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
가위손
가을 산
간절곶 시편
거꾸로 읽는 법
겨울 길음동
겨울 단장(斷章)
겨울 들
겨울 풍경
견디다
계단
공평리
관계
교감
구르는 돌은 둥글다
구름에 깃들어
구멍
귀는 소리로 운다
그것
그늘과 함께 한나절 - 여수 시인의 편지
그늘에 기대다
그다음
그때
그때가 절정이다
그때마다 나는 얼굴을 붉히고
그래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아이
그리운 인력(引力)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그림자
그림자에게 부치는 엽서(葉書)
그 말이 나를 살게 하고
그 말이 나를 삼켰다
그믐달
그 사람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그에게 묻는다
그 여자의 극(極)
그의 말
그자는 시인이다
그 자리
기차를 기다리며
길을 찾아서
깊은 강
꽃점
꿈에 대하여
끈
끝
끝 섬
나는 강변에 있다
나는 공어(空魚)
나는 기쁘다
나는 알지요
나는 어서 말해야 한다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나를 당기소서
나를 살게 하는 말들
나무에 대한 생각
나무의 힘
나의 거울
나의 라이벌
나의 산수
나의 숟가락
나의 어리석음이
나의 잔
나이
날씨
내 마음에 점 찍기 - 점심(點心)
너는 나다
너무 많은 생각
너무 많은 입
너에게 부침
너에게 쓴다
노선
노을 시편
노을을 적다
놓았거나 놓쳤거나
누가 내게 묻는다면
누가 말했을까요
눈
눈 내리는 날
눈물
다시 한 자리
단추를 채우면서
단 한 번
단추를 채우면서
달맞이 고개에서 한 철
답(答)
대대포에 들다
도공의 말
두붉나무
뒤편
뒷길
들
뜻밖의 질문
마들에서 광화문까지
마들 종점
마음아
마음의 경계
마음의 달
마음의 벽
마음의 뿌리
마음의 수수밭
마음의 지진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
마찬가지
마흔 살 되는 해는
말
맴돌다
머금다
모래내 종점
목이 긴 새
못
못질을 하며
몽산포
무서운 시간
무소의 뿔처럼
무심천의 한때
묵상(好拳)
문득
문장들
물가에서의 하루
물결 무늬 고동
물에게 길을 묻다
물음
물의 가족
바다 보아라
바다 시인의 고백
바람길
바람 부는 날
바람 아래 해변
바람을 맞다
바람 편지
바퀴
반드시
발 없는 새
발자취
밥
방편
배경이 되다
배밭을 지나며
벌새가 사는 법
벽
벽과 문
변화
별이 사라진다
별자리
보리밭을 지나다
봄
봄밤
부르는 소리
부재(不在)
불멸의 명작
불편한 진실
붙잡을 수 없는 것들
비
비 오는 날
사라진 것들의 목록
사라진 계절
사람들
사람의 일
사랑
사랑에 대하여
사소한 한마디
사의 찬미 - 윤심덕 조로
사흘 동안
산에서의 하루
산을 오르며
삶에게
삶에게 길을 묻다
상실
상일(上一) 세탁소
상일동 아침
상처
새가 있던 자리
새는 너를 눈뜨게 하고
새록이
새벽 시장
새벽에 생각하다
새에 대한 생각
샛강
생(生)
생각은 강력한 마약
생각은 꼬리가 길다
생각이 달라졌다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생각하는 사람
생각하면서
생의 한가운데
서로 보기
서른 살의 눈
섬말에서
성(聖) 고독
성에
세상을 돌리는 술 한잔
세상 읽기
소리꾼
손
수락 시편
순서가 없다
술래
숨은 꽃
숫자를 세다
스무고개
스스로를 부르다
슬픔을 줄이는 방법
시간이 필요하다
시는 나의 힘
시와 건축
시의 회초리
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시인을 읽는 밤
시인의 말
시인의 말이라고?
시인이 되려면
시인이 시인에게
시작과 끝
시작법(詩作法)
시(詩) 통장
신이 내게 묻는다면
실직
실패
썩은 풀
쓴 맛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아무 날도 아닌 날
아비
아우성
아침마다 거울을
아침에 일어나니
안경 탓이다
알피니스트
어깨동무
어느 한 사람의 산책길
어디로 갈까
어떤 일생
어떤 하루
어제
어제를 돌아보다
어처구니가 산다
얼마나
여름날
여름 한때
여식(女息) 보아라 - 아버지의 옛 편지
여운
역(驛)
오늘 쓰는 편지
오래된 가을
오래된 골목
오래된 나무
오래된 농담
오래 젖은 집
옷깃을 여미다
옷 입다 생각하니
왁자지껄
왜가리
왜 몰랐을까
왜요?
외길
외딴섬
우두커니
우리 같은 사람들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것들
우표 한 장 붙여서
운명이라는 것
웃는 울음
원근(遠近)리 길
위하여
은행에서
이건 우연이 아니다
이른 봄의 시(詩)
이름
이상 난동
이처럼 되기까지
이 하루
인천에 가서
일흔 살의 인터뷰
입
자신
자연을 위한 헌사
자화상
잡(卡))에서의 하루
저녁을 부려놓고 가다
저녁의 정거장
저 달을 들어내면
정든 땅 언덕 위에
정작 그는
좋은 날
좌우명
즐거운 하루
지나간다
지독한 사랑
지루한 날
지혜
직소포에 들다
직업
진로를 찾아서
진실로 좋다
집
칩으로의 여행
차이를 말하다
참는다는 것
참 좋은 말
책장을 덮는다
첫 길
첫 꽃
청사포에서
최고봉
추억
추월산
축복
친구
침묵
침묵 씨(氏)
탈바꿈
풀 베는 날
하나밖에 없다
하늘을 볼 때마다
하루
하루는 하나의 루머가 아니다
하루살이
한계
한 권의 책
한 사람의 선택길
한 아이
한 자리
허기
활
후기(後記)
후회는 한여름 낮의 꿈
휘둥그레진 눈
흐린 날
흑포
희망이 완창이다
1년
1분 동안
2월
2월은 홀로 걷는 달
가시나무
천양희
누가 내 속에 가시나무를 심어놓았다
그 위를 말벌이 날아다닌다
몸 어딘가, 쏘인 듯 아프다
생이 벌겋게 부어오른다. 잉잉거린다
이건 지독한 노역(勞役)이다
나는 놀라서 멈칫거린다
지상에서 생긴 일을 나는 많이 몰랐다
모르다니! 이젠 가시밭길이 끔찍해졌다
이 길, 지나가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라
돌아가지 않으리라
가시나무에 기대 다짐하는 나여
이게 오늘 나의 희망이니
가시나무는 얼마나 많은 가시를
감추고 있어서 가시나무인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나를
감추고 있어서 나인가
가시나무는 가시가 있고
나에게는 가시나무가 있다.
가위손
천양희
머리를 자르다 생각한다
가위는 냉정해
자를 것은 자른다
짧아진 머리를 보다 또 생각한다
누가 이 머리를 절단낸 것일까
가위를 움직이는
저 무서운 손
가을 산
천양희
나뭇잎들이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날,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바람 소리 가을이 늦었다고 투덜댑니다 숲은 또 다른 것들을 품었는지 만삭의 배를 내밀고 일찍 씨 떨군 나무들의 열매가 붉습니다. 붉은 것들이 제멋대로 타는 속을 자꾸 부추깁니다. 한살이를 끝낸 벌레들이 땅 끝으로 숨는 때, 나는 스스로 붉게 타는 나무들의 속을 궁금해 합니다. 맘속이 뿌리 속보다 깊어지는 하루. 하루의 길이 사람의 길이라서 산 끝이 또 올려다보입니다. 산길을 오르고서야 평지에도 바람이 지나가고 있음을 알아냅니다 마을 지붕에선 풀들이 철 늦은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살아 있는 것들의 목소리가 제 그림자보다 더 길어지고 있습니다. 가야 할 길들의 앞날이 위태롭고 지금 바위들은 내 괴로움 곁에서 묵묵합니다. 나는 천지에다 호소하는 마음으로 하늘 언저리를 기웃거립니다. 저 같은 죄인도 구원할 수 있나요? 물가의 은빛 갈대들이 바람에 쓸려 한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저게 세상이라면......망우리쯤에서 어둠이 헐떡이며 달려오고 있습니다 골짜기는 깊어서 제 몸 속에 그것을 오래 감추고 이 길 그치고 나면 가을은 더 붉어질 것입니다.
간절곶 시편
천양희
어제는 간절곶에 가서
산 세월이 무거운 사람들과
간절한 사연 몇 편 적었더랬습니다
쓰다가 못 쓰면
눈물로 점을 찍었지요
물새들이 새 발자국을 찍었는지
모래밭이 아주 환했습니다
장문을 물길이 아니라도
수평선 따라가는 길은
물결 소리 단편처럼 간절했습니다
나는
쓴 것으로 약을 삼은 문장 앞에서
주저앉습니다
쓰지 못한 것은 정작
간절곶뿐입니다
거꾸로 읽는 법
천양희
하루가 길게 저물 때
세상이 거꾸로 돌아갈 때
무슨 말이든
거꾸로 읽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정치를 치정으로 정부를 부정으로 사설을 설사로
신문을 문신으로 작가를 가작으로 시집을 집시로
거꾸로 읽다 보면
하루를 물구나무섰다는 생각이 든다
내 속에 나도 모를 비명이 있는 거다
어제는 어제를 견디느라
잊고 있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직성(直星)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넌 아직도
바로 보지 못하는 바보냐, 한다
거꾸로 읽을 때마다
나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나도 문득
어느 시인처럼
자유롭게 궤도를 이탈하고 싶었다
겨울 길음동
천양희
골목이 텅 비었다 개들도 주정꾼도 보이지 않는다 길 건너 육교 쪽 가로등이 뿌옇다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담을 넘는다 파출소 뒷길 부산상회 탁씨 갈매기 바다 위에…… 콧노래 부르며 덧문을 닫고 있다 늦은 밤 버스 종점 바람이 차다 빈 택시 한 대 총알처럼 지나간다 지가 빠르면 세월보다 빠름감 서울 와서 늙은 수선소집 목포댁 재봉틀 돌리며 중얼거린다 세상에는 왜 이리 고칠 것이 많은가 나도 나를 고치는 데 이십 년이 걸렸다 걸려 있는 빨랫줄 무슨 악연처럼 얽혀 있다 저 줄이… 그 집의 내력 끌고 왔을 것이다 마당 깊고 언덕길 너무 가파르다 누구나 절벽 하나쯤 품고 산다는 것일까 발끝이 벼랑이다 날마다 벼랑 끝을 기어오른다 정상 정복할 등산가처럼.
겨울 단장(斷章)
천양희
이러지도 못하고
어쩔 수도 없을 때
마음은 낡은 기차 바퀴처럼
털털거린다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언제나 사랑은 귀일(歸一)하지 못했다
차창에는
두꺼운 상처 같은 성에가 끼고
갑자기
내 입김 속에 들어오는
창밖은 빈 들이다 빈 들이다
지나치는 일보다 더 빨리
빈 들은 지나간다
지난날의 구름 조각들도
지나가 버린다
남은 것은
거친 들바람 속에 세워둔 몸뿐
몸 위에는
눈물 같은 서리가 덮여 있다
길이 끝나기 전에는
이 길로 마냥 가면
이 겨울
눈보라 속에 놓이는
내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언제나 사랑은 귀일(歸一)하지 못했다.
겨울 들
천양희
마들에 나가
들판 끝 본다
눈 끝의 새 본다
들풀에도 새가 앉네
새는 가벼우니까
들판의 새보다 더 가난한 게 있을까
가난은 가도 가도 가벼운 것
가벼운 것이 들 한쪽 물고
어둔 구름에서 나온 번개같이
날아간다 거침없이
허공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고
경고라도 하듯 거침없이
하늘 추워지고 꽃 다 진다
꽃 진 자리에 새울음 남아 있다
저 울음보다
맑은 가난이 또 있을까
허허들판
겨울 풍경
천양희
헐벗은 나무
둥지 튼 새들은 떠나갔다
허둥대는 바람같이
떠도는 마음 하나 못 붙들고
삶은 종종 살얼음판이었다
나는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어째서
같이 살면서 혼자 일어서야 하고
사람들은 어째서
낯선 거리 떠돌며
돌아가려 하는지
봄은 아직 멀었는데
기다렸다 기다렸다 기다렸다
눈보라 헤치며 어느 날.
견디다
천양희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황새와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는 낙타와
일생에 단 한 번 울다 죽는 가시나무새와
백 년에 단 한 번 피우는 용설란과
한 꽃대에 삼천 송이 꽃을 피우다
하루 만에 죽는 호텔펠리니아 꽃과
물속에서 천 일을 견디다 스물다섯 번 허물 벗고
성충이 된 뒤 하루 만에 죽는 하루살이와
울지 않는 흰띠거품벌레에게
나는 말하네
견디는 자만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그토록 견디는가
계단
천양희
빛을 너무 옹호 마라
빛은 어둠을 통해서 왔거니.
매혹을 너무 탐하지 마라
매혹은 환멸을 통해서 왔거니.
행복을 너무 축복 마라
행복은 불행을 통해서 왔거니.
사랑을 너무 찬탄 마라
사랑은 이별을 통해서 왔거니.
죄를 너무 비난 마라
죄는 삶을 통해서 왔거니.
삶을 너무 믿지 마라
세상은 끝간 데 없는 계단이니까.
공평리
천양희
바람이 혼자 들판으로 내려간다
가다가 풀잎에 귀도 대본다
사람의 말은 너무 누추해
집 없이도 잠드는 짐승들을 말하지 않는다
낮은 산들이 기척 없이 얼굴 내밀고
들판 끝에는 바다 한쪽이 걸려 있다
좁은 길에 허리 묶에 뒤트는 서울
이 길이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공평리에 가서 公平! 하고 부르면
사방이 들판처럼 평평해질까
나는 아직도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오랫동안 내 맘을 헐벗게 하였다
헐벗은 맘속으로 길들이 뻗어 있다
서해바다, 서걱거리는 서쪽
모래밭을 건너가면 마음까지 서걱거리며
나는 한순간 공평리를 잃어버린다
공평을 얻으면 바다를 얻는 것
저 잘난 파도쯤이야 저들끼리 놓아두고
나는 겨우 수평선 하날 빌려 돌아온다
관계
천양희
길은 끝나는 데서 시작됩니다. 시작은 시험입니다.
서로 만나는 데서 길은 시작됩니다.
시작은 삶의 첫 시험입니다.
시험은 삶의 시련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길이
사람의 길입니다.
길은 시작하는 데서 끝이 납니다. 끝은 시련입니다.
서로 헤어지는 데서 길은 끝납니다.
끝은 삶의 마지막 시련입니다.
시련은 삶의 시험입니다. 끝도 시작도 없는 길이
사람의 길입니다.
교감
천양희
사랑때문에 절망하고
절망 때문에 사랑한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환멸은 길고 매혹은 짧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그 말에 우린 서로 '그래 맞아'
그렇게 말했었지요.
희망 때문에 절망하고
절망 때문에 희망한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현실은 길고 환상은 짧다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그 말에 우린 서로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그렇게 말했었지요.
구르는 돌은 둥글다
천양희
조약돌 줍다 본다 물속이 대낮 같다
물에도 힘이 있어 돌을 굴린 탓이다
구르는 것들은 모서리가 없어
모서리 없는 것들이 나는 무섭다
이리저리 구르는 것들이 더 무섭다
돌도 한자리 못 앉아 구를 때 깊이 잠긴다
물 먹은 속이 돌보다 단단해 돌을 던지며
돌을 맞으며 사는 게 삶이다
돌을 맞아본 사람들은 안다
물을 삼킨 듯 단단해진 돌들
돌은 언제나 뒤에서 날아온다
날아라 돌아,
내 너를 힘껏 던지고야 말겠다
구름에 깃들어
천양희
누가 내 발에 구름을 달아 놓았다
그 위를 두 발이 떠다닌다
발 어딘가, 구름에 걸려 넘어진다
生이 뜬구름같이 피어오른다 붕붕거린다
이건 터무니없는 낭설이다
나는 놀라서 머뭇거린다
하늘에서 하는 일을 나는 많이 놓쳤다
놓치다니! 이젠 구름 잡는 일이 시들해졌다
이 구름,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구름 기둥에 기대 다짐하는 나여
이게 오늘 나의 맹세이니
구름은 얼마나 많은 비를
버려서 가벼운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나를
감추고 있어서 무거운가
구름에 깃들어
허공 한 채 업고 다닌 것이
한 세기가 되었다
구멍
천양희
많은 것을 잃고도 몸무게는 늘었다
언제부터 비명이 몸 속으로 드셨나
근심을 밥처럼 먹고 병을 벗삼아
자란 비명들
많은 것을 잃고도 몸무게는 늘었다
언제부터 비명이 맘속으로 드셨나
우울을 우물처럼 마시고 불안을 벗삼아
자란 비명들
잃었거나 잊은 것보다
더 큰 생의 구멍이 있을까 탓하지 말자
귀는 소리로 운다
천양희
귀뚜라미 소리가
귀 뚫어, 귀 뚫어 우는 것 같다
그동안 내가
귀를 닫고 산 까닭이다
내가 나를 견디는 동안
눈을 닦고 보아도 산빛은 어둡고
강물은 먼 데로만 흘러가
꽃 지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이 세상 모든 소리는 비명 같아
귀에 한세상 넣어주는 소리만이
침묵을 대신하는 유일한 문장이라고 쓰고는 하였다
어디서 오는 소리든
슬픈 소리는 눈으로 듣고
귀는 소리로 운다고
귀 뚫은 듯 귀 뚫은 듯
이렇게 자꾸 귀 기울여보는 것인데
나는 이제
다른 소리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되었다
귀는 소리로 운다
그것
천양희
그것은 쓰고 싶은 연장
그것은 무엇이든 덥석 잡는다
한번 잡으면 놓지 않는다
그것은 잡을 때 힘이 세고 놓을 때 힘이 없다
그것은 굴리고 싶은 바퀴
그것은 무엇이든 밟고 지나간다
한번 밟으면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밟을 때 힘이 세고 지나갈 때 힘이 없다
한 시절을 주무르고 누르던 사람들의
전기를 읽다 나는 보았다
그들의 손과 발은 얼마나 손발이 잘 맞는 한통속인가
그늘과 함께 한나절 - 여수 시인의 편지
천양희
구름을 이고 사는 구름송이풀이 있고요
삶을 이고 사는 내가 있지요
한나절 나는 구름을 쫓아다녔어요
바람맞으며 으악, 소리 내는 풀이 있고요
살면서 바람맞은 내가 있지요
한나절 나는 으악새처럼 으악 소리를 내었어요
햇빛 너무 밝으면 그늘 깊고요
한나절 나는 그늘 깊은 집이었어요
마음(心) 아닌(非) 것이 슬플 비(悲)이고요
한나절 나는 슬픔을 이길 힘 찾지 못했어요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고 말들하고요
나는 가끔 뒤돌아보았어요
그늘을 생각하면
나는 미리미리 서늘해져선
한나절이라도 내가 먼저
봄이 되고 싶었어요
그늘에 기대다
천양희
나무에 기대어 쉴 때 나를 굽어보며
나무는 한 뼘의 그늘을 주었다
그늘에다 나무처럼
곧은 명세를 적은 적 있다
누구나 헛되이 보낸 오늘이 없지 않겠으나
돌아보면 큰 나무도
작은 씨앗에서 시작된 것
작은 것이 아름답다던 슈마허도
세계를 흐느끼다 갔을 것이다
오늘의 내 궁리는
나무를 통해 어떻게 산을 이해할까, 이다
나에게는 하루에도 사계절이 있어
흐리면 속썩은풀을 씹고
골짜기마다 메아리를 옮긴다
내 마음은 벼랑인데
푸른 것은 오직 저 생명의 나무뿐
서로 겹쳐 있고 서로 스며 있구나
아무래도 나는
산길을 통해 그늘을 써야겠다
수풀떠들썩팔랑나비들이 떠들썩하기 전에
나무들 속이 어두워지기 전에
그다음
천양희
날이 갈수록 뜨거운 눈물 거들나고
사랑도 눈에 띄게 축이 났지만
저무는 꿈 밖으로
네 인생 미리 버리지 말라
지는 해 서편으로 돌아간다고
이 가을에 나뭇잎 떨어진다고
어찌 세상일 쓸쓸하다 말 할 수 있으랴
아직도 가야 할 길 남아 있고
가난하나 죄 없는 꿈 하나 가졌으니
강물 소리 없이 깊어 가듯
우리도 그렇게 깊어야 하리.
그때
천양희
나루터에서 배를 기다린 적이 있다.
강은 배 한 척을 위해 종일 소리 없이 흘렀다. 그것도 모르고 철없이, 철도 없이 배는 저 혼자 세차게 물결을 일으켰다.
그것이 안타까워 강은 더 깊게 흐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때 나는 누굴 위해 날 무릅쓰던 일이 생각났다.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그를 받으려고 있는 대로 가슴을 열어젖히던 그때가.....강물처럼 깊게 흘러갔다. 소리도 없이......
나루터에서 배를 보낸 적이 있다.
그때가 절정이다
천양희
하늘에 솔개가 날고 있을 때
지저귀던 새들이 숲으로 날아가 숨는다는 걸 알았을 때
경찰을 피해 잽싸게 골목으로 숨던
그때를 생각했다
맞바람에 나뭇잎이 뒤집히고
산까치가 울면 영락없이 비 온다는 걸 알았을 때
우산도 없이 바람 속에 얼굴을 묻던
그때를 생각했다
매미는 울음소리로 저를 알리고
지렁이도 심장이 있어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알았을 때
슬픔에 비길만한 진실이 없다고 믿었던
그때를 생각했다
기린초는 척박한 곳에서만 살고
무명초는 씨앗으로 이름값 한다는 걸 알았을 때
가난을 생각하며 '살다'에다 밑줄 긋던
그때를 생각했다
제 그림자 밟지 않으려고
햇빛 마주 보며 걸어갔던 시인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고독에 바치는 것이 시라는 걸 알았을 때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던
그때를 생각했다
돌아보면
그때가 절정이다
그때마다 나는 얼굴을 붉히고
천양희
가을 하늘에 새 두 마리 아름답구나
내가 쓴 시보다 아름답고 완벽하구나
나는 작은 것 속에 세계가 들어 있다고 쓰지 못했다
그 속에 뭉클한 비밀 있음을 못 보았다
흔들리는 것들, 전에는 나무였던 것 물이었던 것 몰래 바람 소리
물소리 풀잎 소리 서적거리며 따라 온 길섶에도
생생한 생(生)의 기미가 있음을 못 보았다
나는 오직 꽃들이 무사한지 애착했을 뿐이다
꽃 속에 세상을 넣고 다닌 적이 있다
꽃의 의미, 꽃말들, 꽃씨들은 또 얼마나 둥글고 작았던가
작은 것이 아름다워 새들은
세상에 둥근 씨를 옮기고
나무는 새의 둥지를 낮춘다
그때마다 나는 얼굴을 붉히고
태아처럼 동그랗게 웅크렸던 것이다.
그래서
천양희
먹는다, 먹는다면 밥인가
욕인가, 욕망인가
씹고 씹으면서
소화하지 못한 生밥
생(生)의 밥이 된 나를
밥줄이 놓아주지 않는다
밥이 되는 일이 그래서
사는 일이
죽이 되지 않고
온밥이 되는 일이 그래서
쉽지만은 않다
고프면 더욱
생각나는 밥이
허(虛)하면 더욱
고픈 사랑이 그래서
우리의 밥이 되는 밥이 그래서
우리의 밥이 되는 사랑이
그래서 우리가 매달리는 줄이
그래서 면면히 이어질
생(生)의 줄, 밥-줄.
그런 것이다
천양희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내가 없어졌을 때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존재란 그런 것이다
나는 연애의 시작부터 여자를 포기했다
여자가 없어졌을 때
나는 연애를 하기 시작했다
연애란 그런 것이다
나는 시작(詩作)의 출발부터 시인을 포기했다
시인이 없어졌을 때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인이란 그런 것이다
* 김수영 글에서
그리고 아이
천양희
바람도 불지 않는데 나뭇이 하나가 툭, 떨어진다
하늘은 꿈쩍않는데 별 하나가 툭, 떨어진다
비행기 한 대가 떴다 사라진다
그 사이로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비행기 가져와 나뭇잎 가져와
별 가져와
그리운 인력(引力)
천양희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것들이 그립다
모양도 무게도 없는 것들이 그립다
세상 나무들 일제히 손들고
이땅 위 새들도 새끼의 작은 발톱을 아끼고
날아야지 날아야지 마음 먹을까
우리들 높이 솟아오르기 위해
잡초 같은 삶 속까지 솎아내고 싶어
하루종일 땅만 보고 땅만 보고 땅만 보고 있을 동안
세상은 몹쓸 암을 키우고
우리의 하나 남은 하늘까지 덮쳤지
기댈 곳 없어 쓰러진 나무
말라비틀어진 신음 소리 들리나요? 들리나요?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것들
다 새가 아님을 알고 난 뒤
기억하시는지
깊이 가라앉아 세월 보는 일
물 흐르고 흐른 뒤
흔적 남기지 않는 일.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천양희
이게 아닌 데 이게 아닌 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산 넘어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강 건너갔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집까지 잤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그땐 그걸 위해 다른 것 다 버렸지요.
그땐 슬픔도 힘이 되었지요.
그 시간은 저 혼자 가버렸지요.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었지요.
그림자
천양희
마음에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마른 가지 몇개 분질렀습니다
그래도 꺾이지 않는 건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오솔길에 듭니다
바람 부니 풀들이 파랗게 파랑을 일으킵니다
한해살이풀을 만날 때쯤이면
한 시절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나는 그만 풀이 죽어
마음이 슬플 때는 지는 해가 좋다고
말하려다 그만두기로 합니다
오솔길은 천 리로 올라오는
미움이라는 말을 지웁니다
산책이 끝나기 전
그늘이 서늘한 목백일홍 앞에 머뭅니다
꽃그늘 아래서 적막하게 웃던 얼굴이 떠오릅니다
기억은 자주 그림자를 남깁니다
남긴다고 다 그림자이겠습니까
'하늘 보며 나는 망연히 서 있었다'
어제 써놓은 글 한 줄이
한 시절의 그림자인 것만 같습니다
그림자에게 부치는 엽서(葉書)
천양희
바람에 거적들이 너펄거린다.
잠시 눈 부비고
네 얼굴을 들여다 본다
먼지끼고 금간 괴이한 것들
괴이한 것들이 너펄거린다
지하구멍보다 더 패인
삶의 구멍 뚫는 하수인(下手人)
지금은 그것들이 다스리는 나라
우리는 여기 갇혀 있다
웅크리고 보는
밖은 언제나 동일하지 않고
안에서만 속깊이 우는
궁핍한 자들
동일하지 않은 것들에게
축하를 보낸다
어둠이 지나면
안개 걷히고 안개보다 뿌연
궁핍한 자들
자라나며 살찌는 괴이한 것들
정말이지
언제쯤에나 자유롭게
우리를 놓아줄 속셈인가.
그 말이 나를 살게 하고
천양희
접어둔 마음을
책장처럼 펼친다
머리끝에는 못다 읽은
책 한 권이 매달리고
마음은 또
짧은 문장밖에 쓰지 못하네
이렇게 몸이 끌고 가는 시간 뒤로
느슨한 산문인 채
밤이 가고 있네
다음 날은
아직 일러 오지 않는 때
내 속 어딘가에
소리 없이 활짝 핀 열꽃 같은
말들, 언로(言路)들
오! 육체는 슬퍼라. 나는 지상의 모든 책들을 다 읽었노라던 말라르메의 그 말이,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던 김수영의 그 말이, 흠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던 랭보의 그 말이, 누가 나를 인간에 포함시켰소라던 브로드스키의 그 말이, 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떻게 알겠느냐던 니체의 그 말이,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던 발레리의 그 말이……
나는 본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내려앉은 말의 꽃이파리들
내 귀는 듣는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말의 발자국 소리들
나를 끌고 가는
밑줄 친 문장들.
그 말이 나를 삼켰다
천양희
아름다움이 적을 이긴다기에 미소 짓는
이 꽃이 내일이면 진다는 걸 믿지 않았다
할 수 있을 때 장미 봉오리를 모아야 한다기에
한낮의 볕에 그늘 한 뼘 들여놓는 걸 잊지 않았다
불은 태울 수 없고 물은 물에 빠질 수 없다기에
사람이라도 좀 되어보자고 결심했다
끝없는 풍경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기에
세상에 드러나 부끄럽지 않은 것이
꽃밖에 더 있을까 생각했다
삶에는 이론이 없다기에
우리가 바로 세상이란 걸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변했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기에
붓 쥔 자는 외로워 굳센 법이란 걸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갈피를 잡는 동안
그 말이 나를 삼켰다
그믐달
천양희
달이 팽나무에 걸렸다
어머니 가슴에
내가 걸렸다
내 그리운 산(山)번지
따오기 날아가고
세상의 모든 딸들 못 본 척
어머니 검게 탄 속으로 흘러갔다
달아 달아
가슴 닳아
만월의 채 반도 못 산
달무리진 어머니.
그 사람
천양희
보고 있어도 싫증나지 않는 하늘 같은
볼수록 보고 싶은 바다 같은
더 높이 오르고 싶은 산 같은
더 깊게 흐르고 싶은 물 같은
소리쳐도 소리치고 싶은 천둥 같은
부딪쳐도 부딪치고 싶은 방파제 같은
기대도 기대고 싶은 느티나무 같은
시원해서 더 시원하고 싶은 맥주 첫잔 같은
그, 그, 그, 그 사람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천양희
구두 닦는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구두 끝을 보면
검은 것에서도 빛이 난다
흰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창문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창문 끝을 보면
비누거품 속에서도 빛이 난다
맑은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길 끝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빛이 난다
깨끗한 것만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마음 닦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마음 끝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빛이 난다
보이는 빛만이 빛은 아니다
닦는 것은 빛을 내는 일
성자가 된 청소부는
청소를 하면서도 성자이며
성자이면서도 청소를 한다.
그에게 묻는다
천양희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은 늘 같은데
하늘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서울살이 삽십 년 동안 나는 늘 같은데
서울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길에는 건널목이 있고
나무에는 마디가 있다지요?
산천어는 산속 맑은 계곡에 살고
눈먼 새는 죽을 때 한번 눈뜨고 죽는다지요?
동박새는 동백꽃에서만 살고
기린초는 척박한 곳에서만 산다지요?
귀한 진주는 보잘것없는 조개에서 나오고
아름다운 구슬은 거친 옥돌에서 나온다지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고
모든 문제는 답이 있다지요?
사는 것이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고 하겠는지요
슬픔을 가질 수 있어 내가 기쁘다고 하겠는지요
그 여자의 극(極)
천양희
늙지 않는 희망이
추근대는 추억이
썩지 않는 사랑이
겨우 그 여자를 옹호한다 옹색한 옹호
늙을 줄 모르는 아픔이
한정없는 한숨이
썩을 줄 모르는 슬픔이
겨우 그 여자를 변호한다 궁색한 변호
희망이 추억이 사랑이
그 여자의 환상의 極이다
아픔이 한숨이 슬픔이
그 여자의 환괄(括)극(極)이다
그의 말
천양희
산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숲을 말하고
숲에 대해 물어보면
먼저 새를 말하고
새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울음에 대해 말하고
울음에 대해 물어보면
먼저 물에 대해 말하고
물에 대해 말하다보면
어느새
산 아래 내려와 있을 것이다
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다
나머지는 눈부시게 피어나는
저 나무들에게 들으시기 바란다*
* 법정 스님의 말에서.
그자는 시인이다
천양희
그는 일생을 쓰면서 탕진했다 탕진도 힘이었다
그 힘으로 피의 문장을 썼다
불꽃 삼키고도 매운 연기 내는
굴뚝의 문장
시뻘건 꽃 피우다 모가지째 툭, 떨어지는
동백의 문장
모천회귀하려다 불귀의 객이 되는
연어의 문장
문장을 들고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기 위해
쓰고 쓰고 또 쓰는 지독한 짓
문장이란 낭비의 극점에서 완성되는가
말은 뿔처럼 단단해지고
불안은 소리처럼 멀리 퍼진다
뒤져보면 두려움이 슬픔보다 더 두꺼웠다
슬픔은 말하자면 비자금 같은 것인데
슬픔을 저축해둘 걸 그랬어 아이들 듣는데
그런 소리 마라 아이가 자라면 죄도 자라는 것이니
피붙이란 본질적으로 슬픈 것이지
도대체 이놈의 문장은 구속을 담배에 불붙이듯 한다
담배에 불붙이며 중얼거린다
죄를 병처럼 끙끙 앓는 그의 몸은 세찬 바람이다
바람소리에는 운명이 들어 있다 아니 미래의 미지가 들어 있다
어떻든 간에 그자는 시인이다
그 자리
천양희
욱아, 들어보렴 참나무가 욱욱거리며 강물에 떠내려가는구나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뽐내던 참나무가 그까짓 바람쯤이야 그까짓 비쯤이야 하던 나무가 참,나무가 아니었구나 올라갈 줄 모르는 물 속에서 허우적대며 내려가는구나 자존심은 돌멩이처럼 굴러 곤두박질치는구나
끙,끙끙 갈대밭을 지날 무렵 참나무는 더욱 욱욱 거리는구나 그까짓 갈대쯤이야 비웃던 갈대들이 쓰러지지 않았구나 바람에 날리는 갈대가 그 자리에 있었구나
욱아, 들어보렴 갈대는 바람이 불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는구나 고개를 숙이는 자에게 바람은 그냥 지나간다는구나 그렇다는구나
기차를 기다리며
천양희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긴 길인지
얼마나 서러운 평생의 평행선인지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역은 또 얼마나 긴 기차를 밀었는지
철길은 저렇게 기차를 견디느라 말이 없고
기차는 또 누구의 생에 시동을 걸었는지 덜컹거린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를 기다리는 일이
기차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며 쏘아버린 화살이며 내뱉은 말이
지나간 기차처럼 지나가 버린다
기차는 영원한 디아스포라, 정처가 없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기차역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기차역을 지나간 기차인지
얼마나 많은 기차를 지나친 나였는지
한번도 내 것인 적 없는 것들이여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지나간 기차가 나를 깨운다
기차를 기다리는 건
수없이 기차역을 뒤에 둔다는 것
한 순간에 기적처럼 백년을 살아버리는 것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도 기차역을 지나치기 쉽다는 걸
기차역에 머물기도 쉽지 않다는 걸
길을 찾아서
천양희
이 세상 어디에나
자기 위해 길은 열려 있고
뜻있는 곳에 다른 길 있다기에
우리 모두 넉넉히 가기 위하여
한평 땅 빙빙 돌며 몸살 앓는구나
살자고 결심하면
언제 죽음인들 무섭더냐
떠나자고 결심하면
언제 동편이고 서편이고 그 끝 멀다더냐
이제는 서늘하게
폭풍 한 자락으로 휘휘 일어나
그 위에 내 두꺼운 어둠도 넘어뜨려
길 속에 길 있다면
사시사철 길에게만 물어보리라
편치 못한 우리네 일 어쩌냐고
추워서 웅크린 속사정 어쩌자고
전생의 업보쯤 초개같이 버리고
가자 그리운 나라
내 넋으로 내가 살 수 있는 땅.
깊은 강
천양희
바람이 짧게 강변을 지납니다 산 그림자 길게 당겨보고 물새 발자국도 슬쩍 들춰봅니다 상형문자 같은 발자국들 새들도 때로 자국을 남깁니다 물살에 잠길 저것이 흔적일까요 물은 흔적도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걸 몰랐습니다 저기 저 물자리가 무량합니다 물뱀들 물방개들 물결따라 놀고 왼갖 수초들 물을 타고 있습니다 나는 잠시, 물속에서도 잘 놀던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물속에선 누구나 동심으로 돌아갑니다 그것만큼 무심한 것이 더 있겠습니까 무심한 마음으로 무궁하게 살고 싶습니다 이곳에 산다는 건 자주 물먹는 것이라던 친구의 말이 물보라칩니다 물 같은 삶은 없는 것입니다 물속을 한 번 더 들여다봅니다 눈뜬 물고기들이 나를 빤히 올려다봅니다 물 먹고도 잘살고 있다는 듯 물 흐르듯 살지 못한 내가 오늘은 강을 적고 말겠습니다 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에 대해 생(生)에 대해
꽃 점
천양희
어린 시절, 머슴애들과 나는 꽃 점을 잘 쳤다. 꽃잎을 하나씩 하나씩 딸 때면 마음먹고 있는 여자애(남자애)가 자기를 좋아하나 안 하나를 꽃잎 한 잎 따면서 아니다,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로 맞춰보았다. 어린 시절, 머슴애들과 나는 소꿉놀이를 잘했다. 꽃잎을 하나씩 하나씩 딸 때면 마음먹고 있는 여자애(남자애)가 아빠가 되나 엄마가 되나를 꽃잎 한 잎 따면서 아니다,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로 맞춰보았다.
꿈에 대하여
천양희
눈을 감아도 사방무늬로 번져 보이고
버리고 버려도 그림자처럼 따라오니
그대의 집요한 자유자재
동서남북 가로놓여
너의 푸념 나의 푸념 머리 들 곳 없다
벌집처럼 들쒼 고통
한 시대 벌겋게 쏘고 지나갈 때까지
물불 안 가리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나
평생 못 버릴 불치의 풍경 하나
어른 된 오늘까지 우릴 따라와서
우리와 함께 지명되어 앓고 있다.
끈
천양희
수평선이 되고 싶다
한 평의 바다도
못 가진 채
수초처럼 걸려
흔들리는 당신에게
허전하게 편하거나
편하게 허전한
수평선 하나 주고 싶어
우리가 껴안은
수많은 해안선
세상의 끈이 이렇게 길었구나
끝
천양희
천둥 번개같이
한목숨 뚝 끊어놓고
쑥대밭처럼 헝클어진
날마다 밤마다
긴 행렬 짓고
심장을 가로지르는 슬픔에게 물을 뿌리며
다시 슬픔을 키우듯이
가도 가도 끝없이
이 너른 세상 낮은 강둑에 서서
뜀박질에 져도 절망 안하는
아이처럼 나르는 새떼들 보노라면
날벼락 맞고 돌아누운 강물에
달이 지고 해가 지고
잘못도 없었지만 죄인처럼
꺾이기만 하는 그대의 크신 하늘에도
사색이 된 얼굴 숨어들 곳
펼쳐놓지 않으시고
전신을 관통하기만 하시는
벼락같이
한 목숨 뚝 끊어놓고.
끝 섬
천양희
파도가 벼랑을 부여잡는다
벼랑길이 아득하다
아득한 섬 끝, 섬은 어디쯤일까
해안 끝이 많이 휘었다
벼랑에 매달려 산다는 가마우지새
원고지에 매달리는 글쟁이 같다
끝섬은 섬의 끝일까
끝의 섬일까
끝섬은 끝까지 가보아야 하는 곳
끝에 가서야 보이는 곳
내가 원고지를 부여잡는다
고지(高地)가 아득하다
아득한 고지 원, 고지는 어디쯤일까
원고지 사방이 절벽이다
절벽에 매달려 사는 글쟁이들
벼랑에 매달리는 가마우지새 같다
원고지는 내가 올라야 할 고지일까
고지는 끝까지 올라가야 도달하는 곳
끝까지 올라서야 보이는 곳
끝섬은 끝까지 가야 할 끝, 섬일까
원, 고지일까
나는 강변에 있다
천양희
구름떼들이 수면에 어룽댄다 이런 날은 바람도 발끝을 내린다 물새들이 짧게 안색을 바꾸고 실버들 서로 어깨를 낮춘다 버들잎 씹으면 고통이 덜해진대...... 들판 너머 산능선이 오늘 따라 도도하다 산은 늘 높다니까 모래무지 한 마리 모래 속에 숨는다 누가 나를 깨우치러 여기까지 온 것일까 햇빛도 때로 기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세상에 또 있다는 것일까 강 깊어 소리 없는 때, 사람의 마을에 개소리 요란하다 저게 사는 거라면...... 나는 지금 긴 화정론(和精論) 한편 쓰고 싶다 이쪽 저쪽 물길 내려다본다 물은 정말 좋다! 물 따라 생각도 따라간다 생각이 바뀌면 운명도 바뀐다고? 내 눈이 문득 강폭처럼 넓어진다 물풀들 몰래 제 몸을 부푼다 어느새 산그림자 내려와 물속이 더 깊다.
나는 공어(空魚)
천양희
어부들이 속(창자)이 없다고 나에게 붙여준 이름인데
나는 이 이름에 엄청 만족한다오
빌 공(空)자가 얼마나 좋은 거요
공짜하고는 관계가 없소
나는 부지런히 내 속을 비웠소
그래서 나는 속이 없소
속없는 나를 골 빈 놈이라 착각은 마시오
속이 없다고 얼빠진 건 아니오
속없는 내가 나는 좋소
속이 없으니 편하기 그지없소
그래도 바다는 나를 가벼운 놈이라고 나무라지 않소
어부들은 속없는 나를 무척 좋아하오
자기들을 닮았다나, 뭐라나?
세상에, 속 빈 놈이라고 누가 날 비웃는 거요? 모르는 소리 마오
속이 없으니 얼마나 가벼운지 모른다오
무게가 가볍다고 참으로 가벼운 존재는 아니오
속 비우고 사는 내가 나는 대견하오
속없이도 나는 잘 살 수 있소
나는 평생 속없이 살려 하오
나는 기쁘다
천양희
바람결에 잎새들이 물결 일으킬 때
바닥이 안 보이는 곳에서 신비의 깊이를 느꼈을 때
혼자 식물처럼 잃어버린 것들과 함께 있을 때
사는 것에 길들여지지 않을 때
욕심을 적게 해서 마음을 기를 때
슬픔을 침묵으로 표현할 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므로 자유로울 때
어려운 문제의 답이 눈에 들어올 때
무언가 잊음으로써 단념이 완성될 때
벽보다 문이 좋아질 때
평범한 일상 속에 진실이 있을 때
하늘이 멀리 있다고 잊지 않을 때
책을 펼쳐서 얼굴을 덮고 누울 때
나는 기쁘고
막차 기다리듯 시 한 편 기다릴 때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일 때
나는 기쁘다
나는 알지요
천양희
물먹어본 사람은 알지요
물먹는 일이 얼마나 힘든다는 걸
물같이 살아본 사람은 알지요
물같이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다는걸
물먹고 살아본 사람은 알지요
물먹고 사는 일이 물같이 사는 일보다 더 힘든다는걸
물같이 살아본 사람은 알지요
물같이 사는일이 물먹고 사는 일보다 더 힘든다는걸
물먹고 사는 일이 물같이 사는 일과 다르다는걸
물같이 사는 일이 물먹고 사는 일과 다르다는걸
혼자 사는 사람은 알지요
혼자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다는걸
혼자 사는 일이 둘이 사는 일보다 더 힘든다는걸
둘이 사는 사람은 알지요
둘이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든다는걸
둘이 사는 일이 혼자 사는 일보다 더 힘든다는걸
둘이 사는 사람은 알지요
혼자 사는 일이 둘이 사는 일과 다르다는걸
둘이 사는 일이 혼자 사는 일과 다르다는걸
물 먹어본 나는 알지요. 물같이 살아본 나는 알지요
혼자 살아본 나는 알지요
나는 어서 말해야 한다
천양희
누가 산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먼저
나무처럼 곧은 언어는 없다고 말하고
누가 숲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먼저
새에 대해 말하겠네
마침내 새가 솟구쳐올라 허공을 남길 때
나도 빈 둥지처럼 비어 버리겠네
누가 다시 새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먼저
울음에 대해 말하고
그 울음의 진동이 잉잉거릴 때
누가 물음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먼저
물에 대해 말하고
나도 물에게 길을 물으면서 흘러가 보겠네
누가 다시 물에 대해 말하라면
삶이 쓴 최고의 문장이라고 말하고 말겠네
물에 대해 길게 말하다 보면
어느새 산 아래 내려와 있네
올라간 길도 따라와 있네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천양희
마음 끝이 벼랑이거나 새로울 것 없는 하루가 지루할 때마다
바람이라도 한바탕 쏟아지기를 바랄 때가 있다
자기만의 지붕을 갖고 싶어서 우산을 만들었다는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비바람 속을 걸어가던 네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별명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를 생각할 때마다
바람은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서로 부르며 손짓하는 것이라던
절절한 구절을 옮겨 적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라고 다른 얼굴을 할 때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던 죽은 시인의 시를 중얼거릴 때가 있다
여러 번 내가 나를 얻지 못해 바람을 맞을 때마다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오래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이 세상 어디에
꽃처럼 피우는 바람이 있다면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고 누가 말했더라
아무리 가벼운 바람이라도
그 속에는 뼈가 있다고 말한 이는 또 누구더라
바람소리든 울음소리든 소리는 존재의 울림이니까
쌓아도 쌓아도 소리는 탑이 될 수 없으니까
바람이여
우리 함께 가벼워도 되겠습니까
오늘 밤에도 산 위로 바람 부니
비 오겠습니다
나를 당기소서
천양희
49세에 [늑대와 함께 춤을]을 써서
작가가 된 마이클 블레이크와
보길도에 귀양 갔다 65세에 [어부사시사]를 쓴 고산 윤선도와
일생 동안 한번도 여자를 못보고 82세에 죽은 수도승 미하일 톨로토스와
죽을 때, 가슴을 가시에 찔리면서
일생에 단 한번 울다 죽는 가시나무새와
원시림의 높은 가지 위만 날면서
지상에는 내려오지 않는 모르포나비와
아침 이슬만 먹고 사는 부전나비와
백마강 고란사에서만 사는 고란초와
평지에선 살지 않고
바위 위에서만 사는 기린초와
진실로 우리는 그림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동생 테오에게 마지막 편지르 보낸 고호와
병에 걸린 것을 깨닫지 못하는 문명사회에서,
자기가 환자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 [아웃사이더]를 쓴 콜린 윌슨과
눈이 두 개 귀도 두 개인데
입이 하나밖에 없는 것은
두개를 보고 두개를 듣고
말은 하나만 하라는 것이며
하나를 말하기 위해선
둘을 보고 둘을 들어야 한다는 간디와
어머니와 정의 중에서 선택하라면
나는 어머니를 선택할 것이라던 까뮈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네
신이여, 부러지도록 나를 당기소서
다시 부러지도록 힘껏 당기소서.
나를 살게 하는 말들
천양희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한다
불완전하기에 세상이 풍요하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한다
나를 잘못 간직했다가 나를 잃는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한다
시가 없는 세상은 어머니가 없는 세상과 같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한다
그중에서도 나를 살게 하는 건
사람을 쬐는 것도 필요하다는 말
날마다 나를 살게 하는 말의 힘으로
나는 또 살아간다
나무에 대한 생각
천양희
오래된 나무를 보면
삶 속의 나이테가 보인다
줄기는 줄어들고 뿌리만 깊다
사는 게 이런 거였나 중얼거린다
도대체 뿌리가 어디까지 갔기에
가도 가도 뿌리내리지 못하는지
참을 수 없이 가볍게 살고 싶지만
삶이 덜컥, 뿌리 뽑히는 것 같아
무지하게 겁이 난다
마지막이란 그렇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닐 테지
나무 중에서 제일 굽은 나무들도
이름 모를 잡목들도
숲속으로 몸을 들이미는데
시퍼런 참, 나무가
아, 안된다 바람에도 아니 흔들려야 한다
뿌리박고 곧게 서 있을 때 너는 너인 것이다
절대로 굽히지 않는 그게 너 자신인 것이다
나무의 힘
천양희
산이 불탄 끝에 어두워진다
재의 바람이 낮게
산을 쓸며 지나간다
바람맞을 나무는 이제 없다
품속같은 숲 사라지고
새소리 어느덧 사라지고
구불텅한 언덕 사라지고
죽음보다 더 슬픈 시간이 갔다
까맣게 속 탄 나무들 가지들
남은 무엇이 있어서
무어라 무어라 말할듯도 하다
가지 한자락에도
산은 저토록 그리움으로
속이 탔다는 것인가
어린 꽃잎 하나
불쑥 내밀고 있다
고생(苦生)도 저렇게 눈부시다니!
나의 거울
천양희
자신을 잘 모를 때
자신을 과신할 때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는 말을 거울삼습니다.
어려운 일을 견뎌야 할 때
힘든 일을 인내해야 할 때
귀한 진주는 보잘것없는 조개에서 나오고
아름다운 옥구슬은 거친 옥돌에서 나온다는 말을 거울삼습니다.
잘못된 일 때문에 후회할 때
실패한 일 때문에 좌절할 때
희망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고
절망보다 더 나은 교사는 없다는 말을 거울삼습니다.
나의 라이벌
천양희
사는 것이 더 어렵다고 시인은 말하고
산 사람이 더 무섭다고 염장이는 말하네
어렵고 무서운 건 살 때 뿐이지
딱 일주일만 헤엄치고 진흙속에 박혀
죽은 듯이 사는 폐어肺漁처럼
죽을 듯 사는 삶도 있을 것이네
세상을 죽으라 따라다녔으나
세상은 내게
무릎 꿇어야 보이는 작은 꽃 하나 심어주지 않았네
인생이 별거야 하나의 룸펜이지 누구는 말하지만
나는 어둠의 한복판처럼 어두워져
생활을 받들 듯
고통을 씀으로써 나를 속죄했네
아무도 사는 법 가르쳐주지 않는데
누구든 살면서 지나가네
삶은 무엇보다 나의 라이벌, 나를 쏘는 벌
나의 산수
천양희
절에 가면 절하게 되고
바다에 가면 바라보게 된다
절하라고 절이 있고
바라보라고 바다가 있나
절할 때 내 몸은 바닥이 되고
바라볼 때 내 눈은 창문처럼 열린다
나는 창문 밖을 보는데
누군가는 세상을 보고 있다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바닥 모를 바다를 생각한다
나는 몇번이나 땅을 짚고 일어나고
몇번이나 파도 한자락 밀고 당기는데
왜 세상은
푸시맨만 있고 풀맨은 없나
바다에는 그늘이 없고
길에서 절은 절대로 보이지 않나
나의 숟가락
천양희
얼마나 많이 내 삶을 내가 파먹었는가
나의 어리석음이
천양희
나의 어리석음이
저 혼자 밖에 나가
아이처럼 놀고 있다
언제부터
끝없는 놀이는 시작되었는지
골목 담보다
더 커버린 나는
떠들썩한 골목
언저리에 붙어
기웃 기웃 보기만 하고
나의 어리석음만
너 혼자 놀고 있다
이 땅에는 너무 많은 아이
아이들 틈에 끼어
허덕 허덕 떠돌다가
놀아 줄 아이 없어
아이와 아이 사이
골목과 골목 사이
쓸쓸히 걸어가는 나의 어리석음
언제부터
끝없는 놀이는 시작되었는지
언젠가는 끝이 날
아이들의 놀이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웃고 있는 아이들 곁에서
못난 나의 어리석음만
고개 떨군다.
나의 잔
천양희
이태백 같은 시선(詩仙)은 술잔 속에서 달빛과 시를 건져냈는데
오마르 하이얌 같은 주성(酒聖)은 술잔 속에서 루바이야트라는 언어의 보석을 건져냈는데
어떤 시인은 술잔 속에서 수평선을 건져냈는데
나는 내 술잔 속에서 내 얼굴 하나도 건져내지 못했다.
내 손으로 내 잔을 채웠을 뿐이다.
나이
천양희
눈빛이 흐려지면 안 돼
거울 속의 나를 향해 내가 말한다
마음이 무너지면 안 돼
거울 속의 나를 향해 내가 말한다
왜 살아야 하나, 하면 안 돼
거울 속의 나를 향해 내가 말한다
너가 그러면 안 돼
거울 속의 나를 향해 내가 말한다
어제는 거울 속의 너가 나이더니
오늘은 거울 속의 내가 너이구나.
날씨
천양희
날씨가 흐려서 마음이 흐릿한 줄 알았다
비가 와서 눈물이 흐르는 줄 알았다
바람이 불어서 서늘한 줄 알았다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할 때
그런 줄만 알았다
날씨가 맑으면 마음이 개일 줄 알았다
비가 그치면 눈물이 마를 줄 알았다
바람이 멈추면 추위도 가실 줄 알았다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할 때
그런 줄만 알았다
내 마음에 점 찍기 -점심(點心)
천양희
넓은 바다에 도장 찍고 (해인(海印))
밝은 달에게 도장 찍고 (월인(月印))
내 마음에도 도장 찍었지만 (심인(心印))
바람 같은 그대에게 도장 찍지 못했네
마음에 점만 찍고
도장 찍지 못했네
나는 바다에게 부끄러워
나는 달에게 부끄러워
점(點) 점(點) 점(點) 부끄러워
나는 어두워졌네
너는 나다
천양희
함께 있어도 거리를 지키는 벼가 있다
우짖음으로 자신을 지키는 새가 있다
울음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벌레가 있다
하루에 몇십만 번 물결치는 파도가 있다
물살이 역류하는 개울이 있다
나무 위에 사는 나무가 있다
잎 끝에 돌기를 가진 꽃이 있다
한평생 물 안 먹는 짐승이 있다
죽어가면서 빛을 달라고 한 사람이 있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내가 있다
너무 많은 생각
천양희
자기를 무너뜨리며 쌓으며 격렬비열도를 생각하다가
아름다움의 끝은 어디일까 고비사막의 일몰을 생각하는 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생각하다가
시련이 모두에게 좋다고 말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는 밤
희랍인 조르바를 생각하다가
어둠이 빛보다 어둡지 않다고 생각하는 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가장 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는 쥘 르나르를 생각하다가
슬픔은 가면을 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밤
긍정적인 마음의 씨앗을 하얀 씨앗이라는
티베트의 마음 수련법을 생각하다가
잔설 속에는 이미 봄이 와 있다고 생각하는 밤
언 땅에서도 푸르게 자라는 보리를 생각하다가
오래 살기를 바라면서 늙어가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는 밤
불을 때도 연기 나지 않는 청미래덩굴을 생각하다가
시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밤
씀바귀를 씹어도 잠은 오지 않고
너무 많은 생각이
생각탑을 세우는 밤
너무 많은 입
천양희
제갈나무 잎들이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재잘댄다 잎들이 많고 입들이 너무 많다
이(李) 시인은
마흔 살이 되자
나의 입은 문득 사라졌다
어쩌면 좋담,이라 쓰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좋담
쉰살이 되어도 나의 입은
문득 사라지지 않고
목쉰 나팔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좋담?
다릅나무 잎들이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다른 소리를 낸다 잎들이 다르고 입들이 너무 다르다
너에게 부침
천양희
미안하다, 다시 할 말이 없어
오늘이 어제 같아 변한 게 없다
날씨는 흐리고 안개 속이다
독감을 앓고 나도 정신이 안 든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삶이 몸살 같다, 항상
내가 세상에게 앙탈을 해본다
병 주고 약 주고 하지 말라고
이제 좀 안녕해지자고
우린 서로
기를 쓰며 기막히게 살았다
벼랑 끝에 매달리기
하루 이틀 사흘
세상 헤엄치기
일년 이년 삼년
생각만으로도 점점 붉어지는 눈시울
저녁의 길은
제자리를 잃고 헤매네
무엇을 말이라 할 수 있으리
걸어가면 어디에 처음 같은 우리가 있을까
돌아가면서 나 묻고 있네
꿈도 짐도 내려놓고
하루는 텅텅 빈 채 일찍 저물어
상한 몸을 가두네
미안하다, 다시 할 말이 없어
오늘은 이 눈이 어두워졌다.
너에게 쓴다
천양희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
노선(路線)
천양희
형님은 자기 노선(路線)이 있소?
독립문 지나다 아우가 묻는다
그는 대답 대신 자기 자신에게 반문한다
희망은 있는 걸까
아직 그런 게 남아 있다면
거기가 나의 노선이 될 텐데
아우는 자기 노선이 있나?
광하문 지나다 형이 묻는다
그는 대답 대신 형에게 반문한다
희망은 있는 걸까요
아직 그런 게 남아 있다면
거기가 너의 노선이 될 텐데
가다 보면 길이 되는 것
그것이 희망이라면
그 희망이 우리의 노선이리
노을 시편
천양희
강 끝에 서서 서쪽으로 드는 노을을 봅니다
노을을 보는 건 참 오래된 일입니다
오래되어도 썩지 않는 것은 하늘입니다
하늘이 붉어질 때 두고 간 시들이
생각났습니다 피로 써라 그러면...... 생각은
새 떼처럼 떠오르고 나는 아무것도
쓸 수 없어 마른 풀 몇 개 분질렀습니다
피가 곧 정신이니...... 노을이 피로 쓴 시 같아
노을 두어 편 빌려 머리에서 가슴까지
길게 썼습니다 길다고 다 길이겠습이까
그때 하늘이 더 붉어졌습니다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하라...... 내 속으로 노을 뒤편이 드나들었습니다
쓰기 위해 써버린 많은 글자들 이름들
붉게 물듭니다 노을을 보는 건 참 오래된 일입니다
노을을 적다
천양희
노을이 저 혼자 붉다
바다는 놀빛을 당겨
물위에 적는다
좋은 시 한편
공양받은 하늘 한쪽이 붉다
하늘도 때로 취할 때가 있으니
하루에도 몇 번
길을 내는 바다를
누가
바라만 보라고 바다라 했나
보라
넘치지 않는 건 저것뿐이다
하늘을 안고 있는 건
저것뿐이다 저런!
놓았거나 놓쳤거나
천양희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것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 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뿐이다
물에도 결이 있고 침묵에도 파문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사람이 무서운 건 마음이 있어서란 것도 미리 알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가가 되지 못해 누구나가 되어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이지
돌아보니 허울이 허울만큼 클 때도 있었다
놓았거나 놓친 만큼 큰 공백이 있을까
손가락으로 그걸 눌러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쓰고야 말겠다
누가 내게 묻는다면
천양희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세상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 주저 않고 대답하리
부모, 생명, 사랑이라고,
누가 말했을까요
천양희
누가 말했을까요
살아 있는 것처럼 완벽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의 생명일 때 기쁘고 기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숨은 얘기 속삭인다는 것을
여린 잎 속의 푸른 벌레와 생각난 듯이 날리는 눈발과
훌쩍거리며 내리는 비가
얼마나 기막힌 눈(目)이라는 것을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읽었다는 것을
누가 말했을까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의 자연일 때 편하고 편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숨은 얘기 속삭인다는 것을
뒤꼍의 대나무 숲 바람 소리와 소리 없이 피는 꽃잎과
추위에 잠 깬 부엉이 소리가
얼마나 기막힌 소리인가를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보았다는 것을
하늘이 텅 비어 있었다는 것을
눈
천양희
눈을 보고 있는 그대 눈 속에
어느새 눈이 녹아 눈물이 되었네요.
눈물은 왜 눈처럼 녹지 않고
눈 속에 자꾸 고이기만 할까요.
고여서 자꾸 넘치기만 할까요.
눈을 맞고 있는 그대 눈 속에
어느덧 눈이 쌓여 눈길이 되었네요.
눈길은 왜 눈물처럼 녹지 않고
눈 속에 자꾸 쌓이기만 할까요.
쌓여서 자꾸 높아지기만 할까요.
눈 내리는 날
천양희
다섯 번째 시집을 내고
나는 반성하듯 눈을 맞는다
시인을 죽이는 사회가 싫다고
김(金) 시인은 다른 나라로 이민 가고
용케도 베스트 셀러 시인이 된 朴이
교보문고에서 펜사인회를 하는 시간
밖엔 눈이 내리고
큰 시인이 세상을 버렸다
아니다 세상이 그를 버렸다
눈물
천양희
96세에 대학생이 된 아버지가
축하하는 자식들 앞에서
눈물이란 왜 나오는 건지 … 이걸 연구해서
논문이나 써야지 했다는데
61세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한 시인이
회갑을 축하하는 후배들 앞에서
눈물이란 왜 이렇게 짠지 … 이걸 주제로
시나 써야지 했다는데
눈물은 왜 이렇게 대책이 없나
다시 한자리
천양희
구름 걷히자 햇빛이 나 바람 속으로
새들이 날아가 버려
풀밭에 풀처럼 엎뎌 풀벌레들 다 어디 갔나
네 울음 적고 싶구나 해 질때마다 어둠 놓을?
내 어둠 놓을 어디?
비 오니 잎이 져 저 잎자리 다져보던 때가
몰래 흘러가 버려
낙엽 위에 낙엽처럼 누워 푸른 잎들 다 어디 갔나
네 소리 받고 싶구나 잎 질 때마다 마음 붙일?
네 마음 붙일 어디?
나무여, 나는 너무 오래
서 있다 나도 가끔
세상 주저앉고 싶은 나무이다
나무를 불처럼 태우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말하는 자로서
조용히 입 닫고 있다
단 한 번
천양희
눈먼 새는 죽을 때 단 한 번 눈뜨고 죽는다는데 백조는 죽을 때 단 한 번 아름다운 목소리로 울다 죽는다는데 가시나무새는 죽을 때, 가시에 가슴을 찔리면서 단 한 번 울다 죽는다는데 달팽이는 일생에 단 한 번 교접을 한다는데 일생에 단 한 번 번식하는 게도 있다는데 일생에 단 한 번도 여자를 못 본 수도승이 있다는데 일생에 단 한 번도 날지 않는 새들이 있다는데
오직 사람만이 변신의 명수라네
단추를 채우면서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걸
달맞이고개에서 한 철
천양희
달맞이하려고 월견령(月見嶺)을 넘는다 한 고개 넘는데 달이 자꾸 따라온다 따라온 달빛 한 자락 방파제를 넘는다 청사포 포구 파도 높고 물길이 낮다 높고 낮은 것이 고개뿐일까 몇굽이 고개들 고비들 누구나 넘어야 할 고개는 있는 것이다 넘고 싶은 마음이 고개에 머문 듯 오르고 싶은 발길이 고비에 멈춘 듯 넘어가지 않는다 오, 고개와 고비의 높음이여 고개 너머 동백섬이 먼듯 가깝다 가깝고도 먼 저것이 해파랑길일까 투신하듯 달빛 떨어지고 마음은 하늘을 당겨 달을 받는다 지금은 물소리 깊어지는 시간 내 수심도 깊어져 나는 또 넘어야 할 고비가 따로 있다는 것일까 길 잘못 든 그날부터 한 고비 한 고비가 길잡이가 되었다 몇굽이 고갯길 오르다 한 철 다 보내는 동안 달빛을 달의 빛이라 다시 쓰고 옛 이름 월견령을 달맞이고개라 고쳐 읽는다 달맞이고개란 달을 맞이하는 고개라는 것을 물살 잦아든 해안선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보다 먼저 달맞이 한 철 보냈을 것이다
답(答)
천양희
왜냐하면,왜냐하면.....나는 늘
왜냐하면....으로 그친다.
왜냐하면....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
그런 것들이 있어
왜냐하면....누구든 왜냐하면....으로 그친다.
대대포에 들다
천양희
갈대의 등을 밀며 바람이 분다 개개비 몇 발끝 들고 염낭게 갯벌 물고 뒤척거린다 날마다 제 가슴 위에 거룻배 한 척 올려놓는 갈대밭 산다는 건 갈대처럼 천만번 흔들리는 일이었으나 실패한 삶도 때론 무엇인가 남긴다 남긴다고 다 남는 것일까 순천(順天)은 벌써 나를 알아버린 듯 마음의 물결까지 출렁거린다 섬은 발목 잡혀 꿈쩍 않는데 물거품이 해안까지 따라온다 언제 꽃을 바람처럼 피운 갈대들 그들이 환하다 문득 느낀다 내 어둠이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낮게 엎드린 포구 수평선 바라보다 나는 겨우 세상은 공평한가 묻고 말았다 방파제 너머 파도가 밀려간다 밀려간 것은 물결만이 아니다 날마다 내 속으로 밀려온 갈대들 오늘은 대대포에 들고 말았네
도공의 말
천양희
백자를 굽는 것은
마음을 빚는 일이라고
마음 빚는 일은
아궁이에 장작불을 피우는 일과 같다고
타들어 가는 불꽃 보며
타들어 가는 세월을 보는 것이라고
호반으로 떠오르는 달빛을 방 안까지 맞아들이는 일이
아침저녁 물가에 앉아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보는 일과 같다고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듣는 일이
마음 빚는 일이라고
도공이 말하네
도예가 배워서 되는 일이 아니라고
먼저 마음자리부터 살펴야 한다고
흙을 주무르는 손이
제 마음의 모양대로 빚어진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도공이 말하네
백자가 마음 빚는 일이라면
우리도 제 삶을 빚는 도공들이라고
달빛에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꽉 찬 삶을 사는 일이라고
사는 일이 먼저이고 만드는 일이 그다음이라고
도공이 말하네
도공처럼 되긴 아예 틀린 생이여
일류 도공을 꿈꾸던 날이
우리에게는 있었네
두 붉나무
천양희
난 누구지? 넌 내 자연이야
여자가 웃는다 웃음 소리
잎 돋고 꽃피는 소리 같아
지독한 꽃술이야 저 불꽃좀 보라고
불태우고 있잖아 불꽃은 불의 꽃이야
그 여자 활짝 핀다.
불길에 휩싸이듯 그 여자 붉다.
넌 누구지? 난 네 자연이야
남자가 웃는다 웃음 소리
불씨 틔우는 소리 같아
지독한 씨방이야 저 불꽃들 좀 보라구
타오르고 있잖아 꽃불은 꽃의 불이야
그 남자 잠시 꽃 그늘에 든다.
꽃 사태 만난 듯 그 남자 붉다.
두 붉나무 웃음꽃을 피운다.
뒤편
천양희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뒷길
천양희
뒷길은 뒤에 가기로 하고 앞길을 먼저 따라갔습니다
샛길을 끼고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갔습니다
길은 몇갈래 가다가 멈춘 길도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먼저 지평선 하날 당겨 먼 세계를 적었습니다
나아가려면 우선 물러서라는 말이
진(進)과 퇴(退)의 처세법임을 그때서야 겨우 알았습니다
곧은 것은 쉽게 부러지나 굽은 것은 휘어진다고 말들 하지만
구부러지면 온전하다는 저 곡선의 유연함 저 내밀함․․․․․․
놀라운 것은 감추면서 드러내는 그것이었습니다
길 없어도 세상은 새길을 만들고
사람들은 바쁘게 나를 앞질러 갔습니다
옛길이 언제 새길을 내려놓았겠습니까
가파른 길 내 길처럼 걸어갈 때 나도 그랬을 것입니다
멀리 가야 많이 본다는․․․․․․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었습니다
모든 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길의 모든 것은 걷고 싶지 않아도 걷게 되는 것입니다
들판 너머 길 하나 산 너머 길 바라다봅니다
길의 끝은 멀고 그리고 가파릅니다
고갯길은 힘든 그 어떤 것도 넘겨주질 않습니다
나는 몇 번이나 그 길을 넘었습니다
고갯길을 벗어나도 벗지 못하는 업도 있습니다
눈부신 햇살도 모든 어둠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 다시 쓰고 싶은 생이 있겠습니까
앞길밖에 길이 없겠습니까 가다 보면 길이 되는 것
그것이 오래 기다린 뒷길일 것입니다
들
천양희
올라갈 길이 없고
내려갈 길도 없는 들
그래서
넓이를 가지는 들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어
더 넓은 들
뜻밖의 질문
천양희
눈이 녹으면 그 흰 빛은 어디로 가나*
그가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는 다만
그 질문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상상할 뿐
그 흰 빛의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이 세상에
눈보다 더 눈부신 흰 빛이 있을까
얼마간 의문을 가져보다가
생각은 머릿속으로 하는 혼잣말 같고
날리는 눈발은
하염없이 잃어버리는 목소리 같아
눈이 쌓이고 쌓인 눈 위에
또 눈이 쌓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누구의 기억 속에 얼마나 쌓였을까
거듭 가파른 생각을 한다
어느덧
눈에 눈[雪]물이 차오른다
눈이 녹아도
그 흰빛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눈을 쓸면서 뒤늦게 받아들인다
저 흰 빛만큼 눈부시게
내 생각을 들어올린 구절은 없다
어떤 눈은 너로부터 무너지고
어떤 너는 눈처럼 쌓인다
눈이 와서 하는 일이란
나에게서 오점을 지워주는 일
백색이 모두인 눈의 세계에도
유백 설백 청백으로 나뉜다는 걸 알고 난 뒤
눈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뜻밖의 질문을 받을 때처럼 놀라서
눈길을 오래 걸어 본다
쌓이거나 녹거나 하는 것만큼
긴 문장이 있을까
돌아보니
어느 소설의 첫 문장같이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마침내
뜻밖의 질문이 완성되었다
* 셰익스피어
마들에서 광화문까지
천양희
광화문에 가려면 마들에서
노원을 지나 중계를 지나 하계를 지나
공릉을 지나 태릉을 지나 먹골을 지나
상봉을 지나 면목을 지나 사가정을 지나
용마산을 지나 중곡을 지나
군자에서 오호선을 갈아타야 한다
왕십리를 지나 행당을 지나 청구를 지나
동대문을 지나 을지로를 지나 종로를 지나가야 한다
입문하는 길이 이렇게 멀다
마들 종점
천양희
봄비 내려 아침이 늦게 온다
마른 풀이 젖네, 하면서 가로수들이
온몸에 힘을 쓴다
수락산 옆 마들 종점, 첫차가 막 출발한다
아침 하늘이 흐리고 깊다. 바람이 생생
마음까지 들린다. 하루를 겨루는 사람들 몇,
첫차에 오른다. 꽃피운 나무들이 손을 흔든다
그에게 세상은 꽃피우기다
세상은 너무 힘이 세다니까
겨울 깊으면 봄이 온다고?
갈울근린공원이 봄으로 꽉 찬다
늙은 청소부 비틀거리며 마당을 쓸고 있다
'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뭐, 봄바람? 놀고 있네 하듯이
금방이라도 달려갈 것 같은 마들,
마(馬)의 들. 말발굽 소리
들릴 것 같은 마들 종점에서
마음아
천양희
어디나 다 늪이야
아무 곳에나 널 내려놓지 마
어디나 다 사막이야
마음아
아무 곳에나 들어가지 마
어디나 다 늪이야
마음의 경계
천양희
햇살이 수면에 어룽거린다 물방울 모였다 물거품 되고
물떼새들 갈대숲에서 낄룩거린다 가슴검은물떼새!
그 이름만으로 눈시울 붉어져 물 속에 물구나무 선 나 무들
물결 속에 제 속을 허문다
허물어야 할 것은 내 속의 강둑들 모래톱들 경계 없는 강이
나는 좋다 흐르다 멈춘 강이 있다고는 하였으나
깊은 물소리 듣지 않는다면 누가
강물을 밀어 해안까지 가겠는가
강은 수심 깊어 물소리 숨기고
물고기들 잘 때에도 뜬 눈으로 잔다
수심에 잠겨 눈감고도 잠 못 드는 사람들
생(生)은 왜 눈물로 단련되나
그래서 우리가 물길 하나 가졌던가
물길은 물의 길일까 생각하듯 물살 내려갈 때
나도 몇 굽이 내려갔다
물소리 한꺼번에 져 내렸다
마음이 오래 강변에 서 있다
세찬 물결이 어깨를 툭 친다 나아가라고
내려가나 나아가는 물줄기들
시퍼런 것들의 저 서늘한 기운
오늘은 내가 붙잡고 가겠다
강 끝까지 해안까지 더 더 끝까지
마음의 달
천양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 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마음의 벽
천양희
침묵의 소리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곧고 단단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나무의 크기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한가지가 되지 못하고
자꾸 나누어지는 걸까.
말로는 함께 살자면서 살기는 따로따로다.
사람의 에고(ego)가 은행 열매보다 더
단단한 것일까.
좀처럼 깨어지지 않는다.
그 단단함이 사람 사이의 벽을 만든다.
벽이 있는 한, 한가지로 함께 잘 살기란
더 어려워지는 법이다.
나무도 가을 나무껍질이 두꺼우면 겨울이
더 춥다고 한다.
사람 사이의 벽도 너무 높고 두터우면 그곳은
늘 그늘이 지고 추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벽은 저 혼자 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 사람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마음을 탁 튼다면 마음이 만든 벽쯤이야
허물기 쉽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음의 뿌리
천양희
나무는 다리가 하나라서 뿌리내리지만,
나는 다리가 둘이라서 떠도는 것이다.
떠돈다고 다 방황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무서운 건 떠도는 내 마음이다.
몸은 하나인데 마음은 여러 갈래,
나무만 한 한 생(生)이 흔들린다.
바람아 불어라.
내가 뿌리처럼 강해지겠다
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 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마음의 지진
천양희
제 이름 부르며 스스로 울어봐야지
제 속의 비명을 꺼내 소리쳐봐야지
소나기처럼 땅에 패대기쳐봐야지
바람에 몸을 길들여봐야지
늪처럼 밤새도록 뒤척여봐야지
눈알 속에 박힌 모래처럼 서걱거려봐야지
사랑 때문에 허리가 남아돌아 봐야지*
어느 날 문득 절필해봐야지
죽어라고 살기 위해 잡문을 써봐야지
사람 때문에 마음 바닥이 쩍쩍 갈라져 봐야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봐야지
마침내 갈 데가 없어 봐야지
그때야 일어날 마음의 지진
* 정끝별의 시 '춘수(春搜)에서.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
천양희
남편의 실직으로 고개 숙인 그녀에게
엄마, 고뇌하는 거야?
다섯 살짜리 딸아이가 느닷없이 묻는다
고뇌라는 말에 놀란 그녀가
고뇌가 뭔데? 되물었더니
마음이 깨어지는 거야, 한다
꽃잎 같은 아이의 입술 끝에서
재앙 같은 말이 나온 이 세상을
그녀는 믿을 수가 없다
책장을 넘기듯 시간을 넘기고 생각한다
깨어진 마음을 들고 어디로 가나
고뇌하는 그녀에게
아무도 아무 말해주지 않았다
하루 종일
길모퉁이에 앉아 삶을 꿈꾸었다
마찬가지
천양희
산은 저렇게 말이 없고
산속에 누운 너도
말이 없긴 마찬가지
마치 한가지로
너는 몇 년 째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것은 너의 영원한 레퍼토리
그러나 그렇지만
바람 불고 비는 또 내려
얼어붙은 내가 새롭게 놀라지만
오늘은 전화할 데가 없어
하루가 너무 길다
그 많던 오늘은
어디로 다 가버린 것일까
산다는 게 이렇게
미안할 때가 있다니
마흔 살 되는 해는
천양희
부산(釜山) 바다처럼
퍼렇게 멍이 들어
파도처럼 아주 부서지더라도
다시 아무 일 아닌 듯
바다로 있는
마흔 살 되는 해는
우리 그렇게 못 되랴
뱃길같이 금간 마음
물속에 던져 주고
비늘 같은 상처들은
모래 위에 털어내고
먼 지평선
아무렴, 안 울고도 다시 바라볼 수 없으랴
부산(釜山) 바다 파도처럼
아주 부서지더라도
속 빠지듯 큰 소리 한 번 내고
다시 아무 일 아닌 듯
바다로 있는
마흔 살 되는 해는 우리 그렇게
될 수 없으랴
지평선 끝 텅 빈 하늘 같은
말
천양희
어느 날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의 반만큼도
말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말의
성찬이나 말의 홍수 속에서 나는
오히려 말이 고팠다
고픈 말을 움켜쥐고 말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쉬운 말들과 놀고 싶어서 말의
공터를 한번 힐끗 본다
참말은 문득 예리한 혀끝으로
잘려나가고 씨가 된 말이
땅끝으로 날아다닌다
말이 꽃을 피운다면 기쁘리. 말이
길을 낸다면 웃으리. 말은
누구에겐들 업(業)이 아니리
모든 말이 허망하여도 말의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냐
우리는 누구나
쌓인 말의 나무 밑으로 돌아간다.
맴돌다
천양희
피그미 카멜레온은 죽을 때까지
평생 색깔을 바꾸려고
1제곱미터 안을 맴돌고
사하라 사막 개미는 죽을 때까지
평생 먹이를 찾으려고
집에서 2백 미터 안을 맴돈다
나는 죽을 때까지
평생 시를 찾으려고
몇 세제곱미터 안을 맴돌아야 하나
머금다
천양희
거위 눈별 물기 머금으니 비 오겠다
충동 벌새 꿈 머금으니 꽃가루 옮기겠다
그늘나비 그늘 머금으니 어두워지겠다
구름비나무 비구름 머금으니 장마지겠다
청미덩굴 서리 머금으니 붉은 열매 열겠다
사랑을 머금은 자
이 봄, 몸이 마르겠다
모래내 종점
천양희
늦가을 비 내려 하루가 짧게 저문다.
너무 춥네, 하듯이 가로수들이 헐벗었다
모래내 버스 종점. 막차가 돌아온다
밤하늘이 어둡고 깊다. 바람이 출렁,
뼛속까지 밀려온다. 막일 끝낸 사람들 몇,
막차에서 내린다, 마른 가지 끝이 흔들린다
그에게 세상은 가지 끝 오르기다. 미끄러지기다
세상은 너무 미끄럽다니까
냉기도 뒤집으면 훈기가 된다고?
역 앞마당이 썰렁하다. 늙은 취객 하나
거위처럼 뒤뚱거리며 사라진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
간 새'
뭐, 새라고? 영화? 좋아하시네 하면서
흐린 불빛에도 으스러지는 건
지난 시간의 반짝이는 모래들, 모래톱들
누가 손을 넣어 그의 가슴을 뜯어내려는 건가
세상에는 물보다 더 맑은 눈물이 있다는걸
수색(水色)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제 모래 속을 제가 들추어보려는 듯
거기, 모래톱을 안고 사는 모래 천변 사람들
지상의 그물 속에 그, 물속에 걸리는 것은 모래뿐이지
물같이 흐르고 싶은 밤, 모래 위에 앉아
밤새도록 꾸벅거리는 모래내를, 그렁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버스 종점 그 끝에 서서.
목이 긴 새
천양희
물결이 먼저 강을 깨운다 물보라 놀라 뛰어오르고
물소리 몰래 퍼져나간다 퍼지는 저것이 파문일까
파문 일으키듯 물떼새들 왁자지껄 날아오른다
오르고 또 올라도 하늘 밑이다
몇 번이나 강 건너 하늘을 본다
하늘 끝 새를 본다
그걸 오래 바라보다
나는 그만한 사람을 용서하고 말았다
용서한다고 강물이 거슬러 오르겠느냐
강둑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발끝이 들린다
내가 마치 외다리로 서서
몇 시간 꼼짝 않는 목이 긴 새 같다
혼자서 감당하는 자의 엄격함이 저런 것일까
물새도 제 발자국 찍으며 운다
발자국, 발의 자국을 지우며 난다
못
천양희
벽에다 못 하나 박았다. 벽이 울렸다.
박힌 것은 못인데 벽이 다 울렸다.
그 소리 벽을 들어 올렸다.
못 하나 받으려고 벽은 버텼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종일 못을 박았다.
벽에서 못 하나 뽑았다. 벽이 울렸다.
뽑힌 것은 못인데 벽이 다 울렸다.
그 소리 마음을 들어올렸다.
못 하나 보내려고 벽은 버텼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종일 못을 뽑았다.
못질을 하며
천양희
낡고 허물어진, 여기저기
크고 작게 못질을 한다
바르고 곧은 것들만 골라
모진 세상 사방에
자꾸 못질을 한다
나에게는 나의 운명이
못 뒤에는 몇 개의 못들이 박히고
상처 난 자리 떼우듯
군데군데 못질을 하노라면
무수히 박혀
되 아무는 상처의 어디
지은 죄 얼굴 가리고 숨어 있다
목수(木手)여
생전(生前)에 박아두었던
못 하나 빼어 들고
지은 죄, 지은 죄라며
우리의 죄 위에도 못질을 하라
불현듯 눈을 뜨고
마침내 십자가(十字架)를 볼 수 있도록
몽산포
천양희
마음이 늦게 포구에 가 닿는다
언제 내 몸속에 들어와 흔들리는 해송들
바다에 웬 몽산(夢山)이 있냐고 중얼거린다
내가 근처에 머물때는
세상을 가리켜 푸르다 하였으나
기억은 왜 기억만큼 믿을 것이 없게 하고
꿈은 또 왜 꿈으로만 끝나는가
여기까지 와서 나는 다시 몽롱해진다
생각은 때로 해변의 구석까지 붙잡기도 하고
하류로 가는 길을 지우기도 하지만
살아있어, 깊은 물소리 듣지 못한다면
어떤 생(生)이 저 파도를 밀어가겠는가
헐렁해진 해안선이 나를 당긴다
두근거리며 나는 수평선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부풀었던 돛들 붉은 게들 밀물처럼 빠져나가고
이제 몽산은 없다. 없으므로
갯벌조차 천천히 발자국을 거둔다.
무서운 시간
천양희
어둠이 깃드는 숲에 발걸음 멈추고 서 있으면
기척도 없이 안개가 숨어든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의 몸에 가만히 귀를 대보면
작년의 바람소리 거기 박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있으면
함께 산다고 같이 가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영산홍 붉은 꽃은 지옥에 가닿는다고
꽃밭에 눈부셔하며 누가 말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옥까지 가겠노라고
빛의 소리와 어둠의 끝까지 가겠노라고
누가 대답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꿈 없는 잠에 들었던 사이
정오의 태양이 이우는 사이
이백년의 세월은 재처럼 내려앉았다는 생각이 든다
별과 꽃이 난만한 밤에
그가 죽었다는 생각이 든다
봄밤은 무서운 시간이란 생각이 든다
무소의 뿔처럼
천양희
사람들이 왁자지껄 길을 깨우네
가로수들이 벌떡 일어서고
차들이 번쩍, 불을 켜네
눈에 불을 켜고 하루를 피우네
하루의 길이 사람의 길이라서
길의 속이 오래 쟁쟁거리네
속은 들수록 깊어지나
밖엔 고요가 없네
나는 그늘처럼 비껴앉아
무소의 뿔을 생각하네
무소의 외뿔!
단단한 저것이 정신임을 알겠네
우뚝, 저 뿔의 정신
나는 그렇게 오르겠네
더 높이 불끈!
무심천의 한때
천양희
무심천 변에서 무릎 세우고 몇 시간을 보냈다
무심 속에서 온통 물을 이루는
물방울 물보라 물거품들
수심을 들여다보다 무심코!
없을 無에 대해 생각해본다
무욕과 무등(無等)과 무소유의 나날들
그동안 집착하던 것들로 목이 메었다
몸은 벌써 강물에 젖고
마음이 밀물처럼 빠져나간다
무슨 억하심정으로 일생이여.
속세에 갇혀 속수무책인가
나는 유한한 존재로서 세상에 혹하고 싶었다
불혹이든 물혹(勿惑)이든 달랑거리면서
무언(無言)이든 묵언이든 무슨 업이든 生으로.
낚싯줄 몇, 길게 던진다. 파문의 생기(生氣)!
문득 살얼음 드는 생의 생각들
수초처럼 잠겨 없을 無 없을 無 흘러간다
생이 어떻게 무감동인가 무의미한가 무력한가
무색하여 나는 오늘
흰눈썹울새처럼 이동하고 싶다. 무단횡단하고 싶다
강-남-으-로, 강의 남쪽으로
강의 끝으로, 무한대로 무시무종으로 무조건으로
가다보면 공중에 붕(鵬) 뜬 나의 진공(眞空)!
무색계로 가네
이것이 혹 무릉도원인가 무량수전인가
아슬하다 아슬하다. 춘천 하늘 저녁별들이
춘․천․춘․천 깜빡거리고
무심천에 무심히 흐를 것들
뒤돌아보면 흐를 것은
저만치 흘러가 있다. 무심히.
묵상(好拳)
천양희
1
아름다움을 위하여 나는 날 버렸지
어리석음을 위하여 나는 날 버렸지
처녀성을 위하여 순정을 위하여
개 같은 운명을 위하여
불행은 부동자세로 다가오고
나는 종말적으로 울며
허옇게 드러눕는
내 죽음에 동참했었지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를
나는 이 지상에 무덤으로 누워
망망한 대해
내 눈물의 바다를 보았지
시퍼렇게 떠오르는 나를 보았지.
2
오랫동안 나는 슬픔과 살았지
날마다 그와 마음이 맞아
순정적으로 아주 순정적으로
낮과 밤을 바치고
뼈와 살을 바쳤지
눈 오는 밤에는
백설 같은 나의 마음도 바쳤지
아, 꽃 피는 봄에는
금간 내 뼈의 외로움도 바쳤지
아, 바람 부는 날에는
가슴 밑을 흐르는
새벽 강물 소리
깊고 험한 내 생에도 바쳤지.
5
나는 지상에 발 묶인
한 인간의 딸입니다
오랜 절망을 사칭하고
자유를 형벌이라 매도하며
세상의 감옥
탈출을 노리는 죄인입니다
한번 살고 죽어버릴
인간의 탈을 쓰고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증오했습니다
누군가 남의 사랑을 엿보고
누군가 남의 뜰을 짓밟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수천 번 죽였습니다
삶은 나무처럼 가꾸는 것이라고
미래는 해처럼 떠오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긴 혀를
마음으로 수만 번 잘랐습니다
바람이 분다고 바람 속을
물결이 친다고 물결 속을
흔들리며 빠지며 아무래도 무엇인가
부끄러운 흔적만 남겼습니다
신이여
나의 부동자세는 어디에 있습니까.
8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수없이 말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 수없이 걸어가고
버려서는 안 될 것
수없이 버렸습니다
사랑 하나에도 목숨 걸지 못하고
진실 하나에도 깃발 들지 못하고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세상 원망했습니다
혀끝으로 수없이 맹세하며
혀끝으로 수없이 배반하며
혀끝으로 수없이 거짓을 보탰습니다
9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기 때문에 절망합니다
평범한 생(生)
덕지덕지 끼어 있는 세월을 절망합니다
봄이면 봄의 절망이 봄처럼 일어서고
여름이면 여름의 절망이 여름처럼 타고
가을이면 가을의 절망이 가을처럼 떨어지고
겨울이면 겨울의 절망이 겨울처럼 춥습니다
문득 - 백석 탄생 백 주년에
천양희
백석역을 지나다 문득
백석을 생각한다
이름이 백석인
역 하나 지났을 뿐인데
백 년이 지나간 것처럼 문득
간절하게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자야를 생각하는데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백석은 산골로 가고
아닌 싸움에도 지고 돌아와선
어쩌자고 나는 또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가는
흰 바람벽을 생각는데
백석에서 정주까지
그 멀던 역들은
누가 다 지나간 백 년일까
문득 생각는데
어느 사이에 누구도 없이
나 하나는
애인의 문학상을 만든 자야가
문득 부러워졌다
문장들
천양희
당신은 어떻게
관악산이 웃는다고 쓰고
가지가 찢어지게 달이 밝다고 쓸 수 있었나요
개미의 행렬을 지켜보면서
인생은 덧없다고 쓸 수 있었나요
음악은 고통받는 영혼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쓸 수 있었나요
당신은 또 어떻게
나무에는 강렬한 향기가 난다고 쓰고
꽃이 구름처럼 피었다고 쓸 수 있었나요
삶을 그물이라고 쓰고
환상이 삶을 대신할 수 없다고 쓸 수 있었나요
당신은 다시 어떻게
환상도 사실이라고 쓰고
가난도 때로는 운치가 있다고 쓸 수 있었나요
자기 자신이 인도하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다고 쓰고
당신의 의지가 당신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쓸 수 있었나요
당신의 문장들에 많은 빚을 졌다고
나는 쓸 수 밖에 없습니다.
물가에서의 하루
천양희
하늘 한쪽이 수면에 비친다 물총새가 물 속을 들여다보고 소금쟁이 몇개 여울을 만든다
내가 세상에 와 첫 눈을 뜰 때 나는 무엇을 보았을까
하늘보다는 나는 새를 물보다는 물 건너가는 바람을 보았기를 바란다
나는 또 논둑길 너머 잡목숲을 숲 아래 너른 들판을 보았기를 바란다
부산한 삶이 거기서 시작되면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바라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산그늘이 물 속까지 따라온다
일렁이는 물결 속 청둥오리들 나보다도 더 오래 물 위를 헤멘다
너는 아는구나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물이라는 걸 아는구나
오늘따라 새들의 날개짓이 훤히 보인다 작은 잡새라도 하늘에다 커다란 원을 그리고 낮게 내려갔다 다시 솟아오른다
비상! 절망할 때마다 우린 비상을 꿈구었지 날개가 있다면...... 날 수만 있다면 ......
날개는 언제나 나는 자의 것이다
뱃전에 기대어 날지 않는 거위를 생각한다 거위의 날개를 생각한다
물은 왜 고이면 썩고 거위는 왜 새이면서 날지 않는가 해가 지니 물소리도 깊어진다
살아 있는 것들의 모든 속삭임이 물이 되어 흐른다면 ......
물소리여 너는 세상에 대해 무엇이라 대답할까 또 소리칠까 소리칠 수 있을까
물결 무늬 고동
천양희
잔물결 속에 고동이 굴러다닌다
들어 보니
속이 텅 비었다
그속에 집게가 들어가 살고 있다
껍질뿐인 고동을 굴리고 있다
그걸 오래 들여다본다
문득 이게 나라는 생각
나는 살면서도 구른다
구르면서도 산다
구를 때마다
몸 속의 어둠이 터져 나온다
그때마다
텅 빈 몸이 텅텅거린다
잔물결이
껍질뿐인 고동을 굴리듯이
오랫동안
물에게 길을 묻다
천양희
1 - 수초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물속에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물속에서 물만 먹고 살았지요
물먹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물보라는 길게 물을 뿜어 올리고
물결은 출렁대며 소용돌이 쳤지요
누가 돌을 던지기라도 하면
파문은 나에게까지 번졌지요
물소리 바뀌고 물살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웅덩이 속 송사리 떼를 생각했지요
연어 떼들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물가의 잡초들을 힐끗 보았지요
눈비에 젖고 바람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生)도 물 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물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물먹고 산다는 것은 물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물먹고 살수록 삶은 더 파도쳤지요
오늘도 나는 물속에서 자맥질하지요
물같이 흐르고 싶어, 흘러가고 싶어.
2 - 참는다는 것
세상의 행동 중에 참는 게 제일이라*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든 참기로 했지요
날마다 참으면서 일만 하고 살았지요
참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살 길은 갈수록 구불텅거리고
살림은 출렁대며 흔들렸지요
누가 고해 속에 뛰어들기라도 하면
파문은 나에게까지 번졌지요
그때 나는 절벽에 매달려 사는 가마우지 새들을 생각했지요
둥지없는 무소새를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문득 길가의 무명초들을 힐끗 보았지요
발밑에 밟히고 바람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이 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참으면서 사는 일이었지요
그때서야 힘든 것이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힘들게 산다는 것은 힘쓰고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참고 살수록 삶은 더 굽이쳤지요
오늘도 나는 인파속에서 자맥질하지요
힘껏 살고 싶어 힘내고 싶어
* 명심보감의 한 구절
3 -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 하고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힐끗 보았지요
어둠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늘도 나는 사람 속에서 아우성치지요
사람같이 살고 싶어, 살아가고 싶어
* '열자(列子)'의 천서(天瑞)편에서.
4 - 집착한다는 것
세상의 감정 중에 집착이 가장 무섭다고 누가 말했지요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든 집착하지 않기로 했지요
날마다 욕심 버리면서 무심하게 살았지요
무심하게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욕심은 갈수록 줄어들지 않고
집착은 집요하게 매달렸지요
누가 경쟁 속에 뛰어들기라도 하면
여파는 나에게까지 미쳤지요
그때 나는 사는 일이 죽는 일보다 어렵다는 말을 생각했지요
새면서 날지 못하는 거위를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잡초들을 언뜻 보았지요
바람에 휩쓸리고 추위에 웅크리고 있었지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집착을 버리면서 사는 일이었지요
그제야 사람이 무서운 건 마음이 있기 때문이란 걸 겨우 알았지요
집착할수록 삶은 더 굽이쳤지요
오늘도 나는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리지요
중심을 잡고 싶어 잡아가고 싶어
물음
천양희
세 번이나 이혼한 마거릿 미드에게
기자들이 왜 또 이혼했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녀가 물었다
"당신들은 그것만 기억하나
내가 세 번이나 뜨겁게 사랑했다는 것은
묻지 않고"
시 쓰는 어려움을 말한 루이스에게
독자들이 왜 하필 시를 쓰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가 되물었다
"왜 당신은 그것만 묻나
내가 몇 번이나 간절히 무지개가 있는
세상에서 살기를 원했다는 것은
묻지 않고"
물의 가족
천양희
물을 거꾸로 쓰면 룸이고
룸을 뒤집으면 물이 된다고 너가 말했을 때
바다는 거대한 물의 룸이라고 너가 말했을 때
물소리 높아지면 파도가 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물길 깊어져 수심이 되었다고 말하고 말았다
수평선 바라보다
수평한 세상에서 살고 싶네, 너가 말했을 때
하늘 쳐다보다
땅에서 하늘까지 아직도 수직이네, 다시 말했을 때
경계 없는 것들이 좋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흘러가는 것들이 눈물겹다고 말하고 말았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바다는 위대한 것이라고 너가 말했을 때
바다의 모든 소리는 뒤에 여운을 남긴다고 다시 너가 말했을 때
마음에도 밀물 썰물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물결에도 들숨 날숨이 있다고 말하고 말았다
소리와 의미가 잘 맞아 철썩이는
우리는
물의 가족
바다 보아라
천양희
자식들에게 바치노라
생의 받침도 놓쳐버린
어머니 밤늦도록
편지 한 장 쓰신다
'바다 보아라'
받아보다가 바라보다가
바닥없는 바다이신
받침 없는 바다이신
어머니 고개를 숙이고 밤늦도록
편지 한 장 보내신다
'바다 보아라'
정말 바다가 보고 싶다
바다시인의 고백
천양희
그곳에서 이곳까지
바다를 업고 왔다고 그가 말한다
파도처럼 철썩철썩
세상의 귀싸대기 때리며 말한다
끼룩끼룩 말한다
해풍 벗고 온몸으로 힘쓰는 시를
썼으면 좋겠다고 그가 말한다
뻐끔뻐끔 아가미를 벌리듯
물고기처럼 그가 말한다
방파제처럼 단단해진 어둠속에서
잘 때도 눈 뜨고 자는
물고기 눈을 낚아챌것이라고 말한다
해안을 쓰면서 반대편을 써보려고
수평선을 쫘악 갈라놓을 것이라 그가 말한다
대개 절창이란
자신을 절단낸 뒤에야 오는 것이라고
물결 튀기며 그가 말한다
영감의 순간과 불면의 밤이
같은 세계의 겉과 속이라고 말한다
그를 미치게 하는 건 절벽의 확실성이 아니라
반복되는 파도에 대한 회의라고 그가 말한다
절벽을 바라보며
절망 때문에 울었다고 그가 말한다
울음이 한 사람의 언어라면
침묵도 한 사람의 언어라고 말한다
시퍼런 진실은
울음과 침묵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그가 말한다
그에게 시(詩)는
짐이 아니라 힘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소외와 고독은
자청한 그의 이력이라고 말한다
모든 작품은
자서전이자 반성문이라 그가 말한다
생각해보니 그의 고백이
바로 바닷속에 든 칼날 같은 시다
바람길
천양희
제비는 먼 땅을 향해 갈 때
두루미 등 뒤에서 때때로 쉬며 날아간다고 한다
이 땅이 먼 길인 나는
두 발이 지치면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때때로 쉰다
누가 뭐래도 내 뒷 빽은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바람
바람이 있다면 나도 제비처럼
바람의 등 뒤에서 때때로 쉬며 날아가는 것
오늘따라 바람 들린 잡새들
나보다도 더 오래 바람 속을 헤맨다
너는 아는구나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것이 바람이란 걸 아는구나
바람! 바람이 불 때마다
나는 가벼워지고 싶었다
바람처럼 가벼워질 수 있다면
흔적 없는 바람같이 대단한 여행자가 될수 있다면
바람은 언제나 정처 없는 자의 것이다
나무 뒤에 나무처럼 서서
날개 없는 것들을 생각한다
나는 왜 바닥을 치면서 날고만 싶어 하나
사람은 왜 바람을 꽃처럼 피우면 안 되나
탓하지 말자
바람 부는 날
천양희
바람 부는 날
바람을 맞으며 아이가 물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 부는 날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를 보다 아이가 말했습니다.
나무가 무서운가 봐, 나무가 잠을 안 자.
바람 부는 날
시든 나뭇잎을 보다 아이가 또 물었습니다.
나무가 아픈 거야?
어린 것들이 눈부시게 일어나는 아침
숲은 가슴을 열어 새끼들을 안습니다.
얘야, 감기들라 넘어질라.
왼종일 가슴이 조마조마.
바람아래해변
천양희
바람아래해변은
바람아래 있었습니다
바람아래에서
바람을 맞고 있었습니다
바람 맞으며
허연 거품 물고 있었습니다
바다 一部 종일
해안선 쪽으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바람아래해변은
바람아래 있었습니다
바람아래에서
바람을 밀고 있었습니다
바람을 밀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바다 내부(內部)는 종일
바람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 소리 들으며
바람아래해변을 돌아나왔습니다
돌아나오며 별명이
`바람 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를 생각했습니다.
바람을 맞다
천양희
바람이 일어선다 나무가 서 있는 곳은 초록빛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나무는 영원한 초록빛 생명이라고 누가 말했더라 숲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마왕」곡 같아 오늘은 사람의 말로 저 나무들을 다 적을 것 같다 내 눈이 먼저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가 오려나 거위눈별이 물기를 머금고 있다 먼 듯 가까운 하늘도 새가 아니면 넘지 못한다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우리도 바람 속을 넘어왔다 나무에도 간격이 있고 초록빛 생명에도 얼음세포가 있다 삶은 우리의 수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언제였더라 우리는 왜 뒤돌아본 뒤에야 반성하는가 바람을 맞고도 눈을 감아버린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에 땅을 품은 여장부처럼 바람이 일어선다
바람편지
천양희
잠시 눈 감고
바람 소리 들어보렴
간절한 것들은 다 바람이 되었단다
내 바람은 네 바람과 다를지 몰라
바람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바람처럼 떨린다
바라건대
너무 헐렁한 바람구두는 신지마라
그 바람에 걸려 사람들이 넘어진다
두고 봐라
곧은 나무도
바람 앞에서 떤다, 떨린다
바퀴
천양희
철물점 지나다
버려진 바퀴를 본다
구르지 않는 바퀴를 보면
명퇴당한 아비들 같아
덜커덕, 숨이 멎는다
한때 신나게 굴러갔을 저 바퀴
바퀴는 굴러갈 때 바퀴인 것이다
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내 앞을 지나간다
소년은 아직 바퀴의 속력을 모를 것이다
차들이 바퀴를 굴리며 달려간다
속력은 모두 바퀴 때문이란 걸 모를 것이다
구르는 바퀴는 물러서지 않는다
달릴 수 있을 때 달리는 것
그것이 바퀴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바퀴가 되어
세상을 굴리고 싶다
반드시
천양희
한 등반대가 에베레스트산을 오르기 위해 네팔에 도착했을 때 네팔국 심리학자들과 면담을 가졌다 대원들을 따로 불러 같은 질문을 했다 산 정상에 오를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대원들의 대답은 각기 달랐다 한 대원은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했고 다른 대원은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할 것"이라 했다 남은 한 대원은 '나는 반드시 그렇게 할 것' 이라 대답했다 그들 중에서 한 사람만이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예감했다 그가 바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짐 휘타카였다 그들의 짐작대로 단단한 결의를 한 그는 폭풍이 몰아치는 팔천팔백사십팔 미터 정상에 우뚝 섰다 일천구백육십삼 년 오 월 첫날이었다 정상에 아마도란 없다 반드시만 있을 뿐이다
발 없는 새
천양희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발 없는 새
발이 없어
바람 속에서 쉰다네
날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만 쉰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발 없는 새
발이 없어
지상으로 내려갈 수 없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발 없는 새
발이 없어
지상으로 내려가면 죽는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나도 바람 속에서 쉬고 싶다네
발 없는 새처럼 쉬었으면 한다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왜 불지?
바람이 불면 바람 속에서 쉬는 새
바람같이 소리치고 있다네
내 발 어디에 있지?
하늘을 나는 새는 자취가 없다네
발자취
천양희
사람이 무서운 건 관계 때문이고
관계가 힘든 건 마음 때문이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한 구절 한 구절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내게로 왔다
발자취를 생각한 건
그때부터였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은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붉은 문장을 이해한 건
혹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때였다
사랑과 인식의 출발에 눈을 뜬 건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문장을
지운 뒤였다
한 사람의 마음도 살리지 못하면서
관계의 소통과 유대에 대해
말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닻을 내린 건
귀가 순해진 뒤였겠지
그때 비로소
나는 사람이 궁금한 사람이었고
마침내 나는
사람이 힘든 사람이란 걸 알았다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길이보다 깊이를 생각하는 새 아침
아프지도 늙지도 말라는 연하장을 받았다
눈은 펑펑 내리는데
처음으로 나는 눈사람처럼 하얗게 울었다
주저 없이 주저앉아 눈처럼 녹으면서
괜히 열심히 살 뻔했다고 투덜대면서
생각해 보니
발자취는 내 생의 물결무늬자국
밥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서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방편
천양희
책을 읽다가 무릎을 친다
밑줄 치는 대신 무릎을 친다
가령 뼈아픈 문장들
(나에게 몸이 없으면 어찌
나에게 어려움이 있겠느냐)
나에게도 몸이 있었나
생각하는 동안
모르게 고개가 푹, 꺽이네
겨우 고개 들고 저녁을 바라보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볼 때는
우리라는 말은 사용해선 안 된다)
나에게도 고통이
몸이었던 때가 있었나
울컥, 울음 맺히네
벌써 밤이네 하면서 창문을 닫네
(사랑이란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이다)
나에게도 사랑이 있었나
아연하고 실색하네
나는 이미
무릎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네
나를 치고 있는 것이네
무릎은 내가 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네
배경이 되다
천양희
새벽이 언제 올지 몰라 모든 문 다 열어놓는다고
그가 말했을 때 꿈꿀 수 있다면 아직 살아 있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다
나에게만 중요한 게 무슨 의미냐고
내가 말했을 때 어둠을 물리치려고 애쓴다고
그가 말했다
생각의 끝은 늘 단애라고
그가 말했을 때 꽃은 나무의 상부에 피는 것이라고
내가 말했다
세상에 무늬가 없는 돌은 없다고
내가 말했을 때 나이테 없는 나무는 없다고
그가 말했다
바람이 고요하면 물결도 편안하다고
그가 말했을 때 산은 강을 넘지 못한다고
내가 말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
우리는 서로의 배경이 되었다
배밭을 지나며
천양희
나무들 옷은 나뭇잎이야? 꽃들은 나무의 눈망울이야?
다 늦은 봄 한때. 언덕길 오르며 아이가 묻는다
산비탈 아래 배꽃이 환하다
하늘 한쪽에서 햇살이 내려오고
아이는 자꾸 까르르 웃는다
여자는 배나무에 대해 생각한다
저 나무는 꽃을 피울 수 있어서 좋겠다
그러나 세상의 매혹은 짧고 환멸은 길다
아이는 또 뭐라 뭐라 하고
나무는 온몸으로 꽃이 된다
저게 나무의 마음이야
그 여자 언제 열릴지 모를
배밭을 지나며 중얼거린다
꽃이 져도 배나무는
배의 나무인 것이야.
벌새가 사는 법
천양희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파도는 하루에 70번이나
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나는 하루에 몇번이나
내 몸을 쳐서 시를 쓰나
벽
천양희
시선이 시선을 가로막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가로막고 있다
사람과 자연을 가로막는 사회
제발 덮치지 말아다오
우아하게 나는 너와 인연을 끊고 싶다
벽에 기대어
TV를 보다가
벽처럼 높은 철학책을 보다가
보이는 것에 다시 벽을 느낀다
모든 것이 이쯤에서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얼마나 더
싸움에도 희망이 있을 건가!
벽과 문
천양희
이 세상에 옛 벽은 없지요
열리면 문이고 닫히면 벽이 되는
오늘이 있을 뿐이지요
새로울 것도 없는 이 사실이
사실은 문제지요
닫아걸고 살기는 열어놓고 살기보다
한결 더 강력한 벽이기 때문이지요
벽만이 벽이 아니라
때론 결벽도 벽이 되고
절벽 또한 벽이지요
절망이 철벽같을 때
새벽조차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지요
세상에 벽이 많다고 다
낭비벽이 되는 건 아닐 테지요
벽에다 등을 대고 물끄러미 구름을 보다 보면
벽처럼 든든한 빽도 없고
허공처럼 큰 문은 없을 듯하지요
이 세상 최고의 일은 벽에다 문을 내는 것*
자, 그럼 열쇠 들어갑니다
벽엔들 문을 못 열까
문엔들 벽이 없을까
* 인도의 선각자 비노바 바베의 말.
변화
천양희
해가 진다 해 아래 새로운 건 없다고들 하지만 해를 사랑하는 것은 모두 문 밖에 있다 해 아래 있다 어느 곳에서나 아침에 뜨는 해 해도 종일 머무르지 않는다 해가 지면 밤이 올 터 나는 새로움을 변화로만 읽지 않는다 변화란 또 다른 풍경 누군가 옛것을 가져갔다 옛우물 옛집 없어진 ……추억은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데 시간이 걸린다 길눈이 어두워 마음은 자꾸 뒤를 돌아다본다 물거품 같은 것이 옛날이라 말해본다 나는 변화가 무섭다 숲이든 늪이든 하나는 무너져야 하니까 뒤집혀야 하니까 누구도 운명에 대해 방법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무너지고 뒤집힌 뒤 나도 나를 바꾸었다 변화란 변화의 의미보다 얼마나 더 새로운가 내가 사랑하는 것들도 문 밖에 있다 해 아래 있다 해 아래 새로운 건 없다고들 하지만 해지기 전에 오늘을 바꾸기로 한다 오늘을 바꾸는 것 이것이 변화라면 변화인 것이다 변화는 늘 지금부터 온다 해가 진다
별이 사라진다
천양희
나는 1초에 16번 숨쉬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내 심장은 하루에 10만 번 뛰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죽을 때 빠져나가는 내 무게는 21그램인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나는 1분에 0.5리터 공기를 마시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내 심장은 7년마다 한번씩 바뀌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나는 하루에 12번 웃는데
별은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
?
별은 세상에 마음이 없어 사라지고
세상에 마음이 있어 사람들은 무섭게 모여든다
별자리
천양희
프랑스 왕립 천문학회가
새로 발견한 별에
랭보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몇 년 전 파리에서 들려와
나를 감동시키더니
우리는 언제 저렇게
새로 발견한 별에
백석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궁금해지더니
며칠 전 신문에서
별이 1초에 79개씩 사라진다는 것을 보고
꿈이 사라지는 것처럼
놀랐느니
아직 새 별을 발견하지도 못했는지
아무 기별이 없어
이것이 간절함이 극에 달하는 길이거니
무궁의 길이거니
별을 보는 것은 어디서나 길을 묻는 것
나, 오늘 별자리에 들고 말았네
보리밭을 지나다
천양희
보리밭을 지나다
언 땅 뚫고 나온 보리를 본다
동안거(冬安居) 끝낸 수행자 같아
나는 지금 보제(菩提)를 생각하고 있다
보리밭을 갈아엎어
보리수를 심을까 궁리하는 동안
마음이 밭고랑처럼 울퉁불퉁해져
아직 새파란 보리가
나를 흔들어놓는다
보리밭을 지나다
눈 속에 든 보리를 본다
설산고행하는 노고승(老高僧) 같아
나는 지금 보리행을 생각하고 있다
보리밭에 엎뎌
삼천배, 몇배쯤 절하고 나면
나도 감히
보재삼매(菩提三昧)에 빠질수 있을까
아직 새파란 보리가
보제(菩提)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봄
천양희
그 자리가 비었어도 밖엔 봄이 충분하였다.
나 혼자 있어도 밖엔 봄이 충분하였다.
충분한 봄으로 그 시간을 채웠다.
봄밤
천양희
서쪽을 향해 자란다는
측백나무를 생각하다가
북쪽을 향해 봉오리가 솟는다는
목련나무를 생각하다가
안뜰에 심으면 큰 인물이 난다는
회화나무를 생각하다가
새들이 좋아하는
아가위나무를 생각하다가
새가 아니면서 날아다니는
입술박쥐를 생각하다가
새이면서 날지 못하는 거위를 생각하는 봄밤
눈물을 찍어 새를 그린
화가 이징을 생각하다가
한 곡 부를 때마다 모래 한 알 신발에 던져
신이 모래로 가득 차야 노래를 그쳤다는 명창 학산수를 생각하다가
일생 동안 먹을 갈아 구멍낸 벼루가 열 개가 넘었다는
명필 이삼만을 생각하다가
노래를 잘 듣기 위해 자신의 눈을 찌른
악사 사광을 생각하는 봄밤
나, 그만 『무서록(無序錄)』을 읽고 말았네
부르는 소리
천양희
지은 죄도 눕힐 것 같은
수평선 마주 보면
나는 그만 우두커니가 된다
바다한테 와서 한번도 다른 곳에 가지 않은 파도여
넌 바다밖에 몰라 보내지 않았으나
바다는 오래 잠들지 않았다
파도는 너무 일찍
소리 몇절 써버린 죄로
바다한테마저도 버려졌는가
누가 널 부를 때
네가 누굴 부를 때
큰 소리 더 크게 소리쳤는가
너보다도 더 크게 널 부르는 소리
있었는가 잊었는가
부재(不在)
천양희
내 집 주소를 기억하지 마.
나를 기억하지도 마.
주소 불명
수취인 불명
나는 지금
행방불명중.
불멸의 명작
천양희
누가
바다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바닥부터 말하겠네
바닥 치고 올라간 물길 수직으로 치솟을 때
모래밭에 모로 누워
하늘에 밑줄 친 수평선을 보겠네
수평선을 보다
재미도 의미도 없이 산 사람 하나
소리쳐 부르겠네
부르다 지치면 나는
물결처럼 기우뚱하겠네
누가 또
바다에 대해 다시 말하라면
나는 대책없이
파도는 내 전율이라고 쓰고 말겠네
누구도 받아쓸 수없는 대하소설 같은 것
정말로 나는
저 활짝 펼친 눈부신 책에
견줄 만한 걸작을 본 적 없노라고 쓰고야 말겠네
왔다갔다 하는 게 인생이라고
물살은 거품 물고 철썩이겠지만
철석같이 믿을 수 있는 건 바다뿐이라고
해안선은 슬며시 일러주겠지만
마침내 나는
밀려오는 감동에 빠지고 말겠네
불편한 진실
천양희
진실이란 말
참, 나무처럼 시퍼렇지요
시퍼러면 뭐하겠노
새빨간 거짓말이 판치니까
입이 너무 많은 세상이
다 새빨갛게 보이제
그래도 거짓한테는
진실만큼 좋은 선생이 어딨겠노
친구는 거듭 말하지만
오늘은 진실에도 오류가 있다는 말
하지 않기로 한다
어느 날 내가
읽고 있던 『시와 진실』 책장을 덮을 때
나에게 남은 불편한 진실은
나도 이따금 시퍼렇게 질린다는 것이다
거짓의 모서리가 불편해
나는 둥근 진실에 항복했다
붙잡을 수 없는 것들
천양희
세상의 모든 먹는 것 중에서
나이를 먹는 것처럼 먹기 싫은 것이 없고
맛없는 것이 없을 것 같다
세상일이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잘 먹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월과 나이이다
내가 어떻게 벌써 이 나이인가
믿기지 않을 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자신감도 없어진다
그까짓 나이쯤이야, 라며 큰소리쳐보지만
삶이 철컥, 자물통을 채워버리는 것 같아
솔직히 겁이 난다
가는 세월 붙잡을 수 없고
세월 따라 먹는 나이를 나도 어쩔 수 없어서다
세월이 약이겠지요'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젊은 날의 상처나 슬픔도
세월이 치유해주기 때문이다
젊은 날은 가난이나 고통,
슬픔이나 상처까지도 힘이 되었는데
지금은 무섭게만 느껴지니
내가 삶을 너무 과식해서 배탈이 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이고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야 하는 것이 나이라면
잘 보내고 잘 먹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람도 명작처럼
세월이 흐르고 세기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감동을 주는
명인이 될 수 없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도 나이를 잘 먹고 잘 살다보면
명인이 되고 명품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나이를 먹어서 늙는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상과 정열을 잃어버릴 때 늙는 것이다
세월의 흐름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릴 뿐이지만
꿈이나 열정을 잃어버릴 때는
영혼의 주름살을 늘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나이를 먹어서 꿈이 줄어든다면
추억이라도 쌓아놓자
그 추억의 힘으로
마음속에 영감의 수신탑을 세울 수 있다면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어도
희망의 전파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세월이 흐르면서 줄어드는 아름다움이나
희망, 용기나 희열 같은 것이
더 소중하게 생각되고
나이가 들면서 사랑이나 용서,
나눔이나 배려 같은 말이
더 소중하게 생각된다
세월이 간다든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덧없다고 하지만
가는 것은 세월이나 나이가 아니라
우리가 한결같지 못하고 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 들어서 가진 것이 없다고 후회할 때
나는 내가 뿌린 것이 없어서
거둘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세월이 흘러도 해놓은 것이 없다고 자책될 때
나는 또 내가 행한 것이 없어서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횡재할 일이 있을 때 횡액을 생각할 줄 알고
돈이 오는 곳에 반드시
그림자가 따라온다는 것도 생각하게 된 것이
세월을 보내고 나이를 먹은 요즈음의 나 자신이다
세월이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라면
나 또한 그 강이며,
세월이 나를 태우는 불이라면
나 또한 불이라던 말이 떠오른다
그래서 세월과 나이는 함께 간다고 했을 것이다
이 나이에 무슨?...이 아니라
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으로
세월을 잘 보내고 나이를 잘 먹어야겠다
세월이여 제발,
내 나이를 잘 데리고 가다오
비
천양희
쏟아지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쏟아지고 싶다
퍼붓고 싶다
퍼붓고 싶은 것이
비를 아는 마음이라면
그 마음
누구에겐가 퍼붓고 싶다
쏟아지고 싶다
비오는 날
천양희
잠실 롯데백화점 계단을 오르면서
문득 괴테를 생각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생각한다
베르테르가 그토록 사랑한 롯데가
백화점이 되어 있다
그 백화점에서 바겐세일하는 실크옷 한벌을 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친구의 승용차 소나타Ⅲ를 타면서
문득 베토벤을 생각한다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3악장을 생각한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소나타가
자동차가 되어 있다
그 자동차로 강변을 달렸다
비가 오고 있었다
무릎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여자
고흐의 그림 '슬픔'을 생각한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슬픔'이
어느새 내 슬픔이 되어 있다
그 슬픔으로 하루를 견뎠다
비가 오고 있었다
사라진 것들의 목록
천양희
골목이 사라졌다
골목 앞 라디오 수리점 사라지고
방범대원 딱딱이 소리 사라졌다
가로등 옆 육교 사라지고
파출소 뒷길 구멍가게 사라졌다
목화솜 타던 이불집 사라지고
서울 와서 늙은 수선소집 목포댁 재봉틀 소리 사라졌다
마당 깊은 집 사라지고
가파른 언덕길도 사라졌다
돌아가는 삼각지 로터리가 사라졌다
고전음악실 르네상스 사라지고
술집 석굴암이 사라졌다
귀거래다방 사라지고
동시상영관 아카데미하우스 사라졌다
문화책방 사라지고
굴레방다리 사라졌다
대한늬우스 사라지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도 사라졌다
세상에는 사라진 것들이 왜 이리 많은가
나도 나를 버리는데 반생이 걸렸다
걸려 있는 연(緣)줄 무슨 연보처럼 얽혀 있다
저 줄이…… 내 업을 끌고 왔을 것이다
만남은 짧고 자국은 깊다
누구나 구멍 하나쯤 파고 산다는 것일까
사라진 것처럼 큰 구멍은 없다
사라진 계절
천양희
사자 별자리 자취를 감추자 봄이 갔다
꽃이 피었다고 웃을 수만은 없는 그런 날이었다
문을 닫는 순간 내 안의 무엇인가 쾅, 하고 닫혔다
고통이란 자기를 둘러싼 이해의 껍질이 깨지는 것이었다
전갈자리별 자취를 감추자 여름이 갔다
초록 나무에도 그늘이 짙은 그런 날이었다
종이 위에 생각을 올려놓는 순간 말할 수 없어 나는 침묵을 썼다
외로움은 내 존재가 피할 수 없이 품은 그늘이었다
노랑발 도요새가 자취를 감추자 가을이 갔다
고독이 지쳐 뼈아프게 단풍 드는 그런 날이었다
잃다와 잊다가 같은 말이란 걸 아는 순간 내 속에 피가 졌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남은 유일한 이유였다
흰꼬리딱새가 자취를 감추자 겨울이 갔다
몸이 있어서 추운 그런 날이었다
안다고 끝나는 게 세상일이 아니란 걸 깨닫는 순간
내 안의 어둠이 쏟아졌다
이 세상에 와서 내가 없는 계절은 없을 것이었다
사람들
천양희
논둑길 걷다 누군가 무르팍을 툭, 친다. 풀잎이다.
풀잎 속 풀무치다. 풀무치 눈이 퍼렇다. 풀 탓이다.
풀물 든 눈으로 세상을 본다. 세상에는 풀잎보다
더 시퍼런 칼날이 있다. 칼의 날을 세운 날들이
있다. 풀 베듯 베이는 사람들이 있다.
세종로 지나다 누가 머리통을 텅, 친다. 종각이다.
종각 속의 종이다. 종이 울지 않는다. 종 탓이다.
종 치는 마음으로 세상을 치고 싶다. 세상에는
종소리보다 더 소리치고 싶은 목소리가 있다. 절필한
종소리 재창하고 싶은 날들이 있다. 종소리 울리듯
절창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사람의 일
천양희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이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서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천양희
약한자에게는
그대 마을이 크게 보인다
들판에는
한줄기 해가 기울고
외로운 사람 들판을 내려다본다
어둠에 찔려
비명 지르는 들을 벗어나
걸어서 그대 마을에 당도하리라
길고 짧은 불빛
드러내는 낯선 땅
불빛처럼 찬란한
그대의 심장 깊이 깊이
잠시, 긴 창(槍)을 꽂는다
땅위에
피투성이 그대
뼈가루가 튀어 오른다
마을 문턱까지 튀어 오른다
눈 부릅뜨고
미친 내가 튀어 오른다
약한 자에게는
그대 마을이 크게 보인다.
사랑에 대하여
천양희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 칼 힐터
내가 사랑에 대해 쓰면
그건 남자에 대한 것이라 하고
그녀가 사랑에 대해 쓰면
그건 조국에 대한 것이라 한다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 더
남자를 썼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운동권이었고
나는 여권이었다
내가 남자를 만나면
그건 연애하는 것이라 하고
그녀가 남자를 만나면
그건 투쟁하는 것이라 한다
그녀는 투사였고
나는 방관자였다
머리도 가슴도 몸도 쓰라던
그녀의 말이 오늘은
전적으로 옳았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이었다.
사소한 한마디
천양희
1920년 뉴욕의
어느 추운 겨울날
가난한 한 노인이 "나는 맹인입니다"
작은 팻말을 들고
공원 앞에서 구걸하고 있었다
몇 사람만 동전을 던지고 갈 뿐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때 한 행인이
맹인 앞에 잠시 머물다 떠났다
그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맹인의 적선통에 동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엇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마음을 돌려놓은 것일까
팻말은 다음과 같은 글귀로 바뀌어 있었다
"봄은 곧 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봄을 볼 수 없습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마음을 크게 벌었던 것이다.
* 앙드레 브르통의 글.
사의 찬미 – 윤심덕 조로
천양희
죽고 싶다 하면서 살고 싶은 날
친구에게 전화걸어
인생이 뭐길래 이렇게 힘드냐고 하면
그것도 모르냐며
인생이란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것이라고
「사(死)의 찬미」한 소절 불러젖힌다
-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
무얼 찾으려고 찾아내려고
바닥없는 바다에 뛰어내렸을까
자살도 요절도 못한 내가 시인이냐 하면
죽어도 같이 죽는 것이 부럽다고 하면
-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아니냐고 친구는 또 그런다
-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고
내가 한 소절 끝내면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좋은 것이라고
친구는 또 그런다
죽음을 찬미하며 죽어간
윤심덕의 「사의 찬미」
내가 찬미하는 나의 십팔번
사흘 동안
천양희
나는 꼬박 사흘을 잤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흘을 잤다
네가 아프구나, 하면서 사흘을 잤다
시간을 뜯어먹으며 사흘을 잤다
죽은 듯 산 듯 사흘을 잤다
무덤처럼 누워 사흘을 잤다
세상이 이제 나를 보탰다.
산에서의 하루
천양희
산그늘이 어둡고 깊다
산자락 끌고 가는 하루가 길다
구멍 속 딱따구리 종일 딱딱거린다
구멍이 제집인 것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래도 나무는 끄떡 않는다
이곳에 와서야 세상에 어처구니없는
나도 끄떡 않는다
바람이 날 한번 긁고 지나간다 흐린 날이다
날씨가 흐리니 아차산 능선이 흐릿하다
저놈의 흐린 세상
벼랑 아래 구름비나무 한쪽이
조금 기울어져 있다
저것이 또 비구름 만들라나?
구멍 뚫린 나무처럼 몸이 허하다
바람이 날 한번 긁고 지나간다 흐린 날이다
흐린 날씨에도 처녀치마꽃 둘레를 돌고 있는 말벌들
정신이 돌겠다고 아우성이다 말벌 주제에
나도 주제 모르고 여기까지 왔다
그건 모두 산 탓이다
산자락 끌고 내려오는 하루가 짧다
산 아래 마을 멀지 않았다
산을 오르며
천양희
낮은 데서 바라보면
누가 저같이
높이 서고 싶지 않으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오르다 보면
산꼭대기
제일 작은 꽃보다 더 작은 우리
높이 더 높이 서기 위해
얼마나 쓰러지고 일어났던가
높이 높이 서서
거기 무엇을 남기려는가
산 가운데
사람 소리 들리지 않고
메아리만 저 혼자 되돌아온다
우리도 어차피
제자리로 올 것이지만
세상은 언제나
산꼭대기에 높이 선 사람의 편
엉거주춤 산 밑의 많은 사람들
나날이 오르면서
오르지 못하면서
여기
슬픔만 지고 와서
내다 버린다.
삶에게
천양희
사방으로 허둥대며
어디로 간다
발목에는 굵은 쇠사슬을 달고
네가 어디로 확실하게 간다
광화문(光化門)이나 신촌(新村)
어디로 가든 길은 안 보이고
입 앙다물고 버티어 선
가죽같이 질긴 끈
아무리 끊으려도 끊어지지 않는다
공기처럼
핏줄처럼
잘라도 잘라도
그것은 쇠사슬 쇠사슬 쇠사슬
나는 그곳에
덜컹덜컹 자물쇠를 채웠다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세월은 갔다.
삶에게 길을 묻다
천양희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 하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힐끗 보았지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늘도 나는 사람 속에서 아우성치지요
사람같이 살고 싶어, 살아가고 싶어
상실
천양희
존재를 잃어버리면
가슴을 잃는 것이다.
가슴을 잃어버리면
자신을 잃는 것이다.
자신을 잃어버리면
세상을 잃는 것이다.
세상을 잃어버리면
인생을 잃는 것이다.
인생은 실패할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할 때 끝나는 것이다.
상일(上一) 세탁소
천양희
세탁소 아저씨가
아침마다
세탁, 세탁 외친다
세상이 탁하다고
외치는 것 같다
세탁(世濁)!
그 소리 들을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탁한 것은
다 세탁해야 한다고
세탁한 것들 탁탁 털어
저 청청한
햇빛에 말린다면
누가
상일(上一) 세탁소보다
더 잘 세탁할 수 있을까
세상 속에서 탁해진
사람의 옷을 세탁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상일(上一) 세탁소
상일동 아침
천양희
아침마다 뻐꾸기가
보국(保國), 보국 울고
상일(上一) 세탁소 아저씨는
아침마다 세탁(世濁), 세탁 외친다
그 소리
높이 들어 올린 아침
서둘러 깨워야지
저것 봐
낮게 누운 집들
나는 아침을 베고 누워
그 소리 엿들어
이상하다
100년도 더 넘게
그 소리 그 소리 그 소리
밖에 나오니
상일동 아침이
이 땅 위에
충분하였다
상처
천양희
상처를 씨앗처럼 심어라.
씨앗은 썩어 꽃을 피운다.
상처가 곧 꽃이니......
상처를 꽃처럼 피워라.
꽃은 썩어 열매를 키운다.
상처가 곧 꽃이니......
새가 있던 자리
천양희
잎인 줄 알았는데 새네
저런 곳에도 새가 앉을 수 있다니
새는 가벼우니까
바람 속에 쉴 수 있으니까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프리다 갈로의 <부서진 기둥>을 보고 있을 때
내 뼈가 자꾸 부서진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나도 그런 적 있다
작은 것 탐하다 큰 것을 잃었다
한 수 앞이 아니라*
한 치 앞을 못 보았다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
아직 덜 되어서
언젠가는 더 되려는 것
미완이나 미로 같은 것
노력하는 동안 우리 모두 방황한다
나는 다시 배운다
미로 없는 길 없고 미완 없는 완성도 없다
없으므로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어디에나 나를 지켜보는 새의 눈이 있다
* 밥 딜런의 노래에서 인용
새는 너를 눈뜨게 하고
천양희
도도새가 울고 바람은 나무 쪽으로 휘어진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나 보다
가지가 떨리고 둥지가 찢어진다
숲에서는 나뭇잎마다 새의 세계가 있다
세계는 언제나 파괴 뒤에 오는 것
너도 알 것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남은 자의 고통은 자란다고 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렴
일과 일에 걸림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는 것이라고
저 나무들도 잎잎이 나부낀다
삶이 암중모색이다
가지가 찢어지게 달이 밝아도 서계는 그림자를 묻어버린다
일어서렴
멀리 보는 자는 스스로를 희생시켜 미래를 키우는 법이다
새의 칼깃 뒤에도 나는 자의 피가 묻어 있다
그러니 너는 네 하루를 다시 써라
쓰는 자의 눈으로 안 보이는 것은 없을 것이니
극복 못할 일이 어디에 있을라고
극복에도 바람은 있다
뛰어넘으려는 것이 너의 아픈 극복일 것이다
새록이
천양희
시인 이상희의 딸 새록이를
어느 시인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보았다
우연이라도 행복해지고 싶던
내 소원이 봄날처럼 풀렸다
새록새록 피어나는
초록잎 같은 새록이
하늘 아래 아이처럼
뿌리 깊은 나무 보았는가
새록이를 안는 순간
어, 버, 버, 반벙어리가 되었다
아이처럼 좋아서
내 세상이로구나
온종일
새록이와 놀면서
나에게도
딸 하나 새록새록 자랐으면 좋겠다.
새벽 시장
천양희
어둔 밤이 꿈틀, 몸 바꾼다
외등 몇 다투듯 켜지고
골목들이 반쯤 얼굴 내민다
불빛 속에서 우두커니 사람 쪽을 바라다본다
무엇을 구하러 온 것일까 새벽 두시
나는 겨우 옷 한벌 얻으려고
하루의 첫 시간을 다 보냈다
남산순환도로 돌아보니
길 옆 가로수들이 텅 비었다 아뿔사!
내가 너무 껴입었구나 옷 속에 숨은 몸
나는 나를 숨게 만든 세상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해본다
오늘 저 장바닥을 다 돌기 전에
아침이 벌써 올 것이지만
지금 내가 들어서는 이 길 어느 쪽을
몰래 엿보아도 쌓인 것들뿐
그 아래 아무것도 못 벗은 내가 또 쌓인다
벗지 못한 것들이 오래 헐벗었다
흐르는 것, 물이나 구름 바람이나 세월
언제 썩어 거름 된 잎들이 넌 누구냐, 한다
와락 눈앞에 날려드는 생생한 기운
사람들이 새벽을 새벽이 사람들을 마구 흔든다
흔들지만 어디서도 옷 한벌 떨구지 않았다
우리는 어디가 무겁기나 했던가
내려놓을 것이 있기는 있었던가
누군가 툭, 어깨를 치고 간다
텅 빈 동천冬天 하나 날 깨운다
나는 내 손에 잡힌 하루를 풀어준다
문득 세상이 하늘만큼 넓어진다
새벽에 생각하다
천양희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노틀담의 성당 종탑에 새겨진 '운명'이라는 희랍어를 보고 「노틀담의 곱추」를 썼다는 비톨 위고가 생각나고 연인에게 달려가며 빨리 가고 싶어 삼십분마다 마부에게 팁을 주었다는 발자크도 생각나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인간의 소리를 가장 닮았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가 생각나고 너무 외로워서 자신의 얼굴 그리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다는 고흐의 자화상이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어둠을 말하는 자만이 진실을 말한다던 파울 첼란이 생각나고 좌우명이 진리는 구체적이었다던 브레히트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소리 한 점 없는 침묵도 잡다한 소음도 훌륭한 음악이라고 한 존 케이지가 생각나고 소유를 자유로 바꾼 디오게네스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괴테의 시에 슈베르트가 작곡한 「마왕」이 생각나고 쉴러의 시에 베토벤이 작곡한 「환희의 송가」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마지막으로 미셀 트루니에의 묘비명이 생각난다 내 그대를 찬양했더니 그대는 그보다 백배나 많은 것을 내게 갚아 주었도다 고맙다 나의 인생이여
새에 대한 생각
천양희
새장의 새를 보면
집 속의 여자가 보인다
날개는 퇴화하고 부리만 뾰족하다
사는 게 이게 아닌데
몰래 중얼거린다
도대체 하늘이 어디까지 갔기에
가도 가도 따라갈 수가 없다 하는지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날고 싶지만
삶이 덜컥, 새장을 열어젖히는 것 같아
솔직히 겁이 난다
시작이란 그래, 결코 쉬운 일이 아닐테지
새 중에서 제일 작은 벌새들도
이름 없는 잡새들도
하늘 속으로 몸을 들이미는데
귀싸대기 새파란 참, 새가
아, 안 된다. 바람 속에 날개를 털어야 한다
일어나 멀리 날 때 너는 너인 것이다
기어코 너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너인 것이다.
샛강
천양희
생각이 먼저 강물을 거닌다.
산 그림자 길게 당겨 보고
물새들의 발자국도 슬쩍 들춰본다.
상형문자 같은 발자국들 무엇인들 제
나름의 흔적이 없으랴.
오늘도 강은 또 갈대밭을 적시고
물고기들의 눈망울을 적신다.
낚시하는 한 남자, 그 가장(家長)의 신발도 젖는다.
지난밤 새들은 어디까지 날아올랐을까.
물풀 사이로 새끼들은 또 얼마나 끼룩거렸을까.
갈대들이 웅성거리는 오후.
물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내일은 비가 올라나.
맞은편 산 능선이 흐릿하다.
그래도 갈대꽃은 저 혼자 부풀고
물새알들이 지금 따듯한 것 같다.
환한 갈대밭. 누가 가슴을 활짝 열어 놓은 것일까.
샛강이, 그 강 사이가 문득 넓어진다.
넓어지는 세상을 보고 싶다.
물가에 서면 지는 해도 나에게는 늘 가까웠다.
가까운 것이 다 내 것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
붉은 반점 하나 가슴에 그렸다.
갈수록 더 깊어지는 강이여.
너의 침묵이 나를 더 기쁘게 하였다.
저 낮은 물결이 바다를 완성하느니...
한 세계를 바꾸는... 물방울에도 물의 세계가...
물길은 물의 길일까.
오늘도 강기슭에서 뱃머리를 돌리는 배 한 척 있다.
새들이 날개를 낮추는 소리, 갈대 소리
마음의 물결 속으로 스미는 소리 새롭다.
생(生)
천양희
바다는 3%의 소금 때문에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3%의 소금 같은 것입니다
生이란 그렇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3%의 소금처럼 썩지 않는
나를 生生하게 살리는 것입니다
생각은 강력한 마약
천양희
생각은 구름처럼 뿌리가 없다
생각하다 흩어진다
생각이 화근이 된 뒤부터
가끔 생각 없이 하루쯤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지나갈 수밖에 없는 것
생각 어디에 고비가 있는 것도 같다
세상에 생각처럼 강력한 마약이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생각의 중독
생각하다 사람들 깊이 괴로웠으므로 웃음을 고안했고
깊이 생각했으므로 신은 죽었다고 폭탄선언한 사람도 있다
생각을 껌처럼 씹다 뱉고
생각이 우산처럼 폈다 접힐 때
생각 끝에 나는 겨우
백사장에 생각 짧은 치욕을 썼다 지웠다
한줌 모래가 어찌
하루에도 천년을 사는 생각만 할까
생각해보면
나를 살게 한 건 생각 끝에 나온 생각이다
너를 생각한 것이 나를 살렸다 시여!
생각에 기대 시를 생각해내는 밤
생각은 오늘 나의 다짐이니
생각은 나를 따르고 시를 뒤따른다
바닥까지 생각의 허리 구부리고
이제 막 시 한짐 밀고 갈 시간이다
생각에는 먼 것이 있고
나에게는 생각이 있다
생각은 꼬리가 길다
천양희
밀려드는 생각에는 순서가 없지
생각은 낙타가 걷는 속도로 걷는 것 같아
생각이 길처럼 길어도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은 없는 거지
내가 아무리
아무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만 생각하자해도
생각은 언제나 나를 받아내는
나는 생각의 자식
바람이 불 때마다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부터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던 때를 생각하는 거지
평생을 생각만큼 살지 못했으므로
나는 늘 생각을 들고 살지
잘라도 잘라도 생각은 꼬리가 길어
생각 끝에 길이 있는 것이지
생각이 달라졌다
천양희
웃음과 울음이 같은 音이란 걸 어둠과 빛이
다른 色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
내 音色이 달라졌다
빛이란 이따금 어둠을 지불해야 쐴 수 있다는 생각
웃음의 절정이 울음이란 걸 어둠의 맨 끝이
빛이란 걸 알고 난 뒤
내 독창이 달라졌다
웃음이란 이따금 울음을 지불해야 터질 수 있다는 생각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별처럼
나는 골똘해졌네
어둠이 얼마나 첩첩인지 빛이 얼마나
겹겹인지 웃음이 얼마나 겹겹인지 울음이
얼마나 첩첩인지 모든 그림자인지
나는 그림자를 좋아한 탓에
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졌다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천양희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어떤 날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막무가내 올라간다
고비를 지나 비탈을 지나
상상봉에 다다르면
생각마다 다른 봉우리들 뭉클 솟아오른다
굽은 능선 위로
생각의 실마리들 날아다닌다
뭐였더라, 뭐였더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의 바람소리
生覺한다는 건
生을 깨닫는다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生은 오리무중이니
생각이 깊을수록 生은 첩첩산중이니
생각대로 쉬운 일은 세상에 없어
생각을 버려야 살 것 같은 날은
마음이 종일 벼랑으로 몰린다
생각을 버리면 안된다는 생각
생각만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
생각 때문에 밤새우고 생각 때문에 날이 밝는다
생각이 생각을 놓아주지 않는다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생각하는 사람
천양희
생각은 구름처럼 뿌리가 없다
생각하다 흩어진다
생각이 화근이 된 뒤부터
가끔 생각 없이 하루쯤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지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 어디에 고비가 있는 것도 같다
세상에 생각처럼 강력한 마약이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생각의 중독
생각하다 사람들 깊이 괴로웠으므로 웃음을 고안했고
깊이 생각했으므로 신은 죽었다고 폭탄선언한 사람도 있다
생각을 껌처럼 씹다 뱉고
생각이 우산처럼 폈다 접힐 때
생각 끝에 나는 겨우
백사장에 생각 짧은 치욕을 썼다 지웠다
한 줌 모래가 어찌
하루에도 천년을 사는 생각만 할까
생각해보면
나를 살게 한 건 생각 끝에 나온 생각이다
너를 생각한 것이 나를 살렸다 시여!
생각하면서
천양희
떨어지는 폭포를 보며 물길에도 절망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고갯길을 내려오면 바닥이 다 보이는 시냇물 속 웅크리고 있는 조약돌에도 아픔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논둑길을 걷다 보면 하늘 한번 못 보고 고개 숙인 벼이삭에도 고뇌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징검다리 건너가면 쉬지 않고 아래로만 내려가는 물에도 욕심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무덤 곁을 지나다 보면 모난 곳 한 군데도 없는 둥근 것 속에도 불만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솔밭 사이로 가다 보면 한평생 한 색깔로 홀로 선 청솔에게도 변절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하늘을 보다 보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구름에도 정처가 있을까 생각하
면서 돌아오다 보면......
생의 한가운데
천양희
바람속의 영혼처럼
눈이 날린다
홀로 걷다 돌아보니
나홀로 청년들이 실업에 울고 있다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잠을 청한다 청해도 잠은 안 오고
짙어진 나뭇잎 속에
아슬하게 줄을 치는
거미를 바라보다 중얼거린다
저 줄에도
한 생이 걸려 있구나
나도 그것으로 한 생을 견뎠다
가진 것에 만족하면
행복하다는 말을 믿으면서
행복을 돌돌 말아
너에게 던져줄게
깨어진 뒤에야 완성되는 것
그 거룩을
한 줄로 써서 보내줄게
생의 한가운데는
움푹 패였다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오늘도
어느 곳에선가
뜬구름 잡는 일이 일어나고
다리에 쥐가 난 사람들이 걸어가고
어느날
기러기가 V자를 그리며
낮달을 뚫고 날아간다
그래도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
바람속에 얼굴을 묻고
생의 한가운데를 생각한다
아무튼
성자聖者는
시계를 가지지 않는다
서로 보기
천양희
달리는 것이 무서워져
서 있으려 한다
한줄기 아스팔트를 피해
주저없이
억울하지 억울하지
너혼자 서 있는 것은
달려가는 사람들이
비웃으며 맹렬히
비웃음 속으로 달려간다
빌어먹을, 온몸 송두리째
개같이 짖어대며
시시각각 한줄에 꿰어 달려간다
어디서나 우왕좌왕
달려가고 달려가고 달려가고
억울하지? 억울하지?
너 혼자 서 있는 것은
그림자가 슬그머니
나를 따른다.
서른 살의 눈
천양희
허공에서 소리치며
눈이 내린다
가로수들이 그걸 받으려고
우두커니 서 있다
이미 썩은 잎들은 따뜻해
추억의 길들 오래 적막하다
서른이 되면
길모퉁이 어디서나
가로등이 반짝, 켜지리라 믿었다
나는 이제
다른 길 예감할 수 없다
길바닥 하나 덮겠다고
눈발은 종일 몸 바꿔 뒤척인다
그러나 눈송이들이여
백색정토! 설국(雪國)이나 설궁(雪宮)
그건 늘 우리의 함정이었다
한번 내린 눈은
때가 되면 세상이 곧
물든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사람의 길 사이로 눈발이 빠져나간다
눈발이, 눈의 발이 하늘로 들려 있다
눈은 녹고 그래서 눈에 눈물 보인다.
섬말에서
김신용
갈대밭이었습니다
갈대 셋이 몸 엮어 서 있었습니다
둘은 넘어지기 쉬우니 셋이 기둥 버티고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누가 그것을 눈물의 집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눈물로 벽돌 쌓은 집이 아니라고 고개 갸우뚱하겠습니까
마치 솥 鼎자처럼 갈대 엮인 그곳에 조그만 새의 집이 지어져 있었습니다
뻘흙을 물고 날라 갈대잎 촘촘히 침 섞어놓은 작은 새의 집이 지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간장 종지만 한 작은 흙집에, 쬐그만, 아기 손톱만치 쬐그만 새의 알이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새의 알을 갈대 셋이서 품고 서로 몸 엮어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전신으로 서로가 서로를 버팅기면서 바람 속에서, 서로가 몸 부대껴 버텨내면서 안간힘으로 품고 있는 정말 간장 종지만 한 새집 속의 새 알 한 알
그것을 어찌 빛나는 눈물방울이라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솥 정(鼎)자 속에 담겨진 빛나는 눈이라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작은 새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갈대도 셋이 엮이면 기둥이 된다는 것을 바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집이 된다는 것을 갈대밭이었습니다
모두가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벌판이었습니다
성(聖) 고독
천양희
고독이 날마다 나를 찾아온다
내가 그토록 고독을 사랑하사
고(苦)와 독(毒)을 밥처럼 먹고
옷처럼 입었더니
어느덧 독고인이 되었다
고독에 몸바쳐
예순여섯번 허물이 된 내게
허전한 허공에다 낮술 마시게 하고
길게 자기 고백하는 뱃고동소리 들려주네
때때로 나는
고동소리를 고통소리로 잘못 읽는다
모든 것은 손을 타면 닳게 마련인데
고독만은 그렇지가 않다 영구불변이다
세상에 좋은 고통은 없고
나쁜 고독도 없는 것인지
나는 지금 공사중인데
고독은 제 온몸으로 성전이 된다
성에
천양희
유리창에 성에가 끼어 있습니다 햇살이 비치면 성에는 녹아 제 형태를 포기합나다 끝내 창들의 땟자국으로 남아 더러운 자연의 일부가 됩니다 사람도 자신을 포기할 때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대지를 물고 있는 저 나무는 베어내도 잘라내도 나무인 것입니다 그냥 나무일 뿐인 나무도 제 나뭇결을 찾기 위해선 그 속에 못을 박아보아야 합니다 가슴에 수없이 못을 박아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나뭇결 아니 나이테가 다름아닌 못자국이었다는 것을 자국은 제 형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제 흔적은 자기의 일부입니다 유리창의 성에가 아닙니다 창들의 땟자국은 더욱 아닙니다
세상을 돌리는 술 한잔
천양희
포도주를 들다 생각해본다
나는 너무 썩었고 오래 썩었다
발효된 내 거대한 심통(心筒)에
묵은 찌꺼기 누추하다
나는 속썩은 인간으로서 냄새를 피웠고
말 대신 게거품을 물었다
몸속 어디에
포도송이 꽉 찬 포도밭이 있는지
넝쿨이 굽은 뼈처럼 뻗어나온다
마음의 서쪽, 붉게 취한 노을 어룽거려
찔끔, 눈물도 나온다
이 머리통, 나도 생각하는 사람이라
여기, 어디에 도계(道界)는 있는지
술 한잔 돌리면서
내가 귀의한 세상에게
할 말이 있다면
내가 세상을 술잔처럼 돌리고 싶다는 것이다
한잔의 순환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다
포도주를 들다 생각해본다
나는 너무 썩었고 오래 썩었다.
세상 읽기
천양희
세상을 뜻대로 읽고 싶어
가출을 출가로
불성을 성불로
유수를 수유로 읽어보다가
세상을 거꾸로 읽고 싶어
정부를 부정으로
선생을 생선으로
교육을 육교로 읽어보다가
세상을 마음대로 읽고 싶어
가능을 능가로
입산금지를 지금 산에 들어감으로 바꿔 읽어보다가
세상을 세상대로 읽고 싶어
불이(不二)를 이불로
불행을 행불(行不)로
유일을 일류로 착각하다가
삶은 삶 외에 더 읽을 것이 없어
나는 나 외에 더 읽을 것이 없어
각자를 자각으로 쓰고 말았네
실상을 상실로 쓰고 말았네
소리꾼
천양희
목소리 하나로 산을 휘어잡은 새들은 타고난 소리꾼이다 바람보다 먼저 산을 깨우고 계곡 아래 물살도 산정으로 당긴다 당기듯이 소리친다 소리치며 산 그림자를 가볍게 놓아버린다 숲속이 숲의 속이 오래 떨린다 저 떨림은 아무래도 절필한 소리꾼의 재창이다 곡비의 환생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저토록 산이 속으로 울리겠나 울겠나 속으로 우는 것들은 울음도 힘이 된다는 걸 안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던 시인 랭보는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고도 어떻게 시 하나로 한 세상을 휘어잡은 것일까 아무것도 휘어잡지 못하고 남은 자들은 절창 한 소절 표절이나 해서 휘몰이 휘몰이 휘몰이 하리
손
천양희
세상에는 베이는 일이 너무 많다.
풀도 잘못 잡으면 손을 벤다.
사람도 잘못 잡으면 마음을 벤다.
세상에 참 많이 베어본
사람은 안다.
손을 베이면
손이 아니다.
베인 건 마음이다.
마음이 손을 잡는다
수락 시편
천양희
마들역에 내려 1번 출구로 나와
12단지 지나면 갈울공원
벤치에 앉아보렴 새소리 얼마나
바람 소리 얼마나… 돌계단
스무개 단숨에 오르면
수락산 끝자락이 보여
그래, 세상일은 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떨어질 일이 많을 거야
그래도 삶을 수락해야지
산을 오르려면 올라가려면
몇굽이 아찔한 낭떠러지 만날 거야
거기서 정상까지는 꽤 높거든
숨찬 네 몸속에는 수많은 길들이 오르내릴 거야
그렇지, 들고 온 생수(生水)보다 산수가 더 시원할 테니까
가끔 뒤도 돌아보렴
뒤가 있으니 앞이 있다는 말 참, 말이란 걸
새삼 알게 될 거야
그때는 참 좋았지 하고 오늘을 말할 거야
그러면 오늘도 그때가 되겠지
가다 보면 절로 절하고 싶은
봉우리 하나쯤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렇담, 아주 행운인 게지
자기를 낮춘다는 것 쉽지 않거든
내려가는 것 더 어렵거든
말해주마
수락에 가려면
먼저 마들을 지나야 한다
순서가 없다
천양희
늙음도 하나의 가치라고
실패도 하나의 성과라도
어느 시인은
기막힌 말을 하지만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마음을 잡아야 한다고
어느 선배는
의젓하게 말하지만
마음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것
마음은 잡아도 잡아도 놓치고 마는 것
너무 고파서 너무 놓쳐서
사랑해를 사냥해로 잘못 읽는 사람도 있다고
나는 말하지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고통은 위대한 것이라고
슬픔에게는 누구도 이길 수 없다고
다시 어느 시인은
피 같은 말을 하지만
모르는 소리 마라
몸 있을 때까지만 세상이므로*
삶에는 대체로 순서가 없다
* 황지우의 시 「피크닉에서.
술래
천양희
이세상 바람소리
다 맞으며
빈몸 걸칠 것도 없이
두꺼운 인연 하나씩 벗는다
풍지박산 내 뼈가루
바람에 날리고
철천지 한(恨)의 모가지 하나
구천 먼곳까지 너를 부른다
터져라, 터져라
녹슨 끈도 터져버려라
이승에서
눈 가리고 떠돌던 술래
허공으로, 허공으로
나를 풀어다오
나를 풀어다오
날마다 너를 불러내는 소리
저 치명적인 소리
들릴듯
들릴듯
나는 지금 깨었는가 깨었는가
숨은 꽃
천양희
다른 꽃밭을 꿈꾸며 어떤 꽃들은 둥근 꽃씨를 옮겼을 것입니다 세상의 구석까지 꽃말을 전하고 꽃소식을 뿌렸을 것입니다 꽃에게도 꽃의 마음이 있다는 것일까요 늦은 꽃망울들 다투어 필 때, 우리는 무슨 속셈이 있어 꽃길을 따라온 건 아니었습니다 제 속을 열고 웃고 있는 꽃잎들과 잎속의 푸른 무늬들, 꽃술의 의미들 꽃들은 왜 피고 지고 또 피는지 꽃잎 뜯어 꽃점 치며 꽃같이 붉은 사랑 기다렸으나 봄길 너무 짧고 저녁은 일찍 저물었습니다. 노고초 몇 포기 종일 고개 숙일 때 무명초 애써 제 이름 적지 않습니다 우주를 물들이는 한 꽃송이 잎새마다 꽃등 달고 찰랑댑니다 꽃물결 꽃사태 꽃천지 속 꽃가마 타고 꽃구경이나 가고 말겠습니다 꽃의 몸으로 환생하고 말겠습니다 꽃이라고 다 꽃답게 꽃피우는 건 아닐 것입니다 숨어서 피는 꽃 있다면 그 꽃 속은 더 환할 것입니다 비밀의 꽃장이란 얼마나 넘기고 싶은 페이지입니까 지금 누가 그걸 읽는 중일까요 누가 그를 어디에다 숨긴 것일까요
숫자를 세다
천양희
숫자를 세는 것은 내 오래된 버릇
노선을 세고 계단을 세고 술잔을 센다
숫자를 세는 것은 숫자놀음이 아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면서
술잔을 내려놓듯 계단을 내려가듯
지독한 마음의 진동을 눌러 버린다
내가 대학생이던 60년대
아버지는 내게 60년대식으로 말씀하셨다
화낼 일 있을 땐 하나에서 열까지 세고
더 화낼 일 있을 땐 백까지 세어 봐라
그러면 불같은 화도 절로 내릴 것이니
참는 것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그때 불과 얼음을 생각했다
그때부터 생긴 숫자를 세는 버릇
세상 참는 방법이 되었다
오늘도 숫자를 세면서 생각한다
아버지의 방법에 비하면
내 버릇은 얼마나 사소한가
스무고개
천양희
그가 넘어야 할 고개
그건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지요
한 고개 넘어 또 한 고개
웬 고개가 그렇게도 많은지요
우이령 넘고 우듬재 넘었는데
또 한 고개 남았다고 했지요
박달재 넘고 추풍령 넘었는데
또 한 고개 남았다고 했지요
웬 고개가 그렇게도 높은지요
새재 넘고 고모령 넘었는데
또 한 고개 남았다고 했지요
다섯 고개 여섯 고개 넘었는데
또 한 고개 남았다고 했지요
아홉 고개 열 고개 넘었는데
웬 고개가 그렇게도 험한지요
인재 넘고 한계령 넘었는데
이제 다 넘었으려니 했는데
또 한 고개 남았다고 했지요
무등재 넘고 불이령 넘었는데
보릿고개 하나 더 남았다고 했지요
보릿고개가 고비라고 했지요
그건 그가 넘어야 할
스무고개였지요.
스스로를 부르다
천양희
나무가 있는데 생김새가 닥나무와 같으며 결이 검고 그 꽃은 사방을 비춘다 그것의 이름을 미곡(迷穀)이라 하여 차고 다니면 미혹되지 않는다 새가 있는데, 생김새가 올빼미와 같고 머리가 희다 그 이름을 황조(黃鳥)라 하는데 그 울음이 스스로를 부른다 이것을 먹으면 질투하지 않는다
(그 울음이 스스로를 부른다고? 그 꽃이 사방을 비춘다고? 미혹되지 않는다고? 질투하지 않는다고?)
어느덧 내 눈에서 새가 울고 있군요
어느새 내 눈에서 꽃이 피어났군요.
* 이 시는 「산해경(山海經)」을 패러디한 것임.
슬픔을 줄이는 방법
천양희
빛의 산란으로 무지개가 생긴다면
사람들은 자기만의 무지개를 보기 위해
비를 맞는 것일까
빗속에 멈춰 있는 기차처럼
슬퍼 보이는 것은 없다고
까닭 모를 괴로움이 가장 큰 고통이라고
시인 몇은 말하지만
모르는 소리 마라
오죽하면
슬픔을 줄이는 방법으로 첫째인 것은
비 맞는 일이라고 나는 말할까
젖는 일보다 더 외로운 형벌은 없어서
눈이 녹으면 비가 되는 것이라던
선배의 말이 오늘은 옳았다
빗소리에 몸을 기댄 채
오늘 밤
나는 울 수 있다
전력으로
시간이 필요하다
천양희
춘란은 꽃봉오리를 맺고도 일곱 달이 지나서야 꽃을 피웁니다.
봄의 꽃도 죽은 듯한 겨울나무에서 피어납니다.
꽃도 고통 없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사막의 용설란은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웁니다.
그래서 꽃이름을 '세기의 꽃'이라고 합니다.
한란은 여름에 꽃을 피우는데 그땐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꽃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꽃이 언제 말하며 피겠습니까.
꽃이 말없이 피는 데에도 시간은 필요합니다.
꽃이 언제 말하며 지겠습니까.
꽃이 말없이 지는 데에도 한두 달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꽃도 살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시는 나의 힘
천양희
시힘 동인 시낭송회 가서 시의 힘 얻고
돌아오던 날 힘차게 달리는 지하철에서
모든 힘센 것 중에 시의 힘이 으뜸이지 하다가
한 방울의 눈물로 진주를 만드는 게 시라고
아, 눈물만이 희망이지 하다가
침묵에 사다리를 놓는 게 시인이라고
누가 나더러 끝도 없는 그 짓을 왜 하지? 할 때마다
고통은 둘레가 없어 안을 수도 없네 하다가
정신에 절정 없고 몸에 완전이란 없으므로 시작(詩作)이란
시작부터 시인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시인이 없어졌을 때 시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지 하다가
시가 보여주는 것은 마음의 지도인데
누가 나더러 시는 왜 쓰냐고 다시 물으면
잘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힘없는 나에게 아, 시만이 힘이지 하다가
자작(自作)나무 밑에 엎드려 나는 오래 일어나지 않았다
시와 건축
천양희
저 건물은 마치
웃음을 잃은 창백한 시인 같다고
시인이 말했을 때
웃음도 하나의 장식이라고 말한
건축가가 있다
어디, 통곡할 만한 큰 방 하나 없냐고
시인이 물었을 때
통곡할 방을 설계할 건축가는 시인밖에 없다고 말한
건축가가 있다
웃음이 한나의 장식이라면 울음도
하나의 장식이라고 말한 건축가가 있다
나는 놀라서
문득 펼쳤다가 오래 읽은
『시와 건축』책장을 다시 펼친다
영혼으로 지어라 ……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집을 짓는 건축가이니
시의 회초리
천양희
제 속이 검게 썩어가면서도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있다고 내가 말했을 때
꽃은 열매를 맺으려 피지만
열매는 꽃을 피우려 익는다고 그가 말했지요
한 방울의 눈물로 진주를 만든다고
이마를 창에 대고 그가 말했을 때
구름의 언어를 듣는 이도 있다고
침묵에 사다리를 놓으며 내가 말했지요
아무것도 안 잊어버리려고
밤의 말을 이해했다고 내가 말했을 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써야겠다고
땅을 내려다보며 그가 말했지요
도대체 우린
몇 번이나 고독을 탐구했을 까요
그리고 몇 번이나
절경 앞에서 말을 잃었을까요
그가 나를 바라보다보는 것을
몇 번이나 내가 그를 바라다보았을까요
하늘 추워지고 꽃 다 질 동안
나는 그만 저녁처럼 저물어
꽃이 좋은지 열매가 좋은지 묻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시의 스승은 낯선 곳에서 온다고 귀띔할 뿐입니다
시 속에 잠기니
50년이 온통 회초리입니다
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천양희
원고료를 주지 않는 잡지사에 시를 주면서
정신이 밥 먹여 주는 세상을 꿈꾸면서
아직도 빛나는 건 별과 시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제 숟가락으로 제 생을 파먹으면서
발빠른 세상에서 게으름과 느림을 찬양하면서
냉정한 시에게 순정을 바치면서 운명을 걸면서
아무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면서
새소리를 듣다가도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고 책상을 치면서
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시적인 삶에 대해 쓰고 있는 동안
어느 시인처럼 나도 무지하게 땀이 났다
* 연암 박지원의 글<답경지(答京之)>에서.
시인을 읽는 밤
천양희
어둠을 말하는 자만이 진실을 말한다던 파올첼란의 말이 생각자는 밤이다
고통의 집을 보지 못한 사람은 우주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 사람이라던 에머슨의 말이 생각나는 밤이다. 나는 니그로의 밤이 검은 것처럼 검고 나의 아프리카 한복판처럼 검다라던 랭스턴 휴즈의 말이 생각나는 밤이다 누구든 추락하는 동안 가장 강렬하게 사는 것이라던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말이 생각나는 밤이다. 세상에서 가장 것은 슬픔이라던 아흐마토바의 말이 생각나는 밤이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고통을 백지의 공포라던 말라르메의 말이 생각나는 밤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면 백석의 말이 생각나는 밤이다. 말할 필요도 없을 때는 침묵하라던 프랑시스 퐁쥬의 말이 생각나는 밤이다 일생동안 행복했던 시간은 열일곱 시간이었다면 괘테의 말이 생각나는 밤이다 모든 아름답던 것들은 메아리를 남긴다던 로르카의 말이 생각나는 밤이다 이럼 밤에 나는 인간 너머를 생각한다
시인의 말
천양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혁명은 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빨래집게가 어쩌다 아이 속옷을 잡고 있는 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날이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풍경은 엄마가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책 읽어주는 것이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아이의 웃음이 세상에서 가장 환한 꽃이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시는 인간이 어머니 자궁에서 나와 최초로 터뜨리는 울음이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은목서 꽃향기처럼 만리나 멀리
스며나갈 시인의 말이여
시인의 말이라고?
천양희
사랑은 주는 것이
아름답다고
아물지 않은 상처가
아름답다고
시인은 말하지만
모르는 소리 마라
아문 상처가
더욱 아름답다고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뒷모습이
더욱 아름답다고
다시 시인은 말하겠지만
모르는 소리 마라
슬픔의 진창
목 늘여 들어다보면
세상의 모든 상처
거기 모여 살고 있다
나는 그때마다
악몽을 꾸고
나는 그때마다
병석에 눕는다. 누워 있다. 누워 있을 것이다
청춘이 가는 것도 모르고
간 것도 모르고
갈 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어린 내가 보고 싶다.
시인이 되려면
천양희
시인이 되려면
새벽하늘의 견명성(見明星) 같이
밤에도 자지 않는 새같이
잘 때에도 눈뜨고 자는 물고기같이
몸 안에 얼음 세포를 가진 나무같이
첫 꽃을 피우려고 25년 기다리는 사막 만년 청풀 같이
1킬로그램의 꿀을 위해 560만 송이의 꽃을 찾아가는 벌같이
성충이 되려고 25번 허물 벗는 하루살이같이
얼음구멍을 찾는 돌고래같이
하루에도 70만 번씩 철썩이는 파도같이
제 스스로를 부르며 울어야 한다
자신이 가장 쓸쓸하고 가난하고 높고 외로울 때*
시인이 되는 것이다
* 백석의 시〈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시인이 시인에게
천양희
시인으로 사는 삶의 고통을
백지의 공포라고 말한 시인에게
소외가 길을 만드는지
햇살 속으로 망명하고 싶다던 시인에게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던 시인에게
운명을 걸지 않았다면 돈도 밥도 안 되는 시에
순정을 바치지 않았을 것이라던 시인에게
멱라수에 빠져 죽은
굴원의 굴욕을 생각한다던 시인에게
모래를 게으른 평화라고 말하던 시인에게
먼 눈송이와 가까운 눈송이가 폭설을 이룬다던 시인에게
조용한 일이 고마운 일이라던 시인에게
잠들기 전에 다소간의 눈물을 흘린다던 시인에게
고통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므로 위대하다던 시인에게
나는 쓴다
울분을 함께 나눠 가지면 안 되겠습니까?
시작과 끝
천양희
시작이라는 말 처음이라는 말
참 생생(生生)하지요.
첫눈이 첫발자국이 첫 만남이
또 얼마나 푸릇푸릇합니까.
저 보리밭 저 청솔밭
참 청청하지요.
첫해 첫날이
또 얼마나 새록새록합니까.
끝이라는 말 마지막이라는 말
참 멸멸(滅滅)하지요.
노을이 낙엽이 작별이
또 얼마나 뉘엿뉘엿합니까.
저 서산 저 저녁강
참 냉랭하지요.
가는 해 가는 날이
또 얼마나 얼룩얼룩합니까.
시작법(詩作法)
천양희
구름과 비는 짧은 바람에서 생겨나고
긴 강은 얕은 물에서 시작된다
모든 시작들은 나아감으로 되돌릴 수 없고
되풀이는 모은 시작詩作의 적이므로
문장을 면면이 뒤져보면
표면과 내면이 다른 면面이 아니란 걸
정면과 이면이 같은 세계의 앞과 뒤라는 걸 알게 된다
내면에서 신비롭게 걸어나온 말맛들! 말의 맛으로
쓸 수 없는 것을 위해 쓴다고
반복해서 말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혼자 걸을 때 발걸음이
더 확실해진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이미 쓴 것들은 써봐야 소용없고
이미 잘못 쓴 문장들은 엎질러진 물과 같아
무슨 작법으로 자연을 받아 쓰고
무슨 독법으로 사람을 받아 읽기나 할까
모든 살아 있는 시의 비결은 시작에 있다고?
시작의 비결은 어떤 복잡한 문장이라도
짧은 줄로 나누어 첫 줄부터 시작하는 데 있다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자신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작할 수는 있지
그러나 경박한 마음으로 백지를 대해선 안 되는 것이지
경외감을 가지란 말은 아니지만
진지해져야 한다는 말 놓치면 안 되지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
속수이며 무책인 것이
안절과 부절 사이에서 헤맬 때
심사하고 숙고한 단 하나의 진정한 시는
다른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뜨는 것
내일의 불확실한 그것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것
이 말들은 던져진 운명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의자의 위치만 바꿔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나 볼 수 있는
그런 자리는 없는 것일까
시는 시인의 땅에서 바람을 향기롭게 하고
시인은 오직 시를 위해서만 몸을 굽힐 수는 없는 걸까
얼마나 쓰는 것보다 어떻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들
현실을 받아 쓰는 서기(書記)가 되기 위해
쓰지 않는 것이 쓰는 것보다 더 중노동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중요한 건 스스로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일생 동안 시쓰기란 나에게는
진창에서 절창으로 나아가는 도정이었고
삶을 철저히 앓는 위독한 병이었다
그래서 의연하게 고독을 살아내면서 나아가지만
시는 달리는 이들에게 멈추기를 요구하네
빠름보다는 느림을 준비하네 그러므로 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깊은 고독에 바치는 것이네
그게 좋은 시를 읽어야 할 이유
이 세상에 눈물 가득한 예지는 이것뿐이네
고독이 고래처럼 너를 삼켜버릴 때
너의 경멸과 너의 동경이 함께 성장할 때
시를 향해 조금 웃게 될 때
그때 시인이 되는 것이지
결국 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시(詩) 통장
천양희
시를 쓰니 세상에 빚 갚은 것이고
의지할 시를 자식처럼 키우니 저축 아닌가
그래서 나는 절로 웃음이 난다네
시시시(時視詩) 가득한 통장에
마이너스는 없다네
시(詩)앗 뿌렸으니 세상에 보시하는 것이고
시 한섬 거두었으니 추수한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절로 웃음이 난다네
시시시 가득 찬 통장에
마이너스는 없다네
하늘은 모든 것을 가져가고
시라는 씨앗 하나 남겨주었다네
그래서 시 통장에
시인이란 없다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천양희
무너진 흙더미 속에서
풀이 돋는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저 미물보다
더 무엇이라고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풀은 자라
푸른 숲을 이루고
조용히 그늘을 만들 때
말만 많은 우리
뼈대도 없이 볼품도 없이
키만 커간다
신이 내게 묻는다면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리
다만 부끄러워
때때로 울었노라
대답할 수 있을 뿐
실직
천양희
남편의 실직으로 고개숙인 그녀에게
다섯 살짜리 딸아이가 묻는다
엄마, 고뇌하는 거야?
그 말에 놀란 그녀가
고뇌가 뭔데? 되묻자
마음이 깨어지는 거야 하더란다
다섯 살짜리 아이의 말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기막힌 말에
기가막힌 그녀의 마음이 와장창 깨어졌다
그 말 듣는 내 마음도 따라 깨어졌다
세상이 들려 어느 집을
사정없이 때려 눕힌 것이다
다섯 살짜리 아이의 마음을 깨어지게 하는
세상을 그녀는 믿을 수 없다
잠시 머물다가는 자리라도 그렇지
세상이여
세상이여
거꾸로 도는 바퀴여
굴러가고 싶은 그녀의 마음이 실업을 삼켰다
어딜가나 바람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나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실패
천양희
실패에 실을 감는다. 고개 숙이고 밤 늦도록.
실 위에 감기는 실 감기다 얽힌다. 얽힌 것은 풀어야지.
실타래 풀다 문득 실패에 대해 생각한다. 실패!
풀리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있다. 모든 의문들
수수께끼들 실 풀 듯 풀어지지 않는다.
실패는 남고 실없는 날들이 지나간다.
실(實)이 없으면 허(虛)도 없을걸.
실이 실패에서 빠져나간다.
실 한 올 당겨본다.
당기면 끊어지는 실이 있다.
한 번 끊어지면 이을 수가 없다.
이을수록 생기는 실의 매듭.
얘야, 매듭을 맺지 마라. 맺히면 못 쓴다.
무슨 소리예요 어머니.
쓸 수 있는 실이 얼마나 된다구요.
그러면 이 실패 어쩌라구요?
썩은 풀
천양희
썩은 흙에서 풀이 돋고
썩은 풀이 반딧불을 키운다
썩은 것이 저렇게 살다니
썩은 풀의 소신공양!
썩고 썩은 풀이여, 마음은
너무 빨리 거름이 되는구나
나는 아직
속 썩은 인간으로 냄새를 풍긴다
풀밭은 또 저만치서
썩은 풀을 피운다
나에게 썩은 것이 있다면
썩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쓴맛
천양희
쑥부쟁이와 구절초와 벌개미취가 잘 구별되지 않고
나팔꽃과 매꽃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은사시나무와 자작나무가 잘 구별되지 않고
미모사와 신경초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안개와 는개가 잘 구별되지 않고
이슬비와 가랑비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가리와 두루미가 잘 구별되지 않고
개와 늑대가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적당히 사는 것과 대충 사는 것이 잘 구별되지 않고
잡념 없는 사람과 잡음 없는 사람이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평생을 바라본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왜 그럴까
구별없는 하늘에 물었습니다
구별되지 않는 것은 쓴맛의 깊이를 모른다는 것이지
빗방울 하나가 내 이마에
대답처럼 떨어졌습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천양희
나는 이제
이유없이 여유가 없다
나라도 바꾸고
날줄을 타고 말을 바꾸고
두고 갈 것 아무것도 없이
바꾸리, 자신있게 말하는
그대 곁에서
약소한 일 하나 바꾸지 못하고
단지 낡은 문패 하나
바꾸었을 뿐이다
그래도 좋아
그래도 좋아
헛소리처럼 내가 짖어댄다
이런 날에는
잡동사니 잡념(雜念)도 잊어버리고
앞뒤 틀린 문장같이
틀린 인생도 잊어버린다
엄청나게 달라진 어제와 오늘
나도 엄청나게 달라져야 하지만
살다 쓰러졌다 일어서는 평생(平生)
다가서는 나는 보이지 않고
보인다
보인다, 줄어든 행복 줄어든 눈물
동요도 없이 동요도 없이
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낡은 문제 하나
바꾸었을 뿐이다.
아무 날도 아닌 날
천양희
오늘 하루를 생각 없이 보내버렸다
어제 죽은 친구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내일인데
아무 날도 아닌 날이 되어버렸다
오늘을 통해 내일이 오는 줄 모르고
강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이
오늘은 흘러 어디로 갔나
종일 꽃 지는 그늘 속으로
바람이 속설처럼 날아다닌다
날개도 없는 것들이
내일로 가는 길을 지그시 누른다
긴긴 겨울이
주목 속에 봄을 움켜쥐고 있다
바람은 또
앞질러 계절을 살핀다
세상에서 제일 몹쓸 것은
오늘을 함부로 낭비한 사람
낭비하고도 내일을 가질 것 같은 사람
아비
천양희
바람이 불어, 바람은 몇 살이야?
바람은 나이가 없단다. 왜?
바람은 잘 날이 없으니까.
꽃잎이 떨어지네, 꽃의 집은 어디야?
꽃은 집이 없단다. 왜?
꽃은 꽃밭이 집이니까.
꽃을 꺾는 아비가 아이에게 말한다.
아우성
천양희
바람 불면 분다고 아우성
그늘 지면 진다고 아우성
꽃 피면 핀다고 아우성
새 울면 운다고 아우성
산다는 게 무슨 아우성이냐
어디서 구급차 소리 들린다. 구아구아(救我救我) 사람 살려!
배부르면 살찐다고 아우성
함께 있어도 외롭다고 아우성
괴로우면 못살겠다고 아우성
좋으면 미치겠다고 아우성
산다는 게 무슨 아우성이냐
어디서 구급차 소리 들린다. 구아구아(救我救我) 사람 살려!
아침마다 거울을
천양희
아침마다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나를 본다
거울이 물 속 같다
물 속에 내가 빠져 있다. 물 먹고 있다
잡을 것이 없는 물 속에서
나는 허우적거린다
아무도 물 속에 있는
내 속을 모른다. 몰라준다
내 심장의 고랑
내 늑골 밑의 습지
내 머릿속 웅덩이 그리고 나의 무덤
나에게는 다시 써야 할 생이 있다
세상이 잘못 읽은 나의 생(生)
수몰된 생(生)
암매장된 생(生)
누가 읽기도 전에 나를 써버렸다
그들에게 도난당한 장편의 문장들
그 때문에 틀린 생의 제목들
내 생, 너무 오래 생매장 되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나를 본다
나는 곧 재조명될 것이다. 밝혀질 것이다
거울같이 환하게
아침에 일어나니
천양희
어젯밤 먹은 것들
죄다 설(設)하고
어젯밤 품은 욕심
죄다 사(死)하고
아침에 일어나니
연좌 데모하듯
빈 술병들이
앉아 있다
인간의 한 가슴을 적셔 준
저것이
삿대질을 한다
너희들이
내 속을 어떻게 알아?
안경 탓이다
천양희
그는 늘 안경을 쓰고 있다
나는 그의 눈을 잘 볼 수가 없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면
나는 그의 마음을 잘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그가 의문스럽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내가 의심스럽다
영화「빠삐용」에서
안경을 낀 더스틴 호프만 노인이
안경을 끼지 않은 노인 스티브 맥퀸에게
'넌 누구냐'고 묻는다
그의 대답은 '난 아무도 아니오'였다
그는 늘 안경을 쓰고 있다
나는 그의 눈을 잘 볼 수가 없다
그는 가끔 안경을 벗는다
그는 나의 눈을 잘 볼 수가 없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면
그는 나의 마음을 잘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끝없이 내가 의문스럽다
그래서 나는 끝없이 그가 의문스럽다
그 의심이 나를 근시안으로 만든다
안경 탓이다.
알피니스트
천양희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을
열네 번 등정한 매스너가
이 시대 최고의
알피니스트라면
십년 면벽 끝내고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버린
이름 모를 스님은 무엇이라 할가
평지에서도
힘들어 못살겠다고 악을 쓰는
나에게는 아무래도 그 스님이
지상에서 제일 높은 정신의 암벽을
등정한 알피니스트란 생각이 든다
정신은 오를수록
높이가 더 높을 것이니까.
어깨동무
천양희
되면 한다는 사람보다
하면 된다는 사람이여.
……때문에라는 사람보다
……에도 불구하고라는 사람이여.
상실을 실상으로 보는 사람이여.
금지를 지금으로 보는 사람이여.
나는 그대들과
어깨동무하고 싶다.
위기가 위험이라는 사람보다
위기가 기회라는 사람이여.
아니다 아니다 하는 사람보다
그래 그래 하는 사람이여.
나는 그대들과
어깨동무하고 싶다.
어느 한 사람의 산책길
천양희
숲이 잠 깨는지 나뭇잎들이 찰랑거립니다
아침 햇살이 부신 듯 어린 새들 두 눈이 붉어집니다
바람이 몰래 빠져나가느라 오솔길이 더 좁아지는 아침
들쭉나무 아래 철 늦은 산꽃이 순하고
작년의 낙엽들 썩어 거름 된 지 오랩니다
한 사람의 산책길이 그냥 지나가고 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떠들썩하던 사람들 이곳에 와서야
해 지는 서편을 잠시 돌아봅니다
되돌아볼 것은 노을이 아니라 자신입니다
자기 때문에 노을이 아름답다 하였으나
지기 때문에 무서운 건 누구이겠습니까
눈시울이 노을보다 더 붉어집니다
누구에게나 울면서도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입니다
가오리연 하나 기우뚱거리며 언덕을 오르고 있습니다
얼레를 더 당겨, 그래야 더 높이 오를 수 있는 거여
연 연구에 평생을 바친 박노인이 힘주어 말합니다
더 당겨, 더 당겨, 더 당기라니께
나는 무엇을 더 당겨야 하나 당겨서 높이 올려야 하나
지금은 때까치 소리 겨우 나를 당깁니다
너도개미자리풀이 너도 풀이냐 하고 너도밤나무가 너도 밤나무냐 합니다
무릇꽃이 무릇, 꽃이 피는 까닭을 알고 피겠습니까
버짐나무가 버짐을 알겠습니까
세상에 모르는 것이 이것뿐이겠습니까
왠지 사람의 집들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자꾸 올라갑니다
고층으로 올라간 몸이 마음 따라 하층으로 내려가기도 합니다
어느 땐 웃어도 웃어도 우울은 우물처럼 깊습니다
그래도 해바라기는 해, 바라기를 하고
하루살이는 하루로써 세계의 비밀을 알아내려 할 것입니다
어디로 갈까
천양희
외나무다리를 건넜지요
자갈 밭길을 지나갔지요
늙은 팽나무를 돌아갔지요
잡초 속 이정표를 스쳐갔지요
미나리꽝을 바라보며 갔지요
풍찻간 논둑길을 걸어갔지요
남새밭을 건너뛰었지요
물방앗간을 슬쩍 보며 갔지요
샛강 갈대밭을 빠져나갔지요
빈 들판을 질러갔지요
별을 보고 길을 묻기도 했지요
바람에게 옷을 말리기도 했지요
Donde Voy?
나는 어디로 갈까
Donde Voy?
어떤 일생
천양희
부판이라는 벌레가 있는데 이 벌레는 짐 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무엇이든 등에 지려고 한다는데 무거운
짐 때문에 더이상 걸을 수 없을 때 짐을 내려주면 다시 일어나
또 다른 짐을 진다는데 짐 지고 높이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는데
평생 짐만 지고 올라간다는데 올라가다 떨어져 죽는다는데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이 있는데 이 병은 시베리아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라는데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곡괭이를 팽개치고 지평선을 향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간다는데 걸어가다 어느 순간 걸음을
뚝, 멈춘다는데 걸음을 멈춘 순간 밭고랑에 쓰러져 죽는다는데
오르다 말고 걸어가다 마는 어떤 일생
어떤 하루
천양희
건설 중인 빌딩 꼭대기에
둥지를 튼 송골매 두 마리가 새끼를 낳아
다른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공사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몇년 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들려와
나를 감동시키더니
우리는 언제 저렇게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궁금해지더니
며칠 전 신문을 보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놀랐느니
아파트 공사장에
까치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아
다른 곳으로 날아갈 때까지
공사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멜버른이 아닌 우리나라 서울에서 들려와
나를 감동시키느니
이것이 사랑하며 얻는 길이거니
득도의 길이거니
아름다움과 자비는 어디에서나 자랄 수 있는 것
나, 오늘 무우전(無憂殿)에 들고 말았네.
어제
천양희
내가 좋아하는 여울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왜가리에게 넘겨주고
내가 좋아하는 바람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바람새에게 넘겨주고
나는 무엇인가
놓고 온 것이 있는 건만 같아
자꾸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너가 좋아하는 노을을
너보다 더 좋아하는 구름에게 넘겨주고
너가 좋아하는 들판을
너보다 더 좋아하는 바람에게 넘겨주고
너는 어디엔가
두고 온 것이 있는 것만 같아
자꾸 뒤를 돌아다본다
어디쯤에서 우린 돌아오지 않으려나 보다
어제를 돌아보다
천양희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 있는가
새벽강에 나가
혼자 울어본 적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본 적 있는가
버림받은 기분에 젖어본 적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얼굴을 묻어본 적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
인생은 추억을 통해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 있는가
어처구니가 산다
천양희
나 먹자고 쌀을 씻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꽃 다 지니까
세상의 삼고(三苦)가
그야말로 시들시들합니다
나 살자고 못할 짓 했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잘못 다 뉘우치니까
세상의 삼독(三毒)이
그야말로 욱신욱신합니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욕심 다 버리니까
세상의 삼충(三蟲)이
그야말로 우글우글합니다
오늘 밤
전갈자리별 하늘에
여름이 왔음을 알립니다
얼마나
천양희
고층 아파트에서 내다보면
아래 것들이 아주 작게 보인다
하늘에서 보면 한통속일 내가 - 잠깐
착각했을 뿐이다
체중계에 올라서니
몸무게 겨우 50
나이 또한 50, 오공이라 …
놀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아직도 달고 있는 그 무게가
불균형의 몸이... 오, 공이라!
처음으로 잡힌 균형에 내가 다시 놀란다
비 온 뒤 여름날, 나무들이
불끈불끈 솟는다. 아파트를 향해
니네들이 높다면 얼마나 높다고…
보란 듯이 …
여름날
천양희
모든 꿈이 폭발하는 소리
소리칠 때까지
하나씩 들으며, 들어버리며
미친 마음 때문에
망아지처럼 뛰고 싶어
상냥한 자유
상냥한 섬에 닿고 싶어
섬을 겨냥하는 푸른 총구
폭발하는 소리
더 세게 더 크게
초록빛이 쏟아진다
갈증 난 열망
뜨거운 머리 네게 처박고
벼락같이 꽝꽝꽝 깨어지고 싶어
치명적인 배반을 하고 싶어.
여름 한때
천양희
비 갠 하늘에서 땡볕이 내려온다.
촘촘한 나뭇잎이 화들짝 잠을 깬다.
공처가 물끄러미 길을 엿보는데,
두 살배기 아기가 뒤뚱뒤뚱 걸어간다.
생생한 생(生)! 우주가 저렇게 뭉클하다
고통만이 내 선생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몸 한쪽이 조금 기우뚱한다
바람이 간혹 숲속에서 달려나온다.
놀란 새들이 공처럼 튀어 오르고,
가파른 언덕이 헐떡거린다.
웬 기(氣)가 - 저렇게 기막히다
발밑에 밟히는 시름꽃들, 삶이란
원래 기막힌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다시
숨을 쉬며 부푼다. 살아 붐빈다.
여식(女息) 보아라 - 아버지의 옛 편지
천양희
여식 보아라 말하건대
모름지기 여성은 남성과 다르니
네 몸 잘 보존하거라.
무릇 사람은 짐승과 다르니
네 맘 온전히 하거라.
여식 보아라 이르건대
금보다 시간이 더 값진 것이니
세월을 막 허송 말거라.
청춘불재래(靑春不在來)라.
여식 보아라 원하건대
제 갈 길 잘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아내의 길을 잘 가거라.
여식 보아라 빌건대
네 한 몸이 누구보담 소중하니
아프지 말거라.
여식 보아라 바라건대
제정신 차리면 하사불성(何事不成)이니
절망하지 말거라.
몽혼 주사 맞은 날 몽롱해져
환상인지 환생인지 옛 아버지
여식 보아라 여식 보아라 나를 깨운다.
....네 한 몸이 누구보담 소중하니 아프지 말거라 .
여운
천양희
풀벌레들 소리만으로 세상 울린다
그 울림 속에 내가 서 있다
울음소리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는 지금 득음하고 싶은 것이다
전 생애로 절명하듯 울어대는 벌레 소리들
언제 내 속에 들어왔는지 나는 모른다
네가 내 지음(知音)이다
네 소리가 나를 부린 지 오래되었다
시의 판소리여
이제 온전히 소리판이니
누구든 듣고 가라
소리를 듣듯이 울음도 그렇게 듣는 것이다
저 벌레 소리 받아 적으면 반성문 될까
부르고 싶은 절창의 한 소절 될까
소절 소절 내 속에서 울리고 있다
모두 울리는 것들은 여운을 남긴다
역(驛)
천양희
마음은 모르게
제 마음 밟고 떠나고
정거장 나온 몸이
다시 떠난다
가출(家出)하여, 굴러가는 바퀴살
처처에 박히는, 때로 길가에
내어말리는 세월이여
가는 길은 도대체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갔다
가고 남은 길을
철길이 가린다
나, 평행선에 올라 밟는다
갈 길은 멀고
살길은 짧아라
가슴속 끓는 기적소리
누군가 그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머릿속 석탄들이 꺼멓게 타고 있다
급정거에 밀린 등을 밀면
개찰구를 빠져나가
내 발자국을
따라가는 ――→역(驛)
오늘 쓰는 편지 - 나의 멘토에게
천양희
순간을 기억하지 않고 하루를 기억하겠습니다
꽃을 보고 슬픔을 극복하겠습니다
영혼의 주름살을 늘리지 않겠습니다
우울이 우물처럼 깊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가장 슬픈 날 웃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겠습니다
혼자 사는 자유는 비장한 자유라고 떠들지 않겠습니다
살기 힘들다고 혼자 아우성치지 않겠습니다
무인도에 가서 살겠다고 거들먹거리지 않겠습니다
술 마시고 우는 버릇 고치겠습니다
무지막지하게 울지는 않겠습니다
낡았다고 대놓고 말하는 젊은 것들 당장 따끔하게 침놓겠습니다
그러면서 나이 먹는 것 속상해 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겠습니다
결벽과 완벽을 꾀하지 않겠습니다
병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하루를 생의 전부인 듯 살겠습니다
더 실패하겠습니다
오래된 가을
천양희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본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오래된 골목
천양희
길동 뒷길을 몇 번 돌았다
옛집 찾으려다 다다른 막다른 길
골목은 왜 막다르기만 한 것일까
골과 목이 콱 막히는 것 같아
엉거주춤 나는 길 안에 섰다
골을 넘어가고 싶은 목을 넘어가고 싶은 골목이
담장 너머 높은 집들을 올려다본다
올려다볼 것은 저게 아닌데
높은 것이 다 좋은 건 아니라고
낮은 지붕들이 중얼거린다
나는 잠시 골목 끝에 서서
오래된 것은 오래되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래된 친구 오래된 나무 오래된 미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나무가 미래일까
오래된 몸이 막다른 골목 같아
오래된 나무 아래 오래 앉아본다
세상의 나무들 모두 무우수(無憂樹) 같아
그 자리 비켜 갈 수 없다
나는 아직 걱정 없이 산 적 없어
무우(無憂) 무우 하다 우우, 우울해진다
그러나 길도 때로 막힐 때가 있다
막힌 길을 골목이 받아적고 있다
골목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고 있다고
옛집 찾다 다다른 막다른 길
너무 오래된 골목
오래된 나무
천양희
소나무들이
성자처럼 서 있다
어떤 것들은
생각하는 것같이
턱을 괴고 있다
몸속에 숨긴
얼음 세포들
나무는 대체로 정신적이다
고고(高高)하고 고고(固固)한 것
아버지가 저랬을 것이다
오래된 나무는 모두 무우수(無憂樹) 같다
아버지 가고
나는 벌써
귀가 순해졌다
바람 몰아쳐도
크게 흔들리지 않겠다
오래된 농담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평 받으려고
언덕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 밤을 기억해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그늘보다 몇 평이나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 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 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엔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그 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
오래 젖은 집
천양희
비 오는 날입니다 골목이 수런대면서 집들이 들썩거립니다 지붕은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마당을 내려다봅니다 십년을 살던 집 집들이 오래 그늘을 늘이고 사람들의 마음이 어둑해 있습니다 근심 많은 것들의 하루가 길어집니다 이제 어디에 머물든 두렵지 않습니다 아직 산정에 닿지 못한 사람들이 언덕을 쓸며 지나갑니다 한때의 푸른 잎들 피었던 거 다 어디로 쓸렸는지 몸 한 쪽이 기우뚱합니다 능선 따라가는 산길 높았으나 하산하는 물길 낮습니다 오늘까지 우릴 지켜준 건 나무처럼 곧은 마음이었습니다 슬픔도 견뎌내면 어려움 속에서도 힘이 된다는 걸 아는 자 있을 것입니다 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소리 골짜기만큼 깊어집니다 제 속에다 간절함을 품은 까닭입니다 묵묵한 바위들이 비에 젖은 생을 모를 것입니다 나는 빗소리 한 줄 당겨놓고 기다립니다 제 생(生) 볕들기 기다리는 것이 너무 오래 젖은 집일 것입니다 비 오는 날입니다 젖은 집들 위로 하늘이 조금 밝아지고 있습니다 아직 해야 할 일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옷깃을 여미다
천양희
비굴하게 굴다
정신 차릴 때
옷깃을 여민다
인파에 휩쓸려
하늘을 잊을 때
옷깃을 여민다
마음이 헐한 몸에
헛것이 덤빌 때
옷깃을 여민다
옷깃을 여미고도
우리는
별에 갈 수 없다
옷 입다 생각하니
천양희
내가 세상에 와 입은 옷은 몇 벌이었나 옷은 제 옷을 셀 수 없네
몇십 년 입은 옷 그게 바로 내 그림자 내 남루지
누군들 헌옷처럼 남루한 적 없었겠나 몸이 울 때 헐은 마음은 수고로워 새옷 입고 싶네
옷 입는 일은 늘 그렇게 습관처럼 관습처럼 나를 따라다니지
내가 세상에 와 처음 입은 옷은 무엇이었나
옷이 처음 본 것은 누구였나
지나간 건 다시 오지 않듯이 처음은 언제나 끝이 되고 말지
그래도 끝나지 않은 것은 한 몸에 빛과 어둠을 입고 벗는 옷 그러는 동안 여기까지 왔네
옷의 일생은 늘 그렇지 그대여 옷이란 그런 것이네
옷과 함께 잘 낡아가는 것이네
왁자지껄
천양희
다른 데도 아니고
머릿속에서 까마귀, 까마귀 떼가
다른 때도 아니고
아침나절 내내 해질 때까지
까마귀, 까마귀 소리가
오늘은 내가 아파, 말하려다
까마귀, 까마귀 소리가
다른 것도 아니고
까마귀, 까마귀 떼가
무덤도 아니고 내 머릿속에
까마귀 까마귀 떼가 왁자지껄왁자지껄왁자지껄
어쩌자고 저 까마귀 까마귀떼가
어쩌자고 어쩌자고 어쩌자고.
왜가리
천양희
왜?
왜?
왜?
악다구니 쓰며
왜 가리? 왜 가리?
악다구니 써도
너의 날개를 누가 기억하리
왜가리!
왜 몰랐을까
천양희
사과를 깎다 생각한다 사과!
사과 한 알 깎았을 뿐인데
잘못한 일 생각나
그 사과 한번을
깎듯이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가
붉은 사과 한 알보다 더 붉다는 것을
나는 왜 몰랐을까
사과 한 알의 단맛에 물든 내가
그걸 깜빡 놓쳤다
젊어서는 풋사과처럼
붉은 것이 다 열정인 줄 알았다
붉어지는 내 미안
다시는 그런 일 없어야겠다
왜요?
천양희
강변역이 강변에 있지 않고
학여울역에 여울이 없다니요?
물까마귀는 까마귀가 아니고 물새라니요?
섬개개비는 산새이면서 섬에서 살다니요?
송사리는 웅덩이에서 일생을 마치고
무소새는 평생 제집이 없다니요?
질경이는 뿌리로 견디고
가마우지는 절벽에서 견디다니요?
푸른 소나무도 낙엽지고
더러운 늪에서도 꽃이 피다니요?
인생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라니요?
필연적인 것만이 무겁고
무게가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니요?
사자 별자리, 오늘 밤
하늘에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회신 바랍니다 이만 총총
외길
천양희
가마우지 새는 벼랑에서만 살고
동박새는 동백꽃에서만 삽니다.
유리새는 고여 있는 물은 먹지 않고
무소 새는 둥지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새들은 날아오릅니다.
새들은 고소공포증도 폐쇄공포증도 없습니다.
공중이 저의 길이니
제발 그대로 놓아두시지요.
외길이 나의 길이니
제발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요.
외딴섬
천양희
어려운 일은 외짝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실존 때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아직 밟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있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 세상은 내가 극복해야 할 또다른 절망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내가 일어설 때까지는 믿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외딴섬이라는 것을 이제야 겨우 믿게 되었다
우두커니
천양희
희망이 필요하다고 얻어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불행이 외면한다고 오지 않는 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묶는다고 튼튼한 건 아니었습니다.
고통이 깎는다고 깎이는 건 아니었습니다.
마음 한 줌 쥐었다 놓는 날이면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되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
천양희
내가 사는 아파트 경비원이
시집 한 권 달래서 드렸더니
우리 같은 사람들 얘기가 없다고 하신다
우리 같은 사람들?
나는 놀라서
우리 같은 사람들 말고
울 같은 울타리 같은 사람들이라고 고쳐 써본다
어떤 울림이
울을 넘어 넘실거린다
몇 줄의 문장이
한 사람의 구구절절을 옮겨 적는다
시 쓰는 동안
나는 아직 사람을 모른 것이다
인파 속에 사람이 부대끼는 줄 모르고
물결 속에 물방울이 흩어지는 줄 몰랐다
세상에는 좋은 일 나쁜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이런 일 저런 일이 있다는 걸 몰랐다
모르면서 모를 때마다
텅 빈 몸이 텅텅거린다
문득 이게 나라는 생각
우리 같은 사람들이란 생각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것들
천양희
열매를 보면서 꽃을 생각하고
빛을 보면서 어둠을 생각합니다.
꽃은 열매를 위해 피었다 지고
어둠은 빛을 위해 어둡습니다.
별을 보면서 하늘을 생각하고
나무를 보면서 산을 생각합니다.
하늘은 별을 위해 별자리를 만들고
산은 나무를 위해 숲을 만듭니다.
자랑하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다운 풍경은
언제나 우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표 한 장 붙여서
천양희
꽃 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 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 한 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미움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 볼 때까지
험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사람의
눈먼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 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나 말해봐라
우표 한 장 붙여서 부친 적 있나
운명이라는 것
천양희
파도는 하루에 70만번씩 철썩이고
종달새는 하루에 3000번씩 우짖으며 자신을 지킵니다
용설란은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한 꽃대에 3000송이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습니다
벌은 1kg의 꿀을 얻기 위해
560만송이의 꽃을 찾아다니고
낙타는 눈이 늘 젖어 있어 따로 울지 않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새도 있고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새도 있습니다
운명을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요
웃는 울음
천양희
집 어느 구석에서든
울고 싶은 곳이 있어야 한다
가끔씩 어느 방구석에서든 울고 싶은데도
울 곳이 없어
물 틀어놓고 물처럼 울던 때
물을 헤치고 물결처럼 흘러간 울음소리
물소리만 내도 흐느낄 울음은 유일한 나의 방패
아직도 누가 평행선에 서 있다면
서로 실컷 울지 못한 탓이다
집 어느 구석에서든
울고 싶은 곳이 있어야 한다
가끔씩 어느 방구석에든 울고 싶을 때는
소리없이 우는 것 말고
몸에 들어왔다 나가지 않는 울음 말고
웃는 듯 우는 울음 말고
저녁 어스름 같은 긴 울음
폭포처럼 쏟아지는 울음
울음 속으로 도망가고 싶은 울음
집 구석 어디에서든
울 곳이 있어야 한다
원근(遠近)리 길
천양희
가깝고도 먼 것이 무엇이었더라, 원근리에 머무는 마음이여. 길 한쪽이 나를 당긴다. 꼬불꼬불한 것은 길만은 아니다. 내 속의 산맥들 그리고 능선들. 원근리는 몰래 나를 알고 있어서 마음의 명암까지 뭉클해진다. 삶은 꼬리 잡혀 꿈쩍 않는데 하늘 한끝에서 별똥별이 떨어진다. 포기한 자 이탈한 자 그들이 자유롭다 문득 느낀다. 내 그림자가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지도 않은 생나무 그늘이 발끝까지 따라온다. 나는 촘촘한 생의 생잎들을 조금씩 들춘다. 들추다가 지름길을 힐끗 엿본다.재봉새 한 마리 언제 끝날지 모를 집을 짓는다. 빠른 길만이 바른 것은 아니다. 오늘도 길은 가까웠다 멀었다 하였다. 저물녘에서야 마음의 경계 너머 다른 길에 멈춘다.언제나 바짝 엎드린 기찻길. 우린 아무것도 일치할 수가 없다. 세상 속을 가로질러 길 끝과 마음 끝이 나란히 선다. 가깝고도 먼 것이 무엇이었더라. 소리치며 기차가 지나간다. 날마다 내 속으로 들어온 길. 원근리에 가서 꺼내 놓는다.
위하여
천양희
웃는 아침을 위하여
나팔 꽃이 피면 안되나
나팔꽃은 아침을 위하여
웃으면 안되나
아침이 나팔꽃을 위하여
있으면 안되나
아침에게는 나팔꽃도 희망이고
나팔꽃에게는 아침도
희망이니까
우리가 만났다 헤어지는 날에도
너를 위하여
내가 웃으면 안되나
나를 위하여
너가 웃으면 안되나
나에게는 너가 희망이고
너에게는 내가
희망이니까
보아라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 필요하다.
은행에서
천양희
출구를 향해 걸어가기 전에 나는
지불할 약속이라도 후회라도 있는 것처럼
몇초만 더 머물러야 한다
문밖에는 종일 빗소리 부풀고
접었다 폈다 마음은 우산처럼 젖는다
명치 끝에 걸린 그리운 것들을
쓸어내리며 나는
못다 한 말들과
공복의 시간을 청구서에 적는다
생활이란 무엇이냐, 사람이란 또
무엇으로 사는가 생각하며
생을 당겼다 밀어본다, 문도 한번
열었다 닫는다
내가 생의 속으로 들어가
생 속을 들춰본다
떨어질 듯 매달린 벼랑이 몇
날 밝기 기다린 어둠이 몇
나는 아직도 밀지 못한 절망이 많다고 믿는다
아, 한때의 꿈들
온라인으로 이어지고
잠시 나는, 만기로 저축해둔
꿈 하나를 통장에서 꺼낸다, 새의
알을 꺼내듯이 조심스럽게
세월이 한 계좌를 짊어지고 휘청거린다
우리는 누구나 희망을 믿고
희망에 속는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천양희
오래된 하늘은 늙지도 않는데
바깥은 오늘 영하 20도
20년도 넘게
우리도 우리의 바깥이었다
세상에 와
온 몸으로 밀고 간
생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것
이건 충격이다
충격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
이제 순정의 주인공은 없다
어제가 그대에게 단절을 주었다
진실에도 오류가 있다고
말한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내 수첩에는
잘못에 눈 감을까 두렵다,고 적혀 있다
사람이 사람 같지 않다는 거
이건 파격이지
영하에도 까치가 날아다닌다
이른 봄의 시
천양희
눈이 내리다 멈춘 곳에
새들도 둥지를 고른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웃으며 걸어오고 있다
바람은 빠르게 오솔길을 깨우고
메아리는 능선을 짧게 찢는다
한줌씩 생각은 돋아나고
계곡을 안개를 길어 올린다
바윗등에 기댄 팽팽한 마음이여
몸보다 먼저 산정에 올랐구나
아직도 덜 핀 꽃망울이 있어서
사람들은 서둘러 나를 앞지른다
아무도 늦은 저녁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리움은 두런두런 일어서고
산 아랫마을 지붕이 붉다
누가, 지금 찬란한 소문을 퍼뜨린 것일까
온 동네 골목길이
수줍은 듯 까르르 웃고 있다.
이름
천양희
- 왜 나뭇잎의 이름이 보석의 이름처럼 소중히 지어져 있지 않는지 알 수 없다
물도마뱀의 이름이 노랑무늬영원이라니요
물결무늬라는 고동이 있다니요
풍뎅이 이름이 아침깜짝물결무늬라니요
금강입술대고동이라는 달팽이가 있다니요
나비의이름이 수풀들썩팔랑나비라니요
많첩홍매실이라는 나무가 있다니요
풀의 이름이 꽃며느리밥풀이라니요
흰눈썹울새라는 새가 있다니요
나는 그 이름 하나씩 불러봅니다
노랑무늬영원 물결무늬고동 아침깜짝물결무늬
금강입술대고동 수풀들썩팔랑나비 많찹홍매실
꽃며느리밥풀 흰눈썹울새
누구도 그 이름 끊지 못하리
그 이름에 새겨진 물결무늬자국*
* 이성복의 시에서
이상 난동
천양희
때도 아닌데
개나리가 피었다
철없이 웬 개, 나리가
꽃 한번 못 피운 무화나무 우두커니 서 있어
마음이 꽃잎 몇, 피워올린다 나를 웃게 하는 건
피어나는 꽃잎들 움트는 초록들 세상에는 피우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 불이나 바람 구름까지도 때도 아닌
때에 피어버린다고 피고 싶은 몸에 바람이 차오른다
피고 또 피워도 바람뿐이다
꽃 한번 못 피운 무화나무 우두커니 서 있어
철없이 핀 꽃 들여다본다
한 꽃 모두 여려 송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말하지 마라
우리가 언제
꽃처럼 피었느냐
이처럼 되기까지
천양희
복사꽃이 지고 나면 천랑성별이 뜬다지요
아침 무지개는 서쪽에 뜨고 저녁 무지개는 동쪽에 뜬다지요
8초에 103음을 내면서 숲을 노래로 가득 채우는 새가 있다지요
한 뿌리 여러 갈래인 나무에도 결이 있다지요
푸른 나무와 향기로운 풀이 꽃피는 시절보다 낫다지요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지요
누워 있던 땅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벌떡 일어선 것이 가로수라지요
잘못 자란 생각 끝에 꽃이 핀다지요 그것이 시詩라지요
이 세상에 옛애인은 없고 이 세상의 꽃은 모두 아슬아슬하다지요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다지요
달밤이 있어서 인류는 생각하게 되었다지요
사랑할 때 사랑하고 생각할 때 생각하라지요
간절함에는 놀라운 에너지가 있다지요
가난에는 과거가 없다지요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점점 멀어진다지요
다음 어둠이 올 때까지 아직 시간은 있다지요
그러니 수고로운 인생이여
내 몸 전체로 살자
이 하루
천양희
정처없다 말하는 이 있어
자갈 물고 물구나무서니
편하군 편하군
세상 거꾸로 보니 편하다
말하는 이 있어
하루종일
숨통 죄다 지우고
물구나무선다
높은 것 위의 더 높은 것
높은 것들 사이에서 물구나무서서
거꾸로 피를 세우는 자
피를 위해 피 말리는 자
당기고 조이고 피를 흘리는군
높은 것 밑의 더 낮은 것
발바닥 밑의 더 낮은 것
밟히고 처박히고 피를 흘리는군
발바닥 밑에는
바둥거리며 숨통 하나가
언제부터 비명을 지르고 있군.
인천에 가서
천양희
연안부두에 불빛 시끄러운데
사람의 집들은
그들의 그림자를 숨기고 있다
외항선 몇 개 떴다 가는 날은
서울의 두통 서울에서 못 풀고
시퍼런 바다쪽으로 뛰어든다
파도는 갈기를 날리며 일어서고
섬들의 경계선이 무너진다
오늘 항구에는 갈매기도 안 날고
오늘 바다에는 배 한 척 안 다닌다
기다려라 기다려라
머지않아 밀물이 닥치리라
그러면
도시는 모든 입을 열고
사악한 새들을 날려 보내리라.
일흔 살의 인터뷰
천양희
나는 오늘 늦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세월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고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었냐고
입술에 바다를 물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내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노을이며 파도며
다른 무엇인가 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늘 실패했거든요
정열의 상실은 주름살을 늘리고
서쪽은 노을로 물들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았냐고
해송을 붙들고 그가 물었을 때
희망을 바라니까 살았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내일에 속는 것보다
세월에 속는 것이 나았거든요
꽃을 보고 슬픔을 극복하겠다고
기울어지는 해를 붙잡았습니다
당신은 어느 때 우느냐고
파도를 밀치며 그가 물었을 때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할 때 운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보일까 말까 한 작은 간이역이 행복이었거든요
일흔 살의 인터뷰를 마치며
마흔 살의 그가 말했습니다
떨어진 꽃잎 앞에서도 배워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고
참 좋은 인터뷰였다고
입
천양희
환각거미는 입에다 제 알집을 물고 다닌다는데
시크리드 물고기는 입에다 제 새끼를 미소처럼 머금고 있다는데
나는 입으로 온갖 업을 저지르네
말이 망치가 되어 뒤통수를 칠 때 무심한
한마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때 입은
얼마나 무서운 구멍인가
흰띠거품벌레는 입에다 울음을 삼킨다는데
황새는 입에 울대가 없어 울지도 못한다는데
나는 입으로 온갖 비명을 내지르네
입이 철문이 되어 침묵할 때 나도
모르는 것을 나도 모르게 고백할 때 입은
얼마나 끔찍한 소용돌이인가
때로 말이 화근이라는 걸 일러주는 입
입에다 말을 새끼처럼 머금고 싶네
말없이 말도 없이
자신
천양희
남에겐 봄바람같이
자신에겐 추상같이
누구나가 되지 말고
누군가가 되라
자연을 위한 헌사
천양희
자연은 한 권의 통사通史 같다 볼수록 눈앞이 환해진다 나무는 반성하듯 그늘을 옮기고 바람은 새의 둥지를 낮춘다 새들이 세상에 와 첫눈을 뜰 때 무엇을 먼저 보았을까 가지 끝에 걸린 바람소리였나 잎새 키우는 햇살이었나 새는 또 공중에 가득한 저의 길을 보았을까 숲에서 부산히 날갯짓이 시작되면 나는 것만이 저들의 일이란 걸 알았을 것이다
자연은 신이 쓴 자서전 같다 지나온 길 구불텅해 산바람이 마을까지 따라온다 나보다도 더 오래 길 위를 헤맨다 헤매는 누구라도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너는 알았구나 어떤 최고봉도 하늘 아래 있다는 걸 알았구나 오늘따라 산세가 더 잘 보인다 낮은 산이라도 봉우리 보여 주고 높았다 낮았다 다시 솟아오른다 정상! 추락할 때마다 우린 정상을 꿈꾸었지
자연은 나를 서기(書記)로 만든다 이번 생은 비루해! 반성문을 쓰게 한다 탈 수만 있다면 저 산 넘고 싶었으나 나는 나를 겨우 넘었을 뿐이다 능선에 올라 늪 같은 숲 바라본다 숲은 왜 대낮에도 어둡고 나무는 왜 평생 서 있기만 하는가 해가 지니 산 그림자 깊어진다 산 것들의 바람이 저처럼 깊어지면 새소리여, 너는 사람에 대해 무엇이라 노래할까 또 노래할 수 있을까
자화상
천양희
조롱 속에 거울 하나 넣어 놓았더니
거울에 비친 제 모양을 제 짝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살았다는 문조(文鳥)
사막 속에 오아시스 놓여 있었더니
물에 비친 모랫길을 제 길인 양
생이 다하도록 잘 걸었다는 낙타
그게 혹
내가 아니었을까
잡(卡)*에서의 하루
천양희
게가 허물 벗을 때
떠내려온 게 껍데기 건져
그 껍데기 지붕 삼아
바닷가에 세운 옛 선술집 잡에서
잡놈처럼 한잔 걸치고 싶다
상(上)도 하(下)도 없는 수평선 베고 누워도 보고
문도 벽도 없는 하늘 밀고 들어가
바람까마귀처럼 길을 잃고도 싶다
마음대로 소리치는 파도나 한번 되어보다가
선술집 문 열어젖히는 가수알바람이나 한번 되어보다가
내가 잔을 기울이니 해도 따라 기우네 건들거리며
하루를 잡담처럼 넘기고 싶다
잡에서의 하루
참 이것은 너무 많은 잡생각입니다
내가 생각한들 어디까지 가겠습니까
* 김려 『우해이어보』에서.
저녁을 부려놓고 가다
천양희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던
시인 허수경 가고
속수무책이 당신이 세운 유일한 대책이라던
시인 황병승 가고
빈빈(彬彬)의 빛그물로 누워 떠내려가고 싶다던
시인 최정례 가고
붉은 황톳물 넘치는 강을 내려다보며
해가 지도록 울었다던
시인 권지숙 가고
별을 향해 걸어갈 내 발자국에는
왜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는지 묻던
시인 배영옥 가고
한 방울 눈물이 평생의 고백이라던
시인 박서영 가고
오, 나도 드디어 못 하나를 얻었다던
시인 김종철 가고
시인을 슬프게 하지 않고 아프게 하던
비평가 황현산 가고
저녁을 부려놓고
나보다 더 그리운 것은 가네*
그리운 것은 가고 나보다
더 많은 저녁만이 남았네
* 허수경의 시에서
저녁의 정거장
천양희
전주에 간다는 것이
진주에 내렸다
독백을 한다는 것이
고백을 했다
너를 배반하는 건
바로 너다
너라는 정거장에 나를 부린다
그때마다 나의 대안은
평행선이라는 이름의 기차역
선로를 바꾸겠다고
기적을 울렸으나
종착역에 당도하지는 못하였다
돌아보니
바꿔야 할 것은
헛바퀴 돈 바퀴인 것
목적지 없는 기차표인 것
저녁 무렵
기차를 타고 가다
잘못 내린 역에서
잘못을 탓하였다
나는 내가 불편해졌다
저 달을 들어내면
천양희
아버지가 달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달을 들어내면 하늘에 뭐가 남겠느냐?
글쎄요......저 달을 들어내면
하늘에 구멍 하나 남지 않겠느냐
너는 작가가 아니냐
모든 사람의 생에는 구멍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느니*
그 구멍을 오래 들여다보거라
개울물 소리 소슬바람 소리 들릴 것이니
어찌 구멍만이 구멍이겠느냐
저 달을 들어내면
저 달을 들어내면
* 조경란 소설 "나는 봉천동에 산다" 중에서
정든 땅 언덕 위에
천양희
시로서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시로서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시로서
집을 짓고 시로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시가 햇빛이 되고 불빛이 되고
시가 고향이 되고 나라가 되고
시로서 따뜻하고 시로서
사람들이 행복한 곳
정든 땅 언덕 위에
시 같은 피
시 같은 땀
씨 뿌릴 수 있을까
시 같은 인생 시 같은 일생
거둘 수 있을까
정든 땅 언덕 위에
시의 세상
시의 나라
시의 집을 짓고.
정작 그는
천양희
죽음만이 자유의지라고 말한 쇼펜하우어
정작 그는
여든이 넘도록 천수를 누렸고요
자녀 교육의 지침서인 『에밀』을 쓴 루소
정작 그는
다섯 자식을 고아원에 맡겼다네요
백지의 공포란 말로 시인으로 사는 삶의 고통을 고백한 말라르메
전작 그는
다른 시인보다 평생을 고통 없이 살았고요
『행복론』을 써서 여덟 가지 행복을 말한 괴테
정작 그는
일생동안 열일곱 시간밖에 행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네요
정작 그는 알고 있었을까요
변명은 구차하고 사실은 명확하다는 것을요
정작 그는 또 알고 있었을까요
위대한 사상은 비둘기 같은 걸음걸이로
이 세상에 온다는 것을요
좋은 날
천양희
작은 꽃이 언제 다른 꽃이 크다고 다투어 피겠습니까
새들이 언제 허공에 길 있다고 발자국 남기겠습니까
바람이 언제 정처 없다고 머물겠습니까
강물이 언제 바쁘다고 거슬러 오르겠습니까
벼들이 언제 익었다고 고개 숙이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이 해 지는 줄 모르고 팽이를 돌리고 있습니다
햇살이 아이들 어깨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진장 좋은 날입니다
좌우명
천양희
그렇다, 그렇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아니다, 생각될 때
뭐? 하며 나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아니다 아니다,고 생각한 것이
그렇다 그렇다,고 생각될 때
그래? 하며 나는 다시 하늘을 보았습니다.
하늘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괜찮다 괜찮다,고만 했을 뿐입니다.
그때부터 괜찮다는 그 말이
나의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즐거운 하루
천양희
물새 같은 아이 하나
모래 위를 달려간다
파도 한 자락이
아이의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푸른 별이 뜨고
하얀 양 떼들이 몰려왔다
아이는 세상모르고
웃고 있었다
바다도 세상모르고
즐거운 하루
지나간다
천양희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벼르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세상은 그래도 살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지나간 것은 그리워진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랑은 그래도 할 가치가 있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절망은 희망으로 이긴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슬픔은 그래도 힘이 된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가치 있는 것만이 무게가 있다고 믿었던 날들이 다 지나간다.
사소한 것들이 그래도 세상을 바꾼다고
소리치며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 소리 더 잘 들으려고 눈을 감는다.
'이로써 내 일생은 좋았다'고
말할 수 없어 눈을 감는다.
지독한 사랑
천양희
동백처럼 붉게 붉게 피어나지만
떨어질 땐 처연하게
모가지째 뚝, 뚝 떨어진다.
지루한 날
천양희
지루한 날이면
물끄러미 가로수를 바라본다
구름이 느릿느릿
나무 위로 지나가고
햇빛이 느릿느릿
나무 밑을 지나간다
가로수는 어쩌면
누워 있던 땅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어느 날 벌떡, 일어선 게 아닐까
저렇게 평생 서 있다니
지루한 날이면
물끄러미 땅을 내려다 본다
달팽이가 느릿느릿
풀밭을 지나가고
발자국이 느릿느릿
땅을 밟고 지니간다
땅은 어쩌면
서 있던 나무들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어느 날 털썩, 주저앉은 게 아닐까
저렇게 평생 주저앉아 있다니
지혜
천양희
삶이 연습한다고
잘 살아가는 건 아닐 것입니다.
꿈을 가진다고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물이 흐른다고
다 깊어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사람을 만난다고
다 좋아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나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생각의 끝에는 반드시
지혜가 따른다는 것을.
직소포에 들다
천양희
폭포 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
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水宮을.
폭포 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 소리 같은---바위들이 몰래 흔들 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직업
천양희
내 생의 업 중에 큰 업이
시업(詩業)이지 하다가도
시가 밥 먹여주냐,고
시답잖게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밥도 안 되는 그걸로도
업이 될까 싶다가도
누가 나더러
그 시 참 좋데요, 할 때마다
나 혼자 감동 먹어
시로써 배부른 나에게는
말도 안 되지 싶다가도
또 누가 나더러
시만 써서 어떻게 사냐,고 할 때마다
이태백 같은 사람은
술만 마시고도 시선(詩仙)이 되었는데 싶다가도
평생 시로써 업을 삼더라도
시선은커녕 시인도 못 되지 싶다가도
그런데 왜 하필
시업이 내 생업일까 싶다가도
생업이 실업이 안 되었으면 하다가도.
진로를 찾아서
천양희
진로(眞露)도매센터 빌딩을 몇 번 돌았다
불빛 환한 지하에서 두꺼비처럼 두리번거리며
에술의 전당 쪽 계단을 오른다
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진로(眞路)는 어느 쪽일까. 길눈이 어두워
진로(進路)를 찾지 못해 돌아나온다. 오후 7시
저녁 어스름이 내 빈 속에 꽉 들어찬다
저 불빛 저 그림자도 길게 누일 길 있던가
생각하는 사람처럼 깊어지는 가로등들,
모르는 곳에 제 속을 허문다
차소리에 쓸려 나무들은 한 쪽으로 기울고
닳을대로 닳은 길은
사람의 산책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예술의 전당 무궁꽃에 기대어
한 사람의 진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먼 길은 멀어서 하루가 짧고
담벽 너머 보는 지붕들이 뾰족하다
아무도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어
길 같은 길 어디 있냐고 투털대는 사람들이
자꾸만 비좀다며 바닥처럼 빠져나간다
모든 것은 항상 끝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진로여
나는 너에게 줄 미래도 없는데
내 의지는 소의 눈처럼 꿈벅거린다
누가 나를 시험하러 세상을 문제로 내놓은 것일까
어딘가 길잃은 사람 있을 듯
굽낮은 내구두는 아직 귀가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진로(眞路) 너무 아득해 빌딩 숲 헤쳐 닿을 길 없고
이 길 한켠에서 생각나는 것은 사람마다
가지 않은 길 하나씩 품고 있는 한 줌 기대와 기대 속에 묻힌 한 그루
추억의 푸른 나무.
기대는 자주 우릴 설레게 한다
설레임 속에서 새벽이 뜬 눈으로 돌아온다
비로소 진로란
우리들 생이 그렇듯
비뚤비뚤 하거나 비틀비틀한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진실로 좋다
천양희
노을에 물든 서쪽을 보다 든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요즘 들어 든다는 말이
진실로 좋다 진실한 사람이 좋은 것처럼
좋다 눈으로 든다는 말보다 마음으로
든다는 말이 좋고 단풍 든다는 말이
시퍼런 진실이란 말이 좋은 것처럼
좋다 노을에 물든 것처럼 좋다
오래된 나무를 보다 진실이란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요즘 들어 진실이란
말이 진실로 좋다 정이 든다는 말이 좋은
것처럼 좋다 진실을 안다는 말보다 진실하게
산다는 말이 좋고 절망해봐야 진실한 삶을
안다는 말이 산에 든다는 말이 좋은 것처럼
좋다 나무그늘에 든 것처럼 좋다
나는 세상에 든 것이 좋아
진실을 무릎 위에 길게 뉘었다
집
천양희
어디로 이사갈까?
아사달이 묻는다
우리, 무영탑으로 가요
그리운 것 없는 곳으로 가요
어디로 이사갈까?
아사녀가 묻는다
우리, 무영지로 가요
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가요
집으로의 여행
천양희
단풍멸치들은
가을 나뭇잎이 가지를 떠날 무렵
산란한다고
달빛 밝은 밤을 기다린다
달빛이 단풍처럼 물들면
내만(內灣)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가을 멸치를
어부들은 단풍 멸치라 부른다
연어가 모천을 찾는 것은 이 무렵이다
산짐승들이 가을을 기다려
털갈이할 때도 이 무렵이다
이 가을에는
나에게 주어진 낙엽 한 장만으로도
집으로 돌아갈 궁리를 할 듯도 하다
그물을 접어 들고
어부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어디든 가야 한다 가야만 하기에
잔가지를 꺽어
길바닥에다 '집'이라 써본다
차이를 말하다
천양희
그날 당신은 다르다와 틀리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말했지요 당신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다르다는 것은 인정한다고도 말했었지요 그 말 듣는 날이 얼마였는데 어떤 일이든 절대적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다니요 정도의 차이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또 몇 번이나 자기를 낮추는 것과 낮게 사는 것은 다른 것이라 생각했을까요 고독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당신은 독락당(獨樂堂)에 우뚝 세워놓았습니다 오늘은 독수정(獨守亭)이 고독을 지킵니다 처음으로 즐기는 것이 지키는 것과 정도 차이라고 당신은 말합니다 내 의견에 한 의견을 슬쩍 올려놓고 보아요 그래도 다른 것은 다른 것이고 내 생각 깊은 자리 한 생각 잠시 머뭇거려도 그 자리 다른 것은 다른 것이지요 저 자연스러움과 자유스러움의 차이 그 차이로 차별 없이 당신과 나는 당신과 나를 견뎠겠지요 다르다와 틀리다 사이에서 한나절을 또 견디겠지요
참는다는 것
천양희
세상의 행동 중에 참는 게 제일이라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든 참기로 했지요
날마다 참으면서 일만 하고 살았지요
참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살길은 갈수록 구불텅거리고
살림은 출렁대며 흔들렸지요
누가 고해(苦海)속에 뛰어들기라도 하면
파문은 나에게까지 번졌지요
그때 나는 절벽에 매달려 사는 가마우지 새들을 생각했지요
발밑에 밟히고 바람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일 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참으면서 사는 일이었지요
그때서야 힘든 것이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힘들게 산다는 것은 힘쓰고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참고 살수록 삶은 더 구비쳤지요
오늘도 나는 인파 속에서 자맥질하지요
힘껏 살고 싶어 힘내고 싶어
참 좋은 말
천양희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 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 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으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말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책장을 덮는다
천양희
큰 유리새는 고여 있는 물은 먹지 않고 흐르는 물만 먹는다는데 고운 목소리로 운다는데 고고한 새라는데 뻐꾹새는 제 둥지에서 새끼를 낳지않고 새끼를 낳아 다른 새에게 기르게 한다는데 숨어서 운다는데 염치 없는 새라는데 이상하다, 어째서 울음 소리는 똑같이 아름다운 것일까 고고한 아름다움이나 슬픈 아름다움은 그 수준이 다를 뿐이다
첫 꽃
천양희
사막만년청풀은 첫 꽃을 피우기 위해
사막에서 몇 십년이나 견뎌야 한다는데
연꽃 씨앗은 첫 꽃을 피우기 위해
늪에서 몇 천 년이나 견뎌야 한다는데
사람은 첫 꽃을 피우기 위해
어디에서 몇 년이나 견뎌야 할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고
꽃은 세상이 궁금해서
첫 꽃을 피운다
첫 길
천양희
마음이 먼저 첫 길을 밟는다
발자국 하나 더 얹어
세상 속으로 간다
사람의 일들은 가파르고 험하나
가다 보면 길이 되는 그것이 희망이니
희망을 받아 세상을 열고 싶다
이제는 사람같이 살아 봐야겠다고 그래야겠다고
생각의 실마리가
새 길 하나 만든다
벽도 열면 창임을
위기도 기회임을 이제야 알겠다 삶이여
그 무엇으로 한 생이
제 그늘만큼 깊다 한들
오늘은 새해처럼 불끈 솟고 싶다
저 넓은 세상을 달고
청사포에서
천양희
청사포 앞 바다엘 간다. 부산 아지매
사투리가 생선처럼 튀는 아침
바다의 자리는 생생하게 빛난다
투명한 물 속
저 환한 화엄계!
수평선이 세상을 수평으로 세운다
허공에 넘실대는 갈매기소리 공허하다
높은 것만이 이상은 아니라고
흐르는 물이 말하네
수족관에서도 꼬리치는 물고기들
바다로부터 잊혀지고
나는 내 희미한 정신의
시퍼런 파도소리를 듣는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한다
나는 덮치는 저 소리. 미친 듯이
나를 살게 하느니 ……
최고봉
천양희
높은 산에 오를 준비를 할 때마다 장비를 챙기면서 운다고 고백한 산사람이 있었다
14번이나 최고봉에 오른 그가 무서워서 운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무서운 비밀을 안 것처럼 나도 무서웠다
산 오를 생각만 하면 너무 무서워서 싼 짐을 풀지만 금방 울면서 다시 짐을 싼다고 한다
언젠가 우리도 울면서 짐을 싼 적이 있다
그에게 산이란 가야 할 곳이므로 울면서도 떠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무서워 울면서도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이다
능선에 서서
산봉우리 오래 올려다보았다
그곳이 너무 멀었다
추억
천양희
포도는 익으면 향기를 낸다.
향기 속에 포도밭의 추억이 있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볏잎 속에 들판의 추억이 있다.
꽃은 만발하면 꽃잎을 떨어뜨린다.
꽃잎 속에 꽃밭의 추억이 있다.
사람은 나이들면 주름이 진다.
주름 속에 사람의 추억이 있다.
추월산
천양희
바람이 먼저 능선을 넘었습니다. 능선 아래 계곡이 깊고 바위들은 오래 묵묵합니다. 속 깊은 저것이 모성(母性)일까요. 왼갖 잡새들, 잡풀들, 피라미 떼들 몰려 있습니다. 어린 꽃들 함께 깔깔거리고 버들치들 여울을 타고 찰랑댑니다. 회화나무 그늘에 잠시 머뭅니다. 누구나 머물다 떠나갑니다. 사람들은 자꾸 올라가고 절골 물소리는 자꾸 내려갑니다. 내려가는 것이 저렇게 태연합니다. 無等한 것이 저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누가 세울 수 있을까요 저 무량수궁. 오늘은 물소리가 절창입니다. 응달쪽에서 자란 나무들이 큰 재목이 된다고, 우선 한 소절 불러제낍니다. 자연처럼 자연스런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나는 저물기 전에 해탈교를 건너야 합니다. 그걸 건넌다고 해탈할까요. 바람새 날아가다 길을 바꿉니다. 도리천 가는 길 너무 멀고 하늘은 넓으나 공터가 아닙니다. 무심코 하늘 한번 올려다봅니다. 마음이 또 구름을 잡았다 놓습니다 산이 험한 듯 내가 가파릅니다. 이속(離俗) 고개 다 넘고서야 겨우 추월산에 듭니다.
축복
천양희
고통이 바뀌면
축복이 된다기에
그 축복 받으려고
내가 평생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나는 삶을 지고 왔을까요?
절망을 씹다 뱉고
희망을 폈다 접는
그것이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 누가 외면할 수 있을까요?
외면할 수 없는 삶
그게 바로 축복이었습니다
친구
천양희
좋은 일이 없는 것이 불행한 게 아니라
나쁜 일이 없는 것이 다행한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이나 원망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더러워진 발은 깨끗이 씻을 수 있지만
더러워지면 안 될 것은 정신인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투덜대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은
실상의 빛을 가려버리는 거야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세상에 발길질이나 하던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침묵
천양희
저 바위가 슬프다고 울기나 합니까.
기쁘다고 웃기나 하겠습니까.
나는 키 큰 소나무 밑에 엎드려 한참을 일어서지 않았습니다.
침묵 씨(氏)
천양희
침묵 씨(氏)는 파괴를 모른다. 파괴야말로 아름다운 나의 베아트리체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침묵 氏는 웃는다. 침묵은 파괴의 원인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침묵 氏는 웃는다. 침묵을 깨고 싶은 망측한 망치들 도끼들. 그러나 침묵 氏는 끄떡 않는다. 누가 지금 <침묵은 금>이란 말 기억이나 할까. 누가 지금 <면벽묵언>이란 말 이해나 할까. 이제 아무도 침묵을 사랑하지 않는다. 옹호하는 자도 없다. 우울한 저녁이 다가온다. 시간은 부풀고 고요는 붐빈다. 나는 오늘 「침묵에 관하여」를 다시 읽는다. 세상이 침묵을 잘못 써버렸다. 세상이 잘못 쓴 침묵의 문장. 그때 나는 보았다. 폐허는 얼마나 고요한가. 고요는 극점이다. 극점은 또 얼마나 그윽한가. 침묵에 관하여 내 관점의 일부는 그대의 것이다. 침묵 氏. 나는 가만히 책장을 덮는다.
탈바꿈
천양희
곤충도 탈바꿈을 하고 사는데
나는 탈바꿈을 하지 않았다
날아다니는 곤충은 완전탈바꿈을 하는데
나는 완전탈바꿈을 하지 않았다
곤충도 탈바꿈을 하고 사는데
나는 탈바꿈을 하지 않았다
땅에서 사는 곤충은 불완전한 탈바꿈을 하는데
나는 불완전한 탈바꿈을 하지 않았다
날개를 가진 곤충들은 적게 먹고 거저 먹지 않는데
날개가 없는 것들은 많이 먹고 빼앗아 먹는다
날개를 가진 곤충들은 공생하며 사는데
날개가 없는 것들은 기생하며 산다
나도 탈바꿈을 하고 싶다
공생하고 싶다
풀 베는 날
천양희
풀 베다 본다
풀여치 눈이 검다
대낮에도 캄캄한 숲 탓이다
바람이 그걸 당겨 산끝까지 간다
우두커니 나는 풀밫에 서 있어 그때마다 발끝이 들려
마음이 풀포기 몇, 말아올린다. 날 살게 하는 건 썩어
거름된 풀잎들, 싹 내민 무명초들. 풀도 잘못 잡으면
손을 벤다고? 세상에는 베이는 일들이 너무 많다
멍멍해진 눈에 논물이 차오른다. 들판 한쪽을 오래
당겨본다. 실개천 하나 달려나오고 물떼새 왁자지껄
날아오른다. 오르고 또 올라도 하늘 밑이다
우두커니 나는 풀밭에 서 있어 그때마다 발끝이 들려
풀 베다 본다
한 뿌리 모두 여러 갈래다
같은 땅인데 길조차 여러 갈래
풀섶이 내 속에 들어앉는다
풀씨만한 한 생生이 꿈틀거린다
풀아 날 잡아라
내가 널 당겨 일어서겠다
하나밖에 없다
천양희
나무는 잘라도 나무로 있고
물은 잘라도 잘리지 않습니다.
산을 올라가면 내려가야 하고
물은 거슬러 오르지 않습니다.
길은 끝나는 데서 다시 시작되고
하늘은 넓은 공터가 아닙니다.
시간이 있다고 다시 오겠습니까.
밀물 썰물이 시간을 기다리겠습니까.
인생은 하나밖에 없고
나 또한 하나밖에 없습니다.
시간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늘을 볼 때마다
천양희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은 늘 같은데
하늘을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서울살이 삼십년 동안 나는 늘 같은데
서울은 볼 때마다 다르다 하겠는지요
길에는 건널목이 있고
나무에는 마디가 있다지요?
산천어는 산록 맑은 계곡에 살고
눈먼 새는 죽을 때 한 번 눈뜨고 죽는다지요?
동박새는 동백꽃에서만 살고
주목나무는 고목이 되어도 썩지 않는다지요?
귀한 진주는 보잘 것 없는 조개애서 나오고
아름다운 구슬은 거친 옥돌에서 나온다지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고
모든 문제는 반드시 답이 있다지요?
사는 것이 왠지 슬픈 생각이 든다고 하겠지요?
슬픔을 가질수 있어 내가 기쁘다고 하겠지요.
하루
청양희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나는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너마저도
너를 내려놓았느냐.
그렇게 했느냐.
귀뚜라미처럼 찌르륵대는 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하면서
그 거짓말로 나는 나를 지킨다.
하루는 하나의 루머가 아니다
천양희
새벽이 왁자지껄 길을 깨운다 가로수들이 벌떡 일어서고 눈에 불을 켜고 가로등이 소의 눈처럼 끔벅거린다 땅은 꿈쩍 않는데 차들이 바쁘다 발을 구른다 구를수록 눈덩이처럼 커지는 하루 구르는 것이 하루의 일이라서 일의 속이 오래 덜컹거린다 어둠 속이든 가슴속이든 속은 들수록 깊어지나 바깥은 하루살이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진다 지는 것들은 후기(後記)가 없다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고 말할 뿐이다 나는 왠지 세상에서 서늘하여 지는 해를 붙잡았다 놓는다 잘 보내고서 기억하면 되는 걸 그러면 되는 걸 하루가 천년 같다고 생각해본 사람들은 안다 하루는 하나의 루머가 아니다 오늘 하루는 내가 그토록 살고 싶은 내일이다
하루살이
천양희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다 죽습니다.
하루가 하루살이의 일생입니다.
하루의 하루살이가 되기 위해
물 속에서 천 일을 견딥니다.
그동안 스무 번도 더 넘게 허물벗기를 합니다.
천 일동안 수많은 변신을 거듭하다
하루살이가 되면 하루를 살다 죽어버립니다.
하루를 살기 위해 천 일을 견디는 하루살이.
그것이 하루살이의 운명입니다.
한계
천양희
새소리 왁자지껄 숲을 깨운다
누워 있던 오솔길이 벌떡 일어서고
놀란 나무들이 가지를 반쯤 공중에 묻고 있다
언제 바람이 다녀가셨나
바위들이 짧게 흔들 한다
한계령이 어디쯤일까
나는 물끄러미 먼 데 산을 본다
먼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누가 터무니없는 말을 했나
먼 것들은 안 돌아오는 길을 떠난 것이다
이제 떠나는 것도
떠나고 싶은 마음보다 흥미가 없다
내 한계에 내가 질렸다
어떤 생을 넘겨도 동어반복이다
언덕길 오르다 말끝을 흐린다
마음아 그만 내려가자
한 권의 책
천양희
사막만년청풀은 첫 꽃을 피울 때까지
25년이나 견뎌야 한다네 새우 알은
큰 비가 내릴 때까지 천 년이나
사막의 흙속에서 견뎌야 한다네 연꽃 씨앗은
4천 년이나 늪 속에 파묻힌 채 묵묵히
견뎌야 한다네
어느 날 [견딤의 미학] 책 한 권을
읽었다네 그리고 내 생이 바뀌었다네
나는 드디어
고통을 독파했다네
한 사람의 산책길
천양희
숲이 잠 깨는지 나뭇잎들이 촐랑거립니다.
아침 햇살이 눈이 부신 듯, 어린 새들 두 눈이 붉어집니다.
바람이 몰래 빠져 나가느라 오솔길이 더욱 좁아지는 아침.
들쭉나무 아래 철 늦은 산꽃이 순하고
작년의 낙엽들 썩어 거름된 지 오래입니다.
한 사람의 산책길이 그냥 지나가고 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떠들썩하던 사람들 이곳에 와서야
해지는 서편을 잠시 돌아 봅니다.
되돌아 볼 것은 노을이 아니라 자신입니다.
노을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하였으나
지기 때문에 무서운 건 누구이겠습니까
눈시울이 노을보다 더 붉어집니다.
누구에게나 울면서도 가야만 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가오리연 하나 기우뚱거리며 언덕을 오르고 있습니다.
얼레를 더 당겨, 그래야 더 높이 오를 수 있는거여.
연 연구에 평생을 바친 박노인이 힘 주어 말합니다.
더 당겨, 더 당겨, 더 당기라니께.
나는 무엇을 더 당겨야 하나, 당겨서 높이 올려야 하나
지금은 떼까치 소리 겨울 나를 당깁니다.
너도 개미자리풀이 너도 풀이냐 하고 너도밤나무가 너도 밤나무냐 합니다.
무릇꽃이 무릇, 꽃이 피는 까닭을 알고 피겠습니까
버짐나무가 버짐을 알겠습니까
세상에 모르는 것이 이것뿐이겠습니까
웬일인지 사람들의 집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꾸 높이 올라갑니다.
고층으로 올라간 몸이 마음 따라 하층으로 내려가기도 합니다.
어느 땐 웃어도 웃어도 우울은 우물처럼 깊습니다.
그래도 해바라기는 해, 바라기(希)를 하고
하루살이는 하루로써 세계의 비밀을 알아내려 할 것입니다.
한 아이
천양희
시냇물에 빠진 구름 하나 꺼내려다
한 아이 구름 위에 앉아 있는
송사리 떼 보았지요
화르르 흩어지는 구름떼들 재잘대며
물장구치며 노는 어린 것들
샛강에서 놀러온 물총새 같았지요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 새끼들
풀빛인지 새소린지 무슨 초롱꽃인지
뭐라고 뭐라고 쟁쟁거렸지요
무엇이 세상에서
이렇게 오래 눈부실까요?
한 자리
천양희
바람 불다 비가 와 햇빛이 솔밭 가지로
지나가 버려
나무 뒤에 나무처럼 서서 새들은 어디 갔나
네 이름 묻고 싶구나 바람 불 때마다 천지에 나를 놓을?
나를 놓을 어디?
바람 부니 꽃이 꽃자리 살펴보던 때가
그냥 지나가 버려
바위 위에 바위처럼 앉아
꽃들은 다 어디 갔나 네 이름 받고 싶구나
바람 불 때마다 천지에 내 마음 뿌릴?
마음 뿌릴 어디?
바람이여, 나는 너무 늦게
흔들린다 나도 가끔
세상 빠져나가고 싶은 바람이다
바람을 꽃처럼 피우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산 자로서
조용히 접혀 있다
허기
천양희
너와 둘이 있을때 외롭지 않으려고
나는 너를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았다
갈 데 없는 마음이 오늘은 혼자 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외로움이 더 덤빈다.
그래서 밥을 많이 먹어본다. 밥을 먹고 돌아서도
허기가 진다. 허기가 지면 나는 우울에 빠진다
어느 땐 우울이 우물처럼 깊다.
활
천양희
활이 구부러져 있다
어머니 등이
구부러졌다
구부러져야 멀리
날아가는 활
구부러진 활도
부러질 때가 있으니
마지막
어머니 등이 그러하였다
희망이 완창이다
천양희
절망만한 희망이 어디 있으랴
절망도 절창하면 희망이 된다
희망이 완창이다
후기(後記)
천양희
시(詩)는 내 자작(自作) 나무
너가 내 전 집(全集)이다
그러니 시여, 제발 날 좀 덮어다오.
후회는 한여름 낮의 꿈
천양희
후회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좋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가진 것이 바람 소리 물소리밖에 없어
새를 헤아려본 적도 있다
아베르 강을 생각하다
물결을 놓친 적 또 있다
한 생각이 새로이 집을 짓고
한 생각이 있던 집을 허물어
무엇을 해도 하는 것이 후회밖에 없어
나는 아직도 아픈 신발을 신고
어디로 가고 있나
그래도 하늘은 아무것도 슬프지 않고
바람은 아무것도 안타깝지 않으니
내가 어떻게
춤추는 자와 춤을 구별하겠는가
햇살은 햇살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무심한 한여름 낮
어느 구름이 바람때문에 흩어지겠나
'살아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궁색한 궁리를 한다 해도
내가 아무리
아무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만 생각하자 해도
나는 계속계속 생각하게 되지
생각해보면 후회는 내가 지은 그늘 농사이기도 한 것
매미가 운다
인생이 쓰라려 쓰라려 쓰라려*
* 일본 시인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하이쿠에서.
휘둥그레진 눈
천양희
장수 거북이의 주둥이가 새의 부리처럼 뽀족하다구요?
잠수새의 눈이 물속에서도 사람을 볼 수 있다구요?
엉겅퀴꽃의 날개가 씨앗에 매달려 있다구요?
서로나무의 술이 나무 등걸에서 나온다구요?
풀잎새가 꽃자리를 차지한다구요?
주목나무는 고목이 되어서도 썩지 않는다구요?
박쥐는 새가 아닌데도 새처럼 날아다닌다구요?
솔새들은 별자리를 바라보며 날아간다구요?
물닭들은 바람쪽으로 머리를 두고 산다구요?
제비들은 남쪽을 향해 줄을 선다구요?
그렇다면
그래서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되구요.
흐린 날
천양희
생각이 먼저 기슭에 닿는다. 강 한쪽이 어깨를 들어 올린다. 하단(下端)이 저 아랜가. 문득 갈대숲에서 물떼새들이 달려 나온다. 여름이 가는군. 나보다 먼저 바다로 든 길이 중얼거린다. 언제 내가 길 하나 가졌던가. 물줄기를 한참 당기면 마음에 들어와 걸리는 수평선. 세상이 평등하기를 저것이 말해준다. 이런 날은 물가에 오래 앉을 수 있겠다. 물에도 길이 있다고 하였으나 물방개, 소금쟁이, 물잠자리들, 물이 좋아 물 먹고 산다는 것일까. 나는 꿈속에서도 어안이 벙벙한 물고기들을 보았다. 물의 세계란 그런 것일까. 물까지도 한 잔의 물속에선 흐르지 않는다. 나는 또 자주 쓴풀 몇 포기 뽑아 잘근잘근 씹는다. 산다는 건 자주 쓴맛을 보는 것이라던 선배의 말이 오늘은 옳았다.
흑포
천양희
선술집 붉은 등 꺼질 듯 목이 잠겨 껌벅거리고
방파제 아래 파도가 종일 흑흑거린다
수없이 바뀐 뱃길 탓인지, 사람 탓인지
포구 쪽으로 굽은 길이 마을까지 닿는다
누구도 저 길 돌아가지 못하리라
지금은 물 소리 깊어지는 시간
어디서 개 짖는 소리 들려 와
개 같은 인생, 개같이 울고 싶은 저녁이 있다
누가 저 세상을 밀어내고 있다는 것일까
꽃밭을 맴돌면서 꽃은 또 피고 싶은 꽃이 따로 있다는 것일까
돌아보면 하루를 이곳에 다 옮겼다
봉선꽃 지나 방아꽃집 지나 민들레꽃집 지나
시름꽃집 지나 눈물꽃집 지나 ---- 꽃에도 상처가 ---- 상처가 곧 꽃이니!
온 동네에 퍼지는 지독한 화색(和色)
그 속으로 어슬렁거리는 뜬구름 떼
내일은 비가 오려는지
하늘 한 쪽이 완전히 검다
희망이 완창이다
천양희
절망만한 희망이 어디 있으랴
절망도 절창하면 희망이 된다
희망이 완창이다
1년
천양희
작년의 낙엽들 벌써 거름 되었다
내가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작년의 씨앗들 벌써 꽃 되었다
내가 꽃밭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데
후딱, 1년이 지나갔다
돌아서서 나는
고개를 팍, 꺾었다
1분 동안
천양희
옛날 영화를 보았다 "아비정전(阿飛正傳)"!
그가 그녀를 찾아와 함께 시계를 보자고 말한다 시계를 보자고? 놀란 여자가 뭘 원하느냐고 묻는다 원하는 것은 없고 친구가 되어 1분 동안 함께 시계를 봐주면 된다고 한다
그와 그녀는 함께 1분 동안 시계를 본다 그때 그가 말한다 "오늘은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우린 1분 동안 함께 했어 난 잊지 않을 거야 우리 둘만의 소중했던 1분을 이 1분을 지울 수 없어"
이미 그날이 되어버린 시간 앞에서 그녀는 독백한다 "그는 이 1분을 잊겠지만 나는 그를 잊을 수 없었다"
1분 동안 함께 시계를 바라보던 두 사람
1분은 짧고 여운은 길었다 1분 동안의 여운 때문인지 영화가 끝나고도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문득 비익조(比翼鳥)라는 새가 생각났다
암수가 각각 날개와 눈이 하나씩이어서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는 새
그와 그녀는 비익조였다 1분 동안 사랑은 위대한 행위이자 기억과 싸우는 격전지라는 걸 그때서야 알았다 1분 동안 돌아보니 나도 단 한 줄의 비익조였다
2월
천양희
헐벗은 산속 소나무만 푸르다 늘푸른 소나무! 그 사이로 까치가 날아다닌다 살아 있는 것들이 이렇게 좋다 이곳에서 내 하루가 다 끝날 것 같다 사람은 끝이 좋아야..... 쌓인 낙엽들 벌써 거름 되었다 누굴 위해 날 무릅쓴 적이! 하늘이 날 내려다본다 내가 날 내려다본다 내 몸 끝이 벼랑이다 더이상 내려갈 수 없다 산길도 끝이 있어 주저앉는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까치가 각각각(覺覺覺) 깨우친다
언제나 나는 늦게 깨닫는다 늦은 겨울 한줄기 바람이 능선따라 올라온다 조심할 건 저 늦바람! 지금은 꽃샘바람이 꽃을 시샘하고 있는 중 아마도 입춘대길(立春大吉)할
2월은 홀로 걷는 달
천양희
헤맨다고 다 방황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미아리를 미아처럼 걸었다
기척도 없이 오는 눈발을
빛인 듯 밟으며 소리 없이 걸었다
무엇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이 말없이 걸었다
길이 너무 미끄러워
그래도 낭떠러지는 아니야, 중얼거리며 걸었다
열리면 닫기 어려운 것이
고생문(苦生門)이란 모르고 산 어미같이 걸었다
사람이 괴로운 건 관계 때문이란 말 생각나
지나가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걸었다
불가능한 것 기대한 게 잘못이었나 후회하다
서쪽을 오래 바라보며 걸었다
오늘 내 발자국은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된다는 말 곱씹으며 걸었다
나의 진짜 주소는
집이 아니라 길인가?
길에게 물으며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