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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결혼(River Lady) 3

14

해리가 너무 깊이 잠이 들어 있어서 트레벨리언은 그를 흔들어 깨울 수밖에 없었다. 해리는 돌아누우며 싫은 눈초리로 형을 쳐다보고 나서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얘길 좀 하자꾸나."

트레벨리언이 말했다.

"형님은 잠도 안 주무세요?"

"자지 않을 수만 있으면 안 자지."

해리가 애써 눈을 뜨려고 하지 않고 다시 잠이 드는 것 같았다. 트레벨리언은 동생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냥 돌아가진 않겠어."

얼굴을 찡그리며 해리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숨어 있어야 할 사람 대신에 형이 소문을 내고 돌아다니는 모양이군요. 도대체 이 시간에 웬 일이시오?"

"오늘 네 어머니와 클레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

순간 해리의 눈이 번쩍 뜨였다. 당황한 표정 그 자체였다.

"특별한 건 없었어요. 클레어가 엄마를 만나고 싶어 했고, 그래서 만난 것뿐이에요."

트레벨리언은 동생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자기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볼 때마다 항상 그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해리는 틀림없이 그의 어머니와 약혼녀가 행복한 티 타임을 가졌다고 믿고 있었다. 심지어는 클레어가 맥 트레비트가 말했던 대로 공포에 질려 어머니의 방을 나왔다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는 듯했다.

"클레어가 뭐라고 했어요?"

해리가 물었다.

"그 여잔 못 만나 봤다."

그 말에 해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의 미국인 꼬마 상속녀가 형과 함께 노닥거리지 않은 것이 기뻤다.

"클레어가 불평을 한다는 건 어떻게 아셨소?"

"얘길 들었지."

해리는 하품을 했다. 언제나 신비한 척하는 트레벨리언의 태도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관심거리가 될지는 모르지만 해리에겐 그저 지겨울 뿐이었다.

"한다는 얘기 다 했으면 난 다시 잠이나 자야겠어요."

"클레어와 결혼을 하고 나면 네 어머니를……."

트레벨리언의 어투가 경멸조로 바뀌었다.

"……별채로 내보낼 거냐?"

"왜 계속 그렇게 형님은 우리 엄마를 무슨 도깨비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지, 난 도무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엄마는 단순하고 상냥한 여자예요. 항상 그래왔고. 엄마를 이해하려고 조금만 노력을 해봐요. 형도 그걸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형님 질문에 대해서라면 대답은 ''예요. 어머니는 별채로 이사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곳에 어머니가 기거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형님도 잘 아시다시피 엄마는 다리가 불편하잖아요."

"이 집과 레아트리스를 지배할 수 있도록 계속 여기 있겠다는 뜻이로구나."

자신도 모르게 해리는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형은 악마라도 화가 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닌 괴물이 아니에요. 엄만 딸을 사랑하시는 거구, 누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세요. 그게 그렇게 잘못인가요. 리는 완벽하게 행복한 거라구요."

"그게 네 생각이니, 아니면 리 생각이니? 네 누나와 대화를 해 본 게 얼마나 됐지?"

"형님이 누나와 이야기를 나눈 것보다는 훨씬 조금밖에 안 됐죠."

해리가 쏘아붙이듯이 받아쳤다.

"형님이 볼 때, 행여나 형님이 집에 돌아와 모든 걸 바꾸어 놓을 거라고 상상이라도 하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을지 알고 싶어요. 형님은 어렸을 때 이 집을 떠났소. 그리고 외할아버지에게서도 도망쳐서 몇 년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소. 그런데도 이제 와서 집에 돌아와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을 하고 싶어 하는 거라구요.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먼저 사람들 앞에 나서서 형님이 살아 있다는 걸 밝히세요."

트레벨리언은 침대 곁의 높다란 의자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내 생각은 그래요."

해리가 말했다.

"형님은 살금살금 남의 이목을 피해 다니며 배후 조종은 하고 싶지만 남들 앞에 나서기는 싫은 거라구요."

"네 미국 꼬마가 리와 제임스 킨케이드를 맺어 주고 싶어 하더구나."

해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요. 하라고 하세요."

침대로 몸을 뉘이며 그가 말했다.

"클레어가 어떤 중매쟁이 노릇을 하고 싶어 하든지 그건 전적으로 자유예요. 여자들은 그런 일을 좋아하잖아요."

"그녀를 돕지 않겠다는 뜻이냐?"

"도와 줘요? 클레어가 하는 일이라고는 두 사람을 다시 소개시켜 주는 정도가 고작일 거예요. 두 사람이 못 만난 게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럼 네 어머니는 어떡할래?"

화가 치민 얼굴로 해리는 형을 향해 돌아누웠다.

"형님에게도 어머니잖아요. 왜 그렇게 형님은 자기가 무슨 알에서 나서 어머니도 없는 사람처럼 고집을 피우시는 거요? 만일 레아트리스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남자가 있으면, 하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누나는 죄수가 아니잖아요."

해리는 수 년 전 킨케이드를 놓고 어머니와 리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에 관해서는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몇 년 전에는 분명 그런 일이 있었고, 그 당시에 리에게는 어머니가 승낙한 구혼자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트레벨리언의 목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리는 죄수나 다름없어. 네가 그걸 보지 못할 뿐이지. 그리고 빨리 뭔가 손을 쓰지 않으면 네 어린 꼬마 신부도 마찬가지로 죄수 신세가 될 거야."

"더위라도 먹은 모양이군요."

해리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클레어와 결혼을 할 거고, 아무 문제도 없을 거예요. 엄마는 클레어가 꽤 마음에 든다고 말씀하셨고, 내게 아주 좋은 아내가 될 거래요. 내 생각에는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엄마와 리 누나 사이처럼 두 사람이 아주 가까워지기를 난 바라고 있구요. 이제 내 방을 나가 주시겠어요? 잠을 좀 자야겠어요."

해리는 이불을 바짝 끌어당기며 눈을 감았다.

무슨 말을 해야 동생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트레벨리언은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해리는 어머니가 뭔가 잘못된 점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깨달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트레벨리언은 동생에게 뭔가 합리적인 설명을 해 줄 수 있었으면 싶었다. 클레어에게 해리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라는 점을 이해시킬 수만 있다면 트레벨리언은 여기서 손을 뗄 수 있었다. 클레어의 도움에 보답했다는 생각에, 맑은 정신으로 하던 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좋은 생각이었다. 매우 바람직한 생각이지만, 해리가 움직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한, 도무지 성공할 희망이 없었다. 일어나겠다 싶은 일이 발생했을 때 해리는 그것을 용인하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트레벨리언은 클레어를 생각했다. 그녀가 춤추고 웃던 모습을 떠올렸다. 해리와 결혼하여 지긋지긋한 증오로 점철된 이 집에서 살게 되면 클레어도 레아트리스처럼 될까? 공작부인에게 항복을 하고, 언제 어느 때고 그 노파가 하자는 대로 무엇이든 하게 될까? 클레어가 맥 트레비트에게 계속 소를 훔쳐도 좋다고 말했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클레어의 의사에 상관없이 결혼식이 끝난 뒤 반 년 내에 맥 트레비트가 몽고메리 가의 영지에서 쫓겨날 게 뻔하다는 사실을 트레벨리언은 알고 있었다.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는 정말 이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 집필에 몰두하고 싶었다. 페샤어에 관해 정리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자신과 관계가 있는 이 사람들의 일에 마음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 집안사람들과 이 집을 비롯하여 무엇이든 그와 관련된 일에 연루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집안사람들이 그를 죽었으려니 생각해 주는 것이 좋았다. 그것은 트레벨리언에게 엄청난 자유를 의미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여동생에 관한 염려가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집에 돌아온 이후로도 그는 안에서든 밖에서든 레아트리스를 본 적이 없고 찾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클레어가 맥 트레비트에게 했던 얘기로는, 그녀가 여태껏 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비참한 사람이 레아트리스라는 것이었다.

트레벨리언은 해리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 어린 동생 해리는 클레어가 공작부인 자리를 대신하는 데에 도움을 줄 의사가 없음이 분명했다. 해리는 지금이 너무 편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더없이 완벽한 상황인데, 해리가 그것을 바꾸려고 애쓸 이유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트레벨리언은 고민스러웠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방으로 돌아가 그곳에 칩거한다? 집필에 몰두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해리가 그의 미국 약혼녀와 결혼하도록 방관하고, 그녀가 시어머니와 전쟁을 벌이도록 내버려둔 채로? 클레어는 밝고 건강한 젊은 처녀였고, 다른 조건이 없다면 늙은 노파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클레어가 그를 그렸던 그림이 눈앞에 어른거려 트레벨리언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부터 십 년이 지난 후에 이곳으로 돌아온다면, 식사 접시를 들고 시어머니 방으로 들어가는 행복한 젊은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그때쯤이면 그녀의 멋쟁이 남편은 부인의 영혼이 벌써 죽어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도대체 알고 있기라도 할까?

트레벨리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아마 레아트리스와 얘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얘기만 나눌 수 있으리라. 아마 리는 클레어가 생각했던 것처럼 불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15

침대 위에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쓰고 있던 레아트리스는 뭔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데도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했다. 설풋 잠결에 그 모든 소음이 어머니에게서 나온 거라고, 그녀를 깨우기 위한 소리라고만 생각했다.

노인네가 이 늦은 시간에 뭘 시키려고 하는 것이지?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머리를 빗겨 달라고? 뜨거운 물? ? 아니면 책이라도 읽어 달라는 것일까? 때때로 레아트리스는 노인네가 딸을 귀찮게 할 거리가 없나를 헤아리며 일부러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제임스 삼촌이 언젠가, 유제니아는 더없이 심술궂은 사람이라서 하루 스물네 시간을 꼬박 직접 딸을 괴롭히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거라고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레아트리스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이불을 끌어내리고 침대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눈까풀 너머로 불빛이 스며들어 오자 비로소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동쪽 벽 가까이에, 칸막이 벽 뒤에 숨은 오래된 문을 뒤에 열어젖혀 두고 양초를 손에 들고 서 있는 물체는 바로 죽은 오빠의 유령이었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참으려고 손가락으로 입을 틀어 막으며 레아트리스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침대의 헤드보드를 향해 뒤로 물러서며 이불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유령이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레아트리스는 더 달아나려고 애를 쓰면서 이불을 더 높이 끌어당겼다. 소리를 질러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해도 도무지 한마디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앉아 공포에 질려 뻣뻣이 굳어 있었다.

", 머트('바보'라는 뜻으로, 레아트리스 별명)."

유령이 말했다.

"바로 나야."

레아트리스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 자리에 앉아 여전히 사시나무 떨 듯하다가 다시 눈을 깜박이기 시작했다. 이 물체는 유령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오래된 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온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었다. 레아트리스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자세히 그를 들여다보았고, 그는 한 걸음 그녀 앞으로 다가섰다.

"난 살아 있는 사람이야."

그가 말했다.

"변함없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구."

레아트리스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내리고 그를 주시했다. 정말로 그가 나의 오빠일 수 있을까?

"벨리?"

그녀가 속삭였다.

그는 한 차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방을 가로질러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레아트리스는 팔을 벌려 그를 맞았고, 트레벨리언은 그녀에게 다가가 얼굴을 목에 묻었다. 순간 레아트리스의 얼굴은 그의 머리칼 사이로 숨어들었다.

오빠가 정말 살아 있다니! , 신이여 감사합니다. 진정 실제로 그가 살아 있었다니, 이 모든 것이 신의 은총이나이다!

순간 레아트리스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물이 볼을 따라서 조용히 흘러내렸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손이 트레벨리언의 팔을 지나 등을 타고 내려갔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이 정말 그 자리에 있는지 확인을 하듯 그를 매만지는 동안 눈물이 더욱 격해지기 시작했다.

", 착하지."

리를 껴안으며, 세차게 그녀를 껴안으며 트레벨리언이 말했다.

그는 일종의 외투처럼 보이는 괴상한 실크 의상을 입고 바닥이 부드러운 부츠를 신고 있었다. 먼저 한쪽 발끝을 사용하여 반대편 부츠를 벗긴 후에 나머지 쪽도 그렇게 벗어 던졌다. 침대를 기어올라 레아트리스의 곁에 앉은 다음, 그는 양팔을 벌려 오빠라기보다는 연인처럼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애초의 노력이 별반 소용이 없자, 더 이상은 달래 보려고 하지 않았다. 울고 울고 또 우는 동안 가만히 그녀를 껴안고 있었다.

한참만에야 레아트리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진정이 되었다. 어느 만큼 눈물이 진정되자, 사람과의 포옹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는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인간의 몸뚱이를 껴안아 본 지가 벌써 오래고 오랜 일이었다. 그녀와 트레벨리언과는 나이 차이가 두 살밖에 되지 않은 데다 어릴 적부터 두 사람은 매우 가까웠다. 맏이였던 알렉스는 자기만 알았고, 위엄을 세우느라 하찮은 계집아이에게 신경을 써 줄 틈이 없었다. 하지만 벨리는 친구였다.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못된 장난의 공모자였다.

트레벨리언이 아홉 살 때 무서운 외할아버지 곁으로 멀리 떠나 보냈던 날 이후로, 평생에 가장 끔찍했던 그날 이후로 레아트리스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날 벨리는 무개 마차(지붕이 없는 마차)에 몸을 싣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자 오빠이자 그리고…… 정신적 동반자였던 벨리의 모습은 죽는 날까지 마음 깊이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몇 달 후면 벨리가 돌아올 거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단호한 표정을 지켜보며, 레아트리스는 오빠가 절대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최소한 살아서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빠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 어머니에게 대들었던 것이다. 어머니 앞에 똑바로 서서 그녀의 처벌과 경고를, 그녀의 협박을 비웃었다. 하지만 결국 노파가 이겼다. 무엇보다도 벨리는 아직 어린애에 불과했고, 그녀는 공작부인에다 어머니였다. 권위는 바로 그녀의 손아귀에 있었다. 아버지는 공작 수업을 시킬 아버지의 아들 알렉스가 있었다. 그리고 레아트리스가 보기엔, 날 때부터 골칫덩어리였던 둘째 아들 벨리를 떠나 보내는 게 아버지에게도 약간은 즐거운 모양이었다.

"정말로 살아 있는 거예요?"

그녀가 속삭였다. 울먹임을 진정하려고 애쓰며 그녀는 경련에 가까운 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그리고 진정으로."

트레벨리언은 팔로 그녀를 감쌌고, 그렇게 껴안는 동안 그녀의 등이 그의 앞가슴에 닿았다. 항상 해왔던 방식이었다. 이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껴안는 방식이었다. 어렸을 때조차 그들의 어머니는 벨리가 사소하게 규칙을 어겨도 사정없이 매질을 했다. 그럼에도 둘째 아들은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고, 그 사실이 십중팔구 노파를 격노하게 했을 거라고 레아트리스는 생각했다. 매질이 끝나면 오빠는 조그만 어깨를 뒤로 제치고, 그래봐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듯이 당당하게 걸어 나오고는 했다.

하지만 밤이 되어 레아트리스가 살금살금 터널을 지나 오빠의 방을 찾아가 그의 침대로 기어들면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벨리는 항상 울면서 말했다.

"어머니는 왜 그렇게 날 미워하는 거지?"

레아트리스는 대답을 했던 적이 없었다.

"신문에서는 오빠가 죽었대요. 고열로 고생하다가 죽었고, 오빠는 페샤에 도착하지도 못했고, 아파서……."

트레벨리언이 비웃는 듯한 웃음으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너무 건강해서 그렇게 죽을 수가 없었지. 잠시 앓기는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어. 곧 회복됐지. 망할 놈의 배를 일어서서 기다릴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가 영국으로 돌아 온 거야."

레아트리스는 그의 손 하나를 얼굴로 가져가 볼에 대고 문질렀다. 트레벨리언과 원정을 함께 했다던 잭 포웰이 영국에 돌아와, 자기 혼자만이 유일하게 신비의 도시 페샤에 들어갔다고 세상에 발표한 것이 벌써 수 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 사람이 언론에 발표한 바에 따르면, 캡틴 베이커는 병세가 너무 악화되어 페샤에 진입도 하지 못하고 뒤에 남아 있었다고 했다. 포웰은 캡틴 베이커의 병세가 심각해서 해안으로 오는 도중 내내 들것에 누워 있었으며,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에 승선시키려고 했지만 죽고 말았다고 했다.

"어디 있었어요?"

그녀가 물었다.

잠시 그가 대답을 머뭇거렸다.

"찰리의 방에."

레아트리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말을 꺼냈을 때는 태연한 척하려고 애를 썼다.

"거기엔 얼마나 있었어요?"

"몇 주 됐지."

그녀는 벨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한동안 거기 있었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여동생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가 도무지 자기를 만날 생각이나 있었는지 또, 거기에 머문 것이 이번이 처음인지 몹시 궁금했다. 전에도 혹시 오빠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리고 아무도 찾지 않는 그곳에 있으면서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은 무슨 일로 여기에 오신 거죠?"

마음을 쓰지 않는 듯, 느긋하고 태평스레 보이려고 애를 쓰며 레아트리스가 물었다.

하지만 항상 그랬듯이 트레벨리언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는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그 웃음은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베개를 손에 쥐고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내가 오빠를 죽었다고 믿게 놔둘 수 있죠? 내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기나 해요? 평생 내가 가진 거라고는 오빠 편지들뿐이에요. 오빠 편지는 모조리 갖고 있어요. 마지막 한 장까지도 말이에요."

침대에 드러누우며 그는 싱긋이 웃어 보였다.

오래도록 그를 만나지 못했지만, 어디를 가더라도 그 특유의 미소를 담박 알아 볼 수 있으리라. 아홉 살 시절의 도전적이고, 악마도 섬뜩해 할 미소와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네 방을 가득 채웠겠구나."

둘은 함께 미소를 지었다.

"네 트렁크요."

레아트리스는 팔을 뻗어 그의 볼을 매만졌다.

", 벨리, 정말 진정으로 살아 있는 거예요? 유령이 아닌 게 확실해요? 메이 숙모가 오빠 유령을 보았댔어요."

"이른 새벽에 숨을 죽이고 복도를 걸어가다가 우연히 숙모와 마주쳤지. 그 구시대 유물들이 아직도 안 죽었니? 내가 어렸을 때도 그 사람들 꽤나 나이가 들었었는데. 지금은 몇 살이나 됐는지 도무지 상상도 못하겠구나."

"어머닌 틀림없이 그 사람들이 죽었으면 할 거예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죽을 기미가 없다고요. 캐미 숙부는 해리 약혼자의 동생을 자기 연극에 출연시킬 거래요. 잘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의상 문제로 다퉜겠죠?"

"내가 들은 브래트에 관한 애기로 미루어 보면 틀림없이 그 아이가 이겼지 싶은데."

순간 레아트리스가 가늘게 눈을 치켜떴다. 그가 돌아왔다는 충격에서 벗어나며 무엇 때문에 거기 왔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오빠가 그 아이를 어떻게 알죠? 클레어를 만났어요? 아니면 해리를 만난 건가요?"

트레벨리언은 돌아누워 팔베개를 하며 천정을 쳐다보았다.

"해리의 미국 꼬마를 어떻게 생각하니?"

레아트리스는 베개를 들어 찰싹 소리가 나도록 그의 얼굴을 내리치며, 앞으로 수천 번은 더 때려 주겠다는 기세로 덤벼들었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이 베개를 빼앗으며 손을 그녀 곁에 내려놓았다.

"왜 그러는 거야?"

"오빠는 여러 주 동안 여기 숨어 있으며, 해리와 어쩌면 그 애의 약혼녀를 만났어요. 그러면서 내게는 오빠가 죽었다고 믿게 내버려 두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난 이 세상 누구보다 오빠를 사랑했어요. 22년 동안 최소한 일주일에 한 통, 가끔은 대여섯 통씩 편지를 썼어요. 내 생활에서 일어났던 모든 걸 편지에 썼어요. 내 영혼을 오빠에게 쏟아부은 거라구요. 그 모든 세월 동안 오빠는 내 가장 친한 사람이었고, 때로는 유일한 친구였어요. 하지만 오빠는, 오빠가 사랑하는 페샤를 찾겠다며 떠나 버렸고, 그 후로 난 소식을 듣지 못했어요. 이 년 동안 단 한 장의 편지도 없었어요. 그리고 나서 오빠가 죽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었어요. 당연히 믿을 수밖에! 내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기나 해요? 오빠 때문에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알기나 하냐고요? 그리고 이제 오빠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바로 코앞에서 숨어 살면서 비밀 통로를 슬금슬금 돌아다니며 망령 든 늙은 메이 숙모를 만나고, 오빠에 대해 사실은 쥐뿔도 모르는, 적어도 나만큼은 알지 못하는 해리와는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다녔어요. 그리고 지금은……."

레아트리스가 하던 말을 멈추자 트레벨리언은 몸을 일으켜 헤드보드에 기대며 그녀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가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계속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벨리의 품에서 훌쩍이며 그녀가 말했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나을 거라구요?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

말은 이렇게 했지만 레아트리스는 대답을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이지만, 장남인 알렉스의 죽음은 트레벨리언을 공작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눈을 크게 뜨고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공작 각하."

그녀가 속삭였다.

"맞아."

레아트리스는 머리를 다시 트레벨리언의 어깨에 기댔다. 바야흐로 상황이 몽땅 바뀌었다.

"그 여자는 그걸 좋아하지 않을 거야."

레아트리스가 낮은 소리로 말했고, 두 사람은 '그 여자'라는 말이 어머니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여자는 해리가 공작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을 거야. 내 생각이지만 그 아이도 그럴 테고, 안 그래요?"

"난 공작이 되고 싶지 않아."

트레벨리언이 속삭였다.

"그 자릴 바랬던 적도 없고. 해리는 완벽한 공작이야. 그 아이는 사냥을 하고 파티도 베풀고, 귀족원(House of Lord; 영국의 상원)에 앉아 빈둥거리는 일 같은 것도 썩 잘 해낼 거야. 내 생리엔 맞지 않아. 난 작위를 책임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벨리……."

그녀가 말을 꺼냈다.

그는 레아트리스의 머리를 그의 품안으로 당겨 머리를 쓰다듬었다.

"싫어. 난 공작이 되는 게 싫고, 그 자릴 뺏고 싶지도 않아. 해리는 내 원정 자금을 대겠다고 약속했고, 내가 바라는 건 그뿐이야. 평생 할 일이 너무 많아. 내가 찾을 수 있는 가장 부유한 상속녀와 결혼하여 영지내의 저택에서 썩는 건 내 계획 속에 없어."

클레어를 언급한 것이 두 번째였다.

"그녀를 만났어? 클레어를 만났느냐고?"

대답을 너무 오래 지체하자 레아트리스는 몸을 일으키며 그를 쳐다보았다. 항상 벨리는, 심지어는 어릴 적부터 그런 눈을 갖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그런 눈이 어머니를 화나게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두 눈은 강렬한 총기가 있었고, 눈빛만으로는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벨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눈빛만으로는 그를 읽을 수 없었다.

레아트리스도 마찬가지였다. 트레벨리언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집에 돌아오도록 허락을 했었다. 하지만 그의 귀환은 2주를 넘기지 못했다. 어느 날인가 트레벨리언이 밤중에 교회 지하실에 몰래 숨어들었다가 붙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서 납골당을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다음 주에는 사다리를 올라 과부가 경영하던 하숙집 이층에 들어가려다가 붙들렸는데, 그 집은 불법 영업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곳이었다. 아버지도 두 번째 과오는 용서하지 않았고, 아들은 다시 외할아버지 집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트레벨리언은 다시 몇 차례 집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서 곧바로 되돌려 보내졌다.

그 결과 자라는 동안 오누이가 서로 자주 만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벨리는 수천 통의 편지와 수백 장의 사진을 그녀에게 보냈다. 덕분에 그녀는 벨리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벨리가 변장이라고 불렀던 의상을 입고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던 때문이었다.

이제 트레벨리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오빠가 뭔가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죠? 날 찾을 생각이 있긴 했나요. 아니면 날 거들떠보지도 않고 떠날 작정은 아니었어요?"

대답은 그의 눈빛에 있었다.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동원해서 마음껏 저주를 퍼부으라는 트레벨리언의 재촉에 싫다고는 했지만, 사실 오빠 덕분에 아주 이상한 말 몇 가지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레아트리스는 다시 머리를 뒤로 기댔다. 악을 써 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다. 있는 힘껏 비명을 질러 본들 그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을 터였다.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내게 말해 줘요. 모든 것을 말이에요.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요."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어. 그리고……."

"오빠가 여기 있다고 어머니에게 일러바칠 거예요."

트레벨리언이 빙그레 웃었다. 공허한 협박인 걸 잘 안다는 웃음이었다. 설령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레아트리스는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비밀을 발설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가 하자고 한 거야."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이 집에 쉬러 왔어.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고, 그래서 숨어서 체력을 회복할 장소가 필요했거든. 솔직히 말해서 난 집안사람들이 틀림없이 여기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계절에 적응을 못한 거지. 지금쯤은 집안사람들이 대부분 남쪽 영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레아트리스는 몸을 기대고, 클레어를 만났던 얘기며 그녀의 말을 붙잡고 나서 기절한 얘기를 들었다.

"약간…… 당황스러웠지?"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가 물었다. 레아트리스는 그의 여성 편력을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 십대 시절의 트레벨리언은 여자에 대한 탐험 이야기를 편지에 적어 보내고는 했다. 한밤중에 몰래 여학교 담을 넘어 들어간 얘기, 키득거리는 소리를 이상하게 여긴 사감 수녀가 들어오자 어떤 여학생의 침대에 숨었던 얘기 따위였다. 나이가 들자 여자 이야기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레아트리스는 심술 사나운 어머니, 그리고 무관심한 아버지와 두 남자 형제에게 격리되어 있었던 터라, 그의 모험 이야기를 빠짐없이 적어 보내 달라고 트레벨리언을 졸랐었다.

"클레어는 아주 이쁘죠, 안 그래요?"

친근하게 쳐다보며 레아트리스가 물었다.

"아름다움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 클레어는 뭐랄까…… 삶이 있어."

레아트리스는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클레어는 신속하게 움직이고 재빨리 말하며, 항상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 같았다. 자기 모습이나 들여다보며 즐거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그 여자를 꾀었어요?"

순간 트레벨리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여잔 해리의 약혼녀야."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이 웃어젖혔다.

"이집트에서 귀여운 무용수 아가씨와 사귈 때는 그런 데 신경 안 썼잖아요. 그리고 하렘에 쳐들어갔을 때는 또 뭐예요? 그 여자들은 다른 사람 부인이 아니었나요?"

"그 여자들은 내 동생과 결혼할 사람이 아니었잖아."

레아트리스가 웃었다. 트레벨리언의 다양한 여정과 모든 보헤미안 같은 외관에도 불구하고 내면에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의 관습적인 태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 말고도, 그 여잔 날 싫어해."

레아트리스는 놀란 눈으로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내가 늙고 병들고 힘이 없어서 싫대."

머리를 뒤로 기대고 있어서 그는 레아트리스가 웃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웃느라 키득거리는 몸의 진동이 느껴졌다.

"마음껏 웃으렴. 하지만 그 여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그 여자는 해리에게 푹 빠져 있다고. 말끝마다 해리 타령이지. 걔가 완벽하대나 어쨌대나."

"해리가?"

"해리가!"

그런 대단한 농담을 음미하며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입을 열지 못했다. 이윽고 트레벨리언이 다시 입을 열어 그 뒤로 클레어와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라는 말을 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너무 외로워 보여서 말이야. 그 여자는 이 집에 적응을 하지 못했고, 해리는 그녀에게 전혀 신경도 안 썼지."

레아트리스도 마찬가지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사무치게 잘 알고 있었다. 대 저택은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친구가 한 사람도 없었다. 최소한 그녀에게는. 숙모와 고모들이 모여 앉아 아는 사람 흉이나 보며 노닥거리는 응접실에는 앉아 있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어머니의 듣기 싫은 잔소리를 견뎌 낼 재간이 도무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이야기를 들었다. 얘기 속에서 그가 말하는 것 이상을 들었다. 클레어를 아주 좋아한다는 그의 목소리에서 뭔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클레어가 캡틴 베이커의 책을 모두 읽었다는 오빠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모든 책을."

이렇게 말하는 트레벨리언의 목소리에 뭔가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또 벨리와 클레어가 앵거스 맥 트레비트와 함께 지냈다는 별난 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어렸을 때 벨리와 함께 관목 사이를 몰래 기어다니며 앵거스의 위스키를 서리하러 다니던 시절 이래 지금까지 레아트리스는 맥 트레비트 일가 사람은 단 한 명도 단 한 차례도 만난 적이 없었다. 당시에 언젠가 한번은 늙은 남자에게 붙들려 혼쭐났던 일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 남자는 겁만 주고 그녀를 그냥 보내 주었다. 그녀가 완전히 겁에 질려 돌아오자, 벨리는 늙은 허깨비를 본 거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놀려 대며 비웃었다.

그런데도 클레어가 그 늙은이와 시간을 함께 보냈고, 소작인들과 어울려 춤을 추었다는 얘기를 듣고 있는 것이다. 클레어가 요정과 어울려 하루를 보내며 차 대신 감로주를 마시고 취했대도 이 보다 더 놀랍지 않으리라.

"그밖에 또 뭘 했어요?"

다소 경외스럽다는 투로 레아트리스가 속삭였다.

트레벨리언이 미소를 지었다.

"뱃사람처럼 스카치를 마셨고, 아주 이상한 음식을 약간 먹었지. 그 여자는 그런 음식을 아주 좋아했어. 그리고 내가 고열로 쓰러져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날 돌봐 주려고 자기 동생에게 뇌물을 주어 거짓말을 시켰고. , 해리에게 영지를 구경시켜 달라고 해서 거기 일꾼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그녀가 놀란 눈초리로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리가 그런 일을 했다죠? 해리는 제 하인을 코앞에서 마주쳐도 몰라보는 아이잖아요. 걔가 자기 시종 이름이나 제대로 아는지 모르겠어요. 십 년 동안이나 그 사람이 해리 곁에 있었지만 말이에요."

"우리 영리한 막내 동생께서 찰스를 함께 데려갔던 모양이야. 맥 트레비트 늙은이 얘기로는 클레어가 해리를 대단히 겸손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더구만. 그 아이가 대부분의 설명을 아랫사람이 하게 했대서 말이야."

그때 레아트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너무 오랜만의 웃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인생에서 희망이라고는 트레벨리언의 편지뿐이었고, 편지를 통해 대리적으로 그의 모험 속에 살 수 있었다. 그는 편지에 외할아버지 이야기는 거의 쓰지 않았다. 어쩌다가 최근의 할아버지의 매질 때문에 등이 좀 쓰라리다거나, 며칠에 한 번씩 빵과 물로만 연명해 여위었다는 따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편지는 그가 보고 체험한 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밖에 또 뭘했어요?"

트레벨리언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우리 어머니를 만났다는구나."

"그 여잔 필요하다 싶으면 아주 여우를 떨잖아요."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야. 내 추측이지만 클레어가 그 여자를 알고 있는 것보다, 그 여자가 클레어를 더 많이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노파는 클레어의 능력을 감지한 것 같아."

"능력이라구요? 클레어를 능력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꽤나 괴짜로 보이던데요. 대중없이 식사를 거르고, 내 하녀 얘기로는 로저스가 그녀를 조종한대요. 로저스가 하인들 방에서 그렇게 허풍을 떨었대나 봐요. 아마 로저스가 클레어를 염탐해서 어머니에게 일러바치고 있지 싶어요."

"맞아,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트레벨리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클레어를 능력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느냐고 내게 물었지.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여자는 아직 자기 힘을 몰라. 겨우 어린애 딱지를 뗀 나이라서 말이지. 그녀의 진정한 능력은 그녀가 다른 사람을 배려해 주는 데 있어."

"내가 듣기엔, 그게 무슨 능력일까 싶은데요."

레아트리스가 대단히 냉소적으로 말했다. 경험상 그녀에게는 살아남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다. 살기 위해 사람들은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맥 트레비트와 함께 있는 걸 너도 봤어야 했어."

트레벨리언이 말했다.

"자기 손에서 먹을 걸 훔쳐내 먹고살라고 그 늙은이에게 얘기했지. 뿐만 아니라 모든 소작인이 그녀를 흠모했어. 소작인들은 오랫동안 우리 가문 사람들 중에 누구도 받아보지 못한 존경의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더라니까."

레아트리스는 상체를 바로 세우며 그를 쳐다보았다.

"벨리, 그녀를 사랑하는 거예요?"

트레벨리언은 그녀의 등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로구나. 그 여자는 아직 어린애고, 해리를 사랑해. 그리고 공작부인이 되고 싶어 하고……."

얘기를 멈추며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냐, 귀여운 동생아. 난 그 여잘 사랑하지 않아. 사실 나는 약간의 복수를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지."

"어머니에게."

레아트리스가 냉큼 말을 받았다.

"그럼 누구겠니?"

"내가 돕겠어."

어떤 계획인지 묻지도 않고 레아트리스가 대뜸 동조했다.

"살인? 딴 나라의 특이한 독약을 음식에 타 먹일까?"

트레벨리언이 웃었다.

"그렇게 빨리, 상대적으로 고통 없이 죽이는 건 안 돼. 해리가 공작인 한 어머니는 계속 뒤에 남아서 공작부인 행세를 할 생각일 거야. 죽는 날까지 이곳과 다른 영지를 지배할 속셈이겠지."

"물론이에요. 감히 달리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 수 있겠어요? 오빠의 미국 여자는 자기가 공작부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그 여잔 내 여자가 아니야. 해리의 여자라구…… 맞아, 클레어는 해리와 결혼을 하고 나면 시어머니가 조용히 별채로 물러나, 자기가 공작부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클레어는 고지식한 식사 스케줄을 바꿔놓을 생각도 갖고 있고 말이지."

잠시 그가 말을 중단했다.

"결혼으로 물려받을 재산을 투자하고, 소작인들의 집과 농장을 고치고, 여러 가지 미국적인 사업을 벌이겠다고 마음먹고 있어."

"세상에!"

레아트리스가 말했다.

"정말이에요? 해리는 그녀에게 얘기를……,"

노기 띤 목소리로 트레벨리언이 말을 이어갔다.

"해리가 그 여자에게 거짓말을 해서, 결혼을 하고 난 뒤에는 뭐든지 그 여자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던 모양이야."

레아트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해리는 클레어가 그렇게 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 아이야 틀림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제 어머니를 무슨 천사표나 되는 양 생각하고 있구요. 그 아인 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이해를 못하잖아요."

"꼭 맞는 소리야."

"불쌍하고 불쌍한 클레어."

레아트리스가 감정을 넣어 말했다.

"내 보기엔 클레어가 제멋대로 하며 자란 여자일 거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그 어머니는 아주 고약한 여자지만 말이에요. 흔한 일이잖아요? 그 여잔 해리에게 아주 괴상망측한 경칭을 붙였어요. 이를테면 '유어 어너(Your Honorable이 정확한 경칭)''유어 시린 그레이스(Your Grace가 정확한 경칭)' 따위로 말이죠. 숙모들이 그 여잘 인정사정없이 골탕 먹인 거겠죠. 아마 말도 안 되는 걸 가르쳐 주고 뒤에서 그 여자 험담을 했겠죠."

트레벨리언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 아버지는?"

"해리보다 더 게을러요."

"그럴 수가!"

트레벨리언이 상상도 못했다는 듯이 말했다.

"클레어가 집안을 꾸려 간다는 인상을 받긴 했지만, 이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심하군."

그는 레아트리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 팔을 내뻗어 그녀를 잡았다.

"머트, 이쯤 되면 우리가 뭔가 할 때가 된 것 같아. 클레어가 이 들에게 유린당하는 걸 뒷전에 서서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잖니."

레아트리스가 그에게서 몸을 뗐다. 그녀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다. 어머니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식의 농담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의 얼굴은 진지했다.

"안 돼요, 벨리. 우린 지금 어린애가 아니잖아요. 더 이상 곡예를 할 수는 없어요. 그때를 돌이켜 보면, 난 징벌이란 게 뭔지 몰랐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내가 자발적으로 행동을 하지 않으면, 그 노인네는 항상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잔혹한 벌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난 지금 살아남았고, 약간의 안식도 얻었어요. 그걸 빼앗기고 싶지는 않아요."

침대에서 달아나려고 했지만 트레벨리언이 강하게 그녀를 붙들어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그 여자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우리가 항상 바라던 기회라구."

"오빠에겐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내겐 아니에요. 그 여자 성미를 건드렸다가 우리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고 있잖아요. 그 여자는 벨리를 내쫓아 버리고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했어요. 그리고 나한테는……."

레아트리스는 하던 말을 중단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에게보다 네게 더 악랄한 짓을 했지. 그 여자는 너의 영혼을 망가뜨려 버렸어."

레아트리스는 그것이 더 할 수 없는 최대의 모욕임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에게서 떨어져 나가 침대 곁에 내려섰다.

"오빠는 변하지 않았군요, 그렇죠? 항상 문제를 일으키고. 항상 해서는 안 되는 일만 하고. 얻어맞고 굶주리고 방에 갇혀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도, 그 모든 게 오빠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군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거예요, 그래요?"

"그래."

낮은 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난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어. 항상 그 사람들과 맞서 싸웠지. 그 사람들이 내게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난 항상 싸움으로 되돌려 주었지. 그리고 난 지금 성인이야. 원한다면 어디에나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 수 있어. 그렇지만 넌 아직도 겁먹은 계집애에 불과해. 그 여자 방에 감금되어 있는. 서른한 살이나 먹었지만 가족도 없고, 너 자신의 집도 없어. 가진 거라곤 어렸을 적 이후로 거의 만난 적도 없는 오빠의 편지와 네 인생을 지배하는 벨 소리뿐이야."

레아트리스는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방에서 썩 나가라고, 다시는 돌아와서 속을 뒤집어 놓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상황이 어떤지 전혀 모른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그녀의 삶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갖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레아트리스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가 진실을 알고 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스름한 희망의 불빛을 그녀는 보았던 것이다. 벨리를 빼앗기고 나서 대충 1년간은 그녀도 영혼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은 전사였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레아트리스는 자신이 추종자에 불과했음을, 항상 그랬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벨리가 떠난 지 일년이 넘고부터 레아트리스는 어머니가 시키는 것 외에 더 이상 무슨 일을 꾸며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스무 살이 되어 어머니에게 맞서 보려고 했지만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고, 그 뒤로 다시는 꿈도 꾸지 않았다.

"어떻게 할 계획이에요?"

레아트리스는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를 감출 수 없었다.

"널 제임스 킨케이드와 결혼시킬 거야."

트레벨리언이 말했다.

레아트리스는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꿈벅거렸다.

"뭐라구요?"

트레벨리언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건 그 미국인의 생각이야. 해리의 여자 말이야. 내 여자가 아니라. 그 여자가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널 네 평생의 사랑인 킨케이드와 결혼시키는 거라는 얘기를 맥 트레비트에게 했다더구나. 늙은 괴물의 기반을 몇 가지 없애 버릴 수 있다면 그 노파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난 그게 해리나 집안 일, 사랑스런 클레어 자신에 대한 네 어머니의 지배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하지만 그게 클레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야. 난 네가 아직도 제임스 킨케이드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지 묻고 싶구나."

레아트리스는 얘기를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한마디도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우두커니 침대 모서리에 앉아 트레벨리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려다가 그냥 닫았다.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서는 벨리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미국인은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트레벨리언의 눈이 반짝였다.

"그런 걸 조금만 알았더라도 페샤에 가는 건 그만두고 미국이나 탐험해 볼걸 그랬어."

레아트리스가 웃었다.

"제임스와 결혼을 한다……? 난 오랫동안 그일 만나지 못했어요. 하지만 생각은 했죠. 지금 그 사람 뭘 하고 있죠?"

"모르지. 하지만 책 한 권 쓰느라 아직도 전전긍긍하고 있겠지."

트레벨리언은 아주 경멸적으로 조롱을 섞어 이렇게 말했다. 다작의 작가가 책 한 권 쓰는 데 몇 년씩 걸리는 사람을 놀리는 투였다.

"튜더 왕조 중에 한 사람이었나, 맞니? 헨리 8세와 그 부인들?"

"헨리 7(튜터 왕조 최초의 왕으로서 요오크 가의 딸과 결혼하여 장미전쟁을 종식시킨 왕. 헨리 7세는 스코틀랜드와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딸이자 헨리 8세의 여동생인 마거릿 튜터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와 결혼시켰다. 덕분에 스코틀랜드 왕가의 제임스 6(통합 1)는 양국의 왕권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였어요. 그리고 그 사람의 경제 정책과 관계된 책을 쓰는 거구요."

레아트리스가 쏘아붙였다.

"전기를 쓸 때는 대단히 많은 연구가 필요해요. 오빠는 어딘가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그 얘기를 쓰면 그만이지만 말이죠. 그이는 중세의 문서를 읽는 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해요. 그리고 그런 문서들을 처음 찾아내기도 해야 하고 말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트레벨리언을 노려보았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죠?"

"몇 년 동안 그 친구 생각만 했던 모양이구나, 그렇지? 그 친구 책이 얼마나 걸릴 것 같으니?"

레아트리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마지막 들은 걸로는 헨리 7세의 6년째를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했어요."

소곤거리듯이 그녀가 대답했다.

"그게 뭔데? 네 얘길 제대로 못 들었어. 그 친구가 헨리의 여섯 번째 마누라 얘길 쓰고 있다고?"

"오빠!"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베개를 내던졌다.

트레벨리언이 베개를 받아 들었다.

"몇 년 동안 네 편지엔 제임스 킨케이드 얘기밖에 없더구나. 그 친구의 호흡 하나까지 편지에 적어 보냈지 싶어. 난 그 친구가 살아 있는 신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 틀림없이 나도 그 친구만큼 훌륭한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어. 여행을 하면서 많은 걸 보고 많은 사람을 만났어. 하지만 위대한 제임스 킨케이드만큼 놀라운 사람을 가까이에서 만나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 친구가 브램레이에서 겨우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던 그 꼬마라는 게, 우리가 떠드는 소리 때문에 새들이 놀라 도망친다고 자기네 정원에서 우리를 내쫓곤 하던 녀석이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레아트리스는 트레벨리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 친구를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니, ? 난 항상 궁금했어. 심지어는 어렸을 때도 말이야. 왜 우리가 항상 킨케이드네 집 뒤로 걸어 다녀야 했는지 말이야. 네가 나무 뒤에 숨어서 더러운 밀집 덩어리를 그 녀석에게 얼마나 많이 던지곤 했는지 기억하니?"

"난 절대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어요."

갑자기 트레벨리언의 표정이 진지해지며 침대를 내려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왜 그 친구와 결혼하지 않았니? 그 녀석이 청혼을 안 했니?"

"했어요. 그인 내게 청혼을 했어요. 내가 열 여섯 살 때 그이가 청혼을 했어요. 열일곱 살 때도, 열여덟 살 때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스무 살이 되자 청혼을 그만두었어요."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어머니와 함께 마차에 타고 있다가 우연히 눈길이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그인 고개를 돌려 버릴 거예요. 그인 이제 날 미워해요."

"말할 것도 없이 우리들의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레아트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한편에 손을 꼭 쥐고 그녀가 말했다.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그건 정말 내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장면이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자 됐어요 벨리. 다시 죽음에서 깨어난 오빠가 날 제임스와 결혼시키고 싶어 하는 얘기나 어서 해 주세요."

"내가 아니야. 해리의 미국인이지."

레아트리스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잠시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징벌의 참혹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인은 잘 모르겠지만. 레아트리스가 어머니에게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려고 도전했다가 또다시 실패를 하는 날에는, 더 이상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번에는 어머니가 무슨 짓을 할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도전을 하여 성공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레아트리스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뻔했다. 이 집에서 나가는 것. 끊임없는 벨 소리에서 탈출하는 것. 어머니의 끝도 없는 요구와 잔소리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죠?"

 

 

 

16

시어머니 될 사람을 만난 지 사흘 째 되는 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오자 두 개의 사건이 동시에 클레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사가 봉투를 은쟁반에 받쳐들고 방에 와서는 급한 메세지라는 전갈을 했다. 같은 시간, 그녀의 방에 걸린 거대한 초상화가 숨겨진 경첩에 매달려 뒤쪽으로 흔들리며 브래트의 모습이 그곳에 나타났다. 하나로 보기 좋게 땋아 내린 보통 때의 깔끔한 머리채에서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앞이마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어깨에는 거미줄이 내려앉아 있었고, 대단히 놀라는 표정이었다.

"안녕."

꽤나 즐거운 목소리로 브래트가 말했다.

클레어는 뭔가 야단을 치려다가 꾹 참았다. 집사 앞에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짐짓 브래트가 초상화 뒤를 통해 언니 방을 출입하는 것이 늘상 있는 일인 양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고 애를 썼다. 집사가 가져온 쟁반에서 봉투를 집어 들고 열어 보았다.

 

붙잡혀 있어요. 도와 주세요. 옛날 여름 별장. 즉시 올 것.

레아트리스

 

거푸 세 번을 읽고서야 클레어는 편지 내용을 이해했다. 고개를 들어 집사를 올려다 보았지만 태연한 표정이었다. 클레어는 드레스 룸에 있는 로저스를 따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 그녀는 로저스보다 사오 분 가량 먼저 돌아왔고, 더욱이 침실에 시중을 들러 오지 않은 걸로 보아 로저스가 더 늦게 돌아왔음이 분명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브래트도 돌려보내야 했다.

"제가 뭐 도울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가씨?"

집사가 물었다.

"로저스가……."

클레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로저스는 저녁 내내 바빠야 할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집사가 허리를 수그리면서 이렇게 말하고는 침실을 가로질러 드레스 룸을 향해 걸어갔다.

"! 그리고……."

클레어가 말했다.

브래트가 그대로 서 있는 문 쪽을 흘낏 쳐다보았다.

집사는 자신이 허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미소를 지었다.

"이 집에선 많은 걸 보지 않는 법을 배웁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는 그는 방을 떠났다.

브래트가 어슬렁거리며 침실로 걸어들어왔다.

"이 집이 어떤 곳인지 언닌 상상도 못 할 거야. 지도를 찾았어. 아니, 사실은 어떤 늙은 아저씨가 줬어. 전엔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어. 휠체어를 타고 있었는데, 자기 부인을 넷이나 죽이고 마지막 부인에게 총을 맞았다나 봐. 하지만 살아나서 지금은 맨 끝 방에……."

"브래트, 지금 네 이야기를 들어 줄 시간이 없어. 방으로 돌아가서 꼼짝 말고 있어."

브래트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편지 내용이 뭔데?"

클레어가 옷장에서 승마복을 꺼내자 브래트의 눈이 커졌다. 기회를 노리다가 브래트는 클레어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챘다.

"나도 따라가고 싶어."

"절대로 안 돼. 넌 네 방으로 돌아가고, 아무에게도 이 얘기는 하지마. 나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 가서 알아 봐야지."

"해리의 누나가 왜 언니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거지? 왜 해리한테 안 보내고?"

클레어는 옷을 입다가 잠시 멈추었다.

"좋은 지적이구나. 하지만 나도 모르겠어. 그리고 당장 여기서 나가. 비밀 통로 얘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말고."

브래트는 그대로 서서 언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날 안 데려가면, 언니가 해리 말고 딴 남자를 만나고 다닌다고 어머니에게 일러바칠 거야. 아버지에겐 언니가 날 구박했다고 얘기하고, 해리에겐 언니 방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의 먼지 위에 발자국이 찍혀 있더라고 이를 거야. 그리고……."

"됐어!"

클레어가 말했다. 브래트와 입씨름을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날 따라와도 좋아. 하지만 뒷전에 가만히 서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알겠어?"

"물론이지."

브래트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근데 옛날 여름 별장이 어딘 줄은 알아?"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급하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해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클레어. 당신도 이런 메모를 한 장 받았소?"

클레어가 가진 것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쪽지를 내저으며 그가 물었다.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브래트를 보자 그의 얼굴은 미소로 바뀌었다.

"안녕, 사라. 갈수록 예뻐지는데."

"맞아요, 그렇죠?"

자신도 모르게 클레어는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해리."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해리가 돌아보았다.

"그래요. 방금 나도 똑같은 쪽지를 받았어요. 함께 여름 별장으로 가야 해요."

해리는 메시지 내용에서 위급함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사실, 그는 붙들려 있다는 그녀의 메시지를 매일같이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정말 귀찮은 일이군. 누가 그녀를 납치했다고 생각하오?"

클레어는 옷장에서 부츠를 꺼내려다가 잠시 멈춰 섰다. 사라 앤은 해리가 그리 영리하지 못하다는 눈초리를 언니에게 보냈지만 클레어는 모르는 척했다.

"전혀 모르겠어요. 하지만 레아트리스는 우리 둘이 함께 그곳에 와주었으면 하는 것 같아요. 그게 아니라면 납치범이 우리 두 사람을 원하고 있던가. 해리, 옷을 입을 동안 밖에서 기다려 주겠어요? 10분내에 아래층으로 내려갈게요."

"좋아."

그는 이렇게 말하고 방을 나섰다.

브래트는 클레어의 커다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난 언니와 해리 두 사람이 알고 보면 꽤 재미있는 대화를 했다는 데 내기를 걸겠어. 해리는 정말 다혈질이야."

"잠시 입을 닥쳐줄 수 있겠니? 너나 해리나 왜 그렇게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하는지 모르겠구나. 이건 심각한 일이야."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만일 그게 심각한 일이었다면, 몸값에 대한 요구가 있었을 테고, 그 사람들이 언니나 해리 대신 쭈그렁바가지 할머닐 찾아가지 않았겠어, 안 그래?"

단추를 끄르던 클레어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누구라고?"

"쭈그렁바가지. 마귀할멈. 가장 미움 받는 여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틀어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아일랜드까지, 세상에서 제일 미움 받는 여자 말이야. 하지만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아일랜드 얘기는 많이 하지 않아서 거기까지는 장담을 못 하겠지만."

"이걸 좀 끌러 줄래."

브래트가 하는 말뜻을 헤아리고자 애쓰며 클레어가 말했다.

"제발이지 그 놈의 입 좀 닥치구서 말이야."

몇 분이 지나지 않아 클레어는 준비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해리를 찾았다. 그는 홀에 놓인 짐꾼들 의자에 앉아 설풋 잠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해리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며 출발을 채근했다. 그가 미리 마구간으로 하인을 보내 두었던지, 말이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하인 세 사람도 벌써 말에 올라, 랜턴을 손에 들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클레어는 조용하게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고 해리에게 몇 차례 귀엣말을 시도했다. 한꺼번에 별장으로 몰려들면 레아트리스를 해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해리는 걱정도 팔자라는 듯 물끄러미 클레어를 쳐다볼 뿐, 하인들에게는 출발을 지시했다.

브래트는 거친 거세마에 올라타며, 그녀에게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싸구려 소설과 아주 똑같진 않지만, '노련한 서부 사나이, 구조를 위한 출발', 괜찮아?"

잘난 척하며 브래트가 말했다.

"해리는 스코틀랜드 사람이야. 그리고 여기는 상황이 달라."

"해린 잉글랜드 인이야."

브래트는 박차를 가하며, 거대한 동물을 힘들이지 않고 다루었다. 아버지는 아직 걸음마도 배우기 전에 사라 앤을 말잔등에 앉혔다. 아이는 마치 여자 켄타우로스(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의 괴물)처럼 능숙하게 말을 다루었다. 클레어도 승마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지만 브래트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여섯 사람은 길을 따라 폭풍처럼 달려 내려갔다. 그녀는 비밀리에 접근할 필요가 없기만을 바랐다. 그들 일행이 전혀 은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 달리는 소리가 30여 킬로미터 밖까지도 들릴 것 같았다. 그래서 레아트리스가 실제로 위험에 빠져 있지 않기를, 단지 짓궂은 장난에 불과하기만을 바랐다.

어느 순간, 열을 지어 한 사람씩 좁다란 길을 통과하느라 속도가 줄자, 브래트는 클레어를 돌아보며 말했다.

"언니, 알아? 내가 이 집안을 정말 좋아한다는 걸 말이야."

클레어는 심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박차를 가해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여름 별장에 도착했지만 눈앞의 광경은 클레어에게 전혀 뜻밖이었다. 창문은 모두 판자로 막아 놓았고, 문은 바깥에서 빗장이 질러져 잠겨 있었다. 하지만 조그만 건물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열어."

그대로 말 위에 앉아 해리가 말했다.

목사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키가 큰 사람이었지만, 체구에 비해 너무 작은 말을 타고 있는 터라 키가 더욱 커 보였다. 남산만한 복부 위로는 목사 복장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고, 수염이 가슴까지 치렁치렁 드리워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포효하는 듯한 목소리로 목사가 말했다.

"따듯한 난롯가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다가 여기까지 끌려 나왔소.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오, 해리 공작?"

누군지 기억을 헤아리는 듯 해리는 실눈을 뜨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겠소."

이렇게만 대답하고, 해리는 하인에게 눈짓을 하여 빗장을 열게 했다.

방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완전히 알몸이었다. 한 사람은 사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키 크고 잘생긴 남자였고, 문 밖에 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레아트리스의 벗은 몸을 가리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레아트리스는 창피한 듯 남자 뒤에서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었다.

충격스런 장면에 일단 입을 다물며 클레어는 브래트가 방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하려고 애를 썼다. 차라리 노끈 한 가닥으로 꿀벌을 안에 가둬 두려고 하는 편이 훨씬 쉽겠다 싶었다. 어느새 브래트는 말에서 뛰어내려, 문간에 서더니 천연덕스럽게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클레어는 그와 같은 일을 막아 보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다음 순간, 목사의 벽력같은 목소리에 충격에서 깨어났다. 그는 간음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내릴 것이라고 법석을 떨었다.

마침내 말에서 내려온 해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누이가 몸을 가리도록 코트를 벗어서 건네주었다.

"어디 당신 입으로 해명을 해 보시오, 킨케이드 씨?"

해리는 바야흐로 자신의 은밀한 곳을 가리느라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 남자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킨케이드라는 이름을 듣자 클레어는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맥 트레비트를 떠올렸다. 애써 웃음을 감추었다. 십중팔구 맥 트레비트가 꾸민 일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뒤쪽에서는 지옥의 유황불이 죄인을 덮치리라고 소리를 지르며, 여전히 목사가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가까스로 이들을 한 방에 가두어 두고, 두 사람의 옷을 빼앗아 간 사람이 맥 트레비트일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클레어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를 떠올렸다. 두 사람이 발견되었을 때 그 자리에 목사가 나타나도록 한 것도 그가 꾸민 음모임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결혼을 해야 해요."

클레어는 큰소리로 외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목사는 그치지 않고 두 사람에게 저주를 퍼부어 대며 정신없이 돌아다니느라 쉽사리 그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클레어는 해리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누이의 후견인이고 결혼식의 증인이 될 수 있잖아요? 레아트리스를 당장에 결혼시켜야 해요."

해리는 놀라는 빛이 역력했다.

"내 생각엔 어머니가……."

"너희 영혼이 위험에 처해 있도다."

목사가 계속 소리쳤다.

"너희는 반드시 너희의 죗값을 치르리라."

클레어는 레아트리스를 쳐다보았다. 어깨 아래로 기다란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흘러내려 있고, 해리의 코트 아래로 벌거벗은 다리가 드러나 보였다. 항상 입던 주름 드레스보다 백 배는 나아 보였다. 클레어가 질문하듯 눈짓을 보내자 레아트리스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 두 사람을 즉시 결혼시켜야 해야 해요. 지금 당장! 바로 이 순간에! 모든 사람이 뭔가를 봤는데 소문이 안 나길 바랄 순 없어요. 당신 가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거예요."

"내 생각엔……."

해리가 우물거렸다.

도대체 지금 같은 순간에도 그를 지배하는 어머니의 권세가 참으로 엄청나다는 것을 클레어는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리, 나도 알아요."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곁에 서 있는 하인들도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누이를 더럽힌 남자에게 결혼을 강요할 만한 권위를 갖고 있지 못하다 해도 난 이해할 수 있어요. 틀림없이 여기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내 생각에 난……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그런 권위를 갖고 있다는 거요. 하지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클레어가 말했다.

"나는 이 일 때문에 당신 누이가 아이를 갖게 되는 일이 없도록 기도나 하겠어요."

그리고는 벽에 붙어 서서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당신들 모두 비밀을 지키겠다고 맹세해야 해요. 오늘 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돼요."

비밀이 지켜질 가능성은 별로 많지 않다는 듯 회의적인 목소리였다.

"이리 오세요, 레아트리스. 당신은 저와 함께 말을 타고 돌아가도록 하세요."

해리는 칠백여 미터 바깥까지 소리가 들리도록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마침내 그가 말했다. 그리고는 목사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을 결혼시키시오."

승리의 작은 스릴이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클레어는 이 모든 일을 꾸민 맥 트레비트에게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궁리를 했다. 목사는 하인 가운데 한 사람을 시켜 외투를 벗어 킨케이드에게 주도록 했다.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클레어는 아슬아슬한 사건 진행에 너무 긴장하여, 처음에는 목사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았고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브래트를 흘낏 쳐다보았다. 그 아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정신을 집중하여 목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클레어는 레아트리스와 킨케이드 사이에 서 있는 목사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러자 목사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생김새와 목소리와 틀에 박힌 행동거지는 감출 수 있었다. 말투도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두 눈은 숨길 수 없었다. 트레벨리언은 무성한 눈썹 아래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일종의 젠 체하는 그의 표정을. 클레어는 그를 노려봄으로써 대답해 주었다.

나머지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클레어는 입을 열지 않으려고 입술을 꼬옥 깨물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자 해리는 의무상 어쩔 수 없이 누이의 손에 키스를 하고 나서, 제임스 킨케이드와 악수를 나누고 다시 말에 올라탔다. 클레어는 해리가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을 어머니에게는 결코 얘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아트리스와 킨케이드에게 말을 내주고 하인 두 사람이 말에 함께 올라탄 뒤에도 클레어는 별장 안을 어슬렁거렸다. '목사'가 그 작은 말에 올라타고 멀리 사라졌다.

"해리를 따라가."

클레어는 단호한 목소리로 브래트에게 말했다.

"언닌 뭘 할 건데?"

"너하곤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잠잘 시간을 넘기면 안 돼."

"언니도 마찬가지야. 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지, 맞지?"

"도대체 뭣 때문에 내가 이런 밤중에 남자를 만나러 가겠니? 밤공기를 쐬려고 그런다. 해리를 따라 돌아가."

"언니 보석을 모두 감춰 버릴 거야. 그리고 언니가 큰 트렁크에 있는 가짜 서랍에 이상한 책을 감춰 놓았다고 엄마에게 일러바칠 거야."

"넌 정말 사람을 화나게 하는 데는 재주가 있는 애구나. 내가 가려는 곳엔 널 데리고 갈 수 없어.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야."

"서쪽 건물에서 언니가 만났다는 남자와 상관이 있는 일이지?"

클레어는 동생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이제 난 엄마에게 일러바칠 수밖에 없어. 어떤 남자가 있……."

"입 닥치고 말에 올라타."

브래트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마다 항상 짓던 표정이었다.

서쪽 건물까지 말을 타고 돌아가는 데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에서 내린 클레어는 브래트를 쳐다보며 본관 건물로 돌아가라고 다시 한 차례 채근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잠깐도 지체하지 않았다. 클레어도 트레벨리언에 대해 화가 잔뜩 나 부글부글 끓고 있는 중이라 동생 걱정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고풍스러운 돌계단을 오르며, 간간이 횃불을 벽에 꽂아 불을 밝혀 놓은 것을 보았다. 트레벨리언은 손님이 찾아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집필용 책상이 놓인 방을 지나며, 마지막으로 이 방을 보았던 날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짝 뒤를 따르던 브래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트레벨리언이 여행에서 가져온 가면과 의상, 창 따위가 어지럽게 벽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브래트가 곁을 지나치자, 오만이 한쪽 편에 서서 그녀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이도 싱긋이 웃어 보였다.

트레벨리언은 침실에 있었다. 대야와 물병을 곁에 두고, 일어서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가짜 수염을 떼어내고 있었다. 목사 복장과 배에 붙였던 패드는 이미 벗어 던지고, 지금은 사슴 가죽으로 만든 편안한 반바지와 헐렁한 린넨 셔츠를 입고 있었다. 무릎 아래의 다리는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18세기 스타일의 반바지는 선조들의 트렁크에서 꺼낸 게 틀림없을 테지만, 트레벨리언에게 썩 잘 어울렸다.

클레어가 방에 들어서자, 그가 돌아서며 미소를 지었다. 방금 한 일에 대해 잔뜩 칭찬을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죠?"

그녀가 물었다.

"당신도 나와 진배없이 그 옷을 입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두 사람은 결혼한 게 아니라구요."

그는 다소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클레어의 뒤를 쳐다보았다.

"이 아이가 예쁘다는 당신 동생인가?"

그는 클레어 앞을 지나쳐, 사라 앤을 잠시 꼼꼼히 뜯어보았다.

"얼마나 귀여운 아인지 얘기는 들었다만, 누구도 네 예쁜 모습을 반만큼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 같구나."

트레벨리언은 브래트의 손을 들어 먼저 손등에 키스를 하더니 다시 손바닥에 입술을 갖다 댔다.

"트레벨리언!"

클레어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아인 아직 어린애예요."

"곧 어른이 될 거잖소."

여전히 손을 잡고 브래트를 쳐다보며 그가 말했다. 아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트레벨리언을 쳐다보며, 언제라도 그의 품에 뛰어들 심산처럼 보였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에게서 동생의 손을 낚아챘다.

트레벨리언은 브래트에게 윙크를 하고 나서 대야와 거울 앞으로 돌아가 수염을 잡아뜯기 시작했다.

", 하던 얘기를 계속해 보시오."

"당신은 그들을 결혼시킬 권한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예요. 오늘밤 두 사람은 혼인 상태려니 생각하고 킨케이드 씨 집에서 첫날밤을 보내겠지만, 두 사람은 아직 결혼한 게 아니에요."

"그게 전부요? 제기랄!"

트레벨리언은 수염을 떼어내다 살점이 떨어질 뻔하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난 수피교 사제요, 기억하오? 증명서를 보겠소? 길이가 아마 사오 미터는 될 거요. 대단히 아름답고."

"보자구요."

클레어가 생각할 틈도 없이 대답을 내뱉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에요. 우린 두 사람을 혼인이 성립되도록 만들어야 한다구요. 적법한 결혼 말이에요."

트레벨리언이 수염을 가지고 씨름을 하는 모습을 그녀는 한순간도 더는 봐 주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요. 내가 해 드릴게요."

침대 발치의 의자를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트레벨리언이 의자에 앉자, 브래트는 침대 위로 기어올라 배를 깔고 엎드렸다. 그리고는 겨우 50센티미터가 조금 넘겠다 싶은 거리에서 손으로 턱을 괴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클레어는 뜨거운 물을 대야에 붓고, 수건을 대야에 담궜다가 물기를 짜낸 다음, 얼굴에 붙은 가짜 수염에 가져다 댔다.

"우린 두 사람을 자격이 있는 목사에게 데려가야 해요. 합법적으로 결혼을 시켜야 한다구요."

"종교는 관점의 문제요."

수건 아래서 그가 입을 우물거렸다.

"그렇지 않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트레벨리언을 가로막으며 말을 이었다.

"하나님은 계시고, 그게 문제예요."

"내 생각에 중요한 건, 당신이 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인 것 같소."

얼굴에서 수건을 들어내고 나서 그녀는 천천히 수염을 벗겨냈다.

"여기 뭘 갖다 붙인 거예요?"

"뭔지는 모르지만 오만이 만든 거요."

수염을 모두 떼어 내고 나자 그는 아이를 돌아보았다. 브래트는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트레벨리언을 쏘아보고 있었다.

"클레어."

브래트가 말했다. 아주 진지한 목소리였다.

"내 생각에, 저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 같애."

"정말 맘에 드는구나, 똑똑한 꼬마."

트레벨리언이 맞장구를 쳤다.

클레어는 신음소리를 내뱉고는 동생에게 엄한 얼굴을 해 보였다.

"저 사람에게 한마디도 하지 마. 네가 상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딴 사람하고 달라. 뭐랄까…… 저 사람은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여자랑 그렇고 그런 일만 한 사람이야. 심장도 영혼도 없는 사람이구. 저 사람은 현실은 나 몰라라 하지. 저 사람이 하나님의 종을 사칭해서 두 사람을 가짜로 결혼시킨 이유야. 이게 모두 저 사람에겐 장난에 불과해. 모든 삶이 저 사람에겐 농담이지. 저 사람은 현실에는 개입하지 않아. 단지 관찰자일 뿐이지."

이런 일장 연설은 트레벨리언에게나 브래트에게나 별반 효과가 없었다. 서로 계속해서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저씬 탐험가군요."

마침내 브래트가 입을 열었다.

"몇 가지 보긴 했지."

"알아요, 나도 읽은 적이……."

사라가 말을 꺼내려고 했다.

"브래트!"

클레어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사라는 언니의 째지는 소리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라는 트레벨리언에게서 눈을 떼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클레어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내 동생은 책이라고는 평생 읽어 본 적이 없는 아이예요. 제 가정 교사가 두 손 두 발 다 들어서 얘한텐 뭘 시키지도 않아요. 얘는……."

"나도 아저씨 책의 뒷부분에 라틴어로 된 야한 대목을 읽었어요. 클레어가 그 장을 번역해 두었더라구요. , ……, 번역된 걸 읽었죠."

순간 클레어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동생을 돌아보았다.

브래트는 트레벨리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뭐였더라. 음문 봉……."

"음문 봉합술(성행위를 막기 위해 오줌을 배출하기 위한 조그만 공간만을 남기고 봉합하는 수술)."

"맞아요, 그거예요."

"내 무릎에 와 앉거라, 귀여운 아가야. 아저씨가 네가 알고 싶은 걸 모두 알려 주마."

브래트가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자 클레어는 브래트의 팔을 비틀었고, 아이는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트레벨리언, 그만해요. 얜 아직 어린애잖아요."

"물론 어린애지."

트레벨리언은 냉소적으로 내뱉고 나서는, 클레어를 돌아다보았다.

"당신은 불평을 하려고 이곳에 온 거요? 내가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군. 난 당신이 내게 고맙다는 얘기를 하러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오. 맥 트레비트가 당신이 리와 킨케이드를 결혼시키고 싶어한다고 전하길래, 난 두 사람을 결혼시켰소."

"두 사람은 실제로 결혼한 게 아니에요. 그냥 함께 사는 거라구요. 내일 그 사람들에게 가서, 당신이 결혼식을 집전한 거라고 사실대로 얘기하세요. 집전이라고 표현해도 될진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그리고 두 사람은 정식 목사에게 가서 결혼식을 해야 한다고 말하세요."

트레벨리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는 절대로 못하겠소. 어떤 사람들만큼이나 나도 결혼식을 주재할 자격이 충분하오. 감히 그 이상의 자격이 있다고 말하겠소. 난 당신네 일반적인 나라의 목사들이 자격을 얻으려고, 나만큼의 고행을 치렀는지 의심스럽소."

"요는 그게 아니잖아요."

"그럼 내게 설명해 보시오. 도대체 뭐가 요점인지."

"두 사람을 합법적으로 결혼시켜야 한다는 거죠. 정상적인 종교를 가진 사람에 의해서 말이에요."

트레벨리언은 더 이상 비웃지도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야로 걸어가서 얼굴을 씻었다.

"당신 꽤나 고상한 척하는군."

그가 비아냥대는 말투로 말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수피교도 그 가운데 하나임에는 틀림없소. 레아트리스와 킨케이드는 다른 모든 커플과 마찬가지로 결혼이 이루어진 거요."

"그게 무슨 말이죠? 다른 커플과 마찬가지로 결혼이 이루어졌다니?"

"말한 그대로요. 어떤 곳에서는 결혼이 아주 탄력성이 있소. 그곳 사람들에게는 서구 세계의 혼인 풍습이 아주 바보같이 보일 거요. 한 사람과 영원히 혼인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아주 우스운 관습이라는 거지."

얼굴을 닦아 내고 그는 한쪽 벽에 늘어선 커다란 옷장으로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클레어는 그 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옷장은 부츠들로, 부드러운 부츠, 딱딱한 부츠, 가죽 부츠, 채색 부츠, 자수 벨벳 부츠 따위로 가득 차 있었다.

"."

브래트는 탄성을 지르며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곁에 섰다.

트레벨리언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애정 어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신어 봐도 돼요?"

"마음에 드는 걸 얼마든지 신어 보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만둬!"

클레어가 거의 소리를 지르듯이 말했다.

"쟨 어린애예요."

트레벨리언은 옷장에서 부츠 한 켤레를 꺼내서 자리에 앉아 발에 끼었다.

"어떤 나라에선 열네 살이면 결혼하기에 늦은 나이라고 생각하지. 남자는 어린 여자를 신부 감으로 고른다고.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의 여자로 키우는 거야. 자기가 하는 말과 모든 걸 거꾸로 하는 여자, 모든 순간마다 남자에게 잘못을 덮어씌우는 여자가 좋다 싶으면, 신부를 그런 식으로 키우는 거야."

그는 한쪽 눈을 치켜뜨며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난 그런 못된 버릇을 가진 마누라를 원하는 남자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지만, 그런 버릇을 가진 이상한 여자는 여러 명 봤어."

그는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부츠를 잡아당겼다.

"이유가 뭔지 내게 설명해 주겠소? 내가 캡틴 베이커라는 걸 알기 전에는 말로는 다 못 할 정도로 그 사람을 칭찬했소. 그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둥, 세계가 그 사람에게 많은 빚을 졌다는 둥 하는 얘기를 들었소. 캡틴 베이커, 오직 베이커 그 사람만이 페샤에 갈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 능력으로 그 도시를 발견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얘기라는 소리도 들었소. 그렇지만 내가 베이커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무슨 짓을 해야 당신을 마음에 들 수 있을지를 도무지 모르겠소. 내 그림, 한때는 당신도 그걸 좋아했지만, 지금은 싫어하고 있소. 더 이상 내 책이 계몽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이오. 이젠 내용이 너무 추잡해서 당신의 소중한 동생에겐 읽힐 수조차 없다고 말하고 있소. 그리고 내가 수피교 사제가 되었다고 해도 단순한 결혼식조차 집전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클레어는 고개를 돌렸다. 구구절절 틀린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웅은 현실이 아니에요."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트레벨리언은 부츠를 마저 끼우고 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 알겠소. 지금 내가 그 망할 놈에 영웅이구만."

"내 동생 앞에서 욕하지 마세요."

트레벨리언은 클레어 앞으로 걸어가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난 내가 하고 싶으면 망할 놈에 시간을 가리지 않고 망할 놈에 욕지거리를 할 거요. 리와 킨케이드를 결혼시키고자 했던 사람은 바로 당신이고, 난 당신을 위해서 두 사람을 결혼시켰소. 두 사람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함께 감금시켜 버렸소. 심지어는 고미다락을 박박 기어, 고리 달린 장대로 두 사람 옷을 훔쳐내기까지 했소. 이 모든 일을 꾸민 사람이 바로 나인데도, 당신은 내게 고맙다는 소리 한마디 안 했소. 당신은 할 줄 아는 게 불평뿐인 모양이오."

클레어는 아무 말 없이 고집 센 얼굴을 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수납장으로 걸어가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잠시 안을 헤집다가 종이 뭉치를 끄집어냈다.

"수피교 사제가 레아트리스를 결혼시킨 게 탐탁지 않으면, 마음에 드는 종교가 뭐요.?"

트레벨리언은 서류철에서 서류를 몇 장 끄집어냈다.

"영국 종교? 영국의 네 개 종교의 방식에 따라 결혼식을 주재할 수 있다는 자격 증명이 여기 있소. 아니면 미국 종교가 좋소? 미국의 자격 증명서가 제일로 얻기 쉽소.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소명'을 갖고 있다고 얘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목사로 인정하기만 하면 그만이오."

그는 서류 몇 장을 그녀의 발밑에 집어던지고 나서는 다시 서류철을 쳐다보았다.

"아니면 인도 종교가 좋소? 아라비아 종교? 아프리카 종교의 자격증도 몇 개 갖고 있소. 아프리카 사람들의 자격증은 아주 재미있소. 하나는 나무껍질에다 글씨를 썼고, 두 개는 동물 가죽을 사용했소. 설마 잉크로 쓴 자격증이 필요하다는 소리는 꺼내지도 마시오."

그는 나머지 서류를 클레어 발치의 바닥에 내던지며 그녀를 매서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 정도면 당신 마음에 흡족하오? 내가 지금 결혼식을 주재할 자격이 충분해 보이느냐 말이오?"

그녀는 구태여 허리를 구부려 만지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서류들을 내려다보고 나서 트레벨리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당신은 이런 종교들을 하나도 믿지 않겠죠."

클레어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트레벨리언의 눈이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난 그 모든 종교를 믿소."

"당신은 해리를 바보로 만들었어요."

그녀는 그를 노려 볼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화난 목소리로 트레벨리언에게 앙탈을 부렸다.

"해리가 자기 어머니에게 맞서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잖아요."

"당신이 못마땅한 게 바로 그거요? 해리를 바보로 만드는 건 누워서 떡 먹기 보다 쉽소."

그녀는 따귀라도 때려 줄 셈으로 손을 쳐들었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이 손목을 낚아채며 클레어의 눈을 노려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그녀는 금세라도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트레벨리언은 내던지듯이 그녀의 손을 팽개쳤다.

"이곳에서 당장 나가시오. 내가 왜 당신을 특별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소. 당신도 그 인간들과 똑같소. 당신은 내 책을 읽는 걸 좋아했고, 다른 나라 얘기와 그들의 괴상하고 진기한 관습 얘기를 듣기 좋아했소. 하지만 상황이 이쯤되고 보니, 당신도 다른 여자들처럼 앉아서 오줌 누는 동물에 불과했소."

마지막으로 그는 상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녀가 속삭였다.

"난 캡틴 베이커가 눈으로 보고 체험했던 일의 가치를 믿어요. 내 생각은……."

"그 사람이 아니오. 바로 나란 말이오. 그 사람은 영웅이 아니오. 그 사람도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이오. 사랑과 미움을 갖고 있고…… 부츠를 좋아하고, 나이에 관계없이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인간 말이오. 그리고……."

트레벨리언은 스스로 말을 끊으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다시 얘기를 꺼냈을 때에는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가시오. 여기서 나가란 말이오. 난 일을 좀 해야겠소. 그리고 레아트리스에게는……."

그는 침을 삼켰다.

"혼자 알아서 정말로 진짜 '하나님 배경을 가진' 사람을 찾아서 정식으로 결혼을 하라고 이르시오. 오늘 결혼은 어떤 신()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장난한 거라는 얘기도 빼먹지 말고 말이오."

그녀를 돌아보는 트레벨리언의 두 눈이 거센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너무나 뜨거워서 클레어는 주춤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 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시오. 이젠 당신 꼴도 보기 싫으니 말이오."

클레어는 고개만 끄떡일 뿐 도리가 없었다. 조용히 클레어는 뒤에 서 있던 사라 앤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라는 언니의 손을 잡고 트레벨리언의 집무실을 지나서는,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저 아저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겠다, 그지?"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브래트가 말했다.

"맞아."

클레어가 소곤거리며 말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

"내가 생각할 땐, 언니는 해리와 결혼하는 게 나을 것 같다. 해리가 훨씬 다루기 쉬운 사람이잖아."

클레어는 이를 악물었다.

"해리는 어머니가 있어."

브래트는 고개를 들어 트레벨리언 방에 난 창문을 바라보았다.

"해리와 쭈그렁 할머니를 합쳐도 저 아저씨만은 못할 것 같은데."

클레어는 더 이상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본관을 향해 걸어갔다.

 

 

 

17

클레어는 지난 두 주일을 아주 조신하게 보냈다. 그동안 캡틴 베이커가 그녀를 속였던 거라고, 미래의 공작부인으로서의 인생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스스로 되뇌었다.

그녀는 두 주일 동안 식사를 한 끼도 거르지 않았다. 아침식사에는 훌륭하지만 보수적인 드레스를 입었고, 규칙에 따라 식탁에서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열 시에는 승마복을 입고 말없이 뒤따르는 하인 몇 명의 수행을 받으며 야외로 나가 얌전히 말을 탔다. 산책에서 돌아와 점심 드레스로 갈아입고, 지리한 식사 시간 내내 자리를 지키며 개와 말 얘기를 들었다. 점심을 마치고 난 후에는 공작부인이 허락하겠다 싶은 책을 골라 읽거나, 자수를 배워 보려고 갖은 애를 써 보았지만 수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오후 네 시가 되면 티 타임 가운을 걸쳐 입고 내려가 해리의 친척 늙은이들과 차를 마셨다. 말을 걸어 보려 했지만 그들은 대부분 클레어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대꾸가 없었다. 티 타임이 끝나면 여자들은 모두 자기 방에 쉬러 갔다. 고함을 치고 싶었다.

'무슨 일을 했다고 휴식이라는 말인가? 무엇을 위한 휴식인가?'

그녀는 고분고분 두 눈을 감고 자기 방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으려고 노력했다. 휴식 시간이 끝나면 최대한 늑장을 부리며 이브닝드레스를 입기 시작했다. 짧고 눈에 띄며 유행하는 드레스는 피했다. 아주 고풍스럽고 눈에 띄지 않는 옷만을 골라 입었다. 세 시간 반 동안의 저녁식사가 끝나면 방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

두 번째 주가 끝나갈 무렵 클레어는 틀림없이 자신이 미쳐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명을 지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집안을 뛰어 다니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이 왜 그리 괴팍스러운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인가 저녁에 두 노파가 소매에 은식기를 감추는 모습을 보았다. 순간 도둑질을 하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녀는 샐러드 포크를 집어 들어 소매에 감췄다.

포크가 소매 안으로 사라지는 순간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자기를 쳐다보는 집사를 올려다보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클레어는 포크를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해리를 가로막고 나섰다.

"내게 뭔가 할 일이 필요하겠어요."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해도 좋소."

승마 장갑을 끼며 그가 말했다.

"당신을 따라가도 될까요?"

지난 며칠간 고작 식사 시간에나 그를 보았을 뿐으로, 말 한마디 나누어 보지 못했다. 매일같이 그는 클레어의 아버지와, 그리고 런던에서 놀러 온 젊은이 몇 사람과 함께 사냥을 다녔기 때문이다.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이내 그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여자가 무슨 사냥인가 싶으면서도 여자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따라와도 좋소. 하지만 사냥 규칙을 지켜야 하오."

그러마고 대답했다. 브램레이의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찬성했을 것이었다. 조용히 있겠다고, 그가 사냥을 하는 도중에 주의를 산란시키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고, 또 해리에게 약속을 했다.

하지만 말에 올라 해리의 말이 곁에 다가오자, 일주일 동안은 해야 할 정도로 많은 말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대화 상대가 너무 간절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해리."

그녀는 다른 사람 귀에 들리지 않도록 숨을 죽이고 말을 꺼냈다.

"당신의 어머니가 레아트리스의 결혼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어요. 하다 못해 수군거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뾰로통해진 모습을 해리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클레어는 고개를 돌렸다. 지난 며칠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입방아를 찧었지만 그녀가 다가설라치면 금세 입을 닫아 버렸다. 브래트 흉내를 내 두 차례나 문 뒤에 숨어 엿듣기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해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는 딸이 세상에서 더없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고 계시오. 리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걸 알았으면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했을 거라고 아쉬워했소. 사실 어머니는 리가 스스로의 명예에 먹칠을 했기 때문에, 못된 짓을 한 리에게 정착 자금을 상으로 주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소."

다시 클레어는 고개를 돌렸다. 공작부인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레아트리스와 신랑이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

"혹시 예식을 집전했던 사람이 누군지 모르오?"

해리가 물었다.

"그걸 왜 알고 싶은 거죠?"

클레어는 짐짓 무심한 척 물었다.

"어머니께서 물으셔서.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했던 모양이오."

해리가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는 그 남자가 달갑지 않으신 것 같소. 아마 목사가 자리에 없어서 결혼식을 집전하지 못했으면 리를 설득해서 관두게 하실 작정이신가 보오."

클레어는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고개를 돌렸다. 공작부인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끔찍한 노파는 레아트리스를 계속 종처럼 부리며 놓아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다음 순간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에게 생각이 미쳤다. 트레벨리언이 결혼식을 집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공작부인이 어떻게 나올까? 노파를 만난 건 고작해야 한 번에 불과했지만, 첫인상에서 이미 부인은 사람을 쉽게 용서하는 타입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친척뻘되는 사람이 서쪽 탑에 은신해 살면서, 공작부인이 자기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도망치도록 도와주었음을 알면 그녀가 어떻게 나올까?

다음 순간 클레어는 고개를 들었다. 레아트리스의 탈출에 클레어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공작부인이 어떻게 나올까?

"클레어?"

해리가 말했다.

"괜찮소? 창백해 보이는데. 당신은 집에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소."

"아뇨. 괜찮아요. 정말."

클레어는 이렇게 웅얼거리고는 해리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엇보다 집으로는, 그 따분함 속으로는 결코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여덟 시간이 지났을 때, 클레어는 저택의 적막한 평화가 간절히 그리울 지경이 되었다. 해리는 사격장이라는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한 면이 개방된, 지붕이 있는 조그만 피난 캠프였다. 해리는 떠들지 말고 조용히 앉아 있으라고 했다. 앉을 만한 자리도, 깔고 앉을 것도 전혀 없어 그녀는 축축한 바닥에 그대로 앉아야 했다. 해리와 장탄수(裝彈手) 하인은 사격장 다른 쪽 끝에 서서, 하루 종일 새에게 총질을 해댔다.

도착한 지 십여 분이 지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폭우는 아니었지만 그치지 않고 내리는 가랑비는 지붕과 벽으로 새어들어 이내 클레어의 옷을 적셨다.

집에 돌아가고 싶으냐고 해리가 물었다. 클레어는 그렇지 않다고,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가랑비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반문했다. 처음부터 겁을 내서 포기를 하면, 해리가 다음부터는 절대로 데리고 다니려고 하지 않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그들은 식어빠진 점심을 먹었고, 해리는 총질을 계속했다. 해리가 입은 트위드는 비에 확연히 젖어 있었다. 하지만 해리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어쩌면 몸이 젖은 것도 아예 모르는 듯했다. 해리가 예민한 체질이라던 공작부인의 얘기가 머리에 떠올랐지만, 이제 보니 전혀 예민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바닥과 주변이 심하게 축축해져서, 그녀는 무릎을 몸으로 바짝 당겨 끌어안았다. 주변에는 온통 총소리뿐이었다. 여기 물이 새는 피난 캠프에 하루만 더 따라 나왔다가는 귀머거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채기를 하자 해리가 화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클레어, 조용히 있지 않을 거면 집으로 돌아가시오. 당신의 소리가 새들을 놀래키잖소."

"수천 번 총질을 해도 놀라지 않던 새가 어떻게 재채기 소리에 놀란다는 거예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가 반문을 했다.

해리와 장탄수가 시선을 교환했다. 여자를 사냥에 데려 온 것부터 잘못이라는 눈치가 역력했다.

땅거미가 어스름할 무렵에야 드디어 해리는 집에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젖은 몸에 또 비를 맞아야 한다는, 심지어 눈물까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생각만 아니었다면, 클레어는 안도감에 환성을 질렀을 것이다. 너무 추워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고, 물에 젖은 울 드레스는 어찌나 무거운지 20킬로그램은 족히 넘을 듯했다. 몸에서는 물론 젖은 강아지처럼 누릿한 냄새마저 풍겼다.

"재미가 하나도 없었을 거요. 여자들은 절대……."

해리가 말했다.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기침을 참느라 코를 씰룩거리며 클레어가 말했다.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해리는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다정하게 클레어를 껴안았다.

"영국 여자들은 간혹 사냥을 좋아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냥을 좋아하는 미국 여자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소. 오늘 함께 사냥을 와서 기분이 너무 좋소. 당신은 좋은 친구요. 내일은 꿩을 잡으러 북쪽으로 갑시다. 몇 주일 안으로 사슴의 흔적을 쫓을 수도 있을 거요. 사슴 사냥을 할 때는 절대 떠들면 안 되오. 오늘 같이 그러면 안 된단 말이오."

해리는 다시 그녀의 어깨를 껴안았다.

"클레어, 당신과 난 정말 완벽한 커플이 될 거요. 항상 난 사냥을 함께 다닐 수 있는 여자를 원했소. 당신이 너무 책벌레 스타일이라 약간 걱정도 했었소. 오늘 이후로 내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알았소. 결혼을 하고 나면, 우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 거요. 오늘처럼 말이오."

기침을 하자 그가 클레어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집에 돌아가면 마른 옷으로 갈아입어요. 내일은 들꿩을 잡으러 갑시다."

돌연 해리의 얼굴이 밝아지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얼굴을 그에게 향하게 했다.

"좋은 생각이 있소. 결혼 선물로 엽총을 한 정 사 주겠소. 당신 총 말이오. 은장식이 붙은 걸로. 오늘 런던에 편지를 띄워, 당신 사이즈를 재도록 해야겠소. 개머리판 사이즈가 꼭 맞아야 하니깐 말이오."

그는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갈수록 당신과 결혼을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오."

클레어는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치아가 너무 심하게 떨렸다.

"자 갑시다. 훌륭하고 따뜻한 차 한 주전자면 괜찮아질 거요."

해리가 말했다.

클레어는 안락하고 따뜻한 맥 트레비트의 오두막이 그리웠다. 더구나 몸을 훈훈하게 데워 줄 위스키 생각은 더욱 간절했다.

"그래요. 차 맛이 정말 기막힐 거예요."

삼십 분 가량이 지나자 클레어는 침실에 도착했다. 로저스는 클레어가 번번이 젖은 옷을 벗어 놓는다고 쉬지 않고 투덜거렸다.

"내가 그걸 벗겨드릴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잿빛의 키 작은 여자가 잔뜩 물먹은 승마복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좋은 옷을, 게다가 디자인도 특허까지 받은 것일 텐데 이렇게 망쳐 놓다니. 우리 잉글랜드 인은 물론이고 스코틀랜드 인도 거기 미국 사람처럼 돈을 낭비하게 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가씨를 겪은 바로, 미국인은 아무리 좋은 옷이라도 한 번 입고 버리더군요. 잘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난 내 책임이 있고, 저의 일은 그게 전부입니다. 말하자면, 제가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인지의 판단은 제 소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얼마 전만 해도 대체로 야만적이던 나라에서 온 사람을 잉글랜드 숙녀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누구라고 그런 얘길 하겠습니까? 전 단지……."

"로저스!"

클레어는 오한으로 떨리는 턱이 허락하는 한에서 최대한 단호하게 말했다.

"하인을 불러서, 목욕통을 이리로 가져오도록 해 주겠어요?"

"지금 이 시간에 말입니까?"

"그래요. 지금 이 시간에."

로저스가 코웃음 소리를 냈다.

"아가씨 같은 위치에 있는 분에겐 틀림없이 하인에게 가욋일을 시키는 게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겁니다. 우리 하인들은 당신 같은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우린……."

"얼른요!"

언 손으로 힘겹게 승마복 앞단추를 끄르며 클레어가 명령했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며, 집사가 은쟁반을 받쳐들고 나타났다. 쟁반 위에는 보온 커버가 놓여 있었다. 따뜻한 마실 것이 들어 있으리라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하지만 선뜻 구미는 당기지 않았다. 주방은 본관 건물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음식이 도착할 즈음에는 서늘하게 식어 있곤 했었다. 하지만 미지근한 차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로저스."

집사가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래층에서 찾고 있소."

클레어는 밉살스런 키 작은 하녀가 집사에게 시비를 붙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방을 나갔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다. 집사와 단둘이 남게 되자마자 클레어는 꽁꽁 얼어 덜덜 떨리는 팔을 뻗어 보온 덮개를 들추었다.

은쟁반에 담긴 것은 차 주전자가 아니었다. 낮고 폭이 넓은 유리잔에는 클레어가 위스키라고 알고 있는 액체가 넘칠 듯이 담겨 있었다. 어안이벙벙해진 클레어가 집사를 올려다보자, 그는 드물게 보이는, 극히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맥 트레비트네 위스키?"

그녀가 물었다.

"그 중에 최고급품이죠. 25년 묵은 위스킵니다."

유리잔을 집어드는 클레어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위스키를 입으로 가져가며 집사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사랑스러워요."

그녀가 속삭였다.

"많은 젊은 숙녀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클레어는 조금씩 위스키를 홀짝거릴 셈이었는데, 위장으로 전달되는 짜릿한 온기가 너무 반가워 더욱 허겁지겁 들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입도 떼지 않고 바닥을 비웠다. 그리고 나서는 뒷걸음질을 치며 침대 기둥을 붙들고 몸을 안정시켰다. 집사를 쳐다보았다. 집사는 놀란 눈으로 클레어를 쳐다보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혈통이라고 들었습니다."

집사의 목소리에 존경이 담겨 있었다.

"위스키를 마시는 걸 보니, 과연 그런 모양이군요."

그때 문이 열리며 화가 난 로저스가 걸어 들어왔다.

"아래층에서 날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집사는 조용히 빈 잔을 쟁반에 얹어 보온 덮개를 덮고 로저스를 향해 돌아섰다.

"그럼 내가 잘못 들은 모양이오. 당신 아가씨께서 목욕을 하실 테니 벨을 울리시오."

집사의 마지막 말은 순전히 명령조였고, 로저스는 순순히 당김 줄을 당겨 목욕통을 내주었다.

클레어는 침대 기둥을 붙잡고 서서 문을 향해 걸어 나가고 있는 집사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는 방을 나서기 전에 그녀에게 윙크를 하지 않았나 싶었다.

한 시간 반쯤이 지나서 목욕을 마친 그녀는 저녁 만찬을 위해 따듯한 모직 드레스를 챙겨 입었다. 해리가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만찬을 위해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해리는 팔을 빌려 주었다. 클레어는 오늘 그녀가 해리의 기분을 흡족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전례 없이 그를 만족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난 지 처음으로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여느 때는 별로 말이 없었지만, 오늘밤에는 아주 많은 얘기를 했다. 모두가 사냥 얘기였지만.

해리는 새와 오리, 사슴을 잡아죽인 얘기를 했다. 호랑이 사냥을 하러 인도에 갔던 일, 코끼리를 잡으러 아프리카에 갔던 얘기를 했다.

"그리고 달링, 당신도 나와 함께 거기에 가게 될 거요."

저녁 식사에서 해리는 클레어에게 옆자리, 즉 레아트리스의 자리를 내주었다. 긴 식사 시간 내내 그는 두 사람의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 대해 얘기했다. 그는 총 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했다. 사냥개를 앞세운 채 말을 타고 사냥하는 법을, 여우를 물어뜯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흥분한 개떼 뒤를 쫓아 사냥하는 방법을 직접 가르쳐 주마고 했다. 해리는 '피 뿌리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클레어가 이해한 바로는, 불쌍한 죽은 여우의 피를 여우의 이마에 바르는 것을 의미했다.

"모두 신기하고 재미있는 얘기군요."

그녀는 마지못해 이렇게 웅얼거렸으나, 만찬의 피시쉬 코스를 먹지 못했다. 만찬이 끝나고 남자와 여자들이 각기 흩어졌다. 여자들은 응접실로 가서 커피를 마셨고 남자들은 휴식과 흡연을 위해 도서관으로 갔다. 해리는 그녀를 방까지 바래다 주었다.

해리는 두 팔을 클레어의 어깨에 얹고 그녀의 눈을 잠시 동안 찬찬히 쳐다보았다.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난 당신이 좋소."

그가 속삭였다.

"오늘 아주 훌륭한 동반자였소."

"한지만 난 오늘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비 오는 데 쭈그리고 앉아 재채기나 했던 것밖에 없었어요."

"당신도 익숙하게 될 거요. 일단 엽총을 장만하고 나면 오늘보다는 훨씬 재미를 느끼게 될 거요. 동물을 쏘아 넘어뜨리는 쾌감에 비할 건 아무것도 없소. 잡은 동물들을 마주하는 것, 그것이 사냥의 묘미요."

그는 클레어에게 다시 키스를 했다.

"얘기를 하지 않는 것에 관해서라면, 난 말수가 적은 여자가 좋소. 너무 똑똑한 여자는 따분해질 수 있소. 당신이 그렇지 않다는 건 정말 하늘에 감사할 일이오."

"맞아요."

기어드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나도 내가 똑똑한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해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숨은 냉소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좋소."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클레어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이젠 쉬는 게 좋겠소. 내일 메추라기 잡는 걸 잊지 마시오."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로저스는 그녀가 잠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지만, 클레어는 그녀의 잔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고가 정지된 것 같았다. 엽총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죽은 새, 죽은 호랑이, 죽은 코끼리. 캡틴 베이커는 인도 여행에 관해 썼던 두 권의 책에서 코끼리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 그녀는 코끼리가 아주 매력 있고 꽤나 유용한 동물이라고 생각했었다.

로저스가 나가고 나자 클레어는 화장대에 앉아 얼굴에 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바람과 추위 때문에 피부가 거칠어져 있었다. 서서히 크림을 마사지하며,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속으로 되뇌었다.

'공작부인이 된다. 나는 해리와 결혼을 하여 공작부인이 될 것이다. 다른 건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

클레어는 화장대 테이블에서 일어나 침대로 갔다. 그날의 피로와 추위 탓에 금세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미처 동이 트기도 전에 화가 난 로저스가 그녀를 잠에서 깨웠다. 남자들이 아침 일찍 사냥을 떠날 참이므로, 빨리 옷을 갖춰 입으라는 것이었다.

클레어는 승마복을 입었다. 어제 맞은 비로 옷이 아직 축축했다. 하지만 그녀는 군소리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남자들은 벌써 말에 올라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리는 행복에 겨운 환한 미소를 지었고, 클레어가 말에 오르자 그녀의 등을 찰싹 때렸다.

축축한 사격장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 위로 퍼붓는 비와 함께 둘째 날을 보냈다. 해리는 대략 매 시간마다 미소를 지어 보였고, 결혼 선물로 주겠다는 멋진 엽총 얘기에 열을 올렸다.

저택으로 돌아오자 따뜻한 목욕물이, 그리고 찻잔과 그 받침 접시, 찻주전자가 함께 쟁반 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저스가 방으로 들어오자 클레어는 그녀에게 들키지 않도록 위스키를 컵에 담아 조금씩 홀짝거렸다.

셋째 날도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났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해리가 오늘은 토끼와 메추라기를 잡을 거라고 했다. 그것은 클레어가 차가운 이슬비에 젖은 몸으로 소택지를 누비며 남자들이 수백 마리의 토끼를 쏴 죽이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해리는 결혼 선물의 별책 부록으로 새잡이 개를 사 주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즈음에는 너무 추워서 몸에 아무 감각이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해리가 내일은 사슴 사냥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가끔씩 온순한 사슴의 눈을 바라보며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그런 사슴의 주검을 대면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는 얼굴에 크림을 발랐다. 그리고는 침대 위로 올라가 잠을 청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뭔가 소리가 들리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둑한 방안의 불빛 속에서 벽에 걸린 커다란 초상화가 움직이자 그녀는 비밀 통로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피곤함도 잊고 침대를 뛰어 내려와 문을 향해 내달았다.

"트레벨리언!"

클레어는 숨이 막혀 오는 느낌이었다.

문이 열렸다. 하지만 거기에는 트레벨리언이 아니라 말괄량이 어린 동생이 양초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

클레어가 고개를 돌렸다. 피곤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침대로 돌아갔다.

"잘 시간이잖아."

브래트는 비밀 통로로 향한 문을 닫은 다음, 양초를 테이블 곁에 내려놓고는 커다란 네 기둥 침대 위로 올라왔다.

"언니가 사냥꾼이 됐다는 소린 들었어."

"완전히 다이아나지."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뜻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 브래트를 쳐다보며 클레어는 얼굴을 찡그렸다.

"네가 책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으면, 다이아나가 사냥의 여신이라는 것쯤은 벌써 알고 있었을 거야."

브래트가 싱긋 웃어 보였다.

"해리는 신과 여신 이름을 모조리 알고 있다는 데 내기를 걸게. 해리와 하루 종일 그 얘기를 했어? 아니면 함께 이태리어나 프랑스어를 공부한 거야? 아마 정치나 종교 얘기를 했을 수도 있지. 아니면 스코틀랜드 역사? 어쩌면 공작부인이 되고 나서 이 집을 어떻게 하겠다는 따위의 언니의 계획 얘기를 했을지도 모르지."

클레어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발 네 방으로 돌아가 주겠니?"

"해리와 무슨 얘기를 했어?"

"너완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브래트는 침대에 다리를 뻗고 누웠다.

"캡틴 베이커는 만났어?"

"아니, 안 만났어.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솔직히 말해 너무 바빠서 그 사람 생각할 틈도 없었어."

돌아누우며, 브래트는 팔 베개를 하고 머리 위의 침대 닫집을 바라보았다.

"트레벨리언은 여태껏 내가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 제일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아. 그 사람 방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봤어? 대단히 많은 곳을 돌아다녔을 거야."

"문 뒤에서 남의 말이나 엿듣는 따위 말고 뭐라도 좋으니 캡틴 베이커의 책을 읽는 데 조금만 시간을 투자해 봐.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지, 뭘 보고 다녔는지 모두 알게 될 거야. 그는 위대한 사람이야."

"그럼 언니, 아저씨가 해리의 누나를 결혼시켰을 때 왜 그렇게 난리를 피웠어?"

클레어는 무엇이든 대답을 하려고 두 차례나 입을 열었지만 그냥 다시 다물어 버렸다.

"넌 이해 못할 거야."

결국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언니 입으로 그 사람이 영웅이라고 칭찬을 했던 것 때문이지, 안 그래? 언니의 우상이었던 사람이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맞지?"

"그 사람은 결코 보통 사람이 아냐. 그 사람은……."

그녀는 브래트를 노려보았다.

"네 방에 가서 자."

"해리와 함께 있을 때도 캡틴 베이커랑 있을 때만큼 재미있었어?"

"물론이지. 정말 우습지도 않은 질문을 하는구나. 해리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될 수 있으면 그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캡틴 베이커는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야. 해리의 친척이기 때문에, 난 의무적으로 그 사람을 잘 대해 주는 거라구."

"그 때 삼일 동안이나 그 아저씰 간호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도 어쩔 수 없이 그냥 잘 대해 주려고 그랬던 거지, 맞아?"

브래트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트레벨리언 옷을 모두 벗겼어?"

"나가! 당장 여기서 나가."

클레어가 소리쳤다.

브래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심해, 안 그럼 저 늙은 도깨비가 잠에서 깰 거야."

로저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레아트리스가 결혼한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어?"

클레어는 너무 조숙한 동생에게 아이들은 그런 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너무 궁금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전혀 듣지 못했어."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그 쭈그렁바가지가, 그러니까 늙은 공작부인 말이야, 글쎄 졸도해서 거의 죽을 뻔했대. 무슨 발작증이 있다지. 소문으론 입에 거품까지 물고 쓰러졌대나 봐."

"믿을 수가 없어."

맞장구를 쳐 줄 생각은 없었지만 클레어는 동생 얘기를 끝까지 듣고 싶었다.

"해리 얘기로는……."

"해리는 몰라. 사냥 나가 있었어."

브래트는 노골적으로 그녀를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해리가 돌아왔을 때에는 다시 노파가 상냥하게 얘길 속삭였다지 아마. 물론 해리가 근처에 있으면 그 노파는 항상 그렇대.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누구든 레아트리스의 결혼과 연루된 사람은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대. 그 노인네는 어떻게든 딸을 처벌하겠다고 앙심을 품고 있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야. 그리고 그 처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네가 들은 건 틀림없이 헛소문일 거야."

브래트는 더 이상 얘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 언니와 자기 엄마 중에서 택하라고 하면, 언니 생각엔 해리가 누굴 택할 것 같아?"

"그런 질문엔 대답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대답이 어떨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브래트는 잠시 말이 없었다.

"트레벨리언이 그립지 않아?"

"물론, 전혀. 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바빠."

브래트가 짓궂게 웃었다.

"주방에서 언니 옷은 마를 날이 없다고들 수군대나 봐. 냄새가 하도 고약해서 아무도 없는 방에 옷만 덩그러니 걸어 놓고 말려야 한대."

"새로 한 벌 사야 하겠구나."

"그래 사고, 사고, 또 사고. 해리와 결혼을 하려면 그런 옷이 아주 많이 필요할 거야. 언니가 아무것도 안 하고 해리랑 사냥만 하면서 한 평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물론 그렇진 않지. ……."

결혼을 하고 난 뒤에는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며 클레어는 말꼬리를 흐렸다.

"캡틴 베이커도 언젠가 결혼을 할 거라고 생각해?"

"절대로 아냐! 그런 종류의 인간은 절대로 결혼 못해. 설령 결혼을 했다 치더라도, 마누라는 어딘가에서 울도록 내팽개쳐 두고, 다른 나라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탐험하겠답시고 도망쳐 버릴 거야."

"확실해?"

"난 그 사람을 너무 잘 알아. 그 사람 책이라면 모조리 다 읽었고, 그 사람에 관해 쓴 얘기도 마찬가지야. 너무너무 잘 알고 있다고."

"레아트리스를 그렇게 도운 건 트레벨리언이 정말 잘한 거야. 아저씬 대단한 위험을 무릅썼던 거라구. 만약에 잡혔으면 쭈그렁바가지가 무슨 짓을 했을지, 난 도무지 생각하기도 겁이 나."

"친절을 베푼 게 아니야. 단지……."

클레어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진 나도 잘 모르겠어. 틀림없이 뭔가 책을 쓸 거리를 찾느라 그랬겠지."

"캡틴 베이커는 모든 것에게 대해서 글을 쓴다고 언니 입으로 말했잖아. 아저씨가 언니를 그려 놓은 그림 봤어?"

"그래, 봤어."

클레어는 머리를 쳐들었다.

"넌 그걸 언제 봤지?"

"어제 아침에. 그 아저씨가 보고 싶어서……."

"뭐라구 네가? 계속 만나고 다녔단 말이야?"

그녀는 엉겹결에 브래트의 팔을 잡았다.

"그가 하자는 대로 추잡한 짓을 따라 했니? 널 그 사람에게 혼자 두는 건 도무지 안심을 할 수가 없어. 그 인간은……."

"아주 점잖은 아저씨야. 날 건드리지도 않았어, 언니가 걱정하는 게 그거라면 말이야."

클레어는 동생의 팔을 놓고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

"맞아, 나도 그러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 사람은 명예를 아는 사람이야. 자기만의 괴상한 방식이지만 말이야."

클레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떻게 지내?"

브래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생각이지만, 아저씬 언니를 그리워하는 것 같던데."

클레어가 똑바로 일어나 앉았다.

"트레벨리언이?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어? 그렇다고 해서 내게 뭐가 달라지는 게 있다는 뜻이 아니고, 내 말은, 뭣 때문에 네가 트레벨리언이 날 그리워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느냐고 묻고 싶다는 거지."

클레어는 당장 중세의 고문대 위에 올려진다고 해도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트레벨리언을 그리워했는지 실토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는 물론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인간이고, 무뚝뚝하고 냉소적이고 가끔 성미마저 까다로운 사람인 데다가, 항상 질문을 퍼부어서 때때로 자신이 어리석고 너무 유치하다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세상에, 하지만 트레벨리언이 얼마나 그녀를 살아 있는 느낌이 들게 해 주었던가. 함께 있을 때면 온몸의 마디마디 신경이 살아서 꿈틀거렸다.

더구나 트레벨리언은 그녀로 하여금 머리를 쓰도록 만들었다. 마음속에 있는 사실조차 몰랐던 문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스코틀랜드 인에 대한 생각을 말로 표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트레벨리언은 그녀가 인생에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 주었다. 그녀의 생각과 감정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아저씨 입으로 보고 싶다는 말은 안 했어. 하지만 내 보기에는 틀림없이 그래."

브래트가 말했다.

"."

클레어는 다시 베개에 몸을 기댔다.

"난 절대로 그 사람이 보고 싶거나 하지 않아. 난 해리와 함께 아주 행복해. 그인 내게 총을 한 자루 사 줄 생각이래. 개머리판이 은으로 된 것 말이야. 거기 아니면 어디든 은으로 되어 있겠지. 그리고 어쩌면 사냥개도 사 줄 거야."

그때 브래트가 비웃는 소리를 내자 클레어의 얼굴이 붉어졌다.

"언니도 사냥에서 돌아오는 자기 꼴을 좀 봤어야 하는 건데. 물에 빠진 생쥐 꼴에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따로 없었어.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해. 언니의 사랑하는 해리만 빼구 말이야. 그 사람은 벙어리나 다를 게 없어서……."

클레어가 목을 누르려고 하자 브래트가 침대 위에서 몸을 뒹굴어 도망을 갔다. 까르르 웃으며 브래트가 침대에서 한 발짝 도망을 갔다.

"언니가 너무 웃겨서, 내가 왜 여기 왔는지도 까먹을 뻔했어. 잭 포웰이라는 사람 기억하지?"

"사실은 트레벨리언이 갔다 온 페샤를 자기가 발견했다고 우기던 사람?"

"바로 그 사람. 오늘 신문에 그 사람 기사가 났어. 이 포웰이라는 사람이 에든버러에 가서 연설을 할 예정이래. 캡틴 베이커가 아니라 자기가 페샤를 발견했다는 증거를 갖고 가서 말이야. 신문에서는 그게 논…… ……,"

"논박할 수 없을 거라고?"

"맞아. 아무도 거기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을 거래."

브래트가 하품을 했다.

"이제 언니의 캡틴 베이커는 페샤를 처음 발견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없을 것 같아."

"하지만 페샤를 발견한 사람은 베이커야. 그 사람 혼자라고. 포웰인지 뭔지 하는 사람은 아냐. 그 사람들은 절대로……."

브래트가 다시 하품을 했다.

"그렇든 말든 언니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데. 언닌 해리랑 사냥이나 다닐 거잖아. 내 방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벨리가 오늘 밤에 찾아와서 얘길 읽어 줄지도 모른다고 했거든."

"브래트, 넌 그 사람을 그렇게 부르면 안 돼. 그리고 무슨 얘길 읽어 준다고 했니?"

"책을 읽어 준다고 말했었나? 아저씨가 얘길 해 줄 거야. 멋진 얘기, 페샤에 관한 모든 얘기 말이야. 언니도 해 달라고 해. 아참, 잊었어. 언닌 그 아저씨 다신 안 만날 거라면서? 글쎄. 잘 자. 내일 보자구."

브래트가 이빨을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그 젖은 드레스를 다시 입을 거면 말이지, 내가 언니 근처에 접근하지 않더라도 서운해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그 말과 함께 브래트는 양초를 집어 든 다음, 초상화를 제치고 비밀 통로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멍청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클레어는 어느새 주먹을 쥐고 베개를 내리쳤다. 트레벨리언은 정말 괴상망측한 사람이었다. 정말로 진정으로 괴상망측한 사람이었다. 브래트는 트레벨리언이 결혼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결혼하고 싶어 할 정도로 트레벨리언을 사랑하는 여자는 비참하고 외로운 인생을 선고받은 것이나 다를 바 없을 거야. 부인을 남겨 두고 자기만의 여행을 떠나 버리기 일쑤일 텐데, 당연히 외로울 수밖에 없지 않겠어. 홀로 집에 남은 부인이 그가 병이나 걸리지 않았나 온갖 걱정을 하고 있을 동안, 트레벨리언은 책에 적었던 모든 짓을…… 여자와의 모든 짓들을 서슴지 않고 있겠지.'

남편감으로서 그 사람만큼 적당치 않은 사람이 없을 거란 이유를 자신에게 되뇌이며 클레어는 다시 두어 차례 베개를 내려치고 나서 자리에 누웠다. 잠을 청하며 누워 있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영웅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멀리 있는 누군가를 흠모한다는 것은, 현실에서 그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소녀 시절에 트레벨리언의 책을 읽던 생각이 났다. 어디에 있던지 원주민 의상을 입으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을 읽었을 때, 트레벨리언은 천부적으로 재미있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국적인 의상을 입은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가 얼마나 낭만적인 사람일까를 생각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는, 볼 때마다 매번 상당히 특이한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때는 그가 등에 밝은 색으로 새를 수놓은 긴 실크 외투를 입고 다녔다. 다음번에 그녀는 트레벨리언이 18세기 영국 젠틀맨 의상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니다. 남자와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사람이 해야 할 도리가 아니었다. 해리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녀의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훨씬 옳은 일이다. 물론 아버지를 만난 적이라곤 기껏해야, 해리와 함께 사냥을 나가는 길에 지나쳤던 것이 고작이었고, 어머니 얼굴을 본 것은 그보다 훨씬 적었지만 말이다. 지금 어머니는 클레어의 결혼식에 무슨 의상을 입을까 하는 궁리에 빠져 있었다. 웨일즈 공 부처(에드워드 7세를 말함)의 참석이 예상되었고, 아르바는 자기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를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몇 차례 베개를 내리치고 나서 클레어는 애써 잠을 청했다.

 

다음날 클레어는 온전하게 마를 날이 없는 승마복을 걸쳐 입고, 해리와 다시 사냥에 나섰다. 해리, 장탄수와 함께 그녀는 소택지를 걷고, 헤더가 만발한 비탈 언덕을 올라 마침내 아름답고 조그만 숲에 도착했다. 먼길을 걷는 동안 해리에게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절대로 조용히 할 필요가 있다는 해리의 특별한 주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숲에 진입하자 해리가 장탄수에게 뭔가를 속삭였고, 클레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늠름한 수사슴 한 마리가 세 마리의 암컷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장면에 절로 미소를 지으면서 그 아름다운 조물주의 창조물을 쳐다보았다. 아주 살지고, 너무 고요하고, 더없이 평안해 보였다.

다음 순간 곁에서 해리의 라이플이 발사되었고 거대한 수사슴이 바닥에 쓰러졌다. 암컷들은 달아났다.

해리와 장탄수는 환성을 지르며, 한방에 사슴을 쓰러뜨렸다고 열심히 떠들어댔다. 그 거대한 동물에게 다가가는 두 사람을 본 다음 순간 사슴의 머리가 조금 들리는 것을 보았다. 아직 살아 있었다.

클레어는 사슴을 향하여 내닫기 시작했다. 달리는 동안 해리와 장탄수를 앞질렀다. 하지만 사슴에게 미처 닿기도 전에 다시 해리의 라이플이 불을 토했고, 수사슴의 머리가 완전히 땅바닥에 누웠다.

클레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충격이었다. 그동안 사냥에 너무 지쳐 있었고, 지난 며칠 사이에 보았던 수백 마리의 죽은 새와 동물로 인해 그녀는 상심이 너무 컸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불과 몇 분전까지만 해도 살아 숨쉬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거대한 사슴이 지금은 죽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해리는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동물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다. 단지 스포츠를 위해 사슴을 사살했다. 단지 즐거움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 동물을 죽였던 것이다.

"솜씨가 어떻소, 대단하지 않소?"

해리가 등 뒤에서 말을 건넸다.

그를 돌아보는 클레어의 눈은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 있죠?"

"내가 뭘 어떻다는 거요?"

해리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해리가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 하는 동안 클레어의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주먹을 쥐고 해리의 가슴을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당신은 저 동물을 죽일 권리가 없어요. 아무 권리도 없어요. 정말로 아름다운 사슴이었고, 죽여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어요. 당신은, 당신은......"

그는 클레어의 손을 붙들었다.

"달링, 당신은 결혼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거요. 모든 게 괜찮아 질 거요. 처음 사슴을 잡았을 땐, 나도 약간은 제정신이 아니었소."

클레어는 그에게서 물러나며, 해리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할 수 없어요?"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동물을 잡아 죽이는 것 말고 다른 걸 할 수 없느냐구요?"

순간 해리의 표정이 경직되며 잡았던 손을 힘없이 내려뜨렸다.

"난 미국인이 아니오. 당신이 의미하는 게 그런 거라도 말이오."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클레어는 더 이상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클레어는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숲을 빠져나와 언덕을 내달았다. 벌판을 가로질러 달렸다. 말을 매두었던 곳에 도착하자 최대한 재빨리 올라타서 곁안장에 다리를 단단히 감쌌다. 클레어는 말의 배를 걷어차며 앞으로 내달아 경주라도 하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으로 들어섰다. 어머니가 옷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수백 개의 상자들 한가운데 서서 그녀를 불렀다. 상자에는 모두 런던의 상표가 붙어 있었다.

"이리 와서 내가 산 아름다운 옷을 구경하렴, 아가."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보라구, 여기 다이아몬드가 박힌 부채를 보렴."

클레어는 눈물이 가득 차 눈에 아무것도 뵈지 않았다. 클레어는 겨우 고개만 가로젓고 나서는 계단을 뛰어올라 자기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침실로 통하는 문과 보통 끔찍한 로저스가 머물고 있는 드레스 룸으로 통하는 두 개의 문을 모두 잠궈 버렸다.

일단 혼자가 되어 안전하다 싶자 클레어는 침대로 몸을 던지고 거침없이 눈물을 쏟아 내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이유는 확실하지 않았다. 사슴이 죽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싶었다. 부분적이지만, 그녀의 눈물에는 보다 깊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눈물이 쏟아지는 진짜 이유만은 들춰 내고 싶지 않았다.

그날 간간이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클레어는 문을 열지 않았다. 마냥 울고만 있었다.

 

해리가 돌아 왔을 때 사라 앤이 마구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라는 짐짓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꾸미려고 애를 썼지만, 실은 클레어가 눈물을 흘리며 부리나케 돌아오는 모습이 캐미의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려고 마구간으로 달려 왔던 것이다.

사라는 언니 때문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좋은 머리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헤아리는 데는 상당히 똑똑하지 못했다. 클레어는 당위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해리를 사랑할 의무가 있었기에 그를 사랑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가 아니라.

마구간으로 돌아온 해리의 모습에서 브래트는 그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브래트는 조용히 그를 지켜보았다. 남에게 얘기를 하지 않고 감춰 둔 생각이 하나 있다면, 자신이 해리를 얼마나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 브래트는 트레벨리언의 용모를 좋아했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은 여자브래트는 스스로를 여자로 생각했다가 같이 살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반면에 해리는 일생을 함께 살 수 있는 남자였다. 불쌍한 클레어는 너무 꽉 막혀서 해리 같은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지 못했다.

"언니가 또 도망쳤군요, 그렇죠?"

그가 돌아보자 말을 시키려고 브래트가 얘기를 건넸다. 브래트는 탐스러운 사과를 베어 물면서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당신을 기다렸어요."

유혹이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로 브래트가 대답했다.

해리는 브래트를 쳐다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보모한테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니?"

브래트는 혼자서 히죽거리며 그의 앞을 지나쳐 걸어갔다. 브래트는 여자들에게서 보았던 걸음걸이를 흉내 내어 엉덩이를 흔들며 걸었다. 사실 클레어는 엉덩이를 흔들며 걸었던 적이 없었다. 남자를 얻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브래트는 삼 미터 가량 앞에서 멈춰서며, 어깨너머로 해리를 돌아다보았다. 브래트가 생각했던 대로 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절 만나러 들러 주시겠어요?"

사라는 실제로 콧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사과를 멀리로 내던져 버리고 집을 향해 뛰어갔다.

한동안 해리는 그 자리에 서서 그가 어린애라고 생각했던 젊은 여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마구간 벽을 채찍으로 내려쳤다.

"망할!"

그는 욕설을 내뱉고 나서는 집으로 돌아왔다.

 

비밀 통로의 문이 열리고 브래트가 들어왔다. 그녀는 침대 곁에 서서 한동안 클레어를 내려다보았다.

"언니, 해리랑 싸웠지?"

클레어가 코를 훌쩍였다. 그녀는 등을 대고 바로 누워 있었다. 이제는 눈물이 거의 마른 모양이었다.

"모르겠어."

"해리는 그랬다고 하던데. 그는 에든버러에 갔어. 짐도 꾸리지 않고서 말이야. 자기 엄마에게만 얘길 하고 나서, 곧장 말을 타고 떠났어. 하인도 다섯 명밖에 따라가지 않았대. 다른 하인들은 짐을 꾸려서 나중에 따라갈 거래."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었던 모양인지 다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이가 수사슴을 쐈어. 난 이성을 잃어버렸고."

브래트는 침대 끝에 매달린 커튼으로 손장난을 쳤다.

"해리가 자기 어머니를 만난 건 분위기가 그리 화기애애하지 않았을 거야."

"틀림없이 그인 약혼을 깨고 싶어 할 거야. 오늘 난 무서웠어."

클레어가 말했다.

"어쩌면 해리는 파혼을 원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는 언니가 해리와 깨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라구 생각해. 벌써 엄마가 언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외상을 달아놓았는지 알아? 맥아렌 가의 새 공작부인 앞으로 말이야."

"알고 싶지도 않아."

클레어가 말했다.

브래트는 초상화 뒤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돌아가야겠어. 기분이 낳아지길 바라겠어."

브래트가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난 언니가 마음의 결정을 내리길 바래."

"뭘 결심하라구?"

브래트는 대답이 없었다. 그냥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초상화 뒤로 사라졌다.

클레어는 배를 깔고 엎드려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제 해리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해리까지 화나게 했고, 모든 집안사람들이 두 사람이 다투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연인들은 항상 다투는 법 아닌가, 그렇지 않나? 해리와의 다툼이 보통의 사랑싸움이 아니었다는 점을 스스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래서 그는 에든버러로 갔고, 이제 그녀는 저택에 홀로 남았다. 친구도 아무도 없고, 생각할 사람도 없다. 해리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얘기할 사람 마저 아무도 없다. 대화를 나누려면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클레어는 더욱더 격하게 울기 시작했다. 그녀와 해리는 대화를 나누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리가 돌아오면 언쟁을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해리에게 정말 너무 미안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지? 사냥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은 동물들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구경해야 하나? 그래서 백 벌의 승마복과 여섯 정의 엽총을 갖추게 될까? 앞으로 10년 후쯤이면 자리도 결코 권하지 않는 곳에서 시어머니와 고분고분 티 타임을 갖고 있을까?

모든 생각이 그녀를 더욱 서럽게 만들었다.

 

 

 

18

누군가 어깨를 흔들자 클레어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거의 하루 내내 울고불고 하는 통에 눈이 퉁퉁 부어올라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남자가 머리맡에서 들고 서 있는 촛불을 빼면, 방안은 온통 캄캄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겨우 눈을 뜨자 오만의 하얀 옷에서 반사되는 빛을 볼 수 있었다. 말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지만, 잠시 후 그녀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뭐예요?"

그녀가 물었다. 몸을 일으켜 앉으려고 애를 썼지만 몸이 너무 지쳐 있어 근육이 뻣뻣했다. 그녀는 여전히 축축한 승마복을 입고 있었다.

"그 분이 총에 맞았어요."

오만이 독특한 악센트로 말했다.

"누가 그 분을 죽이려고 했어요."

클레어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트레벨리언을 말하는 거예요?"

그녀가 속삭이자 오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는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가 바닥에 닿는 순간 비틀거리며 손을 이마로 가져갔다. 식사 구경을 한 지가 꽤나 오래 전이었기 때문이다. 벽난로 위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니 자정에서 몇 분을 넘긴 시간이었다.

"그 사람이 내게 보냈어요? 얼마나 심하게 다쳤어요? 의사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요? 그 사람 괜찮겠어요?"

클레어가 퍼부어 대는 이 모든 질문에도 불구하고 오만은 한마디뿐이었다.

"따라 오십시오."

그리고는 그림 뒤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클레어는 오만을 따라, 비밀 통로를 지나서 지붕으로 나왔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만을 따르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트레벨리언의 집필실에 도착하자 귀에 들리는 첫 마디는 포효하는 듯한 욕설이었다.

"우라질, 도대체 어딜 싸돌아다니다 오는 거야? 네 녀석 기다리다 출혈 때문에 죽고 말겠다."

순간 클레어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고함을 지를 사람이면 절대로 지옥 문턱에 가 있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침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피를 흘렸으면 조금은 더운 피가 식었을 법도 한데, 여전히 성질이 죽지 않았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겠어요?"

침대 곁으로 다가가는 동안 트레벨리언은 계속 클레어를 주시했다. 린넨 셔츠의 어깨 부분이 피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혈색은 좋아 보였고 충분히 건강해 보였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적의에 찬 목소리였는데, 그것은 트레벨리언이 그녀에게 도움을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란 의문에 대한 답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고, 그래서 도와 주러 왔어요."

클레어는 팔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만지려고 했지만 트레벨리언이 뒤로 물러났다. 그럼으로써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난 당신이 필요 없소."

"그럼 의사를 부르겠어요."

그녀가 방을 나서기 시작했다.

"안 돼!"

클레어는 돌아서며 그를 쳐다보았다.

"나 아니면 의사, 둘 중에 하나예요.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뿐이에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은 베개에 몸을 기대며 항복의 의사 표시를 했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 쪽으로 걸어갔다. 침대 곁에는 오만이 이미 수술 도구와 뜨거운 물, 붕대 대용의 목면을 가져다 두었다. 아주 조심스레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셔츠를 잘라 내고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상처 주변의 혈흔을 빼고는 아주 깨끗했다. 화약 흔적도 없었고, 먼지나 모래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에 감사해야 할 것은 총알이 관통했다는 점이었다. 상처는 팔의 상박부에 있었고, 근육을 관통하여 뼈에는 손상이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상처와 가슴 주변의 피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누가 당신을 쏜 거죠?"

상냥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몇 사람 있을 수 있을 거요. 여태껏 내게 앙심을 품게 만든 사람은 얼마 안 되거든."

"당신이?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요."

그는 눈을 뜨며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울었던 모양이군."

"당신이 다쳤다는 얘기를 듣자 눈물이 억수같이 쏟아지더군요. 여기 오는 동안 내내 울었어요."

트레벨리언이 몸을 베개에 기대고 있는 동안 클레어는 팔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당신을 울린 건 해리라고 들었소. 그 녀석이 수사슴을 쏴 죽여서 당신이 매우 화가 났다고 하던데."

클레어를 쳐다보며, 그가 목소리가 낮췄다.

"그 녀석이 제 어머니에게 당신과 결혼 못하겠다고 했다는 얘기도 들었소."

클레어의 손이 딱 멈추었다.

"그이가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허사였다.

"쓸데없는 소문은 듣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누가 당신을 쐈어요? 사냥꾼인가요? 그 사람들 중에는 총솜씨가 형편없는 사람도 있어요. 지난 며칠간 불구의 몸으로 돌아다니는 동물을 많이 보았어요. 다리나 날개가 없는 새, 깡총거릴 다리가 없는 토끼, 아직 죽지 않은 수사슴, 그리고……."

그녀는 하던 얘기를 멈추고, 금방이라도 다시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할 것 같았다.

 

트레벨리언은 클레어가 팔에 붕대를 매는 동안 의도적으로 찬찬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을 보지 못했던 두 주일 반 동안 뭘 하고 지냈소?"

"벌써 그렇게 됐나요? 위스키를 마시며 당신과 얘기를 하던 게 바로 어제 일 같은데 말이에요. 소작인들과…… 그리고…… 앵거스 맥 트레비트와 함께 춤을 추었던 게 틀림없이 바로 몇 시간 전이다 싶었는데."

단지 그 이름만으로 클레어는 많은 생각이 복받쳤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손에 묻고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트레벨리언은 베개에 몸을 기대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미세한 동정심이 드러나 있었다. 그 또한 한때 그 집안사람이었기에, 클레어가 무엇 때문에 우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 집이 어떻게 인간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순응하거나 영혼이 살해 당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트레벨리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못 만난 지 두 주일 반 동안 트레벨리언은 그녀의 동생을 통해 계속해서 클레어의 근황을 듣고 있었다. 사라 앤은 매일같이 방에 찾아와서 브램레이의 모든 사람에 대한 소문을 얘기해 주었다. 해리가 바라는 부인이 되기 위하여 클레어가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를 들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탐욕스런 어머니가 벌써 클레어가 결혼으로, 합당한 사람과의 결혼으로 상속받을 재산을 건드리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배가 고프오."

울음소리보다 큰 소리로 트레벨리언이 말했다.

"오만이 한 솥 가득 음식을 준비했지 싶소. 내게 먹을 걸 갖다 주시겠소?"

클레어가 코를 훌쩍거리며 두리번두리번 손수건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 데에도 손수건이 없자 붕대 조각에 코를 풀었다. 내키지 않는 참담한 심정으로 침실을 나와 바깥 방으로 갔다. 오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음식을 가득 쌓은 접시 두 개와 넉넉한 위스키 잔을 함께 받쳐든 커다란 쟁반을 손에 들고 있었다. 클레어가 쟁반을 받아 들려고 했지만, 그는 옆으로 비켜서라고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왔다. 쟁반을 침대 발치에 내려놓고 오만은 방을 나갔다.

손을 내밀어 치킨 한 조각을 집으려고 했지만 트레벨리언의 목소리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그 냄새나는 옷 때문에 함께 식사를 못 하겠소. 염소 냄새보다 더 지독하오. 저 문을 열면 외투가 있을 거요. 그건 벗어던져 버리시오. 왜 그런 눈으로 보지? 간섭하려는 게 아니오. 냄새가 없는 곳에서 저녁을 먹고 싶다는 것뿐이오."

대들 기력도 없었다. 클레어는 옷장 왼쪽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헐렁한 로브가 풍성하게 걸려 있었다. 특히 아름다워 보이는 푸른색 로브가 있어, 클레어는 그 옷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옷을 손에 들고 갈아입을 곳을 두리번거리자, 트레베리언이 태피스트리 쪽을 가리켰다. 태피스트리 뒤로 중세의 낡은 곁방, 말하자면 방에 딸린 야외식 화장실이라고 짐작되는 문이 나타났다. 그녀는 조그만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코르셋도 벗어 버리시오."

트레벨리언이 침실에서 고함을 질렀다.

"숨 쉴 때마다 헐떡거리는 소리를 더 이상은 못 들어 주겠소."

저항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다음 순간 클레어는 그 원망스런 옷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승마복을 발기발기 찢어 버렸다. 코르셋도 벗어 버렸다. 그런 다음 속옷까지 젖었음을 알고는 그것도 마저 벗어 버렸다. 알몸에 부드러운 실크만을 걸치자 아주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클레어는 머리를 풀고 손가락으로 빗질을 했다.

클레어의 손이 조그만 녹색 나비들이 수놓인 실크 가운 위를 미끄러졌다. 근래에 들어 처음으로 다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집이나 해리와 있을 때에는 얌전을 떨어야 했지만, 트레벨리언과 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었고, 행여 말조심조차 필요가 없었다.

클레어는 태피스트리 뒤에서 걸어 나와 만족스러운 얼굴로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그는 입으로 향하던 음식을 손에 그대로 들고 순간적으로 굳어 버린 모습이었다. 트레벨리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얼굴에서 맨살이 드러난 발까지 그녀를 한 차례 쭉 훑어보더니, 아주 천천히 시선이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클레어는 절로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리와 곁에 앉으시오."

트레벨리언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원한다면 내 무릎 위에 앉아도 좋소."

다시 시선을 들어 트레벨리언을 바라보며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어색함이 모두 사라졌다. 클레어는 침대 반대쪽 끝에 앉아 단숨에 위스키를 들이키고 나서는 식사를 시작했다. 오만이 만든 음식은 그녀가 지난 두 주일 동안 먹었던 음식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어떤 음식은 맵다 못해 혀를 찌르는 듯했고, 어떤 것은 차가웠으며, 또 다른 것은 부드러운 맛이나 바삭거리는 맛이었다.

"당신이 쓰고 있는 책 얘길 해 주세요."

음식을 가득 입에 물고서 그녀가 열을 올리며 말했다.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모조리 얘기해 주세요. 당신이 생각하고 또 해왔던 일을 전부 얘기해 줘요. 그리고 누가 당신을 쐈는지도 알고 싶어요. 오만은 누가 당신을 죽이려고 했대요."

"그 녀석이 과장한 거요. 틀림없이 당신이 말했던 그대로일 거요. 솜씨 서툰 사냥꾼 말이오."

그녀는 아몬드 양념을 한 치킨 한 조각을 먹어 치웠다.

"하지만 당신은 이른 아침이나 어두워진 다음에만 산책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물론 그렇소."

클레어는 그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당신 말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당신을 쐈다는 건가요?"

"난 이 치킨이 좋소. 당신은 안 그렇소?"

"트레벨리언, 대답하세요!"

"해리에겐 고분고분하면서 내게는 도대체 왜 그리 앙칼진 거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요? 나처럼 다친 사람은 당신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말이오."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니 당신 앞에서는 내숭 떨 필요가 없잖아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클레어는 제풀에 놀란 토끼 눈을 했다.

"내 말을 오해하진 마세요."

트레벨리언은 위스키를 한 차례 홀짝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함께 사냥을 가자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빗속에 쭈그리고 앉아 동물들을 학살하는 걸 쳐다보고 있으라구요?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군요."

"하지만 해리와는 그렇게 했잖소."

"화제를 바꿔도 괜찮겠어요? 어둠 속에서 누가 당신을 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 사람 얼굴은 봤어요?"

"보기는커녕 사람 소리도 못 들었소."

식사를 계속하며 트레벨리언은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틀림없이 누군가 트레벨리언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잭 포웰."

그녀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웃기지 마시오. 잭은 날 미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소. 내가 아는 한 그 친구는 아직도 내가 죽은 걸로 알고 있을 거요."

"브래트 얘기로는 포웰이 에든버러에 있대요. 그리고 그 사람이, 자기 혼자서만이 페샤에 갔다는 논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출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신문에 났대요."

그 뉴스에 트레벨리언이 대단히 놀라는 표정이었다.

"증거가 뭐라는 얘긴 신문에 없었소?"

"없었어요."

느릿한 말투로 그녀가 대답했다.

"그게 뭘 것 같아요?"

위스키를 들이키며 트레벨리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잃어버렸던 것일 거요."

"페샤에서 돌아오면서 가져온 건가요?"

"그렇소."

그는 계속 음식을 먹으며 잠시 말이 없었다.

"에든버러로 가서 우리가 그걸 가져와야겠어요. 포웰이라는 사람에게서 그걸 훔쳐낼 수 있을 거예요. 어쨌든 그게 뭐죠?"

"'달의 진주'."

침대 기둥, 다시 말해 보니 프린스 찰리의 침대 기둥에 몸을 기대며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달의 진주'. 꽤나 이국적이고 값비싸게 느껴지네요. 내일 아침에 우린……."

"우린 그런 일 없을 거요. 당신은 방으로 돌아가시오. 난 잠을 좀 자야겠소. 잠이 오지 않으면, 당신이 사랑한다는 녀석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용서해 달라고 빌어 보지 그러시오? 내가 듣기로, 당신 어머니는 벌써 새 맥아렌 공작부인 이름으로 외상 옷을 샀답디다. 당신은 채무를 반드시 이행해야 할 테고, 오직 동물 쏴 죽이는 것밖에 아는 게 없는 남자랑 결혼을 하면 당신 어머니의 드레스 청구서를 결제할 수 있을 거요."

클레어는 음식 접시를 내려놓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얼마나 무례할 수 있는 사람인지 내가 잠시 잊고 있었군요. 난 당장 내 침대로 돌아가고, 당신이 잠을 자도록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다음에 또 누가 총질을 하면 그땐 의사를 부르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러겠소."

클레어는 입고 있는 실크 로브를 내려다보았다.

"옷을 갈아입고……."

"그냥 입으시오. 그리고 여기서 나가 주기만 하시오. 나도 당신이 얼마나 유머 없는 샌님인지 잊고 있었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클레어는 고개를 곧추세우고 침실을 걸어 나왔다. 일단 트레벨리언의 집무실로 나오자, 창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오만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조용히 해야 한다는 뜻으로 클레어는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따라오라는 동작을 취했다.

계단을 내려와 달빛이 비치는 바깥으로 나왔다. 어느새 오만이 뒤따라 나와 그녀의 옆에 섰다. 클레어는 장신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분명히 그를 죽이려고 했던 거예요? 사고는 아니었나요?"

"살인이었습니다."

클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얼마나 공포를, 그리고 분노를 느끼고 있는가를 깨닫고 그녀도 깜짝 놀랐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저 위대한 캡틴 베이커를 세상에서 앗아갈 생각을 했다는 말인가? 그는 아직도 너무 젊고,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녀는 오만을 돌아보았다.

"트레벨리언은 페샤에서 가져온 '달의 진주'를 포웰이 갖고 있다고 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오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할 땐 그게 아주 값진 게 아닌가 싶어요. 트레벨리언은 그걸 포웰에게서 빼내려고 하겠죠?"

"포웰이 진주를 갖고 있다면 캡틴은 그걸 뺏을 겁니다."

클레어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포웰이 '달의 진주'를 갖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태도로 미루어, 트레벨리언이 그것을 되찾을 결심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언제쯤 출발할 것 같아요."

"당장."

대답과 함께 오만은 그녀 앞을 지나쳐 건물 입구를 향해 섰다.

클레어는 잠시 그대로 서서 하늘의 별을 쳐다보았다. 마음속으로는 틀림없이 트레벨리언을 따라갈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갈등을 하고 있었다. 결혼을 약속한 다른 남자가 있는데…… 그녀는 자신이 소망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살았던 여자다. 그녀는 해리를 사랑하고, 그래서 맥아렌 가의 공작부인으로 일생을 보낼 계획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트레벨리언에게는 빚이 있었다. 레아트리스를 제임스 킨케이드와 결혼시키려는 음모에서 트레벨리언은 유일하게 그녀를 도왔다. 트레벨리언은 그러한 결탁이 브램레이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를 도왔다. 제대로 된 결혼식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더욱이 트레벨리언은 해리의 사촌이었다. 해리가 도움이 필요한 그의 가족을 방관만 하고 싶어 할까? 남편의 모든 가족을 돌보는 것이 공작부인의 임무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클레어는 그녀나 해리의 가족을 모른 체하면서까지 뭔가를 할 수는 없었다. 해리가 만약 이 자리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트레벨리언을 도왔을 것이다. 십중팔구 거대한 말을 올라타고 에든버러로 찾아가 포웰이라는 그 남자에게 '달의 진주'를 트레벨리언에게 넘겨 주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 물론 해리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오만을 돌아보았다.

"반드시 마차를 타고 가라고 하세요. 그리고 함께 갈 수 있도록 날 기다리세요. 최대한 빨리 마구간으로 나가겠어요."

그리고는 본관 건물을 향해 돌아섰지만, 클레어는 집안으로 몰래 들어갈 방법이 막막했다. 사람들 눈에 띌 게 거의 확실한데 현관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비밀 통로와 통하는 유일한 문은 트레벨리언의 탑 안에 있었다.

오만은 그녀가 고민하는 바를 알고 있는 듯, 주변을 빙 돌아 동쪽 날개 건물로 향했다. 관목더미에 숨은 조그만 문이 나타났다. 양초가 없다고 말하려는 참에 오만은 양초와 성냥이 놓인 벽감(壁龕: 벽을 안쪽으로 움푹 패이도록 만들어서 조각품이나 장식물을 놓게 만든 일종의 감실)을 가리켰다. 그녀가 초에 불을 붙이고 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돌아서자 오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클레어는 지금 있는 곳이 어디고, 터널 속에서 그녀의 방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연하기만 했다. 발자국이 있는지를 찾아보려고 바닥에 쌓인 먼지를 내려다보았다. 발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었다. 모두 브래트의 발자국인 듯했으나, 전혀 놀랍지가 않았다.

발자국을 살펴 자신이 있는 곳을 가늠하려고 애를 쓰며 통로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문에 당도했을 때, 잦은 출입 탓에 먼지가 거의 없어진 곳을 발견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은 조용히 열렸다.

불빛이 너무 강렬하여 태양 빛이 어두운 비밀 통로로 쏟아져 들어오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직 브래트일 수밖에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싫어요!"

클레어는 방에 들어서며, 금박으로 장식된 조그맣고 그럴듯해 보이는 무대를 보았다. 무대의 한 중앙에는 몸에 작아 어색해 보이는 채색 실크 의상을 입은 동생과 넝마를 걸쳐 입은 키 크고 바짝 마른 남자가 서 있었다. 클레어가 나타나자 두 사람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런 늦은 시간까지 뭘 하고 있는 거지?"

클레어가 물었다.

"그리고 네가 입고 있는 그 보기 싫은 옷은 뭐냐?"

"난 솔로몬이고, 춤추는 연기를 해야 되는데, 저 아저씨 말로는 그런 걸 연기할 시간이 없대."

뼈만 남았다 싶을 정도로 앙상하게 마른 남자가 힘들게 허리를 구부려 클레어에게 인사를 했다.

"당신의 종, 캐멀롯 J. 몽고메리(캐미의 세례명)입니다, 마담."

무대와 붉은색 고급 의자, 그리고 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 클레어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뭔가를 물어 보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는 동생을 쳐다보았다.

"네 도움이 필요해."

"돌아갈 길을 못 찾겠나 보지?"

브래트가 웃으며 물었다.

"데려다 주는 대가는 내야 해. 그리고 옷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입고 있는 게 무슨 옷이야?"

클레어는 마지막 말은 그냥 흘려들었다.

"데려다 주는 것 이상의 도움이 필요해. 대가는 뭐든 원하는 대로 지불해 주지."

순간 눈이 커지며 브래트가 좋아라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봐요, 캐미."

브래트는 어깨 너머로 소리를 지르고는 클레어를 데리고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길을 찾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두 사람은 모든 갈래 길을 구불구불 구부러지고, 때로는 돌아 나오며 앞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이내 클레어의 방으로 통하는 문 앞에 도착했다.

"그 아저씨를 만난 거지, 맞지?"

문에 들어서며 브래트가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를 의미하는 지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다.

"옷을 갈아입게 도와 줄래. 그 사람이랑 에든버러에 가야겠어."

순간 브래트의 눈이 커졌다.

"해리에게서 야반도주라도 하겠다는 거야?"

"물론, 그렇진 않지. 트레벨리언이 궁지에 몰렸어. 오늘 밤에 그 사람을 죽이려고 누가 총질을 했어. 내 생각에 범인은 포웰인 것 같아. 트레벨리언은 에든버러로 가서 '달의 진주'를 되찾아 올 거야."

브래트가 묘한 시선을 보냈다.

"'달의 진주'가 뭔지는 알아?"

클레어는 옷장에서 여행용 드레스를 꺼내다가 잠시 멈칫했다.

"넌 알아?"

"어쩌면 알지도 모르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모르겠어. 며칠쯤. 그 이상은 아닐 거야."

"벨리랑 함께 밤을 보낼 거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얘기를 했잖아."

브래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그 사람을 부르는 언니만의 이름이니깐?"

클레어는 서두르며 속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코르셋 끈을 좀 묶어 주겠니? 입 좀 닥치고 말이야."

브래트는 될 수 있는 대로 서둘러 언니의 옷을 입혀 주었다.

"해리는 어떡 할 거야?"

브래트가 물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해리를 어떻게 하다니?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우린 사랑싸움을 한 거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리고 언닌 지금 다른 남자 품으로 도망가는 거고."

클레어는 옷을 입던 손을 멈추었다.

"네 얘기와 달리, 내가 지금 딴 남자에게 도망가는 게 절대 아니야. 트레벨리언은 레아트리스와 함께 날 도와주었어. 너도 그 자리에 있어서 알잖아? 지금 트레벨리언은 도움이 필요하고, 난 그 사람을 도와 줄 생각이야. 트레벨리언은 현실의 남자가 아니잖아.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유명 인사잖아. 학자이고. 그 사람은 세계의 재산이야. 세계 시민으로서 나는 그 사람을 도울 의무가 있는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언닌 그 아저씨를 좋아하고 있는 거야. 흠모하는 거지. 그 아저씨 방으로 걸어 들어갈 때 언니 얼굴이 꽃처럼 활짝 피더라고."

브래트가 말했다.

클레어는 드레스의 단추를 마저 채웠다.

"아무래도 네가 해리와 그 사람을 헷갈리나 보구나. 난 해리를 사랑해. 해리를 흠모하고. 내 표정이 밝아졌다면, 그건 해리 때문이야. 트레벨리언과 난 친구일 뿐이야. 아니지, 그 사람이 날 연구 대상으로 삼으려고 했던 뒤로는 친구가 아닐 수도 있지만……."

"트레벨리언이 그린 그 그림들을 말하는 거야? 아저씬 모든 사람의 그림을 그리잖아. 언니도 아저씨가 날 어떤 식으로 그렸는지 봤어야 했는데 말이야. 얼굴은 할머니에다 몸은……."

브래트가 히죽 웃었다.

"아저씨가 내게 준 것 같은 그림을 언닌 아마 본 적도 없을 거야. 그리고 아저씬 나와 캐미가 함께 있는 그림도 그렸다고. 내가 메이와 함께 있는 그림, 도둑질하는 할머니와 함께 있는 그림도. 해리가 자기 엄마와 함께 있는 그림을 언니가 봤어야 하는 건데."

가죽 가방에 옷을 챙겨 넣던 클레어가 잠시 손을 멈췄다.

"모든 사람을?"

"그리고 아저씬 모든 사람 이야기를 글로 쓰잖아. 벨리가 우리 가족들 얘기를 쓸 수 있도록 책상을 두 개나 더 들여놓느라 오만이 고생을 했대. 오만은 지금 벨리 아저씨가 주로 미국인 이야기에 매달리고 있다고 했어."

클레어는 머리빗과 크림 통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맥 트레비트의 커다란 위스키 병을 가방에 밀어 넣었다. 첫 번째 사냥에 다녀온 뒤부터 집사는 계속 클레어에게 위스키를 공급해 주었다.

"넌 너무 여러 사람에게 수다를 떨고 돌아다니는 것 같아. 이 집이 네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것 같고 말이야."

"이 집과 이곳 사람들 모두 완벽하게 마음에 들어."

브래트는 언니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니도 나처럼 얘기할 수 있겠어? 언니도 여기에 어울리냐는 말이야? 아니면 언니는 그 지저분하고 조그만 하얀 오두막집에 사는 사람들과 사는 게 더 어울리는 거야? 언니는 해리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트레벨리언이야?"

클레어는 탕 소리가 나도록 가방 뚜껑을 세차게 닫았다.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 없는 동안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지? 최선을 다해 거짓말을 하는 거야. 그런 네 능력은 미루어 짐작도 못 하겠지만 말이야. 아마 소설이라도 한 편 시작해야 할 거야. 거짓말은 네게 아주 쉬운 일이잖니. 자 이제 이리 와서 내게 키스를 해다오. 당분간 널 못 보겠구나."

브래트는 재빨리 언니의 볼에 키스를 하고 나서는 충동적으로 클레어를 꼭 껴안았다.

"조심해. 언니가 총 맞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이 집에는 좋은 일 뿐만 아니라 나쁜 일도 있어."

"해리의 어머니를 염두에 둔 거라면, 틀림없이 난 안전할 거야. 무엇보다 그 여잔 내 돈을 원하고 있잖니."

"많은 사람들이 언니 돈을 원하지."

클레어는 문 앞에 섰다.

"널 포함해서 말이지. 이제 조심해서 행동해. 그리고 내 보석을 한꺼번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지는 마."

브래트는 그 자리에 서서 클레어가 이미 나가고 없는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난 언니 돈을 바라지 않아."

그녀가 중얼거렸다.

"언니가 눈물을 그쳤으면 좋겠어."

그리고는 돌아서서 클레어의 보석이 담겨 있는 상자를 쳐다보았다. 보석상자 안에서 루비 목걸이를 꺼내어 불빛 아래로 가져가며 다시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어쩌면, 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건 싫어하는 것 같아."

"안 돼."

트레벨리언이 마차 안에서 나지막이 소리치며 들고 있던 지팡이로 마차 지붕을 쳤다.

마차는 움직이지 않았고 클레어는 마차 안으로 올라탔다.

"난 함께 갈 거예요. 더 이상 얘기할 필요 없어요. 난리 굿이라도 해서 사람들을 모조리 깨워, 당신이 여기 타고 있는 걸 들통내지 않을 바엔 더 이상 날 말릴 순 없을 거예요."

"집안사람들 중에 반이 내가 이 집에 있다는 걸 알고 있소. 사람들이 모조리 내 방을 들락거린 탓에, 내가 숨어 있다는 게 비밀이 지켜질 가능성은 거의 없단 말이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의 맞은 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꽤나 놀랍게도, 그가 한눈에 보더라도 완벽하게 재단되고 유행의 첨단을 걷는 복장을 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러면 내가 당신을 따라가야 할 이유가 더욱 많아졌네요. 난 당신을 지켜줄 수 있어요."

순간 트레벨리언이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웃었다.

"당신이 날 보호한다고? 당신은 심지어 절름발이 노파에게서도 자신을 지키지 못했잖소."

말에 가시가 돋쳐 있다 싶었지만 클레어는 고개를 돌렸다.

트레벨리언은 잠시 말이 없었다.

"좋소, 어쩌면 여자를 이길 수 있는 남자는 없겠지. 하지만 당신이 잭 포웰에게서 날 보호하려고 할 필요는 없소. 날 죽이려고 했던 건 그 친구가 아니오."

"그럼 누구죠?"

곧이어 클레어는 마차 유리창에 머리를 갖다 붙이면서 오만에게 마차를 출발하라고 시켰다. 마차가 출발하자 클레어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며 트레벨리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트레벨리언의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다. 마차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빛이라고는 바깥에서 들어오는 랜턴 불빛뿐이었다.

"당신은 나 때문에 가는 게 아니오. 당신이 심심해서 가는 거지."

"난 심심하지 않아요. 글쎄, 어쩌면 약간은 그럴지도 모르죠. 해리가 가 버리고, ……."

"해리가 없어지면 당신은 자유요. 집에서 몰래 빠져나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요. 사실 해리가 여기 있다고 해도, 그 녀석은 당신이 어디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말이오. 결혼 선물로 엽총을 받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소."

"내 얘기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나와 해리간의 관계도 정말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내게 '달의 진주'를 발견한 얘기나 해 주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 진주는 아주 큰 건가요?"

"'달의 진주'는 물건이 아니오. 사람이지. 더 정확히 말하면 여자요. 페샤 사람들이 믿는 종교의 여제사장이지."

"일종의 여자 목사 같은 건가요?"

트레벨리언은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오히려 공주에 가까울 거요. 아니면 여신이던가. 그 여잘 대접하는 방식을 보면 말이오."

클레어는 눈만 깜박이며 멍청히 그를 쳐다보았다.

트레벨리언이 벙싯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오만에게 마차를 세우라고 하면 좋겠소? 당신이 내리게 말이오? 여자를 구해 주러 가는 따위는 성미에 맞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 짓지 마시오. 그게 세상에서 가장 큰 진주였으면 좋겠소? 진주가 아무리 큰 게 있더라도 난 그런데 목숨을 걸진 않소."

클레어는 그가 하는 말을 새기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여자를 구하러 가는 길이든, 희귀한 보석을 가지러 가는 길이든 그녀에게는 달라질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여잔 틀림없이 아주 존경받는 사람이었을 거예요. 당신이 페샤에 갔다 온 걸 입증하려고 그 여자를 거기서 데리고 나온 건가요?"

"아니오. 니사는 제발로 걸어 나온 거요. 자기가 원해서, 나와 함께 그 도시를 나온 거란 말이오. 니사는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소."

"알겠어요. 추측건대 그 여잔 그런 권리를 얻은 것이겠군요. 오랫동안 제사장 노릇을 한 대가로 말이에요."

트레벨리언은 대답이 없었다.

"왜 그 여자를 '달의 진주'라고 부르죠? 진주빛 머리칼이라도 갖고 있나 보죠?"

어둠 속에서 트레벨리언이 그녀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이름을 붙여 준 건, 페샤 사람들이 그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믿기 때문이오."

"."

클레어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

다만 마차를 스쳐 지나가는 어두운 풍경을 내다보았다.

"그 여잔 오랫동안 제사장 노릇을 했나요?"

트레벨리언이 대답이 없자 그녀는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예의 잘난 척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아요. 이제 날 그만 놀릴 수 없어요? 나도 그 진주 얘길 속속들이 모두 알고 싶어요. 그 얘길 시작부터 모조리 알고 싶단 말이에요. 어떻게 그 미인을 얻게 되었고, 왜 이런 한밤중에 그 여자를 구하러 가는 거죠?"

혐오스럽다는 투로 클레어가 말했다.

"당신은 언제든 여기서 내릴 수 있소."

클레어의 고집스런 표정에 트레벨리언이 웃음을 터뜨렸다.

"좋소, 얘길 해 주리다. 페샤에는 일종의 종교 의식이 있는데, 그건 수백 년 동안 내려오고 있는 전통이오. 50년마다 남자 제사장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떠나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젊은 여자를 물색하게 되오. 대략 열서너 살 가량의 여자를 골라 모조리 페샤로 데려가는 거지. 그러면 모든 사람이 함께 여자 제사장이 될 아이를 고르는 거요."

"알겠어요. 그러면 그 여자는 평생 여자 목사 노릇을 하는 거로군요. 그런 뒤에 그 사람들은 또 다른 여자를 고르는 거고."

"절대 그렇지 않소. 페샤인이 그 여자를 제사장으로 모시는 건, 단지 오 년 동안 만이오. 그리고 나서는 죽여 버리지. 45년이 지나면 또 다른 여자를 찾으러 다니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한다구요?"

트레벨리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건 그 사람들의 신앙이오. 세상의 종교는 저마다 다르잖소. 페샤인도 특이한 계율을 갖고 있을 뿐이오."

"하지만 그런 계율은 끔찍스러운 거잖아요. 소름끼쳐요. 당신이 그런 규칙에 대해 뭐라도 항변을 했길 바라요."

트레벨리언이 웃었다.

"난 신성한 도시에서 유일한 이교도였소. 그 도시의 광장에 서서 불교의 계율을 설파할 위치에 설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단 말이오."

"기독교예요."

"뭐라고. , 그래. 그 망할 놈에 진정한 종교 말이지. 모든 사람이 자기 종교가 진짜라고 믿는다는 사실은 대체 알고 있기나 하오?"

그녀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맘껏 비웃으세요. 어쨌든 당신은 그 여자를 구했잖아요. 그 여잔 언제 죽기로 되어 있어요?"

"올해요."

클레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그 여자를 그 무서운 곳에서 도망시켜서 목숨을 구해 준 셈이네요."

"아니오, 사실은. 니사와 시종들이 거리를 걷고 있었소. 그녀가 막 지나치려는 순간, 내가 그 앞에 쓰러졌소. 말라리아 때문이었소. 하지만 니사는 자기 아름다움에 도취되어서 내가 기절한 거라고 생각했소. 그 여잔 날 자기 방으로 데려갔소. 그리고 내가 그 사람들처럼 검은 피부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날 숨겨 줬소."

"그럼 당신이 도시를 떠날 때 그 여자도 따라왔나요? 아무도 그 여잘 막지 않았어요?"

"오 년 동안 그 여자들은 제사장이오. 그 동안엔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소. 원하는 건 모두 가질 수 있고. 니사는 나와 함께 떠나기를 원했고, 그렇게 했소."

클레어가 허리를 수그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 여잔 왜 당신과 함께 페샤를 떠나려고 했죠?"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트레벨리언이 싱긋 웃어 보였다.

"우리가 독개미 마을에 캠프를 쳤을 때 얘기를 해드릴까? 개미들은 한밤중에 나왔소. 그래서 누가 먼저 일어나서 피하라고 알려 주기도 전에 온통 우리 몸을 뒤덮었소. 그 일로 여섯 명이 고열로 시달리다가......,"

"당신 피부가 전혀 검지 않다는 건 어떻게 알았대죠?"

"니사도 자기 눈으로 봤으니까."

간단히 그가 대답했다.

"질투하는 거요?"

"웃기지 말아요.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라고요. 당신은 이해해야 해요. 당신 일생을 지배하는 힘이 바로 호기심이었잖아요."

"니사도 마찬가지로 호기심이 많았소."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당신을 사랑했나요? 당신과 함께 페샤를 떠난 이유가 그거예요?"

"내 생각에 그 여잔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했던 것 같소. 니사는 농촌 마을에서 자랐고, 아주 가난했소. 그리고 페샤 외에 다른 곳을 구경하고 싶어 했소."

"몇 년 내에 그 여잘 죽일 거라는 사실도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테고요."

"틀림없이 약간은 관련이 있을 거요."

클레어는 다시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당신과 함께 페샤를 떠나 그 나라를 여행했군요. 그렇지만 당신이 죽게 되자, 아니 최소한 포웰은 당신이 죽을 거라 생각하고, 당신의 모든 여행 일지와 '달의 진주'를 가져간 거군요. 맞죠?"

"대충은."

다시 말을 꺼내는 클레어의 목소리는 소곤거림 이상이 아니었다.

"그 여잘 사랑해서 지금 구하러 가는 거죠? 그 여잘 포웰이 잡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렇게 이성을 잃었던 이유가 바로 그거죠?"

"내가 그렇게 이성을 잃었던 건 포웰이 그녀의 의사에 반해서 니사를 억류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소. 페샤에서 돌아오는 길에 잭 포웰은 니사를 노획물 같은 걸로, 박물관 직원 눈에 비친 표본이나 되는 양 쳐다보는 경향이 있었소. 난 니사가 어딘가의 답답한 접객실에 죄수처럼 붙들려 있는 것을 원치 않소."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떤 여자는 그런 걸 견딜 수 있겠지만, 어떤 여자는 안 그렇소."

클레어는 마지막 말을 못들은 척했다.

"얼마나 자주 그 여잘 만났어요?"

"최대한 자주."

히죽거리며 이렇게 말했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찡그렸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요? 누가 우리 대화를 들었으면, 서로 연애라도 하는 사이인 줄 알겠소. 내가 몇 달 전에 바람을 피워 당신이 질투를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겠단 말이오."

"정말 웃기시네요. 물론 질투 같은 건 안 해요. …… 난 캡틴 베이커를 연구하는 사람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당신이 실제로 죽지 않았다고 해도, 어쩌면 난 여전히 당신 전기를 쓸 거예요. 그래서 최선을 다해 당신의 모든 것을 알아 내야 해요. 당신이 사랑했기 때문에 신비의 도시에서 아름다운 젊은 처녀를 데리고 나왔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마 내 독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 수 있을 거예요. 독자들은 잘생긴 청년 탐험가와 아름다운 처녀의 사랑 이야기 따위를 좋아할 게 틀림없으니까요."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은 내가 늙고 추하게 생겼다고 했소. 그것 말고라도 니사도 처녀와는 거리가 멀고."

"? 막 생겼어요, 그 여자가?"

"그 여자를 그런 식으로 모욕하지 마시오. 당신도 자신이 딱 오 년밖에 못살 거라고 생각하면 지금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거요."

"난 반드시 현실에서 내가 하고 있는 것만 생각해요.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할 참이고 그 뒤로 행복하게 잘살 거예요."

"고요하고 적막한 아침 식사를 먹으면서 말이지. 도서관 출입도 허용이 안 되고, 해리를 닮은 말이 먹는 것까지 포함해 당신이 모든 걸 감독해야 하는 그런 집에서 말이지."

"그만 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욕보이는 소리를 듣는 데 이젠 진력이 났어요. 그 니사를 사랑했냐고 물었잖아요?"

그녀는 마침내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내게 진실을 말하면 나도 당신에게 진실을 얘기하겠소."

클레어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정말 성질을 돋구는 데에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완전히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그를 쐈다고 해도, 죽이려고 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싶었다. 그녀는 다시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팔 괜찮아요?"

"더 나빠졌소."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나자 갑자기 모든 분노가 증발해 버리는 느낌이었다. 함께 있을 때면 때로 클레어는 그가 캡틴 베이커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의 업적과 저술은 물론 그의 지식마저도, 거의 모든 것을 망각했다.

"페샤 원정 얘기를 해 주세요."

"그래서 그 얘길 당신이 쓸 예정인 내 전기에 쓰려고 그러시오?"

화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내가 궁금해서 그래요. 브래트에게 페샤 이야기를 해 주었다는 얘길 들었어요. 정말 어떤 일이 있었죠? 포웰도 함께 페샤에 갔나요?"

"아니오, 혼자였소."

이미 포웰의 부재를 지적했던 바, 클레어는 생긋이 미소를 지었다. 태도를 바꾸어 그에게 최대한 친밀한 시선을 보냈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과의 관계가 아주 가까워짐에 따라 가끔씩은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그의 두 눈은 아무 변화도 없어 보였지만, 기실 클레어의 질문에 기꺼워하고 있었다. 그러자 돌연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트레벨리언은 남자였고 클레어는 여자였다. 마차 안에는 남자와 여자 단둘이만 있었던 것이다.

이유는 몰랐지만 클레어의 가슴 속에서 심장이 불규칙하게 고동치기 시작해 창밖을 내다보았다.

"얘기해 주세요."

그녀가 속삭였다.

트레벨리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클레어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소?'

"페샤에 들어가기 사흘 전부터."

깊이 숨을 들이쉬며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클레어는 그에게 말을 시켜야만 했다.

"지금 무슨 옷을 입고 있는 거죠? 어떻게 그렇게까지 변장을 할 수 있는 거예요? 페샤 말은 어떻게 배웠죠? 페샤의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생겼어요? 그 닐라 말구요. 이름 맞아요?"

"니사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여행 얘기를 시작했다.

트레벨리언은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다. 마치 배우처럼 호흡을 고르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고, 어디에서 관객의 궁금증을 고조시켜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한때 페샤의 노예였던 남자를 찾아내어 그를 데리고 페샤를 찾아 긴 여행을 시작했던 얘기를 했다. 그 남자와 했던 대화와 페샤어를 배웠던 얘기를 비롯해서.

트레벨리언의 이야기가 페샤 진입으로 이어지자 클레어는 숨을 죽였다. 얘기의 결말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은 클레어로 하여금 그의 목숨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트레벨리언의 얘기에 따르면, 동화와는 달리 페샤는 금으로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었다. 대신, 작고 폐쇄된 곳으로 말할 수 없으리 만큼 오래된 도시였다. 낡은 석조 건물과 함께, 트레벨리언의 표현으로는, 더없이 늙은 남자들로 가득 찬 곳이었다.

"그럼 여자는요?"

클레어가 물었다.

"도시에 있는 여자는 유일하게 니사와 여덟 명의 시녀뿐이었소. 제사장으로서의 오 년 동안 시녀들은 '달의 진주'의 시중을 들지. 그리고 나서 그녀가 죽고 나면 각자 집으로 돌려보내지는 거요. 페샤에 있는 동안 시녀들은 남자들 가운데 누구와도 교접할 수 있지."

"교접?"

"같이 자는 것 말이오.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 같이 사는 것."

그가 말했다.

"하지만 니알라는?"

클레어가 재빨리 물었다.

"그녀에게도 교접이 허락되는 거예요, 그래요?"

"니사는 원하는 건 마음대로 할 수 있소. 페샤에 대한 얘기를 더 듣고 싶은 거요, 아니면 니사의 성생활에 대해 흥미가 있는 거요? 아마 당신의 그런 집착은 성생활의 무경험에서 기인되었지 싶은데."

"!"

클레어가 코웃음을 쳤다.

"얘기나 계속하세요."

트레벨리언은 니사가 그를 구했던 얘기, 목숨을 살렸던 얘기를 했다. 다른 사람 눈에 띄었다면 십중팔구 살해당했을 것이었다. 니사의 밀실에서 함께 지냈던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니사의 밀실을 묘사했다. 수백 년 동안 페샤 인들이 훔쳐 온 보물이 그곳에 얼마나 많이 쌓여 있는지를 얘기했다. 중세의 스페인 인에게서 훔쳐 온 칼이며, 십자군의 목에서 가져온 보석, 실크와 가구, 그리고 그림 등등.

"제사장에게 어울린다 싶은 최상품뿐이었소."

"죽이기 전까지 말이죠?"

클레어가 말했다.

"그 여자를 죽일 때는 날카로운 도끼를 사용해서 단숨에 죽이나요? 오 년 내내 자기들이 숭배해 왔던 여자를 죽이는 방법에 대해 그 사람들이 사려가 깊기를 진정으로 바라요. 고문을 당하면서 죽는 모습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알지 못하는 것은 얘기하지 마시오."

트레벨리언은 이를 깨물며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후 다시 여행 이야기를 계속했다.

동이 트자 그들은 여관 앞에 마차를 세우고 거창하게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 클레어가 하품을 했다.

"당신은 여기서 잠이나 자며 기다리는 게 어떻겠소. 난 에든버러로 들어가서 니사를 데려오겠소."

트레벨리언이 말했다.

클레어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미소 속에는 하시라도 트레벨리언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트레벨리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좋소. 서둘러서 일찍 일을 끝마쳐 버립시다. 앞으로도 갈 길이 많이 남았소."

 

 

 

19

그들은 오후 세 시가 되도록 마차를 멈추지 않았고, 트레벨리언은 페샤 원정의 모든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프리카와 중국 그리고 가고 싶어 하는 나라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그의 얘기 가운데 클레어는 딱 한 차례만 약간의 분노를 느꼈다.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 갔던 얘기를 했을 때였다. 그곳의 추장은 흑인과 백인이 합쳐지면 어떤 아이가 나올까 매우 궁금해 했다. 그래서 자기 마을의 젊은 여자 스물다섯 명을 모아놓고 캡틴 베이커에게 임신을 시키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택했소."

클레어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 않겠다고 했겠죠?"

트레벨리언의 눈이 반짝거렸다.

"다음날 아침 우리 출발이 한 시간 가량이나 지연되었소."

한참이 지나서야 클레어는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퍼부으려다가 다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세 시 쯤이 되자 그들은 여관 앞에 마차를 세웠고 트레벨리언이 방 두 개를 빌렸다.

"잭 포웰의 집이 있는 에든버러 근처까지 왔소. 자정까지 잠을 자 둡시다."

포웰의 집에 갈 때 그녀를 깨워 함께 데려가겠다는 트레벨리언의 약속을 받아 낼 때까지 클레어는 한사코 잠자리로 가려 하지 않았다. 그의 약속을 받아 내고 나서야 방으로 갔지만, 클레어는 너무 피곤해서 거의 옷도 갈아입지 못할 지경이었다. 가까스로 나이트가운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고 나서 쓰러지다시피 침대에 누웠다. 너무 지쳐서 이불조차 제대로 덮지 못했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밖은 아직 어두웠다. 밝은 램프가 방안을 밝히고 있어 그녀는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맞은 편 구석에 놓인 의자에는 트레벨리언이 앉아 있고, 그의 손에는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 매달린 고리에는 버슬이 걸려 있었다.

클레어는 다시 눈을 비볐다. 트레벨리언이 그녀의 버슬을 그리고 있는 중이었다.

"잘 잤소?"

고개를 숙인 채로 트레벨리언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거죠?"

클레어는 이불을 제치고 침대에서 내려와 낚아채듯 버슬을 끌어 내렸다.

"재미있는 물건이오. 그것 말이오. 아프리카에도 그와 같은 걸 입는 종족들이 있소. 하지만 거기서는 풀을 엮어 만들지. 끈이 아니라 일종의 바구니처럼 생겼소. 물론 필요한 경우에는 그걸로 물을 져 나르기도 하지. 하지만 실제 용도는 도저히 알아내지 못했소."

"난 당신의 연구 대상이 아니에요."

곁에 선 클레어의 눈이 이글거렸다.

트레벨리언은 나이트가운을 입은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속옷보다는 난 당신을 더 연구했으면 싶소."

그리고는 음흉한 눈초리로 침대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포웰의 집을 방문하는 걸 몇 시간 늦출 수도 있소. 늦추고 늦추고 또 늦추고."

클레어가 뒷걸음질을 쳤다.

"이런 한밤중에 숙녀 방에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는 법은 없어요. 노크를 했어야죠. 그리고……."

더 이상 듣고 있고 싶지 않았는지 그가 말을 잘랐다.

"준비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소? 그리고 저런 건 입지 마시오."

그는 고개 짓으로 버슬을 가리켰다.

"십중팔구 창문을 넘어 들어가야 하지 싶은데, 걸리적거릴 거요."

"버슬은 꼭 입어야 해요. 내 드레스는 버슬에 맞춰 길이를 재단한 거예요. 그게 없으면 드레스가 잘 맞지 않을 거고, 뒷자락이 바닥에 끌릴 거예요."

트레벨리언이 차가운 눈총을 보냈다.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입지 말라고 했잖소."

그리고는 걸음을 돌려 방을 나갔다.

삼십 분이 지나고 나서 클레어가 암록색 산책 의상을 입고 아래층에 나타났다. 허리 뒤에 버슬을 입은 채로. 뿐만 아니라 싸워 봐야 그녀가 이길 게 뻔하겠지만 얼마든지 싸울 채비가 끝났다고 말하는 듯한 도전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가 얘기를 꺼내려는 듯이 입을 들썩이며 트레벨리언은 고기 파이 하나를 떼밀 듯이 그녀의 손에 건넸다.

"당신이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누굴 원망하거나 하진 마시오. 갑시다."

그를 멈춰 세운 다음, 클레어는 여관 주인의 큰아들에게 어딘가로 꾸러미를 배달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트레벨리언은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고, 그녀도 애써 스스로 얘기하지 않았다. 밝은 적색 대문이 있는 포웰의 집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담하고 예쁜 도시형 주택이었다.

"이제 이 집에 정말로 몰래 잠입하는 건가요?"

클레어가 속삭였다.

"그렇소. 싫으면 여기서 기다려도 좋소."

트레벨리언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클레어는 싫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깊은 숨을 들이 쉰 다음, 트레벨리언을 따라 집 뒤쪽으로 돌아갔다.

"얼레?"

일단 두 사람이 집 뒤편에서 대기하는 동안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죠?"

"오만이 신호를 보낼 거요."

클레어는 입을 꼬옥 다물고 아담하게 생긴 포치의 한켠에 앉아 있었다. 채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굉음이 들려왔다. 거의 혼이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집 앞쪽의 큰 길에서 대포 터지는 소리가 났던 것이다.

"지금이오!"

굉음 사이로 트레벨리언이 소리를 지르며 창문 가까이로 바윗돌을 내려놓았다. 클레어가 미처 상황을 파악할 여유도 없이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번쩍 들어올려 창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발버둥을 치며 열린 창문으로 몸을 밀어 넣으려 했지만, 버슬이 창문의 가로대에 걸렸다. 감히 트레벨리언을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뒤로 약간 물러나며 팔을 뒤로 뻗어 버슬을 조금 밀어 올리자, 등으로 내려앉았다. 납작해진 버슬을 그대로 등에 업고서 클레어는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가자 어느새 트레벨리언이 뒤따라 들어와 그녀 곁에 섰다. 부엌 뒤에 딸린 골방이었다. 바깥 도로에서는 왁자지껄 소음이 들려왔다. 하인이지 싶은 사람들이 두 사람 근처에서 우왕좌왕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는 클레어의 손을 잡고 어두운 방안을 지나 성큼성큼 계단으로 향했다. 전에도 이 집을 왔던 적이 있어 내부 구조를 잘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일단 계단을 오르자, 두 사람은 들키지 않도록 두 차례나 문간에 바짝 엎드려야 했다. 클레어는 잠옷 위로 실내복 가운을 걸쳐 입으며 황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포웰의 모습을 보았다. 예전에 몇 차례 사진으로 보았음인지 금세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거리에서 소음이 계속되는 동안 트레벨리언은 클레어를 이끌고 위층 복도를 걸어 내려가, 중앙 홀의 맨 끝에 있는 문 앞에 도착했다. 잠겨 있었다. 그는 지체없이 발을 들어 육중한 문을 걷어찼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두 사람은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널찍한 방안에는 수백 가지 파스텔 색조의 투명한 실크가 걸려 있었다. 백단향 냄새와 자스민 향이 풍겨왔다.

트레벨리언은 방안의 풍경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으나, 클레어는 문가에 서서 입을 딱 벌렸다. 바닥에는 값비싼 수직 실크가 겹으로 깔려 있고, 천정에서 길게 늘어진 휘장 너머로는 실크 커버를 씌운 방석이 쌓여 있었다.

트레벨리언은 투명한 커튼을 옆으로 제치고 방안으로 들어갔고, 클레어는 그의 등 뒤로 바짝 붙어 섰다. 갑자기 앞에서 그가 멈춰 서자 클레어는 그의 등에 몸을 부딪쳤다. 트레벨리언의 좌우로 고개를 내밀며 무엇 때문에 그가 멈춰 섰는지를 살폈다.

그의 앞에는 제단 앞의 두툼한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양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재론의 여지 없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물주의 창조물이었다. 클레어가 본 것은 겨우 옆모습에 불과했지만, 아담한 얼굴과 그 완벽함은 놀라울 정도였다. 길고 짙은 눈썹이 벌꿀 색 볼 위에서 멈춰 있고, 조그맣고 예쁜 코는 마치 조각 같은 입술을 향해 내려가며 완벽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클레어는 그의 등 뒤에서 걸어 나와 여자를 쳐다보았다. 아주 작은 키였다. 클레어보다 작았다. 몸에 걸친 얇은 실크 가운은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곡선을 전혀 감추지 못했다. 너무도 고요한 모습에 클레어는 그녀가 정말로 살아 있는지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도로에서는 폭발음에 뒤이어 비명 소리가 들려왔고, 바깥의 소음으로 인해 클레어는 현실로 돌아왔다.

"가야 해요."

그녀가 재촉하듯이 소곤거렸지만, 그는 가만히 서서 여자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가 여자에게 말을 건넬 움직임이 없길래 클레어는 여자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직접 얘기를 꺼내려고 했으나, 트레벨리언이 손을 잡으며 그녀를 제지했다.

"기도하는 중이오."

그가 말했다.

다시 몇 초를 기렸지만, 몇 초가 몇 분으로 변했다. 두 사람이 잭 포웰의 집에 있다가 잡히면 감옥 구경을 하게 될까? 아니면 포웰은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을 쏴 버리는 쪽을 선택할까, 클레어는 생각했다.

지루하도록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트레벨리언에게 눈을 돌렸다. 스치 듯이 잠깐 여자를 보았을 뿐이었지만, 클레어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숨이 막혔다. 완벽한 계란형의 얼굴에 완벽한 아몬드 모양의 눈, 완벽한 코, 완벽한 입. 순간적으로 클레어는 미움이 치밀어 올랐다.

다음 순간 그녀의 미움이 한층 깊어졌다. 조물주가 꿀을 녹여 성대에 부으면 이런 목소리가 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프랭크!"

여자는 트레벨리언의 품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의 앙증스런 작은 발이, 보석을 장식한 슬리퍼를 신은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자마자 그가 여자를 온통 감싸 안았다. 여자는 그에게 키스를 했다. 연가 같은 부드럽고 질펀한 느낌의 언어로 쉬지 않고 속삭이며, 그의 볼에, 그의 목에, 닿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키스를 퍼부었다.

"가야 해요."

클레어가 다시 말했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이 키스 세례를 피하려고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보지 못한 듯 싶었다. 더구나 그가 여자의 키스보다 클레어의 반응에 훨씬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그녀의 얘기에 반응이 없어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의 옆구리를 찔러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클레어의 생각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 대신 클레어는 그의 장딴지를 걷어차며 동시에 앞가슴을 내갈겼다.

그가 신음소리를 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요?"

그가 묻는 동안에도 여자는 여전히 그의 목에 키스를 하고 있었다.

"돌아가야 한다구요."

클레어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트레벨리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여자에게 뭔가를 얘기했다. 페샤어로.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키스를 멈추지 않고 목의 바로 윗부분까지 올라갔다.

"트레벨리언! 가야 한다니까요."

클레어가 소리를 질렀다.

트레벨리언은 그녀의 말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미소를 지으며 니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자가 방안에서 클레어의 존재를 인식한 것은 바로 그때였던 듯 싶었다.

니사는 뒷걸음질을 치며 클레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니, 단지 쳐다보는 정도를 넘어 곰곰이 연구를 했다. 니사의 시선이 클레어의 발을 향했다가 천천히 머리로 옮아갔다.

클레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지만, 눈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니사는 클레어의 주변을 돌다가 등 뒤에서 잠시 멈춰 섰다. 트레벨리언에게 뭔가를 얘기하자 트레베리언이 대답을 했다.

"저 여자가 뭐라고 했죠?"

클레어가 물었다.

"니사는 당신 등에 낙타처럼 혹이 달려 있다고 말했소. 난 당신이 등 뒤를 부풀려 보이려고 패드 같은 걸 입었다고 했소. 그리고 내가 생각할 땐, 당신이 낙타처럼 보이려고 그렇게 한 건 아닐 거라는 얘기도 덧붙였고."

클레어는 그를 노려보았다.

니사는 클레어의 앞쪽으로 걸어왔다가는 다시 트레벨리언의 곁으로 걸어가 뭔가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뭐라고 그러는 거예요?"

클레어가 물었다.

"글쎄, 제대로 통역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니사는 당신 엉덩이가 암소 엉덩이처럼 크고, 피부는 개구리 아랫배 색깔 같다고 했소. 아니 도마뱀인가, 가끔 페샤 말이 너무 어렵단 말이야. 어쨌든 가슴이 산처럼 크다고 하고 말이오. 십중팔구 가슴은 진짜일 거라고 했소. 등 뒤의 혹도 가짜가 아닐 거라고 했고 말이오. 그리고 눈은 너무 둥글고 너무 크고, 너무 잘 속게 생겼고……."

"그럼 저 여자에게 이렇게 얘기하세요. 내 가슴은 터럭 하나까지 진짜라고. 그리고 내가 보기에 저 여잔 가슴은 남자 아이처럼 절벽이라고 말이에요."

"?"

트레벨리언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패드를 전혀 안 했단 말이오?"

클레어가 그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나가실까요? 저 여자를…… 저 여잘 데리고 말이에요."

"저 여자를 데려가서 어쩌려고?"

트레벨리언이 물었다. 상황을 매우 즐기는 눈치가 역력했다.

"커브를 돌 때 마차 밖으로 던져 버리게?"

트레벨리언이 미소를 지었다.

"마차 바퀴 아래 묶을까 고민 중이에요. 저 여자 같은 절벽 가슴이면 거의 덜컹거리지도 않을 거예요."

트레벨리언이 웃음을 터뜨리자 니사가 그에게 뭔가를 얘기했다.

"니사는 당신에게 자기 짐을 꾸려 달라고 했소. 포웰이 시녀를 붙여주지 않았으므로 당신이 시녀 노릇을 해도 좋다고 했소."

"저 여자가? 너무나 황송해서 도저히 승낙하지 못하겠다고 통역해 주세요. 나처럼 평범한 인간이 '달의 진주'님 같은 분의 짐을 감히 어떻게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수 있겠느냐고 말이에요."

트레벨리언이 웃으며 니사에게 뭔가를 소곤거렸다. 여자가 페샤어로 무슨 얘기를 하자, 트레베리언이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저었다. 그가 얘기를 시작하자 니사가 대답했다. 트레벨리언이 뭔가를 다시 얘기했다. 니사가 발을 굴렀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예요?"

트레벨리언은 니사에게 얘기를 계속했고, 클레어의 질문에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컵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거요."

마침내 그가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난 그 망할 놈의 컵을 찾으러 가고 싶지 않고."

"무슨 컵을 말이에요?"

트레벨리언이 무슨 얘기를 시작했지만, 니사는 얼굴을 손에 묻고 호소하는 눈빛으로 간절히 그를 쳐다보았다. 클레어는 다정한 표정으로 바뀌는 트레벨리언의 얼굴을 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전에는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클레어를 돌아보았다.

"금으로 만든 컵이오. 보석이 박혀 있고. 페샤에서 가지고 나온 건데, 그게 없으면 함께 가지 않겠다는 거요."

"어디에 있는데요?"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래층 옷장에 있을 거요."

'하찮은 것'이라는 말이 클레어의 혀끝에서 맴돌았다. 스스로를 '달의 진주'라고 부르는 여자는 컵이 없이는 가지 않겠다고 하고, 트레벨리언은 컵을 찾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여자를 버려두고 갈 밖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너무 좋지 않은 결론이었다. 클레어는 여자를 마차에 태우고 한시바삐 출발했으면 하고 진작부터 간절히 바랐다. 설령 그 사람이 모욕과 학대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트레벨리언은 그녀의 표정을 읽었다.

"잭은 니사를 죄수처럼 이 방에 감금시켰소. 방을 나가지도, 심지어 공원 산책도 못 하게 했소. 저 여잔 몇 주 동안 햇빛 구경을 못 했소. 잭은 저 여자를 마치 동물원 원숭이처럼 전시라도 시킬 계획이었던 모양이오."

클레어는 니사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키가 얼추 비슷했고, 대략 나이도 비슷했다. 하지만 생김새는 판이하게 달랐다. 클레어는 강인하고 건강한 미국인이었으며, 잘생기고, 핑크빛 피부와 모래시계 같은 몸매를 가진 여자였다. 반면 니사는 이국적인 얼굴 생김에 검은 피부, 작고 섬세한 몸매를 가졌다.

니사가 트레벨리언 곁에 다가서며 몸을 기대자, 그는 니사를 보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좋아요. 억지로라도 데려가죠."

클레어가 말했다.

트레벨리언이 고개를 돌려 니사에게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얘기했다. 새까만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며 니사는 팔짱을 끼고 제단 앞에 놓인 방석에 주저앉아 버렸다. 트레벨리언은 얘기를 하며 허리를 구부려 여자를 들어올렸다. 니사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트레벨리언이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녀는 그의 손바닥을 물어뜯어 트레벨리언은 거의 그녀를 바닥의 방석에 떨어뜨리듯이 내려놓았다.

"내가 저 여자 컵을 갖다 주겠어요."

클레어가 이렇게 말하며 문을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트레벨리언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어디 있는지는 내가 알고 있소."

그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저 여자와 함께 있으시오. 짐을 좀 챙겨 주고 말이오. 내가 돌아오면 출발합시다."

그는 니사와 함께 클레어를 실크가 주렁주렁 드리워진 방안에 혼자 남겨 두었다. 그녀는 니사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방석에 앉아 생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치아까지도 완벽했다. 이런 여자가 검고 썩은 치아를 갖고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물론 무리라고 생각했다. 클레어는 그녀의 미소를 무시해 버렸다.

"뭐든 가져갈 게 있으면 직접 챙기는 게 좋을 거예요. 내 것은 무슨 옷이든 당신에겐 안 맞을 테니깐. 당신은 튀어나온 데를 채울 수 없잖아요?"

이렇게 말하며 클레어는 니사의 작은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니사가 다시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쪽 벽에 기대고 서 있는 돋을새김 된 금박 수납장으로 가서 옷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옷을 아름답게 수놓아진 커다란 가방에 집어넣었다. 옷을 모두 챙기자 제단에 있던 조그마한 신상을 가방에 챙겼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 방석에 앉았다.

여자는 몸동작으로 방석에 앉도록 권했지만 클레어는 반대쪽을 향해 걸어갔다. 누군가에게서 '네 피부는 개구리 아랫배와 같다'는 말을 들었다면, 그 사람 곁에서 앉아 편안한 기분을 갖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클레어는 방안을 서성거리며 이것저것 실크를 쳐다보았다. 거리를 내다볼 수 있겠지 싶어 실크를 옆으로 제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창문에는 두터운 창살이 설치되어, 보이느니 옆집 건물의 벽뿐이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흐른 느낌이었다. 트레벨리언이 방으로 돌아와서는 전면에 루비가 세팅된 금제 컵을 코트 아래서 꺼내 놓았다. 썩 아름다운 컵은 아니었다. 예술적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 가치가 있지 싶었다.

클레어는 컵을 넘겨받아 촛불에 비춰 보았다. 세팅된 루비 가운데 일부는 현대식으로 세공되어 있었지만, 원석 덩어리 그대로인 것도 있었다. 보석을 컵에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테두리 장식은 한결같이 조잡하고 기형적이었다.

"그렇게 예쁜 건 아니죠, 안 그래요?"

클레어가 말했다.

니사는 클레어의 발치까지 걸어와 컵을 낚아채며 미국인 여자를 성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나가실까요, 숙녀 분들? 당신들 두 사람이 서로 주먹다짐이라도 하기 전에 말이오. 오만도 사람들을 더 이상은 거리에 붙잡아 두기 힘들 거요."

트레벨리언이 말했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을 뒤따라 방을 나섰다. 하지만 뒤에서 니사가 등을 만지작거리는 통에 트레벨리언과 바짝 달라붙게 되었다. 그녀는 니사에게 주의를 주려고 했다. 하지만 트레벨리언이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두 여자는 트레벨리언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벌써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사람들 눈을 피하기 위해 두 차례나 몸을 숨겼다. 바깥 거리는 조용했다. 건물 뒤편에서 트레벨리언은 자물쇠를 풀어 문을 연 다음 두 여자를 내보냈다. 클레어가 앞을 지나치자 그가 속삭였다.

"이번엔 낙타등이 문에 끼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소."

클레어는 구태여 응수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몇 차례 굴곡진 거리를 지나 오만에게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는 마차 꼭대기에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불장난에 사용한 화약이 남긴 흔적인 듯, 항상 입고 다니던 순백색의 옷은 찢기어 더러워져 있었고 뺨에는 생채기가 나 있었다. 니사는 오만을 아는 척하며 대단히 즐거워했고, 그녀가 뭔가를 얘기하자 오만도 미소를 지었다.

세 사람이 재빨리 마차에 올라타자 오만은 말잔등 위로 채찍을 날려 마차를 출발시켰다. 니사가 트레벨리언의 곁에, 클레어는 두 사람의 맞은 편에 앉았다.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클레어는 자신이 화가 났음을, 그것도 대단히 화가 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차 벽에 몸을 기대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스스로 트레벨리언과 여자가 무슨 짓을 하는 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무수히 되뇌었지만, 사실은 두 사람의 말 한마디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클레어는 두 사람이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아니겠는가. 저 여자가 목숨을 구해 준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말이다.

"마차를 세우고 잠을 자고 갈 거요, 아니면 계속 갔으면 좋겠소?"

트레벨리언이 물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클레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너스레를 떨었다.

"내게 물은 거예요? 아마 내가 여기 없지 싶었는데……, 내가 무슨 투명 인간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내가 의자 밑으로 꺼져 버린 건 아닌가 했는데 말이에요."

"니사가 잠들었소."

"이유가 바로 그거였군요."

클레어가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얘기할 사람이 없었던 거로군요. 하지만 저 여자와도 할 얘기는 벌써 바닥났지 싶은데요. 다른 건 몰라도 페샤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랫동안 함께 여행을 했을 테고, 그동안 같이 있을 시간이 대단히 많았잖아요, 안 그래요?"

"니사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 사람이오."

트레벨리언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했던 일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여자는 흔치 않소. 당신 같지 않다는 거요."

클레어가 느끼고 있던 상처가 약간은 위로되는 기분이었다.

"의외로군요. 저 여잔 당신에게 아주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아마 침대에서 뿐이지, 다른 데서는 아닐 거요. 평생을 살면서 난 사람들이 대부분 배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소. 알고 싶어 하고 아는 걸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만, 당신과는 다르게 배움의 과정을 좋아하지는 않소."

"침대에서 말이죠?"

클레어가 소곤거렸다.

"맙소사. 이봐요 아가씨, 난 당신에게 평생의 칭찬을 하고 있는데 질투로 응수하는 게 고작이오?"

"칭찬이라고요?"

클레어가 모욕적인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무슨 칭찬이오? 저 여자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 말인가요?"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을 볼 수 있었다. 타오르고 있었다.

"삐진 이유가 그거요?"

클레어는 고개를 돌리며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두 눈을 감았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하건 나와는 상관이 없어요. 우리가 계획했던 일을 성공한 걸로 난 만족해요. 잭 포웰은 자기가 페샤에 갔다는 증거를 제출할 수 없을 거예요. 아마 당신은 당신의…… 당신 정부에게 영어를 가르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저 여잔 왕립 지리학회에 가서, 어떻게 당신이 페샤와 포웰에게서 그녀를 구했는지 얘기할 수 있을 거예요. 이제 괜찮으시다면, 난 잠을 자겠어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감고는 있었지만, 맞은 편 의자에는 트레벨리언과 여자가 서로 바짝 다가앉아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클레어는 그 분노의 깊이에 스스로도 어리둥절했지만, 두 사람의 행동이 보기에 민망한 때문이라고 자신에게 애써 변명을 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럴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서로 심각한 사이이기 때문이라고.

 

동이 트자 그들은 마차를 세워 식사를 하고 말을 바꾸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출발했다. 니사는 잠에서 깨자 마치 아이처럼 생기에 넘치며 잠시도 가만있지 못했다. 여자와 트레벨리언은 심심풀이로 손장난 게임을 했다. 트레벨리언은 클레어에게 규칙을 배워서 함께 게임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클레어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클레어는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서로 히히덕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이 얼마나 편안하게 서로의 길동무가 되고 있는지를 지켜보았다.

어느 순간, 니사는 클레어를 쳐다보며 트레벨리언에게 뭔가를 얘기했다. 트레벨리언이 클레어를 돌아보았다.

"니사는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으면 당신이 늙어 보이고, 성미도 고약해 보이기 십상이라고 말했소. 그러면 늙기도 전에 주름살이 생길 거라고 하오."

"찡그리고 있는 게 아니에요. 단지 난……."

클레어는 왠지 적당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니사가 다시 트레벨리언에게 뭔가를 얘기했다.

"당신이 니사를 너무 질투하고 있다고 하는군."

"기가 막히는군. 질투를 한다면 왜 따라왔겠어요? 내가 고집을 피워서 당신과 같이 왔다는 얘길 해 줬어요? 그리고 당신은 따라오는 걸 원치 않았다는 얘기는요?"

"벌써 많은 얘기를 했소. 당신과 해리가 날을 받아 놓은 상태라는 것, 당신 가족 얘기, 당신의 귀여운 동생 얘기 따위 말이오."

"제대로 얘길 했는지 도무지 의심스럽군요. 내 동생이 저 여자보다 예쁘다는 얘기도 했어요?"

트레벨리언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오,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소. 니사가 믿지 않을 것 같아서."

"저 여잔 허영 덩어리예요, 그렇지 않아요? 허영기에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고. 그 유치한 손장난 놀이를 보면 말이에요. 글은 읽을 줄 알아요?"

"나도 모르겠소."

클레어는 만족스러운 듯이 코방귀를 뀌고 고개를 돌렸다. 다시는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들이 브램레이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한 시 경이었다. 클레어는 곧바로 침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래트가 자신의 부재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드는 데 문제는 없었는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오만의 도움을 받아 마차를 내리며, 어둠 속에 트레벨리언과 니사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두 사람이 어둠 속에서 찰싹 붙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이 함께 있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클레어는 두 사람이 보니 프린스 찰리의 침대에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배고파요."

클레어가 선언을 하듯이 말했다.

"완전히 아사 직전이에요. 늦은 시간이라는 건 알지만, 오만, 탑에 음식 남은 게 있겠어요? 뭔가를 먹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눈을 마주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음식이 있다고 오만이 고개를 끄덕이자, 클레어는 머리를 반듯이 치켜세우고 그를 따라 탑 안으로 들어갔고, 니사와 트레벨리언이 뒤를 따랐다.

일단 트레벨리언의 집무실에 이르자 클레어는 창가의 의자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그를 쳐다보고 싶지 않았으며, 자신의 생각을 들켰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클레어는 여자가 연신 트레벨리언에게 키스를 해 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만이 식어 버린 음식을 침실로 가지고 들어왔다. 클레어는 니사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트레벨리언은 전혀 의외다 싶었지만, 의자를 당겨 클레어 곁에 앉았다. 아마 트레벨리언은 그렇게 해서 그녀가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니사를 쳐다보고 싶은 모양이라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그녀는 접시 위에 고개를 처박았다.

니사가 페샤어로 트레벨리언에게 뭔가를 얘기했다.

"당신이 숫처녀인지 니사가 묻는군."

트레벨리언이 말했다.

클레어가 고개를 쳐들었다.

"쓸데없는 일에 상관 말라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선 그런 걸 묻는 게 실례라는 얘기도요."

니사가 얘기를 했다.

"자기 나라에서도 그런 걸 묻는 건 실례지만, 자기는 '달의 진주'이기 때문에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 말했소. 그녀가 묻는 건……."

트레벨리언이 말을 중단하고 니사에게 뭔가를 얘기했다. 몇 분이 지나도록 두 사람의 대화가 계속되었다. 오만이 음식을 내왔다. 그녀가 오만을 힐끗 쳐다보자 그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에 대해 뭐라고 했나요?"

그녀가 물었다.

"별 얘기 아니오."

트레벨리언이 대답했다.

"사실대로 말하세요. 저 여자가 한 얘기를 그대로 내게 해 달란 말이에요."

트레벨리언은 니사와 클레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니사 말로는 표정으로 보아 당신이 처녀일 거라고 했소. 당신이, 당신이 아마……."

"아마, 뭐요?"

"아무것도 아니오."

트레벨리언은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입에 음식을 가득 쑤셔 넣었다.

"나도 알아야겠어요!"

클레어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벌써 여러 시간 동안 두 사람이 자기들끼리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봐 왔고, 매순간마다 노여움이 일었다. 지치고 피곤해서 생각도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저 여자가 뭐라고 말했는지 얘기하세요.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비밀 얘기를 알아서는 안 되는 애가 아니라고요."

클레어는 니사를 쳐다보았다. 속이 환히 비치는 겉옷을 입고 그곳에 앉아 있는 그녀의 조그맣고 섬세한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클레어는 미친 듯이 화가 나 있었고, 대부분은 그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반() 창녀 같은 여자가 나를, 이 클레어 윌로비를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로 취급할 수 있을까?

"내가 숫처녀가 아니라고 얘기하세요. 그리고 애인이 아주 여럿 있다는 얘기도 하고요."

"그런 얘기는 하지 않겠소."

트레벨리언이 놀란 듯이 대답했다.

그녀는 그를 쏘아보았다.

"순진한 척하려고 그러는 건가요? 당신이? 당신은 하룻밤에 그 스물다섯 명의 여자와 함께 자지 않았나요? 이제 와 새삼스레 거짓말 하나 덧붙이는 게 주저스럽단 말인가요? 하룻밤에도 난 한 다스나 되는 남자와 잔다고 얘기하란 말이에요!"

트레벨리언의 눈이 반짝였다.

"그건 너무 많소."

", 그런가요?"

클레어가 표정을 구겼다.

"어느 정도면 저 여자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겠어요?"

"밤새도록 깨어 있을 수 있는 남자 한 사람."

"겨우 한 사람?"

순간 트레벨리언이 웃음을 터뜨렸다.

"잘난 녀석 하나 말이오."

"좋아요. 그럼 저 여자에게 그렇게 얘기하세요. 내가 세계 최강의 남자를 거느리고 있다고 말하세요."

"그럼 그 사람이 누가 될 것 같소? 해리?"

"여기서 해리 얘긴 꺼내지 마세요."

클레어는 니사에게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조차 까먹어 버렸음을 깨닫고는 다시 음식 접시를 쳐다보았다.

"당신과 내가 며칠 동안 함께 황홀한 밤을 보냈다고 얘기하겠소."

트레벨리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겪었던 여자들 가운데 당신이 가장 만족스러웠다고 얘기를 하겠소."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눈길에서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날 위해 그런 소릴 하겠다는 건가요?"

그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럽고 가장 달콤한 미소를 클레어에게 보냈고, 그녀도 트레벨리언에게 미소로 답했다.

"고맙군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충동적으로 고개를 돌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의 뺨에 키스를 하려고 했다. 그녀는 단지 오른쪽 뺨에 난 상처에, 어느 때인가 그에게 대단한 고통을 안겨 주었을 그곳에 키스를 하려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움직이자, 아니면 그녀 자신이 고개를 움직였을 수도 있겠지만, 클레어는 뺨 대신 그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게 되었다.

입술이 그에게 닿자 마치 벼락에 맞은 듯이 전기 충격이 온몸을 관통하는 느낌이 들어, 클레어는 이내 뒤로 물러서며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겁에 질린 눈으로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트레벨리언의 얼굴에는 공포 따위의 표정이 없었다. 다만 놀라는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얼굴에서 신중한 표정이 사라지며, 그녀처럼 충격을 받는 모습을 보인 건 단지 촌각에 불과한 동안이었다.

이제 니사의 콧대를 눌러 주기 위한 거짓말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녀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야겠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거의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오만, 터널을 통해 내 방까지 안내를 해 주겠어요?"

클레어는 분주하게 스커트를 만지작거렸다. 트레벨리언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태세였다.

"터널로 갈 필요 없소. 내가 하인들 출입구로 데려다 주겠소."

트레벨리언이 뒤에서 말했다. 마치 이를 악물고 있는 듯한, 어쩔 수 없이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클레어는 싫은 내색을 하려고 했으나 말문이 막혀 버렸는지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뒤를 따라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이미 여러 차례 그녀는 트레벨리언의 곁에서, 뒤에서, 앞에서 걸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주변의 공기가 대전되어 그녀가 마치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공기에서나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탑의 맨 아래층에 도착하자 그가 클레어에게 문을 열어 주었고, 두 사람은 서늘한 달빛 아래로 걸어 나갔다.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고는 팔을 문지르기 시작하면서, 클레어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트레벨리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마치 두 개의 석탄 같았다. 그녀를 쳐다보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석탄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트레벨리언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트레벨리언의 뒤를 따라 건물의 옆벽을 타고 걸었다. 걷는 동안 트레벨리언을 쳐다보았다. 여위었지만 늘씬한 체격, 넓다란 어깨, 걸을 때마다 엉덩이가 움직이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한때는 트레벨리언이 너무 마르고 늙고 병약하다고 생각했다. '준수하다'는 단어에 값하는 해리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선 아무런, 전혀 아무런 결점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순간 그는 클레어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었다.

집 뒤편에 이르자 돌연히 그가 멈춰 서며 클레어를 돌아보았다.

"이 문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첫 번째 출입구를 통과하시오. 거기 좁은 계단이 있을 테고, 그게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이오. 거기서부터는 당신 침실을 찾아갈 수 있을 거요."

그녀가 트레벨리언을 올려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돌아섰다.

"트레벨리언."

클레어가 그를 불렀다.

트레벨리언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돌아보기는 했지만, 단 한 걸음도 다가서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일 미터 정도의 공간이 있었지만, 클레어는 아무런 거리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가 가까이 있음을, 그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거기서 있었던 일. 그러니까 니사와 함께 있으면서 말이에요.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데."

예전에는 트레벨리언의 그런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떨림이 온몸에 와 닿는 느낌이었다. 클레어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방에서 있었던 일과 지금 자기 느낌에 대해 명확히 해두고 싶었다.

"…… 키스 말이에요. 아시겠지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단지 니사가 내 성미를 건드렸기 때문이었어요. 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취급하는 그 여자의 태도가 너무 맘에 들지 않아서였어요."

트레벨리언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쳐다보며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뭐든 내게 할 말 없어요?"

약간 신경질적으로 그녀가 물었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이제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밤 잘 보내세요."

그녀가 다시 말했다.

트레벨리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발길을 돌려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게 잘못인 줄은 알고 있었다. 더는 한마디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다고 그렇게 혼자서 되뇌었다. 하지만 클레어의 귀에는 자신의 속삭임 소리가 들려왔다.

"벨리."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속삭임이었다. 너무나 작고 너무 희미해서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 소리에도 완전히 묻혀 버릴 만큼.

하지만 트레벨리언은 그 속삭임을 들었다. 순간 그렇게 멀리 있어 보이던 그가 어느새 그녀의 팔에 안겨 있었다. 트레벨리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욕정이라고 생각했다. 클레어는 일곱 가지의 치명적인 죄악 가운데 하나라고 들어 왔지만, 예전에는 한 번도 그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트레벨리언의 입술이 지금 그녀의 입술을 덮고 있었고, 그녀 자신도 정신없이 트레벨리언 안으로 파고들고 싶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혀에 닿았던 그의 혀의 부드러운 감촉이 전달되어 왔다.

허리를 휘며 그에게 몸을 밀착하자, 드레스 안에 있는 가슴에서 아픔이 느껴졌다. 풍만한 가슴이 트레벨리언의 단단한 가슴팍에 짓눌리는 데서 오는 아픔이었다. 그가 한쪽 다리를 움직여 클레어의 허벅지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양 허벅지로 그의 육중한 넓적다리를 단단히 조이며 신음을 토해 냈다. 저리도록 그를 만지고 싶은 욕망에 클레어는 손끝이 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온 생애를 걸쳐, 그를 만질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이라는, 이 밤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서 떠올랐다. 앞으로 결코 다시는 트레벨리언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없으리라. 자신을 한 번은 용서할 수 있겠지만, 결코 두 번은 안 될 터이므로. 그래서 클레어는 이 순간에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고 싶었다. 가능한 대로 최대한 그를 느끼고 싶었다.

그녀의 손이 트레벨리언의 등을 거슬러 올라갔다. 어떻게 이 사람을 마르고 늙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손바닥을 펴서 그의 팔을 미끄러져 올라가며 단단한 근육을 느꼈다. 그리고는 그의 가슴과 허리로 되돌아왔다. 계속해서 그녀의 손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신이여 도와주소서! 안 되는 줄 알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손은 트레벨리언의 엉덩이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다.

다음 순간 클레어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만."

그녀가 속삭였다.

"제발 멈춰요. 더 이상은 참기가 힘들어요."

곧바로 트레벨리언이 뒤로 물러났고, 잠시 두 사람은 아무 데도 접촉하는 데가 없이 서로 떨어져 섰다. 하지만 눈은 서로의 시선을, 그 속에 담긴 마음을 읽고 있었다.

클레어는 그가 자신의 초대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단지 손만 내밀면 다가올 것을. 하지만 다시 그를 만진다면 더 이상은 멈출 수 없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귓가에서는 가슴이 천둥소리처럼 두방망이질 쳤고, 숨은 경련하듯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손을 붙들어 둘 만큼의 자제력은 갖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그는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등 뒤에서 그를 부르지 않았다. 클레어는 천천히 후들거리는 다리를 들어 계단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방에는 브래트가 그녀의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팔을 내밀어 아이를 깨우려다 그만두었다. 동생의 인생은 그녀에게, 클레어에게 달려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느낌이 새로웠다.

클레어는 화장대 곁의 의자에 앉아 덩그마한 방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공작의 집이고, 결혼을 약속한 남자의 집이었지만, 그녀는 방금 전까지도 다른 남자와 키스를 하고 있었다. 키스를 했고, 그를 원했다. 진심으로, 간절히…….

내면의 욕망에 굴복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 해리를 잃어버리게 되겠지. 그녀의 부모는 트레벨리언 같은 남자와는 결코 결혼을 승낙하지 않을 게 뻔했고, 클레어는 할아버지가 남겨 준 유산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될까? 틀림없이 그녀의 부모는 이 년도 못 되어 거의 천만 달러나 되는 그녀의 돈을 모조리 써 버릴 것이다.

클레어는 불효라는 느낌이 들자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부모는 그녀를 잘 키워 주었고, 그녀는 부모에게 대단히 큰 빚을 졌다. 하지만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해리와 결혼을 한다면 돈이 그녀에게 올 것이고, 그녀가 그 돈을 관리할 수 있게 된다. 돈을 투자하여 불어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으며, 일부를 떼내 부모에게 줄 수도 있다. 물론 욕구를 자제하는 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그리고 동생을 위해선 지참금을 예비해 둘 수 있게 된다. 사라 앤이 착하고 안정적인 남자와 결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으리라. 해리 같은, 그림과 말을 사들이는 남자 말이다. 하지만…….

클레어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미 다른 남자와 키스를 했고 그에게 욕정을 느낌으로써, 이젠 사랑하는 남자와 모두를 배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야?"

브래트가 클레어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아무것도 아냐."

눈물을 닦으며 클레어가 말했다.

"그냥 피곤해서 그런 가봐. 이제 네 방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사라 앤은 움직이지 않았다.

"트레벨리언 때문이지, 맞지?"

"물론, 그렇지 않아. 내가 왜 트레벨리언 때문에 눈물을 흘리겠니? 그냥 좀 피곤한 것뿐이야. 혼자 있고 싶어."

클레어는 계속해서 눈물을 찍어내며, 사라 앤이 떠날 때까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잠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니사가 거실로 통하는 문에 서서 양팔을 벌리고 그를 맞았지만, 트레벨리언은 그녀를 옆으로 밀어 젖혔다. 그는 벽 쪽에 세워 놓는 곁 테이블로 걸어가 그 위에 놓인 위스키 병을 집어 들었다. 가득 잔을 채운 다음, 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무슨 일 있었어요?"

니사가 영어로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소."

트레벨리언이 그녀에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트레벨리언이 다시 잔을 채워 들이키는 것을 보았다.

"사로잡혔군요."

"뭐에?"

"욕망에 말이에요."

그가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난 느낄 수 있어요. 거의 눈으로 볼 수도 있어요. 당신을 감싸고 있는 것은 욕망이에요. 하지만 날 향한 것은 아니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낭만적인 연애 얘길 너무 많이 들은 모양이군"

트레벨리언은 한때 클레어에 관한 메모가 있었던 탁자로 걸어갔다. 그 위에 지금은 체스판이 놓여 있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하얀 말을 움직였다. 그리고 검은 말도.

"당신에게 엄청난 의미를 가진 여자군요."

"미쳤군. 해리와 결혼할 여자라는 얘기를 했잖소."

니사를 쳐다보는 그의 눈이 달궈지고 있었다.

"난 엄청나게 많은 여자들에 대해 욕망을 갖고 있소. 아마 그녀도 그 가운데 하나일 거요. 그런 여자일 뿐이오."

"그녀에 대한 욕망이라……, 그걸 다른 여자에 대해 느꼈던 욕망과 비교하면 어떻죠?"

그는 흰 말의 여왕을 집어 들었다.

"내가 겪었던 모든 여자, 같이 뒹굴고 싶었던 여자들 전부와 비교한다 해도, 그건 클레어에 대한 욕망에 비하지 못할 거요."

니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그 여자에게 가세요."

니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트레벨리언은 팔꿈치부터 앞으로 내밀어 팔로 체스판을 쓸어버렸다. 장기판의 말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 여자의 정부라도 될까? 그녀의 정부가 되고, 그래서 뒷짐 지고 서서 해리랑 결혼을 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까? 여기 남아서 기다리고 있다가 해리가 떠나면 그녀에게 갈까?"

"전에는 유부녀의 정부가 되는 걸 꺼린 적이 없었잖아요. 어느 집이든 넘나들지 못하는 창문이 없다고 허풍도 떨었고요. 결혼한 여자는 당신과는 기쁨을 나누지만 남편과는 불행을 나누는 법이기 때문에, 유부녀를 좋아한다는 얘길 했던 적도 있구요."

"난 클레어의 불행까지도 함께 하길 원하오."

나지막하게 그가 말했다.

"뭐라구요?"

"그 여자랑 망할 놈에 불행까지도 함께 나누고 싶단 말이오."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그 계집의 모든 걸 원한단 말이오. 그 여잔……."

트레벨리언은 입을 다물었다.

"그 여자가 뭐요?"

"내 고독을 가져가 버렸소. 클레어와 함께 있으면 외롭지가 않소."

트레벨리언은 잠시 니사를 쳐다보더니 내키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

"다른 여자들도 있을 거요. 공작부인이 되는 걸 인생의 목표로 생각하지 않는 여자들 말이오."

니사가 코웃음을 쳤다.

"쉽게 포기를 하시는군요. 그 여잔 아직 해리와 결혼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결혼한 사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군요. 그녀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런 모습은 처음이군요. 난 당신이 수동적으로 뭔가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어요. 뭔가를 추구하는 사람은 항상 당신이었죠. 페샤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을에서 만난 조그맣고 귀여운 여자 기억하세요? 당신은 그 여자를 원했고 그래서 쫓아갔죠. 왜 이 여자는 그렇게 다르죠?"

"이 여자는 특별한 여자요."

"어떻게 다르죠?"

니사는 가만히 서서 트레벨리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트레벨리언과 대단히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터라 꽤나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캡틴 베이커와 포웰의 집에 찾아온 후의 캡틴 베이커는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니사가 알고 있는 캡틴 베이커는 관찰자였다. 끼어 들지 않고, 아무에게도 아무것에도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 관찰자였다. 하지만 미국 여자는 그의 감정을 흔들어 놓았다. 그것도 심각하게.

베이커는 그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니사가 마차 안에서 그의 주의를 흩트러뜨리려고 갖은 짓을 다해도 프랭크의 주의는 온통 클레어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그녀의 남자로서.

"당신은 그 여잘 사랑하는 거예요."

니사가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캡틴 베이커가 그녀를 사랑하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했었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맞아."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맞소, 난 그녀를 사랑하오. 그녀의 정신, 그녀의 육신을 모두 말이오. 그녀의 유머 감각을 사랑하오. 그녀의 사상도 말이오. 그녀의 사고방식, 그녀의 얘기를 사랑하오."

니사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트레벨리언의 모습에서 처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지 못한 무언가를 보았다. 레아트리스와 함께 침대에 올라 부둥켜안고 울곤 했던 어린아이 적의 트레벨리언을 본 것이다.

"누구도, 어느 것도, 내가 그녀만큼 사랑했던 것은 없었소. 대신 그녀가 날 사랑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지 주겠소."

니사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트레벨리언의 눈에서 시선을 돌렸다. 방금 트레벨리언에게 보았던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당신이 해리의 형이라는 얘기도 할 참인가요?"

"할 거요."

그는 선선하게 대답을 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예의 그 신중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니사에게 미소를, 수천 번도 넘게 보아왔던 그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듯한, 그는 자기 지향적인 인간이라고 말하는 듯한, 아무도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듯한 미소였다.

"글쎄, 뭐랄까, 그런 게 인생이오. 모든 사람이 항상 이길 수는 없는 법이오. 카드를 할 거요, 아니면 나와 함께 침대로 갈 거요?"

니사는 웃지 않았다.

"당신은 그 여자에게 가야 해요."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신이 그녈 사랑한다는 걸 보여 줘야 한다구요."

니사는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어야 해요. 그녀가 당신이나 당신 동생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하게 해야 해요."

트레벨리언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이내 위스키 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좋소."

나지막하게 그가 대답했다.

"그녀에게 선택하게 할 거요."

니사가 뭔가 다른 얘기를 했지만 트레벨리언은 듣지 않았다. 이미 문을 향해, 클레어를 향해 걸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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