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그 까닭
햇살이 도타워지고 순한 바람이 산골을 타고 하늘하늘 넘돌기 시작하면서 눈 녹는 산비탈은 질퍽거렸다. 그 즈음이면 또 한 해 겨울 숯구이가 마감되는 것이었다. 긴 겨울 동안 구워낸 숯은 싸리나무 줄기로 엮은 원통형 망태에 담겨 여기저기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으 심이 무섭기넌 무섭다. 저 많은 숯얼 우리가 다 구워냈시니."
"실답잖기넌. 어디 저것만이여? 그간에 차로 쉴 새 없이 실어낸 것얼 생각히 봐. 저것이야 댈 것도 아니제."
"그렁게 사람 심으로 만리성도 쌓는 것이제."
"그러자니 우리가 얼매나 좆빠지게 고상고상 힛냐 그것이여."
"씨부랄 눔에 것, 고상도 고상이제만 삼동 내내 홀애비 신세 되는 것이 질로 개좆 겉은 것이여"
"공자님 말씸이시. 염병허고 이놈으 만주 삼동언 어찌 그리 또 징허게도 진고."
"긍게 말이시. 봄 가을언 쥐좆만허고 삼동이 반년이니 사람 환장헐 일이제."
"그 사람 인심 후허시. 쥐좆만이라도 허먼 좋게? 개미좆에 배룩좆이여."
"허, 저 사람! 자네가 개미좆이고 배룩좆 봤어?"
"이이고 잘났능거. 개미고 배룩이고 좆이 있응게 알을 까든 새끼럴 낳든 헐 것 아니여."
"그나저나 삼동에넌 따땃헌 구둘 지고 마누래 궁뎅이 맨지는 맛으로 사는 것인디, 해마동 그 재미 못 보고 산 지가 발써 멧년이여?"
"긍게 말이여. 니나 나나 이리 숯껌댕이 숯재이 될라고 마주땅에 온 것이 아닌디."
"근디 요놈에 숯언 은제꺼정 꿉어야 허는 것이여?"
"고것얼 누가 알겄어. 전쟁얼 더 크게 벌였당게 끝도한도없는 일이겄제."
"참말로 왜놈덜언 어찔라고 그리 전쟁판얼 자꼬 크게 벌리고 그렁고?"
"아, 배불른 놈이 욕심 더 큰 것 몰라서 그려?"
"아이고, 인자 요 빌어묵을 짓도 더는 못허겄는디 무신 수가 없으까?"
"아이고 이 사람아, 심 파허는 소리 허덜 말어. 항일연군인가 머신가도 다 없어져분 판에 우리럴 돕는 사람덜이 어디가 있겄어. 하늘서 왜놈덜만 골라 한날 한시에 베락얼 쳐불기 전에넌."
"그려, 더 심해지지나 않기럴 바래야제. 우리 신세야 진작에 금가고 깨진 옹구 팔자 아니드라고."
"그나저나 또 한 해 큰탈없이 넘겠응게 그것이나 당행으로 생각허고 처자석 만내로 갈 채비나 어서덜 허드라고. 요것이 워디 사람 사는 시상 이간디."
저녁밥을 먹고 난 남자들은 한바탕 푸념을 늘어놓고는 자기네 숯막으로 흩어져 갔다. 그들은 모두 지치고 시들어 있었다. 또 그들의 몰골은 흡사 까마귀 떼였다. 긴 겨우내 숯을 구워내고, 숯을 담아 옮기고 하느라고 그들은 꼴마저 온통 숯검정투성이였다. 옷만이 시꺼먼 것이 아니었다. 얼굴이며 손도 일부러 숯가루를 바른 것처럼 시꺼멨다. 잘 씻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비누 없이 씻는데다 날이 날마다 숯검정을 뒤집어쓰니 숯검정이 겹겹으로 끼여 살갗으로 배들고 배든 것이었다. 그들은 내일이면 숯구이에서 풀려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그러나 집에 가면 또 농사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농사일도 숯구이와 마찬가지로 아무 이득이 없는 것이라서 그들을 더욱 맥빠지고 시름겹게 했다. 그들이 챙길 짐이라곤 따로 없었다. 베개 삼아 굴렸던 때 절은 옷 보퉁이 하나씩이 전부였다.
"어이, 담배 있능가?"
김진배가 벽에 몸을 부리며 물었다.
"야아, 여그..."
남만석은 쌈지를 매형 앞으로 밀어놓았다. 남만석은 매형 앞에서는 그저 죄인이었다. 매형이 무슨 타박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만주로 온 다음부터 한시도 죄 지은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매형이 한숨만 쉬어도 가슴이 뜨끔했고, 혀만 차도 마음이 섬뜩했다. 그 죄지은 마음은 바로 숯구이 때문에 씻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겨울마다 되풀이되는 숯구이만 없었더라도 고향에서 소작살이하나 만주에서 고용살이 하나 매일반이라고 치부할 수가 있을 거였다. 고향에서는 아무리 소작살이를 한다고 해도 겨울 한 철은 쉬어가며 몸을 추스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주에서는 오히려 겨울에 더 고생을 하니 남만석은 매형 앞에서 도무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자신이 오자고 바람을 넣지 않았더라면 매형은 만주에 왔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고메, 저 꽃불에 괴기 지글지글 꾸워 쐬주 한잔 짝 큭으먼 소원이 없겄다."
누군가가 기지개를 켜며 크고 늘어지는 소리로 말했다. 밤이 되자 써늘해져 화덕에 불을 피운 것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풍족한 것이 나무였다. 소가 얼어 죽도록 혹독한 날씨에도 잠만은 춥지 않게 잘 수 있었다.
"하이고, 바래기도 오지게 바래네. 회만 동헌게 돼지도 안헐 소리넌 허지럴 말어."
"아니여, 묵덜 못헌다고 말도 안허먼 사람이 팍팍히서 어찌 살으라고. 말이라도 험서 신 침이라도 넘개야 그래도 기분풀이가 되제."
"괴기 지글지글 꾸워 쐬주 한잔 허는 것도 좋제만 그보담도 틉틉헌 막걸리 한 사발 쭈욱 허고 코 톡 쏜느 홍어 한점 척 걸치먼 더 부런 것이 머시가 있드라고."
"워따, 환장허겄다. 고것이야 더 말헐 것 이 개 흘레붙는 것 보고 맘 동헌 과부 붙어묵는 맛 아니여!"
"아이고, 참말로 춤 꼴딱 넘어가네. 홍어맛 못 본 지가 은제여?"
"홍어넌 너무 과만허고 가오리라도 한점 맛봤으먼 한이 없겄다."
"어디 그뿐이여. 살 통통허니 올른 낙지 살짝 디쳐서 시큼새콤헌 초장에 착 찍어 막걸리 한잔 쭈욱 허먼 그 짠득짠득 씹히는 맛이 과부 묵는 맛에 비허겄어."
"히, 고것이야 상전 마누래 엎어묵는 맛이제."
"아니, 기왕 묵을라먼 뉘어놓고 묵제 으째 엎어놓고 묵어, 엎어놓고 묵기럴."
"저런 둔자럴 봤능가. 상전 ㅓ마누래럴 덮치는 것인디 뉘고 자시고 헐새가 워딨어. 꼼지락달싹 모허게 팍 엎어놓고 속곳 밑얼 착 벌래야제."
"고것이 무신 맛이여."
"어허, 갈수록 둔자 소리만 허네. 씹맛 중에 질이 번개씹이라는 말도 못 들어봤능감. 간 통개통개허는 상전 마누래에다 도적질허는 번개씹이니 그 맛이 얼매나 오지고 오지겄어."
"크크크크..."
"흐흐흐흐..."
"하이고, 말허다 봉게 눈물난다. 굶고 배곯아도 고향 산천이 질인디."
"그려, 세월만 이리 무정허니 가고 은제나 고향에넌 가게 될랑고."
"살다보면 가질 날이 있겄제. 왜놈덜이 천년만년 갈라고."
타아향앙살이 며엇해에더언가아...
누군가가 노래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로 어우러졌다. 노래가 이어질수록 그 구성진 소리는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그들은 이튿날 아침 일찍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쉬지 않고 걸어 어둑어둑해져서야 집단부락에 도착했다. 장정들이 점심때 주먹밥 한 덩이씩을 먹은 짧은 시간만을 빼고 하루종일 걸었으니 100리가 훨씬 넘는 거리였다. 나무를 따라 옮기다 보니 해마다 산이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산들을 뒤따라 만주의 산들도 마둑잡이로 황폐해져 가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집단부락 집집마다 반가운 소란으로 들떴다.
"아부지!"
"아부지!"
남만석이 집으로 들어서자 아들딸이 반가움에 넘쳐 달려들었다.
"이, 그려, 그려."
남만석은 아이들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피그르르 주저앉았다.
"음마, 어디 아프신게라?"
그의 아내가 눈이 휘둥글해졌다.
"아니시, 나 물 한 그럭 주소."
남만석은 너무 기진맥진해서 말할 기운도 없었다. 머쓱해진 아이들이 숯검정을 뒤집어쓴 아버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남만석은 물 한 사발을 벌컥거리며 다 들이켜고는 뒤로 벌렁 누워버렸다.
"밥 얼렁 헐 것잉게 쬐깨 기둘리시게라."
그의 아내는 허둥거리며 돌아섰다. 남만석은 이내 코를 드렁드렁 고릭 시작했다. 윗목에 쪼그리고 앉은 아이들이 빠끔한 눈으로 아버지를 지키고 있었다. 기름기라고는 없이 꺼칠한 아이들의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피어 있었다. 남만석만이 아니라 다른 남자들도 마치 앓듯이 하며 사나흘씩 잠만 잤다. 군인들도 그들의 피로를 아는지 닷새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동북항일연군의 저항이 사그라졌지만 집단부락에 군인이나 경찰은 그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다만 그 수가 절반 정도로 줄어 있었다. 그건 여러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미약하나마 항일연군의 암약이 포착되고 있었고, 언제 또 그런 식의 무장 조직이 출현할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통제조직 아래서 군량미를 확보하는 것이 최고로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소련과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전시체제의 유지, 강화였다. 특히 소련과의 국경지역에서는 집단부락이 갈수록 증설되고 있었다. 그건 조선사람들을 실컷 부려 곡물을 생산해 내게 하는 동시에 조선사람들로 1차적 방어벽을 쌓는 셈이었다.
꽃바람 뒤에 이슬비가 승치고, 개울물이 돌돌거리면서 살가운 바람이 부자 북만주에서도 짧은 봄이 찾아왔다. 새싹이 파릇파릇 돋자 제일 먼저 활갯짓하고 나선 것이 처녀들이었다. 처녀들은 끼리끼리 짝을 지어 나물을 캐러 나섰다. 봄나물을 먹어야 입맛이 돌고, 또 한 해 농사를 시작할 기운을 차리게 되는 것이라서 집집마다 딸네들이 나물 캐오는 것은 대환영이었다. 그건 결코 미신이 아니었다. 뿌리까지 무쳐 먹는 봄나물에는 비타민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영양소와 약효까지 내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서 입맛을 돋울 뿐만 아니라 활력이 생기게 했던 것이다. 나이 열예닐곱씩 되는 처녀 셋이 도란도랑 이야기를 하다가 킥킥거리기도 하며 나물을 따라 자리를 옮겨가고 있었다. 처녀들은 서로의 이야기에 팔리고 나물에 끌려가며 집과 멀어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바구니에 나물이 그득하게 찬 만큼 집단부락은 까마득하게 멀어져 있었다. 세 처녀들이 등지고 있는 둔덕 위에서 무엇인가가 힛끗히끗 움직이고 있었다. 그건 사람들의 머리 부분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 얼굴들이 천천히 솟아올랐다. 그건 다섯 남자의 얼굴이었다. 한 남자가 손을 치켜듦과 동시에 그들은 세 처녀를 향해 둔덕을 달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본의 국민복 차림이었다. 그런데 처녀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재잘재잘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다섯 남자는 처녀들을 덮쳤다.
워메...
엄니...
어엄...
세 처녀는 입이 가려지며 소리들도 끊기고 말았다. 세 처녀는 제각기 발버둥을 치고 몸부림을 쳐댔다. 그러나 남자들은 익숙한 솜씨로 세 처녀를 끌고 둔덕을 넘어갔다. 처녀들이 있던 자리에는 바구니와 나물들만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둔덕을 넘어온 처녀들은 다섯 남자에게 둘러싸여 쪼그려 앉은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아주 잘들 했다. 이건 셋 다 아다라시니까 돈을 톡톡히 받겠는걸."
턱에 칼자국이 있는 사내가 일본말로 지껄이며 한 처녀의 빨간 댕기머리를 잡아 흔들었다. 소매를 걷어붙인 그의 팔뚝에는 푸른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흔히 낭인이라 부르는 일본 불량배들이었다.
"오야붕께서 오늘 밤 시식을 하고 넘기시지요. 군인들이야 아다라시든 뭐든 여자만 있으면 환장들 아닙니까."
한 사내가 담배 연기를 날리며 아첨하듯 말했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마. 그건 졸병들이나 그렇지. 장교들은 아다라시만 찾아. 아다라시에 미인이면 다섯 배도 더 받는다는 걸 몰라? 자아, 담배들 끄고, 가자!"
세 처녀는 징징 울며 사내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남만석네 집단부락에서는 소동이 일어났다. 행여나 행여나 기다리고 있던 처녀 셋이 날이 어두워지는데도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안 되겄다. 찾어나서야제!"
김진배가 부르짖듯 했다. 그이 큰딸이 셋 중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얼렁 나습시다."
딴 처녀의 아버지가 목메는 소리로 말하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럴지 알었으먼 진작에 나섰어야 헌는 것인디."
또 다른 처녀의 아버지가 발을 굴렀다.
"어이, 남정네덜 다 나오고, 싸게 홰덜 맨글어, 홰!"
부락 대표격인 나이 든 남자가 외쳤다. 집집마다 남자들이 나오고, 여자들은 홰를 만들 갈대들을 한 아름씩 옮겨오느라고 분주했다. 그 웅성거림 때문에 군인들이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 왜들 이래?"
대장이 수상쩍어 하며 눈을 치떴다.
"나물 캐러 간 처녀 셋이 아직도 안 돌아와서 찾으러 가는 겁니다."
일본말을 잘하는 젊은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뭐라고? 저 갈대는 뭔가?"
예, 횃불을 켜야 하니까...
"닥쳐라! 이 밤에 수십 개의 횃불을 켜 들고 사방으로 돌아다니겠다 그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나? 중국 놈들 쏘련놈들 비행기가 폭격을 가해 온다 그 말이야. 방공훈련을 그렇게 시키고, 등화관제 하라고 그렇게 훈육하는데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나. 처녀 셋 찾으려다가 수백 명이 몰살당하고 싶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대장은 핏대를 올리면서 소리 질러댔다. 젊은이의 말을 듣고 모든 사람들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밤에 등잔도 켜지 못하고 지낸 것이 벌써 2년이었던 것이다.
"빨리 해산해, 빨리!"
대장이 칼을 휘두르며 소리쳤고, 부하들이 총으로 사람들을 밀어댔다.
"벨수 없구만. 낼 아침 일찍 나서야제."
"요것이 무신 귀신이 곡헐 노릇이랴."
"글씨 말이여. 산이 있으니 질얼 잊어부렀겄어, 물이 있으니 빠지기럴 혔겄어."
"못헐 말로 누구헌티 잽혀갔능가? 여자덜 잡어간다는 소문덜 있덜 안혀?"
"아서, 아서. 그런 소리 입에 올리덜 말어. 부모덜이 들으먼 팔딱 미치고 환장헐 일잉게."
"그나저나 요것이 예사 병통언 아닌갑는디."
사람들이 떨어져 가며 수군거리는 말이었다.
"허! 요것이 무신 일이다냐."
김진배는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토해 냈다. 남만석은 죽고 싶은 심정으로 그 옆에 서 있었다. 차라리 자신의 딸이 당한 일이었으면 더 나을 것 같았다. 이런 일까지 생겼으니 매형 앞에서는 더 큰 죄인이 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마당에는 세 처녀의 부모들과 가까운 몇 사람만 남았다.
"들어덜 가야제라. 이러고 있다고 무신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닌다."
누군가 한숨 묻혀 침통하게 말했다.
"참말로 환장헐 일이시. 어찌 요런 얄궂은 일이 다 있능고."
어느 여자의 울음 섞인 말이었다.
"다덜 들어갑시다."
김진배가 말하며 돌아섰다. 남만석 내외도 그 뒤를 따랐다. 김진배의 아내는 소리를 억누르며 울기 시작했다. 딸 찾는 것을 포기하게 되자 그동안 참고 있던 울음이 터진 것이었다. 그녀는 집으로 들어서며 더는 소리를 참아내지 못하고 울음이 커졌다.
"아, 시끄러! 재수대가리없어."
김진배가 버럭 소리 질렀다.
"글먼 나보고 으쩌라고..."
그의 아내의 울음에 섞인 말이 서럽고 절박했다.
"여자가 밤에 울먼 액이 끼는 법이여."
김진배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그의 아내는 가슴이 섬뜩해지며 울음을 참느라고 속입술을 깨물었다.
"불도 쓰지 못헝게 자네넌 들어올 것 없이 그냥 가소."
김진배가 방으로 들어가며 처남에게 한 말이었다. 남만석은 그만 엉거주춤했다. 그 말이 너무 싸늘하고 매서웠다.
"야아..."
남만석은 다른 말 한마디 못 하고 쫓겨나듯 물러섰다.
이튿날 새벽 먼동이 트기 전에 벌써 사람들은 집단부락을 나섰다. 그들 중에 몇 사람이 세 개의 바구니와 흩어진 나물들을 찾아낸 것은 해뜰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해가 질 때까지 그 일대를 뒤졌다. 그러나 세 처녀의 종적은 묘연하기만 했다.
"거그서 어디로 갔을꼬? 하늘로 솟았능가 땅으로 꺼졌능가."
"산도 없은 거그서 호랭이가 물어갔을 것이여, 곰이 업어갔을 것이여? 보나마나 뻔허제. 어떤 불량헌 놈덜헌티 잽혀간 것이로구만."
"어찌 그리 장담혀?"
"딱 보먼 몰라? 바구니에 얌전허니 있어야 헐 너물덜이 어찌서 그리 사방으로 흩어지고 널려 있겄능가. 너물덜이 즈그 발로 걸어나갔겄어? 불한당놈덜헌티 안 잽혀갈라고 큰애기덜이 몸살얼 대고, 그놈덜언 잡아 갈라고 난리고, 그러다봉게 바구니가 채이고 엎어지고 히서 그리 된 것 아니겄어."
"그려, 필시 그렇구마."
"맞어, 쪽찝게 점쟁이시."
사람들은 모두 그 말에 동의했다. 달리는 더 생각나는 것이 없기도 했다.
"글먼 그 일얼 어쩐댜?"
"글씨 말이여..."
사람들은 서로서로 쳐다보며 더 말이 없었다. 이 넓디나 넓은 만주 벌판에서 어디로 찾아 나서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그리고 감시받고 살면서 마음대로 나설 수도 없는 처지였다.
"저그 머시냐..., 경찰에라도 찾어달라고 말해 보는 것이 어쩔랑고?"
누군가의 기운 없는 말이었다.
"경차알? 그려, 그리라도 히보기넌 히보는 것이 낫겄제."
다른 사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 처녀의 아버지와 몇 사람은 경비대장을 찾아가 사정을 이양기하고 경찰서에 가게 해달라고 했다.
"경찰서? 그거 좋소. 허나 경찰서가 너무 머니까 당신들이 갈 것 없이 내가 연락을 취해 주겠소. 너무 걱정 말고 일들이나 빨리 시작하도록 하시오."
경비대장의 이런 말이 과히 달갑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더 어쩔 수가 없었다. 한번 말을 그렇게 해버린 이상 직접 가게 해달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글먼 꼭 부탁디리겄구만요."
"사람 생사가 달린 일인게라."
그들은 애원하듯 다짐했고
"알겠소. 당장 조치하겠소."
경비대장은 혼괘하게 응답했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가도 처녀들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농사일에 휘말려 들면서 처녀들의 일을 차츰차츰 잊어가고 있었다. 봄비가 서너 차례 내리면서 사람들의 일손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물을 논에 가두랴, 물길을 잡으랴, 논을 갈아엎으랴, 모내기 채비에 밤낮이 없었다. 경비대에서도 배급량을 늘려주었다. 잘 부려먹어 군량미 생산을 높여야 했던 것이다.
"빌어묵을 놈덜, 똑 소 부래묵디끼 헌당게. 드러와서 참."
"글먼, 저놈덜 눈에 우리가 소가 아니먼 머시여. 실답잖게 사람 대접받고 잡은감?"
"참 드런 놈으 팔자시. 쌀농새 쌔빠지게 져서 새끼덜헌티 쌀밥 한 끄니 못 먹이고. "
"긍게 누가 나라 뺏기라고 큭간디. 말허먼 입만 아프고 심만 피허제."
"그려, 그 죄가 누구헌티 있는지 원."
남자들은 뜬 내 나는 조밥을 샛밥으로 먹으며 쓰게 웃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른들은 군인들의 감시 아래 농사일에 정신이 없지만 열두세 살짜리 어중간한 나이의 아이들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학교도 없어서 아이들은 속절없이 무식꾼으로 커가고 있엇다. 아이들은 농사일을 등 너머로 익혀가며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찾아다녔다. 그중의 하나가 고기잡이였다. 고기잡이는 즐거운 놀이이면서 반찬을 장만하는 일이라 어른들에게 칭찬까지 받았다. 모내기 철이 되면 물이 불어나면서 물고기들도 살이 올랐다. 그래서 아이들은 물줄기를 따라 고기잡이를 나서고는 했다.
열서너 살쯤 먹은 아이들 여섯 명이 물길을 따라 빠르게 걸으며 시끌덤벙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크고 작은 그릇들이 들려 있었다. 물도 푸고 고기도 담아갈 그릇이었다. 두 명은 삽과 괭이도 들고 있었다. 그물이 있을 리 없는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인 보막기 고기잡이를 나서고 있는 참이었다. 보막기 고기잡이는 아무 물줄기에서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논에 물을 대는 물줄기 같은 것이 아니라 물이 늘 흐르고 있는 개울이어야 했다. 개울도 물살이 세거나 폭이 넓어서는 안 되었다. 보를 막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물살이 아주 느리면서 폭이 좁장하고 물풀이 자라나고 있는 개울이어야 했다. 그런 데는 메기며 붕어 같은 것이 많았다. 아이들은 10리가 넘게 걸어 마음에 드는 개울을 찾아냈다. 그들은 개울가로 우르르 내려갔다.
"시끄럽게 허덜 말어. 괴기덜 놀래 도망간게."
몸집이 제일 큰 아이가 낮춘 소리로 말하며 아이들을 휘둘러보았다. 그 눈초리가 매웠다. 아이들이 움찌해졌다. 그가 대장이었던 것이다.
"물이 얼매나 짚은지 봐야제."
그 아이가 괭이를 거꾸로 들었다. 그리고 손잡이를 개울 가운데로 조심스럽게 넣었다. 괭이자루는 반 넘게 들어가다가 멎었다. 그 아이는 몇번 위치를 옮겨가며 손가늠을 해보고 괭이자루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제 다리에 대보았다. 괭이자루의 물 묻은 끝은 그의 무릎에 이르렀다.
"되았다. 여그서 한바탕 허자."
그 아이는 만족스러워하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 아이는 개울 위아래를 둘러보더니 여그 하면서 괭이로 한번 찍고, 두 다리를 짝짝 벌려 한 20보쯤 걸어가더니 또 여그 하며 괭이로 표시를 했다. 그건 보를 막을 위치를 정한 것이었다. 곧바로 아이들은 일을 시작했다. 두 아이가 삽과 괭이를 가지고 개울가를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삽질과 괭이질을 아무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큼직한 풀뿌리와 함께 뒤엉켜 있는 흙은 흡사 흙벽돌처럼 네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건 물속에서 흙이 허물어 내리지 않게 해서 보를 빠르고 단단하게 막으려는 지혜였다. 두 아이가 풀포기 벽돌을 떠 놓으면 다른 아이들은 그것을 부지런히 아까 표시해 놓은 양쪽 위치에다 옮겼다. 그 작업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아이들의 이마와 콧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 일을 마친 아이들은 셋씩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한쪽에 두 명씩이 바지를 허벅지까지 단단히 걷어 올리고 조심조심 개울물 속으로 들어섰다. 양쪽에서 보막기가 동시에 시작된 것이었다. 고기가 도망가지 못하고 가운데로 몰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양쪽의 보가 물 위로 솟겼다. 그런데 위쪽의 보가 한 뼘 이상 높았다. 보안의 물을 퍼내는 동안 흘러 내려오는 물이 넘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보막기가 끝나자 아이들은 제각기 그릇을 들었고, 밖에 있던 두 아이도 물속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들은 맹렬한 기세로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그 일을 하기까지 허튼 소리를 한 아이는 하나도 없었고, 그들은 철저한 협동작업을 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잡은 고기를 똑같이 나누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이제 땀을 뻘뻘 흘리며 물을 퍼내고 있었다. 보 안의 물이 반나마 줄어들고 개울가 양쪽에 진흙이 드러나면서 고기들이 수면으로 푸득푸득 튀기 시작했다.
와아아
야아아
아이들은 마침내 환성을 터뜨렸다. 개울 바닥의 진흙이 다 드러나도록 물을 퍼낸 아이들은 마음 놓고 떠들어대며 고기잡이에 정신이 없었다. 손바닥만큼씩 한 붕어가 진흙탕 여기저기서 펄떡거렸고, 팔뚝보다 더 굵고 큰 메기들이 진흙을 파고들며 숨거나 개울둑에 판 굴속의 진흙탕에 없는 듯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아이고 미끄러라!"
메기를 잡았다가 놓치는 아이가 소리쳤고
"워메 기운 씬거!"
그릇에 담겼다가 튀어오르는 메기를 되잡는 아이의 외침이었다.
아이들은 붕어는 쉽게 잡았지만 미끄럽고 기운 센 메기를 잡느라고 옷이 진흙투성이가 되어갔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냥 신바람이 나기만 했다. 고기를 잡아가기만 하면 옷을 더럽힌 것쯤 어머니가 못 본 척했고 아버지는 껄껄걸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장만하는 붕어 졸임이나 메기매운탕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메기 숨은 놈 더 없능가 찬찬히 절덜 봐!"
몸집 큰 아이의 외침이었다. 메기는 못생긴 것에 비해 아주 영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이제 곧 보를 튼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메기 지놈이 숨으면 어디 숨을 것이여."
"하먼, 지놈이 숨어봤자 우리 은 눈얼 끝꺼정 속일 수야 있간디."
"근디 참 요상헌 것이 한 가지 있드라."
"머시가?"
"우리 고향서넌 성님덜이 고기잽이헐 직에 보먼 붕어고 메기고 벨라 크덜 안큭는디 여그 만주 것덜언 어찌 이리 큰지 몰르겄어."
"아이고 빙신, 고것도 몰르냐?"
"니넌 아냐?"
"그려, 안다. 여그가 만주닝게 그러제 어째."
"니가 빙신이다, 좆겉은 놈아. 고것도 대답이라고 허냐?"
"하 씨팔놈, 누구보고 좆겉은 놈이여, 좆겉은 놈이. 우리 아부지가 그랬는디도 좆겉은 놈이냐!"
"머시, 느그 아부지가 그러셨어? 글먼 나가 잘못큭다."
아이들은 마지막으로 진흙탕 속을 손발로 헤집고 더듬어대면서 이렇듯 신명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야 이 조선 놈의 새끼들아!"
그때 갑자기 터진 중국말 고함이었다.
"이 새끼들이 건방지게 어디서 떠들어대."
또 다른 고함이었다. 아이들은 깜짝 놀라 일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개울둑에는 두 청년이 버티고 있었다.
"이 새끼들, 당장 올라와!"
한 청년이 빠르게 손짓했다.
"빨리빨리 못해!"
다른 청년이 발길질을 했다. 아이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그저 두 청년의 사나운 기세에 눌려 비실비실 둑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중국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요런 조선 놈의 새끼들아, 똑바로 줄 서!"
발길질했던 청년이 좌우로 손짓했다. 겁난 아이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고기들이 든 그릇을 꼭 끌어안으며 눈만 뒤룩거렸다.
"요런 일본 놈 주구 새끼들아, 이렇게 줄 서란 말야, 줄!"
다른 청년이 먼저 올라온 두 아이의 따귀를 사정없이 올려붙이며 옆으로 나란히 세웠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은 눈치빠르게 그 옆으로 늘어서기 시작했다.
"이 일본 놈 주구 새끼들아, 우리 농토 뺏은 것도 모자라 고기까지 네놈들 것인 줄 아냐."
그 청년은 나머지 아이들의 따귀를 찰싹찰싹 때려 나갔다.
"이봐, 그것 가지고 돼? 이 새끼들 버릇을 뜯어 고칠려면 전부 물속에 다 처박아야 돼. 저쪽으로 옮기게 해."
다른 청년이 독 오른 얼굴로 턱짓했다.
"그래, 그것 좋다. 이 새끼들아, 저쪽으로 옮겨!"
그 청년이 또 아이들의 따귀를 빠르게 갈겨대며 왼쪽을 손짓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가라는 거인 줄 알고 내뛰기 시작했다. 그쪽이 자기네들 집이었던 것이다.
"저새끼들 잡아라!"
"저것들이 도망을 가!"
두 청년이 소리치며 아이들을 뒤쫓았다. 한 아이가 여지없이 넘어졌다. 찌그러진 양철그릇이 나뒹굴어지면서 고기들이 쏟아졌다. 붕어며 메기들이 푸득푸득 뛰었다. 아이들은 곧 잡히고 말았다.
"이 주구놈의 새끼들이 도망을 가!"
"그 애비에 그 새끼들이야!"
두 청년은 아까보다 훨씬 더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리고 아이들은 사정없이 걷어차며 떠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고기가 든 그릇을 안은 채 뒤로 벌렁벌렁 넘어가 개울물에 처박히고 있었다.
"아이고, 고기!"
"워메, 내 고기!"
아이들은 물을 뒤집어쓰고 허우적거리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으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두 청년은 물에 빠진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통쾌하게 웃어대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고, 또 어떤 아이들은 더 뒤쫓지 않았다.
두 청년이 말끝마다 일본 놈의 주구 새끼들이라고 욕을 해댄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만척에서는 조선사람들을 북만주로 이민시키면서 관동군과 짜고 중국 사람들의 농토를 시가의 10분의 1 정도만 주고 빼앗았다. 총을 들이댄 강압에 중국 사람들은 억울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만척에서는 그 땅에다가 집단 부락을 짓고 조선사람들에게 농사를 짓게 했다. 만척에서 굳이 중국 사람들의 농토를 빼앗아 조선사람들에게 농사를 짓게 한 것은 조선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군량미로 쌀을 필요했다. 그래서 밭농사밖에 지을 줄 모르는 중국 사람들을 몰아내고 논농사에 능한 조선사람들을 채운 것이었다. 그 속임수 강제이민이 논농사 많은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그 까닭이었다. 이주한 조선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밭을 논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농토를 빼앗기고 가난뱅이가 된 중국 사람들은 일본사람들만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군의 보호를 받아 가며 자기네 땅에 농사를 지어먹고 있는 조선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조선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엄연히 일본군의 감시를 받으며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데도 중국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조선사람들이 일본군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참 큰일이다..."
"예삿일이 아니시, 아그덜헌티꺼정..."
아이들의 말을 전해 들은 어른들은 무거운 한숨들만 쉴 뿐이었다. 어른들은 그 까닭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37. 신탁통치설
식단 중앙에는 태극기가 구심살 하나 없이 반듯하게 부착되어 있었다. 태극기는 그 아래 앉아 있는 사람들이 왜소해 보일 마큼 엄청나게 컸다. 시단 앞면의 천장에서부터 드리워진 길고 폭넓은 현수막에는 신탁통치설 비판 자유한국인대회라고 큼직큼직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 커다란 태극기는 마치 나를 신탁통치해? 안돼, 절대로 안돼하며 엄하게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식장에는 3백여 명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여자들도 꽤나 많았다. 그들은 모두 숙연하고 엄숙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단상의 태극기가 유난히 큰 것은 그들의 마음의 표현인지도 몰랐다.
"만장하신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신탁통치설비판 자유한국인대회를 개최하겠습니다. 다같이 기립하시어 단상의 태극기를 향해 국기에 대한 배례를 올리겠습니다. 일동 기립!"
사회자의 말에 따라 식장의 모든 사람들이 일어섰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그들은 다같이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다 올렸다. 투명한 고요 속에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더욱 숙연하고 엄숙해져 있었다.
"바로! 다음은 애국가 봉창이 있겠습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지휘봉을 들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 남자는 단상 앞쪽 중앙에 자리잡고 서더니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시이작!"
모든 사람들은 지휘자에 맞추어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애국가는 1절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2절을 부르고 다시 3절로 넘어갔다. 어떤 여자들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고, 노랫소리는 갈수록 우렁차면서도 슬픈 음조가 강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애국가를 4절까지 다 불렀다. 오늘만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공식적인 예식에서는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도록 되어 있었다. 4절까지 부르면서 조국의 독립을 생각하고 투쟁의 의지를 북돋우고 단결의 화합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다음은 독립투쟁의 전선에서 혁혁하게 싸우시다 장렬하게 순국하신 독립투사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올리겠습니다. 다같이 묵념 시작!"
깊은 침묵이 장내에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 기억들을 따라 비로소 목이 메고 있었다. 빠르게 스쳐 가는 얼굴, 얼굴들은 수국이 누나에서 멈추어졌다. 수국이 누나는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렸다.
"바로! 예, 모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리에 앉은 모든 사라믈의 얼굴은 경건하고도 침통했다. 그들은 모두 독립투쟁과 직접 관계되는 사람들이었고, 남의 나라 땅 중국 중경에서 올리는 국민의례였던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오늘의 본행사 첫 번째 순서로 신탁통치설 비판 자유한국민대회 추진위원장님의 인사 말씀이 있으시겠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중반의 남자가 연단에 나와 섰다. 보통 키에 마른 편인 그 남자의 얼굴에는 고난에 찬 삶의 역정을 말하는 듯 굵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 모습을 얼핏 보면 시들고 지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만장하신 여러분, 오늘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현하 세계정세는 독일과 일본을 적으로 하고 중국 영국 미국 불란서를 중심으로 연합국 사이에 대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여러분들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진작에 대일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우리 청장년들이 이 전쟁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거도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심히 유감스러운 설이 들려 우리 조선인들을 분노케 하고 실망케 하고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신탁통치설입니다. 그건 연합국 중의 두 나라 대표인 영국의 처칠 수상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종정 후 처리 문제 중의 중대사인 아세아와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의 무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의 신탁통치란 무엇입니까! 일본이 패망하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연합국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건 우리 민족이 스스로 국가를 세울 능력도 없고, 국가를 운영할 자질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강대국의 일방적인 횡포이며, 처칠과 루스벨트의 무지를 백일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재론할 여지도 없이 신탁통치란 우리나라를 또다시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음모이며, 우리 민족에 대한 모독인 동시에 조선인들의 자존심을 능멸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석달 전인 2월에 임정의 조소앙 외교부장께서 비판의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족하지 않아 우리는 좌시할 수 없어서 오늘 이렇게 비판대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자를 통하여 신탁통치의 부당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신탁통치를 절대 거부하는 조선인들의 불굴의 결의를 만천하에 밝히고, 그리하여 처칠과 루스벨트가 자신들의 무지를 자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기탄없는 비판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이상으로 인사의 말씀을 갈음하고자 합니다."
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손 모아 박수를 쳤다.
"추진위원장님의 인사 말씀이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대한민국 신탁통치설 비판의 순서로 들어가겠습니다. 첫 번째 비판자는 이동광씨입니다."
40대 중반의 건장한 남자가 연단에 나섰다. 짙은 눈썹와 큰 입이 야성을 풍기고 있었다.
"불초 소생은 나이 스물에 압록강가을 건넌 이후로 26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러 가지 고초도 겪고 분한 일도 많이 당해습니다만 오늘처럼 죽고 싶도록 분통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더라고 한편인 줄 알았던 연합국들이 우리 조선을 신탁통치한다니 이 어인 일입니까. 좋습니다, 너희들이 나라를 빼앗겼으니 나라를 다시 세울 능력도 없고 또 나라를 지탱해 갈 자질도 없다, 그런 뜻인 모양입니다만 그건 천만의 말이올시다. 첫재 알아두어야 할 것은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친일파 조정대신 놈들이었지 백성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는 자그마치 반만년인 5천 년에 이르고, 그 장구한 세월 동안에 많은 독립된 국가를 세우고 운영해 온 확실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매국노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장 33년 동안 조선의 백성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왜놈들과 피흘려 싸워오고 있고, 싸우다 죽어간 분들만도 백만 숫자를 넘습니다. 넷째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 민족은 거족적인 3.1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계기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엄연히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시 봅시다, 나라를 세울 능력이 없고 나라를 지탱해 갈 자질이 없는 민족이 5천 년의 독립된 역사를 보유할 수 있는 것입니까. 또, 나라를 세울 능력이 없고 나라를 지탱해 갈 자질이 없는 민족이 폭압과 살육을 밥 먹듯이 하는 일본 놈들을 상대로 33년 동안이나 피어린 투쟁을 끈질기게 전개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나라를 세울 능력이 없고 나라를 지탱해 갈 자질이 없는 민족이 그 어느 나라의 경제적 원조도 없이 24년 동안이나 자력으로 망명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사실이 이렇듯 엄연한데 신탁통치라니 그 무슨 망발입니까! 연합국의 수뇌들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강대국의 자만에 빠져있지 말고 두 눈 똑똑히 떠서 조선 민족의 역사와 조선사람들의 심중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노력과 성의를 보이지 않고 신탁통치를 강행하게 되는 경우에는 조선사람들 전체는 연합국을 일본과 똑같은 적으로 간주해서 제2의 독립투쟁을 전개하게 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해 두는 바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에 관한 것입니다. 그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현재의 연합국들을 중심으로 해서 세계 여러 나라에 수없이 승인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연합국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일본과의 관계 때문에 기피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연합국이 결성된 이상 일본은 우리 대한민국과 연합국의 공적인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연합국은 신탁통치 같은 망상을 하루빨리 철회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마땅히 승인하여 3천만 조선 민족을 동지로 삼을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이상으로 소생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옳소, 옳소!"
"옳소, 명비판이오!"
"최고요, 최고!"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며 열렬하게 박수를 쳐댔다.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박수 소리를 따라 장내의 열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저 사람 누구지요?"
송가원은 박수를 치며 방대근에게 물었다.
"아, 3.1운동 적에 학생 대표로 나섰다가 상해로 온 사람이오."
"그럼 민수희 여사하고 같은 경력의 소유자로군요."
"아, 그런 셈이오."
"그 후로는 임정에서 일했나요? 많이 배운 것 같은데."
"저 사람이 임정서 공부시킨 사람들 중에 하나요."
"임정에서 공부를 시켜요?"
"그적에 공부럴 다 마치지 모허고 상해로 온 학생덜이 많었는데 그중이서 머리 존 학생덜얼 골라 김구 주석이 학비를 댄 것이오. 나가 상해에 있을 적에 저 사람은 영어럴 잘허기로 소문나 있었소."
"김구 주석께서 인재들까지 길러내셨군요."
송가원은 처음 듣는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있었다
"그적에 반대헌느 사람덜도 있었다는 디, 앞을 내다보신 것 아니겄겄소. 그렁게 이리 잘 써묵덜 않소."
긴 박수소리가 끝났다. 여자 한 사람과 남자 한 사람이 더 비판 연설을 했다. 그때마다 열렬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면 이상으로 비판연설을 마치고 우리 3천만 민족의 결의를 나타내는 구호를 삼창하기로 하겠습니다. 모두 힘차게 복창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마링 끝나자 한 젊은이가 단상 앞으로 나섰다.
"대한민국 3천만 민족의 결의를 합쳐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삼창하기로 하겠습니다. 신탁통치 결사반대!"
일어선 사람들이 모두 외쳐대며 팔을 치뻗어 올렸다.
신탁통치 결사반대!
신탁통치 결사반대!
목소리들이 더 우렁차게 커졌다.
신탁통치 결사반대!
신탁통치 결사반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박수가 터져 올랐다.
"우리의 이 열렬한 외침이 오늘 발표된 비판연설문들과 함께 연합국 수뇌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순서로 만세 삼창이 있겠습니다."
추진위원장이 연단으로 나왔다.
대한독립 만세에!
대한독립 만세에에!
한국광복군 만세에!
한국광복군 만세에에!
연합국 승리 만세에!
연합국 승리 만세에에!
"이상으로써 신탁통치설 비판 자유한국인대회를 전부 마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났지만 사람들은 부동자세로 서 있을 뿐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정면 단상의 태극기였다. 그 모임은 임정의 간부들이나 광복군의 간부들이 관여하지 않은 조선 사람들의 순수한 뜻이 합쳐진 것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 더구나 중경까지 와 있는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독립투쟁에 헌신하고 공헌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3천만 조선 민족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히 지나칠 것은 없었다.
식장을 나선 방대근 일행은 가까운 음식점을 찾아갔다. 점심때가 다 되어 있었다.
"참 분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묘하군요."
중국식 둥근 탁자에 모두 자리를 잡자 민수희가 말했다. 그녀의 눈가장자리에는 아직도 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판이 어찌 될란지 참 큰일이오."
방대근이 담배를 꺼내며 한숨을 쉬었다.
"저걸 보내면 좀 효과가 있기는 있을까?"
윤주협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까 구호를 외칠 때 사진도 찍었으니 그걸 보면 그 사람들도 달라지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민수희의 말이었다.
"글씨..., 배불른 놈이 배고픈 사람덜 사정 아는 법 없는 것잉게."
방대근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쓰게 웃었다.
"예, 그럴 확률이 큽니다."
송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쩌지요? 괜히 헛일만 하는 거 아니에요."
민수희가 안타깝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로선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요. 이것도 독립운동의 한 방법이니까요."
송가원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대국이란 게 다 그 모양이라. 결국 개인이고 국가고 힘없는 쪽만 억울하고 서러운 거야."
윤주협이 한숨을 쉬었다.
"참, 고것이 그리만 안됐어도..."
무슨 생각인가를 하고 있던 방대근이 불쑥 말했다.
"뭐가 말인가?"
윤주협이 눈길을 돌렸다.
"광복군 말이시. 광복군이 시방 5천 명만 됐어도 요 일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란 말이시. 시기가 안 맞어서 그런 것인디, 왜놈덜이 한 3년만 일찍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만주 동북항일 연국 조선병력얼 이짝으로 이동시켜서 광복군얼 맨글었으먼 연합국도 우리럴 무시 못헌단 말이시. 그런디 시가가 안 맞어 만주서 수천 명 아깝게 죽어가고 인자 광복군 3백여 명이니 강대국덜이 우리럴 무시 안헐 수가 있겄능가. 다 사후 약방문이기넌 헌디."
방대근이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감았다. 담배를 든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예, 그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5천 명은 안 되더라도 2,3천 명만 있어도 달라지겠지요. 힘에는 힘밖에 효과를 내는 게 없으니까요. 연합군이 동남아 전선에서 우리 병력을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임정을 승인할 수 있고, 정부를 승인한 상태에서는 신탁통치니 뭐니가 나올 수가 없는 일이지요."
송가원의 말이었다.
"그럼 이런 사태에 대비하지 못한 임정의 잘못도 크지 않소?"
윤주협이 정색을 했다.
"아니시, 이 일언 그 누구도 어쩔 수가 없느 일이시. 일본이 그리 비밀리에 전쟁을 일으킬지 몰르고 미국도 당헌 판 아닌가. 우리넌 그간에 도처에서 최선얼 다해 싸운 것이고, 인자 새 싸움에 지면헌 것이나 알먼 되네."
방대근이 이야기를 정리하듯 말했다.
"참 옥비 씨, 얼마 전에 말한 부인회 있잖아요, 곧 재건대회를 갖게 될 거예요. 꼭 가입하도록 하세요."
민수희가 말머리를 돌리며 옥비를 건너다보았다.
"지가 무신..."
그때까지 없는 듯 앉아 있던 옥비는 부끄럽게 웃었다. 머리모양이며 옷이 완전히 중국식이었다. 남자들도 그렇듯 여자들도 철 따라 한복을 갖춰 입기 어려운 형편 때문이었다. 그런 옥비의 모습은 천상 중국 여자였다.
"아니에요, 부인회에는 옥비 같은 분이 꼭 필요해요. 그 특출한 재주로 회원들의 마음도 좀 위로해 주고, 학예반에서 아이들도 좀 지도해 주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요. 송 선생님, 웃고만 계시지 말고 응원을 좀 하세요."
민수희는 송가원을 쳐다보았다.
"예, 저는 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죠, 옥비 씨? 명창으로 무대에 많이 서셨을 것이니 부끄러워서 그럴 리 없고, 만주서 항일연군으로 투쟁하셨으니 애국심이 약해서 그럴 리 없고, 뭐가 맘에 안 드는 게 있으세요?"
민수희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옥비에세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아, 아니구만요. 애기가 안직 에래서..."
옥비는 수줍게 웃었다.
"아아, 지극한 모성애 때문에 그렇군요. 그건 염려 안 하셔도 돼요. 평소에는 애도 데리고 나와서 세상 구경도 좀 시키시고, 애를 떼어놓고 해야 될 행사에는 당분간 빠지면 되니까요. 어떠세요?"
민수희는 그 성격답게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그거 괜찮은 방안인 게 가입허는 것이 좋겄소. 여그서 조선사람으로 그저 손 놓고 있어서넌 안 된 게."
방대근의 나직한 말이었다.
"예에..."
옥비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 방 대장님, 무슨 마술 부리세요? 제 권유는 그렇게 안 듣는데 어찌 그리 한마디로 해결을 지으시나요?"
민수희가 어리둥절해했다.
"여보, 방 대장님하고 당신하고가 어디 같소? 방 대장님은 그야말로 옥비 씨의 대장님 아니오. 항일연군, 그게 어디 예사 군대요. 이 세 분들 손에 남아 있는 동상 흉터를 보시오. 이 흉터가 남아 있는 한 이분들은 영원히 항일연군이란 걸 알아두시오. 허허허..."
윤주협의 농담 같은 말이었다.
"어머, 그렇군요. 방 대장님하고 당신이 영원히 의열단인 것처럼."
민수희가 의미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옥비는 탁자 아래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만주의 설한풍 몰아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환자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자신이 부르는 입속의 노래를 듣고 눈물 글썽이며 좋아하던 환자들, 그들 중에 몇 사람이나 살아남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어떻게 그 추위와 위험 속에서 견디고 살아났는지 언제 생각해도 꿈만 같았다. 모든 것이 생시 같지가 않은 데 한 가지는 확실한 것이 있었다. 송가원을 의지하고 믿은 것이었다. 그가 있기만 하면 그 어떤 고초든 참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앞으로가 참 큰일이오. 지원병이라고 허는 조선청년덜이 왜놈덜 전선에 배치되고 있는디. 기맥히게도 동족상쟁얼 허게 생겼시니."
방대근이 쓴 입맛을 다셨다.
"지원병은 또 그렇지만, 곧 징병제가 실시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더 많은 청년들이 끌려올 텐데 그때는 정말 동족상쟁의 비극을 피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송가원의 침통한 말이었다.
"나가 알아보닝게 지원병이라는 것도 태반이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라고 헐 수가 없는 것이 문제요. 왜 그런고 허니, 살기넌 에롭고 돈언 준다고 허고 헝게 가난헌 소작인 자석덜이 나슨 경우가 너무 많으요."
방대근이 혀를 찼다.
"그럼 그만 일어나 보실까요."
민수희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거 점심이 너무 부실해서 죄송합니다."
송가원은 돈을 치르려고 먼저 일어났다.
"임정 간부덜도 점심 굶는 날이 많은디 이만허먼 성찬이오."
방대근이 대꾸하며 잔에 남은 물을 마저 마셨다. 그들이 한 식사는 면 종류로 간소했다. 음식점을 나와 방대근과 윤주협이 짝지어 떠났고, 옥비는 아이가 기다린다며 발길을 서둘렀다. 송가원과 민수희는 병원으로 향했다.
"방 대장님은 생각보다도 용케 혼자 잘 견디시네요."
민수희가 멀어져 가는 방대근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아직도 방대근을 결혼시키지 못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평생 그렇게 살아오신 분이니까요. 저런 분들은 오히려 누구하고 함께 사는 걸 불편해하실 겁니다."
송가원이 말하는 저런 분들이란 아직까지도 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몇몇 의열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천상 타고난 투사들이지요. 저런 분들이 신탁통치설을 듣고 어떤 심정일까를 생각하면 막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요."
"예, 그 흉금을 형용할 수가 없겠지요. 윤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너무 분해하면서 자꾸 술만 마시려고 해요."
"당연하지요. 나 같은 사람이 감정을 주체하기 어렵게 분한데 평생 혈투를 벌여온 분들 심정이야 오죽하겠어요. 가끔 술 좀 드시게 하세요."
"후원금 낼 돈도 모자라는걸요. 근데 한 가지 의문이 있어요. 혹시 우리나라가 독립을 해도 나라를 지탱해 갈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닌가요? 30여 년 동안 능력 있는 분들이 너무나 많이 희생되어서 말이에요."
"아 예, 그거 좀 특이한 발상이군요. 그동안 유능한 분들이 너무 많이 희생된 건 사실이지요. 그러나 신학문을 통헤 배출된 지식인들이 그동안 또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알기로 국내와 만주의 감옥에 갇혀 있는 분들만 2만이 넘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 타협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중국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합하면 또 2만 명은 될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대학과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식민지의 역사를 체험하고 자각한 대중들이 있습니다. 타민족의 지배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대중들의 역사체험과 자각은 우리 민족이 3백 년, 아니 3천 년을 굳건히 설 수 있는 더없이 튼튼한 지반이 될 것입니다.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말자는 전민족적 결의와 결속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를 보존해 나가는 데 4만여 명의 지식층은 너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그 점에 대해서는 낙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머, 전문가가 따로 없으시네요. 지금 말씀하신 측면에서 송 선생님이 오늘 비판자로 나섰더라면 참 좋았을 걸 그랬어요."
민수희는 걸어가면서 정색을 하고 송가원을 쳐다보았다.
"아이, 무슨 말씀을..."
송가원은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저는 또 한 가지 걱정이 있어요. 연합국이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하는 걸 보면서 일본이 전쟁에서 질 거라는 건 확신하게 되는데, 우리가 해방이 되고 나라를 세우면 그 많은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들은 다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기거든요."
"다 죽여야지요."
거침없이 터져나온 송가원의 목소리는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네에?"
민수희는 깜짝 놀라 송가원을 쳐다보았다.
"왜 그리 놀라십니까?"
송가원의 얼굴은 냉정했다.
"그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
"예, 대충 백 50여 만이라고 보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을 다..."
"많은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 두 배, 3백만이라도 다 죽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놈들은 왜놈들과 함께 동족을 살해한 공동살인범들이기 때문이고, 민족 전체를 박해하고 고통 속에 몰아넣은 공동가해자들이기 때문이고, 그놈들이 훼손시킨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그놈들이 짓밟은 민족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 이후 지금까지 도처에서 죽어간 동포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줄잡아 3백만이 훨씬 넘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다 죽이는 게 수가 너무 많습니까? 그건 왜놈들이 죽였지 그들이 죽인 게 아니라고 말하진 맙시다. 그건 해방이 되는 날 바로 그놈들이 하게 될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변명이니까요. 물론 그놈들 중엔 직접 죽인 놈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놈들도 있지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들 모두가 왜놈들의 살육에 가담한 공동살인범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민 선생도 3.1운동의 선봉에 섰으니까 잘 아시겠지만 그 때 총질을 하고 고문을 한 게 왜놈 순사와 형사들뿐이었습니까? 그때의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2년 전인 41년에 임정이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게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들에 대한 가차 없는 처벌을 첫 번째로 꼽은 점입니다. 그 문제의 처리는 독립투쟁만큼 중요합니다."
송가원의 뇌리에는 아버지와 함께 항일연군 전사들의 모습모습들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네, 알겠어요. 전 역시 여자의 한계를 못 벗어나나 봐요."
민수희는 마치 수술실에서 의사의 지시를 받는 간호원 같은 태도로 말했다.
"아닙니다. 여자의 한계라기보다 인정이 너무 많은 거지요. 인정은 선인에게 베풀 때 선이지 악인에게 베풀면 악이 될 뿐입니다."
"..."
민수희는 가슴 서늘함 느끼고 있었다. 송가원이 의지가 굳고 절도가 있는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가혹하리만큼 단호한 의식을 품고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기는 그런 의식 없이 편안한 의사 생활을 버리고 항일연군으로 뛰어들었을 리 없기도 했다. 항일연군의 가열찬 투쟁은 관내에까지 잘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방 대장님은 요새도 맡으신 직책이 없으신가요?"
민수희는 좀 가벼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저 광복군 노병이지요 뭐."
"참 대단하신 분이에요. 어찌 그리 직위에 초연할 수 있으신지."
"글쎄요, 속이 넓은 분이지요."
민수희가 말하는 것은 광복군 개편 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는 작년 5월에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그에 따라 광복군은 개편되면서 간부들의 변동도 생기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양쪽의 갈등이 야기되었다. 그런데 투쟁경력이 그 누구보다 혁혁한 방대근은 제일 먼저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자리다툼에서 물러서고 말았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능력대로 일을 맡아야지요."
송가원은 힐책하듯이 말했다.
"나가 송 선생 춘부장 어런신얼 왜 높이 받드는지 아시오? 그 어러신언 당신으 능력얼 알아보고 기는 직책언 맡으셨어도 감투럴 탐해 암투럴 벌인 적은 한번도 없으셨기 땜시오. 그러고 아랫사람덜헌티도 하찮은 감투에 연연히서 대의럴 그르치지 말라고 갤치셨소. 나가 그 가르침얼 어겨야 되겄소?"
방대근이 지그시 웃으며 한 말이었다. 송가원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방대근은 평복 차림처럼 아무 직책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비밀감찰대장이었다. 그에게 맡겨진 그 직책은 어느 조직표에서도 찾을 수 없이 그야말로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중경에 잠입하고 있는 첩자나 밀정들을 색출해 내는 것이 그 조직의 의무였다. 그래서 송가원마저도 그가 광복군의 노병인 줄만 알고 있었다.
방대근은 며칠이 지나 송가원한테서 연락을 받았다. 허진이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윤주협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허진은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폐결핵 합병증으로 입원한 그는 혼자 외롭게 세상을 떤나 것이었다.
"하루쯤 일찍 가르쳐주지 그러셨소."
윤주협이 원망스러운 듯 송가원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인체란 워낙 예측하기 어렵고..., 아닙니다, 제가 서툴러서 그렇습니다."
송가원이 죄진 듯 고개를 숙였다.
"아니오, 그런 뜻이 아니오. 하도 허망해서 그냥 하는 소리요."
윤주협이 당황해서 송가원의 팔을 붙들었다.
"자네 맘 허망하다고 그간에 애쓴 의사 선생 입장 난처허니 맨글지 말어. 가세, 장례준비허로."
방대근이 걸음을 떼어놓았다.
"참, 사람은 죽어도 백화는 나만이군."
현관을 나서던 윤주협이 걸음을 멈추었다. 병원은 넓은 마당에는 눈부신 햇살이 가득했고, 담을 따라 가꾸어진 화단에는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인생무상이제..."
방대근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참, 자네 허진이가 시 썼던 것 알지?"
윤주협이 무슨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그려, 시 써서 여자덜 꾀고 그랬제."
"인생은 무상하다. 그러나 역사는 치열하다. 식민지의 슬픈 역사 위에 나는 불붙어 타고 싶은 하나의 가랑잎. 이런 시 기억하나? 허진이가 쓴 거야."
"참, 기억력도 좋네."
"기억력이 좋은 게 아니라 상해 있을 때 우리 심정을 얼마나 잘 나타냈나. 그래서 한번 읽은 뒤로는 영 잊혀지지가 않아."
"그렇구만. 아조 절절헌 맛이 있네."
"이렇게 저렇게 하나하나 떠나가고 이제 신흥무관학교 출신은 몇 안 남았네."
신흥무관학교!
그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노병갑이었다. 살려달라면서 벽쪽으로 밀려가던 그 겁에 질린 모습. 그 모습은 가끔 꿈에 나타나고는 했었다. 절친한 친구 중의 하나였는데 살려줄 길이 없었다. 언젠가 술을 마시고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윤주협이가 노병갑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했었다. 그러나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방대근은 노병갑의 이야기를 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지우고 말았다. 그렇다고 마음의 괴로움이 가실 것도 아니었고, 노병갑의 잘못이 고쳐지는 것도 아니었다.
"가세."
방대근은 먼저 계단을 내려섰다.
"단장님한테 연락부터 해야 되지 않겠나?"
윤주협은 한 계단 뒤에 따라오며 말했다. 그가 말하는 단장이란 김원봉이었다. 김원봉은 이제 광복군 부사령관이었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오래 입에 붙은 대로 그저 단장이었다. 김원봉이 의열단 단장이 된 이후 여러 차례 그 직함이 바뀌었지만, 직함 앞에 부자가 붙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임정에서는 그동안 배척해 왔던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들을 수용하기로 태도를 바꾸었고, 그 실현은 광복군 개편으로 나타났다. 모든 이념이나 정파의 통합은 김원봉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추진해 왔던 바라 그는 광복군 부사령관의 직책을 흔쾌히 수용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광복군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들이 각자의 이념을 초월하게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자고 한 덩어리로 뭉친 통합체였다.
"기왕 떠나부렀응게 이따가 일과 끝나고 허는 것이 낫제. 허진이도 일에 방해되는 것 원허덜 않을 것잉게."
방대근이 정문을 나서면서 말했다. 윤주협은 그 예사로운 것 같은 말에서 가슴 섬뜩한 것을 느꼈다. 그 말은 상급 간부가 하는 독립의 일은 잠시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냉정이었다.
한편, 하와이에서 한 달을 넘겨 중경에 도착한 6명의 지원자들은 그동안 군사훈련을 마치고 광복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땅 하와이에서 온 이색적인 존재로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고, 그 멀고 먼 땅 하와이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러 온 애국심은 광복군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능력이 실질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과 인도 주둔 영국군 동남아전구사령관 마운트마트 대장이 체결하는 상호 군사협정 과정에서 그들은 영어회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38. 승자와 패자
지하 취조실은 어둠침침했다. 열댓평 남짓한 지하실 천장에는 촉수 낮은 알전구가 대롱거리고 있었다. 알전구에서 나오는 빛은 지하실의 어둠을 쫓기에는 너무 미약했다. 가운데서 밀린 어둠은 사방 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다. 지하실에는 출입문 이외에는 창문 하나 나 있지 않았다. 아무런 칠도 되어 있지 않은 벽들은 시멘트의 맨살 그대로였다. 그런데 시멘트벽 여기저기에는 거무칙칙한 색깔들이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그건 변색된 핏자국들이었다. 흐린 불빛과 거친 시멘트벽과 얼룩진 핏자국들로 지하실은 살벌했다.
그런데 지하실을 더욱 살벌하게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출입문 가까이에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맞은편 벽의 수도꼭지 아래는 커다란 나무물통이 놓여 있었다. 나무물통 옆벽으로는 투박하게 짠 폭 좁은 침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알전구가 대롱거리는 천장에는 굵은 밧줄 걸린 쇠고리가 박혀 있었다. 침대 옆으로 박힌 대여섯 개의 못에는 가죽 채찍이며 죽도, 밧줄 같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쪽 나무 의자에는 전깃줄이 사려져 있었다. 책상을 밴 그 모든 것들은 누가 보거나 한눈에 고문 기구들이었다. 아니 단 하나, 투박하게 생겼지만 두툼하게 담요가 갈린 침대가 그나마 살벌함을 조금이라도 가시게 해주고 있었다. 덜컹 쇳소리를 내면서 출입문이 열렸다. 푸르칙칙하게 칠이 변색한 출입문은 철문이었던 것이다.
"빨리 들어가"
일본말 외침과 함께 한 사람이 등을 떠밀리고 지하실로 들어섰다.
"에이, 이놈의 냄새."
한 남자가 투덜거리며 들어섰고, 그 뒤를 두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그 남자가 지하실로 들어섰을 때 왈칵 끼쳐온 것은 퀴퀴하면서도 찝찝하고 텁터그리한 냄새에다 눅눅한 습기였다.
"이런 냄새가 나야 지하실 맛이 제대로 나는 것 아닙니까"
뒤따르던 한 남자가 말했다.
"됐어, 자네들은 나가서 좀 쉬어, 내가 특급으로 먼저 한번 돌려볼 테니까."
앞장선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며 말했다.
"특급으로요? 자신 있으십니까?"
한 남자가 묘한 느낌으로 흐흐거렸다. 그 어조와 웃음은 상대방을 놀리는 것 같은가 하면 얕잡아보는 것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자신? 내가 그렇게 한심하게 보이나?"
앞장섰던 그 남자는 빠르고 싸늘하게 되물었다.
"아니 저어....... 그것이 아니고......"
그 남자는 당황해서 어물거렸다.
"이봐, 우리 계장님은 끄덕없어, 두셋도 한꺼번에 문제 없는데 저까짓 하나쯤이야, 자네 괜히 젊다고 으스대지 말어. 큰코다치니까"
다른 남자의 아부가 역역한 말이었다.
"싱거운 소리들 말고 어서 가서 쉬어, 하도 독한 년이라 밤샘을 해야 될지도 모르니까"
계장이라고 불린 그 남자는 빨리 나가라고 손짓했고, 두 부하는 고개를 꾸벅꾸벅 하고는 돌아섰다. 그 남자는 지하실 문을 잠갔다. 그리고 천천히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구두밑창 앞뒤에 박은 징이 시멘트 바닥을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지하실을 울리고 있었다. 구두밑창의 앞코 부분과 뒤축에 박은 반타원형의 은빛 쇠붙이는 비싼 구두를 오래 신으려고 고안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쇠붙이는 흙길, 아스팔트길, 시멘트 복도, 나무 복도에 따라 소리가 달라질 뿐 어디에서나 그 특유의 소리를 냈다. 그 쇳소리는 검은 스틱과 함께 신사요 멋쟁이의 상징이 된 지 오래였다. 그 남자는 여자의 눈을 가린 검은 천을 풀었다. 흐린 불빛 아래 드러난 여자의 얼굴은 다름아닌 최현옥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윤철훈과 헤어질 때의 모습이 별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일 뿐이었다.
"똑똑히 봐둬. 여긴 지하 고문실이다. 영리하고 똑똑하신 선생님이시니까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아도 저게 다 어떤 고문 기구들인지 잘 아시겠지, 아무리 독종들도 차례로 절반만 고문을 당하면 다 불게 마련이지. 가끔 진짜 독종들이 있어서 저 고문들을 다 거치고도 불지 않는 놈들이 있긴 하지, 그러나 그런 놈들은 여기서 죽어서 나가는 거야. 일단 여기 들어오면 두 가지 길밖에 없다. 순순히 불어서 나가는 길과 죽어서 나가는 길이다. 그건 알아서 선택하라."
일본말로 말하는 그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그런데 그 낮고 느린 말이 묘하게도 잔인하고 싸늘한 냉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남자는 담배를 뽑아 물고 성냥을 그었다. 그 불빛에 좀더 확실하게 드러난 그 얼굴은 바로 양치성이었다. 그는 이제 젊은 날의 모습은 간 곳 없이 늙어 있었다. 살이 좀 찌긴 했지만 얼굴에는 쉰 나이의 세월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고, 머리카락도 많이 빠져 반대머리가 되어 있었다.
"이봐, 난 여자 고문하는 것을 원치 않아. 순순히 불고 여기서 나가. 그리고 전향서 한 장만 써, 그럼 이 원산서 살기 거북할 테니까 평양이든 경성이든 원하는 대로 제일 좋은 학교로 보내주지.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이 왜 모르지. 사회주의 혁명이고 조선 독립이고 완전히 가망이 없다는 걸 말야. 지금 일본은 필리핀 싱가포르 미얀마 까지 다 장악했어. 이제 그야말로 아세아의 맹주야. 이게 너에게 베푸는 마지막 기회야. 순순히 대답해. 이주하가 어디 숨어 있지?"
양치성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최현옥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최현옥은 그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주하 어디 있지?"
양치성이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난 몰라요."
최현옥의 싸늘한 대꾸는 조선말이었다.
"말해, 어디 있지?"
최현옥은 고개까지 내저었다.
"이 썅년아, 대답해"
양치성이 마침내 고함치며 최현옥의 얼굴을 후려쳤다.
"........"
"이년아, 이주하 놈이 네년 남편이라도 되냐 어디 맛 좀 봐라."
양치성을 담배를 내팽개치며 최현옥의 옷 중간쯤을 움켜잡더니 힘껏 잡아챘다. 얇은 여름 브라우스가 북 찢어졌다.
"어머."
최현옥은 반사적으로 주저앉았다.
"이 썅년이 그래도 처녀라고 창피한 줄은 아네, 일어나"
양치성은 최현옥의 정강이를 여지없이 걷어찼다.
"엄마"
최현옥은 비명을 토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건 초보에 초보도 아니다. 일어나"
양치성은 최현옥의 뒤로 묶인 팔을 사정없이 잡아챘다.
"엄마아!"
최현옥은 또 비명을 토하며 일으켜세워졌다. 양치성은 밧줄 늘어져 있는 쇠고리 아래로 최현옥을 끌어갔다. 그는 숙달된 솜씨로 밧줄을 최현옥의 뒤로 묶인 손목 사이로 끼워 두 줄을 위로 잡아당겼다. 최현옥의 두 팡이 휘어져 들리면서 목은 앞으로 늘어지고 발뒤꿈치가 올라갔다. 최현옥의 발끝이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게 된 상태에서 양치성은 밧줄을 고정시켰다.
"다시 묻겠다. 이주하 어디 있나"
목이 늘어진 최현옥 앞에 버티고 선 양치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
최현옥은 늘어진 고개를 저었다.
"이런 개썅년!"
양치성은 벌컥 화를 내며 찢어진 옷을 다시 잡아챘다. 연보랏빛 원피스가 위아래 두 쪽으로 찢어지며 휜 속치마가 드러났다.
"제발....., 제발...."
최현옥은 울음 섞인 소리였다.
"그러니까 발가벗기기 전에 빨리 대답해, 어디 있나!"
"글세, 모른다니까요."
"이년아 지금 누굴 놀리나"
양치성은 소리를 빽 지르며 두 손으로 최현옥의 원피스 윗부분을 잡아 찢었다.
"이년아, 빨리 대"
양치성은 또 소리치며 최현옥의 속치마를 북북 찢어댔다.
"모르니까 모른다잖아요. 제발..."
최현옥은 울부짖고 있었다.
"이년아, 개소리 치지 마. 기억이 나게 해주지."
양치성을 최현옥의 젓가리개를 잡아챘다.
"엄마아!"
"불어!"
"......"
양치성은 길이가 허벅지의 중간쯤 닿는, 끝에 고무줄이 든 최현옥의 검정 팬티를 주루룩 끌어내렸다.
"엄마아!"
찢어진 옷들이 어깨에 발목에 걸린 채 최현옥의 알몸이 드러났다.
"빨리 불어!"
"......"
최현옥의 눈앞에는 이주하와 동지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주하의 은신처가 목을 치밀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 순간 최현옥은 이를 앙다물었다. 차라리 나 혼자 죽자! 혈서로 맹세했던 그날이 선하게 떠올랐다. <죽음을 택할지언정 조직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피로 쓴 문구였다.
"어서 대라니까!"
양치성은 두 손으로 최현옥의 젖가슴을 덥석 잡았다.
"....."
최현옥은 이를 갈아붙이며 부르르 떨었다.
"젖이 아주 예쁘구나. 빨리 불어!"
"...."
"이년 이거, 정말 안 되겠네"
양치성의 한 손이 최현옥의 불두덩 거웃을 움켜잡았다.
"엄마아"
최현옥은 울음을 터뜨리면 두 다리를 꼬아 붙였다.
"어디야? 어서 불고 여기서 나가"
양치성은 거웃을 슬슬 쓸어댔다.
"....."
최현옥은 이를 악문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또 은신처가 목을 치받쳐오르고 있었다. 안돼, 안돼. 이런 수법에 넘어가면 안돼. 이건 상투적인 수법일 뿐이야. 최현옥은 다시 동지들의 목숨과 혈서를 생각했다.
"이런 독한 년 봤나. 어디 보자!"
양치성은 침을 내뱉으며 최현옥의 뒤로 돌아가 밧줄을 풀었다. 몸이 축 처져내리자 최현옥은 몸을 바짝 웅크리며 쪼그려 앉았다.
"이년아, 일어나!"
양치성은 최현옥의 뒤로 묶인 손목을 사정없이 잡아채며 올렸다. 어깨가 꺾이는 고통을 줄이려고 최현옥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일으켜 세워졌다. 양치성은 최현옥을 침대 쪽을 우악스럽게 밀어댔다. 최현옥은 침대를 보는 순간 전신이 굳어졌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퍼뜩 깨달았던 것이다. 어머니, 살려주세요. 어쩌면 좋아요. 최현옥은 절박하게 부르짖으며 밀리지 않으려고 버티었다.
"하 기운 쓰네, 이까짓 병아리 기운 쓰지 말고 무서우면 어서 불어!"
양치성은 최현옥의 뒤에서 무릎으로 엉덩이를 걷어참과 동시에 손으로 등을 밀어제켰다. 최현옥은 곧 넘어질 것처럼 앞으로 밀려나가다 침대 위에 나뒹굴어졌다. 최현옥은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그러나 팔이 뒤로 묶여 있어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흐흐흐.... 아직도 생각이 안 나시나?"
양치성은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혁대를 풀었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제발...."
최현옥은 몸을 일으키려고 기를 쓰며 울먹거렸다.
"내 뜻이 아니잖아. 네년이 날 이렇게 만들고 있잖아. 빨리 불라니까"
양치성은 바지 앞단추를 따내리고 있었다.
"...."
최현옥은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흥, 그리 애쓰실 것 없어"
바지를 벗은 양치성은 최현옥의 얼굴을 쾅 밀어버렸다. 최현옥의 상체는 뒤로 벌렁 넘어갔다. 손이 뒤로 묶여 있어서 최현옥의 허리는 활시위처럼 휘어져 있었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말아요. 제발...."
최현옥은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버둥거리며 울부짖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놈 어디 있냐"
"저어.... 저어...."
은신처가 혀끝까지 밀려나왔다. 최현옥은 눈을 질끈 감으며 혀를 깨물었다. 안돼, 안돼. 정신차려. 최현옥은 스스로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동지들의 목숨과 조직의 파괴와...., 정조가, 처녀성이 그것보다 중요할 수는 없었다. 혈서를 썼을 때 목숨은 이미 내놓은 것이었다. 목숨에 비해 정조가 더럽혀지는 것은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가. 혈서는 강요에 의해 쓴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이년이 정말 쓴 맛을 봐야 아가리를 열겠군."
양치성은 최현옥의 두 다리를 쫙 벌렸다.
"정말 마지막이다. 빨리 불어"
양치성이 고함을 질렀다.
"....."
최현옥은 혀를 더 세게 깨물었다.
"이 썅년, 어디 맛 좀 봐라."
"으음..."
최현옥은 신음을 흘리며 발버둥질을 쳤다. 그러나 양치성의 숙달된 솜씨와 우악스러운 기운은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불어, 빨리 불어"
양치성은 흔들어대는 엉덩이에 장단을 맞추듯 소리치고 있었다.
"...."
"이 썅년아, 불어! 불어!"
양치성의 거치른 외침만이 지하실을 울리고 있었다.
"이년아, 이 독한 년아..."
양치성은 마른침을 내뱉으며 팬티를 꿰입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기분 나쁜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 일이 잘 풀려 이주하를 잡기만 하면 승진도 하고, 고향으로 전보 발령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 년이 특종 고문에도 굽히지 않은 것이었다. 저건 확실히 이주하의 은신처를 알고 있는 년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저년은 시집만 가지 않았지 이미 처녀가 아닌지도 몰랐다. 처녀로서 특종 고문을 이겨내는 년은 천에 하나, 만에 하나가 있을까 말까 했다. 아니, 처녀로서 특종 고문을 이겨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저년은 틀림없이 은신처를 알고 있는 년이다.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양치성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살찐 그의 얼굴에는 땀이 번들번들했다. 그는 담배를 빨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최현옥의 옆에 엉덩이를 걸쳤다.
"이 독한 년아, 눈떠. 이것으로 다 끝난 게 아니야. 지금부터 시작이야. 넌 결국 불게 될 거야. 다 죽게 되어 불지 말고 지금 불고 평양이나 경성에 가서 편히 살도록 해. 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그때 최현옥의 눈이 뜨였다. 그리고 고개를 번쩍 들더니 침을 내뱉었다. 그 침은 양치성은 얼굴 한복판에 달라붙었다. 그런데 그 양이 많은 침에는 피가 더 많이 섞여 있었다.
"아니, 이런 개샹년이!"
벌떡 몸을 일으키는 양치성의 입에서 마침내 조선말이 튀어나왔다.
"더러운 놈, 너도 조선 놈이냐. 똥통에 구더기만도 못한 놈!"
최현옥은 양치성을 노려본 채 이를 뿌드득 갈았다. 양치성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냈다. 그리고 담배를 빠는가 싶더니 후닥닥 침대로 뛰어올랐다. 그는 삽시간에 최현옥의 배에 올라타고 앉았다. 그러더니 왼손으로 최현옥의 목을 누르며 담뱃불을 얼굴로 가져갔다.
"아아악...."
최현옥의 비명이 자지러졌다. 양치성은 또 담배를 빨아댔다. 담뱃불이 빠알갛게 살아났다. 양치성은 담뱃불을 이제 최현옥의 왼쪽 볼에다가 갖다댔다.
"으아악..."
양치성은 또 담배를 빨아댔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른쪽 젖가슴에다 갖다댔다.
"으아아아...."
양치성은 또 담배를 빨아댔다. 그리고 이번에는 왼쪽 젖가슴에다 담뱃불이 꺼질 때가지 비비댔다. 담배는 꽁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으아아아..."
최현옥은 비명을 지르며 정신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이년아, 어디다 대로 버르장머리없이 까불어, 조선? 조선은 영원히 없다!"
양치성은 최현옥의 얼굴에다 침을 내뱉고는 침대에서 내려갔다. 그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몇 번씩 닦아내며 지하실을 나갔다. 최현옥은 철문 울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얼굴이며 젖가슴이 화끈거리며 쏙쏙 아리는 통증으로 전신이 비비 꼬였다. 그녀는 몸뚱이를 옆으로 돌려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는 몸을 웅등그리고 떨며 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몰리고 있었다. 발가벗겨진 채 또 다른 놈들에게 무슨 일을 당할 지 몰랐던 것이다. 최현옥은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러면서 침대가 침대가 아니라 또 하나의 고문기구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이 고문대에서 그 특종 고문을 당했을 것인가....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최현옥은 엉기적거리고 걸음을 옮겨 놓으며 고문 기구들을 살펴보았다. 그 여러 가지 고문을 당하며 끝까지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 실토를 하느니 비밀을 지키자면 죽는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현옥은 다시 고문 기구들을 살펴보았다. 손이 뒤로 묶여 있으니 그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방법은 단 하나, 시멘트벽에 머리를 박치는 수밖에 없었다. 최현옥은 이를 앙다물며 맞은편 벽을 응시했다. 동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2년 전에 수사를 받다가 자살한 동지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어왔다. 그 동지가 그때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조직은 지금까지 보존될 수가 없었다. 혈서도 떠올랐다.
<죽음을 택할지언정 조직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그 붉은 피글씨들이 서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최현옥은 숨을 들이키며 아랫입술을 응등물었다. 그리고 전신에 힘을 주었다. 양치성은 옷을 털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두 부하는 바둑을 두느라고 그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에이, 날이 벌써 이리 더우니 원."
양치성은 짜증스럽게 투덜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 계장님...."
"어찌 되었습니까?"
두 형사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둘 다 일본 사람이었다.
"그년 아주 독종인걸."
양치성은 담배를 꺼내며 혀를 찼다.
"그년 그럴 줄 알았습니다."
"예, 얼마나 독하면 노동자도 아닌 선생이 그 짓을 하겠어요."
두 형사는 자리에 앉으며 맞장구를 쳤다.
"자네들, 정신 바짝 차리고 다뤄야 해. 그년이 실토하게만 만들면 이주하 일당은 아주 뿌리를 뽑는 거니까. 그리 되면 자네들은 틀림없이 일계급씩 특진이니까 말야."
양치성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부하들을 번갈아 보았다.
"예, 염려 마십시오. 오를 밤 안으로 당장 해치우겠습니다."
형사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아니야, 그 바둑이나 한판 다 끝내고 시작해도 괜찮아. 그년 지금 기절해 있으니까."
양치성이 앉으라고 손짓했다.
"아니, 특종에 기절을 다 해요?"
앉아 있던 형사가 의아해했다.
"이따가 가보면 알아. 여러 말 할 것 없고, 자네들은 내가 왜 이번 일에 자네들을 뽑았는지나 똑똑히 알아두라구."
양치성은 다시 한번 고문을 단단히 하라는 여운을 남기고 일어섰다.
"어디 가십니까?"
두 형사가 어거주춤을 일으키며 인사말 겸해 물었다.
"난 딴 사건 조사할 게 있네"
양치성은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이봐, 왜 기절했지? 그게 그리 큰가?"
형사 하나가 속삭이며 주먹 쥔 팔뚝을 흔들어 보였다.
"이 사람아, 가운뎃다리가 제아무리 크다 한들 기절하는 여자가 어딨어. 그리고 별로 크지도 않아."
다른 형사가 양치성이 사라진 쪽을 눈짓하며 입을 비틀었다.
"그럼 특종 주사를 찔러도 특효가 안 나니까 두들겨 팬 모양이군"
"그렇겠지. 정조로 죽고 사는 조선년들한테는 그게 특횬데, 효과가 안 났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어."
"근데 말이야, 계장 체면도 있는데 저렇게 직접 나서는 건 좀 심하지 않아?"
"그런 속편한 소리 말아. 만년 계장 신세 면하려고 얼마나 몸이 달아 있는 줄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그건 과욕이지. 조센징으로 본서 계장까지 올랐으면 엄청나게 출세한 것 아니야? 제 주제를 알아야지."
"그리보면 그렇기도 하지. 허지만 사람 욕심이 어디 그런가? 그리고 사실 말이지만, 능력이 아주 뛰어난 데가 있어. 그런 능력으로 조센징이 아니었으면 진작 경찰서장 해먹었겠지"
"조센징이 능력 많은 것도 곤란해. 만년 계자으로 묶어둔 건 아주 잘한 일이야"
"그야 그렇지. 위에서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어."
"그리고 계장은 인간성이 좋지 않아."
"그건 왜?"
"특종주사를 찔러 특효를 봤더라면 그 공을 혼자 차지해서 자기 승진에 이용해 먹었을 것 아닌가. 처녀 가지고 재미는 재미대로 보고 말이야."
"응,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군."
"그년이 실토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뭔가. 특진 기회가 우리한테 돌아왔으니."
"그렇긴 한데. 일이 잘될지 모르겠군. 보통 독종이 아닌 모양인데."
"아무리 독종이라도 별수 있나. 자네하고 나하고 밤새도록 돌려대서 아가리 안 연 것들이 있었나? 우리 솜씨에는 아무도 못 당해. 그러니까 아까 계장이 우리를 특별히 뽑았다고 하잖았어?"
"그야 그렇지, 빨리 바둑 끝내고 특진할 준비를 하세."
"좋아, 밤샘으 ㄹ해야 될 테니까 저녁부터 두둑이 먹자구."
"암 그래야지. 특진 기회는 아무때나 오는 게 아니니까."
"좋아. 좋아. 흐흐흐흐...."
"내가 둘 차례지? 크크크크..."
바둑판에 마주앉은 두 형사는 어깨를 들썩이며 흥이 돋고 있었다. 양치성은 경찰서 뒤쪽의 골목을 따라 한참 걷다가 어느 허름한 밥집으로 들어갔다.
"왔어?"
양치성은 주모에게 낮게 물었다.
"예에, 저기 뒤, 뒷방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곰보인 주모는 굽실거리며 허둥지둥 앞장섰다. 양치성이가 거미줄을 쳐놓고 있는 거점들 중의 하나였다.
"여보세요. 오셨어요."
주모가 방문을 두들겼다. 지체없이 안에서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내가 뛰쳐나왔다.
"안녕하십니까?"
그 사내는 양치성을 향해 허리가 반으로 접히는 깊은 인사를 했다.
"음 들어오게."
양치성은 먼저 방안으로 들어갔다.
"술상 올릴까요?"
주모가 치켜뜬 눈으로 빠르게 눈치를 살폈다.
"응 간단하게 빨리 가져와. 난 찬물 한 사발 먼저 주고."
양치성이는 방에 주저 앉으며 일렀다. 사내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윗목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요샌 어떤가?"
양치성의 날카로운 눈길이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그 사내는 기름때 묻은 노동복 치림이었다.
"찬물 가져왔는데요."
방문이 살며시 열리며 나무쟁반에 받친 물사발이 들어왔다. 사내가 그것을 황급히 받아 양치성 앞에 갖다놓았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어.... 계속 아무 움직임도 없습니다."
"자네가 속고 있는 것 아니야?"
물사발을 입에 대던 양치성이가 신경질적으로 내쏘았다.
"아, 아닙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펴봐도 전혀 움직이질 않습니다."
"그럼 모두 일만 열심히 한다 그거야?"
"예에,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면 사정없이 내쫓아버리니까요."
"여기 술상..."
사내가 또 재빠른 동작으로 술상을 받았다.
"그럼, 그놈들이 공장 쪽에는 완전히 손을 끊은 것인가?"
"예,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여기 술 한잔...."
사내는 양치성의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르려고 했다.
"아니야, 난 또 급한 일이 있어서 가볼 데가 있어. 자네 혼자 천천히 다 마시게."
양치성은 술잔 대신 물사발을 들었다. 지하실에서 한바탕 속이 상하고 땀을 흘린 탓에 갈증이 심하면서 기운이 풀리고 있었다. 술은 입에 대기도 싫었고 시원하게 목욕을 하고 눕고만 싶었다.
"내 말 똑똑히 들어. 그놈들은 완전히 손을 끊은 게 아니야. 그놈들은 옛날과 달리 방법을 바꾼 거야. 그놈들은 지금도 암암리에 움직이고 있어. 그걸 자네가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새 노동자들을 접촉해 봐. 술도 사주고 하면서 말야. 그놈들 꼬리만 잡아내. 그럼 자네 팔자를 고쳐줄 테니까."
양치성은 돈을 던져주고 일어섰다.
"또 뵙겠습니다."
"됐어. 나오지 말어."
양치성은 큰길로 나왔다. 기운이 더 풀리면서 한숨 자고만 싶었다. 양치성은 인력거를 불러세웠다. 양치성은 인력거에 몸을 부리며 눈을 감았다. 아아. 내가 벌써 늙은 것인가.....
또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불쑥불쑥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짓 한 번 했다고 이렇게 몸이 나르지근해지는 판이니 그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마음은 아직도 만주벌판을 누비고 다니던 시절의 청춘 그대로인데 몸이 표나게 달라져 가고 있었다. 마흔다섯을 고비로 제일 먼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 머리였다. 머리를 빗을 때나 목욕을 할 때마다 머리카락은 꼭 거짓말처럼 뭉텅뭉텅 빠졌던 것이다. 그러면서 대머리가 되어갔다. 그 다음에 표나는 것이 얼굴의 주름살이었다. 빠지는 머리카락을 어찌할 수가 없듯이 얼굴에 잡히는 주름살도 그 어떤 재주로도 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세 번째로 표가 난 것이 성욕이었다. 마음은 청년 시절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데 관계를 하고 나면 너무 맥이 풀리고 몸이 무거웠다. 그리고 하룻밤에 두 번이란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마흔다섯 전에는 세 번은 몰라도 두 번은 거뜬했던 것이다. 몸이 이렇게 변해 가고 있으니 늙었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안 떠오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음이 더 초조해지는 것은 직위 때문이었다. 나이에 비해 너무 출세를 못한 것이었다. 자신의 경력과 공적으로 일본 사람이었으면 벌써 10년 전에 아무리 늦어도 5년 전에는 경찰서장이 되었을 거였다. 그런데 자신은 계장에서 멈추어 더 올라갈 줄을 몰랐다. 죽을 고비를 수십차례씩 넘기며 압록강 두만강을 넘나들 때 꿈꾸었던 것은 경찰서장이었다. 그런데 그 중간지점에서 멈추어 버린 것이었다. 전혀 그렇다는 이유가 붙지 않았지만 그건 조선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차별은 심해졌다. 그렇다고 불만을 표시할 수도 없었다. 불만을 나타냈다가는 그 자리나마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사람으로 도 본서 계장이면 하늘을 찌르는 권세였다. 그걸 읽어버리느니보다는 속이 상해도 참아야 했다.
그러나 차별을 당하는 대신 그 권세를 이용해 착실히 모은 것이 재산이었다. 충성을 다 바치느라고 만주로 어디로 떠돌며 일에 정신을 팔다보니 결혼이 형편없이 늦어졌던 것이다. 나이에 비해 아이들이 너무 어린데 돈없이 관직을 떠나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이었다. 자신의 젊음 다 바치고 원하는 만큼 출세를 못할 바에는 실속을 단단히 차려야 그 보상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말썽이 나지 않을 범위 내에서 돈을 차곡차곡 끌어모았다. 그러나 표나게 않게 하려고 은행에 일체 저금하지 않고 고액권 현찰로 집 안 깊숙이 감추고 있었다. 그 사실은 아내도 모르고 있었다. 이제 자신이 유일하게 믿는 건 그 재산뿐이었다. 동생의 사업에 아낌없이 자금을 대주었던 것도 언제 닥칠지 모를 퇴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원산과 군산은 거리가 워낙 멀어 돈을 빼돌려도 말썽이 일어날 염려가 없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그년 참!
양치성은 또 화가 치밀어오르고 속이 상했다. 몸이 이렇게 피곤한 것은 그 짓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 속상함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주하 그놈은 전국적으로 몇 남지 않은 공산주의 수사대상자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그놈은 어디를 어떻게 숨어다니는지 아누리 애를 써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놈을 잡지 못하는 것은 원산 경찰서의 수치였고, 그러므로 그놈을 잡으면 승진과 전보발령은 보장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년이 몸을 망치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 왔습니다."
인력거가 멈추었다. 양치성은 생각에서 깨어나며 무겁게 상체를 일으켰다.
"어머 아빠. 일찍 오시네요?"
대문을 딴 큰딸이 화들짝 반갑게 양치성을 맞이했다. 열네다섯 살쯤 되어 보였다. 그런데 단발머리의 그 학생은 일본말을 썼다. 그건 경찰 집안답게 총독부의 시책을 충실히 따르느라고 양치성이가 그렇게 하게 만든 것이었다. 총독부에서는 모든 학교에서는 물론이고 가정에서도 일본 말을 쓰도록 강압하기 시작한 것이 1년을 넘었다.
"그래 학교 잘 다녀왔니?"
양치성은 딸의 어깨를 다둑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이 더없이 다정하고 인자했다.
"아니,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일찍."
양치성의 아내도 남편을 반갑게 맞이했다. 예쁘장한 그 여자는 양치성에 비해 10살은 더 젊어 보였다.
"응, 피곤해서. 나 목욕물 좀 데우라고 해."
양치성은 일본식 집의 마루로 올라서며 아내에게 일렀다.
"어디 아프세요?"
그녀는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좀 속상하는 취조가 있어서."
양치성의 대꾸는 퉁명스러웠다.
"네 알았어요."
그녀는 마치 일본여자 같은 몸짓을 하며 날렵하게 돌아섰다. 일단 경찰서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일체 사족을 붙일 수 없게 되어 있어서 그녀는 더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동생들은 다 어디 갔니?"
양치성은 방으로 들어가며 딸에게 물었다.
"놀러 나갔어요. 곧 들어올 거예요."
딸이 낯꽃 좋게 방싯방싯 웃었다.
"아이고 피곤하구나. 내가 ...."
양치성은 윗도리를 벗다가 말을 멈추었다. 내가 이젠 늙었나부다 하는 말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려 했던 것이다. 열다섯 살밖에 안 먹은 딸앞에서 할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별 느낌이 없는 딸에게 애비가 늙었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괜히 실망하게 할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아빠, 누우세요. 제가 주물러드릴게요."
딸이 옷을 받아 걸며 상냥하게 말했다.
"그래? 역시 우리 히데꼬는 효녀야."
양치성은 흡족하게 웃으며 딸이 받쳐주는 베개를 베고 누웠다.
"팔을 주무를까요. 다리를 주무를까요."
"다리를 주물러라."
딸은 아버지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아, 시원하다. 아아, 시원하다아."
눈을 사르르 감은 양치성은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읊조리고 있었다.
"아빠, 저한테 소원이 하나 있어요."
"소원? 어디 말해 보려무나."
"꼭 들어주셔야 해요."
"암, 들어주지."
"이번 하기방학에 동무들하고 동경에 여행 가기로 했는데 보내주세요."
"동경? 위험하지 않을까?"
"다섯 명이 되면 담임 선생님이 데리고 가신댔어요."
"그럼 됐군. 보내주지"
"야아, 우리 아빠 최고."
히데꼬는 소리치며 아버지의 얼굴에 제 볼을 부비댔다. 양치성은 달디단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늦장가를 가서 얻은 첫딸이라서 더 귀엽고 정이 많이 갔던 것이다. 히데꼬는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아버지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마루에서 전화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곧 양치성의 아내가 전화 받는 소리로 바뀌었다.
"여보, 전화받으세요, 경찰서예요."
양치성의 아내가 마루를 콩콩 울리고 뛰어오며 말했다.
"엉?"
"양치성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 뭐라구?"
양치성은 수화기를 귀에 대자마자 집이 떠나가게 고함을 질렀다.
"뭐, 머리가 깨져 죽어. 기다려, 나 곧 갈 테니까."
양치성은 윗도리를 손에 든 채 미친 듯이 대문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39. 두 여자
공원 입구 언저리에는 행상들이 즐비했다. 산책객들에게 제 나름의 특색있는 먹거리를 만들어 파는 행상들이었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공원 입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행상들이 손님을 부르는 소리들과 산책객들의 상쾌한 웃음소리들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전동걸은 그 술렁거리고 거리낌 없는 왁자함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모두 자유스러워 보이고 활기차 보였던 것이다. 전쟁의 분위기도 그곳까지는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동걸은 계속 미행에 신경써 가면서 사람들 속으로 섞였다. 사람들 사이사이를 재빨리 빠져나가며 먹을 만한 것을 찾아 행상들을 살펴 나갔다. 작은 알감자를 기름에 볶은 것과 기름에 막 튀겨내고 있는 꽈배기가 구미를 당겼다. 그 두가지를 사들었다. 입구 가까이로 가니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살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아직 오지 않았으면 녹을 것이고, 그냥 지나치자니 날씨가 좀 더운 게 발목을 잡았다. 녹기 시작하면 내가 다 먹어 치우면 되지. 이런 생각으로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들었다. 전동걸은 사람들 속에 섞여 공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람들 울타리는 금방금방 허물어져 갔다. 사람들은 여러 갈래의 길을 다라 넓은 공원으로 흩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동걸은 넓은 중아로를 따라 걷다가 혼자가 되자 오른쪽의 아름드리 나무를 향해 길을 건너갔다. 그리고 아름드리 나무를 지나치는 듯하며 순간적으로 뒤를 살폈다. 계속 확인해 온 대로 미행은 없었다. 전동걸은 오른쪽 세 번째 길로 접어들었다. 공원에는 나무들이 많았고, 무성한 잎들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세 번째 길로 들어서자 금방 풋하고 향긋한 숲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전동걸은 자신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면서 왜 사람들이 공원을 찾아오는지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도시의 거의 끝이라고 하지만 조금 전까지 느꼈던 피곤한 도시의 번잡이 이처럼 말끔히 차단되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햇살이 스며들지 못하는 짙은 숲그늘 여기저기에는 벤치들이 놓여 있었다. 그 벤치에 누워 늘어지게 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숲이 깊어지지 않아서 그런지 끌어안고 있는 연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 길은 한참을 가다가 세 갈래가 되었다. 전동걸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미행은 없었다. 그는 비로소 안심하며 왼쪽으로 세 번째 길로 접어들었다. 숲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지요꼬가 왜 이런 장소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일일까? 이런 낭만적인 공원에서 산책을 즐기려는 것일까? 글세, 요즈음 상황이 그런 생각이 들게 좋지가 않은데, 아마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공원이긴 했지만 복잡하게 장소를 정하는 품이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길이 다시 두 갈래로 갈리면서 왼쪽 길 저쪽에 호수가 보였다. 공원으로 들어오고 있던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이 근방에서는 사람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전동걸은 호수를 향해 걸었다. 나무숲은 호숫가에서 끝나고 있었다. 그 숲그늘을 따라 벤치들이 놓여 있었다.
전동걸은 어느 벤치에 앉을까 두리번거렸다. 그 호숫가의 벤치였지 몇 번째 것이라고 지정된 것이 아니었다. 전동걸은 기왕이면 호수가 잘 바라보이는 벤치를 골랐다. 저쪽 벤치에 남녀 한 쌍이 다정하게 앉아 있었다. 전동걸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먹을 것을 내려놓고 벤치에 앉았다. 그때서야 그는 지금까지 아이스크림 두 개를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받쳐 들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픽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았다. 윗부분이 약간 녹을 기미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우선 자기 것부터 먹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전동걸 씨!"
아이스크림을 막 입에 대던 전동걸은 깜짝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 뒤에서 들린 소리는 남자 목소리였던 것이다.
"뭘 그리 놀래요? 역시 혼자 먹으려는 흑심을 들켜서 그런 거지요? 후후후..."
지요꼬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다가서고 있었다.
"이런 장난은.... 언제 왔소?"
전동걸은 실소를 하며 물었다. 아까 뒤에서 전혀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먼저 와서 저쪽 나무 뒤에 숨어 있었지요. 전동걸 씨는 여러 가지가 낙제점이에요."
지요꼬가 벤치에 앉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뭐가 말이오?"
전동걸은 지요꼬에게 이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제가 숨어 있는 것도 몰랐지요. 퇴로를 생각지도 않고 경치 좋은 자리만 골라 앉았지요, 자기 이름을 부른다고 모른 척하지 않고 그리 놀랐지요, 이게 얼마나 결정적인 것들이에요."
지요꼬는 단둘이 있을 때 전동걸을 꼭 부를 일이 있으면 <전동걸 씨>라고 했다. 전동걸이 창씨개명한 이름을 일본말로 부르는 것을 딱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전동걸 씨>는 순 조선식이라며 전동걸이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예,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 차후로 다시는 그런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전동걸은 정말 야단맞은 소학생이 선생님에게 하는 것처럼 고개까지 깊이 숙였다. 그러면서 그는 또 지요꼬와 이미화를 비교하고 있었다. 지요꼬는 역시 침착하고 냉정한 조직원으로서 적격이었다.
"후후후..... 그러니까 꼭 착한 소학교 생도 같네요."
지요고가 눈을 곱게 흘기며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가져갔다.
"왜 무슨 일 있소?"
전동걸도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물고 용건부터 물었다.
"예, 문제가 좀 생겼어요."
지요꼬가 앉음새를 단정하게 하며 대답했다.
"....?"
전동걸은 다음 말을 눈으로 독촉했다.
"회장님한테 미행자가 따르는 것 같은 게 낌새가 이상하대요. 정기모임을 연기하고, 전원 조심하라는 전달이에요."
웃음기 사라진 지요고의 건조한 말이었다.
"그거 곤란한데.... 미행자 확인은 됐다는 거요?"
전동걸은 아이스크림 맛이 싹 가시는 걸 느끼며 물었다.
"더 이상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그런데 정기모임을 연기할 정도면 꽤 확실한 것 아니겠어요?"
지요꼬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이스크림은 계속 먹고 있었다. 그 여자 답지 않은 태연함에 자신의 긴장이 쑥스러워 전동걸은 아이스크림을 듬뿍 베물었다.
"이상한데...., 뭐가 단서가 됐을까?"
조직을 은폐하고 수사기관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조직원들이 노출행동을 절대 하지 않기로 되어 있는 원칙을 생각하며 전동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문젠 이젠 그만 생각하도록 해요. 더 생각하면 근거없는 추측만 많아질 뿐이잖아요. 그리고 추측이 많아지면 사태를 오판할 위험이 크니까요."
지요꼬의 냉정한 논리였다.
"물론 그럴 수 있소. 그리합시다."
전동걸은 동의했다. 지요꼬는 그 사실을 자신보다 먼저 알고 있어서 그런지 이미 감정이 정리된 상태였다. 그건 조직원으로서 이성적이고 옳은 태도였다. 어쩌면 지요꼬는 지금 당장 그 사실을 알았더라도 그런 태도를 취했을지 몰랐다. 지요꼬는 언제나 빈틈없고 판단이 빠르며 적극적인 여자였다.
"이건 뭐예요? 정문 앞에서 뭘 샀나보죠?"
지요꼬가 봉투를 가리켰다.
"아, 이것 먹읍시다. 미행을 확인하고, 애인하고 산책을 나온 것으로 위장도 하고, 시장하기도 해서 겸사겸사 산 거요."
전동걸은 봉투를 찢어 감자볶음과 꽈배기를 펼쳐놓았다.
"어머 참 맛있게 보이네요. 마침 배가 고팠는데."
지요고가 반색을 했다.
"많이 먹어요. 자아, 먹읍시다."
지요꼬는 서슴없이 꽈배기를 집어들었다.
"요즘 가끔 인간으로 태어난 게 혐오스럽기도 해요."
호수 쪽으로 눈길을 돌린 지요꼬가 갑자기 한 말이었다.
"혐오? 나이에 안 어울리게 염세는 아닐 것이고, 무슨 일 있소?"
전동걸은 혹시 가정교사를 하는 집과 무슨 일이 있나 생각하며 물었다.
"저것 보세요. 저 흰 거위들하고 오리들, 얼마나 사이좋고 평화로워요. 인간들은 저런 평화가 무너지도 모르고 그저 서로 죽이고 죽는 싸움에 광분하고 있잖아요. 인간이라는 게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할수록 싫고 지겨워요."
"그거 생각해 봐야 과히 소득없는 거니까 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소. 인간이란 도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오. 그 능력에서부터 인간의 모든 행.불행은 좌우되기 시작한 거요. 저 거위와 오리들이 저만큼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건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이요."
전동걸은 호수에서 유유히 노닐고 있는 거위와 오리 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들은 정말 한가하고 평화롭게 물 위를 떠다니며 날개를 퍼득이기도 하고 물속에 머리를 박고 물구나무를 서기도 했다.
"그런 것도 같군요. 인간이 인간을 대량살육하는 전쟁을 보면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웃음만 나와요."
지요꼬는 코웃음을 쳤다.
"그 말이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자만에 빠진 동물인지를 스스로 입증한 명언 중에 명언이오. 그런 말을 지어낸 어리석은 자만으로 그후로 또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어리석은 자만에 빠지게 만들었겠소. 그 말도 인간들의 불행에 크게 공헌한 것들 중의 하나요."
"말이 좀 어렵네요. 저어기 저 오른쪽 끝에 있는 거위 두 마리 있잖아요. 아주 사이가 좋아 보이지요? 저도 요즘 저런 거위가 되고 싶은 꿈을 가끔 꿔요."
전동걸은 가슴이 뜨끔해지는 걸 느꼈다. 그건 지요꼬다운 직설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전동걸은 지요꼬의 인간에 대한 혐오가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를 포착했다. 지요꼬는 언제부터인가 사랑의 감정에 빠지기 시작했고, 그 깊이가 점점 깊어져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 굳이 이 장소를 선택한 것도 안전을 도모할 겸 그런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지요꼬가 자신에게 색다른 감정을 표시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화와 동행한 것을 목격한 다음부터였다.
"글세, 그런 꿈이 참 아름답긴 한데, 뭐랄까...., 조직생활자로서는 너무 사적이지 않나 싶소."
전동걸은 지요꼬의 감정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조직을 슬쩍 내세웠다.
"조.직.생.활.자...." 지요꼬는 한마디 한마디를 꼭꼭 씹듯이 말하고는, "그게 대립 관계인지 병행 관계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쑥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꽈배기며 감자볶음을 계속 먹고 있었다.
"대립 관계이니 병행 관계니 하니까 무슨 연구논문 같소. 하하하..."
전동걸은 마땅한 말이 없어서 웃음으로 말을 피하려고 했다.
"그럼요. 어떤 연구논문이 그보다 더 심각할 수가 있겠어요. 그거야말로 인생 전체가 걸린 문젠걸요."
지요꼬의 또렷한 말이었다.
‘이거 야단났군.’
전동걸은 지요꼬가 육박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뒷걸음질 치는 기분으로 또 이미화와 비교했다. 이미화 같으면 속앓이만 할 뿐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었다.
"내가 철학 교수를 하나 소개해 줄 수도 없고 이거 큰일이군. 허허허..."
전동걸은 발밑에서 조약돌을 하나 집어 들고 몸을 일으켰다. 호수를 향해 조약돌을 던지려는데 오리 한 마리가 다른 오리를 올라타고 있었다.
‘저놈 저거....’
그 순간 전동걸은 이미화의 얼굴이 쑥 다가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그 오리를 향해 조약돌을 힘껏 내던졌다.
"우리 저쪽으로 산책해요."
지요꼬가 휴지를 챙겨 가지고 일어났다.
"그럽시다. 여긴 숲이 아주 일품이요."
"그 잘난 신궁이 있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이 숲은 시민 휴식용이 아니라 신궁 치장용인 거지요. 비행기를 타고 전쟁을 하는 자들이 또 신궁을 떠받드는 건 뭔지 모르겠어요."
"그건 당연하지 않소. 군국주의자들은 국민들을 자기네 목적에 동원하는 수단으로 신궁을 최대한 이용해 먹고 있는 것 아니겠소?"
"네 맞아요. 헌데, 우리 위장을 하려면 아주 철저히 해요."
이 말과 동시에 지요꼬는 재빨리 전동걸의 팔짱을 끼었다. 어어, 이거 곤란한데.... 전동걸은 당황했다. 그러나 팔을 뺄 수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지요꼬와의 관계가 끝장나고 말 거였다. 그건 곧 조직의 와해와 직결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위장을 빙자하기는 했지만 여자가 먼저 팔짱을 끼다니.... 전동걸은 그 적극성에 곤혹스러움과 거부감을 동시에 느꼈다. 지요꼬는 직접 사랑의 고백만 하지 않았을 뿐 이제 드러낼 마음은 다 드러낸 것이었다. 대낮에 청춘남녀가 팔짱을 낀다는 것은 아주 관계가 깊은 사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에서는 아무리 신교육을 받은 개명한 남녀라 해도 대낮에 팔짱을 끼고 다닌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선에 비해 일본은 서양 풍조가 훨씬 더 유행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젊은 남녀가 사람들 보는 앞에서 팔짱을 끼고 다닌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하고 걸으니 기분이 어떠세요?"
지요꼬가 평소와는 달리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세, 위장이라 그런지 그저 그렇소."
전동걸은 시침을 뚝 떼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어머, 멋없어, 위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지요꼬는 전동걸의 팔을 더 꼭 붙들며 말했다.
"글세, 난 문학적 소양이 부족해서 그런지 그런 상상력이 발동 안 되는데요."
전동걸은 계속 피해 서기에 바빴다.
"동지의 선은 넘고 싶지 않다 그런 뜻인가요?"
지요꼬의 어조가 달라졌다.
"아니 꼭 그런 뜻은 아니오. 이거 너무 갑작스러워서...."
전동걸은 말이 궁해 얼버무렸다., 사실 여자와 팔짱을끼고 걷는 것이 난생처음이라 어색스럽고 쑥스러울 뿐 지요꼬 같은 여자가 자신의 팔짱을 낀 것은 전혀 기분 나쁜 일이 아니었다. 조직원들 중에서 지요꼬에게 호감을 갖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네, 그래요. 조선 남자들은 아주 보수적인 데가 있어요. 특히 예의 범절과 이성문제에 대해서. 제 행동에 너무 부담 느끼지 마세요."
지요꼬는 오늘은 이 정도에서 끝내기로 했다. 더 적극적으로 나갔다가는 조선 남자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조선 여학생에게 쏠리지 않도록 그동안 꾸준하게 마음을 표현해 왔으니까 조금 더 뜸을 들일 필요가 있었다. 어쨌거나 그 여학생한테 전동걸을 빼앗길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조급한 마음을 눌러야 했다.
숲길이 깊어지면서 팔짱 낀 남녀들의 모습이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었다. 전동걸은 그 모습들을 눈여겨보며 어떤 새로운 감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이런 모습을 이미화가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 순간 지요꼬의 팔을 뿌리치고 싶었다. 동지관계인 여자 때문에 이미화를 잃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요꼬가 이렇듯 적극성을 띠는 것은 그 성격 탓도 있었지만 이미화 때문이기도 했다. 그동안 지요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미화를 입에 올리며 지속적인 관심을 써왔던 것이다.
"저 길로 돌아서 나가도록 해요. 또 족쇄를 찰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지요꼬의 풀죽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가정교사 노릇을 언제나 족쇄를 찼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그럽시다."
전동걸은 또 지요꼬가 딱해졌다. 족쇄를 찼다는 망의 실감만큼 지요꼬에게 학비를 대주고 싶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그렇게까지는 여유가 없었다. 지요꼬는 숲은 벗어나면서 팔짱을 풀었다. 전동걸은 왼쪽 팔이 굳어진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소리없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위장이라 하더라도 팔짱을 낀 채 사람들 많은 정문 앞을 지나갈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만일 모르니까 정문 앞에서 헤어져요."
지요꼬는 조직원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럽시다. 조심해서 가시오."
"네, 조심하세요."
두 사람은 정문 앞세서 사람들 사이에 섞이며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전동걸은 전차를 타고 하숙으로 돌아가는 동안 줄곧 회장의 미행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러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원인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회장이 만약 체포되면 어떻게 되나 하는 불안감이 이외로 크게 밀려들었다. 경찰에서 의심하게 되면 언제든지 잡아넣을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조선사람을 잡아넣는 것은 일본 경찰이 가장 손쉽고 마음대로 하는 일이었다. 좃직원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잡혀 들어가면 조직은 위기였다. 물론 그 어떤 경우에도 조직의 기밀을 누설하지 않는다고 맹세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완전한 방어책일 수는 없었다. 그동안 검거된 무수히 많은 비미결사들이 그런 맹세를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 것이었다. 맹세의 강도를 고문의 강도가 압도해 버리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죽음으로 몰아가는 고문의 혹독함 앞에서 인간은 강철일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전동걸은 책도 읽히지 않는 불안감 속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런데 이미화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너무 뜻밖이라서 전동걸은 어리둥절했다.
"조선 여자 같던데 애인인가요?"
하숙집 주인 여자가 물었다.
"아 예, 뭐 그저...."
전동걸은 수화기를 전화통에 걸며 우물쭈물했다.
"뭘 숨기려고 그래요? 학생 같은 미남이면 애인이 있을 만도 하지."
40대의 주인여자는 야릇하게 눈을 흘겼다. 여자한테서 처음 걸려온 전화라서 그리 관심을 나타내는 모양이었다.
"하하하.... 제가 미남이면 이세상 남자가 다 미남이게요? 미남 소리 처음 듣습니다."
전동걸은 진짜로 웃었다. 남자답게 생겼다는 말은 가끔 들어왔지만 미남이라는 말은 정말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니, 왜 그래요? 사람들이 얼굴을 볼 줄 몰라서 그렇지. 남자 얼굴이 여자처럼 예쁘고 매끈해야 미남인가요? 학생처럼 남자답게 생겨야 미남이지."
주인 여자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예,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앞으로 용기를 내서 살겠습니다."
전동걸은 그런 말 듣기가 민망해 좀 과장되게 몸짓을 지으며 돌아섰다.
"내 말 믿어요. 여자들이 반하게 생긴 매력적인 얼굴이니까."
"예, 믿겠습니다."
저 아주머니가 왜 저리 인심이 후하신가. 여자한테서 저화가 걸려오니까 갑자기 마음이 동하시나.
전동걸은 2충으로 올라가며 떫게 웃고 있었다. 생선 한 토막이라도 잘 얻어먹으려면 하숙집 주인 여자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을 때 잘 눌러주라는 말을 생각하며. 그 말은 유학생들 사이에 흔히 오가는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정조 관념이 희박하고 성이 개방적인 일본 여자들이라서 하숙생들과 관계를 갖는 주인 여자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주인여자와 딸을 동시에 상대하다가 들통이 나서 줄행랑을 친 학생도 있다고 했다. 어쨌거나 일본여자들이 몸을 함부로 내돌리는 것은 조선여자들과 정반대인 것이 사실이었다. 전동걸은 그런 성풍속이 영 마땅찮았다. 여자들이 그리 헤프고 난잡하다 보면 마누라가 낳은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판이니 그건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지요꼬가 그렇게 적극적인 것이 애정 때문인가, 성풍속 때문인가? 전동걸의 머리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지요꼬의 의지 강한 얼굴이 떠오르면서 전동걸은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요꼬는 상식적인 여자가 아니었다. 일본 여자이기 이전에 일본 사람으로서 갖추기 어려운 의식을 가진 지극히 희귀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상식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지요꼬에 대한 모독이고, 자신의 천박성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었다.
전동걸은 단골 카페로 나갔다. 이미화와 첫 만남을 가 던 카페가 단골이 되었다. 무슨 의미를 부여하듯 이미화가 그 카페를 좋아했던 것이다. 이미화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이거 미안합니다. 영국신사가 못돼서."
전동걸은 흔히 쓰는 <영국신사>라는 말을 끌어다대며 웃었다. 일본사람들이 중절모자에 양복과 스틱까지 같춘 차림을 유행시키면서 <영국신사>라는 말도 일상어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아니에요. 아직 시간이 다 안됐는걸요."
이미화가 반가움 담긴 얼굴로 잔잔히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래요? 그럼 영국신사 자격이 없진 않군요."
전동걸은 이미화의 곱고 함초롬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 싱글벙글하며 의자에 앉았다.
"뜻밖에 전화를 다 하고, 무슨 좋은일 있어요?."
다른 날과 달리 상기된 기색에 명랑해 보이는 이미화를 바라보며 전동걸은 담배를 꺼냈다.
"네에...."
이미화는 방그레 웃음 지으며 고개를 까딱까딱했다. 무슨 일인지 맞혀보라고 하는 듯. 아, 예뻐라 전동걸은 가슴이 꿈틀하는 것을 느꼈다. 제게 정말 꽃이라면 당장 꺾고 싶다는 충동이 일고 있었다. 이미화는 의가만 했던 꽃에서 발그레하게 물든 꽃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에도 어느 순간마다 갖고 싶은 마음이 동하고는 했었다. 그러나 그건 욕심이었지 지금 같은 충동은 아니었었다.
"그게 무슨 일일까?...."
전동걸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챌까 봐 눈길을 돌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해 보세요."
이미화의 목소리가 명랑했다.
"오늘, 오늘이 무슨 날일까? 조선이 망한 날도 아니고...., 우리가 만난 날도 아니고....., 미화 씨가 시집가는 날도 아니고..."
전동걸은 담배를 뻐끔거리며 계속 고개를 갸웃갸웃했고, 이미화도 입을 가리고 쿡쿡거리며 웃었다.
"나 그런 것 맞히는 데 소질 없어요."
전동걸은 두 팔을 반쯤 들어 보였고
"안 되는 데요, 꼭 맞히셔야 해요. 동걸 씨한테 관계되는 날이에요."
이미화가 재미있어 하며 말했다.
"나하고 관계된 날? 글쎄요. 오늘이 왜 나하고 관계가 있나...."
전동걸은 장난기 사라진 얼굴로 생각을 더듬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전동걸은 포기하겠다는 듯 헤식게 웃었다.
"정말 모르시겠어요?"
"예, 모르겠어요."
"가르쳐 드려요?"
"예, 가르쳐주세요."
꼭 소년처럼 말대답을 하고 있는 전동걸이가 이미화는 그렇게 좋은 수가 없었다. 얼마나 큰일에 몰두하고 살면 자기와 직접 관계되는 날도 어떤 날인지 모를 것인가. 그런 전동걸이가 더없이 남자답고 매력적이었다.
"생일을 축하드려요."
이미화는 전동걸 앞에 선물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예? 내 생일?...."
전동걸은 어리둥절해졌다.
"네, 어서 받으세요."
이미화는 선물은 더 내밀었다. 하얀 한지에 빨간 끈으로 포장된 선물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전동걸은 선물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언젠가 말씀하셨잖아요."
"내가요?"
"네, 제가 물어서."
"아, 그랬던가요?"
전동걸이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쳤다.
"팔 빠지겠어요."
"아 예에, 고, 고맙습니다."
전동걸은 얼떨결에 선물을 받으며 말을 더듬었다. 그 선물은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고 생소하기도 했던 것이다. 생일날 반찬 푸짐하게 차린 생일상을 받는 것은 익숙했지만 생일 선물을 받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해마다 생일날 아침에 쌀밥과 미역국에 반찬 푸짐한 생일상을 차려주고는 <무병허게 잘 커라> 하는 말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유학을 오고 나서부터 생일날은 까맣게 잊고 지나갔다. 그런데 이미화가 생일을 챙겨주다니! 전동걸은 이미화의 그 자상함에서 어머니의 따스함을 물큰 느꼈다.
"이거 풀어봐도 됩니까?"
전동걸이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어머, 안 돼요. 이따가 혼자서 보세요."
이미화는 당황하며 얼굴이 빨개졌다.
"예, 알았어요."
전동걸은 선물의 앞뒤를 살펴보며 포장도 얌전하고 예쁘게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이제 이미화와 지요꼬를 비교하고 있었다. 지요꼬 같았으면 선물을 풀어보라고 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선물을 풀어보라고 하는 것보다는 풀어보지 못하게 하면서 얼굴 빨개지는 그 부끄러워함이 훨씬 더 여자답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저녁은 내가 살 테니까 뭐 맛있는 거 시켜요."
전동걸은 선물을 탁자 가장자리로 조심스럽게 밀어놓으며 이미화를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생일날 본인이 밥을 사는 법이 어딨어요. 오늘은 제가 전부 맡을 거예요. 축하하려고 제가 먼저 연락했잖아요."
이미화는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강한 어조로 말했다.
"하아...."
전동걸은 놀라움인지 어리둥절함인지 잘 구분이 안 되는 얼굴로 이미화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아니오, 그럼 내가 영화 구경을 시켜드릴 테니까 밥을 사세요."
전동걸은 이미화를 꼭 끌어안고 싶은 마음으로 말했다. 평소에는 잔잔하다가도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자기 의사를 또렷하게 밝히는 이미화가 너무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네, 그렇게 하세요."
영화 좋아하는 이미화가 살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인가 활동사진은 영화라는 새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고, 활동사진이라고 하면 촌사람 취급을 당했다. 이미화는 거침없이 값이 제일 비싼 비프스테이크를 시켰다.
"이거 너무 과용하는데...."
"걱정마세요. 우리 아버지 편하게 돈 잘 버는 거 아시잖아요."
이미화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에이, 미화 씨가 나같이 사상 불건전한 놈한테 이렇게 돈 막 쓰는 줄 아시면 아버지가 혼쭐을 낼 거요."
"네 그렇잖아도 큰일이 한 가지 있어요. 동걸 씨 만나면서 자꾸 이야기 듣다보니까 아버지를 점점 무시하게 되고 싫어지고 그래요.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이미화의 말은 진지했다.
"너무 그럴 것 없어요. 미화씨와 아버지는 생각에 있어서는 별개고 독립체니까 미화 씨 생각을 아버지와 연결시키지 말고 독립시키도록 해요. 아버지 같은 분들은 대화로도 설득으로도 의식이 바뀌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정치성이 있거나 사회성이 있는 대화는 피하면서 그냥 아버지로만 대하도록 하시오."
전동걸의 말 또한 진지했다.
"말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까 문제지요. 글세 아버지는 아버지 생각을 자식들한테까지 주입시키려고 하신다니까요."
"그거야말로 쉽지 않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요."
"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이런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전동걸은 무엇보다도 보람스럽고 즐거웠다. 이미화는 처음에 비해 의식의 채색화가 많이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 의식의 변화는 곧 자신에 대한 애정의 반증이기도 했다.
"근데 남동생이 내년에 대학에 진학하게 되는데 아버지 생각이 문제예요."
이미화가 고기를 자르면서 말했다.
"어떤 과를 원하시오?"
"권세 좋아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 있잖아요."
이미화는 말하기도 창피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법학부 말이오?"
이미화는 속상하는 표정으로 전동걸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뭐라고 하지요?"
"어디 우리네 가정에서 자식들이 무슨 발언권이 있어요? 아버지 말이 법이고, 저처럼 동생도 꼼짝 못 하고 법학부로 가야지요."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동생이 일단 법학부로 진학한 다음에 똑바른 의식을 갖게 하는 수밖에는."
이미화가 반색을 했다.
"수업료는 안 받겠소. 미화 씨 동생이니까."
전동걸은 이미화와 눈길을 맞추며 능청스럽게 웃었고, 이미화는 얼굴이 붉어지며 눈길을 떨구었다.
"영화는 볼 만한 게 있소?"
전동걸은 커피를 저으면서 물었다.
"네, 또오.... 슬픈 애정영환데요."
이미화가 목을 움츠리듯 하며 말을 주저했다.
"그거 좋지요."
"유치하다고 생각하시지요?"
"아니오, 호들갑스럽게 기뻐하는 것보다는 슬픈 게 낫고, 사무라이영화보다는 애정 영화가 낫소. 조선 사람들 거의 다 슬픈 것 좋아하쟎소."
영화는 <비련의 강>이라는 제목처럼 여자들이 눈물깨나 짜도록 슬펐다. 그러나 전동걸은 영화의 슬픈 사연보다는 그 남자주인공이 하는 것처럼 하고 싶은 유혹을 몇 번씩이고 느끼고 있었다. 아니, 그것들 전부는 너무 과한 것이었다. 남자 주인공은 애인이 손을 잡는 것은 물론이고, 차츰 입도 맞추고, 인적없는 수풀 속에서 안고 뒹굴고, 어느 비 오는 날에는 젖도 만지고, 허벅지도 만지다가 끝내는.... 그런 것들 중에서 첫 번째인 손이라도 슬그머니 잡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미화가 너무 영화에 취해 눈물을 짜고 있어서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분위기를 깨버리면 이미화가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전동걸은 줄곧 눈물을 흘릴 정도로 영화에 몰입하는 이미화가 이상스럽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자신은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중요한 고비고비에서 꼭 저건 영화니까 하는 김빠지는 생각이 들어버리는가 하면 영화의 장면을 벗어나 어처구니없게도 스크린 전체가 눈에 들어오고 마는 것이었다.
전동걸은 쓴 입맛을 다시며 또 이미화와 지요꼬를 비교했다. 지요꼬도 저렇게 눈물을 흘릴 것인가? 어쩌면 지요꼬는 애정 영화 자체를 보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지요꼬와 영화를 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영화를 볼 사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일의 긴장 속에서 영화 같은 것을 볼 여유가 없었다.
"그 여자 누구지요? 아주 예쁘던데요."
지요꼬가 무표정하게 물었던 말이었다.
"요새도 영화 자주 보나요?"
그리고 가끔 이렇게 물었었다. 그러면서 지요꼬는 감정표현이 적극적으로 바뀌어갔다.
영화관을 나와 한참 걷다가 전동걸은 입을 열었다.
"방학이 얼마 안 남았는데 언제 집에 갈 거요?"
"바로 가야지요."
"함께 가는 게 어떻겠소."
"네에?"
이미화는 화들짝 놀랐다.
"관부연락선 말이오."
"아 네에, 그거 좋겠네요."
이미화는 하르르 긴 숨을 내쉬었다. 집에 함께 가자는 줄 알았던 것이다. 관부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함께 건너는 것은 바라는 바였다. 함께 배를 타면 그 지루한 뱃길이 얼마나 짧아질 것인가. 전동걸은 하숙방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선물을 풀었다. 책이 나왔고, 책 위로 따로 네모지게 싼 것이 있었다. 책은 투르게네프 단편집이었다. 톨스토이는 거의 다 읽었지만 투르게네프는 아직 손대지 않은 터라 전동걸은 반가웠다. 네모진 포장지를 뜯었다.
"....!"
전동걸은 가슴에서 화끈 불길이 이는 것을 느꼈다. 포장지 안에서 나온 것은 새하얀 손수건이었다. 손수건 여자가 남자에게 손수건을 선물하는 것은 사랑의 고백이었다. 그것도 하얀 손수건은 순결을 바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네모지게 접힌 손수건의 한쪽 끝에는 새빨간 장미 한 송이가 수놓아져 있었다. 장미는 또 무엇인가. 그것도 사랑을 뜻하지 않던가. 그런데 장미만 수놓아진 것이 아니었다. 꽃송이 아래로는 초록빛 가지가 뻗어 있고, 그 가지에는 두 개의 잎이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도 <당신과 나, 장미꽃 같은 사랑을 꽃 피워요.> 하는 것처럼. 전동걸은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다.
아이고, 내가 왜 손을 안 잡았지. 입맞춤을 해도 괜찮을 것을
전동걸은 황홀한 기분으로 손수건을 보고 또 보면서 장미꽃을 한 땀, 한 땀 수놓아 간 이미화의 마음과 정성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이미화와 지요꼬를 비교했다. 두 여자가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너무나 달랐다. 감칠맛이 있고 아름답고 요ㅕ자다운 것은 역시 이미화였다. 전동걸은 이미화를 안 듯 손수건을 가슴에 대고 상체를 마구 흔들어댔다.
기말시험을 다 끝내고 귀국 채비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경도에서 조선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가 검거되었다는 신문보도가 나왔다. 전동걸은 충격 속에 그 기사를 읽어갔다. 체포된 학생들 중에 윤동주 송몽규 같은 이름이 나왔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동지였고 동포였다. 전동걸은 그들이 왜 체포되었는지 또 풀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들며 주먹을 부르쥐었다.
40. 인간 사냥
"읍장님이십니까?"
"예...."
"아, 여기 경찰서장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이쪽으로 좀 오셨으면 하니다. 내지에서 징용대인 노무보국회가 나왔습니다."
"또요?"
하시모토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 순간 후회했다.
"예, 곧 가겠습니다."
하시모토는 다급하게 이 말을 잇대어 붙였다. 징용을 너무 마구잡이로 많이 끌어가 농촌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어 있는데 또 징용대가 나왔다니까 벌컥 화가 치솟긴 것이었다. 그러나 전시체제 아래서 군사 용무는 최우선적으로 처리하도록 규정되어 있어서 하시모토는 자신의 실수를 황급히 덮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사 용무에 적극 협조하지 않는 것은 천황폐하의 칙령을 어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칙령을 어기면 죽음이 있을 뿐이었다.
하시모토는 허겁지겁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 앞에는 도청에나 있는 포장 씌운 트럭이 5대나 줄지어 서 있었다. 노무보국회 대원들이 벌써 도청을 거쳐 징용자 호송차를 끌고 온 것이 분명했다. 하시모토는 순간적으로 소리 질렀던 것이 후회되었다. 경찰서장이 입을 다물었어야지 그렇지 않고 자신이 한 대로 노무보국회 간부에게 말을 해버렸다면 그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었다. 하시모토는 만일을 생각해서 변명할 말을 생각하며 경찰서로 들어섰다.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이시바시 동원부장이십니다."
경찰서장이 몸이 대살지게 생긴 40대의 남자를 소개했다.
"아 예, 원로에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읍장 하시모토입니다."
하시모토는 나이와는 상관없이 그 남자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다. 노무보국회는 육군성의 산하기관이었고, 전시체제 하애서 육군성은 모든 기관 위에 군림하는 가장 막강한 권력의 핵심부였다.
"예, 반갑습니다. 이시바시라고 합니다."
그 남자는 읍장 정도는 얕잡아 보는 태도로 악수를 청했다. 아까 저지른 실수로 마음이 켕긴 하시모토는 그 젊은 남자의 손을 두 손으로 받쳐 잡았다. 그런 하시모토를 경찰서장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서장님한테는 협조를 요청했습니다만 읍장님도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시바시는 국민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군대식으로 말했다.
"아 예, 도움이 되신다면 무엇이든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하시모토는 무슨 명령이든 내리기만 하라는 식으로 연상 굽실거렸다. 그때 사환아이가 녹차를 내왔다.
"녹차 드십시오."
경찰서장이 이사바시에게 권했다.
"예, 조선 녹차가 맛이 일품이라고 하던데 어디 맛 좀 볼까."
이사바시가 붉은 가죽 장화를 툭 치며 다가앉았다. 삼복더위인데도 그는 장교용 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다. 더위를 무릅쓴 과시용이 틀림없었다.
"조선에는 처음 행차십니까?"
하시모토가 눈치 빠르게 물었다.
"예, 만주에서는 몇 년 근무했는데 조선은 처음입니다."
이시바시는 과히 좋지 않은 기색으로 찻잔을 들었다.
"아, 그러시군요. 초행 기념으로 제가 상품 녹차를 선사하겠습니다."
하시모토는 재빨리 말했다.
"아니 뭐 그런 것을...."
차를 한 모금 마신 이시바시의 얼굴에는 엷은 웃음이 피어났다.
"차 맛이 어떠십니까. 조선 중에서도 이 전라도 녹차가 으뜸입니다."
경찰서장이 끼어들었다.
"예, 맛이 아주 기막힙니다. 향기가 진하고 깊고 두꺼운 게 역시 일품이라는 말을 들을 만합니다."
이시바시는 차 맛을 무척 잘 아는 것처럼 말했다. 그는 처음과는 달리 기분이 많이 풀린 기색이었다.
"예, 역시 호걸이 호걸을 알아보더라고 이사바시상께서 조선 녹차 맛을 단박에 알아보시는군요."
아첨기 역연한 하시모토의 비유는 거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뭐 한 20년 마시다보니 자연히 알게 된 거지요."
아시바시는 겸손한 척 거드름을 피웠다.
"그 연세에 다력 20년이면 다성이 되신 거지요."
경찰서장은 하시모토보다 한술 더 뜨고 있었다.
"아니 다성까지야 뭐.... 그런데 조선에 와서 보니까 총독부 정책에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시바시는 담배를 입에 물며 거칠게 성냥을 그어댔다.
"아니, 그게 뭡니까?"
경찰서장이 어리둥절해했다.
"아 조선을 지배한 지가 언제고, 또 내선일체를 실행한 지가 언제라고 조센징들은 아직도 전부 흰 조선옷들이고, 그 상투라는 것에 갓 쓴 자들이 그리 많지요? 이래가지고서야 이게 조선 땅 그대로지 어디 일본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사비시의 말은 날카로웠다.
"예, 그게 글세.... 총독부에서도 여러 총독님들에 걸쳐서 지속적이고 다각적으로 우리 일본식인 검정 복장의 착용을 지시하고, 우리 경찰을 위시한 각급 행정기관에서는 총력을 다해 그것을 추진하고 있지만 만족할 만큼 실효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찰서장의 궁색스러운 설명이었다.
"그것 참 이해가 안 됩니다. 법으로 딱 정해 강압적으로 실시하면 될 거 아닙니까. 말 안 듣는 놈들은 다 감옥에 처넣고요. 조센징들이 검정 옷을 안 입고 꼭 흰옷을 입고 버티는 것은 대일본제국에 반항하고 저항하는 것이 아니고 뭡니까. 왜 그걸 용납하는 겁니까?"
이시바시는 아주 예리하게 경찰서장을 공격하고 있었다.
"예,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총독부나 우리 경찰에서도 그 점을 논의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허나 그 문제에는 복잡한 점들이 많이 지나친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골칫거리가 다 아시다시피 독립운동을 한다는 불령선인들입니다. 그자들을 색출 검거해서 감옥에 가두는데도 감옥이 모자라 계속 신설하는 형편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다, 조센징들에게 흰옷이란 우리 일본 사람들에게 검정 옷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입어온 뿌리 깊은 풍습인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풍습을 강압적으로 바꾸고, 위반자를 감옥에 넣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건 한마디로 조센징들 전부를 독립운동가 만들고 불령선인 만드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특수한 불령선인들을 제외한 일반 대중들은 속으로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목숨이 아깝고 살아가기 위해서 그런대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괜히 별것도 아닌 옷을 가지고 강압책을 썼다가는 엄청난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개도 막다른 골목으로 쫓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괜히 조센징들 숨통을 막아 화근을 만들 필요가 없는 거지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우리가 합방하기 직전인 한 40여 년 전에 조선 임금이 솔선해서 상투를 자르고 단발령을 내렸어요. 그런데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전국 유생들을 선두로 온 백성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고, 심지오는 의병이라는 반군이 생기기도 했어요. 자기네 임금을 상대로 그 모양이었으니 우리가 강압적으로 검정옷을 입히고, 상투를 자르고 해봐요. 그 사태를 수습할 수 있겠어요?"
경찰서장은 어떠냐는 듯 이시바시를 빤히 건너다보았다.
"그것 참, 조센징들도 독한 데가 있군요."
이시바시는 더 공격할 말이 없는지 짭짭 입맛만 다셨다.
"예, 조센징들 아주 끈질기고 음흉하고 보통 골치아픈 종자들이 아니오."
경찰서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일 잘하는 것 하나는 쓸 만하더군요. 징용자들이 지금 전쟁수행에 큰 힘이 되고 있으니까요."
"예, 그리 말썽없이 부려먹으려면 옷 같은 것으로 괜히 감정을 건드릴 필요가 없는 거지요."
경찰서장이 못박듯이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일산 광목이 아주 많이 팔린다면서요?"
이시바시는 무언가 미심쩍은 기색으로 물었다.
"예, 조센징들이 쓰고 있는 광목은 전부 우리 일산이지요."
그건 자신의 영역이라는 듯 하시모토가 얼른 대답했다.
"그럼 아예 광목에 검정물을 들여 생산하면 될 거 아닙니까?"
이시바시는 아주 대단한 생각이라도 해낸 듯 기세좋게 말했다.
"그랬다가는 우리 방직공장들이 다 망하게 되지요. 조센징들은 검정광목을 단 한치도 안 살 것이고, 조선여자들은 거의가 베 짜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시모토의 입가에는 경멸하는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게 또 그리 되나요?"
이시바시는 연속적인 역공을 당해 면목이 없는 듯 쓰게 웃었다.
"저어, 이번에 몇 명이나 징용을 해가지게 되는지요."
경찰서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예, 상부로부터 할당받은 게 3백 명입니다."
이시바시는 일부러 <상부>를 앞세워 말했다.
"예, 3백 명이라...."
경찰서장은 하시모토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시모토는 억지로 웃음짓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시바시의 얼굴이 긴장되며 모소리에 날이 섰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도청에서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몇 년째 징용이 계속되다 보니 곡창지대인 이곳에서는 노동료 부족으로 농사짓기에 어려움이 많은 형편입니다. 군량미 확보에 차질이 없어야 하니까 농사는 그전처럼 지어야 하고, 징용사업은 징용사업대로 지원해야 하고 그렇지요."
경찰서장은 웃어가면서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다.
"예, 그 얘기는 도청에서 잠깐 들었습니다. 그야 전시 체제하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부족한 노동력은 여자들과 노소까지 총동원해 해결해야 될 것 아닙니까. 내지처럼 말입니다."
이시바시의 말은 냉기가 끼쳤다.
"그야 물론이지요. 여기서도 진작부터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경찰서장은 무슨 오해를 받을까봐 그런지 목소리에 힘주어 크게 말했다.
"예, 그래야지요. 오래 쉬었습니다. 차량과 병력 일부는 도청에서 지원받았으니까 여기서는 병력 10명을 지원해 줘야 되겠는데요."
이시바시는 명령하듯 말하며 지휘봉 같은 막대기로 가죽장화를 쳤다.
"예, 지원하고 말고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내지인 경찰은 전선으로 많이 나가 그 자리를 조센징들로 채우고 있습니다. 10명 중에 6명은 조센징들이니 믿지 말고 잘 다뤄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믿지 못할 놈들을 제국 경찰로 채용해 먹여 살리고 있어요?"
이시바시가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아, 오해 마십시오. 다 충성심이야 의심할 것 없는 충견들이지요. 그런데 개별적으로 조센징들에게 둘러싸이거나 하면 맥을 못 쓴단 말이비낟. 특히 이런 식으로 강제징용을 할 때는 동네로 들어가 여자들에게 둘러싸이게 되는데, 여자들이 같은 조선사람인 것을 내세우며 덤비고 몰아대면 이게 곤란해진다 그 말입니다. 미안해 한다고 할까, 마음이 약해진다고 할까, 뭐 그런 심정 있지 않습니까?"
"예,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시바시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또 막대기로 가죽장화를 쳤다.
"3백 명을 확보하지면 며칠 걸리시겠군요."
하시모토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뭐 며칠씩이나 걸리겠어요. 한 이틀이면 되겠지요."
이시바시의 거침없는 대꾸였다.
‘시건방진 놈, 현지 사정도 모르는 풋내기가 가불대기는, 어디 한번 잘해봐라.’
하시모토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는 "수고하시는데 제가 오늘 저녁에 대접을 했으면 합니다. 어떠신지요?" 그는 아주 친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 그거 좋지요."
이시바시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예, 그러면 준비시키도록 하고, 우리 읍사무소에서도 몇 명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시모토는 더욱 우호적으로 말했다.
"아, 그래 주시면 더욱 고맙지요. 그럼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이시바시는 환하게 웃으며 탄력 좋게 몸을 일으켰다.
경찰서장과 하시모토는 재빨리 눈길을 교환했다. 그 은밀한 눈길을 이시바시는 눈치채지 못했다. 경찰서장이 굳이 하시모토를 부른 것은 징용 대장에게 환심을 사는 동시에 뒷다리를 붙들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하시모토가 녹차를 선사하겠다, 한턱을 내겠다 해서 환심을 사놓고, 읍사무소 직원들을 내보내 이시바시의 뒷다리를 잡을 참이었다. 하시모토는 그동안 자기 농장의 소작인들이 징용에 끌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최대한 애써왔고, 그 일에 경찰서장은 공모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읍사무소 직원들은 지원이 아니라 이시바시가 하시모토의 농장 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도록 되어 있었다. 하시모토가 그렇게 일을 꾸미는 것은 물론 소작인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징용을 볼모로 잡은 하시모토는 쌀을 증산하라고 소작인들을 몰아치는 한편 소작료를 80%씩이나 뜯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반발하는 소작인이 생기면 재깍 징용으로 내보내 버렸다. 징용 끌려가면 뼛골 빠지고 고생하고 죽기 십상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판에 소작인들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시바시는 징용대 20여 명을 호송차 5대에 분승시켜 경찰서 앞을 떠나. 차들은 곧 김제 읍내를 벗어나 들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저기 저쪽에 차 세워"
맨 앞차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이시바시는 막대기끝으로 창 밖의 야산을 가리키며 운전수에게 명령했다. 운전수는 전주에서 온 조선인 경찰이었다. 앞차가 정거하자 뒤따라오던 차들이 차례로 멈추었다.
"전원 집합하라"
이시바시는 야산자락의 바위 위로 올라서며 외쳤다. 차에서 내린 경찰들과 읍사무소 직원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목검이 들려 있었다.
"지금부터 지시하는 것을 전원 똑똑히 들어라. 우리가 지금부터 사냥할 징용 숫자는 3백 명이다. 1개조 4명씩으로 편성하여 이틀 동안 임무를 완성해야 한다. 각각 1개 조의 책임 할당량은 75명씩이다. 이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특히 조선인 경찰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같은 조선사람이라고 하여 사정을 보아주거나 임무 수행을 철저히 못할 시는 가차없이 처벌할 것이다."
이시바시는 소리침과 동시에 칼을 휙 뽑아 들었다. 그가 여지껏 몸에서 떼지 않고 있었던 지휘봉같이 생긴 막대기는 그냥 막대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틀어 돌리면 속에서 칼이 나오는 이중으로 된 호신 무기였다. 그 50센티쯤 되는 둥근 막대기 속에서 나온 칼은 폭이 좁고 길어서 유난히 예리해 보였다.
"우리가 수행하는 임무는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의 칙령을 받들고 대 일본 제국 육군성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명심하라. 성전을 수행하고 있는 육군성은 징용자들을 화급히 필요로 하고 있다. 지금부터 남자는 눈에 띄는 대로 사냥하라. 제군들 임의대로 선별하지 말고 무조건 사냥해서 차에 태워라. 선별은 차후에 내가 한다. 지금부터 1개조씩 각 마을로 분산하여 사냥을 개시한다. 지금 시각 오전 11시, 오후 5시 정각에 이 지점에 재집결한다. 이상."
절도있게 지시를 마친 이시바시는 칼을 막대기에 꽂았다. 차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기 논에 둘 있다. 빨리 가서 차 세워."
이시바시가 저 앞쪽의 논을 가리키며 약간 들뜬 소리로 명령했다. 운전경찰은 차를 빨리 몰기 시작했다. 두 대의 차는 벌써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차가 멈추기 바쁘게 이시바시는 차에서 뛰어내렸다.
"뭣들 하고 있나 빨리 내려서 저것들 잡아."
이시바시의 날카로운 외침에 뒤포장 속에서 세 명이 뛰어내렸고, 운전수도 허둥거리며 내려섰다. 그들 네 명은 둘씩 양쪽으로 갈라져 논두렁을 뛰어가고 있었다. 이시바시는 양쪽 팔을 허리에 받쳐올리고 서서 그들의 모습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곧 논에서 농부 둘을 끌어내 이시바시 앞으로 끌어왔다.
"아니, 늙은이들 아닌가"
이시바시의 얼굴이 일순간 짓구겨졌다. 손발에 진흙이 묻은 두 농부는 얼굴에 주름살투성이고 허리가 굽은 노인들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이시바시가 눈을 부라렸다.
"예, 청장년들은 징용을 많이 나가서..."
일본인 경찰이 어물거렸다.
"칙쇼 가자."
이시바시가 막대기로 허공을 내리치며 돌아섰다.
"왜 저리 화럴 내고 저려?"
"헛방쳤응게 그러제."
"치, 여그 실정얼 암것도 몰르는 구만."
이시바시의 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고, 그 뒤를 따르던 두 대가 갈림길이 나타나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돌렸다. 푸르른 들녘에는 머리에 수건을 쓴 여자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이거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군, 이거 징용을 이렇게 많이 끌려갔나,’
이사바시는 초조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막대기로 가죽장화를 탁탁탁탁 치고 있어.
"저기 저 부락 앞에 차 세워"
이사바시는 멀이 보이는 마을을 손가락질했다. 30여 호의 마을을 멀찍이 앞두고 차가 멈추었다. 길이 좁아 차가 더 들어갈 수 없었다.
"2인 1조로 집집마다 샅샅이 뒤져라."
이시바시는 열 받쳐 소리쳤다. 그들이 마을로 가까워지고 있는데 이쪽으로 오고 있던 여자 하나가 갑자기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빨간 댕기가 함께 뛰고 있었다.
"저걸 쫓아라. 틀림없다."
이시바시가 날카롭게 외쳤고, 네 명은 앞다투어 뛰기 시작했다. 이시바시는 당산나무 아래 이르로 걸음을 멈추며 담배를 꺼냈다. 당산나무에서 매미들이 더위를 즐기는 듯 극성스레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이시바시가 담배를 거의 다 피워 갈 즈음에 조장인 일본인 경찰이 한 남자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 왔다. 경찰은 그 남자를 이시바시 앞에 무릎 꿇어 앉혔다. 그런데 그 남자는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반항을 했습니다."
경찰이 코피를 흘리는 이유를 댔다.
"잘했어, 이 정도면 쓸 만하군."
이시바시는 남자를 살펴보며 경찰에게 어서 가보라고 손짓했다. 잡혀 온 남자는 마흔다섯이 넘어 보였다. 그런데 햇볕에 검게 그을리고 마른 얼굴에 비해 목이 굵고 어깨가 넓었다. 전형적인 농부의 체형이었다. 얼굴을 떨군 그 남자는 코피를 닦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꺼냈는지 이시바시는 막대기 속에서 나온 칼을 꼬나들고 있었다.
"이거 어째 이려, 나넌 발써 4년 전에 낭인덜헌티 속아 규슈탄광서 2년 기한 때우고 온 사람이란 말이여. 고건 주재소서도 다 아는 일이여"
한 남자가 끌려오며 고래고래 소리지로고 있었다.
"나는 벌써 4년 전에...."
이시바시앞에 끌려온 그 남자는 일본말로 말을 시작했다.
"닥쳐라, 더 떠들면 아가리를 찢어놓겠다."
이시바시는 그 남자의 말을 자르며 곧 칼질을 할 것처럼 칼을 겨누었다. 서른 대여섯 되어 보이는 그 남자는 아랫입술을 질끈 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안 되어라, 안 되어라. 농새도 못 짓고 있는 병자럴 끌어가는 법이 어디 있다요."
다리를 절룩이며 끌려오는 남자 옆을 따라오며 한 여자가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 앞에 대여섯 여자들이 나와 서 있었다.
"보시게라, 이 남정네넌 병자구만이라. 병자."
그 여자는 남편의 퉁퉁 부은 장딴지를 가리키며 이시바시에게 울상을 지었다. 이시바시는 그 남자의 위아래를 훑었다. 마흔다섯쯤 되어 보이는 그 남자는 키가 좀 작을 뿐 건강해 보였다.
"이건 병원에서 치료시키면 곧 낫는다. 저 여자 끌어가."
이시바시는 조선인 경찰에게 명령했다.
"요런 숭악헌 놈덜아아, 병자럴 끌어가는 법이 시상에 어딨다냐아."
여자는 몸부림치고 목놓아 부르짖으며 마을로 끌려가고 있었다.
"안돼야, 안된당게로. 갸넌 안직 신체검사도 안 받은 애기여."
여자노인이 경찰에게 매달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경찰에게 끌려오고 있는 것은 영다섯 살쯤 나 보이는 사내였다.
"이게 이래봬도 등짐질을 잘하는 걸 보고 끌어왔습니다."
사내를 이시바시 앞에 세우며 일본인 순사가 말했다.
"안돼야, 안돼야, 갸넌 열다섯도 안 묵은 애기여, 애기"
여자노인이 펄펄 뛰며 소리쳤다.
"저 늙은이는 뭐라고 떠드는 거야?"
이시바시는 얼굴을 찌푸렸다.
"예, 열다섯 살도 안 먹었다는 겁니다. 순 거짓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열일곱 살은 먹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데, 골격도 잡히고." 이시바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간단하지, 그놈 바지를 끌어내려" 일본인 순사에게 고갯짓을 했다.
"아, 예"
일본인 경찰은 그 말뜻을 알아듣고 무릎 꿇은 사내를 일으켰다.
"바지 벗어라."
"야아?"
사내는 질겁을 하며 바지춤을 움켜잡았다.
"빨리 내려"
경찰은 목도로 사내의 등을 내리쳤다.
"아이고메, 사람 잡네"
여자노인이 펄쩍 뛰었다. 사내는 어쩔 수 없이 바지를 까내렸다. 그런데 사내의 손은 그것이 보일락말락한 데서 멈추었다.
"더 내려"
경찰이 또 목도를 치켜들었다. 사내의 바지가 좀더 내려갔다. 사내의 불두덩에 거웃이 거뭇거뭇 돋아나고 있었고 뭉특한 성기의 끝은 속살이 빠끔히 드러나고 있었다.
"맞었어, 거짓말이야, 저 늙은이 끌어가"
이시바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상으로 다 끝났습니다."
일본인 경찰이 말했다.
"아 그런가, 그런데 남자가 이것밖에 안 되나?"
이사바시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들에 나간 자들도 좀 있을 것이고, 요행히 딴 데 가서 피한 자들도 좀 있을 겁니다."
"그렇겠군, 이놈들을 빨리 차에 실어."
이시바시는 칼을 꽂으며 명령했다.
"이놈덜아, 안돼야, 안돼야"
"이 베락맞어 뒤질 놈덜아"
"요런 개만도 못헌 인종덜아"
남자들은 묵묵히 끌려가고 있었고, 여자들은 발악적으로 소리지르고 있었다. 남자들이 차에 다 태워질 때까지 여자들은 당산나무 아래서 목이 잠기도록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 울부짖음은 매매들의 울음소리에 섞여 더 애처롭게 퍼지고 있었다. 포장 친 자동차는 다시 짙푸른 들녘 가운데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거 왜 이리 덥나. 물통을 준비할 걸 깜빡 잊었군, 어디 물 마실 데 있나 찾아봐"
이시바시는 손바닥으로 방정맞게 부채질을 해대며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운전경찰이 엉덩이를 들썩하며 대답했다. 한동안 달리던 자동차는 외딴집 앞에 정거했다. 그 집은 주막이었다. 그들은 주막으로 들어섰다.
"저기, 저놈 잡아라."
마당으로 막 들어서던 이시바시가 외쳤다. 한 남자가 마루에 걸터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두 명의 경찰이 잽싸게 쫓아갔다. 다른 경찰 두명은 차에서 사람들을 지키고 있었다.
"어째 이러요, 어째"
두 경찰에게 붙들린 남자는 몸부림치며 소리질렀다. 그의 입에서 보리밥 알갱이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놈아, 꼼짝 말어"
조선인 경찰이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풀이 꺽이고 말았다.
"아이고, 어러신덜, 아이고 앉으시게라, 아이고 이 더운디, 아이고...."
부엌에서 나온 늙은 주모는 비굴한 웃음을 피워가며 수선스럽게 아첨을 떨어댔다. 젊은 여자는 부엌안에 몸을 감추고 얼굴 반쪽만 내밀고 있었다.
"얼렁 시언헌 찬물 갖고 와"
조선인 경찰이 주모에게 일렀다.
"야아, 씨언헌 것 있제라."
주모는 허둥지둥 돌아섰다.
"아이고, 어러신, 아니 대장님. 지가 집에 앓아누우신 노모가 기시구만요, 글고 처자석언 보고 떠얄 것 아니겠능게라. 이리 장사 나와갖고 떠불먼 식구덜이 어찌 되겄능게라. 담에, 다음 판에 나가게 사정 잠 봐주시씨요."
서른서넛쯤 나 보이는 그 남자는 이시바시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두 손을 비비대며 애걸하고 있었다.
"끌어가라."
이시바시가 싸늘하게 명령했다.
"아이고메, 시상에 요런 법이 워딨어, 이리 모질게 사람 생이별시키는 법이 워딨어어"
그 남자는 끌려가며 무슨 큰 짐승이 우는 것 같은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가 먹다 만 개다리소반 옆에는 네모진 등짐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시바시는 무표정하게 물사발을 천천히 기울이고 있었다.
"부장님, 정오가 지났는데 여기서 식사하시겠습니까?"
다시 돌아온 일본인 경찰이 물었다.
"에이. 틀렸어, 이 고약한 냄새가 뭐야 이거"
이시바시는 코 끝에 손부채질을 해대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주막에는 돼지고기 삶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 화식당은 면소에 가야 있습니다."
"괜찮아, 한끼 굶어도 안 죽는다."
이시바시는 마루에서 일어났다. 자동차가 달려가고 있는 들녘에 여자들의 느리고 한스러운 가락이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지고 있었다. 따가운 햇살은 푸르른 볏잎들에 부서져 내리고, 무심한 제비들이 더위를 가르며 경쾌하게 비행하고 있었다.
오후 5시에 5대의 자동차는 이시바시가 지정한 장소에 다시 모였다.
"뭐라고, 총 43명 그동안 뭣들 했나. 자빠져 잤나, 술들을 쳐마셨나. 이래가지고 언제 3백 명을 채우겠나. 모두 파면당해야 정신 차리겠나, 내가 상부에 보고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너희들은 당장 파면이야. 파면. 아무리 사정이 좋지 않더라도 최소한 한 조에 10명씩은 넘어얄 것 아닌가. 그런데 평균 7명도 못 된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이시바시는 분통을 터뜨리며 막대기에서 뽑아낸 칼을 휘두르고 가죽 장화발로 땅을 굴러댔다. 이시바시가 붙잡은 사람은 모두 16명이었다. 그는 차를 타고 돌아오며 나머지 4개 조가 평균 13명 정도씩, 52명으로 계산했다. 그래도 자기가 잡은 것을 다 합쳐 68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3백 명을 채우려면 5일이나 걸려야 했다. 그는 계획 차질이 너무 심해 못내 속이 상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모아놓고 보니 4개 조가 잡아온 것은 27명에 지나지 않았다. 예상이 너무 빗나가 그만 그의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오늘이 첫날이라 일 시작이 너무 늦었고, 부장님께서 잡으신 것을 견본 삼아 내일부터는 성과를 극대화시키겠습니다. 부락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정일에서 큰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으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일본인 순사가 나서서 절도있는 태도로 사과했다.
"좋아, 내일 다시 보겠다. 내일부터는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사냥시간을 연장한다. 다들 내가 잡아온 놈들을 똑똑히 봐둬라."
이시바시가 잡아온 사람들 16명이 모두 끌어내려졌다. 순사들과 읍사무소 직원들은 한 줄로 세워진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들은 몸이 아픈 사람에다 아직 다 크지도 않은 사내까지 잡아 온 것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견본>으로 하라고 하니 감히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잡혀 온 사람들은 경찰서에 맡겨졌다. 장딴지가 아픈 병자만 골라내 병원으로 보냈다.
맘껏 술을 마시고 기생까지 끼고 하룻밤 자고 난 이시바시는 피곤한 기색이 역연한 채로 징용대 앞에 섰다.
"오늘은 2개 조로 편성한다. 자동차 3대가 1조, 나머지 2대가 2조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도록!"
이시바시는 조를 분산시켜 어제 같은 결과가 오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 3대의 자동차를 직접 지휘해서 대원들의 태만과 불성실을 막으려는 것이었고, 4명 1개조가 한 동네를 뒤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침 일찍 논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아침을 먹고 다시 지게를 지고 나서던 차득보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순사 두 명에게 붙들렸다.
"이거 어째 이러시오!"
차득보는 불끈 기운을 쓰며 두 순사를 좌우로 떠밀었다.
"이놈이 이거!"
순사 하나가 재빠르게 목도를 휘둘렀다.
"윽!"
차득보는 비명을 토하며 옆구리를 싸잡았다. 순사가 휘두른 목도가 여지없이 옆구리를 강타했던 것이다.
"이이고메 연희 아부지!"
연희네가 부엌에서 뛰쳐나오며 부르짖었고, 마루에서 놀던 두 아이가 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차득보가 몸을 제대로 펴지도 못하는데 두 순사는 그를 끌어냈다.
"아이고, 무신 죄를 졌다고 이러시오."
연희네가 순사 하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징용 가는 거여, 징용!"
순사가 연희네를 뿌리치며 내쏘았다.
"아이고 으쩌끄나, 으쩌끄나......"
연희네가 울음을 터뜨리며 발을 굴렀다. 차득보는 사립 밖으로 끌려 나가며 기어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좀 이상했다. 징용은 으레 끌려가기 이틀이나 사흘 전에 통고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안 단속도 하고 옷가지도 챙길 여유가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야반도주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차득보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 고샅 저 고샅으로 순사들이 뛰고, 이 집 저 집에서 여자들의 울부짖음과 통곡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차득보는 아내를 잠깐이라도 만나고 싶었다. 농사와 아이들에 대한 당부는 한마디 해야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순사들의 기세로 보아 말을 들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막상 아내를 두고 떠나자니 가슴이 먹먹해지고 콧날이 매워졌다. 자신이 떠나고 말면 아내는 그야말로 외톨이였다. 자신도 부모없고 아내도 친정이 없었다. 옥녀마저 없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아내는 어찌할 것인가. 서로 고적한 신세라 더 정분 깊게 살아온 사이였다.
"물팍 꿇어라."
이시바시 앞에 이르자 한 순사가 차득보에게 명령했다.
"나가 무신 죄졌소. 징용 나가먼 되았제"
차득보는 순사를 노려보았다.
"이놈의 새끼가"
순사가 차득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차득보는 무릎이 꺾였고, 두 순사가 우악스럽게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놈이 뭐랬나?"
이시바시가 억지로 무릎 꿇는 차득보와 순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예, 징용을 나가면 됐지 죄진 것 없으니 무릎을 안 꿇겠다는 겁니다."
"하 제법 똑똑한 놈이로구나. 똑똑해 봤자 버는 것 매밖에 없다는 걸 똑똑히 알아둬야 해 . 이 조센징놈아."
이시바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막대기끝으로 차득보의 머리를 톡톡 때리고 있었다.
차득보네 동네에서는 8명이 붙들렸다. 그들이 차에 실리기 직전에 여자 몇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들 중에 연희네도 섞여 있었다. 그 여자들은 작은 보퉁이를 하나씩 안고 있었다. 여자들은 무작정 남편들에게로 달려갔다.
"출발이다. 빨리 태워라."
이시바시가 외쳤다. 남자들은 아내들에게 보퉁이를 받아들었고, 여자들은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남편들을 따라 걷고 있었다.
"아그덜 잘 키우고.., 농새 잘 돌보고..."
차득보는 목메임을 참느라고 침을 삼켰다.
"야아..."
목이 메어 대답이 제대로 안 나오는 연희네의 눈에는 곧 쏟아져 내릴 듯이 눈물이 가득했다.
"무신 일 있으면 운봉 시님 찾어가고..."
"야아.."
"얼렁얼렁 타라"
"얼렁 타, 얼렁"
순사들이 사람들을 잡았다. 차득보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야아, 당신도..."
연희네가 남편의 손을 맞잡았다. 마침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쏟아져 내렸다.
"야, 얼렁 타"
순사가 차득보의 어깨를 쳤다. 차득보는 차로 밀려 올라갔다. 차가 곧 출발했다.
"아이고메, 으쩌끄나"
"이놈덜아, 이 웬수덜아"
"시상에나, 시상에나..."
여자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때서야 서너 여자가 보퉁이를 안고 뛰어오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해지면서 들녘에 석양빛이 물들고 있었다. 초록빛에 감도는 불그레한 석양빛은 그지없이 신비스럽고 아름다웠다. 그 황홀한 색조 속으로 하얀 해오라기도 작은 제비들도 둥지를 찾아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풍광에 어울리지 않게 자동차 세 대가 흉물스럽게 달리고 있었다. 그 자동차들은 사람 네댓 명을 태운 마차를 앞질러 갔다. 그러나 잠시 후 자동차들은 차례로 정거했다.
"저 마차에 탄 놈들을 다 끌어내려라."
이시바시가 차에서 뛰어내리며 외쳤다. 순사들이 뒤따라오고 있는 마차를 향해 우루루 몰려갔다. 마차가 멈춰지고 사람들이 멱살을 잡히고 뒷덜미를 잡히고 해서 끌려 내리기 시작했다.
"이놈덜아, 나가 누군지 아냐. 이놈덜아, 여그 못 놓겄냐"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유난히 목청 높게 호령을 해대면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두 팔을 허리에 받쳐올리고 선 이시바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남자의 하는 꼴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놈덜아, 나가 누군지 아느냔 말이여. 나넌 만경 만석꾼 정방현이여, 정방현이 느그놈덜이 뒤질라고 이러냐. 여그 못 놓겄어."
그 남자는 더 몸부림치며 양쪽 순사의 다리를 걷어차고 있었다. 그는 과연 정상규의 큰아들 정방현이었다. 그는 허풍을 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만석꾼 지주였다. 정상규가 병상에서 서너 달을 끌다가 죽어버렸으니 만석꾼 재산은 고스란히 그의 차지가 된 것이었다. 그는 전주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봉변을 당한 참이었다.
"그 자식이 왜 그리 까불어?"
이시바시가 가까워진 순사에게 눈을 치떴다.
"예, 만석꾼 지주랍니다."
조선인 순사가 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만석꾼 지주? 흥, 조센징들 거짓말, 빨리 쳐넣어."
이시바시가 막대기로 허공을 치며 돌아섰다. 두 순사가 정방현을 사정없이 차로 떠밀어올렸고, 정방현은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이시바시는 예정보다 3일이나 늦은 5일 만에 3백 명의 징용자들을 그의 말대로 <사냥>했다. 그들은 전주에서 기차에 실렸다. 그런데 붙잡힌 사람들 중에서 꼭 한 사람이 풀려났다. 그는 정방현이었다. 그가 정말 만석꾼 지주인 것이 밝혀지자 당황한 것은 경찰이었다. 만석꾼은 무시해서는 안 되는 고액납세자였고, 식량 생산자였으며, 전쟁 후원금을 내는 후원자였던 것이다. 조선사람치고 제1급에 속하는 재력가이면서 세도가와 더욱 친목을 돈독히 해야 할 형편에 이틀이나 생지옥살이를 시켰으니 그 입장 곤궁하기가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순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그들 3백 명이 내린 곳은 여수항이었다. 그들은 관려 연락선 여수환을 탔다. 관려 연락선은 시모노세키와 여수를 정기적으로 오가는 것을 알았다.
"존 시절 다 가부렀소."
차득보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고
"참말로 그 때가 꿈만 같소."
서근호도 씁쓸하게 웃으며 한숨을 지었다. 그들이 말한 <좋은 시절>이란 사회주의 운동 비밀조직에 속해 서로 연락 임무를 맡았던 때였다. 그들은 배를 탈 때 한 방에 들어갈 수 있도록 나란히 줄은 섰다. 차득보 뒤로는 동네 사람 7명이 따라붙어 있었다. 한동네 사람들은 서로 한 덩어리가 되려고 애를 썼다. 뱃고동 소리를 길게 울리며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선실은 싸늘할 만큼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침울하고 슬픔에 차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울기도 했다.
"요리개 끌어가디끼 허는 것이 무신 연고다요?"
서근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금매 말이오. 육시헐 놈덜이 똥줄이 타도 되는 타는 것 아니겄소."
차득보가 쓰디쓰게 웃었다.
"참 징허고 징헌 놈으 시상이오. 요런 놈으 시상이 은제꺼정 갈라는지 원."
그들은 한숨만 쉴 뿐 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그런 식의 징용 방법이 어째서 생겨났는지 알 까닭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징용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건달패인 낭인들에게 속아 인신매매를 당한 경우였다. 낭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몇 푼의 전도금을 주면서 일본에 가면 돈벌이가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꾀었다. <모집>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을 끌고 간 낭인들은 탄광이나 광산, 철도공사 같은 데다 팔아넘겼다. 낭인들이 받은 돈은 끌려간 사람들의 임금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몇 년동안 감시 속에서 골 빠지게 일만하고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와야 했다. 이 방법은 벌써 1910년경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두 번째는 관에서 알선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일본의 국익 군수산업체서 필요한 조선인 노무자들을 관의 행정계동을 따라 조달하는 것이었다. 사업소-현의 지사-후생성-조선총독부-지방관서의 절차로 이루어졌다. 징용법이 시행되고 나서도 이 방법은 한동안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방법의 문제점은 행정절차 때문에 노무자 조달이 3개월 이상씩 걸린다는 것이었다 전쟁은 자꾸 확대되어 가고, 석탄 생산이며 군사시설 같은 것은 하루가 급한데 3개월이란 너무나 긴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이 세 번째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노무자 징용은 때와 장소에 따라 이 세 가지 방법이 함께 사용되는 것이었다. 18시간의 항해 끝에 그들은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그들은 경찰의 감시 아래 부두에 커다란 창고들에 갇혔다. 숨이 막히는 더위 속에서 그들은 사흘을 보냈다. 그들은 하루에 한 끼밖에 얻어먹을 수 없었다. 그것도 제대로 된 밥이 아니라 주먹밥 한 덩어리에 단무지가 한쪽씩뿐이었다. 그런데 그 밥을 해오는 것은 조선 여자들이었다.
"요것 묵고 어찌 살라고 이러요."
사람들의 노여움이 빗발쳤다.
"우리가 멀 아나요.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요."
여자들의 힘없는 대꾸였다.
"우리 어디로 가게 되는 거요?"
이런 것은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가 그런 걸 어찌 아나요."
여자들이 근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나흘째 되는 날 기차를 탔다.
"우리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일본말을 할 줄 알면서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차득보는 순사에게 물었다.
"닥쳐라, 가보면 안다."
순사가 개머리판으로 차득보의 어깻죽지를 갈겼다. 그들이 탄 것은 객차가 아니라 화물차였다. 도주 방지와 군공사의 기밀 보호 때문에 강제 연행된 노무자들은 전부 화물차에 태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들은 굶주림과 더위에 시달려 객차든 화물차든 따질 겨를이 없었다.
기차가 밤낮으로 달려 그들은 어느 항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들은 수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을 알았다.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어디선가 반수는 딴 곳으로 간 것이었다. 차득보는 배를 타고 나서야 홋카이도로 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늙은 선원한테 살짝 물어본 것이었다. 차득보는 홋카이도가 섬이라는 것뿐 그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41. 정복되지 않는 혼
"아버님 건강은..."
"괜찮다. 아무 걱정 말어라."
송중원은 철망 사이로 아들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얼굴은 나쁜 편이 아니었다.
"더위가 심한데요..."
말이 짧은 송준혁은 또 위아랫입술을 맞물 듯 입을 굳세게 다물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그 입술에는 분노와 고통과 눈물이 뒤엉켜 있었다.
"괜찮다. 책 읽으면서 시원하게 보내고 있다."
송중원은 아들은 바라보며 그윽하게 미소를 지었다. 눈빛이 살아 있고, 분노와 증오가 살아 있는 아들이 대견했다. 수염자리가 완연히 드러나고, 얼굴의 틀이 완전히 잡힌 아들은 이제 어엿한 성인의 체모를 갖추고 있었다. 송준혁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삼복더위를 감방에서 지내시면서 시원하시다니..., 그만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분노가 극에 달하면 차가워지는 것인가....,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아버지의 심중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고생이 너무 심하십니다...."
"괜찮다, 나 혼자 당하는 일이 아니니."
송중원은 안타까워하는 아들을 쓰다듬듯 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들이 참아내고 있는 가슴속의 말을 다 들으면서.
"공부는 마음에 드느냐?"
면회시간이 자꾸 줄어들어 가는 것을 의식하며 이제 송중원이 물었다.
"예에..."
"그래, 고학하느라고 너무 고생이 많다."
"아닙니다. 가정교사라 편합니다."
송준혁은 일부러 <가정교사>라는 것을 강조했다.
"...."
송중원은 그런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눈길을 옮겼다. 더 아들을 쳐다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허탁과 함께 고학을 할 때 아들이 또 고학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든 싸워나가면 자식 대에는 해방이 되리라는 꿈이 확실했었다. 그런데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가 오늘에 이르렀다. 어쩌면 아들도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며 고학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는지고 몰랐다.
"그래, 공부 열성으로 해라."
송중원은 다시 아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들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에는 말보다 더 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
"예에..."
송준혁은 아버지의 눈에 담긴 말을 읽어내고 있었다. 배움이 힘이다. 배워야 이긴다.
"만료"
간수가 외쳤다.
"저는 곧 떠납니다. 그간에 건강하십시오. 외할아버님이 안부 전하셨구요."
송준혁은 철망을 붙들며 한달음에 쏟아놓았다.
"너도 건강해라."
송중원이 괴로운 빛 깃들인 허전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아버지가 걸음을 옮겨 놓을수록 송준혁의 시야는 흐려지고 있었다. 송중원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문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송준혁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송준혁은 전주 형무소를 터덕터덕 걸어 나왔다. 죄명도 형기도 없는 되수, 그것이 아버지였다.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감옥마다 얼마나 될지 아무도 몰랐다. 오로지 총독부만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송준혁은 결국 그 고민을 아버지한테 말씀드리지 못하고 말았다. 그 문제를 의논드리기에는 면회 시간이 너무 짧았고, 괜히 아버지의 마음만 산란하게 할 것 같았던 것이다.
에시마 교수는 자기 아들을 가르치며 자기 집에 와 있으라고 했다. 에시마 교수의 학점을 계속 잘 받은 데다 저서의 원고 정리를 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런 제안을 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학생으로서 일단 영광일 수 있었다. 교수한테 그만큼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인 가정에 기식한다는 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부자유와 불편도 문제였지만 일본인 가정에 산다는 것 자체가 더 문제였다. 그들과 어울려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의식에 변질이 생길지도 모르고, 남들의 눈에도 떳떳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거 전혀 고려할 것 없어. 에시마 교수가 정치성도 없고 인품 갖춘 순수한 학자이긴 하지만 일본인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이야. 그 집에 들어가면 당장 자취생활 면하는 것 하나는 이득이지. 그 대신 일거수일투족이 얼마나 신경 쓰이고 불편하겠는가. 그리고 정작 애 가르치는 것을 따져봐. 교수 아들을 가르치는데 성적이 쑥쑥 안 올라가면 자네 입장이 어찌 되겠나? 그에 비하면 지금 자리는 얼마나 속 편한가. 성적이 떨어지지만 않으면 됐지 김이도가 언제 조카 성적에 관심이나 쓰던가? 그러고 말야, 자네 거기 들어가 살게 되면 에시마 교수의 궂은일은 다 떠맡게 된다는 거나 알라구."
최문일은 가정교사 자리를 소개해 준 사람답게 이렇듯 반대가 단호했다. 최문일은 꼬집을 데를 정확히 꼬집은 것이었다. 그러나 교수의 제안이라서 함부로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좀 생각해 볼 여유를 달라는 말로 일단 피해 서기는 했다. 그러나 이번에 개학을 하면 가부를 분명히 해야 했다. 송준혁은 아버지께 그 문제를 말씀드리지 않는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로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괴롭게 해드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고,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해결해야 될 문제였던 것이다. 마차를 타려고 공설시장 앞을 지나가던 송준혁은 걸음을 멈추었다.
"거 남자덜도 한 땀썩 뜹시다."
"남자덜언 안 된다고 안혀."
"여자덜만으로 어느 세월에 천 땀얼 채우겄어."
"글씨 말이시, 근디 처녀로만 허먼 더 좋당마."
"그러다가넌 10년도 더 걸리겄네."
여자들이 길가에서 수틀 하나에 번갈아 가며 수를 놓고 있었고, 허름한 옷에 지게를 진 남자 서넛이 조금 떨어져서 이런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들은 많이도 아니고 꼭 한 땀씩을 뜨고는 시장 안으로 들어가거나 제 갈 길을 갔다. 송준혁은 그것이 천인침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가 걸음을 멈춘 것은, 저걸 왜 여기서도 하고 있나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천 사람이 한 땀씩 떠서 무운을 빈다는 그것은 일본에서는 벌써 몇 년 전부터 대유행을 이루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날이 날마다 전쟁터로 끌려가는 사람들은 많고, 그 사람들이 다 하나씩 몸에 지녀야 했던 것이다.
"저것얼 지닌다고 무신 효험이 있기넌 있을랑가?"
"몰르제, 효험이 있당게 허기넌 히얄 것 아니라고. 지서이먼 감천이라는 말이 있는디, 전장터에 자석 내보내는 에미 맘으로 어찌 그냥 보내지겄오."
"허기사 그려. 점도 굿도 다 그저 좋당게 허는 것이제. 그나저나 징용에다가 인자 징병꺼정 끌어가면 이놈으 시상이 어찌 되는 것이여?"
"우리겉이 쓰잘디 는 늙다리덜만 남고 쓸 만헌 젊은 사람덜이야 다 파리목심 된 팔자제."
"참, 살수록 험헌 꼴만 보네."
"그려, 누가 이 나이에 지게품 팔로 나설지 알었드렁가. 생때겉은 자석덜 다 징용에 뺏기고."
"그려, 전답 뺏길 적만 히도 덜 서러웠든 것이여. 이 꼬라지가 참...."
"하먼, 그때야 젊기나 혔고, 땅허고 자석허고럴 댈 수가 있간디."
지게 진 늙은 남자들은 푹푹 한숨을 쉬어댔다. 송준혁은 그때서야 조선 땅에서도 징병제가 이미 실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송준혁은 못내 충격을 받았다. 작년 5월에 의결된 조선인의 징병제는 내년인 1944년부터 시행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의 확대롸 계속되는 전사로 병력이 모자라게 되자 총독부에서는 슬그머니 금년 8월 1일부터 징병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송준혁은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누구를 위해 전쟁에서 죽어가야 하는가. 송준혁은 바로 눈앞에 닥친 위기를 느꼈다. 그 위기는 저항감을 불러일으켰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독립투쟁을 하다 죽어야 한다. 평소에 스쳐 지나가곤 했던 생각이 비석에 새겨진 글씨처럼 뚜렷하게 의식에 박히고 있었다. 전쟁터에 끌려나가 일본을 위해 죽는 것. 그건 할아버지의 뜻이 아니더라도 자기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작 만주 땅으로 가야 하지 않았을까 송준혁은 낭패감으로 심정이 착잡했다.
송준혁은 수틀을 든 여자 옆에서 지나치며 슬쩍 눈길을 돌렸다. 수틀 가운데 있는 세로가 긴 천에는 무운장구 네 글자의 외곽선이 먹지의 흔적으로 그려져 있었고, 빨간 숫실은 무자를 거의 다 만들어가고 있었다. 수틀을 든 여자의 불안하고 초췌한 얼굴과 붉은 숫실 글자가 되려면 아직도 먼 세 글자가 송준혁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다행히도 수틀을 본 여자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꼭 한 땀씩 뜨는 것이었다. 그런데 송준혁은 깜짝 놀랐다. 일본 여자 하나가 게다짝을 딱딱거리며 다가섰던 것이다.
"나도 한 땀 뜰까요?"
일본 여자가 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여자는 어색스럽게 웃으면서 수틀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일본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틀림없이 무운장구할 거예요."
일본 여자는 연상 생글거리며 수틀을 돌려주었다. 여자는 초췌한 얼굴에 고마운 빛을 띠며 수틀을 받았다. 두 여자의 옷치장이며 얼굴색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일본 여자는 하늘색 바탕에 방울무늬가 있는 원피스를 입었는데 얼굴은 발그레하게 윤기가 돌고 있었다. 그런데 수틀을 든 여자는 후줄근한 삼베 치마저고리를 걸치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검고 거칠었다. 송준혁은 그 광경을 어이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총독부에서는 징병을 끌어가고, 일본 여자는 생글거리며 천인침을 거들고... 송준혁은 새로운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일본 여자가 생글거리지 않고 좀 슬퍼하거나 안됐어하는 표정만 지었더라도 그렇게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천인침의 바탕천은 여러 가지 색깔이었다. 그러나 글자를 수놓은 숫실은 반드시 빨간 색실이었다. 빨간색이 모든 액운을 막고 온갖 잡귀를 쫓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 사람의 정서잉 모아진 천인침을 몸에 지니면 사지에서도 살아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일본식 미신인데 어느덧 조선 땅에까지 퍼지고 있었다.
앞으로 천인침을 얼마나 많이 만들게 될 것인가.
송준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무거운 발걸음 을 다시 옮겨 놓기 시작했다.
"금예 아덜 이름 지어주고 떠나그라."
아들과 함께 밥상을 받은 홍씨가 말했다.
"제가요?...."
전동걸은 숟가락을 들다가 놀란 기색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애비가 없응게..."
홍씨의 반응은 진지했다.
"아이, 제가 어떻게 작명을 할 줄 아나요."
전동걸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본래 자석덜 이름이냐 아부지나 할아부지가 짓는 버인디, 애비가 징용 끌려가고 없으니 으쩌겄냐. 천상 니가 지어줘야제."
"그렇지만 제가 뭘 알아야지요."
"몰르기넌. 그 학식이먼 되았제."
"참, 어머니는. 제가 무슨 학식이 있다고 그러세요."
"여러 말 말어. 그 학식이면 넘치고 처진게."
홍씨는 담담한 말에 비해 고집스럽게 밀어댔다. 전동걸은 더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척 높은 학식이라도 갖춘 것처럼 믿고 있는 어머니의 말이 우습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전동걸은 이틀 동안 끙끙했다. 여러 가지 뜻을 가진 이름들을 한 50개쯤 종이에 적어나갔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드는 것부터 하나씩 엑스표를 해나갔다.
"어머니, 이름을 지었습니다. 제일이라고요. 제도 제자에 날 일, 일본을 제압하는 큰 인물이 되라는 뜻입니다. 세상도 세상이고, 아버지가 징용 끌려가고 없는 동안에 태어난 원한을 갚으라고요."
전동걸의 뜻풀이였다.
"잉, 아조 좋다." 홍씨는 환하게 웃고는, "그려, 새 종이에다 배제일이라고 깨끔허니 잘 써라. 그러고 나허고 항께 갖다주로 가자." 그녀는 곧 일어날 것처럼 낭자머리를 매만졌다.
"예, 그러지요."
전동걸은 새 종이에다 만년필로 배재일을 정성스럽게 썼다. 한 아이가 평생 지니게 될 이름을 최초로 지었다는 기분과 아버지가 징용 끌려가고 없는 동안에 그 아이가 외롭게 태어났다는 사실과 어머니가 마음쓰고 기뻐하는 일이라서 자연히 정성이 들어갔다.
"아이고메, 참 명필이다."
홍씨는 이름 쓴 종이를 두 손으로 잡고 높이 치켜들며 더없이 흡족해하며 밝게 웃었다. 그녀의 노리에는 아들의 이름을 한지에 붓글씨로 써 왔던 공허 스님의 모습이 스쳐가고 있었다.
"에이 참, 누가 들으면 웃어요."
전동걸은 계면쩍어 고개를 돌렸다.
"웃기넌, 에미 눈에 명필이면 명필인 것이제, 가자."
홍씨는 이름 쓴 종이를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어가지고 방을 나섰다. 집을 나서는 홍씨는 그 어느 때 없이 기쁨에 차 있었다. 전동걸은 어머니의 그 기뻐하는 모습 뒤에 감추어진 외로움을 보고 있었다. 홀로인 어머니의 외로움은 하루이틀 된 것이 아니지만 자신이 일본으로 떠나게 되면서 더 깊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그나마 마음을 의지하고 산 것은 금예 모녀일 수밖에 없었다.어머니가 금예의 아들 이름에 마음쓰는 것은 인정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외로움을 풀 수 있는 또 하나의 대상을 찾는 것이었다.
"요것이 우리 동걸이가 작명헌 금예 아덜 이름이요."
홍씨는 이름 쓴 종이를 방바닥에 펴놓고 몇번씩 손다리미질을 해가며 아들한테 들은 대로 이름풀이를 해주었다.
"아이고, 너무 과만허구만요. 동걸이 학상이 너무 큰맘 쓰셨구만이라. 아즘찮이 아즘찮이 또 아즘찮이오."
보름이는 홍씨와 전동걸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렸고, 아이를 안은 금예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져 있었다.
"자아, 오늘보톰 이 이름으로 불르씨요. 어서 귀에 익어야 헝게, 어디 외할무니가 질로 먼첨 불러보시오."
홍씨는 이름 적힌 종이를 보름이 앞으로 밀어주면서 말했다.
"아부지가 먼첨 불러야 허는 것인디. 요런 소식얼 전허먼 얼매나 좋아라 헐지 몰르는디 핀지 한 장 없으니..."
보름이는 이름 적힌 종이를 쓰다듬으며 한숨지었다.
"금내 말이오. 왜놈덜이 핀지도 못 보내게 헐끄나?"
홍씨는 아들에게 물었다.
"예, 아마 그럴 겁니다. 군사기밀 보호니 뭐니 해서 편지를 못 보내게 하기가 쉽지요."
전동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몹쓸 인종덜이다. 사람덜얼 그리 무작시리 끌어갔으먼 핀지 내왕이라도 허게 히야제."
홍씨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히야지라."
보름이가 체념적으로 말했다. 그건 딸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려라. 발써 1년이 지냈고, 인자 1년만 참으먼 된게."
홍씨는 금예에게 눈길은 돌렸다.
"하먼이라. 세월 묶어놓는 장사 없응게라."
보름이도 홍씨말을 거들며 잠들어 있는 외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떨군 금예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했다. 전동걸은 그런 금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 한 달 만에 남편을 보내고 혼자서 애를 낳은 금예가 가엾고 안쓰러웠다. 그러나 마땅한 위로의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금예야, 맘 강단지게 묵어라. 인자 아그헌티 젖 뽈림서 재롱 보다 보먼 날이 훨썩 잘 갈 것잉게."
홍씨는 위로의 말을 남기고 몸을 일으켰다.
"참말로 고맙소."
보름이도 따라 일어서며 다시 전동걸에게 인사를 차렸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전동걸은 예를 갖추다가 금예와 눈길이 마주쳤다. 금예는 황급히 눈길을 떨구었다. 전동걸은 이틀 뒤에 부산으로 떠났다. 부산에 도착한 전동걸은 또 사르르 기분이 나빠졌다. 그건 처음 부산을 보았을 때 느꼈던 생소한 거부감이었다. 처음 대한 부산은 너무나 일본 냄새가 심했던 것이다. 완전히 일본 같은 부산에서 조선사람인 것이 오히려 어색할 지경이었다. 아직도 조선 냄새가 압도적인 전주에서 학교를 다닌 전동걸로서는 나라를 빼앗긴 상실감이 새삼스럽게 너무 컸고 못내 기분이 나빴다. 그 뒤로도 부산을 거칠 때마다 처음 느꼈던 불쾌감은 어김없이 되살아나고는 했다. 전동걸은 이미화와 약속해 둔 장소로 갔다. 시간이 좀 일러서 그런지 이미화는 아직 와 있지 않았다. 전동걸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멀리 보이는 바닷가에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 전동걸은 갈매기들의 한가로운 비상에 눈길을 둔 채 그날 밤을 생각하고 있었다. 밤 깊어 일부러 갑판으로 나가자고 했던 것은 손수건에 수놓은 빨간 장미에 화답하기 위해서였다. 밤바다는 어둡고, 흐린 전등 서너 개가 밝혀진 갑판 위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갑판 한쪽 구석에서 투프게네프의 소설 이야기를 꺼내다가 슬그머니 이미화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이미화는 화들짝 놀라더니 손을 뿌리쳤다. 순간적으로 꽉 잡았지만 이미 손끝이 빠져 나갔다. 손을 뿌리친 기세로 이미화는 마구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쫓아 갈까 했으나 이미화의 달리는 기세가 너무 거셌다. 손에 남은 순간적인 감촉의 허전함을 느끼며 뒤쫓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심하게 놀란 이미화를 붙들어 무엇을 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미화가 순순하게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역시 이미화는 내성적인 여자였고 전형적인 조선 여자였다. 결혼하기 전에는 그 어떤 접촉도 허용하지 않는 조선의 윤리. 이미화가 하얀 손수건에다 장미꽃까지 수놓아 선사한 것은 순수한 마음의 표현이었을 뿐 그것이 어떤 접촉을 허용한다는 신호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접촉을 시도했던 것은 손을 잡고, 끌어안고, 키스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작 1단계, 그것도 너무 허전하게 끝나버렸던 것이다. 먼저 팔짱을 끼어왔던 지요꼬와는 정말 너무 대조적이었다. 밤바다를 바라보면서 저렇게 놀라게 만들었으니 어떻게 얼굴을 대하나 하는 것이 약간 고민스러워졌다. 그런 이튿날 이미화와 마주치면서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한 혼란에 빠졌다. 생글 웃는 이미화의 얼굴에는 그런 입장 난처해질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 전에 없이 생기가 돌았고, 그 눈빛은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 그렇구나. 다음 순간 머리가 환해지는 깨달음이 왔다. 여자란 저런 것이로구나. 완벽하리만큼 시침을 떼는 당돌함, 그리고 순간적인 피부접촉이 발휘한 효과..., 그 최초의 경험은 당혹스럽고도 황홀했다. 배를 내려가는 사람들이 빽빽한 계단에서 미친 척하고 이미화의 손을 잡았다. "사람들이 봐요. 사람들이." 이미화는 다급하게 속삭였을 뿐 지난밤처럼 그렇게 거세게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꼬물거릴 정도였다. 그 꼬물거림은 오히려 손을 더 꼭 잡도록 자극하고 있었다.
"어머, 여기 계셨군요."
전동걸은 후딱 고개를 돌렸다. 바로 앞에 이미화가 한 떨기 꽃으로 활짝 피어 있었다.
"어서 오시오."
전동걸은 목마름 같은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이미화의 얼굴에 해맑은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니오. 어서 앉아요."
전동걸은 자리를 권하며 이상한 착각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화의 그 친근한 웃음에 방학이라는 시간 간격이 녹아내리며 그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진 것 같았던 것이다.
"창밖을 보며 뭘 그리 생각하고 계셨어요? 철학도로서 인생이란 무엇이냐를 생각하셨나요?"
이미화가 자리 잡고 앉으며 물었다.
"그건 이미 해답이 나와 있어서 나 같은 게 생각해 봐야 더 얻을 게 아무것도 없소. 그래 미화 씨 생각하고 있었소."
"어머, 거짓말..." 이미화는 곱게 눈을 흘기며 얼굴이 붉어지면서, "그런 위대한 인물이 누군가요?"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거 있잖소. 석가모니와 예수라는 두 사나이."
전동걸은 담배를 빼들었다.
"그럼 그 뒤에 나온 그 많은 철학자들은 뭔가요?"
이미화는 마치 학생이 질문하는 것처럼 의문이 찬 눈으로 물었다.
"그건 다 풋내기 어린애들로 밥벌이한 거고, 나무로 치자면 잔가지들이고 강으로 치자면 지류들에 불과하오, 그런데 쓸 만한 사람을 뽑자면 딱 하나가 있긴 있소."
"어머, 그게 누군데요?"
"칼 맑스"
이미화는 놀라며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았다.
"됐소, 그런 얘기하지 맙시다." 전동걸은 담배를 깊이 빨고는 "그간에 더 예뻐졌소." 그는 상체까지 내밀며 이미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머머...."
이미화는 어쩔 줄을 몰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전동걸은 이따가 배에서 결행할 일을 위해 지금부터 뜸을 들이고 있었다. 관부연락선은 출항하기 직전에 안내 방송을 했다.
"승객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립니다. 승객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립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본선이 출발한 이후 목적지 도착 시까지 일절 갑판 출입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최근 들어 미국 잠수함들의 출몰이 빈번해져 갑판을 완전 소등하기 때문입니다. 또 만약에 잠수함의 공격을 받게 되는 경우 본선에서는 대피를 해야 하지 때문에 요동이 심해져 갑판에 있다가는 바다로 추락할 위험이 큽니다. 승객 여러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전동걸은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너무 실망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갑판에 불이 전부 꺼지면 계획 실천이 더욱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수함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아슬아슬함을 즐기며 키스를 하면 더 한층 멋진 추억이 될 것 같았다. 전동걸은 갑판으로 나가보려고 했다. 그러나 문은 밖으로 잠겨 있었다. 전동걸은 맥이 빠져 돌아섰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미국 잠수함들의 빈번한 출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건 한마디로 미국전력의 강화를 의미했다. 그리고 잠수함들이 조선과 일본의 근해까지 접근한다는 것은 공격의 적극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또한 잠수함들의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일본의 모든 배들은 그만큼 피해를 당하게 되고, 또 그 만큼 해역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배에서 내리며 전동걸은 이미화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나 어젯밤 분해서 혼났소."
"왜요."
손가락들의 꼼지락거림이 전보다 한결 덜해진 이미화가 전동걸을 옆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놈의 출입통제 때문에 키스를 못 했잖소."
"어머머."
전동걸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미화는 그의 손을 꼬집어 비틀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첫 키스의 맛이 이렇게 달고 고소한 것이로구나."
"어머, 나 몰라..."
이미화는 꼬집던 것을 멈추고 말았다. 그러면서 전동걸이란 사나이에게 걷잡을 수 없이 휩쓸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전동걸은 이미화의 힘 빠진 손을 다시 감싸 잡으며 키스는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9월 중순경에 사혁회의 회합이 있었다. 그런데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아리요시 동지는 방학 동안에 군대를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우리 계획이 실패한 것입니다. 이제 아리요시 동지가 무사하기만을 빌 수밖에 없습니다."
회장 최우한이 침통하게 말했다. 회원들도 모두 침울해졌다. 자신들이 중국으로 탈출하게 되는 경우 아리요시 동지는 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징병은 더욱더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공장의 노동자들이 절반을 훨씬 넘게 여자들로 바뀐 형편이고, 농촌에서도 여자들이 대거 농사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전쟁터가 확대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이 치열해서 계속 전사자들이 속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날로 악화되어가고 있는 상황은 이미 우리가 예측했던 대로입니다.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우리가 결의한 바를 실천할 수 있는 중국 쪽의 부대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중국의 만주에는 현재 투쟁하는 부대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관내에는 두 가지 부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국민당군 내의 8로군으로 변해 있는 중국공산당의 홍군이고, 다른 하나는 8로군 영역 내에 있는 조선의용군입니다. 조선의용군은 8로군과 긴밀한 협동체제를 이루는 동시에 독자적인 부대조직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부대원들의 절대다수가 조선사람들이며, 그들 모두가 공산주의자들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두 부대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토의를 통해 결정했으면 합니다."
최우한의 보고였다. 회원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방안에 가득한 무거운 침묵이 그들의 심중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건 굳이 토의할 필요도 없는 문제 아닌가 합니다. 당연히 조선의용군으로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느 회원의 의견이었다.
"그렇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다른 회원들의 찬성이었다.
"예, 그럼 토의를 생략하고 가결토록 하겠습니다. 역순으로 묻겠습니다. 조선의용군 선택에 반대하시는 분 거수해 주십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예, 만장일치로 조선의용군 선택이 결정됐습니다. 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그 시기와 탈출 방법에 대해 논의했으면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 시기는 우리 조선 학생들도 징집하는 조처가 취해지는 시점부터 신속하게 대처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리고 탈출하는 방법은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왜냐하면 조선의용군을 찾아가자면 여러 가지 난관이 많고, 둘 이상 행동하게 되면 의심받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회장의 의견 제시였다.
"예,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탈출 방법에 대해 이의가 있습니다. 여긴 저를 포함해서 여자가 둘 있습니다. 그런데 머나먼 길을 여자 혼자서 간다는 것은 여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자 둘이서 같이 행동한다고 해서 그 위험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위험이 다소 감소 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위험을 거의 완전하게 해소시킬 수 있는 방안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남자 회원 한 사람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연인이나 부부로 위장되어 남자 회원의 안전까지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 일석이조의 방안에 대해서 적극 검토, 결정이 내려지기를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지요꼬가 내놓은 의견이었다.
"예, 찬동합니다."
다른 일본 여자 회원의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예,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의견입니다. 그런데 그게 좀 난처한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두 배 이상 많은 남자회원들 중에 누가 동행자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다수결 원칙으로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제비를 뽑을 수도 없고.."
회장이 회원들을 둘러보았다.
"결투로써 결정해야지요. 뭐."
어느 회원의 말에 모두 낮은 소리로 웃었다.
"예, 회장님이 좋은 말씀 해주셨습니다. 그 선택권은 여자 회원들에게 위임해주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동지적 신뢰감과 남성적 신뢰감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요꼬의 분명하고도 단호한 말이었다.
"명언이오, 사실 내 마음 나도 모르니까."
어느 회원의 말에 또 웃음소리가 낮게 흘렀다.
"이번에 뽑히는 두 남자는 성인군자 아니면 고자라는 증거다."
다른 회원의 말에 또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예, 좋습니다. 농담 속에서 다 동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럼 두 여성 동지께서는 선택권을 행사하시지요."
회장이 웃으면서 두 여자 회원을 바라보았다.
"회장님도 너무하십니다. 뽑히지 못한 남성 동지들의 자존심도 고려하셔야죠. 차후에 개인적으로 통보하겠습니다."
지요꼬는 농담조 섞어 재치 있게 받아넘겼고
"네, 그게 좋겠습니다."
다른 여자 회원도 동조했다.
"예, 선택권을 인정한 이상 그 방법에 대해선 당사자들의 자유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예, 됐습니다."
회장이 그 문제를 매듭지었다.
회합이 끝나고 전동걸과 지요꼬는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
"어때요? 저하고 동행하게 된 기분이?"
지요꼬가 자리에 앉자마자 쌔액 웃으면서 물었다.
"악랄하긴. 선택권만 있는 줄 아시오? 거부권도 있소."
전동걸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호, 괜히 착각 마세요. 거부권은 결정된 바 없으니까요."
지요꼬가 생글생글 웃었다.
"내가 새삼스럽게 놀랐소. 어찌 그리 머리가 잘 돌아가는지."
전동걸이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래요. 동걸씨는 더 잘 돌아가면서."
지요꼬가 입을 삐쭉했다.
"그 문제가 나오면서 나는 계속 가슴이 두근두근했소."
전동걸이 뚱하니 말했고
"그랬을 줄 알아요. 제가 동걸 씨 이름을 거론해 동지들한테 입장 난처해질까 봐 얼마나 속이 탔겠어요."
지요꼬는 장난스럽게 쿡쿡거리며 웃었다.
1943년 10월 20일 일본 육군성은 조선인 학생의 징병유예를 폐지했다. 그건 곧 학병제 실시였다. 육군성은 잇따라 제1회 학병 징병검사를 시작했다.
어느 날 전동걸은 지요꼬한테서 쪽지 한 장을 받았다.
‘탈출 개시’
쪽지에 적힌 글씨였다.
"사흘 안에 출발이오. 준비 완료하시오. 연락은 내가 하겠소."
쪽지를 입에 넣고 씹으며 전동걸이 말했다.
"알겠어요. 뭘 시킬 일은 없나요?"
"내가 다 알아서 하겠소."
"네, 그만 가보겠어요."
지요꼬와 헤어진 전동걸은 준비할 것을 생각해 보았다. 준비할 것이란 별달리 없었다. 학교는 안 나가면 그만이었고, 굳이 하자면 시모노세키까지 기차표나 미리 끊어두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그건 이미화였다. 알리고 떠날 것인가. 그냥 가버릴 것인가? 막상 떠날 날이 박두하자 막연하게 생각했을 때와는 달리 그 문제는 심각한 무게로 가슴을 눌렀다. 이미화가 그렇게 비중이 있었던가? 그는 새삼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더듬고 저울질했다. 전동걸은 일단 하숙으로 돌아갔다. 하숙방에 들어서니 생각에 넣지 않았던 것들이 있었다. 책들이며 책상 이부자리...., 전동걸은 잠시 생각했다. 그것들을 다 팔아 치우기로 결정했다. 책들을 집으로 부칠가 생각 했지만 일이 번거롭고, 저것들을 언제 또 보게 되랴 싶었다. 헌책방에 팔아치워서 한 푼이라도 더 비용에 보태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전동걸은 그것들을 다 아래로 끌어내렸다.
"아니, 웬일이예요? 하숙 옮겨요.?"
주인 여자가 눈이 휘둥글해졌다.
"학병 나가게 됐습니다."
전동걸의 대꾸는 퉁명스러웠다.
"아 그렇군요, 성전에 나가게 됐으면 어쩔 수 없지요. 축하해요."
주인 여자가 서운한 기색이면서도 성전 출병을 축하해야 한다는 듯 웃었다.
"예 감사합니다. 제가 나머지 짐 내리는 동안 짐꾼 좀 불러주시겠어요?"
전동걸은 어느 때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예 그러지요. 왜 전쟁이 끝날 줄을 모르고 자꾸 심해지기만 하는 지..."
중얼거리듯 하는 주인 여자의 말에는 하숙생들은 잃어야 하는 불만이 담겨 있었다.
헌책방과 고물상에다가 그것들을 다 팔아치우고 나니 전동걸은 더 할 일이 없었다. 이미화를 언제 만나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내일 만날까 했지만 사흘이란 시간은 너무 촉박했다. 오늘로 벌써 하루는 갔고, 내일이 지나면 모레는 떠나야 했다. 하루의 여유도 없이 만나면 이미화의 놀라움이 더 커질 것 같았다. 다른 할 일도 없는데 오늘 만나기로 했다. 전동걸은 이미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따가 만나 저녁을 먹읍시다. 서양말로 파티라는 걸 하게"
"파티요?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나쁜 일이요."
"네에?"
"아니, 이별 파티라니요?"
"자세한 얘기 만나서 합시다."
"동걸 씨도 학병 나가시나요?"
"그 정도로 알아두고 만나서 얘기합시다."
"네에.... 어서 만나요"
이미화가 전화 속에서 울먹이고 있었다.
"언제 나가세요?"
이미화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모레요."
"어머, 나 몰라..."
이미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기선 차나 한잔 마시고 어디 술 마실 수 있는 조용한 데로 갑시다. 좀 할 얘기가 있소"
전동걸은 이미화의 감정을 어루만지듯 말했다.
"...."
‘난 몰라, 난몰라. 저 울림 좋은 목소리를 못 듣게 되다니. 어떡하면 좋아.’
이미화는 터지려는 울음을 애써 참아내며 목젖이 아프도록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전동걸은 조용한 술집을 찾아갔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금년부터 술은 배급제로 통제되고 있었다. 곡식을 아끼기 위해서 취해진 조처였다. 그러다 보니 술값은 엄청나게 치솟았다. 서민들은 술 한잔 입에 댈 수 없는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미화 씨, 지금부터 감정을 가라앉히고 우리 파티를 시작합시다. 이별은 이별이되 우리가 서로 싫어서 결별하는 것이 아니고 재회가 약속된 일시적인 이별이니까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며 즐겁게 파티를 합시다."
전동걸은 이미화의 잔에 술을 따르며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말을 썼다.
"....."
‘싫어, 싫어, 보내지 않을 거야.’
이미화는 잔에 술이 차오르는 것을 보면서 부르짖고 있었다.
"자아, 영화에서 하는 것처럼 많이는 말고 조금만 마셔 봐요."
전동걸이 술잔을 들었다.
"....."
‘싫어요, 취하도록 마실 거예요. 망할 놈의 세상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요. 이런 세상 살고 싶지가 않아요.’
이미화는 서슴없이 술잔을 들었다.
"자아, 우리의 이별과 재회를 위해서"
전동걸이 술잔을 내밀었다. 이미화가 술잔을 부딪혔다. 전동걸은 정종잔을 단숨에 비웠다. 술잔을 놓던 전동걸은 깜짝 놀랐다.
"아니, 술 어디 갔소?"
이미화의 술잔이 비어 있었고, 이미화는 얼굴을 찡그린 채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마셔도 되겠소?"
"저도 몰라요. 죽고 싶어요."
이미화가 울먹거렸다.
"미화씨, 진정하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똑똑히 들으시오. 자아, 무슨 말인고 하니 학병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건 일본을 위해 싸우는 것이요. 그러다가 재수가 없으면 죽소. 그런데 그 반대로 일본을 상대로 조국을 위해 싸우는 방법도 있소. 물론 그때도 목숨을 잃을 수 있소. 조선 남아로서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을 택해야 되겠소?"
"절 소학교 1학년으로 아시나요?"
이미화가 눈을 똑바로 뜨며 전동걸을 쏘아보았다.
"됐소, 내가 그동안 비밀로 해왔던 얘기를 하려고 물은 거니까 오해는 마시오. 내가 간략하게 얘기할 테니까 잘 들으시오. 난 그동안..."
전동걸은 사혁회에 대해서 간추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그래서 모레 출발하기로 된 거요."
"...."
이미화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전동걸은 눈길을 피하며 술잔을 비웠다.
"그런데 안전하게 도착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이미화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학병에 끌려 나가도 생사가 보장되지 않소."
이미화는 아랫입술을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괴로움에 차서 일그러지고 있었다.
"정말 이런 세상에서 더 살고 싶지가 않아요."
이미화는 목이 메어 말하며 술잔을 들었다. 전돌걸은 자신이 이미화의 가슴에 어느 만큼의 크기와 무게로 자리잡고 있는지 비로소 확인하고 있었다. 그건 무한한 기쁨인 동시에 아픔이었다.
"술 많이 마시지 말아요."
"아니예요. 어디 도망갈 데로 없고 어쩌란 말이에요?"
이미화는 자꾸 울먹이며 술을 마셨다. 통금이 임박해 술집을 나섰을 때는 이미화는 몸을 가누기 어렵게 취해 있었다. 전동걸은 이미화의 팔짱을 끼어도 안 되어 껴안고 걸었다.
"저도 데려가요. 혼자 가지 말아요"
"우리 그냥 현해탄에 빠져 죽어요"
"동걸씨 정말 죽고 싶어요."
이러다가 이미화는 전동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저를...., 저를 다 드리고 싶어요. 다 드리고 싶어요."
알몸인 이미화는 전동걸의 알몸을 끌어안은 채 울었다.
"사랑해, 미화를 사랑해. 나 꼭 살아서 돌아올 거야"
전동걸은 오래 기억하려는 듯 이미화의 알몸을 샅샅이 매만지고 쓰다듬었다.
"내일 몇 시에 떠나시나요?"
"기차표 사고 나서 이따가 연락할게"
전동걸의 말이 자연스럽게 낮추어져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함께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역으로 바로 나갔다.
"기다려. 나는 꼭 살아서 돌아와"
전동걸이 이미화의 손을 꼭 잡았다.
"네, 10년이든 20년이든 기다릴 거예요."
눈물 번지는 눈으로 전동걸을 쳐다보며 이미화도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전동걸이 개찰구를 나가자 이미화의 눈에서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렸다.
지요꼬 먼저 와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동걸은 지요꼬 앞을 지나치며 눈짓했다. 그들은 만약을 몰라서 자리를 따로따로 잡았다. 방학도 아닌데 관부연락선에는 조선 학생들이 많았다. 형사들은 다른 때와는 달리 학생들의 검문을 심하게 하지 않았다. 그자들은 학생들이 학생 징병검사를 받으러 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