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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있은 후 카탸는 더 이상 매트를 자신의 인생 여정에 있어 잠시 스쳐 지나가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그 관계로 인해 자신이 무척 변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에 대해 그렇게 친밀감을 느껴 본 적도, 그렇게 편안한 느낌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에펠 탑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강변을 거닐던 어느 날 저녁, 그에게 그런 심정을 털어놓았다.
매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별로 놀라운 일도 못 되지. 내가 아는 바로는 당신 스스로 어느 누구한테도 편안한 느낌을 갖도록 하지 않았으니까."
카탸는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또 혼자 살아가려는 방식에 대해 야단치려는 건가요? 이젠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어요"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오, 그런 얘길 하려던 게 아니오. 그보다 훨씬 심각한 얘기지. 당신은 가족들로 하여금, 아니 그보단 조부모들로 하여금 당신 주변에 높은 담을 쌓게 해서 그 너머는 안 보려 했잖소"
카탸는 발끈했다.
"난 그들로부터 빠져 나왔어요."
"도망쳐 나온 거지."
매트가 정정했다.
"추적할 수 없도록 해놓고선."
카탸는 조부모에게서 우편물을 받되 자신이 파리에 있다는 건 알지 못하도록 교묘한 조치를 취해 놓았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도 문을 닫아 건 거지."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모른다구? 그럼 대답해 봐. 런던에 친구가 몇 명이나 있지?"
카탸는 어깨를 으쓱했다.
"두세 명 정도요. 오래 된 친구들이에요. 대학에서 알게 됐죠."
"그래, 편지 쓰는 사람이라도 있나? 찾아 주는 친구라도 있소? 당신이 힘들 때 염려해 주는 친구라도 있냐구?"
"...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겠지."
그들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강물을 내려다보며 카탸는 얼굴을 찡그렸다.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죠, 매트?"
"잘 모르겠어. 아마도 당신이 얼마나... 비정상적인가를 깨닫게 해주고 싶은 건가 봐."
걸음을 멈추더니 정면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집을 뛰쳐나오거나 하진 않소."
카탸는 코웃음을 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한쪽 다리를 러시아 제국에 걸쳐놓고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갖고 있지 않아요. 난 혼자서도 잘 살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내가 말하려던 게 바로 그거요, 혼자서도 살 수 있다는 자만심. 당신은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연을 끊어 버리는 순간 다른 모든 사람들과도 끊어버린 거라구. 그건 용감한 일일지는 모르지만 현명한 짓은 못되지."
카탸는 손을 빼내고는 계속 걸어갔다. 매트는 말없이 그녀 곁에서 걸었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그가 한 말들을 되새겨 보았다.
"이봐요, 그런 얼굴 하지 마."
매트가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세상이 끝난 게 아니라구. 당신은 젊어요.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그런 여유있는 삶을 꾸려 나가도 늦지 않지."
카탸는 애써 미소 지으려 했다.
"내 실수들은 뒤에 남겨 놓은 채?"
"그 실수들을 통해 배우면 되는 거야."
매트는 어물어물 말하면서 슬쩍 허리에 팔을 둘러 자기 옆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실수란 그래서 존재하는 거요."
자신들의 이런 우정도 결국에는 실수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거냐고 물어 보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다리 밑을 흐르는 센 강을 바라보며 파리의 저녁을 말없이 그의 곁에 서서 걸을 뿐이었다.
매트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건 정신적 착취야."
딴 생각에 빠져 있던 카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라구요?"
"정신적 착취라구."
그가 재차 말했다.
"당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고 있는 행동 말야. 당신은 결코 거기에 응하지 않았지. 착취자들은 요구를 들어주면 더욱더 기세가 등등해지거든. 하지만 당신도 단 한 번 양보한 적은 있었지."
"언제요?"
카탸는 피곤한 듯 물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요? 그분들 눈엔 그게 아주 대단한 양보로 보였겠죠. 그 땐 보니가 앓고 있었거든요."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그 무언의 질문에 대답하듯 그녀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에게 무슨 나쁜 일이 있었는지 난 잘 몰라요. 모두들 감추려고만 하고 할머니는 마치 성자라도 되는 듯한 표정을 짓곤 울지 않으려고 애쓰셨죠. 내 생각엔 보니가 일종의 신경쇠약에 걸렸던 것 같아요. 그런 지경인데 내가 어떻게 반항할 수 있었겠어요?"
매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분들을 사랑하나 보군."
카탸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두 분 다 사랑하기가 힘든 분예요. 할머니는 너무 격식만 따지시고 할아버지는 날씨처럼 예측하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보니를 다시 데려왔을 때는 두 분 다 이미 나이가 많이 드셨고, 설상가상으로 저의 부모님까지 돌아가시자 두 분은 완전히 탈진상태가 됐어요. 그 나이에 그런 일을 겪는다는 건 참으로 끔찍한 일이죠."
"당신은 너무 마음이 여려요. 그러니 그 이기적인 두 노인네가 당신을 주무르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너무도 차갑게 내뱉는 말에 카탸는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그들이 어떤 해악을 끼쳤는가를 잘 알기 때문이지, 당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허영을 채우기 위해, 그로 인해 가족들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떤 희생을 치르는가는 생각도 않고, 자신들의 계급에 걸맞은 것만 찾으려는 그 어리석은 생각들. 난 그런 것들을 참을 수가 없소."
"그래요, 나도 알아요."
씁쓸히 동의했다.
"그분들을 그렇게까지 잘 아는 줄은 몰랐는데요?"
"그런 경우들을 어디선가 본 것 같소."
침울한 표정이다.
"퍼드에서 폴을 알게 됐을 땐가요?"
괴로운 기억을 더듬고 있는 듯한 그의 표정이 뭔가 미심쩍어 카탸는 불쑥 이렇게 물었다.
"... 그래"
잠시 망설이더니 그가 말했다.
"폴을 알게 됐을 때"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당신이 빠져나온 게 천만다행이오. 아마 당신 판단이 맞을 거요. 그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마도 비행기였겠지? 이젠 잊어버립시다. 사람들 많은 곳에 가서 밤새도록 춤추면서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가 봅시다."
카탸는 웃었다.
"난 학창시절에 많은 사람들과 밤새도록 춤추면서 지내지는 않았는데요?"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그렇게 해봐요."
매트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난 그랬었지. 이번엔 당신이 해볼 차례요."
그녀를 들어서는 한 바퀴 빙 돌렸다. 바둥거리면서 내려 달라고 그의 가슴을 마구 두들기자 짓궂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즐겁게 해줄까, 아가야?"
"오, 그만둬요"
카탸가 소리쳤다. 불안정한 자세 때문이라기보다는 갑작스런 분위기의 변화에 현기증이 났다.
"더 웃다간 어떻게 돼버릴 것 같아요."
"밤새도록 나와 함께 춤춘다고 약속할 때까지는 안 돼."
나이 든 한 쌍이 그쪽으로 걸어오다가 그들을 피해 멀리 돌아갔다. 그들이 아주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내려 주세요."
당황하며 카탸가 애원했다. 매트도 역시 그들을 보았다. 짓궂게 목소리를 높인다.
"내가 원하는 걸 주겠다고 약속만 해준다면"
그들에게 들릴 정도의 큰 목소리다. 갑자기 그 나이 든 커플은 걸음을 재촉했다.
"좋아, 아주 좋았어!"
카탸는 다시 땅에 내려섰다. 말려 올라간 스커트를 내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짓예요! 그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지도 몰라요."
매트는 별로 당황하지도 않았다.
"가십난의 새로운 기사거리가 되겠군."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할 뿐이다.
그리곤 아주 다정하게 팔을 두르더니 학생 술집으로 데려가서는 약속대로 밤새도록 춤을 추자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일찍 일하러 나가야 된다고 설득해 2시 반에 그곳을 나왔다. 언제나처럼 그는 카탸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문 앞에서 가볍게 키스한 다음 떠나갔다. 카탸는 천천히 문을 닫았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아련한 행복감에 젖었다.
어느 날 저녁 퇴근길에 화학관 계단에 드미트리가 우울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가 요즘 밀회를 즐기고 있다고 사람들이 떠들어대고 있어."
드미트리가 불길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요, 그런 얘긴 신물나게 들었다구요. 매트에 대한 험담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요. 모르겠어요? 그런 근거 없는 모략은 듣고 싶지 않다구요!"
카탸는 화를 내며 걸어갔다. 등 뒤에다 대고 그가 소리쳤다.
"그 자가 당신을 뫼리스 개업식에 데려가나 두고 봐. 그게 근거 없는 모략인지 두고 보라구."
카탸는 뒤돌아보지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났던 것이다. 집에 도착할 때쯤에는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물론 드미트리의 비난도, 그것들을 입증하는 자료들도 믿지 않는다. 매트는 그런 식으로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감추고 있는 뭔가가 있다. 오래 전부터 그 점을 느껴 왔고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게 걸린다. 하지만...
그날 밤 매트가 왔을 때 그녀는 다소 긴장했고 그걸 숨기려 했지만 그는 곧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지? 집안 청소를 했소?"
말끔히 닦은 책상을 손으로 문지르며 그가 말했다.
"뭐 걱정되는 일이라도?"
"아녜요, 물론 없어요. 그렇게 꼬치꼬치 묻지 마세요."
"평소와는 다른데?"
그가 예리하게 지적했다.
"시간이 좀 나길래, 방을 치우면 덜 지저분할 거라는 생각을 했을 뿐예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고 애쓰면서 카탸가 말했다.
"그런 것 같진 않군."
매트는 그녀의 회전의자로 가서 조용히 앉았다.
"이리 와요."
시키는 대로 그에게로 다가갔다. 요즘은 늘 이런 식이다. 그의 따스한 포옹은 이제 그녀가 숨 쉬는 공기만큼이나 익숙하고 꼭 필요한 것이었다.
"말해 봐요".
그녀가 말을 않자 다시 물었다.
"우리 문젠가?"
"...조금은요."
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빨리 진행된다고는 말하지 않길 바라오. 내 딴에는 아주 느리게 진행시키고 있는 거니까. 실제로는 거의 정체상태지."
"아녜요... 그게 아녜요."
"그럼 뭐지?"
카탸는 입술을 깨물었다.
"매트, 난 당신 생활에 어울리지 않아요. 그렇죠?"
매트는 그녀를 응시했다.
"어울리지 않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예를 들면 당신 친구들을 내게 한 번도 소개시켜 준 적이 없잖아요?"
"나도 요즘은 친구들을 보지 못했소. 당신과 함께 있지 않을 때는 일을 하니까."
"내 말뜻은 그게 아니에요. 모르시겠어요? 당신 혼자서 파리에서 일한다면 매일 저녁 친구들을 멀리하며 보내지는 않을 것 아녜요?"
"친구라기보다는 귀찮게 따라다니는 자들이지."
그가 비꼬듯 대답했다.
"아냐, 만약 내가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밤마다 술집에 있었을 거요. 그리곤 다음날 일도 못하고 잠을 자면서 그걸 잊으려 했겠지."
그는 다시 덧붙였다.
"당신은 내게 놀라운 영향을 미친 거요."
그는 오랫동안 말없이 키스했다.
"기분이 어떻소?"
"왠지 두려워요."
카탸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녀를 떼어놓으며 묻는다.
"정말이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리석은 생각이겠죠? 잊어버려요. 콜럼버스 얘기나 해줘요"
그는 영화 얘기는 무시했다.
"아냐, 이게 더 중요해"
가볍게 그녀의 볼을 어루만진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괜스레 책상이나 닦게 만든다면... 좋아요, 그래야만 당신 마음이 후련하다면 여기저기 술집을 다녀 봅시다. 하지만 아마도 곧 따분해지고 말 걸"
카탸는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꼭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해요? 새로 문을 여는 디스코테크에 가면 되잖아요. 아주 근사한 개업식을 한다고 들었는데, 초대장을 구할 수 없어요?"
이번에는 매트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이 가늘어지면서 긴장하고 있는 그녀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는다.
"뫼리스에 가고 싶은 거요?"
"왜 안 되나요?"
상당히 흥미가 동하는 것 같은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어려울 건 없지, 이미 초대를 받았으니까. 하지만 당신은 디스코를 좋아하지 않잖아?"
"하지만 늘 내게 생활을 바꾸고 시야도 넓히라고 했잖아요?"
"레이노드의 나이트클럽에라도 가서 시야를 넓히고 싶단 말이오?"
매트는 약간 경계의 빛을 띠며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결국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좋소, 당신 말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 내 생활과 어울린다고 느낀다면.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활이 내게 어울릴지 잘 모르겠소."
카탸는 그곳에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드미트리의 예측이 근거 없는 말인 것을 알게 되어 적이 안심이 되었다. 쇼가 진행되는 동안 카탸는 짐짓 즐거운 척해야만 했다. 한 번도 디스코테크에 가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모든 게 그저 놀라왔다. 하지만 여기 오자고 조른 건 자기니까 매트에게 그런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바베트에게는 그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바베트는 아주 반가와하는 눈치였다. 그녀를 알고 지낸 이후 처음으로 찾아온 카탸의 남자관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나름대로 관심을 갖고 지켜본 모양이다. 처음에는 다소 우려하더니 이제는 적극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좀 너무했구나"
그녀는 강경한 어조로 충고했다.
"오랜 시간 춤을 계속 추려면 굽이 낮은 신발과 시원한 옷을 입어야지."
카탸는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도와줄게. 전에 말했지? 너도 마음만 먹으면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그녀는 야릇한 표정으로 눈을 치켜 떴다. 카탸는 뫼리스 개막 쇼에서 그 화려하고 멋진 모습들을 보고는 가슴이 내려앉았던 걸 떠올렸다. 매트가 자신을 그런 부류의 친구들 틈에 끼워넣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아마도 그들과 비교해 볼 때는 자신이 형편없이 평범하게 느껴졌을 테니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말했다.
"나도 네가 아는 방법을 총동원해서라도 매혹적으로 보이고 싶어, 바베트"
친구는 웃었다.
"그래! 그럼 먼저 쇼핑을 가자. 그리고 나서 그 아름다운 머리를 좀 손질하고 화장을 하는 거야. 하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거야."
정말 그랬다. 일주일 내내 점심시간마다 그 방면에 유능한 바베트를 쫓아다니며 의상실을 훑고 다녔다. 그게 끝날 때쯤 카탸는 등과 소매를 과감하게 파내고 속이 희미하게 비치는 블라우스에, 번쩍번쩍 빛나는 장식이 달린 구두에,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명한 바베트는 지나친 화장은 피하고 카탸의 머리를 과감하게 틀어 올려 몇 가닥만 싱싱한 목 언저리에 늘어뜨린 후 반짝이는 핀으로 고정시켰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본 카탸는 마음에 들긴 했지만 왠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분방한 여자처럼 보였다. 자기 같지 않다고 바베트에게 말했다.
"아마도 네 속에 그런 모습이 감춰져 있었나 보지."
바베트는 가방을 집어 들고 떠나려 했다.
"즐겁게 보내라!"
그녀가 가버리자 카탸는 몸을 숙여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바베트의 노련한 솜씨로 살짝 새도를 발랐을 뿐인데도 두 눈이 크고 시원스레 보였고, 분을 바른 아름다운 핑크빛 얼굴은 다소 환상적인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딴사람처럼 보이게 한 건 은근히 윤기 흐르는 입술이었다. 육감적이고, 그녀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관능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매트도 역시 놀라는 것 같았다. 그는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약간 혐오스러운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그가 아무말도 안하자 짜증스럽게 물었다.
"내가 부끄러우세요?"
"매일 저녁 당신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을 물리쳐야 할 것 같군."
매트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그런 모습을 한 거요?"
"마음에 안 드세요?"
실망한 듯 그녀가 재차 물었다. 그는 망설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마음에 들긴 해요. 그 모습은.."
잠시 말을 끊었다. 잿빛 눈이 아주 심각해 보인다.
"얼마나 섹시하게 보이는지 당신도 알고 있소?"
카탸는 양 볼이 후끈거리는 게 느껴져서 당황한 나머지 몸을 돌렸다. 그가 어깨를 잡았다.
"아니, 얼굴 돌리지 말아요. 어줍잖은 찬사는 늘어놓지 않겠소. 당신은 늘 아름다우니까. 그런데 오늘밤은, 당신을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당신만의 공간에서 나와 진짜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보이는군."
맨살이 드러난 팔을 그가 손등으로 쓸어내리자 그녀의 몸은 가볍게 떨렸다.
"고혹적이야! 당신은 지금 그렇게 보이고 있소, 오늘밤을 잘 기억해 둬요. 이런 일이 자주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는 이상할 만큼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이트클럽에 도착해 파티를 즐기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별로 편안해 보이지를 않았다.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큰소리로 떠들고 그의 친구들과 거리낌없이 어울려 춤을 추어도 그의 기분은 별로 밝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밤이 깊어 갈수록 음악 소리가 커졌다. 매트는 지금 거의 속옷이나 다를 바 없는 재킷을 걸치고 펑크 머리를 한 여자와 춤을 추고 있다. 이상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 광란의 몸짓이 무겁게 짓눌러 온다. 모두 다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때 그 자체를 순수히 즐기고 있는 듯한 얼굴이 보였다. 순간 카탸는 숨을 죽였다. 저쪽 구석에서, 불빛이 흐리긴 했지만 마치 딴 세상에서 온 듯한 느낌을 주는 여자는 다름 아닌 사촌 보니였다. 풀어헤친 검은 머리는 춤을 추는 동안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다. 카리브 해에서 적당히 그을린 듯한 피부는 그 윤기로 인해 그녀가 마치 황금빛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클레오파트라 같은 아이라인을 그리고 그 위에는 밝은 빛깔의 아이새도를 환상적으로 칠했다.
카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보니가 틀림없다. 춤을 막 끝낸 보니는 자신의 파트너가 포도주를 나르는 웨이터라도 되는 양손을 흔들어 보냈다. 그리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카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스쳐가더니 이내 미소로 바뀐다. 반가운 듯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무대를 거쳐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안녕!"
카탸의 테이블에 같이 앉아 있던 남자에게 부드럽게 인사하고는 그녀 옆의 의자에 미끄러지듯이 앉았다.
"여기서 뭘 하니? 실험실에서 실험 용기들과 씨름하면서 노벨 화학상이라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가 부풀려서 말씀하신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카탸는 웃었다.
"낮에만 그래"
보니는 의자 뒤쪽으로 두 팔을 늘어뜨리고는 등을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속눈썹이 길고 끝이 말려 올라가 있다.
"그러니까 밤에는 인간늑대로 변하고.."
목소리를 끌면서 말했다.
"늑대치고는 상당히 아름다운데?"
카탸는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지?"
"여기서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보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는 스타일에 제한을 안 받는 곳이라구."
눈썹을 슬며시 치켜뜨며 배시시 웃는다.
"어때, 맘에 드니?"
"잠시 기분전환을 하기엔 그만이야. 하지만 자주 할 짓은 못되는 것 같아."
"너무 요란한 건 사실이야."
그녀는 무덤덤하게 동의했다.
"하지만 네가 조금씩 그 맛을 알게 됐다니 기쁘구나. 넌 너무 오랫동안 착실한 숙녀였잖니."
카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언니뿐만이 아냐."
"널 사로잡고 있는 남자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어."
쾌활한 목소리로 보니가 말했다.
"그래서 널 여기 데려왔든?"
카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내 생각이었어. 기분을 좀 북돋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거든."
"잘했어. 그는 어디 있니?"
비록 보니를 좋아하고 그녀를 믿지만 카탸는 왠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저쪽에"
매트와 친구들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모호하게 대답해 버렸다
"레이노드 친구들 중 한 명인 것 같군. 전부 여기 와 있지. 크리스팽, 라플라주, 스테피 솔로몬. 아직 못 봤지만 아마 사라센도 올 걸?"
그 목소리에 이상한 기색이 엿보였다. 카탸는 재빨리 물었다.
"그럼 스테피 솔로몬을 봤어?"
"물론, 도착하고 얼마 안 돼서 봤지. 내가 런던에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새로 나온 랑그리주 카탈로그를 갖다 주더라."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뭐 별로 새로운 것도 없더군. 아마 6월에 사라센과 함께 지낼 때 가져온 건가 봐. 가을용 카탈로그도 곧 나올 걸."
카탸는 마치 유리 파편이 튀어 올라 심장에 박힌 것처럼 느껴졌다. 보니는 여전히 떠들고 있다. 카탸가 갑자기 굳어진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그녀가 무심히 던진 한 마디 말이 드미트리가 퍼부어댔던 그 숱한 험담들보다 카탸의 마음속에서 더욱 짙은 의혹을 불러일으킨 줄 그녀가 어떻게 알겠는가.
카탸는 실제로 몸에 상처를 입은 것만큼이나 아팠다. 매트는 지금 망사처럼 생긴 옷을 걸친 녹색 머리 여자와 춤을 추고 있다. 그를 쳐다볼 때마다 아픔이 되살아나곤 한다. 6월에 사라센과 함께 있었다고? 몇 주 전만 해도 그들은 연인 사이였겠지. 그런데 지금은...
"좋아요."
옆에 있던 남자가 춤을 추자고 손을 잡아 끌었을 때 그녀는 무작정 그렇게 말해 버렸다. 보니는 미소를 띠며 손을 흔들고는 동양식 바지에 맨가슴을 드러낸 몇몇 남자들에게 휩싸였다.
"나는 내일 플로리다로 가. 다시 파리로 오게 되면 그때 전화할게"
그렇게 소리치고는 그들과 더불어 강렬한 드럼비트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카탸는 몇 시간 내내 춤만 추었다. 좋은지 싫은지도 모른 채 자동인형처럼 흔들고만 있었다. 그녀는 매트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 갔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다른 누군가에게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순 없었다. 결국 매트가 그녀 앞에 와서 섰다.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그 멋진 얼굴에는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오."
왠지 모를 반항심이 솟구쳤다.
"왜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가는데요."
매트는 경계의 빛을 나타냈다.
"오는 사람도 있고 가는 사람도 있는 거요."
"하지만 아직 붐비고 있어요."
"새벽 6시까지는 계속 이렇게 붐빌 거요. 하지만 내쫓길 때까지 뭉개고 있을 바보 축에 낄 필요가 있겠소?"
그는 춤을 추면서 무대 바깥쪽으로 그녀를 유도했다. 가방과 재킷을 들고는 그에게 소리치는 한 쌍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인 후 그녀를 밀면서 밖으로 나왔다.
후덥지근한 여름밤이었다. 하지만 나이트클럽의 열기 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자 춥게 느껴져서 카탸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매트는 즉시 손가락에 걸고 있던 재킷을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그녀의 방 앞까지 왔는데도 매트는 떠날 생각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조용히 문을 열더니 그녀를 먼저 들여보내고 자신도 들어와서는 문을 닫고 어깨를 기댔다.
카탸는 이상하게 숨이 막히는 듯했다. 몇 발짝 떼놓다가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왠지 자신이 궁지에 몰린 짐승같은 느낌이 들었다. 매트는 야릇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탸는 불안한 듯 입술을 적셨다.
"저... 너무 늦었어요, 매트"
이글거리는 잿빛 눈이 더욱더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다.
"몹시 피곤해요. 데려다 주셔서 고마와요.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겠어요."
커가는 불안을 더욱 고조시키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물론, 우린 그래야만 되겠지."
그녀는 가볍게 웃어 보이려 했다.
"진짜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죠?"
"아닌 것 같애?"
재미있다는 듯 그의 짙은 눈썹이 올라갔다. 그때까지도 그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이리 와요."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카탸는 목구멍에 뭔가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마른 침을 삼켰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만 해요, 매트. 제일 먼저 가야 하거든요."
그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시간에 맞춰 깨워 주지."
카탸는 의자 뒤로 물러섰다.
"이제 그만 가주셨으면 해요, 매트"
그녀는 재빨리 말했다.
"즐거운 저녁이었어요. 이젠 혼자 있고 싶어요."
그는 불쑥 말했다.
"당신 사촌이 오늘밤 거기 있었지? 그녀와 얘기했나?"
카탸는 눈을 감아 버렸다. 고통스런 표정이 나타나지 않길 바라면서.
"그래요."
"그래서 이제 나를 돌려보내고 싶어 하는 거요?"
"네, 그래요."
그녀는 거침없이 말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 그 독재적인 조부모들의 가정교육 때문에 굳게 닫혀진 당신의 마음속으로 이제 간신히 비집고 들어왔는데, 보니 같은 형편없는 여자가 이제 와서 이 모든 걸 망치게 놔둘 순 없어."
입술이 바짝 마른 채 카탸는 그를 응시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 말은 오늘밤에야 당신이 땅에 발을 딛게 됐다는 거요. 거기가 바로 당신이 서야 할 곳이지."
방을 가로질러 와서는 꼭 붙들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의자를 떼어놓았다. 그 바람에 재킷이 흘러내리고 떨고 있는 어깨 위로 그의 따뜻한 손이 다가왔다.
"그렇게 차려입으니까 섹시하게 보인다고 말했었지?"
잠시 황홀한 눈빛이 스쳐지나간다.
"정말 그렇게 보여. 성자라도 당신에게 손길을 보내고 싶을 정도야."
드러난 가슴뼈 위를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어루만지더니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다시 오므렸다. 그로부터 강렬한 욕망이 전해 왔다. 엷은 한숨을 내쉬며 카탸는 축 늘어졌다. 포기한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매트는 열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탐색하는 듯한 황홀한 입맞춤이 계속되었다. 거기 그렇게 선 채 그는 겉옷을 벗겼다. 발 아래로 스르르 옷이 떨어졌다. 이렇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렇다. 카탸는 바로 이렇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에게로 다가가서 입술을 맛보고 그 둘을 모두 태워 버릴 때까지 껴안고, 서로를 탐하고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입술로부터 부드러운 목선을 따라 서서히 내려가면서 여리게 고동치는 맥박에 키스를 해주자 그녀는 낮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 달콤하고 야릇한 감촉에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매트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카탸는 아무 말도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매트도 주저하는 것 같았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땐 더 고혹적으로 보이는군."
매트는 웃음을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을 쥐더니 갑자기 손바닥 안에 따뜻한 키스를 해주고는 소중하게 간직이라도 하려는 듯 다시 꼭 쥐어 주었다.
"오, 매트"
그에게 모든 걸 다 주어 버리려는 듯 카탸가 소리쳤다.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서는 웃으면서 침대 쪽으로 데려갔다. 그가 몸을 숙이려 하자 걱정스러운 듯 그를 쳐다보았다
"매트,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건 아니겠죠? 난 보니완 달라요. 난 모르겠어요.."
강한 키스로 그 말을 막아 버렸다.
"제발. 우리가 이러는 것도 다 그 때문이야. 모르겠어? 이 어리석은 아가씨야. 당신은 보니의 그림자가 아니라구. 당신 할머니가 갖고 노는 인형도 아니고. 당신은 당신 자신일 뿐야. 달리 그걸 이해시킬 방법이 없다면 내가 오늘밤 그렇게 해주겠어."
그건 마치 무슨 맹세처럼 들렸다. 카탸는 움찔했다. 말을 계속하면 할수록 그가 던졌던 관능적인 눈빛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 점을 알려 주려고 날 침대로 이끈 건가요? 치료라도 해주려고?"
"젠장!"
너무도 거친 목소리에 그녀는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 정도로 순진한 거요? 내가 왜 침대로 끌어들였는지 정도는 알 텐데?"
그녀는 애써 웃어 보이려 했다.
"그래요, 좀전에 말했으니까요."
"어리석은 소리 말아!"
매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마음을 바꾼 것 같군."
카탸는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몹시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헝클어진 머리가 결국 머리핀에서 빠져나와 얼굴 위로 쏟아져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표정을 감춰 주었다. 매트는 잠시 동안 화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좋소."
마침내 그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재킷을 집어 들고 있었다. 카탸는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졌소. 편히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실험실에 나가 맡은 일을 해요. 두 번째 기어를 넣을 때까지 이 일은 접어 둡시다. 당분간"
7
그런 일이 있은 뒤 카탸는 그가 다시는 자기를 보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트는 그 전날 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완벽할 만큼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그는 그 일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그 일을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카탸에게도 그것을 계속 상기시켜 주었다. 둘 사이에서 그 일은 거의 농담처럼 돼버렸다.
어느 날 저녁, 영화를 위해 자기가 작곡한 곡들을 카탸에게 들려주었다. 그녀는 멋진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이런 멋진 악상을 얻었죠?"
그의 재능에 진심으로 놀라며 물었다.
"어떻게 이런 곡을 생각해냈어요?"
매트는 약간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 봐, 당신이 얼마나 날 좌절감에 빠지게 했는가를."
카탸가 얼굴을 붉히자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매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는 약간 조심스러운 편이었으나 그건 거의 예외적인 일이었다. 그들이 숲속으로 피크닉을 갔던 어느 날도 그는 그렇게 행동했다. 결국 카탸는 자기가 얼굴을 붉히거나 킬킬거리며 웃게 될까봐 그를 떠나 다른 사람들 속으로 끼어들었다.
일행은 12, 3명 정도였는데 거기엔 대사관 직원도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술잔을 들고 걸어다니고 있는데, 대사관 직원 잭이 그녀에게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카탸는 미소를 지었다.
"네, 그래요. 여긴 정말 멋있는 곳이에요."
그녀는 푸른색과 황금빛으로 어우러진 나뭇잎들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시골에서 사셨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난 도시화될 대로 도시화된 사람이죠. 그게 두려워요. 하지만 다른 모든 도시인들처럼 나도 꿈을 가지고 있어요."
이지적이고 날카로운 그의 얼굴은 호기심에 가득 차 있다.
"꿈을요?"
카탸는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풀이 무성한 개울과 우거진 숲, 그리고 신선한 공기와 햇빛, 아주 전원적인 환상 말예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런 그림을 본 적이 있죠. 양치기의 단순한 생활을 그린 거였어요."
카탸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생긋 웃어 보이면서 약간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그래요, 그게 바로 내게 맞는 생활이에요."
"마리 앙투아네트처럼요? 그 여자는 트리아농에서 목동 노릇을 즐겨 했죠, 알고 계시죠? 그녀는 변장술에 뛰어난 사람이었죠. 사람들은 그런 행동이 심각하고 위험한 일이라는 걸 그녀에게 설득시키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녀는 결국 죽고 말았어요. 가엾은 여자지요."
카탸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지금 뭘 말하려는 건가? 오래 전에 죽은 가엾은 왕비에 대해서가 아니라, 마치 아주 가까운 일을 얘기하듯 그의 목소리는 몹시 심각하다. 이 사람은 도대체 내게 무엇을 경고하는 걸까?
그녀의 보랏빛 눈 속에 어떤 의문이 서리는 것을 보자 그는 좀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훌륭한 연극배우였죠. 옷을 갈아입고는 잠시 딴 사람이 되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녀는 자신이 왕족이라는 데 행복을 못 느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가끔은 자기의 행동방식을 부끄러워했는지도 모르죠."
"당신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연구하셨나 보죠?"
"난 사람들을 연구하죠."
잭은 발 사이에서 풀잎 하나를 뽑아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론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휴일이 필요하죠."
카탸는 갑자기 몸이 떨리고 두려움마저 느꼈지만 조용히 말했다.
"만일 당신이 지금 매트에 관해 말씀하시는 거라면 납득이 좀 가는군요. 하지만 계속 듣고 싶지는 않은데요?"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놀라움과 변명의 빛을 동시에 담고 있다.
"좋아요, 지금 내가 말하려는 건 당신이 단순하고 소박한 애인을 찾고 계신다면, 매트 사라센은 번지수가 틀렸다는 얘깁니다."
카탸의 양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자기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왜? 카탸는 그를 응시했다.
"당신은 그를 좋아하지 않는군요?"
그는 놀라는 듯했다.
"난 그 사람을 좋아해요. 그는 훌륭하죠. 친구로서는 대단해요. 하지만 고객으로선 아주 골칫거리예요. 그는 소동을 잘 일으켜요."
카탸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렇게까지 소동을 일으키는 사람 같진 않던데요?"
그는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네, 그렇긴 합니다. 내가 우려하는 게 바로 그거죠."
"하지만 그가 당신이 예상했던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면, 그건 또 왜죠?"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나무 그루터기에 등을 기대고 있다. 그리고 나뭇잎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마지못해 하듯 조그맣게 말했다.
"그가 야단법석을 떠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기 때문이죠. 그는 친구들과 함께 도망쳐서 술을 마시고 술집을 엉망으로 부숴 놓고.."
그는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는 말을 계속했다.
"그리곤 싸움을 벌이죠. 누군가가 그를 감옥에서 꺼내 주고, 술을 깨게 하고, 벌금을 치르곤 집에 데려다 주었어요. 피해가 그렇게 큰 건 아니었어요. 테이블 몇 개와 의자 몇 개, 그리고 검은 눈을 가진 녀석들 몇이 피해를 입긴 했지만. 또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여자를 찾아가는 거예요. 그가 찾는 건 당신도 아다시피 영원한 연인은 아니죠. 매트는 영원한 관계 같은 관례적인 것에는 속하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카탸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불과 며칠 전에도 매트가 직접 자신은 관례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사람이 악의가 있어서 매트를 비방하고 있는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사람은 불만 많고 소심한 드미트리 같은 사람은 아니다. 매트가 하는 행동 때문에 괴로와하고는 있지만 그는 매트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는 지금 드미트리가 들려준 것과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계속했다.
"그리고 가끔 여자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죠. 잠시 동안 말입니다. 이번엔 당신과 함께였죠."
그는 카탸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녀는 약간 동요되어 낮게 말했다.
"왜 그런 얘길 나한테 하는 거죠? 당신은 날 모르실 텐데요?"
"모르죠. 그러나 난 당신에 관한 것은 압니다. 그게 내 일이니까요. 당신은 누구의 보호도 없이 파리에 혼자 있고, 싸구려 아파트를 빌어서 보조금과 강의료로 생활하고 있죠."
그녀는 잠시 당황했다. 그건 자신이 매트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라는 뜻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요?"
그녀는 재차 다그쳤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만일 매트가 당신에게 임신이라도 시키고 떠나 버린다면 그 뒷수습을 하고 당신을 돌봐 주어야 하는 건 바로 나란 말입니다. 또 국제적인 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조치하고 가능한 한 신문에 오르내리는 일이 없도록 뒷수습을 하는 것도 바로 나란 말입니다."
그는 거칠게 말했다.
"그러니 내 말을 믿으세요.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카탸는 주춤했다. 불쾌함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녀는 침목과 싸우며 술을 한 모금 천천히 마셨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의 배려에 감사해요."
말투엔 빈정거림이 섞여 있다. 다시 한 번 그의 시선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난 혼란을 피하게 해주려는 거예요. 당신은 이런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타입이 아닙니다. 그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죠. 당신은 상처를 입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녀는 여전히 비꼬듯이 말했다.
"곤란하게 되겠죠."
하지만 결국 잭이 말했던 사실을 인정하게 만든 건 다른 사람 아닌 그녀의 할머니였다. 어느 날 실험실에서 돌아오던 길에 집 앞에서 회색 제복을 입은 운전사와 마주쳤다. 그 사람은 파리로 이민 와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어느 저명한 러시아 노인의 운전사였는데, 러시아 클럽 리셉션 때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멈춰 섰다. 그 사람이 다가왔을 때 좀 당황했다. 그리고 그 운전사의 조용한 동작에 따라 리무진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길을 건너와 차창에 몸을 굽혔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노왕비는 차창을 열었다. 조용한 명령에 따라 그녀는 차안으로 들어가 호화로운 뒷좌석의 할머니 옆에 앉았다. 할머니는 그녀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운전사에게 말했다.
"부아 가로, 에릭. 그리고, 내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 계속 달려요."
그는 허리를 살짝 굽히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가 시동을 걸었을 때, 할머니가 작은 버튼을 누르자 운전사와 승객 사이를 가로막는 어두운 유리창이 조용히 미끄러져 내려왔다.
"우리가 지금 하는 말은 아무도 들어선 안 되는 거다."
할머니는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중요한 일인가요?"
카탸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할머니는 이상하게 망설이는 듯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첩보활동을 하듯이 네 뒤를 따른 건 미안하구나, 할아버진 내가 여기 와 있는지 모르신단다. 앞으로도 계속 모르시길 바라고 있지."
카탸는 놀라서 할머니를 응시했다. 할머니는 완벽하게 순종하는 아내다. 할머니는 카시미르 대공에게 먼저 의논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검고 긴 가죽 장갑으로 가려진 할머니의 손은 핸드백을 꼭 붙잡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주 무거운 중압감에 눌려 있는 듯했다.
"우린 네 소식을 듣고 있단다."
할머니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그녀의 부드러운 눈을 응시했다.
"그 사람과 일이 있는 게 사실인지 내게 말해 주겠니?"
<그 사람>이란 분명 매트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건 할머니가 <일>이라고 말씀하신 게 뭐냐에 따라 달라요."
카탸는 말끝을 흐렸다.
"좋다. 그럼 넌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니?"
카탸는 숨이 막혀 왔다. 전에는 할머니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감정, 열정, 확신, 그리고 사랑, 이러한 것들에 대해 얘기를 한 분은 오히려 할아버지인 카시미르 대공이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열정을 누그러뜨리고, 좀 더 예의바른 분위기로 대화를 이끄는 품위 있고 귀족적인 분이다. 할머니가 자기 자신에게 허용하거나 그 어느 누구에게 말하고자 할 때, 감정의 가장 강렬한 표현은 "진심으로 좋아합니다."라는 말이었다.
그나마 할머니가 이 말을 해본 것은 남편에게 뿐이다. 갑자기 파리에 나타난 이유를 알 수 없는 할머니의 모습과 행동만큼이나 앞뒤를 알 수 없는 이 질문은 여느 때의 할머니 성격에서 모두 벗어난 것들이다.
"왜 그런 걸 물으시죠?"
"이런, 세상에!"
할머니는 아직까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모독적인 말을 덧붙이며 말했다.
"넌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그건 무서운 일이야."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백을 열고는 그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카탸는 절망적인 기분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가장자리에 레이스가 달린 손수건을 꺼내더니 코를 풀었다.
"넌 아직도 모를 게다... 아마 기억하지도 못하겠지. 네가 안다고 하더라도 그 고통은 모를 거야."
할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손수건에다 대고 아무렇게나 소리를 내며 코를 풀었다. 할머니는 숙녀답지 못한 소리를 내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는 분인데, 지금 할머니의 태도는 카탸를 점점 더 어리둥절하게 만들뿐이다.
카탸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자기의 양손으로 할머니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
상냥하게 물었다.
"제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고, 카탸는 할머니가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라센은.."
할머니는 어렵게 말을 이어나갔다.
"카탸, 넌 상처를 입게 될 거야. 상처를 입게 돼, 제발, 제발, 다시는 그를 만나지 마라."
할머니의 두 눈엔 의심할 바 없는 애원의 빛이 서려 있다. 카탸는 매우 심각하게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왜죠?"
마침내 물었다.
할머니는 눈을 감았다.
"네가 그렇게 물어 볼 줄 알았지. 사실 그걸 몹시 걱정했단다."
카탸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몸이 떨렸다.
"제겐 그걸 물어 볼 자격이 없나요?"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할머니는 손녀에게서 손을 떼고 눈물을 닦았다.
"그래, 물론 물어 볼 수 있지, 나를 용서해라, 얘야. 내 맘이 혼란스러워서.."
차는 긴 도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러시아워의 자동차 물결 속에서 그들은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낮은 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넌 보니가 18살 때의 일을 기억하겠지?"
그건 너무나 뜻밖의 말이어서 카탸는 그저 할머니를 뚫어지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무엇 때문에 파리에 나타나셨는지 알 수 없지만 할머니가 보니의 불행했던 과거를 자신에게 상기시켜 주려고 파리까지 온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네, 기억해요"
그녀는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땐 누가 물으면 보니는 앓고 있다고 말했었지. 지금은 시골에서 회복돼 가고 있다고 말야. 물론 보니가 신경쇠약에 걸렸다는 소문도 있었단다."
"그래서요? 난 보니와는 기질부터 달라요, 할머니. 그리고 난 쇠약이라는 걸 모르는 아이예요."
"보니도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할머니는 조용히 말하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니는 임신했었다. 아이가 있었단다."
말하기가 꺼려진다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사라센의 아이야."
결국 자기의 손녀를 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을 맺었다. 카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보니는 무도회에서 사라센을 만났다고 그랬다. 폴이 옥스퍼드에 있을 때였어. 보니는 그를 자주 만나러 갔고 그 또한 보니를 자주 파티에 데리고 나갔지. 물론 그가 보니를 유혹했던 거야, 그 사람은 아주 기교가 뛰어난 사람이지."
"보니는 왜 그와 결혼하지 않았죠?"
이렇게 묻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딴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오, 물론 결혼할 수는 없었지. 보니도 그걸 알았고."
"그가.."
이 말을 꺼내는데 입 속에서 너무나 쓰라린 아픔이 느껴졌다.
"그러면 그가 보니를 떠났나요? 그녀를 버렸나요?"
"그는 서로 만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 거야."
할머니는 억제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아이를 위해선 적당한 조치를 취했지. 이걸 달리 생각지는 마라. 아이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있고 그는 정기적으로 양육비를 지불하고 있지. 그 일에 대해선 아주 양심적이란다."
"양심적이라고요?"
억제 못할 분노와 고통에 가득 찬 울부짖음이 카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할머니는 움찔했다.
"난 네가 그에 대해 잘못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사람의 기준은 우리들 기준과는 달라. 하지만 그도 자기 기준을 갖고 있으니 그걸 인정해 줘야지."
자기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일러주며, 그것만이 최선이고 현명한 길이라고 조용히 단언하는 것, 그것은 더욱 틀에 박힌 말로 들렸다. 카탸는 잠시 그런 말을 해준 할머니에게 증오심을 느꼈다.
하지만 아이라니! 그럴 수가... 그러면서도 어떻게 나에게 감쪽같이 숨겨왔단 말인가? 물론 할머니가 잘못 알 수도 있을 것이다. 할머니 말을 곧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할머니가 이런 일을 잘못 알 리가 없다. 보니까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감추려 한다 해도, 매트가 계속해서 양육비를 주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그가 그 아이의 아버지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문제에 대해 할머니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는 점이다.
카탸는 거의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그를 만나야 해."
이 말은 잠시 냉정을 찾고 있던 할머니를 또다시 동요 속으로 밀어 넣었다.
"오, 안 된다. 그건 현명치 못한 짓이야. 그렇게 해봤자 자신을 망칠 뿐이다."
카탸는 입을 약간 내밀고는 어두운 미소를 띠었다.
"그럼, 할머닌 그 일이 이미 나를 망쳐 놓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보죠?"
"그럼, 물론 그렇게 믿고 있다."
할머니는 위로하듯이 카탸의 손을 잡았다.
"난 널 잘 안다. 넌 생각이 매우 깊은 애야. 그리고 지금까지 넌 용감했어. 나는 네가 지금 잘못되지 않나 우려가 되는 거야, 카탸"
카탸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매트는 오늘밤 내 아파트로 올 것이다. 저녁 음악회에 같이 가기로 약속했었다. 우선 내 아파트에서 저녁을 먹고 약간의 술을 마실 것이다. 이러한 상상을 하자 몸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그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할머니에게 말했듯이 그를 만나야 한다. 만나서 이별을 고해야 한다. 카탸는 젖은 눈으로 할머니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니는 아직도 그의 아이를 데리고 있나요?"
그 말에 할머니는 놀라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들이 아파트 앞에 도착하자 운전사가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카탸는 차에서 뛰어내렸다.
"안녕히 가세요, 할머니"
그녀는 걸어가며 인사를 했다.
"편지할게요. 제가 편지할 때까지는 다시는 절 만나러 오지 마세요. 할아버지께도 그렇게 전해 주세요."
커다란 자동차가 미끄러져 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카탸는 멍한 상태로 층계를 올라갔다. 자기 방에 와서 기다리고 있을 매트를 보는 게 두려운 건지, 아니면 자기가 그에게 할 말에 대해 괴로와하며 앉아 있어야 하는 게 더 두려운 건지 알 수 없었다. 문을 열자 매트가 난롯가에 발을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섬뜩했다.
그는 잡지를 읽고 있었다. 그녀가 조용히 거실로 들어서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어렴풋이 잡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트는 손을 앞으로 내밀고 싱긋 웃었다.
"늦었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던 중이야."
"미안해요, 늦었어요."
그녀의 딱딱한 어조에서 무엇인가가 그의 주의를 환기시켜 놓았음이 분명하다. 눈이 가늘어지더니 얼굴빛이 변하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그녀는 코트 단추를 끄르면서 그의 거짓되고 염려하는 듯한 얼굴에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다고 했나요?"
"아니, 하지만 당신은 너무 지쳐 있는 것 같아. 무슨 일이지?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아니면 돌아오는 길에 뭐 좋지 않은 거라도 봤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울음으로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차가운 손에서 코트를 뺏고는 그녀를 감싸듯이 안았다.
"내게 안겨서 얘기해 봐."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애원하는 듯하다.
"싫어요!"
매섭게 한 마디로 거절했다. 그는 한 대 맞기라도 한 듯 팔을 내려뜨렸다. 그리고는 카탸는 옆으로 비켜섰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몹시 흔들리고 있어. 이런 당신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대체 무슨 일이지?"
카탸는 그에게서 돌아선 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매트, 내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 주겠어요? 진실을 말해 주겠어요?"
"난 항상 당신에게 진실만을 말해 왔는데.."
매트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카탸는 약간 웃어 보이고는 거칠게 말했다.
"당신 방식으론 그렇겠죠."
"난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소."
"그러면 지금도 내게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녀는 그의 주위를 맴돌다가 갑자기 떨어져 거리를 두고 이야기했다.
"보니가 아이를 가졌고 당신이 그 아이 양육비를 부담하고 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그의 잿빛 눈은 분노와 당황으로 가득 찼다.
"사실이냐고?"
그의 반짝이는 눈이 그녀에게서 벗어나자 그녀는 어제 빤 세탁물처럼 맥없이 흐느적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정도는.."
그는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탸는 참을 수 없어 고통의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떨리는 입술에다 꽉 움켜쥔 두 손을 갖다 대면서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런 소문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게 좋아."
그의 말투는 몹시도 싸늘하다. 카탸는 심하게 떨렸고 현기증까지 느꼈다. 매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괴로와하는 모습엔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그녀는 노파처럼 떨리는 손을 뻗으며 매트가 앉았던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는 반대쪽에 앉으며 한결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누군가가 당신 귀에다 독약을 쏟아 부은 모양이군. 그게 누군지 말해 주는 게 좋을 걸."
그의 이러한 뻔뻔스런 태도를 믿을 수가 없었다. 마치 책망을 받아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카탸 자신이라는 투다. 그녀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할머니예요."
이 말에 그는 깜짝 놀라는 듯했다. 그녀는 그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를 듣고서야 약간 여유를 갖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할머니가 아무 이유 없이 당신을 비방하러 파리까지 왔다고 말하고 싶겠죠?"
"아니, 난.."
"할머니 얘긴 소문도 아니고, 더군다나 할머닌 독약을 쏟아붓지도 않았어요."
카탸는 그의 대답을 가로막으며 공격적으로 말했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잭 같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갔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 나를 판단하고 비난하기 이전에, 당신은 정작 내게는 나에 관해 충분히 물어보지 않았어."
매트는 떨고 있는 듯했다.
"미안해, 카탸"
그는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했다.
"그러면 만일 그런 말을 한 사람이 할머니가 아니라 잭이었다면 그건 진실이겠군요. 그렇잖아요? 내가 당신에게 그런 걸 열심히 물어 볼만큼 어리석었든 아니든, 그건 사실이겠군요."
"사실이란 게 뭐지?"
"내가 방금 당신에게 물어 본 것 말예요. 할머니가 내게 해주신 말씀이 사실이냐고 물었을 때 당신 입으로 그랬잖아요?"
그리고는 그의 흉내를 냈다.
"오, 미안해. 어느 정도는 사실이야."
"난 할머니가 거짓말을 하셨다고 말하진 않았어. 할머닌 할머니대로 판단해서 당신에게 말해 주셨겠지."
그는 갑자기 몸을 앞으로 숙였다. 매우 창백한 모습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사실들이 선택될 수 있다는 걸 모르는군. 그리고 사실이란.."
그의 목소리는 신랄했다.
"그렇게 자명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
그녀의 가슴은 두근거렸고 몸은 몹시 떨려 왔다. 그녀는 그에게서 멀어져 의자 속으로 좀 더 움츠러들었다. 그가 다가와서 손을 잡자 그녀는 얼른 손을 뺐다.
"좋아요."
그녀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꾸몄다.
"선택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난 할머니에게서 사실을 들었을 뿐예요. 물론 난 지금 그걸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카탸는 그의 얼굴을 흘끗 보고는 그가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보니에게 양육비를 지불한다는 게 사실인가요?"
매트는 당황했다. 그 질문이 그에게 얼마나 뜻밖의 것인가 확연히 느껴진다. 그는 입을 삐죽거렸다.
"당신은 잘못된 질문을 하는 데 재능이 있는 모양이군."
"누구의 견지에서 잘못됐다는 거죠?"
카탸는 날카롭게 반박했다.
"당신 입장에서?"
"난.."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거친 몸짓과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원 세상에! 그래, 내 견지에서요."
"난 알아요."
그녀는 저항하듯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난 틀린 게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아, 내가 확실히 잘못 안 게 하나 있긴 하군요. 당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난 스테피 솔로몬인 줄 알고 있었으니까요.."
매트가 낮은 소리로 말을 가로막았다.
"당신의 그 지독한 사촌에게 내가 진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녀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카탸는 화를 냈다.
"당신은 누굴 비판할 입장이 아니에요."
긴장된 침묵이 잠시 흐른 뒤 그는 말을 시작했다.
"맙소사!"
갑자기 몸을 움직이더니 창밖을 내다보면서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당신은 내가 그 일에 관해 말해주기를 바라는 거요?"
그녀의 상한 감정은 불붙은 나무처럼 타올랐다.
"아뇨!"
그녀는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했다.
"난 그 일에 관해 알고 싶지 않아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니까."
그녀의 입술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너무나 잘 상상할 수 있다구요!"
그 말에 그는 몸을 돌려 재빨리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오, 카탸, 이렇게... 이렇게 맘 상할 필요는 없어."
그녀는 반발적인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난 이미 상처를 입었어요."
"당신은 아주 조심스럽고 수줍었어. 난 당신의 신뢰를 얻기 위해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지.."
"내 신뢰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나 보죠?"
"그럼 그랬지, 이 한 가지 일을 제외하고는 난 당신에게 정말 정직했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죠? 아이까지 있으면서!"
"내 말 좀 들어 봐. 당신 할머니가 말씀하신 건 잊어버려!"
"어떻게요?"
카탸는 비통하게 물었다.
"아이가 있다는 걸 인정해 놓고선"
"하지만 그건 겉보기와는 달라, 당신에게 모든 걸 말할 수가 없어. 난 지금 당신에게 아무 것도 말해 줄 수가 없다구... 이런 젠장! 카탸, 내 말을 조금이라도 믿을 수 없겠소?"
카탸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려고 했죠. 진짜 그러려고 했어요. 한동안은 당신을 믿었었죠. 그런데 할머니는 내가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나를 일깨워 주셨어요. 당신은 조부모님이 내게 나쁜 영향을 준다고 했는데, 매트,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항상 내게 진실만 말씀하셨어요."
"그걸 확신하나?"
그는 조소하듯이 피식 웃었다.
"그 사람들을 믿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 텐데? 그들이 당신과 당신 사촌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말야. 그런데 당신은 아직도 나보다 그 사람들을 더 믿고 있군."
"그분들은 내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어요."
그녀는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언젠간 당신도 알게 될 거야, 거짓말투성이라는 걸."
"당신을 통해서 알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을 통해서는 결코!"
"오, 그래. 하지만 할머니가 틀렸다는 건 인정할 수 있게 된다면.."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당신은 거기 단정히 앉아서 당신도 전혀 모르는 10년 전의 일에 관해 내게 강의를 하고 계시는군! 그것도 당신의 아주 소중하고 친절하신 할머니의 말 때문이라니. 좋아,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할 수 없지. 하지만 우리에겐 많은 방법이 있어. 당신이 할머니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여자가 되고 싶으면 그렇게 해야 돼."
그는 갑자기 그녀를 끌어당겨서는 난폭하고도 차갑게 키스했다. 그의 얼굴은 매우 창백해져 있었고 눈은 빛났다. 그러나 다시 입을 열었을 땐 너무나 거만하고 가벼운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숙녀의 특권인 양 남을 비방하는 따위의 짓은 나한텐 하지 않길. 다시는 당신과 가까이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곤 그는 나가 버렸다.
8
카탸는 다신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실험실의 일과가 끝나도 늦게까지 남아 일을 했다. 프로그램 지도교수가 몇 가지 강의에 자기를 도와 달라고 도움을 청했을 때 그녀는 기꺼이 응했다. 다른 사람들이 일이 있을 때나 바쁠 때면 그 사람들 몫까지 기꺼이 도와주었다. 사실상 그녀는 잠자는 시간 외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집에 있는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주말은 괴로왔다. 평일엔 과학관이나 도서관에 가니까 괜찮지만 일요일엔 그곳도 문을 닫는다. 그래서 도시락을 싸들고-결국엔 먹는 것도 잊어버리지만-지하철을 타고 종점까지 가기도 했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내려서 돌아갈 시간까지 걷다가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낮이 짧아지고 날씨가 차가와져서 결국 간단한 소풍이 되었다.
카탸의 얼굴에서 피로의 기색을 읽은 바베트는 그녀를 꾸짖었다.
"넌 건강해 보이지 않아. 누구나 그렇게 느낀다구. 하지만 일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애."
점심시간이었다. 학생들이 잘 가는 카페에 그들은 마주 앉았다. 카탸는 스튜를 포크로 찌르고 있었다. 카탸가 입을 열었다.
"일이 좋아."
"카탸, 네가 일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 아니야."
바베트는 솔직하게 말했다. 카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난 만족해. 지금 난 하는 일이 아주 맘에 들어. 그리고 교수님도.."
바베트는 말을 가로막았다.
"교수님이 앙리에게 그랬다는구나. 제네바 강의를 위해 네가 교수님을 도와 드렸다고."
카탸는 다시 한 번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래, 난 흥미가 있었어."
"당연히 그렇겠지. 그건 네 연구주제니까. 그리고 넌 이미 논문을 끝냈지. 시간을 잘 이용해서 말야."
바베트는 자연스러운 어조로 동의했다.
"그렇지, 거기엔 아무 것도.."
카탸는 하던 말을 멈췄다.
"그런데, 내 논문이 끝났다고 누가 그래?"
바베트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웃었다.
"아무도, 그냥 내 생각이야. 앙리도 그렇게 느끼고 있고. 네가 그걸 인정하도록 만드는 게 내 작전이지."
카탸는 화가 나는 모습을 감추려고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이 프랑스 아가씨는 진지하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 프로그램이 잘돼 가고 있기 때문은 아니야. 교수님의 제네바 강의 때문은 더더욱 아니지. 넌 제출기한이 일 년이나 남았는데 논문을 끝냈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계속했다.
"그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넌 딴 일은 전혀 하지 않았어.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말야."
카탸는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고 곧이어 눈은 분노로 가득 찼다. 바베트의 얼굴은 다시 부드러워졌다.
"오, 가엾은 카탸, 그렇게 나쁜 상태니?"
카탸는 냉정을 되찾으려고 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바베트는 흔들리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런데, 왜 낙원에서 쫓겨난 아이처럼 방황하는 거니?"
"아니, 난 방황하지 않아."
"아니야, 넌 방황하고 있어."
바베트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사람들이 널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땐 넌 언제나 웃음을 잃고 있어. 그리고, 네가 지금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지."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다.
"그렇지 않아. 솔직하게 말해서 바베트, 그건 비극이 아니야. 그건 지극히 평범한 일에 속해. 사랑이란 항상 잘되지 않게 마련이니까, 모든 사랑이 다 지난여름 파리에 있는 수많은 아가씨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거야."
"파리의 수많은 소녀들이 식사도 잊고 땀 흘려 가며 일만 하지는 않아. 그리고 그렇게 몇 달씩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지."
카탸는 약간 방향을 바꿔 앉았다.
"그래 좋아. 그런 일에 대해 난 그렇게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걸 시인하겠어. 너도 알다시피 난 처음이잖아. 처음으로 사랑한 거였어."
난 이 말을 했다! 이 말을 큰소리로 외쳤다.
바베트는 카탸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전엔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카탸의 말에 놀란 것도, 또 그 말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얼굴엔 동정의 빛이라곤 전혀 없지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그에게 전화나 편지해 봤니?"
"아니"
"넌 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거니? 그 사람으로 인해 그렇게 마음이 아프면서 말야."
카탸는 불쾌해서 못 참겠다는 듯 음식 접시를 밀어 놓았다.
"난.."
숨이 막힐 것 같은 소리로 말했다.
"난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 제발, 바베트"
"좋아"
바베트는 더 이상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네 일은 네가 가장 잘 알 테니까, 난 다시 그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겠어."
카탸는 그 동안 머릿속에서 매트 사라센의 생각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매트와 함께 보냈던 시간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그 일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고 편지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을 만나기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기란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제 드미트리 콜카닌을 본다는 것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그는 2, 3시간마다 전화를 걸어왔고, 친구 집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자기의 불타는 분노를 보이지 않으려고 될 수 있는 한 피해 왔다. 그 분노가 부끄러움과 뒤섞일 때는 더욱더 견디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드미트리는 여름의 텅 빈 도시에서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정확히 짐작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표면적으로는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을 무시하기로 결정한 듯했다. 카탸의 퉁명스러움에도 단념하지 않고 할머니는 폴과 그 가족, 그리고 심지어 보니의 생활까지 섬세하게 적어 보냈다. 그런 할머니의 편지는 감정의 무감각 상태에서 그녀를 일깨워 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치 지옥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일을 했고, 그 속에 완전히 시간을 바쳤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녀의 의식세계에 침범해 들어올 수는 없었다. 그들은 꿈 가장자리의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실험과 그래프와 컴퓨터였다. 그런 식으로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그녀로 하여금 그런 상황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한 데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그 하나는 점심시간에 화학관 입구에서 만난 교수와의 짧은 대화에서였다.
"카탸"
자기 연구생의 세례명을 아는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는 듯 교수는 환하게 웃었다.
"그 제네바 강의 말야, 아주 잘 들었다고 하더군. 난 12월 중순쯤 심포지움 때문에 또 그곳에 갈 예정이야. 내 생각엔 이번 심포지움엔 카탸도 참석해야 할 것 같은데?"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는 같은 연구진의 멤버들과는 같이 여행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보충설명을 계속했다
"거기엔 젊은 남자들이 많이 참석할 거야. 기술적인 문제들이 발표되지."
그는 그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실험의 어려운 점에 대해 말해 줄 조교를 한 사람 필요로 하고 있는데, 앙리는 아내가 임신 중이어서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주 흥미로운 말씀이군요."
카탸는 우선 그와 함께 제네바에 갔다가 바로 영국으로 돌아가서 크리스마스를 예년처럼 가족과 함께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일로 그녀는 마음을 바꿨다. 밝은 빛깔의 평범한 털 스웨터를 사려고 쇼핑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테리나! 카탸! 맞지?"
뒤를 돌아다보니 사촌 오빠 폴이었다. 그는 얼굴 가득히 환한 웃음을 띠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카탸는 너무나 기뻐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폴! 좋아 보이는군요. 그런데 여기서 뭘 하고 계시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이 좀 있어서. 그런데 넌?"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넌 학구열에 불타고 있다더구나. 할머니가 그러셨지."
카탸는 그의 팔을 붙들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여기 대학에 있을 뿐예요. 그런데 오빠 일은...?"
"내가 공항으로 나올 때 안나가 내 손에 쥐어 준, 네 팔 만큼이나 긴 쇼핑 품목을 들고 모험을 떠난 거지."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아내를 매우 사랑하고 아내가 요구하는 걸 모두 들어주는 편이다. 그렇다고 그가 쇼핑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안나는 보니가 올 때를 대비해서 파리에서 사와야 할 것들을 계속 적어 오더군."
카탸의 웃음이 조금 굳어졌다.
"보니는 요즘 파리에 없나 보죠?"
폴은 빠르고 빈틈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보니는 미국에 가 있다더구나. 뉴욕이 좋다던 걸. 일자리까지 얻은 모양이던데."
"믿어지지 않는군요."
카탸는 평범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아니, 분명히 그런가 봐. 사귀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그는 무관심한 듯 대답했다.
"할머니가 용납하시지 않겠지만"
그녀의 웃음은 사라지고 입술에서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는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카페 안으로 들어가 뜨거운 커피를 주문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내게 말해 주겠니?"
그가 물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널 나무라시던?"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뭣 때문에?"
커피가 도착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마시기 시작했다.
"뭣 때문에 그러셨을 것 같아요?"
폴은 잠시 생각했다.
"직업, 결혼, 품위?"
그는 눈썹을 익살스럽게 모았다. 카탸는 내키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 때문은 아니에요."
"아니라고? 그럼 뭐지? 네가 보니처럼 록 기타리스트를 쫓아다니지 않았다면"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웃음기를 거두었다. 잠시 그 조용한 눈이 놀라는 빛을 나타냈다.
"내 입이 주책이군."
그는 후회하듯이 말했다.
"미안하다. 카테리나. 내가 생각을 못했어."
그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조용히 그의 손에 자기 손을 갖다 대고는, 편안하게 감싸주는 따뜻한 손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에 대해서 말해 주지 않겠니?"
"그요?"
"그 록 기타리스트"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혹은 그 비슷한 사람"
그녀는 갑자기 고통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악기가 틀렸군요. 그렇지 않으면.."
말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했다. 폴은 의아해하는 것 같다.
"음악가와 사랑에 빠졌니? 넌 그럴 것 같지가 않았는데, 선생이라든가 혹은 너 같은 과학도?"
"틀렸어요. 난 오빠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니와 비슷해요."
카탸는 자조적인 말투로 내뱉었다.
"난 아주 지독한 사람과 사랑에 빠졌어요. 음악가일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없고 진실하지도 못하고 소름끼치는 과거를 가진 사람이죠."
폴은 웃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충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다. 그늘진 눈으로 말하는 카탸를 조용히 응시하며 말을 꺼냈다.
"그리고 미래엔 어떤 사람이 될 거지?"
"네?"
너무나 뜻밖의 질문에 카탸는 놀라고 말았다.
"미래는"
그는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어떤 의미로든 과거와 같지는 않을 게 아니겠어? 특히 내 가장 소중한 사촌 누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말야."
카탸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은 몇 년 전에도 오빠의 가장 아름다운 사촌 누이와 사랑을 나눴어요."
폴은 똑바로 앉더니 몹시 놀라는 기색이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냐?"
카탸는 눈물이 글썽이는 눈을 딴 곳으로 돌렸다. 그리곤 담담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행운은 가버렸어요. 난 보니가 버린 남자들 중의 하나와 우연히 만난 것뿐예요."
폴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했다.
"카탸, 잘못 생각한 거야. 너와 보니는 똑같은 부류로 보이진 않아. 보니가 달리 말했다면, 그건 보니의 장난기였을 거야."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사실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긴 하지만... "
"그래요, 보니는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보니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폴. 그걸 말해 준 건 할머니예요."
"뭐라고?"
"그리고 할머니도 장난을 좋아하는 분이 아니죠."
"할머니가? 할머니가 보니의 남자들 중 하나에 관해 네게 말씀하셨단 말이지? 할머닌 그들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으셨는데? 네가 착각한 거야."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보랏빛 눈은 다시 슬픔으로 가득 찼다.
"아뇨, 불행히도 그렇지 않아요, 폴. 할머닌 그걸 내게 말해 주러 일부러 파리까지 오셨어요."
그는 카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현명한 얼굴 밑에선 재빨리 머리를 회전시켜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을 면밀히 가려내어 그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마침내 감정이 배제된 투로 말했다.
"무슨 악기지?"
그녀는 다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피아노"
순간 폴의 얼굴빛이 변했고, 눈을 감았다.
"넌 지금 매튜 사라센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냐?"
"그 사람을 알고 계시죠?"
폴은 기운이 없어 보인다.
"세상에! 내가 그들을 서로 소개시켰지. 우린 다 같이 옥스퍼드에 있었어. 그리고 그때 그의 아버지는 얀턴에 있는 집에 있었고, 그래서 우린 가끔 파티를 열곤 했었지, 하지만.."
그는 말을 끊었다.
"할머니가 그 사람이 보니가 버린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그러시던?"
그녀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 일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아직도 마음 아픈 일이다.
"할머닌... 할머닌 내가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카탸는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카탸의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그리고 결국 할머니가 옳았어요."
폴은 고통스럽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그 일에 대해서 그렇게 들은 건 할머니에게서 뿐이지?"
그는 그녀의 부드럽고 검은 머리를 쓸어 주었다.
"자, 할머니가 무슨 의도에서 그렇게 하셨든, 그 의도가 나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할머닌 요사이 몇 년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 모두 알고 계신 건 아니란다. 매트와 얘기를 해보렴, 그를 비난 하지만 말고. 그에게 가서 진실을 물어 봐."
"물어 봤어요."
그녀는 눈길을 돌렸다.
"매트는 할머니 말씀이 맞다고 했어요."
"카탸"
폴은 한숨을 내쉬었다.
"넌 틀림없이 그를 몰아세웠겠구나."
그녀는 짐짓 놀라는 척했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는 내게 거짓말을 했어요. 어쨌든 난 그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물어 볼 수가 없어요. 그 이후론 그를 보지 못했으니까요.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요. 이젠 다 끝났어요, 폴"
그는 심각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래? 언제부터 네 눈에 그렇게 그늘이 지기 시작했지? 넌 현명한 애야, 카테리나. 그리고 넌 겁쟁이도 아니었어. 네 자신을 속이지 마라."
그녀는 낮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끝난 일이에요. 사실을 안 이상 그대로 지낼 순 없어요."
폴은 갑작스럽게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이 말했다.
"카탸, 할머니는 상냥하고 친절한 분이지만 가끔 당신 입장에 맞춰 사실을 왜곡하기도 하지. 네가 매트와 얘기하고 싶지 않다면, 그럼 보니에게 가보렴. 넌 보니를 잘 알잖니. 그 앤 좀 거칠기는 해도 솔직하지. 할머니같이 얘기를 돌려서 하진 않을 거야."
카탸는 그런 제안에 주춤했다.
"싫어요."
"하지만.."
"아니에요. 별 차이 없어요, 그렇게 한다 해도... 그는 더 이상 나를 원치 않으니까요."
그녀는 무서울 만큼 냉정하게 말했다.
"그게 문제예요, 폴. 내가 맘을 바꿔 오빠가 말한 대로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매트 사라센은 내게 싫증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이제는 모든 게 끝났어요."
폴은 그녀의 손을 만져 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흔들리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엾은 카탸, 무척 괴롭겠구나."
그는 슬픈 듯이 말했다. 커피를 다 마신 후에 폴은 쇼핑을 마저 끝내러 돌아갔다. 폴은 여전히 친절했다. 그러나 어떤 거북함 같은 것이 그들 사이에 있었다. 그 거북함은 그녀를 긴장시켰고 울고 싶게 만들어 당황케 했다.
크리스마스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한 건 바로 그 후였다. 그녀는 조부모의 호기심 어린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없었고 괴로운 말들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더욱 견딜 수 없는 건 폴의 친절이었다. 그건 그녀의 최후의 방어벽마저도 깨끗이 쓸어가 버리고, 안간힘을 써서 빠져나왔던 자기연민의 구렁에 또다시 그녀를 던져 넣었던 것이다.
그녀의 결심에 조부모들은 체념하고 표면적으로는 받아들였다. 할머니는 조심스럽게 야단치는 말을 적어 보냈지만, 할아버지는 뜻밖에도 수표 한 장과 <제네바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바란다>고 적어 왔다.
그녀는 교수에게 제네바에 갈 뿐만 아니라 축제 시즌 동안 계속 그곳에 있겠다고 말했고, 호수 근처에 있는 호텔이 그녀를 위해 예약되었다. 그녀가 지내온 중에 가장 이상한 크리스마스였다. 그전에는 집 밖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이 없었고 언제나 가족과 친구들에 둘러싸여 새해의 기원과 소망을 주고받았었다.
이방인만 묵고 있는 이 호텔에 홀로 있는 자신이 자신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무척이나 외롭게 느껴졌다. 카탸는 왜 자기가 이렇게 혼자 있어야 하는 건지 분명히 이유를 알지 못했다. 바베트는 그건 건강에 나쁘다고 말했고 아마도 그 말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카탸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침입자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어느 날 아침 산책길에서 그녀는 눈 덮인 오솔길을 산책하는 어떤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깜짝 놀라 멈칫했다. 그 시간에 그 숲길을 산책하는 사람은 보통 자기 혼자였다. 그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모자를 올렸다. 그는 자기를 만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갔다.
그날 밤 다시 그 사람이 나타났다. 무거운 커튼이 비스듬히 열려진 창가에 혼자 앉아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그 사람이 식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떤 소년과 함께였는데 10살쯤으로 보이는 건강한 아이였다. 그들 둘의 정다운 모습을 보고 그녀는 심한 고독을 느꼈다. 저들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일까? 그들의 출현으로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웨이터가 팔꿈치를 건드렸을 때야 깜짝 놀랐다.
"마드무아젤 앙드레, 합석을 좀 해도 될까요?"
그 호텔에서 파티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는데 약간의 차질이 생겨 빈 테이블이 없다는 것이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거절하기도 뭣해서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곤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자 웨이터는 그 남자와 소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다가와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우린 오늘 아침 오솔길에서 만났죠?"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전 스테이시 알렉산더입니다. 이쪽은 톰"
그 소년은 커다란 눈으로 그녀를 살피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인사했고 카탸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호텔에 묵고 계십니까?"
그는 약간 수선스럽게 물어왔다.
"네, 당신은요?"
"우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그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떠니? 맘에 드니, 톰?"
그 소년은 아직 영구치로 다 갈지도 않은 이를 드러내면서 싱긋 웃었다. 그러자 소년의 얼굴엔 조그마한 보조개가 떠올랐다.
"그럼요, 그게 우리가 이제 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걸 뜻한다면요."
스테이시 알렉산더는 카탸 쪽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난 이 아이가 유럽에서 멋진 휴일을 보냈다고 생각하는데 말하는 걸 들어보면 여행에 대한 불평뿐이죠."
카탸는 톰을 보고 웃었다.
"그럼, 넌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게 더 좋으니?"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저씨가 온 유럽을 비행기를 타고 돌아다닌다면."
그는 어른 같은 농담투로 덧붙였다.
"나도 즐거울 테죠."
"넌 제네바를 좋아하잖아. 스키도 탈 수 있고.."
"스키는 집에서도 탈 수 있어요."
톰은 논리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네 프랑스어 공부에도 아주 좋아."
"그럼요."
톰은 카탸를 진지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프랑스어로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미스 앙드레?"
"톰!"
그가 꾸짖었다. 물론 가볍게 말하긴 했지만 진지한 꾸중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내면엔 이해할 수 없는, 불편하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녀는 좀 더 면밀히 그들을 살펴보았다.
"괜찮아요."
그녀는 스테이시 알렉산더에게 말했다.
"우린 전에 만난 적이 있지 않았나요? 오늘 아침 오솔길에서 만났을 때 전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는 매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아뇨, 만난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미스 앙드레. 당신이 영화에서 날 봤을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난 보잘 것 없는 배우죠. 형편없는 영화에 너무 많이 출연해서 사람들은 나를 본 적이 있다고 착각들을 하죠."
"그래요?"
그가 명백하게 자기를 모른다고 했고, 그녀도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으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한 가지 점이 의문 속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는 나머지 모든 것엔 솔직했다. 만나서 기쁘고 카탸가 매우 마음에 든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았다.
저녁식사가 끝나기 직전에 그녀는 다음날 아침 스케이트를 함께 타러 가자는 초청을 받았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그 초대에 응했다. 그들은 그녀가 묵고 있는 곳보다 더 넓고, 호수에서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스테이시는 호수가 잘 내려다보이는 호화스러운 스위트룸에 묵고 있었다. 그녀가 11시에 그곳에 도착했을 때 톰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저씨가 잠시 여기서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커피를 가지고 올 게요."
쿵쿵거리며 층계를 내려가는 소년의 모습을 보고 카탸는 미소 지었다. 그녀는 마치 한 폭의 그림엽서처럼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진 창가로 갔다. 의자는 헝겁을 이어 만든 밝은 빛의 쿠션으로 덮여 있는데, 소년이 앉아 있던 자리가 움푹 패어 있다. 그리고 마룻바닥엔 그가 읽던 잡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카탸는 그것들을 정리하려고 몸을 구부렸다. 몇 권을 빼놓고는 거의 다 영어책들이었는데, 전혀 어린이들을 위한 책은 아니었다. 그녀는 펼쳐져 있는 페이지의 기사제목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기사의 제목은 <미국인 피아니스트의 대성공>이었다.
훑어 내려가다 그 옆에 매트의 사진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사진은 알아보기 힘들만큼 딱딱하게 보였다. 순간 그녀의 가슴은 돌처럼 굳어졌고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매트 사라센, 웨스트민스터 상 수상자, 오늘 시카고 연주에서 기립박수를 받다> 그리고는 지나칠 만큼 상세하게 그의 성공적인 음악회에 대해 기술하고 있었다. 그 기자는 연주에 아주 매료됐던 모양이다. 카탸는 그의 연주회가 성공이든 실패든 더 이상 자기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그 잡지를 덮어서 자기가 정리해 놓은 파일 꼭대기에 놓았다.
마룻바닥 저만치에 또 한 권의 책이 있었다. 그건 많지 않은 프랑스 잡지 중의 하나였는데, 페이지 중간엔 커피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가 커피잔 받침으로 사용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 페이지에는 유명인사에 대한 가십이 실려 있었다. 순간 카탸는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틀림없이 재수가 없다. 이 잡지들은 재수가 없는 것들이다. 이 기사 역시 매트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아까 미국 잡지의 호평과는 아주 달랐다.
카탸는 대충 훑어보고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나서 평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면서 다시 처음부터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그가 음악을 담당하고 미스 솔로몬이 주연한 최근의 영화가 개봉된 첫날, 뉴욕에서 국제적 영화 스타 스테피 솔로몬과 같이 즐기고 있는 사라센의 사진도 함께 실려 있었다.
그의 음악은 이전의 그의 작품과는 다르고 거기엔 사랑의 테마가 듬뿍 담겨 있다. 그가 이런 작품을 쓴 것은 미스 솔로몬의 사랑에서 영감을 받은 것일까? 독자들도 미스 솔로몬을 기억할 것이다. 작년에 독일 은행가와 이혼한 이후 그녀는 혼자 살아왔다.
매트 또한 한 번도 결혼생활에 묶여 본 적이 없다. 자신은 독신생활을 즐긴다고 항상 말해 왔고, 그의 풍부하고 깊은 감성은 과거 이곳저곳에서 일으켰던 문제들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 준다. 매트는 기자에게서 솔로몬과의 관계에 관한 질문을 받자, 자신들은 둘 다 파리를 무척 좋아하고 같은 동료들을 가지고 있는 아주 좋은 친구 사이라고 말했다. <신비의 여인>이라고 이름 붙여져서 근간에 떠돌던 그녀에 대한 소문은 이제 매트에 의해 <우스운 것>으로 되어 깨끗이 없어졌다. 그는 이 로맨스에 무척 열을 올렸었으나, 지금도 역시 즐겁게 살고 있다. <르 지로스코프>에서 새벽 5시까지 춤을 추고 오래 된 코냑을 몇 병 해치우고 나서야 자리를 뜨는 매트, 아마도 그는 사랑을 나누기 위한 특별히 시간을 맞추는 사람은 아닌 듯하다.
카탸는 맥없이 그 잡지를 떨어뜨리고는 심한 아픔을 느꼈다. 문이 열리고 곧 스테이시의 잿빛 눈이 보였다. 그는 웃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입술이 떨리는 것을 의식하며 카탸는 비참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스테이시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카탸에게 다가오더니 그녀가 힘없이 떨어뜨린 잡지를 집어 들며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그 잡지를 들고는 읽었다.
<신비의 여인이라고 이름 붙은 여자와의 로맨스>
그리곤 책을 내려놓고 물었다.
"이게 바로 당신 아니었소? 매트는 신비에 싸여 있다. 그건 대단한 로맨스 같은데, 내게 그 일에 대해 말해 주지 않겠소?"
9
그들은 옥외 아이스링크 가장자리에 앉아 톰이 자기 또래 아이들과 함께 스케이트 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건 정말 간단한 거요. 매트는 자신을 망치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오. 당신이라면 뭔가 할 수 있을 거요."
그녀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만, 뭣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가 자신을 망치려고 작정했느냐고 묻는 거요, 아니면 왜 당신이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를 물으시는 거요?"
"둘 다요."
"첫 번째 것에 대해선 누가 답할 수 있겠소? 그는 밤새도록 파티를 열고 마셔대고, 그래도 18시간은 꼬박 피아노를 치고 있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난 당신에게 그 이유를 말할 수가 없소. 난 단지 그의 친.."
그는 망설이다가 말을 맺었다.
"친구일 뿐이니까."
"그는 지금 불행한가요?"
카탸는 그의 말엔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내가 그를 알고 있었을 때보다 행복하지 않다고 할 수 있소."
그의 대답은 모호했다. 그녀는 눈이 부셔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얼음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를 가까이하기 힘들었소. 여름 이후로 아무도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소.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열심히 일하고, 얘기라도 하려면 두더지처럼 바늘을 곤두세웠소."
카탸는 그가 일에 열성적으로 뛰어드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바쁘면 지난 일을 생각할 틈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가라앉혀 둘 수 있다. 그러나 매트에게도 그런 종류의 위로가 필요했을까? 자신은 그의 인생에 있어 첫 번째 여자는 아니었다. 카탸가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의 일이 어떻게 되어 가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단지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말소리, 그리고 가끔 주차장에서 시동을 거는 엔진소리만 들릴 뿐이다.
마침내 스테이시가 말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소."
"그런데...?"
그는 그녀의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아니오, 끝까지 들어요."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말을 멈췄다.
"그건 지나치게 열중하는 모습 이상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소. 그는 9월에 필라델피아에서 녹음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고, 그 후엔 시간이 비었었소. 그런데 매니저에게 자기는 휴가를 원치 않는다고 그랬어요.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많은 일을 해치웠고 또 다른 것까지 하길 원했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연주여행은 보통 몇 달, 심지어는 몇 년 전에 예약이 돼요. 그 짧은 기간에 계약이 될 만한 일을 찾을 희망은 별로 없었소. 마치 먹이를 찾아 헤매는 호랑이와도 같이 일을 찾아다녔소. 그때 어떤 제안이 들어왔소. 우리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 오랫동안 앓고 있던 다른 피아니스트를 대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일은 급히 이루어졌소. 그 장소는 파리였소."
"그런데요?"
카탸가 재촉했다.
"그런데 그가 거절했소. 그가 원했던 건 연주회지만 그 연주를 파리에서 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어요. 그는 파리에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소."
스테이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36시간 동안 사라졌다가 결국 곤드레만드레가 된 채 다시 나타났소."
그녀는 놀랐다. 매트는 항상 자기통제를 잘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특히 자기 음악에 있어서도. 그가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는 생각을 하자 그녀의 마음은 견딜 수 없을 만큼 흔들렸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가 가끔 취한다는 얘기는 그들이 들려주었어요. 하지만 난 매트가 술을 마구 마시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들?"
스테이시는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그들이 당신에게 그에 관한 얘기를 했었소? 그들이라니, 도대체 누구요?"
"친구들요."
카탸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내 친구들이자 매트의 친구들이죠."
자기를 깊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대사관 직원을 떠올리며 그녀는 덧붙였다.
"그러면 당신은 그 사람들 말을 믿었소?"
그는 일부러 경멸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카탸는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다시 매트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겨우 그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려는데...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처음엔 나도 믿지 않았죠. 하지만.."
그도 일어나면서 말했다.
"이봐요, 미스 앙드레, 난 끼어들고 싶지도 않고 이건 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소."
"그렇죠."
"난 매트가 걱정이 돼요. 하지만, 난 그를 도울 수가 없소. 그저 보기만.."
"그래서요? 그가 뭘 하는지 보셨나요? 그는 옛날 습관으로 돌아갔나요?"
그녀는 자기 내부에서 휘몰아치는 분노를 감추기 위해 가볍고도 냉담하게 말했다.
"매트는 기진맥진해 있소."
그는 무겁게 말했다.
"지금 상태는 그렇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아요. 밖으로만 나돈다든지 일을 한다든지 혹은 파티에 돌아다니고 있소. 그는 스스로를 죽이고 있는 거요."
그녀는 움찔했지만 경멸조로 말했다.
"파티에 많이 간다고 죽진 않아요. 아마도 그는 즐기고 있는 거겠죠."
스테이시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무감각한 어투로 말했다.
"당신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군."
카탸는 어깨를 으쓱했다.
"매트 사라센의 일은 내 책임이 아니에요."
그는 거의 간청하듯이 말했다.
"그를 보러 가요, 당신이 정말 개의치 않는다면 당신에겐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게 아니오. 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이지만, 그에겐 중요한 일일 거요."
"정말 미쳤군요."
카탸는 당황했다.
"제발"
그녀는 온몸이 떨렸다. 다시 매트를 만난다는 상상을 하자 몸 깊숙한 곳에서 전율이 느껴졌던 것이다.
"난 부자가 아니에요. 훌쩍 미국으로 날아갈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지 못해요."
"그럴 필요까진 없소. 그는 지금 유럽에 있소. 런던에서 연주하고 있어요."
그녀는 놀라서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데려다 주겠소. 그는 그곳에서 음악회를 열어요. 가면 만날 수 있어요."
그는 당황해하는 그녀를 보고 잠시 망설였다.
"걱정 말아요, 비용은 내가 대겠소."
"아니에요."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마치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공포에 직면한 사람 같았다. 한기가 파고 들어와 그녀를 창백하게 만들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듯이 보였다.
"싫어요."
그녀는 신경질에 가까운 높은 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가 더 설득하려 들기 전에 그녀는 뒤로 획 돌아서서 눈을 마구 밟으며 뛰기 시작했다. 마치 지옥의 사자가 뒤쫓아 오기라도 하듯이...
카탸는 호텔까지 걸어서 왔다. 길은 몹시 붐볐지만 눈으로 뒤덮인 거리는 소리를 모조리 감싸주는 것 같아 마치 어떤 영화의 환상을 통해 자기 혼자 걸어가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녀가 들을 수 있는 거라곤 자기의 거친 숨소리와 자기의 발밑에서 들리는 눈 밟는 소리뿐이었다.
그날 그녀는 호텔 주위를 돌며 초조해했고 원하지도 않는 커피를 시켜 놓고선 그냥 돌려보내기도 했다. 산책하러 나가려다 돌아오기도 했고 호텔의 통나무 불 옆에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라도 스테이시에게서 전화가 오면 짐을 챙겨 첫 비행기로 파리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간 그녀를 혼자 있게 놓아두었고 그녀는 조용한 시간을 가지며 스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서 제삼자의 입회하에서 매트를 잠깐 만나 그 둘 다 균형감각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카탸는 스테이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 금방 전화를 받았다.
"내일 3시에 당신을 데리러 가겠소."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그는 놀라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음악회가 끝나면 너무 늦어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소. 그래서 런던에서 하룻밤을 머물러야 할 것 같은데... 다 내게 맡겨요."
카탸는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심한 불안감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얼마 안 되는 짐과 여권, 그리고 여행자 수표를 챙겼다. 그날 밤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오후 호텔 층계 아래쪽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스테이시의 차가 다가왔다. 정복차림의 운전사가 있는 승용차였다. 최신형의 굉장히 호화로운 차여서 자신들만이 타고 있는 작은 비행기와도 같았다. 가는 동안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스테이시와 많은 대화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항상 그랬듯이 매트 생각으로 되돌아가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그들은 작은 비행장에 착륙했다. 여권검사는 형식적인 것이었지만 다른 어떤 국제공항에서보다 더 철저하게 짐 검사를 했다. 그녀는 스테이시와 톰의 짐이 자신의 옷짐보다 훨씬 간단한 것을 보고는 약간 의아스러웠다. 자신들이 음악회 후에 머물 곳이 어딘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의문은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곧 풀렸다. 또 다른 운전사가 그들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따라 런던의 서부지역으로 들어섰다. 홀랜드 파크의 조용하고 숲이 우거진 거리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외부에 높은 기둥이 서 있고 넓은 테라스가 있는 집이다.
"내 친구 집이오."
스테이시는 가볍게 말했다.
"손님들을 위해 이 집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소."
그는 그녀에게 열쇠를 내보였다. 운전사는 그들의 짐을 내려놓고 자기 모자를 만지작거리면서 7시 15분에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차가 떠나자 카탸는 어떤 음모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갑자기 당혹스러웠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의심은 더욱더 커졌다. 방안엔 아름다운 화분들이 가득하고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하다. 틀림없이 손님을 위해 정리해 놓은 것 같다. 스테이시가 즉흥적으로 여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자신을 현혹시키기 위한 거짓말이리라.
카탸는 자신의 방으로 정해진 객실로 갔다. 테이블보가 덮인 탁자 위에는 크림 색 프리지아가 작은 꽃병에 꽂혀 있고 방안은 꽃향기로 가득했다. 방안은 아늑하고 꽃들도 아름다왔지만 그녀의 불안을 더 가중시킬 뿐이었다.
차는 정확히 약속된 시간에 왔다. 카탸는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향수를 뿌렸다. 그러나 여전히 몸은 떨렸다. 그녀의 드레스는 업무상 칵테일 파티에 나갈 때를 위해 제네바로 가지고 왔던 우아한 것이었다. 대담하게 한쪽이 트인 스커트는 서 있을 때는 부드럽게 곧바로 내려와도 슬쩍 돌 때는 춤출 때 입는 드레스처럼 소용돌이쳤다. 옷감은 매우 부드럽고 어두운 청색이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옷은 눈빛을 더욱 진한 보랏빛으로 보이게 했다.
카탸는 오랜 시간에 걸쳐 화장을 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마치 사진을 찍기 위해 차려입은 사진 모델이나 혹은 굉장한 공연을 준비하는 여배우 같았다. 거실로 나가 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스테이시는 정장을 하고 기다리고 있고, 운전사는 우산을 들고 돌층계에 서 있었다.
그들은 셋째 줄 중앙에 앉았다. 첫 번째 작품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짧은 간주곡이었다. 카탸는 매트가 피아노 앞까지 걸어와 앉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쉴 때까지 자기가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의 눈은 잠시도 그를 놓치지 않고 뒤따랐다. 그는 청중의 박수에 웃음도 보내지 않았고 인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청중 쪽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그때처럼-그가 떠나던 날처럼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연주를 시작하자 그는 마치 무엇엔가 홀린 사람 같았다. 피아노가 그를 황홀하게 하는 동시에 괴롭게 한다는 듯 그는 피아노 위로 몸을 구부렸다. 그는 완전히 청중들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매트가 그렇게 연주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카탸는 미국 잡지에서 그가 격찬을 받았던 것을 떠올리면서 그 이유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전 단순한 향상이 아니었다. 이미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연주였다. 그건 대단한 변화다. 어떤 면에서는 매트 사라센의 깜짝 놀랄 만한 감정적 깊이를 발견한 것이다. 1악장이 끝난 다음 주위를 둘러본 카탸는 자신의 느낀 점이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도 똑같이 떠올라 있음을 보았다.
"연주하는 걸 보니 이제는 대가 계열에 속하겠어요."
누군가가 쉬는 시간에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 들렸다.
"대가들 중에서도 으뜸이지."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25년 동안 난 저런 연주를 들어 본 적이 없어."
카탸는 얘기하는 사람들이 누군가 보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그 사람들은 벌써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대신 스테이시의 눈과 마주쳤는데 그 역시 그 대화를 들은 것 같다.
"그가 열중해서 좋은 결과가 나온 거라면 그건 가치 있는 거겠죠. 비록 당신은 그가 자기 자신을 혹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해도 말예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는 천천히 변한 게 아니오.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가 없어져 버렸다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서 나타났소. 처음엔 우리들 중 누구도 그것을 믿지 않았지. 그래서 우린 그에게 틀림없이 무슨 일인가 있었다고 생각하게 된 거요."
카탸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는 느릿느릿 말했다.
"지금까지 난 당신이 그걸 내게 말해 주길 바랐소."
그녀의 마음은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자기의 손끝만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이어 벨이 울리고 그들은 다시 다음 곡을 들을 준비를 했다. 그녀는 약간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스테이시는 그녀의 팔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연주회가 끝난 후에 그를 만나요."
연주가 끝났다. 카탸는 열광하는 팬들에 둘러싸여 그를 잘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아직 그의 음악에 매료되어 멍한 상태이기도 했다. 매트는 얘기를 나누고 있던 어떤 여자 너머로 카탸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매우 평온해 보였다. 그녀를 보고 기쁨도 불쾌감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놀라는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카탸 옆으로 와서 멈춰 섰다.
"크리스마스를 지내러 런던에 왔나?"
그녀는 침을 삼켰다.
"아뇨."
카탸는 그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 왔다는 사실을. 그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방엔 사람이 너무 많고 시끄러웠다.
매트의 눈은 방을 둘러보다가 그녀에게 와 멎었다. 그의 눈은 타는 듯했다. 그녀는 그 집중된 시선에 당황해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카탸는 재빨리 말했다.
"사람들은 당신이 당대에 가장 뛰어난 연주가라고 하더군요. 쉬는 시간에 청중들이 칭찬하는 걸 들었어요."
"사실이지. 그래서, 생각을 바꾸기로 했나?"
그는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모른다고?"
그는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래, 내 음악회가 어느 정도 사회적인 화제가 되기 전에 내 연주회를 보러 온 적이 있었소?"
"당신은 파리에서 연주한 적이 없어요."
그녀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우린.."
매트는 아직 술이 남아 있는 잔에 다른 술을 더 따라 부었다.
"지금도 파리에 있진 않지."
그는 술잔을 냉큼 비우고는 그녀를 비웃듯이 바라보았다. 카탸는 마음이 상했지만 그걸 어떻게 감춰야 할지 몰랐다.
"당신은 이해를 못하는군요."
"내가 이해를 못한다고?"
그의 잿빛 눈은 분노와 취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카탸가 생각한 것보다 더 원초적인 감정이었다. 그는 그녀의 턱을 거칠게 들어올렸다.
"난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협조적이기까지 하지. 잠깐만 기다려요."
그는 옆 테이블에서 또 다른 술을 가져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카탸의 얼굴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손으로만 더듬어서 술을 찾아오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서 읽을 수 있는 타는 듯한 욕망은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몸 깊은 곳에선 매트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그녀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 마디 말도 없이 글라스를 내려놓고는 등을 돌리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가 자기에게서 분노에 불타는 눈을 한시도 떼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굳은 얼굴과 매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스테이시는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카탸에게 현관 열쇠를 주었다. 카탸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택시로 집에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침대로 들어갔다. 그리곤 몸을 둥글게 구부렸다. 잠에 빠지고 싶었다.
카탸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왜 잠에서 깨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무슨 소린가가 들린 것 같았지만 그 소리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스테이시와 톰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들은 열쇠를 갖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그렇다면 그들을 밖에 세워 둔 결과가 된 건지도 모른다. 그녀는 귀를 기울이고 엿들으려 했다. 주위는 조용했다. 침대 옆의 작은 시계는 3시 15분을 가리키고 있다.
잠시 후 아주 부드럽게 그리고 아주 작게 그 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불안정한 손이 문을 더듬는 소리다. 카탸는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그리고 커다란 벨벳 가운에 팔을 끼었다. 그리고는 거실로 나갔다. 주위는 캄캄했다. 더듬거리며 빠져나와 통로 끝까지 가자 판자로 된 문이 있었다. 저녁때는 쉽게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어디가 입구인지 통 알 수가 없다. 그 문은 스테이시나 톰의 방문은 아닌 것 같고 그녀가 쉽게 드나들었던 욕실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현관문인 듯하다. 매우 조심스럽게 그 문을 열었다.
멀리 있는 램프에서 어슴푸레한 빛 흔들렸고 거기엔 매트가 서 있었다. 어깨에 쌓인 눈이 채 녹지 않은 레인코트를 입고 있다. 목에는 요란하고 하얀 실크 스카프를 아무렇게나 두르고, 지금은 많이 구겨졌지만 연주회 때 입었던 연미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그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양손으로 문틀을 짚고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카탸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어리석게 생각된 적이 없었다.
"당신, 계속 마셨군요?"
"많... 이"
그는 끄덕거렸다.
"많이, 많이 그리고 더 많이"
그는 팔을 그녀에게 내밀며 비틀거렸다.
"피곤해, 자고 싶어"
카탸는 본능적으로 그를 부축해 주려고 팔을 내밀었다. 그리곤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 누워야겠어요. 매트, 가서 좀 쉬어요."
그는 그녀에게 애정 어린 긴 키스를 했다.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야. 당신도 알지? 아름답고 분별 있는 아가씨. 쉬라고? ... 그래"
"고맙군요."
카탸는 말했다.
"술이 깨면 다시 말해 주시죠. 그러면 난 우쭐해지겠죠?"
그 자연스러운 키스는 열정의 기억을 휘저어 놓았다. 물론 그런 느낌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겨우 정신을 되찾았다. 술을 깨고 나면 그는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그가 이곳에 서서 적대감 없이 자기를 안고 있다고 해서 자신들 사이에 모든 일이 해결돼가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라고?"
그는 그녀의 어깨 위로 고개를 떨구며 천천히 말했다.
"그래요."
그녀는 마음이 흔들렸다. 이제는 그를 혼자서 그가 묵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그는 곤드레만드레 취해서는 거의 선 채로 잠을 자고 있다. 그녀는 괴로운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캄캄한 복도엔 닫혀 있는 문이 몇 개 있긴 하지만 도대체 어느 것이 방으로 통하는 문인지 알 수가 없다.
"이리로 와요."
그는 자기가 있던 방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어린아이처럼 눈을 껌벅이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카탸는 그의 스카프를 풀어 주고 그의 축 늘어진 어깨에서 코트를 벗겼다.
"당신 방이군."
매트의 말은 조금 또렷해진 것 같다.
"그래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거실에 소파가 있어요. 난 오늘밤 거기서 자면 돼요."
그녀는 고통 속에 있는 그를 돕고, 그를 사랑하며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행복하게 느껴져서 그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그녀는 그의 뺨에 키스하며 가볍게 웃었다.
"지금은 나보다는 침대가 더 필요해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말한 것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알코올 기운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노력 같아 보였다. 그는 침대 끝에 주저앉아서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물 좀"
카탸는 의심스러운 듯 그를 보았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대로 했다. 그녀가 물 컵을 건네주자 그는 물을 받아들고는 한꺼번에 끝까지 다 들이켰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의 붉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어뜨리면서 몸을 곧추세웠다.
"더 줘요?"
"그래, 그렇지만... 난 알 것 같아."
그는 조심스럽게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는 일어서더니 비틀거렸다.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에게로 손을 가져갔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더니 잠시 자기 가슴에다 갖다 대었다. 그리고 나서 뜻 모를 야릇한 미소를 띠며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손을 놓아주었다.
"그래, 맞아. 정신 차려야지.."
그는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카탸는 걱정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더듬었다. 그의 손은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
"침대로 들어가, 이러다 감기 들겠어. 찬바람 좀 쐬고 다시 올게."
불안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며 서 있는데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침대로 뛰어들어 부드러운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매트는 미소를 머금고 문 앞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들면 안 돼"
카탸는 머리 밑에다 베개를 높이 세워 놓고 그 속에다 두 손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가 돌아오기를 얼마나 열망했던가? 동시에 또 얼마나 두려워했던가? 거의 예전과 다름없이 그에겐 따뜻한 애정이 넘치고 있다. 문 앞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부드럽지만 지금은 더욱 안정되고 즐거움에 차 있는 목소리다. 그 소리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들지 말라고 얘기했는데!"
매트는 핀잔하듯이 말했다. 그녀는 커다란 보랏빛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물속에 머리를 집어넣었던 게 틀림없다. 그의 머리카락은 물에 젖어 있었다. 넥타이도 간 곳이 없다. 셔츠는 허리 부분까지 풀어져 있다. 카탸는 무모한 감정의 덩어리에 급습을 당하고 있었다. 그 모든 감정은 그녀를 서둘러 그에게로 다가가게 만들었다. 그러한 자기의 반응에 두려움을 느끼며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매트는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며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카탸, 내 단 하나의 사랑, 그렇게 두려워하지 마."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난 지금 완전히 술이 깼어.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그녀의 입술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신을 믿어요."
그의 눈을 응시하면서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당신이? 증명할 수 있나?"
그리곤 침묵이 흘렀다. 갑작스럽고 심장을 멈추게 하는 듯한 침묵이었다. 카탸 지금 자기가 취하고 있는 행동에 대해 어떤 명확한 생각도 없이 벼랑 끝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폭발할 듯한 그의 검은 눈에선 무서운 무엇인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그의 손은 부드러웠지만 그 손 자체는 다급함으로 떨리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그의 고통을 덜어 주고 그의 외로움을 감싸 그를 평온 속에 잠재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그의 셔츠 속으로 넣었다. 그리곤 그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침대로 가요, 매트"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10
그토록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한 자신에 대해 카탸는 너무나 놀랐다. 마치 자신들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니 평생 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던 것처럼 느껴졌다. 파리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두려움에 가까운 흥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단지 그를 사랑한다는 확신만이 있을 뿐...
매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야, 카탸?"
"그래요"
그녀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차분해져 있었다. 그는 카탸에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결코 부드러운 키스가 아니었다.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드는 열망에 가득 찬 키스였다. 그는 카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중얼거렸다.
그가 너무나 세게 죄었기 때문에 입고 있는 가운에 붙은 금속 단추가 그녀의 몸을 찔렀다.
"왜 그래? 내가 어떻게 했지?"
카탸는 살짝 웃었다.
"아니에요, 이 빌려 입은 가운 때문이죠."
그리고는 단추에 찔린 자국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그곳을 입술로 부드럽게 문질러주었다.
"미안, 내가 서툴러서"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의 입술이 그 작은 상처 자국에만이 아니라 이젠 가슴선을 따라 내려오고 있는 것을 느꼈을 때 그녀는 거의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는 키스에 방해가 되는 그녀의 옷을 벗겨내고 있었다. 카탸는 그의 손이 와 닿는 것을 느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온몸은 떨렸다.
"옷을 너무 많이 입고 있군."
그는 그녀의 피부에다 대고 웃으면서 말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치솟아 오르던 감정을 억제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녀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에게 키스했다.
"사랑해요.."
그러자 그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가시고 눈빛은 검게 변했다. 그는 몸을 돌려서 침대덮개와 가운을 치웠다. 카탸는 그가 자극하고 있는 새롭고 황홀한 감각에 눈을 꼭 감았다. 그 감각은 마치 고통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기쁨으로 전율하고 있었다. 그녀가 매트에게 손을 대자 그는 불규칙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경험이 없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아낌없는 그의 관심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그에게 반응하며 그를 껴안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카탸를 내려다보았다.
"난 생각도 못했지.."
그는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오, 카탸, 당신은 날 너무 괴롭혀 왔어."
갑자기 그의 손이 그녀의 몸을 지배해 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몸 같지가 않고 그의 것같이 느껴졌다. 그 감각에 두려워하거나 불쾌해하는 대신 그녀는 이 뜻밖의 즐거움에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카탸는 계속 그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반은 애원이었고 반은 명령과도 같았다. 결국 그는 그녀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감각의 마지막 단계에까지 그녀를 몰아갔다. 그건 마치 구름 사이를 뚫고나오는 햇빛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은 채 그녀는 빛나는 환희 속을 날고 있었다. 그들 육체의 완벽한 합치와 그 순간의 깊은 친밀감을 느끼면서 매트는 나의 친구이며 연인이고 이 위험한 세계에서 단 하나의 안전한 곳이다. 또한 나의 동료이자 내게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남자다. 가슴이 벅차옴을 느꼈다. 열정적으로 그를 다시 껴안았다. 자기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녀는 기분 좋은 안락감에서 천천히 잠이 깼다. 따뜻함과 나른함이 느껴졌다. 살짝 몸을 뒤척이다가 자기가 매트의 어깨에 머리를 얹고 있음을 알았다. 카탸는 고개를 돌려 미소를 머금은 채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매트의 잿빛 눈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어났어?"
그가 놀리듯이 말했다.
"난 하루종일 잘 줄 알았는데"
카탸는 생긋 웃어 보이며 몸을 쭉 폈다. 그의 품안에서 자기의 몸이 움직인다는 느낌이 너무나 행복하다.
"그럴 여유가 없죠, 이제 당신은 당신 집으로 가야 하니까요."
그는 나른한 손짓으로 그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런 거라면 아직 걱정할 필요 없어."
카탸는 고개를 돌려 흘끗 시계를 보았다.
"시간을 좀 봐요. 이제 금방 주인이 아침 먹으라고 깨우러 올 거예요."
매트는 그녀의 얼굴에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겨 주었다.
"아니, 우리가 일어날 때까지 아버지께서 저 문 앞에서 서성대고 계실 리가 없어."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다, 당신 아버지?"
"당신이 스테이시 알렉산더라고 알고 있는 사람. 그건 필명이지. 아버진 동화를 쓰셔. 하지만 진짜 우리 아버지의 정체는 사라센이야. 무대와 스크린과 제네바 호텔의 스타, 브렛 사라센"
카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분이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거예요?"
매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도, 하지만 해롭지 않은 거짓말이었겠지."
자신을 감고 있는 그의 팔에서 빠져나왔다.
"당신의 거짓말처럼요?"
잿빛 눈이 조심스럽게 변했다.
"내 거짓말...?"
"당신이 내 사촌언니의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 말예요."
카탸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곤 갑자기 소름이 끼쳤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를 황홀하게 해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뒤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건 기필코 이루고야 마는 이기심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테이시는 당신이 여기 산다는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침대에서 뛰쳐나와 옷을 찾았다. 가운은 지난밤 매트가 침대 옆에 던져 놓은 채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카탸는 얼른 가운을 입고는 허리끈을 동여맸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꼭 다물며 뒤돌아섰다.
"그래, 난 여기서 살아."
그는 천천히 말했다.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 건지는 모르지만...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난 이 집에 살고 있지. 아버진 도심으로 들어오시면 이 집을 사용하셔, 그래서 아버지가 열쇠를 갖고 계시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스태피 솔로몬도 포함해서? 이런 생각을 하자 그녀는 고통에 휩싸였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어졌다.
"이상한 뜻으로 해석하지마. 이 집은 정말로 보통 손님들을 위한 집이니까. 당신은 지금 유괴된 게 아니라구. 그러니까 원한다면 언제든지 당신 발로 걸어 나갈 수 있어."
"좋아요."
그녀는 문 쪽으로 가면서 악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옷을 입는 대로 빨리 나갈 거예요."
"왜?"
"왜냐고요?"
그녀는 성난 눈으로 그를 향해 돌아섰다
"내게 왜냐고 물어 볼 수가 있어요? 당신은 당신 아버지를 보내 나를 염탐하도록 하고, 이곳으로 데리고 오게 해서는 나를 마음대로.."
"당신과 잠자리도 같이하게 하고?"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았고 얼굴은 창백해졌다.
"어쩜 그렇게 쉽게 그런 말을.."
그녀는 숨이 막힐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끄럽지도 않나요?"
그는 손을 머리 뒤로 가져가며 기지개를 켜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난 오히려 자부심을 느끼는데"
카탸는 움찔했다. 마치 그가 던진 창에 심장이 관통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어젯밤 의자 위에 두었던 자기의 옷가지를 얼른 주워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방에서 나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르자 갑자기 굴욕감이 엄습했다.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급하게 짐을 챙겼다. 더 이상 매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지난밤 사랑의 연극 속으로 이끌고 들어간 그의 승리감을 견뎌낼 수 없었다.
그녀는 가방을 들고 조용히 그 집에서 나왔다. 주위는 온통 희부연 안개에 싸여 있었고, 금빛 햇살이 안개를 빗질하고 있었다. 아, 이 아름다운 아침에 떠나야 하다니...
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카탸는 사촌 폴에게로 갔다. 할머니 집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틀림없이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고 안정된 짝을 찾아 결혼할 때까지 집에 있으라고 할 것이 분명했다. 폴은 생각보다 훨씬 동정적이었다. 카탸의 여윈 얼굴과 놀란 눈을 보고는 부인을 불러 침대에 눕히고 뜨거운 우유를 가져다주게 했다. 그리곤 폐를 끼칠까봐 조심스러워 하는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고마와요, 폴"
카탸는 작은 소리로 말하곤 곧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가장 나이 어린 조카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 커다란 장난감 곰을 베고 누웠다. 낯선 곳에서 두 번째 밤을 지내는 동안 그녀에게 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잠결에 본능적으로 곁에 매트가 있는 듯 더듬다가 곰 인형이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자기의 지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폴과 안나, 그리고 조카들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웃음을 지어 보이려고 했다. 폴이 깨우러 온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폴이 아니었다. 친절한 안나도 아니었고 이 장난감 곰의 주인도 아니었다. 방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사람은 짙은 오렌지 색 블라우스에 호랑이 줄무늬가 있는 조끼를 입은 예쁜 얼굴이었다.
"보니!"
카탸는 전혀 뜻밖의 만남에 너무나 놀라 숨을 멈췄다. 보니는 편안해 보였다.
"아, 깼구나. 카탸. 폴이 널 방해해선 안 된다고 했는데"
"아냐, 조금 전에 깼어."
보니는 가볍게 웃으면서 곰 인형을 집어 들고 쓰다듬다가 카탸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선 그 작은 침대 옆에 얌전히 앉았다
"그런 대우를 받아 마땅하지"
카탸가 곰을 침대 밑에 쑤셔 넣는 것을 보며 보니가 말했다.
"곰 인형은 대체효과가 그렇게 높지 않으니까"
카탸는 긴장했다. 보니의 출현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트의 옛날 애인과 함께 그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그 옛 애인이 자기의 사촌이라고 하더라도....
"대체효과?"
그녀는 긴장하며 되받았다
보니의 얼굴엔 짓궂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다 큰 처녀와 곰 인형이라...?"
카탸는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 그게 나 같은 어린 소녀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일 수도 있지."
보니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렇지 않아. 넌 사람을 놀라게 하지, 너 자신도 그건 잘 알 거야."
그녀는 핸드백을 뒤져 호박색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그러나 담배에 불을 붙이지는 않고 금색 칠을 한 손가락 끝으로 장난을 하고 있다.
"그게 바로 할머니가 네게 심하게 대하시는 이유 중의 하나지. 어떤 면에서는 물론 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카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니의 방문이 분명히 어떤 목적을 갖고 있음이 확실하다. 보니는 담배 케이스를 내려놓고 창가에서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카탸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그분들은 다른 세계에서 왔어, 카탸. 그들은 선의에서 그런 거야. 그분들을 비난할 수는 없어."
카탸는 갑자기 밀려오는 아픔에 눈을 감았다.
"그래, 적어도 할머닌 내게 진실을 말해 주셨으니까."
틀림없이 보니는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리라. 물론 보니는 자기와 매트의 관계를 조금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폴에게서 들었든, 혹은 그녀 혼자 추측이든.
"그래, 넌 얘길 들었어야 했어. 아니, 내가 미리 말을 했어야 해. 그때 난 너무 어리고 어리석었지. 그리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서 난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했어. 바보같이 말야."
그녀는 카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보니의 사랑스런 눈이 눈물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보고 카탸는 깜짝 놀랐다. 보니는 슬픔을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난 후회되는 게 너무 많아."
"나도.."
카탸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게 언니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이해하고 싶어."
보니는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넌 그 얘길 들었어야 했어. 할머니가 얘기해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그렇게 했어야 해."
카탸는 동정적으로 말했다.
"오, 보니, 그건 언니 인생이야. 언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옳아."
"그게 네게 영향을 끼치는 일이었다면 그렇지 않아. 난 조부모님이 널 밤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대학 가는 걸 반대하면서 전통적인 학교로 가라고 하는 걸 봤을 때.."
그녀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난 무엇인가를 말해 줬어야 했어. 넌 내 어리석음으로 해서 벌을 받고 있었어. 그건 잘못된 거야. 그리고 지금.."
카탸는 긴장했다.
"폴이 그러더라, 할머닌 네가 매트 사라센과 만나지 못하게 할 거라고"
카탸는 머리를 흔들었다.
"난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보니, 난 이미 매트를 만나지 않고 있어."
"할머니가 네게 말씀하신 것 때문에?"
"그리고 매트가 내게 얘기해 주지 않은 것 때문에."
보니는 몹시 괴로와 보였다.
"내 생각엔 매트는 얘기하지 않는 게 좋다고 느낀 것 같애. 그는 아마도 우리... 그래, 나를 보호해 주려 한 걸 거야. 그는 항상 그래 왔어. 자기 자신 안에 모든 걸 담아 둘 준비가 돼 있었지."
카탸의 마음은 날카롭게 아파왔다. 그가 한때 사랑했던 여자를 보호하려 했다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보니는 계속했다.
"하지만 그건 매트의 책임이 아니었어. 내가 네게 말했어야 했는데"
카탸는 보니를 쏘아보았다.
"그의 책임이 아니라고? 언니에게 그의 아이가 있었는데도?"
순간 보니는 당황하는 것 같았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니?"
카탸는 지친 듯이 말했다.
"결국 할머니가 진실을 얘기해주셨지. 그도 부정하지 않았어."
"매트가 내 아이의 아버지라고?"
카탸는 끄덕였다. 보니는 그녀에게로 달려와 두 팔로 그녀를 감쌌다.
"이 가엾은 아이야! 세상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니? 우리의 그 존경스러운 할머닌 아주 용의주도한 분이구나. 잊지마, 거기엔 진실이라곤 전혀 없어."
그녀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카탸는 고개를 들었다.
"매트가 네게 말하지 않은 진실은 신이 알고 계시단다. 하지만 난 말해 주겠어. 내가 어렸을 때 난 매트의 아버지와 일이 있었어. 내가 브렛의 아이를 가졌을 때 그는 나와 결혼하기를 원했지.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닌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셨어. 난.."
잠시 후 보니는 계속했다.
"많은 시간을 히스테리 상태에 있었지. 병원에도 드나들었고. 결국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그 일을 일임해 버렸어. 그건 브렛에겐 견디기 힘든 거였지. 그는 최악의 상태였어. 이혼한 후 매트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결혼과 아이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지. 그는 아마도 신경쇠약에 걸렸던 것 같아. 물론 그런 얘기를 들은 건 아니야"
그녀는 씁쓸하게 덧붙였다.
"난 최근에야 우연히 알게 됐어. 그건 왜 매트가 실제적인 모든 일-돈 문제 같은 것-을 모두 맡고 있고 양자까지 두게 되었는지를 밝혀 주는 열쇠지."
보니는 어쩌면 저렇게 딴사람 얘기를 하듯 차분하게 말할 수가 있을까. 마치 이런 카탸의 생각을 알겠다는 듯 보니는 약간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난 그땐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달랐어.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와 사귈 수 있는 멋있는 여자라고 우쭐해 있었어. 너무 어리석었지. 그리고 그에겐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지 못했고. 난 너무 어렸으니까. 물론 지금은 달라, 지금은.."
그녀는 약간 고통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기야 이런 일은 너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 카탸. 단지 넌 내 전철을 밟아서는 안 돼."
"그게 무슨 뜻이지?"
"네가 매트를 사랑한다면 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야."
보니는 냉정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나 내 과거에 대해선 개의치 말고. 그를 좋아한다면 어서 돌아가."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보니는 놀라는 듯했다.
"그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카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매트는 날 원했었지. 내가 떠나 버리자 그는 괴로와했어. 하지만 어젯밤 다시 그와 만났을 때, 그 사람은 처음엔 자기가 요새 유명해졌기 때문에 내가 돌아온 거라고 말했어."
보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다음엔?"
"그 다음?"
"넌"
보니는 차분히 지적해 주었다.
"조금 전에 네가 처음엔이라고 했어. 그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났지?"
카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이 천천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떨구었다.
"그래"
보니는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그래, 그랬을 거야. 그는 아마 널 유명 인사나 쫓아다니는 여자로 생각했을 거야. 그리고 널 침대로 데려갔겠지. 카탸, 너 정신이 나갔구나."
그러나 카탸는 위로받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날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한 번도 하지 않았단 말야. 그리고, 언니와 아이에 대해서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았어."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은 비에 씻긴 라벤더처럼 어두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런데도 그가 날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11
카탸는 1월 첫째 주 주말에야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부모를 만나게 되더라도 연말을 함께 지내고 가라고 폴과 안나가 설득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카탸가 런던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폴의 집으로 데리러 왔다.
"난 일을 마치면 파리로 돌아갈 거예요, 할아버지"
카탸는 조용하게 말했다.
"그리고 어디에서든지 일은 계속 할 거예요. 제게 일은 중요해요."
할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이젠 누군가와 결혼해서 안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탸는 할아버지를 비난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내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계시나 보죠?"
여태껏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당황했다.
"매트 사라센과 못 만나게 하려고 할머니를 보내셨죠?"
할아버지 얼굴엔 긍정의 빛이 역력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마도 할아버진 내가 보니의 일을 매트와 관계된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라고 할머니에게 말씀하셨겠죠."
"보니는 매트와 많이 만났다"
할아버지는 노해서 말했다.
"매트의 아버지 집에서 그랬겠죠. 보니가 다 말했어요."
카탸는 돌아섰다.
"할아버진 날 속였어요. 할머니도요. 분명한 건 제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용서할지는 몰라도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우린 한동안 만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
한참 뒤에야 카탸는 조부모에게 편지 쓸 여유가 생겼다.
공동거실에 있는 잡지에는-물론 카탸는 이런 책을 사보지 않는다-매트가 콜럼버스 영화 선전을 위해 유럽을 여행하는 데 스테피 솔로몬과 동행했다고 씌어 있었다. 잡지에 나온 그들의 사진은 행복해 보였다.
그가 파리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카탸는 놀랐다. 이번 유럽 순회연주회 중의 첫 번째 연주회는 파리에서 갖는다는 광고가 있었다. 스테이시 알렉산더가 매트는 파리엔 오기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그 음악회 표를 샀다. 그러나 매트가 자기를 찾지 않는 한 그와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러나 그 결심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음악회가 있던 날 밤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실험용 비커를 세 번이나 계속해서 깨자 앙리가 별일 없으면 일찍 집에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해서였다.
집에 와 보니 방문객이 있었다. 대사관의 직원 잭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들이 매일 만나 왔던 것처럼, 그리고 저번에 그녀에게 말해 준 사실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자연스럽게 방안을 거닐고 있었다.
"아파트 관리인이 여기서 당신을 기다려도 좋다고 했죠, 미스 앙드레. 실례가 되지 않았나요?"
카탸는 비에 젖은 스카프를 풀며 당황했다고 말했다.
"그렇겠죠, 너무 뜻밖이겠죠."
그는 인정했다.
"그러나 더욱 뜻밖인 건 사라센이죠."
카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눈썹을 치켜 올리며 안정된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매트 사라센?"
"그렇죠, 매트는 오늘밤 파리에서 연주를 합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와 문제가 좀 있어요."
카탸는 레인코트를 벗으면서 차디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나와도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는 한풀 꺾이는 듯했다.
"그래요, 건방진 행동이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나도 생각다 못해 왔습니다. 미스 앙드레. 매트는 어린애처럼 굴고 있어요. 난 연주회장으로 그를 만나러 갔죠. 그러나 그는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연주하기 싫다고 하면서 계속 술만 퍼마시고 있어요."
그는 잠시 멈췄다가 계속했다.
"당신이 있으면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카탸는 놀란 기색을 감추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제발, 지금 나와 함께 가주지 않겠습니까?"
그는 급하게 물었다.
"어쨌든 그를 무대에 세워야 합니다.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어요. 연주회가 끝나고 마시든지 훨씬 전에 마시는 걸로 끝내든지 했죠. 그런데 이번에는 미친 사람 같아요. 나도 매트의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린 당신이 필요해요, 미스 앙드레. 나를 믿어 주십시오."
그녀도 이런 간청엔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젖은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뒤돌아서 그와 함께 집을 나섰다. 그는 카탸를 데리고 연주회장 복도를 따라가더니 숨이 차도록 층계를 올라갔다. 드디어 회색 칠을 한 문 앞에 이르렀다. 그는 형식적으로 노크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매트는 녹색 벨벳 시트의 긴 의자에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다갈색 머리는 흐트러져 있고 눈은 감겨 있다. 그리고 연미복과 주름 장식의 셔츠를 입고 있긴 하지만 셔츠 단추는 채워지지 않았고 상의는 다른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다. 바닥엔 빈 술병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들이 들어오는 소리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조금 후 스테이시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조심스럽게 옷이 들려져 있었다. 그는 카탸를 보자 표정이 밝아졌다.
"카탸"
그는 카탸에게로 걸어와서 그녀를 안아도 될지 모르겠다는 듯 망설였다. 그리곤 조심스러운 미소를 띠웠다.
"와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매트가 누워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지금 자신이 이곳에서 어떤 마술이라도 부려 매트가 연주하도록 만들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잭은 매트에게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서 움직여 봐요."
매트는 어깨를 구부리고 몸을 약간 움직였을 뿐이다. 잭은 뒤로 물러나며 카탸에게 애원의 눈길을 보냈다.
"보셨죠? 내가 여기 왔을 때부터 계속 이랬어요."
카탸는 의자 옆으로 가서 무릎을 굽혔다. 그리곤 아래로 힘없이 늘어져 있는 매트의 손을 끌어올렸다. 매트의 손은 너무나 차가왔다. 그녀는 자기의 손을 그의 이마에 부드럽게 얹었다.
"매트"
카탸는 강경하게 말했다.
"이렇게 바보같이 굴지 말고 일어나 앉아요."
그리고 그녀는 매트의 뺨을 가볍게 한 대 쳤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효과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를 노려보았다. 카탸는 스테이시가 자기 뒤에서 숨을 몰아쉬는 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에 잭이 웃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매트는 냉정하게 말했다.
"아마도 당신은 딴 사람들이 나가주길 바라겠지? 그래서 우리 둘만 남아 있고 싶겠지?"
"오, 아니에요."
카탸는 깜짝 놀라 간청하는 눈빛으로 스테이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카탸가 급히 일어나 달려갔을 땐 이미 문이 닫혀 버렸다. 매트가 가까이 와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은 가늘고 섬세했지만 강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카탸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앉아"
그는 가볍지만 단호한 소리로 말했다.
"싫어요."
카탸는 화를 냈다.
"나를 바보로 만들려고 여기까지 오게 했나요?"
그는 카탸의 손목을 끌어당겨 그녀를 긴 의자 끝에 내던졌다.
"당신을 여기 오게 한 건 더 이상 우리가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게 하려고.."
"난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카탸는 손을 빼려고 하면서 말했다.
"그래, 그렇겠지."
"난 당신과 말싸움 하고 싶지 않아요. ,"
매트는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리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완벽한 키스를 했다. 그는 고개를 들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카탸는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당신 술 마신 게 아니군요, 오늘 저녁 내내 술 마셨다는 건 거짓말이죠?"
그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내려다보았다.
"바로 맞혔어."
"하지만... 하지만 왜?"
"난 연주 전엔 절대 술을 안 마셔. 그건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일이지."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난, 당신을 때릴 수도 있어요."
"오늘 저녁 당신은 벌써 나를 한 대 때렸잖소. 정말 예상 밖이긴 했지만"
"그건 완전히 당신 잘못이었어요."
카탸는 당당하게 말했다.
"난 정말 당신이 술에 취해서 무감각 상태인 줄 알았으니까요."
그는 카탸를 껴안았다.
"그래, 그건 나도 인정해."
"그렇다면 이제 이런 게임을 만들어낸 이유도 설명하시겠군요."
카탸는 흥분했다.
"그건 내 마지막 모험이었지. 사라센의 최후의 저항이었다구."
"네?"
"당신은 내게 말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편지에 답장도 쓰지 않았어."
카탸는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편지요?"
"난 캠프던힐 가로 날마다 편지를 부쳤어."
카탸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내 조부모님 주소에다 계속 편지를 부쳤단 말예요? 그런데 왜 거기에...?"
"난 당신이 거기로 간 줄 알았지. 그리고 내가 전화를 걸었더니 당신이 거기 있다고 할머니가 그러시더군. 당신은 짐을 가지러 제네바로 돌아가지 않았고 런던에서 계산을 다 끝냈더군. 나도 확인해 봤지."
"알겠어요."
카탸는 숨을 길게 내뿜었다.
"할머닌 당신에게 내가 그들과 같이 있다고 말씀하셨겠군요?"
"할머닌 당신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아무와도 만날 수 없다고 하시더군. 파리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씀도 하셨지. 그리고 내가 알기론 당신은 논문도 다 끝냈고.."
"그걸 어떻게 알죠?"
매트는 약간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확인해 봤지. 난 스파이같이 조사했어. 계속 물어 보며 다녔지. 당신은 작년에 내가 얼마나 당신 가까이에 가려고 했는지 믿지 않았어."
카탸는 당황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요, 난 그랬어요. 당신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았어요. 너무나 동떨어져 있고 너무나 숨기는 게 많아서.."
"난 정말 당신이 런던에 있는 줄 알았어. 당신 할머니가 거짓말을 하실 줄이야, 난 그렇게 우아한 숙녀에게서 거짓말이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지, 그래서 난 파리에서도 당신을 찾으려 하지 않았던 거야. 용서해 줘."
카탸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면서 그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에겐 지금 자기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내가 당신을 만났을 때... 그래, 내가 당신을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당신은 알지. 당신은 내가 상상도 못한 완벽한 여자였어. 당신은 영리하고 친절하고 재미있고 민감했어.."
그는 자기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쌌다.
"당신에게 잘 자라고 인사를 하고 집으로 혼자 돌아와선 침대에 누워 당신 꿈을 꾸곤 했지.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어. 난 한 가지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어."
그는 조용해졌다.
"보니?"
"보니도 문제 중의 하나였지. 보니는 아버지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어. 그리고 그녀는 톰을 버렸고"
"톰?"
"그래, 당신은 톰이 아버지 아들인지 몰랐어? 난 샌디에이고에 있는 아버지 집을 관리하고 있던 부부에게 톰을 맡기기로 했지. 그리고 아버지가 병원에서 나와 세상을 새롭게 사실 준비가 되었을 때 톰을 만났던 거야. 난 톰이 아버지 생활에 활기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카탸는 그의 손에다 입을 맞추었다.
"내가 이레나 공주의 사촌과 사랑하게 된다면 그건 아버지에게 큰 충격이 될 줄 알았지."
"나도 그런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카탸는 부드럽게 말했다.
"가끔 당신은 어떻게 당신이 나 같은 사람에게 말려들었는지 의아해하는 눈으로 나를 봤어요. 마치 내게 반감이라도 있는 듯이 말예요."
"아니야."
매트는 재빨리 돌아섰다.
"아니, 어떤 경우에도 그런 적은 없었어."
"하지만 당신은 차가왔어요.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짜증을 냈어요."
"난 내 자신에 대해서 짜증스러웠던 거야. 난 너무나 당신을 원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건 분별없는 짓이라는 걸 알았지."
매트는 자기의 볼을 그녀의 머리카락에 갖다 대며 말했다.
"그래서 분별 있게 스테피 솔로몬에게로 돌아가기로 했던 거로군요."
그는 카탸의 얼굴을 자기에게 향하도록 하고 그 말을 되받았다.
"스테피에게 돌아가다니!"
"당신은 그전부터 스테피와 관련이 있었잖아요?"
그녀는 불명확한 소리로 낮게 말했다.
"전혀! 난 스테피와 파티에서 만나 같이 있곤 했지. 그건 나도 인정해. 그러나 그건 세상 평판 때문이었어. 스테피는 나와 특별히 사귈 만한 여자는 아니었어."
"하지만 그녀는 콜럼버스 주제음악을 쓰라고 당신에게 일을 주지 않았나요? 당신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 감정을 상하게 할까봐 거절하지 못했죠."
그녀는 자기가 그 당시 얼마나 질투심에 불탔었는가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매트는 웃기 시작했다.
"잘못 짚고 있군, 카탸. 콜럼버스는 우리 아버지가 생각해내신 거야. 아버진 지금도 그 관계 일을 맡고 있거든. 그리고 아버지는 가능하면 내 경력을 쌓게 해주려고 하셨지. 난 아버지의 그런 기분을 다치게 할 수 없었고"
"하지만 그때부터 당신은 스테피와 만났잖아요."
"그래, 하지만 그건 스테피 매니저와 내 매니저 사이에서 합의된 것이었어."
"그럼 아까 두 가지 문제 중에 스테피 문제는 들어 있지 않았나요? 그럼 또 한 가지는 뭐죠?"
"오, 당신은 나에 대해 그렇게 몰랐단 말이오? 당신을 사랑하고, 그건 영원한 것이라는 걸 당신에게 보여 주기 위해 난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당신은 날 마치 그냥 하룻밤 같이 지낸 떠돌이라도 되는 양 뿌리쳤어. 난 몹시 견디기 어려웠지."
카탸는 부끄러운 듯 낮게 속삭였다.
"미안해요."
매트는 한숨을 쉬었다.
"그건 당신 잘못만은 아니야, 난 많은 여자를 만났고 당신이 그 여자들과 다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난 당황했어. 그리고, 그때...내가 당신을 공항에서 만났을 때... 당신이 모든 걸 이해한 줄 알았어. 그리고 모든 일이 잘돼 갈 거라고 생각했지."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내 손 안에서 그 모든 것이 폭발했던 거야. 완전한 실패였어. 하지만 난 왜 그렇게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나도 모르겠어요."
카탸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난 두려웠어요. 하지만 당신이 두려웠던 건 아니에요. 아마도 당신으로 인해 생긴 그 감정이 두려웠던 거겠죠."
"난 그걸 몰랐어."
"그래요, 나도 당신이 몰랐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항상 보니를 아버지의 망나니 여자로만 생각했을 테죠."
카탸는 객관적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보니는 희생자예요. 부분적으로는 우리 조부모 탓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성격 탓도 있었죠. 난 내 성격도 보니와 같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그녀의 뺨을 만졌다.
"왜지?"
그녀는 매트를 한 번 흘끗 쳐다보고는 다시 아래를 보았다.
"당신이 날 대하는 방식 때문이죠. 특히 당신은 결혼 같은 건 믿지 않고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어요."
"오, 내 사랑"
매트는 뉘우치듯이 말했다.
"왜 그런 말을 진작 안했어?"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겠어요? 난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좋아하지 않는다고! 아, 세상에.."
웃음소리와 신음 소리가 뒤섞인 소리다.
"당신은 그런 말 안했어요. 아니 아무도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녀는 숲속으로 피크닉 갔던 날 잭이 경고한 것을 떠올리며 덧붙였다
"그래, 세상여론은 지금 두 가지지, 당신도 내 기사를 읽었겠지? 비평가들은 긍정적으로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어.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사랑에 빠졌느냐, 치명적인 병에 걸렸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지."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그는 입을 삐죽거렸다.
"사랑에 빠졌건 치명적인 병에 걸렸건 별 차이 없다고 했지."
그의 눈빛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
"당신이 날 버려두고 간 다음 난 절망의 늪에 빠졌었어. 난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을 원했던 건데 결국 난 당신에게 화를 내고"
"아니에요! 그건 내가 남자에 대해서 너무 몰랐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을 거예요."
"그래야지."
매트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었다.
"지금부터는 나의 보호와 안내 밑에서만 살아야 해. 당신을 이 세상에 그냥 풀어놓을 순 없지."
카탸는 몸이 떨렸지만 그걸 감추려고 애를 썼다. 그 잿빛 눈은 진지하게 반짝이고 있다.
"앞으론 더더욱 그렇지 않을 거야. 난 당신과 결혼할 거니까."
카탸의 심장은 마구 뛰었다. 거의 숨도 쉬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여유를 되찾으며 말했다.
"만일 내가 당신과 결혼하기를 원치 않는다면요?"
매트는 입가에 천천히 미소를 띠웠다.
"당신을 설득하지. 그건 더 즐거운 일이야."
"난 좀처럼 설득당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럴까...?"
그는 웃으면서 몸을 앞으로 내밀어 그녀에게 키스했다.
"아, 그리고 세레나데가 하나 있는데... 난 당신을 위해 곡을 쓰고 있었어. 오늘밤 당신에게 들려줄 거야."
카탸는 그의 팔 안에서 꿈틀거렸다.
"날 사랑해요?"
매트는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녀는 자기 생애에 있어 이렇게 귀중하고 행복한 느낌을 가져 보지 못했다.
"당신을 너무 사랑해"
그는 다시 말했다.
"난 바로 오늘 아침에도 당신 아파트 앞에 가서 당신을 생각했지. 그때 난 당신이 아파트에서 나오는 걸 봤어."
"그렇다면 당신은 그때까지도 내가 파리에 있다는 걸 몰랐다는 거예요?"
"몰랐지. 아마도 사랑에 대한 나의 열렬한 기원이 당신을 불렀나 보지."
그는 마치 싸움에서 이긴 사람처럼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진 몰랐어. 그래서 난 연극을 꾸미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 다리가 부러졌다고 할 수도 없고, 술에 취했다고 하는 게 제일 좋겠더군. 누가 봐도 납득할 만한 거니까."
"당신은, 엉터리예요."
키스는 더욱 강렬해졌다.
"나와 결혼하겠어?"
"그래요"
카탸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의 불타는 입술을 느끼면서...
"여행하지 않겠어? 나랑 같이."
"언제든지, 어디든지.."
"날 믿어?"
"믿지 않아요!"
그녀의 젖은 레인코트가 벗겨졌다.
"날 사랑했나?"
카탸는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그 대답은 이미 했어요."
"했다고?"
"매트, 당신 지금 내 옷을 벗기고 있다는 걸 아세요?"
그녀는 황홀한 느낌에 젖어들면서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이지."
그는 놀리는 듯했다.
"이 초라한 레인코트와 일할 때 입는 가운을 입고 위대한 매튜 사라센의 음악회에 갈 순 없으니까"
"그래요."
그녀는 재미있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적해 줘서 고마와요. 난 오늘 저녁 여기 왔을 때 당신 음악회에 가려고 온 게 아니었어요."
"내 음악회에 오려고 한 게 아니라구?"
"난 표 한 장을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그걸 두고 왔어요."
그는 재빨리 키스하면서 그녀를 더욱 끌어당겼다.
"그럼 여긴 뭣하러 왔지?"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난 당신의 직업적인 성공에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당신의 인생을 구원하는 데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오, 그렇다면 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지. 이번엔 당신이 내 인생을 구원하기 위한 완벽한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엔 카탸는 거의 숨을 쉬지 않았고 더 이상의 저항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