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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4-8

42. 학병의 파장

11월에 들어서 총독부에서는 대학. 전문대학. 고등학교에까지 징집 영장을 일제히 발급했다. 그리고 중추원에서는 <학병 불지원자는 휴학시켜서 징용키로 결정>했다. 그러니까 학도지원병이란 <지원>은 허울 좋은 장식일 뿐이었다. 이에 발맞추어 이광수와 최남선은 학병지원 권유 연설을 하기 위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결국 제1차로 학병 적격자 1천 명 중에 959명이 지원을 완료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관부연락선 곤륜환이 미국 잠수함에 격침되어 54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2월로 접어들면서 징병 적령을 1년 낮추는 긴급사태

가 야기되고 있었다.

대나무숲이 겨울바람에 쓸리는 소리가 밤의 정적 속에서 스산하게 물결 짓고 있었다. 그 소리에 실리듯 어디선가 다듬이질하는 방망이 소리가 도드락도드락 멀게 들리고 있었다. 문풍지 떠는 겨울밤은 깊어가고 방안의 등잔 불빛은 가물거렸다.

"유언비어 유포죄로 잡혀 들어가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는데 요새 전시 개황이 어떤지 모르겠소."

담배에 불을 붙인 정도규가 말을 꺼냈다.

", 지난번 관부연락선 격침이 사태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반격이 본격화된 상태에서 일본은 제공권을 위협당하기 시작했고, 거기다가 해상권마저 연락선이 격침당할 정도로 위협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이현상의 차분하면서도 힘이 실린 대답이었다.

"그럼 유언비어라는 게 사실이란 말입니까? 29라는 폭격기가 일본 상공에 나타나고, 남지나해에서 수송선들이 폭격당해 침몰하고 있다는 것이.."

유승현이 가부좌를 더 단단히 틀며 물었다.

", 그건 전혀 유언비어가 아닙니다. 그건 막연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두달 전 11월에 미국의 소리 단파 수신 사건으로 10여 명이 실형을 받은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일본이 은폐하고 있는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현상이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그럴 거요. 왜놈들이 제 놈들한테 불리한 일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은폐하겠소. 헌데 신문이고 방송에서는 날이 날마다 승전보만 울려대고, 지식인들은 그것을 액면 그대로 다 믿고 앞다투어 친일 대열에 나서며 광분하고 있으니 한심할 노릇 아니오."

정도규가 세차게 혀를 찼다.

", 그게 이기적이고 약아빠진 지식인들의 박쥐 근성 아닙니까.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새파랗게 젊은 놈들까지 서로 열성적으로 친일을 하려고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문필가라는 것들의 작태를 보십시오. 잡지마다 매달 아첨과 아부의 글을 경쟁적으로 써대느라고 정신들이 없습니다. 딱할 노릇이지요."

이현상이 쓰게 웃으며 담배를 빼들었다.

"저도 책방에서 더러 목차를 펴보기는 하는데, 그런 사람들의 심중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글이란 자기 수명보다 몇십배 긴 것인데 무슨 생각들로 그런 글들을 쓸까요? 전혀 압력을 받을 것 같지 않은 신출내기 문사들까지 열렬하게 천황만세, 성전만세를 외쳐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유승현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 그거야말로 일본이 아세아의 맹주가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서는 자발적 친일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만주사변 이후부터 유행했던, 일본이 조선을 2백 년 지배한다는 말이 근년에 다시 부쩍 유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다 그런 맹신 때문입니다. 2백 년 세월이면 자기들이 30년을 더 산다고 치고 얼마나 까마득한 세월입니까. 그 계산을 해보고 안 되겠다 친일하는게 상수다 하고 나서는 겁니다. 그자들이 근자에 당당하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뭔지 아십니까? 친일 하지 못하는 것은 무능력자다. 참 대단한 능력들 가진 거지요. 허허허...."

이현상의 건조한 헛웃음이었다.

"그럴 거요. 자기네들끼리는 또 경쟁이 치열할 테니까. 그 말이 명언 중에 명언이요."

정도규도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저어. 긴급히 상의드릴 말씀이 한 가지 있습니다."

시국담은 그것으로 끝내고 밀행을 한 본론을 꺼내려는 듯 이현상이 앉음새를 고쳤다.

", 말씀 들읍시다."

정도규와 유승현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 다름이 아니오라 최근에 실시되고 있는 학병지원 문제 말입니다. 그걸 그대로 좌시, 방관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무슨 좋은 생각이 있소?"

정도규는 이현상이 무슨 방안까지 생각하고 있을 것임을 이렇게 물었다.

", 최대한 힘 닿는 데까지 구해 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동지들과 논의한 결과 지리산으로 학생들을 구출해 내자는 잠정적인 결론을 얻었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지리산...."

정도규는 눈을 내리감았다. 한동안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대나무숲 쓸리는 소리와 문풍지 떠는 소리가 한결 가깝게 밀려들고 있었다.

"지리산이 깊고 큰 산이긴 하오만 두어 가지 문제점이 있지 않을까 싶소. 첫째가 왜놈들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방임할 리가 없고, 둘째 언제까지 산중에서 도피 생활을 할 것이냐 하는 문제요"

정도규의 말이 무겁고 어두웠다.

", 그런 점들에 대해서 충분히 토의하기는 했습니다. 처음에는 덕유산과 지리산이 거론됐는데 산의 규모로나 위치로나 덕유산이 지리산을 당할 수 없어 지리산을 택한 것입니다. 지리산은 삼도오군에 걸쳐 있어서 여러 지역의 학생들을 모아들이기에 용이합니다. 그리고 다 아시다시피 그 웅자가 어마어마하여 봉우리들과 골짜기들이 겹에 겹으로 이루면서 수도 없이 뻗어나가 산이면서 산맥을 이루고 있는 것이 지리산입니다. 전라도 쪽 노고단과 경상도 쪽 장터목 아래서 40년 넘게 약초를 캐며 살아온 두 영감님을 만나 보았습니다. 두 분 다 하는 말이 평생을 골골이 다닌다고 다녔지만 지금까지고 지리산을 다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는 동학군들과 의병 잔류자들이 마을을 이루며 무사히 살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몇 명이나 피신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몇십 명을 말할 것 없고 몇백 명이 되더라도 지라산에서는 표도 나지 않습니다. 왜놈들이 그들은 잡아내려면 일이천 명 군대 동원해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젊은 학생들이 신속하고 기민하게 그 많은 산골짜기로 피해 다니는데 무슨 수로 당하겠습니까? 한 일이만 명 동원해서 산을 둘러싸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왜놈들은 현재 큰 전쟁을 치르느라고 몇백 명의 병력도 따로 지리산에 투입할 여력이 없습니다. 얼마나 사정이 급하면 순사들까지 전쟁터로 끌어가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 문제입니다. 제가 전망하기로는 일본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길어야 5년이고 짧으면 2, 3년 내에 패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개시한 이상 일본을 오래 갈 도리가 없습니다. 물자가 부족해서 유기그릇들을 강탈해 가기 시작한 것이 벌써 언젭니까? 그것으로 폭탄과 총알을 만들어 물자 풍부한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습니까? 아니, 왜놈들이 10년을 버틴다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 젊은이들도 산중에서 10년을 맞서 버텨내야 합니다. 그게 왜놈들에게 끌려가 억울하게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고학력 젊은이들이 군대에 끌려 나가는 것은 이중 삼중의 피해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왜놈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 그렇고, 우군인 연합군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그렇고, 해방을 하루라도 늦추게 하는 것이 그렇고, 죽게 되면 그 배움이 민족적 손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산중에서 젊은이들을 그저 무위도식시키는게 아닙니다.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군사 조직화하여 인근 지역의 왜놈들을 상대로 투쟁을 시도하고, 사회주의 사상학습을 철저히 시행하여 해방의 날에 대비시키는 것입니다. 대충 이런 토의였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빈틈이라고는 없이 논리정연하게 말을 마친 이현상이 정도규와 유승현을 번갈아 보았다.

"참 유익한 토의를 한 것 같소. 그런 주도면밀한 토의를 거쳤다면 그 건에 대해서 더 말할 것이 없이 찬성이오."

정도규는 흔쾌하게 찬성했고, 유승현도 폭넓게 고개를 끄덕였다.

",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루라도 빨리 학생들을 피신시킬 수 있을지 그게 문제입니다."

이현상은 다음 단계로 이야기를 끌어갔다.

"그런 별로 어려운 문제는 아닌 것 같소.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극비리에 지난날 조직을 되살려 학생들을 접촉하면 되잖겠소. 근동의 대학생들이야 파악하기가 쉬운 일이니까."

정도규의 빠른 대응 이어.

", 그렇게 해주시면 일이 빨리 진행되겠습니다. 수고스럽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현상은 머리를 숙여 보였다.

"수고라니 무슨 말이오. 이 동지가 하는 수고에 비하면 우린 너무 면목이 없는 사람들이오."

정도규가 손을 내저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현상이 재빨리 가부좌를 풀며 뛰쳐 일어날 기세를 보였다.

"아닙니다. 밤참을 준비했습니다."

유승현이 안심하라는 손짓을 하며 일어났다.

유승현이 받아가지고 들어온 상에는 삶은 닭 두 마리와 술병이 놓여 있었다.

"이 동지께서 이쪽 큰놈으로 한 마리 다 잡수십시오. 저희는 하는 일도 없고 이제 나이만 들어서 이것도 다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유승현이 이현상 가까이 상을 놓으며 말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현상이 쑥스럽게 웃었고

"이동지, 또 가실 길이 먼데 어서 드십시다. 자아, 잔 받으시오."

정도규가 다가앉으며 술병을 들었다.

"요새 웬 술이 다 있습니까. 저는 술을 안 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현상이 잔을 가리며 사양했다.

", 요새 술이 아니고 이삼 년 전에 담아둔 매실줍니다. 약이 되니 한잔만 하십시오. 고기 맛도 더 나고요."

유승현이 권했다.

"아닙니다. 술을 입에 대면 저는 꼭 한 잔이 열 잔이 되어 버립니다. 쉬어갈 처지가 못 되니 아예 입에 안 대겠습니다."

이현상은 닭다리 한쪽을 찢어 들었다.

"됐소, 그러하시오. 우리끼리 한잔 나눕시다."

정도규는 변함없이 철저한 지하 활동가의 모습을 느끼며 유승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어느 날 신세호의 사립 앞에서 목탁소리가 울렸다.

"이 추운디 동냥 나오신 시님이 다 기시네. 시상살이가 에로와진게 시주허는 사람도 없는갑다. 아가, 얼렁 쌀 내다디려라."

새로 손질한 옷에 인두질을 하며 신세호의 아내 김씨는 며느리에게 일렀다. 신세호의 며느리는 사발에다 쌀을 수북하게 담아 나무 쟁반에 받쳐가지고 사립으로 나갔다.

"나무관세음보살, 소승 운봉이라 하옵니다. 신 선생님 기시온지요?"

운봉이 고개를 조아렸다

"야아, 쬐깨 기둘리시게라우."

신세호의 며느리는 약간 놀란 기색으로 서둘러 돌아섰다.

"아부님, 아부님, 운봉 시님이 아부님얼 찾아오셨는디요."

신세호의 며느리는 사랑방 앞에서 조심조심 말했다.

"? 운봉 시님이!"

곧 방문이 열리고 신세호가 나섰다.

"쌀 여그 두고 얼렁 가서 모시그라."

신세호는 며느리에게 이르며 마루를 내려서고 있었다. 운봉과 신세호는 마당 가운데서 마주쳤다.

"그간에 평온하신지요."

운봉이 먼저 합장을 했다.

", 염려지덕으로, 이 엄동에 어인 걸음이시오? 어여 드십시다."

신세호가 반갑게 인사했다.

"긴히 의논디릴 일이 있어서..."

운봉이 자리를 잡으며 운을 떼었다.

", 무신 일이 있는가요?"

신세호는 불을 헤친 화로를 운봉 옆으로 밀어놓았다.

"저어, 큰외손자 일인디요..."

"...?"

신세호는 문득 운봉을 쳐다보았다.

"시방 어디 있는가요?"

"징집날짜 기둘림서 그저 집이서 그러고 있지요."

신세호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말 끝에 한숨이 이어졌다.

"학병에 안 끌려갈 방도가 있구만요."

운봉은 한시라도 빨리 신세호의 상심을 없애려고 이렇게 말했다.

"아니, 머시라고요!"

신세호의 허리가 곧추서며 눈에 불이 켜졌다.

"아조 존 방도가 생겼구만이라. 그것이 그렁게..."

운봉은 유승현에게 들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하기 시작했다. 신세호는 이야기를 유심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 그려서 지리산으로 피허는 것인디 어찌 생각허시능게라?"

운봉은 이야기를 끝내며 화로에 손을 쪼였다.

"그것이 좋기넌 헌디..."

신세호는 고개를 숙이며 무슨 생각엔가 잠겼다. 운봉은 부젓가락으로 재 위에 무심히 낙서를 하고 있었다. 재 위에 씌어지고 지워지고 다시 씌어지는 글씨는 공허라는 한문이었다.

"보내기넌 보내야 하겄는디, 그러고 나먼 집안이 성치럴 못헐 것이니...."

신세호가 한참 만에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는 큰딸이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할 것이 두려웠다. 그 고초를 모면할 방도가 없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딸의 얼굴만 눈앞에 가득할 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운봉은 그때서야 부모한테 우환이 닥치리라는 것을 생각했다. 경찰에서 부모를 끌어다가 호되게 다룰 것은 틀림없었던 것이다. 그 너무 당연한 일을 미리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 면목 없기도 했다. 피신을 권유하려면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건 난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난관을 피할 수 있는 묘안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소승이 그분헌티 무신 묘책이 없는가 알아보겄구만요. 선생님도 그간에 생각혀 보시고라."

운봉은 그저 신세호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유승현에게 물어보면 무슨 묘책이 생길 것 같기도 했던 것이다.

"참 진퇴양난이오. 중지럴 모아보먼 묘방이 없지도 않을 것이니 시님이 그리 히주시먼 고맙겄구만요." 신세호는 곰방대로 쌈지를 끌어당기며 말하고는 "정 방도가 없으먼 에미가 당허는 것이 도리겄지요" 그는 결심하듯 무겁게 말했다.

사흘 뒤 깊은 밤 그림자 둘이 송중원의 집을 나섰다. 그 그림자들은 어둠을 헤치며 빠르게 마을을 벗어났다. 그리고 어둠이 장막을 친 그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날 오후에 하엽이는 경찰서로 달려갔다. 손에는 종이 접힌 것이 들려 있었다.

"우리 아덜얼 잠 찾어줏씨요. 어지께 집얼 나가서 밤에 안 들어오고, 오늘도 하로 내내 기둘려도 안 들어와서 요상하다 싶어 방으로 들어가봉게 책상 우에 이 편지가 있었구만이라. 야가 어디로 죽으로 간 모냥인디, 지발 무신 일 저질르기 전에 찾어주시게라."

하엽이는 편지를 내보이며 울면서 애원했다.

모친 전상서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이 글을 씁니다. 어머님께 먼저 불효를 사죄드립니다. 소자는 이제 더 이상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힘도 용기도 없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 사느니 차라리.... 부모님보다 앞서가는 것이 불효 중에 제일 큰 불효인 줄 잘 알고 있사오나 소자는 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불효자를 용서해 주시고 부디....

불효자 준혁 배상

"이거 유서 아닌가!"

"야아, 일 저질르기 전에 얼렁 잠 찾어주시게라우."

하엽이는 눈물을 흘리며 순사에게 매달렸다.

"그래, 아주 죽기로 작정을 했구먼."

"언제 집을 나갔다고요?"

"어지께요."

"그럼 벌써 열 번도 일 저질렀을 것 아닌가."

"당연하지, 죽기로 작정하고 집 나간 놈을 무슨 수로 찾어."

"젊은 놈들이 왜 이리 자살하는 것을 좋아해?"

"이놈은 이거 학병 나가는 것이 무서워 죽을 작정을 했구만."

"누가 아니래나, 거 귀찮네 참"

"가시오, . 우리도 딴 일로 죽을 지경이오."

"아니고메, 이러시먼 으쩐당레가. 요런 일에 경찰서 안 믿고 누구럴 믿으라고 이러시오."

하엽이는 발을 구르며 더 매달렸다.

"자식 단속을 집에서 잘해야지 이제 와서 어쩌라는 거요. 가시오, 가서 집안 식구들하고 찾아봐요. 우리도 그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태산이니까"

순사들이 하엽이를 몰아냈다.

"시상에, 시상에 요런 야박헌 인심이 어디에 또 있다요."

하엽이는 몸부림치고 통곡하며 경찰서를 떠밀려 나왔다.

 

"야 김명철, 너 술 사는 거 아깝냐?"

술이 취한 박용화가 갑자기 소리 질렀다.

"야 임마, 그게 무슨 소리야"

이마가 툭 불거진 김명철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 거짓말 말어. 내가 눈치도 없는 줄 아냐? 아까 보니까 기분이 싹 안 좋던 걸 뭘 그래."

왼쪽 팔을 받치고 비스듬하게 앉은 박용화는 사뭇 시비조였다.

"야 술맛 떨어지게 그따위 소리말어, 내가 그랬으면 개자식이다."

김명철은 박용화의 심정을 생각해 무슨 말을 하든 받아주기로 했다.

"너 그거 정말이냐?"

"당연하지. 친구지간에 이까짓 술 사면서 아까워하면 그게 어디 사람이냐."

"그래, 그래, 고맙다. 우린 친구지간이야, 친구지간." 박용화는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고는 "그래, 우린 광주 사범의 동창이야. 호남 천재들의 요람 광주 사범의 동창이라구" 김명철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야 누가 듣는다. 그놈의 천재라는 소리 좀 빼라."

김명철이 상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는 박용화보다 덜 취해 있었다.

"아니, 천재를 천재라고 하는데 감히 어떤 놈들이 뭐라고 해, 어떤 놈들이고 까불면 나오라고 해, 다 박살을 내고 말 테니까."

박용화는 금방 태도가 바뀌며 술상을 내리쳤다.

", , 누가 뭐라는 사람 없으니 술이나 마시자."

김명철이 술잔을 들었다. 박용화는 술을 질질 흘려가며 잔을 비웠다.

"어떤 놈들이고 말야 이 박용화 앞에서 까불면 다 죽일 거야. , 다 죽이고 말고, 야 김명철, 너 알지? 내가 학생 때 그 백돼지 때려눕힌 거."

박용화는 곧 누구든지 때려눕힐 것처럼 제 눈앞에다 주먹을 부르쥐어 보였다. 힘이 잔뜩 들어간 그 눈과 얼굴에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하하하... 그래, 그 싸움 한번 볼 만했지, 넌 그 덕에 우등생을 대표하는 주먹의 왕자가 되고 말야."

김명철이 고개를 젖히며 웃어댔다.

"그래. 난 그때처럼 아무나 실컷 두들겨패고 싶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부수고 깨고 싶다. 아니야, 이 세상 전부를 두들겨부수고 박살내보리고 싶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야. 유달산 위에서 떨어져 죽고 싶어. 저 많은 무인도 어디로 가서 바다에 빠져 죽고 싶어. 그런데 그것도 뜻대로 안돼, 난 너무 왜소하고 한심해. 거대한 무장 권력 집단 앞에서 개인은 너무 무력하고 비참해, 내가 이렇게 개미새끼처럼 작고 초라해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 이건 죽을 수도 살수도 없는 참 더러운 처지야."

박용화는 술이 전혀 취하지 않은 것처럼 심각하게 말하고 있었다. 김명철은 그런 박용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영화의 장면들이 바뀌듯이 감정변화가 심한 박용화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박용화는 하병 입영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의 입장은 다른 대학생들과 달랐다. 만약 대학에 가지 않았더라면 학병에 끌려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박용화의 심정은 더 복잡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김명철은 그런 박용화를 꼭 호의로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국민학교 선생 정도는 우습게 알고 더 출세해서 잘살아 보겠다고 뛰다가 제 꾀에 넘어가 덫에 걸리는 놈, 이런 아니꼽고 가소로운 생각도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다.

", 너 우정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지?"

박용화가 또 갑자기 소리쳤다.

"그래, 넌 변했냐?"

"나야 변하고 싶어도 변할 수가 있냐.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신세에, 너 변하지 않은 우정으로 나한테 한 가지 약속해라."

"그래 말해봐"

"약속 꼭 지키는 거지?"

"말을 해봐야 알지."

"너 임마, 약게 놀지마. 네 마누라 빌려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약속부터 해"

"저놈 저거 순 억지네, 그래 , 약속하지"

김명철은 싫은 기색을 또 어색스런 웃음 속에 감추었다.

"나 이제 죽으러 갈 날이 열흘도 안 남았다. 그때까지 매일 술을 좀 사라."

박용화는 술기 가득한 눈으로 김명철을 쏘아보았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김명철은 내키지 않았지만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용화는 언제 폭발하지 모르는 불발탄이었고, 술자리의 약속이란 술 깨고 나면 잊을 수도 있고 어길 수도 있는 것이기도 했다.

"역시 내 친구는 너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목포에 우리 동창은 너밖에 없냐. 몇 놈 더 있으면 좋을 텐데 말야."

박용화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천장을 올려다보며 슬픈 기색을 드러내더니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몇 사람 만나보고 싶으면 이 근방 가까이서 근무하는 애들을 불러 모을 수도 있지, , 너하고 함께 자취했던 유기준이 있지? 걔가 여기 영산포에서 근무한다."

", 유기준이가? 그놈이 진돈가 어디 섬으로 밀려갔었잖아"

박용화가 놀라며 정신을 차리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섬에서 고생했으니까 순환 전근된 거지."

"그놈 그거 사회주의잔데 용케 견디네."

박용화가 입에서 불쑥 나온 말이었다.

", 뭐라구?"

김명철이 깜짝 놀라며 문 쪽을 살폈다.

"아니야, 아니야..."

박용화는 제 실수를 깨달은 듯 두손으로 얼굴을 훔치며 얼버무렸다.

"너 그게 무슨 소리지? 아무리 취중이라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서야 되겠어?"

김명철은 불쾌한 표정으로 따지듯이 말했다.

"이봐, 함부로 입 놀리는 게 아냐, 다 그런 근거가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박용화가 눈을 치떴다.

"근거? 너 정말 사람 잡을 소리만 가려가면서 하는구나. 근거는 무슨 근거냐?"

김명철의 얼굴은 더 불쾌하게 찌푸려졌다.

"흥 아무것도 모르면서 너 그렇게 기분 나빠할 것 없어. 내가 자취하면서 발견한 건데, 그놈이 사회주위 학습 프린트물들을 책 싼 껍데기 속 같은 데다 감춰두고 있었지. 너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놈 성적이 자꾸 떨어졌었지? 왜 그런지 아나? 그게 다 그 프린트물들이 원인이었지. 이래도 근거가 없는 말이야?"

박용화는 전혀 술이 취한 것 같지 않게 오래된 일을 며칠 전의 일처럼 말하며 느물느물 웃고 있었다.

"유기준이가? 그것 참..."

김명철은 유기준이가 그랬다는 것도 그렇고, 박용화의 그 똑똑한 기억력에도 가슴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나도 그놈이 너무 음흉한 데 무척 놀랐었지. 끝까지 모른 척하고 좋게 헤어졌지만 말야"

"그게 뭐 대단한 게 아니라 그 나이 때 흔히 갖는 호기심 같은 것이었겠지."

"허 그런 소리 말어. 호기심이 그렇게 성적까지 뚝뚝 떨어지는 호기심도 있냐? 우리 사범학교 성적이라는게 어디 보통 인문학교 성적하고 똑같으냐? 우리 성적은 바로 직장이 걸려 있고, 직장은 바로 목숨 아니었냔 말야. 내가 모른 척하고 넘어갔으니까 그렇지 그 뒤를 캤더라면 아마 주렁주렁 볼 만했을 것이다."

박용화는 묘하게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그래, 그랬을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그것은 고사상태 아닌가. 괜히 술맛 떨어지니까 그 얘긴 그만하자."

김명철은 <사회주의>라는 말조차 입에 담는 것이 두렵다는 듯 <그것>이라고 했다.

"아닐걸, 그자들이 얼마나 무서운데그래. 유기준이 그놈을 한번 만나 노골적으로 물어봐야겠군. 흐흐흐흐...."

박용화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댔다. 김명철은 가슴이 섬찟해졌다. 유기준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그나저나 자네 일로 모친께서 상심이 크시겠네."

김명철은 박용화의 머리에서 유기준을 모아내려고 느닷없이 그의 어머니들 들이댔다.

"? 우리 어머니?"

박용화는 깜짝 놀라더니 얼굴이 싹 굳어졌다. 그리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런데 술잔을 놓는가 싶더니 손수 술을 따라 또 들이켜버렸다. 김명철은 그런 박용화를 곁눈질하며 자신의 방법에 저으기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 참 불쌍하신 분이지. 불쌍하고 말고. 평생 부두에서 생선 배따기로, 온갖 행상으로 형과 나를 가르치려고 고생고생 하셨지.. 그런데 난 판검사가 되겠다고 공부를 시작하면서 몇 푼씩 보내드리던 용돈을 끊어버렸어. 대학 갈 학비를 모아야 했으니까. 그래도 어머니는 털끝만큼도 서운해하지 않으시고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만 바라셨지. 아니, 오히려 학비를 못 대주는 걸 가슴 아파하셨지. 우리 형은 자기가 원하는 직장으로 옮기지 못하는 좌절감에 빠져 마음에 안 드는 하급 직장에 다니며 술타령이나 해대고, 형수라는 여자는 독해서 시어머니한테 용돈 한 푼 안 드리고 구박만 했지. 어디 내가 판검사가 되고 나서 보자 하고 벼르고 별럿는데 이 꼴이 되고 말았어.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지. 그대로 선생질을 해먹었더라면 어머니 괄시당하고 살지 않게 하고, 나도 사지로 끌려가지 않아도 되는데, 이 미친놈이 헛지랄 다 한 거야. 난 불효 새끼야, 세상에 둘도 없는 불효 새끼야. 우리 어머니 불쌍하고 또 불쌍하지. 이것저것 생각하면 나 미치겠어, 환장을 하겠어. 어머니, 불쌍한 우리 어머니..."

박용화는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아니, 넘 장사 망칠라고 환장혔소. 술 취했으면 고이 삭힐 것이제. 싸게 나갔씨요. 싸게."

주인 여자가 방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무슨 잔소리가 많아. 술이나 가져와!"

박용화가 술상을 내리치며 외쳤다. 그는 이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 정신 차려. 그만 일어나자."

김명철은 주인에게 가라고 손짓하며 박용화를 붙들었다.

"그만 일어나긴, 더 마셔야지."

박용화는 김명철을 뿌리쳤다.

"오늘은 너무 취했어. 너 돈 아까워서 그러냐?"

"어허, 무슨 딴소리야"

"난 죽으러 가는 판에 넌 돈이 아깝다 그거지, 야 임마, 너도 사람이냐?"

"좋아, 여기서 나가서 딴 집에 가서 새 기분으로 마시자구"

"그래, 그래야지. 역시 내 기분 알아주는 놈은 너뿐이야"

박용화는 비틀거리며 김명철에게 끌려 술집을 나왔다.

1월의 밤바람은 매웠다. 그 바람에 갯내음이 실려 있었다.

"두마앙강 푸른 무울에에 노젓는...."

", , 그 노래 부르면 잡혀간다."

김명철이 박용화를 흔들었다.

"머라고? , 왜 잡혀가?"

박용화가 혀가 꼬부라지고 있었다.

"금지곡이니까 잡혀가지"

"뭐야? 왜 그게 금지곡이야?"

"조선인의 민족감정을 자극하고 불온사상을 촉발시킨다는 거야."

"! 언제 금지시켰는데?"

"작년 말이니까 서너 달 됐어."

"씨부랄 것, 개좆같아 못살겠다. 노래도 맘대로 못 부르게 하고 말야."

"그래 잡혀가고 싶으면 맘대로 떠들어라. 잡혀 들어가나 끌려가나 피장파장이다."

"어 씨발놈, 저는 안 끌려간다고 아주 속 편하게 말하네."

"모르겠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그들은 비틀거리고 서로 의지해 가며 한참을 걸었다.

"야 명철아, 우리 저기 들어가자."

"뭐야? 저긴 유곽 아니냐"

"그래, 유곽. 저기 가서 몸풀면 기분 최고지. 가자, 어서."

"야 임마, 정신차려. 내가 누군지 아냐?"

"네 놈이 누구냐. 도끼대가리 김명철이지."

"임마, 난 명색이 선생님이야. 저런 데 들어갔다가 어떤 학부형이 보기라도 해봐. 내 신세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

"야 임마, 잘난 척하지 말고 따라와."

박용화가 김명철을 잡아끌었다.

"글세 안 된다니까"

김명철이 팔을 힘껏 뿌리쳤다. 박용화가 팔을 놓치면서 비틀거렸다.

"너 혼자나 몸 풀어. 난 간다."

김명철은 뛰기 시작했다.

"야 임마, 돈이나 주고 가야지. 나 빈털터린 것 몰라?"

박용화는 비틀거리면서 소리 질렀다. 그러나 김명철은 아무 대꾸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흥 잘도 도망가는구나. 그래, 귀찮다 그거지? 그래, 귀찮겠지. 내가 아무 쓸모가 없는 놈이니까. , 더럽다, 정말 더럽다. 내가 왜 이 꼴이 됐지? 그때 참고 견뎠어야 되는 건데 잘못 생각한 거야. 그때 참았으면 지금쯤은 그 곡성 산골을 벗어나 목포나 여수 같은 데로 전근이 됐을지 모르는데, 유기준 같은 놈도 섬에서 빠져나오는 판인데, 다 그년 에이꼬 때문이야. 그년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성적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 곡성 같은 산골에 처박히지 않았을 것이고, 도회지에서 근무를 했다면 딴마음을 먹었을 리가 없었다. 에이꼬 그년이 원수야. 아니, 구니와께 그놈도 아주 재수없는 놈이야. 그놈이 주둥이를 재수없게 놀리더니 꼭 그대로 됐어. 그놈의 새끼를 그냥 죽일 수도 없고...., 아아,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다."

박용화는 비틀거리고 걸으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 법관이 되시려고? 꿈이 더 커져서 좋소. 꿈이야 크게 가질수록 좋다고 했는데, 그렇지만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르니 조심하시오. 세상에 꿈대로 다 되는 일은 없으니까>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송별회에서 구니와께가 또 술이 취해 한 말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그때 아가리를 찢어놨어야 하는 건데."

박용화는 침을 내뱉고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는 들어가기 싫은 집을 향해 비틀비틀 걸었다.

", 또 술이구만이라?"

판자 대문을 따주며 박용화의 형수가 것질렀다.

"마셨소. 뭐가 잘못됐소?"

박용화도 시비조로 맞섰다.

"성제간에 자조 잘덜 허요."

"뭐가 그리 말이 많소. 언제 술 마시라고 돈 한 푼 줘봤소."

"하이고, 바랠 것이 따로 있제. 나가 죽자도 양잿물 사 묵을 돈이 없는 판이오."

"아이고, 아이고, 밤 짚은디 어찌 또 이러냐. 용화야, 니가 참어라."

뒤늦게 뛰어나온 반월댁은 작은 아들의 등을 밀었다.

"엄니, 그 천인침인가 지랄인가 만들지 마세요. 그게 다 왜놈의 새끼 미신이니까요. 한 방이면 사람이 즉사하는 총알 앞에 그따위 몸의 붉은 글씨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박용화는 방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리며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외치듯하고 있었다.

"그려, 그려. 알었응게 어여 잠이나 자."

반월댁은 울 듯한 얼굴로 작은 아들의 윗도리를 벗겼다. 반월댁은 이제 늙을 대로 늙어 있었다. 박용화는 곧 잠이 들었다. 반월댁은 이불로 작은 아들을 덮어주며 또 눈물이 글썽글썽해지고 있었다. 선생 노릇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대학 공부를 떠난다고 했을 때 말리지 못한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선생이나 면서기 그리고 금융조합 같은 데 다니는 사람들은 징용이고 징병이고 다 면제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던 것이다. 그 똑똑하고 영리한 작은 아들이 어찌 이 일은 내다보지 못했는지 가슴을 쥐어뜯을 만큼 안타깝기만 했다.

박용화는 아침 늦게 잠에서 깨어났다. 술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서 머리는 욱신거리며 아팠고 속은 느글거리고 메슥거렸다. 박용화는 밖으로 나와 찬물을 마시고 둘러보았지만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엄니 어디 가셨소?"

"어디 갔겄소. 장헌 작은 아덜 위허니라고 천인침인가 먼가 뜨로 나갔제."

그의 형수가 톡 쏘며 돌아섰다. 박용화는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토해냈다. 어머니는 또 역으로 어디로 사람들 많은 데를 찾아다닐 거였다. 목포 시가지에는 수틀 들고 종종걸음치는 여자들이 부쩍 늘어나 있었다. 박용화는 어머니가 하는 그 일을 막을 수도, 안 막을 수도 없었다. 또 하루가 가고, 입영날짜는 한 발짝 더 앞으로 다가왔다. 박용화는 고개를 떨구며 또 한숨을 토해냈다.

 

 

43. 종군위안부들의 행로

"아이고, 이 얼굴덜 잠 보소. 둘 다 이쁜 얼굴인디 굶고 살아서 푸석푸석 붓고 마른 버짐 피고 요것이 머시여. 지대로 배불리 묵고 살먼 매화꽃이 부럽겄어, 목단꽃이 부럽겄어. 시상에 부러울 것 없는 이쁘고 이쁜 꽃으로 필 나인디."

여자가 입맛 다셔가며 입심 좋게 말했고, 복실이와 순임이는 창피스러워 고개를 수그리며 얼굴을 가렸다.

"날이 날마동 죽도 지대로 못 묵고 소낭구껍뎅이 빗게 묵고, 풀뿌랑구 캐로 댕기고 험서 집에만 붙어 있으먼 무신수가 생기드랑가? 다 배곯아 황달이나 들고, 그러다가 큰 병이 생기먼 이 존 나이에 한시상 보지도 못허고 저승질이제. 시방 소리소문없이 굶어죽는 사람덜 많은 것 알제? 고것이 강 건너 산 너머 넘덜 일인지 알제? 아니여, 아니여, 바로 자네덜 집안일이여."

여자의 말에는 한층 신명이 오르고 있었다. 복실이도 순임이도 얼굴을 들지 못했다. 여자 앞에 풀뿌리죽을 내놓고 앉은 것 같은 창피스러움이 덮씌워져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말은 그런데가 하나도 없었다. 쌀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밀기울이 떨어진 지도 오래였고, 시래기마저 떨어져 죽을 끓일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소나무껍질이나마 마음대로 벗겨 먹을 수 있은 것도 아니었다. 나무를 죽이고 산을 망친다고 관에서 금하고 있었다. 밤중에 몰래 소나무껍질을 벗기다가 잡혀가 매타작을 당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칡뿌리는 진작 동이 났고, 풀뿌리를 캐려고 산을 헤매야 했다. 쑥이며 나물 같은 것이 나오려면 아직도 한 달은 더 있어야 했다. 굶주리는 나날 속에서 하루 넘기기가 십년살이인데 한 달이면 까마득한 세월이었다. 그때까지 굶으며 기다리자면 죽어도 세 번은 죽을 수 있는 긴긴날이었다.

"그러니 자네덜 좋고, 집안식구덜 살리고 허는 질언 나 말얼 듣는 일인 것이여. 이 선도금 20원이먼 당장 자네 식구덜이 시끄니 밥 척척 묵고 살 것 아니여." 여자는 지전 두 개를 펴서 복실이와 순임이 눈앞에다 빠르게 흔들어 보이고는, "워디 고것만이간디? 자네덜 벌이가 얼맨지나 알어? 한 달에 30원이여, 30. 그것도 다 믹에주고, 입혀주고, 재와줌서 30원이란 말이여. 그렁게 한 달 30원이 곰시라니 모아지는 것인디. 고것이 1년이먼 얼매여? 360원 아니여? 글고 2년이먼 720원이여. 쓴다고 히도 7백원이 남어. 7백원, 7백원이먼 얼매나 큰돈인지 알제? 자네덜언 딱 2년 만에 떼부자가 되는 것이여. 초년 고상언 사서도 처드라고 2년만 돈벌이도 허고 일본 귀경도 허고 오먼 집안 부자 되고, 자네 덜언 딱 시집가기 존 나이 아니여? 어찐가, 가겄제? "

여자는 차지게 입맛을 다시며 복실이와 순임이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여자에게 눈길을 보냈다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은 서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자위는 상기되어 있었고,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저어..., 참말로 30원씩 주는게라?"

복실이가 물었다.

"하먼, 20원언 당장 주고, 한 달에 한분30원썩 준당게."

여자는 또 지전을 흔들어 보였다.

"무신 일얼 허는디 그리 많이 줘라?"

이번에는 순임이가 물었다.

", 공장서 일허제, 공장. 남자덜이 다 군대에 나갔응게 여자덜이 일허는 것이고, 자네덜맨치로 젊고 기운 좋아 일 잘헝게 30원썩 주는 것이로구만."

여자는 연상 절친한 웃음을 지으며 술술 대답했다.

"니 으쩔래?"

복실이가 물었다.

"니넌 으쩔래?"

순임이가 되물었다.

"하이고, 묻고 자시고 헐 것 머 있간디? 맘 딱 정허는 것이제. 요것보드라고, 나가 어디 거짓말허능가."

여자는 옆에놓인 보퉁이를 끌어다가 풀었다.

"음마, 요것이 머시여."

"아이고메, 옷허고 구두 아니여?"

그들의 눈은 휘둥글해졌다.

보퉁이에서 나온 것은 네모지게 접힌 옷 두벌과 뾰족구두 두 켤레였다.

"자네덜이 간다고 맘얼 정허기만 허먼 요것덜 딱 입고 신고 가는 것이네."

여자는 옷을 양쪽 손에 하나씩 들고 흔들었다. 그 옷은 분홍과 갈색의 원피스였다. 복실이와 순임이가 또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은 한층 더 동요하고 있었다. 신식 멋쟁이들이나 입을 수 있고 신을 수 있는 저 서양 옷과 뾰족구두. 검정 고무신 한 켤레 얻어 신을 수 없는 처지에 그 옷과 구두는 너무 욕심나고 가슴 설레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가자"

순임이가 먼저 말했다.

"근디, 엄니헌티 말히야제."

복실이의 자신없는 대꾸였다.

", 되았어, 자네덜만 맘 딱 정허먼 그담언 나가 달 알어서 헐 것잉게 아무 걱정덜 말어."

여자가 원피스를 다시 접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찌헐라는디요?"

복실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자네덜이 나가 허디끼 엄니덜헌티 달 말헐 재주 있는감? 나가 엄니덜 만내서 말허먼 제까닥잉게 아무 걱정얼 말고 낼 아칙에 떠날 채비나 혀두라고."

여자는 신바람 나게 옷과 구두를 다시 쌌다. 그 여자는 월전댁을 붙들고 이야기를 엮어대기에 바빴다.

"자아, 그렁게 요 돈 딱 받고 복실이맨치로 맘 정허씨요."

여자는 월전댁의 메마른 손에 지전 두 장을 쥐어주었다.

"아니구만이라, 아그덜 아부지가 내래다봄서 생야단얼 칠 것인디요."

심한 굶주림으로 양쪽 볼이 푹 꺼지고 눈이 퀭한 월전댁이 고개를 저으며 돈을 되밀었다.

"아이고, 그 무신 실답잖고 새 날아가는 소리다요. 상감도 죽어불먼 그만인디 머시가 내래다보고 올래다보고 그래야. 허고 내려다본다고 칩시다. 편케 돈 잘 벌어 팔자 고칠 자리두고 저 에린 손지새끼덜 배 탈탈 곯려 부황 들게 맨글기럴 바래겄소. 아니먼 돈벌어 배불르게 믹여 잘 키우기럴 바래겄소?"

"....."

월전댁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자에게로 눈길이 갔다. 그런데 월전댁은 가슴이 뜨끔해졌다. 둘째손자를 안고 있는 며느리와 눈길이 마주쳤던 것이다. 월전댁은 얼른 눈길을 돌렸다. 20원이면 손자들을 배불리 먹이며 이 어려운 고비를 너끈히 넘길 수 있는 액수였다.

"알것소, 나가 복실이 말도 들어볼라요."

월전댁은 며느리의 눈길에 밀리듯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참, 뜸 오래 디인다고 밥이 더 맛있어지요? 아깝게 누룽밥만 뚜껍어지제. 아까 이 옷도 구두도 다 귀경허고 순임이란 처녀허고 가기로 맘 딱 정했단 말이오. 일본 가는 배 타자면 낼 아칙에 꼭 떠야 허는디, 어찌 세월아 네월아 허고 앉었을라고 그러요. 글고 말이오, 복실이헌티 들어보나마난게 다된 일 돈 얼렁 받아갖고 저 불쌍헌 손지새끼덜 한끄니라도 더 빨르게 배 채와줘야제 무신 초 친 맛이라고 낼꺼정 굶길라고 그라요. 고것이 할매가 헐 일이요? 얼른 돈 받어다 쌀 팔아오게 허씨요."

그 여자는 능란하게 월전댁의 아픈 데를 찔러대며 돈을 다시 손 사이에다 밀어 넣었다.

"....."

월전댁은 돈을 다시 되돌려주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나 갈라요. 낼 아칙에 일찍허니 오겄소."

그 여자는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어무니...."

며느리가 울먹였다.

"암말 마라. 새끼덜 살래야제."

월전댁은 울음을 삼키며 일어났다. 두 손자는 오랜만에 보는 보리밥을 한 그릇씩 먹어치우고는 곧 잠이 들었다. 복실이는 그런 조카들을 보며 연신 방글거렸다. 월전댁은 목이 메어 밥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복실아, 니 잘헐 수 있겄냐?"

월전댁은 딸하고 나란히 누워서야 입을 열었다.

"하먼, 아무 걱정 말어."

복실이의 목소리는 어머니의 근심스럽고 무거운 목소리에 비해 아주 밝고 명랑했다.

"타국서 고상이 많을 것인디...."

월전댁이 딸의 손을 더듬어잡았다.

"아니여, 농새일도 허고 살었는디 머."

복실이도 어머니의 손을 꼭 마주잡았다.

"다달이 30원썩이나 준다먼 그맨치 많이 부려묵을 거이다..."

"돈만 많이 줌사 고런 것이야 암것도 아니제."

"시집가야 헐 나인디..."

"아니여, 엄니. 나 인자 열일곱잉게 2년 갔다 와도 열아홉밖에 안돼야. 요새 혼인 일찍 허는 것언 숭거리고, 나라서도 금허덜 안혀?"

"그려, 그러기넌 헌디..."

"나가 돈 많이 벌어갖고 와서 논도 사고, 집도 사고, 엄니 비단옷 해디리고, 금반지에 금비녀도 혀디리고 호강시킬라네."

"아이고, 나 호강시킬라 말고 니 시집이나 잘 가야제."

"글고, 엄니 나 없다고 심심해허덜 말어. 오빠 징용 간 지 벌써 1년 되았응게 인자 1년만 더 참으먼 오덜 안혀."

"아이고, 애긴지 알었등마 우리 딸이 다 컸네 웨."

월전댁은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 딸을 와락 끌어안았다.

"엄니..."

복실이가 어머니의 품에서 가느다랗게 어머니를 불렀다.

"?....."

"나 엄니 젖 맨지고 잘라네."

"이잉, 숭허게."

월전댁은 말과 달리 가슴을 헤집고 드는 딸의 손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막내둥이에 대한 정이 샘솟고 있었다. 남편이 재작년에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 과수원에서 아들네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죽고 아들은 곧 징용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생활이 어려워졌다. 과수원에서 품을 팔았지만 그날그날 풀칠하기가 바빴고, 가을에 과일을 다 따고 나면 품팔이 일이 없어져 죽 끓이기도 어려운 겨울을 나야 했다. 딸을 일본까지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놈의 토지 조사 사업으로 논을 빼앗긴 뒤로 남편은 평생을 소작살이로 고생고생하다가 결국 땅도 못 찾고 한만 품은 채 저승으로 떠났다. 참 기막히게 살아온 세월이었는데 아들은 또 징용으로 끌려가고 막내딸도 처녀 몸으로 타국 돈벌이를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월전댁은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월전댁은 웁쌀을 안쳐 딸에게만 쌀밥을 퍼주었다.

"이잉, 나도 쌀밥...."

"에잉, 고모만 쌀밥 묵고..."

두 손자가 칭얼거리며 몸을 내둘렀다.

"아이고, 요 속창아리 는 새끼덜아..."

월전댁은 주먹을 쥐어 보이며 눈을 부라렸다.

"엄니넌 참, 그렁게 무신 베실허로 간다고 나만 쌀밥얼 주고 그렁가."

복실이는 쌀밥을 듬뿍듬뿍 떠서 조카들의 보리밥 위에 보탰다.

"아서, 아서, 고것 너무 많다. 배 타고 먼 질 가는디 쌀밥이라도 한 그럭 묵고 기운 채래야제."

월전댁은 손자들의 보리밥 위에 올려진 쌀밥을 절반씩 갈라서 다시 딸의 밥그릇으로 옮겼다. 그리고 자기 밥그릇에서 보리밥을 듬뿍 떠서 딸의 밥그릇에 보탰다.

"짜아아, 복실이 다 채비혔어?"

그 여자가 들이닥쳤다.

"시방 밥 묵소."

월전댁의 지게문을 열며 말했다.

", 많이 믹이씨요. 나 순임이 딜고 올 것잉게."

여자는 활개치며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마음이 설렁거려 복실이는 밥맛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생각해서 밥을 억지로 다 먹었다.

"복실이 밥 다 묵었지야? 나오니라, 가자."

복실이는 작은 보퉁이를 들고 나왔다.

"고 보퉁이 머시냐?"

여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옷이오, 속옷"

월전댁이 재빨리 대답했다.

"아이고, 옷 다 준다고 안혔소, 어이, 두고 가."

여자가 앙칼스럽게 말했고, 복실이는 보퉁이를 슬그머니 마루에 놓았다.

"복실이 엄니, 멀리 따라나올 것 없이 작별언 여그서 헛씨요. 집 밖에 나와 울고불고허먼 넘덜 보기도 안 좋고, 우리 갈 질도 바쁜 게라."

여자의 말은 차갑고 매웠다. 그 서슬에 월전댁은 주눅 들며 순임이의 어머니가 여기까지 따라오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엄니, 그리혀."

복실이가 눈물 글썽해서 말했다.

"그려, 그려. 몸 성허고, 타관살잉게 몸 더 정히 간수히야 혀."

월전댁은 목이 메며 딸의 등을 어루만졌다.

"야아, 엄니도 무병허니..."

복실이는 어머니를 한 번 더 쳐다보고 사립을 나섰다.

"그려, 그려..."

월전댁이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어서 가라고 손을 저었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버스를 타고 전주로 갔다. 여자는 그들을 간판도 없는 어느 여인숙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여자를 맞이한 것은 일본 남자 하나와 조선 남자 하나였다.

"이분네덜이 느그덜얼 일본으로 달고 갈 것잉게 말덜 잘 들어."

여자가 복실이와 순임이를 골방 같은 데로 밀어 넣었다.

"곧 올 테니까 빨리 옷 갈아입고 있어."

그가 보퉁이 두 개를 던지고는 문을 닫았다. 그런데 복실이와 순임이는 깜짝 놀랐다. 그 방에는 다른 여자들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멀 그러고 섰소? 얼렁 옷이나 갈아입제. 매 안 맞을람사."

어느 여자가 뚱하니 말했다.

?....

복실이와 순임이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보퉁이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치마저고리를 벗고 눈치껏 원피스라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 옷이 보기하고는 다르게 치마저고리보다 불편한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서야 방에 있는 여자들이 다섯이라는 것을 알았다. 조금 있다가 조선 남자가 가위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순임이의 머리채를 붙들더니 다짜고짜 가위를 들이댔다.

"아이고메 엄니, 워째 이러신게라?"

순임이가 질겁을 하며 복실이을 붙들었다.

"잔소리 말고 가만히 있어. 요런 조선년 머리 해가지고 일본 가면 조센징 촌년들이라고 놀림당하는 것 몰라? 조선년이란 표 안 나고 원피스에 어울리게 머리를 짧게 잘라야 취직이 되지, 저봐, 다른 애들도 다 잘랐잖아."

조선 남자가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 흔들며 말했다. 순임이와 복실이는 그때서야 다른 여자들의 머리가 다 짧다는 것을 알았다. 조선 남자는 싹둑싹둑 가위질을 해댔다. 순임이는 가위질소리가 날 때마다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다음 너"

남자의 퉁명스러운 소리와 함께 땋아내린 머리채가 다다미 위에 툭 떨어졌다. 그 머리채 끝에는 아직 빨간 댕기가 묶여 있지 않았다. 초경을 치르지 않은 나이라는 뜻이었다. 그 멀채를 보면서 순임이는 팔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묘한 심정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복실이도 머리채를 잘렸다. 복실이의 머리채에도 빨간 댕기는 묶여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전혀 바깥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두 남자의 감시 아래 겨우 변소를 오갈 수 있을 뿐이었다. 밥도 하루 두 끼 시켜다 주는 것을 먹었다. 방이 좁아 7명이 누울 수가 없어서 웅크리고 앉아서 잤다. 서로 가만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임실 장수 진안 같은 데서 온 것이었다. 이틀이 지나자 세 처녀가 또 들어왔다. 그런데 한 처녀는 집에 보내달라며 울다가 조선 남자에게 사정없이 따귀를 얻어맞았다. 그 처녀는 줄곧 울면서 저녁밥도 먹지 않았다. 밤중에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모집네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순사에게 붙들려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선도금이고 뭐고 받은 것이 없었다. 왜 돈벌이 가기 싫다는 사람을 부모도 모르게 억지로 붙들어가는 것인지 모두 이상하고 의아해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처녀를 위로했다. 일본에 가서 집에 편지하고, 2년 동안 함께 고생해서 돈 많이 벌어가지고 오자고.

다음날 일찍 여인숙에서 나가 기차를 탔다. 그 처녀는 지쳤는지 더 울지 않았고, 조선 남자는 그 처녀를 따라붙듯이 감시하고 있었다. 처음의 그 여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기차에서 내린 곳은 부산이었다. 그들은 해변가의 어떤 수용소로 들어갔다. 수용소에는 창고 같은 건물이 네댓 채 있었고, 일본군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간 건물에는 여자들이 한 20명 정도 있었다. 밥때가 되자 일본군들이 주먹밥 한 덩어리와 단무지 한 쪽씩을 나눠주었다. 건물 밖에서는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은 조선 사람들이 감시를 하고 있었다. 감시가 아주 심해 변소를 갈 때도 꼭 한 사람씩 차례로 가게 했고, 그때마다 감시자가 따라다녔다. 거기서도 밥은 하루 두끼밖에 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배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한다고 더 줄 리도 없었고, 집에서 굶주리던 것에 비하면 그나마 배불리 먹는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면서 먼저 와 있었던 20여 명 중에 경상도와 경기도 처녀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다 합해 놓고 보니 전라도 처녀들이 단연 많았다. 그런데 복실이와 순임이가 놀란 것은 반수 가까이가 선도금을 받지 않고 왔다는 것이었다. 대개 돈벌이 좋은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것이 좋아 따라나섰고, 선도금 같은 말은 듣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 처녀들은 뒤늦게 분해했지만 그 누구도 따지려고 나서지 않았다. 따져봤자 받지도 못하고 얻어맞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걸핏하면 주먹질을 해서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모집에 심부름 갔다 오다 잡혀 왔다는 처녀처럼 아무도 모르게 잡혀온 처녀들이 예닐곱이나 되었다. 왜 그런 못된 짓을 한 것인지 복실이는 생각할수록 의심이 깊어지기만 했다. 닷새가 지나자 처녀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린 어디로 가나요?"

처녀들은 감시하는 사람들에게 조심조심 물었다.

"가긴 어디로 가, 일본으로 가지."

"걱정 말어, 배가 와야 가지."

감시자들의 대꾸는 퉁명스러웠다. 7일 만에 수용소에서 트럭을 타고 부두로 나갔다. 겨울이 가고 있었지만 바닷바람은 찼다. 부두에 모인 처녀들은 모두 80명이었다. 군인들과 감시를 하던 남자들은 처녀들을 두 패로 갈랐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서로 갈리지 않으려고 손을 잡고 꼭 붙어섰다. 50명은 오사카로 가는 배를 탔고, 30명은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를 탔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50명 속에 들어 있었다. 오사카에서는 군부대 안의 군인 막사에 들어갔다. 다음날 안 일이지만 그 옆의 막사에는 50여 명 가량의 조선 처녀들이 먼저 와 있었다. 그곳에서도 주먹밥은 두 끼밖에 주지 않았고, 감시는 훨씬 더 심해졌다. 그런데 일본에 왔는데도 공장에 보내줄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5일이 지나고 10일이 가까워 오자 처녀들은 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처녀들은 자기들을 데리고 온 남자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왜 공장에는 안 보내주나요?"

"잔소리 말고 기다려."

2주일이 지났다. 처녀들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수군거렸다. 처녀들은 더욱 불안해졌다.

"참 이상하네요. 왜 공장에는 안 보내주냐구요."

"딴 곳으로 가니까 그렇지."

"글쎄, 잔소리 말고 기다려."

그리고 또 5일이 자났다. 모두 트럭에 타고 실려 간 곳은 다시 부두였다. 100여 명은 무작정 배로 떠밀려 올라갔다.

"왜 배를 또 타요?"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디긴 어디야. 배를 타고 딴 도시로 가는 거지."

배는 5층으로 엄청나게 컸다. 그런데 배에는 군인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처녀들은 세 패로 나누어져 빈 선실로 들어갔다.

"요것 요상허다. 우리럴 전쟁터로 끌어가는갑다."

복실이가 쪼그리고 앉으며 겁 실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머시여? 고것얼 어찌 알어?"

순임이가 눈이 휘둥글해졌다.

"아이고 이 멍청아, 저 많은 군인덜얼 봐. 군인덜이 전쟁터 아니먼 어디로 가겄냐."

"금매.... 근디 우리럴 어디다 써묵을라고 전쟁터로 끌어가겄냐. 저군인덜도 일본 딴 디 어디로 옮기는 것 아니겄어? 니가 너무 눈치가 싼 것이제."

"글씨..., 그럴랑가도 몰르제."

복실이는 마음이 석연치 않으면서도 나쁜 쪽으로 생각하기가 싫었다. 밥은 하루 세 끼씩 식당에 가서 타먹었다. 반찬은 단무지 한 쪽과 우메보시(매실을 소금에 절이고 풀잎으로 붉게 채색한 것.) 한 개씩이었다. 지독하게 시면서 짠 우메보시는 뱃멀리믈 낫게 하고 배탈이 나지 않게 한다고 꼭 먹으라고 했다. 밥은 세 끼라고 했지만 양이 적어서 주먹밥 두 끼를 먹을 때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우메보시라는 것은 먹기만 고약했지 아무 효과가 없었다. 배 타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처녀들은 뱃멀미로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앓아눕고 선실은 지저분하고 어수선하게 되어갔다. 그러나 배는 멈출 줄을 모르고 며칠이고 갔다. 마침내 배가 정박했다. 처녀들을 다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두 패로 갈랐다. 그런데 복실이와 순임이는 갈라지고 말았다. 앞뒤로 서지 않고 손을 잡고 양쪽으로 섰기 때문이었다.

"복실아, 복실아"

"순임아, 순임아"

둘이는 서로를 부르며 줄에서 벗어났다.

"이년들아, 가만히 있지 못해"

"바가야로"

조선 남자가 순임이를 걷어찼고, 일본 남자가 복실이의 따귀를 후려쳤다. 순임이가 속한 패가 사람 수가 더 많았다. 그들 60여 명은 배에서 내렸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배가 떠날 때쯤 해서야 복실이는 그곳이 오키나와라는 것을 알았다. 배에서 내린 순임이네는 다시 20명씩 세 패로 갈려 트럭에 실렸다. 트럭은 가가기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순임이는 트럭에 타자마자 구두를 벗었다. 구두가 발에 맞지 않아 발가락이며 뒤꿈치에 물집이 잡히고 터지고 해서 너무 쓰라리고 아팠던 것이다. 다른 여자들도 구두를 벗으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순임이네 트럭은 어느 군인부대로 들어갔다. 지붕이 둥근 건물들이 여기저기 많았다. 그들은 그 눈에 선 건물의 맨 끝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들의 눈에 선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다. 키가 껑충하고 잎들이 갈기갈기 갈라진 나무들도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여게가 어덴데 와 이리 덥노."

"그러게 말야, 속옷을 벗어야 되겠네."

"얄궂어라, 여그도 일본땅일랑가?"

하나가 벗기 시작하자 처녀들은 다 따라서 속옷을 벗어댔다. 해거름이 되자 군인 넷이 주먹밥을 가지고 왔다. 그들은 처녀들을 한 줄로 세우고 주먹밥을 받게 했다.

"어머머머...."

"워메, 엄니"

처녀들이 놀란 소리들은 질렀다. 군인들이 주먹밥을 나눠주며 처녀들의 젖가슴을 만지고 쥐어잡고 했던 것이다. 앞의 네 처녀가 그런 일을 당하자 나머지 처녀들은 혼비백산 흩어져 양쪽 나무 침상으로 올라갔다.

"아하하하하..."

"어허허허허..."

군인들은 통쾌하게 웃어젖혔다. 그러고는 주먹밥을 놓고 밖으로 나갔다.

"저런 문디이 자석덜 보래."

"이상해, 아무래도 이상해. 계속 군부대로만 데리고 다니고..."

처녀들은 부쩍 두려워하고 의심스러워하며 입 모아 수군거렸지만 이곳이 어딘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주먹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지 배타기에 지칠 대로 지친 처녀들은 하나둘씩 잠이 들었다. 그런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군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군인은 한둘이 아니었다. 군인들은 처녀들을 향해 침상으로 뛰어올랐다.

"엄마아"

"엄니이"

잠들지 않고 있던 처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 했고 막 잠이 들었던 처녀들이 소스라쳐 일어났다. 그러나 처녀들은 삽시간에 군인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처녀 하나씩을 붙든 군인들은 무작정 처녀들을 바닥에 넘어트리며 눕히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어무이요"

"안돼, 안돼"

"엄니, 엄니"

처녀들은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며 군인들을 떠다밀고 비명을 질렀다.

"바가야로"

"칙쇼"

군인들의 이런 욕설과 함께 따귀 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철퍽철퍽 울리고 있었다. 처녀들의 반항이 차츰 수그러들었다.

군인들은 제각기 바지를 끌어 내렸다.

"아아으.... 엄마..."

"으아으...."

"워메 엄니..."

군인들의 씩씩거리는 숨소리에 섞이는 처녀들의 신음이었다. 처녀들의 원피스는 위로 걷혀 올려져 있었고, 군인들의 바지는 발목에 걸려 있었다. 군인들이 바지를 끌어 올리며 하나씩 나가기 시작했다. 옆으로 웅크리고 누워 흐느끼는 처녀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군인들이 다 나가자 처녀들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군인들이 또 쏟아져 들어왔다. 좀더 어두워진 속에서 군인들은 여자를 차지하려고 법석이었고, 처녀들은 다시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며 비명을 질렀다.

"칙쇼"

"바가야로"

또 욕설이 터지며 따귀 치는 소리들이 철퍽거렸다. 군인들의 거친 숨소리가 처녀들의 신음을 휩쓸고 있었다. 군인들이 바지를 끌어 올리며 나가기 시작했다. 다 나갔나 싶자 또 군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번에는 몸부림치거나 발버둥치는 처녀들이 없었다. 군인들이 나가고 또 쏟아져 들어왔다. 군인들이 나갔다, 또 쏟아져 들어왔다. 다섯 차례 되풀이된 다음에 군인들은 더 들어오지 않았다. 한 처녀에게 다섯 명씩, 100명의 일본군이 거쳐 간 것이었다.

엄니, 엄니, 나 어째야 좋당가, 인자 나 어째야 좋당가, 돈벌이 다 거짓말이여. 우리럴 속인것이여. 요 일얼 어째야 좋당가...’

순임이는 그때서야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흐느끼고 있었다. 모든 처녀들은 어둠 속에서 오열하며 자기들이 어떤 신세가 되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6일 동안 그 퀸세트 막사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해만 지면 그 일을 당했다. 적어서 다섯 차례였고 많은 때는 열 차례도 되었다. 처녀들은 아랫배와 거기가 아파서 걸음도 제대로 못 걸었다. 순임이는 날마다 거기서 피가 흘렀다. 그들을 거쳐 가는 것은 인근 부대의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7일째에 다시 배를 탔다. 지난번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되는 배였다. 배에는 군인들은 없었고 무슨 물건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처녀들은 이제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모두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배는 며칠 만에 어느 섬들 옆을 지나고 있었다. 짙푸르고 맑은 넓고 넓은 바다에 섬들이 점점이 찍혀 있었다. 선원들이 저기가 사이판이고 그 아래로 있는 것이 아프섬이고, 너희들은 파라오섬에서 내릴 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말을 귀담아듣는 처녀는 아무도 없었다. 파라오에 내린 그들은 두 줄로 서서 낯선 나무들이 우거진 숲 그늘을 따라 걸었다. 그때까지 그들을 줄곧 감시하고 때리고 일본인과 조선인 두 남자는 이제 더 감시할 게 없다는 듯 앞서 걸어가며 웃어대고 있었다.

"우리 조선이 어느 짝이겄냐?"

집이 임실이라는 삼월이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같은 전라도라 자연히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몰르겄어."

순임이는 시름겨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멧천리넌 왔겄지야?"

"그려, 그럴 것이여."

별로 오래 걷지 않아 그들이 도착한 곳은 판자로 기다랗게 지은 기역자 집이었다. 그 집은 단층이었는데 터가 아주 넓었다. 넓은 마당 한쪽에 가꾸어진 화초밭에는 색색의 꽃들이 싱싱하게 피어 있었다. 그 꽃들도 처녀들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넓은 마당을 빙 둘러서 있는 나무들은 그대로 울타리였다. 그들을 맞이한 건 일본인 남녀였다. 그들이 부부라는 건 한눈에 표가 났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는 조선말을 곧잘 했다. 여자는 서툴렀지만 알아듣기는 다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 집은 빈집이 아니었다 그들이 도착한 것을 알고 이방, 저방에서 여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고, 신마이들이 또 왔구나."

"조선 처녀 씨도 안 남겄다. 쯧쯧쯧..."

"다들 들어가지 못해"

우락부락한 남자가 빽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릅떴다. 그 험상궂은 얼굴에 쫓겨 열댓 명의 여자들이 우르르 방으로 흩어져 갔다.

"지금부터 방을 배정한다. 방 배정이 끝나면 방 번호순서대로 빨리빨리 목간을 해라. 몸에서 이렇게 냄새가 나서 어떻게 손님을 받겠나. 모두 날 따라와"

처녀들은 처음 줄을 선 그대로 두 줄로 그 주인남자를 따라갔다. 현관과 맞붙어 있는 것이 주인방이었고, 그 옆에 주방과 사무실이 잇달아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방들이 죽 이어져 있었다. 그 방들 문 위에는 번호표들이 붙어 있었다. 주인 남자는 15번 방에서부터 처녀들을 하나씩 밀어 넣었다. 순임이는 21번 방으로 등이 떠밀려 들어갔다. 직사각형의 방은 두 평 남짓이었다. 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었고, 조그만 창문 반대쪽 구석에 옷장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순임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방 가운데 오두마니 서 있었다.

"목간 시작이다야, 순서대로 빨리빨리 해, 15, 15번 나와"

주인 남자가 복도에서 외치는 소리가 찌렁찌렁 울렸다. 판자벽은 너무 얇았던 것이다.

복실아, 니 어디 있냐. 니도 요런 꼴 당허지야? 우리가 바보다. 그런 거짓말얼 믿은 것이. 시상에 요런 숭헌 일얼 두고 어찌 그리 찰덕 묵디끼 거짓말얼 헐끄나, 복실아..., 나 말이여, 나 더 살고 잡지 안혀, 배타고 옴서 멧분이고 바다에 빠져 죽으라고 혔는디...., 엄니가...., 불쌍헌 엄니가 생각나서..., 니가 있으먼 또 몰르겄는디....., 나 미칠 것 겉으다, 환장헐 것 겉당게, 복실아...., 복실아...’

순임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지어 흐르고 있었다.

"순임아. 얼렁 목간혀, 저 끝이여."

20번인 삼월이가 저쪽 복도끝을 가리켰다.

"물은 한 통 빨리 빨리"

목욕탕 앞에서 회초리를 든 주인여자가 어설프게 조선말을 지껄였다. 서너 개의 커다란 물통 옆에 작은 나무 물통 하나가 있었다. 그것을 쓰라는 것이었다. 순임이는 그 물에 얼굴부터 씻었다. 그 물이나마 대하니 살 것 같았다. 집에서 떠나온 뒤로 낯을 제대로 씻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머리를 감기 전에 거기를 몇 번이고 씻었다. 남자들의 그 더러운 것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빨리빨리"

주인 여자가 회초리로 문짝을 쳤다. 순임이는 몸에는 물을 끼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왔다.

목욕이 다 끝나자 사무실로 모이라고 했다.

"이것은 삿쿠다. 군인들한테 이것을 꼭 끼고 일을 보게 해. 그래야 성병도 안 걸리고 임신도 안한다. 다들 알았지."

남자 주인이 거칠게 말했고, 그 마누라가 삿쿠(콘돔)를 한 통씩 나누어 주었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안남미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된장국과 단무지 한 쪽이 반찬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만에 대하는 된장국맛에 밥들을 다 먹었다. 주방과 함께 있는 식당에서 방으로 돌아와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밖이 왁자하게 시끄러워졌다. 조금 있다가 순임이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군인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순임이는 질겁을 했고, 군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헤벌쭉 웃으며 담뱃갑만 한 크기의 종이를 내밀었다. 순임이는 그걸 받을 생각도 않고 자꾸만 뒤로 물러나앉고 있었다. 그건 군인이 주인에게 돈을 치르고 받아 온 전표였다. 군인은 전표를 던지고 바지를 까 내렸다. 그리고 순임이의 두 발목을 잡아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엄니이..."

순임이는 이를 맞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한편, 복실이가 탄 배는 낮에는 미군 비행기들의 폭격을 피해 밤에만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날씨는 더워졌다. 복실이는 날짜가 가는 것을 셈하려고 마음먹었지만 뱃멀미와 더위에 시달려 잘되지 않았다. 배가 오사카를 떠나 20여 일쯤 되었나 싶은데 어느 곳에 도착했다. 트럭을 타고 수용소에 들어가서 그곳이 사이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수용소에 20명의 조선 처녀들이 와 있었다. 거기서 비로소 복실이 일행은 자기네들이 위안부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처녀들은 울고불고 야단법석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소란도 오래가지 못했다. 감시원들이 몽둥이를 휘둘러대고 욕을 퍼부어대는 바람에 처녀들은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감시가 무척 심해졌다. 변소에 일일이 따라다니고, 밥을 끼니마다 갖다주는 것은 물론이었고, 서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 하게 했고, 잘 때도 몇 번씩 돌아보았다. 거기서 60명은 20명씩 세 패로 갈라졌다. 복실이가 속한 조는 배와 기차를 바꿔 타며 한정 없이 갔다. 열흘인지 얼마인지 지나 랑군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복실이를 끌고 온 그 일본 남자와 조선 남자가 계속 함께 갔다.

랑군은 숨을 쉬기 어렵게 더웠다. 복실이네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탔다. 트럭에는 일본군 열댓 명이 타고 있었다. 트럭은 서너 시간을 계속해서 산길로만 달렸다. 산은 갈수록 깊어졌다. 날이 어둑어둑해져서야 트럭은 험한 산속의 어느 집 안에 정거했다. 그 집 앞에는 위안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숲속에서는 구령소리와 많은 군인들이 걷는 발소리들이 들리고 있었다. 일본군 부대가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것이었다. 가끔 대포소리도 쿵쿵 산을 울리고 있었다. 위안소 건물은 쌍둥이처럼 두 채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건 새로 지은 건물로 사이에 길이 나 있었다. 한 건물에 처녀들의 방은 10개씩이었다. 곧 방 배정이 시작되었다. 복실이는 8호실로 들어갔다. 방은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정도의 넓이였다. 벽과 바

닥은 판자였고, 방구석에 담요 두 장이 있을 뿐이었다. 방 출입구에는 문이 달려 있지 않고 커튼이 쳐져 있었다. 저녁밥은 군인들이 커다란 통에다가 한꺼번에 담아 가지고 왔다. 처녀들은 사무실에 둘러앉아 그대로 모둠밥을 먹었다.

"저쪽 세면소에 가서 목간을 하고 푹 쉬어."

한씨가 처음으로 웃으면서 큰 인심을 쓰듯이 말했다. 랑군에 내리면서 누가 조선 성이 뭐냐고 묻자 그는 마지못한 듯 자칭 <한씨>라고 했던 것이다. 그는 내내 와다나베라는 일본성을 써왔던 것이다. 목욕을 다 끝낸 처녀들이 이방, 저방 모여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군인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다 장교님들이시다. 다들 얌전하게 잘 모셔야 해. 빨리 방으로 들어가."

긴장한 한씨가 처녀들을 향해 소리쳤다. 처녀들은 질겁을 해서 제각기 자기네 방으로 뛰어들었다. 복실이는 두 팔을 엇갈리게 해서 손으로 양족 어깨를 틀어잡은 채 방구석에 바짝 쪼그리고 앉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런데 커튼이 걷히며 군인 하나가 쑥 들어섰다.

아이고메, 엄니

복실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진저리를 쳤다.

"하하하..."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손이 복실이의 치마를 헤집고 들었다.

 

 

44. 해바라기 군상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 박 여사, 어서 오세요."

소파에서 무엇을 보고 있던 민동환이 사장실로 들어서는 박정애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전엔 계시는 것 알고 일부러 시간 맞춰 왔죠."

", 잘 오셨습니다. 박 여사는 세월이 갈수록 젊고 멋이 있어집니다."

민동환은 살찐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입에 발린 말을 했다. 그는 얼핏 몰라볼 정도로 살이 쪄 있었다.

"어머, 괜한 말씀."

박정애는 소파에 앉으며 진한 눈길로 민동환을 끌어당기듯 쳐다보며 묘하게 웃었다. 민동환의 말은 그다지 과장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편이었고, 몸치장은 지난날보다 훨씬 더 화려하면서 세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세월을 감추려는 듯 얼굴에 화장이 짙었다.

"박여사께서 어인 행차십니까?"

민동환은 손에 들고 있던 직사각형의 빳빳한 종이를 탁자 위에 슬적 던지듯 하며 대화를 이었다. 그는 박정애가 그것을 보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네 용건은 문화계의 멋쟁이 민 사장님을 뵈려고요."

박정애도 미끈하게 사교적인 발언을 했다.

"아이구, 너무 과분한 말씀입니다."

민동환은 겸손한 척하면서도 아주 기분좋게 웃었다.

", 홍 변호사 청첩장 받으셨군요?"

어느새 탁자 위에 놓인 빳빳한 종이를 알아보고 박정애가 말했다.

"아 예, 역시 박 여사는 소식통이 빠르시군요."

민동환은 예상이 빗나가 문득 이상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청첩장을 박정애의 눈길이 끌리게 놓았던 것은 그녀를 놀라게 하고, 자신이 홍 변호사에게 청첩장을 받을 정도의 사이라는 것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박정애는 벌써 홍 변호사의 아들이 결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빠른 건 아니구요. 저도 어제 받았거든요."

박정애의 가벼운 대꾸였다.

", 그러셨군요. 두 분이 언제 화해를 하신 모양이지요?"

민동환은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글쎄요, 그런 것 한 일 없어요. 아마 박정애라는 인간한테 보낸 게 아니라 국민총력연맹 지부위 간부한테 보낸 것 아니겠어요?"

약간 비웃음을 띠고 있는 박정애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녀는 국민총력연맹을 들먹여 민동환에게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아 뭐, 그랬을 리가 있나요. 겸사겸사 해서 보낸 거겠지요."

민동환은 속마음과는 다르게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박정애가 중인 신분인 제 주제를 잊지 않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이 묘하게 변해서 그렇지 박가가 감히 민씨와 맞상대를 하고 들다니, 참 아니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눈치 빠르고 잽싸게 설쳐 국민총력연맹 지부의 간부 자리를 차고 나섰으니 전혀 괄시하지 못하고 깍듯이 사람 대접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 더 비위 상했다. 홍명준 변호사가 박정애에게 청첩장을 보냈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홍 변호사가 신분적으로 박정애를 아주 무시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홍 변호사도 박정애가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비중까지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 홍 변호사도 아주 약게 놀아요."

박정애가 코방귀를 뀌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민동환은 놀라움을 감추지못하고 눈이 커졌다. 아무리 당사자가 면전에 없다고 하더라도 박정애는 홍 변호사를 너무 나쁘고 고약하게 말했던 것이다.

"홍 변호사 사돈이 누군지 아시나요?"

박정애가 비웃음을 물며 민동환을 빤히 쳐다보았다.

", 아니오..."

민동환은 자신도 모르게 청첩장을 집어 들었다.

". 잡지사 사장님께서 왜 이러실까. 소식통이 영 캄캄하시군요."

박정애는 입바른 대로 거침없이 야유하고 있었다.

"이거 참...., 그 사람이 누굽니까?"

민동환은 멋쩍게 웃으며 청첩장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법원 판사 나으리십니다."

"그럼 일본인 아닙니까?"

"그렇다니까요."

"...."

민동환은 충격을 받으며 그때서야 박정애의 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그러면서 <약게 논다>는 박정애의 말이 그다지 심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민 사장님, 뭐 그리 놀라실 것 없어요. 홍 변호사가 내선일체 혼인론을 몸소 실천하려고 솔선수범해서 나선 거니까 우린 적극 환영하고 뜨거운 축하를 보내면 되니까요."

박정애는 쌕쌕 웃으며 말했다.

"아 예, 그야 그렇지요."

민동환은 당황스럽게 대꾸했다. 박정애는 민동환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민동환이 놀라는 것은 실망해서가 아니라 선망해서이고, 그 속에는 질투가 섞여 있다는 것을 박정애는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민동환은 홍 변호사의 그런 비약에 반사적인 질시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홍 변호사가 일본인 판사의 딸을 며느리로 얻은 것은 분명 신분의 비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장가들일 아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기분이 어떠세요?"

박정애는 바람이 팽팽하게 든 고무풍선을 바늘로 콕 찔러 터뜨리는 기분으로 물으며 또 민동환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 예, 축하할 일이고말고요. 내선일체 혼인론을 솔선수범하는 것이니 그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일이지요. 저는 부조금이나 두둑이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 네까짓 게 날 놀리려고? 하는 생각으로 민동환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받아넘겼다. 또한, 입이 빠른 박정애를 놓고 자칫 무슨 말을 잘못했다가는 금방 홍명준에게 어떻게 전할지 몰랐던 것이다.

", 민 사장님은 과연 모범적인 황국신민이고 인격자로군요."

박정애도 아주 세련되게 웃으며 이렇게 되받아쳤다. 그러나, 저 미꾸라지 같은 놈, 하는 생각과 함께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은 떼칠 수가 없었다.

"아이구, 너무 황송스럽게..." 민동환은 겸손한 척해 보이며 담배를 빼들고는 "사실 말이지 내선일체 혼인론은 참 생각할수록 잘 고안된 것입니다. 말로만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면 뭘합니까. 서로 피가 다르면 언제까지나 물에 기름이지요. 그런데 내선일체 혼인론을 실행해서 서로 사돈이 되고 서로 부부가 되고 하면 당장 한집안이 되어 어우러지는 거고, 자식을 낳게 되면 그야말로 완벽한 내선일체가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 효과로 보자면 창씨개명은 댈 게 아니지요." 그는 아주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어머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민 사장님도 장차 내선일체 혼인론에 따라 자식들을 결혼시킬 건가요?"

박정애는 약간 놀라고 있었다. 송중원을 잡지사에서 내보내는 것을 계기로 민동환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동안 내선일체 혼인론을 적극 찬양할 정도로 의식이 발전되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야 당연하지요. 대동아공영권이 성취된 마당에 우리가 종주국 국민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그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민동환은 얼굴까지 상기되며 말했다.

"그렇군요. 민 사장님이 그렇게까지 확고한 생각을 가지신 줄은 몰랐는데요."

박정애는 묘하게 웃었다.

"그 무슨 서운한 말씀입니까? 잡지 만드는 걸 보시면서도 그러십니까."

민동환은 정말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잡지는 잡지고 개인적인 자식문제는 좀 다른 줄 알았죠."

박정애는 민동환을 믿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내선일체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건 저의 확고한 신념입니다."

민동환은 주먹까지 쥐어 보였다.

"내선일체 혼인론을 실행시켜 나가는 것도 우리 국민총력연맹의 주 임무 중의 하난데, 총독부 정책에 적극 호응한다 하더라도 조선사람이 자식의 문제까지 그렇게 생각하기는 쉽지 않거든요. 민 사장님은 그 계기가 뭔가요?"

박정애는 아까와는 완연히 다른 친근감을 내보이며 물었다.

", .... 잡지의 편집을 바꾼 것부터가 현실을 현실로 냉엄하게 직시하자는 것이었고, 그러니까 그 계기가 굳이 따지자면 대동아회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민동환은 아부 섞인 웃음을 지었다.

"역시 대동아회의의 위력은 대단하군요. 지식인들을 다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야 더 말할 것 있습니까. 대동아공영권의 실현이란 게 지식인들의 상상으로 가능이나 한 일이었습니까. 그 충격이 자발성으로 바뀌지 않을 수가 없지요."

대동아회의란 작년(1943) 115일에 만주국. 중화민국. 필리핀공화국. 타이국. 미얀마 국의 대표들이 동경에 모여 일본천황을 배알하고, 5일과 6일 이틀 동안 제국의사당에서 도조 수상을 의장으로 하여 대동아 백 년의 평화와 번영을 논의한 회의였다. 그건 다름 아닌 황국이 영국. 미국. 네덜란드 등의 아시아 식민지국가들을 해방시키고 새롭게 대동아공영권을 실현시켰음을 일본이 온 세상에 과시한 것이었다. 그 소식을 조선에서도 신문과 방송을 총동원해 대대적으로 알렸음은 물론이었다.

"그래도 아직도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는 지식인들이 있으니 문제 아닌가요?"

박정애는 국민총연맹 지부 간부답게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까짓 자들이 몇이나 됩니까. 그런 자들은 곧 고사하고 말 테니까 아무 걱정할 게 없습니다."

민동환은 자신에 차서 말했다.

"꼭 그럴까요?"

", 틀림없습니다. 우리 잡지에 성전을 찬양하고, 황군 지원을 독려하고, 내선일체를 역설하는 각종 글들이 청탁 없이도 쇄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도도한 물결 속에서 몇몇이 버틴다고 가면 얼마나 가겠어요."

", 그 말도 일리는 있는데, 그렇다고 방임은 금물이에요. 능력자는 하나라도 더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지요."

박정애는 자못 의젓하게 말하며 <우리 편>이라는 말을 썼다.

"그야 물론 그렇지요."

",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 오늘 여기 온 목적 중의 하나가 윤일랑 씨 거처를 알아보기 위해서였어요."

"윤일랑이요? 그자를 왜요?"

민동환의 얼굴이 일시에 구겨지며 말이 거칠어졌다.

"아니, 왜 그리 기분 나빠하지요?"

"그 자식 그거 아주 형편없는 놈입니다. 그놈 얘긴 꺼내지도 마세요. 좀체로 욕을 하는 일이 없는 민동환은 욕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감정이 격해져 있었다.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럼 얘기하지 맙시다. 난 그 사람 능력을 생각해서 회유도 할 겸 도와주기로 할 겸 해서 우리 극단에서 장막 희곡을 쓰게 할 작정이었거든요."

"글쎄요. 그놈이 능력이고 재주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괜히 헛수고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놈이 회유될 놈이 아니거든요."

민동환은 거칠게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럴까요? 내가 보기엔 요즈음이 아주 좋은 기회일 것 같은데요. 그동안 윤일랑도 생활고에 시달릴 만큼 시달렸고 배가 고플 만큼 고팠어요. 제아무리 지조인지 고집인지가 센 윤일랑도 굶주림 앞에 거금을 내놓는데 별수 있겠어요? 일에는 다 기회가 있는 것 아닌가요?"

박정애는 아주 부드럽고도 능란하게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윤일랑의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민동환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의 뇌리에는 그날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송중원이 회사를 떠나고 서너 달 지난 어느 날이었다. 예기치 않게 윤일랑이 사장실로 뛰어들었다. 대낮인데도 그는 술이 취해 있었다.

"야 임마 민동환, 너도 사람 새끼냐."

윤일랑은 다짜고짜 삿대질을 하고 덤벼들었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이 새끼, 몰라서 물어? 잡지를 해 처먹으려면 똑똑히 해 처먹어, 이 새끼야, 친구 형님을 그따위로 야비하게 몰아내고도 네놈이 고이 잡지 해 먹을 것 같으냐? 돈이면 다냐? 이 대가리에 똥밖에 안 든 친일파놈아."

"당신이 뭔데 이래. 남의 일 간섭 말고 당신 글이나 똑똑히 써."

"뭐야!"

윤일랑은 민동환의 멱살을 잡는가 싶더니 그대로 얼굴을 들이받았다.

"어쿠!"

민동환은 주저앉았고, 조금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윤일랑은 사라지고 없었다.

민동환은 그 일을 계기로 사원들을 다 갈아치워 버렸다. 그리고 그 봉변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대신 잡지 내용을 대폭 바꾸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내선일체 혼인론을 실행하기에는 아직 아이들이 어리고, 그전에 실천해야 될 일이 있을 것 같은데요."

박정애가 이야기를 돌렸다.

"그게 뭐지요?"

민동환은 불쾌한 기억을 지우려고 하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집에서 아이들이 무슨 말을 쓰지요?"

"그야..."

민동환은 순간적으로 박정애의 말뜻을 깨달으며 아차 싶었다.

"국어를 안 쓰고 조선말을 쓰는군요?"

박정애는 가차 없이 민동환의 허점을 찔렀다.

"그게 글세..."

민동환이 어색스럽게 어물거렸다.

"민사장님만 그러는 게 아니라 대개 그렇게 철저하지 못해요. 내선일체의 기초는 어린아이들일수록 국어를 상용시켜 몸에 완전히 배게 하는 것 아닌가요?"

박정애는 그야말로 국민총력연맹 간부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 그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총독부에서도 국어상용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지요. 제가 그만.."

"그야 총독부뿐만이 아니지요. 우리 국민총력연맹에서도 가장 중요시하는 사업이 첫째 성전 지원, 둘째가 국어상용운동 아닌가요. 섭섭하군요. 아이들이 국어를 상용했더라면 제가 <국어상용의 가> 표창을 상신할 수도 있었는데."

박정애는 슬쩍 미끼를 던졌다.

"아 그렇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일본말, 아니 국어를 저보다 더 잘합니다."

민동환이 다급하게 말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아닌가요? , 때는 늦지 않았어요."

박정애는 좀더 고소한 미끼를 던졌다.

", 알겠습니다. 당장 국어를 상용하도록 하지요."

민동환은 일본식으로 연거푸 고개를 까닥거렸다.

총독부와 직통하고 있는 전국적인 거대 친일조직인 국민총력연맹에서는 전쟁 지원을 위해 유기그릇을 강탈하고 성금을 걷고 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일본어 상용을 강요해 가면서 그 추진의 효과를 위해서 <국어상용의 가>라는 표창을 시행하고 있었다. 집안에서도 조선말을 일체 쓰지 않고 일본어를 쓰는 가정을 골라 모범이라고 해서 표창장을 주었다. 친일파들 사이에서 그것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본사람들이 그 표창장을 대단하게 생각했고, 그 표창을 받은 사람들을 달리 대했던 것이다.

박정애는 국민총력연맹이 확대 강화되는 기회를 틈타 재력을 앞세우고 연극단체를 배경 삼아 지부의 여성분야 간부직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 연맹에서도 박정애 같은 활동적인 여자는 대환영이었다. 박정애는 국민총력연맹에 들어가면서부터 양쪽 어깨에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그 연맹의 사회적 영향력을 십분 이용해 가며 맘껏 여류인사로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에 허탁이 홍명준에게 한 말이 적중한 셈이었다.

"제가 여류시인 하나를 소개하면 어떨까요. 제 후밴데 아주 시를 잘 써요."

박정애는 마침내 본론적인 용건을 꺼내놓았다.

", 좋습니다. 박 여사께서 추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대환영입니다."

민동환은 과장되게 반겼다. 그 속에는 박정애를 머잖아 이용해야 한다는 계산이 직감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 고맙습니다. 그럼 며칠 있다가 동행할께요. 홍 변호사댁 결혼식장에서 또 뵙도록 하지요."

박정애는 살짝 눈웃음치며 일어섰다.

"이거 점심을 함께 하려고 했는데요."

", 선약이 좀 있어서요."

민동환과 박정애는 송중원의 말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헤어졌다. 그들은 분명 송중원을 매개로 하여 알게 된 사이였던 것이다. 또한 민동환도 홍명준 변호사를 송중원을 통해서 알게 된 사이였다. 그런데 그는 송중원을 그런 식으로 몰아내고서도 홍명준과는 계속 사교를 해오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송중원이 있을 때보다 더 사이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러기는 홍명준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윤일랑은 마분지 봉투에 번역원고를 넣어 가지고 동대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광대뼈가 불거지고 두 볼이 움푹 파일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얼굴만큼 옷도 낡아 있었다. 그의 몰골에서는 가난이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

윤일랑은 길을 건너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저 앞쪽에 괴상한 차림으로 걸어가고 있는 남자에게 윤일랑의 눈길은 박혀 있었다. 그 남자는 국민복에 일본군 전투 모자를 쓰고, 다리에는 각반을 차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스틱을 들고 있었다.

"저놈이 저거..."

윤일랑은 눈을 껌벅이며 다시 확인했지만 그 꼴불견의 차림을 한 것은 틀림없이 소설가 김 아무개였다.

"저 넘이 저거 완전히 미쳤군. 새파랗게 젊은 놈이 저게..."

윤일랑은 그 소설가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 그 젊은 소설가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런 해괴망측한 차림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는 스틱을 치켜들며 내선일체를 외치거나 천황폐하 만세를 부른다고 했다. 총독부의 눈에 띄여 좋은 자리에 취직을 하고 싶어 그런다고도 했고, 군대에 안 끌려가려고 과잉 충성하는 것이라고도 했고, 사실 미친 기가 좀 있다고도 했다. 윤일랑은 그동안 그런 소문을 들었을 뿐 직접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국민복에 전투모와 각반은 뭐며, 스틱은 또 무엇인지, 그 꼴이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수치도 창피도 모륵 사람이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무슨 기적 같기만 했다. 그 꼴은 자발적 친일 문사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소설가는 언행일치를 시키려는 듯 여기저기 지면에다 성전 찬양과 군대 지원 독려의 글을 부지런히 써대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런 부류의 문사들은 관으로부터 아무런 억압도 받지 않은 미미한 존재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운이 없던 윤일랑은 더 맥이 빠져 잡지사까지 터덕터덕 걸어갔다.

"선생님,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윤일랑이 들어서자 잡지사 직원이 반색을 했다.

"마감 날짜 아직 안 지났는데."

윤일랑은 의자에 몸을 부렸다.

"선생님, 그게 아니구요. 며칠 전에 선생님을 급히 찾는 전화가 왔었습니다."

"전화?"

", 저희가 선생님 댁을 알아야 연락을 드리죠. 박정애 씨라는 분이 급히 연락을 달라고 그러시더군요. 좋은 일이라구요. 여기 전화번호 있습니다."

직원이 쪽지를 내밀었다.

"..."

"전화 걸어드릴까요?"

"아니, 됐네."

윤일랑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직원이 머쓱해서 돌아섰다. 윤일랑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편집장에게 원고 봉투를 내밀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편집장이 봉투를 서랍에 넣으며 물었다.

"아니오, 영양실조라서 그렇소. 나 원고료나 좀 주시오."

윤일랑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글쎄요. 될지 모르겠는데요."

편집장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다는 바라지도 않소. 번역이나 해 먹는 놈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선생님은 참, 글 쓸 능력이 없어서 번역을 하면 큰일나겠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편집장이 그 심정을 안다는 듯 스산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났다. 윤일랑은 지난달의 잡지를 건성으로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선정적이거나 엽기적인 야담과 실화를 엮어서 내는 대중잡지였다. 그 가운데 번역한 탐정소설이 한두 편 연재되고 있었다. 야담과 실화를 소설 형식으로 쓰는 것은 번역보다 원고료가 많았다. 그러나 윤일랑은 그 일거리에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 일로 소설 쓰는 붓끝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탐정소설 번역으로 겨우겨우 호구를 해결해 가고 있었다. 탐정소설은 엄연히 필자가 따로 있어서 원작에 충실하게 번역을 하면 소설 쓰는 능력을 팔아먹어 가며 선정적 문장을 꾸며내고, 엽기적 장면을 조작해 내고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일을 맡게 된 것은 이 잡지다 장사만 열심히 할 뿐 일체 친일적 정치성을 띠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잡지에서는 성전 찬양이나 군대 지원 독려 같은 시 소설 나부랭이들이 실리지 않았다.

윤일랑은 송중원이가 말하는 방향으로 소설을 써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소설로 써야 될 쓰라리고 뼈저린 이야기들이 너무 많은데 그것 다 외면하고 옛날이야기나 쓴다는 것이 전혀 내키지 않고 회의스러웠다. 그런데 송중원이가 잡지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민동환을 들이받은 것을 계기로 윤일랑은 붓을 꺾기로 결심했다. 친일로 치달아가는 와중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최소한의 저항을 하는 데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나마 글을 쓰지 않게 되지 곧바로 생활고가 밀어닥쳤다. 최소한의 저항을 시도한 대가는 처자식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굶주림이었다. 그것과 싸우기 위해 찾아낸 일거리가 번역이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다 긁었는데 절반밖에 안 된답니다."

편집장이 난색이 되어 봉투를 내밀었다.

"아니, 그만하면 고맙소."

윤일랑이 희미하게 웃었다.

"선생님, 나가셔서 차 한 잔 하실까요?"

"갑시다. 내가 살 테니."

"아닙니다. 대접은 제가 하겠습니다."

편집장이 봉투를 들고 앞장섰다. 밖에는 5월의 햇살이 눈부셨다.

", 햇빛 좋다. 역시 5월은 계절의 여왕입니다."

편집장이 두 팔을 뻗어 올리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계절의 여왕이라...."

윤일랑의 눈앞에는 노천명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성질 깔끔하고 칼칼한 여인이여, 그대마저 친일로 돌아서다니. 성질만큼 결벽증도 심하더니 그건 어느 정도 의지의 소산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고난 성품에 지나지 않았던가? 서정도 남달리 투명하고, 그러면서도 여류시인답지 않은 질량감 있는 시를 써낸 그대는 꼿꼿하게 버틸 줄 알았다. 그런데 친일이라니, 무엇을 위해서인가? 출세를 위해서인가? 혼자 몸이면서 편히 살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어느 누구의 말마따나 남들이 다 변하니까 따라서 그런 것인가. 그대에게 기대한 건 없다만 괜찮은 시 몇 편이 아깝다. 윤일랑은 시인 노천명을 특별히 탓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류 문사들도 이미 친일의 대열에 가담했고, 미술가며 음악가들도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판이었다. 그리고 종교계며 교육계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지식인들은 친일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그건 다 작년 11월의 대동아공영권 성취라는 것을 계기로 벌어진 사회의 급격한 변화였다. 다만 시 한 구절 때문에 노천명이 생각난 것이었고, 다시 생각해도 그 시적 재능이 아까웠던 것이다.

"선생님, 아까 직원이 말씀드렸던 그 박정애라는 여자분 말입니다. 저한테 따로 전화를 해서 선생님을 꼭 좀 뵙게 해달라고 당부하던데요. 선생님께 도움 될 일이라구요."

편집장이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꺼낸 말이었다.

"김형, 그 여자 직함이 뭔지 아시오? 국민총력연맹 경성지부 간부요."

"예에?"

편집장이 빨던 담배를 입에서 뗄 정도로 놀랐다.

"그런 여자가 나한테 도움을 주면 무슨 도움을 주겠소."

윤일랑은 쓰디쓰게 웃었다.

"회유하려는 것이로군요?"

"그 얘긴 더 하지 맙시다."

윤일랑이 찻잔을 들었다.

", 알겠습니다. 전 그런 것도 모르고 선생님께 도움 될 일이라고 해서..." 편집장은 담배를 연거푸 빨고는 "선생님, 참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그는 앉음새를 고쳤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윤일랑은 찻잔을 놓으며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만해 선생이 타계하신 것 말입니다."

"아니, 한용운 선생이?"

윤일랑은 깜짝 놀랐다.

", 며칠 됐습니다."

"아아, 그분마저 돌아가시다니..."

윤일랑의 메마른 얼굴이 침통하게 일그러졌다.

"그분은 더 사실 분인데 아사나 마찬가집니다. 배급 타 먹기를 거부하셨으니까요."

"배급 타기를 거부했다는 건 알고 있소. 그분은 장기간 동안 아사 투쟁을 해오신 거요."

", 그렇습니다."

", 꼭 계셔야 할 분들이 그렇게 가시다니..."

윤일랑은 뭉텅이 진 한숨을 토해냈다.

"이육사 선생도 가시고 만해 한용운 선생도 가시고.., 이제 문단도 친일 문사들의 독무대가 됐습니다."

편집장도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열여덟 차례씩이나 투옥을 당하면서 치열하게 독립투쟁을 전개해 왔던 시인 이육사는 지난 1월에 북경 감옥에서 옥사했던 것이다.

", 갈수록 암담한 세상이오."

윤일랑의 어금니 맞무는 소리가 뿌드득 들렸다. 둘 사이에 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저쪽 자리의 남자들이 계속되는 일본군의 승리에 대해 아는 척을 하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선생님, 이거 새 일거립니다."

편집장이 봉투를 내밀었다.

"고맙소"

윤일랑은 봉투를 받아놓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신문지에 싼 조그만 것이었다. 윤일랑은 신문지를 펴더니 무슨 가루를 입에 털어 넣었다.

"아직도 소다를 드십니까?"

"아직도가 뭐요. 갈수록 많이 먹게 되는걸."

물을 꿀렁거려 넘기고 난 윤일랑이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왜 자꾸 그걸 드십니까."

"이놈의 세상이 이걸 안 먹게 생겼소. 속 상하는 일들을 보고 들을 때마다 속이 화끈화끈해지고 뜨끈뜨끈해지면서 소화가 안 되고 먹먹하고 더부룩하니 어쩌겠소."

"선생님, 소다를 오래 드시면 나쁘다던데요. 그러지 마시고 큰 병원에 가서 근본적인 진찰을 받아보세요."

"그까짓 것, 죽기밖에 더 하겠소."

윤일랑은 허전하게 웃었다.

태전위산이나 호시위산의 매상을 올려주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한번 병원에 가면 고작 이삼일 치 먹을 약을 주고는 3, 4원이나 받았다. 그런데 위산은 40전이면 삼사일을 먹을 양이었고, 1원이면 열흘 넘게 먹을 양이었다. 그리고 10전이면 두부가 한 모였고, 솔가지 한 묶음 값이었다. 그것에 비하면 병원비는 터무니없이 비싼 것이었다. 의사하고 변호사는 면허증 가진 도둑놈이라는 말은 결코 우스갯소리만이 아니었다. 애당초 병원에는 갈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편집장과 헤어진 윤일랑은 곧바로 집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죽도 끓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점심은 아예 굶는 것이고, 밥보다는 죽을 더 많이 끓이는 형편이었지만 번역하는 원고료 가지고는 여섯 입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윤일랑은 사는 것이 모래밭 걷기 같고, 앞날이 캄캄한 밤길 걷기 같을 때마다 송중원을 생각하곤 했다.

"지식을 팔아먹으려고 해서는 안 되네. 그게 바로 친일의 길이니까."

송중원이 떠나면서 남긴 말이었다.

"어서 애들 밥해 먹이시오."

윤일랑은 아내에게 급히 돈 봉투를 내주었다.

"아빠, 돈 벌어 왔어?"

눈이 퀭해 누워 있던 막내아들이 얼굴이 환해지며 벌떡 일어났다.

"그래, 엄마가 곧 밥 많이 해줄 게다."

윤일랑은 막내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어린것의 몸에 뼈만 남아 있었다. 윤일랑은 가슴이 찡해졌다. 자신은 만해처럼 죽을 수는 없었다. 그만큼 큰 용기도 없었고, 네 아이들이 너무 어렸다.

"엄마, 빨랑 밥해 줘. 나 어지럽고 눈에서 별이 왔다 갔다 해."

막내아들이 휘청거리듯 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떻게 해서든 저것들을 먹여 살리며 버텨내야 한다. 왜놈들이 망할 때까지.

윤일랑은 다시 마음을 다지며 봉투에서 책을 꺼냈다. 책 제목은 <지하실의 살인>이었다. 윤일랑의 얼굴에 서글프고 찬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달포쯤 되어 국민총력연맹 경성지부에서는 표창식이 거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표창을 받을 사람은 열서너 명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미끈한 양복 차림이었고, 살찌고 혈색 좋은 얼굴들에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누가 보거나 한눈에 돈깨나 있고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에 민동환도 엄숙하고 긴장된 얼굴로 끼어 있었다.

"여러분들은 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국어상용에 솔선수범함으로써 타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지부장의 장황한 인사말에 이어 표창이 시작되었다. 표창장은 두꺼운 모조지였고, 거기에는 국어상용의 가 라는 글씨가 크고 뚜렷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민동환은 그 빳빳한 종이를 감격스러운 얼굴로 보고 또 보았다. 그러기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민 사장님, 축하해요."

식이 끝나자 박정애는 민동환에게 다가와 거침없이 손을 내밀었다.

", 예에..."

오히려 민동환이 악수하기를 주저했다.

"기분이 어떠세요?"

", 고맙습니다. 모두가 박 여사님 덕분입니다."

민동환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원 별말씀을. 앞으로 더욱 충성하셔야 해요."

", 여부가 있겠습니까"

민동환과 박정애는 더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45. 당신은 아는가

비행장은 삼분의 이쯤이 나지막한 산줄기를 둘러싸고 있었다. 산줄기 밖으로 뻗어나가는 부분의 양쪽으로는 산줄기가 끊겨 있었다. 그 지형이 산줄기로 에워싸인 분지였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한쪽 산줄기를 끊으며 뻗어나간 비행장 공사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원형의 산줄기와 직선의 비행장이 이루고 있는 형태는 마치 버섯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산줄기가 낮다고는 하지만 흡사 톱으로 나무를 자르듯 해서 산줄기의 일부를 흔적도 없이 없애버린 것은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산 하나를 없애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양쪽에서 산줄기를 자르고 그 부분을 평지로 만드는 힘겨운 일을 해낸 것은 바로 조선 노무자 1천여 명이었다. 그들은 흙을 파내고, 바위를 깨 내고, 그것을 밀차나 등짐으로 죽도록 운반하면서 피땀을 흘린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바위에 깔려 죽고, 흙더미에 파묻혀 죽고, 도망가다 잡혀와 맞아 죽고, 과로로 병들어 죽고 해서 그 수가 60명을 넘었다.

비행장 활주로에는 시멘트 콘크리트공사가 한창이었다. 활주로의 절반이 훨씬 넘게 콘크리트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현장에는 노무자들이 2백여 명 정도밖에 없었다. 그들은 총을 든 군인들의 감시 아래 조별로 시멘트를 져 나르고, 모래를 져 나르고, 자갈을 져 나르고, 물을 져 나르고, 시멘트와 모래와 자갈을 버무리고, 모두가 숨돌릴 겨를 없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 새끼야. 빨리빨리 해"

"야 이 새끼야, 잡담 마라."

조별로 십장들이 외쳐대는 소리가 공사장의 열기를 달구고 있었다. 그런데 공사는 활주로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활주로를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 아래 여기저기서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활주로 양쪽의 산자락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공사가 벌어져 있었다. 15군데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사는 굴파기였다. 한 군데에 50명씩 배치된 노무자들은 굴을 파느라고 진땀을 흘리며 헉헉대고 있었다. 그 일정한 간격을 이루고 있는 굴들은 다름 아닌 격납고였다. 그러고 보면 그 비행장은 천연적 요새였다. 활주로의 삼분의 이 정도가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어서 위장이 잘되는데다, 비행기들이 이착륙할 때 더없이 좋은 바람막이 역할을 할 것이고, 세상에 둘도 없이 튼튼한 격납고까지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노무자들의 막사는 산줄기가 끊긴 지점으로 치우쳐 활주로 양쪽으로 절반씩 자리 잡고 있었다. 막사들은 판자로 지어진 긴 가건물이었는데 정성 들이지 않은 검은 칠이 아무렇게나 되어 있었다. 6월의 해가 붉은 노을을 남기고 사라져도 그들의 노동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노무자들의 하루 노동시간은 아침8시부터 12시간 동안이었던 것이다. 그 시간은 계절에 따라 앞뒤로 조정했을 뿐 하루 12시간 노동은 철칙이었다.

땡땡땡땡땡....

레일 토막 두둘기는 소리가 방정맞다 싶게 빠르게 울리고 있었다.

"아이고, 살았다."

"아이고메 죽겄다."

"아이고 할배요."

노무자들이 그 종소리에 반색을 하고 한숨을 토하고 했다. 이제 쉴 수가 있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소리도 십장을 피해 숨죽여야 해야 했다. 노무자들은 조별로 막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네 줄로 맞춰선 행군대열이었고, 십장들이 구령을 붙이고 있었다. 완전히 군대식이었다. 인원 파악을 쉽게 하고 이탈자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십장이 있는데도 무장 군인들은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들고 여기저기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배필룡은 9조 중간쯤에서 사위어져 가고 있는 보랏빛 노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금예, 또 하루가 갔네. 금예헌트로 갈 날이 또 하로 가차와진 것이여. 금예, 맘 변허지 않고 있는 것이제? 맘 변허먼 안돼야. 그리 되면 금예 죽고 나 죽긴게. 소식 안 전헌다고 원망허덜 말어. 여그서넌 절대로 핀지럴 못쓰게 혀. 비행장 맨그는 것이 바깥 시상에 알려지먼 안 되는 중헌군사기밀이라는 것이여. 쬐깨만 참어. 인자 한 달허고 시무나흘밖에 안 남었응게.’

배필용은 보랏빛 노을에 어린 아내의 모습을 보며 또 간곡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이 끝나면 아내에게 해온 말이었다. 다만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하루씩 줄어드는 날짜 계산이었다. 배필룡은 아내만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다.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고, 마음이 변할 것 같아서 미칠 것 같았다. 떠나오기 전에 마음 변하지 않겠다고 다짐받고 또 다짐받았지만 전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이만 하나 있었더라도 그런 걱정은 안 했을 것이다. 혼인 한달 만에 집을 떠나왔으니 고무신을 바꿔 신기로 마음 변하면 열 번도 더 변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혼인 한 달 만에 혼자 둔 아내는 말뚝에 매두지 않은 소나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너무 예뻐서 다른 사내들 눈타기가 쉬웠고, 아내의 몸은 더 예뻐 어느 사내나 한번 보면 환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다 아내는 장모님하고 다르게 활달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어떤 사내하고 눈맞기도 딱 좋았다. 자식으로 말뚝을 박았어야 하는데......, 이 대목까지 생각하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 당장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은 망망한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었다. 도망가 보았자 집으로 갈 길이 막막했고, 또 이삼일이면 틀림없이 잡히게 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장모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장모님은 아무 걱정 말고 몸 성히 다녀오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배필룡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 그나마 마음의 위로를 삼을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혼인 보름 만에 끌려오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두 달이 다 못 되어 끌려오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아내를 보고 싶어 하지는 했지만 마음이 변할까 봐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 자기네들 부모가 아내를 지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외톨이인 배필룡으로서는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막사로 돌아온 그들은 식기를 가지고 앞다투어 식당으로 갔다. 배식표를 내고 밥을 받고 그릇들은 각자가 씻기로 되어 있었다. 식당은 언제나처럼 왁자지껄 소란했다. 하루에 세 번, 그들에게 밥때는 가장 즐겁고 편하고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꾹꾹 눌러서 퍼, 꾹꾹."

"어허, 밥알 세우지 말어."

"그리 밥을 털어대지 말라니까?"

밥을 받은 사람들은 끼니때마다 하는 소리를 또 외쳐대고 있었다. 그렇다고 주걱을 든 조선여자는 끄덕고 하지 않았다. 눈을 착 내리깔고 서서 주걱으로 연상 밥을 털어대며 딱 한번씩 퍼주면 그만이었다. 아무리 소리쳐 보았자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은 끼니때마다 같은 소리를 외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그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일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밥을 배불리 먹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루 12시간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늘 배가 고파 허덕거렸다. 그렇다고 그 밥을 공짜로 주는 것도 아니었다. 끼니마다 내는 배식표는 하루에 45전씩으로 계산되어 월급에서 공제하고 있었다.

그들의 한 달 임금은 18원이었다. 거기서 밥값으로 한 달 평균 1350전씩을 제했다.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은 고작 450전이었다. 그러나 그 돈이나마 모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배급식으로 나오는 담배와 술값을 내야 했고, 1년에 한 번 지급되는 작업복값도 내야 했다. 그렇게 되면 1년 내내 일해야 모두 다 몇십 전 손에 쥘 수 없는 빈털터리 신세였던 것이다. 밥은 쌀이라고는 구경하기 어려운 콩밥이거나 잡곡밥에, 해변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다시마를 걷어다가 끓여주는 다시마 된장국, 그리고 단무지 한쪽이 매끼 식사였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하루에 45전씩인지 누구나 다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내놓고 따지지는 못했다. 식당의 조선사람들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임금벌이를 하는 것뿐이었고, 그 뒤에는 엄연히 일본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 나서보았자 코앞에 나타나는 것은 동그랗게 뚫린 총구멍뿐이었다. 그렇다고 양이나 많이 달라고 요구하고 나설 수도 없었다. 집단행동을 일체 용납하지 않은 그곳에서 총의 위협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총을 들이대는 것은 단순히 위협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총을 쏘고 싶으면 언제든지 쏘아버렸다.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노무자들은 밥때만 되면 주방을 향해 항의인지 분노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담뱃값이며 술값, 옷값도 일방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뼈가 휘는 고된 노동 속에서 담배 한 대씩 안 피울 수가 없었고, 열흘에 한 번 정도 나오는 술 한잔 안 마실 수가 없었고, 일 년 내내 한 노동으로 다 낡고 삭은 작업복도 바꿔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징용을 끌려올 때 18원에서 20원의 임금이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라고 다들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첫 달을 살아보고야 그들은 또 속임수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말이 좋아 월급을 주는 것이었지 그렇듯 일방적으로 계산을 해버리고 따지지도 항의하지도 못 하게 하니 그것이야말로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이고 철저하게 노동을 착취하는 노예 부리기 바로 그것이었다. 밥은 어찌니 엉성하게 잘도 펐는지 밥알 사이로 바람이 지나다닐 정도로 부피만 많아 보였다. 그것을 꾹꾹 눌러 장정 밥술로 뜨면 대여섯 숟가락이면 그만이었다. 아내의 주걱질로 꾹꾹 눌러 고봉으로 푼 밥도 한 창 농사철에는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팠다. 그런데 농사철 일보다 더 고된 비행장 닦기 노동을 줄기차게 해대면서 반찬도 없는 솜 밥을 먹으니 모두가 배가 고파 허덕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고, 시장시런 저녁밥 묵었응게 참말로 하로가 또 지내갔다. 그려, 흘르지 않는 물 없고, 가지 않는 세월 없는 법이다."

나이 마흔이 넘은 김씨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배필룡을 보고 말했다.

"야아, 여그 첨 떨어졌을 적에넌 참말로 막막하고 기가 맥히등마 날이 가기넌 많이 갔구만이라."

배필룡은 식기가에 붙은 수수알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으며 빙긋이 웃었다.

"근디, 2년이 다 되도락 자네덜 연장얼 그리 안 써묵어 집이 가서 내 소박당허는 것 아닐랑가 몰르겄다?"

김씨가 배필룡과 하달호를 번갈아 보며 씨익 웃었다.

"하이고, 아자씨 것이나 걱정허씨요. 지야 마누래 봤다 허먼 그날 밤 보톰 1365일 밤마동 열 분씩 떡칠 자신이 있응게라."

기운좋게 생긴 하달호가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그도 장가든 지 반년 만에 끌려온 처지였다.

", 그러허소. 우리는 부조금이나 밀 챙개두드라고."

김씨가 배필룡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배필룡은 담배를 빨다 말고 쿡쿡거리며 웃엇다. 그들은 같은 날 끌려온 고향사람들이라 서로 의지하며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아자씨, 그나저나 돌림병 소문 들었능게라?"

하달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니, 무신 돌림병인디?"

김씨의 얼굴이 긴장되었고, 배필룡도 하달호 옆으로 다가앉았다.

"무신 병인지넌 몰르겄는디 열이 나고 설사럴 험서 기운얼 못쓴당마요."

"어디서 들었어?"

"아자씨도 참. 그런 소문이야 옴서 감서 듣는 것 아니겄소."

하달호는 소학교까지 나와 일본말을 곧잘 했고, 유난히 이 소식, 저 소식을 잘 물어오는 귀가 밝았다.

"병이 심허게 퍼진가?"

배필룡이 물었다.

", 왜놈덜언 쉬쉬하고 있는디 발써 대여섯이 의무실로 업혀갔다는 것이여."

"고것 참 탈인디. 병세가 그러먼 이질언 아닐 것이고, 하매 호열자가 아닐랑가?"

김씨가 나이든 사람답게 신중하게 병명을 짚고 있었다.

"호열자먼 무서운 병 아닌게라?"

배필룡이 더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하먼, 무섭제. 되게 퍼지먼 온 동네가 다 떼죽음얼 당허기도 헝게."

"아자씨가 당해 보신 적이 있으시오?"

하달호도 기색이 달자리며 물었다.

"하먼, 20여년 전에 호열자가 지독시리 퍼졌는디 두 달 가차이 찬 바람 날 때꺼정 날이 날마동 줄초상이었응게."

"요것 참 재수 드럽게 되았네, 집이 갈 날 코앞에 두고. 인자 여름 시작잉게 돌림병이 지 시상 만낸 것 아니겄소?"

하달호는 완연히 당황해 있었다.

"그려, 그렇고 말고. 여름이야 온갖 미물덜도 한시상 만내는 철잉게."

"글먼 으째야 되제라?"

배필룡이 두려워하는 얼굴로 물었다.

"글씨..., 찬물 묵지 말고, 넘덜허고 많이 대허지 말고 그러라는 것인디...."

"헹 우리야 다 틀려부렀소. 그 느자구없는 식당년덜이 뜨거운 물 끓여줄 리 만무고, 백 명이 한 막사서 궁굴어대니 병 걸리기 아조 딱 좋구만이라."

하달호가 성질을 냈다.

"아서, 아서. 말이 씨 되는 법이여."

김씨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여. 요놈덜이 우리 일 부래묵을라먼 돌림병얼 막어야 헝게 무신 수럴 쓰기넌 쓸 것이여. 물도 끓이게 허고 말이여. 요놈덜이 일이 한시가 급허다고 야단이고, 일언 안직 다 안 끝나고 혔응게 몸이 단 놈덜언 요놈덜 아니여?"

배필룡의 말이었다.

"그려, 자네 말이 맞구만. 호랭이헌티 열두 번 물려가도 정신만 채리먼 사는 법잉게 너무 겁묵덜 말고 맘덜 단단허니 묵어. 입조심덜 허고."

김씨가 일어났다.

", 다된 잔치에 코 빠치드라고 별 좆겉은 것이 다 지랄이네."

하달호가 투덜거리며 따라 일어섰다.

배필룡도 자리를 뜨며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 나고 있었다.

참 끔찍스러운 일이었다. 이곳에 와서 1년이 조금 지나서 경험한 일이었다. 잠을 자다가 보초가 깨워서 눈을 떴다. 외부에서 경비를 서는 군인들 외에 각 막사마다 두 명씩이 1시간 교대로 보초를 서고 있었던 것이다.

보초가 깨운 사람은 넷이었다. 보초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긴급호출이오. 빨리 본부 앞으로 가보시오."

보초의 말이었다.

"무슨 일이오? 이 밤중에."

누군가 역정을 냈고

"낸들 알겠소. 나야 하라는 대로 당신들을 깨운 것뿐이오."

보초의 대꾸도 불퉁스러웠다.

밤이 깊었지만 그들은 어두운지 모르고 본부 앞으로 갔다. 하늘에 반달이 떠 있었던 것이다. 본부에 도착한 그들은 놀랐다. 자다가 불려나온 것은 자신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넷씩 짝을 지은 사람들은 자꾸 더 모여들었다.

"40, 전원 다 모였나? 됐어. 20명씩 2개조로 정렬하라."

장교가 명령했다. 사병 다섯은 총을 들고 서 있었다.

"1, 연장을 가지고 출발하라."

장교의 명령에 따라 1조는 삽과 괭이를 가지고 사병 넷을 따라 출발했다. 달빛 속에 밤의 적막은 깊었다. 달빛을 20명의 발자국소리만 여리게 이어지고 있었다. 삽을 든 배필룡은 점점 두려움이 커져가고 있었다. 이 밤중에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군인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군인들은 언제나 폭력만 휘두르는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 누구도 말 한마디 없이 걷기만 했다. 앞선 군인이 산으로 길을 잡았다. 산비탈을 오르며 배필룡은 무엇을 파묻으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걸어 산을 넘었다. 비탈을 약간 내려가다가 앞선 군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정지"

20명은 우뚝 멈춰 섰다.

"이 지점을 석 자 깊이로 판다. 2조가 도착하기 전까지 빨리빨리 파라."

군인이 약간 펀펀한 데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그때서야 20명은 땅 위에 직사각형의 금이 널찍하게 그어진 것을 알았다. 달빛 아래 그 금은 이상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그들은 지체없이 삽질과 괭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빨리 해, 빨리빨리"

"2조 도착하기 전까지 못 끝내면 단체기합이다."

군인 셋은 번갈아 가면서 독촉을 해댔다. 단체 기합의 무서움을 너무 잘 아는 그들은 기를 쓰며 땅을 파 내려갔다.

"됐어, 깊이는 그만하면 됐고, 어서 바닥을 골라라."

흙더미 위에 올라선 군인이 지시했다. 땀을 흠뻑 흘린 그들은 삽과 괭이를 놓고 풀섶에 주저앉았다. 그들이 파낸 곳에는 네모진 커다란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도대체 저기다 뭘 파묻으려는 것일까?

배필룡은 어떤 불길한 생각과 함께 그 구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흉물스럽게 보이는 구덩이에는 흐린 달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2조 오나?"

어느 군인이 물었고

", 저기 올라오고 있습니다."

다른 군인이 산등성이에 서서 대답했다.

그 순간 그들 20명은 일제히 일어섰다.

"꼼짝 말고 앉아 있어"

군인이 총구를 휘두르며 싸늘하게 내쏘았다. 그들은 엉거주춤 도로 주저앉았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피울 수가 없었다. 공습 때문에 밤에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절대 금지였다. 한참이 지나 2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 10명씩 좌우로 정렬"

그들은 명령에 따라 일제히 일어섰다. 그러면서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2조의 2명씩이 들고 있는 들것에는 시체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더욱 소스라치고 있었다. 얼핏 보았을 때 시체였지 들것에 누워 있는 것은 분명 산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됐다, 쳐넣어"

장교가 명령했다. 들것들이 일제히 뒤집어졌다. 사람들이 구덩이 속으로 나뒹굴어지고 처박혔다.

"아이고, 살리주이소"

"살려줘요, 살려줘"

"아이고메, 엄니"

"살려주셔유우"

"어마니"

중병환자와 중상자들의 외침이 뒤엉키고 있었다.

"흙 빨리 덮어라, "

장교가 다시 명령했고, 사병들이 개머리판으로 1조 대원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구덩이 속의 환자들은 계속 소리치며 버둥거리고 몸부림쳤다. 1조 대원들은 구덩이 양쪽에서 삽과 괭이로 흙을 퍼넣기 시작했다. 흙 속에서 얼굴이 불쑥 솟으며 외치고, 허옇게 뒤집힌 눈을 향해 흙이 날아가고, 손들이 허공을 쥐어뜯고, 발들이 허공을 걷어차고 있었다. 그러나 흙이 계속 퍼부어지면서 그런 움직임들은 얼마 가지 못하고 흙 속으로 파묻혀 들어갔다. 그런데 달빛 속에서 흙이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흙이 구덩이를 반 이상 채우면서 그런 움직임도 끝났다. 흙이 구덩이를 수북하게 덮었다.

"전원, 위로 올라가서 다져라. 모두 힘껏 밟아"

장교가 또다시 명령했다.

그들 40명은 수북한 흙더미 위로 올라가 제자리 뛰기를 하기 시작했다. 배필룡은 뱃속이 뒤틀려오르는 구역질을 참아내느라고 이를 앙다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뜀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흙이 발에 밟힐 때마다 아까 그 꿈틀꿈틀하던 흙을 밟는 것처럼 발바닥에 뭉클뭉클한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구덩이를 수북하게 덮었던 흙이 다져져 평평하게 되었다.

"다들 수고했다.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은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 만약 소문이 나면 그때는 너희들 전원을 총살한다. 여기 너희들 명단이 있으니 명심해라."

장교는 종이 한 장을 흔들어 보였다. 며칠 동안 비위가 상해 밥맛을 잃었고, 한동안 밤마다 그 꿈에 시달리면서도 배필룡은 그 일을 가슴 깊이 묻어두었다. 그 뒤로도 의무실로 실려가는 중상자와 중병환자는 생겨났다. 그러나 그들 중에 몸이 나아서 돌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전혀 말이 없는 속에서 그들이 또 생매장당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누가 입을 열었는지 사람들은 쉬쉬하는 속에서 생매장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배필룡은 또 끌려나가 그 짓을 하게 될까 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돌림병이 퍼지고 있다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돌림병에 걸렸다 하면 그 사람들은 보나마나 생매장당할 것이 뻔했던 것이다. 배필룡은 잔뜩 긴장했다.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렴녀 돌림병에 걸리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돌림병이 퍼지고 있다는 하달호의 말은 사실로 입증되었다. 이틀이 지나 본부에서 노무자 전원을 집합시켰다.

"다를 똑똑히 들어라. 며칠 전부터 호열자 환자가 발생해서 현재 계속 퍼지고 있다. 이 병에 걸리면 누구나 죽는다. 살아서 집에 돌아가고 싶으면 다음 주의 사항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첫째, 오늘부터는 식당에서 끓여주는 물만 마셔야 한다. 둘째, 침이 튀게 서로 가까이서 말하지 말라. 셋째, 손을 깨끗이 씻되 손을 입에 넣지 말라. 다시 말한다. 이 병에 걸리면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본부대장의 지시였다.

사람들은 며칠이 지나서야 <이병에 걸리면 누구나 죽는다>는 대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환자들은 의무실로 옮겨지는 그날 밤으로 생매장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노무자들은 그 일을 내놓고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 대신 누구나 대장이 말한 주의사항을 잘 지키려고 혈안이 되었다.

"이봐, 식기 씻는 물도 끓여내"

노무자들이 식당에다 대고 외쳤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마실 물 끓여대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여자들이 앙칼지게 맞소리를 질렀다.

"미친 소리라니, 말 조심하지 못해. 이 돌대가리들아, 왜 식기 씻을 물도 끓여 내라는지 몰라? 물은 끓여 마시고 밥을 찬물로 씻은 그릇에 받아먹으면 무슨 소용이 있어. 그릇에 병균 붙어 있으면 도로아미타불이지."

"아이고 참 잘나기도 했네. 그리 다급하면 손수 끓여 쓰셔."

여자들은 전혀 말을 들을 기미가 아니었다.

막사 2개 반인 250명 단위로 배치된 네 개의 식당에서는 이런 소란스러운 시비가 벌어졌다. 그 시비는 십장들을 통해서 본부에 보고되었다. 본부에서는 노무자들의 요구가 일리있다고 생각해서 그 해결책을 마련했다.

"식기들을 일단 찬물로 씻는다. 그런 다음 배식을 받기 직전에 그릇을 끓고 있는 물에 소독해서 꺼내도록 한다."

그래서 식당의 출입문 앞에는 물이 펄펄 끓고 있는 솥이 따로 내걸렸다. 노무자들은 식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밥그릇과 그 끓는 물 속에 담갔다가 꺼냈다. 설거지물을 엄청나게 끓여야 하는 번거로움을 해결한 방법이었다. 그런 예방책은 효과를 나타냈다. 보름쯤 지나면서 호열자 환자는 거의 생겨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에 죽어간 사람들이 40여 명이었다. 그런데 무사하게 병을 피한 사람들은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한 달 열흘 정도로 가까워진 고향 갈 날을 기뻐하고 있었다.

"아아, 정말 날이 가기는 가는구나."

"그 까마득하던 2년이 한 달 열흘로 줄다니, 이거 믿어지지가 않아."

"누가 아니래나. 지나온 날들이 꿈만 같군."

"그래, 그 고생을 어찌 이겨냈는지 모르겠어."

"이삼십 년에 할 고생을 2년 동안에 몰아서 해버린 기분이야"

"맞어, 농사일보다 더 힘든 일이 또 있느니 원."

"그러니 우리 다 골병든 거 아닌가?"

"그나저나 집에 가게 됐으니 골병이야 집에 가서 풀어야지."

"그래, 그래, 집에만 가면 다 저절로 풀릴 병이야."

노무자들은 여기저기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들 방심 말라. 날이 점점 더워지고 있으니까 방심하고 더럽게 하면 호열자는 다시 생긴다. 호열자 예방대책을 계속 지켜나가면서 일을 열심히 해라. 제군들이 보다시피 비행장 공사는 얼마 남지 않았다. 공사를 빨리 끝내는 대로 계약기간을 무시하고 바로 집으로 보내주었다. 집에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으면 열심히 일을 해라."

대장의 말이었다.

"와아아..."

"야아아..."

노무자들은 다같이 환성을 질러댔다. 그것은 그들이 2년 동안에 처음 지르는 함성이었다. 노무자들은 새로운 기운이 솟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중노동에 시달려 깡마르고, 햇볕에 그을려 검게 탄 그들의 얼굴에 밝은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들은 다음날부터 일에 열성을 다 바쳤다. 십상들의 외침이나 욕설이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십장들은 없어도 좋을 존재가 되어버렸다. 역시 자발적인 열성은 효과가 컸다. 여기저기 공사장마다 일이 표나도록 빨리 진척되고 있었다. 군인들의 감시도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노무자들이 군소리 한마디 없이 일에 열중하여 작업효과가 두드러지게 좋아지자 군인들의 할 일도 없어지게 된 것이었다. 더구나 귀국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노무자들이 도망갈 위험도 없었던 것이다.

"이 지시마 열도라는 것이 대체 어떻게 생긴 거야?"

"그것도 모리나? 내사 막 꿈에서 딱 보니께네 섬 아니드나 섬."

"아니고메 잘났능거. 육지 아니라고 혀서 큰 다행이시."

"보래, 사람 무시허지 말그래이. 니도 마 섬 도자 정돈넌 안 아나."

그들은 이런 농담까지 나눌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사실 그들은 지시마 열도라고도 하고 쿠릴 제도라고도 하는 이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배에서 내리자 마자 포장 친 자동차에 실려 이 산골로 왔던 것이다. 그리고는 이곳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 것이었다. 그저 십장이나 식당여자들이 한 마디씩 흘리는 것으로 이곳이 여러 개의 섬들이 잇대어 있는 것 중에서 하나라는 것 정도밖에 몰랐다. 집에 편지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일부러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게 하는 것 같았다. 비행장의 활주로 공사는 완전히 끝났고, 격납고 내부공사도 완료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활주로와 격납고를 연결하는 짧고 좁은 길들뿐이었다. 그것도 지반 다지기는 이미 끝냈고, 콘크리트만 덮으면 되는 것이었다. 계약기간까지는 아직도 20여일이나 남았다. 콘크리트 작업을 아무리 굼벵이걸음으로 한다 해도 사흘이면 뒤집어 쓸 일이었다. 그러면 보름 이상을 빨리 집에 갈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보래, 보름을 더 벌었다 아이가. 보름"

"보름이 뭐야? 열이레는 되지."

"어허, 누가 똑똑헌 경기도 사람 아니라고 헐성불러 그리 야물딱지게 게산허고 나슨가. 이틀 에누리히도 보름이다 그것 아니여."

"그려유. 계산이야 그리 넉넉허니 허는 것이 좋지유."

"내가 마 와 이리 좋노."

"누구넌 안 좋고. 모다 좀도 좋제."

그들은 힘들 일을 하면서도 곧 춤이라도 출 것처럼 기분이 달떠 오르고 있었다. 작업 능률이 너무 좋아 십장들은 그런 정도의 잡담은 이제 개의치도 않았다.

땡땡땡,땡땡땡, 땡땡땡.....

레일 토막이 갑자기 세 번씩 연속 울리고 있었다. 그건 공습 신호였다. 노무자들은 일하던 것을 팽개치고 두 패로 갈라져 뛰기 시작했다. 각기 활주로 양쪽에 있는 막사를 향해 뛰어간 그들은 잠시 후에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다. 그들은 막사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양쪽 막사들 뒤에 있는 산줄기 그 어느 지점에 방공호가 있었던 것이다. 그 방공호는 각각 5백명씩 대피할 수 있는 깊이였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그 방공호를 판 것이었다. 그리고 몇 번의 훈련을 거치고, 또 실제로 공습신호가 가끔 울려 그들의 행동은 매우 기민했다. 방공호가 막사 뒤의 산에 있는 것은 밤중에도 빨리 대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노무자들은 1시간 이상 방공호에 갇혀 있다가 나왔다.

"이거 왜 재수 없이 비행기가 뜨고 이래."

"미국 코쟁이덜 땀세 집에 가는 것 늦어지겄는디."

"누가 아니라. 짜석덜이 누구 화 질르나."

노무자들은 투덜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에는 그 어디에도 비행기가 지나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때는 비 29가 남기고 간 하얀 비행운이 하늘 높이 떠 있기도 했던 것이다. 이틀이 지나고 격납고의 길들 콘크리트 공사가 다 끝나고 있었다.

땡땡땡, 땡땡땡, 땡땡땡....

"이런 니미럴"

"좆겉은 놈덜"

"와 이라노"

노무자들은 욕질을 해대며 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에 갈 날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는 만큼 대피하는 것도 기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코쟁이들 비행기가 이리 자주 뜨면 배가 못 떠나는 것 아닌가?"

"그기 그리 되나?"

"두말허먼 잔소리 아니여?"

"잘난 척들 하지 말어. 비행기 폭격 피해 배가 밤에만 불 다 끄고 다닌다는 말 듣지도 못했어?"

"맞다, 거 누고? 과거급제허게 똑똑타."

"근디 말이여, 그런다 치드라도 그리 되먼 닷새 걸릴 것 열흘 걸리는 것 아니겄어?"

"그야 당연하지."

"그렁게 코쟁이덜 땀세 우리가 좆빠지게 벌어논 날덜얼 배 타고 앉어 다 까묵는 것 아니고 머시여"

"맞다, 코쟁이 그놈마덜 그거 와 우리 일 망칠라꼬 드노."

"여러 말 말어. 어쨌거나 우리는 이제 집에 가는 거야"

"하모, 가는 기제. 마누래 궁뎅이가 눈앞에 선하구마."

노무자들은 어두운 방공호 안에서 규칙위반을 해가며 여기저기서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방공호 밖에는 군인들 열댓 명씩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었다.

"준비이, 투척"

장교의 명령이 떨어지자 방공호 입구를 막고 있던 위장문이 치워지며 군인들이 일제히 방공호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기관총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 ! !

방공호 속에서 수류탄이 연속으로 터지고, 기관총탄은 쉴 새 없이 방공호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수류탄들의 폭음에 묻혀버린 것인지 어쩐지 방공호 속에서는 별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관총은 계속 발사되고, 수류탄을 던졌던 군인들은 돌덩이를 부지런히 옮겨오고 있었다. 방공호 입구에서 무엇인가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시뻘건 피였다. 기관총은 30분 이상 난사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피는 도랑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관총 난사가 끝나자 군인들은 신속하게 돌덩이들을 방공호 입구에다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다른 군인들 한패가 돌이 한 겹씩 쌓일 때마다 반죽된 시멘트를 퍼다 부었다. 그곳에 징용으로 끌려온 1천여 명은 결국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 것이었다. 지시마 열도 여러 섬에서는 그런 식으로 이미 4천여 명이 죽어갔던 것이다.

 

 

46. 하늘이여 하늘이여

탄광촌에서는 바다가 바로 바라보였다. 온통 석탄 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는 탄광촌과 맑고 푸른 바다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수평선 드넓게 펼쳐진 해맑은 바다 때문에 탄광촌은 더욱 칙칙하고 지저분해 보였고, 건물이며 간판들이 거무칙칙하다 못해 사람들까지 석탄 때에 절어 있는 탄광촌 때문에 바다는 한층 더 맑고 푸르르게 빛나 보였다. 그런데 탄광촌이 산속에 있지 않고 바다와 인접해 있는 것부터가 희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산맥이 해안선을 따라 뻗어 있는 탓이었다. 급경사의 긴 산줄기가 드리우고 있는 산자락은 해안에서 미처 1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사할린에는 두 개의 산맥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리고 있었다. 서쪽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산줄기가 서사할린산맥이었고, 동쪽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산줄기가 동사할린산맥이었다. 드넓은 평야 지대는 그 두 산맥 사이에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서사할린산맥에서는 특히 석탄이 많이 생산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광산이 이곳 삭조르였다. 삭조르스크의 삭조르라는 러시아말은 광부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삭조르스크는 광부도시가 되는 것이었다.

서사할린산맥을 따라 해안에 형성된 도시인 우글레고르스크. 일린스크 홀름스크 네벨스크 등은 모두가 탄광 도시들이었다. 그런데 그 도시들은 바로 해안에 있는 까닭에 항구 도시이기도 했다. 삭조르스크를 위시해 그 도시의 탄광들은 모두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대기업인 미쓰비시나 미쓰이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탄광에서 캐낸 무진장한 석탄은 가까운 항구에다 배를 대고 아주 손쉽고 편리하게 실어갔다. 일본사람들은 사할린을 가라후토라고 불렀다.

"이거 봐 김씨,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어? 이러지 말고 말 들어."

십장 주가는 김장섭을 달래듯이 말했다. 주가는 김장섭 일행을 조선에서부터 사할린까지 인솔해 와 그대로 십장 노릇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 방법은 징용자들을 20명 단위로 쉽게 다루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었다.

"아니, 골백 분 말혀도 소양 없소. 나야 딴말에젖 딱 귀먹쟁이 되야부렀응게 인자 집이 보내더라 그것이요. 2년 계약 기간 지낸 지가 발써 보름이오, 보름."

김장섭은 팔짱을 끼고 빳빳하게 버티고 앉은 채 정정하게 외쳤다.

"글세, 누가 안 보내줄라는 거야? 전쟁이 심해져 데려다줄 배가 없다니까."

주가가 눈꼬리를 세우며 짜증을 부렸다.

"! 누구럴 빙신 팔푼이로 아시오? 재 자람덜 실어올 배는 있고 기한 찬 사람덜 실어갈 배는 없다? 고것얼 말이라고 러고 앉었소,시방?"

김장섭이 코방귀를 날렸다.

"어허, 그 배들이 조선으로 안 가고 군수물자 싣고 딴 데로 간다니까 그래."

"그렁게 누가 조선 땅 우리 집 앞에다 디려다돌라고 그러요. 일본 암디나 내래주먼 그담보톰이야 나가 알아소 찾어가겄다 그 말이랑게라."

김장섭은 털끝만큼도 기죽지 않고 십장한테 맞대거리하고 있었다.

", 정말 말 안 들을 거야! 경비대에 끌려가서 한번 쓴맛을 봐야 알겠어."

마침내 주가가 책상을 내려치며 소리 질렀다. 그는 곧 김장섭을 후려칠 기세였다.

"맘대로 헛씨요.내가 주었으먼 주었제. 저는 탄광에 안 들어갈랑게."

김장섭은 목을 더 꼿꼿이 세웠다. 그러나 가슴에서는 찬바람이 섬뜩하게 일었다. 경비대에 끌려가서 병신 안된 사람이 드물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들로 짜인 경비대에 끌려가 매타작을 당하고 나와 시름시름 죽거나,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알았어. 너 같은 놈은 더 이상 좋은 말로 할 필요가 없어. 잘됐어, 시범쪼로 쓴맛을 보여줘야 딴 놈들도 꼼짝을 못 할 테니까. 이 새끼, 썩 나가!"

주가는 벌떡 일어서며 김장섭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이고메, 사람 잡네. 찰떡 묵디끼 약조럴 혔으먼 약조럴 지키란 것이제 나가 어디 못헐 말 큭소? 잘못헌 것이 없는 사람얼 으째서 패요,패기럴, 끝꺼정 존 말로 히도 션찮을 것인디."

김장섭은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듯 하며 정강이를 거머잡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는 한풀 기가 꺾여 있었다.

"이 새끼야, 그만큼 좋은 말로 했으면 됐지 얼마나 더 해. , 잘못한 것이 없어? 넌 이 새끼야, 선동죄야, 선동죄! 딴 놈들까지 마음 들뜨게 만든 선동죄. 선동죄로 경비대에 끌려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저 바다에 처넣어 고기밥 만드는 거야. 이 새끼, 같은 조선사람이라 인정상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겠다. 어떡할 거야? 조용히 일할 거야, 또 까불 거야?"

김장섭이가 기가 꺾인 것을 알고 주가는 잔인하게 벼랑으로 몰아대고 있었다. 김장섭은 이를 앙다물었다. 아내와 자식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너무 보고 싶은 얼굴들이었지만 참아야 하고..., 그리고 살아서..., 늦더라도 꼭 살아서 돌아가야 했다.

"...처자석덜 땀세 벨수 없제라."

김장섭은 한숨과 함께 이말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

주가는 문을 밀고 나가는 김장섭의 빳빳한 뒷덜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상대방을 굴복시켰다는 쾌감보다는 묘하게 마음이 켕기는 기분을 떼치지 못하고 있었다. 처자식들 때문에 참는 것이라는 김장섭의 말이 가슴을 찌르기도 했고, 완전히 꺾인 것이 아닌 그 태도가 신경에 거슬리기도 했다.

"저놈이 나이도 들고, 대가 세기는 센 놈인데... 그저 말썽없이 돈벌이를 하는 게 상책인데 저걸 어찌해야 하나..."

주가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김샌, 어찌 되았소?"

"말이 믹히등게라?"

옷을 빨아 절고 있던 열댓 명의 사람들이 김장섭을 맞으며 물었다.

"고런 지에미 붙어묵다가 좆대감지 뿐질러져 뒤질 좀이 나럴 선동죄로 경비대에 네미겄다는 것이네. 다 좆 털어분 것이제."

김장섭이 가래침을 내뱉으며 담배꽁초를 입에 물었다.

"그럴지 알었소."

"참 그좀 개좆겉은 놈이시."

", 뼈따구가 든 개좆언 양기에나 좋제. 왜놈덜 등에 업고 우리 피뽀는 것도 모지래서 경비대에 넘게? 고런 놈언 똥통에 구데기만도 못헌 놈이여."

"참말로, 못된 조선 놈덜 놀 하는 꼬라지 허고. 진작에 다 오살육시럴 혔어야 어는디."

그들은 하나같이 풀이 죽으며 한숨들을 토해냈다.

"그나저나, 글먼 또 은제꺼정 이놈으 탄가리 마심서 죽사리쳐야 된단게라?"

"아이고,나도 몰르겄네. 이놈으 전쟁이 은제 끝날란지."

김장섭이 한숨을 쉬며 돌 위에 주저앉았다. 다른 사람들도 심란스런 얼굴로 쪼그리고 앉았다. 그들의 얼굴은 잘 먹지 못하면서 중노동에 시달려 메마르고 찌들린 데다가 석탄 때까지 절어 있어서 너무 궁상스럽고 지저분해 보였다.

", 미치고 폴딱폴딱 뛰다가 양잿물 묵고 꼬드라질 일이시. 전쟁이 안 끝나먼 5년이고 10년이고 이염병 지랄얼 히야 된다 그말 아니여?"

"그렁게 말이여. 인자 다 망쪼든 신세로구만."

"요런 가쟁이럴 열두 발로 찢을 놈덜이 으째서 2년 약조럴 안 지키고 이리 사람얼 속이고 개지랄이여."

"아이고 이 사람아, 인자 속이는 것이 아니시. 애시당초 2년이란 것보톰 거짓말이고 속인 것이시."

"머시여? 참말 그럴랑가?"

"그려, 그럴란지도 몰르는디?"

", 왜놈덜이 거짓말허고 속인 것이 어디 한두 가지여, 시방. 징용 돈벌이가 소작질보담 훨썩 낫다고 허든 말부터가 다 거짓말이고 속임수 아니냔 말이여."

"그려, 개씹구년서 불거진 놈덜.아이고, 그나저나 처자석덜 다 굶어죽겄다."

"그렁게 말이여.고것덜이 얼매나 눈이 빠지게 기둘리겄어."

"아이고, 하매 다 굶어죽었을란지도 몰르겄다."

"워메, 가심 터져 죽겄네."

더 초췌해진 그들의 얼굴에는 슬픔과 울음이 번지고 있었다.

"다덜 기운 채리고 맘덜 강단지게 묵드라고. 전쟁이야 누가 이기든 지든 끝장날 날이 있을 것이고, 우리넌 기연시 살아서 처자석헌트로 가야헝게."

김장섭이 손끝이 차들도록 빨아당긴 담재꽁초를 내던지며 불끈 일어섰다.

"빌어묵을, 요런 때 술이나 한 잔 묵어야 허는디."

그들도 따라 일어서는데 누군가가 시름겹게 말했다.

"글씨 말이여. 술집이니 오리아니 있어도 십장이나 구미좀덜 독차지제 우리헌티야 그림에 떡이니..."

"참말로 뼛골 녹아내리게 공일날도 없이 일허고도 술 한 잔도 못 묵는 요런 신세가 시상에 어디 또 있겄어."

"다 쪼그라진 신세 차령허먼 머허겄어. 가서 밥 때꺼정 마룻장 신세나 지드라고."

"그려, 그래도 그것이 질로 실속있는 일이시."

그들은 다 맥 풀린 걸음으로 터덕터덕 걸어 바로 뒤에 있는 막사로 들어갔다.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그러나 노무자들은 일요일에도 2교대로 일을 해야 했다. 그들은 6시간의 오전 채탄을 하고 나와 옷을 빨았고, 그동안에 김장섭은 또 십장을 만나러 갔던 것이다. 그들이 말한 오리아는 사창가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고, 청로라고도 했다. 사창가는 흔히 술집을 끼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일본 퇴기들에다가 조선 여자들도 섞여 있었고, 더러 중국 여자들도 있었다. 노무자들은 술집도 그렇지만 여자들은 더욱 넘볼 수가 없었다. 한번 상대하는 데 2, 3원씩이니 그들에게는 어마어마한 거금이었던 것이다. 술집이나 사창가는 탄광을 경영하는 미쓰비시나 미쓰이 직원들을 최고 고객으로 삼고 있었고, 그다음이 경찰이나 다른 장사꾼들, 그리고 세 번째가 십장이나 구미들이었다. 구미란 조선사람들로 채탄 도급을 맡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십장도 그렇지만 구미들도 노무자들 사이에서 악질로 소문나 있었다. 그들은 일본 회사들로부터 채탄 도급을 맡아 돈벌이를 했는데, 그 수법이 그야말로 악질적이었다. 그들은 노무자들을 폭력으로 위협해 단 한 푼의 돈도 주지 않고 일을 시켜 먹었다. 그들은 유곽에서 여자를 사들이듯 낭인조직을 통해서 노무자들을 사들이기도 했지만, 더 많이는 십장들에게 공급받고 있었다. 일반 노무자들이 큰 사고를 내게 되면 그 처벌로 그들에게 넘겨졌던 것이다. 노무자들이 저지르는 제일 큰 사고가 도망가는 것이었다. 두 번 도망가다 잡히는 사람은 더 말할 것 없이 구미들에게 넘겨졌다. 그들의 조직을 다꼬베아라고 했고.다꼬베아(문어방)행이라고 하면 노무자들 사이에서는 죽는 길로 알려져 있었다. 왜냐하면 다꼬베아에서는 먼저 식사량이 형편없이 줄어들었고, 그다음에는 작업량이 불었고, 그리고 폭행이 극심했던 것이다. 그을은 한마디로 일본의 보호를 받고 있는 조선폭력단들이었다. 탄광회사들은 정부에 요청해서 징용제에 따라 노무자들을 확보했다. 그리고 조선인 십장들을 고용해 노무자들을 다스리게 했다. 또한 한쪽으로는 구미들과 선을 대고 말썽을 일으키거나 저항적인 노무자들을 골라내 부리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돈을 미끼로 하급관리자들을 보두 조선 사람들로 배치하고는 자기들은 뒤에서 편하게 조정만 하는 것이었다.

큰 회사들이 전시호황을 주리고 있는 탄광촌의 유흥가는 꽤나 흥청거렸다. 그러나 노무자들은 그것 때문에 더 생활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싶고 여자를 사고 싶은 욕구를 꾹꾹 참고 이겨야 했던 것이다. 젊은 남자들로서는 특히 여자에 대한 욕구를 참아내야 하는 것이 큰 고역이고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한 달 임금은 18원이었다. 거기서 밥값을 제하고 받는 것이 평균 6원이었다. 거기서 절반인 3원은 무조건 저금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 찾을 수 있다는 그 저금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만약 거부하게 되면 충성심 없는 불령선인으로 몰려 경비대를 거쳐 다꼬메아행을 피할 수가 없었다. 나머지 3원을 집에 송금하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송금할 수가 없었다. 배급 나오는 담뱃값 술값, 그리고 낡아빠진 옷을 꿰매 입다 못해 한 벌이라도 사게 되면 3원은 모자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회사측에서 송금에 대해서는 노무자들의 자유에 맡겼다. 그건 관대해서가 아니라 잇속 때문이었다. 노무자들은 집에 한 푼도 보내지 못하는 것을 몹시도 가슴 아파 하고 안타까워했다.

"바다가 저리 시퍼런히 존디 빠져 죽지도 못허고..."

한 사람이 침상에 벌렁 드러누우며 맥빠진 푸념을 했다.

"죽을 수 있는 팔자전 아무나 타고나간디."

다른 사람도 드러누우며 한숨을 쉬었다. 침상 여기저기에는 사람들이 웅크리고 누워 잠이 들어 있기도 했다. 막사 안은 가운데가 통로였고. 양쪽이 무릎 높이의 침상이었다. 막사마다 100명씩 수용되어있었다. 그러다가 사고로 죽거나 다꼬베아행이 생기게 되면 인원이 줄어들었다. 그 자리를 새로 오는 노무자들이 채웠다.

"어이, 다덜 들어보소. 쩔뚝발이 박씨가 죽었다능마."

한 사람이 뛰어들며 외쳤다.

"머시여?"

"으찌서?"

"언제 말이고?"

놀란 사람들의 물음이 한꺼번에 터졌다.

", 사나흘 됐다는디,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여."

"누가 죽인 거 아이가?"

"아니여, 살기가 에로와 죽었다는 것이여. 주머니서 유서가 나왔당게..."

"장례넌 어찌 되고?"

"그날로 내다 묻었당마."

"참말로 절통헐 일이시. 타국땅서 죽었시니."

"그 사람, 살기가 에로와서 죽은 것만은 아닐 기여. 고향에 못 가서 상심히서 죽은 것일 기여."

"그려, 다리 빙신언 되았제, 배는 곯제, 집이넌 갈 질이 막막허제, 그리저리 히서 죽은 것이로구만."

", 또 한 사람 불쌍허니 죽었네."

" 장례나 우리가 치러줘야 혔을 것인디."

그들은 침통하고 시무룩해졌다.

박씨는 1년 전에 밀차에 다리를 치여 한쪽 무릎 아래를 잘라내야 했다.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은 박씨는 그나마 탄광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것이었다. 박씨는 집으로 보내 달라고 여기저기 애걸하고 다녔지만 아무 데서도 들은 척을 하지 않았다. 그는 구걸도 하고 해변에 나가 고깃배 일도 거들고 하며 연명하다가 끝내 더는 견디지 못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물거품처럼 사라져 간 것이었다.

"얼마나 고적허고 작망했으면 그리 죽었을꼬. 혹시 무신 중병이 들었든 것인가? 어쨌그나 살았어야 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갔어야제. 기둘리는 처자석덜언 어찌허라고..."

김장섭은 그동안 박씨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땡땡땡땡...

레일 토막 두들기는 소리가 방정맞게 울려대고 있었다. 아침 6, 기상을 알리는 종소리인 셈이었다. 김장섭은 더디게 눈을 떴다. 어제하고는 다르게 몸이 묵지그리하고 찌뿌드드했다. 그건 몸이 그러는 게 아니라 마음이 그러니 몸까지 그렇게 느껴졌다. 마음에는 구름이 가득 끼고 기분은 암담하기만 했다. 2년 전 갱내로 들어갈 때의 기부보다 한층 더 막막하고 기가 막혔다. 그래도 그때는 2년만 채우면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날마다 하루씩을 지워가는 재미로 석탄을 캐내는 고달픔을 잊고자 했다. 참 그것은 노무자들 전부가 갖는 유일한 재미였다. 반년을 남겨두고부터는 모여앉으면 그저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마음들이 들떴다. 그런데 그 길이 아무 예정도 없이 막히고 말았으니 마음은 캄캄하기만 했다. 도무지 그좀의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대충 세수를 하고 식당으로 몰려갔다. 그들의 손에는 밥그릇 국그릇 외에 또 하나의 그릇이 들려 있었다. 그건 도시락이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조선 여자들이었다. 어디서나 궂은일은 다 조선사람들 차지였다.

"밥 좀 많이씩 퍼요!"

", 밥에 바람 넣지 말어!"

끼니때마다 터져 나오는 외침이 또 어김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를 외쳐대는 사람들은 대개 새로 와서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1년이 넘은 사람들은 이제 지쳐서 입을 열지 않았다. 새로 온 사람들도 그런 외침이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 외침들은 배고파서 못 살겠다는 불만과 항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탄광의 밥도 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잡곡이거나 콩밥이었다. 그리고 국은 된장을 묽게 푼 다시마 국이었고, 단무지 한 쪽은 나오다 말다 제멋대로였다. 사할린 근해에서는 여러 가지 생선들이 아주 많이 잡혔다. 그런데도 단 한 번도 생선 맛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해변에 지천으로 밀려드는 다시마만 걷어다가 국을 끓여대는 것이었다. 그들은 밥그릇과 도시락에 각각 밥을 받았다. 도시락 구석에는 단무지 한 쪽씩이 놓여졌다. 도시락은 탄광 안으로 가지고 갈 점심이었다. 그런데 도시락에 담긴 밥은 고르게 가득 차지 못하고 사방 구석은 다 비어있었다.

", 아새끼덜도 이리 싸주지넌 안컸다."

"와 아이라. 우리가 걸뱅이도 아니고 거저 얻어묵는 것도 아인데 이기머꼬."

"설다설다 질러 서러운 것이 배곯는 서럼인디, 만리차국 끌려온 것도 서러운디 배꺼정 곯아대니 참말로 기백히고 눈물 나네."

이런 푸념을 늘어놓는 것도 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그들은 식기를 씻어다 놓고 변소를 다녀오고 하면서 채탄작업 준비들을 했다.

땡땡, 땡땡, 땡땡...

730분에 울리는 쇳소리. 그것은 입광 준비를 알리는 것이었다. 노무자들은 조별로 광구 앞에 도열하기 시작했다. 막대기를 든 십장들이 재빠르게 자기 조원들을 조사해 나갔다. 그들은 노무자들의 채탄 연장을 살피는 동시에 노무자들이 옆구리에 차고 있는 도시락들을 막대기로 툭툭 건드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 벤또 끌러!"

어느 십장이 소리쳤다.

", 아니, 밥 들었는데요."

그 노무자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이 새끼야, 끄르라면 빨리 끌러!"

십장이 막대기로 노무자의 어깨를 후려쳤다.

"아이쿠..."

노무자는 어쩔 수 없이 탄가로 묻은 모자기에 싸인 도시락을 풀어냈다.

"벤또 열어!"

"..."

"이 새끼야, 이게 밥이냐!"

노무자가 뚜껑을 연 도시락에는 잘게 부서진 석탄이 들어 있었다. 아침밥이 모자라 어느새 먹어치우고 조사에 들키지 않으려고 석탄을 채운 것이었다.

"이 새끼야, 한꺼번에 먹어치우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못 알아들어!"

십장의 막대기는 사정없이 노무자를 난타해대고 있었다. 그런 광경은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새로 온 사람들이 저지르는 일이었다. 오래된 사람들은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 온 사람들의 그런 행위를 어리석다거나 미련하다고 흉보지 않았다. 그들 중에도 지난날 똑같은 행위를 하다가 들켜 매타작을 당한 일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들과 똑같이 도시락을 먹어치우고 싶은 배고픔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12시간씩 석탄을 캐내고 있는 그들이 첫손가락에 꼽는 고총은 탄가루를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배고픔이었다.

십장들의 검사가 끝나는 대로 노무자들은 광구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채탄작업은 정각 8시부터라서 미리 들어가 준비를 해야 했다. 오후 8시까지 12시간의 노동을 해서 개인당 책임져야 하는 양은 밀차 7대분이었다. 그러나 12시간의 노동은 1시간 정도 초과되는 것이 예사였다. 왜냐하면 조원 전체의 책임량이 채워질 때까지 작업을 계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조원들은 회선을 다해 협동하고 일을 효율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인당 밀차 7대분이란 그야말로 오줌 줄 시간도 아껴가며 일하지 않으면 채울 수 없는 양이었다. 십장들은 광구 밖에서 밀차가 나올 때마다 전표에다가 다섯 오자를 그려나갔다. 그런데 그 책임량이 너무 과중하다고 항의하거나 양을 다 채우지 않고 저항하는 것 같은 것을 노무자들은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십장들의 폭력과 경비대에 끌려가 반죽음이 된다는 석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이 지나 김장섭네 막사 사람들이 일을 마치고 나오니 새 노무자들 14명이 와 있었다. 그들은 이미 5명의 십장들에 의해서 조가 분류되어있었다. 김장섭네 조에는 2명이 보충되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신참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일이 서툴면서 책임량만 불어나기 때문이었다. 막사에서 결원이 생기는 것은 두 가지 이유였다. 첫째가 쿤 사고를 저질러 다꼬베아로 넘겨진 경우였다. 두 번째가 배로 석탄을 운반하는 것 같은 좀 편한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그건 십장들과 친해야만 되는 것인데, 그런 자들은 거의 십장들의 끄나풀 노릇을 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가끔 죽은 박씨처럼 사고로 불구가 되어 폐품 처리되는 경우였다. 새로 온 사람들은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반반씩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거의 그렇듯 김장섭도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집에 돌아가는 것이 좌절되면서 그는 살맛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밤마다 아내와 자식들의 꿈을 꾸었고, 그러다 보면 잠을 설치게 되었다. 그것들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굶어 죽지나 않았는지..., 근심과 걱정이 깊어지기만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몸도 마음도 무겁고 찌뿌드드하기만 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보통 키에 마른 편인 그 사람은 생김도 평범해서 얼핏 보면 눈에 띌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을 끈 것은 그의 얼굴이 너무 하얀 데다 손 또한 너무 고왔던 것이다. 그리고 휜 얼굴은 더없이 선해 보였다. 그는 한 서른쯤 되어 보였다. 사람들은 그 남자가 농사일이나 노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그리고 탄광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어떻게 여기까지 끌려왔는지, 그가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보시오, 댁은 우리하고는 많이 다른데 무슨 일을 하다가 이리 끌려오셨소?"

어떤 비위 좋은 사람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이렇게 물었다.

"아 예..., 저는 심기헌이라고, 천주교 대전성당의 신부였습니다. 그런데 이변 8월에 들어 총독부에서 대전 평양 등 각지의 성당을 군대용으로 강압 접수하고 신부와 신학생들을 노무자나 군인으로 끌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여러분들의 곁에 오게 괴었습니다. 여러분들과 고락을 함께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주님의 은총이 항상 여러분들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그 사람은 담담하게 말하며 성호를 그었다. 막사 안의 사람들은 모두 너무 놀랐다. 신부까지 징용으로 끌어오다니..., 그건 지금 눈앞에 똑똑히 보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아니 저어..., , 신부님, 어째서 총독부에서 그런 짓을 합니까?"

어떤 사람이 호칭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 더러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우리 천주교에서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성당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또 창씨개명도 하지 않은 산부와 신학생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총독부에서 좋아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심기헌 신부는 잔잔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법복을 입지 않았으면서도 신부로서의 품위와 의연함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이고, 그나저나 참 큰일이구만요. 지독시리 배고프고 일도 징허게 심드는디요."

누군가가 끌끌끌 혀를 찼다.

", 고맙습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고통에 비하면 이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형제 여러분들과 함께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짐이 안 되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심기헌은 여전히 웃음 감도는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성직자다운 여유와 겸손으로 말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신기하고도 선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김장섭은 가왕이면 저 신부짐이 우리 조가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비해 침착하고 여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심기헌 신부는 사람들의 관심 속에 일을 열심히 해나갔다. 그의 하얀 얼굴에도 석탄 가루가 범벅이 되었고, 씻어도 다 빠지지 않는 미세한 가루는 날이 갈수록 석탄 때로 절어 그의 얼굴도 거무튀튀히게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고 사람들을 대했고, 배가 고프다는 말은 물론이고 일이 힘들다는 말도 단 한 번 입에 올리지 않았다.

"신부님이 다르기는 다르구만."

"그러기 말다. 무신 신통력이 있능강?"

"다 수양으로 참고 이기는 것이제. 우리도 다 보배와야 혀."

"맞다, 사람이라꼬 다 똑겉은 사람이 아닌 기라."

"그래. 우리도 하나님 믿으면 그리 될까?"

사람들은 이렇듯 존경의 뜻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심기헌 신부는 스스로도 기도 같은 것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체 종교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을 떠나오기 전에도 종교 행위 금지를 경고받았지만 배에서 내리자마자 경비대로 끌려가 또 똑같은 내용의 협박을 당했던 것이다. 한 달쯤 지나자 심기헌 신부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이 안 되도록 변했다. 얼굴은 바짝 말라비틀어졌고 그 색깔도 거무누르스름하고 칙칙했으며, 석탄 때가 절로 절어 거칠어졌고, 손톱 밑마다 석탄 가루가 새까맣게 끼어 있었다. 그러나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 볼품없이 초췌해진 얼굴은 여전히 온화하고 잔잔하게 웃고 있었고, 누구든 이윽히 바라보는 맑고 깊은 눈은 사람들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래저래 놀라고 있었다. 심기헌 신부가 끄떡없이 일을 이기고 있는 것에 놀라고, 그 고생을 하면서도 찡그리는 표정 한 번 짓지 않고 계속 웃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참 얄궂데이, 기운이 없고 죽겄다가도 우예 신부님만 보면 기운이 나노."

"나도 그렇구마, 아칙에 일어나서 신부님허고 눈얼 안 맞치면 하로 일헐 기운이 안 난당게"

사람들은 그때서야 새로 온 두 명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서로서로 멀뚱거리며 쳐다보기만 했다.

"이 새끼들아, 어디 갔는지 빨리 대!"

"이봐, 빨리 경비대에 알려!"

"이 새끼들아, 없어졌으면 뻘리 알려얄 것 아니야!"

십장 다섯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한 막사에서 누가 하나라도 없어지면 나머지 사람들 모두를 공범 취급하고 들었다. 오늘은 한 사람도 아니고 둘이 없어졌으니 그들이 날뛰는 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야 이 새끼들아, 빨리 대!"

"이 새끼들아, 도망가는지 알면서도 눈감았지!"

십장들은 자기 조원들을 막대기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노무자를 20명씩 거느리고 있는 그들 다섯은 막사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나면 또르르 한 덩어리로 뭉쳐졌다. 십장들이 막대기를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는데 막사의 노무자들은 탄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깻죽지를 얻어맞고 정강이를 걷어차인 김장섭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통증을 참아내고 있었다.

"기왕 도망간 것잉게 잽히지나 말그라..."

김장섭은 어금니를 꾹 물었다. 처음 오면 누구나 한 번쯤 도망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것이었다. 대개 한두 달이 고비였다. 자신도 몇 번씩 그 유혹에 빠졌던 것이다. 그러나 도망간 사람들이 잡혀 오고, 그들이 가혹하게 처벌당하는 것을 보면서 그 생각을 단념해 갔다.

미련한 놈은 도망질하고 똑똑한 놈은 두더지질 한다.’

이건 노무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는 말이었다. 그만큼 도망하기란 불가능했다. 우선 경찰들의 경비가 물샐틈이 없었다. 그리고 지리가 어두웠다. 그뿐만 아니라 광부 노릇을 한 외모가 너무 표가 났던 것이다.

"경비대에 알렸어."

"됐어, 이 새끼들 돌려보내."

"이 새끼들아, 아따가 저녁에 보자. 1조부터 출발!"

마지막 남아 있던 김장섭네 막사 노무자들 100, 아니 98명은 무거운 걸음으로 탄광의 검은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네덜도 딴맘 묵들 말어.여그서 도망나가 무사헌 사람이 하나또 없응게. 우리가 못나서 이러고 사는 것이 아니여, 여그가 섬만 아니었어도 발써 멧분이고 도망질혔겄제. 개자석덜헌티 개죽음 허`는 것보담이야 살어서 처자식덜헌트로 가야 헝게 참는 것이여.명심들 허드라고."

김장섭은 막장에 이르러 새로 온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들은 하루종일 기분이 우울한 채 일을 했다. 다른 날보다도 일이 몇 곱 더 힘이 들었다. 그들은 저녁을 먹고 나자마자 침상에 도열해 매타작을 당하기 시작했다. 십장 다섯은 막대기가 아닌 참나무 목도들을 들고 맘껏 서리치고 욕해대며 노무자들을 치고 찌르고, 주먹질하고 발길질해대며 날뛰었다. 그들 98명은 꼼짝을 못 한 채 당하기만 했다. 김장섭은 힐끔힐끔 심기헌 신부를 쳐다보고는 했다. 심기헌 신부는 묵묵히 매타작을 참아내고 있었다. 그들은 취침시간까지 꼬박 2시간을 시달렸다. 십장들이 그러는 것은 책임추궁만이 아니었다. 자기들의 화풀이 겸 더는 딴 맘 먹지 못하게 하는 겁주기였다. 도망자가 생길 때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호된 매타작을 당하고는 했다. 그러나 어떤 반항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반항을 했다가는 즉각 경비대로 넘겨졌던 것이다.

"참 더럽다. 저것도 조선 놈들이라고."

"왜놈덜이 저러먼 서럽지나 않제."

"어데 두고 보자. 나라만 되찾았다카믄 내 손으로 저런 놈덜 다섯은 꼭 껍데기럴 빗길 참인 기라."

그들은 잠자리에 들며 푸념하고 이를 갈았다. 도망친 두 명은 결국 이틀 만에 잡혀 왔다. 그들은 막사 중앙의 양쪽 기둥에 묶여졌다. 십장들의 손에는 몽둥이며 가죽 혁대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노무자들은 침상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이 새끼들아, 여기가 어디라고 도망을 가아!"

십장 하나가 외치며 몽둥이를 날렸다.

"어크!"

노무자 하나가 비명을 토했다.

"이 새끼들, 어디 맛 좀 봐라!"

다시 몽둥이가 날아갔다.

"아악!"

다른 노무자가 비명을 토했다. 다섯 명의 십장들은 줄지어 두 노무자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빙빙 돌 듯이 하며 매질을 해대는 그들의 솜씨는 이골나 있었다. 그들이 네 바퀴를 돌았을 때 두 노무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늘어졌다.

"지금부처 돌림빵이다!"

십장 하나가 소리쳤고, 두 노무자는 기둥에서 풀렸다.

"전원, 일어섯! 침상 일보 앞으로!"

십장의 구령에 따라 노무자들 전부는 일어나 침상 끝에서 5, 60센티의 간격을 두고 옮겨 섰다.

"지금부터 저놈들 때문에 너희들이 기합받은 것을 갚아줘라. 사정 보지 말고 힘껏 갈겨라. 사정 보아주는 놈들은 시범을 보여줄 테니 그리 알아라. 양쪽 동시에 실시한다. 실시!"

십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양쪽 침상에 선 첫 번째 노무자 둘이 자기네 앞에 서 있는 통로의 노무자 뺨을 때렸다. 그런데 그 소리는 찰싹, 찰싹일 뿐이었다.

"정지! 정지! 이 새끼들, 그렇게밖에 못하겠나. 시범을 보여주겠다. 모두, 침상 끝으로!"

십장이 소리치며 달려갔다. 그리고 침상 끝으로 나서는 첫번째 노무자의 따귀를 후려쳤다. 그 소리가 철퍽 했다.

"이렇게 해!"

십장이 소리치며 반대쪽으로 돌아섰다. 또 철퍽 소리가 났다.

"이렇게 하란 말야! 다시 실시!"

십장이 몽둥이로 통로의 바닥을 치며 명령했다. 첫 번째 노무자 둘이 다시 따귀를 갈겼다. 정말 이번에 나는 소리는 철퍽 철퍽에 가까웠다.

"좋아, 다음!"

통로에 선 두 노무자는 옆에선 십장들의 몽둥이 끝에 밀려 옆으로 한 발짝 옮겼다. 두 번째 노무자가 양쪽 침상에서 따귀를 때리는 소리도 철퍽, 철퍽에 가까웠다. 그 소리에는 시범적으로 맞고 싶지 않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도망쳤던 두 노무자는 그런 식으로 50번에 가까운 따귀를 맞아야 하는 것이었다.

"좋아, 다음!"

"멈추시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오!"

그때 이렇게 부르짖으며 어떤 노무자가 통로로 뛰어내렸다.

"저 새낀 뭐야!"

"아니, 저건 신부라는 것 아냐."

십장들이 그 노무자를 노려보았고

"저 두 사람은 당신네들한테 맞은 것으로 충분하오. 왜 우리한테까지 구타를 강요하는 거요. 당장 중지하시오."

심기헌 신부는 십장들 앞으로 거침없이 다가들며 외치고 있었다.

"이 새끼, 건방지게!"

십장 하나가 몽둥이로 심기헌 신부의 어깨를 내리쳤다.

"아이고 신부님!"

김장섭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 새끼 이거 재미있는 놈이네. 중지 안 하면 네놈이 어쩔 테냐?"

다른 십장이 삿대질을 하며 심기헌 신부 앞으로 다가들었다.

"차라리 내가 대신 맞겠소."

심기헌 신부가 터뜨린 말이었다.

"! 신부님이라 과연 다르시군. 아주 재미있게 잘됐어. 그래, 네좀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십장이 심기헌 신부의 멱살을 잡아끌었다.

"이거 아주 좋은 구경거리군. 하하하..."

"좋아,좋아, 두 놈 것 합하면 양쪽 볼에 백 재야, 백 대! 어디 꼴 좀보자. 하하하..."

다른 십장들이 웃어댔다.

"다들 똑똑히 들어라. 너희들이 다 들은 대로 이놈이 대신 맞겠다고 자청하고 나섰으니 너희들은 시범에 걸리지 않게 힘껏 쳐야 한다. 모두 알겠나? 실시!"

십장이 전보다 훨씬 크게 소리치며 몽둥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철퍽

"좋아, 다음."

철퍽

"됐어, 다음."

찰싹

"이 새끼, 이리 와!"

철퍽

"다시 실시!"

철퍽

"바로 그거야. 다음!"

철퍽

"아이고메 신부님, 산부님, 어찌 사서 그 꼴얼 당허시는 게라."

김장섭은 안타깝게 주먹을 말아쥐고 또 말아쥐었다. 뛰쳐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느끼며.

심기헌 신부는 오른쪽 볼을 50번 맞았다. 그의 볼은 검붉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이제 왼쪽 볼에 맞아야 할 것은 도망자 둘을 빼면 48번이었다.

"이제부터 반대쪽이다. 실시!"

철퍽

"좋아, 다음!"

철퍽

9명을 남겨놓고 심기헌 신부의 포에서는 피가 터져 나왔다. 자기 차례가 된 노무자가 머뭇거렸다.

"꾸물거려. 빨리 쳐! 잘난 놈에 새끼니까 코피쯤 무서워하지 않는다."

십장이 소리쳤다.

철퍽

"좋아, 다음!"

철퍽

"좋아, 다음!"

철퍽

"더 세게 쳐라. 다음!"

철퍽

심기헌 신부는 나머지를 다 맞고서야 허리에서 수건을 빼내 코를 막았다. 그의 양쪽 볼은 짝짝이 되어 부어오르고 있었다.

"이놈들 셋은 규칙대로 독감방에 감금한다. 이놈은 우리 규칙을 방해 한 죄다."

십장이 심기헌 신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도망을 하다가 잡히게 되면 그런 식으로 구타를 당한 다음 <독감방>에 갇히게 되었다. 독감방이란 1인용 감방이었다.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가 앉을 만큼의 크기인 그 감방은 바닥은 바로 땅이었고, 사방 벽과 천장은 양철로 되어 있었다. 어쩌다가 바닥에 판자 쪽이 깔려있는 것도 있었다. 일단 그 감방에 갇히면 밥은 고사하고 물 한 방울 주지 않았다. 그리고 풀려날 때까지 이틀이고 사흘이고 물 한 방울 주지 않았다. 그리고 풀려날 때까지 이틀이고 사흘이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풀려날 때까지 이틀이고 사흘이고 문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에 일어설 수 없도록 천장이 낮은 그 속에 앉아 대소변을 처리해야 했다. 여름이면 양철이 햇볕에 달구어져 그 속은 완전히 불화로가 되었고,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겨울이면 그 속은 완전히 얼음덩이가 되어버렸다. 그 독감방은 감방이 아니라 하나의 고문 틀이었다. 그렇게 매타작을 당하고 그 속에 갇혀 여름에는 더위에 질식해 죽고, 겨울에는 추위에 얼어 죽는 사람이 흔했다. 노무자들은 독감방에 갇힌 지 꼬박 하루 만에 풀려났다. 그들은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 있었다. 날씨가 더워 몸이 더 상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물을 먹이고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내고 주무르고 했다. 그런데 심기헌 신부는 풀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애만 태웠다. 심기헌 신부는 다음 날도 풀려나지 못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계속 치료하며 더욱 애가 탔다. 날씨가 더워 땀을 많이 흘리면서 물을 한 방울도 못 마시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요놈덜이 어쩔라고 이렁고?"

"이기 예삿일이 아닌 기라."

사람들은 불길한 생각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의 마음에서는 신부님을 때린 죄의식이 자꾸만 커져 가고 있었다. 심기헌 신부는 만 사흘이 되어 풀려났다. 그는 휘청거리고 비틀거리며 몇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러더니 얼굴을 땅에 박으며 곤두박여 버렸다.

"이 새끼 일어나!"

십장 한나가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거 좀 이상하잖아?"

다른 십장이 쪼그리고 앉으며 심기헌 신부를 들여다보았다.

"이거 간 보양인데?"

"? 아니, 차라리 잘됐어. 그런 골치 아픈 새낀 차라리 없는 게 나아."

"그럴까? 그럼 어쩌지?"

"어쩌긴. 소모 처리하면 그만이지. 사람이야 얼마든지 보충되어 오니까."

<소모>란 죽은 사람을 통칭하는 그들의 용어였다.

"그렇지. 제 놈이 잘난 척해 봐야 별수 있나."

"몇 놈 불러서 시체 치우게 해."

"알았어."

 

 

47. 거짓말의 현장

"바쿠온!(폭음) 바푸온!(폭음)"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터져 나온 외침이었다.

"빨리 피해라!"

방공호는 왼쪽이다, 왼쪽!

"빨리 뛰어, 빨리!"

분대장들의 외침이 뒤엉키면서 규모 큰 집안은 금방 수라장이 되었다. 무더위 속에서 모기에 뜯기며 잠이 들려고 하던 병사들은 서로 부딪치고 소리치고 앞을 다투며 2층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야단법석이었다.

"빌어먹을, 폭탄이나 팍 떨어져 버려라!"

박용화는 오기를 부리며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건 오기만이 아니었다. 정말 폭탄이 떨어져 이대로 세상이 끝장나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다.

"다께다, 이 새끼 죽고 싶어!"

분대장이 소리치며 박용화를 걷어찼다.

그래, 죽고 싶다. 팍 죽고 싶어.’

박용화는 분대장에게 쫓겨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속으로 되치고 있었다. 미얀마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런 생각은 부쩍 심해지고 있었다. 하늘이 깨지고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폭음은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어둠 저편에서 붉고 푸른 불꽃들이 여기저기서 부챗살 모양으로 뻗쳐오르고 있었다. 방공호에는 군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조금 전의 소란은 간 곳이 없고 방공호 안은 종용하기만 했다. 그건 공포의 침묵이었다. 박용화는 갑자기 안으로 파고들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몸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끔쩍도 하지 않았다.

"이 새끼, 가만있어. 늦게 와서 이제 겁나나."

분대장이 박용화의 목덜미를 쳤다. ! 하는 소리인지 땅! 하는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소리가 공중에서 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방공호 바깥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 밝은 빛은 방공화 안에까지 비쳐들었다.

"아니, 이게 뭐야!"

"왜 이러냐!"

방공호 입구 가까이에 있는 병사들의 겁 질린 소리였다.

"입 닥쳐! 조명탄이다."

분대장이 내쏘았다. 그 짙은 어둠은 다 어디로 가고 바깥은 눈부시게 환한 빛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저 위 공중에서는 푸른 서린 백광을 내쏘며 조명탄이 둥둥 떠서 느릿느릿 내려오고 있었다. 그건 낙하산의 느린 낙하와 흡사했다.

"뭐 저런 게 다 있나..."

말로만 들었던 조명탄을 처음 본 박용화는 두려움과 함께 신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마치 백 촉짜리 전등이 낙하산을 타고 하늘에서 유유하게 내려오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씨에에엥, 쓰에에엥, 씨에에엥...

갑자기 귀청을 찢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들이 싸이렌 울려대듯 했다.

! 콰당! ! !

잇따라 폭음이 울려댔다. 땅이 뒤흔들리고, 방공호가 무너져 내리는 듯 진동하며 흙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아그그..."

"아으으흐..."

짓눌리고 으깨진 소리들이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르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귀청을 찢어대는 칼날 같은 소리와 함께 폭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귀신 울음처럼 기분 나쁜 날카로운 소리는 폭탄이 투하되면서 일으키는 마찰음이라는 것을 박용화는 깨달았다.

꽈당! ! !

으흐흐...

"어으윽..."

폭탄이 터질 때마다 겁에 짓눌린 소리들은 흘러나오고, 모두 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박용화는 손가락으로 두 귀를 꼭 막고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옆구리로 등 뒤로 동료들의 떨림이 느껴져 오고 있었다. 그 떨림에 자신도 떨고 있음을 느꼈다.

"야야, 무적의 황군..., 거짓말이야, 새빨간 거짓말이야. 일본은 형편없이 지고 있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박용화는 배신감과 절망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런 감정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부터 점점 심해져 왔던 것이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다시 어둠이 뒤덮이고 폭음이 사라졌다. 까마득한 시간이 지나간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병사들은 방공호를 벗어나고 있었다.

"미얀마가 지옥은 지옥이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기지개를 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누구도 말을 받지 않고 병사들은 숙소의 계단만 오르고 있었다. 그 침묵은 아직 폭격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도 했고, 그 말에 동의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얀마가 지옥이라는 말은 학도병들이 조선을 떠나기 전에 벌써 그들 사이에서 퍼진 말이었다. 학도병들이 파견되는 곳은 크게 세 방향이었다. 남방, 중국, 일본. 그러나 일본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주로 남방과 중국이었다. 남방은 워낙 전선이 광대해 여러 곳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미얀마 는 가장 나빠 지옥으로 꼽히고 있었다. 또한 그래서 학도병들이 가장 많이 투입된 곳이기도 했다.

"저건 영국군이야 미국군이야?"

"알게 뭐야. 그놈들이 연합을 했으니."

"무시무시한데."

"글세, 생각보다 엄청나."

"우리 쪽은 뭘 하고 있는 거지?"

"글세 말야..."

"계속 이렇게 당해야만 하는가?"

"비행기 없으면 별수 없지."

"왜 비행기가 없어. 우리도 있는데."

"모자라서 여기까지 배치가 안 됐으면 여기야 없는 것 아닌가."

"..."

병사들이 모여앉아 나누는 수군거림이었다. 그들은 미얀마에서 당한 첫 번째 야간폭격으로 완전히 기 질려 있었다. 그들은 부산에서 싱가포르까지 배를 타고 온 한 달여 동안 일본 해군력이 고사 상태에 빠졌음을 너무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말레이시아와 태국을 거치면서 다시 공군력의 부재를 실감하다가 미얀마의 첫 번째 도시 모울메인에 도착한 첫날 밤 이 일을 당한 것이다. 마치 영. 미 공군이 환영식이라도 베푸는 듯이. 미얀마 땅을 향해 기차로 북상하면서 걸핏하면 바쿠온! 마쿠온! 외침이 터졌고, 그때마다 기차에서 뛰어내려 논두렁이고 둔덕이고 가리지 않고 머리를 처박았던 것이 그 얼마인지 몰랐다. 하늘을 완전히 빼앗겨버린 전쟁,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불안과 공포가 커갔던 것이다.

"빨리 취침하라. 내일 출발이다."

분대장들이 이 방, 저 방에서 외쳤다. 병사들은 긴장과 공포로 기진백진한 몸들을 이국의 마룻바닥에 눕혔다. 박용화는 온몸에 땀이 끈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잠이 오지 않았다.

"일본이 이 지경이 되어 있다니..., 참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시끌시끌하도록 대동아회의를 벌인 것이 몇 개월이나 되었다고 이 꼴이 되어 있단 말인가. 아니, 달포 전 부산을 떠날 때만 해도 무적의 황국은 도처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다고 신분들과 방송은 떠들어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배로 동지나해를 지나고 남지나해를 지나면서 차츰차츰 확실하게 드러나기 시작했고, 보르네오해를 통과하면서는 그 누구나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5천여 명을 실은 수송선 우가마루는 폭격기와 잠수함의 공격을 피하느라고 야간에만 항해를 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적의 폭격기나 잠수함의 공격에 정확히 걸렸다 하면 5천여 명은 고스란히 물귀신이 되거나 고기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송선을 호위하는 비행기는 고사하고 호위 선단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군은 제공권과 해상권을 적에게 완전히 빼앗긴 상태였다.

일본은 연전연승이 아니라 이미 전쟁에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깨달음은 너무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그만큼의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또 소학교 선생을 걷어치운 것이 발등을 찍고 싶은 후회로 사무쳤다. 그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급수도 오르고 봉급도 오르고 장가도 들어 편안하게 살고 있을 거였다. 내가 왜 이렇게 큰 실수를 거듭하는가.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깨진 항아리였다. 학도병으로 나가는 것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으니 목숨이 안전한 곳으로 배치받아 보려고 온갖 기회를 다 엿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훈련받는 동안에 남들보다 특출하면 좋은 보직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재력가들과 유지들이 뻔질나게 면회를 왔다. 그들은 장교를 불러내서 최고급 향응을 베풀고 뒷돈을 쓴다는 것이었다. 자식들을 사지로 보내지 않으려는 공작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면회 한번 온 사람이 없이 훈련기간이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배치받은 곳은 남방 중에서도 지독이라는 미얀마였다. 판검사가 되고자 했던 꿈은 늑대 사단 보경 168연대 학도병 이등병으로 낙착된 것이었다. 그런데 바다를 벗어나고 보니 상황은 한층 더 참담했다. 기차로 하루면 갈 거리를 사흘이고 나흘이고 걸리는 것이었다 그건 순전히 적기들의 내습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적군의 공군력에 해상에서나 육지에서나 철저하게 제압당해 기동력을 거의 상실하고 있었다. 기차도 비행기들의 폭격 때문에 낮에는 아예 움직이지를 못했다. 그저 도둑고양이처럼 밤에만 움직였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야간폭격을 당해 발이 묶이게 되면 꼬박 하루 반을 숨어 있어야 하는 한심한 신세가 되는 것이었다. 막강한 공군력을 가진 적을 상대로 육군만으로 싸우고 있다니, 이것이 일본의 실체인가? 이건 호랑이와 토끼의 싸움이고, 고양이와 생쥐의 싸움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쟁은 전혀 승산이 없었다. 이 지옥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날 수 있을까... 박용화는 극성스럽게 달려 붙는 모기를 치며 뒤척거리고 있었다. 아침에 기상을 하자마자 신병들은 병참부로 식사를 타러 갔다.

"이거 생각보다 전황이 훨씬 나쁜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박용화는 걸어가며 원재빈에게 물었다.

"당연한 거 아니오."

얼굴 생김만큼이나 원재빈의 대꾸는 무뚝뚝했다.

"무슨 수리요?"

"목탄차 굴리고, 고찰 놋쇠 그릇 쓸어가다 못해 다리 쇠 난간까지 다 뜯어가는 것 보면서도 이런 꼴일지 몰랐소?"

박용화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자신은 그런 것을 보면서 그저 전시의 물자부족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원재빈은 그런 현상을 통해 이런 패배적 전황을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이런 전황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단 말이오?’

이렇게 확인을 해보고 싶었지만 원재빈의 대꾸가 또 어떻게 나올지 볼라 그만두기로 했다 서양사를 전공했다는 그는 챵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말수가 적은데다 어딘가 거만해 보였다. 충청도가 고향인 그는 사회주의 물도 약간 든 것 같았다.

"고참병들은 어제 벌써 좋은 데 갔다 온 눈치들이던데?"

"그래? 그럼 우리도 오늘은 가야지."

"괜히 군침 흘리지 마. 잘못하다간 재미도 못 보고 엉덩이에 멍만 잡히니까. "

일본인 병사 서넛이 걸어가며 나누는 말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곳이란 위안소일 거라고 박용화는 생각했다. 고참병들은 두셋씩 패를 짜서 어딘가를 다녀오는데 신병들은 고참병들의 총까지 분해해서 닦으랴, 밥을 타오랴, 식기들을 씻으랴 하루종일 잠시도 쉴 짬이 없이 보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부대는 다시 북행 열차를 탔다. 마르타반을 거쳐 페구로 가는 동안 비행기들은 편대를 이루어 폭격을 해대고 있었다. 북쪽으로 갈수록 폭격이 심해지는 것은 전선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랑군에서 동북쪽으로 산악지대에 가까이 위치한 페구는 군사 요지이며 늑대 사단의 본부가 자리 잡을 곳이었다. 페구까지 가는 사이에 놓인 철교들은 군수품들을 내려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다. 그리고 다시 짐들을 기차에 옮겨 싣고 떠나는 형편이었다 날마다 적도하의 무더위와 모기에 시달리면서 그런 일을 되풀이하다 보니 군인들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벌써 체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라리아에 걸리는 병사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었다.

페구에 도착하자 병사들에게 위안의 시간이 주어졌다. 위안의 시간이란 무슨 오락 시간이 아니라 부대별로 위안소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건 병사들을 전선에 보내기 전에 사단본부에서 베푸는 육체의 향연이었다. 여자를 상대하게 하는 그 일을 일본군 지휘부는 사기진작의 한 방법으로 써먹고 있었다. 위안소는 열대지방의 무성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적기가 전혀 찾아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마음 놓고 짙은 그늘 아래로 줄지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긴 어떤 나라 피야?"

"어떤 걸 바라는데? 여기 미얀마에는 피가 네 가지야. 일본 피, 조선 피, 중국 피, 원지 피."

"일본 피야 장군용이니까 감히 어쩔 수 없고, 원지 피는 피부가 시커메 사람 같지가 않고, 중국 피는 3등 국민에 친숙하지가 않고, 그래도 조선 피가 친숙한 게 제일 낫지 않겠어?"

"그야 그렇지. 조선 피들은 그 위치도 아주 좋대잖아."

"맞어, 그런 소문이 있지. 히히히..."

"헌데.이게 다 원지 피면 어쩌지?"

"설마. 모울메인에서도 조선 피였다는데. 상부에서 우릴 그리 푸대접할 리가 있어?"

"글세, 두고 봐야지."

일본인 병사들이 끼들거리며 들떠 있었다. 원재빈은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선 처녀들이 위안부로 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안 것은 모울메인에서였다. 직접 보지 못하고 그곳을 다녀온 고참병들의 이야기를 스쳐 들으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군인 전용 위안소가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고, 20여 명 전부가 조선 처녀들이라는 것은 더욱 충격이었다. 왜 그런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자신의 무관심을 힐책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을 떠나오면서도 일본은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지 이렇게 열세에 몰리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지 않았던가. 절대 비밀유지, 그것이 군대가 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위안소나 위안부 문제를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위안소 안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신입 이동부대다. 빨리 준비해, 빨리!"

한씨가 아침밥을 먹고 있는 아가씨들을 몰아댔다.

"뭐가 그리 급해. 밥들도 안 처먹고 오나."

한 아가씨가 톡 쏘아붙였다.

" 아유, 지긋지긋해. 또 까마귀 떼야?"

다른 아가씨가 밥을 씹다 말고 몸서리를 쳤다.

"잔소리들 말고 빨리 하라니까."

한씨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워째 갈수록 신입에다 이동에다 까마구떼 천지여. 참말로 못살겄네."

젓가락을 던지며 복실이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이것들이 왜 이리 말이 많아. 이번 신입병들은 다른 때완 달라. 우리 조선 청년들도 들어 있어."

"네에?..."

"아이고메, 조선 청년덜?"

"워쩐 일이다요?"

아가씨들은 모두 놀라서 눈이 휘둥글해졌다 그런데 그 얼굴들에는 반가움이 역연했다.

"그래, 학병들이 섞여 있다."

한씨가 야간 누그러지며 대답했다.

"학병이 머신디요?"

", 대학교 전문학교 학생들이 지원해서 군대에 나온 거야. 빨리 해, 빨리!"

한씨는 두 팔을 휘저으며 다시 아가씨들을 몰아댔다.

"아이고, 진작에 그리 말헐 것이제."

"이거 어쩌나. 아직 분도 안 발랐는데."

아가씨들은 일제히 숟가락이며 젓가락들을 놓고 식당을 뛰어나갔다. 아가씨들이 말한 까마귀 떼란 이동 병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동 병력이 밀어닥치면 그 수도 많을 뿐만 아니라 사납고 거칠었다. 한 아가씨가 하루에 예닐곱 명 정도 상대하다가 이동 병력이 몰려들게 되면 삼사십 명으로 불어났다. 그 많은 수를 상대하다 보면 아가씨들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아가씨들은 끝없이 덤벼드는 일본군들이 시체를 파먹는 까마귀 떼처럼 자신들의 몸을 파먹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검은색 좋아하고 까마귀 좋아하는 일본사람들을 빗댄 말이기도 했다.

방문인 커튼이 걷혀지며 군인이 쑥 들어섰다. 병장이고, 일본사람이었다. 복실이는 손을 내밀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 와서 숙달된 것은 계급장과 일본사람을 한눈에 식별하는 것이었다. 복실이가 내민 손에는 고무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군인보고 받아서 그것에 끼우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치마를 걷으며 바로 군인이 달겨들었다.

"워메"

복실이는 눈을 번쩍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복실이의 두 손이 군인을 떠밀었다. 막 덤벼들던 군인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군인은 각반을 한 채 바지가 무릎 깨에 내려가 있었다. 으레 이동부대는 수가 많아 각반을 풀어 바지를 벗고 어쩌고 할 새가 없었던 것이다. 규정시간은 30분씩이었지만 군인들의 배설이 빠른데다 10분만 넘어도 밖에서 빨리 나오라고 난리가 나는 것이었다.

"이년이 왜 이래 이거!"

군인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눈을 부릅떴다.

"이거 끼워요."

복실이는 일본말로 내쏘며 고무주머니를 흔들었다. 군인은 그때서야 여자의 뜻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다시 덤벼들려고 했다.

"규칙 위반, 헌병대에 알릴 거예요."

복실이의 목소리는 더욱 싸늘해졌다. 그런 일본말은 다 여기 와서 익힌 것이었다. 군인은 주춤하며 얼굴이 굳어졌다.

"건방진 년, 네가 끼워."

군인이 불뚝 선 그것을 복실이 앞으로 디밀며 손짓했다. 복실이는 비위가 획 상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외면을 하며 고무주머니를 그것에 끼웠다. 그것마저 거절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 짓을 거절했다가 서너 차례 따귀를 맞고 걷어차이고 했던 것이다. 고무주머니를 끼지 않으려는 것은 규칙 위반이었지만, 고무주머니를 끼워달라는 것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예 규정에 없으니 뭐라고 거절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고무주머니를 끼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었다. 우선 성병에 걸리지 말아야 했고, 또 임신을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복실이는 다시 드러누우며 이제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고무주머니를 빼버리지 않나 감시하고 있었다. 군인은 있는 대로 두 다리를 벌리며 자신의 것에다 다시 한번 침을 재빨리 발랐다. 조금이라도 통증을 덜 당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군인의 그것이 몸속으로 파고들자 복실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진저리를 쳤다. 남자의 그것만 보면 비위가 상하고 구역질이 솟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었고, 그것이 봅 속으로 파고들 때마다 더럽고 징그러워 소름 끼치는 것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군인은 긴 숨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무주머니를 빼서 던졌다. 복실이는 고무주머니를 얼른 집어 유리병에 넣었다. 유리병 옆에 군인이 던져놓은 전표가 있었다. 현관 옆의 사무실은 지키고 있는 한 군인이 던져놓은 전표가 있었다. 현관 옆의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한씨한테 150전씩을 내고 받아온 전표였다. 하루 일이 끝나고 나면 그걸 모아다가 한씨한테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실이는 그 전표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전표도 왜놈들의 그것만큼 더럽고 징그럽게 생각되었고, 그걸 꼬박꼬박 챙기다 보면 자신의 신세가 더욱더 비참해지기 때문이었다. 그 전표를 잘 챙겨와야 장부 숫자와 맞춰 보수 계산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 전표를 다시 써먹기 위해서 그러는 것뿐 여지껏 돈은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었다. 한씨와 함께 있는 왜놈 야마가다는 돈을 저금했다가 한꺼번에 준다고 했다. 두 번째 군인이 들어섰다. 거기를 닦아낸 물수건을 마른 나뭇잎 베개 옆으로 놓으며 복실이는 군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상등병에, 역시 일본사람이었다. 복실이는 고무주머니를 내밀며 또 눈을 질끈 감았다.

"새것 야기 있어"

복실이는 눈을 떴다. 군인은 바지를 까 내리며 고무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드러운 눔, 이골났네. 복실이는 씨익 웃는 군인에게 표독스럽게 눈을 흘기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양쪽 옆방에서 숨 헐떡거리는 서리들이 다 들려왔다. 방들이 좁은데다 판자 한 장이 벽이었던 것이다. 열세 번째까지도 일본사람들이었다. 복실이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 수를 세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조선사람을 기다리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내가 왜 조선사람을 기다리고 이러지? 이 꼴을 보이는 게 얼마나 창피스러운 일이라고. 그러나 만나고 싶은 마음은 떼칠 수가 없었다. 집을 떠나온 이후 이 위안소에만 갇혀 지내면서 조선사람이라고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가 누구든 만나면 반갑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에이꼬야, 여기 너희 고향 오빠 오셨다. 빨리 모셔가라."

복실이는 귀가 번쩍 뜨였다. 에이꼬는 여기 와서 야마가다가 지어준 이름이었고, 방문 위의 명찰에도 그렇게 씌어 있었다.

", 알었응게 쬐깨 기둘려."

복실이는 군인이 숨을 헐떡거리고 있거나 말거나 맞소리를 질렀다. 군인이 멈칫 놀랐다. 복실이는 문득 미안한 생각이 들어 눈을 찡긋해 보이며 끌어안았다. 군인은 좋아라 하며 더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군인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복실이는 방을 튕겨나갔다.

"히데꼬야, 나 왔다."

복실이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가만히 말했다.

"들어와, 어서."

커튼이 젖혀지며 히데꼬가 손을 잡아끌었다.

"이 오빠 고향이 목포시래."

히데꼬는 반가움이 넘치는 얼굴로 거침없이 오빠라고 부르며 우뚝 서 있는 군인에게 인사를 시켰다.

"안녕허신게라우, 지넌 김제구만이라우."

복실이는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히데꼬는 전라남도든 북도든 가리지 않고 전라도를 늘 못 잊어 했던 김제를 고향으로 댔다.

"아저 말씨..."

박용화는 아가씨의 말을 듣는 순간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기분이 잔뜩 언짢아져 있던 참이었다. 자신을 조선사람으로 알아보는 것도 거북했고, 더구나 고향 여자까지 불러대는 바람에 재미를 보려던 기분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가씨의 말씨는 그대로 어머니의 말씨였던 것이었다.

", 만나서 반갑소."

박용화도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다.

"너무 보기 좋다. 기왕이면 고향 오빠 위안해 드리는 게 낫지, 그치? 빨리 저쪽 방으로 가세요. 저는 에이꼬 방에 노는 사람 붙들어올 테니까요."

경기도가 고향인 히데꼬는 눈치 빠르게 움직이며 두 사람을 밖으로 밀었다.

"어떻게 이런 데까지 왔소?"

박용화는 판자 바닥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그는 심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위안소에 있는 조선 여자들이 유곽에서 온 그렇고 그런 여자들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대하고 보니 아직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 앳된 처녀들이었던 것이다.

"속아서... 속아서..."

고개를 떨군 복실이는 복이 베었다.

"속다니, 어떻게 말이오? 무슨 좋은 데다 취직시켜 준다고 했소?"

복실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못된 놈들... 그럼 집에서는 이런 걸 전연 모르고 있을 것 아니오?"

박용화는 가슴 저리는 아픔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이런 일이 벌어니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복실이는 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흑 울음을 터뜨렸다.

", 아가씨들 신세나 우리 학병들 신세나 다 똑같소. 이따위 사람 살 땅으로 끌려다니고 있으니. 나 담배나 한 대 피우고 가겠소."

박용화는 담배를 꺼내며 왜 첫 번째 처녀가 그렇게 반가워하며 서슴없이 오빠라고 물렀는지 알 것 같았다.

"저어..., 지가 맘에 안 드시먼..."

복실이는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박용화를 쳐다보았다.

"아니오, 그게 아니오. 애가 어찌 왜놈들하고 똑같이 그 짓을 할 수 있겠소."

박용화는 이 말을 하면서 최초로 피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구만이라, 아니구만이라..."

복실이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만이라도 너무 고마웠다. 아니, 그 말이 고마워서 다른 군인들하고는 다르게 옷을 다 벗고 저 사람을 맞이하고, 자신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표할 수가 없었다.

"나 그만 가봐야겠소."

박용화가 일어섰다.

"은제 떠나시능게라..."

복실이도 따라 일어섰다.

"잘 모르겠소."

"낼 시간 있으시먼..."

복실이는 박용화를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알겠소."

박용화는 그 눈물 어린 눈이 애처롭게 곱다는 것을 느끼며 복도로 나섰다.

"후미꼬야, 느그 충청도 고챵 오빠다아. 얼렁 모시고 가그라,"

어느 방에선가 또 외치고 있었다.

"아이고, 그려? 알었어어."

어느 방에서 다급하게 화답하고 있었다. 복실이는 박용화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어떤 군인에게 떠밀려 방으로 들어왔다. 여자들이 변소 갈 짬도 없이 군인들은 줄을 잇대었다. 그래서 여자들은 이동부대가 나타나면 진저리를 쳤다. 스물다섯 명 정도가 넘으면서 복실이는 거시기가 부어오르면서 속이 쓰라리고 화끈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복실이는 그 학도병 생각과 집 생각이 자꾸 겹쳐지면서 끝없이 밀려드는 군인들이 더 지긋지긋해지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어 군인들이 끊어졌다 그때서야 야자들은 앞다투어 변소로 뛰기 시작했다. 변소를 다녀온 그녀들은 다른 날과 달리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미얀마 여자 둘이 어쩐 일이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점심은 처음부터 굶어왔는데 식당으로 모여드니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너희들 어땠니, 어땠니?"

히데꼬가 여덟 명 중에 넷을 둘러보았다. 네 명 다 고개를 저었다.

"넷 다 안 하고 그냥 갔어?"

"우릴 더럽다고 무시했나? 다 댜학생님네들이라."

다른 아가씨가 내뱉었다.

"아니여 , 우리도 왜놈덜허고 똑겉은 짓얼 히서 되느냐고 큭어."

복실이는 재빨리 말대꾸를 했다.

"맞다, 내가 만낸 모빠는 곧 울라캤능기라."

"그래, 그래. 역시 배운 사람들이라 생각도 깊다. 루리 서러움을 그리알아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니."

히데꼬가 울음을 씹듯 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라니께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안 카드나."

"그런데 왜 우리 네 사람은 없었니?"

"아니여, 근데 저쪽 애들도 우리처럼 눈치 빠르게 했을까?"

"가볼까? 모르고 있으면 가르쳐주게."

"그러자. 가자!"

그들 여덟은 우루루 복도로 몰려나갔다. 처음에 양쪽 건물에 열씩이었다. 그런데 복실이네 쪽에서는 두 명이 탈이 생겼다. 하나는 두 달 만에 목매달아 죽었고, 다른 하나는 네댓 달 전에 실성을 해서 부대 병원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저쪽 건물에서는 하나가 군인의 칼에 찔려 죽었다. 30분 동안에 세 번씩 덤벼들던 군인이 자기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칼을 마구 휘두른 것이었다.

"다들 어디 가!"

사무실에서 밥을 먹고 있던 한씨가 소리를 빽 질렀다.

"가긴 어딜 가겠어요. 고작 옆집이지."

히데꼬가 야무지게 쏘아붙였다. 다른 아가씨들도 눈을 흘기고 입을 삐쭉거리고 하며 밖으로 나갔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군인들은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숨이 막히도록 날은 덥고 군인들은 쉴 새 없이 밀려들고, 아가씨들의 몸은 땀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속에서도 서로 고향 사람 찾아주는 외침은 이어지고 있었다. 해가 기울면서 저 밥때가 되자 군인들이 끊어졌다. 복실이는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거기가 퉁퉁 부어오르고 속이 쓰리고 욱신거리고 화끈거리는 데다 불두덩이며 아랫배 전부가 터지는 것 같고 찢어지는 것같이 아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40명을 치렀는지 50명을 치렀는지 알 수도 없었다. 다른 아가씨들도 몸이 퍼져 꼼짝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북적거리던 군인들의 발길이 끊긴데다 아가씨들마저도 움직이지 않아 위안소 안은 괴괴한 적막에 싸여 있었다. 한참이 지나 아가씨들이 한둘씩 변소로 목욕탕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들은 벽을 짚어가며 걸음을 엉기적거리고 있었다. 목욕을 끝낸 아가씨은 고통스러움과 서글픔으로 일그러진 얼굴들로 엉기적엉기적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그녀들이 들어설 때마다 쉰 가까이 되어 보이는 미얀마 여자 둘이 뜨거운 물수건을 건네주고는 했다. 아가씨들을 바라보는 두 여자의 얼굴에는 안쓰러워하는 빛이 가득했다. 그 뜨거운 물수건을 아랫배에 대라는 것이었다. 그건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었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두 여자가 시작한 일이었다. 뜨거운 물수건을 대면 처음에는 더 아픈 것 같지만 차츰 아랫배의 통증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 여자들은 무슨 나무 열매 즙을 가져와 거기 부은 데다 바르라고도 했다. 그걸 바르면 부기가 다소 빠지기도 했다. 아가씨들은 모두 등받이 없는 걸상에 앉지를 못했다. 선 채로 안남미 밥을 한 그릇씩 받아들었다.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은 채 밥을 떠넣고 있었다. 아가씨들은 식사를 끝내는 대로 앓는 소리를 가늘게 내며 자기들 방으로 들어가 쓰러졌다. 이 방, 저 방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모깃소리와 함께 열대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복실이는 아침 일찍 잠이 깼다. 어젯밤에 장교들이 하나도 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 그 사람들이 밤중에 떠났구나!"

복실이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동부대가 오고, 밤에 자고 가는 장교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면 그날 밤 이동부대는 떠난 것이었다.

"그 사람 이름이나 알아둘 것을..."

복실이는 아쉬움 속에서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히데꼬처럼 오빠라고 불러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말았다. 복실이는 밖으로 나왔다. 아침의 서늘함이 숲속에 가득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부대 쪽을 바라보았다. 군인들이 움직이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많은 군인들의 움직임은 아니었다. 밤새 이동부대가 떠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부디 무사허시게라... "

복실이는 그 남자와 다른 학병들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싸움터는 북쪽이고, 그쪽에서는 사람들이 거기서 죽으면 자기네보다도 더 못한 신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실이는 걸음을 옮겼다. 저쪽 나무 없는 데에 유난히 색깔 짙은 열대의 꽃들이 아침햇살을 받으며 활짝활짝 피어 있었다. 향기도 짙고 아름답기도 한 꽃들이 늘 피는 것은 좋지만 사시장철 여름뿐인 이 땅이 지겹고 지루해 고향을 더 그립게 만들었다.

엄니이...’

복실이는 언제 돌아가게 될지 모를 집 생각을 하며 또 가슴이 먹먹해졌다.

"잔소리들 그만하고 빨리빨리 삿쿠 씻어놓고 그래."

한씨가 식당으로 얼굴을 디밀며 소리쳤다. 아가씨들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며 좋지 않은 기색들로 자리를 떴다. 한씨는 야마가다에게 못지않았다. 복실이는 고무주머니가 든 병을 들고 말숙이와 함께 가까운 개울로 나갔다.

"여그넌 물도 어찌 이리 맑덜 못허고 쿵쿵허니 이런지 몰르겄어."

말숙이는 또 물 타박을 했다.

"어디 물만 그러냐. 사시장철 덥고 모구 많고,요겻이 어디 사람 살디냐."

복실이가 한숨을 푹 쉬며 병 속의 고무주머니들을 풀섶에 쏟아놓았다.

"근디 왜놈덜언 멀라고 요 못쓴 땅얼 차지헐라고 그리 사람덜얼 많이 죽여감서 전쟁얼 헐끄나?"

"긍게 미친 놈덜이제."

"어지께 그 사람덜이 무사해야 헐 것인디."

"금매 말이여.."

"요 빌어묵을 짓도 참 징허다."

말숙이가 고무주머니를 물에 넣으며 진저리를 쳤다.

"나년 요 짓얼 헐 때마동 팍 그냥 죽어북고 잡다."

복실이는 침을 내뱉으며 나뭇가지 젓가락으로 고무주머니를 집었다. 복실이는 침을 내뱉으며 나뭇가지 젓가락으로 고무주머니를 집었다. 복실이는 고무주머니를 씻는 일이 치 떨리게 싫었다. 그것을 씻어서 말려 하얀 가루를 뿌려 소독을 해서는 찢어질 때까지 다시 사용해야 했던 것이다.

"요런 물건이나 잠 잘 대주제. 요런 것이 무신 값나가는 물건이라고."

"요런 짜자헌 물건도 뒷대덜 못허는 판이니 왜놈덜언 곧 망헐 것이여."

복실이가 세차게 말했다.

"아이고, 누가 듣겄다."

말숙이가 빈 주먹질을 했다. 아득하게 비행기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복실이와 말숙이는 고개를 들었다. 몸체가 하얀 비행기 네 대가 햇볕에 반짝거리며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비행기들은 날이 갈수록 자꾸 더 많이 떠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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