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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으로의 탈출

아침으로의 탈출

Mary Lyons

 

1

"어머나 세상에! 로니, 난 정말 결정을 못 내리겠어?"

넓고 통풍이 잘되는 상점을 둘러보며 카민스키 부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난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양탄자를 본 적이 없어."

"그래요, 어리둥절하실 거예요."

로니는 동감한다는 미소를 살짝 던지고는 카펫 더미 위의 클립보드에 꽂힌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높고 먼지 많은 유리창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한 줄기의 가을 햇살이 로니의 긴 금발을 비추며 머리 꼭대기에 떨어져 쌓이고 있다. 이곳은 그녀와 카민스키 부인이 그날 아침에 들른 세 번째 가게였다. 그들은 아무 곳에서도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했다. 로니의 고객은 기운이 빠져 있었고,너무나 많은 양탄자가 진열돼 있어 점점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우리 바깥 양반 말에 의하면 런던은 동양 양탄자 시장의 중심지라던데그렇지만 이 황량하고 오래 된 건물들을 헤매고 다녀야 한다는 말은 해주지 않았어."

카민스키 부인은 연한 빛의 밍크코트를 움켜쥐며 불평했다.

"이런 일을 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처럼 보여요. 정말 힘들겠어요."

그녀는 카펫 더미 위에 앉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로니는 참을성 있게 미소를 띠우며 다시 한번 설명했다.

"그게 바로 제 임무인데요, . 동양 카펫 소개인으로서 고객들을 여러 가게로 모시고 다니면서 적당한 가격으로 가장 좋은 물건을 사실 수 있도록 도와 드리는 것 말이에요. 부인이 여기에서 보시는 물건들은 세계 각 지역으로부터 온 것들이죠. 저희 카샨 회사는 값을 비싸게 부르는 가게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약간의 소개비만을 내시면 되죠. 부인은 상품에 대해 완전히 객관적인 의견을 얻으실 수 있고 돈도 절약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저희들은 부인이 선택한 물건의 질에 대해서 책임을 지죠."

미국인 부인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아가씨. 그건 알겠어요. 금전적인 면에선 이해가 가지만, 양탄자 몇 개를 호텔로 보내 줄 순 없는 건가요? 그러면 시간을 갖고 맘에 드는 것 하나를 고를 수 있을 텐데."

"물론 그렇게 하면 좋다는 걸 저도 알아요. 그렇지만 부인이 여기서 보시는 모든 것들은 관세와 물품세에 묶여 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요, 여기서 부인이 좋아하시는 양탄자를 지정만 하시면 저희들은 곧바로 그걸 선편으로 팜 스프링스에 있는 부인 댁에다 부쳐 드리게 되죠. 그러면 부인은 관세를 물지 않으셔도 되죠."

"그래요, 아가씨 말이 맞아요. 그런데 난 완전히 지쳐 버렸어, 더 이상 이 지저분한 건물들 사이를 헤매고 다닐 생각도 없고."

"부인이 원하시는 걸 금방 찾아 드릴게요."

로니는 시계를 보고 싶은 유혹을 누르며 짐짓 밝게 말했다.

"댁의 거실에 놓을 양탄자를 찾고 계신다고 하셨죠? 거실 크기랑 벽지 색깔, 그리고 커튼 색깔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러죠. 거실은 전문가를 불러다가 금색과 흰색으로 단장했어요. 남편은 비용이 엄청나게 들었다고 불평했지만, 아주 멋있다구요. 어때요? 아가씨도 이해가 가죠?"

카민스키 부인은 허공에다 열심히 손을 휘저어가며 설명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커다란 터키 옥과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유난히 눈에 띈다.

"물론이죠!"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자기 자신이 싫어져 로니는 이를 꽉 물었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던 점원에게 웃어 보이고 나서 그녀는 그 넓은 가게 안쪽 끝을 가리켰다.

"미안해. 너무 오래 걸려서, 조지. 대형 쿰을 좀 볼 수 있을까?"

로니는 고객 쪽으로 다시 돌아서면서 말했다.

"아마 부인은 짙은 푸른색과 어두운 빨간색을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제 생각엔 이게 부인 거실에 더 잘 어울릴 것 같군요."

카펫이 쌓여 있는 통로로 부인을 안내하면서 로니는가끔씩 느끼는 것이지만마치 귀중한 보석들이 보관돼 있는 금고 안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게 이 생각이 떠오르게 한 건 바로 부인의 반지였어요."

점원이 새로운 카펫 더미를 뒤지기 시작하면서 카민스키 부인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이것들은 이란의 쿰이라는 도시에서 온 거죠. 이 나라는 정치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이런 물건들은 점점 귀해진답니다."

로니는 터키 옥 색채를 띠고 있는 부드러운 실크 양탄자를 꺼내려고 몸을 굽혔다. 그것은 흰색, 크림색, 금색의 색조가 어우러져 낙원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 바로 이런 거야!"

미국인 부인은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난 이 푸른 색조를 너무나 좋아해요."

"이건 쿰 제품 중에서도 유일한 모델이에요. 다른 페르시아 양탄자 중에서도 이런 색깔을 보지 못하셨을걸요."

"미스 엘리어트, 전화 왔습니다."

그때 로니의 말을 가로막으며 벽에 붙어 있는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어트 양, 사무실로 와주십시오."

"누굴까?"

로니는 어리둥절했다.

"죄송해요. 잠깐 다녀오겠어요. 천천히 고르세요. 시간을 충분히 갖고 여러 가지 디자인을 보세요. 금방 돌아올게요."

로니는 홀을 가로질러 가게 사무실 쪽으로 난 계단을 내려갔다. 혹시 제이드에게 무슨 일이라도? 그래서 어머니가 전화를 하신 걸까? 제이드는 이제 4살밖에 안 됐지만 워낙에 말괄량이라서 장난이 여간 심한 게 아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팔을 부러뜨리질 않나, 성냥을 갖고 장난하다가 다리에 화상을 입지 않나

사무실 아가씨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로니는 불안한 마음으로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로니?"

"어머, 그웬! 웬일이야?"

"아뇨, 대단한 일은 아니구요. 카펫 감정가격에 대해 좀 급하게 문의할 게 있어서요. 이 손님은 이틀 후에 떠나야 한다는데, 보험에 들어 있지 않은 헤리즈 카펫을 넘기고 가야 한대요. 오늘 저녁 6시에 가서 그 카펫을 좀 봐줄 수 있겠어요?"

로니는 얼굴을 찡그렸다.

"내일 아침에 가면 안 될까?"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아마 그 손님은 2시간밖에 여유가 없나 봐요. 그리고 헨리와 필립 둘 다 오후에 일이 있다고 하고, 디미트리 사장님도 갈 수 없는 형편이고누구에게 부탁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래, 알았어."

로니의 회사 사장 디미트리 카샨은 교통사고로 지난 4주 동안 회사에 나오지 못해서 사원들의 작업량이 늘어나 있었다.

"알았어, 내가 가지. 그걸 팔겠다는 거라면 몰라도 단순히 보험감정 정도라면. 난 시간이 그렇게 충분하지 않으니까."

"난 벌써 그 손님에게 그 점을 분명히 해뒀어요."

그녀의 비서는 로니를 안심시키고 나서 메이페어에 있는 고객의 주소를 불러 주었다.

"벨을 누르시고 셰이크 사미르 씨를 찾으면 돼요. 됐죠?"

"아랍 사람이야? 그런 말은 하지 않았잖아"

로니는 그웬이 전화를 벌써 끊어 버렸다는 걸 알고 말끝을 흐렸다.

사무실 여직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천천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뭐라고 단정지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묘한 예감이 든다. 그러나 뭐 대수로운 일이랴 싶어 그녀는 애써 자신의 직감을 부정하려 했다. 그녀는 동양의 양탄자를 팔고자 하는 아랍 산유국의 상인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역시 그녀가 아랍어를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리라. 때문에 많은 상인들이 그녀의 회사와 거래하기를 원한다.

한동안 생각에 골몰해 있던 로니는 자기가 그 지저분한 복도에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아하! 드디어 찾았군! 내 비서가 당신이 이 건물에 있다고 일러 주었을 때부터 난 줄곧 위아래로 당신을 찾아다녔죠."

로니는 놀라서 제프 포웰을 올려다봤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로니는 마음이 혼란스러워 고개를 흔들었다.

"뭐가요? 카샨 회사를 떠나 내 회사로 오라는 것뿐인데."

그는 싱긋 웃었다.

"당신이 이 포웰 상사에서 일만 한다면, 내 모든 매력을 당신에게 쉽게 납득시킬 수 있을 텐데!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게 어때요?"

"그럴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전 일 때문에 바빠요."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로 미끄러져 내려가려고 하자 로니는 몸을 빼며 말했다.

"안 됐군."

제프는 자기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면서 입을 꼭 다물었다. 로니는 자신의 일에도 성실하고 유능할 뿐만 아니라 미모도 빼어났다. 창백하고 거의 투명해 보일 정도의 맑은 피부에 크고 푸른 눈, 윤기 흐르는 머릿결이 그녀의 매력을 돋보이게 해준다.

지난 몇 년 동안 제프 상점의 정기적인 방문객인 그녀는 그의 접근을 변함없이 거절해 왔다. 그러나 제프로서는 로니의 이런 차가운 반응을 믿을 수가 없었다. 로니가 자기의 매력에 전혀 동요하지 않는 여자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부터 그는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사실 비교적 부유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편인 그는 아무 어려움 없이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그는 떠도는 소문으로 로니의 결혼생활이 깨어졌으며, 그녀에겐 부양해야 할 딸아이가 하나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로니는 이제 겨우 24살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기에는 로니가 아마도 다른 남자들과 교제를 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안 될 수가 없으리라. 그런데 왜 유독 나만은 안 된다는 걸까?

"오늘은 무슨 일이 있는데요?"

로니는 살짝 미소를 띠우며 대답했다.

"손님과 런던에 있는 카펫을 모두 살펴봐야 해요. 하지만 그 손님은 이 가게에서 카펫을 살 거예요. 당신네 가게의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지만 않다면요."

"난 당신에게 특별히 싼 가격을 부르는 게 항상 큰 즐거움인걸요."

그는 로니에게 다가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요어머나, 시간 좀 봐!"

로니는 시계를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가봐야 해요. 카민스키 부인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는 복도를 서둘러 달려갔다.

제프는 그녀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자기 사무실로 돌아갔다. 한 시간이 지난 후까지도 그는 로니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떠올라 좀체로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러나 로니는 달랐다. 그녀는 추근대는 남자를 다루는 데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열심히 카펫을 고르고 있는 카민스키 부인에게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잘생긴 이 상점 주인 따위의 모습은 완전히 머릿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카펫 매출에 관계된 서류를 작성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역시 걱정했던 대로 동창과의 점심 약속시간이 30분이나 지나 있다. 로니는 허둥지둥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장소인 저민 가()로 향했다. 샐리는 한쪽 테이블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

로니는 벨벳으로 된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아침부터 이 가게 저 가게들을 돌아다녔어. 그리고 마침 사무실을 나오려는데 뉴욕에서 전화가 와서 통화가 길어지지 않았겠니"

웨이터가 돔 페리뇽 병이 들어 있는 은제 얼음통을 그들 테이블에 내려놓자, 샐리는 자기 친구의 크고 푸른 눈을 보며 웃었다.

"내게 말할 기회를 준다면, 너한테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걸 상기시켜 줄 텐데"

"어머! 정말 난,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리고 또 직장에서 승진하게 된 것도 축하해 줘. 암스트롱, 로드, 그리고 마샬의 새 간부진들과 같이 점심식사를 할 수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어."

"어머나 멋져! 샐리, 정말 잘됐어."

로니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얼굴의 기쁨의 빛을 드러냈다. 그러잖아도 자기 친구가 런던의 일류 광고회사에서 승진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이제야 그동안의 모든 노고와 재능이 인정돼 빛을 보게 됐다니, 로니는 정말 자기 일처럼 기뻤다.

"그러면 봉급도 많이 오르겠네?"

"나도 그렇게 되길 바래. 이 점심값을 치를 수 있을 정도만이라도 말야."

웨이터가 병 뚜껑을 열어 샴페인을 따라 준다.

", 생일 축하해."

로니는 글라스를 들어올려 건배했다.

", 맛있는데? 지쳐빠진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 같아."

"넌 지쳐빠진 몸같이 보이진 않는데?"

샐리는 자기 옆에 앉은 아름다운 친구를 시샘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니? 제이드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그럼, 제이드는 괜찮아. 이젠 그 애도 나무에서 떨어지면 팔이 부러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거든."

며칠 동안 그 무거운 석고덩이를 싸매고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때의 어린 딸의 그 화난 표정을 떠올리며 로니는 웃었다.

"사실 제이드는 요즘 천사처럼 변했어. 아마 우리 어머니 결혼식에 신부 들러리가 되기로 약속했기 때문일 거야."

"벌써 2주일밖에 안 남았구나. 준비는 잘돼 가니?"

"잘돼 가는 편이지. 하지만 어머닌 제이드하고 나하고 둘만 영국에 남겨 두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이야. 벌써 한 달 전부터 걱정하고 계시니 도대체 어떻게 안심시켜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

로니의 아버지는 미국인으로 테헤란에 있는 석유회사의 간부사원이셨다. 그러나 그 번창하던 회사도 정치적 동요 속에서 이란을 떠나게 됐고, 그래서 존 엘리어트는 일찌감치 은퇴를 해버렸다. 때마침 14살이던 로니가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영국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물론 그의 부인이 영국인이며 그곳에 친척이 많이 있다는 사실도 그의 결정에 중요한 요인이 됐지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런던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후 10년이 넘도록 로니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미망인으로서의 조용한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의 친구 한 사람이 미국에서부터 그녀를 만나러 왔다. 그것이 3년 전 일이었으며, 이윽고 클리포드 T. 브라운로와 어머니는 결혼을 약속하게 된 것이다.

로니도 그들의 결혼에 기꺼이 동의했다. 뿐만 아니라 결혼 후에 어머니가 의붓아버지의 집이 있는 플로리다로 가는 것에도 동의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건 엘리어트 부인이 날이 갈수록 로니와 제이드의 장래에 대해 걱정을 한다는 것뿐이었다.

"네가 좋은 보모를 구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몇 주일 전에 어머니는 로니에게 말했었다.

"물론 소개소들이야 많지만, 마땅한 보모를 찾지 못한다면 어떡할래?"

"어디선가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로니는 어머니를 달래듯이 말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래도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니? 난 네가 직장에 나간 동안 제이드를 돌보는 게 가장 큰 낙이었다. 하지만 넌 그게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 네가 인정하든 않든 간에 말야."

엘리어트 부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제이드는 밝고 영리한 아이야. 그리고 그 애에겐 아버지가 꼭 필요해."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리 결혼은 시작도 하기 전이 이미 끝나 버린 거예요. 물론 결혼은 장난이 아니죠. 엄마 생각은 알아요. 그렇지만 내가 지금 원하는 건 이혼뿐이에요."

어머니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네가 이혼하는 걸 허락할 수 없다. 바디르가 동의했다면 몰라도"

"그는 내 변호사에게 편지로 분명한 의사를 밝혔어요. 소송절차를 검토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이죠. 물론 내가 직접 자기를 만나서 합의를 봐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달린 것이긴 하지만."

로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지만 난 거기에 동의할 수 없어요. 바디르는 제이드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요. 그가 제이드의 존재를 알게 될까 봐서라도 그렇게 할 순 없어요."

"내가 항상 말해 왔다만, 바디르에게 제이드 얘기를 하지 않는 건 정말이지 네가 잘못하는 것 같구나. 그는 자기 딸에 대해 친권을 주장할 법적 권리가 있는 거야. 그가 아이를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하는 건 우스운 짓이야."

로니는 더 이상의 반론을 펴지 않았다. 바디르에게 제이드 얘기를 하지 않았던 일에 대한 어머니와의 의견 차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제이드가 태어났을 때, 바디르는 도만에 감금돼 있었고, 어떤 방법으로도 이 소식을 전갈받을 수 없었다. 또한 독재자인 그의 아버지에 의해서 반 강제적인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로니는 아랍에서는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마음대로 어머니로부터 빼앗을 수 있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었다.

제이드를 빼앗긴다고 생각하면 로니의 온몸은 고통으로 저려 왔다. 딸 얘기를 남편에게 하지 않기로 한 것은 백번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설사 그것이 비도덕적인 행위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몇 년을 참고 기다려 왔다. 그러나 바디르가 동의하든 않든 간에 그녀는 이미 이혼을 결심한 지 오래다. 물론 재혼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이 한 번의 짧은 경험으로 그녀는 결혼생활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와 회의를 갖게 된 것이다.

"! 너 지금 뭐하는 거니?"

"으응?"

샐리의 목소리에 지나간 쓰라린 상념에서 깨어나며 로니는 깜짝 놀랐다.

"실은 저내가 직장에 나가 있는 동안 제이드를 돌봐 줄 보모를 구해야 하거든. 그 생각을 좀 하느라고"

"저번에 만났을 때, 너희 사장이 입원해 있다고 했지? 그 때문에 네가 훨씬 더 바빠졌겠구나."

", 디미트리는 자기 일을 몽땅 내게 넘겨 버리고 갔어. 하지만 난 바쁜 게 좋아."

샐리는 잠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생각에 잠긴 듯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내가 봐도 넌 너무 바빠 보여, 로니. 일도 좋지만 네 시간도 좀 있어야 하잖니?"

"물론 그렇지."

"한데, 네 아픈 데를 건드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는데사실은 우리 아파트에 같이 사는 친구 중 하나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왕자에게 푹 빠져 있어."

"어머, 세상에!"

"글쎄 말야. 그래서 네가 그 친구를 설득해 줄 수 있을까 해서우리도 모두 걔를 설득시켜 보려고 노력해 봤지만 막무가내야. 자기 자신은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글쎄우린 그녀가 혹시 그 사람의 스포츠카에 반한 건 아닌가, 아니면 매일 밤 리츠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값이 어마어마한 보석들을 안겨 주는 거에 반한 건 아닌가 염려하고 있어."

로니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도대체 어떻게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설명해 줄 수 있겠니? 특히 서로 열애중이라고 믿고 있다면 말야."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자들에 관한 사회제도가 굉장히 엄격하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니?"

"그래, 그곳 여자들은 엄격한 규율에 얽매여 있어. 예컨대 여자들이 직업을 갖는다거나 차를 운전하는 일 같은 건 상상도 못할 일이지. 집 밖에 나다니는 것도 안 되고, 심지어는 가게에조차도 남편과 함께가 아니면 갈 수가 없을 정도야. 그 친구가 만일 사우디의 왕자라는 그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거의 집에 갇혀 지내야 할걸. 아마 자기 남편을 거의 못 볼지도 모르지. 게다가 아랍어를 못한다면 아예 침묵 속에서 살아야 할 거구."

", 세상에!"

샐리는 무척 놀라는 듯했다.

"거 참, 대단하구나."

"그래, 서양에서 태어나 자유롭게 커온 사람으로선 놀라는 게 당연해. 하지만 우리도 아랍에서 태어나 회교규율에 엄격하게 따르며 살아왔다면, 우린 또 그게 행복한 생활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도만에서의 나날들이 그렇게 힘들었니?"

로니는 씁쓸하게 웃었다.

"일종의 하렘 생활이었어. 회교 국가의 규방 말야."

"하지만 내 생각엔네 남편이 왕이라서"

"술탄."

로니는 샐리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정확히 말하면 술탄 바디르 이븐 라시드 알 하마드 폐하. 그는 그의 연로한 아버지를 왕위에서 내쫓았지. 난 거기에서 잠깐밖에 살지 않았지만, 그 기간은 내 인생에 있어서 최악의 3개월이었어."

사실 로니와 샐리는 오래 된 친구이기는 했지만, 로니가 결혼했을 때 샐리는 외국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샐리는 로니의 남편이나 도만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샐리는 단지 그때의 경험이 로니를 이런 고립의 상태로 만들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로니는 그 짧았던 결혼생활에 관해 말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항상 분명히 해왔었다.

"난 몰랐어!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아냐, 괜찮아. 그 친구에게 자기 앞에 있는 인생을 긴 안목에서 바라보란다고 해. 그리고 내 결혼문제는."

로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5년 전에 끝났어. 지금 뒤돌아보면 그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의 좋은 점들도 알 수 있어. 그 당시엔 느끼지 못했지만."

그녀는 동양의 그 복잡한 사상들을 설명할 말을 찾느라 잠시 말을 멈추었다.

"서양에 사는 우리가 믿어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지. 생활방식도 완전히 틀리고. 만일 아랍 남자들이 부인을 집에 가둬 둔다는 비난을 듣는다면 그들은 아마 펄쩍 뛸 거야. 우리로선 감옥살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걸 그들은 따뜻하고 애정어린 관심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로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들의 혈연적인 가족과 국가에 대한 공동체 의식, 그리고 그 자부심은 실로 대단해."

"글쎄, 나한텐 그 생활이 무시무시한 것으로밖엔 들리지 않는데? 우리 샴페인이나 더 마실까?"

샐리는 지나가는 웨이터를 보면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에 친구들을 초대하기로 했는데 너도 퇴근길에 들르지 않을래?"

로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싶은데, 6시에 카펫 감정 때문에 약속이 있어. 그리고 가급적이면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해. 제이드 목욕도 시켜 주고그 애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별로 많지 못하잖아."

"넌 참 모성애가 강해. 나도 너만큼 잘하리란 확신만 든다면 곧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텐데"

"로버트 암스트롱은 아직도 너와 결혼하고 싶어하니?"

""

샐리는 얼굴을 붉혔다.

"내가 그의 생활에 충격을 주었단 생각이 들어서 그와 결혼하기로 결정을 내리긴 했어."

"잘됐구나! 그런데 어떻게 마음을 바꾸게 됐지?"

"나도 이제 24살이잖니."

샐리는 글라스의 거품을 내려다보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래, 넌 벌써 중늙은이가 다 된 것 같구나."

로니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로니는 택시 요금을 치르면서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았다. 6시 약속시간에 맞추려고 부랴부랴 이곳까지 달려온 것이다.

"셰이크 사미르 씨와 약속이 돼 있는데요."

검은 코트와 줄무늬 바지를 입은 관리인이 문을 열어 주자 로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 관리인은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더니 흑백 대리석으로 된 홀을 지나 넓은 계단으로 로니를 안내했다. 어떤 커다란 문 앞에서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문을 열어 준다.

그 방은 엄청나게 컸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키가 훤칠한 한 사내가 한쪽 구석에 서 있다.

"셰이크 사미르 씬가요?"

"당신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미스엘리어트."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서 빛나는 샹들리에 밑에 깔려 있는 카펫 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카펫의 품질을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나지 못한 로니가 보기에도 지금 자기 발 밑에 있는 카펫은 고대의 고급 제품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몸을 숙여 그 카펫을 자세히 관찰했다. 완벽한 직조기술, 그리고 비단 같은 광택을 발하는 정교한 세공품에 로니는 완전히 매료됐다. 그것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숨이 막힐 것같이 아름다운 카펫이다. 가장자리의 술 장식도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으로 대단한 걸작이다!

"이건 아주 값진 양탄자 같은데요."

로니는 그 완벽한 카펫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일어나면서 말했다.

"하지만 셰이크 사미르 씨, 상품이 보험에 들어 있지 않으면 대단히 위험하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군요. 우선 내일 아침에 보험 중개업자부터 만나셔야겠어요. 물론 그때 확실한 가격을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그가 가진 카펫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알려 주면서, 로니는 겨우 그 카펫에서 눈을 뗐다. 한데 그가 보이질 않았다. 로니는 어리둥절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캄캄한 한쪽 구석에 무언가 움직이는 물체가 있었다.

그 양탄자에 아직도 마음이 들떠 있던 로니는 얼굴을 찡그리며 카펫 위로 내리비치는 밝은 빛 너머로 회색 그림자를 응시했다. 자기에게로 걸어오고 있는 키 큰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본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온몸이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 바디르?"

의심과 공포가 뒤섞인 목소리가 커다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도대체 그는 여기서 뭘하고 있단 말인가? 그 많은 곳 중에서도 하필이면 이 런던 바닥에서!

 

2

"그래, 당신을 다시 볼 수 있게 돼 얼마나 기쁜지 몰라, 내 사랑 로니. 꽤나 오랜 세월이 흘렀지?"

, 하느님 맙소사! 애절하면서도 담담한 음색을 저렇게도 잘 꾸며내다니. 로니는 옆에 있는 의자를 움켜쥐었다. 마치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온몸이 떨려 왔다. 그녀는 숨을 고르게 하려고 애쓰면서 거의 5년 동안 보지 못했던 남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그래, 틀림없이 이 사람은 바디르야. 그러나 카펫 저쪽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완전히 낯선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놀랍게도 그의 왼쪽 눈은 검은 안대로 가리워져 있다. 게다가 검게 탄 그의 얼굴에는 뺨에서부터 턱에 이르는 곳에 상처 자국도 나 있다. 사납고 험악한 얼굴, 그리고 강렬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사내에게서 과거의 그 여유 있는 매력과 따뜻한 인간미를 기억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검은 눈을 번뜩이며 찬찬히 그리고 조용하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

", 여기서, 뭘하는 거죠?"

로니는 몹시 동요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더듬더듬 물었다.

"몇 년 만에 이렇게 따뜻한 환영을 하고 있지 않소!"

바디르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우린 만나서 해야 할 얘기가 좀 있는 것 같은데, 안 그렇소?"

"아무것도 얘기할 게 없어요우리에겐. 이혼문제 외에는"

그녀는 손이 떨리는 걸 감추기 위해서 두 손을 꽉 쥐었다.

"한두 가지 말할 게 있을 텐데"

그는 느릿느릿 말했다.

"당신이 특별히 우리 이혼문제에 관해 얘기하고 싶다면 당신 얘기를 들을 준비도 돼 있소."

로니는 그의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말투에 화가 났다.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도만에서 도망쳐 나오게 된 게 내 잘못만은 아니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나를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요술 병에서 튀어나온 도깨비처럼 지금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셰이크 사미르는 누구죠?"

로니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 부관이지."

"그리고카펫은?"

바디르는 테이블 한쪽 끝에 몸을 기대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건 단지 당신을 끌어오기 위한 미끼였지그 이상은 아냐."

로니는 혼란스러워 고개를 흔들었다.

"제발! 난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도저히."

"아니 잘 이해할 수 있을걸."

바디르는 입술을 비틀어 쓴웃음을 지었다.

"일 년이 넘도록 당신과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고 당신 변호사에게 계속 말해 왔지만, 그때마다 당신은 거절했다고 하더군. 그래서 난 내 손으로 일을 처리하기로 했소. 그리고 당신을 찾게 됐지. 그러니 난 얼마 나 행운아요!"

그는 냉소적인 농담을 덧붙였다.

"내 사랑하는 아내를 결국 이렇게 볼 수 있게 됐으니"

난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가 아녜요! 로니는 이렇게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녀의 감정은 깊은 악몽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헝클어진 자기 머리카락을 바로잡았다. 바디르가 지신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고 느끼자 로니의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그가 다시 말을 시작했을 땐 어조가 약간 변해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소름이 끼칠 것 같은 따뜻함마저 담고 있었다.

"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말랐군, 로니.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

"내 모습에 대해 얘기하려고 우린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로니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리고그리고우린 왜 이 건물에서 만났죠?"

"물론 클래리지에 있는 내 별장에서 만나는 게 더 좋았겠지. 하지만 내 의도를 당신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소. 이곳은 그런 면에서 아주 적합했으니까."

이 사람은 특별히 나를 보기 위해 도만에서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나와 이혼하려고 온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왜 이런 어려운 방법을 택했을까? 내 변호사에게 동의서를 보내기만 하면 되는 일일 텐데. 그 넓은 방안을 둘러보고 있는 바디르를 로니는 긴장한 채 응시하고 있었다.

"이 건물은 참으로 아름답지 않소?"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장군들 중 한 명을 새 도만 대사로 임명했지. 다음 주에 그는 세인트 제임스 궁에 그의 신임장을 제출할 거요. 그에겐 이 집이 아주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겠소?"

로니는 웃음기 섞인 그의 목소리에 화가 나 이를 꽉 물었다. 바디르는 지금 자기를 만나기를 단호히 거절해 온 내게 복수를 하며 즐거워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갑자기 로니는 이 만남에 단호한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혼에 대한 얘기라면 내 변호사와 하면 될 것이다. 그를 다시 보았다는 충격. 특히 검은 안대와 뺨 밑으로 난 깊은 상처 등의 이상한 변화 앞에서의 충격으로 난 너무 당황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균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가 구상한 이 고양이와 쥐 놀음에 내가 동원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당신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얘기할 게 있다면 내 변호사를 통해서 하죠."

로니는 될 수 있는 대로 단호하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너무 서두르지 마, 로니!"

바디르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지금 어딜 가려고 그래, ?"

그가 가까이 오자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로니는 바디르의 얼굴 위로 번지는 역시 단호한 표정을 노려보았다.

"이 손 놔요!"

로니는 팔을 빼려고 하면서 매섭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내 손길을 애타게 원했던 때가 있었지. 기억하오?"

", 모든 걸 잊었어요."

그녀는 재빨리 그의 말을 되받아넘겼다.

"정말일까?"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래요"

갑자기 그의 팔안으로 끌어당겨졌다. 그의 입술이 덮쳐 오면서 그녀의 외침 소리는 중단됐다. 마치 강철 밴드처럼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그의 팔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쓰던 로니는 뜨거운 키스가 자기 몸속으로 불어넣는 온기를 불안스럽게 느꼈다.

어느 새 난폭하던 그의 입술은 온화하고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변해 갔다. 로니의 맥박은 마구 뛰고 있고, 그녀의 가냘픈 몸은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감정으로 떨고 있었다. 마치 맛을 음미하는 듯한 그의 혀의 신비로운 감각에 로니는 열정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게 됐다. 로니의 팔은 그의 목을 감싸고, 손가락은 그의 검은 머리카락 속으로 급히 파고들었다. 사향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코를 가득 메운다. 갑자기 그의 몸이 강하게 죄어들어왔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올 때 로니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눈을 뜨자 샹들리에의 불빛에 눈이 부셨다. 그 눈부신 불빛 사이로 바디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비꼬는 듯한 미소를 가볍게 띤 채.

"모든 걸 깨끗이 잊어버린 것 같진 않은데 그래, 내 사랑 로니?"

그의 포옹에 자기가 얼마나 쉽게 굴복했는지를 깨닫자 로니의 얼굴엔 붉은 빛이 번졌고, 자기의 그런 모습에 화가 났다. 그는 항상 그녀를 자유자재로 자극하곤 했었다. 도만의 하렘에서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던 때에도 그는 항상 그랬다. 그들 사이의 육체적 매력은 그들 관계에 있어 가장 강하고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지난 5년 동안 그들이 따로 떨어져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은 깨지지 않은 듯하다.

로니는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자기 자신과 바디르에 대해서 화가 난 그녀는 자기를 감싸고 있던 그의 팔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만일 키스로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정말 실수하신 거예요."

로니는 격렬하게 내뱉었다.

바디르의 꿰뚫을 듯한 시선에서 벗어나, 로니는 청색 스커트 안으로 흰 실크 블라우스를 쑤셔 넣으면서 떨리는 손을 자제하려고 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머리 모양이 어떤 상태인지, 얼굴의 화장이 얼마나 엉망이 돼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잡다한 문제에 신경쓸 때가 아니다. 가능한 한 빨리 이곳에서 떠나는 것만이 급선무다.

로니의 말도 무시한 채 바디르는 벽에 걸려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지금 같이 나가는 게 좋겠군. 호텔 내 방에 저녁식사를 예약해 놨거든. 좀 더 편안한 곳에서 우리의 문제를 얘기해 볼 수 있지."

"아무것도 얘기할 게 없어요. 우리의 두 변호사가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으니까요. 난 지금 떠나겠어요."

로니는 냉정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할 이유도 없구요."

", 로니, 그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난 개인적인 문제들을 당신과 직접 얘기하고 싶소. 만일 당신이 나와의 저녁식사를 이렇게 거절한다면, 당신을 따라 당신 집으로 가는 수밖에 없겠군."

"안 돼요!"

"왜 안 되지? 당신 집을 구경한다는 건 흥미로운 일인데."

놀라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로니를 보면서 바디르는 미소를 띠웠다.

"듣자 하니 당신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지?"

", 우리 집에 온다는 건 말도 안 돼요."

로니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가 제이드의 존재를 알아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갑자기 식은땀이 흐른다.

"안 됐군. 난 당신의 그 매력적이신 어머니에 대해서 좋은 추억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 어머니를 뵙고 싶은데 말야."

"아녜요, 어머닌어머닌 지금 건강이 좋지 않아요."

로니는 즉흥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냈다.

"어머닌감기에 걸리셨는데, 아직 낫질 않으셨어요."

"그래? 그렇다면 빠른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겠군."

그의 목소리에서 냉소적인 느낌을 받고서 로니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어깨가 들썩거리며 마치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지독한 사람! 그는 아직까지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그는 나를 완벽하게 앞질러 왔다. 만일 그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가지 않는다면 그녀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 집으로 가고야 말 것이다.

로니가 이 궁지로부터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나더니 진짜 셰이크 사미르가 들어왔다.

"운전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폐하."

그 사람은 로니에겐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바디르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좋아, 로니."

바디르는 낮게 말했다.

"어떻게 할까? 호텔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겠어? 아니면 운전사에게 우리를 당신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할까?"

 

궁전 같은 욕실 문을 걸어 잠그고 로니는 긴 한숨을 몰아쉬며 푸른빛 재킷을 벗었다. 그리고는 윗부분이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가 제이드에 관해 알지 못하도록, 그가 하자는 대로 이 호텔에서 함께 저녁을 먹는 수밖에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지난 5년 동안의 세월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우선은 임신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그리고 나서는 딸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모든 고통을 다 참아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쉽사리 이 사실을 밝힐 수는 없는 일이다.

손으로 턱을 받치고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머리 위에 꽂혀 있던 핀은 온데 간 데 없고, 웨이브진 붉은 금발이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는 게 아닌가. 로니는 핸드백을 열고 빗과 화장 케이스를 꺼냈다.

연한 베이지색 대리석으로 된 벽과 금도금된 수도꼭지, 커다란 욕실을 비추고 있는 번쩍거리는 거울을 통해 보이는 모든 것들을 둘러보고 로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석유 산유국의 통치자답군.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들 어느 것도 원치 않았다. 그녀에겐 금도금된 새장 속에 갇혀서 생활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산도 권력도 자유 없이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게 됐다. 도만에서 갇혀 지내는 동안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로니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나의 과거에 대해 그렇게 슬프게만 생각해야 할 필요는 없으리라. 지금은 모두 지나간 일들이고, 그리고 오늘밤 바디르와의 지나간 결혼생활의 찌꺼기를 다 쓸어내고 나면, 난 도만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될 것이고, 또한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로니는 머리를 빗으로 빗어 내리며 거울 밑에 놓인 아름답게 장식된 병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도만 사람들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단검 모양으로 디자인된 그 향수병의 정교한 세공에 놀라 로니는 그 병에 손을 댔다가 그것이 순금으로 돼 있다는 걸 알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가만히 뚜껑을 열고 그 안의 유향, 백단, 사향이 섞인 향수 냄새를 들이마셨다. 로니는 그것이 깜짝 놀란 만큼 비싼 향수인 바디르가 즐겨 사용하던 아무아즈 냄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조금 전에 그의 품안에서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나면서 가슴이 마구 두근거린다. 그 입술의 감각, 그리고조그만 신음소리를 내며 로니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얼굴에다 찬물을 끼얹고는 자기 마음으로부터 그런 환상들을 지우려는 듯 물기를 닦아냈다.

그건 단지 불행한 사건일 뿐이었어. 그게 전부야. 다시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물론 일어나지 않고말고! 바디르는 아직도 자기 자신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려 했을 뿐이야. 얼굴의 상처를 안대도 나와는 상관없어. 난 이혼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머리를 빗어올려 핀을 찌르는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바디르가 내가 아닌 그 누구와 키스를 하든 잠자리를 같이하든,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건 내 권리가 아닐 테니까. 그러나 '안 돼'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로니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냉정하게 몰아내 버리고 재빨리 화장을 끝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그녀는 자기의 청색 슈트와 브이네크 모양의 흰 블라우스가 아주 사무적으로 보이는 데 만족했다. 이혼에 대해 얘기할 완벽한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다

"항상 그렇지만 당신은 매혹적으로 보이는데!"

로니가 커다란 거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샴페인 한 잔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당신은 안 마실 건가요?"

로니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날카롭게 물었다.

"지금 내 위치로선 우리의 종교적 규율에 잘 따르는 모범을 보여야 할 것 같아서"

그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훌륭하신 회교도라면 왜 '난 당신과 이혼하겠소'라는 말을 세 번 하고 도만으로 돌아가지 않죠? 우리 변호사들은 서면으로 일을 다 처리할 수 있는데그러면 우린 둘 다 행복해질 거예요."

"아냐, 난 행복해지지 않을 거야.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좋아요. 그럼 당신은 뭘 원하죠? 뭘하러 런던까지 온 거예요? 그리고 왜 날 강제로 이곳까지 끌고온 거죠?"

"편안하게 좀 앉지 그래?"

그는 소파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서 있는 게 좋아요."

바디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죽으로 된 안락의자에 가서 앉았다.

"당신은 내가 여기 왜 왔느냐고 물어봤지?"

그는 부드럽게 말을 시작했다.

"그건 간단해, 로니. 이젠 내 딸과 내가 서로 만나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지 않아?"

로니는 마치 명치끝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 당신 따, 딸이라뇨?"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이 들며 더듬더듬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여기 앉아!"

그녀가 놀라서 어쩔 줄 몰라하자 그는 날카롭게 말했다.

"그럼 당신은 끝까지 날 속이려 했단 말이오?"

로니가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자 이렇게 덧붙였다.

"그때 난 감금돼 있었지. 그래도 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어. 당신이 임신했다는 것도 금방 알 수 있었고."

"하지만하지만 당신은 날 한번도 찾지 않았어요. 당신에게서 어떤 얘기도 듣지 못했어요. 당신이 체포됐을 때부터."

"기억해 봐. 아버진 거의 제정신이 아니셨어. 만일 그때 아버지가 당신이 임신했다는 걸 아셨더라면, 우리 모두는 안전하지 못했을 거야"

"그렇지만"

"난 진실을 얘기하고 있어. 내 말을 믿어 줘. 아버진 당신을 철저히 감시했소. 그래서 만일 당신이 아들이라도 낳았다면 내 인생은 끝장났을 거야. 정말 그땐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소. 그래서 당신을 하루빨리 도만에서 빠져나가게 했던 거요. 적어도 서양엔 병원들이 많이 있으니 말이오."

그는 씁쓸하게 덧붙였다.

"당신도 알다시피, 그때 우리나라에 있던 유일한 의료기관이라곤 미국인에 의해 운영되는 작은 진료소밖에 없지 않았소?"

", 날 탈출시켜 준 사람이 당신인 줄은 정말 몰랐어요."

로니는 쿠션에다 머리를 갖다 대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녀는 심한 충격으로 마치 무감각 상태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데 쿠데타로 당신 아버지가 퇴위하신 후엔 왜 날 만나러 오지 않았나요?"

바디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쿠데타의 주요 동기 중의 하나는 나라의 통치권을 완전히 내 손 안에 넣는 거였지.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도만 서부를 이미 손아귀에 넣고 있었고, 그곳은 벌써 러시 아와 중국에서 온 무기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지. 당신과 아이가 나와 접촉하지 않는 편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지. 반란군들 중에 혹 누가 당신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당신과 아이는 납치될 가능성도 있었어."

그는 단호하게 말을 계속했다.

", 로니, 지난 4년 동안 난 너무나 바빴어. 내 모든 시간과 정열을 우리나라를 중세기적 상황에서 20세기 환경으로 이끌어내는 데 바쳤지. 게다가 내 지휘 아래 움직이는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난 더럽고 잔인한 전투를 했소. 그래서 난 당신과 내 딸에 대해 관심을 보일 여유가 없었어."

바디르는 건너편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자의 떨리는 얼굴을 보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로니의 맑고 푸른 눈동자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로니는 그의 강렬한 눈빛으로부터 겨우 벗어났다. 바디르가 계속 제이드에 관해 알고 있었다는 생각과 씨름하려 하자 머리가 지근거렸다.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다. 마음은 마비된 듯했고, 머리는 텅 빈 듯했다.

바디르는 일어나 대리석 벽난로 쪽으로 가서 몸을 기댔다.

"그 반란군들을 다 물리친 지금으로선영국 군단을 내게 보내 준 영국 정부에 감사하지도만은 이제 평화로와."

그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웃었다.

"물론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당장 건물, 병원 그리고 학교 같은 것들을 세우는 일 말야. 하지만 그래도 난 이제 약간 여유를 갖고 딴 일에 신경을 쓸 수 있게 됐지."

"그런데 그 상처자국은 어떻게 된 거예요? 전쟁 때문에?"

바디르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렇게 영웅적인 상처는 못되지. 무엇보다도 도만을 위해선 아버지가 폐위되셔야 한다고 결정하고 나와 내 지지자들은 무혈 쿠데타를 계획했어. 물론 통치자로서의 아버지의 시대는 끝나신 거라고 말해야 했던 건 바로 나였어. 그리 유쾌한 임무는 아니었지."

그는 그녀에게 다가와서 샴페인을 더 따라 주었다.

"불행하게도 아버진 그 결정에 노발대발 반대하셨어. 그리고 아버진 내가 방심한 틈을 타 지니고 계시던 검을 빼들어"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난 날 낳아 주신 분을 공격할 순 없었어. 어리석은 짓 하지 마시라고 말하려는데 아버진 벌써 내 머리를 겨누고 계시더군! 물론 내 지지자들이 검을 빼앗았지. 그 대소동의 결과로 내 얼굴은 20바늘이나 꿰매야 했고, 눈은 심한 난시로 영원히 이렇게 지낼 수밖에 없게 됐지."

그가 그 검은 안대를 벗겨내려고 할 때 로니는 그 무서운 모습을 상상해 보고는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두꺼운 눈꺼풀 아래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는 거의 정상처럼 보였다.

"봤어? 난 단지 이 지독한 난시를 교정하기 위해 이 안대를 하고 있을 뿐이야. 난 안과 전문의들을 많이 찾아다녔지. 그런데 그들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고 하더군. 내 모습이 무섭게 보이지, 로니?"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로니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여기 앉아서 우린 뭘하고 있는 거지? 그의 안대에 대해서 조용히 얘기하고 있는 건가? 그는 항상 매력적인 사람이었고, 지금은 저 안대와 상처로 인해 더더욱 매력적으로 보인다. 로니는 자기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이렇게 위험하고 해적 같아 보이는 완강한 모습에서 오히려 더 큰 매력을 느낀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 그에겐 많은 여자들이 있었으리라. 로니는 쓸데없는 생각에서 도망치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린 지금 우리 딸에 대해 얘기를 나눠야 하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을 꺼낸 후 방안에는 잠시 정적 이 감돌았다.

로니는 떨리는 손으로 글라스를 꽉 쥐고는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다.

"얘기할 게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로니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물론 그 아이를 보고 싶겠죠. 하지만 "

바디르가 신랄한 웃음을 터뜨려 그녀는 머뭇거렸다.

"그래, 로니. 난 제이드를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야! 아까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지? 그래 난 내 딸을 원한다고 대답하겠어. 그 아일 도만으로 데리고 가서 함께 살고 싶어서 런던에 온 거요."

"당신은 제이드를 데려갈 수 없어요, 절대로!"

쓰라린 고통이 로니의 떨리는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나도 그럴 의도는 없소. 하지만 그래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그래, 난 어려움이 없다고 봐. 법정은 날 위해 잘 정리해 줄 거요. 하긴 재판에서 지더라도 난 제이드를 데려갈 테니까."

"안 돼요!"

"안 된다고? 당신은 끝까지 그 아일 보호할 수 있나? 그럴 순 없을걸."

"이 잔인한 사람! 당신이 그 아일 데려가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거예요."

로니는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이드는 당신을 한번도 보지 않았어요. , 제이드는 무서워할 거예요."

"진정해, 로니!"

바디르는 일어나 로니 곁으로 와서 어깨를 감쌌다.

"난 이미 제이드를 당신에게서 빼앗아 올 의도는 없다고 말했잖아?"

"그러면 왜 당신은 법정 운운하고, 그 아일 유괴하겠다고 협박하는 거죠?"

로니는 숨을 몰아쉬었다.

"난 지금 내 딸을 돌려받는 일에 매우 심각하다는 걸 좀 알아 줘."

"심각하다구요? 당신 말이 농담처럼 들리진 않는데요, 안 그래요?"

로니는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이렇게 소리질렀다.

"이리 와, 로니. 그렇게 울 필요 없어."

바디르는 떨고 있는 로니를 팔로 감싸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난 내 딸을 원해. 그리고 당신도 원하지."

그는 자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를요? 당신은 내가 도만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나요?"

로니는 그에게서 재빨리 빠져나오며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미쳤군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제정신이오. 아내와 자식을 내 옆에 두고 같이 살고 싶소. 그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만으로 돌아가진 않아요. 그 고생은 한 번으로 족해요!"

"그렇다면 로니, 당신은 당신 아이를 잃을 각오가 돼 있는 모양이로군?"

그의 소름끼치는 이 마지막 말이 로니에게 일격을 가했다.

"세상에! 바디르,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당신은 너무 잔인해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고통의 눈물도 무시한 채 로니는 그의 팔을 미친 듯이 움켜잡았다.

"그러지 마세요제발내 아이를 데려가지 말아요"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진정해, 로니! 그게 그렇게 잔인한 짓이라면, 당신에게서 제이드를 데려갈 맘은 없어."

"그런데 당신은"

"도만으로 두 사람 다 가자고 말했잖소. 하지만 그절 거절한다면 아이를 포기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오."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어요!"

바디르가 떨고 있는 그녀를 소파로 데리고 왔을 때 로니는 울부짖었다.

"당신도 그곳이 내게 얼마나 끔찍했나 잘 아실 거예요. 난 그렇게 불행한 생활은 처음이었어요. 그렇게 지독하고 중세적인 요새에 갇혀서"

로니는 손에다 얼굴을 파묻고는 지우기 힘든 쓰라린 기억에 온몸을 떨고 있었다.

"모두 과거의 일이야. 도만은 이제 아주 달라졌어. 거기에서 당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바디르는 로니 옆으로 와서 앉으며 말했다.

"내 아내로서 당신은 당신 궁전과 하인들을 갖게 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외출할 수도 있고, 항상 경호원이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 줄 거고. 아직 반란의 무리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내가 증오하는 과거의 도만과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아 보이는데요. 그리고 왜 지금에 와서 이러는 거죠? 지난 긴 세월 동안 우리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으면서. 왜 갑자기 당신 아이를 찾아가려는 거예요?"

바디르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잘 설명해 줬을 텐데?"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마세요. 나도 신문을 읽을 수 있어요. 당신 나라의 전쟁은 훨씬 전에 끝났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이제 와서 당신 딸에 관심을 두게 됐죠?"

"당신이 우리나라 사건에 그렇게 관심을 가졌었다니 감동하겠는데."

그는 비웃는 듯이 말했다.

"장모님 결혼이 내 계획의 실행을 앞당겨 준 것뿐이야. 난 항상 당신과 제이드가 도만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해 왔거든."

"어머니 결혼?"

로니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장모님이 내게 연락을 하셨을 때"

"뭐라구요? 어머니가!"

"장모님은 당신과 제이드의 장래를 무척 걱정하고 계셨어. 장모님이 내게 그런 말씀을 해주신 건 바르고 합당한 일이었어. 그리고 내가 당신네 둘을 책임져야 한다고 하신 것도 옳은 말씀이었고."

", 세상에! 어머닌어쩜 이럴 수가?"

로니는 흥분에 못 이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서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웃었던 거로구나. 야비한 사 람!

"그렇지만 제이드는 이제 반년만 있으면 학교엘 가야 해요. 그리고 난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구요. 당신은"

"동양 양탄자 시장에서 당신이 성공한 건 나도 잘 알고 있지. 당신 회사가 잘돼 가고 있고, 디미트리 카샨이 당신 능력을 신뢰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난 기뻤소."

그의 이런 당당한 말투에 로니는 화가 치밀어 그를 노려보았다.

"내게 생색내려 하지 마세요. 당신은 정말 지독한 사람이군요. 그래요, 난 내 일에 아주 만족해요. 그리고 내가 성공했다면 그건 완전히 내 노력과 노동에 대한 대가예요. 그러니 내겐 당신이나 당신의 그 엄청난 재산 따윈 필요치 않아요. 난 내 일을 내던지고 당신과 함께 도만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추호도!"

"당신이 계속 일을 갖고 싶다면 도만에서도 날 도와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요."

", 제발 바디르, 당신은 내가 말한 걸 하나도 못 알아들으셨군요."

방안을 왔다 갔다 하던 로니는 마음을 좀 가라앉히려고 깊은 숨을 들키고는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정말, 정말로 당신은 나와 제이드를 런던에 그냥 남겨 두실 수 있는 거죠?"

최선을 다해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은 지금 부자예요. 그러니 제이드를 보고 싶을 땐 언제든지 이곳으로 오면 되잖아요."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냐, 로니. 내가 바라는 건 내 아내와 내 딸과 함께 사는 거라고 말했잖아?"

"왜 당신은 다른 아내를 얻지 않죠? 그 나라엔 살아 있는 술탄과 결혼하려는 여자는 무더기로 있을 텐데요!"

바디르는 고개를 흔들었다.

"난 당신을 원해."

"왜죠? 제발"

"아마"

그는 주춤거렸다.

"글쎄, 아마 아들을 원하기 때문이겠지?"

"웃기지 마세요! 당신이 할 일은 딴 아내를 얻어 아홉 달을 기다리는 거예요."

로니는 신랄하게 웃었다.

"나에 관한 일은 쉽게 잊을 수 있을걸요!"

"그만해!"

바디르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내 맘은 변하지 않았어. 장모님 결혼식 후에 당신과 우리 아이는 나와 함께 도만으로 돌아가야 해. 당신은 내 아내야, 로니. 그리고 난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겠어. 알라신의 축복으로 당신은 아들을 많이 낳을 거야. 그게 전부야."

로니는 너무 화가 나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다.

"난 원치 않아요"

", 그렇겠지."

그는 다가와서 로니의 턱을 쥐고는 얼굴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했다.

"하지만 이번 일의 모든 결정권은 다 내가 쥐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좋을걸."

로니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는 확고부동한 표정으로 그녀 바로 앞에 서 있다. 그래, 바디르 말이 옳다. 그가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가 아이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다.

"당신을 증오해요. 당신이 내게 한 걸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로니는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길 없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그리고 당신과 알라신은 끔찍하게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걸요. 난 당신이 말한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거니까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바디르는 부드럽게 말하더니, 자기의 입술로 로니의 입술을 덮었다. 과거에 그녀가 그의 가벼운 애무 아래에서도 어떻게 반응했었는가 하는 아픈 추억을 그 입술은 되살려 놓았다.

그녀의 입술은 갑자기 건조해지고 신경 끝은 날카로와졌다. 그의 계산되고 의도적인 급습 아래서 심한 긴장감을 느꼈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바디르를 뿌리치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로니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걸 억제하려고 애쓰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당신은 오늘밤 나와 저녁식사하기로 한 걸 잊었나?"

그는 놀리듯 말했다.

로니는 과거에 자기를 그렇게 괴롭혔던 그 크고 우람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난 모든 걸 잊었어요. 특히 우리의 그 몇 달간의 끔찍한 결혼생활에 대해서 말예요. 그리고 당신과 함께 식사한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나는데요. 난 이제 집으로 가겠어요. 당신이 무력을 써 이 훌륭한 호텔에서 스캔들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면, 날 말릴 방법은 없을 거예요."

바디르는 차갑게 웃으며 인터폰을 들더니 운전사에게 차를 호텔 문 앞에 대기시키라고 말했다.

"내게서 도망가려고 하지 마, 로니."

그는 부드럽게 경고했다.

"난 무한한 방책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도만으로 돌아갈 땐 반드시 당신과 제이드를 동반하고 갈 거라는 사실을 명심해 두는 편이 좋을 거야."

 

로니는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만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바디르의 비웃는 듯한 말들이 불쾌한 후렴구처럼 피로에 지친 그녀의 가슴속을 쓸고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래도 약간 딴 생각을 하게 해주었던 건 어머니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집에 들어서자 악화된 감정을 더더욱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집은 텅 비어 있었고 어머니가 남기고 간 메모만이 놓여 있었다. 어머니와 제이드는 저녁을 먹으러 나가며, 옛 친구들과 밤을 보낼 거라는 내용이다.

그날 그 사건으로 완전히 기진맥진한 로니는 편안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도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도망갈 길이 없다.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워 제이드와 도망친다고 해도, 그는 막대한 재력과 인력을 이용해서 결국 우리를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는 그 다음엔? 그는 화를 내며 제이드를 유괴해 가겠지. 제이드가 도만으로 가고 나면 난 다시는 제이드를 보지 못하게 될 거야.

도만!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 그곳에서 빠져나온 이후로 로니는 그 짧았던 결혼생활의 아픈 기억들을 지우려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과거의 망령들처럼 자꾸만 되살아나는 기억들을 막을 길 없었고, 마음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악몽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3

로니가 그렇게 어리고 순진했을 때 바디르를 처음 만난 것은 잘못된 운명의 뒤틀림이었을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값비싼 카펫을 잘못된 주소에다 배달하면서까지 로니가 사장 디미트리 카샨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려고 안달만 하지 않았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로니는 그렇게 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었다.

"아니, 난 와일딩이 아니오."

키 크고 기가 막히게 잘생긴 남자가 당황해하는 그녀의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이 살펴보고 있다.

"하지만 이 일은 간단히 해결될 수 있겠군요.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동안 잠시 앉아서 뭐라도 좀 마시는 게 어떻겠소?"

로니는 고급 아파트의 호화로운 거실을 둘러보며 어머니가 하신 경고의 말씀을 떠올렸다. 낯선 남자 집에서 음료수를 받아 마시는 젊은 여자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랑스러운 자기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청록빛 눈동자에 반사된 놀라움이 그녀의 동요된 마음을 얼마나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로니는 자기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웃음을 터뜨리는 데 당황해할 뿐이었다.

"당신은 안전하오. 명예를 걸고, 난 아름다운 젊은 여자를 유혹하는 버릇이 없다고 말할 수 있소.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자라 해도 말이오. , 우린 서로 자기소개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로니 엘리어트예요."

로니는 자기가 가지고 온 양탄자에 눈길을 고정시킨 채 작은 소리로 말하며 자기 볼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이 사람은 지금 날 바보같이 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해.

"아 좋아요, 로니. 난 바디르라고 부르면 돼요."

그는 이렇게 말하며 로니를 가죽 의자 쪽으로 데리고 갔다.

", 편하게 있어요. 그리고 그 틀린 이름과 주소가 정확하게 적힌 종이쪽지를 줘보십시오. 의혹이 풀릴지 아오?"

그는 방을 나가더니 잠시 후 긴 글라스와 병이 얹힌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그동안에 자, 이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마셔 봐요. 여기엔 알코올이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다는 걸 보장할 수 있으니까."

조용하고 친절하게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보자 로니는 마음이 약간 놓였다. 자기를 위해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그가 너무 고마와 그녀는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물론 더듬거리는 목소리이긴 했지만.

"고마와할 것 없어요, 로니."

그는 로니 옆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곤란에 처해 있는 아가씨를 돕는 건 내 의무니까."

그녀의 잔에 주스를 더 채워 주며 덧붙였다.

", 당신에 대해 말해 주지 않겠소?"

"사실말할 게 별로 없어요"

로니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교묘한 질문에 의해 그녀는 점점 더 수다스러워져 갔다. 아버지를 그리워한다는 얘기며, 학교를 졸업하고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던 차에 아버지의 옛 친구 분이신 디미트리 카샨 씨가 동양 카펫 소개인이 되도록 교육시켜 그 회사에 일자리를 주었다는 얘기들을 쉽사리 그에게 털어놓았다. 학창시절에도 방학을 대부분 이란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곳 작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카펫 짜는 광경을 직접 보기도 했다. 그 덕분에 로니는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된 데 대해 매우 기뻐했다.

"동양 카펫 소개인이 되는 훈련은 좀 특별한 경험이 아니오? 특히 당신같이 아름다운 아가씨에겐 말이오."

로니는 자기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과 가슴이 방망이질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전 이런 실수를 하고도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떡하죠?"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내가 당신을 집까지 데려다 주도록 허락하는 거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난 카샨 씨를 좀 알고 있소. 내가 카샨 씨에게 말해 줄 테니 걱정할 건 하나도 없을 거요."

그날 밤 로니는 사장이 어떤 말을 할지를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또 한 가지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든 것은 낮에 만난 그 남자에 대해서 생각할 때마다 느껴지는 야릇한 감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잘생기고 우아한 남자는 나를 어리고 유치하다고 싫어할 거야. 그리고 아마도 그를 다시 볼 일은 없겠지.

다음날 아침, 디미트리 카샨이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해 주었을 때 로니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호화로운 아파트에 살고 있던 사람이 우리 카샨 회사의 귀중한 고객이 됐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더 놀랐다. 카샨은 그가 도만의 바디르 왕자라고 말해 주었다. 로니는 그가 아랍의 부호 군주의 외아들이며, 영국에서 자라나고 교육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날 회사에서 돌아왔을 때 저녁식사를 하지 않겠느냐는 메모 쪽지와 함께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커다란 붉은 장미꽃 다발을 발견하고 로니는 현기증까지 느꼈다.

그후 몇 주일 동안은 기쁨과 행복의 나날들이었다. 영국군 보급 장교였던 바디르의 연대는 런던의 첼시에 있었는데, 그는 거의 매일 그녀를 만나러 왔다. 때로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또는 하이드파크가 내려다보이는 그의 집에서 식사를 같이했다.

로니는 그의 나라 도만의 역사를 듣는 게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그의 아파트 소파에서 그의 곁에 편히 앉아, 아라비아 해가 보이는 아라비아 반도 끝에 위치해 있는 그의 나라가 한때 무역의 중심지였다는 등의 얘기들을 들었다.

"사람들은 흔히 사막인 줄로만 생각하지만 우리나라 남쪽엔 넓고 비옥한 평원이 있지. 그곳에서 나는 유향나무와 희귀한 향료들이 전 세계로 보급됐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곳을 향료해안이라고 불러. 지금은 주요 수출품이 석유지만. 아버지는 국민들의 생필품 문제와 빈곤을 완전히 무시하고 계셔."

여기에서 로니는 그들 부자간의 갈등을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라시드 군주는 그의 아들을 영국에 보내 교육을 시키고 군대 경험을 쌓도록 했지만, 그런 교육이 아들에게 좀 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통치자의 견해를 갖게 하리라고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서부에선 혼란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어. 그건 어떤 발전도 원치 않는 아버지 때문이지."

어느 날 저녁 그는 분노에 가득 차서 곧 도만으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문제는 더 심각해져 가고 있어. 영국군 정보부로부터 러시아와 중국에서 그 지역으로 군대를 투입할 거라는 말을 들었지. 난 돌아가서 아버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아버지 편에 서야 해. 아버진 지금 내가 필요해."

로니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끼치면서 돌이 된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디르를 처음 만난 이후로 멋있는 그의 모습은 자나 깨나 항상 로니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로니를 거의 멍한 상태로 만들어 놓아서 그녀의 사장 디미트리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신이여, 사랑에 빠진 이 아가씨로부터 날 보호하소서!"

내가 사랑에 빠졌다고? 바디르와 함께 있을 때면 인생은 새롭게 보였고, 그가 없을 땐 뭔가가 부족한 것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매일 밤 그녀를 데려다 줄 때 뺨에 가볍게 키스해 주는 것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그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로니는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 자신의 감정에 관련된 모든 의심은 말끔히 사라졌다. 가슴을 꿰찌르는 듯한 아픔이 밀려왔다. 난 바디르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가 없이는 못 산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로니는 이런 비참한 감정을 감추기 위해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잠시 후 그의 팔이 감싸오는 걸 느꼈다.

"울지 마, 내 사랑 로니."

바디르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 흐느끼는 로니에게 말했다.

"뭐가 잘못됐는지 내게 말해 줘, ?"

"당신이 가, 가버리면어떡해요?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로니의 창백한 얼굴엔 붉은 빛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

바디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 긴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울고 있는 로니의 입술에 조용한 입맞춤을 했다. 그의 따뜻한 숨결은 그녀의 얼굴을 더욱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나도 그래, 로니."

그는 이렇게 속삭였다.

"이건 심각한 문제야.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이 이렇게 어린 아가씨와 이토록 완전한 사랑에 빠져 버리다니"

", 바디르!"

로니는 팔로 그의 목을 감싸면서 정신없이 외쳤다.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그의 입술이 로니의 입술을 열정적으로 소유하며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을 때, 로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서로를 그렇게 껴안고 서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안고 있던 손에 힘을 뺐다.

"좀 앉는 게 좋겠군. 그리고 우리 둘 다 그리워할 일을 하지. 당신을 침대로 데리고 가는 일 같은 거 말야."

그는 로니를 소파 쪽으로 데리고 가면서 낮게 속삭였다.

흥분감이 로니를 덮쳐 왔다. 아무리 엄격하게 자라났다 하더라도, 그리고 혼전순결을 강하게 믿어왔던 그녀였지만, 로니는 난생 처음으로 육체적 욕망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품안에 있을 때면, 그가 그녀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에 로니는 완전히 흥분해 황홀경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이곳 런던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내다가 잠깐 볼일이 생겨 도만에 가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 난 당신을 기다리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 중세적이고 퇴보한 나라로 당신을 데리고 갈 수도 없어. 그곳은 영국관 너무나 달라."

", 제발 날 데려가 줘요, 바디르."

로니는 애원했다.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가 버리면 난난 죽어 버릴 거예요."

", 달링."

그는 로니의 가녀린 몸을 팔로 감싸며 말했다.

"나도 당신 없이는 견딜 수가 없어. 하지만 그곳 생활은 너무 야만적이고 구속이 심해서"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요."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도만이 어떻든 상관없어요. 당신과 내가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요."

바디르는 숨을 무겁게 내쉬었다.

"그래, 내가 어찌 그런 애원을 물리칠 수 있겠어? 내 맘속 깊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당신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겠어. 그리고 우린 같이 도만으로 떠나는 거야"

", 바디르! 난 너무 행복해요."

로니의 눈은 기쁨의 눈물로 가득 찼다.

"항상 그렇게 되길 바래."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검은 눈이 어두워지고 고통스러운 표정이 잠시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미소 지으며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키스했다.

", 사랑스러운 로니. 신의 뜻대로 될 거야, 그렇지?"

 

2주일 후, 리젠트파크 사원에서 그들은 결혼식을 올렸다. 간단한 예식 후에 하이드파크 호텔에서 화려한 연회가 베풀어졌다. 로니는 핸섬한 바디르의 모습만을 바라보며 자기가 온 마음을 다 바쳐 사랑하고 있는 남자와 결혼했다는 믿을 수 없는 기쁨에 들뜬 채 그날 하루를 보냈다.

바디르는 엘리어트 부인의 결혼허가를 얻어내는 데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부인은 자기 딸이 아랍인과 결혼해서 멀리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무척 싫어했다.

"바디르란 사람 자체에 대해서 반대하는 건 아냐."

로니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매력적이고 항상 널 위해 줄 거라는 건 안다. 하지만 로니, 넌 너무 어려. 18살밖에 안 됐잖니? 게다가 도만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언제 얘기나 들어봤니? 아랍 사회는 서양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회란다. 완전히 다른 생활방식 속에서 그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일 게다."

그러나 로니는 그들의 사랑은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단호히 주장했다. 일 년만 기다려 보고 결혼하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애원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딸을 무척이나 아끼는 엘리어트 부인은 한숨만 지으며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로니는 바디르에 대한 자신의 육체적 반응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하나의 감정적 기쁨에서부터 또 다른 기쁨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의 능숙한 입술과 손이 떨고 있는 로니의 날씬한 몸을 음미할 때마다, 로니는 육체적 환희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의 열렬한 소유에서 처음에는 고통을, 다음에는 떨리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열정적인 절정으로 이끌리며 욕망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싸여 들어갔다.

그러나 모든 것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 버렸다. 그들의 목가시 같은 생활은 끝난 것이다. 아부다비 왕족과 결혼한 바디르의 고모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아부다비에서 얼마간의 여정을 보내기로 결정했을 때였다.

그때의 일로 로니는 처음으로 아랍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고, 그건 그녀를 꽤나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았다. 그날 저녁 늦게 로니는 호화로운 침실의 열린 발코니에 서서 처음으로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들어가는 걸 느꼈다.

바디르의 고모는 그녀에게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그 작고 수다스러운 고모는 로니의 뺨에 열정적으로 입을 맞춰 주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로니는 그들의 전통적 관습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아무리 부부 사이라 하더라도 남자와 여자가 한 자리에서 식사하지 않는다는 것, 또 여자들은 얼굴에 검은 베일을 써야 한다는 것 등등모든 것이 그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뿐이었다.

여자들만의 저녁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 대부분이 포크를 사용하지 않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음식을 퍼먹는 걸 보고 그녀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니에게 그들의 식사방법을 가르쳐 주던 부인네들은 그녀가 옷에다 음식을 떨어뜨리는 걸 보고 재미있어했다.

"가능한 한 빨리 바디르에게 말해 줘야겠군."

그의 고모는 로니의 이런 모습을 보고 좀 놀라면서 말했다.

"바디르가 내 오빠나 도만의 생활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해주던 가?"

"아뇨, 별로요."

로니는 문화적 괴리감에 지치고 기진맥진해졌다.

"그래?"

그 부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네가 떠나기 전에 시간이 있다면 나라도 많은 얘길 들려 줄 텐데"

뜨거운 밤공기를 식혀 줄 산들바람 한 점 없는데도 로니는 몸이 떨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고모의 친절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느라 바디르가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가는 허리를 감싸고 나서야 그녀는 깜짝 놀랐다.

"당신에게 말할 게 있어요."

로니는 말을 꺼냈다.

"난 몰랐어요모든 게 이 정도인 줄은"

"침대로 가, 내 사랑."

바디르는 로니의 붉은빛 도는 금발의 향기로운 머리에 얼굴을 파묻으며 속삭였다.

"바디르, 걱정돼요그리고"

"내일 걱정해. 당신이 걱정하고 있는 것에 관해선 내일 얘기하지. 지금은 다른 문제에 관심을 가질 때라구."

그는 검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면서 뜨거운 키스를 했다.

", 달링. 난 당신의 아름다운 몸에 너무 빠지게 될까 두려워."

그의 손이 로니의 가슴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오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이 와서 닿자 로니는 몸을 떨었다. 그는 부드럽게 웃더니 그녀를 안아 침대로 데리고 갔다. 그의 사랑 행위는 모든 불안을 그녀의 마음으로부터 지워 버리기에 충분했다.

다음날 늦게 일어난 로니는 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열린 문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옆의 층계에 서서 보니 고모가 화난 목소리로 그에게 소리치고 있는 게 아닌가. 로니는 깜짝 놀랐다. 간간이 자기 이름이 섞여 나오는 것 같긴 한데 도대체 화난 그 부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 가운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라곤 하나도 없다. 바디르가 로니를 향해서 몸짓을 해보였고 그의 고모는 잠시 말을 끊었다.

"좋아."

고모는 한숨을 내쉬며 영어로 말했다.

"난 할 수 있는 걸 다 했어. 바디르, 조심해야 해, 상황이 너무너무 위험해."

"위험하다구요?"

로니는 그 부인의 목소리에서 심각한 어조를 읽어내고선 놀라서 물어보았다.

"당신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바디르의 거만한 말투가 자신을 어린애로 취급하는 것 같아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의 고모는 커피 잔을 요란스럽게 내려놓으며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날 저녁, 그들은 도만의 수도 무리아에 도착했다. 로니와 바디르는 군주님께 인사드리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로니는 군주님과의 첫 번째 만남이라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날씨가 더운데도 불구하고 회색 돌로만 된 벽은 별로 유쾌하지 못한 냉기를 풍겼다. 그건 마치 바디르의 어머니 제노비아 왕비가 자기 아들의 아내를 맞이하는 냉랭한 태도와도 같았다. 단 한 사람 그녀를 반갑게 맞아 주는 사람은 l4살 난 어리고 예쁜 누이동생 마리암뿐이었다. 마리암은 로니에게 환영의 밝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로니와 바디르가 성 안으로 들어가 커다란 무어식 아치를 통해 걸어 들어갔을 때, 바디르는 그의 아버지는 따로 집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들은 어머니와 함께 궁전에서 살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어머니가 거처하는 개인적인 구역을 하렘이라고 한다는 것도 알았다.

로니는 너무나 중세적인 이야기를 듣고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자기가 보게 된 궁전이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알고 나서는 웃음기가 싹 가셨다. 바디르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거의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만큼, 그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백히 했다.

그날 저녁 늦게 로니는 우울한 감정을 없애기 위해 가능한 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해 봤다. 그러나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마련된 방들을 지나가며 로니는 더욱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벽에는 아무 장식도 꾸밈도 없고, 방은 기분 나쁘게 눅눅해 보였다. 가구라고는 선반 하나와 몇 개의 손잡이 고리가 전부였다.

그녀는 조그맣게 콧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면서 천천히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침실 입구에 멈춰서서 로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디르는 간단하게 생긴 길고 흰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다. 가는 허리를 묶고 있는 넓은 금 벨트에는 순금으로 장식돼 있는 의식용 칼이 걸려 있고, 머리에는 색색의 장식이 어른거리는, 실크 터번을 쓰고 있다.

로니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몇 번씩이나 눈을 깜박거려 보았다. 바디르는 무엇처럼 보인다고 해야 할까선풍적이라고 밖에는!

불행하게도 바디르는 로니의 패션 감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드러난 어깨 위에 나비매듭으로 유지되는 청록색의 긴 시퐁 드레스를 보자 그는 곤혹스러운 듯 입술을 꼭 다물었다.

"세상에, 로니! 어떻게 옷을 그 따위로 입을 수가 있어!"

그는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꼴을 아버지가 보신다면 노발대발하실 거라는 걸 모르겠어? 몸을 완전히 가리는 긴 소매 옷을 입어야 한다구. 그런 옷이 있나?"

"이런 날씨 속에서? 당신 미쳤어요? 물론 난 그런 옷도 없구요."

로니는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됐다.

바디르는 로니의 항의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옷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로니의 옷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정말 여기엔 적당한 게 없군. 하지만 그래, 이거면 되겠어."

"이거요? 그렇지만 이건 해변에서나 입는 거예요!"

그 검고 얇은 옷을 로니는 당황해서 바라보았다. 발목까지 오는 긴 소매 옷이어서 수영복 위에나 걸쳐 입으면 알맞는 것이었다. 결코 오늘 저녁 모임에 어울리는 옷은 아닌 것이다.

"해변? 무슨 해변?"

바디르는 비웃듯이 웃었다.

"당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프랑스 남부 에라도 와 있는 줄 알아? 여기 도만에서 일광욕이나 수영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만큼 당신은 어리석었나?"

"그렇지만 내 생각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우리가 늦으면 아버진 화를 내실 거야."

로니는 남편의 갑작스럽고 완벽한 변화에 너무나 놀랐다. 항상 친절하고 신사답던 바디르가 어떻게 내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왜 자기가 이런 옷을 입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로니는 자기 연민의 눈물을 닦아내며 부대자루 같은 검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 이제는 만족하시겠어요? 내가 아주 무시무시하게 보이겠군요?"

"당신이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게 하는 게 더 중요하지."

그는 로니의 손을 잡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술탄과의 첫 번째 만남은 마치 신성재판과도 같았다. 그는 로니와 바디르,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누이가 함께 기다리고 있는 커다란 방으로 느릿느릿 걸어 들어오더니 자기 부인과 딸, 그리고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아들까지도 무시한 채 로니에게 자기 옆의 카펫에 와서 앉으라고 지시했다. 로니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군주의 얼굴에 떠오른 엄숙하고 우울한 표정을 응시하며 그녀는 조용히 다가가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그는 로니 쪽을 보며 친절하게 물었다. 여행이 재미있었느냐, 필요한 게 뭐 없느냐, 하는 것들이었다.

로니는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그의 질문에 놀라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할까? 바디르의 얼굴을 흘끗 보았지만 도움을 얻을 수가 없다. 뭐라고 얘길 해야지? 로니는 망설이다가 바디르와 그의 고모가 말다툼하던 것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기억을 되살려 아랍어를 가르쳐 주는 가정교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간단한 요구에 그 방 전체에는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누구도 꼼짝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숨을 죽이고 라시드 술탄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그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난 교육 같은 건 인정하지 않아. 특히 여자에겐."

그는 쌀쌀한 웃음을 띠우며 덧붙였다.

"아마 넌 재미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나 보군. 영국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인도 대중들을 교육시켰기 때문에 결국 자기들의 제국을 잃었지."

"아뇨, 몰랐어요."

로니는 작은 소리로 말하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우리 말을 배운다는 건 내가 인정해 줄 수도 있지."

잠시 후 라시드 술탄은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난 가서 아들과 개인적으로 얘기를 좀 해야겠어."

로니가 놀라서 일어났을 땐 이미 그는 바디르를 데리고 방을 나가 버린 뒤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로니는 제노비아 왕비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쳤다. 왕비가 어린 딸에게 뭐라고 얘기하자, 마리암은 로니를 보고 살짝 웃고는 서둘러 어머니 곁을 떠났다.

로니도 혼자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옷을 벗고 비참한 마음으로 침대로 들어갔다. 바디르는 그날 밤 침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눈물로 지새웠다. 도만에서의 첫날밤은 앞으로의 생활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잘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조용한 고독 속에서 기나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궁전 안에는 코란물론 아랍어로 된외에 책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로니는 도만으로 올 때 읽을거리를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랍어 교육을 해달라고 요청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매일매일의 아랍어 수업이나마 없었다면 그녀는 완전히 미쳐 버렸을 것이다.

바디르의 어머니 제노비아는 자기 며느리의 궁전생활을 별의별 방법으로 불편하게 만들었다. 식사 시간이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바뀌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로니가 내려가기도 전에 음식을 다 먹어치우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로니는 차라리 하녀 후사에게 자기 방으로 식사를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고독감을 더욱더 가중시켰을 뿐이었다.

로니가 그 어려운 아답어를 조금씩 익히기 시작하기 전까지 그녀를 가장 안달나게 했던 것은 그녀의 시어머니가 아랍어로만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마리암에게서 들은 바로는 제노비아 왕비는 영어를 아주 잘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인들도 아랍어로만 말했다. 그래서 로니는 아주 간단한 요구밖에 할 수가 없었고, 가끔 마리암이나 자기 하녀를 찾을 수 없을 땐 화가 나서 울기까지 했다.

로니가 그래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 준 사람은 바로 마리암이었다. 그녀는 자기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술탄에게 파티마라는 또다른 부인이 있으며, 또다른 두 명의 딸과 궁전의 다른 쪽 끝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녀를 통해서였다.

"우리 어머니와 파티마는 아주 잘 지내세요. 파티마는 뚱뚱하고 여유가 있어서 항상 우리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건 뭐든지 다 동의하시죠. 하지만 그분들이 사이좋게 지내시는 데 도움이 되는 건 파티마가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점이에요. 그렇게 될까 봐 어머니는 굉장히 두려워하셨어요. 이번에 바디르 오빠가 여기 돌아오는 걸 어머닌 원치 않으셨어요. 아버지가 너무그렇게내가 말하는 걸 아시겠어요?"

로니는 마리암이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알았다. 처음 볼 때 자상해 보였던 라시드는 좀 이상하고 유별날 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 제노비아를 두려움에 떨게까지 만드는 사람임을 알았다. 그 딱딱하고 다부지고 야망에 넘치는 부인이 남편의 존재에 겁을 먹는 걸 보았을 때, 로니는 아부다비에서 바디르의 고모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매우 위험하다'고 얘기한 건 바로 라시드 군주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라시드 군주는 칙령을 발표했다. 음악회, 라디오, 담배, , 그리고 허가 없는 여행, 심지어 남자들이 바지를 입는 것까지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막대한 석유 재원을 학교나 병원같이 중요하고 필수적인 일들에 쓰지 않겠다는 완고한 거부였다. 도만을 통틀어 작은 국민학교가 3, 그리고 의료시설이라고는 미국인 의사들에 의해 운영되는 무리아의 작은 보건소가 고작이었다.

궁전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가난으로 고생하고, 궁전 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점점 심화돼 가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그들 둘만이 있게 됐을 때 바디르는 로니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선전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당연하지. 아버지의 부당한 규율을 뒤집어엎으려고 하는 걸 누가 비난할 수 있겠어?"

그러나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바디르가 집에 별로 붙어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 나가 늦은 밤이 돼서야 돌아왔다. 그가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단지 힘 있는 부족 사람들이나 심지어는 술탄의 군 수뇌들과 비밀스럽게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마리암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을 뿐이다.

점점 더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짧아졌다. 그를 볼 수 있는 것은 늦은 밤 그가 침대로 기어들어왔을 때뿐이었다. 몇 주일이 지나자 그의 사랑의 행위는 더욱더 거칠어지고 부자연스러워졌다. 마치 더 이상 그녀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듯했다. 혹은 그녀의 육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성취감을 맛봄으로써, 아버지와의 갈등을 잊어보려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바디르의 부드럽고 달콤한 사랑의 말은 온데 간 데 없어졌다. 그는 그녀의 육체적 나약함을 잔인하게 증명해 보였고, 로니는 매일 밤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더 이상 이렇게 계속할 순 없어요. 바디르이런 식으로!"

어느 날 밤 로니는 침대에서 그에게 소리 질렀다.

"왜 계속할 수 없다는 거야?"

그는 사납게 물어보았다.

"당신의 몸은 내 손끝에서 기뻐서 울부짖고 있어!"

"아니에요!"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군."

바디르는 그녀의 목을 잡으며 말했다.

"난 경험이 많은 사람이야, 로니. 당신이 날 미치도록 원하는 때가 언제인지 난 잘 알아."

그가 옳았다. 로니는 자기 경멸감으로 몸부림치면서 그가 옳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요구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그는 단지 그녀를 애무했고 그녀는 욕망으로 떨고 있었다. 그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로니의 몸은 녹는 것 같았다.

로니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날 밤, 그녀가 전에 경험해 본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그녀를 소유했다.

그들 사이에서 폭발하는 정열은 잔인하게도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희망과 꿈을 모조리 빼앗겼다는 한탄 속에 빠지게 만들었다. 로니는 지독한 지옥의 어두운 감방 속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따뜻하고 애정 어린 사랑은 이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로니는 슬펐다. 결코 이대로 계속 지낼 순 없다. 바디르는 그녀의 모든 자존심을 파괴해 버렸다. 로니는 그에게서, 그리고 도만에서 빠져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심한 말다툼을 한 끝에 바디르는 갑작스럽게 체포됐다. 바디르의 요청에 의해 5분 동안의 면회가 허락돼서 로니는 그가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창백하고 상한 얼굴을 한 그는 로니를 얼른 껴안았다.

", 내 사랑, 당신에게 말할 시간이 없었소. 용서해 줘. 내 사랑을 기억해 줘."

문 앞의 감시원을 무시하려고 애쓰면서 그는 다급하게 말했다.

"마음을 차분히 가지고, 우리 아버지를 매우매우 주의해야 해. 당신 마음이 어떻든 항상 아버지 앞에서는 웃는 낯을 보이는 거야. 그리고 항상 내가 돌아올 거라는 사실을 기억해. 당신은 믿겠지? 그날이 오면 우린 다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거야, ?"

바디르가 뒤돌아 들어갔을 때 로니의 눈은 눈물로 가려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도만 남부 멀리에 있는 궁전에 감금되어 있다는 얘기를 들은 건 그 후 며칠 안 되어서였다.

바디르의 안전을 염려하는 로니의 불안은 그를 변호하고는 어디론가 행방불명됐다는 그의 삼촌에 관한 소식을 듣고는 더욱 심해졌다.

아들의 감금으로 제노비아 왕비는 밤을 꼬박 새우며 자기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조용하고 어두운 궁전엔 날마다 나라를 떠나는 사람들의 무리와 구금, 체포의 소문만이 나돌 뿐이었다.

또한 로니는 그렇게 밝기만 하던 마리암의 성격이 점점 어두워져 가는 걸 보니 더욱 슬퍼졌다. 로니는 마리암에게 좀 더 따뜻하고 편안한 파티마 왕비 궁전에 가 있으라고 했다. 그곳은 이복 자매들 나디아와 사라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성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술탄의 장황한 열변과 맞서야 했던 사람은 바로 로니였다. 마치 그 나라의 남쪽 끝에 갇혀 있는 자기 아들과의 토론을 연장해서 로니와 계속하려는 듯이 보였다.

바디르가 체포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로니는 속이 불편하고 어지러움을 느꼈다. 임신인 것이다. 절망감과 고독감으로 허탈상태에 빠진 로니는 겨우 힘을 내어 후사에게만 그 사실을 알리고 절대 비밀로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기회를 보아 바디르를 만날 수 있을는지를 술탄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며칠이 지난 후 결국 로니는 용기를 내어 바디르를 만나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바디르의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대답했다.

", 얘야. 넌 왜 내가 널 내 곁에 두려 한다고 생각하지? 네가 내 아들의 볼모라는 걸 깨닫지 못했나? 혹시라도 바디르가 도망칠 계획을 하고 있다면 널 지하 감옥에다 처넣을 거라고 그 애에게 말했지."

껄껄대며 웃고 있는 그 노인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놀란 로니는 온몸을 떨며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길밖에는. 그녀 자신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새로운 생명이 살아남기 위해선.

3주일을 절망 속에서 보내고 희망을 거의 포기하려던 때에 로니는 제노비아 왕비의 부름을 받았다. 제노비아의 유창한 영어를 처음으로 들은 로니는 깜짝 놀랐다.

"솔직히 말해 이제 너와 별로 관계하고 싶지 않다. 지금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아. 어떻게 바디르가 너 같은 여자와 결혼을 했는지 모르겠다. 외국 여자와 말이야."

제노비아는 악의가 담겨 있는 말투로 말했다.

", 그렇지, 내 아들이 쫓겨난 건 순전히 네 잘못이야."

"그건 그렇지 않아요."

로니는 항변했다.

"그건 술탄 잘못이에요. 술탄은 미쳤어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시라구요. 왕비님도 그걸 아셔야 해요."

로니의 격정적인 폭발이 온 방을 울리자 제노비아는 창백해졌다.

"조용히 하거라! 이 벽들도 귀를 가졌다."

제노비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로니의 입을 다물게 했다.

"입조심해라. 그렇잖으면 내 아들을 풀어 주도록 할 수 없다."

"그럼그럼 바디르를 도망치게 할 수 있나요?"

왕비의 말에 로니는 가슴이 두근거려 숨을 몰아쉬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내 계획은 실행될 수 없어. 네가 우리나라를 떠날 때까진. 그렇기 때문에 네가 도만을 떠나는 건 빠를수록 좋아. 그리고"

제노비아는 창백한 로니의 떨리는 얼굴을 응시하면서 검을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말을 잠시 중단했다.

"너 혹시 아이를 가진 건 아니겠지?"

"그럼요, 절대 가지지 않았어요!"

로니는 재빨리 거짓말을 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평생 그 궁전에 남아 있도록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좋아, 넌 가도 좋아. 곧 사람을 보내마."

그 후 로니는 며칠을 불안하게 기다리면서 거의 미칠 듯한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후사가 그녀를 깨우러 왔다. 그 하녀는 나선형 통로를 지나 바깥으로 통하는 작은 나무문까지 조심스럽게 로니를 데리고 갔다.

꽉 죄어진 빗장을 열고 부두로 통하는 조용한 거리로 안내하며 빨리 서두르라고 했다. 거기에서부터 로니는 고깃배에 실렸다. 카펫 뭉치 사이에 숨겨진 그녀는 배멀미가 심해서 얼마나 긴 여행을 했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 고깃배는 로니와 양탄자를 아부다비에 있는 바디르의 고모 집에 내려놓았다. 거기에서 로니는 간단한 요기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런던 행 비행기를 탔다.

런던으로 올 때 그 카펫들도 갖고 돌아와서 곧 디미트리 카샨에게 팔았다. 그 카펫을 판 돈과 제이드를 낳고 난 후에 다시 옛날 일자리로 돌아간 덕분에 재정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단지 끊임없이 떠오르는 옛날 생각으로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긴 했지만.

제이드가 태어난 후에도 로니는 바디르와의 행복한 미래에 대한 약속에 집착했었다. 그러나 신문을 통해 도만의 쿠데타 소식과 바디르가 정권을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몇 년이 넘도록 그에게선 한마디 연락도 없었다- 로니는 자기들의 결혼생활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결국 바디르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한 게 아니었다는 잔인한 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에 대한 자기의 사랑이 그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그의 나라에 대한 걱정을 좀 진정시켜 주고 달 래게 해주는 위안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쓰라린 교훈이었다. 그러나 로니는 그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 경험은 그녀의 몸과 마음속에 상흔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다시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지금, 바디르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조심스럽게 쌓아올린 그녀의 새로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그 지독한 나라에서의 고생을 어떻게 견뎌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제이드를 위해서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돌아가는 수밖엔. 자기 미래의 외로운 생활을 생각해 보고는 너무나 끔찍해 베개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가냘픈 몸은 깊은 비애와 아픔으로 저려 왔다.

 

4

로니는 밤새 뒤척이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너무 일찍 깼지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어서 다시 잠을 청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따뜻한 가운을 걸쳐 입고 차를 마시러 아래층으로 터덜터덜 걸어내려왔다. 텅 빈 집의 침묵이 낯설고 외롭게 느껴진다. 특히나 제이드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없어 더욱 그랬다. 그러한 허전함은 지난밤에 내린 결정을 재삼 확인시켜 주었다. 바디르와 함께 도만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어린 딸을 잃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가지 불행 중에 그래도 좀 더 덜한 불행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니 로니는 오히려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듯했다. 머리가 아파서 아스피린을 먹었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한 시간 후, 엘리어트 부인이 돌아왔을 때까지도 로니는 몹시 지쳐 있었다.

"잘 잤니? 출근해야지? 난 금방 제이드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이란다. 교통이 복잡해서"

"그래요, 그래야 어머니 맘도 편하실 거예요, 어머니!"

로니는 어머니 말에 끼어들었다.

"바디르가 지난밤 날 만나려 했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척하실 필욘 없어요. 어머니의 그 소중한 사위가 이미 비밀을 다 털어놨으니까요. 이 모든 게 어머니 덕택이란 걸 알았다구요. 그 지독한 사람이 내 생활 속에 다시 돌아오게 된 것도 말이에요. 너무나 감사해요!"

어머니는 신경질적으로 로니를 쏘아보았다.

"얘야 그렇게 흥분할 필요 없다. 난 네가 화낼 만하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화를 낸다구요? 난 화내지 않아요. , 어머닌 내가 그 무시무시한 나라에서 빠져나올 때 어떤 상태였나 잘 아시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날 다시 도만으로 보낼 생각을 하실 수가 있으세요? 더군다나 바디르와 함께 음모를 꾸미시다니!"

"그렇지 않아!"

엘리어트 부인은 날카롭게 말했다.

"난 네가 말한 것처럼 '음모' 꾸민 적 없다. 다만 너와 제이드 걱정을 했을 뿐이야. 내가 클리포드와 결혼해서 플로리디로 가버리면 너희 둘은 어떻게 할 거야?"

"제발 어머니, 우린 괜찮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넌 제이드를 돌볼 사람을 아직 찾지도 못했잖니? 그리고 모르는 사람에게 그 아일 하루종일 맡겨 둘 순 없어."

"말도 안 돼요! 수많은 여자들이 아이를 맡겨 놓고 직장에 나가도 그 아이들은 아무 일이 없어요. 그리고 제이드는 이제 곧 5살이 되고, 그러면 매일 학교에 갈 거예요."

어머니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이드에겐 아버지가 필요해. 네가 원치 않는다는 건 나도 잘 알아. 그래서 지난 일 년 동안 내가 바디르와 연락이 있었다는 걸 네게 말하지 않았던 거야. 난 너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다."

어머니는 딸을 진정시키려고 꽤나 애를 쓰셨다.

"그에게 제이드 사진과 소식만 조금 보냈을 뿐이야. 어쨌든 제이드는 그의 아이잖니? 난 네가 바디르에게 제이드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 데 대해선 늘 반대해 왔어. 도대체 넌 왜 네 생각만 하는 거니. 제이드 생각을 좀 해볼 순 없니?"

로니는 깊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어머닌 이해 못하실 거예요."

잠시 동안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그녀는 말을 이었다.

"도만이 보통 아랍 국가들과는 다르다는 걸 어머니에게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있겠어요? 그건그건 중세시대로 되돌아가는 것과 똑같을 거예요! 제이드와 난 하렘 속에 갇혀서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아무도 볼 수 없게 된단 말예요."

"바디르는 내게 모든 게 바뀌었다고 말하더라."

어머니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널 사랑하고 있어. 또 자기 아버지가 통치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할 수 있다는구나. 널 위해서 새로운 궁전도 세웠고, 학교와 병원도 세웠다더라"

"계속 날 사랑한다구요? 맙소사! 어머닌 어쩌면 그런 뻔한 거짓말을 믿으시죠? 내가 도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제이드를 납치해 가겠다는 말은 안하던가요?"

솟아오르는 눈물을 숨기려고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어머닌 정말로 그 납치 얘기에 한 몫을 담당하셨나요?"

"아니다!"

엘리어트 부인은 놀란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난 바디르가 그렇게까지 하리라곤 생각지 않아."

"그래요. 어머닌 그 사람이 분별 있고 멋있는 사위인 줄로만 알고 계시니까요."

로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어머닌 그 특별한 악마와 식사를 하기 위해 긴 숟가락이 필요하실 거예요."

"로니, 난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로니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찌할 도리가 없잖아요? 어떻게 그 사람이 제이드를 납치해 가도록 내버려 둘 수가 있겠어요? 그러면 제이드를 다시는 못 볼 텐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죠. 일자리를 포기하고 도만으로 돌아가는 수밖엔. 어머니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우린 떠날 거예요. 이젠 좀 흡족하신가요?"

어머니는 로니의 신랄한 말투에 움찔했다.

"너 지금 뭘 하려고 그러니?"

거실로 빠르게 몸을 옮기는 로니의 뒤를 바싹 따라가며 엘리어트 부인은 말했다.

"난 언제든지 클리포드에게 전화를 걸어서 결혼을 연기할 수 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로니는 코트를 재빨리 입으면서 말했다.

"두 사람의 인생을 망쳐 놓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어머니와 클리포드 아저씬 서로 사랑하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두 분이 불행하게 사신다면 전 화낼 거예요. 절 위해서요. 그래요, 전 바디르와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땐 어떤 충고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혼란 속에 빠지게 됐으니 나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너 지금 어딜 가려고 그러니?"

어머니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사무실에 전화해서 오늘 못 나가겠다고 해야죠. 그리고 나서 카샨 씨를 뵙고 사표를 내겠다고 말하려구요. 그게 그분의 호의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겠죠. 그리고제이드를 데리러 갈 때까지 공원을 좀 산책하다 오겠어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로니는 말을 계속했다.

"미안해요, 어머니. 어머니가 생각하신 건 우리 모두에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몸을 기울여 어머니의 뺨에 키스했다.

"그래요, 지금은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똑바로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게 두려워요."

"제이드에게 말할 거니?"

"모르겠어요. 그것도 생각을 좀 해봐야겠죠."

로니는 수화기를 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비서의 말로는 아직까지 그녀를 찾는 손님은 없었으며, 우편물이나 서류처리도 급한 건 없다고 한다.

로니는 사장과 얘기하는 게 두려웠지만, 디미트리는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로니. 난 이제 괜찮아. 다음 주면 출근할 수 있을 거야. 난 일하고 싶어 못 견디겠어."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래서 당신은 도만으로 돌아갈 건가? 물론 당신 남편은 당신이 도만으로 돌아오길 바라겠지. 난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의 예리한 눈은 그녀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로니, 필요하다면 망설이지 말고 언제든지 날 찾아와요. 오래 된 당신의 일은 항상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잠시 후 로니는 켄징턴 가든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바삭거리는 낙엽들을 밟으며 걷고 있는 그녀의 머릿속은 바디르가 제시한 짧은 시간 안에 정리해야 할 많은 것들로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건 그녀 자신과 제이드의 옷가지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도만에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오만가지 물건들을 꾸려야 할 것이다. 하렘에 갇혀 있었을 때는 칫솔같이 간단한 것도 얻기 힘들었던 걸 잘 기억하고 있으니까.

깊은 한숨을 내뱉고 로니는 코트 주머니 속 깊숙이 자기의 차가운 손을 찔러넣으며 공원 벤치에 앉았다. 그녀의 머릿속을 달리고 있는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좀 정리해 보기 위해서였다. 바디르는 어머니에게 도만은 모든 게 변했다고 했다지만, 그녀는 믿을 수가 없다.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생활방식이 그렇게 쉽게 바뀔 리는 없을 것이다. 숨 막히는 권태로움, 거의 감금상태에 가까운 수많은 나날들, 바디르와 그녀 자신 사이에서 커가기만 하던 긴장감이런 것들을 로니는 너무나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로니는 스스로를 달래면서 쓰라린 기억들을 접어 두려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디르가 지금 영국에 있으며, 2주일 안에 도만으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제이드에게 말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로니는 항상 어린 딸이 자기 아버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될까 봐 조심해 왔다. 그리고 아빠는 멀리 있는 그의 나라를 떠날 수 없기 때문에 함께 살지 못하는 거라고 말해 왔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설명만으로는 나이에 비해 영리한 제이드를 만족시켜 주질 못했다.

어린 딸은 끊임없는 질문들을 나열해 갔다. 아빠는 왜 자길 보러 비행기를 타고 오지 않느냐는 둥, 아빠가 그 나라를 떠날 수 없다면 엄마와 자기가 아빠를 보러 가면 되지 않느냐는 둥, 의레 그런 식의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그녀는 최선을 다해서 설명해 왔는데. 결국 그 결정적인 시기가 오고 만 것이다. 제이드는 바디르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한번도 보지 못한 딸을 보면서 바디르는 또 어떤 행동을 할까?

남편이 딸의 그 수다와 끊임없는 질문에 쩔쩔매는 모습을 상상해 보다가 로니의 입가엔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번져 나왔다. 귀엽고 얌전한 딸애를 기대했다면 아마 깜짝 놀라게 될걸.

시계를 내려다보고는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공원에서의 몽상은 이제 끝내고 서둘러 차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잖으면 유치원에서 나오는 제이드를 데리러 가는 데 늦을 것이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엘리어트 부인은 당황해하고 있었다.

", 난 뭘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네정말, 모르겠어"

로니는 놀라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제이드가 거실로 뛰어가자 그녀는 제이드의 코트를 걸면서 물었다.

"이것 봐라. 이 모든 것들사람들이."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자기의 잿빛 머리카락을 만졌다.

"넌 모르지. 벨이 아침 내내 끊임없이 울렸어. 여기에 사인하세요. 저기에 사인하세요난 아주 미쳐 버리겠어."

"어머니, 제발 진정하세요. 어머니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통 모르겠어요. 그리고, 제이드!"

제이드가 그들에게로 다가오자 로니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것 봐라."

제이드가 그들 앞에서 발끝으로 빙그르르 도는 걸 지켜보면서 엘리어트 부인은 외쳤다. 다이아몬드 머리 장식으로 보이는 것이 제이드의 머리 위에서 반짝였고, 짧고 푸른 드레스 위로 번쩍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엄마엄마! 나 좀 봐요. 굉장히 멋있어 보이지 않아요?"

제이드가 유쾌하게 웃자 머리장식이 그녀의 귀 뒤로 흘러내렸다.

"당장 풀어!"

로니는 제이드에게 화난 목소리로 말하고 자기 어머니 쪽으로 홱 돌아섰다.

"저것들은 아마도진짜 다이아몬드는 아니겠죠?"

"보석상에서 나온 사람이 진짜라고 했다.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대부분"

부인은 이렇게 말하며 발버둥치는 제이드의 머리와 목에서 번쩍이는 보석들을 끌러냈다.

"이 거실은 바로 알라딘의 동굴이 돼버렸다. 와서 좀 보렴."

", 세상에!"

로니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테이블이며 의자마다에 높이 쌓여 있는 상자 더미들을 보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도대체 이것들이모두 어디서 온 거예요?"

"글쎄 이 보석들이 모두 애스프레이스에서 왔다는구나."

엘리어트 부인은 검은 가죽 케이스의 장식구슬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대부분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더라. 그리고 에메랄드 목걸이도 있고."

넋을 잃은 듯 머리를 흔들고 나서 부인은 음료수 진열장 쪽으로 걸어갔다.

"난 보통 대낮에는 잘 마시지 않지만, 지금은 알코올이 좀 필요하구나."

"그런데도대체 누굴까?"

"그래 맞아. 분명히 바디르일 거야. 그가 아니라면 이런 걸 사 보낼 만큼 돈이 많은 사람이 누가 있겠니?"

엘리어트 부인은 술잔을 들고 한 모금 길게 들이마셨다.

"그것뿐인 줄 아니?"

제이드가 커다란 상자를 뒤지다가 어두운 밤색 모피 코트를 꺼내자 부인은 덧붙여 말했다.

"저 흑담비 털코트 하며, 실크 드레스들이걸 보낼 사람은 바디르밖엔 없잖겠니? 하지만 이걸 다 어디다 두지? 우리에겐 방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그 사람에게 설명해 주는 게 좋겠구나."

"그래요, 그럴게요. 빌어먹을!"

로니는 화가 나서 욕을 하려다가 제이드가 방에 있는 걸 깨닫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제이드에게서 모피 코트를 빼앗고는 부엌으로 데리고 가서 점심을 주었다. 잠시 후, 로니는 어머니가 다시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너 정말 조심해야겠어"

"알아요, 어머니."

로니는 한숨을 쉬었다.

"제이드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하지만 바디르 때문에 미칠 것 같아요. 그 사람은 도만 날씨가 적어도 섭씨 37도는 이상이라는 걸 알면서 내게 이런 모피 코트를 보내다니! 이 다이아몬드 값만으로도 자기 나라의 그 가엾은 국민들을 적어도 한 달은 먹여살릴 수 있을 텐데. 멧돼지 같은 사람!"

로니는 수화기를 들면서 말을 계속했다.

"이런 것들은 얄팍한 사탕발림에 불과해요."

클래리지에 있는 바디르의 방으로 전화를 걸자 그의 부관 사미르가 받았다.

"내 남편에게 쓸데없는 것들을 보내지 말라고 전해 주시겠어요? 우습게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말라고"

", 로니."

로니가 준비했던 말들을 끊고 바디르의 풍부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내 딸을 보는 일에 관해 얘기하고 싶은데?"

"당신이 원하실 땐 언제든지 볼 수 있을 거예요. 그게 아마도 본드 가를 모두 사버리는 소동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더 낫겠죠."

로니는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그러나 그는 로니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낮게 웃을 뿐이다.

"당신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내일 3시에 제이드를 만나겠어. 우린 그 애를 리젠트 파크 동물원에 데리고 가는 거야. 알겠소?"

"안 돼요!"

로니는 자기가 어린아이처럼 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바디르 때문에 왜 계속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생각할수록 속이 상했다.

"아직 날씨가 쌀쌀해서 안 돼요."

"제이드가 아픈가?"

"아뇨, 물론 그 아인 아주 건강해요."

로니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러면 제이드를 따뜻하게 입히면 될 것 아니오? 로니, 당신은 그 모피 코트가 있으니 그걸 입으면 될 테고."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짧게 들리더니 그녀가 대답할 말을 찾기도 전에 그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날 밤 로니와 어머니는 제이드에게 아빠는 지금 영국에 와 있으며 내일 제이드를 보러 올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랬더니 이 꼬마 아가씨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잠자리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 제이드를 재우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로니 역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 덕택에 다음날 아침 늦잠을 자고 말았다. 그래서 그날은 사무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일들을 다 해치울 수가 없게 돼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좀 일찍 사무실을 나와야 하는 날이면 항상 그렇듯이 전화는 끊임없이 울려댔다. 로니가 헐레벌떡 집에 도착했을 땐 집 앞에 커다란 리무진이 세워져 있었다.

로니는 심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러한 불안감을 보이지 않으려고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거실로 들어섰다. 바디르의 검은 안대를 자기의 조그만 눈에다 갖다 대 보이면서 제이드는 그의 무릎에 앉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나 어때요, 엄마?"

제이드는 의자 위에 깡총 뛰어올라서며 잠시 동안 거울을 들여다본 뒤 말했다.

"난 아빠만큼 멋있어 보이지 않는데."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자기 아버지의 무릎으로 올라간다.

잠시 동안 로니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똑같이 검은 머리를 가진 이 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걸 보자 로니는 왠지 슬픔이 울컥 밀려 와 목에 무엇인가 큰 덩어리가 걸려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온몸이 떨렸다. 왜 나는 부녀간에 저렇게 닮았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어깨까지 내려온 자기의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하고 있는 제이드를 바디르는 웃으면서 내려다보고 있다.

"이 아인 역시 내 딸이지?"

그는 로니의 맘을 정확하게 읽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진짜 아빠가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제이드는 행복해하며 웃었다.

"우린 정말 아랍으로 가는 거예요? 엄마 예쁘지 않아요? 엄마는 그 모피 코트와 다이아몬드를 보고 화를 막 내셨어요"

제이드는 자기 엄마를 흘끗 쳐다보고는 계속 말했다.

"난 엄마가 할머니에게 나쁜 말을 하는 걸 들었어요. 내게도 다이아몬드를 주실래요? 유치원에서 제일 친한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 이름은 질이에요. 난 걔가 싫어요. 그런데 질은 분홍색 진주 목걸이를 가졌어요. 하지만 만일 이 진짜 다이아몬드를 내가 갖게 된다면, 질은 아마 약올라서 미치려 할 거예요. 난 질이 그러는 걸 보고 싶어요."

로니는 제이드에게 가서 코트를 입고 오라고 시키고는 바디르에게 말했다.

"역시 당신 딸답군요."

"그럼, 저앤 항상이렇게 수다스러운가?"

그는 씩 웃으며 물었다.

", 천만에요. 그 정도 가지구요?"

로니는 놀리듯이 상냥하게 말했다.

"제이드는 아직은 좀 수줍어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당신과 좀 더 가까와지면 아마 평소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 줄 거예요."

"그러면 이제 내 인생은 지루하진 않겠군!"

바디르는 넓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는다.

제이드가 춤을 추듯 걸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빨리 가요, 아빠. 낙타도 보고 싶고 뱀도 보고 싶어요"

"그래, 준비가 다 됐단다. 우린 엄마가 저 모피 코트를 걸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지? 엄마는 저것 때문에 화를 냈다며?"

어쩔 수가 없다. 저 굉장한 걸 입고 나가는 수밖에! 그렇게 하는 자기 자신이 증오스러웠지만, 동물원에 들어갈 때쯤에는 그 호화로운 모피 코트의 따뜻한 느낌이 싫지 않았다.

동물 우리 앞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제이드를 지켜보고 있던 로니는 자기 앞에 서 있는 바디르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감기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

바디르가 다가와 로니의 코트 깃을 세워 주며 말했다.

"그런데 보석이나 옷을 사준 일로 아내와 말다툼하게 되리라곤 전혀 예상 못했는데?"

"제발 놔줘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자기 옷깃을 단단히 잡고 있는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천천히 미소를 띠웠다.

"내가 얼마나 무심했는지난 아직 이렇게 사랑스러운 딸을 낳아 준 당신에게 감사하지도 못했군. 그리고 아이에게 그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준 것에 대해서도 말야. 당신은 아직 내 반지를 가지고 있겠지, 로니?"

""

린디는 더듬거렸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번득이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외면했다. 커다란 비취 반지는 종이에 잘 싸서 작은 보석함에 보관해 두었었다. 그리고 도만을 떠나면서 그녀는 바디르가 주었던 모든 보석들을 기꺼이 그곳에 두고 왔었다. 유일하게 그가 결혼 전날 자기 손에 키워 준 그 도장 반지만을 지니고. 약혼반지는 결혼 준비로 경황이 없어서 미처 장만하지 못했었다.

"어찌됐든 상관없어."

바디르는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깨뜨리며 대답해야 하는 곤란함에서 그녀를 구해 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이드가 커서 자기 엄마처럼 아름답게 된다면, 난 정말 행복할 거요."

그의 잠긴 목소리가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었지만, 로니는 자기감정을 억제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닫기도 전에 그의 팔에 꼭 안겨서 그의 입술이 자기의 입술을 탐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한없이 밀려 오는 흥분의 조류가 그녀의 온몸을 휩쓸고, 감각의 끈이 자신의 통제력으로부터 풀려 나갔다. 그녀의 모피 코트를 제이드가 마구 잡아당길 때야 비로소 로니는 현실로 돌아왔다.

"이리 와서 코끼리 좀 봐요. 아빠, 뭣 때문에 엄마에게 키스해요? 우리 아이스크림 사먹어요, ?"

바디르가 로니의 떨리는 몸을 풀어 주자 제이드는 바디르의 손을 잡고 간이 매점 쪽으로 끌고 갔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로니는 목이 긴 기린 한 쌍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저주의 말을 내뱉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람? 그의 키스가 퍼부어질 때마다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다니. 그것도 동물원 한가운데서. , 맙소사! 사지가 후들후들 떨리는 이유를 깨닫고 로니는 얼굴이 붉어졌다. 바디르의 강한 육체도 이제는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리라고 그토록 굳게 믿어왔는데, 자기의 이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자 부끄러움과 슬픔이 그녀의 몸을 휘저어 놓는다.

동물원에서의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그의 장난스럽고 비웃는 듯한 시선과 마주치는 걸 피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약간 마음이 놓였던 것은 딸에게 마음이 사로잡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제이드 역시 그에게 매우 열중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내일 또 널 만나러 온다고 약속하마, 제이드."

그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 바디르는 제이드에게 다짐했다.

"내일은 호텔에 와서 나와 차 마시지 않을래?"

", 좋아요!"

제이드는 기뻐하며 할머니에게 그날 있었던 멋진 일들을 자랑하기 위해서 차에서 뛰어내려 집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내일은 어머니가 제이드를 데려가야 할 것 같아요."

로니는 차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난 너무 바빠요. 할 일이 잔뜩 있어서"

"맘을 편하게 가져, 로니. 도만으로 돌아가면 우린 우리끼리만의 시간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게 될 테니까."

"아녜요!"

로니는 숨을 몰아쉬며 쏘아붙였다.

"내가 말한 건 그런 뜻이 아녜요. 난 정말 바빠요. 그리고"

"그래, 나도 당신이 말한 뜻을 알아."

그는 부드럽게 로니의 말을 중단시켰다.

"그렇지만 내 말은 밤에 말야. 물론, 우리가 도만으로 돌아갈 때까진 당신에게 싱글베드를 즐기도록 허락해 주지. 하지만 당신 마음속에 일말의 의심도 남아 있지 않게 할 거야."

그는 경고하듯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이 도만으로 돌아가는 건, 그건 내 아내로서 돌아가는 거야. 어떤 의미에서든 말야."

"난 분명히 말했어요."

로니의 눈은 분노로 번득였다.

"그럴 수 없어요"

바디르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 그럼. 내 사랑 로니,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것, 필요한 것을 찾게 될 거야."

 

일주일 후에 샐리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냈을 때까지도 로니는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샐리의 아파트에서 옛날 학교 친구들에 대한 근황을 주고받으며 어린 소녀들처럼 킥킥대면서 저녁식사를 했다.

"너무 재미있어."

로니는 긴 숨을 내쉬었다.

"잠시 동안이나마 모든 걸 잊을 수 있어."

"네 남편은 정말로"

바디르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얘기를 들은 샐리가 물었다.

"네 남편은 그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또다시 네가 바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믿는 거니?"

"좀 정신이 나간 것 같지? 지난 5년 동안 우린 모두 변했어. 바디르는 결혼할 때보다 더욱 딱딱하고 완강한 성격이 됐고, "

로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지난 5년 동안 고생도 많았지. 그렇지만 난, 난 좋은 일자리를 얻어서 제이드를 잘 키워 왔어. , 내 모습을 봐."

그녀의 목소리는 딱딱해졌다.

"그와 결혼할 때의 그 별 같은 눈을 가졌던 어린 소녀의 모습을 이젠 찾아볼 수 없어. 그런데도 그 사람은 날 그 증오스러운 나라로 데려가려고 갖은 수단을 다 쓰고 있어. 그건 내겐 너무 끔찍한 일이야. 모든 남자들은 다 그렇게 뻔뻔스럽니?"

"글쎄?"

샐리는 생긋 웃었다.

"다이아몬드와 모피 코트 선물을 받는다는 게 그렇게 기분 나쁜 일일까?"

"그건 시작에 불과해."

로니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 멍청한 사람은 도대체 돈을 얼마나 썼는지 몰라. 글쎄 세상에, 끊임없이 벨이 울리고, 계속해서 커다란 소포 더미들이 배달돼 오고, 샐리, 믿을 수가 없었어. 어머니와 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 우리 집은 상자들로 홍수를 이루었다니까. 수십 켤레의 레인, 구찌, 찰스 주르당 구두들과 핸드백, 그리고 네가 아마 구경도 못해 봤을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 장식들, 린네르 시트, 베갯잇, 타월, 향수"

로니는 무겁게 한숨을 내뱉었다.

"끝이 없어!"

샐리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 엄청나다, !"

"우리 어머닌 하루가 지나서야 안정을 되찾으셨고, 우린 도둑맞을까 봐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니까. 웃지 말라구 "

친구가 키득키득 웃자 로니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도대체 넌 그 모든 걸 다 싸가지고 도만으로 갈 거야?"

"남편은 그 문제를 아주 쉽게 해결해 주었어."

로니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오늘 아침 그 물건들을 모두 본드 가에서 가져온 가죽 케이스와 가방에 실었지. 제이드의 가방도 있어. 하지만 제이드는 별로 관심이 없어. 오히려 뉴마켓의 가게에서 급하게 사들여 온 말안장과 고삐에 더 흥미를 느껴. 그것들은 아마 조랑말용인 것 같아. 제이드는 아직 말을 타보지 못했거든."

"제이드는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니?"

샐리는 웃느라고 젖어 있는 눈을 닦으며 물었다.

"좋아해. 확실히 그앤 아빠를 굉장히 좋아해."

로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제이드와 바디르는서로 꼭 닮았어. 그리고 둘이 너무나 잘 맞아."

"그러면넌 어떻니?"

샐리는 차분하게 물어보았다.

"넌 아직 그에게서 매력을 찾을 수 있어?"

"너 지금 농담하니? 전혀 아니올시다야! 난 정말 그 사람을 증오해. 그렇게 오랫동안 사라졌던 사람에 대해서, 5년 동안이나 날 내팽개쳤던 사람에 대해서 너 같으면 어떤 느낌을 갖겠니?"

"난 모르겠어."

샐리는 자기 친구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사실 그녀는 로니가 스스로에게 완전히 솔직하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래서 대화를 다른 쪽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5일 후에 있은 엘리어트 부인의 결혼 만찬회에서 샐리는 이 키 크고 잘생긴 검은 미남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사람이 정말 네 남편이니? 그가 여기 올 줄은 몰랐는데"

샐리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래."

그의 넓은 어깨의 뒷모습을 응시하면서 로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대단한 남자는 경고도 없이 나타났어. 이 만찬회가 끝나면 바로 제이드와 날 데려가려 할 거야. 우리에게 도망칠 기회가 없다는 걸 확인시켜 주려는 거야. 나쁜 사람 같으니!"

"하지만 로니, 저 사람은솔직히 말해서너무 멋있다. 그리고 저 검은 안대와 상처"

"해적같이 보이니?"

로니는 씩 웃었다.

"넌 너무 부정적이구나. 저 여자들을 좀 봐. 모두 선망의 눈초리로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잖니? 솔직히 로니, 난 욕망으로 불타고 있는 저렇게 많은 가슴들을 본 적이 없어!"

"넌 학교 다닐 때도 그러더니 여전히 속물적이구나."

로니는 제이드가 오고 있는 걸 보고는 생긋 웃어 보이는 샐리에게 따끔하게 말했다.

"아빠가 우린 곧 떠날 거래요."

제이드는 신이 나서 달려왔다.

"우린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된대요. 지금 입은 내 드레스는 너무 예뻐서 이걸 입고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하셨어요. 멋있지 않아요, 샐리 아줌마?"

"그래, 너무 예뻐 보이는데! 로니, 저렇게 깜찍한 드레스를 어디서 샀니? 정말 예쁘다."

"내가 어떻게 저런 걸 사주었겠어? 자기 아빠와 쇼핑 나가서 사가지고 온 거지."

로니는 제이드를 내려다보며 샐리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서 로니의 팔을 강하게 붙든다.

"로니, 사람들에게 작별인사 할 시간인데?"

주름 잡힌 진주빛 실크 드레스 차림에 분홍빛 장미로 장식된 베일이 드리운 작은 모자를 쓰고 있는 로니를 찬찬히 살피면서 바디르는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와 클리포드 아저씨가 신혼여행 떠나시는 걸 보기 전엔 갈 수 없어요. 그리고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난 당신 어머니와 새아버지께 다 얘기해 놓고 왔어. 그리고 옷도 갈아입을 필요 없고. 내 비행기로 갈 거니까."

"그렇지만"

"5분의 시간을 주겠소. 그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당신은 이 방에서 강제로 끌려 나가게 될 거야."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로니는 돌아서서 방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어머니와 새아버지에게 조용히 키스하고, 친구들과 친지들에게도 작별인사를 했다. 온몸이 마비된 것 같다.

바디르는 제이드를 인질로 삼아 이제 가까운 장래에 그의 모든 요구를 그녀에게 강요할 것이다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로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5

깊고 아늑한 대리석 욕조에 몸을 담그고, 로니는 멍하게 자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지독한 나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에 직면해서 초조와 불안 속에 2주일을 지냈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이 호화로운 새 궁전에서 살게 되다니. 바람이 잘 통하는 그녀의 커다란 침실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그때의 어두운 감옥 같은 방과는 너무나 다르지 않은 가! 이곳은 뭐랄까그래, 기가 막히게 멋있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분홍빛 대리석 천장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긴 비행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데다가 제이드를 재우느라 한바탕 법석을 떠느라 앞으로 묵을 장소에 대해서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새 궁전의 한쪽은 예전에 라시드 술탄이 자기 개인의 침실을 가지고 두 명의 부인을 번갈아 방문하게 하던 그 옛날 하렘의 새로운 형태일까? 로니는 바디르가 따로 떨어진 구역을 갖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그를 피하기가 아주 어려울 테니까.

자기 남편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건 런던을 출발해서 7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비행하는 동안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바디르의 전용비행기 보잉 727에 오르자 로니는 엘리자베스 잭슨이라는 여승무원에게 소개됐다. 그 여자는 제이드의 가정교사가 될 사람이라고 했다.

로니는 남편이 자기와는 아무런 의논도 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그 결정에 대해 반대할 기회도 주지 않았으므로 더욱 화가 치밀었다.

바디르는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녀의 반항적인 표정도 무시한 채, 한 아랍인 스튜어디스에게 항공기 안의 작은 침실로 로니를 안내해 주도록 했다.

"당신은 좀 쉬는 게 좋겠어. 그동안 제이드는 미스 잭슨이 돌봐 줄 거요."

바디르는 조용히 말했다.

"난 피곤하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과 말다툼하고 싶지 않으니 시키는 대로 해요."

그는 냉정하게 덧붙이곤 몸을 돌려 부관 셰이크와 말을 나눴다.

바로 옆에서 스튜어디스가 졸졸 따라다니는 바람에 로니는 더욱더 울화통이 터져 소리라도 꽥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재워 논 제이드가 깰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화를 꾹꾹 참으며 침실로 들어갔다.

몇 시간 후, 잠에서 깨어난 로니는 그제서야 비로소 남편의 말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참말로 피곤하고 신경이 쇠진해 있었던 모양이다. 로니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계속해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고, 스튜어디스가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들어와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놓았다.

"두 시간 후면 도만에 닿게 돼요. 왕비 폐하, 뭐 시키실 일은 없으세요?"

로니는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겨우 일어나 앉았다.

"난 괜찮아요. 고마와요. 그런데, 내 딸은?"

"공주님은 아직 자고 있어요. 깨울까요?"

"아니에요, 그냥 놔두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차 고마와요."

로니는 스튜어디스에게 밝은 미소를 지었다.

"마침 마시고 싶었는데."

"뵙게 돼서 기뻐요, 왕비 폐하."

스튜어디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로니는 찻잔을 들고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그 연갈색의 액체를 내려다보았다. '왕비 폐하', '공주님'이라니. 가능한 한 빨리 이 일에 관해 바디르와 얘기할 필요가 있겠다. 그렇잖으면 평범한 소녀 제이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버릇없는 아이가 될 것이다. 특히 바디르가 계속해서 그 아이가 원하는 건 뭐든지 사준다면. 나 자신은 또 어떤가? 어떻게 왕비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단 말인가? 물론 회교 군주국의 왕비인 건 사실이지만.

로니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방에 붙은 작은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침울하게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와 푸른 눈 아래의 검은 그늘을 보니 '말라빠진 포도'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 성싶다. 실제로 그녀의 모습은 형편없었다. 지난 2주일 동안 신경을 온통 곤두세우고 지냈던 까닭이다.

욕실에 샤워가 있는 것을 보고 로니는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따뜻한 샤워의 가는 물줄기 아래서 로니는 곧 도만에 도착하는 일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가 영국에서 사들인 옷들과 보석들은 언제 어디서 입고 치장하라는 걸까? 하렘에 갇혀 지내면 아무도 만날 일이 없을 텐데.

앞으로 그런 식으로 격리된 채 긴 세월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이 모든 호화스러운 물건들도 자유없이는 아무 쓸모도 없다. 바디르는 나를 가두어 놓고 열쇠를 밖으로 집어던질 것이다그런 남편에게 두려움과 적개심 외의 도대체 다른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잠시 후, 로니는 화장을 새로 하고 푸른색 실크 드레스를 입었다. 마음이 조금 가라앉은 것 같았다. 바디르에게 자기의 이런 비참한 심정을 그대로 나타낼 필요는 없으리라. 그녀는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보며 히스로에서 그녀의 트렁크를 싣던 사람들의 투덜대던 모습을 생각해내고는 빙그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뽑아온 책들과 기타 소설책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앞으로 l1년 동안은 도만에서 지낼 각오다. 그때라면 제이드도 16살이 되니까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난 그 끔찍한 나라에서 도망쳐 나오는 거다. 나를 붙들어 매둘 구실도 더 이상 없으니까. 그리고 그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난 36살의 추한 중년 여자가 돼 있겠지. 하지만 교양있는 중년이 되리라.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로니의 생각들을 가로막는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아까 그 스튜어디스가 들어왔다. 시원한 음식이 준비돼 있으며, 제이드는 아직 자고 있다고 한다.

로니는 시계를 흘끗 내려다봤다. 착륙하려면 아직 한 시간 남짓이 남아 있다. 제이드는 더 자도록 놔두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로니는 침실을 나왔다.

비행기 중앙에는 바디르와 셰이크가 앉아 있고 한쪽 편 유리 칸막이가 쳐진 곳에서는 다른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바디르가 얼굴을 돌려 자기를 쳐다보는 걸 무시한 채 로니는 스튜어디스를 따라 식사 테이블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자리에 앉고 나서야 자기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너무 긴 여행이죠?"

"그래요."

로니는 이 여자가 제이드의 새 가정교사라는 엘리자베스 잭슨이라는 걸 알았다.

"앞으로제이드를 가르쳐 주실 거라면서요?"

시원한 음식과 샐러드 등이 테이블 위에 놓여졌을 때, 로니가 말했다.

"남편이 그 나라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던가요?"

"많이 해주진 않으셨어요."

엘리자베스는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제이드는 아주 똑똑해 보이던데요. 난 중동 쪽으론 첫 번째 방문이에요."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미스 잭슨, 경고해 두고 싶은 게 있어요. 앞으로 당신이 있을 곳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원시적'이라고 해야 좋을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부인왕비 폐하"

", 제발."

로니는 재빨리 말을 가로막았다.

"내 이름은 로니예요. 그리고 당신을 이제부턴 엘리자베스라고 부를게요. 괜찮겠죠?"

"그럼요, 술탄께서 무례하다고 반대하시지만 않으신다면요."

이 적절한 대답에 로니는 약간 미소를 지으며 도만에서 완전히 자기 혼자 있게 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계속 가정교사만 해왔나요?"

"전 몇 년 동안 초등학교 선생으로 있었죠. 그리고 2년 전부터 쿠웨이트 대사의 아이들을 개인지도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술탄께 추천되게 된 거죠. 좀 우습게 들리실지는 모르겠지만 전 정말로 좋은 가정교사가 될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약간 불안해 보이는 부인을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전 이제 서른이 다 돼가고, 내 인생에선 그렇게 재미있는 일이 없었어요. 그래서 더 추하게 늙기 전에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죠. 그래서 이 먼 아라비아로 갈 기회를 잡은 거예요. 전 솔직히, 그곳이 얼마나 거칠고 원시적인 곳인가에 관해선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아요. 하지만 따님을 가장 우수하게 교육시키겠다고 약속드릴 수는 있어요."

"좋아요."

로니는 입술을 약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이 새 가정교사는 자기를 좀 무시하는 듯한 기분까지 든다. 예쁘지는 않지만 부드러운 미소와 빛나는 눈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귓속이 약간 틔는 걸로 봐 비행기의 고도가 낮아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비행기는 착륙했다.

로니는 서둘러 제이드를 깨웠다. 아직도 잠이 덜 깬 제이드를 얇은 면치마로 갈아입혀서 엘리자베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짐을 챙기러 방으로 돌아왔다. 가방을 분주히 싸고 있는데, 갑자기 욕실 문이 열리더니 바디르가 나온다.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나라 옷으로 갈아입은 바디르를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면서 로니는 말했다. 길고 흰 옷을 입은 그의 멋진 모습은 옛날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되살려 놓았다. 몸이 너무 떨려서 바디르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지 않았더라면 쓰러졌을 것이다.

"부부는 보통 같은 방을 쓰지."

그는 그녀를 더 꽉 죄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조종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줄 알았나?"

"아뇨"

로니는 갑자기 숨이 막혔다. 그에게서 풍기는 향수 냄새와 단단한 그의 몸이 가까이 오자 그녀의 신경기능은 온통 마비되는 듯했고 민감한 육체는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걸까? 로니는 자기 몸이 보이는 반응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디르가 그녀의 머리에서 부드럽게 핀을 뽑았다. 로니는 그에게서 얼굴을 돌려 눈을 감으며 뺨이 달아오르는 걸 억제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지금 뭘 하는 거예요?"

자기의 붉은 금발머리가 어깨까지 드리워지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내뱉았다.

"단순히 당신의 더없는 영광을 맛보고 있지."

바디르는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리고 우리 뜻에 따라 한 침대를 써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건 부끄럽게 보이지 않소?"

그의 부드럽고 놀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작은 방안에 울려 퍼졌다. 로니는 몸을 빼려 했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로니의 거부하려는 의지는 그의 따뜻한 입술에 휩싸여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와닿자 저항할 수 없는 떨리는 반응들이 일어났고, 몸의 모든 신경들이 흥분으로 떨렸다. 그녀는 팔을 들어 그의 목을 휘감은 채 그 달콤하고 촉촉한 입술의 내리누름에 그녀의 입술을 내맡겼다.

바디르는 그녀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만족을 표시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가는 허리께로 미끄러져 내려오자, 그녀의 몸은 더할 수 없이 유연해졌다. 그가 그녀를 침대에 눕히려고 팔을 약간 풀었을 때야 로니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안 돼요!"

로니는 고개를 돌리며 그를 밀쳐냈다.

"가엾은 로니, 당신은 불안해 뵈는군."

그는 떨고 있는 로니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의 건망증은 일시적인 병일뿐이야!"

그의 조소 섞인 웃음은 증오스러웠다. 그녀는 침대에서 재빨리 빠져나오며 자기혐오감에 불탔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로니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면서 빠르게 거울 쪽으로 걸어갔다. 머리카락을 감아올려 머리 뒤끝에다 잡아매려 했지만, 손이 너무나 떨려 평소처럼 쉽사리 안 됐다.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바디르는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의 몸은 날 간절히 원하고 있어, 내 욕구만큼이나 말이야. 이건 부인할 수 없을 걸?"

로니는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냈다.

"당신은 당신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당신을 황홀경의 꼭대기까지 올려 줄 수 있지. 혹은 그 이상으로"

그는 떨고 있는 로니에게로 다가왔다.

"우린 둘 다 그렇다는 걸 알고 있지. 당신도 빨리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게 좋을 거야."

"당신은 야비한 사람이에요! 난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너무 안달나게 하지 마, 로니."

그의 부드러운 말투엔 무시할 수 없는 경고를 내포하고 있는 듯했다. 거울 속에 비친 꼭 다문 그의 입술과 엄격한 표정을 보자 로니는 등골이 오싹했다.

"우린 곧 도만에 도착하게 될 거요. 난 우리나라의 새로운 지도자라는 사실을 당신이 잊지 않기를 바라오."

그는 협박에 가까운 무게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순 없을 거야. 물론 당신이 딸을 잃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다르지만."

"당신은 유괴범이에요! 당신은 당신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군요."

로니는 이를 악물며 소리질렀다. 그녀는 문 쪽으로 가면서 자제심을 찾으려고 애썼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당신 아버진 어리석게도 당신을 감옥에 가두었죠. 당신 아버지가 그렇게 미치지만 않았어도 당신을 해치울 수 있었겠죠. 그리고 날 행복한 과부로 만들었겠죠!"

로니가 그 작은 침실 문을 쾅 닫고 나올 때 그의 냉소적인 웃음소리만 안 들렸어도 그녀의 기분은 조금 나았을 것이다. 비행기 내 중앙 라운지로 나왔을 때까지 그 소리는 그녀의 귀에 울려 왔다.

잠시 후 제이드에게로 돌아오자, 로니는 자기 자신에 대해 저주하기 시작했다. 저항도 못하고 감정에 이끌린 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동물원에서의 그 불운한 일이 있은 이후에도 그를 피하려고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던가? 앞으로 어떻게 그를 피해야 할지그 감옥 같은 하렘은 삭막한 복도들과 방들로 가득 차 있다. 아마도 빈틈없이 머리를 쓴다면, 바디르의 존재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 다.

제이드를 비행기에서 내려놓으며, 로니는 마치 뜨거운 터키탕으로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후끈한 열기가 그녀를 덮쳐 왔고, 어두운 밤공기는 아직도 모래와 포장도로를 뜨겁게 내리쬐던 태양의 흔적과 도만 특유의 향기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상하게도 친근하게 느껴졌다.

로니는 라시드 군주의 오래 된 차들 중의 하나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뜻밖에도 검은 리무진들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엘리자베스와 제이드와 함께 로니는 검은색으로 착색된 유리가 끼워진 검은색 롤스로이스에 올라탔다.

"아주 호화스럽죠?"

차가 천천히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하자 엘리자베스는 번쩍이는 차의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한 듯 물었다.

"일종의 베일 같은 거예요."

검은 유리창을 놀란 눈으로 보고 있는 엘리자베스에게 로니는 말했다.

"아라비아에선 여자들은 항상 남자들의 시선에서 감추어져 있죠. 남편이 당신에게 앞으로의 당신 생활에 있어 중요한 것을 말해 주 지 않았나 봐요. 좀 자세히 말하자면, 당신은 아마 하렘이라는 곳에서 살게 될 거예요. 하렘이란 궁전 안에 있는 여자들만의 구역이죠. 그리고 그곳에서 거의 나올 수 없을 거예요."

로니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아무튼 도만에 오신 걸 환영해요, 미스 잭슨!"

차는 계속 달렸다. 로니는 창밖을 멍하게 응시했다. 밤이라 밖에는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나트륨 등이 번쩍이는 넓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걸 알고 로니는 적이 놀랐다. 그 늙은 군주가 통치하던 때와는 너무나 달랐다.

여행은 지루할 정도로 길었지만, 마침내 차는 완전히 멎었다. 차문이 열리고, 그들이 내리자 밝은 빛이 그들의 눈을 부시게 했다.

"어머나!"

엘리자베스는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정말로 놀라왔다. 로니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오래 된 요새의 회색빛 외면은 온데 간 데 없고, 그 자리엔 길고 하얀 현대식 2층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게 아닌가! 무어식 아치 모양의 긴 유리창은 불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고, 그 빛이 앞뜰과 넓은 잔디밭을 훤히 비추고 있다. 집 주위에 꾸며진 우아한 정원 안쪽에는 계단식 작은 폭포가 빛나고 있다. 정말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바디르가 하얀 회교도 옷을 펄럭이며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다.

"드디어 도착했군."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어리둥절해하는 로니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그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난 이해를 못하겠어요."

로니는 중얼거렸다.

"도대체그 낡은 궁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그 낡은 궁전은 없어져 버렸지. 난 이 오래 된 도시 외곽에 새 집을 짓기로 결심했어. 그리고 이건 이곳 무리아에 있는 내 주요 거처지. 그 낡아빠진 궁전에 비하면 상당히 발전했지. 어떻게 생각해?"

"확실히 그렇긴 하군요."

입구에서부터 하얀 대리석이 깔린 마루와 돔 모양의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우아한 기둥들은 숨이 막힐 정도로 큰사했다.

"정말 아름다와요. 그 지독한 감옥 같던 궁전에 비하면 완전히 딴 세상 같군요."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로니는 그 옛날의 끔찍한 궁전생활에 대한 기억은 모두 잊었다. 제이드가 자기 방을 보러 가자고 조를 때까지도 그녀는 그 기억을 잊고 있었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물속에 누워 있는 지금도 자기의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는 데 지쳐서 그녀의 머리는 팽팽 돌 지경이다.

바디르가 이 새 집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그가 약속한 내 자유로운 생활도 사실일까? 그녀의 지친 마음속으로 이런 희망적인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곧 그런 생각에서 벗어났다. 내가 정신이 나갔었군! 비행기 안에서의 일을 어떻게 이렇게 금방 잊을 수 있을까?

바디르가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기로 마음먹은 거라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로니의 이런 생각을 방해하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녀의 옛날 하녀가 방으로 들어오고 있다. 후사를 보자 너무도 반가와 기쁨의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왕비님, 모든 게 준비됐어요. 벽장에서 왕비님 옷을 꺼내 놓았구요, 간단한 식사도 딴 방에 준비해 놓았어요."

후사는 그녀에게로 다가와서 등을 씻어 주겠다고 했다.

"너무 오래 탕 안에 계시면 안 돼요. 살결이 마르고 주름이 지 거든요. 그러면 군주님께서 좋아하시겠어요?"

이렇게 말하고는 깔깔대며 웃는다.

"이 새 궁전은 너무나 아름다와."

로니는 바디르와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피하려고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바디르 어머니도 여기에 사시나?"

"아뇨, 제노비아 왕후님과 마리암 공주님은 몇 마일 떨어진 궁전에서 살고 계신답니다. 그리고 파티마 왕후님과 따님들은 딴 집이 마련돼 그곳에서 사시죠. 군주님은 어머니를 두 분이나 두셔서 좋으시겠어요. 아참, 군주님은 너무 바쁘세요. 이 나라는 하룻밤 사이에 변했거든요. 그래요, 우린 정말로 군주님의 은총을 받은 거예요. 밤낮으로 군주님은 국민들의 복지를 위해 일하신답니다. 아마 왕비님은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도시와 도시를 잇는 새 도로들, 병원, 학교지난 5년 동안 군주님이 하신 일들은 정말 놀라운 거죠."

"그건 오래 전에 그렇게 됐어야지."

로니는 짤막하게 말하고는 금방 후회했다. 도만 국민들이 그렇게 필요로 하던 사회개혁이 늦어졌던 건 바디르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이제 군주님이 사랑하시는 왕비님과 함께 사시게 됐으니 얼마나 행복하실까요? 그리고 어린 공주님은 굉장히 예쁘시고."

후사는 일어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 왕비님이 아이를 잃지 않도록 기도했어요. 알라신께 제 기도를 들어 달라고 간구했지요. 왕비님이 이곳을 떠나가실 때 전 너무나 걱정했어요. 그때 어땠었나 기억나세요?"

그녀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며 로니에게 탕 안에 너무 오래 있지 말라고 재차 당부하고는 웃으며 방을 나갔다.

로니는 욕조에서 나와 떨리는 손으로 몸을 닦았다. 그래, 옛날 기억이 나냐구? 물론이지. 그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어. 이 나라로 다시 돌아와야 했을 때, 그리고 또다시 바디르와 함께 지내야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괴롭고 비참했던 것도 다 그때의 기억 때문이지.

후사가 꺼내 준 실내복과 가운을 입고 로니는 안정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내가 지금 이렇게 제정신을 찾을 수 없는 건 2주일 동안의 긴장과 긴 여행으로 인한 피곤함 때문일 뿐이야.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건 충분한 수면이야.

로니는 거실에 놓여 있는 음식을 무시한 채 커다란 침실로 들어갔다. 자기 주위를 살펴보느라 너무 피곤했던 그녀는 침대에 들어가자마자 금방 잠들어 버렸다.

아치형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과 열린 창으로 불어오는 미풍에 사각거리며 흩날리는 커튼 소리에 로니는 잠이 깨었다. 그녀는 졸린 눈으로 분홍빛 벽과 장밋빛 실크 커튼을 바라보았다. 커튼은 커다란 침대 위의 천장에서부터 우아하게 내려뜨려져 있었다. 작은 소리가 들려와 로니는 고개를 들었다. 욕실로 통하는 문 쪽에 바디르가 서 있다.

"오호, 드디어 일어났군."

그는 흰 대리석 바닥을 가로질러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이제 막 샤워를 하고 나온 모양이다. 그의 검은 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고, 허리 부근에 작은 타월 하나만이 걸쳐져 있다.

한 줄기 햇살이 그의 팔과 넓은 어깨의 구릿빛 피부를 비춰 주고 있다. 시간도 그의 힘찬 매력을 씻어가 버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로니는 자기 남편을 바라보면서 온몸에 밀려오는 전율을 느꼈다. 그가 침대 위에 올라와 그녀 옆에 앉자 비로소 그녀의 머릿속에선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금 몇 시죠?"

로니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면서 낮은 소리로 물었다.

"10."

바디르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미소 지었다.

"세상에! 제이드는요?"

로니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제이드를 보러 가야겠어요, "

"그럴 필요 없어. 제이드는 벌써 아침 먹고 페이잘 숙부와 미스 잭슨과 함께 말을 타러 갔으니까."

그의 애정 어린 부드러운 말투에 또다시 신경이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그의 검은 눈이 그녀가 입고 있는 얇은 실크 가운으로 쏠리자 그녀의 얼굴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너무 늦게 일어났군요. , 어쩜 이렇게 오랫동안 잠을 잤담? 일어나서 옷을 입어야겠어요."

로니는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지 않는데, 지금은 말야."

그는 재미있다는 시선을 던지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게 딴 계획이 있는데"

"싫어요! 제발 바디르, 당신은 진정으로 날 원하고 있지 않아요. 당신도 알잖아요! 다른 여자들이 많이 있잖아요"

"나와 당신 자신을 모욕하지 말라구, 로니.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보여 주지."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깨끗이 사라졌다. 그의 검게 번뜩이는 눈을 보며 로니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싫어요! 제발안 돼요!"

로니는 침대에서 빠져나오려고 바둥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바디르가 그녀의 손목을 세게 움켜쥔다. 손목을 잡아빼려 했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바디르를 향해 무자비하게 되돌려져 있었다. 그에게 잡힌 손목이 으스러질 것만 같다. 로니의 입에선 작은 비명이 새나왔다. 그녀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빨로 그의 손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끙끙거리며 그녀의 팔을 약간 놓아 주었다. 그러나 금방 다시 그녀를 잡아 끌어당겼다. 바디르는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혀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당황해하는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좋아, 내 붉은 머리의 아가씨. 당신이 언제까지 날 거부할 수 있나 보자구."

그는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이제 곧 당신은 완전한 만족감을 갈구하게 될 거야."

"아녜요!"

로니는 그의 어깨를 떠밀며 소리 질렀다.

"난 아주 참을성이 많은 남자야, 로니."

바디르는 느릿느릿 말했다.

"5년 동안을 기다려 왔어."

"당신을 증오해요! 이건, 이건정당하지 못해요!"

그녀의 푸른 눈에는 분노와 좌절의 눈물이 넘쳐흘렀다.

그의 입술은 잔인한 미소로 일그러졌다.

"아니, 당신은 날 증오하지 않아. 그럴 필요도 없고. 오히려 나만이 해줄 수 있는 자비로움을 간청하게 될 거야."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감싸고 그 달콤함이 흩어진 감각을 침범해 들어오면서 로니의 저항은 점점 더 수그러들었다.

로니의 감정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도 같이 그녀가 이전엔 경험해 보지 못한 영역으로 자꾸만 달려가고 있었다.

"바디르, 바디르!"

로니가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그는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

"?"

"바디르제발!"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날 원하나, 로니?"

그의 낮은 목소리는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우며 들어오는 듯했다.

""

승리의 웃음을 터뜨리며 그는 다급하게 그녀의 몸을 감싸들어왔고 그들은 곧 환희의 절정에 이르렀다.

바디르의 품에 조용히 안긴 로니는 자기가 보인 터무니없는 반응에 쓰라린 부끄러움을 느꼈다. 애써 냉정하려고 했건만

"이제 알았어?"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정당하지 못하다고 해야 할 이유는 없겠지?"

그의 말은 로니의 굴욕감을 더욱더 가중시킬 뿐이다.

"꼴도 보기 싫어요! 당신그리고 나 자신도."

그녀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흐느껴 울었다.

"얼마나 더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하느님."

바디르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올려 자신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게 했다.

", 내 사랑, 난 얼마나 좋은지 몰라."

그는 부드럽게 말하고는 떨고 있는 그녀의 입술 위로 자기의 입술을 재빨리 갖다댔다.

"당신을 원해. 그리고 난 언제 어딜 가든 당신을 항상 데리고 갈 거야. 당신은 내 아내야당신은 나만이 줄 수 있는 달콤한 기쁨을 열망하게 될 거고."

절망으로 흐느끼던 로니는 어느 새 또다시 열정의 깊은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폭발시켜 버릴 것만 같은 그의 압도적인 힘에 이끌려 그녀의 몸은 한없이 타들어 갔다.

 

6

"잘 자거라, 제이드."

로니는 몸을 숙여 딸에게 키스해 주었다.

"내일도 말을 탈 수 있어요, 엄마?"

로니는 웃었다.

"지난 4주일 동안 거의 매일 탔는데, 내일이라고 뭐 다르겠니?"

"작은할아버진 나보고 말을 잘 탄다고 하셨어요. 내게 소질이 보인대요."

제이드는 엄마를 보고 방긋 웃었다.

"엄만 페이잘 할아버지가 낙타도 탈 줄 아신다는 걸 아세요? 그래요, 할아버진 정말로 탈 수 있으시대요. 미스 잭슨에게 낙타 타는 걸 가르쳐 주신다고 했어요. 하지만 난 조랑말 타는 것부터 우선 배워야 한대요. 진짜로."

제이드는 말을 잠깐 끊고는 자기가 알고 있는 단어 중에 가장 좋은 수식어를 골라냈다.

"진짜로 할아버진 기차다구요."

로니는 미소를 지었다.

", 이 수다쟁이야, 이젠 자러 갈 시간이잖니?"

"정말 그렇군!"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어깨 뒤에서 들려오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바디르는 퓨마처럼 조용히 다가왔다. 그는 제이드의 침대 모서리에 와서 조용히 앉는다. 이 사람은 야생동물만큼이나 예측할 수 없고 위험한 사람이다. 로니는 갑자기 그가 더욱더 두렵게 느껴졌다.

"엄마가 예뻐 보이지 않아요?"

제이드는 일어나 앉아 아빠의 목에다 팔을 감으며 물었다.

"아빠, 오늘밤엔 안 나가세요? 나도 같이 가고 싶어요."

"넌 아직 너무 어려서 안 돼."

바디르는 웃으면서 제이드에게 키스해 주고 베개 위로 내려놓았다.

"아참, 그리고 네 엄마는 아주 예쁘구나. 날이 갈수록 더 사랑스러워져."

"네 아빠는 아주 아부를 잘하시는 분이지!"

로니는 가볍게 말하며 일어서서 제이드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주고는 방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며 시계를 흘끗 보았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 준비할 시간은 한 시간도 넘게 남았으니까.

자기 방으로 들어간 로니는 아치형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며 행복한 기분을 맛보았다. 계단식 폭포에서 내려오는 차갑고 맑은 물로 채워진 대리석 풀과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이 나라에 도착한 지 거의 한 달이 다 돼가지만 로니에게는 아직 도만의 변화와 그리고 남편과의 혼란스러운 감정에 적응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남아 있었다.

후사의 바디르에 대한 찬양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 나라에서 첫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그녀는 정말로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모든 도시에 학교와 병원들이 들어서고, 새로운 정신이 온 나라에 확산되고 있었다. 단지 그 낡은 궁전을 없애 버리는 데 만족하지 않고 바디르는 무리아의 허물어져 가는 집들을 대부분 철거해서 현대식 가옥과 쇼핑센터를 세운 것이다.

로니가 도만으로 끌려 올 때 가졌던 분노는 바디르의 개혁의지와 국민에 대한 진정한 사랑에 감동해서 날이 갈수록 점점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도만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날까지만 해도 이런 너그러운 생각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편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 맛있는 음식에 손을 댈 수도 없을 정도였으니까.

", 그럼"

하인들이 커피를 따라 주고 나가자 바디르는 조용히 말했다.

"이곳에서 당신이 할 일을 찾아봐야지?"

"당신은 이미 생각해 놓은 게 있을 텐데요?"

로니의 신랄한 반응에 그는 웃기만 했다.

", 내 사랑하는 부인, 내가 깨어 있는 시간은 모두 당신의 감미로운 육체에 바치고 싶지만해야 할 일도 많고. , 사람이란 즐기기도 해야 하고 일도 해야 하고"

그가 쓰는 즐긴다는 표현에 로니는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해 보였다.

"당신의 그아내로서의 재능은 제껴 놓고 말이지."

바디르는 그녀가 화를 참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익살을 떤다.

"당신이 유능한 직업여성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당신이 디미트리 카샨 상사를 운영할 수 있다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새로운 사업계획을 진행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거야."

"어떤 사업계획?"

"카펫 산업이지. 그리고 현대식 섬유산업도. 도만에선 아직도 전근대적인 염색기술에 의존해서 직물을 생산해내고 있거든. 당신은 이 방면에서 그야말로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기 생각에만 몰두해 있던 로니는 깜짝 놀라 멍청히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요카펫 시장에 대해선 조언해 드릴 수 있겠지만, 도만에는 카펫을 짜는 전통이 없잖아요. 멋진 생각이긴 해도, 직조공을 훈련시키는 데만도 몇 년이 걸릴지 몰라요. 게다가 난 이 나라에서 모든 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지도 못하고"

"난 한 나라를 통치한다는 건 커다란 회사를 경영하는 것과 같다는 걸 알았소."

바디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면 이런 계획을 말하지도 않았을 거야. 당신은 나와 장관들을 돕고, 우린 당신이 말하는 기술적 요구만큼 상당한 재원을 확보해 주겠어."

로니는 테이블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바디르가 말하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가 하렘에서 갇혀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가? 그는 정말로 그녀에게 보다 더 의미있는 인생을 살도록 해주려는 것일까? 거기에는 물론 대단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 시도해 볼 만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아라비아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갑자기 울적해졌다.

"그래요, 참 멋진 생각이에요. 그런 기회가 주어지기만 한다면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회교 나라에 사는 여자가"

그녀는 자신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요. 그에 관한 한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로니, 확실히 도만은 바뀌었어. 시대가 바뀌었다구."

바디르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내가 통치하게 되면서부터 아버지의 박해를 피해 외국으로 갔던 국민들을 돌아오도록 장려했지. 거기엔 우리가 요구하는 기술을 가진 외국인을 고용하려는 의도도 있고."

그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했다.

"이란 이라크 전쟁 난민들에게 보호시설도 마련해 주었다는 사실엔 당신도 흥미를 가지게 될 거요. 그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카펫 편직공이니까."

"대단히 좋은 생각이에요. 우린 그들의 전문기술을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바로 그거요!"

바디르는 들떠 있는 로니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내가 카펫 산업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 이유를 이제야 이해한 것 같군. 그리고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대개 자유로운 생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회교 복장에 대한 규율도 좀 완화하기로 했지. 난 사실 좀 더 자유스러운 통치를 하고 싶어. 그러면 당신도 좀 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될 거야. 물론 최소한 두 명 정도의 경호원이 따라붙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렇지만 물론 그들은 당신을 보호만 할 뿐이지 당신 일에 대해서 간섭을 하는 건 아냐. 그리고 당신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지 않아도 되고. 당신의 그 서양식 옷을 입어도 되는 거야."

로니는 자기에게 개인적인 자유와 활동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그 모든 얘기들은 꿈 같은 내 용들이 아닌가.

"런던에서 왜 이런 사실들을 내게 말해 주지 않았죠?"

"내 말을 믿었겠어? 당신은 날 무슨 지독한 악당 대하듯 했잖아? 이런 말을 해봤자 시간낭비에 불과했을 걸?"

"그래요, 사실 난"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바디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스쳐 지나가갔다. 그 친근하고 따뜻한 미소를 보면서 로니는 다시 한번 둔탁한 충격을 받았다.

"난 아직 당신 대답을 기다리고 있어."

침묵을 깨고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기꺼이 날 도와 주겠소, 아니면 이 일이 당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오? 당신의 정신적 육체적 능력으론 너무 무리라고 생각하나?"

"아뇨, 물론 그렇진 않아요!"

그의 거만한 말에 자극되어 로니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경박한 반응을 후회했다.

"그래, 동의한 거야. 좋았어!"

바디르는 일어서며 말했다.

"그런데 의논해야 할 게 많아요난 모든 것에 동의한 건 아니니까요."

그의 손에 이끌려 침실로 가면서 로니는 분명히 말했다.

"그래, 물론 당신은 내가 바라는 걸 해주리라 확신하고 있었어."

침실 문을 닫으면서 그는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난 확신했지. 당신이 해줄 거라고그래, 오늘밤에 말야!"

 

일은 그렇게 돼버린 거였어! 로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괘종시계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오늘밤에 있을 공식적인 연회에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서둘러야 한다.

침실로 들어서자 후사가 준비해 놓은 하얀 실크 드레스가 다이아몬드 왕관과 더불어 테이블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도만의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의 옷차림을 본 이후로 로니는 바디르가 런던에서 그 많은 것들을 사들인 이유를 궁금해 하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면 마리암과 이복누이들, 즉 나디아와 사라는 결혼식이나 리셉션, 그리고 오늘밤 연회와 같이 특별한 때를 위해서는 파리로부터 옷을 사들여 와야 할 정도였다.

로니는 옷을 벗으면서 마리암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옛날 그 지독한 감옥 같은 생활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돼 주었던 어린 소녀의 모습을 지금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제 l9살이 된 마리암은 다시 보게 된 로니를 아주 어색하게 대했고, 로니 또한 그들 사이의 벌어진 틈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몰랐다. 게다가 셰이크 사미르가 이 키 크고 날씬한 아가씨에게 아주 푹 빠져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오빠의 아내에게까지 어색하고 신경질적으로 대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마리암과의 관계는 되살려 볼 생각이 있다지만 제노비아 왕후와는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는 바디르의 요구에는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해서 막상 만나 보니 두려워했던 만큼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 늙은 왕후는 옛날보다 훨씬 더 호의적으로 로니를 대해 주었다.

"내게 임신했다는 걸 숨겼다고 나무라진 않겠다."

왕후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린 그 아일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

도만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를 로니에게 간단히 물어보고는 덧붙였다.

"그런데 아이를 가끔 내게 보내 줄 수 있겠니?"

로니는 그러마고 약속했다. 할머니와 함께 차를 마시고 돌아오는 제이드는 언제나 즐거워 보였다.

파티마 왕후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더 살이 찐 그녀는 여전히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녀의 딸 나디아의 문제를 참고 견디기 위해선 저런 좋은 성격이 필요했으리라고 로니는 생각했다. 지금은 21살이 된 나디아는 이기적이고 항상 불만에 차 있었으며, 자기 동생 사라에게 심한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 다루기 힘든 나디아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반면 부드럽고 상냥한 성격을 가진 사라는 바디르의 삼촌 셰이크 하산과 3년 전에 결혼했다. 바디르가 체포됐을 때 항의하다가 감금당하기도 했던 하산은 사라와 결혼할 무렵 이미 딸을 하나 가진 홀아비였다. 그들은 아들을 하나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그 아들은 지금 두 살이고 바디르의 후계자로 돼 있다.

그리고 바디르의 또 한 명의 삼촌인 페이잘은 그의 거의 모든 생활을 말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페이잘과 제이드는 처음부터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작은 꼬마 아가씨는 거의 마구간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다.

제이드 생각을 하며 로니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틀었다. 어린 제이드는 자기의 새로운 생활에 행복해하고 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그리고 조랑말과 다정한 페이잘 할아버지와 더불어. 내 자신의 문제가 어떻든 간에 난 올바른 선택을 한 거야. 제이드를 생각한다면 모든 게 참 다생한 일이지.

시원한 물줄기가 새 직물공장 문제로 입씨름하던 한낮의 뜨겁던 열기를 식혀 주었다. 바디르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벌써 이란의 망명자들과 함께 일을 상당히 진행해 놓고 있었다. 자기네들의 기술이 도만에서 가치를 인정받게 되자 그들은 몹시 기뻐했다. 이미 몇몇 마을에서는 작업장이 건설되고 있다.

로니는 샤워를 끝내고 타월로 몸을 닦으며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흘끗 보았다. 자기가 보기에도 살결이 보드랍고 또한 풍만해 보인다. 또한 청록빛 눈동자는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 자기 자신이 이렇게 눈부시게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의 육체에 대한 바디르의 불타는 욕망이 점차 약해지길 바란다면 그와 동시에 자기 자신의 실망도 각오해야 한다. 아무리 거부하려고 애써도 밤마다 그의 뜨거운 사랑의 행위는 끊이질 않았다.

물론 처음엔 갖은 방법으로 그와 싸웠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였다. 그의 손과 입술이 강하게 덮쳐 오면 그녀는 꼼짝할 수가 없게 된다. 그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이렇게 며칠 밤이 지난 후부터 로니는 자기 자신에게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내가 바디르와 싸우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나 자신의 감정과 싸우고 있는 것인가? 지금에 와서 이 질문은 하나의 연습문제처럼 보일 뿐이다. 어떻게 그녀를 협박해서 도만으로 납치해 온 바디르에게 이렇게 손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뭐가 뭔지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녀는 지금에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18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만난 그녀의 첫사랑을 그렇게 쉽게 무시해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니는 아직도 그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자기를 버려 둘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마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하는 그에게 갖는 자신의 깊은 애정과 견주어 볼 때, 과거의 모든 일들은 너무나 불합리해 보인다.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함께 일하면서, 그녀와 바디르는 신뢰와 우정의 새로운 틀을 쌓아나갔다. 국민들에 대한 그의 관심과 배려, 그리고 자기희생적인 헌신에 거듭 놀랐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있는 힘을 다하여 그를 도왔다. 마음을 다 쏟아 그를 사랑했고그의 장점뿐만 아니라 그의 단점까지그것은 곧 로니 자신의 감정의 시작이자 전부였다.

그런데 바디르는 어떤가? 그는 육체적인 욕구에 대해서는 솔직하다. 그 사실은 매일 밤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기의 깊은 내심의 감정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는 항상 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마도 현실주의자인가 보다. 도만을 떠난 이후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던 몇 년이라는 세월을 망각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고, 딸을 혼자 떠나보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무시해 버린다는 것도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로니는 거울로 된 차가운 벽에 몸을 잠시 기대고 있다가 실크 가운을 걸쳐입고 천천히 침실로 나왔다. 생각에 너무 몰두해 있었기에 잠시 후에서야 비로소 그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창문 쪽에 서 있던 바디르는 로니가 들어오자 검은 안대를 옆으로 밀어내고 재미있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금방 제이드와 오랫동안 얘기를 했지. 우리가 며칠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제이드는 얌전하게 행동하겠다고 약속했어."

로니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얘기예요?"

"남부에 있는 내 여름 별장에 가기로 했소. 그렇게 오래 있진 않을 거야. 그동안 제이드는 미스 잭슨과 페이잘 아저씨와 함께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갈 수 없어요. 새 직물공장 때문에 어려운 일이 많아요. "

"지난달에 당신이 한 일에 대해 난 놀라고 있어. 하지만 나하고 말싸움 해봤자 아무 소용없을 거야. 우린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하는 것뿐이야."

그는 냉담하게 말했다.

로니는 무겁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가 일단 맘먹은 일이라면 아무리 반대를 해도 헛수고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와서 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바디르와 국토개발 장관이 그녀를 힘껏 도와 준다 해도, 섬유계의 새로운 경영자들은다른 아랍 남자들과 마찬가지로여자에게 명령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제이드도 우리가 떠난다는 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

바디르는 웃었다.

"말하는 게 당신을 닮았어."

"난 당신에게 경고했어요."

로니는 서랍장으로 걸어가 실크로 된 속옷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 그랬었지."

바디르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로니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곤 천천히 허리에다 손을 갖다댄다.

"당신이 내 말에 따르지 않을 거라고 말한 걸 난 잘 기억하지."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을 가볍게 누르면서 그녀의 긴 머리칼을 따라 내려왔다. 그녀는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게 되어 마치 그대로 석고상이 된 기분이었다. 얼음 같은 한기가 그녀의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 그녀의 벨트를 풀고 가운을 벗겨 발 아래로 떨어뜨리는 그의 손을 막을 힘이 없다.

"좋아, 로니?"

그는 중얼거리더니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을 자기의 입술로 덮어 버렸다. 그 달콤한 키스에 그녀는 작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는 로니의 푸른 눈을 응시한 채 입술을 떼고는 낮게 웃으며 그녀를 침대 쪽으로 데려갔다.

"아녜요, 바디르. 우린!"

로니는 숨을 헐떡거렸다.

", 그래, 우린 할 수 있어. 내 사랑."

"하지만 리셉션과 연회그리고 손님들은"

"나 없이는 리셉션도 연회도 할 수 없어. 그래, 우리의 손님들은 나의 즐거움을 기대해야만 할 거야. 그리고 달링, 내 즐거움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당신과 함께"

 

리셉션장에 도착한 것은 족히 반시간은 늦어서였다. 손님들은 다 모여 있었다. 변명으로 둘러댔다. 그러나 그녀의 붉은 얼굴은 그들이 늦게 온 이유를 정확히 나타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프랑스 대사의 환한 미소를 받자 더욱 그런 확신이 든다.

그들이 늦게 자기들의 궁전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로니는 아직 그 일로 혼란스러웠고 제이드도 걱정됐다.

"헛된 논쟁은 피하자구."

그들이 침실로 들어갈 때 바디르가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당신을 런던에서 데리고 오는 데 꼬박 2주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난 잊지 않고 있어. 그런 일은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좋은 교훈을 얻었지. , 이제 더 이상 얘기하지 맙시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오."

"당신이 침대로 들어가 얌전히 바로 잠드는 날이 있다면, 난 아마 너무나 놀란 나머지 심장마비를 일으킬걸요."

"당신의 그런 슬픈 종말을 두고 볼 순 없지."

그는 웃으면서 다가와 로니를 팔로 감쌌다.

"난 정말 끝까지 희생할 수 있지. 그리고 당신을 그 지독한 운명에서 구해 줄 수도 있어."

그는 그녀의 다이아몬드 머리장식을 떼내어 옆 의자에 놓으며 말했다.

", 당신은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로니는 그를 노려보았다.

"끝까지 희생할 수 있다구요? 정말 뻔뻔스럽군요."

그가 부드럽게 웃자 로니는 안절부절못하며 중얼거렸다.

"당신 자신이 어떤 사람인 줄 알아요? 당신은 완전히 구제할 수 없는사람이란 말예요!"

그녀의 떨리는 입술을 품으러 다가오는 그의 요구에 끌려 들어가면서 로니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로니는 여름 궁전의 넓은 테라스에 나와 앉아 있었다. 넘실거리는 청록색의 파도 너머 아라비아 해와 인도양의 바닷물이 만나는 드넓은 수평선이 내려다보인다. 이제 막 해가 지는 중이다. 그 붉은 빛은 긴 모래 해변을 은은한 호박색으로 물들여 놓고, 해변을 따라 서 있는 코코넛 숲을 굽이쳐 비추고 있다.

이 마준이라는 지방은 로니가 상상했던 황량한 모래벌판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이었다. 웨일스 크기만한 지역을 덮고 있는 높은 산맥들은 녹색의 비옥한 평온을 둘러싼 채 반원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평원은 카리브 사람들도 부러워할 만한 수 킬로미터의 모래 해변으로 이어져 있다. 이곳은 기후가 변덕스럽고, 매년 6월에서 9월까지 계절풍이 불어온다고 바디르가 설명해 주었다.

"계절풍이 불어오는 동안 해변이 구름과 안개로 뒤덮이게 된다면 그건 나쁜 소식이야. 왜냐하면 그건 비가 그치지 않는다는 징조고, 그 지방은 이내 암흑의 땅이 되고 말거든."

그는 금방 밝은 미소를 띠웠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지, 로니. 그 나머지 기간 동안 마준은 따뜻하고, 아열대 성 식물들로 가득 차 늘 푸르러 있어. 밀과 사탕수수와 목화밭을 가로지르는 강들과 코코넛 나무숲을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 그리고 푸른 바다와 빛나는 금빛 해변. 내겐 아니, 당신에게도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

어제 공항에서 이곳으로 오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고 난 로니는 바디르가 도만의 특별한 이 구역에 대해 그렇게 시적으로 표현한 이유를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푸른 들판은 농작물로 풍성하고 초원은 갖가지 꽃과 소떼들로 가득 차 있다.

풀이 우거진 정원 한가운데 서 있는 이 여름 궁전은 해변이 바로 내려다보이고 높은 벽으로 보호돼 있는 탑 모양의 건물이었다. 이 궁전은 바디르의 증조부 카림 군주가 l870년에 지은 것인데, 그 내부엔 안뜰로 통하는 미로와 또 다른 건축양식의 방으로 통하는 작은 통로가 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바디로가 테라스로 나왔을 때 로니는 그를 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녀가 커피를 가져왔고, 해질녘 어스름을 밝혀 주는 램프가 깜박이고 있었다.

"당신 가족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살았나요?"

"카림 할아버지 이후의 모든 술탄들은 이 지방과 이 궁전을 사랑하게 됐지. 나도 이곳에서 태어났어. 그리고 아마 이 안에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을걸."

그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미소 지었다.

"그럼 바로 여기서?"

"그래."

로니의 머뭇거리는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아버지가 날 체포해서 가둬 둔 곳도 바로 여기지. 재미있어 보 이지 않아? 여기 감금돼 있는 동안 두 번의 계절풍을 겪었지. 그후에 만일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난 아마도 어둠과 절망에 묻혀 자살하고 말았을 거야."

가벼운 말투였지만 쓸쓸함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그는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면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난 이 아름다운 곳에 대해 아주 상반되는 감정을 가지고 있어."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건 자연스러운 일일 거야. 누구라도 자기가 갇혀 있던 감옥으로 돌아와 보고 싶어 하진 않을 테니까. 물론 방을 새로 단장하고 바꾸는 게 도움이 되긴 하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모래를 찰싹거리는 파도 소리만이 밤공기를 가르며 들려왔다.

로니는 그의 생각을 방해하게 될까 봐 움직이지도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체포된 이후 바디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잃어버린 그림의 조각들을 채우듯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몇 달 동안의 폭우 속에서 난 이곳으로 끌려 오게 됐지."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

"이곳엔 나와 날 감시하는 사람들을 빼놓곤 아무도 없었어. 혼자 감금돼서 좋았던 점 한 가지는 우리나라를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내가 세운 계획들을 어떻게 실행에 옮길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뿐이었지. 사실 탈출하려고 맘만 먹었다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었어. 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버진 그 생각이 결말이 난 것으로 간주하신 것 같아."

"당신 아버진내게"

로니는 낮게 말했다.

"당신이 도망치려 한다면 날 지하감방에 가둘 거라고 말했어요. 미안해요, 바디르. 당신을 도울 길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 로니."

그는 미소를 띠웠다.

"아버진 그때 노망을 부리고 있었소. 아무리 멋있고 예쁜 천사라 할지라도 아버지를 설득하진 못했을 거야. 아버지와 전 국민과의 내란이 심해지자 내가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게 점점 더 분명해졌어. 하지만 그렇게 하기 전에 우선 당신이 안전한지 알아야만 했소."

"런던에서 당신이 말했잖아요. 당신이 날 이 나라에서 떠날 수 있도록 조처를 취했다구요. 그런데 난 그게 당신 어머닌 줄 알고 있었는데"

"그래, 그렇게 조처한 건 바로 나와 어머니라고 해야 옳은 말일 거야. 처음엔 그렇게 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어."

바디르는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의자에서 일어나서 어두운 테라스를 왔다 갔다 했다.

"내가 얼마나 바랐는지"

그는 중얼거리다가 거친 웃음소리를 냈다.

"모든 소원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거라면 거지라도 잘살 수 있겠지! 그 옛날의 일들을 후회해 봤자 얻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모두 지나간 일인데 말야?"

"그래요, 한데 당신이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갔는지에 대해선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건 다음에 얘기하자구. 지금은 너무 늦었고, 그리고 우린 훨씬 더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얘기해야 하니까."

떠오르는 달빛을 받고 있는 키 큰 남편의 모습을 로니는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바디르는 오늘밤 뭔가 좀 달라 보인다.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낮은 목소리가 로니의 혼란스러운 생각을 깨뜨렸다.

"당신은 왜 내가 우리 단둘이만의 시간을 원했다고 생각하지? 당신이 도만에 온 지 한 달도 넘었어. 이제 우리 관계에 대해서 얘기를 좀 나눠야 할 시간이야."

바디르는 다가와서 달빛에 빛나는 로니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매일밤 당신이 내 품안에서 느꼈던 게 불타는 욕망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겠어?"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밤이면 밤마다 당신의 감미로운 육체로 나를 돌려세워 놓은 것 하며, 사이렌 소리같이 나를 따라다니는 그 기쁨의 외침을 당신은 부정할 수 있나?"

차가운 밤공기에 온몸이 식어 버린 로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조만간 당신에게서 단순한 육체적 욕망을 넘어선 뜨거운 감정이 일어나게 될까?"

그는 상냥하게 물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과거를 잊고 다시 날 사랑하게 될 텐데. 내가 당신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듯이 말야. 지난 날의 내 행동이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망쳐 놓은 건가?"

로니는 그를 응시했다.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지금 정말로 바디르가 말하고 있는 건가? 믿을 수가 없어, 아직도그녀의 심장은 마구 뛰기 시작했고 피가 온몸을 통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입술은 갑자기 바싹바싹 타들어 오는 듯했고, 치솟는 흥분으로 통증마저 느꼈다.

"지금 방금 말한 걸 다시 한번 말해 줄 수 있어요?"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 달링."

그는 로니를 잡아당겨 팔에 안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에 자기의 얼굴을 묻었다.

"난 당신을 줄곧 사랑해 왔어. 단 일분도 빼지 않고. 나도 알아. 내가 당신을 진저리나게 대했다는 걸 말야. 우선 당신이 도만에 처음 와서 알게 된 사실들에 대해 난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었지. 그리고 당신이 도만에서 빠져나간 후에도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지 않았어."

그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사랑이란 믿음의 문제가 아니겠어? 그래서 지금 당신에게 날 믿어 달라고 얘기하고 있는 거야.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 당신을 버려 두었던 거라는 걸. 내가 도만을 떠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당신을 금방 데려올 수 없었던 것도 다 당신을 위해서였다는 걸 믿어 줘, 제발. 당신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어. 내 생각이 당신을 위한 최선의 결정이었다는 걸 이해하겠어?"

"아뇨, 난 당신이 말하는 걸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만은"

로니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계속했다.

"당신은 정말로 날 사랑하고 있나요?"

", 달링. 어떻게 그걸 의심할 수가 있지?"

로니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그는 속삭였다.

"난 사실 당신에게서 제이드를 빼앗아 오려던 게 아니었어. 하지만 당신이 결코 도만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었지.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꺼지지 않았기를, 그리고 이곳으로 돌아와 다시 우리들의 사랑의 꽃을 피워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살아왔는데"

", 바디르."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 다음 순간, 로니는 바디르의 팔에 꼭 안겨 그의 열렬한 키스를 받았다. 그녀의 모든 의구심과 불확실성은 사라져 버리고, 그녀의 가슴은 기쁨으로 뛰기 시작했다. 바디르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 눈앞이 아찔해진 로니는 자기의 떨리는 몸을 남편에게 의지했다.

", 바디르, 당신을 사랑해요!"

로니는 절실하게 속삭였다.

그는 승리의 외침을 터뜨리며 그녀를 안아올렸다. 그리곤 마치 솜털보다도 더 가벼운 듯 두 계단씩 층계를 마구 뛰어올라 포근한 침대 위에 로니를 내려놓았다.

"내 사랑 로니,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

 

길고 뜨거운 낮과 밤이 기쁨과 행복으로 빛나는 시냇물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로니와 바디르는 그 궁전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벽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방 저방을 그와 함께 다니면서, 혹은 이국적인 꽃향기가 가득한 정원의 나무 그늘에서, 로니는 자기 주위의 아름다운 것들에 도취돼 있었다.

"저것들은 당신의 이 황홀한 아름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어느 날 오후, 그들이 누워 있던 바로 옆의 맑은 물 위로 한 쌍의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바디르는 이렇게 말했다.

", 바디르저것 좀 봐요. 사랑스럽지 않아요?"

"보고 있어."

그는 팔꿈치를 짚고 일어나 그녀의 긴 가운을 풀어내렸다. 그러자 그녀의 고운 살결이 드러났다.

"당신은 정말 사랑스러워!"

지난밤 잠자리에서의 기억이 그녀를 떨리게 했다. 그녀는 기쁨의 긴 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

그는 깊은 키스를 했다.

"그리고사실"

로니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사실난 아이를 가진 것 같아요."

그 소식에 대한 그의 반응을 걱정했던 로니는 그가 뛸듯이 기뻐하는 것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당신은 정말 멋있는 여자야!"

로니를 껴안으며 바디르는 소리쳤다.

"당신에게 약속하겠어, 로니. 당신이 임신해 있는 동안 한시도 당신 곁에서 떠나지 않을 거야. 당신이 제이드를 가졌을 때 당신 곁에 있지 못한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 태어날 아들을 카림이라고 부릅시다. 우리 증조할아버지 이름을 따서 말야."

로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들이라고요? 난 장난감 기차를 사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요. 여자 아인 아마 인형놀이를 더 좋아할걸요?"

", 안 돼. 당신은 내 자리를 이을 아들을 하나 낳아 줄 거야. 난 확신해."

"그러면만일 내가 그렇게 못하면? 내가 딸을 낳게 된다면요?"

로니의 푸른 눈엔 금세 그늘이 졌다.

", 로니, 난 물론 아들을 원하지만, 만일 알라신이 우리에게 제이드처럼 예쁜 딸을 내려 주신다면, 더욱 행복하고 만족해할 거야."

로니는 다시 그의 입술과 손을 통해 밀려들어오는 욕망의 물결에 몸을 맡겼다. 부드럽고 푸른 풀밭 위의 그 평화로운 광경을 방해하는 것이라고는 로니가 내는 환희의 작은 신음소리뿐이었다.

높이 솟아 있는 한낮의 태양은 키 큰 나무들을 비추어 드넓게 펼쳐진 초원 위에 얽혀 있는 두 사람의 몸 위로 기다란 나무 그림자를 드리웠다.

 

7

", 슬프게도 우리의 좋은 날들도 이제 끝날 때가 가까와 왔나 보군."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 바디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난 또 공무를 돌보러 가야 돼. 내일 하산 아저씨가 우릴 만나러 오기로 돼 있거든."

로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아직도 바디르의 사랑에 대한 놀라움과 기쁨에 흠뻑 젖어 있어서 그들의 행복한 결합을 방해하는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당신은 제이드를 보고 싶어 할 거고. 당신도 어젯밤에 말했었지? 전화로 제이드와 얘기하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말야."

"그래요, 하지만 제이드가 우리를 그렇게 아쉬워하진 않는 것 같아요. 페이잘 숙부를 제이드는 너무나 좋아하고 있거든요. 당신도 주의하지 않으면, '기찬 사람'이 못될 거예요."

"도대체 제이드는 어디서 그런 말을 골라냈지?"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글쎄 말이에요. 석 달 전쯤,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고 나더니 ''이라는 말을 막 하고 다니잖아요. 어머니와 난 몇 주일 전에야 그 말을 못하게 하는 데 성공했어요."

로니는 깔깔대며 웃었다.

바디르도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 그래. 그런데 난 이번에 태어날 아이가 정말 남자 아이기를 기도하고 있어. 제이드와 같은 딸아이를 두 명씩 갖는다고 생각해 봐. 어휴, 그 수다를 어떻게 감당해?"

"그렇긴 해요."

로니는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

"그건 그렇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덧붙였다.

"제이드가 자기 사촌 알리를 알게 되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래서 하산 숙부님 내외와 알리도 불렀지. 당신도 사라를 다시 보지 돼서 즐겁지?"

"그럼요, 난 사라를 좋아해요. 그녀는 자기 어머니를 닮아 친절하고 차분하죠."

"그래, 그런데 자기 어머니처럼 뚱뚱해지진 않았으면 좋겠어. 파티마는 날이 갈수록 살이 더 찌신단 말야."

그러나 사라는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처럼 보인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오후, 로니는 테라스에 나와 앉아 이런 생각을 했다. 사라는 임신 7개월이라고 로니에게 웃으며 고백했건만, 그녀는 여전히 날씬하고 자그마했다.

"혹시 로니 당신도?"

사라는 그날 아침에 로니의 붉은 피부와 긴 가운 밑으로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보고 이렇게 물어왔다.

로니는 배가 불러 와 더 이상 사실을 감출 수 없게 될 때까지는 임신했다는 사실을 자기와 바디르만의 비밀로 하려고 했다. 그래서 사라의 갑작스러운 질문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라의 아들 알리는 테라스 한쪽 끝 모래밭에서 조용히 놀고 있다. 로니는 사라에게 자기가 아기를 가졌다는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당신도 아다시피 궁전 안에서의 소문이란 그렇잖아요."

로니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금방 쫙 퍼져서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죠."

"맞아요."

사라는 슬픈 듯이 동의했다.

"그런데 제이드는 어디 있죠? 오후 내내 보이질 않네요?"

", 페이잘 숙부님 낚시 가시는 데 따라갔어요. 하산 숙부님과 바디르만 데리고 가실 생각이셨는가 본데 어디 제이드가 가만있겠어요? 기어이 따라가고 말았죠."

로니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도 함께 데리고 갔어요. 페이잘 숙부님 참 멋쟁이시죠?"

"글쎄요그렇긴 한데"

사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런데 페이잘 숙부께서 미스 잭슨을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사실 뭐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놀라운 일이 아니라구요?"

로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페이잘 숙부님이 지금 나이가 몇이신데, 엘리자베스와"

사라의 남편 하산 숙부가 페이잘 숙부보다도 더 나이가 많다는 생각이 떠올라 로니는 머뭇거렸다.

"괜찮아요, 로니."

사라는 미소를 지었다.

"영국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오래 된 바이올린 소리가 더 좋다!' 하산은 이미 백발이 됐지만 난 내 남편이 모든 면에 있어서뭐랄까정력적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그녀는 깔깔대며 웃는다.

"제발당신네 둘은 결혼과 어린애 얘기 외에는 할 얘기가 없나요?"

이 날카로운 말투에 로니는 얼른 뒤를 돌아다보았다. 테라스를 따라 죽 놓인 안락의자 중의 하나에 나디아가 앉아 있다. 나디아가 왔다는 얘기는 들었다. 별로 유쾌하지 못한 손님이지만.

"결혼과 아이는 그야말로 진실된 생활의 한 단면이죠."

로니는 미소를 띠우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진실이라구요! 우리 불쌍한 여자들은 결혼하자마자 자기네들이 덫에 걸렸다는 걸 깨닫게 돼요."

사라가 자기 언니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걸 좀 완화시키려고 로니는 살짝 웃었다.

"그게 사실일지도 몰라요, 나디아. 하지만 당신도 사랑에 빠지게 되면, 자기가 그렇게 따뜻하고 애정어린 덫 안에 있다는 사실을 행복하게 여길 거예요."

"전혀 그렇지 않을걸요."

나디아는 로니를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은 어리석은 여자예요. 당신 남편이 또 다른 아내의 침대에서 바로 당신에게로 돌아가도 당신은 반갑게 맞아 주겠죠? 하지만 난 그런 모욕을 참을 수 없어요."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로니는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라는 나디아가 더 이상 얘기하지 못하도록 손을 흔들어댔다.

", 모두 어리석군!"

나디아는 사라에게 날카롭게 말했다.

"바디르는 어떻게 아이샤 얘길 로니에게 계속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언젠가는 로니도 알게 될 텐데 말야. 로니가 사실을 아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나디아! 언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사라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바디르는 아마 언니를 죽이려고 할 거야. 언닌 어쩜 그렇게 심술궂고 잔인하지?"

"난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아랍어로 다투기 시작하는 자매를 보며 로니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른 아내라뇨? 아이샤? 난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 여자에 대해선"

"물론 로니 당신은 들었을 리가 없죠. 가엾은 로니!"

나디아는 악의에 가득 찬 말을 내뱉었다.

"당신의 그 소중한 남편도 다른 남자들과 다를 게 없어요. 정말이에요."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바디르는 훌륭한 회교도일 뿐이에요. 당신은 행운이라고 생각지 않나요, 로니? 다른 아내가 한 명밖에 없으니 말예요. 네 명쯤 거느릴 수도 있을 텐데"

로니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바디르가다른 여자와 결혼했다고? 또 다른 아내라니? 나디아는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거겠지. 저 여자는 어쩜 저렇게 심술궂고 어리석기까지 할까. 저런 여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니, 나도 참 어리석지. 가능한 한 빨리 그녀를 자기 어머니에게로 돌려보내라고 말해야겠다. 정말 더 이상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

로니는 사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사라의 뺨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게 아닌가!

"어머, 사라, 울 필요 없어요. 나디아가 분별이 없어서 그런 걸 뭐. 모두가"

자기를 바라보는 사라를 본 순간 로니의 목소리는 줄어들었다. 사라의 눈에 담긴 의미는 분명 슬픔과 동정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요, 사실이에요."

사라는 눈물을 닦으려고 손수건을 찾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로니, 미안해요. 우리의 이런 풍습이 서양 여자들에겐 이해하기 힘들다는 걸 나도 잘 알아요. 하지만 바디르는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어요. 난 잘 알아요"

"그런데 어떻게?"

로니는 자신의 가슴을 감싸고 있는 손이 얼음처럼 차가와진 걸 느꼈다.

"그리고 아이샤는 도대체 누구죠?"

사라는 의자에 기대앉아 있는 나디아를 노려보았다.

"언니 소원을 말하길 잘했군 그래. 바디르는 언니가 한 짓을 알게 되면 아마 언니를 가만두지 않을걸."

사라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제발 사라, 사실대로 얘기해 줘요."

사라의 말에 나디아가 반항적인 고개짓만을 해보이자, 로니는 큰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심한 아픔이 밀려 와 온몸이 죄어들었다. 거의 숨을 쉴 수가 없다.

사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디르는 이 얘기를 비밀로 하라고 했지만사실이에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녀는 힘들게 얘기를 시작했다.

"한 가족의 장자는 그 숙부의 딸과 결혼하게 돼 있잖아요, 우리의 전통으론 말예요. 그래서 바디르는 하산의 딸이자 그의 사촌 누이인 아이샤와 결혼했죠. 당신이 이해해 주길 바래요. 물론 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당신은 하산과 결혼했잖아요."

로니의 머리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아이샤의 어머니는 아이샤를 낳고 바로 결핵으로 죽었어요. 그 병으로 아이샤의 외가 가족들도 많이 죽었죠."

사라는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아이샤는 바디르와 결혼을 했어요. 그리고 한참 후에 난 하산과 결혼했죠."

"그런데 어떻게? 내 말은어디서? 그리고 언제?"

로니는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나도 자세한 건 잘 몰라요. 그때 난 어렸으니까요. 아마도 내 생각엔 그들이 결혼한 건 5년이 좀 지난 것 같아요. 그리고 아이샤는 지금 무리아 뒤편에 있는 산에서 살고 있죠. 그런데 로니, 중요한 건 당신이 이해해 주는 일이에요."

중요한 건 내가 이해해 주는 일이라고? 그녀에겐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무서운 공포가 떨리는 그녀의 몸을 번갯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자기는 바디르와 중혼을 한 것이며, 자기의 귀한 딸도 비합법적으로 처리돼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순간 무엇인가가 그녀의 머리를 세게 내리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그 테라스와 궁전과 바다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점점 더 빨리 돌아 결국은 그녀를 멍한 상태로 이끌어갔다. 그녀가 제정신에서 들었던 마지막 소리는 자기의 억눌린 신음소리뿐이었다. 이어 로니는 딱딱한 테라스 바닥 위로 쓰러졌다.

그 빙빙 도는 흐릿한 안개로부터 떠올라 멍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로니는 지금 자기가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걸 알았다. 방안은 많은 하인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은 모두 상기된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이마에 차가운 수건을 대주고 있는 사라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방안의 소음과 혼란스러움이 너무 심해 견딜 수 없이 느껴졌다. 로니는 신음소리를 내며 또다시 끝없는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로니가 완전히 의식을 되찾았을 때엔 모든 소음과 혼잡함이 사라지고 조용했다. 빈 방을 둘러보다가 로니는 창가에서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바디르를 발견했다. 로니는 조금 전 테라스에서의 일을 떠올려 보고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무슨 일이야, 로니?"

그는 침대 옆에 앉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궁전 안에 있는 사람 누구한테서도 난 얘기를 듣지 못했어. 내가 낚시에서 돌아왔을 때, 사라는 울기만 할 뿐 아무 설명도 해주려 하지 않더군. 하인들도 자기들 방에 숨어서 집에 무슨 초상이라도 난 듯이 울고만 있으니, 무슨 일인지 제발 말해 줘, 로니."

그는 그녀의 이마에서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쓰다듬어 주며 부드 럽게 말했다.

바디르의 따뜻하고 친절한 손의 감각은 그녀를 더욱 슬프게 했다. 샘솟는 눈물이 끊임없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내 사랑 로니. 의사를 불렀으니까 이제 곧 괜찮아질 거야."

"아뇨! 난 괜찮아지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파묻으며 흐느꼈다.

", 바보같이 울긴"

"뭐라구요?"

로니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녀의 몸은 분노로 이글거렸지만, 몸속에서는 한기를 느꼈다.

"남편이 거짓말쟁이, 부정한 남자라는 걸 알고 나면 내가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리고 내 아이가서출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내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그의 손이 갑자기 멎었다.

"그게 사실이에요? 당신, 정말로 나 말고 다른 아내가 있는 거예요?"

그녀의 쉰 목소리는 온 방에 울려 퍼졌다.

로니는 겨우 일어나 앉아서 푸른 눈으로 바디르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선 핏기가 가시고,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래요?"

로니는 떨리는 손으로 또다시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닦아냈다.

"당신에겐 다른 아내가 있는 거죠, 맞죠?"

바디르는 괴로운 듯 자기 이마에다 손을 갖다 대면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로니. 부인하진 않겠어. 내게 다른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말야.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죠? 나디아 말이 맞나 보죠?"

로니는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적어도 이 나라에 네 명의 아내를 숨겨 놓았겠죠?"

"나디아가!"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큰 걸음으로 왔다갔다했다.

"그 못된 것이!"

"그래요, 나디아는 못됐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아주 옳았어요!"

로니는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어떻게 당신은 그렇게 오랫동안 날 속일 수가 있다고 생각했죠? 누군가 내게 말해 주었어야 했어요. 내가내연의 처라는 걸"

그녀는 흐느끼며 또다시 베개 위로 몸을 던졌다.

바디르는 침대 쪽으로 와서 눈물에 젖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 내 단 하나의 사랑. 로니, 당신은 정말로 내 아내요. 그리고 우리 아이도 서출이 아냐! 난 제이드가 나의 합법적인 딸이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도 그렇다는 걸 당신에게 맹세할 수 있어."

"맹세라구요? 그 따위 맹세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

로니는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서 몸을 빼냈다.

"그리고 이 끔찍한 나라에서 '합법적'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 한 남자가 동시에 네 명의 아내를 가지는 것도 합법적이고, 그 남자의 아이들도 모두 합법적이죠. 그 애들 어머니가 누구든 간에 말이에요. 이 나라에선 모두 합법적이죠. 유럽이나 미국에서 말하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살려고 해도, 당신은 또 금방 중혼제에 얽매이고 말 거예요."

바디르는 또다시 일어나서 방안을 뚜벅뚜벅 걸어 다녔다.

"정말이야, 로니. 당신은 내 첫 번째이고 합법적인 아내야. 우리의 결혼은 유럽이나 미국식 법에 비추어 봐도 합법적이야. 당신에게 맹세할 수 있어. 그러니까 제이드는 진짜 내 딸이고,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아이도 서출이 아니라구."

"대단하시군요."

로니는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다른 아내들과 아이들에 대해선 어떡하죠? 그들에겐 뭐라고 말하나요? 잠자리에서 내게 해주었던 똑같은 얘기를 하나요? , 하느님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그녀의 울음소리는 온 방을 돌아 소름끼치게 그녀의 귀에 다시 울려왔다.

"로니! 제발 좀 진정해."

"진정하라구요? 지금 진정하라구 그랬어요?"

그녀는 고함을 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가 당신을 진정시켜 드리죠, 군주님!"

로니는 빈정대면서 바디르의 뺨을 한 대 쳤다.

"그래, 충분해."

그는 또다시 올라가는 로니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당신이 날 때리고 싶어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야."

", 그래요?"

로니는 그에게서 손목을 빼려고 애쓰면서 숨을 헐떡거렸다.

"내가 칼을 가지고 있었다면 서슴없이 당신의 그 시커먼 가슴을 찔렀을 거예요."

바디르는 입술을 삐죽였다.

", 그래, 당신은 그럴 수 있겠지."

"웃을 일이 아녜요!"

"물론이지."

그는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 이제 우린 분별 있고 차분하게 얘기해야 돼."

그는 로니를 침대 쪽으로 데리고 와서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난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 다른 여자와 결혼한 적이 없소. 우리의 결혼은 아랍에서나 서양에서나 완전히 합법적인 거야. 그래, 난 또 다른 아내가 있긴 해. 그건 내가 회교나라의 법에 따른 것이고, 우리가 결혼한 다음의 일이었어. 그 여자와 내게 있어선 그것도 또한 합법적인 결혼이지. 내 말 이해하겠어, 로니?"

바디르는 로니의 턱을 쥐고 자기의 검은 눈을 향해 얼굴을 돌리게 했다.

"나야 모든 걸 너무나 잘 이해하죠."

로니의 목소리는 떨렸다.

"도대체 당신에겐 얼마나 많은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거죠?"

"당신 말고 딴 아내는 한 명밖에 없어. 아이도 제이드 외에는 없고. 이 문제를 잘 생각해 보면, 물론 내가 태만하긴 했지만 의도적으로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당신이 말하는 '거짓말'이라는 것과 내가 말하는 '거짓말'이라는 것은 아주 다른 것 같군요."

로니는 신랄하게 말했다.

"지난 5년 동안 내게 커다란 거짓말을 했죠. 이 일에 대해선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어요."

", 달링. 당신이 내 말을 좀 들어본다면"

"내게 이 혐오스러운 일을 받아들이게끔 할 달콤한 말들을 할 기회를 달라구요? 천만에요! 내가 그 달콤한 말에 빠져 있는 동안 당신은 다른 아내에게 내 얘기를 할 테죠? 아니면 내 존재에 대해서도 그 아내에게 숨기고 있나요?"

"아냐, 아이샤는 당신에 대해 전부 알고 있어. 그리고"

로니는 목구멍 끝까지 차오는 질투의 검은 덩어리 때문에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한 지붕 밑에 두 아내를 두다니!"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네들은 내 얘기를 하며 재미있어했겠군요. 요즘에도 그 여자를 보러 갔나요?"

바디르는 잠시 로니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긴장한 듯이 보였다.

"로니."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 그래야만 했어. 하지만 난 결코"

"세상에! 당신은 연애박사시군요. 안 그래요?"

로니는 마구 웃기 시작했고, 그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미친 것처럼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바디르가 로니의 뺨을 때릴 때까지 방안을 계속 울렸다.

", 미안해. 로니, 나도 모르게 그냥"

로니가 침묵에 빠져 슬쯤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바디르는 조용히 말했다.

"제발, 당신 자신을 괴롭히지 마. 소용없는 짓이야."

", 바디르"

로니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날 런던에서 데리고 왔어요? 어떻게, 어떻게 당신은 날 이런 고통에 처넣을 만큼 잔인할 수가 있죠? ?"

그를 쏘아보는 로니의 얼굴엔 핏기가 가셨다.

", 아니에요! 모두 내가 어리석었던 탓이죠."

문득 이런 무서운 사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 마치 마비가 된 듯했다.

"당신에게 아들이 필요해서였나요? , 세상에난 이제야 모든 걸 알겠어요. 당신의 그 소중한 아이샤는 당신에게 아이를 낳아 주지 못했군요. 그래서 갑자기 날 생각해낸 거구요? 어리석게도 당신과 결혼한 여자, 당신이 5년 동안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여자인 날 말이에요. 아이샤와의 일이 잘돼 가지 않으니 바보 같은 날 임신하게 만들어 놓았죠. 그리고 그 여잔 골칫덩어리가 됐겠죠. 하지만 적어도 그 여자도 아이를 가질 수 있을 텐데요. 그렇죠, 바디르?"

"제발, 로니, 그게 아냐!"

로니는 놀리듯이 그에게 얼굴을 찡긋해 보이고는 그의 대답을 무시한 채 낮은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얘기가 아주 흥미로와지는데요! 그 놀라운 재능을 이용해서계략, 납치, 그리고 성적인 매력우리의 멋진 주인공은 어리석은 여자를 도만으로 다시 데려오는 데 성공했어요. 그리고 나서 꺼릴 게 뭐가 있었겠어요. 계획대로 그 여자는 아이를 가졌고! 그건 정말 현명한 일이었어. 우리의 주인공은 돌아서서 너털웃음을 웃었겠죠. 그에겐 지난 5년 동안 함께 살아온 둘째 부인도 있고, 그리고 또 다른 부인은 자기의 아이를 가지고 있어요. , 현명한, 현명한 바, , 바디르!"

로니는 고통과 비탄으로 온몸을 떨며 흐느껴 울었다.

"로니!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너무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전혀 그렇지가 않아."

그는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로니를 끌어안고 뜨거운 키스를 했다.

로니는 자신의 몸이 배신해 그의 열렬한 포옹과 불타는 키스에 응하려고 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하여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그리곤 재빨리 일어나서 욕실로 달려 들어가 문을 쾅 닫고는 안으로 잠가 버렸다. 비틀거리며 의자 위에 앉아서 가쁜 숨을 진정시켰다. 나와서 자기 말을 좀 들어보라는 그의 간절한 요구도 무시한 채.

"바보같이 굴지 마."

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 안에서 영원히 있을 순 없을걸. 난 일주일이 걸려도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제발 이성을 좀 되찾아 봐, 로니?"

"지옥에나 떨어지라구!"

그녀는 크게 소리를 지르고 마치 무도병에 걸린 사람처럼 온몸을 떨었다. 자제심을 되찾으려고 애쓰기 시작한 것은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였다.

그녀는 의자 위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 떨리는 몸을 팔로 꽉 움켜쥐고는 그 고통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한순간에 하늘에서 지옥으로 떨어져 버린 듯한 갑작스럽고도 지독한 변화의 충격을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잠시 후 떨리던 몸이 조금 진정되자 이제 앞으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바디르로 하여금 나와 이혼하게 만들 수 있을까? 내가 이 나라를 떠나도록 그는 내버려 둘까? 아니, 그는 이 모든 것을 틀림없이 거부할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지금 이 나라에서 혼자다. 친구도 없고 도와 줄 사람도 없다. 바디르는 도만의 절대적인 통치자고, 그의 말은 곧 법률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징벌이 내릴 것을 알고도 누가 날 도와 주겠다고 손을 들겠는가. 그리고 무 엇보다도 그의 사랑 행위를그것도 나디아가 말한 대로 딴 여자의 침대에서 바로 돌아와서 하는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맹세했다. 다시는 그가 내 몸을 소유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어떻게 그를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거부할 때마다 그는 항상 힘으로 나를 압도해 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내 몸이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자기 자리를 이을 아들을 너무나 열렬히 바라고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서슴지 않고 날 소유할 것이다. 어린애! 그래, 어떤 방법으로든 아이를 이용해 볼 수 있을 거야.

눈물로 흠뻑 젖은 로니는 샤워 쪽으로 다가갔다. 머리와 몸을 적셔 주는 시원한 물줄기 아래 서서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좀 더 건설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잠시 후, 흰 타월로 몸과 머리를 말리면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이 성공할지 못할지는 알 수 없지만.

", 이제 조금 제정신을 차린 것 같군."

발코니 쪽으로 난 창문에 기대서서 바디르는 말했다.

"난 이 방문을 잠갔어. 내가 아이샤와 결혼하게 된 정확한 이유를 당신에게 말할 기회를 줄 때까진 우린 여기에 있어야 해, 알았어?"

"아뇨."

로니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방을 가로질러 안락의자에 가서 앉았다.

"내가 왜 당신의 유치한 변명을 들어야 하죠? 당신의 다른 아내와 당신과의 관계에 대해선 털끝만큼의 흥미도 없어요. 나한텐 그것 말고도 중요한 일이 얼마든지 있는걸요."

"당신은 정말 바보 같군!"

그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난 바보예요. 하지만 이제부턴 영리해지기로 했어요. 그러니 바디르, 조용히 하고 내 얘기를 먼저 듣는 게 좋을 거예요."

"난 당신과 이혼하지 않을 거야. 영국으로 돌아가게 하지도 않을 거고."

그는 날카롭게 말했다.

"물론 그러시겠죠!"

바디르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스쳐지나가는 걸 보면서 로니는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신경질적으로 몸이 떨리는 걸 억누르며 로니는 자기가 생각했던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린 결혼을 한 상태죠. 결혼이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6년 동안 말예요. 우리에겐 어린 딸이 있고, 그리고 또 다른 아이가 뱃속에서 자라고 있어요. 어머닌 제이드에겐 아빠가 필요하다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새로 태어날 아이도 마찬가지겠죠. 그러니까 난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당신 아내로서 처신하고, 최선을 다해 당신의 사랑에 응할 준비가 돼 있어요."

로니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당신은 나와 내 딸에게 입힌 손해를 보상해야 마땅해요. 당신의 두 번째 아내 아이샤와 이혼하세요. 난 그 여자에 대한 반감은 없지만, 내 아이들에겐 아버지의 유일한 사랑이 필요해요. 제이드의 인생관이 아버지의 그 파렴치한 비도덕성을 보고 더럽혀지는 건 바라지 않아요."

그녀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

"내 말 알아듣겠어요?"

"그래, 로니, 잘 알겠어."

그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그리곤 뒤돌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는 해를 배경으로 그의 큰 키가 떠올라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건 나의 아이샤에겐 너무 잔인한 일이야."

"당신의 아이샤? 아이샤와 함께 지옥으로나 가시죠! 우리 딸과 새로 태어날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죠?"

로니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 생각을 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바디르. 이런 생활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겠어요? 아이들은 아버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요. 당신은 우리 아이들이 당신처럼 자라나길 바라나요? 어떻게 그처럼 빨리 그 무시무시한 옛날 궁전에 대해 잊어버릴 수가 있죠?"

"나도 잊을 수 없어, 로니! 당신이 말한 게 모두 옳아. 그렇지만 난 그렇게 할 순 없어. 당신이 내 설명을 듣는다면"

"오호, 그래요!"

로니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난장판이 된 우리의 결혼생활에서 그래도 난 무언가를 구해 보려고 했어요. 당신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일이 괴롭더라도 제이드와 새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면 감수하리라 맘먹었죠. 그런데 이젠 별수 없군요. 마지막 결정을 하는 수밖에."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로니? 당신 지금"

"지금부터 어떻게 할 건지 말해 주겠어요."

그녀는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지금 뱃속에 있는 아이가 당신이 그렇게 바라는 아들일 확률은 100프로겠죠?"

"그렇지, 물론. 그런데"

"당신은 오늘밤 이 궁전을 떠나세요. 나와 제이드, 미스 잭슨 그리고 후사와 몇 명의 하인들만 놓아두고 모두 데리고 떠나세요."

"그렇겐 못해!"

그는 분노로 가득 차서 말했다.

", 그래요? 그렇지만 난 당신 없이 여기서 살 거예요. 한 달에 한번쯤은 제이드를 당신에게 보내드리죠. 하지만 당신은 이곳에 한 발짝도 들여놔서는 안 돼요."

"그렇게 터무니없는 생각에 동의할 거라고 믿어?"

"당신은 내기를 좋아하지 않나요? 당신이 여기서 떠난다면 난 당신의 아들을 주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떠나지 않겠다면 난 지우겠어요."

"말도 안 돼!"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그건 죄악이야."

로니는 바디르로 하여금 화나게 해서 분명한 생각을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엄포는 계획한 대로 그럴싸하게 일을 진행시키는 데 효과가 있는 듯했다.

"무슨 죄악? 내 생각엔 오히려 지금 우리의 생활로 새로운 생명을 끌어들이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은 없을 것 같은데요. 자기 아버지가 두 명의 아내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라게 하는 일 말예요."

"당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바디르는 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당신 아버지의 지하 감옥 같은 곳에 날 가두지 않겠다면 아이를 지우지 않겠어요. 물론 당신은 그 지독한 당신 아버지와 똑같겠죠. 나머지 8개월 동안 감옥 속에 날 묶어 둘 수도 있겠군요. 라시드 군주가 당신을 이곳에 감금해 두었듯이 말예요."

딱딱하게 굳어 버린 그의 표정을 보고 더욱 용기를 얻어 로니는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 문을 열고 날 체포하라고 감시병들을 불러들이시죠."

", 세상에, 당신은 참 영리한 여자군. 꼭 우리 어머니처럼!"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만들어낸 각본은 대단하군. 난 당신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해칠 거라곤 믿을 수 없어. 그렇지만 당신이 시도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내가 무릅쓰진 못하리라는 것도 당신은 잘 알고 있지."

바디르는 창가를 서성거리다가 마침내 로니를 돌아보며 얼음처럼 차갑게 말했다.

"좋아, 로니. 당신이 이겼어. 당신이 말한 대로 하지."

자기 인생을 망쳐 놓은 남자에 대한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 바디르의 처진 어깨와 긴장된 얼굴을 보자 갑자기 아픔이 밀려왔다.

", 바디르."

로니는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이해할 수 없나요, 당신은? 당신이 날 버리고 딴 여자와 결혼한 일로 난 지독한 불행 속에 빠져 버렸다는 걸요. 당신은 금방 내가 이겼다고 했죠."

그녀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엔 승자가 없어요. 패자만이 있을 뿐이에요."

그는 돌아서서 잠시 동안 로니를 바라보았다.

"난 패자가 아니오, 로니. 그리고 앞으로도 이 사실을 잘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그가 문을 꽝 닫고 나간 한참 후에까지도 이 차가운 경고의 말은 온 방안을 채우고 있었다.

 

8

로니가 옷을 입는 동안 후사는 의사를 침실 밖으로 안내했다. 로니는 자기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고 나서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왔다.

"뭐 시원한 것 좀 드시고 가시겠어요?"

로니는 닥터 윈슬로에게 물어보았다. 닥터 윈슬로는 무리아 병원의 산부인과 의사였는데, 바디르는 이 젊은 미국인 의사를 로니의 임신 기간 동안의 주치의로 임명했다.

", 한 잔 마시죠."

그는 싱긋 웃었다.

"이곳은 정말 아름답군요."

"그래요, 전 여기서 아주 행복하답니다. 여긴 참 평화롭고 조용해요."

그렇게 말하고 로니는 하녀를 불러 시원한 라임 주스를 청했다.

"당신에겐 이런 곳이 좋아요. 그런데 계절풍이 불어오기 전엔 이번이 마지막 왕진 같군요. 계절풍이 불어 닥치면 당신도 아마 여기 있을 순 없을 겁니다. 게다가 당신은 임신 7개월이에요. 이젠 더 자주 검진을 받으셔야 하는데"

", 아니에요!"

하녀가 주스를 놓고 돌아가자 로니는 갑자기 말을 내뱉었다.

"전 정말 괜찮아요. 영국 날씨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 비 따위가 무슨 문제겠어요?"

로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계속 여기에 있을 수 있도록 제 남편을 설득해 주시겠어요?"

그는 로니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사실 당신이 왜 이곳을 떠나려 하시지 않는지 이해는 합니다. 지난달에도 무리아로 당신을 데려가지 않도록 당신 남편을 설득하느라 혼났어요."

"하지만 전 이곳에서 아주 잘 지낼 수 있어요."

"물론그렇긴 하지만요. 당신은 혈압이 좀 높아요. 계절풍만 없다면 당신이 여기 있어도 좋겠지만, 날씨가 나빠지면 정기적으로 검진하러 올 수가 없지요. 이 점에 있어선 전 군주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로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선생님 말씀대로 해야겠군요. 곧 떠나도록 해야겠네요."

로니는 그 의사에게 더 이상의 설명을 하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지난 두 달 동안 날 위해서 해줄 만큼 해줬는데, 계속 그렇게 해달라고 그에게 강요하는 건 무리야.

정원을 천천히 걷다가 로니는 커다란 야자나무 밑에 있는 벤치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이 궁전에서 로니 홀로 보낸 시간이 어느덧 6개월이 다 돼가고 있었다. 바디르에게 또 다른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의 생활은 그야말로 비탄과 암흑의 나날이었다. 처음 몇 주일은 천천히 흘렀다. 조용한 생활의 평화로움과 평온함이 그녀의 혼란스러운 정신에 약간의 위안을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바디르에 대한 애정과 그 때문에 받은 상처는 생각보다도 깊은 것이었다.

로니는 그의 또 다른 아내 아이샤에 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투가 뿜어내는 독소는 그녀를 몹시도 괴롭혔다. 밤이면 밤마다 바디르가 딴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더구나 그 여자는 바디르가 단념할 수 없다고 했을 정도니까 그녀 자신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여자일 것이다.

처음엔 낮이나 밤이나 다른 여자를 안고 있는 바디르의 영상이 그녀의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이런 생각은 로니의 건강을 심하게 갉아먹었다. 날이 갈수록 로니의 몸은 수척해졌고, 안색도 창백해졌다. 푸른 눈 아래엔 어두운 그늘까지 생겼다. 그녀가 비참함과 고통의 구렁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닥터 윈슬로의 충격적인 말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저 좀 보실까요."

닥터 윈슬로는 말라빠진 로니를 측은한 듯 바라보았다.

"술탄께선 당신이 임신해 계신 동안 당신의 건강을 내게 일임하셨습니다. 지금 아이는 건강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못해요! 지난번 왕진 후에 난 당신 건강이 좋지 않다고 군주님께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군주님의 노여움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죠. 당신을 위해서 뭔가 하고 싶어도 말씀이죠, 당신의 많은 노력과 협력이 없으면 곤란해요. 그렇잖으면 군주님께선 아마도 당신을 강제로라도 무리아로 데려가실 거예요. 이건 정말입니다. 당신은 그걸 막을 수 없어요."

그녀를 바디르에게로 돌아가게 할지도 모른다는 협박은 로니가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녀는 아직도 고통 속에 있었지만, 자기의 마음속에서 바디르의 영상을 지워 보려고 노력하기도 했고, 밤낮으로 그녀를 괴롭히던 질투심을 억제하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조금씩 그녀는 살이 불기 시작했고 혈색도 되돌아왔다. 청록빛 눈에도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주 장해요!"

다음 달에 방문한 닥터 윈슬로는 한층 아름다와진 로니를 바라보고 말했다.

"계속 이렇게 하세요. 아주 좋아질 거예요."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로니의 생각은 중단됐다. 그리고 잔디밭을 가로질러 자기에게로 뛰어오는 제이드를 보았다.

"엄마, 나 물고기 잡았어요. 정말로 내가 잡았다구요!"

제이드는 흥겹게 춤을 추듯이 다가왔다.

"그런데 잭슨 선생님이 그건 아기 물고기래요. 그래서 그냥 물에 돌려보냈어요."

"내년에 다시 그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거야. 그땐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커져 있을걸. 바로 너처럼 말야."

페이잘 할아버지가 제이드에게 선물한 낚싯대를 들고 걸어오던 엘리자베스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내일 낚시하러 가도 돼요? 엄마도 같이 가요, ? 엄마."

제이드는 로니를 껴안으며 종알대다가 엄마 뱃속에서 아이가 움직이는 걸 느꼈는지 까르르 웃으면서 말했다.

"이 아기도 틀림없이 났시를 좋아할 거예요. 아이참, 아기가 빨리 태어나야 될 텐데, 그래야 내가 모아 놓은 조개껍질을 보여 줄 수 있는데"

"그래, 조금만 기다리면 돼."

로니는 일어나 제이드의 손을 잡고 천천히 궁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아기가 네 조개껍질을 감상할 수 있게 되려면 좀 시간이 걸릴걸."

"의사 선생님은 뭐라세요?"

제이드가 꽃을 꺾고 있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멈춰서서 로니에게 물었다.

"좋대요. 그런데 우린 곧 여길 떠나야 될 것 같군요. 계절풍이 불어닥치기 전에 무리아로 돌아가야 해요."

"걱정 마세요. 이곳이 전원적이긴 하지만그리고 당신이 돌아가고 싶어하지는 않지만요. 당신은 아기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하느라 바빠질 거예요. 그러다 보면 딴 생각할 시간도 없어질 거구요."

로니는 엘리자베스에게 고맙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때나마 바디르가 가정교사를 고용한 데 대해 불쾌하게 여겼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엘리자베스와는 지난 몇 개월 동안 계속 같이 지내 왔기 때문에 로니는 이제 그녀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돼 있었다.

그렇다고 물론 엘리자베스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건 아니다. 그러나 자기와 바디르 사이가 멀어져 버렸다는 건 그녀도 눈치 챘으리라. 그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동안 그녀도 제이드와 함께 이 여름 궁전에 있었고, 바디르가 갑작스럽게 모두 이 궁전을 떠나라고 명령한 이유를 모를 사람은 거의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일 바로 직후에 있은 바디르와 나디아 사이의 심한 말다툼으로 모든 것은 더욱더 명확해졌으리라.

그때 로니는 자기 침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래층에선 화가 난 바디르의 천둥 같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사라는 몸을 떨면서 로니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들어왔다.

"나디아에게 경고했어요."

사라는 아직도 겁에 질려 이를 딱딱 맞부딪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일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됐는지 모르겠어요. 바디르가 정신이 나갔나 봐요! , 로니, 정말 미안해요."

"제발 더 이상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

"한데 바디르가 설명했다면"

", 그래요, 그는 설명했어요!"

로니는 소리를 지르며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사라는 이런 상태에서 떠날 수 없다고 했지만, 로니는 떠나 달라고 했다. 물론 사라는 친절했지만 그때 로니의 심정으로서는 바디르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싫었다. 그 이후로는 사라도, 나디아도 어떻게 됐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요, 제이드와 전 짐을 싸기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저 꼬마 아가씬 아주 좋아할 거예요. 자기 조랑말도 다시 탈 수 있고."

꽃들 사이를 쏘다니고 있는 제이드를 보며 엘리자베스는 조용히 말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어떨지는 모르겠지만제이드는 아빠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아버지를 방문하는 걸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도 알아요."

로니는 한숨을 지었다.

"하지만 나도 그 일에 대해선 어쩔 수가 없어요."

"괜찮을 거예요. 이제 무리아로 돌아가면 제이드는 곧 생기를 되찾을 거예요. 어린애들이란 원래 회복이 빠르잖아요. 그리고 조랑말과 그 기찬 페이잘 할아버지와 같이 지내게 되면 금방 모든 걱정을 잊어버릴 거예요."

", 엘리자베스."

로니는 약간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훌륭한 가정교사예요."

"난 이 꽃들을 후사에게 갖다 줄 거예요."

제이드는 꽃을 꺾어 들고 오며 말했다.

"후사가 아주 좋아하겠죠?"

"그래, 후사가 아주 기뻐하겠구나."

로니는 웃으면서 제이드의 손을 잡았다.

", 점심 먹을 시간이 다 됐어. 배고프지 않니?"

그들은 집으로 들어왔다.

사흘 후에 셰이크 사미르가 로니를 만나러 왔다. 그 젊은 의사의 경고가 옳았던 것이다.

"군주님께서 나흘 안으로 떠날 준비를 하시랍니다. 기상대 예보가 좋지 않아요. 그래서 군주님께선 비가 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시길 바라고 계십니다."

"바라는 게 아니라 명령하는 거겠죠."

로니는 빈정거리며 말했다.

"어쨌든 난 그가 바라는 대로 하기로 했다고 군주님께 말씀드리세요. 그런데내 딸과 난 정확히 어디에서 살게 되는 거죠?"

그 젊은 부관은 놀라서 로니를 바라보았다.

"물론 당신 집에서죠. 무리아의 궁전에서 말입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군주님께서 이 말을 전하라고 하셨어요. 안 된 일이지만 무리아로 돌아오는 당신을 마중나갈 수 없겠다구요. 그래서군주님은 무척 애석해하고 계세요."

셰이크는 목소리를 다듬더니 계속했다.

"군주님은 국내 각 지방 순시를 떠나시려고 합니다. 아마 6주 정도는 걸리실 거예요. 물론 아기를 낳기 전까진 충분히 돌아올 거라고 하셨습니다."

로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당신은 필요 이상으로 당신 일에 충실하시군요. 군주님의 명령을 아주 멋있게 전달하는 당신의 외교적 수완에 난 감탄했어요. 당신은 외교관이 되시면 좋겠는데요?"

셰이크 사미르는 주춤거리며 말했다.

"전 다, 다만 군주님 말씀을 전해 드린 것뿐"

"알아요."

바디르의 명령으로 이곳에 온 사람에게 괜히 불만을 터뜨렸다는 후회를 하면서 로니는 말했다.

"내가 한 말에 대해 사과드리겠어요. 용서해 주시길 바래요."

"물론이죠, 왕비님."

그는 미소를 띠웠다.

"지금 당신은 어려운 때죠, 이제 금방 아이가 태어날 테니까요. 그리고 전 몇 달 만에 당신을 뵙게 돼 정말 기쁩니다."

", 셰이크 사미르!"

로니는 부드럽게 웃었다.

"당신은 정말로 멋있는 외교관이에요! , 편히 앉아요. 그리고 내게 얘기들을 좀 해줘요. 마리암은 어떻게 지내죠?"

"마리암 공주님은 잘 계십니다."

그는 페이잘 숙부가 초청한 피크닉에서 마리암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로니가 도만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마리암이 자기를 어색하게 대했던 이유가 이젠 궁금하지 않았다. 마리암은 바디르의 두 번째 아내에 대한 일을 알고 있었고, 로니와 특히 친했던 만큼 다른 어떤 식구들보다도 그 사실을 감추기가 더 힘들었던 것이다.

"마리암에게 내 사랑을 전해 주세요."

사미르가 떠나려 할 때 로니는 이렇게 말했다.

"난 모든 걸 이해한다고 말해 줘요. 그리고 내가 무리아로 돌아가면 서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구요."

그는 로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 말은 전하겠다며 깊숙이 인사를 했다.

 

로니는 떠나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무척이나 슬펐다. 떠나기 전 날 하늘을 쳐다보고는 그 갑작스러운 출발을 수긍하게 됐다. 두꺼운 안개와 끝없이 내리는 억수 같은 비는 바디르가 말한 대로였다. 로니는 자신의 운명을 그냥 내맡겨야만 했다. 3개월 후에 날씨가 맑아지면 이 평화롭고 한적한 궁전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마 임신 중이어서 그랬겠지만, 수도로 돌아오는 여행은 무척이나 길고 힘들게 느껴졌다. 궁전에 도착했을 때에는 발목이 퉁퉁 부풀어 올라 있었다. 도만의 전통의상인 긴 드레스를 이런 더운 날씨에 입는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임신해 있는 흉한 모습을 감추는 데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로니가 지친 것은 이 궁전으로 돌아온다는 것에 너무나 신경을 곤두세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셰이크 사미르가 바디르는 당분간 이곳에 없을 거라고 말했을 때 로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었지만, 사실은 그렇게 된 데 대하여 감사하게 여겨야 할 일이었다. 가실 줄 모르는 증오심을 가지고 그와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는 건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이제 아이가 태어나면 바디르는 어떻게 할 작정일까? 아이를 떼겠다고 한 로니의 협박은- 그러나 결코 실행에는 옮기지 못할- 쓸데없는 것이 돼버렸다. 그런데 남자 아이를- 그의 왕위를 계승할- 낳는다면 바디르는 이제 더 이상 아이가 필요하지 않겠지?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로니는 열망하고 있었다.

바로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 때문에 그녀의 생각은 중단됐다. 아마 후사가 야식이라도 들고 오는 소리겠지. 로니는 욕조의 물마개를 빼고 커다란 욕조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난처하게도 그 욕조는 여름 궁전에서 사용하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와서 내 손 좀 잡아 줘, 후사. 욕조에 갇혀 버리겠어."

로니는 웃으면서 후사를 불렀다.

발소리가 가까와지는 걸 듣고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보던 로니는 거의 까무라칠 뻔했다. 거기 오고 있는 사람은 바디르가 아닌가! 로니의 눈은 두려움으로 커졌고, 온몸은 바들바들 떨려 왔다. 그는 보드라운 큰 타월을 하나 집어 들고는 그녀가 갇혀 있는 욕조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더듬거렸다.

"당신이 떠, 떠났는 줄 알았는데?"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해댄다. 검은 안대도 하지 않았고 늘상 입던 전통의상도 입지 않았다. 그는 그 넓은 어깨에 타월로 된 짧은 가운만을 걸치고 있었다.

"불행히도 내 여행계획은 연기됐소."

그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내가 아직 무리아에 있는 건 로니, 당신 때문은 아니오."

바디르는 숨을 들이쉬면서 눈으로 그녀의 몸을 훑어 내려갔다. 욕조의 물은 이제 다 빠져나가 로니의 벗은 몸이 완전히 드러났다. 본능적으로 로니는 자기의 부른 배와 가슴을 가리려고 팔로 몸을 감쌌다.

"아냐, 보여 줘."

그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아서 그녀의 몸에서 떼었다.

"내 아이, 나의 아들"

그는 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가 가까이 오자 로니는 움찔했지만, 그가 욕조 밖으로 그녀를 데리고 나와 부드러운 타월로 감 싸주었을 때는 이상하리만큼 그의 손길이 자상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당신의 이 부드러운 살결을 잊을 수가 있겠소?"

그는 그녀의 팔과 어깨를 닦아 주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얗고부드럽고마치 실크 벨벳 같아."

"제발, 날 나가게 해줘요."

그가 타월을 재빨리 던져 버리자 로니는 소리를 지르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녀의 몸은 그의 손 아래서 떨고 있었고, 그의 강한 시선은 모양이 변해 있는 그녀의 몸을 살피는 데 열중해 있었다.

그들의 격한 행동으로 인해 로니는 뱃속의 아이가 발길질을 하는 것을 느꼈다. 바디르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로니를 얼른 놓아 주었다.

"당신 아들은, 혹은 딸일지도 모른지만, 오늘밤엔 아주 활기가 넘치나 본데요?"

로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타월을 재빨리 집어들었다. 그녀는 바디르의 뜻밖의 출현에 아직도 놀란 상태였고, 그들 사이에 가득 차 있는 긴장의 무거운 분위기로 멍해 있었다.

"정말이야?"

그는 매료된 눈빛으로 로니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로니는 자신의 몸을 가리려고 타월을 손에다 꽉 움켜쥐었다.

", 바디르! 당신은 아이가 어떻게 발길질하는지 아세요?"

"아니, 내가 알 리가 있나? 당신이 제이드를 배고 있었을 땐 난 당신 곁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당신의 뱃속에서 내 아이가 크고 있는 걸 보는 기쁨을 또 한 번 거절당해 왔지."

로니는 그의 목소리에서 풍기는 쓰라린 분위기에 마음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그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보니 그의 얼굴엔 과로의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전에는 그의 검은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았는데그녀는 너무나 놀라 자기를 쓸쓸히 바라보고 있는 바디르를 편하게 해주어야겠다는 연민에 휩싸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타월을 옆으로 당기고 그의 손을 잡아끌어 자기 배에다 갖다댔다.

"느낄 수 있어요?"

다시 한번 그녀의 뱃속에서 아이가 움직이자 로니는 조용히 속삭였다.

"아기들은 어떤 때는 가만히 있지만, 당신이 지금 보았듯이 아주 활동적일 때도 있어요. 꼭 제 아버지처럼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그는 웃음을 터뜨리기는 했지만 그의 검게 탄 얼굴에는 경외심마저 감돌았다.

"내 아기가 이렇게 자라고 있고, 곧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게 너무나 신기하군. 하지만 로니, 이리 와."

잠시 후 그는 로니를 부드럽게 두 팔로 안아올렸다.

"당신은 여행 때문에 너무 지쳐 있다고 들었어. 좀 쉬어야지."

"아녜요. 제발 날 좀 내려 놔요, 바디르. 그리고 오일도 발라야 돼요. 난 정말"

로니는 목이 메어서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녀는 타월 한 장 사이로 그의 단단한 가슴과 피부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고, 서로의 얼굴이 가까와지자 코에 익숙한 그의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그 모든 것은 그들이 과거에 함께 지냈던 행복했던 순간들, 그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보냈던 짜릿하고 비밀스러운 순간들의 기억을 되살려 놓았다. 로니는 모든 의지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로니는 그의 비열한 행동에 대해 생각해 봐도 그가 자신을 침실로 안고 들어오는 동안 그녀의 몸과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오는 나른함을 어쩌지는 못했다. 그는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방을 나갔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들어왔을 때 그의 손에는 오일 병이 쥐어져 있었다.

"걱정할 것 없어, 로니."

그는 침대 위에 앉으면서 말했다.

"내가 오일을 발라 줄 테니까."

", 아녜요, 당신은이러면 안 돼요. 싫어요."

"천만에."

거부하는 그녀의 손을 무시한 채 그는 타월을 벗겨내면서 중얼거렸다.

"당신이 이렇게 사랑스럽게 보인 적이 없었어."

그는 손바닥에 오일을 약간 따라서 로니의 배에 마사지를 해주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은 그녀의 살갗 위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내가 어떻게 당신 몸을 보고 싶지 않겠어? 특히나 내 아이를 배고 있는 당신 모습을 말야."

그녀의 몸을 문지르고 있는 그의 손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를 들으면서 로니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그의 손을 멈추게 할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알겠어?"

그는 속삭였다.

"우리는 온전한 하나의 반쪽씩이라는 걸 말야. 당신이 날 미워하고 증오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원하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하지 못할 거야."

그의 말이 옳았다.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로니는 이미 그의 신비로운 손에 매료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다.

"바디르안 돼요!"

바디르가 오일 병을 옆으로 밀쳐 놓고 그녀에게로 다가왔을 때 로니는 신음소리를 냈다.

", 로니그래."

로니의 목소리에 망설임 같은 게 섞여 있다는 걸 안 그는 더욱더 눈동자를 번뜩였다.

떨고 있는 그녀의 몸을 감싸는 그의 팔은 단단하고 따뜻했다. 그의 입술은 그녀의 눈에서 솟아나는 눈물을 따라 내려왔다. 그리고 그의 가슴이 자기의 가슴에 와서 닿자 그녀는 마치 환각에 빠진 듯 몽롱해져 버렸다.

"내 사랑, 로니너무 오랜 시간이었어. 너무나 큰 고통이었어! 제발 날 거절하지 마."

그는 고통스러운 듯이 속삭였다.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겠어. 하지만 난 당신의 사랑스러운 몸에는 어찌할 수가 없어. 난 당신을 안고 싶어."

도덕적으로 옳건 그르건 간에, 그리고 과거의 불행이 어쨌건, 미래의 일이 어떻게 되든,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을 단단히 묶고 있는 욕망의 끈에 자신을 내맡기는 수밖엔. 지금 이 순간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은 그의 몸의 열기와 힘, 그리고 그녀의 핏속을 흐르는 견디기 힘든 황홀함뿐이었다. 로니는 흥분감에 젖어 거의 의식을 잃은 채 기쁨의 신음소리만을 웅얼거릴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로니가 잠에서 깨었을 때는 아침 햇살이 침실 안으로 쏟아져들고 있었다. 그녀는 나른한 몸을 쭉 뻗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큰 침대에는 자기 혼자만 누워 있는 게 아닌가. 구겨진 시트와 아직도 바디르의 머리 자국이 남아 있는 베개를 보자 두려움과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엄습해 왔다. 지난밤의 일들이 필름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로니는 절망의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베개에다 얼굴을 묻었다.

, 하나님! 전 어떻게 된 걸까요. 그의 요구에 응하다니지난밤 자기가 바디르에게 어떻게 응했으며, 그를 얼마나 열망했었는가를 기억해낸 로니는 자기혐오와 수치로 미칠 것만 같았다.

로니는 떨리는 몸으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쓰라린 눈물을 닦으려고 손수건을 찾았다. 그런데 무슨 소리가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문 쪽을 돌아다보니 거기엔 바디르가 하얀 가운을 입고 서 있었다.

"제발, 나가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질렀다.

", 세상에"

로니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눈물로 가려진 시선은 시트만을 꽉 움켜잡고 있는 자기의 손에 고정돼 있었다.

오랜 침묵이 흐른 후에 바디르는 침대 옆으로 와서 비통하게 흐느끼고 있는 로니를 내려다보았다. 헝클어진 그녀의 붉은 금발과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떨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지난밤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변명할 말이 없다는 건 나도 잘 알아."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의 그 달콤한 육체는 어떤 성인군자라도 유혹할 수 있을 거야. 하물며 난 나약한 인간이야."

로니가 손에다 얼굴을 파묻고 간헐적인 흐느낌 소리를 내자 그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

"난 그러고 싶었지만, 금방 무리아를 떠나지 못할 급한 이유가 생겼어. 그렇지만 내 집안에 대한 소문이 나돌도록 내버려 둘 순 없어."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난 국내시찰을 떠날 수 있을 때까지 이 궁전을 계속 사용해야 해. 하지만 로니"

그는 씁쓸하게 덧붙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 당신은 날 혐오의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고도 아주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될 거야. 내 말 알겠어?"

쏟아지는 눈물에 지치고 그의 잔인한 말에 놀란 로니는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방안의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며 그는 갑자기 몸을 홱 돌려 나가 버렸다. 그가 입은 가운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간다.

 

9

로니의 인생에서 가장 긴 3주일이 지나갔다. 과거에도 어려운 때가 있긴 했지만 이토록 비참하고 불행했던 적은 없었다. 그 어떠한 것도 그녀의 절망의 무게를 받쳐 줄 수 없는 연옥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증막 같은 날들이 계속되는 동안 머리를 쪼개는 듯한 두통도 그녀를 줄곧 따라다니면서 무시무시한 생각들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생각들이란 곧 태어날 아이와 포기할 수 없는 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그리고 바디르를 향한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깨어 있을 때나 잠들었을 때나 그의 존재는 로니를 항상 쫓아다녔다. 그가 잔인하게 자기를 버린 일, 그의 굳어진 무관심이 그녀를 몹시도 괴롭혔다. 죽음과도 같은 이 병에서 영원히 회복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옛날에 라시드 군주에게 아랍어를 배우겠다는 요구만 하지 않았어도, 아랍어를 모르기만 했어도, 로니는 바디르가 어디서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지 정확히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하인 둘이서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됐던 것이다. 그들의 얘기에 따르면 바디르는 무리아의 저편 언덕 너머에 있는 집으로 또 다른 부인을 자주 만나러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설에 가까운 그런 얘기조차도 그를 향한 깊은 감정을 깨뜨리진 못했다. 자신이 바디르를 증오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나약함이 혐오스러워질 뿐이다. 커다란 침대 위로 그가 들어올 때마다 그녀는 항상 잠들어 있었고, 아침에는 그가 자리를 떠난 한참 후에야 눈을 떴다. 그 특유의 향수 냄새가 아직 남아 있는 것만이 그가 밤새 자기 옆에서 자고 갔다는 증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마리암이 로니를 찾아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편두통을 심하게 앓고 있던 로니는 자기의 이 절망적인 상황을 호소할 수조차 없었다. 마리암은 로니의 수척한 모습과 청록빛 눈에 서려 있는 비통함을 보고서 너무나 놀라와했다. 그녀는 제이드가 조랑말을 좋아한다는 얘기며 엘리자베스의 지도하에 공부를 해가는 얘기 등 가벼운 화제로 대화를 이끌어가다가, 며칠 전에 사라가 딸을 낳았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하산 숙부님은 딸을 낳았다고 아주 좋아해요."

마리암은 열심히 말하다가 자기 잘못을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하산 숙부와 새로 태어난 아기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자연 그의 큰딸 아이샤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난 사라에게 갔었죠. 사라는 새로 생긴 산부인과 병원에 있어요."

마리암은 재빨리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거긴 시설이 아주 좋던데요. 대부분이 영국인이거나 미국인인 간호사들도 무척 친절해요. 당신도 거기서 아이를 낳을 거예요?"

로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생각이에요."

출산준비를 이제 보다 세심하게 해야 할 때가 됐다는 걸 아프게 깨달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사라가 바라던 딸을 낳게 돼 기뻐요. 사라에게 내 사랑을 전해 줘요."

그들 사이의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자 마리암은 곧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며칠 후에 제노비아 왕후가 찾아올 거라는 전갈을 받은 로니는 후사를 시켜 죄송스럽지만 만나기 곤란하다는 말을 전하도록 했다. 또다시 의례적인 대화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게 너무나 싫었던 것이다.

"말도 안 되지. 난 로니를 보지 않고는 돌아가지 못해."

제노비아는 후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로니의 침실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자기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며느리의 의사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태연하게 안락의자에 앉은 그녀는 자신의 두터운 눈썹 아래로 로니를 유심히 살폈다.

", 마리암 말이 맞았어. 너와 바디르 사이의 문제가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다는 게 사실이로구나."

"전 정말 그 문제에 대해선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아이를 낳으려면 얼마나 남았지?"

로니는 기대고 있던 긴 의자에서 몸을 천천히 일으키고는 벨을 울려 하녀에게 커피를 가져오라고 했다.

"한 달 정도요."

로니는 다시 쿠션에 등을 기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바디르 그 녀석, 그렇게 바라던 제 아들의 출생을 이토록 위태롭게 하다니, 바보 같은 녀석!"

제노비아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좋아, 어쨌든 나는 이 불행한 일을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해야겠어."

제노비아는 갑자기 손뼉을 쳐서 후사를 부르더니 로니의 저항도 무시한 채 후사에게 외출용 숄을 가져오도록 했다. 그리고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 로니를 궁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에 태웠다. 너무도 갑작스런 일에 당황한 로니는 지금 뭘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다.

"물론 잘하려는 의도이긴 했지만, 난 결국 너와 바디르에게 심한 타격을 주었어. 그땐 내가 옳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자동차가 무리아의 거리를 빠른 속도로 빠져나간다.

제노비아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 그래. 난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알았어. 사실 난 지독한 실수를 저질렀던 거야."

로니는 너무 혼란스러워 조용히 제노비아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건 네가 이 나라에 처음 왔을 때 어땠었나를 이해하는 일이야."

제노비아는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바디르가 자기 아내라고 널 데리고 도만으로 돌아왔을 때, 내 맘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바디르의 할아버지가 첫 아내로 프랑스 여자를 맞아들였다는 건 알고 있니? 여기서 태어난 아들이 장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혈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왕위를 계승받지 못한 일이 있었단다. 이제 내 말에 이해가 가니? 결국 아랍인 아내에게서 난 자식에게 도만의 통치권이 넘어갔지."

"전 모르겠어요"

로니는 너무 놀라서 제노비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왕후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넌 현명한 여자니까 그때의 상황이 어땠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다. 난 바디르를 외국으로 내보내 교육을 받게 하면서 제정신을 잃어가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게 하려고 온갖 힘을 다 기울였었다. 한데 내 아들이 한 짓이라고는고작 외국인 아내를 데리고 귀국한 거였지."

"하지만 바디르에겐 딴 남자 형제가 없잖아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파티마가 아들을 갖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고, 내 남편이 죽고 나면 하산이나 페이잘이 왕위에 오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어. 하산은 이미 사라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지 않았니. 게다가 바디르가 체포된 직후에 내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내 남편이 하산에게 왕위를 물려 줄 계획이라는 거야. 상황이 몹시 다급해졌다는 걸 알고 어쩔 수 없이 널 이 나라에서 떠나게 해야 했단다. 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날까지 난 온갖 노력을 다 했지. 네가 떠나자마자 난 바디르를 억지로 순수한 아랍 여자와 결혼시켰었다. 그런 후에는 바디르가 감옥에서 도망쳐 나와 도만을 통치하게 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지."

로니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무슨 뜻이죠?"

"바디르를 위해, 즉 내 아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그리고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말이야."

"그래요,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감사해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군요!"

로니는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당신의 그 솜씨에 박수를 보내야겠군요?"

"아니, 내가 잘못했다는 걸 이제는 깨달았다고 말했잖니. 제발 진정해라. 제발!"

로니 옆으로 다가앉아 로니의 팔을 잡으며 제노비아는 이렇게 말했다.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 당신은 나쁜 사람이에요! 당신이 내 맘을 얼마나 상하게 했는지 알기나 하세요? 그걸 안다면 제발 좀 가만히 계세요!"

"넌 이해를 못하는구나."

"그래요. 난 내 남편을 한 번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바디르가 어떻게 주위의 이런 말에 따를 수가 있었는지 믿을 수가 없어요!"

로니의 목소리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난 그가 소신 있는 사람인 줄 알았었는데, 옆에서 하라는 대로 줏대 없이 행동하다니! 날 멀리 밀어젖혀 놓고는 딴 여자와 즐겁게 결혼을 하다니"

너무나 화가 나서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로니! 조용히 하고 내 말 좀 들어봐."

제노비아는 로니의 손을 잡으면서 딱딱하게 말했다.

"실제로는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 전혀 다르다구!"

", 하느님!"

로니는 자리에 기대고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궁전으로 돌아가게 해줘요."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어."

"뭐라구요?"

로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제노비아를 쏘아봤다.

제노비아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꺼냈다.

"난 지금 널 아이샤에게로 데려가는 길이야."

", 뭐라구요!"

로니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녀의 두 눈은 분노로 타오르고 있다.

"안 돼요, 싫어요!"

"아니, 난 그렇게 해야만 해. 달리 방법이 없어."

"난 방법이 있어요! 세상에, 그만큼 날 괴롭혔으면 됐지 도대체 뭐가 또 부족해서! 제발, 날 당장 내려 주세요!"

로니의 말에는 흐느낌이 섞여 있었다. 뿌연 차창 밖을 내다보니 차는 벌써 산맥을 향해 펼쳐진 평원을 먼지를 내면서 가로질러가고 있었다.

"제발 로니, 난 진실만을 얘기하고 있다."

제노비아는 열심히 로니에게 납득시키려 했다.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잖니? 그건 사실이다.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어. 바디르의 아내, 아이샤는 말이다아이샤는 지금 죽어가고 있단다."

제노비아의 말은 로니의 혼란된 마음에 또 하나의 충격을 던져 줬다.

"죽어간다구요?"

"난 아이샤와 약속했어. 널 그녀에게 데려다 주겠다고 말야.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날 사람과 한 약속을 깨뜨릴 수가 없구나. 이런 요구는 엄숙한 거야. 무조건 따라야만 하지."

"아이샤가 죽어간다구요? 하지만 왜죠? 난 이해할 수가 없어요."

로니는 혼란스러워 고개를 흔들었다.

"네게 얘기를 해주려고 했지만, 넌 들으려고 하지 않았어."

제노비아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모든 걸 이해시키려면 바디르가 체포돼 그 여름 궁전에 갇혀 있을 때의 일부터 얘기해야겠구나. 그래, 난 아들이 걱정돼서 미칠 지경이었지. 어머니로서 그렇지 않았겠니? 내 남편이 바디르에게서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리라는 건 너무나 명약관화했지. 그의 일은 도대체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 불투명해지기만 했고"

"그래요"

"네가 인질로 궁전에 남아 있는 한 바디르를 구해내기란 불가능했지. 그러던 중 바디르에게서 인편으로 연락이 왔다. 네가 도만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거였지. 그앤 그때 내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단다. 그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한 가지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바로 아랍인 아내를 맞아들이라는 거였지."

"저런"

로니의 목소리는 신랄했다.

"바디르는 얼마나 신이 났을까!"

로니의 신랄한 말에 제노비아는 약간 움츠러들었다.

"그래, 네가 화낼 만도 하지. 하지만 바디르는 그게 아니었어, 로니. 내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 안전을 위해서 단지 네가 안전할 수만 있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마지못해 승낙했단다."

"그랬을까요?"

"내가 지금 말하는 건 진실이라고 맹세할 수 있다. 바디르의 동의를 얻자마자 난 널 아부다비로 떠나게 했지. 바디르는 갇혀 있어서 자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단다. 네가 떠날 때 비싼 양탄자들을 같이 보낸 것도 그의 제안이었단다. 넌 그것들을 잘 처리할 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자기가 쿠데타에 성공하고 내가 골라 준 부인과 이혼한 다음 널 도만으로 다시 데려올 수 있는 날까지, 넌 그 양탄자들을 팔아서 생활할 수 있을 거라고 말야."

제노비아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무겁게 내뱉었다.

"난 그 아이의 이런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지. 내가 바라는 건 단지 그가 안전하게 왕위를 계승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걸 보는 일뿐이었으니까."

"난 정말 바보 같은 여자였군요. 당신의 그 게임에 이용만 당하는. 그렇잖나요?"

제노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바보 같지 않았어. 내가 한 일이 널 이렇게 만들어 놓을 줄이야! 그 당시 넌 너무 어렸어, 상황을 이해하기엔. 그러나 난 네가 강하고 자립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됐지. 내가 저지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넌 끝내 포기하지 않고 네가 처해 있는 역경을 딛고 일어선 거야. 그 지독한 내 남편조차도 너를 굴복시키지 못했을 정도니까. 그래! 네게는 그 누구도 감히 어쩌지 못할 위대한 힘이 있었어."

"세상에! 그런 찬사로 내게 보답하시려구요?"

로니는 의자에 다시 기대앉았다.

"당신의 그 미친 듯한 권력욕을 저주해요. , 지위, 재산이 모든 걸 얻는 데에는 너무나 엄청난 대가가 필요하군요!"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제노비아의 볼은 붉게 물들었다.

"네 말을 다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말이다, 아가, 만일 제이드나 새로 태어날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겨 위기에 처해 있다면, 넌 어떻게 하겠니? 너 역시 애들을 위해 무슨 수단이든 다 써보지 않겠니? 그 애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말야. 그러잖으리라고 과연 장담할 수 있을까?"

로니는 자기가 바디르로 하여금 두 번째 아내와 이혼하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생각해 봤다. 잠시 차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아이샤에 대해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로니가 관심을 가진 유일한 것은 오로지 자식들의 행복에 대해서였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보호를 보장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바디르의 행동에 분노하면서도 솔직히 그를 곁에 두고 싶어했다.

"난 모르겠어요. 어머니 말씀이 옳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난 좀 더 너그러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잔인하지 않게"

로니는 솟아나는 눈물을 억제하느라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제노비아는 자기 옆에 앉아 있는 로니를 찬찬히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정말. 내가 오늘 아이샤에게 널 데려가는 것도 어떤 후회의 말로도 내 미안함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야. 바디르가 이 사실을 알면 몹시 화를 내겠지. 그 아인 무척 자존심이 강하잖니. 너도 알다시피 말야. 날 용서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아이샤는 널 보고 싶어한단다. 네게 할 말이 있으니 널 꼭 데려다 달라고 했어. 아이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로니의 입에서 튀어나올 질문에 미리 대답하고 있었다.

"난 단지 아이샤가 내게 맡겨 준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야."

제노비아는 잠시 주춤했다.

"로니, 내가 말하는 걸 들어주렴. 제발 어떻게 된 일인가 설명할 기회를 좀 다오."

"'어떻게 된 일인가' 이 말은 계속 내 마음을 괴롭혀 온 말이에요."

로니는 멍하게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마침내 그러마고 대답했다.

제노비아는 잠시 생각들을 모아보려는 듯 자리에 등을 기대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바디르가 다른 아내를 얻는 데 동의를 하고 네가 우리나라를 떠난 뒤, 한때는 모든 게 내 계획대로 잘 돌아가는 듯이 보였지. 바디르의 새 아내로 선택될 여자는 거의 확정적이었단다. 아이샤는 내 시동생인 하산의 딸이니까. 특히 내가 아이샤는 하산의 좋은 행실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말해 주었더니, 네 시아버지도 아이샤를 좋게 보시더군. 네가 도망갔다고 화가 나 있던 라시드 왕에게는 더욱더 그렇게 보였던 거야."

그녀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멀지 않아 난 내가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어. 내 아들의 인생에 간섭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난 아이샤에 관 해서도 너무나 몰랐던 거야. 하산은 북부를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샤도 그곳에서 자라났지. 난 그 아일 어릴 때만 봤기 때문에 그 애 어머니의 목숨을 앗아간 결핵균이 이미 야이샤의 몸에도 침투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었던 거야.

바디르와 결혼해서 여름 궁전으로 왔을 때, 16살짜리 소녀 아이샤는 이미 창백해져 있었단다. 그리고 그곳을 계절풍이 휩쓸고 지나가자 그 애는 병으로 쓰러졌지. 하지만 내 남편은 아무 조치도 하려고 하지 않았어. 내가 무릎을 꿇고 의사를 보내 주라고 간청도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단다. 그래서 아이샤의 병은 점점 더 심해졌어. 바디르와 감시병들도 최선을 다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지. 한번 몸 속에 들어온 병마는 나갈 줄을 몰랐고, 아이샤는 점점 더 심해져 갈 뿐이야."

"결핵은 충분히 치료될 수 있는 병인데요?"

제노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바디르는 아이샤를 데리고 스위스로 가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에게도 보여 봤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거였어. 아이샤는 자기가 살던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애원했지. 그곳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고 싶다고."

"저런! 가엾은 아이샤."

죽어가는 아이샤는 항상 자기가 질투해 오던 '다른 여자'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어서, 로니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바디르는 아이샤와 이혼하지 못한 거야. 그는 항상 말해 왔어. 아이샤가 자기와 결혼한 것은 비극이며, 그녀의 건강이 저렇게 나빠진 것도 완전히 우리 가족의 책임이라고. 만일 아이샤가 남부로 다시 돌아가 살았더라면 병에 걸리진 않았을 거라는 거지."

제노비아는 한숨을 지었다.

"그래, 물론 바디르가 옳아. 아이샤가 살아 있을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바디르의 보호와 관심이 필요해."

로니는 그에게 또 다른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던 날 바디르에게 퍼부었던 말들을 떠올리며 자기 손에다 얼굴을 묻고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그는 왜 내게 그런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았을까요? 왜 런던에서도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을까요?"

"글쎄, 바디르가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만"

제노비아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포근하고 동정적이었다.

"내 짐작으로는, 아마 네가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그래서 아이샤가 살아 있는 동안엔 널 도만으로 데려올 수 없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네 어머니가 너와 제이드 문제를 편지에 적어서 보내신 거다. 그는 그 기회를 잡아아겠다고 결정한 거고. 네가 자기의 재혼에 관해서 계속 모르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제노비아는 싱긋 웃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남자들이란 아주 단순하지. 하지만 로니, 바디르는 정말로 널 사랑하고 있단다. 그건 내가 보장할 수 있다."

로니의 마음은 고통과 혼란으로 들끓어 올랐다. 차가 좁은 오솔길을 통과해 속력을 늦춤으로써 그녀의 혼란스러운 생각도 따라서 멈추었다. 잠시 후, 그들은 계곡 쪽으로 돌출된 절벽 위에 세워진 작고 하얀 단층 건물 앞에 다다랐다.

"아이샤가 도만으로 돌아오겠다고 했을 때 바디르가 그녀를 위해 세워 준 집이지. 이곳 공기는 이 근방에서 가장 맑거든."

운전사가 차문을 열어주자 제노비아는 먼저 내렸다.

로니는 떨리는 몸을 억누르면서 제노비아를 따라 무거운 나무 문 앞에 섰다. 풀먹인 푸른 유니폼을 입은 간호원이 문을 열어 주었고, 그뒤엔 흰 가운을 입은 도만인 의사가 있었다.

"이젠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의사는 제노비아에게 이렇게 말하더니 로니에게로 돌아섰다.

"왕비님이신가요?"

바로 전에 들은 얘기들로 너무 당황하고 놀란 상태여서 로니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시다면 절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의사는 그녀를 데리고 긴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왕비님, 지금 아이샤 왕비님은 최악의 상태이십니다. 그분은 지금 오로지 왕비님 만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계시니까 왕비님의 방문은 그분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환자의 쇠약함을 보고 슬퍼하지 마시고 자연스럽게 대해 주십시오."

그는 방문을 열기 전에 이렇게 당부했다.

그를 따라들어가 침대 옆의 의자 쪽으로 다가갔다. 막대기처럼 비참하게 마른 여자를 내려다보며 로니는 터지려는 울음을 꾹 참았다. 길고 검은 머리로 뒤덮인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창백했고, 자기에게 다가온 여자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만이 유일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당신이 로니인가요?"

아이샤는 살짝 웃으면서 낮게 말했다.

"아랍어를 할 수 있으신가요?"

", 그래요."

로니는 의자에 앉으며 속삭였다.

"잘됐군요. 난 영어를 잘 못해서."

아이샤는 로니에게 다시 한번 미소를 지어 보이고 나서 아랍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난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당신에게당신에게 말할 게 있어요이건 중요한 거예요"

"제발,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아요."

로니는 힘들여 숨을 쉬고 있는 아이샤의 야윈 손을 자기의 따뜻한 손으로 꼭 잡았다.

"당신은 지금 안정해야 돼요."

"아뇨, 난 시간이 없어요. 그리고이건 중요한 거예요. , 바디르는"

아이샤가 기침을 하기 시작하자 간호사가 재빨리 와서 얼굴의 땀을 닦아 주었다.

"가엾은 바디르는 나 때문에 너무나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해 왔어요. 그는 한번도 화를 내지 않았어요"

아이샤는 숨을 들이마시느라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너무 친절했기 때문에너무 고통 받았기 때문에, 난 말해야 해요, 당신에게"

그녀는 로니를 올려다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래요, 당신은 바디르가 항상 말하던 대로 정말 아름답군요."

그녀는 긴 숨을 내쉬었다.

"난 언제나 당신을 질투했었다는 걸 고백해야겠군요. 내가 바보 같았죠."

"나도 당신에게 질투심을 가졌었는데요"

아무리 애를 써도 슬픔이 목에 잠겨 와 말을 할 수가 없다.

"나에게요? 당신은 너무 어리석어요!"

아이샤는그 약한 몸을 떨며 웃었다.

"내가 당신을 보고 싶어했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당신에게 이 말을 해야 했어요. 바디르와 난 같이 살지 않았어요남편과 아내로서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 아이샤!"

로니는 침대 옆에 놓인 휴지를 뽑아 눈물을 닦았다.

"가엾은 바디르! 그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죠. 항상 내게 친절하게 대해 주면서도 진심으로 날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도 거기 있었던 거구요"

아이샤의 목소리는 줄어들었다. 그리곤 베개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래요"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또다시 숨을 몰아쉬며 긴 침묵을 깨뜨렸다.

"그래요, 난 정말 그를 사랑해요. 내 온맘을 대해 바디르를 사랑했지요. 하지만 난 그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어요."

그녀의 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당신이 진실을 안다면, 로니?"

아이샤는 일어나려고 애쓰면서 야윈 손으로 로니의 손을 움켜잡았다.

"바디르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와 결혼한 것으로 인해 당신이 바디르와 멀어졌다는 걸 난 알 수 있어요. 그는 너무 불행해요. 당신은 그를 용서할 수 없나요? 나와의 결혼그건 그의 뜻이 아니었어요.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그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거예요."

바디르에 대한 아이샤의 헌신적인 사랑을 목격하면서 로니의 얼굴에는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제발 울지 마세요."

아이샤는 숨 가쁘게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그의 사랑을 저버리지 말아 달라는 거예요. 그건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니겠어요?"

"그래요, 솔직히 말해서 난 그를 사랑해요."

로니는 갑자기 부끄러운 감정이 몰려 와 목이 메었다.

"바디르는 내게 진실을 말해 주려고 했지만내가 들으려고 하지 않았죠. 모두가 내 잘못이에요!"

", 아녜요. 나도 바디르와 결혼한 사람이니까 그를 잘 알아요. 그는 두려웠던 거예요."

"바디르가두려워했다구요?"

로니는 눈물로 가려진 눈으로 아이샤를 바라보았다.

", 그래요. 바디르도 사람이잖아요? 그는 당신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던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우리의 결혼을 알아 버렸고그는 당신에게 말하려 했지만 당신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죠. 그래요, 난 바디르를 사랑해요. 하지만그는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이지만또한 확고하고 거만하기도 하죠."

로니와 아이샤는 모두 눈물을 글썽이면서 서로를 바라보며 밝게 웃고 있었다.

"우린 친구예요, 그렇죠?"

아이샤는 미소를 띠우며 속삭였다.

"그럼요."

로니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모든 걸 말해 주다니 당신은 너무나 너그럽군요.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

"아뇨, 우리가 서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너무 행복해요. 당신의 새 아기가 태어나는 걸 내가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당신에겐 귀여운 딸이 있다고 들었어요. 바디르는 그 아일 무척 사랑한다고 했죠. 그 아이에 대해 말해 주겠어요?"

"그러죠그 애 이름은 제이드구요, 지난 4월로 5살이 됐어요"

로니는 아이샤의 손을 꼭 붙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이샤는 평화롭게 베개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제이드는 자기 아버지와 꼭 닮았어요. 성격도 그렇고, 꾸물거리는 것도 똑같아요."

아이샤가 웃자 더욱 용기를 얻은 로니는 제이드가 당치도 않는 단어들을 즐겨 사용하는 일이며, 말타기를 좋아한다는 얘기들을 계속해 나갔다.

"물론 페이잘 아저씨가 그 애를 너무 버릇없게 만들어서 그렇지만요."

이때 로니는 의사가 자기 옆에 와서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는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샤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는 로니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떼어내고는 그 창백한 아이샤의 얼굴에 시트를 덮었다. 로니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의사를 바라보았다.

", 이럴 수가안 돼요!"

로니는 극도의 비통함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녜요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제발"

그녀는 손에다 얼굴을 묻고 의자에 털썩 몸을 기댔다.

", 왕비님."

의사는 로니의 어깨를 감싸며 낮게 말했다.

"아이샤 왕비님을 위해서라도 우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시던 왕비님을 보셨으니, 아이샤 왕비님은 틀림없이 알라신의 품안에서 평화롭고 안전하게 계실 겁니다."

"그렇지만 우린 이제 금방 친구가 되었는데, 그리고그리고 나도 할 말이 많았는데이젠 아이샤와 얘기할 수 없으니!"

로니는 흐느끼면서 의사에게 이끌려 천천히 문 쪽으로 갔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단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일 뿐이지요. 그 안에서 아이샤 왕비님은 벌써 고통을 다 벗어 버리셨을 겁니다. 아이샤 왕비님의 순수한 영혼은 축복받은 사람들 가운데 아름답게 빛나고 있어요."

그 의사는 부드럽게 말했다.

"왕비님은 아이샤 왕비님이 가지게 된 이 행복을 시샘하셔선 안 됩니다. 그리고 아이샤 왕비님이 왕비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걸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로니는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방을 나와 복도를 따라 걸었다. 슬픔으로 온몸이 거의 마비돼 대기하고 있던 차에 자기 몸을 실으면서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궁전에 차가 도착했을 때까지도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슬픔과 자책감으로 온몸을 떨며 로니는 차에서 내려 자기 남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 바디르!"

로니는 울부짖었다.

"가엾은 아이샤, 아이샤는아이샤는"

"그래, 그래, 나도 알아, 로니."

그는 로니를 꼭 끌어안으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난 너무 어리석었어요!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너무 잔인했어요! 그리고그리고 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요."

로니는 흐느껴 울었다.

"날 용서해 줄 수 있나요?"

"용서할 게 없소.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밖엔아이샤의 너그러움으로, 아이샤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었지. 우리는 이 소중한 선물을 받아서 잘 간직해야잖겠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바디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입술을 꼭 다문 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그래요. 그렇고말고요."

길게 내뿜는 그의 숨소리를 느끼며 로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로니를 더욱더 힘껏 껴안으며 뜨거운 키스를 했다.

그날 저녁 늦게 로니는 깊은 잠에서 깨었다. 로니가 고개를 돌리자 바디르가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로니 곁으로 와서 앉았다.

"기분이 좀 괜찮아?"

그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 "

그는 로니가 일어나는 걸 도와주었다.

"우린 말해야 해요. 그런데 어떻게 사과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 사이에 무슨 사과의 말이 필요하겠어? 오래 전에 당신이 내 아파트에 왔을 때부터 난 나도 모르게 사랑에 빠졌었지. 그때부터 당신에게 가졌던 내 깊은 사랑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로니."

로니는 떨리는 자기 손만 내려다보다가 용기를 내어 바디르의 눈과 마주쳤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영원토록요. "

그녀는 베개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너무 어리석었다는 걸 알아요. 우리의 결혼생활은 아주 복잡한 것이었죠, 바디르. 날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나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의심했던 것에 대해서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당신을 나무랄 수 있겠어? 모두가 내 잘못인걸. 그래, 처음부터 그랬어. 우리가 결혼하면서부터 우리의 사랑은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긴장의 연속이었지. 난 그때 기다렸어야 했어. 쿠데타가 성공할 때까지 참았다가 당신과 결혼했어야 옳았어. 하지만 난 당신을 너무나 원하고 있었으니까! 당신은 참으로 아름다왔어. 그래서 난 내가 없는 동안 다른 남자에게 당신을 빼앗길까 봐 두려웠던 거야."

"그때 난 결혼해서 날 도만으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잖아요."

"그래, 난 그때 어떤 불행이 일어날 건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어야 했어. 하지만 당신에 관한 한 난 너무나 약하니"

그는 로니에게 키스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은, 그때 난 너무 오래 우리나라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독재적인 통치나 당치 않은 처사들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몰랐다는 거야."

"가엾은 바디르."

로니는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난 당신 아버지에게 미안함을 느껴요. 그분은 20세기에 맞춰 사시기엔 너무 힘드셨던 거예요. 이제 그걸 알겠어요."

바디르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나보다 더 관대하군. 자기 아버지에 대해 반역음모를 꾸민 건 큰 불효지. 벌을 받는 게 마땅했어. 그래서 결국 그 대가를 치렀고, 당신의 존재를 그렇게 갈망하지만 않았어도 그 5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지진 않았을 거야."

"아이샤?"

로니는 떨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지나가고 바디르는 로니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막다른 골목이라더니, 정말 아버지가 당신을 협박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심정이 꼭 그랬어. 난 당신을 안전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지. 한번 보지도 못한 여자와 결혼하는 수밖에. 그 무시무시한 결정 때문에 우리 모두는 고통을 당하게 된 거야. 가엾은 아이샤!"

그는 어조를 부드럽게 하여 계속 말했다.

"처음 그 여름 궁전에 왔을 때, 그녀는 너무나 겁에 질려 있었지. 상상할 수 있겠어? 그녀는 어머니도 없었고, 아버진 체포돼 있었고, 자기가 살던 곳 밖으론 거의 나가본 적도 없었어. 아이샤가 금방 앓아눕자 난 그게 내 책임이라는 걸 알았어, 로니. 당신을 구하려고 한 선택이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샤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결과가 된 거야. 이해할 수 있겠어?"

"물론이죠. 딴 아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당신의 진실된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요."

바디르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난 처음부터 아이샤에게 당신에 관한 걸 말했지. 그리고 그녀의 결혼은 명목뿐인 결혼생활이라는 걸 밝혔어."

"나도 알아요. 아이샤가 얘기해 줬어요. , 바디르! 아이샤를 좀 더 빨리 만날 수 있었더라면너무 늦게 만났어요."

로니는 바디르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아이샤는 아름답고 착한 여자였어. 난 아이샤를 좋아했고 마음을 다해 돌봐 주었지. 하지만 아이샤가 당신이 될 수는 없었어."

잠시 후, 바디르는 로니의 놓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황금률 중의 하나를 이제 깨뜨릴 작정이야. 당신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건 내겐 너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어. 내 일생을 통틀어 지난 몇 주일처럼 얼어붙어 있어야 했던 적은 없었지! 그런 의미에서 우린 얼음에 둔 샴페인을 좀 마시기로 하지. 내 열을 좀 식혀 줄 수 있을 거야."

로니는 눈물이 괴어 있는 눈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마, 요 마녀 같은 아가씨야."

그는 장난스럽게 말을 하고는 인터폰을 들어 샴페인을 가져오라고 했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나고, 쟁반을 든 후사가 들어왔다. 그녀는 작은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더니 로니에게 의미 있는 미소를 던지고는 얼른 나가 버린다.

"후사는 어쩔 수 없는 로맨티스트야!"

거품이 이는 샴페인 잔을 아내의 손에 건네주며 바디르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글쎄, 후사는 계속해서 당신에 대해서 물어보고, 당신을 빨리 도만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거야. 물론 난 그럴 용기가 없었어. 그렇지만 장모님의 편지를 받았을 땐 말야, 그 편지엔 장모님 결혼소식과 당신에 대한 걱정이 적혀 있었지. 드디어 모험을 하기로 결심을 했어.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었지. 하지만 내가 아무리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당신과 더 이상은 떨어져 살 수가 없었어.

그리고 우리가 대사관에서 다시 처음 만났을 때, 그때 키스를 해보고는 당신이 아직도 내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았지. 하지만 까다롭고 고집 센 당신을 다루는 건 큰 문제였어. 당신을 도만으로 다시 데려오는 일은 내가 해본 일 중에 제일 힘든 일이었어. 방울뱀이 우글거리는 동굴 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그래요? 그래서, 내 맘을 얻으려고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을 했나요?"

로니는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 초인종 소리는 아직도 소름이 끼칠 정도예요. 그 모피 코트 하며!"

", 로니. 당신은 그때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어. 그래서 동물원에 가서도 당신을 강제로 안아 버렸지."

볼이 붉게 물든 로니를 바라보며 바디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그리고 사실 당신이 런던에 왔을 때 아이샤 얘기를 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바디르는 슬픈 표정으로 샴페인 잔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우겨서 당신 홀로 그 여름 궁전에 남아 있었던 몇 개월은, 사실 우리가 떨어져서 보냈던 5년보다도 훨씬 더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어. 물론 당신이 아이를 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사실 난 당신에게 달려가서 진실을 말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렇지 못했지. 물론 모든 게 내 책임이란 건 알면서도 은근히 화가 나잖아. 난 이렇게 생각을 했지.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겠지 하고 말이야.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내 자존심이 허락을 않더군."

", 바디르"

로니의 눈엔 눈물이 글썽였다.

"당신에게 너무나 고통을 주었군요."

"우린 둘 다 충분히 고통을 받았어. 착한 아이샤는 우리에게 소중한 선물을 주고 갔어. 우리에겐 사랑스러운 딸이 있어. 뿐만 아니라, 이제 곧 또 하나의 아이가 태어나게 돼. 로니, 감사한 마음으로 행복한 미래만을 바라보자구.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는 뒤돌아보지 말구 말야."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리고 4개월이 흐른 어느 날, 로니는 수평선을 천천히 넘어가고 있는 붉은 해를 창문 너머로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 여름 궁전에 온 지도 일주일이 다 돼가고 있었다. 로니는 이미 나른하고 편안한 상태로 빠져들어갔다. 멀리서는 배에서 내린 어부들이 서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가까이에서는 제이드가 자기 아빠와 재잘거리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왔다.

만족스럽게 긴 숨을 내쉬고 로니는 고개를 숙여 자기 품에 안긴 아이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진 카림은 바디르를 꼭 빼닮았다. 아기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산이라곤 한 가지 반짝이는 청록빛의 눈동자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품에 안겨 쌔근쌔근 자고 있어 그 푸른 눈은 나른한 눈꺼풀에 숨겨져 있다.

"난 내 아들에게 질투가 나는데."

바디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드의 방에서 건너오고 있는 남편을 올려다보며 로니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 아이는 식욕이 왕성해요. 자기 아빠랑 똑같애."

아기의 턱에 묻은 우유를 닦아내며 로니는 아이를 안아올려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

깊이 숨을 내쉬며 바디르는 로니 옆에 앉았다.

"당신에게 전해 줄 뉴스가 세 가지 있는데. , 우선 첫째로, 난 내가 친 전보의 회답을 받았지. 당신도 들으면 좋아할걸. 장모님과 당신 새아버지가 우릴 만나러 일주일 안으로 오시겠대."

"어머, 정말이에요? 어머니를 다시 보게 되다니!"

"그리고 어머니도 새 손자를 보시면 좋아하시겠지, ?"

그는 자기 아들의 뺨을 살짝 건드리며 자랑스러운 듯 덧붙였다.

"카림은 아주 영리한 아이야. 오늘 날 보고 웃었다고 했지?"

"그래요? 그리고 다른 두 가지 뉴스는 뭐죠?"

"당신은 기억하겠지내가 이복 누이동생 나디아에게 굉장히 화를 냈었던 일 말야. 난 화가 너무 나서 나디아를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사촌들에게 보내 버렸었지. 그들은 엄격한 종교 교파를 따르기 때문에 나디아가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면 뭔가를 좀 느끼는 게 있을 것 같아서 말야. 그런데 놀랍게도 난 오늘 그쪽 집안 어른으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어. 나디아가 그들 중에 제일 나이 많은 왕자와 열애에 빠졌으니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거야."

바디르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제일 우스운 건 그 왕자는 이미 두 명의 아내와 셀 수 없이 많은 자식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거야. 물론 축하를 보내야지. 그리고 그 가엾은 왕자가 마음을 바꿀 생각만 없다면, 난 어마어마한 지 참금을 보낼 생각도 있다구."

"말도 안 돼요!"

로니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참으며 반대했다.

"나디아를 그렇게 혼란 속으로 밀어 넣을 필요까진 없어요. 여태까지도 불행하게 지내왔는데."

"아니,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나디아는 아버지와 제일 많이 닮았지. 난 당신이 어떤 걸 내걸어도 당신과 내기할 수 있어. 나디아는 곧 자기 남편을 설득해서 두 아내를 버리게 하고,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만들 거야. 나디아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그렇게 되면 그 남편의 일생은 점점 더 비참하게 되겠지? 그 가엾은 사람에겐 지참금이 위로가 될 거야."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또 다른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오늘 페이잘 숙부께서 날 만나러 오셨지. 그 나이 드신 분이 내게 결혼 승락을 받아야 하겠다고 하셨을 때,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

"뭐라구요?"

"숙부님께선 우리 제이드의 가정교사님과 결혼하고 싶으시대. 그리고 난 이미 엘리자베스에게서 들은 말이 있거든. 집안으로 말들을 데리고 들어오지 않겠다는 것과 두 번째 아내를 얻지 않겠다는 걸 약속하기만 한다면 그녀도 숙부님과 결혼할 생각이 있다고 말야."

"너무 잘됐어요. 얼마나 신나는 일이에요! 엘리자베스에게 당장 가서 말해 줘야겠어요."

"아니, 지금은 안 돼."

바디르는 로니의 품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받아안아 아기 침대에 눕히며 나직이 말했다.

"지금은 이 아이의 아버지에게만 신경을 써줄 시간인 것 같은데, 안 그래?"

그는 로니를 침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로니의 푸른 눈동자가 기쁨으로 반짝였다.

", 바디르."

그의 몸속에서 고동치는 열정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그리고 그녀의 핏줄 속으로도 욕망의 물결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찌 감히 폐하의 말씀에 거역할 수 있겠나이까? 난 그런그런 대역죄는 감히 저지를 수가 없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