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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를 위하여(The Princess)

아리아를 위하여(The Princess)

Jude Deveraux

 

1

미국 플로리다주() 키웨스트, 1942

JT 몽고메리는 모터보트에서 길다란 다리를 쭉 뻗으며, 상처 입은 한쪽 장딴지를 보트 바닥에 널브러진 나무 상자에 턱 올려놓았다. 그는 사람의 시선을 끄는 강렬한 인상, 무척이나 특출나게 잘생긴 남자였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을 아주 짧게 깎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잘생긴 외모에 손상이 간 건 아니었다. 빛나는 푸른 눈동자, 대리석처럼 차가우면서도 향기로움이 가득한 부드럽고 달콤한 입술, 약간 고집스러워 보이는 턱, 얼굴에 비해서 너무 크다 싶을 정도의 코. 그의 어머니는 이 코를 몽고메리 집안의 코라고 불렀는데 그 설명이 걸작이었다. 몽고메리 가문의 그 특이한 완고함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퍼붓는 모든 주먹질로부터 얼굴을 보호하려는 신()의 은총이라나?

아직도 난 이해하지 못하겠네.”

빌 프레이저가 보트의 속도를 조정하며 심드렁하게 말을 건넸다. 빌은 JT와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15센티는 더 작았고, 스물 셋의 나이에 머리카락이 드문드문 빠지기 시작해 끝간 데를 몰랐다. 그리고 몸매는 콘크리트 벽돌을 쌓아놓은 듯 다부졌다. 빌은 JT와 친구 사이란 게 늘 커다란 행운이라 여겼는데, JT가 가는 곳에는 항상 여자들이 줄지어 꽁무니를 따라다녀 그 덕을 톡톡히 본 게 아니었다. 마침내 여섯 달 전, 빌은 그 중에서 한 여자와 눈이 맞아 결혼으로 골인했다.

JT는 빌리의 말에 대꾸하기 싫을 정도로 귀찮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으로선 잠시 동안 눈을 감고 바다의 소금기 밴 신선한 공기를 한껏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어쩌면 역겨운 기름 냄새와 기계의 소음으로부터, 그리고 누군가를 돌보고 수많은 질문들에 일일이 대답하는 등의 자잘한 것에서부터 부담스런 책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천국과도 같은 느낌이랄까.

내가 자네처럼 혼자의 몸이라면, 당장 듀발 스트리트로 가서 평생을 보내겠네. 조물주께 버림받은 이런 고립된 섬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려는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JT는 한쪽 눈을 떠 빌을 쳐다보다가 눈길을 돌려 주위에 떠 있는 여러 개의 홍수림(紅樹林, 열대의 강 어귀해변에 둘러싼 교목관목이 무성한 숲) 섬을 둘러보았다. 그는 도시에서 성장한 빌에게 지금 마음속에 자리한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JT는 메인 주(미국 북동부의 주)에서 자랐는데, 그곳은 사람들이나 기계의 소음과는 동떨어진 곳이었다. 드넓은 바다와 파도소리, 물새소리가 들리는 평화로운 곳……. 친구들이 열 여섯에 처음으로 자동차를 샀을 때, JT는 돛단배를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선 열여덟 살에 이르기까지 그는 혼자서 꼬박 사흘에 걸쳐 바다 여행을 하곤 했다. 전세계를 혼자서 항해하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진주만(하와이 주 오아후 섬에 남쪽에 위치한 군항)을 공격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휩쓸리기 시작하자 그 꿈은…….

이봐! 이 세상을 저버리지는 말게나. 식량은 충분하겠지? 그렇게 내가 먹을 것만 밝히는 놈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지 말라고. 돌리가 그러더군. 자넨 뼛가죽만 남았다고 말이야.”

빌이 툴툴거리자, JT는 귀엽고 예쁘장한 빌의 아내 돌리가 그런 말을 할 때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 빙긋 웃었다.

충분해.” JT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나서 다시 두 눈을 감았다. 도시 사람들은 결코 바다를 끝없이 이어지는 연회 식탁으로 보지 못하지. 그는 그물과 낚싯대, 낚싯바늘 각각 한 개씩, 속이 깊은 냄비 두 개와 조그만 채소 상자 하나, 그리고 이것저것 들어가 있는 연장통을 마련했다. 앞으로 며칠 동안 왕처럼 살 계획이었다. 그는 침묵과 고독, 그리고 책임감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상태를 떠올리며 딱딱한 바닥에서 몸을 움직였다.

갑자기 빌이 웃음을 터뜨리자, 아주 평범한 그 얼굴에 물결처럼 주름이 잡혔다. 빌은 훌륭한 첩보원이 될 자질이 충분히 있는 친구였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사람들 속으로 재빨리 모습을 감추는 독특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좋아. 하지만 내 생각엔 아직도 자네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어쨌든 그건 자네의 삶이야. 중령은 자네가 다음 주 월요일까지 복귀하길 원하고 있네. 그때 내가 자네를 데리러 오겠네. 그리고 돌리도 자네에게 말했잖나? 자네가 그 화상 연고를 바르지 않겠다고 계속 고집을 피우면 그녀가 내일 이곳으로 와서 직접 발라주겠다고 말이야.”

JT가 눈을 번쩍 뜨며 짐짓 공포스런 표정을 짓자 빌이 코웃음을 쳤다.

, 이제 섬에 도착하게 되면 어떤 일이 펼쳐질지 한번 상상해 볼거나. 그물침대에 편안하게 누워 두 명, 아니 세 명의 아름답고 눈부신 천상의 여인이 내게 망고 열매를 먹여주면 난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받아먹겠지.”

여자 얘기는 말게. 제발, 여자를 데려올 생각은 말아주게.”

JT의 푸른 눈동자에 음울한 빛이 드리웠다.

그런 JT의 모습이 우스웠던지 빌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자그마한 해군 소속 여군 예비 부대원과의 사건은 자네 실수가 컸네.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자네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는 걸 누구든 알 수 있었어. 왜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던 게지? 내 생각엔 아주 괜찮은 한 쌍 같은데 말이야.”

그건 저쪽에 있는 나의 섬 때문이었어.” JT는 결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퍼붓는 빌의 견해를 무시하며 아련하게 젖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렇다면 섬 하나하나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날 납득시켜보게. 싫겠지만 자네가 꼭 해야 할 일이야. 그래도 안심이 되는 건, 자네 혼자 이곳에서 지내다가 처절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다시 아주 크나큰 기쁨으로 일자리로 돌아오게 되리란 사실이지.”

JT는 그 말에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평화,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방수포를 두드리는 빗소리와 바람소리 밖에는 없는 상태, 그리고 음식! 해군의 양식은 바다가재, 새우, 조개, 이런 것이라면 부족함이 없었다.

속도를 줄여. 해변에 부딪칠 작정이야?”

그가 빌에게 거의 소리치다시피 목소리를 높였다.

빌이 순순히 따르고는 좁다랗고 하얀 모래가 펼쳐진 해변으로 모터보트를 천천히 몰았다.

화상 입은 피부가 당겨지는 고통을 한껏 줄이려고 왼쪽 다리를 길게 뻣뻣이 내뻗고는 JT180센티미터 길이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보트 밖으로 다리를 내밀어 얕은 물속으로 조심스럽게 내딛었다. 무거운 해군 군화가 미끄러운 자갈 때문에 왠지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는 불현듯, 빌이 떠나고 거북살스런 제복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더 시간이 걸려야 하는지 갑자기 짜증스러웠다.

마지막이야.” 빌이 JT에게 첫 번째 상자를 내밀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꿀 수 있어. 나라면 말일세, 일단 근무 시간을 벗어나 휴가를 얻게 되면 그 마지막 날까지 엉망으로 취해 지내겠네.”

JT는 턱과의 경계선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흰 이를 몽땅 드러내며 히죽거렸다.

음식 고맙네. 그리고 연고도 부지런히 바르고 포동포동 살이 오르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하겠노라고 돌리에게 꼭 전해주게.”

그가 두 번째 상자를 해안에 내려놓으면서 빌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돌리는 아직도 자넬 걱정하고 있을 걸세. 그리고 자네가 돌아올 때면 예쁘장한 계집애들을 스무 명쯤 대기해 놓고 있을 거야. 자넬 만나게 해주려고 말이야. 내 분명 장담하지.”

그 때까진 나도 그 여자들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을 걸세. , 이제 자넨 떠나는 게 좋겠어. 비가 올 것 같군.”

JT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알겠네. 자넨 내가 어서 가버리기를 원하는 거지? 일요일에 데리러 오겠네.”

일요일 저녁에!”

좋아, 일요일 저녁. 그렇다고 자넨 돌리와 함께 지낼 필요는 없어. 돌리는 자넬 끔찍이도 걱정하는 날 염려할 거라고.”

그렇겠지. 자넨 지금 내게 근사한 제안을 하는군. 돌리와 자네, 그리고 내가 여기서 함께 산다?”

JT는 보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멋진 농담이군.”

빌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포동포동하고 자그마한 아내 돌리는 목숨과도 같은 소중한 사랑으로 언제나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녀가 자신을 선택해 결혼한 것이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JT는 그의 절친한 친구로 두 사람을 소개까지 해주었다. JT의 외모는 빌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멋진 사내인데……, ?

JT가 빌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가게, 이곳에서 떠나란 말일세. 그리고 일요일에 올 때 길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기억하도록 하게.”

빌이 뱃머리를 돌려 JT의 도움을 받아 좁은 해변을 빠져나갔다.

JT는 해변에 서서 빌이 다른 섬 하나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두 팔을 벌리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죽어 썩어 들어가는 바닷고기 냄새, 짭조롬한 소금기가 밴 공기, 저 뒤쪽의 홍수림에 불어오는 바람은 고향에 온 것 같은 푸근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몇 분 정도 더 서 있다가 가져온 물건을 주섬주섬 들고 해변을 따라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1년 전쯤 해군 측에서 처음으로 그를 키웨스트(플로리다 주 서쪽 끝에 있는 미국 최남단의 섬)로 보내 선박 수리 작업을 감독하도록 파견했을 당시, 그는 선박의 갑판에서 쌍안경으로 이리저리 살피다가 우연히 이 섬을 보았다. 그때 이 섬이 휴식을 취하기엔 아주 적당한 장소라는 느낌이 한순간에 와 닿았다.

지난 한 해 동안 그는 키웨스트 주변 섬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읽으며,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는 홍수림 섬에서 캠핑을 하는 데에 어떠한 것들이 필요한지 나름대로 연구를 해왔다.

홍수림 섬의 내부로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기록은 충분히 이해가 갈 만했다. 이 섬을 형성하고 있는 홍수림의 가지가 땅바닥까지 축 늘어져, 마치 나무줄기로 된 천연 감옥을 형성하듯 빈틈이 없었다.

JT는 셔츠를 벗고, 날이 넓고 커다란 칼을 집어 들고는 수풀을 베면서 좁다란 오솔길을 만들어 나갔다. 섬의 중앙에 있는 담수(淡水, 민물) 웅덩이까지 갈 생각이었다.

비오듯 땀을 흘리며 이제는 반바지와 부츠 차림으로, 드디어 무려 네 시간 동안 사투 끝에 그곳에 닿았다. 너무 말랐다던 돌리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사실 3주 동안 병원에서 지낸 탓에 몰라보게 살이 빠졌다. 몸 전체의 왼쪽 부위에 입은 화상은 아직도 새살이 나오는 상태여서 땀이 흐르자 가렵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멈춰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햇살에 반짝이는 자그마한 이파리의 홍수림이 삼면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꼴이었지만, 웅덩이와 조그만 공터가 앞쪽으로 훤히 뚫렸다. 수풀 아래에 감춰진 물줄기가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돛대로 만든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피우고 얼마간의 식량을 놓아둘 만한 공간으론 충분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그게 전부였으니까…….

그는 얼굴에 줄줄 흐르는 땀을 훔쳐내고는 뒤돌아서 오솔길을 따라 내려왔다. 길은 제법 구불구불하고 모퉁이가 많아 꽤 복잡했다. 모퉁이 두 개를 돌아 고리모양으로 구불거리는 낮은 나뭇가지 아래로 기어가, 잠시 후에 다시 가지를 쳐내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갓 만든 오솔길이 잠잘 곳까지 이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여러 번 독일 잠수함이 키웨스트로 들어온 적이 있었으며, JT는 하룻밤이라도 목에 총검이 겨누어진 채 잠에서 깨어나는, 그런 방해는 받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반바지에다 부츠를 신고선 뱀이 또아리를 튼 것처럼 구불거리는 오솔길을 내려가 다시 모든 짐을 끌고 와선 허리춤에 단검을 차고 허리를 쭉 폈다. 고개를 드니 수평선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는 연장통에서 자루걸레를 꺼내들고 해변으로 가서는 부츠를 벗고 따뜻한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마 분명히 이곳엔 신기한 게 널려 있을 거야.”

그는 메인 주, 고향의 차가운 바닷물을 생각하며 누군가 들으란 듯이 소리 내어 말했다.

물이 가슴까지 차오자, 그는 자맥질하여 익숙한 동작으로 물밑을 헤엄쳐갔다. 그러자 물속에서 삐죽이 솟아나온 난파선의 아주 조그만 조각 하나가 걸리적거렸다. 키웨스트 근처의 얕은 해면까지 전쟁의 파편들이 널려 있다니, 이건 너무 서로에게 불행한 짓거리들이야. 물속은 사물을 분간하기 힘들었지만 형체를 알 수 없는 짙은 그림자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는 언젠가 배의 일부분에 속했을 파편의 구멍에 자루걸레를 쑤셔 넣고 헤집었다. 자루걸레를 다시 꺼내자, 바다가재 네 마리의 더듬이가 걸레의 실밥 사이로 삐죽이 나와 있는 게 보였다.

바다가재를 해변으로 가져가는 도중에 한 마리가 달아나 버렸지만 그는 재빨리 다른 세 마리의 집게발을 꼭 붙들고 오솔길을 따라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불을 지피고 냄비에 물을 끓였다. 능숙한 솜씨로 한 마리 씩 재빠르게 다듬어 끓는 물속에 집어넣었다. 이놈들은 고향에서 잡았던 놈들과 달랐다. 더 작았고, 껍질에는 반점이 있었지만 요리가 다 되었을 때에는 빨간색으로 변해 형태가 거의 같아졌다.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났다. 그는 가볍게 요기를 한 후 빈 껍질을 휙 던져버리고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매달은 그물침대로 올라갔다. 부드럽게 와 닿는 공기와 거의 느낄 수 없는 싱그러운 바람을 싣고 밤이 깊어갔다. 철썩철썩 부딪치는 파도소리, 헛헛한 기분이 싹 가셔 모든 게 편안했다. 정말 오랜만이다. 고향을 떠난 뒤 처음으로, 평화로움을 만끽한다는 게 마치 꿈만 같았다.

그는 일 년만에 그 어느 때보다 곤히, 아주 곤히 잠들었다. 아침식사용으로 새우요리가 그득히 쌓여 있는 꿈을 꾸었다. 지난 몇 주만에 처음으로, 화상을 당했던 날 그 끔찍한 밤에 대한 꿈에 시달리지 않았다. 불길에 휩싸이는 꿈도 꾸지 않았다.

태양이 코끝을 간지럽히며 하늘 높이 떠오를 때까지 계속해서 잠을 잤다. 새벽 다섯 시에 그의 코밑으로 차가운 철제 쟁반을 들이밀고는, ‘오늘 아침에는 기분이 어떠세요?’라고 묻는 거만한 간호사가 없다는 게 문득 스쳐지나갔다. 날아오를 것 같은 해방감으로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잠결에 미소를 머금고선 모닥불 위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물고기의 꿈을 꾸었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너무 깊이 잠들어서 그 소리를 들을 수조차 없었으며, 거의 무슨 소리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 총소리였다. 그는 지난밤, 평온한 느낌으로 잠이 들었던 탓이라, 지금 그 총소리는 자신을 겨눈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 후다닥 몸을 곧추세우고 앉았다. 그물침대가 덩달아 흔들거렸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물침대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몸의 왼쪽 부위에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꼈지만 부츠를 신고 신속하게 끈을 꿰고는 권총을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 마음이 안 놓였는지 휘둘러보다가 공터를 떠나면서 단검을 허리춤에 찼다.

해변에 이르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괜히 놀랬다 싶어 혼자 키득거렸다.

그건 꿈이었어.”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나서, 오솔길이 있는 쪽으로 뒤돌아섰다.

한 발자국을 떼려는 순간 다시 한 발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해변 한쪽 귀퉁이에 낮게 엎드린 자세로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을 보았다.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두 명의 남자가 모터보트에 타고 있었다. 한 사람은 모터 옆에 앉아 있었고, 다른 사람은 서서 소총을 들고 물속의 뭔가를 겨누고 있었다. JT는 눈을 몇 번 껌벅거리고는 검고 둥근 형체가 물속으로 잠기는 걸 보았다. 그건 사람의 머리였다!

JT는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결국, 지금은 전시 상황이었으며, 물속의 머리는 아마도 사살 일보직전인 독일 첩보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불현듯 떠올렸다. 그는 나무 뒤에서 소리 죽여 권총을 꺼내들고 부츠를 벗어 던지고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JT는 소리를 죽여 헤엄치면서, 두 남자와 물속의 머리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보려고 애썼다. 갑자기 머리가 물속으로 내려가 표면에서 사라지자, 그는 잠수하여 보트 바로 아래로 헤엄쳐갔다.

저기!”

더 깊이 막 잠수하려는 순간, 위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사이를 두고 있다가 물속으로 총탄이 마구 날아왔다. 총탄 하나가 그의 어깨로 파고들었다.

그는 계속해서 아래로 아래로 잠수하면서, 두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렸다.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다시 표면으로 떠올라야 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축 늘어진 몸이 아래쪽으로 떠내려가는 걸 발견했다. 그는 더 깊이 잠수하려고 더 힘껏 자맥질을 했다.

그는 축 늘어진 사람의 허리춤을 잡고 위쪽을 향해 손발로 갈퀴질하듯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 나무뿌리가 보여 그 뿌리가 있는 곳에 닿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폐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해 터져 버릴 듯했으며,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머리끝까지 차 오를 정도였다.

수면 위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 JT는 깊은숨을 토해냈다. 두 남자를 피해야 한다는 것보다 숨을 쉬어야 한다는 데에 정신이 온통 쏠려 있었다. 그는 붙들고 있는 사람의 허리춤에서 손길을 옮겨 머리채를 움켜잡고는 물 밖으로 그 사람의 머리를 끌어올렸다. 그는 자세를 고치고는 귀를 기울여 붙들고 있는 사람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JT와 겨우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두 남자가 모터보트에서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다행히 두 사내는 등을 보이고 있었다.

JT는 조용히 나무 뿌리 쪽으로 헤엄쳐갔다. 나무 뿌리에 매달려 있던 날카로운 대합조개가 갑자기 달려들어 화상 입은 쪽을 마치 칼로 베듯 상처를 덧내자 JT는 순간 질식할 것 같은 통증으로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뿌리 쪽으로 더 가까이 가면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두 남자는 노를 사용하여 보트를 다루고 있었다.

그녀를 드디어 해치웠군. , 여기서 빠져나가자고.”

그래도 확실하게 해두어야 하지 않겠나?”

소총을 든 남자가 두리번거리며 대꾸했다.

그녀라고?”

JT는 시선을 돌려 축 늘어진 채 어깨에 기대어 있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과연 여자였다. 섬세한 외모의 젊은 여자로 상당히 예쁜 얼굴이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처음으로 JT는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여자를 쏜 보트의 두 남자를 공격하고 싶었지만, 조그만 단검 이외에 달리 무기가 없었다. 게다가 몸은 절반 밖에 치유되지 않은 화상으로 덮여 있는데다가 방금 어깨의 총상이 얼마나 깊은지조차도 모르질 않는가.

그는 충동적으로 여자를 더 가까이 끌어당겨, 언제 덤벼들지 예측할 수 없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대합조개로부터 가느다란 여자의 몸을 보호하려다가, 우연히 젖가슴을 곡선을 스치게 되었다. 홀연 그녀에 대한 보호 본능이 더욱 강하게 꿈틀거리는 걸 느끼며, 사랑스런 몸짓으로 그녀를 바짝 기대게 했다. 그는 마치 잃어버린 동전을 찾듯이 물속을 들여다보며 두리번거리고 있는 두 남자의 등을 노려보았다.

무슨 소린가 들었어. 모터 소리 같았다고. 그녀는 죽었어. 여기서 얼른 빠져나가자.”

앉아 있는 남자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소총을 어깨에 맨 다른 남자가 자리에 앉더니 그러자고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남자가 모터에 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이 탄 보트는 바다의 물살을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이내 사라져갔다.

JT는 보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글 같은 뿌리 숲에서 빠져 나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있는 힘을 다해 여자의 몸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그는 해변에 닿을 대까지 상처 입은 팔로 그녀를 붙들고 다른 팔로 헤엄을 쳤다.

죽지 말아요, 아가씨.”

그는 그녀를 물가로 데려오면서 안타까운 목소리로 계속 중얼거렸다.

죽으면 안 돼요.”

마치 유리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녀를 해변에 엎드린 자세로 누이는 순간 그녀의 폐에서 물이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길다란 소매의 목깃이 높고, 스커트를 한껏 부풀린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며,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물기에 젖어 착 달라붙었다. 드레스 역시 몸에 착 달라붙어 아름다운 몸매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은 한쪽으로 돌려져 있는 상태로, 영원히 뜨지 않을 것처럼 두 눈이 감겨 있었다. 도자기처럼 투명하면서도 창백한 한쪽 뺨에는 굵고도 검은 채찍자국 같은 상처가 고혹스런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마치 한 번도 햇빛에 노출된 적이 없는 희귀한 꽃처럼 보였다. 이렇듯 섬약한 미인을 누가 죽이려 했단 말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마음속에서 보호 본능이 세차게 끓어올랐다.

아름다운 아가씨.”

그는 반쯤은 애무하는 손길로 그녀의 옆구리에 압박을 가한 다음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숨을 쉬어요, 아가씨. 이 멋진 몽고메리를 위해 숨을 쉬어 봐요. 제발, 아가씨.”

총상을 입은 어깨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대합조개에 벤 여섯 군데의 상처에서는 더 많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이 아름다운 아가씨의 생명이었다. 그는 그녀를 살려달라고 신께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아가씨. 제발 숨을 쉬어보세요.” 그의 목소리가 애절하게 떨렸다.

포기해선 안 돼요. 이제 안전해요. 내가 보호해주겠소. 제발, 아가씨. 날 위해 깨어나세요.”

가슴 조이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순간 그는 그녀의 몸속으로 부르르 경련이 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살았다! 그는 감격을 억누르지 못해 부드럽고 투명한 뺨에 키스하며, 차가운 피부에 온기를 불어넣으려는 듯 점점 기운이 솟구쳤다.

그거예요, 아가씨. 조금만 더요. 이 멋진 나를 위해 크게 숨을 들이쉬어봐요. 숨을 쉬어봐요, 아가씨!”

다시 한번 경련이 그녀의 몸속을 관통하더니 몸이 크게 한 번 들어 올려졌다. JT는 그녀에게 온 마음을 불어넣은 것 같아 자신은 오히려 허탈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녀가 짭짤한 바닷물을 뿜어내는가 싶더니 몸을 일으키려고 애쓰면서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JT는 어찌할 바를 몰라 연신 싱글거렸다. 커다란 기쁨의 물결이 핏줄을 뚫고 지나가는 짜릿함에 몸을 움찔이며, 한쪽 무릎 위로 그녀를 끌어올리면서 신께 감사드렸다.

그거예요, 아가씨. 이제 됐어요.” 그녀의 축축한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조그맣고 연약한 등을 어루만졌다. 아마도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느꼈던 감정이 바로 이런 감정이 아닐까? JT는 이 아가씨를 구한 게 왜 그렇게 기쁜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손등으로 그녀의 귀여운 뺨을 어루만지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녀를 천천히 흔들면서 얼렀다.

이제 안전해요, 아가씨. 정말로 모든 게 안전해요.”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듬어 목에 파묻었다.

당신은…….” 그녀가 기침을 해대며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말하지 말아요, 아가씨. 그냥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물기가 다 마르면 내가 집으로 데려다 주겠소.” 그는 그녀를 달래며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당신은…… 콜록콜록…… 아마…… 콜록콜록.”

뭐라고요? 내게 감사의 말을 하는 거라면 이 다음에 해도 돼요. 당장은 마른 옷을 입어야겠소. 뜨거운 물고기 수프를 좀 먹으면 어떻겠소?” 그의 목소리는 깊고 사랑이 넘쳐흘렀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 JT는 그녀를 뒤쪽으로 움직이게 해서 간격을 두고 쳐다볼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두 팔을 그녀의 등 뒤로 두르더니 마치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요, 아가씨. 다시는 아무도 당신에게 해코지하지 못할 거요.” 그녀가 저항하는 몸짓을 해 보이자 그는 너그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다시 몸을 추스리도록 다독거렸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겼다. 현대적인 의미에서나 과거의 기준으로나 보나 이렇듯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이었다. 자그마한 체격에 균형을 이룬 용모와 완벽한 형태의 머리 모양은 마치 그녀가 옛날 왕족사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은 묘한 느낌이었다. 뭐랄까, 어머니가 읽어주던 동화 속의 요정? 그녀는 조난당한 공주였으며 그는 그녀를 구출한 왕자 같은 느낌, 그 어떤 따뜻함이 그에게 물밀 듯 밀려들었다.

그는 보호하려는 몸짓으로 그녀의 등을 가볍게 매만지며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아가씨.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말을 하려다 그녀가 다시 기침을 해댔지만 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녀가 기침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는 동안 그의 두 눈동자가 부드러움으로 빛났다.

당신은…… 콜록콜록…… 날 만지면 안 돼요. ……콜록콜록…… , 콜록콜록…… 왕족이에요.” 그녀가 말을 끝낼 즈음에 그녀의 등은 꼬챙이처럼 뻣뻣해졌다.

JT는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금세 이해하려고 멍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난 왕궁의 공주고 당신은…….” 그녀는 고개를 숙여 그의 발가벗은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날 만지면 안 돼요.” “, 이런!” JT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녀의 등에서 힘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평생동안 그런 굴욕스런 배신감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얼른 일어서며 앉아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조금도 감사하게 생각지 않는군요.” 그는 말을 꺼냈다가 도대체 무슨 말로 치미는 화를 삭여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턱이 심하게 떨렸으며, 그녀를 쳐다보는 두 눈동자는 푸른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 당신 스스로 아침거리를 찾아보시죠, 공주님.”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그녀에게서 돌아서서 그녀만을 남겨두고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2

아리아는 그가 떠난 텅 빈 해변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머리에는 상처를 입었고 폐에도 손상을 입었는지 숨을 쉴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두 다리가 욱신욱신 쑤셨다. 그녀는 이 엄청난 시련 앞에 그저 해변에 누워 꺼이꺼이 울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왕궁의 공주는 울어서는 안 된다. 공주는 결코 그 어떤 것을 느끼더라도 어느 누구에게든 내색을 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디서든 그 누구를 만나든 간에 항상 미소를 지어야 한다. 아무리 엄청난 고통을 당할지라도…….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왔고, 이제 그녀에게 제2의 천성으로 자리잡았다.

조그만 소녀였을 때, 그녀는 조랑말에서 떨어져 한쪽 팔이 부러진 적이 있었다. 그때 겨우 여덟 살이었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일어서서 다친 팔을 몸 쪽에 바짝 붙이고, 어머니가 있는 내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마부도 가정교사도 그녀가 다쳤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팔의 골절이 다 나은 후-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한껏 칭찬해 주었다.

밤새도록 생명을 지키려고 사투를 벌인 끝에 이제 그녀는 이상한 나라에 와서 여기 이렇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구해준 남자가 무척이나 이상한 행동을 한 게 영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녀는 나무들이 우거진 쪽을 흘낏 쳐다보며, 그 이상한 남자가 약속했던 물고기 수프를 가지고 언제쯤 돌아올지 은근히 기다려졌다. 물론 그녀는 그에게 옷을 입으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떤 남자라도 옷을 입지 않은 채로 그녀 앞에 나서지 못하게 하라고 단단히 이르시곤 했다. 그가 하인이든, 남편이든, 또는 어떤 낯선 섬의 원주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해변 아래쪽에 몇 미터 높이의 종려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그 나무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복잡했으며 두 다리는 애써 걸음을 떼느라 후들거렸지만, 그녀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왕궁의 누군가가 보고 있기라도 하듯이 몸을 구부정하게 하거나 축 늘어뜨리지 않으려고 배에 힘을 주고 안간힘을 다했다.

공주는 항상 공주인 거야. 어디에 있든 또는 주위의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을 하든 그건 절대 변하지 않는 사실이란다.’ 그래,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어. 나는 공주로 남아 있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처지를 깨닫도록 분명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모든 상황에서 날 이용하려 들 거야.

아까 그 남자 역시 이용하려 했다는 게 문득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수없이 부르던 아가씨란 단어! 그녀는 생각할수록 자꾸 얼굴이 달아올라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그가 어루만지던 손길! 아무도,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녀를 그렇게 만진 적은 없었어. 왕궁의 공주를 만져서는 안 된다는 걸 그가 미처 알지 못했단 말인가?

그녀는 종려나무 그늘에 앉았다. 나무 등치에 몸을 기대고 편안한 자세로 쉬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설핏 잠이 들면 그 남자가 음식을 가지고 돌아와서 잠이 든 그녀를 보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세를 가다듬고 그녀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갈매기 떼 춤추는 바다를 아련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바다를 바라보다 지난 스물 네 시간 동안의 사건이 온통 머릿속을 휘저었다.

지난밤은 일생에서 최악의 밤이었다. 아아 어느 누구의 일생에서라도 최악의 밤이었으리라. 사흘 전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조국(祖國) 랑코니아를 떠났다. 그녀는 미국 정부의 정식 초청을 받아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아리아가 공식 순회에 참석할 계획이라고 미국 관리들이 그녀의 수행원에게 말을 건넸다. 이번 여행의 목적을 두고 랑코니아의 왕인 그녀의 할아버지는, 미국의 이런 환대는 단지 자신을 설득하여 랑코니아의 바나듐(금속원소로 합금 재료나 촉매 등으로 쓰임)을 사려는 전략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아리아가 이번 경험을 통해 견문을 넓히리라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길고 지루한 기차 여행이 끝나자, 곧이어 고풍스런 의자로 장식하고 벽은 무늬가 들어간 능라로 처리한 군용비행기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벽지 일부분은 채 들러붙지 않아 삐죽이 튀어나오기도 했지만 아리아는 보고도 못 본 채, 그 미국인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했다. 나중에 동생과 함께 그 얘기를 하며 한바탕 웃음거리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 미국인들은 조금은 이상스럽다 싶을 정도로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누군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더니, 또 채 일 분이 지나지 않아 다른 누군가가 그녀에게 팔꿈치를 내밀고 얼른 말을 건넸다.

모든 일에 신중하게 처신하십시오, 아가씨.”

마이애미라는 곳에 착륙하는 즉시, 미국의 최남단에 있는 섬, 키웨스트로 가는 조그만 비행기에 탑승했다. 아리아는 엄청난 규모인 이곳 해군 기지와 그 안에 전쟁에서 파손된 선박들이 수리되고 있는 곳을 둘러볼 예정이었다. 무척이나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2주일에 걸친 여정(旅程)은 여러 군데의 해군 기자와 군사 병원의 방문, 장교 부인과의 오찬 등으로 빡빡하게 짜여졌다. 그녀는 그러한 일정에 한 번쯤 어느 오후엔가 멋진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릴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하고 바랬지만 시간이 전혀 없는 듯했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바나듐을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 그녀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려고 애를 쓸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잘생긴 젊은 남자들과의 파티 같은 유흥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말란 말씀도 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붉은 카펫이 아리아를 맞았다. 그녀는, 저마다 섬세하게 짠 긴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 상스럽게 짧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있는 여러 명의 살찐 부인들에게서 인사를 받았다. 아리아는 그들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의례적으로 빙긋 웃어 보였다. 속으로는 발가락이 아파 미칠 지경이었고 키웨스트의 더위 때문에 머리가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시녀에게 꽃다발을 건네주니 그 시녀가 그 꽃다발을 미국 장교에게 건네주었으며, 그가 다시 사병에게 건네주었고, 그 사병은 또 다시 꽃다발을 운전사에게 건네주자 운전사가 길다란 검은색 리무진 트렁크에 꽃다발을 넣을 때까지 세 번씩이나 터져 나오려는 하품을 꾹 눌러 참아야 했다.

아리아는 해군 기지에 있는 한 건물의 어떤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 방을 보는 순간 아리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곳은 미국인들이 이 섬을 샅샅이 뒤져 금박 가구를 모조리 찾아 이 방에 몽땅 갖다놓은 것처럼 보였다. 애초부터 성급하게 지은데다가 순전히 직무를 보기 위한 방들로 이루어진 멋없는 이 건물에 연회장을 꾸며 금박 가구들로 치장해 어딘가 어설퍼 보였다.

아리아는 시녀에게 주의하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행여 시녀가 입을 잘못 놀려 미국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봐 미리 손을 썼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녀는 이 방이 끔찍한 기억으로 남을까봐 덜컥 겁이 났다. 두 명의 의상 담당자가 연회를 위해 그녀를 치장하는 데 무려 한 시간이 걸렸다.

연회가 열리는 어줍잖은 방에서 그녀는 여러 명의 장군과 좀약 냄새가 나는 양복을 입은 지방 관리들에게 둘러싸여 높다란 단에 설치된 길다란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들 모두 각각이 연설을 하도록 되어 있어 아리아는 조는 내색을 보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그녀는 또한 배가 고팠지만 마음껏 먹을 수가 없었다. 식사시간 내내 사진사들이 이러저리 왔다갔다하며 법석을 떨지 않는가? 왕족이 식사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힌다는 건 법도에 어긋난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두 손을 긴장한 채로 꼭 쥐고 있었고, 결국 접시에 손도 안 댄 상태로 물릴 수밖에 없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그녀는 겨우 방으로 돌아왔다. 길다랗고 육중한 검은색 드레스가 짓누르는 듯해 온몸이 파김치가 되었다. 다음 날 일정으로, 아침 여섯 시에 한 정치인과 아침식사를 한 다음, 일곱 시에는 회전 나침반 실험실이라는 곳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녀는 보고가 끝나고 혼자 남아 방 한가운데 선 채로, 의상 담당자가 와서 드레스를 벗겨주기를, 그리고 시녀가 목욕을 시켜주기를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누군가가 머리 위로 무거운 뭔가를 떨어뜨려 잠시 그녀는 의식을 잃었고, 그녀를 방에서 끌고나가 그 건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두 남자가 가리개를 벗겨내기까지 그녀는 제대로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나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고 다시 돌려 보낸다면 당신들에게 후한 보상을 내리겠소.”

그녀가 간신히 숨을 고르고 입을 열자마자 곧 입에 재갈이 물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손과 발이 묶였다. 사내들은 그녀를 자동차의 뒷좌석으로 거칠게 내던지고는 차를 몰고 어디론가 달렸다.

그녀의 어머니와 할아버지는 왕족에게 도사리고 있는 위험에 대해 자주 장황하게 설교하다시피 했으며, 그녀가 열두 살이었을 때 그녀의 생명을 노리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아리아는 자동차의 뒷좌석에 조용히 누워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손목을 비틀어대며 묶고 있는 끈을 점점 느슨하게 만들었다.

앞좌석의 남자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차를 몰 뿐이었다. 얼마쯤 가다가 그들은 차를 세우더니 밖으로 나갔다. 바다 냄새가 아련하게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아리아는 그 틈을 타 손목의 끈을 푼 다음 발을 묶고 있는 끈을 풀었다. 하지만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그 끈으로 다시 가볍게 손목을 잡았다. 지금쯤이면 해군 기지에 경보가 울리고 사람들이 그녀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탈출하기에 적당한 기회가 오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미처 알기도 전에, 사내들이 돌아와 다시 천으로 그녀를 덮어씌우곤 어깨에 걸쳐 맸다. 그리고 어디론가 이번에는 보트 같은 것에 태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숨을 쉬게 하라고.”

한 남자가 모터에 시동을 걸면서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서 천이 벗겨졌다.

두 남자의 모습이 분명하게 보였다. 아리아는 순간, 그들이 그녀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내보이는 건 그녀를 살해할 계획이란 걸 깨닫자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는 숨을 쉴 때마다 파고드는 바다 냄새와 그저 멀뚱하니 하늘을 바라볼 뿐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한 시간쯤 되었을까, 바닷바람이 제법 잔잔할 즈음 그들 중 한 남자가 말했다.

충분히 멀리 온 것 같군. 이쯤에서 끝내세.”

그가 보트의 속도를 줄이더니 그녀의 발 위로 지나갔다. 아리아는 이제 푸르른 나무 이파리를 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다른 남자가 소총을 집어 들고 장전이 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걸 보았다.

아리아는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였다. 천 아래서, 그녀는 느슨해진 끈을 없애고 조그만 모터보트의 한쪽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순간 보트가 휘청거리며 흔들리자 두 남자는 깜짝 놀라 잠시 주춤하는 사이 귀중한 몇 초를 틈타 그녀는 물속으로 깊이 잠수했다. 그러다가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고개를 위로 내밀자마자 총을 들고 있던 남자가 그녀에게 총탄을 발사했다. 그녀는 재빨리 다시 잠수했다. 그러기를 몇 번……. 네 번째로 잠수한 후, 낯선 남자가 자신을 붙들고서 무례한 말을 하기 전가지 그 동안의 일은 아무 것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무척이나 더운 낯선 곳, 종려나무 아래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잠도 자지 못하고 음식도 없었다. 이 섬엔 반쯤 벌거벗은 남자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는 일어서서 옷을 단정하게 하려고 매만지고는 부드럽게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면서, 그를 찾아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미국인들은 근본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왜 나를 만진 걸 사과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음식을 가져다주지 않는 걸까? 그를 찾아 날 미국 정부 측에 데려다 달라고 해야겠군. 미국 정부는 지금쯤 극도로 흥분해 있을 거야.‘

그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한 시간이나 걸려 좁고 비린내와 짭짤한 냄새가 나는 조금만 해변을 두루 살펴보았지만 그의 흔적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왕족을 다루는 방법치고는 너무나 이상하지 않은가. 그녀는 물론 그 미국인이 왕을 받들어본 적이 없으리란 건 이해가 됐지만, 그렇더라도 이 남자의 무례한 행동을 결코 눈감아줄 수는 없었다. 그녀의 나라에서는 백성들이 어떻게 하면 그녀를 기쁘게 해줄까 하고 안달이었는데……. 그녀가 왕궁에서 나서기만 하면 백성들은 길가에 열지어 서 있다가 손을 흔들어 주든가, 아니면 선물을 안겨주곤 했다. 그 남자는 혹시 왕자가 아닐까? 그가 마치 허물없이 대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듯이 행동했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인지도 몰라.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미국인이고 모든 미국인은 평등하며, 즉 미국인은 모두가 평민으로 미국에는 그 어떤 왕족이나 귀족도 없으며 단지 평민들로 가득 찬 나라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해변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음식을 가져다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미국인이라고 하지만 공주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예의 정도는 알아야 되지 않을까?

정오가 되어 햇살이 내리꽂자 그녀는 아까의 그 종려나무로 되돌아갔다. 더위와 배고픔, 수면 부족은 그녀로서는 참기 힘든 형벌과도 같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 다리를 쭉 뻗고는 잠이 들었다.

어슴푸레한 소리에 눈을 떴을 때에는 사방이 어둠에 휩싸였다. 이상스런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뒤쪽의 수풀에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에 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종려나무에 파고들 듯 바싹 기대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온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약간 졸음기를 느꼈지만 정신을 가다듬고는 그 해군 기지에서 일어났던 일을 찬찬히 되새겨보았다.

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왕이신 할아버지께 알렸다면 할아버지께서는 무척이나 걱정하고 계실 거야. 가능하면 빨리 돌아가서 안전하다는 걸 세상에 알려야 해.’

이런저런 생각을 더듬다가 다시 얼굴을 파묻고 설핏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떴을 땐 아침 햇살이 살포시 다가들 무렵이었다.

태양이 떠오르자 그녀는 똑바로 자세를 추스리며 적막만이 감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마도 벌거벗은 그 남자는 이미 이 섬을 떠났을 거야. 나는 이곳에 홀로 남아 결국엔 죽게 되겠지.’

막막한 느낌만이 짓눌러 왔다. 그때였다.

그림자 하나가 햇빛을 가리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셔츠의 단추를 채우지 않아 검은 털로 덮인 가슴 부분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배고프시오?”

그가 큼큼거리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뚜벅 물었다.

.” 그가 그녀 앞으로 한 두름의 물고기를 내밀자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JT는 어이없다는 듯이 물고기를 수풀 쪽으로 홱 던지더니 나무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봐요, 우린 시작을 잘못했던 것 같소. 내가 너무 친구를 대하듯 함부로 대해, 최고의 기분으로 아침식사를 하기도 전에 분위기를 산산조각 부서뜨린 것 같소. 그러니 다시 시작하면 어떻겠소? 내 이름은 JT 몽고메리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불을 지피느라 쪼그리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나뭇가지에 물고기를 꿰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는 뭐랄까, 반쯤 열린 셔츠에 털이 난 가슴하며 얼굴에 검은 구레나룻이 덮여 있는 모습이 아주 원시적으로 보였으며, 역사책에 나오는 흉노족의 광폭한 왕인 아틸라의 분위기와 비슷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런 생김새를 갖춘 남자들에 대해 주의를 하라고 누차 강조하곤 했었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제대로 차려 입지 않은 남자들 역시 각별히 주의하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그녀는 어머니가 여기 이 남자처럼 그런 남자가 존재한다는 걸 상상해 본 적이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이런 남자가 활개를 치고 다닌다면? - , 이건 생각만 해도 끔찍해. 저런 남자에겐 절대로 결코 자유가 주어져서는 안 돼!

당신 이름은 뭔가요?” 그가 눈치도 없이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그녀는 속셈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그런 친근한 미소는 딱 질색이었다. 그런 미소에 대해선 냉정하게 대해야 해.

폐하라고 하면 돼요.” 그녀는 냉정하게 대답하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신음을 내뱉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좋소, 당신 좋으실 대로 하지요. , 여기 있소.”

그가 꼬챙이에 끼운 물고기 한 마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황망히 그걸 쳐다보았다. 공주는 차린 음식에 대해선 일체 불평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런 걸 어떻게 먹으란 말인가?

여기 있습니다.” JT가 다시 말하더니 물고기를 종려나무 이파리 위로 홱 던졌다.

그걸 드십시오.” 아리아는 공포스런 눈빛으로 물고기를 쳐다보았다. 그가 다른 쪽 불가에 앉아 물고기를 먹는 모습에 공포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럴 수는 없어요.” 그녀는 간신히 숨을 헐떡이며 내뱉었다.

뭘 그럴 수 없다는 거요?” 그가 입 안에 물고기를 반쯤 문 채, 실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나와 함께 앉아 있을 수 없어요. 당신은 평민이고 난…….”

바로 그거로군!” 그가 소리치며 일어나서는 그녀를 굽어보았다.

난 당신에게 할 만큼 했소. 먼저 난, 내 목숨을 걸고 당신을 구했는데, 당신은 날 만지면 안 돼요. 난 왕족이에요!’ 라는 감사 인사가 고작이더군요. 그리고 음식을 주어도 먹지도 않고 당신을 전하라고 부르라는 명령을 내리질 않나, 한술 더 떠서 이젠…….”

폐하예요.” 그녀가 야무지게 얼른 말을 막았다.

뭐라구요?” 어처구니없어 소리치자 그의 입에서 음식이 튀어나왔다.

난 전하가 아니라 폐하예요. 난 왕위를 물려받을 공주예요. 언젠가 난 여왕이 될 거예요. 당신은 날 폐하라고 부르세요. 그리고 즉시 날 해군 기지로 데려가요. 또 한 가지, 지금 당장 내겐 나이프와 포크가 필요해요.”

잠시 후, 그녀의 가정교사에게 배운 적이 없는 영어로 그가 몇 마디 하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감히 이 남자가 내 앞에서 화를 내는 거지?’

아리아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를 해군 기지로 호위한다면 그건 크나큰 영광이며, 그의 가문 대대로 언젠가 소주들에게 들려줄 가문의 영광이기도 할 텐데……. 평민들의 신경질에 대해선 무시하는 편이 나았다. 평민들이 그토록 감정적인 것은 출생의 비천함과 교육의 결여 때문이었다.

이걸 먹는 즉시 떠나야 해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나이프를 닦아주면, 그걸로 먹겠어요.” 남자가 허리띠에서 휴대용 접는 나이프를 꺼내 칼날이 나오게 한 뒤, 그녀의 손이 있는 곳에서 일 센티도 안 되는 곳으로 홱 집어던졌다. 그녀는 그래도 움찔하지 않았다. 평민들은 너무나 예측할 수 없는 돌발적인 행동들을 일삼았다. 그러한 기질로 그들은 위험을 자청하기도 하질 않았는가. , 이젠 그런 기질들을 제압하려면 강하게 나가야 한다.

그녀는 바닥에서 나이프를 집어 들어 명령하는 동작으로 그 앞에 대고 흔들었다.

이젠 가서 보트를 준비하세요. 난 곧 준비가 될 거예요.”

내려다보던 남자가 조그맣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적어도 어느 정도 유머는 있는 사람이구먼.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철없는 짓인지 제대로 알고나 있는지 몰라. “, 공주님. 당신은 그곳에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십시오.”

그 말을 남기고 그가 몸을 돌렸다. 아리아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고기로 시선을 돌리고는 중얼거렸다. “공주라는 말이 꼭 개를 부르는 소리로 들리는군.”

물고기를 어떻게 먹는지를 알아내는 덴 제법 시간이 걸렸다. 음식에 손이 닿으면 안 된다. 그녀는 꼬챙이 하나를 발견하여 점점 불씨로 변해가는 불에 쏘인 다음, 드디어 이 꼬챙이와 나이프로 차갑게 식은 물고기를 다룰 수가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그녀는 그 남자가 남기고 간 물고기 세 마리를 모두 먹어치웠다.

정오가 되어도 그 남자는 보트를 가지고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오래 걸리는 게 분명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물고기 세 마리를 잡는 데에 하루가 꼬박 걸렸으니 보트를 가지고 오려면 이틀쯤 걸릴지도 모르잖아? 하루가 다 지나가는 데도 그는 아직 돌아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든 미국인들이 다 이럴까? 할아버지는 왕궁의 하인이 그런 행동을 했다면 참지 못하셨을 거야. 미국은 랑코니아에 비해 역사가 턱없이 짧았으며, 모든 미국인들이 이 남자처럼 느끼고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장차 이 나라는 어찌 될 것인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이 남자처럼 훈련이 안 된 사람들을 데리고 미국은 어떻게 전쟁에서 이기겠는가? 지금 당장 미국에 필요한 건 바나듐이 아니라 제대로 훈련받은 새로운 국민이 필요한 거야. 늦은 오후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느다랗고 따뜻한 빗줄기가 내리더니 바람이 일기 시작하자 빗줄기 역시 점점 더 차가워졌다. 아리아는 종려나무 아래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 치마로 두 다리를 푹 감쌌다.

절대로 그에게 훈장을 추천하지는 않을 거야.”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빗줄기가 그녀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치자 이가 딱딱 마주치기 시작했다.

그는 나에 대한 의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어!” 번개가 치고 비가 채찍처럼 굵어지기 시작했다. “비를 피하는 방법도 모르고 있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 남자가 앞에 서 있었다. 아직도 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상태였으며, 구레나룻이 더욱 검게 보였다.

보트는 어디 있죠?” 빗소리를 뚫으려는 듯 그녀는 목청을 높였다.

보트는 없소. 앞으로 사흘 동안 우린 여기 함께 묵어야 해요.”

난 이곳에 머물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날 찾고 있을 거예요.”

이 문제는 다음에 논의해도 되겠죠? 내 캠프로 돌아가는 게 좋겠소. 내게도 별로 반가운 얘기가 못 되지만 말이오. 일어나서 날 따라와요.” 그녀는 뻣뻣한 다리를 가눌 수 없어 종려나무에 의지해서 일어나서는 또 다시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내 뒤에서 걸어야 해요.” “아가씨, 당신이 그 동안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모르겠군요. 누군가 당신을 죽여버리지 않고 아직도 살려두었다니……. 그럼, 먼저 가시오. 앞장서라고요.” 하지만 이내, 그녀는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전혀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당신이 앞장서도 돼요.” 그녀는 마치 커다란 은혜를 베풀기라도 하듯 말을 꺼냈다.

참으로 친절하시군요.” 그가 처음으로 공손하게 대답하는 것 같아 아리아는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그가 돌아서서 몇 걸음 앞서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를 따랐다.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몇 발자국 뒤에서 그를 따라가다가 세찬 빗줄기 때문에 한순간 그의 모습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금세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녀는 꼼짝 않고 서서 기다리며, 몰아치는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눈을 똑바로 뜨려고 애썼다. 그는 길게 느껴지는 몇 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뒤돌아왔다. “버짝 붙어서 걸어요.” 그가 빗속에서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쓸데없이 큰 소리 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잠시 그가 돌아서서 쳐다보더니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았다. 아리아는 전율을 느낄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도 다시 내게 손을 대다니. 그녀는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려고 손을 비틀었지만 그의 손 힘만 더욱 강해졌다. “당신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난 알고 있소.”

그가 고함을 지르더니, 그녀의 팔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 남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해. 그가 앞장서더니, 개를 끌고 가듯 아리아의 손을 끌고 갔다. 잠시 후 그가 또 다시 머리를 숙이고 머리를 굽히라고 그녀에게 명령조로 소리쳤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의 양어깨를 움켜잡고선 그녀를 땅바닥으로 밀쳤다. 그는 그녀더러 덤불 속을 기어가라고 했다! 그녀는 그에게 덤불을 잘라내야 한다고 말했으나 남자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질펀한 땅에 배를 깔고 끌려가거나 스스로 기어가야 할 기로에 놓여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꼴사나운 상황이었다.

두 사람이 마침내 공터에 이르자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 지에 대해선 잠깐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남자에게서 아까 그런 취급을 받아 잠시 제 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빗속에 서서 그가 쥐었던 손목 근처를 문질렀다. 이곳이 이 남자가 살고 있는 곳일까? 집도 없었고, 몇 개의 상자와 조그만 텐트 모양을 내고 있는 검은 천 하나가 전부였다. 랑코니아에서는 아무도 이렇게까지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

저쪽으로.”

그가 소리치며 나뭇가지 위에서부터 늘어진 천 조각을 가리켰다. 그곳은 가장 초라한 종류의 피난처였지만, 다행히 물기가 없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얼굴에서 물기를 닦아내고 있는데 -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 남자가 그녀 옆으로 기어들어갔다. 아무리 미국인이라지만, 이건 너무 우스꽝스런 짓거리라고 밖엔 달리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가요. 당신에게 허락할 수 없…….”

서슬이 퍼런 그녀의 소리에 그가 코 밑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내 말 잘 들어요, 아가씨.” 그는 빗소리에 묻힐 정도로 최대한으로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내게 이만한 자격은 있소. 난 춥고, 젖어 있으며, 무척 배가 고픈데다가 이미 총상을 입었고, 화상이 다시 덧나는 고통스런 상황이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건 당신은 내가 이번 전쟁에서 얻은 첫 번째 휴가를 망쳐놓았소. , 한 가지 선택을 하시오. 나와 함께 이곳에 머물든지 당신의 그 잘난 왕궁 법도를 지켜 저기 빗속에 앉아 있든지! 그게 선택할 조건의 전부요. 그리고 내게 뭘 허락하고, 뭘 허락하지 않겠다는 건지 분명하게 얘기해주신다면, 난 기쁘게 당신을 저 밖으로 던져버릴 거요.” 아리아는 그를 쳐다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건대 그녀가 상상했던 그런 미국이 아니었다. 어쩌면 다른 방법을 시도해야 될 것 같군. 이 남자는 끔찍할 정도로 폭력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 아마 그는 다른 두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내게 총을 쏠지도 모르잖아.

마른 옷을 입을 수 있겠어요?” 그녀는 작전을 바꿔 썩 마음에 드는 하인에게 지었던 미소를 그에게 지어보였다. 남자가 투덜거리는가 싶더니 쭈그린 자세로 방수포의 한쪽 구석으로 다가서서, 금속으로 된 상자 하나를 열었다.

흰색의 해군복이 있소. 이게 전부요.” 그가 옷을 그녀의 무릎으로 홱 던지더니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물기를 막으려고 깐 고무바닥에 누워 사지를 쭉 뻗고는 담요를 끌어올리고 나선 이내 두 눈을 감았다.

아리아는 너무도 황당한 꼴을 당해 충격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모든 미국인이 이와 같단 말인가? 사람을 유괴하질 않나, 총격을 가하질 않나, 아가씨라고 부르질 않나, 나이프를 홱 던져주질 않나……. 미국은 이런 사람들로 가득 찬 곳이란 말인가? 나는 울지 않으리라.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절대 눈물을 보여선 안 돼!

그녀는 드레스의 단추를 풀려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한번도 혼자서 옷을 벗어본 적이 없었으며 어떻게 벗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마른 옷가지를 와락 움켜쥐고 남자와 가능하면 멀리 떨어진 곳에 누웠지만, 온몸이 오슬오슬 떨리는 건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또 뭐요?” 그가 중얼거리며 눈을 뜨더니 일어나 앉았다.

내가 공격할까봐 겁내는 것이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처럼 재미없는 여자는 여태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아리아는 연신 몸을 떨어댔다.

내가 저 밖의 빗속으로 나간다면, 당신이 입고 있는 그 옷을 벗고 다른 걸로 갈아 입겠소?” “방법을 몰라요.” 그녀는 이를 딱딱부딪치며 말을 건넸다.

무슨 방법을 모른다는 거요?” “내게 소리 좀 그만 질러요!”

치미는 화를 누르며 그녀도 일어나 앉았다.

난 혼자서 옷을 벗어본 적이 없단 말예요. 단추……를 어떻게 끄르는지 모른단 말예요……남자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가 지금 뭘 생각하는 거야? 왕궁의 공주가 혼자서 뭘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녀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난 한 번도 혼자서 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어요. 배울 수는 있을 거예요. 당신이 내게 기본 원리를 알려주면…….” “돌아서요.” 그는 그녀의 어깨를 밀쳐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드레스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당신이 나를 만지는 것은 내 허락의 범위를 벗어난 것 같군요…… 이름을 다시 한 번 말해주겠어요?” “JT 몽고메리요.” “그래요, 몽고메리. 내가 믿기로…….”

그가 그녀를 돌려세워 마주보고는 말을 끊어 목소리를 높였다.

미합중국 해군 소속 대위 몽고메리요. 당신의 빌어먹을 하인처럼 그냥 몽고메리가 아니고, 대위란 말이오. 이해하시겠습니까, 공주님?”

이 남자는 매번 이렇게 말끝마다 소리를 지르는 것일까?

, 물론이에요. 당신이 직함을 사용하고자 한다는 걸 이해해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인가요?”

그 이상이오. 내 힘으로 얻은 것이오. 난 그걸…… 스스로가 셔츠 단추를 잠근 대가로 얻었소. 이제, 그 드레스를 벗어요. 아니면 내가 벗겨주기를 원하시오?”

내가 해볼게요.” “좋아요.” 미련없이 그는 돌아서서 다시 등을 대고 누웠다.

아리아는 드레스를 벗으면서 내내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여러 겹의 젖은 속옷을 감히 벗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기에 머리 위로 하얀 제복을 끼면서도 여전히 불편한 상태였으며, 입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에는 온 신경을 쏟을 정도로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옷을 다 입고, 자리에 누울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무바닥 덮개는 습기로 축축했으며, 속옷이 피부에 눅눅하게 감겨왔다. 머리카락도 젖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몸을 떨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몽고메리 대위가 갑자기 몸을 굴러 그녀 위로 담요를 홱 덮고는 그녀의 등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럴 수는 없어요…….”

너무 급작스런 일이라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입 닥쳐요. 입 닫고 주무시오.”

그의 커다란 몸, 그리고 아주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자 그녀는 더 이상 항거할 수가 없었다. 잠에 빠져들기 전에 그녀는 천국에 계신 어머니가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지 않기를 갈구하는 짧막한 기도를 올렸다.

 

 


3

아침이 되었다. 잠에서 깨어난 아리아는 그의 자리가 비어 있음을 깨달았다. 또다시 혼자였다. 그녀는 잠시 동안 그대로 누워 끔찍스런 전날의 사건을 더듬어보았다. 한시바삐 해군 기지로 돌아가서 이 세상에, 그리고 특히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안전하다는 걸 알려야 하는데……. 그녀는 조그맣고 누추한 피난처에서 기어 나와 일어섰다. 조그만 화톳불이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그 남자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그의 제복은 손을 덮은 채 늘어졌고, 허리선은 무릎까지 내려왔으며, 바지 아랫단은 발 아래까지 덮고 있었다. 한 발자국 떼는 순간 옷에 발이 걸려 넘어지자 아리아는 툴툴거리며 되돌아서 한쪽 구석에 내팽켜쳐진 축축한 드레스를 끌어당겼다.

비는 이미 그쳐 청명한 햇살이 눈부신 아침이었지만 벌써 더워지기 시작했다. 공터는 그야말로 무척이나 좁았으며,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남자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인기척에 귀를 세우며, 그녀는 해군 제복을 벗었다.

그 속옷들을 모두 입고 있기에는 너무 더워요.”

갑자기 뒤쪽에서 그 남자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아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입을 벌리고 호흡을 멈춘 채 드레스를 바짝 끌어당겼다.

JT가 그녀의 발치에서 하얀 제복을 주워들고, 얼룩을 발견했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소유물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군요, 아가씨.”

“ ‘아가씨가 아녜요. …….”

, 나도 알고 있소. 내 상전이시라는 거죠? 일요일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총격을 당하지 그러셨소? 그런 차림으로 있을 거요, 아니면 거기 그렇게 서 있을 거요?”

당신, 여기에서 당장 떠나요. 난 남자 앞에서 옷을 입지 않아요.”

공주님, 자신의 매력을 과대평가하고 있군요. 내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고 행진을 해도 돼요. 난 아무 관심이 없으니까, 서둘러 옷을 입어요. 새우 요리가 기다리고 있소.”

아리아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말 끝에 힘을 주었다.

당신이 계속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당신은 엄청난 무례를 범하고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경고하겠어요.”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녀 앞으로 다가와 걸음을 멈추더니, 그녀가 움켜쥐고 있는 무거운 검은색 드레스를 잡았다. 그녀는 뜻하지 않은 그의 행동에 입안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가 나이프를 꺼내 드레스의 길다란 소매를 베어내더니 이내 스커트도 한 자락 찢어냈다. 그러고는 그걸 그녀에게 다시 내밀었다.

그게 도움이 될 거요. 그리고 그 속옷들 역시 절반쯤 내던져 버리시오. 더위 때문에 기절한다 해도 내가 구해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마시오. 난 처음부터 당신에게 어떻게 대할지 충분히 훈계를 들었으니까.”

그는 바닥에서 그물을 집어 들고 뚜벅 사라졌다. 그녀는 조그만 개울가에 넋이 나가 멍하니 서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브래들리 숙모가 미국인들은 미개인이라 매너도 없으며, 더더욱 남자들은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곤 했지만, 이 남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한 게 틀림없었다. 분명 이 나라 전체는 그 같은 남자들로 - 권위에 대한 존경심이라곤 없는 남자들로 채워지진 않았으리라.

십 분 정도 지난 후, 그가 꿈틀거리는 새우로 가득한 그물을 들고 다시 돌아왔을 때, 아리아는 아직도 그대로 서 있었다.

시녀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내가 도와주겠소.”

그가 새우 그물을 거칠게 바닥에 홱 집어던지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그녀에게서 드레스를 빼앗아 거칠게 그녀의 머리 위로 올렸다가 끌어내리자, 허리 부분에 들어간 심이 그녀의 코를 긁었다. 드레스가 제대로 끼워지자, 능숙한 솜씨로 짧아진 소매 안으로 그녀의 팔을 밀어 넣고는, 마치 먹이를 공격하는 예비 동작인 듯 더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등 쪽의 단추를 잠갔다.

단추를 잠그는 동안 소름이 끼쳐 내내 아리아는 등에 힘을 잔뜩 넣고 뻣뻣한 자세를 취했다. 이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야. 행동의 옳고 그름도 제대로 판단할 줄도 모르는 게 분명해. 그녀는 단추가 다 채워지자 그에게서 벗어나 나무 상자 위에 앉았다. 드레스는 이제 상당히 짧아져서, 종아리 중간 정도까지 밖에 닿지 않았으며, 두 팔은 맨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제 아침식사를 가져다주세요.”

그녀는 자세를 가다듬고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꿈틀거리는 새우 그물을 느닷없이 그녀의 무릎에 던졌다.

아리아는 비명을 지르지도 펄쩍 뛰지도 않았고, 끓어오르는 노여움 역시 드러내지 않았다.

당신의 나이프를 빌릴 수 있겠어요?” 침착하게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나이프를 내밀었다.

공주는 그 어떤 것이 주어지든 간에 거부하지 않는다.’ 그녀는 주문을 외듯 속으로 웅얼거렸다. ‘공주는 아랫사람의 음식을 거절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물을 열었다. 수많은 다리를 달고 꿈틀거리는 생물을 보자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져 속이 뒤집혔다.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려고 깊게 숨을 들이쉬고, 칼끝으로 새우 한 마리를 찔러 천천히, 아주아주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다리 하나가 입술에 닿자 두 눈을 찔끈 감았다. 뱃속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새우를 막 입에 넣으려는 순간, 남자의 손이 그녀의 손을 살짝 쳤다. 너무 놀라 그녀는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배가 고파요?” 그의 말소리가 부드러웠다.

당신 음식은 분명 맛있을 거예요. 전엔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거든요. 당신만큼 나도 이 음식을 즐길 수 있을 거예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는 멀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더니 나이프에 꽂힌 새우와 그물에 가득한 새우를 도로 가져갔다.

먼저 씻은 다음 요리를 해야 하는 거요.” 그녀는 그가 물이 끓고 있는 냄비에 새우를 한 움큼 텀벙 집어넣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전에 새우를 본 적이 없소?” “물론 있죠. 하지만 접시에 담겨져 내 앞에 놓이곤 했죠. 그렇게 분홍빛으로 꿈틀거리는 것과는 전혀 닮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게 새우란 걸 미처 몰랐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걸 날것으로 먹으려고 했소.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서 왔소?”

랑코니아.” “, . 들어본 적이 있소. 산악지대로 염소와 포도가 유명한 곳 맞죠? 미국에서 뭘 하고 있소?” “당신네 정부가 날 초청했어요. 내가 사라진 이후로 그들은 안달이 나 있을 거예요. 당신은 날…….” “그 얘기는 다시 시작하지 맙시다. 이 섬에서 당신을 벗어나게 해줄 방도가 있다면 그렇게 하겠소. 날 믿어요. 아가씨.”

난 당신의 아가씨가 아니에요. …….”

, 이 새우들의 머리를 잘라내고 껍질을 벗겨요. 그동안 난 소스를 만들 테니.”

뭐라고요? 난 식모가 아니에요. 당신의 개인적인 시녀는 더더욱 아니라고요.”

그가 일어서자, 한줄기 햇살이 가려졌다. 그의 차림새는 반바지에다 셔츠는 단추를 풀어둔 상태였다. 두 다리가 확대되어 눈앞에 다가섰다. 너무 우람하고, 무척이나 짙은 갈색이었으며, 털이 많이 나 있었다.

당신은 지금 미국에 있습니다, 공주님. 그리고 이곳에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당신이 직접 해서 먹으세요. 난 금 쟁반에 식사를 받쳐 들고 당신에게 갖다 바치지는 않아요.”

그가 나이프와 물에 떠다니는 나무 하나를 주워 그녀의 발치에 홱 집어던졌다.

여기에다 놓고 잘라서 껍질을 벗겨요.”

당신 정부에서는, 당신이 날 대하는 방법에 대해 유감스럽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몽고메리 대위님. 당신 정부는 내 나라가 가지고 있는 바나듐을 무척이나 원하고 있지만 만약 내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미국에 그걸 팔지 않을 거예요.”

제대로 대접을 받는다!” 그가 침을 튀며 소리를 질렀다.

난 엉터리 같은 당신을 구했소. 그 대가가 뭔지 한번 보시오.”

그가 왼쪽 어깨의 셔츠를 끌어올리자, 피부에 울퉁불퉁 부어오른 섬뜩할 정도의 주름이 깊이 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또한 그 주위에는 반쯤 치유된 상처가 팔뚝과 갈비뼈를 지나 허벅지까지 길게 나 있었다. 한쪽 다리 역시 상처를 입어 그 어느 곳보다 더 깊었고 제대로 아물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참혹한 그의 모습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런 걸 내게 보여서는 안 돼요. 제발 내가 있는 곳에서는 옷을 입고 계세요.”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걸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소, 그렇죠?”

내 백성들은…….” “백성들이라, 빌어먹을! , 이 새우나 빨리 다듬어요. 내가 그 새우를 손질해야 한다면, 당신은 못 먹게 될 거요.” “내가 요구한 음식을 거절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이봐요, 아가씨. 당신은 날 시험하고 있을 뿐이오.”

몽고메리 대위, 날 그렇게 불러서는 안 돼요…….” “집어치워요!”

그가 소리를 냅다 내질렀다.

그녀는 익은 새우 한 마리를 나이프에 꽂아 집어 들어 나무토막 위에 얹어 놓고선 나이프로 세로로 가르려 했다. 하지만 새우는 이리저리 미끌거릴 뿐 잘라지지 않았다.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요?” 그가 거칠게 나이프를 빼앗더니 왼쪽 손으로 새우를 잡고, 능숙하게 머리를 잘라낸 다음 꼬리를 절단하고 껍질을 벗겨냈다.

보았죠? 쉬워요.” 아리아는 가슴이 죄어드는 공포를 느끼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걸 만지다니…….” “새우? 물론 이걸 만졌소.”

난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사람은 손으로 음식을 만져서는 안 돼요.”

그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옥수수는 어떻게 먹소? 핫도그는? 햄버거는?”

그런 건 먹어보지 않았어요. 음식에 손을 대야 하는 것이라면, 난 그런 건 먹지 않겠어요.” “사과는?” “물론, 나이프와 포크로.”

그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그녀가 마치 딴 곳에서 온 외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한 손을 잡아,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곤 그 위에 살찐 새우 한 마리를 뚝 떨어뜨렸다. 그녀가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한 손에는 새우를, 다른 손에는 나이프를 쥐게 한 다음, 새우를 씻는 동작을 하는 동안 내내 그녀에게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해댔다.

아리아는 구역질을 참으려고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무진 애를 썼다. 그녀는 눈을 감고 거부하려 했지만, 무시무시한 이 남자는 그녀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곤 다음 동작을 알려주었다.

이제 알겠습니까, 공주님? 내가 돌아올 때면, 많은 새우가 씻어져 있겠죠?”

그녀는 그가 사라지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한 무더기의 새우는 커다란 돌무덤 같았다. 이건 마치 하룻밤 사이에 지푸라기로 금을 만들지 않으면 다음날 아침에 목이 잘리게 되어 있는 공주가 된 느낌이었다. 시험삼아 다른 새우 한 마리를 집어 들었다. 그걸 다 씻는데에는 꼬박 오분이 걸렸다. 하지만 다 씻고 나니 살점이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다.

미국 정부는 이런 얘길 좋아하지 않을 거야. 이 얘기를 들으면, 틀림없이 이 남자를 장기형에 처할 거라고. 그는 발목에 쇠고랑을 차고 쥐가 우글거리는 지하 감옥에서 썩게 되겠지. 아니면 더 나은 경우, 그는 랑코니아로 보내질 거야. 그렇게 되면 할아버지는 그에게 적당한 형벌을 내리실 거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바로 머리 위에서 남자의 거친 콧김이 느껴지자 그녀는 깜짝 놀라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기척을 내야 될 것 아니에요? 내 허락 없이는 내 영역에 들어 올 수 없어요.”

이곳은 내 영역이오. 아니, 열마리도 씻지 못했군. 이런 식이라면 우린 굶어죽을 거요.”

그녀는 그가 나이프를 들고 새우를 손질할 거라 예상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다른 한 꾸러미의 물고기를 내려놓고 커다란 나이프를 사용하여 머리들을 제거한 다음, 머리만을 실로 묶어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후 몸통을 흐르는 물에 헹구었다.

점심식사를 위해 청게를 잡을 거요. , 우리가 아침식사를 하게 된다면 말이오.”

그의 야만스런 행동에 그녀는 몸 둘 바를 몰라 안절부절하다가 결국은 엄지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그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자리에 앉아 벤 곳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걸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피가 흐르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거 놀랐는데? 당신 역시 우리네 미천한 사람들의 피처럼 빨갛군. , 물속에 손을 넣어요.”

그래도 그녀가 꼼짝하지 않자,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개울 쪽으로 끌고 가서 그녀의 손가락을 물속에 잠기도록 잡아끌었다.

아가씨,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당신은 가장 쓸모 없는 인간이오. 당신은 그다지 훌륭하지도 않은데 세속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군, 그래. 당신은 백성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하는 거죠? 그저 결혼해서 더 쓸모 없는 애새끼나 낳는 거요?”

아리아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난 보간 헤시아의 줄리앙 백작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어요.”

그래요?”

JT는 그녀의 손을 들어 올리고 벤 곳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다시 말을 건넸다.

그를 만난 적이 있소?”

물론이죠. 그를 세 번 만났긴 해도 춤은 네 번씩이나 추었어요.”

네 번씩이나! 당신이 임신을 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일이군요.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말아요. , 저쪽으로 가서 계속 새우를 다듬어요.”

무례하고, 불한당 같은 남자. 그에게 지하 감옥은 너무 과분할 거야. 수치스럽고 구역질 나는 그런 혹독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고.

난 손을 다쳤어요. …… …… 볼일 보는 곳이 이디에 있죠?”

여기 이 나무들이 보이지 않소? 이곳 전체가 커다란 화장실이오.”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그녀는 좁다란 오솔길 쪽으로 걸어갔다. 정말 끔찍스러운 남자야. 그 남자처럼 속물스럽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이 남자처럼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무례함에 굴복할 아리아가 아니었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으며, 온몸이 쇳덩이처럼 무겁고 더웠지만, 그래도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한 가닥 위안이 되었다.

해변으로 가는 오솔길을 찾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찾아냈다. 운만 좋다면 이 섬으로 들어오는 보트를 발견해 소리쳐 부를 수는 있겠지. 그녀는 해변을 따라 걷다가, 해초 더미가 썩은 웅덩이에 발목까지 빠졌다. 그러다가 간신히 자세를 잡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다시 해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변에 조개껍데기는 거의 없었으며, 좁다랗고 긴 청색의 풍선처럼 생긴 게 보였다. 그녀는 한쪽 발을 떼다 말고 걸음을 멈추고는 몸을 굽혔다.

건드리면 안 돼요!”

날카로운 소리에 그녀는 손길을 거두고 돌아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해변 위쪽 둔덕에 서 있었다.

계속 날 따라올 거예요?”

그가 군용 소총을 들고 있다가 소리가 나게 개머리판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당신 나라에 바나듐이 있다고 했소?”

굉장히 많죠.”

그녀는 풍선 같은 물체를 잡으려고 다시 허리를 굽혔다.

잠깐 그건 군함 파편이오.”

그가 다급하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파편 속엔 사람에게 치명적인 촉수를 가진 독충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죽는 경우도 많죠.”

.”

그녀는 허리를 펴고 다시 해변을 굽어보았다.

이젠 날 내버려둬요.”

전혀 못 들은 척 그가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자신을 죽게 내버려둘 건가요? 당신은 사건에 말려드는 걸 즐기는 묘한 취미를 가지고 있군. 난 당신이 해변에 돌아다니는 걸 원치 않아요. 전에 당신을 죽이려던 두 녀석이 되돌아올지도 모르오.”

당신의 해군 부대에서 날 찾으러 선박을 보낼 거예요.”

두 사람은 종려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는 털썩 주저앉고선 소총을 나무에 기대어 놓았다.

방금 생각을 해보았는데, 난 당신을 보호하든지 아니면 당신네가 소유하고 있는 바나듐을 보호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여겨지는군요. 당신은 공터로 돌아가야만 할거요.”

해변의 끄트머리가 바다에 잠겨 이내 자취가 사라졌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몽고메리 대위님. 그냥 여기에 앉아서 선박을 기다리겠어요.”

그녀는 해변의 끄트머리에 앉아 등을 똑바로 펴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JT는 지친 듯이 종려나무에 등을 기댔다.

내 말 들으세요.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만 말아요. 우린 이곳에서 사흘을 더 지내야 하오. 그리고 난 당신을 미국 정부측에 안전하게 인도할 계획이오. 먹는 것 가지고 당신의 그 알량한 자존심에 싫증이 나면 내게 알려주시오. 캠프에 청게를 잡아다 놓았소.”

그가 누워서 꾸벅 조는 기색을 보이자 아리아는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작렬하는 태양으로 열기가 확확 달아올랐고, 뱃속에서는 허기 때문에 꾸르륵소리를 냈다. 백리향(꿀풀과의 낙엽관목. 잎은 약재나 소스의 원료로 쓰임)이 들어간 푸른 콩과 부드러운 양고기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태양이 물결 위로 부서지며 반짝거렸지만 항해하는 선박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앞 물속에서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가 느릿느릿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이 남자가 물고기를 꼬챙이로 찔러 불 위에 얹어 요리하던 방법을 떠올렸다. 이곳에 온 이후로 그녀가 먹었던 마지막 식사였고, 음식을 먹은 게 아주 오래 전의 일인 것만 같았다. 그녀는 불을 지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고기를 어떻게 잡는다지?

그녀는 뒤돌아보고는 그가 잠들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한쪽 발을 소총에 올려놓은 어정쩡한 자세였다. 소총 정도쯤은 그녀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사냥놀이를 하며 다뤄왔기에 손에 익숙했다.

조용조용히 그를 깨우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둔덕으로 기어올라가 소총에 손을 댔다.

그걸로 뭘 할 계획이오? 날 제거하려고?”

물고기를 잡을 참이었어요.”

그녀의 대꾸에 그는 두 번 눈을 깜박거리더니 히죽 웃었다.

뭐라고요? 소총을 낚싯대로 사용한다고? , 이런 총알을 미끼로 사용한다?”

당신처럼 무례한 사람은 여태 만나본 적이 없어요. 난 물고기를 쏠 계획이란 말이에요.”

그가 이를 더 드러내며 노골적으로 히죽거렸다.

물고기를 쏜다고요? M1 소총으로? 아가씨, 당신은 총을 쏠 줄 모르면서 그래 가지고 뭘 맞추겠소? 반동이 생겨 벌렁 넘어지고 말 거요.”

, 과연 그럴까요?"

그녀는 소총을 들어 올리더니 총알이 장전되어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놀이쇠를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그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어깨에 턱 하니 올려놓고 조준을 한 다음 발사했다.

한 방 더 쏠게요.”

그녀가 한 손을 그에게 내뻗으며 나서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말을 잃은 채, JTM1 실탄 하나를 그녀의 손에 얹어 주었다.

그녀는 다시 장전하고선 이번에는 소총을 머리 위로 흔들더니, 한 떼의 오리를 겨냥했다. 그러고는 발사하자 오리 한 마리가 몇 미터 앞 물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소총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JT는 그녀를 지나쳐 둔덕을 내려가, 물속으로 첨벙첨벙 걸어갔다. 그러고선 커다랗고 붉은 물고기 한 마리를 건져 올렸다. 그놈의 머리끝은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다. 그는 돌아서서 몇 발자국 더 걸어가 오리를 찾았다. 이 놈의 머리도 날아가고 없었다.

공주에겐 결정적일 때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답니다.”

아리아는 다부지게 얘기를 하고선 돌아서서 캠프 쪽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내려다보았다.

점심으로 내게 그걸 차려주세요.”

그는 뚜벅 걸어와 한 손으로는 그녀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소총을 등에 걸머맸다. 그러더니 그녀의 두 팔을 들어 올려 오리와 물고기를 덥석 안겨주었다.

당신이 죽인 건 당신이 씻어서 먹으시오. 내가 당신의 하인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될 거요. 그 사실을 당신에게 주입시켜야 한다면 말이오.” 그녀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남자들은 내가 그네들보다 총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날 때면 항상 화를 내죠. 말해보세요, 몽고메리 대위, 당신은 승마할 줄 알아요?”

젠장, 그보다 난 내 옷을 스스로 입을 줄 알면 굶어 죽지는 않을 거요. 이제 캠프로 가서 깃털을 뜯으시오. 그리고 이번엔 당신이 이 일을 반드시 끝마치시오.”

 

이제 난 그를 미워한다.” 아리아는 오리 털 하나를 뽑으면서 중얼거렸다.

난 내일도 그를 증오할 것이다.” 하나를 더 뽑았다. “난 어제도 그를 증오했다.”

아직도 덜 끝냈소?” 아리아는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기척을 내는 게 도리 아니에요?”

했소.” 그는 맨살이 드러난 그녀의 팔을 힐끔 바라보았다.

당신이 지금 햇빛 속에 앉아 있다는 걸 알고나 있소?”

내가 원하는 곳에 앉아 있는 거예요.”

JT는 어깨를 으쓱하고선 게를 굽어보더니 씻기 시작했다.

난 그를 영원히 증오할 것이다.” 아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중얼거렸다.

이건 완벽한 것 같군.” 그녀는 허리를 펴고 일어서는 순간 아찔함과 동시에 땅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얼마쯤 지났지? 그녀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그물침대에 누워 있었다. 몽고메리 대위의 찡그린 얼굴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귀부인 마님 같으니라고.” 그가 중얼거리더니 점점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 빌어먹을 드레스를 입고 있으니 더위를 먹은 거요. 게다가 직사광선을 쐬고 허기진 게 겹친 거라구요.” 그가 툴툴거리며 돌아서서, 혼잣말로 웅얼거렸다.

이거 은성(銀星) 훈장이라도 받아야겠군.” 아리아는 이런 상황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팔을 내려다보니 살갗이 분홍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물고기와 게를 가득 감은 철제 쟁반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녀는 그물침대에서 일어나 앉기가 상당히 어려워, 몇 번 더 중얼거리는 투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자 몽고메리 대위가 음식 접시를 내려놓고, 허리를 구부려 그녀를 두 팔로 들어 올렸다.

이러면 안 돼요.” 장작개비처럼 뻣뻣하게 굳은 그녀는 놀라서 숨을 헐떡였다.

그는 나무 상자에 그녀를 내려놓고 음식 쟁반을 그녀의 무릎 쪽으로 밀쳤다.

난 애들 세 명을 한꺼번에 들 수도 있소. 그 애들이라면 당신처럼 성가시게 굴지는 않았을 거요.” 입술을 질근 깨물 뿐 그녀가 먹으려 들지 않자, 그가 투덜거리며 나이프를 내밀었다. “당신은 감사합니다라는 말도 모르오?”

아리아는 겨우 나이프를 받아들고 대꾸도 없이 음식을 바라보았다. 먹을 것을 앞에 두고 품위를 지킨다는 건 차라리 고문과도 같은 고통이었고, 군침이 돌아 도저히 먹지 않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온 신경을 집중시켜 긴장한 채 침을 삼키며 나이프를 들고, 물고기를 찍어 한 입 먹고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남자가 불 위로 몸을 수그리더니, 거품을 내뿜고 있는 음식에 손질을 가했다. 게를 다 먹어치우기 전에, 구운 오리를 사 분의 일쯤을 그가 그녀의 접시에 툭 내려놓았다. 이걸 어떻게 해서 먹어야 하는지 요령이 생기기까진 약간의 시간이 걸렸지만, 나이프와 손가락 끝을 사용하여 고기를 붙들고, 남김없이 쓱싹 해치웠다.

남자는 그녀의 빈 접시를 보자 놀라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자 그가 말을 꺼냈다.

이제 그 옷을 좀 벗어야겠군요.” “뭐라고요?”

당신은 기절했소. 기억나요? 그렇게 많은 옷을 입으면 큰일이 날 거요. 플로리다는 아주 덥단 말이오. 내가 단추를 풀어주면 숲으로 가서 속옷을 벗어요. 날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요. 혹시라도 내게, 어떤 여자를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하겠소. 당신보다 좀 더 살이 찌고 마음씨가 부드러운 여자를 원한다고 말이오.”

그는 그녀를 돌려세우더니 드레스의 등에 달린 단추를 풀고선 나무숲을 가리켰다.

아리아는 숲으로 들어가면서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그녀는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인정했다. 계속해서 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질 않은가. 그렇지만 그가 명령하는 건 분명 옳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녀는 드레스를 벗은 다음 층층이 차려입은 속옷을 내려다보았다. 먼저 급작스럽게 짧아진 치마 아래로 내보이지 않으려고 허리춤에 둘둘 말았던 풍덩한 속치마인 페티코트를 벗었다. 다음으로 비단 캐미솔을 벗자 거들과 속바지와 긴 양말을 단단하게 여민 분홍빛 공단 코르셋이 드러났다.

그녀는 코르셋의 끈을 쥐고 걸쇠를 풀려 했지만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다. 할 수 없이 그 위에 드레스를 입고 페티코트와 캐미솔을 들고 나무 사이에 버려두었다.

그는 주춤거리며 다시 공터로 돌아온 그녀를 흘낏거리며 쳐다보았다.

아직도 충분히 벗지 않았소.” “더 이상은 벗지 않을 거예요…….”

그는 그녀를 돌려세우더니, 드레스의 등 단추를 열고 코르셋에 달린 걸쇠를 잘라냈다. 그러고는 나무 숲 쪽을 가리켰다. 아리아는 나머지 속옷을 벗어버리자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피부에 벌겋게 자국을 낼 정도로 꽉 조이던 거들을 벗고, 속바지까지 벗어 던지자 피부가 겨우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다시 드레스를 입고 굽이 낮은 슬리퍼를 신자, 정말로 퇴폐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맨살에 느껴지는 드레스의 비단 감촉이 무척이나 매끄러웠다. 물론 이제 드레스 차림이 편안해졌다. 그녀를 조이던 육중한 고무줄이 없어져 상체와 하체 모두 풍만해 보였다. 지금까지 그녀는 몸매를 조절하는 온갖 종류의 속옷을 일컫는 파운데이션을 입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서본 적이 없었다. 가슴이 커지는 첫 번째 신호가 보이던 열네 살에 어머니는, 그녀에게 파운데이션을 입히도록 시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공주는 옷을 헐렁하게 입어서는 안 된다.’고 어머니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 또 반복한 말이었다. 밤에 잠을 잘대를 제외하고, 아리아는 그 때부터 줄곧 파운데이션을 입고 지냈다.

그녀는 병풍이 되어 준 나무숲을 떠나기에 앞서 자신의 그런 모습이 낯설어 잠시 망설였지만, 드디어 용기를 내어 머리를 쳐들고 등을 꼿꼿이 세우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글쎄, 그녀가 이런 사실을 내세워 행동한다면 끔찍한 그 남자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잘못 판단했다. 그녀가 공터로 들어오자 그는 쓱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눈길을 돌렸다. 그러다가 다시 오랫동안 찬찬히 그녀를 뜯어보았다. 아리아는 그의 눈길을 무시하고선 해변으로 나 있는 오솔길 쪽으로 돌아섰다.

어딜 갈 생각이오?” “보트가 오는지 보러 해변에요.” “그러면 안 돼요. 여기 있으시오.”

몽고메리 대위, 난 왕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그 어느 누구에게서라도 명령을 받지 않아요.” “좋아요, 아가씨. 여기서는 내가 왕이오. 당신이 미국 정부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보호하는 것이 항해사로서의 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당신을 볼 수 있는 곳에 머물면서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시오.” 아리아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오솔길 쪽으로 돌아섰다. 그가 그녀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청각이 그다지 좋지 않은 모양이군. 여러 척의 독일 잠수함이 이 지역에서 발견된 적이 있단 말이오.” 그녀는 그의 팔을 세차게 뿌리쳤다.

내 사촌들은 독일인이에요. 오히려 잘 됐군요. 그들이 날 할아버지가 계신 고국으로 데려다 줄 거예요. 난 더 이상 미국을 좋아하지 않아요.” 남자가 그녀에게서 물러나더니 마치 그녀가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우린 독일과 전쟁 중이오.”

그가 귀엣말로 속삭이듯 나지막이 말하자 이에 뒤질세라 그녀가 얼른 받아쳤다.

당신 나라는 독일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지, 내 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요.”

그가 그녀를 붙들기도 전에 그녀는 오솔길로 몇 발자국 들어섰다.

이봐요. 귀여운 배반자. 당신은 싫든 좋든 나와 함께 여기에 있게 될 거요. 그리고 내 친구가 내일이면 오는데, 그 때 내가 당신을 미국 정부 측에 인도하겠소.”

그는 그녀의 한쪽 팔을 붙들고 공터로 끌고 가서 명령을 한 후 더 이상 논의할 게 없다는 듯이 그녀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 나무에 등을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오로지 자기 주장만 펼치는 이 남자에게 굳이 설명한다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보다 안타까운 일은, 지금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시간을 허비하여 할아버지의 수명을 몇 달 단축시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지금쯤 그녀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어 상당히 걱정하고 계실 게다. 당신의 왕위를 계승할 유일한 아들인 아리아의 아버지를 교육시켰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아리아가 다섯 살이었을 때에 젊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 때부터 할아버지의 희망은 온통 어린 손녀에게 쏠렸다. 그녀는 역사와 정치학 및 경제학에 대해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지금 그물 침대에 누워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는 이 남자 역시 애국심에 대해선 조금 아는 것 같았지만, 자신의 국가가 전시 중인데 홀로 즐기고 있다는 게 영 못마땅했다. 왕이나 여왕이라면 조국이 전시에 놓여 있을 때 휴가를 즐기는 법은 결코 없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수록 백성들은 왕족이 모범을 보이기를 진심으로 바라질 않는가.

그녀의 할아버지는 이 세계의 대부분을 폐허로 만든 이 끔찍한 전쟁을 피해 나라를 지켰다. 미국에 바나듐을 판매한다면 독일이 무슨 일을 벌이게 될지 두려워했지만, 랑코니아는 무척이나 돈이 필요했다. 랑코니아가 이번 전쟁에서 중립국임을 선언하자, 다른 나라들로부터 일체 수입이 차단되었던 것이다.

저 몽고메리 작자는 랑코니아가 산악지대에다 염소와 포도의 나라라고 말했지만, 이제 포도나무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유괴 대상이 될 정도로 매우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도 할아버지께서는 그녀를 미국으로 보내는 위험을 감수했다. 바나듐을 판매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존폐 위기와 관련된 그런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몽고메리는 너무나 어리숙하고 멍청했다. 이런 무지몽매한 남자의 감시를 받아 이곳에 꼼짝도 못하고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니……. 그녀는 미국 정부가 그녀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할아버지에게 알리는 걸 늦춰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미국의 신문은 모든 것을 떠벌리기를 좋아하지 않는가.

그녀는 생각을 거두고 남자를 흘낏 쳐다보았다. 그가 잠들었음을 알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소리를 죽이고 공터를 떠나 오솔길로 내려갔다.

그녀는 해변에 이르렀지만 점점 바다로 태양이 함몰되어 아주 멀리까지 볼 수가 없었다.

홀연, 모터 소리가 뚜렷이 들려왔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내달렸다. 섬의 모퉁이 근처에 막 정박한 모터보트 한 대가 있었다. 그리고 세 명의 남자가 모래 해변에 보트를 끌어올리려고 낑낑거렸다. 그녀가 신호를 보내려고 한쪽 손을 치켜들고 입을 여는 순간 누군가 갑자기 머리를 모래에 내리꽂았다. 몸 위로 육중한 뭔가가 내리눌렀다. 그래, 이건 바로 몽고메리 대위야.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말아요. 단 한 마디도 안 돼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유람객은 아닌 것 같소.” 그가 귀에 대고 재빨리 속삭였다. 아리아는 숨을 좀 쉬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한 손을 치켜들고 내려오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가 그녀에게서 조금은 비껴 났지만 더 가까이 끌어당겨 그녀의 몸은 여전히 그의 몸 아래로 들어가 있는 꼴이었다.

당신은 이래선 안 돼…….” 그가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 조용! 그들이 이쪽을 보고 있소.”

그녀는 간신히 그의 손가락을 옆으로 밀쳐내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한 사람이 보트 옆에 서서 담뱃불을 붙이는 동안, 다른 두 사람은 무거운 상자를 들고 나무숲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이 돌아왔을 때, 그들의 손은 비어 있었다.

그들이 보트를 타고 시동을 걸어 사라지는 동안 JT는 아리아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이제 놔주세요.” 그들이 사라지자 그녀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JT는 계속해서 그녀를 붙든 채, 한 손을 그녀의 엉덩이를 더듬어 내려갔다.

어떤 종류의 속옷을 입고 있었소? 그런 속옷 차림은 나름대로 퍽 의미가 있었던 게 분명해요.” 어머니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지금 이 이상한 상황에선 여자로서의 본능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가슴께를 팔꿈치로 있는 힘껏 치고는 몸을 굴러 빠져나간 다음 벌떡 일어섰다. 남자는 갈비뼈를 문지르며 그대로 누워 있었다.

여기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소. 캠프로 돌아가시오.”

그 남자들은 상자 안에 뭘 넣어두었죠?”

그가 다리를 끌어 모으며 허리를 구부렸다.

, , 공주님은 호기심도 많으시군요. 당신이 그들에게 당신의 섬을 어지럽히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고 알려줘야겠군요.” “이건 미국인의 섬이예요.”

그녀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면서도 도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이봐요.” 그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당신 나라에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한 거요?”

그가 자리를 툭툭 털고 해변으로 내려가자 그녀가 뒤따라갔다.

죄수로 붙잡혀 있지 않을 때에만 누구나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죠. , 당신. 나에게 손댈 생각은 말아요.” “누군가가 오래 전에 당신에게 손을 댔겠군. 당신 몇 살이오?”

나 원 참…….” 그녀는 말을 꺼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스물넷.” “전쟁 중인 미국에서는 그만한 나이면 노처녀에 속해요. 당신과 결혼하게 될 왕자는 어떻소?” “그는 백작이에요. 영국과 노르웨이의 왕실과 혈연을 맺고 있죠.”

, 알았어요. 당신은 순수 혈통의 아이들을 낳겠군. 당신과도 혈연 관계가 있소?”

그녀는 그의 말투가 혐오스러웠다. “아주 조금. 사돈의 팔촌쯤?”

그걸로 보아 허튼 소리를 하는 얼간이는 아니겠군. 누가 그를 골랐던 거요?”

몽고메리 대위, 난 그런 개인적인 질문은 아주 싫어해요.” “난 당신의 나라에 대해 알고자 할 뿐이오. 관습이나 뭐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말이오. 당신은 미국인들에 대해 호기심이 없나요?”

난 당신들의 관습에 대해 이미 익혔어요. 영국 청교도단이 17세기에 이곳에 도착했고, 텍사스 독립전쟁 중 1836년 멕시코 군에게 포위되어 187명의 미국인 수비대가 전원 엘라모 요새에서 살해당했으며, 정부는 헌법에 기초를 두고 있고, 당신의…….”

아니오. 내 말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에 대한 인상을 뜻해요.”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 생각에 미국인들은 매우 이상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이제까지의 경험 중에서 이번이 가장 즐겁지 못한 여행이었어요.” 그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보트가 정박했던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기 꼼짝 말고 있어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그대로 있어요.”

그는 나무숲으로 사라다가, 잠시 후에 돌아왔다.

훔친 해군 재산이오. 숨겨놓은 곳이 아주 넓어요. 암거래하고 있는 게 확실해요.”

암거래요?” 그가 그녀의 팔을 와락 잡았다. “여기를 피합시다. 그들은 오늘밤 두 번 정도는 더 들락거릴 거요. 나중에 돌아가서, 해군 측에 알려야겠소.”

아리아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더니 앞장서서 해변으로 걸어 내려갔다.

왕만이 당신과 함께 걸을 수 있다는 뜻인가요? , 말해보시오. 줄리 백작은 당신 옆에 서서 걷나요?”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더니 교교한 달빛이 흐르는 어둠속에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줄리앙 백작이에요. 그리고 공공 장소에서는 내 옆에서 걷지 않아요.”

그녀가 다시 돌아서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당신의 남편은 물론, 랑코니아의 왕이 되는 건가요?”

내가 포고하지 않는다면 그는 왕이 되지 않아요. 그리고 난 그런 포고를 하지는 않을 거예요. 난 여왕이 되고, 그는 단지 여왕의 부군이 될 뿐이에요.”

그가 왕이 되지 않을 거라면, 왜 당신과 결혼하죠?”

아리아는 치마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남자는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공주로서의 체통을 잊게 하는 묘한 재주를 가지고 있군.

랑코니아 때문이죠.” 그녀는 간단하게 대답하고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날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네 번 만나고서?” “세 번이에요. 이걸로 대답을 마치죠. 당신 나라의 도서관에 랑코니아에 관한 책이 있을 거예요. , 저녁식사로는 뭘 차려주실 건가요?” “우리 둘이서 음식을 준비할 거요. 양파를 썰어본 적 있으세요, 공주님? 그 일을 좋아하게 될 거요.”

 

 


4

아리아는 코를 훌쩍거리며 열심히 손을 놀렸다. 양파 냄새는 정말이지, 그녀가 예전에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듯이 지독했다. 그녀는 캠프 쪽으로 시선을 돌려 몽고메리 대위가 그날 밤의 잠자리를 마련하려고 그물침대를 손질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위한 잠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난 어디서 자는 거죠?” 그는 그물 침대에 누워 굳이 눈을 뜨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무 곳이나 원하시는 곳에서요, 공주님. 우리 나라는 자유 국가요.”

밤 공기가 점점 싸늘하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팔을 문질러댔다.

난 그물침대에서 자고 싶어요.” 여전히 눈을 감고선 그가 한쪽 팔을 뻗었다.

내 손님이 되어 주세요, 아가씨. 기꺼이 원하는 바입니다.”

아리아는 어처구니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그곳에서 내려오고 내가 거기에서 잔다면, 그건 너무 큰 희망사항이겠지요.”

그렇소, 너무 원대한 꿈이오. 1인분의 야영 도구를 준비했소. 침대 하나와 담요 하나,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당신과 함께 쓸 수는 있을 거요. 그리고 난 단지 잠을 자는 것 외에 아무 짓도 하지 않으리라는 걸 믿어도 돼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리아는 땅바닥에 앉아 나무에 등을 기댔다. 맨살에 닿는 밤 공기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산들바람이 불어오자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녀는, 그물침대에 누워 따뜻한 담요를 덮고 자는 그를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그리곤 등을 기대고 두 눈을 감았지만, 이가 딱딱 맞부딪쳐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캠프 주위를 걸어 다녔다.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자고 있는 것 같았는데, 느닷없이 그가 한쪽 팔을 그녀에게 뻗었다. 뭘 하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그의 팔을 잡고 그물침대로 뛰어올랐다. 그녀는 그에게 등을 돌리려고 애썼지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물침대에 누운 두 사람 사이가 좁혀졌다. 바짝 긴장해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자 통증이 왔다. “미안합니다.” 그녀는 마치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우연히 어깨를 부딪칠 때 나누는 말처럼 말하고는, 되돌아 누워 그녀의 머리를 그의 어깨에 파묻었다. 그녀는 오싹 몸이 떨려 손에 잡히는 대로 그의 셔츠를 끌어당겨 덮으려 했지만, 이건 꼭 그의 품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꼴이 되었다. 마지못해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는 순간 놀랍게도, 느낌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그가 두 팔로 그녀를 감싸더니 나지막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에이, 지금 이런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속 편할 것 같았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는 나름대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게 현명하리라. 게다가 커다랗고 따뜻한 그의 몸이 무척이나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쪽 다리를 움직여 무릎을 구부리곤 그의 다리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푸근한 마음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잠으로 빠져들었다.

 

일어나세요, 아침이요.” 마치 사기꾼 같이 은밀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녀는 단잠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남자에게 더 바짝 다가붙었다. 그는 그녀의 두 어깨를 그러잡고 조금 뒤로 밀친 다음 그녀를 흔들었다.

일어나라고 말했잖소. 그리고 머리 손질 좀 해요! 여기저기 흐트러져 엉망이오.”

그녀는 아직도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듯 눈은 반쯤 뜬 상태에서 머리칼은 어깨로 풀어헤쳐졌다. 그녀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그가 그물침대 밖 땅바닥으로 그녀를 밀어버리다니! 그녀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날벼락을 당한 듯,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 부딪쳐서 얼얼한 엉덩이를 문질렀다.

당신은 내가 만난 사람 중 잠자리를 가장 많이 차지한 사람이오.”

그가 화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덧붙였다.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소? 생식의 실태에 대해 배운 적이 없느냔 말이오.”

공립학교를 말하는 것이라면, 다닌 적이 없어요. 내겐 개인교사와 여자 가정교사들이 있었지요.” 천연덕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기지개를 켰다.

난 아주 잘 잤는데. 어때요, 당신도 그랬죠?”

아니오! 엉망이었소. 사실, 난 제대로 잘 수가 없었소. 이걸로 우리 둘이 함께 자는 건 마지막이오. 이번 휴가가 끝나면 난 전쟁터로 돌아가서 쉴 거요. 머리를 손질하라고 말했잖소? 예전처럼 뒤통수에다 고정시켜요. 할 수 있는 한 단단하게. 그리고 속옷을 다시 입으세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고는 그는 쿵쿵 소리가 울릴 정도로 발걸음을 떼며 오솔길로 사라졌다. 아리아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싱글거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뭘 잘못했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지만, 그녀는 그의 그런 태도에 상당히 통쾌했다. 그녀는 물가로 걸어가서 맑고 투명한 조그만 연못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많은 남자들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녀에게 결혼을 신청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녀의 외모에 아무 상관없이, 장차 여왕과 결혼하기를 꿈꾸던 사람들이었다. 그녀보다 열 여섯 살이 많은 줄리앙 백작은 아리아가 여덟 살이었을 때에 그녀와 결혼하겠노라고 할아버지에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리아는 머리카락을 살며시 만져보았다. 지금 당장은 지저분하지만 단정해지면……. 그녀는 오솔길을 내려다보았다. 그 남자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식량이 들어 있는 상자 안을 살펴보았다. 샴푸는 없었지만 통통한 비누 한 개와 얇은 수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옷을 벗고 개울로 들어갔다. 그가 돌아왔을 즈음엔 그녀는 머리를 감느라 거품 투성이였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입을 헤벌리며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그만 수건을 움켜쥐고 나뭇가지 뒤로 몸을 가리려고 애썼다.

저리 가세요. 여기서 썩 물러서란 말예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여전히 넋 나간 표정으로 그는 돌아서서 캠프를 떠났다.

아리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얄미운 남자, 그가 퍼부었던 끔찍스런 말이 스쳐지나갔다. ‘내 앞에서는 발가벗고 돌아다녀도 괜찮아요. 난 당신에게 아무 흥미도 없을 테니까.’

, 그런데 지금 그의 반응은 어떤가? 사랑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질 않았던가. 물론 그는 정말로 하찮은 사람이긴 하지만, 때로 그런 남자는……. 그녀는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사촌 하나는 결혼도 않았는데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 아버지는 매일 밤 그녀의 침실 시계 태엽을 감는 하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아리아는 그 하인이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소녀에게 최면을 걸었다며 어머니가 말씀하신 걸 들었다. 아리아는 씨익 웃음을 지으면서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옷을 입는 데에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러나 속옷을 다시 주섬주섬 챙겨 입지는 않았다. 그러고 나서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아직도 머리를 빗고 있었다.

아침식사로 바다가재를 잡아왔소. 상자에 크랙커도 있소.”

그가 말을 중단하는 순간, 그녀는 그의 시선이 온 몸에 다가드는 걸 느꼈다. 이른 아침 살포시 다가드는 바닷바람을 안으며 그녀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느닷없이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겨 얼굴 가까이 마주보았다.

내 사랑, 당신은 불장난을 하고 있군. 당신은 날 조롱이나 하는 하인쯤으로 생각하겠지. 그리고 날 안전하다고 여기고 있겠지요. 하지만 당신 생각은 틀렸소.”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파듯이 꾹 누르며 바싹 끌어당기더니 굶주린 듯이 격렬하게 키스했다. 키스가 끝나자 그녀를 놓아주었다.

당신은 스물 네 살이지만 아직도 어린애요. 천진한 어린 소녀. 그런 식의 표현은 당신의 줄리 공작이 기꺼이 해주겠지. 하지만, 내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아요. 난 당신의 하인이 아니고 그렇다고 당신에게 안전한 인물도 아니오. 이제 저쪽으로 가서 그물을 걷어내어 내게 새우를 가져다주시오.”

아리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제대로 알아듣기엔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줄리앙은 꼭 한 번 그녀에게 키스했지만, 그땐 신사답게 그리고 그녀의 허락을 받은 후에 한 것이었다. 그건 이 남자의 키스처럼 원색적이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난 당신을 증오해요.” 그녀가 속삭이듯 웅얼거렸다.

좋아요! 나도 당신에게 아무런 사랑을 느끼지 않소. 이제 그만, !”

아침식사는 두 사람이 입을 꾹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아 어색하고 음침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식사를 마친 후, 그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리아는 자신의 허락 없이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저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이지, 그녀는 그에게 말을 건네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으며, 이제는 그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벗어나 이 섬을 빠져나가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기원했던가.

담배를 다 태우고 나서 그가 일어나더니, 뚱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캠프에 그대로 있으라고 하고는 오솔길로 사라졌다. 아리아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할아버지 생각을 했다. 백성들과 그리운 고국으로 어떻게 갈 수가 있을까.

몇 시간이 지나도 그 남자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해변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 걸어갔다. 해변에서 그는 한 그루의 종려나무 아래에 길게 누워, 두 눈을 감고 셔츠의 단추는 열어놓고선, 소총을 나무에 기대놓고 있었다.

또 낚시를 할 계획이오?” 눈을 뜨지 않고 뚜벅 그가 물었다.

그녀가 막 대답하려는 순간, 두 사람은 모터보트 소리를 들었다.

JT가 후다닥 날렵하게 일어서며 명령했다.

자세를 낮춰요. 그리고 꼼짝말고 있어요.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나오지 말아요.”

그는 소총을 움켜쥐고 해변을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리아는 나무 뒤에 몸을 웅크리고 살펴보았다. 그가 똑바로 서서 인사하는 몸짓으로 손을 흔드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뜻밖의 그의 모습에 갑자기 멍청한 기분이 되어 그녀는 일어서서 치마를 툭툭 털고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거추장스런 소매를 뜯어내고 치마를 싹둑 도려내 조금 우스꽝스런 드레스, 머리카락은 일주일 동안 미용사의 손길을 받지 않아 암만 해도 모양새가 흉해 보였다. 그래도 그녀는 최선을 다해 매무새를 고쳤다. 행색은 초라했지만 수 년 동안 교육을 받아온 대로 품위를 갖춰 몽고메리 대위와 모터보트에서 내리지 않고 있는 남자를 향해 해변으로 내려갔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이렇듯 기쁜 적이 없었다네.”

JT가 낯선 남자와 포옹을 나누었다. 그는 몽고메리 대위보다 훨씬 더 작았다.

돌리가 빨리 가보라고 등을 떠밀더군. 그녀는 온갖 불길한 상상을 하면서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며 조바심을 치잖아. 내가 그 등쌀에 견딜 수가 있어야지. 게다가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 여기에 잠시 머물면서 낚시를 하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했네.”

고맙지만 반가운 일이 아닌 걸. 난 여기보다 편안한 곳으로 돌아가길 원해.”

그 동안 아주 외로웠나 보군. 내가 말했잖나…….”

그는 아리아를 보자 토끼 눈처럼 동그랗게 뜨더니 돌연 말을 중단했다.

이 악마 같으니라고.” 그러더니 킬킬거리며 음흉하게 웃고선 찬탄 어린 눈길로 아리아를 쳐다보았다. 고풍스런 귀부인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걷는 모양이나 서 있는 태도에 기품이 서려 있었다. 빌은 JT 집안이 꽤 재력이 탄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JT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었다. 아내를 얻게 되면 JT와 돌리와의 우정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질투심을 느끼지 않아도 되리라.

자네, 내게 한 가지 설명을 해주게나.”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JT는 빌의 말을 가로채고는 아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라고 말했잖소.” 빌이 알겠다는 표정을 보이며 싱글거렸다. 연인들의 말다툼이라……. 그는 아리아를 더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우리 서로 어디에선가 만난 적이 없었던가요? 그리고 JT, 우릴 소개해주지 않을 건가?”

JT는 한숨을 내쉬고는 마지못해 말을 건넸다.

빌 프레이저, 이 분은 공주님이시고…….”

JT는 아리아에게 혼란스런 표정을 보이며 머뭇거렸다.

난 당신의 이름을 모르고 있소.” “공주님!” 갑자기 빌이 끼어 들더니 놀란 입을 벌렸다. “그 분과 닮았군요. 그저께 공장을 방문했던 그 공주님과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 난 이곳에 있었어요.” 아리아는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를 하는 건가 하며 눈을 크게 떴다. “난 여러 날 동안 여기에 있었어요.”

사실은 몇 년이나 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JT는 아리아의 한쪽 팔을 붙잡고 종려나무쪽으로 끌고 가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이봐.” 빌이 잔뜩 불만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자넨 공주님을 그런 식으로 다루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나? 내 말은 그 분이 상당히 중요한 임무를 띠고 우리 나라를 방문해 뭔가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냔 뜻이야.”

그래, 뭔가 대단하지.”

JT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들이 왜 당신을 쏘았는지 이제 내게 말해봐요.” “쏘았다고?”

빌이 두 사람 뒤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얼른 덧붙였다.

내가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오십 명쯤의 하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어. 총격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들은 바가 없는데?”

, 자네 공주님이 공장을 방문하고 있었을 때, 이쪽 공주님은 나와 함께 여기에 있었어.” 빌이 혼란스런 표정을 지으며 아리아에게 물었다.

여동생이 있으세요?” “그래요. 하지만 나와 닮지 않았어요.”

아리아도 똑같이 혼란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세하게 얘기를 해보시오.”

JT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최대한 간략하게 아리아는 유괴를 당했다가 도망친 얘기를 해나갔다.

손을 묶은 끈을 풀 수 있지만 옷의 단추는 풀 수는 없다? , 묘한 일이군.”

JT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누구든 급박한 상황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잖아요.” 그녀가 씨근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하, , .” 빌은 두 사람이 서로 으르렁거리자 화제를 재빨리 돌렸다.

당신을 유괴했던 녀석들이 대역을 이용했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대역이라고요?” 아리아는 섬뜩한 기분으로 몸을 움츠렸다.

누군가가 당신으로 분장하고 있는 거요.” JT가 설명하자 아리아는 놀라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빌이 JT에게 심각한 표정을 던졌다.

어느 쪽이 가짠지 어떻게 알지?” JT는 아리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쪽이 진짜 공주야. 내 목숨과 가족들의 목숨까지 걸겠어. 여기 그녀처럼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빌은 아리아를 아주 낯선 눈길로 바라보았다.

내 아내는 당신을 만나보길 원했죠. 다음 날 내가 집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그녀는 당신에 대해, 공주님에 관해 수백 가지 질문을 던졌어요. 당신이 뭘 입고 있는지, 얼굴은 어떤지, 왕관은 쓰고 있었는지 등등에 대해 무척이나 알고 싶어했죠.”

그가 말을 중단하고선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분은 당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리아가 그에게 희미한 미소를 건넸다. “언젠가 당신의 아내를 초대하겠어요.” 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JT를 돌아보았다.

그녀 말이 정말인가?” “어느 정도는. , 우리 이 문제에 대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따져 보자고.” 아리아는 이 문제에는 명백한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날 정부 관계자에게 데려다주세요. 그러면 내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할 테고, 그들은 그 협잡꾼들을 몰아낼 거예요.”

어느 쪽이 진짜 공주님인지 그들이 어떻게 알겠소?”

JT는 귀찮게 졸라대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근엄한 아버지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말해주면 되잖아요. 당신은 미국인이에요.” “내가 평민이라는 걸 잊으신 겁니까?”

JT는 성마른 목소리로 대꾸했다.

모든 미국인은 평등하다고 생각했는데요. 내가 아는 바로는, 모든 미국인은 똑같이 중요한 인격체라고 하던데요. 당신들 각각은 한 사람의 왕과 같다던데, 아닌가요?”

아리아가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정말…….” JT가 약이 올라 뭐라 한 마디 하려는 순간 빌이 가로막았다.

, 잠깐만. 당신들 두 사람 싸우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까요?”

JT가 약이 올라 뭐라 한 마디 하려는 순간 빌이 가로막았다.

워싱턴에 누구 고위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소? 장군이나 상원의원 같은?”

, 브룩스 장군이 일주일 동안 랑코니아에 머문 적이 있었죠. 내가 이번 여행길에 오르도록 할아버지를 설득하려고 왔었어요. 할아버지께서는 별로 마음 내켜하지…….”

그녀의 할아버지는 왕이시라네.” JT가 빌에게 얼른 설명해주더니 다시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당신을 워싱턴의 브룩스 장군에게 데려다 주는 것이겠군요.”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곧추세웠다.

난 갈 준비가 되어 있어요. 옷을 가져오기만 하면 당신과 함께 떠날 준비가 다 될 거예요. , 이런!” 그녀는 그제서야 그 동안 얼마나 무모한 일이 벌어졌는지 적절하게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제대로 입을 만한 옷도 없고, 의상 담당자도, 시녀도 없었다. 더군다나 랑코니아로 돌아갈 길은 막막했다.

그 여자가 정말로 저와 닮았나요?” 아리아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힘없이 물었다.

생각해보세요. 그녀는 당신만큼 예쁘지 않았어요.” 빌이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자 JT가 빌에게 불쾌한 표정을 던졌다.

이봐, 미국이 바나듐을 얻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가 걸린 거라고. 내 생각엔 자네가 그 공장에 배치된 이유는 협잡꾼들이 바나듐을 적()에게 넘길 가능성이 있어 미리 손을 쓴 거라고 여겨지는군.” “바나듐?” “철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섞어 쓰는 금속이지.”

JT가 성급하게 설명하고선 아리아에게 비난의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런 당신 모습을 알아볼 장군은 아마도 없을 거요. , 자넨 우리가 그 보트로 마이애미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마이애미! 거기까진 시간이 꽤 걸리잖아.”

마이애미에 가서 그녀에게 옷을 좀 사주고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를 태워주면, 그걸로 끝이야. 우리로선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이곳의 지리를 잘 모르잖아. 누군가 함께 가야 하지 않겠나?”

지금은 전쟁 중이라는 걸 자네도 기억하겠지? 우리 둘은 내일 아침 아홉 시까지 귀대해야 해. 전시에 귀대가 늦어지면 사살될 수도 있어. 그녀는 브룩스 장군을 만나기만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리게 될 거야.” JT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오솔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난 그녀와 함께 갈 수가 없어. 이봐, 쇼핑하러 가세.”

빌이 아리아에게 흥분에 들뜬 표정을 지으며 싱긋 웃고는 친구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JT, 자네 미쳤군. 마이애미에 도착할 때쯤이면 한밤중일 걸세. 게다가 일요일이잖아. 문을 연 상점도 없을 테고, 또 옷값은 어떻게 지불할 건가? 그녀에게는 돈이 전혀 없고 자네 역시 값비싼 새 옷을 사줄 형편이 안 되잖나. 의복 구입 쿠폰도 없고 말이야. 내 생각엔 그녀를 정부측에 넘겨 그들이 이 일을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그렇지 않아.” JT가 간단하게 대꾸하곤 입을 다물었다.

내게 말해주질 못할 이유가 있는 것 같군. 그렇지 않나? 내 말은, 결국 나도 이 일에 끼어 들었단 얘길세.” JT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키웨스트에서 보낸 누군가가 그녀를 죽이려 했어. 그녀가 그 가짜 공주에게 가서 자기가 진짜 공주라고 선언하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이틀 안에 죽음을 당하게 될 걸세. 브룩스 장군에 대해 들은 바가 있네. 두뇌 집단을 가지고 있다더군. 그 장군이라면 그녀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까 알 거야.” “자넨 나보다 그 장군을 더 신뢰하는 것 같군.”

네발로 기다시피 하며 덤불을 통과하면서도 빌은 JT의 뒤를 놓치지 않았다.

삼십 분 후 그들은 보트에 올라타 떠날 준비를 마쳤다. 빌은 아리아가 타는 걸 도와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아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에게 미리 경고하겠는데, 그녀 손을 잡기도 전에 자네 얼굴을 처박고 말 걸세.”

JT가 불쾌한 표정으로 이죽거렸지만, 아리아는 흔들리는 보트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정신을 집중시키며 바둥거릴 뿐이었다.

, 제기랄! 밤새 걸리겠군.” JT는 아리아를 번쩍 들어 올려, 한쪽으로 반쯤은 홱 집어던지다시피 했다. “이제 거기 앉아서 얌전히 굴어요.” 아리아는 등을 빳빳이 세우고 그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두 뺨이 홍당무처럼 붉어지는 건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말이지, 이 남자에겐 지하 감옥도 과분할 거야.

그들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출발한 탓에 그녀는 보트에 하나뿐인 의자를 이를 악물고 꽉 붙들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보트의 한쪽으로 넘어지자 혐오스런 몽고메리 대위 입가에 상당히 만족스런 미소가 얼핏 스쳤다.

잠시 후 JT는 빌에게서 보트의 조종대를 넘겨받더니 더 빠른 속도로 몰기 시작했다. 소금기 밴 바닷바람이 아리아의 얼굴에 세차게 부딪쳤다. 처음에는 충격을 느낄 만큼 놀랐지만, 차츰 느낌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빌은 가끔씩 괜찮냐고 그녀에게 물어보았지만, 몽고메리 대위는 드넓은 바다에 시선을 꽂고 있을 뿐이었다.

오후 늦은 시간에 보트에 연료를 넣으려고 플로리다 주 동남부 연안의 키라고 섬에 잠깐 들렀다. 오랫동안 긴장한 터라 근육이 뻣뻣하게 조여왔지만 아리아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한 곳에 몇 시간씩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교육을 받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었다.

샌드위치 파는 곳이 어디죠?” JT가 선착장 관리인에게 물었다.

부두 끝에 거티라는 가게가 있소.” 빌은 JT가 음식을 사오는 동안 보트에서 아리아와 함께 남아 있었다. “이게 뭔가?” JT가 돌아오자 빌이 음식 봉지 안을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샌드위치를 먹는데 나이프와 포크라니? 그리고 사기 접시까지?”

JT가 빌의 손에서 봉지를 뺏어들고선 딱딱거리며 말했다. “출발할 준비 되었나?” “자넬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야.” 빌이 맞받아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JT가 훌쩍 뛰어 보트에 올라타자 빌이 뱃전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곧바로 다시 북쪽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JT는 현재 있는 돈을 톡톡 털어 사온 싸구려 접시에 계란과 야채를 섞은 샌드위치를 토막토막 잘라서 나이프와 포크를 얹어 아리아에게 내밀었다.

며칠만에 처음으로, 아리아는 편안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빌이 놀라 입을 벌리고 쳐다보는 모습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진짜 공주님이시군. 돌리에게 말해줘야겠어.” 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건넸다.

돌리는 이 얘기를 믿으려 하지 않을 거야. 아무도 이 얘기를 믿으려 하지 않을 거라고. 우리끼리 아는 얘기로 해 두세.” JT가 강한 어조로 말을 하자 빌이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JT를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자정이 다 되어 마이애미에 도착했다.

상점들이 문을 여는 아침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이거 야단났군.”

빌이 신음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해군에선 귀대 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펄쩍 뛰지 않는가. 자넨 영창에 갈 각오라도 서 있는 겐가?” 보트가 완전히 정박하기도 전에 JT가 훌쩍 뛰어내렸다.

보트를 묶어두고 그녀를 내려주게. 난 전화 한 통 해야겠네.” 아리아는 불안한 걸음걸이로 부두로 나가 사다리로 올라갔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나약함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다 됐소. 몇 분이 지나면 택시가 올 거고 친구가 우리를 옷가게로 데려다 줄 거요. 새벽 네 시에 출발하는 기차가 있소. , 공주님. 지금 옷을 구입하지 못할 만큼 피곤하지는 않겠죠?” JT가 다가와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지만 아리아는 어깨를 폈다.

난 조금도 지치지 않았어요.”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울리면서 택시가 바로 코앞에 이르자 JT는 지체없이 아리아를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좋은 분인 것 같군. 자넨 그녀를 그런 식으로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돼.”

그녀는 빌이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JT는 앞좌석에 오르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운전사에게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들은 황량하고 어두운 밤거리를 통과했다. “이곳에 문이 열렸을 거라고 확신하나, 젊은이?”

택시 운전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JT에게 물었다.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열려 있을 거요.” 그들은 덩굴로 뒤덮인 벽 뒤에 숨은 듯 자리잡은, 웅장하면서도 무척 고급스런 대저택가의 조그만 상점 앞에서 멈추었다.

내 생각엔 그렇지 않을 것 같군. 시내로 가봐야 할 것 같아.”

빌이 심드렁하게 말하는 순간 JT가 택시에서 내렸다.

여기야.” JT는 깜박이 등을 켜고 서 있는 검은 캐딜락 쪽으로 걸어갔다.

빌이 그의 뒤를 쫒아 얼른 뛰어내렸다.

폐를 끼쳐 미안해요, 에드. 전시가 아니었다면, 이런 부탁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JT가 웬 사내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는 살이 포동포동 오르고 윤기가 흐르는, 상당히 부유층으로 보였다.

이곳 판매원은 아직 오지 않았나?”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굳게 닫힌 상점을 바라보았다.

안 왔는데요. 가족들은 잘 지내세요?” “잘 있다네. 한 녀석은 예일대학에 다니고 있고, 다른 녀석은 공군에 입대했다네. 어머니는 어떠신가?”

물론, 매양 그렇듯이 자식들 걱정이시죠.”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안쪽 코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이거면 충분하길 바라네.” 그가 돈을 한움큼 내밀자, JT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충분합니다. 여자들을 잘 아시잖아요.” JT가 히죽 웃으며 돈을 받았다.

그녀를 만나볼 수 있을까?” JT가 택시로 다가와서 문을 열며 나오라는 손짓에 아리아는 우아한 동작으로 택시에서 내렸다. “공주님, 영광입니다.” 나이 많은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아리아는 미국 사람들의 태도에 익숙하지 않아 순간 당황했다. 그는 잠깐 인사를 건네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섬에서 몽고메리 대위에게서 받은 터무니없는 대접을 생각해보면, 이 남자의 행동은 매우 훌륭했다. 그녀는 그에게 답례로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였다. 검은색 시보레 승용차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마른 체격에 매부리코에 강한 인상을 풍기는 한 여자가 내리자 JT가 그녀에게 힐난하는 투로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나 있는 게 분명했다.

값비싼 의상실에는 윗사람에게 아첨하고 아랫사람에게 교만하게 구는 그런 판매원을 고용하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자고 있다가 한밤중에 명령을 받고 부랴부랴 나오질 않았던가. 그녀가 남자들을 쳐다보며 한 마디 내뱉었다.

이건 정말이지, 감사할 일이 못 되는군요. 전쟁이 진행 중인지에 대해서는 난 관심 없어요. 난 이런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요.” 그녀가 아리아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쭉 훑어보았다. “내가 맡아야 할 분이 이분인가요?” 세 남자 모두 입을 열려고 했으나 아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당신의 조그만 가게 문을 열고 가지고 계신 물건을 내게 보여주시겠어요? 괜찮다면 한두 점 사겠어요.” 아리아가 그 여자에게 선심이라도 베푸는 것처럼 다분히 고압적인 자세로 말하자, 세 남자가 동시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요!” 아리아가 칼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죠, 아가씨.” 여자가 열쇠를 찾아 더듬거리며 온순하게 대꾸했다.

아리아는 불이 켜지자마자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이런 가게는 처음이었다. 옷본이나 옷감을 파는 곳이 아니라, 이곳은 기성품 가게였다. 그녀만을 위해 만든 옷이 아닌 이미 만들어진 옷을 입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아리아 뒤편에서 판매원 아가씨가 대위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리아는 커다란 옷걸이에 걸린 블라우스를 만져보았다. 상아색의 실크 축면사로 감촉이 꽤 좋았다. 그 옆에는 검은색의 조그만 점박이가 박힌 노란색 블라우스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노란색을 입으면 어때 보일지 한 번쯤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다. 그 블라우스가 어울리는지 입어볼 수는 있겠지. 기성품들이기는 하나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으리라.

이봐요!” 갑자기 판매원 아가씨가 JT를 퉁명스럽게 부르고는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여기로 전화해서 메이비스에게 지금 당장 이곳으로 건너오라고 말하세요.”

대부분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JT는 이런 여성스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며 유순하게 행동했다.

저분은 누군가?” JT가 다이얼을 돌리고 있는데 빌이 나이든 남자 쪽으로 고개짓을 하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의 친구분이셔. 한두 개 은행을 소유하고 있지.”

JT가 다이얼을 돌리며 뚜벅 대꾸했다. “여보세요, 메이비스?”

JT는 상대방이 받았는지 수화기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다리겠습니다.” 아리아를 바라보며 JT는 성급하게 말을 끝냈다.

은행가는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비스가 도착했다. 빌과 JT는 조그만 금박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JT가 참지 못하고 이리저리 의자를 옮겨 앉는 동안 빌은 꾸벅꾸벅 졸았다.

이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군요.” 아리아가 거울에 비춰보며 뭇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미국에서 유명한 메인보커 제품이에요.”

불만스럽다는 듯이 판매원이 톡 쏘아붙였다.

여기저기 구겨지지 않게 조심해서 다루세요…….”

그러죠. 이걸 한번 볼까요?” “스카퍼렐리(프랑스의 유명한 의상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상품명)?” “그걸로 하겠어요. 잘 싸주세요.” “그러죠.”

판매원이 뜻밖이라는 듯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가씨께서는 여행용 가방을 가지고 계세요?”

내겐 가방이 없어요. 당신이 가방을 줬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하지만, 아가씨. 이 가게에서는 여행용 가방을 팔지 않아요.”

아리아는 이 여자가 꽤 지쳐보인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어디서 구해 오세요. 그리고 옷을 얇은 종이로 조심스럽게 포장해 주길 바래요.” 아리아는 보면 볼수록 미국인들이 참으로 이상한 존재로 다가섰다.

판매원이 옷 갈아입는 방에서 나가더니 메이비스에게 뭐라고 귀엣말을 하자, 메이비스가 튕기듯 밖으로 뛰어나갔다. 판매원이 JT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준비해야 할 게 있어요.”

JT가 지루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일어섰다.

우린 시간이 없어요. 키웨스트로 귀대할 시간이 몇 시간 남지 않았소. 그녀는 몇 사이즈를 입죠?” “6. 그녀는 완벽한 6 사이즈인데, 옷이 완벽하질 못하죠.”

여자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당신 가게에 있는 모든 6사이즈를 하나씩 주시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러면 돈이 아주 많이 들 텐데요. 그리고 의상 쿠폰은…….”

JT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백 달러자리 지폐 한뭉치를 세기 시작했다.

“6 사이즈가 모두 불량품이라 폐기처분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죠? 날 믿으세요.”

판매원의 시선이 돈에 고정되었다. “구두 값도 있어요.” JT가 지폐를 계속 세었다. “그리고 장갑도요. 양말도 있고요. 물론, 속옷도 있죠. 또한 인조 장신구 역시 필요할 거예요.”

JT가 돈 세는 걸 중단했다. “공주님!”

갑자기 JT가 큰소리로 부르자 빌이 화들짝 깨어나면서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보석을 원하세요?” “에메랄드와 짙은 적색인 루비가 필요할 거예요. 그리고 물론 다이아몬드와 진주도요.” JT가 판매원 아가씨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녀가 안경을 낀다거나 금으로 만든 팬티를 입지는 않겠죠?”

저희 가게에 다이아몬드 귀고리 한 쌍이 있어요” JT가 몇 백 달러를 더 보탰다. “그걸 주시오. 그리고 그녀에게 맞는 사이즈는 뭐든 주세요.”

그 순간 메이비스가 문가에 나타났다. 그녀 뒤에는 흰색의 가죽실로 끝처리가 된 청색의 즈크(무명실로 두툼하게 짠 직물) 여행용 가방들을 들고선 졸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이걸 어디에 쓸 거죠?”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지만 판매원은 대꾸도 없이 그걸 받아들자 JT는 뒤로 물러섰다. “아름답군요, 아가씨. 너무나 아름다우세요.”

잠시 후 옷 갈아입는 방에서 판매원이 아리아를 감탄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리아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았다. 옷은 전쟁 탓인지 천을 절약하느라 짧게 만든 건지는 몰라도, 재단이 잘 되어 있어서 아주 기분 좋게 몸에 꼭 맞았다. 하지만 얼굴 부위는 이 미국인들과 너무도 달라 보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리아는 지금 길다란 머리카락을 지저분하게 아무렇게나 묶었고, 얼굴은 파리하고 핏기가 없었다.

당신의 잘생긴 젊은 양반께서 점점 조바심을 치고 계세요.”

판매원 아가씨가 미안해 하는 투로 말을 건넸다.

그 사람은 저와 아무런 관계도 없고, 더군다나 특별히 잘생기지도 않았어요.”

아리아는 새치름히 말하고는 몸을 틀어 스타킹의 솔기를 쳐다보았다.

미국 여자들은 이렇게 옷을 짧게 입나요?” 아무런 대꾸도 없자 아리아는 고개를 들고선 판매원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잘생기지 않았다고요?” 여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리아는 언뜻 몽고메리 대위를 사실 정면으로 쳐다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고풍스런 조그만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듯이 앉고선 두 다리를 바닥에 쭉 뻗고 있었다. 메이비스는 호주머니에 두 손을 깊이 찔러 넣고 그의 주위를 왔다 갔다 했다. 이제 보니 몽고메리 대위는 넓은 어깨에, 길고 놀라울 정도로 탄력이 넘치는 다리, 짧지만 유달리 검은 머리카락에다 짙은 눈썹 아래로 푸른 눈동자가 빛났고, 코가 무척이나 컸다. 그리고 약간 갈라진 듯이 굴곡을 이룬 턱, 완벽하게 분할된 입술이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아리아는 제자리에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딴전을 피웠다.

이 모자가 괜찮을 것 같군요.” “그래요, 아가씨. 그분 잘생겼죠?”

그리고 이 스타킹을 사겠어요. 진녹색의 실크 정장도 싸주세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여자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회피하는 아리아를 쓱 한 번 맥없이 보다가 이내 사라졌다.

아리아는 혼자 남자, 다시 거울로 다가가 자신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녀는 섬에서 절묘하게 잘생긴 한 남자와 단 둘이서 며칠을 보냈다. 물론 그의 야비한 태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무척 많았지만, 어찌 되었든 그건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상관없는 일이잖아. 그녀가 랑코리아를 떠나기 전, 여동생은 잘생긴 미국 군인들과 시간을 보내서 좋겠다는 둥 짖궂게 놀렸던 일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그녀는 무척이나 잘생긴 남자와 함께 섬에서 단 둘이,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시간을 보냈음에도 그녀는 그를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공주님, 빨리 서둘러야겠습니다. 그 기차가 한 시간 안에 떠나기 때문에 우린 그곳으로 가야 해요!” JT가 거울 반대편에서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리아는 잠시 두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은 후, 옷 갈아입는 방을 떠났다. 너무나 잘생긴 사람이야. 그녀는, 모든 악마는 잘 생겼다는 얘기가 문득 스치자 이제서야 그게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빌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에 대해 그녀가 무슨 말인가 꺼내기도 전에, 여행용 가방을 가져왔던 남자가 되받아서 휘파람을 불었다. 그녀 생각에 휘파람은, 두 사람이 기분 좋다는 걸 뜻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몽고메리 대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한쪽 팔을 붙잡더니 문 쪽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그의 손길을 홱 뿌리치고 - 그를 만난 이후로 그러한 동작으로 짜릿한 만족을 느꼈다 - 의자에 앉아 톡톡 튀는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를 이렇게 해 가지고 여행을 할 수는 없어요.”

시키는 대로 하세요. 그게 도움이 된다는 걸…….” 판매원이 JT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아리아와 JT 사이에 나서서 주머니에서 빗을 꺼내들었다.

제가 너무 무례하게 구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모양새를 꾸밀 시간이 없소.”

JT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여자가 아리아의 엉성한 머리카락을 빗질하고선 능숙한 솜씨로 아리아의 머리 꼭대기 즈음에 끈으로 묶어 바싹 고정시켰다.

왕관처럼 보이는군요.” 여자는 상당히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아리아에게 손거울을 건넸다. 아리아는 손거울을 비춰보며 손질이 깔끔하게 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메이비스가 자신을 바라보며 키득거리는 걸 보았다. 메이비스의 머리 모양새는 어깨에 닿는 길이로 찰랑거렸으며 얼굴은 냉정하면서도 매우 현대적으로 보였다. 아리아의 머리카락은 랑코니아에서야 완벽했지만, 이곳 미국에서는 완전히 구식 스타일이었다.

JT가 그녀에게서 거울을 빼앗고는 숨도 쉬지 않고 속사포로 말을 퍼부었다.

기차 안에서 스스로 잘났다고 우쭐거려도 돼요. 서둘러요. 우릴 기다리고 있는 택시가 두 대나 있소. 한 대는 우릴 위한 것이고 다른 한 대는 빌어먹을 당신의 여행용 가방들을 위한 것이오.” 그가 의상실에서 나와 아리아를 거리로 끌고 나갔다. 그가 택시 안으로 그녀를 밀어 넣으려는 순간 판매원 아가씨가 향수병 하나를 들고 달려나왔다.

행운을 빌어요.” 아리아는 자연스럽게 손바닥을 아래로 하고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자가 아리아의 손끝을 잡고 반쯤 무릎을 굽혔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새 옷이 맘에 들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선 상점으로 되돌아갔다.

JT가 다시 아리아를 밀어 넣으려 했지만, 빌이 앞으로 나서더니 둘 사이에 끼어 들었다.

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주님.” 아리아는 그에게 현기증이 일 정도로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우아하게 택시 안으로 들어갔다. 빌이 반대편 문을 열고 들어가고 JT도 그의 뒤를 따랐다. “아내에게 이 얘기를 해줘야겠네.” 택시가 속도를 내어 출발하자 빌이 싱글거렸다.

내가 진짜 공주를 만났다는 걸 그녀는 믿지 않을 거야.”

언젠가 랑코니아로 초청하겠어요. 제 집을 당신에게 소개할게요.”

집이라고요? 궁전에서 살지 않나요?”

그가 잔뜩 실망한 어린 소년처럼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제 집은 돌로 만들었지요. 삼 백 년 된 거죠. 방이 무려 260개나 된답니다.”

공주님, 그건 궁전이에요.” 빌이 만족한 듯 껄껄 웃었다.

아리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를 실망시키지 않은 게 무척 기뻤다. 그녀는 한가운데에 달걀 만한 루비가 박힌 아라톤 왕관을 쓰고 그와 그의 아내를 맞아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 모두 옛집 방문 놀이를 끝냈으면, 이제 각자 할 일을 하지.”

JT가 심드렁하게 한 뭉치의 녹색 지폐를 내밀었다.

이봐요, 공주님.” “그게 뭐죠?” 그녀가 희미한 불빛 사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돈이오.” 그가 퉁명스럽게 내뱉듯이 말을 던졌다.

아리아는 시선을 돌렸다. “난 돈을 만지지 않아요.” “그녀는 틀림없는 공주님이야.”

빌이 놀라 다시 입을 벌리는 모습은 정말 감동을 받은 게 분명했다.

JT가 친구를 가로질러 몸을 기울이더니 아리아의 무릎에 놓인 품위 있는 자그만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레이스 처리가 된 손수건한 장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이봐요. 여기에 돈을 넣어두겠소. 워싱턴에 닿으면, 가방을 들어주는 짐꾼을 찾아서 그에게 이 돈을 주시오. 1이 새겨져 있는 지폐 한장을 말이오. 0이 두 개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겠소? 그리고 웨이버리 호텔로 데려다줄 택시를 잡아달라고 하세요. 운전사에게는 1이 새겨진 지폐 다섯 장을 주시오. 그 호텔에서 레온 카톤이란 사람을 찾으시오. 그가 없으면, 호텔 직원에게 그를 불러달라고 하세요. 그리고 당신은 아만다 몽고메리의 친척이라고 하세요.” “난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해요.” “하지만 당신은 나를 익히 알고 있잖소, 그분이 바로 내 어머니요. 그녀의 이름을 대지 않으면, 당신은 결코 방을 잡지 못할 거요. 카톤 씨가 비상용 응접실로 데려다줄 거요. 하지만 그러려면 나의 어머니 이름을 대야 해요. 녹색 지폐를 내보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요.” “녹색 지폐요?”

그들에게 백 달러짜리 지폐를 보이세요. 그러면 그들의 관심이 당신에게 집중될 거요. 그리고 당신의 태도나 모든 짐가방도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 생각해요. , 여기 있소.”

그가 주머니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상자를 열고 각각 다섯 개의 조그만 다이아몬드가 박힌 한 쌍의 귀고리를 꺼냈다. 그리고선 귀고리를 들어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에 비춰보았다. 썩 훌륭한 것은 아니었지만 없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당신은 도대체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전혀 할 줄 모르시오?”

난 미국에 바나듐을 줄 거예요.” 그녀가 고개를 똑바로 세우며 다부지게 대꾸했다.

그 말에는 자네도 반박할 여지가 없는 것 같군, JT. 그녀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다면 말이야. 그리고 우리 정부를 설득할 영향력을 쥐고 있으니…….”

빌이 아리아의 한쪽 손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운전기사에게 빨리 서둘라고 했다.

걱정 말아요, 아가씨. 누구든지 당신이 진짜 공주님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 그녀를 만지지 말고 아가씨라고 부르지도 말게나. 그녀는 왕족이라고.”

JT가 빈정거리는 투로 내뱉었다. “자네, 내리겠나?” 빌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세 사람 모두 입을 굳게 다물어 나머지 여행은 내내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

 

 

 

5

아리아는 웨이버리 호텔 응접실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귓가에 호텔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윙윙 울려 퍼졌다. 여지껏 그녀는 한 번도 경망스럽게 크게 소리 내어 웃어본 적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를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진저리를 쳤다.

기차에선 어땠는가? 지저분하고 덜컹거리는 소음에다 연신 그녀를 만지려고 안달하는 수백 명의 군인들로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만지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투에 그들은 기차가 들썩이도록 푸하하웃음을 터뜨렸다.

워싱턴에 도착해서도 그녀는 낯선 곳이 너무나 두려워 가슴이 두근거렸고, 돈 때문에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짐꾼은 그녀가 내민 지폐를 보자 그녀의 발에 키스를 하다시피 했지만, 택시 운전사는 수많은 짐가방으로 사납게 욕을 해대며 고함을 질렀다.

호텔 데스크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길을 비키라고 명령조로 말하자, 그들은 상당히 언짢은 기색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엄청난 가방 꾸러미에 관해서도 수군거리며 말들이 많았다.

아리아는 어떻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지 알지 못했지만 금세 파악하게 되었다. 데스크에 다다르자, 그녀는 몹시 피곤하고 조급해졌다. 불행히도, 호텔 사무원도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응접실을 원한다고 말하자 바로 코앞에서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녀 뒤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녀가 응접실을 원한다고 떠들어대자 그녀는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향해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감히 이런 무례를!

순간 곤란할 땐 녹색지폐를 내보이라는 몽고메리 대위의 충고를 떠올린 그녀는 끔찍스럽게 야비한 이 조그만 남자에게 지갑을 내밀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가 더 크게 웃어제꼈다.

그때까지 한숨도 자지 않고 하룻밤을 보낸 터라, 아리아는 기분이 엉망이었다. 그녀는 미국과 미국인들을 증오했으며, 몽고메리 대위가 그녀에게 해준 말을 절반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또한 피곤이 더해가 영어 구사 능력도 떨어져 혼란이 가중되면서 그녀의 말투에 랑코니아 억양이 섞이기 시작했다.

--다 몽고메리.” 그녀는 겨우 이 말을 찾아내 더듬거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당신, 독일인이세요?” 사무원의 말에 사람들이 모두 굳게 입을 다물고 적개심에 불타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뒤에서 다른 사람이 걸어오는 순간 그 이름을 반복했다.

그 남자는 호텔 지배인이었으며, ‘아만다 몽고메리라는 이름은 마술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는 사무원을 호되게 나무라더니, 손가락을 까딱이며 벨 보이를 불렀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아리아는 엘리베이터로 안내되었다. 그는 사무원의 무례함을 깊이 사죄하며, 전쟁 때문에 뒤숭숭해 좋은 서비스를 한다는 게 힘들다고 말했다.

비상용 응접실에 홀로 있게 된 아리아는 여전히 어리벙벙했다. 목욕은 어떻게 하는 거지? 지배인 케톤 씨가 뭐든지 필요하면 벨을 누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어디에서도 벨을 찾을 수가 없었다.

노크 소리가 나더니 그녀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한 남자가 그녀의 짐 가방의 바퀴를 굴리며 들어왔다. 짐 가방을 옷장 안에 들여놓고, 남자가 그곳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제 가도 돼요.” 그녀가 무표정하게 말을 건네자 남자는 희미하게 냉소를 짓더니 문쪽으로 다가갔다. “기다려요!”

갑자기 그녀가 소리치며 지갑을 펼쳤다. 그녀가 알기로, 미국인들은 지폐 앞에서는 어떤 일이든 했으며, 지폐에 0이 두 개 들어가 있을 경우에는 상당히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폐 한 장을 꺼냈다.

난 시녀가 필요해요. 내가 옷을 입고, 목욕을 하고, 짐을 푸는 걸 도와줄 만한 사람을 알고 있어요?” 백 달러짜리 지폐를 보자 남자의 두 눈이 곧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얼마나요? 제 여동생이라면 그 일을 할 수 있지만, 그녀는 영원히 누군가의 시녀가 되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번에는 아리아가 놀랄 차례였다. 그녀의 나라에서 왕족의 시녀가 되는 건 명예스럽지 못한 그런 미천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녀들은 귀족들이었다.

며칠 동안요.” 그녀가 겨우 말을 얼버무렸다.

동생에게 전화를 하겠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의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색 전화기로 다가갔다.

아리아는 전화를 사용하긴 했지만 누군가가 항상 그녀를 대신해서 다이얼을 돌려주었던 탓에 남자가 다이얼을 돌리는 걸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가 여동생에게 뭐라고 말을 꺼내면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리아는 왠지 거북해 침실로 갔다.

두 시간 후에 여자가 도착했다. 여자는 뾰로통한 표정에 무척이나 화가 나 있는 듯해, 아리아는 이 여자가 진짜 시녀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저 전쟁 중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시중을 들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풍겼다. 그녀는 아리아가 지시하는 것만 했으며, 그것도 마지못해 하는 눈치였다.

오후 네 시가 되어서야 아리아는 자리에 누웠다. 오랜만에 목욕에다가 머리를 감았으며, 평범한 식사를 끝내고 이젠 몇 시간 동안 잠을 자둘 생각이었다.

가까스로 잠이 들었는데 느닷없이 요란하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전 공주입니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악착같이 그런 호칭을 버리지 않는군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뭘 원하는 거죠, 몽고메리 대위?”

그녀는 바짝 긴장한 자세로 침대에서 꼿꼿이 일어나 앉았다.

빌이 나더러 전화해서 당신이 괜찮은지 알아보라는군요.” “물론 난 괜찮아요.”

호텔방을 잡는 데에 뭐 큰 문제는 없었소?” “아무 문제도요. 모두들 아주 친절했어요.”

그녀는 거짓말을 하자 코끝이 아려왔다. “브룩스 장군은 만나봤소?”

내일 만날 거예요.” “내일? 오늘은 뭘 했소?”

그녀는 데스크에서 한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며 비웃음을 당했고, 아주 못마땅한 시녀의 시중을 받았으며, 독일인이냐는 사무원의 물음에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당했다고, 지금 이 순간 그에게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머리를 감고 뜨거운 욕조에서 몇 시간을 보냈죠.”

어련하시겠소. 내 진작에 그런 사실을 알았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공주님은 무엇보다 호사스러워야죠. , 그럼 장군께서 당신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내일 밤 다시 전화를 하겠소.” “제발 귀찮게 굴지 말아요. 당신 정부가 그 가짜 공주를 제거하리라 믿어요.”

그가 잠시 말을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말을 건넸다.

아직 신문 보지 않았겠죠? 그 공주는 가는 곳마다 대단한 열광을 받고 있어요. 아마도 미국인들은 그녀를 아주 좋아하게 될 거요. 진짜 공주를 원하지 않게 될 정도로 말입니다.”

그녀는 전화기를 데고 노려보다가 꽈당내려놓았다.

비열한 남자 같으니라고!“

그녀는 침대를 박차고 나와 저녁식사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거실로 들어갔다. 시중드는 여자와 호텔 종업원이 그녀가 저녁식사를 할 때 신문을 사다주었지만 그녀는 신문이 놓인 채로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이내 신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두 번째 페이지를 들추자 자신과 매우 닮은 여자가 제복을 입은 두 명의 남자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는 사진이 한눈에 들어왔다. ‘미국 전역에 평화를 전하는 랑코니아의 아리아 공주라는 커다란 제목과 함께 기사가 곁들여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사진 속의 공주가 바로 사촌 시시라는 걸 알아차렸다.

항상 나를 질투했지, 시시?” 그녀는 사촌 동생 시시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진을 가까이 들여다본 그녀는 시시의 숙모인 에머 부인이 뒤쪽에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을 발견했다. 에머 부인은, 아리아와 함께 미국으로 왔던 수행원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시시를 보호하고 있는 게 사진으로 봐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리아는 그 수행원들 가운데 누구 한 사람이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그 아이가 내가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는 침대로 돌아갔지만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아침이 되자 더 많은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아리아가 스타킹을 신겨달라며 한쪽 다리를 내뻗자 시녀로 고용했던 여자가 발끈하며 나가버렸다. 아리아는 별 수 없이 낑낑거리며 혼자서 옷을 입는데, 무려 세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 손질로 검은색의 베일이 드리워진 모자를 쓰고는 한결 머리 모양이 돋보이는 것 같아 무척이나 흐뭇했다.

그녀는 호텔을 나오면서 점점 자신감이 줄어 위축이 되는 걸 느꼈다. 하지만 머리를 높이 들고 어깨를 뒤로 젖히곤 당당하게 걸었다. 로비를 걸어가는데 남자들이 낮게 부는 휘파람 소리를 들었지만, 눈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도어맨은 그래도 그녀가 뭘 원하는지 눈치 빠르게 행동했다. 그녀가 브룩스 장군을 만나고 싶다고 하자, 도어맨이 휘파람을 불었다. 택시 한 대가 다가왔다. 아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운전사가 자동차 앞머리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길고 검은 캐디락을 가리켰다.

저 차를 원해요.” 도어맨이 알겠다는 듯이 눈을 껌벅이고 나서 자동차로 다가가서 운전사에게 말을 걸자, 운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국방성으로 데려다줄 겁니다.” 미국인들은 모두 자신이 한 모든 행동에 대해 대가를 바란다는 건 아리아에겐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아리아는 0이 두 개 들어간 지폐 가운데 한 장을 도어맨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도어맨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형 승용차의 뒷문을 열었다. 아리아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두 눈을 감았다. 화려한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유괴된 이후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사가 그녀에게 자동차 문을 열어주더니, 국방성으로 통하는 문을 가리켰다.

이미 돈은 받았습니다.” 그녀가 지갑에 남아있는 지폐 몇 장 가운데 하나를 건네자 운전사가 엄숙한 낯빛으로 말했다.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이 미국인의 친절이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승용차를 타고 온 시간은 폭풍 전야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그녀는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국방성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곳에 들어서니 수많은 사람들이 다급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며, 타이핑 소리로 귀가 아플 지경이었고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며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으며, 라디오에서는 계속 다급한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어떤 책상 앞에서 간신히 걸음을 멈추고 브룩스 장군에 대해 물었다.

저쪽입니다.” 책상 뒤에 앉아 있던 여자가 입에 여러 자루의 펜을 가득 물고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되풀이 말했다. 책상 뒤에 앉아 있던 여자가 입에 여러 자루의 펜을 가득 물고 분명하지 않은 목소리로 되풀이 말했다.

저쪽에서 물어보세요.” 아리아는 복도를 걸어 내려가 다시 물었다. “전 그분의 비서가 아닙니다. 지금 전시 상황이란 걸 모르세요?” 남자가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아리아는 전부 다섯 명에게 물었으나 그들은 모두 그녀를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겼다. 그녀는 다시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군인들이 그녀에게 총을 겨누며 제지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다음 주에 다시 오라며 소리쳤다. 또 누군가는 전쟁이 끝나면 오라고 빈정댔다. 그러더니 또 다른 누군가가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더니 문을 열고 그녀를 주차장 쪽으로 반쯤 떠밀어버렸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똑바로 고치고 나서 비뚤어진 모자를 제대로 쓴 후,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미국인들이 진실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별 수 없이 그들에게 귀가 번쩍 뜨일 만한 선언을 해야겠지. 그녀는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방 한가운데로 당당하게 걸어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독일 스파이요. 브룩스 장군에게만 내 비밀을 털어놓겠소.”

한 사람씩 하고 있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주 잠깐 동안에 사방이 조용해지면서 침묵이 흐르더니, 갑자기 그 침묵이 깨지고 말았다. 권총을 든 군인들이 복도 사방에서 다가와 그녀를 포위했다.

날 만지지 말아요.” 그녀가 앙칼지게 소리쳤지만 군인들은 그녀의 팔을 번쩍 들자 발이 바닥에서 들려져 대롱대롱 매달리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군인들에게 끌려 기다린 복도를 지나쳐갔다. 사람들이 사무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리아는 모자가 흘러내려 얼굴을 반쯤 가리자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다시는 랑코니아를 떠나지 않으리라고 하늘을 두고 맹세했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군인들이 그녀를 의자에 풀썩 앉혔다.

얼굴이나 한 번 봅시다.” 말할 수 없이 분노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아는 고개를 들고 모자를 뒤로 젖히고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브룩스 장군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다시 만나서 무척 기쁩니다.” 그녀는 흥겨운 리셉션에 참석한 것 마냥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그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브룩스 장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가 있어!” 그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군인들에게 명령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바싹 긴장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보기 흉한 검은색 권총을 든 군인이 아리아에게 총부리를 겨눈 채 대꾸했다.

내가 어떻게든 싸워 이길 수 있을 거야.” 장군이 냉정하게 경멸조로 말하곤 그들을 모두 내보냈다. 둘만 남게 되자, 장군은 아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주님!” 그가 아리아의 한 손을 잡고, 가볍게 그녀의 손가락을 만졌다.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버지니아에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니라 나를 닮은 누군가겠지요.” 장군이 한동안 그녀를 쳐다보았다.

차를 시키고 우리 함께 얘기를 좀 나누도록 하지요.” 아리아는 차 쟁반에 놓인 걸 모두 먹어치웠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점심식사가 들어왔고, 장군은 그때까지도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랑코니아에서 공주와 함께 있었을 때, 거의 모든 일들에 대해 반복해서 질문했다. 그는 그녀가 진짜 공주라는 걸 믿을 수 있는 근거로 결정적인 뭔가를 알고 싶었다. 시계가 두 시를 가리키자 그가 아리아를 조그만 거실로 안내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그곳에서 쉴 수 있었다. 세 시 삼십 분에 이르러 그녀는 어떤 방으로 인도되었는데, 그곳에는 네 명의 장군과 사복을 입은 신사가 두 명 앉아 있었다. 그녀는 다시 모든 걸 반복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앵무새가 말하듯 반복하면서도 그녀는 조급함이라든가 짜증 섞인 피로한 기색을 전혀 내보이지 않았다. 일의 심각성을 따지자면 이 정도의 불편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않아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걸 도와주지 않는다면 모든 걸 잃게 되리라. 신분을 잃는 건 물론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될 것이며, 국적을 잃어 떠도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사태는, 랑코니아가 가짜 여왕을 맞이하게 되리란 점이다. 그녀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똑바로 앉아서 질문에 대답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열 시에 그들은 호텔로 그녀를 다시 보내면서 무장한 경비병과 여성대원을 딸려보냈다. 육군 여성 부대의 한 대원이 그녀에게 목욕을 하라고 하고, 그 동안 그녀의 짐 꾸러미를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아리아는 알았다. 아리아는 여자에게 시간을 넉넉하게 주려고 피부가 불어 주름이 생길 때까지 욕조에 있었다. 자정이 되어서야 마침내 그녀는 잠자리에 들었다.

 

커다란 국방성 회의실에는 희뿌연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육중한 원목가구인 마호가니 테이블에는 빈 컵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으며, 재떨이에 담배꽁초들이 수북하게 넘쳐흘렀고, 말라빠진 샌드위치 부스러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땀과 분노가 섞인 독특한 냄새가 가득히 배어났다.

난 바라지 않는 바입니다!”

라이온즈 장군이 침이 잔뜩 묻은 담배꽁초를 입술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옮기면서 소리쳤다.

그녀가 진실을 얘기하고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아직도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스미스 의원이 목소리를 낮춰 끼어 들었다. 그는 여섯 명 가운데 그래도 가장 생생해 보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눈 밑에는 잠을 자지 못해 생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의 왼쪽 손에 있는 흉터를 보셨어요?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열두 살 때 사냥을 하다가 떨어졌다더군요.”

하지만 어느 공주가 미국에 더 이로운지 신중하게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랑코니아는 바나듐 이외에 실제로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가짜 공주가 우리에게 바나듐을 준다면, 굳이 우리가 진짜 공주 운운하며 나설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코너 장군이 성가시다는 투로 말을 건넸다.

랑코니아는 독일과 러시아 주변 국가입니다. 러시아는 현재 우리의 우방이지만 공산주의 국가예요. 전쟁 후에는…….”

전쟁이 끝난 후에 랑코니아에 일어날 일을 누가 안단 말입니까? 이 공주를 왕위에 복귀시켜야 합니다. 그 보고서에 그녀가 독일 왕족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녀가 독일 왕족과 결혼을 하면 어떻게 되죠?” 갑자기 여섯 명이 동시에 입을 열어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브룩스 장군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내 말은 그녀를 왕좌에 앉히는 게 가장 시급하게 내려야 할 판단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그녀를 도와주면 미국에 바나듐을 주겠다고 했던 그녀의 약속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미국인과 결혼하면 더 확실하게 미국에 바나듐을 줄 겁니다.”

미국인과?” 스미스 의원이 놀라서 입을 벌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귀족 출신은 귀족하고만 결혼을 해요. 이 나라에 군주체제가 사라졌다는 걸 모르십니까? 그러니 어디에서 미국인 왕자를 구한단 말입니까?”

그 공주는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겁니다. 여러분, 내 말을 잘 들으세요. 미국인과 결혼해서 그를 왕위에 앉히기만 하면 도와주겠노라고 제시할 경우, 그녀는 그렇게 할 거예요. 날 믿으세요.” 브룩스 장군이 희미하게 확신감에 넘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약혼을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를 만나본 적이 있소. 오동통 살이 찐 조그만 송아지처럼 생겼어요. 그녀의 아버지뻘이 될 만큼 늙기도 했고요. 그는 돈 때문에 우리 공주를 원하고 있을 뿐이란 말입니다.”

브룩스 장군이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끝냈다.

우리 공주라고요?” 라이온즈 장군이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그녀를 도와 그녀 옆에 미국인을 앉힌다면 당연히 우리의 공주가 될 겁니다. 러시아와 독일에 그토록 가까이 위치해 있는 랑코니아의 군사적인 위치를 생각해 보세요.”

모두들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렇다면 왕이 될 사람으로 누구를 고르죠?” 짧은 침묵을 깨고 스미스 의원이 물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요. 그리고 미국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 겁니다.” 라이온즈 장군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브룩스 장군이 덧붙였다.

가문이 훌륭해야 해요. 깡패나 저능한 사람을 데려다 놓고 공주에게 결혼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훌륭한 미국인인 경우에만 왕좌에 오를 수 있습니다.”

아덴버그 장군이 하품을 길게 했다.

, 휴회하고 내일 명단을 알아봅시다.” 모두들 선뜻 동의하고선 자리를 떴다.

다음 날 아침 여섯 사람이 졸리운 눈빛으로 다시 모였다. 그들 가운데 네 사람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재미삼아 어떤 미국인이 훌륭한 왕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내들에게 물었다. 영화배우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클라크 게이블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고, 케리 그란트가 간발의 차이로 뒤로 물러났다. 로버트 테일러도 몇 표 얻었다.

네 시간 동안의 논의 끝에, 여섯 명의 이름이 물망에 올랐다. 그 가운데 둘은 젊은 국회의원이었고, 한 사람은 그다지 젊은 축에 속하지 않은 부유한 사업가였으며, 세 명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의 자손이었는데, 이 가운데 한 명은 메이플라워 호()로 이 땅에 건너왔던 조상의 후손이었다. 각자의 이름이 위원회에 넘겨졌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신상 조사를 세밀하게 하도록 지시가 내려졌다.

그리고 몽고메리라는 그 친구도 조사를 해봐요. 그가 입을 닫고 있을 만큼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봅시다.” 스미스 의원이 뒤늦게 추가로 덧붙였다.

 

사흘동안 아리아는 호텔 방에 죄수처럼 갇혀 지냈다. 소총을 든 두 명의 구인이 하루종일 문밖에 지키고 서 있었으며, 창문 아래 길거리에는 더 많은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틀째 되는 아침, 브룩스 장군의 특별 배려로 커다란 잡지 꾸러미가 배달되었다.

아리아는 자리에 앉아 처음으로 미국인들의 관심사가 뭔지 호기심을 갖고 읽어 내려갔다. 그들은 경박하고, 영화배우나 밤무대 가수에게 주로 관심이 있는 듯했다. <라이프> 잡지는 여러 페이지가 말끔하게 찢어져 나가기도 했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여섯 시, 세 명의 여성 대원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와 옷 입는 걸 도와주었다. 그들은 손놀림이 매우 능숙했으며, 아리아가 지시하는 일을 묵묵히 처리하면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여덟 시에 그녀는 다시 국방성으로 가서 전과 똑같은 여섯 명을 마주 대하고 길다란 테이블 끝에 앉았다. 그들은 그녀가 미국인과 결혼하여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리아는 머리끝까지 치미는 굴욕감과 두려움을 전혀 내보이지 않았다. 이 미국인들은 그녀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참을성 있게 미국인 남편이 왜 불가능한지 그 이유를 설명하려 애썼다.

내 남편은 왕자 출신이어야 합니다. 미국인들은 내 나라와 통합할 왕국이 없잖습니까?”

당신은 지금 미국이란 왕국에 와 있소.” 한 남자가 경멸조로 뚜벅 대꾸했다.

그건 불가능해요.” 그녀는 인내심을 잃은 듯 말끝이 떨렸다.

난 이미 약혼한 몸입니다. 내 백성들은 내가 약혼을 파기하는 걸 원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왕위에 계신 내 할아버지께서도 마찬가지이실 테고요.”

그녀는 이 폭탄선언으로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으리라 확신했지만 그렇지가 못했다. 스미스 의원이 앞뒤가 맞지 않은 터무니없는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 모든 일을 누가 꾸몄는지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그 가짜 공주를 몰아내면 당신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실수를 범하고 있소. 당신은 가망이 없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가망이 없는 사람이라고요?”

그렇다면 가망이 없는 공주님이라고 해두죠. 우린 누가 당신을 죽이려 했는지, 미국이 바나듐을 손에 넣는 걸 원하지 않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내야 해요. 누군가 당신과 가까운 사람이었을 겁니다.”

아리아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옳다는 생각에 비참한 느낌마저 들었다. 체면이 점점 깎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 가짜가 사촌 동생이라는 걸 말할 필요는 없었다. ‘시시가 그런 일을 꾸밀 선동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시는 신경이 쇠약할뿐더러 쉽게 잘 놀라는 연약한 처녀였다. 그녀가 지금 아리아의 위치를 대신해서 연기하고 있다면, 그건 누군가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를 뿐이리라.

몇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가슴에 여러 개의 훈장을 매달고, 커다란 몸집에 반백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말문을 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당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당신을 찾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운 계획은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얼른 끼어 들었다.

우린 그 가짜 공주가 일정을 마치고 랑코니아로 돌아갈 즈음, 그녀를 포로로 잡는 겁니다. 그와 동시에 당신이 랑코니아에 나타나면, 누군가가 당신이 가짜 공주인 줄 알고 당신에게 접근하여 실종된 공주의 자리에 당신을 앉히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린 누가 바꿔치기를 했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스미스 의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브룩스 장군이 목청을 가다듬고 분위기를 바꿨다.

이 모든 일의 유일한 책략은 당신이 미국인 남편과 결혼하여 미국인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리아는 지금까지 들은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했다. 그들의 말은 너무나 빨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난 미국인이 아니에요. 내가 미국인이라고 음모를 꾸민 자들이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우리가 가르쳐주겠소.” “하지만 왜요?”

그녀는 놀라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돌연,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녀는 이상한 음식과 이상한 풍습, 그리고 말하기 전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우선 생각해야 하는 서툰 영어를 사용하는 데에 신물이 났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스파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과 그녀가 스타킹을 신겨달라고 해서 그녀에게 욕설을 퍼분 시녀에 대해서도 질려버렸다. 또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과 일을 처리하는 것도 지겨웠다. 너무나 간절하게, 그녀는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브룩스 장군이 그녀의 한쪽 손을 잡고 꼭 움켜쥐자 그녀는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우리가 포로로 잡은 그 가짜 공주에게 당신이 하던 대로 말하고, 걷고, 나이프와 포크로 쿠키를 먹으며 진짜 공주로 행세하라고 으름장을 놓는 겁니다. 그러면 처음에 당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그 가짜 공주가 진짜 공주인 줄 알고 다시 그런 짓을 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들은 성공적으로 해낼 겁니다. 우리는 그 즉시 진짜 공주와 닮은 다른 여자가 필요하다는 상황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들어야겠지요. 그런 다음 미국인을 공주로 훈련시켰다며 당신을 그들에게 제시할 겁니다.”

공주로 훈련시켜요?“ 터무니없는 제안에 그녀는 고국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한꺼번에 싹 가셨다. 브룩스 장군이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리아는 그들의 계획을 신중하게 파악해야 된다고 결심했다. “그렇다면 간략하게 말해 내가 미국인이 되는 길을 익히고 나서 공주가 되는 걸 배워야 한다는 건가요?” “그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스미스 의원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아주 거만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공주의 몸으로서는 아주 잘 해낼 겁니다.”

스미스 의원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이 일을 위해 굳이 미국인 남편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아리아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그들이 세운 계획의 일부분을 착실하게 해낸다면, 그들은 이런 터무니없는 - 미국인 남편감을 골라야 한다는 - 짓거리를 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라이온즈 장군이 앞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사실, 우리가 당신을 위해 기꺼이 우리 목숨을 내거는 유일한 이유는, 당신이 미국인 남편을 당신 옆의 왕좌에 앉히는지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저 문을 걸어서 나갈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우린 당신 말을 전혀 듣지 않은 걸로 할 겁니다.” 그녀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까지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난 당신들에게 바나듐을 주기로 동의했잖아요.”

스미스 의원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눈빛이 차가웠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린 그 이상을 원하고 있습니다. 바나듐은 현재를 위한 것입니다.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말입니다. 보다 중요한 건 이 전쟁이 끝난 후 랑코니아에 군사기지를 세우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독일과 러시아의 동태를 손쉽게 파악할 장소를 원한다는 거죠.” “당신들이 이 전쟁에서 이긴다면…….” 아리아는 점점 커지는 노여움을 드러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독일이 이긴다면 랑코니아는 미국인 여왕의 배우자, 즉 적을 갖게 되겠군요.” 그녀는 자신의 나라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우린 패배하지 않을 게고 그는 왕이 될 겁니다.”

스미스 의원이 차갑고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럴 수 없어요…….” 아리아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아버렸다. 그들은 너무나 엄청난 것을 요구하고 있어! 개인적인 희생은 물론이고, 외교적인 희생과 군사적인 희생을 요구했다. 그녀는 생각을 가다듬으려고 슬그머니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과연 난 무슨 일을 당하게 될까? 미국은 이제까지 마주친 나라 중에서 가장 이상한 나라였다. 이런 곳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까?’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그녀는 고개를 들고 온통 자신에게 쏠린 시선과 당당히 맞섰다. 문이 열리더니 제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들어와 브룩스 장군에게 뭔가를 귀엣말로 속삭였다. 그러고선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공주님, 우린 당신을 잠시 떠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시켜 당신을 쉴 장소로 모셔가도록 하겠습니다.” 브룩스 장군이 일어서자 다른 사람도 따라 일어서며 밖으로 나가, 아리아는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미국인들의 태도에 온몸 깊숙이 파고드는 공포를 지금 당장 극복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그녀는 무장한 경비병을 따라 대기실로 갔다.

 

여섯 명의 남자들은, 지치고 충혈된 열 네 명의 선발된 요원들이 앉아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아리아 공주의 남편감 후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느라 지난 사흘 동안 전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후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하고라도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연고지를 방문하는 자유가 허용되었다. 한 여성 대원은 사흘 동안에 세 군데의 마을에서 파마를 세 번 했다. 그녀는 소문이 오르내리는 최고의 장소는 바로 미용실이라는 걸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열 네 명의 조사요원들은 너무나 지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만히 앉아 서로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 여섯 명이 들어서자, 열 네 명은 미적거리며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대위 한 사람이 서류를 들고 앞으로 나갔다.

뭘 알아냈소?” 스미스 의원이 성급하게 물었다.

그다지 흡족한 것이 못됩니다. 먼저 찰즈 토마스 웰던.”

대위가 서류를 들고 찰스 토마스 웰던의 훌륭한 족보를 읊어댔다.

나로선 그만하면 상당히 괜찮은 것 같군. 그에게 뭐가 잘못되었나?”

브룩스 장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성연애자입니다, 장군님.” “다음.” 장군이 목청을 돋우며 딱딱한 어조로 명령했다.

다음은 사업가로서 열여섯 살에 미천한 신분인 여자와 결혼했으나 이젠 그녀에게 막대한 돈을 치르고 그녀를 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혼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또 다른 남자는 지독한 도박사였으며, 또 다른 남자는 그의 가족이 암거래한 물건으로 이번 전쟁에서 한몫 잡고 있었다. 젊은 의원 중 한 명은 투표권을 돈으로 매수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자는?” 브룩스 장군이 피곤이 묻어 있는 느릿한 음성으로 물었다.

조부모가 독일인입니다. 그의 충성심을 확신할 수가 없어요.” “이제 어떻게 하죠?”

라이온즈 장군이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꾸 시간이 지나가고 있어요. 가짜 공주는 두 주일 후에 랑코니아로 돌아갈 게고, 그때 바나듐 계약서를 주고받겠지요. 만약 일이 틀어져 그녀가 그 계약서를 독일 측에 넘긴다면, 우린 랑코니아 땅으로 전쟁을 끌고 가야 할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물론 채광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겠지요.” “제게 오빠가 한 분 있어요.”

한 여성 대원이 말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젊은 대위 하나가 일어섰다.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보고사항이 있습니다. 공주의 목숨을 구했던 몽고메리 대위에 관한 것입니다.” “시간이 없소.” 스미스 의원이 성마르게 입을 열었다.

읽어봐!” 브룩스 장군이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잘 타이넌 몽고메리는 메인 해안의 조그만 읍내에서 자랐습니다. 그 읍내는 실제로 그의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의 가족은 워브룩스 조선소를 갖고 있죠.”

대위가 온통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보고 흡족한 듯 잠시 말을 중단했다. 워브룩스 조선소는 상당히 규모가 컸으며,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 회사는 첫 번째로 군함을 만드는 체제로 과감하게 돌아섰다. 해군 측에서는 워브룩스 조선소에 엄청나게 빚을 지고 있었다.

그의 가족은 엘리자베스 1세 재위 기간에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이 가족의 좌우명은 땅을 팔지 말라는 것이며, 그들은 그걸 지켜왔죠. 그들은 13세기 레널프 드 워브룩스라는 선조(先祖)에게 물려받은 땅을 아직도 영국에 가지고 있습니다. 18세기 들어서서도 미국에서 그들은 재력이 막강했고, 가족중 한 사람이 타거트가문의 여자와 결혼을 하여 메인 주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죠. 19세기초, 타거트 가문 가운데 일부가 부를 찾아 동부 해안으로 떠났으나 모든 걸 잃어버렸습니다. 1880년대에 이르러서야 케인 타거트라는 남자가 힘들게 다시 돈을 벌어들여 그나마 옛 명성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몽고메리 대위의 고모 한 분이 19세기 말엽 콜로라도로 가서 이 케인 타거트의 아들과 결혼했습니다. 그들은 현재 거대한 대리석 저택에서 살고 있으며 펜톤-타거트 강철회사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대위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다시 이었다.

몽고메리 대위는 워싱턴 주()에 있는 타이넌 제재소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몽고메리 가문의 엄청난 재력을 제외하고라도 그는 러시아의 대공작 부인이었던 조상을 비롯해 프랑스 공작부인이었던 사람도 있었고, 몇 명의 전설적인 총잡이는 물론이고 여러 명의 영국 백작도 있었습니다. 그의 조상들은 모든 미국 전쟁에 참여해 기꺼이 싸웠고 훈장도 받았습니다. , 이런 세상에! 그의 가문 중에는 여자들도 훈장을 받았던 기록이 있습니다.

몽고메리 대위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추문이라고 할 만한 단서를 전혀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세 형들과 함께 아버지의 조선소에서 일했습니다. 그는 고독을 즐기는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보트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학교 성적은 우수했으며 지방 보트 팀의 주장을 삼 년 동안 맡았습니다. 진주만 공격 직후 해군에 자원하였으며 - 그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신병 훈련소를 거쳐 이탈리아로 파견되었습니다. 일 년 육 개월 전 그는 미국으로 다시 와서 장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에게 키웨스트에서 선박을 군용으로 바꾸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두 달 전 PBM(광선 무기의 일종)을 너무 낮게 발사해 탄약저장소를 명중시키는 통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열 한 명이 죽었지만, 몽고메리 대위는 탄약이 폭발하여 산산이 날려버리기 전에 화재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는 매우 심한 화상을 당해 병원에서 몇 주일을 보냈고, 공주를 구했을 당시에는 그 섬에서 병가(病暇)를 받아 요양을 취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대위가 서류를 내려놓으며 모인 사람들을 쑥 훑어보았다. “결론적으로, 이 몽고메리라는 대위에게는 미국이 귀족 칭호를 부여해도 좋을 완벽한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절대로 안 돼요!“ 아리아는 놀라 숨을 헐떡거렸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난 그토록 무례하고 건방진 남자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그와 결혼하느니 차라리 거리에서 구걸을 하겠어요.” 평생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감추지 않고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그 동안 참아 왔던 자신의 혐오와 공포, 반발심을 모든 사람에게 퍼붓기라도 하듯 사납게 날뛰었다. 이 미국인들은 제정신이 아니야! 스미스 의원이 경멸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만 관계되는 일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요. 난 그 가짜 공주와 그녀의 조종자들이 당신 나라에 어떤 짓을 벌일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소. 지금으로선 그들이 당신 할아버지를 살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그가 서류가방을 닫고선 야멸차게 덧붙였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공주님. 건강을 빕니다.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말이오.” 순간 아리아의 마음속엔 여러 가지 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조종하는 누군가 - 살인자 - 의 도움을 받아 시시가 왕좌를 차지한다면? 랑코니아는 한때 호전적인 국가였다. 그 살인자가 전세계를 황폐화시키는 이번 전쟁을 틈타 과연 랑코니아로 들어 올까? 일부 랑코니아인들 - 대개 잃을 자식이 없는 나이든 사람들 - 은 랑코니아가 이번 전쟁에 합류한다면 피폐해가고 있는 랑코니아 경제에 막대한 도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떠벌리곤 했다.

아리아는 어느 미국 호텔에서 지내면서, 전쟁으로 박살난 랑코니아의 외곽지역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게 되는 걸 상상해 보았다. 그러한 모든 죽음이 결국 그녀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다면? 단지 몇백 명을 위해 수천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을지도 몰라. 그녀가 지금 오로지 선택할 길이란 진저리나게 싫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기다려요!” 그녀가 스미스 의원에게 소리쳤다.

그가 문께에서 걸음을 멈췄지만 돌아서지는 않았다.

…… 난 당신이 요구하는 대로 하겠어요.” 그녀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자세를 흐트리지 않으려고 근육을 긴장시켰지만 어딘가 약간 정신이 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엉엉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몽고메리 대위는 이미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이오.”

스미스 의원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방을 떠났다.

개자식!” 아리아 뒤에 있던 여성 대원이 중얼거리곤 아리아의 한 팔을 잡았다.

, 당신에게 이제 필요한 건 실컷 우는 거예요. 함께 가요. 제가 질 크리스트 장군 집무실로 모셔다 드릴게요. 그분은 지금 자리에 안 계시니까, 그곳에서 남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거예요. 몽고메리라는 남자는 정말로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인가요?”

아리아는 목이 콱 막혀 말을 할 수가 없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전 제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기뻐요. 미국인은 결혼에 대해서 억압적으로 지시하지 않죠. 전 제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어요.” 그녀가 질 크리스트 장군 집무실 문을 열쇠로 열었다. “, 여기에 계세요. 전등을 끄면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예요. 다섯 시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당신이 어디로 갔는지 전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녀가 아리아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고 문을 닫았다.

아리아는 가죽으로 덮인 조그만 소파에 앉아 초조한 듯 두 손을 딱딱 쳤다. 한 번 울기 시작하면, 쉽게 그쳐질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공격을 당한 랑코니아를 그려보려 애썼다. 그러다가 자신을 희생하는 이러한 행동으로 랑코니아를 파괴에서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불행히도 몽고메리 대위가 그녀를 조소하는 장면이 떠올라 계속해서 괴롭혔다. 그의 무례함, 그가 그녀를 끌고가 보트에 홱 밀치던 일이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여왕의 배우자로 교육시킨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기분은 더 엉망이 되어갔다. 그녀는 자신이 이러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급박한 처지를 할아버지께서 이해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6

꼬박 스물네 시간이 지난 후, ‘랑코니아 프로젝트로 이름을 붙여 작업하던 여섯 명이 네 명으로 줄었다. 두 명은 더 급박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회의실을 떠났다. 사실 그들은 공주의 고충만을 알고 있었을 뿐, 몽고메리 대위의 고집불통에 대해선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브룩스 장군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으며, 목소리는 쉬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은 어떤가?” 브룩스 장군이 예쁘장하게 생긴 젊은 여성 대원에게 물었다. 그들은 다양한 사람들을 내세워 몽고메리를 설득시켜 보려고 했지만 그다지 신통치가 않아 여자를 내세우기로 했다. 그래도 아직까지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JT…… , 몽고메리 대위는 공주와 결혼하느니 군사법정에 서겠답니다. 제가 그에게 가문이 훌륭해서 공주와 결혼해야 한다고 하자, 자신의 형제들 중 아무에게나 공주를 주시라고 하더군요. 형제들은 공주를 만나보지 않았으니 아마도 쉽게 유혹당할 거라던데요.”

그녀가 고개를 들고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형제들?” 브룩스 장군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제가 알아봤습니다, 장군님.” 한 젊은 대령이 얘기를 계속했다.

가장 큰 형은 머리가 좋아, 지금까지도 베일에 싸인 비밀조직의 회장을 맡고 있다던데, 다른 두 형제는 그가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둘째는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지난 주에 기관총으로 총격을 당해 한쪽 다리가 날아갈 뻔했습니다. 셋째는 지난 달에 영국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가족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죠.” 브룩스 장군의 얼굴에 실망의 그림자가 퍼졌다. “사촌은 없나?” “시간이 없어요!”

갑자기 스미스 의원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몽고메리 대위가 완벽해요. 그가 가장 적합한 미국인일 겁니다. 그리고 왕자다운 풍모도 지니고 있고요.” 그가 여성 대원에게 열렬한 동의를 구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IQ143으로 측정되었고 그는 부자예요. 기록에 의하면, 랑코니아는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몽고메리 집안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도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랑코니아에 호의를 베푸는 유능한 미국인이 될 겁니다.” 브룩스 장군이 덧붙였다. 스미스 의원이 그 앞으로 서류를 차곡차곡 올려놓았다.

그를 위협해서 워브룩스 조선소의 정부 지원을 잃는 위험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걸 강조해야만 합니다.” “타이넌 제재소나 펜톤-타거트 강철회사도 말이죠.”

대령이 얼른 덧붙였다. “그렇다면 그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하죠.”

스미스 의원의 말에 물 끼얹은 듯이 갑자기 방안이 조용해졌다.

그가 이목을 집중시킨 데에 으쓱하며 계속했다.

그는 공주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뿐더러 왕이 된다는 건 더더욱 웃긴 얘기라고 하며 코웃음치고 있어요. 그러니 이 결혼은 속임수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이 결혼을 일시적인 첩보 작전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그는 그녀와 살면서 그녀에게 미국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고, 그녀를 랑코니아로 데려간 다음 그녀가 다시 왕좌에 떠난다는 조건을 내세우면 승낙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랑코니아에서는 결혼은 영원하며, 그는 왕이 되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브룩스 장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 가서 어떻게 되겠죠. 두 사람을 결혼시키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가장 최우선적인 일입니다. 미국은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결과는 나중에 걱정하도록 하자고요.”

공주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죠?” 대령이 그래도 불안하다는 표정을 짓자 의원이 코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 거요. 나라를 지키려고 그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그보다 더 심한 어떤 일이라도 할 거요. 그녀는 몽고메리 대위를 왕으로 만들 생각이 전혀 없을지도 모르죠. 그가 이 문제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봅시다. , 갈까요? 그에게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얼마 동안이나 수면을 취하지 못한 거죠?” 대령이 시계를 쳐다보았다. “서른여덟 시간입니다.”

음식은?” “스물네 시간 동안 샌드위치 한 조각과 콜라 한 잔이 전부였습니다.”

스미스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 갑시다.”

 

아리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해 입을 벌렸다.

몽고메리 대위가 왕국의 공주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고요? 여왕이 될 몸과 결혼하는 걸 거부했단 말입니까?” 여성 대원은 JT가 아리아에 대해 말했던 끔찍한 표현을 그녀에게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JT, 그녀가 비인간적이며 돌덩어리 같고 여자 같지도 않아, 차라리 비너스 여신상과 사랑하는 게 낫다고까지 했다. 그 대신 여성 대원은 JT를 설득해 이 결혼에 동의하도록 했던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그가 그러면 그걸 받아들일 거라는……, …… 그걸 뭐라고 하죠?”

아리아가 숨이 턱 막히는지 말을 더듬었다. “이혼, 아니면 결혼 무효선언.”

하지만 왕족은 이혼을 절대로 할 수 없어요. 어떤 이유에서건, 공주는 한번 결혼하면 그걸로 끝이에요.” 아리아는 벽에 걸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사진에 시선을 돌렸다. 기막힌 일이다, 이건! 몽고메리 대위, 그 거만하고 무례한 남자와 함께 섬에서 보냈던 시간이 너무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조국을 위해 그녀는 그와 결혼하는 것에 동의했고 남은 삶을 그와 함께 보내기로 했는데, 이제 와서 그는 그런 그녀와의 결혼을 원치 않는다고 지껄이다니 도대체 무슨 남자가 그 모양이람! “나도 우리의 결혼이 영원할 거라고 말하지 않겠어요.”

그녀가 웅얼거리듯 낮게 말했다. “제가 알기론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여성 대원은 문득 스미스 의원이 이번 일에 대해 그녀에게 상세히 설명했던 게 구구절절 떠오르자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는 공주를 아주 좋아했으며, 자신의 조국을 위해 기꺼이 싸우는 사람은 누구든 좋아했다.

군대 측에서 당신들 두 사람을 위해 버지니아에 집을 한 채 세를 얻어 마련해 놓았지요. 말과 집사까지 갖추어져 있지만, 그 대위가 거절하고 있어요. 그는 키웨스트의 근무지로 돌아가고 싶다는군요. 당신들 두 사람은 조촐한 집에서 살게 될 거예요. 하인도, 그리고 특별한 권리도 전혀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군인 봉급으로 살아가야 해요.”

여성 대원은 아무도 JT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에 대해 공주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공주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여성 대원은, JT가 공주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 공주는 전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원은 이토록 우아한 공주가 앞치마를 두르고 개수대에 가득 담긴 접시를 닦는 모습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당신이 미국인이 되는 걸 익히면, 일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게 그의 의견입니다.”

그 대위는 무척이도 의견이 많은 게 분명해요, 그렇죠?”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절반도 몰라요.’라고 여성 대원은 말하고 싶은 걸 꾹 눌렀다.

그럼, 그의 조건에 동의하세요?” “내게 선택권이 있나요?” “아니오, 그렇지 않을 거예요. 준비 되셨어요? 두 사람의 결혼식을 위해 군목사(軍牧師)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아리아는 한 마디도 않고 일어서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지금 그녀에게 주어진 이 일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백성들에게서 축복 받는 낭만적인 허튼 결혼식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가 이틀 동안이나 입은 것이라서, 구겨지고 아무렇게나 축축 늘어져 있다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여성 대원이 문을 열 때까지 문 앞에 서 있었다. 밖에서는 여섯 명의 다른 여성 대원이 기다리고 있었고, 모두들 즐거운 표정으로 생긋 미소를 지었다.

결혼식에 참석할 남자들은 당신이 누군지 몰라요. 그들은 군대 측에서 당신과 당신의 연인을 재회시켜주고 드디어 오늘 두 사람이 결혼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첫 번째 여성 대원이 재빨리 속삭였다. “이건 오래된 겁니다. 제 할머니 것인데 빌려드릴게요.” 한 여자가 조그만 금 로켓(사진 등 기념품을 넣어 목걸이에 다는 자그마한 장신구)을 내밀며 말했다.

이건 새 것입니다.” 다른 여자가 조그마하고 예쁜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평화를 상징하는 파란색입니다.” 또 한 여자가 아리아에게 파란 물감을 들인 카네이션 꽃 장식을 아리아의 양쪽 어깨에 핀으로 꽂아주었고, 다른 여자는 아리아의 신발 한쪽을 벗기고는 행운을 비는 뜻에서 동전 한 닢을 밀어 넣었다.

아리아는 모든 일들에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참으로 미국 여자들은 눈물 겹도록 그녀에게 너무나 잘해주는 것 같아. 그러나 남자들은……! 그녀는 이런 여자들이, 무례하고 매너도 엉망인 남자들과 어떻게 잘 지내는지 의아했다.

결혼식장으로 회의실이 사용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테이블을 한쪽으로 밀어붙일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그녀가 행진할 복도도 없었다. 그녀는 여성 대원 옆에 서서 벽을 따라 저쪽 끝에 있는 남자들 쪽으로 걸어갔다. 정장을 차려 입은 남자들이 몇 명 있었지만, 열두 명 정도는 제복을 입고 가슴에는 번쩍거리는 훈장들을 달고 있었다. 이 결혼식은 고위층이 참석할 만큼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게 분명했다.

몽고메리 대위는 의자에 앉아, 한쪽 팔을 괴고 반쯤 졸고 있었다. 그의 뺨과 턱에는 며칠 동안 수염을 깎지 않아 시커멓게 돋아나 있었고, 제복은 얼룩이 져 더러웠고 마구 구겨졌다.

아리아는 갑자기 분노가 치솟았다. 이 남자들은 그가 얼마나 보기 흉한지 직접 말을 건네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도저히 그냥 보고 넘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몽고메리 옆으로 다가갔다.

그런 모습으로 감히 내 앞에 나타나다니, 정말 뻔뻔스럽군요.”

그녀는 그를 쏘아보며 몰아세웠지만, 그는 눈도 뜨지 않았다.

공주님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감미롭군요.” 브룩스 장군이 두 사람 쪽으로 얼른 다가와 아리아의 팔을 잡고선 군목사 앞에 세웠다.

그는 며칠 동안 뜬눈으로 날을 보냈소. 예식이 끝날 때까지 그의 신경을 건드려서는 안 돼요. 자칫하다간 다시 마음을 바꾸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리아는 주먹을 꼭 쥐었다. 이 남자에게 결혼을 애걸해야 할 만큼 난 아무런 가치도 없단 말인가? 느릿느릿 JT가 일어섰다.

마음을 바꾸고 싶습니까, 공주님? 난 기꺼이 그러겠소.” 그녀는 그를 쳐다보는 대신 랑코니아의 정겨운 모습을 떠올리려고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군목사가 주저하며 아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라고요?” JT가 턱수염을 문지르며 얼빠진 표정으로 묻자 군목사가 무뚝뚝하게 되풀이했다. “빅토리아 쥬라 아리아 실린 제니타.” “, 알겠습니다.”

아리아가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잘 타이넌 몽고메리를 사랑하고 받들겠노라고 맹세했지만, ‘복종하겠습니다라는 부분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공주님, 사랑하고 받들고 복종하겠습니까?” 군목사가 다시 재촉하자 아리아는 JT를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JT가 입을 열었다.

우린 오늘 이미 많은 거짓말을 했소. 그렇다고 하시오.”

JT의 말에 그녀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군목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이제 남편과 아내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신부에게 키스하세요.”

JT가 아리아의 허리를 그러잡았다. “제기랄, 자야겠소.” 아리아는 JT에게 질질 끌려나가다시피 하며 결국 여성 대원에게 조그만 금 로켓을 되돌려줄 여유조차 없었다. 브룩스 장군이 킬킬거리며 한 마디 툭 던졌다. “두 사람 모두 감옥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는 것 같군.”

스미스 의원이 뭐라고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아리아는 군대에서 제공한 수수한 검은색 승용차 뒷좌석에 등을 기대고는 애써 편안한 모습으로 미소를 지어보이는 데에 정신을 집중했다. 뒷좌석 다른 쪽 끝에 곧바로 문을 열고 달아날 자세를 취하듯 최대한 그녀와 멀리 떨어져서, 이제 남편이 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가 머리를 창문에 바싹 기대고 있어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지만, 그 역시 마음이 진정된 게 분명해 보였다.

아리아는 다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섬에서 둘이 함께 고립되어 지내는 동안, 그는 짐짓 그녀가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을 꾸몄다. 또한 그녀가 왕족 혈통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무시하면서도 그는 그녀가 예쁘다거나 마음을 끌어당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냉정하게 쏘아붙였을 때 아리아는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다. 왕족이건 아니건, 그녀는 욕망을 불러일으킬 만한 여자이길 원했다. 아리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유괴된 이후로 마치 2년을 보내 것처럼 2주일을 지냈고, 그동안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지만, 이제 모든 것이 마무리가 되었다. 그녀는 결혼했으며-몽고메리 대위가 몸을 뒤척이며 손발을 쭉 뻗자 그녀는 그를 훔쳐보았다-더 나빠질 일은 없으리라. 그는 야회복 정장을 입으면 아주 멋져 보이는 건 물론이고 무거운 접견복을 견뎌낼 만큼 충분히 강해 보였다. 그래, 아직 미국인이 되는 법을 익혀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지만, 그게 어렵다고 해봐야 얼마나 어렵겠어? 많은 사람들이 그걸 쉽게 해치우는 것 같지 않아? 하지만 결혼 첫날밤이 곧 닥칠 참이었다. 어머니가 이날 밤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어떻게 하는지, 그리고 많은 남자들이 단순히 여자에 대한 느낌이 아닌, 정열에 의해 이끌리게 된다는 걸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 남편 앞에서는 항상 가장 예뻐 보이도록 해야 하며, 남편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키도록 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오늘밤은 결혼 첫날밤, 의미 있는 밤이 되리라. 물론 그녀의 남편은 아주 이상한 사람이었지만, 지금까지도 아리아는 거의 알지 못하는 남자와의 결혼에 대해 나름대로 각오를 해왔던 터였다. 아마도 오늘밤이 지나면 몽고메리 대위도 그렇게까지 무례하게 굴지 않을 거야. 내일 아침이면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에 키스를 하며 지금까지 끔찍하게 굴었던 일에 대해 진심으로 용서를 빌겠지. 오늘밤이 지나면…….

그녀는 운전사가 문을 열어줄 때야 비로소 승용차가 멈췄다는 걸 알았다. 두 사람은 그녀가 머물던 호텔 뒤쪽에 있었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운전사가 남편을 위해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렸다. JT가 뒷좌석에서 길게 누우려 하자 운전사가 얼른 그를 붙잡았다.

다 왔습니다, 선생님.” JT가 승용차에서 길다란 몸을 꼼지락거리며 움직이자 운전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JT는 생전 처음 보기라도 하듯이 호텔을 쳐다보았다.

좋소.” 그는 중얼거리더니 아리아를 세워두고 혼자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러고는 잠시 후에 다시 돌아와서 그녀의 한쪽 팔을 붙잡아 끌고 갔다.

당신 방은 어디요?” “분홍색 방이에요.” JT가 걸음을 멈추더니 돌아서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눈은 충혈되었으며 수염은 시간이 더할수록 덥수룩하게 변해갔다.

이곳을 떠난 후 다시 돌아오면 당신 방을 어떻게 찾는지 알고 있소?”

저기로 가야 해요.” 그녀는 데스크를 가리키며 계속 말을 이었다.

때로는 기다리기도 하지요. 그러면 누군가가 날 방으로 안내해줄 겁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열쇠를 주지 않던가요?”

시내로 통하는 문의 열쇠 말인가요? 글쎄요,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여기 있어요, 움직이지 말고. 알았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를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나를 가까이 두기 위해 안달을 하는 게 분명해.’

JT가 데스크에서 몇 마디를 나누고 지배인 캐톤 씨와 악수를 한 다음, 돌아와서 그녀를 엘리베이터로 데리고 갔다. “침대에 드러눕기만 한다면 내 평생 더 기쁜 일은 없겠소.”

문이 닫히는 순간 그가 툭 내뱉자 아리아는 그 말에 빙그레 웃었다.

그가 방문을 열고, 그녀를 복도에 세워둔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의 한쪽 팔이 불쑥 나오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는 그녀와 아주 가까이 서서 방문을 잠갔다. 아리아는 부드러운 눈길로 그가 꼭 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이제 두 사람 뿐이다. JT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 침대가 보이는구나.” 그는 비틀비틀 거실을 지나 침실로 걸어가더니 한쪽 신발을 홱 벗어던지고 침대에 벌렁 누워 잠이 들어버렸다.

아리아는 아직도 문가에 서 있었다. 몇 분을 기다렸지만 침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몰려와 겁에 질려 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는 벌써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자는 것 같았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로 그녀는 받아들였다.

…… 준비할게요.” 그녀는 나즈막이 말하고, 나이트가운을 입으려고 옷장 쪽으로 갔다.

하지만 결혼 첫날밤을 위해 입을만한 옷이 아무 것도 없음을 금새 알아차렸다. 오늘밤은 평생에 한 번밖에 없는 밤이며, 그녀는 최고로 보이고 싶었다. 그녀는 JT를 쳐다보며 그가 잠든 척하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있다가 그가 몸을 뒤척이더니 코를 고는 소리를 냈다. 침대 옆의 조그만 탁상시계를 쳐다본 그녀는 오후 네 시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이곳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상점에서 적절한 나이트가운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편의 잠을 확 달아나게 해줄 멋진 나이트가운으로 말이다.

그녀는 핸드백에 깨끗한 손수건이 들어 있는 걸 확인한 후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방문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몽고메리 대위가 주었던 녹색 지폐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서 항상 했던 대로 했다. 캐톤 씨를 부르자 그가 자동차를 대기시켜주고 운전사에게 돈을 지불했다. 그녀는 위엄을 잃지 않고, 가고 싶은 곳을 설명을 했지만 운전사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상당히 애를 먹었다. 운전사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마침내 호텔에서 일하는 예쁘장한 아가씨를 불러세워 아리아가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택시 운전사가 아주 커다란 건물 앞에서 멈춰서더니 그녀에게 다왔다고 했다. 아리아는 백화점을 본 적이 없어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세 명의 여자가 그녀의 시중을 들려는 건지 거의 달려나오다시피 했다. 그녀는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를 택했다.

숙녀용 잠옷을 보았으면 해요.” “이쪽으로 오세요, 아가씨.”

판매원이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에 우월감 같은 걸 느꼈는지 우쭐거렸다.

어느덧 두 시간이 지나자, 판매원 여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리아는 상점 안의 모든 나이트가운을 입어보고 대부분을 바닥에 그녀로 떨어뜨려놓았다. 판매원은 물건을 계속해서 대주고 팽개쳐진 잠옷들을 다시 접어서 포개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아리아가 입고 벗는 걸 도와주어야 했다.

마침내 아리아는 가슴이 깊게 파이고 소매가 없는, 발이 고운 명주실로 성기게 짠 부분과 두툼하게 짠 부분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분홍빛 실크 잠옷으로 정했다.

판매원 아가씨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절 따라오세요. 상자에 넣어드릴게요.” 그러나 판매원은 아리아가 옷 입는 걸 도와주어야 한다는 걸 깨닫자 마지막 남은 참을성마저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판매원은 나이트가운을 거칠게 상자에 집어넣었다.

저 여잔 내가 하녀라도 되는 것처럼 시중 들어주기를 바랬나봐?”

! 경비원이 듣겠어.” 동료 아가씨가 얼른 옆구리를 쿡 찔렀다.

경비원에게 그녀를 다루라고 하겠어.”

아리아는 옷 갈아입는 방에서 나오는 순간, 판매원이 분홍빛 나이트가운을 담은 상자의 뚜껑을 닫는 걸 보았다. 판매원이 계산서를 가져오려고 카운터로 가자, 아리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상자를 집어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맙소사! 저 여자가 물건을 훔쳐가고 있어.”

카운터에서 그 모습을 본 판매원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전화벨이 열한 번이나 울려서야 JT는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 지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몽고메리 대위님이신가요?”

그런 것 같소.” “, 전 워싱턴 경찰국에 근무하는 데이 경사입니다. 들치기 혐의로 숙녀 한 분을 감금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분 얘기로는 당신의 아내라고 하던데요.”

JT는 찬물을 한바탕 뒤집어 쓴 듯 눈을 번쩍 떴다. “벌써 그녀의 신원을 기록했소?.”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이번 전쟁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라면서 수많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아주 이상한 분입니다. ()이 없다며 자신은 여왕이라고 하면서 우리더러 폐하라고 부르랍니다.” JT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분은 공주님이시고 폐하요.” “뭐라고요?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어요?”

경사, 믿기 어렵겠지만 그분은 귀중한 분이오.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그분을 감금하면 정부에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될 수도 있소. 당장 그분을 그곳 조용한 방으로 모시고 차를 한 잔 대접해 주겠소? 그리고 받침 접시도 함께 주시오.” 경사가 잠깐 말을 끊었다.

이 이상한 분과 정말로 결혼을 하신 겁니까?" "그렇소. 내가 곧 가겠소.“

당신이 오셔서 그분을 모시고 가면 정말로 고맙겠습니다.”

JT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누가 나에게서 그녀를 데려갈까?”

 

 

7

아리아는 유리로 쭉 에워싼 경찰서 사무실 의자에 앉아 유리벽 저쪽 잔뜩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무시하려고 온갖 애를 썼다. 그들이 묵직하고 하얀 원통형 찻잔을 건네주면서 옆에 있는 차를 따라 마시라고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묘하게도 컵을 재떨이에 받쳐왔다. 그녀는 그걸 만져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난 몇 시간은 생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치가 떨렸다. 사람들은 그녀를 이리저리 밀치며, 소리를 지르고, 같은 질문을 수없이 반복하면서도 무엇보다 그녀의 대답을 믿지 않았다.

순간 꺼칠한 몽고메리 대위의 얼굴이 저쪽 편에 나타나자 거의 환성을 지를 뻔했다. 그가 성난 표정으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리아에게 소리를 질러댔던 사람들이 그를 에워쌌다. 그녀는 그가 이렇게 버릇없고 난폭한 다른 미국인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궁금해졌다. 그가 여러 장의 녹색 지폐를 건네주며 흰 종이 몇 장에 서명을 하고,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들이 뭘 원하는지 이해하기만 한다면 똑같은 일을 해낼 수 있으리란 자신이 생겼다. 미국인이 되는 걸 익히는 일은 아마도 아주 쉬울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몽고메리 대위에게서 물러나자, 그가 성큼성큼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갑시다.” 그가 거칠게 문을 왈칵 열더니 고함을 버럭 질렀다.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마시오. 안 그러면 저 사람들에게 당신을 감금시키라고 할 테니까.” 아리아는 나이트가운이 든 상자를 들고, 당당하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호텔로 돌아오면서도 그는 한 마디 하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갈 뿐이었다. 호텔 방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전화기로 갔다.

룸서비스죠? 특별실로 식사를 올려 보내 주시겠소? 아니오. 여기엔 메뉴판이 없어요. 아무거나 4인분을 가져다주시오. 그리고 와인도 한 병 가져오시오. 창고에 있는 것 중에 제일 좋은 것으로. 서둘러요.” 아리아는 눈을 깜박이며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전화를 끊고 그녀에게 돌아섰다.

잠시라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좀이라도 쑤시오? 지금 난 맛있는 식사와 어느 정도의 수면을 취하는 걸 가장 원하고 있소. 그리고 샤워를 하고 나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게요. 내게 그럴 시간을 좀 주시오. 그러고 나면 당신과 미국 정부가 만들어낸 문제를 다룰 수 있을 것 같소.” 아리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절반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지금 식사를 할 거라는 것쯤은 알아차렸다. 식사 후 그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려 할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얼굴이 붉어졌다.

내 시녀였던 그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당신이 내게 목욕을 시켜주면, 난 제대로 준비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즈막이 말했다.

당신, 욕조에 물을 채우는 것도 아직 배우지 못했소?” 그가 의아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리 와봐요. 내가 알려주겠소.” 그녀가 머뭇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미국 아내들은 시녀가 목욕을 시켜주지 않나요? 캐톤 씨를 불러 누군가를 오라고 부탁할까요?” “이봐요, 미국 아내에게는 시녀가 없어요. 그러니 당신에게도 시녀 같은 건 없어요. 지금부터 당신은 스스로 옷을 입고, 혼자서 목욕하는 건 물론이고, 덧붙여 내가 남편 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소.” 아리아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다른 데로 돌렸다. 그는 욕조에 물받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약간 거칠고, 어느 정도 무례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그 방법을 배웠다. 룸서비스 담당자가 노크를 하지 그는 그녀를 혼자 남겨두고 욕실에서 나갔다. 그녀는 욕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 비누칠을 하면서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몽고메리 대위는 음식이 식어가고 있다고 두 번이나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혼자 옷을 입는 게 쉽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나이트가운이 머리 위로 매끄럽게 걸쳐져 입기가 한결 수월했다. 몇 분 동안 저쪽에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아 그녀는 그도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식사를 다 끝낸 지저분한 접시들이 커다란 테이블에 하나가득 널부러져 있었다. 저 천박한 사내가 결혼식 날의 저녁식사를 혼자서 먹었다니! 그녀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더러운 접시를 쳐다보았다. 남은 것이라곤 음식찌꺼기만 남은 접시뿐이었다. 이 남자가 욕조에 물을 채우는 방법을 가르치긴 했지만, 그녀는 그에게 몇 가지 태도를 가르쳐야겠다고 단단히 별렀다.

그녀는 침실 쪽으로 돌아섰다. 그는 침대 한쪽에 등을 잔뜩 웅크리고 모로 눕고는 신문으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그녀가 시트를 들치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는데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숙녀답지 못하게 시트를 홱 잡아당기는데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깊이 숨을 들이쉬고, 그녀는 그 옆에 누워, 두 손을 옆구리에 바싹 갖다붙이고 속삭였다.

난 준비됐어요.”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녀는 혼잣말로 또 한 번 웅얼거렸다. 그래도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아무리 남편이라지만 이건 너무 도를 지나친 행동이잖아! 그녀가 그의 얼굴에서 신문을 홱 들춰내자 반쯤 입을 벌리고 잠든 그의 얼굴이 괴물처럼 나타났다. 짙은 구레나룻으로 그의 얼굴이 더욱 미련해 보였다.

난 준비됐다고요!” 그녀는 공주답지 않은 태도로 그의 얼굴에 대고 고함을 지르고는 얼른 누웠다. “준비됐다고?” 그가 중얼거리며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는가 싶더니, 후다닥 일어나 앉았다. 침대가 덜컹거렸다.

발사!” 그가 갑자기 소리치다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현재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은 것 같았다. JT는 얼빠진 시선을 돌려 아리아를 쳐다보았다. 이내 지나칠 정도로 치장을 한 아리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리아는 누워서 마치 차렷 자세로 두 손을 양옆에 붙이고는 다리를 빳빳하게 긴장시키고 두 눈은 천장을 바라봤다. 지금이 그때다. 바로 남자가 동물이 되는 때라고. 모든 남자들은 그렇게 한다. 왕이건 굴뚝 청소부건 이때만큼은 모두가 똑같다고 어머니가 일러주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상처 당하는 차례야.

뭘 위해 준비했다는 거요?” 몽고메리 대위가 피곤에 지친 목소리로 뚜벅 물었다.

결혼 첫날 밤.” 그녀는 말끝을 떨며 말하고는 닥쳐올 고통을 생각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아주 아프게 할까? 잠시 침묵 끝에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눈을 떴다.

결혼 첫날 밤?” 그가 큰 소리로 웃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당신 생각에 내가……? 당신과 내가……? 그거 좋은 생각이오. 욕실에서 저녁 내내 시간을 보낸 이유가 그거요?” 그가 겨우 웃음을 참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봐요, 아가씨. 난 이 전쟁에 도움을 주려고 당신과 결혼했을 뿐이지 다른 이유는 없어요. 당신 몸에 손을 대고 싶은 뜻이 전혀 없단 말이오. 당신이 아무리 우스꽝스런 옷을 걸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 뜻엔 변함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난 당신이 왕좌에 복귀하는 순간, 이 결혼이 되는 것 이외에 바라는 게 없소. 당신이 나 같은 사내를 데리고 귀국한다면 당신의 줄리 백작은 오만상을 찌푸릴 거요. , 이제 다른 곳으로 가 나 잠 좀 자게 해주겠소? 하지만 호텔을 떠나지는 말아요! 다음번엔 당신은 아마도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에 전쟁을 선포할지도 모를 그런 일을 저지를 거요.”

이 순간만큼, 아리아는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운 몇 년 동안의 교육에 진정으로 감사하고픈 심정이었다. 공주로서 거절당하는 것도 결코 작지 않은 수치스러움이었지만, 여자로서 거부당한다는 건 그녀에게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주었다.

, 나가요! 내 침대에서 나가시오. 다른 방으로 가서 자란 말이오. 사람을 불러 당신을 위해 소파에다 잠자리를 꾸며주라고 하겠소.” 마음을 다잡으며 한껏 위엄을 다해 아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몽고메리 대위. 내 침상은 내가 손보겠어요.”

그녀는 결혼 첫날밤에 자신이 거부당했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거실로 걸어갔다. 뒤쪽에서 그가 문을 소리 나게 닫으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아리아는 밤새도록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단 한순간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했던 행동과 말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다. 가장 명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의 맘에 들게 하려고 밖에 나갔던 일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켰는지와 그가 자신을 냉정하게 거절한 일이었다. 그녀는 그를 저주했다.

그녀는 감정에 별로 익숙하지 않았지만 이제서야 모든 걸 확연하게 깨달았다. 조상 중에 여러 명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마지못해 결혼해서 남편이나 아내가 되어 서로가 증오했다. 18세기 무렵 한 부부는 이십 년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지내기로 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동안 여자는 세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들 모두 왕인 남편을 닮았으리라고 아리아는 생각했다. 그녀는 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소파에 앉아 긴장 자세를 풀지 않았다. 이제 그가 가르쳐주는 것을 배워 그녀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만이 최선의 바램이었고 두 사람 사이의 다른 모든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이제 여동생이 왕좌를 이을 후계자를 낳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으리라. 아리아는 울지 않았다. 지금 눈물을 참는 게, 어렸을 적에 팔이 부러졌을 때보다 훨씬 더 힘겨웠다.

 

JT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입 안이 쓴 약을 삼킨 것처럼 텁텁했고, 눈꺼풀은 무거웠으며 등이 욱신욱신 쑤셨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 아무렇게나 풀어진 혁대를 마저 빼냈다. 아직도 제복차림에다 셔츠는 구깃구깃 몸을 휘감았다. 그는 왠지 허전해 공주가 침대 옆자리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녀가 거실에 있음을 떠올렸다. 골이 나 있나 보군? 그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생각했다. 그녀는 내가 해야 한다고 믿었던 걸 하지 않아 나를 더 미워하고 있을 거야.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지난 사건들을 되씹어보았다. 그녀는 그가 구해준 날부터 구제불능인 아가씨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요구하고, 위압적이며, 독재적인데다가 항상 그에게서 더욱 많은 것을 원했다. 그가 아무리 많은 것을 주어도, 그녀는 그 이상을 기대했다. 그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그녀에게 주었으나-그 돈은 새 보트를 사려고 그가 2년 동안 저축한 것이었는데-그녀는 고맙다는 말조차 할 줄 몰랐다.

그는 기차에 그녀를 태워 워싱턴으로 보내고 나서,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를 눈앞에서 사라지게 했다는 것이 그토록 홀가분하게 느꼈던 적은 없었다. 그는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하지만 그런 은혜를 받지 못했다. 며칠 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JT는 워싱턴으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청'사항을 실현하려고 그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는 것 말고는 뭐든 다 했다.

그에게서 뭘 바라는지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 골칫덩어리인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여자를 만났던 걸 수없이 저주했다.

군용 비행기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그들은 그를 조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가 이 불쾌한 여자와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처음에 그는 그들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어넘겼지만 오랫동안 웃을 일이 아닌 성 싶었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들은 그에게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주지 않았고 잠도 재우지 않았다. 그들은 매 시간마다 돌아가며 그를 구타하고, 그가 신성하게 간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약탈했다. 그리고 최후로 지켜왔던 그의 자존심마저 짓밟았다. 그들은 지금 그가 보이고 있는 행위가 국가를 얼마나 모욕하고 있는지, 그리고 가문의 명예를 얼마나 더럽히고 있는지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평생을 불명예를 안고 살아가도록 그를 불명예스럽게 제대시켜 고향으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들은 그를 설득하려고 여자 하나를 들여보냈다. 그녀는 애교 있는 목소리로 그를 달래며, 결혼은 일시적일 뿐이며 미국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아니 전세계의 평화를 위해 그가 몹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버티다가 마침내 동의했다.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공주가 처한 위기에서 도와줄 누군가를 정말로 필요로 하고 있었으며, 그녀의 나라가 가지고 있는 광산과 전략적 위치는 이번 전쟁에 매우 중요했다.

그는 육군과 해군 양측의 거물급 몇 명이 기다리고 있는 회의실로 들어갈 때쯤엔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그가 안 돼 보였는지 누군가 의자를 내주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머리를 푹 숙이고 잠에 빠져들었다가 마치 하인을 대하듯이 명령을 하는 공주의 말투에 잠이 깼다.

그는 그녀의 조금만 목을 틀어쥐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동의했지만-이건 그녀가 원한 일이었다-그녀는 대담하게도 여전히 그를 얕잡아보고 있는 게 화가 치밀었다.

결혼식장 대용인 회의실에 그녀는, 마치 희생양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순교자라도 되는 듯이 서 있엇다. JT는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적의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가 이 사랑스런 여자에게 비열한 짓이라도 저지르고 있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랑스럽다? ! 그는 목구멍까지 치미는 고함을 꾹 삼켰다. 아마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고, 무려 2년 동안 착실히 모은 돈을 그녀 때문에 한꺼번에 날려버렸는데, 이건 마치 몹쓸 악당이 되는 것처럼 그런 취급을 받다니!

여성 대원들조차도 그에게 적대적인 표정을 던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JT는 더욱더 화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었다. 그는 여자들 때문에 곤란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가정환경에 대해선 흠 잡을 데라곤 없었다. 그의 집안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했고 그와 그의 형제들은 그다지 형편없는 얼굴은 아니었으며, 특히나 그는 항상 여자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공주를 만난 이후로, 모든 여자들이 그가 마치 악마의 화신이나 되는 듯이 쳐다보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맹세하건대, 그는 나쁜 짓이라곤 눈곱만큼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익사할 뻔한 그녀를 구해주었고, 오늘에 이르러선 결혼에 동의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그가 엄청나게 나쁜 짓을 저지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형식적인 결혼식을 치르면서도 그의 생각은 온통 수면뿐이었다. 공주를 호텔로 데리고 돌아오는 일은 크나큰 시련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제대로 따라오지 못했다. 2분마다 그는 돌아서서 그녀가 아직도 거기에 있는지 알아본 다음-그녀는 없어지기가 일쑤였다-다가서서 함께 데리고 걸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곯아떨어졌다.

전화가 울리고 그녀가 들치기로 체포되어 있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그래, 그건 끔찍한 일주일의 완벽한 마무리였어. 완전히 끝내기 안타였지. 그는 피곤한 몸을 끌다시피 하며 경찰서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도 그녀는 그 특유의 그 거만한 낯빛으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는 걸 확신하는 것처럼…….

물론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바보스런 행동을 뒤처리해 준 그에게 감사의 한 마디도 건넨 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이 걸어갈 수 있도록 통로마다 붉은 융단이 펼쳐지기를 기대하기라도 하듯 그곳에 꼼짝 않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호텔에서 그녀에게 거의 빌다시피 한 사람은 그였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피곤하며, 어느 정도로 배가 고픈지를 설명하려 애썼지만, 그녀는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녀는 곧 뭔가를 새롭게 새기기를 기다리는 대리석 같았다. 완벽하리만치 조그만, 아니 주먹만 한 그녀의 얼굴은 차가운 냉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그는 음식을 주문한 후, 욕조에 물을 채우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의 오만한 태도를 싹부터 당장에 잘라버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그를 하인으로 취급할 게 분명했다.

룸서비스 담당자가 노크를 하자 그녀에게 벗어나는 구실이 되어 뛸 듯이 기뻤다. 그녀는 그가 식사하는 동안 내내 욕조에 있었다. 그는 4인분을 모두 혼자 먹어치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그녀에게 뭔가 먹을 것을 주문하라고 말할 참이었지만,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나니 침대가 그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기 전에 벌써 잠에 곯아떨어져 버렸다.

다음으로 그가 기억하는 건 누군가가 귀에 대고 큰소리로, '준비됐어요!'라고 소리친 일이었다. 그는 언뜻 잠이 깨어, 똑바로 일어나 앉아 총을 발사하라고 지시하면서 잔뜩 긴장했는데, 다시 정신을 가다듬자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공주는 옆에 누워 있었다. 주름 장식이 잔뜩 달린 분홍색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주먹 쥔 손을 양옆에 꼭 붙이고, 다리를 빳빳하게 긴장시킨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몸 전체가 너무나 긴장해 있어 마치 강철로 만들어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 쪽에서, 그가 자신을 겁탈(?)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는 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이토록 차갑고 무감각한 여자가 어떻게 자신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지, 처음 당해본 일이라 어이가 없었다.

그는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가슴이 깊게 패이고 속이 비칠 정도로 얇은 나이트가운을 몸에 착 달라붙게 입고는 윤곽선을 다 드러내놓고 누운 그녀의 저의를 간파했다. 침대에서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 남자의 원초적인 본능을 이용하여 그를 성공적으로 유혹한 것처럼 누워 있는 그녀를 보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는 순간 제정신으로 돌아와 그는 고함을 질렀다. 그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대리석 같은 몸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방을 나갔다.

그는 금세 죄책감을 느꼈다. 뭔가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는 배를 깔고 누워 주먹으로 베개를 '쾅쾅' 내리쳤다. 그녀가 미소를 지어 보이기만 했더라면, 그녀가 인간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만 했더라면, 그래, 그녀가 인간일 수만 있다면……. 잠시 후 그는 다시 잠이 들었다.

이제, 그는 시계를 쳐다보고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랬더라면 저 거만한 공주와의 결혼도 없었던 일이 될 텐데……. 이번 전쟁에서 미국의 승패를 거머쥔 제1급의 공적(共敵)이 아니라 단지 평범한 몽고메리 대위로 남아 있었으리라.

 

아침 아홉 시에 아리아는 몽고메리 대위가 침실에서 나오자 얼굴을 들었다. 아직도 구겨진 제복을 입고 있었으며 턱에는 수염이 더욱 까맣게 뒤덮였다. 마치 해적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꿈이 아니라 생시구먼!"

그는 중얼거리며 아직도 무거운 눈꺼풀을 껌벅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모든 게 꿈이 아니었나 생각했소."

다리가 저리는 걸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조심스럽게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지난밤에 대해서는……."

그가 말을 건네자 그녀는 그를 지나쳐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순간 그가 그녀의 한쪽 팔을 붙잡아 끌어당겨 마주보게 했다.

"지난밤엔 내가 너무 거칠었던 것 같소. 고관 나리들께서 날 수십 시간 재우지 않았소. 그러다가 마침 잠이 들었는데 당신이 체포되어 있다는 전화를 받은 거요."

그녀가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당신이 훔친 거요?"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면서 나이트가운을 매만졌다.

"좋군."

"이건-당신이 그렇게 불렸던 걸로 생각하는데-우스꽝스런 옷이에요."

그녀가 빠져나가려 하자 그가 길다랗게 흘러내린 잠옷 자락을 움켜쥐었다.

"지난밤 일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하는 거요. 당신은 리타 헤이워드(미국 영화배우, 댄서로 지내다 영화에 데뷔, 강렬한 성적 매력으로 인기를 얻었음. 출연작품은 살로메 등이 있음)가 될 수 있었고 난 당신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소. 당신 감정을 상하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니오."

"그래요."

그녀는 무표정하게 대꾸하고선 턱을 치켜들었다.

"난 상황을 잘못 이해했을 뿐이에요. 절 놓아주셔서 제게 옷을 입을 시간을 주신다면, 제가 미국인이 되는 법을 익히는 수업을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좋소." 화난 음성으로 그가 말끝에 힘을 주었다.

"이 일을 빨리 끝낼수록 당신은 그만큼 빠른 시일에 당신의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고 난 내 삶으로 복귀할 수 있을 거요." 그녀는 욕실 문을 '' 소리 내어 닫지 않았다. 이 정도의 일쯤이라면 충분히 감정을 다스릴 수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그토록 매력이 없단 말인가? 그동안 보았던 예쁜 미국 처녀들처럼 젊고 발랄해 보이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정말로 볼품없이 보인단 말인가?

그녀는 간단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직선으로 늘어진 스커트와 어깨에 심이 들어간 윗도리를 입고, 약간 베일이 늘어진 모자를 왼쪽 눈썹 부위에 살짝 얹었다. 스타킹의 솔기를 맞추느라 엄청난 시간을 소모했지만 마침내 손질을 마쳤다.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자 몽고메리 대위는 의자에 축 늘어져 있었다.

"드디어 나왔군." 그가 중얼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욕실로 곧장 들어갔다.

그는 면도를 하고 샤워를 한 후 수건을 허리에 감고 나타났다. 볼썽사나운 그의 모습을 피해 아리아는 거실로 돌아왔다.

두 사람이 호텔방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는 강의를 시작했다. 호텔방의 열쇠 사용법을 보여주고, 엘리베이터 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메뉴와 미국 웨이터들에 관해 설명했다. 두 사람이 아침을 먹는 동안 그녀는 포크를 엉뚱한 손에 들고 있다고 지적 받았으며, 빵을 먹을 때에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지 않고 손을 사용하고, 맘에 들지 않는다고 계란 요리를 되돌려보낼 수 없다는 지시를 받았다. 잘못된 것을 고쳐주면서 그는 포크의 위치를 바꿔주었고, 동전 세는 방법을 말해주며 테이블 위에 한 무더기의 동전을 쌓아놓고 머릿속으로 전체 액수를 헤아려보도록 했다. 그녀가 반밖에 세지 않았을 즈음 그는 벌써 떠날 채비를 했다. "하루종일 그 일로 꾸물거릴 수는 없어요." 그가 그녀의 의자를 뒤로 빼주며 덧붙였다.

"미국인이라면 모두 국가의 수도(首都)에 대해 알아야 해요."

그는 전화를 한 통 하더니 대기중인 군용 승용차로 그녀를 반쯤 끌다시피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은 온종일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는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그녀를 끌고 다니면서 그곳의 역사를 설명한 후, 차에 먼저 올라 그녀가 승용차로 돌아올 때까지 조바심치며 기다렸다. 둘 다 차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여자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여자들, 남편을 위해 헌신했던 여자들 등, 영광스런 미국 여자들에 관해 얘기했다. 그는 특히 '돌리 프레이저'라는 여자를 높이 평가하는 듯했다.

"저게 뭐죠?" 아리아는 아브라함 링컨의 동상을 본 후 그가 승용차에 그녀를 밀어 넣자마자 재빨리 물었다.

"약방(그때 당시 약품류 외에도 일용잡화화장품담배커피소다수의 음료를 팔던 상점임)이오. , 갑시다. 아직도 국립박물관과 국회도서관 등 가봐야 할 곳이 남았어요."

"저 사람들은 뭘 마시고 있는 거죠?"

"콜라. 빈둥거릴 시간이 없어요. , 갑시다."

아리아는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약방을 쳐다보았다. 뭔가 유쾌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국립박물관에서 '헤더'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통통하고 조그만 키에 금발머리 아가씨로 모퉁이를 급히 돌아 그들을 향해 거의 뛰다시피 달려왔다.

", 실례합니다." 그녀는 공손하게 말하는가 싶더니 곧이어 비명을 질렀다. "JT!"

그녀는 들고 있던 가죽 서류가방을 떨어뜨리고, JT에게 팔을 두르며 열정적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아리아는 옆에 서서 아무 관심도 없이 지켜보았다. 다만 미국인들은 공공 거리에서 이렇게 행동한다는 걸 눈여겨볼 뿐이었다.

"JT,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이곳에 얼마나 있을 거예요? 오늘밤 시내에서 한바탕 놀자고요. 그리고 나서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룸메이트가 몇 시간 동안 우리에게 자리를 비워줄 수 있을 거예요. 어때요?"

"이봐,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지. 내게 미소를 보내는 여자를 본다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당신은 모를 거야. 지난 며칠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어." 이 말에 아리아는 자리를 피해버렸다. JT가 잠깐 기다리라고 소리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겨우 그녀를 따라잡아, 다른 손으로는 여전히 금발머리 아가씨의 팔을 붙든 채 한 손으로 아리아의 팔을 붙잡았다. "JT, 누구예요?" 금발머리 여자가 샐쭉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쪽은 공…… 내 말은……." 그가 아리아를 쳐다보았다.

"당신 이름이 뭐요?" "빅토리아 쥬라 아리아 실린 제니타예요."

잠시 사이를 두고, JT가 손바닥을 탁 쳤다.

"그래, 맞아. 빅키라고 하면 되겠군! 이쪽은 헤더 에디슨이오."

"빅키가 아니라 아리아예요. 내 가족은 날 아리아라고 불러요."

헤더가 의심스런 눈길로 JT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저 여자분을 뭐라고 부르죠?" 아리아가 부드럽게 미소를 짓더니 뚜벅 끼여들었다. "아내예요." 눈깜짝할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 헤더가 '철썩' 소리가 나게 JT의 뺨을 후려치더니 돌아서서 씩씩거리며 사라져버렸다.

"여기 있으시오." 다급하게 그가 아리아에게 명령하더니 헤더를 뒤쫓아갔다.

아리아는 혼자 미소를 머금으며 며칠 만에 처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 남자가 뺨을 맞는 걸 보니 기분이 썩 괜찮은걸? 길 건너편에 아까 보았던 것과 비슷한 약방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JT가 일러준 데로 푸른 신호등을 기다렸다가 횡단보도를 건너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제복을 입은 젊은이들과 두꺼운 양말에 갈색과 흰색의 신발을 신은 아가씨 여러 명이 빨간색의 등 없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리아는 빈 곳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뭘 드릴까요?" 하얀 앞치마 같은 걸 두른 나이든 남자가 물었다.

그녀는 JT가 했던 말이 뭔지 기억을 더듬었다.

"코트 있어요?" "뭐라고요?" 푸른색의 제복을 입은 잘 생긴 젊은 군인이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내 생각엔 이 아가씨가 콜라를 얘기하는 것 같군요." "맞아요."

아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콜라." "체리로요?"

나이든 남자가 조금은 묘한 말투로 물었다. "." 그녀는 얼른 대답했다.

"이 근처에 사세요?" 젊은 군인이 은근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 난 웨이버리 호텔에 머물고 있어요."

"아주 비싼 데 있군요. 이봐요, 아가씨. 시내에 친구가 몇 명 있는데 오늘밤 시내로 가서 한바탕 즐기려고 하거든요." "시내에서 한바탕 논다고?"

그녀는 방금 했던 헤더라는 여자가 했던,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남자가 원뿔 모양의 종이컵을 빙 두른, 금속 틀이 있는 이상한 잔에 콜라를 담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 그 안에는 빨대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십대 소녀들을 힐끔 쳐다보고 그들을 흉내냈다. 첫 모금을 마시는 순간 거의 목이 막힐 뻔했지만, 입안과 목이 콜라의 공기방울에 적응되자, 맛이 좋다는 걸 알았다.

"어때요?" 옆에 있던 군인이 느물스럽게 웃었다. 다른 군인이 그녀 뒤쪽으로 걸어왔다.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자네 같은 깡패와 데이트하겠나? 이봐요, 아가씨. 난 새벽까지 춤출 수 있는 나이트클럽을 두 군데나 알고 있어요. 그런 다음……."

세 번째 군인이 그녀 뒤로 다가왔다.

"그들 얘기는 듣지 말아요. 이 친구들 둘다 진짜 숙녀를 어떻게 다루는지 몰라요. G 스트리트에 한 군데 알고 있어요. 거긴……."

갑자기 JT가 그들 사이로 밀치고 들어오자 군인이 말을 중단하다가 거칠게 쏘아붙였다.

"차례를 기다리쇼, 친구. 우리가 먼저 발견했소." "이빨을 몽땅 뽑히고 싶소? 난 어제 이 여자와 결혼한 몸이오." "내가 보기에 당신은 그녀를 잘 돌봐줄 것 같지 않은데, 그래?"

아리아는 계속해서 콜라잔으로 고개를 숙이고선 미소를 띠었다. , 내가 어떻게 이런 분위기에서 웃음이 나온단 말인가. 그녀는 역시 웃고 있는 십대 소녀들 쪽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소녀들 가운데 하나가 얼른 그녀에게 윙크를 보냈다. 아리아는 바로 이런 생기발랄한 여자들의 모습이 그녀가 좋아하는 미국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이봐요." JT가 화난 음성으로 말하고는 그녀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여기서 나갑시다." "기다려요! 콜라 값을 지불해야 해요."

경찰에서 한 차례 호된 경험을 한 후, 그녀는 모든 것에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맞소. 내가 내겠어요." 군인들이 서로 내겠다고 한꺼번에 나섰다.

"아니, 아니에요. 난 당신 나라의 돈을 익혀야 해요." 그녀는 능숙하게 JT의 손아귀를 벗어나 어정쩡한 표정으로 서 있는 군인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갔다. 그녀는 계산대 뒤의 남자에게 얼마냐고 묻고는 서툴게 핸드백을 열고 잔돈 지갑을 꺼냈다.

"이 동전이 맞나요?" 그녀가 25센트짜리를 들고 말했다.

군인들이 맞는 동전을 찾도록 도와주려고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프랑스 인이군요? 당신을 보는 순간 알아봤죠." "오우, 아가씨. 난 프랑스 말을 조금 할 줄 알아요." JT가 군인들 틈에서 그녀를 끌어내 간신히 상점에서 빠져 나왔다. 차에 오를 때까지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은 순순히 따르기가 그다지도 힘드오? 난 당신에게 미국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소. 그런데 당신은 멋대로 사라져서 천한 뜨내기처럼 경박스럽게 굴며 다니는군." "헤더처럼은 아니에요."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말하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가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듣고 말았다.

"이 일에서 내 친구들은 제외하시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날 제외하시오. 난 미국인이오. 당신은 미국인 아내고. 당신은 약방 같은 데나 앉아서 남자들이 치근덕거리면 맞장구나 치는 그런 방탕한 프랑스 여자가 아니란 말이오. 격에 맞는 태도로 행동해요. 공주라서 훌륭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지금 그러고 있지 않은 게 분명해요. 미국인 아내는 숙녀요.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에게 순종해요. 하지만 당신은 우스꽝스런 우리 결혼식에서조차 그러지 않았소. 그리고……." "당신은 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계세요?"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선 고집스레 말을 이었다.

"미국인 아내는 자신이 할 수 잇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남편을 도와요.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남편에게서 도움을 얻고……."

그는 관광을 하는 동안 매분마다 그녀에게 연설을 해댔다. 하지만 아리아는 약방에서의 짤막한 모험이 강한 인상을 안겨줬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국립미술관에 걸려 있는 미국 그림들에 관심을 가지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서로 손을 잡고 남자 쪽에서 슬쩍 키스하면 여자는 킬킬거리는, 다른 쌍들을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혼한 사람들이 아닌 것 같죠? 아니면 결혼을 했어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 같아요. 결혼한 여자들이라면 뭔가 아내의 본분을 지키는 행동을 할 텐데요."

그녀의 물음에 그는 대꾸하지 않고 안내서에 적힌 다른 사진 설명을 소리나게 읽었다.

 

호텔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1미터 높이로 쌓인 역사책들이었다.

"내가 주문한 것들이오. 여기 이 책들 끝부분엔 문제풀이가 있소. 한 단원을 읽고 나면 내가 간단한 질문을 할 거요. 난 샤워할 테니 그 동안 시작하시오."

"난 샤워할 테니 시작하시오." 아리아는 빈정거리듯 그의 말을 똑같이 따라하고, 닫힌 욕실 문 쪽으로 집어던지려고 책 한 권을 집어 들었으나, 옷장에 꽂혀 있는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랑코니아의 공주, 월요일에 뉴욕 방문 예정'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랑코니아……." 그녀는 혼잣말로 마치 최면에 걸린 듯이 되뇌었다.

"랑코니아. 난 미국인이 되는 법을 익혀서 나의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미국 정부 측으로부터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해." 그녀는 첫 번째 교재를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JT가 바지만 걸친 채 욕실에서 나왔다. 바로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상대편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귀를 기울였다.

"아니야. 당신에게 화나지 않았어." 그녀가 이때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아는 역사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발가벗은 등이 보였다. 불쾌한 광경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말을 하는 동안 근육이 꿈틀댔다. 몸 한쪽으로는 길게 상처자국이 나 있었다. 섬에 있었을 때보다 그래도 치유가 된 듯했지만,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오늘 일을 마쳤으니, 잠깐 휴식이 필요해."

돌연, 그가 몸을 돌려 아리아를 쳐다보자, 아리아는 얼른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아무 문제없어. 삼십 분 후에 여기서 봐." 그가 전화를 끊자 아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면도를 말끔히 하고선 감청색 제복을 입고 침실에서 나왔을 때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방안 가득히 향긋한 그의 로션 냄새가 퍼졌다.

"이봐요. 나 잠깐 나갔다 오겠소. 당신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소. 내가 없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오. 룸서비스 담당자를 불러서 당신 식사를 주문하시오. 난 늦을지도 모르오."

더 이상 다른 말없이 그가 방을 떠났다.

아리아의 어머니는 남자의 부정(不貞)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남자들이란 결국 아내가 참아내야 할 대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짓이 아내의 마음을 얼마나 상하게 하는지 어머니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리아는 창가로 가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JT가 통통한 헤더에게 팔을 두른 채 호텔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그가 그녀에게 키스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다가들었다. 아리아는 돌아서서, 주먹을 쥐고 양 옆구리에 바싹 붙였다.

"네그 라 이 이그제카트!" 그녀는 격하게 욕설을 퍼붓고 나서 그런 언어를 사용한 자기 자신에 놀라 누가 들었을까봐 얼른 한 손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녀는 전화를 들고 룸서비스 담당자를 찾아 상어알 요리, 살찐 거위 간 요리, 샴페인, 굴 등을 시켰고, 그러다가 높게 쌓인 역사책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국 잡지 묶음도 보내주세요."

"영화 잡지나 전문 잡지를 원하세요? 아니면 다른 걸 원하세요?"

상대편 여자의 따분한 음성이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 아무 것이나요. 그리고 콜라 한 잔, 아니 두 잔하고…… 위스키를 갖다 주세요."

수화기에선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위스키와 콜라를 어떻게 같이 드시겠다는 거죠?"

"괜찮을 거예요." 아리아는 아무런 염려말라는 듯 당당하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잡지 한 무더기와 함께 식사가 도착했다. 잡지는 모두 그녀가 자세히 들은 적이 없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녀는 음식을 먹고, 목욕을 하면서 잡지를 읽었다. 그러고는 좀 정숙해 보이는 하얀 나이트 가운을 입고 침대로 기어올라갔다. 이번엔 몽고메리 대위가 소파에서 잠을 자야 해. 그에게 생각이 미치자 잡지에 더 깊이 코를 파묻고 읽어 내려갔다.

내 남편은 다른 여자와 함께 나를 배반했다.’

그녀는 탐욕스럽게 그 기사를 읽어나갔다.

 

 

8

다음 날 아침, 무척 이상하고 귀에 거슬리는 불쾌한 소리에 잠이 깬 아리아는 눈을 떴다. 몽고메리 대위가 그녀 옆에 누워 시끄럽게 코를 골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가 언제 방으로 돌아왔는지 전혀 몰랐다.

바로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나, 전화기가 그가 있는 쪽에 있었으므로 그의 몸 위로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여섯 번 울리자 그가 더듬거리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몽고메립니다.”

그는 잠시동안 듣고 있더니 시선을 돌려 아리아를 쳐다보았다.

키웨스트로 날아가기 위해 준비하려면 최소한 얼마나 걸리겠소?”

누군가 짐을 싸준다면…….” “한 시간.” JT가 말을 가로막더니 다시 수화기 쪽으로 말을 했다. “한 시간 후에 출발하겠소.”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일어섰다.

미국인 아내는 자신의 가방은 물론이고 남편 것까지 챙긴다오. 아이구, 골치야. , 샤워하는 동안 가방을 챙기도록 해요.” 아리아는 그에게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녀는 룸서비스 담당자를 불러 아침식사를 주문한 다음, 게리쿠퍼의 사진이 실린 잡지를 집어 들었다. 잠시 후, JT가 그녀의 손에서 잡지를 나꿔챘다.

이 쓰레기 잡지는 뭐요? 이걸 어디서 구했소? 그리고 왜 아직도 옷을 입지 않은 거요? 벌써 가방을 반쯤은 쌌어야 했잖소. 이봐요, 공주님. 미국인이 되고 싶다면, 배우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게 좋을 거요. 지난밤에 역사책은 어느 정도나 읽었소?”

당신이 지적해준 만큼요. 내가 당신 가방을 챙겨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노크 소리와 함께, ‘룸 서비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려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가 1인분의 식사만을 주문한 걸 본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가 그녀에게 아내의 역할을 전혀 모른다고 하자, 그녀는 그가 뭘 좋아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의 식사를 주문할 수 없었다고 대꾸했다. 그는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그녀는 미국인이 되거나 그녀의 나라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정말로 관심이 없는 게 아니냐고 비아냥거렸다.

그 말에 아리아는 언쟁을 벌이는 걸 포기했다. 아주 침착한 태도로, 그녀는 전화기 쪽으로 다가가, 평소 그녀가 혐오하는 허풍스런 태도로 일부러 꾸며, 그가 전에 지시했던 음식들을 하나하나 읊어댔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 이토록 불쾌한 남자의 규칙에 얽매이게 되었는지, 그리고 랑코니아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기억해보려 애썼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녀가 모든 옷가지들을 싸고 짐을 꾸리며 틈틈이 계란 요리를 먹는 동안 그는 테이블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그는 먹고, 그녀는 일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신문을 읽고 그녀는 일했다.

미국 여자들은 왜 이렇게 하는 거지? 왜 옳지 못한 일에 반항하지 않는 거지?”

그녀는 화가 치밀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준비 다 됐소? 여자들이란 그저……, 옷 입는데 웬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거요?”

그가 조바심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그의 등을 노려보며 순간 여행 가방으로 그의 등을 후려치는 상상을 했다. 공주다운 행동에 대한 어머니의 가르침도 이 경우에는 통하지 않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두 사람을 태워다줄 수송편이 대기 중이라고 군인이 알려왔다.

미국 아내는 짐도 들어야 하나요?” 그녀가 짐짓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편이 원하면 그렇게 하오.” 그는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벨을 눌렀다. 그러자 짐꾼이 아리아의 여러 개의 가방을 실어갈 손수레를 가져왔다.

두 사람에게는 군용 수송편이 제공되었지만, 비행기 내부엔 하려하게 꾸민 흔적이 없었다. JT는 뒷좌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가져온 역사책을 아리아가 읽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잠깐씩 눈을 떴다. 그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대해 짧은 문답식 질문을 한 다음, 청교도에 관한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녀는 모든 질문에 제대로 응답했지만 그는 칭찬 한 마디하지 않았다.

3장을 시작하는 사이, 그가 잠에 곯아떨어지자 아리아는 손가방에서 잡지 하나를 꺼내 역사책 위에 놓고 교묘하게 가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뒤로 기대고 편안하게 보다가 깜박 졸았다. 순간 역사책이 그녀의 무릎 위로 떨어져 펼쳐졌다.

이게 뭐요?” JT의 물음에 그녀가 놀라 깨어났다. “이거 멋지지 않아요?”

그녀가 졸음기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JT의 얼굴에 미소가 감도는 것을 보았다. “난 당신이 미국 식민지 시대에 관해 읽고 있는 줄 알았소.”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비행의 소음이 시끄럽게 주위를 에워싸자 두 사람은 머리를 더 가까이 댔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그가 꽤나 잘 생겨 보였다.

역사에 기록된 것보다 미국에는 더 많은 것들이 있겠죠?”

물론이오. 오락거리가 풍부하죠.” 그가 영화 잡지에 시선을 꽂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그걸 아마 보았을 거요. 그리고 가족이란 게 있소. 미국의 가정생활이 어떤지 설명해 줄까요?” “. 역사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해 듣고 싶어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입을 열었다.

미국인 가족 내의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평등하며 오십 대 오십으로 역할을 분담하고 있소. 남편은 돈을 벌고, 아내는 집안을 돌보죠. 아니, 잠깐, 실제로는 오십 대 오십이 아니라, 육십 대 사십이거나 칠십 대 삼십일 거요. 남편이 의무는 허리가 휘는 책임감을 동반하는 것이니까. 남편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항상 뭔가를 제공해야 하는 사람이오. 아내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 되었든 그걸 가져다주고, 가족들이 부족한 것 없이 지내도록 하는 게 남편의 의무요. 남편은 매일같이 일하고 항상 풍부한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생활비를 대주며, 보상은 거의 바라지 않고 많은 것을 주는 사람이죠. 남편은…….”

JT는 말을 중단하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 당신도 사진을 봤겠구먼. 우리 남자들은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오. 당신 같은 여자들이 차나 마시면서 한가하게 오후를 보내는 동안에라도 말이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바로 덧붙였다. “그리고 전쟁도 남자들 몫이라오.”

알겠어요.” 그가 말을 마치자 아리아는 쉽게 대꾸했지만 사실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내가 가정을 돌본다는 말은 지붕이 새는 걸 고쳐야 한다는 뜻인가요?”

아니오. 전혀 그런 말이 아니오. 지붕 고치는 사람을 부르면 돼요. 내 말은 집안을 청소하고, 유리창을 닦는다든가 뭐 그런 걸 말하는 거요. 요리를 하고 말이오. 물론 지붕을 고치는 게 아니오.” “유리창을 닦아요? 바닥도 닦나요?”

집안 구석구석 모두 청소하오. 그다지 큰 일은 아니오. 결국, 숙제정도에 불과하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오. 왕국의 공주라도 말이오.”

아내는 요리를 한다고 하셨죠? 식단도 알아서 하나요? 설거지도 하고요?”

물론이오. 미국 가정주부는 재주가 많고, 자립심이 강하다오.”

손님이 오셨을 때에는 어떤가요? 손님들을 위해 요리를 하나요? 접대도 하는가요?”

아내는 집안을 돌본다고 했잖소. 그 말에는 모든 게 포함돼요. 손님 접대도 물론 포함되고.” “옷도 손질하나요?” “그렇소.” “아이들도?” “물론이오.”

그런 일을 어떻게 꾸려나가죠?”

대개 남편이 아내에게 봉급을 가져다주면 아내는 그걸로 이런저런 지출내역을 짜서 아채를 산다든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구입해요.”

알겠어요. 그럼 자동차 운전도 하나요?” “안 그러면 아채를 어떻게 사오겠소?”

놀랍군요.” “뭐가 놀랍다는 거요?”

당신의 애기를 정리해 보면 미국 가정주부들은 비서나 경리, 식모, 자가용 운전사, 식당 요리사, 집사, 회계원, 하녀, 간호사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말씀해주세요. 아내들은 정원 손질도 하나요?”

정원을 돌보는 거요, 당신이 묻는 게 그거라면. 하지만 남편이 시간이 날 경우 도와주기도 하죠.” “결국 한 여자가 식모도 되고, 지배인도 되고, 마부도 되네요. 그러고도 오후에 차를 마실 시간이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에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나긋나긋하던 목소리도 사라지고 이내 무뚝뚝하게 변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오.” “전쟁을 시작한 건 남자들이 분명하죠? 내가 알고 있는 여자치고 다른 여자의 아이들에게 폭격을 가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러기엔 아마도 너무 바빴나 봐요. 차를 마시거나 울타리를 손질하거나 설거지를 하느라고 말예요. 또는…….” “화장실에 좀 가야겠소.” 그가 자리를 뜨자 아리아는 역사책을 집어 들었지만 읽지는 않았다. 미국인이 되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울지도 몰랐다.

비행기가 키웨스트에 착륙했다. 그곳에 그들을 기다리는 승용차가 있었다. 운전사가 그들을 태우고 좁다란 거리를 지나갔다. 넓직한 공동묘지 건너편에 밝은 색의 꽃이 만발한 이층집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자동차가 그 집 앞에 멈추자 JT는 칠이 벗겨진 나무문을 열었다. “어떻게 해군측에서 우리에게 집을 마련해주었는지 모르겠군. 집을 구하려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말이오.” 아리아는 집을 구하기 위해 꼬박 일 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는 끔찍한 장면이 떠오르자 소름이 돋았다.

아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집은 아주 자그마하고 초라했다. 좁은 복도와 이어진 거실용 방이 하나, 나머지 반은 부엌 비슷한 것이 차지하고 있었다. 일층에는 또한 커다란 흰색의 기계 장치가 되어 있는 욕실이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길쭉한 방이 있었고, 그곳의 한쪽 끝에는 더블 침대, 그리고 욕실을 타고 연결된 벽 뒤에는 싱글 침대가 감추어져 있었다. 집에는 조악한 가구들로 가득 차 대부분 선명하지 못한 청색과 분홍색으로 치장되어 좀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JT가 아리아의 짐 모두를 층계로 끌고 올라와 방에다 갖다놓았다. “난 기지로 가봐야겠소. 옷가지를 꺼내 걸어두시오. 군에서 이곳을 다시 치장해준다고 했으니까 음식을 만들어야 할 거요. 다 끝내면, 다시 책을 읽으시오.”

그가 층계를 내려가기 전 잠깐 멈추더니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이내 돌아서서 집을 떠났다.

층계 쪽으로 이어진 발코니를 발견한 아리아는 바깥으로 나가 아래쪽의 좁다란 거리와 건너편에 있는 공동묘지를 바라보았다.

이봐요! 집에 누가 있는 거요?” 갑자기 아래층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JT 있어요?” 그러다가 어떤 여자가 불쑥 끼어들어 목청을 높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아리아는 생각했다.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집을 예사로 허락도 없이 들락거리나?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층계 중간쯤으로 내려올 즈음 아래쪽에서 남녀세 쌍이 문에 들어서고 있었다.

와우!” 한 남자가 그녀를 쳐다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당신이 JT의 마음을 사로잡은 숙녀로군요?” 나머지 일행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아리아는 스스로 옷을 입는다거나 돈을 세는 일은 잘 못했지만 사람들을 접대하는 데에는 꽤 이력이 붙어 자신감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당당하게 인사를 건네며 가벼운 몸짓으로 능숙하게 층계를 내려갔다. “공주님!” 그리고 뒤이어 빌 프레이저가 문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뒤에 있는 예쁘장한 금발 여자가 들뜬 목소리로 불렀다. “전 그런 뜻으로…….”

그는 금발 여자가 대뜸 그런 호칭으로 부르자 당황해 했다.

…….” 아리아가 입을 열었다. “공주님이라고 하면 돼요.”

한 남자가 웃음을 지어보이며 얼른 말을 가로챘다.

그게 당신께 적합한 표현이에요. 공주님, 이 사람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저희는 새 신부를 환영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가 칼과 패티, 플로이드와 게일, 래리와 보니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어서 빌이 사랑스런 아내 돌리를 인사시켰다. 또 다른 손님이 있었는데, 미첼이라는 독신남이었다.

미첼이 그녀의 한쪽 팔을 잡았다.

“JT는 바보로군요. 당신 같은 미인을 혼자 남겨두다니.” “그 드레스는 어디에서 샀나요?”

패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들은 각자 음식이 든 야채 봉투와 찜냄비를 가지고 왔다. “실크예요? 진짜 실크인가요?” 보니가 끼어들었다.

우리 모두 오늘 제대로 온 것 같군요. 내가 그런 드레스를 입는다면, 잔뜩 구겨지고 말 거예요!” “나도 저런 드레스를 한번 입어봤으면…….”

미국 여자들이 주거니 받거니 수다스럽게 떠들자 아리아는 그 여자들이 자신을 좋아해 주기를 온 마음으로 바랬다. 그들은 꽃무늬가 들어간 예쁜 면직물 여름옷을 입고 있었으며 시원해 보이는 샌들을 신고 있었다. 모두가 아주 젊고 발랄해 보이는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짙은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그에 비해 그들 앞에 서 있는 아리아는, 실크 드레스에 긴 머리카락을 모두 바싹 뒤로 넘긴 상태로 구식이고 무척이나 이질적인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여자들이 잔뜩 기대에 찬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그들을 기쁘게 해줄 뭔가를 열심히 마음속으로 생각해보았다.

공주님!” “몽고메리 대위가 내게 여러 벌의 옷을 사줬어요. 그런데 아직 풀지 않았거든요. 여러분도 보시면 좋아할 거예요.” 잠시 후 아리아는, 거실에 서 있다가 우르르 몰려드는 여자들에게 떠밀리듯 계단을 올라갔다. “식사는 어떻게 됐소?”

한 남자가 소리쳤지만, 여자들 중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십 분이 지나자 위층은 아리아의 짐가방에서 옷가지들을 꺼내면서 수다스럽게 지껄이는 여자들의 목소리로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에 입가에 미소를 머금다가 다시 십 분이 더 지나자 은근히 재미가 느껴졌다. 미국에 온 이후 처음으로, 그녀는 정말로 편안히, 마음껏 즐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녀는 보니에게 유명한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스카파렐리의 의상을 입어보고 싶은지 물었다. 금세 네 명의 여자들은 속옷 차림이 되었다.

래리에게 이걸 보여줘야겠어요.” 보니가 화려한 붉은색 이브닝드레스를 입으면서 연신 싱글거렸다. “그런 양말을 신은 채로요?” 아리아가 눈을 찡긋거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양말보다는 지금 신고 있는 이게 더 나을 것 같군요.”

그녀는 실크 스타킹 한 켤레를 집어 들었다. 보니가 민망한 듯 울상을 짓더니 손을 뻗었다.

순간 아리아가 내밀었던 손을 도로 움츠렸다. “값을 치러야 해요.”

보니는 아리아의 뜻하지 않은 태도에 눌라 멀뚱거리며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지 말아요. 그 대가로 당신처럼 내 머리를 잘라줄 미용사를 찾아주시겠어요? 그리고 화장품을 살 수 있는 곳도요.” 저녁 시간은 패션쇼로 변했다. 여자들은 남편들에게 멋지게 보이려고 앞을 다투어 아리아의 정장과 실내복, 드레스를 입고 한껏 뽐냈다. 돌리는 정장차림에 약간 살집이 많아 어색했지만, 어깨끈이 없는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정말로 매력적이었다. 돌리가 층계를 내려오자 남자들이 우우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빌은 질투가 얼마나 심한지 몰라요.” 돌리가 으스대며 한바퀴 빙 돌았다.

자그마한 뒤뜰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JT가 얼른 돌아왔으면 좋겠어. 안 그러면 맛있는 고기를 놓치고 말겠는 걸요. 도대체 그는 어디 있는 거죠?” 게일의 말에 여자들이 각자 손에 옷가지를 들고 떠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근무지로 갔어요.” 아리아가 별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립스틱 색깔 괜찮아 보이나요?” 여자들은 이 두 사람의 결혼에 호기심이 상당히 많았다. JT는 화상을 입어 병원에서 지낸 후 휴식을 취하기 위해 섬으로 떠났다가 녹초가 되어 돌아와선, 누구든 만나기만 하면 화를 냈으며, 며칠이 지난 후 검은색 리무진이 나타나 JT를 싣고 며칠 동안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가 돌아왔을 때는 아내와 함께였다. “멋져 보여요.” 돌리가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며 말을 꺼냈다. “여기를 정리하고 뒤뜰로 내려갑시다. 뒤뜰에 도착할 때쯤이면 먹을 게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겠네요.”

아리아는 사람들을 접대하는 데에 특출난 재주를 발휘했다. 그녀는 눈에 띄지 않게 세련된 행동으로 모두들 충분히 식사를 하도록 했으며, 손님들의 잔이 비워진 적이 없도록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하인 없이 혼자 해내기엔 약간 어려웠지만 그녀는 잘 해냈다. 몇 번인가 돌리가 쳐다보는 걸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JT는 후식 시간에 도착했다.

여기 신랑이 오셨어요. 이리 와, 미첼. JT를 신부 옆에 앉히라고.”

게일이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이걸로 됐소.” JT가 빌과 돌리 쪽으로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먹을 게 남아 있나?” “고기는 떨어지고 없지만 양배추 샐러드와 감자 샐러드, 새우 샐러드 등 무엇이든 있어요. 저기 저쪽에. 맘껏 들어요.” 아리아의 말에 JT는 아리아에게 굳은 표정을 던졌다. “내 아내가 음식 접시를 가져다줄 걸세.” 잠깐 동안 모두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아리아가 음식 접시를 옆으로 밀치고 일어섰다.

래리, 애플 파이 좀 더 드시겠어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공주님. 너무 많이 먹었어요.” “공주님?” JT가 빈정거리며 물었다. “그건 내가 붙여준 별명이야.”

빌이 대뜸 나서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숨을 내쉬며 아리아가 접시를 들고 가 음식을 채우기 시작했다.

JT는 일어서서 테이블 건너편으로 가서 섰다.

미국 여자들은 남편들의 시중을 들어요. 또한 훌륭한 안주인 역할을 하기도 하고 말이오. 당신 혹시 모든 사람이 당신 시중을 들어야 한다고 요구했소? 햄버거를 먹는 데 설마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진 않았소?” “그만두게.” 빌이 꾸짖는 투로 쏘아붙였다.

그녀는 아주 훌륭하게 잘하고 있어. 멋진 파팁니다, 공주님.”

이렇게 하면 기쁘시겠어요, 주인님?” 아리아가 JT에게 음식이 그득히 쌓인 접시를 내밀었다. “잔꾀 부리지 말아요. …… , 안녕, 돌리.”

그가 돌리에게 눈인사를 하곤 접시를 받아들고 떠났다. 돌리가 일어서서 잠시 동안 아리아를 쳐다본 다음, 그녀의 팔을 잡았다.

월요일에 함께 만나서 기분 좋게 오랫동안 얘기 나누도록 해요.”

그 순간, 누군가가 집안에서 레코드를 틀었는지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빌이 돌리에게 춤추자고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한 쌍씩 안으로 들어가 거실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미첼과 JT, 그리고 아리아만이 뒤뜰에 남아 있었다.

몽고메리 부인, 춤 추실까요?” 미첼이 제의하고는 아리아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JT는 음식 접시에 코를 박고 있을 뿐 고개도 들지 않았다.

미국 춤을 처음 대하는 아리아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그녀와 약혼했던 남자조차도 이렇게 몸을 가까이 대고 춤을 추지는 않았다.

, 긴장을 풀어요.” 미첼이 아리아의 뻣뻣해진 몸을 잡아당겼다.

미국인 아내들은 나긋나긋하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공주님은 어디 출신이죠?” “파리요.” 아리아는 얼른 대꾸했다.

!” 그가 그녀를 더 끌어당기려 했지만 그녀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프랑스 인이라면, 사랑에 대해 어느 정도 아시겠네요.”

전혀 아무 것도 몰라요.” 그녀가 꽤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첼은 그 말에 소리 내어 웃고는 아리아를 껴안았다.

JT에겐 항상 의아스러운 점이 있었죠.”

점잖게 구는 게 좋을 거예요.” 돌리가 미첼에게 말하고는, 뒷문 쪽을 향해 고개짓으로 가리켰다. JT가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JT가 미첼과 아리아를 향해 일부러 쿵쿵소리를 내며 걸어오자 다른 부부들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는 두 사람을 보지 못한 것처럼 지나쳤다.

, 잠깐 시간 좀 낼 수 있겠나? 레이더 설치에 대해 얘기를 나눴으면 하네.”

지금 말인가? 지금은 토요일 밤이야.”

그래, 알아. 전쟁은 주말도 없잖은가? 내일 기지로 가서 직접 그걸 보고 싶은가?”

일요일에?“ JT가 턱을 문질렀다. “그건 우리가 처음 설치했던 레이더인데 걱정이 돼. 그것뿐이야. 그 빌어먹을 물건은 영국에서 가져온 거라서 미국 선박에 잘 맞을지 모르겠어. 아마 선박의 항해 방향을 엉뚱하게 알려줄지도 몰라.”

빌이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돌리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아내와 함께 보내는 날이 아닌가요?”

곧 처리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어요. 돌리, 초콜릿 케이크 가져왔나요?”

그래요. 당신이 손수 자르던가 아니면 당신을 대신해서 잘라줄 크고 힘센 아내를 데려오시겠어요?” 돌리가 야멸차게 쏘아붙이고선 홱 돌아서서 떠나버렸다.

뭣 때문에 화가 난 거지? 자네가 마음 상하게 할 만한 짓을 했나?”

내가 아니야, 친구. 자넨 어떻게 공주님을 혼자 내버려둘 수 있지?”

빌이 몰아붙이자 JT가 고함을 질렀다.

예상하는 대로야. 그녀는 쓸데없이 예쁘기만 하지. 난 그녀에게 욕실의 수도꼭지 트는 법까지 가르쳐야 해.” “미첼은 그녀가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군.”

그건 내가 가르친 덕분이지. 일주일 전에 그녀는 금접시에 굴요리를 가져다가 시중까지 들어달라고 요구했을 정도였어.”

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JT가 왜 아리아와 결혼했는지 그 내막을 알고있었다.

그녀는 그녀 나라에서라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어. 처음에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했어. 하지만 지금은 미첼의 손이 온몸을 더듬어도 신경 쓰지 않은 것 같더군.” 그가 JT를 올려다봤지만, JT는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증류 선박 교섭에 관한 준비는 다 되어가나?“ “그래.”

빌이 불쾌함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한 잔 더 해야겠네.” JT가 아리아쪽으로 걸어갔다. 미첼이 이내 아리아에게서 손을 떼자 다시 모두들 숨을 죽였다.

난 위층에서 해야 할 일이 좀 있소. 당신이 모두 신경 써주시오. 여기 계신 분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다주도록 해요.”

JT가 말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모두들 원할 때까지 머무르세요. 맘껏 노시기 바랍니다. , 그럼.”

그들은 층계를 올라가는 그를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았다.

판 깨라는 소리로 들리는군.” 게일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JT에게 꼭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군?” 래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대답을 기대하기라도 하듯이 모두의 눈동자가 아리아에게 쏠렸다.

돌리가 앞으로 나와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내일 11시에 우리 모두 플래글러에 있는 아이스크림 판매대에서 만나는 게 어때요?”

“JT는 일하러 갈 것 같은데?” 빌이 입끝을 말아올리며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그는 빼고 우리끼리 가야겠네요? 우리가 1045분에 모시러올게요공주님.”

돌리가 미소를 띠며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식탁을 치우고 떠날 준비를 하는 데에는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미첼이 아리아의 한쪽 손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내일까지 안녕히 계세요, 공주님.” 아리아는 문가에 서서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곤 밤공기를 가르는 돌리의 말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해주세요, 빌 프레이저. 아마도 밤새워 얘기해 줘야 할 것 같은데요.” 2층 침실에서 JT는 시트로 하반신만 덮고 상반신은 벗은 채, 큰 침대에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주위에 서류가 널려 있었다.

조그만 침대가 내 것이겠군요.” 그녀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으음.”

JT는 쳐다보지도 않게 짧막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아리아는 그를 향해 코에 주름을 잡으며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래도 그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옷장 서랍을 열고 쌓여 있는 나이트가운을 쳐다보았다. 충동적으로 그녀는 결혼 첫날 밤-결코 다시는 오지 않을 결혼 첫날 밤이었다-에 그녀가 샀던 분홍색 실크가운을 꺼냈다.

그녀는 욕실에서 오늘밤에 틀었던 레코드판에 수록된 곡조를 흥얼거리며 미첼의 팔에 안겼던 일을 떠올렸다. 물론 아주 어색한 일이었고, 게다가 랑코니아 인의 기준으로 봐선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었지만 대체로 꽤 기분좋은 일이었다.

목욕을 한 후 그녀는 머리를 풀어 빗질을 하며, 머리카락을 양어깨와 등위로 가지런히 흘러내리게 했다. 욕실을 나와 JT의 침대를 가로질러 옷장에 옷가지를 걸면서도 미소를 머금은 채 흥얼거렸다. 이제 그녀는 옷장을 정리하는 데에 꽤 익숙해지고 있었으며, 옷가지들이 말끔하게 걸려 있는 걸 보고 상당한 자부심으로 뿌듯했다.

미첼이란 분은 누구죠?” 그녀가 고개를 돌려 JT의 등을 향해 물었다.

뭐라고요? , 그는 광학관련 상점을 경영하고 있소.” “광학 관련 상점? 그럼 안경을 만들어요?” JT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의 매장에서는 크로노미터(천문항해용 정밀 시계)와 선박용 시계를 수리해요.”

그렇다면 중요한 사람이겠네요?” “전쟁 중엔 모두가 필요한 사람들이오.”

그렇군요. 그런데 그분의 서열은 어떻지요? 당신보다 위인가요?”

그녀는 그가 앉아 있는 침대 끝에 앉았다.

, 알겠소. 당신은 그가 공작인지 왕자인지 알고 싶은 거로군. 안 됐지만, 공주님. 그는 내 상관이 아니오. 내 위로는 상관이 한 명뿐이고, 그분은 산업분야 소속이지. 따라서 난 미첼의 상관뿐만 아니라 빌의 상관이고 칼과 플로이드, 래리의 상관이오. 이게 무슨 냄새요?”

마이애미에서 판매원 아가씨가 준 향수예요. , 미첼이란 분은 아주 좋은 분 같더군요.”

밤에는 항상 향수를 바르오?”

, 물론이죠. 그리고 오늘 모인 다른 사람들도 아주 좋은 분들이었어요. 미국은 무척 자유로운 곳인가봐요. 행동을 통제하는 규칙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어요.”

내 침대에서 내려가서 당신 침대로 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그 나이트가운은 입지 마시오. 그리고 머리 모양을 단정하게 땋도록 하시오. 이제 여기서 나가요. 날 혼자 있게 해주시오. 그리고 역사책을 가져가서 읽어요. 내일 7장부터 11장까지 문제를 낼 거요.”

난 하루종일 아이스크림만 빨고 있는 줄 아나?” 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면서 반항조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침대에서 영화 잡지에 나와 있는 사진들을 보며 머리 모양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곰곰이 궁리했다.

 

정말, 지긋지긋하네요.” 돌리 프레이저가 몸을 일으키더니 침대 머리판에 머리를 기대며 툴툴거렸다. “돌리, 난 내 아내가 그런 말을 사용하는 걸 원치 않아.”

빌은 불 속으로 더욱더 파고들며 한사코 일어나 앉기를 마다했다.

나도 내 남편이 그런 비밀을 감추고 있는 걸 원치 않아요.”

빌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모든 게 JT의 일이라 생각하자고. 비밀을 지키려고 결혼한 남자를 하늘은 도와줄 거야.”

공주! 진짜 공주가 지금 이곳 키웨스트에 와 있고 난 그녀를 만났어요. 당신은 언젠가 그녀가 여왕이 되리란 걸 알고 있어요? 그리고 JT가 그녀와 결혼한 상태라면, 왕이 될 거예요. 난 왕과 여왕을 알게 되는 거고요.” 빌이 고개를 다시 돌리곤 천장을 바라보았다.

“JT는 왕이 되는 걸 원치 않아. 당신도 그의 집안 배경을 알잖아. 그는 이 세상의 90퍼센트의 왕들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 그는, 늘 보호해야 하고 미국인이 되는 걸 가르쳐야 하는 공주와 결혼했어. 랑코니아에서는 모든 일이 정리되는 즉시, 그는 그녀를 그곳으로 데려다주고 나면 그 결혼은 무효가 되는 거야.”

그녀에게 미국인이 되는 걸 가르친다? ! 그 많은 역사책들 보셨어요?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자기 시중을 들게 하는 태도도 봤잖아요! 내 생각에 두 사람은 그 섬에서 썩 잘 지냈던 것 같지 않더군요. JT는 아직도 그녀에게 화가 나 있는 거라고요.”

“JT 말로는 그녀는 밥맛이래. 평생동안 다른 사람의 시중을 받은 탓에 모든 게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거야. 혼자서 옷을 입어본 적도 없다더군. 게다가 걸을 때도 그가 그녀 뒤에서 두 발자국 떨어져서 걷기를 바란다는 거야.”

하지만 오늘은 그러는 걸 전혀 못봤잖아요.” “그녀는 워싱턴에서 들치기로 체포되었어. 물건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도 몰랐대. 짐꾼에게 백 달러짜리 지폐를 내밀기도 했대.”

그렇다면 그는 뭘 했죠? 돈 세는 법을 가르쳐주었나요?”

물론이지. 그런 일 아니면 그가 뭘 했겠어?” 빌이 당황하며 얼른 대답했다.

그녀를 쇼핑하는 곳에 데리고 가요. 그게 돈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

그가 마이애미에서 의상실로 데리고 갔어. 옷을 한 짐이나 사봤다고. 돌리, 이제 잠 좀 잡시다.” “그래요. 하지만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 JT가 그녀와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녀를 떠나려 하지 않을 테고, 그냥 결혼한 상태로 머물면서 왕이 되려고 하겠죠?” “난 미국인이 왕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물론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여왕과 결혼하면, 왕이 되는 거죠. 에델이 일요일에 미용실 문을 여는지 모르겠네요. 지금 당장 전화해서 물어봐야겠어요.”

돌리, 새벽 두 시야.” 빌이 짜증스럽게 말했지만, 돌리는 벌써 침대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래도 상관치 않을 거예요. 우린 공주님을 아주 아름답게 만들 거예요. JT가 뿌리칠 수 없도록 말예요. 두 사람이 랑코니아에 도착할 때쯤이면, 그는 절대로 그녀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할 거예요. 그럼 아마 사격분대와 겨루어야 할 거라고요.” 빌이 신음소리를 내며 머리위로 베개를 끌어당겼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9

일어나요. 오늘 아침엔 아침식사 요리법을 가르쳐주겠소.“

마지못해 아리아는 눈을 떴다. JT는 황갈색의 제복을 제대로 갖춰 입고 방 저쪽에 서서 그녀가 아랫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고함을 질러댔다.

지금 몇 시예요?” “아침식사 시간이오. 어서 일어나요!”

이토록 이른 시간에 항상 그렇게 소리를 지르나요?”

그녀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집에서는 시녀가 매일 아침 내 침실로 차를 가져다줬어요. 항상 도자기 세트에 담아 왔죠. 그렇게 평화로운 방법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는 없나요?”

JT에게서 아무런 대꾸가 없자 아리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어,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일어나요!” 그가 다시 한 번 소리치더니 돌아서서 층계를 내려가 버렸다.

아리아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천천히 중국 산둥 산() 비단 정장을 입으면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방문하는 일이나 잘되길 바랬다. JT는 거실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참 오래도 걸리는군.” 그가 일어서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건 프라이팬이오. 이것들은 계란이고, 그리고 이건 버터……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쟁 중에 버터 대신 쓰는 마가린이란 것이오. 프라이팬에 버터를 바르고, 계란을 툭 깨서 넣는 거요. 제기랄! 베이컨을 잊어버렸군. 냉장고에서 꺼내 와요.”

냉장고요?” 멀뚱거리는 그녀를 밀치고 그가 거칠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게 베이컨이오. 당신은 베이컨 요리법을 배우게 될 거요. 그리고 머지않아 야채 가게로 가서 야채 사는 법도 배우게 되겠지. 싱크대 안에서 프라이팬을 하나 더 꺼내 베이컨을 넣으시오.” 아리아는 문을 열고 계란을 요리하는 팬처럼 생긴 다른 팬을 찾았지만 아무 곳에도 없었다. 싱크대 꼭대기에는 계란 봉지, 빵 덩어리, 엊저녁에 사용한 팬, 계란 껍질, 이상해 보이는 반짝거리는 금속 그릇들로 가득차 있었다. 결국 그녀는 계란을 요리하고 있는 팬 손잡이를 움직여 계란을 한쪽으로 밀어내면 베이컨 굽는 자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순간 뜨거운 팬 손잡이에 손바닥을 데자 얼른 뒤로 물러나면서도 입을 꼭 다물고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아직도 베이컨을 넣지 않았소?”

그녀는 왼손만을 사용해 베이컨을 넣으려고 했으나 어려운 일었다. 아리한 통증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걸 만질 줄도 모른단 말이오? 이봐요, 두 손을 사용하도록 해요.”

그가 화난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오른손을 잡자 아리아는 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그 소리에 놀란 JT는 동작을 멈추고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뒤집어 들여다보았다. 피부가 부풀어오르면서 물집이 생기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손바닥에 마가린을 덥석 쥐어주었다.

그렇게 심하게 데였으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마가린이 덴 곳에 닿자 시원한 느낌으로 고마울 따름이었다.

빌어먹을, 저쪽에 서서 지켜봐요.” 그가 과장된 어조로 말하고는 아리아가 아무 쓸모도 없다고 투덜거리며 아침식사 요리를 끝냈다. 그러더니 테이블에 음식을 올려놓고 다시 욕설을 해대기 시작했다. 아리아가 먹을 음식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녀의 베이컨과 계란 요리를 만드는 동안, 그의 음식은 점점 식어갔다.

마침내, 두 사람 모두 자리에 앉아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

이곳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아. 궁에서 할아버지, 여동생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던 것과 얼마나 다른가?“ 그녀는 할아버지, 여동생과 지난밤부터의 이야기를 하며 유쾌한 분위기에 젖어들 걸 생각하며 웃음을 머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미국인들의 어줍잖은 행동에 소리 내어 껄걸 웃으시리라. “무슨 일인지 나도 좀 알 수 있겠소?”

JT가 고개를 들고 뚜벅 물었다. “뭐라고 하셨죠?”

당신이 웃고 있으니 그 이유가 궁금했던 거요. 난 지금 내 기분을 돋우어줄 뭔가가 필요해요.” “사실은 지난밤의 얘기를 할아버지께 얘기해드리면 얼마나 즐거워하실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초라한 음식을 쳐다보며 기름기 때문에 약간 거부감이 들었다. “지난밤 당신은 별로 맘에 들지 않던 모양이군요. 그들은 당신의 친구들이에요.”

JT가 미간을 좁혔다.

당신의 왕실 가족들에게 내 친구들을 어떻게 설명할 건지 알고 싶군.”

그의 말투가 조금은 냉소적이었지만 아리아는 그가 무슨 뜻으로 그런 건지에 대해 맘에 두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종종 평민들이란 유머 감각도 없이 하찮은 일에도 항상 아주 심각해 하며 위엄을 부리느라 고심하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음식을 약간 떼어 입에 넣은 아리아의 표정이 금세 변했다. 그녀는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거리더니 이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보니, 케찹은 어디 있지?”

그녀는 낭패감에 빠진 어린 소년처럼 몸짓을 해보이며 굵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보니, 난 토마토 케찹이 먹고 싶단 말이야. , 그리고 마요네즈는 어딨어? 보니, 애플파이는 안 가져온 거야? 내가 애플파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잖아.”

JT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래리의 말투인데? 돌리 말로는 보니가 없으면 그는 굶어죽게 될 거라고 했소.”

아리아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이번에는 눈을 자주자주 깜박거렸다.

난 저 붉은 드레스가 너무 맘에 들어요. 여기 있어요, 여보. 물론 대부분 빨간색은 내게 잘 맞지 않아요. 하지만 어린애처럼 빨간색을 입어 봤거든요. 빨간색을 입기에는 내 머리카락이 너무 짙은 색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여보. 하지만 빨간색을 입기엔 난 너무 살이 쪘어요. 여기 있어요, 여보. 결혼한 이후로 계속해서 살이 찐 거예요. 양파 썬 것 좀 더 드릴까요, 여보?” JT가 빙그레 웃었다.

영락없이 래리의 부인 보니군.” 아리아는 싱긋 웃어보이고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패티는 어땠소?” 잠시 후 JT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아리아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두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일어서서 JT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서더니, 패티의 걸음걸이를 완벽하게 흉내냈다. 무릎을 가지런히 모아 다리를 구부리지 않고 뻣뻣하게 하고는, 양 팔꿈치를 굽혀 두 손을 병아리 날개처럼 펼친 우스꽝스런 걸음걸이였다.

, 이런 램프를 사야겠어요.” 아리아가 노래라도 하듯이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신기한 빛을 낼 거예요. 그게 사람의 피부에 그렇게 좋데요.”

아리아는 동작을 멈추고 JT를 돌아보았다. 그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아리아는 오래간만에 관객을 갖게 되어 상당히 즐거웠다. 그녀는 사람들을 흉내 내는 특기를 가지고 있어, 할아버지와 여동생은 모든 공식 모임이 끝나면 그녀의 연기를 칭찬하며 토닥거려주곤 했다. 물론 그녀는 가장 가까운 친지들 앞에서만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고국에 있을 때에 즐겨하던 온갖 기교를 동원하여 JT를 위해 연기했다. 그녀는 전날 밤에 온 손님 각각을 차례로 연기해 보이며 그들의 모든 말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아리아의 묘사에 따르면, 남자들은 게으르고 약간 말수가 적으며 갓난아기처럼 투정 부리고 항상 돌봐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음식과 그릇들을 가져다주고, 그들의 요구대로 해주는 등 온갖 구미를 맞추었다. 마치 남자들이 덩치만 클 뿐, 어린아이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 연신 의상과 돈, 머리 모양과 돈, 요리와 돈, 또 돈 얘기를 지루하게 반복했다. 하지만 그녀의 묘사는 결코 악의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묘사의 대상에 대해 어느 정도 호감을 갖도록 이끌었다.

그녀가 연기를 끝내자 JT는 배를 움켜잡고 웃어댔다.

누가 미국 남자들에게 유머 감각이 없다고 얘기했지? 그녀는 기이하게 생각되었다.

우리가 그토록 형편없소?” 그가 웃음을 머금은 채 물었다. “으음.”

아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짧게 대꾸했다. JT의 얼굴엔 아직도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이리 와봐요. 설거지하는 방법을 알려주겠소. 당신도 이 간단한 일을 좋아하게 될 거요.”

그는 개수대에 물을 채우고 세제 바르는 법을 알려주면서 처음으로 퉁명스럽게 굴지 않았다.

이제 안쪽에 손을 대고 닦기 시작하시오.”

아리아가 순순히 그의 말대로 하지 그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아참, 당신의 화상 입은 손을 깜박 잊었소.”

그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은 채 꽤 오랫동안 쳐다보다가 놓았다.

내가 씻을 테니, 당신은 물기를 닦으시오. 당신 나라에 대해 얘기해 봐요.”

그가 첫 번째로 씻은 접시를 내밀면서 말했다. 아리아는 자신의 나라에 대해, 아름다운 여러 산에 대해, 싱그러운 자연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밤공기에 대해 말해주면서 이 일이 점점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키웨스트와 많이 다르겠군?”

내가 본 것과는요, 그래요. 하지만 이곳의 꽃은 아주 예뻐요.”

언제 한 번 구경 갈 수 있을 거요.” 그 말에 아리아는 몸을 으스스 떨었다. 워싱턴 DC에서 구경했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그날 그는 그녀를 거칠게 차에 밀어 넣었다가 밖으로 밀어냈으며, 콜라를 마셨다고 고함을 질러대질 않았던가.

JT는 그녀가 움츠러드는 걸 보고 접시가 가득한 개수대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좀더 즐거울 거요. 이봐요, 난 기지로 가봐야 해요. 오늘 읽을 거리가 있소?“

역사책이 있어요.” “그래요, 그럼…….” 그가 말끝을 흐리자 아리아가 얼른 덧붙였다.

돌리가 날 열한 시에 아이스크림 가게로 데려가겠다고 했어요.”

좋소. 그럼 당신 혼자 여기 남아 있지 않겠군.” 그가 개수대에 물을 뺀 후 손을 닦았다.

난 가야겠소.” 그가 위층으로 올라가더니 잠시 후에 신문을 가득 들고 나타났다.

내 서류가방 본 적 있소?” “여기 있어요, 여보.”

그녀가, 래리가 물었을 때 보니가 대답한 것처럼 흉내 내며 말했다.

JT가 웃으며 그녀에게서 가방을 받아들려고 다가왔다.

오늘밤에 봅시다, 여보.” 그는 이렇게 말했다가 쑥스러운지 얼른 정정했다.

공주라는 뜻이었습니다.” 집을 나서는 그를 보며 아리아는 문설주에 기대 미소를 머금고는 중얼거렸다. “‘여보라는 말이 더 좋은 것 같아요.” 돌리는 정확하게 열한 시에 도착했다.

아이스크림 가게 갈 때 뭘 입고 갈 거예요? 너무 고리타분한 분위기가 나네요.”

특별히 다른 뭐가 없어요. 그렇게 이상해 보이나요?” “공작을 만나게 되면 멋지겠네요.”

돌리가 아리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자요, 먼저 게일 가게로 가서 당신이 원하는 걸 찾아낼 수 있는지 알아봅시다. JT는 벌써 기지로 출근했나요?”

.” “,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오늘 당신을 신나게 해주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세 시까지 우릴 찾지 못할 거예요.” 아리아는 돌리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녀를 따라 문을 나섰다.

 

JT는 책상에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서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선박에 증류 시설을 설치하는 새로운 계획안을 포함해 영국제 레이더를 미국 선박에 설치하는 계획도 있었고, 그밖에 비슷한 여러 가지 계획안이 겹겹이 놓여 있었다. 그는 발갛게 충혈된 눈을 비볐다. 지난밤에 공주가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며 얇은 두겹의 실크 가운을 입고 그의 침대 끝에 앉은 후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약간은 묘한 기분으로 그녀를 깨우기 전에 잠시 동안 잠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겐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에게 미국인이 되는 법을 가르친 다음, 그녀에게 벗어나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녀와 개인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도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기로 섬에 있을 때, 그녀가 물가에 나체로 서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공주치고 형편없는 몸매가 아니었다. 제기랄! 미스 아메리카로서도 괜찮은 몸매였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지금까지는 견딜 만했다. 그녀는 거부감이 일도록 거만했으며, 차갑고 비인간적이었잖은가. 그러나 오늘 아침 그녀는 약간 따뜻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패티의 걸음을 흉내 내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참으로 이상한 여자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토록 아무 도움도 못되는 여자였지만 동시에 그만큼 겁이 없는 여자이기도 했다. 손을 데었을 때에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리고 내가 만들었던 계란 요리! 계란은 베이컨 요리만큼 오래 걸리지 않는데, 오늘 아침 먼저 계란을 프라이팬에 넣은 다음 베이컨을 넣고, 두 가지를 동시에 꺼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설익은 베이컨으로 음식이 끔찍했을 텐데 그녀는 늘 하는 대로 아무 내색 없이 먹었다. “JT, 여지껏 있었나?” JT는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데이비스 사령관에게 절도 있게 경례를 붙였다. “, 아직 퇴근하지 않았습니다.” “갓 결혼했다고 들었네.”

, 사흘 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건가? 왜 새색시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가지 않고 있나?” “레이더 계획을 검토하고…….” 사령관이 손을 내저었다.

자네가 그토록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게 기쁘네만, 사는 데에는 일 이외에 다른 여러 가지 일도 있는 걸세. 아무리 전시라 하더라도 말일세. 이건 명령일세, 대위. 집으로 가서 나머지 시간을 아내와 함께 보내도록 하게.” JT가 얼굴 하나 가득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즉각 명령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아리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듯 아스라한 눈길로……. 그녀는 젊은 아가씨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이제 어깨 길이로 짧아진 머리에 손을 얹어보았다. 가볍고 시원한 느낌이었다. 입고 있는 칙칙한 실크 정장 대신 노란색과 하얀 색으로 물들인 면직물 여름옷을 입고 있었는데 팔과 어깨, 목을 드러낸 디자인이 산뜻했다.

괜찮아요? 맘에 들어요?” “맘에 쏙 들어요.”

돌리의 물음에 아리아가 나직이 말하곤, 스커트를 살짝 들어 올리면 빙글 돌았다.

아주 자유로운 기분이에요. 마치…… 마치…….” “미국인처럼?”

돌리가 얼른 끼어들었다.

맞아요. 나 미국인처럼 보이나요? 여기 돌리 같은 미국인처럼요?”

돌리? 아주 대중적인 미국인처럼 보여요. 당신은 백 퍼센트 미국인이에요.”

옆에 있던 게일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미첼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아리아는 여전히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보며 물었다.

미첼?” 보니가 놀라 입을 떡 벌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건넸다.

하지만 JT…….” 아리아는 아차 싶어 얼른 상황을 수습했다.

물론 내 남편을 두고 한 말이었어요. 미첼이 웃을 거란 뜻일 뿐이에요. 내 말은, 몽고메리 대위도 그럴 거라는 거죠. 그가 웃는 걸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대개는…….”

그녀는 네 명의 여자가 흥미로운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자 말끝을 흐렸다. 돌리가 어색한 침묵을 깼다.

“JT는 엄청나게 많이 웃는 사람이예요. 지금은 단지 새로운 레이더와 그밖에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늦게까지 고심해야 할 일이 많은 것 뿐이예요. 모든 게 끝나는 즉시 금세 신바람나게 웃게 될 거예요. 당신도 곧 아시게 되겠죠. 어머! 315분이네요. 가야겠어요. 사내들이 기다릴 거예요.” 보니, 게일, 그리고 패티가 게일의 가게 정문을 빠져나가자 돌리가 얼른 아리아의 한쪽 팔을 붙잡았다.

“JT는 정말로 멋진 사내예요. 그는 키웨스트 섬에 도착한 이후로 모든 미혼 여성들과 결혼한 여성들의 절반에게서 눈길을 끌었어요.” 아리아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정말요? 그렇다면 미혼 남성들이 남아돌았겠군요.” 돌리가 아리아를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JT가 당신에게 잘해주지 않았나요?” “그는 내 남편이에요.” 아리아는, 이 미국 여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깜박 잊게 만드는 묘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내게 매우 친절했어요.” “, 그리고 빌이 내게 친절해지기 시작하고 있어요. 내 생각엔 딴 여자가 있는 것 같아요. , 아이스크림 먹으러 갑시다.”

JT를 제외한 여자들의 남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첼도 그들 틈에 끼어 있었다. 미첼이 은근하게 쳐다보는 눈길에 아리아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혔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군대측에서 남편감으로 이 남자 같은 사람을 골랐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이 남자에게는 날 만지면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

여기 모인 부부들은 모두 갓 결혼한 쌍들인데, 서로를 끌어안고 마치 몇 달 동안 서로 못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했다. 아리아는 새로 자른 머리카락과 빌려 입은 여름옷 때문에, 외국의 공주가 아니라 그들과 똑같은 부류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첼이 자연스럽게 의자를 그녀에게로 아주 가까이 가져가더니 한쪽 팔을 그녀의 의자 등받이 위로 돌렸다.

얼마나 달라 보이는지, 못 알아보겠어요.”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 속삭였다.

전에도 아름다웠지만 이젠 사람들이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겠어요. 언젠가 함께 달밤에 드라이브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리아는 몸 둘 바를 몰라 시선을 떨구었다. 이 남자는 커다란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기분을 최고로 만들어 주었다. 그건 그녀가 미국에 도착한 이후로 느껴오던 것과는 아주 색다른 경험이었다.

내 남편이…….” 그녀가 나즈막이 중얼거렸다. 미첼이 그녀에게 약간 더 가까이 다가갔다.

“JT,는 당신처럼 매력적인 여성에게 고마워하지 않는 게 분명해요. 공주님, 전 당신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 당신의 표정과 당신의 행동 방식을 좋아합니다. 당신 같은 여성은 여지껏 만나본 적이 없어요. JT는 사랑에 빠져 있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당신이 그와 결혼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 임신 중이신가요?” “절대로 아녜요.”

아리아가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미첼의 한 손이 그녀의 어깨로 올라오는 것 같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피부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은 느낌이 좋았다. 이처럼 그녀의 피부를 만진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두 사람의 코가 거의 닿을 듯했다.

여기서 나갑시다.” 미첼이 속삭였다. 그녀가 동의하려는 찰나, 아뿔사! 일이 깨져버렸다. 빌어먹을 JT 몽고메리 대위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 주여! 빌어먹을 머리카락을 어떻게 한 거요?” JT가 다가오며 빽 소리를 질렀다.

순간적으로, 아리아는 미국인 아내에서 왕궁의 공주로 돌아갔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며 되받아서 그에게 고함쳤다.

내 앞에서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사용하는 거예요! 가요! 여기서 나가요!”

아이스크림 가게에 있는 사람들은 JT의 첫 번째 고함소리에 동작을 멈추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아리아의 명령에 그들은 깜짝 놀라 멍한 표정으로 멀거니 앉아 있었다. 가장 먼저 돌리가 정신을 차리며, 그 순간 JT보다도 더 독재적인 태도를 취한 아리아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걸 느꼈다.

, , JT 앉아요. 그렇게 노려보지 말고. 아가씨, 이분에게 청량음료 한 잔 갖다 줘요.”

돌리가 JT에게 눈짓으로 가리키곤 아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가 무의식적으로 낮아졌다.

, 공주님, 제발 앉으세요.”

아리아는 점차 제정신이 들면서, 자신이 주위의 모든 시선을 끈 건 둘째치고라도 다시 이방인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미첼이 그녀의 손을 잡고 가볍게 토닥이는 걸 느꼈다. 그녀는 자리에 풀썩 앉았다. JT는 아직도 서서, 여전히 주위를 왔다갔다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앉아요, JT.” 돌리가 불쾌함이 가득 묻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두 사람은 갓 결혼한 사람들이에요.”

그녀가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하자, 사람들이 점차 하나씩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한 사람만이 JT에게서 아리아에게로, 다시 미첼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누가 누구와 결혼했다는 거지?” JT는 마침내 자리에 앉아 청량음료 잔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게일이 아리아의 손을 토닥였다.

당신이 옳았다고 생각해요, 공주님. 남편이 쓸데없이 주여!’란 말을 내뱉지 않도록 하세요. 일단 시작하면, 결코 그치지 않을 테니까요.”

아리아는 누군가가 그녀를 위해 주문한 딸기 아이스크림 선디(시럽과일 등을 얹은 아이스크림)를 쳐다보며, 당장이라도 바닥이 갈라져 자신을 삼켜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첼은 여전히 한쪽 팔을 그녀의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있었지만 아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더 이상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지 않고, 약간 뒤쪽으로 몸을 젖힌 자세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별난 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얼마 전 경찰이 그녀를 체포했던 날과 똑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를 유리벽으로 된 새장 같은 방에 가두고 쳐다보며 웃어댔던 그 끔찍한 사람들의 모습……. 그녀가 무슨 짓을 벌이기만 하면 사람들은 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미국에서 알고 있는 단 한 사람-몽고메리 대위-만이 그녀를 가장 거칠게 다루었다. 그래도 그녀는 그와 연결된 이 새로운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무척 열심히 노력해왔다. 그녀는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수없이 침착하자고 되뇌었다.

해변으로 나가요.” 갑자기 돌리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옷을 갈아입고 노을이 지면 수영하러 가요. 그리고 JT. 바다가재를 잡아주실 수 있죠? 구워 먹게 말이에요.” “난 해야 할 일이 있소.”

JT가 중얼거리고는 손도 대지 않은 컵의 빨대를 들었다 놓았다 했다.

잔뜩 인상을 찡그린 JT를 향해 돌리가 상체를 앞으로 수그렸다.

그렇다면 제 집으로 당신 아내를 태워다줄 정도의 친절은 가지고 계시겠죠?”

그녀는 아내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녀에게 맞는 수영복을 찾아보게요.”

그러지요. 지금 가고 싶은 거요?” JT가 열쇠를 찾아 더듬거리며 말했다.

돌리가 일어서며 손사래를 쳤다.

다시 생각해 봤는데, 당신과 나, 둘이만 떠나고 한 시간 후에 래리와 보니의 아파트에서 모두 만나는 게 어때요? , 당신 우리의 공주님을 잘 돌봐주세요.”

그녀가 빌에게 말하고는 JT의 팔을 잡고 문 밖으로 끌고 갔다.

이런 빌어먹을!” JT 소유의 군용차에 타자 마자 돌리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빌이 모든 걸 얘기해줬어요. 내 생각에 당신은 정말 못된 남자예요.”

오늘은 내 생전 처음으로 여자에게서 지독한 모욕을 받았소. 당신까지 내게 그러지 말아요.”

누군가가 해야 해요. 당신이 그 사랑스런 아가씨를 다루는 방법은 정말이지, 수치스러울 정도예요.” “사랑스러워? 사랑스러운 여자라면 사람들 앞에서 남편을 망신시키지는 않아.”

할렐루야! 당신도 봤잖아요.” 돌리가 빈정거리는 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미첼은 그녀를 좋아해요. 당신만 빼고 우리 모두 그러는 것처럼요.”

돌연,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JT, 당신의 매력에 넋을 잃은 여자들을 많이 보아왔잖아요. 하지만 그들에게 발등 찍힌 적도 많잖아요. 그런 매력을 아내에게 사용하는 게 어때요?” JT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건 그녀가 나를 미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날 깔보기 때문일 수도 있소. 그녀는 날 평민으로 생각하오. 아니면 그녀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 내가 할 일은 그녀에게 미국인이 되는 걸 가르치는 것이고 난 그 일을 할 뿐이오.”

그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져, 돌리는 그의 마음을 바꿀 그 뭔가 미묘함을 그에게서 느꼈다.

그녀는 정말 예쁘죠?” “송곳처럼 날카로운 여자를 좋아한다면 그렇겠지요.”

알겠어요.” “뭘 알았다는 거요?” 그가 덤벼들 듯이 물었다.

당신은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뭐라고?” 그가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고는 멈춤 표지판 앞에서 소리가 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당신은 조금만 긴장을 풀면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빌 얘기로는, 그녀가 미국에 왔을 당시 처음엔 혼자 옷도 제대로 입지 못했는데 이젠 당신 아침식사 요리까지 한다던데요?” “형편없지요, . 손을 데고 말았다고요.”

그럴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애쓰고 있어요. 그녀가 얼마나 외로울지 생각해본 적이나 있어요? 그녀는 자신을 경멸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낯선 나라에 머물고 있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당신의 학대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다고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나 때문에 그녀는 살아난 거요.”

씩씩거리다가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JT가 조용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그녀에게 빠져들고 싶지 않소. 군대 측에서 가짜 공주를 데려가는 즉시, 그녀는 왕좌로 복귀될 거요.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그녀는 선심 쓰듯 내게 키스하라며 손을 내밀고 이렇게 말할 거요. ‘건강하세요, 풋내기 양반.’ 아니면 훈장을 리본에 매달아 내 목에 걸어줄 거요.”

당신은 헤더 에디슨에게 빠져들어도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데이비 론리나 카렌 필레슨 같은 여자에 대해서도요. 그리고 그 빨강머리 이름이 뭐였더라?”

JT가 미소를 띠며 말을 가로막았다.

요점만 얘기해요. 당신도 잘 알고 있다시피 아리아는 달라요. 당신은 왕궁의 공주와 하룻밤도 제대로 지내지 못할 거요. 그녀는 하얀 울타리가 쳐진 자그마한 저택을 꿈꾸는 게 아니라 성과 땅 관리, 그리고 평생 동안 하인을 부리며 사는 걸 꿈꾸고 있다고요. 왕에게는 남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사생활이나 자유가 없어요.”

그래서 계속 그녀에게 야비하게 군다는 뜻이로군요?” “난 야비한 게 아니오. 거리를 유지하는 것 뿐이라고요. 그 빌어먹을 미첼이라면 더 잘할 텐데. , 미안해요.”

돌리가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삼켰다. 공주가 그런 욕설에 대해 지적했던 일이 생각났다.

내 생각엔 그녀가 미첼과 사랑에 빠질 것 같아요.” “뭐라고!” JT는 자동차가 마리나 호텔의 주차장으로 막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 다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난 당신들 두 사람 가운데 그 누구도 비난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에게는 약간의 따뜻한 배려라든가 친절함이 필요하며, 모든 여자들은 남자가 아름답다고 해주기를 바라죠. 그녀는 오늘 아주 멋져 보였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JT는 간신히 주차장에 차를 대고 돌리를 차 안에 내버려두고는 혼자 내리더니 호텔 쪽으로 걸어가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 어깨가 처졌다. 그녀는 자동차에서 내리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작전 성공이다! 그에게 뭔가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자극을 주지 않았던가.

이 호텔은 한때 갑부들이 드나드는 곳이었지만 전쟁이 터지자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이제는 갓 결혼한 장교들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장엄한 모습을 갖춘 오래된 로비는 예전과 변함이 없었으며, 한쪽에는 아직도 선물 가게가 옛모습 그대로였다. “기다려요!” 두 사람이 나란히 유리문을 지나가다가 JT가 막아섰다.

그녀가 이걸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가 목이 깊게 파인 정열적인 스페인 동북부 지방의 이름을 딴 카탈로니아수영복을 가리켰다.

물론이지요.” 돌리는 흔쾌히 대꾸하고 JT를 따라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가 비치파라솔과 밀짚모자를 고르는 걸 도와주었다. 밀짚모자를 고르면서 그가 그녀의 하얀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며 설명했다. 그리고 이와 한 쌍으로 커다란 밀짚 비치백도 고르며 물었다.

그밖에 뭐가 필요할까요?” 사랑! 돌리는 이 말을 입 밖에 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너무 성급하게 몰아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미첼에게서 벗어나도록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그 말에 JT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더니 무뚝뚝하게 판매원 아가씨에게 물었다.

보석 있어요? 다이아몬드 있소? 아니면 에메랄드도 괜찮고요.”

판매원 아가씨는 긴장을 한 모양인지 침을 꿀꺽 삼켰다.

없습니다, 손님. 하지만 고급 프랑스제 향수가 있는데요.”

좋아요. 모든 종류를 사분의 일 갤런(액체의 부피 단위로 1갤런은 미국 단위로 3,785리터임)씩 담아주시오. 아니, 반 갤런씩 담아주시오.” “온스(액체의 무게 단위로 1온스는 28.35그램임) 단위로 파는데요.” 판매원이 상냥하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가 성급한 목소리로 말하며 돌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갈 준비 됐어요?” “당장 위층으로 올라가서 내 수영복을 가져올게요.”

JT가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 혹시 새 것이 필요해요?” ‘잘생긴 신사에게서 받은 선물치고 공짜란 없단다.’

돌리는 갑자기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또한 그 대가에 대해선 나중에 걱정하라고 하셨지. “, 새 수영복이 있다면 무척 기분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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