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집단최면
"자아 여러분, 모두 주목해요, 주목! 지난 시간에 배운 걸 다 암기해오라고 숙제 냈었지요? 지금부터 주가 주가 암기를 잘하나 조사를 하겠어요. 이건 시험 보는 거니까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잘 암기해서 좋은 점수를 받도록 해야 해요. 자아 그럼, 대일본제국이 조선사람들을 개명시키고 편하게 살게 해주기 위해 여러 가지 시설을 했다. 그것이 어떤 것들인지 암기할 수 있는 사람!"
젊은 여선생은 막대기로 교탁을 탕 치며 왼쪽 팔을 반쯤 들어올렸다.
"저요, 저요!"
"선생님, 저요!"
50여 명의 아이들 중에서 기세좋게 팔을 뻗어올리며 소리치고 있는 것은 열댓 명이었다. 선생은 일본여자였고 학생들은 조선 아이들이었다. 고양이상인 여선생은 얼굴을 찌푸리며 아이들을 휘둘러보았다.
"아니, 겨우 이것밖에 안돼!"
여선생이 앙칼지게 내쏘았다. 손을 들지 못한 아이들이 기죽고 주눅 들어 고개를 떨구었고, 손을 든 아이들은 주위를 둘러보느라고 바빴다.
"암기해 오지 않은 학생들은 이따가 매 맞을 줄 알어!"
여선생의 목소리는 차고 날카로웠다. 아이들의 고개는 더 수그러들면서 어깨까지 움츠려졌다.
"어디 그럼 누구부터 암기해 볼까?"
여선생이 싹 웃으며 손 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선생님, 저요!"
"저요,저요!"
철없는 제비새끼들이 입 짝짝 벌리며 먹이를 다투듯 아이들은 엉덩이까지 들먹이며 다시 소리치기 시작했다.
"저어기, 김경일!"
여선생이 막대기끝으로 지목했다. 뒤쪽에서 한 아이가 벌떡 일어섰다. 몸집이 큰 아이는 혈색이 좋고 입성도 깨끗했다. 한눈에 행세깨나 하는 집안의 자식이라는 표가 금방 났다.
"예, 대일본제국은 조선사람들을 개명시키고 편히 살게 해주기 위해 철도를 놓아주었고, 에에... 전등을 가설해 주었고, 으음... 서당을 많이 지어..."
몇몇 아이들이 킥킥, 쿡쿡 웃었다.
"아니 저어, 서당이 아니고..., 서당을 없애고 저어..., 학교를 많이 지어 신식공부를 가르쳐주었고, 에에..."
"됐어, 그만 해. 김경일, 그래 가지고는 안되겠지? 좀더 열심히 하도록 해." 여선생은 치부책에다가 무엇인가를 간단히 적고는, "다음 누구?" 막대기로 교탁을 탕 치며 아이들을 휘둘러보았다.
"저요!"
"저요, 선생님!"
어찌 된 일인지 손을 든 아이들은 열 명 남짓으로 줄어 있었다.
"너, 박용화 해봐."
앞에서 두번째 줄에서 한 아이가 발딱 일어섰다. 그 아이는 아까 아이보다 절반밖에 안될 정도로 몸집이 작고 말랐으며, 가무잡잡한 얼굴에 입성도 구지레했다. 집안의 궁한 형편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의 눈은 초롱초롱했고, 어딘가 다부져 보이는 인상이었다.
"옛, 대일본제국은 조선사람들을 개명시키고 편히 살게 해주기 위해 첫째, 방방곡곡에 철도를 놓아 천릿길을 하루에 다니게 해주었고, 둘째 사방팔방으로 신작로를 닦아 우마차 대신 자동차를 타고 다니게 해주었고, 셋째 도시마다 전등을 가설해 어두운 등잔불 대신 대낮같이 밝게 살게 해주었고, 넷째 구식 서당을 없애고 신식 학교를 수없이 많이 지어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신식공부를 가르쳐주었고, 다섯째 우체국 시설을 완비해 어느 곳에서나 편지와 전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해주었고, 그외에도 대일본제국이 조선사람들을 위해 해주신 일들은 너무나 많아 일일이 다 셀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일들은 조선사람들의 힘으로는 백년이 걸려도 할 수가 없는 것인데 대임본제국과 천황폐하께오서 베풀어주신 은총으로 조선사람들은 만만세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박용화라는 아이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단 한 군데 막힘이 없이 줄줄이 외워댔다.
"박용화, 잘했어요. 아주아주 잘했어요. 우리 다같이 박용화에게 박수!"
여선생은 더없이 흡족하게 웃으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모두 선생을 따라 박수를 쳤다. 박용화는 부끄러운 척했지만 그 가무잡잡한 얼굴은 득의만면해져 있었다.
"자아, 모두 박용화처럼 암기해야만 당당한 황국신민이 되고 백점도 맞을 수 있어요. 그럼 이번엔 문답을 해보겠어요. 박용화 일어서!"
"옛!"
"일시동인이란 누가 하신 유시지요?"
"예, 천황폐하께오서 하신 유십니다."
"맞았어요. 그 뜻이 뭐지요?"
"예, 모든 신민을 다 똑같이 사랑하신다 함입니다."
"예, 맞았어요. 모든 신민이란 누구누구를 가리키는 거지요?"
"예, 첫째 일본사람, 들째 조선사람입니다."
"맞았어요. 그럼, 황공하옵게도 천왕황하의 크나큰 은총을 입은 조선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지요?"
"예, 천황폐하를 하늘 높이 받들고 충성으로써 결사보은해야 합니다."
"그렇지요. 그다음 문답, 조선사람들은 왜 가난하지요?"
"예, 게으르고 불평만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맞았어요. 그럼 잘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예, 일본사람을 본받아 불평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잘 맞혔어요. 조선사람들은 왜 병에 많이 걸리지요?"
"예, 더럽고 공동위생을 지킬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맞았어요. 그럼 병이 안 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예, 일본사람을 본받아 언제나 깨끗하게 하고 공동위생을 잘 지켜야 합니다."
"좋아요, 백점이에요, 백점! 여러분, 다같이 백점 맞은 박용화에게 다시 박수."
아이들은 다시 선생을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자아 그럼, 또다른 사람!"
여선생은 다시 막대기로 교탁을 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심상소학교 4학년 수신시간이었다. 손을 들었던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이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암기했지만 그 누구도 박용화만큼 막힘없이 잘하지는 못했다. 반복되는 내용에 지루해진 아이들은 한눈을 팔거나 졸고, 손장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선생의 날카로운 눈은 그런 것을 놓치지 않았다. 눈에 띄는 쪽쪽 불러내 막대기로 두 손바닥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여선생은 할 일이 없어서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암기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 반복을 통해서 학급 아동 전체가 암기하도록 하는 것이었고, 어린것들의 머릿속에 그런 사실들을 각인시켜 일본의 위대성과 조선의 열등성이 뼛속까지 스미게 하는 것이 교육 목표였다. 손을 든 아이들의 암기가 다 끝나자 나머지 아이들은 교탁에서부터 출석번호대로 줄을 섰다. 그리고 여선생 앞에 두 손바닥을 나란히 폈다. 얼굴에 살얼음이 낀 여선생은 아이들의 손바닥을 석 대씩 내리쳤다. 손바닥을 맞은 아이들은 두 손을 허공에 마구 털어대기도 했고, 입에대고 불기도 했고, 맞비비며 뺑뺑이를 돌기도 했고, 사타구니 사이에 넣고 깡충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눈물이 맺히면서도 아프다고 소리치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소리를 냈다가는 더 맞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딸랑 딸랑 종이 울리고 시간이 끝났다. 여선생이 나가고 조금 있다가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고메, 인자 살았다!"
"아이고 징헌 눔에 수신시간."
"나넌 피가 다 보타부렀다."
"나넌 봉알이 뽀짝 쫄아부렀다. 히히..."
아이들은 비로소 조선말을 하며 키들거리는 여유를 찾았다.
"야 용화야 쓰발놈아, 니넌 어찌 그리 달달 잘도 외우냐?"
박용화를 에워싼 대여섯 명의 아이들 중에 하나가 물었다.
"요 좆만 새끼넌 외우는 디 선수 아니여?"
"우리넌 돌대그빡이고 요새끼 대그빡언 금대그빡이랑께"
"아이고 니기미헐 놈덜아, 나 깝깝혀죽겄다."
박용화는 소리치며 두 팔을 휘저었다. 공부가 다 끝나자 청소할 분단을 빼놓고 아이들이 우루루 밖으로 몰려 나갔다. 열 명의 청소분단 아이들이 걸상이 올려진 책상을 뒤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박용화는 책상을 옮기지 않고 먼지떨이개를 들고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아이는 책상을 옮기느라고 애쓰고 있는 아이들에게 빨리빨리 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아이는 분단장이었다.
"용화 저것언 순 좆겉은 놈이다."
"선생님헌티 신용받는다고 저 지랄이여."
"분단장 산수 숙제럴 다 해준께."
"저새끼 꼴비기 싫어 똑 죽겄어."
"고 잘난 디그빡얼 팔 조사부러야 허는디."
"저 씨발놈이 쌈도 잘허덜 안혀."
책상을 맞들어 옮기는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말이었다.
박용화는 청소가 다 끝날 때까지 비질은 물론이고 물걸레질 한번 하지 않고 먼지 터는 시늉만 하고 다니다가 끝났다. 학교 운동장가로는 플라타너스 잎들이 가을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아이들이 몇몇씩 모여 놀고 있었다.
"야, 용화야 항꾼에 가자."
구슬치기를 하고 있던 한 아이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그 아이는 다른 애들과는 달리 가방을 메고 있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은 책보를 들거나 허리에 동이고 있었다. 박용화도 검정물 들인 무명책보를 허리에 질끈 묶고 있었다.
"멋났다고 쫓아오냐?"
박용화는 옆에 다가선 아이에게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그 얼굴이 거만스럽기 그지없었다.
"용화야, 나 산수 숙제 잠 해도라."
"얼매 낼라고?"
"나가 오늘은 돈이 ㅇ응께 꽃구실 다섯 개 주께."
"좆뽀는 소리 허고 자빠졌네. 꽃구실이 니 에미냐, 씨발눔아."
"꽃구실 다섯 개먼 돈이 얼맨지나 아냐?"
"요런 빙신 겉은 새끼, 꽃구실이야 구실치기로 얼매든지 딸 수 있당께."
박용화는 빽 소리를 질렀다.
"아 씨이, 글먼 외상으로 허자."
"잡소리 말고 연필 한 자리 내."
"잉, 그려."
"향나무연필로."
"그것언 얼매나 비싸다고."
"좆겉은 새끼, 나도 안혀."
"아니, 아니여. 향나무연필로 줄게."
박용화는 멀리 삼학도가 바라보이는 공원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아 한 시간 정도 산수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향나무연필 한 자루를 받아채였다.
"요것 비밀이다 잉!"
그 아이가 가방을 메며 말했다.
"좆겉은 놈, 나가 애기냐?"
박용화는 코웃음을 치며 경멸스럽게 웃었다.
박용화는 혼자 걸으며 몹시 배가 고팠다. 점심을 굶어서 이맘때쯤이면 언제나 느끼는 배고픔이었다. 박용화는 형에게 슬쩍 들러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가자면 형네 직장을 지나게 되어 있었고, 어찌 재수가 좋으면 떡이나 고구마 한 개쯤 사먹을 수 있는 돈을 얻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형은 식구들이 직장에 찾아가는 것을 영 싫어했다. 동화형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그런지 아버지만큼 무서웠다. 그리고 오늘 암기에서 백점 맞은 것을 자랑할 수도 없었다. 형은 이상하게도 일본사람들을 아주 싫어했다. 독립운동가도 아니면서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박용화는 속이 쓰리도록 베고픔을 느끼며 멀리 떠 있는 삼학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삼학도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섬과 부두 사이에 떠 있는 일본 기선들을 보고 있었다. 일본은 기선이 저리도 많은데 왜 우리는 하나도 없을까. 일본은 기선이 많은 것처럼 힘이 세다. 우리는 돛단배뿐이라서 힘이 약하다. 기선 한 척하고 돛단배 백 척하고 싸워도 기선이 이긴다고 했다. 쇠로 된 기선한테 나무로 된 돛단배가 지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왜 우리는 그 꼴이 되었을까. 게을러서 가난하다는데 그것이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닐까?
"야, 이 과자는 맛없다."
"봐라, 그 상점 것 맛없지."
"이상하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딴 상점 것 사먹으로 가자."
"그래, 역전 상점이 맛있다."
일본아이들 셋이 앞다투어 뛰어갔다.
박용화는 그 아이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에 고인 군침을 꿀떡 삼켰다. 그 아이들이 너무 부러웠다. 모두 가방을 멨고 반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사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된 것이 일본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일본아이들은 검정고무신 같은 것은 아예 신지를 않았다. 박용화는 무겁게 몸을 일으키며 또 그 생각을 했다. 어서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만 되면 얼마든지 돈벌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산수숙제를 해주고 돈을 벌고 고구마나 떡도 얻어먹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쌀밥에 고깃국을 배가 터지도록 먹고, 돈을 맘껏 써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박용화는 밑져봐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형에게 들러보기로 했다. 행에게 돈을 못 얻더라도 형이 일하는 사무실을 드나드는 것은 은근히 기분좋은 일이었다. 형은 아버지에 비하며 쥐어박기 잘하고 무뚝뚝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막노동을 하는 창피함에 비하면 형은 책상에 앉아 필을 놀리는 어엿한 사무원이라서 남들에게 자랑스러웠다. 아버지는 새로 생긴 고무신공장에 잘 다니다가 2년 전에 쫓겨나고 말았다. 장사가 잘 안 되는 공황이라는 것으로 회사에서 임금을 깍아 내리자 직공들이 전부 들고일어나 쟁의라는 것을 일으켰다. 3백여 명이 사흘 동안 일을 안 하고 공장 앞에서 시위만 하자 경찰들이 총을 돌고 나서게 되었다. 50며 명이 붙들려가고 공장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아버지도 주동자로 50여 명 속에 끼어 있었다. 아버지는 닷새 만에 경찰서에서 풀려났는데 더는 공장에 다니지 못했다. 깎인 임금도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왜 저렇게 미련할까 하는 생각을 그때 처음로 했던 것이었다.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공장 사람들 모두가 왜 그리 아무 이익도 없는 헛일을 하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형한테 그것을 따져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형은, "대갱이에 피도 안 모른 쥐좆만한 새끼가 싸가지 업는 주딩이 까고 자빠졌네. 요새끼, 담에 크먼 머시가 될라고 이려" 하며 여지없이 머리통을 까는 것이었다. 눈에서 불이 번쩍하고 어찌나 아픈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딴 공장에 자리를 구한다고 나다녔지만 한 달을 그냥 보내고 결국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게 되었다.아버지가 하는 일은 목화짐을 배로 나르는 것이었다. 눈치를 보니 그것도 형이 구해준 자리 같았다. 왜냐하면 형이 필을 놀리는 사무실이 바로 목화 모아들이는 일을 보는 곳이었던 것이다.
형도 미련하기로 치자면 아버지보다 더했다. 형은 주판 잘 놓고 암산 잘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은행에 있는 행원들도 형은 못 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형은 은행에 비하면 움막이나 다름없는 좁은 사무실에 박혀 있었다. 사무실 크기만이 아니라 월급도 서너 배는 차이가 난다고 했다. 형은 근사하게 양복을 입은 은행원이 될 수 있었는데도 아버지와 똑같이 시위 주동자가 되어 퇴학을 당하고 그리 볼품없이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대목에서 영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시위는 형이 먼저 주동한 것인데 아버지가 그걸 보고 배운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형에게 가르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걸 아버지나 형한테는 물을 수가 없고, 어머니나 누나들한테 물어보았자 알 것 같지가 않았다. 어머니는 일본 글은커녕 한글도 알지를 못했고, 누나들은 자신이 구구법을 가르쳐주는 처지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아버지나 형은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미련했다. 손해만 보면서 시위를 주동하고 나서는 것은 기선하고 돛단배가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이 왜 그 쉬운 이치를 모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박용화는 형네 사무실 문을 살금살금 옆으로 밀었다. 문틈으로 보니 네댓 사람이 사무를 있었고, 형은 어떤 사람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음마, 니 왔냐. 들오니라."
문이 확 밀리며 뒤에서 들린 여자 목소리였다. 박용화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형을 최고라고 손꼽는 급사 순심이었다.
"박 서기님, 동상 용화 왔구만요."
사무실로 들어가며 순심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박용화는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무실 사람들의 눈길이 다 자신에게로 쏠렸던 것이다.
"멀라고 또 왔냐. 싸게 집이나 가그라."
박동화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박용화는 아따 뜨거라 싶어 후딱 돌아섰다. 사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 그러잖아도 그냥 돌아설까 하던 참이었는데 급사 순심이가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기분이 잡친 박용화는 더 배고픔을 느끼며 집으로 터덕터덕 걷기 시작했다.
사공에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박용화는 배고픔을 잊으려고 <목포의 눈물>을 흥얼거리며 걷고 있었다. 목포사람들치고 그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삼년 동안에 어른들이 어찌나 물러댔던지 아이들까지도 다 배워 어디서나 청승스럽게 부르는 것이었다.
상공회의소 직원과 이야기를 다 끝낸 박동화는 마음이 께름칙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동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동생에게 너무 면박을 준 것 같아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상공회의소 직원의 설레발에 짜증이 나 있던 판에 동생은 괜히 덤터기를 쓴 것이었다. 총독부가 일본에 필요로 하는 면화 10억 근을 모두 조선에서 생산해내기 위해서 면화장려계획을 세운 것이 지난달 9월이었다. 그것은 이른바 남면북양정책의 일환이었다. 그 뜻은 남쪽에서는 면화를 생산해내고, 북쪽에서는 양을 사육(1가구당 5마리)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기후와 풍토에서는 면화 재배와 양 사육이 적당치 않아서 생긴 정책이었다. 면화는 쌀과 비슷하게 무덥고 찌는 기후 속에서 잘되는 까닭에 그동안에도 전라도 지방, 특히 전라남도에서는 거의 강압적으로 면화를 심어왔던 것이다. 군산항에 쌀이 집중되듯이 목포항이 목화더미로 뒤덮이는 것은 그런 연고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년부터 10억 근을 생산해 내야 한다니 그건 이만저만한 큰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계획을 차질없이 실행하기 위해서 관계 기관에서는 벌써부터 일대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각 읍면 직원들은 재배지 확대의 세부 계획을 세우랴, 농민들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랴, 인심 잃기 딱 좋은 고약한 일을 새로 떠맡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일과는 별로 상관도 없는 상공회의소에서 덩달아 뛰면서 사람을 귀찮게 하고 있었다. 상공회의소와 관계가 있어보았자 내년 가을에 목화를 따고 나서부터였다. 금년 1월에 설립인가를 받고 생겨난 상공회의소에서는 한가하니까 괜히 일거리를 찾아 바람을 일으키고 다녔다.
박동화는 그 정책을 어느 누구보다도 싫어했다. 면화 재배는 뽕나무심기와 마찬가지로 농민들만 괴롭힐 뿐 아무런 이득이 없는 농사였다. 값을 낮게 책정해서 빼앗듯이 해버리는 그 농사는 농민들의 피땀을 빠는 또 하나의 착취였다. 그런데 면화 재배가 확대되면 될수록 그 강압이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약해질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일거리도 훨씬 불어나게 될 판이었다. 그렇다고 일이 불어난 만큼 보수를 올려줄 리 없었다. 박동화는 자리에 와 앉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와따 참, 3년 공딜에 소 키와났등마 우황 들어 죽어불드라고 나가 딱 그 짱이랑께."
"무신 일 났소?"
"나가 말얼 안헐라고 혔는디 말얼 참을랑께 천불이 일어 못살겄네. 나가 술 참어감서 돈 모타 산 자전거 말이시."
"고것이 워찌 됐간디요?"
"아 금메 어지께밤에 도적맞어 부렀당께로."
"웜메 아까와라!"
"고것 안돼기넌 혔소마넌, 10년 수절 과부 재가혀서 고자 만낸 것보담언 나스요."
"누가 고런 재수없는 일 당했당가요?"
"아 저, 술도가 딸기코 지배인 안 있다고, 그 사람이 유성기럴 사들고 집으로 척 들어갔는디, 그것얼 대청 끝에 놓고 칙간에 간 새에 아, 금메 여섯 살 난 손지새끼가 밀어서 댓돌에 치고 석대에 치고 마당에 떡얼 쳐서 노래 한 곡조 못 들어보고 끝장나 부렀다드랑께."
"맞구만요, 유성기가 자전거보담 비싼께요."
"거 무신 서운헌 소리럴 그리 헌당가. 나 돈 1원이먼 그 사람 돈 10원 허고 진배없단 것을 생각 안혀?"
"잉, 그도 그렇구만요."
"고런 오살육시럴 헐 놈얼 어쩌크름 잡제. 사거리에서 망얼 볼 수도 ㅇ고."
"그 자전거가 여그 목포바닥에 있겄소? 폴새 나주나 광주로 넘어갔제."
"아니 시방 누구 복장 질르는 것이여!"
퇴근시간이 다 되어 직원들이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박동화는 듣기가 싫어서 일을 하는 척하고 있었다.
"박 서기님, 전화 왔는디요."
여습사의 목소리가 쨍하니 울렸다. 박동화는 전화통이 걸린 데로 천천히 걸어갔다. 일도 맘에 들지 않고 직원들도 맘에 차지 않아 오후만 되면 잔뜩 피곤했던 것이다.
"자네 동화여? 나 봉길이시."
박동화는 문득 긴장했다. 그러나 태연하게 응대했다.
"이, 자넨가?"
"오늘 밤 술 한잔 허능 것이 워띠여?"
"잉, 좋제."
"글먼 이따 일곱시에 삼학도서 만내세."
"그려, 그리허세."
박동화는 아무 내색없이 도로 자리에 와 앉았다. 그러나 속은 팽팽히 긴장되어 있었다. 봉길이란 이름은 조직원의 가명이었고, 술집 삼학도는 비밀접선처의 암호였다. 마음의 긴장 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있었다. 몇 개월에 걸쳐서 검거가 걷잡을 수 없이 심했던 것이다. 자신은 고정책으로 박혀서 현장활동에는 나서지 않고 있지만 불안감은 날로 커져가고 있었다. 지금도 전혀 시간 여유가 없이 만나자는 것이 아무래도 무슨 일이 터진 것만 같았다. 퇴근을 한 박동화는 국밥부터 사먹었다. 20리 길을 걸어가야 했던 것이다. 박동화는 사무실을 나서면서부터 시가지를 벗어날 때까지 뒤에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 있을지 모를 미행을 알아채기 위해서였다. 야산자락의 외딴집에는 조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그서 뜹시다. 행여 몰릉께로."
조직원이 앞장서 나섰다. 10월의 어둠은 빨리 내렸다. 다시 목포 쪽으로 야산 두 개를 거쳐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광주 방직공장 조직이 들통나 부렀소. 바람이 되게 쳐서 총책이 상해로 떠야 허게 생겼응께 선편얼 물색해야 쓰겄소."
"글씨요..., 고것이 에롭게 되았는디요."
"무신 소리다요?"
"긍께 머시냐, 상해 뱃질이 맥힌 지가 너댓 달 되았구만요. 아시대끼 윤봉길 거사로 왜놈덜이 눈에 불쓰고 나대는 통에 임정꺼정 항주로 이전허지 안했능가요. 그후로도 왜눔덜이 항구럴 철통겉이 지킴서 조선사람만 배에서 내렸다 허먼 잡아채고, 화물선얼 더 눈독 딜이는 판이라 아무도 일얼 안 맡을라고 손얼 끊었구만요. 들통이 나먼 자기덜도 크게 당헌께요."
"알 만허요. 그나저나 큰탈이시."
조직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근디, 상해로 뜰라는 계획 자체럴 바꾸는 것이 어쩔랑가 싶구만요. 왜놈덜이 얼매나 난리판굿얼 지기먼 임정이 이전얼 혔겄능가요."
"나 생각도 그러요. 근디 참 난감허요. 조선팔도넌 이중 삼중으로 거무줄이 쳐지고, 만주에 상해꺼정 저 꼴이 되았시니 어디로 가야 쓰겄소."
"그려도 조선 땅이 안 낫겄능가요?"
"고것이 그렇덜 않으요. 일단 저놈덜 수사선상에 올르면 옴치고 뛸 디가 없소. 봇씨요, 치안유지법이 개정되고 전번달 9월꺼정 열 달 동안에 우리 동지덜이 어찌서 3천 명이 넘게 체포되았겄소. 유치장이고 감옥이 모지래서 난린디, 운동얼 지속허자먼 노출된 사람덜언 중국땅으로 뜨는 질밖에 다른 수가 없소."
"그렇기도 허구만요."
박동화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담배만 피웠다. 박동화는 지난달까지 체포된 사람들이 3천 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짚고 있었다.
"오늘 수고혔소. 또 만냅시다."
조직원이 손을 내밀었다.
"예, 미안시럽구만요."
"아니오, 우리 뜻이 아닝께. 심냅시다."
박동화는 어둠 속을 걸으며 마음은 어둠만큼 어두웠다. 적색노조와 적색농조는 계속해서 파괴되고 있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앞을 전망하기가 어려웠다. 목포의 공장들과 부두노동자들 속에도 조직이 침투되고 있을 거였다. 제발 아무 탈 없이 조직이 확장되어 나가기를 빌었다.
44. 떨어진 별
칼바람 휘몰아치는 소리는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끝없는 설원 위에 불어닥치는 그 바람 소리는 날카롭고 예리하면서도 괴기스럽고 음산했다. 수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지르는 비명소라, 온갖 귀신들이 울어대는 울음소리, 그런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 바람은 영하 30도의 추위 속에 얼어붙은 눈벌판을 휩쓸며 몰아치고 있었다. 그 거친 바람은 녹지 못하고 쌓이기만 하는 설원의 눈가루를 날려올려 마치 눈이 내리는 것처럼 눈보라를 일으켰다. 얼굴을 찢고 째는 것처럼 날카롭고 매서운 그 바람은 아무리 모직옷이라 하더라도 이름 그대로 <칼바람>일 수밖에 없었다. 벽난로에 통나무장작이 활활 타고 있는 방안에서도 그 바람 소리는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런데 바람 소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섞여 들이는 것 같았다. 지삼출은 문득 긴장하며 귀를 세웠다. 집주인은 벽난로의 따스한 불기운에 취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지삼출의 귀에 잡힌 것은 무슨 짐승들이 떼지어 뛰고 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런데 이광민은 아무 낌새도 느끼지 못한 채 주인집 아이의 헌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삼출은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츰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가만있거라, 저것이 무신 소리제?...
세찬 바람 소리에 뒤섞이고 있는 그 소리를 알 듯 말 듯해서 지삼출은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런데 지삼출은 잠시 후 깜짝 놀랐다. 그것은 말발굽 소리들이었던 것이다.
마적 아닌가?
지삼출의 머리를 친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여기는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 땅 연해주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런데 말발굽소리들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삼출은 아무래도 불안한 생각을 떼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맡고 있는 일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이 이동지, 저 소리 딛긴가?"
지삼출은 더 참지 못하고 이광민을 불렀다.
"예? 무, 무슨 소리요?"
이광민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저 소리 잘 들어보소. 말떼덜이 뛰오고 있덜 안혀?"
지삼출은 말보다 빠르게 밖을 향해 손짓했다. 이광민은 창가로 다가서서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맞아요, 말발굽 소립니다."
이광민의 얼굴이 싹 긴장되었다.
"저것이 멋이까?"
"마적떼 같은데요."
이광민의 입에서 지체없이 나온 말이었다.
"연해주에도 마적이 있능가?"
"그럼요. 국경이 가까우니까 털고 도망가는 겁니다."
"탈났네. 얼렁 쥔 깨우소."
지삼출이 벌떨 일어났다.
"아저씨, 쥔아저씨! 마적떼 습격 같은데요."
이광민이 집주인을 흔들었다.
"어, 뭐라구? 마, 마적떼!"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뜬 주인이 허둥거렸다.
"예, 저 말발굽소리들 들어보십시오."
말발굽소리들은 완연히 가깝고 분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맞소, 마적떼요. 어서 그 중국옷 벗고 옷들 갈아입어요."
겁에 질린 집주인이 벽에 걸린 옷을 내려 이광민에게 던지고는 허둥지둥 옷장 쪽으로 달려갔다. 이광민과 지삼출은 정신없이 옷을 갈아입으며 주인이 왜 그러는지를 알아차렸다. 중국에서 왔다는 것이 표가 나면 꼼짝없이 마적떼의 표적이 될 거였다. 옷을 다 갈아입고 중국옷을 아무렇게나 뭉쳐 감추었을 즈음에 총소리들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손 들고 벽으로 돌아서요."
집주인이 외쳤다. 그리고 시범을 보이듯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벽으로 가서 몸을 찰싹 붙이듯이 했다. 그건 아주 숙달된 마적맞이 동작이었다. 저항할 의사가 전혀 없으니 무엇이든 마음대로 가려가라는 뜻이었다. 지삼출과 이광민도 마적떼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서 집주인과 똑같이 벽에 다 붙어섰다. 바깥에서는 총소리와 말발굽소리와 외침들이 뒤섞이며 바람 소리를 제압하고 있었다. 마적 떼다운 위압적이고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마적 떼들은 기습할 때는 언제나 총알 아까운 것 없이 마구 총질을 해댔다. 반항을 못 하게 미리 기를 꺾고 드는 술책이었다. 그러나 그건 결코 위험용의 공포만이 아니었다. 조금만 기미가 이상하거나 의심스러운 짓을 하면 여지없이 총을 갈겨버렸다. 마적들은 말을 귀신같이 잘 타는 것만큼 총쏘는 솜씨도 뛰어났다. 그들이 탐하는 것은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재물이었으므로 누구나 반항을 포기했다. 만약 몇 사람이라도 반항을 포기했다. 만약 몇 사람이라도 반항을 하면 그들은 살아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네마저 불바다를 면하기 어려웠다. 마적들의 외침과 뜀박질 소리가 요란하게 엉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에 바른 두꺼운 기름종이가 북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방안으로 총구 하나가 쑥 들어왔다. 그 총구는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빠르게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방안을 훑었다. 그리고 총구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거칠은 발길질과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찬바람과 눈가루들이 왈칵 몰려들었다. 그리고 총은 겨눈 마적들이 뛰어들었다. 세 명은 민첩한 동작으로 각자의 방향을 찾아 경계를 폈다. 그들은 온통 털로 뒤덮여있었다. 강추위와 강풍에 견딜 수 있도록 털모자에 털외투를 입은 것이었다. 강추위와 강풍을 막는 데는 역시 추운 지방의 짐승 모피가 제일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구두는 목이 긴 가죽장화였다. 그들의 치장은 그 어떤 군대보다도 추위를 잘 견뎌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전혀 반항의 기미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세 마적은 제각기 코를 큼큼거리며 큼직한 단칸방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편을 피웠는지 안 피웠는지 아편 냄새를 맡는 것이었다. 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바로 값비싼 아편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다니던 그들은 서로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집주인이 아편을 피우지 않으니 집 안에 아편 냄새가 배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중국말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가자, 딴 집으로."
"아냐, 뒤져봐야지."
"냄새가 전혀 안 나잖아."
"그래, 뒤져봤자 헛일이야."
"그래도 혹시 알아?"
"이렇게 냄새 없는 집은 허탕이라니까."
"이러다간 딴 집도 다 놓친다."
"맞아, 빨리 가자."
다른 집으로 가자는 두 사람의 의견에 눌려 나머지 마적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다시 재빠른 동작으로 방안을 설쳐대기 시작했다. 털모자며 털외투 같은 값나가는 물건들은 서로 다투어 거머잡고 있었다. 벽에 걸렸던 털로 된 모자나 옷들은 순식간에 그들의 품으로 옮겨졌다.
"이 새끼들! 왜 아편도 안 피워."
마적 하나가 지삼출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차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쿠!..."
느닷없이 엉덩이를 차인 지삼출은 무릎이 꺾이며 반쯤 주저앉았다. 위기를 모면하게 되어 잔뜩 긴장해 있던 마음이 사르르 풀리고 있던 참이었다.
"에이 재수없어!"
금방 배우기라도 한 듯 두 번째 마적이 집주인의 엉덩이를 걷어차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가난한 조선놈들, 똥이나 먹어라!"
세 번째 마적이 이광민의 엉덩이를 걷어차고는 후닥닥 밖으로 내달았다. 열려진 문밖으로 마적들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보였다. 말을 탄 마적이 총을 휘두르며 쏜살같이 달려가기도 했다. 총소리는 잠잠해졌지만 눈위를 다급하게 뛰는 발자국 소리나 외침들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문이 활짝 열린 채로 매운 바람과 눈가루들이 통째로 집 안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벽에서 돌아선 그들 중에 그 누구도 문을 닫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건 일부러 그대로 두는 것이었다. 찢어진 종이창, 열려진 문, 그건 다른 마적들에게 이미 마적이 훑고 지나갔다는 것을 알리는 표식이었던 것이다. 마적떼는 한 시간 남짓 온 마을을 들쑤시고 분탕질을 해댔다. 다시 총소리와 함께 말발굽 소리들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적 떼가 마을을 떠나가는 것이었다. 세찬 바람이 일구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 가는 마적 떼는 2백여 명이었다.
"하이고야, 붕알 깨지는지 알었다."
지삼출이 샅을 훔치며 통나무로 투박스러운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나이에 깨진들 대수요?"
집주인이 담배를 꺼내물며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아이고, 간이 콩알만해ㅈ습니다."
이광민이 문을 닫으며 한숨을 토했다.
"흐흐흐... 그놈덜 코에 바람든 것이시."
지삼출이 어깨를 들썩이며 더없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런! 아편 안 피우는 내 공은 어디로 갔소?"
집주인이 장작개비를 벽난로에 넣으며 화가 난 척 말했다.
"그야 더 말헐 것이 머 있간디요? 그 공 치하허게 우리 뽀드칸지 먼지 한 잔씩 헙시다."
지삼출이 의자를 벽난로 앞으로 끌고 가며 비위좋게 받아넘기고 있었다.
"그럽시다. 그것 안 털렸으니 지씨가 보드카 한 병 사는 건 싼 거요."
집주인은 지삼출보다 한술 더 뜨고 나왔다. 지삼출과 이광민의 눈이 마주쳤다. 지삼출이 어이없는 얼굴이었다. 이광민이 웃으면서 눈을 깜박거렸다.
"좋소, 나가 한턱내겄소."
지삼출이 흔쾌하게 웃어넘겼다. 그들은 벽난롯가에 둘러앉아 보드카병을 땄다. 벽난로는 러시아서민들의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난방과 취사 겸용이었다. 벽난로는 널찍한 한칸짜리 방의 가운데쯤에 세 자가 넘는 두께의 벽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장작을 넣는 아궁이 위에는 두꺼운 철판이 깔려 있었다. 불길을 간접적으로 받아 언제나 달구어져 있는 그 철판이 취사용이었다. 물은 언제나 그 위에서 따끈하게 데워져 있었고, 다른 취사를 할 때는 장작불을 약간 앞으로 끌어내면 바로 철판에 불길이 닿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두껍고 넓은 벽 양쪽은 온돌방보다도 더 뜨끈뜨끈했다. 그 벽이 난방용을 겸해 아이들과 어른들의 방을 구분 짓고 있었다.
"요상허시, 저 마적떼덜언 어째 삼동도 없이 그리 난리판굿얼 꾸미는고?"
술잔을 기울이고 난 지삼출이 독한 보드카의 술기운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며 말했다.
"마적떼라고 다 똑같소? 그놈들이야 돈 따라서 다니는 놈들이니까 농사만 짓는 데하고 여기하고는 다르지요."
집주인의 대꾸였다. 마적떼들은 대부분 날이 풀리는 삼사월 경에서부터 겨울이 닥치는 10월 11월경까지 극성스럽게 날뛰다가 혹한이 몰아닥치면 활동을 중지했다. 그동안 벌어들인 돈을 왕초한테 분배받아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겨울나기 좋은 곳으로 숨어드는 것이었다. 짐승들이 겨울잠을 자듯 그렇게 겨울활동을 중지하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영하 3, 4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운 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은신처는 거의가 산림 속이었다. 그런데 나뭇잎이 다 떨어져 버린 겨울에는 발각되기가 쉬웠다. 그뿐만 아니라 눈 위에 말 발자국을 남기게 되어 관헌들을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한겨울을 편히 놀고 먹은 마적들은 날이 풀리면 긴밀한 연락망을 통해 다시 떼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르강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에 아편이 밀거래되는 소만 국경 지역에는 마적들이 겨울잠을 자지 않는 것이었다. 아편을 쫓아 오히려 겨울에 더 극성을 부렸다.
"참 사람 사는 건 묘해요. 혁명 후에는 아편이 뚝 끊어질 줄 알았는데 계속 나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광민이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아니오, 이젠 좋은 시절 다 지나갔소. 옛날에 비하면 이게 어디 아편 나오는 거요? 그저 병아리 눈물이지. 단속을 해대지만 땅이 워낙 넓으니까 눈 피해 가면서 재배를 하다 보니 양은 적어지고 값만 치솟는 거지요. 그러니 마적들은 더 눈에 불을 켜고 덤비고. 한창때가 혁명 일어나기 10여 년 전부터 혁명전쟁이 끝날 임시까지였는데, 그땐 아편을 가진 농부들이 썰매를 타고 아무르강을 줄줄이 건너가고, 말 탄 러시아 경찰들이 마적 떼를 막아주느라고 호위를 하지 않았겠소. 연해주에서 지주 된 조선사람들치고 아편에 손 안 댄 사람들 저의 없어요. 어쨌거나 그때가 돈 흔하고 살기 좋았어요. 이젠 공동농장 바람에다가 만주에는 왜놈들까지 진을 쳤으니 이래저래 이것도 파장이지요."
집주인 회고조로 서글픈 듯 말하고는 바닥에 남은 술을 홀짝 마셨다.
"근디, 나가 만주에 태어났드람사 마적떼 왕초놀이럴 한바탕 해묵었을 것인디."
지삼출이 뚜벅 내놓은 말이었다.
"예에?"
이광민이 놀라서 지삼출을 쳐다보았고, 집주인이 무슨 의미인지 모호한 웃음을 클클거리며 웃었다.
"어찌 그리 놀래고 그려? 죽은 장작림이가 마ㅈ떼 왕초 출신인 것얼 물라서 그러능가? 마적이란 것이 우리 조선사람덜헌티넌 벨라 안 좋아도 중국 사람덜언 높이 보기도 허고, 또 아무나 마적단에 들어가도 못허덜 안혀?"
그때서야 이광민은 지삼출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사실 마적은 단순한 도둑 떼만은 아닌 일면도 지니고 있었다. 땅 넓은 중국의 풍토에서 지역적으로 군벌들이 발호하고, 그 부패와 착취에 대항해서 무장조직을 갖춘 반골적 성격이 마적에게는 내포되어 있었다. 그 <마적>이라는 이름 자체도 그런 냄새가 짙게 풍겨났다. 마적은 말은 탄적이란 뜻인데, <적>은 바로 집권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 자신을 위협하는 적이었던 것이다. 만주벌판을 종횡으로 누비는 마적단들은 부지기수였지만, 그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장들은 부하들을 몇백명에서 천 명이 넘게 거느리고 있었고, 관청에서 오히려 그 위세를 두려워할 지경이었다.
"나가 허는 말언 말이여, 만주사변이 일어난 뒤로 왜놈덜얼 상대혀서 싸우고 나스는 마적단이 늘고 있다는 것이로구만. 그 얼매나 장헌일이여."
이렇게 말하는 지삼출의 머리에는 흰머리가 더 많이 늘어나 있었다.
"예, 그거 참 장한 일이지요."
이광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만주사변으로 만주 전체가 일본군의 손아귀에 장악당하자 중국 사람들은 항일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국군 부대들도 독립군 부대들과 연합군을 조직해 나갔다. 그런 기운에 발맞추듯 일본군에게 총부리를 돌려 싸움에 나서는 마적단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마적대장이 마점산이었다.
"마적이 밉고도 고마운 것언 재물은 빼어가도 여자덜언 털끝 한나 안 다치는 것이여. 고것덜이 재물 탐허디끼 여자도 탐허는 막돼묵은 도적 떼였으먼 우리 조선 여자덜이 남아나기나 혔겄어. 고것덜이 여자 손 안 대는 규율을 엄허니 지키는 것얼 보먼 아조 신통방통허당게."
지삼출은 새삼스럽게 고마움을 느끼는 듯 담배를 빨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건 그렇고말고요. 마적들이 도적질을 하면서도 별로 인심을 잃지 않는 건 인명 살상을 함부로 하지 않아서지요. 특히 여자들한테 손대지 않은 건 우리 조선사람들한테 큰 부조한 거지요. 여자들 잡아가고 강간하고 해댔으면 우리가 어찌 됐겠어요."
나이 든 집주인이 동감을 표시했다. 마적들은 그들 나름의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반항하거나 대항하지 않으면 인명 손상을 입히지 않았다. 둘째, 여자들에게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 인질을 잡아갈 때도 남자만 잡아갔다. 셋째, 동네 단위로 돈을 요구할 뿐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이 없었다. 넷째, 자기들이 요구한 돈은 반드시 받아냈다. 동네를 습격해서 자기네가 책정한 일정액을 요구하고, 현당에서 그 액수가 다 안 차면 인질을 잡아갔다. 그리고 1차 예정일까지 돈을 바치지 않으면 인질의 양쪽 귀를 잘라 보냈고, 2차 예정일을 넘기면 손가락을 잘라 보냈고, 3차 예정일까지 넘기면 목을 잘라 보냈다. 그러니 동네 사람들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나머지 돈을 갖다 바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쩌다가 여자를 겁탈하려고 드는 마적이 없지 않았다. 갓 마적이 된 젊은이들의 경우였다. 그러나 그 사실이 드러나면 두목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가차없이 총살을 시켜버렸다.
"으쩌겄소? 아까 그 마적 떼가 우리가 기둘리는 것 채간 것은 아니겄제라?"
지삼출이 은근히 걱정스러운 듯 집주인에게 물었다.
"글쎄요, 내일 가 보도록 하겠소."
집주인의 기색도 밝지가 못했다. 지삼출과 이광민은 아편덩이를 구하려고 모피 장수로 변장해 국경을 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정한 양을 다 구하지 못해 나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집뒤짐을 면해서 그렇지 만약 집뒤짐을 당했더라면 아편 덩이를 구하려고 모피장수로 변장해 국경을 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정한 양을 다 구하지 못해 나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집뒤짐을 면해서 그렇지 만약 집뒤짐을 당했더라면 아편덩이를 빼앗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광민은 러시아말을 할 줄 알고 국경 지리에 익숙해 지삼출을 호위할 겸 동행한 것이었다. 밤이 되자 바람 소리는 더 거칠어졌다. 이광민은 침대에 누워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 광막한 설원을 휩쓸고 있는 그 바람 소리는 한없이 외롭고 슬프게 느껴졌다. 그 바람 소리는 무슨 외로운 절규 같기도 하고, 또 어떤 슬픈 울부짖음 같기도 했다. 잠은 오지 않고, 바람 소리 저편에 있는 여자가 자꾸만 생각났다. 이제는 남의 사람이 된 여자 윤선숙. 왜 그리 간절하게 보고 싶어지는 것인가. 남의 사람이 되어서 더 그런가. 가까이 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집주인의 말로는 우수리스크까지 2백 리 정도라고 했다. 마차를 타면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칼바람 부는 눈보라 속에서라도 윤선숙을 한 번만 만나보고 싶었다. 사랑했노라고. 사랑하고 있다고. 그러나 밤에는 줄달음쳐가는 생각이 날이 밝으면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혼자였더라면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헤어지던 날의 그 눈물 맺혔던 서글서글한 눈망울은 세월이 흘러가도 안타깝기만 한 그리움이었다. 서로 마지막이라고 말하지 않았기에, 헤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리움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무사히 돌아오라는 말을 지키지 않은 것은 자신이었고, 사랑을 깬 것도 자신이었다. 그래놓고 못 잊어 그리워하는 심사는 또 무엇인가. 윤철훈 그 사람 너무했어. 내가 있는 곳을 가르쳐줄 일이지. 이런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망상이었다. 만약 윤철훈이가 자신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고 윤선숙이가 자신을 찾아 길을 떠났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었다. 그때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서로 만나기란 불가능했고, 윤선숙은 무슨 변을 당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윤철훈은 현명했다. 그 침착하고 치밀하며 냉정하면서도 이해심이 많은 강건한 그 사나이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금도 국경을 넘어 다니며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당 사업에 나서고 있는 것인지. 이광민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안 되겠어요. 더 구하기가 어려워요."
다음날 집주인이 돌아와 한 말이었다.
"하, 그것 첨 난리시. 일이 낭팬디."
지삼출의 얼굴이 어둡게 일그러졌다.
"미안하지만 딴 길을 찾아보도록 하시오. 내 힘으로는 더 어려우니까."
"알겄소. 그간 애 많이 쓰셨소."
지삼출은 곧 단념했다.
이광민은 순간적으로 윤철훈을 생각했다. 옛날에 자신이 아편을 운반했던 일과 함께 그를 찾아가면 일이 해결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을 곧 묵살했다.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달라진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맡바닥에는 그 길에 윤선숙이를 만나고 싶은 엉뚱한 욕심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지삼출과 이광민은 얼어붙은 아무르강을 썰매 마차로 건넜다. 2월이 저물고 있었지만 광막한 벌판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그 막막한 눈벌판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신이 멍해지고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어디가 어디인지 방향을 알 수가 없고 그 눈바다에 파묻히고 말 것만 같은 것이다. 마차는 눈이 없는 계절에 비해 절반밖에 달리지 못했다. 날도 춥고 길도 미끄로운 탓이었다. 그러나 그건 눈이 안 오는 날의 경우이고 눈이 내리면 마차는 아예 떠나지를 않았다. 한겨울에 만주나 연해주에서는 함박눈이라는 건 내리지 않았다. 강풍에 휩쓸려 내리는 건 가루눈이었다. 날씨가 혹독하게 춥고 바람이 세차 눈송이들이 바스러지는 것이었다. 눈이 내리면서 바람이 몰아치면 눈은 하늘에서만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거센 바람이 겹겹이 쌓인 눈을 불어 올려 눈보라룰 일으키기 때문에 눈은 하늘과 땅에서 동시에 오는 형국이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땅에서 솟기는 눈이 뒤엉키는 속에서는 열 발짝 앞을 보기가 어려운 지경이었고,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니 말인들 제대로 달릴 리 만무했던 것이다.
마차 역마다 새로 생긴 만주군과 일본 관동군들이 합동으로 검문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주군은 일일이 일본군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작년(1932년) 3월에 관동군의 힘으로 세워진 만주국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검문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겨울과 함께 조선과 중국의 항일군들의 활동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삼출과 이광민의 모피장수 변장은 겨울철에 딱 맞는 것이기도 했다. 농부로 변장하지 않았던 것은 겨울에 농부가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의심받기 쉬웠던 것이다.
"저어, 예정에서 3할찜얼 못 채왔구만요. 거그도 인자 예전 겉지 안히서..."
지삼출이 기름종이에 싼 아편덩이를 송수익 앞에 내놓으며 옹색해했다.
"혹한에 애쓰셨소. 그만하면 됐소."
송수익이 지삼출의 크고 거칠은 손을 감싸잡았다. 송수익은 그 아편을 방대근이 편에 장춘의 주장록에게 장춘은 신경으로 그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관동군이 그곳에 총사령부를 정하고 만주국을 세우면서 <새로운 도읍지>라고 의미를 부여한 것이었다.
"탈 없이 전허고 왔구만요."
나흘 만에 돌아온 방대근이 송수익에게 보고했다.
"애썼네. 다른 말은 없고?"
"예, 예정대로 일얼 추진허겄다고..."
"음, 가서 쉬게."
송수익은 눈을 내리감았다. 이회영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분은 이제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만주의 상황은 돌변하고 있었다. 독립군들이 처한 입장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바로 후방이 전방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무정부주의 투쟁도 새롭게 계획을 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직의 총력을 만주에 집중시킨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구체적인 투쟁사업을 정했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이회영은 작년 11월에 만주를 향해 상해에서 배를 탔다. 그러나 실천하기 위해 이회영은 작년 11월에 만주를 향해 상해에서 배를 탔다. 그러나 대련에 내리자마자 수사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상해에서 밀정에게 탐지되어 미리 연락이 취해져 있었다. 이회영은 고문을 못 이기고 다음 달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그분은 떠났지만 그분과 함께 세운 계획은 남아 있었다. 송수익은 그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송수익은 방대근을 데리고 장춘으로 떠났다. 중국옷에 모피장수 차림이었다. 조선옷을 입고 기차나 마차를 타면 몇 배나 조사가 심했던 것이다. 장춘은 만주사변 전의 장춘이 아니었다. 신경이란 이름답게 신장춘이 대대적으로 꾸며지고 있었다. 일본사람들이 주도하고 있는 신장춘의 건설은 그 길 폭부터가 달랐다. 넓은 만주 땅을 맘껏 써야겠다는 듯 자동차 10대가 오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넓었다. 그리고 가로수를 이중으로 심어 길을 치장하고 있었다. 길 양쪽에다가는 낙엽 지는 활엽수를 심었고, 다시 두 줄의 화단으로 길을 3등분해서는 그 화단에 사철 푸르른 침엽수를 심어놓은 것이었다. 그 넓은 길들을 따라 양쪽으로 새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그 건물들이 지니는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가 서양식이라는 것과 사오층에 이르는 고층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건물마다 좁고 긴 창문들이 촘촘하게 나 있었다. 그건 통풍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시가전용이었다. 그러니까 신장춘은 시가지 전부를 요새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건물들이 좌우로 거느리듯 하고 있는 특이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 육중한 건물의 높게 휘어진 지붕에는 청색의 암수 기와로 치장되어 있었고, 둘레에는 드높은 돌담이 처져 있었다. 그 건물은 바로 만주국 위에 군림하면서 만주를 지배하고 있는 관동군 총사령부였다. 송수익은 먼발치에서 그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가시제라."
방대근이 등짐을 추스르며 속삭이듯 빠르게 말했다.
"음, 가세."
그 말뜻을 금방 알아들으며 송수익은 발길을 돌렸다. 그쪽을 오래 보고 있다가는 순찰병들에게 의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장춘에는 순찰병들이 유난히 많았다. 구장춘 쪽에 있는 주장록의 식당으로 갔다. 신장춘을 둘러본 것은 저녁 밥때에 맞추어 식당에 들어서기 위해서였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었다. 식당으로 들어서며 송수익은 주인 주장록에게 빠른 눈인사만 했다. 주장록도 다른 손님들을 대하듯 목청 높게 어서 오라는 소리를 외칠 뿐 아무 표도 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속에서 간소하게 저녁을 먹었다.
"뒷문을 따놓을 테니 돌아서 오시오."
송수익이 내민 돈을 받으며 주장록이 빠르게 말했다.
"맛있게 잡수셨습니까?"
그리고, 그 말을 지우듯 주장록이 큰소리로 외쳤다.
"예, 잘 먹었습니다."
송수익도 정말 중국 사람처럼 응수했다. 송수익과 방대근은 어두워진 골목을 타고 돌았다. 뒷문이 빼꼼하게 열려 있었다.
"자아, 저쪽 방으로 들어갑시다."
기다리고 있던 주장록이 앞장섰다. 그곳은 살림집이었다.
"그건 잘 처분됐소."
주장록이 자리 잡고 앉으며 말했다.
"고맙소."
송수익이 눈인사를 보냈다.
"돈부터 드리지요."
"아니오. 간수하지도 어려우니 그대로 두시오. 어차피 또 드려야 할 건데요."
"언제 떠나시나요?"
"한 사오 일 머물러야 되겠소. 오늘내일 사이에 세 사람이 더 오기로 되어 있으니까요."
"예, 여기서 회합을 하기로 했군요."
"빨리 준비를 해야지요."
"예, 숙소는 정했나요?"
"아니, 아직..."
"잘했어요. 여관은 이제 틀렸어요. 여관마다 밀정들이 다 박혀 있다고 봐야 하고 검문도 심하니까요."
"밀정이..."
"우리 중국놈들도 쓸개 빠진 놈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일본 놈들이 주는 돈 받아먹는 재미에 날이 갈수록 앞잡이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벌써 3년째니 그럴 만도 하지요. 그럼 숙소를..."
"예,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바쁜 일 좀 끝내고 제가 안내하지요."
송수익은 담배에 불을 붙여 깊이 빨았다. 조선이나 중국이나 왜놈들에게 빌붙는 놈들 때문에 전도가 더 어두워지는 것이었다. 왜놈들보다 더 흉악하고 더러운 종자들. 체포당하는 모든 투사들의 뒤에는 어김없이 그놈들의 밀고 있었다. 똥통의 구더기만도 못한 놈들. 생각할수록 분노와 증오는 커지기만 했다. 송수익은 주장록의 그런 세심한 배려에 큰 고마움을 느꼈다. 주장록은 같은 중국인 단원인 주양지의 조카였다. 주양지는 하얼빈에 가 있어서 이번 일에서는 빠지게 되었다.
"저어 선생님, 한중연합군이나 한중연합토일군이 공산당 유격대덜허고 재연합허는 방도는 없을랑가요?"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방대근이 입을 열었다.
"글세, 그게 만주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가장 중차대한 일이긴 하네만, 이념이 같은 세력들 사이에서도 어려웠는데 이념이 다르니 지난하지 않겠나."
송수익은 무거운 마음으로 대꾸했다. 모든 세력이 통일을 이루는 재연합을 꿈꾸는 방대근의 생각은 백번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건 거의 불가능이었다. 방대근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한중연합군은 신빈현을 중심으로 조선혁명당군과 중국의용군이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물리치자고 합작한 것이었다. 한중연합토일군은 북만주영안현에서 한국독립당과 중국군 제14사단이 같은 목적으로 결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 조직들이 각처에서 유격대를 조직하고 나섰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그 세력들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다음날 점심 무렵까지 다른 세 사람이 다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송수익은 손님이 없는 심야에 식당 2층에서 회합을 하기로 결정했다. 바람 소리만 깨어 있는 깊은 밤에 네 사람은 2층 구석방에 모여앉았다.
"자금은 다 준비됐습니다. 거사 방법과 거사 날짜를 정할 일이 남았습니다."
송수익이 회의를 시작했다.
"거사 방법이라면 상해에서 쓴 방법이 제일 효과가 크지 않겠습니까?"
"총보다는 그렇지요."
"예, 그게 좋겠습니다. 허나 불발을 막기 위해 여분을 준비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물론 그런 대비는 해야지요."
"그런 대비도 대비지만 그보다 먼저 요원의 기술이 어떠냐가 더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예, 그 두 가지 문제는 염려들 안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실패를 절대로 없애기 위해 요원을 이중으로 배치하고, 각자가 폭탄을 두 개씩 휴대시킬 작정입니다."
송수익의 말이었다.
"아니, 그럼 두 사람이?..."
"예, 두 사람 다 의열단 출신이니 솜씨야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예, 그렇다면 든든합니다. 헌데, 의열단 출신을 어떻게 둘씩이나..."
"그건 차후에 말씀드리지요."
"폭탄 확보는 어떻게 됩니까?"
"그건 여기 주장록 씨가 맡을 것입니다."
"거사일은 언제가 좋을까요?"
"앞으로 무슨 행사가 없습니까?"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요. 상해의 일이 있어서 행사날에는 검문 검색이 자심할 텐데요."
"예, 그것도..."
타앙!
느닷없이 총성이 울렸다.
"엉?"
"뭐야, 뭐!"
그들은 모두 튕기듯 일어났다.
타당, 탕!
바로 아래층에서 울리는 총소리였다.
"발각됐소. 피하시오!"
송수익이 절박하게 토해냈다. 세 사람이 후닥탁 밖으로 뛰쳐나갔다. 송수익은 커튼을 제치고 의자로 작은 창문을 부쉈다. 그리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꼼짝 마라, 쏜다!"
일본말 외침과 함께 송수익은 여기저기 난타를 당하며 고꾸라졌다. 식당 전체가 포위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장록이가!
송수익은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생각했다.
"이새끼, 일어나라!"
송수익은 심한 현기증 속에서 사진으로 본 관동군 총사령관의 얼굴을 떠울리고 있었다. 송수익의 팔이 뒤로 꺾이고 손목에 쇠고랑이 채워졌다.
그래, 내가 죽는 게 낫지...
송수익은 어둠 속에 떠오르는 방대근과 이광민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가자, 빨리 걸어라"
주먹은 송수익의 등을 갈겼다. 골목을 벗어난 송수익은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어둠 저편의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종원아, 가원아...
매서운 찰바람이 송수익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45. 파도, 파도, 파도
"선생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지만복은 글 쓰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김건오가 차려 자세로 서 있었다.
"응, 건오 왔구나. 이리 좀 앉아라."
지만복은 옆책상의 의자를 끌어당기려고 몸을 일으켰다.
"아닙니다, 곧 떠나야 합니다."
김건오가 한 발짝 물러나며 사양했다. 입고 있는 독립 군복에 어울리도록 그 목소리는 절도 있고 힘이 넘쳤다.
"아니, 잠깐이라도 앉아라."
지만복은 굳이 의자를 끌어와 김건오를 앉혔다. 지만복은 김건오에 대한 인간적 애정과 헤어지는 아쉬움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 훈련은 힘들지 않더냐?"
지만복은 담배를 빼 들며 물었다.
"아니, 재미있었습니다."
김건오는 씨익 웃었다. 건강미 넘치는 그 얼굴은 싱그러운 만큼 앳돼 보였다.
재미!...
지만복은 순간적인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건 언제나 마음속에 담겨있는 열등감과 죄의식이 또 고개를 든 것이었다.
"그래, 군복이 아주 잘 어울린다. 부모님이 아주 장해 하시겠다."
지만복은 아버지에 대한 죄스러움을 생각하며 말했다. 지삼출은 아들이 독립군이 아닌 것을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했고, 지만복은 아버지의 그런 심중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뭐, 그렇지도 않습니다. 아버지는 좋아하시는데 어머니는 안 좋아하십니다. 어머니는 선생님처럼 선생이 되는 걸 바라시지만 저는 공부가 싫거든요. 선생님께서 절 가르치셨으니 잘 아시잖아요. 저 공부 잘 못 하는 거."
김건오는 뒷머리를 긁으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는 김판술의 아들이었다.
"왜에, 그만하면 잘하는 편이지. 그래, 어느 집이나 아버지 마음과 어머니 마음은 다른 법이다. 부디 자중자애하거라. 가면 어디로 가는 거냐?"
"예, 열아홉 살입니다."
"기운만 믿지 말고 상관 명령을 잘 따르도록 해라."
지만복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예,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김건오가 일어나며 거수경례를 했다.
"그래, 자 이것 받아라."
지만복은 돈을 김건오의 손에 쥐여주었다.
"아닙니다, 선생님."
"어른이 주는 건 받는 거야."
지만복은 김건오가 운동장을 벗어나 사라질 때까지 그 당당하고 힘찬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수동 아저씨의 아들 상길이도, 김판술 아저씨의 아들 건오도 독립군으로 나섰는데 자신만 학교에 뒤처져 있다는 열등감과 자괴감이 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라 잃은 백성, 타국을 떠도는 삶, 남아로서 해야 할 가장 중대한 일이 총을 들고 적과 싸우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총에 대한 공포감과 두려움... 스스로의 병신스러움을 생각할수록 미칠 것만 같았다.
"총만 든다고 독립투쟁이 아닐세. 아동들을 내실있게 잘 가르치는 것도 그와 똑같은 독립투쟁이야. 사람이 육신만 가지고 사람일 수 없고 정신이 있고서야 제대로 된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교육이란 정신을 기르는 숭엄한 일인즉 긍지와 책무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게. 자네가 가르친 아동들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두 독립투쟁에 나서게 한다면 그보다 더 큰 독립투쟁이 어디 있겠는가."
지만복은 또 송수익 선생의 말을 기둥으로 붙들 수밖에 없었다. 김건오네 신병대는 야간에만 행군해서 이틀 만에 홍경현에 머물고 있는 본대에 도착했다. 야간향군은 일본군과 만주군을 피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엄한 군사훈련이었다. 병사들은 행군 중에 물 한 방울 먹을 수가 없었고, 잠시 쉴 수도 없었다. 군관들도 똑같이 행동하기 때문에 아무도 불평을 하지 못했다. 3월 중순의 날씨는 많이 풀린 편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얼음이 얼어붙는 영하의 기온이었다. 그런데도 행군하는 병사들은 땀을 끈끈하게 흘렸다. 그러나 신병들은 본대에 도착하고 나서 발이 부르트고 배가 고팠던 고생의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연전연승의 전과를 울리고 있는 조선혁명당군의 구병들이 열렬히 환영해 주었던 것이다.
"신병 여러분들의 본대 합류를 구장병 여러분들과 함께 열렬히 환영하는 바이올시다. 여러분도 다 아다시피 이제 조선만이 아니라 만주까지 왜적들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날로 친일파와 밀정들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여러분들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청죽 같은 청춘을 바치겠다고 나섰으니 그 높은 뜻에 하늘이 감읍할 일이요, 땅이 감읍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조선의 남아, 대한의 장부로서 지금 제일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신병 여러분들처럼 왜적을 쳐서 물리치려고 궐기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나 밀정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으니 이런 슬프고 통탄할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그런 놈들은 이완용을 필두로 하는 을사오적과 한치도 다를 것 없는 매국 역적이며 민족 반역도배들입니다. 독립군을 밀고하고 독립지사를 팔아먹고 동포들을 이간시키는 그놈들은 왜놈들보다 더 나쁜 놈들입니다. 왜놈들과 함께 그런 놈들을 몰살시키는 것이 우리 조선혁명당군의 본분이며 사명입니다.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나선 여러분들의 용맹에 감읍하여 여러분의 장도를 하늘이 도울 것입니다. 앞으로 부대 규율을 잘 지키고, 동지들과 화목하면서 용맹스럽게 싸워주기를 바랍니다."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의 환영사였다.
어금니를 맞문 김건오는 말만 들었던 양세봉 장군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일본군과 싸워서 한번도 진 적이 없는 장군, 소규모 전투는 꼽지 않더라도 신빈현전투, 1 2차 쌍성보전투를 모두 승리로 장식한 양세봉 장군이 바로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홍경현의 성에는 조선혁명당군과 연합한 이춘윤의 중국의용군도 함께 주둔해 있었다. 홍경성은 전략적 위치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특히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독립군 근거지였던 뿌리 깊은 곳이었다.
신병들은 매일 사격과 구보 훈련을 받았다. 사격훈련은 총알을 아끼기 위해서 사격 자세와 조준 연습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 하나 힘들다고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고참병들도 신병들과 함께 훈련을 받기 때문이었다.
"총알 하나하나는 모두 동포들의 피요 살이다. 한번의 연습이 총알 하나를 아끼고, 열 번의 연습이 왜놈들 심장을 꿰뚫게된다. 다들 이를 악물어라."
가혹하리만큼 엄한 훈련 조교들이 하는 말이었다. 김건오는 그 말에 정신을 가다듬고는 했다. 총알 하나하나는 모두 동포들의 피요 살이다. 그 말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였던 것이다. 거의 모든 동포들이 중국인의 소작인으로 얼마나 고달프고 배주리고 살면서 독립자금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것이 학전, 군전, 생전이라는 말이었다. 농사지어 자식을 가르치는 땅이 학전이었고, 군자금을 내는 땅이 군전이었고, 식구들이 먹고 사는 땅이 생전이었다. 동포들은 소작농사를 짓는 궁한 속에서도 그렇게 농토를 삼등분해서 군자금을 꼭꼭 냈던 것이다.
열흘쯤 지나 부대에 비상령이 내려졌다. 일본군과 만주군이 합세해서 쳐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중연합군은 중대별로 신속하게 배치되었다.
콰광! 쾅, 쾅!
일본군의 박격포 공격이었다. 폭음과 함께 여기저기서 포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김건오는 성벽에 바짝 붙어서 전신이 울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박격포탄들이 터지는 진동은 땅을 흔들어댔고, 그 흔들림에 정신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때, 무서운가?"
옆에 엎드린 고참병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예, 아니, 저어..."
김건오는 당황해서 코밑을 훔쳤다.
"겁먹을 것 없어. 처음엔 다 그렇지만 몇 번 겪어보면 베짱이 생기니까."
고참병이 등을 두들겨주었다. 한중연합군은 박격포탄이 잇따라 터지거나 말거나 총 한 방 쏘지 않고 죽은 듯이 도사리고 있었다. 적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따다다다...
한결 가까워진 적들의 기관총 공격이었다. 몰려오고 있는 적들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다. 공격의 기본대로 이쪽보다 서너 배는 더 많은 병력이었다. 박격포와 기관총 공격의 지원 아래 적들은 돌격을 감행해 오고 있었다.
"사겨억 개시!"
한중연합군에 사격 명령이 떨어졌다.
타앙!
김건오는 깜짝 놀랐다. 옆의 고참병이 쏜 총소리였다. 김건오는 숨을 몰아쉬며 개머리판을 어깨 깊이 끌어다 붙이며 총대에 옆볼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몰려오는 일본군을 향해 정조준을 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한중연합군이 성안에서 일제히 퍼붓는 사격에 일본군과 만주군들은 비명과 아우성을 지르며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희생자들이 속출하자 적들은 시체와 부상자들을 끌고 허겁지겁 사격권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대오를 정비한 적들은 다시 박격포와 기관총 공격을 앞세우며 돌격을 감행해 왔다. 그러나 이쪽의 격렬한 반격으로 적들은 다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똑같은 공방전이 치열하게 반복되면서 한나절이 다 지나갔다. 서로가 점심은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싸우고 있었다.
"저놈들이 우리 총알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모두 총알을 아끼도록 하라!"
각 중대장들이 부대에 하달한 명령이었다. 오후에도 공방전은 계속되었다. 적들의 사상자도 많았자만 이쪽에도 희생자들이 생기고 있었다. 박격포가 입히는 피해였다.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석양빛 속에 새들이 둥지를 찾아 날아가고 있었다. 적들도 더 이상의 공격을 포기한 채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동차에 싣고 부축하고 한 사상자들은 수백 명이었다.
"만세에!"
"만세에!"
"만세에!"
스산한 석양빛을 등지고 패퇴해 가는 적들을 바라보며 한중연합군 병사들은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천여 명이 4천여 명을 상대로 끝끝내 전략요충지를 지켜낸 대승이었다. 다음날 동포들이 돼지를 잡고 떡을 하는 잔치가 벌어졌고, 양세봉 장군의 또 하나의 승리는 동포들 마을에서 마을로 빠르게 퍼져가고 있었다.
"전투에서의 지형지물의 활용은 대포 수백 문보다 더 효과를 발휘합니다. 청산리의 대승은 바로 그 본보기입니다. 병력은 산등성이에 펼칠 게 아니라 골짜기 양쪽으로 배치해야 하고, 별동대로 하여금 적을 유인해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의 경우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병력배치는 골짜기가 필수적입니다."
노병갑의 힘찬 말이었다.
"예, 1 중대장님의 의견입니다. 또 다른 의견들 없으십니까?"
사령관이 간부들을 둘러보았다. 열서너 명의 간부들은 생각에 잠긴 얼굴일 뿐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러면 참모장과 1중대장의 의견을 놓고 어느 것 하나로 결정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먼저, 병력을 산등성이로 배치하자는 참모장의 의견에 동의하시는 분들 거수해 주십시오."
세 사람이 손을 들었다.
"예, 세 분입니다. 작전회의에 기권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나머지 분들은 모두 1중대장 의견에 동의하시는 것이 됩니다. 그럼 병력배치는 1중대장 의견대로 하겠습니다."
노병갑은 참모장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고 눈길을 떨구고 있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참모장을 무시하고 있었다. 신팔균 장군이 훈련시킨 무관학교를 나왔다고는 하지만 작전이론이 부족했던 것이다. 다만 그가 참모장이 된 것은 사령관의 조직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년 12월 한중연합토일군을 결성할 때 자신의 조직은 너무 허약했던 것이다. 김좌진 장군이 세상을 떠나면서 조직이 분산되었고, 그나마 수습한 것이 몇십 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수로 한국독립당 세력 앞에서는 참모장 자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노병갑은 그때 많이 고민했었다. 참모장에서 1중대장으로 밀려나느니 차라리 독립부대를 이끌면서 대장 노릇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름을 그럴듯하게 지어 붙이고 대원들은 차츰 모아들이면 될 거였다. 그러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바로 방대근이었다. 무언가 초연한 듯한 그의 모습과 함께 그가 남기고 간 말들이 쟁쟁히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세월은 이제 10년 전이 아니었다. 만주의 상황이 급변해 조선독립군과 중국군이 연합을 꾀하는 형세였다. 그런데 몇십 명을 데리고 대장 노릇을 하면 그건 골목대장 꼴일 뿐이었다.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면 방대근이 뭐라고 할 것인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을 것은 너무 뻔했다. 그리고 그건 대의에도 상황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결국 욕심도 죽이고 자존심도 죽이고 방대근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방대근의 말을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 무거웠던 고민은 스러졌다. 그러나 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상관으로 인정해야 하는 괴로움이 새로 생겨났다. 가능하면 참모장과 무난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작전계획을 수립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의견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작전계획은 전투의 승패만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귀한 목숨의 손상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런데 허점과 약점을 뻔히 보면서도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걸 지적하고 계획을 수정하다 보면 서로 사적 감정까지 상하게 되는 것이었다. 한중연합토일군은 낫처럼 휘어진 골짜기의 양쪽 비탈 중간지점에 집중 배치되었다. 봉우리에서 내려다보면 왼쪽에는 조선독립군이 배치되고 오른쪽이 중국군 14사단 병력이 배치되었다. 적들이 진입하는 쪽에서 보자면 독립군 쪽이 먼저 눈에 띄게 되어 있었다. 불리하다면 불리한 위치였지만 독립군 간부들은 스스로 먼저 그쪽을 택했다. 그건 셋방살이하는 사람의 심리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골짜기의 거의 끝부분에다 바위로 엄폐물을 만들고 병력을 배치해서 일시에 삼면공격을 할 수 있도록 했다.
4월은 북만주의 추위도 녹이고 있었다. 살을 에던 혹독한 바람은 간 곳이 없었고, 따스한 햇살은 쌓이고 쌓인 눈얼음을 녹이기에 바빴다. 골짜기의 논은 다 녹아 큰비 온 것처럼 개울물이 불어나 있었다. 아직 썩지 않은 낙엽들 사이에서 초록빛 선연한 새싹들이 파릇파릇 돋고 있었다. 그런데 산비탈은 눈 녹은 물이 배서 미끄럽기 그지없었다. 일본군들은 혹한의 겨울에는 잠잠했다가 추위가 풀리는 3월부터 <토벌>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한중연합토일군 병사들은 바위며 고사목 같은 것을 은폐물 삼아 낙엽까지 뒤집어쓰고 있어서 20리가 넘는 긴 골짜기 그 어디에서도 사람의 흔적이라고 찾을 수가 없었다.
"일본군이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포병 기병까지 합해서 몇천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사단병력이 출동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척후대의 보고였다.
"그래, 사단 병력은 와야겠지." 예상했다는 듯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1중대장, 별동대 출동시키시오!" 노병갑에게 명령했다.
"옛, 알겠습니다.."
노병갑이 거수경례를 붙였다. 팽팽하게 긴장된 그의 얼굴은 긴 흉터과 함께 더없이 강인해 보였다. 노병갑은 부대원들이 대기하고 있는 골짜기 아래까지 말을 휘몰았다. 말이 뛰는 탄력을 받으며 그의 온몸에서는 새로운 힘이 뻗치고 있었다.
"별동대는 1중대장이 많아 선임중대장로서 한번 시범을 보이는 게 어떻겠소?"
참모장의 말이었다. 아주 그럴싸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의도는 가장 위험한 궁지에 몰아넣겠다는 것이었다.
"예, 좋습니다. 제가 맡지요."
지체없이 대답했었다. 그건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정면공격이었다. 피하려고 하면 비겁이고 명령 불복종이었다. 그러나 참모장은 자충수를 놓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적을 유인하는 선발대가 꼭 위험한 것만은 아니었다. 지휘 방법으로 위험을 얼마든지 차단할 수 있었다. 참모장은 유인작전의 위험만을 계산했지 그 일을 성공시키고 난 다음을 계산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유인작전을 성공시키면 그때 궁지에 몰리는 건 참모장이었다. 말에서 내린 노병갑은 부하들을 이끌고 골짜기가 양쪽으로 확 벌어지면서 산줄기가 낮아지고 있는 개활지로 나아갔다. 백 명의 병력을 20명씩 나누고, 각기 백여 미터의 간격으로 배치시켰다. 한 조 20명의 병사들은 소대장들의 지시를 받다 서로의 간격을 넓게 벌리고 엎드려 있었다. 배치를 끝낸 노병갑은 맨 앞의 조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부하들에게 여유를 보이자는 것이었다. 전장에서의 지휘관의 일거일동은 병사들의 사기에 직결되었다. 지휘관은 언제나 의연해야 하고 당당해야 했다. 작은 바위에 등을 기댄 노병갑은 담배 연기를 후우 내뿜었다. 담배 연기 흩어지는 저편으로 문득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 많이 끼는 겨울에 볼 수 없었던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아, 하늘 참 미치게 푸르구나!
고향 산천이 불쑥 밀려들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언제나 슬픔이었다. 평안북도 태천의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는 의병에 나섰다가 압록강을 건넜고, 배에서 돌이 크는 병을 얻어 만주 땅에 뼈를 묻었다. 자신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을 때 아버지는 병색 짙은 얼굴에 환한 웃음을 담으며,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했었다. 그리 환한 웃음을 본 것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나를 만주 땅에 두지 말아라."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아버지는 뼈만이라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건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 아버지의 한이었다.
아... 독립... 독립...
노병갑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담배를 연거푸 빨고 있었다.
"중대장님, 적이 나타났습니다."
부관의 보고였다.
"음..."
노병갑은 담배를 눌러 끄고 느리게 몸을 돌렸다. 기마대를 앞세운 적들의 모습이 저 멀리 보였다. 노병갑은 혁대 구멍을 두 개 조였다. 중국군과 연합하고 나서 대규모 전투는 처음 치르게 되는 것이었다. 그동안에는 추적부대를 떼치는 소규모 전투를 했을 뿐이다. 일본군은 추적대나 탐색대에도 언제나 만주군을 앞세우고 있었다. 소위 일만연합군의 강화였는데,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관동군 총사령관 밑에서 꼴사납게 만주국의 황제 감투를 쓰고 있듯 만주군의 중국인들도 일본군의 통제를 받아가며 길잡이란 꼭두각시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일만연합군은 쥘부채를 펼친 모양새인 개활지의 넓은 초입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병력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 이름부터가 돼먹잖은 한중연합토일군을 완전히 토벌하기 위해 관동군 사령부에서는 1개 사단을 투입하고 있었다. 적의 선발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적의 사정거리 안에 들기 전에 노병갑은 외쳤다.
"사겨억 개시!"
맨 앞줄 20명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적의 선발대가 즉각 전진을 중단하고 방어태세를 취했다. 이쪽에서는 위치를 알리기 위해 사격을 계속했다. 이쪽의 위치를 확인한 적들이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1조 이동 개시!"
노병갑이 명령했다. 20명이 사격을 중지하고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전직에서 보기는 영락없이 도망가는 꼴이었다. 물러선 1조는 두 번째 줄 2조와 합류했다.
"사겨억 개시!"
1.2조는 적을 향해 다시 사격을 시작했다. 먹이를 본 배고픈 짐승들처럼 적들은 총을 갈겨대며 공격해 오고 있었다. 노병갑은 적의 사정권 안에 들지 않게 거리를 조정해 가며 다시 명령했다.
"1.2조 이동 개시!"
뒤로 물러선 1.2조는 3조와 합류했다. 적들의 전진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도망치고 있는 적들이 많아지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5조까지 노병갑의 중대가 전부 합해졌을 때는 적의 선발대는 골짜기의 초입에 이르러 있었다.
"잘 들어라! 1조 좌측 능선, 2조 우측 능선, 완전히 산개하여 후퇴하라. 3.4.5조, 골짜기로 후퇴한다. 작전 개시!"
노병갑의 중대원들은 세 방향으로 분산되어 뛰기 시작했다. 적진에서 그걸 보기는 완전히 겁먹고 혼비백산하는 꼴일 수밖에 없었다.
"부대 정지!"
골짜기 입구로 들어서며 노병갑이 명령했다.
"다들 잘 들어라. 적을 완전히 유인하기 위해서 지급부터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한다. 후퇴 지점은 골짜기 끝. 정조준 사격으로 적들을 사살하라!"
명령에 따라 병사들은 제각기 은폐물을 찾아 몸을 감추고 적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탕!
적 하나가 픽 쓰러졌다.
타앙!
적 하나가 벌렁 나자빠졌다.
땅!
적 하나가 퍽 엎어졌다.
우와아아 -
적진에서 함성이 터져 올랐다. 그건 환성이 아니라 분노의 소리였다. 그리고 적들은 총을 난사해대며 골짜기로 몰려들고 있었다. 노병갑의 부대원들은 조금씩 조금씩 물러서며 적들을 쓰러뜨리고, 적들은 점점 더 거세게 골짜기로 파고들고 있었다. 적들이 쏘아대는 총소리가 골짜기를 흔들며 어지러운 메아리를 만들고 있었다. 노병갑부대원들이 골짜기의 끝부분에 다다랐을 때 골짜기 깊이까지 들어선 일본군은 수백 명을 헤아렸다. 그들을 향해 양쪽 산비탈과 골짜기의 끝부분에서 일시에 사격이 시작되었다. 일시에 터지는 수많은 총소리가 골짜기를 뒤흔들고, 적들의 비명소리와 외침들이 뒤엉키고 있었다. 일본군 지휘관들은 도스께끼!(돌진)을 외쳐대고, 일본군들은 수라장을 이룬 채 죽어가고 있었다. 삼면에서 총탄은 빗발치고, 삽시간에 사상자는 속출하고, 혼란에 빠진 부대는 정비되지 않고, 일본군들은 마침내 시체와 중상자들은 버려둔 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도 무사히 골짜기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매복조에게 걸려 또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했다. 골짜기 일대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그 요란하던 총소리들이 그쳐 버리자 봄볕 화창한 대낮은 밤보다 더 깊은 적막으로 빠져들었다.
꽝!
꽈광! 쾅, 쾅!
느닷없는 폭음이 적막을 찢으며 산을 뒤흔들었다. 적의 박격포 공격이었다. 처음에 여기저기 질정 없이 떨어지던 포탄은 점점 방향을 잡아가며 골짜기로 떨어지고 있었다.
긴급 작전회의가 열렸다. 사단 병력인 적은 아직 너무 많이 남았고, 좌우회 공격을 할지 모르니 대비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적이 다시 골짜기로 공격해 들어올 확률은 작고, 박격포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병력을 분산시키자는 것이었다. 박격포 공격이 계속되는 속에 병력 재배치를 끝냈을 즈음이었다. 적들은 기관총을 난사해대며 골짜기로 다시 몰려들었다. 병력은 아까보다 두 배가 넘었다. 그런데 적들은 계속 골짜기를 타고 오지 않고 그물 치듯 양쪽 산비탈로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그물몰이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쪽에서도 신속하게 병력배치를 바꾸었다. 그러나 일본군들이 시도한 그 작전은 큰 착오였다. 산비탈에는 낙엽이 두껍게 쌓여 있는 데다가 땅에는 눈 녹은 물이 흠뻑 배 있었던 것이다. 지형은 비탈인데다가 두껍게 쌓인 낙엽으로 행동은 굼뜨지, 물에 밴 땅은 미끄럽지, 지휘관들이 외쳐대는 도스께끼에 쫓기며 일본군들은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속절없이 날아오는 총알밥이 될 수박에 없었다. 일본군들은 또 시체를 즐비하게 남겨둔 채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에 일본군들은 예상했던 대로 죄우측으로 우회공격을 감행해 왔다. 그러나 그 공격도 무모한 것이었다. 불리한 위치에서 산을 치오르는 돌격작전이었는데, 그 경과와 결과는 두 번째 공격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 무모한 작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긴 지형상으로 더 이상 다른 작전이 없기도 했다. 골짜기로 파고들 수 없는 일본군은 그들 특유의 도스께끼작전을 세 번이고 네 번이고 감행했다. 그러나 그들로서도 물 흠뻑 밴 산비탈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잎 떨군 아름드리 나무들의 그림자가 산비탈에 길게길게 뻗치면서 일본군들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대패한 그들의 뒤를 석양의 어스름이 뒤쫓고 있었다.
"만세에!"
"만세에!"
"만세에!"
감격에 넘치는 만세소리가 사도하자의 산골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만주군 둘이 개울가에서 한가롭게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총은 파랗게 돋고 있는 풀섶에 뉘어져 있었다. 맞은편에서 바지게를 진 두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바지게를 졌으니 보나마나 조선사람이었다. 군인들을 마주 보고 걷고 있는 그들은 벌써 주눅 든 기색이 완연했다. 두 농부는 고개를 푹 떨군 채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 군인들 옆을 지나쳤다. 두 군인은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이 이야기하기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군인들 옆을 지나가는 듯했던 두 농부가 갑자기 돌아섰다. 그리고 지겟작대기로 두 군인의 머리를 후려쳤다. 한 사람의 작대기가 뚝 부러졌고, 두 군인은 비명을 토하며 나자빠졌다. 농부들은 바지게를 벗어던지고 각기 총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두 군인을 내리쳤다.
"되았어. 피 흘르먼 표난게 인자 목얼 졸라."
한 농부가 시범을 보이듯 정신 잃은 한 군인의 복을 밟고 올라섰다. 어서 자기처럼 하라는 듯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그 농부는 다름 아닌 천수동의 아들 천상길이었다. 상대방도 군인의 목을 밟고 올라섰다.
"우선 급헝게 저짝 땅 파서 묻어두드라고."
천상길의 나직한 말이었다. 그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느낄 수 없었다. 바지게에서 삽과 괭이를 꺼낸 그들은 조금 떨어져 있는 빈터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너무 깊이 팔 것 없고, 흙이 남을 것잉게 바지게에 담아야 혀."
천상길의 말이었다.
기운 좋게 땅을 파헤쳐 두 구의 시체를 한 구덩이에 파묻는 시간은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흙언 저 밭에 뿌려불먼 표 안 나제."
천상길이 바지게를 지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천상길이가 하는 대로 묵묵히 따라할 뿐이었다. 남은 흙까지 말끔하게 처리해 버린 천상길은 바지게에 총 두 자루를 넣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벌건 대낮에 저지른 일이었다. 천상길은 밤에 마을 세포회의를 소집했다. 젊은 남녀 스물셋 전원이 모였다.
"동지얼, 보시오. 요것이 오늘 탈취투쟁에서 얻은 전파요. 여러분덜 중에서넌 어찌 맨손으로 무기럴 탈취허라 허냐고 생각혔을 것이오. 허나 맘만 굳으면 이 시상에 안 될 일이 아무것도 없소. 당이 무기 탈취 투쟁얼 지령헌 것언 바로 우리에 열렬헌 당성얼 믿었기 때문이오. 무기 탈취 투쟁언 이중 삼중으로 효과가 큰 사업이오. 첫째 돈 안 딜이고 무장얼 헐 수가 있고, 둘째 적들에 화력에 타격을 입히고, 셋째 적들을 제거허는 것이오. 시방 이 총언 두 자리뿐이지만 앞으로 열 자리, 시무 자리가 돼야 여러분덜이 유격대로 다 무장허게 될 것이오. 어찌 그리 되느냐! 이 총으로 분주소를 습격허는 것이오. 앞으로 열흘 안에 총얼 열 자리 이상으로 불릴 것잉게 기둘리시오. 시방 만주 전역에서넌 무기 탈취 투쟁이 전개되고 있응게 여러분덜도 더욱 심얼 내고 각오럴 더 단단히 허시오. 유격대로 투쟁헐 날이 눈앞에 닥쳐왔소."
천상길은 조직원들에게 무기 탈취 투쟁의 시범을 보인 것이었다. 조직원들은 하나같이 놀라움과 감동 어린 얼굴로 천상길과 총을 번갈아 보아가며 말을 잃고 있었다. 광동에서 돌아온 천상길은 1국 1당주의 시행과 함께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그동안 당의 지시에 따라 인민들 속으로 잠입했다. 낮에는 농사짓는 농부였고, 밤에는 공산당 선전 선동 공작원이었다. 몇 년에 걸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포섭해 나갔다. 사상교육으로 세뇌시키고, 그다음에는 군사훈련을 시켰다. 물론 무기 없는 군사훈련이었다. 몽둥이로 총을 대신했고, 총을 쏠 수 있는 기초 교육을 실시했다. 무기 탈취 투쟁과 유격대 활동 개시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결정이었다. 유격대의 활동 개시 지령은 그동안 지하에 감추어져 있었던 인민조직을 투쟁세력으로 노출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만주 전역에서 중국공산당이 항일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는 것을 뜻했다.
46. 먼 저쪽의 그대
"왜 이리 늦니? 순덕이 넌 여고보 시절 버릇 여태 못 고쳤구나?"
박미애가 톡 쏘아붙였다.
"어머 얘, 10분 늦은 걸 갖고 뭘 그러니? 네가 이런 으리으리한 데서 만나자니깐 옷 갈아입어 보다가 그런 거지."
최순덕은 미안한 기색 없이 눈을 흘겼다.
"괜찮아, 어서 앉기나 해."
"으응? 같이 화를 내야지 옥주 너 혼자 인심 얻기야? 요런 배신자!"
박미애는 한옥주의 팔을 꼬집었다.
"얘, 니네들 어쩌자고 이런 델 막 출입하는 거니?"
최순덕이 서양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천장 높은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얘, 챙피하게 촌닭처럼 굴지말어, 여기 반도호떼루말고 커피 제대로 마실 만한 데가 어디 있니?"
박미애가 눈길 싸늘하게 핀잔했다.
"너 여기 첨이니?"
한옥주가 물었다.
"그렇지 그럼. 넌 자주 왔어?"
"아니, 애 미애 따라서 몇번 왔지 뭐."
"미애 넌 상급학교 가더니 막 신여성으로 활개질이구나?"
최순덕이 입을 삐쭉했다.
"어머, 제 촌스런운 것 좀 봐. 이까짓 반도호떼루에서 커피 마시는 것 가지고 무슨 신여성 운운이냐. 옷은 번듯하게 입구선. 그거 어디 거냐?"
박미애는 최순덕의 연보랏빛 원피스에 눈길을 보냈다.
"응, 동경 긴자에서 사 온 거야."
최순덕이 자기 옷을 힐끗 내려다보며 새침하게 대꾸했다.
"흠, 그럴 줄 알았어. 색깔을 괜찮은데 모양이 좀 어색하다 싶더라니."
박미애가 코방귀를 뀌었다.
"어머, 재 말하는 것 좀 봐. 넌 어디 건데 그러니?"
최순덕이 박미애의 핑크빛 원피스에 눈길을 박았다.
"일본양장이 양장이니? 원숭이 흉내지. 양장을 안할래믄 몰라도 양장을 하기로 나섰으면 본고장 것을 입어야 되는 것 아니니?"
박미애는 고개를 약간 틀어 돌리며 말꼬리를 사렸다.
"본고장? 그게 어디니? 영국이야, 독일이야?"
"넌 망신당할 소리만 하고 앉았구나. 불란서래, 불란서."
한옥주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잰 전문학교를 다닌다는 애가 왜 저렇게 무식하니. 불란서가 아니며 이태리는 짚어야지. 그저 일본 것이 제일인 줄 알고 있으니 원. 커피나 마시자."
박미애는 최순덕을 묵살하듯 나비넥타이를 맨 종업원에게 손을 까딱거렸다.
"값이 비쌀 텐데 꼭 이런 데서 마셔야 맛이니? 기집애, 어쩌다 겉멋만 잔뜩 들어가지구"
최순덕이 커피를 저으며 박미애에게 눈을 째지게 흘겼다.
"쟤 촌스럽게 굴어 정말 같이 못 놀겠네. 커피 맛 좋구, 분위기 좋구, 상류사회 기분 만끽하게 해주는데 뭐가 비싸냐?"
박미애가 여지없이 튕겨버렸다.
"흥, 장사꾼 딸년들이 이런 데 모여앉아 커피 마신다고 상류사회 인간 되니? 우린 뼛속까지 중인이니까 괜히 군침 흘리지 말어."
최순덕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하! 정말 넌 개명 못한 미개인이구나. 야, 지금이 고종황제 시절인 줄 아니? 개명세상 된 지가 25년이 다 돼가는데 무슨 새 까먹는 소리니, 소리가. 요새 세상은 돈 많은 게 양반이고 귀족이야. 화신상회 박홍식이를 봐라. 지물상회 하던 골에 지금은 장안에 둘도 없는 귀족으로 총독부 관리들도 쩔쩔매잖니. 사람대접 제대로 받고 살고 싶으면 넌 그놈의 고리타분한 생각부터 뜯어고쳐. 자기가 먼저 나 못났음네 하는데 누가 대접을 해주니?"
박미애는 숨도 쉬지 않고 공박했다.
"그건 미애 말이 맞다, 얘. 우리들 집안 재력이면 어디다 내놔도 기죽을 게 없잖지? 우리 아버지들 대에서나 중인이지 이제 우린 당당해져야 한다구."
한옥주의 말이었다.
"흥, 우리 기분이야 백번 그렇지. 양반님네들이 안 받아주니까 탈이지."
최순덕이 코웃음 치며 쓰게 웃었다.
"모르는 소리 말어. 미애는 양반댁으로 시집간댄다."
"아니, 뭐라구?"
최순덕이 화들짝 놀랐다.
"얘, 딴 얘기 그만하구 그 얘기 좀 듣자꾸나."
한옥주가 박미애를 툭 쳤다.
"그 얘기 헐 새가 어디 있니? 순덕이가 계석 트집이니."
"아냐, 아냐. 이제 안 그럴 테니 어디 그 얘기 좀 해봐라. 성씨가 뭔데?"
맞은편에 앉은 최순덕은 박미애에게 곧 다가앉듯이 앉음새를 고쳤다.
"송씨."
"어머, 송씨면 양반 좋지. 이름은?"
"가원이."
"어머, 송가원. 이름도 아주 멋지다. 뭘 하는 사람인데?"
"경성제대 의학부 금년 졸업."
"어머머, 세상에!"
그동안 눈이 반들거리며 물어대던 최순덕은 그만 맥이 탁 풀리며 안색까지 변했다.
"정말 넌 무슨 복이 그리 많니? 자유연애니?"
최순덕이와 별로 다를 것 없는 기색인 한옥주가 애써 웃음 지으며 물었다.
"그럼, 요새 세상에."
박미애는 시침을 떼며 말했다.
"처음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데?"
"얘는, 별걸 다 알려고 하네."
박미애는 표독스럽다 싶게 쏘아붙여 버렸다.
"그래, 혼인은 언제 하니?"
최순덕이 부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졸업하면 곧."
"그럼 혼인 예물도 정해졌겠구나?"
"다이아반지."
"뭐야?"
최순덕은 커피잔을 칠 만큼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주 반지도 아니고 다이아반지라니 너무 기막히다, 얘. 작위라도 받은 귀족이니?"
한옥주가 하르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너 정신 있니? 작위가 그리 영광으로 보여?"
"왜 갑자기 우국지사처럼 그러니?"
한옥주의 얼굴이 무색해졌다.
"장남이니?"
최순덕이 정신을 수습한 듯 물었다.
"아니, 차남."
"저걸 어째. 어찌 그리 알짜로 골랐니. 그만 묻자. 나 열통 터진다."
최순덕이 의자에 등을 부려버렸다.
"체, 물어볼 것 다 물어보고선 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자. 시집은 어디니?"
"응, 저기 전라북도 전준데, 개업은 서울서 해."
"옥주야, 우린 어떡허니?"
최순덕이가 울상을 지었다.
"순덕아, 우린 밥통들이다."
한옥주가 어깨를 들까불었다. 그러나 박미애가 한 거의 모든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다만 간절히 바라고 있는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한편, 졸업을 앞두고 송가원은 결혼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박정애와 민동환의 사이에 끼여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박정애와 민동환의 서로 자기네 동생과 짝을 지으려고 너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한쪽부터 정리를 하려고 민동환에게 박정애네와 얽힌 사정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자네 그 여잘 사랑하나?"
민동환의 저돌적인 물음이었다.
"글쎄..."
"무슨 책임질 일 저질렀나?"
"아니."
"그럼 간단하잖은가. 조건대로 학비를 갚아버리면 되는 거지."
민동환은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고 들었다. 혹 떼려다가 오히려 혹 붙이는 격이 되었다.
"우린 참 귀하고 멋진 연인이에요. 허탁 씨와 송중원 씨와 나, 그리고 그 인연으로 연결된 송가원 씨.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이 아니에요. 하늘이 내린 소중한 인연이에요. 서울 어디든 마음에 드는 곳에 병원을 차리도록 해요. 장소만 정하면 아주 멋들어지게 꾸며줄 테니까. 하얀 가운을 입은 가원병원 원장 송가원 씨, 생각만 해도 너무 근사해요. 우리 어서 그 모습을 보도록 합시다."
박정애는 그 성격답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며 몰아댔다. 생각다 못해서 피신하고 다니는 허탁을 만났다.
"박정애 씨가 자넬 동생 신랑감으로 탐내는 건 하나도 나쁠 게 없네. 그야 자유의사니까. 허나 자넨 그 문제를 놓고 조금치도 나를 의식하진 말게. 박정애 씨가 나나 자네 형을 연결시키는 것이야 박정애 씨가 구사하는 작전의 일환일 뿐일세. 또, 만약 자네가 그 뜻을 거부했을 때 박정애 씨와 나 사이가 틀어진다면 그거야 박정애 씨의 그만한 인품이니까 내 입장이 난처해지거나 서운할 건 없네. 여러 말 할 것 없이, 결혼문제는 일평생의 문제야. 모든 문제는 자네의 판단에 따라 자네가 결정하게."
허탁 선배의 말은 냉정할 만큼 분명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더 이상 의논할 사람도 없었다. 아니, 허탁 선배의 말마따나 자기 자신의 문제지 누구에게 의논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결국 문제는 두 여자가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박미애는 언니만큼도 못 되는 아주 곤란한 여자였다. 언니는 그래도 사회주의자를 짝사랑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돕는 헌신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박미애는 어떻게 된 것이 사회문제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이 보석이며 외제 옷 같은 것에만 온퉁 정신이 팔려 있는 천박한 속물이었다. 그 속물근성을 평생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민동환의 여동생은 두어 번 인사를 나누었을 뿐이니까 속마음이 어떤지 알 수가 없고, 그 인상이 전혀 마음에 끌리지 않았다. 못생긴 것도 아닌데 얼굴에 싸늘한 냉기가 흐르는 것이 영 정이 붙지 않았다. 두 여자를 젖히고 다가드는 얼굴이 있었다. 옥비였다. 송가원은 양쪽에 어물어물 미뤄가면서 졸업식날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졸업식장을 나오는 송가원에게 두 여자가 꽃다발을 안겼다.
"축하해요. 정말 멋있어요."
박정애가 꽃다발처럼 화려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축하드립니다."
한껏 멋을 부린 박미애가 언니 옆에서 고개를 까딱했다.
"근데 어떻게 된 일이죠? 형님을 여기서 만나뵐 줄 알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니."
박정애가 의아스러워했다.
"며칠 전에 편지로 축하받았습니다."
"편지요? 왜, 또 더 아픈가요?"
"아니오. 보호 조처 때문에요."
"보호 조처?"
"경찰 말입니다."
"저런 못된 놈들, 아주 창살 없는 감옥을 만들었군."
"언니, 누가 듣겠어."
박미애가 언니를 쿡 찔렀다.
"예, 잊어버리세요."
송가원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송가원 씨, 형님말고 이 졸업식을 누가 가장 축하하는지 아세요.?"
"글쎄요..."
박정애가 자기라고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서 송가원은 대답을 어물거렸다.
"글쎄요라니, 본인이 알면 무척 섭섭해하겠는데요?"
"아, 허탁 선배 말씀입니까?"
"예에, 이제 맞혔으니 됐어요. 보고 싶지 않으세요? 허 선배는 보고 싶어 하던데."
"왜요, 보고 싶지요."
"그럼 잘됐어요. 허 선배랑 함께 우리 축하 파티해요."
"그럴 수가 있습니까?"
"물론, 좋은 장소를 물색해 놨어요."
"아니, 아까부터 뭘 그리 찾으세요? 누구 또 올 사람 있어요?"
박미애가 쏘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아, 아니, 아닙니다."
송가원이 당황스럽게 얼버무렸다. 박정애가 동생을 빠르게 쏘아보았다.
"갑시다, 어디 가서 차나 마시면서 얘기하다가 파티 장소로 가게."
박정애가 발을 떼어놓았다.
"예, 그러지요."
송가원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다시 한번 사람들 쪽을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옥비는 보이지 않았다. 왔다면 옥비가 먼저 자신을 찾았을 거였다. 그저 웃기만 했을 뿐이지만 올 것 같은 기색이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박미애는 그런 송가원에게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송가원은 파티라는 것을 한 이후로 며칠째 참담한 기분에 빠져 자취방에만 박혀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옥비가 찾아왔다.
"아니, 어쩐 일이오? 정작 졸업식 날에는 오지도 않고."
송가원은 반가움과 당혹감이 엇갈리는 감정으로 옥비를 맞이했다.
"그럴 일이 잠 있어서...'
옥비는 슬픈 듯한 웃음을 희미하게 흘리며 치마를 모아 잡고 앉았다. 계절에 어울리게 받쳐입은 연한 유록색 치마저고리에서는 상큼하고 싱그러운 봄기운이 돋아나고 있었고, 쪽 곧은 흰 가리마와 탐스럽게 큰 쪽에 꽂힌 은비녀는 옷과 함께 어우러져 아리따운 옥비의 자태를 자아내고 있었다. 송가원은 옥비의 그 눈 시리고 가슴 저리는 모습을 옆눈길에 담으며 다시금 참담한 감정의 계곡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공허 스님한테서는 아무 소식도 없으시오.?"
송가원은 담뱃갑을 끌어당기며 손님 대접을 위한 말거리를 찾고 있었다.
"예..., 근디 다른 것이 아니고, 요것이 2천 원인디, 학비 빚진 것얼 갚으시라고... 졸업 전에 해올라고 애썼는디..."
옥비는 손가방에서 한지에 싼 것을 내놓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고 고개는 수그러져 있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학비 빚진 것을 어떻게 알았소?"
송가원의 목소리는 떨리고 격했다.
"그만 가겄구만요."
옥비는 서둘러 일어섰다.
"아니오,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소?"
충격과 혼란에 빠진 송가원은 벌떡 일어나며 옥비의 앞을 가로막았다.
"암것도 묻지 마시고..."
옥비가 애원하듯 송가원을 쳐다보았다. 그 눈에 눈물이 핑그르 돌아있었다. 송가원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은 박정애와 박미애였다. 그러나 다시 혼란에 빠졌다. 그들과 옥비가 연관지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민동환이 떠올랐다. 그러나 민동환이 그럴 사람은 아니었다. 옥비가 방을 뛰쳐나갔다.
"옥비, 이것, 이것..."
송가원은 돈뭉치를 집어 들며 다급하게 더듬거렸다. 송가원이 돈뭉치를 들고 밖으로 나갔을 때는 옥비는 비탈길을 마구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큰길과 만나는 비탈길 어귀에는 인력거가 머물러 있었다.
다 틀렸어..., 다 틀렸어...
비탈길을 위태롭게 뛰어 내려가고 있는 옥비의 뒷모습을 송가원은 멍하니 바라본 채 그 말을 질정 없이 뇌고 있었다. 옥비를 붙들어 돈을 가져가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너무나 뚜렷했다. 그러나 눈 하나 가득 찼던 눈물이 그 생각을 허물어버렸다. 그 눈물 앞에서 차마 그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옥비는 기다리던 인력거를 타고 떠나갔다. 송가원은 그날 밤을, 아니 그다음 날 아침을 생각하며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방으로 들어서 송가원은 돈뭉치를 떨어뜨리며 쓰러지듯 벌렁 누웠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날 아침의 기억은 떼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강하게 밀려들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깨진 항아리였다. 벗어날 수 없는 족쇄였고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이었다. 그것은 계획적인 일이었다. 그 인가가 먼 별장, 그 독한 양주, 허탁 선배까지 동원한 것은 완벽한 음모였다. 그럼 허탁 선배도 음모에 가담한 것일까?... 아니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 허탁 선배는 이용당한 것일 뿐이다. 허탁 선배는 내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한 것뿐이고, 그 들뜬 분위기를 박정애와 박미애는 빈틈없이 이용한 것이었다. 아침에 정신을 차려보니 발가벗은 박미애가 옆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허 선배님은 새벽에 떠났어요. 가원 씨 술이 풋술이라고 흉보던데요?"
목적을 달성애 통쾌하다는 듯 박정애가 깔깔대고 웃었다. 풋술..., 그 말을 되씹고 되씹었다. 거시서 또렷하게 씹히는 알맹이가 두 가지 있었다. 이놈아,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정신을 차려야지 하는 힐책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허 선배는 자신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결혼문제는 일평생의 문제야. 모든 문제는 자네의 판단에 따라 자네가 결정하게."
허탁 선배의 말이 쟁쟁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결국 졸업식에 피붙이 하나 오지 못했다는 감상에 빠져 술을 마셔대기 시작했던 것도, 시국 이야기로 허탁 선배와 함께 감정이 고조되어 가면서 더욱 폭음을 해댄 것도, 술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을 놓쳐 일을 저지른 것도 모두 자신의 책임일 수밖에 없었다. 그따위로 일을 망쳐놓고 학비 빚을 갚으라고 돈을 가져온 옥비에게 도저히 그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옥비가 어떻게 학비 빚을 알게 되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편, 옥비는 인력거 안에서 줄곧 눈물짓고 있었다. 그날을 생각할수록 서러움이 사무쳤다.
"흥, 내가 하루이틀 뒤를 밟은 줄 알아요? 둘이 양화점에 들어간 날 이후로 뒤를 밟느라고 학교공부도 다 망칠 지경이 됐어요. 그분하고 나하곤 어떤 사인 줄이나 알아요? 우린 혼약한 사이예요. 그래서 우리 집에서 의학부의 비싼 학비며 생활비를 전부 대고 있어요. 기생 술판에서 창을 해먹으면 고이 창이나 해 먹고 살 일이지 주제넘게 어디다 대고 꼬리를 치고 덤벼, 덤비길. 한 번만 더 그분 만났다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똑똑히 명심해."
박미애라고 했다. 학비를 도움받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집안이 내려앉았다는 말과 함께 공허 스님은 용돈 부탁을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비를 대주는 조건으로 혼약을 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건 박미애라는 범절 모르고 천스럽고 야한 상대한테서 느낀 여자로서의 직감이었다.
창이나 해먹는 것? 꼬리를 쳐? 가만두지 않는다고?
옥비는 이를 앙다물었다. 학비를 갚게 해서 박미애의 음흉한 속셈을 깨뜨려버리고 싶었다. 아니, 송가원을 그 못된 여자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야하게 양멋이나 냈지 그리도 상스럽고 보배운 데 없는 여자가 그분의 아내가 된다는 것을 그냥 보아넘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 자리를 넘보거나 탐할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첫대면에서 마음이 휘둘리고 사로잡혔지만 담담하게 감정을 다스렸던 것이다. 자신은 이미 몸이 망쳐진 처지였던 것이다. 몸이 더럽혀지지 않았더라도 감히 오르려고 하지 않을 나무였는데 몸까지 더렵혀 스스로 댕기머리를 걷어 올린 신세였으니 가슴 뒤흔드는 뜨거운 감정도 어렵지 않게 쓰다듬어 숨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응달에서 피움하는 사모의 정까지 포기할 것은 아니었다. 그분이 마음 열고 팔 벌려주기만 한다면 응달의 연정이나마 달게 꽃피우리라 했었다.
박미애에게 당한 수모를 사리물고 큰돈 구하는 데 눈독을 둘이기 시작했다. 소리 속을 알고, 재산 많고, 마음이 후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 고급 기생 술판에서 노니는 남자들 중에 재산 많은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색탐이 크기는 했지만 마음이 후하지를 못했고, 소리 속을 아는 사람은 더 드물었다. 재산이 많으면서 소리 속을 알면 자연히 소리꾼에게 마음이 후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세 가지가 어우러진 사람을 찾으려고 긴 날들이 조바심 속에서 타들어갔다. 경상도 진주 부자 이병연을 만날 때까지 몇 달 동안 속병이 생길 지경이었다. 송가원은 돈을 은행에 저금해 놓고 막연하게 공허 스님 나타나기만을 고대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는 도저히 돈을 돌려줄 용기도 체면도 없었던 것이다. 옥비의 처지에서 그런 거액을 어떻게 구했을까를 생각하면 더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박미애 쪽에서는 아주 마음놓고 혼인준비를 추진해 나아가고 있었다. 박미애는 이제 언니를 젖혀놓고 병원 자리부터 보로 다니자고 성화였다. 마치 개선장군처럼 당당해지고 도도해진 박미애의 꼴을 보기가 역겨워 송가원은 그녀를 만나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했다. 박미애는 혼전에 정조를 망친 것에 대해 조그만치의 부끄러움이나 쑥스러움 없이 오히려 위협적인 무기로 휘두르고 있었다. 그 뻔뻔스러움이 함정을 판 음모와 겹쳐지면서 얼굴 대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혼인날은 가까워오고, 송가원은 더 미룰 수가 없어 민동환에게 연락을 했다. 싸구려 술집에서 술기운을 빌려 혼인할 수밖에 없게 된 사연을 털어놓았다.
"참, 그러게 내가 뭐래던가. 빨리빨리 처리하랬지. 어쩔 수 없지. 서로 인연이 안 닿는 거니까. 허나, 형님 모시고 잡지하려는 일까지 이런 식으로 망치진 마세. 그땐 나도 안 참을 거니까."
민동환은 억지로 웃는 모습을 보였다. 송가원은 박미애와 건건이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집에서 다이아반지를 해주기로 했으니까 가원 씨는 우리 친구들 만나면 가원 씨가 해준 것으로 해야 돼요."
"뭐요? 그리 못하겠소."
"아니, 해주지도 못하면서 무슨 오기예요?"
"오기가 아니라 그따위 거짓말은 하기 싫다 그거요."
"그게 무슨 거짓말 뜻이 뭔지도 모르고 있소? 사실이 아닌 걸 사실인 것처럼 꾸며대는 건 모두 거짓말이오. 그리고, 그따위로 체면 세우는 가식은 나는 죽어도 싫소."
"참 잘나기도 했군요. 그럼 어쩔 거예요?"
"금반지를 끼시오. 나도 금반지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몰라요, 나 가겠어요."
박미애는 부르르 성질을 내며 돌아섰다. 그러나 송가원은 붙들지 않았다. 그 못돼먹은 속물근성을 뜯어고치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며,
"빨리 병원 자리 보러 다녀요."
"필요 없소. 아직 수련 과정이 남았으니까."
"미리 자리를 잡아두면 될 거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소."
"왜요? 혼인시키는 기분에 들떠 있을 때 받아야 한 푼이라도 더 많이 받는단 말예요."
"글쎄, 난 개업을 해도 서울에서 할 생각이 없고, 처가 덕을 보고 싶지 않소."
"뭐, 뭐라구요? 그럼 어디서 개업할 건데요? 개업은 무슨 돈으로 하구요?"
"개업은 고향 쪽으로 가서 할 거고, 돈이야 취직해서 벌어가지고 하겠소."
"아이고 엄마, 나 미치겠네. 가원 씨, 똑똑히 들어요. 그건 처가 덕이 아니라 내가 당당히 받을 상속분이라구요."
"흥, 여자한테 상속도 하고 인심좋은 집안이군. 그럼 미애 씨가 받아쓰면 될 거 아니오."
"나한텐 직접 안 준단 말예요."
"내가 말해 주겠소."
"누굴 놀려요, 지금? 나 가요."
결국 박정애가 나서서 병원 자리 얻기를 종용했다. 그러나 송가원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처가 덕을 본다는 것 자체가 몹시 비위에 거슬렸고, 그런 조건으로 얽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박정애와 박미애에게 보복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남자다워서 좋아요. 허지만 고생하면 후회할 거예요."
박정애가 쓰게 웃었다.
"의사 월급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자취생활에 비하면 너무 호화롭게 살게 될 겁니다."
송가원은 쥐어박듯이 말해 버렸다.
"미애가 고생될 건 안 생각해요?"
"허영과 사치를 버리면 고생될 게 없지요."
"고집불통에 푸로레타리아적 사고방식까지 가졌군요. 그럼 뜻대로 해요."
앞서 나가는 박정애를 보며 송가원은 속으로 통쾌하게 웃어제쳤다. 공허 스님은 혼례식이 지난 다음에야 나타났다. 송가원은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다 털어놓고 돈을 옥비에게 좀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려, 자네도 짐작혔능가 모르겄네만, 옥비가 그 큰돈얼 맨글자면 어떤 한량헌티 신세럴 멧길 것인디, 일이 뻐그러지기넌 혔어도 옥비으 그 깊은 맘언 자네가 잊어부러서넌 안될 것이네 잉."
"예..."
송가원은 고개를 떨구었다. 돈을 두고 나가는 옥비의 눈에 그렁거렸던 눈물의 의미가 가슴을 치고 있었다.
얼마쯤 지나 송가원은 민동환의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다른 게 아니고 자네가 앞장서 형님을 좀 뵈러 가게 해주게."
민동환의 말이었다.
"자네 정말 잡지를 하려나?"
송가원은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민동환을 바라보았다.
"나도 뭔가를 해야 될 것 아닌가. 만석꾼 자식 그냥 놀고 먹으면 그 갈 길이 주색잡기에 패가망신이란 걸 잘 알지?"
"뜻은 좋은데 돈 없애고 고생하고 그럴까 봐 걱정이군."
"그런 걱정일랑 말게. 나 솔직하게 하는 말인데 말야, 잡지사 발행이면 사회 명사 아닌가? 사회 명사 명함 갖는데 그만한 돈 없애는 거야 아까울 것 없잖은가. 그리고 형님께서 편집을 책임지시고 내용을 알차게 만들어나가면 사회에 공헌도 하고 말야. 양수겸장이 바로 그거 아니겟어?"
민동환은 솔직하게 말한 만큼 구김살없이 웃었다. 거창하게 말을 꾸며대고 되지 않게 큰일이나 하는 것처럼 으스대는 것보다는 그 솔직함이 송가원은 더 든든하게 느껴졌다.
"잡지 성격이나 내용은 정했나?"
"글세, 문학을 중심으로 해서 종합잡지를 만들면 어떨까 싶은데 이건 그저 막연한 생각이고, 구체적인 것이야 형님하고 상의해서 결정해야지."
"헌데, 서울에도 능력자들이 얼마든지 많을 텐데 왜 하필 우리 형님이지?"
"그건 자제가 모를 대목이지. 물론 서울에 문필가 문학가 편집경력자들 많지. 그런데 자네 형님하고 그 사람들하고 다른 점이 뭔지 아나? 자네 형님은 두 번씩이나 감옥생활을 한 투쟁경력의 소유자야. 그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경력이 없고, 한번쯤 겪은 사람이 몇 명 있을지 모르지. 난 형님이 가진 그런 의자가 편집책임자로서 적임이라고 생각하네. 자네와 나와의 관계는 1퍼센트 정도 작용했을 거네. 이해가 되나?"
"그 잡지 잘못하다가 매냥 판금 당하겠군."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송가원은 민동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형의 그런 경력은 현실적으로 기피 사항이면 기피 사항이었지 환영받기 어려웠고, 형은 정신적인 회복을 위해서도 생활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아, 형님이나 나나 잡혀 들어가지 않을 선에서 판금을 당해야 잡지가 유명해져."
"아이고, 벌써 경영자 다 돼셧네. 그래, 월급은 많이 주려나?"
송가원은 농담조로 물었다.
"당연하지. 생활 보장을 시켜드려야지."
"고맙군."
"이 사람아, 정떨어지게 그런 말 말어. 언제 가려는가?"
"자네 좋은 날에."
"그래, 그럼 모레가 어떤가?"
"그러세."
"청은 들어주시겠지?"
"그건 염려 말게. 내가 강제로라도 움직이게 할 테니까."
"고맙네."
"이 사람아, 정떨어지게 그런 말 말어."
들이는 마주 보며 소리 내서 웃었다.
47. 혁명은 외로운 것
땡볕이 쏟아지고 있는 푸른 들녘을 자동차가 달리고 있었다. 그건 덩치 큰 짐차가 아니라 고급 승용차였다. 들녘의 초록빛 물결 속에서 그 검정 승용차의 모습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하이고, 우리넌 숨맥혀 죽겄는디 저 잡것언 얼매나 시언헐고 이."
논에서 피를 뽑고 있던 여자가 땀을 훔치며 멀리 달리고 있는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빌어묵을 놈, 간이 사리살살 녹겄제."
"간만 녹아? 매가리없이 처진 늙은 붕알도 신선놀음이제."
"저사람 헛소리허는 것 잠 보소. 저놈 붕알이 누가 매가리없이 처졌다고 그려? 요분참 에 열다섯 살 묵은 첩얼 시번찌로 딜였단 말 듣지도 못혔능감?"
"갸럴 50원 빚에 뺏어왔담서?"
"이자꺼정 치먼 80원이라데?"
"이자야 고것이 무신 빚이여? 있는 놈덜이 없는 사람덜 등치고 간 꺼 내 묵을라고 즈그 멋대로 정헌 것인디."
"갸가 영판 이쁘담서?"
"근디 날이날마동 울어싼다데."
"어찌 안 그렇겄어. 그 나이에 시집얼 간 것도 아니고 억지로 붙들려 와갖고 밤마동 늙은 왜놈헌티 못헐 일 당허자니 고것이 사람 살 일이여."
"갸도 갸고, 그 부모 맴이 얼매나 씨리고 에리겄어."
"그 부모네넌 만주로 떴다등마."
"하여튼지 간에 저놈이 쳐죽일 놈이여."
"저런 껍데기럴 뒤집을 놈이 천벌얼 안 받고 사니."
"시장시런 소리 말소, 어느 시상이고 악독헌 놈덜만 잘사는 것이 시상사 아니드라고."
"저 오살헐 놈이 타고 댕기는 저 자동차 하로 지름값이 얼맨지나 아능가, 자네덜, 하로에 대두 한 말 값이여, 대두 한 말!"
"머시여? 대두 한 말! 누가 그려?"
"누구넌 누구여, 그 도리우찌 삐까닥허니 쓰고 댕기는 싹수없는 운전수 놈이 까바시는 주딩이제."
"아이고메, 저런 사지럴 찢어죽일 놈이 우리 피 다빨고, 우리 등골다 빼 묵네."
"저놈 누가 깍 안 죽이는가!"
"아이고, 그런 꿈도 꾸지 말소. 그간에 그런 맘 묵은 사람덜 다 경찰에 잽혀갔을게."
"아이고, 천불이야. 차나 팍 엎어져 부러라."
품앗이하고 있는 다섯 여자는 해도해도 분이 풀리지 않아 또 험담과 욕들을 한바탕 해대며 더위를 이겨낼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여자들이 바라는 것과는 달리 자동차는 들판길을 잘도 굴러 죽동마을 앞에 이르렀다. 차가 멈추자 누군가가 잽싸게 뒷문을 열었다. 차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내린 것은 하시모토였다. 그가 내리자마자 도열하듯 서 있던 예닐곱 명이 허리를 반으로 꺾는 일본식 인사를 했다. 턱끝으로 인사를 받은 하시모토는 마을 쪽으로 날카로운 눈길을 돌렸다.
"예, 예, 가시지요."
농감이 연상 허리를 굽히며 안내했다. 당산나무 아래에는 열명쯤의 젊은 남녀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들 옆 한쪽으로는 여행 가방 같은 것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에에 또, 자네들이 농촌계몽 나온 학생들인가?"
하시모토가 지팡이끝을 휘저으며 젊은이들에게 물었다. 땅을 짚는 지팡이 끝으로 사람들을 싸잡아 지목하는 태도는 더없이 오만하고 방자해 보였다.
"예, 그렇습니다."
남학생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나는 이곳 농장의 경영주다. 내 농장에서는 여하한 일이 있어도 계몽 활동을 할 수가 없다.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당장 물러가라!"
하시모토는 살벌하게 명령했다.
"예, 그말 들었습니다만 저희들은 순수한 뜻에서 농민들을 돕고자 합니다."
"잔소리 마라. 내 소작이들은 다 내가 알아서 한다. 당장 내 농토에서 떠나라."
"그렇지만 농민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건방진 놈, 어디다 대고 그따위 소리야, 너 경찰서 유치장 맛을 봐야 정신차리겠어? 네놈들 아니라도 통독부에서 실시하는 농촌지흥운동으로 족해, 이봐, 저놈들을 몰아내!"
하시모토는 고개를 돌리며 명령했다.
"예, 알겠습니다." 농감은 허리를 굽히고는, "얘들아, 저놈들 몰아내라."
자기 옆에 둘러선 젊은이들에게 일렀다. 불량기 띤 젊은이들이 학생들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이거 이러지 말아요. 우리 발로 걸어갈 테니까!"
학생이 젊은 패거리에게 내질렀다. 젊은 패거리는 주춤 멈춰섰다.
"여러분, 다들 떠납시다."
대표의 말에 다른 학생들이 가방을 집어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데가 다 있네."
여학생이 한숨을 폭 쉬었다.
"그러니 소작인들이 엄마나 고달프겠어."
다른 여학생이 혀를 찼다.
"저놈 차 타고 다니는 것 보시오. 얼마나 지독하게 착취를 했으면."
남학생이 침을 내뱉었다.
"농촌에 저런 고급 차가 굴러다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다른 남학생이 고개를 내둘렀다. 학생들은 뙤약볕 속을 걸어 마을을 떠나갔다. 그들은 하기 방학을 이용해서 농촌 계몽 활동을 나온 것이었다. 농촌 계몽 활동은 3년째를 맞고 있는 사회운동이었다.
"저놈들이 딴 부락으로 가면 안 되니까 따라가서 우리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도록 해. 저것들이 공산주의자들하고는 다르지만, 그래도 저것들이 거쳐가면 어디서고 소작쟁의가 더 일어난단 말야. 무슨 소린지 알겠나?"
하시모토는 농감을 노려보았다.
"예, 깨끗하게 몰아내겠습니다."
농감이 돌아서며 젊은 패거리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그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이 더러운 조센징 새끼들! 가라 가라!"
운전수가 자동차 옆에 모여든 아이들을 향해 일본말로 내뱉으며 잎 달린 나뭇가리즐 휘두르고 있었다. 열댓 명의 아이들은 회초리질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차 옆을 떠날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신기한 자동차라는 것을 먼발치로만 보았지 그렇게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봐라, 봐라, 니 얼굴이 개떡맨치로 납짝하니 퍼졌다. 히히히..."
"그려, 니 얼굴도 안 그러냐. 킥킥킥..."
아이들은 번들번들 윤기 나는 차체에 비치는 자기네 얼굴을 보며 그리 즐거운 것이었다.
"저것 타먼 호시가 기맥히게 좋담시로?"
"하먼, 인력거고 자전너넌 댈 것이 아니랴."
"나넌 후제 커서 운전수 될란다, 글먼 얼매든지 호시 탈 수 있응게."
"나도!"
"나도!"
"좆만 새끼덜아, 나마 맡은 것이여!"
"아무나 먼첨 되는 것이 임자제."
"씨발놈, 까불래."
"좋아, 붙어볼래?"
두 아이는 곧 싸움이 붙을 기세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운전수를 두고 다투었을 뿐 자동차를 가질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하시모토 같은 부자, 그건 너무 어마어마하고 까마득하게 높아 그들은 아예 꿈조차 꾸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삼베옷을 걸친 아이들의 모습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감물 얼룩이 든 삼베옷이나마 위아래 갖추어 입은 아이들은 몇이 안 되고, 나머지 아이들은 갈비뼈 드러나고 배만 불룩한 윗뭄을 맨살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리고 검정 고무신이나마 신은 아이는 하나도 없고 거의가 맨발이었다. 그 가난한 모습과 번들거리는 자동차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하시모토는 당산나무 그늘에서 쥘부채를 하늘거리며 가늘게 뜬 눈으로 들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했고, 살도 많이 불어나 있었다. 그에게도 세월은 어김없이 얹힌 것이었다. 그는 말을 쏘아 죽인 다음에 차를 사들였던 것이다. 옛날에는 요시다에게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만 기왕 말을 없앤 마당에 그 대상을 바짝 올려잡기로 했던 것이다. 그 일대에서 고급 승용차를 타는 것은 단 한 사람, 군산 부청장이었다. 그와 똑같은 차종을 사들였다. 재력으로 보나 나이로 그와 맞먹지 못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면사무소로."
하시모토는 차에 오르며 운전수에게 일렀다. 면사무소를 찾아가 농촌진흥운동의 강연회를 강화시킬 작정이었다. 학생들을 쫓아냈다고는 하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것들이 주변에서 설쳐대며 그놈의 계몽 바람을 일으키면 그 영향이 자신의 소작인들에게 안 미칠 수 없었다. 학생 놈들이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친다 어쩐다 하는 것도 문제인데, 그 문제는 그놈들이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농사일을 거드는 것이었다. 농사 지어보지 않은 놈들이 거들어봐야 오죽할까마는 그게 소작인들의 마음이 흔들레 방치해서는 안 되었다. 말은 채찍질을 할수록 잘 달리듯 아래 것들은 딴생각을 못 하도록 그저 조이고 닦달하는 것이 최고였다. 학생 놈들의 바람을 막자면 매일 밤 동네마다 강연회를 열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밤부터 하시모토의 논을 소작 부치고 있는 사람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동네 단위로 마을회관이나 타작마당에 모여 강연을 들어야 했다. 강연에 나선 사람들은 면사무소 주재소 금융조합의 간부급과 보통학교 교사들이었다. 농촌진흥운동은 금년 3월부터 총독부에서 전국에 걸쳐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이었으므로 하시모토는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셈이었다.
"우가키 총독각하께서는 농민들이 잘살게 하기 위해서 농촌진흥정책을 세우시고 그 운동을 적극 전개토록 하셨습니다. 총독각하께서는 작사는 농촌은 굶는 사람이 없는 농촌을 만들기 위해 다음 세가지 목표를 세우셨숩니다. 첫째 춘궁퇴치입니다. 다시 말해 봄철에 굶는 보릿고개를 없앤다 그겁니다. 둘째 차금퇴치입니다. 이건 돈을 빚내 쓰는 것을 없앤다 그런 말입니다. 셋째 차금예방입니다. 돈을 빌려쓰는 것을 미리 막는다 그런 뜻입니다. 그럼 이 세 가지 목표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력갱생으로이룰 수 있습니다. 자력갱생이란 농민들 스스로가 힘쓰고 노력해서 생활을 새롭게 일으켜야 한다 그런 말입니다. 그럼, 지금까지의 조선사람들은 어땠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사람들의 가장 나쁜 점은, 첫째 부지런하지 못하고 게으른 것입니다. 둘째 미개하고 무지하여 머리를 쓸 줄도 모르고 아는 것이 모자랍니다. 셋째 나라를 위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지를 못합니다. 이 세 가지 점만 고치면 여러분들은 금방 배곯지 않고 잘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 그건 간단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보고 일본정신과 일본풍습을 익히고 본받으면 됩니다. 그건, 첫째 대일본제국의 신민임을 자각하고 국기 게양을 잘해야 합니다. 둘째 신사참배를 열성으로 잘해야 합니다. 셋째 무슨 일에나 불평불만이나 앞세우고, 남의 험담이나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넷째 나라를 위한 세금을 즐거운 마음으로 남보다 먼저 내는 습관을 기르고, 모든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다섯째 빨래하는 시간을 절약하고 괜히 힘들게 고생하지 말고 횐옷에 모두 검정물을 들여 입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앞으로 5년 동안 적극적으로 실행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빚도 지지 않고 밥고 굶지 않고 잘살게 될 것입니다."
하루종일 불볕 속에서 일에 시달리고 지친 농부들은 모기에 뜯겨가며 그런 강연을 들어야 햇다. 그들은 파김치가 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하품하기에 바빴고, 꾸벅꾸벅 졸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일에 지쳐서만 하품을 하고 조는 것이 아니었다. 강연 내용 그 어디에도 귀가 솔깃해지거나 마음을 사로잡은 대목이라곤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매일 밤 사람을 바꿔가며 똑같은 내용을 되풀이해대니 자장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31년 6월에 조선 총독이 된 우가키는 <조선 2천만 민심의 향배 거취는 제국의 장래에 있어서 흥망 그 자체라 해도 좋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조선사람들을 확고하게 장악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그 방법은 <조선인들에게 적당히 빵을 제공>하고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경멸적 태도를 고쳐서> 내선융화를 도모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내선융화를 실현하기 위해 내놓은 방안이 농촌 진흥 운동이었다. 그 5개년계획은 전국의 각 도 · 군 · 읍 · 면 단위로 농촌진흥위원회를 조직하고, 경찰관과 관리들을 동시에 동원하면서 시작되었다. 경찰관과 관리들의 동원은 치안정책과 농업정책을 일치시키자는 것이었고, 그 시도는 바로 해마다 극심해지고 있는 소작쟁의를 사전에 차단하고 근절시키자는 것이었다. 조선사람들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을 장악하고 길들이지 않고서는 조선 지배 자체가 위험하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경찰관과 관리들만이 아니라 학교 교사와 금융조합 직원들까지 농민 지도자로 동원되었다. 그들은 일장기를 게양하라, 신사에 참배하라,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라, 집 안과 골목의 청소를 깨끗이 하라, 여자들도 남자들하고 똑같이 일을 하라, 술을 적게 마셔라, 부업을 하라, 옷에 검정물을 들여라, 가락이 느린 조선 노래를 부르지 마라,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까지 하라는 것도 많고 간섭도 많았다. 그러나 조선 전체의 토지 중 60퍼센트를 인구 3.5퍼센트에 불과한 지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땅을 전부 빼앗아 재분배하지 않는 한 총독부가 내세운 춘궁퇴치며 부채정리 그리고 적당한 빵을 제공하는 일이란 애시당초 공염불이고 거짓말이었다. 한편, 정상규도 눈에 불을 켜고 다니며 학생계몽대를 몰아내고 있었다.
"머시여? 아는 것이 심이다, 배와야 산다? 고것이 어떤 시러베아덜놈이 떠드는 소리여. 농새 지묵는 것덜이 일이나 열성으로 허먼 되았제 다늦게 언문자 배와서 과거급제럴 헐 것이여, 면서기럴 해북을 것이여. 학상놈덜이 밥 처묵고 배지가 뜨뜻허먼 그늘서 낮잠이나 자빠져 잘 일이제 무신 초친 맛으로 촌에넌 몰켜와 갖고 설레발이여, 설레발이. 야학인지 놀이턴지 벌래놓고 밤잠 못 자게 히서 낮에 낮잠 퍼자 농새일 망치고, 못된 생각이나 귓구멍에 쏘삭쏘삭혀서 소작쟁의나 허게 맨글고, 요런 빌어묵을 놈덜, 썩 나가그라, 내 땅서 썩 나가!"
정상규는 학생들에게 삿대질을 해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든 버티려고 했지만 농부들이 학생들에게 떠나주기를 바랐다.
"학상덜 고마운 맘 잘 아는디, 학상덜이 저 말 안 들으먼 내년에... 내년에... 우리 소작이..."
학생들은 농부들이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계몽한다고 소작인들의 소작이 떼이게 할 수는 없었다. 학생들은 정상규의 농토에서 떠나야 했다.
여름밤의 은하수가 기울 만큼 밤이 깊어져 있었다. 모기들도 풀벌레들도 잠이 들었는지 밤은 깊은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저편 어둠 속에서 별똥별이 순간적으로 긴 꼬리를 그리며 반짝했다가 사라졌다. 그림자 하나가 담에서 뛰어내렸다. 담이 꽤 높은데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림자는 안채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안방으로 접근한 그림자가 대청마루에 엎드리듯 했다.
"정형, 정도규 형!"
그림자의 낮고 빠른 목소리였다. 방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정형, 정도규 형!"
그림자는 방문까지 질벅거렸다.
"누, 누구요?"
방 안에서 놀란 목소리가 울렸다.
"정형, 나 안종화요."
"아니, 안형!"
벌떡 몸을 일으키는 느낌이 밖에서도 여실히 느껴졌다.
"아니, 이 밤중에 누가 왔당가요?"
잠에 취한 여자 목소리였다.
"서울서 친구가 찾아왔소. 당신은 마음 쓰지 말고 그대로 자시오. 난 사랑으로 나갈 테니."
낮은 정도규의 목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안종화와 정도규는 어둠 속에서 서로 손을 마주 잡았다.
"이게 어쩐 일이오.?"
정도규가 물었다.
"쫓기다보니..."
"갑시다, 사랑으로."
정도규가 앞장섰다.
"불은 안 켜는 게 좋겠소. 경찰 감시로 여기도 창살 없는 감옥이니까."
사랑방으로 들어서며 정도규가 말했다.
"여기도요?"
안종화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묻어났다.
"앉읍시다. 출감 이후로 가택연금 상태로 계속 감시당하고 사는 형편이오."
"아, 그래서 서울 걸음을 한 번도 못했군요. 이건 서울보다 더 형편이 고약한데요."
"그럴지도 모르죠. 바닥이 좁고 감시하기가 쉬우니까요."
"그럼 곧 떠야 되겠는데요."
"너무 염려 마세요. 안 동지 피할 데야 제가 마련하지요. 헌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서울 고무회사와 경성 제사공장을 대상으로 공작을 진행했는데 노출되고 말았어요."
"고무회사와 제사공장이면 건실한데..."
정도규의 말은 조직 노출이 아쉽다는 것 같기도 하고, 왜 그리됐느냐고 묻는 것 같기도 했다.
"왜놈들 경찰망은 지독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요. 물론 막강한 재력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요, 폭력과 금력으로 동시에 공략해대니까 폭력이 두렵고 가난한 사람들은 마음이 흔들리고 변하게 되겠지요."
"그럼 그동안 생활이 감옥살이 연장이었겠군요?"
안종화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럴 수야 없지요. 밤을 이용해 세포들을 움직이면서 조직구축을 꾀해 왔어요. 실효도 있고요."
"헌데 말입니다, 이렇게 연금상태에 있을 게 아니라 이번 기회에 저와 함께 서울로 잠입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실은 피신만을 위해서 정형을 찾아온 게 아니고 무슨 중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됐거든요. 계속되는 검거로 조직일꾼들은 고갈상태에 빠지고, 노동자가 선봉이 되고 중심이 돼야 하는데 정형 같은 사람이 농민들을 상대로 시골에 있어서야 되겠어요?"
정도규는 그때서야 너무나 뜻밖인 안종화의 행보에서 느꼈던 미심쩍음이 풀리면서 그의 논리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글쎄요... 노동자 선봉, 노동자 주체, 노동자 무산자성, 그에 반해서 농민들의 소소유자 의식, 고립, 분산성, 그것은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노동자를 절대시하고 농민을 부차시하는 것은 쏘련혁명의 원칙이고, 그 원칙은 우리 조선에서도 그대로 수용되고 적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감방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쏘련사회, 아니 정확히 말해서 러시아 사회에 적응될 수 있는 원칙이지 조선 사회에 적응되는 원칙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혁명 직전의 러시아사회의 구조와 형태와 현재 조선 사회의 구조와 형태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혁명 직전의 러시아 사회는 구라파 강국들보다 한발 늦기는 했지만 엄연히 도시산업 노동자 계층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본주의적 모순을 체득하고 있었고요. 또한 러시아는 땅이 방대하게 넓어 농민들의 경작지도 그만큼 넓을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서로 멀리 떨어져 살게 되는 고립성과 분산성을 갖게 될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소작농보다는 자작농이 훨씬 많으니까 자기 땅을 지키려는 소소유자의식도 강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조선은 어떻습니까. 도시산업적 노동자계층이 형성된 것은 길게 잡아야 10년이 조금 넘을 겁니다. 그리고 현재도 그 수가 백만을 넘지 못합니다. 그런데 농민들을 봅시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 경작면적도 작으니까 멀리 떨어져 살고 싶어도 그러지를 못하고 올망졸망 마을을 이루다 보니 고립, 분산이 아니라 연계, 집합의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농민층의 경작지 실태를 보더라도 조선 시대부터 소작농이 전체 농민들의 70퍼센트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왜놈들 세상이 되면서 85퍼센트 이상 치솟은 거지요. 그러니까 현재 농민은 전체 조선 백성 중에 90퍼센트이고 그중에 85센트가 소작농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재론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진짜배기 무산 계급이지 소소유자의식을 가질 수나 있습니까? 물론 그들의 절대 소망은 어서 자기들 땅을 가져 소작농 신세를 면하는 것입니다. 그걸 혁명에 반하는 소소유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판단한다면 그건 오류가 아니라 이론과 논리의 기본 식별력도 못 갖춘 아둔입니다. 소작인들의 땅에 대한 갈망은 바로 노동자들을 앞지르고 압도하는 혁명 요소고 혁명성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특질과 역사체험을 조선 농민들은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조선 농민들은 저 고려 시대부터 흉년이 들면 나라를 상대로 감세를 요구했고, 토호들의 횡포나 관리들의 착취가 심해지면 대규모 민란을 일으켰고, 악질 지주들의 악질 지주들의 만행에는 언제나 집단적으로 방어하고 대항해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 농민들은 긴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또 투쟁의 방법과 기술도 다양하게 가지고 있다 그겁니다. 그건 바로 무엇입니까? 혁명적 잠재력입니다. 총독부가 발표한 것을 보면 지난 10년 동안에 노동쟁의보다 소작쟁의가 세 배 네 배로 많이 일어났던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그 혁명적 잠재력의 폭발인 동시에 우리의 운동을 그만큼 빨리 흡수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해왔습니까? 그저 무조건적으로 쏘련의 이론을 우리에게 적응시키려고 급급하면서 노동자 우선, 농민 경시의 운동을 해왔습니다. 그건 우리가 저지른 큰 불찰이고 오류입니다. 물론 운동지도층이 도시 중심의 지식인들이었으니까 농민들의 그런 특질을 잘 모르고 소홀히 했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지금까지도 소련이론의 맹목적인 추종과 무조건적인 대입은 심각한 문젭니다. 안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거 참.... 저야말로 농촌이나 농민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아닙니까. 허나 정형의 이론에 심한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쏘련 이론의 맹목적인 추종과 절대 신뢰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현실에 맞게 방향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당이 없으니..."
정도규는 어둠 속에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형은 앞으로의 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요... 갈수록 어려워지겠지요. 만주사변 이후로 경찰력만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까지 증강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만주를 안정시키려면 반드시 조선이 안정돼야 하기 때문인데, 그 안정 추구가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겠지요."
"예, 그건 틀림없습니다. 서울에서는 벌써 운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당이 없으니 통제력이 없고, 분파별로 지하활동을 하니 효과는 작고, 단압이 심해지니 불안감은 커지고, 독립은 요원하다는 사회풍조가 생겨나니 의식은 동요를 일으키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꼭꼭꼬오오옥-
장닭의 목청 뽑아대는 소리가 청결하고도 장쾌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거 어느새 밤이 다 갔군요. 더 밝아지기 전에 머슴을 따라가십시오. 그 포교당은 안심할 수 있으니 푹 쉬세요. 만나는 건 밤에밖에 안되니까 그리 아시고요."
"이거 폐가 너무 많습니다."
"무슨 말씀을..."
두 사람은 사랑방을 나섰다. 머슴을 따라 묽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안종화를 정도규는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의식을 채우고 있는 것은 고서완이었다. 운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안종화의 말 때문인지도 몰랐다. 고서완이 그렇게 생각을 바꾸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그는 애초에 기독교 신자였고, 결국 종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소극적 방법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기독교 사회주의자. 그는 변절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 운동은 분명 포기한 것이었다. 고서완은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사회주의 운동으로 해낸 일도 많았고, 감옥살이까지 한 극단의 고생도 했다. 그런데 상황의 변화에 따른 관점의 설장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그건 기회주의는 아니었다. 그는 방법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혁명에 대한 확신의 부족이었고 의지의 부족이었다.
"26년부터 작년까지 7년 동안에 감옥에 갇힌 사람이 3천5백을 넘습니다."
"알고 있소."
"단속은 자꾸 심해지는데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갈 것 아닙니까."
"당연하오."
"그럼 결과는 뭡니까? 왜놈들은 뿌리를 뽑겠다는데, 이런 식으로 검거되다간 결국 뿌리가 뽑힐 건 자명한 거 아닙니까. 그런 무모한 대응이 어디 있습니까?"
"절대 뿌리뽑히지 않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린 그동안 고보 1학년한테까지 교육했소. 그들은 자라나고 있고, 그들은 또 아랫세대를 교육시킬 것이오. 그리고 출감하는 사람들이 또 운동을 계속하는 거요."
"그건 지나친 낙관이고 망상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낙관 없이 혁명은 꿈꿀 수 없고 망상 없이 혁명은 설계되지 않소."
"망상은 과학의 모체요. 또한 과학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에게 과학은 망상으로 보이는 법이오."
"확신이 망상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현실주의자들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을 언제나 망상가라 비웃었소. 그러나 인류 역사는 결국 그 망상가들의 의지대로 변화하고 발전해 왔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상태에서 방법을 바꾸지 않는 건 무모한 자살행윕니다."
"방법 전환은 변질이고, 변질은 혁명의 살해행위요. 무모한 길을 가는 것, 그것이 혁명의 길이고, 그래서 혁명은 고통스럽고 외로운 것이오. 괴로워할 것 없소. 마음먹은 일이 소극적일 뿐 변절은 아니니까 잘해나가도록 하시오."
"죄송합니다..."
고서원에게 했던 말은 꼭 그에게 한 것만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지기 위해 한 말이기도 했다.
48. 고난
열서너 평의 비좁은 공장 안에는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가득했다. 두 남자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재봉틀 발판을 밟아대고 있었다. 재봉틀 두 대는 공장을 절반 가까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재봉일을 할 때는 옆으로 퍼져 일감 받침대 역할을 하는 재봉틀 뚜껑이 차지하는 면적 때문이었다. 그 맞은편 벽에는 1인용 침대 같은 두꺼운 나무판이 책상 높이 달려 있었다. 그건 양복점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그리고 대각선으로 또 하나의 문이 달려 있었다. 그 문은 직공들이 뒷골목으로 통행하는 문이었다. 두 대의 재봉틀과 재단대가 차지하는 면적과 두 개의 문으로 오가는 통로를 빼면 열서너 평의 공장 안에 남는 공간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들이 다섯이니 공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이 비좁았다. 재단사 하나, 재봉사 둘, 시다(보조원)가 둘이었다. 비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사방의 벽에는 2층 선반이 매어져 있었고, 그 아래로는 옷이나 모자가 걸린 못들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재단사 쪽으로 치우쳐 소형 무쇠 난로가 놓여 있었다. 그 무쇠 난로의 위치가 바로 이 공장에서 누가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가를 나타내고 있었다. 정육점에서 칼 든 자가 제일이듯 양복점 공장에서는 가위 든 재단사가 제일이었다. 그다음이 재봉사인데, 재봉사라고 다같은 재봉사가 아니었다. 재단사가 일감을 넘겨주는 오른쪽 재봉사가 상급이었고, 그 옆의 왼쪽 재봉사가 하급이었다. 그 등급은 두 명의 시다도 마찬가지였다. 구석지에 쪼그리고 앉아 재봉사한테 일감을 넘겨받고 있는 시다가 상급이었고, 앉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잡일을 하고 있는 것이 하급 시다였다.
"야 이 새끼야, 불 꺼지는 것 안 보여!"
재단사가 가위를 던지며 버럭 소리쳤다.
"예, 예, 알겠습니다."
두루마리 옷감통을 간추리고 있던 시다가 화들짝 놀라며 뒷문으로 뛰어나갔다.
"저 조센징 새끼 저거, 손이 곱아 가위질이 제대로 되나 말야."
재단사는 혀를 차고 돌아서며 담배를 빼 물었다.
"조센징들 설인가 뭔가 때문에 우리들만 죽어나는 거지요, 뭐."
쉴 기회를 잡았다는 듯 상급 재봉사가 재봉틀을 멈춰 잡으며 말을 걸었다.
"그러게 말야. 조센징 새끼들은 왜 꼭 구정을 쇠느라고 지랄이야, 지랄이."
재단사는 작고 마른 생김대로 신경질적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총독부에선 왜 그럴 콱 틀어막지 못하지요?"
상급 재봉사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구정 쇠지 말고 신정 쇠라고 한 지가 벌써 언제야. 헌데 조센징 새끼들이 말을 들어 먹어야 말이지. 그렇다고 만세 부르는 것도 아니고 한데 총독부로서도 더 어쩔 수가 없겠지."
재단사는 제법 아는 척을 했다.
"저어... 그 말 해보셨어요?"
하던 일을 매듭지은 하급 재봉사도 일손을 놓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거 말하나마나 아니냐. 먼 산만 바라보고 들은 척도 안 하더라."
재단사가 양복점 문 쪽에다 대고 눈을 흘기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때 하급 시다가 담을 양철동을 돌고 다급하게 난로 앞으로 다가섰다.
"밤일까지 시키면서 사장님을 떼돈을 벌면서 이거 너무하는 것 아닌가요."
하급 재봉사는 얼굴이 구겨지며 투덜거렸다.
"이새끼야, 상여금도 못 받고 골빠지는데 석탄이나 제때 제때 퍼넣으란 말야!"
재단사가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하급 시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아이고메!"
석탄을 넣고 있던 하급 시다의 몸이 난로 쪽으로 쏠리며 질겁을 하고 소리쳤다. 그의 얼굴이 난로에 달 듯 말 듯하며 피해 갔다.
"이새끼야, 조센징 말 씨부리지 말어."
재단사가 또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예, 잘못했습니다."
하급 시다는 굳이 몸을 돌려 고개를 꾸벅 하고는 다시 돌아섰다. 그 하는 폼이 그렇게 길들여진 것이었다.
씨부랄 눔에 쪽바리새끼, 지 에미 꾸묵게 불이 이리 존디 공연시 사람 못 잡아묵어 달달 볶아대는 것이제.
하급 시다는 이글거리는 불덩이 위에 석탄을 퍼넣으며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난로의 불빛에 비친 그 얼굴을 꺼칠하게 메마르고 잔뜩 지쳐 있었다. 그 젊은이는 다름 아닌 손판석의 아들 손일남이었다.
"야 이새끼야, 석탄재를 빨리빨리 치워야 바람이 잘 통한단 말야."
재단사가 내쏘았다.
"예, 곧 치우겠습니다."
손일남을 그저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복종의 뜻을 표시했다. 군대의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난로에 석탄을 다 넣은 손일남을 부지런히 밖으로 나가 쓰레받기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틀어 돌려가며 석탄재를 들어내고 있었다. 석탄재를 내다 버린 손일남을 다시 아까 하던일 시작했다.
"이새끼야, 너 정말 볼딱지를 얻어터져야 정신 차리겠어? 이 바닥 이거 말끔하게 못 치워?"
재단사가 담배꽁초를 발끝으로 잉끄려대며 손일남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평소에 비하면 바닥에 널려 있는 헝겊쪼가리들은 반에 반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여금을 받을 가망이 없게 되자 그는 괜히 손일남에게 성질을 부리며 못살게 굴고 있었다.
"예예, 잘못했습니다."
손일남을 또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새끼야, 먼지 안 나게 살살 쓸어, 살살!"
재단사는 그저 말머리마다 <이새끼>를 붙이며 또 손일남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예, 알겠습니다."
손일남도 그저 한결같이 복종의 태도를 취했다.
니 에미허고 붙어묵다가 좆대감지럴 못 빼고 뒤질 놈아! 오늘 얼음판에 엎어져 손마가지나 작씬 뿐질러져 부러라.
그러나 손일남을 분을 참아내며 이렇게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재단사가 손목이 부러져 버리면 어찌 될 것인가! 공장 안에는 다시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바빠졌다. 그리고 재단사도 다시 돌아서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다. 손일남은 옷감이 주름지지 않게 옷감통에 감는 일을 다시 계속했다. 재단하기 위해 마구 풀어 잘라낸 다음 다시 감는 것이었다. 옷감통을 한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옷감을 감는 그의 손놀림은 무슨 기계처럼 민첩하고 정확했다. 옷감은 그 어디에도 주름지는 일 없이 착착 감겨나갔다. 옷감 감기를 끝내 손일남은 옷감통을 두 개씩 들어 양복점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비좁은 통로를 지나가면서 양쪽 어디에도 부딪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썼다. 만약 어느 쪽에나 부딪쳤다가는 엉덩이 정도를 차이는 것이 아니었다. 코피가 터지거나 어디가 멍이 들도록 얻어맞게 되어 있었다. 가위질이고 바느질이고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데 방해를 했다가는 그 분풀이야말로 가혹했다. 손일남은 양복점으로 통하는 문을 빠끔하게 밀었다. 양복점에 손님이 있나 없나 확인하는 것이었다. 손님이 있을 때는 양복점에 나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검정 고무신에 학생복 비슷한 검은 옷을 입은 손일남의 꼴은 너무 구질스러웠던 것이다. 그 꼴이 번드르르하게 꾸며놓은 양복점과 어울릴 리 없었고, 더구나 손님들 앞에 나서게 되면 양복점 망신이었던 것이다. 사장이 그렇게 정하지 않았더라도 손일남은 자기가 먼지 그리했을 거였다. 돈 많고 거드름피우는 손님들 앞에 자신의 거지 같은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날이 춥고 오전이라서 그런지 양복점에는 손님이 없었다. 손일남은 문을 열고 양복점으로 나가 빠른 동작으로 옷감통을 제자리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이내 공장으로 들어섰다.
아... 나는 언제 저리 되나...
손일남은 또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양복점에서 공장으로 들어서면 꼭 재단대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일어나는 슬픔 같은 부러움이고 서러움 같은 회한이었다. 양복 기술을 배우겠다고 집을 떠나온 후로 몇년 동안에 수천 번도 더 한 생각이었다. 너무 분하고 서러운 꼴이 많아 서울에 온 것을 후회도 많이 했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얼마나 했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때마다 떠오른 것은 어머니 얼굴이었다.
"일남아, 이 에미넌 니만 믿겄다. 일본 사람덜 밑이서 기술 배운다는 것이 얼매나 심이 들고 에롭겄냐. 왜놈덜이 쿠세가 씨다든디. 그려도 참고 또 참음서 그저 기술만 배와내라. 니넌 손재주가 있응게 금세 배울것이여. 아부지넌 몸 부실허제, 성제간언 많으제, 장자인 니가 실해야 안 헐 겄이냐. 이 에미넌 니만믿응게 잘혀라 잉."
역에까지 따라 나온 어머니가 울면서 한 말이었다. 서울에 온 것이 후회스러울 때마다, 얻어맞고 구박을 당할 때마다 손일남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참고 견디어냈다.
옷감통 여섯 개를 다 옮긴 손일남은 가봉이 끝난 바지를 들고 앉았다. 바지 안쪽에 박음질이 끝난 부분을 감치기 위해서였다. 양복점 직공생활 몇 년 동안에 가까스로 익힌 기술이 바지속 감치기, 바지 단추달기, 바지 단춧구멍엮기였다. 일감으로 바지나마 손대게 된 것이 미처 1년도 못 되었다. 그전에는 수많은 잡일뿐 옷에는 손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양복을 거치고, 재봉틀을 거치고, 재단대에서 가위를 놀릴 수 있게 되려면 그 세월이 언제일지 가마득하기만 했다. 공장에서 기술을 배운다고 했는데 정작 기술을 가르쳐주는 사람을 아무도 없었다.
"이새끼야, 누군 기술을 가르쳐줘서 배운 줄 알어? 다 제 알아서 하는거지."
기술을 가르쳐달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도 못하는데 재단사가 발로 툭툭 차면서 지껄이는 말이었다. 그러나 서당개 3년이라고 했다. 잡일을 하는 구멍구멍 눈치껏 요령껏 살피고 익혀서 바지나마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옷감통에서 촤르르 옷감을 풀고, 도르르 옷감을 감는 것 같은 것은 기술 축에도 들지 못했다. 그래도 기술의 초보는 바늘과 실을 다루는 것부터였다. 이빨로 단 한번에 실 끊기, 실끝을 위아래 앞니 사이에 넣고 다듬으며 살짝 침 발라 바늘에 꿰기, 그것이 익숙해지는 데도 이삼 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그리도 작기만 하던 바늘구멍이 점점 커져 보이게 되고, 두 번 세 번 다듬어도 갈라지고 침이 많이 묻어 처지던 실끝이 한 번으로 다듬어지면서 꼿꼿하게 서게 되자 실꿰기는 단 한 번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다음부터가 바늘다루기였다. 감치든 뜨든 박든 바늘 끝이 마음먹은 대로 박히고 솟고 하기까지는 왼쪽 엄지손가락을 얼마나 많이 찔렸는지 모른다. 바늘 끝에 눈이 달리고 발이 달린 것처럼 되고, 아무리 작은 단추라도 단 한 번 바늘을 찔러 두 개나 네 개인 구멍 중에 마음먹은 구멍을 찾아내면서도 단추를 낙낙하게 달 수 있게 되면서 속감과 겉감의 성질을 터득하게 되었고, 옷감을 만져만 보고도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저녁마다 재봉틀 청소를 하면서 슬쩍슬쩍 발판을 굴려보아 그 요령과 속내도 어지간히 익혔던 것이다. 그러나 눈치로만 익히고 있는 것이 재단이었다. 옷의 모양새와 멋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재단솜씨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러니 재단사는 공장 안의 왕일 수밖에 없었다. 재단도 흉내를 내보고 싶었지만 가위질을 할 것이 없었다. 옷감은 아예 바라지도 않고, 커다란 종이가 있었으며 그려보고 잘라보고 하겠는데 종이 살 돈이 없었다. 머릿속에 본을 그려놓고 그저 빈 가위질로 자르는 시늉을 해볼 뿐이었다. 주인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면서 기술까지 가르쳐주는 거라며 굉장한 은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수시로 목청을 높이면서 땡전 한닢 주지 않았다. 먹여주는 것은 잡곡밥을 손수 해 먹는 것이었고, 재워주는 것은 공장의 재단에서 자는 것이었고, 입혀주는 것은 싸구려 천으로 공장에서 적당히 박음질한 것이었다.
"이새끼 이거 제법이네. 오늘부터 바지를 줄 테니까 큰절하고 받어. 그렇다고 시건방 떨면 내쫓기는 거야. 알겠어!"
바지를 들고 재단사가 한 말이었다. 손일남은 바닥에 무릎 꿇어 큰절을 하며 눈물을 씹었던 것이다. 그때도 눈앞에 떠오른 것이 어머니였다.
"야 이새끼야, 배고프다."
상급 재봉사가 소리쳤다.
"예, 알겠습니다."
손일남은 일손을 멈추고 후닥닥 일어났다. 한동안이 지나 들어온 손일남의 손에는 낡아빠진 냄비가 들려 있었다. 그는 난로에서 주전자를 내리고 냄비를 올려놓았다. 점심밥을 짓는 것이었다. 찬물을 만진 그의 손이 벌겋게 얼었고, 손등은 터서 갈라져 있었다.
"재단사님, 상여금을 안 주겠으면 반찬값이라도 좀 올려달라고 해주세요. 이거 원 맨날 간장에 다꾸앙만 먹고 어찌 일을 하겠어요."
상급 재봉사가 담배를 꺼내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글세, 말을 해서 들을까?"
재단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말을 안 듣다니요. 일을 이렇게 많이 부려먹으면서 그게 말이 됩니까? 우리도 조센징들처럼 쟁의를 벌여야 말을 들어줄래나요?"
"이봐, 말조심해, 아랫것들 앞에서."
재단사가 눈꼬리를 세웠다.
"뭐 크게 바라지도 않는다구요. 겨울인데 김이라도 한 장씩은 먹게 해 줘야지요."
기가 꺾인 상급 재봉사는 어물거리는 투로 말했다.
"알았어, 기다려봐."
재단사가 혀를 차며 담배를 꺼냈다. 그때 양복점 쪽의 문이 열리며 쿠렁한 소리가 울렸다.
"옷감 왔다, 빨리 나와라."
"예예!"
다시 일감을 잡고 있던 손일남이 튕기듯 일어나 양복점으로 나갔다.
"지랄한다, 옷감만 밀어닥치고."
담배를 근 재단사가 어슬렁거리며 손일남의 뒤를 따랐다. 공장에서 양복점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건 그 사람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말끔한 양복 차림이었다. 손일남은 마차에 실려온 옷감뭉치를 나르기 시작했다. 둥글게 말린 옷감뭉치들은 열두어 살 먹은 아이들의 몸집만큼씩 컸다. 그것을 하나씩 어깨에 올리고 뛰듯이 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손일남의 숨결은 거칠어지고 있었다. 열다섯 행보를 넘겨 그는 곧 쓰러질 듯이 비틀거렸다. 눈앞이 샛노랗게 변하면서 현기증이 일어났던 것이다. 손일남은 정신을 차리려고 이를 앙다물었다. 주인과 재단사가 보고 있는 앞에서 쓰러졌다가는 모든 것이 끝장날 판이었다. 손일남을 가까스로 정신을 모아 잡고 숨길을 가다듬었다. 스무 뭉치를 다 옮기고 났을 때는 손일남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내배 있었다. 그는 또 난로에 올려놓은 밥이 걱정되어 부랴부랴 공장으로 들어갔다. 상급 시다가 밥을 푸고 있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많았던 모양이지?"
누런색 단무지인 다꾸앙을 씹으며 상급 재봉사가 물었다.
"예, 스무 뭉칩니다."
손일남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씨팔, 사장만 살판났구나. 야 이새끼야, 밥이나 빨리빨리 올려."
손일남은 그의 밥그릇을 일감 받침대에다 얼른 올려놓았다. 재단사가 없는 공장에서 이제 그가 왕이었다. 상급 시다가 자기 밥까지 푸고는 냄비를 던지듯 해버렸다. 손일남은 밥이 밑에 깔린 냄비를 집어 들었다. 그게 솥이면서 자신의 밥그릇이었다. 상급 시다도 같은 조선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냉정하고 매몰차기가 다른 일본기술자들하고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그저 상급자들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는 것과는 반대로 손일남에게는 바늘 한 땀 뜨는 요령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시집살이 맵게 치른 며느리가 독한 시어머니 된다는 격이었다.
오후가 되면서 재단사는 양복점으로 뻔질나게 오갔다. 양복을 맞추는 손님이 있을 때마다 불러나가는 것이었다. 사장을 거들어 손님이 양복을 맞추게 꾀고, 양복 기지와 색깔을 정하고, 손님의 의향을 들어가며 양복 모양새를 정하고, 줄자로 치수를 재고 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 일이 중한 만큼 그는 월급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의 월급이 얼마인지 아는 사람은 공장 안에 아무도 없었다. 그 어떤 재단사든 보수는 사장하고 단둘이만 아는 비밀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액수가 다른 종업원들에 비해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손일남은 그런 재단사가 하늘 높이 부럽기만 했다. 재단사는 가위 하나만 들면 이 세상 어디를 가나 떠받들려진다고 했다. 운전수가 돈을 많이 벌고, 기생들이 줄줄이 따른다고 했지만 운전수도 재단사에 비하면 하품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재단사가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가위였다. 재단사는 자기 가위는 그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했고 무슨 일이든지 부려 먹지 못해 안달이면서도 가위를 가는 것만큼은 반드시 손수 했다. 손일남은 밤마다 재단사의 가위를 남몰래 꺼내보는 것이 재미고 위안이었다. 나도 재단사가 될 때까지..., 그때마다 다짐하는 말이었다.
월급은 상급 시다까지 받았다. 그런데 재봉사와 시다의 월급 차이는 엄청나게 컸다. 손일남은 그 차이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얼마가 되어도 좋으니까 어서 월급을 탈 수 있기만을 바랐다. 월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사고 싶은 것이 큰 종이와 연필이었다. 거기다 온갖 모양의 본을 그려가며 재단 연습을 할 작정이었다. 지금까지는 얼핏얼핏 눈에 익힌 것을 뒷골목 땅바닥에 막대기로 그려보곤 했었다. 참 희한한 것은 건성으로 보기에는 다 그것이 그것인 것 같은데 신경 써서 보면 사람의 체형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기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직공들은 밤일을 지겨워했지만 손일남의 밤일할 때가 좋았다. 몸은 고달프지만 맛있는 저녁을 얻어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장은 밤일을 시키는 대신 저녁을 사주었는데, 짜장면이 생선탕 같은 별미를 맛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한 달 이상 야근을 하게 만든 음력 설 경기도 설을 며칠 앞두고 사그라들었다. 설에 맞춰 입으려고 사람들이 양복을 다 찾아간 것이었다. 야근에서 벗어난 손일남은 밤이면 한 집 건너 양화점의 시다인 배춘복이와 다시 얼굴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배춘복은 서로 같은 처지라서 친하게 된 유일한 친구였다.
"일남아, 내다. 문 잠 열그라."
"니 손언 뒀다 엿 사묵을래?"
손일남은 재봉틀을 청소하며 대꾸했다.
"와 그리 말이 많노. 사람이 눈치가 그리 없어갖고 어데 밥 빌어묵고 살겄나."
손일남은 그때서야 눈치가 이상해 문 쪽으로 달려갔다.
"손에 멀 들었간디 그리 큰소리여?"
손일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열었다.
"보래, 요래 갖고 문 열게 생겼나."
기세 당당하게 말하는 배춘복은 투가리를 받쳐들고 있었다.
"고것이 머시여?"
"딱 보먼 모르나? 해장국 아이가, 해장국 아이가, 해장국."
"아니, 돈이 어디서 생게서?"
"사람이 어데 돈만 갖고 사나. 삐떡 숟갈이나 갖고 온나."
"아니, 돈 아니먼 고것이 어디서 나?"
숟가락을 챙기려고 돌아서는 손일남의 어금니 사이사이에서는 신침이 지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그 청진동식당 안 있나. 거그 황해도 가스나가 살짝 빼준기라."
"황해도 가시네가? 고것이 어쩐 일이여? 니허고 그렇고 그런 새가 된겨?"
"내사 마 팍 떡얼 쳤삐ㄹ능기라. 흐흐흐흐..."
"머시여? 고것이 은제여?"
손일남이 소스라쳤다.
"머 그리 시끕헐 것 없는기라. 그기 아무리 황해도 촌가스나라케도 서울바닥서 짜드락 보고 들은 기 있는데 우리겉이 쌩붕알만 찬 놈덜이 올라타고 재미보그로 해주겄나. 택도 없는 일이니께네 안심 푹 놓그라."
배춘복은 과장되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랴? 엎었다 뒤집었다 사람 정신없이 맹그네? 대체 무신 연고여?"
손일남은 재단대 위에 배춘복과 마주 보고 걸터앉으며 숟가락을 내밀었다.
"머 연고랄 것꺼지야 없고, 그놈으 가스나 구두럴 고쳐줬능기라."
"그 가시네가 구두럴 다 신어?"
"어데, 쥔집 딸년 헌 구두럴 얻어갖고 뒷굽얼 고쳐달라 안카나. 설에 집에 신고 가겄다꼬. 그래 우짜노, 그 가스나도 우리허고 다를 기 없는 불쌍헌 신세고, 헌 구두라도 얻어신고 설에 집 찾아갈끼라 쿠는데."
"그려, 잘헌 일이구마."
"그러이 그 가스나가 인사 채린다꼬 요거럴 살짝 빼돌려준 거 아이가."
"그 가시네 맘 곱네."
"무신 소리 하노. 쥔덜이 보먼 그 가스나나 나나 생짜 도적년 도적놈인기라. 안 글나? 흐흐흐흐..."
"크크크크..."
그들은 정신없이 해장국밥을 퍼넣기 시작했다.
"선지에 괴기꺼정 많이도 들었네."
국밥이 반쯤 줄었을 때 손일남이 코를 들이마시며 말했다.
"그러이 순 도적년 아이가."
그들은 다시 큭큭대고 웃었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들은 번갈아가며 트림을 해댔다. 배가 불러 자연히 솟는 트림이 아니라 마음이 흡족해 일부러 하는 트림이었다.
"그나저나 그 황해도 큰애기 신세가 부럽네. 헌 구두라도 신고 집 찾아간게."
손일남이 혀를 찾다.
"하모, 우리에 비하믄 상전 아이가."
"참, 시상언 공평허지도 못허다. 설이라고 비싼 양복 해입는 사람덜이 그리도 많은디, 그 양복 해대니라고 밤일험서 죽사리 치고도 집이도 못가니."
손일남이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참 좆겉은 시상인기라. 우예 된 놈으기 구두 해신는 놈덜도 해마동 그리 느노 말이다. 백지 야근허는 날만 질어지고, 속 뒤비져 몬살겄능기라."
"조선사람덜이 자꼬 신식 멋쟁이덜이 돼가고, 돈도 많이 벌고 그리 되는 판잉게."
"맞다, 조선사람덜언 와덜 그리 양치장에 사죽을 몬쓰고 미치노 말이다. 알다가도 모릴 일이라."
"그야 풍조도 그렇고, 관공서고 어디고 왜놈덜허고 상대헐라먼 한복 입어갖고넌 사람 취급을 안 해준다는 것 아니여."
"지랄, 망쫀기라. 좌우간 그기넌 그기고, 니넌 꼬붕 안 생기나?"
배춘복의 말에 손일남은 그만 가슴이 철렁해졌다. 배춘복의 말투가 자기는 꼬봉(부하)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그건 바로 월급을 받는 자리고 한 등급 올라가는 것이었다.
"니넌 꼬붕 생기는갑제?"
"안죽 모리겄다. 나태호가 어디로 옮길라카는 눈친데, 자리가 비믄 올래준다 캤는데 그기 우예 될란지..."
"나태호넌 어찌서 옮길라는디?"
"거 왜놈 히로세허고 등급은 같으믄서도 월급은 절반밖에 안되니께네 뜰라카는 것 아이가."
"그야 어디 거그만 그려? 방직공장이고 고무공장이고 솥공장이고 우리 양복점이고, 왜놈덜허고 똑겉은 일 허고도 월급 절반밖에 못 받는 것이야 조선천지가 다 똑겉덜 안혀?"
"이놈아야, 그기 아닌기라. 왜놈덜이 쥔이고 사장인 디야 그기 맞지마는도 조선사람이 쥔인 디넌 그기 아닌기라. 조선사람이 개업허는 디로 착 옮깄다 카믄 등급도 올르고 월급도 지대로 딱 받아묵는다 아이가. 양복점도 그란다 카든데, 니 그것 모리나?"
"그것이야 아는디, 니나 나나 그보담도 더 중헌 것이 있어."
손일남이 한숨을 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로의 석탄불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기 머꼬?"
배춘복이 주머니를 부스럭거리더니 담배꽁초를 꺼냈다.
"아니, 니 그간에 담배 배운기여?"
손일남이 깜짝 놀랐다.
"와, 나넌 담배 피먼 안되나?"
배춘복이 눈을 흘겼다.
"담뱃값언 하늘서 떨어지냐 땅에서 솟냐? 땡전 한닢 못 버는 신세에."
"누가 돈 내고 담배 피나? 요 꽁초 보래이. 반도 안 태우고 내삐리능기라. 돈 많은 놈덜이라 담배도 고급 아이가. 그냥 내삐리기도 아깝고, 속터지는 일도 많고, 그래저래 담배 배와라. 우리도 남자고, 속터지는 일에 질인기라."
배춘복은 꽁초 하나를 더 꺼내 쑥 내밀었다.
"아니여, 나너 담에 벌어서 필기여."
손일남은 고개를 저었다. 조선놈이고 일본놈이고 돈 많은 놈들의 꼴이 더러워서도 그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것도 존기고. 아까 머가 더 중허다 할라 캤드노?"
"이, 우리 기술 배우는 것 말이여. 왜놈덜이 고급 기술은 아무리 세월이 가도 안 갤차준다는디, 니나 나나 요 길얼 잘못 든 것 아니겄어?"
손일남의 목소리는 침울했다.
"와 아이라. 큰 공장에 기계기술 같은 거넌 더 말헐 것도 엄고 시장시런 인쇄기술이다 선반기술이다 미장이기술꺼정도 조선사람이 다 알게넌 안 갤차준다 카데. 그기 다 무신 자리서고 즈그놈덜이 왕 노리 해묵을락카는 왜놈덜 곤조통 아이겄나. 그라이 인자 와서 우짜겄노."
배춘복도 담배 연기와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공장에 백혀 20년이 넘어도 조선사람덜언 가우 못 잡아보고 재봉틀만 돌려대야 헌다는디, 참 땁땁헐 일이제."
"우짜겄노, 조선놈으로 태인 기 죄 아이가. 니나 나나 그리만 돼도 소작질허는 것보담이야 안 낫겄나. 그리 걱정 말그래이."
"..."
손일남은 속으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단지 재봉사로 끝나려고 그 고생을 참고 견디어온 것이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재단사까지 올라가야 했다.
"보래, 니 양복기지 쪼가리 모타둔 것 있지러?"
"워째, 또 양말 구멍났간디?"
"묵자 것도 없이 하도 싸대니께네 빵꾸나는 것언 양말뿐인기라."
배춘복이는 먹쩍은 듯 히히 웃었다.
"그 쪼가리야 많제." 손일남은 선반 구석지에서 그동안 모아둔 천쪼가리들을 한 움큼 꺼내리고는, "어디 양말 벗어보드라고." 배춘복을 쳐다보았다.
"와?"
"잘못 꾸매서 잘 떨어지기도 헝게."
"그라믄 니가 꾸매주겄다 그기가?"
"그것이야 니보담 솜씨가 나슨게."
"치아라, 꼬린내 나는 양말이구마는."
"얼렁 벗어. 해장국 얻어묵었응게 나도 인사 채래얄 것 아니여?"
"니 미쳤나? 섭하구로."
배춘복이가 눈을 부라렸다.
"그야 농이고, 나가 지대로 한분 꾸매주고 잡은게 얼렁 벗어."
"우정이다 그 말이가?"
"그려, 우정에 표시여."
"화아 이거 살맛난다 아이가. 꼬린내 숭보지 말그래이."
"피장파장잉게 그런 걱정 말어."
배춘복은 좋아서 벙글거리며 양말을 벗었다. 양말을 건네는 그의 손도 양말을 받는 손일남의 손만큼 거칠고 터 있었다. 그런데 손일남과는 달리 그의 손톱에는 퍼런 멍들이 잡혀 있었다. 구두틀에 잔못질을 하느라고 얇은 쇠망치끝이 빗나가 친 자리들이었다. 배춘복의 양말바닥은 본살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천으로 덧기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 바느질 솜씨가 서툴러 박음자리가 둘쑥날쑥이었고, 실이 얽힌 데도 있었고 늘어진 데도 있었다. 딱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손일남은 날렵하고 빠른 솜씨로 양말을 꿰매나가기 시작했다.
"화아, 니 솜씨 기맥히데이. 그간에 헛고상헌 것 아이구마."
배춘복은 손일남의 바느질 솜씨를 들여다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손일남이가 바느질하는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ㅣ
"체, 호시 태우덜 말어. 요것 갖고넌 안직도 멀었응게."
손일남은 말을 하면서도 손은 마찬가지로 놀리고 있었다.
"호시 태우는 기 아이라. 내사 마 그리 쪼맨헌 바늘 갖고 죽었다 깨난다 케도 그리 몬하겄다."
배춘복은 또 담배꽁초를 꺼내 불을 붙였다.
"느그 상점도 신문 보지야?"
"하모. 신문 안 보는 상점도 있능강."
"신문 다 보고 그 신문지넌 어찌허고 있는 것이제?"
"신문지? 그야 직공덜이 담배도 말아 피고, 칙간도 가고 안 그라나."
"고것 사나흘에 한두 장썩 빼다줄수 있을랑가? 안 찢어지게 혀서."
"헌 신문지 머할라꼬?"
"글씨, 쓸 디가 있응게."
"느그 상점언 신문 안 보나?"
"쥔이 차곡차곡 모타서 고물장시헌티 되판게 그러제."
"머시라꼬? 우리 쥔보담도 더 지독시럽구나. 참말로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날 인종 아이가."
"딴말 말고, 그리허겄어 못허겄어?"
"그기야 와 못허겄노. 낼 당장 줄낀께 걱정 말그라."
"자아, 다 되았다. 그짝 것도 벗어라."
손일남이가 양말을 건네주었다.
"이짝은 기얀타."
"아, 얼렁 벗어. 기왕 손댄 짐에 떨어진 디 있능가 보게."
"이거 나 너무 호사허능구마는."
배춘복은 고맙고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나머지 한쪽을 벗었다.
"요것 봐. 여그도 낼모레먼 구멍나게 생겼제."
손일남은 다시 천조각을 골라 가위질을 했다.
"우따, 추버지네. 돈 있는 놈덜이 우째 그리 지독하노."
배춘복은 부르르 떨며 불기 다 사그라든 난로에 대고 눈을 흘겼다.
"본시 지독헝게 부자가 되았겄제."
손일남이 한숨 실린 가락을 붙여 중얼거리듯 말했다.
배춘복이 돌아가고 손일남은 문단속을 했다. 그리고 선반에서 담요를 꺼내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공장 안에는 냉기가 돌기 시작했다. 일과가 끝나고 난 다음부터는 석탄을 땔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사장이 내세운 이유는 화재 위험 때문이었다. 손일남은 재단대 위에 담요 한 자락을 깔고 나머지로 덮고 누웠다. 진작에 신문지를 생각해 내지 못했던 것이 이상했다. 신문지를 펼쳐서 두 장을 붙이면 큰 종이의 크기였다. 연습인에 신문지인들 안될 것이 없었다. 연필은 재단사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이라도 어디 있을 거였다. 그게 없으면 숯으로라도 그릴 수 있는 일이었다. 신문지가 생기면 당장 시작해야 했다. 손일남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몸을 바짝 오그려 붙이고 떨면서도 그는 다른 날처럼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온갖 모양의 본을 그리며 잠이 들고 있었다. 이튿날 밤에 배춘복은 신문지를 말아 들고 왔다.
"니 신문지 머할라꼬 그라노?"
"디 쓸 디가 있응게 묻덜 말어."
손일남은 배춘복에게도 발설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놈마야, 니하고 내하고 못헐 말이 머꼬? 똥딱기 헐라는 눈치는 아이고. 답답타, 뻐뜩 말해 보그라."
배춘복은 무슨 색다른 눈치를 챘는지 그냥 지나칠 기세가 아니었다.
"글먼 니허고 나허고만 아는 비밀이다 잉?"
손일남은 다짐부터 놓았다.
"그기야 걱정 말그라. 나도 마 다 여문 붕알 안 달ㄹ나."
배춘복은 샅을 쓸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긍게 말이여, 고급 기술은 안 갤차주는디 그냥 당험서 허송세월만 헐 수야 없는 일 아니겄어? 그저 눈치코치로 어깨너머로 배운다고 히도 재단기술은 그것으로 다 안된단 말이여. 그려서 그날그날 본 뽄얼 여그다 그려감서 연습허고 익힐라는 것이제."
손일남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놈마야, 그리 존 생각얼 우찌 해냈노!" 배춘복은 손일남의 손을 덥석 잡으며, "구두도 재단이 질 에롭고 고급 기술 아이가. 나도 그카먼 되겄다." 그는 눈을 빛냈다.
"그려, 인자 생각헝게 구두도 그런갑네. 글먼 니도 눈치껏 그리혀라."
손일남은 참으로 오랜만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맞다, 즈가 그런다꼬 우리가 당허고만 있을끼가. 그캐서 우리도 멋떨어진 재단사가 돼야 이 고상헌 뒤끝얼 볼 것 아이가."
배춘복도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근디, 아무도 몰르게 조심히야 혀!"
손일남은 배춘복을 응시하며 다짐을 놓았다.
"그기야 두말허먼 잔소리라. 보래, 니캉 나캉 상점 나란히 채리놓고 나넌 니 구두 해주고 니넌 나 양복 해주고 하믄 얼매나 좋컸노. 손님도 서로 보내주고 받고 말이다."
무슨 눈부신 광경을 바라보는 듯 천장으로 향한 배춘복의 눈은 가늘어지고 있었다.
"그려, 그리만 됨사 더 바랠 것이 없겄제."
손일남은 목이 메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손일남은 재단사가 기본본을 대고 옷감 위에 그려나가는 변형본을 순간순간 눈독을 들이고 살폈다. 그리고 밤에는 신문지를 펴놓고 몽당연필로 그것을 그려나갔다. 어깨가 넓은 사람 좁은 사람, 가슴이 두꺼운 사람 얇은 사람, 배가 나온 사람 홀쭉한 사람, 등이 굽은 사람 뻣뻣한 사람, 구구각색인 체형에 따라 본은 조금씩 달라졌던 것이다. 본을 다 그리고 나서는 그것을 가위질까지 해보았다. 가위질을 해보아야 모양새가 확실해지고 기억에도 분명히 박이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신문지를 갈기갈기 찢어 난로 속에 태워버렸다. 한 달쯤 본 그리기를 하게 되자 어느 정도 체형에 따른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림의 선도 떨림이 줄어들고 부드럽게 흘러내려갔다. 그런 변화를 스스로 확인하며 손일남은 그 일에 더욱 열심히 매달렸다. 몸에서는 새로운 기운이 솟으며 잡일도 힘드는 줄을 몰랐다. 그날 밤도 손일남은 배불뚝이의 본을 뜨느라고 정신을 팔고 있었다.
"야 이새끼야, 너 지금 뭘하고 자빠졌어!"
느닷없이 터진 일본말 고함이었다. 손일남은 소스라쳐 고개를 들었다.
"어!"
바로 눈앞에는 두 재봉사가 버티고 서 있었다. 너무 일에 빠져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손일남은 딱 굳어지고 말았다.
"이새끼가 감히!"
상급 재봉사가 손일남의 얼굴을 후려쳤다.
"윽!"
손일남이 비틀거렸다.
"뭘해! 이새낄 죽여!"
상급 재봉사가 옆에 서 있는 하급 재봉사에게 소리쳤다.
"예, 알겠습니다."
하급 재봉사가 윗도리를 벗어제쳤다. 그들은 술냄새를 푹푹 풍기고 있었다.
"이새끼, 건방지게!"
하급 재봉사가 손일남의 배를 걷어찼다.
"아이쿠!"
손일남은 배를 싸잡고 휘청거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이를 앙다물었다. <이새낄 죽여!> 하는 외침대로 그들이 정말 자기를 죽일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는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요런 조센징!"
상급 재봉사가 또 발길질을 했다.
"아구구구..."
손일남은 곧 쓰러질 듯 쓰러질 듯하면서도 쓰러지지 않으려고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이새끼가 이거!"
하급 재봉사가 의자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러나 손일남은 의자를 비켜섰다. 의자가 빗나가면서 하급 재봉사는 제 기운에 쓸려 나뒹굴어졌다.
"아니, 이새끼 좀 봐! 넌 정말 죽었다!"
상급 재봉사가 소리치며 또 의자를 치켜들었다. 공장 안이 좁아 더 이상 어디로 피할 데가 없었다. 손일남은 그 의자에 머리를 맞으면 죽을 거라는 생각을 퍼뜩 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재단대에 놓인 가위였다. 그는 재빨리 가위에 손을 뻗쳤다. 그 순간 상급 재봉사가 내려친 의자가 그의 등을 후려쳤다. 손일남은 숨이 컥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손일남은 다시 이를 갈아붙이며 가위를 틀어잡았다.
"비켜요, 저놈은 내가 죽이겠어요!"
이런 외침에 손일남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급 재봉사가 치켜든 의자를 막 내려치는 순간이었다. 손일남은 그에게 달겨들며 가위를 내질렀다.
"아아아!..."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르며 하급 재봉사가 쓰러졌다.
"너도, 너도 죽이고 말 거야!"
손일남은 이를 뿌득뿌득 갈며 가위로 상급 재봉사를 겨누었다.
"살인이야! 사람 살려, 살인이야아!"
상급 재봉사가 밖으로 뛰쳐나가며 소리치고 있었다.
보름쯤 지나 손판석은 경찰서의 호출 명령을 받았다.
"그 일말고 나 몰르는 무신 일이 또 있소?"
부인댁은 불안에 떠는 얼굴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어허, 실답잖은 소리 말어."
손판석은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도 불안한 기색이 비치고 있었다.
"근디 경찰서서 불르먼 존 일언 아닐 것 아닝게라?"
"그야 그렇제. 나 댕게올랑게 너무 걱정 말소. 벨일 아닐 것이네."
손판석은 이렇게 말하고 집을 나섰지만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나마 직장을 잃어 생계가 막연해진 지 두 달째인데다가 호출을 당한 불안감까지 겹치고 있었던 것이다. 창고지기에서 떨려난 것은 부두노동자들의 쟁의를 방관했다는 것이었다. 언제
나 그랬듯 쟁의가 잘되기를 바랐지 저지에 협조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전혀 몰랐던 일이라고 잡아뗐고 그 일로 일자리를 뺏는 것은 부당하다고 따졌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인자 나이도 있고 헝게 더 맘에 두지 않는 것이 좋겄구만이라. 몸도 성허지 않은디 그만허먼 오래 해묵은 것 아니겄소. 산 입에 거무줄 치는 법 없응게 맘 편허니 묵고 기둘려봇시오."
서무룡이가 건들거리며 한 말이었다. 손판석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말았다. 서무룡의 말이 버릇없기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성하지도 못한 몸으로 오래 버틴 것이었고, 그 일 하기에는 나이도 너무 많이 먹은 게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동안에도 벼텨온 것은 두 가지 끈이었다. 협조하는 척만 했던 경찰의 끄나풀 노릇이었고, 서무룡이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었다. 서무룡에게 무슨 기대를 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모아놓은 돈 없이 두 달째 놀고 먹자니 가끔 그의 생각이 날 만큼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렇다고 차마 찾아가 볼 수는 없었다. 아무리 형편이 다급하다 한들 나이 먹은 체면에 말이 아니었고, 서무룡이가 하는 짓은 주먹패 왕초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손판석이 유일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공허였다.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공허 스님을 만나보면 그래도 마음의 위안이라도 될 것 같았던 것이다. 언제 온다는 예정이 없는 분이었지만 만난 지가 오래되어 행여나 행여나 하며 밤마다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손판석은 그동안 여러 가지 궁리를 해보았다. 그러나 앞으로 먹고 살 일이 막막하기만 했다. 나이는 먹고, 몸은 부실하고, 자식들은 많고, 말년이 한심스럽기만 했다. 앞날이 캄캄하니까 생각나는 것은 지난날이었다. 지삼출이며 송수익 장군 같은 분이 못내 그리웠다. 특히나 지삼출에 대한 그리움은 생각할수록 절절해졌다. 그 나이에 총을 들고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고, 어쩌고 사는지..., 그와 함께 의병으로 보냈던 세월이 꿈만 같기도 하고 눈물겹기도 했다. 그 젊었던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세상은 달라진 것 없이 나이만 먹었으니 그 허망하고 서러움 또한 가슴에 사무쳤다. 손판석은 쭈뼛거리며 경찰서 사찰과를 찾아갔다.
"당신이 손판석이라고?"
"예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
형사는 턱짓을 했다.
"저어..., 무슨 일인지..."
손판석은 손을 모아잡았다.
"말이 많아. 나가 있다가 부르면 들어오라니까!"
일본 형사는 싸늘하게 내쏘았다.
"예에, 예..."
손판석은 허둥지둥 복도로 쫓겨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일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손판석은 복도에서 서성거렸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오가는 사람들의 싸늘한 눈초리와 살벌한 분위기가 그것마저 흠을 잡을 것 같았던 것이다. 지루하고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손판석은 언제부턴가 소변이 보고 싶었지만 변소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변소 간 사이에 부를지도 몰랐던 것이다.
"손판석!"
"예에..."
손판석은 가슴이 쿵 울리는 것을 느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당신 아들이 손일남이야?"
"예에..."
손판석의 가슴은 더 크게 울렸다.
"당신 아들이 사람을 죽였어!"
"예에?"
손판석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의 불편한 다리가 휘청 꺾였다. 그러면서 그는 털퍽 주저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