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걸어서 반만 리
전동걸은 3개월 동안의 군사훈련을 마쳤다. 조선의용군의 기본 군사훈련은 혹독하리만큼 강도가 높고 맹렬했다. 사격이며 분대 전투 같은 훈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격전 훈련은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만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지니지 않고 완전무장을 한 채 태항산록 그 끝없는 골짜기와 봉우리를 열흘 이상씩 타 넘는 것이었다. 먹을 것은 어떻게 해서든 산종에서 구해야 했다. 산 열매도 따먹었지만 절대로 따먹으면 안 되는 마을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꾸고 있는 과실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생업으로 삼아오는 데다 수확량도 엄청나 그 세 가지는 태항산 명물로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 그 열매들을 단 하나도 손댈 수 없는 것은 <인민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민을 적극적으로 돕되 인민의 것은 지푸라기 하나도 손대선 안 된다. 이것은 중국공산당 군대인 팔로군의 절대적 강령이었다. 일본군 척결을 위해서 팔로군과 합작투쟁을 벌이고 있는 조선의용군은 당연히 그 강령을 따라야 했던 것이다. 팔로군은 인민의 재산만 축내지 않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동 중에 민박을 하더라도 절대로 방에 들어가는 일이 없었고, 기껏해야 헛간을 빌리거나 처마 아래서 이슬이나 서리를 피했다. 밥도 다 손수 해 먹고 떠날 때는 집 안 청소며 헌 울타리 같은 것도 고쳐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팔로군은 태항산을 중심으로 한 해방구 안에 사는 인민들에게 일체의 세금을 물리지 않으면서 농번기와 추수철에는 농사일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일본군과 장개석의 국민당군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었다. 팔로군은 자신들의 그런 헌신적 행위에 대해서 누구나 이렇게 말했다.
‘우리 팔로군은 인민의 군대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인민이기 때문이다.’
팔로군은 두 개의 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일본군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민당군이었다. 일본군을 무찌르기 위한 국민당군과의 국공합작은 작년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팔로군의 세력이 자꾸 확장되어 나가자 위협을 느끼게 된 장개석은 일본군들로 하여금 태항산을 집중 공격하도록 유서 팔로군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바로 인민들이었다 인민들의 지지가 늘어나는 만큼 팔로군의 세력은 확장되는 것이었다.
배를 곯으면서도 신병들은 불평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교관이며 다른 고참병들도 자신들하고 똑같이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먹이를 현지에서 해결해 가며 굶어가며 싸워야 하는 유격전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이니 불평이 나올 수 없기도 했다. 그리고 신병들 모두가 강제로 끌려온 것이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려고 사선을 넘어 모여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유격전 훈련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첫째가 전반적 유격 전술을 익혀 유격전 용사의 기본을 갖추게 하는 것이었다. 둘째가 장대하게 뻗은 태향산록의 중요한 지점들의 지리를 익히는 동시에 일본군의 전방 거점을 확인시키는 것이었다. 셋째가 민간인들을 상대로 팔로군과 똑같은 헌신적 생활을 몸에 익히는 것이었다. 넷째가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는 체력단련과 함께 정신력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이틀 동안 꼬박 굶는 것은 물론이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게 하면서 줄기차게 산을 넘고 골짜기를 건널 때도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어쩐지 물이 흘러가는 개울 옆을 지나가기도 했다 중국의 강물들은 거의가 투신자살을 하려 해도 망설여질 만큼 탁하지만 산중이라서 개울물은 맑았다.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고통을 참아내는 것, 그것이 훈련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사람의 시체를 뜯어먹고 산다는 승녕이 고기든 까마귀고기든 못 먹을 것이 없었다.
"왜 태항산에 승냥이 떼와 까마귀 떼가 많은지 아십니까? 근년 사오 년 동안에 사람들이 그만큼 많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쪽도 그렇지만 왜놈들도 많이 죽었습니다."
교관이 승냥이고기를 뜯으며 태연하게 하는 말이었다.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만드는 그 끔찍한 말을 들으며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 그것도 유격전 훈련 중의 하나였다. 조선의용군 본부는 화북에서도 장대하기로 이름난 태항산록 속의 오지산 아래 펼쳐진 드넓은 분지의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 군정학교로 되돌아온 신병들은 마침내 살아났다는 듯 환호성을 질렀다.
"신병 동무 여러분, 그 어려운 유격전 훈련을 한 사람의 낙오도 없이 이렇게 당당하고 용맹스럽게 끝내준 것에 대해 격려와 함께 고마움을 표합니다. 지금부터는 휴식입니다. 맘껏 쉬십시오."
교관이 손을 흔들며 웃었다.
"와아아-"
시병 20여 명은 다같이 함성을 질렀다. 교관이 돌아서고 그들은 해산했다. 전동걸은 마구 뛰기 시작했다.
"여보게 동걸이, 나 좀 보세."
사혁회 회장 최우한이 소리쳤다.
"여태까지 신물 나게 봤는데 뭘 또 봐."
전동걸이 고개만 돌리고 외쳤다.
"어딜 가는데 그래?"
"사람이 눈치없기는."
"그 꼴로 임 보러 가?"
"한시가 급해."
"완전히 미쳤군."
"급한 건 내가 아니라 저쪽이야."
"저, 저 말하는 것 보라니. 빨리 오게."
"알겠네."
최우한은 무거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훈련을 같이 받은 회원은 둘뿐이었다. 지요꼬까지 합해 네 사람이 태항산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나머지 회원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훈련을 떠나 있는 동안 어떤 회원이 도착하지 않았나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아무도 더 오지 않았다면 나머지 회원들은 더 이상 못 오게 된 것이 분명할 거였다. 아무 일도 없고서야 이토록 늦어질 리가 없었던 것이다. 전원이 무사하게 태항산에 도착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반수밖에 무사하지 못한 것은 너무 큰 손실이었다.
"지요꼬!"
전동걸은 선전부로 뛰어들며 외쳤다.
"어머, 동걸 씨!"
무슨 일을 하고 있던 지요꼬가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일손을 놓고 마구 전동걸에게로 뛰어갔다. 둘이는 서로 얼싸안았다.
"아, 보기 좋습니다. "
"연극의 한 장면 같은데요."
"그것 참 부럽소이다."
사람들이 웃으며 한마디씩 했다.
"아이, 그러면 부끄러워 오래 못 안잖아요."
지요꼬가 전동걸의 품에서 벗어나며 사람들에게 눈을 흘겼다.
"부끄럽긴요. 여긴 해방굽니다. 생존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사랑의 자유도 보장하는 해방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예 고맙습니다 이 정도면 흡족합니다."
전동걸이 능글능글 웃으며 받아넘겼다.
"훈련이 힘들었지요?"
선전부장이 담배를 권하며 물었다.
"아닙니다,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전동걸의 진지한 대답이었다.
"호, 참 대단하시군요. 유격전 훈련을 받고도 그리 끄떡없으니..."
선전부장은 전동걸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체력도 정신력도 대단하시군요."
다른 대원이 말했다.
"아닙니다. 고관님과 고참병들이 꿋꿋하시니까 저희 신병들이야 꼼짝 못 하고 참아낸 거지요."
전동걸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 그동안의 훈련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그의 얼굴에 잘 드러나 있었다. 이제 전동걸의 얼굴에서는 동경에 있을 때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린데다가 살이라고는 붙어 있지 않았다.
"부장 동무, 혹시 그동안에 저희 회원들은 더 오지 않았습니까?"
전동걸이 이야기를 바꾸었다.
"예, 더 없었소."
"그것 참..."
전동걸의 얼굴에 어둠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단념하는 게 좋을 거예요."
지요꼬의 말이었다.
"전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전동걸이 몸을 일으켰다.
"지요꼬 동무도 함께 가시오. 일과도 다 끝나가는데."
선전부장이 지요꼬에게 눈짓했다.
"네, 고맙습니다."
지요꼬가 인사하며 발딱 일어섰다.
태항산의 연봉들이 석양빛에 현란한 색조로 물들고 있었다. 오지산의 다섯 봉우리는 정말 손가락 다섯 개가 하늘을 어루만지듯 하는 형상으로 석양빛을 받아 더 뚜렷해지면서 신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것 참 이상하네. 다 사고를 당한 걸까?..."
전동걸은 먼 산줄기를 바라보고 걸으며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중도 포기한 사람도 있을지 몰라요."
지요꼬가 침착하게 말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소."
"더 기다리지 않는 게 좋아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어요. 조직부에서도 이젠 단념하는 눈치예요."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 참 안됐는데..."
전동걸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난 그때가 좋았어요."
지요꼬가 전동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길옆의 옥수수밭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그 힘에 전동걸은 끌릴 수밖에 없었다. 지요꼬는 전동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입맞춤을 하기 시작했다. 전동걸은 지요꼬를 꼭 끌어안으며 봉천의 그날 밤을 생각하고 있었다.
"누가 보겠소."
입술을 떼며 전동걸이 말했다.
"보면 어때요. 우린 공인받은 사인걸요."
지요꼬는 전동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자자, 이따가. 이 옷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 난다고..."
"괜찮아요, 다 당신 냄새니까."
그날 밤 이후 지요꼬는 단둘이 있을 때는 꼭 당신이라고 했다. 그때마다 전동걸은 이미화의 모습을 보았다.
"자아, 그만 갑시다. 최우한 동무가 기다리고 있소."
"난 여기가 좋고도 싫어요."
전동걸에게 끌려 옥수수밭을 나오며 지요꼬가 투정 부리듯이 말했다.
"알고 있소. 마음대로 사랑을 못 하니까 싫으시겠지."
지요꼬가 눈을 곱게 흘기며 전동걸의 손을 꼬집었다.
"어떻소, 선전부 일이."
전동걸은 지요꼬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일이 새롭고 보람도 있어요."
지요꼬는 밝은 웃음과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마음에 든다는 뜻을 더 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잘됐소. 이제 총 쏠 생각 같은 건 하지 말고 그 일을 열심히 하시오."
지요꼬도 제식훈련과 사격훈련까지는 남자들과 꼭같이 받았다. 팔로군의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팔로군에서는 남녀차별이 전혀 없었다. 권리의 차별이 없으니까 의무의 차별도 없어서 군인으로서 기본 훈련을 남녀가 똑같이 받았다. 그런데 지요꼬는 기본 훈련을 받고 나서 선전부에 보직을 받았지만 자꾸 전투요원이 되겠다고 나섰다. 그 저의가 뻔해 전동걸은 비식비식 웃기만 했다. 조직에선는 지요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체력 부족이 그 이유였다. 그 명백한 이유 앞에서 지요꼬는 더 어쩔 수 없이 선전부로 갔다. 지요꼬가 선전부에 배치된 것은 그 학벌이 십분 참조된 것이였다. 지요꼬가 보직을 받으면서 조선의용군에는 일본 여자가 둘이 있었다. 한 대원은 초창기부터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최우한은 그동안 말끔하게 목욕을 하고 숙소에서 편안히 누워 있었다.
"최 동무, 고생 많으셨지요?"
지요꼬가 최우한과 악수를 했다.
"아이고 말도 말아요,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소."
최우한은 고개를 내 둘렀다. 지요꼬는 전동걸과 최우한의 반응이 너무 다른 것에 흠칫 놀랐다. 아까 전동걸이가 그렇게 의연하고 당당한 태도를 보여 여러 사람들이 다같이 호감을 나타낸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몰랐던 것이다.
"연인과 해후한 기분이 어떻소? 저 친구 아까 날 떼놓고 정신없이 도망갔는데."
최우한이 짓궂게 웃었다.
"아주 달고 고소해요. 이따가 만나요. 빨리 목욕하세요."
지요꼬는 생긋 웃으며 돌아섰다.
"이거 참, 역시 사람 속은 모른다니까. 지요꼬가 자네한테 저리 반할 줄 어찌 알았겠나."
최우한이 벌렁 뒤로 드러누웠다.
"말 말게, 괴로우이."
최우한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대꾸하고는 깜짝 놀랐다. 가슴 양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미화와 지요꼬 때문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전동걸은 서둘러 목욕탕으로 갔다. 전동걸은 그날 밤을 생각했다. 어떻게 피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사는 심하고, 부부행세는 해야하고, 한방에 누워있으니...... 모두 평양의 대동상회는 꽤나 큰 잡화상이라서 접선하기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손님으로 들어가서 물건을 고르며 접선하고, 몇 가지 물건을 사 가지고 나오면 그처럼 자연스러운 위장이 없었던 것이다.
"천진의 일우상회를 찾아가시오. 암호는 대동강 나룻배요."
평양에서 머물 때까지만 해도 그저 연인으로 위장했다 경의선을 타고 신의주에 이를 때까지만 해도 역시 그랬다.
"동걸 씨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요."
국경을 넘기 전에 검사가 시작되자 지요꼬가 한 말이었다.
"봉천, 용무가 뭐요?"
지요꼬가 한꺼번에 내민 기차표 두 장을 보며 이동경찰이 물었다.
"봉천에 가는 게 아니에요. 서주에 주둔하고 있는 동생 면회를 가는 거예요."
"아! 동생이 서주에서 보국층성하고 있군요. 당연히 면회를 가셔야지요."
이동경찰의 태도는 금방 달라졌다.
"그런데. 저분은..."
이동경찰의 날카로운 눈이 전동걸에게 멈추었다.
"네, 제 남편이에요."
"조선사람... 같은데요..."
"네, 조선사람이에요. 왜, 안 되나요? 총독 각하께서 주창하시는 내선일체 혼인론을 실행한 것인데요."
지요꼬는 기분 나쁘다는 듯 이동경찰을 꼬나보았다.
"아, 아닙니다.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원로에 편히 가십시오."
이동경찰은 황급히 기차표를 돌려주고 다음 좌석으로 가버렸다. 지요꼬는 기차표를 손가방에 넣고 있었고, 전동걸은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요꼬의 손가락 하나가 전동걸의 허벅지를 살살 긁고 있었다. 어때요, 어때요. 내 재주가 어때요, 하는 것처럼. 전동걸은 슬며시 손을 옮겨 지요꼬의 선을 꼬옥 잡았다. 잘했소, 잘했소, 아주 잘했소, 하는 것처럼.
안동역의 조사에서도 그런 식으로 거뜬하게 넘어갔다. 봉천역에 내렸는데 출찰구를 지키던 경찰이 전동걸을 붙들었다. 거시서도 지요꼬는 매끈하게 해치웠다. 북경행 기차를 타려면 하룻밤을 자야 했다.
"어떻게 하지요? 여관에서 불심검문을 당하면."
"부부라면서, 방 따로 쓰는 부부도 있소?"
전동걸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말해 버렸다. 그리고 한 방에 들어갔다. 요와 이불이 한 채밖에 없는 것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길을 나선 이국땅의 첫날 밤에 부부가 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는 것을 실천하듯이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임신하면 어쩌지?"
전동걸이 지요꼬를 안은 채 말했고
"그렇게 바보로 보여요?"
지요꼬가 전동걸의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북경에서 바로 천진으로 기차를 갈아탔다. 일본을 벗으로 생각한다는 일우상회의 간판부터가 철저한 위장용이었다. 일우상회의 주인도 평안도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정해 준 숙소에서 이틀을 보내고 어떤 영감님을 따라 북경으로 돌아왔다. 북경 만주산 뒤의 은거지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태항산으로 갈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거시서 들으니 조선의용군에서는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2년 전부터 조선사람들과 선이 닿는 비밀조직을 광범위하게 가동하고 있다고 했다.
다섯 사람이 안내원을 따라 길을 나섰다. 일본여자가 태항상으로 조선의용군을 찾아가다니..., 지요꼬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지요꼬는 더듬거리는 조선말을 빨리 익히려고 애를 썼다. 회원들 사이에서도 기억력 좋기로 소문났던 지요꼬는 하루가 다르게 말을 잘 익혀나갔다.
채항산까지는 직선거리로만 쳐도 3천 리라고 했다. 그런데 일본군들을 피해 가며 안전지대로 가야 하기 때문에 이리저리 돌다보면 길이 얼마나 더 멀어질지 모른다고 했다. 그 길을 처음서부터 끝까지 걸어서 가야 된다는 것이었다.
"어느 지점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일본군의 경계선을 넘는 루트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사람 수가 두 명을 넘지 않을 때, 또는 긴급한 경우에만 쓰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아주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차를 세 명 이상이 이용한다는 것은 좀 곤란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일본이 중국 대륙을 절반쯤 점령한 것을 놓고 흔히들 일본의 중국 점령이란 점과 선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게 무슨 뜻인고 하니 점이란 도회지를 말하는 것이고 선이란 철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본군은 중국의 절반 중에서도 도회지들이나 철도밖에는 점령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일본이 사력을 다해 병력을 투입해대도 일본군의 점령지역 안에서도 일본군을 아직까지도 보지 못한 중국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실정입니다. 우리는 그 허점을 이용해서 점과 선을 피해 도보로 가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안전한 대신 시일이 많이 걸리고, 여러분들이 고생하시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을 안내원 하나가 위험을 무릅써가며 일을 마치는 시일이 대개 보름 걸립니다. 그런데 도보로 가면 네다섯 달이 걸리지만, 안전도에 있어서나, 안내원 활용의 효율성에 있어서나 도보가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한 가지 여러분들이 고생하시는 문제인데, 그것도 헛고생이 아닌 것을 명백히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여러분들은 군인이 되기 위해 이 길을 택하셨습니다. 태항산에 가면 엄청나게 힘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 훈련을 이겨내자면 미리 한 4, 5천 리 걸어 신체를 단련해 두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걸으며 걸으며 산천 구경을 실컷 하십시오. 세상만사 음양이 있는 법이니 여러분들은 음도 양으로 바꿀 줄 아는 훈련을 지금부터 시작하시는 겁니다. 여기는 만만디의 땅 중국입니다. 모두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십시오."
안내원의 논리적이면서도 구수한 설명이었다.
곧 겨울이 시작되었다. 겨울옷을 사 입어가며 날마다 걸었다. 아무리 춥고 눈이 많이 오는 날이라고 해도 길을 떠났다. 단 3, 4리를 걷더라도 장소를 옮겨야만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전동걸은 그런 것을 다 요령으로 받아들였다. 성을 황이라고만 하는 젊은 안내원은 공산주의 이론에도 밝았고, 특히 세계정세에 통달하고 있었다. 조선의용군에서 그런 교육을 시킨다고 했다. 밤이면 그에게 중국의 복잡한 상황에서부터 세계정세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단순히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의용군이 될 예비교육이기도 했다. 그러나 걷는 것이 완전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일본군의 망대 아래를 밤중에 통과하기도 했고, 또 어느 때는 철길을 가로질러 건너기도 했다. 아직 일본군의 점령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었다. 그래도 걷는 것은 끝나지 않았다. 석 달이 넘으면서 지요꼬는 농담을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조선말이 숙달되어 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배우려는 의욕이 뜨거운데다 날마다 전동걸에게 매달리듯 팔짱을 끼고 걸으며 배우는 것이니 효과가 안 날 수가 없었다. 봄이 짙어지면서 광막한 대지가 초록색으로 뒤덮이고 온갖 꽃들이 낭자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중국말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안내원이 이야깃거리가 동나게 되자 중국말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는 이러다가 일본말 잊어버리겠어요."
지요꼬의 엄살이었고
"잘됐지요 뭐. 어차피 남편 삼으면 조선 여자 되는 것 아닙니까."
안내원의 말에 모두 소리내 웃었고, 지요꼬는 놓아서 전동걸의 팔을 더 꼭 붙들었다.
"저어기 보이지요, 저 산. 저게 태항산입니다."
어느 날 마침내 안내원이 팔을 뻗치며 손가락질했다. 아슴하게 먼 저쪽에 긴 산줄기가 누워 있었다.
"와아아!"
그들은 모두 어린애들처럼 환성을 질렀다.
"아직 마음들 놓지 마세요. 오면서 많이 보았지만 빤히 보이는 것도 가다 보면 아주 멀지 않습니까. 산은 높아서 아주 멀리서도 보이니까 더 그렇습니다."
안내원의 말이었다.
"저게 아무리 멀어도 북경보다는 가깝겠지요."
지요꼬가 이렇게 말해 사람들을 웃겼다.
거기까지 여섯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얼굴들은 햇볕에 그을리고 말라 거칠어져 있었다. 그러나 눈들이 빛나고 있어서 그런 모습들은 지쳐 보이는 게 아니라 강인해 보였다. 변하지 않은 사람은 안내원 하나였다. 그는 애초에 막일꾼이나 농사꾼 같은 모습이었으니 변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태항산 속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곳이라고 해서 안전하지가 않았다. 산마을들을 따라 일본군의 망루들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저놈들이 저희들 말대로 동계토벌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고는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을 발붙이지 못하게 하계다고 저리 망루나 포대를 세운 겁니다. 하나 저걸 무서워하는 조선의용군이나 팔로군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항산록이 워낙 넓고 깊어 활동할 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이렇게 자유롭게 오가는데 우릴 잡겠다는 저놈들은 오히려 저 속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꼴이지요."
안내원이 비웃으며 한 말이었다.
태항산록은 산줄기가 겹겹으로 겹쳐져 펼쳐지고 뻗친 장대한 산악이었다. 그런데 나무들은 그다지 풍요롭지가 못했다. 산마을들은 두 산줄기 사이의 평지나 골짜기의 산자락 또는 분지 같은 곳에 이루어져 있었다. 그 마을마다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계단식으로 밭을 일군 것이었고, 감나무 호도나무 대추나무를 꼭 과수원 하듯이 많이 가꾸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색은 마을들이 모두 불탄 흔적과 허물어지고 무너진 데가 많다는 점이었다.
"저게 모두 일본군들이 초벌 나와서 한 짓들입니다.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죽였지요. 전과를 올리지 못하니까 무고한 인민들에게 분풀이를 한 거지요. 적진아퇴로, 일본군이 태항산을 넘어오면 조선의용군과 팔로군은 미리 태항산을 벗어나 산록 주변의 크로 작은 마을들을 상대로 선전, 선동 활동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되니 열이 받친 일본군들은 엉뚱하게 인민들을 살해하고 방화하는 겁니다. 다음에 차차 보게 되겠지만 저쪽, 일본군의 점령지 쪽의 태항산 줄기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살아 있는 게 없다시피 합니다. 토벌을 한다고 일본군들이 끝없이 불을 질러댄 겁니다."
자꾸 걸음이 빨라지며 안내원이 설명하고 있었다.
마을들을 지나고, 골짜기를 올라 산등성이를 넘고, 다시 나타나는 마을을 멀리 바라보며 또 산등성이를 넘으며 산은 자꾸 깊어져 가고 있었다. 서산에 해가 뉘엿뉘였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까마귀 떼가 검은 바람을 일으키며 휘돌다가 먼 숲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비탈진 수수밭과 조밭 사이로 오솔길이 구불구불 나 있었다. 안내원의 걸음이 어찌나 빨라지고 있는지 그 뒤를 따르느라고 다른 사람들은 숨을 헉헉거렸다. 그들은 그때서야 안내원이 자신들의 느린 걸음에 맞추어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곡식밭이 끝나자 비탈의 경사가 급해졌다. 오솔길은 더 구불거렸다. 경사가 어찌나 심한지 서너 발짝 앞의 땅이 코에 부딪칠 지경이었다. 안내원은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그들만 비탈길을 오르느라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디선가 까마귀 떼의 까욱거리는 음산한 울음소리들이 들리고 있었다. 몸집 작은 새들의 짹짹거림도 숲속에서 들려왔다. 작은 산꽃들이 잡풀들 사이에서 앙증맞게 피어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바탈길을 올라가서 고갯마루 가까이에 이르렀다. 안내원은 돌 위에 편안하게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마침내 다 왔습니다."
안내원은 왼쪽 팔을 들어 가리키며 벌떡 일어섰다.
"와아!"
"아아..."
"어머나"
그들은 고갯마루에 올라서는 대로 탄성을 울렸다. 그들의 눈앞에 확 트인 조망은 아주 딴 세상이었단 것이다. 태항산록이 줄기줄기 굳건히 뻗어가며 우람한 봉우리들을 받치고 있는 속에 드넓은 분지가 아늑하게 깃들여 있었다. 깊고 깊은 산속에 그렇게 넓은 분지가 펼쳐져 있는 것은 자연의 오묘함이 아닐 수 없었다. 감나무 호도나무가 무리지어 여기저기 소담한 숲들을 이루고 있는 사이로 하얀 모래밭이 뱀 형상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 가운데로 석양빛을 반사하며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강을 끼고 띄엄띄엄 자리잡은 마을들 주위로는 곡식밭들이 초록빛 비단을 펼쳐놓은 듯 곱고 싱그러웠다. 그 아름다운 전원풍경 속에 조선의용군 본부며 팔로군 군구사령부가 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았다.
"다들 가시지요. 저래봬도 또 한 20리는 걸어가야 합니다."
안내원이 걸음을 옮겨놓았다.
"아이고, 이제 2백 리도 단숨에 가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뜬 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비탈길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반만 리를 걸어온 그들의 다리에서는 새로운 힘이 솟고 있었다.
전동걸은 목욕을 끝내며 그때의 회상에서 벗어났다. 그는 얼굴을 닦다 말고 자신의 알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두 다리에 불끈 힘을 주었다. 허벅지에 뿔뚝불뚝 근육이 드러났다. 여기 오기 전에는 아무리 힘을 주어도 밋밋했던 허벅지였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그 근육에서 비로소 독립군이 된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하면, 학병으로 끌려갈람사 독립군이 돼야겄제. 나가 인자 허는 말인디..., 니 아부님도 독립군니셨니라..."
어머니의 담담한 말이었다.
"예에 그, 그럼 산소는 어딨나요"
"독립군이 산소가 워디 있어. 만주 땅 그 어디서 돌아가신 것이제."
그리고 어머니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독립군이 산소가 워디 있어..."
그 말은 지금도 귓속을 쟁쟁히 울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남편의 산소도 모르며 서러움을 삭이고 살아온 강인함 때문이었을까. 자신을 떠나보내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이틀을 휴식한 다음 전동걸은 출동 명령을 받았다. 군복을 벗고 사복을 입으라고 했다. 조선의용군 군복은 팔로군과 똑같이 초록색이었다. 휴대하는 무기는 권총과 단검이었다. 동행은 고참병 한 명이었다. 둘 다 허름한 사복에 허름한 배낭. 누가 보거나 중국인 촌뜨기요 농사꾼이었다.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간다는 임무 하달이 없었다. 그건 고참병이 이미 알고 있을 거였다. 전동걸은 적진 침투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코가 뭉툭하면서 강인한 인상인 고참병은 처음부터 발 빠르게 걸었다. 유격전 훈련을 하면서 유격전의 성패는 기동성에 달려 있다고 수없이 강조했다. 조선의용군들은 하루에 평균 150리를 갈 수 있는 주력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적이 100리씩 추격해 온다면 50리의 차이는 이틀 만에 완전히 적의 배후를 칠 수 있게 되고, 옛날이야기에 흔히 나오는 축지법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조선의용군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조선의용군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 하루 평균 2백 리를 걷는다고 했다. 어쩌면 그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일 지도 모른다고 전동걸은 생각했다. 키도 별로 크지 않은 사람이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5분이 미처 못되어 간격이 벌어져 뛰어야 하는 것이었다. 신병들 중에서는 잘 걷는 축에 들었는데 그 사람 앞에서는 어림없었다. 분지를 벗어날 즈음에 의용군 20여 명이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보였다. 농사짓는 당번이 된 부대원들이었다. 조선의용군은 자급자족 원칙이었다. 싸우면서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고참병은 말 한마디 없이 줄기차게 걷기만 했다. 서너 시간을 쉴새 없이 걸으니 전동걸의 다리는 뻣뻣하게 굳어져 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쉬어가자고 할 수도 없었다. 어떤 임무 수행을 겸한 시험인지도 몰랐던 것이다. 점심때가 되어 고참병은 꽤 번화한 동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바로 식당으로 들어갔다.
"힘들지요"
전동걸의 물잔에 차를 따라주며 그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아, 아닙니다. "
전동걸은 당황해서 대답했다. 고참병은 서른 살쯤 되어 보였다.
"미안하오. 갈 길이 급해서 빨리 걷는 것이니 힘들더라도 좀 참으시오 그 대신 식사는 양껏 하시오."
"예, 괜찮습니다."
혹시 무슨 일을 하려 가는지 말하려나 기대했지만 고참병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음식이 푸짐하게 나왔다. 전동걸은 오후에 또 정신없이 걸을 것을 생각해 배부르게 먹었다. 끊이지 않은 물을 먹으면 설사하고 열 오르고 구토하는 풍토병에 걸리기 때문에 따근한 차도 네댓 잔이나 마셨다. 그러나 그게 큰 잘못이었다. 아픈 다리를 쉰데다가 배가 물러 걷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고참병과 간격은 자꾸 벌어지는데 고참병은 인정사정없이 빨리 걸어가고 있었다. 먹은 것을 도로 토해낼 수도 없고, 전동걸은 아이고, 이 미련한 놈아를 되뇌이며 헐떡거리고 뛰었다. 고참병은 해가 져도 걸음을 멈출 줄을 몰랐다. 전동걸은 이를 악물고 걸었다. 젊은 내가 질 수 있느냐 하는 오기가 뻗쳐오르고 있었다. 벌써 150리는 걸어오지 않았는가 싶었다. 고참병은 어두워서 더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어느 초라한 마을로 들어섰다. 여자 노인네 혼자 사는 집에서 저녁밥을 얻어먹고 자려고 들어간 곳은 헛간이었다. 고참병은 헛간 바닥에다가 거적을 깔더니 태연하게 앉아 담배를 피워물었다. 전동걸도 거적 위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말로만 들어온 팔로군식 생활을 처음으로 겪는 것이었다. 전동걸은 묘한 기분으로 담배를 맛있게 빨았다. 너무 빨리 걷느라고 담배 피울 틈도 없었던 것이다.
"일찍 잡시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니까."
고참병은 벌렁 드러누웠다. 전동걸도 따라 누울 수밖에 없었다. 헛간문 밖으로 밤하늘이 가득했다. 별 밭이 휘늘어져 있었다. 중국 하늘에서 바라보는 은하수가 묘하게 슬펐다.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이미화의 그 희고 가녀리고 안온한 얼굴이 은하수 저편에 걸려 있었다. 이미화와 몸을 섞었던 그날 밤을 생각하며 전동걸은 아른아른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전동걸은 고참병이 깨워서야 눈을 떴다. 미처 어둠이 걷히지 않은 사방에는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물이나 한잔 마시고 떠납시다. 아침은 가다가 먹고."
고참병이 따끈한 차를 내밀었다. 먼저 일어나 차를 끓인 것이었다. 물이 나빠 의용군들도 중국 사람들처럼 잎차를 상비하고 다녔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일어나 했어야 하는데요."
전동걸은 정말 미안하고 면목이 없었다.
"아니오, 전혀 그런 신경 쓰지 마시오. 팔로군이나 우리나 계급이 없는 군대요. 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하면 되는 거요."
고참병이 약간 웃었다. 계급이 없이 부서와 직책만 있는 군대, 그러면서도 목숨을 거는 명령이 통하고, 세력이 날로 확장되어 가고 있는 군대. 그것이 조선의용군이고 팔로군이었다. 이런 군대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를 생각했다. 전동걸은 차를 한 모금 입에 담으면서 문득 첫날 조선의용군 본부에 들어섰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본부의 정면 벽에는 태극기와 중국공산당 기가 깃대를 서로 엇갈리게 해서 붙어 있었다. 그건 조선의용군과 팔로군이 공적 일본군을 상대로 합작투쟁을 하고 있다는 상징이었다. 그것은 가슴이 뭉클하도록 인상적이었다. 동경에서 사혁회가 꿈꾸었던 바가 바로 실현되고 있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조선의용군이 태극기를 내걸게 된 것은 팔로군 태항산 군구사령관인 팽덕회 장군의 권유에 따른 것이라는 말을 며칠 뒤에 들었다. 젊은 축들은 붉은 기를 내세우자는 의견도 내놓았지만, 인민들의 광범위한 호응을 얻으려면 인민들의 눈에 친숙하고 감정이 융화되어 있는 태극기라야 좋다고 팽 장군이 권유했다는 것이었다. 고참병은 또 안개를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걷고 어제처럼 어두워져서야 숙소를 정했다. 전동걸은 오히려 다리가 풀려 어제보다 걷기가 나아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음날 점심은 어느 산골짜기에서 미리 준비한 빵을 먹었다.
"읽어보시오."
고참병이 접힌 종이를 불쑥 내밀었다. 전동걸은 종이를 펼쳤다.
‘조선동포 및 조선학도병에게 고함.’
등사된 삐라의 제목이었다.
‘조선 청년들은 조선의용군에 동참하라. 현재 일본군에는 조선의 학생들이 강제로 끌려와 있다. 그들이 탈출하면 동포들은 그들을 적극 보호하고, 조선의용군으로 안내하라. 학도병 여러분들은 하루빨리 일본군을 탈출하여 조선의용군으로 오라.’
전체가 한글로 된 삐라의 내용이었다.
"학병 두 사람이 일본군 점령지역 안에 지금 은신해 있소."
"학병이오?"
"석달 전부터 이 삐라를 뿌린 효과일 거요."
전동걸은 가슴이 뜨겁게 벌떡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학병들이 탈출하고 있구나... 그건 생각만으로도 가슴 뜨거워지는 일이었다.
"여기서 한숨씩 잡시다."
고참병은 비탈에 몸을 눕혔다.
"..."
전동걸은 어리둥절해서 고참병을 쳐다보았다.
"아, 저 비행기를 보시오."
고참병의 엉뚱한 말이었다. 전동걸은 고개를 젖혔다. 나뭇잎들 사이로 뚫린 저편 하늘로 새하얀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태항산으로 걸어오는 동안에 많이 보았던 B51 폭격기였다.
"저게 뜰 때마다 왜놈들은 망해 가고 있소."
고참병의 말은 안내원이 했던 말과 똑같았다. 나무숲을 벗어난 비행기가 푸르른 하늘 저 높이 날아가고 있었다. 전동걸은 비행기가 반짝거리는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어둡기 시작해서 그들은 산을 넘었다. 산 아래쪽이 일본군 점령지역이었다. 산을 내려가 일본군의 망루를 몇 개나 피해 가며 점령지역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배꼽을 넘는 강도 두 번이나 건넜다. 거의 자정에 가까워질 무렵 어느 산굽이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어떤 청년이 뒷산으로 앞장섰다. 바위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토굴이 나타났다. ㄱ 자로 꺾인 토굴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청년이 성냥을 켰다. 과연 일본군복을 입은 청년 둘이 서 있었다 고참병과 전동걸은 그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49. 음모,음모
여자들이 당산나무 아래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면에서 머시라고 허드랑가"
"여자덜얼 어쩌겄다는 법이여"
"여자얼도 잡아간다는 법이라든디"
"여자덜얼 멀라고"
"무신 그리 얄랑궂인 법이 있능고"
"여자도 징용 끌어간다는 것이랑마."
"머시여 여자럴"
여자들은 불안한 얼굴로 중구난방 떠들고 있었다.
"정읍댁언 어째 이리 안 온고."
"하매 올 때가 되았는디."
"구장이 또 질게 새살까는갑다."
"구장이 원체로 새살까기 좋아헝게."
"구장이 멀 알랑가."
"구장이 면사무소서 다 듣고 왔다는 것 아니여"
더위가 한풀 꺾여 당산나무에서 우는 매미들의 울음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들녘의 초록빛도 생기를 잃으며 노란 기색을 엷게 내비치고 있었다. 9월로 접어든 절기의 변화는 미묘하고도 정확했다. 성큼 높아진 하늘가로는 새하얀 뭉게구름들이 탐스럽고도 아름답게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려, 저그 정읍댁 온다."
"어찌 저리 걸음이 천근이다냐."
"일이 안 좋은감만."
"그럴란지도 몰르제."
여자들은 정읍댁에게로 우르르 몰려갔다.
"무신 법이랴."
"여자덜 끌어간다는 것이 참말이여?"
"다 헛소문이제."
여자들은 정읍댁을 둘러싸며 다투어 물어댔다.
"아이고메 이 사람덜아, 저 그늘로 가서 차근허니 말허세."
정읍댁이 손을 내저었다.
"그려, 늦더우에 이마빡 까지네."
"이, 정읍댁이 심들 것이로구마."
여자들은 다시 당산나무 아래로 빠른 걸음들을 옮겼다. 정읍댁이 돌위에 걸터앉고 다른 여자들은 그 앞에 둘러앉았다.
"고것이 무신 일인고 허니 말이여, 만으로 열두 살보톰 마흔 살꺼정 배우자 없는 여자덜얼 끌어간다는 것이드만."
"배우자 배우자가 머시여"
"어따 ,무식허먼 눈치나 보고 가만히 있어야 본전 찾는 법 아니여."
"배우자가 서방 아니여, 서방."
정읍댁의 대꾸였다.
"글먼 첨보톰 쉰 말로 헐 것이제 뜸금없이 유식헌 문자 쓰고 긍가."
"아, 서방이고 임자고 딴소리 말어 집구석마동 난리판굿 일어날 일놓고."
"아니 글먼, 그놈으 소리가 큰애기고 과부고 임자없는 여자덜언 다 잡아가겄다는 것 아니여."
"그렁게 말이여."
"아아니, 요런 환장헌 놈덜이 있능가."
"아니여, 만으로 열두 살이먼 그냥 나이로 열시 살 아니라고 고것이 어디 큰애기 축에 들기나 허간디 솜털도 안 가신 풋것덜이제."
"긍게 말이시 그 여자덜 끌어다가 어디다 써묵을라고 그런디야."
"구장 말로넌 일본공장에 보낸다등마"
정읍댁의 힘없는 대꾸였다.
"일본 공장 혼여자덜이 공장에 가서 무신 일 허라고."
"남자덜이 다 전쟁터에 나갔응게 여자덜이 공장일얼 히야 된다는 것이여."
"아이고 오살헐 놈덜, 즈그 왜년덜 끌어가제 어째 우리 조선 여자덜얼 끌어가."
"이개잡녀러 새끼덜이 남정네라고 생긴 것언 다 끌어가등마 인자 여자덜꺼정 끌어갈라고 지랄발광이구나. 아조 조선사람 씨럴 말리자고 작정얼 혔구만."
"아니여 아니여. 쓰잘디 는 소리덜 그만 허고, 안 끌려갈 방도럴 찾어얄 혔구만."
"잉, 그래야제."
"그방도가 머시간디"
"아, 정신채려. 얼렁얼렁 시집보내 임자럴 맨글먼 될 것 아니여."
"맞네, 맞어. 왜놈덜도 헛똑똑이여."
"음아, 헛똑똑이넌 바로 자네시"
"워쩌"
"아, 둔덕이 있어야 등얼 비비고, 실이 있어야 바늘을 쓸 것 아니겄어. 총각이란 총각언 징병이다 징용이다. 다 끌어갔는디 무신 수로 시집얼 보내 아이고메, 그러고 봉게 그러시."
"얼랴, 요 일얼 으쩐댜"
"참말로 찰났네. 우리 집언 딸이 싯이여."
"딸없는 집이 어디 있간디."
"요런 백여시 겉은 놈덜이 총각덜 먼첨 다 끌어가서 피허지 못허게 해놓고 그런 법 맨글었구나."
"영축없이 그렇구마."
"째보고 봉사고 사우 삼을 수도 없는 일이고 참말로 큰탈나부렀네."
여자들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한숨들을 토해냈다. 새로 생긴 법에 대해서 여자들이 이렇게 관심을 나타내는 것은 전에 없는 일이었다. 전에 같으면 남자들이 나섰겠지만 그럴 만한 남자들은 다 징용에 끌려가서 없었던 것이다.
"딸년덜얼 다 죽일 수도 없고..."
"무신 놈으 시상이 갈수록 이 지랄인고..."
"참말로 더는 못살겄는디..."
여자들은 간 한숨을 끌며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연희네는 자기집안에 해가 미치지 않게 된 것을 천만댜행으로 안도하며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그러나 남편 걱정으로 가슴은 날마다 타들고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 편지라도 한 장 왔으면 좋으련만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러나 남편이고 아들이고 징용에 끌려간 집치고 편지를 받은 집은 하나도 없었다. 분명 편지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편지를 보내지 않을 남편이 아니었다.
여자들이 그렇듯 신경 쓰는 새 법은 다름아닌 여자 정신대 근무령이었다. 총독부에서는 지난달 8월 23일 그 법을 공포하고 즉각 시행을 전국 행정 조직에 하달했다. 그건 군대 위안부를 더욱 적극적으로 조달하기 위한 관권의 동원이었다. 그 법은 전국적으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딸 가진 집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혼인을 빨리 시키려는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자의 정조를 생명과 맞바꿀 만큼 중하게 여기는 것은 계층이나 직업에 차이가 없이 공통된 절대가치였다. 그런 사람들이 시집 안 간 딸을 타국으로 떠나보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위안부로 끌려간 여자들은 그나마 개인적으로 은밀히 접촉해거 사기를 치거나, 아무도 모르게 납치를 해갔기 때문에 개인의 문제로 덮어져 온 것이었다. 그런데 총독부가 여자동원을 법으로 공포하고 나서자 삽시간에 사회문제를 야기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혼인소동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혼인소동과 함께 도처에서 홍독부를 비난하는 소리와 일본에 대한 반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징용이고 징병언 그렇다고 쳐. 처녀덜꺼정 끌어가겄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여."
"하먼, 요것언 말이 안 되는 소리여. 총독부가 히도 너무허는 것이제."
"쳐녀허고 사기그릇은 내돌리먼 금가드라고, 동네 안에서 내돌려도 금이 가는 판에 일본으로 내돌리먼 그것이 어찌 되겄어."
"두말허먼 잔소리여. 아, 제사공장 방직공장 댕기는 처녀덜이 다 무신꼴 났는지 보먼 알 것 아니여. 조선 안에서도 태반이 신세 베래분 판에 부모 눈 없는 일본으로 감사 더 말헐 것이 머시가 있어."
"글먼 요것일 으째야 쓰꼬"
"으쩌기넌 으쩌. 막아야제."
"막아 무신 수로."
"어허, 그리 물컹허니 못난 소리 말어. 딸년덜 다 신세 망쳐갖고 와서 시집도 못 가고 평상 뒷방살이 시킴서 속 썩어 내래앉는 꼴 안볼라면 딸 가진 사람덜이 미리 한덩어리로 물쳐갖고 나서야제."
"어이, 그 말 한분 씨언허니 잘허능구만그랴."
"맞어, 그리 나스먼 되겄구마."
"하먼, 딸자석 신체 망치는 판에 무서울 것이 머시여."
"그 말 한분 잘혔네. 은제꺼정 이리 당허고만 살 것이여. 그려, 당헐 일이 따로 있제. 사람이 당허고 사는 것도 한도가 있는 것이여."
"하먼 요분참에 총독부가 아조 쌩똥 싸게 맨글어야 혀 ."
"그렇고말고. 총독부도 지맘대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걸 봬줘야 혀."
동네에서 오가던 말은 이렇게 장터로 모아지며 힘을 받았다. 그런 심상치 않은 동요는 끄나풀이나 형사들을 통해 즉각즉각 보고되었다. 읍장 하시모토는 경찰서와 자체 조사를 통해서 그런 민심 동요가 심각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총독부에서는 20만 명에서 30만 명의 정신대를 동원할 모양인데 읍장으로서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도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여자 정신대 문제로 민심의 동요가 심각함 가급적 도회지와 중류층 이상은 피하면서 비밀리에 요령껏 실시하여 민심의 동요를 최대한 막을 것.’
하시모토는 도청의 기동력에 감탄하고, 또 그 해결책에 감탄했다. 가급적 도회지와 중류층 이상은 피하면서... 그건 바로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뚫어주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말을 뒤집으면 가급적 벽촌과 하류층에서 정신대를 동원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김제 읍은 곡창지대의 핵심이면서 군산과 전주를 잇는 중간지점의 도회지였다. 자신은 자연스럽게 정신대 동원 의무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만약 체면치레가 팔요하면 변두리의 하류층에서 무슨 꼬투리든 잡아 약간 끌어내면 될 거였다. 하시모토는 께름칙해 왔던 기분이 활짝 밝아지는 것을 느끼며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에에 또, 정신대 동원 문제로 민심이 별로 좋지 않다는 보고 내용은 잘 알고 있고, 나도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해 보기도 했소. 그동안에 민심 동향이 또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 어디 파악하고 있는대로 기탄없이 말해 보시오."
하시모토는 있는 껏 거드름을 피우며 예닐곱 명의 간부들을 휘둘러보았다.
"예에... 말씀 사뢰기 죄송합니다만 민심이 가라앉지를 않고 악화일로에 있습니다. "
오른쪽에 앉은 간부가 눈동자를 떨군 채 어렵사리 말했다.
"악화일로라..., 다음"
하시모토는 왼쪽 간부에게 턱짓했다.
"예에... 저 역시 심기 불편하실 말씀을 올리게 되어 면목없습니다만 민심이 날로 나빠지고 있음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날로 나빠지고 있음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날로 나빠진다..., 거 왜 그 모양인가. 다음"
하시모토의 턱끝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예에... 그날로 나짜지는 원인이 주로 여자들이 입을 쉴새 없이 놀려대서 자꾸 나쁜 소문이 증폭되고 또 증폭되고 하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여자들이 입방아를 찧어댄다..., 여자라는 종자들의 주둥이는 어디서나 문제지. 다음"
하시모토의 척은 다시 왼쪽으로 돌아가며 혀를 찼다.
"예에... 조선 속담에 여자들 악담에는 오뉴월에도 서릿발이 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자들이 모여 대일본제국과 총독부를 향해 온갖 악담들을 퍼붓고 있는데, 성전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 그건 몹시 불유쾌한 것인데 어찌해야 좋을지 참 난처한 바가 없지 않습니다."
"으으응, 그것 재수 없는 일이지. 여자는 백여우요, 요물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걸 모조리 불경죄나 유언비어 유포죄로 잡아넣을 수도 없고..., 다음"
하시모토의 눈초리에 독이 묻어나고 있었다.
"예에... 저도 심해지고 있다는 말씀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자아, 그 정도면 되었소. 에에 또 문제는..., 십분 좋게 보아주어 여자들이 자기네 딸들 징용당할까봐 모성애가 발동되어 민심을 어지럽히고 있는데, 그걸 가라앉히는 방법은 단 하나, 자기네 딸들이 징용당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하는 것 아니겠나."
하시모토는 간부들을 눈 아래로 깔아보며 마치 무슨 엄청난 예언이라도 하듯이 복소리에 거만을 묻혀냈다.
"예에,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예에,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간부들은 하나같이 나부와 아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를 내며 머리를 두 번, 세 번 조아렸다.
"다들 똑똑히 들으시오. 내일부터 각 동네별로 구장 반장 등을 총동원하여 앞으로 정신대 문제에 대해서 떠들거나 악담을 하는 경우에는 바로 그 집 딸을 징용한다는 점을 강력히 주지시키시오. 그리고 구장 반장들에게는 바로 그런 집을 적발해 내라고 강력히 지시하시오. 지금 내가 내린 지시가 제대로 전달되었는가 안 됐는가의 여부는 경찰력을 통해 확인하겠소. 모두 알아듣겠소?"
히시모토는 위압적으로 명령을 내리며 간부들을 휘둘러보았다.
"예, 알겠습니다."
"예,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간부들은 다시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간부들의 얼굴에는 석연찮은 빛과 주저하는 빛이 역연했다. 하시모토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하아, 왜들 그리 찜찜한 얼굴들이요 할말들 있으면 기탄없이 히시오."
히시모토는 담배를 탁자에 톡톡 두들기며 묘하게 웃고 있었다.
"예에...읍장님 지시사항은 명심, 시행하겠사옵니다만 그 지시대로 읍민들이 더 이상 떠들지 않고 일제히 입을 닫아버리는 경우에는 그게 좀 난처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오른쪽 첫 번째 간부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어물거리며 불안한 눈길로 하시모토의 눈치를 살피기에 분주했다.
"그런 걱정들인 줄 알았소. 그건 내가 알아서 책임질 테니까 여러분들은 내 지시나 확실히 시행토록 히시오. 만약 차후에 우리 읍에서 입놀리는 자들을 내가 발견할 시는 여러분들을 문책할 것이니 그리들 아시오. 이상 회의 마치겠소."
히시모토는 먼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간부들은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여전히 미심쩍고 의아스러운 얼굴들이었다. 하시모토는 창밖을 내다보고 담배를 빨며 비식이 웃고 있었다. 도청의 지시가 어차피 도회지 제외로 방향이 잡히고 그 일을 공개적으로 추진하기를 원하지 않는 이상 그 지시를 곧이곧대로 밝힐 필요는 없었다. 그건 상부의 지시에 급급하는 것 같아 읍장의 체면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방법대로 해야만 민심을 일시에 잠재울 수 있는 동시에 읍장의 막강한 권한을 읍민들에게 실감시킬 수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구장이나 반장들 중에서 과잉충성자들이 있어서 계속 입 놀리는 자들을 적발해 오는 경우 그때는 마음 놓고 징용을 할 수 있었다. 다수세력이 개개인의 이익을 따라 분산되어 버린 상태에다가 위반사항까지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임자 없는 밤 줍기인 것이었다. 하시모토의 계산은 적중했다. 김제 읍내서는 이틀 사흘 사이에 정신대 동원에 대한 불평불만은 마당의 눈을 쓸어버린 듯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 사실을 확인한 하시모토는 홍무과장을 은밀하게 불렀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으시오. 앞으로 사오일 안으로 변두리 지역의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정신대의 대상이 되는 딸을 가진 집들을 한 사오십 가구 조사하시오. 하층민이되 말썽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없는 집으로 신경 써서 고르시오. 이 일은 총무과장만 알아야 하고, 추진과정에서도 극비리에 진행되어야 하오. 특히 신경 써야 할 것은 한 동네에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오. 분산, 분산시켜야 하는 것을 잊지 마시오.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내 그 공을 잊지 않겠소. 할 수 있겠소. 할 수 있겠소."
하시모토는 그 목소리도 낮았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 총무과장을 믿겠소."
하시모토는 은밀하게 웃으며 총무과장의 어깨를 두들겼다.
"예, 반드시 책임완수를 하겠습니다."
총무과장은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낮은 대답에 힘이 뻗치고 있었다. 총무과장을 내보낸 하시모토는, 총독부가 하는 일은 너무 서툴러. 내가 군문에 발을 들였더라면 딱 총독감인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까짓 여자 2, 30만을 동원하는 데 번거롭고 어리석게도 법이고 뭐고 공포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행정 조직에 긴급지시를 내려 전국 벽촌의 읍, 면에 할당을 하면 아무 말썽 없이 감쪽같이 해치울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걸 괜히 법을 만들고 한 덩어리로 뭉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총독부 고급관리라는 것들은 그저 권세나 떵떵거리고 치부나 이골나게 잘했지 세상 판세 돌아가는 인심을 모르고,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묘수도 모르는 자들이었다. 기껏 한다는 짓들이 탁상머리에 둘러앉아 무작정 이 법, 저 법 만들어 대포를 쏘아대는 것만 능사로 삼는 아둔하고 요령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것이 하시모토였다. 하시모토는 제아무리 잘난 척해 봤자 정신대라는 것이 왜 필요하며 그동안 어떤 방법으로 조달되어 왔는지를 종합적으로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인 지방의 읍장일 뿐이었다. 그러나 총독부에서는 전쟁상황은 급박해져 가고, 군인들의 사기는 떨어져 가고, 군대 위안부들은 대량으로 필요해져 가고, 군인들의 사기는 떨어져 가고, 군대 위안부들을 대량으로 필요한데 그전처럼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필요한 여자들을 충당할 수 없으니까 단시일 내에 목적을 달성히기 위해 법을 앞세워 적극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일본이 군용위안소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만주를 침략한 직후인 1931년이었다. 그때는 유곽에서 몸을 팔던 여자들을 모아 데려간 것이었다. 그런데 매춘부가 아닌 일반 처녀들 1백여 명으로 일본군이 육군위안소를 직영을 개설한 것은 중일전쟁이 터진 다음해인 1938년이었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일본의 낭인패거리들과 조선의 친일파 매춘업자들을 동원해 돈벌이 좋은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 여점원을 하면 돈도 벌고 동부도 할 수 있다, 간호부는 사람 대접받고 돈도 많이 벌고, 의사하고 결혼도 할 수 있다. 이런 거짓말을 꾸며대서 사기극을 벌이며 처져들을 군용 위안부로 끌어갔다. 그러다가 1974년 12월 말에 태평양전쟁의 전선 전역에 걸쳐 기지위안소 개설을 명령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조선여자들의 인원수를 물품대장에 올려놓고 각 부대에 물품으로 배급했다. 이때부터 총독부에서는 근로정신대로 위장된 종군위안부들을 손쉽게 끌어가기 위해서 친일파 지식인들과 문인들을 동원했다. 그들은 순회강연을 하고 잡지에 글을 쓰고 해서 총독부가 원하는 만큼 조선여성들을 종군위안부나 근로정신대로 끌어가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시인 주요한은 1941년 국민문학 11월호에 댕기라는 시를 썼다.
나라의 부름 받고 가실 때에는
빨간 댕기를 드리겠어요
몸에 지니고 싸우시면
총알이 날아와도 맞지 않아요.
북쪽에서 돌아오는 기러기는
갈대 밑에 재우겠어요
꿈에 돌아오시는 당신은
원앙침에 주무시게 하겠어요.
아무르의 얼음도 여름에는 녹겠지요
녹았어도 소식이 없는 여름일랑
까만 댕기에 하이얀 간호복 입고
저도 나라 위해 있는 힘 다 바치겠어요.
서강 저녁놀의 타는 듯한 붉은 핏빛은
장렬하게 싸우다 산화하신 당신의 피
무언의 개선, 마을 역 앞에서
하이얀 댕기 드리우고 만세를 외치겠어요.
그리고 시인 노천명은 1942년 3월 4일 자 매일신보에 부인 근로대라는 시를 썼다.
부인 근로대 작업장으로
군복을 지으려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
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올라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두 땀 무운을 빌며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
훌륭히 싸워 주 공을 세워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만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또한 시인 모윤숙은 친일의 시들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한 직후에 조선임전보국단이란 친일어용단체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우리들 여성의 머릿속에 대화혼이 없고 보면 이 위대한 승리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며 여성들이 일제의 전시 동원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나설 것을 역설했다. 그리고 이화여전 교장인 김활란은 1942년 신세대 12월호의 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라는 글에서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든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반도 여성은 웃음으로 내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며 여성들이 일제의 전시 동원에 앞장서라고 충동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4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일본군의 전황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병사들의 사기도 저하되어있었다.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종군위안부들이 대량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그 급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독부에서는 법이라는 칼을 휘두르고 나선 것이었다.
김제 경찰에서는 날마다 가난에 찌들려서 메마르고 궁상스러운 사람들이 몇 명씩 끌려와 있었다.
"폭력을 할 거라고 누가 그랬어. 빨리 대"
형사가 싸리나무 회초리로 상투 튼 오십객의 남자 목을 후려쳤다.
"아고. 아이고메에에... , 그냥 장터서, 장터서 들은 말이랑게라. 긍게 누가 그랬는지 어찌 알겄능게라. 죽을죄럴 졌구만이라. 살래주시게라, 살래주시게라."
겁에 질리고 양쪽 입꼬리에 침버캐가 낀 남자는 손을 싹싹 비비댔다.
"이 새끼 이거 거짓말하는 것 봐. 그런데 왜 그말을 여기저기다 퍼뜨리고 다녀. 누가 시켰지 그게 누구야. 빨리 대."
"아크크크... 아니랑게라, 아니랑게라. 하도 요상시런 말이라 혀본 것이제 시킨 사람 없구만이라. 지가 거짓말허면 개아덜이구만요. 아이고 참말로, 이 가심얼 팍 짜개 뵐 수도 고. 잘못혔구만이라우, 잘못혔구만이라우."
회초리로 후려칠 때마다 붙에 덴 것처럼 몸을 솟구치는 남자는 그저 비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너 같은 놈은 어찌 되는지 알아 그따위 불온한 말로 민심을 어지럽히는 놈들은 다 사형이야, 사형."
형사는 남자를 험상궂게 노려보며 쪽 편 손바닥으로 복을 자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아이고메에에, 살래주시게라우, 사시넌 안 그럴 것잉게 한 분만 살래주시게라우."
"너 같은 놈은 즉각 죽여야 해. 따라와."
형사는 남자의 멱살을 잡아끌고 유치장으로 데려갔다. 밤이 되자 형사가 나타났다.
"이봐, 너 정말 누가 시켜서 그런 말 퍼뜨리고 다닌 게 아냐"
"하먼이라, 하먼이라. 하늘이 내래다보고 있구만요."
남자는 곧 울 듯이 철창을 붙들고 매달렸다.
"그래도 소용이 없어. 그런 말을 하고 다닌 죄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형사의 말은 싸늘했다.
"아이고메, 살래주시씨요, 살래주시씨요."
"글쎄에, 살아날 길이 있기는 있을 건데 말야..."
"아이고메, 무신 일이고 시키는 대로 헐 것잉게 살래만 주시씨요."
"글쎄에, 그게 정말이야."
"야아, 야 살래만 주시씨요."
"그럼 내가 손을 써볼 테니까 딸을 정신대로 보낼 수 있어"
"야아, 그러제라."
"그럼 여기다가 지장 눌러봐."
남자는 형사가 내민 인주를 엄지손가락에 묻혀 종이에 손도장을 눌렀다. 다음날이면 또 다른 사람이 끌려와 취조를 당했다.
"이봐, 왜 남의 집 물건을 훔쳤지 그것도 일본사람 상점 것을 말야."
형사가 막대기로 책상을 톡톡 치며 여자를 노려보았다.
"야아, 하도, 배가 고파서..."
옷도 남루하고 얼굴도 마를 대로 마른 여자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상점에서 몇 번이나 도둑질을 했지."
"아, 아니구만이라. 요분이 첨이구만이라."
"잔소리 마라."
형사가 막대기로 책상을 내리쳤다.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바르르 떨었다.
"그 상점에서 물건을 자꾸 도둑맞는 것 아는데, 바른대로 대."
형사가 눈을 치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랑게라, 아니어라. 참말로 요분이 첨이어라."
부들부들 떠는 여자의 말에 울음이 묻어나고 있었다.
"거짓말하면 죄가 더 커진다는 걸 몰라 좋은 말로 할 때 바른대로 대."
"아이고메, 사람 환장허겄능거. 잼편이 징용 나가고 새끼덜 믹에살리니라고 하도 배럴 곯다봉게 나도 몰르게 그리 된 것이구만이라. 참말로 첨이어라."
여자는 떨면서 손을 비비며 빌고 있었다.
"이게 정말 맞아야 정신차리겠어."
형사가 막대기로 여자의 어깨를 후려쳤다.
"워메"
여자의 몸이 들썩했다.
"더 맞기 전에 빨리 대."
형사가 또 막대기를 치켜들었다.
"아니어아, 아니어라. 나 복장 터져 죽겄소. 딱 첨이랑게라."
손을 싹싹 비비대는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형사는 여자의 어깨를 잡아챘다.
"아이고메, 살래주시씨요, 살래주시씨요. 나가 1년이나 징역살이럴 허먼 우리 새끼덜 다 굶어죽소. 한 분만 살래주시씨요."
여자는 유치장으로 끌려가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아이고메 , 아이고메, 요 이얼 으째야 쓸끄나. 우리 새끼덜 다 굶어 죽게 생겼는디 으째야 쓸끄나아."
여자는 우치장에 갇혀 통곡을 했다.
"이거 왜 이리 시끄럽게 떠들어. 여기가 당신네 안방인 줄 알아 당장 입 닥쳐."
다른 형사가 나타나서 소리쳤다. 그런데 그 형사는 목소리만 클 뿐 아까의 형사에 비해 썩 부드러운 태도였다. 여자는 그 기미를 눈치채고 철창에 매달렸다.
"나으리, 나으리, 나 잠 살래주시씨요. 나가 징역살이허먼 우리 불쌍헌 새끼덜 다 굶어 죽소."
"내가 아까부터 들어보니 사정이 딱하기는 한데, 아주머니가 지은 죄는 있고, 자식들은 살려야겠고, 아주머니가 내 누이동생 나이 또래라 도와주고 싶기는 한데..., 내 생각으로 아주머니가 풀려날 길은 딱 한 가지가 있소."
"고것이 머시다요 풀려나기만 험사 무신 일이고 다 허겄소. 나 잠 살래주시게라."
여자는 철창 사리로 곧 머리를 내밀 것 같은 기세였다.
"정말이오?"
"하먼이라, 하먼이라."
여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러니까 말이오, 큰딸을 정신대에 보내고 다른 자식들을 살리도록 하시오."
여자의 얼굴이 문득 굳어졌다.
"머시나, 우리 큰딸이 열시 살밖에 안 묵었는디라"
"만으로 열두 살부터니까 딱 맞소."
"그 에린것얼..."
"그게 무슨 소리요. 학교에 다니면 국민학교 6학년인데. 지금 국민학교 6학년들이 당당하게 정신대에 나가는 걸 보지도 못했소?"
여자는 철창을 놓고 주저앉으며 기운 다 빠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벨수 없제라. 남은 자석덜 싯얼 살래야 헝게..."
50. 패전의 길
파라오의 맑고 맑은 바다는 청록색으로 이루어진 무지개였다. 바닷물이 어찌나 맑은지 물속의 검은 바위들이 꿰비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잔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도 환히 들여다보였다. 그리고 더 아름다운 것은 그 색깔이었다. 물의 깊이에 따라 녹색과 청색이 연한 색에서부터 진한 색까지 여러 층을 이루면서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청록색 무지개로 피어나고 있었다. 수평선도 가이 없이 넓었고, 아스라한 수평선 그 끝에서는 새하이얀 구름들이 언제나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순임이는 또 그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순임이가 바라보고 있는 쪽은 서북쪽이었다. 그쪽이 조선 쪽이었던 것이다. 위안소의 여자들이나 노무자들은 한결같이 그쪽을 바라보고는 했다. 순임이는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눈앞이 흐리멍텅했으며, 속이 메슥거리면서 자꾸 구역질이 솟고 있었다. 606 주사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성병에 걸려 또 그 독한 606 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606 주사는 어찌나 독한지 밥맛을 완전히 떨어지게 했고, 얼굴 색깔까지 노랗게 변하게 했다. 그 주사가 원래 독하기도 독하지만 성병을 빨리 낫게 하려고 양을 많이 쓰기 때문이라고 했다. 위안소 여자들 사이에서는 606을 많이 맞으면 애기보를 상해 영영 아이를 봇 낳게 된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순임이는 또 죽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 맑고 푸르른 바다를 보면 언제나 죽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그런데 성병까지 걸려 독한 주사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니 더 한심하고 비참해 죽고 싶은 마음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죽고 싶은 마음을 꼭 가로막는 삶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순임아, 돈 많이 벌 욕심 내덜 말어. 돈이 사람 따라와야제 사람이 돈 따라간다고 되는 법이 아닝게. 돈이야 되는 대로 벌고 몸 성히야 쓴다 잉. 몸성허니 와야 혀, 몸 성하니..."
끝내 문 앞에서 이별해야 했던 어머니의 눈물 젖었던 얼굴이 어김없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삼월이가 바다에 빠져 죽은 후로는 죽는 것이 허망하고 무섭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삼월이는 군인들을 받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가 얻어맞기도 많이 얻어맞았다. 마루야마는 성질이 거칠은 만큼 매질도 무지막지했다. 아가씨들이 조금만 눈에 거슬려도 매질을 하는 마루야마가 돈벌이인 군인들을 받지 않으려고 하니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그런데 삼월이는 온몸에 멍이 가실 날이 없도록 두들겨 맞으면서도 군인들을 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이었다. 맞는 것이 너무 딱해 아가씨들이 나서서 여러 말로 삼월이를 달래고 타이르기도 해보았다. 그러나 삼월이는 그 짓을 하는 게 죽기보다 싫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맞으면서까지 군인을 받지 않으려는 삼월이의 마음을 아가씨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맞는 것으로 군인을 안 받는 게 아니라 맞고 나서 그 짓을 해야 했던 것이다. 아가씨들은 삼월이는 결국 맞아서 죽을 거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삼월이는 마루야마에게 붙들려 군 병원으로 끌려갔다. 삼월이는 며칠이고 돌아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삼월이는 거기를 수술받은 것이었다. 거기가 너무 작아서 거기를 찢어 키우는 수술을 했다는 것이었다. 삼월이는 열흘 만에 돌아왔다. 마루야마는 그날로 삼월이의 방에 군인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 군인을 물어뜯고 떠밀고 하는 소동은 마찬가지로 일어났다. 그날 밤 삼월이는 기절을 할 만큼 심하게 맞았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삼월이가 보이지 않았다. 해질녘에 신발은 작고 판판한 바위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그 끝이 서북쪽을 향해 있었다.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 채 순임이는 자꾸 풀을 뜯으며 아리랑을 읊조리고 있었다. 순임이의 눈에는 이제 바다는 보이지 않고 고향의 정경이 보이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지금 군인들에게 시달릴 시간이었다. 그러나 성병 때문에 주사를 맞는 동안은 군인들을 받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아가씨들은 누구나 성병이 무섭고 임신하는 것이 무서워 꼭 고무주머니를 사용하게 했다. 그러나 오후 늦게 오는 하사관이나 밤중에 오는 장교들 중에는 고무주머니 끼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잖았다. 쇠투구를 끼면 맛이 안 난다는 것이었다. 그런 계급 높은 사람들에게 규칙 위반을 내세우며 관계를 거부하면 마루야마의 매타작이 있을 뿐이었다. 마루야마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성병 검사는 괜히 하는 거냐고 소리쳤다. 성병이 걸리면 치료하면 되니까 값비싼 손님들 비위부터 맞추라는 것이었다. 사병 1원 50전, 하사관 2원, 장교 2원 50전, 자고 가는 장교는 3원이나 4원이니 돈벌이에 눈이 시뻘건 마루야마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마루야마는 처음에 약속했던 한 달에 30원씩의 돈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은행에 저금했다가 고향에 돌아갈 때 한꺼번에 준다고 돈을 구경시키지도 않았다. 어떤 아가씨는 돈을 집에 부쳐야 하니까 매달 달라고 했다가 누굴 의심하는 거냐고 소리치는 마루야마에게 매질만 당했다.
"순임아, 니 여그소 머하누."
순임이는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이, 분옥이구나. 어여 와."
순임이는 분옥이를 올려다보며 스산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분옥이라는 여자는 임시한 것이 완연히 표가 나도록 배가 불렀다.
"또 고향 생각허고 있었드나."
부옥이는 배를 받치며 거북스럽게 순임이 옆에 앉았다.
"허먼멀혀 설거지넌 다 큭어."
순임이는 풀잎을 씹으며 바다 저쪽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어물쩍 해치았다."
분옥이는 배가 불러지면서 군인들을 못 받게 되자 식당으로 옮겨 부엌일을 하게 되었다. 원래 일하던 원주민 둘 중에 하나를 내보낸 것이었다.
"인자 얼매나 남었어."
순임이가 분옥이의 배에 눈길을 주며 물었다.
"한 달 좀 못 남았제."
"그걸 낳서 으쩐댜?"
"우짜기넌. 땅에 파묻어삐는 기지."
분옥이는거침없이 말하고는 혀를 톡 찼다. 순임이의 얼굴이 괴로운 듯 찌푸려졌다.
"그래도 요것이 효잔 기라. 요것 덕에 그 더러분 짓 안헌 기 발써 몇 달이고. 요것이 나오지 말고 고챵 가기전까지 그대로 있었으믄 얼매나 좋겄노."
분옥이가 쓰게 웃었다.
"담배 있소 담배 없소, 담배 있소 담배 없소."
좀 이상스럽게 들리는 조선말에 순임이와 분옥이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맨발에 헌옷을 걸친 원주민 노인이 똑같은 소리를 부슨 노래하듯 되풀이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용타, 저 미런시러분 것덜이 조선말얼 다 헐지 알고 말다."
"우리 노무자 아자씨덜헌티 담배 얻어피울라고 일삼아 배운 것이제 아리랑 잘 부르는 사람덜도 많덜 안혀. 아자씨덜이 여그다 냄기고 간 것이 아리랑허고 저 두마디 말이로구만..."
순임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담배 있소 하는 말은 원주민들이 조선 노무자들에게 담배를 달라고 하는 말이었고 담배 없소는 노무자들의 대답이었다. 1939년까지만 해도 거기만 겨우 가린 채 발가벗고 살아온 원주민들은 담배를 뒤늦게 배워 그들이 접촉하기 쉬운 조선 노무자들에게 얻어 피우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삼아 조선말 한마디를 배운 것이고, 담배를 배급받고 있는 노무자들로서는 그들에게 줄 담배까지 남아돌지 않아 담배 없소 라는 말을 자주 한 것이었다.
둘이는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너 달 전에 일어난 엄청난 사건의 충격에 또 휘말려 들고 있었다. 파라오에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벌써 조선의 노무자들이 5백여 명 와 있었다. 그들 중에는 가족을 데리고 온 사람들도 약간 있었다. 그들을 노무자라고도 했고 개척단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파라오에 군인들이 증원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증원된 일본군 속에는 징병으로 끌려나온 조선 청년들이 3, 40명이 있었다. 그들은 파라오에 돈 지 얼마 안 되어 노무자들과 접촉해서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에 대항하고 나섰다. 일본군은 다른 섬에 주둔하는 군인들까지 동원해 그들에게 동격을 감행했다 그 항전에 가담하지 않은 노무자 몇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일본군의 집중포화 속에 몰사했다. 일본군은 그 시체를 한 구덩이에다 다 파묻어 버렸다. 그들이 그렇게 쉽게 한 덩어리가 될 수 있었고, 항전에 나섰던 것은 만용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미군은 파라오를 3월 31일과 4월 1일 이틀 동안 맹렬하게 공습했다. 그리고 또 미군은 사이판섬의 상륙작전을 6월 15일에 시작하면서 엄청난 공습을 가해대고 있었다. 바로 그 시기에 파라오에서는 그들이 뭉쳐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미군이 파라오에 상륙할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태평양 고도의 원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순임아, 우예 됐든지 간에 니나 나나 요새 그 드러분 짓 안하니께네 천만다행인 기라. 와 요새 와서 군인놈덜이 그리 사납게 변허는지 우리가스나덜이 시끕 묵능다 아이가."
"즈그 놈덜이 쌈에 지게 생겼응게 지랄발광덜 허는것이제."
"왜놈덜이 지기넌 지겄제."
"하먼, 사이판섬얼 뺏긴 지가 은젠디."
"그라모 우리도 고향 갈 날 얼매 안 남은 거 아이가. 몸조심하제이."
"그려, 그래야제..."
순임이를 따라 분옥이도 한숨을 쉬었다.
1944년 6월 15일에 사이판섬의 상륙작전을 개시한 미군은 7월 10일에 작전을 성공시켰다.
며칠이 지난 아침나절이었다.
쾅 콰당쾅쾅 콰광쾅
느닷없는 폭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에그머니나"
"아이고메."
"어무이요"
아가씨들은 제각기 비명을 지르며 방에서 뛰쳐나왔다. 계속 터지는 폭음과 함께 집이 곧 무너져 내릴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가자, 여기 있으면 죽는다."
"아니야, 곧 끝날 거야. 이런 일 한두 번 당했나 뭘."
금방 패가 갈라졌다 반수는 벌써 집을 뒤쳐나가고 있었고, 나머지 반수는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먼저 위안소를 나간 여자들이 빈처를 가로질러 숲속으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 새로 터지는 폭음들과 함께 위안소가 불길에 휩싸였다.
"저, 저..."
"안돼, 안돼..."
그들은 숲속에서 발을 굴렀다. 위안소는 폭삭 무너지며 불붙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 나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분옥아..., 분옥아아...,"
순임이는 나무를 붙든 채 분옥이를 부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폭탄은 쉴새 없이 떨어지고, 코롤 시내는 여기저기서 검은 연기와 함께 불길이 솟고 있었다. 싸이렌 울리는 소리와 양철 지붕에 소나기 쏟아지듯 하는 총소리와 사람들의 비명과 아우성과 군인들이 내닫는 군홧발 소리와 폭음과 폭음이 얽히고설키고 뒤엉키며 코롤 시내 일대는 수라장이 되고 있었다.
"폭탄이 이쪽으로도 떨어진다."
"여그 있으먼 안 되겄다. 산으로 피허자."
그들은 숲속을 뛰기 시작했다. 순임이는 손등으로 눈을 씩씩 문지르고는 그들을 따라 뛰었다. 폭격은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산에서 바라보는 코롤 시내는 완전히 불바다였다. 비행기는 코롤 시내만이 아니라 섬 안에 있는 건물이라는 건물에는 차근차근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폭격은 밤에도 계속되었다. 어디에서 불빛만 반짝했다 하면 여지없이 그곳에 폭탄이 떨어졌다. 폭격은 다음 날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도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산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나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폭탄은 대중없이 산에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찢기고 터진 사람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사람들은 배가 고파 허덕거리며 폭탄을 피해 다니다가 뒤늦게 왜 산을 폭격해대는지 알았다. 군인들이 산으로 피했기 때문이었다. 폭격은 나흘, 닷새 계속되었다. 순임이네 일행은 열셋에서 여덟으로 줄었다. 다섯이 폭탄에 맞아 죽은 것이었다. 그들은 굶다 못해 골짜기의 개울에 있는 커다란 달팽이를 잡아먹기로 했다. 그동안 산열매는 많은 사람들이 다 따먹어 동이 나버렸다. 산에서 쌀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군인들 뿐이었다. 군인들은 분대별로 몰려다니며 낮에만 밥을 해 먹었는데, 그들의 눈빛이 이상한 게 제정신들이 아닌 것 같았다.
폭격은 파라오와 가까운 섬들에도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었다.
"세상에 무슨 비행기가 그리 많고 무슨 폭탄이 그리도 많니."
"왜놈덜 씨럴 말릴 작정인 갑다."
"왜놈덜 씨 말릴라쿠다가 우리도 다 죽겄다."
순임이네 일행은 이제 다섯으로 줄어들었다. 그들은 이제 도마뱀과 뱀도 잡아먹었다. 원주민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의 꼴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밤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군인들은 총을 들이대며 옷을 벗으라고 했다. 군인들은 예닐곱 명 되었다.
"좋아요. 얼마든지 위안을 해줄 테니까 그 대신 쌀을 좀 줘요. 우리는 며칠동안 계속 굶어서 죽을 지경이에요."
누군가가 나서서 말했다.
"아, 바로 조센삐로구나. 좋아, 주지."
그들은 군인들의 담요를 깔고 치마를 걷어 올려야 했다. 순임이와 관계를 한 군인은 엎드린 채 울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내일 싸우러 나간다고 했다.
"우리는 오늘 밤이 마지막이다. 내일 나가면 다 죽는다. 너희들은 살아서 돌아가거라."
어느 군인이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 번, 네 번 달겨들었다. 우는 일본군은 처음 보았던 것이고, 그도 어느 집 귀한 아들이라는 생각에 딱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새벽에 군인들은 떠나갔다.
폭격은 열흘을 넘겼다. 순임이네는 셋으로 줄었다. 산골짜기마다 시체 썩는 냄새로 잔동하고 있었다. 순임이네는 항고를 꼭들고 다니며 도마뱀이며 쥐를 거기에다 익혀 먹었다. 열사흘째 되는 날 순임이는 폭격을 당했다. 혼자남은 아가씨가 순임이를 부르며 통곡했다. 보름 만에 폭격이 끝나고 비행기에서 삐라를 뿌렸다. 조선 사람은 손들고 나오라고 한글로 씌어 있었다. 연합군은 1944년 5월 15일에 파라오의 한섬인 페리류에 상륙했던 것이다.
"빨리 타라, 빨리 빨리!"
야마가다가 손을 내저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자동차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줄지어 달리고, 군인들이 어지럽게 뛰고 있었다. 폭음은 사방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복실이 일행은 정신없이 자동차로 떠밀려 올라갔다. 포장친 차 안에서 군인들 몇 명이 그녀들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동차가 출발하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한씨 아저씨 어디 있지?"
한 아가씨가 두리번거렸다.
"으응 안 보이네."
"야마가다하고 저 앞에 타고 있겠지 뭐."
"아닌디. 한씨는 야마가다 꼬봉으로 우리럴 감시나 하제 그럴 자격이 없는디."
복실이의 말이었다.
"그래, 그 말이 맞아. 그런데 어딜 갔지?"
"도망간 거 아니가?"
"맞어, 그 백여시가 그랬을랑가도 몰러. 얼렁 야마가다한틔 알리자."
복실이가 야무지게 말했다.
"그래야 되겠다. 우리가 당할 필요는 없잖아."
"맞다. 벌 끼 없어 매 벌게 생겼나."
그래서 그들은 목소리를 합쳐 <야마가다상!>을 외쳐댔다. 그런데 그 목소리들은 생기가 돌고 있었다. 자동차가 멈추고 야마가다가 뒤로 뛰어왔다.
"뭐야!"
야마가다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으로 찢어졌다.
"한씨가 없어요, 한씨."
어느 아가씨가 일부러 <한씨>라고 말했다. 야마가다가 펄쩍 뛰듯이 놀랐다.
"어디 갔나요? "
다른 아가씨가 묘한 어투로 물었다.
"이놈이, 이런 족제비 같은 놈이 도망을 갔구나. 이런 죽일 놈이."
아가씨들은 웃음을 참으며 눈길을 주고 받고 있었다. 야마가다는 앞으로 갔다가 되돌아와서 차에 올랐다. 자기가 아가씨들을 감시하겠다는 뜻이었다.
"나쁜 놈의 새끼, 은혜를 배신하다니. 제놈이 가면 어딜가. 폭타에 맞아 뒈지겠지. 조센징, 갬만도 못한 놈!"
야마가다는 이빨로 말을 갈아내듯이 하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가씨들은 야마가다가 당한 것을 보고 고소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씨에 대한 믿고 괘씸한 감정은 더 커지고 있었다. 자신들을 여기까지 끌고 와서 그렇게 못되게 군 것도 원한이 맺혔는데 형편이 위급하게 되니까 혼자서 미꾸라지처럼 도망을 가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아가씨들은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일본군이 몰리고 있는 전세는 생각보다 훨씬 불리하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이길 가망이 없으면 한씨가 도망을 갔을 것인가. 폐구에서 만달레이로 옮겼을 때 벌써 쫓기고 있다는 것을 다 눈치챘던 것이다. 만달레이로 와서도 하뤄도 편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비행기의 폭격은 날로 심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두 달이 못 되어 어디론가 쫓겨가고 있는 것이다. 그 눈치 빠른 한씨가 도망가버린 것은 일본군이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뭉일 것이다. 일본이 지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아가씨들은 한씨가 도망가 버린 충격과 함께 불안에 휩싸이고 있었다. 복실이는 또 말숙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폐구를 떠나올 때 말숙이는 함께 오지 못했다. 실성한 것이 낫지 않아 쓸모가 없으니까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차가 떠나고 나서야 그것을 알았고, 함께 데리고 가야 한다고 야마가다에게 덤벼들었다가 흠씬 두들려 맞기만 했다. 실성한 말숙이가 어디를 떠돌고 있는지 생각할수록 기가 막힐 뿐이었다. 어쩌면 진작 세상을 떠났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매일 폭탄이 질정 없이 떨어지고, 먹을 것은 없고, 실성한 말숙이가 살아갈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또 말라리아에라도 걸리면 더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바쿠온! 바쿠온!"
자동차가 갑자기 멈추면서 들려온 외침이었다.
"빨리 내려, 빨리!"
야마가다는 차에서 뛰어 내리면서 소리쳤다. 아가씨들은 재빨리 차에서 뛰어 내리면서도 놀라지 않았다. 그놈의 <바쿠온!>이란 소리는 그동안 신물나게 들어온 것이었다.
"저 장글로 들어가, 장글로!"
야마가다가 겁 실린 얼굴로 방정맞을 만큼 빠른 손짓을 하고 외치고 있었다. 자동차는 숲 가까이에 밀어붙이느니라고 야단법석이었다. 비행기에서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쾅 콰광 쾅
가까이에서 폭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복실이 일행은 정글 속을 마구 뛰었다. 자동차에서 한 발짝이라도 더 떨어지자는 것이었다 야마가다가 앞장섰고, 함께 타고 있었던 군인들이 아가씨들을 뒤따르고 있었다.
"됐어, 여기 서."
야마가다가 뛰기를 멈추었다. 무성한 나뭇잎들이 얼크러져 하는이 잘 보이지 않았다. 키 큰 나무들만 울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 아래로는 또 온갖 종류의 풀들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그 풀들도 풀이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키도 크고 잎도 억셌다. 여름뿐인 땅에서 가장 신바람 나는 것은 정글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과 풀이었다. 아가씨들은 조그만 바위 옆에 오글오글 모여앉았다.
"그렇게 한데 모이지 말고 멀찍멀찍 떨어져. 몰사하고 싶지 않으면 빨리 떨어지란 말야"
야마가다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아가씨들은 마지못해 나무 하나씩을 등지듯 안 듯 하며 서로 떨어져 섰다. 정글 속에서는 낮에도 모기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가씨들은 폭탄보다도 당장 눈앞에 있는 모기에 질겁을 했다. 그들에게 말라리아는 성병만큼 무서운 병이었다. 아니, 성병은 606 주사를 맞으면 낫기나 하지만 말라리아는 키니네를 먹어도 잘 낫지를 않았다. 균이 워낙 독해서 그런다는 것이었다. 몸이 약한 사람은 하루걸이로 오르는 열에 부들부들 떨며 한두 달 앓다가 시름시름 죽어갔다. 말라리아로 죽은 아가씨가 서넛이었다. 일본군의 90%가 말라리아 보균자인 것처럼 아가씨들도 다 한 차례씩은 말라리아를 앓았던 것이다.
폭탄은 계속 떨어지고, 정글에서 놀란 새들이 요란스럽게 울어대며 날개를 퍼득거리고 있었다. 원숭이들도 날카롭게 꽥꽥거리며 어지럽게 날뛰고 있었다.
"어머, 자동차가 탄다."
"아이고메, 큰일났네."
아가씨들의 눈길이 일제히 자동차 쪽으로 쏠렸다. 자동차는 한두 대가 불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칙쇼 칙쇼"
야마가다는 마구 욕을 해대며 막대기로 풀줄기들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려, 그려, 잘헌다. 아조 아 불 질러부러라"
복실이는 속 시원한 것을 느끼며 자동차들이 다 불타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쾅 쾅 콰광
폭탄은 정글 속에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불타는 것을 보고 군인들이 정글 속에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엄아아"
"엄니이"
아가씨들은 혼비백산 뛰기 시작했다. 군인들도 이리저리 뛰었다.
"너무 멀리 가지 말어 너무 멀리 가지 마"
그 경황 중에서도 야마가다는 소리소리 지르며 아가씨들을 단속하기에 바빴다.
‘이대로 도망을 가버리면 어떨까.’
복실이는 아름드리나무 뒤에 숨으며 생각했다.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이 었다 식당에서 일하던 원주민 아주머니들이었다. 한씨가 그렇게 도망을 칠 줄 알았더라면 자신도 그 아주머니들에게 숨겨달라고 부탁했어야 했다. 그럼 그 아주머니들은 틀림없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 아주머니들은 가난해서 식당에서 일을 할 뿐 일본사람들을 아주 미워했고, 강제로 끌려와 그 짓을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무척 딱해했던 것이다.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데리고 다니지 않고 그때그때 새로 구했다. 복실이는 이번에 옮겨가는 곳에서 아주머니들하고 잘 사귈 생각을 하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기서 도망치다가 잡히면 반 죽게 얻어맞을 것이고, 잡히지 않는다고 해도 아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고, 당장 한끼 먹을 것도 수중에 없었던 것이다.
"으아악"
느닷없이 터진 여자의 찢어지는 비명이었다.
"뭐야 왜 그래, 왜"
놀란 야마가다가 그쪽으로 허둥지둥 뛰어갔다. 아가씨들도 그쪽으로 몰렸다.
"뱀이 뱀이..."
왼쪽 다리를 붙들고 주저앉은 미순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미순이의 발목에는 바늘로 찔러놓은 것처럼 뱀의 이빨 자국들이 찍혀 있었고, 뱀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흔적도 없었다.
"이거 큰일났군, 이봐, 군인들 빨리 와봐, 빨리. 뱀에 물렸다"
야마가다가 허둥거리며 군인들을 부르고, 아가씨들은 미순이를 둘러싸고 조바심을 쳤다. 독사에게 물리면 즉사하니까 숲속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는 말을 그동안 자주 들어왔던 것이다.
"무슨 뱀이었어요"
군인 서너 명이 뛰어왔다.
"모르겠어, 모르겠어"
"어디 봅시다. 독사면 큰일인데."
아가씨들은 군인들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군인 하나가 무릎을 꺾고 엎드리며 미순이의 발목에 입을 대려는 순간이었다. 미순이가 피그르 쓰러졌다.
"아니"
"미순아아"
미순이는 눈을 번히 뜬 채 숨이 끊어져 있었다. 아가씨들은 하얗게 질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꼭 거짓말처럼 그렇게도 빨리 사람이 죽어버리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뱀에 물리지 말아야지요."
군인들이 돌아가며 말했다.
"어쩌지요"
미순이를 내려다보며 한 아가씨가 울먹였다.
"풀을 꺾어 덮어."
야마가다의 대꾸였다.
"저 군인들보고 좀 묻어달라고 그러세요."
"군인들이 민간인 무덤 파는 일도 있나."
야마가다가 내쏘았다.
"우리가 그냥 민간인인가요 그동안 군인들한테..."
"잔소리 말앗."
야마가다가 홱 돌아서 버렸다. 아가씨들은 울면서 잎이 크고 넓은 풀줄기들을 꺾기 시작했다. 미순이는 간호원이 되는 줄 알고 선도금 같은 것도 없이 끌려왔다고 했다. 미순이는 아버지의 소작 신세를 면하게 해드리려고 했던 것인데 이 꼴이 되었다며 서글프레 웃고는 했었다. 미순이는 노래를 꽤나 잘해 모두 좋아했던 것이다 그동안 미순이가 부르고 따라서 합창한 아리랑만 해도 수백 번은 될 것이었다. 복실이는 특히 미순이가 슬프디슬프게 부르는 울밑에 선 봉선화야를 좋아했었다.
"미순아, 잘 가그라잉"
복실이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손이 찢기거나 말거나 억센 풀잎 줄기를 꺾어대고 있었다.
폭격이 끝나고 정글을 벗어났다. 그들의차는 파편에 몇군데가 우그러지고 찍히고 했을 뿐이었다.
"깊이 파지 말고 빨리빨리 묻어라."
"집합, 집합"
폭격으로 죽은 군인들이 있는 모양이었고, 사방은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다.
"차 뺏기기 전에 빨리빨리 타"
야마가다는 미순이가 죽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듯 자동차가 무사한 것만 좋아서 벙글거렸다. 계속 폭격을 당하면서 정글로 숨고, 다시 차를 타고 해서 나흘 만에 도착한 곳이 라시오였다. 만달레이레서 그랬듯 그들은 어느 커다란 2층집으로 들어갔다. 어떤 부자가 살았던 집인지 발도 많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구들도 더러 남아 있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저녁밥은 가까운 부대로 먹으러 갔다.
"야아, 위안부들이다."
아, 반갑소, 우리 위안 좀 잘 해주게.
"다들 예쁜데. 히히..."
군인들이 반색을 했고, 이를 드러내며 헤벌쭉 웃기도 했다.
"빌어먹을 놈들."
"아이구 징그러워."
목소리를 낮춘 아가씨들은 부르르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저녁밥을 먹고 돌아오는데 키 작은 하사 하나가 야마가다를 따라왔다. 아가씨들은 그 하사가 한씨 대신 배이 되는 것임을 직감했다.
"내일부터 일 시작이다. 빨리빨리 자기들 방 청소해."
방 배정을 끝낸 야마가다의 지시였다.
"저거 아주 독하게 생겼다."
"그려, 적은 꼬치가 맵드라고 아조 깡아리가 있게 생겼는디."
아가씨들은 자기네 방으로 돌아가며 하사에 대해 수군거렸다. 역시 그들의 예감대로 그 하사는 한씨 대신 배치된 것이었다. 이튿날부터 아가씨들은 인육지옥으로 빠져들었다.
"아이고메, 어찌 된 것이 우로 올라올수록 이놈덜이 성난 짐승덜이 된다냐."
그것도 모르나. 전쟁터는 가찹제 언제 죽을란지는 모르제 하니께네물불 안 개리고 덤비는 거 아이가."
"맞았어, 다 죽기 전에 발광들을 하는 거야. 그나저나 우리 조선청년들이나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 아니면 무슨 소식을 들을 수 있어야지."
"그래, 기왕이면 조선 청년들이 말 한마디라도 정이 붙고..."
아가씨들은 누구나 조선 청년들을 기다렸다. 조선 청년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고, 그들한테서 궁금한 소식을 한두 마디씩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며칠이 지나 그들은 이동병력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또 한바탕 까마귀 떼에게 뜯길 각오를 했다. 그런데 들이닥친 군인들은 그들의 각오를 비웃듯 거칠고 난폭하기 짝이 없었다. 먼지투성이인 구두를 신은 채 방에까지 들어오는가 하면, 아가씨들보고 각반을 풀고 구두를 벗기라고 명령했다. 하사관이나 장교들은 가끔 그런 경우가 있었지만 사병들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가씨들이 그 요구를 들을 리 없었다. 그러자 그 군인들은 거침없이 따귀를 갈기고 들었다. 이방, 저 방에서 아가씨들의 비명과 울음소리들이 터지고 그들의 욕설로 시끌덤벙해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야마가다와 하사의 태도였다. 그들은 이 방, 저 방으로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며 원하는 대로 다 위안해 드려. 이분들은 특별한 분들이야 하면서 아가씨들을 달랬다. 아가씨들은 그동안 눈치가 늘어 재빨리 태도를 바꾸었다. 굳이 거칠은 사람들을 상대로 폭행을 당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횡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자기들도 옷을 홀랑 다 벗고는 아가씨들에게도 다 벗으라고 했고, 고무주머니를 끼우지 않으려고 했고, 일을 한차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담배 한 대를 피우고는 또 달겨들고 또 달겨들었던 것이다. 아가씨들이 그걸 거부하면 칼을 뽑아 목에다 들이댔다. 정해진 30분 안에 몇 번을 하든 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야마가다와 하사가 똥 집어먹은 상이 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으니 아가씨들은 그 일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아가씨들은 그들이 도대체 어떤 특수부대 인지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가씨들은 하루종일 짓이겨져 또 걸음들을 엉기적이며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그것들 만주에서 온 놈들이래."
조선청년을 만났다는 아가씨의 말이었다.
"만주 그게 어떤 부댄데"
"그건 말 안해, 비밀이래."
"아이고 만주라카믄 멀리서도 왔네."
싸움에 지게 생겼으니까 만주의 군인들까지 끌어오는 거라고 복실이는 생각했다. 그건 극비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관동군 투입이었다. 며칠이 지나 복실이는 조선 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복실이는 우울해 보이는 그 청년을 정성스럽게 대해 주었다.
"요 새 전쟁판이 저찌 돼가고 있는게라."
복실이는 청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물었다.
"형편없소. 우리 부대는 반수 이상이 죽어 부대를 재편성하려고 일시 퇴각한 거요. 일본은 곧 질 거요."
청년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글먼 어쩌실랑가요"
"나도 모르겠소. 학병들은 기회만 있으면 영국군 쪽으로 탈주하고 있는데..."
"글먼 오빠도 그리허시제라."
",,,"
청년은 복실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울 듯한 얼굴이 되며 복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가씨나 조심해요. 여기서 전쟁터가 얼마 안 되니까."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51. 아이누족의 온정
일이 끝나고 나면 막사 안은 뒤숭숭해졌다. 노무자들은 십장이나 감독 모르게 수군수군하고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도로공사는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도로공사가 완전히 끝나면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 며칠 전부터 여러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유바리 탄광으로 가게 될 것 같다던데."
"뭐라구 유바리 탄광"
"아니, 그생지옥이라카는 탄광 아이가"
"맞구만 한분 들어갔다 허먼 살아서 나오기 에홉다는 탄광이 거그여."
"아니야, 비행장이 더 급해 비행장 닦으러 간다는 말도 있어."
"맞다, 나도 그런 말 들었는 기라."
"글세, 그런 말이 있기도 한데 어떤 것이 맞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나저나 어디가 더 나슬랑고."
"그야 석탄가루 안 마시는 석만으로도 비행장이 낫지."
"하모, 날마다 굴속에 드가먼 해럴 한분 지대로 보나, 숨얼 한분 지댜로 쉬나."
"어데 그뿐이가. 굴 무너져 저승객 되는 것언 우짜고."
"그래, 석탄 캐내기 어렵고 굴 무너질지 모를 나쁜 데로만 우리 조선 사람들을 딜여민대잖아."
"그도 그렇고, 잘 묵지도 못헌 속에 석탄가리 반년만 마시먼 다 폣병쟁이 된다는 것 아니여."
"맞다, 운 좋게 살았다캐도 폣병쟁이로 집 찾아가믄 머하겄노."
"그러게 말야. 땡전 한닢 벌지도 못하고 맨주먹 쥔 신세에 폣병쟁이나 돼서 집 찾아가면 그 꼴 참 한심시럽지."
"아이고, 처자석덜 어찌 사는고 모르겄다. 워째 요새넌 꿈도 잘 안 꿔지고."
"그러게 말야. 기한이 넘었으니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다 굶어 죽지나 안 했는지 모리겄다. 내사 마 처자석만 생각허믄 가심에서 피가 솟는다. "
"아이고 이놈으 신세, 전쟁이나 어서 끝아야 집으로 가제."
그들의 이야기는 언제나처럼 또 집 생각, 집 걱정으로 모아지며 한숨들이 깊어지고 있었다.
"타아향사아리 며엇해던가아..."
누군가가 노래를 시작했다.
"손꼽아 헤에어보니..."
곧 막사 안의 목소리들이 합해졌다. 그들이 단체행동으로서 유일하게 제지를 받지 않는 것이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업장에서도 점심때 같은 때는 모여앉아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 슬픔도 서러움도 깊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심도 달래지고 힘겨운 것도 이겨낼 수 있고는 했다. 제일 많이 부르는 노래가 아리랑이었고, 그다음이 도라지였다. 그리고 누가 무슨 노래를 시작하건 곧 합창이 되었다.
아아리라앙 아아리라앙 아아라아리요오...
노래는 아리랑으로 바뀌면서 이내 또 합창으로 어우러졌다. 아리랑은 진작부터 조선총독부가 부르지 못하게 한 금지곡이었다. 그런데 조선이 아니라서 그런지 어쩐지 일본인 감독들은 노무자들이 합창하는 아리랑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어떤 감독은 흥얼흥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어쪄면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아리랑이 금지곡이라는 것을 모를지도 몰랐다. 그런데 일본인 감독만 아리랑을 흥얼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북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족들까지 아리랑을 부를 줄 알았다. 그동안 조선의 노무자들이 이곳 저곳의 공사장에서 수없이 아리랑을 불러온 결과였다. 물론 조선 노무자들과 아이누족들과는 접촉이 철저히 금지되었다. 공사장이 아이누의 마을에서 가까운 듯하면 감독과 시장들의 감시는 더욱 철저해졌다. 조선 노무자들은 일본 경찰의 통제를 받고 있어서 그런지 공장에는 접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말리 지나다녔다. 그러면서 그들은 끝없이 바람결에 실려오는 아리랑을 익힌 것이었다.
아이누족들은 세 가지 점에서 일본사람들과 다른 것이 금방 표가 났다. 첫째 얼굴들이 검었고. 둘째 키가 작으면서 몸통이 굵고 동그라며, 셋째 머리카락을 완전히 뒤로 넘겨 색색의 치장을 하고 있어 그들은 대부분 일본 옷들을 입고 있었지만 그 특이한 생김은 한눈에 일본인과 다른 종족임을 구분할 수 있게 했다. 조선 노무자들은 그 아이누족과 일본인들과의 관계를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아 알게 되고는 했다. 북해도가 원래 아이누족들의 땅이었는데 일본사람들이 빼앗았고, 살기 좋은 땅은 일본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아이누족들은 산간으로 밀려 천대받고 산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왜 아이누족들과 접촉을 못하게 하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조선사람들과 아이누족들과 접촉을 못하게 하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조선사람들과 아이누족들은 같은 처지였던 것이다. 노무자들 사이에서는 자기들끼리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 은밀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아이누족들한테 도망가면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무자들은 쉽게 도주를 감행하지 못했다. 도망자들이 잡혀 와 처형당하는 참혹한 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 여기는 섬이다. 아무리 도망쳐 보아야 사방이 빙빙 둘러 바다다. 갈곳이 없으니 도망칠 생각은 안하는 게 좋다. 그런데 바보 같은 놈들이 가끔 도망을 친다. 그런 놈들은 반드시 잡힌다. 너희들도 일본 경찰의 조직망과 수사력이 어떤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잡혀 온 놈들은 절대로 살려두지 않는다. 너희들은 딴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또 바보 같은 놈이 생기는 경우, 그놈이 어떤 꼴로 죽어가는지 그때 보면 잘 알 것이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국민복 차림을 한 일본사람이 한 말이었다.
차득보네가 투입된 곳은 도로 공사장이었다. 북해도에서 조선 노무자들이 일하는 곳은 세 군데라고 했다. 탄광, 비행장, 도로 공사장인데 그중에서 제일 나쁜 곳이 탄광이라는 것이었다. 차득보는 도로 공사장에 떨어진 것을 그나마 큰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도로 공사장의 노동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루에 12시간씩 하는 중노동은 농사일보다 몇 갑절 더 힘이 들었다. 땅을 파고, 돌을 지고, 밀차를 밀고, 땅을 다지고 하는 쉴틈없는 일들이 농사일보다 중노동인데다가, 그 일에는 농사일과는 달리 흥겨움이나 즐거움이 없었던 것이다. 일에 흥이 돋지 않고 즐거움을 느낄 수 없으면 세상에 그 일처럼 힘겨운 일이 없는 것이었다. 농사일이야 정성을 들이고 힘을 쏟는 만큼 작물이 실하게 잘자라는 성이 눈에 보이고, 그 보람은 알찬 수확으로 결실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로공사는 아무리 고되게 해보았자 남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헛일이었다. 더구나 명색이 자작농으로 살아온 차득보로서는 도로공사가 더욱 허망하고 지겹기만 했다. 도로공사는 평지만이 아니어서 보통 힘 드는 것이 아니었다. 낮은 산줄기를 끊어내거나 경사진 산비탈을 깎아내게 될 때는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고 바위를 깨내고 하기 때문에 큰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을 위험도 많았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한층 힘겹고 고된 것은 배고픔 때문이었다. 한철 허리 휘는 농사는 밥심으로 짓는다는 말이 있었다. 아침 먹고, 샛밥 먹고, 점심 먹고, 샛밥 먹고, 저녁 먹고..., 그런데 그 밥이 그릇 담긴 것보다 위로 솟긴 것이 더 많은 고봉밥이 아니었던가. 그런 푸짐한 밥을 먹어도 한바탕 논일을 해대고 방귀 몇 번 뀌고 나면 푹 꺼져버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농사일보다 훨씬 억지 기운 써야 하는 중노동을 하면서 먹는 것이라고는 딱 세끼 밥뿐이었다. 그것도 말이 좋아 세끼지 그 양을 다 합해 놓아보았자 농사철 고봉밥 한 그릇이 될까말까였다. 더구나 반찬이라고는 단무지 한 가지가 제멋대로 나오다 말다 하는 그 밥을 먹고 하루에 12시간씩 일을 하자니 그 누구나 배가 고프고 기운이 달려 헉헉거렸다. 그렇다고 적당히 요령을 피울 숟 없었다. 그것을 막으려고 책임량을 정해 놓고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십장이나 감독들은 죽도며 몽둥이를 휘두르고 다녔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언제나 연락만 하면 트럭을 타고 득달같이 나타나는 경찰들이 있었다. 그러니 탄광만 생지옥이 아니었다.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4개월쯤 되어 마침내 한 사람이 밤중에 도망을 갔다. 남은 사람들은 눈 뒤집힌 십장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도망가는 것을 지키지 못한 죄였다. 그러나 그들은 터무니없이 매질을 당하면서도 도망간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이 잡히지 않기를 빌었다. 송아지만 한 개를 앞세운 경찰들이 수색을 나서기 시작했다. 도망간 사람은 이틀 만에 잡혀 오고 말았다. 그 사람의 처형은 곧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노무자들 5백여 명을 공사장에 모아놓고 그 사람을 끌어왔다. 그런데 손을 뒤로 묶인 그 사람은 팬티밖에 입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 사람은 노무자들이 막사별로 줄지어 앉은 앞쪽의 빈터에 세워졌다. 노무자들 양쪽으로는 경찰들이 열 명씩 총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사람을 잡아 온 경찰들이었다. 그리고 그 경찰들 앞에는 산줄기를 끊으면서 깨낸 돌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에에 또, 너희들이 여기 도착했을 때 내가 뭐라고 했었나 도망가 봐야 소용없다고 했었지. 저놈을 봐라. 저놈이 바로 내 말을 믿지 않은 악질 배반자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지. 도망가는 놈은 절대로 살려두지 않는다고 했다. 저런 놈은 시범조로 처벌해야 한다. 그런데 저놈한테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저놈이 도망갈 수 없도록 철저히 감시하지 않은 너희들에게도 죄가 있다. 그러니 너희들 손으로 저놈을 시범조로 처단해서 너희들의 시범을 삼도록 하겠다. 지금부터 처단을 실시하라."
총감독은 일본사람들이 좋아하는 시범조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앞줄 일어섯’ 감독하나가 나서서 구령했다. 앞줄의 노무자 50명이 일어섰다.
"똑똑히 들어라. 준비 명령에 따라 각각 25명씩 양쪽에 있는 돌을 하나씩 집어 들고 신속하게 3보 앞에 쳐진 줄에 맞춰선다. 그리고 실시 명령에 따라 저놈을 향해서 일제히 돌을 힘껏 던져라. 만약 돌을 던지지 않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던지거나, 힘없이 던지는 놈들은 모두 경찰서로 끌어갈 것이다. 다들 똑똑히 알아들었지. 자아 지금부터 시작하겠다. 준비이."
노무자들은 양쪽으로 갈라져 돌무더기에서 돌을 집어가지고 다시 일렬로 늘어섰다. 노무자들과 그 사람과의 거리는 20여 미터 정도였다.
"실시이."
노무자들의 손에서 돌들이 날아갔다. 돌들이 빗발치는 속에서 그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다음 줄, 일어섯."
두 번째 줄의 노무자들이 일어서는데 저쪽에서는 십장 두 명이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이마와 얼굴, 가슴팍 같은 데서 피가 내비치고 있었다 눈을 꼭 감은 그 사람은 허리를 약간 구부린 채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준비이."
뒤에 앉은 노무자들은 모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실시이."
빗발치는 돌들과 함께 그 사람은 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다음 줄, 일어섯."
그 사람의 몸 여기저기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바위에서 깨져나온 그 돌들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 사람의 허리는 좀 더 구부러져 있었다.
"준비이."
까마귀 서너 마리가 까욱거리면서 날아가고 있었다.
"실시이."
빗발치는 돌들에 떠밀려 그 사람은 또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다음 줄, 일어섯."
그 사람의 몸에서 흐르는 피들이 엇갈리고 있었다. 푸들푸들 떨리는 그 사람의 몸은 흔들리고 있었다.
"준비이."
차득보는 나도 사람인가 우리가 이게 사람인가 하는 생각으로 입술을 깨문 채 떨고 있었다.
"실시이."
빗발치는 돌들에 파묻히듯 하며 그 사람의 비명을 들리지 않았다.
"다음 줄, 일어섯."
그 사람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두 십장이 물러서자 그 사람은 더 서 있지 못하고 머리부터 곤두박이고 말았다. 십장 둘이 달려갔다.
"안 되겠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십장 하나가 소리쳤다.
"그만하면 됐다. 매달아라."
총감독이 명령했다.
"좌측 25명, 빨리 삽과 곡괭이를 가져와."
감독이 서 있는 노무자들에게 명령했다. 앉아 있던 노무자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모두 그 사람을 파묻으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우측 25명, 저 십장들 앞으로, 뛰어어갓."
노무자 25명은 땅을 팠고, 나머지 25명은 십장들이 시키는 대로 공사장의 각목을 가져다가 십자가를 급조했다. 그리고 기절한 그 사람을 십자가에다 묶었다. 곧 십자가가 세워졌다. 십자가에 매달인 그 사람은 정신을 잃은 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것으로 공개처형을 마친다. 저놈에게 절대로 손대지 마라. 만약 손대는 놈은 저놈과 똑같은 방법으로 또 처형할 것이다 지금까지 소요시간 40분, 오늘 작업을 40분 연장한다. 이상"
노무자들은 각기 십장을 따라 공사장으로 흩어져 갔다. 차득보는 그 사람이 그 정도에서 기절한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가 더 버티었더라면 자신도 곧 돌팔매질을 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 사람은 어찌 될 것인가...피를 저렇게 흘리고,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차득보는 아까부터 몇 번이고 공허 스님을 생각했다. 이런 경우에 공허 스님은 어찌했을 것인가. 그러나 어떻게 했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을 끝내고 막사로 돌아와서도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날과는 다르게 모두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그렇다고 잠이 든 것도 아니었다.
이튿날 작업장에 나간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사람의 몸뚱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귀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너무 질려 소리치지도 못했다. 까마귀 떼는 인기척을 느끼면서도 전혀 날아갈 기미 없이 검은 날개들을 퍼득이고 괴기스럽게 까욱거리며 무언가를 다투어 쪼아대고 있었다. 노무자들은 그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일에 매달렸다. 그쪽서는 하루종일 까마귀들의 까욱거림이 귀신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비로소 어떤 꼴로 죽는지 보여주겠다던 총감독의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그들은 아침보다 더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 많던 까마귀들은 다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는데 그 사람의 시체에서는 사람의 형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너덜너덜한 시체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팔다리와 등쪽의 살과 가죽이었다. 눈에서부터 내장 전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사람이 하루 만에 그렇게 참혹한 꼴이 되어버리는 것은 난생처음 목격한 노무자들은 저 밥을 먹지 못했다. 그 이변에 놀란 것은 식당의 여자들이었다.
"아니, 왜들 이러시유."
"무슨 일들 있었소."
"아니, 금식투쟁 벌이는 거요."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곧 십장들이 달려왔다.
"빨리 밥들 처먹어."
"내일 일들 어떻게 하려고 이래."
"이 새끼들, 배고프단 말도 다 거짓말이로군."
십장들은 설치고 돌아갔다.
"비위가 상해서 못 먹겠는 걸 어떻게 해요."
"내일 책임량 다하면 될 거 아닙니까."
"너무 그라지덜 마이소. 우리가 개돼지가 아닌 기라요."
참다못한 노무자들이 한마디씩 했다.
"좋아, 책임량만 다 하면 됐어."
"그래, 그 꼴 보고 한끼 굶는 것도 효과 있는 일이다."
"옳아, 밥 굶으면서 도망갈 마음 싹 씻어내라."
십장들이 코웃음 흘리며 돌아섰다. 노무자들은 속 쓰린 배고픔 속에서 그 사람을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 도망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했다. 노무자들은 다음날 아침밥은 먹었다. 배도 고팠지만 일을 나가야 했던 것이다. 노무자 50명은 점심시간에 뽑혀나가 그 사람을 땅에 묻었다. 총감독은 봉분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그 사람의 죽음은 흔적도 없이 감추어지고 만 것이었다. 노무자 명단에 빨간 글씨로 소모라고 쓰면 그만일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서 그 사람이 왜 잡혔을까 하는 말이 조심스레 나오게 되었다.
"더 멀리 달아났어야 하는데 동작이 너무 느렸던 거야."
"아니, 아마 아이누를 만나지 못하고 헤매다가 잡혔을 거야."
"그게 아니야. 소지품을 놓고 가서 개가 냄새를 맡게 한 게 잘못이야."
다 그럴듯한 말이었다. 차득보는 그 말들을 곱씹어 생각해 보았다. 소지품을 두고 간 것부터가 치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공사는 끝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섬이라고 했지만 바다는 보이지 않았고. 노무자들은 고향 쪽인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아리랑을 불렸다. 그 누구도 돈을 벌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 달 18원에서 밥값 12원 제하고, 강제로 3원을 저금하고, 나머지 3원으로 배급 나오는 담배와 술값을 재고 나면 빈털터리가 되었다. 3원을 저금하지 않겠다고 나섰다가 불령선인으로 몰려 매타작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저금한 돈을 집에 돌아갈 때 준다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이라는 말이 떠들기 시작했다. 계약기간을 어기면서 조선으로 보내주지 않자 생겨난 말이 있었다. 약속을 지키라고, 집에 돌려보내달라고 수십 명이 집단 항의를 하고 나섰다가 무장경찰 2백여 명이 출동했다. 그들은 모두 트럭에 실려 가 피멍이 들도록 폭행을 당하고 돌아왔다. 계약 기간이 1년인 사람도 있었고, 2년인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끌려오기 쉽게 하려고 마음대로 정한 것뿐이고, 이제 아무 소용도 없게 된 것이었다. 총을 앞세워 계약기간도 자기들 마음대로 안 지키는데 저금한 돈도 안 주면 그만 아니냐 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노무자는 시름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한사람이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하였다.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사람이었다.
"죽느니 도망을 갔어야지."
"잡힌 다음을 생각해서 못 갔겠지."
"무슨 소리야. 왜 꼭 잡힐 것만 생각해. 안 잡힌 사람들도 있는데."
"잡혀서 그렇게 끔찍하게 죽고 싶지 않았던 게지."
"기왕 죽을 바에야 도망가고 봐야지. 잡히고 안 잡히고는 반반 아니냔 말야."
"그야 자네 생각이고, 그 사람들은 잡히는 것만 생각한 게 아닌가."
그 자살을 놓고 노무자들의 생각이 엇갈렸다. 차득보다는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아이누 마을까지만 가면 살아난다는 것이었다. 아이누족은 일본사람들에게 감정이 많기 때문에 자기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조선사람들을 동정한다는 것이었다.
서너 달이 지나서 또 한 사람이 도주했다. 그 사람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사람이었다. 다시 경찰이 동원되고 야단법석이 났다. 그러나 이틀, 사흘이 지나고, 다시 닷새가 넘었건만 그 사람은 잡혀 오지 않았다. 노무자는 전혀 그 사람의 일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서로 쳐다보는 눈빛들은 윤기 나고 안도하고 있었다. 열흘이 지나자 경찰들도 수색을 주저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서너 달이 지나서야 노무자들은 소곤소곤 그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사람, 평소에도 발이 아주 빨랐어."
"그러게 말야. 운수도 잘 타고 나기도 했을 거야."
"아니야, 그 사람이 똑똑해. 소지품부터 하나도 안 남겨놓은 걸 봐."
"그야 앞 사람이 한 실수니까."
"그나저나 그 사람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때는 어쩌려는 걸까?"
"원 별걱정을 다 하네. 그 사람도 집에 가는 거지 뭐."
"아니, 그때 또 잡혀서 또 당할 것 아니냔 말이지."
"참, 사람 답답한 소리만 하네. 전쟁 끝나 우리를 보내주는 판인데 그 사람이 당하긴 왜 당해. "
"그럼 도망가는 게 장땡이게."
"그거 인자 알았나 삼십육계보다 한 수 위가 도망치는 거란 말도 모르나."
도망에 성공한 그 사람은 노무자들 사이에서 가장 부러운 존재가 되었다. 차득보의 마음에서도 그 삶은 지워지지 않았다. 도로공사가 끝마무리 되어 가면서 노무자들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다음에 옮겨갈 곳이 비행장이 아니라 탄광이라는 것이 확실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득보는 마음을 공글리기 시작했다. 절대로 탄광까지 끌려 들어가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진작 도주를 하고 싶었지만 실수 없이 완전하게 하려고 계획을 치밀하게 짜면서 기회를 노려왔던 것이다. 그동안 도로공사를 해오면서 줄기차게 살펴온 것이 어느 방향, 어디 쯤에 아이누 마을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로 공사는 자꾸 이동하면서 진행되는 것이었고, 아이누 마을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신경을 쓰며 유심히 살펴보면 차츰 잡히는 곳도 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전혀 볼 수 없기도 했다. 그리고 별다른 짐 없이 다니는 아이누들이 있는가 하면 어느 지역에서는 큰 짐들을 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아이누들이 몸 가볍게 다니는 데는 마을이 별로 멀지 않다는 것이었고, 짐을 지고 다니는 데는 마을이 산골 그 어딘가 멀다는 뜻이었다. 차득보는 도로공사를 따라 이동하면서 그런 곳의 위치. 거리. 방향. 지형 같은 것을 눈에 익히고 헤아리고 했다. 대부분의 노무자들은 반년을 일을 하고도 자기들이 얼마 정도의 거리를 도로로 닦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차득보는 그 거리가 몇십 리쯤 되고 어느 지점에서 방향이 어느 쪽으로 바뀌는지를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등짐을 지면서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발걸음 수를 몇 번씩이고 세었고, 땅을 다지면서 그저 어기어차 소리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방을 살피고 또 살폈던 것이다 차득보는 특히 산세를 유심히 살폈다. 어차피 도로는 도주에 쓸모가 없는 것이었고, 아이누족들은 산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부터 날씨는 꾸물거렸다. 차득보는 하늘을 힐끔힐끔 올려다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비가 와라. 좍좍 쏟아져라.’
차득보는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비만 오면 도주를 감행살 작정이었다. 비가 오면 도주하기에 이중 삼중으로 좋았다. 제일 좋은 것이 경찰 수색견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다. 비가 많이 올수록 빗물에 냄새가 지워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빗소리에 이쪽의 행동을 완전히 감출 수 있었다. 또한 수색대의 출동을 늦추고, 수색을 둔화시킬 수 있었다. 오후가 되면서 빗방울이 후둑거리기 시작했다.
‘아이고메 하느님’
차득보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부르짖었다. 천둥이 치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 1시간쯤 먼저 일을 마쳐야 했다. 그건 바로 늦가을에 어김없이 북해도를 지나가는 태풍이었다. 차득보는 탈주를 완전히 작정했다. 천둥 번개 속에 비는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와 바람 소리 때문에 이쪽 막사에서 일부러 고함을 쳐대도 저쪽 막사에서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노무자들은 다른 날보다 일찍 잠이 들었다. 차득보도 태평스럽게 눈을 감았다. 십장들의 방은 막사의 왼쪽 문 양쪽에 칸막이 되어 있었다.
차득보는 자정 가까이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매일 술 한 잔씩을 하는 십장들은 그 시간이면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질 거였다. 차득보는 계획을 바꾸었다. 산을 타 넘기로 했던 것을 도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비가 생각보다 억세게 쏟아지니까 개에게 추적당할 염려가 거의 없었고, 산은 기동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갑자기 불어나 골짜기들의 급류에 휩쓸릴 위험이 컸고, 개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게 된 기회에 도로를 이용하면 산을 타는 것보다 배는 더 멀리 도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십장들의 방에서 띵띵 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빗소리 속에서도 차득보의 곤두세운 귀에는 그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고 있었다. 시계는 11번을 울렸다. 차득보는 살금살금 일어났다. 발끝으로 걸어 십장들 방으로 가서 귀를 기울였다. 드렁드렁 코고는 소리만 요란했다. 그는 제자리로 돌아와 소지품 보따리를 꺼내 허리에 질끈 동여맸다. 그리고 오른쪽 문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변소를 오가는 문이라 잠겨 있지 않았다. 숨을 멈추며 살짝 들이밀었다. 몸이 빠져나갈 만큼 열리자 잽싸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재빨리 문을 닫았다. 옆에 누가 서 있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비가 기세 좋게 내리고 있었다. 차득보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환히 떠오르고 있었다. 막사들 주위로는 철조망이 처져 있었고, 정문 초소에는 두 명의 경비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변소 뒤의 철조망을 넘으면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일단 산으로 들어가서 방향을 바꿀 작정이었다. 차득보는 숨을 들이켜며 빗속으로 나섰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변소 뒤를 돌아 철조망에 이르렀다. 혁대에 찔러둔 수건을 빼내 손을 감았다. 그리고 철조망을 기어올랐다. 평소에 보아두었던 대로 나무 기둥 옆을 타고 오르는데도 철조망은 심하게 흔들렸다. 철조망에 다 올라 아래로 뛰어내렸다. 빗소리와 바람 소리는 역시 고마웠다. 차득보는 대중잡아 산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둠에 눈이 익으면서 흐릿한 형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평수에 눈여겨보아 두었던 산은 별로 높지 않았다. 큰 산줄기에서 뻗어내린 여러 개의 지맥 중에서 하나였고, 그 끝부분에 솟은 작은 봉우리였다. 빨리 골짜기를 찾아가기로 했다. 골짜기에는 그동안 쏟아진 비가 몰려 흘러내리고 있을 거였다. 그물줄기를 타고 내려가며 냄새를 완전히 지울 작정이었다 그러면 제아무리 냄새를 잘 맡는 개라도 더는 어쩔 수가 없게 될 거였다. 골짜기에는 역시 물이 세차게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차득보는 무릎까지 차오르는 물속을 걸었다. 골짜기를 따라서 내려가면 도로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그는 미끄러지고 넘어져 가며 도로에 다다랐다. 일단 탈주에 성공했다는 안도감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새까만 까마귀 떼의 퍼드득거림과 괴기스러운 울음소리들이 떠올랐다. 차득보는 왈칵 소름이 끼치는 걸 느끼면서 주먹을 부르쥐었다. 그는 도로에 발을 디디면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뛰기 시작했다.
비는 강해지다가 약해지다가 하며 끊임없이 내렸다. 차득보는 줄기차게 뛰면서 한 가지 안타까운 게 있었다. 바람이 등 뒤에서 불었으면 좋으련만 맞받으면서 뛰자니 힘도 들고 속력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가 오는 것만도 다행인데 그것까지 바랄 수는 없었다. 날이 희미하게 트일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뛰었다. 얼굴을 흘러내리는 비를 계속 핥아먹어 목마른 줄을 올랐다. 날이 더 밝아지기 전에 몸을 숨겨야 했다. 대강 짐작으로 7, 80리는 온 것 같았다. 아이누들을 보았던 지점을 되살려가며 차득보는 산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산길을 따라서 산등성이 두 개를 넘었다. 그러자 분지가 나오면서 특이하게 생긴 초가집 대여섯 채가 빗발 속에 말리 보였다.
"아이고메, 고맙십니다."
차득보는 나무를 부둥켜안으며 가쁜 숨과 함께 이 말을 토해냈다. 아이누의 초가집은 온몸에 털이 난 짐승처럼 집 전체가 짚인지 풀인지 모를 것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가운데 창문이며 큰 문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차득보는 비안개 부 게 서린 산비탈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속이라 바람이 별로 심하지 않았다. 분지에는 밭농사가 지어져 있었고, 어떤 밭들은 벌써 추수한 흔적이 보였다. 밭가의 도랑으로는 물이 넘치며 흘러가고 있었다. 차득보는 첫 번째 집의 큰 문을 두들겼다. 짐을 뒤덮고 있는 것은 억새풀 종류였다. 안에서는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잠들이 깨기는 너무 이른 새벽이었다. 그렇다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차득보는 다시 문을 두들겼다. 안에서 무슨 말이 들렸다. 그러나 차득보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일본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누말인 것이 분명했다.
"조선사람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저는 조선사람입니다."
차득보는 일본말로 또박또박 말했다.
"아버지 조선사람이래요."
안에서 들려온 일본말이었다.
"어서 문 열어라."
차득보는 손을 가슴에 얹으며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숨길을 따라 그의 눈은 내려 감기고 고개는 한정없이 수그러들고 있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며 차득보를 맞이한 것은 머리 하얀 오십객의 남자였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차득보는 안으로 들어서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서 올라오시오. 춥지요."
주인이 다정하게 웃으며 차득보의 손을 잡았다. 비에 젖을 대로 젖은 차득보의 몸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그의 입술은 시퍼렇었다. 차득보는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때 젊은 여자가 가지고 나온 수건을 젊은 남자가 받아 차득보에게 건네주었다.
"예, 고맙습니다."
차득보는 또 머리를 공손하게 숙였다. 공허 스님이 여동생을 찾아주려고 자신을 데리고 주막에 찾아갔을 때 이후로 그만큼 고마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공허 스님의 말을 듣고 일본말을 배워둔 것이 마침내 큰 효험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차득보는 머리와 얼굴을 대충 닦았다.
"저쪽으로 가서 옷부터 갈아입으시오."
주인이 옷을 내밀었다.
"예에, 정말 고맙습니다."
차득보는 머리를 숙이고 또 숙였다.
젊은이가 웃으면서 한쪽 방문을 열어주었다. 차득보는 일본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때서야 그는 몸이 부들부들 떨리도록 추운 것을 느꼈다. 차득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주인이 담요를 내밀면서 뒤집어쓰라는 시늉을 했다. 차득보는 또 고맙다고 인사하고 담요로 몸을 감쌌다. 주인이 담배를 권하는데 젊은 여자가 차를 끓여 가지고 왔다.
"자아, 추운데 어서 드시오."
"예, 고맙습니다."
차득보는 정말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 사람들의 따뜻한 정성에 그는 내가 언제 남한테 이런 인정을 베풀어본 적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여긴 오래 있을 데가 못됩니다. 곧 여길 떠나서 안전한 데로 가세요. 그곳에 조선사람들 몇이 사는데, 조선사람들이 오면 자기네들한테 보내달라고 우리보고 부탁을 했어요. 그 사람들은 이제 우리 아이누하고 똑같아요. 여긴 샤모들이 오늘이라도 들이닥칠 위험이 있으니까요. 우리 아들이 그곳까지 모셔다드릴 겁니다."
주인은 차를 마시며 말했다. 샤모는 아이누족들이 일본인들을 경멸해서 부르는 아이누말이었다.
"예, 예, 고맙습니다."
아침을 먹고 곧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젊은 여자는 그동안에 차득보의 옷을 짜서 불에 쪼여가지고 거의 다 말린 상태였다. 차득보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섰다.
"편히 가시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차득보는 그야말로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다. 젊은이와 함께 산을 넘고 또 넘었다. 빗속을 하루종일 걸었다 젊은이가 싸 온 점심을 동굴 비슷한 데서 먹었다.
"조선사람들은 샤모들보다 몸집도 더 크고, 기운도 더 세고, 얼굴도 더 잘생겼는데 왜 샤모들한테 당하며 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니누는 수가 너무 적어 당했지만."
젊은이가 점심을 먹으면서 한 말이었다.
"예, 권력을 잡고 있던 대신 몇 놈이 나라를 팔아먹은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나라를 되찾으려고 30년 넘게 독립투쟁을 해오는데도 우리 조선은 신식무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일본 놈들은 신식무기를 얼마든지 만들어내니 싸우기가 너무 어렵지요."
차득보는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심을 이렇게 말했다. 깊은 산중의 분지에 도착한 것은 저녁밥때가 다 되어서였다. 집이 십여 채가 서로 감싸듯 다정하게 모여 있었다.
"조선사람이 왔소, 조선사람"
젊은이는 어느 집의 문을 두들기며 목청 높이 외쳤다. 문을 열고 뛰쳐나온 사람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조선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차득보를 얼싸안았다.
"어서 오시오.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예에..., 고맙구만요, 고맙구만요..."
차득보는 목이 메고 있었다. 동포라는 곳이 이렇게도 좋은 것인가..., 차득보는 난생처음으로 동포의 뜨거운 피를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차득보는 깜짝 놀랐다. 아이를 안고 부끄러운 듯 인사하는 여자는 분명 아이누였던 것이다.
"놀라셨지요. 제 아냅니다."
스물대여섯 되어 보이는 그 남자는 씨익 웃었다.
"예에, 그러시구만요..."
아침에 젊은이의 아버지가 그 사람들은 이제 우리 아이누하고 똑같아요 했던 말뜻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난 외삼촌 집으로 가겠어요."
젊은이가 밖으로 나갔다.
"예, 이따가 연락할게요. 모두 모여 술 한잔해야지요."
"술이 있어요?"
"그럼요 샤모가 여기까진 못 오니까 맘 놓고 담가 먹어요."
"예, 좋지요. 연락하세요."
두 사람은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자아, 몸 닦고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그 남자는 아내가 가지고 나온 수건과 옷을 차득보에게 건네주었다. 차득보는 옷을 갈아입으며 자신이 너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아이누 마을 몇 군데에나 그런 부탁을 해놓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자아, 편히 앉으세요. 저는 강상호라고 합니다."
"예, 저는 차득보라고 헙니다."
"여기에 우리 조선사람이 전부 다섯입니다. 서로 줄을 대서 모인 거지요."
"다 여그서 혼인얼 허셨능게라."
"아닙니다. 혼인한 사람은 사람은 셋입니다. 다른 두 분은 고향에 처자가 있어서요."
"글먼 도망 나오신 지 오래되셨능가요."
"예, 3년 됐습니다."
"예에, 근디 지럴 이리 구해 주신 것이 너무 고마운디, 그런 부탁얼 그 동네에만 허셨능게라."
"아닙니다. 한 스무 개 마음에 해놓고 있습니다."
"아, 그러시구만요. 근디 이리 도망 나와 사는 사람덜이 멧이나 되는지 다 아시는 게라"
"아닙니다. 한 스무 개 마을에 해놓고 있습니다."
"아, 그러시구만요. 근디 이리 도망 나와 사는 사람덜이 멧이나 되는지 다 아시는 게라?"
"다는 알 수가 없고요, 150명이 되는 것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참 아이누 이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예, 사람들이 순하고 인정이 많습니다. 그나저나 징용 끌려나온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 고생들이 참 큰일입니다. "
"예, 그 수야 말로 헐 수 없이 만컸지요. 죽기도 억수로 죽고......"
강상호의 아내가 차를 끓여왔다.
"추운데 어서 드세요."
"예에......"
차득보는 잔을 들며 다시 목이 메었다.
일제는 160여만 명을 강제징용했고, 30여만 명의 여자들을 위안부와 정신대로 끌어갔고, 4천5백여 명의 학도병을 포함해 징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간 젊은이들은 40여만 명이었다.
52. 신새벽
아흔아홉 골짜기를 거느린 지리산 준령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한발 늦은 봄이었지만 4월의 양광은 지리산 준령에 쌓였던 눈을 다 녹이고, 골짜기 골짜기의 응달에 숨은 눈까지 녹이면서 나무마다 풀마다 새 움을 틔워내고 있었다. 웅장하고 장엄한 자태의 지리산은 우아하고 환상적인 유록색 비단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백설로 치장했을 때의 지리산은 위엄이 충만했고, 이제 싱그러운 유록색이 번지고 있는 지리산은 자애스러웠다. 산 높고 골 깊으되 그 준령 또한 몇십 리에 뻗치며 산맥을 이루어내고 수많은 골짜기를 거느렸으니 누구나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며 감탄하는 산, 그것이 지리산이었다.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에 <지리산의 도령들> 소문이 퍼진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 소문은 가지가지였다. 독립군으로 나서기 위해 훈련을 하고 있다고도 했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도를 닦고 있다고도 했고, 왜놈들 총에 이길 수 있는 무술을 연마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 소문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지리산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그냥 <청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도령들>이라고 높여 부르는 것에서 그들의 하는 일을 장하게 생각하고 있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여러 가지 소문들과 달리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만은 어느 사람의 말이나 다 똑같이 일치하고 있었다. 그들이 학병으로 끌려가기를 거부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수가 몇 명인가 하는 것은 또 구구각색이었다. 2백 명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3백 명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4백 명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소문을 경찰서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 어느 곳 경찰도 그들을 잡으려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 까닭을 너무나 잘 알았다. 경찰들이 수백 명 지리산으로 들어가 보았자 지리산이 워낙 높고 크고 넓어 도령들을 잡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경찰들이 꼼짝을 못하는 그 사실이 통쾌해 <지리산 도령들>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학병을 피해 지리산에 들어온 학생들은 화전민들의 거처를 따라 여러 골짜기에 분산되어 있었다. 화전민들의 거처 가까이에 자리 잡은 것은 화전민들의 덕을 보려는 것이 아니었다. 화전민들이 살고 있는 곳은 산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지혜를 배워 학생들은 움막을 쳤다. 그리고 화전민들과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그들의 의식을 깨우쳐 나가려는 것이었다. 또한 화전민들은 가끔씩 산 아래로 왕래하기 때문에 바깥소식을 들을 수 있는 통로였다.
송준혁은 피아골에 있었다. 피아골의 양달에는 작은 산꽃들이 피어나고 나무들의 실가지마다 연초록의 새잎들이 마치 신비스로운 기적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송준혁의 동료들은 산밭을 파 엎다가 일손을 잠시 쉬고 있었다. 밭두렁에 둘러앉은 그들은 여섯이었다. 모두 10명이었는데 넷은 그 어딘가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그들은 24시간 번갈아 가며 보초를 서는 생활을 입산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또 다른 군대 생활을 하는 셈이었다.
"선생님이 오실 때가 되지 않았나?"
누군가가 담배 연기를 날리며 말했다.
"글세, 선생님이야 아무 예고도 없으신 분이니까."
그들이 말하는 선생님이란 이현상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요새 전황은 어찌 돼가는지 모르겠군."
"태평양 섬들을 다 뺏긴 지가 작년 말이니 지금쯤 동남아서도 거의 다 뺏겨가는 것 아닐까."
"아마 그러기가 쉬울 거야. 일본은 이제 풍전등화야. 국민학교 4학년까지 근로동원을 시키고 있으니 그게 최후의 발악이고 단말마의 비명이 아니고 뭐겠어."
"참, 그 평양사단에서 검거된 학생들은 어찌 됐을까?"
"글세, 중형을 받게 되겠지."
"그 사람들도 우리처럼 미리 대처했어야 하는데."
"그러게 말야. 거긴 학생들을 이끌 지하조직이 없었던 모양이야."
"아니야. 있었어도 선생님 같은 탁견을 가진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 우리도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그 학생들같은 신세가 됐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지도자란 필요한 거지."
"그렇지. 어쨌거나 그 학생들이 안 됐어."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작년 12월에 일어난 평양사단 사건이었다. 그건 다름 아니라 평양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학도병들이 훈련소를 탈출하여 항일게릴라전을 전개하려고 계획했다가 발각되어 70여 명이 검거되었던 것이다. 그 사건이 세상에 던진 충격은 대단했다. 남자들은 징용, 징병, 학병으로 무차별 끌려가고, 여자들마저 정신대로 끌려가고, 국민학교 4학년 이상은 근로동원에 끌어내면서 일제의 탄압은 극에 달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무장게릴라전을 계획했다는 것은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는 조선사람들을 고무시킨 한 줄기 빛이었던 것이다.
휘이 휙!
북쪽 등성이에서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울렸다. 얼핏 들으면 무슨 새소리 같았지만 그건 선요원을 통과시켰다는 보초의 신호였다. 여섯 사람의 눈길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또 무슨 좋은 소식이 있나?"
한 사람이 급하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틀림없이 좋은 소식이 있겠지."
다른 사람도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 저기 오는군."
한 사람이 커다란 바위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람은 재빠른 동작으로 산비탈을 타내리고 있었다.
"아, 어서 오시오."
이쪽에서 높인 목소리로 반겼고
"아, 안녕들 하시오."
선요원이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저 기분 좋은 기색을 보니까 좋은 소식이 있는 것 같은데."
"맞어, 그런 것 같아."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화색이 돌았다.
"동지들, 아주 대특보요, 대특보!"
선요원이 그들과 악수를 나누며 부풀어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소. 그게 뭐요?"
"예, 너무 놀라지들 마세요. 마침내 며칠 전에 미군이 오키나와 상륙에 성공했소!"
"와아아-"
그들은 두 팔을 뻗쳐올리며 환성을 터뜨렷다.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그것은 두 달 전에 있었던 마닐라 탈환과 이오섬(유황도) 상륙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미군의 마닐라 탈환과 이오섬 상륙은 동남아 전세의 변화로 일본의 부분적 패배에 불과했지만 오키나와 상륙은 바로 일본 영토의 상륙으로 일본의 전면적 패배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럼 일본 본토 상륙도 얼마 안 남은 것 아닙니까?"
"글쎄요, 그건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를 문제지요. 왜냐하면 이번 오키나와 상륙도 3개월이나 걸렸으니까요. 섬 주민 전체를 총동원해 저항을 꾀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주민들까지 전쟁터로 내몰았단 말입니까?"
"예, 주민들을 총알받이로 써먹은 것인데, 그거 왜놈들답지 않습니까. 그놈들이 좋아하는 소위 사무라이식 말입니다."
"야비한 놈들 같으니라니."
그들이 지리산 속에 있으면서도 나라 밖에서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까지 샅샅이 알고 있는 것은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청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소식은 이렇게 선요원들을 통해서 각 조직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키나와를 점령한 위기 속에서 일제가 일억 총옥쇄라는 새로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는 것을 학생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억 총옥쇄란 일본과 천황에게 충성을 다 바쳐 일본사람 7천만과 조선사람 3천만은 다같이 깨끗하게 죽자! 하는 뜻이었다. 그건 패전의 위기에 직면한 일제가 발악적으로 내세운 집단자살의 구호였다. 그런데 지식인들은 총독부가 조작하고 있는 승전의 보도에 취해 일본이 조선을 2백 년 동안 지배할 거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일억총옥쇄를 여기저기서 열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큰 소식이 있습니다. 히틀러가 자살했습니다."
"예?"
"아니, 히틀러가? "
"그럼 독일은 완전 패배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쪽 전쟁은 다 끝난 거지요."
"그럼 일본의 패배는 정말 목전에 와 있습니다. 그쪽의 병력이 이쪽으로 대거 투입되면 일본이 무슨 수로 견디겠어요."
"그렇지요. 금년 안에 결판이 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힘냅시다."
"예, 힘냅시다."
그들은 목소리를 합쳤다.
"이건 교잽니다."
선요원이 배낭에서 등사물 한 뭉치를 꺼냈다. 선요원은 인사를 마치기 바쁘게 돌아섰다. 그들은 가슴이 울렁이는 감정 속에서 다음 조직을 향해 순식간에 등성이를 넘어가는 선요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리산에 분산되어 있는 학생조직은 10명을 단위로 하고 있었다. 산속에서 많은 수가 집단적으로 거처할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피해를 최소화하고 기동력을 살리자는 것이었다. 그 10명씩의 조직을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 선요원들이었다. 선요원들은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본부 선요원과 소대 선요원이었다. 선요원들은 지역을 분할해서 각 소대에다 본부의 지시와 긴급사항 같은 거을 수시로 전하고, 정규적으로 사상교재를 배달했다. 그리고 소대 선요원들은 소대와 소대 사이의 연락만을 맡았다. 각 소대원들이 가장 중요하게 실시하고 있는 것이 사상학습이었다. 그건 물론 사회주의 사상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학습하고 토론하며 날들이 쌓이면서 그들은 사회주의자로 변모하고 강화되어 나아가고 있었다. 바로 송준혁이 그런 전형적인 예였다. 그는 농과를 전공하면서 막연한 독립의식만 가지고 있었지 사회주의 사상은 본격적으로 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리산 생활을 통해서 그는 견고한 사회주의자로 단련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이 두 번째로 중시하는 것이 체력단련이었다. 그들은 날마다 기본적인 운동과 노동을 중시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골짜기를 치올라 준령까지 등산을 했다. 어느 소대나 준령에 오르면 천왕봉에서부터 노고단에 이르는 지리산 연봉들을 관망할 수가 있었다. 가까이로는 백운산에서부터 멀리로는 수십 리 밖까지 바라볼 수가 있었다. 가까이로는 백운산에서부터 멀리로는 덕유산까지, 그리고 그 아랫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조국을, 독립을, 인민을 생각하고는 했다. 그 등산은 단순히 체력단련만이 아니라 평소의 학습을 반추하고 음미하며 의식을 강화시키는 기회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세 번째로 열성을 바치고 있는 일은 농사짓기였다. 자급자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조직의 운영비를 절감하자는 노력이었다. 산속에서 그들의 능력으로 자급자족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고, 자금조달의 어려움을 다소라도 해결하자는 자구책이었다. 그들은 화전민들을 스승으로 받들며 농사를 지어 식량의 반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농사를 지으면서 인민적 삶을 체득하는 것도 하나의 목적이었다. 거의가 농사를 지은바 없는 그들로서는 농사짓기를 통해서 이론과 현실을 일치시키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의 생활규범과 질서를 제시하고 지도하는 총책은 이현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현상을 자주 볼수 없었다. 그는 서너 달에 한 번 정도로 나타났는데 그때마다 옷차림은 달랐다. 변장을 하고 아랫세상을 다니다가 돌아온 모습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깨닫게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민족은 반드시 해방됩니다. 일제는 지금 망해 가고 있습니다. 이건 악한 자는 하늘의 벌을 받는다는 식의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객관적인 사실의 진행 속에서 일제의 패망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해방의 그날에 대비하기 위해 오늘을 성심껏 살며 분투해야 합니다."
그가 학생들에게 하는 말은 이런 정도로 짧았다. 그들은 산밭에 고구마를 심고, 옥수수와 조도 뿌렸다. 텃밭에는 상추와 아욱 같은 것도 뿌렸다. 그리고 산나물도 많이 뜯어 무쳐 먹고 응달에 말렸다. 화사하면서도 서러운 꽃 진달래가 무리지어 피었다 꽃송이째로 떨어져 지면서 4월이 지나갔다. 철쭉이 피어나기가 아직 일러 5월을 기다리고 지리산은 유록색 만발한 속에 차츰 초록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아무런 예고 없이 그들 앞에 이현상이 나타났다. 선요원과 또 한 명이 수행하고 있었다.
"동지들, 수고가 많소."
이현상은 학생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악수했다. 송준혁은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이분 같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왜 이분같이 하지 않는 것일까도 연달아 생각했다. 폐병 때문에 아버지는 사실상 운동을 중단한 것 같은데, 지금 옥고를 치르고 있으니 문제였다.
"여러분, 기쁜 소식을 기다립니다. 지난달부터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소개가 실시되고 있습니다. 미군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사흘 전인 5월 2일에 영국군이 미얀마 랑군을 점령했습니다. 이로써 일제는 작년부터 본토를 폭격당하는 동시에 이제 동남아 전선에서는 동으로부터 미군에게, 서로부터 영국군에게, 북으로는 중국군에게 대협공을 당하는 최악의 사태에 빠졌습니다."
본부 요원의 말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반색을 하면서도 다른 때와 같이 환성을 지르지는 않았다. 이현상 앞이었던 것이다.
"동지들, 이제 일제는 패망했습니다. 다만 항복의 절차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각오로 새 출발에 임해 주기 바랍니다."
이현상은 이 말을 남기고 유록색 아기잎들이 햇살이 반짝이는 봄 숲속으로 사라져 갔다.
"저것 좀 봐!"
누군가의 말에 그들은 모두 고개를 하늘로 젖혔다. 아지랑이 기운 아른거리는 하늘 저 높이 새하얀 비행운을 남기며 반짝거리는 점으로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최근에 부쩍 자주 나타나기 시작한 B29였다. 그들은 언제까지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소쩍새가 구슬프고 애절하게 봄 한나절을 울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쌀을 내놔!
사내는 고약하게 치뜬 눈으로 홍씨를 꼬나보았다. 다른 일본 사내는 어슬렁거리며 집 안을 살피고 있었다.
"멧번이나 말해야 혀요. 없소."
홍씨는 싸늘하게 내쳤다.
"다 알고 왔다니까. 집을 뒤져야 알겠어!"
"맘대로 허시오. 만일에 뒤져서 안 나오먼 어쩔라요?"
마루에서 사내를 내려다보는 홍씨의 매운 눈길에 싸늘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뭐야? 건방지게 말이 많아. 기우찌상, 말로 안 되겠소, 뒤집시다."
사내가 일본 사내에게 말했다.
"당연하지 처음부터 뒤졌어야지. 쌀 감춘 불령선인들이 말로 해서 내놓는 것 봤소?"
일본 사내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하는 말이었다. 두 사내는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홍씨는 까딱도 안 하고 꼿꼿이 서 있었고, 늙은 머슴은 헛간 그늘에 쪼그리고 앉아 곰방대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머슴도 오래전부터 젊은 사람이 없어 늙은 사람을 쓸 수밖에 없었다. 역시 농사일은 기운이 밑천이라 소출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작년 6월부터 미곡 강제 공출제가 실시되면서 농사지은 쌀을 빼앗기고 배급을 타 먹는 꼴로 변했던 것이다. 지금 집뒤짐을 하고 있는 두 사내는 미곡 공출과 배급을 맡고 있는 식량영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작농인 경우에 그런 집뒤짐을 당하는 것은 예사가 되어 있었다. 아들 동걸이 때문에 줄곧 주목을 받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작농들은 공출로 빼앗기는 것이 억울해 쌀을 숨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출가격이라는 것이 총독부에서 일방적으로 책정한 형편없는 헐값인데다가 그 돈마저 온갖 잡부금과 강제저축으로 공제해 버려 사실상 그냥 빼앗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홍씨는 쌀을 감추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들키는 날에는 아들의 문제까지 덧날까 봐서였다. 그저 금예네에게 몇 말 주어 아이에게 먹이도록 했다.
두 사내는 집뒤짐에 이골이 나서 장독대, 헛간 잿더미, 똥장군 속까지 살피고, 담 밑까지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숨긴 일이 없으니 나오는 게 있을 리 없었다.
"하, 숨겨도 아주 단단히 숨겼구만."
사내가 손바닥을 털며 떫은 입맛을 다셨다.
"이거 이상하지 않소. 다른 장소 어디다 빼돌린 것 아니오?"
일본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홍씨는 방으로 들어가며 방문을 쾅 닫아버렸다.
"갑시다. 제보가 잘못된 것 같소."
사내가 앞서 대문 쪽으로 돌아섰다.
"글세, 별로 부자 같지도 않은데. 쌀을 숨겼더라도 이런 집에 5월까지 남아 있을 리도 없고......"
일본 사내가 혀를 차며 뒤따랐다.
"에이이, 못된 놈. 징용 징병에 안 끌려갈라고 뒷돈 써감서 그 자리 한나 얻어내서 허고 댕기는 짓이라고넌...... 에이이, 쯧쯧쯧...... 저것이 어디 양반집 자석이고 배왔다는 놈이여, 저거......"
늙은 머슴이 혀를 차대며 곰방대를 돌에다 마구 두들기고 있었다. 식량영단이라는 데 취직을 해서 공출에 나서고 배급 주는 일을 하고 있는 30대의 조선 사내들은 전부가 징용을 피해 사회적 배경과 돈으로 그 자리를 차지한 신종 친일파들이었다. 그들은 공출원과 배급원의 일만이 아니라 수색원의 일까지 하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할아부지, 쟁기질 안 나가요?"
물동이를 이고 들어오던 부엌데기 처녀가 머슴에게 물었다.
"아이고, 이놈의 시상 농사지서 머허겄냐. 땅얼 그냥 놀리는 것이 낮제."
머슴이 더디게 몸을 일으켰다.
"음마, 경찰서에 잽혀갈 소리만 골라감서 허시오. 잉."
처녀가 부엌으로 들어가서 통을 놓았다.
"야아야, 사정을 몰르면 말얼 말어라. 사람 속 터져 죽겄응게."
머슴이 혀끝이 떨어질 정도로 세차게 혀를 찼다.
"아니, 무신 일 있었소?"
처녀가 앞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며 부엌에서 나왔다.
"그려, 난리가 났제"
"무신 난리라?"
처녀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안방 쪽을 재빨리 살폈다.
"식량영단인지 개콧구녕인지 허는 놈덜이 왔다. "
"아니, 그 잡것덜이 왜 우리 집얼 와라. 가실허는 것도 아닌디."
"에이, 벽창호시."
"무신 소린게라?"
"집 뒤지로 왔당게."
"쌀 숨킷다고라?"
"삼천리 돌아 인자 아네."
"그래 어찌 됐소?"
"어찌 되았겄어?"
"숨킨 것디 없덜 않은게라?"
"그려, 헛탕쳤제."
"염병헐 놈덜, 개지랄도 에진간히 허고 댕기네."
처녀가 대문 쪽에다 침을 내뱉었다.
"인자 나 맘 알겄어?"
"야야, 저 잡것덜 꼬라지 뵈기 싫어 실은 다 땅 엎어놓고 농새 안지어야 하요."
"그려, 그려 인자 옳은 말 허능구마 말이라도 그리혀야 속이 풀리제."
머슴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어줍게 웃었다. 그런데 사실 농사를 짓지 않고 놀리는 논들이 있었다. 관청에서는 식량증산을 외쳐대고 있었지만 그 반대로 놀리는 논들은 이 삼년사이에 부쩍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건 대지주들의 논으로 소작인들을 구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작인들을 징용과 징병으로 엄청나게 끌어갔기 때문이다. 총독부에서는 1944년에 농사를 짓지 못하고 놀리는 논을 50여만 정보로 집계할 정도였다. 그러나 식량의 감소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농사를 짓고 있는 논들도 노인들이나 여자들이 소작살이를 하는 판이라 소출이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 공출 실시로 지주들은 전처럼 소작인들을 닦달하지 않았고, 자작농들도 농사에 열성을 바치지 않았다. 또한 쌀을 감추는 것도 식량 감소의 한몫을 거들었다. 이렇듯 이중 삼중의 원인이 겹쳐져 식량 감소는 심해지고, 그럴수록 총독부에서는 공출 할당량을 높이고, 악순환을 계속되면서 식량영단의 횡포는 극심해지고 있었다.
총독부에서는 공출 실시와 함께 미곡의 유통을 일체 금지시켰다. 크고 작은 쌀장수들이 일제히 문을 닫고 역마다 경찰들이 나서서 승객들의 짐을 일일이 조사하는 사태가 벌이지고 있었다. 중학생 이상의 승객들이 가지고 있는 짐들을 전부 수색해서 곡물이 나오면 무조건 압수하는 것이었다. 일본농촌의 식량 감소도 조선 농촌의 경우와 마찬가지여서 일제는 군량미 조달마저 궁지에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 그러고 송진 받고 칡넝쿨 걷는 것 어찌 되았능게라. 곧 걷으러 올 것인디요."
처녀가 걱정스레 머슴을 쳐다보았다.
"아이고 썩을놈에 것, 나도 몰르겄다."
머슴이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메, 그러먼 어짤라고 그요? 당허기넌 아짐씨가 당헐 것인디."
처녀가 펄쩍 뛰며 안방 쪽을 흘깃 살폈다.
"요런 오살헐 놈덜이 온갖 잡것덜얼 공출허라고 지랄발광이니 농새도 심이 부차는 판에 사람이 어찌 살겄냐. 니가 어찌 잠 히봐라."
"음마, 나라고 노는지 아요. 아주까리씨 뿌래야제, 삼씨에 목화씨 뿌래야제, 나도 공출허니라고 팔자에 없는 농새꾼 일꺼정 허는 것 몰라서 그러요?"
처녀가 당차게 공박을 해댔다.
"빌어묵을 놈덜이 인자 똥도 공출허라고 헐 것이다. 에잇, 천하에 몹쓸 개종자덜 겉으니라고."
머슴은 침을 내뱉으며 지게를 지고 낫을 들었다.
"어디 가요?"
"칡넝쿨인지 왜놈덜 할애빈지 걷으로 가제 어디 가야."
늙은 머슴은 벌컥 쏴지르며 밖으로 나갔다. 총독부가 실시하고 있는 공출은 쌀만이 아니었다. 놋그릇들을 제일 먼저 공출하기 시작해서 해가 갈수록 공출의 종류가 불어나 작년에는 콩·조·수수 같은 잡곡을 비롯해서 목화 · 아주까리 · 삼줄 · 채소 · 칡넝쿨 · 송진 · 솔가지 등 그 종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그런 것들을 집집마다 할당했기 때문에 여자들은 텃밭 한쪽이나 울타리가를 따라 목화·아주까리 · 삼씨 같은 것들을 따로 뿌려 농사 아닌 농사를 지어야 했다. 사람들은 그런 잡일에 시달리며 왜 그런 것들이 전쟁에 필요한지를 의아해했다.
홍씨네 머슴은 수심 깊은 타령을 느리게 흥얼거리며 산으로 오르고 있었다. 입성 남루하고 핼쑥하게 마른 계집애들이 쑥을 뜯고 있었다. 보릿고개의 굶주림이 극에 달한 판에 죽거리는 쑥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그 김샌 아니여?"
홍씨네 머슴이 저쪽에서 낫질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누구여? 잉, 천샌 아니라고."
저쪽 남자가 홍씨네 머슴을 알아보며 무겁게 허리를 폈다.
"멀 그리 부지런히 혀?"
홍씨네 머슴 천서방은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이고, 요거 헐 짓얼 헝가. 개아덜놈덜헌티 드러운 꼴 안 당헐라고 칡넝쿨 걷고 있네."
김서방이 등을 쿵쿵 소리나게 두들기며 긴 한숨을 쉬었다.
"나도 시방 그 잡놈에 칡넝쿨 걷으로 나오는 참이시."
천서방이 지게를 벗어 던지며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았다.
"아이고, 인자 칡넝쿨도 동이 나부렀네. 양얼 다 채울라면 더 짚이 들어가야 되겄구마."
"으째 안 그러겄어. 니나 나나 다 나스는 판인디. 앉소, 담배나 한 대썩 꼬실리세."
천서방이 털퍽 주저앉았고, 김서방이 그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안사람언 잠 어찐가?"
천서방이 담배쌈지를 건네며 물었다.
"차아암…… 김서방이 먹구름덩이 같은 한숨을 토해내고는, 가망이 없구만…… "
하며 저 멀리 눈길을 보냈다.
"그것 참 난리시. 사람이 호랭이가 열두 번 물어가도 정신얼 채래야 살드라고 아무리 복장 터지고 가심 무너지는 일 많이 당해도 맘얼 강단지게 묵어야 되는디."
천서방이 안쓰러워하는 얼굴로 끌끌끌 혀를 찼다.
"그려, 아덜놈덜 둘이 징용에 끌려나갈 때꺼지만 혀도 할망국가 속 아파 험스로도 그냥저냥 젼디드마 딸년이 정신댄가 머신가로 끌려나간게 그리 허망허니 병이 나불드랑게. 맘이 병이란 옛말이 어찌 그리 맞는지."
김서방은 담배를 빨며 시름 깊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도 헐 것이여. 에미덜 맘이란 것이 독헐 적에넌 참 독허다가도 허물어질라먼 그리 허망허니 허물어진당게. 내 마누래도 아덜 둘이 돈벌어 올 것이라고 오륙 녕얼 잘 젼디등마 죽었단 소식 듣고넌 똑 거짓말맨치로 열흘얼 못 넴기고 눈얼 감아불드랑게. 참, 나도 팔자가 꼬부랑 막대기 팔자지만 김샌 팔자도 다 늙어 참 고약허시."
천서방은 쓴 입맛을 다셨다.
"참말로, 내 말년 팔자가 이리 비비꾀일지 누가 알었간디. 왜놈덜이라먼 인자 자다가도 치가 떨리능마."
"그려, 그려, 당연지사제. 그려도 너무 속 태우덜 말어. 그리 당헌 사람덜이 한둘이 아닝게 자석덜 생각히서라도 김샌언 기운 채래서 자석덜 기둘려야제."
"그리 맘묵을라고 애넌 쓰는디……"
김서방이 또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의 얼굴은 그가 입고 있는 무명옷만큼 바래고 삭아 있었고, 주름지고 처진 눈꼬리에는 눈물이 지적지적했다.
"나 인자 가볼라네."
"어이, 애쓰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웃음을 나누고 헤어졌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징용과 정신대에 빼앗기고 또 공출할 칡넝쿨을 걷느라고 산비탈을 타고 있는 김서방의 팔자에 비하면 자신의 팔자는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생각하며 천서방은 산을 오르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홍씨네 마을은 시끌범덩해졌다. 여자들까지 낀 칠팔 명이 2명씩 조를 짜서 이 집, 저 집에서 시비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국민총력연맹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안 되어라, 안돼. 우리넌 멀로 밥 묵고 살으라고 인자 숟그락 젓그락꺼정 뺏어갈라고 드요."
부엌데기 처녀가 두 팔을 쫙 벌려 부엌문 앞에서 버티고 서서 기를 세웠다.
"빨리 비켜나지 못해. 성전이 급하다고 했잖아!"
종아리가 절반 이상 올라간 짧은 검정색 통치마에 하얀 인조저고리를 받쳐입은 젊은 여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금매, 숟그락 젓그락 뺏어가불먼 손꾸락으로 밥 묵고 국 묵으라 그것이요?"
처녀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당차게 맞서고 있었다. 그 기세에는 자기 영역인 부엌을 아무렇게나 침범당하지 않겠다는 뜻도 엿보이고 있었다.
"정말 말 안 들을 거야. 꼭 완력을 써야 되겠어!"
사십 중반의 남자가 처녀를 곧 잡아챌 것 같은 사나운 기세로 불쑥 다가섰다.
"을선아, 그만허먼 되았다. 다 맘대로 가지가게 문 활짝 열어줘라."
그때까지 마루에서 그 시비를 내려다보고 있던 홍씨의 말이었다.
"아이고메, 아짐씨이……"
을선이가 울상이 되며 홍씨를 쳐다보았다.
"니 말대로 손꾸락으로 묵고 살자."
홍씨는 이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자가 을선이를 밀쳤고, 을선이는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남자와 여자는 거침없이 부엌으로 들어가 살강 위의 나무함에 담긴 숟가락과 젓가락들을 몰아잡아 자루에다 넣었다. 살강 위에 엎어놓은 그릇들 중에서 놋그릇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벌써 이삼년 전에 놋그릇들은 말할 것도 없고 놋제구, 심지어 놋요강까지 다 쓸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그릇들은 사기로 바뀌었고, 제구는 기계로 깎아 붉은 칠을 한 나무제구로 바뀐 것이다. 그것들도 거의가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라 엉뚱한 사람들을 떼부자 만들어주었던 것이다.마침 홍씨댁에 와 있던 금예는 죽어라고 자기 집으로 뛰고 있었다.
"엄니, 엄니 수, 숟그락……"
금예는 사립을 뛰어들며 다급하게 말을 토해냈다.
"아이고메!"
금예는 울부짖으며 주저앉았다. 아들 제일이의 숟가락만은 안 뺏기려고 달려왔던 것이다. 그것은 아이 낳기를 바라며 남편이 징용 끌려가기 전에 장만해 주고 간 것이었다.
허깨비군대
쿵! 쿵!
딸랑, 딸랑, 딸랑……
쿵! 쿵!
딸랑, 딸랑, 딸랑……
느닷없이 울려대는 요란한 소리에 윤철훈은 무선송신을 멈추며 후다닥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아찔해졌던 그의 의식은 섬광처럼 빠르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저건 도둑놈들이 아니다. 헌병대의 기습이다. 전파가 탐지됐다. 어떻게……, 뒷문으로 도망가나? 아니다, 때가 늦었다. 괜히 길안내를 해주는 것이다. 아이들,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
쿵! 쿵!
딸랑, 딸랑, 딸랑……
사진관 문을 부수는 소리와, 문을 칠 때마다 문에 달린 종이 자지러지듯 울려대고 있었다. 윤철훈은 집으로 연결되어 있는 비상연락줄을 마구 잡아당겼다. 그걸 잡아당기면 안방에서 종이 울리도록 되어 있었다.
쿵! 쿵!
딸랑, 딸랑, 딸랑……
우지끈! 삐지직……
윤철훈은 줄을 잡아당기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가위로 줄 끝을 잘라버렸다. 줄매듭만 손에 남고, 줄은 자취 없이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우당탕탕!
"빨리빨리!"
"샅샅이 뒤져라!"
군화 소리들과 함께 터지고 있는 일본말이었다. 윤철훈은 줄 매듭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눈을 감았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절대로 여기 올라와선 안돼!"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그건 이미 정해 둔 규칙이었다. 영리한 아내를 믿었다. 아내는 침착하고 기민하게 대피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손들엇!"
윤철훈은 눈을 떴다. 서너 개의 총구멍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헌병 둘이 달겨들어 그의 팔을 꺾었다. 그리고 등뒤로 쇠고랑을 채웠다.
"딴놈들 있나 더 뒤져라!"
"무전기 여기 있습니다."
"좋아, 빨리 챙겨."
윤철훈은 암실에서 촬영실로 끌려나왔다.
"다른 놈들은 없습니다."
"틀림없나?"
"옛, 두 번씩 확인했습니다."
"무전기 압수했습니다."
"됐다, 가자!"
윤철훈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다시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하얼빈으로 가서 조직의 도움을 얻어 국경을 무사히 넘자면 사오일은 걸릴 거였다.
‘여보, 아이들 잘 부탁해…… 애들아, 건강하게 잘 커야 한다……’
윤철훈은 아내와 아이들을 작별했다. 이렇게 잡힌 이상 살아날 길은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무사한 것만도 천행이었다. 윤철훈은 자동차로 밀려 올라갔다. 자정을 넘긴 밤거리는 적막에 싸여 있었다.
‘한곳에 너무 오래 있었어.’
윤철훈은 이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직종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옮겨 다녔더라도 결국 장춘 시내였으니까 어차피 탐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방심은 그것이었어……’
윤철훈은 청산가리를 휴대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그건 너무 오래 무사해서 비롯된 방심이었다. 단 몇 초로 끝내 버릴 일을 너무 길게 끌게된 것이었다. 차은심은 비상종이 울려대는 것에 놀라 잠이 깼다. 다급하게 울려대던 비상종이 뚝 끊어졌다. 그건 남편이 위기에 빠졌다는 신호인 동시에 빨리 피하라는 신호였다. 차은심은 두 아이를 깨워 뒷마루방 아래 파놓은 지하실로 피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집 안을 뒤지는 기척은 전혀 없었다. 남편 혼자 잡혀간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차은심은 밖으로 나와 사진관의 동정을 살폈다. 사진관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진관으로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건 어리석은 유혹이었다. 냉정해야 했다. 남편은 남편만이 아니라 조직원이었다. 자신도 아내만이 아니라 조직원이었다. 조직의 규율을 엄수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은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냉정해야 했다. 차은심은 방으로 들어왔다. 두 아이는 겁난 얼굴로 꼭 붙어앉아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그 말똥말똥한 눈을 보자 차은심은 가슴이 찡 울리며 왈칵 눈물이 나려고 했다.
"자라니까 아직 안 자니?"
차은심은 두 아이를 감싸안았다.
"잠 안 와."
큰아이가 말했다.
"나 무서워."
작은아이가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비행기가 가버렸으니까 이젠 자도 돼."
"비행기가 왜 밤에 오고 그래?"
작은아이가 물었다.
"그야 비행사 맘대로니까 그렇지."
큰아이의 대꾸였다.
"엄마, 형 말이 맞어?"
"음, 맞다."
"비행기는 밤이 캄캄하지 않나?"
"자동차처럼 불 켜고 다니는데 뭐가 캄캄해."
"엄마, 형 말이 맞어?"
"으음, 맞네."
"비행기는 새도 아닌데 어떻게 하늘을 날아다녀?"
"멍청이, 그야 비행기니까 그렇지."
"못써. 동생한테 그런 말 하면."
"엄마, 형 말이 이젠 안 맞지?"
"으음, 반은 맞고 반은 안 맞는데."
"그럼 왜 날아다녀요?"
큰아이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응, 그건 너희들이 담에 더 크면 자세하게 알게 될 건데, 비행기가 새처럼 날아다닐 수 있게 기계장치를 해서 그런 거야. 그 기계장치는 공부를 많이 하면 알 수 있게 돼."
"거봐, 형도 틀리는 게 있지."
작은아이가 형에게 혀를 낼름했다.
"요게 그냥."
"에이, 그러다 또 싸울라고. 자아, 이제 그만 자자."
차은심은 두 아이를 눕혔다.
"아빠는?"
큰아이가 눈을 올려 떴다.
"사진관에서 일하시지."
"아빠는 맨날 일이야."
작은아이가 방싯 웃었다.
"그래, 너희들 잘 키우려고 그러시지."
차은심은 두 아이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엄마는 안 자?"
"말 그만 하고 어서 자라니까."
차은심의 가슴은 울고 있었다. 이 어린것들에게 아버지가 없어지다니…… 그건 너무 기막힌 일이었다. 시종 긴장하고 불안한 생활이었지만 이런 일이 닥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갈 줄 알았었다. 일본의 패전은 임박해 오고 있었다. 관동군은 대거 중국전선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영국군과 미군에게 계속 패배하고 있었다. 소련으로 돌아갈 날도 머지않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탐지되었단 말인가. 어디에서 허점이 생긴 것일까……
아이들은 곧 잠이 들었다. 차은심은 눈물을 참아가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얼빈행 아침 첫차를 타야 했다. 짐은 작은 가방 하나로 줄였다. 짐 때문에 행동이 둔해져서는 안 되었고, 누구 눈에나 가벼운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보여야 했다. 날이 밝자마자 뒷방의 식모를 깨웠다.
"며칠 동안 길림의 친척 집에 다녀올 테니까 너도 집에 가서 쉬어라."
차은심은 하얼빈과 정반대인 길림을 간다고 했다.
"아저씨 식사는 어쩌고요?"
"눈치없기는. 아저씨도 함께 가시니까 그렇지."
"네에, 알겠어요. 며칠 계시다 오세요?"
"응, 닷새다."
"첫차로 갈 테니까 너도 어서 준비해라."
"네에, 고마워요 아주머니."
차은심은 아이들을 깨워 손수 낯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엄마, 우리 어디 가?"
작은아이가 들떠서 물었다.
"응, 친척집에 간다."
"친척집이 어딘데?"
큰아이가 벙글거리며 물었다.
"응, 엄마 바쁘니까 자꾸 묻지 말어."
"아빠도 같이 가?"
작은아이의 물음이었다. 이 말은 그냥 피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아빠는 일이 바쁘시니까 우리만 가는 거야."
"아, 좋다. 아빠하고 같이 가면 재미없어. 아빤 무서우니까."
큰아이가 손뼉을 쳤다.
"그래, 그래, 아빠하고 같이 가면 우리 맘대로 못 놀아. 그치?"
작은아이도 깡충거렸다. 차은심의 가슴은 눈물로 젖고 있었다.
"으응, 아빠 어디 계셔? 인사하고 가야지."
큰아이가 집을 나서다 말고 두리번거렸다.
"응, 아빠는 바쁜 일로 누구 만나러 가셨다. 그냥 가도 괜찮아. 어서 가자."
"치이, 아빤 맨날 바빠."
작은아이가 서운한 얼굴로 입을 삐쭉했다.
‘저것들이 무슨 마음이 쓰이는 것인가……’
차은심은 울컥 솟는 눈물을 참느라고 속입술을 깨물었다. 기차표는 2등으로 샀다. 3등을 타고 조사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기차 안에서 떠들면 안돼. 시끄럽게 하면 일본 순사가 잡아가니까.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얌전하니 가야 해. 알겠어?"
차은심은 두 아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엄한 얼굴로 일렀다. 두 아이는 시무룩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에서도 그렇지만 만주에서도 <일본 순사>는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호랑이보다 훨씬 더 위력이 컸던 것이다.
기차가 하얼빈을 향해 출발했다. 차은심은 창밖을 내다보며 솟구치는 울음을 씹어 넘기고 있었다.
"여보, 이게 뭐예요. 당신 혼자 두고……, 아이들만 아니었으면 저는 안 떠날 텐데…… 정말 미칠 것만 같아요……, 사랑해요……"
아무리 참으려고 애써도 눈물이 비어져 나와 차은심은 화장실을 찾아갔다. 기차는 하얼빈까지 펼쳐진 몇백 리 평원을 거세게 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편 윤철훈은 지하 고문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취조는 헌병대 도착 즉시 시작되었다. 그건 한시라도 빨리 조직을 일망타진하겠다는 의도였다.
"사진관을 차려놓고 무전 송신을 해온 스파이! 여러 말 하지 않겠다. 하수인들을 대라."
뱀 같은 인상의 대위가 차분하게 말했다.
"……"
윤철훈은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을 때까지는 입을 열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안 들리나? 하수인들을 대."
얼굴이 얇고 턱이 뾰족한 대위의 목소리가 약간 빳빳해졌다.
"……"
윤철훈은 첫 번째 시도하고자 했던 것이 무위로 돌아간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며 헌병들을 걷어차고 도주하려고 했었다. 그건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격을 유도해서 자신을 쏘게 하려는 것이었다. 가장 빨리 그리고 손쉽게 죽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기 전에 벌써 헌병 둘이 양쪽에서 팔짱을 단단하게 끼어버렸던 것이다.
"신사적으로 하려고 했는데 대접을 안 받겠다 그건가? 다시 묻는다, 빨리 하수인들을 대!"
눈이 유리알처럼 반들거리는 대위의 목소리가 팽팽하게 곤두섰다.
"……"
윤철훈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역전에서 밥장사를 하는 최규승과 인력거꾼 하서방을 입에 올리지 않으리라고 또다시 결심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으면 그뿐 그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정말 피를 봐야 알겠나!"
마침내 대위가 감정을 폭발시키며 책상을 내리쳤다.
"!……"
그 순간 윤철훈의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발소와 음식점 주인을 하수인으로 끌어들이자는 생각이었다. 그들한테서 필요한 정보를 얻어냈다고 하면 타당성도 있고, 사실 그들을 통해 얻어낸 정보들을 실토하면 그들은 물론이고 그들에게 그런 말을 흘려준 장교들까지 걸려들게 되는 것이었다. 최규승과 하서방을 보호하면서 왜놈들끼리의 분란을 야기시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너무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이봐! 이 새끼 지하실로 끌어가."
벌떡 일어선 대위가 윤철훈을 걷어차며 소리 질렀다. 윤철훈은 가죽채찍고문, 고춧가루물고문, 전기고문을 차례로 당하며 아침을 먹고, 점심까지 먹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시간조정을 했다. 이발소와 음식점 주인을 끌어들이게 되면 그들이 조사받는 동안에 그만큼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아내가 아침 첫차를 탔다면 지금쯤 하얼빈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오후 취조부터는 입을 열기로 했다.
"자아, 또 시작해 보실까? 아직도 고문이 부족하신가? 걱정할 것 없어. 우린 폴란드에서 수입한 45가지의 고문 방법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보다시피 기운 센 고문기술자들도 얼마든지 확보하고 있고. 네놈이 입을 여는 건 하수인들을 도망시키려는 의돈데, 그게 네놈 뜻대로 되진 않아. 오늘 아침 9시를 기해서 신경 전역에 비상령을 내렸으니까. 네놈이 버텨봐야 오늘 못 넘기고 입을 열게 만들 수 있어. 어때, 더 맛을 볼 테야, 실토를 할 꺼야? 누군가, 하수인들이?"
대위가 낮고 싸늘하게 말했다.
"예, 저어……"
윤철훈은 대위를 힐끗 보며 주먹질에 맞고 터진 아랫입술에 침을 발랐다.
"좋아, 어서 말해."
대위가 긴장하며 의자를 바짝 끌어당겼다.
"저어……, 사쿠라이발소하고 아사히음식점 주인들이……"
사쿠라이발소하고 아사히음식점 주인들? 그거 내지인들 아닌가? 대위가 깜짝 놀랐다.
"예……"
"아니, 내지인들이 너하고 한패라는 것야?"
대위는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예, 그들이 군사정보를 빼내줬습니다."
윤철훈은 일부런 <군사정보>라고 못을 박았다.
"이런 죽일 놈들이 있나. 조센징한테 군사정보를 빼주는 매국노 짓을 하다니. 이봐, 당장 출동 준비. 이놈을 꼼짝못하게 묶어둬."
대위는 시뻘겋게 흥분해서 소리쳤다. 윤철훈은 양쪽 손목과 발목을 쇠사슬로 묶는 건 그 어떤 자해행위도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윤철훈은 생각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이발소와 음식점 주인들은 그 사실을 적극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것을 간단했다. 그동안 입수했던 중요한 군사정보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그것을 전부 그들한테서 입수한 것으로 몰아대면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올가미를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치겠지만 그러나 그들의 말보다는 자신의 말을 더 믿게 되어 있었다.
‘어디 너희들끼리 한바탕 두들겨패고 맞고 해봐라. 장교도 몇 놈쯤 쇠고랑을 차보고.’
윤철훈은 멍든 얼굴로 비식이 웃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죽지 못한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그런 보복이라도 하고 죽는 것이 그래도 뜻있는 일이라 싶었다. 소련 스파이에게 이용당한 일본인들과 군사 정보가 흘러나가게 한 장교들. 전시하의 군사재판에서 그들은 사형을 면키 어려울 것이고, 재수가 좋아야 무기징역일 거였다. 윤철훈은 그동안 무선송신해 온 정보들을 간추려보았다. 만주 주둔 관동군의 실태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해서 보낸 것이 보람이라면 보람이었다. 관동군은 한마디로 종이호랑이였고 허깨비였다. 무적의 70만 관동군-그건 이제 허풍이고 위장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과 동남아 전선으로 엄청나게 투입되고 있어서 이제 지난날의 관동군이 아니었다. 그건 너무 놀라운 사살이었다. 정보를 수집한 사람이 놀란 형편이었으니 그 정보를 수신한 소련에서는 얼마나 더 놀라고 또 반가워했을 것인가. 어쩌면 임무가 거의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불행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패전은 얼마 안 남은 것 같았다. 중국과 동남아 전선에서 패배가 거듭되고, 만주가 이렇게 비었는데 유럽전선에서 승리한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하면 일본은 그야말로 사면초가, 패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무사한 것만으로도 천행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더 고통당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빨리 죽는 것이었다.
"이 새끼, 왜 거짓말이야! 네놈이 스파이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는데."
대위가 지하실로 뛰어들며 외쳤다.
"허, 그야 당연하지요. 스파이가 스파이라고 하면서 활동하는 법도 있나요? 그 사람들은 나한테 술 얻어 마시고, 화투해서 돈 따먹고 하면서 자기들도 모르게 스파이 하수인 노릇을 했지요. 이 사실도 부인한다면 나한테 데려오세요. 그 사람들한테 어떤 군사정보를 얻었는지 하나하나 다 밝혀줄 테니까요. 그럼 그 사람들은 그 정보를 누구한테서 빼냈는지 알게 될 것 아닙니까?"
윤철훈은 태연하게 말했다.
"뭐, 뭣이라고. 이놈이 아주 악질적인 방법을 썼네. 병신 같은 새끼들이 조센징 놈의 꾀에 당하다니."
대위는 책상다리를 걷어차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한참이 지나 이발소와 음식점 주인이 지하실로 끌려 들어왔다. 풀죽은 그들은 윤철훈을 보자 자기들의 결백을 주장하듯 욕을 퍼부었다.
"이 개 같은 놈아!"
"요런 쳐죽일 놈아!"
"당신들을 이용해서 미안하오."
윤철훈은 그들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는 기분으로 똑똑하게 말했다.
"저놈 말 들었지! 저놈이 이용했다는데도 너희들은 이용당하지 않았다는 거야?"
대위가 소리를 꽥 질렀다. 그 소리가 지하실을 크게 울렸다.
"글세, 군사기밀이 될 만한 것은 알려준 게 없다니까요."
이발소 주인이 부들부들 떨었다.
"예, 예, 저도 조센징한테 그런 것 알려준 게 없습니다."
음식점 주인도 떨며 말했다.
"병신 같은 새끼들, 조센징한테 이용이나 당하고. 스파이한테 이용당한 네놈들 죄가 얼마나 큰지 알기나 해?" 대위는 두 사람을 증오스럽게 노려보고는, "이 새끼들 끌고 올라가 유치장에 처넣어. 대질심문은 이따가 하겠다." 그는 두 부하에게 일렀다.
"대위님,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대위님, 한 번만 눈감아주십시오."
두 사람은 지하실을 끌려 나가며 절박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대위는 담배를 피워물며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너 소속이 어디야? 공산당이야, 국민당이야?"
대위는 그런 행위를 하는 조선사람은 으레껏 중국의 그 어느쪽에 속한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윤철훈은 어떻게 대답할까를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굳이 소련이라는 것을 기피할 필요가 없었다. 괜히 공산당이나 국민당 어느 쪽이라고 했다가 거짓말한 것이 드러나 곤욕을 치를 수도 있었고, 대위가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소련을 들이대 놀라는 꼴도 좀 보고 싶었다.
"쏘련이오."
"뭐, 뭐라고?"
대위는 윤철훈의 생각보다 훨씬 더 놀랐다.
"너 정말 쏘련이야?"
대위의 목소리가 칼날이었다.
"예."
"하, 이것 참!"
주먹으로 책상을 치는 대위는 무척 낭패스러운 얼굴이었다. 대위는 담배를 빡빡 빨고 나서 반도 안 탄 담배를 구둣발로 잉끄려댔다.
"이 새끼, 쏘련 어디로 송신했나?"
"블라디보스톡입니다."
"침투도 거기서 했나?"
"예."
"다른 조직이 또 있지?"
"그건 모릅니다. 저는 혼자였으니까요."
"잔소리 마라. 다른 조직을 대!"
"고정 스파이가 고정 스파이끼리 연락이 안 된다는 건 상식 아닙니까. 특히 쏘련 조직은 단독활동입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몇 놈이나 훈련을 받았나?"
"그때부터 저 혼자였습니다."
"사진관 개설자금도 그때 가져왔나?"
"예."
"다시 말한다. 여기서 포섭한 조센징 조직을 대."
"그건 정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주 임무가 군사기밀 탐지였기 때문에 조선 사람을 포섭해 보았자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교들의 출입이 잦은 고급 이발소와 고급 음식점의 주인들에게 접근한 것입니다."
"사진관에도 장교들 출입이 많았지?"
"예."
"여우 같은 놈. 정보수집을 많이 했나?"
"아닙니다. 위장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정보 수집에는 별로 효과가 없었습니다. 사진관은 이발소나 음식점하고는 달라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지도 않고, 제가 조선사람이라 장교님들이 하시해서 감히 무슨 말을 붙일 수도 없었습니다."
윤철훈은 술술 말을 꾸며대고 있었다.
"한 달에 몇 번씩이나 송신했나?"
"정규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전파를 탐지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정보들을 모아 한꺼번에 보냈습니다."
"여우 같은 놈, 바로 그래서 네놈을 그리 오래 못 잡았던 거야. 이발소와 음식점에서 빼낸 정보가 뭐지?"
"주로 병력이동 상황이었습니다."
"그걸 그자들이 어떻게 알지?"
"그런 고급 영업소의 단골손님들은 거의가 장교님들이시고, 부대가 이동하면 장교님들도 이동해서 영업에 지장이 생기니까 그 주인들은 부대 이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장교님들이 이동을 앞두고 이발하고 술 드시면서 무심코 이동한다는 말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그런 말들 중에는 어떤 부대가 어느 곳으로 이동한다는 식의 중요한 정보가 적지 않았습니다."
윤철훈은 이발소와 음식점 주인 그리고 장교들을 한 올가미에 넣어 조이고 있었다.
"하, 이런 놈의 일이 있나!"
대위는 한숨을 푹 쉬며 담배를 빼물었다. 그 한숨 소리에서 윤철훈은 승리의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넌 너 나름대로 수집한 정보를 벌써 다 송신했고, 넌 이미 잡혀 있다. 지금까지 대답은 사나이답게 잘했다. 지금부터 묻는 말도 사나이답게 대답하라. 알겠나?"
대위가 다가와 윤철훈의 오른손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인 담배를 내밀었다.
"예, 알겠습니다."
윤철훈은 고분고분하게 행동을 취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자신을 믿게 해야 이발소와 음식점 주인 그리고 장교들의 올가미가 더 조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관동군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중국 전선입니다."
"다른 데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윤철훈은 <동남아전선>은 살짝 피해 섰다. 이건 완전히 유도심문의 시작이었다. 송신된 내용을 파악하려는 것이었고, 그에 따른 응급대책을 강구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관동군이 얼마나 된다고 알고 있지?"
"관동군 사령부에서 말하는 대로 70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동안 부대 이동 정보에 관심을 많이 쓴 모양인데, 얼마나 이동했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제가 짐작하기로는 한 3분의 1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윤철훈은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이거야말로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절반이 넘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지만 슬쩍 3분의 1로 줄였다.
"3분의 1이라. 꽤나 정확하게 아는 편이군."
대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윤철훈은 또 승리의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너 같은 놈은 조센징인 게 아깝다."
대위는 이 말을 남기고 지하실을 나갔다.
"새끼, 건방지게 까부는군. 관동군은 허깨비군대라고 송신된 것이나 알아둬."
윤철훈은 담배를 맛있게 빨며 쓰게 웃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나흘 동안 이발소와 음식점 주인과 대질심문이 계속되었다. 윤철훈은 계획대로 그들을 몰아댔다. 그들은 그런 말 한 일 없다고 펄펄 뛰었지만 그때마다 몽둥이질이며 채찍질을 당할 뿐이었다.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런 정보를 흘린 장교들을 대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매를 견디다 못해 장교들의 이름을 대고는 했다. 수사는 윤철훈의 의도대로 그들 사이의 싸움으로 변해 있었다. 윤철훈은 저희들끼리 두들겨패고 물어뜯는 싸움을 느긋한 마음으로 즐기고 있었다.
윤철훈은 <특별수송자>가 되어 6일 만에 차에 실려 헌병대를 떠났다. 물론 윤철훈은 자신이 <특별수송자>인 것을 모르고 있었고, 알았다 하더라도 그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특별수송자>란 세균전부대에 생체실험용으로 보내는 그들의 암호였다. 윤철훈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기차를 탔다. 헌병 둘이 감시를 했고, 등 뒤로 채워진 쇠고랑은 풀어주지 않았다. 윤철훈은 이제 마지막 길을 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전시상황 속에서 스파이는 재판이고 뭐고 없이 총살을 시키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심한 갈증처럼 보고 싶었다. 고문의 고통만큼 진한 그리움으로 보고 싶었다. 그것들이 애비 없는 한세상을……, 어둠 짙은 차창에 아내와 두 아이의 모습이 어리고 있었다. 윤철훈은 눈물을 씹으며 아내와 아이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여보, 아이들을…… 얘들아, 건강하게……’
기차는 어둠 속을 줄기차게 달리고 있었다. 윤철훈은 이번 사건의 마무리에 더없이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게 자체 분란을 일으키게 만든 것도 통쾌했지만 최규승과 하서방이 무사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이 빨리 그리고 편하게 죽는 것뿐이었다. 윤철훈은 줄곧 기차에서 뛰어내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헌병은 변소까지 따라다녔다. 새벽에 기차에서 내리고 보니 하얼빈시의 빈강역이었다.
‘왜 여기로 데려온 것일까?……’
너무 뜻밖이라 윤철훈은 잠시 멍해졌다. 하얼빈, 아내가 좋아한 도시였다. 도시의 형태는 모스크바를 본뜨고 건물들은 유럽풍으로 지은 신하얼빈은 길바닥까지 돌을 네모지게 깎아 반원형 연속무늬로 치장한 도시였다. 아내는 그런 도시의 꾸밈보다는 바로 도시 옆을 흘러가고 있는 그 폭넓은 송화강과 강변에 줄지어 선 가로수 그리고 송화강에 지는 노을을 좋아했다. 잠시 거쳐 가면서 다시 오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윤철훈은 자동차에 실려가면서도 아무리 생각해 보았지만 왜 하얼빈으로 데려온 것인지 짚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윤철훈은 헌병대에서 내렸다. 조사를 다시 하나 하는 생각에 윤철훈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유치장에 갇혀서 하루를 보냈다. 점심도 굶기며 하루종일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늦은 저녁밥을 먹고 윤철훈은 또 차에 태워졌다. 아무리 노려도 빨리 그리고 편하게 죽을 기회는 오지 않았다. 어느 건물 안에서 차를 내렸다. 헌병 둘이 윤철훈의 팔짱을 단단히 끼었다. 윤철훈은 그들을 따라 어두운 마당을 가로질러 계단으로 내려갔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의 불빛은 너무 흐려 계단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헌병 둘이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불빛이 밝아졌다. 또 문이 나타나면서 헌병 하나가 지키고 있었다. 지하실에서는 습기와 함께 곰팡이 냄새가 났다. 두 번째 문을 통과하자 복도와 함께 양쪽으로 사무실 같은 것이 나타났다. 아주 넓은 지하실이었다. 왼쪽 첫 번째 사무실로 들어갔다. 네다섯 명의 헌병들이 앉아 있다가 그들을 맞이했다. 윤철훈을 데리고 온 헌병 중의 하나가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 확인이 끝나자 두 헌병은 돌아갔다. 윤철훈은 다시 두 헌병에게 끌려 복도로 나왔다. 윤철훈은 오른쪽 두 번째 방으로 끌려갔다. 방으로 들어서던 윤철훈은 흠칫 놀랐다. 사람들이 열대여섯쯤 있었던 것이다. 윤철훈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쇠사슬에 발목이 묶였다. 윤철훈은 그들이 모두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들은 거의가 얼굴에 피멍이 잡히고 옷에 피얼룩이 든 채 맥이 빠져 있었다. 그들을 헌병 하나가 지키고 있었다. 헌병들은 한 시간 간격으로 교대를 하면서 그들이 서로 말도 못하게 하고 앉지도 못하게 했다. 그들은 밤이 깊어 지하실에서 끌려 나왔다. 그들은 뒷문이 달린 뚜껑 덮은 차에 밀려 올라갔다. 헌병 둘이 타고 뒷문이 닫히면서 차가 출발했다. 한동안이 지나자 차가 심하게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하얼빈 시내를 벗어나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이었다.
‘그래, 이제 죽으러 가나보다……’
윤철훈은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차가 한 시간 남짓 달려 덜컹거리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차가 멈추고, 철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또 차가 멈추고, 철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하기를 네댓 차례 했다. 그들은 차에서 끌려내렸다. 차는 지하실 입구에 멈춰 있었다. 그들이 끌려간 곳
은 목욕탕이었다. 헌병들은 간 곳이 없고 육각몽둥이를 든 건장한 청년들이 그들을 지휘했다.
‘목욕을 시켜? 이곳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총살을 시키리라는 예상이 빗나가고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 윤철훈은 갑자기 의심이 솟았다. 그렇다고 육각몽둥이를 휘둘러대는 거친 청년들에게 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런 말을 꺼내면 그 청년들은 대답 대신 육각몽둥이로 입을 부술 것 같은 기세였다. 목욕을 끝낸 그들은 번호가 찍힌 푸른 죄수복으로 갈아입었다. 윤철훈은 자신의 번호를 내려보았다. 2983.
‘여기가 감옥인가? 아닌데, 감옥이 아닌데.’
한밤중에 죄수들을 목욕부터 시키는 감옥이 있을 리 없고, 목욕시설도 너무 좋았던 것이다. 윤철훈은 의심이 부쩍 더 생겼다. 그들은 2층 감방으로 끌려갔다. 윤철훈은 3인 감방으로 밀려 들어갔다. 눈높이로 난 구멍이 난 철문이 쿵 닫혔다. 윤철훈은 다른 두 사람이 중국공산당 지하 공작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도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이지 무척 궁금해했다. 이튿날 아침밥을 먹자마자 윤철훈네 감방문이 덜컹 열렸다.
"셋 다 빨리 나와. 예방주사 맞으러 가야 하니까."
육각몽둥이를 든 청년 셋이 버티고 서 있었다. 세 사람은 청년 셋에게 팔을 붙들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끌려갔다.
"자아, 호열자 예방주사를 맞게."
오십객의 남자가 윤철훈의 팔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해방 그리고 비극
내륙인 만주의 7월 중순은 폭염으로 끓고 있었다. 개들이 그늘에서도 혀를 빼물고 헐떡거렸고, 나뭇잎들마저 한낮에는 맥을 못쓰고 시들거렸다. 그 지글거리는 폭염을 헤치고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달려온 자동차 두 대가 지삼출네 마을 앞에 멈추었다. 포장 친 자동차 속에서 군인들 20여 명이 뛰어내렸다. 총을 든 그들은 2개 조로 나뉘어 한패는 마을로 뛰어들었고, 다른 한 패는 들로 흩어져 갔다. 마을로 들어선 군인들은 둘씩 짝을 지어 이 집, 저 집을 덮치기 시작했다. 지삼출의 집에도 군인이 들이닥쳤다.
"머시여!"
마당가 나무그늘에서 잠든 손자에게 부채질을 해주고 있던 지삼출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늙은 지삼출을 힐끗 쳐다본 두 군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워메, 놀래라. 사람 간 떨어지겄네!"
부엌에서 나오던 무주댁이 군인과 맞부딪치며 질겁을 해서 소리쳤다. 두 군인은 기민한 동작으로 집 안을 다 뒤지고 옆집으로 뛰어갔다.
"어째 또 저런다요?"
무주댁이 겁먹은 얼굴로 부산하게 남편 쪽으로 다가왔다.
"몰르겄네, 빌어묵을 놈덜. 지삼출은 혀를 차고는, 딴 집에 가보소. 또 무신 연고로 저 지랄덜인지."
그의 찡그려진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누가 숨어든 것도 아니고 요상시러라."
무주댁이 치마 말기를 추슬러 올리며 잰걸음질을 쳤다. 개가 짖어대고, 군인들의 외침이 터지고,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울리고, 마을은 금방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손들엇!"
"손 번쩍 들엇!"
군인들의 외침이 여기저기서 울리고 있었다.
"아이고, 저놈덜이 어쩔라고 남자덜얼 또 저리 싹 몰아댄다냐……"
허리가 약간 굽은 무주댁은 군인들이 하는 짓을 보며 허둥대고 있었다. 무주댁의 머리에도 세월의 눈이 하얗게 내려 있었다. 군인들은 늙은이와 어린아이들만 빼놓고 남자들을 무작정 내몰고 있었다.
"아이고메, 난리 나부렀소. 남자라고 생긴 것언 다 잡아가요."
무주댁은 숨을 할딱거리며 남편에게 말했다.
"머시여? 무신 일인고?"
지삼출이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름살 많고 머리 흰 외양에 비해 아직도 기력은 실해 보였다.
"또 군대 끌어갈라는 것 아니겄소?"
무주댁도 산전수전 다 겪어 눈치 빠르게 말했다.
"그렇겄제. 쌈에 판판이 진다는 소문이등마."
지삼출이 바지끈을 새로 조여 묶으며 눈썹이 꿈틀했다. 만주에는 조선에 비해 일본의 전황이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건 중국공산당 지하공작원들을 통해서 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관동군에서는 유언비어 유포죄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넣고 있었다. 그래도 일본이 질 거라는 소문은 끈질기게 나돌았다. 그리고 사오 개월 전부터는 중국에서 돈벌이를 하던 온갖 조선 장사꾼들이 돈들을 챙겨가지고 압록강을 넘어가고 있다는 소문도 퍼지고 있었다. 큰비 올 것을 쥐들이 제일 먼저 알 듯 세상 판세 돌아가는 것은 장사꾼들이 제일 빨리 아는 법인데 그들이 괜히 압록강을 넘어가겠느냐는 말이 일본의 패망을 아주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도 했다.
무슨 죄를 진 것처럼 남자들이 두 손을 들어올리고 자동차 있는 데로 끌려 나왔다. 군인들이 살벌한 기세로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들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도 두 팔을 든 채 논두렁에 한 줄로 서서 잡혀 오고 있었다. 잡혀 나온 40여 명은 자동차 앞에 두 줄로 세워졌다. 동네 사람 2백여 명이 반원을 그리며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군인들 10여 명은 잡혀 온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었고, 다른 10여 명은 동네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지휘봉을 든 장교가 두 줄로 선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나가기 시작했다.
"너!"
장교가 지휘봉으로 가리키면 뒤따르는 군인이 그 사람을 잽싸게 끌어내 따로 세웠다. 햇볕은 쨍쨍 내려쬐고, 땅은 후끈후끈한 열기를 뿜어내고, 폭염으로 숨이 막히는 속에서 무거운 침묵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너!"
장교의 목소리만이 침묵을 쨍 울리고는 했다.
"너!"
"너!"
40여 명 중에서 지적당한 사람은 14명이었다.
"나머지 사람은 해산시켜."
장교의 명령에 따라 군인들은 14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그들은 나이가 많아 보이거나 어려 보이는 두 축이었다.
"에에 또, 여기에 뽑힌 14명은 영광스럽게도 대일본제국의 성전에 참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너희들은 모두 황은을 입은 이들을 열렬한 박수로 환송하도록!"
장교가 동네사람들을 향해 한 말이었다.
"아이고, 나는 마흔셋이오. 우리 큰아들이 봄에 군대에 나갔소."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그 남자는 뼈대가 굵고 몸이 건장해 나이보다 다소 젊어 보였다.
"잔소리 마라!"
장교가 빠락 소리질렀다.
"저 사람 말이 맞으요. 나이도 마흔셋에다가, 큰아들이 군대에 나갔는디 아부지꺼정 나가는 것언 너무 과허요."
지삼출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닥쳐라! 이 늙은이."
장교가 눈을 부릅떴다. 무주댁이 뛰어나와 지삼출을 잡아끌었다.
"우리 아덜언 인자 열여섯밖에 안 되았소."
한 여자가 뛰쳐나와 자기 아들을 붙들었다. 그 총각은 키가 클 뿐 어머니의 말마따나 얼굴에는 앳된 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뭣들 하느냐, 빨리 태워라!"
장교가 지휘봉으로 허공을 후려치며 외쳤다. 군인들이 우루루 달겨들어 14명을 총대로 밀어제켰다. 아들을 붙들었던 여자는 땅바닥에 나뒹굴어지고, 그들은 자동차로 떠밀려 올라갔다. 자동차 두 대는 곧 출발했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다른 자동차 한 대에도 어느 동네에서 끌려가는 사람들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고 이놈덜아, 이놈덜아, 그 에린것얼……, 이 죽일 놈덜아……"
그 여자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멍하니 서 있었다. 끝이 안 보이게 넓은 벌판은 푹신하고 두툼한 질감으로 푸르렀고, 강렬한 햇살은 볏잎들에 부딪히며 들녘을 눈부시게 장식하고 있었다. 그 들녘 가운데로 넓게 뚫린 길을 따라 두 대의 자동차는 또 흙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 지삼출은 큰아들도 군대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니, 머시여? 서, 선상도 군대로 끌어가?"
지삼출은 60리 길을 내달아온 큰며느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 큰아들은 소학교 선생만이 아니었다. 나이도 마흔하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약하고 특히 총에 겁이 많아 일찍이 독립군으로 나서지 못했던 큰아들이 군대 생활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지 앞이 암담하기만 했다. 그리고 큰아들 작은아들을 모두 일본군에 빼앗기자고 평생을 싸워온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심정은 너무 착잡했다.
"벨수 있냐, 요것이 조선사람덜 팔자다. 맘 강단지게 묵고 무사허니 돌아오기럴 기둘리자. 소문도 그렇고, 왜놈덜 허는 꼬라지럴 봐도 그렇고, 이놈덜이 망헐 날이 바로 눈앞으로 닥쳤응게."
지삼출은 큰며느리에게 힘주어 말했다. 그건 그저 위로의 말이 아니었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지삼출은 일본인 곧 망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왜놈덜이 망허기넌 망허겄소?"
무주댁이 옷고름에 눈물을 찍어내며 물었다.
"두고 보소, 절대로 금년 못 넴길 것잉게. 그간에 나가 점친 말 틀리는 것 봤능가?"
"아이고, 그리만 됨사 얼매나 좋겄소. 당신이 점친 말이야 열에 아홉언 맞었제라."
"큰아가, 아부님 말씸 믿고 기운 채리자 잉?"
무주댁은 큰며느리를 다둑거렸다.
"야아, 그리허겄구만요."
큰며느리가 머리를 조아렸다.
한편, 남만석네 집단부락에서도 다급한 징병이 실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쪽에서는 세대주를 제외한 그 자식들로 국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집단부락을 운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집단부락은 일본군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아주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후방기지들이었던 것이다. 여름에는 군량미를 생산해 내고 겨울에는 연료를 생 새 내는 조직이니 아무리 형편이 급하더라도 그 조직을 파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요것이 무신 소리여? 어찌서 우리 아그덜이 왜놈 군대럴 나가?"
"금매 말이여, 여그가 조선도 아니고 만주 아니여?"
"그렇제. 만주꺼정 와서 그 고상히갖고 키운 자석덜 아니라고."
"하먼, 요것언 말이 안 되는 것이여. 즈그덜 좋자고 허는 쌈에 어째 우리 자석덜얼 끌어가."
"그려, 요것언 그냥 당헐 일이 아니여."
"하먼, 따질 것언 따져야제. 다른 일도 아니고 자석덜 일 아니여?"
"그렇제. 시상에서 질로 중헌 일이여."
집단부락 경비대장한테 징집통지를 받은 부모들은 쉽게 뜻을 모았다. 그러나 총을 들이댄 군인들 앞에서 그들은 따지고 어쩌고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동안 만주의 조선사람들은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징용이나 징병에 많이 끌려갔다. 일본의 선만일여 정책에 따라 만주의 조선사람들도 일본이 좋을 대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에는 징용이나 징병으로 끌어가려면 며칠 전에 통지서를 발부하는 최소한의 절차는 밟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징병은 그런 형식적 절차도 없이 총을 들이대고 마구잡이로 끌어가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만큼 사태가 급박해진 것이었다. 그건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변화 때문이었다. 2개월 전에 독일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유럽전선에서 독일군을 도맡다시피 해서 승리를 이룩한 소련은 연합국 안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일본의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 있는 힘을 확보한 것이었다. 유럽전선에서 승리한 병력을 만주에 투입하면 일본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해 있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변화 앞에서 일본은 최대 위기를 느꼈다. 그동안 중국과 동남아 전선을 막느라고 병력을 빼돌려 관동군은 형편없이 허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럽전선에서 승리한 사기를 앞세우고 소련군이 소만국경을 돌파해 공격을 해오는 날에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 위기를 막아내기 위해서 관동군은 부랴부랴 병력 충당에 나선 것이었다.
지만복은 송화강 건너 하얼빈 외곽지역에 있는 훈련소로 끌려갔다. 폭염 속에서 실시되는 훈련은 하루 12시간을 넘었다. 낮이 긴 여름의 해가 뜨기 전에 시작된 훈련은 해가 지고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영웅 나포레옹은 자기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했다. 그건 바로 우리 관동군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 관동군에는 불가능이 없다. 훈병 여러분은 영예스러운 관동군으로서 지금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신화를 창조하고 있는 주인공들이다. 그 신화는 무엇인가? 1주일, 단 1주일만에 신병훈련을 완수하는 일이다. 영광스러운 황군, 무적의 관동군 용사로서 여러분은 대일본제국의 명예를 쌍견에 짊어지고 있다. 신화를 창조하라! 최선을 다하라! 관동군 용사에게 불가능은 없다!"
매일 아침 훈련교장에서 교관들이 핏대를 세우며 외쳐대는 소위 정훈교육이었다.
정말 신병훈련은 1주일간이었다. 겨우 7일 동안에 제식훈련, 사격훈련, 돌격 훈련까지 하자니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강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폭염은 기승을 부리고, 먹는 것은 부실하고, 훈련은 강행되고, 훈련병들은 견디다 못해 퍽퍽 쓰러졌다. 그러나 쓰러지는 사람들에게 휴식이라고는 없었다. 정신력이 해이되었다 하여 조교들의 군홧발이 빗발칠 뿐이었다. 맞아 죽지 않으려면 쓰러지지 말아야 했다.
지만복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 낙오되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사나흘이 지나면서 죽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지만복은 자식들만을 생각했다. 그 어린것들 때문에도 개죽음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훈련병들 사이에 쉬쉬하면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선생님, 혹시 그 소문 들으셨어요?"
같은 내무반에 있는 소학교 제자가 지만복에게 속삭였다.
"무슨 소문?"
지만복은 지친 눈으로 생기 도는 제자를 바라보았다. 제자는 이제 열여덟 살이었다.
"못 들으셨군요? 선생님 말입니다, 곧 쏘련군이 만주로 쳐들어온다는 겁니다."
제자는 더 목소리가 낮아졌다.
"뭐라구?"
지만복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처럼 반가운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쏘련군이 만주로 쳐들어오면 우리 조선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검게 빛나는 제자의 눈은 지만복에게 산수문제를 풀 듯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글쎄다……, 그게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지만복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덧셈과 뺄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말이야 좀 복잡한 문제다. 쏘련이 들어와 일본을 쳐부수면 우리 조선사람들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지. 헌데 말이다, 곤란한 문제는 일본군이 되어 있는 우리 조선남자들이다. 우린 쏘련군에게 총을 쏘아야 하는 일본군이고, 쏘련군이 볼 때에는 우린 적군일 뿐이니 말이다."
지만복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선생님, 그건 간단하잖아요. 우린 총을 안 쏘면 되지요."
제자는 재빨리 말했고, 지만복은 제자를 딱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게 그런 뜻이 아니다. 총을 쏘고, 안 쏘고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일본군이라는 게 문제란 말이다."
"선생님, 그건 하나도 걱정할 게 없어요. 쏘련군이 진짜로 쳐들어왔다하면 그때는 도망가면 되잖아요."
제자는 또 거침없이 말했다.
"너!"
지만복은 소스라치며 재빨리 주위를 살피고 제자를 응시했다.
"……그러면 안 되나요?"
제자는 계면쩍어하며 말을 어물거렸다.
"안 되는 게 아니라 큰일난다. 그런 생각으로 자칫 잘못했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아냐? 왜놈들 총에 총살당하기 쉽다. 그런생각은 아예 하지를 말아라. 알겠느냐?"
"예에……"
"그냥 대답만 해선 안돼. 경거망동했다가는 큰 변 당하면 어찌 되겠느냐. 이런 때일수록 진중해야 한다. 알겠지?"
지만복은 다시 다짐했다.
"예에……"
제자는 소학생처럼 풀이 죽었다.
"그리고 말이다, 그런 말 다시는 딴 사람한테 꺼내서는 안 된다. 그런 말 한 것을 여기 교관이나 조교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고이 살아남지 못한다. 알겠지?"
"예에……"
지만복은 불안한 속에서도 희망을 얻었다. 훈련을 이겨내기가 한결 수월했다. 소련군이 기왕 일본군을 치려면 하루라도 빨리 치기를 그는 고대하고 있었다.
"요새 아무런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유포시키고 있는 놈들이 있다. 그런 놈들은 적발 즉시 총살이다. 장병 여러분들은 추호도 현혹되지 말기를 바란다."
교관과 내무반장들이 열을 올려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유언비어가 어떤 것인지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걸 입에 올리면 모르고 있던 훈련병들까지 알게 될 거라는 염려 때문일 거였다. 그러나 그 유언비어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훈련병은 하나도 없었다. 지만복은 가까스로 훈련을 견디어내고 기성 부대로 떠났다. 자동차들은 산이라고는 볼 수 없는 광막한 벌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차는 쉴새없이 덜컹거리며 요동 쳤고, 신병들은 포장 친 차 속의 찜통더위와 함께 끊임없이 조리질당하면서 기진맥진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 강가에서 밥을 해먹을 때나 어느 들판에서 야영을 하게 될 때마다 다른 차를 타고 온 사람들에게 서로 묻고는 했다.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해가 저쪽에서 뜨니까 동쪽으로 가고 있는 건 틀림없지요?"
"그쪽이 동쪽이긴 한데, 차가 꼭 동쪽으로만 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어쨌거나 넓게 잡아 동쪽이면 쏘련 쪽이 맞지요?"
"그렇지요. 쏘련 쪽이지요."
그들은 어렴풋이 소만국경지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사흘 만에 부대에 도착했다. 지만복은 막사 안에 붙어 있는 달력을 보고서야 7월 24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튿날은 모처럼 휴식이었다. 그 하루 동안에 신병들은 부대에 대한 이런저런 소식들을 앞다투어 물어날랐다. 소련땅 하바로프스크가 한 2백 리쯤 떨어져 있다는 것, 고참병들 중에 조선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 부대 앞에 흘러가는 큰 강이 흑룡강이라는 것 등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보다 놀란 것은 그 부대에서는 소련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이 전혀 비밀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일전불사를 외치며 신병들의 사기를 북돋우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병들은 사기가 오르기는커녕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자신들의 능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총알받이 하려고 끌려온 것이구나!……’
지만복은 참담한 심정으로 이 생각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었다. 직업도 나이도 불문하고 징집을 했을 때부터 관동군이 얼마나 위기에 몰려 있는지는 짐작했었다. 그런데 7일간의 속성훈련에다가, 그런 엉터리훈련을 받은 조작군인을 최전방인 국경부대에 배치하는 것을 보면 관동군의 위기는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도망가면 되잖아요.>
어린 제자의 말이 떠올랐다. 지만복은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고 싶었다. 일본을 위해서 소련군에게 총을 한 방이라도 쏠 이유가 없었고, 이런 속 빈 군대에 있다가 개죽음당하는 것은 너무 뻔한 일이었던 것이다.
"미리 경고한다. 너희들 중에 혹시라도 탈주를 도모하는 자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일찌감치 버려라. 여기서부터 신경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해서 만주의 절반인 동부 전역에 헌병대 조직망이 거미줄처럼 쳐져 있다. 제아무리 영리하고 날쌘 놈이라고 하더라도 부대 밖 이삼십 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체포된다. 다 알다시피 전시하의 도망병은 무조건 사살이다. 비겁한 짓으로 더럽게 죽지 말고, 황군으로서 충성을 다하라!"
대대장이 신병 환영사에 덧붙인 말이었다. 속이 빈 군대인 것처럼 그 말도 터무니없는 공갈 협박인지도 몰랐다. 그럴 가능성은 다분했지만 그러나 이 국경에서부터 길림까지는 너무나 까마득하게 멀었다. 아무런 경계나 조사가 없어도 걸어서 가기에는 몇 달이 걸릴 수천 리 길이었다. 지만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암담한 심정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루를 쉰 이튿날부터 신병들은 총 대신 삽과 곡괭이를 들었다. 그들은 참호파기에 동원된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방어선이 아니다. 너희들 개개인의 목숨을 지킬 생명선이다. 최단시간 내에 최장의 거리를 파도록 최선을 다하라!"
키가 작으면서도 독기가 성성한 중대장이 쇳소리를 내며 외친 말이었다.
"미친놈들, 말은 그저 뻔질나게 잘 내뱉는군. 밥은 그저 배가 고파 허리를 펼 수 없도록 주면서도 뭐, 최단시간 내에 최장의 거리를 파도록 최선을 다하라?"
지만복은 쓰게 웃었다. 어렸을 때 배가 많이 고팠었지만 나이 들고 나서 이처럼 배가 고프기는 처음이었다. 양이 너무 적어 그야말로 수저를 놓으며 배가 고팠다. 젊은 사람들은 그저 <아이고, 배고파 죽겠네>를 훈련소에서부터 입에 달고 살았다. 기성 부대에 오면 좀 나아지려나 했던 꿈은 사라진 것이었다. 일본군은 군인만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식량도 모자라는 것이 분명했다. 지만복은 초라한 일본군의 허상을 쓴웃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참호는 서서 총을 쏠 수 있는 깊이와 두 사람이 왕래할 수 있는 넓이로 파야 했다. 그런데 참호파기는 하루이틀로 끝나지 않았다. 소대별로 독립된 그 작업은 1차방어선이 끝나면 2차방어선으로 이어지고, 2차방어선이 구축되면 3차방어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3차 방어선이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는 어느 날이었다.
쿵! 꽝! 쿵쾅!
난데없는 폭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쏘련군이다, 쏘련군!"
웨에엥엥엥……
폭음과 싸이렌소리가 뒤엉키고, 군인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뛰고, 부대마다 일대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소련군이 8월 8일을 기하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소만국경 전역에 걸쳐서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 · 중국 · 소련 세 나라의 국경이 맞닿고 있는 두만강 하류의 핫산 일대에서는 소련군이 당일로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로 진격해 들어왔던 것이다. <무적의 관동군> 못지않게 <귀신도 잡는 국경수비대>라고 뽐내던 그들이 전쟁개시 단 몇 시간 만에 무너지고 만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드넓은 전선에 걸쳐 장기전을 수행하느라고 일본군이 얼마나 허약해져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쿵! 콰당탕탕! 콰광!
소련군의 탱크들이 가로로 일직선을 이루어 진격해 오며 불을 뿜어대고 있었다.
"기관총! 기관총을 난사하라!"
소대장이 허둥거리며 목이 터지고 있었다.
따다다다다……
지만복네 소대의 기관총들이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쿵! 쿵쾅! 콰당탕!
기관총 사격에 탱크들은 끄떡도 하지 않고 밀려들고 있었다. 그건 마치 코끼리 떼에게 콩알을 던지는 격이었다.
"수류탄, 수류탄 투척! 수류탄 투척!"
소대장이 갈팡질팡하며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지만복네 소대의 고참병들이 수류탄을 던지기 시작했다. 신병들은 소총밖에는 가진 것이 없었다.
쿵쾅쾅쾅! 콰당탕탕탕!……
수류탄의 폭음음 흔적도 없고, 탱크들은 더 거세게 불을 뿜어대며 몰려오고 있었다. 코끼리떼에게 돌을 던져 코끼리떼를 성나게 한 꼴이었다.
"소대, 제2선으로 후퇴하라! 제2선으로 후퇴하라!"
소대장이 허겁지겁하며 목소리가 찢어지고 있었다. 지만복네 소대원들은 허둥지둥 참호를 벗어나 제2방어선으로 내뛰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제3방어선에서마저 밀려나게 되기까지 하루 반이 걸렸다. 13일 동안 죽을 힘을 다해 팠던 세 개의 방어선은 단 하루 반 만에 다 무너진 것이다.
"소대, 후퇴! 후퇴!"
지만복네 소대원들은 무작정 벌판을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탱크들이 그들을 앞질러버렸다. 그들을 앞지른 탱크들은 그들을 향해 대가리를 돌렸다.
와아, 와아!
그들의 뒤에서는 소련군이 함성을 지르며 쫓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포위당한 것이었다. 그들은 총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지만복네 중대원 삼분의 일 정도가 죽고 나머지는 다 포로가 되었다. 신병들은 총 한번 제대로 쏘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소만국경의 관동군들은 그 어느 부대나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조선으로 진격한 소련군은 이틀 만인 8월 10일에 웅기를 점령했고, 12일에는 나진과 청진을 점령하고 있었다. 지만복은 포로가 된 중대원들과 함께 집과는 반대쪽인 아무르강(흑룡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조선사람들과 지만복은 소련 땅을 밟으며 집들이 있는 동쪽 하늘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높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무심히 떠가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남만석네 집단부락에서는 뜻밖의 외침에 놀라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왜놈덜이 다 없어졌다! 왜놈덜이 다 도망갔다아!"
어떤 사람이 이쪽 마당, 저쪽 마당으로 팔을 휘젓고 뛰며 마치 울부짖듯이 외쳐대고 있었다.
"머, 머시라고?"
"무신 소리여? 저것이 무신 소리여?"
"왜, 왜놈덜이 도망얼 가?"
집집마다 사람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우루루 사무실로 몰려갔다. 사무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일본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만주 경찰들도 없었다. 그들은 사무실로 뛰어들었다. 흩어진 책상 위에 총 서너 자루가 나뒹굴어져 있었다.
"밤새 다 도망갔구마."
"어쩐 일이까?"
"어쩐 일이기넌. 전쟁에 진 것이제."
"글먼 우리도 고향 가야 되겄네."
"하먼, 가야제."
"와아, 인자 살았다."
그들은 마당으로 나왔다.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마당으로 나와 있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아침햇살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들은 말을 잊고 있었다.
"우리도 얼렁 고향 찾어가자아!"
누군가가 힘차게 외쳐댔다.
와아-
아이들까지도 모두 팔을 뻗쳐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저그 창고에 곡식이 있을 것이여. 그것보톰 노놔갖고 짐얼 싸야제."
"그려, 그래야 노자도 맨글제."
"자아, 여자덜허고 아그덜언 물러스거라."
남자들은 길 떠날 채비를 착착 서두르기 시작했다. 창고의 곡식을 풀어 식구 수에 따라 배급을 시작했다. 내일 떠나기로 하고 여자들은 짐 싸기를 서둘렀다. 곡식 배급은 오후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참으로 오랜만에 집집마다 밥을 푸짐하게 지었다. 배가 불거지도록 밥을 많이 먹은 사내아이들은 마당에 나와 옷을 걷어올리며 서로 배 크기를 자랑했다. 이튿날 아침에 남자들은 자식이 군대에 끌려간 집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했다.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지만 결국 다같이 떠나기로 했다. 다 고향을 찾아올 수 있는 나이이니 떠날 때 같이 떠나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그들은 점심까지 싸 가지고 길을 떠났다. 여자고 남자고 힘닿는 데까지 짐들을 이고 지고 있었다. 1백 가구 6백여 명의 행렬은 꽤나 길었다. 그들이 한 20리쯤 걸었을 즈음이었다. 저 왼쪽에서 사람들이 떼지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무슨 소리를 외치며 달려오고 있었는데 손에는 무슨 연장 같은 것들을 들고 있었다.
"저것이 머시여?"
"글씨, 요상헌디?"
"우리헌트로 쫓아오고 있는 것 아니여?"
"잉, 그런 기색인디."
불안스러운 말들이 오가면서 그들의 발걸음은 자연히 멈추어졌다.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외침도 좀 더 분명하게 들렸다. 그건 중국말들이었고, 그들의 손에 들린 것들은 여러 가지 연장이었다.
"뙤놈덜이 우리 해꼬지헐라고 오네!"
"그려, 왜놈덜 도망간 것 알고 땅 뺏긴 원한 갚을라고 오는겨."
"맞구마. 요 일얼 으쩌제?"
"큰탈났구만."
"벨수 없소. 싸와야제."
"무신 수로. 우리넌 맨주먹인디."
"근다고 앉아서 처자석꺼정 다 죽일라요?"
"그려, 처자석덜언 살려야제."
"다덜 짐 내려!"
여자고 남자고 다 짐들을 내렸다.
"우리가 저놈덜얼 맡을 것잉게 여자덜언 새끼덜 델꼬 저짝으로 내빼."
나이 제일 많은 남자가 서쪽을 가리켰다. 모두의 눈길이 그쪽으로 쏠렸다.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는 중국 사람들과는 반대쪽, 그쪽에는 망망한 광야가 펼쳐져 있었다.
"일본 놈 주구들을 쳐죽여라!"
"주구들을 몰살시켜라!"
중국 사람들의 외침이 확실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들이 손에 손에 든 연장이 도끼 낫 쇠스랑 같은 것들인 것도 뚜렷하게 보였다.
"멋덜 허능겨. 얼렁 가!"
나이 많은 사람이 발로 땅을 구르며 소리쳤다. 남자들은 자기 아내와 자식들의 등을 떠밀었다.
"죽기 살기로 내빼야 혀. 저놈덜이 따라오지 못허게."
나이 많은 사람이 목터지게 소리질렀다. 여자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와아, 주구놈들 죽여라아!"
중국 사람들이 100여 미터도 못되게 가까워져 있었다.
"돌이고 머시고 다 집어 들어!"
나이 많은 사람의 명령에 따라 백여 명의 남자들이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라!"
"깨끗하게 원수를 갚아라!"
중국 사람들이 연장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달겨들었다. 그들은 중국 사람들과 얼크러졌다.
으악!
어이쿠메!
처절한 비명 속에 피가 튀는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쉽사리 끝나지 않고 있었다. 조선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도 중국 사람들에게 덤벼들고 또 덤벼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 사람의 연장을 뺏어 싸우기도 했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광막한 벌판 저쪽으로 기를 쓰며 도망가고 있었다. 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남자들이 거의 다 쓰러져 갈 즈음 여자들과 아이들의 모습은 끝없는 광야 저쪽에 점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끝>
덧붙임 : 그들은 그날 이후 오늘날까지 그때를 <해방>이라 부르지 않고 <그 사변>이나 <그때 사변>이라 부르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