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테
권지니
** 프롤로그 - 흥정
겨울 막바지에 이르자 차가운 빗줄기가 못내 아쉬운 듯 저녁거리를 스산하게 적신다. 차갑게 식은 비를 검은 우산으로 받쳐 들며 한 중년의 신사가 허름한 식당 문을 열고서 자신의 일행을 찾는 듯 두리번거린다. 30년의 세월도 이곳만은 비켜 가는지 가게마다 있을 법한 간판 하나 없었고, 나무로 만든 미닫이문은 열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냈으며, 낡은 의자나 탁자마저도 이 가게 문 열던 그 당시 그대로였다.
신림동의 어느 구석진 골목에 위치한 이 식당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수재만 다닌다는 명문대에 입학한 제갈석은 부모의 도움을 일절 받지 않고 졸업하겠다고 선언한 뒤 집을 나왔다.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막일을 하며 2학기 등록금과 집세를 내고 나니, 생활비가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다. 며칠 동안 계속 비가 내려 막일도 나가지 못해 수중에 돈이 없던 제갈석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자 성북동 본가에 들러 합천댁이 해주는 맛깔스런 음식을 먹을 생각으로 자췻집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골목 구석진 가게에서 내뿜는 구수한 고기 냄새가 그를 유혹했다. 배는 채우지 못하더라도 냄새만이라도 배불리 맡아보자는 생각에 간판도 제대로 걸려 있지 않은 가게 앞에 섰다.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한 시간 넘게 그곳에 서서 삼겹살과 소주를 감칠맛 나게 먹는 사람들을 문밖에서 지켜보고만 서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을까? 어깨를 툭 치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눈이 아주 맑은 청년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불쑥 말을 꺼냈다.
"형씨, 오늘 나하고 술친구 합시다!"
그가 미처 말할 새도 없이 자신의 팔을 꽉 움켜잡고는 고깃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얼떨떨해 있는 제갈석에게 자리를 권하며 자신도 맞은편에 앉더니 주방을 향해 고함을 지른다.
"아주무이, 여기 삼겹살하고 소주 한 병!"
그러자 주방에서 걸걸한 목소리의 사투리가 가게 안을 꽉 채운다.
"야, 이 머시마야! 니 눈까리는 뒤에 붙었나? 바빠서 내 뒤질 것 같으니께네 니가 갖다 무라!"
양반집에서 곱게 자란 제갈석은 거친 아주머니의 사투리와 험한 말투에 배고픔도 잊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의 앞에 앉은 청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껄껄 웃더니 삼겹살과 소주를 챙겨 가지고 와서는 그에게 잔을 건넨다.
"하하, 아주머니 말투에 놀란 것 같군요. 저도 처음에는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왔는데, 이제 익숙해지니까 괜찮아지더군요. 형씨도 적응될 겁니다."
제갈석으로서는 낯선 자신에게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그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 이유인즉 청년은 고깃집 2층에서 자취하고 있었고,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웬 남자가 고깃집 앞에서 꼼짝도 안하고 서 있더란다. 처음에는 무심코 봤지만, 한 시간 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려와 봤더니 여전히 가게 앞에 서 있는 그의 모습에 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학생들 배고픈 건 뭐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구질구질하게 비 내리는 날 혼자서 마시는 술만큼 처량한 것도 없고, 마침 형씨가 내 술친구 하려는 듯 서 있는 거 보니까 반갑기만 하더만요.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잘 지내봅시다. 나 채병훈이오."
웬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이끌리게 하는 매력이 있는 친구였다. 남자였지만 여자보다 더
맑고 선한 눈빛에 제갈석은 마음속으로 그를 평생의 벗으로 삼아버렸다.
"하하, 이거 우리 인연이 있나 봅니다. 난 요 아래 파란 집에서 자취하고 있소. 그리고 형씨 말대로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친구 합시다. 나도 알고 보면 꽤 괜찮은 사나이고, 형씨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나 제갈석이라 하오!"
그의 직선적이면서도 소탈한 태도에 채병훈 역시 너털웃음을 지으며 오른손을 내민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아는 제갈석 또한 그의 손을 불끈 쥐어 잡았다. 무언으로 서로의 눈을 바라보던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욕쟁이 아주머니가 구시렁거린다.
"하여튼 머시마들은 가시나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 아이가. 이것 봐라. 이 아까븐 고기 다 타는 거 봐라. 어찌 이럴꼬. 너거가 고기 태우는 바람에 가게 안이 연기로 가득 찼다 아이가. 내가 미치뿐다."
갓 마흔 살이 된 주인집 아주머니는 화재로 남편과 두 아이를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실의에 빠져 있다가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든 어리든 상관하지 않고 말을 툭툭 놓으며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욕을 하긴 했지만, 듣기 싫은 욕이 아니라 왠지 모르게 감칠맛이 나는 애교로 느껴져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리고 묘한 인연으로 자신의 벗이 된 채병훈은 알면 알수록 진짜 멋진 녀석이었다.
제갈석이 서울에서 꽤 알아주는 집안이라는 것을 알게 된 채병훈이 그에게 했던 말 때문에 더욱더 그가 맘에 들었다.
"자네 대에서 말아먹지나 말게."
그 말의 뜻은 자신이 이루지 않고 부모가 물려준 재산은 의미가 없다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우정은 세월이 흐를수록 뿌리 깊은 나무처럼 더욱 단단하고 견고해졌다. 지금 바로 그 친구가 술친구가 필요하다며 자신에게 연락을 했지 않은가.
* * * *
잠시 회상에 잠긴 그를 깨우는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든다.
"야, 이넘아, 추버 뒤지겠다. 퍼뜩 문 안 닫고 머하노."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는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한 할머니의 구수한 사투리에 제갈석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껄껄거리며 문을 닫는다.
"하하, 아주머니 목소리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정정해 보여서 듣기 좋습니다. 요즘 일이 좀 바빠서 통 찾아 뵙지 못했었는데 잘 지내셨죠?"
그가 들어설 때부터 카운터에 앉아 돈을 세던 할머니는 여전히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한다.
"와? 욕째이 할마시가 디비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게 궁금해서 왔디나?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니 면상 떼기 보기가 나랏님보다 더 보기 힘드니 원..... 병후이는 구석에 쳐박혀서 술 먹고 있으니께네 어여 가보거래이."
대학생이었던 채병훈과 제갈석이 자신의 가게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두 사람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 되리라 생각했던 할머니는 그 예견이 들어맞자 내심 그 누구보다 좋아했었다. 대학가의 푸른 소나무처럼 늘 푸를 것 같은 그들도 이젠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사나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 세월의 무상함이 절로 느껴졌다. 아주머니가 말은 무뚝뚝하게 하고 있지만, 내심은 그의 방문에 기뻐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라 제갈석은 그저 허허 웃음을 내며 창가 쪽 구석 자리를 향해 걸어간다.
벌써 소주 반병을 비우고 있는 자신의 막역지우(莫逆之羽)인 채병훈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 친구, 날 두고 먼저 시작하다니. 섭섭한걸?"
두 사람 다 아무도 못 말리는 애주가라서 자주는 안먹더라도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볼 때까지 마시곤 했었다. 제갈석의 걸걸한 목소리에 반가운 듯 털털한 웃음을 내며 채병훈은 악수를 청한다.
"오다 보니 일찍 왔더라고. 그래서 가만히 있기도 뭣하고 해서 먼저 시작했지. 비가 와서 그런지 술친구도 간절하고. 이곳도 그립고.... 그래서 자네한테 청한 건데 이렇게 냉큼 달려와 주니 이 채병훈 기분이 날아갈 것 같구먼. 하하."
"벗이 부르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달려와야지. 달리 친구인가? 하하."
서로의 어깨를 반가운 듯 두드리는 두 사람의 모습엔 오랜 세월을 같이한 벗만이 가질 수 있는 편안함과 친근함이 있었다. 그런 모습에 옆자리에서 술을 먹던 네댓 명의 대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저런 우정 오래도록 간직하자며 건배를 외친다.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고 할 정도의 최대 규모의 그룹계열사 오너와 전국적으로 최대의 호텔망을 가지고 있는 고려호텔의 최고경영자가 이렇게 허름한 고깃집에 앉아 소주를 마시리라고는 어느 누가 생각을 했겠는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술잔을 기울인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데 이곳만은 그대로구먼."
채 회장이 주위를 새삼스레 둘러보며 말하자 제갈석은 살짝 말소리를 죽이며 말한다.
"이곳은 그대론데 저 아주머니 욕은 삼십 년 전보다 더 거칠어졌다고. 크크큭...... 아아아악!"
욕쟁이 할머니에 대한 애정 어린 흉을 보며 웃다가 현장범으로 잡힌 제갈석이다. 오래간만에 왔다고 반가운 마음에 삼겹살 3인분을 직접 서비스하러 왔다가 그의 말을 들은 욕쟁이 할머니는 제갈석의 귀를 잡아당긴다.
"머, 이런 넘이 다 있노! 야, 이넘아, 내가 욕하는데 니가 머 보태준 거 있나? 니가 고기를 줘봤나? 쌔주를 줘봤나? 하다 못해 병훈이처럼 박카스를 사다 줘보기나 했나? 오랜 정을 생각해서 공짜로 줄라 캤더니만 니 돈 내고 니가 사무라!"
박카스를 하루에 서너 병씩 먹는 할머니를 위해 이곳에 올 때마다 박카스를 꼭 몇 박스씩 사들고 오는 채 회장이었다. 할머니의 말에 킥킥대며 웃던 채병훈은 슬쩍 거든다.
"그거 쌤통이로구나. 하하, 아주머니, 제가 드린 박카스는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피곤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드십시오. 크큭."
배신을 한 친구를 장난스레 노려보며 제갈석은 할머니를 향해 애처로운 표정으로 싹싹 빈다.
"아주머니, 이 친구가 준 뇌물에 넘어가다니 전혀 아주머니답지 않습니다요. 전 박카스에 피로회복제까지 드릴 테니 제발 귀 좀 놓아주세요. 이래 봬도 한 가정의 가장인데 이러고 있는 걸 가족이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의 말에 짐짓 생각하는 척하던 할머니가 봐줬다는 듯 슬며시 귀를 놓아준다.
"그 말 진짜제? 하긴 니 돈 억수로 번다고 맨날 신문에 나와쌋더라. 그라면 둘이 이바구해라. 주방에 가시나가 새로 들어왔는데 일하는게 영 시원찮아서 그거 보러 가야 된다 아이가."
올 때처럼 휑하니 가버리는 할머니의 뒷모습에 제갈석과 채병훈은 껄껄거리며 웃는다.
* * * *
소주잔을 시원스레 들이키던 채병훈이 자신의 빈 술잔을 제갈석에게 건네주고 술을 따라주며 말한다.
"사실은 자네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오늘 보자고 했네."
친구 사이이지만 사소한 부탁 한 번 청하지 않던 그가 딱 한 번 그에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
10년 전, 아내를 잃고 충격을 받은 채병훈은 한동안 두문불출했었고, 떠나기 전날 제갈석에게 전화해서는 자신이 나타날 때까지 호텔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었다. 그 시기가 채병훈에게 가장 힘든 날들이었다. 채 회장의 아내가 죽기 전부터 새로 착공에 들어간 제주도 호텔 공사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큰 충격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 딸과 함께 공사장에 들어서던 이 여사가 관리자의 잘못으로 떨어지는 철근에 깔려 죽은 것이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본 채 회장은 자신을 자책하며 한동안 이성을 차리지 못한 채 거의 술로 지새웠고, 당연히 회사와 하나밖에 없는 딸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인 채병훈은 마음의 정리가 어느 정도 된 듯 그야말로 위기일발일 때 나타나서 자신의 회사를 전보다 더 탄탄하게 일으켜 세웠고, 지금의 고려왕국을 만들어 낸 것이다. 지금도 웃고는 있지만 항상 마음 한 켠에는 그의 죽은 부인 때문에 어딘가 모르게 그늘이 있는 이 친구가 자신에게 부탁을 한단다.
"자네 부탁이라면 내 뭔들 못 들어주겠나. 말해 보게나. 우리 마누라 달라는 말만 아니면 내 다 들어줄 터이니. 하하."
쉽게 말을 꺼낼 수 있도록 우스갯소리를 하며 마음의 배려를 해주는 제갈석이 고마운 듯 술을 권하며 채 회장은 말한다.
"자네, 내 호텔 가져가게."
시원스럽게 한입 털어넣던 제갈석은 그의 짧은 한마디에 사레 걸린 듯 캑캑거린다.
"캑! 자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하는구먼. 그 호텔이 자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나에게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다니. 나 웃기자고 그냥 해본 말이지?"
농담일 거라고 치부해 버리며 제갈석은 빈 술잔에 소주를 들이붓는다. 채 회장은 소주를 반 잔 정도 먹다 남기더니 고개를 돌려 비 내리는 창밖을 쓸쓸한 눈으로 쳐다본다.
"모란이 엄마가 나와 평생 가약을 맺었을 때와 모란이가 태어났을 때를 빼고는 삼십 년 전 이 자리에 앉아 있을 때가 나에게 가장 의미 있고 행복했던 시간인 것 같구먼. 그때는 내 꿈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서 내 몸뚱아리 정도는 아깝지 않게 내어줄 수 있는 패기와 열정이 있었는데.... 지금 그걸 다 가지고 나니까 나한테 남는 건 아무 것도 없더군. 바람 따라 가는 구름처럼 세월을 따라 여기까지 쫓아왔는데. 허, 인생무상이로구먼."
신세 한탄하듯 주절주절 말하던 채 회장이 탁자를 손으로 박자를 맞추듯 탁탁 치며 흥얼거리듯 노래를 부른다.
"음~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은
음~ 그리워 말아요 떠나갈 님인데"
이십 년간 채 회장의 애창곡이기도 한 '하얀 나비'는 그 또한 무척이나 좋아하는 노래이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이 노래와 친구의 신세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제갈석 또한 젓가락을 두드리며 따라 부른다.
"음~ 어디로 갔을까 길 잃은 나그네는
음~ 어디로 갈까요 님 찾는 하얀 나비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음~ 음~~ 음~~~음~~~`"
채 회장이 부르기 시작한 노래는 술을 먹고 있던 구세대들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는지 노래 가사를 아는 사람들은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노래를 모르는 신세대들조차 멜로디와 가사가 주는 애절함에 서로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몸을 건들거리며 허밍으로 부르고 있었다. 눈을 감고 몸을 좌우로 흔들며 노래를 부르던 채병훈과 제갈석은 자신들로 인해 가게 안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괜히 머쓱해졌다. 젊은 사람들 앞에서 왠지 주책을 부린 것 같기도 해서 노래가 끝나고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자 모두들 오래간만에 향수에 젖어서 좋았다며 감사의 말을 건네는가 하면, 젊은이들은 "아저씨, 짱입니다요." 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얘기하다 보니 왠지 자신의 신세가 하얀 나비 같은 마음이 들어 불렀던 노래가 이런 파장을 일으키다니.....
"오래간만에 불러보니까 좋구먼."
"옛날 생각이 나는군. 우리 대학 다닐 때는 이런 술자리에서 노래도 참 많이 불렀었지.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자네 노래 실력은 여전하구먼. 하하, 이제 기분이 좀 나아진 게야?"
그의 말에 채병훈은 한쪽 입술 끝을 올리며 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문다. 담배에 불을 붙여준 후 제갈석 또한 담배 한 가치를 물고는 연기를 입 안으로 삼킨 후 내뿜었다.
"좀 낫군. 그런데 말야, 난 요즘 자네가 부러우이. 자네 변덕 다 받아주는 착한 아내와 든든한 아들까지...... 자넨 복도 많지."
"자네 곁에는 모란이가 있지 않은가?"
괜스레 미안해진 제갈석은 술잔에 술을 붓고는 금세 잔을 비운다.
"큭. 맞아, 우리 모란이가 있지. 내 아내가 남기고 간 내 사랑스러운 딸...... 아내가 죽고 내 슬픔이 너무 커서 그 애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어. 나보다 그 애가 더 충격을 받고 슬펐을 텐데. 하지만 그때는 아내를 쏙 빼닮은 딸애를 보는 것만으로도 난 견딜 수 없이 괴로웠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회사 사정도 악화일로를 달리고 있었고. 나의 약한 모습을 그 어린것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유학을 보내버렸어.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때의 나는 내가 도망치기보다 모란이가 도망가 주길 바라는 마음에 그랬던 것 같아."
딸아이의 생각에 가슴이 미어진 채 회장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숨을 고른다.
"외국으로 보낸 이유를 내가 그 애를 버린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 그게 아닌데....... 서로 시간을 가지면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 거라고 생각하고 1년이나 2년 예정으로 보냈던 유학이 어느새 9년이란 세월이 흐르더군. 거기에다 귀국하자마자 제주도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고. 허, 이게 어디 사람이 사는 건가?"
자존심이 강한 채 회장으로서는 딸이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테고, 모란이 또한 아버지에게 상처 입은 마음으로 그에게 먼저 다가가진 않을 것이다. 이들 부녀 사이에는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자네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구먼. 그러면 모란이를 저대로 놔둘 참인가? 이 여사가 죽기 전까지는 얼마나 밝고 낙천적인 아이였는지 어릴 때부터 보아온 내가 잘 알지. 상처를 받고 의기소침해 있다고 해서 천성적으로 타고난 성격은 없어지지 않는 법이라네. 그러니 자네가 잘 달래보도록 해."
채병훈은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말한다.
"난들 왜 노력을 안 했겠는가. 그런데 모란이가 그런 여유를 안 준다네. 그 녀석 너무 변해버려서 나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지 에미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피해버리고. 휴........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는지. 그 여린 녀석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준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아파."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는 그의 오랜 벗을 보면서 제갈석 역시 마음이 좋지 못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까? 채병훈이 자신의 아들인 제갈윤에 대해서 슬쩍 물어보는 것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윤이가 호텔 사업에 관심을 가진다는 말이 돌던데..... 사실인가?"
그의 호기심 어린 말투에 제갈석은 화들짝 놀란다. 그와 친구로서의 인연을 맺고 서로의 꿈을 향해 나아갈 때 서로가 맺은 약속이 있었다. 라이벌 관계는 되지 말자고. 그 약속은 삼십 년간 철저하게 저켜졌고, 채병훈은 오로지 호텔업에만 몰두했으며, 제갈석 역시 호텔 사업만 빼고는 모든 사업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달 전 호텔 사업을 제시하는 윤에게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일절 말도 못 꺼내게 했는데 그것이 어느 사이에 소문이 났나 보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네. 그냥 관심을 가졌을 뿐 자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 열려 말게나."
아들의 경솔함 때문에 미안해진 제갈석은 친구에게 이해를 구하며 미안해 한다. 그러자 채병훈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며 말한다.
"하하, 자네 왜 이러나. 난 오히려 윤이가 호텔업에 관심을 가져줘서 기쁘기만 하다네. 이 세상에서 내가 믿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자네 아닌가? 그런 자네에게 내 호텔을 맡기고 싶네. 인수하게나!"
친구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감지한 제갈석은 화가 난다는 듯 언성을 높이며 짧게 말한다.
"농담으로 듣겠네!"
"허, 내가 사업 얘기를 농담으로 하는 거 봤나?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평생을 날 죽였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면서 살게 될걸? 그러니 내 말 좀 진지하게 들으라구."
웃음 띤 목소리고 말은 했지만 지친 듯한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이........ 이 친구 무슨 말을 하는 게야. 죽다니? 왜 죽어? 자네 혹시........"
"이제야 감이 오나? 하하, 아직 죽지 않으니 걱정 말게나. 김 박사 말로는 공기 좋고, 조용한 곳으로 여행이나 다니면서 신선놀음하면 오래오래 살 수 있다고 했으니 이제 그 말에 따라보려고 하네. 단, 자네가 내 부탁을 들어줬을 경우에만 해당하네. 나의 기쁨이었고 슬픔이었던 것을 모두 알고 있는 자네라면 내가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받아주게."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심장을 움켜잡곤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제갈석은 자신의 둔감함에 혀를 차며 채 회장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빼앗았다.
"심장에 문제가 있었던 게로군. 그런 사람이 술을 먹어? 자네 죽고 싶어 환장한 거 아닌가? 이제부터 술은 일절 입에 대지 말게나."
고려호텔은 그냥 호텔이 아니었다. 제갈그룹이 제갈석 자신이라면 고려호텔 역시 채병훈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최고라고 자랑하는 제주 고려호텔에서 그의 아내를 떠나보냈었다. 그렇게 한평생을 호텔을 위해 살아왔던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자네 호텔을 맡기보다는 모란이가 자네 회사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경영자 수업을 받든가, 아니면 유능한 인재를 그 자리에 앉히는 게 나을 수 있지 않나?"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채 회장은 말한다.
"자네 말대로 모란이를 내 뒤를 잇게 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 애는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까지도 지 에미를 빼닮은 애라구. 냉정하지 못하고 무척 감정적이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바이올린밖에는 모르는 애가 사업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지. 그렇다고 내 것을 생판 모르는 남에게 주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말인데 이제부터 자네와 사업가 대 사업가로서 흥정을 해볼까 하네. 내가 힘들게 일궈 낸 내 호텔을 자네한테 그저 준다고 생각하진 않았겠지? 하하."
친구의 건강이 걱정되면서도 반면에 그의 속내가 궁금해지자 제갈석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내민다.
"흥정이라구? 이거 입맛 다시는구먼. 나도 공짜로 그저 받기는 싫다고."
호기심이 잔뜩 묻은 눈으로 채 회장을 바라보던 제갈석은 온화하게 내비치던 친구의 맑은 눈이 한순간 날카롭게 번뜩이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몸을 떨었다.
"자네 아들을 모란이에게 주게나!"
채병훈의 단호한 한마디에 잠시 당황해 하며 말문을 열지 못하던 제갈석의 비상한 머릿속이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한순간 빠빠지더니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무릎을 탁 치며 가게 안이 떠나가라 웃어젖힌다.
"푸하하하, 역시 채병훈이야!"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한참을 웃어대던 제갈석은 갑자기 켕기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겸연쩍은 얼굴로 말한다.
"자네, 내 아들에 대해서 사전에 다 조사해 봤겠지?"
자신의 아들 제갈윤은 한마디로 사업을 하기 위해 태어난 녀석이다. 철두철미한 성격답게 독창적이며 진취적인 사업 추진력과 사람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더불어 항상 노력하는 모습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갈그룹의 사장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들이 내심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차갑고 이성적인 모습에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스포츠신문에 실리는 스캔들 때문에 제갈석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나이가 꽉 찬 아들을 야단칠 수 없는 노릇이고, 오로지 평생의 반려자를 빨리 만나 그런 화려한 생활을 접었으면 하는 마음에 결혼을 재촉했으나 그의 아들은 콧방귀만 뀔 뿐이다.
물론 오늘 조간시문에 나왔던 '앞서 가는 경영인 제갈윤' 이란 제목으로 종종 신문에 실리긴 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화제보다는 유명 여자 연예인과 재벌 후계자의 스캔들에 더 관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런 아들의 얘기를 자신의 입으로 친구에게 말하기 껄끄러워 머리를 긁적인다. 그러자 채 회장은 바닥을 울리는 깊은 웃음소리를 내며 말한다.
"물론 당연히 조사해 봤지.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다른 회사들도 해내지 못한 계약을 자네 아들이 보수적인 독일 베네닉트 사를 상대로 단 1시간 만에 계약을 체결했다면서? 수완이 대단하다고 요즘 경제계에서는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더군. 그리고 부산시와 주민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황금의 땅이라 불리는 그곳에 신성건설을 제치고 대형 백화점과 아파트를 지을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는 거?"
"하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는 건 알지 않는가."
제갈석이 아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는 채 회장은 빙긋 웃으며 말한다.
"이보게나, 젊을 때는 다 한 번씩은 거치는 거 아닌가? 물론 자네 아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여배우들과 스캔들을 뿌리고, 연예잡지에 실리는 설문 조사에서 미혼 여성이 뽑은 최고의 남편감 1위, 대한민국 최고의 매력남 1위에 매년 오른긴 하지만 자기 관리는 철저하게 하는 애라고 난 생각하네. 물론 바람둥이 기질이 있어서 내심 걱정은 되긴 해도 그건 모두 자네 아들이 잘나서 그런 거니 이해하기로 했네. 허허, 그리고 바람둥이가 개과천선하면 최고의 남편감이 된다는 사실을 자네를 보고 알았는데..... 아닌가? 하하."
제갈석 또한 지금의 아내 한 여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많은 여자들을 울리고 다녔지만, 자신의 아들만큼은 아니었다.
"무슨 소리! 나는 내 아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고. 큭큭, 그리고 자네가 다 알고 있으니 말을 하기 쉽구먼. 내 아들이지만 나도 내 아들을 모를 때가 많아. 독립심이 강하고, 거만하고, 차가워서 어쩌면 모란이에게 상처를 지 모르네. 그게 걱정스러워서 그런 거지."
채 회장은 이야기하고 있는 친구의 예리한 눈을 살짝 피해 슬며시 술잔을 되가져와 한입 털어넣자 제갈석은 알면서도 슬쩍 눈감아 준다.
"윤이를 보고 있으면 자네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그래서 더욱더 그 애한테 끌리더구먼. 그리고 모험일지는 모르지만 왠지 모란이의 짝으로는 윤이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리고 윤이는 차가운 애가 아니야. 마음속에 따뜻한 정을 가지고 있는 애라구. 아주 우연하게 그걸 보게 되었지. 그 전부터 윤이를 점찍어 두긴 했지만 자네 말대로 바람둥이에게 내 딸애를 맡길 수는 없잖은가? 그냥 그렇게 두고만 보고 있었지.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서는 윤이를 확실하게 내 사위로 삼을 생각을 하게 되었다네."
자신도 모르는 아들의 얘기가 채병훈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제갈석은 괜스레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낀다.
"이 년 전이었던가? 제주도 호텔에 신축공사 문제로 그곳에서 한 달 정도 있었는데 마침 윤이가 그곳으로 출장을 왔더라구. 하루 예정으로 왔는데 일이 빨리 끝났다며 호텔로 날 찾아 왔더군. 마침 회의가 있어서 윤이에게 호텔 커피숍에 있으라 했지. 30분 후에 커피숍으로 내려갔더니 로비 소파에 않아 시간이 빠듯한지 시계를 보고 있더구먼. 안부인사 전하러 왔다고 하면서 윤이가 나한테 부탁할 게 있다고 하는 거야. 뭐냐고 물었더니 혹시 이 주위에 구둣가게가 있냐고 물어보더군. 하하.
몸에 딱 맞는 고급 정장을 쫙 빼입은 제갈윤이 정장구두 대신 어울리지 않는 낡은 슬리퍼를 신고 있던 모습이 떠오르자 채병훈은 웃음을 터뜨렸고 영문을 모르는 제갈석은 눈만 둥그렇게 떴다. 웃음을 겨우 참고서 채병훈은 말을 잇는다.
"무슨 소리인가 하고 윤이 발을 쳐다보니까, 글쎄 고동색 슬리퍼를 신고 있더군먼.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웬 중학생 아이 가 호텔 직원들 몰래 자신에게 다가와서는 구두 닦아 주겠다고 하더라는 거야. 나이도 어린애가 어떡하다 이런 일을 하게 되었냐고 묻자 집은 쪼들리게 가난하고, 일주일 후에 큰누나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아버지에게는 다 떨어진 운동화 외에는 낡은 구두조차 없더라는 게야. 생각 끝에 구두닦이로 돈 벌어서 구두를 사드릴 생각으로 이곳까지 왔다며 구두 닦게 해달라고 사정하더라는 게야. 그랬을 경우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했겠나?"
아무 말 않고 고개만 흔들어대는 제갈석의 얼굴을 보며 그는 말을 잇는다.
"가난하긴 했지만 그 아이의 눈을 보니 자존심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느낀 윤이는 그 아이에게 네 아버지의 신발 치수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는구먼. 285라고 대답하는 그 아이의 말에 마침 자신과 치수가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마침 잘됐구나. 난 290인데 신발을 잘못 사서 285지 뭐냐. 오늘 한 번 신어봤는데 발이 아파서 다른 거 사 신을까 생각 중이었거든. 아, 네가 가지고 가면 어떨까? 난 어차피 발 아파서 이 신발 못 신을 거구, 이 신발은 나보다 네가 더 필요한 것 같구. 어때?' 그 아이로서는 그보다 더 고마운 말은 없겠지. 연신 고맙다고 꾸벅거리며 윤이가 마음을 돌릴까 봐서 얼른 나가더라는군. 하하, 그 구두가 그 아이 집 두 달 생활비라는 걸 그 애는 알까 모르겠네."
친구의 말에 제갈석은 아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재듯 말한다.
"큭, 누구 아들인데! 하하. 자, 그렇다면 둘이 어떤 식으로 만나게 해주지?"
사실 채 회장의 내외와 제갈 회장 내외는 자신의 가족들보다 더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지만, 모란이와 윤이는 서로 잘 모르고 지냈다. 아주 어릴 때 몇 번 보긴 했어도 서로 나이가 들자 부모를 따라다닐 나이가 지났으니 마주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선보듯이 하면 윤이도 그렇고 모란이도 그렇고 피하려 들 테니까, 우선은 상황을 봐가면서 결정하자고. 서두르다 보면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까 말야."
"자네 말이 맞네. 그럼 그 일은 차후로 미루고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게...... 아니지, 자네는 술 마시면 안 되니까 나 혼자 자네 몫까지 마셔야겠구먼."
제갈석이 약올리며 실실거리면서 말하자 채병훈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잔에 소주를 넘치도록 따른다. 엄한 표정을 짓는 제갈석을 향해 잔을 들어 올리며 채병훈은 껄껄거린다.
"오늘 이후로는 술을 자제할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인상 쓰지 말고 나의 건강을 위해서 건배나 하자구. 하하."
제갈석 역시 껄껄 웃으며 자신의 잔을 들어 친구의 잔과 부딪친다.
"자네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그들의 외침에 욕쟁이 할머니가 술잔을 가지고 와서 옆자리에 털썩 앉더니 두 중년의 사내들을 마구 야단친다.
"늙은 넘들이 노망났나? 너거 가게 세났나? 와 소리는 지르고 난리고! 그카고 너거가 친구 할 때 내도 있었는데 나는 와 쏙 빼놓고 너거끼리 건배하노? 의리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내 잔에도 까득 부어봐라."
할머니의 말에 제갈석과 채병훈은 장난기 있게 연신 미안하다며 할머니의 잔에 술을 부어주고는 새로 건배를 한다.
"욕쟁이 할머니의 욕이 날로 번창하기를!"
"위하여!"
"하하하하."
삼겹살의 구수한 연기와 소주의 쓴맛을 즐기던 사람들은 그들의 건배에 같이 이구동성으로 위하여를 외치며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웃는다. 성에가 낀 창문 밖으로 바쁘게 걸어가던 사람들은 가게 안에서 한소리가 되어 울려 나오자 잠시 멈춰 서서 창문 안을 들여다본다.
** 1. 엄마 잃은 따오기
"모란아.... 으음...... 우리 모란이 두...... 고 이제 떠나야해. 헉헉, 모란아...... 언제나 씩씩하고 강하게 잘 자라야 한다. 알았지? 허헉, 우리 아기 사랑해....."
하얀 안개 속으로 자꾸만 사라져 가는 엄마의 옷자락이라도 움켜잡으려는 듯 팔을 휙휙 휘저어 보지만 잡히는 것은 손끝에서 빠져나가는 안개뿐이다.
"어....... 어엄....... 마!"
경련을 일으키듯 벌떡 일어난 모란은 꿈과 현실을 자각 못하고 꿈속으로 사라져 간 엄마의 모습을 찾기 위해 어둠뿐인 주위를 휙휙 둘러본다. 하지만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건 새벽을 향해 달리는 어둠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모란은 창으로 희미하게 스며드는 달빛을 따라 적막뿐인 밤하늘 위로 애처롭게 뜬 달을 향해 슬픈 미소를 짓는다.
"엄마, 그곳에 있는 거야? 거기서 날 보고 있는 거야? 모란이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괴롭고 힘든데..... 왜 날 두고서 엄마 먼저 간 거야. 흑흐흐."
마치 달 속에 엄마가 있는 것처럼 서럽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울먹이며 중얼거린다.
"엄마 생각나? 아빠 출장가시고 나 잠 안 온다고 칭얼거릴 때면 꼬옥 안아주며 노래 불러줬잖아. 오늘따라 엄마의 노래가 왜 이렇게 그리운 걸까? 이젠 들을 수 없다는 게 이렇게 가슴이 사무치도록 슬프다니...... 이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알았다면 날이 새도록 엄마가 불러주는 노래만 듣고 있을 걸 그랬어. 흑흑."
그녀를 꼬옥 안아주며 자장가처럼 부르던 엄마의 노래가 오늘따라 유난히 머릿속을 맴맴 돌면서 모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이더뇨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
엄마아, 엉엉."
따오기의 울음소리만큼 처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노래를 부르던 모란은 끝내 오열을 터뜨리며 엎드려 울었다. 울면서도 1절, 2절, 3절, 4절을 부르고, 도돌이표가 있듯 계속해서 노래를 부른다. 애달프게 부르며 슬피 우는 그녀의 침대 주위로 어느덧 새벽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
"너 얼굴이 꼭 퉁퉁 부은 짬뽕 면발 같은데? 사진 찍어줄까?"
놀리듯 말하는 윤호의 말에 모란은 힘없이 웃는다. 침대 위에 무릎을 세우고 팔을 괴고 앉아 있는 모란의 모습은 곧 쓰러질 것처럼 연약해 보여 항상 옆에서 지켜봐 주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출장 가면 한동안 연락을 못할 것 같아 아침에 전화했더니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윤호는 그런 모란이 맘에 놓이지 않아 아침 비행기를 타고서 이곳으로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다.
"그렇게 형편없어 보여? 잠을 잘 못 자서......"
말끝을 흐리는 모란의 말에 윤호는 무엇 때문인지 대충 눈치챘다.
"너 또 악몽 꿨구나? 안 되겠다. 이제 그만 서울 가자. 너 이러고 있으니까 채 회장님이 마음이 안 놓이시는지 요즘 통 기운 없어 보이더라."
아버지의 얘기에 모란은 아예 얼굴을 무릎 위로 파묻었다. 그런 모란이 애처로워서 윤호는 침대 가장자리에 살며시 앉으며 모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모란아, 네가 힘들어하는 만큼 채 회장님은 너보다 더 힘들어하셔. 그런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해야지. 이게 뭐냐? 너 한국 들어오고 하룻밤만 본가에서 자고는 이곳으로 도망쳐 왔잖아."
윤호가 쓰다듬어 주는 부드러운 손길에 차츰 마음이 가라앉았다.
"서울로 돌아가야지. 그런데 아빠 얼굴 볼 자신 없어. 나를 보면서 슬픈 표정을 짓는 아빠의 얼굴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죄책감이 드는걸. 엄마가 죽은 지 10년이 지났어. 잊을 때도 되었는데 왜 잊혀지지 않는 걸까? 아빠는 왜 엄마를 잊지 못하는 걸까?"
채병훈 회장은 우리 나라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호텔업계의 최고경영자이다. 그 최고의 자리에 있는 아버지를 둔 자식이라면 남부럽지 않은 자신의 환경에 만족스러워하고 행복해야 하는데 지금 모란의 모습은 무척이나 불행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인 채 회장 역시 마찬가지이고.....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해 항상 안타까운 윤호는 다시 한 번 더 모란을 설득한다.
"잊으려고 노력도 안 하잖아. 그리고 채 회장님은 너 때문에 슬픈 게 아니라 사고가 난 직후 널 제대로 위로도 못해 주고 바로 유학을 보낸 게 미안해서 그런 거라고. 제삼자인 나도 아는 사실을 왜 너만 모르는 거니? 그리고 평생을 이곳에서 보낼 거 아니라면 지금 나와 같이 서울로 돌아가자."
모란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죽은 이후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죄책감이란 친구는 자꾸만 그런 이성을 눌러버리고 과거에 연연해하며 불행하길 바라는 듯 모란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오빠, 시간을 조금만 더 줘. 응? 어제는 아빠랑 통화도 했었어. 목소리가 늙으셨더라. 사람은 몸만 늙는 줄 알았는데 아빠 목소리 듣고는 목소리도 늙는다는 걸 알았어...... 나름대로 정리되면 아빠 곁으로 갈 거야."
윤호의 선한 눈을 안경 너머로 쳐다보며 모란은 애원하듯 말했다. 긴 속눈썹 아래로 상처 입은 까만 두 눈동자가 자신을 향할 때면 윤호는 머리가 멍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리고 동생 같기만 하던 이 여자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커버린 걸까? 무대 위에서 연주를 하는 모습을 지켜본 후로 모란은 더 이상 윤호에게 여자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인도 아닌 아주 애매모호한 감정이라 섣불리 모란에게 다가설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한 달간 오페라 가수의 섭외 문제로 이태리로 가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런 그의 급한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모란이 고개를 들고 윤호에게 말한다.
"오빠, 오늘 이태리 간다면서 여기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당연히 안 되지. 하지만 너와 같이 가지 않으면 나도 이태리고 뭐고 없어."
실제로 그럴 생각이었다. 그녀를 이곳에 그대로 방치해 두면 예전의 모란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유들유들하고 부드럽다가도 한 번 마음먹은 일은 꼭 해내고 마는 결단력과 단호함이 있는 윤호였다. 윤호의 어머니인 김 여사는 서울에서도 상류층 아이들만 다니는 사립유치원 원장으로 그녀의 어머니와 여고 동창생이기도 했다. 세 살 위인 윤호와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고, 가족들끼리도 자주 만나 식사를 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지만 그녀의 엄마가 죽고, 모란 역시 유학을 가버리자 자연스럽게 왕래가 뜸해졌다. 그러나 윤호와는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통화를 했었고, 유학 가 있는 동안에도 윤호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었다.
지금은 음반사와 (주)유노 엔터테인먼트 사를 경영하고 있는 미래가 유망한 사업인이기도 했다. 볼 거 못 볼 거 다 보고 자란 사이가 바로 윤호와 모란을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란은 윤호를 편안하게 의지할 수 있는 친오빠처럼 생각했다.
"이번 이태리 출장 건은 중요한 거잖아. 그 오페라 가수를 땅겨 오려고 오빠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나 때문에 포기할 순 없어. 오빠 나 정말로 서울 갈 거야. 그러니까 어서 가라구."
"아니, 지금 가야 해. 그리고 내가 돌아왔을 때 넌 서울에 있어야 한다구. 아 참, 그리고 너 이 오빠를 위해서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윤호의 말투에 모란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에게 말해 보라는 듯 눈으로 말을 건넨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회사는 일반 연예인들보다는 클래식 쪽에 더 중점을 두고 있어. 특히 너처럼 주목받기 시작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우리 회사와 계약하게 된다면 네가 세계적인 무대에 이름을 남길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줄 것이고, 또 그럴 만한 실력이 너에게 있으니 넌 금세 세계인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 회사 역시 레벨이 틀려지지. 어떠니?"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조금씩 변해가나 보다. 문학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던 윤호 오빠가 이젠 사업가의 모습으로 변해서 이익을 따지는 냉정한 사람으로 변하다니. 하긴 주위 환경의 변화란 것은 무시 못하지. 그 첫째 예로 자신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모란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윤호에게 미안해하며 말한다.
"오빠, 난 지금 너무 지쳤어. 대학원 졸업하고 선생님의 권유로 독주회를 하긴 했지만 바로 이곳으로 와버렸지. 공연이 끝나고 내가 느낀 건 만족감이 아니라 공허함이었어. 그리고 사람들이 나에게 던지는 부담스런 시선이 날 압박하듯 조여와서 미칠 것만 같았거든. 난 그런 명예를 위해서 바이올린을 켠 건 아니야. 달리 할 게 없었으니까.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바이올린밖에 없었어. 그래서 손에 피가 날 정도로 악기만 켰어. 그래야만 했거든. 안 그럼 미칠 것만 같아서....... 오빠, 내가 왜 이 멍청한 안경을 덮어쓰고, 70년대에나 볼 수 있는 이런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해? 눈이 나빠서? 옷을 입을 줄 몰라서? 큭."
무감각한 눈으로 윤호를 보고 있는 모란의 눈길에 윤호는 점점 부끄러워졌다. 사실 사업얘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모란의 천재성을 미국에서 확인한 뒤로부터는 자꾸만 탐이 났던 것이다. 그리고 모란의 마지막 말에 새삼 그녀를 보았다.
십 년 전의 모란은 길 가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볼 정도로 정말 예뻤다. 단순히 예쁜 것이 아니고, 사람의 눈길을 잡아끄는 매력과 청순함이 어우러져 가슴속에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그런 아름다음이 어린 나이었음에도 느껴졌던 것이다.
윤호야 어릴 때부터 모란을 봐왔기에 아무렇지 않았지만 그의 친구들이나 처음 모란을 본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소개해 달라고 아우성들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예쁜 애가 미국에서는 전혀 딴 얼굴이 되어 있어 처음 그녀를 미국에서 만났을 때는 몰라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대해서 별달리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윤호는 그녀의 다음 말을 계속 기다렸다.
"엄마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서 이것저것 물어대고 뒤에서 수군거리고, 정말 견딜 수 없었어. 저 아이 엄마가 쟤를 살리고 죽었다지? 재수 없는 애 아니야? 크큭. 그런데 아버지마저 날 미국으로 보내버리더라고. 아, 오빠가 무슨 말하려는지 알아. 아빠가 그런 이유로 날 미국에 보내 게 아니라는 거. 하지만 그때 난 충격을 받은 상태였고 사춘기이기도 했었어. 지금이야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때의 난 극단적으로 생각했지. 늘 낙천적이던 내가 변해버렸어. 그런데 오로지 바이올린만이 날 구제해 주었어. 악기를 켜는데 많은 남자들이 방해를 하더라? 나의 까만 머리와 까만 눈동자가 그들의 이목을 끌었나 봐. 오늘 약속 있니? 오늘 밤 어때? 우리 사귈래? 풋, 난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어. 내가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악기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의 시선에서 멀어지기 위해 날 감춰야 했어. 나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의 시선들이 너무 싫었어. 아니, 그때는 그랬어. 지금은 아무렇지 않지만 그때의 나는 어리고 약했으니까. 악기를 들고 있을 때의 난 강할 수 있었지만, 그걸 놓아버리면 길 잃은 아이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거든. 그때는 바이올린에 의지를 했지만 지금은 나 자신 그대로 서고 싶어. 그래서 당분간은 무대에 서고 싶지 않아. 그리고 오빠에겐 미안하지만 난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내 마음 이해하지? 이런 일로 오빠와 멀어지고 싶지 않은데..... 미안해."
또다시 기운이 빠져버렸는지 목소리에 점점 힘이 없어진 모란에게 힘을 주듯 그녀의 희고 작은 손을 살며시 잡아주며 윤호는 싱긋 웃는다.
"이 오빠가 탐욕에 잠시 눈이 어두웠나 보다. 하하, 사실 네가 그렇게 큰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거든. 아마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을 가야. 마침 내 옆에 이태리에서도 알아주는 마에스트로 비에띠 카를로스가 앉아 있었거든. 그런데 그 사람이 너의 연주를 듣더니 'Beautiful! Wonderful! Oh, my God!' 만 중얼거리는 거야. 몸이 오싹해졌는지 팔까지 문지르면서. 그걸 보니까 사업적인 욕심이 생기더라구. 이건 너의 뛰어난 재능 때문에 생긴 내 욕심이니까 이해해 주라. 알았지? 이제부터 이런 일로 너를 곤욕스럽게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구. 하지만 지금 당장 짐은 싸야해."
* * * *
일 년 전 미국에서 독주회를 열게 된 모란이 그의 가족들에게 초청장을 보내왔다. 가족들을 대표해서 그는 채병훈 회장과 같이 연주회장에 참석하게 되었다. 마침 그녀가 보내준 입장권은 VIP석이었기 때문에 그의 주위에는 각국에서 날아온 클래식계의 실력 있고 유명한 연주가와 지휘자들이 앉아 있었다. 동양인이었고 초연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거물급들을 앞에 두고 연주 할 수 있게 된 계기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산드로 바빈스키의 애제자가 천재라는 소문이 입 소문을 타고 퍼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현재 알렉산드로 바빈스키의 제자는 단 두 명뿐이었다. 그가 키운 이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각국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바로 알렉산드로 바빈스키의 제자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도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천재라고 부른 적이 없던 알렉산드로는 버클리 대학에서 주최한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갔다가 상상을 뛰어넘는 그녀의 연주 실력에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곳에 있는 심사위원들을 경악하게 한 모란의 태도였다. 모란이 연주를 하다가 바이올린을 내리더니 심사위원들을 똑바로 보며 했던 말은 지금까지도 전설적이라고 할 정도로 그쪽 계통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저분 때문에 제 연주의 흐름이 깨져서 도저히 연주를 못하겠습니다. 그럼."
딱 한마디를 하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무대에서 내려온 것이다. 모란의 말대로 연주가들은 음악의 맥이 끊어지면 흐름이 흩어져서 연주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대 연주가에게 그런 당돌한 말을 하다니. 모두들 알렉산드로가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그건 그들의 오산이었다. 오히려 알렉산드로는 그녀의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에 박수를 보냈고, 겨우 설득한 끝에 끝 번호를 달고 다시 콩쿠르에 참가하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모란이 1등을 했고, 그때부터 알레산드로는 모란에게 친히 달려가서 자신의 제자가 되어줄 것을 제의했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지오 그란데슈가 그에게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했을 때도 알렉산드로는 어림도 없다며 내쫓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이름도 없는 동양인 여자애를 찾아가 직접 러브콜을 보냈다는 소문이 세계 각국으로 퍼지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그들은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모여든 것이다. 그런 사실에 채병훈 회장 역시 흐뭇했는지 연신 미소를 지으며 팜플릿에 있는 딸의 사진을 손으로 만져댔다.
이곳에서 모란은 바이올렛으로 불렸다. 이 여사가 생전에 제비꽃과 조동진 씨의 제비꽃 노래를 무척 좋아했었는데, 모란이 엄마를 생각하며 미국식 이름으로 바이올렛으로 바꾼 것이다. 아마도 음악으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곧 연주회장에 불이 꺼지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나와서 튜닝하기 시작했다. 정리가 된 듯하더니 곧이어 모란이 소녀처럼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바이올린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윤기 흐르는 까만 생머리를 옆 가르마를 타서 등 아래까지 흘러내리게 했고, 오른쪽 귀에 보라색 제비꽃을 꽂아 인형 같은 얼굴을 청초한 소녀의 모습으로 보이게 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에 제우스가 첫눈에 보고 반한 이오를 연상하며 여기저기서 탄성을 내질렀다. 24살이 아니라 14살의 요정 같았다. 하지만 곧 관객들은 그녀의 외모가 아닌 연주 실력에 숨조차 쉬지 못하게 되었다. 청순한 외모와 더불어 열정적인 연주 실력이 오묘하게 조화가 죄자 그녀의 신비로운 매력에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 같아 사람들은 그 모습을 놓칠까 두려워 눈조차 깜빡이지 못할 정도가 된 것이다.
3옥타브에서도 안정적으로 자유 자재로 연주하면서 음정, 박자, 테크닉, 그 어느 것 하나 흔들리지 않고 정확하게 바이올린으로 표출해 내자 지휘자들과 음반 관계자들은 진주를 발굴해 낸 알렉산드로에게 속으로 감탄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마에스트로 비에띠 카를로스는 거만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것으로 유명했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녀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 온 사람처럼 보였다. 동양인의 연주는 다 그렇고 그렇다며 그녀의 연주 역시 형편없을 거라고 말하면서 같이 온 동행과 내기까지 내걸었다.
윤호는 한마디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채 회장이 참으라는 듯 손을 잡아주며 연주가 시작되면 저자의 코가 납작해질 거라고 말해 주었다. 채 회장의 말대로 그 거만한 작자는 모란의 현란한 테크닉과 생동감 넘치는 연주에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고, 휴식 시간에는 친히 그녀의 대기실로 들어가 자신의 오케스트라와 연주해 줄 것을 부탁까지 했다는 것이다. 연주가 끝나자 기자들과 음반 관계자들은 앞 다투어 그녀의 대기실로 달려갔지만 그녀는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 다음날 아침 신문과 매스컴에서는 한국에서 온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바이올렛에 관한 찬사로 시끌벅적했다.
바이올렛의 바이올린 소리에 나의 심장은 터질 것 같았고, 연주가 계속되었다면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 Maestro. 볼프강 자발리쉬 -
제우스가 사랑한 이오가 바이올린을 들고 다시 태어난 것인가? 그녀는 제비꽃처럼 신비롭고 청초했다. 하지만 그녀의 연주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었다.
- 뉴욕 타임즈의 조단 에인쉬 기자 -
난 오늘 밤 제비꽃 소녀에게 내 혼을 빼앗기고 연주회장을 나와야 했다. 그리고 그녀의 연주가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한 난 연주를 하지 못할 것이다.
- Violinist. 아이작 스턴 -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찬사와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고 한국으로 온 것이다. 윤호로서는 그런 그녀가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그런 어마어마한 기회를 아무렇지 않게 내던지고 온 모란이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긴 그녀는 엉뚱하고 사람을 놀래키는 이상한 재주가 있지. 생각에 잠긴 윤호의 팔을 모란이 살짝 잡는다.
"오빠 고집도 나 못지않네. 크큭, 오빠 말대로 곧 서울 갈 테니까 빨리 공항으로 가. 하지만 지금 당장은 곤란해. 짐도 챙겨야 하구. 한 달 정도 더 있다 갈 생각이었는데, 오빠가 이렇게까지 말하니까 일주일 안으로 서울로 돌아갈게."
그녀의 말에 안심이 되는지 윤호는 모란의 정수리를 손으로 헝클어뜨린다.
"자식, 진작에 그럴 것이지. 하하, 이제야 말 잘 듣는 모란이로 돌아왔구나."
"오빠, 우리 말은 바로 하자구. 미국 가기 전까지는 오빠가 내 말 잘 들었다는 거 알지?"
옛날 좋았던 시절을 생각하며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모란은 우울했던 기분이 사그라지는 것 같아 윤호에게 내심 고마웠다. 아침에 윤호의 전화를 받을 때만 해도 기운이 없고 힘들었는데, 그녀의 상태를 눈치챈 윤호가 이렇게 달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참으로 좋은 남자. 좋은 오빠.
모란은 시간에 쫓기며 바삐 걸어가는 윤호를 문밖에서 배웅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 2. 그와 그녀를 위한 운명의 전주(前奏)곡
고려호텔의 화려하고 번쩍이는 엘리베이터 안에 몸을 기대던 제갈윤은 파티가 한창 중인 로즈 스위트룸이 있는 층에서 내려섰다. 화려하지만 우아하고, 현대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고려호텔은 아시아를 비롯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고품격 호텔이다. 올해의 호텔 베스트10에 선정되었고, 프랑스 여행전문지에서 뽑은 세계 5대 호텔에 선정되기도 한 고려호텔은 각 나라 국빈들과 외국에서 온 VIP손님들이 선호하는 최고의 호텔로서 국내는 물론이고, 각 나라의 유명 잡지사에서 일부러 촬영 올 정도로 주위 경관과 객실의 아름다움이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어 내고 있었다.
최고의 호텔인 만큼 이곳 스위트룸 객실 비는 다른 어느 호텔보다 월등히 비쌌고, 이곳에서의 파티는 재력과 권력을 상징했으므로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재벌 자제들의 사교 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오늘 역시 미성제과의 외동딸인 신소영의 스물 여섯 번째 생일 파티를 이곳에서 가장 비싸다고 하는 로즈 스위트룸에서 열고 있는 중이다.
- 이곳 스위트룸은 규모가 각각 다른 35개의 스위트룸을 보유하고 있으며, 각 객실의 팻말은 꽃 이름으로 불린다 -
파티가 열리고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제갈윤은 잠시 멈춰 서서 맞은편 문에 걸려 있는 고급스런 팻말에 눈길을 보낸다.
[Peony Suite Room]
채 회장의 직계가족만 쓸 수 있는 이 스위트룸의 열쇠는 제갈윤도 가지고 있었다. 채병훈 회장의 절친한 벗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특혜를 가지게 되었고, 제주도나 부산으로 출장을 갈 때면 종종 이용하기도 했었다.
생일 파티가 한창 중인 로즈 스위트룸 문을 밀고 들어가자 화려한 객실만큼이나 파티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턱시도와 고급 양복을 입은 남자들과 거의 벗다시피 한 부띠끄 의상을 입은 여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이제 막 파티를 시작한 듯 소란스러웠다. 그런 모습에 익숙한 듯 제갈윤은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미니바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의 등장과 동시에 시끄럽던 객실 안이 한순간 조용해지더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나타날 때면 꼭 한 번씩은 보이는 반응들이다. 물론 파티의 주인공인 소영 역시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나타날 때면 얼이 빠진 듯 쳐다보곤 했다.
큰 키에 잘 어울리는 건장한 체격과 한 번쯤 기대보고 싶은 넓은 어깨, 골프와 테니스를 즐기는 그의 피부색은 탄력 있게 그을려 있었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잘생긴 그의 얼굴은 그리스 신화 속의 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신처럼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넓고 반듯한 이마, 짙고 모양새가 잘 갖추어진 눈썹 아래로 남자의 속눈썹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속눈썹은 아주 길었고, 쌍꺼풀이 없는 크고 어두운 두 눈은 남들을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있어 어떤 때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길고 곧게 뻗은 코는 보기 좋을 정도로 컸고, 항상 다물어져 있는 입술은 키스하고 싶을 정도로 크고 육감적이었으며, 강인한 턱 선 아래로 근육이 굵게 잡힌 목 줄기와 말할 때마다 울리는 그의 목젖마저도 멋졌다. 완벽한 외모와 재력과 권력을 갖춘 그는 혼기를 앞둔 딸들을 가진 부모라면 모두 탐낼 정도로 완벽했다.
소영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제갈윤에 대한 동경과 사랑으로 몇 년 동안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비록 제갈윤과 같은 대재벌은 아니지만 미성제과라면 이쪽 업계에서는 꽤 알아주는 편이었고, 준재벌에 속할 정도는 되었기에 이들과 어울릴 수준은 되었지만 소영은 더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제갈윤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
오빠라고 부르며 따라다닌 지 6년이 되었건만 제갈윤은 그녀에게 관심 없어 했고, 그의 곁을 맴도는 많은 여자들처럼 자신 역시 싸구려처럼 보일까봐 접근도 쉽사리 못하던 참에 생일을 맞이한 것이다. 화려해 보일 것 같은 제갈윤은 실상은 이런 모임에 참석을 잘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제갈윤과 절친한 친구이며 세경건설의 기획이사이기도 한 최호민을 생일 파티에 초대했다.
그녀의 오빠인 신경민과 고등학교 동창인 최호민은 학교 다닐 때부터 그녀의 집에 들락날락하며 소영과도 친하게 지냈다. 한때는 호민을 자신의 결혼 상대자로 생각도 했었지만 제갈윤을 본 뒤로는 그런 생각은 접었다. 물론 호민 역시 어디 한 군데 빠지지는 않았다. 세경그룹의 둘째 아들이며, 현재 세경건설 기획이사이기도 한 호민은 외모도 그렇고 성격이 샤프한 남자였다.
'흥, 혹시나 제갈윤이 안 된다면 호민 오빠를 유혹해야지.'
그런 그녀의 엉큼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갈윤은 미니바에 걸터앉아 생수를 마시고 있는 호민 옆에 앉는다.
"어? 너 안 온다더니 웬일이야?"
파티가 시작된 지 한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건만 호민은 슬슬 지겨워져 나가려던 참이었다. 소영의 간절한 부탁만 아니었다면 이런 여자애들 파티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친구의 여동생이 애원하다시피 부탁을 하는데 뿌리칠 수가 없었다. 꿍꿍이는 윤에게 있다는 걸 알고 있는 호민은 생일 선물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윤은 그의 부탁을 거절했었는데, 마음이 변했는지 지금 나타난 것이다.
"일 끝나고 시계 보니까 저녁 시간이더군. 밥 먹으러 온 거야."
저녁 식사 시간이 아니었으면 오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는 윤의 서툰 변명을 듣고 호민은 친구의 우정에 고마웠다. 자신이 부탁했기 때문에 그가 온 것이다. 서빙하는 웨이터에게 위스키를 부탁한 후 윤은 호민이 피우고 있는 담배를 뺏어 들어 자신의 입에 베어 문다.
"너 남의 담배 뺏어 가는 거 아직도 안 고쳤냐?"
"이상하게 내가 돈 내고 피는 담배는 맛없는데 네가 피우고 있는 담배는 맛있더라구. 하하."
친한 사람 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 농담을 하며 윤은 의자를 빙그르 돌려 파티장 안의 사람들을 훑어본다.
"파티의 주인공이 소영이라구? 신 회장이 외동딸을 아주 귀히 여기나 보군. 이런 사치스런 파티까지 열어주고 말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소영을 바라보는 윤의 눈길을 따라 호민 역시 회전의자를 돌려 소영을 본다.
"그러게. 그런데 참 이상하지? 남매지간인데도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것 같아. 경민이는 부드럽고 점잖은데, 소영이는 딴판인 것 같아. 오랫동안 알아왔지만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변했어."
호민은 경민에 대한 예의로 소영의 험담을 차마 하지는 못하고 말을 빙빙 돌려서 말했지만 윤은 소영을 처음 봤을 때 이미 성격 파악을 끝냈었다. 모델 뺨칠 정도의 늘씬한 몸매와 매년 달라져 가는 얼굴은 성형으로 본래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었지만 짙은 화장으로 매력적으로 보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을 못하고 남이 가지 것에 욕심을 내는 욕심쟁이에다가 자신의 능력으로 서기보다는 남의 힘을 빌려 자신을 빛내려고 하는 허영덩어리였다. 그리고 소영은 눈치 못 챘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자신이 소영이 발라놓은 찜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생각에 피식거리며 호민을 향해 능글거린다.
"쟤랑 잘해 보지 그러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소영이가 고등학교 때 발라놓은 찜이 너라는 소리가 들리던데."
은근슬쩍 놀리는 윤의 말에 호민은 기겁을 하며 남이 들을까봐 주위를 둘러본다.
"얌마,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난 저런 스타일은 딱 질색이야. 저런 속물근성이 다분한 애들은 남자 말아먹는다니까? 그리고 난 네가 나타나서 그 찜에서 해방되었다구. 크큭, 너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나?"
반격에 들어가는 호민이다. 마침 윤이 부탁한 위스키를 가지고 온 웨이터 때문에 대화가 끊겼다. 얼음에 차갑게 식혀진 위스키를 들이키던 윤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시원한 양주의 쓴맛에 기분이 좋아진 듯 말한다.
"흠, 좋군. 그런데 넌 왜 한잔 안 하고?"
"요즘 계속 과음했더니 속이 쓰려서....... 윽."
속이 쓰리다며 배를 쓱쓱 문질러대던 호민이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낸다.
"왜 그러냐? 윽."
윤 역시 자신의 주위로 몰려드는 화려한 의상의 여자들을 보고는 신음 소리를 내뱉는다. 그리고 호민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쟤들만 없다면 그럭저럭 파티는 즐길 만한데 말야."
그의 말을 못 들었는지 소영은 두껍게 마스카라를 칠한 속눈썹을 요염하게 깜빡거리며 윤
의 팔을 잡는다.
"오빠, 못 올 줄 알았는데 왔네? 오빠가 와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
아무리 차갑고 냉정한 윤이었지만 생일인 소영에게 오기 싫은 거 호민이 때문에 억지로 왔다는 말은 못하고 말을 돌렸다.
"로즈 스위트룸은 예약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용케 빌렸구나?"
그의 말에 으쓱해진 소영은 자만심에 빠져 자랑하기 시작한다.
"안 그래도 예약이 된 상태라서 안 된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부탁하니까 금방 빼주던걸? 호홋, 그런데 여기 너무 건방진 것 같아."
간들거리면서 말하던 소영이 갑자기 독기가 어린 목소리를 뿜어내며 씩씩거리는 것이다. 왜 그러냐는 호민의 말에 소영은 화가 잔뜩 오른 목소리로 대꾸한다.
"로즈가 안 된다면 모란 스위트룸을 줄 수 없겠냐고 했더니 절대로 안 된다는 거야. 가족들 외에는 쓸 수 없다고. 맨날 비어있는 객실 하루쯤 빌려주면 어떠냐고 했더니 그래도 안 된데. 흥, 다행히 아버지 때문에 이곳을 빌리게 되었지만."
외국에서 귀빈들이 왔을 때조차 빈 객실이 없어 다른 호텔로 보낼지언정 모란 스위트룸은 아무나 내주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은 소영은 자신이 처음으로 그 룸에서 파티를 연 주인공이 되고 싶어 억지를 부렸으리라는 건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 알았으리라. 사람들이 비웃는다는 것도 모른 채 흥분한 소영이 계속 지껄인다.
"채 회장님 딸 이름을 따서 만든 객실이라며? 유치해서 정말!"
그러자 호민의 옆에 있던 김민성 의원의 막내딸인 효연이 말한다.
"굉장히 못생겼다던데? 그러니 고려왕국의 못난이 공주라는 별명이 붙었겠지. 크큭, 못생긴 얼굴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한다고 하더라. 얼마나 못생겼는지 한번 보고 싶은걸?"
"그러게 말야. 하긴 그 얼굴로 나타나 봤자 상대해 주지 않을 테니 미리 피하는 거겠지."
소영의 말에 그 주위에 몰려 있던 무리들이 웃기 시작했다. 정작 직접 보지도 못했으면서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를 사실인 것 마냥 얘기하는 여자들의 심보 어린 말투와 유치함에 호민은 질린 듯 말한다.
"어허, 점잖은 가문의 여식들이 왜 이러시나. 채 회장님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면 윤이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아지지. 알다시피 제갈 회장님과 채 회장님은 형제보다 더 친한 사이인데 너희들이 그러면 쓰냐? 그리고 모란 룸은 윤이 가족도 쓰고 있는 곳이라고."
어릴 때부터 존경해 온 채병훈 회장의 집안에 대해서 좋지 않은 말을 지껄이는 소영과 그 패거리 때문에 윤은 슬슬 짜증이 나려던 참이었다. 그의 그런 상태를 눈치챘는지 호민이 화제를 슬쩍 바꾼다.
"자자,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그런데 오늘 연주는 없는 거니? 생음악이 있어야 파티 맛이 나는데 말야."
'채 회장네와 윤이 오빠네가 친한 사이였다니.'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소영은 말실수한 걸 알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노릇이고, 화제를 바꿔준 호민이 고맙기만 했다.
"윤이 오빠는 모르겠구나. 진수 오빠 파티 때 호민 오빠도 있었으니까 알겠지만 오늘 그 건방진 기지배 또 불렀으니까 기대하라구. 그런데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한번 알아보고 올게."
소영이 다른 속으로 가버리고,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새로운 인물들이 쏙쏙 들어오자 윤과 호민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벌떼마냥 우르르 떼지어서 빠져나간다.
"진짜 마음에 안 드는 족속들이로군."
윤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호민에게만 들릴 정도로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호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미련을 못 버린 듯 자신들의 주위에서 얼쩡거리는 여자들을 훑어보며 말한다.
"여기 애들 다 그렇지 뭐.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뒤에서는 호박씨 까고.... 그건 그렇고, 너 진수 얘기 모르지?"
그렇지 않아도 소영이가 건방진 여자애 어쩌고 해서 무슨 일인가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국회의원인 부친 백 믿고 깝죽거리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며칠 전에 진수로부터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지만 거절했었다. 보수적이고 명예를 중요시하는 위 의원과는 달리 딸 넷을 낳은 끝에 어렵게 본 막내아들 진수는 응석받이로 자라서이지 개망나니였다.
"나도 그 녀석 꼴 보기 싫어서 안 가려고 했는데 영훈이 자식이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그 파티에 온다고 같이 가자는 거야. 어부지리로 따라갔다가 그 통쾌한 장면을 보았지."
진수의 이야기에 신이 난 호민은 생수 잔을 들이킨 뒤에 계속 말한다.
"마침 우리가 갔을 때는 피아노 치는 남자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플루트로 구성된 연주단이 연주를 하고 있었고, 파티에 참석한 애들은 춤추고 이야기하고 뭐, 한마디로 파티 분위기였지. 고려호텔의 연주단은 명문대 출신들에다가 실력 또한 알아주잖냐. 그날은 피아노 치는 남자만 빼고 다 여자들이었는데 참 예쁘더라고. 그런데 문제는 진수 녀석의 저질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한 거야. 술을 얼마나 처먹었는지 아주 곤드레만드레 되어서는 연주하고 있는 여자들 옷 속으로 십만 원짜리 수표를 한 장씩 꼽아주더라구. 다들 곱게 자란 여자들 같았는데 모욕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두 명이 울면서 뛰쳐나가니까 남아 있던 여자들도 기가 막힌 표정으로 따라 나가더군."
쉬지 않고 말을 하던 호민은 목이 마른지 잠시 말을 끊고 물을 들이킨다. 호민이 말을 끊은 틈을 타서 윤이 말한다.
"인간 저질이군. 그 녀석 무리들은 하나같이 왜 그 모양들인지 모르겠군. 룸살롱 다니면서 못된 짓만 하고 다닌다더니 그날도 그랬나 보군."
"누가 아니래냐? 그래서 말야....."
호민은 그날 있었던 일들을 중간중간 통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 있던 여자들까지 합세하자 또다시 윤의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미니바 쪽이 떠들썩하자 주위에 흩어져있던 사람들까지 무슨 일인가 하고 모여들기 시작했고, 윤과 호민은 사람들에게 파묻힌 꼴이 되었다. 그 사이로 윤은 아주 맑고 고운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갑자기 객실 안으로 베토벤의 운명이 울려 퍼졌다.
"빰빰빰 빠~~~~ 암."
* * * *
화려한 객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피아노 선율만이 거실을 꽉 채우고 있을 뿐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곧 미니바가 있는 방 쪽에서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음이 들려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3~40명의 남녀가 어느 한 부류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원을 감싸고서는 웅성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음음, 지금 연주하면 될까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그들은 여전히 그녀를 등진 채 자신들만의 대화에 빠져 있었다. 고함을 질러도 그들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 같아 모란은 뒤돌아서서 창가에 멋지게 놓여져 있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자신을 또다시 이런 곤란한 지경에 빠뜨린 아저씨를 원망하면서.
* * * *
고려호텔의 총지배인이자 아버지의 대학 후배이기도 한 김현우. 총지배인은 모란이 어릴 때부터 아저씨라 부르며 무척이나 따르던 소탈한 중년의 신사이다. 제주도 호텔에서 일 년 정도 지내다가 이젠 집에 가야 할 때라고 느낀 모란은 평창동 본가로 향했다. 그런데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나와야 했다. 아버지가 프랑스로 출장을 가면서 그녀의 방 인테리어를 부탁하고 갔다고 한다. 아마도 모란이 다음 달 정도 되어서 올 거라 생각하고 그녀가 오기 전에 더 예쁜 방을 만들어 주고 싶은 아버지의 배려 같았지만 당장에 그녀가 자야 할 방이 없었다. 물론 이 넓은 집에 잠잘 곳 하나 없겠냐마는 공사 때문에 집 안이 소란스러웠고, 인부들이 왔다 갔다 하는 통에 정신이 산만해서 공사가 끝날 때까지는 호텔에 있을 작정이었다.
모란 스위트룸이라 적힌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따스하고 편안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 아버지가 가족들을 위해 특별히 만든 객실이었기 때문에 다른 스위트룸보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우아하고 품위가 있었으며, 다른 무엇보다 내 집 같은 편안함이 있어 좋았다.
짐을 대충 정리하고 샤워를 마친 모란은 아저씨와 저녁이나 같이 먹을 생각으로 총지배인실로 들어갔다. 오래간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식당으로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17층에 잠깐 멈춰 서고 문이 열리자 악기를 든 여자들이 누가 쫓아오는 것 마냥 재빨리 타는 것이다. 바이올린과 플루트를 든 여자들이 울고 있었고, 그들을 위로하는 여자들의 모습에 깜짝 놀란 모란과 지배인은 영문을 물었다. 직원 사무실에 데리고 들어가 그들을 진정시킨 후 이유를 물었더니, 위진수라는 작자가 자신들의 드레스 안으로 팁이라며 십만 원짜리 수표를 넣어주더란다. 모란과 지배인은 그의 몰상식한 행동에 분개했지만, VIP고객이었고 또한 정계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위 의원의 외동아들에게 딱히 한 소리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연회담당 지배인이 들어왔다. 지금 당장 연주단을 보내지 않으면 이곳을 고소할거라고 난리를 피우고 있다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는 것이다. 연주단들은 일을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로즈 스위트룸에는 가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었고, 호텔 측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고개인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차에 모란이 슬쩍 말했다.
"아저씨, 제가 가서 연주할게요. 음, 한 시간 정도만 연주하면 되죠?"
김현우는 안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수수한 원피스 차림으로 바이올린을 들고서 그 개망나니가 있다는 로즈 스위트룸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호텔에서 10년 넘게 피아노를 연주해 온 Mr.정은 연주를 하면서 모란에게 눈인사를 보내왔다. 모란 또한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술이 엉망으로 취해서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대고 있는 남자 앞으로 걸어갔다. 곱상하게 생겼지만 왠지 유약해 보이는 남자는 모란이 들고 있는 바이올린을 보더니 냅다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누가 너 불렀냐? 야! 안경쟁이 너 말고 아까 그 예쁜 기지배들 불러오란 말야!"
여기가 무슨 룸살롱인 줄 아나? 기분 나쁘게 반말을 하는 그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모란은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한다.
"고객님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연주하던 분들은 자신들의 실력이 얼마나 형편이 없었으면 점잖으신 고객님이 돈까지 쥐어주며 나가라는 표시를 했겠냐며 이곳의 수준 높은 분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부끄럽다고 연주를 그만하겠답니다."
자신을 치켜세우는 말에 기분이 한껏 좋아진 그 개망나니가 히죽 웃으며 말한다. 아마도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비꼬는 말을 알아들었을 테지만 술에 잔뜩 취한 진수로서는 그녀의 배배 꼬는 말을 알아들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 역시 고려호텔 직원들은 겸손하구먼. 그런데 말야, 네가 우리의 수준에 맞출 수 있을까? 그러면 말이지, 아까 걔네들이 연주한 시시껄렁한 팝 연주말고 비탈리의 샤콘느가 듣고 싶거든? 만약에 그걸 연주한다면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은 용서해주지. 어때?"
"진수, 그만하지. 피아노 연주만으로도 충분하다구. 그리고 그 곡은 웬만한 연주가들도 어려워서 피하는 곡이 바로 샤콘느라구. 우린 이곳에 네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온 것이지 연주 들으러 온 게 아니잖냐. 그러니 이제 파티나 즐기자고."
수려한 외모의 남자가 앞에 나서며 모란을 옹호해 주듯 말해준다. 진수는 바이올린 연주곡이 어떤 것이 있는지 몰랐지만 예전에 사귀던 여자애가 들으면 들을수록 슬퍼진다며 차에서 매일 듣던 곡이 바로 샤콘느였다. 수수하고 안경 낀 얼굴이 얌전해 보였지만 왠지 만만치 않아 보여 진수는 모란을 괴롭혀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늘 못마땅한 듯 자신을 쳐다보던 호민이 여자를 감싸주자 기분이 나빠져서 고집을 피웠다.
개망나니의 말에 모란은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다. 이곳에 올 때만 해도 가벼운 소품곡 몇 곡만 켜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이렇듯 무리한 부탁, 아니, 명령을 하는 이 개망나니의 뺨을 힘껏 갈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제가 그 곡을 연주하면 앞으로 더 이상의 소란은 없다는 걸 믿어도 되나요? 그럼 연주하죠."
지방대학이라도 나왔을까 싶은 이 여자가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 진수는 성의 없이 약속을 해주었다. 피아노 반주도 없고, 악보도 없었고, 속물들 속에서 연주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오늘 이후로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주었으니 자신이 조그만 희생을 할 참이다.
다행히 한 번 연주했던 곡은 잊지 않고 모두 기억했다. 모란이 거실 중앙으로 나아가자 무리 지어 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터 주었다. 바이올린 켤 때의 모란은 평소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말이 없어 있는 듯 없는 듯해 보이지만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하면 그녀 주위로 빛이 모여드는 것처럼 보였고, 연주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혼을 홀리는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지금 역시 그녀가 연주를 시작하고 끝나기까지의 10여 분간의 시간 동안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고, 그녀의 연주에 소름이 끼친다는 듯 손으로 팔을 쓱쓱 문질러 대는 여자들의 모습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띄었다. 호민 역시 모란의 연주를 들으면서 사막에 홀로 버려진 듯한 소름 끼치도록 섬뜩한 느낌에 넋이 빠져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막내 여동생인 민애가 첼로를 전공하는지라 동생 따라 연주회를 많이 다닌 호민은 웬만한 클래식에는 능통해 있었다. 방금 여자가 연주했던 샤콘느는 자기 기량에 자신이 없다면 청중 앞에서 연주하지도 않으며, 음반도 잘 내지 않는다는 아주 까다로운 곡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수수해 보이는 저 여자가 샤콘느를 연주하는 순간 그녀의 모습은 열정적이었고, 진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연주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독기까지 느껴졌다. 아마도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 같다.
연주가 끝나고 몇 분간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개망나니 진수마저도.
그녀는 여운을 남긴 채 진수를 향해 똑바로 걸어가서는 그의 셔츠 안에 수표를 넣어주며 말한다.
"그분들이 팁을 돌려주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그녀는 그곳에서 나왔다. 진수는 몰랐을 테지만 위 의원과 그녀의 아버지는 대학 동문이었고, 위 의원이 정계에 몸담을 수 있도록 막대한 도움을 줬던 사람이 바로 채 회장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모란이 진수에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 이하의 행동은 참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날은 그렇게 흘러갔고, 오늘은 돈 자랑하기 좋아하는 여자가 자신의 생일 파티에 모란을 지정하며 연주를 부탁했다는 것이다. 마침, 이날은 연회담당 잘못으로 연주단들이 다른 객실과 더블 약속이 돼버렸다. 어쩔 수 없이 아저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 방에 들어서게 된 것인데, 불러도 대답 없는 그들에게 자신이 왔다는 표시는 해야 할 것 같아 피아노 앞에 앉았다.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병행하며 레슨을 받은 모란은 피아노 실력 또한 수준급이었다. 한때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놓고 무엇을 전공으로 해야 할지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가장 극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곡은 뭐니뭐니해도 베토벤의 '운명' 이다. 길게도 필요 없고 한 소절이면 충분했다.
"빰빰빰 빠~~~~ 암."
* * * *
진수의 생일 파티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호민의 이야기에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이다가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들려오는 깨질 듯한 피아노 소리에 놀라서 거실로 우루루 몰려 나갔다. 윤과 호민 역시 한 손에 술잔을 들고서 그들의 뒤를 따라 나갔더니 갈색 원피스를 수수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피아노 옆에 서 있었다. 마침 지배인실에 가서 한바탕 쏟아 붓고 객실 안으로 들어오던 소영은 모란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와서 잔소리를 해댄다.
"이봐, 이렇게 늦게 오면 어떡해? 당신 때문에 내 파티가 엉망이 되려고 한다구. 어서 연주
나 해욧!"
여자는 소영의 거만한 말투에 아랑곳하지 않고 보면대 위에 악보를 올려놓으며 연주할 곡목을 체크한다. 호민이 팔꿈치로 윤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그 여자야. 진수를 혼낸 여자."
호민의 들뜬 목소리에 윤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까만 생머리를 뒤로 빗어 넘겨 촘촘하게 땋아 내렸고, 조그만 얼굴에는 까만 뿔테안경이 반을 차지하고 있어 생김새는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붉게 물든 도톰한 입술만이 여자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눈에 띄지 않는 여자였다. 저렇게 소심하고 얌전해 보이는 여자가 진수를 상대로 그런 말을 퍼부었다니 믿어지지 않았지만 호민의 말을 듣고는 잠깐이지만 존경심까지 생겼다.
소영에게서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튜닝을 하는 여자의 모습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곧 Mr.정이 들어왔고, 여자는 소영의 옆을 지나쳐 피아니스트 옆에 서서 선율이 고운 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건방지면서도 당당한 태도에 소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호텔 직원인 주제에 주제 파악도 못하고 감히 국회의원의 아들인 진수를 한방 먹인 이 여자의 콧대를 꺽어주기 위해 불렀건만, 여자는 소영이 심한 말을 해도 잠자코 듣기만 할 뿐 아무 반응이 없다. 오히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여자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이런 여자를 상대로 자신이 열을 내는 건 왠지 우습다는 생각에 그만하기로 했다. 자신이 아니라도 이 여자를 혼내줄 진수가 좀 있으면 오지 않는가. 조금 있다 두고보자는 메시지를 담은 눈으로 모란을 향해 쏘아주고는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윤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저런 여자가 진수 오빠를 상대로 그런 말을 했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그래서 따끔하게 혼내줄 생각으로 오늘 저 여자를 보내달라고 했더니, 글쎄 저 여자는 여기 정 직원이 아니래. 아르바이트 주제에 감히 어딜! 그런데 이상하네. 저 여자 못 보내준다고 했거든. 흥, 그래도 사람은 알아보는 모양이야. 냉큼 올려보내는 거 보니까."
소영의 속물근성인 말에 짜증이 나서 한마디 하려는 차에 소영은 반대편에서 자신을 부르는 친구에게 가버렸다. 소영이 떠난 자리에는 곧 제갈그룹의 안주인 자리를 탐내는 여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 * * *
연주를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을 뚫어질 것처럼 쳐다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 때문에 모란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굴복시키고 제압하는 당당함과 강렬함이 그녀의 연주를 방해하고 있어 모란은 아예 눈을 감고 연주를 했다. 30분 정도 연주하고 5분간의 휴식 시간이 다가왔을 때 겨우 눈을 떴다.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연습했을 때조차 이렇게 피곤하지 않았다. 왜 이럴까? 아마도 저 남자의 부담스러운 시선 때문인가 보다.
"모란 씨,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Mr.정이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가고, 다음에 연주할 악보를 뒤적거리는데 부드러운 음성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곤하시죠? 이거 먹으면 한결 나을 겁니다."
쥬스를 건네주는 남자는 며칠 전 그 개망나니로부터 옹호해 주었던 남자였다.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금테 안경이 그런 그의 모습을 한결 부드럽고 샤프하게 보이게 했고, 친절한 목소리가 모란이 호감을 갖도록 만들었다.
"어머, 또 보네요. 그날은 고마웠어요."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이 웃음으로 벌어지면서 여자의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그 모습이 무척 상큼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호민은 시원스럽게 웃는다.
"하하, 도와준 것도 없었는데요, 뭘. 그래도 진수 덕분에 아가씨의 전율을 일게 하는 훌륭한 연주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클래식은 잘 모르지만 일반학교에서 배운 실력은 아닌 것 같던데. 그렇죠?"
예리한 그의 말에 깜짝 놀란 모란은 새삼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보기보다 클래식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것 같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호감이 갔다.
"고마워요. 잘하진 못하지만 칭찬해 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음, 혹시 듣고 싶은 곡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특별히 연주해 드릴게요."
"어? 진짭니까? 하지만 오늘은 참을게요. 제가 듣고 싶은 곡은 차이코프스키 곡인데 오늘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진 않죠. 나중에 꼭 연주해 준다는 약속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그녀를 그저 평범한 바이올린 연주가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렇듯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며 기분을 좋게 해주는 호민에게 인간적으로 끌렸다.
"그러세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전에 연주한 적 있어요. 음, 약속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호홋."
일 년 전 카네기 홀에서 독주회를 가졌을 때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하는 그녀의 실려에 각 클래식 전문 잡지사와 신문사에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인터뷰 요청 때문에 한동안 그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 모란은 그때를 생각하며 기분 좋게 승낙한다.
"앗, 작품번호가 35번이죠? 그건 저도 무척 좋아하는 곡인데.... 와."
한참 음악 얘기에 몰두하고 있는 그들의 머리 위로 깊고 울리는 듯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저 여우 떼들에게 맡겨놓고 생쥐아가씨와 밀담을 나누고 있었군."
감히 그녀를 생쥐라고 표현하는 거만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그녀가 생각해도 이상했지만 왠지 그 검은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던 그 남자일 거라는 생각에 돌아보니 역시나 그였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모란은 거미줄처럼 가는 실들이 그들 둘을 칭칭 감는 듯한 숨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역시 안경에 가려진 그녀의 눈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긴장감을 느낀 호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의 시선을 자신 쪽으로 돌리려고 말을 걸었다.
"얌마, 숙녀 분에게 생쥐아가씨라니. 사과해."
눈싸움하는 사람들처럼 모란과 윤은 호민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서로가 먼저 눈길을 돌리길 바라면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허, 이거 누가 보면 사랑에 빠진 남녀라고 생각하겠군.'
호민은 그들이 왜 그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그저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1분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온 Mr.정이 의자에 앉으면서 그들의 눈싸움은 무승부로 끝날 수 있었다.
내가 왜 처음 보는 저 촌뜨기 여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인 걸까? 그녀가 돌아보는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것처럼 그녀에게서 눈길을 뗄 수 없었고, 눈썹 하나 깜짝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굳어졌다. 그의 복잡한 심경과는 달리 여자는 너무나도 태평스러워 보여 윤은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그의 눈길에서 벗어난 여자는 피아니스트와 악보를 보면서 곡목을 정하고 있었고, 진수의 일로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 호민은 그녀의 뒤에 서서 자신이 좋아하는 팝을 한 곡 넣어달라고 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겉으로는 태연해 보였지만 모란 역시 그를 보며 느낀 충격에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악보를 훑어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신경 쓰이는 남자는 자신의 옆에 서서 도무지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모란은 퉁명스럽게 쏘아붙인다.
"멀대 같은 아저씨는 저리 좀 비켜주시죠? 연주하는데 방해돼요."
뾰로통하게 말하는 걸 보니 자신이 한 말 때문에 토라져 있다고 생각한 윤은 약을 살살 올리듯 말한다.
"오, 생쥐아가씨라고 해서 화가 난 모양이군. 그렇다면 내 사과하지. 그런 의미에서 나도 신청하고 싶은 곡이 있는데 받아주겠소? 아니면 팁을 줘야 하나?"
그의 말에 피아노 주위의 공기가 이상한 기류를 타듯 점점 퍼져 나갔다. 호민 역시 평소와 다른 윤의 말투에 깜짝 놀라면서 그만하라는 손짓을 해 보인다. 호민의 손짓을 보면서 윤은 말실수를 한 걸 알았지만 자신에게 무심하게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그의 신경을 건드렸던 것이다. 그의 빈정거리는 말에 악보를 넘기던 그녀의 손이 잠시 정지하는가 싶더니 이내 미소를 띤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고마운 말씀이지만, 당신의 팁을 받을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왜?"
"그야 당신의 신청곡은 받지 않을 테니 팁을 받을 일이 없죠. 이젠 진짜 연주 시작해야 해요. 지금 서 있는 곳이 맘에 드는 것 같은데 제가 옮겨드릴까요?"
순진무구한 눈으로 웃으면서 말하는 그녀가 왜 이렇게 얄미울까?
"됐소. 내가 옮기지."
더 이상 그녀와 얘기했다가는 자신의 이미지가 땅으로 추락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먼저 백기를 흔들고 미니바에 가서 독한 위스키를 한입에 꿀꺽 삼켰다. 그의 옆에 서서 호민이 킥킥대며 웃는다.
"크큭, 천하의 제갈윤이 후퇴를 다 하고 웬일이냐?"
그의 놀리는 말에 또 화가 치밀어 오른 윤은 한 잔 더 들이킨다.
"얌전해 보이는 것이 보통내기가 아니군. 저 여자와 결혼할 남자의 처량한 모습이 눈에 다 보이는구먼."
이렇듯 여자 때문에 흥분하는 일이 좀체 없는 윤이 저 여자와 채 5분도 안 되는대화로 이렇게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는 걸 보니 아까 둘이 눈을 마주치면서 뭔가가 오고 간 모양인가 보다.
그러고 있는 사이 거실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 * * *
"오, 너 오늘 잘 만났다. 촌뜨기 네 년이 날 조롱하고서 도망을 가? 너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응?"
나이트클럽에서 그의 친구들과 한참 부킹하며 술 먹고 있는데 소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 또한 파티에 초대받긴 했지만 그곳보다는 나이트클럽에서 쌈박한 애들과 부킹하고, 광란의 밤을 보낼 생각으로 파티장 대신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런데 소영이 30분 전에 전화해서는 그 촌뜨기가 지금 이곳에 있으니 얼른 오라는 말에 눈에 불을 켜고 쏜살같이 달려왔다. 지금 자신의 눈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면서 연주하고 있는 이 건방진 촌뜨기 때문에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었다. 약속만 아니었다면 이 호텔을 뒤집어엎을 생각이었지만 언제든지 촌뜨기가 눈에 띄기만 하면 가만히 놔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단 소영은 자신의 의도대로 진수가 나타나자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진수가 개망나니이긴 해도 자신과 같은 특권층이 아닌가. 그런데 저 보잘것없는 여자애가 진수를 상대로 그런 막말을 했다면 그건 자신들에 대한 도전이었으므로 그런 애를 가만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자신의 파티에서 연주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진수가 왔으니 저 여자애는 그날 도도하게 굴었던 걸 곧 후회하게 되리라.
* * * *
모란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개망나니를 보는 순간 두통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아 어떻게 해결할까 생각하며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데 개망나니가 그녀의 팔을 홱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모란은 혹여 악기에 흠집이 생길까 걱정하며 얼른 바이올린을 품에 꼭 껴안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개망나니가 말한다.
"왜? 오늘고 그날처럼 지껄여보지 그래? 응?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뭐? 아쩌거 어째? 니 까짓 게 감히 나한테 팁을 내던져?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알아도 너무 잘 알아서 탈이지."
속으로 중얼거린 말이 어느 사이에 입 밖으로 새어 나간 모양이다. 그녀의 말에 진수는 진짜 열이 뻗쳤는지 위에 걸치고 있던 윗도리를 벗어서는 카펫 위로 내던져버린다. 파티장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모란과 진수를 중간에 두고 동그랗게 우너을 그리며 그들을 에워쌌다. 그들도 진수의 행동이 잘못된 건 알았지만 한낱 호텔 직원이면서 자신들과 같은 특권층에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무언의 응원에 힘입은 진수는 유치한 말을 술술 내뱉는다.
"호, 니가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없구나. 꼴랑 호텔에서 연주나 하는 주제에 나를 놀려? 너 진짜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서 그 따위 소리를 해? 너 때문에 호텔 문 닫게 하고 싶지 않으면 여기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해. 그럼 용서해 주지."
팔짱을 끼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는 개망나니의 태도에 모란은 가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지 아버지 힘만 믿고 하루하루를 허송세월하는 이 인간쓰레기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속물들에게 치가 떨렸다. 모란이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자 진수는 그녀가 겁을 먹었다고 오해하고는 한술 더 뜬다.
"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무서운가 보지? 하지만 내가 당한 것만큼 너도 당해야겠어. 자, 어서 무릎 꿇고 사과해 보라고."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윤과 호민은 무언으로 그녀를 도와주자는 신호를 주고받았다. 호민이 벽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그려놓은 동그란 원 안으로 들어와서는 진수를 향해 걸어오면서 말한다.
"얌마, 어린 아가씨를 상대로 이게 뭐냐? 네 꼴이 우스워지기 전에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라."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넌 빠져. 엉?"
자신보다 두 살 어린 진수의 건방진 말에 호민이 진수를 곧 때릴 것처럼 한 발 내밀자, 그보다 한 발 앞선 모란이 미소를 띠운 표정과는 달리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술 먹었을 때만 개망나니인 줄 알았는데 말짱할 때도 마찬가지군."
모란의 충격적인 말에 여기저기서 '헉'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고, 호민과 윤조차 그녀의 대담한 발언에 깜짝 놀라서 좀더 지켜보기로 했다.
태어나서 여태껏 그런 충격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던 진수는 일주일 사이에 두 번씩이나 그녀에게서 비웃음이 섞인 말을 듣자 충격을 받았는지 입만 벙긋거리며 멍청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잠시 말을 끊은 모란은 그들의 반응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모습으로 계속 말한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말하는 건데 난 이곳에 연주하러 온 거지 댁의 모욕을 받으러 온 게 아니에요. 댁이 뭔데 나한테 무릎을 꿇어라 말라 그러는 거죠? 그리고 유치해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도대체 나이가 몇이기에 아직까지 아버지 찾고 다녀요? 아버지 바지저고리 붙들고 다닐 나이는 지난 것 같은데 웬만하면 자신의 힘으로 살아보세요. 뭐, 억울하다 싶으면 일러바치세요. 난 상관없으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자 어디선가 힘있는 남자의 짧은 박수 소리가 들려온다. 윤은 벽에 기대선 채 떨어져 서 있는 모란에게 감탄 어린 눈빛을 보내며 말한다.
"멋지군!"
얼굴을 못 들 정도로 자신을 망신시키고 있는 촌뜨기의 말에도 화가 났지만, 평소 자신을 인간 취급도 안 하는 윤의 짧은 한마디에 진수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곧 모란의 작은 얼굴을 향해 손을 날린다.
"쫙!"
고요하던 거실 안이 손과 볼의 마찰음으로 인해 발코니에 있던 유리창이 흔들릴 정도로 그 소리의 여파는 컸다. 곁에 서 있던 호민조차 진수의 날렵한 손놀림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얼굴이 옆으로 돌아간 모란의 모습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이 비열한 자식, 여자한테 손을 대?"
진수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요량으로 오른팔을 치켜드는데, 왼쪽 뺨이 빨갛게 부어오른 모란이 호민에게 바이올린을 내밀며 말한다.
"잠시만 들고 계세요."
얼떨결에 악기를 받아 든 호민은 그녀의 다음 행동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쫙!"
"쫙!"
먼저 모란의 오른손이 진수의 왼뺨을 향해 힘껏 내리쳤고, 곧 이어 왼손으로 진수의 오른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가냘픈 그녀의 체구에서 나왔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때렸던 모양으로 진수의 양쪽 뺨은 그녀의 조그만 손자국이 붉고 선명하게 찍혔다.
맞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작은 별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자신도 모르게 양손으로 양 볼을 감싸고 있던 진수는 또 한 번 모란의 야멸찬 말을 들어야 했다.
"남이 나에게 모욕을 주면 난 그 배로 갚지!"
오만하게 턱을 앞으로 내밀며 입을 꽉 깨물고 말하던 모란은 호민에게 잠시 맡긴 바이올린을 되찾아 와서는 피아노 쪽으로 우아한 발걸음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는 Mr.정에게 눈짓으로 연주하라는 신호를 보내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연주하기 시작했다.
윤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모든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그녀의 자존심이 대단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의 쇼크를 안겨줄지는 몰랐다. 그런 그녀에게 존경심마저 느꼈지만 은근히 걱정되기까지 했다. 진수 성격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윤은 자신이 나서주기로 했다.
치욕적인 모욕을 당한 진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두 주먹을 움켜쥐고는 두고 보자는 말을 남기고 문밖으로 휑하니 나가버렸다. 엘리베이터 앞에 왔을 때쯤, 뒤따라온 윤이 진수의 앞에 서서는 빈정대는 눈빛으로 진수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한다.
"남자 망신은 네가 다 하고 다니는구나. 부끄러운 줄 알라고. 그리고 더 이상 추해지지 말고 여기서 그만해라. 그 여자 말대로 이런 일로 위 의원님이 네 뒤처리하는 꼴불견은 보이지 않겠지? 아, 아니지. 위 의원님 성격에 이번 일 알게 되면 너 또 추방당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남자답게 깨끗하게 잊고 다시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마. 이건 경고니까."
진수는 윤에게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갖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진 그에게 처음에는 존경심을 가지고 다가갔다가 자신을 한심해 하는 윤의 태도에 비굴함을 느낀 후부터는 그를 멀리했다. 그런데 지금 최악의 상태인 그의 앞에 나타나 그 여자를 옹호하며 자신을 비웃는 윤을 향해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형이 그 여자 기둥서방이라도 되는 거요? 왜 나서는 거지? 그건 나와 그 여자 일이니까 빠져."
윤 앞에서는 얼굴조차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로 주눅이 드는 그였지만, 그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다. 그래서 툭 내뱉듯이 말했지만 오히려 싸늘한 목소리로 윤이 진수의 눈을 쏘아보며 말한다.
"이런, 그런 말할 처지가 아닐 텐데. 한 달 전에 홍 사장한테 도박 빚 때문에 사채 썼다는 말이 들리더군. 청렴결백한 자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주 좋아하시겠군. 그리고 대선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이런 이야기가 돌면 그분이 아주 좋아하시겠어. 이 사실 외에도 더 흥미진진한 자네 이야기를 알고 있으니까 행동 똑바로 해. 난 내 말을 거역하는 자와 두 번 말하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냉혹해지지. 그건 너도 잘 알 거야.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군. 잘가라구."
윤은 친히 진수가 엘리베이터에 탈 수 있도록 버튼을 눌러주며 잘 가라는 말과 함께 돌아섰다. 윤의 뒷모습을 보며 진수는 이를 꽉 악물고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오늘의 수모는 그대로 돌려주지. 두고 보자, 제갈윤."
그 복수의 기회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너무 빠른 시간 안에 다가오고 있었다.
** 3. 어긋난 복수
"내가 좀 늦었지? 아버지가 갑자기 호출하셔서 본가에 좀 다녀오느라고."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은 윤은 친구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리에 앉는다. 약속 시간에 맞춰서 온 호민과 경민, 성욱은 일찌감치 한잔씩들 하고 있었고 뒤늦게 온 윤을 향해 야유를 보냈다.
고려호텔 지하에 위치한 이곳 Cantabile Bar는 윤과 그의 친한 친구들이 가볍게 한잔하거나 중요한 고객들을 접대하기 위해 자주 애용하는 곳이었다. 클래식한 유럽풍으로 인테리어를 한 이곳은 은은한 불빛 아래고 우아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고급스러움과 편안함을 지향하는 까다로운 손님들 취향을 다 맞춰주었기에 외국인과 내국인들로 항상 만원이었다. 그리고 일류 가수들의 라이브 음악은 분위기 있는 노래와 때로는 흥겨운 댄스음악으로 손님들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춤추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접대가 아닌 이상은 룸에서보다 홀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지금 역시 윤과 그의 친구들은 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윤의 잔에 양주를 따라주며 호민이 알 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제갈 회장님이 널 집으로 부를 일이라면 보나마나잖아. 뭐, 결혼하라는 말밖에 더 있겠냐? 하하, 어쨌든 모두 바쁜 사람들인지라 모이기 힘든데 한자리에 모였으니 건배라도 하자구. 그리고 성욱이가 드디어 결혼이란 올가미에 걸려들었단다. 축하해야지!"
모두들 서로의 일 때문에 바빠서 이렇게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날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오늘은 시간이 어떻게 잘 맞았는지 의기투합이 되어 이곳에 모인 것이다.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성욱을 보며 윤이 잔을 들어 올린다.
둥글둥글한 얼굴에 성격 또한 온순하고 착한 성욱은 일진대학의 이선진 총장의 장남이다.
"우리의 건강과 사업을 위하여! 그리고 무덤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성욱을 위하여!"
모두들 웃으며 "위하여"를 외치고 자신에게 할당된 잔을 쭉 들이켰다.
"성욱이 너, 우리 몰래 감쪽같이 연애를 하더니 드디어 가는 거냐? 날짜는 잡았구?"
조용한 성격답게 목소리조차 작은 경민이 말을 건네자 성욱이 연신 빙글거리며 웃음 띤 어조로 말한다.
"약혼식하고 나서 결혼식 날짜 잡으려구. 이제 너희들 같은 애들하고 어울리지 못해서 어떡하냐? 하하, 사실은 독신생활 더 즐기다가 결혼할 생각이었는데 미진이를 만난 순간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더라구."
성욱은 일진대학의 교수였고, 그의 조교로 있던 미진과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호민이 부러운 듯이 말한다.
"임마, 뭐가 그렇게 좋아서 계속 히죽거리는 거냐? 하하, 사업의 목적으로 하는 정략결혼이 아닌 사랑으로 맺어져서 내가 더 기분이 좋다. 미진 씨처럼 참한 아가씨를 만나게 된 걸 복으로 알라구!"
담배를 피우며 주위를 둘러보던 윤은 호민의 말에 껄껄대면 웃는다.
"하하, 너 요즘 여자들처럼 봄 타냐? 만날 때마다 결혼타령이니. 그러지 말고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선이라도 봐라. 그 중에 네 맘에 드는 여자가 있을지 누가 아냐? 아 참, 네가 찾고 있다던 그 여자는 찾았냐?"
"찾았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보쌈해서라도 내 방에 꼭꼭 숨겨두지."
친구들의 말이 금시초문인 성욱은 깜짝 놀라며 호민에게 영문을 묻는다.
"너 좋아하는 여자 있었냐? 그런데 그 여자가 너 싫대?"
"말 한 번 못 걸어봤단다. 하하."
윤이 놀리면서 안주로 나온 땅콩을 입에 집어넣는다. 호민은 성욱을 위해서 그의 마음을 뺏어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1년 전인던가? 미국에 일주일간 출장 갔었지. 마침 민애가 있는 곳이어서 걔 아파트에서 지냈는데 민애가 연주회 가자고 하더라구. 한국에 있을 때도 둘이 자주 갔었으니까 흔쾌히 따라갔지. 그런데 민애가 말하기를 오늘 연주회는 아주 특별하다고 하는 거야. 왜 그러냐고 했더니 20대의 한국인 여잔데 유학 왔다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알레산드로의 눈에 띄어서 그의 밑에서 사사하다가 오늘 첫 독주회를 연다는 거야. 그게 뭐 대단한거냐고 했더니, 알렉산드로가 처음으로 인정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인데 대단하지 않냐면서 주위를 둘러보라고 하더군. 정말 그 넓은 연주회장이 빽빽했고, 이름 있는 거장들이 VIP석에 앉아 있더군. 머리에 보라색 제비꽃을 꽂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무대 위로 걸어 나오는 순간 입이 저절로 벌어졌어. 정말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순수하고 아름다웠지. 처음에는 그녀의 외모에 입이 벌어졌고, 그 다음에는 그녀의 연주에 눈조차 감을 수가 없었어. 진짜 황홀했다고."
그때의 그녀가 또다시 그의 뇌리를 어지럽히는지 호민은 넋을 잃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맺었다. 그의 황홀한 옛 생각을 뚫고 경민이 말한다.
"외모도 완벽하고 연주 실력까지 최상이면 우리 나라 매스컴에서 가만둘 리가 없는데."
그러자 호민이 정신을 차린 듯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한다.
"안 그래도 바이올렛의 연주가 끝나고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기자들과 음반사 관계자들이 그녀의 행방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는데, 연주가 끝나자마자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거야. 그 이후로 그녀를 본 사람이 없다는군. 그런데 그곳 연주회장에서 채 회장님을 봤거든. 그분이 그쪽에 관심이 있었나?"
"채 회장님 딸이 그곳에 있으니 같이 연주 보러 갔겠지 뭐. 그건 그렇고 그 바이올렛인가 하는 여자에게는 미련 두지 말고 다른 여자도 만나 봐. 네 말 들어보니까 그 여자가 네 앞에 나타날 리는 없을 것 같다."
윤의 말에 농담조차 진지하게 하는 경민이 슬며시 웃으며 호민을 향해 은근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여자 하나 소개해 줄까?"
바이올렛에 대해서 말할 때의 그 황홀한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호민은 눈을 빛내며 경민의 빈 술잔에 고급양주를 부어주면서 손바닥까지 비벼대며 아부한다.
"윤이는 몰라도 너라면 내가 믿지.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라고. 그런데 누군데? 내가 아는 집안의 여식인가?"
"녀석, 금방 돌변하네. 크큭. 응, 키 크고 늘씬한데다가 생긴 것도 괜찮은 것 같고, 집안도 그만하면 너와 어울리겠군."
호민의 관심을 부추기듯 뜸을 들이며 경민이 말하자 호민은 입맛까지 다시며 안달을 했다.
"누군데? 누구야?"
여유 있게 술잔에 든 양주를 한 모금 먹은 후, 경민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여자의 이름을 강조하듯 말한다.
"신. 소. 영."
경민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허탈한 표정의 호민을 빼고는 다들 고개를 젖혀대고 웃기 시작했다.
윤의 등장과 동시에 Bar에 있던 여자들은 그의 테이블로 눈길을 주고 있다가 남자들의 호쾌한 웃음소리에 반했다는 듯 추파를 보내고 있었다.
* * * *
"윤아, 정신차려봐. 이제 그만 나가자."
웬만해선 술에 취하지 않는 윤이 빈속에 스트레이트로 독한 양주를 계속 들이키더니 결국에는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기대어 잠이 든 것이다. 성욱은 가족들 모임이 있어서 먼저 나갔고, 남아서 술을 먹고 있던 호민과 경민마저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많이 마셨던지라 더 이상 마셨다가는 정신을 잃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우 깨워 Bar에서 나오자 윤이 정신을 잠깐 차린 듯 부축하고 있는 호민에게 말한다.
"오늘 왜 이렇게 취하냐? 음...... 난 여기서 자고 갈 테니까 너희들은 먼저 가라."
보통 때 같으면 우겨서라도 자신의 아파트로 갔을 테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몸도 무겁고, 술에 취한 몸은 더 이상 서 있기도 힘들어 모란 스위트룸 키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호민과 경민도 그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윤을 겨우 부축해서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누이자마자 잠 속으로 빠진 윤의 옷을 호민이 벗기기 시작했다. 속옷만 남겨두고 다 벗긴 후에 경민과 호민은 침실 문을 조용히 닫고 나왔다.
* * * *
호민이 택시를 탔을 즈음, 또 한 대의 택시가 호텔 정문 앞에 섰다. 오래간만에 만난 지혜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수다를 떨다가 새벽 12시를 넘긴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란 모란은 서둘러 지혜의 집을 나섰다. 자고 가라는 지혜의 말이 고맙긴 했지만 항상 여자는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하며 잠자리는 아무 곳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돌아가신 엄마의 말이 떠올라 사양하고, 일산에서 택시를 타고 온 것이다. 그 전날 밤에도 악몽 때문에 잠을 설친 모란은 피곤함이 몰려오자 어서 빨리 룸에 들어가서 잘 생각으로 발걸음을 빨리 했다.
커튼을 열어놓아서인지 달빛이 거실 안을 시원하게 비추고 있었고, 모란은 굳이 거실 불을 켜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바로 욕실로 향했다. 10분 만에 샤워를 끝내고 몸에 바디로션을 바른 뒤 속옷만 입고서 편안한 침대로 곧장 뛰어들었다. 시트 속으로 들어온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잠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모란은 그 느낌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깊은 수면으로 빠져들었다. 며칠 동안 그녀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던 그 강렬한 눈빛의 사나이가 옆에서 자고 있는 걸 알았다면 그녀는 편하게 잠들지 못했으리라.
* * * *
윤과 모란이 서로를 의식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을 즈음, 모란 스위트룸 문밖에서는 진수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윤과 모란이 한방에 있는 것을 확인한 진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꺼내어 든다.
"아, 박 기자님? 잘 지내시죠? 요즘 기삿거리가 될 만한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제가 도움이 될까 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네, 네......... 하하, 그럼요. 연예인보다 더 인기 좋은 제갈윤의 스캔들인데 군침 돌지 않습니까? 재벌 3세와 호텔 여직원의 하룻밤의 사랑! 멋지죠? 하하, 물론 제목이야 박 기자님이 알아서 하시는 거고, 전 그냥 제보만 드리는 겁니다. 이 정도의 기사면 대박 아닙니까? 네...... 네? 여기는 고려호텔 1105호 모란 스위트룸이요. 하하, 사례는 무슨.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시라구요. 그리고 아시죠? 제보자의 비밀은 보장하는 거. 네, 물론 지금 안에서는 두 사람이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죠. 다른 기자에게 넘어가기 전에 빨리 서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내일 신문을 기대하죠.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네, 그럼."
전화를 끊은 진수는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간다.
* * * *
1시간 전.
제갈윤에게 이를 갈고 있던 진수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섹시한 여자와 화끈하게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고려호텔로 향했다. 여자가 간단하게 칵테일이라도 하자고 해서 Cantabile Bar로 들어가려는 순간, 마침 술에 취한 경민과 호민이 인사불성이 된 윤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본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술에 취한 그들이 룸 하나 빌려놓고 다같이 자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그는 부킹으로 만난 여자와 칵테일을 마시면서 끈적거리는 농담을 하며 지분거렸다. 그러자 곧 여자가 야릇한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왔고, 앉은 지 20분도 채 안 되어서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고 로비로 들어섰다. 그때 호텔 정문을 밀고 나가는 호민과 경민의 모습이 눈에 띄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 뒤를 따라 나갔더니 역시나 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복수할 기회를 하늘이 내려준 건지, 호민이 탄 택시가 떠나자마자 그 자리에 또 한 대의 택시가 서더니 자신을 사교계에서 웃음거리로 만든 그 촌뜨기가 택시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며칠 전 윤이 자신에게 경고했던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남의 일에는 상관하지 않던 윤이 자신을 협박하면서까지 여자를 감싸주기에 단지 여자를 불쌍히 여겨서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둘이 호텔에서 밀회를 나눌 정도로 은밀한 관계였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위진수의 눈에 띄었으니 너희 둘은 각오하고 있으라구.
진수는 로비에서 여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모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의 예상대로 여자는 윤이 들어갔던 룸으로 들어갔고, 진수는 연예계에서 악명 높은 박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제갈윤과 촌뜨기를 전국적으로 망신 줄 생각으로 제보한 것이다.
스포츠 신문 제 1면에 어떤 제목으로 나올까 생각하면서 진수는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향해 내려갔다. 여자는 기다리다 지쳐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진수는 하룻밤의 쾌락 대신 몇 달 동안 웃음거리가 될 제갈윤에게 복수를 했다는 짜릿한 기분에 한껏 기분이 좋아져 호텔을 나섰다.
** 4. 그와 그녀가 잠든 사이에
"여보, 전화 받아보세요. 급한 것 같은데."
한 여사는 곤히 자고 있는 남편의 어깨를 살며시 흔들며 전화기를 손에 쥐어준다.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는 웬지 기분이 나빠서 한 여사가 직접 받지 않았지만, 오늘 밤은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아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는 중에 전화를 받은 것이다.
잠결에 전화를 받아서인지 목소리가 가라앉은 제갈석은 상대방이 충격적인 말을 했는지 벌떡 일어나 앉는다.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 보게."
한 여사는 목청을 높이는 남편의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며 가까이 다가와 앉는다.
"음..... 그래서 윤이가 여자와 같이 호텔에 있다고?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가 여자와 호텔에 있는 게 그 무슨 대수라고 이 새벽에 전화한 건가?"
놀란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아무 일이 아니라는 듯 오히려 차분하게 말하는 제갈 회장의 목소리에 오히려 박 기자가 당황해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지만 재벌 3세와 호텔 여직원의 사랑이란 타이틀은 세간의 관심을 끌 만큼 흥미진진하죠. 그야말로 왕자와 신데렐라 이야기 아닙니까? 무엇보다 제보한 사람의 사회적 위치가 어느 정도 있는 탓에 이번 기사를 내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회장님과의 친분을 생각해서 먼저 알려드리고 기사를 내보내는 게 예의일 것 같아 전화 드린 겁니다. 참, 그리고 그 여자가 이번 일을 빌미로 방송국이나 잡지사를 돌아다니면서 떠벌리고 다닌다면 회사의 이미지에도 좋지 않을 겁니다."
박 기자의 설득력 있는 말에 제갈석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갑자기 무엇인가를 생각해 낸 듯 빙긋이 웃으며 수화기에 대고 말한다.
"흠, 자네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군. 박 기자, 먼저 연락해줘서 고맙네. 그리고 내 자네한테 부탁 하나 하지. 딱 2시간만 나한테 시간을 주게. 그 후로 자네가 기사를 쓰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터이니. ........ 음, 알았네. 내 이 보답은 추후에 다 갚아 주겠네. ...... 암, 그렇고 말고. 그럼 들어가세나."
전화를 끊은 제갈석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다. 한 여사 또한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남편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 또한 알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제갈석은 한 여사에게 같이 갈 곳이 있다며 옷을 입으라고 한다. 영문도 모른 채 한 여사는 남편의 서두르는 목소리에 아무 것도 물어보지 못하고서 집을 나선다.
* * * *
실크처럼 매끄러우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운 무엇인가가 자신의 맨몸에 부딪혀온다. 윤은 잠 속에 빠져들면서도 편안하고 따뜻한 촉감이 좋아 꼬옥 껴안아 주었다. 자신의 품안에서 그 무엇인가도 기분이 좋은지 한숨을 포옥 내쉬었고, 그 향기가 윤의 콧속으로 상큼하게 스쳐 지나간다.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너무나도 여성스럽고 향긋한 꽃향기에 흠뻑 젖어든 윤은 품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놓치기 싫은 듯 두 팔 가득히 품는다. 그건데 그 무엇인가가 그의 등을 훑어 내리듯 만지더니 이번에는 평평한 가슴으로 이동해서는 확인하듯 자꾸만 만져댄다. 깊이 잠들긴 했지만 그 무엇인가가 그의 몸을 자극해 오자 본능적으로 그이 아랫도리가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여자가 옆에 있을 때 취하는 남자의 습관처럼 자신의 손이 그 무엇인가의 등을 쓰윽 만지다가 더 아래로 내려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말랑말랑한 것을 진흙 주무르듯 주물럭거리면서 신음 소리를 냈다. 이대로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무엇인가와 침대에서만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며 놓치기 싫은 듯 그 무엇인가를 품속에 더욱 끌어당긴다.
잠들 때면 항상 테디 인형을 껴안고 자는 모란은 복슬복슬하던 털은 온데간데없고 탄탄하고 매끄럽게 변신한 곰 인형이 자신을 껴안아 오자 다른 어느 때보다 기분 좋은 느낌을 받으며 더욱더 곰 인형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손 아래로 닿는 느낌이 좋아 통통한 곰 인형의 몸을 잠결에 이리저리 만져보았지만, 곰 인형은 어느 사이에 탄력 있는 근육질로 변해 있었고, 짧은 다리가 자신의 허벅지 위로 놓여질 만큼 길어졌다. 이때부터 인형이 이상해졌음을 느꼈지만 참으로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포근한 느낌이 좋아 그대로 꿈속을 헤맨다. 그런데 곰 인형에게 어느 사이에 손까지 생겼는지 자신의 몸을 이리지리 만져대는 것이 아닌가? 급기야는 그녀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신음 소리까지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위로 자잘한 바람이 왔다 갔다 하면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우리 삼돌이가 술도 먹나?
의식에서는 자신이 항상 껴안고 자는 인형이 아님을 알았지만, 꿈속에서 삼돌이가 순식간에 멋있는 왕자로 변해버렸고, 곧 자신을 향해 사랑 고백을 하면 껴안아 주자 모란은 지금 느끼고 있는 모든 것들이 꿈이라고 생각하며 더욱더 꿈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근사한 왕자를 놓치기 싫어 매달리듯 꼭 껴안는다.
윤과 모란이 서로를 찾으며 꼭 껴안고 잠들어 있을 즈음, 제갈석과 한 여사는 침대 맡에 서서 그들의 애정 어린 몸짓을 보며 빙긋이 웃고 있다. 커튼을 열어둔 창문 안으로 달빛이 새어들어 침실을 은은하게 비추자 그들의 모습은 멜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연인의 모습 같았다. 한 여사는 약간은 민망스러운 얼굴로 남편을 향해 눈썹을 치켜세웠고, 제갈석은 이만 나가자는 표정을 지으며 침실 문을 조용히 닫고 나왔다. 마침 제갈석의 전화를 받고 황급히 달려온 채 회장이 거실로 들어선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모란이와 윤이가 함께 있다니!"
호텔에 둘이 같이 있으니 빨리 오라는 제갈석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라서 자다가 부리나케 달려온 채 회장이다. 그리고 침실로 달려가려는 채병훈을 제갈석이 잡는다.
"어허, 이 친구 진정하고 여기 좀 앉게나. 자네 피곤해 보이는구먼. 여보, 여기 생수 좀 갖다주구려."
출장 갔다가 어제 저녁 늦게 도착한 채 회장은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피곤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에구, 한 여사님도 계셨군요. 너무 놀라서 인사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이제야 한 여사가 눈에 들어온 채병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인사를 한다. 한 연사는 채 회장에게 물 잔을 건네주며 남편 옆에 다소곳이 앉으며 말한다.
"아니에요, 호홋. 이제부터 이 양반 이야기 한번 들어보세요. 아무래도 이 시간 이후로 우리 집안과 채 회장님네가 좋은 인연을 맺을 것 같아요.
호텔로 오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한 여사는 앙큼한 미소를 지으며 채 회장에게 말을 건넸고, 채병훈 또한 한 여사의 의미심장한 말에 더욱 궁금해졌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친구에게 빙긋 웃어 보이며 제갈석은 말한다.
"조금 전에 박 기자에게서 전화를 받았네. 어떤 녀석이 박 기자한테 윤이와 호텔 여직원이 함께 밤을 보내고 있으니까 취재하라고 제보를 넣었나 보더라구. 아마도 윤이한테 유감이 많은 녀석이었나 봐. 다행스럽게도 박 기자는 기사를 터뜨리기 전에 나한테 먼저 알려주었던 거지."
친구의 말을 중간에서 끊으며 채병훈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아니, 그럼 말이 이상하지 않은가. 호텔 여직원이라고 말했다며? 그런데 왜 자네는 모란이라고 생각한 거지?"
채 회장의 순진한 말에 제갈석은 약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우리 윤이가 비록 여자를 좋아하는 놈이긴 해도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서 아버지 친구의 호텔에 올 녀석은 아니네. 더 더욱 이곳에서 그럴 일은 없지. 그리고 며칠 전 여기 커피숍에서 우연히 모란이를 봤었네. 자네 출장 가 있는 동안 이곳에 있는다고 하더군. 그러니 말이 딱딱 들어맞지 않나?"
"그럼 지금 둘이 같은....."
말을 흐리는 채 회장을 바라보며 한 여사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뒷말을 이어준다.
"윤이와 모란이는 한 침대에서 잘 자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호호."
보통 이런 상황에서의 부모라면 기절해도 시원찮을 텐데 오히려 잘됐다고 말하는 제갈석 내외를 채 회장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하하, 이 친구 딸 가진 부모라고 인상 쓰는 거 보게나. 우리 애들 연결해 주기로 한 거 생각 안 나는가? 오늘이 바로 절호의 찬스라구. 박 기자 말 듣는 순간 기발힌 생각이 떠오르더군. 30분 후에 기자들이 이곳에 올 거네. 모든 상황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척척 들어맞으니까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구. 자네도 이의 없겠지?"
이제서야 친구의 의도를 파악한 채 회장은 껄껄 웃는다.
"역시 너구리 제갈석이로구먼. 그런데 저 똑똑한 애들이 우리 생각대로 따라줄지 모르겠구먼."
"우린 그 애들보다 인생 경륜도 더 오래됐고 또한 더 약았지. 저깟 것들이 안 넘어오면 어쩌겠나. 하하. 그런데 우리 연극을 좀 해야 돼. 모란이와 자네 사이가 좀 그렇긴 하지만 모란이는 그 누구보다 자네를 사랑하니까 자네 병을 좀 이용하자고...... 괜찮겠지?"
딸을 속여야 한다는 게 꺼림칙했지만 딸을 위해서 하는 일이기에 채 회장은 친구의 말에 따르기도 했다.
"좋아, 그러지. 그럼 이제 저 애들을 깨우러 들어가야 하는 건가?"
채 회장의 말에 한 여사는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여보, 우리 잘해 보자고요. 채 회장님두요, 호호. 오래간만에 우리 아들의 당황해 하는 표정을 보게 생겼군요. 아이, 신 나라! 자, 그럼 들어가 볼까요?"
애처럼 신나서 침실 쪽으로 걸어가는 한 여사의 뒤를 쫓으며 제갈석과 채병훈은 킥킥거리며 웃는다.
* * * *
"자, 어떡하겠니? 이제 20분 후면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이 들이 닥칠게다. 그 전에 해결 보자꾸나."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훌쩍거리는 어머니 - 물론 연극이었지만 - 와 그 어느 때보다 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 그리고 채 회장의 표정에 윤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앉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의 애처로운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모란도 또한 처음 보는 아버지의 무표정한 모습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무릎 위에 놓여진 자신의 두 손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런데 크고 강인해 보이는 손이 자신의 손을 꼭 잡아주는게 아닌가. 둘은 서로를 바라보느라 몰랐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세 사람은 그들 몰래 고개를 돌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관심이 없는 건 아니로군."
제갈석은 친구의 눈을 향해 무언으로 그 말을 전했다. 그러자 채병훈 역시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모란은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윤의 눈을 보다가 또다시 그의 강렬한 기운에 끌려갈 것 같아 눈을 살짝 내렸다. 그의 품에 안겨 깨어났을 때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귀에 익숙한 중후한 목소리의 호통소리와 찢어질 듯한 여자의 비명소리에 깨어나기 싫은 잠에서 억지로 일어났고, 순간 자신의 놀란 눈과 마찬가지로 믿어지지 않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곰 인형을 끌어안고 잤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리에는 그녀의 마음을 며칠 동안 어지럽힌 사내가 자신의 몸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꼭 끌어안고 있는 게 아닌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던 그들은 침대 발치에 서서 노기 어린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들의 부모를 보았다.
그때까지도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던 윤과 모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떨어졌지만 거의 벗다시피 한 모습으로 이불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시트를 가슴께까지 끌어올리고 침대 반대쪽으로 서로 떨어져 앉았다.
역시 위급한 상황일 때는 남자의 순발력이 더 빠른가 보다. 윤이 오히려 화를 내며 그들 보모를 향해 말한다.
"아니, 이게 어찌된 겁니까? 이 여자는 왜 여기에 있는 거며,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채 회장님까지 여기에 웬일입니까?"
아직 술에서 깨지 않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안고 윤은 뒤죽박죽이 된 상황을 풀어볼 생각으로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질문을 퍼부어 댔다.
윤이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자 모란 역시 옆에 있는 남자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떤 연유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낯선 남자와 침대에 있는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였고, 거기에다가 제갈 회장부부에게 이런 추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모란은 부끄러워 얼굴조차 못 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의 침대 위로 그녀가 몰래 들어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발끈해진 모란은 윤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퍼부어 댄다.
"무슨 소리에욧! 당신이 내 침대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이 룸은 우리 가족만 쓸 수 있는 전용 룸이라구요. 잠깐, 아버님 어머님이라뇨? 그럼 저분들이 당신 부모님? 그럼 당신은 제갈 회장님의 아들? 어떻게 된 거죠?"
그녀의 정신없이 퍼붓는 질문에 답해 줄 사람은 한 여사와 아버지밖에는 없다는 듯이 그들을 본다. 모란의 횡설수설하는 말에 윤 또한 깜짝 놀란다.
"아니, 여기가 당신 방이라고? 여긴...... 헉!"
이제야 윤은 그녀가 누구인지 감이 잡혔다. 말로만 듣던 고려왕국의 못난이 공주 모란이었던 것이다. 채 회장의 딸에게 못난이 공주라는 별명을 붙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건 좀 오버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황해 하며 시트로 벗은 몸을 가리려고 애쓰는 모습이 순진한 소녀처럼 보이게 했고, 핑크 빛 볼과 붉은 입술이 청순함과 섹시함을 동시에 엿보이게 했다. 순간적으로 조금 전까지 그녀의 몸을 더듬었던 생각에 미치자 이상야릇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뚫고 제갈 회장이 말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 말하기는 좀 어색하구나. 둘이 옷 챙겨 입고 거실로 나오도록 해라. 빨리해야 할 게야."
냉정하게 한마디 남기고는 훌쩍거리는 한 여사와 말 없는 채 회장을 데리고 거실로 나가버린다. 그제야 윤과 모란은 등을 도린 채 옷을 챙겨 입는다. 먼저 옷을 입은 모란이 윤의 등에 대고 화가 잔뜩 오른 목소리로 몰아붙였다.
"여긴 내방이고, 당신이 왜 내 방에서 자게 되었는지 말해 주어야 할 거에요!"
소영의 생일날에 갑자기 사라진 그를 연주하면서도 은근히 찾았었다. 한참만에 돌아온 그는 호민과 잠시 얘기하는가 싶더니 나가버렸고, 그 이후로는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순간에 마주칠 줄이야.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침대 속에서라니.
황당하고 부끄러운 일을 겪게 한 윤에게 화가 치밀어 올라 그를 향해 분통을 터뜨렸지만 그는 오히려 차분한 음성으로 대꾸한다.
"당신이 채 회장님 딸이라는 건 나도 방금 알았고, 내가 누구인지는 당신도 알았을 거요. 알다시피 이곳은 당신 가족들도 쓰지만 채 회장님의 특별 배려에 우리 가족도 쓸 수 있는 룸이오. 어젯밤에는 술에 취해서 이곳에서 묵었던 거요. 당신이 이곳에 있는 걸 알았다면 내가 이곳에 올 이유가 없지 않겠소. 아마도 내가 자고 있을 때 당신도 미처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잠든 것 같으니 당신이나 나나 잘못을 가리기에는 좀 그런 것 같군. 그리고 우리 두 사람만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간단하게 끝날 일이지만 부모님까지 이곳에 온 걸 보면 더 심각한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으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요."
윤 역시 그녀 못지않게 당황하고 부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누구와 자든 상관이 없을 정도의 성인이었고 사생활을 존중해 주눈 부모님이었지만, 귀로 듣는 거와 눈으로 직접 아들의 그런 모습을 목격하는 건 또 다른 일인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냉정하고 일목요연하게 말하는 윤의 말을 들어보니 그 또한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란은 아버지의 슬프면서도 화난 표정만이 신경 쓰일 뿐이다. 옷을 다 입은 윤은 창가에 서서 밖을 멍하니 보고 있는 모란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왜 그렇게 꼿꼿하고 자존심이 강한가 했더니 채 회장님을 닮아서였군. 솔직히 진수 녀석을 한방 먹여주었을 때 감탄했었소. 그러니 지금 역시 그때처럼 힘을 내라구. 자, 그럼 나가봅시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봐야 할 것 아니겠소."
걱정스러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왠지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에 윤은 모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소파에 나란히 앉자마자 덫에 걸려버렸다.
** 5. 눈물 한 방울로 결혼은 시작되고?
"겨.... 결혼이라니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결혼이라뇨?"
제갈 회장의 결혼하라는 말에 윤과 모란은 동시에 목청을 높였다.
"우린 오늘 처음....... 아니, 그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거의 모르는 사이라고요. 그런데 우연히 한 침대에 같이 있었다고 해서 결혼이라니 말이 됩니까? 그리고 아까부터 이상했던 건데 왜 아버님 어머님과 채 회장님이 이곳에 있을 수 있었던 건지 궁금합니다."
윤의 말을 예상한 듯 제갈석은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으며 말한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니? 혹시 우리가 꾸민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능청스럽게 말하는 아버지의 말에 윤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그러게 네가 평소 행동을 똑바로 하고 다녔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크게 번지지 않았을 게 아니냐. 웬만한 연예인들보다 더 매스컴에 자주 오르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게지. 너에 대한 조그만 일이라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기자들에게는 이번 일은 아주 큰 기삿거리일 게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냐고 물었더냐? 박 기자가 제보를 받았다더구나. 너와 여자가 객실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 아마 그자가 박 기자 외에도 다른 신문사에까지 연락을 했을 테니 조만간 그들이 들이닥칠 게다."
그 녀석은 박 기자에게만 전화를 했을 테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 제갈석은 각 신문사와 방송국에 전화를 해서 같은 시간에 올 수 있도록 조처를 미리 해두었다. 그 생각에 웃음을 삼키며 마치 생각할 여유를 주듯 제갈석은 입을 다물었다.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는지 모란은 억울해 하며 한마디 한다.
"그렇다고 결혼까지 할 필요가 있을 까요?"
그녀의 말에 한 여사가 엄격한 목소리로 어림도 없다는 듯 모란을 향해 말한다.
"우리들 역시 너희들이 아무 일 없었다는 건 믿는다만 사람들은 그런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들이 생각하고 싶은 대호 생각하는 간사함이 있단다. 이번 일 역시 너희들이 같은 침실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너희 둘을 그런 사이로 생각할 건 삼척동자라도 알 게야. 그리고 모란이 넌 혼기가 꽉 찬 여자다. 그것도 채 회장님의 무남독녀인 네가 내 아들과의 이런 스캔들이 터진다면 넌 곧 따돌림당할 수도 있어.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요즘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너도 네 아버지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윤아, 난 내 아들을 명예를 지킬 줄 아는 남자로 키웠다. 네가 그 전까지 사귀었던 여자들은 다들 자기 몸 하나 지킬 줄 알고, 끝날 때는 깔끔하게 처신을 잘하는 여자들로만 사귀었다는 거 이 에미가 잘 안다. 하지만 모란이는 그런 애들하고는 다르다는 걸 말해 주고 싶구나. 내 말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잘 알아들었겠지?"
항상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던 어머니가 이렇게 굳은 표정과 엄격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강요 아닌 강요를 하자 윤은 도망갈 기회가 점점 멀어짐을 느꼈다. 애초부터 결혼에는 관심이 없던 윤은 이렇게 쉽게 끌려가기 싫었지만, 모란의 떨림이 자신에게 전해오자 난감해졌다. 그 여직원이 채 회장님의 무남독녀라는 사실이 기자들에게 퍼지기 시작하면 모란은 우리 나라에서 웬만한 집안에 시집가기는 힘들 것이다. 자신이야 남자고, 그런 일쯤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길 수 있지만 여자인 모란은?
한참 생각을 하고 있는 윤의 머리 위로 채 회장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란아,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이런 일로 너에게 억지로 결혼을 강요하고 싶진 않다만, 네가 윤이와 결혼하게 되면 난 이 호텔을 윤이에게 넘기고 여행이나 다닐까 싶구나."
모란은 뜬금없는 아버지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런 모란을 바라보며 제갈석은 채 회장의 말에 부연 설명을 해준다.
"모란아, 네 아버지는 더 이상 일을 해서는 안 된단다. 심장에 이상이 있어서 의사로부터 휴식을 취하라는 말을 들었던 모양이야."
제갈 회장의 말을 듣고 있던 모란은 날카롭게 숨을 들이키며 손으로 입을 가렸고, 얼굴은 점점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
아버지가 아프다.
아버지가 쓰러진다.
아버지가 죽는다.
안 돼!
눈앞이 깜깜해지며 10년 전 엄마가 죽었을 때의 가슴 찢어질 듯한 슬픔이 눈앞으로 밀려 들어왔다. 쇼크를 받은 모란의 상태를 윤이 먼저 알아차렸고, 그녀를 소파 위로 눕히자 그제야 진정이 된 듯 모란은 눈을 가만히 감는다. 윤과 마찬가지로 결혼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아버지, 그리고 채 회장님. 모란 씨와 얘기를 나눈 후에 말씀드릴 테니 잠시 자리 좀 비워주십시오."
그의 말에 제갈 회장 부부와 채 회장은 베란다로 나갔다.
절망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딸의 모습이 떠오르자 마음에 걸린 채 회장은 친구에게 그만두자는 말을 했지만 제갈석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 정도는 예상했던 거 아닌가. 나 역시 중간에 그만둘까도 생각해 봤지만 둘이 너무 잘 어울리더군. 그리고 생각 외로 서로에게 끌리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어. 한 번도 내 예감은 빗나간 적이 없으니 우리 두 아이를 믿어보세나."
그의 말에 한 여사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이 양반 말이 맞아요. 누구보다 제 아들은 내가 더 잘 알죠. 진짜로 모란이에게 마음이 없고 끌림이 없다면 그 애는 어떡해서든 결혼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 낼 거예요. 그런데 냉정한 애가 모란이가 쓰러지니까 안절부절못하고 울컥해 하는 모습을 보니 그 애들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군요. 채 회장님의 말에 모란이가 충격을 받은 게 마음이 걸리지만 이 정도야 예상했던 거니까 채 회장님도 굳게 마음 잡수세요."
그들의 말에 이제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채병훈은 환하게 웃는다.
* * * *
소파 위에 누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란의 모습에 윤의 마음 또한 편하지 않았다. 채 회장마저 이 세상을 뜨고 나면 그녀에게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이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리고 아픈 걸까? 왜 그녀의 눈물이 송곳처럼 그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은 아픔을 주는 걸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눈앞에 있는 여자를 보호해 주고 싶다는 이상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생각과 함께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그의 입 밖으로 툭 내뱉어졌다.
"모란 씨, 우리 결혼합시다."
아니, 이게 자신의 목소리에서 나온 것인가? 불쑥 말하는 그의 말에 그녀도 놀랐는지 눈을 번쩍 뜬다.
"나야 내놓은 자식이고 남자라서 괜찮지만, 어머니 말씀대로 모란 씨는 여자가 아닙니까? 그 사실이 이 사회에서는 남자보다 불리하다는 건 잘 알고 있을 거요. 아버지 말씀대로라면 곧 기자들이 들이닥칠 테고, 우리의 일이 매스컴을 타게 되면 부모님들이 한동안 곤욕을 치를지도 모르오. 우리 부모님들이야 나의 악명에 단련이 되어서 괜찮지만 당신 아버지는 상황이 다르지 않소.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많을 테고. 흠,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하는 게 최선의 방법인 것 같소."
이건 어불성설이다. 말의 이치가 하나도 맞지 않은데 지금 말한 게 최선인 양 말하고 있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 여자는 또 뭔가.
모란은 힘없이 일어나 앉으며 물기 어린 눈으로 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그녀의 마음을 온통 끌어당기던 그가 아니던가. 그리고 침대에서 그의 품에 안겨 일어났을 때는 놀라움 못지않은 야릇한 설렘마저 느꼈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 결혼을 제의하고 있었고, 그녀로서는 결혼 이외에는 다른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모란은 아버지를 잃을지 모른다는 극단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기에 윤의 말이 흐린 날 비추는 한줄기 햇살인 것마냥 그의 말을 붙잡고 늘어진다.
"그래도 될까요? 나........ 난 아버지마저 잃을 수 없어요. 아빠가 아프신 줄 알았다면 아빠 곁을 떠나지 않았을 거예요. 결혼만 해주세요. 그럼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게요. 음, 나중에 진짜로 당신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때 놓아드릴게요."
눈물 어린 한숨을 내뱉으면 모란이 애원한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인 결혼을 아버지 때문에 결심한 그녀를 바라보며 윤은 여자의 희생정신과 가족애에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윤은 그녀의 마지막 말에 기분이 상했다.
이 여자가 방금 이혼 이야기를 했던가? 윤은 그녀의 간절한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한다.
"결혼도 하기 전에 이혼 이야기를 하다니 당신도 어지간하군. 지금은 상세하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으니 우선 부모님께 말씀드립시다. 아마도 저 양반들 벌써 계획을 세워놓은 것 같으니."
모란의 머릿속은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백지상태였다. 그저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르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 같았고, 진짜로 그랬다. 모란과 윤의 마음이 결정되자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 * * *
"이럴 수가!"
진수는 보고 있던 신문을 손에 움켜쥐고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재벌 3세와 호텔 여직원의 불장난이란 제목을 기대하고 신문을 펴 들었건만 그곳에는 그런 추잡한 기사 대신에 세기의 로맨스라 적힌 기사가 한 면 가득 실려 있었다.
제갈석 회장의 외아들 제갈윤(30) 군과 호텔왕 채병훈 회장의 무남독녀인 채모란(26) 양의 약혼식이 이른 새벽 가족들만이 모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제갈윤의 마음을 사로잡은 채 양은 바이올린을 전공한 유학생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1년 전 귀국했다. 그때부터 그들의 사랑은 꽃피우기 시작했고 결혼식은 되도록 빨리하고 싶다고 말한 제갈윤은 한눈에 봐도 신부가 될 약혼녀에게 빠져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업으로 이루어지는 재벌들의 정략 결혼이 아닌 사랑으로 이루어진 이들 한 쌍에게 축하의 말을 보낸다.
이 약혼으로 많은 여성들이 울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는 바이다.
- 동양신문. 박기철기자 -
설마 그 촌뜨기가 채병훈 회장의 딸일 줄은 그 누가 알았겠는가. 재수 좋은 놈은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더니 윤 같은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군. 진수는 일을 더 크게 벌였다가는 진짜 무슨 일이라도 당할 것 같아 외국에 잠시 나가 있을 생각으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 * * *
모란은 자신의 신랑이 된 윤의 모습을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지금 그는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될 그들의 아파트 문에 키를 꽂고 있느라 그녀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참으로 정신없이 보낸 한 달이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모란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다른 사람의 힘에 끌려다닌 것만 같았다.
기자들이 들이닥쳤고, 그들 앞에서 그와 사랑하는 사이인 것처럼 연기해야 했으며, 한 달 안에 결혼식을 치러야 했기에 결혼식 준비와 신혼살림을 준비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바빴던 것이다.
그동안 그와 만난 건 몇 번 되지 않았다. 호텔에서 그런 일이 있고 그다음 날 오후 커피숍에서 잠시 만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했고, 형식상이긴 했지만 양가 부모 상견례 할 때 만났고, 예복 맞출 때 잠시 마주쳤었다. 그리고 오늘 결혼식장에서 그를 본 게 다였다. 결혼식장에서 예복을 입은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숨이 꽉 막히는 것만 같았다.
꽤 잘생긴 남자인 줄은 알았지만 일류 디자이너가 직접 재단한 흰 턱시도는 그의 까무잡잡한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로마에서 봤던 조각상이 자신의 앞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곧 차갑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모란은 현실을 직시했으며 앞으로 그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딴생각에 빠져 있는 모란의 멍한 모습을 지켜보며 윤은 한숨을 내쉰다. 한 번 생각에 빠지면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녀 때문에 지금 두 번이나 그녀의 이름을 불려야 했던 것이다.
"여기가 우리의 집이오. 들어오시오. 헉!"
현관에 들어서던 윤은 한 달 전과는 180도로 달라진 거실을 놀란 눈으로 훑어본다. 호텔에서 그 일이 있은 후 윤은 결혼하기 전까지 성북동 본가에서 지냈고, 결혼에 관한 모든 일은 그의 어머니와 그녀에게 다 맡겼다.
그 후로는 일 때문에 바쁘기도 했지만 그녀와 마주치기 싫어서 이곳에 와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여기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자신의 아파트를 바꿔놓은 것이다. 그는 은근히 화가 났다.
윤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문밖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모란을 향해 턱을 치켜 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고, 할 수 없이 그는 모란에게 다가가서 성질을 꾹꾹 누르며 딱딱하게 말했다.
"안 들어오고 뭐 하는 거요? 그리고 들어와서 나와 상관없이 인테리어를 바꾼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요."
윤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하자 모란은 그게 무슨 큰 이유가 되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윤에게 말한다.
"저번에 아파트에 손 좀 댔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 윤이 씨가 맘대로 하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신혼집에 들어갈 때는 신랑이 신부를 안고 문턱을 넘어야 잘산다고 했어요."
그러고 보니 3주 전에 모란이 그에게 전화해서는 인테리어를 바꿔도 되냐고 물어봤었고, 그는 빨리 전화를 끊을 생각으로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제기랄, 내 무덤을 내가 팠군.'
그런데 이 여자가 지금 무슨 말을 했지? 신랑이 신부를 어쩌고 어째?
우리는 그런 평범한 부부사이가 아니다라고 말하려다가 오늘 결혼했는데 괜히 이런 일로 얼굴 붉힐 필요가 없다고 느낀 윤은 천장을 향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모란을 번쩍 안아 들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그녀의 무게에 마음이 왜 이리 아픈 걸까?
"당신 좀 많이 먹어야겠군."
무뚝뚝하게 말한 뒤 침실 안까지 안고 들어갔다. 그곳 역시 거실과 마찬가지로 싹 바뀌어져 있었다. 모란의 말 때문에 억지로 안아 들어오긴 했지만 악상 그녀를 내려주려니 아쉬운 마음까지 드는 것이다.
땅에 내려선 모란은 난데없이 윤의 볼에 앵두 같은 입술을 갖다 댔다. 뽀뽀를 한 모란이나 뽀뽀를 당한 윤이나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원래 모란의 성격은 감정의 표현이 자유로운 편이었고,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 표현을 하는 예술가의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죽고 나서는 자신의 밝은 부분을 모두 마음속에 죽여버렸고, 오로지 바이올린을 켤 때만 그 모든 것을 발산시키곤 했었는데, 소영의 생일날 그와 눈이 마주치면서부터 서서히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려는 듯 모란이 침실의 창문을 열며 수다를 떤다.
"어머나, 한강이 다 보이네요. 빨리 밤이 왔으면 좋겠어요. 이곳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너무 근사할 것 같아요. 베란다에서 와인 잔을 치켜들고 도시의 야경을 바라본다..... 한편의 영화 같지 않아요? 그리고요......"
저 여자가 저렇게 말이 많았었나?
수수한 외모처럼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한 여자인 줄 알았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성격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은 그가 무슨 말을 해도 거치적거리지 않을 것 같아 결혼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그녀는 계속 그의 예상을 깨기 시작한 것이다.
"윤이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인상 써가며 하세요? 자꾸 그런 습관 들이면 이마에 주름살 생겨요. 혹시 우리의 집을 마음대로 바꿨다고 화나신 거예요?"
그보다 키가 작은 아내는 그를 올려다보며 야단맞을 걸 각오하는 표정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린다. 막상 그녀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니 싫어도 싫다고 말할 입장이 못 되자 윤은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까마득해지기 시작했다.
"내 주름살은 당신이 걱정 안 해도 되오. 그리고 이미 손댄 집을 예전처럼 다시 바꾸는 것도 웃기는 일이니 이대로 살아야지 별수 있소? 다만 이 집 인테리어를 했던 김나영 실장이 보면 실망하겠군."
아직까지 거실과 침실밖에 보진 못했지만 전보다 훨씬 나아진 것 같기도 했다. 편안하면서도 따뜻한 벽지의 색조와 엔틱스타일의 가구들로 이루어진 침실은 여성의 손길이 많이 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곳곳에 아기자기하게 만든 소품들과 꽃장식을 보고 있으려니 이젠 이 집은 그만의 집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전의 자신의 집은 독신남자가 사는 집답게 서늘하고 심플한 스타일로 고급 인테리어 잡지책에서 금방 빠져나온 듯한 집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집은 따뜻한 우리 집이란 제목으로 바뀐 것만 같았다. 그의 무뚝뚝한 말에 모란은 또 할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그의 손을 이끌고 다른 방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자신의 서재가 있던 방이었는데 지금은 연습실을 위해 만들어진 방처럼 보였다. 외부 소음 차단과 내부 소음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최대한 줄이도록 페카멧과 스티로폼을 넣고 비닐을 치고, 합판과 석고보드가 벽에 발려져 있었다. 침실과는 달리 어두운 분위기가 안정감 있게 변해 있었다. 자신의 서재에 있던 마호가니 책상은 그대로 있었고, 벽면을 꽉 채운 장식장 속에는 그의 책들과 그녀의 음악서적들이 빽빽이 꽂혀져 있었다. 2인용 소파가 놓인 자리에는 그녀의 피아노와 보면대가 놓여져 있어 구가 밤늦게 일하고 잠깐 눈을 붙일 때 누워 자던 소파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앉으면 곧 잠들 것 같은 안락의자가 피아노 옆에 고풍스럽게 놓여져 있었다. 한쪽 벽면이 그의 공간이라면 그 반대편은 그녀의 공간이었다.
"전 주로 밤에 연습을 해요. 그러니 당신이 잘 때 소리가 새어 나가서 잠을 깨우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렇게 해두면 방음과 흡음의 효과를 동시에 볼 수 있어서 제가 연습할 때 당신이 서재를 이용하더라도 소리가 거슬리지 않을 거예요."
조심스럽게 설명하는 모란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자신과 상의 없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바꿔버린 이 여자에게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윤은 변해버린 서재 때문에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진정하려고 노력하며 서재 문을 닫았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옷방으로 쓰이는 방문을 열어보았다. 그런데 그녀의 방으로 쓰여야 할 방이 예전 그대로 아닌가? 그의 뒤를 졸졸 따라온 그녀는 변명하듯 말한다.
"이 아파트는 넓은 데 비해서 방이 3개밖에 안 되더군요. 사실은 이곳을 제 연습실로 만들려고 했는데 이곳에 있는 것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니 공간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옷방은 그대로 두고 당신 서재를 연습실 겸 서재로 만들었던 거예요."
정작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그녀는 그의 쏘아붙이는 눈길을 피했다.
"난 그게 알고 싶은 게 아니오. 결혼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형식상의 결혼을 제의했고 나 또한 동의했소. 어느 정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우리 일이 사라질 때 다시 생각해 보자고 했었고, 그 첫 번째로 섹스는 안 된다고 당신이 말했던 것 같은데..... 아니오?"
그의 말이 맞다. 비록 아버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승낙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그와 잠자리까지는 하고 싶지 않아 결혼 문제로 의논할 때 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던 것이다. 그 역시 그녀의 말에 비웃음 섞인 표정을 짓긴 했지만 동의해 주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된다면 감정적으로 그와 가까워질까 두려워서 윤에게 그런 제의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바뀔 줄은 모란 자신도 미처 몰랐다.
* * * *
결혼하기 이틀 전날 밤, 아버지는 모란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날 두 부녀는 밤이 새도록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지만 해도 모란은 사랑이란 감정을 무시하며 살아왔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망연자실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사랑 같은 건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자식까지 먼 곳으로 보내버릴 정도로 아버지를 약하게 만든 그 사랑이란 걸 증오하며 오로지 바이올린에만 매달리면서 그곳에서 버텼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아버지가 일깨워 주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면 어느 누가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하지만 모란이 있었기에 아내를 따라 죽지 않고 이날 이때까지 그녀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는 아버지의 말에 모란은 아버지 품 안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 순간 10년 동안 마음속에서 쌓아올린 벽들이 한순간에 와르르 쏟아지기 시작했고, 문득 윤과의 결혼을 망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엄마를 처음 본 순간 한참 동안 서로의 눈 속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고 말해 주었다. 모란은 윤과 눈이 마주쳤을 때의 그 오묘한 느낌이 되살아났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은 그녀에게 관심 없어 했고, 지금 역시 침실을 같이 쓰는 것에 대해서 열 받아 있지 않은가.
"제가 그런 말을 했었죠. 하지만 섹스는 안 된다고 했지 침실을 따로 쓰자는 말은 아니었어요."
"아니, 그게 말이 되오? 당신 바보 아냐? 남녀가 같은 침대에 있으면서 잠만 잔다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 거요? 하물며 형식상의 부부라도 당신은 여자고 나는 남자인 거요."
윤의 어이없어 하는 말에 모란은 그런 그가 더 이상하다는 듯 말한다.
"우리가 잤던 그날 밤에도 아무 일 없었잖아요. 당신 입으로 나에겐 관심 없다고 말했었고, 그런 나를 안고 싶은 건 아니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각 방을 쓴다는 소문이 아빠 귀에 들어가게 되면 자신 때문에 그런 결혼을 했다고 생각하고 자책할지 몰라요. 그렇게 되면 심장에 무리가 갈 테고...... 그러니 당신이 양보 좀 해주세요."
상기된 표정으로 양해를 구하는 모란을 내려다보며 윤은 짜증이 섞인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채 회장네 부녀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꼬이는 것 같아 윤은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물에 속은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버지가 죽게 될 거라며 까만 눈동자에 눈물을 가득 담은 그녀를 본 순간 가슴에 비수가 꽂힌 것처럼 그의 마음이 아파왔고, 결국에는 결혼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젠 같은 이유로 그녀와 한 침대를 써야 한다니.
사실 윤은 그녀와 침대를 같이 쓰면서 손대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미처 자각을 못했을 테지만 그날 부모님들이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게 아닌가.
"당신 나를 믿소?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요. 내 소문을 들어서 알 테지만 난 하루라도 여자 없으면 못 사는 남자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당신도 알 테지?"
사실보다 더 과장해서 말한 윤은 그녀가 기겁을 하고 방을 옮길 줄 알았다. 하지만 아까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당신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어요. 서로의 일에 상관하지 말자고 당신이 말했었고, 저 역시 그 말에 따를 거예요. 당신이 누구와 만나서 무슨 짓을 하든 상관은 않지만 당분간은 조심해서 만나주세요.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바람피운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고, 시부모님과 저희 아버지 귀에 그 이야기가 들어가는 것 또한 바라지 않거든요. 새벽 늦게 들어오는 건 상관없지만 외박은 안 돼요."
윤은 그녀의 말에 기가 막혔다. 해서 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것이다. 지금 그녀는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있었다. 아무리 형식적인 부부 사이라지만 외도를 눈감아 주겠다는 그녀의 말에 화가 났다. 어느 부인이 남편의 외도를 눈감아 준단 말인가. 그것도 갓 결혼한 새 신부가.
윤은 분통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고 조소 띤 얼굴로 모란을 쳐다보며 차갑게 말한다.
"좋소.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시오. 혹시라도 잠결에 당신을 내 애인인 줄 알고 만지게 되면 날 깨우시오. 남자의 몸은 여자가 깃털처럼 건드려도 반응하게 되니까. 하하, 그럼 난 그만 나가볼 테니 당신은 마음대로 하시오. 오늘 밤은 늦을 거요."
건드렸다가도 모란인 줄 알면 흥분이 식어버린다는 식으로 그가 말하자 모란은 그의 모욕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화가 난 그녀를 남겨 둔 채 윤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며 나가버렸다. 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되다가도 저렇게 자신의 속을 긁는 소리를 할 때면 눈곱만큼 있던 정도 없어지는 것만 같다. 그렇지만 모란은 그런 그를 탓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하지 않아도 될 결혼을 선뜻 해주었고, 그로 인해서 그녀는 그에게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진 것이다.
모란은 한숨을 푹 내쉬며 넓은 집을 둘러보았다.
둘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혼자 있으니 너무나도 넓어 보였고, 외롭기까지 했다.
* * * *
운전하면서도 윤은 그녀에게 그렇게 하고 나와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같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자신의 기분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말을 함부로 했던 것이다.
윤은 자신이 생각했던 그대로의 사람이 심플하고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볼 때마다 달랐다. 진수 앞에서 한 치의 수그림도 없이 꼿꼿하게 서서 자존심을 지키던 모습, 호텔 방에서 보여줬던 그 연약함에 그녀를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런 그녀가 이젠 아닌 척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그를 휘어잡으려고 하지 않는가.
어느 모습이 그녀의 참 모습인지 이젠 헷갈리기까지 했다. 마음에 안 든다. 그녀의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며 윤은 액셀을 힘껏 밟았다.
* * * *
그후로 한 달 동안은 서로에게 부딪히진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처럼 지냈다. 윤은 그녀가 일어나기 전에 출근했고, 저녁 늦게까지 일하는지 여자를 만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항상 새벽 늦게 들어와서는 샤워하고 바로 침대로 들어가서 잠들었다. 이런 반복된 생활이 계속되자 모란의 마음은 불편하기만 했다.
그녀와 말하기 싫고, 같이 침대에 들기 싫어서 피하는 거라는 걸 모란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그러지 말아달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모란은 그저 속만 끓이고 있었다.
한만디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아주 난처한 입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비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윤이 회의하다 쓰러져서 지금 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모란은 전화를 끊자마자 지갑만 챙겨 들고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걱정이 된 나머지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병실에 들어가자 남편은 침대 위에 누워 영양제를 맞으며 잠들어 있었다. 마침 아버지의 주치의이기도 한 김 박사가 들어왔고, 모란의 모습을 보더니 결혼 축하의 말을 전하며 싱긋이 웃는다.
"우리 모란이 결혼하더니 더욱 예뻐졌구나."
"김 박사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그런데 이 사람 왜 이러는 거죠? 쓰러졌다고 하던데...... 혹시 큰병은 아니겠죠?"
걱정 때문에 마음이 다급해진 모란은 김 박사의 여유 있는 말투가 불만스러웠다. 남은 이렇게 애가 타는데 저 웃음은 뭐람!
"하하, 새신랑이 요즘 너무 힘을 쏟아 부어서인지 과로를 했던 모양이야. 피로가 쌓여서 과로가 되었고, 그게 누적이 되어서 쓰러진 거지. 젊은 사람이 또 영양실조가 뭔가. 넌 네 남편에게 뭘 먹이기에 영양실조까지 겹치게 만드는 게냐. 그러니 당분간 휴식을 취하게 하고, 영양가 있는 것도 듬뿍 먹이면 금방 일어날 게다. 그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잔 모양이야. 영양제 맞더니 금세 잠에 곯아떨어지더구나. 일어나는 대로 네 남편 데리고 집으로 가면 되니까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거라."
신혼부부가 밤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기에 쓰러져서 이곳까지 오냐는 식으로 김 박사가 말하자 모란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김 박사와 이 비서가 나가고 모란은 남편이 누워 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은 깨어 있을 때보다 훨씬 부드럽고 어려 보였다. 하지만 한 달 전보다 몸이 많이 야위어져 있었다. 눈 주변으로는 피곤에 절어 그늘이 져 있었고, 입가에는 깊게 팬 주름 때문에 그의 얼굴이 우울하게 보였다. 그런 그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저려왔다.
나 때문에 이 사람이 이 지경이 된거야. 지금 하던 식으로 생활하다가는 이보다 더 큰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란은 그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잠들어 있던 그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아 준다.
"당신 이제부터 각오하세요. 당신의 무표정한 얼굴, 싸늘한 눈빛, 상처 입히는 말투, 이젠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예요. 당신과 처음 만났던 날의 나였다면 당신을 이대로 내버려 두었을 테지만, 이제 난 예전의 나를 되찾았어요. 윤이 씨, 당신이 아픈 게 내가 아픈 것처럼 너무 마음이 아파서 당신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어요. 내가 당신을 지켜줄 거예요."
그가 듣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서 모란은 그의 손을 잡으며 독백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인다.
"당신은 내 가족이니까...... 내 남편이니까."
* * * *
회사에 가겠다는 그를 이 비서에게 집에 모셔다 드리라고 말한 후 그녀는 삼계탕 집으로 유명한 식당으로 부리나케 달려가서는 2인분 봉투를 들고 아파트로 왔다. 하지만 그는 없었다. 병원에서 바로 회사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못 말리는 고집불통에다 청개구리 같으니라고!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아? 피식 웃으며 모란은 삼계탕 봉지를 들고 다시 아파트 문을 나선다.
윤은 사무실에 들어오면서 비서에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말한 후, 소파에 드러누웠다. 사실 집에 가서 편안한 침대에 누워 자고 싶었지만 그녀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사무실로 온 것이었다.
한 달 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했고, 먹지도 못했다. 아침 일찍 곧바로 출근해서는 커피 한 잔으로 때웠고, 점심때에는 약속이 없으면 대충 넘어갔으며, 저녁은 일하다가 때를 넘기면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기에 거의 먹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와 되도록 부딪치지 않으려고 회사에서 일하다가 일부러 새벽 늦게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내가 여자와 어울리느라 늦게 온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사실 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생활이 복잡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항상 시간에 쪼들리고 일에 바빠서 연애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여자들도 그런 그를 이해해 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잠시일 뿐, 곧 그에게 매달리고 귀찮게 했으며 지치게 만들었다.
그 시기가 되면 그와는 끝인 것이다. 차라리 지금의 아내가 그녀들보다 나릉지 모른다. 그에게 요구하지도 않고, 귀찮게 하지도 않았으며, 매달리지도 않으니..... 그 생각에 빠져들며 윤은 졸기 시작했다.
* * * *
"처음 뵙겠습니다. 서현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려요, 사모님."
모란이 비서실로 들어서자 늘씬하고 매력적인 여비서가 누구냐고 물었고, 신분을 밝히자 모란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다.
수수하게 생긴 여자가 냄비를 들고 들어오기에 다른 사무실에 갈 음식이 잘못 배달된 줄 알고 나가라고 말하려다가 그녀의 조그만 몸에서 풍기는 고상한 분위기에 슬쩍 누구인지 물어봤던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예감이 들어맞아 결례를 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말씨가 다소곳하고 상냥한 모란을 향해 자신의 소개를 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이이는 사무실에 있나요? 어머, 그러고 보니 퇴근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 왜 아직까지 퇴근 안 하고 사무실에 있는 거예요?"
"사장님이 아직 퇴근을 안 하셔서....."
"저런, 그이가 일하느라 현아 씨를 챙기지 못했군요. 저녁 늦게까지 붙잡아 두다니 사장님이 너무 무정하다. 그죠? 걱정말고 어서 가보세요."
저녁 8시가 다 되어가건만 비서가 퇴근도 못하고 붙잡혀 있는 걸 보니 안됐다는 생각에 모란은 서 비서에게 그만 가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란의 말에 얼굴이 환해지다가 금세 말을 흐리는 걸 보니 남편은 무척 엄한 상관인가 보다.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질 테니 어서 가보라고 말한 뒤 모란은 남편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일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문을 열었는데, 불이 꺼져 있어 어두웠다. 스위치를 켠 뒤 주위를 둘러보니 윤은 소파에 불편하게 누워 있었고, 표정 역시 편해 보이지 않았다.
회사로 오면서 음식은 거의 식어 있었고, 할 수 없이 회사 근처에 있는 조그만 식당에 들어가 음식만 데울 수 있겠냐고 부탁했더니 아주머니는 자신의 식당 냄비에 담아서 끓여주기까지 했다. 그래서 아직까지 뜨끈뜨끈한 냄비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그를 깨웠다. 잠에서 깨어난 윤은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란 듯 길게 눕힌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며 멍한 눈으로 그녀를 본다.
왜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이 여자는 내 눈앞에 있는 거지? 그런 그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죽은 마누라가 살아서 온 듯한 표정이네요. 호호. 아 참, 이 음식 빨리 먹어야 돼요. 안 그럼 또 데워야 하니까. 회사 옆 식당 아주머니 참 친절하시던데요? 공짜로 음식도 데워주고, 냄비와 그릇도 빌려주는 거 있죠? 그건 그렇고, 집으로 가라고 했더니 왜 사무실로 와서는 나를 고생시키는 거예요? 집에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부랴부랴 왔잖아요. 남자들은 여자를 귀찮게 한다더니 그 말이 맞나 봐요."
쉴 새 없이 종알거리며 냄비에 있는 닭 몸통을 그릇에 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윤은 진짜 죽은 마누라가 살아서 돌아와도 이보다 놀라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영양식 삼계탕 대령입니다. 어서 드세요."
모란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삼계탕을 그의 앞에 놓아주며 자신도 맞은편에 앉는다. 한눈에 봐도 먹음직스럽게 보였고, 냄새 또한 그저 그만이었다. 단지 이 요리가 그녀의 솜씨가 아닌 서울에서 유명한 삼계탕 집에서 즉석으로 가져온 것이지만.
밥 먹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구수한 냄새가 그의 코끝으로 스쳐 지나가자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투덜거리며 먼저 국물을 떠먹었다. 뜨끈하고 걸쭉한 국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체면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윤은 정신없이 먹어대기 시작했다. 모란은 먹기 좋도록 뼈를 발라낸 살코기를 윤의 그릇에 더 얹어준다.
"천천히 드세요. 그리고 깍두기도 먹어보세요. 이 집은 삼계탕과 깍두기로 유명하다고요."
"음, 맛있군. 그런데 당신은 왜 안 먹는 거지? 식기 전에 어서 먹도록 해."
아내가 자신에게 할당된 음식을 자꾸만 그에게 덜어주자 윤은 그녀가 제대로 못 먹는 게 아닌가 싶어서 무뚝뚝한 목소리로 챙겨준다. 무심하게 말하긴 했지만 말속에 묻어 나오는 다정함을 느낀 모란은 생긋 웃으며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넣는다.
"당신 그거 알아요? 우리 이렇게 마주 앉아서 밥 먹는 건 처음이라는 거."
윤은 입안에 음식물을 가득 넣고 말하는 아내의 모습을 신기해하며 쳐다본다. 보통 여자들은 남자 앞에서 밥 먹으면서 말을 잘 안 하는데 이 여자는 나를 남자로 보지 않는 건가? 하긴 같은 침실을 써도 아무 느낌이 없다고 말하는 여자이니 어련하겠어. 괜히 또 심통이 났다.
"당신이 여기 오지 않았다면 마주 앉아서 밥 먹을 일도 없었겠지."
남편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모란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이 남자의 변덕은 왜 이렇게 죽 끓듯이 하는 거야. 하지만 병원에서 각오한 바가 있었기에 화를 삭이며 표정만은 생글거리며 말한다.
"그렇겠죠. 하지만 이제부터 아침은 꼭 드시고 출근하세요. 그리고 김 박사님이 말씀하셨다시피 당분간은 좀 쉬셔야 돼요. 일이 바쁘다면 정각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시구요. 알았죠?"
타이르듯이 말하는 모란의 말에 윤은 이 여자가 자신이 생각하던 그 여자가 맞나 싶었다. 한 달 사이에 이렇게 달라지다니. 요구하지도 않고, 귀찮게 하지도 않았으며, 매달리지도 않는다고? 아직 매달리지는 않았으니 두 가지는 그 목록에서 지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윤은 일부러 싸늘한 목소리를 내며 말한다.
"아내다운 말투로군. 당신이 또 잊었을까봐 말하는 건데 서로의 일에 상관하지 말자고. 그리고 다 먹었으면 그만 들어가도록 해. 난 일 더하고 들어갈 테니까."
빈 그릇을 치우던 모란은 벌떡 일어서서 책상에 기대어 서 있는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꼿꼿하게 서서는 허리에 두 손을 걸치고 최대한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난 당신 아내예요. 병원에서 당신이 영양실조 걸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심정 생각해 봤어요?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된 신랑이 영양실조와 과로 때문에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왔다는 말을 시부모님이 아시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난 그런 원망 듣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 일에 상관하지 않겠다고 한 말 취소예요. 이제부터 정상적으로 생활하세요. 그럼 저 먼저 들어갈게요. 일찍 들어오세요."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안고 한참을 쏘아붙이던 그녀는 그가 미처 말할 새도 없이 휑하니 나가버린다.
내 아내라고? 아내란 이런 걸까? 하긴 결혼하면 여자들은 달라진다더니 저 종달새 같은 여자가 아내가 맞긴 맞나 보다. 일찍 들어오라는 말은 그의 어머니조차 그에게 하지 않았던 말인데. 모란이 그에게 그 말을 한 순간 윤의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졌다.
아내가 있는 것도 괜찮은 것 같군.
갑자기 집에 가고 싶어진 윤은 서둘러 재킷을 걸치고 나오려다 모란이 치우다 만 빈 그릇들이 눈에 띄었다. 빌려온 건데 그대로 놔둘 수가 없어 그릇들을 냄비 안에 넣고 나서 봉지를 찾았지만 닭뼈가 담긴 봉지에 냄비를 넣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릇이 담긴 냄비를 손에 직접 들고 사무실 문을 나섰다. 마침 올라오는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자신의 층에서 내려서자 조금 전에 휑하니 나갔던 아내가 타고 있지 않은가. 모란 역시 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당신 일한다더니? 어디 가는 거예요?"
윤은 약간은 어색한 동작으로 두 손에 받쳐 든 냄비를 들어 보인다.
"어머, 당신이 챙겨서 가지고 왔군요. 안 그래도 냄비 가지러 가던 참이었는데. 어서 타세요."
윤은 그녀 옆에 머쓱하게 서서는 변명하듯 말했다.
"빌린 거라며? 그래서 집에 가는 길에 돌려주고 갈려고 그랬지."
생기려다 만 정이 또다시 스멀스멀 그녀의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순간이다. 보통 냉정한 사내라면 빈 그릇이 탁자에 있든 말든 사관하지 않았을 테지만 자신의 남편은 남에게 시키지 않고 손수 갖다 주지 않는가. 그는 보기보다 정이 많은 사람이야.
"고마워요. 이거 갖다 주고 우리 데이트할래요? 나 꼭 하고 싶은 거 있는데."
"데이트? 9시가 다 되가는데 무슨."
이젠 더 이상 그녀와 아옹다옹하기 싫어 윤은 그냥 그녀가 하는 대로 놔둬 볼 참이다.
"데이트하는데 아침이면 어떻고 저녁이면 어때요. 뭐, 당신이야 데이트라면 지겹도록 해봤겠지만 난 한 번도 해본 적 없다고요. 괜찮죠?"
혹시나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하는데 어찌 안 된다고 하겠는가.
** 6. 첫 데이트
"워메, 사장님의 사모님이었구먼요. 이렇게 예쁘고 상냥한 분을 아내로 둬서 사장님은 좋게쑤. 다음에 저희 식당에 오시면 시원한 콩나물국 끓여줄 테니 꼭 와요."
팔짱을 끼거나 꼭 끌어안고 가는 연인들과는 달리 모란과 윤은 뚝 떨어져서 걸었지만 모란은 마냥 좋기만 했다. 가게에서 나설 때 아주머니가 한 말이 생각난 모란은 기분이 좋아져서 윤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도 들었죠? 그 아주머니가 저보고 예쁘데요. 오래간만에 예쁘다는 말 들으니까 기분이 참 좋네요."
그녀의 말에 초를 치듯 그가 장난스럽게 말한다.
"예쁘다는 말 들어보기나 한 건가? 하하."
"뭐라고요?! 당신 어디 가욧!"
그녀의 주먹 세례를 피해서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가던 윤은 뒤 돌아서서 잰걸음으로 달려오는 그녀를 기다렸다.
모란이 그를 끌로 온 이곳은 덕수궁 돌담길이 있는 길가였다. 4월의 봄바람을 타고 벚꽃 잎이 노을빛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그들의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나돌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거의가 연인들의 모습이었다.
"헉헉, 당신 치사빤쮸예요. 그렇게 도망가다니."
애들처럼 치사빤쮸라는 말을 쓰며 토라진 듯 말하는 모란의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귀여워 보인다.
"다리가 짧은 당신 자신을 탓해야지 남을 탓하면 되나? 하하, 그런데 여긴 사람들이 무척 많군."
사실 모란이 키가 작긴 했지만 키에 비해서 하체가 무척 길어 자신의 키보다 훨씬 커 보였다. 펑퍼짐한 옷만 입었을 때는 몰랐지만 호텔에서의 그날 밤 살짝 본 바에 의하면 그렇다.
"그런데 데이트 장소로 왜 이곳을 선택한 거지? 이곳은 오히려 피해야 하는 장소라구."
그의 말에 모란이 피식 웃었다.
"당신도 그런 미신 믿는 거예요?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이 걸으면 헤어진다? 크큭, 그럼 우린 안심해도 되겠네요. 연인이 아니잖아요."
떨어지는 벚꽃 잎 하나를 허공에서 잡은 윤은 그녀의 말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하지만 곧이어 말하는 그녀의 말에 그런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우린 부부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호호, 낮에 차 타고 이곳을 지나칠 때는 그저 그랬는데, 당신과 같이 달빛과 벚꽃송이를 맞으며 산책하니까 너무 즐거워요. 아 참, 왜 데이트를 하게 되면 이곳에 오고 싶냐고 물었죠? 엄마가 살아 계실 때였어요. 그날도 오늘처럼 벚꽃 잎들이 만개했었고, 저녁이 되자 부모님은 산책 가자며 저의 손을 잡고 이곳에 왔었어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돌담길을 걷는 부모님의 머리 위로 그들의 사랑에 감동한 듯 벚꽃 잎이 쏟아질 듯 떨어졌죠.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걷는 돌담길은 어떤 느낌일까? 그때의 나는 그저 부모님과 함께 있다는 것에 대한 기쁨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과 꼭 이곳을 찾아와 그 느낌의 정체를 찾으려고 했죠."
추억에 젖어든 그녀의 눈과 목소리는 손에 든 꽃잎보다 더 고왔다. 그런데 이 여자가 방금 뭐라고 했지? 사랑하는 사람과 이곳에 온다고? 가슴 한구석이 기분 나쁘게 묵직해지면서 어느 날에 그녀가 사랑하게 될 그 남자에게 화가 났다.
"흠, 그랬었군. 그런데 나와 먼저 이곳을 거닐게 돼서 어떠하오? 나중에 당신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와야 하지 않을까?
윤은 자미 걸음을 멈추고 돌담에 기대어 서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고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자신의 손에 든 라이터를 그녀가 뺏듯이 가져가더니 그에게 불을 붙여준다.
"남자에게 불을 붙여주는 것도 해보고 싶었어요. 호호, 그리고 당신으로도 충분해요."
만약 그가 그 이유를 물었다고 해도 그녀는 대답하기가 애매했다. 솔직히 자신도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먼 훗날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떡할 거냐고 그가 묻는 순간, 다른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더니 자신의 앞에 있는 이 남자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생각했던 것이 입으로 툭 내뱉어진 거고......
그가 그 이유를 물어볼까 두려워진 그녀는 꽃잎을 잡는 착하며 수선을 피워댔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그녀에게 자꾸만 채근하고 싶어졌다.
나로 충분하다고? 그건 무슨 뜻일까?
윤은 그 말의 뜻을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꽃잎을 잡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겨우 하나를 잡은 모란은 그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자신의 재킷 안으로 손을 쓰윽 집어넣는 게 아닌가. 설마 이 여자가 사람 많은 곳에서 나를 유혹하려고? 긴장이 되면서 기대감도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그의 재킷 속에 든 지갑을 가져가더니 카드 하나를 빼내서는 다른 곳에 꽂고 그 자리에 벚꽃 잎을 조심스럽게 끼워 넣는다.
"오늘을 위한 기념이에요. 벚꽃에는 왜 향기가 없는지 모르겠어요. 당신 지갑 안에 꽃향기가 가득 배였으면 좋겠는데 아쉽네요. 당신 그거 알아요? 모란꽃이 원래는 향기가 없다는 거. 어머, 뭐 하는 거예요?"
윤은 그녀가 건네주는 지갑을 받아들여 참으로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기분 좋은 떨림을 받았다. 그는 그 보답으로 만지작거리던 벚꽃 잎을 그녀의 귓가에 꽂아주었다. 그녀의 귀는 작고 앙증맞아 벚꽃 잎과 참 잘 어울렸다. 민감한 귀에 그의 손길이 닿자 벚꽃 잎의 서늘함과 강인한 손의 따스함에 발가락 아래로부터 짜릿함이 몰려왔다. 그는 싱긋 웃더니 그녀의 손을 꼭 잡고는 왔던 길로 급히 되돌아간다.
"자, 여기서 시작하면 되겠군. 돌담길 끝에서 끝까지 걷는 게 소원이라고 했었지? 당신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질투할 정도로 우리 이 길을 멋지게 걸어보자고."
그녀의 말에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마음 깊이 새겨듣고 있었나 보다. 모란은 주책없이 자꾸만 눈가로 모여드는 물기에 눈을 깜박여 댔다. 그녀의 안경 너머로 무엇인가 반짝거리며 볼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리자 윤은 잠시 당황했다. 여자들과 끝낼 때 매달리며 우는 여자들은 봤어도, 사소한 한마디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는 여자는 모란이 처음이었다. 왠지 자신이 큰일을 한 것 같은 뿌듯함이 밀려왔다.
"아니, 이런....... 당신 울리려고 이런 거 아닌데."
울어서인지 코맹맹이 목소리가 된 모란은 피식 웃으며 팔짱대신 그의 강인한 큰 손안으로 작고 하얀 손을 슬며시 끼운다.
"지금의 모습을 엄마가 보셨다면 질투보다는 흐뭇해하실 거예요. 그리고 난 당신 손잡고 걸어가고 싶어요."
당신의 온기가 내 손으로 타고 오는 느낌이 너무 좋다는 걸 알았거든요. 모란은 뒷말을 속으로 되뇌며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 역시 그녀의 자그마한 손을 맞잡아 주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란의 조금 전 질문에 차근차근 말해 준다.
"삼국사기를 보면 선덕여왕의 공주시절 일화 중 모란꽃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 당나라 태종이 홍색, 자색, 백색의 모란꽃을 그린 그림과 그 씨앗 석 되를 선덕여왕에게 보냈지. 선덕여왕은 그림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오. '꽃은 고우나 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씨앗을 심어 꽃을 피워 보니 역시 향기가 없었다 하더군. 그리고 그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은 선덕여왕이 배우자가 없음을 당 태종이 조롱한 것이라는 말도 있고. 하지만 그건 선덕여왕의 <모란도>에 관한 일화일 뿐 확실한 건 알 수 없지. 모란꽃에 향이 있음을 말한 시가 있거든.
그의 해박한 지식에 모란은 감탄한 듯 그를 올려다보며 더 얘기해 달라는 듯 잡고 있는 손을 흔들어 댄다. 졸라대는 그녀의 작은 몸짓에 윤은 짧게 웃으며 계속 말한다.
"모란꽃은 당나라 때 낙양에서 번성하던 꽃이라, 일명 낙양화라고 불렸다고 하더군. 당나라 중서사인 이정봉의 모란시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소. '밤이라 깊은 향기 옷에 물들고, 아침이라 고운 얼굴 주기(酒氣)올랐네.' 이 시를 보면 향이 있음을 알 수 있지. 또 한 예는 당나라 귀족들은 모란을 번식시키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하더군. 새로운 품종 개량이 계속 되었고, 그 모란 종류가 꽃을 피우면 연회를 연기할 정도로 상류 사회에서는 특이한 모란을 갖는 게 자부심이었던 모양이오. 그 많은 품종 중에서 향이 없어진 모란도 있었고, 아마도 그 모란을 선덕여왕에게 보냈다는 설도 나돌고 있소. 하하, 꼭 내가 꽃 박사가 된 것 같군."
사실은 호텔에서 그 일이 있은 후 일부러 인터넷을 뒤져 모란꽃에 대해서 알아봤던 것이다. 그때는 그저 그녀의 이름에 왜 꽃 이름을 붙였는지 단순한 호기심에 알아봤을 뿐이라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이렇게 자신을 올려다보며 존경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그녀를 보자 미리 알아두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와, 전 거기까지는 몰랐어요. 예전에 엄마가 선덕여왕과 모란에 얽힌 일화만 얘기해 줬었거든요. 호호, 오늘 공부를 많이 하네요. 그리고 또 더 없어요?"
돌담길 중간쯤 왔을 때 지나가던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면서 모란이 쓰러지려고 했다. 쓰러지기 직전 윤이 붙들어 주었고, 그녀가 괜찮은지 확인한 후에 손잡는 대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가 자신의 어깨에 팔을 두르자 왠지 보호받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돌담길이 왜 이렇게 짧은 걸까? 평생을 걸어도 괜찮을 텐데.....
"이렇게 가면 부딪혀도 넘어지진 않을 거야. 어디까지 말했지? 모란은 꽃과 잎이 풍성하게 피어나면 복된 미래가 다가오는 조짐이고, 반면에 꽃이 시들거나 색깔이 풍성하지 못하면 좋지 않은 일이 닥칠 징조라 생각한다더군. 생각난 김에 우리 다음 달에 모란꽃 보러 갈까?"
아니, 내가 지금 그녀에게 꽃구경 가자고 말한 건가? 내심 자신이 한 말에 당황해 하고 있는데 그녀는 그런 그의 말을 반기며 그녀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그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건다.
"야호, 꼭 데려가 주세요. 약속! 새끼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복사하고, 코팅까지 했으니 이제 당신은 약속 어기면 안 되는 거예요. 호호."
애들처럼 약속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밟고 나서야 모란은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우리 때는 새끼손가락에 엄지손가락 도장만 찍으면 끝이었는데 더 늘었나 보군."
"팩스 보내는 것도 있는데 그건 몰라서 코팅에서 끝났어요. 크큭, 늘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그도 덩달아 웃으며 돌담길 끝까지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녁 늦은 시간이었지만 벚꽃 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구경 온 가족들과 연인들로 길거리는 인산인해였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부딪힐까봐 자신의 품으로 더욱 끌어당기며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고 말한다.
* * * *
집으로 돌아온 윤은 달빛과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느낀 친밀감을 아파트에까지 지속시키려니 왠지 어색해 먼저 샤워하겠다고 말한 뒤 욕실로 들어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를 피해 다닌 그가 아니던가. 갑자기 사이좋게 지내려니 몸이 근질거리기까지 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그녀는 피식 웃으며 침대 정리를 했다. 그러고 보니 결혼하고 한 번도 같이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던 것이다. 늘 그녀가 잠든 후에 그가 들어왔으니, 막상 같이 침실에 들려니 모란 역시 가슴이 떨렸다. 호텔에서의 그날 밤 자신의 몸을 감아오던 그의 강인하고 남성적인 몸이 생각나자 이젠 얼굴까지 빨개졌다.
내가 왜 이러지?
윤이 샤워를 하고 가운을 걸치고 나오자 모란은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윤은 그녀보다 먼저 침대에 몸을 눕히자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의 가냘프고 부드러운 몸을 만져보았던 기억이 있었기에 결혼하고 나서는 되도록 그녀의 몸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몰아붙이도록 일을 했고, 다행히 새벽 늦게 집에 오면 바로 잠들 수 있었다. 그런데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제대로 잠들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30분쯤 지났을까?
모란은 흰 면 잠옷을 입고 쑥스러워하며 그의 옆으로 기어 들어오더니 곰 인형을 그들 사이에 눕히고 스탠드를 껐다. 늘 새벽 늦게 침대에 들 때면 커다란 곰 인형을 꼭 껴안고 자는 그녀의 버릇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가 아닌 인형을 다정스레 안는 아내가 얄미워졌다.
"남편이 아닌 곰 인형을 껴안고 자는 사실은 우리만 알자고. 나의 명성을 아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난 얼굴조차 못 들고 다닌다고."
그의 말에 모란은 킥킥대며 웃는다.
"그럼 당신도 우리 삼돌이 안아볼래요?"
슬며시 그의 쪽으로 삼돌이라 불리는 곰 인형을 밀어붙이는 그녀에게 윤은 구시렁거리며 눈을 감았다.
"잘 자시오."
"우리 꿈속에서 만나요. 호호."
그녀의 애교 섞인 굿나잇 인사에 윤은 웃음을 참으며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정작 잠들지 못할 것 같던 윤은 일찍 잠들었지만 모란은 그의 남성적인 향기에 취해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만 같았다.
오늘 당신이 맞은 영양제에 특별한 뭔가가 더 추가되었나봐요. 그 약효가 떨어지지 말았으면......
그녀도 스르륵 잠이 들었다.
* * * *
새벽 6시 정각이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윤은 오랜 수면으로 다른 때보다 더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그의 품 안에 있는 삼돌이는 마냥 좋은지 그가 노려보아도 미소지으며 모란과 같은 순진무구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끙, 잠결에 그녀에게서 삼돌이를 빼앗아 온 모양이군.
상쾌한 아침 햇살이 하루를 시작하듯 커튼 사이를 파고들어 아기처럼 자고 있는 그녀의 얼굴 위로 살짝 내려앉았다. 옆모습을 보이고 새근거리며 자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이렇게 유심히 본 건 처음이었다. 자느라고 안경을 벗어놓았는지 지금 그녀의 모습은 무방비 상태였다. 안경 때문에 눈빛이 희미해 보이던 눈은 감겨 있어서 볼 수 없었지만, 속눈썹은 거의 환상적이었다. 인형 속눈썹처럼 숱이 많아 성냥개비 하나 올려놓아도 될 만큼 길었고, 안경 위에 걸쳐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았던 코는 작긴 했지만 예쁘게 오똑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맘에 들어 하는 그녀의 입술은 앵두 그 자체였다. 선이 뚜렷하고 붉게 물든 입술은 그녀가 말할 때나 웃음지을 때 저절로 시선이 갈 정도였다. 하얗게 우윳빛이 나는 듯한 그녀의 피부는 햇살 아래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늘 수수한 원피스에 얼굴의 반을 가리는 안경으로 자신의 모습을 꼭꼭 감추고 있어 언뜻 그녀를 보면 촌뜨기처럼 보였지만, 이렇게 자세히 뜯어보니 그녀는 웬만한 미녀들보다 더 예뻐 보였다.
그런데 내가 왜 일어나자마자 그녀의 얼굴을 이렇게 멍하니 보고 있는 걸까? 괜히 머쓱해진 윤은 자신의 품에 안긴 삼돌이를 그녀의 품으로 돌려보낸 뒤 출근 준비를 했다.
어제 일로 그녀와 가까워지긴 했지만, 아침을 먹고 나간다거나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을 한다는 게 왠지 머쓱했다. 아마도 그는 서서히 그녀에게 기울어지는 자신의 감정을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 그런 감정을 막아보려고 나름대로 애써보지만 그게 잘될까?
* * * *
"현아 씨, 좋은 아침이에요! 아침에는 더 상큼해 보이네요? 호호."
문서 작성을 하고 있던 서 비서는 사람의 기분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청아한 목소리에 기분 좋게 고개를 치켜들었고, 모란임을 확인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아침에 이렇게 뵈니까 저도 기분이 좋네요."
여태껏 몇몇의 사모님을 모셔봤지만 제갈윤 사장의 와이프처럼 아랫사람에게 진심으로 따뜻하고 상냥하게 대해 주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성북동 한 여사님도 좋은 분이시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있는 반면에, 모란은 같이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비록 펑퍼짐한 옷과 안경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지만, 서 비서의 예리한 눈은 모란이 평범한 외모 이상의 소유자라는 걸 파악했다.
서 비서의 말에 모란은 맑은 목소리에서 나오는 웃음소리를 종달새처럼 까르르거리더니 사장실 쪽으로 눈길을 보낸다.
"지금 이충식 비서실장님에게 보고 받고 계세요. 곧 나올 시간 됐는데."
그때 병원에서 본 적이 있는 이 실장이 사장실에서 나왔다. 이 실장은 모란의 모습을 보더니 인사를 정중하게 했고, 모란 역시 다소곳하게 인사를 건넨다.
"이 실장님이 그날 애 많이 써주셨는데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죄송해요."
예의 바른 그녀의 말에 이충식 또한 현아와 같은 생각을 하며 모란에게 진심 어린 미소를 보인다.
"아닙니다. 제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날 사모님이 댁으로 모시라고 했지만 사장님이 워낙에 완고하셔야 말이죠. 하하. 그런데 오늘 아침엔 어쩐 일로?"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사장이 갓 결혼한 새신랑답지 않아 그들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모란이 찾아온 걸 보니 자신의 기우였던 것 같다. 이 실장은 모란이 들고 온 종이 백을 눈여겨보다가 싱긋 웃는다.
모란은 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잠을 깼지만 그는 벌써 출근을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또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이거지? 남편의 건강은 아내가 챙겨야 하는 것!
모란은 얼른 일어나서 대충 씻고는 아파트를 나섰다. 아침을 거의 안 먹는 윤에게 위에 부담이 적게 가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죽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술 드신 후에는 꼭 찾는 필동까지 찾아가서 따뜻하게 데운 죽을 사 온 것이다.
"요즘 회사 일이 바쁜지 아침 식사를 자꾸 거르는 것 같아서 죽 좀 가지고 왔어요. 혹시 아침 안 드셨으면 같이 드시겠어요?"
이제야 제갈윤 사장도 제대로 된 안주인을 맞이했군.
이 실장은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닙니다. 전 먹었습니다. 회의는 한 시간 후부터 시작하니까 여유 있게 드시면 될 겁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윤은 책상 앞에 앉아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남도 아니고 밖에서 아침 인사를 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에요?"
기분 좋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와는 달리 윤은 퉁명스럽게 말한다.
"당신 요즘 회사 출입이 잦은 것 같군."
어젯밤의 다정하던 그는 온데간데없고 또다시 아이스맨이 된 것 같았다.
흥, 이젠 그 모습에 안 속는다구요.
"당신이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이럴 수밖에 없다구요. 그렇게 폼 잡고 있지 말고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아니면 거기서 드실래요?"
이젠 그의 말이 그녀에게 먹히지 않는단 말인가? 윤은 미간을 찌푸리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가 사무 보는 책상으로 다가와서 서류들을 한쪽으로 치우더니 종이 백에서 죽 그릇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난 십 대 이후로 아침을 먹어본 적이 없소. 오히려 아침에 뭘 먹으면 속이 거북하다고."
"흥, 그러니까 영양실조 같은 어처구니없는 병에 걸리죠. 당분간은 당신 영양식해야 해요. 그리고 이제부터는 삼 시 세끼 꼭 드셔야 해요. 안 그럼 매 끼니 때마다 음식 싸들고 올 테니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죽은 부드럽고 매끄러워서 위에 부담도 덜 가고, 아침에 먹기엔 이보다 좋은 것도 없다구요."
윤은 밥 먹기 싫은 아이마냥 투정 부리며 끝까지 먹지 않겠다고 버텼고, 그런 윤을 달래며 숟가락까지 쥐어주는 모란의 모습은 영락없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자, 숟가락 들고 한술 떠보세요. 일부러 죽 잘하는 곳까지 가서 사왔단 말이에요. 마음으로는 직접 만들어서 해오고 싶었지만 요리 솜씨가 엉망이라서 당신 더 병날까봐 참은 거예요. 크큭, 아마도 내가 만든 음식 드시면 당신 또 병원 신세 져야 할거예요. 왜 안 드세요? 제가 떠 먹여 줘야 먹겠어요?"
한참 조잘거리며 나무라는 모란을 보니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한숨을 푹 쉬고는 그녀가 놓아준 죽 그릇에 숟가락을 갖다 댔다.
"당신은 왜 안 먹는 거요? 같이 먹읍시다."
그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의외로 다정하고 부드러운 면이 많은 남자였다.
"그 말을 기다렸다구요. 자고로 음식은 혼자 먹는 것보다 같이 먹는 게 더 맛있고 소화가 잘된다구요. 호호, 그런데 여긴 너무 불편해."
이젠 능글맞을 정도로 능청스럽게 변한 모란의 모습에 윤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당신의 모습에 내가 적응될지 모르겠군.
"그럼 저 탁자로 옮기지. 아냐, 당신은 손대지 말고 그냥 소파에 앉아 있으라구. 내가 할 테니까."
그러자 모란이 잔소리를 해댄다.
"거봐요, 처음에 내가 탁자에서 먹자고 했을 때 그렇게 했으면 이렇게 번거롭지 않았을 거 아니에요. 무식하면 두 손 두 발이 고생한다더니........ 푸하하, 당신 지금 표정 사진 찍고 싶어요. 크크큭."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윤의 다양한 표정 변화에 모란은 깔깔대며 웃어댔다.
뭣, 무식이 어쩌고 어째?
삼십 평생 무식하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오히려 천재 소리 듣고 자라온 나에게 무식? 윤은 그녀의 웃음을 무시하고 뚱한 얼굴로 그녀가 가지고 온 것들을 탁자로 옮겼다.
"에이, 농담한 것 가지고 그렇게 인상 쓰면 어떡해요. 크큭, 이제 그만 할게요. 야채죽으로 사 왔는데 좋아하세요?"
아무래도 더 건드리면 단단히 삐질 것 같아 모란은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이 남자 의외로 잘 삐지네. 아유, 귀여워!
"죽은 다 좋아하오. 버섯만 빼고. 알레르기가 있거든."
"의외로 버섯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야채죽으로 사왔는데 잘됐네요. 당신 덕분에 아침에 죽도 먹어보고, 나 호강했지 뭐예요. 호호."
죽 위로 김가루와 깨, 달걀 노른자가 얹어 나와 한눈에 봐도 깔끔해 보였고, 따끈하게 끓여 나온 죽은 구수하면서도 되지도 묽지도 않은 부드러운 질감이 한입 넘기는 순간 목구멍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죽도 맛있었지만 입맛을 돋우는 젓갈류와 배추김치와 물김치가 고소한 죽 맛을 한결 맛깔스럽게 만들었다. 오늘도 어제처럼 모란은 자신의 그릇에 있는 죽을 그에게 더 건네준다.
"당신은 일하는 사람이니까 많이 드셔야죠."
어제의 감동이 오늘까지 이어진다는 말이 언뜻 윤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가 쓰러진 이후로 어미 닭으로 변한 그녀의 모습이 처음에는 생소해서 거부감이 생겼는데 이젠 차차 익숙해지면서 그걸 즐기는 자신을 느꼈다.
이런 사소한 것에서 사람들은 감동을 받기도 하는군.
일회용 그릇에 담긴 죽을 싹싹 비운 윤은 포만감에 기분이 여유로워지는 것 같았다. 싱긋 웃기까지 하자 모란이 슬쩍 웃으며 말한다.
"당신 그거 알아요? 조선시대에 왕들은 일어나면 간단하게 죽을 먹는 경우가 많았대요. 지금 당신 얼굴이 꼭 임금이 죽을 먹고 난 후 짓는 만족스런 표정 같아요."
"하하, 그런가? 당신 덕분에 오늘 하루 종일 기운이 넘칠 것 같군. 이제 집으로 갈 건가?"
"네,"
왠지 그녀를 이대로 보내려니 미안해졌다. 자신 때문에 아침잠까지 설친 그녀인데...... 그는 시계를 보며 모란에게 차 한 잔 하자고 한다.
"그럼 커피 한 잔 하자."
비서에게 커피 가져오라는 말을 하기 위해 인터폰을 누르려 하자 모란이 그의 손을 잡는다. 윤은 또 이 여자가 무슨 말하려고 이러나 싶어 자신의 손을 잡은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직원들을 위해서 만든 옥외 휴게실이 그렇게 예쁘다면서요? 날씨도 좋은데 그곳에서 커피 한잔해요."
괜찮을 리가 있나. 안 된다는 말을 할 새도 없이 말을 끝내자마자 후다닥 나가는 그녀를 어느 누가 말리랴.
* * * *
자판기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직원들은 차갑고 엄격하기로 소문이 난 제갈윤 사장이 그의 부인과 함께 그들 뒤로 줄을 서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그들의 모습에 흥미진진한 듯 힐끔힐끔 쳐다본다. 그럴 만한 것이 제갈석 회장이나 제갈윤 사장은 회사가 생긴 이후로 이곳 자판기를 이용한 적이 없었다. 자판기가 있다는 것도 모를걸?
까만 정장 바지에 어울리는 까만 실크 셔츠를 팔까지 올려붙인 제갈윤의 모습은 패션잡지 책에서 금방 빠져나온 모델 같았고, 그의 옆에 다소곳하게 서서 연신 생글거리는 모란의 청순한 모습에 직원들은 의외로 잘 어울린다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그 말을 한 여직원과 남자 직원은 모란이 못 들었으리라 생각했지만, 소리에 민감한 모란은 그들이 처음부터 무슨 말하는지 다 들었던 것이다. 기분이 으쓱해진 모란은 빙글거리며 윤의 팔을 잡아당긴다.
윤은 조금 전보다 배로 많아진 직원들이 자신의 주위에 몰려들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커피 자판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군.
자판기를 한 대 더 들여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모란이 그녀의 얼굴을 봐달라는 듯 팔을 잡아당기기에 윤은 아내를 내려다봤다.
"응? 왜?"
모란은 그들의 얘기를 해주고 싶었던지라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속삭인다.
"우리 앞에 있는 직원들이요, 우리가 너무 잘 어울린대요. 호호."
윤은 그녀의 말에 기분 좋게 호응해 준다.
"정말? 저 직원들 누군지 알아내서 승진시킬까?"
"그렇게 해도 돼요?"
모란이 그의 농담에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윤은 그녀의 순진함에 웃음이 나와 껄껄대고 웃었다. 키가 작은 그녀를 위해서 한껏 몸을 낮춘 그와 까치발을 하고 서서 귀에 손을 갖다 대고 속삭이는 그들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부러움의 환성을 자아냈다. 그리고 늘 무표정하던 사장이 아내에게 웃어 보이자 주위에 있던 여직원들은 그 매력적인 모습에 끔뻑 넘어갔다.
"얘, 우리 사장님 웃으니까 더 멋지다. 그지?"
"그러게, 그런데 우리 사장님은 항상 무표정한 얼굴인 줄 알았는데 웃을 줄도 아네?"
그 소문이 1시간도 채 안 되어서 퍼져 나갔고, 회장실에 있는 제갈석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정말인가? 우리 윤이와 새아기가 휴게실에서 다정하게 커피 마시고 직원들과 얘기도 나누었다고? 자네 헛것 본 거 아닌가?"
제갈 회장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비서실장을 향해 다시 설명을 요구하자 이 실장은 차근히 설명한다.
"사모님이 사장님 아침까지 챙겨서 회사에 오신 걸 제 둔 눈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두 분이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줄 서서 커피를 뽑은 후 직원들과 이야기 나눈 후에 사장님은 사모님을 정문 앞에서 배웅하고 사무실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실장의 말에 제갈석은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내 눈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니까. 결혼하고 한동안 윤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없음을 은근히 걱정했었는데 이젠 안심을 해도 될 것 같았다. 그게 다 사람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겠는가. 제갈석은 이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할 채병훈에게 알리기 위해 수화기를 들었다.
죽을 들고 회사로 찾아간 후로 모란과 윤의 사이는 차츰 좋아지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그녀를 피한다거나 그녀가 일어나기 전에 출근하는 일은 없었다. 불만이 있다면 예전처럼 새벽 늦게 들어오진 않았지만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간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나마 모란이 그가 올 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린다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는 차츰 일찍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다른 부부들처럼 격의 없이 친해진 건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어느 정도의 선을 모란에게 그어놓은 윤은, 한마디로 웃다가도 화내는 그런 식이었다.
** 7. 앞치마 입은 남자
어느 날 아침, 냉장고를 뒤지던 모란은 난감했다. 반찬으로 내놓을 만한 게 없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전기밥솥에 코드를 빼놓은 것도 모르고 취사를 눌렀던지라 차가운 밥통 안에는 넣을 때와 똑같이 물에 담가놓은 쌀만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일하러 오는 아주머니가 미리 아침 준비까지 해주고 갔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전기코드만 꽂으면 되었다. 그런데 일하던 아주머니가 시어머님이 편찮으셔서 일주일간 못 온다고 하자 그때부터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제는 대충 먹던 걸 내놓으면 되었지만 그것마저 다 떨어졌다.
"난 왜 엄마를 닮아서 요리를 못하는 거지?"
이제 와서 죽은 엄마를 탓해도 소용없는 법. 하지만 그에게 아침을 먹이지 않고 보낼 수는 없었다. 모란은 좋은 수가 생겼는지 갑자기 행동을 재빨리 했다.
윤은 문밖에서 통통통 두드리는 도마질 소리에 잠이 깼다. 오늘도 여전히 삼돌이는 그의 품에 안겨 행복한 듯 웃고 있었고, 모란이 잠들었을 그 건너편 자리는 비어 있었다. 6시에 일어나던 기상 시간이 7시로 바뀐 윤은 수면 식간이 늘어나자 한결 가뿐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주방에서 음식 써는 소리가 들리는 거지?"
문득 2년 전 갓 결혼한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났다. 와이프가 주방에서 도마질하는 소리에 잠 깰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을 때 그와 결혼 안 한 친구들은 그 친구를 비웃었다. 아마도 그 친구는 지금 그의 심정과 같았을 것이다. 궁금해진 그는 살며시 일어나서 아내가 눈치채지 않도록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있는 주방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앞치마를 걸치고 요리하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 때면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여지없이 달려가서 안아줬다나? 윤 또한 그러고 싶었지만 꾹 참고서 욕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그녀가 해주는 아침을 먹고 출근할 수 있겠군."
기대감으로 급히 씻고 옷을 챙겨 입고 있던 그에게 문밖에서 식사하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뭐요?"
식탁 위에는 푹 퍼진 라면과 신김치 하나만 달랑 놓여져 있었다. 아침부터 그렇게 설쳐대며 만든 요리라는 것이 애들도 쉽게 끓여 내는 라면이라니. 그리고 어느 누가 아침으로 라면을 먹는단 말인가. 무덤덤하게 말하긴 했지만 남편의 목소리에 담긴 실망감을 느끼며 모란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몰라서 묻는 거예요? 라면이잖아요."
기가 푹 죽어 있는 아내의 모습이 안돼 보여 윤은 일부러 크게 웃으며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하하. 라면인 건 나도 안다고. 당신이 주방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기에 난 당신이 만든 음식을 먹을 줄 알았거든. 흠, 뭐, 라면에 파도 들어가고 계란도 들어갔으니 요리라고 할 수 있군. 자, 먹자고."
젓가락을 들긴 들었지만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여자는 라면도 제대로 끓일 줄 모르나 보다. 얼마나 끓여댔는지 면발이 푹 퍼져 있었고, 물 조절을 잘못했는지 거의 쫄면 같았다. 그리고 면을 넣을 때 수프와 계란, 파를 한꺼번에 넣어서인지 윤기가 없었다. 그릇에 놓인 라면은 그야말로 면죽 같았다. 다른 사람이 끓인 거라면 두 번 쳐다보지도 않고 놔두고 갔을 테지만 - 그는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 그를 위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한 성의를 생각하니 남길 수가 없어 두 눈 꾹 감고 한입에 다 먹었다. 그러자 모란은 자신의 것까지 덜어주는게 아닌가. 그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나왔다.
"윽."
"왜요? 맛이 없어요? 아주머니가 당분간 못 오신다고 해서...... 당신도 눈치챘겠지만 전 요리에는 완전 젬병이에요. 하려고 노력은 무척 많이 했는데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 요리가 안 나오더라구요."
하긴 쉬운 라면조차도 이 정도로 만드는데 요리를 바란 내가 잘못이지. 기가 푹 죽은 그녀의 모습이 무척 애처로워 보였다. 그 모습에 또 약해지는 윤이다. 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윤은 두 눈을 꾹 감고 아예 불어서 붙어버린 면을 한꺼번에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그제야 그녀는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물 잔을 건넨다.
이렇게 짜게 먹어본 라면은 또 처음이군. 윤은 그녀가 건넨 물 잔을 반가운 듯이 받아서 원샷해 버렸다.
그의 서류 가방을 들고 나온 모란은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의 차가 세워져 있는 주차장까지 따라 나온다. 이 아파트에는 남편이 출근할 때 주차장까지 따라 나와서 배웅하는 여자가 없었다. 그 사실을 말해 주며 아파트 문을 나설 때 들어가라고 말해도 꾸역꾸역 따라 나오는 그녀이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 걸고 창문을 내리면 아내는 그의 볼에 가볍게 뽀뽀를 해준다.
"오늘도 행복하고, 웃음으로 가득한 날 되셔야 해요. 잘 다녀오세요."
그녀의 시야에서 그의 차가 벗어날 때까지 아내는 그곳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애정 어린 표현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웠지만, 아침마다 그녀의 그런 배웅을 받고 보니 이젠 오히려 자연스러워져서 어떤 날은 그가 그녀의 볼에 뽀뽀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복숭아 빛 봉이 빨개지며 수줍게 웃는 그녀이다.
그녀가 끓여준 라면 때문에 속이 거북해진 윤은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비서에게 소화제를 갖고 오라고 했다.
* * * *
모란은 오늘 아침이 참으로 행복했다.
그녀가 끓여준 라면을 - 처음에는 좀 놀란 듯했지만 - 군말 없이 먹어준 그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요리를 먹어본 사람들은 다들 기겁을 하며 더 이상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라면을 다 먹더니 그녀가 덜어준 것조차 싫은 내색하지 않고 다 먹지 않았는가. 점점 그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의 매력에 빠져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그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을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놔두다 보면 알 수 있으리라.
* * * *
거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모란의 정신없는 잔소리에 윤은 반항 한번 못해 보고 거실 베란다로 쫓겨나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이다. 시원한 강바람과 5월의 싱그러움이 이곳 베란다로 찾아 들었는지 윤의 담배 연기를 감싸 안고 어느 사이에 사라져 버린다. 윤은 난간에 기대어 서서 거실을 청소하고 있는 모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요리만큼이나 청소도 서툴군.
일하는 아주머니가 오시려면 아직 3일 정도 더 있어야 했고, 그동안만이라도 다른 도우미 아주머니를 부르라고 말했지만 모란은 자신이 집안 살림할 수 있다며 그의 말을 거절했다. 그 마음이 기특했지만, 윤은 미칠 것만 같았다. 첫날 아침은 불어터진 라면으로 때웠고, 저녁은 자장면을 시켜 먹었으며, 슈퍼에서 인스턴트로 포장된 음식들을 있는 대로 다 사 왔던 모양인지 어제 아침과 저녁은 전자레인지에 데운 밥과 3분이면 완성된다는 국, 그리고 통조림 속의 반찬들을 먹어야 했다.
저녁은 밖에서 먹고 들어올 수도 있었지만, 그녀 혼자서는 밥을 잘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 되도록 저녁은 같이 먹도록 노력은 하는데 이틀 동안 그녀가 내미는 음식들은 윤의 위장을 못살게 굴었다. 목마른 놈이 먼저 우물 판다고 오늘은 새벽같이 일어나서 냉장고를 뒤져보니 웬만한 음식은 만들 정도는 되었던 것이다.
어제 퇴근하면서 서 비서 책상을 지나쳐 가는데 요리책이 눈에 띄었다. 빌려줄 수 있냐는 윤의 말에 그녀는 그의 말을 잘못 들었는가 싶어 긴가민가 하는 표정으로 "네"라고 말했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요리책을 들고 나와버렸다. 아마도 소문이 또 삽시간에 퍼져 나가겠지? 하지만 그런 걱정보다 모란과 그의 건강을 생각해서 인스턴트는 그만 먹어야 했다. 그 생각에 오늘 아침에는 그가 직접 아침상을 차렸다.
요리책을 앞에 두고 도마질을 하느라 능숙한 주부들보다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춘 것 같았다. 밥이 좀 되긴 했지만 먹을 만했고, 두부가 들어간 된장찌개는 묽었지만 처음 한 것치고는 맛이 괜찮았으며, 여러 야채들을 섞어 만든 계란말이는 모양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맛있었다. 반찬이 단출하긴 했어도 그녀가 만들어 준 라면이나 인스턴트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뿌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을 즈음 모란이 전자레인지에 인스턴트 봉지를 넣기 위해서 나왔다. 하지만 곧 그의 모습을 보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아예 주저앉아서 웃는 것이다. 한참을 웃던 그녀는 갑자기 생각난 듯 서재로 가는가 싶더니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와서는 찰칵하고 그의 모습을 찍어댔다.
어느 날인가부터 그의 모습을 찍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띄었고, 처음에는 찍지 말라고 화도 내보고 달래보기도 했지만, 그의 사진첩을 보니까 요 근래 사진이 없더라는 것이다. 굳이 못 찍게 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아침 하느라 바빠서 씻지도 못해 부스스한 머리와 파자마 차림 그리고 그녀의 딸기 그림이 있는 앞치마를 입고 있는 그의 모습을 여직원들이나 친구들이 보면 저 여자처럼 배꼽을 잡고 웃어댔을 것이다. 찍지 말라고 손을 카메라 앞에 갖다 대보지만 그녀는 이리저리 도망 다니면서 찍어댔다. 하지만 이젠 그런 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같이 웃으면서 그녀에게 앉아서 아침을 먹으라고 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짝 놀라더니 그가 차려놓은 된장찌개와 계란말이를 먹고는 울음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그녀의 갑작스런 울음에 혹시나 음식이 잘못되었나 싶어 맛을 봤지만 괜찮은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왜 우는 거지? 그녀는 울면서도 꾸역꾸역 밥을 먹는다. 먹기 싫은데 나 때문에 억지로 먹어서 그러는 건가? 울고 있는 아내 때문에 신경이 쓰인 윤은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아 숟가락을 놓았다. 그러자 그녀가 숟가락을 입에 넣은 채로 왜 안 먹냐는 듯이 바라본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윤은 퉁명스럽게 말한다.
"내가 만든 게 그렇게 맛이 없는 건가?"
남자가 토라지기도 하는구나.
눈물은 볼에 흐르면서도 모란은 그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파편이 앞에 튀긴 했지만 윤은 별로 신경도 안 쓴다.
"푸하하. 아니에요, 그런 거. 나 정말 감동했거든요. 엄마가 죽은 뒤로 일하는 아줌마들 말고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이렇게 음식을 해준 건 처음이에요. 그리고 당신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죠. 음식 못한다는 이유로 라면이나 인스턴트 같은 걸 아침마다 내놓으니 당신이 얼마나 곤욕스러웠겠어요. 저보다 일찍 일어나서 밥상도 차려주고. 그런데 된장찌개나 계란말이 먹어보니까 너무 맛있잖아요. 처음에는 감동해서 울었는데 나중에는 하늘이 불공평해서 울었어요. 크큭."
언제 울었냐는 듯이 금세 웃어대는 그녀이다. 외롭게 자란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평생 아침상을 차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라 윤은 그저 그녀가 불쌍해서라고 해석하고는 그녀의 말꼬리를 잡고 질문을 한다.
"왜 불공평하다는 거지?"
그의 질문에 그녀는 여전히 음식을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한다.
"당신은 처음 하는 음식조차도 완벽하게 만들어 내는데, 그 반면에 난 6개월 동안 요리학원 다녔는데도 처음 실력 그대로더라구요. 어느 날, 나에게 가능성이 없다고 느낀 원장선생님이 저를 조용히 불러내서는 말하더군요. 요리 잘하는 남편을 만나던가 가정부를 두는 게 나를 위해서나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서 좋을 거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하고는 그곳을 그만뒀죠. 크큭."
한탄 조로 말하며 장난스런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는 모란을 바라보며 윤은 한참을 웃어댔다. 윤은 웃으면서 오늘 저녁은 무엇으로 만들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이틀 사이에 주부 다 됐군.
그가 만든 음식들을 너무나 맛있게 먹어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명치끝이 팔딱팔딱 뛰기 시작했고, 아내의 그런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한 개 남은 계란말이를 두고 서로 먹겠다고 젓가락으로 결투하며 그들은 그릇의 바닥이 보일 때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웃고 있는데 거실 바닥을 청소기로 밀면서 뛰어가던 그녀가 넘어지는 게 아닌가. 그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면서 급히 그녀가 쓰러진 곳으로 뛰어갔다.
** 8. 처음부터 사랑이었다!
일요일이었다.
남들에게는 그저 빨간 숫자가 되면 쉬는 날이겠지만 그녀에게 오늘의 일요일이 특별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회사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겠다고 그가 선포를 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기쁜데 그녀를 위해서 아침상까지 차려주었다. - 물론 인스턴트에 질려서 그가 직접 요리한 것이었지만 모란은 억지로라도 남편이 자신을 위해서 요리했다고 믿는다 - 사실 라면을 끓였던 그날 아침에 그녀 나름대로 반찬을 만들어 보았었다. 하지만 곧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갔고 할 수 없이 라면을 끓였던 건데 그것 역시 실패였던 것이다.
아침을 먹고 나자 그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동안 못 봤던 책이나 봐야겠다며 서재로 들어갔고, 달리 할 일이 없던 그녀는 이틀 동안 못했던 청소를 하기 위해 청소기를 꺼내들었다. 집이 워낙 넓어서 삼십 분 넘게 청소를 한 끝에 겨우 주방을 끝냈다. 청소기를 돌리면서 거실에 들어서자 윤이 서재에서 나왔는지 소파에 앉아 TV를 보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모란은 짖궂은 미소를 띠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일부러 그의 주위를 맴맴 돌면서 잔소리 해대자 그녀의 남편은 투덜거리며 담배를 들고는 베란다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모란은 슬쩍 웃었다.
사실 거실에서 담배를 피워도 상관은 없었지만 다른 부부들을 보니 한결같이 남편들은 베란다로 나가서 담배를 피웠고, 자신도 여느 부인들처럼 그런 잔소리를 해보고 싶어서 오버를 해봤던 것이다. 베란다로 쫓겨난 남편이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자 모란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그가 처음으로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날이었고, 특별히 두 사람이 하는 일은 없었지만 자신이 볼 수 있는 가까이에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그 행복감이 지나치게 밀려왔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청소기를 밀고 뛰어가다가 청소기 선에 걸려서 넘어졌다. 약간 접질렸는지 일어서려는데 발목이 시큰거렸다.
그녀가 넘어진 걸 보고서 부리나케 달려온 윤은 그녀를 소파에 앉혀놓고 발목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이리저리 놀러보더니 약간 접질렸다면서 파스를 붙여주었다.
"조심하지 그랬어. 당신은 청소도 하면 안 되겠어. 이런, 팔목만 가는 줄 알았더니 발목도 무척 가늘군. 많이 아파?"
파스를 조심스럽게 붙여주며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는 남편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모란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난 왜 하는 일마다 엉망인지 모르겠어요. 바이올린 켤 때는 집중이 잘되는데 그 외의 일에는 도저히 집중이 안 돼요. 산만하고 잘 잊어버리고."
"예술가들의 특징이 아닌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이성적인 면보다 감성 쪽이 더 발달해서 자신이 추구하는 것 외에는 관심을 덜 가지게 되지. 그런 이유 때문에 자연히 건망증도 생기고 산만하게 되는 거야. 다른 무엇보다 당신은 바이올린 하나는 잘하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구, 알았지? 그런데 발목이 이러니 청소는 못 하겠군."
그녀의 발목을 조심스레 주물러주며, 기죽은 그녀의 기분을 돋우기 위해 위로를 해주고 있는 윤의 모습에 모란은 콧등이 시큰해졌다.
모란이 바이올렛이라는 것도 모를 테고, 소영의 생일날 소품곡 몇 곡 긁적였을 뿐인데 그가 어떻게 자신의 실력을 알겠는가. 하지만 지금 그의 말투는 그녀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것처럼 치켜주며 위로해 주고 있었다. 모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남편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왜 자꾸만 감동을 시켜서 당신만 바라보게 만드냐구요!
겉으로 보이는 차가움은 껍데기일 뿐이었고, 알면 알수록 참으로 멋진 남자였고, 자상한 남편이었다.
이 남자가 사랑하게 될 여자는 얼마나 좋을까?
사랑?
헉!
그가 사랑하게 될 여자를 생각하니 질투라는 못된 감정이 심장 근처를 콕콕 찍어댄다. 사랑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질투가 아니던가.
그럼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 건가?
감동을 주는 영화의 한 장면들처럼 필름이 커트 되면서 그와 처음 만났던 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의 일들이 뇌리를 스쳐간다.
설마....... 그럴 리가 없어!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 모란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는다.
"안 돼요. 오늘 마음먹고 청소 시작한 건데 끝내야 해요."
결연한 표정으로 청소를 해야 한다는 모란의 말에 윤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녀에게 움직이지 말고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는 TV를 켠 후, 그녀가 볼 만한 채널에 고정시킨 뒤 그는 청소기를 들고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청소를 하는 것이었다. 남편의 의외의 행동에 깜짝 놀란 모란은 멍하니 앉아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하는 것보다 더 체계적이고 능률적으로 일해서 그녀가 하루 종일 걸려서 일할 분량을 단 2시간 만에 끝냈다. 바닥에 물걸레질을 하는 그의 모습에 모란은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윤 역시 자신이 이런 청소까지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그녀를 만나고부터 지금까지 자신다운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일요일 오전을 집안 청소로 보내고, 점심때가 되자 윤은 점심으로 뭘 먹을지 생각하며 소파에 넋이 빠진 사람마냥 앉아 있는 모란을 불렀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충격받은 표정인데 넘어지면서 어디 잘못된 건가?
윤은 그녀 앞에 다가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질끈 묶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청소하면서 몇 가닥이 빠져나와 있자 그는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한다.
"당신 안색이 너무 창백해. 혹시 아까 넘어지면서 다른 곳도 다친 거 아냐?"
마음속에서는 그에 대한 사랑을 거부하기 위해서 그의 단점들을 생각해 내고 있던 모란은 남편의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그녀와 키 높이를 똑같이 하고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본다.
"아........... 아니, 안 아파요. 저, 전............. 음, 지금 바이올린을 켜야 해요."
횡설수설하던 그녀는 갑자기 바이올린을 켜야 된다며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황급히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의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윤 또한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알고 있기로는 결혼하고 난 이후로 그녀가 악기에 손을 댄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악기를 켜야 된다며 서재로 도망치듯이 가버리다니. 윤은 왠지 허탈하면서도 섭섭했다. 그녀가 하루종일 무엇을 하며 보내는지 알고 싶은 마음에 일요일 하루 그녀와 보내려고 한 건데 저렇듯 서재로 도망가 버리다니.
내가 뭘 잘못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