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그들은 그렇게 속았다.
남만석이 포함된 이민단 2백 호는 기차를 탄 지 꼬박 7일 만에 하얼삔 역에 내렸다. 거거서 다시 만척회사의 트럭을 타고 서쪽으로 3백여 리를 실려 갔다. 그들이 내린 곳은 산줄기가 멀리 보이는 드넓은 벌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어디에서도 사람 살 집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해는 저물어서 어스름은 내리고, 그들을 실어 온 트럭들은 방향을 되돌려 돌아가고 있었다. 남은 것은 인솔하고 온 만척회사 직원 대여섯과 총을 든 군인 10명이었다.
"요상허시? 워째 요런 허허벌판에다 똥 푸대끼 혀부린댜?"
"금매 말이여, 여기서 하로 쉬어가잔 것도 아니겄고."
"여기가 우리 살땅 아닐랑가?"
"무슨 소리여? 집이라고는 눈얼 씻고 찾어도 없는디"
"워쩌 아이, 베룩도 낮짝이 있제 그리 속히기야 허겄능가."
남자들이 끼리끼리 모여 수군거리는 말이었다. 그때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한 사람이 흙벽돌 위에 높직이 서 있었다.
"예에, 또, 지금부터 하는 말 똑똑히 들으시오. 바로 여기가 당신들이 살 땅이오. 내일부터 보름에서 스무 날 동안 추워지기 전에 당신들이 살 집을 지어야 되어. 집은..."
"잡소리 말어 집 준다고 약조헌 것언 머시여!"
어느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맞어. 워째 초장보톰 거짓말이여!"
"개좆이나, 사람얼 멀로 보고 허는 개지랄덜이여!"
또 다른 남자가 어기차게 외쳐댔다. 남자들이고 여자들이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탕!탕! 타당!
총소리가 진동했다. 군인들이 흙벽돌 위로 뛰어오르며 총을 겨누었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얼어붙고 말았다.
"에에 또, 방금 소리 지른 세 사람을 처벌할 수도 있소. 그러나 처음이니까 용서하도록 하겠소, 만약 앞으로 또 그러는 자들이 있으면 그때는 가차 없이 총살이요. 총살! 여기 있는 군인들은 앞을로 계속해서 당신들을 감시할 테니까 명심하도록 하시오. 그 조선사람들은 싸늘한 눈길로 사람들을 휘둘러보고는 집 때문에 당신들을 속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속인 데 아니라 이민자들이 너무 많아 일손이 달려 그리됐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 두시오. 그리고 당신들은 아주 재수가 좋다는 것 미리 알아두시오. 저쪽 흑룡강 일대로 간 사람들은 지금 황무지에서 나무뿌리를 캐내면서 논밭을 만들어 가고 있소. 그런데 여기는 그런 고생할 필요가 없이 바로 농사를 지을 수가 있는 농토요. 만약 여기가 싫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곳으로 보낼 수 있소."
그는 쨍쨍한 목소리로 협박을 해댔다. 가족 수에 따라 쌀도 보리도 아닌 조가 배급되기 시작했다. 그건 몇 년 전부터 조선에도 나돌고 있는 만주산 조였다.
"하 이것 참, 보리도 아니고 조밥 신세라니..."
"니기럴, 보리라도 반썩 줄 것이제."
사람들은 뜬내 나는 조를 받아들고 한숨을 토로하며 맥을 풀렸다. 배급은 사흘 치씩이었다.
"요것 참말 드럽게 되었다. 인자 와서 옮겨 뛰도 못허고."
남만석의 매형 김진배는 얼굴을 구길 대로 구긴 체 말이담배를 마구 빨아댔다.
"참말이제 왜놈덜언 믿지 못헐 개종자덜이로구만."
남만석이도 담배 연기를 짙게 내뿜으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는 절망스럽기도 하고 면목이 없기도하고, 그 심정을 뭐라고 형용할 수가 없었다 왜놈들에게 속은 것이었지만 매형과 어머니를 대할 면목이 없어 마음은 참담하기만 했다.
"그렁께 똥인지 된장인지 잘 알아봤어야 할 것 아니여. 어쩐지 자네가 너무 설레 발얼 치드라니"
김진배는 아주 노골적으로 처남을 타박하고 들었다.
"누가 요지렁 알았당게라."
울상이 된 남만석은 먹구름 같은 한숨을 뭉텅이로 토해냈다.
"거 무신 깨진 북 치는 소리여. 한나 보먼 열얼 알드라고 그리 겪어보고도 왜놈덜 곤조통얼 몰랐다는 것이여?"
김진배의 어투는 더 강해져 있었다
"요 일언 설마 했제라."
남만석은 궁지로 몰리며 한숨만 더 짙어졌다.
"이 사람아, 설마가 사람 잡는 것 몰라."
노을기가 사위어지고 있는 서쪽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죽림댁이 입을 열었다.
"아서, 아서. 다 엎어진 물이고 깨진 옹구여. 다 잘되자고 한 일잉게 맘덜 상하지 말고 앞일이나 생갹혀. 맘덜 상허면 그것이 병이고 화가 된 게. 이땅 널른 것 봉게로 그리 잘못 온것도 아닌 것 같기도 허구야."
그 말은 사위와 아들에게 하는 것 같았지만 실은 곤궁한 입장에 처한 아들을 구해 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은 죽림댁이 목포를 떠나 이곳에 올 때까지 처음으로 입을 땐 말이기도 했다. 죽림댁은 아들이 2년 전에 이민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이번에 기차를 탈 때까지 만주에 올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들과 사위의 등쌀에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마음은 남편 곁에 둔 채로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것이다. 그러나 지난날 땅을 빼앗길 때 그랬던 것처럼 또 총부리를 들이대고 있으니 이 낯설고 묘한 냄새 나는 땅에서 살아갈 도리밖에 없는 일이었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짐을 풀어 솥을 꺼내고 개울물을 떠다가 밥 짓기를 서둘렀다. 그리고 이불 모둥이를 풀어 아이들을 감싸야 했다. 10월 초순이었지만 가을 걷이는 이미 끝나 있었고, 밤이 되면서 남쪽의 겨울 같은 추위가 몰려들었던 것이다
총독부 정책을 대행하는 만척회사에서는 금년 1월부터 또다시 제3차 농업이민 1만 1천호 모집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 2백 가구는 목포와 신안 일대 그리고 정읍과 고창 일대에서 사람들이 섞인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군인들이 나서서 무작정 그들을 줄지어 세웠다. 그리고 나무 토막 치듯 반으로 갈랐다.
"이쪽 사람들은 빨리 짐을 챙겨라!"
군인 대장의 명령이었다. 지적당한 쪽이 딴 곳으로 옮겨간다는 것을 사람들은 금세 알아차렸다.
"자 저짝으로 가게 해줏시오. 우리 한집안 사람인디"
"나도 저짝으로 보내주시게라. 우리 한동네 사람이 갈라졌구만요."
이 사람 저사람이 나서면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가만히 있지 못해 가봤자 10리 밖이야. 살면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어."
만척회사 직원인 조선사람들이 빽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움츠리고 말았다. 10리라는 것에 안도하기도 했던 것이다.
"오나가나 저런 백여시 같은 놈덜언 꼭 있네 잉."
"긍께 말이시. 멀 얻어묵자고 이 멀고먼 디꺼정 와갖고 저 염병지랄인지 모르겠네."
"똥통에 구데기만도 못헌 놈덜이 개씹에 보리알 깨대끼 여그저그 잘도 기여 붙고 사는구만."
"소리 안 나는 총이 있으면 저런 씨부랄 놈덜보톰 삭 쥑여없애야 되는 것인디."
남자들이 수군거리는 말이었다.
1백 가구 6백여 명이 짐들을 이고 지고 떠나갔다. 나머지 사람들을 놓고 군인들은 다시 조 편성을 했다. 집짓기 조, 담쌓기 조, 호파기 조로 나누었다.
"얼어 죽지 않고 총 맞아 죽지 않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집을 지어라. 어젯밤에 자봐서 알겠지만 여긴 벌써 남쪽의 겨울과 다르다. 그리고 이 지역은 또 공산 비적들이 총질을 해대며 식량을 뺏어가고 사람들을 죽이는 곳이다. 하루라도 빨리 집을 짓지 않으면 그놈들 손에 식량도 다 뺏기고 총 맞아 죽게 된다. 다들 똑똑히 명심하라."
군인 대장의 살벌한 말이었다. 그 말은 아니었어도 사람들은 벌써 집을 빨리 지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아들들은 감기가 걸려 콧물을 흘리고 노인들은 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산 비적이란 말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동북항일연군을 말하는 것이었고, 그 지역은 중국인 조상지 장군이 이끄는 제3로군 활동 지역이었다.
남만석은 매형네와 갈라지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으로 생각하며 담쌓기 조에서 일을 시작했다. 삼사일이 지나면서 병통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감기만 심하게 퍼지는 것이 아니었다. 뜻밖에 설사병이 생겨났다. 그건 다름 아닌 수질이 나빠 얻은 병이었다.
"물을 꼭 끓여서 먹어. 끓여서."
약을 구해 달라는 말에 이렇게 대꾸했다. 사나흘 설사는 사람을 몰라보게 수척하게 만들었고, 설사가 곱똥으로 바뀌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그건 단순한 설사가 아니라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이질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기운을 못 차리고 쓰러져도 땅바닥박엔 누워 있을 데가 없었다. 여자들까지 기운을 쓸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집짓기에 나섰다. 집을 하루라도 빨리 짓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길이었던 것이다. 일들은 훨씬 빨리 진척되어 갔다. 군인들은 할 일이 없어서 잡담을 하거나 휘파람을 불러댔다. 그러나 칠팔일이 지나면서 여기저기서 통곡이 터지기 시작했다. 곱똥에서 피똥을 싸던 환자들이 끝내 이질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었다. 주로 아이들과 노인들이었다.
집들은 예정보다 나흘이나 빠르게 11일 만에 완성됐다. 1개 동에 10세대씩 들어가는 판잣집 10개 동이 줄지어 서 있었다. 식구가 얼마이건 간에 방 하나, 부엌 하나씩이 배당되었다. 그러나 밤 추위 속에서 한뎃잠을 자던 것에 비하면 그것은 천국이었다. 아이들은 좋아서 소리치며 팔딱팔딱 뛰었다. 온돌방은 따뜻했던 것이다. 창고와 공회당이 완성되고, 우물에서 맑은 물을 길어 올리기까지는 사흘이 더 걸렸다. 담 밖 구덩이를 따라 가시철망이 쳐지고, 담 네 귀퉁이에 포대가 설치되는 것으로 집단부락은 완전히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군인들은 일본군과 만주군이 5명씩, 10명으로 늘어났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자기들이 군인들의 감시 아래 죄인과 같은 감옥살이 생활을 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땡땡땡땡땡...
종 대용으로 공회당 기둥에 매달린 레일 토막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아이들만 빼고 모든 사람들은 허둥지둥 공회당 앞으로 모였다.
"이래 가지고 공비들의 내습에 대처할수 있으무니까!"
일본군이 서툰 조선말로 외치며 발을 굴렀다. 비상소집 훈련이었던 것이다. 남자들로 자치대라는 것을 짰다. 그리고 순번대로 밤마다 야경을 돌고, 포대 경계병들의 보조 노릇이 그들의 임무였다. 그동안 날씨는 완연히 겨울로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은 짐을 정리해 가며 사나흘 편히 쉬었다
"아이고 이만허먼 살겄네."
"으째 속이 컬컬한 것이 한잔 생각 간절허재."
"그나저나 요런 불쌍놈덜이 방 한나가 머시여."
"아니 글머, 저놈덜이 둘썩 줄지 알았등감? 그리 겪어보고도 헛소리여."
"하이고 이 사람아. 붕알 긁으랑게 장딴지 긁덜 말고. 헛소리넌 저 사람이 허는 것이 아니고 자네가 하는 것이여."
"허어, 참, 인자 발바닥 긁는 벽창호시. 저 사람 밤에 그 재미 못봐서 그러는 거 아니여."
남자들은 모두 집 떠날 채비를 해야 했다. 그들은 멀리 보이는 산으로 숯을 구우러 간다는 것이었다. 그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숯언 무슨 숯이여?"
"나가 안가. 자네가 안가, 즈그놈덜 꼴리는 대로 허는 것이제."
"보나마나 뻔하덜 안혀, 왜놈덜 숯 없음사 삼동에 갱신얼 못허덜 안트라고. 즈그놈덜 붕알 따땃허니 놀힐라고 우리 붕알 얼릴라는 것이제."
"참 씨부랄 놈덜, 개 걸리 사람 부래먹을라고 지랄염병이시. 농새꾼얼 멀러 보고 숯쟁이 맨글라는 것이여."
"참말이제 드럽다. 만주거정와서 숯쟁이질이 왠 말이다냐. 인자 조상 젯상에 절도 못 올리게 되았다."
사람들은 숯굽는 일의 생소함이나 고달픔 이전에 숯 굽는 일 자체에 혐오감을 느꼈다. 일본세상이 되면서 숯은 장작이나 솔가리나무를 압도할 정도로 번창했다. 다다미방에서 겨울나기를 하는 일본사람들은 방마다 숯화로를 끼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왜 자기들이 숯쟁이로 끌려가야 하는지 그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중국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반적으로 물자난을 겪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시급한 것이 기름이었다. 그래서 총독부는 38년 1월에 인조석유제조사업법을 공포했다. 그리고 4월에는 원료공급난으로 전국 고무공장의 휴업상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말이 숯 굽는 일이었지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두 가지 일이었다. 벌채와 숯 굽는 일을 동시에 하도록 되어 있었다. 먼저 아름드리 나무들을 찍어 넘어뜨려야 했고, 그다음에 가지들을 잘라내 숯가미에 넣을 수 있도록 토막을 내야 했다. 그러니까 그곳은 산판 겸 숯가마였고, 일본사람들은 목재와 숯을 동시에 구하는 일거양득을 취하고 있었다. 산에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람한 산줄기의 등성이마다 다른 집단 부락에서 끌려온 조선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리 부래묵으면 품삯은 어찌 되는 것이여?"
며칠 지나자 누가 내놓은 말이었다.
"그려, 요것이 예사로 심드는 일인가. 산판일에다 숯쟁이에다, 품삯얼 받어도 곱쟁이로 받어야 헐 판이여."
"고것 공자님 말씸이시. 당장 따져봐야 될 일 아니라고?"
그렇고 말고 만척 놈덜언 낭구 풀아묵고 숯 폴아묵고 이증으로 돈벌이 하는 것 아니겄어."
"잉, 그렇구만 그리 오지게 둔벌이 험서 우리헌티 품삯얼 안 준다는 것언 우리얼 홍어좆으로 아는 거여."
"그려, 괴기년 십어야 맛이 나고 말언 털어놔야 책이 생기드라고, 듣고 봉게 고것 참 아조 존 생각이네."
"글면 당장 따지고 나스드라고."
"아니, 아니여. 산판이고 부두 겉은 디서 그 간조란가 머신가 계산하는 날이 메칠이여? 열흘인가 그렇제?"
"맞어, 대개 다 열흘이여."
"글먼 열흘 채우고 보는 것이 어쩌것능가?"
"잉, 그것도 좋은 생각이시."
"그려, 그래야 따지기도 좋제."
그런 발의는 다음 날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금세 퍼져나갔다. 의견일치를 본 그들은 사흘을 더 기다렸다. 열흘 간의 일이 끝났건만 돈을 줄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경비대 막사 앞으로 모였다. 만척회사 직원 한 명은 군인들과 함께 거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먼저 맞이한 건 군인들이 겨눈 총구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군인들은 총부터 들이댔다. 그들은 조선사람들과 항일연군을 차단시키는 목적을 겸해 상주하고 있었다.
"우리 품삯은 어찌 되는 것이요?"
"심진 일얼 시키먼 품삯얼 춰져얄 것 아이겼소."
"어떤 산판이고 숯가마고 품삯 안주는 디넌 없소."
그들은 만일을 생각해 대표 같은 것을 뽑지 않고 누구인지 모르게 여기저기서 외쳐댔다 .
"뭐라고, 품삯? 다들 정신 나갔나! 지금 부락에서 처자식들은 뭘 먹고 있나. 그건 누가 먹여 주는 건가. 그것이 품삯이 아니고 뭐야. 다들 정신 똑똑히 차라라구, 다시 그따위 소릴 하는 놈들은 가차없이 처벌하고 말 테니까 빨리 해산해."
만척회사 직원의 기세는 시퍼랬다.
"해산해, 해산!"
군인들이 곧 총을 쏠 것처럼 설치며 소리쳤다. 그들은 흩어져 숯막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따져야 할 말들을 가슴에 담은 채.
식구들이 먹는 것이라고는 뜬 내 나는 조밥에 소금 국뿐이었다. 자신들이 먹는 것은 다른 잡곡도 섞인 밥에 된장도 풀린 국이라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품삯과 합당한 것인지 따져야 했다. 그건 주먹구구로 따져도 어림없이 안 맞는 액수였다. 그러나 총을 들이대는 판이니 말 한마디 꺼낼 수가 없었다. 참말로 갈수록 태산이다.
"나가 미친놈이제, 왜놈덜얼 믿다니."
"시싱에, 요리도 악독헌 놈덜이 어디 또 있을까. 근디 말이여 이만이지 개붕알 인지가 시작된 것이 3년인디 어찌 요런 소문이 한 가닥도 안 들였을꼬?"
"자다가 봉창 뚜딜기는 소리 허덜 말어. 집단부락인지 감옥인지 맨글어놓고 그런 소리여? 사람덜마동 각단지게 집단부락에 가두고 그리 옴지락딸싹 못하게 해대는디 무신 수로 소문이 나것어."
"인자 으째야 쓰까?"
"으쩌기넌 멀 으째. 다 똥싸 뭉갠 팔자제"
"굶어죽어도 지 땅서 굶어죽어야 허는디."
"그나저나 요런 빌어묵을 놈에 땅언 어찌 이리 시월에 엄동설한이고 이 개질랄이여."
찬바람 스며드는 숯막에 남자들의 한숨소리만 짙었다 무릎에 머리를 웅크려박고 앉은 남만석은 또 후회에 후회를 곱씹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목포의 부투와 다도해가 선하게 떠올라 있었다. 남만석은 발등을 찍고 싶다는 말이 무슨 말ㅇ인지 비로소 절감하고 있었다. 기어이 땅을 찾으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거역해 받는 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왜놈들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고생살이를 면해 보려는 자신의 약은 생각으로 더 큰 고생살이의 구렁텅이로 빠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머니께는 너무 면목없고 죄스럽기만 했다. 자신이 이렇게고향이 그리운데 어머니는 얼마나 더할 것인가. 아버지의 산소 앞에서 울음을 그치지 못해 어머니의 모습이 가슴 어리게 다가왔다. 숯굽기 한 달을 넘기면서 사람들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지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고, 온몸에 숯검정 범벅인 일은 지긋지긋하기만 하고, 보고 싶은 건 처자식뿐이었다.
"언제까지 일하냐고? 왜, 놀고 먹고 싶어서? 내년 봄 농사 시작할 때까지 해야지."
이 응답 앞에서 사람들은 그만 말을 잃어버렸다.
한편, 집단부락의 여자들도 편안히 앉아서 있지를 못했다. 나날이 추워지는 날씨에 땔감을 구해야 했던 것이다. 여자들은 10리, 20리 밖의 둔덕빼기 억새밭이나 강가의 갈대밭을 찾아가야 했다. 여자들은 살얼음이 끼는 10월의 추위에서 말로만 들어온 만주의 추위를 실감하고 있었다. 더 추워지기 전에 땔감을 비축하려고 여자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떼지어 나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거리가 멀어서 그렇지 버려진 땅에 억새와 갈대는 지천으로 많았던 것이다. 군인들은 이미 남자들을 볼모로 잡아두었다는 듯 여자들이 떼지어 나무를 하러 나서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무니, 인자" 아침마다 시어머니를 만류했다.
"아니여, 알시랑토 안다."
죽림댁은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짚신을 꿰신었다.
왜 시어머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고 저리 깊은 근심이 서리게 되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남편이 저지른 큰 잘못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아들 원망하는 말 한마디 내비치지 않았다. 그 원망스러움을 속으로 다 삭이자니 얼마나 속이 아플 것인가. 남만석의 아내는 시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이 큰데 시어머니는 나무까지 하러 나서는 것이었다.
"가자, 니가 기운 남었을 적에 한 짐이라도 더 보태야지 새끼덜이 안얼제."
죽림댁은 앞서 집을 나섰다. 죽림댁은 아무리 기를 썼지만 젊은 여자들이 이는 나뭇짐을 당할 수가 없었다. 젊은 여자들에 비해 표나게 작은 나뭇짐을 이고도 숨을 헐떡거려야 하는 자신에게서 죽림댁은 이제 쓸모없이 늙었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죽림댁은 날마다 이어온 나뭇짐을 사위네와 똑같이 반으로 나누었다.
"니 서운해 말어라 이."
죽림댁은 나뭇짐을 나누면서 며느리에게 말하고는 했다.
"하먼이라, 어무니 맘 다 아는구만요."
남만석의 아내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며 흔쾌하게 대꾸했다.
" 니가 딸년 좋으라고 이러는 것이 아니다. 김서방 대허기가 바늘 방석이라..."
"야야, 아범이 실수헌 것 다 아는구만요."
죽림댁은 아들이 사위를 만주로 끌어온 잘못을 그렇게라도 해서 갚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큰 사고가 터졌다. 정읍에서 온 한서방의 딸이 공회당 뒷기둥에 목을 매달아 죽은 것이었다.
"군이 싯이서 옷 벗고 막..."
"누나럴 꼼지락도 못허게 하고..."
서너 아이가 부들부들 떨며 더듬거린 말이었다. 여자들은 무슨 사태가 벌어졌었는지 알아차렸다. 한서방의 아내는 열다섯 먹은 딸의 굳어진 몸을 끌어안고 한바탕 통곡을 하고는 사무실로 대달았다. 그 눈에서 파란 불이 돋고 있었다. 여자들도 모두 뒤쫓아 갔다. 군인들이 모두 시치미를 뗐다. 대장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여자들은 아까 그 아이들을 데려왔다.
"아까 그놈돌이 누군지 알지야?"
"겁묵지 말고 대."
"하먼, 엄니 아줌니덜이 이리 있응게 겁묵을 것 하나또 없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안고 에워싸며 말했다. 그런 여자들의 눈빛도 달라져 있었다. 아이들은 세 군인을 손가락질해 나갔다. 그때서야 군인은 당황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이놈의 새끼들!"
대장이 세 군인의 따귀를 차례로 후려갈겼다. 다음날 군인 셋은 어디론가 끌려갔고, 여자들은 한서방네 딸을 땅에 묻었다.
"아이고오, 아이고오, 민네누리로 돌라고 헐 적에 주고 올 것을..."
"입얼 줄이자고 즈그 언니 맘에는 없는 집에 시집보낸 것이 죄진 것 겉애서 그냥 딜고 왔등마 요것이 무신 날베락이야, 아이고오, 아이고오, 나못살어. 즈그 아부지보고 머시라고 말히야 쓴다냐..."
한서방의 아내는 딸의 무덤을 치며 통곡했다. 타국으로 떠나며 입을 하나라도 줄이자고 딸을 시집보낸 것은 한서방네만이 아니었다. 딸이 이팔청춘 16살이 넘은 집에서는 거의가 시집을 보내고 떠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집단부락이 완성되기 전에 벌써 사람들은 총각들의 수와 처녀들의 수가 턱없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여자들의 나무하기는 더욱 극성스러워졌다. 날씨가 하루 다르게 추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서방네 아내도 한 사나흘 몸져누웠다가 다시 낫을 들고 나섰다 어린 자식들이 넷이나 더 있었던 것이다. 집집마다 집 뒤에는 갈대단과 역새단들이 집 높이로 쌓여져 올라갔다. 여자들은 갈대와 억새가 짚보다 더 불땀이 좋은 것을 큰 다행으로 생각하고 고마워했다. 갈대와 억새는 재가 많이 나왔다. 여자들은 재도 함부로 하지 않고 부락 밖의 넓고 나직하게 구덩이를 파고 모았다. 농사가 몸에 벤 여자들의 지혜였다. 재에 오줌을 섞으면 그보다 더 좋은 거름이 없었던 것이다.
남만석의 아내는 잠자리에서 일어나며 옷고름을 여몄다. 시어머니와 아이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깨울까 봐 발끝으로 가만가만 걸어 밖으로 나왔다. 시어머니는 잠귀가 밝은데다 만주로 오고부터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그녀는 밥을 다 지었다. 그런데도 시어머니는 일어나지 않았다. 웬 늦잠인가 싶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녀는 방으로 들어왔다. 시어머니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나무를 가자면 어서 아이들에게 밥을 먹여야 했다. 그녀는 아이들로부터 깨우기 시작했다. 감히 시어머니를 깨울 수 없고, 그 소리를 듣고 시어머니가 어련히 일어나랴 싶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일어나는 데로 시어머니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불길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그녀는 서둘러 시어머니에게로 다가갔다.
"어무님, 어무님!..."
그녀는 손끝이 섬뜩한 것을 느꼈다. 죽림댁은 자는 듯 숨이 끊어져 있었다.
"어무님, 어무님, 어무님..."
23. 변절자는 용서말라
"안녕하시오, 주간 선생."
야유조와 시비조가 뒤섞인 목소리에 송중원은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예상대로 형사 우자마였다. 그는 작달만한 키에 어울리지 않게 거만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물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송중원은 반가운 척하며 펜을 놓고 일어섰다. 직원들이 일을 하는 척하며 우지마에게 빠른 눈총을 쏘고 있었다.
"앉으시지요."
송중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별일 없소?"
우지마가 의자에 털썩 앉으며 형사 특유의 상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의 눈길은 재빠르게 송중원을 훑고 있었다.
"예, 아무 일도 없습니다."
송중원은 우지마의 눈을 쳐다보며 아주 우호적인 웃음을 보냈다. 그런 자들을 대할 때는 눈길을 피해서는 안 되고, 그러면서 당신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송중원은 잘 알고 있었다. 눈길을 피하면 당장 의심을 하려고 들었다. 고문하는 자들이 고문에 굴복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해 으레 사적 감정을 돌발시켰다. 그때부터 고문은 극치를 이루는 것이었다.
"당신은 항상 아무 일도 없지."
아까의 주간 선생이라는 호칭도 묘한 시비조였지만 당신이란 호칭은 노골적인 시비조였다.
"예, 아시다시피 잡지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송중원은 더욱 부드럽게 웃으며 일본식으로 머리를 연거푸 조아렸다.
"누가 아나, 그 속을"
우지마는 흘리듯 말하면서도 눈은 싸늘하게 송중원을 노려보았다.
"무슨 말씀을 그리 서운하게 하십니까. 모범적으로 살고 있는 것 다 아시면서."
송중원은 정색을 했다. 이런 경우 어물거렸다간 영락없이 트집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거 이번에 공포된 조선인 씨명에 관한 건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우지마는 묘하게 웃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야 내선일체를 촉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치로 시기적절한 거지요."
송중원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그게 진심인가?"
"예, 그게 사실 아닙니까."
"그럼 창씨 개명을 실시하게 되면 당신은 뭘로 바꿀 거야?"
우지마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야 좋고 마음에 드는 것을 더 생각해 봐야지요. 자식들한테까지 전해 줄 건데 함부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흥, 네놈 얕은수에 내가 걸려들 것 같으냐.’
송중원은 여유 있게 말했다.
"아, 그건 그렇지. 자식들한테까지 전해 주려면 성이 좋아야지." 우리마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잡지에 뭐 이상한 건 없고?" 그는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예, 없습니다."
"그래 없어야지, 총독부에서 걸려 날 뒷북 치게 만들면 우리 좋은 사이가 박살나는 거니까."
우지마는 노골적으로 협박하고 있었다.
"그런 염려 전혀 하지 마십시오."
송중원은 능란하게 받아넘기고 있었다.
사장만 같아도 좋은데... 우지마를 배웅한 송중원은 뜨거운 탕 안에 들어앉았다가 나온 것처럼 전신에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곤혹스럽고 복잡한 심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놈이 더럽고 징그럽기도 했고, 그러지 말자고 하면서도 그놈을 대하는 것은 전혀 숙달되지가 않았다.
"창씨 개명에 우지마로 하겠다고 그러시지 그랬어요. 그놈 좋아하는 꼴 좀 보게 말입니다."
한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흠, 미처 그 생각을 못 했었군."
송중원이 담배를 빨며 쓰게 웃었다.
"그랬으면 의형제 삼자고 덤비자고? 아유, 징그러."
다른 직원이 과장되게 어깨를 떨었다. 경리담당 여직원이 킥 웃으며 입을 가렸다.
"그 얼마나 영과이냐.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를 아우로 두는 건데."
처음의 직원이 정색을 한 척 말했고
"그도 그렇네. 주간님께서 신세 편해질 절호의 기회를 놓치셨습니다."
"아참, 아깝고 아깝습니다."
다른 직원이 가슴을 치는 시늉을 했다.
"그거 아깝네, 허허허..."
송중원은 일부러 소리 내서 웃었다. 직원들의 마음 씀에 화답하려는 것이었다. 우지마가 한바탕 휘젓고 가면 직원들은 꼭 그런 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송중원은 여직원에게 수화기를 받아들였다.
"송형인가? 나 일랑이네, 여기 길 건너 다방인데 좀 나올 수 있나?"
"자네가 다방에? 응, 곧 가지."
송중원은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윤일랑은 다방이고 카페를 영 싫어했다. 꼴사나운 서양풍이라는 것이었고, 맛도 없는 물 한잔에 두부 서너 모가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늘 궁색한 살림을 꾸려가는 소설가의 실감 나는 계산법이었다.
"이 사람아, 차 두 잔이면 보리쌀이 반 되고, 두부가 대여섯 모고, 장작이 서너 다발인지 모르진 않겠지? 어디서 눈먼 돈 생겼나?"
송중원은 자리 잡고 앉으며 윤일랑을 놀리듯이 말했다.
"흥, 찻값을 자네가 내지 않을 수 없을걸. 내 정보나 들어보고 그런말 하게."
윤일랑이 거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보? 어째 으시시하군 "
송중원은 담뱃갑을 윤일랑 앞에 놓으며 어서 말하라는 눈짓을 했다.
"놀라지 말게, 이 편지부터 읽어봐."
윤일랑은 다 낡은 외투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봉투를 꺼내 탁자에 던지고 담배를 빼들었다. 송중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를 쿵쿵 울리는 충격이 연속되고 있었다.
"이 사람아, 눈떠 내가 놀라지 말라고 미리 말했잖은가."
윤일랑이 놀라듯이 말했다.
"아, 정말 해도 너무하는구나..."
송중원은 신음을 어금니에 물며 더디게 눈을 떴다.
"어떤가, 내가 굉장한 존재로 뵈지 않나? 자칭 조선의 톨스토이요, 조선의 대문호라고 하는 거물한테서 그런 편지까지 받으니 말이야."
윤일랑은 거드름을 피워 보았다.
"그렇군..."
송중원의 핏기없는 얼굴이 더 핼쓱했다.
"과연 자네한테 찻값을 물릴 만한 정보 아닌가."
"그래, 내가 밥까지 사지."
눈길을 떨구고 있는 송중원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자넨 역시 사리 판단이 빨라서 좋아."
윤일랑이 필요 이상으로 키들키들 웃었다. 송중원은 담배를 빼들었다.
"이봐, 자네한테 그거 사악이야."
윤일랑이 답배를 뺏으려고 했다.
"빌어먹을, 어서 죽기나 했으면 좋겠네."
송중원은 거칠게 성냥을 그어댔다.
"현진건은 술 권하는 사회라더니 자네한테 담배 권하는 사회로구먼."
윤일랑은 연상 키들키들 웃었다.
"이런 편지... 자네한테만 보낸 건 아니겠지?"
송중원은 비로소 눈길을 들어 윤일랑을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이지, 등사만 안 했다 뿐이지 이름 바꿔가며 여럿한테 보냈지."
"윤일랑도 어떤 반응들일까?"
"어떠긴, 소설가 한우섭은 득달갈이 달려가 만선일보에 취직하는 추천서를 받았다는데."
"뭐라고!"
송중원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부렸다.
"뭐 그리 놀랄 것 없네. 그보다 더한 사람들도 마구 친일파로 넘어가기 바쁜 판인걸."
윤일랑이 피식 웃었다.
"도대체 그 양반은 왜 그 모양일까. 친일을 하려면 혼자서나 할 일이지."
"참 순진하긴. 단체를 만들었으니 이젠 거느리는 세력이 있어얄 것 아닌가. 그 세력 뭐 하려고?"
"영리한 사람이 자꾸 왜 이러나. 그 편지에 자명하게 나와 있지 않은가. 자기 자신의 전도와 출세를 위해서지."
"글세, 그런 편지를 써야 할 정도로 압력을 받은 건가?"
"천만에, 그 사람은 솔선수범해서 충성을 하는 거야 진저, 진심으로 일본사람이 되고 싶어 한단 말일세. 자네도 보면 모르겠나?"
"빌어먹을, 무슨 그런 개 같은 인종이 다 있어."
송중원은 담배를 잉끄리며 내뱉었다.
"그렇지, 이제야 속 시원한 말 한마디 하는군. 그러니까 그자를 친일파라고 하는 건 큰 실례를 범하는 것인지나 알아두게나."
윤일랑은 특유의 비꼬는 어투가 나오고 있었다.
"그래, 우리가 아직도 조선사람 대접을 하고 있어서 그리 부르는 거지. 헌데 혹시 한우섭이 만나봤나?"
"뭐하러 만나, 노모가 중병이라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을 더 이상 굶주리게 할 수가 없었다. 출산한 아내가 고 있다. 자식들을 맹 무식 만들 수 없느냐, 문학가가 지사는 아니지 않느냐, 예술과 지조는 별 게 아니냐, 이따위 변절자들의 판에 박은 괴설이나 들어주려고 만나?"
윤일랑은 아이들이 숨가쁘게 구구단을 외워대는 것처럼 줄줄이 엮어대고는, "자네 혹시 그놈한테 원고료 선불한 것 없나?" 그는 송중원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글세, 좀 있긴 있는데..."
"나 그럴 줄 알았어. 얼만데?"
"글세, 한 50원 되나..."
송중원의 얼굴이 곤혹스러웠다.
"야단났군, 아니 가만있자. 그런 놈들한테는 악착같이 받아내야 하네. 이젠 월급도 많이 받아야 될 텐데 그 돈 떼먹게 둘 수는 없잖은가. 결국 자네가 변상해 내야 할 판인데 그게 말이 되나?"
"글세,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북간도 용정으로 가버리는 건데 무슨 수로..."
"이 사람아, 자넨 그놈의 인정이 탈이야. 용정 아니라 북경이라도 그렇지. 사흘거리로 편질 보내는 거야. 제 놈도 열 번 받으면 토해내지 별수 있겠나."
"글세, 그짓을 그거..."
"이보게, 자네가 못하겠으면 내가 자네 이름으로 편지를 대신 써주지. 이건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응징이지."
"그 돈 받기를 포기하고 자네가 뒤집어쓰는 건 값싼 인정주의도 못되고 악의 조장이야. 악."
윤일랑은 악을 쓰듯 악에다가 힘을 썼다.
"응징이라..., 알겠네. 내가 편지하지."
송중원이 어이없다는 둣 웃었다.
"이 사람아, 자넬 위해서만이 아니야. 나도 분풀이 좀 하려고 그래, 그놈이 만주에 가서 독립투사들을 비적이니 공비니 해가며 필을 놀려댈 것을 생각하면 미치겠단 말이네. 그 짓 해서 받은 돈으로 그 유명한 용정 색주가에게 계집들 끼고 술이나 처먹고."
윤일랑의 눈에서는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윤일랑의 청결하고도 강건 의지를 보고 있었다. 궁핍한 생활 조건으로 보자면 그도 얼마든지 한우섭처럼 될 수 있었다. 그가 마음대로 소설을 써내지 못하는 것도 그 청결하고 강건한 의지 때문이다. 나운규의 아리랑 같은 작품만을 머릿속에 수십 편 담고 있으니 소설로 써보았자 발표될 리가 없었다. 이미 잡지사마다 자체 검열 기준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알겠네, 자네한테 검열을 받도록 하지."
"흐흐, 느닷없이 검열관 감투 썼군."
낡은 외투깃을 타고 흐르는 윤일랑의 웃음이 쓸쓸하고도 허탈했다.
"그렇지 않아도 눈치빠른 젊은 놈들이 자진해서 가입한다는 소문이던 그런 식으로 매수까지 하니 조선 문인협회도 총독부의 돈독한 사랑을 받을 날도 머지 않았군."
"간부 나리들 살판나게 생겼지."
두 사람은 마주 보며 떫고 쓴웃음을 지었다. 조선 문인협회는 두 달 전인 10월 29일 이광수 최남선 김동환 이태준 박영희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친일문학단체였다.
"그나저나 자넨 요새 어떤가?"
윤일랑이 이야기를 바꾸었다.
"글세, 사장이 잡지 발행에 흥미가 식어가는지. 내가 자꾸 싫어지는 것인지... 하여튼 좋지가 않네."
"젠장, 딴 사업에 손댄다는 소문은?"
"무슨 돈벌이 회사를 차리긴 차릴 모양인데, 난 전혀 관심 없네."
"그자도 친일파 다 된 건가?"
"뭐, 친일파까지는 모르겠고, 처음과 달라서 마음이 변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
"그자도 별수 없는 속물이로군."
"어쩌겠나. 윗물이 더러워져 있으니."
"그래, 아랫사람들이 핑계 대고 변명하는 게 대 유행이니까, 혹시 잡지를 그만두는 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만하면 만석꾼 자식으로 돈 바르게 쓴 셈이고, 잡지도 오래 해온 편 아닌가."
송중원의 말은 담담했다.
"그리되면 자네가 문제 아닌가."
"나도 친일하지 뭐."
"농담도 아니고, 자넨 나보다 장가를 일찍 들어 한창 돈 들어갈 때 아닌가."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지."
"잇몸이 있어야 말이지."
"그 얘긴 그만해. 발등에 떨어진 불도 아닌데."
송중원이 괴로운 듯 말했다.
"알겠네. 좌우간 숨 막히는 일들뿐이니 어찌 살지. 이상처럼 자식 없이 일찍 죽는 게 제일이야,"
"체, 왜 갑자기 경멸해 마지않던 이상 타령이야. 자네도 염세주의로 기우나? 그것도 문인협회 가입 동기의 하나가 될 수 있는데"
"웬일인가. 그럴듯한 농담을 다 하고, 이상의 글 태반은 서양 놈들 것 모방이지만 죽음 하나는 산뜻한 게 창조적인 데가 있거든."
"가세,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하지."
"역시 내 정보가치가 술까지 뻗치는군."
윤일랑은 쿡쿡거리며 일어섰다.
"그걸 갑자기 그대로 실어버리지 못하는 게 한이네."
"염려 말게. 내 자식한테까지 물려줄 테니까. 내 자식 대에 가서는 설마 이놈의 세상이 끝장나지 않겠어?"
"응, 그것도 참 좋은 방법이군. 우리 다 죽고 나서 그 편지가 공개되면 참 가관이겠네. 해방이 된 땅에서 얼마나 비판을 당하고 얼마나 조롱거리가 되겠나. 잘 보관해 두게."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내려가면서 송중원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기다려라 역사의 심판을!"
윤일랑이 팔을 뻗치며 웅변조를 흉내 냈다. 해거름의 거리에 몸을 웅크린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길가에는 지저분한 눈이 쌓여 있었다.
식민의 거리에 겨울바람은 치고
묶인 삶들은 신음하는데
외로운 영혼의 방황은
오늘도 어느 거리에 그림자를 드리우는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길을 건너며 윤일랑이 읊었다.
"그거 괜찮은데. 누구 신가?"
"누구 시긴, 그냥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거지."
천상 문인인 윤일랑이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하는 괴로움과 외로움이 그 즉흥시 속에 있음을 송중원은 가슴 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또 한 해가 다 가는군."
윤일랑이 외투깃을 세웠다.
"그러게..."
"곧 나오려나?"
"응 퇴근 시간이 다 됐네."
"그럼 나 여기 있겠네."
"추운데 들어가지."
"인사하기도 귀찮고, 여기가 좋네."
송중원은 편지를 가져온 윤일랑의 심정을 헤아리며 혼자 사무실로 올라갔다.
한 해가 저물고 있었다. 윤일랑은 술병이 났는지 어쩐지 며칠째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는 위장이 별로 좋지 않아 가끔 소다를 먹으면서도 술자리가 생기면 폭음을 했다. 그 폭음은 괴로움의 크기요 분량이었다. 송중원은 날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말이고 해서 다소라도 원고료를 챙겨주려고 손쉽게 쓸 수 있는 글감을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온 사장이 불렀다.
"주간님, 오늘 밤에 시간 어떠세요?"
"예, 별일 없습니다."
"잘됐군요. 몇 분하고 술자리를 하기로 했으니 주간님도 동석하시지요,"
"예..."
송중원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사장은 더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되짚어 무슨 술자리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쪽에서 기다리는 예의를 갖추었으면 사장은 의당 누구와 무슨 일로 만나는 술자리라는 설명을 하는 것이 예의였던 것이다. 송중원은 그냥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석연찮기도 했고 기분이 언짢기도 했다. 그런데 술집에서 세 사람을 만나보고 송중원은 너무 놀랐다. 철학 교수 황인곤, 소설가 이석진, 사회비평가 문신행이 전혀 뜻밖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신문들에 자주 토막글을 쓰며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명인사들이었고, 글에 아주 모호하고도 기묘하게 친일 냄새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사장이 왜 이런 사람들에게 술집에서 술을 사는 것인지 송중원은 그 의도와 속셈을 찾아내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장은 전에도 유명 필자나 유명 인사들과 더러 술자리를 같이 해왔었다. 그건 사장의 사교인 동시에 자기 과시였다.
오늘도 그런 것인가?
송중원은 그 이상을 짚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께름직한 기분은 가셔지지 않았다. 그 사람들의 성분이 마음에 걸렸고, 전에는 미리 의논을 했었던 것이다.
"중국은 언제쯤이나 다 차지하게 되겠습니까?"
사장 민동환의 말이었다. 일본이 당연히 이긴다는 전제로 한 그의 말투에 송중원은 어이가 없었다.
"그야 냉정하게 말하면 시간문제 아닙니까. 벌써 중국의 중요한 지역은 다 점령한 상태이니까요."
사회비평가 문신행이 자기 말의 신빙성을 높이려는 듯 냉정하게 라는 말을 내세워 내놓은 대답이었다.
"그렇습니다. 중국은 애초부터 일본의 적수가 못되었지요. 늙고 병든 호랑이가 중국이고, 젊고 총 잘 쏘는 포수가 일본인이니까요,"
철학 교수 황인곤이 유식을 과시하듯 말했다.
"그 비유가 참 철학적이고 문학적입니다. 일본이 아세아의 맹주가 될 날도 머지 않았지요."
소설가 이석진이 말했다. 기생들을 앞세우고 술상이 들어왔다. 술상 두 개가 옆구리를 붙이고 나란히 놓았다. 기생들까지 10명이 둘러앉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거 문 빨리 닫아라."
민동환이 호령했다. 바깥 날씨가 너무 추워 유리창 달린 마루가 있는데도 방으로 통바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넓은 온돌방은 모두가 양복을 벗었을 만큼 방바닥이 따끈따끈했다. 기생들 다섯이 윗목에 나란히 서서 나비춤을 추듯이 차례로 인사를 했다. 손님 세 사람이 기생 등을 고르고, 술자리가 짜여졌다. 기생들이 날렵하게 술을 따랐다. 두 개의 큰 교자상에는 온갖 술안주들이 자리다툼을 하듯 빽빽하게 차 있었다. 사장 민동환이 술잔을 치켜들며 목청 높여 말했다.
"뭐라고...!"
송중원은 머리가 쿵 울리면서 정신이 아찔해지는 현기증을 느꼈다.
"나를 이렇게 몰다니!"
"자아, 앞으로 잘해 봅시다."
"예, 새 마음 새 뜻으로!"
"조선계는 잘될 겁니다."
송중원은 왼손으로 상끝을 붙들었다. 가슴이 화끈거리며 열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목에서 피 냄새가 났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 술잔을 비웠다. 술을 넘기자마자 구역질이 왈칵 솟아올랐다. 송중원은 다시 어금니를 맞물려 구역질을 참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기침까지 터지려고 했다.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어 송중원은 입을 막고 일어섰다. 송중원은 변소로 가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기생이 종종 걸음 치며 따르고 있었다. 송중원은 숨을 헐떡이며 토악질을 했다. 술이 다시 넘어왔다. 그 술 냄새가 마치 민동환의 말인 것처럼 역하게 느껴졌다. 더 넘어오는 것은 없으면서도 구역질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송중원은 한 손으로 가슴을 다른 손으로 베를 싸잡고 몸부림했다. 가슴은 뜨거웠고 배는 뒤틀리고 있었다.
송중원은 거울을 보고 있었다. 거울도 웃고 있었다. 웃으니까 그 모습이 한결 좋아 보였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눈을 훔치고 얼굴을 닦았다. 머리카락도 간추렸다. 민동환이가 야비한 수법을 썼으면 이쪽에서는 당당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기는 것이었다. 송중원은 옷차림까지 손질하고 변소에서 나왔다.
"선생님, 어디 많이 편찮으세요? 술이 얹히셨나요?"
그때까지 멀찍이 지켜서 있던 기생이 뛰어오며 하얀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니 괜찮아. 추운데 방에 들어가 있지 뭘..."
송중원은 수건을 받아들며 웃었다. 수심 깃들인 인상인 기생의 얼굴에 추위가 오소소 묻어 있었다. 전에 민동환이 벌인 술자리에서 한두 번 본적이 있었지만 이름 같은 것은 기억이 없었다.
"선생님, 무슨 약 좀 드릴까요?"
"아니, 됐소."
송중원은 걸음을 옮겨 놓았다. 양복 윗도리와 외투가 방 안에 있었다. 기생을 시킬까 생각했다. 그러나 괜히 번잡해질 것 같았고, 당당한 태도도 못되었다. 손수 옷을 입고 나오기로 했다.
"이젠 잠꼬대 같은 독립 운운할 때가 아닙니다. 일본과 화합 방법을 모색할 때지요."
"그렇구말구요. 일본이 아세아의 맹주가 될 날이 닥쳤는데 눈치가 있어야지요. 일본이 내선일체를 내세운 건 우리 입장에선 고맙기도 한 거지요."
"예, 천만다행입니다. 우리 조선사람들을 종으로 취급하지 않고 동등하게 받아들이는 건데, 우리가 의지할 데는 더 이상 좋은 게 없지 않습니까."
방에서 들려오는 거침없는 말들이었다.
‘똥통에 구더기만도 못한 놈들...’
송중원은 방문을 옆으로 밀쳤다.
"아니, 어디 불편하신가요?"
황인곤이 기생을 껴안은 채 눈치 빠른 척 물었다. 술기운 내비친 그의 두툼한 얼굴에는 능란한 사교적 웃음이 끈적이고 있었다.
"아닙니다."
송중원은 무표정하게 벽 쪽으로 걸어가 윗도리를 내력서 입고 외투를 팔에 걸었다.
"아니 주간님, 왜 이러십니까?"
민동환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의 처사를 파면으로 받아들이겠소."
송중원은 냉정한 대꾸였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변명 할 것 업소. 서로 거북하니까."
송중원은 방을 나섰다.
"아니 주간님, 그게 아니고..."
민동환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러나 민동환은 따라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 외투 입으세요"
대문까지 따라 나온 기생이 말했다.
"응, 그래야지."
송중원은 외투를 걸치려고 했다. 그런데 기생이 외투를 잡고 거들어주었다.
"선생님!..."
송중원은 느낌이 이상해서 고개를 돌렸다. 기생이 눈물 글썽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수심이 더 깊어 보였다. 송중원은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기생은 정 많게도 파면당한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고맙소, 들어가시오."
송중원은 자신도 모르게 존대로 말하고는 돌아섰다. 어두워진 거리의 겨울바람은 차가웠다. 송중원은 몇 번이고 찬바람을 들이켰다. 가슴의 열기는 가셔지고 없었다. 어디 가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윤일랑은 있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집에까지 찾아가기는 너무 멀었다. 윤일랑은 뭐라고 할까? 기발한 독설을 퍼부어대겠지. 그는 이제 어느 잡지사를 찾아가나? 잡지마다 친일로 기울고, 문학지들은 순수문학이란 포장지로 친일을 눈가림하고, 대다수의 문일들은 예술의 순수성을 내세우며 현실을 교묘하게 기피하며 자기합리화의 변명거리로 삼았다.
임마누엘 신부는 역시 예언을 정확히 했다. 그 인터뷰는 민동환의 반대로 게재하지 못했던 것이다. 송중원은 걸음을 멈추고 설죽의 술집 앞에 와 있는 것을 알았다.
"어머 선생님, 어서 오세요."
설죽이 반색을 했다.
"나 외상술 좀 마시러 왔소."
"예, 얼마든지요. 헌데 혼자세요?"
"가능하면 술 동무도 좀 해주고요."
"송중원은 허물어지듯이 주저앉았다."
"아니, 무슨 일이세요?"
"흥, 아주 조오은 일이오."
송중원은 허물거리고 웃었다.
"무슨 일이세요?"
설죽이 바싹 다가앉았다.
"나 파면당했소."
"어머!"
"오늘 술값 못 받을지도 모를 거요."
"왜 그랬어요? 그 사장도 변심했나요?"
"하, 귀신이 따로 없군. 허형이 어째서 반했는지 이제 알겠소."
"너무 상심 마세요, 취직이야 또 하면 되니까요. 제가 곧 술상을 들여올게요."
설죽이 다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송중원은 눈을 감았다. 허탁이 못내 보고 싶었다.
24, 거룩한 죽음, 이름 없는 꽃들
관동군은 만주 3개년 치안숙정계획 마지막 해를 맞이하여 동변도 치안숙정계획을 구체화시켰다. 그것은 간도, 통화, 길림의 동남만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연군 제1로군을 완전히 소탕해 버리기 위한 작전이었다. 관동군 제2 독립수비대 사령관인 노조에 소장을 토벌대장으로 한 그 작전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3월까지 실시하며, 7만 5천 명의 대병력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관동군이 그렇게 대병력을 동원하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한만 국경 지역에서 활동하는 제1로군이 아직까지도 항일연군 중에서는 제일 강력했고, 둘째는 39년 노먼한에서 소련군과 무력충돌이 생겼는데 일본군이 패한 사건이 생겼다. 그 패배는 일본군에게 큰 충격이었고, 만약에 소련과의 전쟁을 생각할 때 후방 기지 겸 작전기지로서의 만주가 완벽한 치안을 확보한 가운데 안정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이 토벌 작전에서 병력만 어마어마하게 동원된 것이 아니었다. 그전의 포위, 차단, 섬멸 작전을 강화하는 한편으로 진드기 전법을 새로 전개했다. 진드기 전법이란 토벌전 특수전 같은 데서 단련되고 숙달된 강한 병사들로 특수공작대를 조직하여 항일연군을 찾아다니며 추격하고 또 추격해서 일각의 여유도 주지 않고 지쳐 쓰러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건 포위 작전에서 유격대의 소부대가 쉽게 빠져나가는 허점을 보완해 유격대를 잡는 또 다른 유격 전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은 그들의 오래된 작전 중의 하나인 현상금도 내걸었다. 1로군 간부들에게 막대한 현상금이 붙은 전단이 사방에 뿌려졌다. 양정우 방대근 조아범 김일성 진한장 최현에게는 1만원, 박득범 방진성은 5천원, 위증민 전광에게는 3천원씩 붙어 있었다.
1941년 1월로 토벌 4개월째를 맞은 1로군들은 많은 피해를 입은 채 소부대로 분산하여 일본군을 피하고 있었다. 부대 규모가 클수록 피해가 크기 때문이었다. 제3 방면군 12단장 천상길은 5명으로 줄어든 부하들을 이끌고 노숙할 만한 곳을 찾고 있었다. 아침나절에 포위망을 뚫느라고 사력을 다한데다 하루종일 추위 속에 눈길을 걸어 부하들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단장님, 저거, 저거 뭡니까?"
꽁꽁 얼어붙은 부하 하나가 말을 제대로 못 하며 바위 쪽을 가리켰다.
"음, 왜놈들이 또 투항 권고문을 붙인 거겠지!"
바위에 붙은 종이를 보며 천상길은 픽 웃었다.
"그래도 뭔지 가봐야지요? 찢어버려야 하니까요."
다른 부하의 말이었다
"그러지."
천상길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들을 앞장섰다. 바위 앞에 다다른 그들은 모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제1로군 군장 양정우가 체포되었다.’
주먹만큼씩 크게 쓴 글씨였다.
‘이제 항일연군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두 번째 줄이었다.
‘일분군은 최강의 무적의 군대다.’
세 번째 줄이었다.
‘아래 편지를 장본인에게 전해 주라.’
네 번째 줄 밑에는 봉투 하나가 붙어 있었다.
"단장님. 이게 정말일까요?"
"군장님이..."
부하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부하들도 불안하고 두려운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야!"
천상길이 일단 부정했다 군장이 체포되면 1로군은 끝장나는 것이었다. 1로군이 끝장나면 항일연군은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로군 대원들은 누구나 1로군이 항일연군 제일 강하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왜놈들의 조작이야. 지금 동지들은 불안해하고 무서워하고 있지!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왜놈들이 조작한 거야. 우리 대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동요하고 실망하게 만들려고 말야. 왜놈들이 얼마나 악질적인지 겪어봐서 잘 알잖아. 절대로 속아서는 안 돼!"
천상길은 부하들 하나하나를 응시하며 강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조작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부터라도 그 부정의 힘에 의지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살을 에는 추위와 눈구덩이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예, 맞습니다. 이건 틀림없이 왜놈들이 꾸며낸 거짓말입니다. 우리 경호여단이 얼마나 강한데 군장님이 체포됐겠어요."
한 부하의 말에 천상길은 살아난 기분이었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보다는 부하 쪽에서 하는 말이라 더 좋았다.
"우리 경호여단이야말로 최상의 부대 아닌가."
천상길은 아까보다 더 힘차게 말하며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그의 손을 감싸고 있는 벙어리 장갑은 장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낡고 찢어져 속에서 솜이 드러나고 있었다. 때 절고 헐어빠진 그들의 옷도 나뭇가지며 가시 같은 것들에 찢겨져 장갑 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헌데 이 편지는 뭘까요?"
"어디 또 수작을 했는지 보자."
천상길은 기세 좋게 두껍고 큰 종이를 북 찢으며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 편지를 부하들 앞에서 보고 싶지 않았다. 또 무슨 내용으로 대원들의 사기를 떨어트리고 마음을 동요시킬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편지를 못 보게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더 궁금해지고 의심스러워해 오히려 상호 간의 신뢰가 깨질 수 있었다. 천상길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한 장의 편지는 연필로, 그 씌여져 있었다.
간청서
소인의 차남 전춘생은 19살 철없는 젊은 혈기로 가출하여 항일연군에 가담하였습니다. 하오나 항일연군은 대일본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나날이 수없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더욱이나 항일연군은 속산에 갇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고, 입을 것이 없어 이 엄동설한에 떨고 있다는 소문도 전해 듣고 있습니다. 그런 소문들을 듣고 부모로서 차마 밥을 넘길 수가 없고, 불 땐 더운 방에서 잠도 잘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가망없는 싸움에 귀한 목숨 헛되게 버릴까 봐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애가 타고 피가 마릅니다. 그리고 더욱 몸이 나는 것은 옆집 김용칠이가 투항해서 아무 벌도 받지 않고 잘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춘생이도 용칠이 같이 살 수 있도록 어서 찾아주시기를 간절히 간청드리면서 이 글월을 올립니다.
천상길은 머리가 띵해지면서 이 편지가 사실인지 아닌지 혼란이 일어났다. 어찌 생각해 보면 사실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조작 같기도 했다. 비틀비틀 잘 쓰지 못한 연필 글씨와 애타 하는 부모의 마음을 보면 사실이었고, 그 글이 막히는 데 없이 매끈하게 잘 지어진 것을 보면 조작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인지 자신 있게 분간이 되지 않았다. 천상길은 그 편지를 찢어 버리지 않고 본 것을 후회했다. 자신이 분간이 잘 될 때 부하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고, 단장으로서 태도 결정만 남아 있었다.
"이런 흉악한 놈들, 제 놈들이 쓴 편지를 베끼게 했구나, 글씨를 이렇게 못 쓰는 사람이 어떻게 글을 이렇게 잘 짓나. 우리를 잡지를 못하니까 이제 별놈의 짓을 다 하는구나."
천상길은 분노에 찬 얼굴로 말하며 편지를 부하들에게 내밀었다. 편지를 받아든 부하들은 서로 얼굴을 내밀었다. 천상길은 돌아서며 방을 둘러보았다. 깊은 산에 적설만 가득하고 바람이 없으니 정적은 깊었다. 왜놈들에게 쫓기고 포위망을 뚫고 하면서 지난 석 달 동안 남만주에서 동만주를 오간 것이 네 차례였다. 이제 1월 한 달만 더 버티면 추위는 고비를 넘기게 되는 거였다. 추위만 덜해도 버티기가 한 수 쉬웠다. 그러나 문제는 식량과 물자였다. 금년에는 식량과 물자가 더욱 달렸다. 왜놈들이 수 많은 병역으로 더욱 철저하게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쪽이 고통스러우면 왜놈들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왜놈들은 옷을 좀 더 두툼하게 입고, 세끼 밥을 굶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왜놈들을 계속 끌고 다니며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것이 이기는 방법이었다. 천상길은 아버지와 동생들의 모습을 지우며 어금니를 맞물었다.
"아직도 다 안 읽었나?"
천상길은 부하들 쪽으로 돌아섰다.
"아 예, 다 읽었습니다."
부하 하나가 편지를 내밀었다.
"어떤가, 내 말이 맞나 틀리나?"
천상길은 편지를 북 찢으며 부하들을 휘둘러보았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않았다. 그들의 얼굴은 시무룩하고 슬픈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왜 집 생각들이 나나?"
"당연히 나겠지. 그래, 맘놓고 집 생각들 해도 좋아. 그러나 정신 똑똑히 차려야 해. 지금 동지들이 집 생각을 하며 슬퍼하는 것, 그게 바로 왜놈들이 노리는 거야. 이런 약탈한 수법을 향수에 젖게 하고,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전의를 잃게 하려는 것 아닌가. "
"내 말이 틀리나?"
천상길은 편지를 겹치고 계속 찢어대며 부하들은 주시하고 있었다.
"예, 단장님 말이 맞습니다."
"그래요, 글씨에 비해 글이 너무 잘 지어진 것이 수상해요. 틀림없이 조작된 겁니다."
응답은 이렇게 했지만 부하들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자아, 모두 편지는 잊어보리도록해. 왜놈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우리를 망치려고 하니까 거기에 속아 넘어가선 안돼.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고생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거니까. 알겠나!"
천상길은 엄한 눈초리로 부하들을 훑었다.
"옛."
"알겠습니다."
부하들이 차려 자세를 취했다.
"좋아.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노숙처를 찾자. 자아, 출발"
천상길의 판단은 틀리는 데가 없었다. 1로군 군장 양정우는 체포되지 않고 엄연히 경호원 보호 속에 부대를 총지휘하고 있었다. 다만 소부대로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는 대원들이 양정우를 직접 보기가 어려울 뿐이었다. 편지도 가족에게 베껴 쓰기를 강요해서 만들어낸 조작이었다. 일본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토벌전과 심리전을 병행시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참을 더 걸어 남쪽 박힌 바윗덩이들을 찾아냈다. 북풍막이에 안성맞춤이었고 등성이가 가까워 만일의 사태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들은 바위 밑의 눈을 발로 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져야만 그 위에 누워도 눈이 눅어지지 않았다. 눈이 다져지자 솔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 하얀 눈 위에서 솔잎들은 유난히도 푸르러 보였다. 그 솔잎들이 그들에겐 요였다. 솔가지를 깔면 눈의 냉기가 한결 덜했다. 그들은 바위를 등지고 웅크리고 앉았다. 천상길이 배낭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조그마한 광목자루였다.
"자아, 저녁들 먹어야지."
천상길이 자루에 손을 넣었다. 부하들이 헐어빠진 장갑들을 벗고 두 손을 모아 바가지를 만들었다. 천상길이 옆의 부하들의 손바가지에 자루에서 꺼낸 것을 한주먹 홀려주었다. 손바가지에 담긴 것은 수수였다. 천상길은 부하들에게 차례로 수수한 주먹씩을 나눠주었다. 그러고 나니 자루는 훌쭉했다.
"자아, 다들 먹지."
그들은 손바가지에 입을 대고 날수수를 먹기 시작했다. 어둑살과 함께 바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잎 다 떨어진 실가지들 사이로 별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수수를 다 먹은 그들은 눈을 한 덩어리씩 뭉쳐서 먹었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어둠 저 멀리 나란히 줄을 선 불빛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군들의 야영지였다. 일본군들은 어두워지기만 하면 행동을 멈추고 횃불들을 밝혀댔다. 추워서 불을 피우는 것은 아니었다. 항일연군의 야간기습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누구 나하고 보초를 같이 설 사람"
천상길의 말에 부하 하나가 나섰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 자도록."
네 사람은 솔가지 위에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두루말이 담요 한 장을 펴서 덮었다. 그들은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곧 잠이 들었다. 보초는 한 시간 간격으로 두 사람씩 교대했다. 동사를 방지하기 위해서 시간 간격이 짧았다. 자정 무렵이었다.
탕!
탕!
두 보초가 잠든 누군가를 향해 총을 쏘아댔다. 그리고 그들은 어둠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 뭐냐, 뭐냐!"
"무, 무슨 일이냐!"
놀라고 당황한 목소리들이 뒤엉켰다.
으으으...,으윽...
어둠 속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단장님이다!"
"아니, 단장님을!"
"단장님..."
"단장님..."
신음소리가 끊어졌다. 어둠 속에서 바람소리만 거칠었다.
한편, 경위여단에서는 긴급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포위망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참모장 정수룡이 일본군에 체포된 것이다. 1로군의 정보가 토벌대에게 고스란히 넘어가게 된 위기였다. 방대근은 긴급연락대를 편성해 직접 지휘하고 나섰다. 참모장의 정보로 토벌대가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각 방면에게 이동명령을 전달해야 했다. 각 방면군의 사령부 밀영 위치가 토벌대에게 알려지는 경우 치명타를 입게 되는 것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긴급작전이었다.
방대근은 2명 1개조로 짠 연락병들을 각 방면군에 띄웠다. 그리고 행군을 계속하며 2차로 연락병들을 보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연락병의 임무란 중요하고도 위험했다. 정보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행동도 혼자나 많아야 둘이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돌발 사고가 빈번한 유격전에서 찾아간 부대가 어디론가 이동해 버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때부터 연락병들에게는 더 심한 고통과 위험이 따르게 되었다. 이동한 부대를 찾으려고 산속을 헤매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길을 잃고 조난당하기도 하고, 포위에 걸려 사살당하기도 했고, 식량이 떨어져 굶어 죽기도 했다. 그래서 연락병들을 몸이 튼튼하고 정신 무장이 견고하며, 산속의 지리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을 기본 조건으로 했다. 임무의 중요성만큼 연락병들은 특별대우를 했고, 일반 대원들도 연락병이라면 다르게 생각했다.
방대근은 부하 네 명을 데리고 미리 저 둔 두 군데 비상 지점에서 연락병들을 규합했다. 예정된 엿새째까지 무사히 돌아온 연락병들은 8명이었다. 2개조 4명이 변을 당한 것이었다. 방대근은 10일 만에 경위여단의 밀영으로 새로 정한 곳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또 돌발사태가 터져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갔는지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사람들이 머물렀다 떠난 흔적은 없었다.
"이게 어찌 된 것인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 것인가?..."
방대근은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 지금부터 본대를 찾아나선다. 모두 각오를 단단히 하도록!"
방대근은 부하들에게 비장하게 말했다. 부하들도 차려 자세로 총을 굳게 잡았다. 방대근은 열흘 전의 활동지역으로 은밀하게 접근해 갔다. 위험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부대의 종적을 찾아내자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대장님, 저것 좀 보십시오."
옆을 따르는 부하가 방대근에게 낮게 속삭였다. 그 부하가 손가락질한 비탈에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시체 세 구가 눈 위에 나뒹굴어져 있었다.
"음, 탐색기가 기습을 당헌 모양이군."
방대근의 담담한 대꾸였다. 그들은 경계를 하며 시체 옆으로 다가갔다.
"이삼 일 지낸 것 같군."
시체와 그 주위를 살피며 방대근이 중얼거렸다. 시체들 위에는 눈가루가 살얼음 끼듯 덮여 있었고, 핏자국들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눈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시체에 내린 눈은 거센 바람에 쌓이지 못하고 날아간 것이다.
"탐색조가 나슨 것이 이상헌디..."
방대근은 사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가벗겨진 일본군의 시체는 가끔 볼 수 있었다. 그건 물자가 부족한 유격대들이 총에서부터 양말까지 모조리 벗겨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일본군이 시체를 놓고 도망칠 만큼 다급해지는 경우는 대개 10명 미만의 정찰대가 탐색을 하다가 기습당할 때였다. 그러나 대규모 병력으로 포위 작전을 시도하고 있는 일본군이 정찰대를 투입하는 것은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건 유격대의 활동 거점들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에서 섬멸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취하는 작전이었던 것이다.
‘이상하다..., 정작 경위여단의 이동상호아이 적에게 포착되었단 말인가? 제일 먼저 대비하고 나선 경위여단이 그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적의 탐색조가 투입된 것은 무엇인가?...’
방대근은 혼란이 일어났다. 어쨌든 탐색조가 투입된 것은 이쪽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것이다. 방대근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 결론과 함께 방대근의 머릿속에서는 불길한 생각이 스쳐갔다. 탐색조 뒤에는 대부대가 따르게 마련이었다. 새로 정한 밀영에 자취도 없는 부대와 일본군 대부대가 정면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대근은 머리를 흔들며 그 불길한 생각을 떼치려고 했다.
"자아, 출발"
방대근은 전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부대를 출발시켰다. 방대근 부대는 이틀 동안 산줄기를 넘고 또 넘었다. 그러나 부대의 종적은 묘연하기만 했다. 사흘째 되는 날 방대근은 어느 등성이에서 20여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건 바로 경위여단 대원들이었다. 어지럽게 흩어진 그 시체들은 포위상태에서 싸우다가 죽은 것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방대근은 정신없이 시체들을 확인해 나갔다. 혹시 조카 삼봉이가 있지 않나 해서였다. 삼봉이가 후방대에서 전투대로 옮긴 것이 1년 반이었다. 방대근은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다행히 삼봉이는 없었다. 20여 명이 한꺼번에 죽었다는 것은 경위여단의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확증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사람이 몰살을 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어떤 간부가 체포된 것인가? 누가 또 투항을 한 것인가?...’
방대근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부하들은 두려움에 찬 얼굴로 대장의 눈치만 살폈다.
"다덜 심내. 본대가 어디든 있을 것잉게"
방대근은 부하들에게 이 말밖에 할 것이 없었다. 이튿날 열 구가 넘는 시체를 발견했다. 방대근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절망을 느꼈다. 경위여단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 너무 뚜렷했던 것이다. 그 시체들의 위치로 보아 경위여단은 이동 중에 집중적인 공격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건 정보 누출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는 증거였다. 방대근은 또 시체를 확인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삼봉아!"
어느 시체의 얼굴을 들어보던 방대근이 부르짖었다. 오삼봉은 눈에 엎드린 채 죽어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방아쇠에 걸려 있었다. 방대근의 흐려진 시야에는 큰누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생으로 시든 꽃이 되어 있었던 그 모습이 가슴을 쓰라리게 했다. 방대근은 눈으로나마 조카를 덮어주었다. 방대근 부대는 한 주먹씩 하루에 나누어 먹던 잡곡마저 바닥이 났다. 그들은 눈으로 배를 채워가며 이틀을 헤맨 끝에 10여 명의 대원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 부대는 정치위원인 중국 사람 한인화가 이끌고 있었다.
"말도 말아요, 우리 경위여단은 산산조각이 난 겁니다. 글세 호위분 대장 놈이 부대 자금 1만 원까지 훔쳐 가지고 투항을 해버렸지 뭡니까. 그놈 때문에 포위를 당하는데..., 참 우리 중국 놈들 하는 짓하고는, 조선 동지들한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정치위원의 침통한 말이었다.
"그럼 군장님은 어찌 됐습니까?"
방대근은 너무 큰 충겨과 함께 양정우 장군의 안부를 물었다. 정치위원이 고개를 떨구었다. 방대근은 너무 큰 충격과 함께 양저우 장군의 안부를 물었다.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사력을 다해 찾아 헤매고 있는데 행방불명입니다. "
방대근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대장을 행방불명된 부대... 경위여단은 이미 난파선이었고 바퀴 빠진 수레였다. 호위 분대장은 바로 양정우 장군의 호위를 맡은 책임자였다. 그리고 경위여단의 기관총대장이기도 했다. 그는 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 어째서 변심을 하게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앞날이 그렇게도 가망 없이 느껴졌던 것일까? 부대 자금 1만 원까지 훔쳐 가다니, 도대체 그게 어디 인간인가. 아니, 그런 돈 욕심으로 그놈은 양 장군과 나한테 붙은 현상금까지 타 먹으려고 했겠지? 아니야, 어쩌면 그놈은 애초에 왜놈들 첩자로 잠입했던 것은 아닐까?
방대근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방 동지.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정치위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예, 계속 군장님을 찾고 대원들을 찾아야지요. 군장님도 우릴 찾고 계실 겁니다."
방대근은 지체없이 힘주어 말했다.
"고맙소, 그렇게 합시다. 이제 방 동지와 합류했으니 경위여단은 재생하게 된 것이오."
정치위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럼요, 경위여단은 건재합니다."
방대근은 정치위원의 손을 잡았다. 정치위원도 방대근의 손을 맞잡으며 부르르 떨었다. 그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집단부락을 습격해 가며 열흘이 넘도록 양정우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양정우의 자취는 묘연했다. 2월도 중순에 이르러 있었다.
"우리 병력이 너무 약하니까 1방면군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어느 날 정치위원이 꺼낸 말이었다. 그 말은 양정우 찾기를 그만 포기하자는 뜻이었다. 그건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예, 그러지요."
방대근은 아무런 이의 없이 동의했다. 그동안 산속을 무작정 헤매며 다닌 것이 아니었다. 그전에 사용했던 자신들의 비밀통로를 따라 뒤질 만큼 다 뒤졌던 것이다. 살아 있다면 못 만났을 리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더라도 정치위원 결정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1방면군 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통화현에서 환인현 일대의 지역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동안 이 지역을 고수한 것은 양정우 군장의 뜻이기도 했다. 양정우 군장은 자꾸 서쪽으로 진출해서 8로군과 연결을 맺으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당 중앙과 연결하려는 의도였다. 다시 국공합작으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공산당의 홍군은 홍군 깃발을 내리고 국민당군 내의 제8로군으로 변모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양정우의 그야말로 꿈에 지나지 않았다. 8로군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그 사이에는 일본군들이 첩첩이었던 것이다. 그 시도로 병력을 꽤나 잃었고, 특히 조선대원들의 반발을 샀다. 조선대원들은 조선 땅이 멀어지는 곳으로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1방면군 쪽으로 이동한 방대근은 송가원부터 찾아보았다.
"송동지, 무사혔소 잉!"
"아니, 방 대장님 아니십니까!"
송가원이 반가움 넘치는 얼굴로 물었다.
"도망 왔소."
방대근이 씨익 웃었다.
"이쪽보다 공격이 심한 모양이지요?"
"아니오, 변절자 땜시 경위여단은 궤멸 상태가 되야부렀소."
"그것 참..., 워낙 견뎌내기가 어려우니까요."
송가원은 놀라지 않았지만 괴로운 듯 얼굴이 찡그려졌다.
"왜놈덜 작전이 맞어들어가고 있소."
"그놈들, 영리하다고들 해야 할지 교활하다고 해야 할지. 금년부터는 여자 사진에다 옷까지 내걸지 않았습니까. 최악의 조건에서 시달리는 젊은 사람들 앞에 그따위 짓들을 하니..."
송가원은 고개를 저었다. 일본군들은 풍만한 여자들의 알몸 사진을 투항 권고문과 함께 붙였고, 옷들을 나무에 걸어놓기도 했던 것이다. 갈수록 그 방법이 자극적이고 다양해지고 있었다.
"참, 왜놈덜헌티 요상시런 것 많이 배운게 좋소. 방대근은 쓰디쓴게 웃고는, 근디 말이여. 이,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먼 길림으로 가시오." 목소리를 낮추며 송가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전망이 안 좋은가요?"
송가원은 부대들이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 더 절망스러웠다.
"짐작언 허겄지만, 시방 어떤 부대고 풍전등화요."
방대근은 말을 끝내기 바쁘게 자리를 떴다. 그런데 수국이가 속해 있는 이동 후방대는 이틀 전부터 일본군들에게 기고 있었다. 최대한의 안전지대를 골라가며 어렵게 구한 물자로 전투병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던 후방대의 아지트가 일본군들에게 발각된 것이었다. 후방대 23명 중 남자는 여섯뿐이었다. 그들도 전투하기에는 어렵게 부상 치료를 받았거나 몸이 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고 있는 일본군들은 2백여 명이었다. 후방 대원들은 눈보라 속을 밤낮없이 내닫고 있었다. 그들은 산을 넘고 넘으면서 뒤따라오는 일본군들에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일본군도 살펴야 했다. 무턱대고 내닫기만 하다가 다른 일본군 부대와 맞닥뜨리면 꼼짝없이 포위당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본군들을 떼치기 위해 이틀 밤을 한숨도 자지 않고 줄기차게 산을 타넘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끈질기게 쫓아오고 있었다. 진드기 전법이었다. 그들은 사흘째는 더 견디지 못하고 한숨씩 자기로 했다. 눈보라는 치고 먹는 것은 날곡식을 씹을 뿐인데다가 잠까지 자지 못하니 기진맥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들은 바위를 등지고 서로 붙어 앉아 절반씩 교대로 붙이기로 했다. 보초도 서야 했고, 오래 잠들어선 안 되었던 것이다. 총을 끌어안은 수국이와 필녀는 눈보라 치는 혹한은 아랑곳없이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두 시간 정도씩 눈을 붙인 그들은 다시 출발을 서둘렀다. 그런데 두 사람이 모자랐다. 바위에 등을 기대고 쪼그려 앉은 두 사람의 몸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몸이 약한 두 남자는 괴로워 추위를 더 이겨내지 못한 것이었다.
"양식은 떨어져 가고, 이러다간 안 되겠소. 유인작전을 써봅시다."
날이 밝자 후방대장이 말했다. 발이 빠르고 총을 잘쏘는 사람으로 8명을 골라냈다.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필녀였다. 나이 든 필녀가 나서자 젊은 여자들이 다투어 나섰다.
"니넌 안돼야."
필녀가 한 여자의 가슴을 손으로 막았다.
"..."
수국이는필녀를 노려보았다.
"젊은 것덜 삭신만 허겼냐."
필녀가 달래듯이 웃으며 말했다.
"..."
수국이는 표정 없이 물러섰다.
"자아, 나머지 대원들은 왼쪽 등성이를 타고 가시오. 이따가 다시 만납시다."
후방대장이 선발대 출발을 명령했다. 유인조는 선발대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며 자신들의 모습을 노출시키기 시작했다. 일본군들이 보이자 유인조는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군들은 즉각적으로 응사해 왔다. 유인조는 계속 선발대의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며 사격을 했다. 일본군들의 추격은 맹렬해지고 있었다. 유인조는 더욱 빨리 이동하며 산등성이 하나를 넘었다. 그리고 총소리를 뚝 끊었다. 그들은 골짜기 쪽으로 위장 발자국을 냈다. 그런 다음 방향을 반대쪽으로 틀어 사력을 다해 내닫기 시작했다. 유인조가 선발대와 합류해서 다소 안심하고 하룻밤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따돌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줄기차게 쫓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후방대에 위기가 닥쳤다. 아껴가며 먹은 양식이 동나고 말았다.
"참 요상허이, 어째 우리 편얼 요리 만날 수가 없당가."
필녀가 안타깝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예요. 만날 때도 되었는데..."
다른 여자 대원이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말할 기운도 없는 것처럼 묵묵히 걷기만 했다. 유격대를 만나기를 바라는 것은 그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유격대의 수는 현격하게 줄었고, 산악은 골골이 첩첩이 깊고 넓기만 했다. 날곡식이나마 입에 넣은 것이 없게 되자 그들은 표나게 지쳐갔다. 행군 속도가 느려지고 쓰러지는 사람이 자주 생겼다. 그럴수록 일본군의 위협은 가까워졌다. 그들은 다시 유인작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몇 시간의 여유를 가졌을 뿐 일본군은 계속 쫓아오고 있었다.
"동지, 강동지 정신 차려요."
뒤따르던 대원이 그 대원을 흔들었다. 눈에 얼굴을 박은 그 대원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니, 강동지!"
그 여자 대원의 몸은 거짓말처럼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혹한 속에서 몸이 얼고 얼어 숨이 끊어진 것이었다.
7일째 되는 날 그들은 일본군과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굶주림과 피로에 지칠 대로 지쳐 일본군에게 따라잡히게 된 것이다.
"다들 힘내시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갑시다."
앞장선 후방대장이 대원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지점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일본군들은 벌써 총을 쏘아대며 산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됐소, 여기 엎드리시오, 다음 대원..."
후방대장은 대원들의 사격 위치를 정해 나갔다. 눈보라는 줄기차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가로로 산개한 일본군들은 아무런 거침없이 진격해 오고 있었다. 그건 포위대형이었다.
"여러분, 저놈들 하는 짓 잘 알지요? 여자들 잡으면 강간하고 나서 죽이는 거. 내가 총을 쏠 때까지 모두 기다리시오."
후방대장의 외침이 눈보라 속에 흩어지고 있었다. 일본군들이 차츰 사격권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필녀는 총을 더 바짝 끌어당기며 광대뼈를 밀착시켰다. 바로 그 옆에서 수국이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있었다.
탕!
사겨억 개시!
대원들은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눈보라 속에 총소리들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산이 울리면서 겹메아리가 파장 짓고 있었다. 바람 소리에 섞이는 그 메아리들은 슬픈 울음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대원들은 뭐라고 소리치며 돌진을 감행하고 있었다. 대원들은 정신없이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일본군들이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지고 고꾸라지고 있었다.
"그려, 그려, 느그덜 죽고 나 죽자!"
필녀는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이를 갈아붙였다.
"엄니, 엄니..."
수국이는 일본군들이 쓰러지고 비탈을 굴러내릴 때마다 어머니를 불렀다. 비로소 어머니의 원수를 제대로 갚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쾅!
수류탄이 터졌다. 섬광이 치뻗어오르고 비명소리가 뒤엉켰다.
"워메!"
필녀가 소리치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쾅!
필녀와 수국이의 몸이 들썩했다. 수류탄은 연거푸 터지고 있었다. 후방대원들 쪽에서는 더 이상 총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일본군들이 환성을 지르며 내닫고 있었다. 일본군들이 후방대원들 쪽으로 몰려들고 있을 때였다.
탕! 탕!
두 방의 총성과 함께 일본군 두 명이 나뒹굴어졌다. 두 다리가 절반씩 없어진 여자가 바위에 기댄 채 총을 쏘고 있었다. 그건 필녀였다. 일본군들의 총이 필녀에게 집중되었다. 필녀는 총을 떨구며 눈 위에 머리를 박았다.
"서언사상니임..."
필녀는 철망 사잉로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송수익 선생을 보고 있었다.
3월 중순을 넘기면서 날씨는 완연히 풀리고 있었다. 깊은 산중의 눈도 녹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군들의 토벌은 늦추어지지 않았고 방대근은 6명으로 줄어든 부하를 이끌고 동만주 돈화 북쪽에 이르러 있었다. 적과 싸우고 피하면서 산악 1천 5백 리를 이동해 온 것이다. 어느 날 방대근은 항일연군 1개 분대를 만났다. 그들은 제5로군 소속이었다.
"이 길로 쏘련으로 이동하시오. 우리도 한가지 임무만 끝내면 쏘련으로 갈 거요,"
중국인 분대장의 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누가 그런 결정을 내렸단 말이오?"
방대근은 믿을 수 없는 말이라고 연달아 물었다.
"우리 군장님이시오. 그걸 대원들에게 알려 주라고 하셨소."
"주보중 군장님께서..."
방대근은 항일연군의 활동이 이제 막을 내렸음을 알았다. 주보중 장군의 결정이라면 당의 결정이었다. 주보중 장군은 5로군을 맡고 있는 동시에 동북항일연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것이다. 그는 당 중앙의 핵심인 주은래가 만주로 파견한 인물이었다.
쏘련으로 후퇴...
방대근은 고개를 저었다. 혹하사변의 기억이 너무나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할 수는 없었다. 방대근은 하룻밤을 골똘히 생각했다. 항일연군은 이제 궤멸 상태였다. 쏘련으로 가지 않으려면 단 한 군데. 그 반대쪽으로 가야 했다. 그쪽 어딘가에 지난날의 의열단 세력과 김원봉이 있었다. 그쪽으로 간다면 부하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쪽은 중국과 일본이 한창 전쟁 중이었다. 무장한 7명이 일본군의 경계를 뚫고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총을 다 버린다고 해도 일곱이 한꺼번에 행동하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위험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이었다.
"동지덜, 잘 들으시오. 어지께 이얘기 들어서 다 알고 있겄지만 우리 항일연군은 쏘련으로 후퇴하고 있소. 인자 항일연군이 만주서 헐 일인 끝난 것이오. 헌디 나가 생각허기로넌 쏘련으로 가봤자 환영받을 것 같지 않고, 그리 할 일도 없을 것 같소. 그려서 난 안 가기로 작정혔소. 그러면 동지덜헌테 남은 길은 두 가지요. 첫째는 쏘련으로 가는 것이고, 둘째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 후일얼 기약하는 것이오. 그것은 동지덜 자유의사에 멧길 것이니 좋을 대로 하시오."
대원들은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은 오래 계속되었다.
"어째 말들이 없소?"
"말하나 마나지요. 대장님이 안 가시는데 누가 쏘련엘 가겠습니까?"
어느 대원의 단호한 말이었다. 방대근은 대원들을 살펴보았다. 모두 같은 뜻을 나타내고 있었다.
"알갔소. 그러면 우리 후일얼 기약하도록 합시다. 총을 땅에 묻고 여그서 뜹시다. 동지덜 노자라도 장만헐 사람얼 찾어가야 헝게."
방대근은 착잡하게 말했고, 대원들은 모두 고개를 떨구었다.
25. 뿌리 뽑기
어디인지 모를 첩첩산중이었다. 무주의 산골 같은가 하면 어딘가 낯설고 이상했다. 산은 절벼과 바위투성이로 험하고 골짜기는 깊었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산속 어디에선가 으시시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음산한 바람에 자꾸 떠밀렸다. 걸음을 놓지 않으려고 버티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바람에 밀려 마음과는 달리 발이 자꾸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괴기스러운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구슬프면서도 흐느끼는 것 같은 새 울음소리는 차츰 커지면서 골짜기를 울리고 있었다. 너무 소름 끼치고 무서워 귀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새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손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새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음산한 바람이 휘익 거세지면서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뒤엉키며 골짜기를 울려댔다. 그 웃음소리들은 새소리보다도 훨씬 더 소름 끼치고 무서웠다. 또 귀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손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그 웃음소리들이 등을 미는 바람처럼 몸을 앞으로 당기고 있었다. 뒤에서는 바람이 밀고 앞에서는 웃음소리들이 끌어당기고, 몸이 붕붕 뜨듯이 발은 빨라지고 있었다. 발을 떼어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댔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발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느닷없이 소리가 울렸다.
"어엄니이, 어엄니이."
서럽고 애타게 골짜기를 울리는 그 소리는 삼봉이의 목소리였다.
"삼봉아, 삼봉아, 어디 있는겨. 삼봉아 얼른 나오니라. 에미 여그 있다. 얼렁 나와."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목이 터져라 소리쳐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어엄니이, 어엄니이."
삼봉이의 목소리는 더 서럽고 애타게 골짜기를 울리고 있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삼봉이는 보이지 않았다.
"엄니, 엄니, 엄니..."
삼봉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삼봉아, 삼봉아, 삼봉아!"
삼봉이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 붙들려가고 있었다. 삼봉이가 걸친 하얀 옷은 피범벅이었고, 검은 옷을 펄럭이며 삼봉이를 끌고 가는 두 사람은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삼봉이를 향해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삼봉이와 손이 아슬아슬하게 닿듯 말 듯 되었다. 그런데 바람이 뚝 그쳤다. 그리고 걸음도 멎었다. 발을 떼어놓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땅에 딱 붙은 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삼봉이는 검은 사람들에게 붙들려 골짜기 저 위로 붕붕 떠가고 있었다.
"삼봉아! 삼봉아! 삼봉아!"
그때서야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어엄니이, 어엄니이."
삼봉이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삼봉아! 삼봉아! 삼봉아!"
발은 꼼짝도 하지 않으면서 목소리만 커지고 있었다. 아들을 붙들 수 없는 미칠 것 같은 심정을 소리로 토해냈다.
"삼봉아아, 삼봉아아, 삼봉아아!"
"엄니, 엄니, 정신채리소, 엄니, 어찌 또 이렁가."
어머니의 목소리에 놀라 잠이 깬 금예는 어머니를 흔들어댔다.
"엄니, 엄니 정신 차리랑게."
금예는 어머니를 더 세게 흔들어댔다. 가위눌렸을 때 얼른 깨우지 않으면 넋이 붙들려간다는 말이 겁났던 것이다.
장닭의 목청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름이는 하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아들을 잊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아들은 그렇게 살다가 가도록 되어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이끌고 있던 것이고, 시아버지와 남편이 바라는 길이었다. 그러나 절손을 시킨 것은 자신의 외로움 이전에 남편에게 큰 죄를 지은 것이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꿈에 나타나는 것은 그 잘못을 꾸짖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인자 고만 혀라, 나 팔 빠지겼다."
보름이는 등을 돌리며 앉음새를 고쳤다.
"나 암시랑토 안혀, 인자 다리 뻗소."
금예는 어머니의 다리를 붙들었다.
"아니여, 자꼬 두들기고 주물르면 인 백이는 법이여,"
보름이는 다리를 펴지 않으려고 했다.
"인 백이먼 무슨 걱정이여. 자꼬 더 뚜들기고 주물르면 되제 나 기운신 것 어디다 써묵게."
금예는 한 손으로 어머니의 무릎을 잡고 다른 손으로 발목을 잡아 다리를 쭉쭉 펴며 말했다. 그 순간 보름이의 뇌리에는 서무룡이 퍼뜩 스쳐갔다. 금예는 불거진 눈만 서무룡이를 닮은 것이 아니었다. 늘씬하게 큰 키며, 남자 같은 기운, 서글서글한 성질까지 커갈수록 서무령이란 떡판으로 찍어낸 떡이었다.
"시집언 안 가고?"
"히, 엄니 가치이로 가먼 되제 머."
금예는 선머슴처럼 히 하고 웃었다. 보름이는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야가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디 짐치국보톰 너무 단단히 마시는 것 아니여. 동걸이럴 아조 맘에 딱 작정혔능갑네."
보름이는 겁이 났다. 짝사랑이란 것이 우물가에서 물 한 바가지 떠준 나그네 보듯 해야 고운 것이지 5월 단오에 쌍그네 타듯 해서는 탈이 생기고 병이 되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뭐라고 꼬집거나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철없기넌, 부처님 말씸이 부부 인연이야 3천 년 인연이라고 허셨느디, 어디 니 맘대로 된다냐, 물 흐르디끼 바람 불디끼 순리로 인연 따라 벡 리 밖으로도 가고 천 리 밖으로도 가고 그러는 것이제."
보름이는 딸이 알아들으라고 이렇게 돌려서 말했다.
"치, 부처님언 허시는 말씸마동 영 알쏭달쏭하고 야릿꾸릿한 말만 골라서 허신당게. 살생얼 하지 말라. 글먼 굻어 죽어라 하는 것이고, 인생 무상이니라, 글먼 사나마나 헝게 당장 죽으라 허는 것이고, 인연얼 맺지 말어라 그리운 사람언 못 만나서 괴롭고 원수는 만나서 괴로우니라. 글먼 다 혼자서만 살어야 하고 말이시. 부부 인연도 그렇제. 사람 한평생이 60년인디 어찌 부부 인연이 3천 년이란 것이 말이 되간디."
"하이고, 서당 개 3년이라고 절밥 얻어묵등마 들은 풍월이 열두 발이시. 부처님 말씸 그리 엇지게 생각허먼 벌받는 것이여. 부처님이 다듣고 기시는디."
보름이는 달에게 눈총을 쏘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대견하고 안쓰러웠다. 가르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귀동냥으로나마 그런 것을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제 생각을 말하는 데 써먹을 줄 아는 것이었다.
"아이고, 부처님이 다 듣고 보시나마나 나 몰르겄네 날 샜응게 물이나 질로 가야 쓰겄네, 엄니하고 아짐시넌 부처님이야 허먼 꼼짝얼 못헝게."
금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금예가 말하는 아짐시는 홍씨였다.
"그려, 우리가 이리 사는 것도 다 부처님이 맺어준 인연 덕인 것이여."
보름이는 후덕한 홍씨를 생각하며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홍씨를 만난 것을 만주를 다녀온 운봉 스님을 따라 포교당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였다.
"으쩌시소, 나도 외롭고 가차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그 선선한 말이 너무 뜻밖이라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한 입도 아니고 두 입이 으 게 그런 폐럴..."
물론 놀고 먹을 것은 아니었지만 두 입이 얹힌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폐라 생각 말고 다 부처님 뜻이라고 생각하시오."
홍씨의 담담한 말이었고.
"아아, 그리 생걱허시먼 더 좋을 것이 없겠구만요. 집안일 농새일 두루 도와감서 두 보살님이 말동무허고 사시먼 서로 적적허시지도 않고라."
운봉 스님이 거들고 나섰다. 운봉 스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 말을 따르면 운봉 스님한테 폐 끼치는 걸 면할 수 있었다. 운봉 스님은 가게 차릴 돈이 다 장만될 동안만 포교당에 머물라고 했던 것이다. 절집에 쌀 한 톨이라도 시주를 했으면 했지 부지깽이 하나라도 축내서는 벌을 받는다고 했다. 그런데 가게를 차릴 큰돈을 신세 진다는 것은 애초에 내키지 않는 일이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선사에 머물 면목이 없었고 다 공허 스님 뜻이라는 운봉 스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포교당까지 따라왔던 것이다.
"한집서 살먼 내사 좋제만 금예 엄니가 몸도 맘도 편편시럽덜 않을 것잉게..."
홍씨는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서 집부터 장만해 주었다. 운봉 스님이 돈을 보태려고 했지만 홍씨는 고개를 저었다. 운봉 스님은 공허 스님의 뜻임을 내세웠지만 홍씨는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홍씨를 따라나선 또 한 가지는 더 이상 가게라는 것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가게를 하면 자꾸 큰 딸이 생각이 날 것 같았다. 큰딸은 어서 잊고 싶었다. 가게를 다시 하면서 작은딸이 큰딸을 두고두고 욕할 것도 두려웠던 것이다.
금예는 두레박질을 느릿느릿하며 여자들의 말을 즐기고 있었다. 우물가에서 여자들의 잡다한 이야기를 듣는 건 물긷는 재미 중의 하나였다.
"아따, 저놈으 젖통 잡 보소 소젖만허시."
"김샌이 잠 안자고 밤새도록 주물렀능감마, 바새 영판 더 커져부렀는디."
"주물르기만 혀? 뽈고 핥고 야단났제. 그놈으 소리에 뒷집서 잠얼 못자겼드랑게."
"아이고메, 몰르는 사람덜이 들으면 참말인지 알겼소. 애기가 묵을 젖얼 뽈고 핥고 허는 남정네가 시상에 어딨다요."
"무신 소리여, 아그덜얼 네다섯 난 젖도 아니고 첫애기 낳고 저리 탱글탱글허고 젖얼 그냥 둘 남전에가 어딨어. 인자 봉게 새댁이 거짓말 구레이 담넘어가디끼 스리슬짝 잘도 하네 그려."
"음마, 내 속 짚어 넘 속이라고 하샌이 그랬는갑소이. 우리 집서는 얘기가 뽈고보톰언 통 그러덜 않는디라."
"하이고, 새댁 놀릴라다가 정읍댁 됩데 당해부럽네그랴."
여자들이 까르르 웃었다.
"아이고, 큰 애기가 그리 좋아라고 웃으먼 으쩌?"
볼똥이 금예에게로 튀었다.
"음마, 우서운 소리 형께로 웃제라."
금예는 무안을 타지 않고 맞받아쳤다.
"얼랴, 쟈 능청시런 것 잠 보소."
"아이고, 금예도 시잡갔다 허먼 젖통이 저리 커질 참잉게 지끔 보톰 비유가 좋아야제."
"그려, 시방도 저리 불룩헌디"
"아서 아서, 큰애기보고 헐 소리가 따로 있제 큰애기가 시집가지 전에 요런 소리 듣고 시집가서 밑천 되게넌 혀도 큰애기럴 놀림감 삼는 법은 아니시."
어느 여자의 말이었다. 그건 처녀들에게 자연스럽게 성교육을 시킨다는 뜻이었고, 처녀를 놀려 수치심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헌디, 그놈으 창씨개명이 머신지넌 어쩌허는 것이여?"
어떤 여자가 새 이야기를 꺼냈다.
"빌어묵을, 낮 놓고 기억자도 몰르는 일자무식이 한문얼 어찌 알어 이름을 바끌 것이여."
"음마, 이장 말도 못 들었어. 면사무소 가먼 서기덜이 다 척척 알아서 히준다고 한여."
"글씨 히주먼멀혀, 알아묵덜 못허는디. 그나저나 낼모레 우리 동네가 다 면사무소로 간다등마."
"참, 염병지랄도 드럽게넌 해싼다. 경당당널 짜라, 방공훈련얼 해라. 폐품인지 걸레짝인질러 내라. 밥 작게 목고 일 많이 혀라. 고런 것들도 모지래서 인자 이름을 갈아야 하는 것이여? 사람이 어지러와서 살 수가 있어야제."
"벨수 있간디. 나라없는 백성이."
여자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금예는 물동이를 이었다. 놀림당했던 새댁도 물동이를 이었다. 그러자 저고리가 위로 쑥 올라가며 커다란 젖이 다 드러났다. 금예는 큰 웃음이 떠졌다. 밤새 젖이 불어나 커질 대로 커진 두 개의 젖통은 걸음을 옮기게 되면 번갈아 가며 멋대로 흔들릴 참이었다. 금예는 간신히 웃음을 참아내며 우물가에서 벗어났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왜 처녀 때는 젖을 가리라고 별나게 단속하도 야단하며서도 일단 시집을 가서 아이만 낳으면 젖을 그리 다 내놓고 다녀도 괜찮은 것인지. 처녀 때는 그냥 옷으로 가리는 것만이 아니었다. 치마말기로 꽁꽁 동여매서 젖 모양이 드러나지 않게 해야 했다. 처녀가 젖이 불룩하게 드러나면 큰 흉거리였다. 젖이 큰 처녀들은 어찌나 꽁꽁 동여맸던지 시잡 가서 애를 낳고는 으레 젖몸살을 앓았다. 어떤 여자들은 젖몸살이 너무 심해 몸져눕기도 했고, 더 심하면 한쪽 젖이 못 쓰게 되기도 했다. 그런 고생을 뻔히 알면서도 왜 그걸 고치지 않고 계속 젖을 동여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젠가 동네 아주머니에게 살짝 물어보았다.
"그야 처녀가 젖이 크먼 보기 숭하고, 신상에 해롭제."
"신상에 해로와라?"
"하먼, 걸을 때마다. 방뎅이넌 씰룩씰룩허제 젖거정 철렁철렁히보소. 총각 놈이 눈이 뒤집어져 그냥 놔들까보겼는가?"
"글먼 애 낳으면 어찌 다 그리 내놓고 다닌다여?"
"그야 임자 있는 몸에 애엄씨꺼정 되야부렀는디 무신 상관이여. 애엄씨 젖이야 그것이 아그 밥통이제 어디 처녀 젖허고 같으간디?"
그러나 의문은 속 시원히 풀린 것이 아니었다. 자신도 젖이 큰 편이라 맨날 동이고 다니는 것이 너무 불평스러웠던 것이었다. 가슴을 꽁꽁 동여 매면 갑갑하고 불편할뿐만아니라 여름에는 온통 땀띠가 극성을 부렸던 것이다. 그 고생 때문에도 어서 시집을 가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 금예 앞에 한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옆고샅에서 불거져 나온 것이었다. 그 남자는 물동이를 잡느라고 치켜 올려진 점예의 두 팔을 붙들더니 쪽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젖가슴을 재빨리 더듬고는 옆고샅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런 잡놈을 새끼가 못된 놀부놈 행투 어디서 배와갖고!"
어찌할 틈도 없이 일을 당한 금예는 남자의 뒤에다 소리 질렀다. 성질 같아서는 아가 뒷덜미를 잡아채고 싶었지만 머리에는 물동이가 이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하나밖에 없는 물동이를 내동댕이칠 수도 없었다. 홍씨네 머슴 필룡이에게 못된 놀부놈 행투라고 금예가 소리친 것은 심성 고약한 놀부가 저지르는 여러 가지 못된 것들인 애호박에 말둑 박기, 수박밭에 말 달리기, 똥누는 애 주저앉히기. 애 밴 여자 걷어차기 같은 것들 중의 하나였다.
"저런 쌔럴 배놀 염병헐 놈이 지가 묵을 떡인지 아닌지도 몰르고 나대고 지랄이시. 어디 잡히기만 해봐라. 낯짝얼 와드득 쥐어뜯어 내 천자럴 양쪽 볼다구에 내놀 것잉게."
금예는 분을 참지 못해 물이야 출렁이든 넘치거나 말거나 발을 굴러대며 걷고 있었다. 금예의 마음은 홍씨의 아들 동걸이에게 가 있는데 머슴 필룡이가 느닷없이 그 짓을 하고 들었으니 부아가 날 만도 했다.
한편, 홍씨는 창씨개명 때문에 고심하고 있었다. 창씨 개명을 하지 않는 자들은 불령선인이고, 그 자식들은 학교에 입학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들 동걸이는 대학입학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것도 조선에 있는 대학이 아니라 일본에 유학을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허 스님을 생각하면 일본식으로 이름을 고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름에 게다짝을 발에 꿰는 것도 용납하지 않은 공허 스님이었다. 그런데 당신의 아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면 어찌 된단 말인가. 그렇다고 학교에 안 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공허 스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런 때 어찌했단 말인가?
홍씨는 공허 스님에게 의논하는 마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호탕하게 웃으며 적당하게 고쳐서 학교에 보내라고 할 것 같았고, 범눈을 무섭게 뜨며 절대로 안 된다고 할 것도 같았다.
동걸이, 동방의 큰 인물이 되라고 지은 이름이오.
한지를 펼쳐놓으며 공허 스님이 껄걸 웃었었다. 한지에는 동걸이라는 붓글씨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 두 글자를 보는 순간 아침 해가 뜨는 것 같은 밝은 빛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이름뿐 성이 없었다. 자신도 묻지 않았고 공허 스님도 입을 떼지 않았다. 승려에게 속가의 인연을 묻는 법이 아니었다. 승려는 머리를 깎으면서 속세와의 모든 인연을 끊는 것이었다. 부모와의 인연을 시작으로 모든 인연을 끊는 것이니 속세의 성명 삼자도 나이도 없어지는 거였다. 운봉의 말을 듣고 한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마음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도 평소의 다짐 때문이었다. 그리고 운붕 앞에서 그분과의 인연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금예 모녀를 거두기로 한 것은 공허 스님이 남기고 간 뜻이라 여겼다. 그 마지막 뜻을 고이 받들고자 했다. 그 모녀를 거둔다고 해서 동걸이를 가르치는 데는 아무 탈이 없었던 것이다.
"저놈얼 끝꺼정 갤치자먼 살림이 실해야 허는디. 작인덜 단속은 어쩐고?"
공허 스님이 올 때마다 잊지 않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아버지의 마음이었고, 직접 표시하지 못하는 동걸이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 관심은 너무 고마워 재산을 착실하게 모아왔던 것이다.
"나가 보태지넌 못혀도 축낼수야 있간디. 저놈 뒷수발에 쓰소."
공허 스님은 절대로 돈을 받아 간 일이 없었다. 그래서 재산을 더 야무지게 단속해 왔던 것이다. 혼자 작정을 하고 있던 홍씨는 아들이 전주에서 돌아오자마자 창씨개명 이야기부터 꺼내놓았다.
"엄니, 그런 걱정 마시고 이 글보톰 잘 들어보시씨여."
동걸이는 앉음새를 단단히 하고 신문을 펼쳐들었다.
"내가 향산이라고 씨를 창설하고 광랑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 어명과 독법을 같이 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신민이 못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 광랑이 좀 더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엄니 들으시기에 어떠신게라?"
동걸이는 웃으며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아이고, 어쩌거넌, 그 사람 넋나간 것 아니다냐? 그 사람, 왜놈 되고 잡아 환장헌 것이고, 조선언 영영 해방되기 어렵다고 허는 것 아니여?"
홍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쯧쯧쯧..., 그런 글 써서 무신 영화럴 보는지 몰라도 원..."
홍씨가 고개를 내저였다.
창씨개명은 1940년 2월1일부터 실시되었고, 그 글은 창씨개명을 마친 이광수가 2월 20일 매일신문에 발표한 것이었다. 그런데 동걸이는 한 달이 넘은 신문을 가방 깊숙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너저나 나넌 으째야 쓰겄냐?"
홍씨는 근심스럽게 아들을 쳐다보았다.
"호랭이 잡을라면 호랭이굴에 들어가야지."
동걸이의 다부진 말이었다. 그의 선 굵은 얼굴은 공허 그대로였다 .
"그렇기는 헌디. 글먼 어찌 고칠라고?"
"엄니, 그것이야 아무걱정 마시게라. 전자앞이다가 큰 대자 하나만 턱 놓으면 되는구만이라. 왜놈덜 즈그가 발광얼 혀봤자 우리 성씨만 크고 높게 해주는 것잉게요, 대전동결. 지가 큰 이늘 겉지 않은게라? 하하하하..."
동걸이는 고개를 젖히며 통쾌하게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며 웃는 모습에서 홍씨는 공허 스님의 환생을 보고 있었다.
26. 귀향의 뜻
"거거가 법원의 자료집 같은 것들을 정규적으로 발간하는 곳일세."
"법원?"
술잔을 들다 말고 송중원은 홍명준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 눈에 의아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응, 신경에 거슬리는 모양이지?"
"내 그럴 줄 알았어. 허나 아무 걱정 말게. 자네가 써야 할 글도 없고, 딴 사람들한테 글을 청탁하는 일도 없으니까, 자넨 그저 주는 자료들 가지고 책만 만들어내면 되는 거지."
홍명준은 미리 준비했던 말을 한달음에 쏟아놓았다.
"뭐, 재판에 관계되는 자료들인가?"
그러나 송중원의 눈길은 여전이 의아스러웠다.
"대개 그렇지."
"그럼 우리 조선인들 것이 태반이겠군."
"그럴지도 모르지."
홍명준은 말이 나가는 순간 대답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인의 거의 다가 조선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엉터리 재판기록이 많겠군."
송중원의 말은 담담한 듯 낮았지만 입가에 쓴웃음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말어. 자네가 한 일도 아닌데..."
송중원은 무표정하게 또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동안 그의 얼굴은 더 마르고 상해 있었다. 그런데 홍명준의 얼굴은 아래가 더 넓어 보일 정도로 살이 찌고 기름기가 번지르르하게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과 함께 그 모습은 너무 대조적이었다.
"형편이 급한데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어. 자식들이 한둘이 아닌데 자식들만 생각하게."
홍명준은 술잔을 비우며 눈꼬리로 송중원의 기색을 살폈다.
자식들... 너무 많았다. 어쩌다보니 다섯이나 생겨나 있었다. 세월은 부질없이 흘러가고 남은 건 자식들이었다. 그것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생활의 위기는 심각했다. 점심을 굶긴 지는 벌써 오래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 아닌가. 자식들하고 먹고 살아야지.
누구나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변명으로 효과가 있었다. 몰론 먹고 살아야 하는 것만큼 절실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변명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글세... "
송중원의 핏기없는 메마른 괴로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여보게, 자네하고 상관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어. 보수도 괜찮으니까 눈 딱 감고 일해 봐."
홍명준의 어조에 간곡함이 서려 있었다.
"상관없다고? 글세, 엉터리 재판기록들을 책으로 만드는 행위는 뭐지? 그건 잘못된 판검사들의 행위를 인정하고 동조하는 것 아닌가? 지금 독립운동으로 실형을 받고 복역 중인 사람들이 2만 명이 가깝지 않은가. 그 형벌의 정당성은 인정될 수 없다. 그런데 그 재판 기록들을 책으로 만들어?"
"좀 더 생각해 보겠네..."
송중원은 한숨을 물며 담배를 빼들었다.
"이봐, 생각하고 말고 할 것 없다니까. 복잡하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걸리지 않을 일이 하나도 없어."
"알겠어. 좀 더 생각해 볼 테니까 그 얘긴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세."
송중원은 술잔을 들며 희미하게 웃었다.
홍명준은 섬찟한 것을 느꼈다. 송중원의 초췌한 얼굴에 스치고 지나가는 차가운 웃음은 분명 거절이었다. 다만 말을 부드럽게 할 뿐이었다. 그 웃음과 거절은 자신에 대한 경멸이기도 했다. 송중원이가 한마디로 재판을 엉터리라고 하는 앞에서 사실 변호사로서 자신은 떳떳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사상범에 대한 변호사로서 한 일은 없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방관하며 법조계 물결을 타 넘어왔던 것이다. 설죽이 송중원의 실직을 걱정해서 일삼아 알아본 자리였다 송중원을 만날 때까지만 해도 거절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송중원의 생각과 태도를 아는 터라 미리 고른다고 고른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확인한 송중원은 몸이 나빠 다만 활동을 중단하고 있을 뿐이지 조금과 다른 것이 없었다. 생활의 어려움이 얼굴에 여실히 드러나 있는데도 보수 좋은 자리를 거절하는 그 독기, 그게 용기 같기도 했도 얼마나 오래갈지 의심스러운 한편 송중원이가 그 깡마른 몸으로 바들바들 떨며 거대한 바위를 떠받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송중원 앞에서 부끄러움은 면할 길이 없었다.
"그래, 그런 자리가 자네 기질에 안 맞을 지도 몰르지."
홍명준은 이야기를 마무리 짓듯이 말했다.
"그건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의 문잴세."
송중원이 홍명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눈이 얼굴에 비해 너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그런가, 근본의 문제라..."
홍명준은 멋쩍게 웃으며 어물거렸다. 둘 사이에는 침묵이 가로놓였다. 홍명준은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으려고 했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허탁의 이야기를 꺼내자니 그렇고, 한창 시끄러운 창씨개명이야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다 낡은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그동안 흘러간 세월의 거리만큼이나 서로의 사이가 멀어져 있다는 것을 홍명준은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있었다.
"그 신여성 박정에는 요새도 여전한가?"
챠명준은 가까스로 박정애를 생각해 냈다.
"음..."
송중원은 비식 웃고는 그만이었다. 그때 방문을 똑똑 두들기고는 설죽이 들어왔다
"술 모자라지 않으세요?"
설죽이 상 옆구리에 앉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송형이 더 생각해 보겠다는데,"
홍명준이 설죽을 보며 씁쓰레하게 웃었다.
"당연하지요. 어디 놀이 가는 것도 아닌데 신중히 생각해야지요."
설죽은 눈치 빠르게 말하며 홍명준에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 그건 그렇고, 설죽은 창씨개명을 했나?"
홍명준은 이야기를 빨리 돌리려다 보니 불쑥 이렇게 물었다.
"관공서 등쌀에 하긴 해야겠어요. 이 장사도 못 해먹게 한 대잖아여."
"이 장사까지도?" 홍명준은 놀라고는, "그럼 뭐라고 고칠 건가?" 이야깃거리를 제대로 찾았다는 눈치였다.
"그건 쉽잖아요. 향산설자."
"향산설자? 무슨 뜻인가?"
"무슨 뜻이긴요, 소설가 이광수가 가르쳐준 대로 성은 향산, 이름 설죽은 설자로 한 거지요. 우리 집 애들은 다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하하하하..."
송중원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참 묘안일세."
홍명준도 따라 웃었다.
"역시 이광수가 가련한 조선 민족과 우매한 대중을 위해 공헌을 많이 하는 구만. 그가 바라는 대로 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송중원은 꼭 참말을 하는 것처럼 정색을 하고 있었다.
"아이 송 선생님. 저 같은 바보는 속겠어요."
설죽이 곱게 눈을 흘겼다.
"허, 죽이 잘 맞네."
홍명준이 껄껄거리고 웃었다. 설죽도 함께 술을 마시게 되자 술자리가 어우러졌다. 송중원과 홍명준은 취해서 술자리를 떴다. 밖으로 나와 홍명준은 변소로 갔고, 송중원은 쪽마루에서 걸터앉아 구두를 신고 있었다
"선생님 이거..."
내실 쪽에서 달려온 설죽이 반으로 접은 편지봉투를 송중원의 주머니에 넣으려고 했다.
"이게 뭐요!"
송중원이 설죽의 손을 내치며 노려보았다. 그 눈이 술 취한 사람 같지 않았다.
"이건 제 뜻이 아니예요."
설죽이 빠르게 속삭였다.
"...!"
"허 선생 뜻이예요."
"허탁, 허탁"
송중원의 음성은 울음 같았다. 설죽은 봉투를 송중원의 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홍명준과 헤어진 송중원은 밤 깊은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자기가 갖춘 지식으로 빌어먹기를 거부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임마누엘 신부의 목소리가 또 들려오고 있었다. 송중원은 비척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몇군데 취직자리가 나왔었다. 탐정소설이나 애정소설들만 실려대는 삼류 대중잡지, 완전히 친일로 기운 종합잡지, 흥미 위주의 일본소설이나 번역해서 찍어내는 출판사, 일본 글 번역한은 일 같은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알아볼 곳도 없었고,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마지막 남은 길은 하나였다.
"그래 가야지, 서울을 떠나야지..."
송중원은 또 스스로를 일깨우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고향으로 가는것도 문제였다. 땅이라고는 단 한 마지기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고향으로 가야 했다. 고향에 가면 문중도 있고 처가도 있었다. 서울에 더 있다간 굶어 죽든지 지식을 팔아먹든지 막다른 골목이 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지식을 팔아먹기 쉬운 도시 서울을 버려야 했다. 송중원의 취한 눈앞에는 큰아들 혁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걱정 마세요. 제가 1년 동안 벌어서 대학 가겠습니다."
그래서 준혁이는 제 친구 아버지가 하는 제분공장에 취직을 했다. 준혁이는 일본으로 유학 갈 생각을 하고 있다가 제분공장 직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애비로서 모아들 수가 없었고, 입학을 하게 되면 회사에서 마련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혁준이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고, 대학의 꿈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다만 진학 계획을 1년 뒤로 미룬 것이었다. 송중원은 가슴 뜨거움을 느꼈다. 기면서 숨어 사는 처지에서도 허탁은 자신에게까지 마음을 쓰고 있었다. 어젯밤에 설죽이 허탁의 이름을 댔을 때만 해도 설죽의 재치이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허탁은 다투듯 시샘하듯 변절하고 있는 실직자들의 꼴을 보면서도 아직 절망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계산대로 하면 그는 영원히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적 낙관주의란 바로 허탁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설죽에게도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허탁을 뒷바라지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자신에게까지 마음을 쓴 것이었다. 통 크고 정 많은 여자였다. 복덕방에 집을 내놓고 이사 갈 준비를 시작하게 했다.
"아빠, 왜 시골로 가는데요?"
"아빠, 나 시골 가기 싫은데?"
"아빠, 그냥 서울서 살아요."
어린것들은 이 모양이었다. 송중원은 입을 다물었고, 아내가 아이들의 입을 막느라고 급급했다. 송중원은 윤일랑을 만났다.
"다 그리 마땅찮은가?"
윤일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뭐."
"그렇겠지. 언제나 떠나게 되나?"
"집이 곧 팔릴 것 같네."
"나도 암담하네. 연애소설을 쓰느냐, 친일을 하느냐, 기로에 선 삐에로야."
"역사소설을 써봐, 왜놈들이 조선을 비하하는 조롱거리로 은근히 좋아하는 궁중 비사나 권력 암투 같은 것 말고, 현진건의 무영탑 같은 방향으로 말야, 무영탑은 문화적 긍지와 애정의 숭고함을 동시에 느끼게 되고 소설적 재미도 잘 갖추었거든."
"그래, 괜찮은 방법이지. 자넨 내려가면 소설 좀 쓰려나?"
"난 재주 없다니까, 노동을 해야지."
"그 나이 몸으로?"
"더 건강해질 수도 있네."
"그건 지식의 환상이지."
"고향이 서울인 자넨 몰라. 난 지게질도 할 줄 알고 낫질도 할 줄 아네."
"양반족보로 그런 걸 다했어?"
"무슨 소린가. 우리 장인 어른은 손수 농사를 다 지으셨는데. 투쟁의 한 방법으로 농촌에서 양반이 직접 농사를 짓는 건 흉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네. 이젠 양반이고 뭐고 그런 사고방식을 버려야 하지만 말야."
"난 그런 것도 모르니까 문제가 있어."
"그런 건 별거 아니고 의식과 의지가 얼마나 꿋꿋하냐가 문제야."
"그렇겠지. 요즘엔 혼란이 아주 심해. 박영희가 친일로 나선 것이야 탓할 기회조차 없지만 임화까지 친일의 깃발을 들고 설치기 시작한 데는 아연할 수밖에 없어."
"다 표리부동한 망동들이지. 적극성을 버렸으면 최소한 침묵은 해야지 침묵이 동조고 묵인인 일면도 있지만 거부고 저항인 일면도 있으니까 말야, 적극 반일에서 친일로 반전하는 그들의 내면을 어떤 방법으로도 이해할 수가 없어."
"애초에 기회주의고 박쥐 근성을 가진 놈들이기 때문이야. 용성할 수 없는 행위를 한 놈들을 이해하려고 할 것도 없네. 싸우면서 죽어가고 갇힌 사람들이 엄존하는 한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도륙해야 하네."
"그렇지,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네."
"그런데 자네가 떠나면..."
윤일랑은 눈물을 삼키듯이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보름쯤 지나 송중원은 가족을 데리고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아 집이 빨리 팔렸던 것이다. 송중원은 기차에 흔들리며 앞으로 살아갈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게 논을 몇 마지기나마 마련하게 된 것이 마음을 가볍게 했다. 장인의 편지로도 나도는 집들이 많아 집값이 아주 헐값이라는 것이었다. 만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집을 내놓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총독부 척시과에서는 2월부터 또 1940년도 만주 이민을 1만여 호 목표로 추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다 서울에는 유입 인구가 많아져 집값이 오르고 있었다. 그 차액으로 논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설죽이 준 돈으로는 생활비와 이사비용으로도 너무 유용하게 잘 썼던 것이다. 설죽은 허탁에게 전하는 편지를 받으며 끝내 눈물을 비쳤다. 허탁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 설죽의 말로는 무슨 새 일을 시작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고 했다. 전시체제 강화와 황국신민화 강행이 맞물려 돌아가는 상황속에서 사상운동 단속은 더욱 가혹해지는데 새로 시작한 일이 무엇인지 불안하기만 했다. 어쨌든 논을 몇 마지기라도 장만해서 식생활부터 안정시키면 정신적 여우도 생길 것 같았다. 그러나 농사를 손수 짓는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지 어쩐 지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일단 시도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장인의 뒤를 이어 처남이 손수 농사를 짓고 있으니 배워가면서 적응하면 한 사람 몫은 다 못해도 반몫은 하지 않으랴 싶었다.
송중원의 가족은 전주에서 내렸다.
"엄마, 저기 외할아버지가 나오셨어요."
큰딸 이화가 먼저 알아보고 하엽이에게 말했다.
"워메, 아부님이!"
하엽이는 개찰구 저쪽에 의관 차림으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아버지를 보고 놀랐다. 그 옆에는 남동생 기범이도 있었던 것이다.
"저러, 과거급제하고 금의환양하는 것도 아닌데이 멀리까지..."
송중원이 민망해하며 중얼거렸다.
"외할아버지!"
"외삼촌!"
아이들이 출찰구를 먼저 빠져나가며 소리쳤다.
"이 멀리까지 뭐하러 나오셨습니까."
송중원은 장인 앞에 깊이 절했다.
"멀기넌, 원족삼아 나왔제 원로에 다 무사허고?"
신세호는 온화하게 웃으며 사위와 딸 외손들을 둘러보았다.
"예, 준혁이는 말씀드린 대로 서울에 두고, 다른 애들은 별 탈 없습니다."
송중원이 어려워하며 대답했다.
"그려, 잘 내려왔네. 서울살이가 존 것만이 아니지. 가세."
신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송중원은 비로소 처남과 인사를 나누었다. 하엽이도 남동생의 팔을 잡으며 눈물이 글썽거렸다
"매형이 농사짓고 살겄다는 것이 참말잉게라?"
신기범이 누나 옆에 놓인 트렁크를 집어 들며 씨익 웃었다. 그 그을린 얼굴이며 골격이 아버지 신세호와는 달랐다. 건강한 것이 외탁이었다.
"그럴 작정이네. 자네가 선생님이 되어 주게."
송중원은 일부러 쾌활하게 말하며 웃었다.
"월사금얼 톡톡허니 내셔야 하는디요."
신기범이 걸음을 옮겨놓았다.
"암, 내구말구."
그들은 소리 맞춰 웃으며 역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르며 하엽이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아버지와 남동생의 마중이 심란스러움을 다소 가라앉혀 주고 있었던 것이다
송중원은 열흘이 넘게 바뻐 보였다. 처남을 따라다니며 집을 구하고 논을 장만하기 위해서였다. 집이 뜻밖에도 헐값이라 논을 여섯 마지기나 살 수 있었다. 송중원은 기묘한 감정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집값이 싸서 생각보다 논을 많이 장만한 것은 좋았지만 만주로 떠나면서 집을 헐값으로 처분해야 하는 사람들이 딱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민 저거 말이 모집이제 실지로넌 다 강제로 끌어가는 것이구만이라. 지주 놈덜이 관허고 한통속이 되야갖고 맘에 안드는 작인덜 소작얼 막 띠부는구만요. 글먼 소작 띠인 작인덜이 어디로 가겠는게라. 안 굶어 죽을람사 만주로 가야제라. 지주놈덜이 아조 고약허니 친일얼 해묵는당게요. 글고 어떤 디서넌 이장이고 면서기가 강제로 몰아대서 신청서럴 내기도 허고요, 아조 난리판굿이랑게요."
신기범이 침을 내뱉었다.
"그런 소문이 사실이었구만."
송중원은 얼굴이 찌푸려졌다.
"첨에넌 안 그랬는디 해마동 자꼬 심해지능마요."
"그러겠지, 조선에서는 쌀값이 치솟고, 쌀을 아끼느라고 도정도 심하게 못하게 하는 법을 연속으로 만들어내고 있는판이니. 만주 땅 개간시켜 군량미 확보하느라고 혈안이 된 거지."
"그나저나 매형은 애초에 농사질 생각은 허덜말고 머심이나 착실허니 부릴 맘이나 묵으씨여. 그 논이먼 식구덜 살 걱정은 면했응게."
"아니네, 이 사람아. 해보지도 않고 그런 법이 어디 있나. 장인어른께서 손수 농사지으신 것 생각 안 하나?"
송중원은 정색을 했다.
"똑똑히 매형이 어찌 그리 헛짚는 소리 허는 그런게라? 아부지가 농사지신 것언 매형보담 젊었을 적이고, 몸에도 병이 없었단 말이오. 그러고, 아부지도 매형 나이가 되심서 머심얼 부림서 허였당게요. 매형언 이적지 농사져 본 일도 없제, 몸언 성허덜 않제, 나이넌 묵었제. 다 뜬구름 잡는 이얘긴게 머심 부림서 병이나 낫게 허는 것이 상수요."
신기범도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노동을 하면 몸도 더 건강해지지 않겠니?"
처남의 말이 일리가 있기도 해서 송중원은 기가 한풀 꺾여 들었다.
"노동도 천차만별잉게라. 농사노동언 성헌 몸도 삭아내리게 하요. 삼복더우 땡볕 속이서 논얼 한나절만 매봇시여. 매형 병언 열 배넌 아니라도 두세 곱쟁이넌 도질 것이오. 거름내기, 물푸기, 벼베기, 타작, 무신 일이고 매형 병 도지게만 허는 것이제 낫게 헐 것언 암것도 없소."
"이거 참, 무위도식할 수도 없고, 어쨋든 내가 할만한 일이 있을 것이 아닌가."
송중원은 더 풀이 죽어 처남을 쳐다보았다.
"야아, 사람이 활동얼 안허고 손끝 맺고 앉어만 있어도 오만 병이 다 생기는 법이제라. 매형은 병 나슬 정도로만 활동허게 텃밭농사나 짓고, 살포 들고 물꼬 보로 댕기고 그러씨요. 그럼서 매형이 갖춘 학식으로 딴 일얼 차차로 찾아보먼 되덜 안컸소."
"알겠네, 좀 더 생각해 보세."
송중원은 농업노동이 심심풀이거나 감상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치열한 생존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처남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의 생각에 감상이 게재되어 있었음을 어느 정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엇다. 억지로 될 일도 아니었고, 오기로 될 일도 아니었다. 처남과 다시 상의해서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일거리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신세호는 조촐한 술상을 차려놓고 사위를 불렀다. 아들도 옆자리에 앉혔다.
"맘언 어떤가?"
신세호가 사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환갑에 이른 그는 수염이 반백이었고, 주름 잡힌 온화하고 담담해 보였다. 곱게 늙은 보기 좋은 얼굴이었다.
"예, 편안합니다."
송중원은 머리를 조아렸다.
"편헐 리야 있겄능가. 잊어볼 것언 잊어불고 새 맘얼 갖도록 허게. 사람이란 것이 배왔다고 다 옳은 길로만 가는 것이 아니지. 사람의 심성이나 성정은 천차만별이라 배운 사람이 배운 머리로 악행얼 허로 들자면 더 악독하게 하는법 아니든가. 자고로 간신배덜 중에 무식헌 놈덜 하나도 없었고, 근년에 부쩍 늘어나는 친일배 놈덜이 간신배놈덜허고 다 똑겉은 종자네. 그런 인종덜이 늘수록 맘 단단허니 묵고 새 생활얼 찾도록 허게."
신세호의 말은 나직하면서도 근엄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러고... 요것은 닷 마지기 문서지. 자네 앞으로 명의럴 바꾼 것잉게 간수허게."
신세호는 두툼한 봉투를 송중원 앞으로 밀어주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장만한 논으로도 밥 걱정은 안 하게 됐습니다."
송중원은 당황해서 봉투를 장인 앞으로 밀어놓았다.
"어디 밥만 묵고 살아지는가. 진작 기범이하고 의논혀서 자네 몫으로 갈라둔 것잉게 거둬두게."
"아닙니다. 장인 어른 사시기도 풍적하지가 못한데 제가 어찌..."
"여러 말 말게. 나야 아만하면 부자고, 사위도 엄연헌 자석이네."
송중원을 이윽히 바라보는 신세호의 눈에는 말보다 더 많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었다.
"자네가 내 사위가 아니고 그냥 송수익의 자식이었다 해도 그런 인사는 치렀을 거야."
신세호가 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매형, 나 맘 변허기 전에 얼렁 챙기시오, 나가 턱 오망헌 것이 욕심 많은 것 잘 알제라?"
신기범이 웃으며 호리병을 들었다.
"그려, 술이나 한잔 따러라. 허허허..."
신세호가 수염을 가다듬으며 술잔을 들었다.
"자아 매형도 한잔 받으시제라."
송중원은 술잔을 들며 두서없이 처가 형편을 생각하고 있었다. 처남 아래로는 시집보내야 할 처제가 둘이 더 있고, 처남도 또 아이들이 둘이었다. 처남은 아이들이 더 생길 텐데 남은 논이 얼마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장인어른, 그럼 제가 두 마지기만..."
"어허 사내 맘이 그리 졸해서야 쓰능가. 자아, 술이나 쑥 드세."
신세호는 송중원의 말을 막아버렸다. 며칠이 지나 경찰서에서 형사가 찾아왔다.
"송중원이가 누구여?"
마당 가운데다 자전거를 받치며 사내는 거침없이 내질렀다. 그 자전거에 전시 제복이며 말투에서 송중원은 형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작은 아들과 함께 닭장 짜던 것을 멈추지 않고 송중원도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나요."
"허, 경성 물 묵어서 근가 제법 풀기가 빳빳허시. 척 보먼 3천 리라고 나가 누군지 몰라서 그러고 있는겨, 시방?"
그 사내는 송중원 쪽으로 걸어오며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금시초문인 사람이 왜 남의 집에 들어와 이러는 거여. 초면 예절도 없이."
송중원은 상대방의 홈을 찌르고 들었다. 초장부터 밀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방자해지는 이자들의 기질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허, 초면 예절이라고?" 사내는 멈칫하는 기색이더니. "그려, 역시 유식헝게 따질 것을 따지능마. 공무집행 태도럴 정식으르 취허라 그것이제? 그려, 나 다나카 나가미즈 형사여, 인자 되았어?" 그는 놀리는 듯하는 어조와는 달리 독 오른 눈으로 송중원을 노려보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아시다시피 제가 송중원입니다. 저쪽으로 가시지요."
송중원은 그때서야 일어서며 인사하는 척했다. 그리고 마루 쪽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그자의 창씨개명한 이름을 듣는 순간 웃음이 터지려 했다.
"빨건 줄 그어진 신세먼 이사 오듬 저로 신고보톰 히야제 신간 편허게 닭장이나 짜고 앉었어?"
아직 권하지도 않았는데 털석 마루에 걸터앉으며 형사는 시비조로 말했다.
"서울 경찰서에서 20일 이내라고 했으니까 아직 시일이 좀 남았지요."
송중원은 형사와 떨어져 앉으며 눈길을 울타리 밖 먼 하늘로 보냈다.
"글먼, 시일이 꽉 차기를 기둘린다 그것이여?"
형사는 완전한 시비조였다
"아니지요. 20일간의 시일을 준 건 집안 정리부터 하라는 것 아니겠어요? 마지막 날 신고해도 법에 안 걸리고"
송중원은 나지막하게 또 형사의 허점을 찔렀다.
"무신 소리여, 빨를수록 좋제. 그야 그렇고, 창씨개명인 안헐 심판이여. 머시여?"
형사는 이야기를 슬쩍 창씨개명으로 돌려댔다. 이놈이 듣던 대로 예삿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창씨개명이야 8월까지니까 아직도 서너 달 남았는데요."
"자꼬 시일만 따질 일이 아니여!"
형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창씨개명언 동네마동이 이장이 앞서서 단제로 시행허고 잇는디. 이 동네넌 발써 다 끝났다. 그 말이여. 근디 창씨개명얼 안허겼다고 뻗딘 불령선인이 다섯이여. 그중에 질로 악질이 누군지 알어? 바로 당신 장인 영감탱이 신호세란 말이여. 당신도 시방 장인허고 짝궁이 되야갖고 뻗대고 니슬 심뽀제?"
형사는 독이 지르르 흐르는 얼굴로 이를 앙다물며 송중원을 노려보았다.
"그거 첨 듣는 소리요."
송중원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거짓말 말어, 나럴 멀로 보고 아그덜도 안 믿을 거짓말이여. 거짓말이."
형사는 더 크게 소리질렀다
"안 믿을 라면 그만두시오."
송중원의 말은 냉담했다. 정말 장인의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장인이 창씨개명을 쉽게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단체로 몰아붙이는 상황 아래서 거부했다는 것은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글먼 당신언 어쩔 셈이여?"
형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송중원을 겨누었다.
"급한 일 아니니까 차차로 생각해 봐야지요."
송중원은 살짝 비켜섰다.
"누구 놀리는 것이여. 시방! 이 동네단체로 끝냈다는 말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부렷어?"
형사는 취조실이 아는지 마룻장을 내리쳤다.
"이거 죄진 일도 없는데 죄인 다루듯 하지 마시오. 동네별로 한 건 사무를 편리하게 하자고 한 것이지 법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잖소. 법으로는 기한 내에 아무때나 자유로 하라고 정하고 있단 말이오."
송중원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하, 이거 법 드럽게 잘 따지네. 어디 보드라고, 나도 앞으로 법얼 짠득짠들허니 따져줄 것잉게."
형사는 벌떡 일어서서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의 뒷덜미에 시퍼런 날이 서 있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사립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송중원을 쓴웃음을 문 채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신세호는 사위네 사위 사립을 들어섰다.
"허어, 살림살이 재미가 꼬소하구나."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위와 딸을 보자 신세호는 마음이 흡족하여 절로 웃음이 나왔다. 송중원은 닭장을 마무리하고 하엽이는 텃밭에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창씨개명이라고 형사가 왔드라고?"
"예 제 동향을 살필 겸 겸사겸사 온 것 같습니다."
작은아들이 가서 말한 것이라고 송중원을 생각했다.
"왜놈덜이 들이대 칼이 자석덜얼 학교에 입학 안 시켜주겄다는 것인디. 조선말얼 안 갤치고 없애분 학교 댕기나 마나세."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지만 쇠보다 강한 뼈가 든 말에 송중원은 가슴이 철렁했다. 형사가 간 다음에 그 문제가 걸려 고심을 하고 있었는데 장인의 말은 그 해결책 같았던 것이다. 장인은 하나뿐인 아들을 전문 학교나 대학에 보내지 않고 농사에 주저앉혔다. 상급학교 공부 더 해보았자 그걸 써먹는 길이 바로 친일하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건 옳은 말이었고, 그 단호함에 창씨개명 거부로 이어져 있었다.
"예예..."
송중원은 아직 확실하게 정리가 안 되게 모호하게 대답했다.
"조선말도 없애고 조선성씨도 없애고, 그런다고 조선사람이 다 없어질지 아는 왜놈덜이 가소롭제. 그리 쉽게는 안 되는 것잉게."
신세호는 독백하듯 하며 자리를 떴다. 이틀이 지난 해질녁에 신기범이 송중원의 집으로 뛰어들었다.
"매형, 나허고 경찰에 잠 갑시다."
"경찰서."
담 밑에 호박구덩이를 파고 있던 송중원이 삽질을 멈추었다.
"아부지가 끌려 들어가셨다요."
"엉?"
"머시여?"
송중원의 놀라는 소리와 부엌에서 나오던 하엽이의 소리가 겹쳐졌다.
"술 잡숩고 또 면사무소 앞이다 오짐얼 깔기셨당마요."
"뭐라고?"
"음마, 무신 소리여?"
신기범을 쳐다보는 송중원과 하엽이의 얼굴에는 놀라움보다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더 강하게 드러났다
"못 믿으시겠제라? 아부지넌 술만 잡수셨다 하먼 그러신 지가 벌써 맺 년 되았구만요."
"아니. 글먼 병을 고쳐야겠제."
하엽이가 안타까와 하며 울상이 되었다 .
"누님언 그것이 노망끼라고 생각허는갑소 이."
신기범은 태평스럽게 씨익 웃었다. 아까 집으로 들어올 때와는 너무 다른 반응이었다.
"글먼 무신 소리여?"
"아부지가 술취젭다고 암디서나 그러는 것이 아니단 말이오. 왜놈덜 점방 앞, 왜놈덜 집, 왜년들 모여 떠드는 디. 요런 디다만 오짐얼 깔기 신당게라."
"글먼 역부러 그러시는 것이여?"
"눈치 빨릉게 좋소."
신기범이 또 씨익 웃었다.
"은제보톰 그러시는디? 그러다가 일 안 당허시능겨?"
"아매 그것이 사둔 어런 별세허신 소식 듣고 한 두달 달 지냄서 시작된 것인디, 경찰서에 끌려간 것이 어디 한두 번이간디여. 그려도 술 취해 헌 일인 디다가 연세가 많으시고, 아부지가 통 몰르는 일이라고 잡아띤게 순사덜도 어찌헐 도리가 없는 것이제라."
송중원은 큰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장인이 선택한 한 저항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지난날 동네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금 불납운동을 펴기도 했던 장인은 그런 것이 용납되지 않는 상황에 처해 선택한 것이 그 외로운 저항인 것 같았다. 의관을 점잖게 차려입은 장인이 술이 취해 오줌을 갈겨대고 있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송중원은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려서 사람덜이 아부지헌티 붙인 별호가 먼지 아시오? 오짐대감이다요."
신기범은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아이고, 어찌 웃고 그려. 근디 어찌서 해필허니 면사무소 앞이다 그러셨능고. 죄가 커지면 어쩌실라고."
"그 뜻얼 모르겄소? 창씨개명 반대허시니라고 그랬겄제라. 근디 면사무소 앞이라 나도 맘이 찜찜해서 매형보고 항께 가잔 것이구만요."
"그럼, 가고말고 잠시 기다리게. 나 옷 좀 갈아입고 나올 테니."
송중원은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오줌대감, 그 별명이 슬프고도 눈물겨웠다. 장인의 그 행위가 창씨개명을 거부한 것보다 더 크고 강하게 느껴졌다. 대감이라는 말속에는 사람들이 장인의 뜻을 다 알아차리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27. 진로를 바꿔라
"그런데 말이오, 이번에 소학교에서도 조선어 학습을 폐지시켜 버렸소. 조선 교사들은 기분이 안 좋을지도 모르겠는데, 어디 제일 젊은 다께다 선생이 대답을 해보시오."
교무주임이 흐트러진 몸짓으로 한 사람을 손가락질했다. 다께다 선생이라고 지적당한 것은 바로 박용화였다. 술자리의 대여섯 사람은 모두 취해 있었다. 박용화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끼며 몸을 바로잡았다.
"예, 그건 당연한 조처라고 생각합니다. 내선일체로 모두 황국신민이 된 마당에 조선학생들의 모국어가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박용화는 거침없이 말했다.
"그게 진심이오?"
"예, 그렇습니다."
"내 앞이니까 그러는 게 아니고 진정이냐 그거요. 술자리니까 괜찮으니 진정을 말해 보시오."
"아닙니다, 진정 잘된 조처입니다."
"으하하하하... 역시 다께다 선생은 환골탈태한 황국신민이고, 사범학교 교육을 잘 받은 모범교사요. 교무주임은 흡족하게 웃어젖히고는, 자아 오늘 술 잘 마셨으니 그만 일어나기로 합시다."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께다 선생, 우린 한잔 더 합시다."
구니와께가 불쑥 말했다.
"아, 젊은 선생끼릴 한잔 더 하겠다고? 그것 조옷치. 젊어서 술이 조금 모자라기도 하겠지. 젊은 선생끼리 한잔 더 하면서 친목을 돈돈히 하는 것, 그것 좋구말구."
교무주임이 비틀거리며 손을 흔들어댔다. 다른 선생들은 교무주임을 따라 나가고 방에는 구니와께와 박용화 둘이만 남았다.
"다께다 선생, 여긴 우리 단 둘뿐이니까 내가 한마디 물어보겠소. 이제 조선학생들은 모국어를 전혀 배울 숴 없게 됐소. 아까 그 대답이 정말 진심인 거요?"
구니와께는 술 취한 몸을 바로잡으려고 애쓰며 물었다.
총독부에는 38년의 조처에 이어 금년(1941년) 3월 31일부로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하고 조선어의 학습을 폐지시키는 국민학교 규정을 공포한 것이었다. 이로써 모든 교육기관에서는 조선어 교육이 완전히 폐지되게 되었다.
"아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그럼 내가 딴마음을 두고 거짓말을 했다는 거요? 내가 한 말은 사실 그대로요. 그건 당연한 조처요."
박용화는 또 긴장을 느끼며 당연한 조처를 되풀이했다.
"이거 보시오. 다께다 선생! 여긴 우리 둘뿐이라고 하잖았소. 교무실에서 회의를 하는 것도 아니고 교단에서 애들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니까 진심을 말해 보라 그거요."
구니와께는 눈을 질끈 감으면 술이 주루룩 흘러내릴 것처럼 취한 눈으로 박용화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저놈이 저거 무슨 속셈으로 저따위 소릴 지껄여대지? 흥, 날 구렁텅이에 몰아놓으려고? 어림없다, 내가 그런 얄팍한 수작에 넘어갈 것 같으냐.’
박용화는 술기운이 깨는 것을 느끼며 긴장했다.
"구니와께 선생, 무슨 말을 그리하시오. 내 진심은 단 하나, 피와 살과 뼈까지 황국신민이라는 사실뿐이오."
박용화는 조회 때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치듯이 힘차게 말했다.
"으아 하하하하..., 피와 살과 뼈까지 황국신민이라고? 보신에 좋은 말은 잘도 외우고 있군. 그건 당신의 말이 아니라 소설가 이 뭐라는 자가 작년에 신문에 쓴 글인 줄 나도 알고 있지. 조선 늙은이나 젊은이나 배웠다는 사람들이 왜들 이 모양이야 이거."
구니와께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박용화를 쳐다보며 반말을 해대고 있었다. 그가 꼬집은 말은 이광수가 1940년 9월 매일신보에 쓴 심적 신체제와 조선 문화의 진로라는 글 가운데 한 구절이었다.
‘저놈이 진심이야, 연극이야? 일본 놈이 못하는 소리가 없네. 저놈이 평소에도 좀 이상하긴 하지 않았던가? 아니야, 아니야, 속아 넘어가선 안돼. 저게 고단수 유도신문일 수도 있으니까.’
"구니와께 선생, 정신차리오. 당신이 지금 얼마나 반역적이 비애국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줄이나 아시오? 내가 만약 경찰에 고발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그 말이오."
"으아 하하하하..., 고발? 얼마든지 해보시지. 더 출세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 날 고발하면 다이신이 오히려 감옥살이를 하게 되지. 당신 영리하니까 왜 그런지 금방 알 수 있겠지? 당신이 고발한 것을 내가 당신한테 뒤집어씌울 거거든. 출세를 위해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는 거라고 말야. 그럼 누구 말을 더 믿겠나? 그야 당연히 내 말을 믿지 않겠어? 그해도 피와 살과 뼈까지 황국신민이라고 미친 소릴 외쳐댈 건가? 이봐, 당신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조선사람은 영원토록 조선사람일 뿐이야. 정신 똑똑히 차리라구."
구니와께는 싸늘하게 조소를 보내고 있었다. 박용화는 충격을 느꼈다. 구니와께의 뒤집어씌운다는 수법도 충격이었고, 자신의 진실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충격이었다.
"도대체 당신 진심은 뭐요?"
박용화는 더 술이 깨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 진심? 조선인으로서 당신 진심을 듣고 싶은 게 내 진심이지. 우리 단둘이 뿐이야. 날 의심하지 말고 진심을 말해 봐."
구니와께는 앉음새를 고치며 술잔을 들었다.
"구니와께 선생,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모르지만 열 번 백번 물어도 내 대답은 아까 한 것과 똑같소."
"이 더러운 자식!"
구니와께가 술상을 내리쳤고
"뭐야!"
박용화도 술상을 내리치며 마침내 맞고함을 질렀다. 그건 위장이 아니었다. 가식도 아니었다. 조선말을 전면적으로 가르치지 않게 된 것이 어딘가 한 가닥 아쉬움이 있을 뿐이지 당연한 조처라고 생각했다. 소학교 때부터 배워온 대로 일본은 거대하고 위대한 나라였다. 나이가 먹어가고 공부를 해갈수록 그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실감하고 확인해 나갔던 것이다. 조선의 독립이란 잠꼬대 같은 망상이었다. 어차피 독립이 안될 바에는 내선일체가 빨리 되어야 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도 일본사람들과 똑같이 활동하고 대접받으면서 잘살게 되는 것이 행복의 길이었다. 그러자면 조선사람들이 어서 황국신민이 되도록 솔선해서 나서야 했다. 그런데 조선사람들은 일본말은 물론이고 일본 글을 너무나 몰랐다. 도회지는 그래도 나은 편인데 농촌으로 가면 전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합방이 되고 30년이 지났는데 어찌 그럴 수 있는지 놀랍기만 했다. 그렇게 의사소통이 안 되어가지고는 화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화합이 안 되면 조선사람들은 계속해서 천대받고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관공서의 문서고 각급 학교의 교과서고 모두가 일본어였다. 이제 조선어는 조선사람들끼리 말할 때뿐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그러니 없애는 건 당연했다. 그걸 없애야만 내선일체가 빨리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봐, 내가 가장 경멸하고 멸시하는 게 누군지 아나? 당신 같은 사범학교 출신들이야. 그 피 끓는 젊은 나이에 할 짓들이 그리 없어서 사범학교를 지망하나? 조국의 장래와 민족의 미래가 어찌 되든 말든 자기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젊은 놈들. 그런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기회주의자들을 어찌 경멸하고 멸시하지 않을 수 있겠나."
"닥쳐! 너 이제 보니 아주 사상이 불온한 놈이야."
박용화는 또 술상을 내리치며 눈을 부릅떴다.
"고등계 형사가 쓰는 말 흉내 내지 말고 내 말 똑똑히 들어. 우리 일본이 조선과 똑같은 처지에 빠졌다면 당신 같은 부류들은 살아남지 못해. 민족 반역자요 배신자들이니까. 그런데 말야, 조선 민족을 반역하고 배신한 부류들을 일본이 후대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 일본이 그 부류들을 믿는다고 생각하나? 곰곰이 생각해 봐."
"구니와께, 당신이야말로 민족반역자요 배신자 아닌가. 일본에 위해한 언행만 골라서 하고 있으니."
"허, 그 두뇌가 아깝군. 그 충성심에 탄복할 뿐이야. 내가 한마디만 더 하지. 그렇게 투철한 충성심에다 열렬한 출세욕을 가졌으면 사범학교를 잘못 지망한 거지. 이 산골 소학교에서 시작해서 평생을 해봐야 조선 사람은 교장 해먹기 어려울걸. 빨리 출세하고 권세를 부리고 싶으면 이보다 훨씬 빠른 길이 있지. 군대, 군대에 지원해. 일본은 군인이 지배하는 나라고, 사범학교 출신을 바로 장교가 될 수 있으니까. 아참, 그렇군! 다께다 히데오, 이름도 무사에 딱 어울리는군그래. 빼어난 영웅이 되어보는 게 어때. 내가 보기엔 군인이 기질에도 맞는 것 같은데."
박용화는 너무나 놀랐다.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면서 하는 말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벌써 몇 달 전부터 진로 문제로 고심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구니와께 선생, 너무 많이 취한 것 같으니 그만 일어납시다. 오늘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해두겠소."
박용화는 약간 흔들리며 일어섰다.
"천만에, 오늘 이야기를 똑똑히 기억해 두시오. 그리고 내가 당신을 안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소."
구니와께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박용화 쪽으로 비웃음을 보내며 술잔을 들었다. 선이 가늘고 해사한 그의 얼굴은 지적인 분위를 담고 있었다.
밖에는 흐릿한 달빛이 깔려 있었다. 하늘에는 반달이 기우뚱하게 떠 있었다. 술집을 나선 박용화는 숨을 들이켜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밤공기에서 산뜻한 봄기운이 느껴졌다. 박용화의 눈에 잡히는 거은 흐릿한 달빛 속에 검게 드러난 산줄기들이었다. 달비칭 흐려 산줄기들은 더 흉물스럽고 음험해 보였다. 그런 산줄기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박용화는 또 숨이 막히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 산줄기들은 남도 제일이라고 하는 웅장한 산 지리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박용화는 이곳을 어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또 느끼고 있었다.
이 산의 감옥 같은 곡성 땅에 처음부터 정이 붙지 않았었다. 이런 시골 구석으로 발령을 받을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 원인은 모두 에이꼬에게 있었다. 에이꼬의 덫에 걸려 밀애의 정사에 빠지다 보니 졸업반 성적이 나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딴 꿈에 취해 석차 순위 따위에는 관심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에이꼬와 결혼을 하고, 빨간 정문으로 빛나는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에 진학한다는 황홀한 꿈 앞에서 석차에 급급하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박용화는 긴 한숨을 끌며 걸음을 옮겨놓았다. 에이꼬, 그 방자하고 당돌한 계집에게 희롱당한 것을 생각하면 스스로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색정에 취해 할딱거리는 에이꼬의 발가벗은 꼴이 떠올랐던 것이다. 한번 길을 트기 시작하자 에이꼬의 식구들의 눈을 피해 자취방으로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유기준이 딴 친구에게로 짐을 옮겨간 것도 에이꼬가 원한 것이었다. 자신도 위험한 비밀을 가지고 있는 유기준과 헤어지는 것이 홀가분하기도 했다.
"왜년덜 너무 좋아허지 말어. 급행열차 탈라다가 차 엎어지는 수도 있응께로."
유기준이 남기고 간 말이었다. 그 말에 코방귀를 뀌었던 것이다. 그 말이 꼭 질시하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에이꼬는 성욕이 강한 것만이 아니었다. 성 행위을 야하고 요란스럽게 하기를 즐겼다. 병풍식으로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본 춘화를 쫙 펴놓고 거기에서 하는 대로 하기를 원했다.
"이런 걸 어디서 구했어? 여자가."
처음에 놀라서 물었더니
"일본사람은 조선사람하고 다른 것 몰라요? 여자도 이런 것 보는 건 흉이 아니에요."
에이꼬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이었다. 하기는 일본사람들의 성 풍속이 조선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그러려니 넘기고 말았다. 또 춘화도를 보아가며 즐기는 성희에 취해 더 탓할 생각이 없기도 했다.
에이꼬와 성접촉이 깊어질수록 동경 유학의 꿈은 무르익어가고, 석차를 다투는 대신 입시 대비의 공부를 해나갔다. 그런데 동기 방학 직전 어느 날이었다.
"나 이번 방학 시작되면 바로 동경으로 떠나 안 오게 될 거예요."
에이꼬가 발가벗은 채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일본의 학원에 다니면서 마지막으로 입시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명령이에요."
"아니, 그거 말고 우리 사인 어떻게 되는 거냐고."
"어떻게 되긴요. 아쉽지만 이젠 이별을 해야지요."
에이꼬가 서운한 듯 약간 웃었다.
"이별?"
"네에, 이젠 헤어져야 할 때가 왔잖아요."
에이꼬의 눈자위가 붉어지며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아니, 우리 결혼은, 결혼은 어떻게 하고?"
자신도 모르게 말이 더듬거려졌다.
"네에? 결혼이오?"
에이꼬가 놀라며 얼굴이 싹 굳어졌다.
"아니, 왜 놀라지?"
"그럼 놀라지 않게 됐어요. 갑자기 결혼은 무슨 결혼이에요? 서로 좋아지냈으면 됐지."
"아니, 결혼하지도 않을 남자하고 그 짓을 1년씩이나 했단 말야?"
"호호호호..., 이제 알았어요. 조선식으로 생각한 모양이군요. 그러지 말아요, 귀찮게. 여긴 조선 땅이지만 엄연히 일본이니까 유치하게 조선식 꺼내지 말아요. 조선 여자들은 정조하는 걸 신주 단지 모시듯 하며 처녀가 몸 버렸다고 마구 죽잖아요. 그런 멍청한 짓이 세상에 또 어디 있어요. 그까짓 정조라는 게 뭔데 한번 성관계로 목숨을 끊어요, 그래. 우리 일본 여자들한테는 그런 것 없어요. 재미 보는 것은 재미 보는 거고 시집가는 건 시집가는 거예요. 왜 내가 박상하고 관계를 시작했는지 알아요? 내 친구 후미꼬 있잖아요, 걔가 박상을 보자마자 관계를 갖고 싶어 했어요. 걔가 그러니까 슬그머니 질투가 나잖아요. 내가 더 가까운 사인데 빼앗길 수 없는 일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박상을 차지하고 후미꼬한테 단념하라고 했지요. 이제 알았어요?"
"갈보 같은 년!"
"어머, 왜 욕을 해요? 서로 재미 봤으면 됐지 남자답지 못하게."
"나가, 이 더러운 년아! 당장 나가!"
그리고 받아든 성적표의 석차는 12등으로 밀려나 있었다.
"여기가 내 무덤이구나!"
산으로 뺑뺑 둘러싸인 곡성에 첫발을 디디며 느낀 심정이었다. 첫 번째가 광주, 그리고 순천. 더 못하면 목포나 여수까지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외의 지역으로 밀려나면 장래는 어둡기만 했다. 그런데 나주며 장성도 지나쳐 곡성까지 밀려나 버렸으니 교육자로서의 출세란 암담하기만 했다. 잘 먹지도 못하면서 에이꼬 그년의 쾌락을 충족시켜 주느라고 체력소모를 하고 신세까지 망친 것을 생각하면 그년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자신의 불찰이었다. 왜년들이 정조 관념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너무 소홀히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 관념이 없는 것은 기혼 여자들이지 처녀까지 그럴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데리고 살고, 사촌 육촌이 붙어먹고 혼인을 하고, 이모 고모하고도 그 짓이 예사고, 하숙집 주인 여자와 그 여동생이 번갈아 가며 옷을 벗고 덤비는 바람에 하숙을 옮겨야 했다는 이야기 같은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처녀까지 그렇게 놀아나고는 한 점 미련이나 부끄럼도 없이 돌아설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잊자고 했다. 잊으려고 했다. 새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우람한 산줄기뿐인 이곳은 산으로 된 감옥이고 산으로 된 무덤이었다. 전혀 정이 붙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질식할 것만 같았다. 사범학교에 지망하면서 품었던 꿈은 그것이 아니었다. 교육자로서 남들보다 먼저 출세하고 성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 꿈이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욕구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무 가망 없는 시골구석에서 젊은 날을 소모하며 나이를 먹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곡성으로 밀려나 버리도록 나쁜 성적이 명기되어있는 한 그 꿈을 이룩할 길은 없었다.
그래서 곡성을 탈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다. 소학교 교사보다 낫고 빨리 출세할 수 있는 길, 역시 먼저 떠오르는 것은 판검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준비기간이 너무나 길었다. 대학의 많은 학자금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고학을 한다고 해도 집안에서 일부를 대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좋은 일자리를 구한다 해도 먹고 살고 학비까지 해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오락가락하는 생각 중의 하나가 사관학교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사관학교는 사범학교보다 더 철저한 관비제도라서 학비만이 아니라 먹여주고 입혀 주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교가 되면 그 위세와 지위는 벽촌의 소학교 선생에 댈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구니와께의 생각은 놀랍게도 자신의 생각과 일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건 그다지 신통할 것도 없긴 했다. 왜냐하면 지원병 제도가 생기면서 고보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 꽤나 사관학교의 길을 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용화는 걸음을 멈추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 더러운 자식!
내가 가장 경멸하고 멸시하는 게 누군지 아나?
진심을 말해 보라 그거요.
아무리 몸부림 쳐도 조선사람은 영원토록 조선사람일 뿐이야.
이러운 자식!
구니와께의 거침없는 말들이 뒤죽박죽되어 들리고 있었다.
구니와께... 그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 정체는 무엇일까? 속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일까? 사범학교를 다니고, 선생인 자가...
박용화는 머리를 흔들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괄시와 차별은 무시로 받아왔지만 그런 문제로 일본사람에게 야유와 모독을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소학교에서부터 사범학교까지 칭찬만 받아왔던 종류의 일에 그건 날벼락이었다. 황당하고 얼떨떨했다. 그리고 부끄럽고 괴로웠다. 구니와께의 말대로 하자면 당장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독립운동에 나서야 했다. 그 말은 옳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게 될 법이나 한 일인가. 흔한 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요, 목포 앞바다의 철선과 돛단배가 싸우기였다. 소학교 때부터 아버지와 형이 하는 것을 보았지만 아버지는 공장에서 쫓겨나 집안 살림은 더 가난해졌고, 형은 퇴학을 당한 죄로 지금까지도 직장을 옮기지 못한 채 술주정뱅이로 변해 가고 있었다. 독립이란 도저히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구니와께는 일본사람이라 그런 걸 잘 모르는 것일까? 그저 술주정이었을까? 놀리고 골탕을 먹이려고 일부러 그랬을까?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취중진언이라고 그자는 평소부터 품어왔던 생각을 술기운 빌려 토해놓은 것이 틀림없었어. 도대체 그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인가. 어떻게 일본사람 중에 그런 자가 있을 수 있는가. 그자는 평소에 별로 말도 없고, 아이들도 열심히 가르쳤다. 좀 색다른 것이 있다면 책을 많이 읽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난한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아니, 혹시 그놈이 사회주의자 아닐까!
퍼뜩 떠오른 그 생각과 함께 유기준의 얼굴이 밀려들었다. 유기준은 검거되는 일 없이 해남으로 발령을 받았던 것이다. 유기준처럼 구니와께도 사회주의 사상을 감추고 있을지 몰랐다. 유기준이 검거되지 않았으니 그와 함께 조직을 이루고 있었던 학생들도 발령을 받은 것은 틀림없었다. 구니와께도 그런 식일 수 있었다. 그가 사회주의자라면 그의 말은 술주정이 아니라 진심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속단할 수는 없었다.
박용화는 술이 자꾸 깨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구니와께의 말들이 두서 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괴롭고 부끄럽고 고통스럽고 창피스러웠다. 독립, 그게 가능한 것인지, 독립운동, 그게 무슨 색다른 방핵이 있는 것인지... 잠자리를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한숨도 안 잔 것처럼 시차없이 구니와께의 말들이 밀려들었다. 박용화는 신음을 물었다. 구니와께의 예리한 말들이 가슴을 치는 것보다는 그를 어떻게 대할지가 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구니와께는 언제 그런 말들을 했느냐 싶게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박용화는 자신이 오히려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구니와께의 그런 태도에서 박용화는 섬뜩한 무서움을 느꼈다.
"어젯밤 구니와께 선생하고 술 더 많이 했소?"
수업에 들어가려는데 이 선생이 다가서며 물었다.
"예, 좀 더 했습니다."
박용화는 얼버무렸다.
"역시 젊은 기운이 좋소. 무슨 좋은 얘기도 많았소?"
이 선생은 약간 비굴한 느낌의 웃음을 흘리며 눈치를 살폈다.
"뭐, 별 얘기 없었는데요."
박용화는 역시 어물거렸다.
"혹시 저어..., 인사문제 같은 건 안 나왔소?"
이 선생의 웃음은 조금 더 비굴해지고 있었다.
"아닙니다. 그런 얘긴 전혀 없었는데요."
박용화는 그때서야 그 비굴한 웃음의 의미를 알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게 어찌 될라는지..."
이 선생은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박용화는 40객인 이 선생의 구부정한 등을 보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선어 학습의 폐지로 생길지 모르는 인사이동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선생의 모습이 17, 8년 후의 자신의 모습일 것을 생각하며 박용화는 부르르 한기를 느꼈다. 구니와께의 태도와 이 선생의 모습이 겹쳐서 박용화는 전혀 수업을 할 기분이 아닌 채로 출석부를 펼쳤다. 그는 아동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야마모도 후미꼬
하이.
마쓰오 하루꼬.
하이.
기우찌 에이꼬
하이.
요시다 하루꼬
하이.
우사이 에이꼬
하이.
요시하라 후미꼬
하이.
하라노 후미꼬
하이.
박용화는 그만 짜증이 나고 말았다. 성만 다를 뿐 같은 이름이 너무 겹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7명의 이름을 부르는데 에이꼬와 하루꼬가 둘씩이었고, 후미꼬는 셋이나 되었다. 그건 단시일 내에 창씨개명을 몰아붙인 결과였다. 시골사람들이 어떻게 고쳐야 좋을지를 모르고, 동네 단위로 몰아대다 보니 일은 바쁘고 해서 면서기들이 제멋대로 일본식 작명을 해댄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끝에는 무조건 '꼬'를 붙여서 영자, 춘자, 미자, 숙자 등이 무더기로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날마다 그 이름들을 별 생각 없이 불러왔으면서도 박용화는 오늘따라 그것이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어젯밤 일 때문이었다.
박용화는 밤마다 며칠을 고민했다. 그러나 독립될 가망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자주 일어나던 소작쟁의며 노동쟁의도 씻은 듯이 없어졌고,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것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사회주의자들이나 지식인들의 전향과 친일은 속출하고 있었고, 모든 학교와 전국적으로 근로보국대를 조직하는 것도 모자라 다시 경방단을 조직해서 거미줄처럼 감시망을 짰고, 사회 저명인사들로 조직된 대표적인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2년 만에 이름을 국민총력연맹으로 바꾸고 전국적으로 활동을 강화하고 있었고, 작년 1940년 8월에는 조선어 신문으로서 대표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결국 폐간당했고, 조선문인협회에서는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문예보국 강연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그런데 금년 2월에는 마침내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이 공포되었던 것이다. 그건 지금까지의 보안법이나 사상범취체법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법이었다. 그건 말뜻 그대로 사상범을 예방하기 위하여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도 의심스럽거나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체포해서 감옥에 가둘 수 있는 법이었다.
모든 상황이 이중 삼중의 가시철망이었고, 겹겹이 칼날들이 뻔득이는 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독립운동을 한단 말인가. 그건 허황되기 이를데 없는 몽상이고, 개죽음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이었다. 일본은 중국을 계속 이기고 있고, 중국을 다 차지하는 날에는 일본은 그야말로 아시아의 맹주였다. 그날이 머지 않았는데 조선사람들이 살아날 길은 내선일체에 호응해 황국신민이 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인과 똑같은 1등 국민으로 대접을 못 받는다 하더라도 3등 국민인 중국인들보다는 낫게 2등 국민의 지위는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결론에 되돌아온 박용화는 심각하게 장래의 진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신학기가 머지않았으니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장래성 없는 교사 생활은 이미 포기했고, 남은 것은 두 가지였다. 군인의 길이냐 법관의 길이냐였다. 며칠 고심한 끝에 박용화는 법관의 길을 택했다. 군인이 되는 것은 우선 목숨의 위험이 너무 컸다. 출세도 좋고 권세도 좋지만 죽고 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전쟁터에 나서면 장교 아니라 장성도 총 한 방이면 황천길이었다. 굳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군인이 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중국 땅에서 싸우다 보면 조선 독립군들에게도 총질을 하게 될 텐데, 그런 난처한 짓은 미리 피하는 게 좋았다. 독립운동을 안 하면 그만이지 차마 그런 망나니짓을 할 수는 없었다. 또한, 구니아께에게 체면을 세워야 했다. 군인의 길을 선택하면 마치도 그가 가르쳐준 대로 따르는 꼴이었다.
그러나 법관은 장교보다 사회적 지위나 권세가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고, 생명의 위험이란 전혀 없었다. 다만 학자금이 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동안 저축한 돈도 얼마간 있었고 앞으로 1년 동안 최대한 내핍생활을 하며 모을 작정이었다. 다시 사범학교 시절의 자취생활로 돌아가면 월급을 거의 다 모을 수 있었다. 1년 동안 술이며 잡기 같은 것을 일체 끊고 시험공부에 몰두하면 학비도 모으고 의무복무기간 2년도 끝나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에이꼬 그 년 앞에 당당히 나서기 위해서도 법관이 되어야 했다. 박용화는 이런 결론을 내리자마자 곧바로 하숙을 옮겨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담배부터 끊었다.
"구니와께 선생, 우리 단둘이 있으니까 하는 말인데, 당신 혹시 사회주의자 아니오?"
박용화는 구니와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구니와께는 가슴이 철렁하며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혹시 무슨 꼬리가 잡혔나 싶었던 것이다.
"뭐 그리 놀랄 건 없소. 그날 밤 언행이 꼭 사회주의자 같아서 하는 말이니까. 구니와께 선생도 이런 산골에 박혀 있다간 장래가 요원한데, 어떻소? 나한테 권하지만 말고 구니와께 선생이나 사관학교를 가는 게."
박용화는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난 죽기 싫어 사관학교는 포기하고 딴 길을 선택했소. 몇 년 뒤에 두고 봅시다."
박용화는 구니와께를 노려보며 돌아섰다. 구니와께는 서글픈 표정으로 멀어지는 박용화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28. 정인들이 열매
중경의 5월은 온갖 꽃들의 흐드러진 웃음으로 화사했다. 녹음을 이루기 시작한 고목들과 가지가지 꽃들은 한데 잘 어우러져 오래된 도시의 봄 정취를 무르익게 하고 있었다. 포근한 햇살 속에 세월의 흐름 같은 것은 무감한 듯 고적들은 의연하게 서 있었고, 꽃과 벌 나비 들은 한가롭게 벗하며 고도의 봄을 한껏 아름답고 풍성하게 꾸며내고 있었다.
그러나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그런 봄 정취와는 대조적이었다. 어딘가 불안한 기색들이었고 지친 모습이었다. 그 누구도 봄을 즐기는 느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군인들을 가득 실은 트럭 한 대가 경적을 요란하게 울려대며 큰길을 질주해 갔다. 그 순간 봄의 정취가 산산이 깨져나가고 있었다. 그 트럭이 남겨놓고 간 것은 전운이었다.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그 트럭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며 눈들에 더욱 짙은 불안이 서리고 있었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 어느덧 5년째가 되고 있었다. 일본군이 북경과 남경을 점령할 때까지만 해도 그 기세로 중국대륙을 곧 손아귀에 넣을 것 같았다. 그러나 중국 대륙의 중간 부분에서 전선은 남북으로 걸친 채 장기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건 속전속결을 계획했던 일본군의 작전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일본군은 전력을 소비하게 되고 중국군은 전력을 강화해 나가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속전속결을 하지 못하고 장기전에 말려들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내전을 중단하고 일본에 대항해 국공합작을 한 것이었다. 둘째는 만주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이 투쟁하면서 일본군의 세력을 양분시켜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이 1940년 중반에 이르러 거의 소멸되었다고 해서 일본군은 만주 지역의 병력을 대대적으로 중국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소련이 만주의 국경선을 따라 병력을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중국과 소련을 적으로 삼아 계속 병력을 양분시켜 놓아야 하는 궁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장기화는 면할 수가 없고, 병사들은 죽어가고, 병력은 보충해야 하고, 군비는 계속 소모되고, 군 장비는 끝없이 필요하고, 완전히 구렁텅이에 빠진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조선에서는 군인 지원제며 징용제를 강행하게 되고, 식량 배급 등 온갖 규제법들을 만들어내기에 급급하고, 친일단체까지 동원하여 5억 원 강제 저축 운동을 전개시키는가 하면, 41년 2월에는 급기야 내선일체 정신대라 하여 소학교 6학년 졸업생인 조선 어린이들 6백 명을 뽑아 일본의 군수공장에 보내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상해의 임시정부는 그동안 전세에 따라 여러 곳으로 이동하다가 이제 중경에 머물러 있었다. 임정에서는 작년 9월에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방대근과 송기원은 해룡병원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신 담배럴 그리 꼬실리요? 의사도 속 타는 법 있는갑소 이."
연달아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송가원을 보며 방대근이 피식 웃었다.
"아 예... 실은 의사들이 더 겁이 많은지도 모릅니다."
"아니, 고것이 무신 소리요?"
방대근이 의아스러워했다.
"예, 이런 일이 있어요. 제가 대학 다닐 때 교수 한 분이 맹장 수술에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였어요. 그런데 그분 아들이 맹장에 걸렸지요. 그러자 그분은 자기 손으로 수술을 못 하고 동료 의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남의 손에 수술을 맡겨놓고 그분은 수술실 밖에서 수술이 끝날 때까지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 떨었다는 겁니다."
"허, 중이 지 머리 못 깎는 격이로시."
"그런 셈이지요."
"병이 무서운지 다 아는디다가, 자기 혈육잉게 그럴 만도 허겄소. 허나 맹장이야 배럴 째는 것이고, 애 낳는 것이야 그저 된똥 누는 것이나 똑같은 게 아무 걱정헐 것 없소."
송가원은 푹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어째 웃소?"
"아니, 방 대장님이 애 낳아보셨습니까? 여태까지 장가도 못 드신 분이."
"이, 그야 우리 아부지덜이 늘 허시든 말씸잉게."
방대근이 헤식게 웃었다.
"그것이야 당해 보지 않은 남자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쉽게 하는 소리지요. 여자들이 하는 말은 못 들어보셨어요?"
"여자덜이? 글씨, 머시라능고?"
"진통할 때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 손에 쥔 차돌이 녹아내릴 정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애 날라고 댓돌에 신 벗어놓고 들어감서 나가 저 신얼 또 신을 수 있을랑가 허는 생각얼 헌다는 말도 안 있소."
"잘 아시는군요."
"그야 다 들은풍월잉게."
방대근이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된똥 누는 것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되지요."
"에이, 다 여자덜 엄살이오."
"아니라니까요. 의학적으로 볼 때도 출산은 여자들 생사가 걸린 문젭니다."
"그러요? 그나저나 산에서 요 일 안 당허기 천만다행이오. 산에서 애 낳고 죽은 대원도 서넛 있었는디. 송 선생은 의사라 재주가 좋았는갑소이."
방대근은 송가원을 빤히 쳐다보며 묘하게 웃었다.
"참, 의사라고 별 재주 있나요, 잠자리 피하는 것밖에."
송가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허! 참말로 부전자전이시."
방대근이 놀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전자전이라니요?"
"이, 송 선생이 옥비 명창 대헌 것이 똑 춘부장 어러신이 필녀아짐씨 대헌 것허고 같으다 그 말이오."
"글쎄요, 저야 뭐... 헌데, 방 대장님은 장가 안 드세요? 윤주헙 선생이 걱정을 많이 하시던데요."
"이 시절에 장개넌 무신..."
방대근이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송 선생님, 축하합니다. 딸 낳았습니다."
여자의 명랑한 목소리였다.
"아, 예!"
송가원이 벌떡 일어섰다.
"산모도 건강하구요."
간호원이 밝게 웃었다. 중년의 간호원은 윤주협의 아내 민수희였다.
"잘되았소, 첫딸 살림 밑천인디."
방대근이 일어서며 뚜벅 말했다.
"예, 딸이 키우기 재밌지요. 방 대장님이 산모 데려오느라 수고 많이 하셨어요."
민수희는 천성적이다 싶은 친화력을 밝은 웃음으로 감싸 나타내고 있었다.
"지야 무신..., 산모가 상상큭제라."
"고생은요, 된똥 한번 싼 것뿐인데."
송가원이 픽 웃으며 말했고
"네에?"
민수희가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아이고 참, 쯧쯧쯧..."
방대근이 민망해하며 몸을 돌려세웠다.
"아닙니다. 수고하셨는데 오늘 저녁은 제가 한턱내면 어떻겠습니까?"
송가원은 얼른 말을 둘러붙이고 있었다.
"네에, 좋아요. 한턱내세요."
민수희는 재치있게 받아넘겼다.
"예, 장소는 다시 연락드리죠."
민수희가 바쁘게 뛰어갔다.
"왜 그리 돌아서 계십니까?"
송가원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아이고, 송 선생 믿고 어디 농담허겄소?"
방대근이 뒷덜미를 쓸며 눈총을 쏘았다.
"농담을 해도 하도 이상하게 하시니까 저도 한번 써먹으려고 그런 거죠."
송가원은 계속 쿡쿡거렸다. 그 흥겨운 기분에는 옥비가 순산을 했다는 기쁨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쨌그나 이리 맘놓고 웃는 날이 있응게 참 좋소. 나 인자 가봐야겄소."
방대근은 빙긋이 웃으며 돌아서려고 했다.
"어디로 가시게요?"
"거그 의용대말고 또 있겄소."
의용대란 김원봉이 38년 9월에 조직한 조선의용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따가 디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저녁을 함께 하시죠."
"예, 그래 봅시다."
방대근은 걸음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널찍한 병원 뜰을 가로지르던 방대근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벽돌담을 따라 이어진 화단에는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꽃이 있었다. 짙고 엷은 가지가지 보랏빛 꽃송이들이 뭉클뭉클 무게구름 피어나듯 풍성하고 탐스럽게 피어있는 수국꽃이었다. 그 꽃송이들에 수국이 누나의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수국이 누나는 이름 그대로 수국꽃처럼 곱고 예뻤었다. 여지껏 수국이 누나처럼 예쁘고 참한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을 주고 싶은 여자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수국이 누나는 어디서 당한 것일까...
방대근은 또 그 생각에 마음이 어두워졌다. 누나가 살아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살았다면 두 달이 되도록 동네로 돌아오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송가원이와 옥비가 찾아온 것이 누나의 변고를 더 확실하게 해주었다.
농사꾼으로 변장하고 동네를 찾아온 송가원과 옥비의 건강은 오랜 굶주림과 고생으로 형편없이 나빴다. 그들이 몸을 회복하기 기다리면서 길 떠날 준비를 갖추어나갔다. 송가원에게 몇 번이고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권했다. 그러나 송가원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도 말라는 듯 아예 일언반구 대꾸를 하지 않았다. 뜨내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하고 셋이서 길을 떠났다. 남자만 둘인 것보다는 여자 하나가 끼어 있으니 눈속임하기가 한결 좋았다. 더구나 옥비가 명창이라 노래로 손님들을 끌어모으는 뜨내기 장사꾼으로서는 아주 그럴싸하게 격을 갖춘 것이었다. 옥비는 네 차례나 검문하는 일본군들 앞에서 노래를 뽑아댔던 것이다. 중경까지 다다르는 데는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기차를 타면 3일 정도의 길이었지만 왜놈들을 피하느라고 기차를 마음대로 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전선이 가로막혀 중경까지 직통으로 가는 기차가 있지도 않았다. 걱정했던 전선 통과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무적의 대군이라고 큰소리치는 일본군이었지만 전선 전체를 군인들로 울타리를 치지 못하는 한 그 어디엔가 구멍은 뚫려 있게 마련이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요지경속이라 그런 길안내를 해주고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김원봉은 중경에 자리잡고 있었다. 김원봉은 지난날부터 줄기차게 독립운동의 통일전선을 꾀해 왔으므로 임정이 있는 곳에 김원봉이 있으리라는 예측은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원봉은 이제 의열단 단장이 아니었다. 의열단은 지난 1935년 7월에 다른 네 개의 독립운동단체들과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조직하면서 발전적 해체를 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이 윤주협과의 만남이었다. 윤주협은 그동안에 자식을 둘이나 두고 있었다. 그러나 돈을 한 푼도 벌지 못하는 윤주협은 허울 좋은 아버지에 지나지 않았다. 살림은 아내인 민수희가 버는 돈으로 꾸려가고 있었다. 송가원은 우선 취직을 하기로 했다. 독립군 내에 병원이 없었고, 생활 대책을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송가원의 취직은 아주 손쉽게 이루어졌다. 양의사가 부족한 탓이었다. 그 취직을 주선한 것은 민수희였다. 그건 주선이라기보다는 자기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끌어간 셈이었다. 그런데 송가원은 밤낮없이 일하다시피 하는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과가 끝나고 나면 왕진 가방을 들고 독립군이나 조선사람들의 진료에 나섰던 것이다. 그 무료진료를 남의 병원 내에서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진료에 옥비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옥비는 명차이 아니라 이제 어엿한 간호원 노릇을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옥비가 아이를 낳았으니 송가원의 고생이 더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
"수국이나 필녀나 다 편헌 맘으로 갔을 거이다. 나겉이 쓰잘디 는 늙은이가 너무 오래 산다. "
길을 떠나오던 날 지삼출 아저씨가 한 말이었다. 이제 백발이 된 지삼출 아저씨의 눈가장자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방대근은 콧날이 시큰해지는 걸 느끼며 병원을 나섰다. 수국이 누나를 생각하면 군산에서부터 만주까지 가슴 시리고 쓰라린 일들뿐이었다.
저녁때 송가원이 한턱을 내는 자리에 윤주협 부부와 방대근이 모여앉았다.
"애 아버지 된 기분이 어떻습니까?"
윤주협이 찻잔을 들며 물었다.
"뭐..., 얼떨떨하고..., 그렇습니다."
송가원이 어색하고 쑥스럽게 웃으며 어물거렸다.
"나는 첫애를 본 순간 아,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란 말이 맞구나 하는 생각밖에 떠오른 것이 없습니다."
"아이, 당신은..."
민수희가 남편에게 눈을 흘겼다.
"아닙니다, 저도 아까 애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딸인지 아들인지 구별도 안 되도, 누굴 닮았는지도 몰르겠고, 기분이 아주 이상했는데 윤 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 저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송가원이 좀 짓궂게 웃었다.
"보시오, 의사 선생님도 저러시는데..."
윤주협이 아내를 곁눈질했다.
"고상하지 못하게 그런 말 말고 방 대장님 총각 신세 면하게 해드릴 궁리나 해보세요."
민수희는 재빠르게 화제를 바꾸어버렸다.
"에이, 그런 말씸 마시게라. 이 나이에 무신..."
방대근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이 사람아, 그러니까 더 장가를 들어야지."
윤주협이 정색을 했다.
"말 마소. 총얼 들어야 허는 우리 처지도 그렇고, 또 무신 재주로 믹여 살릴 것잉가."
방대근은 이제 고개를 내둘렀다.
"그리 생각지를 말게. 우리도 우리 입장을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가 됐네. 이젠 우리도 총 들고 앞에 나서기는 어려워진 나이가 아닌가. 나이에 맞춰서 사는 법도 배워야지. 옆으로 좀 비켜서서 다른 일을 맡는다고 해도 직접 총 들고 앞장서는 것보다 못할 것도 없고 말야. 그리고 독립운동은 우리 대에서만 하고 말 건가? 자식 대에도 해얄 것 아닌가. 그러니 나처럼 돈벌이 하는 여자를 얻어면 될 거야."
윤주협의 진지한 말이었다.
"예, 맞는 말씀입니다. 백전노장의 경험을 살려 해야 될 다른 중대한 일드링 얼마나 많습니까. 방 대장님께서는 연세를 고려하셔서 인생 전체를 살펴보실 때가 됐습니다."
송가원은 더욱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아아..., 내 나이가 벌써 마흔다섯이 넘었구나!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갔나. 마음은 지금도 신흥무관학교 시절 그대론데..."
방대근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었다.
"저어..., 이러면 어떻겠어요. 제가 방 대장님께 어울리는 마땅한 신부감을 골라 중매를 서는 게요."
민수희가 본격적으로 나섰다.
"아이고, 아닙니다. 이 볼것없는 늙다리헌티 누가 시집올라고 허겄능가요."
방대근은 두 손을 내저었다.
주문한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아, 자아, 주객이 전돈디 인자보톰 축하주나 맛나게 마십시다."
방대근은 서둘러 백주병을 들며 자기 이야기를 덮고 피하려고 했다.
"괜히 대장님 얘기 피하려고 그러지 마세요. 생녀 축하주 마시면서 노총각 결혼문제 의논하는 건 아주 합당하게 잘 어울리는 일이니까요."
민수희가 노련하게 방대근의 의도를 파괴하고 들었다.
"거 가다가 쓸 만한 한마디 잘하네. 그럼 축하주부터 한 잔씩 듭시다."
윤주협이 방대근을 건너다보며 놀리듯이 웃었다.
"이 사람아, 이 나이에 자석 낳아 어쩌라는 것이여?"
방대근이 술잔을 들며 눈을 부라렸다.
"걱정도 팔자로군. 늦자식 두면 오래 산다는 말 듣지도 못했나?"
윤주협이 술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맞대거리를 했다. 그들은 술잔을 높이 들어 중국식 건배를 했다.
"방 대장님, 이 자리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약속하세요."
민수희가 백주의 독한 맛에 진저리치며 말했다.
"무신 약속?..."
방대근이 안주를 집다 말고 민수희를 쳐다보았다.
"제가 신부감을 골라오면 피하지 마시고 그때그때 선을 보시겠다구요."
"차암, 억지 춘향이도 유분수제..."
"아니, 그렇게 적당히 넘기지 마시고 확실하게 대답하셔야죠."
민수희가 다그치듯 했고
"저것이 전라도식으로 그러겠다는 대답입니다."
송가원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얼랴, 이 사람 사람 잡네그랴."
방대근이 헛웃음을 쳤다. 윤주협이 더 말하지 말라고 자기 아내에게 눈짓했다.
"그나저나 요새 김원봉 동지가 너무 의기소침해 있어서 문제 아닌가?"
윤주협이 방대근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글씨, 문제넌 문제제."
방대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김원봉 동지를 알고 나서 그렇게 의기소침해 있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네."
"그야 당연지사 아니겄능가. 김 동지 세력이 그리 약화된 것이 일 시작허고 첨잉게."
주량 큰 방대근은 술잔을 남들보다 빠르게 비우고 있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고 날개 부러진 독수리란 말이 근자의 그분을 보면 실감나요."
민수희가 측은한 얼굴로 말을 거들었다.
"자네가 보기로는 어쩌등가. 그리 분산을 막기가 에로웠등가?"
방대근은 미간이 찌푸려지는 심각한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글세, 사면초가라고 할 수밖에 없지. 전에도 잠깐 말했지만 나나 자네가 김 동지였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거야. 보게,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는 무장부대를 만들자니 어디 그만한 재력이 확보되나, 기존대로 활동하자니 중국군의 휘하에 든 보조군으로 대원들의 불만은 높아지지 않나, 조선독립군으로 독립된 상태에서 중국군과 협동한다는 명목으로 중국군의 재정지원을 받으려고 고위 간부들을 계속 접촉했지만 그럴 필요가 뭐 있느냐는 반응으로 일이 풀리기를 하나, 그런 상황 속에서 연안 쪽의 중공당은 조직적인 유인을 계속 해오지 않나, 그런 난감한 상태를 제갈량인들 어찌 풀어나갈 수 있겠나. 김 동지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무장독립부대를 운영할 수 있겠나. 김 동지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무장독립부대를 운영할 수 있는 재원을 확보하지 못했고, 그리 되자 불만이 커진 공산주의 간부들이 부하를 이끌고 연안 쪽으로 이탈하는 것도 막을 도리가 없었던 것 아닌가."
"그려, 결국은 이짝에 우리 동포덜 수가 작아서 생긴 병통이시. 동포 덜 수가 만주만 같앴어도..."
방대근은 침통하게 술을 들이켰다.
김원봉은 1938년 9월에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곧 중, 일 양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무한 전선에 참전했다. 그러나 무한은 함락되었고, 조선의용대원들은 중국군 부대에 배속되어 일본군에 대한 선전 활동, 일본군 포로들의 신문, 일본군 점령지에서의 첩보 수집, 암살, 파괴 활동 같은 것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군의 보조군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군의 지휘를 받는 그런 역할에 불만을 품은 대원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조선독립군으로 무장하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김원봉 앞에 닥친 현실은 냉엄했다.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자기네 군대의 운영에도 정신이 없는 중국 정부에서는 조선독립군의 지원을 냉정하게 외면했다. 김원봉은 중국정부를 상대하는 현실과 대원들이 주장하는 이상 사이에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공산주의 간부들이 이탈하면서 김원봉의 세력은 그 어느 때 없이 약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김 동지가 참 안됐네."
윤주협이 한숨을 쉬었다.
"그려도 조선의용대 조직헌 것이 헛일헌 것이 아니시."
얼굴에 술꽃이 핀 방대근의 어조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무슨 말인가?"
"생각해 보소, 한국광복군이 어찌 그리 독립조직얼 표방허면서 창설되었능가. 그건 조선의용대의 체험이 귀중헌 바탕이 된 것 아니겄어."
"그야 두말할 것 없지."
"어쨌그나 김 동지가 무신 주의고 분파럴 초월해서 독립운동에 한 덩어리로 뭉치자는 통일노선은 백번 옳은 것인디, 요새 참 외롭게 되았어."
"그러게 말야. 어떤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고, 급진적 공산주의자들은 기회주의자라고 매도해대니 원..."
윤주협이 쓰디쓴 얼굴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야 다 깊은 속 모르는 극단주의자들의 입방아제. 김 동지의 성분얼 꼭 말허자면 머시라고 헐까..., 혁신적 민족주의자거나 진보적 민족주의자제."
"김 단장님이 약간 의기소침해 있으니까 인간적인 매력은 더 있어 뵈서 좋아요."
민수희의 말이었다.
"심각한 얘기 하는데 거 무슨 싱거운 소리요."
윤주협이 아내를 마땅찮게 쏘아보았다.
"싱겁긴요, 사실대로 말하는 건데. 그전에는 너무 강건하고 굳센 무사시라 사람 같지가 않고 겁나고 그랬거든요."
그렇지 않느냐는 듯 민수희는 방대근을 쳐다보았다.
"그 말 일리가 있구만요. 김 동지도 험헌 풍파에 시달리고 나이도 나이고, 안 변헐 수가 없겄지요."
방대근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왼손을 긁어댔다.
"방 대장님, 그 손 긁으면 안 된다니까요."
송가원이 술잔을 기울이다 말고 의사답게 방대근을 지적했다.
"이, 그렇제 참. 술기운이 돈께로 근지러와 죽겄는디."
방대근이 머쓱해져 중얼거렸다.
"예, 열이 나서 그런 겁니다. 참으세요, 저도 참는데요."
송가원이 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 손이 의사 손 같이 않게 마디마디가 군살이 박인 것처럼 거칠고, 푸르죽죽한 피부는 들떠오르는 듯 여기저기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 마치 심한 피부병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항일연군 시절에 동상이 걸렸던 흔적이고 후유증이었다. 그런데 저투부대를 지휘했던 방대근의 손은 송가원보다 훨씬 더 심했다. 또한 그들의 발가락은 손보다 더 심해 늘 진물이 흐르는 형편이었다.
"지기럴, 이기지도 못헌 쌈, 동상만 남고..."
방대근이 쓴웃음 지으며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아닙니다, 방 대장님. 항일연군은 당당하게 이긴 겁니다. 만주에서 대토벌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쪽에서는 그 겨울로 항일연군이 소멸될 거라고 걱정들 했거든요. 그런데 세 해를 더 싸워냈으니 얼마나 장한 승립니까. 저는 방 대장님이나 송 선생님도 자랑스럽지만, 송 선생님 부인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 혹한 속에서 견디어냈는지 믿어지지가 않고, 그 앞에서는 감히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민수희가 진정어린 얼굴로 겸손하게 말했다.
"그렇구말구. 항일연군이 없어서 만주의 왜병 놈들이 다 이쪽으로 몰려 왔어 봐. 중국 대륙은 진작 왜놈들 것 되었을지도 모르지."
윤주협이 코를 벌름거리며 아내의 말에 호응했다.
"허, 찬물도 상이라면 좋드라고 비말이라도 그리헝게 듣기에 과히 나쁘덜 않네. 말만 그리허덜 말고 여그 술이나 담뿍 따르소."
방대근이 혼쾌하게 웃으며 빈 술잔을 들었다.
"네에, 술을 제가 따라 올리죠."
민수희가 날렵하게 술병을 들었다.
"아, 아아니, 요거 황송시러바서 당최..." 술기운 불콰한 방대근이 과장된 몸짓으로 읍하는 시늉을 하고는, "기왕 허신 일인디 우리 송 선생헌티도 한잔 따르는 것이 으쩌시겄소?" 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네에, 그러잖아도 따르려고 했어요. 송 선생님은 항일연군의 용맹스러운 군의관일 뿐만 아니라 현재 저의 상사이시니까 제가 밉보여서 되겠습니까. 제가 쫓겨나면 우리 윤주협 동지 굶어죽는걸요."
민수희의 막힘없는 농담이었다.
"아하하하..."
"어허허허..."
술자리는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옥녀는 산후가 좋아 사흘 만에 퇴원을 했다. 옥녀는 송가원의 아이를 낳은 넘치는 기쁨 한구석에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아들이 아니고 딸인 까닭이었다. 아들을 낳았더라면 박미애의 생각을 깨끗이 지울 수 있었을 거였다. 그런 옥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가원은 아이를 안고 병원을 나서며 그저 싱글벙글했다.
열흘쯤 지나 민수희는 방대근에게 맞선볼 날짜를 알려 주었다. 다른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원 노처녀를 물색했던 것이다.
"나이는 서른둘이구요, 광주에서 시발된 학생운동 때 평양에서 시위를 주동했다가 검거를 피해 동료들과 북경으로 탈출한 겁니다. 독립 의지가 강하고, 교양 있고, 인물도 예쁜 편입니다. 평소에는 결혼 같은 것 별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방 대장님 같으신 분이라 마음이 동한 것 같아요. 그날 시간 꼭 지키셔야 해요."
민수희의 빠른 설명이었고, 방대근은 그저 덤덤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 사흘 뒤에 민수희는 신부감을 데리고 약속한 음식점으로 나갔다. 약속 시간 5분 전이었다. 그런데 방대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시가 되었다. 그래도 방대근은 나타나지 않았다. 5분이 지났다. 그래도 방대근은 나타나지 않았다. 10분이 지났다. 그래도 방대근은 나타나지 않았다. 30분까지... 방대근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