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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인연(A Vengeful Passion)

어쩔 수 없는 인연(A Vengeful Passion)

Lynne Graham

 

1

애슐리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언니 집 주방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그들은 얼마나 더 경찰서에 있어야 하는 걸까? 지금쯤이면 엉뚱한 사람을 잡아왔다는 게 밝혀졌을 만도 한데... 그녀의 남동생은 결코 차 도둑이나 불량배가 아니다. 결코 다른 사람의 소유물에 손을 댈 그런 아니가 아니다. 안 그런가?

그렇다고 팀이 천사라는 건 아니다. 십대들이란 다 그렇지 않은가? 그 아이는 바보가 아니다. 곧 다가올 마지막 기말 시험만 치르고 나면 신작로처럼 곧게 뻗은 미래가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는 걸 모를 아이가 아니다. 그런 그가 왜 엉뚱하게 궤도를 벗어나 남의 차를 훔치는 짓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팀은 자신의 차도 갖고 있는데!

팀은 두 달 전부터 누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부모님이 뉴질랜드에서 친척들과 길고 긴 해후를 나누는 동안 달리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팀은 수잔과 아널드와 지내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애슐리는 그런 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수잔의 규칙에 따라 사는 게 싫으니까.

온통 하얗게 장식한 주방이 마치 공연을 위한 극장 무대처럼 느껴졌다. 정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물론 흐트러진 것도 없었다. 수잔은 어지럽히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언니 집은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바로 수잔 자신처럼. 그러나 조금 전 전화로 수잔은 몹시 신경질을 냈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는 가운데 팀이 경찰에 잡혀갔으니 아무리 냉정한 그녀라도 평소의 침착성을 잃을 만하다.

수잔의 엄격한 도덕성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느 곳에서도 살지 못할 것이다. 수잔은 독재자나 다름없다. 그런 사실을 애슐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으리라. 미혼의 십대 여동생이 임신한 사실을 발견한 날, 수잔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동생에게서 등을 돌렸다. 만약 누군가의 웃음거리가 될 위기에 놓여 있다면 수잔은 말 그대로 그를 피하기 위해 길이라도 건널 사람이다.

애슐리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 만약 팀이 유죄일 거라는 생각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수잔은 아널드 혼자 경찰서에 가도록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차 한 잔 가져다 줄 가요, 포레스트 양?"

애슐리는 깜짝 놀라 휙 돌아섰다. 언니의 가정부, 애덤부인이 문가에 서서 가운을 여미고 있었다. 그녀는 눈에 띌 정도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고맙지만 됐어요. 마실 수 없을 것 같아요" 애슐리가 중얼거렸다.

"무슨 전갈이라도...?"

"아뇨, 아직"

" 그는 아주....영리한 젊은이인데" 늙은 여자가 말했다.

애슐리는 회상에 젖어들었다. 팀은 아버지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 일단 흥분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성급하고 격하게 덤빈다. 아버지, 헌트 포레스터는 어릴 때부터 팀의 성격을 부추겼다. 남자는 배짱이 있어야 한다면서. 그러나 딸에겐 그렇게 대하지 않았다. 딸은 그저 중요한 아들을 얻기 위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실수쯤으로 여겼다. 아버지의 성차별 규칙록 2장에, 여자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달콤한 설탕과 톡 쏘는 향료쯤으로 규정되어 있다. 애슐리는 한 번도 그 규칙록에 맞춰 행동한 적이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항상 아버지의 규칙을 어겼다.

애슐리는 배반자였지만 수잔은 언제나 충신이었다. 수잔은 18살 때 아널드와 사귀었다. 거의 스무 살이나 연상이었는데도, 아널드는 언니의 처음이자 마지막 남자 친구였다. 수잔은 바깥세상으로 날개를 펼쳐 본 적이 없었다.

그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자유를 음미하기 위해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었다. 애슐리는 언니가 독재자인 아버지와 항상 팽팽한 긴장과 자주 일어나는 불화로 인한 집안 분위기에서 달아나고 싶어서 그렇게 빨리 결혼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을 자주 한다.

"왔어요..."애덤스 부인이 긴장하며 말했다. "전 방으로 돌아가야겠어요, 포레스트 양"

애슐리는 떨리는 손으로 붉은 금발을 쓸어 올리며 숨을 고르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수잔은 여동생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모른다. 아마도 언짢은 기색으로 애슐리를 대할 것이다. 현관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애슐리는 복도로 나갔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분노 때문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팀이 들어오길 기도하면서....다시 말하자면, 죄를 뒤집어쓴 팀이 들어오길 기대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그녀는 다른 경우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문을 확 밀어젖히고 들어온 껑충한 젊은이는 그녀가 그곳에 서 있는 것도 보지 못했다. 팀은 2층으로 달려갔고 곧 탁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졌다. 뒤이어 아널드가 나타났다. 비옷을 벗던 나이 든 남자는 얼어붙은 동작을 멈추었다. "애슐리?"

수잔은 그를 밀치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오만한 언니의 얼굴은 곧 굳어졌고, 두 눈이 마치 불타는 것처럼 빛을 발했다. "애슐리?"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수잔...."아널드는 제지하듯 아내의 소매를 잡았다.

"당신은 가만있어요!"수잔은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남편을 지나쳐 집안으로 들어섰다. "애슐리가 이곳에 있어 차라리 잘됐어요.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애슐리도 똑똑히 알아야 하니까요!"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애슐리는 무시무시한 침묵이 흐른 뒤 멍청한 앵무새처럼 되물었다.

"이건 모두 네 잘못이란 말이야!" 수잔이 소리쳤다.

"엄마 아빠가 돌아오시면 뭐라고 말씀드릴까? 팀을 내게 맡기셨는데... 내 책임이란 말이야. 아빠가 이 일을 아시면, 널 팀과 가까이 있게 했다고 영원히 날 비난하실 거여! 넌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 아빠가 네게 불호령을 내리진 않을 테니까!"

노여움으로 부들부들 떠는 수잔의 모습은 정말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애슐리는 친숙한 사람들이 전혀 낯선 모습으로 변해 버리는 요지경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평소 언니는 딱딱한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 오늘 밤 수잔에게서 침착성이라곤 조금 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애슐리는 애원하듯 한 손을 내밀었다. "수잔, 진정해. 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야?"

"우리 가족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에 네가 빠진 것 있어? 팀이 부서뜨린 차가 누구 건지 알아?" 수잔이 고함쳤다. "차를 박살낸 이유를 알기나 해?"

팀이 유죄라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애슐리에게 현기증이 몰려왔다.

"우리의 어리석은 동생은 4년 전 널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남자에게 복수를 하러 갔던 거야!" 성난 수잔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더니 떨리는 손으로 울음을 터지려는 입을 가렸다. "팀이 어떡했겠니? 그 남자의 차로 그의 집을 박살내 버렸다고! 배상할 돈만 해도 엄청나단 말이야. 그 차값만 해도 우리 집값보다 더 비싸다고!"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는 극도로 높아졌다. "팀은 그 비싼 꼴불견 같은 분수도 박살내고 잘 가꾸어진 잔디밭도 엉망으로 만들었어! 그 댓가로 팀은 이제 감옥에 갈 판이라고!"

" 그럴 리가..." 애슐리는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속삭였다.

아널드가 아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껴안으려 했지만, 수잔은 그를 거칠게 밀어냈다. 그러고는 몇 분전의 팀처럼 2층으로 손쌀같이 달려가 버렸다.

"언니는 우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싫은 거야"아널드는 한숨을 지으며 애슐리를 라운지로 데려갔다. "스스로 진정할 때까지 내버려두는 게 가장 좋아"

어지러운 물결이 한 차례 애슐리를 휘감았다.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그녀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소파 등을 움켜잡았다. 그럴 리가 없어. 사실이 아닐 거야. 내가 대학 다닐 때 사귀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팀이 알 리가 없어. 어쩌면 제정신이 아닌 수잔이 애슐리에게 괜한 억척을 퍼붓는 건지도 모른다.

술병들이 늘어선 찬장으로 다가간 아널드가 혼잣말을 했다. "누굴 비난할 수도 없어. 그저 팀이 잠깐 정신이 나간 것뿐이니까"

"팀이...비토의 차를...그럴 리가 없어요" 애슐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널드는 위스키를 홀짝거렸다. 그는 애슐리에게 한 잔 권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 정도로 정신이 산란한 것이다. "미안해, 처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직 감도 못 잡겠지?" 그가 지친 어조로 말했다.

"아널드!" 애슐리는 소리를 지르며 그를 흔들어 정신이 들게 해주고 싶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어서 말해 줘요!"

아널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팀은 카발리에리의 조카인 피에트로와 함께 학교를 다녔어"

"그런 말은 한 번도 안했는데!" 애슐리가 소리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팀은 우리 가족과 카발리에리 가족이 예전에 어떤 관계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 아널드의 마른 얼굴에 짙은 주름이 했다. "믿어지지 않지만 어쨌든 두 소년은 실제로 친구였나 봐. 나이트클럽에서 싸움을 먼저 시작한 건 피에트로였어. 우리 가족보다 자기에가 더 큰 영향력을 가졌다면서, 불쌍한 팀은 혼자서...."

"싸움이라뇨?" 애슐리는 멍하니 형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널드는 신음하듯 낮게 말했다. "둘이 다투고 난 후, 팀은 클럽 물품을 훼손하고 불손하게 행동했다는 죄목으로 치안 판사 앞에 서게 되었지"

애슐리는 뻑뻑한 눈을 감았다. "왜 제게 아무 말 안 했어요?"

"사실, 팀은 적진에서 싸운 거나 마찬가지였어." 애슐리의 물음에는 아랑곳없이 아널드는 한숨을 내쉬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나이트클럽에서 그렇게 싸운 뒤, 팀은 자신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어. 클럽 주인은 카발리에리 사람을 법정에 세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거든"

"그렇다면 이번 일이 팀이 처음으로 저지른 말썽이 아니군요." 경악한 나머지 애슐리의 목소리마저 흔들렸다.

"그 후 피에트로와 사이가 벌어졌는데, 지난 달 팀은 피에트르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했지" 아널드는 눈에 보일 정도의 마지못한 태도로 계속 얘기했다. " 그 파티에 온 사람 중 하나가 팀이 처제 동생인 걸 알아본 거야. 그때 이미 두 소년은 한 소녀를 가운데 두고 경쟁 관계에 있었지. 피에트로가 급히 끼어들어 처제의 지나간..., 그러니까... 그의 숙부와이 관계에 대해 뭐라 비꼬는 말을 한 마디 했고 둘을 또다시 치고 박고 싸웠어"

애슐리는 무릎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가장 가까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명치끝에 커다란 매듭이 맺힌 듯 구역질이 났다. 아널드는 애써 그녀의 고통스런 눈길을 피하여고 했다.

"팀은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피에트로를 바닥에 쓰러뜨렸어" 그는 음울하게 말했다. " 그 후 그에 대한 보복으로 피에트로는 학교에서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계속 팀을 괴롭히기 시작했어."

비탄에 잠긴 한숨이 그녀의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얼마 전부터 계속 상처를 입고 오는 팀에게 무슨 일이냐고 다그쳤지만, 팀은 그저 벽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집스럽게 캐내려고 할수록 팀은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 결국 그녀는 단념하고 자신의 일에만 신경을 쏟았다. 그녀는 4년이나 넘게 가족들과 사이가 안 좋은 상태였다. 때문에 요즘에 회복된 팀과의 사이를 위태롭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애슐리는 괴로운 듯 머리를 숙였다. "계속 말씀하세요"

"그런 공격을 받은 이유를 얘기하지 않는 팀 때문에 수잔과 난 몹시 상심했어. 그래서 학교로 찾아가려고도 생각했지만, 팀이 싫어할까 봐 그만뒀지. 지금은 가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어"

"팀은 왜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요?" 애슐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처제를 내쳐 버린 장인어른의 결정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그게 모두에게 커다란 심적 부담을 준 것 같아. 특히 장모님과 처남에게 더..."

눈물로 흐려진 애슐리의 눈에 카펫이 출렁거렸다.

"팀은 처제에게 커다란 애착을 갖고 있어. 우리가 못 미더우니까 얘기하지 않았던 거지" 아널드는 약간 망설였다. "사실 20년간 함께 살아오긴 했지만 내 사랑하는 아내, 수잔이 단지 장인어른이 원한다는 한 가지 이유로 자신의 귀여운 여동생을 모른 척하며 산다는 건 좀 이해하기 힘든 일이야"

애슐리의 머리는 속이 타는 듯 뜨거웠다. 순간 입안에서 피맛이 느껴졌다. 엉겁결에 자신의 혀를 깨문 것이다. "미안해요" 그녀가 속삭였다.

"처제가 미안해 할 건 아무 것도 없어. 팀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한 거야" 아널드가 옹호했다. "처남은 카발리에리 집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 집을 엉망으로 만들었어. 잡히기 전에 도망치긴 했지만 얼굴을 보이고 말았지"

애슐리는 실제로 몸이 아픈 느낌이었다. 그녀의 과거가 팀의 현재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누나의 명예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것이다. " 그가 고소했어요?"

"... 카발리에리 가는 유럽 금융계에서 가장 큰손인데, 쉽지 않을 거야. 그런데 팀은 이 일에서 그냥 빠져나가고 싶지 않은가 봐. 자신이 일으킨 말썽이니 책임을 지겠다는 심정인 것 같아"

"어쩜, 그렇게 무심한 말을!" 조금 충격에서 벗어난 애슐리는 튀듯이 일어섰다. "팀은 절 감싸려다 그렇게 된 거라고요!"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다른 사람의 재산을 훼손시킨다는 건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용서받기 힘들어"

"그럼, 팀이 달리 무슨 짓을 할 수 있었겠어요?" 애슐리는 숨을 헐떡거렸다. "그가 아직 덜 자란 아이처럼 행동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엄청나게 돈이 많고 권력이 막강한 비토의 가족에게 분풀이할 수 있는 방법이 팀에겐 달 리 없었던 거예요!"

기분이 언짢은 듯 아널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너무 직설적인 대화법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우린 처남을 위해 최고의 변호사를 쓸 거야. 하지만 장인어른이 처남을 가만두지 않을걸. 팀은 이미 오래 전에 따끔하게 벌을 받았어야 했어"

"올라가서 팀을 만나겠어요" 애슐리는 형부의 넋두리를 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런 넋두리가 팀을 도와주진 못한다.

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팀은 침대 발치에 앉아 있었다. "아까는 누나가 집에 온 줄 몰랐어"

"형부가 다 얘기해 줬어. 왜 그랬어, ? ? 비토가 네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잖아...."

그가 고개를 홱 쳐들었다. "아니라고? 누나는 어떡하고?" 팀은 격렬하게 물었다. " 그는 누나의 인생을 박살 했어. 누나가 집에도 갈 수 없게 만들었다고. 누나는 그놈 때문에 가족들에게서 따돌림 당하고, 그놈 때문에 더러운 침대에서 자고, 구역질나는 일을 하고 있잖아!"

동생의 신랄한 말이 그녀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듯 했다.

"그리고 피에트로, 그 개자식이 자기 삼촌이 누나에게 한 짓이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는 듯 말하잖아!"

"넌 비토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잖아" 그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누난 19살이었고 그놈은 28살이었어"팀이 쏘아붙였다. " 그걸로도 충분히 알 수 있어"

"우린 그저 잘 안 된 것뿐 이야, "

"그 자식은 임신한 누나를 버리고 다른 여자랑 결혼한 나쁜 놈이야" 팀은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기를 잃었던 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잿빛처럼 창백한 얼굴로 그녀는 딱딱하게 속삭였다. " 그렇지 않아, . 그는 내가 임신한 사실을 몰랐어. 우리가 헤어진 그 당시엔 나도 모르고 있었는걸. 그리 알고 난 후에도 그에게 말하지 않았어. 그가 결혼한 건 나와 아무 상관없어." 동생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누나를 응시했다. "거짓말! 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난 사실대로 말한 거야, "

동생의 얼굴은 마치 병자처럼 보였다. "누날 믿을 수 없어. 그 놈은 누나를 버렸어. 그것도 절망의 구렁텅이에. 누나를 이용한 거야! 그는 아이에 관한 것도 알았어야 해! 그 자식은..."

"피에트로는 알고 있었어?"

"글쎄, 아니 몰라. 하지만..."

"비토도 몰라" 손톱이 점점 그녀의 손바닥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그에게 모든 얘기를 했더라면 하고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하지만 과연 그녀가 얘기했다면 그가 이해했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말하기 싫은 일이 있는 법이다. 십대 소년에게 설명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특히 그 소년이 자신의 누나를 유혹 당하고 버려진 순진한 희생자라고 결정해 버렸을 경우엔 더욱 힘들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난 어린애가 아니야, 애시" 팀은 벌컥 화를 냈다. "나도 다 안다고. 식당에서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돌아버린 거야. 그들이 누나에게 한 짓과 내게 한 짓 때문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 그전...눈앞이 빨개졌어, 누나도 알지?"

그렇다. 그녀도 정확히 알고 있다. 성질로 치자면, 그녀와 팀은 많이 닮았다. 둘은 마치 저주받은 것처럼 아버지의 급하고 격한 성격을 물려받았다. 그녀가 너무나도 증오하는 저주이자 약점이었다.

아널드는 아래층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데려다 줄게"

"아뇨, 진짜...그럴 필요 없어요" 그는 그녀의 축 늘어진 어깨에 재킷을 둘러 주었다. "나가자고. 나도 바람을 좀 쐬고 싶어"

애슐리는 형부에게 길을 가르쳐 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공부하고 있는 방송 대학 학위는 어떻게 되고 있냐는 한 가지 질문이 있은 뒤, 그들 사이엔 더 이상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비토를 만나야 했다. 적어도 그는 그녀의 말을 들어주긴 할 것이다. 만약 그녀가 머리를 숙이고 기어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애슐리도 누구 못지않게 강한 자존심의 소유자지만, 팀의 자유와 어머니의 평화가 관련된 일이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팀이 그녀 때문에 고통 받은 것에 대한 속죄가 될 것이다.

피곤에 지쳐 침대에 들 즈음엔 어느 전도 충격의 여파는 가라앉아 있었다. ,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단 한 번의 실수로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나요? 인연이 아닌 남자를 사랑한 게 그렇게 크나큰 실수인가요?

실수한 걸로 치면, 그녀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비아 포레스터는 조용하고 친절한 사람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이끄는 대로 따른다. 못 살게 구는 남편과 30년 동안 함께 살아온 그녀는 무슨 일에든 먼저 사과하는 주관 없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너무 심약한 나머지 남성을 마치 신인 내려주신 존재처럼 생각하는 독재자 같은 남자의 의사를 거스를 수 없는 여자다.

18살 때부터, 애슐리는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자제할 수 있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고는 자신의 전 인생을 마치 전쟁 계획 마냥 치밀하게 설계해 놓았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곧바로 전도유망한 직업 세계로 뛰어든다는 식의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녀의 그 계획은 1단계에서 물에 빠진 바위처럼 침몰하고 말았다. ?

그 미친 듯한 5개월 동안 그녀는 자신의 목표물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자라면서 몸소 경험한 교훈들을 깜박한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빴던 것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철썩 같이 믿은 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져서는 안 되는 뭔가 원할 때 자신에게 그런 핑계를 대는 법이다. 비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뭔가 금지된 듯하고, 뭔가 위험스럽고, 웬일인지 자제할 수 없는 그 무엇. 한때 그녀는 자신만의 엄격한 규칙 안에서 생활했다. 그녀의 전쟁 계획표에는 남자의 자린 없었다. 남자는 뭐든 가지려 하고, 요구하고, 기대하며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존재다. 혹시 그녀가 30대가 되어, 웬만큼 성공한 자리에 있을 때라면, 그때라면 남자를 위해 아주 작은 자리를 하나 마련할지도 모른다. 그 남자가 그녀의 야망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고, 그의 작은 자리도 불만 없이 만족해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한 것. 운명은 그녀가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깡그리 잊어버릴 정도로 근사한 비토라는 남자를 그녀 앞에 등장시켰다. 비토는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곳에 그녀가 있길 바랐다. 그에게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녀는 제대로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그녀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 놓으려고 했다. 아주 조금씩 그녀의 자부심을 비난하며 깎아 내렸다. 지금이야 말이지만, 그런 상태에서 깨어나게 된 게 그녀로서는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어느 날 우연히 거울 속의 자신을 본 순간, 그녀는 엄마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고 착각했다. 독으로 자신을 조금씩 죽이는 남자에게 홀려 더 이상 자부심을 갖지 못 하는 불행한 여자가. 바로 그때 애슐리는 비토 디 카발리에리와 결혼하는 것보다 더 나쁜 운명은 없다고 생각했다.

 

2

"아무리 기다려도 소용없을 거예요" 안내원은 애슐리를 성난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의미 없는 예의마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미 말했잖아요. 디 카발리에리씨는 만날 수 없다고요. 런던에 있을 때 그는 언제나 예외 없이 바빠요. 이미 앞으로 몇 주는 약속이 꽉 차 있는 걸요"

전화를 받을 시간도 직접 만나줄 시간도 없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그를 꼭 만나야 한다. 그는 그녀가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비토네처럼 가족간의 유대가 강한 집도 드무니까.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는 탁아소에는 아프다고 전화하고 은행 문을 열자마자 카리조에리 은행으로 들어왔다. 처음 두 시간 동안 그녀는 21층 건물의 1층에서 바닥만 바라보며 기다렸다. 아마도 그녀가 심약한 사람이었다면, 비토가 단 5분도 시간을 내주지 않을까 봐 마음을 조마조마해서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를 둘러싼 주위는 화려하고 우아했다. 최고로 성공한 은행이라는 걸 암시라도 하듯 건물은 번지르르하게 빛이 났고, 안내 탁자에 앉아 있는 안내원조차 우수한 엘리트처럼 보였다. 4년전 이 근사한 건물을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관심 없는 표정으로 어슬렁거리던 때가 생각나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비토는 날 만나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애슐리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생각했다. 그래, 좋아. 우리가 친구인 상태로 헤어진 건 아니니까. 그들을 서로에게 극도의 증오심을 품은 채 헤어졌다. 그래도 그녀는 비토가 최소한 세련되게 반응하리라고 기대했는데....

"포레스터 양? " 또다시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1시간을 더 기다릴 용의가 있다면 어쩌면 디 카발리에리 씨가 당신을 만날 수도 잇다는군요. 지금은 뭐라 확실한 대답을 드릴 수 없어요." 여자는 경고하듯 말했다. "사장님이 점심 전에 잠깐이라도 시간을 낼 수 있도록 그의 수석 비서가 애쓰고 있어요"

안내원의 생색내는 태도에 애슐리는 몸속으로 한 줄기 분노가 치달았다. "말할 수 없이 친절하군 요" 그녀는 날이 선 투로 말했다.

"맨 위층에서 기다리세요." 상대방 역시 못마땅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맨 꼭대기 층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저도 모르게 그 화려함에 감탄하고 나서 그녀는 자신에게 화를 냈다. 책상에 앉은 세련된 갈색머리 여자는 애슐리를 거만하게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카키색재킷과 면바지를 입은 애슐리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약간 가렸다. 왠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약속한 한 시간이 다 되어 가자 명치끝이 아려오는 듯했다. 비토가 분명히 의도적으로 기다리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 카발리에리 씨가 지금 만나시겠답니다."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몰려드는 불쾌한 기억들에 순간 당황하면서 지갑을 꽉 쥘 정도로 긴장하게 만드는 그에게 은근히 화가 났다. 복도 끝에서 한 중년 여자가 그녀에게 인사했다. "카발리에리 씨는 단 10분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10분 만에 그 무자비한 남자에게서 팀의 자유를 얻어 낼 수 있을까? 신경질적인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 심히 참았다. 아예 없는 것보다 그래도 10분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이중문이 활짝 열리자 거대한 사무실이 나타났다. 그녀 앞에 1에이커나 되는 카펫이 펼쳐졌다. 은행컴퓨터와 여러 대의 전화가 놓인 책상이 보였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때의 기억을 그가 떠올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녀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비토가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땀이 났다. 기억하던 것보다 더 키가 크고 거무스름하며, 기억하던 것보다 백배는 더 매력적이었다. 세상의 모든 세련됨이 한자리에 모인 듯했다. 극도로 우아한 옷차림에 차가운 미소, 한 치의 무례함도 없는 예의 범절. 그러나 겉모습 밑에는 그녀의 이상형인 신세대 남자와 거리가 먼 거만함과 남성 우월이 자리 잡고 있다.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그건 그녀가 계획한 첫 마디가 아니었다. 정말, 그녀 자신의 귀에도 초라하게 들릴 정도였다.

"짧게 끝내 달라고 요구한다고 해서 날 무례하다고 생각하진 않겠지?" 비토는 책상에서 2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될 수 있는 대로 짧게 끝내겠어요."

비웃는 듯 검은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동생의 행동에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애원은 듣고 싶지 않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려 그가 주위를 딴 데로 돌리자 애슐리는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를 살펴보고픈 유혹이 강렬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강하고 어두운 얼굴을 강조해 주는 단단한 광대뼈와 남자답게 적당히 솟아오른 코, 육감적인 곡선을 그리는 입술.... 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그리고 비토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 흑단보다 어둡고 햇빛을 받은 순금보다 더 순순한 금빛 눈동자였다.

그녀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비토는 여전히 어둡고 격렬한 성적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15살에서 50살 사이의 모든 여자들이 그가 지나갈 때면 시선을 끌려고 안달일 정도다. 하지만 난 그 무리에서 제외야. 애슐리는 그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내리깔면서 그녀의 피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목 아래의 작은 맥박이 뛰기 시작했다. 비토의 야성적인 남성미에 즉각 반응하는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났다.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가볍게 사과의 말을 했다.

"당신은 내가 무릎을 꿇고 애원하긴 원하는 거죠, 그렇죠?" 생각지도 못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말을 내뱉은 순간 후회가 밀려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토는 기습적인 말에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돌아 나왔다. 뭐든 꿰뚫어볼 듯한 금빛 눈동자가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쓰다듬었다. "당신이 이곳에 온 정확한 이유가 뭐요?" 예의 바르게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그가 물었다.

"팀에 대해 얘기하려고, 그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도. 당신은 모르고 있겠지만, 당신 조카가..."

비토는 눈을 가늘게 든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신을 빌리로 동생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가 말을 가로챘다. " 그건 유감스런 사건이오"

애슐리가 뻣뻣해졌다. "유감스럽다고요?"

"피에트로의 앞니가 두 개라 부러졌소." 비토가 메마른 어조로 대꾸했다. "피에트로가 내게 와서 정직하게 얘기해주었소. 그런데 난 당신 동생이 우리 집을 쳐들어온 사건과 이 일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오"

"그래서 당신은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을 개시를 했군요. 다음의 행동은 뭐죠?" 애슐리가 재치 있게 말했다. "팀은 교외에서 네 명의 소년에게 얻어맞았어요, 그 중 한 명이 바로 당신 조카예요"

"언제 얻어맞았는데?"

애슐리는 몇 초 동안 생각하고 난 후에야 날짜를 말할 수 있었다.

"그때 피에트로는 로마에서 사촌 결혼식에 참석하고 있었소." 비토는 조금 전보다 더 메마른 어조로 대꾸했다. " 그러니 그 자리에 있었을 리 만무하오."

그녀는 턱을 치켜들었다. "그가 그 자리에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일을 꾸민 건 피에트로가 분명해요."

비토는 책상 위에 황금 펜을 내려놓았다. "당신은 지금 환상을 쫓고 있소. 피에트로는 그런 비겁한 행동은 하지 않소. 증거가 없다면, 더 이상 그런 얘기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요" 차가운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그 사건의 정확한 정황까지 알지 못해서 화가 났다. 네 명의 젊은이가 팀을 공격했다. 그것이 그녀가 아는 전부였다. 애슐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 조카와 내 동생 사이의 적대감은 한 소녀 때문에 생겼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이 굳어졌다. " 그게 이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애슐리는 긴장했다. "내가 개입됐기 때문이에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비토가 빈정거렸다. "전혀 관련이 없는 것 같은데..."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을 작정이죠?" 그녀는 성난 목소리로 내뱉었다.

차가운 미소가 그의 입술에 자리 잡았다. "내가 당신이라면 사과의 말을 하고 난뒤 지금 즉시 저 문으로 나가겠소. 당신은 지금 피에트로나 그 이름 모를 소녀에게 얼토당토않은 비난을 퍼붓고 있소" 그는 더욱 비아냥거렸다. "당신의 비난이 이토록 비열하지만 않았더라도, 설명하지 못할 일을 설명하녀는 당신의 노력을 가상하게라도 여겼을 거요"

그녀의 투명한 피부가 천천히 불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접근은 실패였다. 그에게서 이런 모욕적인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비토가 정말 이렇게 가증스러울 정도로 달변가일 줄은 몰랐다. 이 사무실에 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참기를 짜듯 온갖 용기를 낸 것인데.

"내가... 좀 흥분했나 봐요" 애슐리는 팽팽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에 팀은 다가올 시험 때문에 심적으로 매우 압박을 받고 있었어요. 난 그저 당신이 그의 심리 상태를 안정시킬 수 있게 해주길 바랄 뿐이에요"

"하지만 난 그의 심리 상태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소" 비토의 목소리엔 전혀 감정이 들어 있지 않았다. " 그는 아이도 아니고 정신박약아도 아니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지."

그녀는 안전하게 그의 왼쪽에다 눈길을 두었다. 지금이야. 지금이 바로 팀이 피에트로의 놀림에 왜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했는지 설명할 때다. 그들이 헤어지고 난 후,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그녀의 미래에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비토에게 설명할 때다. 하지만 어떻게 비토에게 임신했었다는 걸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껏 그 누구하고도 얘기해 본 적 없는, 아주 사적이고 비극적인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이 약해졌던 한순간, 그녀는 수잔에게 비토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수잔이 조심스럽게 행동해 줄 거라고 믿고, 그녀를 좀 더 잘 알았어야 했는데... 아버지가 임신에 대해 수잔과 아널드가 하는 얘기를 엿듣고 만 것이다.

헌트 포레스트는 다른 사람의 자식이 말썽을 일으키면 언제나 가장 먼저 비웃는 사람이다. 자유분방한 부모일수록 자식들이 더 빗나간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녀의 임신 소식은 그녀의 아버지를 격노하게 만들었다. 달이 지날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딸의 모습으로 동네에서 체면을 잃을까 두려워한 그는 기꺼이 딸과 의절했다. 곧 이어 딸이 가진 아이의 아버지가 다른 사람과 이미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임신 4개월 만에 애슐리는 유산했다. 식구들은 모두 그녀의 유산이 자연 현상에 의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승자박을 한 셈이었다. 십대 때부터 결코 결혼하지도, 아이를 가지지도 않겠다고 공언하고 다녔으니까. 모두들 낙태가 비교적 쉽게 이루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고, 결굴 애슐리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안 돼, 비토에게 말할 수 없어. 남달리 아이에게 깊은 애착을 지닌 그에겐 더욱 안돼. 비토 역시 날 믿어 주지 않을 거야. 만약 내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그는 지금보다 몇 배 더 날 증오할거야.

"팀은 이제 겨우 18살이에요" 고통스런 기억을 저만큼 흘려 보내며 그녀가 말했다. " 그리고 이 일은 내 잘못도 있어요. 한번도 그에게 말해 준 적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내 말은, 그는 우리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팀은 엉뚱한 추측을 한 거예요, 하지만 난 이 일이 있기 전까지 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몰랐어요...."

침묵이 이어졌다. 비토는 침묵을 무기처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어떻게 그런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여하튼 그는 그렇게 했다. 그는 극도로 편안하고 침착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자신 만만한 태도로 자기에 앉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갑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봐요, 난 동생 변명이나 하려고...."

"하지만 그가 유죄라는 건 인정하겠지" 그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유죄>라는 단어가 경보 음처럼 그녀의 뻣뻣한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만약 팀이 형을 선고받는다면, 그의 인생은 파멸하고 말 거예요. 걘 잠깐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뿐이라고요.

지금은 자신이 한 짓을 매우 후회하고 있어요"

그가 흔들림 없는 눈길로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럼, 그와 함께 왔소?"

"팀은 내가 이곳에 온 줄도 몰라요" 그녀는 잠깐 사이를 둔 뒤 거칠게 덧붙였다. " 그리고 왜 내게 그런 질문을 하는지도 모르겠군요. 너무 불공평해요. 당신이 얼마나 경찰들을 들쑤셔 놨는지, 팀은 이 건물 부근에 오기만 해도 즉시 체포되고 말 지경이라고요!"

"생기발랄하군." 비토는 마치 칭찬이라도 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생기발랄하고 활기찬 사람인지 잊고 지냈소. 그런데 만약 나나 우리 가족 중 한 사람이 그 차 앞에 있었다면, 당신의 매력적인 남동생이 브레이크를 밟았을 것 같소?"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가 소리쳤다. "왜 쓸데없이 있지도 않은 나쁜 상상을 하는 거죠? 그가 당신 차를 미친 듯이 몰았다는 건 알아요. 그렇지만 누군가를 죽이려는 건 아니었어요! 술에 취해서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다고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죠,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지만..."

비토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다리 모양을 만들었다. "법을 어긴 자는 처벌받아야만 하오. 그가 한 행동의 결과를 감싸고 도는 건 그를 위해서도 좋지 않소"

"당신 차를 부서뜨린 것뿐이잖아요!" 그녀는 화가 나서 그에게 소리쳤다. "애초에 팀은 차를 부러뜨릴 계획 따윈 없었다고요. 차와 우스꽝스러운 분수를 부셨다 해서 십대 소년을 감옥으로 보낸다는 건 지나친 처사예요. 팀을 파멸시키고 말 거예요!"

"초범인데 감옥까지 보내진 않을 거요"

"이번이 처음이 아니..." 경악한 그녀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검은 눈썹이 생각에 잠긴 듯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반쯤 덮었다. "그렇다면 내 양심도 평화로울 수 있겠군. 그의 행위가 다분히 성격적 특성 때문이라는 당신의 변명은 아무래도 효과가 없을 것 같군. 그가 전에도 법을 어긴 적이 있다면, 이번엔 그냥 빠져나갈 수 없을 거요. 첫 번째 경고가 그의 폭력적인 성향을 억제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게 확실하니까"

강철 띠 같은 긴장이 그녀의 눈썹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난 지금 이곳에 팀을 돕기 위해 온 거야. 그런데 돕기는 커녕 비토의 분노만 더 사고 말았다. "팀을 만나 본 적이 있어요?"

"아주 잠깐" 비토가 대답했다. "조카네 파티에서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누었소. 머리 색깔이나 성질이나 당신과 비슷한 점이 많더군"

"내게 폭력적인 성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녀는 비난하듯 물었다.

그는 그녀의 신랄한 말을 무시했다. " 그는 당신의 눈을 가졌더군" 매우 조용히 말하는 그의 육감적인 입술이 굳어졌다. "둘 다 무시 못 할 육체적인 매력을 지녔소.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까 그는 당신과 달리 겉만 번지르르하더군."

화가 난 그녀는 고개를 홱 쳐들었다. " 그래도 당신은 팀을 관대하게 대해야 할 한 가지 이유가 있어요..."

애슐리는 커다란 에매랄드 그린의 눈동자로 한껏 비난하듯 그를 쳐다보았다. "누구도 극도로 화가 나면 정상적인 길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당신도 한 때 그랬잖아요."

표정이 변하면서 그의 턱선이 단단하게 맞물려졌다. "그런 말은 할 필요 없소. 난 그 일로 고통 받지 않으니까."

아주 짧은 몇 초 동안 위험스럽게도 그녀는 자제력을 잃을 뻔했다.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 생각났다. 강간? 아니, 강간은 아니었다. 격렬한 분노로 시작해서 미친 듯한 열정으로 끝맺은 만남이었다. 사랑이 담긴 행위도, 심지어 욕망도 없었다. 치욕스럽다는 남자의 표정이 그 일이 있은 후 몇 달 며칠이고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분노를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지만 애슐리는 동생을 생각하며 가만히 억눌렀다.

"당신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무릎 꿇고 애원할 수도 있어요" 그녀는 뻣뻣하게 말했다. "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소"

애슐리는 턱을 내밀었다. "좋아요. 손해 액은 얼마나 되죠?"

비토가 차갑게 웃었다. "당신 가족은 그만한 재력이 없을 텐데....<우스꽝스러운 분수>눈 예술가가 조각한 예술품이란 말이오. ? 그건 주문 제작한 페라리 F40 이오. 4년 전에 40만 파운드를 주고 샀지. 지금은 벌써 수집가들의 목록에 올라 있는 차요" "4...40 만 파운드라고요, 차 한대에?" 애슐리는 믿을 수가 없어 말을 더듬거렸다.

"페라리 탄생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몇 개안되는 작품이었단 말이오."

"말도 안돼.... 차 한 대에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 붓다니!" 애슐리는 숨을 헐떡거렸다. "당신에겐 돈이 아무 것도 아닌가 보죠!"

비토는 의미심장하게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당신에겐 모든 것이고..."

"우리가 서로 사랑했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녀의 목에 상처를 주는 듯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정말이오?" 비토가 얼른 말을 받았다. "당신 입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나오니 정말 이상하군. 우리가 함께 있을 때 그토록 무감정하게 행동하던 당신 입에서..."

금빛 눈동자가 수수께끼 같은 눈으로 그녀의 붉어진 뺨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탐 얘기로 돌아갈까요?"

"과거 얘길 꺼낸 건 당신이오" 그가 상기시켰다.

" 그건 내가 어리석기 때문이죠, 당신의..."

"나의 감성에 호소하려 한 게?" 그가 비꼬듯 말했다. "난 섹스에 감성적인 인정을 갖고 있진 않소."

긴가민가하던 진실이 전기 충격처럼 세차게 그녀를 내리쳤다. 그녀는 수치스러울 뿐만 아니라 기만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내 감정을 파괴시켰소."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녀가 소리쳤다.

어둡고 금지된 노여움이 그의 눈초리에 넘실거렸다. "난 정말 당신이 유치한 생각에서 벗어나 어른이 될 거라고 믿었소. 그래서 당신에게 청혼하는 영광을 주었던 거고..."

", 다시는 그런 영광 필요 없어요!" 애슐리는 화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마치 커다란 호의라도 베푸는 것처럼 청혼했죠. 부모님이 원하는 뻣뻣한 제인을 피하기 위해 좋은 핑계거리를 찾았던 거예요! 하지만 제정신이 들고, 다시 계산기를 두드리고 난 후엔 탐욕스런 두 손으로 그녀를 잡아챈 거죠!"

아무런 경고도 없이 비토가 벌떡 일어서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 앞에 섰다. 그의 어두운 모습이 화강암처럼 굳어 있었다. "또다시 내 전처를 그런 식으로 말하면, 당신이 여자라는 걸 잊고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소!"

"...전처라고요? ...죽었나요?" 190cm의 잔혹하고 위협적인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새로운 소식에 당황해 하며 조심스럽지 못한 자신의 혀를 저주했다. "유감이에요"

"아니 아닐걸." 비토가 이를 갈듯 말했다.

"좋아요. 그녀를 모르기 때문에 정말로 유감인 건 아니에요!" 애슐리는 진실 되게 말했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그녀가 성녀고 아주 근사한 사람이었다는 건 알아요"

"아주 많이 달랐지" 그는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당신은 보티첼시의 천사 같은 얼굴에 악녀 같은 성질과 창녀 같은 도덕성을 가졌소. 카라나와 닮은 점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소"

애슐리는 백짓장 같은 얼굴을 하고 눈썹 위로 땀이 비어져 나오는 걸 느꼈다.

"세상에..."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을 만나려고 한 내가 정신이 나갔지!"

"우린 둘 다 일시적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소."

애슐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카리나는 죽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건 화려한 잡지에서 본 사진과 이름뿐이다. 두 갑부 집안이 합병되는, 이탈리아에서는 올해의 결혼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비토는 전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애슐리와 헤어진 지 한 달 만에 약혼하고, 그 한 달 후에 결혼했다. 카리나는 구름 속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으리라. 비토를 얻었으니 정말 하늘이라도 오를 기분이지 않았겠는가. 신부는 사랑에 빠진 기색이 확연했다.

하지만 비토는 사랑 없이 결혼했다. 심지어 육체적인 끌림도 없이. 그들이 결혼하는 날, 애슐리는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까지 그가 정말로 떠났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떠나 버렸다. 너무도 확실하게 그의 인생에서 애슐리를 쫓아낸 것이다. 아무런 후회 없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녀 역시 사랑에 빠진 다른 여자들과 다름없이 심약하고 어리석었다. 길고 괴로운 몇 달 동안 그녀는 유령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회색 지대에 살았다. 그리고 결국, 가장 쓰라린 진실을 대면하고 받아들였다. 비토는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다. 만약 사랑했다면,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없다.

꼼짝도 않고 그녀는 그의 이탈리아 수제 구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는 날 증오해. 한때의 어리석음으로 내게 청혼했고, 그 청혼을 내가 감히 거절했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 그를 만나 뭘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해야지, 팀을 감옥에 가게 할 순 없으니까.

"미안해요" 그녀는 남동생을 구하기 위해 목을 가다듬었다.

"성질을 부리는 게 아닌데..."

"아무도 당신에게 성질 죽이는 법을 가르칠 수 없을 거요" 비토는 불쾌한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할 수 있지"

당신이? 그녀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화산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그녀에게 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한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이고, 다른 한 사람은 비토였다. 분노가 그녀를 휘감았다. 분노와 두려움. 이 두 번째 감정을 깨닫고 그녀는 본능으로 긴장했다. 애슐리에게 생존이란 의미는, 누군가가 그녀를 겁나게 한다는 걸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불신감에 찬 눈빛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난 애원하러 온 게 아니에요..."

짙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알고 있소. 당신이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으니까"

" 그렇게 말해야 직성이 풀리나요?"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너무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갑작스런 움직임에 느슨하게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 풀어져 그녀의 어깨 위로 금빛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슬그머니 화가 치민 그녀는 자꾸만 뺨을 스치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비토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고요. 내가 이 방에 걸어 들어온 순간부터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어요!"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도 그렇지 않길 바라오" 민감한 그녀의 목덜미를 짜릿하게 만드는 낮은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는 잠깐이나마 그녀를 휘청거리게 했다. 찌를 듯한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주 보는 그녀의 눈길이 공허했다.

"당신의 청혼을 거절한 걸 뼈저리게 후회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예요" 그녀는 토해내듯 말했다.

"내가?" 비토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 거렷다. "지난 4년간 좋지 안았던 감정을 정리하는 뜻에서라도 서로 정직할 필요가 있어요"

", 제발 정직해지시오, 카라" 그가 느릿하게 부추겼다.

그녀는 힘겹게 침을 삼켰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당신의 소유물이 되길 거부했다는 데에 난 여전히 자부심을 느낀다는 거. 밤낮으로 감시당하고 복종해야 하는 삶은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결코 잘 되지 않았을 거예요"

"침대에선 잘됐잖소" 비토는 졸린 듯한 말투로 말을 가로막았다. " 그것이 어떻게 잘됐냐면..."

극심한 열기가 그녀의 뱃속을 채웠다. 그의 말에 충격 받고 당황한 나머지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비토는 놀라울 정도로 쌀쌀맞게 그녀를 살펴보았다. 공기 중에 떠도는 차가운 기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그게 그토록 희생을 강요하는 거였소? 내 아내가 되는 게? 당신의 피부에 실크를 걸치고, 목에 다이아몬드를 거는 일이? 아무래도 내가 당신을 과대평가한 것 같군"

"당신이 상인처럼 내가 놓친 물질적인 이익을 늘어놓을 줄 알았어요" 애슐리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당신은 처음부터 내가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잖아요. 몰랐다고 말하진 않겠죠. 결혼은 남자들에겐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여자들은 압박당하는 가부장적인 제도예요"

"여권 운동 자에게 박수를,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처음 듣소!" 비토는 성난 사자가 포효하는 것처럼 그녀에게 소리쳤다.

그녀는 분노로 몸이 뻣뻣해져서 몸을 홱 젖히며 어깨를 들썩였다. "당연히 당신도 나름대로의 의견이 있겠죠... 내게도 나름대로의 의견이 있는 것처럼. 여하튼, 잊는 게 더 좋은 과거 이야기나 하자고 이곳에 온 건 아니에요. 이제서로 인신공격을 그만해요. 당신을 괴롭히려고 온 건 아니에요. 당신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항상 그랬죠" 그녀는 비난하듯 말했다.

"아주 교묘하게 사과하는군"

채워지지 않는 열정을 그녀는 멀리 쫓아 버렸다. 설명할 순 없지만 결혼에 대한 그녀의 그런 믿음은 십대 초반부터 형성되었다. 불행으로 끝날 게 분명한 결혼을 피하게 된게 누구 덕분인데, 내가 사과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만난 지 다섯 달이 지나면서부터 그들은 적어도 하루에 두 번은 꼭 말다툼을 했다. 나중에는 거의 벼랑 끝에 선 듯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비토에게 팀의 행동에 대한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동시에 가장 부적당한 사람이었다.

팀은 비토의 반감을 감소시키지 못했다. 그녀는 바위처럼 단단한 그의 옆모습을 신랄한 눈으로 흘끗 쳐다보았다. 뚜렷한 뼈대로 형성된 그의 얼굴엔 속에서부터 우러나는 강인함이 드러나 있었다. 그래, 우린 친구 상태로 헤어진 게 아니야. 비토는 푸른색 피를 가진 인간으로, 상상도 못 할 만큼 돈이 많고 거만하다. 지금껏 자신이 원해서 안 되는 일은 별로 없었으리라.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졌다. 그가 원하는 일은 어떤 일이든 그대로 됐다. 만약 당신의 이름이 카발리에리라면, 세상은 당신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녀가 아주 감격하며 청혼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고 가족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청혼했는데, 그녀가 너무도 쉽게 거절했으니, 그에게는 범죄 행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팀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기만 하면 되잖아요" 그녀는 애원하듯 말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비토가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당신의 말처럼 내가 상인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내게 이익도 없는 그런 짓은 하지 않지. 당신 동생을 풀어주어 봤자 아무런 이익이 없잖소. 그의 자유는 내게 아무런 가치도 없소. 당신에겐 가치 있는 거요?"

그의 가벼운 물음이 그녀에겐 무엇보다 잔인하게 들렸다. 애슐리는 몸을 떨었다. "물론...중요해요" 그녀는 팀의 일그러진 미래와 어머니의 약한 정신 상태를 생각했다.

"자신의 자유보다 중요하오?"

그녀는 얼른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검은 속눈썹에 둘러싸인 금빛 눈동자가 긴장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곧 옷 위로 드러난 그녀의 여성스런 몸을 훑었다. 오직 뜨거운 피를 가진 이탈리아 남자만이 눈길 하나만으로 이렇게 성적인 위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중요해요? 흥미롭군" 그가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내 침대로 돌아온다면, 동생에 대한 고소를 취하할 수도 있소"

그녀는 얼굴이 빨개졌다. "우습지도 않군요, 비토"

"웃기려는 게 아니오" 그는 우아하게 작은 책상 끝에 걸터앉았다. "당신이 내게 온다면...완전히 온다면.." 그가 강조했다. "당신 동생은 자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애슐리는 숨을 삼켰다.

"당신은 한때 사랑도 없이 나와 함 침대를 썼잖소. 이번엔 증오와 함께 행복하게 침대를 함께 쓸 수 있을 거요" 그가 으르렁댔다.

그녀는 꼭 쥐고 있던 두 손을 놓고 주먹을 쥐었다.

"당신의 보디 랭귀지는 여전히 아주 독특하고 인상적이군" 비토가 말했다. " 그 불같은 성미를 침대에서도 발휘해봐요. 혹시 아오, 내가 당신의 범죄자 동생에게 페라리를 한 대 사 줄지"

그녀는 분노로 몸을 덜덜 떨었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그는 과거에 집착하고 있는 거야. 날 치욕스럽게 만들고 싶은 거겠지. 지금 그녀는 비토의 다른 면, 즉 어두운 면을 보았다. 다른 여자와 결혼한 그날, 그녀에게 안겨 준 잊지 못할 잔인함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검은머리를 뒤로 젖히며 목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언젠가 당신이 말한 적 있지. <좋다고 생각되면 추구하라.> 난 지금 당신이 충고한대로 하고 있는 거요"

"하지만 진심은 아니겠죠...그럴 리가 없어요"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뚫어질 듯 강력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지..."

"왜 하필 지금 나와 결혼하길 원하는 거죠?" 그녀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비우는 듯 감정이 풍부한 그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카라" 그가 매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4년 전에 당신이 직접 그 이유를 말했잖소. 내 뒤를 따라다니며 시중들어 줄 하인과 내 이기심을 달래 줄 헌신적인 노예와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나의 부를 과시해 줄 수 있는 여자가 필요해서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섹스... 내가 원할 때마다 무제한으로 섹스를 제공해 줄 여자. 오로지 결혼만이 내게 이 모든 걸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당신 입으로 직접 말했잖소"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고 폐에서 산소가 빠져나갔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신음 소리를 냈다. 이미 오래 전에 잊어버린 말이다. 하지만 비토는 잊지 않았어.

"그리고" 그는 계속 말했다. 눈을 반쯤 감은 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욕적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속은 썩었을지 몰라도 당신은 완벽한 몸매를 가진 아주 아름다운 여자요. 난 아직도 그 여자를 소유하길 원하지. 그런데 내 손에 쥐어진 기회를 왜 그냥 흘러 보내겠소?"

"미쳤군요!" 그녀가 소리쳤다.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야!"

"내가?" 비토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다른 방법으로도 당신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오? 난 당신을 원해, 애슐리. 그게 당신이 가진 유일한 카드요. 선택은 오로지 당신이 하는 거요"

"당신과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요!"

" 그게 당신의 최종 대답이오?"

한껏 분노를 발산하며 문께로 간 애슐리는 마지막 말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뒤돌아서야 했다. "나쁜 놈!" 그녀는 멸시하는 어조로 소리쳤다. "오늘 내게 한 말 때문에라도 당신은 지옥 불에 타 죽을 거야"

"당신과 함께라면 그것도 좋지" 경멸에 찬 그의 눈동자가 재미있다는 듯 빛을 발했다.

 

3

"원할 때마다 무제한적인 섹스를 제공한다고..." 애슐리는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물며 승강기에서 내렸다. 감히 날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감히...

순간 팀의 굳어진 얼굴이 그녀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발을 헛디디면서 그녀는 거의 넘어질 뻔했다.

공포로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람들이 빠르게 오가는 보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팀의 안전이 자신 때문에 무산된다는 생각을 하자 그때까지의 분노가 수증기처럼 사라졌다.

맙소사, 다시 집으로 돌아가 팀이 감옥에 가는 걸 멍하니 쳐다볼 생각이었나? 죄책감이 그녀를 산채로 집어삼켰다. 적어도 비토는 날 만나 주긴 했다. 그런데 난 그렇게 힘겹게 얻은 기회를 어떻게 했는가?

팀을 위해 비토를 설득하기는커녕 감정에 북받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오지 않았는가? 난 팀의 자유를 날려 버린 거나 마찬가지다. 나 혼자만의 이기심 때문에 비토를 비난하면서.

애슐리는 속이 메슥거렸다. 아무리 생각 없는 사람이라도 나처럼 철없이 행동하진 않았을 거야. 후회는 이제 아무 소용없었다. 그런다고 이번 일에 대한 그녀의 책임이 줄어드는 건 아니니까.

팀은 그녀를 방어했다. 그녀의 명예를 위해 싸우고 얻어맞고 치욕을 당했다. 피에트로의 비열한 공격에 대한 무언의 증오와 분노는 자연히 누나를 불행하게 만든 비토에게 향하게 마련이었다.

그는 분명히 비토의 페라리를 어딘가 먼 곳에 버려 둘 생각이었으리라. 애슐리는 팀이 그 차를 망가뜨릴 의도가 없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모든 십대 소년들처럼 팀도 자동차 광이다. 그러니 그렇게 근사한 차를 손상시킬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다. 그게 아무리 미운 사람의 차일지라도.

복수하겠다는 팀의 일념과 어리석고 유치한 장난의 결과가 예상치도 못한 엄청난 악몽으로 변한 거라고 애슐리는 확신했다. 그러나 엄격한 재판관들의 눈에는 팀의 행동이 그렇게 보일 리 만무하다. 팀이 받은 정신적인 압박과 폭행은 괘념치도 않을 것이다. 팀은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다. <우리 가족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에 네가 빠진 적 있어?> 수잔은 신랄하게 말했다.

규칙을 어기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4년전 그녀는 아버지의 엄중한 규칙을 어기고 비토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가공할 아버지의 노여움 앞에서 고개 숙이는 걸 애슐리는 거부했다. 애슐리는 결국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은 데 대해 가혹한 대가를 치렀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그녀는 그 대가를 아직 다 치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행동이 어머니에겐 엄청난 비탄을 가져다 줄 것이다. 아들이 감옥에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약한 그녀의 어머니는 결코 견뎌내지 못 할 것이다. 깨지기 쉬운 유리같은 실비아 포레스트는 이번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또 다시 주저앉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팀이 감옥에 갇히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그 두 가지 불행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지금 그녀의 손안에 있다.

너무 늦은 게 아닐까? 애슐리는 어깨를 쫙 펴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발길을 돌렸다. 카발리에리 은행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뺨을 붉게 물들인 채 그녀는 안내원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

가갔다. "카발리에리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곧바로 올라오시랍니다. 포레스터 양"

당황한 애슐리가 눈을 깜박거렸다. 비토는 어떻게 내가 되돌아올 줄 알았을까? 나 자신도 알지 못한 일을 그가 어떻게 먼저 알았을까?

승강기 안에서 그녀는 쇠고랑이라도 묶인 듯 발목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또다시 넓은 복도로 발을 내딛으면서도 마치 비토가 채워 놓은 쇠고랑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건 정말 말도 안돼. 비토가나더러 자기와 결혼하자고 하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비토가 섹스를 즐기는 건 분명하지만 이렇게 까지 섹스의 노예는 아니다.

비스듬한 유리창으로 햇살이 극도로 현대적인 사무실을 비추고, 키가 크고 유연한 비토의 모습이 바닥에 그림자를 늘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 어두운 눈동자 뒤에 도대체 어떤 생각이 자리잡고 있을까? 그때 그녀의 머리를 전광석화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다시 돌아올 줄 어떻게 알았죠?" 파고들 듯한 침묵을 깨지 않으면 애슐리는 당장에라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짙은 눈썹이 거만하게 치켜 올라갔다. "언제나 처음엔 불같이 화내고, 그 다음엔 훌쩍 나가고, 그리곤 호전적인 태도로 다시 돌아오잖소? 내겐 익숙한 일이지"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당신이 날 너무 몰아세웠어요."

"잔인하게도" 그도 동의했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가족애를 발휘할 줄은 몰랐는걸"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아직도 옛날의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과거에, 그녀는 가족의 유대 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듯 행동하면서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의 바람을 싹 무시했다. 모든 외국인들을 증오하는 아버지를 보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솔직히 두려웠다. 그리고 그들의 배경이 너무나 다른 것 역시

두려움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내게 결혼을 강요해서 당신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그녀는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강요하는 거요? 당신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소"

"불공평한 선택이잖아요!" 그녀는 절망에 차 소리 질렀다.

"인생은 언제나 불공평한 거요" "당신은 불가능한 걸 요구하고 있어요!"

" 그렇다면 우린 더 이상 할 얘기가 없겠군" 차가운 한마디였다.

"지금 얘기하고 있잖아요" 그녀는 시간을 벌기 위해 무슨 말이고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이미 많은 얘길 나누었소. 내 아파트에서 점심이나 들면서 계속 얘기하도록 하지" 갑작스럽게 던져진 제안에 그녀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점심?"

"배가 고파서" 비토는 캐시미어 코트를 걸친 채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전용 승강기가 그들을 태우고 사무실에서 주차장으로 곧장 내려갔다. " 그래...지금은 뭐하고 있소?" 비토는 리무진이 차들의 행렬 사이로 끼여들자 물었다. " 그 이브닝 파티에서 당신 동생은 내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시 않더군"

"뭘 하다뇨?" 그녀는 불안한 듯 물었다.

"당신의 직업" 그는 참을성 없이 말했다. "당신이 나 대신 선택한 직업 말이오"

"" 자신의 꼭 쥔 두 손을 내려다보면서 그녀는 거짓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소매업에 종사하고 있어요"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잖아. 야간 대학을 다니며 보육사 자격을 얻을 때까지 백화점에서 일하고 거니까.

"놀라운 걸. 당신이 선택할 만한 분야가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다는 좀 더 격이 높은 직업을 구할 줄 알았는데.."

비웃는 듯한 그의 눈초리를 피하여 그녀는 어깨를 들썩였다. 안돼, 그에게 말할 수 없어. 그런 치욕을 당할 수없어.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회계학 공부를 계속했더라면 이미 그녀는 그 분야로 진출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토는 그 동안 그녀가 어떻게 지냈는지 모른다. 그가 옳았다는 걸 말해 줄 필요가 있는가?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는 그의 말이 옳았다고?

회계학을 선택했을 때 그녀는 모든 사람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그녀는 사업 쪽으로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유치하게도 아버지에게 남자만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리라 마음먹었다. 고집불통인 애슐리는 실패하고 나서야 진실을 받아들였지만, 그때 비토에게 버림받지 않고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그 마지막 시험은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어린이들과 함께 일한다는 게 즐겁다. 그리고 진짜 선생님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 현재 그녀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다. 그런데 산산조각이 난 인생을 재정비해서 이제 겨우 두 번째 인생을 꾸려 나가는 중인데 느닷없이 비토가 나타나 그녀의 인생을 파괴하려 하고 있다.

"혹시 고용 계약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 아니오?"

"전혀"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아기 보는 일에 무슨 특별한 문제가 있겠는가 싶어서 속으로 샐쭉 웃었다. " 그런데 당신이 왜 나랑 결혼하려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군요"

"아직 당신에게 얘기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비토는 수수께끼 같은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들으면 분명히 마음이 놓일 거요"

호기심이 일었다. "지금 말해요" "비밀이 보장되는 아파트에서 얘기하겠소"

아파트는 다행하게도 한때 그들이 함께 살던 곳은 아니었다. 좀 더 작고, 그저 실용적인 가구가 적당히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툴루즈 로트레크(프랑스의 화가)의 연필 데생 트리오는 아직도 우아한 식당에 걸려 있었다. 애슐리는 한눈에 그것들이 진품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카발리에리 가는 세계적으로 개인 소장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니까. 그 데생들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백만 파운드는 넘을 것이다.

4년 전에도 비토의 이런 환경과 접하면서 종종 느끼곤 했던 감정, 뭍에 나온 물고기 같은 심정이 또다시 되살아났다. 이건 그녀의 세계가 아니었다. 자동차 매매 업을 하는 남자의 딸인 그녀에겐 상류층은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그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엄중한 경고를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 비토가 아니라...그의 어머니였다. 그 기억이 오랫동안 애슐리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헬레나 디 카발리에리가 어딘가 에서 감시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 하인이 식사를 가져왔다. 팀이 체포되었을 때부터 거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도, 식욕이 나지 않았다. 음식을 계속 접시 가장자리로 밀어내며 간간이 와인만 몇 모금 마셨다. 그러나 비토는 왕성한 식용으로 나오는 음식마다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먹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덤덤하게 반응하는데도 혼자서 열을 내며 말했다.

커피는 편안한 응접실에서 마셨다. 애슐리는 깃털같이 부드러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그럼 들어볼까요?" 그녀는 약간 턱을 치켜들고 재촉했다. "비밀을 요하는, 나와 결혼하길 원하는 특별한 이유를"

"물론 평생 함께 살자는 건 아니오" 비토는 벽난로에 기댔다. "당신이 동생을 위해 뭐든 한다는 말에 떠오른 생각이지"

"뭔데요?" 그녀는 잔뜩 긴장해서 톡 쏘듯 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그녀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쩐지 어두운 예감이 드는 게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비토는 강한 호기심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한 가지 있소"

"영국 황실의 보석?" 애슐리는 비아냥거렸다. "아마 당신이라면 살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이를 원하오" 비토가 말했다. 마치 빈정거리는 그녀의 말을 듣지도 못한 듯이.

그녀는 뭔가 무거운 것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돌같이 굳어진 그녀는 갑작스럽게 빨라진 심장 고동 때문에 심장이 꼬인 듯 가슴이 아팠다. 그가 어떻게 알았...?아니야. 내가 유산한 사실을 알 리가 없어. 실낱같은 안도감이 그녀를 달랬다. 비토가 그때의 일을 알 리 없다.

"전 부인과의 사이엔 아이가 없어요?" 메마른 입술 사이로 질문이 새어 나왔다. 지난 4년 동안 비토가 다른 여자와 함께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가졌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결혼하고 6개월 후에 카리나는 병이 났소" 비토는 마지못한 듯 말했다. "백혈병이었지. 아이를 갖는다는 건 생각지도 못 할 일이었소"

애슐리는 당황했다. 그렇게 젊은 여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교통사고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유감이에요" 그녀는 현기증을 느꼈다. 아직도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신이 왜?"

"왜냐하면 나도 그렇게 무감정한 여자가 아니니까요!" 애슐리는 성이 나서 그에게 쏘아붙였다.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동정을 표하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었어요?"

창백해진 비토가 비명처럼 숨을 내 쉬었다. "좋소."

애슐리는 그가 한 말을 정리해 보려고 애썼다. 드디어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필이면 왜 아이를 갖는 일에 날 원하죠?"

"내게 아이를 줄 수 있으니까 당신과 결혼하려는 거요"

그녀의 눈 속에 어둡고 깊은 불꽃이 튀었다. "정말 잔인하군요!" 그녀는 숨을 헐떡거렸다.

" 그게 그렇게 불가능한 요구라곤 생각지 않소. 잔인한 게 아니라고" 비토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당신은 대리엄마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잖소. 자신의 아이를 원하지 않으니까.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우린 이혼할 거

, 당신은 자유롭고 아무런 방해없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계속 살아가면 그만이잖소"

애슐리는 떨리는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질하며 못 믿겠다는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 그런 말을 듣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그런 불쾌한 제안을 태어나 처음이에요! 그리고 나말고도 그런 조건으로 당신과 결혼할 여자는 수도 없이 많잖아요!"

"하지만 난 아내를 원하지 않소" 비토가 음울한 미소를 보냈다. "영원하든 잠깐이든 아내는 필요 없소. 순전히 아이를 갖기 위해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건 불공평한 일이오. 그런 공허하고 꾸며진 관계는 원치 않소..."

"하지만 나와는 그런 결혼을 해도 불공평하지 않다는 뜻인가요!" 애슐리는 격렬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우리 관계엔 공허하다든지 꾸며야 할 게 없잖소. 당신은 아이를 좋아하지 않고, 경력에 금이 갈지도 모르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싫어하니까. 4년 전에 분명히 그렇게 말했잖소"

그녀는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땐 겨우 19살이었고 다른 십대들과 마찬가지로 엉성하고 유치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임신에 대한 그녀의 혐오는 아들을 가져야겠다는 아버지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를 낙태한 어머니의 건강이 날이 갈수록 나빠지는 걸 봐왔기 때문이라고.

"앞으로 몇 년은 더 있다 재혼해도 되잖아요" 그녀는 딱딱하게 말했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만나지 못할 거요.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말이오." 비토는 계속 덧붙였다. " 그리고 나이 많은 아버지가 되고 싶지도 않소. 우리 아버지는 내가 태어났을 때 50에 접어든 나이였소. 지금은 돌아가셨고, 우린 한 번도 친하게 지내 본 적이 없소. 나이 차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지"

그는 한 번도 아버지가 그렇게 나이 든 분이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엘레나 디 카발리에리는 남편보다 적어도30살은 아래인 모양이다. 애슐리는 얼른 곁가지 생각을 옆으로 치우고 비토의 불가능한 제안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녀의 목안에서 신경질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럴 수가, 그는 자신의 아이가 태어날 뻔했다는 거 알고나 있을까... 만약 그녀의 그 짧디 짧은 임신과 그녀의 가족 사이에 얼룩진 여아 낙태 사건을 그가 알고 있다면, 결코 그녀에게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으리라!

"상속자를 낳아 주는 영광을 줄 정도로 날 높이 평가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애슐리는 비아냥거렸다. 위험스러울 정도로 약해진 자신의 자제력이 그의 앞에서 산산조각이 날까 봐 은근히 두려웠다.

비토의 단단한 입술이 긴장된 곡선을 그렸다. "당신은 육체적으로 아주 아름답고, 정신적으로 매우 총명하며, 도덕적으로는 매우 용기가 있는 편이지"

애슐리는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겉만 번지르르하고 형편없는, 자기 자식을 나 몰라라 하는 엄마가 될 거라는 뜻인가요?"

"그렇게 말하진 않았소" 비토는 베일에 싸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게 그 말이잖아요!" 애슐리는 고통스럽게 내뱉었다. "진짜 여자라면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인생을 바친다고 생각하겠죠, 그녀 자신까지도!"

"내가 아는 건" 비토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날 위해 아주 작은 양보나 희생을 할 여자는 아니란 거요"

애슐리가 새된 웃음소리를 질렀다. "아주 작은 양보? 희생?" 그녀가 앵무새처럼 되풀이해 말했다. "학업과 미래에 갖게 될 직업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이탈리아로 이사 가서, 당신과 결혼해서 토끼처럼 아이나 낳고 살라고요! 몇 달 동안 마치 날 이해하는 듯하더니만..."

"난 놀라울 정도로 참았소" 비토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은 정직하지 못했어요!" 애슐리가 쏘아붙였다.

"우리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내 의견을 조금 죽이고 있었을 뿐이오" 비토가 악문 잇새로 내뱉었다. "당신 이빨이 부딪힐 때까지 흔들어 주고 싶은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내 말을 듣도록 육체적인 힘까지 쓰고 싶었던 때가 얼마나 여러 번이었는데! 당신 머릿속으로 들어가 제대로 생각 할 수 있도록 고쳐 놓고 싶었던...."

"당신에게 필요한 건 집안일 이나 하고, 얌전히 말이나 잘 듣는 로봇 같은 여자예요!" 애슐리는 지갑을 집었다.

"그만 돌아가겠어요, 당신의 그 더러운 제안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말 안 해도 알 거예요"

"저 문을 걸어 나간다면 당신 동생은 감옥에 가게 될 거요!"

애슐리는 손잡이로 내민 손을 거두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비열한!" 잊었던 현실이 되살아났다.

"당신이 날 그렇게 만든 거요" 비토는 아주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의 강렬한 눈빛 속에 여름 폭풍이 시작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두운 빛이 타올랐다. "당신에게 황홀한 섹스의 세계를 선보여 주겠지만 영원한 약속 같은 건하지 않지"

애슐리는 커피 잔을 그에게 집어던졌다. "어떻게 그런 말을?" 그녀가 씩씩거렸다.

잔은 빗나가 벽난로 모서리에 부딪쳤고, 그 내용물만 비토의 재킷에 쏟아졌다. 그래도 싸지 뭐, 애슐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신사는 결코 숙녀를 때리지 않는다고 하더군" 비토는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 방엔 숙녀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여자는 없을 것 같소"

"내게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간...." 애슐리는 두 번째 커피를 준비해 온 남자 하인이 문을 두드리자 입을 다물었다.

"고맙소" 비토는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난 오늘 마실 커피는 이미 다 마신 것 같군"

문이 닫히자 강력한 손이 애슐리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끌어당겼다. "이거 놔요!" 그녀가 소리 질렀다. 그러나 그거 꼼짝도 않자 뭔가가 그녀의 속에서 폭발했다. 팔을 흔들고 발로 그를 차면서 완강하게 반항했다. 비토가 그녀를 훌쩍 들어올려 공중에서 한 번 흔들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 얌전해지자 그때서야 땅 위에 내려놓았다

"야생 동물처럼 행동할 거라면" 비토가 억양 없는 어조로 말했다. "기꺼이 동물 우리도 만들어 줄 수 있지"

그의 잔인한 반응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멍하니 그의 금빛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왠지 숨이 막혔다. 졌다는 사실이 별로 놀랍지 않았다. 비토와 싸워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으니까. 그녀가 의지가 강하고 고집불통이라면, 비토는 그녀보다 두 배는 더한 사람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비토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녀만큼 격렬한 성격이었지만 언제나 냉철한 지성으로 자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둘이 다툴 때마다 늘 그가 이겼다.

갑자기 생각이 끊어지고, 그녀는 아직도 그가 손을 놓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느슨하게 잡은 손목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엉덩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놔줘요!" 그녀는 거칠게 요구했다. 손목을 쓰다듬던 손가락이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뒤로 잡아당겼다.

"당신은 마치..."

"발기한 수컷 같다고?" 비토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무릎을 떨리게 만들었다. " 그래, 난 지금 바로 그런 상태요"

"...비토, 안 돼요!" 그러나 그는 이미 그녀의 목에 뜨거운 입술을 눌러 대고 있었다. 그녀는 신음 소리를 내며 뜻밖의 격렬한 폭풍을 만난 사람처럼 떨고만 있었다. 머릿속 어딘가 에서 누군가 비웃듯 속삭이고 있었다. 비토에 관한 한 그녀는 언제나 약하다고, 그가 만지기만 하면 그녀는 .... , 이런, 그냥 만지기만 했는데도! 그의 혀가 도발적으로 그녀의 닫힌 입술을 자극하더니 이윽고 다시 멀어져 갔다.

숨 막힐 듯한 어지러움이 그녀를 감싸고, 갑작스레 목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위험하고 거친 긴장감에 몸부림쳤다. 애슐리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그녀의 온몸이 이끌리듯 그에게 다가갔고, 천천히 두 손을 올려 그의 넓은 어깨를 감싸안았다. 비토는 이제 유혹적으로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만 퇴근해도 좋아요"

그 말이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비토가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토록 열렬한 키스를 하고도 비토는 평소의 차가운 어투로 말하고 있었다. 애슐리는 눈을 뜨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잘생긴 얼굴을 마주보았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 것 같소" 비토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옷을 너무 많이 입었다는 것만 빼면"

애슐리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 그의 얼굴을 공포에 찬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가 손끝으로 은근히 그녀의 가슴께를 애무하자 그녀의 몸은 어느새 다시 자신을 배신하고 있었다. 긴 흐느낌 같은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오자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감싸고, 손바닥으로 예민한 곳을 애무했다.

충격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애슐리는 몸을 굳혔다. 비토의 손이 닿으면 나도 모르게 반응한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난 이제 더 이상 십대 소녀가 아니야. 어떻게 그가 내게 이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지? 고통에 찬 눈으로 그녀의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설명할 수 없는 대답을 듣기 위해.

비토의 손이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 안 그렇소 카라? 우린 여전히 서로를 열망하고 있소.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던 아주 강력한 무언가가 있소" 그는 불안정하게 숨을 쉬었다.

"그런 말 말아요!" 애슐리는 그에게서 빠져 나오려고 몸을 비틀며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직도 몸이 떨리긴 했지만 자제력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당신 같은 여자와 있는 게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모르겠소. 남자와 마찬가지로 섹스를 즐기고, 결혼하기 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지지 않는 여자와 말이오" 비토가 능글거리며 말했다.

그의 솔직한 말이 채찍처럼 그녀를 때리는 듯했다.

"뭐가 잘못됐소?" 어둡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비토......." 비토는 그녀를 완전히 잘못 알고 있다. 그녀가 말하는 걸 언제다 다른 쪽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진심으로 한 소리가 아닌데도 그는 진심이라고 믿곤 했다. 지금도 그는 옛날에 그녀가 설교하듯 했던 말을 그대로 믿고 있다.

"<좋다고 생각되면 그대로 행하라>" 비토는 검은 벨벳처럼 매끄러운 어조로 그녀의 말을 이용했다. "나와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 못할걸, 왜냐하면 난 이미 당신이 원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제발 내가 했던 그 바...바보 같은 말 좀 그만 할 수 없어요!" 그녀는 머뭇거리듯 소리치다가 그의 손가락이 허리께를 배회하듯 애무하자 곧 입을 다물었다.

"그래, 바보 같은 말을 했다는 건 인정하는군" 비토가 몰인정하게 말했다. "아니면, 지금 나와 함께 침대에 들기 싫다는 뜻이오?"

절망감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지금 잠자리를 같이하자는 게 그녀에게 치욕감을 주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욕구 때문이지 알 수 없었다. 맙소사, 동생의 자유가 지금이 일에 달려 있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뭐가 뭔지 뒤죽박죽이에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비토는 그녀의 찌푸린 얼굴을 보는 게 재미있는 듯 슬며시 웃었다. 그 모습을 봤다면, 분노가 또다시 그녀를 휩쓸었겠지만 다행히 그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 게다가 비토가 욕정을 놀랍게도 쉽게 억제한다는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 예고도 없이 애슐리가 울음을 터뜨렸다. 비토 못지않게 그녀 자신에게도 충격적인 눈물이었다. 혼자 있고 싶어진 그녀가 미처 달아나기도 전에 비토가 그녀를 붙잡았다.

"놔줘요!" 그녀가 흐느꼈다. "내가 어떻게?" 그가 두 팔로 그녀를 껴안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요!" 흐르는 눈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흐느낌이 목에서 간신히 빠져 나왔다. "..난 차...창녀가 아니라고요"

"물론이지, 당신이 너무 지나치게 생각한 거요" 비토는 그녀를 안심시키며 한 손으로 눈썹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애슐리의 눈물이 비토의 티셔츠를 온통 적시고 있었다.

"지금은 당신과 싸울 기력이 없어요. 당신도 잘 알잖아요!" 그녀는 굴욕감이 들어 주먹으로 그의 단단한 가슴을 살짝 쳤다. "난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는데! 여자가 이렇게 우는 걸 얼마나 경멸하는데!"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이탈리아어로 달래는 듯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더욱 펑펑 울었다. 그의 그런 중얼거림이 듣기 좋았기 때문에. 너무나도 친숙하고 따스한 남자의 향취가 그녀를 감싸고, 규칙적인 그의 심장박동소리가 기묘하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누군가가 이렇게 그녀를 안아 준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히 마지막으로 안아 준 사람도 비토였으리라.

머리를 쓰다듬던 손가락이 그녀의 젖은 뺨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척 평안했다. 그가 침대발치에 있는 소파에 그녀를 내려놓자 애슐리는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더 가까이 달라붙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전히 탈진한 그녀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사과하겠소" 비토가 망설였다. "가끔 당신은 나 자신도 무척 싫어하는 면을 드러내게 하고 있소"

"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우린 서로에게 좋지 않은....."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을 두드렸다. 그의 입술이 다시 그 차가운 미소를 그렸다.

나와 싸우려 들지 마." 의지가 강한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와 싸우려 하면 당신만 다칠 뿐이오."

"상대방이 넘어지면 밟아 주는 게 당신의 취미인가요?"

"당신은 넘어진 게 아니오" 그가 일어섰다. " 그저 베터리를 갈아야 할 때가 온 것뿐이지. 내가 없는 그 동안 이 아파트로 이사 오는 게 어떻겠소?"

"없는 동안?"

"두 시간 후에 제네바로 떠나야 하오. 다음 주에 돌아오지. 돌아와서 오페라에 데려가 주겠소. 오페라 좋아하잖소" 마치 응석부리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는 듯한 말투였다. 그녀는 이를 갈았다. "팀은?"

"경찰에 전화하겠소" "잘 처리될까요?"

"이 모든 일이 개인 소유의 재산에 관련된 것이니만큼, 고소를 하든 안 하든 그건 모두 내가 알아서 할 문제요"비토가 거만하게 말했다.

안도감이 몰려 왔다. 그가 나를 위해 고소를 취하한다. 갑자기 애슐리는 한기를 느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뒤바뀌고 만 것이다. 4년 전에도 그가 자신과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를 버리고 산 지 두 달만에 전 세계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한 결혼을 하고, 그는 카발리에리 머캔타일 은행 유례상 가장 젊은 은행 총장이 되었다. 그때 그녀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괴리감을 느꼈다. 어쩌면 그녀가 노이로제에 걸린 건지도 모른다. 지나친 상상일지도 모르고.

"별로 좋은 아내는 못 될 거예요. 비토 " 그녀가 속삭였다. "<리엥 느 샤뚜이 키 느 팽스>" "몽테뉴" 비토가 해석했다. "<고통 없는 기쁨은 없다.>"

"난 마조키스트가 아니에요" 애슐리가 멍하게 말했다.

"그냥 사업이라고 생각해도 좋소, 서로 이익을 교환하는, 당신이 나쁜 아내가 되지 않는다면, 나도 나쁜 남편은 되지 않겠소. 결혼 후의 우리사이는 당신 하기에 달렸소"

", 정말 영리하군요. 비토!" 애슐리는 그는 노려보았다. 그는 이미 무선 전화기를 들고 차를 대기시키라고 명령을 하고 있었다.

"내용 면에서나 목적 면에서나 보통 결혼과 마찬가지일 거요"

"만약 우리가 정신 병원에 산다면, 가능한 얘기예요"

그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날 처음으로 그가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다. 저도 모르게 그의 눈길에 이끌려 그녀는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당신의 배터리가 다시 채워지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줄 알고 있었소. 아참, 떠나기 전에..." 그가 으르렁거렸다. "한 가지 더 규칙이 있소"

"뭐라고요?"

"우리 가족이 되는 걸 기뻐하면 좋겠소. 그리고 당신의 위치에 맞는 옷을 입는 매너도 익혀야겠지. 그건 다음 주에 해결합시다."

그녀는 이를 앙 다물었다. 입술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비토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자는 안 돼" 그가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 남자와 히히덕거려도 안 되고, 남자 친구도 안 돼. 알겠지? 친구도 안 된다구. 만약 이 규칙을 깨면 인생이 결코 살 만하지 못할 거요. 내 장담하지. 카라"

 

4

"내 덕분에 둘이 다시 만나게 되어 고맙다는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팀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거칠게 말했지만 애슐리는 어린 동생이 필사적으로 믿고 싶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야 팀도 양심의 거리낌없이 자신의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테니까.

애슐리는 기차가 빨리 도착하길 바랐다. 지난 5일 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똑같은 얘기만 하고 있었다. 그녀처럼 팀도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다. 수잔과는 달리 그는 애슐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와 결혼하는 게 잘될 것 같아?" "글쎄, 아직 말하긴 이르잖아"

팀은 고개를 저었다. " 그는 분명히 누나와 날 만나지 못하게 할 거야..."

애슐리는 계속 미소를 지었다. 그것만이 팀을 제대로 설득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는 지금 공부를 계속하러 집으로 가는 길이다. 누나 걱정을 하게 놔둘 수 없었다. 뉴질랜드에서 돌아온 부모님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팀이 발치에 놓인 륙색을 걷어차며 말했다. "집에 돌아가서 내 차를 팔아 그 돈을 비토에게 보낼 거야!"

"그러지마. 아버지가 눈치 채실 거야!" 애슐리는 경악했다.

남동생이 얼굴을 찌푸렸다. "비토에게 전액을 몽땅 돌려주진 못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진 해야지"

"그의 차는 보험 회사에서 보상해 줄 거야"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안 그래?" 팀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의 차를 어떻게 했는지 잊을 수가 없어. 누나가 날 구해 줬다고 해서 그 일이 내 책임이 아닌 것처럼 행동할 순 없어"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말할 작정이야?"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역을 나온 그녀는 비토의 아파트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아직 본격적인 이사는 하지 않았지만 몇 가지 물건을 갖다놓긴 했다. 그리고 지난 닷새 동안은 팀과 함께 그녀의 아파트에서 지냈다. 만약 그녀가 영리한 여자라면, 이 결혼은 결코 하면 안 되는 일이다. 비토의 아파트로 한 발 들여놓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받는데, 두 발짝 들여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는 이미 한 번 유산한 적이 있기에 출산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도 자신의 제안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녀는 이상적인 후보가 되기엔 자격 미달이니까.

현재 그녀가 처한 곤경은 간단했다. 상속자인 아들과 복수를 원하는 비토의 욕망 중 어느 것이 더 강렬할까? 물론 묻지 않아도 상속자인 아들을 얻는 문제가 그에겐 더없이 중요할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도 철면피같이 아들을 얻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애슐리가 태어난 날, 그토록 원하던 아들 대신 또다시 딸을 얻은 헌트 포레스터는 병원을 나가, 아내와 갓 태어난 딸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불만스런 한숨을 내쉬며 애슐리는 홀 안에 있는 고가구에서 발견한 열쇠로 아파트로 들어갔다. 아직 풀지 않은 짐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방이라고 정한 작을 침실로 내려섰다. 그녀의 짐이 사라지고 없었다. 장롱 문을 열자 생전보지도 못한 옷들만 걸려 있었다. 서랍을 열어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디 있다가 오는 거요?"

애슐리는 화들짝 놀라 뒤로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비토가 천둥 번개를 머금은 먹장구름처럼 문가에 서 있었다. 길고 유연한 그의 몸 전체가 전지적인 긴장으로 터질 듯했다. 상아빛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간편한 바지 차림을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제네바에 있는 줄 알았는데!"

"5일 동안 당신과 연락하려고 아파트로 몇 번이나 전화했는지 알기나 하오!" 그가 음울하게 말했다. "다시 묻겠는데, 어디 있었소? 짐도 오늘 아침에야 갖다 놓았다더군"

설명을 요구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애슐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 짐은 어디 있죠?"

"버렸소"

애슐리는 너무 놀랄 한참 동안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라고 했어요?"

"당신이 가진 그 넝마 조각 같은 옷들" 비토가 말했다. "내가 모두 버렸소"

애슐리는 천천히 마른 입술을 적셨다. "믿을 수가 없군요"

그가 장롱을 열어젖혔다. "제네바에서 옷을 좀 샀소. 당신에겐 자루 같은 옷이 아니라 좀 더 신선한 옷이 필요해"

"...자루 같은?" 애슐리가 더듬거렸다. 그가 사실을 말한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비토는 4년 전에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만했지만, 지금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당신을 처음 만난 그날 밤 그런 생각을 했지. 헐렁한 티셔츠에 느슨한 바지와 부츠... 당신이 사는 세계였지. 무슨 이유인지 당신은 자신의 여성스러움을 경멸하고 있었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우습군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4년 전 난 분명 장님이었던 모양이오. 당신은 여자라는 사실을 증오하고 있소" 비토는 아주 조용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이제 화는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걸 꿰뚫어 보았다. 마치 그녀의 살갗을 통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생각까지 엿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버지에게 그녀의 여성스러움은 결코 자랑거리나 축하할 게 못 되었다. 오로지 극복할 수 없는 악조건일 뿐이었다.

자신의 집에서조차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은 그녀는 어머니나 언니와 달리 어릴 적부터 남자아이처럼 자랐다. 아버지는 애슐리가 뭔가를 잘못했을 때에만 그녀를 돌아 봐주었다. 아버지의 그런 무관심은 십대가 되면서 더욱 그녀의 반항심을 부추겼다. 그런 애슐리에 비하면 수잔은 그야 말로 모범생이자 말 잘 듣는 아이였다. 수잔은 언제나 좋은 점수를 따는 침착하고 숙녀 같은-아버지가 가장 자주 쓰는 말로 여성스러운 아이였다.

애슐리는 장롱에 걸린 이국적인 옷들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 그래서 진짜 인간에게 인형처럼 옷을 입히겠다는 건가요" 그녀는 고통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창조해 낸 그 환상적인 여자는 단지 겉모습만 이라는 걸 명심해요. 그 안에 있는 건 바로 나예요"

비토가 목을 가다듬었다. "당신의 잠자고 있는 여성스러움을 깨닫기 바라오"

마치 착실한 조사원처럼 그녀는 사정없이 서랍을 열었다. 이런 일을 예상했어야 했는데.... 이건 그의 세계에 적응하도록 하는 계획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옷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그녀의 옷 입는 법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왠지 애슐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몹시 아팠다.

"스누피 잠옷 대신 실크 레이스 가운을 입고 내 침대에 드는 게 그렇게도 당신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오?"

그는 그녀와 얼굴을 마주치려고 노력했다. 그도 자신이 그녀를 상처 입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애슐리는 그가 자신의 감정을 눈치 챈 것 같아 이를 악물었지만, 4년이나 지난 지금도 이렇게 꿰뚫을 수 있다는 게 어쩐지 거북했다.

"난 그렇게 쉽게 난처해하진 않아요." 하지만 그녀는 지금 난처하다. 옷은 모두 여성스러운 몸매를 자랑하는 것들이었고, 속옷 역시 모두 외제로 입기조차 꺼려지는 육감적 디자인이었다. 그건 마치 비토에게 그녀는 아무 생각 없는, 인생에서 중요한 건 오로지 자신의 주인을 즐겁게 하는 게 전부인 섹스의 노예처럼 보이게 했다.

"나머지 당신 소유물은 저기에 있소" 그는 구석에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그건 모두 사진이나 일기 등 아주 개인적인 소유물들이었다.

"누가 이걸 다 정리했죠?" "내가 했소."

그가 정리했다고 해도 별로 걱정스럽지 않았다. 비토는 한 번도 사적인 일을 꼬치꼬치 캐물은 적이 없다. 언제나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주었다. 그녀는 12살 때부터 일기를 썼는데 한 번도 그 습관을 깨뜨리지 않았다. 그녀의 비밀스런 생각을 적은 일기를 볼만큼 비토가 못 믿을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래, 난 언제나 비토를 믿었다. 결코 날 배신하거나 실망시킬 사람이 아니라고.

그가 카라나와 결혼했을 때 그렇게 낙담하고 죽을 정도로 비참했던 게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가 말했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언제까지나 사랑할 것이라고,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그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어리석은 그녀는 그를 믿고 그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건 말뿐이었다. 말은 그렇게 값어치가 없는 법이다. 하지만 애슐리는 그가 떠날 때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들 사이에 어떤 나쁜 일이 생겨도, 성질이 가라앉으면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자 애슐리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결국 그녀는 다시는 누구도 사랑할 엄두를 내지 못하며 살았다.

"오페라에 가기 전에 저녁을 먹어야 하니까. 당신은 옷을 갈아입는 게 낫겠소"

"하나 골라 주는 게 어때요?" 그녀가 신랄하게 말했다."인형에게 하듯이 말이에요"

비꼬는 그녀의 말엔 신경 쓰지 않고, 그는 대답처럼 검은 이브닝드레스를 건네주었다. 근사한 드레스였다. 금빛 자수가 놓인 걸로 보아 큰돈을 치른 게 분명한 옷이었다.

"결혼하기 전에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어요" 그녀가 갑작스레 말했다.

"지난주에 이미 얘기가 끝난 걸로 아는데..."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핥듯이 바라보는 눈동자는 굳은 결심으로 빛났다. "거래에 대한 내 입장을 분명히 한 걸로 아는데, 당신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지키는 게 좋을 거요"

"당신에게 아이를 낳아 줄 수 없어요!" 그녀의 목에서 고통스러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니겠지?" 그의 단호한 얼굴이 호기심으로 굳어졌다. 순간 그녀는 말도 안 되는 그의 의심에 당황했다. 설마 그가 유산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애슐리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얼른 자신의 편집광적인 불안을 거두었다. 그가 알 리가 없어.

"아뇨, 내 말은 그게 아니에요. 우리 가족은..." 잠시 망설이다. 곧 억지로 계속 말했다. "....우린 아이를 쉽게 낳지 못해요. 수잔은 이제 시도하려고도 하지 않는 걸요. 우리어머니도 세 명의 아이를 낳긴 했지만, 그러는 동안 11번이나 유산을 했어요..."

"정말 안됐군, 하지만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그럼, 날 의사에게 보내 봐요!" 애슐리가 거칠게 말을 가로막았다. "십중팔구 그런 진단이 나올 거예요!"

비토의 입술이 뭔가 기묘한 곡선을 그렸다. "당신을 병원에 보내는 건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소.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일단은 자연에 맡겨봅시다."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 거죠?" 그녀가 속삭였다.

"나와 결혼하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쓰는 것으로 보이는 걸."

애슐리는 걱정스럽게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눈을 들었다. 비토의 금빛 눈동자가 격정의 빛을 띠고 부드럽게 도톰한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신자처럼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렵사리 그에게서 눈을 뗀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말이 신경 쓰이지 않아요?"

"전혀" 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내가 원하는 것을 가졌소"

그가 나가고 문이 조용하게 닫히자 애슐리는 몸을 떨었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그렇다, 그는 자신의 손아귀에 그녀를 가진 셈이다. 만약 그녀가 아주 말을 잘 듣는다

면 그도 합리적으로 행동하겠지만, 그녀가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면-계속해서 싸우려 들면-그는 손에 힘을 주며 그녀를 옥죌 것이다. 비토가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게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인내심이다.

그녀는 침실에 붙은 욕실에서 재빨리 샤워했다. 그리고 나서 검은 가운으로 몸을 감싸고 화장대에 앉아 실타래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질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비토가 골라 준 값비싼 드레스는 여성스런 그녀의 몸매를 완벽하게 드러내 주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들이 처음 만난 날 밤에도 그녀는 검은 색옷을 입고 있었다....

갑자기 애슐리는 시공을 넘어 그녀의 전 인생을 흔들어놓은 새해 전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녀는 혼자 있었다. 친구들은 모두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었지만 애슐리는 크리스마스 선물 주는 날 아버지와 크게 싸웠기 때문에 혼자 있었다. 그 다음 날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보고 죄책감이 든 그녀는 곧바로 런던으로 오는 기차를 타고 말았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아버지도 곧 잠잠해지리라는 기대를 하며.

런던으로 돌아와 보니 방 친구중 한사람이 아파트에 남아 있었다. 피비, 인생에서 남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타입으로 큰 파티에 가는데 같이 간다던 친구가 약속을 어겼다며 혼자 가고 싶지 않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피비는 연중 최고로 중요한 파티라고 애원했다. 화려한 상류층 사람들이 모두 오는 이 파티의 초대장을 얻느라고 불쌍한 그녀의 어머니가 갖은 고생을 했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친구 얘기에 귀가 솔깃해진 애슐리는 상류층 사람들이 어떻게 즐기는지 구경하는 것도 퍽 재미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피비가 빌려 준 귀여운 검은 드레스를 입은 애슐리는 거울 속에 비친 유혹적인 이방인을 보고 내심 당혹스러웠다.

"와우, 너 눈동자 끝내 준다" 피비가 눈살을 찌푸렸다."짙은 상대도 안 되겠는걸"

택시 안에서 피비는 현명하게도 경고하는 걸 잊지 않았다. "네가 학생이란 말은 하지마. 너무 애송이처럼 들리니까 비서나 다른 직업을 대. 그리고 절대 네 나이를 말하지만. 십대라면 모두들 흥미를 잃을 테니까. 알았지?"

메이페어 호텔에서 열리는 개인 파티였다. 도착한 지 20분만에 피비는 어떤 남자를 만나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애슐리는 열성적인 젊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벌써 샴페인을 몇 잔이나 마셨는지 모른다. 대학에 처음 들어와서는 밤에 몇 번 외출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돈을 너무 적게 주셨기 때문에 공부하는 시간 이외의 모든 여가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자연히 남자와 사귀는 건 꿈도 못 꿀 일이 되고 말았다.

백합꽃이 배달되었을 때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내게 온 게 아닌 거예요"

"22번 테이블에 앉아 계신 숙녀 분을 위한 겁니다."웨이터다 고집했다.

다음엔 분홍 샴페인이 배달되었다. 그녀의 파트너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가 소리쳤다. "누가 이런 장난을 하는 거지?"

"누군가 실수를 한 모양이에요" 그녀는 백합이 포장된 작은 상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곳에서 이런 화려한 선물이 그녀를 위한 것일 리가 없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웨이터가 싱긋 웃으며 세 번째로 나타나자 그녀의 파트너가 물었다. 웨이터는 위협적인 손짓으로 그녀 앞에 명함을 한 장 내려놓았다.

"그 신사 분께서 기다리십니다. 마담" "휠체어에 앉아 있나요?"

"아닙니다, 마담. 3번 테이블에 앉아 계십니다" 웨이터는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명함을 들어 힐끗 이름을 읽어보고는 이끌리는 마음을 자제하며 재떨이에다 버렸다. 그녀와 함께 있는 남자가 명함을 집어 들더니 금세 얼굴 색이 변했다. "비토 디카발리에리?"

애슐리는 비아냥거렸다. "처음 듣는 이름인 걸요"

"비토 디 카발리에리를 모르다니...!" 웨이터는 마치 그녀는 화성에서 온 사람처럼 쳐다보았다. "잡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이지"

웨이터가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여성 편력으로 아주 안 좋은 소문이 도는 사람입죠."

"어떻게 생겼는데요?" 창피한 줄도 모르고 그녀는 혈관 속으로 약간의 흥분이 스쳐 지나갔다.

"큐피트보다 잘생겼다!" 웨이터는 그 말을 내뱉고는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호기심이 자꾸만 그녀를 갉아먹었다. 애슐리는 댄스 플로어로 한 걸음 내딛으며 무관심한 척 슬쩍 3번 테이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배회하는 동안, 비토가 일어나 곧장 그녀에게 걸어왔다. 그도 그녀만큼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냥 간단하게 춤 신청이나 하면 될걸, 왜 그렇게 복잡하게...?" 그녀는 중얼거리며 몸을 떨었다.

"난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오" 짙은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뜨겁고 끈적끈적한 꿀처럼 감쌌다. 고압 전류가 흐르는 듯 남자의 강력한 성적 매력에 현기증을 느낀 그녀는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플로어로 나오지 않았다면...?"

"당신을 데리러 갔겠지" 그는 부드럽게 말을 맺으며 그녀의 손을 들어, 부드러운 손목 안쪽에 은밀하게 입술을 눌러 댔다. 모든 뼈가 살 속에서 녹기 시작했다.

딱 한 번 우연히 그의 여동생, 길리아가 둘이서 처음에 어떻게 만났는가 물은 적이 있다. 애슐리가 사실대로 말하자 길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농담하는 거겠죠" 길리아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오빠가 얼마나 재미없는 사람이라고요. 은행 일을 무슨 사명으로 알고 일 중독증에 걸려 사는 사람인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구식이라구요... 그래서 카리나 같은 여자하고나 결혼할 줄..."

길리아는 얼굴이 새빨개져 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그때처음 애슐리는 카리나의 이름을 들었다. 예민한 애슐 리가 비토에게 묻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족끼리 잘 아는 집안의 딸이라고만 했다. 부모님은 카리나와 결혼하길 바라시지만 그건 돼지가 나는 것과 같다며 비토는 껄껄 웃었다.

4년 전 왜 토끼처럼 달아나지 않았을까? 그러기는커녕 그와 동등한 어른처럼 보이기 위해 비서라는 얘기를 꾸미고, 나이까지 4살이나 올려 말했다. 비토와 함께 있다고 해서 자부심을 느낀다거나 하진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남자들의 관심에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남자 친구를 다루는 데 어떤 어려움을 겪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가짐 기묘한 성격 탓인지 하나같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처음 만난 순간부터 주도권을 쥔 건 비토였다. 그녀도 나름대로 대화를 주도하려고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런 하찮은 일을 애슐리는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춤추면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 키스는 그녀의 다리는 후들거리게 만들었고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그날 밤 그녀는 운전기사가 딸린 리무진에 올라탔고 어찌된 일인지 다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피비에게서 빌린 구두는 그의 아파트로 가는 승강기 안에 떨어뜨렸고, 드레스는 홀에서 잃어버렸다.

"평생 동안 당신과 같은 여자를 만나길 꿈꿔 왔소" 비토가 신음 소리를 냈다. "드디어 당신을 찾았으니 다시는 놔주지 않겠소. 아주 정열적이고...격정적인..."

말 그대로 정열적이고 격정적인 밤은 아침의 차가운 햇살이 비추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겉으로는 세련된 남자처럼 보이는 비토는 시트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 충격으로 얼어붙은 듯 굳었다. 그녀가 불안해서 움츠리고 있는 동안, 비토는 연인이 아니라 재판관처럼 행동했다. ,왜 거절하지 않았지? 당신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데도 왜 가만히 있었지? 순결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모르는 건가? 왜아닌 척했소? 그리고 도대체 몇 살이오?> 라고 물었다. 아침 햇살 속의 그녀가 도저히 23살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십대라고? 그는 얼굴이 하얘졌다. 그녀 또래의 여동생이 있다는 건 그녀도 몰랐다. 그는 침실을 알몸으로 왔다 갔다 하며 가끔 이탈리아어를 섞어 가며 말했다. 자신이

왜 화가 났는지를. 자신을 그렇게 함부로 굴린 그녀를 나무랐다. 그렇지만 결국 아주 거만한 투로 자신과 같은 남자를 만난 그녀가 아주 운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도 난 애슐리는 시트로 몸을 감싸며 방안에 흩어진 자신의 옷가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요?" 비토가 물었다. "집에 가려고요"

"우린 얘길 해야 되오" 그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란 듯했다.

"하룻밤 정사가 그렇지, 뭐 다른 거 있어요?" 그녀가 씁쓸하게 물었다.

"이건 그런 게 아니야!" 비토는 격렬한 눈으로 핥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난 지금껏 한 번도 하룻밤 정사를 즐긴 적이 없소. 맙소사, 날 도대체 어떤 남자라고 생각하는 거요? 어젯밤은 섹스 이상의 의미가 있었소"

"당신은 날 바보로 만들었어요"

"그럼, 오늘 내가 어떻게 행동할 거라고 기대했소? 당신은 내게 거짓말을 했잖소" 그가 비난했다. "당신이 처녀라는 걸 알았더라면, 결코 함께 자지 않았을 거요... 내가 분명히 거칠게 굴었을 텐데. 사랑을 나눌 때 예방 조치도하지 않았소. 어쩌면 임신하게 될지도..."

애슐리는 도톰한 입술로 살짝 웃었다. ", 괜찮아요. 약을 먹는 중이니까"

"하지만 당신은..."

"왜요?" 그녀는 그의 거무스름한 잘생긴 얼굴이 어떤 결론을 내리고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녀가 의도적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연인이 될 준비가 된 그녀가 그저 그를 선택한 것뿐이라고, 그러나 애슐리가 약을 복용하는 이유는 불규칙한 달거리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임신을 피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과거의 커튼이 내려지고 그녀는 현재로 되돌아왔다. 그때부터 일부러 거짓된 자존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바로 첫날부터. 비토가 자신의 혼란스럽고 연약한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게 싫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달아나는 것뿐이었다. 그녀 자신에게나 그에게 무척 화가 났다. 그녀 역시 전날 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냥 달아나 버리기엔 뭔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특별한 일이. 남자를 이런 식으로 느끼게 될 줄을 꿈에도 몰랐다. 솔직히 말해서 - 마지못해 인정하는 거지만 - 그런 느낌이 그녀를 정말로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준비됐소?"

애슐리는 자신의 모습을 잔뜩 의식하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디너 재킷을 근사하게 입은 비토가 눈에 모일 정도로 숨을 멈추었다. "라파엘로의 그림에 나오는 여인 같소"

"날라리가 된 기분이에요"

그의 육감적인 입술이 빈정거리듯 비틀어졌다. "입을 열자마자 라파엘로의 여인과 닮은 점이라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군"

차안에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 가족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거예요. 4년 전에도 날 당신에게 빌붙은 싸구려 웨이트리스 취급을 했으니까!"

그의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왜 우리 가족이 당신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요?"

그의 예리한 지적에 한 순간 당황했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녀를 찾아왔던 일에 대해선 아직 얘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건 정말로 기분 나쁜 일이었다. 엘레나 디 카발리에리가 무례하거나 잔인하게 군 건 아니었다. 비토의 어머니는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비토와 결혼한다면 애슐리가 그의 인생을 파괴하게 될 거라며 설득하는 엘레나의 결사적인 절망감에 그녀는 무척 상처를 받았다. 사실 엘레나는 불쌍할 정도로 애원하는 태도를 보였다.

"애슐리, 내가 물었잖소"

"그냥 추측한 거예요"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래서 내 청혼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 그랬소?"

청혼? 그런 걸 청혼이라 이름 붙일 수 있나? 다른 여자들은 부드러운 애정과 꽃을 받는데 내가 받은 건 뭐지? 비토는 다른 남자들처럼 무릎을 꿇거나 하지 않았다. 5개월이나 동거한 후 그가 그녀를 싸구려 취급하지 않은 건 순전히 그녀가 운이 좋아서였다. 그와 기꺼이 잠자리를 함께한 여자들은 그에게 1페니의 가치도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아내와 아들뿐이었다. "애슐리" 그가 재촉했다.

"그것과는 상관없어요. 그냥 당신과 결혼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임신했다는 걸 알고 난 이틀 뒤 이탈리아에 있는 비토에게 전화를 했다. 길리아가 전화를 받았는데 비토는 지금 약혼 파티 중인데 그래도 그와 통화하고 싶냐는 물음에 애슐리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애슐리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너무 큰 충격이라 믿기지 않았다. 두 사람이 진지한 사이였다면 비토가 그렇게 서둘러 다른 여자에게 돌아서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당신은 나와 결혼할 거요" 금빛으로 그을은 비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도전적으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 그리고 이 결혼이 끝났을 때 당신은 이렇게 잘난 체하진 못할 거요"

"잘난 체하는 게 아니에요!" 애슐리가 격하게 내뱉었다.

비토가 그녀에게 완전히 경멸에 찬 눈초리를 보냈다.

"당신이 몸을 숨기고 있는 그 단단한 조개껍질을 조금씩 깨부술 거요. 아무 데도 도망갈 곳이 없을 때까지 모조리!"

"만약 그러면 당신을 지금보다 더 증오할 거예요" 메마른 입술로 애슐리는 그에게 소리쳤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자 은근히 겁이 났다.

"그렇다고 내가 잃을 게 있소?"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들은 파크 레인에 있는 니코에서 저녁을 먹었다. 강한 호기심과 질투가 섞인 눈초리들이 입구에서부터 그들을 따라다녔다. 애슐리는 메뉴 판에 눈길을 주며 당당하게 행동하려고 애썼다. 부드러운 양고기가 입안에 녹아들자 긴장된 신경 역시 녹기 시작했다. 와인을 마시려고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그녀는 자꾸만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귀찮다는 듯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애슐리의 탐스럽고 새하얀 목이 드러났다.

"언젠가는 몽땅 잘라 버려야지" 애슐리는 그가 반대하리라 예상하며 불쑥 말했다. 사실 긴 머리는 그녀의 유일한 허영이었다. 그런데 반대는커녕 침묵만이 감돌자 그녀는 얼굴을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비토는 꼼짝도 않고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애슐리는 그의 딱한 표정을 보고 충격으로 몸이 굳어졌다. 검은 얼음처럼 차갑디 차가운 눈동자가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뭐가 잘못됐어요? 왜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죠?"

비토는 옆으로 밀어놓은 접시에 냅킨을 내던졌다. "이제 아까 그냘 지나쳤던 얘길 할 시간이 된 것 같소" 그는 아주, 아주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오늘 어디에 있었소?"

그녀는 약간 놀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팀과 함께 있었어요. 런던을 떠나 집으로 갔어요. 시험 공부하러"

순간 비토의 눈동자에 섬광처럼 번득이는 분노가 그녀의 얼굴을 꿰뚫는 듯했다. 만약 그들 사이에 식탁이 가로막고 있지 않았다면, 비토는 자신의 긴 갈색 손가락으로 그녀의 목을 졸랐으리라. 그녀의 목, 그렇다. 비토는 더 이상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격렬한 눈동자는 계속해서 그녀의 목 아래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의 그을린 얼굴은 분노를 참느라 문자 그대로 창백해져 있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그가 낮게 위협조로 중얼거렸다. "오늘 아침,

아파트에서 짐을 발견하고 당신 언니에게 전화했소. 그것에 있는가 해서. 수잔이 당신도 없고 팀은 이미 몇 시간 전에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하더군..."

애슐리는 팀이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지막 시간을 그녀가 아닌 애슐리와 보내려 한다는 걸 수잔이 알면 섭섭해 할 테니까. "팀은 그저 오전 기차를 탄 척했을 뿐이에요. 우린 하루 종일 함께 있다가......"

비토의 짙은 눈썹이 올라갔다. " 그리고 그가 당신의 목을 깨물었겠지" 완전히 비웃듯이 말했다.

"깨물다뇨?" 그녀는 본능으로 한 손을 오른쪽 귀 밑에 생긴 작은 상처로 가져갔다. 멍들었나? 어렴풋이 슈트케이스를 정리하다가 다친 기억이 되살아났다. 찍하고 나서 황급히 짐을 싸느라 금방 잊어버렸는데...

"이 교활한 창녀 같으니..." 비토는 상스런 욕설을 내뱉었고 애슐리는 심장이 오그라붙는 걸 느꼈다. "더러운 창녀. 하루 종일 정부와 침대에서 뒹굴었으면서..."

"...아니에요" 애슐리는 말을 더듬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부당하고 말도 안 되는 그의 비난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증거를 보지 않았다면 나도 믿지 않았을 거요" 비토는 으르렁거리듯 말하며,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듯 계산서를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웨이터가 혹시 음식이 잘못된 게 아닐까 걱정하며 잽싸게 다가오자 놀랍게도 그는 웨이터는 다시 돌려보냈다. "다른 와인으로 주시오" 그가 잇새로 내뱉었다.

"비토, 제발...여기서 나가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가 공허하게 웃었다. "아니 적어도 이곳에 있으면 당신은 안전하오. 밖에 나가면, 지금 이 기분으로선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가 없소. 난 정말 내가 왜..."

"비토..." 그녀는 마음속으로 퍼져 나가는 이름 모를 공포를 억누르려고 애쓰며 그에게 애원했다. 화가 난 비토를 본 건 여러 번 있었지만 이토록 격렬한 분노를 뿜어내는 그를 본 적은 없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난아주 부드럽게 대해 줬소. 언제나 그랬지. 오늘 밤 내가 환상적인 연인 상을 만들어 낸다고 당신은 날 비난했지" 그의 비웃음이이 마치 하이에나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은 결코 나의 환상의 여인이 될 수 없소, 그건 기적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지. 여하튼 이번 일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긴장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참 바보지. 당신은 옛날부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떠벌리고 다녔는데" 비토가 얼음처럼 차갑게 말했다.

"4년 전 당신은 내가 떠난 지24시간도 되기 전에 아파트를 나갔소. 도대체 어딜 갔소?" 애슐리는 산소가 모자라 숨을 쉴 수 없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그녀의 뺨이 붉어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신의 그 작은 아파트로 돌아가지 않았잖소? 말해 봐도 대체 어디로 갔소? 분명히 다른 남자의 침대로 곧바로 뛰어들었겠지.."

"아녜요!" 그녀는 소리쳤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옆 테이블을 힐끗 쳐다보고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남자가 아니라 소년이었소?" 비토는 계속해서 무서울 정도로 감정을 배제한 조용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스티브는 그냥 친구였어요" 그녀는 고통스럽게 속삭였다.

"물론 당신은 친구와 함께 노는 것도 좋아하겠지" 비토가 차갑게 내뱉었다. "당신은 그의 집으로 이사 간 거요. 몇 시간 만에 내 침대에서 그의 침대로 옮겨간 거라고. 그렇게 행동하는 여자를 뭐라고 하는지 잘 알고 있겠지?"

" 그건 오해예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니" 비토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도 차라리 오해한 거라면 좋겠소. 그래야 내 이기심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것보다 더 남자의 자존심을 뭉개는 건..."

감정이 격앙되는지 그가 잠시 입을 다물자 애슐리는 몸이 떨려 왔다. 뭔가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재난이 서서히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 그래" 비토가 떨리는 숨을 들이쉬었다. " 그 남자의 집으로 이사 간 지 한 달 후, 당신은 작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사와 낙태 수술을 하기로 약속했소. 물론 친절한

마음에서 그 작은 문제를 죽인 건 아니겠지, 안 그렇소?"

철창에 갇혀 고통으로 울부짖는 동물처럼 거대한 흐느낌아 그녀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입을 열었다면 짐승 같은 소리를 냈을 테니까.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충격을 받은 애슐리는 비토의 손에 이끌려 어떻게 레스토랑은 나왔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애슐리는 마비 상태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마치 얼간이처럼 리무진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비토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 말로 그녀는 모든 방어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실제로 그의 비난을 들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갈 곳이 없어서 스티브의 아파트로 들어갔다는 말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비토와 헤어지기 전, 그녀는 돈을 아끼려고 자신의 방을 짧은 기간 동안 세를 주었다.

스티브는 그런 그녀를 소파에 자게 해주었다. 그는 정말로 좋은 친구였다.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에야 성숙한 한 여자로서 느낄 수 있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너무도 어리고 미숙한 그녀가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는 도움을 주었다.

임신에 대한 애슐리의 첫 번째 반응은 오로지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비토가 카리나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그녀는 자신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할지에 대해선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처음엔 스티브가 그녀 대신 병원을 예약해 주었다. 스티브는 비토가 떠난 지금 그녀의 몸은 그녀의 것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녀 또한 아이는 원하지 않았다. 낙태를 하는 게 유일하고도 실용적인 결론이라고 스티브는 말했다. 그녀는 아이를 기를 돈도 없었다. 아이를 낳으면 생활비를 어떻게 꾸려 나가고, 그 아이에게 어떤 삶을 베풀어 줄 것인가?

전문적인 상담을 받아 보기도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스티브의 모든 노력과는 반대로, 그녀의 몸은 약해지고 마음은 더욱 우울해졌다. 그리고 수술하기로 한 날이 되었다. 병원에서 기다리는 그10분 동안 애슐리는 갑자기, 처음으로 임신이 절실한 현실로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아기가 딸인지 아들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붉은 머리카락인지 검은 머리카락인지, 녹색 눈을 가졌을지 검은 눈동자를 가졌을지도 궁금했다.

마침내 그녀는 이 일을 감행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극도로 날카로운 감정 상태에 빠진 그녀를 걱정한 병원 관계자들은 그녀를 데려갈 누군가를 부르자고 했고, 스티브가 그날 시험이 있었기 때문에 애슐리는 할 수 없이 수잔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수잔에게 임신 사실을 얘기하게 된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결코 수잔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언니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아기를 키울 생각이라고. 그건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선언은 아버지의 격렬한 분노를 야기하고 말았다. 아기를 유산하고 말았을 때 애슐리는 그것이 마치 하늘이 내리는 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아기를 원하지 않은 그녀에 대한 벌. 이성적으로는 그런 생각이 말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을 차지한 죄의식은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다.

"비토...." 그녀가 중얼거렸다. " 그 얘긴 이제 끝났소"

"그럼 왜 꺼냈어요?" 애슐리가 소리쳤다.

딱딱한 그의 옆얼굴은 조금의 양보도 보이지 않았다.

"비밀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오. 처음 만난 날 얘기했어야 했는데"

"낙태를 한 게 아니에요...유산한 거라고요" 그녀는 고통스럽게 속삭였다.

"당신이 가진 최고의 장점은 아무리 쓰다 해도 진실을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지성을 모욕하지 마"

"스티브와 잔 적도 없어요!" 마음속 어딘가에 선입을 다물라고 속삭이지만, 그녀는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

"사실대로 말하는 게 더 좋을 거요" 비토가 신랄하게 말했다. "사실, 당신은 내 침대에서도 그다지 많이 잔 건 아니잖소"

그는 전혀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었다. 그의 믿음은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심적 고통을 몰라주는 그에게 화가 난 애슐리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오늘은 팀과 함께 있었어요. 그리고 이 멍은 아침에 슈트케이스를 다루다가 다친 거고요. 게다가 내게 애인 같은 건 있지도 않아요"

"당신은 남자와 섹스를 했소. 사랑이란 말은 정말로 완곡한 표현이지"

그는 약속대로 그녀를 오페라에 데려갔다. 애슐리는 그가 어떻게 이 정도로 잔인할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늘 오페라를 좋아하는 그녀였지만, 옆 사람들의 속삭이는 소리만 귀에 들어올 뿐 오페라 감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도 역시 듣고 있지 않았다. 비토는 나를 믿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녀에겐 자신의 말을 변호할 증거가 없었다. 눈물이 소리 없이 두 뺨 위로 흘러내렸다.

비토는 오페라가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데리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있는 듯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그 벽을 깰 힘도 없었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애슐리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렇게 몸이 쑤실 정도로 가슴이 아파 보기는 생전처음이었다. 옷을 벗은 그녀는 상처 입은 동물이 안식처를 찾듯 침대에 파고들었다. 그가 나가는지 현관문을 쾅하고 닫히는 소리를 들은 그녀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가 모든 것을 되돌려 놓았다. 아직 아물지도 않은 상처를 열어젖힌 것이다.

"애슐리, 제발...." 그의 손이 베개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는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애슐리는 깜짝 놀라 조그맣게 비명을 질렀다.

"...저리 가요!" 흐느낌 사이로 차가움이 묻어났다.

그의 몸무게로 침대라 기울어졌다. "내가 못 되게 굴었소. 인정하지. 당신에게 상처 주고 싶은 나머지..."

"날 충분히 상처 입혔으니까" 그녀가 헐떡였다. "이제 그만 가요, 날 혼자 내버려두라고요"

"4년 전엔 한 번도 당신이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이번 주만 해도 벌써 두 번째군..." 그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끊어졌다. "당신은 언제나 날 거칠게 만들어..."

"예전엔 샤워 물줄기 아래서 울었어요"

비토는 웃음기 없는 미소를 흘렸다. " 그걸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분명히 그 일로 날 놀렸을 걸요" 그녀는 중얼거리며 일어나 앉아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으려고 티슈를 찾았다. "당신이 나간 줄 알았어요..."

"이런 당신을 두고 나갈 수 없어서 되돌아왔소" 그는 그녀의 손에 브랜디를 쥐어 주었소, 애슐리는 마치 전쟁에 나가는 카자흐 인처럼 단숨에 들이켰다. 알코올로 인해 목이 아픈 건 좀 나아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었다.

비토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더니 저항하는 애슐리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열흘 후에 우린 결혼하게 될 거요. 그리고 나서 스리랑카에서 6주간의 긴 신혼여행을 보낼 거요"

애슐리는 그의 격렬한 검은 눈동자 속에 깃든 저항할 수없는 단호함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확실히 그녀의 육체를 소유했고, 함께 지내는 5개월 동안 결혼해 달라고까지 했다. 그런데도 비토는 그 아기가 자신의 아기였는지 아니었는지조차도 묻지 않았다. 분명 4년전 그녀의 거절로 그는 엄청나게 실망한 게 틀림없었다.

"다시 시작할 수 없을까?" 단호한 어투가 말 그대로 그의 잇새로 비어져 나왔다.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두꺼운 양 입술이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진심이오."

"5분마다 혈투를 벌이면서요? 이 이을 그냥 없던 일로 해줄 수도 있잖아요?" 애슐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더 빠르고 간단하잖아요"

갈색으로 그을린 비토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격렬하게 움켜쥐어다. 그의 눈동자가 잔혹스런 빛을 발하며 마치 칼처럼 날카롭게 그녀를 쏘아보았다. "증오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소"

"그렇다면, 조심해야 할 거예요. 증오가 거의 강박 관념에 가까울 정도로 당신을 압박할 테니까" 그녀가 중얼거렸다. 건조한 목청 안에서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런 압박감을 당신도 알게 될 거요" 비토가 내기 하듯 말하며 분노를 표출하듯 거칠게 그녀의 작은 어깨를 꽉 붙들었다.

그의 손길에 그녀의 작은 맥박이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애슐리는 자신의 알몸과 그와의 간격이 너무나 좁다는 데 신경이 쓰였다. 그런 은밀한 느낌이 보이지 않는 번개처럼 그녀의 몸을 관통하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숨쉬기가 불편했다. "내가 거절했기 때문인가요? 당신 이외의 다른 남자를 찾았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그녀는 뚫어져라 자신을 응시하는 그의 강한 눈에서 불타는 어두울 불길이 가라앉기를 바라며 일부러 심한 말을 던졌다.

비토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사실. 아주 잠깐 그의 얼굴근육이 움찔하긴 했지만 너무나 짧은 순간이라 자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오" 그가 이를 갈 듯 내뱉었다. 그 고백에 벼락을 맞은 듯 놀란 건 그녀였다. "놀란 것 같군, 왜요? 단지 당신을 탐했던 거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화를 낼 것 같소?"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길고 하얀 목을 차갑게 쓰다듬었다.

"사랑?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소. 그런 감정에 대한 희망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지. 28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동갑내기들보다 더 나이가 든 편이었으니까. 그런데 댄스 플로어에서 당신을 본 그날 밤 난 지금껏 내 인생에서 원했던 그 어떤 것보다 간절히 당신을 원했소..."

애슐리는 몸을 떨면서 그녀가 한때 믿었던 이 믿어지지 않는 진실을 호기심에 차 듣고 있었다. "욕망이죠" 그녀는 격렬하게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통제할 수 없었던..."

"아니, 이건 그렇지 않다니까..." 강한 손으로 뻣뻣하게 긴장한 그녀의 등을 감싸 안은 비토는 검은머리를 아래로 숙였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열기가 그녀의 온몸을 엄습했다. 애슐리는 자신의 몸을 뚫고 지나가는 짜릿함을 느끼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를 그만두게 할 수 있어. 그렇게 해야 돼. 그녀의 머릿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안돼요, 그만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쉬어 있었다.

그는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녀의 두 손을 잡아 등 뒤로 돌렸다. 그의 강한 눈길이 그녀를 애무하듯 쓰다듬었다. 그의 눈길을 따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애슐리는 그만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아직도 시트에 감싸 인 그녀의 가슴이 배반자처럼 부풀어 오른 게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만약 당신이 남자 없이 살 수 없다면, 그 남자는 분명히 내가 될 거요" 그가 거칠게 말했다.

순간 약이 바짝 오른 그녀가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강제로 범해야만 직성이 풀린다면, 계속하시지!"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가 딱딱하게 굳은 그의 육감적인 입술선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당신이 사랑을 어떻게 그렇게 멜로드라마인 양 말할 수 있는 거지? 적어도 이 일에 관한 한은 정직해야 하는 것 아니오? 당신은 지난 주, 4년 반 만에 처음으로 날 만났는데도 날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소..."

화가 난 애슐리가 소리쳤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비토가 남성 특유의 만족스런 미소를 띠었다. "날 그렇게 쳐다보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지금 이곳에 있지도 않았을 거요. 스스로 무덤을 판 거지"

애슐리는 그의 손이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 두 손을 빼낸 후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조금 전에 벗어 둔 옷을 잽싸게 낚아채고는 문으로 내달았다. 아파트가 어두웠기 때문에 그녀는 홀로 가는 길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군요!" 벽과 자신의 몸 사이에 그녀를 가두며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요" 그가 불규칙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당신이지"

이런 일이 또다시 벌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어진 애슐리는 무릎을 들어 올리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저 천천히 내려오는 그의 입술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건 마치 바싹 마른 건초에 불을 당긴 거나 다름없었다. 전혀 통제할 수 없는 대 화재 같은 거였다. 그의 혀가 굶주린 듯 그녀의 젖은 입술을 파고들자 기쁨의 신음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긴장한 그녀의 몸이 아이스크림처럼 녹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어깨를 잡고 완전히 굴복한 듯 그에게 키스를 되돌렸다.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들 이외의 세상은 격렬하고 원시적인 감각으로 인해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거칠게 옷을 벗어 던지는 비토가 이탈리아어로 뭔가 중얼거리더니 곧 신음 소리를 냈다. " 도대체 내게 무슨 마술을 건 거요? 이건 생각지도 않았는데..."

잠시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젖은 살갗을 스쳐 지나가더니 비토의 뜨거운 몸이 부딪쳐 왔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민감한 허벅지를 애무하자 애슐리는 숨을 헐떡였다.

"기분이 어떤지 말해 봐" 그가 잇새로 내뱉었다.

"비토, 제발.., 세상에, 제발...멈추지 말아요" 그녀는 열에 들떠 말했다.

그는 마치 침략하는 군대처럼 그녀에게 다가왔다. 자비심 없는 정복자처럼.

애슐리가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불이 켜 있었다. 맨 처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사진이었다. 웃고 있는 카리나의 사진. 비토의 팔에 안겨

있는 카리나의 사진, 신혼여행 중에 찍었음이 분명했다. 마치 너무나 빨리 내려가는 승강기를 탄 것처럼 애슐리는위가 뒤틀리며 구역질이 났다.

줄무늬가 있는 감청색 재킷을 입은 그가 넓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잘생겨 보였다.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지난 몇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격렬한 감정과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감추느라 갖은 애를 썼다. 곧 눈물이 흘러내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적어도 그의 앞에서는.

"지금 가야 하오" 그의 말투에는 아무런 감정도 섞여 잇지 않았다. 직감으로 그가 떠나고 싶어 안달이라는 느낌이외에는.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나도 떠날 수 있나요?" 그녀라 속삭였다. 마치 애원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처음으로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소" "당신이 만든 일이에요" 그녀가 나무랐다.

"우리가 만든 일이지" 그가 투덜거렸다. "내가 계획한일은 아니오.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소"

거의 신경질적인 웃음이 그녀의 다문 입 사이로 흘러나왔다. 차갑게 구는 비토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를 놓아 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의 선조들은 중세 시대 때부터 고리 대금업자였으리라. 비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꼭 갖는 사람이었다.

"작은 수첩을 하나 준비해서 매번 도장이라고 찍지 그래요, 나와..."

"그만" 그가 거칠게 소리쳤다. "계획적인 게 아니었소!"

"아니라고요?" 그녀는 그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힐끗 쳐다보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당신은 날 철저하게 비난하고 오페라로 끌고 갔어요. 그리고 당신은.... 그러고 나서 당신은..."

"내가 간밤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소? 당신에게서 손을 떼지 못한 날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 같소?"

얼음이 소리는 내며 깨졌다. 긴장이 마치 간헐천(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분출하는 온천)처럼 솟아나며 잔혹하게 소리쳤다.

"침대에 돈을 던지지는 않아요?" 애슐리가 긴장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창녀에게는 그렇게 하잖아요?" "당신은 창녀가 아니오!"

"나더러 창녀라고 한 건 당신이에요" 그녀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비토는 불만감을 나타내듯 두 손을 흔들었다. "질투가 나서 그랬소, 너무 질투가 나서 앞뒤 가리지 않고 말한 거요. 이젠 당신이 오늘 팀과 함께 있었다는 걸 믿소. 하지만 아깐 당신이 정말로 다른 남자와 함께 있었다고 믿었소!"

" 그래서 이젠 내 수준이 높아졌다는 건가요?"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난 마치 창녀가 된 듯한 기분이에요. 어떻게 내 기분은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 거죠?"

그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자신의 모국어로 길고도 낮게 욕설을 지껄였다. 우아한 타원을 그리며 휙 돌아선 비토가 갑작스레 뚫어질 듯 그녀를 쏘아보았다. "내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면 당신을 풀어 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착각은 자유지" 그가 음험하게 말했다. "다음 주에 우린 예정대로 결혼할 거요. 어떤 것도 그 사실을 바꾸지는 못할 거요"

"아무래도 지은 죄보다 더한 벌을 받는 것 같네요"

잠시 동안 그는 문가에 서서 빛나는 눈동자로 믿을 수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감탄하듯 바라보았다. 마치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그를 괴롭히기라도 하는 듯 그의 입술이 굳어졌다. "누가 죄인이고 누가 벌을 준단 말이오?" 그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이건 불공평해요. 난 당신 가족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요. 그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아요. 그들이 왜나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애슐리는 내뱉듯이 말하며 긴장된 신경을 완화시키려고 애썼다.

"바보같이 굴지 마" 비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를 갈았다. 두 사람은 끝이 없을 것 같은 교통지옥을 헤쳐 나가는 동안 내내 같은 논쟁으로 입씨름하고 있었다.

"결혼식 전에 우리 가족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거요"

손톱이 그녀의 부드러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특히 비토의 어머니, 엘레나 디 카발리에리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아들의 침대용 장난감처럼 바라보던 그 싸늘하고 메마른 눈길을 또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 파티는 어머니의 생각이오. 당신을 가족으로 환영하고, 친구들에게 가족으로서 소개하려는 건데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요?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이토록 큰 파티를 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왜 그런 수고를 하는 걸까? 애슐리는 몸집이 작고, 놀라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여자를 떠올렸다. 겉으로 보기엔 깨질듯 연약해 보이지만 낡은 장화만큼 거친 성깔을 숨기고 있는 여자를, 그들의 마지막 만남을 생각하면 애슐리는 아직도 가슴 한쪽이 시렸다.

애슐리는 힘들게 침을 삼키며 실크 드레스의 주름을 손으로 폈다. 손가락에 낀 약혼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저녁 식사때 비토가 건네준 반지였다. 어떤 열정이나 따스함은 기대할 수 없었다. 한 다발의 꽃과 작은 선물을 건네주던 이탈리아 인 특유의 로맨틱한 연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렇다고 그녀가 그런 걸 바랐다는 건 아니다. 그녀는 꽃을 싫어한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가혹하게 대한 다음날 어김없이 집으로 꽃을 보내곤 했다. 그러면 그녀의 어리석은 어머니는 기분이 좋아져 모든 걸 용서해 주었다. 비토가 처음으로 그녀의 아버지처럼 행동했을 때 애슐리는 기뻐하기는커녕 되려 화를 냈다. 어머니처럼 되는 게 두려 웠기 때문에.

애슐리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 전엔 전혀 몰랐던 사실을 이제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불행한 어린 시절이 마치 거대한 벽처럼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 가족도 결혼식에 초대해야지"

애슐리는 몸을 떨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그래도 당신 언니는...?" "우린 별로 안 친해요"

"당신과 친한 사람이 있기는 하오?" 비토가 비꼬듯 물었다.

누구보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비토였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주려고 준비한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비토는 전부가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잔돈이 아니라 안전한 예금 계좌가 되고 싶어 했다.

거대한 저택은 환한 불빛으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곳은 그들이 런던에 머물 때 그녀의 집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리 오래는 아닐 것이다. 그녀는 최대한 1년 정도 결혼 생활을 유지할 생각이니까.

"널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모른단다" 영국 기숙 학교에서 배운 엘레나 디 카발리에리의 영국식 영어가 완벽하게 흘러나왔다.

그녀에게 한쪽 팔을 잡힌 채 애슐리는 자신이 끌려가는 것을 발견했다. 놀란 그녀는 등 뒤로 비토를 돌아보았다. 그는 진짜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바로 그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미소였다.

"우린 얘기한 필요가 있어" 엘레나가 문을 열고 거의 강제로 그녀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서재를 왔다 갔다 하며 애슐리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미래의 시어머니는 그녀에게 샴페인을 한 잔 권했다. "좀 앉겠니?"

애슐리는 의자에 등을 뻣뻣이 세운 채 앉았다. "우린 모레 결혼해요" 이 상황에선 전혀 불필요한 말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자신이 모든 위협과 싸울 준비가 된 여자처럼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보다 더 날 행복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게다" 엘레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애슐리는 당황스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엘레나가 한숨을 쉬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4년전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닌 일을 방해해서 정말 미안하다. 올바르지 못한 판단을 한 거지. 그런데도 난 비토가 런던에서 돌아온 뒤에도 내가 한 짓을 얘기하지 못했단다. 네가 그를 버렸을 때 그 아이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 전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단다. 하지만 이젠 극복한 것 같더구나."

"그래요. 하지만 책임을 느끼실 필요는 없어요. 제 나름대로... 그와 결혼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거든요" 애슐리는 확실치 않게 말했다.

"왜 비토에게 내가 널 찾아갔었다는 얘길 하지 않았니?"

"그에게 말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미 지난 일인 걸요" 애슐리는 자신 역시 너그러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너와 내 아들이 행복해지길 간절히 바란다. 너희 둘을 위해서 시계를 뒤로 돌릴 수만 있다면 하고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단다" 엘레나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애슐리를 쳐다보았다. "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도 친구가 되길 바란다"

그녀가 진심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엘레나는 비토가 사랑하는 여자가 바로 애슐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이 결혼이 불행으로 끝나게 됐을 때 과연 엘레나는 어떤 얼굴을 할까?

비토는 한 무리의 남자들과 함께 홀 건너편에 서 있었다. 그녀가 다가가자 그는 즉시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몹시 편안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가 중얼거렸다. "아무 것도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잖소. 우리 어머니는 아주 친절한 분이시거든"

남자들은 가끔 아주 어리석다니까, 애슐리는 속으로 화를 냈다. 엘레나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감정적인 여자이자과잉 보호를 하는 어머니다. 깨어질 듯 연약한 겉보기와는 달리. 솔직히 엘레나가 애슐리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기도 했지만, 애슐리는 그 정도로 오래 비토 곁에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다음 몇 시간은 그저 이름들과 얼굴들이 한데 뒤섞여 흐릿한 기억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비토가 그녀를 화나게 했다. 내 여자, 그녀의 어깨 위에 놓인 단호한 손이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쳐다 는 보되 만지지는 마라,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만심이 온몸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기억나는 건 그의 세 명의 여동생 중 한 명이었다. 길리아, 임신한 배를 아름다운 드레스로 가린 그녀는 애슐라는 마치 친한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당신과 비토가 다시 만나 전 아주 기뻐요" 그녀가 따스하게 말했다. "오늘 밤 이곳에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언제 결혼했어요?" 애슐리가 물었다.

"거의 3년 되어가요" 길리아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 그리고 얘는 우리의 세 번째 아기 구요"

"세 번째?" 애슐리는 몹시 놀랐다. 길리아가 웃었다. "처음에 쌍둥이를 낳았지 뭐예요"

애슐리는 간신히 미소 지었다. 어떤 여자들은 쉽게 아기를 낳는데 또 어떤 여자들은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건강미와 활력이 넘쳐흐르는 길리아에겐 그 일이 아주 간단하게 느껴질 것이다.

"길리아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지" 비토가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 그의 등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순간 뭔가 속에서 툭하고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 입 닥치고 지옥에나 가요!" 그녀는 잔혹하게 쏘아붙이고는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애슐리!" 그냥 지나치려는데 한 남자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하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요?"

그녀는 순간 당황해서 눈을 깜박거렸지만, 곧 조쉬의 친숙하고 정다운 얼굴을 알아보곤 미소를 지었다. "나도 당신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싶은데요?"

", 길리아의 쌍둥이를 받아 줬기 때문에 이 파티에 초청 받을 수 있었소" 그의 밝고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런던으로 쇼핑 여행을 하러 온 길리아가 아기의 탄생을 위해 미리 정해 둔 로마 병원 대신 갑자기 국립 병원에서 아기를 낳게 되면서 알게 되었소. , 이번엔 당신이 변명할 차례요. 함께 춤추면서 얘기하는 게 어떻소?"

그녀의 조쉬의 품에 안겼다. 조쉬는 작년에 알게 된 의사로 탁아소에 자신의 작은딸을 맡기는 편 부였다. 그녀에겐 정말로 특별한 남자였다. 조쉬를 좋아하고 그도 그녀를 좋아했지만, 두 사람의 교제가 어느 순간에 도달하자 그녀는 그만두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저히 그와는 사랑을 나눌 수 없었다. 아니 욕망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비토는 키가 컸기 때문에 사람들의 머리 위로 그를 볼 수가 있었다. 맙소사, 그녀는 지금 금지된 사람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이외의 다른 남자!

"난 좀 늦었는데, 그녀를 보았소?" "누굴요?" 그녀가 물었다.

"비토 디 카발리에리의 아내 될 사람"

"당신과 함께 춤추고 있잖아요"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이겠지!" 조쉬는 약간 뒤로 물러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곧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으며 부드러운 입술을 깨물었다. "농담이 아니군. 어떻게 그를 만나게 됐소?"

"오래 전에요" 그의 고통을 본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발꿈치를 들고 그의 딱딱한 입가에 입을 맞추었다. "당신이 아니어서 미안해요, 그는 떨쳐 버릴 수 없는 편두통과 같은 사람이에요" 파티에 도착한 후에 자신이 샴페인을 지나치게 마셨다는 걸 깨달으며 그녀가 속삭였다. "우린 왜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걸까요, 조쉬? 왜 언제나 틀린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걸까요?"

"인생이란 바로 그런 거요" 조쉬가 완벽하게 아름다운그녀의 뺨에서부터 부드러운 머리카락까지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조금 불안정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소, 당신 곁에 있으며 판단을 제대로 내릴 수가 없소...."

"그렇다면 당신 대신 내가 판단해 주겠소. 헤네시 선생"비토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애슐리는 얼른 얼굴을 돌렸다. "다시 한 번 더 그녀에게 손을 댔다간 온몸을 불 질러 놓고 말겠소!"

그녀가 휙 돌아서자 비토가 그녀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의 잘생긴 얼굴은 분노로 얼룩져 있었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죠?" 애슐리가 숨을 들이마시며 다그쳤다. "어쩌면 그렇게 조쉬에게 면박을 줄 수 있냐고요?"

전혀 뉘우치지 않는 태도로 비토는 서재에 있는 위스키를 한 잔 따랐다. "미리 경고했잖소. 그 불쌍한 놈에게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않았더라면, 때려눕히고 말았을 걸!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생겨 먹은 여자요?"

"뺨에 키스한 게 어때서요?" 그녀가 물었다. "조쉬는 친한 친구라구요"

"물론 함께 누웠던 침대도 아직 식지 않았겠지" 비토가 한껏 비꼬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육감적인 그의 입술이 잔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경험자로서, 그의 심정을 충분히 알 수 있지. 그에게도 내게 한 것처럼 사랑하게 만들어 놓고 가차 없이 등을 돌렸소? 당신에게 매달리고 애원할 정도로 못난 남자 같군? 바보 같으니.... 만약 우리 관계에서 누군가가 매달리고 애원해야 한다면, 그건 바로 당신이 될 거요"

그녀는 몸을 떨었다. 위협하는 그의 말투가 그녀를 공포로 떨게 했다. "먼저 나를 죽여야 할 거예요"

"아니, 카라" 비토가 매끄럽게 말했다. "내가 할 일은 당신을 침대로 데려가는 것뿐이오. 요즘에 내가 꾸준히 계획하던 일이지. 지난 한 주 동안 당신에게 소홀히 대한 건 아무래도 내 실수인 것 같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긴장한 그녀가 중얼거렸다.

"사람들 머리 위로 나를 쳐다본 뒤 당신은 헤네시에게 착 달라붙었소"

그녀의 얼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빨갛게 물들었다. 그렇다. 그녀는 그가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부인하기에 그녀는 자신에게 너무 정직했다. 그가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에 그녀도 복수를 해준 것이다.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아주 충동적으로.

"왜 그랬소?" 비토가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턱을 치켜들었다.

"지옥에나 가요"

"만약 내가 지옥에 간다면, 당신도 데려갈 거요" 분노로 얼룩진 그의 강하고 어두운 얼굴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왜 그런 싸구려 연극이 필요했는지 묻고 있잖소"

그녀가 뒤로 물러나지 못하도록 강한 손이 그녀의 좁은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강한 눈길과 마주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쁜 숨을 삼켰다. "파티 장소로 되돌아가야 하잖아요..."

비토의 긴 손가락이 목선을 쓰다듬자 애슐리는 깜짝 놀라 침을 꿀꺽 삼켰다.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두 입술이 벌어지면서 뜨거운 열기가 분출되었다. 기다란 손가락들은 애무하듯 그녀의 턱선을 따라 올라왔다. 애슐리는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는 고양이처럼 그의 손바닥에 뺨을 갖다 대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무진 애를 썼다.

"파티"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자신의 마음속에 일고 있는 열기를 무시하려고 애쓰면서.

"왜지?" 그가 고집스럽게 물었다. "왜라뇨?" 자신을 경멸하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헤네시"

"당신이 날 아프게 했기 때문이죠"

그가 뒤로 물러섰다. 현기증을 느끼며 그녀는 그를 쳐다보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속도 메슥거렸다. 애슐리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당신은 정말로 날 증오하는군요?' 생각하기도 전에 질문이 혀끝에서 흘러나왔다. "지난 일을 모두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내 입장에서 보면 상황이 전혀 달랐다는 걸 이해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런가?"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덤덤한 말투였다.

"떠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난 어딘가 살 곳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 아파트는 그 해 말까지 빌려 놓은 거요" 비토가 메마르게 말했다. "당신이 이사 갈 필요는 없었소. 게다가 당신 계좌로 은행에 적잖은 돈까지 넣어 두었다고"

"그랬죠..." 끊어질 듯한 웃음이 그녀의 입에서 삐져나왔다. " 그 마지막 작별은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수표책이 특별한 의미를 전달해 주었죠. 도대체 날 뭐라고 생각한 거예요? 반드시 돌을 지불해야 하는 창녀로?"

그의 광대뼈 근처가 붉게 물들었다. "당신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책임감을 표현한 거요"

"함께 살 때조차도 당신 돈은 쓰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당신이 떠난 뒤에 그 돈을 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파트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어요. 당신이 떠나기 2주전에 세를 주었거든요. 그래서 스티브의 소파에서..."

"그 아기... 내 아기였소?" 그는 아무런 경고도 없이 물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서 있었지만 그녀는 그가 긴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얘긴 이제 끝났소> 일주일 전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비토도 역시 인간이었다.

질문의 잔인함이 마치 날카로운 죽창처럼 그녀를 관통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그녀가 숨을 훅 들이마셨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비토가 빈정거리듯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애슐리는 고개를 숙이고 솟아오르는 고통을 누르려고 애썼다. 화를 내고 싶었지만, 분노는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고 그저 절망적인 상실감만이 남아 있었다.

"맞아요. 당신의 아기였어요." 그녀는 자신의 나약함을 저주했다. "그리고 ...."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게 다요" 비토가 격렬하게 가로막았다.

"어떻게 알았죠?" 드디어 그녀가 물었다.

"당신에게 사설탐정을 붙였지. 알고 싶었거든" 비토는 감정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았지만 꽉 쥔 주먹이 그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다른 남자가 있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날 멀리하려는 이유는 따로 있더군."

애슐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그녀가 태어나지 않은 그들의 아이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 그를 멀리했다고 믿고 있다.

"믿지 않겠지만" 그녀는 강력하게 말했다. "낙태를 한 게 아니에요. 마음이 바꿨죠. 그런데 그만 2달 후에 자연유산을 하고 말았어요."

"이제 파티로 돌아가야겠소."

"비토, 내게 이럴 순 없어요!"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미 지난 일이오. 영원히 묻어 두자고. 애가 알고 있다는 얘길 당신에게 하는 게 아닌데..."

"하지만 이미 말했어요." 그녀가 격렬하게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 그러니 그 얘길 없었던 걸로 할 순 없어요!"

" 그렇게 해야 돼"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살펴보는 그의 어두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이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았다는 내 추측이 틀렸다는 건 인정하겠소. 아직도 가슴 아파하는 게 분명한 듯하니까. 하지만 이 얘긴 이쯤에서 끝내는 게 가장 좋겠소."

한 줄기의 고통이 칼로 변해 그녀의 가슴을 저미는 듯했다. 애슐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반짝거리게 했다. "이쯤에서 얘길 끝내자구요?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 도대체 어디에 있었어요, 비토? 난 겨우 19살이었고 마땅히 갈 만할 곳도 없었어요! 당신은 날 임신시켜 놓고 휑하니 떠나 다른 여자와 결혼했어요, 그런데도 날 사랑했다는 말이 나와요? 도대체 어디 있었어요, 내가 당신의 그 잘난 사랑을 절실히 필요로 했을 때 어디 있었냐구요?"

그는 충격으로 몸을 뻣뻣이 굳힌 채 서 있었다. 이제야자신의 도덕적인 죄를 깨달았는지 비토의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애슐리는 떨리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당신은 자신이한 말을 지키지 않았어요, 비토. 여태껏 한 번도 지킨 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녀가 언도하듯 말했다.

"당신에겐 엄청난 돈과 자신을 이해해 주고 무슨 일이든 도와주는 가족이 있죠. 당신은 만화의 주인공처럼 살아왔어요! 지금껏 살아오면서 어려운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

갈등을 겪어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요? 물론 없겠죠, 그러니 당신 머릿속의 생각이란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것뿐이지. 다음 끼니를 어떻게 때울까 라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가는 고민 따윈 해본 적도 없잖아요!"

그의 창백한 얼굴이 검붉게 변했다. 약간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뺨 위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치워 주었다. 번개처럼 빠른 분위기의 전환에 당황스러움은 느끼면서도 애슐리는 그의 두 팔에 안겼다. 잠깐이나마 그의 눈동자에 곤혹과 고통이 교차하는 것을 보았다.

살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도니 엘레나의 조심스런 얼굴이 나타났다. "방해하려는 게 아니라. 바깥에 두 사람의 주신이 빠진 파티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고..." "애슐리도 곧 나올 겁니다." 그가 엘레나를 데리고 방을 빠져나갔다.

침묵 속에 남겨진 애슐리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자제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그때 어디선가 자정을 알리는 시계 종소리가 들렸다. 36시간 후면 비토의 아내가 된다고 생각하니 절로 가슴이 떨렸다.

"한 시간 안에 빌라에 도착해야 돼" 비토는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으면서 짐짓 운전사 밴더와의 쓸데없는 대화를 즐기는 척했다. 시골 언덕 위에 있는 저택은 4대째 카발리에리 가의 소유다. 그는 이 사실을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해 주었다.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한 시간을 보낸 후에도 애슐리는 여전히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편하게 앉아 차창 밖 스리랑카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밴더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빠르게 지껄이며 차창 밖으로 손을 이리저리 내저으면서 아무런 소용없는 신호를 보내며 운전했다.

그들 뒤에는 파인애플을 가득 실은 수레 황소 한 마리가 끙끙거리며 끌고 있었고, 앞쪽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낡아빠진 짐마차가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껑충하게 키가 큰 한 젊은이가 짐 꾸러미 옆에서 아슬아슬한 자세로 잠을 자고, 짐 꾸러미에선 코코넛이 짐마차 바퀴 아래로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짐마차 앞엔 한 늙은이가 머리에 물고기를 인 채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가하게 걷다가 머리에 인 바구니가 무거운지 가끔 멈춰 서기까지 했다. 애슐리는 금방이라도 신경질적인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 차라리 그를 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밴더는 그저 격렬하게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이곳 콜롬보에서 운전하려면 강철 같은 신경이 필요하지" 비토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은 애슐리는 새어 나오는 하품을 눌렀다.

"아직도 피곤하오?" 비토는 정중하게, 그러나 약간 놀란 듯 쳐다보았다.

"조금" 그들은 어제 결혼식을 치렀고 지난밤을 비행기 안에서 보냈다. 그저 잠만 잤는데도 그녀는 왜 이렇게 피곤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비토의 아내가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아서인 듯했다.

왠지 불가능한 일 같았다. 애슐리 디 카발리에리라니. 교회밖에 쫙 깔린 기자들을 보고 그녀는 적잖이 놀랐다. 아주 조용한 결혼식일 거라고 생각했다. 정상적인 결혼이 아니니까 비토가 간단하게 치르는 결혼을 선호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배달된 아름다운 부케와 실크 웨딩드레스는 그녀는 몹시 당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일어난 일들에 비하면 그것은 그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애슐리는 행복한 신부인 척해야 했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결혼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저택에 도착한 애슐리는 저택을 관리하는 하인들과 길고도 지루한 인사를 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비토의 태도로 보아 다들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애슐리는 또다시 하품을 삼켰다. 이를 본 키가 작고 둥근 얼굴의 가정부 파라이야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애슐리를 식민지 시대의 아름다운 마호가니 가구들이 가득 찬 위층의 커다란 침실로 안내했다. 그러나 애슐리는그 침실을 감상할 시간이 없었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침대 옆에 당당하게 자리 잡은 카리나의 사진을 보았기 때문이다.

빛처럼 빠르게 프라이야는 애슐리의 갑작스런 긴장의 원인을 알아차렸다. "사진을 옮길까요?"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무런 지시가 없어서 그냥 놔둔 거예요"

", 괜찮아요. 그냥 놔둬요" 너무 쉽게 속마음을 간파 당한 것에 놀란 애슐리는 억지로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카리나의 사진이 걸려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옆에서 첫 번째 부인이 빤히 쳐다보는데 비토의 팔에 안겨 있어야한다는 건 정말 생각지도 않았다. 거대한 분노와 모욕감이 그녀를 뒤덮었다.

샤워를 하고 난 후 애슐리는 내던지듯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사진이 눈에 띄자 이 결혼이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만약 카리나가 죽지 않았더라면, 비토는 아직도 카리나 옆에 있을 것이다. 지금쯤은 아이도 있으리라. 애슐리는 비토가 카리나를 사랑했다는 괴로운 진실을 씹으며 살포시 잠이 들었다.

애슐리는 불편하고 옅은 잠을 깨우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일어선 그녀는 불을 켰다. 머리가 빙빙 돌고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흰 디너 재킷을 입은 거무스름한 비토가 그녀를 발끝부터 차근차근 훑어보았다. 그는 잘생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걱정스런 눈길로 물었다. "어디 아프오?"

솟아오르는 구역질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녀는 심드렁한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몸이 불편한 건 분명했다. 생각해 보니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질 못했다.

"의사를 부르겠소" 비토가 즉시 결정을 내렸다.

적대감 섞인 눈으로 애슐리가 내뱉듯 말했다. "필요 없어요! 당신과 관계된 일은 뭐든 다 싫어요."

그는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저녁은 30분 후요."

"가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투덜거리고는 뜨거워진 이마를 문질렀다. "너무 더워요."

"에어컨을 안 틀었으니까 덥지." 비토는 뚱하게 말하고는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는 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 에어컨이 있는 줄 몰랐어요"

그가 문가에서 차가운 수건을 던졌고 그녀는 얼굴을 닦았다. 자세를 똑바로 한 그녀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치고 나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 비토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곧 내려갈 게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언제부터 복용한 거요?"

그를 힐끗 쳐다본 그녀는 잔뜩 긴장했다. 비토의 한 손에 작은 알약이 들려 있었다. 피임약이었다. 너무나 놀란 애슐리의 입이 우아하지 못하게도 헤벌쭉 벌어졌다. 그가 약을 갖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약은 슈트케이스맨 아래쪽에 넣어 둔 작은 가방에 있었는데... "어디서 찾았어요?"

"하녀 중 한 명이 당신이 자는 동안 짐을 풀었소" 비토가 숨을 들이쉬었다. "약은 세면대 옆에 놓여 있더군"

"약이 어떻게 그곳에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그녀가 멍청하게 말했다.

"내가 하녀에게 물어 봐 주길 바라는 거요?"

애슐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길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비토가 무거운 침묵을 무자비하고도 아주 효과적으로 깨뜨렸다.

"우린 이미 합의를 봤잖소" 비토가 약을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날 속였소."

"...그건 당신이 요구하는 게 ...그러니까...."

"당신도 이미 동의한 일이오." 비토는 양보 없이 쏘아붙였다. "이런 사기 극은 더 이상 싫소."

<합의... 속임수... 사기극> 사업 계나 법정에서나 쓰는 단어를 그는 서슴없이 쓰고 있다. 그는 내가 감정에 의해 움직이고 살아서 숨 쉬는 인간이라는 걸 모른단 말인가? 아니면 그런 것엔 신경 쓰지 않나?

"1년이면 충분할 거요" 그녀의 혼란스런 생각 속으로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1년 동안 날 속이지 않는다면 당신을 놓아주겠소"

1. 그녀는 불신이 섞인 신경질적인 웃음을 흘렸다. 1....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낭비할 생각인가?

애슐리는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차가운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옷을 입으면서 이모든 소리들이 어디서 나는 건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프라이야가 그녀를 바깥으로 안내하자 그 많은 목소리들이 잦아들었다. 그들은 촛불 아래 베란다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애슐리는 곧 코코넛 횃불이 집 앞 커다란 공터를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무대처럼, 뒤편은 팜나무의 잎사귀로 가장자리가 꾸며진 스크린 같았다.

비토가 그녀를 의자에 앉히면서 귓속말로 속삭였다. "나도 정말 놀랐소. 직원들이 우리 결혼을 축하하려고 여흥을 준비했나 봐"

콜람 나티마라는 민속극을 공연할 것이라고 비토가 설명해 주었다. 해설자가 모습을 나타내고, 두 명의 북 치는 사람과 한 명의 피리 연주자가 입구에 나타났다. 무용수들이 한 사람씩 화려한 옷과 거대한 가면을 쓰고 모습을 드러냈다. 신과 악마, 그리고 스리랑카 고유의 신비스러운 무속신들.

프라이야가 갖다 중 스리랑카 특유의 알코올음료를 마시면서 애슐리가 물었다. "그런데 콜람이 도대체 무슨 내용이죠?"

프라이야가 그녀를 보고 히죽 웃으며 가장 화려한 가면을 쓴 두 사람을 가리켰다. "이쪽 사람은 왕이고, 저쪽 사람은 왕비예요. 왕비는 아기를 가지고 싶어 하죠" 그녀는 어둠속으로 물러났다.

어리석은 애슐리! 그녀는 머리끝까지 빨개져서 무대 위의 무용수들이 관능적인 몸짓으로 춤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신호부부에게 이보다 적당한 내용은 없으리라. 그녀는 비토의 눈길을 피했다.

갈색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틀어쥔 손을 더듬었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오"

눈은 멍하게 무대 위의 무용수들을 계속 바라보면서 거부하는 표현으로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

"당신은 사사건건 싸우려 드는군" " 그럼 뭘 기대했어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여긴 말다툼할 곳이 못 되오"

공연이 끝나자 애슐리는 턱이 아려 올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비토는 커피를 응접실로 가져오게 했다.

"그렇게 참기가 힘들었소?" 둘만 남게 되자마자 그가 성급하게 물었다.

"그래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비토에게 그의 뜻대로 어떻게든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외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세상에!" 지난 며칠 동안 너무 침착하고 조용했던 그가 갑작스럽게 분노를 폭발하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도대체 내게서 뭘 원하는 거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그가 격렬하게 주장했다.

"당신은 나의 과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이곳에 있어요!" 그녀가 소리쳤다.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단 말이에요!"

"난 정말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소" 비토가 소리쳤다. " 그런데 당신은 결혼 사진을 찍을 때조차도 미소 짓지 않았소!"

에슐리는 코웃음을 치며 의자 뒤에 서서 그를 흘겨보았다. "웃는 신부를 원했다면 날 택하지 말았어야죠!" 그녀는 폭발하듯 말했다. "집안 전체에 카리나 사진이나 붙여놓고.... 내 눈길이 닿는 곳마다. 그 테이블 위에 사진이 있는 것도 전혀 놀랍지 않아요!"

약간 뒤로 물러서며 비토는 그녀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곧 다 치워 버리겠소. 아니면 태우는 의식이라도 할까?"

"무슨 뜻이죠?" 그녀는 분노에 차서 물었다.

"당신은 질투하고 있소" 그는 아주 조용하게 말했다.

명치끝이 아려 오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이를 갈았다.

"정말 못 말리겠군요. 하긴 지금가지의 당신으로 보아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네요!"

문을 소리 나게 닫고 방을 나온 그녀는 자신의 침실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옷을 벗고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차가운 샤워 물줄기 아래에 선 그녀는 비토와 함께 있으면 왜 항상 최대의 적은 그녀 자신이 되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언제나 자제력을 잃고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한다. 욕실에서나 오면서 그가 침실에 있길 기대했으나 그가 없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화나게 했다. 애슐리는 머리에 두른 수건을 풀고 헝클어진 머리를 빗질하기 시작했다. 머리 빗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거울 속에 있는 그를 보았다. 그녀의 머리로 손을 올린 그는 불현듯 긴장으로 떨리는 손에서 빗을 빼앗아 아주 조용히 빗질했다.

"이러지 말아요" 그녀가 약하게 말했다.

"그렇게 큰 소리쳐서 미안하오" " 날 그냥 혼자 있게 해줘요"

"그럴 수 없소 " 육감적인 그의 입술이 위험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마지막 빗질을 할 때까지 애슐리는 마치 조각처럼 앉아 있었다. 그의 두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천천히 끌어당기자 그녀는 떨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는" 그는 적당한 말을 찾는 듯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오."

목욕가운이 사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그는 굶주린 듯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초인적인 노력으로 애슐리는 그의 입술의 열기를 뿌리치고 품에서 벗어났다. 자신을 증오하며 마치 그의 흔적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는 자신의 붉어진 입술을 문질렀다. "이러지 말아요."

"왜 그러오?" 비토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당신은 날 원하고 있소. 다른 남자보다 더. 그래서 나와 싸우려는 거요. 나와 함께 있으면.... 위협을 느끼니까"

그의 조용한 확신이 그녀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어떤 심리학책을 뒤져 본 거예요?" 그녀는 간신히 말을 했다. "오해는 이유를 내가 모를 거라곤 생각지 말아요. 당신 입장에서 보면 아주 재밌겠죠"

"그럴까?" 그의 눈이 파고들 듯 그녀를 쏘아보았다. "지금껏 날 원하는 여자들은 많았소, 카라"

순간 적대감이 솟아올랐다. 사실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권력, , 악마적인 매력, 게다가 여성을 끌어당기는 성적 매력까지. 그녀가 비토를 미칠 정도로 사랑한 것도 따지고 보면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 왜 날 택한 거죠?" 그녀가 비웃듯 물었다.

그가 넓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신의 아름다움과 성격... 그리고 그밖에 자질구레한 것들이 있소...."

"말하자면?" 그녀는 방어하듯 팔짱을 꼈다.

희미한 미소가 그의 딱딱한 입술 선을 부드럽게 했다. "내게 도전하는 듯한 당신의 말투와 행동.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사사건건 나와는 반대되는 생각을 즉각 말하는 것. 무엇보다 당신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오. 마치중국의 수수께끼 상자 같단 말이오..."

물론 그가 기를 쓰고 열고 싶어 하는 상자, 그가 풀고 싶어 하는 신비겠지. 그는 그녀를 겁나게 한다. 그의 말이 옳다, 그녀는 그에게서 위협을 느낀다.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빛내면서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 그런데 당신은 우리가 논쟁할 때마다 왜 항상 마치 방어막처럼 커다란 가구 뒤에 숨는 거요?"

"그런 적 없어요" 그녀는 부정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침대 저편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지금도 그러고 있잖소. 처음엔 화가 나더니 지금은 익숙해졌소. 당신은 육체적으로 날 무서워하는 거요, 4년 전엔 그게 그렇게 모욕적일 수가 없더군" 그가 조금씩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면서 고백했다. "한 번도 당신을 다치게 한 적이 없는데 왜 날 무서워하는 거요?"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말할 필요도 없이 한 가지 대답밖에 떠오르지 않는군... 누가 그랬소?"

눈처럼 하얀 얼굴을 떨면서 애슐리는 그의 말을 인정이라도 하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가 강한 팔로 껴안는 데도 그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생각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그녀는 그가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 그를 죽여 버리겠어." 그가 이를 갈 듯 잔인하게 말했다.

그녀는 매맞는 아이는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따귀를 맞거나 몸을 잡고 흔드는 행위, 그리고 너무 세게 잡은 나머지 생기는 멍 같은 건 있었어도, 아버지가 지나치게 가부장적인 사람이고, 화가 나면 자신의 힘이 얼마나 센지 모른다고 애슐리는 항상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다고 그녀의 감정에 난 상처가 치유된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손을 대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어머니를 때린 적이 없었다. 물론 언니나 동생을 때린 적도 없었다.

왜 하필 그녀냐는 의문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그녀는 아버지의 눈에 자신은 뭔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에겐 수잔이나 팀처럼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아버지는 수잔과 팀을 무척 사랑하셨다. 팀은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과는 완전히 다르게 아들을 사랑했다. 애슐리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가 당신을 때렸냐고 묻잖소?" 비토가 물었다.

눈을 깜박인 그녀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 그건 당신의 생각일 뿐이에요" 그녀가 속삭였다.

"당신 얼굴을 보기 전 까진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긴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분노에 사로잡혀 그녀의 섬세한 얼굴선을 꿰뚫을 듯 살펴보았다. "누구요?"

그녀가 순진하다면 그가 정말로 걱정한다고 믿었으리라. 애슐리의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솟아올랐다. 그의 반응이 왜 그녀를 울리는지 알 수 없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에요" 그녀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남에게 쉽사리 말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에요"

"부부는 남이 아니요"

"우린 부부가 아니에요!" 그녀가 격렬하게 부인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당신은 내 아내요, 그 사실을 빨리 받아들일수록 더 행복해질 거요. 그리고 내가 힘으로 당신을 다치게 하진 않을 거라는 사실도 함께 받아들이도록... " 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 언젠가는 더 이상 나와 싸울 필요도 없을 거요. 나를 믿는 법을 터득하게 될 테니까"

"백년을 기다려도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녀는 일어서려고 했다.

그는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가슴 굴곡을 재빠르게 입술로 더듬었다. 그녀는 다신 주저앉으면서 자신을 뒤흔드는 뜨거운 열기를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맙소사... 잊어버리고 있었군" 손을 뒤로 뺀 그가 눈에 익은 작은 상자를 꺼내더니 한 손으로 상자를 열고 작은 알약을 내밀었다. "의학은 언제나 이득을 가져다주는 법이오. 이 약에 대해서 저녁 내내 생각했소..."

당황한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가 그녀의 입안에 약을 집어넣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꿀꺽 삼켰다. "하지만 당신은..."

"물론 이런 일이 빨리 일어날 필요는 없겠지. 그래야 당분간 즐길 수 있을 테니까..." 그가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 아주 중요하지"

그의 마음이 변했는데도 애슐리는 이상스럽게 작은 고통을 느꼈다. 그에게 임신이란 함께 잠자리를 하지 못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기쁘지 않소?"

"기뻐요.... 하지만 당신은 다른 걸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속삭였다.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작고 탄탄한 가슴을 감싸 쥐었다. 순간 반사적으로 그녀의 두 눈이 감겼다. 온몸의 작은 근육들이 모두 뜨거운 불길에 휩싸이는 듯했다. 다른 한 손이 그녀의 하얀 허벅지를 쓰다듬자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사 없었다.

한참 후, 그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비토는 몸을 굴려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팔꿈치에 턱을 괴고 그를 쳐다보았다. 긴장을 푼 듯한 그의 태도는 순전히 가장된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그의 온몸에 흐르고 있었다. 순간 그가 침대에서 튀듯이 일어나 옷을 입었다.

방금 그들이 함께 나눈 특별한 것을 뒤로하고 한마디 말도 없이 그냥 걸어 나간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문을 열려는 순간에 그녀는 도전하듯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주인님. 제가 당신을 실망시켰나요?"

빛처럼 빠르게 그가 뒤돌아섰다. 검게 빛나는 비수처럼 그의 눈길이 그녀를 찔렀다. "하나도 우습지 않소"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이런 경우엔..."

"어떤 경우? 도대체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있었단 말이오?" 그가 뜨거운 콧김을 내불었다.

하얗게 질린 그녀는 그에게 도전한 걸 후회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아내라고 말했다. 남편은 아내와 사랑을 나누고 난 뒤 곧바로 일어나 한마디 말도, 어떠한 몸짓도 없이 그냥 나가 버리지는 않는다.

"말해 봐" 그가 거칠게 말했다. "알고 싶소."

"지금이 그런 얘기를 하기에 적당한 시간은 아닌 것 같군요" 애슐리는 눈물이 나려는지 약간 울먹거리는 소리로 대꾸했다.

"네 상상력이 미친 듯 날뛰고 있소" 그가 강요했다. "난 진실을 더 좋아하오"

"당신은 진실이 눈앞에서 춤을 취도 알지 못할 거예요"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날 이런 식으로 취급하다니....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해 놓고...."

"어떻게 그럴 수 있겠소... 당신을 만질 때마다 과거가 되살아나는데?" 그가 잇새로 거칠게 내뱉었다. "나라고 이러고 싶은 줄 알아? 나 자신조차 비참해지는 그런 창피한 질문을 난들하고 싶은 줄 알아?"

"그럼, 뭘 원하는 거죠? 남자들의 명단과 장소, 시간까지?" 그녀의 신랄한 공격에 그가 눈에 띄게 몸을 굳혔다. "당신을 믿으라는 말은 뭐죠?" 그녀가 투덜거렸다. "4년 전에도 당신은 날 믿지 않았어요"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 그 이유가 뭔지 알아요? 처음 만난 날 우린 잠자리를 함께 했어요. 점잖은 숙녀라면 그런 짓을 안 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불을 내뿜듯 마지막 말을 내뱉고 나서 얼른 일어나 은신처를 찾듯 욕실로 달려갔다.

"애슐리... 이리 나와"

말없이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이번엔 그가 너무 심했다. "당신에게서 손을 떼지 못한 난 뭐 자랑스러운 줄 아시오?" 그는 런던에서도 이런 말을 했다. "애슐리..."

그녀는 순전히 그를 내쫓을 양으로 샤워 기를 틀었다. 한참 후 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특별한 계획도 없이 그저 멀리 떠나야겠다는 격렬한 생각에 사로잡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가방에 몇 가지 중요한 물건들만 챙기고 나서 발끝으로 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현관문조차 잠겨 있지 않았다.

베란다 층계를 내려왔을 때 어둠 속에서 한 물체가 성큼 나타났다. "마님, 나가십니까? 차를 원하세요?"

한밤중이었는데도 하얗게 웃는 남자는 전혀 놀라지 않은 듯했다. 서투른 그의 영어가 우스웠다.

"네 자동차" 그녀는 뭔가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아 기분 좋게 동의했다. "콜롬보에 가고 싶어요."

"밴더를 데려와야겠어요. 시간이 걸려요" 그제야 남자는 걱정스러운 듯했다.

"당신이 태워다 줄 순 없어요?" 애슐리는 그가 모든 하인들을 다 깨울까 봐 서둘러 물었다.

"? 쿠마가?" 남자는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이름을 말했다. 그러더니 아주 기쁜 듯 웃었다. ", 내가 마님을 데려간다. 쿠마, 아주 좋은 운전사 " 그가 말했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애슐리는 서둘러 차를 탔다. 쿠마는 액셀러레이터에 발을 올려놓고 도로로 질주하듯 내달렸다. 도로 위로 바퀴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좀 더 천천히 몰 수 없어요?" 애슐리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아주 천천히, 쿠마는 아주 천천히 간다"

쿠마는 100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로 내달렸다. 마치 경주를 하는 운전사처럼 모퉁이를 돌기도 했다.

"천천히!" 10여분이 지난 후, 도로 한쪽이 층층으로 경작된 차밭으로 이어지는 낭떠러지라는 걸 생각해 낸 그녀는 그제야 공포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쿠마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났다. 차는 통제력을 잃고 길 한쪽으로 미끄러졌다. 바깥쪽 바퀴가 개천을 치고, 차는 공회전을 하며 기울어지더니 마침내 멈추었다. 애슐리는 비명을 질렀다. 쿠마는 더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차가 흔들거렸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천천히 가는데 사고 났다" 쿠마가 투덜거렸다. "영화에서는 천천히 안 가, 빨리 간다." 안전띠를 푼 애슐리는 도로로 기어 나와 도랑을 건너뛰었다. 사고의 반작용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저 쿠마가 자신의 언어로 계속해서 떠드는 소리만 귓가에서 윙윙거릴 뿐이었다. 그때 뭔가 거대한 소리가 그녀의 주위를 끌었다. 달빛 아래서 차가 길 끝으로 구르더니 낭떠러지 아래, 층층으로 꾸며진 대지로 굴러 떨어졌다. 쿠마가 핸드브레이크 올리는 걸 잊은 것이다.

쿠마가 공포에 찬 비명을 지르면서 도로로 몸을 날렸다. 한참 동안 쿠마는 그런 상태로 엎드려 있었다. 애슐리는 차가 부서진 것에 대해 비토가 그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간신히 그를 달랬다. 완전히 믿지 못하는 듯한 그의 가여운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애슐리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도로 아래쪽으로 몇 마일 내려간 곳에 자그마한 민박집이 있는 것을 발견한 그들은 걷기 시작했다. 그곳까지 가는데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쿠마가 민박집 주인을 깨우는 동안 애슐리는 부러진 샌들을 벗었다. 뚱뚱한 주인과 호기심이 가득 찬 얼굴을 한 아내와 아이들은 그들의 이야기에 내심 흥분한 듯했다. 그때가 새벽 3시경이었고, 애슐리는 자신이 어떻게 그렇게 충동적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랜 된 듯한 세면대에서 찬물로 씻고 난 후, 그녀는 깨끗한 시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침대를 둘러싼 희끄무레한 모기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느 새 그녀의 생각은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 운명적인 파티가 있고 난 다음 날 애슐리는 다시는 비토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그의 제의를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그날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 그녀가 바쁘다고 하자 그는 그 다음 날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바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웃음을 터뜨릴 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날 밤 말 그대로 거대한 장미 꽃다발을 가져왔고 때마침 곁에 있던 방 친구들 때문에 그의 꽃다발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그녀는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정말로 이럴 필요는 없어요" 그녀는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와 함께 있는 게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듯했다. 그리고 별이 다섯 개나 달린 고급 식당에서 스크램블드에그와 토스트를 주문했다. 왜냐하면 자신 때문에 돈을 낭비하는 건 정말로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난 깨끗한 시트 위에서 잠을 깨죠" 그녀가 말했다. "어젯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내게 빚진 게 아무 것도 없다고요"

"왜 그렇게 날 못 밀어내서 안달이오?" 그가 마침내 그녀에게 물었다.

분명히 그에게 그건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다. 어젯밤...이른 너무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는 나이가 더 많은 만큼, 더 현명하게 행동했어야 했다. 그건 모두 그의 잘못이요, 그의 책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도 없었던 일처럼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왜요?" 그녀가 대담하게 물었다.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가 그의 아름다운 입가에 어렸다."아무래도 당신에게 푹 빠진 것 같소"

"욕정"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욕정에 빠진 거겠죠"

"게다가 당신이 내게 충분한 시간을 준다면 청혼도 할 생각이오"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 말이 그녀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가 진심일 리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까 우린 해야 할 일이 생긴 거요" 비토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난 그럴 시간이 없어요" 그녀는 심각하게 대꾸했다.

한쪽 눈썹이 휘어졌다. "날 위한 시간이 생길 거요" 그는 조금의 의심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그렇게 충분한 시간이 있지 않았다. 은행 업무란 정말로 할 일이 많았으니까. 갑자기몇 간 후에 유럽으로 출장을 가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애슐리는 강의도 듣고 짬을 내서 웨이트리스로도 일했다. 그리고 비토가 없어도 충분히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자 친구와 남자 친구도 많았다.

계획은 서로를 더 잘 알자는 데 있었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았다. 자꾸만 어긋나는 그들의 스케줄 때문에 처음3주간 동안 거의 만나지 못하고 지냈다. 함께 점심을 하기 위해 그가 그녀를 아파트로 데리고 간 날 그들은 예상치도 못한 정열을 불태웠다. 그들은 함께 사는 것에 대해 실제로 의논해 본적이 없었다. 단지 그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그녀에게 복잡한 아파트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자신의 아파트에서 공부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제의한 것뿐이었다. 애슐리는 조용한 것이 좋았고 비토는 밤마다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았기 때문에 그녀는 집에 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옷장에 옷을 함께 걸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들은 자주 의견이 엇갈려 격렬한 싸움을 하곤 했다. 그녀가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하는 웨이트리스 일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그녀를 그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그 전과 동일하게 그녀가 친구와 만나고 교내 모임에도 참여하는 게 그로서는 불만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그저 화만 낼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가 그녀와 어울리기로 마음먹고 그녀의 남자 친구와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었는데, 단순하던 그의 성냄은 걷잡을 수 없는 질투와 소유욕 짙은 의혹으로 변하고 말았다.

비토는 사귀는 여자가 있으면 그녀를 24시간 소유하길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함께 있을 수 없다면, 여자가 소박하고 여성스러운 꿈을 꾸며 집에서 얌전히 그의 전화나기다리길 원하는 남자였다.

싸움은 점점 더 격렬하고 파괴적이 되어 갔다. 두 사람 다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애슐리는 점점 더 불안해졌고, 화를 내는 그를 감당하기 힘들어 점점 더 절망적이 되어 갔다. 쉽게 그를 떠날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끔직한 진실에 하루하루가 숨 막히는 듯했다. 그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하는 곳은 오로지 침실뿐이었다.

그가 그녀를 비난하며 타이르려 한 날, 애슐리는 아파트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곤 밤새 뜬눈으로 지샜다. 그런 날이면 비토도 어김없이 잡을 설치곤 했다. 학교 성적도 나빠져 평균치에도 못 미쳤다. 그녀의 집중력은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머릿속엔 그저 비토... 비토... 비토뿐이었다. 그는 그녀가 공부하는 것을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그녀가 자신이 가진 문제를 모두 그의 탓이라고 비난하자 그도 분별력을 잃고 그녀에게 회계학의 기본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가 사과를 했지만, 그녀도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들 사이엔 돌이킬 수 없는 깊은 골이 팬 듯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 그는 갑자기 이탈리아로 떠났다. 일 주일 동안 전화도 안 할 정도였다.

그가 돌아오기 전날 엘레나가 찾아왔다. 그리고 비토가 되돌아와 최후통첩을 했다. 그의 아버지가 아프다고 했다. 런던에서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사업과 가족에 대한 의무가 있다고 했다.

"우린 결혼해야 돼" 그가 가정부에게 짐을 꾸리라고 말하고 난 뒤 어깨너머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젠 철들 때도 됐잖소" 그가 말했다.

"나도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젊을 때 가정을 갖고 싶소" 그가 말했다.

"이젠 정말로 이 따위 여권 신장론에 진력이 났소..." 그가 말했다.

"은행에서의 내 위치나 책임이 당연히 당신의 위치보다 우선한다는 것도 받아들이기를 바라오" 그가 말했다.

격렬한 말다툼이 일어났다. 그렇게 화가 난 상황에서도 애슐리는 비토가 그녀의 세계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진실로 믿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둘이 처음 만난 5개월 동안, 비토는 자신의 날카로운 혀를 감추고 그녀의 비위를 맞추고 웃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손아귀에 들어왔다 싶으니까 감쪽같이 얼굴을 바꾸고 모든 논쟁에서 그녀를 묵사발로 만들고, 말꼬리를 물고 늘어져 그녀를 정말로 어리석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애슐리는 순종적인 침묵에 싸인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토로 인해 어머니와 비슷한 수준으로 줄어든 자신을 보았다. 그런 모습에 그녀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딱딱한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거리며 애슐리는 고통스러운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멍하게 어젯밤 얼마나 도망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저 쿠마가 그녀의 바보 같은 짓으로 인해 고통 받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식당에 앉아 차림표를 들여다보던 그녀는 희미한 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비토가 베란다에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꼼짝 않고 있었다. 갈색으로 그을린 한 손이 뼈마디가 새하얗게 되도록 강하게 크림색 재킷을 쥐고 있었다. 흰 셔츠는 단추가 아무렇게나 잠겨져 있고, 검은머리는 젖은 채 헝클어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은 긴장된 턱선을 따라 거뭇해진 수염이다.

그는 천천히 침을 삼키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강렬한 눈으로 그녀의 놀란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당신이 죽은 줄 알았소" 그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비토는 부산스러운 집주인이 가져온 술을 한 입에 털어 넣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강한 술기운이 그를 소생시킨 듯했다. 긴장했던 입술선도 부드러워지고, 안색도 자연스럽게 되돌아왔다.

"프라이야가 날 깨우더니 어젯밤에 유럽 여자가 차를 타고 나갔다고 말하더군. 그러고는 죽었다고..."

애슐리가 창백해졌다. "미안해요"

"차를 보니 어느 누구도 살아 나올 수 없는 상황이더라구" 그는 아직도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곳에 온 건 당신의...

시체가 어디로 옮겨졌는지..." 갑자기 그의 고르지 못한 목소리가 끊어졌다.

"쿠마와 난 차가 길 아래로 구르기 전에 밖으로 나왔어요, 쿠마가 핸드 브레이크 올리는 걸 잊었지 뭐예요" 그녀는 목안에서 불안정한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걸 참았다.

"사고는 그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비토가 이를 갈 듯 소리쳤다. "그는 면허증도 없소. 당신을 죽일 수도 있었단 말이오!"

"쿠마가 운전할 줄 모른다고요?" 애슐리는 당황해서 간밤의 대화를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쿠마는 밴더를 데리고 오겠다고 말했는데도 그녀가 그에게 운전해 달라고 요청했다. 쿠마는 그저 그녀의 요청에 흥분해서 기분이 우쭐해진 것이다. " 그런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어요" 그녀가 서둘러 덧붙였다. " 그에게 데려다 달라고 내가 고집을 부렸거든요. 그 사람 잘못은 없어요. 그저 날 기쁘게 해주려고 그런 거예요"

비토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관심 없는 눈빛이었다. " 그를프라이야에게 보내겠소. 그녀의 조카거든" " 그가 일자리를 잃게 되는 건 아니겠죠?"

"당신이 살아 있으니까. 어쨌든 지금은 뭐든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요? 내 동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땐 금방이라도 감옥에 보낼 것 같더니만.." "쿠마는 내가 결혼하고 싶은 누나를 갖고 있진 않거든"비토는 전혀 웃지 않고 말했다. " 그래서 용서하는 쪽을 택했소"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지 궁금하겠죠..."

그는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주인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우린 첫날밤을 좀 특별하게 보낸 것 같군" 그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침이나 먹자고"

식탁 위에는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음식이 탐스럽게 놓여 있었다. 애슐리는 정말로 배가 고팠다.

비토의 침묵이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인데도, 둘이 나란히 앉아 조용히 아침 식사를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녀가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이젠 날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겠죠. 서로 동의한 일이..."

"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소" 그가 무뚝뚝하게 말을 가로막았다.

"우리 두 사람 모두 감정적이었어요" 그녀가 우울하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의 과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은 내게 없소" 그는 절제된 눈길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자신의 잘못을 차분히 시인하는 듯 별다른 변화는 없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육감적인 입술은 그가 결코 쉽게 내뱉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사실, 나 역시 금욕적인 생활을 한 건 아니니까"

"이해할 수 있어요" 갑자기 상황은 그가 용서를 빌고, 그녀가 용서해 줘야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자존심뿐이었다.

"지난 18개월 동안 여자가 하나 있긴 했소"

그의 말이 그녀를 경악케 했다. 애슐리는 혀를 깨물었고 비릿한 피맛이 났다.

비토는 들릴 정도로 숨을 크게 내뱉었다. "몇 달 전에 헤어졌소. 그녀의 뭐가 날 끌어당겼는지 알아?"

구역질이 났다. 비토는 고백을 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가 왜 이러는지 그녀로선 정말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그가 입을 다물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그가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건 생각도 하기 싫었다.

"당신과 똑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소" 자신을 경멸하듯 그의 목소리엔 분노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었지"

"나처럼 오밤중에 산을 내려가다 당신의 차를 박살내 버리는 여잔 아니겠죠. 아마" 그녀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당신 이외엔 어느 누구도 못하는 짓이지" 거의 놀리는 듯한 어조였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런 말하긴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해야겠소" 그가 숨을 내쉬었다. " 그 파티가 있던 날 당신이 한 말 ...당신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라고 한 거 ... "

"그 얘긴 하고 싶지 않아요" 이번엔 그녀가 말을 가로막았다. 아기... 그 얘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애슐리..."

"아뇨!" 격하게 말한 그녀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우린 얘길 해야 해"

"싫어요!" 비틀거리며 벌떡 일어선 그녀가 그가 더 고집을 부린다면 달아날 생각이었다. "어쩌면 너무 이른지도 모르겠군" 그는 놀라울 정도로 마음 좋게 포기했다.

형편없이 찌그러진 차를 보고 그녀가 죽었거나, 죽진 않았다 하더라도 죽기 일보 직전의 부상을 당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너무 심하게 놀란 나머지 아직도 제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놀라울 정도의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이 얼마나 오래 갈까?

그로부터 10일 후, 그녀는 댐불라 동굴 사원의 높은 성벽 위에 서 있었다. 햇빛이 달구어진 땅의 열기를 맨발로 느끼면서 요 며칠 동안 비토가 정말로 정중한 태도로 손톱만큼의 적대감도 없이 잘 지내려고 애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면에선 비토를 전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중이었다. 조금 화가 나기도 했지만 사실이었다. 사소한 충돌로 일으킬 만한 소지가 있는 화제가 금지된 지금, 매순간마다 긴장감이 감돌던 때는 이미 지나가고 없었다.

그녀는 정글의 편평한 분지 위에 솟은 몇백 피트나 되는 거대한 붉은 바위들과 시기라야 시가지의 전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비토가 쓰라고 고집을 피우며 준 밀짚모자를 썼는데도 무척 더웠다. 얼굴 위로 미끄러지는 땀을 닦으면서 그녀는 갑자기 심한 피로와 현기증을 느꼈다. 높은 곳에 있는 사원까지 힘들게 등반한 후에도 안내원은 긴 시간 동안 그들에게 벽과 지붕에 칠해진 그림들을 구경시켜주었다.

"물 좀 마실 수 있을까요?" 그녀가 속삭였다.

비토는 작은 스님과 하던 얘기를 멈추었다. 그의 이런 면도 요즘에 알게 된 것들 중 하나였다. 그는 결코 한때 그녀가 생각했던 그런 돈 많은 속물도, 일 중독자도 아니었다. 그런데 4년 전에는 왜 그런 식으로만 보였을까?

"힘들어 보이는군" 한쪽 팔로 그녀를 살포시 부축하며 그가 중얼거렸다.

"더워서..." 그는 벽이 만들어 놓은 그늘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당신을 이곳까지 데리고 올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녀는 두 팔로 자신을 감싸 안았다. 스리랑카로 왔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황소기질을 가졌다고 마음속 깊이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녹초가 된 게 지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저께와 그끄저께도 이렇게 다리가 떨리고 구역질이 아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 비록 그런 자신의 나약함을 비토에게 숨기긴 했지만. 그는 야단법석을 떨었다. 층계에 그녀를 앉히고 나서 어딘가에서 부채를 들고 와 열심히 부쳐 댔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엾고 약한 여자를 구해 주는 강하고 자신감에 찬 남자처럼.

내려오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비토는 마을의 작은 카페로 그녀는 데리고 가 차가운 음료를 사주었다. "차있는 곳에 가기 전에 여기서 잠깐 쉬도록 합시다"

"관광이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그녀는 우울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비토는 긴장했다. "일이 그리운 모양이군"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었어요"

"당신은 일에 대해선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소" 그가 지극히 가볍게 말했다.

"별로 얘기할 게 없어요" 그녀는 음료수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의 조각 같은 광대뼈가 어두운 기색이 깃들였다. "물론 그 일로 날 비난하겠지. 일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소. 만약... 그러니까... " 그가 정말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 우리가 헤어질 때, 당신이 원하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필요한 건 뭐든지 해 주겠소. 아는 데가 많거든"

"관두세요. 카발리에리 가의 영향력이 지나쳐서 일을 얻지도 못할 거예요" 뻣뻣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우리가 헤어질 때 .... 지난번엔 수표 얘길 하더니, 이번엔 새로운 일자리라. 그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줄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것을 줄 수는 없으리라. 그녀는 갈망과 가지 혐오감으로 가슴이 메슥거렸다.

그날 밤 이후, 그는 한 번도 그녀를 만진 적이 없었다. 매일 저녁 식사가 끝나면 잘 자란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대용으로 쓰는 서재의 컴퓨터로 가 버리고 그녀는 혼자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오랫동안 서재에 머물면서 겨우 몇 시간 정도의 수면만 취하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다른 연인이 있었다고 생각하자 정나미가 떨어져 버린 걸까? 아니면 이런 예상치 못한 자제 뒤에 뭔가 타당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더 이상 그녀에게서 욕망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이미 알고 다 아는 처지란 경멸을 가져 올 수도 있는 일이니까.

"정확히 어디서 일했소"

"당신이 전혀 모르는 곳"

"왜 그렇게 비밀에 부치려고 하오?"

"이봐요!"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빈정거리듯 중얼거렸다. "난 대학에서 밀려났다고요, 비토"

그는 못 믿겠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어쨌다고?"

"시험에서 떨어졌어요"

"낙제를 했다는 말이오?" 그는 경악한 듯했다.

그녀는 대담하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 어째서 시험을 다시 치지 않았소?"

"건강 상태도 안 좋은데다가 아버지가 원조를 끊었어요."

"?"

"왜냐하면 당신과 동거했다는 걸 알아 버렸기 때문이죠" 그가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학생에게 대출해 주는 제도는 없었소?'

"그때 이미 난 많은 부채를 안고 있었어요. 비토. 원조 없이 공부하며 생활비를 번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예요"

그는 매우 창백했다. " 그런데도 여전히 내 돈은 받지 않았군, 당신의 말대로라면 점점 더 힘든 일뿐이었는데도 말이오"

한때 그는 애슐리의 야망을 깊게 혐오했다. 야심에 찬 여자와 같이 있는 게 불편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야망보다 그녀의 야망이 더 높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다 흘러간 일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살았소?" 그가 우울하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일했죠. 한동안은 가게에서 일했어요. 속물같이 이해하는 척하지 말아요, 비토!" 그를 쏘아보면서 그녀가 내뱉었다.

"난 속물이 아니오" 그가 으르렁거렸다. " 그저 당신의 얘기에 마음이 뒤숭숭할 뿐이오."

", 그런 감정도 꺼버려요. 그땐 내 곁에 있었다 해도 고소해 했을 거면서!" 애슐리는 씁쓸하게 말했다. "고작내 욕구와 야망이 당신의 것에 비해 보잘것없게 됐다는 말이나 했겠죠. 놀라운 일도 아니죠. 비토, 내가 열 일곱 살 때 운전을 배우고 싶어 했는데 아버진 만약 신이 여자에게 운전을 시킬 생각이었다면 태어날 때부터 운전대를 갖고 태어나게 했을 거라고 말했으니까요! 아버지와 당신은 선사 시대 동굴에서 아주 사이좋게 지낼 거예요!"

"당신 기분이 그럴 땐 무슨 말을 해도 안 먹혀들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치한 짓이었지만 괘씸한 마음이 조금 가시는 듯했고 그를 안절부절못하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현재 비토를 사랑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난 날 그가 얼마나 거만하고 이기적인 돼지였나 하는 걸 잊을 생각은 없었다.

"우린 너무 닮았소" 그가 한숨을 쉬었다. "다혈질에다 강한 의지력과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지"

"난 자기 중심적이진 않아요" 그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녀를 힐끗 보았다. "4년 전 당신은 한 번도 내 감정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었소. 당신의 감정을 내게 얘기한 적은 있어도, 내겐 뭘 원하는지 물어 본 적이 없었소. 자신이 뭘 할 건지에 대해서만 얘기했지,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었소"

애슐리는 자신이 얼마나 방어적이었던가, 또한 얼마나 완고했던가를 생각하면서 몸을 떨었다.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게임도 감수했소. 하지만 다른 사람의 규칙에 따른 게임을 한다는 게 내게 그다지 자연스런 일은 아니었소"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서 할 수 있는 한 격렬한 어조로 말했다.

비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게 더욱 그녀를 화나게 했다. 물론, 날 사랑했을 리가 없겠지. 사랑에 빠진 남자라면 그렇게 곧장 다른 여자와 결혼할 리가 만무하니까.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 뭔가 다른 게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가 짜 맞추어야 할 어떤 사실이. 비토는 그녀가 스티브와 함께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와 함께할 미래가 없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것 아니었을까? 그리고 카니라, 어릴 때부터 친숙했던 카리나가 더 알맞은 아내가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애슐리는 머리가 아파 왔다.

두 번째 주는 느릿하게 흘러갔다. 애슐리는 매일 오후수영장 옆 긴 의자에 드러누워 커다란 양산 아래서 꾸벅꾸벅 조는 게 일이었고, 비토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서재에서 보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 받지 못하는 여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고 둘 사이에 감도는 침묵으로 또다시 긴장이 고조되었다. 비토처럼 활력이 넘치는 남자가 이렇게 성 과계를 절제할 수 있다는 참으로 특이한 신혼여행이었다.

지루해진 그녀는 또 다른 잡지를 찾으려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무릎에 조개처럼 착 달라붙은 젖먹이와 함께 프라이야가 복도에서 꽃을 꽂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활짝 웃으며 애슐리가 몸을 숙였다. "누구예요?"

"막내 손자예요. 뉴안이라고" 프라이야가 걱정스러운 듯한 숨을 쉬었다. "사위가 캔디에 있는 병원에 입원 중이라딸도 함께 가 있거든요"

"심각한 병은 아니겠죠?" 애슐리는 꼬마의 시선을 끌기 위해 손장난을 하느라고 바빴다. "종기인 모양인데 오늘 수술이랍니다"

"내가 아기를 정원으로 데리고 나갈게요. 날씨가 아주 좋아요"

두 시간 후, 풀이 무성한 정원에서 들리는 소리란 애슐리와 장난치는 뉴안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뿐이었다. 지난한 시간 반 동안 애슐리의 팔 안에서 편안하게 잠자던 뉴안이 30분전에 깬 것이다. 프라이야가 기다란 잔에 라임주스를 담아 와서는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좀 쉬셔야 해요, 마님" 그녀가 불안한 듯 법석을 떨었다. "너무 지치면 아기에게도 마님에게도 안 좋아요"

아기를 받아드는 프라이야를 보며 애슐리는 얼어붙었다. 프라이야는 자신의 손자 얘기를 한 게 아니었다.

조그만 체구의 여자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자식이 열 명이고 손자가 20명인 걸요. 척하면 삼천리죠.... 주인님은 마님이 왜 하루종일 피곤해 하고 식욕이 없는지 걱정하세요. 빨리 말씀드려요, 주인님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 주라고요"

프라이야가 집으로 들어가자 애슐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불가능해, 불가능한 일이라고. 런던의 그날 밤, 거역할 수 없는 열정이 모든 자제력을 앗아가 버린 그날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이젠 명백해졌다. 구역질, 현기증, 피곤함, 코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도 몰랐다니... " 프라이야의 손자랑 있는 당신을 봤소"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그녀의 얼굴에 분홍 물이 들었다. 좁은 엉덩이와 긴 근육질의 허벅지가 두드러지는 바지를 입은 비토는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힘들게 그의 남성적인 육체에서 눈을 뗐다. "일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요."

"하루 종일 컴퓨터와 시간을 보내려고 당신과 결혼한 건 아니잖소"

물론 아들을 갖기 위해 결혼한 거겠지. 코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애슐리는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충격에서 아직헤아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임신하긴 했지만 옛날처럼 다시 유산할 가능성도 농후했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비토는 억제된 어투로 말했다.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아이들을 잘 다루는군"

"애들을 싫어한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 내가 뭐 애들과 잘 지내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요? 내가 교육받은 것도 ... 지금껏 하던 일도 바로 그건데!"

비토는 매우 당황했다. "당신의 일?"

"탁아소에서 일했어요" 샌들에 발을 꿴 그녀는 숲으로이어 진 비탈진 잔디밭을 걸었다. "이전엔 왜 그런 얘길 안 했소?" 갈색 손가락들이 그녀의 약한 팔을 잡았다.

화가 난 그녀는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녀는 나무 그늘로 걸어갔고 그는 다시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들은 야생란과 무성한 잎사귀로 둘러싸인 채 서있었다. 그곳은 길고 넓은 잎사귀들이 많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공작새가 짝을 부르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비토의 어둡게 빛나는 눈을 어지럽게 바라보았다. "혼자 있고 싶어요!"

"당신은 그레타 가르보가 아니오. 그만 도망다니라구" 그가 뱉어내듯 말했다. "당신에게 시간을 준 게 실수였소"

"무슨 뜻이에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당신을 혼자 있게 해준 건 우리 결혼에 대해 제대로 된 생각을 하리라는 희망 때문이었소. 하지만 당신이 한 일이라곤 또다시 내게서 멀어지는 것뿐이었소. 우리 사이엔 끊을 수 없는 운명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내게로 와서. "

"운명?" 그녀가 코웃음 쳤다.

그의 눈동자가 원시적인 불길에 타올랐다. " 그러지마"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뭘요? 웃지 말라고요?" 애슐리는 희미하게 흥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남성다움이 그녀로 하여금 싸우고 싶게 만들었다. "당신 생각을 내가 모를 것 같소? 호랑이처럼 발톱을 세우고 날 할퀴고 싶겠지만 마음대로 안 될걸" 그가 쏘아붙였다. "싸우려고 결혼한 게 아니잖소. 승자와 패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어느 새 애슐리는 그의 금빛 눈동자에 갇힌 자신을 발견했다. "정말로 내 생각을 알고 있다면, 승자니 패자니 하는 말은 못할 거예요. 당신이 미워요!"

"아니, 당신은 날 믿기가 두려운 거요" 그가 거만하게 반박했다. "미워하는 게 아니라고" "당신이 미워요!" 그녀는 계속 격렬하게 대꾸했다. "미워요! 밉다고요!"

애슐리는 두려웠다. 이젠 그가 뭘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껏 아들과 복수 중 어느 것을 더 원할까, 하는 의문을 수도 없이 가졌다. 복수, 결혼하던 날 밤. 아이 갖는 걸 잠시 연기하자는 그의 말이 바로 대답이었다.

"다시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어요! 알겠어요?" 그녀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황당하게도 눈부신 미소가 그의 딱딱한 입술 선을 부드럽게 해주었다. "하루에 적어도 두 번은 당신을 몰아붙여야겠군. 일주일 후엔 당신의 모든 비밀과 ... 모든 생각을 알 수 있겠는 걸. 그래, 이젠 4년 전 당신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날 사랑했다는 걸 알겠소?" 화를 내는 통에 자신이 인정한 사실에 경악한 그녀는 몸을 돌려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렇겐 안 되지" 미처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힘센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는 다른 쪽 손을 들어 그의 따귀를 때리려고 했다. 비토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균형을 잃은 그녀의 허리를 안고 풀밭에 넘어졌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불리한 자세가 되자 애슐리는 그에게서 빠져 나오려고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 !" 그가 야단치듯 말했다. "치고 달린다. 곤경에 빠지면 항상 그러나 보지?"

"왜 이러는 거예요!"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의심으로 불타올랐다.

한순간 그의 표정은 뻔뻔스럽게도 장난기가 흐르는 듯하더니 이내 진지해졌다. 그녀의 두 손을 잡은 채 그는 굶주린 듯 입술을 탐했다. 거친 불길이 찌르듯 그녀의 명치를 집어삼키고, 그의 혀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입술이 빨갛게 멍들고 그녀의 뼈 마디마디가 뜨거운 피부 아래 꿀처럼 녹아내릴 때까지 입 맞추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원하오" 그가 고백했다. "너무나 당신을 원했소 당신을 가지게 되면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기분일 거요"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속옷을 벗기고 부드러운 피부를 만졌다. "안돼요" 그녀가 신음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과는 반대로 몸은 이미 그녀를 배신하고 있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었다.

"아니, 당신을 가질 거요 ... " 그가 웅얼거렸다.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오히려 지난날의 사랑보다 더 강렬하고 격렬했다. "당신이 고양이였다면, 엔진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을 거요" 그녀의 눈썹에 장난스럽게 키스하고 나서 비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옷을 다 차려입은 그는 활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미소를 지었다. "기분 전환 겸 나랑 같이 아침 먹자고 하면 싫다고 하겠지?"

"싫어요" 그녀의 대담을 시트에 가려져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일어나 앉기라도 하는 날엔 그의 앞에서 토할 것만 같아서 조각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는 껄껄 웃으며 날렵하지만 느릿한 동물처럼 방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어갔다. " 그럼, 나중에 봅시다"

지난번엔 이 정도로 입덧이 심하진 않았다. 의사가 말하길, 입덧을 안 하는 건 그만큼 임신이 불안정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죽을 것 같은 구역질은 임신이 아주 안정적이라는 뜻이다!

프라이야가 비스킷과 향기로운 차를 갖고 나타났다. 프라이야는 애슐리에게 의사에게 가봐야 한다고 걱정했지만 그녀는 충고를 무시했다. 프라이야가 욕실에서 매우 아파하는 애슐리는 발견한 뒤로 이런 아침 풍경은 일상이 되고 말았다. 예전에 한 번 아기를 잃은 경험이 있는 그녀는 쓸데없이 비토의 희망을 부풀리고 싶지 않다고 프라이야를 설득시켰다.

그렇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는 아이를 가졌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어떤 검사나 조사는 필요 없었다. 벌써 가슴이 부풀고 극도로 예민해졌다. 곧 배가 불러올 텐데 언제까지 비밀을 지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비토는 그녀와 같은 침대에서 자면서 매일 밤 사랑은 나누었다. 오후 시간에도 그녀와 사랑을 나누는 일이 허다했다.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는 시간은 바로 지금, 오전뿐이었다. 그녀도 그런 그의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이 좋았다.

이미 한 달 전에 털어놨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는 그녀를 혼자 두고 떠났을 것이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자존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래 전에 그렇게 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런 상태가 그녀는 너무나 행복했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하루하루 살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내일이면 그들은 런던으로 되돌아간다. 신혼 여행은 끝이 나고 괴로운 현실이 눈앞에 닥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보호하듯 한 손으로 배를 만졌다. 아이를 빼앗길 순 없었다. 어딘가 멀리, 카발리에리 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으로 달아나야 한다. 그러려면 달이나 화성 같은 곳으로 가야겠지.

점심시간 직전에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눈동자와 똑같은 에머랄드색 옷을 입은 애슐리를 본 비토는 통화중이었는데 수화기에다 대고 말을 더듬거렸다.

"분명히 아주 공기가 좋아서일 거요" 그가 웅얼거렸다. 그의 어두운 두 눈은 어지러운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날이 갈수록 더 멋있어지는군"

"그저 당신의 눈에만 그런 것뿐이에요" 그녀는 커다란 크림 접시를 앞에 둔 고양이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맙소사, 당신은 날 죽이고 말 거요" 그가 속삭였다.

그가 원하는 건 섹스지만 ... , 어떤가?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기꺼이 두 번째로 만족하고 오늘을 위해 살기로 했다. 쓴 후회 같은 건 내일을 위해 미뤄 두기로 했다. 그녀에게 허용된 유일한 행복이 이것이라면, 흔쾌히 탐욕스런 두 손으로 거머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식사해요" 그녀가 말했다.

"오늘이 여기서의 마지막 날이오" 그가 마지못한 어조로 말했다. "코끼리를 다시 보고 싶다고 했잖소"

지난주에 피나웰라에 있는 코끼리 집에 갔었다. 그가 기억하고 있었다. 완벽한 친구이자 연인이며, 재밌고 사려 깊은 지성적인 비토.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비토. 가끔은 이 정반대의 비토의 성격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래서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지도 모른다.

"사진을 보는 걸로 대신할래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할 얘기가 있소"

그는 진지해 보였다. 요즘은 그가 진지해질수록 그녀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순간 입맛이 싹 가시고 말았다. 그녀는 음식을 접시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얘기만 하려고 하면 왜 그렇게 불안해하오?""싸우게 되니까요"

"싸우지 않아도 되잖소" 그가 으르렁거렸다.

"당신은 날 교장실 바깥에서 기다리는 아이처럼 느끼게 해요"

"당신에게 그런 기분 들게 하고 싶지 않소, 하지만 우린 서로에게 아주 솔직해지는 법을 배워야 하오"

"왜요?" 그녀가 내뱉듯 물었다. "몇 달 후면 난 가버릴 건데 ... 안 그래요?"

그가 긴장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좀 더 나은 대화를 해서 안 될 건 없잖소?"

똑같이 긴장하며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당신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어요. 그렇죠? 지금껏 당신이 원하는 걸 주려고 노력했지만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 거예요! 물론 우리가 지금 나누고 있는 게 환상이란 것도 알아요, 하지만 .... "

"그런가?" 우울한 검은 눈동자가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 그래요" 자랑스럽게 턱을 치켜들었지만 속으로는 그가 이미 의심하고 있지 않나 해서 두려웠다. 자존심만은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당신의 돈에 상응하는 좋은 것을 제공하고 있잖아요!"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거짓말을 철회하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경멸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벌떡 일어섰다. "창녀가 필요하다면 창녀에게 갈 거요. 하지만 당신은 열정에 대한 보너스를 받을 자격이 충분한 것 같군!" 그녀 앞에 작은 가죽으로 된 지갑이 툭 던져졌다.

"의무감 이상의 서비스에 대한 값이오"

그는 집 앞에 있던 4륜구동 차에 올라타더니 끼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는 지갑을 열었다. 팔랑개비 국화 같은 흠집 없는 파란 색 사파이어 반지가 손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보석은 매우 이국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최상급의 보석으로 몇천 파운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이 그녀의 기분을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 그건 약혼이나 결혼반지처럼 어떤 명분을 나타내기 위한 게 아닌 개인적인 선물이었다. 그녀는 울컥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돌아온 건 9시가 지나서였다. 그녀는 거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가에 그가 나타나가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그렇게 애원하는 투로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의 어둡고 전혀 미소 짓지 않는 옆 얼굴을 힐끗 쳐다본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괴로웠다.

"잊어버려" 그가 차갑게 대꾸했다. "당신은 응당한 보답을 받은 거니까"

"하루 종일 어디 갔었어요?" "마치 진짜 아내처럼 묻는군"

비토, 사랑해요. 제발 내게 이러지 말아요. 그녀는 그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아직, 아직은 아니었다. 어쩌면 영원히 준비가 안 될지도 모른다. 그가 술 한 잔을 따라 그녀에게 건냈다. "잠자리에 들어야지, 내일은 아침 일찍 떠날 거요"

"내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진정해. 당신 남동생은 몇 주 전에 풀려났으니까"

"내가 사과하는 건 그 일과는 아무 상관없어요."

"없다고? 글쎄, 우리 사이엔 단 한 가지 조건밖에 없었잖소, 안 그렇소? 말해봐" 그가 거칠게 물었다. "나와 끊임없는 섹스 경험에서 당신이 이렇게 울며 애원할 정도로 내가 좋았다는 거요?"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과는 그런 경험이 없었으니까" 딱딱하게 굳어져 대답했다.

"불평등한 걸 좋아하지 않았잖소, 카라. 4년 전 당신이 그 자식 팔에 안겨 길을 걷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그가 잔인하게 내뱉었다. "만약 내가 차에서 내렸더라면, 당신을 죽여 버렸을 거요!"

"4 ... 4 년 전 에요?"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스티브와함께 있는 날 봤다고요 ... 길에서?" "서면으로 써주길 원하오?" 그가 빈정거렸다.

"... 그렇다면 당신은 ... "

"청혼을 거절당한 후에도 돌아왔냐고?" 그가 차갑게 물었다. "물론, 하지만 그 당시의 난 처벌에 관한 한 풋내기였소"

그녀는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나와 스티브 사이에 아무 일도 없다는 걸 알지 못했군요!"

"당신은 그의 팔에 안겨 있었고 그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소"

그녀를 봤다던 그날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날이었다. 학생들이 주로 모이는 술집에서 그녀가 울기 시작하자 스티브는 재빨리 그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에 뭐가 잘못됐을까, 하고 질문하자 그가 안아준 것뿐이었다. "맙소사, 그가 한 일이라곤 날 안아 준 것뿐이었는데 ... 당신과 아기 때문에 너무나 화가 난 날 달래 주려고요!"

"그런 순서라면, 알겠군. 아기에 대한 공포, 그리고 나"

뭔가가 애슐리의 안에서 끊어졌다. 마지막으로 잡고 있던 지푸라기마저 놓친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격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날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날이었어요, 절벽 끝에선 기분이었죠!" 그녀가 사정없이 말했다. " 그런데 당신은 가까운 차안에 앉아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스티브가 하게 내버려두고 있었다는 말이에요? 날 감시하고, 있지도 않은 증거로 구역질나는 의심이나 하고 있었어요? 이제 와서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어떻게?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라도 그렇게 가까이 있었지만 소극적이어서 나설 수 없었다는 말은 안 하겠어요"

그녀의 격렬함이 그를 놀라게 한 게 분명했다. "소극적이어서 그런 게 아니야!" 그가 잇새로 뱉어냈다.

", 아니라고요?" 그가 얼굴 하나는 더 컸지만, 애슐리는 그를 올려다보며 으르렁거렸다. "소극적이어서 그랬다는 것도 좋아요. 당신은 날 충분히 사랑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았어요. 비토, 무엇보다 그 비뚤어진 자존심이 먼저였죠!"

"그건 ... "

"그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 버렸어요! 내가 용서하고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내게 빚을 졌어요, 비토 ... 매일 아침 가슴에 칼을 맞지 않았나 확인해야 할 거예요!"

분노에 찬 그녀는 그에게 잡힌 두 손을 확 잡아 뺐다. 좌절감과 고통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실제로 그를 치지나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4년 전 바보 같은 오해로 인해 그녀의 인생과 행복이 물 흐르듯 흘러가 버린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진 않았소" 마지못한 고백을 나지막했다.

드디어 그녀의 입장이 밝혀졌지만 우습게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애슐리를 사라했지만 그는 카리나와 결혼했다. 그건 그가 애슐리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 정보가 결코 달가울 리 없었다.

"더 얘기하고 싶어요, 비토? 좀 더 나은 대화를 계속하고 싶은가요? " 그녀가 이죽거렸다. " 그녀는 사랑하지 않았지만 당신은 그녀와 결혼했어요 ... "

"당신이 날 원하지 않았으니까"

", 이런 바보!" 애슐리는 코웃음을 쳤다. "여자에게서 사랑을 받는지 아닌지도 구분 못해요? 스물다섯 살이 되기 전엔 6명의 아이도 결혼도 싫다고 말했지 ... 당신이 싫다고 말하진 않았어요!"

비토는 현기증이 나는 듯했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맙소사" 그가 낮게 말했다.

분노가 어느 정도 가시자 눈물이 솟아올랐다. "자러 가야겠어요."

"애슐리"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마지못해 그를 쳐다보았다. 음울한 눈동자가 그림자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4년 전 우린 둘 다 너무 성급하고 어리석은 결론을 내렸소"

"나보다 당신이 더 많은 선택을 했죠"

"당신에게 청혼한 건 그 길밖에 없었지 때문이오" 그가 평이한 어조로 투덜거렸다. "런던에 머물 수도, 내 아내가 아니면 당신을 이탈리아로 데리고 갈 수도 없었소"

그녀가 비꼬는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내게 결혼하자고 물어 보지 않았어요. 우리가 결혼해야 한다고만 말했죠"

"그게 그 말이었소"

"당신의 태도는 항상 그랬어요 ... 최후통첩이었죠. 당신이 원하는 것과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뿐이었어요."

"그렇게 생각했소? 아니오, 그 당시 당신은 결혼을 원하지 않았소. 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지. 당신 눈에는 선물과 꽃다발이 더 근사한 청혼으로 보였겠지. 하지만 그때 우리 아버지는 살날이 겨우 몇 달밖에 남지 않았고 ... "

"아프시다고 했지 죽어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요!" 그녀가 비난했다.

"당신이 별로 관심 있어하지 않기에 ... "

죄책감이 들어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때 마침 그의 어머니가 다녀간 뒤라 상처받고 방어적인 기분 상태였다. 그의 가족이 관련된 일이라면 그다지 너그러운 마음이 되지 못했다.

"난 이미 화가 나고 괴로웠소" 비토는 딱딱하게 고백했다. "아버지가 나더러 카리나와 결혼하라고 했거든 ... 내가 이미 당신에 대해 얘기했는데도 말이오! 그 문제로 우린 쭉 격렬히 맞서고 있었소. 죽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유언이었소.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유언으로 남기셨소 ... "

"몰랐어요" 그녀는 충격 받았다. 그녀와 결혼하길 바랐던 비토는 단순히 가족의 반대에만 부딪힌 게 아니었다. 늙고 병든 아버지의 불합리한 요구와 대치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비토는 가족들과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보수적인 그는 분명 손톱만큼의 걱정도 끼치지 않는 충성스럽고 책임감 강한 아들이었으리라. 비로소 애슐리는 엘레나 디 카발리에리의 방해 공작 뒤에 숨겨진 강한 동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애슐리가 자신의 아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거라고 믿었으리라.

"알았다고 해서 달라졌을까? 지금 당신은 옛날에 날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그가 빈정거렸다. "우리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계속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소"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당신은 언제나 우리의 관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암시를 했으니까... <만약 내가 누군가를 만난다면, 만약 당신이 다른 누군가를 만난다면>이란 말을 자주 했지!"

애슐리는 턱을 치켜세웠다. " 그땐 난 자신이 너무 어려서 어떤 약속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속박된 기분이 싫었어요 ..."

"그래서 언제나 날 하룻밤 상대처럼 느끼게 만들었군 그래!" 그가 거칠게 쏘아붙였다. "그렇게 느낀 건 바로 나예요!"

"다음 모퉁이만 돌면 나보다 더 나은 남자가 기다릴지도 모르니까 두려웠던 거요" 비토는 분노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비웃었다. "그럴 듯하지만, 아무도 없었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내가 개방적인 어른의 관계를 제의했지만 당신이 다룰 줄 몰랐던 거예요!"

"당신은 어른의 <>자도 몰랐소"비토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날 원하기는 했지만, 나와 함께 해야 하는 맹세 따윈 원하지 않았던 거요. 당신이 내게 준 건 섹스와 바보 같은 말다툼, 혼란뿐이었소!"

"... 고맙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크게 떠진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당신은 내 감정 따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거만하고 고집 센 ... 황소 같은 사람이에요!" 애슐리는 쏜살같이 방을 빠져나가 한 번에도 계단씩 뛰어 올라갔다.

비토는 복도로 성큼성큼 걸어가 검은머리를 뒤로 젖혔다. "런던의 우리 집 욕실엔 잠금 쇠가 없을 텐데 그땐 어떡할 거요?" 그가 이죽거렸다. " 그런 감정을 나와 같이 나눠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쾅하고 닫히는 문소리가 대답이었다. 애슐리는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감정의 불길이 그녀를 탈진시켰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그녀는 다시 싸울 태세를 갖추고 고개를 들었다. 프라이야가 나타났을 때 애슐리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간섭한다고 생각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프라이야가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그녀 뒤로 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 "계단을 그런 식으로 뛰어오르면 넘어져 아기가 다칠 우려가 ... "애슐리가 신음했다. "맞아요 ... 깜박 잊고 있었어요 ... "

"아이를 갖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면 안 돼요. 마님, 언제나 차분하고 조심스러워야 하죠. 아깐 가슴이 조마조마 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어요" 애슐리는 자제력을 잃은 자신에게 다시금 화가 났다. 그때 비토가 문가에 나타나자 프라이야는 인사를 사고 재빠르게 방을 나갔다.

"뭘 원하는 거죠?" 그녀는 비토가 혹시 그들의 대화를 엿듣지 않았을까 싶어 두려웠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갑작스런 이해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잘 자란 인사하려고"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잘 자요!"

"당신 어머니의 임신 경력에 대해 알면, 카발리에리 부인... " 베키트 의사가 입을 열었다. "브라운!" 애슐리가 그에게 다시 경고했다. "아무도 내가 임신했다는 걸 몰랐으면 해요"

"전에도 말했듯이 어머니의 불행을 지나치게 마음에 두는 것 같소. 솔직히 난 당신의 건강보다 정신 상태가 더걱정스럽소. 당신의 임신은 정확하게 단계를 밟아 나가

고 있소. 2주 동안 피임약을 복용했다고 해서 아기에게 어떤 해를 입히진 않소. 좀 준 체중도 입덧이 가라앉으면 자연스레 괜찮아질 거요. 앉고 싶소?"

등을 뻣뻣하게 펴고 긴장한 채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뭐가 잘못됐어요?'

그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잘못된 건 아무 것도 없소. 내가 말하는 대로 스캔을 바라보기만 하면 ... "

"아기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말아요"

"내 환자로 남아 있고 싶으면, 더 이상 비관적인 말은입 밖에 내지 마시오" 그가 계속 말했다. "임신한 걸 아무도 몰랐으면 하겠지만 ... 생각보다 빨리 배가 불러오겠는걸. 보이죠? 아기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오 ... 간호사!"

애슐리는 충격으로 거의 의자에 떨어질 뻔했다. 머리를 두 무릎 사이에 밀어 넣고 있어야만 했다. 쌍둥이라니...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쌍둥이!

조쉬가 바깥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사고희생자처럼 창백한 얼굴로 층계를 뛰어 내려갔다.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 그게 옛날 친구에게 인사하는 방법이오?" 그는 잡고 있던 택시 안으로 그녀를 밀어 넣었다. "전화상으로 내게 누군가를 소개해 달라고 말하는 당신이 너무나 비밀스러워 신경이 쓰여서 ... "

"나 임신했어요!"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축하합니다!" 택시 운전사가 말했다.

"쌍둥이래요" 그녀는 비극조로 조쉬에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 집안에 그런 거 없어요!"

"비토네 가계 유전이오."

조쉬는 그녀를 근사한 식당에 데리고 갔고, 애슐리는 속내 얘기를 마음껏 쏟아냈다.

"왜 이런 얘길 비토와 하지 않는 거요?'

그건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아기를 빼앗아 갈 궁리만 하는 남자에게 어떻게 솔직해질 수 있겠는가? 애슐리는 배가 불러오기 전에 되도록 빨리 비토를 떠날 계획이다. "대답할 수 없어요"

" 그가 당신을 함부로 대하오?" 조쉬는 화가 나서 숨을 들이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수건을 입에 대고 침을 꿀꺽 삼켰다. 조쉬는 그녀에게 매우 잘해 주고 있다. 아내가 아니라 여동생을 대하듯이. 스리랑카에서 런던으로 돌아온 지 열흘, 애슐리는 자기만의 침실에서 생활하고 있다. 비토는 닷새 전에 밀라노로 떠났다. 그녀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섹스와 바보 같은 말다툼, 혼란 ... 스리랑카에서의 그다툼 이후 그는 놀라울 정도로 예의 바른 대화와 경악할 정도로 사려 깊은 행동으로 일관했다. 그렇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그녀를 함부로 대하고 있었다.

"아뇨, 매우 친절해요" 또다시 흔들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우린 단 한 번의 말다툼도 없었어요. 티격태격하는 말장난도요. 그는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 동의해요. 정열은 이미 사라지고 없어요 ... "

"임신을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모르는 남자들도 있소..."

"이런, 이런, 이런, 이게 누구실까?"

조쉬는 아무런 동요 없이 애슐리에게서 손을 떼고 그들 테이블 옆에 서서 징그럽게 웃고 있는 젊은이를 올려다보았다. "안녕, 피에트로" 그가 건조하게 인사했다.

"말해 봐요, 숙모. 이 일을 숙부에게 말할까요. 아니면 우리의 작은 비밀로 간직할까요?" 피에트로가 느물거렸다.

"저리 가. 이 못된 녀석!" 애슐리는 낮은 소리로 내뱉었다. "안 그러면 네 이빨이 모두 목구멍에 가 있을 거야!"

놀란 피에트로의 예쁜 이마가 접혔고, 뺨을 발갛게 붉히며 증오의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두고 보자고"

"그게 현명한 대처였을까요? 이런 상황은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거잖소" 조쉬가 불안한 듯 말했다.

애슐리는 피에트로를 결혼식에서 잠깐 만났다. 지금은 과부가 된 비토 누나의 외아들로 제멋대로 자란 아이의 표본이었다. 비토가 그녀와 결혼한 걸 피에트로는 싫어했다. 팀을 놀릴 때만 해도 당연히 팀의 누나가 숙부의 아내 가될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을 테니까

"두려워하는 기색은 되려 그를 부추길 뿐이에요" 그녀는 걱정스럽게 손목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가야겠어요."

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 비토는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애슐리는 도둑질하다 잡힌 도둑처럼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일 돌아오기로 돼 있었잖아요!"

"침대 밑을 살펴봐야 하는 거요? 찬장도 찾아보고?" 그가 놀렸다.

명치끝이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며 애슐리는 멍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의 연인을 찾으려면 말이오" 그가 약간 메마른 어조로 설명했다. "농담이오"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던 그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는 피곤하고 화가 난 듯 보였다. "집에 잘 왔소. 카라. 당신이 너무나 보고 싶었소" 그가 한껏 비아냥거렸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미안해요"

"내가 지금 가장 바라지 않는 게 사과요. 세상에, 내가 뭐지? 당신의 간수? 그래서 날 볼 때마다 그렇게 움츠러드는 거요?" 그가 격렬하게 말했다.

그녀는 작은 비밀 때문에 늘 긴장하게 된다. 그녀가 그의 팔 안으로 몸을 던진다면 그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별로 환영받진 못하리라. 그들의 관계는 지금 벼랑 위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비토는 더 이상 그녀에게서 어떤 매력도 못 느끼는 듯했고 그들 사이의 정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쩌면 그는 더 이상 뭔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게 지겨워졌는지도 모른다. 애슐리는 거실 소파에 주저앉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엔젤리씨가 왔습니다. 마님"

애슐리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잡지에서 눈을 돌렸다. 누구라고? 그들의 하인들은 손님이 환영받을 거라고 확신 없이는 결코 손님을 거실까지 안내하지 않는다 ... 물론 예외가 있긴 하겠지만. 친척이라면 말이다. 문가에 만화에 나오는 악당처럼 징글거리는 피에트로가 서 있었다.

"비토를 만나러 왔다면 그는 위층에 있어" 온몸의 근육이 부자연스런 긴장에 휩싸였다. 피에트로가 흔들흔들 그녀에게 다가왔다 "날 바보라 생각하시나 본데. 그는 지금 밀라노에 있어요"

애슐리는 불안하게 몸을 곧추세웠다. "위층에 있다니까"

그가 낄낄거렸다. "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거겠죠!"

"날 협박하는 거야?"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가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붙였다. "어떻게 생각해요?"

"담배 피우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아주 잘생긴 소년이었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차가운 눈동자엔 어리지 않은 뭔가가 음흉한 게 느껴졌다. "숙부 집에서 내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싸구려 여자의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보기보다 더 바보로군"

"나가 주면 좋겠어. 피에트로"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누구 맘대로, 당신이 날 여기로 오게 했잖아, 안 그래? 난 갓 결혼한 부부가 헤어지는 걸 싫어하지" 그가 빈정거렸다. "길리아 말로는 숙부는 아주 질투심이 많다지... 약혼 파티에서 소란을 일으킬 뻔했다더군. 정말 상상이 안 돼. 난 항상 숙부를 매우 침착한 사람으로 봐왔는데, 여자 뒤꽁무니 보단 은행에 더 관심이 많은 ... "

"나가!" 그녀가 고함쳤다.

"당신은 멍청이 남동생보다 더 감정적이군. 내가 그를 멋지게 골려 주었지, 안 그래?"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 친구들이 그에게 톡톡히 교훈을 가르쳤지. 당신도 남동생의 실수에서 뭔가 좀 배우는 게 좋을 거야. 앞으론 내게 아주 착하게 굴도록 해"

애슐리는 실제로 몸이 아픈걸 느꼈다. 피에트로도 팀처럼 십대야. 그냥 어린애야. 속으로 자신은 다독거렸다. 그러나 팀을 집단 폭행하도록 시켰다는 말을 듣자 그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오늘 점심시간에 착한 의사 선생과 서로 손을 맞잡고 히히덕거렸다고 비토 숙부에게 말할까, 아니면 그냥 조용히 있을까?"

"그에게 뭘 말하든 네 마음대로 해"

피에트로가 이마를 접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한 번 말하기 시작하면 끝까지 가고 말 거야. 돈에 대해 얘기할지도 모르지. 4년 전 그를 버리는 대가로 받은 ... "

"뭐라고?" 목쉰 소리로 그녀가 가로막았다. 그녀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 어머니가 말해 주던걸, 우리 가족 사이엔 공공연한 비밀이야" 그는 그녀의 충격을 즐기는 듯했다. "당신은 거액의 수표를 갖고 숙부는 위안으로 카리나를 가졌잖아"

"그 수표는 현금으로 바꾸지 않았어!" 애슐리는 숨을 헐떡였다.

"비토 숙부는 자존심이 강해 ... 돈을 받는 대가로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걸 알면 결코 행복해 ... "

"이 나쁜 자식!" 애슐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분노에 차 고함쳤다. " 그렇게 되면 네 할머니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해 봤어? 네가 한 짓으로 그녀와 비토의 관계가 어긋날 수 있다는 생각은?"

그가 그녀에게 뭐라고 더러운 욕설을 했다.

눈앞이 흐릿했다. 구역질이 나고 어지러워진 애슐리는 비틀거리며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소파에 다시 앉았다는 걸 느꼈을 때 피에트로가 목 졸린 소리를 내는 걸 들었다. 흔들리는 머리를 들었을 때 그녀는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비토가 한 손으로 조카를 벽에 밀어붙인 채 빠른 이탈리아어를 내뱉고 있었다. 자제할 수 없는 노여움에 싸인 그녀의 남편은 피에트로를 마구 흔들어 댔다.

위험하다는 생각에 애슐리는 벌떡 일어섰다. "그만 멈춰요, 비토!"

그녀가 영어를 쓰자 비토도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감히 내 집에 들어와 내 임신한 아내를 위협해?" 그는 사자처럼 포효했다. "너와 내가 볼일이 끝났을 때 차라리 죽었으면 하고 바라게 될 거다!"

애슐리는 그가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다른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내 임신한 아내> 비토가 그렇게 말했다. 귓가에 요란한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그녀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애슐리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번개처럼 모든 것이 생각났다. 비토는 그녀가 임신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우스꽝스런 조심성은 완전히 시간 낭비였다. "기분이 어때?" 비토가 잔뜩 걱정스런 투로 물었다. "의사를 불러야 할까?"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뇨, 괜히 소란스러워질 뿐이에요"

비토는 한숨을 쉬었다. "벌써 소란을 피운 게 아닌가 걱정이 되오. 가족 주치의를 불렀거든"

"그런, 왜 귀찮게 물어 본 거예요?"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었소" 그가 무겁게 대꾸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도 이제 알고 있으니까, 당신이 ... "

"어떻게 알았어요?"

"스리랑카에서의 마지막 날 밤에 ... 프라이야와 얘기하는 걸 들었소"

그녀의 속눈썹이 열리고 녹색 눈이 나타났다. "엿들은 것 같지 않아 보였잖아요!" 그녀가 항의했다.

그가 우아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게 금융업계에선 아주 유용하지"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렸다. "내게 말할 수도 있었잖아요. 날 바보로 만들다니 ... "

그가 훅하고 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주면 당신이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소. 나 역시 몹시 놀랐다고" 그가 조용히 고백했다. " 그날 밤에 ... "

"그래요!" 그가 괴로운 얘길 꺼내지 않기 바랐다.

"믿기 않겠지만, 정말로 미안하오 ... "

"당신 말이 맞아요 ... 전혀 믿지 않아요!"

"이렇게 되리라 곤 생각도 못했소. 정말 나쁜 타이밍이오" 그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임신은 항상 그래요. 당신이 뛸 듯이 기뻐하지 않아서 오히려 놀랍군요!"

"그래도 되나?"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그저 벽만 쳐다보았다. 이제야 런던에 돌아온 이후의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아기에게만 신경 쓰길 원한 것이다. 평화와 조용함만이 아기에게 이로울 테니까. 그 외에 다른 건 분명히 중요하지 않았다.

"당신이 원하는 걸 얻었으니, 이제 날 좀 혼자 내버려둬요" 그녀가 씁쓸하게 웅얼거렸다.

"내가 원하는 게 정말 이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그에 대한 대답으로 그녀는 등을 돌리고 누웠다.

"당신이 혼절하지만 않았어도, 조카를 가만두지 않았을 거요" 그는 다른 대화를 계속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잃는 게 별로 없었을 거예요"

"막 장으로 들어왔을 때 그의 소리가 들려서 밖에 서서다 들었소" 그가 잠시 사이를 두었다. "오늘 오후엔 너무 충격적인 일이 많은 것 같소"

그녀는 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정확히 어디까지 들은 걸까? 천천히 몸을 돌려 눕자 비토가 창가에 미동도 않고 서 있는 게 보였다. 그의 마음이 몹시 복잡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긴장으로 불꽃이 튀었다.

"피에트로가 팀과의 일에 대해 거짓말한 것처럼 들리던데 ... "

"제멋 대로고 폭력적인 내 동생 말인가요?"

비토가 화난 듯 힐끗 쏘아보았다. "내 조카를 오판한 것만큼이나 당신의 동생도 오판했소. 최근에 피에트로와 거의 접촉한 일이 없어서. 사실 당신에게 말하는 걸 듣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를 옹호하겠지. 왜냐하면 ... 그는 우리 가족이니까" 그가 입술을 꼭 다물었다. "매형이 죽고 난 후, 우리가 그를 망친 거요. 온갖 응석을 다 받아 주고 ... "

", 자신을 탓한 는 건 그만 해요" 애슐리가 신음했다. "그는 못 되고, 속이 좁고 악랄한 소년이에요. 당신에처럼 큰 가족이면 그런 아이가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죠"

"당신과 팀이 피에트로의 손에 그렇게 고통 받은 건 정말 미안하오 ... "

"난 당신 손에 의해 더 고통을 받았어요" 말을 내뱉자마자 그녀는 후회했다.

"어머니가 돈을 줬다는 게 사실이오?"

강철 같던 그의 자제력이 이제 위협을 받고 있었다. 애슐리는 일어나 앉아 그의 도전하는 눈빛을 맞받았다. 그는피에트로가 한 말이 사실이 아니길 몹시 바라고 있었다. "당신이 청혼하기 바로 전 날 그녀가 찾아왔어요 ... "

앙 다문 그의 이가 검은 피부와 대조돼 희게 빛났다. " 그리고 내 인생에서 나가 달라고 당신에게 돈을 줬다?"

애슐리는 고개를 숙였다. "아뇨, 그렇게 잔인하진 않았어요. 떠날 때 탁자 위에 수표를 놓고 간 거예요" 그가 이탈리아어로 심한 욕을 내뱉는 걸 듣고 그녀는 이마를 접었다. " 그게 다예요"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에게서 알아낼 거요" 그가 차갑게 뱉어냈다. 그의 어조에는 노여움과 수치심이 깔려 있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정확하게 알고 싶소"

애슐리는 비토의 강력한 의지와 싸울 힘이 없었다. "당신도 이렇게 생각해요?" 그녀가 느리게 말했다. "내가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배경도, 올바른 종교도 ... 제대로 된 건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고? 짧게 말해 당신 인생을 망칠 거라고?"

그가 등을 돌렸다. 재킷을 통해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그가 주먹으로 벽을 쳤고 그녀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어머니가 틀렸소" 그가 이죽거리듯 속삭였다. "내 인생을 망치려면 당신이 필요 없었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나 혼자서도 충분히 내 인생 같은 건 망쳐 버릴 수 있으니까"

"어머니는 아주 좋은 의도로 그러신 거예요. 날 잘 몰랐잖아요. 당신 아버지를 걱정했던 게 틀림없어요 ... "

"결코 어머닐 용서하지 않겠소" 비토가 격렬하게 말했다. "어머니의 보호가 필요한 십대도 아니었다고!"

"아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언제나 아들일 뿐이에요"

"어머니를 옹호하는 거요?"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왜지?'

애슐리는 한숨을 쉬었다. "어머닌 우리가 끔찍한 실수를 하지 않게 해주신 거예요"

그의 코와 입 사이에 깊은 곡선이 새겨졌다. "아마 우리두 사람에게 큰 호의라도 베풀었다고 생각하셨겠지"

의사의 도착은 환영받은 방해였다. 의사는 칼로 자를 것같은 분위기 가운데로 걸어 들어왔다. 절대 안정이 그의 실질적인 처방이었다. 저녁 식사도 침대 위에서 했다. 식사 후 비토가 나타나길 기다리다 지쳐 그녀는 깜빡 졸았다.

한참 후 그녀가 전등 불빛에 졸린 눈을 뜨자 비토는 물가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넥타이도 재킷도 입고 있지 않았다. 헝클어진 검은머리와 거뭇거뭇해진 턱선, 평소의 완벽한 모습이 아니었다. 한 손에는 술잔까지 들려 있었다.

"몇 시죠?" 그녀가 물었다.

"자정이 ... 넘었소"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정말로 모르겠소" 아주 천천히 늘어진 어눌한 말투였다.

그의 어머니가 옳았어.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난 비토에게 죽음의 키스와 같아 ... 그를 술 마시게 한 건 다름 아닌 나니까.

그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로레나를 만났소, 피에트로의어머니. 누나는 이제 피에트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그와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갈 생각이래. 누나는 죽은 매형의 가족들과 아주 친하게 지내는데. 그들이 아들 교육에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소. 그래도 피에트로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진 않을 거요"

침대에 앉아 어깨 밑으로 내려간 잠옷 끈을 올리는 애슐리는 파도 위로 올라온 인어처럼 선정적이었다. "바쁜 저녁을 보냈겠군요" 손가락으로 천천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으며 말했다. "기분이 훨씬 좋아졌어요"

"잘됐군" 그는 쥐고 있던 크리스털 잔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난 당신을 괴롭히는 천부적인 재주를 가진 것 같군. 하지만 이 모든 건 내가 의도한 것도 계획한 것도 아니오. 난 그저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소. 당신이 내게 이두 번째 기회를 빚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 "

참을 수 없어서 그녀는 속삭였다. "내가 따를 수 있을지 자신 없어요"

그는 고개를 젖히고 자조하듯 거칠게 웃었다. "한 번도 이런 수치심을 느껴 본 적이 없소.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이 날 사랑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소 ... "

불만스런 외침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떨림이 그녀의 긴장된 몸속을 관통했다.

"단추만 제대로 맞추면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소. 어느 날 잠이 깬 당신은 내 가슴에 칼을 꽂고 싶은 대신" 그가 거칠게 말했다. "이 남자 없인 살 수 없다고 생각할 거라고. 그리고 당신이 담쟁이덩굴처럼 찰싹 달라붙어서 성경에 나오는 이브가 아담에게 나아가듯 ... "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비토" 나오는 데 꼬박 30초가 걸린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그녀를 임신시키지 않으려 했던 것도 놀랍지 않았다. 아이보다는 복수를 더 강력히 원하고 있었으니까. 지금가지 참은 것만 해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 사실, 그가 <제대로 낀 단추>라고 부르는 복수를 지금껏 미루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를 솔직하게 대했으니, 그는 분명 그 지루한 노력을 아껴 뒀으리라. 비토는 이미 실제로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더 빠르고 더 쉽게 원하는 것을 얻고 있었다. 애슐리는 너무나 치명적인 상처와 수치심으로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가 비명처럼 숨을 내쉬었다. "내가 얼마나 거만한 사람인지 ... "

"맞아요" 그녀가 참담하게 말했다.

"당신에게 한 짓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다시 날 ... 사랑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 " 그의 목소리가 약간 어색하게 들렸다.

애슐리는 그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는데 그가 말을 더듬고 목소리가 이상한 건 술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미친 짓이죠" 그녀는 숨을 반쯤 쉰 채 겨우 내뱉듯 말할 수 있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오"

멍하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적이고 야비하지" 그가 거칠게 숨을 쉬었다. 목소리에는 절망과 비슷한 뭔가가 섞여 있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소 ... "

그녀는 그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소리치고 몇 가지 물건을 그에게 던지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질 테니까. 그런데 그녀는 비토와 함께 있으면서 처음으로 아무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방어벽은 내려진 채였다. 고통이 너무 지나쳐 분노를 느낄 수가 없었다.

"당신의 침묵이 몹시 견디기 어렵군"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순간 그녀가 눈을 들었고, 절망한 그의 어두운 눈과 얽혔다. 마치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육체적인 힘을 발휘한 것처럼 그가 기가 꺾인 듯했다. 이런 상태의 비토

- 연약하고 불확실한 - 는 본 적이 없었다. 다시는 이런 그를 볼 수 없으리란 것도 자명했다.

"둘 다 좀 더 진정이 된 내일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군 ... "

다시는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과연 아기를 빼앗아 갈 수 있을까? 그녀는 어떤 서류에도 사인하지 않았다. 마약 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도 아니다. 법정에서 그가 어떤 논쟁을 벌일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애슐리는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차멀미 나지 않소?" 비토는 걱정스런 눈으로 그녀를 힐끗거렸다.

애슐리는 이를 앙다물었다. 그녀의 건강에 대한 언급이 벌써 세 번째다. 그녀는 어제 온종일 침대에서 지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선언이 있었다. 오늘 점심 약속은 현재 그들의 결혼 상태를 고려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듯했다.

"우리가 함께 지냈으면 좋겠소,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그가 아주 조용하게 말했다. " 그건 내게 아주 중요한 일이오"

"어련하시겠어요!" 피가 날 때까지 입술을 깨물며 그녀는 끝없이 펼쳐진 도로를 응시했다.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함께 있다가 그러고 나서 헤어진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그는 감수성이라곤 하나도 없는걸 까? 계속 그와 함께 산다면 그녀는 파멸하고 말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선 그에게서 달아나야 했다. 그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떠나는 건 아주 어려울 것이다. 아직도 그녀는 결혼에 매달리고 싶어 하니까.

"지난번엔 내가 없었으니까 ... "

"필요 없어요!" 그녀가 내뱉었다. "어떤 일에도 당신은 필요 없어요"

"알고 있소. 그저 당신이 함께 있어 줬으면 하고 ... "

"그래서 날 감시하게요?" 그녀가 잔인하게 말을 잘랐다. "또다시 낙태할까 봐?"

운전대를 잡은 그의 갈색 손가락들이 새하얀 관절을 보여 주고 있었다. "4년 전에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 걱정을 할 거라고 생각하오?"

애슐리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지금 그녀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4년 전 그녀가 자연 유산했다는 걸 믿고 있었다. "언제 생각을 바꿨죠?"

"여러 주전에, 하지만 당신이 얘길 하고 싶어 하지 않았지" 그가 마른 어조로 말했다. "반드시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았거든요"

"난 정말로 이 아기를 원하오" 그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과거에 당신을 버려뒀다고 이번에도 내게 권리가 없다는 뜻은 아니잖소"

"당신의 권리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지겹다는 듯 속삭였다.

"도대체 내 말을 뭘로 알아듣는 거요?" 그가 갑자기 화를 냈다. "영어로 내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알잖소. 내게 그게 어떤 건지 모르겠소?

내가 잘못했소! 사방팔방 아무리 뒤져봐도 ... 좋아, 내가 잘못했소! 남은 일생 동안 당신에게 잘못했다고 말한다 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요!"

"어떤 언어로든 당신이 5분 동안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면 난 정말 놀라 자빠질 거예요. 그러니 남은 일생 동안 그런 말을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은 그만 해요!"

"잠시 고속도로를 빠져 나가야겠소" 그가 으르렁댔다.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데요" 감미롭게 말하긴 했지만 빈정거리는 걸 멈추진 못했다. " 그리고 이 속도대로 간다면 다음 출구에선 길 난간에 대고 인사하게 될 거예요"

그는 긴장감 도는 침묵 속에서 다음 출구를 통과하더니5분 후 도로를 넓혀 놓은 부분에 차를 세웠다. 부르릉 거라는 엔진을 끄자 갑작스레 위험스러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미안하오 ... 이게 당신이 원하는 거요?"

녹색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원망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아무리 미안해해도 충분히 않았다. 석 달 전 그녀는 그를 증오하면서 그런 대로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의 그녀는 비참한 짝사랑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원하는 건 아기뿐이다. 하긴 새삼스러운 뉴스도 아니다. <멀미나지 않소?>, <어지럽지 않소?>, <잠시 내려서 커피라도 마실까?> 그가 뭘 걱정하는 건지 명백했다.

"내가 결혼을 강요한 거라면 미안하오. 당신 동생을 협박한 것도 미안하고, 임신시킨 것도 미안해 " 그가 거슬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면 당신 기분이 좀 나아지오?"

"별로" 앙 다문 입술이 새하얗게 변했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임신시켜서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모른다는 말은 정말로 듣고 싶지 않았다.

욕설을 웅얼거리며 비토가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꽉 쥐고 있는 그녀의 두 손은 전혀 반기지 않았다. 그는 안전띠를 풀고 돌아앉았다. "당신의 모든 것을 돌보고 싶소"

" 그런 구역질나는 소리 한 마디만 더하면 ... "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정말로 멀미가 나고 말 거예요!"

그녀의 창백하고 흔들리는 얼굴을 본 그는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란 걸 깨닫고 좌석에 몸을 기대며 끊어 오르는 좌절감을 삭였다. 침묵이 그녀의 신경을 긁어 댔다.

"내가 4년 전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바꿀 순 없소!"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낙제한 일, 당신 가족이 등을 돌린 일,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당신이 아기를 잃은 일 ... 난 그곳에 없었고 또 그래야 했소. 말할 수없는 죄책감을 느끼 ... "

"오래가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경솔하게 말했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줘서 손해 날 건 없잖소" 비토조화를 냈다. "나의 행동을 마음속 깊이 부끄러워하고 있소. 쉬운 길을 택했던 거요. 당신이 내게 상처를 주자 그냥 떠나 버린 거지"

"수표책도 잊지 말아요" 애슐리는 말하자마자 후회했다. 그건 허리 아래를 때리는 것과 같았다. 죄의식, 부끄러움, 그리고 후회. 이 모든 걸 인정한다는 건 그에겐 엄청난 처벌이었다. 비토는 매우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판단에 매우 자신 만만한 사람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고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애슐리는 그의 죄의식도 사과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둘 다그녀의 고통을 치료할 수 없으니까.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런 그를 증오했다.

"4년 전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힘이 내게 있는 줄은 몰랐소. 당신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그저 당신을 잃는 게 두려웠을 뿐이오. 당신이 자유를 요구할수록 난 화가 났소. 가끔 ... 가끔 난 당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당신을 증오했소 ... "

우연히 두 사람의 눈길이 얽혔다. 잠깐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녀는 얼른 눈을 돌렸다.

"당신은 날 불안하게 만들었소.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날 그렇게 만든 사람이 없었는데 ... "

그녀는 깜짝 놀랐다. 저도 모르게 그를 쳐다보았다. 육감적인 입술을 음울하게 일그러뜨리고 그가 그녀를 응시했다. "당신은 나에 비해 너무 젊었지"

"그래요" 그녀가 불안하게 맞장구쳤다. "내가 뭘 하는지 몰랐어요. 그저 자신을 보호하려도 애썼죠. 상처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당신을 사랑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당신이 이기길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렇지 않았소" 그가 웅얼거렸다.

그러나 그가 이겼다. 그 후에도 그의 인생은 계속됐으니까. 그녀의 인생은 죽어버렸다. 비토는 그녀가 그를 사랑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그녀를 믿고 있었다면 그날 차안에서 앉아 있는 대신 길을 건너 그녀에게 말을 건넸으리라.

"전화했어요... 이탈리아로 당신에게 전화했어요" 그녀가 숨가쁘게 말했다. "아기에 대한 얘길 하려고 ... "

그는 눈썹이 한데 모아졌다. "난 받은 적 없는데 ... "

"길리아가 받았어요. 당신은 약혼 파티 중이라더군요 ...아무 말도 못했어요" 애슐리는 황량하게 고백했다. "정말로 할 말이 하나도 없더군요"

그가 이탈리아어로 신음하듯 뭐라고 웅얼거렸지만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두운 얼굴을 바싹 긴장한 채 그는 그녀의 눈을 피했다. 그의 거친 광대뼈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별안간 차를 출발시켰다. "늦겠소" 그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점심 약속을 취소할 순 없을까요?" 그녀가 희망에 차있었다. "전화로 핑계를 대고?" 그가 긴장했다. "안 돼"

"사교적이 되고 싶은 기분이 전혀 아니라고요"

"의문의 여지가 없소. 꼭 가야 되오"

1시간 30 분 후, 그녀는 자꾸만 이상한 예감에 시달렸다. 차가 눈에 익은 풍경들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녀의 고향에서 10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애슐리는 사뭇 불안해졌다.

"그 사람들이 어디 사는데요?" 그녀가 긴장한 어조로 물었다.

"여기서 별로 멀지 않소"

"난 이 근방에서 자랐어요" 그녀는 마지못해 사실을 말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고향이 나오면 길 좀 가르쳐 줘요"

애슐리는 숨을 멈추었다. " 그들이 사는 곳이 거기예요?"

비토는 음울한 눈길로 그녀를 힐끔거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집으로 가는 거요, 카라" 그녀는 충격으로 얼어붙었다. "믿을 수가 없군요!"

"어제 장모님께 전화했더니 우릴 점심 식사에 초대하셨소 ... "

"차를 세워요!" 애슐리는 숨가쁘게 말했다. "난 안 갈 거예요!"

"아니, 갈 거요" 비토는 덤덤하게 반대했다. " 그리고 벽을 허물게 될 거요. 내 잘못으로 당신은 가족들과 잘 지내지 못했소. 이건 당신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 중하나요 ... "

"날 위해?"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반복했다.

그녀의 불만을 완전히 잘못 해석한 비토가 달래듯이 말했다. "그들에게 거절당하지 않을 거요. 장모님은 당신 이보고 싶어 안달이 났을 거요. 전화할 때 우셨거든"

애슐리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요 몇 년 동안 그녀를 만나려는 자그만 한 노력조차 보이지 않았다. 실비아 포레스터는 언제나 남편의 법에 복종했다. 도대체 왜 우릴 초대했을까? 아버지를 설득하는 게 가능해진 걸까? 정말 믿고 싶었지만 그만큼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를 몹시도 그리워했다.

"아버진 날 미워하세요"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아버지들은 자신의 딸을 미워하지 않소. 우리 아버지도 딸이 결혼도 하지 않고 남자와 동거한다면 똑같이 화를 냈을 거요. 우리가 결혼했으니 이제 상황은 많이 달라졌소. 이미 오래 전에 화는 가라앉았을 거요" 그는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차는 벌써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가 길을 가르쳐 줄 필요가 없었다. 스태버스톤은 그렇게 크지 않았고 아버지의 자동차 전시장은 마을의 주도로 끝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찾기가 아주 쉬웠다. 에드워드 시대 약식인 그녀의 집은 도로 뒤쪽으로 50야드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차에서 내리면서 비토는 거의 마비 상태인 그녀를 쳐다보았다. "갑시다" 그가 재촉했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연 사람은 창백하고 긴장된 얼굴을 한 수잔이었다. 비토는 아주 차분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모두 정원에 있어요" 그녀가 불편하게 말했다. "엄마가 우릴 초대했어요.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많을수록 즐겁지" 애슐리가 빈정거렸다. "팀은?"

"지금 친구들과 함께 그리스에 있어"

애슐리가 정원으로 나가는 프랑스식 창문으로 걸어가자 수잔이 갑자기 앞을 가로막았다. 걱정과 곤혹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아빤 네가 오는 걸 모르고 계셔" 수잔이 떨리는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엄마가 이런 짓을 하시다니 믿을 수가 없어 ... "

애슐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울려나왔다. "이 바보 같은 여자가!" 아버지의 익숙한 목소리에 애슐리는 얼어붙었다. "이 따위 외국 오물을 먹으라는 거야! 바보 같은 외국 놈들이나 먹는 걸? 어떻게 감히 내 돈을 이런 데 낭비하는 거야 ... ?"

얼마인지 모르는 시간 동안 그들 셋을 공포로 얼어붙어 있었다. 애슐리는 어머니가 사과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뱃속이 뒤틀렸다.

"정원으로 나가요" 수잔이 거의 애원하는 투로 비토에게 말했다.

애슐리는 수치심으로 비토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두 뺨은 언니와 마찬가지로 빨개졌다. 잠시 동안이나마 아버지를 만나려면 비토는 이제껏 그가 배운 처세술을 총동원해야 할 것이다. 조금 후에 펼쳐질 광경에 신경이 곤 두선 애슐리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허락 없이 그들을 초대했다는 걸 알고 기가 꺾였다.

창문 너머로 아버지의 화난 넓은 어깨와 신문을 읽고 있는 형부 아널드가 보였다. 그녀는 비토의 손을 잡고 저지시켰다. "나 혼자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수잔이 안심한 듯 끼어들었다. "마실 거 한 잔 갖다 드릴게요. 비토"

애슐리는 바깥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아널드에게 골프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고 형부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조용하고 온순한 아널드는 까다로운 장인과 논쟁하길 꺼려했다.

"아빠 ... "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애슐리는 햇살을 느끼며 등을 꼿꼿이 세우고 턱을 높이 들었다.

헌트 포레스터가 마치 성난 황소처럼 벌떡 일어섰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게냐?"

애슐리는 억지로 앞으로 나갔다. "... 이제 서로 화해할 때가 됐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이 창피도 모르는 여우 같으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얼굴을 디밀어?" 그가 소리치고 나서 성큼 걸어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했지, 기억나? 넌 더 이상 우리 가족이 아니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어, 이 앙큼한 창녀! 그런데 넌 우릴 그냥 놔두기 싫은 거지, ? 네 악의에 찬 장난 때문에 팀은 거의 감옥에 갈 뻔했잖아 ... "

"아빠, 제발 ... " 그의 손가락들이 마치 강철 집게처럼 그녀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한 마디 한 마디 분노에 찬 말을 내뱉을 때마다 손가락에 힘이 가해졌다.

"내 아내를 놓으시오" 비토가 경멸에 찬 어조로 조용히 명령했다.

"저리 가요, 비토!" 애슐리가 공포에 차 소리 질렀다.

"안 그러면 다치게 될 거야" 헌트 포레스터가 비아냥거리면서 젊은이의 비싸 보이는 양복과 실크 셔츠를 훑어보았다.

"당신 딸은 임신 중이오" 비토가 차갑게 말했다.

애슐리는 어지럼증과 구역질이 났다. 어디에선가 어머니가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아주 친숙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비토가 그녀에게 해를 가하는 아버지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오호라. 그런 식으로 그를 교회 제단 앞까지 데리고 갔구만!" 아버지가 가증스럽게 빈정거렸다. "두 번째 행운이라, 마치 ... "

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누르며 비토가 아버지의 턱을 날렸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헌트 포레스터가 잔디 위에 나가떨어졌다. 수잔이 비명을 질렀고 아널드가 벌떡 일어섰다. 애슐리는 충격으로 식탁에 기대서 있었다. 무릎이 흐물거렸다.

"싸우고 싶다면" 비토가 신랄하게 말했다. "당신 크기에 맞는 사람을 골라야지!" 아널드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항상 진지하던 그의 얼굴이 기쁨으로 출렁거렸다. "굉장한 펀치군!" 찬사로 머리를 휘저으며 그가 말했다.

"적어도 내 뒤에 있는 이 바보보다는 배짱이 있군 그래!" 헌트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으르렁댔다. "하지만 지금 당장 아내를 데리고 나가 ... "

" 그들이 가면, 나도 가요!" 갑작스런 위협에 그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다. 실비아 포레스터는 절망적인 눈으로 자신의 어린 딸을 바라보았다. "잠시 동안 네 집에 묵어도 될까?"

"... 뭐가 어떻게 돼 가는 거야?" 헌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더듬거렸다. "정신이 나갔소, 실비?"

"몇 년 전에 이렇게 했어야 했어요 ... 용기가 없어서..." 실비아는 떨리는 손을 애슐리에게 내밀었다. "친자식의 결혼식에 갈 수 없었을 때 ... 내가 얼마나 나약한 사람이 됐는지 깨달았단다. 아버지가 널 이런 취급하게 내버려두다니, 정말 미안하구나"

"우리 집엔 언제든 환영합니다, 장모님" 비토가 친절하게 말했다.

", 그럼 여기서 잠시 ... " 애슐리의 아버지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비아라고 부르게" 그녀의 어머니가 수줍게 말했다.

"정말 친절하구먼 ... "

"그가 날 쳤소!" 헌트가 믿을 수 없는 고함쳤다.

"맞아도 싸요" 애슐리를 잡고 있는 팔을 떨면서도 실비아는 중얼거렸다. "당신이 왜 이 아일 그런 식으로 대했는지 말할 거예요. 애슐리도 알 권리가 있어요"

"안 돼!" 헌트가 소리 질렀다.

"안으로 들어갑시다" 비토가 제안했다.

당황한 애슐리는 아버지가 혼자 서 있는 곳을 힐끗 돌아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렇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대들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또한 실비아가그녀에게 할말이, 그것도 아버지를 저토록 화나게 하는 일이 있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수잔, 나와 아널드는 집에 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실비아가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전화하마"

언니와 형부가 마지못해 방을 나가자, 아버지가 문가에 나타났다. "제발 말하지 마" 그가 잇새로 말했다. " 그들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당신이 애슐리와 상관있는 일로 만들었어요" 어머니는 불안한 얼굴을 들었다. "모두가 내 잘못으로 고통 받고 있어요. 당신은 나랑 이혼했어야 해요. 20년 넘게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대신에"

"실비 ..." 헌트는 이상하게도 위축된 모습이었다.

"... 난 외도를 했단다" 실비아는 말을 더듬으며 누구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 그리고 네 아버지가 알게 되었지.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 ... 그게 네 아버지의 아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 "

", 세상에 ... " 애슐리는 가까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니가 조용히 울었다. "네 아버지도 알고 계셨단다... 네가 태어났을 때, 온통 빨간 머리에다 수잔과 너무나 다르게 생겨서 ... 우린 네가 헌트의 아이일 수 없다고 생각했어. 난 너무 부끄러웠고 ... 널 자신의 자식으로 키우려는 네 아버지가 너무 고마웠단다" 애슐리는 어머니가 밝힌 사실에 경악했다.

"애슐리가 오해하겠군요" 비토가 중얼거렸다. " 그녀가 장인의 아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잖습니까? 팀과 애슐리는 쌍둥이처럼 닮았는걸요."

"그 사 ... 사람이 붉은 머리였다네" 실비아가 불안정하게 속삭였다. "우린 내 할머니가 붉은 머리였다는 걸 잊었던 거야. 6년 후 팀이 태어날 때까지 우리가 실수했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 하지만 그땐 이미 애슐리와 아버지와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있었어. 그는 여전히 애슐리가 자신의 아이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어 ... 아마 이아일 볼 때마다 그 남자가 생각났겠지"

침묵이 영원히 계속될 듯했다. 애슐리의 아버지는 의자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보였다. 애슐리는 정말로 어지러웠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저도 모르게 비토를 쳐다보았다. 처음엔 어머니에게 마음이 갔지만 다음 순간 놀라울 정도로 고통스런 연민이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어머니의 고백은 그의 모든 권위를 앗아가 버렸다. 아버지는 이혼할 수 없을 정도로 어머니를 사랑했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때부터 어머니를 벌 준 것이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가고 싶으세요?" 비토가 장모에게 조용히 물었다. 애슐리는 신경질적인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눌렀다. 그들 중 침착한 사람은 비토뿐이었다.

긴 침묵이 잇달았다.

"헌트와 난 할 얘기가 많은 것 같네" 실비아가 망설이며 말했다. 그녀는 자제력과 자신감에 찬 태도로 일어섰다. 그녀의 모습엔 새로운 강인함이 들어차 있었다.

"점심은 다음에 하죠" 완벽하게 침착한 태도로 비토는 애슐라를 데리고 복도로 나갔다. 실비아가 딸을 꽉 껴안았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런 상태의 네 아버지를 두고 떠날 수 없단다"

"그녀는 그를 떠나지 않을 거요" 비토가 운전하면서 입을 열었다. "장인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두 사람을 위해서라면 이번 일은 잘 일어난 거요. 진실은 밝혀져야 하니까. 당신을 위해서라도 좀 더 일찍 일어나지 않은 게 유감이오"

애슐리는 그를 힐끗 훔쳐보았다. 그는 이를 악문 것처럼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 일이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그래도 그가왜 이렇게 산산이 부서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말해 봐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게 어떤 건지, 당신 편을 들어주지 못한 엄마와 어느 편도 들지 않겠다고 작정한 형부와 함께?"

손이 떨렸다. 그녀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도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두려웠어요" 그녀가 불쑥 내뱉었다.

"외롭고요" 비토가 욕설을 낮게 지껄였다.

"모두가 다 고통받았어요" 그녀가 계속 말했다. "아마팀이 가장 덜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아들이고, 아빠가 가장 좋아했으니까. 수잔은 탈출하려고 아널드와 결혼한 거에요. 항상 긴장감이 돌고 ... 격한 말다툼이 잦았죠. 난 언제나 아버지와 싸웠거든요. 돌아보면 좀 바보 같은 일이지만 아버지는 날 가만두지 않았어요"

별안간 한 번도 얘기한 적 없는 뭔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있었다. 어떤 기억들이 말로 표현하기도 전에 그녀의 머릿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끊임없는 비난과 경시, 빈정거림과 처벌. 어머니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자주 치르며 살았다. 죄의식이라는 대가를.

"아버지가 때렸다는 말은 아직 안하고 있지만, 장인은 당신을 때렸던 거요" 비토가 어둡게 말했다. "그와 당신의 얼굴을 보고 알았소. 정말, 장인이지만 계속 패주고 싶더군. 그랬다면 기분이 좀 나아졌을 텐데 ... "

"그만 해요! 아버지는 정말로 날 때리지 않으셨어요"

그녀가 항의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식으론 아니지만... 하지만 아버지가 때릴까 봐 늘 두려웠어요. 언제나 내게 지나치다 싶게 화를 내셨으니까" 그녀는 어렵사리 침을 삼키며 그런 기억들을 억눌렀다.

"대학 다닐 때 당신이 그토록 자유를 갈망했던 게 놀랍지 않군" 덤덤한 어조였다.

"그래요" 그가 이해해 줘서 그녀는 무척 기뻤다. 그가 배고프냐고 물었다. 그녀의 뱃속은 음식 생각만으로도 울렁거렸다. 한 번인가 두 번 그녀가 대화를 해보려고 시도했지만 비토는 점점 더 비사교적으로 굴었다. 하긴 그는 방금 지옥에서 온 것 같은 친척들을 만났으니, 애슐리는 낙담한 채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평화가 느껴졌다. 어린 시절 그녀를 그토록 괴롭히던 의문들이 풀렸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그다지 불쾌하지도 않았다. 그래, 난 엄마의 외도에 대한 죄 없는 희생양이 됐던 거야.

집에 도착하자 비토는 전화할 데가 몇 군데 있다고 했다.

"늡은 점심을 차리라고 할게요." 그녀가 말했다.

"배고프지 않소" 날카로운 그의 대답이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됐는지 궁금했다. 그의 잘생긴 모습은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극도의 압박감에 의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 에그는 한 번에 두 계단씩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한 시간 후, 애슐리는 비토를 찾고 있었다. 그들의 운전사가 두 개의 가방을 들고 계단에서 그녀를 지나쳐 갔다.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는 비토의 침실로 걸어갔다. 그는 망연자실한 사람처럼 창가에 서 있었다. 그에게서 긴장감이 파도처럼 밀려 나왔다.

"또 여행을 가는 줄은 몰랐어요" 그녀가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말해 주지 않았잖아요" 비토가 몸을 홱 돌렸다.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거요. 여기 있을 수 없어서"

"떠난다고요?" 갑작스런 심경의 변화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얘져서 그저 그를 바라보기 만했다. "하지만 당신은 ... "

"아기가 태어날 때 까진 있고 싶다고 말했지" 그가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당신이 원하는 게 아니잖소"

그녀는 떨리기 시작한 두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들이 서로 파고들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비토가 갑자기 후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벽에다 머리를 박아 대는 일을 그만하고 그냥 변화를 위해서 당신의 바람을 들어주려는 거요"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는 자신이 이곳에 있어야 한다며 그녀를 설득하려고 무척이나 애썼는데 ...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그가 가려고 한다는 게 ... 아무런 경고도 없이 ... 아무런 얘기도 없이 ... "하지만 난 당신이 떠났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 없잖아요 ... "

"말할 필요도 없소.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니까" 그가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강인한 얼굴이 긴장으로 팽팽했다. "당신을 비난하는 건 아니오. 내가 한 짓을 생각하면 ... " 그는 입을 다물고 어깨를 들썩였다. "어쨌든 당신은 아주 잘 참아 줬소, 내가 예상한 것보다. 그리고 이젠 사실을 직시할 때가 된 거요. 내가 없어진다면 당신은 더 편안할 거요 ... "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떠나는 거라면, 아무 데도 못 가요!" 애슐리는 두 팔로 자신을 감싸 안았다. "내가 곁에 없다면 헤네시가 더욱 좋아할 거요" 비토가 불쑥 말했다. "조쉬가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마드레 디 디오!" 비토는 격렬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에게서 몸을 돌려 멀어졌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까지 그와 사귀고 있었잖소. 내가 그 사이에 끼어든 거고. 곧 그와 관계를 계속할 수 있도록 자유로워질 거요 ... "

나를 기다리는 다른 남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야? 맙소사, 조쉬와 내가 손을 맞잡고 낄낄거렸다는 피에트로의 말을 비토가 들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 애슐리는 비토를 바라보았다. 잔뜩 부은 얼굴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긴장한 그는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조쉬와 그런 관계가 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당신과 달리, 난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옮겨 다니는 나비가 아니니까"

"난 카리나의 팔 안으로 날아간 게 아니오" 비토가 씁쓸하게 내뱉었다. "정신없이 취해서 그렇게 된 것뿐이오" 애슐리는 몸이 굳었다. "뭐라고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오 ... " "나한텐 중요해요!"

마지못해 그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난 그녀를 친한 친구로 여겼소. 어느 날 저녁, 당신이 병원에 간 사실을 알고 난 뒤 그녀의 아파트로 갔소 ... "

" 그리고?" 애슐리가 강한 어조로 즉시 물었다.

"얘기 나눌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난 너무 취해 있었소"

그가 절망적으로 내뱉었다. 곤혹스러운 듯 서서히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음 날 아침 난 그녀의 침대에서 잠이 깼고 어떻게 그곳에 갔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소"

깊은 고통을 느끼며 애슐리는 고개를 돌렸다.

" 그래서 그녀와 결혼한 거요. 카리나는 날 사랑했소. 결혼 후 난 당신에겐 다른 사람이 있다고 믿었고, 당신이 낙태를 했다고 생각했소 ... "

"그랬군요" 그녀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몹시 안 좋은 상태여서 어머닌 일을 서둘렀소. 완전히 미친 짓이었지" 비토는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을 잃은 난 그런 상태에서 결혼을 하든 말든 정말로 아무 상관이 없었소. 결혼식이 끝난 후 카리나는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다고 고백하더군. 당신이 아다시피카라 ... 난 정말 바보였소. 조금만 더 생각해 봤더라도, 그날 밤 너무 취해서 아무 일도 못했을 거라는 의심 정도는 했을 텐데"

그는 카리나와 결혼한 진짜 이유에 대해선 입도 벙긋한 적 없었다. 그런 사실이 그를 바보처럼 느끼게 했으니까. 카리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를 함정에 빠뜨렸다. 명예를 소중히 생각하는 그의 가치관에 도박을 한 것이다.

그의 입술이 탄탄해졌다. "이와 시작한 거 솔직하게 다 말하겠소. 그게 그녀와 결혼한 유일한 이유는 아니오. 그녀는 날 사랑했고 난 내가 당신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걸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었소. 결혼하는 데 있어 최고의 이유는 아니었지 ...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받을 가치가 있는 여자와 결혼하는 데 있어서는 말이오 ... "

" 그건 그녀의 선택이었어요"

비토가 이마를 접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내가 자신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밝은 믿음을 카리나는 갖고 있었소. 집 안 곳곳에 사진을 갖다 놓더군.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난 죄책감을 느꼈소 ... 그래서 오랫동안 그 사진들을 치워 버릴 수 없었던 거요. 그건 마치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잊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소!" 애슐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비토가 몸을 폈다. "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노력했소, 하지만 실패했지. 사랑을 주문하듯 만들어 낼 수 없었거든. 난 정말 좋은 관계를 맺는 재주가 없나 봐 ... 사실, 아주 비참했소!"

"아녜요, 당신은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그녀도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 "

"카리나와 난 원하는 것에 대해선 아주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이오?" 그는 빛나는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잠시 쳐다보더니 넓은 어깨를 들썩이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4년 전, 난 당신에게 푹 빠져 있었소.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주에 결혼하려고 했지. 그건 별로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지, 그렇지 않소?" 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지금 떠나려는 거요. 당신의 동정은 바라지 않소"

"내가 왜 당신을 동정한다는 거예요?" 애슐리가 쓰디쓴 어조로 서둘러 물었다. "당신은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비토. 그래서 지금 나가려는 거죠!"

"복수를 원한 적은 없소" 비토는 짧게 웃으며 말했다. "그저 당신을 원했고 ... 필요로 했지. 그리고 만나 지 며칠 되기도 전에 아직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소!" 애슐리는 깜짝 놀라 숨을 헐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내게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요. 날 증오했으니까" 그가 창백하고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날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소"

그는 이틀 전 그녀의 침실에서 지금과 똑같은 말을 했다. 그땐 완전히 그의 말을 오해하고 말았지만.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그가 한 짓을 용서해 줄 수 있느냐고 물으면서 ...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당신의 침묵이 몹시 견디기 힘들군"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아이를 원한다고 말했잖아요!" 그녀가 소리쳤다.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얼마나 절실하게 당신을 원하는지 들키고 싶지 않았소. 그리고 만약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로 당신을 묶어 두리라 생각했소. 도박을 한 거지, 당신이 떠날 수 있을 거라곤 믿지 않았거든"

"당신이 옳아요"

"하나만 옳고 다른 건 모두 틀렸지" 그가 사납게 말했다.

"아뇨" 그녀의 목소리에 부드러움이 배어 나왔다. "언제 내가 유산에 대해 거짓말하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됐죠?"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게 지금 중요하오?"

"" 그녀가 고집을 부렸다.

"스리랑카에서 그 사고가 있고 난 후에, 난 정말로 당신을 잃었다고 생각했소. 그 충격이 머리를 맑게 해주더군" 그가 이를 갈았다. "당신을 사랑하는 걸, 과거나 현재 같은 건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걸 깨달았소. 내 완고함이 우리 사이에 가장 커다란 장벽이었소. 한 번도 내게 거짓말한 적 없는데, 난 자문했지 ... 왜 이제 와서 거짓말을 하겠느냐고?"

애슐리는 감정의 물결로 몸이 떨려 왔다. "다시 짐을 푸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이 떠나는 게 싫어요"

그는 잔뜩 긴장하더니 한 손으로 공기를 갈랐다. "이런 식으로 당신과 살 수 없소! 오늘 오후, 당신이 내게서 뭘 보는지 깨달았소" 그는 숨을 반쯤 쉰 상태에서 말했다. 그의 곤혹스런 감정이 강하게 느껴졌다. "당신이 날 어떻게생각하는지 알았지. 당신 아버지와 같은 남자라고 믿고 있었소 ... "

그가 떠나려는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된 애슐리는 눈물이 나오려 했다. " 그런 적 없어요" 그녀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버진 내가 사랑을 두려워하도록 만들었어요. 결혼도 두려워하게 만들었죠.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이 되지나않을까 두렵게 했어요. 4년 전 당신을 사랑하게 되자 난 몹시 두려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녜요. 모르겠어요?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요. 비토 사랑해요!"

믿고 싶어 하는 그의 강렬한 눈빛에 고통이 스며들었다. 재빠르게 방을 가로질러 온 그는 강한 두 팔을 내밀어 그녀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입술에 그의 격렬한 욕구가 전달되었다. 애슐리는 탐욕스런 두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그를 꼼짝 못하게 했다.

"맙소사, 너무 길었소" 그가 신음했다. "지금부터 10년간 당신과 사랑만 나눌 거요!" " 그렇게 희생적이지 않아도 돼요" 애슐리는 부끄럼도 없이 끈질기게 그를 끌어당겼다. 침대로 향하던 그가 갑자기 몸을 굳히더니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안 돼" 그가 한숨 쉬었다. "아기, 책에서 읽었소"

"... 무슨 책?" 그녀가 말을 더듬었다. 갑자기 억제력이 부족한 자신이 창피해졌다. 그는 아주 심각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유산의 위험이 있으면 ... 섹스는 안 된다고"

"의사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어요" 애슐리가 속삭이며 몸을 살짝 움직이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도리를 그녀에게 밀어대며 반응했다. 흥분한 남성의 욕구가 느껴지자 그녀의 뇌에서 다른 생각 따윈 모두 사라져 버렸다.

"확실하오? 또다시 당신을 잃는다면 죽어 버릴 거요" 그가 거칠게 내뱉었다.

"그럴 기회는 없을 거예요"

"정말로 날 사랑하는 거요?"

"아주 정열적으로 ... 미친 듯이 ... 영원히" 그의 손과 입의 움직임으로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비토 ... 운전사가차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넘어졌다. "날 용서하다니 믿을 수 없군" 그가 머리카락에 대고 신음했다. "당신이 청혼을 거절했을 때 얼마나 낙담했는지 모르오. 하지만 당신이 옳았소. 순전히 내 이기심 때문이었지"

"나도 그렇게 빨리 아파트에서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어린애 같은 행동이었어요" 그녀가 후회스럽다는 듯 말했다.

"죽도록 사랑해" 비토가 두 팔로 그녀를 꽉 껴안았다.

"다시는 실망시키는 일 없을 거요 ... "

"지금 실망시키고 있잖아요" 순간 그가 긴장하더니 걱정스러운 눈으로 웃고 있는 녹색 눈을 내려다보았다. "내게 천국을 보여 주었던 이 남자에 대해 뭔가 기억이 날 듯해요 ... 그리고 지금 <다시는 놔주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는 중이에요 ... "

"당신만 좋다면 ... " 그가 느릿하게 웅얼거렸다.

"좋아요 ...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