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Отцы и дети [Ottsy i deti] 1862)
Ivan Sergeevich Turgenev
1
1859년 5월 20일, XXX거리에 있는 한 여인숙에서의 일이었다.
“어떻게 됐어, 피오트로(Piotr)? 아직도 보이지 않는가?”
높지 않은 현관에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안으로부터 나타난, 약간 짧고 먼지 투성이가 된 외투에 바둑 줄무늬의 양복바지를 입은 40쯤 되어 보이는 한 신사가 자기 하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인은 턱에 허연 솜털이 났으며, 작고 흐리멍덩한 눈초리의 오동통한 젊은 사나이였다.
하인은 한쪽 귀에 단 터키옥의 작은 귀걸이, 포마드를 바른 군데군데 빛깔이 다른 머리털, 은근한 몸짓 등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것이 가장 새로운, 진보한 세대의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큰길 쪽을 거드름을 피우며 바라보고 나서 대답했다.
“아니요, 나타나시지 않으셨습니다.”
“보이지 않는가?”
주인은 거듭 물었다.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하고 하인은 또 한 번 대답했다. 주인은 한숨을 쉬고 조그마한 벤치에 걸터앉았다. 그가 다리를 포개고 생각에 잠긴 듯이 주위를 둘러보며 벤치에 앉아있는 동안, 독자에게 그를 소개해 두겠다. 그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Nikolai Petrovitch Kirsanov)라 불리고 있다. 그는 이 여인숙-15마장쯤 떨어진 곳에 농노 200명을 거느린 훌륭한 토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한편 농민들과의 사이에 토지의 경계선을 정하여 농장을 만든 이후로 면적 2000정보의 소유지라 불리기도 한다.
그의 아버지는 1812년(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침공해 들어온 해)에 용맹을 떨친 장군으로 별로 읽고 쓸 줄도 몰랐으며, 버릇도 없었지만, 악의가 없는 러시아의 사나이였다. 그의 일생은 각고정려의 연속이었으며, 처음에는 여단장이었다가 나중에는 사단장이 되었는데 줄곧 지방에서만 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계급 덕분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의 형 파벨(Pavel)과, 이분에 대해서는 뒤에 나온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남부에서 태어났으며, 14세가 될 때까지 엉터리 가정교사들이나 버릇은 없지만 아첨하기를 잘하는 부관들, 그 밖의 연대 참모부에 있던 자들에게 둘러싸여 집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콜랴진 집안 태생으로 처녀시절에는 아가타(Agathe)라고 불리었으나 장군 부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자신의 이름 옆에 다른 이름이 붙어 아가포클레야 쿠지미니시나 키르사노프(Agathokleya Kuzminishna Kirsanov)라 불리게 되었다. 그녀는 화려한 모자를 쓰고, 비단옥으로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며, 교회에서는 맨 먼저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고, 큰 소리로 잘 떠들어댔으며, 아침에는 자식들을 불러 손에 입을 맞추도록 시켰고, 밤에는 자식들을 축복해주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극히 만족하게 살고 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유난히 용기가 없을 뿐 아니라 겁쟁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지만, 형 파벨과 마찬가지로 군무에 종사해야만 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입대 통지서가 와 있던 바로 그날, 그는 한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어 두 달 동안 침대에 눕게 되더니, 그만 평생을 절름발이로 지내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에 대한 일을 단념하고 문관으로 만들기로 하였다. 아버지는 그가 열여덟이 되자 곧 페테르스부르크로 데려가서 대학에 넣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의 형은 그 무렵 근위연대의 사관이 되어 있었다. 젊은 두 사람은 외가로 아저씨가 되는, 일리야 콜랴진(Ilya Kolyazin)이라는 고관으로부터 어딘지 모르게 감시를 받으면서, 한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자기 사단과 아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분방한 서기식의 필적으로 가득 채워 쓴 사절지의 회색 종이를 아들에게 부쳐줄 뿐이었다. 이 사절지 한구석에는 육군소장 피오트로 키르사노프(Piotr Kirsanov, General-Major)라는 글자가 매우 공들인 듯한 소용돌이 무늬에 둘러싸여 화사하게 쓰여 있었다. 1835년에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학사로서 대학을 졸업했고, 같은 해에 아버지 키르사노프 장군은 사열에 실격했다는 이유로 퇴역하게 되어 아내와 함께 페테르스부르크로 집을 옮겼다. 장군은 타브리체스키(Tavrichesky) 공원 옆에 집을 얻어 살며, 영국 클럽(부자로 바탕이 좋은 지주나 고관만을 회원으로 하였음)에도 가입할 만큼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졸도하여 죽고 말았다. 아내[fit. Agathokleya Kuzminishna]도 이어 그 뒤를 따랐다.
그것은 외로운 도시생활에 융화될 수 없었고 퇴역생활의 슬픔이 그를 좀먹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양친이 살아 있을 때부터 두 사람을 꽤나 심려시키고 슬프게 했는데, 그것은 그가 전에 있던 하숙집 주인 프레폴로벤스키(Prepolovensky)라는 관리의 딸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쁘장하며, 이른바 현대 여성으로서 여러 잡지의 과학란에 실린 진지한 논문을 읽곤 했었다. 그는 부모상을 마치자 곧바로 그녀와 결혼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연고로 취직했던 황실영지성을 그만두고 처음에는 산림학교[the Lyesny Institute] 근처의 별장에서, 나중에는 시내로 나와 계단도 있고 좀 추워 보이는, 응접실이 있는 어느 조촐하고 아담한 집에서 사랑하는 마샤(Masha)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맨 나중에는 농촌에 거처를 정하고 거기서 얼마 안 되어 아들 아르카디(Arkady)를 낳았다. 부부는 지극히 만족하며 평온하게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언제나 떨어지는 일이 없이, 원앙새처럼 함께 무엇이든 읽거나 함께 피아노를 치거나 이중창을 부르곤 하였다. 그는 꽃을 가꾸고 새장을 돌보기도 하며 가끔 사냥을 나가거나 농장 관리를 하기도 했다. 아르카디도 점점 자랐고, 그도 또한 만족해하며 평온하였다.
10년이 꿈처럼 흘렀다. 1847년에 키르사노프의 아내가 세상을 떴다. 남편은 간신히 그 타격을 이겨냈으나 수주일 동안에 머리가 희어버렸다. 조금이라도 울적한 기분을 풀기 위하여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려 했지만… 이미 1848년(프랑스는 1848년 2월과 6월에 혁명이 일어났고, 그때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국민의 외유를 금지)이 다가왔다. 그는 할 수 없이 시골로 돌아와서 꽤 오랫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가 농장관리의 개선에 손을 댔다. 1855년에 그는 아들을 대학에 넣었다. 아들과 세 차례의 겨울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지냈고 거의 아무 데도 나가지 않았으나 아르카디의 젊은 친구들과는 친해보려고 애썼다. 마지막 겨울에도 그는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금 이 1859년 5월에 이미 백발이 되었고 뚱뚱하게 몸이 불었으며, 약간 등이 굽은 그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찍이 그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학사 학위를 받은 아들을 그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태양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인은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또는 아마도 주인의 눈에 띄는 곳에 있는 게 거북한지, 출입문 쪽으로 들어가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고개를 푹 숙이고 현관의 낡은 계단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통통한 얼룩배기 병아리 한 마리가 그 커다란 노란 발로 껑충껑충 소리를 내면서, 한 발 한 발 계단 위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 마리의 때묻은 고양이가 계단의 난간 위에 거드름을 피우는 양 웅크리고 앉아서 그 병아리를 밉살스러운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여인숙의 어둠침침한 현관 입구에는 따뜻한 호밀빵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우리의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공상에 잠겨 있었다. 아들 녀석이… 학사… 아르카디가…하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이런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이든 다른 생각을 해보려 해도 또다시 같은 생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죽은 아내를 생각하였다.
“조금만 기다려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그는 중얼중얼 투덜거렸다. 토실토실한 흰 비둘기 한 마리가 길바닥에 날아와 앉더니 아장아장 샘 옆의 웅덩이로 물을 마시러 갔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그쪽을 가만히 바라보았을 때 이미 그의 귀에는 가까워오는 마차 바퀴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오시는 것 같습니다.”
하고 출입문 쪽에서 급히 내달아오며 하인이 이렇게 말했다. 세 필의 역마를 단 여행마차가 나타났다. 마차 안에서는 학생모의 테와 그리운 얼굴의 눈에 익은 윤곽이 언뜻 보였다
“아르카디, 아르카디”
하고 키르사노프는 큰 소리로 외치면서 뛰어나가 두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이미 그의 입술은 아직 수염이 하나도 나지 않은, 먼지가 뿌옇게 앉고 볕에 그은 젊은 학사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2
“아버지, 먼지를 털게 해주세요.”
하고 아르카디는 여독으로 얼마쯤 쉰 듯하였지만 아버지의 포옹을 들뜬 기분으로 맞으면서, 청년다운 낭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버지에게 먼지를 묻혀드리고 있잖아요.”
“괜찮다, 괜찮아”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다정한 미소를 띠면서 거듭 말하고 아들의 외투 깃과 자신의 외투를 두어 번 손으로 털었다.
“네가 정말 보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
하며 옆으로 비켜서면서 이렇게 말하더니, 곧장 빠른 걸음으로 여인숙 쪽을 향해 걸어가면서 “어서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너라, 말을 빨리 준비하고”
하고 말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자기 아들보다도 훨씬 흥분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는 약간 도가 지나쳐 침착성을 잃은 것 같았다. 아르카디는 아버지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버지”
하고 그는 말했다.
“제 친구 바자로프(Bazarov)를 소개하겠어요. 제가 가끔 편지에 썼던 그 사나이입니다. 우리 집에서 잠시 머무르는 것을 쾌히 응해주었어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급히 돌아서서 여행마차에서 방금 내려선, 술이 달린 길고 헐렁헐렁한 웃옷을 입은 키 큰 사나이에게 다가가면서, 그 장갑을 끼지 않은 붉은 손을 꼭 쥐었다. 그러나 아들의 친구는 약간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진정으로 기쁘게 여기오.”
하고 그는 말을 꺼냈다.
“이런 누추한 곳에 와준 호의에 감사하오. 실례지만… 자네 이름과 부칭(러시아인에게는 성명 외에, 아버지 이름에 일정한 어미를 붙인 부칭이 있으며 이름과 부칭을 함께 부르는 것이 예의로 되어 있음)은 뭐라 하오?”
“예브게니 바실리예프(Yevgeny Vassilyev)입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나른하긴 하지만 사나이다운 목소리로 대답하고 나서, 웃옷의 깃을 접어 젖히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쪽으로 그 얼굴을 활짝 드러냈다. 길고 홀쭉한 얼굴에다 이마는 넓고, 코는 위쪽으로 펀펀하고 아래쪽은 오똑 솟아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큰 눈에다 모랫빛 구레나룻을 기르고 생기 있는 얼굴에 점잖은 미소를 띠고 있는 품이 자신과 지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Yevgeny Vassilyitch), 제발 우리들 집에서 지루하지 않게 보내주기 바라오.”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을 이었다. 바자로프는 얇은 입술을 약간 움직였으나 아무 대답도 없이 학생모를 조금 들어올려 인사했을 뿐이다. 그의 담갈색 머리는 길고 숱이 많았지만, 유난히 크고 울퉁불퉁한 머리통을 가리지는 못했다.
“아르카디, 그럼 어떻게 할까?”
하고 아들을 돌아보면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또 말을 꺼냈다.
“지금 곧 말을 준비할까? 그렇잖으면 좀 쉬었다 가겠느냐?”
“아버지, 집에 가서 쉬지요, 말을 준비시켜 주세요.”
“지금 곧, 바로 지금 말이지”
하고 아버지는 말을 받았다.
“이봐 피오트로, 들었지? 서둘러서 준비해야 돼.”
현대적인 하인 중의 하나인 피오트로는 젊은 주인의 손에 입맞추러 가지 않고 다만 떨어져서 머리를 숙였을 뿐 다시 출입문 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넌 여기 오는데 포장마차로 왔지만, 네 여행마차에 매달 세 필의 말도 준비됐다.”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그러는 동안 아르카디는 여인숙 안주인이 가져온 양철 국자의 물을 마셨고 바자로프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역마를 풀고 있는 마부 쪽으로 다가갔다.
“여행마차로 가도록 하죠”
하고 아르카디는 나직이 말했다.
“제발 저 친구를 너무 어렵게 생각지 마세요, 겪어보면 아시겠지만, 수더분한 친구로 조금도 잘난 체하거나 하는 점이 없어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마부가 말들을 끌고 왔다.
“이봐, 빨리 하게, 털보 영감”
하고 바자로프가 마부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게 미츄하(Mityuha)”
하고 양가죽 코트의 뒤쪽 벌어진 곳에다 두 손을 쑤셔 넣고 서 있던 다른 마부가 끼어들었다.
“도련님이 자네를 뭐라 부르셨지? 그러고 보니 정말 털보로군.”
미츄하는 다만 모자를 흔들었을 뿐, 잠자코 땀에 흠뻑 젖은 세 필 중 가운데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자, 빨리빨리 해라, 있는 힘을 다해서”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소리를 질렀다.
“술 한 턱 낼 테니”
몇 분 만에 말들이 매어졌다. 아버지와 아들은 포장마차 속에 자리를 잡았다. 하인인 피오트르는 마부석에 올랐다. 바자로프는 여행마차에 뛰어오르더니 머리를 가죽 베개 속에다 묻었다. 그리고 두 대의 마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3
“이제 마침내 너도 학사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구나.”
하고 아르카디의 어깨며 무릎을 만져보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드디어 돌아왔어.”
“큰아버지께서는 어떠세요? 안녕하신가요?”
하고 아르카디가 물었다.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마치 어린 아이 같은 기쁨에 벅차면서도, 두 사람의 대화로 흥분한 기분을 되도록 빨리 가라앉히고 싶었던 것이다.
“별고 없으시다. 형님도 나와 함께 너를 마중하러 나오고 싶어 하셨었는데 다른 일이 생겨서.”
“저를 오래 기다리셨나요?”
하고 아르카디가 물었다.
“그랬지, 다섯 시간쯤.”
“아버지가 최고야.”
아르카디는 재빨리 아버지 쪽으로 돌아앉아 그 볼에 소리를 내어 입을 맞췄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가만히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주 훌륭한 말을, 널 주려고 준비해놓았다.”
하고 아버지는 말을 꺼냈다.
“집에 가거든 보려무나, 네 방도 도배를 해놓았단다.”
“바자로프에게도 방이 있습니까?”
“그 사람에게도 쓸 만한 방이 있을 것 같다.”
“아버지, 제발 그 친구에게 친절히 대해주세요. 제가 그 친구와의 우정을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고 있는지 아버지에게는 다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넌 그 사람과 사귄 지가 오래되지 않았느냐?”
“얼마 안돼요.”
“그래서 지난겨울에는 그 사람을 볼 수가 없었구나. 그 사람은 무얼 하는 사람이냐?”
“전공은 자연과학입니다. 정말 뭐든지 다 알고 있어요. 내년에는 의사 시험을 보고 싶다는가 봐요.”
“아아, 의과로군.”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피오트르”
하고 부르며 한 손을 들어 가리켰다.
“저기 우리 농부들이 가고 있는 것 같은데?”
피오트르는 주인이 가리킨 옆쪽으로 눈을 돌렸다. 재갈을 벗긴 말들이 끄는 사륜마차 몇 대가 좁은 시골길을 매우 급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다른 짐마차에도 양가죽 코트의 앞자락을 열어젖힌 농군들이 한 사람씩 혹은 두 사람씩 타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하고 피오트르가 대답했다.
“도대체 저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읍으로 나가는 길인가?”
“아마도 읍 쪽일 겁니다. 술집에 가는 길이겠죠”
하고 하인은 얕잡아 말하며, 동의를 구하기라도 하는 듯 마부가 있는 쪽으로 약간 몸을 기울였다. 그러나 상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우직한 구식 남자로 최신식의 사고방식에는 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올해는 나도 농부들 때문에 속 썩는 일이 많았었다.”
하고 아들을 바라보면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을 이었다.
“소작료를 내지 않는단 말이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버지, 머슴들은 마음에 드십니까?”
“응”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완고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부추김을 당하고 있으니 난처한 노릇이지. 진정으로 노력하겠다는 생각이 아직 없는 거야. 그놈들은 농기구만 망가뜨리고 있어. 그래도 밭갈이만은 그럭저럭 제대로 마치긴 했다. 고생이 있으면 낙도 있는데 말이야. 그런데 너는 농업에 취미를 가지게 되었느냐?”
“아버지 농장에는 그늘이 없어서 그게 유감이에요.”
하고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북쪽 발코니에다 차양을 만들어 붙였다. 이제는 바깥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게 되었단다.”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마치 무슨 별장 같겠군요… 그러나 그런 건 대단한 게 아니에요. 그 대신 여기는 공기가 아주 썩 좋잖아요. 냄새도 아주 향기롭고요. 정말 이 지방처럼 좋은 냄새를 풍기는 곳은 세계 어디를 가도 없을 거예요. 정말 여기에선 하늘도…”
아르카디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뒤를 흘긋 돌아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지”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너는 여기서 태어났으니까 여기 것은 뭐든지 특별하게 생각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렇지만 아버지, 인간이 어느 곳에 태어나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그렇지만 말이다.”
“아닙니다, 그런 건 정말 아무래도 좋은 거예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옆에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포장마차가 반마장도 채 가지 못한 동안에 두 사람의 대화는 다시 시작되었다.
“네게 편지로 알렸던가 생각나지 않지만”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을 꺼냈다.
“네 유모였던 예고로브나가 세상을 떴다.”
“정말입니까? 불쌍한 할머니. 그런데 프로코피치는 아직 살아있습니까?”
“살아있지. 그리고 조금도 변함없이. 노상 툴툴거리고 있단다. 마리노 마을에서는 별다른 변화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집의 관리인도 그냥 그대로입니까?”
“변했다면 관리인을 바꾼 것뿐일 게다. 자유로운 신분이 된 전의 농노들은 더 이상 고용하지 않을 작정이다. 적어도 어떤 책임 있는 걸 맡기지 않겠다고 결심했단다. (아르카디는 눈으로 피오트르 쪽을 가리켰다.) Il est libre, en effet(저 사람도 실은 해방된 농노란다).”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나직이 말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저 녀석은 하인이니까. 지금 집에는 상인 출신의 관리인이 있는데 제법 일을 할 만한 사나이 같더라. 나는 그자에게 매년 250루블씩 주기로 작정했단다. 그런데 말이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속으로 망설이고 있을 때 언제나 그러듯이, 한손으로 이마와 눈썹을 문지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아까 마리노 마을에는 눈에 띄는 변화는 없을 거라고 네게 말했지만… 그건 전혀 당치도 않은 말이란다. 나는 네게 사전에 이야기해 두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는 잠시 말을 더듬었지만, 곧 프랑스어로 말을 계속했다.
“엄격한 도학자라면 내 솔직함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첫째로 이런 건 숨겨둘 수가 없으며, 둘째로는 너도 잘 알다시피 나는 언제나 부자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문제에 대해서는 내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있단다. 그렇다하더라도 물론 넌 나를 비난할 권리가 있다. 이 나이에… 한 마디로 말해서, 그건… 그 처녀 말이다. 너도 어쩌면 벌써 들었을는지 모르지만…”
“페치니카 말입니까?”
하고 아르카디는 거침없이 물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얼굴이 빨개졌다.
“제발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지 말아다오, 그렇단다… 그녀는 지금 내 집에서 살고 있단다. 나는 그녀를 우리 집에 있게 했지… 쓰지 않는 작은 방이 두 개 있어서 말이다. 그러나 물론 그런 건 모두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거니까.”
“무슨 말씀을, 아버지, 어째서 그러시는 겁니까?”
“네 친구가 우리와 함께 지내게 되면… 거북할 테니까…”
“바자로프 일이라면 제발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친구는 그런 건 모두 초월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너도 역시”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덧붙였다.
“딴채가 허술해서… 걱정이구나.”
“아버지,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하고 아르카디가 말을 받았다.
“마치 용서를 비는 것 같으신 데요. 남이 보면 우습게 생각하겠어요.”
“물론 나는 남의 웃음을 사게 되어 있다.”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더욱 얼굴이 붉어지면서 대답했다.
“그만두세요, 아버지, 제발 그러시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하고 아르카디는 상냥하게 웃음을 지었다.
‘무엇을 저다지도 미안해하실까?’ 하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선량하고 친절한 아버지에 대한 너그러운 애정이 남모르는 우월감과 뒤섞이어 그에게 가슴 뿌듯한 느낌을 주었다.
“제발 그러시지 마세요.”
하고 그는 자기 자신의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무의식중에 뿌듯해하며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자기 이마를 문지르고 있는 손가락 사이로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무언가 가슴을 찌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자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여길 봐라, 여기서부턴 벌써 우리 밭이란다.”
하고 오랜 침묵 끝에 아버지는 이야기를 꺼냈다.
“저 앞에 보이는 건 우리 숲이지요?”
하고 아르카디가 물었다.
“그렇지, 우리 것이었지. 그러나 얼마 전에 팔아버렸다. 올해는 목재로 쓰려고 베어 가겠지.”
“어째서 팔아버리셨어요?”
“돈이 필요했었지. 게다가 그 토지는 농부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어서.”
“소작료를 내지 않는 그 농부들 말입니까?”
“그건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러나 언젠가는 지불할 테지.”
“숲을 팔다니 아까운 일인데요.”
하고 아르카디는 말하고 나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지나가고 있는 곳은 그림처럼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밭 너머 밭이 있으며, 조금 높아지는가 하면 다시 낮아지면서 지평선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여기저기에 그다지 크지 않은 숲이 눈에 뜨이고 또 듬성듬성 낮은 관목이 흩어져 나 있으며, 좁은 골짜기가 꼬불꼬불 이어져 있었다. 그러한 풍경은 두 사람의 눈에 마치 에카테리나 여왕 시대의 옛날 지도 속에 그려진 풍경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험한 언덕의 양쪽에 둘러친 작은 시내와 제방이 헐기 시작한 몇 군덴가의 조그만 못과 대개는 반쯤 바람에 날려버린 어둠침침한 지붕 밑에 나지막한 농가가 늘어선 한 촌락이 나타났다. 마른 가지로 엮은 벽이 기울기 시작한, 보리타작하는 헛간의 커다란 문은 텅 빈 곡물 창고 옆에 빠끔히 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벽이 헐어 떨어진 벽돌집 교회당이 있는가 하면, 십자가는 기울고 묘지 목책은 낡아 쓰러진 것이 가는 길에 나타났다.
아르카디의 가슴은 조금씩 죄어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이 마주친 농부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헌 누더기를 걸치고 바짝 여윈 말을 타고 있었다. 누더기를 걸친 거지처럼 껍데기가 벗겨지고 가지가 꺾여진 버들이 마을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말라붙어서, 마치 물어뜯기라도 한 것처럼 털이 꺼칠꺼칠하고 빼빼 마른 암소들이 시궁창 옆에 있는 풀을 걸신들린 양 뜯어먹고 있었다. 소들은 무엇인지 아주 무서운,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독아(毒牙)에서 이제 방금 뿌리치고 뛰어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는 화창한 봄날의 불쌍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눈발이 휘날리는 엄동설한을 수반하는, 아무 즐거움도 없고 끝도 없는 겨울의 흰 환영이 눈앞에 나타나기라도 할 것 같았다.
“아니다.”
하고 아르카디는 생각했다.
“이 지방은 풍요롭지가 못한 것이다. 만족이라든가 근면이라든가 하고 떠들어보았댔자 쓸데없는 짓이야. 안 되니, 이런 꼴로 가만 놔둬서는 안 되지. 어떻게 해서라도 개조해야 돼… 그러나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어떻게 손을 대면 된단 말인가?”
아르카디는 이러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봄은 그 호사함을 되찾고 주위의 모든 것을 금빛 찬란한 푸른빛으로 되어 있었다. 나무들도, 관목도, 풀도, 모든 것들이 따사로운 미풍의 고요한 입김 아래 물결치듯 나부끼며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끝없이 철철 흐르는 시냇물처럼 종달새들이 소리 높이 노래하고 있었다. 방울새들은 풀밭 위를 맴돌며 날아다니면서 울어대는가 하면 군데군데 쌓여 있는 흙 위를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있었다. 또 키가 낮은, 봄에 씨 뿌린 곡식의 부드러운 푸르름 속에서는 선명한 까만빛을 번득이며 까마귀들이 한가로이 날고 있었다. 까마귀들은 벌써 약간 흰빛이 도는 호밀밭 속으로 그 모습을 숨기고, 다만 그 조그마한 머리를 몇 개 호밀밭의 희뿌연 속에 드러낼 뿐이었다. 아르카디는 가만히 쏘아보고 있었으나 이내 그의 사색은 엷어지다가 사라져버렸다. 그는 자기 외투를 벗어 제치고 매우 유쾌한 듯이, 마치 어린 사내아이처럼 아버지를 쳐다보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다시 끌어안을 정도였다.
“자, 이제 거의 다 왔다.”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입을 열었다.
“이제 이 언덕을 오르기만 하면 집이 보일 게다. 이제부터 함께 재미있게 살자꾸나, 만일 괜찮다면 농사일을 도와다오, 우리들은 이제부터 사이좋게 지내면서 서로를 잘 이해해주어야 할 게 아니냐?”
“물론 그렇습니다.”
하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아주 날씨가 좋군요.”
“그건 네가 돌아왔기 때문이지. 정말 눈이 부시는 봄 날씨로구나. 하지만 나는 푸슈킨의 시에 동감이다. 기억하고 있겠지. 에프게니 오네긴 가운데에 이런 구절이 있지 않느냐. 네가 찾아오면 왜 이다지도 슬프냐, 봄이여, 봄이여 사랑의 계절이여. 무엇이…”
“아르카디”
하고 여행마차에서 바자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로 성냥을 보내주게. 파이프에 불을 붙이지 못하고 있단 말이야.”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르카디는 아버지의 시 낭송에 약간 어리둥절했지만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급히 주머니에서 은제 성냥갑을 꺼내어 피오트르를 시켜 바자로프에게 건넸다.
“궐련을 줄까?”
하고 또다시 바자로프가 외쳤다.
“보내주게나”
하고 아르카디가 대답했다. 피오트르는 포장마차로 돌아와서 성냥갑과 함께 굵직하고 검은 궐련을 건넸다. 아르카디는 그것을 천천히 피우면서 몹시 강하고 독한 냄새를 주위에 풍겼다. 그런데 그 냄새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지금껏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에겐, 아들에게 무안을 주지 않기 위해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이긴 하지만, 무의식중에 코를 옆으로 돌렸을 정도였다. 25분쯤 지나 두 대의 마차는 붉음 함석지붕에 회색 칠을 한 목조건물의 현관 앞에 멈춰 섰다. 여기가 이른바 마리노(Maryino) 마을, 일명 노바야(Novaya [New], 슬로보드카 слободка [slobodka] 새로운 자유농민의 마을) 또는 보브일리 후토르(Бобылий хутор [Bobyliy khutor], 소작인의 마을)였다.
4
많은 하인들이 주인을 마중하러 현관으로 몰려든 건 아니었다. 열 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혼자 모습을 나타냈을 뿐으로, 그 뒤를 이어 집안에서 나온 것은 피오트르와 아주 흡사한 젊은 친구였다. 그는 가문 표지가 새겨진 흰 단추가 달린 회색 제복을 입은, 파벨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의 하인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포장마차의 작은 문을 열고 또 여행마차의 덮개를 벗겼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아들과 바자로프와 함께 어둠침침하고 거의 텅 빈 대청을 빠져나가 제법 현대적으로 꾸며진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때 대청문 뒤에서 젊은 여자의 얼굴이 언뜻 눈에 띄었다.
“이제야 집에 도착했구나”
하고 모자를 벗고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입을 열었다.
“뭣보다도 먼저 저녁을 먹고 푹 쉬는 게 제일이야.”
“먹는 건 확실히 나쁘지 않은 일이지요.”
바자로프는 손과 발을 쭉 뻗으며 얘기하고 나서 소파에 걸터앉았다.
“암, 그래그래, 저녁을 가져오너라. 빨리 저녁을 먹어야겠어.”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럴 만한 이유가 아무 것도 없는데 말을 굴렀다.
“아, 마치 프로코피치(Prokofitch)도 저기 오는군.”
머리가 하얗고 여위었으며, 가무잡잡한 얼굴에 구리 단추가 달린 연미복을 입고 목에 장밋빛 목도리를 한 60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노인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싱끗 웃곤 이내 아르카디에게로 다가가서 그 손에 입을 맞추고, 손님에게 머리를 숙인 다음 문 쪽으로 물러나 뒷짐을 지고 섰다.
“이봐, 프로코피치, 저 애가 마침내 집에 돌아왔어… 어때, 저 애를 어떻게 생각하나?”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을 꺼냈다.
“매우 훌륭해 보이십니다.”
하고 노인은 말하며 또다시 싱끗 웃었으나, 이내 그의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저녁식사 준비를 시키시는 겁니까?”
하고 그는 새삼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암, 그래그래, 부탁이야. 그런데 바자로프, 먼저 자네 방으로 가보겠나?”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제발 염려하시지 마십시오. 다만 제 변변치 못한 가방과 그리고 헌 의복을 그리로 갖다 놓도록 말씀해주십시오.”
하고 바자로프는 자기 웃옷을 벗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하지. 프로코피치, 이분 외투를 들여다놓게. (프로코피치는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바자로프의 헌 옷을 받아들고 그것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더니, 발꿈치를 들고 방을 나갔다) 그런데 아르카디, 잠깐 네 방에 가보지 않겠느냐?”
“예, 몸을 씻어야겠어요.”
아르카디가 대답하고 문 쪽으로 갔을 때 중키의 남자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새카만 영국제 조끼가 딸린 양복에 요즘 유행하는 넥타이를 나지막하게 매고 니스 칠을 한 반장화를 신은 파벨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Pavel Petrovitch Kirsanov)였다. 언뜻 그는 45세쯤 되어 보였다. 그 짧게 깎은 회색 머리에는 거친 은처럼 검은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상아빛이고 주름살이 없어 마치 얄팍한 칼이나 무엇인가로 다듬기라도 한 것처럼 단정감과 청결감을 주었으며, 젊었을 때의 대단했던 아름다움의 흔적이 엿보였다. 맑고도 까만 그의 가느다란 눈은 그 중에서도 특히 아름답게 보였다. 이 아르카디의 큰아버지의 풍채는 귀족적으로 우아했으며, 청년과 같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20세가 지나면 사라지게 마련인, 높은 곳을 지향하는 고매한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장밋빛 손톱을 길게 기른 아름다운 손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조카에게 내밀었다. 그 손은 커다란 오팔 단추로 채운 눈같이 흰 커프스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우선 유럽식으로 악수를 한 다음에 그는 세 번, 러시아 식으로 조카에게 입을 맞추었다. 즉 조카의 뺨에 자기의 향수 냄새가 나는 콧수염을 서너 번쯤 가볍게 갖다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잘 돌아왔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를 바자로프에게 소개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 날씬한 몸을 약간 굽히고 조금 미소를 띠었으나 손을 내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손을 도로 주머니 속에 넣었다.
“오늘은 네가 돌아오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고 그는 상냥스럽게 몸을 흔들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아름다운 흰 이를 드러내 보이면서, 반가운 듯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는 도중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아무 일도 없었어요.”
하고 아르카디는 대답했다.
“다만 좀 꾸물거렸던 거예요. 그 대신 우리들은 지금 늑대처럼 배가 고파요, 아버지, 프로코피치에게 좀 서두르라고 해주세요. 전 잠깐 밖에 나갔다 올 테니까요.”
“기다려주게, 나도 함께 가겠네.”
하고 갑자기 바자로프가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소리쳐 말했다. 두 젊은이는 밖으로 나갔다.
“저 사람은 누구냐?”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물었다.
“아르카디 친군데, 그 애 말로는 매우 영리한 사나이랍니다.”
“그 사람도 우리와 함께 지내게 되는 건가?”
“그래요.”
“저 털보 녀석이?”
“그렇다니까”
파벨 페트로비치는 손톱으로 탁자를 톡톡 때렸다.
“아르카디는 제법 s'est degourdi(세련되어진 것 같은데)”
하고 그는 말했다.
“그 애가 돌아와서 기쁘군.”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은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바자로프는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음식만 먹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자신의 이른바 농장생활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고 가까운 장래에 행해질 정부 시책이라든지, 여러 위원회라든지, 의원들이라든지, 기계 설비에 필요한 점 등에 대해서 역설하기도 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식당 안을 천천히 서성거리면서(그는 전혀 식사를 하지 않았다), 가끔가다 붉은 포도주가 담긴 작은 글라스의 술을 맛보거나, 또는 아주 간간이 아아, 응, 흠 하는 식으로 어떤 의견을 말한다기보다는 차라리 감탄하는 듯한 소리를 내곤 했다. 아르카디는 페테르스부르크의 소식을 몇 가지 들려주면서도 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젊은 사람이 이제 겨우 어린 티를 벗어나서, 자신을 어린애로 보아오던 사람들에게 돌아왔을 때에 느끼는 그러한 어색함이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자기 이야기를 길게 끌기도 하고, 아버지라는 말을 피하고 한번은 아버님이라는 말로 바꾸려고까지 했으나 그것도 실제로는 입안에서 우물쭈물 얼버무릴 정도였다. 또는 지나치게 세련된 태도로 자기가 마시고 싶은 양보다도 훨씬 많은 양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포도주를 단숨에 비워버리기도 했다. 프로코피치는 그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다만 입술만을 깨물 뿐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모두들 흩어져 갔다.
“자네 큰아버지는 좀 괴짜신데”
하고 바자로프는 느슨한 웃저고리를 입은 채 아르카디의 침대 한구석에 걸터앉아 짤막한 파이프를 피우며 말했다.
“시골에서 저런 멋진 모습을 해보았댔자 소용없잖은가. 게다가 그 손톱, 손톱은 전람회에라도 내보냈으면 좋겠어.”
“그건 자네가 모르는 탓이야.”
하고 아르카디가 대답했다.
“정말 예전에 우리 큰아버지는 인기가 대단한 분이셨어. 언젠가 자네에게 큰아버지 이야기를 해주겠네. 정말 미남자로 여자들을 홀딱 반하게 만드셨다네.”
“응, 역시. 결국 옛날 추억 때문이란 말이군. 여기선 아무리 뇌쇄시키려 해도, 유감스럽게도 아무도 없지 않은가. 나는 유심히 보았는데, 그 분의 칼라는 정말 놀랍더군. 마치 돌처럼 딱딱해서 아무리 봐도 이상하고 게다가 턱을 그렇게 들어 올리고 있는 모양하며, 아르카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정말 우습지 않은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정말로 큰아버지는 호인이셔.”
“봉건적인 현상이야. 그러나 자네 아버지는 좋은 분이시더군. 그분이 시를 읽는다든지 하는 건 쓸데없는 일 같지만. 농사일도 제대로 아시지 못하면서 말이야. 그러나 착한 분이시더군.”
“아버지는 나에겐 귀중한 분이시네.”
“그분이 조심스러워하는 것을 자네도 눈치 챘겠지?”
아르카디는 자기는 몰랐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놀랍더군.”
하고 바자로프는 말을 이었다.
“그건 낡아빠진 낭만주의야. 그들은 감정에 완전히 압도될 만큼 자신의 신경조직을 자극시키고 있으나 말이야… 그래서 균형이 깨지는 거지. 그러나 이제 실례해야겠어. 내 방에는 영국식 세면대가 있기는 하지만 문에 자물통이 잠기지를 않아. 어쨌든 영국식 세면대는 장려할 만한 것이지. 곧 진보를 의미하니까 말이야.”
바자로프는 밖으로 나갔다. 아르카디는 즐거운 기분에 싸였다. 자기가 태어난 집에서, 낯익은 침대 위에서, 그리운 손, 분명 유모의 상냥하고 어진, 쉴 줄 모르는 손으로 부지런히 다듬질했을 이부자리에 파묻혀 잠을 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인 것이다. 아르카디는 예고로브나(Yegorovna)를 생각하자 이내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저 세상에 있을 유모를 위하여 편안히 천당으로 가 주기를 빌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았다.
그와 바자로프는 곧 잠이 들었지만, 한집안의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자지 않았다. 아들의 귀가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마음을 흥분시켰다. 그는 침대에 드러눕기는 했지만 촛불을 끄지 않고 팔베개를 한 채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형은 자정이 지났으나 서재에서 함브스(гамбсовом [gambsovom], 프랑스 출신으로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유행가구를 제작하던 사람) 제 안락의자에 앉아, 석탄불이 가물거리는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옷도 벗지 않고 다만 니스 칠한 반장화를 뒷굽 없는 빨간 중국식 슬리퍼로 갈아 신었을 뿐이다. 그는 갈리냐니(Galignani, 파리에서 발행되고 있던 영자신문) 지의 최근호를 손에 들고 있었으나, 읽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만히 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로에서는 파란 불꽃이 가물거리다가는 갑자기 타오르곤 하였다. 그의 생각이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다만 지나간 일에 대해서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긴장되고 엄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은 추억에만 잠겨 있는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표정이다. 뒤쪽 작은 방에는 하늘색 조끼를 입고 까만 머리에 흰 모자를 쓴 한 젊은 여인이 대형 트렁크 위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페니치카였다. 그녀는 무엇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면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혹은 열어놓은 문 쪽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그 문 뒤로는 어린이용 작은 침대가 눈에 뜨이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갓난아이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5
다음날 아침, 바자로프는 누구보다도 일찍 깨어나서 집 밖으로 나갔다.
“이런”
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그는 생각했다.
“여긴 형편없는 곳이로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자기 소작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했을 때, 그는 아주 평평한 불모지를 4정보쯤 새 저택의 부지로 떼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집과 부속 건물과 농장을 건설하고, 정원을 만들고, 못은 한 군데, 우물은 두 군데 팠다. 그런데 어린 나무들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못에는 겨우 조금밖에 물이 괴지 않았으며, 우물은 둘 다 약간씩 염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라일락과 아카시아로 꾸며놓은 정자만이 제법 무성하게 자랐기 때문에, 거기서 가끔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거나 하였던 것이다. 바자로프는 잠시 동안 정원의 샛길이란 샛길은 모두 돌아다니며 가축의 우리나 마구간을 기웃거려 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농장의 두 사내아이를 발견하곤 곧 친해져서 그 아이들과 함께 저택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곳에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늪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
“개구리는 잡아서 뭣에 쓰나요?”
한 사내아이가 그에게 물었다.
“뭣에 쓰냐하면”
하고 바자로프가 대답했다. 그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는 결코 관대하지 않았고 또 매우 무뚝뚝하게 굴었으나, 그들의 신뢰를 자신에게 모으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개구리 배를 좍 갈라서, 그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고 하는 것이다. 너나 나나, 다만 두 발로 걸어다닌다는 것만 다르지 개구리와 똑같으므로, 우리들 뱃속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게 되는 거란다.”
“그래서 그런 걸 뭣에 쓰나요?”
“실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네가 병이 들었을 때, 내가 너를 고치게 될 때 말이다.”
“그럼 나리께서는 의사시군요?”
“그렇단다.”
“바시카, 너 들었지? 이 나리께서 말씀하셨어, 너나 나나 개구리와 똑같다고 말이야, 참 신기하지”
“난 무서워, 개구리란 것이.”
바시카가 말했다. 그 소년은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로 담황색 머리에다 높은 칼라가 달려 있는 헐렁한 회색 웃옷을 입었는데, 발은 맨발이었다.
“뭐가 무섭다고 그래? 개구리가 물지도 않는데?”
“자, 물에 들어가는 거다, 이 어린 철학자들아”
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그 사이에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눈을 뜨고 아르카디 방으로 찾아갔다. 그는 벌써 옷을 다 입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테라스로 나가서 그늘진 차양 안으로 들어갔다. 난간 옆에 있는 탁자 위에서는 아카시아 꽃이 우거진 사이에서 벌써 찻주전자의 물을 든 한 소녀가 거기에 나타났다. 어제 도착한 사람들을 제일 먼저 현관 앞에서 마중했던 그 아이였다. 소녀는 가늘고 야무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페도시야 니콜라예브나(Fedosya Nikolaevna)는 몸이 좀 불편하셔서 나오실 수가 없으십니다. 손수 차를 따라 드시겠는지, 그렇잖으면 두냐샤(Dunyasha)를 보내드려야 할는지, 여쭤 보고 오라 하셨습니다.”
“내가 따르지, 내가 손수”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황급히 말을 받았다.
“아르카디, 넌 차에 무얼 넣어서 마시겠느냐, 크림을 넣겠니, 아니면 레몬을 치겠니?”
“크림을 넣어주세요.”
하고 아르카디는 대답하고 잠시 잠자코 있다가
“아버지?”
하고 불렀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어리둥절하여 아들을 바라보았다.
“뭐냐?”
하고 그는 말했다. 아르카디는 눈을 내리깔았다.
“용서해주십시오, 아버지. 제 질문이 괴로움을 끼쳐드리게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고 그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도 어제 숨기는 일없이 말씀하셨으므로 저도 숨김없이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노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이야기해보렴”
“아버지께서 저한테 이런 걸 물어볼 용기를 주셨으니 여쭙겠는데요… 대체 페니…(Feny…) 그분이 여기에 차를 따르러 나오지 않는 것은 제가 여기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시선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그 사람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거야. 부끄러운 게지…”
“부끄러워할 게 없지 않아요. 첫째 제 사고방식은 아버지께서도 잘 아시는 터이며,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르카디로서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둘째로 제가 아버지의 생활이나 습관을 조금이라도 구속하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게다가 저는 믿습니다만 아버지께서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함께 한 지붕 밑에서 살게 하고 있는 한 그분에게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재판관은 아닙니다. 특히 저는 말씀예요, 특히 아버지처럼 언제든지, 뭐든지 제 자유를 구속한 적이 없는 분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아르카디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관대한 인간이라 느끼고 그와 동시에 자기가 아버지에 대해 무슨 교훈 비슷한 말을 지껄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말이 한 사람의 인간에게 강한 영향을 주는 것이므로 아르카디는 마지막 말을 분명하게 효과가 나타나도록 말했다.
“고맙다, 아르카디”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가락은 또다시 눈썹과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네 생각은 정말 맞다. 물론 그 사람이 그만한 가치가 없었더라면… 이건 결코 경솔하게 넘어갈 일은 아니다. 너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색하구나. 그러나 너도 짐작하겠지만, 그 사람은 네가 있는 곳에, 더욱이 네가 도착한 바로 다음날에 나타나는 것이 거북한 거다.”
“그럼 제가 그분한테로 가겠습니다.”
하고 아르카디는 관대한 마음이 새삼스러이 치밀어 오름을 느끼면서 큰 소리로 외치고 벌떡 일어섰다.
“저를 부끄러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그분에게 설명하고 오겠습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르카디”
하고 말을 꺼냈다.
“제발 부탁이다… 어쩌면 좋을까… 거기에는… 네게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아르카디는 벌써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테라스에서 뛰어나갔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당혹스러운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자신과 아들 사이에 장차 기묘한 관계가 불가피하게 따르리라는 생각을 하였는지, 또는 그가 이 문제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면 아르카디가 좀더 그를 존경하게 되리라고 의식하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비난하였는지 그것은 간단히 말할 수가 없다. 이런 기분은 그의 가슴 속에 있었던 것이지만 감각으로써 그것도 막연하게 느꼈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고 가슴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아버지, 우리는 가까워졌어요.”
하고 그는 제법 상냥하고 득의만면한 선량한 표정으로 이렇게 외쳤다.
“페도시야 니콜라예브나는 확실히, 오늘은 몸이 좀 불편해서 나중에 온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는 제게 동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젯밤에 동생에게 입을 맞출 수 있었을텐데요. 지금 막 입을 맞추고 오는 길이에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무슨 말을 할 듯이 일어서더니, 두 손을 벌리고 아들을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자 아르카디가 아버지의 목을 덥석 끌어안았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아직도 끌어안고 있는 건가?”
하고 두 사람 뒤에서 파벨 페트로비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그가 나타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을 다 같이 기쁘게 했다. 아무리 감동적인 상태에 있을지라도 거기서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어지는 때가 있는 법이다.
“무얼 그렇게 놀라는 겁니까?”
하고 들뜬 표정으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대꾸했다.
“학수고대하던 끝에 겨우 아르카디를 만나기는 했는데… 나는 어제부터 이 애를 실컷 볼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어.”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나도 이 애를 안아 주고 싶은걸.”
아르카디는 큰아버지한테로 다가가서 또다시 자기 볼에 그의 향수 냄새가 나는 콧수염이 가볍게 닿는 것을 느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탁자 앞에 걸터앉았다. 그는 우아한 영국식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에 쓰고 있는 검은 술이 달린 붉은 색 작은 터키모자가 아름다웠다. 이 터키모자와 아무렇게나 맨 넥타이가 시골 생활의 자유스러움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아침의 옷차림에는 노상 그러하듯이, 역시 희지는 않지만 탈색한 루바시카(러시아 특유의 품이 넓은 남자용셔츠)의 거북스러워 보이는 옷깃이 깨끗이 면도를 한 턱을 어색하게 떠받치고 있었다.
“네 새 친구는 어디 있느냐?”
하고 아르카디에게 물었다.
“그 친구는 집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늘 일찍 일어나서 아무 데나 쏘다니죠. 그 친구에게 신경 쓰지 마세요. 딱딱한 예의범절 같은 걸 좋아하지 않는 친구예요.”
“그래 그건 알고 있다.”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천천히 빵에다 버터를 바르면서 말했다.
“그 사람은 우리 집에 오래 머무를 거니?”
“그때 가봐야 알아요. 아버지에게 가는 길에 여기 들른 거예요.”
“그의 아버지는 어디 사시는데?”
“우리와 같은 현으로, 여기서 80마장쯤 되는 곳이에요. 거기에 약간의 소유지가 있대요. 전에는 연대의 군의관이었고요.”
“그래그래… 그 거야, 바로 그거란 말이다. 바자로프라는 성을 어디서 들은 것 같아서 내내 머리를 짜내고 있던 참이야… 니콜라이, 우리 아버님 사단에 바자로프라는 의사가 있었지?”
“있었던 것 같아요.”
“옳아, 맞았어. 그렇다면 그 의사가 저 사람의 아버지란 말이군. 흠”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콧수염을 만졌다.
“그런데 그 바자로프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냐?”
하고 그는 잠시 사이를 두고 물었다.
“바자로프가 어떤 사람이냐고요?”
하고 아르카디는 엷은 미소를 띠었다.
“원하신다면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가 말씀드리겠어요.”
“그래 부탁한다, 얘야.”
“그 친구는 니힐리스트예요.”
“뭐라구?”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물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나이프 끝에다 한 점의 버터를 찍은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 친구는 니힐리스트예요.”
하고 아르카디는 거듭 말했다.
“니힐리스트라면”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을 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러시아어로 허무라는 뜻은 라틴어 니힐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그러한 인간은… 아무것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인간을 뜻하는 것일 테지?”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는 인간이라 하는 편이 좋겠지”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참견을 하고는 이내 버터를 바르기 시작하였다.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아니지요, 아무래도 좋은 건 아니지요. 니힐리스트란 어떠한 원리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인간입니다. 그 원리가 어떠한 존경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조금도 믿으려 들지 않는 인간이지죠.”
“그래서 어떻단 말이냐, 그게 좋다는 말이냐?”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물었다.
“그건 사람 나름이에요, 큰아버지. 어떤 사람에게는 그래도 좋을 것이며, 어떤 사람에겐 아주 나쁠 거예요.”
“글쎄, 그런가. 그러나 그건 우리들과는 아주 딴판이로구나. 구세대의 우리들은 생각하기를 원리 없이는 네가 말하는 이른바, 그 믿을 수 없는 원리 없이는 한 발짝도 걸을 수가 없으며, 숨도 쉴 수가 없단 말이다. Vous avez change tout cela(너희들은 완전히 돌았어). 제발 오래 살아서 하느님께서 너희들에게 장군 계급장이라도 내려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들은 다만 너희들을 주목하고만 있기로 하지. 알았나, 다들… 어허, 참 뭐라 했더라?”
“니힐리스트입니다.”
하고 아르카디는 똑똑하게 말했다.
“그렇지, 예전에는 헤겔 학파라는 게 있었는데, 지금은 니힐리스트로군. 너희들이 그 공허 속에서, 진공 속에서 어떻게 존재해나갈 것인가 두고 보겠다. 그러면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제발 지금 곧 벨을 울려주게. 내가 코코아를 마실 시간이야.”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초인종을 울리고 “두냐샤” 하고 목청을 높여 불렀다. 그러나 두냐샤 대신 페니치카 자신이 테라스에 나타났다. 그녀는 나이가 스물 셋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로, 살결은 희고 부드러우며, 새까만 머리와 눈, 붉은 입술은 어린애처럼 도톰하게 부풀고, 조그만 손은 가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산뜻하고 정교한 무늬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코코아 잔을 가지고 왔는데, 그것을 파벨 페트로비치 앞에 놓으면서 몹시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예쁘장한 얼굴에는 뜨거운 피가 섬세한 피부 속에서 진홍색 물결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탁자 가장자리를 짚은 채 멈춰 서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이 곳에 온 것이 부끄러운 듯하였으나, 그러면서도 이곳에 나올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엄하게 눈썹을 찌푸렸으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당황한 듯 쳐다봤다.
“페니치카, 잘 잤소?”
하고 그는 잇새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고 그녀는 높지는 않지만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자기에게 상냥하게 미소 짓는 아르카디를 곁눈질로 흘긋 바라보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가볍게 몸을 흔들면서 걸어갔는데, 그것이 도리어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테라스에는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코코아를 마시다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기 니힐리스트 군이 오시는군.”
하고 그는 나직이 말했다. 정말 꽃밭 사이를 누비면서 바자로프가 뜰을 걸어오고 있었다. 삼베 웃옷과 아랫바지가 흙탕물에 젖어 있었다. 찐득찐득 달라붙는 늪지대의 식물이 그의 낡은 둥근 모자에 뒤엉켜 매달려 있었다. 그는 오른손에 그리 크지 않은 자루를 들고 있었다. 자루 속에는 뭔지 살아 있는 것이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테라스로 다가와서 꾸벅 인사를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차를 마시는 시간에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내 돌아오겠습니다. 이 포로들을 어떻게 해줘야만 하거든요.”
“자네는 무얼 들고 있나, 두꺼비인가?”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물었다.
“아닙니다. 개구리입니다.”
“그걸 먹는 건가, 아니면 기르는 건가?”
“실험용입니다.”
하고 그는 거침없이 말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렇다면 저걸 해부하려는 거로구나”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원리는 믿지 않으면서 다만 개구리는 믿는다는 거로군.”
아르카디는 유감스러운 듯이 큰아버지를 바라보았으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살며시 어깨를 움츠렸다. 파벨 페트로비치 자신도 재치 있는 말을 한다는 게 잘 되지 않은 걸 느끼고, 농사일에 대한 것이라든지 새 토지 관리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 관리인이 엊그제 그에게 찾아와서 머슴인 포마가 몰래 도망치기를 잘해서 다루기가 힘들다며 호소를 했던 것이다.
“그 녀석은 씨부리는 놈이라서 얼토당토않은 영문 모를 소릴 한 겁니다요.”
하고 지배인은 말했다.
“어디를 가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쁜 평판을 자청하고 다닌단 말씀이에요. 잠시 동안은 얌전히 있다가 또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고 나가버리니 말입니다.”
6
바자로프는 돌아와서 식탁 앞에 앉더니 서둘러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형제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르카디는 슬며시 아버지 쪽을 살피다가 또 큰아버지 쪽을 살피는 것이었다.
“예서 멀리 나갔었던가?”
하고 드디어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물었다.
“저 새로 개간한 숲 옆에 댁의 늪이 있지요. 거기서 저는 도요새를 다섯 마리쯤 날려버렸습니다. 아르카디, 자네라면 쏘아 떨어뜨렸을 텐데.”
“자네는 사냥은 하지 않는가?”
“하지 않습니다.”
“자네는 물리학을 전공하는가?”
하고 이번에는 파벨 페트로비치가 물었다.
“물리학, 그렇지요. 자연과학 전체입니다.”
“게르만인은 최근에 이 방면에 꽤 성공하고 있다는데.”
“그렇습니다. 독일은 이 점에서는 우리들의 선생입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비꼬기 위해 일부러 독일인 대신에 게르만인이라고 했는데 아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자네는 독일인을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가?”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점잖으면서도 신중한 말투로 말했다.
그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오름을 느끼고 있었다. 바자로프의 전혀 거리낌 없는 태도가 그의 귀족적인 기질에 분노를 일으킨 것이다. 이 의사 아들은 굽실거리거나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답조차 띄엄띄엄 귀찮다는 듯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음성은 심술궂을 뿐만 아니라 어딘지 무례한 데마저 있었다.
“그곳 학자는 유능한 사람들입니다.”
“흥, 흐음 그렇다면 러시아의 학자에 대해서는 아마도 그만큼 칭찬할 기분이 나지 않겠군 그래.”
“아마 그럴 겁니다.”
“이건 정말 칭찬할 만한 겸손의 미덕이로군.”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몸을 쭉 뻗으면서 머리를 약간 뒤로 젖히고 이렇게 내뱉었다.
“그런데 아까, 아르카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이야기해준 바에 의하면, 자네는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더군. 권위를 믿지 못한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무엇 때문에 제가 그런 걸 인정해야 합니까? 그리고 제가 무엇을 믿어야 좋단 말씀입니까? 이야기가 이치에 맞으면 ‘나는 동의한다’ 다만 그것뿐입니다.”
“그럼 독일인은 모든 면에서 이치에 맞는 말만 하고 있다는 건가?”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그의 얼굴은 마치 구름 저쪽 높은 곳으로 두둥실 흘러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무관심하고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든 것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바자로프는 하품을 억누르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는데, 그는 분명히 논쟁을 계속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아르카디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질렸어, 네 친구는 정말 예의범절이 바르군 그래’ 하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나 자신으로 말하자면”
하고 그는 약간 애쓰는 기색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좋은 일은 못 되나, 나는 독일인을 역성 들지는 않지. 러시아의 독일인에 대해서는, 그건 물론 논의할 것도 못 되는 정말 보잘것없는 것들이지. 그러나 독일의 독일인도 나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거든. 그래도 옛날 한때는 독일인 중에도 저 실러라든가 괴테라든가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여기 있는 내 동생도 그들에겐 특별한 호의를 지니고 있지만… 지금은 화학자라든가 유물론자라든가 하는 패들만이 판을 치고 있단 말이야…”
“훌륭한 화학자는 어떠한 시인보다 스무 배나 더 쓸모가 있습니다.”
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가로챘다.
“호호, 그래”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그는 마치 졸고 있는 듯이 눈썹을 조금 추켜세웠다.
“자네는 예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로군.”
“돈 버는 예술이라든가, 치질을 고치는 예술은 말입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얕보는 듯한 냉소를 띄면서 언성을 높여 말했다.
“흥, 그래그래, 그건 설마 농담이겠지. 그렇다면 자네는 모든 걸 부정하는 거로군? 그건 그렇다 하고 결국 과학만을 믿는다는 말이지?”
“저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과학이란 대체 뭡니까? 과학 일반 말씀입니다. 각종 직업에 칭호가 있듯이 과학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과학 일반이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말 옳은 말씀이여. 그럼 그 밖의 인간생활에 사용되고 있는 법률 따위에 대해서도 이러한 부정적 태도를 취하고 있겠군?”
“아니, 이건 신문입니까?”
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파벨 페트로비치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끼어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여보게,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자네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기로 하세. 그리고 자네 의견도 자세히 들어보고 내 의견도 말함세. 나는 자네가 자연과학을 하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기쁘다네. 내가 듣기에는 리비히(독일의 화학자)가 전답의 비료에 대해 놀랄 만한 발명을 했다더군. 제발 내 농사에 대하여 지도해줄 수는 없겠는가? 무슨 좋은 도움을 받을 수는 없겠는가?”
“무슨 일이든 분부해주십시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 리비히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우선 알파벳을 익히고 나서 책을 읽어야 하는데, 우리들은 아직 그 초고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역시 이 녀석은 정말 니힐리스트다운데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생각했다.
“어쨌든 기회가 있으면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형님, 우리들은 이제부터 토지 관리인을 만나보러 가야겠군요.”
파벨 페트로비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래야지”
하고 그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위대한 지식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와, 이런 시골에 5년간이나 처박혀 산다는 것은 불행한 노릇이야. 아주 바보처럼 되니 말이야. 배운 걸 잊지 않으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문득 그런 것은 모두가 허사라는 것을 알게 돼. 그리고 사물의 이치를 아는 인간은 그런 시시한 짓은 하지 않는 거다, 너 같은 것을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늙은이라는 거다 하는 평이 돌게 마련이지. 정말 큰일이야. 젊은이들이 우리들보다 현명한 것 같아.”
파벨 페트로비치는 천천히 발꿈치를 돌려 조용히 걸어 나갔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어찌된 거야, 저분은 언제나 저러신가?”
하고 형제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에게 냉정하게 물었다.
“예브게니, 자네가 지나치게 말대꾸를 한 거야.”
하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자네는 그분을 노하게 한 거야.”
“자네 말이 옳아. 내가 그런 사람들을, 그런 시골뜨기 귀족들의 응석을 보고만 있겠는가 말이야. 정말 그런 것은 모두 자만심이야, 우쭐거리는 나쁜 버릇이야. 진부한 재담꾼 기질이야. 그러나 그분이 그게 취미시라면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더 활약하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만 그런 분은 멋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거야. 나는 꽤 보기 드문 물방개를 잡았어. 디티스쿠스 마르기나투스(Dytiscus marginatus)라는 건데, 알겠지? 그걸 자네에게 보여주겠네.”
“나는 자네에게 그분의 이야기를 해주기로 약속했었지”
하고 아르카디는 입을 열었다.
“물방개 이야기 말인가?”
“아니, 그건 그만두게, 예브게니. 내 큰아버지 내력 말일세. 우리 큰아버지는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조롱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동정이 갈 만한 분이지.”
“나는 구태여 말리진 않겠네. 그런데 어째서 자네는 그토록 그분에게 흥미를 갖고 있지?”
“공정해야 되니까 말일세, 예브게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그러지 말고 들어주게…”
그리고 아르카디는 자기 큰아버지의 내력을 친구에게 들려주었다. 독자들은 그 내력을 다음 장에서 알게 될 것이다.
7
파벨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는 그 아우 니콜라이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자기 집에서 다음에는 중앙 유년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그 두드러지게 뛰어난 용모로 인하여 남의 이목을 끌었다. 게다가 그는 매우 자신만만하였고 약간 남을 깔보는 버릇이 있었으며, 더구나 그의 해학적인 행동 때문에 누구한테서나 귀염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사관이 되자 여기저기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사고 있었으므로 장난을 치기도 하고,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짓조차도 그한테는 어울렸다. 여자들은 그에게 반해서 미칠 지경이었으며, 남자들은 그를 멋쟁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그를 부러워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아우와 한집에 살며, 또한 조금도 아우와는 닮은 점이 없는데도 아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아우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약간 절름발이였다. 이목구비는 좀 작은 편인데도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으며, 약간 수심을 띤 그다지 크지 않는 검은 눈과 부드러운 가는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그는 게으름을 잘 피웠지만, 책은 즐겨 읽었으며, 세상과의 접촉을 꺼려했다.
형인 파벨 페트로비치는 하룻밤도 집에서 지낸 적이 없으며, 그 과감성과 기민성은 유명했었다. 그는 사교계의 청년들 사이에 체조를 보급시키려 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읽은 것이라고는 겨우 대여섯 권의 프랑스어 책뿐이었다. 28세에 그는 벌써 대위가 되어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찬란한 출세의 길이 열려 있었다. 그럴 즈음에 모든 것이 바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무렵 페테르스부르크의 사교계에 P공작부인이라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부인이 가끔가다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에게는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예의는 바르지만 머리가 좀 모자라는 남편이 있었는데, 자식은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외국으로 떠나는가 하면, 또 갑자기 러시아로 돌아오는 등 대체로 이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불성실한 바람둥이 여자라는 평판이 나 있었으며 열심히 온갖 종류의 쾌락에 빠져 있었다. 또 젊은 사내들과 지칠 정도로 춤을 추었고, 또 소리 높이 깔깔거리고 웃었으며 농담을 했다. 또 식사 전에 응접실의 어두컴컴한 곳에서 젊은이들과 만나곤 했다. 그런가 하면 밤이면 눈물을 흘리거나 아무 데도 마음을 달래줄 곳을 찾을 수 없다는 듯이 기도를 드리곤 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가끔 날이 샐 때까지 자기 방에서 괴로워하며 손을 비틀어대며 방안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앉아서 파리하게 싸늘한 표정을 짓고 성서의 시편을 읽기도 했다. 그러다가 해가 뜨면 그녀를 부르는 곳으로 달려가 웃고, 담소하고 하면서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는 것이 있으면 무엇에든지 간에 자기 자신을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매우 훌륭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 내려뜨린 머리는 금빛으로 황금처럼 무겁게 무릎 밑까지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미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얼굴 전체에서 예쁜 곳이라고는 다만 눈뿐이었다. 그것도 그다지 크지 않은 잿빛 눈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눈의 표정이었다. 재빠르면서 예리하고, 대담하리만큼 태연자약하며, 또 우울할 정도로 생각에 잠기는 수수께끼와 같은 그 눈의 표정이었다. 그녀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뭔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일 때에도 그 눈의 표정에는 뭔지 수상쩍은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옷차림에 신경을 썼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어느 무도회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어 함께 마주르카를 계속 추었는데, 그 동안 그녀는 한 마디도 분별 있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다. 이성을 꾀어 차지하는 데 익숙한 그는 이번에도 역시 자기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의 열정을 만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는 더욱더 괴로웠고 한층 강하게 그 여자에게 끌려 들어갔다. 그녀는 완전히 몸을 내맡기고 있을 때라도 여전히 더 이상 깊이 아무도 들어가 볼 수 없는, 뭔가 비밀스러운, 근접하기 어려운 것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 영혼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녀는 어떤 불가사의한, 자기 자신도 모를 힘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힘은 뜻대로 그녀를 농락하는데 그녀의 대단치 않은 머리로는 그 힘에 의한 순간적인 충동을 어찌할 수가 없는 듯했다. 그녀의 행동은 모두가 모순투성이였다. 이를테면 그녀의 남편에게 가장 의심을 품게 할 유일한 단서라고 할 수 있는 그런 편지를 그녀는 자기가 거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써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슬픔의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웃지도 않았고 자기가 선택한 남자와 농담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난처한 듯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대개의 경우 때때로 이 난처함은 갑자기 싸늘한 공포로 바뀌는 바람에 그녀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기괴망측한 표정으로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럴 때 그녀는 자기 침실에 자물쇠를 채우고 틀어박혀 있는데 하녀가 문틈에 귀를 대고 엿들어보면 그녀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달콤한 밀회를 끝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오면서 키르사노프는 완전한 실패 뒤에 오는 씁쓸한 괴로움에 정신이 황폐해지는 것을 마음 깊이 느끼는 것이었다. 나는 또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하고 그는 자문을 하면서도 마음은 아프기만 했다. 그는 어느 날 보석에 스핑크스가 새겨져 있는 반지를 그녀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이게 뭐예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스핑크스예요?”
“그렇습니다. 그 스핑크스는 바로 당신입니다.”
“저요?”
하고 그녀는 묻고 나서 수수께끼 같은 눈을 서서히 그에게로 돌렸다.
“정말 영광이로군요.”
하고 그녀는 엷은 미소를 띠면서 덧붙였지만, 두 눈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P공작부인이 자기를 사랑해주고 있을 동안에도 파벨 페트로비치의 마음은 무겁고 괴로웠다. 그렇지만 그녀의 그에 대한 관심이 식었을 때, 그건 생각보다 꽤 빨리 닥친 결과이지만, 그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괴로워하고 질투하며 그녀를 귀찮게 굴고 어디든지 그녀 뒤를 따라다녔다. 그녀는 그가 그처럼 집요하게 따라 다니는 것이 지겨워서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는 친구들의 간청이나 상관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장교직에서 물러나 공작 부인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녀의 뒤를 쫓아 돌아다니기도 하고 애써 그녀를 잊으려고 애쓰기도 하면서 타국에서 4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신의 나약함에 화가 치밀었지만…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불가사의한, 거의 부조리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매력이 넘치는 그녀의 모습은 그의 마음속에서 너무도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던 것이다.
바덴(서독 서남부의 프랑스와 스위스에 인접한 지방에서 그는 어떻게 된 셈인지 또다시 그녀와 친밀하게 되었다. 그녀는 한 번도 그를 그렇게까지 열렬하게 사랑했던 적이 없으리라고 생각될 만큼 그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한 달 후 모든 것은 막을 내렸다. 불꽃이 마지막으로 한 번 튀는가 싶더니 영원히 꺼져버린 것이다. 이별이 피치 못하다는 것을 예감한 그는 이와 같은 여자와의 우정이 가능하기라도 한 듯이 그녀의 친구로 머물러 있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그녀는 슬며시 바덴을 빠져나가 그 후로는 줄곧 그를 피해 다녔다. 그는 러시아로 돌아와서 전과 같은 생활을 다시 계속하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그전의 궤도에 오를 수는 없었다. 그는 마치 무엇에 중독된 인간처럼 각 지방을 떠돌아다녔다. 그는 다시 사교계에 나타났고, 사교계 신사로서의 관습을 모조리 익혔으며, 둘이나 셋쯤의 새로운 사랑의 정복을 자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 스스로도, 또는 타인으로부터도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또 자기 자신 아무 일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나이가 들어 백발이 되었다. 밤마다 클럽에 자리를 차지하고 괴로운 듯이 울적해 있거나 독신자들과 어울려 토론하기를 일삼게 되었는데,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나쁜 징조였다. 물론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고 유수같이 그야말로 유수같이 10년이 흘러갔다. 어디에서도 러시아에서처럼 이토록 시간이 빨리 흐르지는 않을 것이다. 교도소에서는 더한층 빨리 흐른다고들 하지만 어느 날 클럽에서 식사가 끝난 다음, 파벨 페트로비치는 P공작부인이 세상을 떴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광란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파리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패들의 곁에 못박인 듯이 서 있기도 하고 클럽의 방이란 방을 모두 기웃거리며 돌아다니기도 했으나 여느 날처럼 일찍 집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몇 시간 후 그는 자기 앞으로 온 소포 한 개를 받아들었다. 그 속에는 그가 공작 부인에게 선물한 반지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스핑크스에 십자형의 표시를 해 놓고, 이 십자형이야말로 수수께끼의 해답이라고 그에게 전하도록 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1848년이 시작될 무렵의 일로, 마침 그때 아우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상처를 당하고 페테르스부르크로 돌아와 있던 때였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아우가 농촌에다 거처를 정하고 난 이후로 아우와 만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결혼한 것은 파벨 페트로비치가 공작 부인과 사귀기 시작한 바로 그 무렵이었다. 외국에서 돌아왔을 때 형은 아우네 집에서 두어 달쯤 신세를 지며 그 행복한 모습을 보려고 아우의 집으로 갔던 것이나 거기서 겨우 일주일을 머물렀을 뿐이다. 형제의 처지가 너무나도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1848년에는 그 차이가 좁혀져 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상처를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자신의 추억을 단념했다. 공작부인이 죽은 후로 그는 애써 그녀에 대한 생각을 지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니콜라이에게는 그럭저럭 후회 없는 생활을 해왔다는 뿌듯함이 남아 있었으며, 아들이 그의 슬하에서 자라고 있었다. 파벨은 그와 반대로 불안한 황혼기에 처한 외로운 독신자로서, 청춘은 지나가 버렸지만 노령에는 아직 접어들지 않았다는 희망 비슷한 비애, 비애 비슷한 희망의 시기에 있었다. 이때는 파벨 페트로비치에게 있어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가슴 아픈 시기였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함께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저는 이제 형님을 마리노에 초대하지 않겠어요.”
하고 하루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형에게 말했다. 그는 죽은 아내인 마리아를 기념해서 자기 마을을 이렇게 명명하였던 것이다.
“형님께선 아내가 살아있을 때에도 마을에 오시면 그토록 지루하게 지내셨는데 이제는 울적한 심정에 돌아가실까 두렵습니다.”
“그 당시에 다는 어리석었고 안절부절 못했지”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대답했다.
“그 뒤로 나의 마음은 가라앉았어. 현명해지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지금은 그와 반대로 너만 용서해준다면 너한테 가서 영원히 살아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
대답 대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형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파벨 페트로비치가 자기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고 결심하기까지에는, 이런 대화가 있은 지 반년이 지난 후였다. 그 대신 한번 마을에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그는 마을을 버리지 않았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아들과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지낸 세 번의 겨울 동안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독서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영어로 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대체로 자기의 모든 생활을 영국식으로 영위하고, 근처 사람들과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다만 선거 때에만 외출했는데 거기서도 대부분 침묵을 지켰으며, 다만 이따금 자신의 자유주의적인 언행으로 구식 지주들을 골려주거나 깜짝 놀라게 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새 시대의 대표적 인물들과는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그런 식이었다. 구식 지주나 새 시대의 대표적 인물들은 모두가 그를 거만한 사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모두가 그의 완벽한 귀족적인 태도 때문에, 또는 그가 여자가 반할 남자라는 평판 때문에 그를 존경했던 것이다. 그가 존경을 받게 된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복장을 하고 언제나 일류 여관의 일등실에 머물렀다는 것, 그가 음식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으며, 한번은 루이 필립(프랑스의 왕) 궁정에서 웰링턴(영국의 군인. 정치가)과 함께 식사를 한 일까지 있었다는 것, 그는 뭔지 보통이 아닌 놀랄 만큼의 고급 향수 냄새를 풍겼다는 것, 그는 어디를 가든지 진짜 은으로 만든 여행용 화장도구 케이스와 여행용 목욕통을 들고 다녔다는 것, 그는 능숙하게 휘스트를 즐겼는데, 실제로는 솜씨가 좋으면서 노상 지기만 했다는 것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흠잡을 데 없는 그의 성실성 때문이기도 했다. 부인들은 그를 두고 반하기 안성맞춤인 우울증이 있는 사나이로 여기고 있었으나, 그는 그들과 교제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알겠지, 예브게니”
하고 자기 이야기를 마치면서 아르카디는 말했다.
“자네가 큰아버지에 대해서 그릇 판단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더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큰아버지는 몇 번이나 우리 아버지의 다급한 사정을 구해주셨고 당신 돈을 전부 주시기도 했어. 소유지는 말일세, 자네는 아마 짐작이 가지 않겠지만, 두 분은 나눠 갖지를 않으셨어. 하지만 큰아버진 누구든지 기꺼이 도와주시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언제든지 농부들을 감싸주고 계신 거야. 하긴 농부들과 이야기하실 때면 큰아버지는 얼굴을 찌푸리시고 향수 냄새를 맡고 계시긴 하지만 말일세…”
“알 만해, 그토록 신경이 예민하시니”
하고 바자로프는 말을 가로챘다.
“그럴싸한 말이야.”
“하지만 큰아버지의 마음씨는 유달리 착하셔. 그리고 결코 바보는 아니야. 나에게 여러 모로 유익한 충고를 해주시기도 했지… 특히… 특히 여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말이야.”
“하하, 뜨거운 맛에 경을 치고는 날 것을 불어댄다는 바로 그거로군. 그야 뻔한 일이지”
“글쎄 한 마디로 말해서”
하고 아르카디는 계속했다.
“큰아버지는 심각하게 불행하셔. 나를 믿어주게. 그분을 멸시하는 건 좋지 않아.”
“누가 그분을 멸시한댔나?”
하고 바자로프가 응수했다.
“그러나 역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네. 남자가 자기의 모든 생활을 여자의 사랑이라는 카드 한 장에 걸었다가 막판에 가서 그 카드에 실패했을 때 녹초가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타락한다면, 그런 남자는 사내대장부라고, 아니 수컷이라고 말할 수 없단 말이야. 자네는 그분이 불행하다고 했으며 그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분은 아직도 어리석은 생각을 아주 버리지는 못한 거야. 나는 확신하지만, 그분은 정말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아. 그 불쾌한 갈리냐니(Galignani)지 같은 걸 읽고, 한 달에 한 번 농부들의 체형을 면제해주기도 하니 말일세.”
“하지만 큰아버지가 받은 교육이나 그분이 살아온 시대를 고려해보아 주게.”
“교육이라니?” 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받았다. “어느 누구나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교육해야만 하는 거야. 이를테면 나처럼 말일세…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라는 것에 대해서는, 왜 내가 시대에 의존해야 하지? 시대 같은 건 내게 의존시키는 편이 오히려 나을 거야. 아니 이런 건 모두 무의미한 생각일세. 그리고 남녀간의 신비한 관계라니, 뭘 말하는 건가? 우리 같은 생리학자는 그것이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고 있는 거야. 자네, 눈의 구조라도 연구해보게나. 자네가 말한 수수께끼 같은 눈의 표정이란 건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가. 그런 건 모두 로맨틱한 헛소리이고, 진부한 미학일세. 자, 물방개라도 보러 가지 않겠나?”
그러고 나서 두 친구는 방으로 건너갔다. 그 방에서는 이미 값싼 담배 냄새와 뒤범벅이 된 무슨 외과 수술용 냄새가 자욱하게 풍기고 있었다.
8
파벨 페트로비치는 아우와 토지 관리인이 이야기하는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다. 관리인은 키가 크고 마른 남자로 폐병환자처럼 나직한 음성에 간사스런 눈을 하고 있었는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아무리 의견을 내세워도 “당치도 않은 말씀을, 더 말하실 것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며 농부들을 주정뱅이나 도둑놈으로 만들어버리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최근에 새로운 방식으로 개혁된 농장경영은 기름을 치지 않은 마차바퀴처럼 삐걱거렸으며, 생나무로 만든 수제가구처럼 째지는 소리를 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절망을 한 것은 아니지만 몇 번이고 한숨을 짓거나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그는 돈 없이는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이제 돈이 거의 다 떨어진 형편이었다. 아르카디의 말은 사실이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몇 차례나 자기 아우를 도와주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잘 타개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골치를 앓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면서 파벨 페트로비치는 주머니에 두 손을 쑤셔 넣은 채 창가로 천천히 다가갔다. Mais je puis vous donner de l'argent(내가 돈을 주마)하고 입안에서 우물우물 말한 다음 여느 때처럼 동생에게 돈을 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자신도 돈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경영상의 번거로움이 그의 기분을 우울하게 했던 것이다. 게다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꽤 열심이며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대로 일을 순조롭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견딜 수가 없었다. 실제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어떤 점에서 잘못하고 있는가를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그도 정확히 지적해낼 수는 없었다. ‘아우는 실무적인 일엔 소질이 없어. 속고 있는 거야’ 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니콜라이 페르토비치는 그와 반대로 파벨 페트로비치의 능력을 높이 사서 노상 그의 충고를 요청했다.
“저는 억지도 쓸 줄 모르고 머리도 좋지 않아 일생을 시골구석에서 보내고 말았지만, 형님은 꽤 오랫동안 세상 사람들과 사귀셔서 사람들을 잘 다루십니다. 매처럼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계시고요.” 하고 그는 늘 말했던 것이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 말에 그저 외면만 할뿐이었으나, 그러면서도 자기에 대한 동생의 신뢰를 배신하지는 않았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를 서재에 남겨둔 채 그는 집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가르고 있는 복도를 따랄 걸었다. 지붕이 매우 낮은 문 앞에 다다르자 주저하는 듯이 멈춰 서서 콧수염을 한 번 쓱 쓰다듬고는 그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들어오세요.”
하는 페니치카의 음성이 들려왔다.
“납니다.”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한 다음 문을 열었다. 페니치카는 갓난아이를 안고 앉아 있다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소녀에게 갓난아이를 안겨주며 밖으로 내보낸 다음, 서둘러 머릿수건을 고쳐 맸다.
“폐가 된다면 미안한데”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녀 쪽을 쳐다보지 않고 말을 꺼냈다.
“뭐 잠깐 부탁할 게 있어서… 오늘 시장으로 사람을 보낼 때… 녹차를 사다주도록 일러줘요.”
“알겠습니다.”
하고 페니치카는 대답했다.
“얼마나 사오도록 시킬까요?”
“글쎄요, 반 파운드면 충분할 겁니다. 그런데 이 방도 좀 바뀐 것 같군요.”
하고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고 페니치카의 얼굴을 슬쩍 살핀 다음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저 커튼 말입니다.”
그녀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자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한 것이다.
“예, 커튼 말씀이시로군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께서 제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벌써 오래되었는걸요.”
“그래요. 나도 여기에 꽤 오랫동안 오지 않았지요. 이제 이곳도 꽤 좋아 보이는군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덕분이에요.”
하고 페니치카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전의 별채보다도 여기가 좋지요?”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정중하게 물었지만 웃음기는 띄지 않았다.
“말할 수 없이 좋아요.”
“세탁부가 들어 있어요.”
“흠”
파벨 페트로비치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나가겠지 하고 페니치카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나가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긴장한 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못박힌 듯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왜 아기를 데리고 나가라고 했나요?”
마침내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난 어린애를 좋아해요. 내게 그 애를 보여줄 수 없겠소?”
페니치카는 당황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파벨 페트로비치를 두려워했으며, 그도 그녀에게 이제껏 거의 말을 걸지 않았던 것이다.
“두냐샤”
하고 페니치카가 소리질렀다.
“미짜(Mitya)를 데려와주세요.”
페니치카는 집안사람들 누구에게나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니,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옷을 갈아 입혀야 하니까.”
페니치카는 문 있는 곳으로 돌아섰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페니치카는 재빨리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혼자 남아서 이번에는 찬찬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가 있는 천장이 낮은 그다지 크지 않은 방은 매우 깨끗했으며 아늑했다. 방안은 최근에 새로 바른 벽지 냄새와 향수 냄새가 뒤섞여 풍기고 있었다. 벽쪽에는 등이 굽은 의자가 몇 개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지금은 돌아가신 키르사노프 장군이 원정했을 때 폴란드에서 사온 것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모슬린의 휘장이 달린 작은 침대가 둥근 뚜껑이 달리고 철제 죔쇠가 있는 트렁크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반대편 구석에는 영검이 뚜렷한 성 니콜라이의 커다란 검은 성상이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매우 작은 자기로 만든 채색 달걀 하나가 붉은 리본에 매달려 성인의 가슴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창가에는 작년에 만든 잼을 넣은 원통형의 병이 몇 개 정성껏 봉해져 있었는데, 파란빛이 투명하게 보였다. 그 봉한 종이에 페니치카가 쓴 ‘잼’이라는 굵은 글자가 눈에 띄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이 잼을 매우 좋아했다.
천장 밑으로는 길고 가느다란 끈에 꼬리가 짧은 방울새의 새장이 매달려 있었다. 방울새가 쉴 새 없이 지저귀고 팔딱거려 새장은 줄곧 흔들리고 있었다. 삼씨 몇 개가 부슬부슬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두 창문 사이에 놓인 그다지 크지 않은 장롱 위쪽 벽에는 갖가지 포즈를 위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꽤 오래된 사진이 몇 장 걸려 있었다. 그것은 엉터리 사진사가 찍은 것이었다. 같은 장소에 페니치카 자신의 사진도 한 장 걸려 있었는데 그것은 촬영이 아주 엉망이었다. 어쩐지 눈이 없는 것 같은 얼굴이 검은 액자 속에서 억지로 웃으려 애쓰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인데, 그 외에는 뭐가 뭔지 분별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이 페니치카의 사진 위에는 예르몰로프(Yermolov) 장군이 산양 가죽 망토를 걸치고 멀리 카프카즈 산줄기(Кавказские горы [Kavkazskiye gory], 코카서스 산맥)를 자못 위엄 있게 얼굴을 찌푸리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이마 위에는 비단으로 싼 장화 모양의 바늘꽂이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늘어져 있었다.
5분쯤 지났다. 옆방에서 옷 스치는 소리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장롱 위에서 손때가 묻어 다 뜯어진 한 권의 책, 즉 <마살스키의 친위병들(Стрельцов Масальского [Streltsov Masalskogo]을 집어들어 몇 페이지 넘겼다. 그때 문이 열리고 페니치카가 미짜를 안고 들어왔다. 그녀는 깃에 수를 놓은 빨간색의 깜찍한 루바시카를 아기에게 입히고, 머리도 빗겨주고 얼굴도 닦아주고 있었다. 갓난아이는 건강한 아기들이 모두 그렇듯이 힘겹게 숨을 몰아 쉬며 몸을 이리저리 뒤치면서 조그마한 두 손을 내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푹신한 루바시카는 갓난아이에게 효과가 있었는지, 그 오동통하고 보들보들한 아기는 만족한 빛을 띠고 있었다. 페니치카는 머리도 단정히 빗고 머릿수건도 맵시 있게 고쳐 썼지만, 있는 그대로도 좋았다. 사실 건강한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어머니보다 더 매력 있는 것이 이 세상에 또 있겠는가?
“고놈 꽤 토실토실하군.”
하고 제법 너그럽게 말하며 파벨 페트로비치는 미짜의 두겹진 턱을 집게손가락의 긴 손톱으로 간질였다. 갓난아이는 방울새 쪽으로 눈을 돌린 채 웃기 시작했다.
“큰아버지시다.”
하고 페니치카는 아기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가만히 흔들면서 말했다. 그러는 동안 두냐샤는 동전을 밑에 깔고, 불붙인 향을 살며시 창가에 놓았다.
“그런데 이 아이는 몇 개월 되지요?”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물었다.
“6개월 되었어요. 이제 열하루부터는 7개월이 됩니다…”
“8개월이 아닌가요, 페도시야 니콜라예브나”
하고 조심스럽게 두냐샤가 참견했다.
“아니야, 7개월이야, 당찮은 소릴”
갓난아이는 또다시 웃기 시작하는가 했더니, 트렁크 쪽으로 눈을 돌렸다가 이번에는 갑자기 다섯 손가락으로 모두 어머니의 코와 입술을 움켜쥐었다.
“요 장난꾸러기”
하고 그 손가락을 얼굴에서 떼어낼 생각도 하지 않고 페니치카는 말했다.
“이 아이는 동생을 닮았군요.”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했다. ‘그럼 이 애가 누구를 닮겠어요’하고 페니치카는 생각했다.
“그래”
하고 혼잣말이라도 하듯이 파벨 페트로비치는 말을 이었다.
“틀림없이 꼭 닮았는데”
그는 거의 슬픈 듯이 조심스럽게 페니치카를 바라보았다.
“큰아버지시다.”
하고 그녀는 되풀이했지만 이번에는 속삭이듯 하였다.
“아아, 형님, 여기에 계셨군요.”
갑자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음성이 들려왔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급히 뒤돌아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동생이 매우 기쁜 듯이, 매우 고맙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으므로 그도 미소를 띠고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기가 참 귀엽구나”
하고 그는 말하고 시계를 보았다.
“난 차를 부탁하려고 여기에 잠깐 들렀단다.”
그리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방에서 나갔다.
“형님이 스스로 오셨댔나”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페니치카에게 물었다.
“당신이 직접 문을 두드리시고 들어오셨어요.”
“그럼 아르카디는 그 후론 오지 않았었나?”
“오시지 않았어요. 저 다시 별채로 옮기면 안 될까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그건 또 왜?”
“얼마 동안은 거기가 좋을 것 같아요.”
“아…니야.”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더듬거리면서 말하고는 이마를 닦았다. “이제 와서, 지금은 안 돼… 안녕, 꼬마야.”
갑자기 활기를 띠어 말하고는 아기에게 다가가서 그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약간 엎드리듯 하여, 미짜의 빨간 루바시카 위에 놓인 우유처럼 흰 페니치카의 손에 입을 갖다댔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이 양반이 무얼 하시는 거예요?”
하고 그녀는 속삭이면서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살며시 들었다. 그녀가 눈까풀 아래로 눈을 살짝 흘기면서 부드럽게, 약간 바보스럽게 웃음을 띠고 있을 때 그녀의 표정은 매력적이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페니치카를 다음과 같은 인연으로 서로 알게 되었다. 3년쯤 전의 어느 날, 그는 멀리 읍에 있는 한 여인숙에서 잔 일이 있었다. 그가 안내 받은 방의 말끔함이나 침구의 홑이불 등의 깨끗함에 그는 깜짝 놀랄 만큼 기분이 좋았다. 여기 안주인은 독일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안주인은 러시아인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50세쯤 되어 보이는, 옷을 깨끗하게 차려 입은 여인이었는데 이목구비가 잘 생기고 지혜로워 보였으며 말소리도 또박또박하였다. 그는 차를 마시며 그녀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가 꽤 마음에 들게 되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 무렵 이제 막 새로운 저택으로 옮겼을 때였는데 농노 신분의 사람들을 자기 집안에 두는 것을 꺼려 새로운 고용인을 찾고 있었다. 안주인은 이 읍을 찾아오는 손님이 적다는 것,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것을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는 가정부로서 자기 집에 입주하면 어떻겠느냐고 그녀에게 넌지시 말해보았다. 그녀는 승낙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페니치카라는 딸 하나만을 그녀에게 남겨놓고 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다. 2주일쯤 지나서 아리나 사비시나(Arina Savishna, 이것은 새 가정부의 이름이었다)는 딸과 함께 마리노 마을로 들어와서 별채에 살게 되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선택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아리나는 집안일을 깔끔하게 정돈했다. 그때 벌써 열일곱 살이었던 페니치카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없었으며 어쩌다가 한번 눈에 띌 정도였다. 그녀는 조용히 아주 소박하게 살고 있었고 다만 일요일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교회당의 어딘가 한구석에서 그녀의 창백하고 섬세한 옆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여 일 년 남짓이 지났다.
어느 날 아침, 아리나는 서재에 있는 그에게 찾아와 여느 때처럼 허리를 굽혀 인사한 다음, 딸의 눈에 난로의 불티가 들어갔는데 보아줄 수 없겠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집에만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웬만한 상처 정도는 치료할 수 있으며, 가정 상비 약상자까지도 갖춰놓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즉시 환자를 데려오도록 아리나에게 일렀다. 주인이 자기를 부르고 있다는 걸 알자 페니치카는 두려운 생각이 앞섰지만, 어머니의 뒤를 따라나섰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녀를 창가로 데리고 가서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붙들었다. 그 빨갛게 부어 염증을 일으킨 한 쪽 눈을 살펴본 다음, 그는 그녀에게 바르는 물약을 처방해서 그 자리에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자기 손수건을 몇 갈래로 찢어서 찜질하는 방법을 그녀에게 가르쳐주었다. 페니치카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듣고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나리의 손에 키스해야지, 바보 같으니” 하고 아리나는 딸에게 말했다. 니콜라이 페크로비치는 그녀에게 자기 손을 내밀지 않고, 약간 망설이다가 그녀의 숙인 머리의 가르마에다 입을 맞추었다.
페니치카의 눈은 이내 나았다. 그러나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에게 준 그녀의 인상은 금방 가셔지지 않았다. 그 깨끗하고 상냥스러우면서도 두려운 듯이 쳐들던 얼굴이 노상 그의 눈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손바닥에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털을 느끼고 있었다. 약간 벌어진 틈새로 진주알 같은 이들이 햇빛에 반짝반짝 윤을 내고 있는, 그녀의 천진난만한 입술이 눈에 선하였다. 그는 교회에서는 한층 주의 깊게 그녀 쪽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와 말을 하려고 애를 썼다. 처음 한동안 그녀는 그를 피하였다.
하루는 해질녘 보행자가 밟아서 다져진 호밀밭의 좁다란 샛길에서 그와 마주치자, 페니치카는 그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쑥과 들국화가 우거져 있는, 키가 훤칠하게 자란 호밀밭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누런 호밀 이삭 사이로 조그마한 짐승처럼 이쪽을 엿보고 있는 그녀의 작은 머리를 보고 부드럽게 그녀에게 소리쳤다.
“안녕, 페니치카. 난 물어뜯진 않아요.”
“안녕하세요.”
하고 그녀는 자기가 숨어 있는 곳에서 나오려고도 하지 않고 속삭였다. 그 후로 그녀는 조금씩 그에게 낯이 익어갔지만 여전히 그가 있는 곳에서는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어머니인 아리나가 콜레라로 죽어버렸다. 페니치카는 어디에 몸을 의지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자기 어머니를 닮아서 깔끔한 것을 좋아했으며, 생각이 깊고 마음이 곧았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도 어렸으며 아무 데에도 몸 붙일 곳이 없었다. 그런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너무나 선량하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그 후의 일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형님이 스스로 당신을 보러 여기엘 들어오셨단 말이지?”
“그래요.”
“그건 정말 잘된 일이야. 미짜를 좀 흔들어줄까?”
그러고 나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거의 천장까지 닿을 만큼 갓난아이를 높이 들어 올려 어르기 시작했다. 아이는 매우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어머니는 매우 조마조마하여 아이가 들어올려질 적마다 그 드러나 있는 작은 발쪽으로 자기 두 손을 내뻗치는 것이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자기의 훌륭한 서재로 돌아왔다. 그 벽에는 잿빛이 도는 아름다운 벽지가 바래져 있었고, 알록달록한 페르시아 융단 위에는 무기가 죽 걸려 있었다. 호두나무 가구는 검푸른 빛깔의 비로드로 씌워져 있었고, 거기에는 떡갈나무 고목으로 만든 renaissance(르네상스식) 책장과 훌륭한 책상 위에는 청동으로 만든 작은 조각품들이 몇 점 놓여 있었으며, 그 옆에는 벽난로가 있었다. 그는 소파에 몸을 내던지고 두 손을 머리 뒤로 돌린 채 거의 절망적인 모습으로 천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을 벽에게까지 숨기고 싶어서였는지, 또는 무슨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는지, 어쨌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에 걸려 있는 묵직한 커튼을 치고 나서 또다시 소파에 몸을 내던졌다.
9
바로 그날 바자로프도 페티치카와 알게 되었다. 그는 아르카디와 함께 뜰을 거닐면서 몇몇의 나무들이, 그 중에서도 특히 떡갈나무가 왜 뿌리를 내리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백양을 좀더 심어야겠네. 전나무도, 혹은 보리수도 좋겠지. 진흙을 섞어 넣어주면 좋을 거야. 저쪽 정자 옆에 있는 나무들은 잘 자라고 있군.”
하고 그는 덧붙였다.
“아카시아나 라일락 같은 건 잘 자라거든, 돌봐줄 필요가 없지. 아니, 저쪽에 누가 있는 것 같군.”
정자에는 페니치카와 두냐샤가 미짜와 함께 걸터앉아 있었다. 바자로프가 멈춰 서 있는 동안 아르카디는 아주 오래 사귄 친구이기라도 한 듯이 페니치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 사람은 누군가?”
하고 바자로프는 그들 곁은 지나치자마자 그에게 물었다.
“정말 미인이군.”
“누구 말인가?”
“뻔하지 않나, 미인은 하나뿐이었는걸”
아르카디는 다소 망설이면서 페니치카가 어떤 여자인가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알겠네.”
하고 바자로프는 말했다.
“자네 아버지의 눈이 보통 높으신 게 아니군. 난 맘에 들었어, 자네 아버지가 말이야. 정말일세. 멋있지 않은가. 그건 그렇고 인사라도 드려야 하지 않겠나”
하고 그는 덧붙여 말하고는 정자 쪽으로 되돌아갔다.
“예브게니”
아르카디는 깜짝 놀라며 뒤에서 외쳤다.
“제발 조심하게, 부탁일세.”
“걱정하지 말게”
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우린 온갖 경험을 다 해본 사람들 아닌가. 그런 거 이해 못할 시골뜨기도 아니고.”
그는 페니치카 쪽으로 다가가면서 모자를 벗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바자로프는 공손히 인사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아르카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친구입니다. 이래봬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 염려 마십시오.”
페니치카는 벤치에서 일어나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아기가 정말 예쁘군요.”
하고 바자로프는 말을 이었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추어올림으로써 당신을 흘리려는 수작은 아니니까요. 아기 볼이 어쩌면 이렇게 빨갛습니까? 이는 나기 시작했나요?”
“네.”
하고 페니치카가 말했다.
“벌써 이가 네 개나 났는데, 이번에 또 잇몸이 좀 붓기 시작하는군요.”
“어디 좀 볼까요… 아니,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의사니까요.”
바자로프는 두 손으로 아기를 받아들었는데, 놀랍게도 아이가 전혀 떼쓰지도 낯을 가리지도 않았으므로 페니치카와 두냐샤는 어리둥절해했다.
“과연 그렇군. 대수롭지는 않습니다. 정상적으로 다 잘되어가고 있으니까요. 튼튼한 이가 될 겁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그런데 당신은 건강에 자신 있으십니까?”
“괜찮아요, 덕분에.”
“다행이로군요. 무엇보다도 건강이 최고지요. 그런데 당신은?”
하고 바자로프는 두냐샤 쪽을 돌아보며 또 물었다. 두냐샤는 집안에서는 꽤 얌전한 소녀였지만 일단 문밖에만 나오면 웃기를 잘했으므로 대답 대신 다만 소리 내어 킬킬거릴 뿐이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자, 부인의 장군님을 돌려드리지요.”
페니치카는 아기를 두 손으로 받아 안았다.
“어쩜 그렇게 얌전히 안겨 있었을까”
하고 그녀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느 아기나 제게 안기면 얌전해진답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대답했다.
“전 그 비결을 알고 있으니까요.”
“아기는 자기를 귀여워해 주는 사람을 알아보는 거예요.”
하고 두냐샤가 참견했다.
“네 말이 맞아”
하고 페니치카는 수긍했다.
“미짜도 어떤 사람에게는 절대로 안기려 들지 않으니 말이야.”
“그렇지만 저에게는 오겠지요?”
하고 아르카디가 물었다. 그는 그 동안 저 만큼에 떨어져 서 있다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미짜를 안으려고 팔을 내밀었지만 미짜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앙앙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꽤나 당황했다.
“다음에 낯을 더 익히면 그때 안아주지”
하고 아르카디는 너그럽게 말했다. 그리고 두 친구는 그곳을 떠났다.
“그 여자 이름이 뭐랬지?”
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페니치카… 아니 페도시야일세.”
하고 아르카디가 대답했다.
“그럼 부칭은? 그것도 알아둬야 하지 않겠나.”
“니콜라예브나일세.”
“Bene(좋아 (Lat.)). 나는 그 여자가 내 앞에서 그다지 피하거나 거북스러워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 어떤 사람은 어쩌면 그 여자의 그런 점을 나쁘게 말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야. 무엇 때문에 그녀가 불편해해야 한단 말인가. 그 여자는 아기 어머니야. 그녀의 태도는 충분히 정당하다고.”
“그야 물론 정당하지”
하고 아르카디가 참견했다.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는…”
“자네 아버지도 역시 정당하시지”
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가로챘다.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물론 누구든지 뜻밖의 상속자 같은 건 반갑지 않겠지?”
“나를 그따위로 생각하다니, 자네 부끄럽지도 않은가”
하고 말을 받아 아르카디는 열을 올려 말했다.
“나는 그런 뜻에서 아버지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아냐. 나는 아버지가 그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거라고.”
“아, 그렇군.”
하고 바자로프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들도 참 어지간히 관대하군. 그러니까 자네는 아직도 결혼의 의의 같은 것에 연연해하고 있단 말이지. 나는 자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두 친구는 입을 다문 채 몇 걸음 나아갔다.
“나는 자네 아버지의 농장 시설을 다 돌아봤는데 말이야.”
하고 바자로프는 또다시 말을 꺼냈다.
“가축은 빈약하고 말들은 지쳐 있었어. 건물도 허술하고 고용인들은 낙인찍힌 게으름뱅이처럼 보였어. 또 토지 관리인은 바보 아니면 사기꾼이더군. 어느 쪽인지 아직 분간되진 않지만 말이야.”
“자네 오늘은 꽤 비판적이군,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그리고 아무리 선량한 농부들이라 해도 자네 아버질 반드시 속이고 말 걸세. 러시아 농부들은 하느님도 잡아먹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난 큰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해.”
아르카디가 말했다.
“자넨 틀림없이 우리 러시아인에 대해 좋지 않은 견해를 갖고 있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러시아인의 단 하나 장점은 자기 자신을 낮추어 평가하는 겸손함이야. 둘을 곱하면 넷이라는 사실만 중요하지, 나머지 것은 모두가 하찮은 거야.”
“그럼 자연도 하찮은 것인가?”
하고 아르카디는 이미 중천에 떠 있는 태양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빛을 받아 여러 빛깔로 물든 들판을 생각에 잠긴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로는 자연도 하찮은 것이지. 자연은 신전이 아니라 일터인 것이며, 인간도 거기서는 일꾼에 지나지 않지.”
바로 그때 길게 끄는 첼로 소리가 집안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썩 좋은 솜씨는 아니었지만 감정을 넣어 누군가가 슈베르트의 기대를 켜고 있었다. 달콤한 멜로디가 꿈결처럼 바람을 타고 두루 퍼져나가고 있었다.
“저건 또 뭔가”
하고 바자로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버지께서 켜시는 거야.”
“자네 아버지가 첼로를 다 켤 줄 아시나?”
“그렇다네.”
“자네 아버지의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
“마흔 넷이지”
바자로프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어째서 웃는 건가?”
“생각 좀 해보게. 마흔 네 살의 사내가 말이야, 그것도 pater familias(한 집안의 어른이 말일세 (Lat.)), 이런 시골에서 첼로를 켜다니.”
바자로프는 계속해서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러나 아르카디는 평소에 이 친구를 자기의 현명하고 성실한 조언자로서 존경은 하고 있으면서도 이번만은 따라 웃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10
거의 2주일이 지났다. 마리노 마을에서의 생활은 별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르카디는 즐기면서 지냈으며, 바자로프는 일을 했다. 온 집안사람들은 그의 그 조심성 없는 태도와 다소 무뚝뚝하고 퉁명스런 말투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 중에서도 페니치카는 그와 아주 친해져서 한번은 한밤중에 그를 깨우러 갔을 정도였다. 미짜가 경련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노상 하는 버릇대로 반은 농담조로, 반은 하품을 하면서 그녀 방에서 두 시간 남짓 버티고 앉아 아기를 간호한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파벨 페트로비치는 바자로프를 몹시 미워했다. 그는 바자로프를 거만하고 낯가죽이 두꺼운 녀석, 남을 빈정거리기나 하는 속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바자로프가 자기를, 즉 파벨 키르사노프라고 하는 자기를 존경하지 않고 도리어 경멸하려 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젊은 니힐리스트를 다소 두려워하며 아르카디에게 미칠 그의 영향이 유익한가 어떤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물리화학의 실험에도 즐겨 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다. 바자로프는 현미경을 가지고 와서는 몇 시간이고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인들도 그한테 놀림을 받으면서도 그를 따랐다.
그들은 그래도 그가 자기들의 동료이지 주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냐샤는 즐겨 그와 함께 장난을 치고, 메추라기 암컷처럼 교태를 부리며 슬쩍 지나치면서 흘긋흘긋 관심 있는 듯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지독하게 허영심이 강하고 우둔한 피오트로(Piotr), 노상 눈살을 찌푸리고 있고, 남에게 예의 바른 것처럼 행동하며, 글자를 더듬더듬 읽을 수 있고, 자기 연미복에 종종 솔질을 한다는 것, 고작 그런 것이 장점인 이 사나이도 바자로프가 눈에 띄면 이내 히죽히죽 웃고는 얼굴이 환해지는 것이었다. 하인들의 자녀들도 이 의사 뒤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다만 늙은 프로코피치(Prokofitch)만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식탁에 앉아 있는 그에게 불쾌한 얼굴로 식사를 내주곤 했으며, 그를 두고 흉물스러운 놈 또는 사기꾼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가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는 모습은 숲속에 숨어 있는 진짜 돼지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프로코피치는 제 나름대로 파벨 페티로비치에 못지않은 귀족주의자였다.
1년 중에서 가장 좋은 계절인 6월초가 다가왔다.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사실 멀리서부터 콜레라가 또다시 전염해올지도 모른다고 위협하기는 했지만, XXX현의 주민들은 이제 그런 것엔 익숙해져 있었다. 바자로프는 매우 일찍 일어나서 2마장이나 3마장쯤 되는 곳까지 나갔는데, 산책하는 것은 아니고, 그는 목적 없는 산책 따위는 질색이었다, 풀이나 곤충 따위를 채집하는 것이었다. 때때로 그는 아르카디를 데리고 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두 사람이 언제나 반드시 논쟁을 벌이곤 했다. 그런데 아르카디는 자기 친구보다도 훨씬 더 말을 많이 하는데도 불구하고 결국은 항상 지고 마는 것이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어찌 된 일인지 돌아오는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뜰까지 두 사람을 마중 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자 있는 곳까지 갔을 때 갑자기 젊은이들의 재빠른 발소리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정자의 반대쪽을 걷고 있어서 그를 보지 못했다.
“자네는 아직도 내 아버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하고 아르카디가 말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숨을 죽였다.
“자네 아버지는 좋은 분이셔”
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하지만 그분은 이제 구시대의 인물이고 인생의 황금기는 이미 지나가 버렸어.”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청각을 더 세워 귀를 기울였다. 아르카디는 아무 말이 없었다. 구시대의 인물은 2분쯤 숨을 죽이고 서 있다가 어정어정 집 쪽으로 걸어갔다.
“그저께 내가 보니까, 그분은 푸슈킨을 읽고 계시더군.”
하고 그 동안에 바자로프는 계속 말하였다.
“제발 설명을 해드리게. 그런 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말일세. 그분은 어린애가 아니잖은가. 그런 부질없는 짓은 그만 둘 때란 말일세. 요즈음 세상에 로맨티시스트가 되시려는 건가. 그만두셔야 해. 조금이라도 유익한 걸 읽으시도록 권해드려.”
“어떤 걸 읽으시도록 하면 좋을까?”
하고 아르카디가 물었다.
“글쎄, 우선 첫걸음으로 비히너(Friedrich Karl Christian Ludwig Buchner, 독일의 유물론 철학자)의 <물질과 힘(Stoff und Kraft)>은 어떨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고 아르카디는 찬성하는 뜻을 나타냈다.
“그 물질과 힘은 대체로 쉬운 말로 쓰여 있으니까 말이야.”
그날 점심 식사 뒤에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자기 형의 서재에 들어가 앉으면서 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형님, 형님이나 저나 시대에 뒤진 인간이 되어버렸고 우리들의 인생은 이미 다 끝나버렸다고 하는군요. 그래요, 바자로프가 옳아요. 그러나 정말 저는 단 한 가지 괴로운 게 있어요. 그건 앞으로 아르카디와 굳게 손잡고 친밀하게 되어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저는 뒤에 처지게 되었고 그 애는 저 앞을 달리게 되어 서로 이해하고 지낼 수가 없게 된 점이에요.”
“그런데 어째서 그 애가 저 앞으로 달려가 버린 거지? 그리고 어째서 그 애와 우리들 사이에 그렇게 지독한 차이가 생겨버렸단 말이냐?”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것은 순전히 니힐리스트인가 뭔가 하는 그 녀석이 우리 애 머리에 그런 생각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란 말이야. 나는 그 의사 놈이 꼴 보기 싫어. 내가 생각하기엔 그 녀석은 그저 그런 사기꾼에 지나지 않아. 개구리 같은 걸 잔뜩 잡아다가 무슨 수로 그 녀석이 물리에 도움이 되는 짓을 할 수 있겠어?”
“안됩니다, 형님. 그런 말씀을 하시면…. 바자로프는 현명하고 뭐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놈의 자존심은 아주 비위에 거슬린단 말일세.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또다시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래요.”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인정했다.
“그 사람은 자존심이 강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존심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다만 아무래도 미심쩍은 일이 있습니다. 시대에 뒤지지 않기 위하여 저는 모든 짓을 다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농부들을 관대하게 대하기도 하고 농장을 새로 만들기도 하여 온 마을에서 저를 급진 과격파라고 여길 정도였습니다. 또 책도 읽고 공부도 했으며, 여러 모로 시대적인 요구에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제 일생이 종막을 고했다고 그들이 말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형님, 어쩐지 저 자신도 그들이 옳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어째서 또 그런 말을?”
“실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오늘 제가 의자에 앉아서 푸슈킨을 읽고 있노라니… 마침 <집시>를 읽어나가고 있을 때라고 생각되는데… 갑자기 아르카디가 아무 말 없이 제게로 다가와서 애정과 연민이 어린 표정으로, 마치 어린아이에게라도 하듯이 제게서 살며시 책을 빼앗아 들더니, 제 앞으로 독일어로 쓴 다른 책 한권을 내놓는 거예요… 그러고는 슬며시 웃으며 나가버리더군요. 푸슈킨도 가지고 가버렸고요.”
“이런, 세상에. 도대체 그 애가 어떤 책을 갖다놓던가?”
“바로 이겁니다.”
그리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프록 코트의 뒷주머니에서 평판 높은 비히너의 9판째 팜플렛을 꺼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것을 두 손으로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흠”
하고 그는 신음했다.
“아르카디가 아비의 교육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군 그래. 그래서 좀 읽어보았나?”
“읽어봤어요.”
“그래, 어떻던가?”
“제가 무식한 건지, 이 책이 엉터리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무식한 거겠지요.”
“난 자네가 독일어를 잊어버렸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물었다.
“독일어는 기억하고 있어요.”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 책을 되돌려주고 나서 동생을 의심스러운 듯이 흘긋 보았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아, 참”
하고 화제를 바꾸고 싶어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콜랴진(Kolyazin)에게서 편지를 받았어요.”
“마트베이 일리이치(Matvy Ilyitch)한테서 말인가?”
“그래요. 이번에 도시를 시찰하기 위해서 XXX에 온 겁니다. 그 사람은 이제 거물이 되었다는데, 친척의 정분으로 우리를 만나고 싶다는 겁니다. 저와 형님과 아르카디를 읍으로 초대한다고 써 있더군요.”
“넌 갈 생각이냐?”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물었다.
“아니요, 형님은?”
“나도 안 가. 50마장이나 되는 곳엘 가다니 그럴 바보가 어디 있겠냐? 마트베이는 자기의 위세 당당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고 싶은 거야. 멋대로 굴라지. 그 사람에겐 아첨꾼들이 실컷 아첨해줄 테니까, 우리가 없더라도 상관없을 거야. 대단한 벼슬을 한 것도 아니잖아. 그까짓 문관 3등(тайный советник [taynyy sovetnik])이 아닌가. 만일 내가 매우 고된 일을 계속 근무했더라면 지금쯤은 시종무관장(генерал-адъютантом [general-adjutant])이 됐을 거야. 어쨌든 너나 나나 구시대의 인물인 건 사실이다.”
“그래요, 형님. 이제 관을 준비하고 가슴에다 손을 얹을 때가 왔나 봐요.”
하고 한숨을 내쉬며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말했다.
“아니야, 나는 그렇게 일찍 단념하지는 않겠어.”
하고 형은 투덜거렸다.
“나는 또 그 의사와 입씨름을 한바탕 하게 될 거야. 그런 예감이 들어.”
바로 그날 저녁 차를 들 때, 그 입씨름이 한바탕 벌어졌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이미 전투 태세를 갖추고 민감하고 단호한 태도로 응접실에 들어왔다. 그는 적을 물고 늘어질 구실만을 노리고 있었으나 그 구실을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바자로프는 결코 키르사노프 댁의 늙은이(그는 두 형제를 이렇게 불렀다)가 있는 앞에서는 그다지 많이 지껄이지를 않았는데, 그날 따라 그는 기분이 상해서 입을 다문 채 차만 계속해서 몇 잔씩 마시고 있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조바심에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의 기대는 실현되었다. 화제는 이웃 마을에 사는 어느 지주에 관한 것이었다.
“건달입니다. 형편없는 귀족입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에서 그 지주와 알고 지냈던 것이다.
“잠깐 물어보겠는데”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은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자네는 건달과 귀족이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는가?”
“저는 형편없는 귀족이라고 했습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성가시다는 듯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대꾸했다.
“확실히 그랬네. 그러나 내가 짐작하기엔, 자네는 진짜 귀족에 대해서도 형편없는 귀족에 대해서와 같은 의견을 가진 듯하군.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걸 자네에게 말해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네. 여기서 말해두겠네만, 누구나 다 나를 자유주의적이며 진보적인 인간으로 알고 있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나는 귀족을 진짜 귀족을 존경하는 바일세. 생각해 보게, 선생(이런 말을 하자 바자로프는 파벨 페트로비치 쪽을 쳐다보았다). 생각해보게, 선생” 하고 그는 매섭게 되풀이했다. “영국의 귀족들은 말일세,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손톱만큼도 양도하지 않으며, 또 그러기 때문에 남의 권리도 존경하는 걸세. 그들은 타인에 대해서 의무의 수행을 요구하며, 또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도 의무를 수행하는 걸세. 귀족 계급은 영국에게 자유를 주었고 또한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세.”
“그런 이야기는 귀가 아프도록 수없이 들었습니다.”
하고 바자로프가 대꾸했다.
“그런데 당신께서는 그것으로 뭘 입증하시려는 겁니까?”
“선생, 내가 요것으로 증명하고 싶은 것은(파벨 페트로비치는 이런 말이 어법상으로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화가 났을 때에는 습관적으로 요것으로라든가 요것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 것이다. 이런 이상한 습관에서 알렉산더시대의 유산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귀족들은 모국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따금씩 모국어로 이야기할 때에는 요것이라든가 요놈이란 말을 쓰고 있었다. 즉 우리 순수한 러시아인은 동시에 고관 귀족이기 때문에 학교의 규칙 같은 건 무시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요것으로 증명하고 싶은 것은 자존심이 없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경심이 없이는, 귀족에게는 이런 기분이 발달해 있긴 하지만, 사회의 … bien public(사회복지)… 사회구조에 있어 아무런 기반도 마련할 수 없는 것일세. 선생, 개성이야말로 요긴한 것일세. 인간의 개성은 반석처럼 견고해야만 되는 것일세. 왜냐하면 그것을 기초로 해서 모든 것이 세워지기 때문일세. 나는 모든 걸 다 짐작하고 있네. 이를테면 자네는 내 습관도, 내 몸단장도, 나아가서는 내 깔끔함까지도 우습게 여기고 있는 모양인데, 이것은 모두가 자존심에서, 의무감에서, 그렇지, 의무감에서 그러는 걸세. 나는 농촌에서, 촌구석에서 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나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은 없네. 나는 인간다운 존재로서 나 자신을 존경하고 있는 것일세.”
“잠깐 실례입니다만, 파벨 페트로비치 씨”
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그런 당신은 자신을 존경하신다면서 팔짱을 끼고 앉아 계십니다. 그렇게 하고 계신다면 사회복지를 위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자신을 존경하지 않으셨더라도 그와 같이 하셨을 것입니다.”
파벨 페트로비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건 아주 딴 문제일세. 왜 내가 자네 말대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가, 그걸 지금 분명히 밝힐 필요는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귀족주의는 하나의 원리이며, 현대에 있어 원리 없이는 패륜이나 무뢰한들도 살아나기가 어렵다는 걸세. 나는 아르카디가 도착한 그 이튿날 그 애에게도 이런 말을 했네만 지금 자네에게도 거듭 강조해두겠네. 니콜라이, 그렇지 않은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에 바자로프가 말했다.
“귀족주의, 자유주의, 진보, 원리, 그야말로 여러 가지로 외국의 쓸모도 없는 단어들뿐이로군요. 러시아인에게는 그런 건 거저 준대도 필요 없습니다.”
“그럼 뭐가 필요하다는 건가? 자네 말을 듣고 있으니 우리는 인류의 테두리 밖에, 그 법칙의 테두리밖에 놓여 있는 것 같군. 역사의 논리가 요구하는 것은…”
“하지만 그런 논리가 우리들에게 무슨 쓸모가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들은 그런 게 없더라도 문제없이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뻔하지 않습니까. 당신께서는 배가 고플 때 한 조각의 빵을 자신의 입에 넣기 위해 논리를 필요로 하십니까? 그런 추상적인 논리들이 과연 우리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파벨 페트로비치는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을 하다니, 나는 정말 자네란 사람을 이해할 수 없군. 자네는 러시아 국민을 모독하고 있어. 원리라든가 규칙 같은 걸 어째 인정할 수 없다는 건가. 난 도무지 모르겠네. 도대체 자네는 무엇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건가?”
“큰아버지, 제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하고 아르카디가 참견했다.
“우리는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인정되는 것에 의해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지금 단계에서는 무엇보다도 부정이 가장 유익한 것이므로 우리는 부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걸 말인가?”
“예, 모든 걸 말입니다.”
“어떻게? 예술이나 시뿐만 아니라… 그리고 또 … 입 밖에 내기도 무서운 노릇이군…”
“모든 걸 말입니다.”
하고 말할 수 없이 침착한 태도로 바자로프는 거듭 말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그에게로 가만히 눈을 돌렸다. 이런 일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르카디는 매우 만족하여 얼굴이 약간 붉어졌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참견했다.
“자네는 모든 걸 부정하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자네는 모든 걸 파괴하고 있는데… 그러나 건설이라는 것도 필요한 게 아닌가?”
“그런 건 우리들의 할 일이 아닙니다. 우선은 터가 깨끗하게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현시대의 상황 속에서 국민 모두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고 아르카디가 점잖게 말했다. “우리는 그 요구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이기주의의 만족에 젖어 있을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마지막 구절은 어쩐지 바자로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구절에서는 철학, 즉 로맨티시즘의 냄새가 풍기는 것이었다. 바자로프는 철학을 로맨티시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젊은 제자를 반박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다.
“아니야, 그렇지가 않아”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갑자기 격렬하게 소리 높여 말했다.
“나는 자네들이 러시아 국민을 정당하게 알고 있다고도, 또 자네들이 국민의 요구나 갈망의 대표자라고도 보고 싶지가 않네. 아니, 러시아 국민의 실상은 자네들의 상상과는 전혀 다르단 말일세. 그들은 전통을 신성한 것으로 존중하고 가부장제에 의거하며, 신앙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국민일세.”
“그 말씀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가로챘다.
“그 점에 있어서는 당신의 말에 동의할 용의마저 있습니다.”
“만약 내가 옳다면…”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아무것도 증명하고 있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거예요.”
하고 아르카디는 틀림없이 위험하리라 생각되는 상대방의 수를 이미 간파하고 있는 숙련된 체스 선수 같은 표정으로 이렇게 되풀이했다.
“어째서 아무것도 증명하고 있지 않다는 게지?”
깜짝 놀란 파벨 페트로비치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자네들은 자기 국민에게 반대 행동을 취하는 건가?”
“그것이 뭐가 어떻다는 말입니까?”
하고 바자로프는 언성을 높여 말했다.
“국민은 천둥소리를 듣고 이건 예언자 엘리야가 눈부신 마차를 타고 하늘을 달리고 있는 소리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될 말입니까. 제가 국민에게 동의해야만 합니까? 그리고 제가 그에 반대한다고 해서 국민은 러시아인이고, 저 자신은 러시아인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아니, 그런 말을 하는 자네를 어떻게 러시아인이라 볼 수 있겠는가. 나는 자네를 러시아인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네.”
“우리 조부님은 땅을 경작하셨습니다.”
하고 오만한 자부심을 가지고 바자로프는 말했다.
“당신의 농부 중 누구라도 좋으니, 당신과 저 우리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같은 국민처럼 느껴지는가 물어보시지요. 당신은 농부들과 이야기하시는 것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자네는 농부들과 이야기는 하면서도 농부들을 경멸하고 있는 거로군.”
“그야 물론 농부가 경멸을 받을 만하면 말입니다. 당신은 제 사상 경향을 비난하시는데, 그것이 길에서 우연히 주운 것이라든가, 누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하던가요?”
“물론. 니힐리스트 같은 것도 매우 필요한 것일세.”
“그것이 필요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당신도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라고는 생각지 않으시잖습니까.”
“여러분, 여러분, 제발 개인적인 공격은 하지 마십시오.”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소리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미소를 지으면서 아우의 어깨에 한 손을 얹으며 그를 다시 앉혔다.
“염려 말게”
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이성을 잃거나 하지는 않아. 내겐, 말하자면 이 의사… 이 의사 선생께서 그토록 저주하시는 바로 그 자기 존중의식이란 게 있으니까 말이야. 실례하네.” 하고 그는 바자로프 쪽으로 돌아앉으면서 말을 계속했다. “자네는 혹시 자기 학설을 새로운 학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오산일세. 자네가 옹호하는 그 실리주의는 벌써 몇 번이나 거듭 유행했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비난 속에서 소멸되고 말았으니까…”
“또 외국어를 쓰시는군요.”
바자로프가 말을 가로챘다. 그는 화가 나기 시작해서 얼굴이 구릿빛으로 거칠게 변했다.
“첫째 우리는 아무것도 옹호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건 우리들의 양식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우리가 하고 있는 건 이런 것입니다. 저번에, 바로 며칠 전의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 있다는 것, 우리나라에는 도로다운 도로도, 상업도, 정당한 재판도 없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 알겠네. 자네들은, 이런 표현이 꼭 어울린다고 생각하네만, 고발자들이로군 그래. 자네들이 고발하는 것의 대부분에는 나도 찬성하는 바이지만…”
“그때 우린 아무리 우리나라의 병폐에 대해서 떠들어댄다 해도 다만 떠들어대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저 속된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나라 안에서 그토록 똑똑한 체하는 패들이, 이른바 선각자나 고발자라는 분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우리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술이라든가, 무의식적 창조라든가, 의회 정치라든가, 변호사 제도라든가, 뭔지 뜻도 모르는 걸 우리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동안에도 우리는 나날의 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걱정해야 합니다. 또 말할 수 없이 지저분한 미신이 우리를 질식시키려 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주식회사가 오로지 정직한 인간의 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파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기를 쓰고 있는, 다름 아닌 농민의 자유문제도 역시 우리에겐 아무런 이익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농부들은 술집에서 흠뻑 취하기 위해서 그들 스스로가 약탈하는 따위의 짓도 즐겨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을 가로챘다.
“그래, 자네들은 그런 걸 잘 알면서도 자신은 손톱만큼도 진지한 일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단 말이지?”
“손톱만큼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하고 볼멘소리로 바자로프는 거듭 말했다. 어째서 자기가 이렇게 상류계급 인사 앞에서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했던가 하고 그는 갑자기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럼 욕설이나 하고 마는 건가?”
“욕설이나 할뿐입니다.”
“그게 니힐리스트라는 건가?”
“그게 니힐리스트라는 겁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되풀이했지만, 이번에는 한층 더 무뚝뚝한 태도였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 그렇군.”
그는 이상스러우리 만큼 점잖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니힐리스트는 모든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으면 안 돼. 자네들은 우리의 구세주이며 영웅인 셈이군. 그런데도 어째서 자네들은 자신과 같은 고발자이기도 한 다른 사람들을 욕하는 건가? 자네들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떠들어대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다른 죄라면 몰라도 그 점에 관해서라면 우린 죄를 짓지 않고 있습니다.”
하고 바자로프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뭔가? 자네들은 실천하고 있는 건가? 실천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바자로프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가볍게 몸을 떨었으나 이내 다시 자제했다.
“흠… 실행하고 파괴한다…”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 까닭도 모르고서 왜 그와 같은 짓을 한단 말인가?”
“우리가 파괴하는 건 우리가 바로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하고 아르카디가 참견했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조카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렇습니다. 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변명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하고 아르카디는 잘라 말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변변치 못한 자식”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호통 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는 그 잘난 신념을 가지고 러시아에서 무얼 지지하겠다는 것인지 생각 좀 해보는 게 좋겠다. 아니, 이쯤 되면 천사라도 화를 낼 게다. 힘이라. 야만적인 칼믹족(서몽고족의 총칭)이나 몽고인 일지라도 힘은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우리에게 귀중한 것은 문명이란 말이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선생, 우리에게 귀중한 것은 그 문명의 성과인 걸세. 그런 성과 같은 건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하지 말게. 삼류작가, 즉 엉터리 작가, 또는 하루 저녁에 5코페이카를 받는 떠돌이 피아니스트, 그런 패거리일지라도 자네들보다는 가치가 있을 걸세. 어째서 그러냐 하면 그들은 문명의 대표자로서 천한 몽고인적인 힘의 대표자가 아니기 때문일세. 자네들은 자신을 선각자라 자처하고 있지만, 차라리 칼믹족의 천막 속에라도 들어가 있는 게 어울릴 걸세. 힘이라. 그러나 마지막으로 힘이 있는 자네들 생각들 좀 해보게. 자네들은 기껏해야 네 사람 반쯤 되겠지만, 반면에 나머지 패들은 수백만이나 있어, 자네들에게 자기들의 신성한 신앙을 짓밟히기는커녕 자네들을 짓밟아버릴 것일세.”
“짓밟히게 된다면 할 수 없지요.”
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그러나 두고 봐야 알 일입니다. 우리는 당신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것처럼 그렇게 적은 숫자가 아니니까요.”
“뭐라고? 자네들은 국민을 자네들의 뜻에 쉽게 따르도록 해나갈 수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1코페이카의 초로 모스크바가 다 타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하고 바자로프는 대답했다.
“흠, 그래, 처음엔 사탄처럼 거만하게 굴더니 이젠 우롱하려고 덤벼드는군. 젊은 녀석들이 이런 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니, 코를 질질 흘리는 풋내기들의 마음이 이런 것들에게 순종하고 있다니. 저걸, 저 꼬락서니를 좀 보게. (아르카디는 외면한 채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게다가 이 전염병은 벌써 멀리까지 퍼져버리고 말았어.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화가들은 로마에 가도 바티칸에는 그림자도 나타내지 않는다는 거야. 라파엘로 같은 건 거의 바보 취급을 당하고 있고 말이야. 왜냐하면 그가 권위자라는 것 때문이라고 하더군.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너무나 무력하고 무능하여, 성과 같은 건 있을 턱이 없지. 자기들의 창작력이라면 기껏해야 샘터의 처녀가 고작이면서도 노력하려 들지를 않지. 게다가 처녀를 그린 그 꼬락서니란. 그래, 자네 생각대로라면 그들이 훌륭한 작자들이라는 게 아니오?”
“제 생각으로는”
하고 바자로프가 대꾸했다.
“라파엘로 따위는 반 코페이카의 가치도 없죠. 그러나 나머지 패들이 라파엘로보다 낫다고 할 순 없습니다.”
“브라보, 브라보. 잘 들어둬라, 아르카디… 요즘의 젊은이들이 말을 어떻게 둘러대는가를 말이다. 생각해보게. 어떻게 그들이 자네들 뒤를 따르지 않고 배겨낼 수 있겠는가. 예전의 젊은이들은 공부를 해야만 했지. 무식쟁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어. 그러기 때문에 싫더라도 공부를 해야만 했던 거야. 그런데 지금의 이 패거리들은 세상의 모든 것은 엉터리다 하고만 말하면 모든 게 해결되니 말이야. 젊은이들은 그저 기쁠 수밖에. 옛날엔 그저 순한 양들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갑자기 니힐리스트로 되어버렸단 말이야.”
“그토록 침이 마르도록 추어올리던 자기존엄의식이라는 것을 이젠 단념하신 것 같군요.”
하고 바자로프는 냉담하게 말했다. 그러는 동안 아르카디는 얼굴을 붉힌 채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우리들의 논쟁이 너무 길어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끝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당신에게 동의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고 그는 일어나면서 덧붙였다. “그것은, 현재 우리 나라의 생활, 다시 말해 가정적이거나 사회적인 생활 중에서 완전무결하게 부정을 모면할 만한 제도를 단 한 가지라도 저에게 제시해 주실 경우입니다.”
“그런 제도라면 몇백만이라도 보여드릴 수 있지”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는 언성을 높여 말했다.
“몇 백만이라도 말일세. 그렇지, 이를테면 농업조합만 보더라도.”
싸늘한 미소가 바자로프의 입술을 스쳐갔다.
“아니, 농업조합에 대해서는” 하고 그는 말했다. “당신 동생분과 이야기 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동생 분께서는 지금 농업조합이라든가, 연대보증이라든가, 금주라든가, 그와 유사한 여러 가지 것들이 대체 어떤 것인가를 실제로 경험하고 계시는 중인 모양이니까요.”
“그렇다면 가족은 어떤가. 우리나라의 농민들에게도 가족이라는 게 존재하고 있으니까.”
파벨 페트로비치는 언성을 높여 외쳤다.
“이 문제도 역시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 편이 당신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신도 아마 며느리와 관계하고 있는 시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셨겠지요? 파벨 페트로비치 씨, 한 이틀쯤 생각할 여유를 가져보시는 게 어떨까요. 당장에 무언가를 발견해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말씀예요. 우리 나라의 모든 사회층을 샅샅이 조사하여 그 하나하나를 잘 생각해주십시오. 그 동안에 저는 아르카디와 함께 잠깐 나갔다가 오겠습니다.”
“모든 걸 우롱하겠다는 거로군.”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개구리를 해부하려는 겁니다. 자, 가세, 아르카디. 안녕히 계십시오.”
두 친구는 밖으로 나갔다. 형제는 마주앉아 아무 말 없이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렇다니까”
이윽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말을 꺼냈다.
“저게 요즘의 젊은이들이야. 저런 녀석들이 우리의 후계자란 말이야.”
“후계자라…”
하고 낙담한 듯 한숨을 쉬면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가 되뇌었다. 그는 논쟁을 하고 있는 동안 줄곧 불안한 모습으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애처로운 눈빛으로 아르카디를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형님,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언젠가 돌아가신 어머니와 말다툼을 한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께선 역정을 내시며 제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셨어요. 저는 마침내 어머니께 말씀드렸지요. 당신은 저를 이해 못하신다고요. 저와 당신은 각기 다른 세대에 속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예요. 어머님은 무섭게 화를 내셨지만 저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환약은 쓰지만 먹지 않으면 안 되지요. 그런데 이번엔 우리들 차례가 되어서 우리의 후계자들이 당신들은 우리와 세대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환약을 드셔야 합니다 하고 우리들에게 말하는 거예요.”
“이봐, 넌 너무 온순하고 지나치게 소극적이야.”
하고 파벨 페트로비치가 대꾸했다.
“나는 반대로 이렇게 확신하고 있어. 너나 나나 좀 구식으로 말하기도 하고 또 저런 뻔뻔스런 자긍심은 갖고 있지 않지만, 우리들이 그들보다 훨씬 옳다고 생각한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왜 저렇게 거만을 떠는 건지. 붉은 것과 흰 것, 당신은 어느 포도주가 좋으냐고 한 녀석에게 물어보면 나는 붉은 쪽을 선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나직이 대답하고 나서 마치 그 순간 우주 전체가 자기를 우러러보기라도 하는 양으로 거드름을 피우는 거야.”
“차를 들여가도 좋겠습니까?”
페니치카가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며 조용히 물었다. 그녀는 응접실에서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동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찻주전자를 물리도록 일러줄 수 없겠나?”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대답하고 그녀를 바라보며 일어섰다. 파벨 페트로비치는 “bon soir(잘 쉬게)” 하고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자기 서재로 물러갔다.
11
반시간 뒤에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정원에 있는, 평소 자기가 좋아하던 정자로 나갔다. 그는 슬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비로소 그는 아들과 자신 사이의 거리감을 확실히 의식했다. 거리감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뚜렷하게 커져갈 것이라는 것을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 이젠 그가 겨우내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최신 서적들을 읽으며 지낸 일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젊은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열띤 토론에 자기 의견도 제법 한몫 낄 수가 있다고 기뻐한 그였는데 그것도 역시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형님은 우리가 옳다고 말했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존심 같은 것은 제쳐놓고라도 나는 그들이 우리보다 진리로부터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그 무엇인가를, 이쪽에 대한 어떤 우월감 같은 것을 갖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젊기 때문일까? 아니, 단지 젊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 우월감은 그들이 우리보다 지주 기질의 흔적이 적다는 점에서 나온 건 아닐까?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머리를 푹 숙이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시를 부정한다는 건’ 하고 그는 또다시 생각했다. ‘예술이나 자연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건?’…
그리고 그는 어떻게 자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를 이해하려 애쓰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태양은 정원에서 반 마장쯤 떨어진 곳에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사시나무 숲 뒤로 숨어 버리고 말았다. 그 숲의 그림자는 고요한 들판을 가로질러 끝없이 뻗쳐 있었다. 한 농부가 그 숲 옆의 어둑어둑한 좁은 길을 따라 흰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어둠 속을 달리고 있는데도 그 농부의 모습이 어깨 언저리의 이음새까지도 뚜렷이 보였으며, 말의 발놀림도 아주 또렷하게 눈에 띄었다. 석양빛은 숲속으로 들어가, 그 무성한 숲을 헤치며 포플러 나무 줄기에 따뜻한 빛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줄기는 마치 소나무 줄기처럼 보였다. 또한 그 우거진 잎들은 거의 검푸른 빛을 띠었고 그 위로 저녁놀로 어슴푸레 붉어진 희부연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제비 몇 마리가 하늘 높이 떠서 날고 있었다.
바람은 아주 잔잔히 불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늑장을 부리고 있는 꿀벌들은 라일락 꽃 속에서 졸린 듯 천천히 윙윙거리고 있었다. 유일하게 혼자 삐쭉 뻗쳐 있는 한 가지 위에는 모기떼가 왱왱거리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감탄하다가 하마터면 좋아하는 시 구절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그러나 그는 아르카디를, 그리고 물질과 힘을 생각해내곤 침울해졌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거기에 앉아 자기만의 슬픈 위로 속에 잠겨 있었다. 그는 공상하기를 좋아했다. 시골에서의 생활은 그의 이런 성향을 발달시켰다. 그가 여인숙에서 아들을 기다리면서 이와 같은 공상에 잠겨 있었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때는 명료치 못했던 부자간의 관계가 명백해졌다. 그런데 그 결과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또 저승으로 가버린 아내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가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살아온 동반자로서의 아내도, 선량하고 근검절약한 가정주부로서의 아내도 아닌, 날씬한 몸매에 호기심 어린 청순한 눈을 가진, 소녀처럼 가느다란 목 위에 머리채를 단단히 감아 올린 젊은 처녀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녀와의 첫 만남을 생각해냈다. 그때 그는 아직 학생이었다. 그는 그 당시에 살고 있던 자기 집 계단 앞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만 실수로 그녀와 부딪친 그는 뒤돌아서 용서를 빌려고 했으나 “Pardon, monsieur(미안합니다).”라는 말만 겨우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녀는 머리를 숙인 채 잠시 미소를 짓고 나서 갑자기 놀란 토끼처럼 달아나 버렸다. 그러고는 계단 아래 모퉁이에서 그를 흘긋 보곤 의미 있는 표정으로 낯을 붉혔다. 그 후로 처음 한동안은 수줍은 방문, 불완전한 말, 반웃음, 한숨, 근심, 충격, 그리고 마침내 그 숨찬 기쁨…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 어디로 사라져버렸단 말인가?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되었고, 그는 세상에서 흔치 않은 행복에 젖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처음의 그 달콤했던 순간, 그 순간은 어째서 영원히 죽음이 없는 생명으로 이어질 수 없는 것일까? 그는 자기 생각을 자기 자신에게 분명히 하려고 애쓰지는 않았지만, 그 행복했던 시절을 추억보다 좀더 강한 무엇인가로 잡아 매 두고 싶었다. 다시 한 번 마샤와 가까이서 있고 싶었고 그 따스함과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자 그때 마치 그의 이런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그의 바로 곁에서 페니치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계세요?”
그는 몸을 떨었다. 가슴 아픈 생각도 부끄러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페니치카와 비교할 수 있다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지만, 페니치카로 하여금 자기를 찾아 나서게 한 것이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불현듯 그에게 자신의 백발을, 자신의 늙음을… 자신의 현실을 생각나게 하였다. 그가 오랫동안 잠겨 있던 마법의 세계는, 과거의 너울거리는 희미한 안개 속에서 나타났던 그 세계는 살며시 흔들리는가 했더니 꺼져버리고 말았다.
“여기 있소”
그는 대답했다.
“곧 갈 테니, 가 있어요.”
이게 바로 지주 기질의 흔적이라는 거야.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떠올랐다. 페니치카는 말없이 정자에 있는 그를 훔쳐보고는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그는 깜짝 놀랐다. 공상에 잠겨 있는 동안 어느 새 캄캄한 밤이 되었던 것이다. 주위는 아주 어둡고 조용했으며, 매우 창백하고 조그만 페니치카의 얼굴이 그의 앞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그는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감상은 쉽게 가라앉지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에 잠긴 듯이 자기 발밑을 골똘히 내려다보는가 하면, 이미 별이 돋아나 반짝이고 있는 하늘로 눈을 들어올리기도 하면서 천천히 정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그는 거의 지칠 정도로 많이 거닐었으나 그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 막연하고 우울한 어떤 열망은 여전히 가라앉을 줄 몰랐다.
아아, 만일 그때 그의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를 바자로프가 알았더라면 그를 얼마나 비웃을 것인가. 아르카디 역시 그를 비난할 것이다. 농장주에다 지주인 마흔 네 살의 사나이의 눈에 눈물이, 까닭 모를 눈물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이것은 첼로를 켜는 것보다도 백배나 더 나쁜 일이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계속 거닐었다. 등불이 비치는 창문들이 그를 기꺼이 지켜보고 있는 저 집안의 평화스럽고 아늑한 잠자리 속으로 들어갈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는 어둠과 정원, 얼굴을 스치는 신선한 공기의 감촉과 울적함, 그 가슴 설레임과 이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작은 길모퉁이에서 그는 파벨 페트로비치와 마주쳤다.
“어떻게 된 거냐?”
하고 그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에게 물었다.
“유령처럼 얼굴이 새파랗군. 기분이 나쁜 게로구나, 왜 쉬지 않지?”
니콜라이 페트로비치는 그에게 자기의 심리상태를 간단히 설명하고 나서 발걸음을 옮겼다. 파벨 페트로비치도 정원의 끄트머리 쪽을 향해 거닐면서 그와 마찬가지로 생각에 잠겨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운 검은 눈에는 별빛 외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그는 천성적으로 로맨티스트가 아니었으므로, 열정적인 마음과 프랑스식으로 말하는 인간 혐오의 정신이 있으면서도 공상 따위는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들어보겠나?”
하고 바로 그날 밤,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에게 이야기했다.
“굉장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어. 오늘 자네 아버지는 자네의 저 귀하신 친척으로부터 초대를 받았다고 하셨지. 자네 아버지는 안 가신다고 했으니 우리 둘이서 XXX로 가보지 않겠나. 사실 그 권력자는 자네를 부르고 있는 거야. 마침 날씨도 매우 좋아졌으니 함께 읍내 구경도 좀 하자고. 대엿새쯤 돌아다니면 충분할 거야.”
“그런데 자네는 거기서 이리로 다시 돌아올 생각인가?”
“아니, 아버지한테 가봐야만 해. 자네도 알다시피 아버지는 XXX에서 30마장쯤 되는 곳에 계셔. 오랫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어. 늙으신 부모님을 위로해드리지 않으면 안 돼. 우리 부모님은 좋은 분들이야. 아버지는 더욱 그러시지. 재미있는 분들이셔. 나는 그분들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고”
“그래, 자네는 부모님 곁에 오래 있을 작정인가?”
“그럴 생각은 없어. 이마도 지루할 테니까.”
“그럼 돌아가는 길에 여길 다시 들러 가겠는가?”
“모르겠어… 생각해보지. 그런데 어떻게 하겠나? 가보지 않겠나?”
“글세”
하고 아르카디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속으로 이 친구의 제안을 무척 기뻐했으나 자기 기분을 숨기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가 니힐리스트가 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이튿날 그는 바자로프와 함께 XXX로 떠났다. 마리노 마을의 젊은이들은 두 사람의 출발을 매우 섭섭히 여겼고, 두냐샤는 눈물까지 흘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노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2
이들 두 친구가 찾아간 XXX시는, 어느 신진 현지사의 관할에 속해 있었다. 지사는 러시아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진보주의자이면서도 또한 전제주의자였다. 그는 자기가 통치하기 시작한 지 한 해 동안에 손님 대접하길 좋아하는 귀족 단장(퇴역한 근위기병 2등 대위로, 사육 목장 주이기도 했다)뿐만 아니라 자기 부하 직원들과도 싸움이 잦았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분쟁은 마침내 페테르스부르크 본청에서도 모든 걸 현지에서 심사할 것을 위임한 대리자를 파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를 만큼 널리 파급됐던 것이다. 당국에서 선출한 사람은 일찍이 키르사노프 형제의 후견이었던 저 콜랴진의 아들, 마트베이 일리이치 콜랴진(Matvy Ilyitch Kolyazin)이었다. 그도 또 신진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얼마 전에 겨우 만 40세가 되었을 뿐인데 벌써 대정치가의 지위를 노리고 있었으며, 가슴 양쪽에는 별 모양의 훈장을 하나씩 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는 외국 것으로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조사를 받은 현지사와 마찬가지로 진보주의자로 여기고 있었고, 벌써 중요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의 허영심은 끝가는 줄 몰랐지만 태도만큼은 소박했고, 남의 의견에 자못 찬동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너그럽게 귀를 기울이고, 제법 호인답게 껄껄 웃어댔으므로 처음 한동안은 ‘유쾌하고 좋은 사람이다’란 평판마저 들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중요한 때에 가서는 이야기를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때면 곧잘 “에너지는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하고 말했던 것이다. l'energie est la premiere qualite d'un homme d'etat(에너지는 정치가의 제일 가는 특질입니다)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바보 취급을 당했으며 조금이라도 경험이 있는 관리라면 누구든지 마음대로 그를 우롱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고 기조(Guizot,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자기는 구습을 지키는 관리나 시대에 뒤떨어진 관료주의자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자기는 사회생활의 중대한 현상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또는 한 사람 한사람에게 불어넣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이에 관련된 말이면 그는 뭐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현대문학의 발달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늘 깔보는 듯한 오만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어른이 길에서 장난꾸러기 애들을 만나 잠깐 놀아주는 것 같은 그런 식이었다. 사실은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옛날에 페테르스부르크에 살고 있었던 Madame Svyetchin(스베치나 부인, 신비적 유파의 여류 작가)의 야회에 가기 위한 준비로, 아침 일찍 콩디약(Condillac, 프랑스 계몽기의 감각론자)의 책을 한 페이지쯤 읽는 버릇이 있었던 알렉산더 시대의 정치가들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도만은 그렇지가 않아 한층 현대적이었다. 그는 빈틈없는 관리요 매우 교활한 사람으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물의 이치를 분별하지도 못했고 지혜도 없었지만 오직 자기의 재산상의 일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만은 재간이 있었다. 이 점에서는 아무도 그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이었던 것이다.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교양이 있는 고관이 으레 그러하듯, 아주 선량한 태도로,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차라리 지나치게 명랑한 태도로 아르카디를 응대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가 초대한 친척 두 사람이 시골집에 그냥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자네 아버지는 언제나 이상한 사람이었으니까”
하고 그는 자기의 비로드로 만든 호사스런, 품이 넓은 실내복의 술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제복의 단추를 단정하게 채워 입은, 마음씨가 좋아 보이는 젊은 부하 직원 쪽을 바라보더니 뭔가 마음에 걸리는 듯한 얼굴 표정으로
“어떻게 된 거야.”
하고 언성을 높여 말했다.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입술이 맞붙어버린 듯한 젊은 사람이 일어서서 이상하다는 듯이 자기의 상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부하를 어리둥절케 한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더 이상 그쪽에는 눈도 주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고관들은 어쨌든 부하들을 어리둥절케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빌려 쓴 수법은 가지각색이었다. 그 중 많이 사용된 것은, 즉 영국식으로 말해서 꽤나 좋아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수법이다. 즉 고관은 가장 간단한 말까지도 갑자기 시치미를 떼고 귀머거리가 된 체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is quite a favorite(뭐가 제일 좋지)? 하고 묻는다. 그러면 부하는 그에 대하여 공손한 태도로 대답한다.
“오늘은 금요일입니다, 가… 각… 하.”
“응? 뭐라고? 무슨 말인가? 자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하고 고관은 긴장된 표정으로 되풀이한다.
“오늘은 금요일입니다, 가… 각… 하.”
“아니, 뭐? 금요일이라고? 어떤 금요일인가?”
“금요일입니다, 가… 각… 하, 일주일 가운데의 하루입니다.”
“아니 자네는 그런 것까지 가르치려 드는 건가?”
마트베이 일리이치도 자유주의자라는 평판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고관이었던 것이다.
“나는 자네에게 현지사를 찾아뵙고 오도록 권하고 싶은데 괜찮겠나?”
그는 아르카디에게 말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이걸 권하는 것은 권력자에게 굽실굽실하러 갈 필요가 있다는 구식 관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만 지사가 훌륭한 인물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자네도 또 이곳 사교계를 가까이 하고 싶겠지. 자네도 시골뜨기는 아니지 않은가? 지사는 모레 큰 무도회를 열기로 되어 있어.”
“아저씨께서도 그 무도회에 가십니까?”
하고 아르카디가 물었다.
“지사는 나를 위해서 그 무도회를 열어주시는 거야.”
하고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제법 동정해 마지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 춤출 줄 아나?”
“출 줄은 알지만 서투릅니다.”
“그거 안됐군. 그곳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으니까 말이야. 젊은 사람이 춤출 줄 모르면 수치야. 그렇다고 해서 나는 구식 관념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야. 나는 인간의 지혜가 두 다리에 달려 있다는 따위의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바이런주의는 우스꽝스럽지. il a fait son temps(그런 시대는 지나가 버렸어).”
“그러나 아저씨, 저는 조금도 바이런주의 같은 것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주의 같은 건…”
“나는 자네를 그곳 아가씨들에게 소개해주려고 하는 거야. 자네를 내 깔개 밑에 넣어주지”
하고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말하고 자기 혼자 자못 만족스러운 듯이 껄껄댔다.
“자네는 아주 따스해질 것이네.”
하인이 들어와서 지방 세무 관리의 도착을 보고했다. 그 관리는 주름살투성이인 입술에 부드러운 눈을 가진, 매우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한 마리 한 마리의 작은 꿀벌들이 한 송이 한 송이의 작은 꽃에서 예쁜 꽃가루를 따내고 있는 여름날이 가장 좋다는 것이었다. 아르카디는 밖으로 나갔다.
그는 자기들이 묵고 있는 음식점 겸 여관에서 바자로프를 만났다. 그에게 함께 현지사를 방문하자고 설득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할 수 없는 일이지”
이윽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엎질러진 물이니까. 어차피 지주들을 보러 온 거니까, 그들을 보러 가기로 하자.”
현지사는 젊은이들을 상냥하게 맞이했지만,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앉지 않았다. 그는 노상 안절부절 못하며 바쁜 체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거북스러운 제복과 매우 어색한 넥타이를 매고, 차분히 앉아서 먹을 시간도, 마실 시간도 없이 모든 일을 처리해나가고 있었다. 그는 고을 안에서 부르달루(Bourdaloue, 프랑스 설교가로서 예수회 신부)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 유명한 프랑스의 설교가를 가리켜서 말하는 게 아니라 부르다(бурду [burdu] 값싼 술)라는 술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키르사노프와 바자로프를 자기가 여는 무도회에 이미 초대해놓고서 단 2분도 못 되어 다시 두 사람을 초대한다고 되뇌었으며, 그때는 이미 두 사람을 형제로 여겨 카이자로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들이 현지사의 집에서 나와 자기들 숙소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들 곁을 지나치던 한 사륜마차에서 갑자기 슬라브식[Slavophil]의 상의를 입은, 키가 그다지 크지 않은 한 남자가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하고 외치며 바자로프에게로 달려왔다.
“아, 자네로군, 시트니코프(Sitnikov)”
하고 인도를 걸으면서 바자로프는 말했다.
“여기엔 웬일인가?”
“이거 정말로 우연입니다.”
하고 상대는 대답하고 나서 마차 쪽을 돌아보고 다섯 번쯤 손을 흔들며 이렇게 소리쳤다.
“내 뒤를 천천히 따라와야 해요, 따라오라고. 아버지가 여기서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고 도랑을 건너뛰면서 그는 계속했다.
“그래서 나를 이리로 오라는 분부가 있었어요. 나는 오늘 당신이 여기 왔다는 걸 알고 벌써 당신 숙소에 다녀왔어요. (실제로 두 친구가 숙소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거기서 한쪽에는 프랑스어 다른 한쪽에는 슬라브 식으로 조합시킨 글자로 시트니코프라는 이름이 인쇄되어 있는, 양 귀퉁이가 접힌 명함 한 장을 발견했다.) 당신은 설마 현지사를 방문하고 오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가 아닐세. 우리는 방금 그분한테서 돌아오는 길인걸.”
“아아, 그렇다면 나도 그분한테 가겠어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나를 당신의 … 이분에게 소개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쪽은 시트니코프이고 이쪽은 키르사노프야.”
하고 바자로프는 계속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대단히 영광입니다.”
옆으로 다가와서 웃음을 띠고, 그 너무나도 고상한 장갑을 서둘러 벗으면서 시트니코프는 말을 꺼냈다.
“성함은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나는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를 옛날부터 알고 있었으며, 말하자면 그의 제잡니다. 이분 덕택으로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아르카디는 바자로프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작지만 상냥한 인상을 주는 매끈한 얼굴에 불안하고 좀 둔한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마치 안으로 쑤셔 넣은 듯한 두 눈은 가만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가끔씩 어색하게 웃는 것이었다.
“정말입니다.”
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처음으로 내 앞에서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가 권위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몹시 감격했습니다. 마치 갑자기 눈이 뜨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는 이제야 인간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브게니 바시릴예비치, 이곳에 있는 어떤 부인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만나보셔야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부인은 당신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부인에게도 당신이 찾아주시는 게 정말 즐거운 한때가 될 것이고요. 부인에 대한 소문은 들었을 줄 아는데요?”
“도대체 누굴 말하는 건가?”
하고 바자로프는 성가시다는 듯 말하였다.
“쿠크신(Kukshin) 부인입니다. 그야말로 훌륭한 천성을 가진 분입니다. emancipee(진정한 의미에서의 개방된 여자입니다). 부인은 선각자이시지요. 어떻습니까? 이제부터 다들 부인한테로 갑시다. 부인은 바로 이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서 아침을 들도록 합시다. 아직 아침을 드시지 않았지요?”
“응, 아직.”
“그럼, 마침 잘됐어요. 부인은 말예요, 남편과 헤어져 있으니까 아무도 꺼려할 사람이 없어요.”
“미인인가?”
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가로챘다.
“아…닙니다. 그렇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를 부인한테 데려가려고 하는 건가?”
“무슨 농담을 그렇게…부인은 우리에게 샴페인을 낼 겁니다.”
“허허 그런가. 자넨 정말 처세에 밝군. 그런데 자네 아버지는 아직도 일수판매를 맡아 하시고 계신가?”
“예, 그래요.”
하고 시트니코프는 성급하게 말하며 껄걸 웃어댔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좋겠지요?”
“어떻게 할까?”
“자네는 온갖 사람을 다 보고 싶어 하시지 않는가, 가보세.”
하고 아르카디가 나직이 말했다.
“함께 가시죠, 키르사노프 씨? 당신이 빠지면 곤란한데요.”
“하지만 이렇게 여럿이 몰려가도 괜찮겠는가?”
“괜찮아요. 쿠크신은 좋은 부인인 걸요.”
“샴페인이 한 병은 나온 댔지?” 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세 병입니다.”
하고 시트니코프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건 내가 보증하죠.”
“무얼 걸겠나?”
“내 목이라도 걸지요.”
“자네 아버지의 지갑을 거는 게 좋겠군… 어쨌든 가보세.”
13
아브도치야 Avdotya (에우도키에 Eudoxie 또는 예브도크시아 Evdoksya) 쿠크신이 거주하고 있는 모스크바 귀족풍의 그다지 크지 않은 집은 XXX시의 최근 화재가 났던 어느 거리에 있었다. (우리나라 현청 소재지의 도시가 5년마다 불탄다는 건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현관 입구에는 쭈그러진 명함이 꽂혀 있고 그 위쪽에 초인종 줄이 걸려 있었다. 현관문을 열러주러 나온, 실내모를 쓴 여자는 하녀도 아니고 말벗도 아닌 것 같아 보였는데, 이런 점에서 여주인의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뚜렷이 엿볼 수 있었다. 시트니코프는 아브도치야 니키치시나(Avdotya Nikitishna)가 집에 계시냐고 물어보았다.
“당신이군, 빅토르?”
하고 옆방에서 가늘고 깐깐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와요.”
실내모를 쓴 여자는 이내 들어가 버렸다.
“저 혼자가 아닙니다.”
하고 시트니코프는 나직이 말하면서 상의를 재빨리 벗었다. 그러자 잠옷 같기도 하고 짧은 웃저고리 같기도 한 것이 나타났다. 그는 아르카디와 바자로프에게 기민한 시선을 던졌다.
“상관없어요, Entrez(들어와요).”
젊은이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간 방은 응접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작업실 같았다. 종이와 편지들, 그리고 대부분은 펴보지도 않은 몇 권의 두꺼운 잡지들이 먼지투성이인 책상 위에 뒹굴고 있었다. 그 언저리에는 내던져진 궐련 꽁초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가죽 소파에는 젊은 금발 여인이 반쯤 누워 있었다. 약간 헝클어진 머리에, 그다지 깨끗지 않은 비단옷을 입고, 짧은 두 팔에 커다란 팔찌를 끼고, 머리에는 레이스가 달린 머릿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누런 담비 모피로 장식한 짧은 비로드 외투를 자기 어깨에 아무렇게나 걸치면서 졸린 듯한 나직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빅토르” 하고 인사하며 시트니코프의 손을 잡았다.
“이쪽은 바자로프이고 이쪽은 키르사노프입니다.”
하고 시트니코프는 바자로프를 흉내 내어 짤막하게 소개했다.
“어서들 오세요.”
하고 쿠크신은 대답하고, 그 둥근 눈으로 바자로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둥근 눈 사이로는 작은 들창코가 고독한 듯이 붙어 있었다.
“당신을 알고 있어요.”
하고 말하며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바자로프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 개방된 부인의 자그마하고 평범한 얼굴에는 분명 못생긴 곳이라곤 아무 데도 없었지만, 그 얼굴 표정은 왠지 보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무의식중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시장하신가요? 그렇잖으면 심심하신가요? 그렇잖으면 소심하신가요? 왜 그렇게 불안해하시나요? 하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도 시트니코프처럼 노상 걱정스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막역한 사이처럼 말을 하거나 행동하는가 하면, 동시에 또 서먹서먹하게 굴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마 자기 자신을 선량하고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실제로 그녀가 하는 행동은 애초에 그녀가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의 반대되는 행동이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어린아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고의적이었다. 즉 자연스럽지가 못했다.
“그래그래,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바자로프 씨”
하고 그녀는 거듭 말했다. (지방이나 모스크바의 부인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그녀에게도 처음부터 상대방 남성을 이렇게 성으로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담배 피우시겠어요?”
“담배도 담배지만”
하고 시트니코프가 말으 받았는데, 그는 안락의자에 축 늘어져 기대어 한 발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우리들에게 아침을 좀 주지 않겠습니까. 지독하게 배가 고파서요. 그리고 샴페인도 한 병 곁들이도록 말 좀 해주세요.”
“요 곰팡이”
하고 소리치고 나서는 예브도크시아는 소리 내어 웃었다.(그녀가 웃자 윗잇몸이 완전히 드러나 보였다)
“안그래요, 바자로프 씨, 이 분은 곰팡이지요?”
“저는 안락한 생활을 좋아하는 것뿐입니다.”
하고 시트니코프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자유주의자라는 데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아녜요, 지장이 있어요. 지장이 있고말고요.”
하고 예브도크시아는 큰 소리로 말하면서 하인에게 아침 식사와 샴페인을 준비하도록 일렀다.
“이 점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고 바자로프를 돌아보면서 그녀는 덧붙였다.
“물론 내 의견에 동의해주시겠지요?”
“아닙니다.”
하고 바자로프가 대꾸했다.
“고기 한 점은 빵 한 쪽보다도 나은 겁니다. 화학적 견지에서 보더라도 말입니다.”
“당신은 화학에 흥미를 가지고 계시나요? 그건 내가 매우 좋아하는 거예요. 나는 내 스스로 새로운 접합제를 발명해내기까지 했는걸요.”
“접합제를? 당신이?”
“그래요, 내가 말예요. 무엇 때문일까 생각하시겠죠? 인형의 머리를 만드는 데 그것이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예요. 난 정말 실용적인 사람이에요. 하지만 아직 다 완성된 건 아니에요. 또 리비히를 읽지 않으면 안돼요. 그런데 모스크바 통보(Московских ведомостях [Moskovskikh vedomostyakh], 지주, 승려 층의 신문)의 부인 노동에 대한 키슬랴코프(Kislyakov)의 논문을 읽어보셨나요? 제발 읽어보시도록 하세요. 당신도 부인 문제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계시지요? 또 학교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당신 친구는 무슨 일을 하시는 분예요? 성함은요?”
쿠크신 부인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참을성 없이 연방 자기 질문만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지나치게 귀염을 받은 어린애가 자기 유모에게 하는 식이었다.
“저는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 키르사노프라 합니다.”
하고 아르카디가 말했다.
“전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브도크시아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멋지군요. 어때요, 피우시지 않겠어요? 그런데 빅토르, 난 당신 때문에 화가 났다는 걸 알고나 계세요?”
“어째서요?”
“당신이, 내가 들은 바로는, 조르주 상드(자유분방한 연애로도 유명한 프랑스의 소설가를 칭찬하기 시작했다더군요. 그 여자는 시대에 뒤떨어진 여자로, 그 이상 아무것도 아녜요. 그 여자와 에머슨(미국의 사상가, 청교도주의, 독일 이상주의 심취)을 비교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 여자는 교육에 대해서도, 생리학에 대해서도, 어느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 여자는 태생학에 대해서는 들은 적도 없을 것 같은데, 요즈음 세상에 도대체 그걸 모르고도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예브도크시아는 두 손을 펼쳐 보이기까지 했다.) 아아, 이 문제에 대해서 옐리세비치(Elisyevitch)가 얼마나 멋진 논문을 썼는지. 천재적인 분이에요. (예브도크시아는 언제나 ‘사람’이라고 하는 대신에 ‘분’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바자로프 씨, 내 옆 소파에 앉아주세요. 아마 모르실 테지만 나는 당신을 무척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건 왜죠? 들어보고 싶군요.”
“당신은 위험한 분이에요. 지독한 비평가인 걸요. 아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내 자신도 우스꽝스러워요. 난 마치 어느 장원의 조용한 여자 영주처럼 말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난 정말 시골 영주예요. 내가 직접 영지를 관리하고 있고, 게다가 말씀예요, 토지 관리인인 예로페이(Erofay)가 나를 돌보아주고 있어요. 마치 쿠퍼(Cooper, 미국 소설의 창시자)의 소설에 나오는 개척자 같은 멋진 표본이에요. 어딘가 마음내키는 대로 행하는 데가 있어요. 나는 완전히 이곳에 뿌리를 박아버리고 말았어요. 살기 힘든 곳이에요, 그렇잖아요? 하지만 할 수 없어요.”
“도시는 다 마찬가집니다.”
하고 바자로프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이해관계란 모두 하찮은 것뿐이어서 그게 무서운 거예요. 전에 나는 겨울이 되면 모스크바에서 지내곤 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제 남편이, 쿠크신 씨가 살고 있어요. 게다가 모스크바도 지금은 … 잘은 모르지만 아마 전혀 딴판이 되어 있을 거예요. 난 외국으로 갈 예정이에요. 작년에는 어쩌면 갈 뻔도 했었지요.”
“물론 파리시겠군요?”
하고 바자로프가 물었다.
“파리와 하이델베르크에 말예요.”
“하이델베르크엔 어째서?”
“그건요, 거기에는 분젠(Bunsen, 독일의 화학자)이 있거든요.”
이에 대해서 바자로프는 아무런 대답도 하려 들지 않았다.
“피에르 사포지니코프(Pierre Sapozhnikov)는 말예요… 당신은 그분을 아시나요?”
“아니, 모릅니다.”
“피에르 사포지니코프를 모르다니요. 그분은 아직 리디아 헤스타토바(Lidia Hestatov)네 집을 드나든다는 군요.”
“나는 그 여자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분이 갑자기 내게 동행해주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다행히도 나는 자유로운 몸이며 애들도 없어요. 다행히 라고?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예브도크시아는 담배로 노랗게 물든 손가락으로 담배를 한 대 말아서, 그 이음매를 혀로 핥아 붙여 빨아보고는 불을 붙였다. 하녀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자, 아침상이 들어왔어요. 수프를 들기 전에 요리부터 먼저 드실까요? 빅토르, 병마개를 따주세요. 그건 당신이 전문이시죠.”
“전문이고 말고요, 전문이지요.”
하고 시트니코프는 중얼거리고 나서 또다시 껄껄 웃었다.
“이곳에도 예쁜 여자들이 있습니까?”
하고 석 잔째의 글라스를 홀짝 마시면서 바자로프가 물었다.
“있고 말고요.”
하고 예브도크시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정말 머리가 텅 빈 여자들뿐이에요. 이를테면 Mon amie, Odintsova(내 친구 오딘초바) 같은 사람은 나쁘지 않아요. 유감스러운 건 그분 평판이 어쩐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하더라도 독립적인 견해 같은 것도 없고, 이해의 폭도 넓지 못하며 어쨌든 그런 비슷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교육제도를 완전히 고쳐야만 돼요. 난 이것에 대해 일찍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우리나라 여자들은 교육을 잘못 받은 거예요.”
“그런 무리들은 손을 쓸 수가 없지요.”
하고 시트니코프가 말을 받았다.
“그런 무리들은 경멸해야 합니다. 저도 경멸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철저히 말입니다. (남을 경멸하고 그 경멸을 말로써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시트니코프에게 있어 가장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는 특히 부인들을 공격했는데, 수개월 뒤에 두르돌레오소프 공작 집안 태생의 영양이라는 이유만으로 자기 아내 앞에서 엎드려 빌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그들 중의 어느 한 사람도 우리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도 우리와 같은 진실한 남성들의 화제에 오르기에 족한 여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대화를 이해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고 있지 않을 겁니다.”
하고 바자로프가 말했다.
“당신은 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고 예브도크시아가 참견했다.
“예쁜 여자들 말입니다.”
“뭐라고요? 그렇다면 당신은 프루동(Proudhon,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가, 무정부주의자)의 의견에 찬성하시는 거로군요?”
바자로프는 거만스레 버티고 앉아 있었다.
“나는 어떤 의견에도 찬성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권위를 타도하라.”
하고 시트니코프는 자신이 비굴할 정도로 숭배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마음대로 격한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소리쳤다.
“그렇지만 마콜리(Macaulay, 영국의 역사가))라는 분은…”
하고 쿠크신은 말을 꺼내려 했다.
“마콜리를 타도하라”
하고 시트니코프가 또 떠들어댔다.
“당신은 어리석은 여자들을 편드시는 겁니까?”
“어리석은 여자들이 아니라 여성의 권리를 편드는 거예요. 나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그걸 지키려고 마음먹었어요.”
“타도하라”
그러나 여기서 시트니코프는 그 말을 하다 말고
“그야 물론 저도 그 권리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고 말했다.
“아니에요. 내가 보기엔 당신은 슬라브주의자(19세기 중엽의 러시아의 지식계급의 일파가 주장하던 주의, 사상)예요.”
“아닙니다. 전 슬라브주의자가 아닙니다. 그야 물론…”
“아니에요, 아니에요. 당신은 슬라브주의자예요. 당신은 가정훈의 추종자예요. 당신은 손에 회초리라도 쥐는 게 좋겠어요.”
“회초리는 좋은 겁니다.”
하고 바자로프가 참견했다.
“그런데 우리는 마지막 한 방울에 이르렀습니다.”
“무엇에요?”
하고 예브도크시아가 말을 받았다.
“샴페인에 말입니다. 최고로 존경하는 아브도치야 니키치시나, 당신의 피가 아니라 샴페인에 말입니다.”
“여자들이 공격당하고 있을 때 나는 잠자코 들을 수만은 없어요.” 하고 예브도크시아는 계속했다. “그건 몸서리쳐지는 일이에요, 소름이 끼쳐요. 여자를 공격하는 것보다는 <De l'amour(사랑에 대해서)>라는 미슐레(Michelet, 프랑스의 역사가)의 책을 읽는 편이 나아요, 그건 굉장한 거예요. 어때요, 연애 이야기라도 하지 않겠어요?”
하고 소파의 구김살 투성이인 쿠션에 괴로운 듯이 한 손을 떨어뜨리며 예브도크시아가 이렇게 덧붙였다.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아니 어째서 연애 이야기 같은 걸 하자는 겁니까?”
하고 바자로프는 말했다.
“아까 당신은 오딘초바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아마 그런 이름이었죠? 그 부인은 어떤 분입니까?”
“매력적이에요. 정말 매력적인 분이에요.”
하고 시트니코프가 열을 내며 말했다.
“제가 소개해드리겠어요. 현명한 여자로 돈 많은 과부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분은 아직 충분히 깨지 못한 데가 있습니다. 그분이라면 우리 예브도크시아와 더욱 가까이할 필요가 있죠. 예브도크시아, Et toc, et toc, et tin-tin-tin! Et toc, et toc, et tin-tin-tin(당신의 건강을 위하여 잔을 듭시다. 쟁강, 쟁강, 쟁그렁. 쟁강, 쟁그렁, 쟁그렁)”
“빅토르, 당신은 장난꾸러기로군요.”
아침 식사는 오래 계속되었다. 샴페인은 처음 한 병에 이어서 또 한 병, 그리고 세 병째, 네 병째까지 나왔다. 예브도크시아는 쉴 새 없이 지껄여댔다. 시트니코프는 그녀에게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들은 결혼이란 대체 무엇인가. 편견인가, 그렇잖으면 죄악인가?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어떠할까. 평등할까, 그렇지 않을까? 또 본래 개성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등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브도크시아는 들이켠 포도주로 얼굴이 빨갛게 되어 음정도 맞지 않는 피아노 건반을 납작한 손톱으로 두드리면서 쉰 목청으로 처음엔 집시의 노래를, 다음에는 세이므로 시프의 발라드 ‘그라나다는 꿈꾸며 졸고 있네’를 부르기 시작했다. 또 시트니코프는 머리에 머플러를 두르고 “그대 입술과 내 입술은… 뜨거운 키스로 맺어지도다…”라는 가사에 맞추어 기절초풍할 만큼의 연인 역할을 연출했다. 아르카디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여러분, 이거 점점 정신병원을 닮아가는군요.”
하고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바자로프는 오로지 샴페인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가끔은 좌중의 대화에 비꼬는 듯한 몇 마디를 던지곤 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는 큰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켜고 일어서더니 여주인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아르카디와 함께 밖으로 나가버렸다. 시트니코프도 역시 두 사람 뒤를 따라 뛰어나갔다.
“그래, 저 여자 어때요?”
하고 그는 그들에게 들러붙어 따라오면서 물었다.
“제가 말한 대로 정말 대단한 인물이지요? 그런 여자가 좀 더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그분은 어느 의미에선 고상한 도덕적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당신 아버지의 사업체도 역시 도덕적 현상인가?”
하고 마침 그때 지나치고 있던 선술집을 가리키면서 바자로프가 말했다. 시트니코프는 또다시 새된 소리로 웃었다. 그는 자기 출신을 몹시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바자로프한테서 당신이라는 칭호를 듣고 그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렇잖으면 성을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14
며칠 뒤 현지사 댁에서 무도회가 열렸다.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사실상 이 축제의 주인공이었다. 현의 귀족 단장은 “본인은 사실 이분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참석한 것입니다.” 하고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지사는 무도회 석상에서도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앉아서 지시만 내리고 있었다. 마트베이 일리이치의 부드러운 태도는 다만 그 위엄에 의해서만 가까스로 그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상냥하게 대했지만, 이따금씩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소 싫은 표정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존경의 빛을 보였다. 즉 부인들 앞에서는 en vrai chevalier francais(진짜 프랑스 기사처럼) 겉치레 인사말을 늘어놓았으며, 고관들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굵직하고 잘 울리는 목청으로 쉴 새 없이 웃어대고 있었다. 그는 아르카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큰 소리로 조카라 불렀다. 낡은 연미복을 입은 바자로프에겐 마음에도 없는 너그러운 시선으로 흘긋 바라보며, 애매하기는 하지만 꽤 상냥스럽게 우물쭈물 말을 걸어주었다. 그러나 다만 “나는…”이라든가 “매우”라든가 하는 말만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또 시트니코프에게는 손가락 하나를 펴 보이면서 빙긋 웃는가 싶으면 어느 새 머리를 돌려 외면해버리곤 했다. 무도복 같은 건 입지도 않고 때묻은 장갑을 끼고 극락조처럼 머리를 꾸미고 무도회에 나타난 쿠크신에게까지 그는 “Enchante(반갑습니다).” 하고 말했다.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춤추는 남자 상대도 모자라지 않았다. 문관들은 대개가 벽 가까이에서 웅성거리고 있었지만, 군인들은 열심히 춤추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파리에 6주일쯤 체재하여 거기서 “Zut(알았다니까)”, “Ah fichtrrre(아아, 이건 정말)”, “Pst, pst, mon bibi(이봐, 이봐, 잠깐만)” 따위의 여러 가지 위세 있는 감탄사를 배워온 어떤 한 사람이 더욱더 그러했다. 그는 그런 말들을 파리의 토박이 같은 투로 정확히 발음했지만, 때로는 “si j'aurais(만일 내가 가졌더라면)”을, 그리고 “absolument(절대로)” 대신에 “si j'avais(반드시)”를 쓰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저 대러시아적 프랑스어로 말한 것이다. 즉 우리 동포들한테서 “comme des anges(천사처럼 프랑스어를 잘 하시는군요).”라는 말을 듣기 위해선 필요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그런 말들을 아주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아르카디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춤 솜씨가 서툴렀고 바자로프는 전혀 추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그들에게 시트니코프가 끼어들었다. 그는 얼굴에 경멸의 조소를 띄고 밉살스럽다는 듯한 눈초리로 거리낌 없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지만, 제법 그것에 재미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그의 얼굴빛이 변했다. 아르카디 쪽을 돌아보더니 다소 당황한 목소리로 “오딘초바 부인이 왔어요.” 하고 말했다. 아르카디는 두리번거리다가 문 가까이에 서 있는, 검은 색 옷을 입은 키가 큰 한 부인을 발견했다. 그녀의 당당한 인품은 아르카디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녀의 드러난 두 팔은 균형 잡힌 몸에 아름답게 늘어져 있고, 반들거리는 머리에는 가느다란 푸크시아(fuchsia)꽃 가지가 꽂혀 있는데, 둥근 어깨 위로 자칫하면 떨어질 듯이 아름답게 걸려 있었다. 밝게 빛나는 두 눈은 도톰하게 튀어나온 하얀 이마 밑에서 조용히 총명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고 입술에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상냥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엄숙한 맛이 감돌고 있었다.
“당신은 저분과 잘 아십니까?”
하고 아르카디는 시트니코프에게 물었다.
“아주 잘 알지요. 원하신다면 소개해드릴까요?”
“부탁합니다. 저 4인조 무용[quadrille]이 끝나거든.”
바자로프도 또한 오딘초바 부인을 관심 있게 바라보았다.
“놀라운 모습인데”
하고 그는 말했다.
“다른 여자들과는 전혀 딴판이군.”
4인조 무용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시트니코프는 아르카디를 오딘초바 부인에게 데리고 갔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그녀와 친밀한 사이는 아닌 듯하였다. 그녀가 놀란 듯 그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도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을 더듬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르카디의 성을 들었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반가운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니콜라이 페트로비치의 아드님이 아니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 아버님을 두 번 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한 소식은 가끔 듣지요.”
하고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당신을 알게 되어 매우 기뻐요.”
그때 어떤 부관이 그녀에게로 뛰어와서 4인조 무용을 청했다. 그녀는 승낙했다.
“정말로 춤을 추시려는 겁니까?”
하고 아르카디가 공손히 물었다.
“그래요. 그런데 어째서 내가 춤을 추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거지요? 내가 너무 늙어 보이나요?”
“천만에요. 왜 그런 생각을… 그러나 그러시다면 당신에게 마주르카를 청해도 괜찮겠습니까?”
오딘초바 부인은 너그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요.”
하고 말하면서 그녀는 아르카디를 바라보았는데, 그것은 아랫사람을 무시하는 표정이 아니라 시집간 누이가 아직 어린 동생을 바라보는 그런 표정이었다. 오딘초바 부인은 아르카디보다 약간 연상으로 29세였는데도, 그는 그녀 앞에서 자신이 초등학생이나 어린 제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두 사람 사이의 연령차는 실제보다 훨씬 뚜렷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마트베이 일리이치는 위엄이 있는 표정을 하고 비위를 맞추는 듯한 언사를 쓰면서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아르카디는 옆으로 비켜서기는 했지만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는 없었다. 그는 4인조 무용을 추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상대에게도 고관에게 그런 것처럼 막역한 태도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머리나 눈을 가볍게 움직이며 두 번쯤 조용히 웃었다. 그녀의 코는 대개의 러시아인과 마찬가지로 약간 두꺼웠으며, 피부 색깔도 완전히 투명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그런데도 아르카디는 이제껏 이렇게 매력 있는 부인을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의 음성은 그의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옷주름까지도 다른 여자와는 달리 한층 맵시가 있고 여유가 있는 듯이 생각되었으며, 그 몸짓도 놀랄 만큼 경쾌하고 자연스러웠다.
마주르카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아르카디는 자기의 춤 상대인 그 부인 옆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는데, 왠지 서먹서먹한 느낌이 들어 이야기를 걸려고 애썼으나 그저 잠깐 머리에 손을 대거나 했을 뿐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지루하게 서먹서먹해하거나 가슴만 졸이고 있지만은 않았다. 오딘초바 부인의 침착성이 그한테도 전파된 것이다. 15분도 채 못 가서 벌써 그는 자기 아버지나 큰아버지에 대해서, 페테르스부르크나 시골생활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오딘초바 부인은 부채를 약간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그때그때 고개를 얌전히 끄덕이며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남자들이 그녀에게 춤을 청하러 올 때마다 그의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그때 시트니코프도 두 번인가 그녀에게 춤을 청했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아 부채를 손에 들었지만 그녀의 가슴은 전혀 숨차 보이지 않았다. 아르카디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그녀 옆에 가까이 앉아서 그 눈을, 다시없이 아름다운 그 이마를, 사랑스러운 가운데에도 위엄이 있는 총명한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한다는 행복감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녀 자신은 그다지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가끔 하는 그 말 속에는 경험적 지식이 엿보였다. 아르카디는 그녀의 몇 가지 의견에 의하여 이 젊은 부인은 이미 여러 가지 감정을 체험하고 깊은 명상을 해왔다고 결론을 내렸다.
“당신과 함께 서 있던 분은 누구지요?”
하고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시트니코르가 당신을 내 옆으로 데려왔을 때 말예요.”
“그럼 그 사람을 보셨군요?”
하고 이번에는 아르카디가 물었다.
“정말 잘 생겼지요? 그는 바자로프라 하는 제 친굽니다.”
아르카디는 자기 친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가 친구에 대하여 너무 자세하게 열광적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오딘초바 부인이 그가 있는 쪽을 돌아보며 찬찬히 뜯어보았을 정도였다. 그러는 동안 마주르카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아르카디는 이 부인과 헤어지는 것이 섭섭했다. 그는 약 한 시간쯤 그녀와 즐겁게 보낸 것이다. 사실 그는 그 동안에 그녀가 얼마나 자기에게 너그러운 태도를 취해주고 있었던가, 자신은 얼마나 그녀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러나 대개의 젊은이들의 마음은 그러한 감정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마련이다. 음악은 그쳤다.
“고마워요.”
하고 오딘초바 부인은 일어서면서 말했다.
“당신은 나를 찾아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친구도 함께 데리고 와주세요. 난 아무것도 믿지 않을 용기를 지닌 분을 꼭 만나보고 싶군요.”
현지사가 오딘초바 부인에게로 걸어와서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곳을 떠나면서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는 아르카디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방긋 웃어 보였다. 그는 나직이 인사를 하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검정에 잿빛을 띤 비단옷에 싸인 그녀의 몸매는 얼마나 날씬해 보였던가) 이 순간에 벌써 그분은 나의 존재 같은 건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곤 이때 가슴 속에 뭔가 우아한 겸손함 같은 것을 느꼈다.
“어떻던가?”
하고 아르카디가 한쪽 구석의 자기 자리로 돌아오자 바자로프가 그에게 물었다.
“충분히 즐겼는가? 아까 어느 지주가 그 여자를 보고 저런, 저런 하고 말했는데, 그래, 자네 보기엔 그분은 어떻던가? 그 말대로 저런, 저런, 저런 이던가?”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난 전혀 이해할 수가 없군 그래”
하고 아르카디가 대답했다.
“오, 저런 저렇게 순진하다니까?”
“그렇다면 난 그 지주를 이해할 수가 없어. 오딘초바 부인은 무척 매력적이야. 그렇지만 그분은 냉정하고 엄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서…”
“잔잔한 연못일수록… 이라는 말을 자네는 알고 있겠지?”
하고 바자로프가 말을 받았다.
“자네는 그분이 냉정하다고 말하지만 거기에 진짜 매력이 있는 거야. 자네도 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는가.”
“그렇긴 하지”
하고 아르카디는 말했다.
“나는 그런 걸 판단할 수가 없어. 그분은 자네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 하더군. 자네를 데리고 오라고 내게 부탁했어.”
“자네가 나에 대해 얼마나 떠들어댔을지 짐작할 만해. 하지만 잘했어. 나를 데려가 주게. 그분이 단순히 시골 사교계의 인기인인가, 그렇지 않으면 쿠크신처럼 개방된 여인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어쨌든 그분은 내가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좋은 어깨를 가지고 있더군.”
아르카디는 바자로프의 냉소적인 태도에 불쾌함을 느꼈으나(흔히 그러하듯이) 결국 자기 불만에 직접적인 원인이 아닌 다른 이유로 그 친구를 비난하려고 했다…
“어째서 자네는 여성의 사상적 자유를 허용하려 들지 않는 건가?”
하고 그는 나직이 말했다.
“왜냐하면 말일세, 내가 관찰해본 결과 자유로운 사상을 논하는 여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괴물들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야.”
대화는 여기서 중단됐다. 두 젊은이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곳을 떠났다. 쿠크신은 신경질적으로, 그러나 약간 겁을 먹은 태도로 두 사람의 뒤에서 조소를 퍼부었다. 두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여 주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자존심은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더 늦게까지, 심야의 새벽 세 시가 지날 때까지 시트니코프와 폴카, 마주르카를 파리식으로 추어댔다. 이 교훈적인 광경으로써 현지사 주최의 축제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