까닭에 잠깐 먹고 얼핏 나오려 하고 그 뒤를 힘없이 휘우적거리며 따라갔다.
『어디로 갈까?』
『글쎄.』
『맥주나 한잔 먹어보세그려.』
『맥주? 그까짓 것을 먹어야 취해야지 위스키나 브란디가 아니면 주량이 차지를 않을걸.』
자기네끼리 의논이 분분하다. 춘우는 그저 새끼에 맨 돌멩이처럼 어디든지 가자는 대로 가리라 하고서 구경만 한다. 술 낸다는 친구는 돈푼이나 있고 놀기를 좋아하나, 원래 술은 먹을 줄 모르는 까닭에, 그 대신 여편네를 좋아한다. 그래서, 술집에 가자면 반드시 계집애를 보러 가는 것이며 술을 먹으러 가는 것이 아니요, 요리 집에 가서 논다 하면 기생 없이는 놀지를 않는 사람이라, 지금도 자기의 애인의 볼 마음이 불현듯 나서 춘우 술 사준다는 핑계로 애인을 보러 가는 것이다.
『요리 집으로 가지.』
하며 로이드 안경에게 물어보았다.
『아직 일르지 않을까?』
『이르기는 무엇이 일러. 일직 가야 기생도 맘대로 부르지.』
『자네야 판에 박아논 기생이 있으니까 언제는 못 만나보겠나.』
할 때 옆에서 이 말을 듣던 춘우가 만일 요리 집에를 간다 하면 시간이 너무 늦어질 터인즉, 그리하지 말고 간단히 어디 가서 술이나 몇 잔 먹고 헤어지리라 하고서,
『요리 집에는 가서 무엇을 하나 어디 청요리 집에 가서 저녁이나 먹지.』
하며 만류를 하려 한즉 또 그 새부렁거리는 친구도 속심은 단단하여
『그러이, 그래. 돈 많이 들이고 그리로 갈 것 없네. 어디 가서든지 간단히 먹지.』
그러나, 그 말이 모두 성금이 서지 못하였다. 네 사람은 명월관지점으로 갔다.
방 하나를 치우고 들어앉아 있을 때 춘우의 마음은 술 먹을 것이나 또는 놀 마음은 조금도 없고 다만 오늘 저녁에 자기 집에 돌아가서 어떻게 사랑의 셈을 따질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자기가 돈을 가지고 대금업자나 또는 이해타산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지 못한 것이나마 한가지로, 사랑에 들어서도 그리 타산적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을 자기가 자기를 알므로 여간한 결심을 하지 않아서는 아니될 것이라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나 춘우는 다만 한옆에 우두커니 앉아서 속만 혼자 조리고 앉아있었다.
조금 있더니, 기생이 들어왔다. 그 기생을 볼 때 춘우의 눈은 뚱그래지며 가슴이 설렁하였다. 당장에 대들어서 손목을 보여주고 인사라도 하고 싶었으나, 춘우는 그렇게까지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기생이란 옛날에 춘우더러 선생님 선생님하고 친하게 따랐으며, 자기가 시골로 갈제 용금루 난간에서 눈물까지 흘려주던 설성월이었다. 기생 역시 춘우를 보기는 반갑고 놀라는 눈으로 보았으나,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어버렸다. 다른 기생이 또 하나 와서 술을 먹기 시작할 때는 벌써 방안이 어둠침침하여질 때였다.
술들이 얼근히 취하더니, 서로 취기가 술잔이 왔다 갔다 한다. 로이드 안경은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기생을 더럽게 건너다보며 잡담을 하고 앉았는데, 설성월은 그때까지 별로이 말이 없이 좌석 주인 옆에 앉아있다. 그는 무슨 난처한 일이나 있는 듯이 유쾌하지 못한 표정으로 술만 따른다.
춘우는 술 먹을 생각보다도 집에 갈 생각이 더 많아서 여내 시계만 꺼내보고 있을 때 깐죽깐죽하는 친구가 춘우를 보더니,
『시계는 왜 그렇게 보나?』
하며 옆으로 다가앉아서 술잔을 주며,
『한잔 들게. 그러고, 나 한 잔 주게.』
하며 술을 권한다.
『자네가 전에 일본 있을 때는 그렇게까지 술을 잘 먹더니, 요새 와서는 한동안 끊었었다지?』
『그랬었지!』
『예끼, 미친 사람. 술을 왜 끊나? 술처럼 좋은 것이 없데. 열정이 없는 사람이 향내 나는 술을 먹으면 그저 가슴에서는 불보다도 더 뜨거운 열정이 솟아오를 것이요, 세상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하는 사람이 한번 마약(痲藥) 같은 술잔에 입을 대이면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잊어버릴 대로 잊어버릴 것일세. 울고 싶거든 먹어보게, 맘껏 울 것이요. 웃고 싶거든 먹어보게, 폐부가 터지도록 웃을 수가 있는 것일세. 거기에는 거짓이 없어지고 흉허물이 없어지고 세상의 모든 얼기설기한 그물을 벗어나 초연한 경지에서 놀 수가 있단 말일세.』
한참이나 술 철학 강의를 하고 나더니, 다시
『그러나, 여자는 사귈 것이 아닐세. 영원한 「스핑쓰」라 고 말한 사람도 있지마는, 여자는 못 사귈 것이야.』
『그러면, 여자가 남자를 볼 때 역시 영원한 「스핑쓰」로 보는 것은 자네는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야.』
춘우는 옆에서 권하는 술을 사양하다 못해 주는 대로 받아먹어서 얼근하게 취해 온다. 그러는 동안에 옆에 있던 설성월이가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술이 들어가서 돌기를 시작하는 대로 춘우의 마음이 누그러지기 시작하더니, 다시 자기의 손으로 자기에게 술을 권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술을 먹는 것이 자기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하는 말이 술 먹은 사람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이요, 옛날부터 오늘에 그렇지 않아본 일이 없는 진리지마는, 어찌하여 먹으며 무슨 까닭에 먹은 지도 알지 못하고, 술잔을 입에서 떼지 못하는 것은 그 가운데 사람의 어떠한 약점이 있는 까닭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기는 하면서, 춘우도 술을 마시고 싶은 대로 마시었다.
『이춘우씨 전화 받으셔요.』
뽀이가 들어오더니, 춘우에게 눈짓을 한다. 일동은 모두 그 편을 보았다. 춘우는 전화할 사람이 없는데 이상하다는 듯이
『전화? 누군가?』
하고 밖곁으로 나갔다. 그런즉 뽀이가
『이리 오셔요.』
하더니, 다른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누구야?』
하며 필연 다른 방에서 자기를 불러 가느라고 속인 것인가 보다 하고 뽀이를 따라가 본즉, 거기는 설성월이가 빈방에서 혼자 앉아있었다.
『오!』
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춘우의 다리는 벌써 술기운에 바로 놓여지지를 아니한다.
『참 오래간만야.』
하며 설성월의 손을 잡는 춘우는 설성월의 웃는 낯을 치어다보며,
『그래 언제 서울 왔어.』
『온 지 두서널 달 돼요. 선생님 말씀은 제가 모두 듣고 있었지요. 그래 안녕히 계셨어요.』
『잘 있었지.』
『부인도 안녕하시구요.』
『부인? 하하 잘 있어. 내가 아내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담.』
『그것을 몰라요. 모두 다 알아요. 그러나저러나 아까는 매우 실례를 했어요.』
『무엇을?』
『인사를 여쭙지 않아서요.』
『응 그것야 나도 하지 않았으니까 마찬가지지.』
『그런데, 선생님 퍽 변하셨어요.』
『무엇이 변했어?』
『글쎄 무엇이라고 꼭 집어서 말씀은 할 수 없어요. 어떻든 이상해지셨어요.』
하며, 다시 춘우를 신기한 듯이 들여다본다.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러는 게지.』
『참 웬 약주를 그리 많이 잡수셔요. 저는 오늘야 첨 뵈었어요.』
『술 먹는 사람이 공연히 먹는 줄 아는 게지.』
『사내 어른이 약주를 너무 아니 잡수셔도 빽빽하고 융통성이 없어서 안 되겠지마는, 너무 많이 잡수실 것도 아네요.』
『하지만, 먹게 되면 어디 그런가.』
설성월은 무슨 말을 할 듯 말듯 입을 버릴 듯하다가, 나중에 결심한 듯이 입을 열면서
『선생님, 부인의 이름이 영숙씨죠?』
춘우는 고개를 번쩍 들면서,
『그래.』
『또 전 남편 되시는 이는 철수씨고.』
『응, 그것은 어떻게 그렇게 자세 아누.』
『자세히 알지요.』
할 때 옆의 방에서
『성월이-』
하고 소리를 질러 부른다. 그러자, 뽀이가 와서 재촉을 한다.
『가만이 있어, 곧 갈 터이니.』
춘우는 뽀이를 보내고서
『어디서 보았나.』
그 대답은 하지도 않고,
『또 그 딸이 지금 앓지 않아요.』
『그래.』
『선생님이 지금 약주를 아니 잡숫다가 다시 잡숫는 것이며, 또는 침울하게 계신 것이며, 전보다 몹시 변한 것을 저는 그 원인이며 어떻게 해서 그러한 것까지 모조리 알고 있어요.』
하고 일어서며, 춘우가 다시 그립다는 듯이 어깨에 매달려 보며
『저의 집에 내일 한번 오셔요. 그러면, 선생님을 위해서 말할 것이 있으니까요.』
『무슨 말을?』
『무슨 말이든지요.』
『가지.』
『꼭요.』
동명과 번지를 가르켜 저러고 설성월은 먼저 나아갔다.
춘우는 다시 한번 신기러운 중에도 의아한 생각이 나서 천천이 난간으로 배회하며 생각하였다. 옛날에 놀던 사람을 다시 만나자 옛 회포가 다시 새롭기도 새롭거니와 그렇게까지 자기의 사정을 자세히 아는 것이 이상하였다. 그리고 옛날에는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서까지 사랑하리라 하던 설성월이도 오늘에 와서 퍽 많이 범연하여진 것을 생각하여 보고 또 자기 가슴에 있는 정열이 옛날의 그것보다 얼마나 식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사람의 살림살이가 그만큼 간사한 것을 깨달았다.
옛날에는 자기가 없으면 못 살겠소 하고 눈물을 흘리던 설성월이도 오늘에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기생의 생애가 죽어도 싫다던 사람이 오늘에는 또다시 웃음을 지어 웃으며 목소리와 단장을 일부러 만들어 남자의 피를 긁으랴 한다. 그것이 억지로 질질 끄을리어 그리하는 것인 것은 누구나 거짓말이 아니라 하겠지마는 자기 혼자만 질질 끄을리어 세상살이를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부귀나 영화를 누릴 때로 누리는 사람도 제가 사람의 새끼인 이상에는 인간고(人間苦)를 떠나지 못하였을 것이며 제아무리 지지하천의 미천한 사람이라도 사람인 이상에는 또한 그것을 변치 못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기생의 처지를 동정하는 것은 그 뒤에 사회의 결함이 있으므로 그 결함을 저주하는 반동으로 나오는 동정이요, 여자라는 성적(性的)으로 보아서 동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기디 까지든지 여성이란 여성은 면치 못할 것이므로서 남자의 반목과 질시가 끊일 수가 없을 것이며, 애착과 사모가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사회상(社會相)을 떠나서 본점에 있어서 기생도 다른 여성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을 것이다.
춘우는 이렇게 종작이 없는 생각을 하고 왔다 갔다 하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술을 먹었다.
춘우는 인력거를 타고서 정신없게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영숙은 춘우를 맞아서 전과 같이 자리에 눕히었다. 춘우가 눈을 떴을 때에는 그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에 왔을 리가 없는 자기가 집에 와서 누워 있는 것은 기적이었다. 여러 친구와 지껄이고 떠들며 기생들과 희롱하던 장면이 딱 끊어지고 자기의 아내인 영숙 앞에 누워 있는 장면이 너무 급하게 이어진 것이 춘우에게는 이상한 감흥을 일으킨다.
그는 이제 자기가 친구들에게 끌려가기 전에 하루 종일 고민해야 내려온 그 사랑의 부채의 청장을 어찌하였는가? 하는 생각은 할 때, 그는 자기가 너무 무슨 일에 등한하고 성 의가 없어 보이었다.
자기의 일생을 지배하는 큰일이라도 결심에 결심을 하였던 일이 술과 설성월로 말미암아 계획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하면 그것은 너무 가벼운 일이다. 그러나 춘우는 어저께 밤에 설성월이가 자기에게 일러준 일을 생각하였다.
지금에 영숙과 자기 사이의 중대한 문제를 청장 하려는 이때에 자기와 영숙과 또는 철수나 청아의 관계를 자세히 안다 하며, 또는 거기에 대하여 내게 말하여 준다는 것을 그대로 지내 쳐버린다는 것은 또 한 번 생각하여 볼 일이다.
하루를 연기해서라도 설성월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어제 맘먹은 대로 청장을 하리라 비록 기생인 설성월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도 내게는 참고가 될는지 알 수 없다고 춘우는 하루를 연기하기로 하였다.
그날 저녁때 춘우는 설성월을 찾아갔다. 기생집에 발 들여 놓은 지가 하도 오래인지라, 그는 서먹서먹하여 얼마간 주저하였다. 남들이 설성월이를 약하여 성월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춘우도
『성월이!』
하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다시 목소리를 높이 하여 불렀다. 그때야 안에서
『누구야?』
하는 소리가 나며 나오는 사람은 설성월이었다.
『에그 오셨어요.』
춘우는 설성월이 몹시 난처해하는 눈치를 보고서
『손님이 계시우?』
하며 설성월의 말을 미리 해주었다.
『예.』
『그러면……』
하고 한참이나 춘우는 말이 없이 있다가,
『어떻게 할까?』
『글세요.』
춘우는 무엇을 깨닫듯이
『옳지, 내가 부를 터이니 기다려줘.』
『예, 그러셔요. 오래간만에 모처럼 오신 걸 들어오시지도 못해서 미안합니다.』
『천만에.』
춘우는 요리 집에 앉아 인력거를 보내었다. 얼마 아니하여 설성월은 왔다. 자리가 정한 후로 춘우는 설성월의 말문을 열리게 하기 위하여 그동안에 어떻게 지냈으며 서울로 다시 오게 된 사정 이야기를 물었다. 설성월은 자못 감구의 회포가 있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나의 사정을 아나.』
춘우는 혼자 맥주를 들며 물었다. 설성월은 고개를 잠깐 숙이고 상긋 웃어서 자기가 그만한 것을 아는 것이 자랑스러운 듯이 입을 연다.
『그것을 몰라요. 선생님이 지금에 어떻게 괴로우신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저는 아는데요.』
『무슨 괴로운 맘을 나는 조금도 괴롭지 않아. 언제든지 유쾌한 마음으로.』
『듣기 싫어요. 그렇게 거짓말을 하신다고 제가 속을 줄 아십니까.』
춘우는 속으로는 그 말을 인정하며 겉으로는 억지로 웃음을 나타내면서,
『내가 속이기는 무엇을 속인단 말이야. 그 속지 않는 이야기를 좀 들려주어.』
『속지 않는 이야기요. 저는 그 말씀을 선생님께 말씀하기는 싫어요. 그것이 조금도 선생님께서는 이롭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롭거나 해롭거나 그것은 성월이가 내게 친절함을 보이는 것이니까, 무슨 이야기든지 해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내게 이롭다고 이야기를 하고, 이롭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여 주지 않는다 하면 그것은 의리 있는 사람들이 하지 못할 일이니까.』
『의리요? 제가 무슨 의리가 있겠읍니까. 의리가 비록 있다 하드라도 그 의리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우리들이니까.』
하고 말이 없다가, 갑자기 나지막한 소리로
『선생님!』
하고 춘우를 부르더니,
『아까 저의 집에 있던 이가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몰라.』
『그이가 바로 청아의 아버지얘요.』
이 말을 듣고 춘우는 자기도 모르게
『응?』
소리를 냈다.
『그 사람이 철수야.』
춘우는 당장에 철수가 옆에 있는 것처럼 주먹을 쥐고 벌렸다.
『아 나의 행복이라면 어디서 어디까지 깨뜨려 부수려 하는 악마다.』
이럴 때 옆에 방에 어떠한 손님이 들어오더니, 춘우와 설성월의 이야기를 남겨놓지 않고 듣는 사람이 있었다. 설성월과 춘우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렇게 노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그러나, 김철수가 우리 집에 오는 것을 가지고 노하실 것은 없을 것 같읍니다. 우리 집에는 누구든지 올 수가 있는 것이 아네요. 그렇다고 오는 이를 가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 저의 직분이니까요.』
설성월은 춘우에게 철수의 말을 한 것이 여러 가지로 자기와 춘우 사이의 관계를 소원히 하게되는 동기나 되지 아니할까 하여 철수와 자기 관계를 춘우가 의심하거나 오해하지 않게 하려고 극력으로 변명을 하였다.
『철수가 성월의 집에 다닌 지는 얼마나 되나?』
『얼마 되지 아니해요. 한 서너 달 되는지요.』
『그러면, 성월이도 철수를 생각하는 게지?』
『안요.』
고개를 내흔들며
『그저 여러 번 놀았을 뿐에요.』
춘우는 얼굴에 엷게 올라온 술기운에 조금 흥분이 되어
『그야말로 나를 속이려고 하는구나. 그렇게 나도 쉽게 속으려 하는 사람은 아니야!』
하고 조소하듯이 웃음을 웃었다.
『그거 참 기막히네. 그것야 제가 변명을 한다고 곧이 들이시지 않으시면 곧이 듣지 않으실 터이오. 변명하지 않드라도 저의 양심은 있는 것이니까요.』
춘우와 성월의 이야기가 잠깐 머리를 딴 데로 돌리었다가, 춘우가
『그러나저러나 어저께 이야기하여 주마 한 것을 이야기해 주어야지.』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머리를 바로잡게 되었다.
『어저께 하겠다는 말씀요?』
『응.』
『그것은 말씀을 해드릴 터인데요.』
『그래.』
『저의 요구 조건도 하나 들어주신다 하면 말씀을 하여 드리지요.』
『무슨 요구 조건?』
설성월은 잠깐 웃음을 띠우더니 부끄러운 듯이 얼굴빛이 불그레하여진다.
『무슨 요구든지 제 요구면 언제든지 들어주시지요.』
『내 몸으로나 내 마음으로 할 수만 있으면.』
『그러면, 다음에 다른 말씀을 하시지 못합니다.』
『그래, 한 입으로 두 말 할가.』
『그러면, 이야기하지요. 선생님의 부인이 지금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은 선생님이 모르실 것입니다. 영숙 씨만큼 선생님을 사랑하는 이가 없어요. 선생님이 지금 영숙씨를 의심하는 것도 나는 알아요. 그러나, 그 의심하시는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영숙씨는 지금도 예전과 다름없이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이 말을 듣는 춘우는 속으로 비웃었다.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러나, 겉으로는 웃음을 지으면서,
『그것은 무슨 증거로?』
『증거요? 증거는 얼마든지 있지요. 영숙씨가 선생님에게 맹서까지 하고서 철수씨에게는 가지 않겠다 하였지요.』
『그래.』
『그러고도 영숙씨는 철수씨에게 아니 갈 수가 없게 되어 선생님의 눈을 기이고 다닙니다.』
『그것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람. 한 번 내게 맹세를 한 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그것이 잘한 일이 못 될 터인데, 두 번씩.』
『글쎄요. 얼핏 생각하면 그래요. 그렇지만, 만일 영숙씨가 선생님을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렇게 선생님을 속일 리가 없지요. 가야 하기는 가야 할 터인데, 선생님이 그것을 아신다 하면 선생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아마 좀 좋지 못하시겠지요.』
『그것야 그렇겠지.』
『또 선생님이 군색하실 때에 영숙씨가 철수씨와 사실 때에 장만하였던 패물을 팔든지 그렇지 않으면 철수씨의 주머니서 나온 금전을 갖다 드린다 하면 그것을 선생님이 받으시겠습니까?』
『물론 받지 않겠지.』
『그러니까 말얘요. 영숙씨가 선생님을 속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얘요.』
춘우는 설성월에게 이 말을 듣고서 비로소 지나간 일을 한 가닥 두 가닥씩 풀 수가 있었다. 그와 같은 말을 듣고서 춘 우는 영숙의 일동일정을 모두 이해할 수가 있었다. 문을 닫고 다니는 것이며, 돈을 변통하여 가지고 와서 자기에게 말을 하지 않은 것이며, 영숙의 얼굴에 전에 없던 근심 빛이 있는 것을 춘우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만일 설성월이 말이 참말이라 하면, 나는 도리어 영숙에게 죄를 지었으며, 그만큼 영숙을 알아주지 못한 사람이다.』
하고 속으로 뉘우치는 생각과 또는 감사한 생각이 핏속에 스미어드는 듯이 느끼었다.
『그렇지만 선생님!』
설성월은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선생님이 영숙씨를 사랑하시는 것도 제가 알고 영숙씨가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도 저는 압니다. 그러나, 선생님과 영숙씨의 장래가 반드시 불행에서 끝날 줄을 저는 알아요. 선생님이나 영숙씨의 사랑은 반드시 영구히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춘우는 이 말을 들을 때 가슴이 서운함을 느끼었다.
『왜?』
『왜요? 그것은 청아라는 아이 때문이지요. 선생님은 사내 양반이시니까 자세히 모르실는지 알 수가 없겠지마는, 여자는 자식을 내버리고 그 남편을 따라가는 일이 없다고 해도 가합니다. 만일 자식을 내버리고 애인을 따라간 여자가 있다 하면 그것은 음부거나 사랑이 아니라 색정이겠죠.』
『그러면, 자식이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자식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이지.』
『어느 편이든지 마찬가지지요.』
『그러면, 청아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면 고만이지.』
『글세 딱한 말씀도 하시네. 청아를 그 애 아버지가 내줄지 말이지요. 애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영숙을 잊지 않고 자기 것을 만들려고 별별 수단을 다 쓰는데요.』
『그것은 내 생각 같아서는 영숙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원수를 갚으랴 하는 것이겠지. 만일 참으로 영숙을 사랑한다 하면 얼핏 청아를 내놓으면 얼마나 영숙이가 즐거워할 것이냐 말야.』
『그것은 선생님이 바꾸어 생각을 하여 보셔요. 선생님도 그런 일을 당하시면, 아마 그대로 계시지를 않으실 터이지요.』
춘우는 속마음으로 얼마간 설성월의 말을 옳다고 생각한 점이 있었다.
『자, 술 한잔 먹지 않을 터이야.』
『술요? 선생님이 주시는 술이면 한 잔만 먹지요.』
얼마간 이야기가 중단되었다.
설성월은 핏빛 같은 포도주를 따라서 한 모금 마시고 입맛을 다시려고 입술을 벌리었다가 다칠 때 옥 같은 이에는 선지 같은 포도주가 묻었다 사라진다. 술기운이 어린 눈으로 설성월을 보는 춘우의 눈에는 옛적에 자기를 위하여 눈물을 흘려주던 설성월이의 고아(高雅)한 듯하고 순진한 듯한 그림자는 어느덧 사라지고 깜직하고도 그 미력에 끌려 들어갈 듯한 빛이 보였다. 마치 여자마술사(女子魔術師)를 대한 듯이 뻔히 그런 줄 알면서도 그리로 끌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듯하였다.
설성월은 속눈썹이 긴 까만 눈동자를 수정같이 번쩍이며 입을 꼭 다문 채 한참이나 뚫어지게 춘우를 보더니,
『선생님! 선생님의 요구하시는 대로 제가 할 것은 다 해드렸으니까, 저의 요구도 선생님이 들어주셔야죠.』
하며 목마른 사람처럼 포도주를 마시었다.
『참 무슨 요구인데, 들을 만하면 들어주지.』
『들을 만하면 들어주셔요?』
『그래.』
『그러면, 들어 주실 만하지 않으면 못 들어주시겠다는 말이지요?』
『그것야 다시 말할 것도 없겠지.』
『첫째 선생님은 영숙씨를 단념하세요. 그러신다 하면, 또 제가 말씀할 것이 있으니까요.』
『그것은 지금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일이니까 천천히 대답하지.』
『제가 이런 말씀을 하면 선생님이 저를 고약하고 또는 몰인정한 사람이라 하실는지 모르겠지마는, 선생님을 위하여 저는 말씀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오늘 이 자리에서 단념을 하시지 않는다 하면 도리어 선생님이 후회하시게 될 것입니다. 영숙씨는 벌써 철수씨에게로 돌아간 지 오래니까요.』
춘우의 마음은 에이는 듯이 아팠으나, 그러한 내색은 조금 도 밖으로 내보이지 아니하며,
『영숙이가 철수에게로 돌아갔거나 그것은 그 당자의 할 일이요, 내가 단념을 하거나 말거나 그것은 또 내가 할 일이니까……』
설성월은 허리가 부러질 듯이 웃으면서,
『사내 양반들은 저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야. 그래도 잊지를 못하셔서 입으로 말씀은 저렇게 하시지만, 속으로는 영숙씨나 철수씨를……』
『아니.』
춘우는 설성월의 말을 중단시키어,
『조금도 그 사람들을 원망을 하거나 또는 원수로 알지는 않아. 영숙에게나 철수에게 운명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까.』
춘우의 말에는 애조가 흘렀다.
설성월은 이 말을 듣더니, 반쯤은 그러하다고 춘우의 말을 긍정(肯定)하는 듯도 하고, 또 반쯤은 춘우의 가슴속을 들여다보아, 그 괴로운 것을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고 감추려 하는 것을 비웃는 듯이 코웃음 비슷한 웃음을 웃다가,
『그럴가요? 그러는지도 모르지요.』
하며 춘우를 다시 뚫어지도록 들여다보더니,
『그런데요.』
하고 다시 말을 이으며 분결 같은 손으로 타는 듯이 새빨간 능금을 들었다 나타났다 고양이가 방울 작난 하듯 하다가, 다시 그것을 놓고
『선생님! 선생님이 옛날의 설성월이를 잊어버리신 지가 오래시지요?』
하며 의미가 깊은 눈초리로 본다. 춘우는 그의 표정으로서 성월의 맘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때의 춘우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아픈 감정이 설성월의 말을 통하여 얼마간 녹아 버리는 듯함을 느끼었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아직까지도 옛날의 성월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고대로 가지고 있는데.』
하는 말을 춘우는 자기가 자기의 입을 의심할 만큼 옛날의 순진한 마음이 없어진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선생님도 거짓말을 하실 줄 아시게 되었습니다그려.』
『내가 무슨 거짓말을 해.』
『정말로 저를 옛날과 똑같이 생각하여 주셔요?』
『그럼.』
『그럼요? 저도 그동안에 선생님보다 더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런 까닭에 남이 거짓말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잘 분간할 수가 있게 되었답니다.』
『그것야 그럴는지 모르지마는, 내가 거짓말한 증거가 무엇야?』
『하하 증거요? 증거야 지금 당장의 선생님 가슴에 손을 대어 보십시오. 그 심장이 얼마나 높이 뛰나, 영숙씨 때문에 고민을 하신다는 것은 즉 저를 잊어버리셨다는 증거니까요.』
『그것이 어째서?』
『그래도 못 알아들으시겠어요? 영숙씨와 꿈 같은 사랑을 속살거리실 때나 선생님의 팔 위에 영숙씨를 끼어 안으셨을 때 아마 설성월을 한 번도 생각이나 해보신 때는 없으셨을 터이지요.』
춘우는 말이 없었다. 성월은 어느 틈에 춘우 곁 가까이 가 앉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춘우의 귀를 간지렀다. 그의 입 향기가 춘우의 코에 미치었다. 검다 못해 푸른 눈동자가 그의 마음을 모두 빨아들일 듯이 춘우의 얼굴 위에서 굴러다니는 듯하였다. 그의 연지 바른 입이 가까이만 가도 불같이 뜨거워 춘우의 피를 태울듯하였다.
부드러운 손이 춘우의 다리 위에서 산 뱅어처럼 꼼지락거릴 때 춘우는 무엇에 홀리는 줄 모르게 홀리었다. 춘우의 팔이 설성월의 허리를 감고 가슴과 가슴이 닿고 뺨과 뺨이 문질러졌다. 그러다가는, 입과 입이 다았다 떨어질 때 그들은 서로 부끄러웠다. 이것이 설성월과 춘우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다. 옛날에 두 사람은 이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사랑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또는 반드시 유탕기분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과 마음을 서로 경계하기는 두 사람이 똑 마찬가지지마는, 또는 정과 정을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옛날과 다른 것이 그들의 가슴을 둘이 서로 헤치는 것이 너무 쉽고 또는 너무 빨라 어느 것이 진정인지 그것을 두 사람까지도 분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성월은 지금에 춘우의 약점을 안다. 춘우의 속이 몹시 원망과 분노와 또는 비애로 찬 것을 안다. 더구나 세상에 혼자 선 것 같이 쓸쓸함을 안다. 이것을 속히 알아챈 성월은 춘우의 마음을 얼핏 사로잡기 쉬운 것을 안다.
『선생님! 제가 아까 단념하시란 말씀을 여쭌 것이 몹시 잘못된 말이지요?』
춘우는 다시 단정한 태도로 말을 끄내었다.
『천만에 그 말에도 일리가 있겠지.』
『글쎄요. 그렇지만 제 생각 같아서는 선생님이 영숙씨를 단념하지 않으시고 만일 고집을 세우신다 하시면, 네 사람 이 불행해질 터이고요. 그렇지 않으시면 한 사람이 불행해지겠죠……아니 그렇지도 않죠. 도리어 다섯 사람이 행복스러워질는지도 몰라요.』
『다섯 사람이라니? 또 한 사람은 누구야?』
『그것은 생각해 보셔요. 그런 사람이 저기 어디에서 선생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터이니까요.』
춘우는 알아챘으나, 그를 일부러 모르는 체하였다.
『그렇게 모르신다 하면 차차 제가 아르켜 드릴 때가 있겠지요.』
「인생은 영원한 단념이다」이 말이 새 말이 아니지마는, 춘우에게는 다시 진리를 말하는 것 같다.
『단념! 단념!』
단념이라는 것은 하려다가 할 수 없으니까, 고만두고 내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목숨을 단념한다고는 할지라도, 이것을 단념할 수가 있을까?』
춘우는 그대로 그 자리에 엎드리어 울었다.
『안돼! 안돼! 영원히 단념은 못할 것이다.』
춘우는 고개를 비벼가며 울었다.
『내가 한 사람이 행복스럽기 위하여 세상 사람이 다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단념을 할 수 없다.』
『아 안돼! 누가 어떠한 말을 하든지 나는 영숙을 놓을 수는 없다.』
하며 춘우는 다시 일어서서
『성월! 너와 나와는 다시 만나지 말자. 오늘 내가 네게 한 것도 내가 영숙에게 대하여서는 일종의 부정(不貞)이다. 죄악이다. 자 얼핏 헤어지자.』
춘우는 시뻘겋게 피가 오른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는 설성월을 돌아다보며,
『잘 가거라. 서로 깨끗하게 잊어버리자. 다소 만나지 말자.』
하고 나오려 하매 설성월은 생긋 웃으며, 춘우의 소매를 잡고 귀에다 입을 대고 나지막한 소리로
『그렇지만 내일 이맘때가 되기 전에 만나뵙게 되겠지요.』
하고는 자기도 나왔다. 설성월이 춘우를 보내고 막 돌아서려 할 제, 뒤에서 탁 달려드는 사람 하나가
『재미가 좋구려. 두 분이.』
놀려먹는 어조로 말을 하는 사람은 철수였다. 설성월은 무슨 원수나 만난 듯이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앗 언제 오셨어요?』
하고 달려들려 하며,
『나 온 것은 알아 무엇하료?』
하고 역시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춘우는 혼자 경성 시가를 헤매었다. 꿈 같은 생각이 가슴을 눌러서 느긋한 감정이 안개같이 전신을 싸고돌 뿐이다.
달아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가, 뿌리침을 당한 것 같이 그는 적적함과 무서움과 외로움이 있었다. 벌써 서로 갖다가 붙이려 하나, 붙일 수 없이 깨어진 것 같이 영숙과 자기 사이에는 파탄(破綻)이 생긴 것을 알 때에 그는 광야에 홀로 선 것 같았다.
그에게 다시 불행과 불운이 닥쳐올 것을 깨달을 때 그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에서 끓어 올라와서 눈물이 뜨겁게 두 눈에서 솟을 뿐이다. 그는 정처 없이 돌아다니었다. 가는 곳 오는 곳마다 영숙과 자기의 옛날 사랑을 이야기하는 기억의 흔적이 아닌 곳이 없으며 행복의 기념이 아닌 것이 없었다. 옛날에 길거리를 거닐 때에는 반드시 영숙이 자기 옆에 있어 희망과 즐거움이 가득 찬 얼굴로 서로 쳐다보았으나 오늘의 자기는 혼자 넓은 길거리를 외롭게 걸어간다.
그는 나침반(羅針盤)을 꺾어 뜨린 배 모양으로 지향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옛날의 어머니가 자기를 강보에 싸서 들고 푸지한 것을 두 발로 장단 맞춰 밟으시며,
『자장 자장.』
하시던 어머니가 보이더니, 또다시 자기의 손목에 이끌리어 길가를 헤매이는 인우가 보인다. 어머니를 잃어버린 자기와 자기 동생의 우애는 그것으로 인하여 더욱 깊었으며 아내를 잃어버린 아버지는 그것으로 인하여 지금의 타락을 깊은 구렁에서 신음하는 것이다.
『만일 어머니가 계셨드면?』
이러한 소리로 부르짖은 것이 하루에도 몇 번인지 알지 못하였었으나, 오늘같이 어머니 없는 서름을 느끼어 본적이 드물었다. 모든 불행의 원인(遠因)을 찾아 올라가서 그것이 귀착되는 곳은 어머니 없는 그곳이다. 춘우는 불현듯이 인우가 보고 싶었다. 혼자 남아 있는 인우를 생각할 때 내버리고 온 자기가 너무 무정한 듯하였다. 데려오려 하나 주지 않는 아버지의 심사도 책망할 수도 없거니와, 혼자 내버려 둔 자기가 부끄러울 만큼 죄악 같았다.
『그렇다. 오래간만에 인우나 만나보자.』
그는 과자가게에 가서 과자를 샀다. 그리고 다시 서대문을 향하여 갔다.
『아버지가 보시면 꾸중을 하시겠지 문에서 내쫓으시겠지.』
『그렇지만 간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간다. 탕자가 돌아오는 것을 맞는 부잣집 아버지같이 너를 맞아주지는 않을지라도, 나는 인우를 위하여 가볼 것이다.』
춘우가 집에 들어설 때에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반가웠다. 마당에서 마루 끝으로 올라설 때에는 아버지가 마루까지 뛰어나왔다. 인우가 지다가 울면서 반가워 벗은 채 뛰어나왔다.
『춘우냐?』
『언니!』
『예. 오냐.』
단 네 마디가 세 사람을 울릴만큼 감격이 있었다. 춘우의 아버지의 입끝과 코가 씰룩씰룩하고 떨리도록 감격이 복바쳐서 말을 못하고 그저 울 듯 웃을까 하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니? 너도 집에 올 날이 있구나.』
『언니 인제 가지 않소?』
인우는 과자를 먹으며 춘우를 어머니 어루만지듯 어디를 어루만져야 좋을지 몰라서 팔다리를 더듬기도 하고, 고개를 대고 비벼보기도 하면서 좋아하였다.
『그래 그래.』
춘우는 무엇이라 대답할지 몰라서, 그저 그래그래 할 뿐이었다.
『인제 언니가 왔으니까, 나는 퍽 좋아, 당최 가지 말우, 나는 퍽 보고 싶었어.』
『그동안에 창가 많이 했니?』
『창가? 누구허고 해? 같이할 사람이 있어야지. 언니가 간 뒤에는 같이할 사람이 없어 못했어.』
인우는 몹시 수척하여졌다. 보지 않았드면 좋으리만큼 여위고 못되었다. 그것도 춘우에게 어머니 없는 탓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언니!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나허구 갑시다.』
그는 애원하듯이 춘우의 팔에 실리며 말을 하였다.
『같이 가지. 어디든지 데려다주지.』
춘우는 울고 싶기만한 감정으로 그 말을 하였다. 인우는 춘우를 보더니, 꺼칠꺼칠한 수염을 만져 보면서,
『이게 뭐요. 수염 좀 깎구. 전에는 아주 예쁘더니, 흉해.』
춘우도 아는 바지만, 인우도 자기의 얼굴이 못된 것을 알아주고 동정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언니!』
『응!』
인우는 무슨 말을 할 듯하더니, 아버지의 눈치를 살핀다.
『왜 그래. 말을 해라.』
아까까지는 절대의 권위자는 아버지였으나, 지금은 자기의 후원자를 얻은 인우는
『저.』
하고 다시 입을 답치면서
『아버지께 또 꾸중 들게.』
아버지는 눈을 흘겨보며 자기의 죄악을 폭로시키려는 인우를 무섭게 흘겨본다.
『말해라. 내가 들어보아서 꾸중 안 듣게 해주께.』
춘우는 인우를 끼어안고 타일렀다. 인우는 그때 말 아니할 수 없는 듯이
『언니가 지난번 겨울에 날더러 꽃이 피면 어머니가 오신다 하더니, 어디 어머니가 오시우? 벌써 꽃이 다 떨어졌는데』
춘우는 인우를 끼어안고 그대로 울고 싶었다. 자기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인우의 어린 가슴을 태우게 하였는가?
『어머니 그렇게 보고 싶으냐?』
『보고 싶고 말고, 나는 어머니가 얼핏 와서 다른 애들처럼 귀애해주었으면 좋겠어.』
『인제 네가 나만해지면 오시지.』
『또 더 있어야 해?』
『그래.』
二○
춘우는 그날 저녁을 인우에게 끌려 자기 본집에서 잤다.
어제저녁에 어린 인우가 자기에게 한 말이 뼛속에 사무칠 듯하여 잊을 수가 없었다. 어린 동생이 그렇게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할 것은 춘우가 생각지 못한 바가 아니지마는, 진정으로 이렇게 핏속에까지 그것을 느끼어 보기는 드물었다.
지금에 자기가 실연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어떠한 운명의 번롱을 받아서 그렇게 사랑하던 영숙과 서로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가슴 아픈 사실을 앞에다 두고, 또는 어린 인우의 불쌍한 꼴을 볼 때 그는 어찌 가슴 속에서 물 끓듯 용솟음치는 느낌과 깨달음이 없었으랴. 춘우는 직감적으로 어머니가 어떠한 것을 알았으며 다시 생각할 여지가 없이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웠다.
춘우는 어린 인우를 그대로 남겨 두고서 나올 수가 없었다.
『언니 나허구 가.』
하고 옷고름을 입에다 물고 눈물 망울이 어린 눈으로 자기를 치어다볼 때, 그는 어린 인우의 따르는 마음을 이끌어다가 자기를 반성하여 보았다.
『네가 그렇게 무정한 사람도 아닌데.』
할 적에는 모든 원망과 저주의 마음이 가슴 한복판에 모여들며 하늘을 우러러 실컷 울고 싶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춘우는 거기에서 바로 자기의 회사로 갔다. 가는 길에서도, 앉아서도, 서서도, 무엇을 먹으면서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오늘 아침에 인우가 밥을 먹으면서 자기를 향하여
『언니, 어머니가 오시지를 못하시거든, 나를 데려가라고 해주지를 못하겠오?』
하는 말이다.
아아, 데려를 가달라는 곳이 어린 인우는 어느 곳이며 어떠한 곳인지 모르고 하는 말일가, 거기에는 무슨 암시가 있는 듯하였다. 어머니만 올 수 있으면 어디든지 간다. 그곳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일지라도.
그는 인우의 경우를 다시 청아와 영숙에게 갖다 대보았다.
옛날에 어머니가 자기와 자기 동생에게 하시던 것을 생각하여 보고 영숙이 청아에게 할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자기 어머니는 자기에게 한 것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일이 되어서 그렇게 한 일도 아니겠고, 자기가 어머니에게 사랑을 반드시 받을 만한 무엇이 있어서 받은 것도 아니다. 절대의 모성의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 영겁으로부터 영겁에 그것이 흘러내려 가는 것이니, 그것은 이해관계나 채권과 채무가 있어 따질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와 자기 어머니와 사랑을 만일 여기에 누가 있어서 저해하였다 하면, 아니라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이 그것을 벌써 저해하여 지금 자기와 인우를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었으며 자기는 하늘과 운명을 저주하는 것이다. 만일 단념하지 않으랴 아니할 수 없는 목숨이 자기의 행복을 저해하지 아니하고, 그 다른 것이 있어서 저해하였다 하면, 얼마나 자기는 그것을 미워하고 원수로 알았으랴? 이것을 보면 영숙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또한 영숙을 사랑은 하지마는 청아야 또한 어떠하랴. 자기 어머니를 빼앗은 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저주하랴.
『만일 어제 설성월의 한 말이 정말이라고 하면? 영숙이가 참으로 철수에게로 돌아갔다 하면 그의 마음이 아니요 몸일 것이며, 이성(異性)의 사랑이 아니라, 모성(母性)의 사랑일 것일가?』
『그러나, 그것을 누가 믿으랴? 내버림을 받은 나는 언제든지 내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것이 다만 육체상뿐이라고 하드라도.』
『그러하면, 지금에 영숙이 그렇게까지 다시 철수에게로 돌아가기를 승낙하였다 하면 어찌하여 나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하고 용기 있고 또는 말쩡하게 얼핏 자기를 아니하고 미지근하고 해명무실하게 질질 끌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며, 또는 그런 기색을 알리지 아니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만일 그래도 사랑이 나에게 남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 나머지 사랑을 쓸어 가지고 가는 것이 옳으며, 그렇지 않고 나에게 사랑의 전부가 그대로 조금도 이지러진 곳이 없이 남았다 하면, 그때에는 다시 나에게 오는 것이 옳을 것이어늘, 벌써 가기를 승낙한 그로서 그것을 결단하지 못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이 모든 생각을 하여가면서, 춘우는 잡았던 붓을 책상 위에다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오정 친 때 일을 고만두고 회사 문밖으로 나왔다. 전 같으면 으레이 발길이 자기 집으로 향하였을 터이지마는, 오늘에는 발길이 그리로 돌아서지를 아니한다. 어제 저녁에 설성월이 앞에서 큰소리로 하던 것이 오늘에는 어느덧 풀어져 버리고 힘이 죽었다. 그저께는 사랑의 셈을 따지려고 자기 집으로 가는 길에 친구에게 끌려 술 먹으로 갔다가 설성월을 만나 그것을 중지하였고, 어저께는 어린 인우를 만나느라고 그것을 고만두었 더니 오늘은 춘우 가슴에 이상한 감개가 있어서 또 허락하지 않게 되는 모양이다.
춘우는 나오기는 나왔으나, 발 내놓을 곳이 없었다. 그는 길거리에 한참 서서 어디로 가야 좋을까, 그것을 생각할 때, 자기가 비로소 넓으나 넓은 세상에 몸 하나를 붙일 곳이 없이 외롭게 된 것을 느끼었다.
춘우의 발길은 다시 창하의 집으로 돌려졌다. 자기가 자기 혼자 해결하지 못할 이 일을 같이 의논할 사람이라고는 창하밖에 없다.
창하는 마침 문밖으로 나오다가 춘우를 보고서,
『이게 웬일인가? 오늘이 일요일도 아닌데.』
하며 이상스럽게 본다.
『오늘은 몸이 좀 아파서 일찍 나왔네.』
『어디가 그렇게 아프단 말인가. 또 어제저녁에 너무 먹은 게지?』
『아냐, 먹지도 않았어. 대관절 어디로 가는 길인가?』
『별로이 정한 곳은 없네.』
『그러면, 내가 의논할 일이 있어 왔는데.』
『무슨 일?』
창하는 돈이나 꿔달라는 줄 알고, 속으로 변통할 궁리부터 하였다.
춘우는 잠깐 아무 말이 없다가,
『어쨌든 천천히 걸어가며 말하지.』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어온다.
『그런데, 여보게 그저께 명월관지점에서 설성월이를 만나지 않았겠나?』
『성월이?』
하고 창하는 눈을 크게 뜬다.
『그래?』
『무엇이 그래야. 만났다니까.』
『퍽 컸지?』
『크기도 퍽 컸거니와, 사람도 아주 변했데. 인제는 아주 기생야.』
『그럴 테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지 않은가.』
『무엇이?』
『그 애가 나와 영숙과의 일을 여간 소상히 알지를 않데그려.』
『어떻게? 아마 조사를 해본 게지.』
『조사가 다 무엇이야. 철수가 그 집에를 다니데그려.』
『무어야?』
하고 창하는 춘우의 얼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그래 아마 내 이야기와 자기 사이를 모조리 말한 모양이야.』
『그러고, 어저께는 내가 성월이에게 여간 훈계를 받지 않았네.』
『무엇이라구?』
『날더러 영숙을 단념하고 저하고 지내잔 그 말야.』
『빌어먹을 년, 기껏 그런 소리밖에 모른담. 어쨌든 자네는 팔자 좋아.』
『무슨 팔자가 좋아? 여보게, 말 말게, 팔자 좋은 사람이 계집에게 내버림을 당해.』
『누가?』
『누구 누구야, 영숙의 일 말이지.』
창하도 거기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여보게 내 생각 같아서도 영숙이와는 암만해도 손을 끊는 것이 옳을 것 같으이.』
춘우는 조금 침울한 빛으로 말을 하였다. 창하는 다만 앞만 내다보며 걸어가면서,
『글세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하고 확실한 대답은 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영숙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도 아냐. 그렇지만 그에게는 청아가 있으니까.』
『청아가 있으니까, 어떻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내가 인정이 없는 것 같네.』
『무슨 인정이 없단 말인가. 영숙이 청아를 떼치지 못해서 그러하는 것은 혹 어머니된 도리에 그러할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생각을 해보게. 맨 처음에 자네를 따라올 적에는 청아를 그렇게 내버리고 와서는 천년만년같이 살자 하던 여자가 갑작스럽게 자식 생각을 한단 말인가. 여자라는 그래서 사귀기가 어렵다는 것이야. 처음에는 여러 가지 밖의 유혹과 또 자기 유혹 즉 자기가 공상도 하여보고 희망도 하여보아 자연히 거기에 끌려 넘어가는 그러한 유혹에 빠져서 자네하면 자네에게 왔다가 그것이 싫증이 나고 또는 부족하여 다시 가는 것이지.』
『그러면, 어떤 다른 남자를 따라간다는 것은 모르지마는, 왜 전엔 싫다고 내던진 사람에게로 가느냐 말야.』
『압다, 딱두하지. 생각을 좀 해보게. 자네는 돈이 없지 않은가. 자네허구 살려면 자연히 고생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지 않겠나. 그러니까, 당장에 딴 남자 구하려 할 수 없고 또 구한다 하드라도 그만큼 돈 있는 사람이 없을 듯하니까, 사람은 조금 부족하드라도 청아를 핑계 삼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지. 저도 그만하면, 철이 날 때가 되었으니까, 그럴 것 아닌가. 인제는 그저 덮어놓고 사랑 사랑 할 때가 아니거든.』
춘우는 창하의 말이 옳다고는 하면서도 듣기에 좋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면, 왜 얼핏 가지를 아니하고 그러고 있어.』
『그것은 또 이유가 있지. 만일 제가 그대로 단결에 획 뿌리치고 가보세. 세상에서 누구를 욕하겠나. 그러니까, 자연히 정의가 버스러지거든, 그 책임을 자네에게 둘러싸고, 자기는 곱다랗게 빠져가잔 그 말이거든. 그래서 철수에게 몰래 다니며 내용은 다해놓고, 자네가 물러서기를 기다리는 것이란 그 말야. 내 말이 옳으니. 그래 애당초에도 내가 자네더러 그러지 않았나. 옛날에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속인 것처럼 자네도 나를 속인다고.』
춘우는 처음 창하를 찾아올 때 그래도 속으로는 창하가 자기와 영숙을 다시 얽어매는 무슨 좋은 방법을 가르쳐주기를 바랐더니, 지금 너무 냉연한 태도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서 속으로 섭섭한 마음까지 났으나, 또한 그 말이 그럴 듯도 하여 춘우의 마음은 동요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사람이 그럴수야 있나. 영숙이가 어데로 보는지 그런 사람은 아니든데.』
『자네 눈에야 왜 아니 그렇게 보이겠나? 미운데도 예뻐 보일 터이지. 그렇지만 내 눈으로 본다든지 내 생각 같아서는 그리 영숙의 일을 찬성은 할 수가 없네.』
춘우는 몹시 창하가 야속한 것 같았다. 어떤 때에는 이 사람이 무슨 혐의로 자기와 영숙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렇게까지 친구를 의심하는 마음이 나기까지 하였었으나, 춘우는 그것을 얼핏 제어하고 아무리기로, 창하가 내게 그렇게까지 할 리가 있을 리는 없지 하고, 얼른 마음을 돌려먹었다.
그러면, 내가 영숙을 아주 단념해버리는 것이 옳을가. 만일 그랬다가 도리어 두 사람에게 더 큰 불행이 돌아온다 하면 어찌 할가. 춘우는 여러 가지로 걱정을 하며 마음의 결정을 하지 못하는 중, 어느덧 종로에 두 사람은 왔다.
네거리에서 두 사람은 사면을 훑어보며,
『어디로 갈가?』
하고 서로 얼굴만 치어다본다.
『글세.』
춘우는 도리어 창하의 얼굴을 치어다 보았다.
『저 성월의 집에 가보세, 어딘가.』
춘우는 창하의 입에서 이 말이 떨어질 때, 그는 번개와 같이 어제저녁에 자기가 한 말이 생각되며, 또 성월이가 자기에게 웃으며 하는 말이 『내일 이맘때가 되기 전에 만나 뵈옵지요.』 하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어저께 주먹을 쥘 때의 춘우만큼 힘이 스러진 지금의 춘우는 성월에게 마음이 끌리어 가는 줄 모르게 끌려가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난다.
『성월의 집?』
『그래.』
『거기는 무엇하러 가나?』
『오래간만에 만나보니 말야.』
『나는 가기가 거북한걸.』
『왜?』
『어제저녁에 술이 취하여 다시는 만나보지 말라고 그랬어.』
『하하, 그것은 취담으로 알겠지. 어서 가보세.』
창하는 춘우의 소매를 끌어잡아다닌다.
『나는 집만 가르쳐주겠네.』
춘우는 마지못해 끌려가는 듯이 따라갔다.
『압다, 공연히 그러네그려. 가고 싶거든 국으로 가지 잔말이 무슨 잔말야.』
『정말야, 들어가지는 싫어.』
『염려 말게. 내가 끌고 왔다고 해줄 터이니.』
춘우는 고개를 쳐들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두 사람이 설성월의 집에 들어서서 성월을 찾았을 때는 마침 목욕을 하러 갔으므로, 만나지를 못하였다. 춘우는 가슴을 내려 앉히고 적이 홀연하였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뭇내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가? 갈 곳이 있어야지.』
『글세 화나는데 술이나 좀 먹었으면 좋겠는데.』
『술? 술 먹기야 쉽지. 어디 가서든지 한 잔 해볼가?』
『하지만, 너무 일러서……』
『일르면 어떤가, 아늑한 곳에 가서 먹세 그려.』
두 사람은 다시 아늑한 곳을 찾아서, 문밖으로 나왔다. 절에서 술을 시켜서 먹을 때 춘우는 옛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올라서 실없이 처량한 생각이 난다.
『여보게.』
춘우는 창하를 술이 취하여 거슴츠레한 눈으로 보면서 애조가 깃든 목소리로
『나는 자네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믿지 않나? 그렇지만, 오늘 자네가 내게 한 말은 아무리 하여도 믿을 수가 없네그려. 자네가 오늘 이 자리에서 내 말 하나만 들어주겠나?』
『무슨 말을.』
『나는 영숙의 일을 아주 못 믿을 수도 또 아주 믿을 수도 없네. 그러니까, 나는 이것이 죄악일는지는 모르되, 영숙의 마음을 한번 시험해 볼 터이야.』
『어떻게 시험을 한단 말인가?』
『그것은 내가 성월에게 사랑을 옮긴 것처럼 하여 보이겠네. 그래서, 자기가 나를 성월의 말과 같이 참으로 사랑을 하여 그런 말을 하였다. 하면 내가 행복자인지 모르지마는, 그렇지 않고 자네 말과 같다 하면, 나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네. 또 영숙이가 참으로 청아를 위하여 부득이 나를 떠나간다 하면, 나는 나를 희생하는 수밖에 없어. 그 점에 들어서는 나는 절대로 양보할 터일세. 나는 그 자식을 위하여 자기의 애인에게 대한 사랑을 희생하는 그 고상한 생각과 또 는 성자(聖者)의 난행(難行)같은 행동을 저해하려 하지 아니하네. 거기에 얼마나 고통과 번민이 있는지 그것은 나의 몇백 배일 터이지.』
창하는 억지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그는 거기에 어디까지든지 후원을 하여보마 하였다. 뜨거운 손을 서로 잡고 맹서하였다.
『자네의 일이면 어디까지든지 힘써보지.』
시험을 할만큼 춘우가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영숙에게 더 할 수 없는 사랑을 받고, 또는 더 할 수 없는 사랑을 영숙에게 줄 때에는 다른데 마음이 끌릴 때가 없었으나, 자기의 가슴이 지금 공허(空虛)함을 느낄 때에 그는 어디로든지 잡아다니는 데가 있으며, 그리로 기울어지기가 쉽다. 아무리 분별이 있고 이지(理智)에 강하다하드라도, 춘우의 온몸에는 뜨거운 피가 흐른다. 자기가 자기를 믿을 수 없는 청춘이다.
그날 저녁부터 춘우는 집에 들어가는 것을 고만두었다. 그리고, 설성월에게 가서 날마다 파묻혀 있다시피 하였다. 여기에서 독자의 의혹을 풀기 위하여 한마디 말하여 둘 것은 춘우가 설성월의 집에 다닐 때에 반쯤은 마음이 끌리어 애인처럼 대접하고, 반쯤은 순전히 기생처럼 대하였다고 하여 둔다. 설성월도 역시 춘우를 미덥고 그리우나 그 반면에는 어디까지든지 기생으로서 기생 노릇을 한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하여둔다.
사흘이 지내었다. 영숙은 홀로 사흘 밤을 자고 나서 창하를 찾아왔다.
『창하씨! 어떻게 해서든지 춘우씨를 집으로 돌아오도록 권고를 해주시지 못할가요?』
하고 울면서 청을 하였다.
『내가 친구를 위하여 애는 써보죠. 그러니 책임은 질 수가 없어요.』
하며 냉정하고도 원망하는 어조로 간단히 대답을 할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한번 만나보게만 하여주셔요.』
하는 영숙의 마음에는 몹시 후회하는 정이 생기었다.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때, 살필 결코 춘우를 내버리려 한 것은 아니요, 지금 어찌할지 몰라서 가로에서 헤매일 때, 춘우가 저렇게 타락하여 가는 것을 보고 그대로 참을 수는 없다는 의협심이 불덩이 같이 솟아올랐다.
『예! 어떻든지 한 번만 만나보게만 해주실 수 없을가요. 영숙이 함께 것을 회개하고 옛날과 같이 기다린다고 좀 데려다주셔요. 제가 춘우씨를 만나뵈옵고 모든 것을 자백하겠다고 말씀을 하시고, 집으로 데려다주셔요.』
졸르는 말에 창하는 어디까지 엄연한 태도로
『영숙씨가 철수의 집에 발을 들여놓지를 않는다면, 언제든지 돌아가마고 말을 하였읍니다.』
영숙의 가슴에는 가시를 박는 것 같이 찔리는 말이다.
『누가 그런 말을 춘우씨에게다가 했어요. 제가 애아버지에게 다닌다는 말을 누가 했어요.』
『누가 한 것은 아실 것이 없겠지요. 지금 세상에서는 춘우더러 실연자라고 하니까요.』
『실연자요?』
『예, 실연자요. 영숙씨가 춘우를 내버렸지요.』
영숙은 무서웠다. 세상이 무서운 것을 비로소 알았다. 자기의 마음은 알지도 못하고 춘우를 실연자를 만들어 준 것은 무서운 세상이다.
『그럴 리가 없지요. 저는 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이 춘우 씨를 사랑합니다. 결코 변할 리 없어요.』
창하의 귀에는 그 소리가 가증하게 들릴 뿐이다.
『그러면, 그 증거를 분명하게 보이지를 않으시고, 세상의 의심을 살만한 행동을 하시나요? 이런 말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마는, 친구의 부인이라는 것을 떠나서 나의 친구나 또는 누님이라는 생각으로 충고를 하는 것이니까, 어떻게 알아주지는 마셔요.』
『예, 저 역시 언제든지 오라버니와 같이 믿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창하씨의 말씀을 들어 왔어요. 또는 저를 위하여 귀찮게 군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세상에서 그렇게 떠든다는 것은 오해겠죠. 어쨌든지 춘우씨를 만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려고 해요.』
『춘우를 만일 영숙씨가 만나겠다고 하면, 춘우는 도리어 만나지 않으려고 애를 쓸 터이지요. 춘우의 마음은 아직까지도 영숙씨를 잊지 못하니까요. 그 사람이 지금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쉽게 타락할 사람이 아닌 것은 내가 보증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일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억지로 영숙씨를 단념하려고 애쓰는 춘우겠지요. 그러고 정을 딴 데로 옮기어 자기의 괴로움을 잊어버리려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너무 나를 믿어주지 않는 까닭이 아닐가요?』
『아니지요. 춘우는 너무 영숙씨를 믿었지요. 너무 믿었던 까닭에 오늘에 이 일이 생긴 것이지요.』
『그렇다고 하면, 춘우씨를 절대로 다시 돌아오게 하지 못할가요.』
『그것은 영숙씨가 하시기에 있지요.』
『어떻게요?』
『어떻게요? 그것은 영숙씨가 지금이라도 그동안에 하신 것을 분명하게 춘우에게 말씀을 하시고, 춘우에게 사죄하셔야죠.』
『사죄요?』
영숙은 속으로 기가 막혔다. 사죄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사죄할 만큼 내가 춘우에게 부족히 한 것이 무엇이냐. 한옆으로 분한 생각까지 나서, 그대로 일어서 나오고 싶은 생각까지 났으나, 그는 아서라 하고 마음을 돌려먹었다.
『사죄하죠.』
목소리를 덜렸다.
『춘우씨를 다시 돌아오시게만 하면 무슨 짓이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니, 어떻든 만나 뵈옵게 말하여 주셔요.』
『그러면, 내가 권고를 하여보겠습니다. 그러면 댁에 가서 기다리십시오.』
『아뇨, 여기서 기다리지요. 다녀오셔요.』
창하는 춘우에게 이 말을 전하여주려고 설성월의 집으로 갔다. 춘우는 술이 몹시 취하여 설성월의 방에 누워서 잠이 들었었다. 설성월은 마루에 나와서 하인을 데리고 무슨 일인지 하고 있었다. 창하는 누워 자는 춘우를 흔들었다.
『왜 이래 잠도 못 자게.』
『나야 날세. 웬 잠을 이렇게 자나?』
『귀찮아.』
춘우는 손으로 창하를 후려친다.
『내 말 좀 듣게.』
『허 저리 가.』
『이게 웬 술을 이렇게 먹었누.』
설성월도 들어와서 흔든다.
『여보셔요. 선생님. 박선생님 오셨어요.』
『무엇야. 창하가 왔어.』
이제야 조금 정신이 든 모양이다.
『어디.』
하고 고개를 쳐들어보더니, 다시 누우며,
『웬일인가, 식전참에.』
하며 다시 씩씩하고 자려 한다.
『고만 좀 일어나세 내 말을 좀 듣게.』
『무슨 말.』
『글세 일어나.』
설성월도 빽 지르는 목소리로
『글세 일어나셔요. 박선생님이 하실 말이 있다고 하시니.』
『할 말이 있거든 해. 내 귀로 들을 터이니.』
『그런 게 아니라 여보게.』
창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영숙이가 오늘 집에 왔어.』
춘우는 숨소리를 죽이고 가만이 들으며
『왜?』
『왜가 무엇야. 자네가 사흘이나 안 들어온다고 날더러 데려다 달라고.』
『나는 데려다 무엇을 해?』
『누가 아나. 울며불며 모든 것을 잘못하였다고, 자네만 만나면 사죄를 하겠다고 하네.』
『사죄? 흥 무슨 사죄야. 제가 내게 잘못한 것이 있나? 사죄를 받을 아무것도 나는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모두 자기가 잘못하였으니, 지난 일은 모두 용서하고 돌아와 달라고 하데.』
설성월은 춘우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과 또는 그 행동이며 표정만 살피고 있다.
『가거든 이렇게 말이나 하여주게. 영숙과 나와는 다시 만날 기회가 영원히 없으리라고. 그러고 철수에게로 돌아가서 행복스럽게 살기만 하면 나는 더 만족한 것이 없다고. 그러고 춘우라는 사람은 일평생 죽을 때까지 영숙을 잊지 않겠다는 말을 하더라고 하여주게.』
춘우는 눈을 감고 군소리하듯이 말을 하였다.
『그러나, 꼭 한 번만 만나면 모든 자세한 말을 하겠다고 하니, 가보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안 될 말.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춘우는 아직 세상에 나지를 않았다고 말하여 주게. 그동안 내게 하여준 고마운 마음은 진정으로 감사를 한다고 그러고, 옛날과는 아주 다른 춘우가 지금 영숙을 만날 필요는 없다구 그래.』
하며 성월의 손을 잡으며,
『내게는 설성월이라는 애인이 있다고 하여 주게. 나의 마음은 시냇물같이 설성월에게 홀렸다고 하여 주게.』
하고 한참 말이 없다가,
『흥, 그러나 성월에게도 충고다. 어느 날 어느 때에 나의 마음이 다시 또 다른 곳으로 흐를는지 나도 알지 못하니까 성월 너도 아주 믿지는 말라는 말야.』
성월은 다만 코웃음 비슷한 웃음을 띠웠다.
창하는 더 권해야 쓸데없는 것을 알아채었다. 그래서 그 대답을 하여 주려고 자기 집에 있는 영숙에게로 가고, 춘우는 다시 잠이 들었다.
창하가 간지 두서너 시간이 지나서 어떠한 사람 하나가 설성월의 집으로 춘우를 찾아왔다. 그는 얼핏 보기에 시골 농촌에서 농사를 하는 사람 같은데, 와서 춘우를 찾았다.
『여기 이춘우씨라고 계시죠?』
『어데서 오셨어요?』
설성월은 의아해서 주저주저하며 시원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저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어디서요?』
『그 어른 부인에게서요.』
『부인?』
하며 편지를 달래서 앞뒤를 뒤적거려보다가.
『예. 계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 계신데요.』
『언제나 오시나요.』
『있다 저녁때쯤 오시겠죠.』
『그럼, 그 편지를 두었다가 드려주십시오.』
『그렇게 하셔요.』
설성월은 그 편지를 받아 들고 몹시 마음이 좋지 못했다. 일변 질투의 마음이 생기며 그 편지를 당장에 찢어버리고도 싶었다. 그러나, 다시 편지를 들여다보다가,
『이 속에 무엇이라고 씌어있누.』
뜯어서 먼첨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며 편지 든 손이 떨린다.
『아니다. 남의 편지를 뜯어보아서는 안 된다는데.』
하다가도, 누가 들어오는 기색만 있으면 얼핏 그것을 감추었다. 물김에 봉한 것을 눅이어 떼어보려고 하기도 몇 번인지 몰랐으나, 그래도 참아 그것을 그렇게 하지는 못하였다.
그날 저녁에 설성월이 놀이에 다녀와 두 시 가량해서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까, 춘우가 와서 자리를 깔고 혼곤이 잠이 들어 잔다. 옷을 갈랑 입은 설성월은 춘우를 깨웠다. 흔들어 깨는 바람에 춘우는 눈을 뜨고 치어다보더니,
『어느 틈에 왔어?』
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성월의 허리를 끼어 안으려 하니까, 성월은
『왜 이러셔요. 가만이 계셔요.』
하고 팔을 떠밀치며,
『오늘 나으리께 반가운 것을 하나 드리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 마치시면 용치.』
『무슨 반가운 것을?』
『글쎄 무엇이든지 알마 마쳐보셔요.』
『무엇을 알아마쳐.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분수가 있지.』
『그러면, 그것을 드릴 텐데요. 내 청하나를 들어주실 터입니까?』
『또 무슨 청야.』
『글쎄 들어주실 테얘요?』
『청야 벌써 들어주지 않았나.』
『아니 난 싫어. 그런 소리만……』
『그럼 또 무슨 청야, 말을 해.』
『싫거든 고만두시구려. 나도 드릴 것을 드리지 않으면 고만이지.』
『대관절 준다는 건 무엇야?』
『무엇이 무엇얘요. 당신 애인에게서 온 것이지.』
『내 애인이 또 누구람, 생트집을 잡아도 분수가 있지.』
하고 말도 하기 싫다는 듯이 돌아들어 눕는다.
『그렇게도 보기 싫으셔요? 보기 싫으시기도 하겠지. 누구시라구, 척척 편지를 보내는 여자가 있으니까. 장하시우.』
『편지가 또 무슨 편지야. 그거 사람 미치겠네.』
『고만두셔요.』
『무얼 고만두어?』
『성월쯤야 어디 선생님 같으신 이가 눈이나 떠보실 테얘요.』
『농담도 오래 하면 재미없어. 잠이나 자.』
하고 이불을 뒤집어 쓴다 설성월은 혼자 떠들다가, 춘우가 대꾸를 해주지 아니하니까 싱거워서 설합 속에 편지를 꺼내서 머리맡에다 내던지며,
『자, 이것 좀 보셔요.』
하였다. 춘우는 무엇인가 하고 그것을 집으려 하니까, 설성월은 그것을 재빨리 다시 집으면서,
『혼자는 못 보실걸.』
하고 주지를 않는다.
『어디서 온 것야. 피봉이나 잠깐 봐.』
『자요.』
하고 멀찌거니 들고서 피봉만 보인다.
춘우는 그것을 보더니, 와락 달려들어 빼앗으려하며,
『그것이 언제 왔어.』
하니까, 설성월은 다시 손에다가 움켜쥐고
『왜 이러셔요. 그렇게 쉽게요. 한번 내 손에 들어온 것인데.』
춘우와 설성월은 편지 하나를 중심으로 씨름이 시작되었다. 춘우는 빼앗으려고, 설성월은 아니 빼앗기려고, 서로 끼고서 온 방안을 뒹굴었다. 나중에는 떠다 놓은 자리끼가 엎질러진 것도 불계하고, 서로 간질이고 꼬집고 어기고 비틀었으나, 설성월은 눈물을 흘려가면서도 놓지 않았다.
『엥.』
춘우는 화가 났다.
『앙시기도 하지.』
하고 요우에가 쓰러지며
『그놈의 편지 안 보아도 괜찮아.』
하고 숨이 차서 펄떡거린다.
『그렇게 쉽게.』
성월은 걸레로 방바닥을 훔치며 춘우를 노려본다.
『글쎄,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을 한다는 것야?』
『남 무엇을 하든지 간에 상관하실 게 무엇얘요.』
『왜 상관이 안 돼. 내게 오는 편지를 가지고 안 내놓으니까 말이지.』
『누가 안 드린대요.』
『그럼.』
『나고 같이 보시잔 말얘요. 내 손으로 내가 들고 같이 보 셔요.』
『그럼 진작 그러지.』
『누가 진작 안 그랬어요. 남의 손을 모두 비틀어 놓으시구.』
분한 듯이 손을 들여다보다가
『에끼.』
하고 달려들어 춘우를 꼬집어 뜯는다.
『이게 무슨 짓야 아파. 자, 같이 봐, 같이.』
성월은 어느덧 춘우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나란히 엎드려 편지를 뜯어서 둘이 보기를 시작하였다. 이 아래 쓴 것이 그 편지의 전체이다.
당신이 나가시던 날 저는 공연히 섭섭한 생각으로 하루 종일 울고 지냈습니다. 그랬는데 정말 그날 저녁에 당신이 돌아오시지를 않으시지요. 혹시 어디가 약주나 잡수시고 실수나 하시지 않으셨나 하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기다렸어요. 춘우씨! 사흘 동안을 이때나 오시나 저때나 오시나 하고 기다리기는 하였으나, 반가운 춘우씨가 오시기는 고사하고 춘우씨가 다른 여자에게로 마음을 옮기시고 저는 돌아보지 않으신다는 소문을 듣고서 얼마나 제가 낙담을 하였는지, 그때의 저의 마음은 만척이나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받는 것이 제게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이며, 감사할 일이요, 다시 당신에게 내버림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운명이 그렇게 시키는 것이니까, 누구를 원망하고 허물을 할 것은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오늘 창하씨에게 말씀을 들으니까, 당신이 저를 의심하시며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하시더란 말을 듣고서, 저는 눈물이 쏟아져 흐르는 얼굴로 글자가 흐려 보이지 않는 붓을 잡고, 모든 일의 자세한 것을 말 대신 여쭈워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또는 장래가 똑같을 것입니다. 차라리 더욱 더욱 깊어가기는 할지언정 조금이라도 빛이 여위거나 엷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에 당신에게 이와 같이 오해를 받게 된 것도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데서 나온 일이 도리어 당신의 노여우심을 사게 되었고, 마음을 아프게 하여드리어 그것은 무엇으로써 사함을 받아야 좋을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오늘 그와 같이 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또는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까닭이 아니신 것도 저는 압니다.
다만 죄 많은 몸이 어려서 부모를 그릇 만난 죄인지, 철모를 제 시집을 잘 가지 못하여 남의 첩의 몸이 되어 거기에서 죄악의 씨라고 하올는지, 청아라는 계집애 하나를 낳아서 어머니 노릇을 하게 된 것이, 오늘에 저를 참으로 사랑하여 주시고 참으로 사람답게 알아주시는 당신까지 그렇게 괴로우시게 하여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두 번 당신을 속였습니다. 아니지요. 두 번뿐이 아닙니다. 다시 애아버지하고 만나지 않겠다고 제가 스스로 맹세를 하여 놓고 그것을 맹세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두 번이오며, 또는 그 두 번 죄를 짓는 것에 따라서 수없이 당신의 눈을 가리우게 하였습니다.
춘우씨! 그것이 죄인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을 속이고 청아의 병을 위하여 애아버지에게 다니는 것이 죄인 것을 모르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그 말을 제 입으로는 당신에게 말씀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제가 제 가슴에다 독약 묻은 화살을 박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그렇다고 어미 된 마음에 청아를 잊지 않으리라고 여간 노력을 하였사오나 그것도 저의 힘으로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천륜이 되어 그러한지 무정하게 어린 것을 떼어버릴 수는 없었어요. 여기에 저는 몹시 고민하였습니다. 당신이 절더러 무슨 근심이 있느냐고 물어보실 때마다 저는 가슴이 저리는 듯하였어요.
어머니 되랴, 남의 애인이 되랴? 저는 참으로 헤매였습니다. 어머니가 되자면 애인을 내버려야 할 터이요, 애인이 되려면 어린것을 잊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된다 하면 그것은 일평생 사랑 없는 남편 밑에서 유모와 같이 쓸쓸한 세상을 지내야 할 터이요. 그렇지 않으면 애인을 따라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제, 어느 정도까지 동정하여 주셔야 할만한 고민을 느끼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죄라 하겠지마는, 어떠한 때에는 당신을 잊자 하고 굳은 결심을 하고서 애아버지에게 다시 돌아가겠다고 승낙까지 하였다가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후회를 하고 운 일까지 있었어요.
춘우씨! 참으로 괴롭고 무서운 세상얘요. 어쩌면 좋을지 모를 세상얘요.
당신은 저를 원망하시겠죠. 원망도 좋습니다. 또 책망하신다 하면, 그것을 받지요. 당신이 이 괴로움을 없이하여주기 위하여 저를 죽여주신다 하면, 그것도 달게 받겠습니다.
아아, 그런데 춘우씨! 돌아오십시오. 모든 것을 단념하고 잊어버리고 다만 홀로 깨끗한 마음으로 저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시 효창원에서 꽃을 따며 노래하던 그때로 돌아가셔요. 그때의 그 잊을 수 없는 즐거움을 지금에 다시 생각할 때에 춘우씨가 새삼스럽게 그리운 듯합니다.
즉일 영숙 춘우는 편지를 읽다가 그대로 엎드려 울었다. 설성월도 웬일인지 눈물이 나서 고개를 돌리었다.
『내가 잘못야.』
눈물은 베개 위에 시내처럼 흐른다.
『고만우셔요.』
한참 우도록 가만해 내버려두던 설성월은 춘우의 어깨를 흔들면서 울음을 그치라고 위로를 한다.
『내가 생각한 것이 옳지.』
춘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었다.
『눈물이나 씻으셔요.』
설성월의 그때 감정은 자기가 영숙이가 되어서 춘우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는 것을 듣는 듯이 춘우에게 동정이 갔었다. 그는 눈물을 씻기며 어린애 어루만지듯이 어루만지면서, 『그렇게 우실 것이 무엇얘요? 선생님께서는 다시 옛날의 행복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동정은 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다시 질투의 불길이 타올라 오기 시작하여 말하는 어조마다 비꼬아 말을 한다.
『선생님이 지금은 눈물을 흘리실 때가 아네요. 지금이라도 기다리고 계신 영숙씨에게로 가시지요.』
춘우는 설성월의 이 말을 듣고 속으로 비웃었다.
『내가 다시 영숙에게로 가?』
『그럼요.』
『아니지 가지 못하지.』
하고 춘우는 다시 눈물이 두 눈에 핑그르 돈다.
『왜 못하셔요.』
설성월은 거짓말이라는 듯이 춘우를 본다.
『그것은 성월이는 모를 것이야. 어떠한 일이 있든지 나는 영숙에게로는 다시 가지를 않을 터이니까.』
『거짓말 마셔요. 왜 가시지를 않으셔요. 그렇게까지 모든 것을 자백하고, 또 그렇게까지 결심을 하고 있는 이에게.』
『안 가지. 내가 그만큼 영숙을 못 믿거나 또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숙이가 나를 사랑하는 까닭에 말을 하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나도 영숙을 사랑하므로 가지 않는 것이야.』
『그렇지만, 선생님이 참으로 진정으로 사랑을 하신다 하면, 남이 가지 마시라고 해도 가실 터인데, 일부러 선생님 자신이 안 가신다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선생님 마음 가운데 영숙씨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부족하신 까닭이시겠지요.』
춘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을 할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내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는 것을 나는 어떠한 경우에 슬퍼하는 때도 있어. 벌써 나의 마음은 그렇게 열정적이 아니요, 그렇게 단조하지가 않으니까.』
『그렇지만, 가보셔야죠. 가보시지 않고 어떻게 합니까. 젊은 부인이 혼자 계실 터인데.』
『영숙의 몸을 보호할 사람은 나외에 또 있으니까. 그것이 걱정할 것이 없지. 그러나, 마음을 보호하여 주는 사람은 아마 일평생 없을 터이지. 그의 마음의 성벽은 이미 무너졌으니까.』
설성월은 춘우의 이 말을 믿을 수가 없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춘우가 영숙에게 향하는 정이 벌써 식어버렸는지도 알 수가 없어서 춘우의 마음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면, 장차 어떻게 하실 터얘요?』
춘우는 이 말을 듣고 나서,
『장차? 장차는 성월이허고 결혼이나 하고 살까?』
하고 실없는 말이라는 의미인지 씽긋 웃었다.
설성월은 속마음으로 그렇게 되면, 자기에게는 만족한 일이어서 속으로는 좋았으나, 기생이나 그와 같은 사회에 있는 여자들이 거의 공통으로 가진 자포자기와 또는 동경할만한 단념의 관념에서 나오는 말로
『피 듣기 싫어요.』
하며, 저도 웃음에 붙여버린다는 듯이 말대꾸도 하지 않으려한다. 그러나, 또다시 말문이 열리며
『정말 어떻게 하실 터얘요. 아주 영숙씨허고는 헤지실 터입니까?』
하고 지근덕거린다.
『그렇다니까 그러네. 일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지낼 마음야.』
『듣기 싫어요. 어디 두고 보셔요. 영숙씨와 만나지 않으신다는 말도 거짓말이요,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도 거짓말얘요.』
어느 틈에 닭이 울더니, 두 사람은 눈 위에 잠이 내리눌리어 어느덧 잠이 들었다. 춘우는 영숙과 만나매, 그 편지를 한 일도 없고 또는 영영 자기를 내버린 것을 속 못 채리고 찾아가서 영숙의 냉대에 받고 분한 마음에 영숙을 죽이고 자기가 죽으려고 덤비려하니까, 그 뒤에서 철수가 나타나서 사냥총으로 자기의 뒤를 향하여 놓으려 하는 것을 어쩐 일인지 설성월이가 난데없이 뛰어나와 그것을 가로막다가 가슴을 맞고, 그대로 쓰러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깨니, 그것이 꿈인 것을 알고 옆을 보니까, 성월이가 머리를 허트린 채 곤하게 자고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가슴을 문질러 내려 앉히고 날이 밝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二二
그 이튿날 저녁때이다. 서쪽 하늘에는 넘어가는 저녁 해가 핏빛같이 보기에 무섭고 지긋지긋한 광선을 난사하여 온 세상을 그 빛으로 세례를 주려는 듯이 내려붓는다. 산 중턱에 걸리어 무서운 눈방울을 꿈벅거리는 해는 웬일 인지 세상과 하직하는 것을 주저하는 듯하다. 해를 보내자, 다시 달이나 별을 맡기는 몇만 년 전 사람이나, 또는 몇만 년 후 사람이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나, 그때나 이때나 그것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나 유의식적으로나 가슴속에 뭉클 한 비애를 느끼는 것은 우리 인류의 비애이다.
날이 가고 달이 바꾸이매, 나고 죽는 것은 우리 인류가 자꾸 되풀이하는 평범한 사실이다. 언제든지 면하지 못하는 것은 이 비애이다.
수구문 밖에는 수철리라는 공동묘지가 있다. 넘어가는 해가 이 산비탈 위에 앞산 그림자를 끌어다가 비추인 산길 위로는 춘우가 어린 인우를 이끌고 서울을 향하여 돌아온다.
『아까 보던 것이 어머니 산소요?』
인우는 오던 길을 다시 돌아다보며 물었다.
『그래.』
『그런데, 왜 거기 계시우. 그러고, 내가 왔는데도 나와 보지도 않으시고……』
춘우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흩어질 대로 흩어진 데다 인 우의 이 소리를 들으매, 가슴이 터져서 피가 솟는 듯하다. 춘우는 어린 인우에게 죽음이라는 것을 아니 가르쳐 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 속에서 주무시느라고 나오시지를 않으신단다. 아직 잠을 깨실 때가 되지를 않아서.』
『그렇지만 왜 흙 속에 누워계셔?』
『그 흙 속에는 훌륭한 집이 있고 뜰이 있고 물이 흐르고 언제든지 꽃이 피는 곳이 있으나 우리는 어머니처럼 착하지가 못해서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돌아다니다 가만 온단다.』
『그럼, 우리도 어머니같이 착한 일만 하면 어머니께로 가게 되지.』
『그렇지.』
『그러면, 어머니도 나를 귀애하고 언니도 귀애하고……』
『그래, 그런데 내 이야기 하나 하여주랴?』
『응.』
『너 누에라고 하는 벌레 알지.』
『누에? 몰라, 누에가 무엇요.』
『누에라 하는 것은.』
말을 끄내면서 따라오는 인우를 구름이 낀 눈으로 내려다본다.
『저 면주실을 입으로 뽑아내는 벌렌데, 그 실로 우리의 옷을 짜는 것야.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알에서 까지면서 굼벙이 같은 벌레가 되어 뽕나무 잎을 먹으면 손가락같이 굵어진단다. 그래 그것이 굵을 대로 굵으면 제 입에서 실을 토해서 그것으로 제 몸을 칭칭 감아서 집을 만든 후 그곳에서 죽어버린단 말이지.』
인우는 춘우를 보며
『제가 죽아?』
하며 신기히 여긴다.
『그래, 제가 죽은 뒤에는 번데기라는 것이 되어, 그 속에 들어 있다가, 또 얼마가 되면은 다시 그 속에서 나비가 되어서 그 전에는 기어다니던 것이 나래를 펴고 펄펄 날아다니게 되는 것이란다.』
『응, 그러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그렇지.』
『그래, 그와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저렇게 땅속에 계시더라도, 나즉에 더 좋게 되어 인우를 보러 오실는지도 모르는 것이야.』
춘우는 이러한 이야기로 인우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면서도, 그것이 너무 현실적이 아닌데 저도 홀로 속으로 부끄러웠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그러한지, 언니가 없으면 쓸쓸해서 못 견디겠어. 인제부터는 언니가 집에 있고 아무 데도 가지 말아요.』
『그러지, 집에 있지. 인제는 언제든지 집에서 너와 같이 있자.』
춘우는 인우에게로 돌아가기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춘우에게는 인우에게로 돌아가기 전에 또 한 가지 할 일이 있는 것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자기가 짧다고 하면 짧으나, 또 값으로는 한이 없는 영숙과 자기 사이의 사랑의 역사를 눈 딱 감아 버리고 자기가 이제 상처 난 가슴을 어린 인우의 사랑으로 바꾸려 할 때, 그에게 어찌 무량한 감개가 없으랴. 그러나, 괴로움을 견디어 이긴 뒤에 즐거움이 그의 가슴에도 얼마 아니하여 그의 가슴에 넘쳐흐를 것은 기대하지 않고 자연히 돌아올 것이다.
지금 그에게는 마지막의 괴로움이 꼭 한 가지 남아 있으니, 그것은 영숙에게 최후로 마지막 말 한 마디를 하는 것이니, 그것은
『잘 있으라.』
하고 짧고도 기막힌 말이었다.
인우를 처음으로 어머니 산소까지 데리고 왔던 춘우는 다시 마지막으로 영숙을 만나보려 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기는, 자기의 마음을 안다. 자기가 영숙을 눈 딱 감고 보지 않으면 모르거니와, 다시 그의 얼굴을 보고, 다시 그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의 웃음을 본다 하면 그는 지금까지 결심하였던 것이 눈같이 녹아버릴 것을 자기는 안다. 만일 다시 만난다 하면, 그 일순간에 또다시 자기는 거짓말을 하게 될 터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그 순간을 다시 지내는 때에 또다시 비극의 원인을 이룰 것이다.
『그래도 가서 말이나 한마디 하여 볼까?』
하고 왈칵 발길을 그쪽으로 향하였다가도,
『아니 안 된다. 나를 의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좋다. 나를 너무 매정한 사람이라고 해도 좋다. 내가 나의 굳은 신념(信念)아래 행하는 일이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든지 좋다. 나는 결코 주고서 다시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날 창하는 기뻐 뛰며 춘우를 찾아왔다.
『야, 춘우 춘우.』
그는 춘우의 손목을 잡아 흔들며,
『고마워 고마워, 자네에게는 옛날의 행복이 다시 돌아왔네.』
하고 치하하였다. 춘우는 하도 이상하여
『무슨 옛날 행복이란 말인가.』
하고 냉연한 태도로 창하에게 물었다.
『지금 영숙씨가 또 내게 오셨어?』
『그래.』
『그런데, 지금껏 생각한 것이 모두 잘못이 되었네그려. 내가 너무 지나치게 생각을 해서 영숙씨를 믿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도 자네에게 미안하게 되었네.』
『자네가 의심한 것이 무엇인가.』
『압다 어서 가세. 지금 내가 기여이 자네를 데리고 가야 하겠네.』
『나는 갈 수가 없네.』
『왜!』
『자네의 말도 나는 벌써 자세히 알고 있네, 자, 자, 이것을 보게.』
춘우는 주머니에서 영숙의 편지를 꺼내주었다. 창하는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숨에 읽고 나서 두 주먹을 마주치며,
『글쎄 이것야, 이것. 내 말도 이 말이란 말이야.』
하고 혼자 좋아한다.
『그렇지만, 나는 갈 수가 없네. 내가 세상에서 어떠한 욕을 먹드라도 가지는 않을 터이야.』
『압다 공연히. 좋거든 그냥 좋다고 그래. 어서 잔말 말고 가.』
하며 춘우의 손목을 잡아끈다.
『나는 아주 장담을 하고 왔네. 자네를 데리고 갈 터이니, 집에 가서 기다리시라고.』
춘우는 도리어 귀찮은 기색을 뵈이면서,
『이거 왜 이러나 놓게.』
하며 손을 뿌리친다. 창하도 춘우의 기색이 너무 거짓말 같지 않으므로 무색하기도하고 이상하기도 하여
『정말인가?』
하고 춘우를 둥그런 눈으로 치어다 보았다.
『정말이지, 거짓말인가. 실없이 할 일도 따로 있지.』
춘우는 침착한 태도로 대답을 하였다.
창하는 불가사의한 일을 당한 듯이 고개를 수긋하고 앉아 있다가,
『왜 그러나? 내 생각 같아서는 자네가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나는 결심한 것이 있어.』
『무슨 결심을?』
『당초에 이제부터는 영숙과 만나지를 않으려고.』
『그것은 또 무슨 까닭야. 나는 자네 마음을 알 수가 없네. 어느 때는 날더러 어떻게 하면 다시 만나게 하겠느냐고 하더니, 지금 일이 다 해결이 되니까, 또 만나지를 않겠다고 하니 이번에는 자네가 한번 버티어보는 셈인가?』
『아니지, 이번 일을 그렇게 술 먹는 사람의 장난처럼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럼 왜 그래. 영숙씨도 모든 일을 자백하였고 또 철수나 청아를 단념하고 다시 자네게로 온다고 하였는데.』
『단념?』
춘우는 반쯤 코웃음 같이 말을 하며,
『철수는 단념하려면 그것은 될는지 몰라도, 청아는 단념하지 못할 것이니까. 내게 청아를 단념하는 것보다도 청아를 데려온다 하면 내가 갈는지 모르지마는 그 외에는 내가 갈 수가 없네. 만일 내가 지금 간다 하면 얼마 동안은 다시 옛날같이 지낼 수가 있을 터이지. 그러하나, 영숙은 또다시 나를 속이지 않으려 하나, 아니 속이지를 못하게 될 것이며 그 맹세를 몇백 번 몇천 번 거듭하고라도, 그 맹세를 이기게 될 터이지.』
『그렇지만, 이 사람아 그런 일이 세상에 아주 없는 일이 아닌 게 아닌데. 그까짓 것을 가지고 그럴 것이 무엇인가?』
『그렇지만, 나는 벌써 나의 어린 아우에게 맹세를 하였네. 나는 다시 너를 떠나가지 않겠다고.』
그날 밤이다. 낮부터 하늘 위로 떠돌아다니던 구름장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이리 쌓이고 저리 쌓이더니, 해가 넘어간 뒤로는 반짝거리야 할 별들도 눈을 감았으며, 떴다가 사라져야 할 초생달도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를 숨기었다.
경성의 둘레를 빙그르 돌은 산 위에는 시커먼 구름들이 산 위에다가 다시 산을 쌓은 듯이 메뿌리가 보이지 않도록 쌓여 있고, 괴물이 지내가는 듯이 바람에 불리어 공중을 달려가는 무서운 구름장만 컴컴한 가운데 움직일 뿐이다. 마치 지구라는 큰 자연 뭉텅이가 지금에 운명을 한 듯이 칠같이 검은 어둠이 그 위를 내리덮으며, 무엇인지 원혼을 하소연하는 귀곡새가 효창원 송림 위로 울면서 지나간다. 장례식을 하는 듯이 바람 한번이 지나가면 소나무가 이리 굽히고 저리 흔들리는 대로 몸속으로 스며드는 으스스한 소리가 사람을 웅숭그리게 한다.
밤 열 시가 넘었다. 모래가 깔린 길이 분명히 보이지는 아니하나, 희미한 가운데로 이리 구부러졌다. 저리 펼친 것이 은은히 보이는데, 영숙의 집을 향하여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조심스럽게 영숙의 집문간 앞에 가까이 와 선 사람은 춘우였다. 며칠 되지 않건마는 자기 집문간에 와 서 있자 몇 해를 지낼 것 같이 그립다. 깜깜한 밤이지만 모든 것이 대낮에 보는 것보다는 더 소상하다.
춘우는 문틈으로 안을 살피었다. 고요 정적한 가운데 백지 한 장을 통하여 영숙이가 앉아 있어 가끔가끔 가늘은 기침을 하는 소리가 그 적막을 깨뜨리는 소리이다. 춘우는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아니하고, 앞대문을 돌아서 뒤 창으로 갔다. 춘우는 결코 영숙을 의심하여 그것을 엿들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영숙을 안보리라 안 보리라 입술을 깨물어가면서 결심을 하려 하였으나 그의 발은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는 들창에 귀를 기울이고 방안의 공기를 들여다보았다. 영숙의 숨 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게 고요하고 아무 말이 없다. 그러자, 다시 창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영숙은 책상 앞에 앉아서 무엇인지 뒤적거리며 열심히 읽고 앉아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옛날에 자기가 영숙에게 보내였던 편지이다. 영숙은 그것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가는 그것을 춘우나 만난 듯이 자기 가슴에다가도 대여보고 또는 뺨에다가도 대여보았다. 나중에는 그 편지에 엎드리기라도 하듯이 입속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셔요.』
하며 보기도 하였다. 춘우는 이것을 볼 때 그대로 뛰어들어가 끼어안고 싶었다. 그리고, 도리어 자기가 영숙에게 사죄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끓어나오는 마음을 억제하고 한참이나 멀거니 서 있었다. 다만 벽 하나 창 하나가 두 사람은 천 리나 만 리를 격한 것처럼 지척에 두고도 서로 알지 못하며 서로 만나지 못하며, 또는 서로 말을 하지 못하게 한다. 누가 말을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요, 누가 만나지 못하게 한 것도 아니요, 누가 서로 알지 말란 것도 아니지마는, 그 무슨 신의 섭리(攝理)가 두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생각하면, 모든 것이 애닮을 따름이다.
춘우는 시커멓게 흐린 하늘을 쳐다보고 섰을 때, 가슴에서 치밀리는 슬픔이 눈물이 되어 두 눈에서 흐를 뿐이다. 애닲음과 또는 섭섭함이 춘우를 미치게 할 듯하다. 그는 속으로
『아아 영숙! 영숙은 내가 여기 서서 우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러나, 영숙의 방안은 언제까지든지 고요할 뿐이다. 소나무가 우수수하기를 시작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신선한 바람이 나뭇잎을 건드리고 지내갈 때마다 처끈처끈한 물기운이 춘우의 전신을 적셔준다.
춘우에게는 어둠도 없고 비도 없고 추움도 없다. 그의 눈앞에는 산천초목이 모두 없고 다만 영숙을 떠나가는 슬픔이 그의 가슴에 찼을 뿐이다.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다.』
하고 것을 생각할 때, 그는 그대로 담에 기대어 울었다.
비는 소리를 치며 쏟아진다. 어느덧 낙수가 머리 위에 떨어진다. 그는 온몸이 젖어 쥐어짜게 되었어도 그 자리에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는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집 한 바퀴를 휘돌았다. 빗방울 떨어지는 장단을 맞춰서 바로 옆에 집에서는 다다미질을 한다.
그는 다시 문간에 와 섰다. 무슨 결심을 한 것처럼 그는 우뚝 서더니, 주머니에서 편지 한 장을 끄내어 우편함(郵便函)에다가 그것을 넣었다. 그러고는, 발길을 돌이키어 다시 그 길로 내려올 때 그는 몇 번인가 돌아다보았는지, 한 걸음 이 한 번, 두 걸음에 한 번, 어두컴컴한 가운데 집 그림자의 윤곽이 사라질 때까지 그는 돌아다보았다. 그는 전차 궤도 앞으로 올 때까지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를 않았다. 비는 여전히 퍼부었다.
하루 저녁을 쏟아지던 비가 새벽이 되자 어느덧 개고 왜청 가루로 물들인 듯한 하늘에는 아침볕이 웃는 듯이 솟아올랐다.
영숙은 하룻 밤을 홀로 새고 나서 아침 문을 열어할 제, 그의 눈에는 이상한 편지 한 장이 우편함에 있는 것이 보였다. 언제 우편배달부가 두고 간 것인가 하고 피봉을 보자, 거기에는 자기 이름이 씌어있고, 그 뒤에는 춘우의 이름이 씌어있다. 우표를 붙이지 않은 것을 보면은 필연 누가 갖다둔 것인데, 춘우씨가 갖다 놓고 가신 것인가, 그러면 왜 들어오시지를 아니하셨을까?
피봉을 뜯고 속의 사연을 보니까, 사랑하는 영숙! 영숙의 편지는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는 지 알 수가 없소. 나는 그 편지를 읽고 감사한 마음과 또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울었소. 마음으로 다시 사죄하는 바이요. 그러나, 우리의 운명은 여기에 두 사람을 서로 떠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우리는 그 운명에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요.
영숙! 영숙은 지나간 짧은 세월에 일평생 잊지 못할 사랑을 내게 부어주었지요. 그러나 그것이 오늘에 꿈같이 사라질 것을 알았다면, 오히려 그 행복을 처음부터 취하지 않았을 것을 이것도 신이 아닌 사람의 하는 일이니까 그러할는지!
영숙은 영숙의 직분이 있는 것을 알아주시오. 나의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이 있는 것을 알아주시오. 나는 지금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정처 없이 갑니다. 영숙은 남의 어머니로서의 직분을 지켜주기를 바라오.
영숙은 그대로 엎드려 울었다. 만일 세상에 가장 슬픈 일이 있다 하면 이것이라고 결정을 하도록 기가 막혀 울었다.
二四
그 후부터는 춘우의 행적이 어디로인지 사라졌다. 아무도 춘우의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자, 한 달이 지내어 창하는 춘우를 만났다. 그는 춘우가 거의 시골 사람 같이 된 것을 보았다.
『이게 웬일야.』
창하는 농부의 손같이 된 춘우의 손을 잡으며 반갑게 물었다.
『그동안에 시골 좀 다녀왔어. 그래 지금 서울로 들어오는 길이야.』
『그러면, 편지도 한 장 아니해.』
『편지는 해 무엇하나.』
춘우는 짚신 신은 발로 땅을 긁으며 말을 하였다.
『그럼 어디어디로 다녔단 말인가.』
『각처로 다니었지.』
『걸어서?』
『그럼 빌어먹어 가면서.』
춘우는 웃음을 평생 웃지 않을 사람 모양으로 얼굴이 엄연하여졌다.
『그동안에 영숙은 시골로 갔지.』
창하는 춘우가 불쌍한 듯이 쓸쓸한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일은 그렇게 돼야 할 것이지.』
영숙은 춘우가 시골을 떠난 후, 며칠이 못 되어 자기 어머니, 청아 또는 철수를 따라 철수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옛날과 같이 마찬가지가 되었다. 영숙과 춘우가 만나기 전이나 헤여진 오늘이나 무엇이 다르랴. 그러나, 산과 산을 격하여 남쪽과 북쪽에 나누여 있는 두 사람의 가슴 속에는 옛날의 애끈이는 흔적이 남아 있다. 한 사람은 다시 순진한 사랑을 하여 보지 못할 만큼 마음에 병이 들었고, 또 한 사람은 일평생 남의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태양은 서산을 넘는다. 아아 어디선지 어린애 우는 소리가 들이어온다.
춘우는 창하를 이끌고 가며 말했다.
『오래간만에 술이나 한잔 먹세.』
行者付記
어머니 終
이 소설은 시작할 때부터 신문소설(新聞小說)로 예정하고 쓴 것이요, 또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끝을 너무 속하게 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실로 용두사미가 된 것은 작자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독자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작자의 사정을 사정으로 양해하여 주시고, 작자가 예술적 양심이 박약하여 그리된 것으로 알아주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