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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3-8

37. 폭우

"병구 아부지이, 밥 왔소, !"

"창배 아부지이, 얼렁 나오씨오, 얼렁!"

광주리를 인 두 여자가 논두렁에 서서 번갈아가며 목청을 뽑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풀죽은 삼베 저고리의 등판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불볕은 살이 따갑게 내리쪼이고, 볏잎 하나 까딱하지 않도록 바람기라고는 없었다. 논두렁의 잡풀들이 불볕을 이기지 못해 시든 듯 맥이 풀려 있었고, 논마다 물이 잡혀 있는데도 뜨거운 기가 후끈거리며 끼쳐왔다. 더위를 피해 모두 어느 그늘로 피했는지 메뚜기며 개구리 한 마리 튀지 않았다. 불볕은 줄기차게 내리쪼이고, 지열은 후끈거리며 솟기고, 들녘은 그야말로 숨이 컥컥 막히는 가마솥더위로 끓고 있었다.

"와따, 이 더운디 부지런 떨었구마."

논두렁을 앞서 걸어오며 한기팔이 목에 걸친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훔쳤다.

"어허, 배꼽시게가 열두 점얼 딱 치자말자 기맥히게- 맞춰 오네 잉."

김장섭이 시장기 동하는 단 입맛을 다셨다. '배꼽시계'라는 말은 '불알시계'라는 말과 함께 몇 년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말이었다. 추가 달린 일본제 벽시계가 부잣집이나 지주네집의 대청마루의 벽에 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난 말이었다. 자전거 유성기와 함께 불알시계는 부자와 지주들이 체면을 세우고 위세를 부리기 위해 다투듯 장만하는 물건들이었다. 여자들은 거기다가 재봉틀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이고, 얼매나 배고프시오? 욜로 앉으씨요, 욜로."

한기팔의 아내 월전댁이 남편한테 호미를 받아들며 자리를 권했다.

"아이고메, 쬐깨 기둘리씨요, 쬐깨."

김장섭의 아내 송산댁이 서두르는 몸짓으로 남편을 막아서며 허리를 굽혔다.

"머시여?"

"요런 잡놈에 거마리가!"

송산댁이 진흙 묻은 남편의 종아리를 찰싹 쳤다. 송산댁은 진흙과 함께 잘 구분이 안되는 거머리를 어느새 발견한 것이었다. 기다랗던 거머리가 땅에 떨어지면서 거의 둥그스름한 형태로 변했다. 그런데 거머리를 피를 얼마나 빨았는지 탱탱했다.

"워메, 여그 또 붙었네."

송산댁이 소리치며 남편의 다른 종아리를 또 찰싹 쳤다.

"와따메, 열녀가 따로 없당게. 우디 당신도 잠 봅씨다."

월전댁이 자리 잡고 앉은 남편에게로 다가들었다.

"나넌 발써 시 마리 띠내고 왔네."

한기팔이 손을 저었다.

"그 자리에 담뱃가리 볼랐소?"

"피울 담배로 모지래시."

"음마, 피 한 방울이 어디헌디 그냥 둬라? 글고 피 안 막으면 피냄새 맡고 또 딴놈이 달라붙는단 말이오. 쌈지 이리 주시게라."

"어허, 배고프구마."

"아재, 아줌니 말이 맞으요."

김장섭이 거머리가 뜯은 자리에 담뱃가루를 바르며 쌈지를 내밀었다.

"누가 몰라서 그러간디."

한기팔이 귀찮다는 얼굴이었다.

"에라이 잡것! 니가 또 논으로 기들어갈라고? , 그리넌 못혀."

그 사이에 몸을 길게 늘이고 꿈지럭거리기 시작한 거머리를 송산댁은 짚신발로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 동작은 그냥 짓밟는 것이 아니었다. 발뒤꿈치로 짓밟아선 휙 비틀었다. 그 힘차고 빠른 동작은 거머리를 짓이기는 것이었다. 두 번의 그런 동작으로 거머리 두 마리는 딱딱한 논두렁 위에서 검붉은 피와 함께 터져 죽었다.

"워메, 아까운 거. 저 피가 보라밥 한두 그럭으로 맨글어지겄어."

송산댁이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참마로 징헌 놈에 물건이여. 일도 되디된디 피할라 뽈아내고 지랑이여. 하느님언 멀라고 저런 쓰잘디 없는 것도 맨글어내고 그러신고."

월전댁도 남편의 다리에 흘러내린 피를 보며 진저리를 쳤다.

"사람헌티야 소양없제 저것덜도 다 지각각 한 목심이시."

한기팔이 광주리 앞으로 다가앉았다.

두 사람은 아내들이 따라주는 막걸리부터 한 사발씩 받았다.

"염병, 갈수록 맹물이여."

술사발을 단숨에 비운 김장섭이 이렇게 내뱉으며 풋고추를 된장에 푹 찍었다.

"술도가 놈덜이 돈독이 올라 물얼 자꼬 더 많이 타닝게라."

송산댁이 남편을 편들 듯 말했다.

"오살헐 놈덜, 돈언 삼태기로 긁어딜임스로도 더 벌겄다고."

원전댁의 목소리가 표독스러웠다.

"어이, 자네도 항께 묵세,"

한기팔이 숟가락을 들며 아내에게 말했다.

"아니구만이라, 나 묵고 나왔소."

월전댁이 얼른 물러나 앉았다.

"그려, 자네도 항께 묵드라고."

김장섭도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고, 아그덜 믹임서 다 묵었소."

송산댁도 물러나 앉으며 손을 저었다.

"묵기넌 머시럼 묵어."

한기팔이 아내를 잡아끌려고 했다.

"참말로 묵었당게라. 얼렁 많이 드시씨요. 어이, 콩이나 손보세."

월전댁이 몸을 일으켜버렸다.

"야아, 그러제라."

송산댁도 몸을 발딱 일으켰다.

그때서야 한기팔과 김장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봉으로 솟은 보리밥에 숟가락을 찔렀다. 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보리밥에는 그래도 큼직큼직한 완두콩이 섞여 있었다. 울타리 농사에서 따 넣은 것이었다. 월전댁과 송산댁은 자기네 논두렁을 찾아가 콩나무 둘레의 잡풀들을 뜯기 시작했다. 콩은 따로 비료를 주거나 무슨 품이 들지 않고 저절로 되다시피 하는 농사였다. 그러나 둘레에 잡풀들이 너무 많으면 땅 기운을 빼앗겨 콩깍지가 한결 덜 맺혔다. 콩 농사는 저절로 된다 해서 내버려 두었다간 가을에 낭패를 보기가 십상이었다. 메주 쓸 콩이 모자라게 되면 그건 소박감이었다. 간장 된장은 일 년 내내 떨어져서는 안 되는 물건이고, 간장 맛 된장 맛이 그 집안의 음식 맛을 좌우하는 것이고, 안주인만이 만들고 간수하고 쓰는 유일한 것이 간장과 된장이었다. 그 전적인 책임은 논두렁 농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텃밭 농사가 그렇듯 논두렁에 콩을 박는 것에서부터 거두는 것까지 남자는 전혀 도와주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인심 사납고 몰인정한 지주라 하더라도 논두렁의 콩 농사에 눈독 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내려온 범할 수 없는 풍습이었다. 아이들도 보리나 밀 서리는 눈치껏 해대지만 논두렁의 콩은 절대 손대지 않았다.

"어이, 밥 다 묵었구마."

월전댁과 송산댁은 잡풀을 뜯다 말고 머릿수건을 벗어 손에 묻은 흙을 닦았다. 손가락들 끝에는 푸르스름하게 풀물이 들어 있었다.

"이동만이 놈 소문 들으셨소?"

월전댁이 상보로 광주리를 덮으며 남편에게 물었다.

"무신 소문?"

담배를 맛있게 빠는 한가팔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 아까 들은 것인디 왜놈허고 새가 찌그럭째그럭 헌다등마요."

"어째 그런당게라?"

김장섭이 관심을 드러냈다.

"왜놈 기술자가 금얼 빼돌리는 눈치라 이동만이 놈이 난리당마요."

송산댁이 얼른 대답했다.

"햐 고놈, 꼬시게 잘되았다."

김장섭의 목소리가 시원하게 터져나왔다.

"요시다놈이 뜨고 그놈이 없어져도 나아진 것언 하나또 없으니 원."

한기팔이 혀를 찼다.

"고놈이 찰팍 망해부러야 허는디."

김장섭이 짭짭 입맛을 다셨다.

"그리 되기야 어디 쉽겄능가. 그놈이 얼매나 백여시라고," 한기팔이 고개를 젓고는,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메..." 그는 앉음새를 고치며 주먹으로 등을 퍽퍽 두들겼다.

"어디 봅씨다, 어디."

월전댁이 잽싸게 남편의 등뒤로 옮겨앉았다. 송산댁도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남편의 등을 쿵쿵 두들기기 시작했다. 한기팔과 김장섭의 군살 박인 손발은 희멀건하게 물에 팅팅 불어 있었다. 불볕을 받아 보글보글 물거품이 솟길 정도로 더워진 논물에 벌써 이삼 일째 손발을 담그고 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남자들의 논매기는 여자들의 밭매기만큼이나 고된 농사일이었다. 무논에 발은 빠지지, 허리는 반으로 접히지, 불볕은 등판을 태우지, 볏잎 끝들은 눈이고 얼굴을 찔러대지, 더워진 논물에서 훈김은 솟지, 거머리들은 달라붙지, 피는 얼굴로 쏠리지, 허리는 아프지, 땀은 쉴 새 없이 흐르지, 논매기는 어지간한 장정이 아니고서는 이겨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논매기 10년에 허리 무너져 내려앉고, 밭매기 10년에 엉치 절단난다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몰랐다. 한기팔과 김장섭은 손발만 불어터진 것이 아니었다. 너무 오래 머리를 밑으로 숙이고 있어서 눈에는 핏발이 성성했고, 얼굴은 부슥부슥했다.

"아이고, 되았네, 되았네, 그만 허소." 한기팔은 미안한 생각이 들어앉은 자리를 약간 피하고는, "어째 날이 요상허덜 안혀? 비가 올라능가?" 그는 미간을 좁히며 하늘을 둘러보았다.

"금메 말이오..., 어 꿉꿉허기도 헌 것 겉기도 허고..., 벨라 좋덜 않은디요."

김장섭이도 하늘을 둘러보며 느리게 대꾸하고 있었다.

"비가 안 와도 되겄는디..."

한기팔이 곰방대를 쌈지 안으로 디밀며 중얼거렸다.

"하먼이라. 요새 비 오먼 안되제라. 이대로 가먼 풍년 들겄는디."

김장섭이 목젖이 다 보이도록 크게 하품을 했다.

"한숨 눈 붙이씨요. 우리 갈랑게."

송산댁이 눈치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요놈에 가마니때기 그늘이 손바닥만히서..."

월전댁이 대나뭉에 걸어놓은 배 터진 가마니때기를 돌리려고 했다.

"어이, 냅두소. 그늘이야 우리가 맨글 것잉게."

한기팔이 손을 내저었다. 대나무줄기 두 개를 논둑에 박고 거기에 배 가른 가마니때기를 하나씩 걸어놓은 것은 나무 그늘이라고는 없는 들판에서 그늘을 얻자는 것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낮잠 한숨을 자려면 불볕 막을 그런 그늘이나마 있어야 했다. 해가 중천에 있어도 댓줄기를 엇비스듬하게 박으면 몸 하나 누일 그늘은 만들어졌던 것이다.

"어이, 그 발치에 담뱃가리나 잠 뿌리소."

한기팔이 김잔섭에게 쌈지를 던졌다.

"무신 소리다요. 그늘은 나가 맨글라요."

김장섭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한기팔이 굼뜨게 몸을 움직여 쌈지에서 집어낸 담뱃가루를 발 뻗칠 만한 풀섶에다 뿌리고, 김장섭은 댓줄기를 뽑아 엇비스듬하게 다시 박고 있었다. 담뱃가루를 뿌리는 것은 뱀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였다. 지네와 닭이 상극이듯 담배와 뱀도 상극이었다. 아무리 독한 독사도 담배 연기를 세 번만 쐬면 꼼짝을 못 하고 비실비실 죽어갔다. 월전댁과 송산댁은 그늘이 커지는 것을 보면서 광주리를 이었다. 광주리가 가벼워졌는데도 그들의 걸음은 올 때에 비해 한결 느렸다. 남편들이 기다리지 않는 탓만이 아니었다. 점심을 굶은 빈속에 차츰 허기가 심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다다를 때까지 그들은 말이 없었다. 허기가 질 는 말을 하면 더 기운이 파했던 것이다. 월전댁은 광주를 부뚜막에 내려놓기 바쁘게 바가지에 반나마 물을 떴다. 그리고 장독대로 나갔다. 장독에 띄워놓은 쪽박으로 간장을 떠서 바가지 물에 부었다. 손가락으로 휘저어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점심 대용이었다. 간장 한 종지쯤 탄 물은 땀 많이 흘린 허기를 면하게 해주었다. 간장이 땀으로 빠져나간 염기를 벌충해 주었고, 물은 빈속을 달래주었던 것이다. 긴 여름해에 점심을 거르는 여자들이 으레껏 하는 보신책이었다. 해가 기울면서 습한 바람결이 땅을 훑기 시작했다. 시원한 느낌이라고는 전혀 없는 눅눅하고 무거운 바람결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고, 잎 달린 것들은 모두 어지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다 쪽 하늘끝이 어둠침침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구름이 끼지 않은 하늘도 이상하게 충충해져 있었다.

"비가 오겄제라?"

송산댁이 다급하게 사립을 들어서며 물었다.

", 와도 큰비가 오겄는디."

벌써 비설거지를 하고 있던 월전댁이 대꾸했다.

"비서러지허시능게라?"

"어이, 자네도 얼렁 가서 허소."

"야아, 그래야겄구만이라."

쥐들이 찍찍거리며 툇마루 아래서 소란을 피웠다.

"보소, 서생원덜도 피난짐 싸니라고 야단났네."

"금메 말이오. 저것덜 설레발치는 것 봉게 참말로 큰비 올랑갑는디라."

송산댁이 머릿수건에 손을 얹고 달려나가며 말했다. 개미 떼가 어디론가 줄을 잇고, 쥐들이 다급하게 집을 벗어나고, 구렁이가 나무를 타고 오르면 큰비가 올 징조였다.

"닌장맞을, 메칠 헛일큭수마. 장마 지내놓고 무신 놈에 비가 또 올라고..."

한기팔이가 사립을 들어서며 투덜거렸다. 밀짚모자를 썼지만 그의 얼굴을 검붉게 익어 있었다.

"아부지, 인자 오시는게라."

월전댁에 앞서 큰딸이 아버지를 맞이했다.

어둠살이 퍼지면서 바람은 더 거칠어졌다. 시커먼 구름도 어느새 하늘을 절반 가까이 가리고 있었다. 반딧불도 날지 않았고, 모기의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한기팔은 툇마루에서 저녁상을 받았다. 양념 된장에 풋고추와 상추쌈이 먹음직스러웠지만 한기팔은 자꾸 하늘에 신경이 쓰여 입이 달지를 않았다. 저녁을 마치고 나자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하늘을 뒤덮은 구름 탓이었다. 한기팔은 툇마루 기둥에 기대 담배를 피우며 마땅찮은 된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7월 중순이 넘어 오는 큰비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저 멀리서 푸른 불빛이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쇳덩어리 구르는 소리가 감감하게 울려왔다.

"밥 묵었으면 자빠져 자그라!"

한기팔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윗방문 앞에서 키들거리던 두 딸의 웃음소리가 뚝 멎었다. 어둠 속에서 바람은 더욱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 어느 집에선가 질그릇이 나뒹굴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월전댁은 큰딸을 데리고 비설거지를 더 야무지게 하느라고 어둠 속을 부산스레 오가고 있었다. 푸른 불빛이 아까보다 훨씬 가깝게 번쩍 스쳤다. 그리고 잠시의 여유도 없이 쇳덩어리 구르는 소리가 확연하게 들려왔다. 번개 치고 천둥 울리는 것이 그리 간격 없이 맞붙어서는 비가 와도 예사 큰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어째 요상허제라?"

월전댁이 툇마루에 걸터앉으며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영 지랄 겉구마."

한기팔이 혀를 차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둑, 툭툭, 후두둑...

울타리의 호박잎이며, 헛간의 박잎, 텃밭의 남새잎에 빗방울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각을 이룬 여러 갈래의 푸른 불빛이 번쩍했다. 그 순간적인 불빛에 옆사람의 모습이 환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꽈당, 우과르쿵당당...

하늘이 깨지는 듯 크고 요란한 천둥소리가 터지며 머리 위도 쇳덩어리들이 굴러가고 있었다.

"에그마 엄니!"

딸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 끼대들어가 자랑게!"

한기팔이 버럭 소리질렀다.

"이놈으 가시네덜아, 속채려."

월전댁이 급히 토방을 고 가며 억누른 소리로 딸들을 꾸짖었다.

쏴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만으로도 얼마나 거칠게 쏟아지는 빗줄기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에서 바람은 줄기차게 불어대고, 번갯불과 천둥은 연달아 하늘을 뒤흔들어댔다. 그럴수록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부어댔다. 잔 물방울들이 툇마루까지 들이치고 있었다. 한기팔은 그 물보라를 맞으며 담배만 뻑뻑 빨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더위가 밀려가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도록 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조금 빗줄기가 약해지는 듯했다가도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면 빗줄기는 또다시 거칠어져 좍좍 쏟아졌다.

"곤헌디 눈 잠 붙이씨요. 이러고 앉었다고 끄칠 비도 아닌디."

월전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랄, 다된 농새 망치네."

한기팔이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논들이 물에 잠기고 있었다. 벼들이 흙탕물에 휩쓸리고 있었다. 아물아물 잠으로 빠져들며 한기팔은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닌 상태로 그런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요란한 빗소리 속에서 종소리와 사람들의 외침이 울리고 있었다.

"한샌, 한샌!"

어떤 사람이 한기팔을 불러댔다.

'한샌, 한샌, 얼렁 나와! 방죽 터져!"

외침이 더 커졌고,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 누구여!"

한기팔은 놀라서 밖으로 나섰다.

"나 장샌이여. 방죽 터지는디 얼렁 나오소!"

", 알겄네."

한기팔을 그때서야 사태를 알아차리고 토방으로 뛰어내렸다. 짚신을 발에 꿰던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토방에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마당에 물이 찰 정도면 논들은 이미 물에 잠겨버린 것이었다.

"어이, 어이! 일어나소, 집에 물 차네."

한기팔은 방에다 대고 소리쳐 아내를 깨웠다.

", 무신 소리다요?"

잠 덜 깬 월전댁의 소리였다.

"집에 물 차올릉게 정신채리란 말이여. 방죽 터져 나넌 나간게."

"워메, 방죽이 터져라!"

월전댁이 마루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한기팔을 벌써 비 쏟아지는 마당을 가로질러가고 있었다. 집집마다 나선 남자들이 어둠 속의 빗줄기를 뚫고 고샅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고샅은 무릎에 가깝도록 물이 차 있었다.

"어떤 방죽이 터진다는 것이여?"

"몰르겄어."

"요리 억수로 퍼붓는 비에 어떤 것 한나만 터지겄어?"

"둘 다 터지먼 어쩌라고."

사람들은 빗소리를 이기려고 목소리들을 한껏 높이고 있었다. 방죽은 어느 것도 터지면 안 되었다. 간척지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저수지 방죽이 터지면 그 물이 간척지 전체를 뒤덮는 것은 물론이고 집들까지 다 떠내려 보내고 말 거였다. 그런데 바다를 막은 방죽이 터지면 더 큰 일이었다. 바닷물이 밀어닥치는 날에는 간척지 전체가 다시 바다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한 해 농사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농토를 전부 잃게 되었다. 간척농장의 모든 소작인들은 총동원되어 두 패로 갈라졌다. 한 패는 저수지에 배치되었고, 다른 패는 바다 방죽에 배치되었다. 방죽이 터진 것이 아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것이었다. 비가 줄기차게 퍼부어대는 어둠 속에서 소작인들은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는 간격으로 늘어섰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사무원과 농감들이 종을 흔들어대고 소리를 질러대고 하는 시끌벅적한 북새통을 거쳐야 했다. 불이라고는 밝힐 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그만큼 일이 처리된 것은 소작인들이 솔선해서 몸과 마음을 한 덩어리로 뭉친 때문이었다. 모든 소작인들은 계속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면서 비가 쏟아지는 어둠 속에서 자기 앞의 방죽에 이상이 생기나 어쩌나를 줄곧 살펴야 했다. 그들은 논에 대한 걱정은 진작 접어버렸다. 논길을 타고 방죽으로 오는 동안에 벌써 논들이 물에 잠겨버린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새로운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이 자꾸 차올라 방죽의 비탈로 조금씩 밀려 올라가면서 떠오른 것이 집 생각이었다. 간척지 전체에 그리 물이 불어나면 집들이 무사할 리 없었던 것이다. 잠시도 그칠 새 없이 퍼부어대는 폭우를 수문들은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수지의 범람을 막으려고 저수지 수문에서는 물을 쏟아내고, 촉우는 줄기차게 쏟아지고 바다 방죽에 있는 수문들은 그 많은 양의 물을 바다로 내쏟지 못해 시간이 갈수록 간척지의 물은 불어날 수밖에 없었다.

"집이 어찌 될랑고?"

"무링 다 찼겄는디."

"얼매나 찼을꼬?"

"방꺼정 찼을란지도 몰르겄는디."

"그리 되먼 큰탈 아니여?"

"탈이고말고."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니덜 안혀?"

"여그넌 으쩌고?"

그들은 밤비를 너무 오래 맞아 벌벌 떨면서 집걱정을 했다. 그러나 집으로 갈 수도 없었다. 방죽을 지켜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간척지의 물이 너무 불어나 집으로 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한편, 가장들이 없는 집집마다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토방을 넘은 물이 마루로 차오르면서 벽에 붙은 흙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돼지의 꽥꽥거리는 비명소리와 닭들이 꼬꼬댁거리는 울음소리가 천둥소리와 빗소리에 섞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마루를 넘어선 물은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엄니, 엄니!"

막내딸이 겁질려 월전댁의 치마를 붙들고 매달렸다.

"아이고메, 이 일얼 어쩔끄나!"

월전댁이 방안을 휘도는 물을 내려다보며 부르짖었다. 등잔의 흐린 불빛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목침이며 나무 재떨이가 물 위로 떠올랐다.

뿌지지직!

집 어디에선가 울리는 소리였다. 그건 나무와 나무가 비비틀리는 소리였다.

"아이고, 저것언 또 먼 소리여!"

두 딸을 싸안은 월전댁이 어쩔 줄을 몰라 허둥거렸다.

"엄니, 여그서 나가야 되덜 안컸소?"

큰딸이 어머니보다 침착하게 말했다.

"가먼 어디로 갈 것이냐?"

"저그 뒷산으로 가야제라."

"뒷산? 아서라, 갔을라먼 진작에 갔어야제. 여그가 이 꼴이먼 거그 가는 질언 한 질이 넘게 물이 찼을 거이다."

울상이 된 월전댁은 고개를 저었다. 월전댁의 말은 맞았다. 뒷산까지는 10리가 넘었고, 집들보다 낮은 평지길을 가야 했던 것이다.

"요런 때 남정네넌 다 나가불고..."

월전댁은 아들 병구라도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을 일본사람의 과수원에 보낸 것이 벌써 3년 였다. 소작농사에 붙들어 매봤자 소출이 더 느는 것도 아니었고, 무논농사 배워봤자 앞날이 빤했던 것이다.. 왜놈 머슴살이라는 께름칙함이 없지 않았지만, 과수 기르는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했고, 머슴살이 새경보다 곱절이 되는 월급을 준다고 했다. 남편은 내키지 않아 했지만 자신이 우겨 2백 리 밖으로 보냈던 것이다.

"엄니, 송산댁헌티 소리질러 볼게라?"

", 송산댁언 어찌고 있는지 몰르겄다. 그 집 아그덜언 에린디."

월전댁은 그때서야 송산댁을 생각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삐끄덕, 끼이익......

나무들이 비틀리고 어긋나는 것 같은 소리가 더 심하게 들렸다.

"엄니, 집 무너질랑갑네."

막내딸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요런 방정맞은 주딩이! 고런 소리 허는 것 아니여."

월전댁은 질색을 하며 막내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나 그건 곧 자신의 마음이었다. 아까부터 그 불안감으로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간척지 공사가 끝나고 모두가 허술하게 지은 집들이었던 것이다. 돈들이 없으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간척지 건너편의 일본 기와집들에 비해 볼품없고 초라한 초가집들이었다.

"엄니, 엄니, 송산댁이 없구마."

온몸이 물에 젖은 큰딸이 방으로 뛰어들며 숨이 가빴다.

"먼 소리여?"

"송산댁이 아그덜 딜고 피난 떠났는갑소. 아무도 없당게라."

"아이고, 무정헌 사람. 갈라먼 항께 가얄 것 아니여."

월전댁은 물속에서 발을 굴렀다. 물은 어느덧 무릎 가까이 차오르고 있었다.

"아니여, 딴 집에 가 있을란지도 몰러. 송산댁이 그리 야박허덜 안혀."

작은딸의 또렷한 말이었다.

", 그럴란지도 몰르겄다."

큰딸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요 일얼 으째야 좋다냐. 비나 잠 끄치든지 날이나 잠 새든지..."

월전댁이 어찌할 줄을 모르며 허둥거렸다.

한편, 저수지 쪽에서는 흘러들어오는 물길을 막아보려고 벌써 몇 시간째 안간힘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이 분간이 안되는 어둠 속에서 가마니에 콥을 퍼담는 작업이 더디었고, 물살이 거세 가마니들을 떠넘기는 바람에 별다는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 ! 밀지 말어!"

"왜 그려, ?"

"어야야야..., 아이고, 사람 살리소오!"

"사람이 물에 빠졌다, 물에!"

"어디여, 어디!"

"아이고, 사람 살소오, 사람..."

비 쏟아지는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절박한 외침만이 빗소리에 섞이다가 얼마 가지 못하고 사라졌다. 장닭의 그 장쾌한 울음소리도 없이 어둠이 서서히 걷혀가고 있었다. 희끄무레해지는 어둠 속에서 제일 먼저 드러난 건 질펀하게 물이 차버린 간척지였다. 논이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끝없이 넓은 간척지는 또 하나의 바다로 변해 있었다. 밤새도록 비를 맞으며 방죽을 지킨 소작인들은 그 물바다를 보고 모두 방죽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많은 물이 다 빠지자면 며칠이 걸릴 것이고, 그러는 동안에 물속에 잠긴 벼들은 다 상해 버릴 거였다. 그런데 비는 그칠 기미가 없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날이 더 밝아지면서 소작인들이 더 놀란 것은 그 물위에 고리짝 반닫이 옷가지 이불 바가지 물통 장군 새갓통 같은 온갖 살림살이와 농기구들이 떠 다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초가지붕까지 떠 있었던 것이다.

", , 쩌것이..."

"아이고메..."

"저걸 으쩐댜!"

그들은 말을 못 하고 발을 구르고 가슴을 쳤다. 집까지는 헤엄을 쳐서 갈 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쩌그 저것이 머시여!"

"어디 말이여?"

"지붕에 사람덜이 안 탔다고?"

"그렇제?"

", 그렇구마. 대여섯 사람 되는디."

약간 약해진 빗발 사이로 저 멀리 지붕에 올라탄 사라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 위치면 동네에서 많이 떠내려온 것이었다. 지붕 위의 사람들은 흰 천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려, 요 앞꺼정만 와라."

"아이고, 저거럴..."

"쬐깨만 더 와라, 쬐깨만..."

사람들은 애가 달아 빈 몸짓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나자 지붕이 물 속으로 푹 가라앉았다. 그 순간 사람들의 모습도 자취를 감추었다. 잠시 후에 지붕이 다시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지붕이 아니라 지붕이 부서지고 난 짚더미였다. 사람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방죽의 사람들은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는 하늘에는 아직도 새카만 먹구름이 두껍게 끼어 있었다.

"수문 쪽으로 모여, 수문!"

농감들이 종을 흔들어대며 이쪽 저쪽으로 뛰고 있었다. 빗속에 갯내음이 짙게 풍기고 있었다. 밀물 때였다. 소작인들은 여러 개의 수문 중에서 가까운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밤새도록 비를 맞으며 떨어댄 그들의 얼굴은 푸르딩딩하게 불어 있었다. 짚신이 어디서 벗어졌는지 맨발인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바닷물 못 들어오게 수문얼 다아야 혀. 심덜 써, !"

농감이 외쳐대고 있었다.

간척지에 찬 물이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바닷물이 밀려들고 있었다. 바닷물의 힘에 간척지의 물이 지고 있었다. 밀물이 밀려들면서 파도가 방죽을 때리기 시작했다. 위에서는 비가 내리고 아래서는 방죽을 때린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고, 방죽 위에 선 사람들은 이중으로 물벼락을 맞고 있었다. 수문들을 닫은 소작인들은 방죽 위에 퍼질러 앉고 말았다. 허기에 지친 데다 집 걱정까지 겹쳐 그들은 거의 탈진상태에 빠져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려 해도 갈 길이 없었다. 비는 밤보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약해지는 듯하다가 다시 강해지고, 멎는 듯하다가 또다시 쏟아지고 하면서 오전 내내 내리고 있었다. 바다 쪽 방죽의 반이 넘는 높이로 밀물이 실리며서 간척지 쪽의 물도 자꾸 불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썰물이 될 즈음에 손잡이가 달림 일본식 나무 물통, 양철통 같은 것들을 수십 개 날라왔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금방 알아챘다. 썰물과 함께 다시 수문을 열었다. 그리고 물통 하나에 여덟 사람씩 조가 짜여졌다. 간척지의 물을 바다고 퍼내자는 것이었다.

"일얼 시캐묵을라먼 주먹밥이라도 한 텡이씩 주고 시캐묵으씨요."

누군가가 농감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일얼 시캐묵어? 그려, 낼꺼정 집에 안 가고 잡으면 물 안 퍼내도 돼야."

농감이 눈을 치뜨며 내쏘았다. 소작인들의 약점을 여지없이 찌른 것이었다. 물통으로 물을 퍼낸다는 것은 얼핏 생각하면 조가피로 바닷물을 떠내는 것처럼 어이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한 사람이 할 때 그럴 뿐이었다. 그렇지만 3천 명이 넘는 소작인들 절반이 바다 방죽에 나와 있었다. 그들이 힘을 합쳐 물을 퍼내기로 한다면 대여섯 개의 수문으로 빠져나가는 수량에 못지않을 거였다.

"그려, 한시라도 빨르게 집에 가봐야제."

"얼렁 허세, 얼렁."

소작인들은 금방 한 덩어리가 되었다. 밤새 어찌 되었는지 모를 처자식들의 안부가 조바심이 날수록 물을 한 통이라도 더 퍼내 빨리 길을 틔워야 했던 것이다. 점심때가 지나면서 비는 가랑비로 변했다. 구름 색깔도 회색으로 엷어지고 꽤나 높아져 있었다.

"인자 가는 비구마!"

", 그려. 다덜 심내드라고."

소작인들은 서로 힘을 돋워가며 물 퍼내기에 더 열을 냈다. 비가 그쳐가니 물 퍼내는 것이 그만큼 효과가 나게 되는 것이었다. 수문들로 물이 쏟아져 나가고, 소작인들이 쉴 새 없이 물을 퍼내게 되자 물에 떠돌아다니던 온갖 것들이 물살을 따라 방죽으로 밀려들었다. 물통 같은 것들은 건져서 바로 물푸기에 쓸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돼지나 닭 같은 것들이 죽어서 둥둥 떠내려왔다.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외면했다.

"아니, 저것이 머시여!"

"? , 사람..."

여자의 시체가 떠내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시체를 건져올려 방죽 위에 올렸다. 금방 주위의 사람들이 와르르 몰려들었다. 구경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혹시 자기 식구인지 몰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기나긴 방죽에서 건져 올려진 시체는 한두 구가 아니었다. 거의가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가끔 섞여 있는 남자들은 노인이었다. 시체를 본 소작인들의 물푸기는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비는 완전히 멎어 있었다. 간척지의 물은 표나게 줄어들고 있었다. 방죽의 물놓이가 낮아지는 것을 물을 퍼내면서 직접 확인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먹은 것 없는 사람들은 진땀을 흘리고 있었고, 입마다 침버캐가 끼어 있었다. 해거름이 가까워 물을 푸던 소작인들은 와, 와 환성을 지르며 앞다투어 물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모두 미친 것 같았다.

"안돼야, 안돼야, 다덜 서!"

농감들이 악을 써대며 종을 흔들어댔다. 그러나 그 외침이나 종소리는 공허하게 흩어질 뿐 누구 하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소작인들이 무질서한 듯하면서도 물속에서 일정한 넓이를 유지하며 달려가고 있는 것은 우마차가 다니는 논길이었다. 간척농지의 추수 편의를 위해 닦아놓은 그 길을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길의 물 깊이가 무릎 정도밖에 안 된 것을 확인한 소작인들은 그만 물통을 내동댕이치고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집으로 가지 못하고 방죽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도 몇이 있었다. 건져 올려진 시체가 식구인 사람들이었다. 한기팔을 헐레벌떡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마루에 아내와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아이고, 여보!"

한기팔을 환성을 질렀다.

"아이고메, 워 인자 오시오. 나가 더 못살겄소, 더 못살겄소오..."

월전댁이 갑자기 통곡을 터뜨리며 남편을 붙들고 매달렸다

"워째 이려, 워째?..."

한기팔은 어리둥절했다.

"아이고메, 나가, 나가 큰딸년 잡아묵었시니 어찌 더 살겄소오? 나가..."

"머시여!..."

한기팔은 머리가 쿵 울리는 현기중을 느끼며 두리번거렸다. 어지러운 시야에 잡히는 건 분명 딸이 둘뿐이었다.

"우리럴 먼첨 지붕에 올래놓고 언니넌... 언니넌..."

작은딸이 울음을 터뜨렸다. 막내딸도 따라서 울기 시작했다. 한기팔은 진흙 범벅인 마루에 털퍽 주저앉았다. 시집보낼 나이가 다 되었던 큰딸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방문 위에까지 물이 찼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집채는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벽의 아래쪽 흙은 거의 다 떨어져 나가 수수깡으로 엮은 속뼈가 다 드러나 있었다. 헛간은 내려앉았고, 텃밭은 진흙탕을 뒤집어쓰고 망가졌고, 마당은 질퍽거리는 진흙투성이였다. 한편, 뒷집의 김장섭은 정신을 잃을 듯 울고 있는 아내를 붙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울지만 말고 똑똑허니 말얼 혀! 창동이가 어찌 되았냔 말이여, 창동이!"

3살 먹은 딸은 아내가 업고 있는데 6살 먹은 아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가... 나가..."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송산댁의 눈이 희게 뒤집히고 있었다.

"어이, 정신채려! 정신채려!"

김장섭은 몸이 달아 아내를 흔들었다. 그러나 송산댁은 정신을 잃고 피그르 쓰러졌다. 김장섭이가 집으로 들어섰을 때 송산댁은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리고 헛것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런 변을 당한 집이 한두 집이 아니었다. 집이 무너진 집은 훨씬 더 많았다. 물이 빠지면서 허물어진 것이었다.

"어쩌겄능가, 다 상허지 않고 그만헌 것얼 다행으로 생각히야제. 우리보담 더 기맥힌 사람덜도 많응게. 자네 안직 나이 젊은게 자석이야 또 나면 되는 것 아니여. 안사람 잡지덜 말어. 자석 잃은 에미 맘언 애비 맘도담 수백 곱절 씨리고 아픈 것잉게. 알겠능가?"

"야아..."

"그려, 심내세. 산목심언 또 살아야제."

한기팔이 김장섭의 어깨를 다둑거렸다.

하룻밤과 한나절 동안 퍼부어댄 폭우는 김제, 만경 평야도 물바다로 만들었다. 이동만은 길이 트이기를 기다리며 안달을 해대고 있었다. 비가 그치고 하루 반 동안 조바심을 친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조랑말을 몰았다. 겨우 드러난 길은 진흙탕이었다. 그러나 급한 그의 마음은 진흙탕쯤 아랑곳하지 않았다. 논에는 아직도 흙탕물이 차 있었다. 벼들은 흙탕물에 잠겨 맥을 못 쓰고 있었다. 그런 들판을 바라보며 지주들의 가슴이 내려앉듯 이동만의 가슴에도 흙탕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지주가 아니면서도 지주와 똑같은 심정인 것은 아니 지주보다도 더 절벅한 심정인 것은 사금광 때문이었다. 지주들이야 흉년이 들거나 말거나 평년작에 맞추어 소작료를 내라고 어거지로 밀어붙이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사금광이 물에 휩쓸려 망쳐졌으면 그는 어디 비빌 데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동만은 조롱말의 엉덩짝이 부르트도록 채찍을 휘둘러 반나절 만에 자신의 사금광에 도착했다.

"아이고메, 나넌 망했네!"

이동만은 진흙탕으로 뛰어내리며 탄식을 토했다. 사금광에도 아직 물이 차 있을 줄을 알았다. 그런데 논을 파낸 흙더미들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바심치며 걱정했던 것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었다. 그 흙더미들은 보나마다 물에 휩쓸려 사금광을 메웠을 것이 틀림없었다. 다른 데로 흘러갔다고 해보았자 그건 많은 양일 수가 없었다. 그 흙을 다시 파내자면 생돈이 깨져나갈 판이었다. 이동만은 그런 손해를 보게 될까 봐 이틀 밤을 잠을 자지 못했던 것이다.

"요런 빌어묵을 놈덜이 이적지 코빼기도 안 비치고 있네!"

진흙탕물 속에 덜렁 서 있는 목조건물을 바라보며 이동만은 열을 뿜어냈다. 그 건물은 사무실 겸 채금기를 돌리는 공장이었다. 사람 손으로 흙을 물에 일어 금석을 골라내던 예전 방법을 기계로 바꾼 것이었다.

"우노사와 그 개자석이 요리 헛트로 헝게 십장놈덜도 그대로 보배우는 것이여."

이동만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이빨을 뿌드득 갈아댔다.

근디, 그것언 어찌 되었제!’

이동만의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금석은 5일 간격으로 모아 금을 빼내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날이 4일째였다. 그 금 박힌 돌들을 잘 간수했는지 어쩐지 뒤 게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이동만은 허겁지겁 진흙탕물로 뛰어들었다. 옷이 젖거나 말거나 그는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목조건물을 향해 내달았다. 목조건물 안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진흙을 뒤집어쓴 기계며 연장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사무실 문도 열려 있었다. 이동만은 부리나케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도 난장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책상이며 의자 같은 모든 물건들이 엎어지고 뒤집어져 있었다. 금석을 보관하는 커다란 함도 넘어져 있었다. 이동만은 반쯤 열린 문짝을 열어젖혔다. 함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렇겄제. 요것얼 미리 안 치웠음사 지가 사람이 아니제.’

이동만은 비로소 안도했다. 그러나 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서슴없이 정강이까지 차는 흙탕물에 손을 집어넣어 바닥을 더듬기 시작했다. 금석들이 바닥에 쏟아져 있을지도 모른다 싶었던 것이다. 너무 갑자기 쏟아진 비라 손을 못 썼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아무도 없는데 그걸 혼자 차지할 마음도 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을 아무리 휘저어대도 돌덩이는 하나도 잡히지 않았다. 헛수고만 한 이동만은 옷을 다 버린 채 조랑말을 다시 몰아댔다. 김제로 우노사와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우노사와의 태만을 닦달할 겸 금석을 잘 치워놓았는지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우노사와는 하숙집에 있지 않았다.

"어제 군산 가서 안 들어왔는데요."

주인인 일본 여자의 대답이었다.

"어제는 물도 다 안 빠졌는데 군산을 가요?"

이동만은 벌컥 역정을 냈다.

"아니, 왜 나한테 화를 내지요? 인력거는 뒀다 어디다 쓰나요?"

일본 여자는 앙칼지게 내쏘며 돌아섰다.

요런 빌어묵을 놈이 또 술타령허로 가서 지집년 끼고 자빠졌구나!’

이동만은 그만 울화가 뻗쳐올랐다.

"이려! 이려!"

이동만은 터무니없이 고함을 지르며 조랑말을 채찍으로 갈겨대고 있었다. 조랑말은 기를 쓰며 진창길을 달리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이 이동만에게 쏠리고 있었다. 군산으로 곧게 뻗은 신작로를 달리며 이동만은 사금사업에 손댄 것을 또다시 후회하고 있었다. 그동안 돈만 무더기로 들어갔지 전혀 재미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사금은 금광인데 어쨌거나 금이 펑펑 쏟아져야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문젯거리가 동업자 우노사와였다. 금이 아무리 많이 나와보았자 현장에 붙어 있는 우노사와가 속이려고 들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벌써 그런 눈치를 채고 우노사와와 다툰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불화가 생길 때마다 우노사와의 태도는 좋아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불손해지는 것이었다. 기분 나쁘게 사람을 의심한다는 것이었고, 지금이라도 그만두려면 그만두라는 식의 배짱을 부렸다. 이동만은 분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성질대로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구렁텅이에 빠질 대로 다 빠져있는 형편이었다. 그 상태에서 손을 뗀다면 쪽딱 망하는 판이었다. 우노사와가 속임수를 쓰지 못하게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날마다 현장을 지키기로 했다. 그랬더니 불화는 더 심해지고, 주먹패 등살에 시달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생선 있는 데 구더기 슬더라고 사름판에는 군산의 일본 주먹패들이 설치고 있었다. 그들이 달라진 것은 턱없이 많은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이었다. 그놈들을 물리칠 방법으로 재깍 생각해 낸 것이 사찰과장이었다. 평소에 공들였던 덕을 톡톡히 볼 기회였다.

"그거 무슨 사고를 낸 것도 아닌데..., 거 돈 있는 쪽에서 좀 줘서 적당히 구슬리시오. 세상살이란 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소."

사찰과장이 어물어물 발뺌을 하고 말았다. 농장에서 쫓겨날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같은 일본사람이라고 감싸고 돌아가는 눈치가 역연했다. 이동만은 또 죽 쒀서 개 좋은 일만 시키는 것 같은 쓰린 심사를 곱씹으며 점심때가 지나서야 군산에 도착했다. 마음이 급해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터라 몹시 배가 고팠다. 그러나 점심을 먹으며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어서 우노사와가 잘 다니는 요정으로 곧장 조랑말을 몰았다. 군산은 물난리를 당한 것 같지 않게 말끔했다. 바로 바다 옆이라 물이 잘 빠진 탓이었고, 여기저기 사람들이 나서서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말끔한 시가지에 비해 이동만과 조랑말의 꼴을 가관이었다. 몇십 리 흙탕길을 사족을 못 쓰고 달려오느라고 조랑말의 다리며 배는 온통 흙투성이였고, 이동만의 얼굴이며 옷에도 말 뒷발이 튕긴 흙들이 묻어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노사와 상 있소?"

이동만은 낯익은 주인 여자의 인사도 받지 않고 이렇게 내질렀다.

", 저쪽 방에..."

일본 여자는 기분 나쁜 기색으로 이동만에게 눈을 흘기고 종종걸음을 쳤다.

"우노사와 상, 우노사와 상, 당신네 이상이 찾아왔어요, 이상이."

긴 쪽마루를 콩콩거리고 뛰어가며 주인 여자가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이동만은 여자를 따가 자갈 깔린 길을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런데 어느 방문이 열리며 네댓 면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은 서둘러 구두를 찾아 신고는 이동만을 피하듯 하며 대문 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니! 저것이...

이동만은 주춤 멈춰섰다. 그들 중에 눈에 잡히는 얼굴이 있었다.

가만있거라, 저게, 저게 누구더라...

이동만은 그 얼굴을 다시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벌써 대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저게..., 저게...

알 듯 알 듯하면서도 그 얼굴이 누군지 딱 잡히지 않았다.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찾아오고 그러시오? 물이 다 빠지고 일을 시작하자면 아직 멀었는데."

쪽마루로 나서 우노사와가 하는 말이었다. 그 순간 이동만은 그 얼굴이 누군지 퍼뜩 깨달았다. 그건 바로 자신에게 돈을 뜯으려고 덤비는 주먹패 몇 놈 중의 하나였다.

그런 놈하고 어울리다니, 저놈하고 다 한패거리 아닐까?

이동만은 머리가 쿵 울리며 현기증을 느꼈다. 자기가 시달림을 당하는 데도 본 척도 하지 않았던 우노사와의 태도가 뒤늦게 되짚였다.

"저놈들하고 뭘 하고 있었소?"

이동만은 우노사와 쪽으로 내달으며 소리쳤다.

", 심심해서 화투 좀 쳤지요."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선 우노사와는 유들유들하게 웃고 있었다.

", 저놈들 속에 나한테 돈을 내놓시라고 합박하는 불량배도 끼어 있던데, 그런 놈들하고 화투를 쳐? 그놈들하고 한패지?"

이동만은 곧 우노사와의 멱살을 잡아챌 것처럼 손짓하며 고함을 질렀다.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시오. 내가 누굴 위해 그런 놈을 끼워준 줄이나 알고 그런 말 하시는 거요? 다 이상을 위해서요. 그런 놈 하나쯤을 빼내 이렇게 구슬려놔야 이상한테 함부로 못할 것 아니겠소."

", 뭐라고?..."

이동만은 어리둥절해졌다.

"사람 공은 모르고 왜 그렇게 억지소리를 합니까?"

우노사와는 여유만만하게 쪽마루에 앉으며 여전히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동만은 우노사와의 말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뭐라고 더 할 말도 없었다.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일당 접어놓기도 했다.

"그것 그렇다 치고, 나흘 치 금석은 우노사와상이 잘 치워뒀지요?"

"아니, 금석이라니요?"

우노사와는 의아스런 얼굴이 되었다.

"나흘 치 있잖소, 나흘 치! 비 온 날까지 모아둔 나흘 치 말이오!"

이동만은 참아왔던 열이 뻗치고 있었다.

"그걸 왜 날 보고 이래요? 그날 퇴근하고 비가 쏟아져 난 오늘까지 거기 발걸음도 안 했어요."

우노사와는 불쾌한 얼굴로 내쏘았다.

", 뭐라고? 궤짝이 텅 비었던데 그럼 그게 어떻게 된 거요?"

"나야 모르겠어요. 숙직한 사람이 있을 것 아니오."

"숙직..."

"이상, 이런 식으로 사람 의심하고 무시하면 나 기분 나빠서 이상하고 더 일 못 하겠소. 딴사람 구해 보시오."

우노사와는 정면공격을 가하고 들었다. 그건 이동만의 결정적 약점인 동시에 금석을 빼돌린 자신의 행위를 은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던 것이다.

"아니오, 아니오, 내가 우노사와 상을 의심할 리가 있소. 마음이 급해 그리된 것이오. 기분 나빴으면 이해하시오. 내가 우노사와상을 안 믿으면 누굴 믿겠소."

이동만은 그만 기가 꺾여 우노사와의 비위를 맞추고 들었다. 그나마 우노사와가 없어지면 꼼짝없이 망하는 판이었다. 이제 돈을 벌기를 바라지 않았다. 디민 본전만 찾으면 더 바랄 것 없이 깨끗이 손을 씻을 참이었다.

"이삼 일이면 물이 다 빠질 테니 다시 일할 준비나 하시오. 물살에 구덩이가 다 메워졌을 것 아니오."

"그럽시다, 그럽시다..."

이동만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또 생돈이 깨져나갈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고 있었다.

니놈이 주먹패덜허고 내통꺼정 혀서 나럴 둘러묵고 위협허고 혀? 니만 주먹패 있냐? 나도 있다. 어디 누가 이기는가 보자. 나가 어찌히서 번 돈인디. 놀부 돈언 빼묵어도 나 돈언 그리 쉽게 못 빼묵어. 하먼, 못 빼묵제.

이동만은 흙투성이 마차에 오르며 자기도 주먹패를 동원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우노사와를 꼼짝 못 하게 조여 반드시 본전만은 되찾아야 했던 것이다.

며칠이 지나 신문들은 그 폭우의 전국적 피해를 보도했다. 사망자가 2,657명이었고, 손실된 가옥이 37,438호에 이르고 있었다.

 

 

38. 그리운 이름 옥비

"아아......"

강의실을 벗어나 밖으로 나오는 순간 송가원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 같은 탄성을 입에 물며 양껏 심호흡을 했다. 5월의 눈부신 햇살과 함께 풍겨오는 꽃향기가 기가 막혔던 것이다. 포근한 햇살 속에서 화단의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벌들과 나비들이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고향의 장다리밭이 펼쳐지고 있었다. 샛노란 꽃을 피운 키 큰 장다리밭에 수없이 날고 있는 하얀 나비들. 그 나비들을 잡으려고 쫓아다니다가 장다리밭을 망쳐 야단 맞던 일.

, 어머니......

불현듯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꿈에서 언제나 생생히 살아 있는 모습이었다. 단 한 번도 돌아가신 모습이기는커녕 앓는 모습도 아니었다. 꿈은 잠재의식의 재현이다. 의학적 판단이었다. 그 논리에 근거하자면 자신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분명히 인정했고, 생활을 통해서도 그 허전한 상실감을 절감하고 있었다. 다만 세월이 가도 잊혀질 줄 모르는 그리움이 절절하게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 그리움의 힘이 꿈을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싶었다. 과학, 그리고 의학, 그것이 인간의 모든 것을 해결하고 해명할 수 있는가? 또 회의가 고개를 들었다. 강의를 듣다 보면 의학박사라는 교수들은 자기네가 마치 인간의 생명에 대해 절대 권능을 가진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나니오 디데른다?(뭘하고 섰나)"

송가원은 고개를 돌렸다. 조선사람끼리도 꼭 일본말을 쓰는 황학구였다.

"꽃구경하고 있네.'

송가원은 일부러 큰소리로 대꾸했다.

"의학도가 꽃구경? 그건 좀 안 어울리는데?"

황학구는 여전히 일본말로 지껄이며 지나쳐 갔다.

, 저거도 사람이라고!

송가원은 실소를 하며 그와 반대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황학구는 일본놈이 못 되어 안달이 나는 족속이었다. 그의 말대로 하자면 일본 것은 모두가 거룩하고 위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 만큼 그는 조선사람인 것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했다. 그러니 일본인 교수들이 하느님으로 우러러보일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교수들에게 아부하고 아첨하는 꼴은 일본 학생들조차 역겨워하고 경멸했다. 그는 춘원 이광수의 철저한 추종자였다. 춘원이 글을 쓴 대로 조선사람들을 비하하고 천시했으며, 조선 것은 무엇이든 보잘것없는 것이고 유치한 것으로 매도해 버렸다. 어떻게 해서 그리될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 대목은 납득이 갔다. 이광수라는 존재였다. 이광수의 자유연애론이 자칭 신여성들을 정조방임으로 놀아나게 하듯이 그의 민족개조론과 자치론이 황학구 같은 부류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학구보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명성 드높은 이광수라는 위인이었다. 황학구야 철이 덜 든 학생이라고나 하지만 이광수는 나이 든 소설가에 언론인이 어찌 그 꼴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하기만 했다. 송가원은 이광수 같은 부류들이 퍼뜨리고 있는 해독을 생각할 때마다 적의를 넘어서 살의를 느끼고는 했다. 아버지 같은 분들이 몸 바쳐 이룩하려는 것에 그자들은 직접 찬물을 끼얹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조소를 보내게 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머니처럼 당하는 죽음들을 얼마나 하찮고 무가치하게 여길지는 새삼스럽게 따질 것도 없었다. 그런 부류들을 방치한 채로 병든 몸뚱이나 찢고 째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무시로 회의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송가원은 원남동 네거리에 있는 중국음식점 사천관으로 빨리 걸었다. 약속 시간이 좀 늦은 것 같았다.

"여그시, 여그."

송가원이 음식점으로 들어서자 먼저 알은체를 한 것은 공허였다.

"아니 스님, 벌써 오셨군요?"

송가원은 꾸벅 인사를 하면서도 반가움을 표하지 못하고 놀라기부터 했다. 스님은 어느새 양복을 벗고 승려 차림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옆자리에는 곱상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배고프제? 얼렁 앉소."

공허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송가원을 올려다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스님, 2층에 방이 있는데 어떠세요?"

"? 고것 좋제. 조선사람헌티야 요 걸상보담 방이 질이고, 나가 괴기한 점얼 묵드라도 맴이 편헐 것잉게."

공허가 바랑을 들고 일어났다. 2층 구석방을 잡았다.

"자아, 서로 인사 트고 지내소. 저그넌 아까 나가 말헌 송가원 학상이고, 여그넌 전라도 신명창 옥비여."

자리를 잡고 앉자 공허가 두 사람을 인사시켰다. 송가원은 고개를 꾸뻑하며 새삼스러운 눈길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다소곳이 고개를 수그렸다가 드는 여자의 눈과 마주쳤다. 여자는 당황스럽게 눈길을 떨구었다. 송가원은 여자가 풍기고 있는 숫티가 마음에 들었다.

"양쪽 다 나가 믿는 사람덜잉게 서로 알고 지내는 것이 이참저참 심이 될 것이여."

공허가 덧붙이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송가원은 그 말뜻을 헤아리며 다시 여자에게 눈길이 쏠렸다. 공허 스님이 믿을 만큼 그 일에 심지가 굳은 여자소리꾼, 꽤나 이색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옥비라는 여자는 한쪽 무릎을 세운 위에 두 손을 포갠 앉음새로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흐트러진 데 없는 그 잔잔한 모습이 곱기도 한 반면에 다부진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스님은 언제 재입산하셨습니까?"

송가원은 공허를 건너다보며 웃었다.

"그려, 그보담 자네 배고픈디 우선 멀 시키고 보세. 나가 오랜만에 자네 배 채와줄라고 왔응게 묵고 잡은 것 맘놓고 시키소. 술도 묵고."

공허가 호탕하게 말했다.

"스님이 무슨 돈이 있으시다고."

송가원이 입을 삐쭉하며 씩 웃었다.

"아니며, 이 사람아. 이 중옷얼 그리 무시허덜 말어. 시상이 아무리 험허게 변해 가도 이 중옷 보고 보시허는 선남선녀넌 안직 수두룩헝게. 자네 밥 사줄 푼돈이야 얼매든지 있응게 아무 걱정 말고 배꼽이 요강꼭지가 되게 오늘 포식허소."

공허는 장삼의 폭 넓은 소매를 흔들어 보였다. 거기에 돈이 들었다는 뜻이었다.

"스님이 이 집에서 못 나가도 저는 모릅니다. 중국 사람들 돈에 지독한 것 아시죠?"

"어이, 놀부넌 명함도 못 내미는 것 잘 아네. 얼렁 시키기나 허소."

공허는 계속 느긋했다. 명함이라는 것도 일본 세상이 되면서 자꾸 번져나가고 있는 물건들 중의 하나였다. '명함 지닌 것은 친일파'라는 말도 언제부턴가 생겨나 있었다. 송가원은 평소에 먹고 싶었던 값나가는 요리를 맘 놓고 몇 가지 시켰다. 공허 스님은 언제 대해도 정겹고 푸근한 분이었던 것이다.

"나가 만주 댕게오니라고 양복얼 벗었네."

공허가 나직하게 말했다. 송가원은 문득 긴장하며 공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눈길은 다음 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무사허시데. 이짝 집안 소식도 다 알려디렸고."

"어무님 돌아가신 것도요?"

"하먼, 질 중헌 일인디."

"뭐라고 하시던가요?"

송가원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 어런이야 무신 표식이 있간디? 가심 터지고 무너지는 일일수록 더 내심 안 비치고 돌부처가 되시니께. 허나, 그 어런도 사람인디 그 짚은 맘이 어쨌겄어. 그냥 득병히서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당신 일로 화럴 입고 돌아가신 것인디. 혼자서 땅얼 치셨겄제."

"형님 일도 이야기하셨어요?"

"? 아픈 거?"

"......"

"아니여. 병이야 나스먼 될 일인디 근심 디릴 것 없어서 말씸 안 디렸네."

", 잘하셨어요. 형님도 바라는 게 아니니까요."

"나도 성님 그런 맘얼 생각허기도 혔네. 허고, 자네가 의학공부허고 있는 것얼 아조 반기시데. 착실허니 공부 잘 마치라는 당부도 전허시고."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의학공부가 아조 에롭담서?"

공허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음식을 옮겨놓고 있는 청년을 의식해서였다.

", 좀 어렵기도 하지만 더럽고 지저분하고 그런 게 더 죽겠어요."

송가원도 태도를 바꿔 엄삼을 떠는 것처럼 말했다.

"그려서 의사덜이 독주럴 잘 마신담서?"

"스님은 참 별걸 다 아시는군요. 수술을 하고 나면 대개 술들을 마시더군요."

"그려, 그럴 것이여. 사람이 사람얼 찢고 째고 허는디 비우가 안 상헐 리가 있겄어? 근디 여그넌 어째 술이 없어?"

공허가 상을 둘러보았다.

"저는 또 수업이 있어서요."

"에이, 많이넌 말고 한잔언 히야제. 그 덕에 이 땡초도 한잔 얻어 마시고."

공허는 술을 가져오게 했다.

"옥비야, 딴맘 묵지 말고 술 잠 따라볼기여?"

공허가 옥비를 쳐다보았다.

"야아, 따라올려야제라."

옥녀는 선뜻 대답하며 앉음새를 고쳤다. 공허가 작은 중국 술병을 옥녀에게 건네주었다. 옥녀는 공손하고도 날렵한 맵시로 공허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이거 초면에 생광입니다."

송가원은 잔에 술을 받으며 눈인사를 함께 보냈다. 눈길이 마주친 옥녀의 귓볼이 발그레하게 물들고 있었다.

"짜아, 한잔허세." 술을 한 모금 홀짝 들이켠 공허는 중국백주의 독한 맛에 진저리를 치고는, "자네, 혹시 자네 사둔어런댁서 공부 배움서 농새일 거들었든 차득보라고 아능가?"

그는 송가원을 건너다보았다.

", 알지요."

", 그 사람 여동상이 바로 이 옥비 명창이시."

", 그래요?"

송가원은 놀라움과 함께 옥비라는 여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공허 스님이 왜 믿을 만하다고 했는지 비로소 ...깨달으며.

"자네 소리 맛얼 아능가?"

"글쎄요, 어려서부터 더러 듣기는 했어도..., 잘 모르지요 뭐."

"요새 젊은 사람덜 다 그렇제. 인자 더러 만내서 소리 속얼 알도록 혀봐. 나넌 귀명창언 못되야도 이 옥비 소리 들으먼 맘미 풀링게."

"그럼, 서울에 있습니까?"

"하먼, 한성이라 낙원동서도 일류 기생집서만 소리럴 안헌다고. 쬐깨 있으먼 방송에도 나올 것이고."

"아이 차암..."

옥녀는 부끄러워하며 공허의 장삼자락을 잡아당겼다. 그 수줍어하는 모습 어딘가에 오빠를 닮은 데가 있음을 송가원은 느끼고 있었다.

"그려, 그건 그렇고. 자네 신간회 해소된 것 알제?"

공허는 옥녀를 보고 빙긋 웃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 며칠 전에 그리됐더군요."

송가원은 공허 스님의 서울 걸음이 그 일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짐작했다.

"자네도 젊은 게 해소가 옳다고 생각허겄제?"

"글쎄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 자세한 내막을 잘 모릅니다만, 사회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민족주의자들이 개량적 태도를 취했다고해도 단체를 해소시킨 것은 너무 성급한 처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개량적으로 자치운동을 도모하려고 한 것은 민족주의자들 중에서도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을 골라내서 단체에서 몰아내는 것이 옳지 그런 자들 때문에 단체 자체를 해산한다는 건 그야말로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격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신간회처럼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는 단체가 뭐가 또 있습니까. 신간회는 그동안 총독부의 감시와 저지를 받아가면서도 전국에서 많은 일들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신간회를 대신할 수 있는 그 어떤 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몇 년 동안 힘들여 구축한 전국조직을 하루아침에 와해시켰다는 것은 보통 큰 잘못이 아닙니다. 제 도끼로 제 발등 찍은 거지요. 그런데 그 잘못이 저지른 더 큰 잘못이 있습니다. 신간회가 없어지는 것을 누가 가장 바랐던 것입니까? 총독부와 자치론자들 아닙니까. 소위 말하는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은 빈대 잡을 생각에만 빠져 초가삼간을 다 태워 총독부가 바라는 대로 해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총독부의 일등공신 노릇을 한 셈인데, 그 사람들한테 남은 건 총독부의 역습뿐입니다."

송가원은 화가 나서 술잔을 단숨에 뒤집었다.

"화아- 요 메칠 새에 첨으로 듣는 질로 가심 씨언헌 탁견이시. 고것이 자네 혼자서 생각헌 것잉가?"

공허는 눈이 휘둥글해져 송가원을 바라보았다. 그 의견이야말로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면서도 미처 정리를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아닙니다. 어떤 선배하고 토론을 해서 얻은 결괍니다."

송가원은 허탁의 이름을 댈까 하다가 공허 스님이 알 리 없어서 그만두었다.

"아 참, 탁견이시, 탁견이여."

공허는 고개를 폭넓게 끄덕이며 감탄을 연발했다. 아무리 토론을 거쳤다 하더라도 그건 분명 송가원의 의견이었던 것이다. 공허는 송가원이가 자기 줏대를 가진 어엿한 성인임을 새롭게 느끼고 있었다.

신간회는 19297월 제2차 전체 대표회에서 변호사 허헌을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했다.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우세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발한 민족주의 세력에서는 곧 경성지회대회를 열어 조병옥을 지회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이때부터 좌우대립이 심해져 신간회는 내부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간회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의 진상 보고와 아울러 대대적인 민중대회를 계획하다가 허헌 홍명희 같은 중앙간부 44명이 검거되었다. 신간회는 다음해 11월에 김병로를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것을 계기로 간부진에서는 자치론을 거론하게 되었다. 그러자 부산지회에서 중앙집행부를 비판하며 신간회 해소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영향은 평양지회와 다른 지회들로 번져나갔다. 신간회는 마침내 31515일 전체대회를 열고 해체를 결의하고 말았던 것이다.

"어째, 공부넌 재미가 있능가?"

공허는 대낮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연거푸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아유, 재미가 뭡니까. 억지로 해가면서 생각이 많습니다. 고름이나 짜고 배나 째고 하는 게 제 기질에 맞지도 않고, 세상은 자꾸 묘하게 변해 가고, 집어치울까 어쩔까 고민이 태산입니다."

송가원은 허탁에게도 하지 않은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려? 집어치운 담에 어쩔라고?"

공허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아주 은근하게 물었다.

"형님도 하든 일 못 하고 있고 그러니까 그 길로 나가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

"요것 보소, 가원이!" 앉음새를 고친 공허는 송가원을 응시하며, "공부 무사허니 잘 마치라는 춘부장어런 말씸 단단허니 명심허소. 공부넌 때가 있는 것이고, 착실허니 헌 공부넌 다 써묵을 디가 있는 법이시. 시방 자네 맘도 아는디, 그 공부 잘허먼 어디다 톡톡허니 써묵을지 아능가? 저짝서 안 죽어도 될 사람덜이 얼매나 많이 죽어가는지 아능가? 시퍼런히 젊은 사람덜이 말이여. 워째 그러겄어? 의사가 없기 땜시여. 무신 말인지 알아묵겄제? 뜻만 있음사 질이야 항시 있는 것잉게 딴맘 묵덜 말어. 나 말 알아듣겄능가?" 공허의 얼굴은 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 명심하겠습니다."

송가원은 정신이 퍼뜩 드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미처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려, 고맙네." 공허는 송가원의 반응에서 진심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근디, 성님언 그리 냅둬도 되는 것이여?" 그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폐 나쁜 데는 약을 쓰고 있으니까 정신안정에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씩 나아가고 있으니까 형님 스스로 회복할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그려, 자네가 잘 챙기소 잉."

공허는 못내 속상한 얼굴로 술잔을 비웠다.

"낮술 그리 많이 해도 괜찮습니까?"

", 의학에서넌 안 좋은지 몰라도 도통헌 사람헌티는 밤낮이 따로 없네."

공허가 정말 도사처럼 의연하게 말했고, 옥녀가 쿡 웃음을 터쳤다. 송가원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어, 한 가지 여쭤볼 게 있는데요. 일진회라는 것 있지 않습니까? 남쪽에서도 그 단체에 동학 잔당들이 다 가담했습니까?"

"그 무신 생뚱헌 소리여? 그야 북쪽서 그런 것이제. 이용구라는 못된 접주 놈이 변심히서 그리된 것이고, 남쪽서넌 그런 일 없어. 근디, 어찌 그리 우세살 말얼 허고 긍가?"

"아 예, 저도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어떤 젊은 문필가가 그렇게 썼더란 말입니다. 그래 이상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젊은 문필가? 어떤 몰무식헌 놈이 또 멋대로 필 놀리고 그려? 요새 시자 좀 들었다는 젊은 놈덜이 큰탈이여. 관부연락선 타고 동경물 이삼 년 묵고 오먼 즈그덜이 시상만사 다 아는 것맨치로 주딩이 까고 필 놀리고 그런단 말이여. , 북쪽맨치로 남쪽서도 동학당덜이 다 일진회에 들어갔음사 왜놈덜이 멀라고 동학당 잡을라고 눈에 쌍불얼 켰을 것이여. 의병이 일어나기 전보톰 남쪽서넌 동학당덜이 활동허고 있었고, 의병이 일어나자 다 의병에 합쳐진 것 아니여. 남쪽 동학당도 인종덜이 많다봉게 일진회에 열에 한둘이야 들어가기도 혔겄제. 그것얼 갖고 북쪽허고 똑같다고 허능 것이야 몰무식헌 놈덜이 한나만 아록 둘은 몰름서 나대는 것이제. 나가 똑똑허니 봐서 아는 일인디, 남쪽 일진회넌 태반이 불량배덜 끌어모은 것이여. 왜놈덜이 어찌서 전라도땅얼 놓고 남한 대토벌얼 헌지 안가? 그 의병덜 태반이 동학당덜이라 옛 원한 품고 끝꺼정 버텼기 땀시여. 어쨌그나 그런 못된 글언 당최 읽덜 말어."

공허는 열이 받쳐 있었다.

", 알겠습니다. 언제 내려가실 건가요?"

송가원이 밖에 걸린 시계에 눈길을 보냈다.

"나야 뜬구름잉게. 자네 수업시간이 다 되았는갑제? 그려, 가서 공부허소."

공허는 바랑을 끌어당겨 속을 뒤적거렸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송가원이 몸을 일으켰다.

", 요것 받소."

공허가 앉은 채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얼매 안 된 게 묵고 잡은 것 사묵어."

"아닙니다, 돈 있습니다."

"어허, 어런이 주는 것언 받는 것이여."

"차암, 스님이 무슨 돈이 있으시다고..."

송가원이 마지못해 봉투를 받았다.

"나가 학비럴 대야 허는디..."

공허의 목소리가 잠겨 들었다.

"잘 쓰겠습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그려, 또 만내세. 공부 잘허고."

공허는 송가원의 손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 그 눈시울에 붉은 기운이 젖어 있었다. 송가원은 방을 나서며 옥녀에게 눈인사를 보냈고, 옥녀는 일어나 나부시 절을 했다. 송가원은 교문을 들어서다가 말고 옥비의 거처가 어디인지 알아보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되돌아서기에는 음식점이 너무 멀었고 강의시간은 임박해 있었다.

 

이경욱은 한남권번 건너편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권번에 드나드는 여자들은 역시 기생답게 모두 화사한 차림이었다. 인력거도 자주 왔다가 떠나고는 했다. 이경욱은 딴전을 피우듯 하면서 드나드는 여자들을 놓치지 않고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옥비 명창은 찾을 수가 없었다. 벌써 한 시간이 넘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것이었다. 아니, 마음은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옥비 명창을 만나려고 벌써 두 번째 한남권번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권번 앞에 서면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그 두려움은 용기가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용기와는 다르게 너무 큰 죄의식 때문에 생기는 것이었다. 옥비 명창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만큼 앞을 가로막는 두려움도 컸다. 막상 그녀를 대면하고 무어라고 해야 할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할 것인가. 제 아버지 잘못을 제가 사죄드리겠습니다 할 것인가.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고 해서 그녀의 상처가 낫는 것인가? 자신이 대신 사죄를 한다고 그녀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인가? 그렇게 될 리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 되기를 바라는 건 이쪽의 이기심이요 파렴치함일 뿐이었다.

"찾어가 보기넌 허시요마넌 안 만내니만 못헐 것이오. 갸가 강단이 씬디다가 가심에 맺힌 한이 큰 게..."

옥비의 오빠 차득보가 마지못해 한남권번을 가르쳐주며 한 말이었다. 그나마 그가 입을 열었던 것은 아버지가 재산을 다 날리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갸가 강단이 씨디다가 가심에 맺힌 한이 큰게...

예인이라는 것을 당당히 내세운 것도, 술 따르기를 거부한 것도 예사 강단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처녀의 순결을 망치는 음모를 꾸민 것이었다. 그것도 왜놈의 욕심을 채워주기 위해서. 술 한 번 따르는 것도 함부로 하지 않은 그런 처녀의 몸을 망쳐놓았으니 가슴에 맺힌 한이 크다는 말은 결코 과장일 것이 없었다. 한 맺힌 여자 앞에 불쑥 얼굴을 내밀고, 내가 이동만의 아들이오 해놓고, 나는 당신을 사모하는데 우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니까 옛일을 잊고 내 정을 받아주오 할 것인가?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인 것이다. 그 애비에 그 자식이란 욕이나 먹기에 딱 알맞은 짓일 거였다. 이경욱은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두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가자, 고양이도 낯짝이 있지...

이경욱은 권번 안쪽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또 잊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실천할 자신은 전혀 없었다. 그동안에도 잊어야지를 골백번도 더 되씹었으면서도 서울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두 번 걸음을 그냥 돌이키면서도 서울에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아니, 후회하기는커녕 옥비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마음 한쪽은 후련하고도 든든했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를 때의 그 막막하고 안타까웠던 것에 비하면 이젠 상면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한남권번은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 기생들이 모인 곳이라고 했다. 옥비는 낮에 그곳에서 어린 기생들에게 소리를 가르치고 밤이면 청에 따라 술자리에 나가 소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경욱은 또 밤에 소리를 한다는 데에 끌리고 있었다. 밤에 술자리를 만들어 소리를 청하면 어떨가... 그 만남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어쩌면 옥비 명창은 자신을 못 알아볼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생일날 자신은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익혔지만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스쳤을 뿐이었던 것이다. 옥비가 자신을 못 알아보는 상태로 만나는 것이 서로 마음을 다치지 않고 좋을 것 같았다. 자신의 목적은 어쨌거나 옥비를 한 번 만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완전히 파산을 하고 세상을 떠나버린 형편에 고등고시 합격은 생활 방편으로도 다급해져 있었다. 그 다급함 앞에서 꼭 해결해야 할 문제가 옥비와의 만남이었다. 옥비를 만나보면 마음을 잡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이경욱은 또 윤동선을 생각했다. 서울에서 술자리에 동행할 사람은 그 친구밖에 없었다. 그가 마음에 내키는 상대는 아니었다. 조선 학생들이 많지 않은 동경의 학교생활에서 같은 조선사람이라는 다 한 가지 이유만으로 교분을 유지했을 뿐 깊이 있는 마음이나 감정의 융화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이였다. 윤동선은 귀족주의가 완전히 몸에 배어 있었다. 조선왕조에서 대대로 큰 벼슬을 했다는 것을 긍지로 내세웠고, 일본의 작위를 받은 것을 당연한 대접으로 알았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런 그의 귀족주의가 일본의 여학생들한테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남학생들에게도 먹혀들어 가는 것이었다. 보석을 사람의 가치보다 우위에 두는 속 빈 여학생들이 귀족 앞에서 사족을 못 쓰는 건 그렇다 하더라도 제법 이성적이고 냉철하다는 법학부 남학생들까지 귀족주의 앞에 은근히 주눅 들고 부러워하는 눈치를 보이는 건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신사와 천황을 받드는 왜놈들의 근성이었고, 관습적 권위 앞에 길들여진 인간의 아둔함과 나약함이었다. 윤동선은 일본의 작위와 풍족한 학자금을 앞세워 정조 관념이라고는 전혀 없는 일본 여학생들을 맘껏 희롱했다. 그는 자기가 희롱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가 오히려 일본 여학생들에게 희롱당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본 작위를 가진 조선 귀족 집안의 대학생, 그리고 그가 베푸는 돈맛과 육체의 맛, 그런 것들은 허영에 찬 일본 여학생들에게 장식 효과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동선에게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었다. 그 많은 여학생들의 인기를 누리면서도 자신이 남성적으로 매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착각하지 않은 점이었다. 그런 착각까지 했더라면 윤동선과는 그나마의 교분마저 끊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윤동선한테서 한 가지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머리가 아주 좋은 것이었다. 암기력이 비상한 그는 법학과가 아주 적격이었다. 윤동선은 졸업하던 해에 바로 고등고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경성에서 검사로 자리를 잡았다. 집안의 후광이 작용했던 것이다.

"자네 법관 될 마음이 없구만?"

"그게 무슨 소린가? 시험 치른 사람 앞에서."

"딴말 말게. 자네 얼굴에 그리 씌었어."

"검사 나리 눈치라 다르군."

2년 전에 만나서 나눈 말이었다. 종로로 나온 이경욱은 경성역으로 가는 전차에 올랐다. 날씨가 더워 전차 안에서는 사람들의 훈기와 땀내가 후끈 풍겨나왔다. 한낮이 아직 멀었는데도 7월 중순의 더위는 무더웠다. 이경욱은 손잡이를 잡으며 눈을 감았다. 이래저래 신경을 쓴 탓인지 피곤했다.

"아조 잘 뒤진 것이여!"

"하먼, 씨언허니 잘 뒤졌제!"

"그려, 그놈 뒤진 것 봉게 하늘이 무심털 안혀."

"맞네, 하늘이 날베락친 것이네."

"긍게 말이여. 안 그러고야 논바닥에 꼬드라졌을 리가 있겄어."

"그놈이 진 죄가 얼맨디. 당연지사제."

여자들의 악에 받친 이런 말들이 또 북치듯 의식을 난타해대고 있었다. 이경욱은 신음을 씹었다. 사람들의 온갖 저주를 잊으려고 했지만 잊혀지지가 않았다. 아버지에게 퍼부어진 그 많은 저주들을 잊기에는 아직 시간이 너무 짧았다. 이제 겨우 두 달 정도가 지났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논바닥에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금을 캐내기 위해 파내놓을 흙더미 위에 쓰러져 숨이 끊어진 것이었다. 그 죽음이 너무 갑작스러워 아무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객사가 되어 아버지는 담 한쪽을 헐고 마당으로 들어와 더는 집 안으로 오르지 못한 채 산으로 떠나야 했다. 그 험한 마지막 길마저 아버지는 동정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런 장례를 통쾌해했다. 그건 피할 도리가 없는 아버지의 인생살이 결과였다. 아버지는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남겨놓은 재산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이승을 떠나면서 욕은 다 먹었던 것이다. 뒤늦게 알게 된 일이지만 아버지는 동업자인 우노사와에게 고스란히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우노사와는 주먹패를 끌어들여 자기 세력을 확대해 가며 금석을 빼돌리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그에 맞서서 조선 주먹패들을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조선 주먹패들은 돈을 아버지에게 받아먹으면서 속으로는 우노사와와 한통속이 된 것이었다. 그건 단순한 회유가 아니라 경찰의 힘이 작용한 것이라고 했다. 우노사와가 경찰에 손을 썼고, 조선 주먹패들은 경찰력 앞에서 아버지를 배신해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짜인 구조 속에서 아버지는 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들이 야합한 가운데 금석을 계속 도둑맞아 가면서 아버지는 허기진 배당을 받았고, 그 돈으로 재투자를 하고 주먹패들에게 뜯기도, 그러다가 어느 날 우노사와가 자취를 감추어버렸던 것이다. 그때서야 사기당한 모든 내막을 알게 된 아버지는 폐광이 된 흙더미 위에서 펄펄 뛰다가 쓰러져 그대로 숨이 끊어져 버린 것이었다.

과욕이 사람 잡는다는 말은 꼭 아버지를 두고 한 말이었다. 금광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가 더 큰돈을 벌 욕심만 앞세워 사금판에 발을 디밀었을 때부터 아버지의 불행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금판은 거칠기가 부두는 댈 것도 아니라고 했다. 광주끼리 이권을 다투다가 그에 연관된 주먹패들이 금산사 주지를 죽였는데도 범인들을 잡는 둥 마는 둥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일본 주먹패들이 저지른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살벌한 판에 뛰어들었으니 아버지가 견딜 리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남긴 것은 덩그렁 집 한 채뿐이었다. 만석꾼 재산이라고 소문난 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어디를 가나 기승을 부리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욕뿐이었다. 그 욕들을 막을 재간이 없는 채로 마음은 차라리 홀가분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떳떳치 못한 치부로 오랜 세월 동안 쌓여왔던 열등감과 수치스러움이 그 욕들을 먹으며 씻겨져 나가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이경욱은 덕수궁 앞에서 전차를 내렸다. 법원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서도 이경욱은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윤동선이 더 친일적으로 변해 있을지도 몰랐고, 여지껏 고등고시에 합격하지 못한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신경이 쓰이기도 했던 것이다. 현관 수위실에서 알아보니 윤동선은 사무실에 없었다. 재판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점심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 남아 있었다. 이경욱은 어디 가까운 데 가서 차나 한잔 마시며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돌아섰다. 법원을 나서다 말고 이경욱은 걸음을 멈추었다. 새로 짓고 있는 법원 건물이 아까보다 더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얼마나 죄인이 많기에..., 망할 놈들이 마구 잡아들이는 거지...

몹시 기분이 상한 이경욱은 담배를 빼들었다. 치안유지법을 해마다 강화시켜 사상범의 최고형을 무기에서 사형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건 '체제변혁을 도모하는 자'라고 하여 노골적으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을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 법원 건물의 신축은 치안유지법의 강화와 직결되는 것일 터였다. 손가락이 델 정도로 꽁초를 빨고 있던 이경욱은 법원을 막 벗어나고 있는 사람에게 시선이 멎었다. 묵직한 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사람은 분명 대학 선배 홍명준이었다.

"선배님, 홍 선배님!"

이경욱은 꽁초를 팽개치며 홍명준에게로 달려갔다. 시간 보내기가 따분했던 참이라 이경욱은 선배를 만나게 된 것이 더욱 반가웠다.

"아니, 이게 누군가!"

홍명준이 멈칫하다가 반색을 했다.

"저 이경욱입니다."

", 알지, 이형. 여긴 어쩐 일이오?"

", 동창 윤동선을 좀 만나러 왔는데 재판에 들어갔다고 해서 도로 나오던 참입니다."

"그렇지, 윤동선과 동창이겠군. 그 사람 점심때나 돼야 재판이 끝날 텐데, 별일 없으면 내 사무실로 갈까? 바로 여기 가까운데."

", 구경 좀 시켜주십시오."

바라던 바라 이경욱은 얼른 대답했다.

"가지. 헌데, 자넨 어떻게 된 건가? 공부 착실히 하는 것 같던데 어째 요 몇 년 사이에 이름을 볼 수가 없으니."

홍명준이 걸음을 옮겨놓으며 물었다.

", 좀 고민이 있어서 억지로 시험만 치렀지 계속 낙방을 했습니다."

"으음, 억지시험에 억지낙방을 한 모양이군. 여전히 맑스와 레닌이 고민인가?"

"아닙니다, 딴 일이 좀 있어서..."

이경욱은 당황스럽게 대답했다.

"윤동선이한테 무슨 부탁이 있나?"

"아닙니다. 서울에 올라온 김에 그냥 좀 만나볼까 해서..."

"다행이군, 용건이 없어서. 그 사람 아주 모범적인 검살세."

홍명준의 어조에는 야유의 기색이 역연했다. 이경욱은 얼굴이 화끈해지는 걸 느꼈다.

"그동안 더 많이 변한 모양이군요."

"그도 괜찮은 일이지. 가장 편하게 사는 방법이니까."

멀지 않은 사무실에 다다를 때까지 두 사람은 더 말이 없이 걸었다.

"앉게나. 오랜만에 만났으니 차는 한잔 마셔야지."

홍명준이 안락의자에 자리를 권했다.

이경욱은 빠른 눈길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아담한 실내는 변호사 사무실답게 꾸며져 있었다. 책상 옆의 유리창 달린 책꽂이에 빼꼭하게 꽂힌 두툼한 책들이 사무실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경욱은 순간적으로 야릇한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어떤 허전함과 함께 부러움도 아니고 시샘도 아닌 감정이 획 스쳐갔던 것이다.

"자넨 고시 치를 맘이 없나?"

홍명준이 마주 앉으며 물었다.

"아닙니다. 금년부턴 맘먹고 공부를 할 작정입니다."

이경욱은 어색스럽게 웃었다.

"그래, 기왕 할 것이면 허송세월할 게 없지. 배운 게 그건데."

홍명준이 중얼거리듯 하며 담배를 권했다.

사무원 아가씨가 차를 내왔다.

"저어..., 법원에 새로 짓고 있는 건물은 뭔가요?"

이경욱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물었다 윤동선을 만날 생각이 별로 없어서 홍명준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그거 말인가?" 홍명준은 쓴웃음을 흘리며 담배를 빨아 천천히 연기를 내뿜고는, "그게 5백여 명을 재판한 대법정을 짓는 것일세." 하고는 찻잔을 들었다.

"아니, 무슨 죄인이 그렇게?..."

이경욱의 눈이 휘둥글해졌다.

"그게 다 만주에서 붙들려온 우리 동포들일세. 들어보게. 그게 어떻게 된 일인고 하니 말야, 잘년 5월달에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동만주 일대에서 반일폭동이 일어났네. 그 폭동은 며칠 사이에 진압이 됐는데, 문제는 그 폭동의 주도세력이 중국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조선사람들이라는 사실이네. 그러니까 체포되는 사람들은 거의가 조선사람들 아니겠나. 그런데 몇 달이 지나 폭동이 진답되는 듯하면서도 진압이 안 되고 만주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양상을 보이면서 금년 2월의 춘황폭동으로 이어졌네. 그러는 동안 체포되는 사람들이 2천여 명이고, 그중에서 중국 사람들을 빼고 조사를 한 결과 주동자들로 골라낸 조선사람들이 5백여 명일세. 그들을 다 서울로 압송해 왔는데, 그 많은 사람들을 재판할 법정이 없는 거네. 그래서 그 대법정을 짓고 있는 걸세."

"이런 미친놈들이 있나!"

이경욱이 자신도 모르게 터뜨린 말이었다.

"그렇지, 미친놈들이지. 허나 꼭 미친 짓을 하는 것만이 아닐세.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대법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되네."

"예에......"

이경욱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아까 자신이 판단했던 것과 일치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헌데, 일이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닐세. 자네 만보산 사건 알지?"

", 그건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습니까."

"그 만보산 사건이라는 게 또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닐세. 아까 말한 그 폭동사건으로 조선사람들은 중국 관헌과 일본 경찰에 쫓겨 오지로 오지로 집단적 이주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네. 그 사람들 중의 일부가 장춘현 만보산 아래로 피신을 한 거지. 거기서 논을 일구려던 조선사람들과 그걸 막으려는 중국 사람들 사이에 말썽이 일어났고, 중국 관헌들이 동원되자 그에 맞서 일본영사관 경찰이 출동을 했네. 고맙게도 조선사람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지. 그런 간섭까진 좋은데, 일본영사관에서는 더 큰 문제를 일으켰네. 그게 뭐냐면, 그 대단찮은 충돌을 마치 중국 관헌과 중국 사람들이 조선사람들을 집단적으로 폭행해대고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는 것처럼 과장하고 날조해서 그곳 주재 기자가 기사를 쓰도록 공작을 한 거네. 그 과장되고 날조된 기사가 서울에서 호외로 뿌려지고, 다른 신문들도 다투어 기사를 싣고 한 것이 열흘 전쯤 아닌가. 그 기사들을 읽고 자극받고 흥분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중국 사람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중국집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네. 그게 서울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상사 아닌가. 왜놈들이 노린 이간책동이 보기 좋게 성공한 거네. 조선 땅에서 중국 사람들이 당하면 중국 땅에서는 또 누가 당하겠는가. 뒤늦게 일제의 저의을 알아차릴 사회단체에서는 사건의 진상조사에 나서고, 중국 측에 해명할 길을 찾고, 대중들의 보복행위를 중지시키려고 애쓰고 있네. 그건 예사 문제가 아닐세."

홍명준은 심각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이경욱은 속으로 못내 당황하고 있었다. 현직 변호사와 지방의 법학도와의 차이, 그 정보의 차이는 직위의 차이보다 더 엄청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홍명준은 이 사건이고 저 사건이고 신문에 보도되지 않은 사실들까지도 샅샅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고작해야 신문에 난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고, 대중들이 중국 사람들에게 보복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서울에 있는 변호사라고 해서 모두가 홍명준처럼 그렇게 그 사건들에 대해서 잘 알 리는 없었다. 그건 홍명준의 변호사로서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경욱은 홍명준 선배를 다시 생각하면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신은 그런 사태의 심각성 같은 것을 모르고 태평스럽게 여자를 만나려고 서울에 올라온 것이었다.

"변호사 생활에 애로점이 많으시죠?"

이경욱은 그만 자리를 뜰 생각을 하며 인사삼아 물었다.

", 그런대로 괜찮네."

홍명준이 잔잔하게 웃었다.

"오늘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전 이만..."

"그래, 반갑네. 자네도 빨리 결판을 내도록 하라구."

",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밖으로 나온 이경욱은 잠시 생각했다. 윤동선을 만날 마음은 더 없어져 있었다. 그리고 옥비를 술자리에서 만나볼까 한 것이 잘못된 생각인 것 같았다. 서울서 어정거릴 것이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경욱은 법원을 뒤로 하고 큰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제 반발해야 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더 이상 세상의 변두리에서 배회하고 싶지 않았다. 고서완 선생님의 말을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기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그분이 석방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경욱은 경성역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옥비에게는 편지로 모든 것을 털어놓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 만나는 것이 더 순조롭고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39. 뿌리

"응애애..."

아이의 울음소리가 가녀리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낳다, !"

담배를 빨고 있던 구상배의 얼굴이 환해지며 방영근의 손을 잡았다.

"아아......"

방영근은 어색스럽게 웃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그의 얼굴은 구상배와는 다르게 여전히 긴장되어 있었다.

"머꼬?"

구상배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방 쪽에다 대고 소리쳤다.

"급하기도 하요. 꼬치라요, 꼬치!"

방안에서 맞받아 소리치는 여자의 달뜬 음성이었다.

"이 집에 꼬치 풍년 아이가. 술 한잔 걸게 내야 되겄다."

구상배가 방영근의 어깨를 쳤다.

"야아, 그러제라."

그제서야 방영근은 긴장 풀린 웃음을 빙그레 피워냈다.

"기술도 좋다. 우예 셋얼 쪼로록 아덜로만 뽑아내노. 염치없구로."

구상배가 눈을 흘겼다.

"성님이 중매 잘 들어 그렇제라."

방영근이 쑥스러운 듯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말이사 고맙다마는 아들딸 낳는기사 어데 밭 따라가나, 씨 따라가제."

"술언 오늘 밤에 한잔허실랑게라?"

그기 좋겄제? 사람덜이 일 끝내고 오먼 그냥 안 넘길라 할 서 아이가."

"그러제라. 술 장만해 갖고 와야겄소."

방영근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뻐떡 댕게오게. 나넌 인자 농장에 나가봐야 안되겄나."

구상배는 다녀오라는 손짓을 하며 돌아섰다.

방영근은 그런 구상배에게 조장 이상의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출산을 염려해 자신의 하루 일을 면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자리를 지켜준 것이었다. 그리고 조원들 역시 고맙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일을 빼먹은 만큼 조원들은 힘들어지는 것이었다. 출산 때는 누구나 농장일을 나가지 않고 집을 지키도록 되어있었지만 방영근은 그 당연한 혜택에 새삼스러운 고마움을 느꼈다. 또 득남을 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동네를 벗어난 방영근은 큼직한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동네 어귀의 갈림길에는 샌달우드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었다. 그 둘레로는 크고 잡은 돌들이 키 높이로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어느 누가 언제부터 그 나무아래 돌을 놓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근방에 조선사람들이 자리 잡게 되면서부터 하나둘씩 불어나 세월을 따라 돌무더기를 이루게 된 것이었다. 방영근은 그 돌무더기 앞에 걸음을 멈추고 손에 든 돌을 조심스럽게 돌과 돌 사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바르게 서서 머리를 조아렸다.

살펴주신 덕에 득남얼 혔구만요. 무병허니 잘 크게 보살펴주십소사.

방영근은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다. 장가를 들고부터 돌을 쌓게 되는 횟수가 잦아졌다. 아이들을 낳을 때마다, 아이들이 아플 때마다 돌을 하나씩 얹게 되었다. 그때마다 고향을 생각했다. 그럴 때면 샌달우드나무는 고향의 당산나무로 변해 있었다. 방영근은 상점으로 바빠 걷기 시작했다. 세 번째로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 뿌듯하게 기쁘면서도 또 허전하고 쓸쓸하기도 했다. 이대로 여기서 한평생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깊어지는 것이었다. 그 생각은 아이들을 하나씩 낳을 때마다 깊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커 나면서 그 생각은 마치 삽질을 해대듯이 선명하게 깊어지는 것을 느끼며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건 혼자서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어느 집 아이들이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 하루가 다르게 표가 나는 것이 영어를 쓰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영어를 지껄여댔고, 그 아래 어린것들까지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곧잘 흉내 내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누구나 집에서는 영어를 못 쓰게 했지만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놀 때면 으레껏 영어를 지껄이며 키들거리고 장난을 쳤다. 그러니 그 손짓발짓이 천상 흰둥이들 흉내였다. 그럴 때마다 어른들은 자기들의 뿌리가 하와이 땅 깊이 박히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녁밥을 먹고 나서 사람들은 방영근네집 앞 빈터로 모여들었다. 마침 보름 사나흘 지난 달이 둥두렇게 떠오르고 있었다.

"좋다, 달도 밝고 술맛 나게 생겼다."

"누가 아이라. 이태백이 안 부럽겄다."

"에이, 아니여. 달이라고 다 똑겉은 달이간디. 저놈에 하와이 달언 밍숭밍숭헌 것이 서럽덜 안혀 맛이 없어."

"이 사람아, 달이면 그냥 달이지 무슨 맛이 있고 없고 해."

"아아니, 고것이 무신 ㅆ무식헌 소리여? 춘하추동 사시절 절기 따라 달이 다 달르다는 것얼 몰르는 조선사람도 다 있네그랴. 여름달이 게심심허고 텁터그리헌 것에 비허먼 겨울달언 얼매나 적적허고 서러우냔 말이여. 근디 하와이 달언 항시 그 멋대가리없는 여름달이제 은제 가을달이고 겨울달 맛이 나냐 그것이여."

"맞다, 그 말 한분 명언이네. 달이야 우리 고향서 보든 가을달 겨울달이 참말로 좋았제. 가심 찡하고 눈물 핑 도는기 참 기맥혔능기라."

"그래도 나는 저 달을 보면 고향 생각만 잘 나고 서럽기만 하더라."

"그야 누구넌 안 그렇간디."

"짜아아, 묵자 것 없는 술상 나가요오."

큼직한 술상을 또 한 사람과 받쳐든 방영근이 뒷걸을질을 치며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리를 내주며 비켜앉았다. 술상이 뒤따라 또 하나 나왔다. 잇댄 두 개의 술상에 20여 명이 빼꼭하게 둘러앉았다.

"이기 득남주니께네 산모 탈없이 기동허고 얼라 무병허니 크게 축수허는 맘으로 많이덜 드소 마."

구상배가 좌장답게 한마디했다.

"어이, 영근이 자네도 한마디허드라고."

"어허, 술덜이나 많이 묵어."

방영근이 쑥스러워하며 주먹으로 허공을 쳤다.

"염치없이 아들을 셋씩이나 주루룩 낳았으니 무슨 할말이 있겠어. 우리는 술이나 많이 축내 앙갚음하더라고."

"맞다, 뻐떡 술이나 묵자."

모두 흥겨운 마음으로 술잔을 들었다. 술잔마다 달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새로 태어난 목숨의 앞날을 축원하며 술잔들을 부딪쳤다. 서양 술을 마시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익힌 서양 격식이었다.

"저사람언 우예 그리 기술이 좋노."

"누가 아니래나. 그 기술이 부럽다니까."

"부럽으먼 배우소."

"배워서 안 되는 기술이니까 부럽지."

"맞다, 맞다. 아하하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늦장개 가등마 실속언 혼자 다 채린당게."

"그기 다 도적놈 심뽄기라. 넘덜언 본전치기도 못허는 판에 세 곱 장사하능 거 아이가."

"도적놈 소리 안 들을라면 앞으로 딸만 셋을 낳게."

"옛끼!"

"딸만 셋 낳은 사람 딸 여섯 되기 쉬운 것 알지? 여섯 곱 장사하게 될 날 머지 않았으니 두고 보게."

"그리 되먼 그것도 볼 만허겄네."

"왜 아이라. 그리 되몬 자석덜이 전부 ㅁ이 되능기고? 이륙에 십에이, 모다 열둘 아이가. 참말이제 이문 큰 장사네."

"말년이 든든히서 좋겄는디."

"모르지. 애들 서양물 들어가는 것 보면 아들 많다고 말년 편하게 될지."

"그런 소리 마소. 조선놈언 어디서고 조선놈인기라. 효도 안하믄 그대로 둘기등가."

"그야 우리 맘이제 뜻대로 되간디."

"무신 소리 하노. 그러니께네 조선풍속대로 갤차야 허능기라."

"그 말 맞네. 늙어서 사나운 꼴 안 당하려면 어렸을 때부터 조선식 예의범절을 잘 가르쳐야 해. 이 서양식 중에서 제일 못돼먹은 게 효도 모르는 것이야. 인륜을 모르는 게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꼴이야."

"그러이 타국서 자석덜 키우기가 곱절 에로븐 것 아이가."

그들은 어느덧 자식들 기르는 문제로 의견이 모아져 있었다. 자식들을 교육시키는 문제와는 또 다르게 그 문제는 그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심각한 문제였던 것이다.

하와이의 조선사람들은 세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그 누구든 자식들에게 다시는 농장 생활을 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자기들의 고생을 자식들에게까지 되풀이시키지 않겠다는 부모들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교육열은 더없이 뜨거웠다. 둘째, 밥에다 김치를 먹듯이 조선사람으로서의 생활과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여름뿐인 땅이었지만 해가 바뀌면 꼭 설을 쇠고, 비록 양주를 따라 올리더라도 꼭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셋째, 어떻게 해서든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얼른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서만이 아니었다. 실생활에서 노란둥이라는 차별에다가 나라 없어서 당하는 설움이 겹쳐지고 있었다. 일본사람이나 중국 사람들이 당하지 않는 무시와 멸시 그리고 손해를 언제나 당하며 살고 있었다.

"성님요, 그 특헌금인지 머시깽인지 우이할겁니꺼? 요분 공일날 또 찾아올긴데 말입니더."

누군가가 이야기를 바꾸며 구상배에게 물었다.

"글씨러..."

구상배가 무거운 목소리를 흘리며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특헌금이란 특별헌금을 말하는 것이었다. 좌장인 구상배의 반응이 모호하자 술자리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것 또 괭이헌티 생선 ㅁ기는 것 아니겄어."

누군가가 퉁명스럽게 침묵을 깼다.

"맞어, 죽 쒀서 개 좋은 일 시킬 것 없다구."

다른 사람이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하모, 우리도 인자 곰 노릇 더 할 기 없는기라."

또 다른 사람이 거들고 나섰다.

"보래, 보래, 우리가 한두 분도 아이고 낙담하기로야 서로 다 똑겉은 맴인기라. 허나 지끔 이 시각에도 하나뿐인 목심 내걸고 싸우는 사람덜이 수태 많덜 않나 말이다. 그분네덜 생각허믄 우리가 이라 술잔 걸치고 편케 앉어 막말헐 기 아닌기라. 그간에 우리가 낸 세금이고 후원금이 아무리 피땀얼 짠 것이라 캐도 목심 바쳐 죽고, 지끔도 싸우고 있는 분네덜에 비허믄 조족지혈 아이가. 그라고 말다, 우리 혈세 중간에서 띠묵은 인종이 나쁘고, 후원금 받아갖고 변심헌 인종이 못된 것이제, 어데 성심으로 싸우는 독립투사덜얼 도매금으로 몰아쳐서야 사람 도리가 되겄나. 그 문제는 입에 술 대고 헐 이바구나 아니니께네 담으로 미루는기 좋겄다."

구상배의 차분하면서도 무게 실린 말이었다.

",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헌데, 우리가 하는 말은 후원금을 걷는 중간에 선 사람들을 못 믿겠다는 것이지 목숨 내걸고 싸우는 독립투사들을 욕하는 게 아닌데요."

"맞심더, 우리 죄인 맨글지 마이소."

"하먼, 우리가 낸 혈세가 그분네덜헌티 안 전해진 것이 분허고 원통히서 허는 말이제라."

그들의 항의는 날카로웠다.

"그거럴 누가 모리나. 술 묵은 기운에 짜드락 말 많이 허다보믄 그런 말실수도 생길지 모르니께네 미리 막은 거 아이가. 오늘은 노래나 불르고 기분 좋게 놀그라."

구상배가 그들을 다둑거리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그들이 품고 있는 그런 불신감은 이승만 한 사람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 사건에 뒤이어 박용만이 밀정으로 변절해 북경에서 살해된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4년 전인 192810월의 일이었다. 그 소식이 하와이에 퍼지자 사람들이 받은 충격과 절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에 대한 배신감이 박용만에 대한 기대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에 그 충격과 절망은 더 큰 것이었다. 이승만사건이 일어난 서너 달 후인 7월에 중국에 있던 박용만 하와이에 불현듯 나타났다. 그가 하와이에 온 목적은 중국에 넓은 황무지를 확보하고, 그 땅을 개간하여 자립적인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드는 동시에 대조선독립단의 독립군을 양성하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에 필요한 자금은 자그마치 2만 달러였다. 그러나 하와이의 거의 모든 조선사람들은 그 모금에 호응했다. 그건 박용만이 전부터 지니고 있었던 진실성에다가 이승만에 대한 실망감이 보태져 조성된 신망의 표현이었다.

모금은 무난하게 이루어져 박용만은 이듬해 3월 다시 죽은 것이었다. 그 소식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절망을 준 것만이 아니었다. 구구한 살해 원인으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질정없이 떠도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간추리면 박용만이 밀정이냐 아니냐로 요약되었다. 그때까지도 호놀룰루에 본부를 두고 있었던 박용만계의 조선독립단 사람들은 박용만이 변절자가 아님을 누누이 강조하고 다녔다. 그들의 말을 믿자면 명망 높은 독립투사를 무고하게 죽인 죄가 의열단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정반대의 주장도 꼬리를 이었다. 박용만이가 무슨 시정잡배고, 의열단이 또 무슨 왜놈들의 야쿠자 패거리냐. 의열단 같은 데서 확실한 근거 없이 그런 중대한 일을 도모할 리가 있느냐. 이런 식이고 보니 사람들은 혼란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자기들이 낸 헌금에 쏠리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 의혹과 함께 사람들은 차츰 박용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자기들이 낸 헌금에 쏠리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의혹과 함께 사람들은 차츰 박용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게 된 계기가 생겼다. 서너 달이 지나 조선에서 건너온 신문에 박용만 밀정으로 살해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사람들은 한인회에서 거둬들이는 정규적인 세금만을 마지못해 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마저 외면해 버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싸늘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그동안 특별헌금을 모금하는 일이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최근에 특별헌금을 모으는 사람들이 다시 농장마다 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모금 운동과 함께 떠오른 이름이 상해임시정부 국무령 김구였다. 김구가 올해 조직한 무슨 비밀단체란 일본 요인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조직된 임정 직속의 한인애국단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이틀이 지나 공일날이 되자 모금원들이 찾아왔다.

"어서 오이소. 일언 잘돼가능교?"

구상배가 구면인 그들을 맞으며 나무그늘에 자리를 권했다.

", 안녕하십니까. 이거 참, 생각보다 일이 어렵습니다."

모금을 주동하고 있는 임성우란 사람이 떨떠름하게 웃었다. 그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하와이의 대조선독립군단의 독립군 훈령 시절에 대위였던 사람이었다.

"그럴 낍니더. 그간에 그리 민심얼 잃었시니 우예 일이 쉴케 되겄능교."

구상배가 세 사람에게 담배를 권했다.

"글세 말입니다. 상해에선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거 야단났습니다."

"돈언 얼매나 보내야 되능교?"

", 급한 대로 천 딸라 정도는 보내야 사업을 착수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천 딸라라카믄 그리 큰돈도 작은 돈도 아니구마는도..."

"그렇지요, 동포들이 맘들만 합해 주면 당일에도 해결될 액수지요"

"사람이 한 분 속제 두 분 안 속는다 캤는데, 여게 사람덜이사 크게 두 분이나 속았으니께네 그 맘덜이 우짜겄능교. 그러이 무작정 헌금하라카지 말고 사람덜 맘얼 합허는 방책보톰 세와야 될기요."

", 우리도 그걸 생각해 봤는데 마땅한 방책이 있어야 말이지요. 무슨 좋은 생각이 없습니까?"

임성우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담배를 빨아당겼다.

"글씨요..., 그기야 머 에롭게 생각할 기 없는 일 아닌기요. 보이소, 사람덜이 와 헌금얼 안 낼라칸다고 생각허능기요?"

"그야..., 또 속을까봐 그러는 거 아닙니까."

"바로 그깁니더. 그라이께네 요분 일에넌 속는 기 아이라는 무신 보증서럴 사람덜헌티 보이는 무신 방도럴 찾아보이소."

"보증서라..."

그들은 침울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사나흘이 지나 구상배를 다시 찾아왔다.

"이런 방법은 어떻겠습니까? 김구 선생이야 임정 국부령이시니까 믿을 수 있는 겄이야 더 말할 것이 없고, 못 믿는 것은 우리들 아닙니까. 그러니 헌금자 명단을 작성해 헌금자들이 일일이 싸인을 하게 해서 총액이 얼마인지 모두가 확인하게 합니다. 그리고 돈을 보내는 것도 누구에게 맡길 게 아니라 우체국을 통해서 보내고, 그 송금증을 모든 사람에게 확인시키는 것 말입니다."

구상배를 바라보는 임성우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맞심더. 그리하믄 우리도 헌금얼 내지예."

"아이고 고맙습니다."

임성우가 구상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리고마 무신 말씸이신교. 이 일이 어데 사사로 이문 보는 일인교. 일얼 못 돕는 지가 고맙다꼬 말씸디래야지요."

구상배가 손을 맞잡으며 웃었다.

그 특별헌금 1천 달러는 열흘을 넘기지 않고 모아졌다. 그리고 미국우체국을 통해서 상해임시정부로 보내졌다.

방영근은 저녁밥을 먹고 나서 갓난둥이를 어르고 있었다. 아이는 그동안 젖살이 올라 제법 얼굴 꼴을 갖춘 것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아내도 몸이 실해 아무 뒤탈 없이 산후회복이 빨랐다. 방영근은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산후 뒤탈로 몸고생 마음고생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은 병원을 드나드느라고 빚더미 위에 올라앉기도 했다.

"여보게, 영근이. 영근이 있나?"

밖에서 나직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 누구여?"

방영근은 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놓고 일어섰다. 그 순간 어머니의 모습이 흩어져 나갔다. 또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늘 그리운 어머니였지만 아이들을 낳고 나면 더욱 애달프게 그리워지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장가를 들이지 못한 채 큰아들을 타국으로 보내는 것을 그리도 가슴 아파했었다. 그리고, 오래 걸리지 말고 곧 돌아와 손자들 안고 살기를 소원했었다. 그런데 세월은 감감하게 흘러버리고, 아이들은 할머니 얼굴도 모르며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의 그 모습만이 떠올랐다. 얼마나 늙으셨는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사시는지..., 살아 계시기나 한 것인지...,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가슴은 눈물로 젖었다. 방영근은 판자문을 밀었다. 어스름 속에 서 있는 것은 뜻밖에도 김칠성이었다.

"아니, 자네가 어찐 일이여?"

방영근은 뜨악하게 말하며 고개를 틀어 돌렸다. 장사하는 공일날도 아닌데 찾아온 것이 영 이상했던 것이다. 공일날이라고 해도 자신을 피해 다니는 김칠성이었다.

"자네허고 상의할 일이 좀 있어서..."

김칠성은 머뭇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허고 상의헐 일? 글씨이, 나 무신 소린지 잘 몰르겄는디."

방영근은 고개를 외로 튼 채 찬바람나게 대꾸했다. 김칠성이가 농장을 떠나 행상으로 변한 뒤로 방영근은 그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자네한테 해로운 일이 아니니까 저쪽으로 좀 가서 얘기하세."

김칠성은 여전히 옹색스럽게 말했다.

"나헌티 해로운 일이 아니먼 글먼 이로운 일이란 것이여?"

방영근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 말이 왠지 기분 상했던 것이여?"

"여보게, 이젠 날 너무 미워하지 말고 얘기나 좀 들어보게. 내가 한 일을 잘했다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김칠성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방영근은 잠깐 생각했다. 아무리 꼴을 보고 싶지 않더라도 일부러 찾아온 사람이었다. 지난 일을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믿지 않더라도 그대로 퇴짜를 놓기는 인정상 못할 일이었다.

"가드라고, 저짝으로."

방영근은 앞장섰다. 아이들이 조선말과 영어를 뒤섞어 쓰며 어둑발이 번지는 속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꽃들도 밤을 맞이하느라고 색깔 고운 잎들을 오므려가고 있었다. 방영근은 나무 아래 돌방석에 앉았다. 김칠성이도 그 옆에 앉으며 담뱃갑을 방영근에게 내밀었다. 방영근은 담배를 뽑아들며 이 친구가 왜 찾아왔을까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잡히는 것이 없었다.

"저어, 내가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고 자넨 날 미워하지만, 용석이도 죽고 없으니 그래도 내가 친한 건 자네밖에 없으니 그래도 내가 친한 건 자네밖에 없잖나. 다른 사람들도 알긴 하지만 속을 믿을 수가 없고."

김칠성은 여기서 말을 끊고 담배를 두어 모금 빨았다. 방영근은 묵묵히 담배만 피웠다.

"자네하고 상의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니고, 나도 나이 들어 이젠 행상을 더 하기도 어렵고, 그동안에 돈도 좀 모아 자리 잡고 앉아서 일할 만큼도 됐는데, 돈벌이를 이것저것 생각해 보니까 아무래도 세탁소가 제일 나은 것 같더군. 그래서 세탁소를 차렸으면 하는데, 그 일이 혼자서는 어려운 일이라 자네가 나하고 함께..."

"아니, 나보고 자네 밑이서 종업원질허란 것이여 시방?"

방영근이 말을 자르고 들었다.

"이 사람아, 말을 다 들어봐. 종업원질 하라는 게 아니고 나하고 동업을 하자는 거야."

"나야 동업헐 돈이 없제."

"어허, 말을 다 들어보라니까. 일거리는 해군들의 옷을 하기로 길을 터놨으니까 돈벌이는 괜찮을 거고, 자네는 돈이 없어도 되니까 나하고 함께 일하면 다달이 월급은 따로 주고, 그리고 이익금에서 3분의 1을 자네 몫으로 주겠네. 그리 되면 농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두 배는 더 나을 걸세. 자네도 나이 들고 애들은 커가는데 언제까지 파인애플 가시에 찔려가며 고생할 수는 없잖은가. 내 생각이 어떤가?"

농장보다 두 배의 돈벌이..., 나이는 들어가고, 아이들은 커가고... 방영근은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었고, 김칠성은 그 약점을 정통으로 찌르고 있었다. 세탁소.... 그건 돈벌이가 괜찮은지 모르지만 결국 남들의 때 낀 옷을 빨아주는 일이었다. 벌써 조선사람들이 손쉽게 차리고 나서는 업종이었다. 그러나 돈벌이가 괜찮다고 해서 남자가 할 짓인가?....... 방영근은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참을 담배만 빨아댔다.

"...딴 살람얼 구해보소."

마침내 방영근이 말했다.

"아니, 왜 그러나?"

김칠성의 목소리가 당황스러웠다.

"작게 묵고 가는 똥 쌀라네. 휜둥이덜 때 찐 옷 빨아감서 배 잠 더 불르게 살기넌 싫응게."

방영근은 담배를 발끝으로 잉끄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 사람아, 여긴 조선이 아니라 미국이야. 직업이야 뭐가 됐건 돈 있는 사람을 제일로 치는 미국이란 말야. 자넨 미국 사람들 사는 것 보지도 못했나?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 봐. 공일날 또 올 테니까."

방영근은 더 대꾸 없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아이들은 한결 진해진 어둠살 속에서 여전히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모기조차도 꺼리지 않고 동무로 삼는 것인지 아이들의 외침과 웃음소리가 무슨 반짝거림처럼 약동하고 있었다. 모기들이 극성을 떨기 시작할 시각이었다. 하와이에는 뱀이라고는 없었지만 모기나 파리는 그 크기부터가 다른 게 기세가 대단했다. 그런 것들이 살기 좋은 기후 탓일 거였다.

"누가 왔등교?"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던 방영근의 아내가 물었다. 수더분하고 선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 저짝 유서방이 마실나왔등마."

방영근은 적당히 말을 받아넘겼다. 아내에게 아예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도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렸는데 아내는 더 심할지도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아내는 그 누구보다도 자식들을 많이 가르치고 싶어 하는 옥심을 가지고 있었다. 농장 일을 남자 못지않게 열심히 해대는 것도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방영근은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농장을 벗어나 새 밥벌이를 시작한 조선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대개 음식점 세탁소 이발소 채소장사 행상 같은 것을 했다. 그 가게들은 영 보잘 것이 없었고, 손님도 조선사람들을 주로 해서 중국 사람이나 필리핀 사람들이 섞여들었다. 그러나 모두가 다 돈벌이는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망해 다시 농장으로 찾아 들어오기도 했다.

세탁소...., 아무리 생각해도 구질스럽고 더러워 남자가 할 짓이 못되었다. 날마다 빨래를 빨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자 그만 진저리가 쳐졌다. 세탁소에 비하면 농장 일은 돈벌이가 좀 덜 된다고 하더라도 천덕스럽지 않고 어엿한 농사였다. 그리고 벼농사가 그렇듯이 파인애플 농사도 힘겨운 속에서 정성을 바친 만큼 그것들이 자라나고 열매 맺고 익어가는 재미와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날마다 땟국물에 빠져 살면 어찌 될 것인가. 천만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아내와 함께 열성으로 일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아내가 알뜰살뜰하기도 했지만 그동안 돈을 모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려, 농사일이 질이다. 작게 묵고 가는 똥 싸자!

방영근은 다시금 마음을 정했다.

 

 

40. 만주침략

1931918일 마침내 만주사변이 터졌다. 일본의 관동군들이 만주를 침략한 것이었다. 만신철도를 따라, 남만주에서 제일 큰 도시이고 압록강으로부터 중국의 첫 관문인 봉천을 하루아침에 점령한 관동군들은 거침없이 북동진을 감행하고 있었다. 관동군들의 거센 침략 앞에서 중국군들의 대항이란 극히 미미했다. 관동군들의 침략을 너무 갑작스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만주군벌 장학량의 군대는 적극적인 저항에 나서지 않고 관내인 북경 쪽으로 후퇴 작전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이 내린 후퇴 명령이었다. 장개석으로서는 변방에 일본군이 침략하는 것보다 내륙에서 공산당과 싸우는 내전이 더 다급했던 것이다. 관동군들은 무적의 상태인 만주벌판을 하루에도 몇백리씩 점령해 나아가고 있었다. 만주사변은 일본의 조작극에 의해 돌발한 사건이었다. 오래전부터 만주를 손아귀에 넣고자 노려왔던 일본은 결국 침략의 구실을 꾸며내기에 이르렀다. 관동군은 자기네 관할인 만주 철도를 봉천의 외곽지역인 유조구에서 스스로 폭파시켰다. 그러고는 그게 중국 측의 소행이라고 뒤집어씌우는 동시에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전격적인 군사행동을 개시한 것이었다. 방대근은 북만주 영안현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무정부주의 투쟁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노병갑을 만나러 와 있었던 것이다.

"이거 야단났네. 관동군이 기병이고 포병이고 총동원시켜 침략을 감행하고 있다는군."

노병갑이 가지고 온 정보였다. 그는 독립군 장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놈덜 비행기넌 안 띄우겄어."

방대근은 덤덤하게 말을 받았다.

"이놈들이 만주를 전부 집어삼킬 생각일까?"

노병갑은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두말허먼 잔소리제."

방대근은 무표정했다.

"그럼 중국하고 싸우겠다는 건데, 왜놈들 그거 미친놈들 아니야?"

"아니제. 즈그 생각으로야 청나라허고 싸와 이겼고 러시아허고도 싸와서 이겼응게."

"그거 참 골치 아프군. 헌데, 그놈들이 벌써 길림을 넘어섰다는데 그쪽 독립운동 단체들은 어떻게 했을끼?"

"그야 우선 피허는 것이 묘수 아니겄어. 그것이 병법에 기본잉게."

방대근은 어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앞일이 어찌 되겠나?"

노병갑이 담배를 빼들었다.

"많이 에롭게 되겄제."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글씨....., 그냥 당허고만 있기야 허겄능가."

"아니야, 중국 사람들은 영 이상해서 당장 위험이나 손해가 없으면 그저 숨 죽이고 있을지도 모르네."

"아니여. 중국 사람덜이 인자 옛날 청나라 시절 사람덜이 아니시. 신해혁명 뒤로 이 사람덜도 개명헐 만치 개명혔네."

"그렇지도 않아 이 사람아. 개명한 것들이 왜놈들하고 삼시협정을 맺어 우리 독립운동을 그리 방해하고, 우리 동포들을 그리 못살게 굴었단 말인가."

"그야 부패헌 장작림 군벌이 헌 짓거리제 중국 사람 전부가 그런 것이 아니제."

"자넨 관내에 가 있어서 만주 천지가 어떤 꼴이 된 줄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그놈의 협정 때문에 우리 독립투사들이 얼마나 많이 피해를 입고 감옥행이 된 줄 아나? 27년에 고려공청 만주총국 간부 29명이 체포된 것을 필두로 해서 다음 해 신민부 간부 9,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간부와 당원 72, 참의부 간부 40여 명 등 부지기수네. 거기다가 알게 모르게 당한 일반 동포들의 피해까지 생각해 보게."

"그려. 송 선생님헌티 이얘기 들어 나도 그 실상얼 알고 있네. 근디 인자 안 달라질 수가 없네. 장작림이야 왜놈덜 수에 놀아나다가 폭사꺼정 당혔지만 그 아덜 장학량이야 왜놈덜얼 원수로 삼고 있고, 또 만주 땅에 중국 사람덜이 나스게 되야 있는디, 그리 되먼 우리넌 믿을 만헌 동지덜얼 얻는 심이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중국서도 우리허고 손얼 잡을라고 헐 것잉게. 일이 돌아가면 요분 사태가 우리헌티 꼭 불리헌 것만도 아니제."

방대근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럴 수도 있긴 한테....."

노병갑은 왼쪽 볼을 만지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볼에는 전에 없었던 큰 흉터가 잡혀 있었다. 한눈에 칼질을 당한 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군복과 그 흉은 묘하게 잘 어울리고 있었다. 가무잡잡한 그의 인상을 아주 강인하게 하기도 했고, 어쩌면 아주 잔인하게 보이게도 했다.

"자네도 얼렁얼렁 대책얼 강구혀얄 것이고, 나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시. 인자 나가 헌 말에 답헐 때가 안 되았능가."

방대근을 노병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글쎄..., 자네 말 듣고 며칠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난 역시 공산주의는 싫고 무정부주의는 뭔지 모르겠네."

답은 분명했다. 그러니까 현재의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려, 자네 맘얼 알겄네. 근디 나가 보기로넌 말이시, 자네넌 공산주의럴 싫어허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덜얼 미와허는 것 겉고, 무정부주의럴 몰르는 것이 아니라 알라고 허지도 않는 것 겉구마. 나 말이 틀린가?"

방대근은 노병갑에게 눈길을 꽂은 채 정면으로 들이댔다. 노병갑은 묘하게 웃었다. 그리고 눈길을 돌리며 담배를 빼 들었다. 어쩌면 자네 말이 맞는지도 모르지. 난 지금까지도 흑하사변을 잊을 수가 없네. 난 그 사건 이후로 공산주의자들이든 쏘련이든 믿지 않아. 그런데 또 공산주의자들은 우리 김좌진 장군을 죽였네. 난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그리고, 무정부주의라는 건 너무 모호하고 막연해.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뜬구름 잡는 얘기 같단 말야. 그러니 내가 설 자리는 어디겠나."

방대근에게 맞서듯 노병갑의 태도도 분명했다.

"그려, 솔직허니 말해준게 고마우시. 근디, 자네겉이 중책얼 맡고 있고, 또 젊은 사람이 사태럴 잘못 오해허고 있어서야 되겄능가. 흑하사변은 그 당장에넌 진상얼 잘 몰르고 입장에 따라 서로 주장이 다르덜 안혔능가. 그러다가 세월이 흐름서 그 진상이 다 밝혀졌네. 쏘련은 연해주에 진을 히고 있는 일본군헌티 트집 안 잽히고 그놈덜얼 몰아낼라고 일본군헌티 트집 안 잽히고 그놈덜얼 몰아낼라고 일본놈덜이 원허는 대로 조선독립군얼 무장해제시키고 그담에 자기덜 군대에 은폐시켜 합동으로 일본군허고 싸울라고 혔네. 그것이야 흑하사변 뒤에 전개된 빨치산활동으로 입증되었네. 그런디 쏘련에 그런 의도허고넌 별개로 우리 조선공산주의자덜이 파벌대립으로 우리 독립군덜얼 죽이고 무장해제시켰다고 야단이 났고, 독립운동 단체덜언 등사꺼정해서 쏘련얼 성토허고 비난혔네. 물론 진상을 잘 몰랐을 때였응게 얼매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제. 근디 자네넌 어찌서 그때 생각얼 그대로 지니고 있능가?"

방대근은 노병갑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자네 말하는 걸 보니까 자네도 공산주의 물이 들었구만. 그럼 어째서 공산주의자들은 우리 김좌진 장군을 죽였나. 자넨 또 공산주의자들이 모함하는 대로 김좌진 장군을 밀정이라고 할 텐가!"

언성이 높아진 노병갑의 얼굴은 검붉게 흥분되어 있었다.

"아니시. 나도 이런저런 말얼 많이 들었는디 그 말얼 하나또 안 믿네. 나도 그 어런 뫼시고 청산리서 그 어런 뫼시고 청산리서 싸운 사람으로 그분에 지조와 인품얼 믿네. 그분이 화럴 당헌 것언 공산주의에 반대허는 그분 언행에 자극받은 극단적 공산주의자으 소행이제. 그분얼 직접 뫼셔온 자네 심정언 잘 아는디, 그 일허고 공산주의허고넌 따로 구분혀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게 다 그거지."

노병갑은 담배꽁초를 신경질적으로 비벼껐다.

"고것이 그렇덜 않으네. 나야 공산주의자년 아니네만 기차이서 그 속얼 딜에다 봉게 그 사람덜찌리도 극좌라고 허는 극단적 공산주의자덜에 대해서 비판도 많고 경계도 허고 그러데."

"그래 봐야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야."

노병갑의 태도는 단호하기만 했다.

"그려, 나가 공산주의 변호인도 아닝게 그 말언 그만 허세. 근디 우리가 한 가지 명심헐 것이 있네. 자네나 나나 멀라고 만주 땅서 요 고상덜얼 허고 있는가? 그야 천번 만번 물어도 대답언 똑겉이 독립, 독립얼 위해서 아니여? 민족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무정부주의자든 조선사람이먼 그 목적은 다 똑겉이 한나여. 단지 목적얼 달성허는 방법으로 서로 다른 주의럴 택헌 것뿐이란 말이시. 근디 주의가 다르다고 혀서 서로 미와허고 등지고 싸와서야 되겄능가. 아니여, 서로 돕고 손얼 잡고 연합혀야혀. 우리 의열단이 중국공산당이나 조선공산당얼 도운 것언 다 그런 뜻땀시여. 자네넨 공산주의자덜얼 원수 대허디끼 허는디, 나넌 시방 송 선생님 밑에서 무정부주의 투쟁얼 허제만 언제 또 공산주의자로 활동헐란지 몰르네. 독립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허먼 주의야 언제든지 바꾼다는 것이 내 주의잉게로, 글먼 그때 가서 자네 나 가심에다 총질헐랑가?"

"그런 극단적인 예는 들지도 말어."

노병갑은 말허리를 잘랐다.

"아니여, 극단적인 것이 아니여. 보소, 자네도 다 아는 신채호 선생, 이회영 선생, 송수익 선생 겉은 분덜이 어찌서 그 연세에 무정부주의 투쟁에 나스셨겄능가? 그분네덜이 학식으로나 경륜으로나 안목으로나 우리보담 얼매나 높으신가? 세상도 변허고, 상황도 변허고, 민족주의로넌 한계가 있다고 판단허실 것이네. 우리 신흥무관학교 시절에 배운 것이 있제? 안목얼 넓고 크게 갖고 사물얼 바르게 판단허란 것 말이여."

장대근은 잎차잔을 들었다.

", 자네 그간에 의열단에서 폭탄 던지고 암살하는 기술 배운 게 아니라 언변술을 배운 모양이군."

노병갑이 냉소적으로 웃었다.

"맞네. 연애도 많이 허고, 책도 많이 읽고, 토론도 많이 혔네. 근디, 끝으로 한마디만 더 허고 나 뜰라네. 우리 독립지사덜 중에 훌륭허신 분네덜이 많네. 그중 나가 질로 존경허는 분덜이 아까 말헌 세 분이시. 그 분덜이 세운 공도 공이지만 나가 머리숙이는 것언 세 분 다 절대로 직위나 감투에 연연허지 않으신 것이네. 그러니 분파나 파벌얼 지을 필요가 없었제. 우리 독립운동 단체덜이 한나로 뭉치지 못헌 것이 그놈으 직위와 감투 탐해서가 아닌가. 우리가 신흥무관학교 댕길 적에 조장 한나 뽑는 디도 가심이 두근두근혔든 것얼 생각허먼 임시정부 국무령도 헐 수 있는 분데덜이 그리 초연헌 것이야 참말로 굉장헌 일이제. 나도 가끔 가다 감투 욕심이 솔깃혀질 때가 있는디, 그때마동 그분네덜얼 생각험서 맘얼 털고 허능구마. 나 인자 떠야 쓰겄네."

방대근은 다 헐어빠지고 때 전 중국옷을 털며 일어섰다. 그는 영락없는 중국 농부였다.

"아니 이 사람아, 이렇게 느닷없이 가면 어쩌나."

노병갑이 당황스럽게 일어났다.

"무신 소리여. 메칠 잘 묵고 잘 놀았으며 되았제. 그런 급작헌 소식 듣고 더 있어지겄능가."

"그렇긴 하지. 이거 서운해서 어쩌나."

"서운해야 또 만나면 반갑제."

"그래, 송 선생님 안부도 걱정인데 어서 가게."

노병갑은 마차역까지 전송을 나갔다.

"먼 길 조심하게. 관동군들을 맞바라보고 가는 거니까"

악수를 하며 노병갑이 쓸쓸히 웃었다.

"감서 멧놈이라도 보냈으면 좋겄는디. 또 만내세."

방대근은 하늘을 눈짓하며 씨익 웃었다.

"이 사람아, 괜히 딴생각 말고 조심하라니까."

노병갑이 놀라며 정색을 했다.

"그냉 농이시, "

방대근은 손을 흔들며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까맣게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노병갑은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다.

, 그게 나를 두고 한 말이었구나!

노병갑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군복을 내려다보았다. 한족총연합회 소속 독립군 참모장. 자신의 그 직위를 두고 방대근이 그런 말을 했음을 노병갑은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못된 친구, 날 단단히 야유했군.

노병갑은 기분이 불쾌했다. 방대근의 말은, 지금의 감투에 연연해서 다른 주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조병갑은 발길을 돌리며 방대근의 말을 되짚고 있었다. 그의 말은 마디마디에 전부 가시가 돋쳐 있었다.

나는 감투를 탐한 적이 없었던가?

노병갑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떳떳하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참모장자리를 욕심냈었고, 안무부대 출신인 경쟁자에 대해 군관학교를 나오지 않았다고 험담했던 것이다. 방대근이..... 그는 의열단원일 뿐 아무런 직위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방대근은 아무 거리낌이 없었고 당당했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은 신흥무관학교 시절부터 모든 면에서 방대근에게 딸렸던 것이다. 체구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고 인물은 더 말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방대근이야말로 참모장 아니라 사령관을 해도 손색이 없는 능력자였다. 그런데 아무런 고위직도 없이 중국 농부 행세를 하며 의연하게 만주벌판을 오가고 있었다. 노병갑은 괴로운 신음을 씹었다. 지금 방대근은 무슨 생각을 하며 떠나가고 있을 것인가. 길림에서 북만주까지 그 먼 길을 찾아왔을 때는 함께 일할 것을 믿었기 때문일 거였다. 그런데 자신을 거절을 하고 말았다. 그 거절을 꾸짖기라도 하듯 방대근은 긴말을 했던 것이다. 그는 평소에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 노병갑은 방대근이 남기고 간 말들이 모두 가시로 변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방대근도 마차에 흔들리며 노병갑을 생각하고 있었다. 장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노병갑의 모습은 보기에 좋았다. 독립군 참모장, 그 직위도 그의 투쟁경력과 나이에 걸맞게 잘 어울렸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너무 외골수로 막혀 있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만주의 상황이 급변하는 속에서 자칫 잘못하면 그는 골목대장이 될 형편에 처해 있었다. 그렇지만 차마 그것까지 지적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김좌진이 죽고 없는 한족총연합회란 그 앞길을 전혀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만주의 3부가 통합해 국민부가 조직된 것이 293월이었다. 그런데 신민부에 속해 있었던 김좌진은 그 통합에 불만을 품고 휘하의 군정파를 이끌고 분리되어 나왔다. 그리고 영안현에서 새로 조직한 것이 한족총연합회였다. 그런데 6개월 만에 김좌진을 암살당하고 말았다. 총수를 잃어버린 한족총연합회는 이제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방대근은 노병갑의 생각을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겪은 일들이 줄줄이 꼬리를 이어 떠올랐다. 우수리강가에서 허벅지만큼 큰 메기를 몽둥이로 때려잡던 일, 마적 떼의 기습을 받고 맨발에 속옷 차림으로 정신없이 총질을 해댔던 일, 하루를 꼬박 굶고 고구마 하나를 얻어 반씩 나눠 먹으며 집결지를 찾아갔던 일....... 방대근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9월 하순으로 접어든 만주벌판에는 어느덧 가을이 짙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벼 베기하기에 바빴다.

여긴 논농사가 더 어려울 텐데.....

방대근은 또 가슴 뭉클한 서러움을 느꼈다. 논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보면 언제 어디서나 어김없이 일어나는 감정이었다. 그들은 물어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조선사람이었던 것이다. 만주에서 조선사람들은 점덤 더 살리 어려워지고 있었다. 중국지주들이 갈수록 소작료를 올려댔던 것이다. 초기에는 3.7제였던 것이 4.6제로 변했고 다시 5.5제가 되더니 6.4제로 뒤집히기에 이르렀다. 그건 조석 쪽의 영향이라고도 했고, 조선사람들이 자꾸 많아지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 이유야 어쨌거나 간에 가장 중요한 원인은 중국 지주들의 탐욕에 있었다. 작년 말과 금년 초에 걸쳐서 일어난 추수폭동과 춘황폭동에 거의 조선사람들이 앞장섰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공산당원들이 선전하는 계급투쟁에 조선사람들은 그대로 호응하고 나셨던 것이다.

추수나 제대로 하는 것인가.....

방대근은 지삼출 아저씨를 생각했다. 올해 농사는 꽤 풍년이라고 했었다. 이미 관동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지삼출 아저씨를 생각했다. 올해 농사는 꽤 풍년이라고 했었다. 이미 관동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그쪽에서 무슨 피해나 입고 있지 않은지 걱정이었다. 추수한 벼를 약탈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던 것이다.

기차를 갈아탄 방대근은 장춘 역에서 끌어내려졌다. 일본군들이 착검한 총을 겨누며 젊은 남자들을 골라냈던 것이다. 기차에서 끌려 내려졌다. 일본군들이 착검한 총을 겨누며 젊은 남자들을 골라냈던 것이다. 기차에서 끌려 내려간 남자들은 두 줄로 세워져 몸수색을 당했다. 열 걸음 정도의 간격으로 늘어선 일본군들은 언제든지 총을 발사할 수 있도록 앞에총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반항 같은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도록 살벌한 분위기였다. 2백여 병의 남자들 중에서 예닐곱 명이 줄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들의 몸에서 칼이며 많은 액수의 돈이 나왔던 것이다. 그들은 총을 겨눈 네 명의 군인들에게 역건물 쪽으로 끌려갔다. 방대근은 칼을 지니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었다고 안도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신속하게 10명씩 조를 짠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빨리 10명씩 조를 짜라!"

일본도를 휘두르는 군인의 말을 한 남자가 중국말로 바꾸었다. 그 통변은 중국옷을 입지 않았을 뿐이지 중국 사람이 틀림없었다.

참 잽싸게도 붙어먹는다.

방대근은 이 생각을 하다가 자신의 생각이 빗나간 것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런 자들은 진작부터 일본의 밀정으로 암약해 왔을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군인들은 재빠른 동작으로 사람들을 열 줄로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곧 대열이 이루어졌다.

"지금부터 저쪽 열차에서 하역작업을 실시한다. 누구든 잔꾀를 부리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 조가 전부 단체기합을 받게 된다. 그러자 작업을 빨리 끝내는 조는 바로 기차로 보내줄 것이다. 모두 열심히 하라!"

화물차 칸마다 한 조씩 배치되었다.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화물차의 문을 열었다. 차량마다 물건들이 가득가득 들어 있었다. 그러나 포장된 그 물건들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군인들의 감시 속에서 그 물건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 왜놈들하고 상면을 이렇게 하다니.

방대근은 끙끙 힘을 써대며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강압적 노동을 당하는 것은 오히려 통쾌했다. 일본군들은 총칼로 위협할 줄만 알았지 그런 행위가 만주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반감을 사게 될지는 계산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런 일을 많이 저지를수록 이쪽의 투쟁은 유리해지는 것이었다. 짐들은 하나같이 크기보다 무거웠다. 그것들이 무기이거나 탄약 종류일 거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이것들을 다 폭파해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방대근은 몇 번이고 그 생각을 했다. 두 시간 정도가 걸려 하역작업을 끝냈다. 날씨가 서늘서늘한데도 사람들은 모두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기차로 돌려보내면서도 일본군은 수고했다는 빈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방대근은 장춘까지도 관동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셈이었다. 그런 식으로 나간다면 앞으로 한두 달이면 만주 전역을 장악할 것 같았다. 장춘은 만주의 거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 말을 시작했다.

"장춘은 또 언제 점령했나?"

"그러게 말야. 이거 큰일났군,"

"우리 군대는 뭘하고 있는 거야?"

"이런, 자다 일어났소? 관내로 철수했다는 소문난 지가 언젠데."

"빌어먹을,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하는 게 무슨 놈의 군대야."

"그러니 세금 헛냈지."

"소문대로 일본군인놈들이 아주 돼먹지 못했군."

"아주 형편없는 악질들이야."

"저런 것들 맡에서 어찌 살지?"

", 저 군대는 아무것도 아니오. 더 무섭게 설치고 다닌다는 소문도 못 들었소?"

"더무서운 거?"

"거 낭인팬지 뭔지가 마적떼보다 더 무섭게 설치고 다니다는 소문도 못 들었소?"

"낭인패가 뭐요?"

"이런 답답하기는. 일본마적떼라고 생각하면 되오."

"그 낭인패가 군대하고 한통속이라는 말이 맞는 거요 어쩌는 거요?"

"그러니까 그리 멋대로 설치는 거 아니오."

"어떤 조선사람들 동네에서는 그놈들이 여자들을 강간하고 재산까지 다 털어갔다는 거요."

"그래도 그건 나은 편이오. 어느 동네서는 집들까지 다 불질렀다고 합디다."

"조선사람들 동네만 그러는 게 아니오. 우리 중국 사람들도 당하기는 마찬가지요."

"이거 정말 큰일이네. 관내로 이사를 갈 수도 없고."

방대근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기차 안 어디에 앞잡이들이 섞여 있을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가슴에서는 불길이 일고 있었다. 새로운 싸움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싸워야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길림역에도 일본군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방대근은 서둘러 역을 빠져나왔다. 마음은 백여 리 밖 집으로 줄달음질 치고 있었다. 넓은 역 마당으로 나오던 방대근은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빽빽이 둘러선 마당 가운데에서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함소리는 분명 일본말이었다. 아무리 집에 갈 마음이 급해도 그걸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방대근은 그쪽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사람들이 그리고 있는 동그라미 안에서는 한 사내가 두 명의 일본군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두 일본군은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사내를 번갈아 가며 걷어차거나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사내의 얼굴은 이미 피투성이였고 중국옷도 흙범벅이 되어 있었다.

"저 사람이 뭘 잘못했소?"

방대근은 옆의 남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뚱한 얼굴로 그저 고개를 저었다. 방대근은 모여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남자들만도 어림잡아 육칠십 명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은 옆의 남자처럼 표정 없는 얼굴들로 자기네 중국 사람이 폭행당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무표정한 구경꾼들일 뿐이었다. 방대근은 몸속에서 찬바람이 휘도는 전율을 느꼈다. 그 무표정한 침묵, 그건 바로 비겁한 침묵이었던 것이다. 일본군이 중국 사람을 그리 심하게 두들겨 패는 것도, 많은 중국 사람들이 그 광경을 무감각하게 구경만 하고 있는 것도 처음 대하는 것이었다.

이래 가지고서 뭐가 될 것인가!

방대근은 이런 충격에 부딪혔다. 그의 의식 속에서는, 만약 그 사내가 비밀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쩔 것인가 하는 생각이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 사내가 비록 얻어맞을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저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아마 저 사람들이 처음 당하는 일이라서 그러겠지...

방대근은 중국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을 애써 지우려고 했다. 저런 일을 자꾸 당하면서 분노하게 되고, 그 분노들이 모아져 공분으로 자라나게 되고, 그 공분이 자각적 증오로 바뀌어 폭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선사람들도 저럴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차 역으로 가면서도 방대근은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방대근은 마차를 타고 가며 줄담배를 피워댔다. 이 생각 저 생각 머리가 복잡했던 것이다. 앞으로 의열단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송수익 선생은 또 어떻게 할 것인지. 장학량의 군대와 조선독립군은 어떻게 할 것인지. 조선혁명당에서 분열된 국민부파와 공산당파의 독립군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장학량의 군대와 중국공산당은 어떻게 할 것인지. 중국공산당은 관내에서처럼 군대조직을 갖출 것인지. 의문만 무성할 뿐 그 어느 것도 확실한 답은 없었다.

"아이고메 대근아, 니 인자 오냐!"

마차에서 내리던 방대근은 깜짝 놀랐다. 이쪽으로 내닫고 있는 것은 수국이 누나였다.

"여그 어쩐 일이여?"

"아이고, 피 다 보타부렀다. 얼렁 오제."

반가움이 넘치는 수국이는 주먹으로 허공을 쳤다.

"온다고 정신없이 온 것이구마."

방대근은 수국이 누나한테서 문득 어머니를 느꼈다. 그 목소리며 몸짓이 꼭 어머니 그대로였던 것이다.

"아이고메, 노총각 기둘리다가 허리 다 빠지겄네."

필녀가 다가서며 과장되게 허리를 쿵쿵 두들겼다.

"아니, 필녀누나도 나왔소? 왜덜 이러요? 나가 과거급제허고 오는 것도 아니고."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방대근은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얼렁 가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닝게."

수국이가 동생의 팔을 잡아끌었다.

"무신 일 났능가?"

방대근은 낮고 빠르게 물었다.

"동네 들어가먼 안돼야."

수국이의 대답도 낮고 빨랐다.

"선생님언?"

"피허셨어. 시방 글로 가는 것잉게 더 암 말도 말어."

수국이도 필녀도 걸음이 빨라졌다. 방대근은 뚜벅뚜벽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41. 협박과 회유

"어이, 그러지 말고 담뱃값언 잠 주소."

정재규는 똑같은 말을 세번째 했다. 아내의 눈치를 슬슬 살피는 기죽은 그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많이 잡혀 있었다. 삼사 년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파삭 늙어 있었다. 결국 미두로 재산을 다 날리고 빚쟁이한테 집까지 빼앗긴 다음부터 그는 팍팍 늙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 윤씨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인두질만 하고 있었다. 꼭 다물린 윤씨의 입언저리에는 화가 잔뜩 뭉쳐져 있었다.

"어이, 안 딛긴가? 담뱃값 잠 돌란 말이시."

"자작으로 댈 돈 없으먼 그놈으 담배 끊으씨요!"

마침내 윤씨가 입을 열며 인두를 화로에 푹 꽂았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차고 매섭기가 칼날이었다. 그리고 인두를 화로에 거칠게 꽂는 그 손짓에서 울화가 파르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 야박허니 허지 말소. 이 나이에 담배꺼정 끊으먼 무신 재미로 살겄능가."

정재규는 비굴하게 웃으며 질기게 달라붙었다.

"아니, 머시라고라? 이 나이에 사는 재미 찾게 생겼소 시방? 만석꾼 재산 그 못된 주색잡기로 다 털어묵고 나럴 이 나이에 섟바느질 시케묵게 맨글어놓고, 아덜 한나 있는 것..."

"아이고, 아이고, 되았네 되았어..."

정재규는 인두에라도 덴 것처럼 후닥닥 일어나 방을 뛰쳐나갔다. 아내의 그 넋두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과거사가 시시콜콜히 들춰지고 까발려질 참이었다. 그 장탄식에 걸려들었다 하면 그나마 바깥출입도 못 하고 하루해가 다 가도록 곤욕을 치를 판이었다. 이제 뜸해진 편이었지만 집까지 빼앗기고 난 처음 몇 달 동안에 당한 곤욕을 생각하면 징글징글하고도 넌덜머리가 났다. 소리를 지르거나 사납게 나대며 덤비기라도 했으면 이쪽에서도 무슨 수를 써볼 수도 있을 거였다. 그런데 정작 미칠 일은 소리를 높이지 않는 대신 바짓가랑이를 꽉 틀어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아내가 지쳐서 그만 둘 때까지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지는 끝도 없이 긴 넋두리를 듣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엄니, 아부지헌티 인자 너무 그러지 마씨요."

방으로 들어선 딸이 윤씨 옆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니 헐 일이나 혀."

윤씨는 옆에 놓인 일감을 딸에게 밀치며 싸늘하게 내쏘았다.

"남자 체면에 담배도 없으먼..."

"니가 머럴 안다고 잔소리냐? 그 담뱃값이 참말로 담뱃값인지 아냐? 참새가 방앳간 못 잊어 허드라고 또 미두장에 찾어가서 그놈으 하마꾼질럴라는 것이제."

윤씨의 서슬에 딸은 더 말을 못 하고 일감을 끌어당겼다. 사립을 나선 정재규는 하늘을 보고 한숨을 토했다. 수중에 땡전 한 닢 없으니 오라는 데도 없고 갈 데도 없었다. 그의 입성은 주름진 얼굴만큼 볼품없고 후줄근했다. 한창 기세 좋게 돈을 써대던 시절에 맞춰 입은 양복은 색이 바래고 낡은 데다 때까지 절어 있었다. 그리고 가죽이 갈라지고 뒷굽이 닳아빠진 구두는 양복보다 더 궁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차림새보다 더 초라한 것은 그의 집이었다. 다 낡은 초가삼간은 옛날의 만석꾼 기와집에 비하면 움막이나 다름없었다. 문간채 사랑채 안채에다 별채 곳간까지 있었던 거옥에서 내몰려 곧 주저앉을 것 같은 초가삼간 신세로 몰락한 것이었다. 그 초가집의 지붕은 다른 집들에 비해 지붕이 유난히 검은 회색이었다. 지난 가을에 이엉조차 갈아입히지 못했던 것이다. 부자가 망해도 3년 먹을 것은 있다는 말은 정재규하고는 인연이 없었다. 미두에 휘말려 집까지 잡혀 먹고 말았으니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재규는 맥빠진 발길을 터덕터덕 옮겨놓고 있었다. 날은 춥고 갈 데는 없었다. 담뱃값이라도 받아냈어야 하마꾼 행세나마 될 터인데 아내는 바늘끝 하나 들어가지 않는 차돌멩이였다. 아내는 돈만 한 푼도 안 주는 것이 아니었다. 집에서 쫓겨난 이후로 잠자리를 한 번도 같이 한 일이 없었다. 어쩌다 손을 뻗치면 파르르 일어나 앉고 말았다. 내외간의 장을 완전히 뗀 것이었다. 어쩌면 그럴 만도 하다 싶기도 했다.

"아니, 집꺼정... 집꺼정..."

집을 빼앗기게 된 것을 안 아내는 대청마루에 넘어지며 까무러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다음부터 자신을 쳐다보는 아내의 눈은 예전의 눈이 아니었다. 그나마 잠을 재워주고 밥을 먹여주는 것도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몰랐다. 정재규는 몸을 웅크리고 찬바람 속을 걸으며 동생 상규를 찾아가 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창피만 당하지 돈을 줄 놈이 아니었다.

"! 재산 탈탈 털어묵고 요런 꼴 날지 진작에 알었소. 나헌티 덕 뵌 것이 머시가 있다고 손벌리고 뎀비요, 뎀비길. 나가 맘만 묵었음사 그 집도 차지혔을 것이오. 근디 으찌서 그만둔지 아시오? 재수대가리없어서 그랬소. 그 집언 아부지 대로 운세가 다 끝난 것이다 그 말이오. 나가 그간에 얼매나 논얼 늘쿤지 아시오? 8천 석이오, 8천 석. 인자 만석꾼 될 날 낼모렌게 눈 똑똑허니 뜨고 귀경이나 잘허씨요."

작년에 찾아갔을 때 상규가 침을 튀기며 한 말이었다. 그동안 그놈이 자신의 논을 사들여왔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치솟는 성질대로 하자면 따귀를 갈기고 싶었었다. 그러나 그건 순간적인 감정일 뿐이었고, 팔면 따귀를 갈기고 싶었었다. 그러나 그건 순간적인 감정일 뿐이었고, 팔려고 내놓은 논을 누가 샀든지 그건 상관할 바가 못 되었던 것이다. 정재규는 막내동생 도규네를 생각했다. 동생도 없는 집에 계수한테 손을 벌리기는 면목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상규를 찾아가는 것보다는 실속 있는 일이었다. 아내가 알면 펄펄 뛸 일이었지만 그동안 서너 차례 담뱃값을 얻었던 것이다.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말을 꺼내면 계수는 상규놈처럼 박절하게 끊지를 못했다.

가만있거라....., 도규가 3년 반을 언도받았으니까 풀려날 날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그래, 잘됐다.

정재규는 도규네를 찾아갈 구실을 찾아냈다. 출감날짜를 알아보고 어쩌고 하면 걸음이 자유스러워질 거였다. 정재규의 발길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기시느냐."

대문을 연 머슴의 아내에게 뒷짐을 진 정재규가 물었다. 거드름을 피우는 그의 목소리와 태도는 여전히 양반의 기세 그대로였다.

"아아, 기시는디요....."

머슴의 아내는 고개를 약간 숙이기는 했으나 눈을 치떠 정재규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 태도만큼 어조도 공손하지가 못했다. 싫은 기색과 함께 왜 왔느냐고 따지는 투였다.

"나 왔다고 일르거라."

정재규는 그런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문 문턱을 넘어섰다.

", 주색잡기로 패가망신허고 알거지 된 꼬라지에 그려도 양반 행세 넌 다 허고 앉었네"

종종걸음을 치며 앞서가고 있는 머슴의 아내는 이렇게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아이고, 날도 추운디 큰아부님께서 어쩐 걸음이신가요."

정도규의 아내 김씨가 대청마루로 나서며 인사했다. 김씨는 싫은 기색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정재규에게는 재산분배 때 이미 마음을 닫았던 것이다.

"거 머시냐, 동상 출감이 가차와진 것 겉애서 날짜도 알아보고, 조카덜도 잘 큰가 어찐가 알아도 보고 헐라고....."

정재규는 점잖게 헛기침을 했다.

"예예, 추우신디 안으로 드시제라"

김씨는 예절을 깍듯이 갖추는 체했다. 어쨌거나 집안의 장자였던 것이다. 정재규는 방으로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여름도 아닌데 밖에서 얘기를 한다는 게 격에 어울리지 않았고, 속마음이 너무 빨리 드러낼 수도 없어서 대청으로 올라섰다.

"출감날짜가 어찌 되오?"

정재규는 계수가 권하는 대로 아랫목에 자리 잡으며 물었다.

", 이달 그믐이구만요."

"글먼 얼매 안 남었는디, 경성언 언제 올라갈 참이시오?"

"하로 전에 올라갈랑마요."

"나도 올라가 보기넌 올라가 봐야 헐 참인디 땡전 한 닢 없는 신세니 원....."

정재규는 은근슬쩍 속마음을 내비쳤다.

"아니구만요, 날도 춥고 헌디 고상시럽게 멀라고 가시고 그래라우. 그냥 지 혼자 댕게올랑마요."

김씨는 당황스럽게 말했다. 비용이 곱으로 드는 것보다도 마음에 안 들고 궁상스러워지기까지 한 시아주버니와 동행한다는 것이 끔찍스러웠던 것이다.

"아그덜언 공부 잘허요?"

"예예....."

김씨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마음이 불안했다. 자신의 말에 대꾸는 없이 딴말을 꺼내버리니 경성을 따라나서겠다는 것인지 어쩐지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상규넌 더러 오요?"

"통 걸음이 없으시구만요."

", 그놈이 영 느자구가 없고. 나헌티만 박절허니 허는 것이 아니라 여그도 그리 몰인정허니 허다니. 동상이 없는 집안에 더러더러 계수씨도 찾어보고 조카덜도 살피고 허는 것이 사람에 도리고, 넘덜이 보드라도 체면이 스는 일 아니겄소. 자석이 돈에만 인색헌 것이 아니라 정에도 그리 인색하단 말이오. 그것이 어디 돈 드는 일이오."

정재규는 돈 울거낼 생각에만 급급해 손아랫사람에게 손윗사람의 험담을 하는 체통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돈을 뜯어내려고 찾아온 자신의 행위를 사람의 도리로 둔갑시키는 교활까지 부리고 있었다.

"......"

"그놈이 나 덕얼 몰라보는 놈인디 동상집 우환이 안중에나 있겄소. 그놈언 에랬을 적 보톰 욕심만 많고 인정이 없어서 선친께서도 미와헌 놈잉게 서운케 생각덜 마씨요. 그놈에 비허먼 도규넌 인정도 많고 사리도 ㅂ은 것이 나무랠 디가 없소. 나 덕에 고마워헐지도 알고."

정재규는 계수가 돈을 내놓지 않을 수 없도록 몰고 있었다.

"......"

김씨는 말을 참고 있을 뿐이지 속이 꼬이고 있었다. <내 덕, 내 덕> 해대는데 도대체 자기가 동생들에게 보인 덕이 무엇인지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똑같이 삼등분해야 될 재산을 억지로 더 뺏어가서 주색잡기에 다 탕진한 주제에 이제 와서 뻔뻔스럽게도 <내 덕> 타령이었다. 작은 시아주버니가 박절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속 시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작은 시아주버니를 욕하면서 남편을 치켜세우는 그 음흉한 속이 뱀보다 더 징그러웠다.

"글먼, 나허고 항께 상경허고 허먼 계수씨도 불편시럽고 헐 것잉게 혼자 편허니 댕게오도록끔 허씨요. 나가 갈 디가 잠 있응게 인자 그만....."

정재규는 무슨 인심이라도 쓰듯이 말하고는 일어설 눈치를 보이며 뭉그적거렸다.

"이리 찾어봐 주신게 고맙구만요."

김씨는 건숭으로 인사치레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겉으로 보기에는 배웅을 하려는 아랫사람의 예절바른 태도였지만 속으로는 어서 가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뭉그적거리는 속셈을 빤히 알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외면했다.

"저그 머시냐..... 절친헌 집에 초상이 났는디..... 빈손으로 갈 수도 없고, 안 갈 수도 없고...... 어찌 잠 나 체면얼 세와줬으먼 쓰겄는디....."

정재규는 머리를 짜내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을 꾸며대고 있었다. 차마 담뱃값을 달라고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부조넌 얼매나 혀야 되는디요?"

김씨는 일부러 이렇게 물었다. 막연하게 돈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입으로 달라는 액수를 말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맴이야 많이 허고 잡제만 나가 갓끈 떨어진 신센게 한 2원 허먼 넘치지도 쇠지도 안컸는디....."

정재규는 속이 타는지 입술에 침을 축였다.

"우현이는 우리 집안 장손으로 아버님 어머님 제사를 지낼 아이오. 허고, 그애한테 무슨 죄가 있소. 우리 재산을 결국 아버님 것이니까 그애의 학자금만큼은 우리가 대야만 아버님에 대한 도리요. 형수님한테 한 약속이니까 마음 쓰지 않게 미리미리 갖다 드리시오. 허나 형님한테는 한 푼도 줄 필요가 없소. 탕진한 만큼 고생을 해야 하니까."

남편이 면회 때 한 말이었다. 김씨는 그 말을 지키지 못한 것이 짐이 되어 있었다. 큰 시아주버니한테 벌써 여러 차례 돈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밉고 남편의 말도 있었지만 막상 면대를 하고서 야박하게 내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어려운 시아주버니였고, 바라는 돈도 거절할 만큼 큰돈이 아니었던 것이다.

"즈그도 옥바라지허니라고 돈이 째이고 시아주버님 처지도 다 알고 헝게 1원만 허시제라."

김씨는 그 돈이 부조금으로 쓰일 것이 아님을 다 알고 반으로 깎아내렸다.

"딴 디 가서 또 구해 보태드라도 어쩔 수가 있겄소."

정재규의 얼굴은 비로소 밝아졌다. 깎일 줄 알고 미리 2원을 불렀던 것이니 목적한 바는 완전하게 달성했던 것이다.

", 잘 쓰겄소. 고마우요."

김씨가 방바닥에 밀어놓은 돈을 정재규는 얼른 집어들며 일어섰다.

만석꾼 장자 참 싸다.

김씨는 경멸적인 냉소를 입에 물고 배웅을 하려고 나섰다. 찬바람 속을 헤치는 걸음걸이는 아까와는 딴판이었다. 활개질 치는 걸음걸이에 기운이 넘쳐나고 있었다.

"아이고메, 붕알 다 얼겄다."

신작로에 다다른 정재규는 몸을 부르르 떨며 내뱉었다. 얼굴에 소름이 잔뜩 돋은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군산에 나가는 것도 급했지만 너무 추워 몸부터 녹여야 했다. 그는 대서방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정재규는 대서방 유리창문을 옆으로 밀치며 들어갔다. 무쇠난롯가에 둘러앉은 제 남자의 눈길이 정재규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심드렁하고 시큰둥한 얼굴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날이 찹구만요."

한 남자가 마지못한 듯 앉은 채로 인사말을 건넸다. 그는 대서방 주인이었다. 전에는 정재규 앞에서 사족을 못 쓰고 굽실거린던 사람이었다.

"어이, 한냉허시."

정재규는 일부러 문자를 썼다. 그것으로나마 너희들과는 지체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었다. 난롯가를 다 차지해 버린 그들은 누구 하나 정재규에게 자리를 내줄 기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대서방 드나들며 일거리도 물어오고 잔돈푼도 뜯어 쓰고 하는 그들은 정재규와는 구면이었고, 그가 한창때에는 다 술값을 받아썼던 위인들이었다. 그런 그들 뒤에서 손을 비비고서 있는 정재규의 모습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근디, 그 정신 나간 인종 이름이 머시라고 혓어?"

", 이봉창이랑게, 이봉창."

그들은 잠시 끊겼던 이야기를 잇대기 시작했다.

"그 사람 어찌 될랑고?"

"보나마나 사형이제 어째."

"그려, 딴사람도 아니고 천황얼 죽일라고 폭탄얼 던졌시니 더 볼 것없제."

"근디 말이여, 천황이 죽었시먼 어찌 되았으까? 독립이 됐을랑가?"

"자다가 봉창 뚜딜기는 소리 말어. 천황 아덜이 천황 자리에 앉으면 그만이고, 조선사람덜만 더 죽어났겄제."

"근디 요상허단 말이여. 일본이 만주꺼정 다 집어묵어 부렀는디도 독립허겄다고 그리 나스는 사람덜이 있당게."

"그렁게 넋나간 인종덜이제."

"만주꺼정 일본것 되야부렀시니 인자 독립이고 머시고 영 글른 것 아니여?"

"그야 두말허먼 잔소리제."

"글먼 으쩐디야?"

"으쩌기넌 머시럴 으쩌. 밥술이나 뜨고 살라먼 일본사람덜헌티 더 찰싹 붙어야제."

"고것이 상수넌 상수겄제?"

"하먼, 요런 시상에서넌 잘났다고 나대는 것이 빙신이여. 그저 눈치싸게 처신험서 그작저작 사는 것이 질이제."

"그려, 나대다 죽는 놈만 빙신이제."

그들의 이야기가 끊어졌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이 동경의 루전문 밖에서 일본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193218일에 일으킨 그 거사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어이, 담배나 한대 주소."

정재규는 참다못해 대서방 주인에게 말했다.

"담배가..., 담배라아..."

싫은 기색이 완연해진 대서방 주인은 꿈지럭거리며 담배 찾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담배 살 돈 없음사 담배럴 끊는 것이 옳고, 그리 못허겄으먼 궐련 얻어피울라 생각 말고 써럭초럴 피워야겄제."

한 남자가 이렇게 내뱉으며 유리창문을 드르륵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 , 머시여!"

정재규는 말을 더듬으며 얼굴에 노기가 솟았다.

"아이고 머 참으시게라. 담배 여깃구만요, 담배."

대서방 주인이 담배 한 개비를 달랑 정재규 앞에 내밀었다. 담뱃갑을 내밀었다가는 서너 개비 뽑아갈지도 몰라 미리 대비한 것이었다.

"그려..."

정재규는 그 담배 한 개비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두어 모금 깊게 빨아들인 정재규는 아무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참말로, 사람 추접시럽게 되야부렀네."

"나 겉으먼 모랫바닥에 쌔럴 박고 죽었으먼 죽었제 그 담배 안 받아 피우겄네."

"그 담배 패대기럴 쳤으먼 나가 한 갑얼 딱 사줄라고 혔는디."

"있든 집 새끼덜이 망허먼 더 드럽게 변허는 것이여. 쬐깨 더 두고 보소. 군산 바닥 꽁초가 동날 것잉게로."

"몰르제. 시방도 넘덜 안 보는 디서야 슬금슬금 집어 피우는지."

"저 물건 시방 어디 가는 것이여?"

"어디넌 어디겄어. 미두장에 가제."

"저 꼬라지 해갖고 멀라고?"

"하마꾼질허제 어째."

"속창아리도 없는 인종이시."

"창아리있음사 담배 얻어피겄어."

"허기사 그려. 근디 그놈에 미두가 인백이먼 아편맨치 지독헌 것 아니여?"

"주색잡기야 다 그렇제."

"근디 그놈에 미두가 아조 요상허당게."

"머시가?"

", 어ㅊ게 된 놈에 것이 백에 백 놈이 판판이 망해 넘어가기만 허제 돈얼 따는 놈언 하나또 없냔 말여."

"실답잖기넌. 돈 따는 놈덜이야 왜놈덜이제 누구여."

"고런 눈치야 누가 몰르간디. 그 판속이 어쩌크름 되냔 것이제."

"고것얼 알먼 여그 이러고 앉었겄어."

"고상 몰르고 큰 부잣집 새끼덜이 등골 다 빼믹히는 것인디, 어쨌그나 왜놈덜이 수완이 좋기넌 존 놈덜이여."

미두에 직접 뛰어들어 전재산을 날려버린 정재규 같은 사람도 그 속내를 모르는데 그들이 알 까닭이 없었다. 미두는 한마디로 미두회사들의 조작과 농간으로 이루어지는 사기극이었다. 미두장 둘레에 자리 잡고 있는 미두회사들의 연간수입은 10만 원이 넘었다. 한 회사의 수입을 10만 원씩 잡고 10개의 회사면 100만 원이었다. 쌀 한 가마에 10원씩으로 높게 잡아주더라도 100만 원이라는 돈은 쌀 10만 가마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그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은 바로 미두꾼들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미두회사들이 서로 짜고 속임수를 쓰는 첫 번째 것은 가격 조작이었다. 일본 대판 미두장의 쌀값은 올라도 군산 미두장의 쌀값은 오르지 않았다. 그런 내막을 알 리 없는 미두꾼들은 나날의 가격변동에 눈에 핏발이 섰다. 미두회사들이 부리는 두 번째 농간은 사재기였다. 가격 조작으로 쌀값이 폭락하면 사들였다가 쌀값이 폭등하면 팔아넘기는 수법이었다. 그런 이중의 속임수 속에서 미두꾼들은 정신없이 놀아나다가 백이면 백 망하고 엎어지는 것이었다. 어쩌다 미두장이나 미두회사에서 횡포를 부리는 수가 있었다. 너무 허망하게 돈은 날린 미두꾼이 분김에 저지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이내 출동한 경찰에 꼼짝없이 붙들려갔다. 은행과 마찬가지로 미두회사들은 철저한 관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고서완은 신작로 가까이에서 담당형사에게 붙들렸다.

"어디 행차시여? 날도 차운디."

어깨 벌어진 형사가 고서완의 앞을 가로막으며 기분 나쁜 웃음을 입가에 물고 있었다.

"한성 좀 가는 거요."

고서완의 무표정한 대꾸였다. 그의 핏기없는 얼굴에는 병색이 내비치고 있었다.

"한성언 또 머시여, 경성이제." 형사는 트집 잡듯 말을 걸고 들며, "어디고 집 떠날 적에넌 미리 신고허고 허락받으란 지시 까묵었어? 가차운디도 아니고 경성꺼지 갈람서 누구 맘대로 이려, 이거!" 그는 사나운 눈초리로 고서완을 노려보았다.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하루 만에 곧 내려올 거요."

고서완은 형사의 눈길을 피해 먼데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잔소리 말어! 하로 아니라 한나절얼 집얼 떠나도 지시대로 혀얀단 말이여. 경성 가는 용무가 머시여?"

"책 구하러 가요."

사실대로 말을 했다가는 그물에 걸려들 것이 분명해 고서완은 슬쩍 눙치고 들었다.

"체액? 무신 책인디? 또 공산주의 퍼칠라는 책이겄제?"

"아니오."

"아니기넌 머시가 아니여. 고런 못된 책 구헐라는 심뽄게 나 눈 피해 살짝 빠져나갈라고 헌 것이제."

고서완은 올가미가 목에 감기는 것을 느꼈다.

"그게 아니오. 반년 동안 집에 갇혀 책만 읽다 보니 더 읽을 책이 없소."

". 말이야 그럴듯허시. 본시 공산주의 허는 인종덜언 말얼 아구가 딱딱 맞게 잘허제. 여그서 말히서 될 일이 아닝게 따라와!"

형사는 옆에 세워둔 자전거 뒷바퀴의 받침대를 거칠게 걷어찼다. 고서완은 맥이 빠지는 걸 느끼며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그 어떤 이유를 대든 한성에 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 뻔해 살짝 그냥 다녀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동네를 벗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형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건 동네 사람 누군가가 형사의 끄나풀로 자신을 줄곧 감시해 오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형사는 닷새 간격으로 찾아올 뿐이었다. 기다렸던 정도규의 출감 마중은 못 하게 되고 말았다. 정도규와 함께 재판을 받은 고서완의 형량은 3년이었다. 주동자가 아니라서 6개월이 가벼웠던 것이다. 그러나 반년 전에 출감한 고서완은 감옥살이나 마찬가지의 생활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담 형사가 붙었고, 동네를 벗어날 때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사전에 보고하고 허락을 받으라는 연금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고서완은 허약해진 몸을 돌보면서 나날이 우울했다. 그런 조처는 자신에게만 내려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건 바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고사 작전인 동시에 독립운동의 사전 봉쇄책이었다. 그 새로운 책략 앞에서 어떻게 대응해 나아가야 할 것인지 막막하기만 했다. 고서완이 경찰서에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있는 사이에 정도규는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뜻밖의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들었다. 총을 든 경찰 둘과 소복을 입은 한 사람이었다.

"나 전 형사여. 나가 자네 담당이로구만. 앞으로 자네 맘대로 동네럴 떠서넌 안돼야. 만약에 동네럴 뜰 적에넌 이유 여하럴 불문허고 사전에 나헌티 보고허고 허락얼 득허란 말이여. 이 명령얼 어기는 날에넌 어찌되는지 알겄제. 또 콩밥 신세여. 글고 나 말 잘 새겨들어. 자네가 놀아나든 그놈에 공산주읜가 무신 귀신단진가넌 깨끔허니 털고 잊어부는 것이 졸 것이여. 인자 뜻대로 안될 것잉게. 감옥서 고상험서 많이 생각혔것지만 시상언 그전 시상이 아니게 변혔응게 어서어서 개심허는 것이 질일 것이여. 나보담도 많이 배왔응게 눈치도 더 빨를 것인디 말이여, 만주꺼정도 다 일본 것 되아분 판에 독립이고 머시고가 될 일이겄어? 개꿈꾸덜 말고 개심히서 편허니 사는 것이 질이여. 되지도 안헐 일 험서 자꼬 몸 상허다가 지 명대로 못 살고 죽으먼 누가 알아주기나 허간디? 잘 생각혀 보드라고?"

전가라는 형사는 협박에 회유까지 곁들이고 있었다. 정도규는 그때서야 왜 고서완이가 서울에 올라오지 못했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앞길에 드리워진 어둠의 장막을 보았다. 정도규는 열흘 가까이 앓듯이 누워서 보냈다. 그동안에도 고서완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도 얼마나 심하게 행동통제를 받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 형사가 또 찾아들었다. 그는 벌써 두 차례나 다녀갔던 것이다.

"인자 기운 채릴 만허니 되았겄제?"

전 형사는 맘놓고 반말짓거리였다.

"..."

정도규는 본 척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책에만 눈을 박고 있었다.

"사람 말아 말 같덜 안혀?"

전 형사의 목소리가 비틀렸다.

"필요한 말만 하시오."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정도규의 대꾸는 낮고 싸늘했다.

"필요헌 말? 그러제. 이따가 경찰서로 나와!"

전 형사가 느닷없이 내쏜 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정도규는 비로소 눈길을 돌렸다.

"못 알아들을 소리가 머시여?"

전 형사가 눈을 부라렸다.

"왜 오라는 거냔 말이오."

정도규가 상대를 맞쏘아보았다.

"점심때 지내 두세시꺼정 사찰과로 나와. 호출 명령잉게 명심혀."

전 형사는 삐딱하게 쓴 도라우찌라는 모자를 약간 들어올렸다가 팍 눌러쓰는 손짓을 하며 돌아섰다.

호출 명령?... 정도규는 무슨 일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먼저 잡히는 것이 진봉면의 다목농장 소작인들이 일으키고 있는 소작쟁의였다. 8백여 명의 소작인들이 쟁의를 탄압한 주재소를 포위하고 맹렬한 시위를 며칠째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다목농장은 특히나 인심 사납기로 소문나 있었다. 농장주인 다목은 일본 정치계에 몸담고 있는 인물이었는데, 농장에는 추수철에 한 번씩 모습을 나타냈다. 그런데 그의 집은 호화롭기 이를 데 없이 꾸며져 있었다. 1년에 미처 한 달도 머무르지 않는 그 집의 지붕은 구리기와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올 때쯤이면 소작인들이 동원되어 며칠씩이고 녹을 닫아내 지붕이 번쩍번쩍해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물론 그 위험한 일에 임금을 따로 쳐주지 않았다. 그리고 소작료가 높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 농장 소작인들이 쟁의를 일으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쟁의에 자신이 연관되었는지 어쩐지를 캐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다음에 짚이는 막연한 생각은, 다른 어떤 사건과의 연루를 의심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좀 이상한 데가 있었다. 미리 시간을 정해 놓고 경찰서로 나오라고 한 점이었다. 만약 자신이 그러한 의심을 받고 있다면 경찰에서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호출 명령이라는 위압적이고 기분 나쁜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경찰의 그런 태도는 꽤나 관대하고 신사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경험으로 보아 자신이 그런 의심을 받고 있다면 형사가 나온 길에 당장 끌어갔지 그렇게 앞 뒤 가릴 경찰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떤 새로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경찰서로 나오라는 것일까?... 정도규는 머리가 혼란스럽기만 했다. 열흘 가까이 신열이 있는 몸을 뒤척이며 오로지 생각한 것은 어떻게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새 활동은 시작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출감자들에게 은밀하게 지시되고 있는 것은 <지하서클> 운동의 추진이었다. 그건 노동자 농민 학생층을 대상으로 <혁명적 소조직>을 구축해 나아가는 전술이었다. 그 전술은 코민테른 산하 프로핀테른 "국제 적색 노동조합"1930<9월 테제>에 따른 것이었다. 9월 테제는 조선의 현실 상황에 맞추어 공산주의 운동의 전환을 제시하고 있었다. 첫째는 일제의 극렬한 백색테러가 자행되는 상황에서 당 재건은 일단 보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내포하고 있는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불식하고 대중적 기반을 튼튼하게 확보하기 위해 하층 노동자와 빈농층에 침투하여 그들이 당면한 경제문제를 바탕으로 그들을 결속시키고 그 힘을 정치문제로 확대하여 일본제국주의와 투쟁할 수 있는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적색노동조합><적색 농민조합>을 결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조합 운동은 필연적으로 지하에서 소조직 단위로 전개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정도규는 어쩔 수 없이 오후 2시가 넘어 집을 나섰다. 아내 김씨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왔다.

"그만 들어가시오, 추운데."

정도규는 검정 두루마기 깃을 여미며 말했다. 겨울철에 검정 두루마기를 입게 된 것도 단발이 일반화되면서 퍼진 것이었다.

"..."

걸음을 멈춘 김씨의 입에는 무슨 말인가가 물려 있었다. 김씨는 함께 따라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회색빛 들녘에는 추위가 가득 차 있었다. 빈 들녘을 둘러보며 걷던 정도규의 눈길이 한곳에 머물렀다. 사람들이 떼지어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먼발치였지만 그 사람들의 수는 삼사백 명은 되어 보였다. 쟁의를 일으킨 소작인들이 지주네집으로 몰려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 싸워야 한다. 싸우지 않고는 얻어지는 게 없다. 노동쟁의든 소작쟁의든 끝없이 일으켜야 한다. 그건 단순히 생존투쟁만이 아니다. 그 투쟁을 통해 의식은 각성되고, 각성된 의식은 독립투쟁으로 발전하다.

정도규는 그들에게 성원을 보냈다. 그 성원은 또한 스스로의 가슴에 심는 의지의 나무이기도 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총독부는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노동쟁의와 소작쟁의에 골머리를 앓아왔던 것이다.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는 사회주의자들의 활동과 함께 1백여 건씩 발생하면서 해마다 증가되어 왔던 것이다. 한해에 각각 2백여 건이 넘는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진압하자면 총독부도 애깨나 먹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보 학생들의 끊임없는 동맹휴학과 함께 그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는 거의가 사회주의자들의 역할과 영향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총독부가 치안유지법을 계속 강화시켜 가면서 사회주의자들을 뿌리뽑으려고 혈안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 성과에 긍지와 보람을 느꼈던 것이다.

정도규는 신작로에 이르렀다. 신작로에는 변함없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쌀가마를 가득가득 실은 우마차들이 군산 쪽으로 줄을 잇고 있었다. 정도규는 상을 찌푸린 채 신작로를 건너갔다.

"아 정도규상, 역시 동경에서 공부한 사람이라 시간을 잘 지키는군요."

키 작은 사찰과장이라는 자가 존대까지 써가며 아주 친절하게 대했다. 그 짓이 수상해서 정도규는 경계심을 더 키웠다. 어떤 허방을 파놓고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앞장선 사찰과장이 안내한 곳은 뜻밖에도 경찰서장실이었다.

"아 정도규상,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자아 앉읍시다." .

일본인치고는 키도 크고 잘생긴 편인 경찰서장이 악수까지 청하면 한말이었다. 정도규는 무표정하게 손을 내밀었다가 거둬들이고 안락의자에 앉았다.

"몸은 어디 아픈 데가 없소?"

경찰서장이 마주앉으며 담뱃갑을 내밀었다. 사찰과장은 어느새 나가고 없었다.

"예에..."

출감 후 아직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아 정도규는 담배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서장과 한마디라도 더 하는 것이 싫어서 그냥 담배를 빼 들었다.

"정상, 기분이 어떻소? 우리가 행동을 통제하니까 기분이 나쁘지 않소?"

경찰서장은 놀리는 듯하는 묘한 웃음을 담배 연기와 함께 날렸다.

"글쎄요..."

정도규도 경멸하는 것 같은 쓴웃음을 건성으로 빠는 담배 연기에 실어 날렸다.

"과히 기분나빠하진 마시오. 감시하자는 게 아니라 보호하자는 거니까."

경찰서장은 흐흐거리며 웃었다.

"..."

정도규는 <보호>라는 말의 엉뚱한 쓰임새에 정말 코윳음이 나오려고 했다.

"정상은 우리 대일본제국이 두달 전인 작년 11월 말로 만주 전역을 장악했다는 걸 알고 있소?"

"."

"빠르군. 어디서 알았소?"

형무소에서 광고했으니까요."

", 그건 광고할 만한 경사지. 정상은 그걸 어떻게 생각하시오?"

"글쎄요..."

", 물론 마땅찮으시겠지. 그런데 말야, 우리가 만주를 점령한 것으로 조선의 독립이 더 유리해졌다고 생각하나 더 불리해졌다고 생각하나? 아니, 이건 정상을 너무 무시하는 질문 아닌가? 뭐 꼭 대답할 건 없소. 불리해졌다는 건 어린애들도 다 아는 사실이니까."

경찰서장은 자문자답을 하고는 여유있게 담배를 두어 모금 빨았다. 무쇠난로 위의 무쇠주전자에서는 물이 썩썩 소리내며 끓고 있었다.

"정상이 요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한번 알아맞혀 볼까요?"

"..."

"적색노동조합과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려고 하고 있지요?"

", 눈치도 빠르시군요."

정도규는 허방이다 싶어 경찰서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좋소, 출감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다 그런 지시를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허나 그건 다 몽상이오. 공산주의자들이 적색조합운동을 시작한 게 작년 초부터요. 그게 함경도에서부터 시작되어 평안도와 경기도 그리고 경상으로 퍼지고 있는데 우리 경찰은 속속 색출해 내고 있소. 우리 경찰조직망이 어떤지는 정상도 대략 알고 있겠지. 앞으로도 적색노조는 암암리에 조직되겠지. 허나 그건 오래 못 가. 우리 경찰은 공산주의자들을 몇만 명이든 몇십만 명이든 완전히 박멸할 때까지 수사에 총력을 기울일 거니까. 그게 총독부의 제1의 방침이지. 치안유지법은 괜히 강화하는 줄 아나. 한 번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자가 재범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사형이야. 재수가 좋아야 무기지. 치안유지법 강화 이후 두 달 동안에 얼마나 잡혀 들어갔는지 아나? 8백여 명이야. 놀라지 말아. 앞으로 그보다 10, 20배까지 잡아들이면 아무리 조직에 능한 공산주의자들이라 해도 씨가 마르겠지. 이봐, 자네도 오랏줄에 목 매달리기 전에 꿈 깨는 게 좋아. 일본은 지지 않는 해야. 유리의 힘이 만주에서 끝날 것 같나? 조선의 독립이고 해방은 망상 중에 망상이야. 우리 일본과 협조해 가면서 편히 사는 길을 택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지. 자네 학벌 좋겠다, 인물 잘났겠다, 마음만 바꿔먹으면 내가 얼마든지 장래를 보장할 수 있지. 은행 같은 데를 원하면 곧 자리를 마련할 수 있고, 무슨 사업을 하겠다면 얼마든지 지원을 해줄 수도 있지. 내 말 우습게 듣지 말고 잘 생각해 봐. 출감한 지 며칠 안돼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만주를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지식인들의 태도가 변화하고 있고, 전향하는 공산주의자들도 차츰 늘어나고 있으니까. 난 내 손으로 자넬 잡아넣기를 원하지 않아. 허나 자네가 내 말을 안 듣고 행위를 계속하다가 내 손에 잡혀도 나쁠 건 없지. 자네 같은 거물을 잡아들이는 건 내 공에 보탬이 되니까. 어떤가, 내 말이."

경찰서장은 언변좋게 말을 끝내고 등을 뒤로 젖히며 정도규를 눈 아래로 깔아보았다.

"..."

눈길을 아래로 떨군 정도규는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좋소, 지금 당장 대답하기 곤란할 수도 있소. 돌아가서 생각해 보고 언제든지 연락하시오."

경찰서장은 다시 존대를 쓰며 담배를 빼들었다.

"그럼 가도 됩니까?"

정도규가 눈길을 들었다.

"가시오. 가서 잘 생각해 보시오."

정도규는 일어섰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 사무실을 나갔다.

저놈이 인사도 안 하고 가네. 저게 안 될 놈이로군. 조선 놈으로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건 장하다만 우리의 장애물이니 처치해야지. 어디 걸려들기만 해봐라.

경찰서장은 정도규가 사라진 문 쪽으로 담배 연기를 푸욱 소리나게 내뿜었다.

 

 

42. 사랑의 여울

"어이, 가원이!"

강의실에서 나오던 송가원은 뜻밖의 조선말에 고개를 후딱 왼쪽으로 돌렸다. 의학부 복도에서 조선말로 그렇게 거침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사랑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자네가 웬일이야?"

민동환이 바쁜걸음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무슨 이야긴가를 나누며 걷던 일본 학생 둘이 민동환을 피해 서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강의를 이리 시간을 꽉 채우나. 이 화창한 5월에 멋대가리없이."

민동환은 불평스럽게 강의실에다 대고 눈을 흘겼지만 기색은 아주 밝았다.

", 멋 찾고 흥 찾아가며 영문과 식으로 강의했다가 사람 죽이는 건 누가 책임지고?"

", 그 말도 그렇군. 오늘 강의는 다 끝났나?"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겨놓았다.

". 헌데 여기까지 어쩐 일인가?"

"나가서 얘기하세."

민동환이 빠르게 눈짓했다. 그의 상기된 것 같은 얼굴과 그 눈짓에서 송가원은 무슨 기분 들뜰 만한 일이 있다는 것을 느꼇다.

"이보게, 아주 굉장한 일이 터졌네. 상해에서 일본 백천 대장 등 고급 군관과 고급관료 10여 명을 폭살시켜 버렸네."

건물 밖으로 나온 민동환이 쏟아놓은 말이었다.

"아니, 뭐라고? 그게 어떻게 된 일이야?"

송가원은 깜짝 놀랐다.

"왜놈들이 상해사변 승리 축하를 홍구공원에서 벌이는데 윤봉길이란 청년이 폭탄을 던져버린걸세."

", 통쾌하군!"

송가원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정말 통쾌하게 소리쳤다.

", 통쾌하지 통쾌해!"

민동환도 주먹을 들어올려 부르르 떨며 해사한 얼굴이 상기되고 있었다.

"왜놈들, 만주사변 일으킨 보복을 톡톡히 당한 셈이군. 담배 한 대 주게."

송가원이 화단가에 주저앉으며 손을 내밀었다.

"맞았어. 중국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우리 조선사람이 해치운 거지. 이게 담배 한 대 가지고 되겠나? 축하주를 코가 비틀어지게 마셔야지. 오늘밤에 그 술집에 가자고 찾아온 거네."

민동환이 송가원의 옆에 앉으며 담뱃갑을 내밀었다.

"축하주, 마셔야지. 헌데, 폭탄을 던졌다면 그게 의열단인가?"

"그건 모르겠네, 신문에 안 났으니까."

"그 윤봉길이란 사람은 어찌 됐고?"

"현장에서 잡혔다네."

"그렇겠지..."

담배 연기를 내뿜는 송가원의 얼굴이 침율해졌다.

", 괴로워할 것 없네. 조선의 남아로서 그만큼 장한 일을 하고 죽으며 뭘 더 바라겠나."

이렇게 말하는 민동환의 목소리에도 그늘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윤봉길이 행사장의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진 것은 1932429일이었다. 그 거사는 이봉창에 이어 한인애국단에서 두 번째 일으킨 것이었다.

"가세. 얘기하면서 슬슬 걸어가면 술 마시기 적당한 시각이 될 거네."

민동환이 일어나며 무슨 감정풀이를 하듯 담배꽁초를 발로 비비댔다.

"그러세. 죽도 밥도 아닌 우리는 이런 때 술 안 마시면 언제 마시겠나."

"이래저래 술 권하는 사횔세."

민동환은 문학부 학생답게 현진건의 소설 제목을 인용하며 떫게 웃었다.

"글세, 모르겠네."

다른 때 같았으면 우선 사양을 했겠지만 오늘은 기분이 그렇지 않아 송가원은 그냥 따라나섰다. 송가원은 민동환에게 마냥 술을 얻어마시기만 해서 면목이 없는 처지였다. 시위 때 채찍에 맞아 눈을 다친 민동환을 병원에 데려다준 것이 인연이 되어 술 친구로 가까워진 것이었다. 옥비가 소리를 하고 있는 값비싼 술집에 갈 수 있었던 것도 민동환의 덕이었다. 옥비의 일터를 알게 된 것은 옥비가 먼저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공히 스님과 헤어지고 나서 달포쯤 지났을까. 뜻밖에도 옥비한테서 좀 만나자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옥비는 마치 공허 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점심을 푸짐하게 사주었다. 그리고 돈 봉투까지 내밀었다.

"공허 시님 심바람이구만요."

이 말 앞에서 더 사양할 수가 없었다. 몇 번 망설이다가 거처가 어디인지를 물어보았다.

"낙원동 상춘관서 밤에 소리럴 허고 있구만이라우."

"저어, 소리 들으러 가도 됩니까?"

옥비는 부끄러운 듯 잔잔하게 웃기만 했다. 그런데 헤어져 돌아가는 옥비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옥비는 댕기머리가 아니라 낭자머리였던 것이다. 그때까지 뒷모습을 보지 못한 채로 그 나이며 품행으로 으레껏 댕기머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를 보고 그렇게 가슴 무너져 내린 것은 난생처음 겪은 일이었다. 그런데 달포쯤 지나 옥비한테서 또 연락이 왔다. 옥비는 전처럼 또 점심을 배부르게 사주고 돈 봉투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 더는 돈을 안 받으려고 했다. 많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그건 공허 스님의 심부름이 아니라 그녀가 마련한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졌던 것이다.

"아니구만요, 틀림없이 공허 시님 심바람이구만요. 아무 맘 쓰시덜 말고 받으시써요."

옥비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가 학자금얼 대야 허는디..."

지난번에 했던 공허 스님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공허 스님이 돈을 대주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싶었다. 되짚어 생각해 보니 그날 공허 스님이 옥비를 데리고 나와 인사를 시킨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로도 옥비는 꼭 달포 간격으로 연락을 해왔다. 옥비가 주는 돈은 읽고 싶은 책을 사는 데 유용하게 썼다. 네 번째 만났을 때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남편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저어, 부군도 소리하는 분입니까?"

", 아니구만요, 지넌 혼인헌 적이 없구만요."

당황한 옥비는 말을 더듬었다. 얼굴이 금방 새빨개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쫓기듯 급하게 자리를 떴다. 그때부터 궁금증은 발동하기 시작했다. 혼인하지 않은 여자가 왜 난자 머리를 했을까? 그리고, 왜 글썽였을까? 무슨 곡절이 있는 모양인데, 그게 무엇일까? 의문은 자꾸 가지를 쳐나갔다. 그런데 의문과는 반대로 낭자머리를 보고 느꼈던 실망감은 가셔지고 없었다. 어느 날 민동환을 만나 상춘관에 대해 물어보았다.

"상춘관? 기생들이 나앉는 최고급 술집이지."

"제기랄, 술값도 굉장하겠군."

"비싸기야 좀 비싸지. 헌데 왜 그러나?"

"아니야, 아무것도."

"이 사람아, 아무것도 아니긴. 자네 얼굴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뭘. 우리라고 한판 즐기러 못 갈 곳도 아닌데 뭘 그러나. 왜 그런지 어서 말이나 해봐."

한량기 많은 민동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술자리를 만들고 싶은 눈치를 드러냈다.

"실은 아는 고향 여자가 거기서 소리를 하는데 술값이 비싸서 어디 소리 들어보겠나."

"이 사람아, 그런 걱정 말게. 상춘관 정도에 있는 소리꾼이라면 틀림없이 상급이니까 술값이 비싸도 하나도 아까울 것 없네. 오늘 당장 가세."

"아니, 그런 뜻이 아니네."

"알아, 알아. 전혀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어. 난 자네 같은 사나이와 술 마시는 게 좋은 거야. 술도 안 마시면 이놈의 세상을 어찌 살겠어."

민동환에게 끌리다시피 상춘관을 찾아갔다.

"오셨구만요..., 오셨구만요..."

옥비는 뜻밖에도 너무 반가워했다. 자신도 옥비가 반가운 한편으로 그 모습에 너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화롭게 꾸며진 술집의 분위기와 함께 화사하게 차린 옥비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더 곱고 우아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소리하는 옥비는 정말 전혀 딴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목정이며 자태..., 청요릿집에 마주앉아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딴사람으로 옥비는 둔갑해 있었다. 그 변한 모습은 분명 둔갑이었다. 같은 사람이 그토록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처음 경험한 일이었다.

"그려, 지대로 시집 못 가보고 낭자머리 올린 팔자여. 그리 몸 베래불고 처녀가 아니라고 낭자머리 올렸시니 도로 풀으라고 헐 거이냐 어쩔 거이냐. 그러니 그 가심에 맺힌 한이 서리서리 얼매나 크겼냐."

반년 만에 만난 공허 스님한테 들은 옥비의 곡절이었다. 옥비의 당황함과 그 눈물의 뜻을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려, 아무 말 말고 받아둬라. 나가 주는 돈이나 매일반잉게. 기생덜중에 독립운동허는 사람덜 돕는 독립기생이 있는 판인디, 소리꾼이 소리히서 번 돈으로 독립지사 아덜 용돈 잠 못 댈 것이 머 있겄냐. 갸도 왜 놈덜헌티 웬수 갚을 맘이 돌뎅이로 굳은게 니가 담에 존 일 허는 것으로 갚도록 혀."

공허 스님의 말이었다.

옥비는 달포 간격으로 꼬박꼬박 연락을 해왔다. 그러데 봉투에 든 액수가 조금씩 불어나고 있었다.

"이보게, 요새 식자층 사이에서 퍼지고 있는 말 들어봤나?"

길을 건너며 민동환이 물었다.

"무슨 말인데?"

송가원은 빠르게 앞을 스쳐 가는 인력거를 피하며 가방을 바꿔 들었다.

"앞으로 2백 년 정도는 독립이 가망 없다는 말 말이네."

"뭐라고? 앞으로 2백 년 정도?"

송가원이 놀라며 걸음을 뚝 멈추었다.

"역시 의학도라서 소식이 어둡군."

민동환이 픽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어떤 작자들이 그따위 소릴 지껄이는 거야?"

민동환의 옆으로 따라붙는 송가원의 목소리는 뜨거웠다.

"거 왜 있잖나, 탁상공론 좋아하고 말 만들어내기 잘하는 문필가니 뭐니 하는 사람들 말야."

"그런 한심한 인간들이 있나. 헌데, 왜 갑자기 그런 소릴 지껄여대는거야?"

"이 사람아, 갑자기가 아니야. 다 나름대로 근거와 이유가 있는 거지."

"근거와 이유? 그게 뭔데?"

"만주사변이지. 만주까지 왜놈들 손에 들어갔으니까 조선 독립은 이제 가망 없이 됐다는 것 아닌가."

"이런 빌어먹을! 헌데, 왜 하필 2백 년인가. 그 근거는 또 뭐야?"

"인도가 그렇대나 어떻대나."

"인도? 좀 배웠다는 지식으로 잘도 꿰어맞추는군."

"그나저나 앞으로가 볼 만할 거네."

"뭐가?"

", 생각해 보게. 그런 암담한 말 자꾸 퍼져나가면 이놈의 세상 돌아가는 게 어찌 되겠어. 그러잖아도 총독부에 굽히고 드는 자치론이 득세하는 판에 심약하고 약삭빠른 지식인들의 변심이 속출할 거 아닌가."

"그렇겠군..."

2백 년, 2백 년..., 송가원은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식민지와 왜놈들을 의식한 것을 소학교 들어갈 때부터 치더라도 15년 남짓이었다. 그런데 그 세월이 그리도 길고 지긋지긋했었다. 그런데 또 2백 년이라니.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한 세대가 바뀌는 것을 30년으로 잡으니 7대에 걸치는 세월이었다. 그렇게 되면 조선은 영영 없어지고 마는 것이아닐까. 송가원은 좌절감을 느끼는 동시에 문득 한 가지 생각에 부딪혔다.

"이보게, 그게 혹시 총독부에서 의도적으로 지어낸 말 아닐까?"

"총독부?..."

", 총독부에서 지어낸 유언비어를 얼빠진 문필가라는 것들이 퍼뜨리고 있는 게 아니냔 말이야."

"글쎄, 왜 갑자기 총독부를 생각했나?"

", 2백 년이란 세월이 얼마나 긴지 생각하다 보니까 그만 좌절감이 생기지 않겠나. 헌데 나만 좌절감이 생기겠나? 그 말 들은 사람들은 거의가 그렇겠지. 그 말에 들어 있는 악의가 느껴지면서 직감적으로 총독부 소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른 거지. 그리고, 그래도 생각이 있는 문필가들이 그런 악의가 담긴 말을 무책임하게 했을까 싶기도 하고 말야."

", 자네 말도 일리가 있네. 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한 사실이 있지. 총독부가 어쨌는지 그건 모르겠고, 식자층들 사이에 그 말이 기세 좋게 퍼져나가고 있고, 문필가들이 한숨을 쉬어대며 의기소침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네. 난 글줄이나 쓴다는 선배들이 그러는 걸 직접 보았으니까. 그 말을 어디서 누가 시작했거나 간에 그런 고약한 말을 퍼뜨리고 있는 건 그 말을 조작해 낸 것하고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짓 아니겠나."

"빌어먹을, 그걸 무슨 수로 막지?"

"그물로 바람 막기지 뭘."

계동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누더기를 걸친 늙은 여자가 삐쩍 마른 손을 내밀며 다가섰다. 등에 업힌 아이는 목을 늘인 채 자고 있었다. 송가원은 가방을 바꿔 들며 돈을 꺼내려고 했다. 그런데 민동환이 먼저 노인네의 손에 돈을 놓았다.

"고맙습네다. 복 많이 받으세요."

노인네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걸인들이 갈수록 느는군."

민동환이 혀를 찼다.

"왜 안 그렇겠나. 왜놈들 이주가 늘어나는 만큼 땅 뺏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소작인들은 소작료가 올라갈수록 빚이 늘어나고, 농촌에서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걸인이 되는 것 아닌가."

"얼마 전에 신문에 난 걸 보니까 총독부에서 조사한 걸인들 수가 전국적으로 5만여 명이야. 해마다 몇천 명씩 불어난 추센데, 총독부에서 뭐랬는지 아나? 조선사람들은 게을러서 일을 하지 않고 편히 얻어먹고 살려고 해서 그런다는 분석이더군."

"죽일 놈들, 항상 그따위로 사실을 호도하고 제놈들 잘못을 조선사람들 잘못으로 뒤집어씌우지."

송가원은 침을 내뱉었다. 낙원동 초입에 이르렀을 때는 남매로 보이는 두 아이가 그들 앞에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 송가원이가 돈을 주었다. 두 아이는 꾸벅 절을 하고는 긴 그림자를 끌며 석양빛 속으로 멀어져 갔다. 상춘관 앞은 도착하고 떠나는 인력거들로 분주했다. 꽃처럼 차린 기생들이 지분 내음을 풍기며 내리고 있었다.

"너무 일찍 왔나보네."

송가원이 멋쩍어했다.

"일찍은 무슨. 술 많이 마셔서 좋지."

민동환이 눈짓하며 앞장섰다.

"어머 서방님, 오셨사와요."

인력거에서 막 내린 기생 하나가 민동환에게로 쪼르륵 달려갔다.

", 경희 아닌가. 그간 잘 있었나?"

민동환이 기생을 보고 반가워했다. 그 기생과 짝이 되어 몇 번 술을 마셨던 것이다. 기생은 송가원에게는 가볍게 눈인사만을 했다. 경희라는 이름처럼 그 기생은 아주 앳돼 보였다. 나이 어린 기생들일수록 그전의 기생 냄새가 나는 이름이 적고 일반 처녀들의 이름과 구분이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 그것도 새로 생기기 시작한 풍조였다.

"옥비 명창은 아직 안 왔사와요."

술상과 함께 들어온 경희가 송가원에게 말했다.

"안 오는 건 아니겠지?"

민동환이 물었다.

"좀 늦어지는 것입죠. 명창이 어디 우리 애송이 기생하고 같은가요."

경희가 민동환 옆에다 붙어 앉으며 꽃빛 웃음을 피워냈다. 민동환은 새삼스럽게 송가원에게 기생을 권하지 않았다. 송가원은 이 집을 찾아온 기생을 옆에 앉히는 걸 완강히 사양했던 것이다. 그것이 옥비라는 여자를 향한 송가원의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옥비라는 여자를 잠깐이라도 옆에 앉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송가원은 옥비라는 여자에게 무언의 경고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내가 이러니 너도 그 어떤 놈 옆에도 앉으면 안 된다 하고,

"자아, 술 드세."

민동환이가 잔을 들었고, 둘이는 잔을 부딪쳤다.

"자넨 인제 졸업인데 뭘하려나?"

단숨에 비운 술잔을 민동환에게 건네며 송가원이 물었다.

"몰라, 뭐 할 만한 일이 있어야지."

"찾아보면 있겠지."

"자네처럼 의사로 딱 정해졌으면 좋겠는데 이놈의 영문학이란 죽도 밥도 아니니 원."

"글을 써도 좋고, 학문을 해도 좋고..."

"글쓸 재주는 애당초 없고, 학문이라는 것도 답답해서 싫고, 모르겠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잡지나 하나 하면 어떨지."

", 병환은 좀 어떠신가?"

"별 가망이 없다더군."

"심려가 크겠네."

"노환이시니까."

"잡지..., 그것도 괜찮겠지."

주량이 큰 송가원은 연상 술잔을 비워 민동환에게 넘기고 있었다.

"자넨 졸업하면 서울서 개업하려나?"

"나야말로 어쩔지 모르겠네."

"모르긴. 서울에서 하게. 내가 도울 테니까."

"말이라도 고맙네."

"이 사람아, 빈말이 아니야."

민동환이 정색을 했다. 그는 여동생을 생각하며 하는 말이었다.

"고맙네. 고마워."

송가원은 말을 막듯이 빈 잔을 민동환에게 내밀었다.

"지금부터 난 반잔씩만 따라라. 저 친구하고 똑같이 마셨다간 난 황천길이다."

민동환이 기생에게 일렀다. 송가원은 박정애를 생각하고 있었다. 박정애는 벌써부터 서울에서 개업하기를 은근히 종용하고 있었다. 그 의도 뒤에는 여동생 미애가 있었다.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담이었다.

, ,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옥비 명창일 거예요."

기생 경희가 발딱 일어났다. 방문이 열리면서 옥비의 모습이 드러났다. 옥비는 다소곳한 몸가짐으로 들어섰다.

"오셨구만요..."

옥비는 송가원에게 나부시 인사했다. 반가움 넘치는 얼굴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잘 있었소?"

송가원이 옥비를 올려다보았다. 눈길이 마주치자 옥비는 당황스레 눈길을 떨구었다.

"옥비 명창, 나도 왔소."

민동환이 짓궂게 두 사람 사이를 헤집고 들었다.

"예에..."

옥비가 예를 갖추었다.

"고수가 없는 걸 보니까 소리하러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떠시오, 오늘은 특별한 날인데 예인 자격은 접어두고 우리한테 술 한 잔씩 따르는 게."

민동환이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데요? 어느 분 생신이라도 되시나요?"

기생 경희가 민첩하게 말을 받았다.

",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상해에서 윤봉길이란 청년이 폭탄을 던져 왜군 대장 등 높은 벼슬아치들 10여 명을 폭살시킨 소식을 들었지."

", 알아요. 소문 들었는데, 아주 속 시원한 일이에요."

경희가 총명하게 생긴 눈을 빛냈다.

"너도 속이 시원하더냐?"

민동환은 대견하다는 듯 경희를 바라보았다.

"저도 조선사람인걸요."

"그래, 조선풀도 기뻐할 일이다."

민동환이 경희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 저도 술 따르겄구만요."

옥비가 나직하게 말했다.

"예에, 그래야지요."

민동환의 목소리에 흥이 넘쳤다. 옥비는 송가원의 옆에 살포시 자리 잡고 앉았다. 송가원은 옥비 쪽의 몸에 찌르르 전기가 통하는 것을 느꼈다. 옥비는 먼저 민동환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송가원의 잔에도 남실거리도록 술을 따랐다.

저 술이 한 방울이라도 흘러 허실이 되면 안 되는데...

옥비는 송가원의 입으로 옮겨지고 있는 술잔을 보며 이런 주술을 달고 있었다. 송가원은 역시 술을 단숨에 비웠다. 술잔을 지켜보고 있던 옥비는 아무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가슴이 화끈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이래서는 안되는데. 감히...

옥비는 자신의 가슴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방바닥에 붙으려는 몸을 떠밀어 올렸다.

"이따가 뵙겄구만요."

옥비는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자네 형님은 글 쓰시나?"

민동환이 물었다.

", 몸이 많이 좋아져서 뭘 쓰긴 쓰는 눈치더군."

송가원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서울오는 안 올라오시나?"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글을 쓰시자면 어차피 서울생활을 하셔야 될 텐데."

"모르겠어. 차차 두고 봐야지."

송가원은 또 마음이 무거워졌다. 형만 생각하면 마음이 우울하고 착잡해졌다. 가산이라고는 세 조카들과 함께 다섯 식구가 한 해 먹고 살기가 빠듯할 정도의 논밖에 없었다. 그런데 커나는 조카들을 가르치자면 형의 경제능력이란 너무나 허약했던 것이다.

"이보게, 내가 잡지를 하게 되면 말일세, 자네 형님을 모셔서 도움을 받는 게 어떨까?"

민동환은 그동안 심중에만 담아왔던 말을 꺼내놓았다.

"글세, 전에 잡지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긴 한데. 그나저나 잡지가 되긴 하겠나? 창간되었다 하면 두세 번 내고는 문을 닫는 잡지사들이 수두룩한데."

"그야 적은 자본으로 판매에만 의존하니까 그렇지. 난 이래봬도 만석꾼 재산 상속잘세. 해마다 만 석씩만 투자하면 본전인 농토는 그대로 있고 잡지는 평생 해나갈 수 있지 않겠나?"

민동환은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주먹구구로는 그런데 잡지사 경영내막을 전혀 모르니 뭐라고 할 수가 없군."

"그 문제 이전에 말야, 잡지를 내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그야 내용이 좋은 잡지라면 얼마든지 내는 게 좋지. 아무리 검열이 있다지만 잡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또 있으니까."

"그래, 왜놈들 몰아내자, 독립운동하자, 하는 소리를 직접 쓰지는 못하더라도 글이란 묘한 거니까. 그리고 잡지의 파급효과란 것도 무시할 수 없지. 아무래도 잡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민동환은 결정을 내리듯이 말했다.

"더 신중히 생각해 보게."

", 오늘은 이모저모로 아주 의미있는 날이네. 만석꾼 재산 보람되게 써볼 테니까 자넨 자네 형님한테 잘 권해 주기나 하게."

민동환의 말은 아주 결정적이었다.

"두고 보세. 아아, 취하는군."

송가원은 두 팔을 쭉 뻗어올렸다.

"술만 많이 드시고 안주를 잘 안 드시니 취하시죠. 안주 좀 많이 드세요. 실은 술값보다 안주값이 훨씬 더 비싸니까 실속도 차리셔야지요. 몸상하시면 옥비 명창이 서러워합니다."

경희는 눈을 핼끗하고는 고기 한 점을 집어 민동환의 입으로 가져갔다. 민동환이 소리내 웃으며 고기를 받아먹었다.

"네 눈에도 옥비 명창이 저 서방님을 사모하는 것으로 뵈느냐?"

"그러믄입쇼. 척하면 삼천립지요. 어디 옥비 명창뿐인가요. 저 서방님께서도 옥비을 사모하기는 매일반인걸요."

"어허,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송가원이 화난 척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어색스러워져 있었다. 경희는 민동환의 뒤로 얼굴을 숨기는 척하고 있었다.

"허허허허... 그러게 품행조심해야 하는 게야."

민동환이 경희를 싸안으며 웃어댔다.

밖에서 소리하는 가락이 먼 울림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저런, 우리보다 선수를 치지 않았나."

민동환이가 경희를 밀어내며 말했다.

"아니와요. 저쪽에서 먼저 목을 풀고 나야 이쪽에서 하는 소리가 진짜 진국이 되는 거예요."

경희가 냉큼 말을 받았다.

"요런 앙큼한 것. 그럼 어디 너부터 한가락 해봐라."

술취한 민동환이 귀여워죽겠다는 듯 경희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저는 소리 못하는걸요."

"누가 소리 하랬느냐. 넌 쉬운 신식노래로 해."

"그래, 아리랑을 한번 불러봐라."

송가원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아리랑이요?"

경희가 깜짝 놀랐다.

", 여기서도 못 부르는 거냐?"

"그럼요. 얼마 전에 손님들이 합창을 해대다가 걸려서 다 잡혀가고, 쥔어른까지 혼쭐이 났는걸요."

"빌어먹을!"

송가원이 내뱉었다.

"됐어, 황성옛터나 불러봐. 아주 슬프게 불러라. 슬프디슬픈 세상이니까."

민동환이 취기 어린 소리로 말했다.

기생 경희가 앉음새를 가다듬고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권번에서는 기생들에게 신식노래도 가르치고 있었다. 손님들의 요구가 자꾸 늘어나는 탓이었다. 그런 만큼 소리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옥비 명창, 거 슬픈 것말고 힘차고 통쾌한 것 뭐 없소? 그런 것으로 좀 불러보시오."

술 취한 송가원이 옥비에게 이렇게 소리를 청했다. 그러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에는 그저 부르는 대로 듣기만 했던 것이다.

"...심차고 통쾌헌 것..."

너무 갑작스러운 청에 당황한 옥비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고수를 쳐다보았다.

"적벽가 중에서 조조 군사 물리치는 대문으로 허먼 되덜 안컸어?"

고수가 얽힌 고리를 풀어주었다. 옥비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셨다. 민동환은 물론이고 주량이 큰 송가원도 몸을 가누지 못하도록 만취했다.

"우리는 뭐야, 술이나 퍼마시는 우리는 뭐야. 빌어먹을, 우리는 뭐냐니까..."

눈이 개개풀린 송가원은 언제부턴가 이 말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했다. 손님들이 거의 다 가고 없어서 옥비는 처음으로 송가원의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 술시중이란 술 그만 마시라는 만류였다. 그런데 술이 너무 취한 송가원은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민동환이가 기생과 얼크러져 야하게 돌아가도 송가원은 옥비의 옷깃 하나 스치지 않았다. 1시가 다 되어 그들은 술자리에서 일어났다. 송가원도 민동환도 곧 넘어질 것처럼 비틀거리고 휘청거렸다. 그러면서도 송가원은 가방을 찾아 들었다. 옥비는 다소 안심하며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민동환은 기생의 부축을 받으며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혼자 방을 나서는 송가원은 곧 넘어지거나 어디에 부딪힐 것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다쳐서는 안되지. 이런 때 안 붙들어보면 언제 붙들어봐.

옥비는 이런 생각과 함께 비틀거리는 송가원을 부축했다.

"으음, , 누구여? 아아, 옥비 명창... 괜찮소, 나 안 취했소, ..."

송가원은 잡힌 팔을 빼려고 했다.

"안 괜찮으시구만요. 너무 많이 취허셨는디요."

옥비는 송가원의 팔을 더 꼭 붙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송가원이 가방을 떨어뜨리며 옥비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옥비의 입술을 덮었다. 옥비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누가 볼까 무서웠던 것이다. 송가원을 떠밀며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진작 방에서 할 일이지...

옥비는 송가원의 품을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술 취한 송가원의 힘은 오래가지 않았다. 송가원의 품을 벗어난 옥비는 머리를 매만지며 마구 달아나고 있었다. 마음과는 반대로 남들의 눈을 피해야 했던 것이다. 혼자 비틀거리며 긴 마루를 걸어나온 송가원은 위태롭게 댓돌로 내려섰다. 그때 양복 차림의 지배인이 달려와 송가원을 부축했다. 몸을 숨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구두가 너무 헐었구나...

옥비는 전등불빛 아래 드러난 송가원의 낡은 구두에 눈길을 박고 있었다. 송가원은 민동환이가 기다리고 있는 인력거에 올라갔다. 인력거가 떠나는 것까지 지켜본 옥비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서야 비로소 입술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뜨거움이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 느닷없는 입맞춤과 보듬김이 마치 꿈결인 양 아득하고 소중스러웠다.

사나흘이 지난 송가원은 자취방에서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자정이 다 되어 명륜동 산비탈의 어두운 골목을 찾아든 사람은 허탁이었다.

"역시 의과생이라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있었군."

방으로 들어서며 허탁이 한 말이었다. 송가원은 허탁이 쫓기는 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또 일 터졌군요?"

자리를 권하는 송가원의 목소리는 낮고 빨랐다.

"이런, 내 몸에서 그런 냄새가 풍기나? 그건 좀 곤란한데. 자네가 그런 냄새를 맡으면 개들은 더 잘 맡을 것 아닌가."

허탁은 손가락으로 담배 피우는 시늉을 해 보이며 떨떠름하게 웃었다. 송가원은 얼른 담뱃갑을 건네주며 말했다.

"어디 몸에서 나나요. 형님이 이 시간에 이 빈민촌을 왜 찾아왔겠어요."

"그래, 또 들통이 났다."

허탁은 허기진 사람처럼 담배를 급히 빨아댔다.

"이번에 무슨 일인데요?"

", 각 노동현장에 침투해서 혁명적인 적색노조를 조직하는 건데, 인쇄직공들을 상대로 일이 잘돼가다가 터졌다.

"왜 그렇지요? 또 끄나플이 섞여들었나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놈들이 워낙 이중 삼중으로 거미줄을 쳐놓고 있으니까."

"빌어먹을, 그렇게 당하기만 해서 어쩌지요?"

송가원은 담배를 빼들며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싸움이란 서로 잡고 잡히고 하는 거니까."

허탁은 여유만만하게 웃었다.

"괜찮긴요. 계속 이쪽이 잡히는 게 많으니까 문제지요. , 저녁은 드셨어요?"

", 아무리 똥줄이 타도 띠는 안 거르지. 혁명은 곧 체력이니까." 허탁은 능청스럽게 웃고는, "자네는 걱정 안해도 돼. 이쪽이 많이 잡히는 거야 당연한 거고, 아무리 많이 잡혀도 활동은 계속 이어지니까. 지급 러시아 만주 중국 등지에서 파견된 사람들까지 합세되어 지하운동이 맹렬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의 어조는 자신에 차 있었다.

"글쎄요, 그리 낙관할 일만은 아니잖아요? 경찰서에서는 사회주의 냄새를 조금만 풍겨도 마구 잡아들이고, 식자층에서는 앞으로 2백 년 정도는 독립될 가망이 없다는 말이 퍼지고 있는 판인데요."

"다 알고 있어. 허나 친일파들이 아무리 많이 생겨나도 친일파 아닌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법이지. 왜 그런지 아나? 근본적으로 저버릴 수 없는 민족적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이지. 쉽게 말하면 왜놈들에게 짓밟히며 사는 게 싫다 하는 생각 때문이란 말야. 우리의 운동은 그 점을 믿는 것이고, 그 바탕에 뿌리를 내리는 것 아닌가. 자넨 아무 걱정 말고 의술이나 열심히 익혀. 그래서 장안의 명의가 되어 부자 놈들에게 비싸게 받고,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싸게 받아 돈을 많이 버는 거야. 그리고 그 돈을 나 같은 사람한테 대주면 그보다 장한 독립운동이 어디 또 있겠나. 난 자네만 믿네."

허탁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흐거리고 웃었다. 그 느긋하고 태평스러움이 전혀 쫓기고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 언제 그런 날이 오겠어요. 왜놈의사들 등쌀에."

"이 사람아, 체념하지 말어. 자네도 알지? 두들겨라 열릴 것이다!"

"아이고, 공산주의자가 왜 갑자기 예수님 말씀입니까?"

"진리는 만사형통 아닌가. 그건 그렇고, 나 곧 떠야겠는데 부탁 하나 해도 될까?"

", 말씀하세요."

"아침 일찍 말이야, 박정애 씨한테 전화 걸어서 만나가지고 정릉으로 좀 오라고 해주겠나?"

"정릉이요?"

"그렇게만 말하면 알아. 전화로 하지 말고 꼭 만나서 말해야 하네."

", 알겠어요."

"나 가네."

허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돈 없으시죠?"

"됐네, 됐네. 벼룩에 간을 빼먹지."

허탁이 돌아서는 송가원의 팔을 붙들었다.

"이거나 가져가지."

허탁은 담뱃갑을 집어들고 방을 나갔다. 송가원은 급히 뒤를 따랐다. 허탁은 곧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송가원은 아무것도 보이는 것 없는 짙은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늘 넉넉하고 느긋하며 어떤 충격이나 힘에도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거나 구부러지는 유연성과 여유로 끈질기게 버티어 나아가는 사람, 외유내강의 표본 같은 허탁의 모습이 어둠 속에 뚜렷이 떠올라 있었다. 또 얼마나 많은 허탁이 이 어두운 밤에 쫓기고 있을 것인가... 나라를 찾으려는 저 외로운 발길... 없어진 나라는 밤에 저리도 맥박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송가원의 뇌리에는 불현듯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도 이 밤에 만주벌판 그 어디에서 쫓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송가원은 또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모습은 여전히 흐리기만 했다. 삼각산 줄기 그 어디선가 소쩍새가 밤 깊은 줄 모르고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망국의 한을 서러워하는 것처럼.

송가원은 수업을 제쳐놓고 9시에 종각 옆의 카페로 나갔다. 박정애는 아직 와 있지 않았다. 송가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담배를 빨았다. 유성기에서는 알 수 없는 일본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송가원은 그 일본노래가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주인이 왜놈의 새낀가... 송가원은 짜증스럽게 이런 생각을 했다. 일본 상인들은 진고개와 명동에서 황금정으로 세력을 뻗치고, 이삼년 전부터는 종로에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조선놈이 왜놈노래에 더 환장하기도 하니까...

송가원은 자신이 너무 긴장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까짓 노래야 어쨌건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려고 했다. 노래 생각을 하다보니 옥비 생각이 떠올랐다. 그날 밤 어떻게 집에까지 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옥비의 소리를 들은 것까지는 기억이 어렴풋한데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까마득했다. 그런데 무언가 실수를 한 것 같은 느낌이 께름칙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술병이 난 것인지 어쩐지 민동환은 얼굴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송가원이 담배를 끄려는데 박정애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위에는 동생 미애가 따르고 있었다.

"어머, 오래 기다렸어요?"

박정애는 언제나처럼 밝고 활달했다.

"아닙니다..."

"학교 가는 길이라 함께 나왔어요."

박정애는 동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예,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입니다."

송가원은 좀 어색하게 박미애에게 인사했다. 박미애는 언니 박정애가 그렇듯 화려한 양장 차림이었다.

"이런, 청춘남녀 인사가 그래서야 되겠어요? 오랜만이라니. 자아, 앉읍시다."

박정애가 환하게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런 농담이 아니었다. 그 말이 송가원에게는 커다란 바윗덩이의 무게로 가슴에 얹혔다.

"언니 참 무식하네. 거룩한 인술을 익히는 의학도한텐 공부할 시간도 모자라른 것 몰라?"

뱍미애가 끼고 있던 책 서너 권을 탁자 위에 놓고 앉으며 묘하게 비꼬았다.

"하긴 의학도들이 제일 공부하기 힘들다고 하더라."

박정애는 이렇게 눙치며 동생에게 재빨리 눈총을 쏘았다. 박미애는 언니의 눈길을 피하며 입을 삐쭉했다.

"근데 웬일이에요? 아침 일찍 만나자고 전하를 다 걸고,"

커피를 시키고 나서 박정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어..., 그게 그러니까..."

송가원은 난처한 얼굴로 어물거렸다.

"이 자리선 말하기 곤란한 문젠가요?"

박정애가 눈치 빠르게 반응했다.

"거봐, 난 불청객이지."

박미애가 탁자 위의 책들을 와락 끌어안으며 곧 일어날 기세였다.

"왜 이래, 경박하게!"

박정애가 내쏘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허 선배님..."

박정애의 말과 송가원의 말이 거의 겹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박정애의 얼굴이 금방 긴장되었다.

"알았어요, 조금 있다가 말하도록 해요." 박정애가 송가원에게 눈짓하고는, "넌 이렇게 아침 일찍 사람들 없는 카페에서 만나 모닝커피를 나누는 게 얼마나 로맨틱하고 센치멘탈한 아름다움인데 불청객이고 뭐고 따지고 그러니. 이 봄날 아침의 커피 한잔의 추억, 인생은 아름다운 추억 만들기니까 기분 좋게 커피 마시고 학교에 가."

그녀는 능란하게 말하며 동생의 등을 다둑거렸다.

"치이, 난 가사과에서 요리나 재봉틀 기술 같은 것만 배워서 그런지 로맨틱이고 센치멘탈이고 그런 고상한 기분은 몰라."

박미애는 토라진 기분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 언니의 호들갑에 휘말려 경성제국대학 의대생 송가원을 만나는 기대에 부풀었던 것인데 나와서 보니 자신은 완전히 귀찮은 존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송가원보다도 더 괘씸한 것은 언니였다. 나가자고 호들갑을 떨 때는 언제고 이제는 적당히 발라맞춰 어서 쫓으려 하고 있었다. 송가원이 아니고 다른 남자라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커피잔이 세 사람 앞에 놓였다. 세 사람은 말없이 커피맛을 맞추느라고 손을 널렸다. 박정애가 무슨 생각엔가 빠져 있으니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가로막힐 수밖에 없었다.

"가원 씨는 공일날도 공부하기에 그리 시간이 없어요?"

박정애가 언니 노릇을 해야 되겠다는 듯 커피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 실은 일본 학생들하고 경쟁하기가 힘에 벅찹니다. 똑같은 답안지라도 일본 학생들에게 점수가 더 가고, 해부실에서도 좋은 위치는 일본 학생들 우선이니까요. 공장이나 공사판에서만 임금 차별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건 사실이기도 했고 변명이기도 했다.

"아휴 분해, 못된 놈들."

박정애의 감정은 어느 때보다 격했다.

"그리 분하면 언니도 허탁 씨 따라나서."

박미애는 언니의 감정을 정통으로 찔렀다.

"너 정말!..."

박정애가 동생을 노려보았다. 박미애는 복수를 해서 통쾌하다는 듯 샐쭉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박미애는 커피를 반쯤 마시고 일어섰다.

"또 뵙겠습니다."

송가원이 일어나며 인사했다.

"네에..."

반기는 웃음과 함께 박미애의 얼굴이 붉어졌다.

"뭐가 어떻게 됐지요?"

박정애는 동생이 문을 나가기도 전에 물었다.

", 쫓기고 있습니다. 어젯밤 늦게 찾아와서 정릉으로 와달라고 전하라 하시더군요. 다른 말은 없었구요."

", 커피 빨리 마시고 나가요."

송가원은 반쯤 남은 커피를 한 모금에 마시고 일어섰다.

"또 만나요."

카페를 나선 박정애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총총히 걸어갔다. 송가원은 뾰족구두 신은 박정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최신식 멋쟁이가 경찰에 쫓기고 있는 사회주의자의 은신처를 거침없이 찾아가고 있었다. 저 여자를 저리도 급하게 끌어당기고 있는 힘은 무엇인가.

아아, 사랑의 위대한 힘이여...

송가원은 이런 생각을 하며 5월의 눈부신 햇살 속에 더욱 화사한 박정애의 꽃무늬 원피스에 어리는 사랑의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허탁은 아내가 있는 몸이었던 것이다. 이틀인가 지나 송가원은 옥비의 연락을 받았다. 달포가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이상하다 싶었다.

"그날 밤 내가 무슨 실수를 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술이 너무 취해 집에 어떻게 갔는지 통 기억이 없는데, 술을 깨고 나니 무슨 실수를 한 것같이 마음이 찜찜하고 영 이상합니다."

송가원은 옥비를 만나자마자 이 말부터 털어놓았다.

"아니구만요, 아무 실수도 안허셨구만요."

옥비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가슴은 화끈거리고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날 밤의 입맞춤의 뜨거움이 그대로 되살아 오르고 있었다. 그 알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더없이 다행이다 싶었다. 취중진언이라고 속마음을 보여준 것으로 더 바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일 있습니까? 혹시 스님이..."

"아니구만요. 저어... 구두럴 맞치러 가시자고..."

"구두요?..."

"그날 밤 봉게 너무 헐어서..."

"아닙니다. 물 새고 가죽 터질라면 아직 멀었어요."

"곧 그리 되겄든디요. 가시제라."

"아니, 괜찮아요. 물 새기 전에 밑창 갈고, 가죽 터지면 꿰매고 해서 앞으로 5년은 더 신을 수 있어요."

"그리 궁싱시러서 되간디요. 가시제라."

"학생인데 궁상스러운 거 없어요."

"지 맘이 안 그렁게 가시제라."

"아니, 정말 괜찮아요. 어렵게 버는 돈 헤프게 쓰려고 하지 말아요."

두 사람의 기세는 팽팽하게 맞섰다.

"농사짓고 노동허는 것에 비허먼 열 곱 쉽게 버는 돈이구만요. 천헌 돈이라고 피허시능게라?"

옥비는 억지소리로 기세를 꺾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 , 그게 아니고요..."

"안 가시먼 앞으로 상종 안허겄다는 뜻으로 알겄구만요."

", 이거 참, 그게 아니고..."

"공허 시님도 좋아허실 거구만요. 가시제라."

옥비는 마지막 수를 던졌다.

"이거 참..."

송가원은 지고 말았다. 옥비와 송가원은 나란히 걸어 종로로 나갔다. 옥비는 송가원과 함께 종로통을 걷는 것이 황홀할 만큼 기분이 좋았다. 몇개의 양화점을 지나쳐 화신상회 가까이에 있는 제일 큰 양화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송가원과 옥비를 뒤따르는 여자가 있었다. 학교에서 관철동 집으로 돌아오던 박미애가 그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박미애는 그들이 양화점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발길을 돌렸다. 박미애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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