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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4-4

16. 타국의 저승길

구상배의 병은 심상치가 않았다. 시름시름 앓으면서 일어나지 못한 지가 벌써 보름이었다. 구상배는 그저 가슴이 좀 답답할 뿐이라고 했지만 얼굴에 드러나는 병색은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보이소 예, 조장님 병세를 우예 생각허시능교?"

방영근은 방문을 열다 말고 아내를 돌아보았다.

"그기 쪼매 이상탄 생각 안드시능교?"

방영근의 아내는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글씨, 성님언 벨 병 아니다, 하도 몸이 곯고 삭아서 몸살이 오래가는 것이다 허시는디 나도 요상헌 생각이 드리넌 든 지가 오래시."

"시상에 보름 넘는 몸살이 어데 있능교. 그라고 말임더, 그 신색 껌게 변해 가는 것 보이소. 그기 예사 병이 아닌 기라요."

"그려, 나도 얼굴 타들어가는 것 봄서 겁이 나는디......"

"그 연세도 있고, 그리 세월 가라 허고 있을 일이 아닌 기라요."

"글씨, 으찌야 쓸꼬?"

"문안만 댕기지 말고 병원에 가시게 하이소, 무신 병인지보톰 알아야 할 거 아닌교."

"그야 나가 진작에 말 안혔간디."

방영근은 혀를 찼다.

"그래, 머라카는데요?"

"옛날 노인네덜 허는 말 있덜 안트라고. 내 병언 나가 질로 잘 안다, 이러다가 나슬 거이다. 그럼서 병원 갈 꿈언 꾸도 안트란 말이시."

방영근은 또 혀를 찼다.

"그런다꼬 보고만 있으믄 우짜능교. 그 양반 돈 없애는 거 아까바서 그라는 긴데 옆에서들 밀고 끌어야제요."

얼굴을 찡그리며 남편을 올려다보는 방영근의 아내 눈길에 야속해하는 빛이 담겨 있었다.

방영근은 아내의 그런 마음을 이해했다. 아내는 중매를 섰던 구상배에게 늘 고마워하고 마음을 써왔던 것이다.

"그려, 당신 말도 틀린 말언 아니시. 중이 지 머리 못 깎는 법잉게."

방영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을 나섰다.

"오늘 일 못 나가는 일이 있드락캐도 병원 모시고 가이소.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는 일인 기라요."

방영근은 뒤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 말은 자신이 애써 덮고 있는 불길한 생각과 일치했던 것이다. 방영근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으로 병문안을 했다. 그런데 병세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 한 닷새 전쯤부터는 병원에 가보자고 권했었다. 그러나 구상배는 전혀 병원에 갈 기미가 없이 손을 내저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우격다짐으로라도 진작 병원을 찾아가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성님, 일어나셨능게라?"

방영근은 구상배의 집으로 들어서며 인기척을 냈다.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꽃들의 향내가 짙었다.

"아이고, 또 오시능기요. 일어나나마나 엊지녁에 한숨도 못 잤능기라요."

구상배의 아내가 마치 일러바치기라도 하듯 말했다.

"아니, 무신 일인디라? 아파서요?"

방영근은 놀라며 거푸 물었다.

"다른 일 있겄능교. 진작에 죤 아부지 말 듣고 병원 갔어야지예. 그리 잠 한숨 못 자놓고도 병원에넌 또 안 가겠다카이 무신 고집이 저리 황소고집이 있는지 모리겄능기라요."

구상배의 아내는 정말 일러바치고 있는 것이었다. 자기로서는 고집을 꺾을 수 없으니 병원에 좀 데려가 달라는 뜻이었다. 죤은 방영근의 큰아들 이름이었다. 미국 이름을 붙이고 싶어서 붙인 것이 아니었다. 학교를 보내려고 어쩔 수 없이 붙인 것이었다. 성은 몰라도 이름만은 미국식으로 하지 않으면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제일 흔해 빠진 죤으로 붙이고 말았다.

"성님, 잠 으쩌신게라?"

방영근은 누워있는 구상배 옆에 앉으며 그 몰골에 놀라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중병환자처럼 변해 있었던 것이다. 눈은 퀭했고 안색은 더 검푸르게 변해 있었으며 전신은 까부라져 있었다.

"멀라고 또 왔노......"

구상배의 목소리에는 힘이라고는 없었다.

"얼매나 아팠으먼 한숨도 못 지무셨소?"

"아이라, 기얀타."

"성님, 이러지 말고 오늘은 시상없어도 병원에 가십시다."

"또 그 소리가. 치아라."

구상배는 눈을 치뜨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나 기침이 터져 나오며 몸이 옆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기침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방영근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방으로 뛰어든 구상배의 아내가 울상이 되어 혀를 차고 있었다. 가까스로 기침을 잡은 구상배는 숨을 헐떡거리며 가슴을 붙안고 있었다. 수척하고 검푸른 얼굴에 열이 올라 병색은 더 짙어져 보였다.

"내사 마 환장해 죽겄구마는."

구상배의 아내가 답답해 죽겠다는 듯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성님, 지가 성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언 이 하와이 땅에 성님 한 분뿐인거 성님도 아시제라?"

방영근은 착잡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

구상배는 맥 풀린 눈으로 방영근을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성님, 지가 성님헌티 바래는 소원이 딱 한 가지가 있소. 성님언 어찌는지 몰라도 지넌 성님 없이넌 못산 게 두 분도 말고 딱 한 분만 병원에 가주씨요."

방영근의 말은 간절했다.

"치아라카이. 내 병 내가 다 안다 안카나!"

구상배는 또 눈을 치뜨며 벌컥 화를 냈다.

"그라다가 큰일 당하믄 우짜랄꼬 그라능교. 다 키워놓지도 몬한 새끼덜 생각해 보고 고집얼 피와도 피우이소."

구상배의 아내가 빠락 소리질렀다.

"저논으 에펜네가 머시라카노. 내 죽을까 봐서 겁난다 그 말이가? 택도 없다. 내사 해방돼서 고향땅 기 전에넌 죽어도 안 죽는다. 안글나, 나네?"

구상배는 방영근을 쳐다보았다. 그 눈에 언뜻 생기가 내비쳤다.

"하먼이라, 지가 성님 뫼시고 가야제라." 방영근은 콧날이 시큰해지는 걸 느끼며 구상배의 손을 잡고는, "성님, 그렁게 병원에 한 분만 가보시잔 말이어라. 병 맞히는 점쟁이 없고, 병에 장사 없단 말도 안 있등게라." 그는 사정하듯 달래듯 말했다.

"보래 동상, 우예 그리 내 말을 몬 알아듣노. 내사 마 그간에 그리 고상허고 살았어도 약 한 첩 안 묵은 강골인 기라. 이래 메칠 더 앓다가 발딱 일어날 끼니께네 아무 걱정 말그라. 내사 마 사주팔자에 아흔살 수 타고난 사람 아이가. 인자 그만 일이나 나가그라."

구상배는 웃음 지어가며 오히려 방영근의 마음을 돌리려고 들었다.

"야아, 잘 알겄구만이라. 성님이 의사 아닝게 벨 병이 아니란 성님 말언 믿을 것 없고, 돈이 아까와 그러시먼 즈그덜이 돈얼 다 댈 것이고, 아픈 양반 옆에 두고 몰른 칙허는 것언 사람 도리가 아닝게 우리가 오늘 전부 일얼 못 나가는 한이 있어도 성님얼 억지로 띠미고라도 병원에 갈 것이구만이라. 아칙 묵고 다 몰아올 것잉게 성님언 그리 알고만 기시씨요."

방영근은 제 할 말을 하고는 일어났다.

"보래, 동상 보래. 내 말 쫌 들어보라카이......"

구상배가 다급하게 불렀지만 방영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아침을 먹은 사람들이 방영근을 따라 다 구상배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일덜 안 나가고 와덜 이라노?"

구상배가 당혹스러운 눈길로 조원들을 둘러보았다.

"병원에 안 가시면 우리도 일 알나갈랍니다."

"병원에 모시고 갈라고 왔지요."

"사람 목심이 중허제 그까진 일이 무신 대수간디요."

"우리 일 나가게 할라카믄 병원 먼첨 가이소."

방영근은 입을 다물고 있었고, 사람들은 다투어 한마디씩 내놓았다.

"이 사람덜아, 와 그리 철이 없노. 일 안 나가먼 굶어죽는 것 모리나?"

"그것 아시는 양반이 병원 안 가면 아파죽는 것은 왜 모르시오. 자아, 여러 말 하지 말고 어서 병원으로 모셔갑시다."

이 말에 사람들이 모두 일어섰다.

"알 다, 알 다. 내 병원에 갈 끼니께네 뻐뜩 일덜 나가그라 그만."

구상배는 마침내 손을 들고 말았다. 열흘 가까이 되어서야 조사 결과가 나왔다. 구상배의 아내는 의사 앞에서 까무러치고 말았다.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 석 달 살기가 어렵다고 한 것이었다. 폐암이라고 했다. 그 결과에 이웃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방영근은 그날 밤 몸을 가눌 수 없도록 술을 마시고 꺼이꺼이 울었다. 구상배는 이틀을 더 있다가 퇴원을 했다. 그는 병이 다 낫기라도 한 것처럼 좋아했다. 이웃들도 밝은 얼굴로 그를 맞았다. 그 밝은 얼굴들은 그의 병을 절대 입에 올리지 않기로 약속한 결과였다. 오로지 그 혼자서만 자신의 병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방영근은 아침저녁으로 더 지성껏 병문안을 갔다. 날로 병이 깊어져 가고 있는 구상배를 속절없이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이 하와이땅에서 결국 이렇게 죽어가야 하는 것인가......

그 허망함과 서러움 또한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구상배가 바로 자신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가 요리 오래 누버 있어서 자네덜헌티 체면이 말이 아니구마는. 이 약이 신통하니께네 쪼매만 기둘리라. 내가 곧 일나갖고 곱 더 많이 일해 다 갚을 기구마는."

구상배가 병에 든 알약을 내보이며 말하고는 했다. 그러나 그 알약은 치료제가 아니라 진통제일 뿐이었다. 구상배는 그것을 점점 자주 먹고 있으면서도 통증이 가라앉는 것만으로 병이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었다.

"성님, 깝깝허시제라? 기운이 괜찮허먼 저짝 어디로 귀경이나 안 나가실라요? 하와이 풍광도 더러 볼 만헝게라."

방영근은 일요일이면 구상배와 함께 집을 나서고는 했다. 택시를 타고 여기저기 경치 좋은 데를 구경시켰다. 집 안에 갇혀 지내는 답답함을 면하게 해주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어차피 고향 땅에는 못 가는 형편에 뼈를 묻을 하와이나마 두루 눈에 익혀 정 붙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간에 일에 시달리고 궁색하게 살아오느라고 하와이인들 마음먹고 구경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동상, 조선이 어느 짝이고? 여게가 맞능강?"

커다란 바위 구멍으로 시간차를 두고 바닷물이 치솟는 신기한 구경을 하고 있던 구상배가 뚜벅 말했다.

"야아, 여그가 맞구만이라."

방영근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맞지러, 내 맘이 그리 씨이드마는......" 구상배는 한동안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발씨러 년 세월이고. 알고 보믄 이 하와이 섬이락카능 기 창살 없는 감옥이었능기라. 여게서 죽을 나이가 다 됐시니 우이하믄 좋노" 그는 착 까라진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방영근은 그만 가슴이 섬뜩해졌다. 이 양반이 자기 죽을 것을 알고 있나 싶었던 것이다.

"어디 하와이만 감옥이겄소. 왜놈덜 발 밑에서 사는 조선도 감옥이기넌 매일반이제라. 땅덜 다 뺏기고, 지 땅얼 도로 소작질히서 사는 판이라는디 그런 놈으 시상이 어디 사람 사는 시상이겄소. 거그에 비허먼 우리 신세가 훨썩 낫제라. 분허고 원통허지나 않은게라."

방영근은 일부러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리며 목청까지 높여서 말했다.

"그래, 그리 보믄 그렇기도 허제. 여그서나 거그서나 다 조선 백성으로 태인 기 죄라......" 구상배는 한숨을 푹 쉬고는, "보래, 중국캉 전쟁 붙은 거 우찌 돼가고 있능공? 새로 들은 소식 머 없나?" 그는 방영근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들으나마나 허구만이라. 들어먼 자꼬 천불만 일어난게라."

"? 왜놈덜이 이기는 기가?"

"야아, 뙤국놈덜도 참 빙신 팔푼이덜이랑게라. 조선이야 작은 게 당혔다고 혀도 중국이야 큰놈의 나라가 어찌 그 꼬라지 허고 자빠졌는지 모르겄당게요."

방영근은 침을 내뱉었다.

"그러기 말다. 중국이 조선 꼬라지 되믄 우리 조선 신세는 영영 글른 것 아이가?"

구상배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방영근은 문득 말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상심이 병을 더 덧나게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아니구만이라. 한인회 양반덜 허는 말이, 왜놈덜이 초장잉게 그리 나대고 까불대는 것이제 그리 쉽게 중국얼 묵지넌 못허고 됩데 당헐 것이라고 허드만이라. 중국이 원체로 땅도 널르고 사람도 많애서 왜놈덜이 조선 집어묵디끼 헐 도리가 없다는 것이제라. 욕심 많은 비암이 지 아가리 큰 것만 믿었제 몸통 작은 것언 몰르고 쪽제비 뒷다리 덜퍽 물었다가 됩데 지가 잡아믹히는 꼴이나 같제라."

언젠가 얼핏 들었던 말에다가 살을 붙이느라고 방영근은 애쓰고 있었다.

"그래, 그리 볼 수도 있겄네. 우째 그리라도 돼야 우리 숨통이 쪼매라도 티이덜 안컸나."

구상배가 어떤 희망을 갖고 싶은 듯 희미하게 웃었다.

"하먼이라, 꼭 그리 될 것이구만요. 여그서도 중국 사람덜 허는 것 보시게라. 겉보기로 게을르고 느려빠지는 것이 삼복 쇠붕알 늘어처지는디끼 험스로도 속으로넌 즈그덜찌리 똘똘 뭉쳐 돌아가는 것이 얼매나 지독시럽고 야무요. 촐싹기리기 잘허는 왜놈덜이 중국 사람덜 못 당허는 것이야 자명헌 이치구만이라."

방영근은 아주 자신만만하고 신바람 나게 말했다.

"자네가 틀리게 생각는 일이 벨라 는데, 자네가 그리 생각하믄 맞는 생각인 기라."

구상배는 좀더 밝아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수평선과 하늘이 맞닿아 있는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밀려든 파도가 바위 구멍으로 치솟아오르는 것을 무심히 내려다보며 방영근은 불현듯 끼쳐오는 냄새를 맡고 있었다. 어머니의 냄새였다.

하와이에 중일전쟁 소문이 퍼진 것은 한두 달 전이었다. 농장 사람들의 신경은 온통 그쪽으로 쏠려갔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내 더 풀이 죽었다. 그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 조선은 점점 더 일본의 발 밑에 밟히게 된다는 것을 알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문이 퍼진 뒤로 다른 소문들이 꼬리를 이었다. 하와이에서 중국 사람들과 일본사람들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부두에서 중국 노동자들이 일본 배에 불을 지르려다가 들켜 몰매를 맞았다고 하는가 하면, 어느 공사장에서는 두 나라 노동자들 수십명이 패싸움을 벌여 많이 다쳤다고 했고, 어느 날 밤에는 일본상점들의 유리창이 돌팔매질로 다 깨졌다고 하기도 했다. 그 뒤로도 더러 들려오는 소식은 조선사람들을 자꾸 우울하게 만들 뿐이었다. 일본이 계속 이기고 있다는 소식이었던 것이다.

"보래 동상, 저 낭구 보믄 생각나는 거 머 없나?"

구상배가 느린 턱짓을 했다.

"야자수낭구 말인게라?"

해변가 좁장한 모래밭에는 키 껑충한 야자수 네댓 그루가 바닷바람에 엉성한 잎들을 날리고 있었다.

"그래, 야자수......"

"있고말고라, 저놈으 것만 보먼 첨에 여그 하와이땅에 발 디딜 적 생각이 확 난당게라. 그 겁도 나고 걱정도 되고 허든 쇼상시런 맘에 저 얄궂게 생긴 것이 눈에 딱 들어오는디, 낭구도 아니고 멋도 아니고......, 그 맘얼 머시라고 히야 헐께라? 그때가 엊그제 겉은디 발써 30년이 넘게 흘러가부렀구만요. 참 세월무상이라등마 그 말이 똑 우리 놓고 생긴 것 겉으요. 성님언 저 낭구 보먼 무신 생각이 나시는디라?"

방영근은 서글프고 축축해진 마음으로 구상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내가 우에 동상 좋아허는지 아나? 언제고 내 맘얼 환히 아능기라. 나도 저 낭구만 보믄 그때 생각이 물큰물큰 난다 아이가. 우리 늙을 만도 하제, 33년이믄......"

퀭한 구상배의 눈에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그렇제라, 강산도 시 분썩이나 변헐 세월인디......"

"요새 와 이리 소나무가 보고 접노......"

구상배가 탄식처럼 말했다.

"소나무가요?......"

방영근은 또 가슴이 섬뜩해졌다. 죽음을 짐작하면서 그런 맘이 드는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래, 거 왜 우리 조선소나무 안 있나, 부우 틈새서 꼬불탕꼬불탕 꽤이고 비비틀리믄서도 장허디장허게 청청헌 소나무 말이다. 조선 소나무넌 향내도 좋고 바람소리도 좋고, 언제 봐도 변함없는 기 그 얼매나 좋드나. 그 소나무가 와 이리 보고 접는지 몰리겄다."

구상배의 눈에는 곧 흘러내릴 것처럼 눈물이 가득했고 목소리도 메어있었다. 방영근은 한겨울에 솨아아, 솨아아 불어대는 솔바람소리를 듣고 있었다.

"성님, 없는 소나무 그리워 말고 눈앞이 청청헌 자석덜얼 보시게라. 고것이 바로 성님이 하와이땅서 씨 뿌리고 키운 성님 소나문게요."

"머시라? 그 말 한분 기맥히데이."

구상배는 반색을 하며 손등으로 눈을 씩씩 문질렀다.

"자석덜 커난 것 보먼 세월이 무상헌 것만도 아니드만이라. 성님이나 지나 늦장개 들었는디도 자석들이 그리 커났응게요."

"맞다, 무상타령이사 영 깨닫기 글른 우리 중생덜 욕심 아니겄나. 우리 젊은 세월 자석덜이 내리 묵고 큰 것인께네." 구상배는 깊은 생각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쨌그나 자석덜언 애물인 기라." 그는 혀를 차며 한숨을 쉬었다.

"성님이사 애물인 자석이 어딨소. 다 끌끌허니 잘 컸고 효자 효년디."

"무신 소리 하노. 토마스 그 자석이 내 속얼 얼매나 태우노 말이다. 장남이라쿠는 기 뽁싱이 머꼬, 뽁싱이. 시상에 해묵고 살 짓이 없어 치고 박고 때리고 맞는 짓으로 나섰단 말가. 내사 마 그놈마가 장남만 아니락캐도 그리 속은 안 상헐 기라."

구상배는 콧구멍을 번가라 막아가며 코를 풀었다. 조선 땅을 떠난 지가 그 얼마인데도 총각 때 몸에 익힌 습관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성님, 성님 속상허는 것도 진작보톰 다 알고 있는디, 사람이 지 좋아서 허는 일언 다 지 팔자 타고나는 것 아니겄소. 토마스가 성님이 그리 말기는디도 기연시 뽁싱으로 나슨 것언 갸가 뱃속보톰 심 좋게 타고났고, 그 심으로 에랬을 적보톰 쌈 잘히서 그리 된 것 아니겄능게라. 사람언 지가 좋고, 지가 질로 잘헐 수 있는 일 허는 것이 질인디, 토마스넌 고것이 바로 뽁싱이단 말이요. 글고 여그넌 조선이 아니고 미국 아닌게라. 미국서 뽁싱 선수럴 얼마나 높게 쳐주요. 토마스도 그런 것꺼정 다 생각혔을 것이오. 조선사람으로 이름 날려 출세도 허고 돈도 버는 질로 빨른 질이 그것인 것얼 토마스가 어찌 몰랐을 것이오. 왜놈덜 뽁싱 혀서 때래눕히먼 얼매나 좋겄소. 그리 되먼 토마스가 이승만이 박용만이보담 더 유명해질 것이오. 우리 조선사람덜 분풀이럴 대신 혀주는 것잉게라. 그러니 나쁘게만 생각덜 마시란 말이오."

방영근은 그냥 귀에 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느 세월에 그리 된단 말이고."

구상배가 퉁명스럽게 쏴질렀다.

"아니 성님, 그 뽁싱장서 새로 시작헌 청년덜 중에 토마스가 질로 잘헌다는 말 듣지도 못허셨소?"

"아이고, 시장시럽네. 나 기운도 파허고 헌께네 그만 가세."

구상배가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참 바닷물도 징허게넌 푸르고 맑네."

방영근은 구상배를 부축하며 그 기색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방영근은 다음날 바로 토마스를 만났다.

"토마스야, 니 효도 한분 혀야 쓰겄다."

방영근이 대뜸 한 말이었다.

"예에?......"

토마스는 방영근을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구상배를 빼박은 얼굴이었다.

"무신 말인고 허니 말이여, 아부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니가 뽁싱시함에서 한 판 보기 좋게 이겨불란 말이다."

"아니, 그게 무슨 효도지요? 아버지는 제가 복싱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시는데요."

토마스는 더욱 알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영근은 마음이 급해 결론부터 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놈아, 아부지 속맘언 그렇덜 안혀. 기왕지사 시작헌 것잉게 니가 이름나고 장헌 선수가 되기럴 바래신단 말이여."

"에이, 아니에요. 어저씨가 잘못 아셨어요."

토마스는 거침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놈아, 나가 허는 말 똑똑허니 들어. 나가 어지께 아부지 모시고 바람 쐬러 나가서 니 이얘기럴 많이 혔다. 뽁싱 허는 것 마땅찮게 생각허덜 말고 기왕 시작헌 것잉게 잘되기럴 바래라고. 뽁싱도 잘허기만 험사 출세도 허고 돈도 버는 일이라고 알이여. 긍게로 잘허기나 허먼 좋겄다고 허셨단 말이다."

"아니, 그게 정말이에요?"

토마스는 눈이 휘둥글해졌다.

"이놈아, 이 아자씨가 머 묵겄다고 니헌티 거짓말얼 허겄냐. 긍게로 니넌 은제나 시함에 나스게 되겄냐?"

방영근은 토마스 옆으로 다가앉으며 침을 삼켰다.

"시함은 좀더 있다가 하게 될 거예요."

"얼매나?"

"아마......, 한 달쯤 더 있다가요."

"글먼 되았다. 그간에 똥줄 빠지게 연습 많이 혀갖고 꼭 이기도록 혀야 써. 그래야 아부지가 안심허고 눈감으실 것잉게. 알겄냐!"

"예에......"

토마스는 아랫입술을 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고 말이다, 니허고 싸우는 것이 왜놈이먼 참 좋겄는디. 어찌 그리헐 수넌 없겄지야?"

"그건 왜요?"

", 생각혀 봐. 니가 왜놈얼 보기 좋게 때래눕혀불먼 아부지 속이 얼매나 씨언해지겄냐. 니가 대신 아부지 원수 갚고, 한 풀어디리는 것인디. 글고 조선사람덜도 전부 얼매나 좋아라 허고. 거 머시냐, 왕얼 영어로 머시라고 허디냐?"

"킹이요."

"그려, ! 니가 바로 하와이 조선사람덜 킹이 되는 것이여!"

방영근은 엄지손가락까지 세워 보였다.

", 알겠어요. 관장님한테 그렇게 되게 부탁해 보겠어요."

"니 그리 알고 맘 단단허니 묵어라 잉."

방영근은 토마스의 어깨를 두들겼다.

", 열심히 하겠어요."

토마스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구상배의 병세는 나날이 나빠져 갔다. 기운이 없어서 일요일에 나들이도 못하게 될 형편이었다. 그즈음에사 구상배는 자기의 병이 나을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내가 죽을병이 든 기제?"

구상배는 불쑥 이런 말을 내놓고는 했다.

"무신 소리다요. 고상허고 산 사람덜 목심이 더 찔긴 것 몰르시요? 고상허고 산 사람덜 독기에 그런 병도 무서와 못 뎀비는 법이랑게라."

방영근은 과로움 속에서 이런 말로 위로하고는 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방영근은 토마스의 시함을 어서 열리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토마스는 맹훈련을 하느라고 해변의 모래밭을 아침저녁으로 뛴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토마스의 시합 날짜가 다가왔다.

"아저씨, 왜놈하고는 시합을 못 하게 됐어요. 이번 시합에는 출전하는 왜놈이 없거든요."

토마스가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방영근에게 한 말이었다.

"아니여, 맘쓰덜 말어. 기왕이먼 그렇다 그것이제 나슨 놈이 없응게 잘되았어. 그런 맘 쓰지 말고 흰둥이던 껌둥이던 이기기만 혀."

방영근은 돌덩이 같은 토마스의 주먹을 어루만졌다.

"성님, 토마스가 낼 시합얼 헌다는디 어쩌실랑게라?"

방영근은 구상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머시라? 어쩌기는 어쩌노. 아가 안 가믄 누가 갈 끼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구상배가 지체없이 한 말이었다. 방영근은 가슴이 쩡 울리는 것을 느꼈다. 어찌할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성님, 토마스가 맞는 것 보고도 괜찮허시겄소?"

"아무 걱정 말그라. 쌈에 안 맞고 허는 쌈이 어딨드노. 그놈마가 누구 탁했는지 아나? 젊었을 적 날 빼박았는 기라. 인자 허는 말이지만도 나도 젊었을 직에 쌈깨나 안했드나."

구상배는 소리까지 내며 근자에 볼 수 없었던 웃음을 환하게 웃었다.

"글안해도 성님 주먹 씬 것이야 알 사람 다 아요."

방영근도 오랜만에 홀가분한 웃음을 웃었다.

구상배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옮겨 업혀 가며 권투 시합장으로 갔다. 3회전씩 하는 경기의 네 번째가 토마스의 차례였다. 토마스의 상대는 백인이었다. 토마스는 어찌나 발이 빠르게 이쪽으로 뛰고 저쩍으로 뛰고 하는 지 백인을 놀리는 형국이었다. 토마스는 한 대 치고 옆으로 뛰고, 두 대 치고 뒤로 뛰고 하며 거의 맞지를 않았따.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두 주먹이 안 보일 정도로 난타를 해대고는 상대방을 붙들어버렸다.

"저놈마가 나보담 낫구마는."

1회전이 끝나자 구상배가 뚱하니 한 말이었다. 옆에 앉은 사람들이 소리 죽여 웃었다. 토마스는 2회전 중반쯤에 상대방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두 번째에는 더 일어나지 못하도록 완전히 때려눕히고 말았다. 구상배도 이웃사람들도 만만세를 불렀다. 다른 구경꾼들도 좋아서 야단법석이었다.

구상배는 권투시합이 끝나고 열여드레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웃 사람들은 정성 들여 꽃상여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상여가 나갈 때 그러는 것처럼 느리고 무거운 발걸음에 맞추어 서럽고 한스러운 가락으로 아리랑을 불렀다. 구상배를 보내고 돌아온 사람들은 조장으로 방영근을 뽑았다. 방영근은 슬픔 가득한 얼굴로 눈을 감을 채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17. 어디 계시옵니까

첫째,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한다.

둘째,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친애 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한다.

셋째,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하련,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한다.

일본말로 외워대는 계집아이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까지 울려 나오고 있었다. 텃밭가 거름더미에서 바지게에 거름을 옮겨 담고 있던 차득보는 느닷없이 울려 나오는 일본말에 쇠스랑질을 멈추었다.

첫째,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한다.

둘째, 우리......

계집아이는 더 또렷하고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다시 되풀이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니, 저런 못된 년이!"

차득보는 쇠스랑을 거름더미에 힘껏 찔러대며 내었다. 그는 그때서야 딸년이 되풀이해서 외워대는 것이 황국신민의 서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야이 연희야, 이년아!"

차득보는 버럭 고함을 질러대며 텃밭을 가로질러 내달았다. 그 바람에 거름더미 둘레에서 지렁이를 쪼고 있던 어미닭과 병아리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리고 마당가에서 조개껍데기로 흙장난을 하고 있던 사내아이가 겁 실린 눈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어찌 그러신게라?"

젖먹이를 업은 연희네도 부엌에서 황급히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연희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계속 외워대고 있었다.

"야 이년아 연희야, 당장 주딩이 닺지 못혀!"

차득보는 더 크게 고함을 지르며 토방으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곧 방으로 뛰어들어 딸을 요절낼 것 같은 기세였다.

"아이고메, 어째 이러시요. 저것 외는 것이 숙제라든디."

순간적으로 판세를 알아차린 연희네는 다급하게 남편을 붙들었고, 그때서야 방안의 연희 목소리도 뚝 끊어졌다.

"숙제고 지랄이고, 연희 이년 당장 나오니라."

차득보가 또 버럭 소리쳤다. 연희네는 남편이 무지하게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은 첫딸은 살림밑천이라며 연희를 여간 예뻐한 것이 아니었고, 이렇듯 욕을 한 일이라곤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편의 그런 심사를 모를 바도 아니었다. 왜놈들이라면 치를 떠는 남편인데 멋모르고 딸년이 다른 것도 아닌 황국신민의 서사를 소리 높여 외워댔으니 속이 뒤집힌 것은 당연했던 것이다. 옆걸음질을 치며 방에서 나오고 있는 연희의 눈에는 겁이 잔뜩 실려 있었고, 씰룩거리고 있는 입언저리에는 벌써 울음이 가득 몰려 있었다.

"지가 미리 그리 못허게 큭어야는디 그만 깜빡 혔구만이라. 다 지가 잘못혔구만요."

연희네는 자기가 먼저 뒤집어쓰고 나섰다.

"니 집구석에서 왜놈말 씨부릴라고 누가 갤치드냐!"

차득보는 눈을 부라리며 마룻장을 쳤다.

"선상님이 백분썩 외오라고 히서......"

몸을 움츠린 연희가 떨면서 말했다.

"근다고 소리소리 질러대, 그런 놈에 핵교 당장 때래치어라!"

"아이고메, 다시넌 못 그러게 허먼 되제......"

연희네는 남편에게 애원하는 눈으로 말했고, 연희는 제 엄마 옆으로 붙어서며 빼액 울음을 터뜨렸다.

"시끄럿!"

차득보는 소리치며 쌈지를 꺼냈다. 남편이 쌈지를 꺼내는 것을 보고 연희네는 남편의 감정이 한풀 꺾인 것을 느끼며 딸에게 재빨리 말했다.

"얼렁 울음 뚝 끄치고, 다시넌 안 그러겄다고 아부지헌티 빌어라. 그래야 핵교에 댕긴다."

연희는 얼른 울음을 그치며 눈물을 훔쳤다. 학교를 못다니게 된다는 것은 너무 서럽고 기막힌 일이었던 깃이다.

"아부지, 다시넌 안 그러겄구만이라우."

연희는 선생님 앞에서처럼 단정하게 서서 말했다.

"그려, 다시넌 집구석에서 왜놈말 입 뻥끗도 말어." 차득보는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왜 그런지 자네가 일러주소." 그는 아내에게 눈총을 쏘며 마당으로 내려섰다.

차득보는 가슴에 가득 찬 울화를 담배 연기로 푹푹 내뿜으며 다시 거름더미 쪽으로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철없는 딸년의 죄일 것이 없었다.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공부는 가르치지 않고 그따위 것이나 100번씩 외워오라고 시킨 선생이란 것들이 못돼먹은 인종들이었다. 그러나 또 선생들만 욕할 일도 아니었다. 선생들은 위에서 명령을 해대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왜놈들이 하는 모든 짓이 그렇듯 따지고 거슬러 올라가면 언제나 총독부에 가 닿았다.

동네마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놈의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게 닦달하기 시작한 것이 작년 10월 초순부터였다. 그와 함께 떠들어대기 시작한 말이 내선일체였다. 일본과 조선이 한덩어리가 되고, 조선사람이 일본사람과 똑같이 대접받으려면 그것을 반드시 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달달 외우지 못하면 일본을 반대하는 생각을 속에 품고 있는 것이니까 경찰소로 잡아간다고 으름장이었다. 참으로 갈수록 태산이었다. 여기저기 신사를 지어대느라고 한동안 시끌덤벙하게 돌아치고, 조선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말썽이 일어나고, 여러 지방에서 자진해서 학교 문을 닫았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니 지난달에는 전주에서 신흥학교와 기전학교가 신사 참배를 거부하면서 폐교를 하는 판이었다. 그런데 총독부에서는 한술 더 떠서 이제 민간인들한테까지 황국신민의 서사며 내선일체를 들이대고 있었다.

황국신민의 서사 외우기는 좀체로 잘되지 않았다. 그 짓이 억지 춘향이인데다가 꼭 일본말로 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마지못해 그저 따라 외우는 척만 할 뿐 돌아서면 욕이고 코방귀였다. 왜놈들은 농촌 사람들의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옷에 검정물을 들여 입으라고 그렇게 성화를 댔어도 여전히 흰옷 그대로였고, 양력설을 쇠라고 그리 으름장을 놓아도 끄떡하지 않고 음력 설을 쇠고, 상투를 자르라고 그렇게 귀찮게 굴어도 아직도 상투머리가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황국신민의 서사를 일본말로 외우라니 소귀에 경 읽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12월에 또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일본천황의 사진을 모든 학교마다 붙여놓고 학생들에게 신사참배하듯 하게 한 것이었다. 해가 바뀌고 봄이 되면서 차득보는골똘히 많이 생각했다. 딸년 연희를 그런 놈의 학교에 보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고민 때문이었다. 입학 수속 마감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차득보의 그런 속마음을 알게 된 그의 아내는 펄쩍 뛰었다. 한마디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느냐는 것이었다. 자신이 까막눈인 것을 한스러워하는 연희네로서는 딸을 학교에 안 보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 대목은 차득보도 별로 다를 것이 없어서 아내의 말을 들어주는 척 연희를 입학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이 못가 한다는 짓이 결국 구더기 장 망치는 짓이었던 것이다.

빌어묵을, 철없는 니가 무신 죄가 있냐. 다 나라 뺏긴 어런덜 죄제.

차득보는 담배꽁초를 내팽개치며 휴우 한숨을 내뿜었다. 샛노란 병아리 한 마리가 쪼르륵 달려와 파르스름한 연기 피워올리고 있는 담배꽁초를 거침없이 쪼았다. 다음 순간 병아리는 질겁을 해서 뒤로 물러서다가 작은 흙덩이에 걸려 발랑 넘어졌다. 더 놀란 병아리는 허둥지둥 일어서더니 뮈라고 삐약삐약 다급한 소리를 지르며 어미닭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다른 새끼들을 데리고 거름더미 아래를 헤집고 있는 어미 닭이 구르륵 꾸륵 목 안에서 굴리는 소리를 내며 얼른 날개를 내려 그 병아리를 감싸 안았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차득보는 짧게 혀를 차며 거름더미에 꽂힌 쇠스랑을 뽑아 들었다. 다시 쇠스랑질을 하는데 아까처럼 팔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어떻게 돌아가는 세상인지 도무지 가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왜놈들의 기세는 사나워지고 숨통이 조여드는 답답함은 심해지고 있었다. 3.1운동 때나 신간회 활동 시절이 꼭 꿈만 같았다. 중국하고 전쟁을 벌이면서 떠돌기 시작한 소문이 조선이 해방되기는 영영 틀렸다는 것이었다.

그 믿을 수 없는 소문이 정말인 것처럼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유승현 선생이 전향을 한 것이었다. 유승현 선생은 전향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향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유승현 선생도 군청에 드나드는 감투를 썼다. 유승현 선생이 전향을 하면서 그러잖아도 시들어가던 조직의 움직임은 정지되고 말았다. 그렇게 믿었던 유승현 선생까지 전향을 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정말 나라를 영영 되찾기는 틀려서 전향을 한 것인지, 공산주의 세상이라는 것을 이룰 가망이 없어서 전향을 한 것인지, 다시 감옥살이하게 된 것이 겁나 전향을 한 것인지, 그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에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것을 알아보자면 공허 스님 한 분뿐인데 어쩐 일인지 공허 스님은 소식이 감감했다. 하도 궁금해서 포교당을 한번 찾아가 보았지만 운봉 스님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심란스럽고 맥이 풀려 농사지을 기운도 나지 않았다.

차득보는 동생 옥녀를 생각하며 손바닥에 침을 튀겼다. 아무리 속상하고 맥풀리는 일이 있어도 옥녀가 논 장만해 준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다 잡히곤 했다. 옥녀는 밑도끝도없이 만주로 간다는 편지 한 장을 보낸 뒤로는 깜깜무소식이었다. 편지를 받고 바로 공허 스님한테 물어보았지만 오히려 공허 스님이 어떻게 된 일냐고 되물었던 것이다. 세상에 공허 스님이 모르는 일도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고, 그래서 옥녀가 만주로 떠난 것이 더욱 이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 어린 나이에 헤어져서도 끝끝내 다시 찾아온 옥녀였는데 장성한 나이에 하는 일이니 어련하랴 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차득보는 거름지게를 지고 고샅을 벗아났다.

"아리롱 아리롱 아라리요오, 아리롱 고개로오 아롱아롱 잘도나 넘어간다. ......"

"얼씨구나 조옷타아 지화자아 조옷타아, 빌어묵을 인생살이 술타령이 질이다......."

두 남자가 당산나무 아래서 늘어처지는 가락에 맞추어 춤인지 무엇인지 모르게 팔다리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이 사람덜아, 대낮보톰 요것이 무신 짓이여. 이디에 초상난 것도 아니겄고, 농새철 시작된 지가 은제라고."

차득보는 지겟작대기로 앉음돌을 치며 목청을 돋우었다.

", 누구라고, 인자 우리헌티넌 농새철이고 지랄이고 없네. 자작농인 자네나 좆빠지게 지게질험서 농새 잘 지묵소."

서막동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헤벌쭉하게 웃었다.

", 누가 공자님 말씸 허싱고 혔등마 자네 득보 아니라고, 그려, 자네나 어서 좆빠지고 새빠지게 농새길혀. 우리야 좆도 아닌 농새 엎어부렀응게."

주춘길이가 비틀거리고 팔을 내저으며 끄윽 트림을 했다.

"어허, 누가 듣는디 입 잠 점 허니 놀리고. 자네덜 무신 일 있제?"

차득보는 그들이 소작을 떼였으리라 생각하며 지게를 받쳤다.

"젖겉은 놈으 시상 좆겉다고 허고, 씹겉은 놈으 시상 쓰다고 허는디 머시가 점 코 안 점 코가 있어. 니미씨펄!"

"그려, 개좆만도 못헌 놈으 시상, 술 묵은 개라고 술취헌 짐에 욕허제 은제 욕허겄냐."

"자네덜 혹시 소작 띠인 것 아니여?"

차득보는 비틀거리는 두 사람을 붙들었다.

", 소오작? 고런 드런 놈에 것얼 띠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걷어 차부렀네."

"하먼, 야이 악독헌 김가놈아 니 에미 젯상에나 올려라 허고 우리가 보기 좋게 탁 걷어 차부렀다. 그것이시."

"이 사람덜아, 무신 소리 허능 것이여 시방?"

영 엉뚱한 소리라 차득보는 아무것도 짚이는 게 없어서 두 사람을 흔들었다.

"그려, 눈치빨른 자네도 영 땅짐얼 못허겄제? 그려, 그걸 것이여. 흐흐흐......"

"이 사람아, 우리가 얼매나 장헌 일얼 헌지 알고 잡제? 그려, 그럴 것이여. 우리가 말이여, 만주로 뜨기로 도장 콱 눌러불고 기분 쪼옷케 한 잔씩 걸쳐부렀단 말이시."

"아니, 이민 신청얼 혔다 그것이여?"

차득보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아, 대낮에 몽달이 귀신얼 본 것도 아니겄고, 멀 그리 놀래고 그려?"

"그려, 자작농이 우리 소작농덜 맘 알간디. 여그보담 더 살기 드러운 디넌 없을 것잉게 만주 가서 한판 보기로 젭구만, 어찐가, 잘 큭제?"

"그려, 술덜 걸칠 만허시."

차득보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자네 술 한잔 안 살랑가? 우리허고 이별이 얼매 안 남었는디."

"그려, 술 한잔 사소. 미운정 고운 정 다 듬서 산 우리덜 아니라고?"

"그러제, 술 사야제. 이따가 보세."

차득보는 스산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지난달 3월부터 시작된 두 번째 만주 이민 바람은 지금 한창이었다. 그 바람은 작년 3월에 불었던 첫 번째보다 한결 더 거셌다. 이장은 물론이고 면직원들까지 나서서 바람잡이로 설쳐댔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지주들도 표나지 않게 그 일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쉽게 모집하게 하려고 마음에 안 드는 소작인들의 소작을 떼버린다고 했다. 갑자기 소작논을 잃은 소작인들은 살길을 찾아 만주 이민을 신청하기 십상이었다.

차득보는 거름지게가 턱없이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서막동과 주춘길이가 이민 신청을 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세상은 참으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소작살이가 어렵기는 했지만 세상은 참으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소작살이가 어렵기는 했지만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들 만주로 떠나면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선전하는 대로 된다고 한들 왜놈들이 데려가는 것인데 꼼짝없이 왜놈들의 종살이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선전을 다 믿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왜놈들이 속이고 거짓말한 것이 어디 한두 가지던가. 그러나 소작농들로서는 그 말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차득보가 맥이 빠지고 심란스러운 이유는 딴 데 있었다. 소작인들이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전처럼 의지할 데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었다. 신간회가 활동할 때만 해도 소작인들은 소작료 인상을 걱정하지 않았다. 대규모로 소작쟁의를 일으키면 조선 지주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동척까지도 소작료를 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신간회가 없어지고도 사회주의 운동이 계속될 때까지는 역시 대규모 소작쟁의로 소작료 인상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사회주의자들이 무더기로 잡혀 들어가기 시작하고, 사회주의 운동이  르 죽이게 되면서 소작쟁이도 대규모로 일으킬 수 없게 되었다. 그때부터 소작인들은 믿을 데가 없어지고 말았다. 지주들이 소작료를 올려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소작쟁의를 일으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한 동네 정도가 소규모로 일으키는 것으로는 지주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작료는 5할을 넘어 6, 7학로 올라도 소작인들은 당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벌써 몇 년이었다. 그런데 유승현 선생 같은 분마저 전향을 해버리니 소작인들은 아무 가망 없이 적막강산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7할씩 소작료를 뜯기고 배곯고 사느니 소작인들은 행여나 해서 만주로 이민을 떠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시절은 이제 다시는 안 오는 것인가......

그나마 신간회 시절을 그리워하는 차득보의 가슴은 허전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이틀 동안 거름을 다 낸 차득보는 아무래도 이상해서 포교당을 다시 찾아가 보기로 했다. 공허 스님 꿈을 꾸었는데 너무 불길했던 것이다. 온몸에 피투성이인 스님이 사립을 들어서다 픽 쓰러졌던 것이다. 전에도 서너 번 꿈을 꾸었는데 그때마다 스님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스님 같으신 분이 무슨 변을 당했을 리가 없다고, 걱정을 하니까 그런 꿈을 꾸게 되는 거라고, 좋은 꿈을 꾸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포교당을 가는 길목 어느 기와집 가까이에서 차득보는 걸음을 멈추었다. 예닐곱 명의 농부들이 대문 앞에서 뭐라고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차득보는 그것이 소작쟁의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소작을 떼인 사람들끼리 그렇게 모인 것이었다. 근년에 들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대규모 소작쟁의가 사라지면서 그렇게 변한 것이었다. 몇백 명, 몇천 명이 모였던 것에 비하면 그 소작쟁의는 초라하고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소작쟁의라기보다는 소작을 다시 부치게 해달라고 애걸하러 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들 앞에 굳게 닫힌 대문은 열릴 것 같지가 않았다. 차득보는 자신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또 느끼며 가슴에서 찬바람이 일고 있었다. 차득보는 그들을 보기가 민망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른 길로 방향을 바꾸었다.

차득보의 그런 관찰과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도소작관회의에서는 조선토지령 실시 이후 소작쟁의 양상이 단체쟁의에서 개인쟁의로, 소작료 감면보다는 소작권 확보 목적으로 변했다고 총독부에 보고한 것이 신문에 보도되고 있었다.

"시님, 공허 시님 소식이 궁금히서......"

차득보는 운봉 앞에 합장을 했다.

", 여적 무소식이구만요."

운봉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 얼굴에도 근심이 가득했다.

"너무 오래 소식이 없으신디......, 어찌 알아볼 방도넌 없능게라우?"

차득보의 말은 조심스러웠다.

"글씨요...... 그것얼 어째해야 헐란지......"

운봉은 차득보의 말을 책망으로 듣고 있었다. 공허 스님과 차득보의 남다른 인연을 알기 때문이었다. 운봉은 이런 대면을 할 때마다 입장이 얼마나 옹색하고 곤궁한지 몰랐다. 홍씨가 찾아왔을 때도 그랬고, 오삼봉의 어머니를 대할 때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자꼬 꿈이 얄궂어서......"

말이 씨 되더라고 차마 꿈이야기를 다 털어놓지는 못하고 차득보는 이렇게 어물거렸다.

"만주서 자리잡기로 허신 것인지 어쩐지......, 소승도 맘이 안 좋아 어찌 알아볼 방도럴 찾고 있구만요."

운봉은 홍씨와 오삼봉의 어머니에게 한 말을 그대로 했다. 그러나 몸이 달 뿐 뾰족한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공허 스님은 당신이 하는 일은 모두 비밀로 해왔듯 오삼봉을 데리고 가면서도 어디로 간다는 것을 한마디도 흘려놓지 않았던 것이다.

"만주서 자리잡으셨으먼 하매 무신 소식이 있어도 있지럴 안혔겄능게라."

", 그렇기도 허고......, 시님이 원체로 넘몰르게 허시는 일이 많으신게 안 알릴 수도 있고......, 그렇구만요."

"야아, 그렇기도 허제라."

차득보는 더 할말이 없었다. 괜히 운봉 스님을 괴롭히는 것 같은 면구스러운 생각도 들어 그만 일어섰다.

"여그 기시든 분은 어디 가셨능게라?"

차득보는 아까부터 손판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마당을 걸어나오면서 두리번거렸다.

", 손 영감님 말인게라? 이리로 떠나셨구만요."

"이리여라? 아조 떠나셨능게라?"

차득보는 문득 서운한 생각이 들어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아덜이 양복 재단 기술자로 내래와 돈바 이럴 잘히서 모셔갔구만요. 그 양반 말년이 아조 잘 풀리셨제라."

운봉의 얼굴에 밝은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야아, 그런 아덜이 있었구만이라."

차득보는 처음 듣는 그 이야기에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공허 스님한테 옛날 의병에 나섰던 분이라는 한마디를 듣고 마음속으로 높게 보았고, 처자가 없는 홀몸이라 포교당에 의탁한 줄 알고 더욱 안쓰러운 정이 갔었던 것이다.

", 아덜이 아조 효자드만이라."

"참 잘되섰구만요. 장허신 어런 말년이 편케 되야서."

차득보는 진정을 표하며 운봉에게 합장을 했다.

"또 걸음 허시게라."

운봉은 대문 밖까지 배웅했다. 담 너머까지 풍성한 가지들을 걸쳐 수많은 꽃망울을 달고 있는 수국 아래서 운봉은 차득보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차득보의 걸음은 느렸고 어깨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운봉은 차득보가 그리 변한 것을 비밀리에 이어져 오던 사회주의 운동이 그나마 끊겨버린데다 공허 스님마저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것으로 짐작했다. 특히 차득보는 공허 스님을 부모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운봉은 멀어져 가는 차득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또 한 사람 홍씨를 생각하고 있었다. 홍씨는 공허 스님 소식 때문에 그동안 벌써 세 번이나 다녀갔던 것이다. 홍씨는 엊그제 왔을 때는 눈물까지 보였었다.

"저어......, 그간에 말씸얼 못 디린 것인디......, 어찌 그리 자꼬 꿈자리가 사나운지......"

홍씨는 몹시도 주저하고 조심하며 이 말을 꺼내놓았었다. 운봉은 그 순간 이상하게 짚이는 것이 있었다. 자꾸 꿈을 꿀 정도라면 예사 사이가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세 번씩이나 찾아온 것으로 연결되었다. 공허 스님이 한가롭게 앉아 대중설법을 하는 승려도 아닌데 신도가 그리 열성으로 안부를 걱정할 만큼 인연이 깊어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홍씨는 또 뜻밖의 말을 했다.

"시님 기둘리다가 우리 동걸이 상급핵교 가는 절기도 지내불고......"

홍씨가 애달아 하며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듣는 순간 운봉의 머리를 스치는 또 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럼 동걸이가 공허 스님 자식이란 말인가!

그러나 운봉은 놀라지 않았다. 그건 다만 깨달음일 뿐이었다. 다른 승려라면 몰라도 공허 스님의 경우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고, 또 흠일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봉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건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고, 물어보아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짐작이 그러면 짐작으로 족했고, 만일 사실이 그렇더라도 덮어야 할 일이었다.

"어디로 찾아 나설 수도 없고, 시님께서 무사허셔야 헐 것인디......"

홍씨는 끝내 눈물까지 보였다. 운봉은 홍씨와 공허 스님과의 관계를 알아차렸다. 여자의 눈물이 흔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아무 관계에서나 내비칠 수 없는 것이 여자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보살님, 아무 걱정 마시고 쬐계 더 기둘리시게라우. 소승이 백방으로 알아보겄구만요."

운봉은 이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야아......, 시님이 평상 고상만 허셨는디......"

홍씨는 눈물을 보인 것이 실수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리고 서둘러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이 운봉의 눈에는 옛날 혼자서 탑돌이를 하던 때보다 더 외롭게 보였다. 그때의 젊음은 다 사위어지고 없었지만 조신한 몸가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 홍씨의 모습이 더없이 측은하기만 했다. 운봉은 홍씨가 돌아가고 나서 혼자 법당 가운데 앉아 오래도록 부처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만 무거울 뿐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홍씨 못지않게 무게로 가슴에 얹히는 돌이 오삼봉의 어머니였다.

"부처님, 이 미련헌 놈이 한 분만 현몽허게 히주십소사......"

운봉은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빌고 있었다. 오삼봉의 어머니는 공허 스님 소식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처 문제 해결이 또 하나의 짐이 되어 있었다. 오삼봉의 어머니는 벌써 몇 달 전부터 거처를 옮기기를 바라고 있었다. 혼자도 아니면서 더는 절밥을 축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모녀가 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해내 공밥을 먹는 것이 아니면서도 눈칫밥이기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눈칫밥에 살 오르는 일 없더라고 그 옹색한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삼봉의 어머니는 군산에 두고 온 가게를 처분해 어딘가 안전한 곳에 가서 살기를 원했다. 그건 손쉽게 해결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운봉은 그 일을 해결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일은 꼬이기 시작했다. 그 가게를 지키고 있던 딸과 사위가 주인을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나가 경찰서에 끌려가 얼매나 매타작당헌지 알기나 허요? 그 고상헌 것에 비허먼 이까진 가게넌 너무 싸요."

핏대를 올린 사위의 말이었다.

"음마, 엄니도 참 뻔뻔허시요 이. 가게 내뿔고 도망갈 적은 언제고 인자 와서 처분해 가겄다는 것언 무신 염치다요. 나가 경찰서서 당헌 낏언 치지 않드라도 애 아범이 그리 당젭는디 요것 홀랑 팔아갖고 가불먼 나넌 무신 낯짝 들고 살아지겄소. 사우넌 백년손이드라고, 사우 그리 못헐 일 시켰응게 요런 가게 한나 넘게주는 것이야 당연지사제라."

남편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나선 딸의 말이었다. 운봉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탐욕이 만고의 근원이라는 부처님의 말씀만 생생해질 뿐이었다. 운봉은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사위와 딸이 했던 말을 오삼봉의 어머니에게 그대로 전했다.

"그것덜 순 도적놈 도적년 아니여."

옆에 앉아 있던 작은딸이 부르르 성질을 내며 소리쳤다.

"아서! 시님 앞이서 그 무신 쌍소리여."

오삼봉의 어머니는 찬바람 끼치게 딸을 엄하게 꾸짖었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더니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작은딸은 분을 못 삭여 숨을 씩씩거리고 있었다. 오삼봉의 어머니는 고개를 떨군 채 말을 시작했다.

"지가 생각이 짧었구만요. 갸덜이 그런 승헌 일 당헐지럴 못 생각혔으니. 갸덜 말이 백분 맞구만이라. 갸덜이 그리 말허기 전에 미리 줬어야 헤미 도리였을구만이라. 지 맘언 똑 그리허고 잡혔으라, 지가 인자 나이 들고 자석이 또 한나 딸렸응게, 이 자석 없이 혼자 몸임사 무신 짓이고 험서 살 수가 있는디, 이 자석이 딸렸응게 그 가게러 갸덜허고 반반씩 허는 것이 어쩔랑가 모르겄구만요. 시님께서 새중간서 옹색시러우시드라도 어찌 한 분 더 걸음 해주시먼......"

오삼봉의 어머니가 아주 힘겨웁게 한 말이었다.

", 그리허겄구만이라."

운봉은 오삼봉의 어머니가 작은딸만 없었다면 정말 그 가게를 큰딸이 원하는 대로 해버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이고, 코딱지마헌 점방 푼이나 나간다고 반타작허고 머허고 혀라."

큰딸은 지난번보다 더 기세를 올렸다. 그동안에 탐욕이 더 커졌음을 운봉은 느끼고 있었다.

"어무님이 그리 말씸허시는디 우리가 어찌 거역허겄능게라. 글먼 그리허기로 허고, 점방이 엿 할 가락도 아니고 눈깔사탕 한 개도 아닝게 처분허자먼 하로이틀로 안될 것이구만이라. 말이 오가고 처분될 기미가 있으먼 시님헌티 기별디리겄구만요."

사위가 선선하게 말했다. 운봉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난번 느낌으로는 가게를 먼저 탐낸 건 사위 같았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태도가 바뀌어 일이 쉽게 풀린다 싶었던 것이다. 운봉은 큰딸의 말은 빼고 사위의 말만 오삼봉의 어머니에게 전했다.

"야아, 그 사람 맘이 고맙구마요, 고맙구만요......"

오삼봉의 어머니가 낮은 소리로 한 말이었다.

", 고맙기넌 머시가 고마와. 순 도적놈 심뽀제. 언니 그것이 더 도적년이여."

작은딸은 분을 못 참고 또 욕을 해댔다.

"니 참말로!"

오삼봉의 어머니가 칼날처럼 꾸짖었다. 운봉은 차득보가 사라지고 없는 들길에서 눈을 거두며 그 소식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 벌써 한 달이 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한 달이라니?......

마당으로 들어서며 운봉은 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 조그만 가게를 처분하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운봉은 내일이라도 한번 가봐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운봉은 이튿날 일찍 군산 걸음을 나섰다. 김제에서 군산으로 뻗은 넓은 신작로에는 여전히 쌀가마니를 가득가득 실은 달구지들이 느리게 굴러가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소나무 껍질을  기다가 법을 어겼다고 잡혀가는 춘궁기인데도 배에 실려 나갈 쌀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운봉은 그 쌀가마니들을 보며 더욱 배불러지는 지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과 전쟁이 벌어지면서 살판난 사람들은 지주들이었다. 쌀값이 마구 치솟고 있었던 것이다. 가게로 들어서려던 운봉은 주춤했다. 가게에는 낯모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쥔 안 기신게라?"

"나가 쥔인디, 으째 그요?"

시주를 하라고 할까 봐 그러는지 그 남자는 아주 불퉁스러웠다. 운봉은 아차 싶었다. 사위의 얼굴과 함께 그 선선하던 말이 번쩍 떠올랐다.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어 머시냐......, 그전 쥔허고 아는 사인디, 요것얼 은제......"

"보름 넘었소."

"혹시 어디로 갔는......"

"몰르겄소, 군산얼 뜬다고만 혔응게."

주인은 귀찮다는 듯 운봉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내쏘고는 했다. 운봉은 가게 거래액을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그 남자의 태도로 보아 엇나가는 소리나 들을 것 같았고, 그 액수를 안다고 해도 사람이 없어져 버린 마당에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잘 알었구만요. 장사 잘허시게라."

운봉은 합장을 하고 돌아섰다. 주인은 그때서야 좀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어물어물했다. 운봉은 길가에 망연히 서 있었다. 어이없다고 할 수도 없고 기막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인간사 고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그저 가슴 절절해지고 있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이런 짓을 하다니, 탐욕이란 이다지도 무서운 것인가 하는 생각이 새삼스러워지고,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는 회의와 함께 절망이 앞을 가로막았다. 운봉은 오삼봉의 어머니를 만나기가 겁났다. 도저히 그 사실을 전할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아들의 생사 걱정으로 애가 타고, 거기다가 눈칫밥 먹는 나날이 바늘방석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면 어찌 될 것인가. 운봉은 모녀의 거취 문제는 이제 자신에게 맡겨진 짐이라고 느꼈다. 공허 스님의 뒤를 따르기로 한 이상 그 짐은 당연히 자신이 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난처한 것이 있었다. 포교당으로 옮길 수 없다는 점이었다. 경찰에서 오삼봉 체포를 포기했을 리가 없고, 군산과 김제는 너무 가까웠던 것이다. 일단 그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기로 작정하자 운봉은 마음이 다소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끝도 없는 미궁인 한 그 사위와 딸을 한시바삐 마음에서 내몰아 잊어버리고 싶었다.

운봉은 봄기운 짙게 밴 들길을 걸어 포교당으로 돌아가며 또 공허 스님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늦어야 한 달, 더 늦어야 두 달이면 돌아왔어야 했다. 아니, 중도에서 다른 어떤 일을 보고 온다고 해도 석 달이면 돌아왔어야 했다. 그런데 벌써 반년을 넘어 열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만주에서 일을 하기로 한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만약 그랬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진작 연락이 왔을 것이다. 당신이 돌아오기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오삼봉의 어머니를 잊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무슨 변을 당한 것일까? 홍시도 차득보도 꿈자리가 사납다며 걱정이었다. 꿈자리가 사납다면 무슨 꿈이었을까? 공허 스님이 돌아가신 꿈이었을까? 그건 서로 발설하지도 묻지도 않았지만 그런 꿈일 것이 거의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서 자신은 꿈을 꾸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 그들보다 공허 스님한테 정이 약하고 관심이 적어서인가? 글쎄, 과연 그럴까? 비구끼리의 인연은 인연이 아닌 것인가? 아니, 그들의 마음이 중보다 사삭스러워서 그러는 건 아닐까. 아니지, 그까짓 것은 문제가 아니지. 정말 공허 스님이 변을 당해 돌아가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걸 확인해야 하는데 확인할 길이 없는 것이다. 오삼봉의 어머니조차 자기 형제들이 사는 곳을 모르고 있었다. 만주를 가자 해도 찾아가 볼 곳이 없었다. 홍씨에게도 차득보에게도 만날 때마다 백방으로 알아보겠다고는 했지만 그건 자신의 마음일 뿐이었다. 운봉은 도 여기서 생각이 막히고 말았다. 몸이 비비꼬이도록 안타깝기만 했다. 운봉은 돈 마련할 궁리로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오삼봉의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 그만한 가게를 차릴 수 있는 돈을 장만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차득보가 다시 찾아왔다.

"시님, 지가 만주를 찾어가 볼 디럴 알아냈구만이라."

차득보는 흥분되어 있었다.

"아니, 세세허니 말 잠 히보시오."

운봉이 놀라며 차득보를 붙들어 앉혔다.

"야아, 지가 공허 시님허고 친허신 신세호 선상이란 어런얼 잘 아능구만요. 곰곰 생각허다봉게 그 어런이 공허 시님이 만주 가시는 디럴 알라지도 모른다 싶드랑게라. 그래 찾어가서 공허 시님 일얼 다 말씸디리고 마주 가시는 디럴 아시냐고 여쭤 구만요. 그런디 그 어런도 몰르시고, 그 어런 사우가 만주에 댕게온 일이 있는디, 거그가 공허 시님이 찾어가실 만헌 디라등마요. 긍게 그 어런 말씸이 경성으로 사우럴 찾아가서 세세허니 알아보람서 편지꺼정 써주시드랑게라."

차득보는 조끼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운봉에게 불쑥 내밀었다.

", 이건 지체헐 일이 아니라 바로 올라가야 헐 일이구만요."

편지를 받아든 운봉도 흥분기를 감추지 못했다.

"하먼이라. 저도 마누래헌티 채비허라고 혔응게 시님도 만주꺼정 가실 채비럴 허시게라우."

"아니, 만주꺼정 가실라고요?"

"하먼, 가야제라!"

차득보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농새철이 되았는디......"

"시방 농새가 문제간디라. 농새야 놉 사서 부치먼 되고, 또 일년 농새 망친다고 대수간디요. 근디, 지허고 항께 가는 것이 싫으신게라?"

", , 아니구만요. 순전히 농새 걱정 땀시 그렇제 소승도 초행길에 항께 가먼 얼매나 심이 되겄소. 당최 그런 말씸 마시게라."

운봉은 펄쩍 뛰었다.

"알겄구만이라. 공허 시님 일인디 농새야 뒷전이제라. 댕게와도 보름이먼 뒤집어쓸 것잉게 그간에 망칠 농새도 없구만요."

차득보의 목소리가 축축해지고 있었다. 운봉과 차득보는 이튿날 서울로 올라갔다. 물어물어 송중원의 잡지사를 찾아갔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어요?"

운봉의 말을 듣고 난 송중원은 너무 놀랐다.

", 공허 스님은 십중팔구 제가 다녀온 것으로 가셨을 겁니다. 거기 가면 무슨 소식을 알 수 있겠지요."

송중원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차득보는 제대로 찾아왔다는 반가움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느끼고 있었다. 그곳에 찾아가서 좋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될까 봐 겁이 나는 것이었다. 운봉의 마음도 차득보와 다를 것이 없었다.

"만주는 언제 가실 건가요?"

장인의 편지를 옆으로 치우며 송중원이 운봉을 쳐다보았다.

"예에, 이 질로 바로 갈라고 다 채비혀 갖고 왔구만이라."

", 그게 좋겠지요. 너무 늦었는데 하루라도 빨리 가봐야지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제가 간략하게 편지를 써드릴 테니까."

송중원은 책상으로 옮겨 앉았다. 경찰의 조사에 걸리지 않도록 편지 문구를 생각하며 송중원은 공허 스님한테 필경 무슨 탈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 오래도록 소식이 없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무슨 탈을 당했던 어딘가에 살아 계시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혹시 기차에서 조사를 받으면 여기 적힌 대로 가는 곳을 대고, 만주가 살 만한지 친척 집에 찾아가는 길이라고 말하세요. 요새 왜놈들은 조선사람들이 만주로 옮겨가는 것을 아주 좋아하니까요. 그리고 기차 안에는 밀정들도 많고 왜놈 순사들도 조선말을 다 알아들으니까 입 조심하구요."

송중원의 편지를 내밀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기차를 바꿔 타는 것이며 마차 역 같은 데까지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제 집으로 모셔야겠지만 집이 누추하고, 내일 일찍 떠나시자면 역에서도 너무 멀고 그렇습니다. 그저 여기서 하룻밤 주무십시오."

두 사람에게 저녁을 대접한 송중원은 여관까지 잡아주었다. 공허 스님의 행적을 찾아가는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든 주고 싶었던 것이다. 송중원의 뇌리에는 공허 스님의 울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아버지의 뼛가루를 만주벌판에 뿌렸다는 대목에서 공허 스님은 기어이 눈물을 떨구었다. 번히 뜬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울음을 참아내느라고 입에서는 헉헉 하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송중원으로서는 공허 스님이 우는 것도 충격이었고, 진정한 남자의 울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것도 충격이었다.

"그려, 그 어런 뜻얼 헛되게 허지 말어야제."

장삼자락으로 눈물을 훔치고 몸가짐을 단정히 한 공허 스님의 한마디였다.

"다녀오는 길로 저한테 꼭 연락해 주시구요."

송중원은 이 당부를 남기고 여관을 떠났다.

"참 너무 과만허니 잘 해주시는구만이라 이."

자리를 잡고 앉으며 차득보가 말했다.

", 그것이 다 공허 시님이 쌓아둔 음덕 아니겄능가요."

운봉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제라, 시님이야 덕만 베풀고 사시는 어런이싱게."

차득보의 머릿속에서는 공허 스님이 자기를 돌보아준 숱한 일들이 빠르게 스쳐 가고 있었다. 차득보는 담배를 말아 불을 붙이며 동생 옥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만주를 간 것인지......, 혹시 공허 스님과 연관된 것은 아닌지......, 왜 여지껏 아무 연락도 없는 것인지......, 생각할수록 의문만 커질 뿐이었다. 이번 길에 어쩌면 옥녀 소식도 알게 될지 모른다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운봉과 차득보는 나흘 만에 지삼출네 동네에 당도했다. 길림 주변의 평야 지대까지는 동북항일연군의 세력이 미치지 않아 그 동네는 집단부락 신세를 면해 있었다. 동네사람들이 운봉과 차득보를 에워쌌다. 공허 스님을 찾으러 왔다는 말에 모두들 놀란 것이었다. 운봉은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연유를 차근차근 이야기해 나갔다.

", 탈났네! 시님언 안 오셨는디."

지삼출이 탄식처럼 토해낸 말이었다. 둘러앉은 사람들도 모두 근심스럽고 어두운 얼굴들이었다. 운봉과 차득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은 듯 앉아 있었다. 방안은 얼어붙고 있었다.

", 글먼......, 시님언 어찌 되셨을게라?"

운봉은 말을 더듬었다. 아무도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 만에 지삼출이 입을 열었다.

"입에 못 담을 말인디......, 시님언 이 시상 사람이기가 에롭소."

지삼출의 침통한 말이 운봉과 차득보의 가슴을 치고 있었다. 다음날 동네사람들은 차득보가 명창 옥비의 오빠라는 것에 놀랐다. 차득보가 어느 여자에게 그저 지나가는 말로 동생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놀란 것은 차득보였다. 동생이 만주로 온 까닭도 그렇고, 또 그 남자를 따라 싸움터로 뛰어든 것도 너무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그 상대가 신세호 선생의 사돈네 총각이라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 그러나 차득보는 동생이 자기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만주를 떠나고 있었다. 연모하는 사람을 찾아 만주까지 와서 뜻을 이룬 것도 그렇고, 목숨 내걸고 싸움터로 뛰어든 것도 그랬다.

 

 

18. 위장전향

"음마, 움마, 소쿠리럴 그리 대먼 쓰간디,더 옆으로 틀어, 더 쩌쩌쩌, 다 옆으로 새나간다. 물질 봐감서 소쿠리 대여."

"얼랴, 얼랴, 토하 한두 번 뜨간디 손이 저리 헛돌고 그런댜, 자네 시방 무슨 생각하고 있는겨!"

"생각언 무슨 생각, 간밤에 서방 폼에서 마디마디 찌릿찌릿하고 두리둥실 숨 꼴딱 넘어가든 그 꿀맛에 취해 있는 것이제."

"옳여! 아까 아칙에 봉게 강샌 지게 진 사지가 오뉴월 엿가락맨치로마 축 늘어졌드라."

"그려 그려, 저사람 필경 호시럴 타도 지독시리 탄 것이구만."

"하먼, 강샌 그 코럴 보소, 호시럴 태웠단 하면 배꼽이 툭 불거지게."

"아이고메, 애맨 사람 잡덜 말어, 그것 귀경 못헌지가 닷새도 넘었응게."

"워메, 워메 저 말하는 것 잠 보소, 누구넌 보름도 맛 못보고 사는 디 이 삼복 염천에 닷새 갖고 저 발광이시."

"하이고, 보름씩이나 넴기는 것이 뉘 집 물건이다냐, 엿이나 바꽈묵어야 쓰겻다."

"실답잖은 소리 허덜 말어, 엿장시 눈에단 명씨백였간디, 고런 물건언 삶어서 된장 발러놔도 개도 안 물어가."

"하이고 장난소리 되게 한다. 퇴깽이하고 개가 허능 것 보지도 못혔는감? 자주 방정떰서 퇴깽이씹허먼 멀혀, 밑만 추지게 맹글어놓게. 배고프다 싶을 적에 떠억허니 일어나서 개 안 부럽게 진득하니 혀주는 것이 진짜배기제."

"아이고 염병한다. 그 맛에 도통해부렀네 이."

"이 사람덜아, 날 푹푹 쪄대는디 맘 싱숭생숭허니 맨글지 말어."

"아니, 과부니 걱정이여 냄편이 펫병쟁이니 걱정이여, 황소 곁은 냄편요렇타께 두고."

"그려, 잘 되았네, 시방보톰 짠뜩짠득허니 풀 먹여갖고 밤 되기 무섭게 냄편 홀라당 홀겨붙드라고."

"하먼, 고것 좋제 한바탕 땀 쫙 뽑고 나서 늘어져 삐딱하니 찌운 은하수럴 보먼 낮에 이리 욕본 것도 봄눈 녹디끼 사르르르 풀리고 잠언 또 얼매냐 달디다냔 말이여."

"하이고, 그 맛에 미치다가 남정네 삭신 녹아내는 것언 한 생각혀고? 낮에 소금 땀 쏟고 밤에 피땀 쏟게 허고."

"얼라 유식이 탈이여, 여름 방사 보약이고 겨울 방사 비상이란 말도 모르는감!"

"이아고 주둥이덜 그만 놀려, 조상님네들이 욕허시겄다."

"요런 빌어먹을 일 험스르 음담도 안허먼 사람 복장 터져 죽어"

"하먼, 이 이얘기에넌 부처님도 삐식히 웃는다등마, 조상님네덜언 요런 이얘기 안히고 살았간디 머."

", 또 소쿠리 잘못 댄다."

예닐곱 명의 여자들이 논가의 물길을 따라서 민물새우를 뜨고 있었다. 젓갈 새우보다 조금씩 큰 민물새우들은 윗논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아래서 수백 수천 마리씩 무리 지어 맴돌이 휘돌이를 하고 있었다. 초여름에는 속살이 꿰비칠 듯 맑은 청옥빛이던 민물새우들은 날이 무더워지고 알을 배게 되면서 미묘한 청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8월 중순이 넘어서면서 논물이 밭는다는 것을 어찌 그리 용하게 아는지 민물새우들은 7월이면 조알갱이보다 더 작은 알들을 수 없이 많이 매달아 배불뚝이가 되어 있었다. 소쿠리를 든 여자들은 새우 떼를 한쪽으로 몰아가며 재빠른 동작으로 떠내고 있었다. 도망가지 못하고 소쿠리에 담긴 새우들은 튀어오르고 파닥거리고 뒤엉키며 한동안 분주하게 수선을 피웠다. 그 소쿠리는 저만치 논두렁에 모여앉은 여자들 쪽으로 옮겨졌다. 소쿠리는 커다란 함지박에 엎어지면서 새우들을 털어냈다. 새우들은 다시 발버둥을 했지만 이미 물을 떠난 신세라 아까보다 한결 기운이 떨어져 있었다. 또 예닐곱 명의 여자들이 함지박이로 둘러앉아 일손을 재게 놀리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두 개의 단지와 커다란 소금바가지가 놓여 있었다. 여자들은 새우를 한 마리씩 집어 세심하게 알을 뜯어내 단지에 담고 있었다. 온갖 거친 일들을 다해 남자 손 못지않게 투박해진 여자들의 손에 잡힌 한 마리의 민물새우는 너무 작아 보였고, 거기서 뜯어낸 알들은 더욱 작은 양이었다. 한참동안 알을 뜯어 담은 다음 한 여자가 한줌을 집어 단지 안에 고루고루 뿌렸다.

"썩을 놈에 것, 어느 세월에 이 단지로 하나가 차겄냐."

어떤 여자가 침을 내뱉었다.

"궁게 말이여, 꼭 삥아리 눈물 겉애갖고 말이시."

"으째 지주라고 생게묵은 잡것덜언 토하알젓에 환장덜 허능가 몰라."

"저 사람 자다가 봉창 두딜기네 시방. 맛나기로 젓 중에 질이요 정력에 좋기로 동삼이 아니고 할배 헌다는디 눈에 불 안 쓰게 생겼어."

"그려, 애첩이 저붐끝으로 살짝만 찍어묵어도 따구럴 올려붙인다고 안혀."

"문딩이 잡것들, 소작으로 피 뽀는 것도 모지래서 여론 열불나는 일꺼정 일부리고."

"하이고, 말도 마소, 작인 팔자 꼬부랑 팔자, 서럽고 드러우먼 니도 지주 되라고 안혀."

"그려, 정가 놈도 만석꾼 되고 봉게 왜놈돌도 비우 맞치고 드는 판 아니여."

"말도 말어, 그리 독허고 징허게 만석꾼 되면 머헐 것이여, 우리헌티 그리 죄짓고 지가 지 명대로 살 상불러."

"실답잖은 소리 말소, 욕 많이 묵는 놈이 오래 산단 말도 몰롱가. 정가 놈도 백 년도 더 살 것잉마. 그리 욕심이 끝이 없으니 욕심 따라 기도승해진다고 안허드라고."

"아이고 정가놈언 사람 종자가 아니여. 즈그 자석덜헌테가정 그리 야박허니 허는 것 잠 보소 그 재산 저승에 갈 것이여 머시여."

", 긍게로 큰자석 그리 망쳐논 것 아니고 머시여. 지 눈깔 지가 찔른 것이제."

"그려, 그놈 행투허는 것 보면 앞날이 발써 훤혀. 정가놈 꼬드라지면 그 큰아들 놈이 당대에 재산 다 엎어묵을 것잉마."

"하먼, 즈그 큰아부지 꼴 나겄제."

"그나저마 우리도 재수넌 드럽게도 없는 팔자여. 해필하고 정가놈 같은 악독한 놈 밑에서 소작료 넘달보담 더 뜯기고 이 땡볕속에서 이지랄꺼정 힘서 살어야 하다니."

"그런 소리 말어. 그려도 조선 놈 지주가 처묵을 토하알젓 담구는 것이 낫제 왜놈 지주가 처묵을 것 담구는 작인덜 속이 어찌강는가."

"왜놈 지주가 토하알젓얼 다 묵어?"

"이 사람 귀 막고 사능가? 거 하이야 타고 댕기는 죽산면 왜놈 있덜 안혀. 그놈이 토하알젓이면 환장얼 헌다는 것 아니여."

"아니 그 독허기로 소문난 하시모토가 먼가 허는 놈 말이여?"

"그려, 그놈, 그놈이 토하알젓 많이 담구라고 작인덜얼 물어 못 나게 잡진다드랑게."

"그놈이 토하알젓에 은제보톰 맛딜였는디?"

"그야 알겄어? 소문난 지 얼래 안된게 질어야 이삼 년이겄다."

"염병한다, 쪽바리놈, 고것도 바닥이라고 못된 것만 배와갖고 못된 행투하고 자빠졌다. 그놈 타고 댕기는 하이야에넌 으째 베락얼 안 치는고, 아이고, 하는ㄹ이 언제 악독헌 놈덜 벌허는 것 봤능가. 시장시런 소리넌 하지럴 말소."

"아이고메, 더와 숨막혀 죽겼다. 바랍 살랑살랑 이는 감나무 밑 평상에 앉어 흰 쌀밥에 해금내 사르르 도는 토아할젓이나 비베묵었으면 살것다."

"어따, 쌔년 짤라도 침언 질게 뱉고 잡고나."

"아서라 말어라 헛된 꿈 꾸덜 말어라. 이내몸 소작 신세 서러움만 짚어진다."

한 여자가 육자베기 가락에 실어 말을 엮었다. 여자들에게 욕을 푸짐하게 얻어먹고 있는 것을 정상규였다. 그는 대부분의 다른 지주들이 그렇듯 젓갈 중에 젓갈로 치는 민물새우 알젓을 장만하기 위해 소작인들의 아내를 내몰아 사역을 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지줏집의 잔치날이나 초상을 치를 때 소작인들이 불려가 일을 도맡아 해도 단 한 푼 노임이라는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처럼 토하알젓을 담그는 데도 수고비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 정상규는 마침내 작년으로 만석꾼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그야말로 귀신도 그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오갈 수가 없도록 큰 부자가 된 것이었다.

"어이 주모, 술상 안 내올 참이여!"

스물서너 살 나 보이는 청년이 마루에 다리를 내뻗고 앉아 소리 질렀다.

"아이고, 멧 분썩이나 말해야 알아묵겼소. 우리넌 땅 파서 장사허년 말이오."

주모가 부엌 앞에서 냄새를 다듬으며 쳐다보지도 않고 맞소리를 질렀다.

", 자네 눈에넌 만석꾼 농토가 뵈지도 안혀."

청년은 애꿎은 기둥을 걷어차며 또 소리쳤다.

"구실이 서말이라도 뀌어야 보배 아니겄소."

주모의 거침없는 야유였다.

"머시여? 그려서 나넌 흥어좆잉게 술 더 못 주겼다. 그것이여?"

"홍어 머시고 문어 머시고 간에 밀린 술값이나 끄고 말허씨요."

주모는 냉정하게 내쳤다.

"참말로 이러기여. 그 농토가 다 내 것 된다는 것 알고 허는 소리여 몰르고 하는 소리여."

"하이고 참, 어느 세월이겄소, 마른 하늘서 쏘내기 쏟아지기 고대험서 외상술 퍼주다가 이년이 먼첨 쪽박 차게 생겼소."

"어허! 그까진 외상이 얼매나 된다고 그려. 우리 아부지가 천년만년 살 것 아니겄고, 우리 아부지 숨만 꼴닥허면 그 당장 어찌 되는지 볼려?"

그 청년은 어디서 한잔했는지 얼굴에 약간 술기운을 비치고 있었다. 그는 정상규의 큰아들 정방현이었다.

"두고 보자는 만석꾼 안 무서운 게 얼렁 외상이나 끄란 말이오. 벌써 쌀 열 가마니 값이 넘었소!"

"아니, 참말로 이럴 것이여! 요런 씨부랄 놈에 집구석얼 팍 그냥!"

정방현은 벌떡 일어나더니 마루 끝에 놓인 빈 국밥 그릇을 치켜들었다.

"이이고메, 알겄소, 기둘리씨요., 기둘려."

사십객의 주모는 손을 저어대며 일어섰다. 정방현의 거칠고 앞뒤 안 가리는 성질에 그릇 하나 깨는 것으로 끝날 리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화를 지르고 뜸을 들였으니 어서 술을 먹여 보내는 상수였다. 돌깍쟁이 애비한테 한 푼 얻어쓰지 못하는 신세지만 떼일 염려는 없는 외상이기는 했다.

"난장맞을, 만석꾼이먼 멀혀, 천석꾼만도 못헌 불쌍놈이게. 돈 아까와 상급핵교 안 보내서 멀쩡헌 자석 저리 망쳐논 인종언 시상에 그놈 하날 것이다. 그 지독스런 놈이 필경 지 자식한테 벌받게..."

주모는 술상을 차리며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정상규는 큰아들이 고보를 나오자 더는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큰아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싶어했지만 정상규는 요지부동이었다.

"고보꺼정 배왔으면 배울 것언 다 배운 것이여, 유학입네 허고 일본 가먼 시건방만 들고 집안 망쳐묵는 못된 것만 배와갖고 온다. 느그 작은 아부지 허는 꼬라지럴 봐."

정상규는 말은 이런 식으로 했지만 속셈은 아까운 돈 더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눈앞에 다가와 있는 만석꾼 될 날을 하루라도 앞당기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의 아내는 큰아들을 대학에 보내려고 애걸도 하고 울기도 하고 했지만 끝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의 큰아들 정방현은 술타령을 하기 시작했고 거칠게 변해 갔다. 정상규는 큰아들에게 면서기를 하든지 어쩌든지 돈벌이를 하라고 성화를 냈다. 그러나 정 현은 아예 아버지를 대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상규는 구설수에 올랐다. 사람들은 정상규의 속셈을 어찌 그리잘 찍어내 욕을 하고 흉을 보는지 몰랐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자 장성규는 또 똑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작은아들이 고보를 졸업하게 된 것이다. 작은아들 의현이는 형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려고 조건을 달리하고 시기를 앞당겨 아버지 공략에 나섰다.

"아부지 지넌 일본으로는 안 걸랑마요. 경성에 있는 대학으로 가고, 공산주의 겉은 것은 절대로 안허겼구만이라."

작은아들이 이렇게 나오자 정상규는 못내 당황했다.

"느그 성이 대학얼 안 갔는디 니가 대학얼 가면 어찌 되겄냐."

"아이고, 아덜 또 한나 베래놀라고 이러요. 자석덜 전정 다 망침서 만석꾼이먼 머허고 돈 많으면 머헌다요, 지발 적선헌다고 의현이넌 대학얼 보냅시다. 이러다가 자석덜헌티 줄줄이 원수 사요. 천 석도 못되는 집안 서도 일본으로 유학 보내는 것 보지도 못혀요. 넘덜 눈도 무서운디."

그의 아내는 애걸복걸하며 매달렸다.

"어허, 졸업언 당아 멀었는디 어찌 이리 미리보톰 설치고 북새통이여."

말이 궁해진 정상규는 이렇게 공박하며 피해 섰다.

매앰 매앰 맴 쓰르르...

매미들이 시샘이라도 하듯 극성스레 목청을 뽑아대고 있었다. 매미들의 울음소리로 땡볕내리쬐는 한낮 더위는 더욱 무더워지고 있었다. 삼베옷이 추레하게 걸친 남자 그 더위를 헤치며 쭈볏쭈볏 정상규의 집으로 돌어서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정재규였다. 흰머리는 히끗거리고 얼굴은 늙고 입성마저 후줄근한 그의 가난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 무신 바람이 불었다요?

대청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던 정상규가 대뜸 내쏘았다. 얼굴을 찌푸린 그는 일어나지도 않고 곰방대만 빨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낡은 망건에 낡은 삼베옷을 걸치고 있었다. 만석꾼이란 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 그저 그냥 걸음 했구만..."

정재규는 동생 눈을 살피며 대청 끝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리고 구겨지고 때 절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늙은 것만이 아니었다. 혈색이라고는 없이 파리한 게 어딘가 아픈 것 같았다.

"염천에 유람이라, 신간 편해 좋소."

정상규는 올라앉으리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형을 비꼬고 있었다.

"그려 집안언 다 무고허고?"

정재규는 바늘 돋친 동생의 말을 한쪽 귀로 흘려보내며 인사를 차렸다. 그건 하고 싶어서 하는 인사가 아니라 말이 궁해서 하는 입치레였다.

"몰르겄소, 무고헌지 유고헌지, 나가 군청에 볼일이 있어 나갈라든 참이오."

정상규는 거짓말을 꾸며대며 일어날 태세를 취했다. 또 손 벌리고 나올 것이 뻔해 선수를 치려는 것이었다.

"아이고 동상, 동상, 나 말 쬐개 들어보드라고. 질게 말 안헐 것잉게."

정재규는 곧 동생을 붙드기라도 하려는 듯 다급하게 두 팔을 벌렸다. 그 당황한 얼굴은 너무 비굴해 보였다. 정상규는 짜증을 내며 신경질적으로 부채질을 해댔다.

"다른 것이 아니고 말이여, 동상이 만석꾼 된지도 1년이 되았응게 말이시 논얼 많이도 말고 열 마지기만..."

"아니, 머시여!"

정상규는 버럭 소리치며 부채고 마룻장을 쳤다.

"아니, 아니. 논얼 그냥 도란 것이 아니여."

정재규는 다급하게 손을 내젓고 고개를 흔들어댔다.

"글먼 머시오?"

정상규는 눈을 부릅뜬 채 형을 노려보았다.

"나가 무슨 염치로 논얼 그냥 두라고 허겄어. 그것이 아니고 말이시, 논이란 자네 이름으로 두고 한 열 마지기럴 나가 작인 부처먹게 해도라 그런 것이구마."

"아니, 고것이 무신 새 날아가는 소리다요? 둘러치나 메치나 그 열 마지기 소출이 넘 것 되는 것이야 뻔헌디. 고것도 말이라고 하고 앉았소."

정상규는 부채 든 손으로 삿대질을 했다.

"어이, 동상 나가 살면 얼매나 살겄는가. 나 잠살게 히주소."

정재규 울상이 되어 동생을 바라보았다. 두 손을 모으지 않았을 뿐이지 빌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아덜놈이 돈벌이 허고 있는지 위째 나헌티 와서 이려요."

정상규는 고개를 홱 돌려보렸다.

"아이고, 말도 마소. 그놈이 글씨 그 에미하고 딱 짜갖고 나럴 웬수 대허디끼 힘서 땡전 한닢 안준단 말이지. 나가 얼매나 팍벵하면이리 자네럴 찾아왔겄능가."

"! 죄년 진 대로 가고 공언 은 대로 간다는 옛말이 그른 디가 하나또 없당게." 정상규는 아주 통쾌함을 느끼며 코방귀를 뀌고는, "처자석이 몰라라 하는 사람얼 머시가 이쁘다고 딴 사람덜이 알은치어겄소. 글고 나넌 만 석으로 심이 다 찬 것이 아니란 것이나 아씨요. 인자보톰 만오천 석얼 채우기로 혔다. 그것이오. 그리 알고 가보시게라." 그는 부채를 휘저으며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아이고, 동상, 글먼 닷 마지기, 닷 마지기만 돌려주소. 나 불쌍하니 생각허고."

정재구는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펴 보이며 허둥거렸다.

", 닷 마지기 아니라 반 마지기도 어림 없소."

정상규는 싸늘하게 내치며 부채를 활활활 부쳐댔다.

"보소, 동상 도규는 우리 우현이 대학 학자금얼 대주덜 안혔다고. 궁데 인자 자네넌 나럴 잠 살게 히주소."

"나야 또 만 오천 석 채와양 헝게 반 마지기도 축낼 수 없다고 한였소 그 인심 좋은 도규집이나 가봇씨요."

"아이고, 베룩이도 낯짝이 있드라고 나 인자 그 집에넌 못 가네 어이, 나 잠 보소."

정재규가 황급히 동생을 붙들려고 하는 바람에 그 자세가 기는 꼴이 되었다.

", 우리가 성제간 연이 끊어진 지가 언젠디 인자 와서 보고 말고 혀라. 날아가든 새 똥구녕이 웃겄소. 하고, 중국 놈덜하고 전쟁이 붙어 세금이 오르는 바람에 천불이 솟는 판인디 그 무슨 넋나간 소리여. 소리가."

정상규는 가래를 돋워 내뱉으며 짚신을 끌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정상규가 말하는 세금은 지난 41일부터 적용된 중일 전쟁특별세였다. 총독부에서는 중일전쟁에 대비하느라고 그 특별세만이 아니라 연달아 새로운 법들을 공포해대고 있었다. 2월에 중일전쟁특별세와 함께 육군특별지원령을 공포했고, 4월에는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관제를 공포했다.

어찌할 수 없이 동생의 집에서 빈손으로 물러난 정재규는 땡볕 속을 터덕터덕 걷고 있었다. 푸르른 들녘에는 새하연 해오라기가 가늘고 긴 목을 세우고 느린 걸음을 한가롭게 옮겨놓고 있었다. 해오라기의 그 고상하고 우아한 자태를 보자 정재규는 그만 가슴이 찡 울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창 호시절의 자기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맘껏 멋 부리고 돈을 뿌려댔던 지난날의 기억들이 줄줄이 떠오르고 있었다. 일본 기생들을 발가벗기던 술판, 수천 원씩이 오락가락했던 노름판, 일본 경찰 간부들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던 돈의 위력... 다 그립고 안타까운 기억들이었다. 설마 이런 꼴이 될 줄은 몰랐었다. 그놈의 미두, 모두가 미두때문이었다. 미두에만 손대지 않았더라고 이렇게까지 망하지는 않았을 거였다. 제아무리 술이란 것이 밑빠진 독에 물 붓기고, 계집들 밑이 한정없이 다 하나 미두에 손대지 않았더라면 살아생전 알거지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 미두에 손을 댔던고. 아니, 중도에서라도 왜 손을 못 떼었던고. 내가 망하는 동안에 상규놈은 만석꾼이 되지 않았는가. 미두를 중도에서 손을 뗏더라면 지금도 2천 석, 아니 천 석은 지닐 수 있지 않았던가. 정재규는 정말 돌로 발등을 찌고 싶었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후회였다. 지금 당장 서럽고 야속한 것은 아내와 아들이었다. 아무리 재산을 탕진하고 거덜냈다 하나 그렇게 야박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겨우 세끼 밥 이외에는 정말 돈 한 푼을 구경시키지 않았다. 여자 독기는 오뉴월에도 서릿발이 친다는 것은 꼭 아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집까지 날아간 그날 이후로 아내는 살이 닿지 못하게 내치면서 원수 대하듯 했고, 아들까지도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하긴 아들놈이 그렇게 담 너머 개 보듯이 무시하는 것이 꼭 아내의 수작만은 아니기도 했다 자신이 재산을 탕진하는 것을 아들놈은 어려서부터 쭉 보아왔던 것이고, 작은어머니에게 학비를 타러 다니면서 얼마나 눈치가 보였을 것인고, 작은 어머니에게 학비를 타러 다니면서 얼마나 눈치가 보였을 것인가. 그래도 고맙고 고마운 것이 막내동생 도규요 계수였다. 그리 덕을 볼 줄도 모르고 도규에게 논을 제일 적게 준 것이 참 미안하고 면목 없었다. 그나저나 이런 언제까지 살아야 하나. 아니, 왜 이리 어지러우냐..., 내가 왜 이러냐... 정재규는 푸른 들판이 빙글빙글 도는 어지러움 속에 숨을 헐떡거리며 논길에 쓰러졌다.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한 손으로는 풀포기를 움켜잡은 채 그는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한편, 정도규는 덕유산 화전민의 움막에 동지들과 함께 모여 있었다. 그 움막은 어느 화전민이 버리고 간 것이었다. 정도규까지 네 명의 얼굴은 모두 침통했다. 그들 중에 정도규가 사십대 중반으로 나이가 가장 많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엇비슷하게 서른두셋 정도로 보였다.

"그러니까 다른 조처들에 비해서 전향자들이 전조선사상보국연맹을 결성한은 우리의 기분이 나쁠 뿐이지 별로 우려할 만한 것은 아닐 것이오, 총독부가 노리는 것은 시위효과지 정작 그 사람들이 할 만한 일은 없지 않겠소."

정도규가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예 그렇긴 합니다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강연 같은 것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들의 전향을 변명해 가며 사회주의를 부정하고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럼 사회주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나 대중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혼란을 일으키고, 동요하고 그들을 본받고..., 악영향이 의외로 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선이 굵은 얼굴에 안경을 낀 사람의 말이었다. 그는 이현상이었다.

"이 동지의 말도 일리가 있소. 분명 그런 나쁜 영향을 끼칠 국면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이미 전향자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역효과가 발생하는 국면도 있을 것이오. 모반자. 간신. 변절자. 배신자 등에 대해서는 불신하고 멸시하는 우리 민족의 공통적 가치관이고 정시기 때문이오."

정도규는 담배를 빼들었다.

"헌데, 이렇게 사면초과로 악법들이 나오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지는 것 아닙니까. 전국적으로 조직되는 근로보국대 같은 것은 특히 우리 운동의 장애물입니다. 무슨 대책을 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콧날이 날카로운 조직원의 말이었다.

"오늘 모임의 주안점이 그것이기도 하니까 좋은 의견들을 말해 보시오."

정도규가 담배를 깊이 빨았다.

"저어, 유승현 동지의 위장전향은 어떻습니까?"

이현상이 정도규를 쳐다보았다.

"비밀이 잘 지켜지고 효과가 크오. 본인은 손가락질당하고, 관에서 감투를 씌우고 해서 여러모로 괴로워하지만 말이오."

정도규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유승현의 괴로운 승리가 아주 통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그럼 위장전향을 더 적극 추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적 속에 들어가 적들의 파괴 공작을 막는 동시에 대중들이 사회주의 의식을 견지케 하는 가장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전략은 위장전향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감옥에서 많은 동지들이 전향을 거부하며 투쟁하고 있는 것은 위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그건 운동의 수면 상탭니다. 또한 우리가 벌이고 있는 투쟁도 힘겹고 고생이 많습니다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외곽 배회입니다. 오죽하면 국내 망명 이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그런 측면에서 위장전향은 적극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현상의 침착한 말이었다.

", 그 의견에 찬성합니다."

여지껏 말이 없었던 눈썹 짙은 조직원이 담배를 끄며 말했다.

"으음..., 그게 적 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오. 허나 거기에 문제가 없는 게 아니오. 첫째는 전향자로 행동보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변질되어 정말 전향자가 되어버리는 위험이오. 들째는 위장전향이 드러나서 더 심하게 당하게 되는 점이오."

정도규의 지적이었다.

", 그 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식이 투철한 동지면 그 두 가지 문제점이 동시에 해결될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현상이 내놓은 대안이었다.

"그야 더 말할 것 없소."

정도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위장전향에 찬성부터 하겠습니다."

콧날 날카로운 조직원의 말이었다. 그러니까 위장전향의 안건은 표결에 부칠것도 없이 만장일치가 되었다.

", 그럼 정 선생님을 적임자로 제안합니다."

이현상이 대뜸 한 말이었다. 정도규는 물론이고 다른 두 명도 어리둥절해졌다.

", 전부 놀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그 이유를 간략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의식의 면에서 투철하신 거야 조선 공산주의자 제1세대로서 저의 세대를 학습시키고 이끌어 오셨으니까 더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두 번째는 이런 거칠은 지하투쟁을 하시기에는 이제 연세가 너무 많으십니다. 그동안에 겪어오신 고생도 너무 심했고, 젊은 저희들이 뵙기에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우리 운동의 장래를 위해서 지금부터는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시며 건강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끝으로 조직자금이 갈수록 고갈상태에 빠지고 있습니다. 정 선생님의 재력을 토대로 수익 높은 어떤 사업을 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조직체계의 불변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 그거 좋은 의견입니다."

", 찬성입니다."

두 조직원이 거의 동시에 의사표시를 했다.

정도규는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앉아 아... 내 나이가 벌써 마흔 다섯인가. 그렇지, 태현이가 대학생 아닌가. 사회주의를 접하고 20... 그동안 해놓은 일이 무엇인가. 왜놈들 등쌀에 형체는 없지만 한일은 적잖았지. 조선사람 전체에게 사회주의라는 것을 인식시킨 것, 15년여에 걸쳐서 소작쟁의. 노동쟁의. 동맹휴학을 주도해 가며 현실문제를 해결하고 독립의식을 무장시킨 것, 헛보낸 세월은 아니었다. 꿋꿋하게 살려고 애썼고, 앞으로도 그래야지...

정도규는 팔짱을 풀며 긴 침묵을 깼다.

"조직의 원칙대로 만장일치인 동지들의 결정을 따르겠소."

 

 

19. 쌀밥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천산산맥은 언제나 신비스럽고 우람하고 장엄했다. 천산산맥은 몸피가 거대하면서 길이도 끝없이 길었다. 그리고 능선은 톱니 모양으로 이어져 나가며 험준한 산줄기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 도전하고 하늘을 제압하려는 것처럼. 천산산맥은 사람이 오르는 것을 자부하는 것처럼 아득히 멀리 있으면서도 언제나 사람들을 위압하고 있었다. 천산산맥을 보고 압도당하지도 않는 사람이 없었고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장엄한 모습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솟는 경탄의 소리와 함께 압도당했고, 계절의 변화를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나 순백의 자태를 드리운 만년설을 보면서 신비스러운 경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의 무덤 위에 가을 들꽃을 한 아름 놓은 윤선숙은 먼 천산산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의 가슴을 쓰다듬듯 한 손을 무덤 위에 올리고 있는 윤선숙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보, 어쩔 수 없었어요. 아무리 경환이를 지키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절 나무라지 마세요. 제가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당신도 잘 알잖아요, 당신 어머님, 경환이까지 잃고 정말 더 살고 싶지 않았어요. 갈대밭뿐인 이 소금땅에서 더 살아야 할 아무 희망이 없었어요, 주환이와 명혜를 데리고 함께 죽고 싶었어요. 몇 번이고 죽으려 했는데, 허나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두 아이의 눈을 보면서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벌써 1년 세월이 지났어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아니, 주환이와 명혜를 잘 키우려고 몸 부서져라 열심히 살았어요. 저에겐 오로지 그 생각밖엔 없고, 그게 유일한 보람이고 희망이예요. 이 살벌한 땅, 황무지에서 다른 무슨 희망이도 꿈이 있겠어요. 연해주는 천국이었어요. 여긴 지옥이예요. 이 지옥에서 우리 조선사람들은 모두 일하는 짐승들일 뿐이예요. 사람들은 연해주에서 생각했던 것들을 다 잊었어요. 아니, 억지로 잊으려고 해요. 독립이니 해방이니... 그런 걸 여기선 용납하지도 않고, 또 여기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부질없다는 걸 사람들은 알아요. 천산산맥이 가로막힌 여기서 조선은 너무 멀고 어느 쪽인지 모르잖아요. 저처럼 모두가 자식들 때문에 사는 일하는 짐승들이 된 거예요. 그게 당국이 바라는 거고, 그래야 그나마 연명할수 있으니까요, 우린 너무 비참하게 버려지고 짓밟히고 있어요, 그나마 어쩌겠어요, 우릴 구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데. 여보, 오늘이 경환이가 당신 곁으로 떠난 날이예요. 부디 경원이를 잘 보살펴주세요, 외롭지 않게... 심심하지 않게..."

윤선숙은 만년설 거기 어디에 남편이 꼭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평소에도 만년설을 바라보면 남편의 얼굴이 불현 듯 떠올랐고, 꿈에서도 남편이 만년설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남편이 만년설 거기 어딘가에 살면서 아이들과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환상을 떼칠 수가 없었다. 윤선숙은 눈물을 닦고 무덤으로 눈길을 돌렸다. 들꽃무더기가 스산한 바람결에 잘게 떨리고 있었다. 꽃들의 흔들림 위로 아들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숨을 거두기 직전이었다. 눈을 번히 뜬 채 엄마를 부르던 그 모습, 윤선숙은 흑 눈물을 보였다. 윤선숙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한참을 느껴울었다.

"아가, 경환아, 또 춥겠다. 잘자, 엄마가 또 올게."

윤선숙은 무덤을 다둑거리며 소리내서 말했다. 남편과는 달리 속으로 말하면 아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았다. 무덤 위로 눈물이 뚜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윤선숙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무덤앞에서 일어났다. 무덤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크기도 제각각이었고 방향도 제각각이었다. 다만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 같은 같을 뿐이었다. 그 봉분이 조선사람들의 묘인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저 세상으로 떠날 때마다 여기저기 내다 묻은 것이라 묘들은 크기도 방향도 구구각색이었던 것이다. 날로 늘어가고 있는 그 묘들을 볼 때마다 윤선숙은 마음이 쓰라렸다. 작년 한 해 동안에 죽은 사람들이 수백 명으로 공동묘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묘지는 그곳만이 아니었다. 여기는 가까운 집단농장들의 사람이 묻힌 것일 뿐 다른 곳에도 이런 묘지들은 또 있었다.

경환이는 타슈켄트에 도착해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틀 동안은 걷잡을 수 없이 토하고 설사를 해대다가 사흘째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어디 들어앉을 집도 없이 어수선한 속에서 약 한번 써보지 못하고 당한 황당한 일이었다. 허약한 아이들과 노인네들이 똑같은 증세로 줄줄이 죽어갔다. 물이 달라지면서 생긴 풍토병이었다. 그러나 어느 가족이나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우선 밤추위를 막을 움막이라도 짓고 산 사람이 먼저 살아가야 할 방도를 찾는 것이 더 급했다. 관도 없이 시체를 내다 버리듯 묻고 사람들은 갈대를 베서 움막 짓기에 나서고는 했다. 그나마 기차를 타고 오면서 눈 속에 묻었던 것보다는 낫다고 위안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사람들 앞에 놓여진 것은 억센 갈대숲이 우거진 황량한 황무지뿐이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시설이라고는 전혀 아무것도 없었다. 군인들이 조선사람들 앞에 놓아놓은 것은 헌 농기구들이었다. 그건 연해주를 떠나올 때 거둬들여 화물칸에 따로 실어 온 것이었다. 곡식은 배급할 테니 그 농기구로 빨리 땅을 개간하라는 것이었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살라고 황무지에다 완전히 내다 버린 것이었다.

"세상에 이런 법은 없소?"

"우리 조선사람들이 잘못한 게 뭐가 있소."

"우리가 짐승이오?"

"짐승도 이렇게는 못 살아요."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어요."

"그렇소, 그 좋은 집, 좋은 땅 뺏고 내몰았으면 그만한 집과 땅을 내놔야 이치에 맞지."

그들은 마침내 분노했다. 그리고 관에 따지고 나서기로 했다. 러시아 말을 잘하는 식자 든 사람들을 대표로 뽑았다.

"이렇게 나섰다가 혹시 무슨 일 당하지는 않을까요?"

"그건 염려 없소, 기차에 탔던 군인 놈들은 다 떠나고 없소."

"됐소, 일을 시작합시다. "

그러나 그 항의는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그 대표들은 기차에서 또 종적이 묘연해지고 말았다.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죄목이 분명히 밝혀진 것이었다. 소비에트 정책에 대한 반동 행위, 사람들은 그때서야 확연히 알았다. 비밀경찰은 다 똑같은 비밀경찰이고, 조선사람들은 철저하게 버림받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집단농장이 편성되면서 끔찍한 명령이 떨어졌다.

고려인들은 앞으로 10년 동안 절대 이 지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이 금족령 앞에서 조선사람들은 오히려 무표정했다. 정당한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공포와 설사병에다 밤추위를 견디지 못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위급함에 비하면 그 금족령은 먼 메아리였던 것이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나서서 땅을 파고 갈대를 베었다. 추위를 막을 움막을 지을 수 있는 유일한 재료는 황무지에 우거진 갈대뿐이었다.

"아무리 움막이라도 갈대만 가지고 어떻게 집이 되나요?"

윤선숙은 울상이 되어 김두만에게 물었다.

"예 선생님, 아무 걱정 마세요. 무식한 놈 말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것 아닙니까. 제 집 옆에 선생님 집을 지어드릴 테니 보고만 계십시오."

김두만은 느긋하고 넉넉하게 웃었다. 그 꾸밈없고 두둑한 웃음을 보는 순간 윤선숙은 가슴 뭉클한 어떤 빛을 느꼈다.

"이 세상에 사람이 못살 경우란 없는 법이다. 그저 마음이 천하고 천하가 마음속에서 다스려지는 게야. 손에 들어오지 않은 돈 남이 잘 쓰면 됐지."

장사에 속거나 돈을 떼이고도 아버지는 늘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며 웃어넘겼던 것이다. 아버지의 웃음과 김두만의 웃음은 너무나 많이 닮아 있었다.

"그래, 웃자 우는 것보다 낫지. 죽지 못할 바에야 웃어야지."

윤선숙은 억척스럽게 땅을 팠다. 난생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힘 드는 줄을 몰랐다. 두 아이를 하루라도 빨리 밤 추위에서 막아내야 했다. 그곳 추위는 시베리아의 추위에 비하면 별것은 아니었다. 낮에는 영하 2, 3도 정도였다. 그러나 밤이면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댔다. 천산산맥에서 불어닥치는 그 바람은 몹시도 차고 매웠다. 병든 사람은 밤 추위를 못 견뎌 죽기도 했다. 모두 황량한 황무지에서 갈대숲을 바람벽 삼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을 지새웠다. 윤선숙은 갈대를 베러 나섰다.

"아이고 선생님, 그냥 계세요, 손 다 상하십니다. 언제 이런 일을 해 보셨다고."

김두만은 민망해하며 만류했다.

"저도 무식한 말 한마디 할까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잖아요."

자기 말을 흉내 내는 것을 알아들은 김두만은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윤선숙도 따라 웃었다. 윤선숙은 갈대 베기가 너무 어려웠다. 낫질이 서툴러서만이 아니었다. 갈대는 엄청나게 굵고 키가 컸던 것이다. 갈대는 보통 굵기가 손가락 다섯 개를 합한 것만 했고, 키는 2미터 이상 3미터에 이르렀다. 그건 갈대가 아니라 흡사 나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벌써 며칠 사이에 새 이름을 지어냈다. 사람들은 갈대를 참대라는 새 이름으로 불렀다. 윤선숙은 그 이름이 좋았다. 갈대라고 하기엔 너무 크고 참대라고 하니까 흡사 대나무 같은 그 모습과 어울렸던 것이다. 사실 울창한 갈대숲은 차라리 무슨 나무숲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울창함이 실감 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람들이 갈대를 치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짐승들이 괴성을 지르며 내뛰었던 것이다. 그건 멧돼지들이었다 울창한 갈대숲은 멧돼지들의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갈대를 무더기무더기 베어 모은 사람들은 움막을 짓기 시작했다. 움막은 땅을 사람 키 깊이로 파내고 그 위에 갈대로 지붕을 해덮는 것이었다. 아무리 움막이라고 하지만 지붕을 얹자면 지붕의 틀을 짜는 들보와 서까래 그리고 그것을 바치는 기둥으로 쓸 나무는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재목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누구도 그것이나마 달라고 하자고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덩이 사방에다 기둥을 세웠다. 윤선숙은 눈이 휘둥글해져 그 기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건 위아래의 굵기를 똑같이 하려고 갈대 여섯 개를 세 개씩 서로 위아래가 바뀌게 해서 한 덩어리로 묶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묶은 끈이 더 기가 막혔다. 갈대의 껍질을 넓적하게 벗겨 대여섯 군데를 동여맨 것이었다. 들보도 서까래도 그런 식으로 해결되었다. 다만 그 쓰임새에 따라 갈대의 수가 많고 적어질 뿐이었다. 지붕은 갈대를 잎 달린 채로 엮어서 세 겹 정도씩 덮었다. 한 겹일 때는 틈새로 하늘이 보이다가 세 겹을 덮자 하늘이 지워졌다.

갈대의 쓰임새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방구들을 놓는 데도 썼다. 구들장들을 어디서 구할 수가 없으니까 방고래에 갈대를 촘촘히 걸치고 그 뒤에 두껍게 흙을 발랐다. 갈대 구들장이 생겨난 것이다. 갈대를 잘라 움막을 지은 것은 개간 작업의 일부분을 미리 한 셈이기도 했다. 하나의 집단농장은 4개의 부리가다로 짜여져 있었다. 1개부리가다에는 분조장 아래 60명에서 70명이 편성되었다. 그들이 개간해야 할 땅은 대개 25만 평에서 30만 평씩 배당되었다.

윤선숙도 개간에 나섰다.

"아니 선생님, 이러지 마세요.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셔야지 이게 말이 됩니까."

3분양조인 김두만이 펄쩍 뛰었다.

"지금 학교가 없는걸요."

", 곧 학교부터 지어야지요. 어디 자식들 공부를 중도작파할 수야 있습니까. 우리끼리 의논 중에 있으니까 선생님은 그때까지 쉬세요."

"아닙니다. 저도 갈대 뿌리 하나라도 뽑아야지요. 혼자 노는 것은 다른 여자분들한테도 면목없고 말이 안 됩니다."

18세 이상 여자들은 모두 부리가다에 편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 그러시지 말고 이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이들을 모아가다 옛날얘기도 해주시고, 창가도 가르쳐주시고, 놀이도 시키시고 그래 주세요. 그것도 다 공부 아닙니까. 모두 그걸 더 좋아하고 원할 겁니다. 그래야 학교도 더 빨리 짓게 되구요."

김두만은 역시 조선사람답게 그 경황 중에서도 자식들의 교육을 중시하고 있었다. 연해주에서도 조선사람들은 두 가지로 유명했다. 첫째는 조선사람들은 바위 위에 올려놔도 살아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조선사람들은 굶으면서도 자식들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윤선숙은 김두만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각 집단농장은 250세대 정도로 이루어졌다. 윤선숙은 아이들을 상굽반과 하급반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상급반을 오전에, 하급반을 오후에 모이게 했다. 김두만의 말대로 부모들은 그런 시도나마 기뻐하고 반겼다. 윤선숙은 실낱 같은 희망이나마 붙든 기분이었다.

조선사람들은 배급받은 잡곡으로 근근이 배를 채우고 날마다 개간이라는 중노동에 시달렸다. 반찬이라고는 소금뿐인 밥을 먹고 매일 갈대뿌리와 싸우는 것이었다. 갈대가 엄청나게 큰 만큼 그 뿌리들도 억세고 깊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뿌리들은 얽히고설켜 떡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갈대가 없는 지역은 다른 풀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그 뿌리들 또한 갈대뿌리 못지않게 뽑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겨울인데도 연해주처럼 날씨가 춥지 않은 것이었다. 바람은 불어도 평지에서는 눈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눈은 내리기는 하지만 이내 녹아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산산맥은 만년설의 구분 없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루도 쉬지 않는 노동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은 끊임없이 죽어갔다. 거의가 노인이나 아이들이었다. 먹는 것이 부실한데다가 전혀 치료를 받을 수 없으니 병에 걸렸다 하면 십중팔구 저승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자들은 노동을 하는 틈틈이 신원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건 주로 학력과 경력에 대한 조치였다. 그 조사원들은 물론 러시아인 당원들이었고, 통역을 하는 조선인 당원들이 하나씩 끼어있었다. 그 조선사람들은 몇 년 전에 연해주를 떠나 당원 교육을 거쳐 이곳에 미리 배치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연해주에서 살아온 조선사람들은 러시아말을 숙달되게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느 지역에서나 조선사람들끼리 모여 살다 보니 대개 러시아말이 서툴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은 그 조사를 받으며 하나같이 불안해하고 께름칙해했다.

"자네보곤 뭘 묻던가?"

"별거 아니야. 이쪽으로 이주시킨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야."

"뭐라구? 그게 답하기 얼마나 곤란한 건데. 그래 뭐라고 했나?"

"곤란하긴 뭐가 곤란해. 평소에 생각했던 대로 답했지."

"뭐라고?"

"이건 말도 안 된다. 어찌 그럴수가 있느냐, 그랬지."

"에이 거짓말, 그 반대로 했구만그래."

"그리 잘 알면서 뭘 묻고 그러나. 다 목이 하나씩밖에 없는 신세에."

"그래, 우리 같은 신세에 어쩔수 없지. 헌데 왜 그런 걸 조사하고 그러지?"

"글세, 그리 멍청한 수로 속마음을 떠보려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러게 말야. 영 찜찜해."

"빌어먹을, 일도 힘들어 죽겠는데 미친놈들이 별 수작질을 다해."

사람들이 알아차린 것은 자신들이 의심을 받고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김두만에 집단농장의 사람들은 개간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요일에는 흙벽돌 만들기를 했다. 짚 대신 갈대잎을 잘게 썰어 섞어서 목침덩이보다 두 배정도의 흙벽돌을 만들었다. 그건 하교를 짓기 위한 것이었다. 봄이 되면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자는 계획 아래 모두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 일을 주도하고 있는 건 김두만이었다. 윤선숙은 사람들에게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아이들을 모으는 일에 더욱 열성을 바쳤다. 갈대숲만 펼쳐져 있는 허허벌판 황무지에다 다른 놀이를 찾을 수 없는 아이들도 갈대더미로 바람막이 한 노천학교로 곧잘 모여들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상급반 아이들에게 며칠 동안 가르친 아리랑을 합창시키고 있는데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윤선숙은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리고 비밀경찰로 넘겨졌다. 윤선숙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공포에 떨었다. 비밀경찰의 악명은 오래전부터 소문나 있었고 남편도 비밀 경찰한테 당한 것이었다.

"왜 그 노래를 가르치나?"

"고려 노래라서 가르쳤습니다."

"고려 노래란 걸 누가 모르나. 그게 아니고, 소비에트를 반대 선동하려고 그랬지!"

",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소비에트를 소비에트 국가 하나뿐이야."

"그런데 넌 소비에트에서 고려 국가를 가르쳤는데도 소비에트 반대 선동이 아니란 말이야!"

"아닙니다, 아리랑이란 노래는 고려 국가가 아닙니다. 그건 고려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민요일 뿐입니다. 민요, 여기 있는 고려인 당원들에게도 물어보세요."

거듭되는 신문에 시달리다가 윤선숙은 이틀 만에야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인 당원들이 윤선숙의 말을 뒷받침해 주었고 남자가 아니라는 것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앞으로 또 가르칠 텐가!"

", 아닙니다. , 절대 안 그러겠습니다."

"소비에트에 충성과 함께 그걸 맹세할수 있나!"

", 맹세합니다."

"좋아, 서약을 해."

윤선숙은 풀려나고 나서야 집으로 내달으며 곧 눈물을 쏟았다. 굴욕적으로 빌고 서약을 한 것은 의식에 없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두 자식의 생각뿐이었다. 윤선숙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모두 어이없어 하고 기막혀 했다.

"이젠 별걸 다 간섭이군"

"이거 숨 막혀서 어디 살겠어."

"그나저나 다시는 가르치지 못하게 했으니 그게 부르지도 못하게 한 것 아닌가?"

"가만있어, 그게 어떻게 되는 건가?"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그게 바로 그 말이지."

"아리랑을 못 불러? 아리랑을 금지해? 그럼 이게 뭐가 되나? 우린 그럼 노랠 부르지?"

"허허 참, 기막힌 일이로구나."

그런데 다른 집단농장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어른들이 일을 하면서 합창을 한 것이었다.

그 사람들이 붙들려가면서 각 농장마다 명령이 떨어졌다. 아리랑 금곡령이었다. 그런데 금지령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조선의 모든 명절을 쇠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이 있었다.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해가 바뀌고 2월이 돌아왔다.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에 놀랐다. 표가 나게 날이 풀리면서 봄기운이 중순을 지나면서 나무들에 새 움이 돋기 시작하고, 풀들이 파르파릇 새싹을 피워냈다. 그리고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온갖 꽃들이 피어나 들녘을 찬란하게 장식했다. 그러나 기디리야 강에는 겨울에 볼 수 없었던 힘찬 세로 물줄기가 굽이쳐 흐르기 시작했다. 천산산맥을 온통 하얗게 뒤덮었던 눈이 마침내 녹아내리는 것이었다. 연해주보다 두 달이 이르게 오는 봄이었다. 물이 불어나는 강물을 보면서 사람들은 모두 가슴 설레었다. 숙명처럼 논농사를 해야 하는 그들에게 물만큼 반갑고 귀한 것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힘을 냈다. 물길을 터서 강물을 끌어들여야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잠시도 쉴틈없이 일과 싸웠다. 논둑을 쌓고 수로를 내어 올해부터 벼농사를 지어야 했던 것이다. 배급은 추수철까지 한정되어 있어서 가을에 수확을 거둬들이지 못하면 굶어 죽게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먼동이 틀 때부터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황무지에 철 이른 땀을 뚝뚝 떨구었다. 그렇게 일에 매달리면서 사람들은 기어이 3월 말에 학교를 지어냈다. 윤선숙은 너무 고맙고도 미안해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흙벽돌을 쌓아 올려 갈대로 지붕을 덮은 학교는 다른 관공서 건물들에 비하면 형편없이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다.

"이거 참, 꼭 짐승우리 같아 죄송합니다. 우리 생활이 차차 나아지면 새로 좋게 짓도록 하지요."

김두만이 미안해했다.

"아닙니다. 전 너무 좋고 과분합니다. 그저 열심히 가르치겠습니다. "

윤선숙의 눈에는 그 어떤 왕궁보다도 더 좋아 보였고 눈물겨울 뿐이었다. 윤선숙은 흙벽돌을 만들때부터 자신의 땀방울 섞인 것이 더없이 떳떳하고 보람스러웠다.

4월이 되면 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짧은 봄이고 빨리 오는 여름이었다. 여름이 빠르면 그만큼 겨울도 빠를 것은 절기의 자명한 이치였다. 절기의 변화를 짚는 데 귀신인 농부들은 볍씨 뿌릴 시기를 앞당겼다. 개간이 덜 된 논도 말이 끄는 쟁기질로 갈아엎어 물을 대기 시작했다.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구먼."

"그럼, 사람의 힘이 무섭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참 신기하군 신기해."

"아이고 꿈만 같네"

사람들은 논에서 논으로 이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감격하고 감개무량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날씨가 더워지면서 사람들이 새로운 병을 앓기 시작했다. 모기가 번창함에 따라 말라리아가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움막생활에서 모기에 안 물릴 수가 없었고, 약은 약대로 구할 수가없었다. 사람들이 잇따라 죽어가고 있었다. 그저 치료책이라는 것이 하루 걸러 한 번씩 오한과 열이 심하게 날 때 찬물로 낯을 씻거나 머리를 감지 말라고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열을 내리게 하려고 그렇게 한 사람들은 십중팔구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윤선숙은 밤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 잠든 두 아이를 지키고 앉아 모기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두 자식에게 불행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던 것이다. 더 이상 찢어지는 일을 할수 없었고, 두 자식은 삶의 유일한 기둥이고 희망이었다. 윤선숙은 학교에 오는 아이들에게도 절대로 개울가 숲에 가지 말라고 이르고 또 일렀다. 모기들은 낮에는 그런 습한 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걸핏하면 개울로 나갔다. 고기잡이를 하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개울에 붕어와 잉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용케도 알아냈던 것이다.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불에 구워 소금에 찍어 먹는 붕어와 잉어의 맛이 얼마나 기막힐 것인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말라리아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만큼이나 중대한 사태가 벌어졌다. 볍씨를 뿌리고 한 달이 지났는데도 여러 곳에서 전혀 싹이 올라오지 않았던 것이다. 제대로 자란 것은 벌써 물 위로 한 뼘 정도 솟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 원인을 찾아내려고 눈에 불을 켰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벼가 자라나지 않는 지역에서 어쩌다가 한두 줄기의 벼를 찾아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 벼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 벼들은 희한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갈대의 실뿌리 사이에 걸려 물속에 뿌리발을하는 동시에 싹을 물 위로 키워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갈대 뿌리는 미처 다 뽑아내지 못하고 갈아엎어 물을 채운 것이었다. 그런데 볍씨를 뿌릴 때 잘못되어 갈대 뿌리에 걸린 것들은 싹을 틔우고 정작 제대로 땅에 닿은 것들은 전혀 싹을 틔우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그 원인을 알아차렸다. 땅에서 소금기가 돋아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깨달음을 확실히 뒷받침해주는 사실이 있었다. 이곳에서 갈대만큼 흔한 것이 소금이었다. 그런데 그 소금이 바닷가가 아니라 산에서 캐내는 돌소금이었다. 소금이 나는 산이 있듯 평지에도 소금기를 품은 소금땅이 여기저기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벼가 나지 않은 논들의 물을 전부 뺐다. 그리고 새 물을 다시 채웠다. 그 물을 삼사 일 두었다가 다시 빼고 새 물을 채웠다. 소금기를 빼기 위한 물갈이었다. 남자들이 그렇게 논일에 매달리고 있을 때 여자들은 밭일에 땀을 쏟고 있었다. 제일 먼저 씨를 뿌린 것이 콩과 고추였다. 간장 된장 고추장을 같은 채소 씨를 뿌렸다. 그다음에 무 배추 시금치 갓 같은 채소 씨를 뿌렸다. 오래 묵혀둔 땅이라서 그런지 채소들은 아주 잘 자랐다. 채소가 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들은 모두 생기가 돌았다. 소금으로만 절이고 간을 맞추었지만 김치와 국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의 여름 날씨는 특이했다. 4월부터 8월까지 하늘에서 구름 한 점 볼수 없었다. 하늘은 짙푸르게 맑기만 했고, 한창 더운 6월 한낮에는 37, 8도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몇 달 동안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데도 전혀 가뭄이 들지 않는 것이었다. 가을부터 겨울동안 내린 눈비를 땅은 묘하게도 잘 품고 있었던 것이다.

벼들이 누릿누릿 익어가고 있는 7월 말쯤이었다. 어느 날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김두태의 아내가 장딴지를 싸잡으며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다른 여자들이 놀라 보러 갔다.

", , 저것..., 저것..."

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남기고 김두태의 아내는 눈이 뒤집힌 채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너무 놀란 여자들은 김두태의 아내의 몸을 살폈다. 오른쪽 장딴지가 동전 크기만큼 빨갛게 부어올라 있고 그 가운데에 가시로 찌른 것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여자들의 눈은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저것인가 보다, 저것!"

어느 여자가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그 여자가 손가락질한 곳에는 꼬리를 치켜세운 이상하게 생긴 거미 한 마리가 유난히 불룩한 배를 끌 듯하며 느리게 기어가고 있었다.

"저 거미가 그랬을까?"

"뱀이 아니고?"

"맞어, 저게 독거미야."

"아이고, 백사만 무서운 게 아니네. 모기에 뱀을 거미에, 이놈의 땅은 사람 살 데가 아니야."

그 거미는 산란기에 꼬리에 독침을 내쏘는 독거미였다. 그 독은 말도 즉사시킬 만큼 무섭다는 것을 경험이 없던 그들이 몰랐던 것이다. 졸지에 아내를 잃어버린 김두태는 논일이 안중에도 없이 밭으로만 헤매고 나섰다. 그의 손에는 굵은 갈대줄기가 몽둥이처럼 들려 있었다. 그는 독거미를 찾아내기만 하면 갈대줄기로 마구 내려치며 통곡하듯 소리를 질러대고는 했다. 먼발치에서 그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여자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추수가 가까워진 9월 초순께였다. 윤선숙의 농장에서 네 사람이 잡혀갔다. 그 갑작스런 체포에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어리둥절해했다. 윤선숙이 더욱 놀란 것은 그 네 사람 속에 김두만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농장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잡혀간 사람들 수는 조금씩 달랐다. 그런데 잡혀간 사람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아냈다. 그들이 식자층이거나 똑똑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지난 일을 되짚으며 문득문득 깨닫고 있었다. 그건 몇 달 전에 실시한 신원조사였다. 보름쯤 지나 소문이 퍼졌다. 그들은 모두 딴 곳으로 이송되었고, 죄목은 일본 스파이거나 소비에트 정부를 반대한 반동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당치도 않은 누명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항의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다만 왜 그들이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깨달았을 뿐이었다. 윤선숙은 새로운 슬픔과 증오 속에서 남편을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은 어차피 무사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런 일을 저질러놓고 마치 달래기라고 하듯 관에서 알린 소식이 있었다. 개간한 땅의 수확은 소출이 안정될 때까지 3년 동안 공출을 면제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풀 죽고 맥빠진 채 첫 농사의 가을걷이를 시작했다. 밭농사가 실한 것에 비해 논농사는 부실했다. 소금 논에서 수확이 전혀 없는 데다 첫해 농사라서 이런저런 실수가 따랐던 것이다.

"이래 가지고 한 해가 살아질까."

"글세 모자랄지도 모르겠군"

"모자라도 별수 없지. 밭농사한 것으로 어찌 때워나가고 그래야지."

"이럴 줄 알았으면 밭농사를 더 해야 하는 건데."

", 빌어먹을, 땅에서 소금기가 올라올 줄 누가 알았겠나."

"내년에는 농사를 지울 수 있을까 몰라?"

"바닷가 간척논 간 기 빼는 데 3년 걸린다고 하지 않던가. 내년에도 안 되기 쉽지."

타작하는 남자들의 말은 근심스럽고 우울했다. 천산산맥이 차츰 흰옷을 갈아입고 찬바람이 거세지면서 겨울이 완연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조선사람들의 정착금을 중간에서 착복했고, 관리들이 조사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소문은 조선사람들을 뒤늦게 분하고 원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소문의 진상을 확인할 수 없었고, 더구나 분풀이할 대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윤선숙은 그 소문 앞에서 쓰디쓰게 웃었다. 그 소문에서처럼 조선사람에 대한 처우 계획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털끝만큼도 위로를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강제 이주를 시킨 소련 정부의 처사에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연해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러시아인들로 중추를 이룬 당원들의 타락으로 도처에서 병들어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20. 3세대의 얼굴

"아구고메 추워라. 요놈의 짓도 오늘로 끝이다."

유기준이 밥상을 들고 들어오며 부르르 떨었다. 방안으로 통바람이 몰려들었다.

", 밥냄새 안 나냐?"

유기준이 벌겋게 언 손으로 방문을 닫으며 박용화 쪽으로 눈총을 쏘았다. 박용화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고개를 빠뜨리고 앉아 있었다. 박용화는 무거운 얼굴인 채 돌아앉았다.

", 참 좆겉어서 못살겄다. 니가 그지랄이면 나 같은 놈은 어찌께 밤에 폴세 무동산 소낭구에다 목매달아야 혔겄다.쌍판 피고 밥이나 묵자."

유기준이 털퍽 주저앉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밥상에는 잡곡 섞인 밥 두 그릇, 콩나물국, 살얼음 낀 김치, 곤쟁이 젓갈이 전부였다. 자취하는 학생들의 밥상다웠다. 박용화는 마지못한 듯 숟가락을 들었다.

"참 시상언 공평하지도 못허나. 29등 헌놈은 웃고 3등헌놈언 불어 터졌으니, 나넌 3등만 한분 혀보먼 원도한도 없겄다."

유기준이 혀를 차며 밥을 떠넣었다.

"니넌 몰라."

박용화의 말이 퉁명스러웠다.

"아니, 1등 못 차지혀서 분이 끊는 뻔히 알고 몰르고가 머시가 있나? 배불른 놈 욕심이제."

"꼭 그것만은 아니여. 머시라고 할까..., 나가 밉고 한심스러워 그려."

국을 조금 떠넣은 박용화는 쓴 입맛을 다셨다.

"엎어치나 메치나 그것이 그 소리제 "

유기준이 킁 소리를 내며 웃었다.

"되았어. 그렇다고 해둬. 니넌 죽어도 재 속얼 몰를 것잉게."

박용화는 쓰게 웃으며 국에다가 밥을 말았다. 성적표를 받고 나서 입맛이 싹 가셔버린 것이다.

"몰르긴 머시럴 모느나? 니넌 광주로 오기 전에는 니가 질로 머리 좋다고 생각혔겄제. 근디 광주로 올라오고 1등은 말다 허고, 그렇게 니 능력에 의심이 가고 니 뜻대로 안 되는 니가 밉고 한심스럽고 그리 되는 것 아니여?"

유지준의 지적에 박용화는 그만 가슴이 뜨끔해졌다. 박용화는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밥을 숟가락 가득 떠서 입으로 몰아넣었다.

"광주 아닌 촌에서 광주사범에 온 놈덜치고 즈그가 대그빡 질로 좋다고 생각 안 해 본 놈덜이 어이 있겄냐. 광주사범에넌 다 수재덜만 모였다고 시상이 인정하는 판잉께. 니넌 이번 학기에 2등도아닌 3등으로 밀려러라. 니가 그리 된 것이야 니 머리가 모지래서가 아니고 그놈으 가정교사 허니라고 시간이 모지래서 그리 된 것 아니냐. 그러고 1등이고 50등이고 졸업만 하면 선생질 해묵는 것이야 일반인지 무신 상관이 있냐. 서나 밥 빌어묵으면 되았재 고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겄냐."

유기준은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허기사 그려. 다 잊어불자."

박용화는 태도를 바꾸며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유기준의 말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기준의 말이 더 듣기 싫어그만 막으려는 것이었다. 유기준의 말은 위로가 아니라 귀찮은 간섭일 뿐이었다. 유기준의 말은 언뜻 들으면 그럴싸한 것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부가 뒤처진 자들의 자기 위안이고 체념주의일 뿐이었다. 도회지와 벽촌, 그건 단순히 지역의 차이가 아니었다. 1등 인생과 3등 인생의 진로 구분이었다. 그 구분으로부터 10, 20년이 지나면 어떻게 되어 있을 것인가. 교감과 교사, 교장과 교사의 차이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도 다 똑같은 밥 빌어먹을 것인가. 박용화는 속으로 경멸의 웃음을 내보내고 있었다.

"니 집에넌 참말 안 갈 것이여?"

유기준이 말을 바꾸었다.

"속편언 소리 말어라. 나야 니맨키로 학자금 대주는 부모가 없응께로."

박용화는 한숨 짓듯 말했다.

"차암, 방학에 집에도 못가고..."

유기준이 혀를 차며 미안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야 팔잔께 니나 밥해 묵든 신세 면하든 편케 잘 쉬었다. ."

"니 혼자 삼시세끼 다 해묵을라면 살맛 나겄다."

"미쳤다냐? 식은 밥언 밥 아니여."

"이 삼동에 식은 밥 묵겼다고? 머리가 너무 잘 돌아도 탈이다."

"아랫묵에 묻어드는디 무슨 걱저이여. 얼기만 안허면 엇어서 못 묵제"

"잘되았다. 나가 얼매나 소중헌 인물인지 새록새록 알게도 되고."

"그려, 평소에넌 통 몰르고 산께 잉?"

그들은 마주 보고 웃었다. 그들은 대조적인 인상이었다. 박용화가 가무잡잡한 얼굴에 차돌같이 야무지고 성깔 있게 보이는 데 비해 유기준은 해말쑥한 얼굴에 여자처럼 야무지고 유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나저나 그 검사 나리 자제분께서 그리 돌대그빡이라 방학 내내 속깨나 터지겄다."

유기준은 밥그릇을 긁으며 혀를 찼다.

"그런 돌대그빡이 있어야 나 같은 인생도 다 사는 것 아니여. 속터지는 것이야 즈그 에미 애비고 나야 고맙기만 허재."

박용화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씨익 웃었다. 그 표정이 날카로우면서도 잔인해 보였다.

"요분에 성적이 잠 올랐을 끄나? 니 체면이 있는디."

유기준은 손을 저으며 밥상을 붙들었다.

"지기럴, 조선어 시간없앤 것은 아무리 혀도 너무 과혔어."

책을 뽑아 가방에 넣던 유기준이 투덜거렸다.

"꾸척시럽게 무슨 소리여? 그것이 언제 적 일이라고."

벽에 기대 놈듯이 하고 있던 박용화가 옆눈질을 했다.

"책얼 봉께 또 생각이 나서 하는 소리제. 헐 일이 따로 있제. 혀도 너무혔어."

유기준의 어조가 달라지며 얼굴이 찡그려졌다.

"니 사범학교생이 못하는 소리가 없다. ."

박용화가 씩 웃었다.

"사범학교생이라고 속도 없었다. 조선 놈언 조선 놈이고, 쓰고 단 것이야 다 알제."

"쟈가 시방 무슨 소리 허능겨? 똑 퇴학당헐 소리만 하고 앉었네."

박용화가 정색을 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 , 그리 놀래덜 말어라. 말이 그렇다 그것이제 다된 잔치에 코빠칠 맨치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멍청하지도 않은께."

박용화의 기세에 눌리는 것인지 속마음을 감추는 것인지 유기준은 희말건하게 웃어 보였다.

"내선일체가 시작되았는지 조선어 시간 없애는 것이야 당연지사제. 안그러고야 내선일체가 되덜 안코, 내선일체가 안 되면 조선사람덜만 손홴께."

다시 등을 기대는 박용화의 말은 단호했다. 그런데 그 말은 교장의 말 그대로였다.

"옳여, 공자님 말씸이여."

유기준의 말은 찬동을 하는 것인지 비꼬는 것인지 그 어조가 아주 묘했다. 그들 사이에는 더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박용화는 눈을 감고 있었고, 유기준은 부지런히 짐을 싸고 있었다.

유기준이 말하는 조선어 시간 폐지는 작년 4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총독부는 조선교육령 개정에 따라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 규정을 폐지하고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 규정을 전면적으로 실시했다. 그리고 중학교 과정의 조선어 시간을 일어. 한문. 역사. 수학 등의 과목으로 대체하도록 해버렸다. 내선일체를 내세운 조선어 말살 정책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1월에 전국적으로 일본어 강습소 1천여 개를 개설하고 전 조선인에게 일어 강습을 지시한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야 용화야, 나 갈란다."

유기준이 큼직한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 가자."

박용화가 벌떡 일어나서 벽에 걸린 교복을 내렸다.

"가기넌 어디럴 가!"

유기준이 눈치를 채고 손을 저었다.

"사랑과 권세는 돈으로 살수 있을지 모르나 우정만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거어디니, 벗이여 내 순수한 우정을 사양치 마아시라아."

박용화 활동사진의 변사 흉내를 내며 재빠르게 교복을 갈아입고 있었다.

"짐도 벨라 없는디 멀라고 가."

유기준은 박용화에게 정말 미안한 심정으로 말했다. 집에 가지 못하는 박용화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찌 그리 울상이다냐? 니가 니 부러와서 더 서운해헐랑가 몰라 그러지야? 아서라, 나가 소학생이냐. 그런 걱정말고 올 때 꽂깜이나 많이 챙게오니라. 가자, 싸게"

박용화는 유기준의 어깨를 치며 먼저 방문을 나섰다.

"짜석, 드럽게 배짱 씬 철허네."

유기준은 뒤따르며 내쏘았다. 박용화는 유기준이 사라진 개찰구 저쪽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돌아섰다. 그런 감상을 막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방학에도 집에 가지 못하는 서글픔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박용화는 역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가며 눈앞에 어른거리는 모습을 지우려고 했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어머니는 가난에 찌들린 모습이었다. 다 낡아빠진 무명옷에 메마르고 늙은 얼굴이었다. 평생 가난에 시달리고 고생에 지친 그 모습은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애절한 그리움이고 쓰라린 눈물이었다.

"나야 암시랑토 안타. 니나 공부 열성으로 하여. 연필 한 자리 못 사줌서 무신 에미라고... 이 고상 잊즘서 살게 부티 큰사람 돼야 써."

작년부터 방학 때 집에 못 오게 되는 것을 알고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부티 큰 사람 돼야 써..."

어머니 말의 여운을 따라 또 한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보통학교 때의 담임 야스꼬 선생이었다.

"난 네가 사범학교에 꼭 합격할 줄 알았어. 넌 나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고 자식이나 다름없어. 그런데 이젠 선생으로 내 뒤를 잇게까지 됐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모름지기 황국신민으로 큰 교육자가 되거라. 그런 뜻으로 이 만년필을 선사한다. 이 만년필로 열심히 공부해라."

박용화는 무심결에 교복 윗주머니를 만져보았다. 야스꼬 선생의 체취와 함께 만년필이 만져졌다.

"내 벌이가 코딱지만혀서 식구덜 믹여살리기도 모지랜다. 니 진정 미가 알어서 고학얼 혀, 고학. 나멘치로 신세 안 망칠라먼 딴 짓거리 허덜말고."

술 취한 형의 말이었다. 전력이 나빠 직장 옮기는 것을 결국 포기해 버린 형은 술타령이 심해졌다. 형은 머리가 좋은 것에 비해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어쩌자고 만세 시위에 앞장섰다가 퇴학을 당해 평생을 망치게 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형은 한 시절 사회주의 운동에도 가담했던 눈치였다. 그런 짓이야말로 수재의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었다. 학생들 이삼백 명이 변두리 목포 바닥에서 시위를 벌여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아니, 젊은 혈기였으니까 그건 또 이해한다고 치자. 그다음에 다시 사회주의 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일본을 상대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었던 것 아닌가. 참 가당찮고 어림없는 짓이었다. 대일본제국의 막강한 힘 앞에서 그건 망상일 뿐이었다. 그 도전은 목선과 칠선이 싸우기였고, 토끼와 호랑이의 싸움이었다. 자신은 4학년 때 벌써 그런 것들을 다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어른들이 그런 것을 모르는지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제 일본은 중국을 이기며 나날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일본은 벌써 중국을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중국을 다 차지하게 되면 일본은 그야말로 아시아의 태양이었다. 이런 시점에서 내선일체라니, 그 아니 황공한 은혜인가. 조선사람도 차별받지 않고 일본사람과 똑같이 된다는 건 출세하는 데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자네의 황국신민으로서의 충심을 높이 사 추천하는 바이니 추호의 실수도 없이 성심을 다해 주기 바라네."

교무주임이 가정교사 자리를 알선해 주며 한 말이었다. 조선사람의 집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일본 상인의 집도 아니었다. 일본 검사의 집이었으니 학교에서도 얼마나 신중을 기했을 것인가. 그런데 결국 자신이 뽑힌 것이었다. 검사, 그건 판사와 함께 최고 권력기관에 속했다. 그런 사람의 자식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건 더없는 영광이고 출세 길은 훤히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학비도 벌고, 배경도 만들고...혼신의 힘을 다 쏟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겨 3등으로 밀려나고 말았던 것이다.

"어디 두고 보자. 이번 방학에 미리 다 공부를 해 둘 테니까!"

박용화는 역전의 넓은 마당을 가로지르며 어금니를 맞물었다. 아직 1년의 기회가 남아 있었다. 발령에는 졸업반 성적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었다. 박용화는 내친김에 수학 참고서를 사가지고 들어가기로 했다. 미리 공부를 해가자면 수학은 아무래도 참고서가 있어야 했다. 박용화는 부르르 떨며 본정통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매운 바람이 바짓가랑이 속으로 파고들었다. 내의를 입어본 적이 없었다. 속옷 살 돈이 있으면 더 보태 겉옷을 사 입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박용화는 추위를 이기려고 빠르게 걸었다. 외투를 입은 사람들마저도 추위를 타고 있었다.

본정통은 언제나 화장을 야하게 한 여자처럼 화려했다. 유리창이 번들거리는 상점마다 제각기 특성 있는 물건들로 치장해 놓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박용화는 가끔 본정통에 나올 때마다 기분 좋지 않은 느낌을 갖고는 했다. 그건 한마디로 위축감과 생소함이었다. 그 감정은 처음 본정통을 구경하면서 생긴 것이었다. 박용화는 언제나처럼 양쪽의 상점들을 보지 않고 책방으로 곧장 걸어갔다. 아직 시간이 일러 책방에는 서너 사람밖에 없었다. 박용화는 그 한가함이 썩 기분이 좋았다. 느긋한 마음으로 책 구경을 시작했다. 철학책 문학책 인생론 설화집... 사고 싶은 책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참고서를 한두 권 보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찼다. 그 읽고 싶은 책들은 교사가 되어 월급을 받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목차만 훑어보고 도로 꽂고는 했다.

"어머, 박용화 상!"

여자의 목소리에 놀라 박용화는 얼떨결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 에고..."

바로 옆에 서있는 여학생은 디구야의 누나 에이꼬였다. 그런데 그 옆에는 다른 여학생이 또 있었다.

"책 사러 왔군요?"

별로 예쁘지도 않으면서도 깜찍하고 어딘가 당돌한 느낌을 풍기는 에이꼬가 생긋 웃었다.

"예에... 참고서 좀 사려고..."

박용화는 에이꼬를 알아본 순간부터 긴장해서 얼굴이 굳어졌고 말끝도 제대로 맺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니?"

에이꼬 옆의 여학생이 속삭였다.

", 인사해, 우리 동생 다구야의 가정교사 박용화 상. 이쪽은 내 친구 후미꼬에요."

에이꼬가 두 사람을 인사시켰다.

"첨 뵙겠습니다. 박용화라고 합니다."

박용화는 당황스럽게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 안녕하세요. 후미꼬예요. 사범학교생에. 조선 학생으로 검사님댁 가정교사라, 머리가 천재신가 보죠?"

고개를 까닥한 후미꼬가 대뜸 한 말이었다.

", 아닙니다. 그저..."

말을 더듬는 박용화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말을 뭘 해. 언제나 이찌방!"

에이꼬가 엄지손락을 세워 보았다.

"아이, 징그럽고 겁나는 사람이구나."

후미꼬는 이렇게 말해놓고 킥 웃었다.

"그럼 저는 이만..."

박용화는 그만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저어, 어제 방학했지요? 그럼 모찌 먹으로 가요."

에이꼬의 느닷없는 말이었다.

"아니 저어, 저는..."

박용화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주머니에는 몇 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책을 물러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걱정말아요, 방학 기념으로 내가 살 테니까요."

에이꼬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이거 참... 그냥 두 분이서..."

박용화는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조선 천재하고 동석하는 영광을 주시오"

후미꼬는 일본 여학생다운 활달함을 보이고 있었다. 일본 여자들은 조선 여자들처럼 그렇게 심하게 내외하는 법이 있었지만 특히 신식공부하는 여학생들은 언행이 무척 자유로웠다. 박용화는 어찌할수 없이 두 여학생을 따라 책방을 나섰다. 박용화는 에이꼬가 그렇게 반갑게 대해 준 것이 너무 뜻밖이고 고마웠다. 에이꼬를 이렇게 밖에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서로가 학교에 다니고 자신은 저녁에 다구야를 가르치고 하다보니 밖에서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이꼬는 지난 1년 동안 정이 들었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에이꾜는 그동안 수학 문제를 풀어달라고 몇번 부탁해 온 일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에이꼬는 어딘가 도도하고 냉정한 태도였었다. 그건 어쩌면 동급생으로서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이 창피스럽고 부끄러워 오히려 더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친밀감을 나타낼 만큼 시간이 쌓인 것도 아니기는 했다.

단팥죽에 찹싹떡을 파는 집들은 본정통 샛길에 많았다. 그건 일본사람들이 겨울철에 유난히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따끈따끈한 단팥죽에다 숯불에 구워낸 말랑말랑한 찹쌀떡을 곁들여 먹으면 추위에 언 몸을 녹이는 데는 썩 괜찮기도 했다. 그래서 그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조선사람들도 즐겨 먹는 것이 되고 말았다. 다꾸앙이나 왜간장이 그런 것처럼.

"난 처음에 박상이 우리 일본사람인 줄 알았어요. 생김이 어찌 그리 일본사람 같지요?"

에이꼬보다 곱상하게 생긴 후미꼬가 목도리를 풀며 생긋 웃었다.

"아니 뭐..."

박용화는 당황스러워하며 어물거렸고

"얘 좀 봐. 초면에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에이꾜가 눈을 흘겼다.

"아니, 초면에 못 할 소리긴 생김이 그렇댜는 것뿐인데"

후미꼬도 맞받아 눈을 흘겼다.

"자아, 젠사이 드세요."

마침 탁자에 옮겨지고 있는 단팥죽을 에이꼬가 박용화 앞에부터 밀어 놓았다.

"방학하자마자 놀 생각은 하지 않고 참고서부터 사다니, 난 공부에 그리 미치는 사람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후미꼬가 예쁘장한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맨날 30등짜리 아니니, 부모들한테 야단이나 맞고."

에이꼬가 픽 웃었다.

"두 분도 책 사러 오시지 않았습니까."

박용화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책이면 다 책인가요. 우린 새로 나온 애정 소설 있나 보러 간 거예요.후후후..."

후미꼬가 입을 가리고 웃었고, 에이꼬는 후미꼬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니 얘, 니네 아버지가 까다로운 분이신데 박상을 가정교사로 채용한 걸 보면 굉장히 인정하는 모양이지?"

후미꾜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럼, 박상 듣는 데서 한 말은 아니지만, 내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실 정돈데."

박용화는 가슴이 쿵 울리는 충격을 느꼈다.

"그래? 그거 간단하잖아. 사위를 삼으면 되는 건데."

"얘가 정말 못하는 소리가 없어. 넌 입이 너무 방정이라 탈이야."

에이꼬의 얼굴이 빨개졌고, 못들은 척 단팥죽을 퍼 넣고 있는 박용화의 가슴에서는 우르릉 쿵쾅 천둥이 치고 있었다.

", , 나 허벅지 다 멍들겠다. 젠사이 한 그릇 사주고 이렇게 막 꼬집어대니?"

후미꼬는 아파서 죽는 시늉을 했다.

"넌 이젠 말하지 말어."

이렇게 비약할수록 박용화의 감정은 차가워지면서 분통이 분노로, 분노가 증오로 바뀌고 있었다.

유기준 그놈은 정말 사회주의 혁명을 믿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감상일까? 신념이든 감상이든 어찌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사회주의 운동은 이미 끝장난 것이 아닌가. 그건 경찰의 끊임없는 수사 때문만이 아니다. 거물급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얼마나 많이 전향을 했는가. 그리고 다른 사건들에 연루된 사회의 저명인사들도 또 얼마나 많이 전향서를 발표하고 있는가. 기준이 놈은 이광수 신홍우 같은 사람들이 전향서를 쓰는 것을 보지도 못하는가 그 유명한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면 될 텐데 제 놈이 뭐가 잘났다고 다 거덜난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단 말인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보석 중이던 이광수 외 28명은 3811월에 사상전향진술서를 재판장에게 제출했고, 그보다 석달 앞선 9월에는 이승만 동지회의 국내 지부인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구속된 신홍우 등 54명이 전향성명서를 발표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던 것이다.

박용화는 이어지고 이어지는 생각들로 하마터면 공부 가르치러 가는 것을 잊을 뻔했다.

다구야의 성적은 9등이 올라있었다. 박용화는 속으로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1년은 보장된 것이었다.

"박 선생님 너무 수고하셨어요. 검사님도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오세요. 검사님도 뵐 겸 식사 같이 해요."

다구야의 어머니가 어느 때 환하게 웃으며 말했고 "정말 놀랬어요, 저 밥통 성적을 그렇게 올려놓다니, 박상은 역시 실력자예요." 낮에 만났던 친밀감이 더 생긴 것이 분명한 에이꼬가 어머니 옆에 앉아 거들었다.

박용화는 계속 유기준의 생각에 빠져 공부도 되지 않았고, 밤새도록 잠까지 설쳤다. 유기준이 장해 보이기도 했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했도, 용기 있어 보이기도 했고, 무모해 보이기도 했고... 모르는 척 그냥 지내야 할 것인지, 딴 이유를 대고 헤어져야 할 것인지, 그대로 지내다가 만약 수사에 걸려드는 날에는 자신에게도 피해가 미칠 것이고, 빨리 헤어지는 게 가장 현명한 것이 아닌지... 매일같이 황국정신의 충일을 교육받고 있으면서 정반대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황국정신의 최일선 수호자요 전파자로서 기능해야 할 소임을 맡은 소학교 교사가 그런 사상을 품고 어찌 행동하려 한 것일까... 경찰은 사범학생들만은 믿었다. 사범학생들 또한 자신들의 세계에서는 불온사상이 뿌리발을 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이일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새벽녘에 설핏 든 잠에서 깨어났지만 박용화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뒤숭숭했다. 어느 것하나 결론이 내려진 것이 없었다.

박용화는 다구야네 집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박군, 수고했네. 성적이 향상된 김에 이번 동계방학을 이용해 가일층 기초를 튼튼하게 잡아주게. 시간을 두 배로 늘려서 말이야. 물론 보수도 두 배로 지불하지. 이거 받아두게. 특별 상여금이야."

다구야의 아버지가 봉투를 내밀었다. 다다미방에 일본식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박용화는 얼굴을 제대로 못든 채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러면서 또 생각하고 있었다.

, 나도 대학을 가서 법관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아시하라 검사를 대할 때마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소학교 교사... 그리고 기껏 출세를 해보아야 다 늙어서 하는 것이었다. 판검사와 교장, 권세로나 지위로나 그건 비교조차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다 판검사는 서른 전에도 될 수 있어서 평생을 권세를 누리는데 교장은 최소한 마흔을 넘어야만 바라보는 자리였다. 박용화는 이시하라 검사의 집을 나오다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을 붙들었다.

이시하라한테 그걸 제보해서 대학 가는 기회로 삼으면 어떨까!

이 생각과 동시에 유기준의 얼굴이 떠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박용화는 그 생각을 떼치려고 하면서도 떼치지 못하고 열흘을 넘게 고민했다. 그런데 이시하라 검사가 신년 휴가를 얻어 부인과 소학생인 두 아이를 데리고 일본에 다녀온다는 것이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박용화는 좀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아버지가 일본으로 떠나자 다구야는 그날부터 공부를 하지 않고 밖으로 뛰어내려고만 들었다.

"아버지 안 계시는 며칠만이라도 나 좀 못살게 굴지 말아요. 박상은 날 가르쳐 돈을 버니까 좋겠지만 난 미칠 것 같아요."

다구야가 소리치며 대들었다.

"돈벌이?"

박용화는 심한 모독감과 함께 후려치고 싶은 분노를 느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사실 그만한 돈벌이 자리는 구하기 어려웠고, 어린 것을 상대로 양양한 전도를 망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 다구야는 기어이 일을 저질렀다.

"아침 일찍 도망 나갔어요.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 대신 내 수학 좀 봐주세요. 숙제가 너무 많거든요."

에이꼬의 말이었다.

박용화는 어쩔 수 없이 에이꼬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만약 다구야가 한 짓을 이시하라 검사가 알면 어찌 될 것인가. 여행을 떠나면서 잘 보살피라고 몇 번이고 당부했던 것이다.

"왜 그리 기분이 나빠 보여요?"

에이꼬가 방으로 들어서며 생긋 웃었다.

"다구야 일을 검사님이 아시면 어떡합니까."

"그야 우리 들이만 비밀로 하면 되잖아요."

에이꼬는 더 진한 눈웃음을 지었다.

"또 식모가 있잖아요."

"그야 내가 책임지는 거구요. 아무 걱정말고 앉으세요. 사실 다구야도 불쌍하잖아요."

에이꼬는 아양 떨듯 하는 목소리로 말하며 박용화의 팔을 붙들어 앉혔다. 박용화는 섬뜩 놀라며 방석에 주저앉았다. 어찌할 틈도 없었다. 붉은 칠이 된 넓은 앉은뱅이 책상 가까이에 놓인 무쇠 화로에는 백탄이 화력 좋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수학이란 게 왜 있는지 모르겠어요. 나 같은 예술가 지망생에겐 무용지물이에요."

에이꼬가 짜증스럽게 말하며 책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박용화의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박용화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떨어져 않았다.

"아이, 왜 그래요. 우리 둘밖에 없는데."

박용화가 에이꼬의 목소리가 달라진 것을 느끼는 순간 에이꼬는 박용화의 목을 감고 들었다. 그 바람에 박용화는 뒤로 벌렁 넘어졌다. 목을 감은 채 에이꼬는 입을 맞추었다. 박용화의 눈앞에는 이시하라 검사의 얼굴이 쑥 밀려들었다.

"간단하잖아. 사위를 삼으면 되는 건데."

"그렇지, 굴러들어온 기회다!"

이 생각을 하는 순간 박용화는 몸이 확 불붙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에이꼬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몸을 뒤쳐 에이꼬를 다다미 바닥에 눕혔다.

"아흐응, 그래요, 그래요..."

에이꼬의 뜨겁고 비릿한 콧소리였다. 박용화의 손이 에이꼬의 치마를 걷어올렸다.

 

 

21, 입속의 노래

김건오는 중국인 대원과 함께 눈보라치는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눈보라는 어찌나 심한지 몇발짝 앞이 안보일 정도였다. 눈보라는 공중에서만 휘몰아치는게 아니었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바람은 휘돌고 맴돌면서 땅에 쌓인 눈을 휩쓸어대며 눈발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눈보라가 하늘에서 내리는 것과 땅에서 솟는 것이 뒤엉키며 안개가 낀것처럼 뿌옇게 시야를 막고 있었다. 눈발은 무슨 가루처럼 작고 가늘었다. 너무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결에 산산이 바스러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주나 시베리아에서는 함박눈을 보기가 어려웠다. 영하 40도의 혹한을 품고 휘몰아치는 바람은 그대로 칼날이었다. 바람이 세찬 만큼 잎이 다 떨어진 밀림의 가지들을 올리는 바람소리는 요란하고도 기괴했다.

온몸이 눈으로 뒤덮인 두 사람은 골짜기로 굴러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 해가며 산중턱을 타고 있었다. 골짜기에는 거센 바람에 휘몰린 눈이 그 깊이는 알 수 없도록 쌓여 있었고, 자칫 잘못해서 굴러 떨어지게 되면 눈 속에 파묻혀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이다. 두 사람은 포위망을 뚫다가 부대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사흘째 아무것도 못 먹고 지칠대로 치쳤으며 정신마저 혼미해져 있었다.

"김동지, 저거..., 이저 뭐지?"

중국인 대원이 비틀거리며 총끝으로 앞을 가리켰다.

"? 저거..., 저거 뭐지?"

눈썹과 짧은 수염에 눈이 잔 묻은 김건오가 눈을 껌벅이며 되물었다. 몇 발짝 앞의 아름드리 나무에 무언가가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무슨 종이가 붙어 있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그쪽으로 허덕거리며 다가갔다. 그들의 눈에 먼저 띈 것은 종이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 아니, 이게 뭐야?"

"아니, 이게, 이게!"

그들의 말은 서로 겹쳐졌고, 서로를 쳐다보는 놀란 눈에는 묘한 광채가 어려 있었다. 조금 전의 흐리고 풀린 눈들이 아니었다. 종이에는 음식을 걸게 차린 상 앞에서 한 남자가 발가벗은 미녀를 안고 술을 마시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은 나무 앞으로 더 바짝 다가섰다. 그림 밑에는 글씨가 씌여져 있었다.

"지금 곧 투항하라, 쌀밥과 미녀와 돈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래의 쌀밥을 먹고 원기회복해서 곧 투항하라. 절대로 처벌하지 않고 우대한다."

중국인 대원과 김건오의 손이 거의 동시에 나무에 걸린 망태기를 붙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혔다. 서로를 노려보는 눈에서는 적의가 뻗치고 있었다.

"진 동지, 나눠 먹어야지." 김건오가 흐리게 웃었고 "그래 김동지, 똑같이 나눠." 중국인 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망태기를 떼내렸다. 과연 망태기에는 쌀밥 덩어리가 담겨 있었다.

"정말 밥이다. 쌀밥!"

중국인 대원이 환성을 지르며 망태기에 손을 집어넣었다. 쌀밥 덩어리는 크지 않았다. 딱 주먹만했다. 그건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두 사람은 칼을 꺼내 둘로 나누려고 낑낑 힘을 썼다.

"똑같이 나눠, 똑같이!"

중국인 대원이 숨차게 말했고

"글세, 걱정말어"

김건오가 주먹으로 칼자루를 내려치며 내쏘았다. 두 사람은 바람을 등지고 얼음덩어리와 똑같은 밥덩이를 허겁지겁 먹어대기 시작했다. 눈보라는 그칠줄 모르고 휘몰아치고 밀림은 기괴한 소리로 울어대고 있었다. 그렇게 자극적인 그림과 함께 쌀밥까지 매달아 놓은 것은 일본군이 새로 시작한 유인술이었다. 일본군은 항일연군 대원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얼마나 고통받고 시달리고 있는지를 꿰 어보고 그런 자극적인 심리전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작년에 이미 투항 권고문을 계속 붙여서 꽤나 효과를 보고는 이렇듯 자극적인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었다.

"김동지, 가자."

"그래, 가야지."

김건오는 눈앞이 좀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그러나 일어나 기운은 나지 않고 그대로 앉아 한숨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얼어 죽지 않으려고 그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이거 말이야!"

중국인 대원의 목소리가 커졌고 김건오는 그에게 눈길을 돌렸다. 중국인 대원은 종이를 흔들고 있었다. 김건오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 뭐라고?"

"이거 말이야, 투항, 투항하자고."

종이를 흔드는 중국인 대원의 목소리는 좀더 커졌다.

"..."

"우리 이러다가 죽고 말 거야."

"..."

김건오는 눈앞에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어 죽은 대원들 많이 봤잖아."

"..."

지삼출 아저씨의 얼굴도 떠올랐다.

"이젠 더 싸워봤자 가망 없어."

방대근 대장의 얼굴도 떠올랐다.

"대원들은 절반도 훨씬 더 넘게 줄어버리고, 먹을 것도 없고, 무슨 수로 싸워 이기냐."

양세봉 장군의 얼굴도 떠올랐다.

"정빈 대장이 괜히 투항했겠냐."

"안돼, 그래도 안돼!"

김건오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난 이제 개죽음하고 싶지 않아. 이걸 봐, 쌀밥, 고기, 여자, , , 따뜻한 방, 왜 대답이 없냐, 넌 싫으냐!"

"진동지, 그래선 안 되잖아."

김건오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중국인 대원을 응시했다.

"안 되긴 뭐가 안돼. 가망이 없다는 줄 알면서도 개죽음하겠다는 거야?"

"간부들을 생각해 봐. 철통같은 간부들..."

"다 소용없어. 굶어 죽고 얼어 죽는 판에 마음만 철통같으면 무슨 소용이야. 간부들도 결국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말 건데 난 그런 개죽음은 싫어."

"그래, 다 그렇게 될지도 몰라..."

김건오는 풀뿌리를 캐머고 나무껍질을 벗겨먹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김동지는 싫으면 관둬. 나 혼자 갈 테니까."

중국인 대원이 일어섰다.

"이 산중에서 나 혼자!..."

김건오는 덜컥 겁이 났다. 바위틈이며 나무에 기댄 채 죽어있는 대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직도 입 안에 남아 있는 쌀밥의 맛이 새롭게 진동했다.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옛날의 정빈 대장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가! 왜놈들의 길잡이 노릇을 하며 우리 항일연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건 얼마나 무서운 배신이고 더러운 행위인가. 왜놈들이 우대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투항자들을 다 그렇게 악용하고 있다 남아들이 그렇게 더럽게 살아야 하겠는가.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당당히 죽어야 하겠는가. 여러분은 조국을 위해 당당히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랑스러운 남아의 길이의, 우리가 왜놈들에게 이기는 길이다.

방대근 대장이 조선과 중국의 부하들에게 해온 훈시였다. 김건오는 어금니를 맞물며 눈을 감았다.

"정말 안 가겠어? 좋아, 그럼 나 혼자 간다."

중국인 대원이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중국인 대원은 눈보라 속을 허우적거리며 가고 있었다. 김건오는 나무에 몸을 기대며 총을 겨누었다. 그런데..., 얼어 죽은 동지들이 모습이 다시 눈 앞을 가렸다. 추위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굶주림이 떠올랐다. 아까 보았던 그림이 그 위에 겹쳐졌다.

"진 동지를 죽이고 나서 나 혼자... 결굴 부대를 못 찾게 되면..."

눈 위에 난자당해 죽은 대원들의 모습과 함께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김건오의 마음은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진 동지, 진 동지, 함께 가, 함께!"

김건오는 소리치며 눈보라 속을 허겁지겁 뛰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집단부락을 이용한 차단 작전과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포위작전은 항일연군에게 치명적인 인명피해를 가속화시켰다. 배고픔과 추위라는 최악의 상황 속에 몰린 항일연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또한 대원들의 사기도 날로 저하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대원들의 사기를 더욱 떨어뜨린 것은 투항 권고문이었다. 배고픔과 추위를 이겨내지 못한 대원들이 투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빈은 투항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군의 길잡이가 되어 토벌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는 며칠 전까지 동지이고 상사였던 양정우의 목을 겨누고 나선 것이었다 그것은 일본군의 강요였건 어쨌든 간에 그는 이중 배신을 한 것이고 1로군 대원들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빈의 투항을 알게 된 양정우는 급히 부대를 재편성시키고 활동 지역도 바꾸었다. 부대의 모든 기밀이 송두리째 일본군으로 넘어간 거에 대비한 조치였다. 그래서 1로군의 제1사에서 제6사까지 경위여단과 3개 방면군으로 재편성되었다. 방대근은 경위여단의 부여단장으로 직위가 바뀌었다. 그건 다른 방면군 군장과 같은 직위였다. 1로군 병력은 1년 사이에 반 이상 줄어들었다. 대부분의 동계 토벌 동안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 맞아 죽어 빨치산의 숙명적인 죽음의 행로를 걸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투항자들이었다. 그들 중에 7, 80퍼센트가 중국 사람들이었다.

작년 11월 무렵 또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본군의 동게 토벌은 해가 바뀌어도 끝나지 않았다. 혹한이 절정을 이루는 1월이라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일본군의 차단 작전으로 항일연군은 식량난만 극심하게 겪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물자 고갈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각한 것이 신발과 약품이었다. 매일같이 험한 산을 몇십 리씩 오르내리고 이동하다 보면 신발은 금세금세 밑창이 드러났다. 가죽 장화는 아예 바라지도 않고 일본말로 치카다비라고 부르는 신발을 구하는 것도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그리고 약품도 거의 구할 수가 없어 안 죽어도 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산 아래 집단 부락들을 습격하는 것과 산중의 토벌대를 지원하고 있는 보급부대를 기습하는 것이었다. 그건 적들에게 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필요한 물자를 구하는 이중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한 가지 문제는 적진으로 뛰어드는 위험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목숨을 내건 싸움이었고, 그 길을 택하지 않으면 아사와 동사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바로 일본군의 작전에 굴복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작전의 위험만큼 유리한 점도 없지 않았다. 일본군은 포위 작전에 혈안이 되어 병력을 산중에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곳은 후방으로 경계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 허점을 찌르는 것이었다.

방대근은 눈보라 치는 밤을 택해 출발시켰다. 눈으로 발자국을 지워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목적지는 미리 탐색을 끝낸 보급부대였다. 그 부대는 두 겹의 산줄기를 벗어나 분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통나무로 엮은 임시방편의 큰 창고가 있었고, 동서 양끝 문에 경비초소와 함께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었다. 눈보라 치는 밤의 어둠은 비 쏟아지는 밤의 어둠보다 더 먹물이었다.

방대근의 작전명령이 개시되었다. 1단과 제220명씩 분산되었다. 방대근은 제3. 4단의 장비를 다시 점검했다. 담을 타고 가시철망이나 구덩이 위에 걸치기 위한 사다리가 각 단에 두 개씩이었다.

"일단 담얼 넘으면 3단은 경계, 4단이 창고 습격, 그담에 임무교대헌다. 3단 각 분대넌 방화럴 잊지 말도록."

방대근은 제3. 4단을 이끌며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광민은 제2단을 신속하게 몰아 서쪽 문 주위에다 분대별로 배치시켰다.

"만일의 사태가 돌발하더라도 분대의 대오는 철저히 지키도록!"

이광민은 네 분대장들에게 속삭이듯 낮은 소리로 명령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외칠 만큼 강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만일의 돌발사태란 포위공격을 당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분대의 대오를 철저히 지키라는 것은 낙오병이 생기지 않게 함과 동시에 투항자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분대단위 대오 고수는 모든 부대에 내려진 명령이었다.

!

타당 타앙...

눈보라 속에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공격 준비!

이광민은 분대장들에게 명령하며 손짓했다. 분대장들은 기민하게 흩어져 갔다.

따다다다 따르륵...

가관총 사격이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터지는 외침과 함께 새로 생겨난 불빛들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이광민은 그 불빛들을 응시한 채 빠르게 셈을 세고 있었다.

! !

따다다다 따르륵...

타당 탕! !

수류탄 기관총 소총소리들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바람소리에 겹겹의 메이리가 실리고 있었다.

공겨억 개시!

이광민은 명령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 총소리를 신호로 서쪽 문에도 불이 붙었다. 서쪽 문에서도 공격이 시작되자 보급부대 안은 고함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 뜀박질 소리로 야단법석이었다. 3단과 4단 대원들은 빠른 동작으로 통나무 담을 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먼저 담을 넘어온 방대근은 구덩이와 가시철망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 것 없습니다."

3단장의 보고였다.

"다시 한번 확인 하시오."

방대근은 자신의 눈에도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지만 재차 명령했다. 집단 부락에 비해 너무 허술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역시 아무것도 없습니다."

"됐소, 그렇다고 아조 안심허지넌 마시오. 혹시 다른 덫이 있을지 모롱게."

방대근은 왜놈들도 이리 허술한 데가 있나 생각하며 주위를 시켰다. 양쪽 문에서는 총소리들이 요란하고 뜨거웠다. 보급부대 안의 시끌벅적하던 소란은 가라앉아 있었다. 병력이 양쪽으로 분산된 것이 분명했다. 방대근은 앞장서며 부대를 이끌었다. 창고에 접근할 때까지 다른 장애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 허술함에 방대근은 저으기 놀랐다. 전선과는 멀고, 임시 주둔이라서 담 이외에는 장애물을 설치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또한 그 허점은 항일 연군을 앝잡아본 데서 나오기도 했다. 방대근은 묘한 쾌감을 느끼며 재빠르게 지휘하고 있었다. 4단 대원들은 분대별로 창고를 하나씩 맡았다. 각 창고의 큰 문에는 빗장만 질러져 있을 뿐 자물쇠는 채워져 있지 않았다. 창고로 들어간 대원들은 미리 준비한 홰에 불을 붙였다. 횃불이 밝아지면서 창고에 쌓인 물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쌀. 신발, 약품, 총알을 갖기 시작했다. 양쪽 문에서는 총소리가 치열했다. 총소리 속에 날카로운 비명이 섞이기도 했다. 4단 대원들은 3단 대원 동무들과 교대했다. 총을 겨눈 방대근은 창고에서 창고로 뛰기 시작했다. 그는 창고에 불지르는 것을 지휘해 나갔다. 부하들이 물건을 챙겨 담는 동안 그는 직접 불 잘 붙을 것들을 모았고, 횃불을 거기 놓고 나오라고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3단과 4단 대원들은 다시 담을 타 넘기 시작했다. 양쪽 문에서는 여전히 총소리들이 난무하고 수류탄이 폭발하고 있었다. 짐을 무겁게 진 3단과 4단 대원들을 숨을 씩씩거리며 눈보라 속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보급부대의 불빛이 한참 멀어진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은 명령에 따라 총을 한 방씩 쏘며 외쳤다.

우와아아-

퇴각 신호였다.

"분대별로 퇴각한다. 1분대 퇴각!"

이광민은 급히 명령을 내렸다. 3분대까지 퇴각을 확인한 이광민은 마지막으로 명령했다.

"4분대 퇴각!"

!

폭음과 함께 섬광이 부챗살처럼 뻗쳐올랐다. 그리고 비명들이 찢어지고 있었다. 4분대에 수류탄이 날아든 것이었다. 이광민은 등에 강한 충격을 느끼며 눈 위에 퍽 엎어졌다. 눈에서 불꽃이 튀는 현기증과 함께 그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양쪽 문에서 총성이 멎었다. 부대 안에 다시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본군들이 고함지르고 소리치며 창고로 뛰어가고 야단법석이었다. 이광민은 정신이 깨어났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신음소리가 났다. 그는 그때서야 수류탄 공격을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 수도 없었고, 손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눈에 묻힌 횐쪽 볼의 차가움이 한없이 시원하다고 느꼈다. 그 시원함이 온몸으로 퍼지면서 몸이 하얗게 표백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청산리전투가 끝나고 퇴각한 산속의 소나무 가지에 내걸었던 태극기였다. 그 태극기 위에 겹쳐지는 얼굴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그 모습들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1로군에서는 긴급사항을 결정했다. 치료가 불가능한 중환자와 병약자들을 하산시키는 것이었다. 치료시설과 약이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에 있다는 것은 무모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 죽음을 막고 집을 찾아가 치료를 받게 하자는 조치였다. 그런 환자들은 여러 곳의 비밀아지트에 수용되어 있었다. 비밀 아지트는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판 굴이 대부분이었다. 송가원은 비밀 아지트를 돌기 시작했다. 송가원도 오른쪽 발의 새끼발가락과 네 번째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옥녀는 두 손 손가락이 전부 동상이었다 자꾸 물을 만지게 되는 탓이었다.

"정말 조심하시오. 이러다가 큰일 나겠는데"

송사원은 남들 보지 않는 틈만 생기면 옥녀의 손을 열이 나도록 문질러 주며 말하고는 했다. 그것이 유일한 치료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옥녀는 오히려 동상 걸리기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송가원이 손을 그렇게 문질러 줄 때마다 한없이 달고 그지없이 황홀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대 거인 토벌 작전으로 병원이 비밀 아지트로 변하면서 단 한 번도 깊은 사랑을 나누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토벌을 피해 다니느라 둘만의 잠자리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송가원과 옥녀를 호위하는 무장대원은 넷이었다. 그건 군장 지위와 맞먹는 특대우였다. 그런데도 송가원은 또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사령부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총을 지급해 주었던 것이다. 송가원은 환자들에게 사령부의 결정을 전달했다.

"...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앞으로 이삼일 안에 하산할 준비를 하십시오. 집에 가서 치료를 하면 여기 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송가원은 자신이 맡고 있는 수용소의 환자들을 모두 하산시킬 준비를 하였다. 사령부에서 선별을 하라고 했다. 그러나 선별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수용소에 머물러야 하는 그들은 이미 중증이었고 다시 총을 들고 싸울 가망성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환자들은 놀란 기색으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저는 안 갈랍니다. 내려가 봐야 찾아갈 집도 없어요,"

한사람이 불쑥 말했다. 두꺼비라는 별명을 가진 강원도 사람이었다 스물대여섯쯤 되는 그 사람은 동상에 총상까지 심했다. 산밭을 일구며 나뭇짐을 져내 살아오던 그는 일본 순사를 죽이고 도망 온 것으로 유명했다. 어느 날 철원으로 나뭇짐을 지고 나왔다가 순사가 무작정 지게를 걷어차 넘어뜨리는 바람에 결기가 솟아 그 순사를 떠밀었다. 그런데 벌렁 넘어지는 순간 순사는 그대로 죽고 말았다. 그 길로 줄행랑을 친 것이 만주였다. 항일연군에 들어온 그는 어찌나 용맹스럽게 잘 싸웠던지 분대장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허벅지에 총상을 입어 수용소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지 말고 내려가서 어쨋든 병원엘 찾아가도록 하시오. 병원에 가면 곧 나을 병인데 여기 이러고 있어서는 결국 죽게 된단 말이오."

송가원은 일부러 몰악스럽게 말했다.

"왜놈들한테 죽긴 왜 죽어. 난 여기서 죽겠소."

그의 말은 퉁명스러웠다.

"잡혀 죽긴 왜 잡혀 죽어. 가짜로 투항하는 척하면 되는데, 어쨌든 귀한 목숨은 건져야 할 것이 아니오."

", 상부에서 그러라고 했나요?"

그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 그렇게라도 해서 목숨을 보존해야 한다고 결정했어요."

투항자들이 계속 생겨 따로 지켜야 할 기밀이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부대가 상황에 따라 빈번하게 이동하고 있어서 투항자들의 제보로 피해를 입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령부에서는 투항을 역이용해서 환자들을 살리자는 계획을 세운 것이었다.

"그것도 좋은 방책이구요. 왜놈 덕에 몸 나아가지고 다시 들어오면 되겠군요."

그 사람은 정말 두꺼비처럼 눈을 깜박거렸다.

", 그러면 더욱 좋겠지요."

송가원은 미처 그런 생각까지는 못했던 터라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별이 목전에 닥쳤는데 우리 옥비 명창 노래나 한 가락 들어보면 좋겠는데요."

딴사람이 불쑥 말을 했다.

"그래요?"

송가원은 고개를 돌렸고, 무슨 유인물을 읽고 있던 옥녀가 고개를 들면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송가원은 옥비가 읽고 있던 것이 3.1 월간인 것을 알아보았다. 그건 옥비가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환자수용소마다 비치된 것이었다.

"이건 다들 읽었습니까?"

송가원이 옥비의 손에서 3.1월간을 가져가며 물었다.

", 달달 월 정도로 읽었어요."

"그럼요, 읽을 것이 뭐가 또 있나요."

환자들은 모두 당연하지 않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3.1 월간은 재만한인 조국광복회의 기관지였다. 조선사람들은 중국 사람들과 연합하여 조선의 해방을 위해서 투쟁한다는 취지의 코민테른 결의가 나오면서 그 구체적인 실천으로 항일연군 안의 조선사람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것이 재만한인 조국광복회였다. 그리고 그 기관으로 동사본이나마 3.1월간이 매달 발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반일과 해방투쟁, 민족단결이 주를 이루었다. 3.1월간은 조선대원들의 정신무장을 위한 학습자료이기도 했다.

"그럼 옥비 명창이 한 곡조 불러야겠소."

송가원이 조금 옆으로 비켜앉으며 말했다.

"무신 노래로...?"

옥비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임막하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많이 야위고 거칠어진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타향살이요."

두꺼비가 재빨리 곡목을 댔다. 그건 조선대원들이면 누구나 애창하는 노래였다. 적에게 에워싸이다시피 하고 있는 유격투쟁에서 소리내어 노래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항일연군 내에서 세 가지 절대 금지 사항이 있었다. 소리. 불빛. 연기가 그것이었다. 그 세 가지는 적과 직결되는 것인 동시에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그 사항을 어기는 것은 바로 적을 부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박수도 손바닥이 서로 엇갈려 소리가 안 나게 박수를 치듯 노래도 소리가 퍼져나가지 않게 부르는 요령이 있었다.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입 안에서만 굴리면 가까이 앉은 사람들에게만 들릴 뿐 전혀 들리지 않았다.

타아햐앙사아리 며엇해에더언가아아...

두 손을 가슴에 포겐 옥비는 눈을 사르르 감은 채 노래를 시작했다. 환자들도 눈을 내려감으며 낮게 흐르는 노랫소리에 귀를 모았다. 그들의 입은 소리를 내지 못한 채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었다. 옥비는 눈물 젖어오는 가슴으로 절절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나마 노래를 부를 때가 사는 것 같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환자들이 자기 노래를 듣고 기뻐하는 것이 옥비는 무척 흡족하기도 했다.

"옥비 노래가 어떤 명약보다 낫소. 아픈 것도 잊고 저리들 좋아할 때 병이 낫는 법이니까."

송가원의 이런 말에 옥비는 더욱 보람을 느끼며 어는 환자수용소에서나 노래 청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재청이요, 재청!"

환자들이 공박수를 치는 가운데 어떤 사람이 재청을 불렀다. 그들의 눈에는 물기가 젖어 있었다.

", 이번에는 아리랑을 불러주시오."

옥비는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앉음새를 고쳤다.

아아라라앙 아아리라앙 아아라아리오오...

소리가 낮고 가늘어 더욱 애절하고 서럽게 느껴지는 가락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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