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하와이의 폭풍
사탕수수농장이고 파인애플농장이고 조선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큰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소동의 기세는 뜨겁고 거셌다. 방영근네 파인애플농장에서도 <신한민보>가 각 작업조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소동이 커져가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동포신문 <신한민보>에는 엄청난 사실이 실려 있었다. 그건 <임시대통령 '리승만' 탄핵안>이었다. 저녁을 먹자마자 방영근네 작업조는 샌달우드나무 아래 모여앉았다. 그들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다른 날과는 달리 지친 기세도 없이 그들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상배 형님, 어서 읽어보시오. 더 올 사람 없소."
누군가가 성질 급하게 말했다.
"글씨, 그래야 되겄지러. 보래, 내사 마 글도 짤르고 눈도 침침하고 그런 기라. 누가 속시원케 읽어보소, 마."
조장 구상배가 신문을 들어 보이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아따, 어사또 뽑는 과거 모요. 글 짤르고 질고 찾게."
누군가가 퉁을 놓았다.
"맞소, 순 언문으로만 쓴 그 신문에 못 알아볼 글자가 머 있다꼬 그라능교. 성님이 뻐떡 읽으시이소."
다른 사람이 야무지게 말을 받았다.
"무신 소리 하노. 낫질 쟁기질 배왔다꼬 다 똑겉은 낫질 쟁기질이등강. 언문 깨치타캐도 토막글 읽기 달르고 줄글 일기 달브레라. 누가 좋겄노?"
구상배가 다시 좌중을 둘러보았다.
"영근이 저 사람 뭘 하고 있어. 어서 일어나지 않고."
어떤 사람이 방영근을 지목했다.
"그렇지러. 뻐떡 안 나서고 머하고 있었드노."
구상배가 반색을 하며 신문을 방영근에게 던져주었다.
"체, 나라고 머 벨수 있간디요."
방영근은 구시렁거리듯 말하며 마른 입맛을 다셨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근심의 빛이 무겁게 서려 있었다.
"그것도 마 출세라 생각카고 큰소리로 읽어보소."
방영근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신문을 펼쳐 들었다.
임시대통령 <리승만> 탄핵안
1925년 3월13일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임시대통령 '리승만' 탄핵안>이 상정되어서 동 3월 18일까지 토의를 종결하고 심사원에게 넘기었던바 동 3월 23일 의회에서 심사 위원의 보고를 받고 재적의원 5분의 4의 출석과 출석의원 4분의 3의 가표로 임시대통령 <리승만>탄핵 면직을 통과하였다.
탄핵 심판서
탄핵 제안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곽 헌, 최석순, 문일민, 고준택, 강창제, 강경신, 라창현, 김현구, 림듣산, 채운개.
탄핵 피고자
대한민국 임시대통령 <리승만> "초래에 응하지 않고 결석"
탄핵안 심사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사법의원
탄핵 심판의 내용
임시대통령 <리승만>은 시세에 암매하여 정견이 없고 무소불위의 독재 행동을 감행하였 으며 포용과 덕성이 결핍하여 민주주의 국가 정부의 책임자 자격이 없음을 판정함.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기탄없이 저촉하였고 국정을 혼란시키어 서 국법의 신성과 정부의 위신을 타락하게 하였음을 판정함.
임시대통령 <리승만>의 범과 사실을 심리하고 대한민국 임시헌법 제4장 제21조 제14 항에 의하여서 탄핵 면직에 해당함을 판정함.
<리승만> 범과의 사실
"일"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그 직임에 피선된 지 7년에 임시대통령의 선서를 이행하지 않었으며 정부의 행정을 집정하지 않었고 각원들과 불목하여 정책을 세워보지 못하였다.
"이"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대미 외교사업을 목적하고 설립한 구미위원부를 가지고 국무원과 충돌하였고 아무때나 자의로 법령을 발포하여서 질서를 혼란하게 하였으며 정부의 처사가 자기 의사에 맞지 않으면 동지자들을 선동하여 정부를 반항하였다.
"삼" 임시대통령 <리승만>은 그 직임이 국내 13도 대표가 임명한 것이라 하여 신성불가침의 태도를 갖이고 임시 의정원 결의를 무시하며 대통령 직임을 <황제>로 간주하여 <국부>라 하며 <평생 직업>을 만들려는 행동으로써 민주주의 정신을 말살하였다.
"사"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미주에 앉어서 구미위원부로 하여금 재미 동포의 인구세와 정부 후원금과 공채표 발매금들을 전부 수합하여 자의로 처단하고 정부에 재정보고를 제출하지 않아서 재정 범포가 어느 정도까지 달하였는지 알지 못하게 하였다.
"오" 임시대통령 <리승만>이 민중단체의 지도자들과 충돌하여 정부의 고립상태를 주출하고 재미 한인사회의 인심을 선동하여서 파쟁을 계속하므로 독립운동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방영근이 읽기를 끝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사건이 두 달이 넘어 뒤늦게 신문에 보도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임시정부에서는 탄핵 심판서를 이승만에게 보내고 만일 사실상 착오가 있으면 2개월 안으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공소하라고 통고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아무 회답을 하지 않았다. 그 절차를 거쳐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탄핵안을 세상에 공식화했던 것이다. 이십여 명인 그들은 잠잠했다.
"머하고 있노. 기운 다 파했나?"
누군가가 불쑥 내쏘았다.
"어이, 얼렁 가서 쌀밥 고봉으로 갖고 오소."
방영근이 쓴웃음 섞어 빈정거리며 담배를 꺼냈다.
"무신 태평시런 소리 그리하고 앉았노. 사람 속 뒤비지는데 그리 한담 말고 뻐떡뻐떡 읽그래이."
"저 사람 또 귀먹쟁이 3년이시."
다른 사람이 내질렀다.
"무신 소리 하노?"
"다 끝났다는 말얼 그리 못 알아묵어?"
"머시라? 그기 그리 되나?"
그 사람은 그때서야 좌중을 둘러보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다른 때 같았으면 한바탕 웃음이 터질 만도 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웃지 않고 모두 침울하고 찌푸린 얼굴들로 앉아 있었다.
"다들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니로구만. 대통령 자리를 황제인지 임금인지로 생각하고 자칭 국부라고 하거나, 자기 패거리 짜서 밤낮으로 모함을 하거나 헐뜯어대거나 다 제멋에 겨워서 흥!이지만 말야, 거 세금이고 후원금 같은 것을 제 맘대로 했다는 것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일 아니겠어. 독립운동에 쓰라고 우리가 피땀 흘려 낸 혈세를 상해로 보내지 않고 이승만이 제멋대로 했다는데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야!"
마침내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는 말을 해갈수록 흥분을 하다가 결국 분노를 터뜨렸다.
"누가 아이라. 그간에 이승만이가 우리 혈세 띠묵는다꼬 짜드락한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었능기라."
"근디 말이여, 어이 영근이,아까 그 대목얼 한분 더 읽어보는 것이 어쩌겄능가. 모를 말이 더러 있드랑게로."
"보래, 내가 머시라카드나. 글자만 소리내 읽는다꼬 되나 어데. 속뜻얼 알아야제. 어이 영근이, 그 대목 새로 읽어보능 기 우떻겄노."
구상배가 일렀다.
방영근은 네 번째 조항을 천천히 다시 읽어 내려갔다.
"보래, 보래, 딴말이사 앞뒤 짚어감서 얼추 알겄다마는도, 거 범포라카는 말언 머꼬, 범포."
"범포라... 그렁게 고것이 말이시 잉... 나라사람이 바쳐야 헐 돈이고 곡식얼 써 없애부린다 허는 말이로구마."
방영근은 말뜻을 쉽게 풀면서 빗나가지 않게 하려고 신격을 썼다.
"맞다, 인자 앞뒤가 딱 맞는다 아이가!"
그 남자는 자기 허벅지를 철썩 치며 외치고는,
"그라니꺼네 이승만이가 우리가 낸 혈세고 후원금이고 얼매나 많이 묵어쳤는지 모린다 그 말 아이가?"
그는 눈을 부라렸다.
"맞네, 맞어. 바로 그 말이구마."
누군가가 찰싹 손뼉을 치며 호응했다. 범포란 다름 아닌 <공금 횡령>의 또 다른 말이었다.
"쯧쯧쯧... 우째 그랄 수가 있노..."
구상배가 담배 연기를 탄식으로 내뿜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참 기가 막힐 일이구나."
"우째 그런 인종이 다 있노."
"아이고메, 우리 돈이 어쩐 돈이라고. 이리 문딩이 상호 돼감서 피땀 쏟아 번 돈얼 지눔이 어째서 묵어."
"우리 돈이 그냥 돈이가. 우리 돈은 핀 기라, 피!"
"그러니 혈세라고 했지."
"우리가 독립운도에 쓰라고 돈 냈지 제놈 사복 채우라고 돈 냈나."
"아이고, 원통허고 절통헌거. 묵을 것 안 묵고 입을 것 안 입고 낸 그 아까운 돈얼 으째야 쓰까."
그들은 다투어 감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다덜 보이소! 우리가 이리 당허고만 있으믄 되겄능교."
"그려, 무신 수럴 내야 혀."
"그렇고말고. 그놈을 그대로 둬서는 안된다고."
"그려, 그놈이 돈얼 도로 토해놓게 맨글어야 허."
그들은 점점 흥분해 가고 있었다.
"왜 아이라. 이 하와이 사는 우리 조선사람덜이 다 이승만이허트로 몰키 가서 도로 토해놓게 해야 된다카아."
"그것 참 좋은 생각인데. 이리 당하기만 해선 안 될 일이라니까."
"맞어, 혈세 낸 사람덜언 다 우리허고 똑겉은 맘 아닐 것이여."
그들의 동요는 차츰 심해지고 있었다. 곧 자리들을 박차고 일어날 것 같은 기세였다.
"다덜 화통 삶아묵었나? 우예 그리덜 맴이 급하노."
구상배가 엄한 얼굴로 좌중을 휘둘러보았다.
"그려, 말이야 다 맞는 말인디, 일이야 우리 뜻대로 그리 잘되지넌 않을 것잉마. 무신 소리냐먼 말이여, 이승만이넌 대통령자리서 쫓겨나는 것으로 죄닦음을 헌 심이고, 그라고 그 인사가 우리가 몰켜간다고 히서 돈얼 도로 토해낼 물건이 아니라 그런 말이시."
방영근은 구상배의 말을 뒷받쳤다.
"이, 그렇기도 헐 것이여. 그 인종 낯짝 뻔뻔하고 경우 없기로야 진작에 소문난 것잉게."
누군가가 진하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와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은 험한 욕설을 퍼부어대며 계속 이승만을 성토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만 말이 얽히고설키는 가운데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건 남용석이었다. 그는 기죽은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딴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한 얼굴로 망연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남용석은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선미와 이혼을 하고 다달이 위자료를 물게 되면서부터 후원금은 고사하고 세금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남용석은 그동안 두어 차례 경찰서에 갇히기도 했다 땡볕 속에서 파인애플 가시에 찔려가며 죽도록 일해서 번 돈을 꼬박꼬박 뜯기는 것을 그는 너무 억울해했다. 그래서 어느 달엔가는 위자료를 주지 않았다. 그러자 선미는 즉각 경찰서에 고발을 해버린 것이었다. 남용석은 어찌할 수 없이 위자료를 주고 풀려났다.
"그년이 내 철천지 웬수여. 그년 죽이고 나가 죽어야 혀."
남용석이 아무때나 불현듯 내뱉기 시작한 탄식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이상하게 변해 갔다. 웃음이 사라진 얼굴은 늘 침울했고,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먹는 것을 소화시키지 못해 끅끅 트림을 해댔고, 맥이 다 빠진 것처럼 어깨가 처져내려 일손이 무디어졌다. 그런데 술자리가 생겼다 하면 염치고 체면도 없이 폭음을 해댔다. 그런 다음 날이면 영락없이 술병이 생겨 일을 나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내놓고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런 일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여자들까지 일을 나가고 있는 공동노동이 파인애플 농사였다. 그런 날이면 사람들의 얼굴에 싫은 기색이 역연했다. 그럴 때마다 방영근은 자기가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조심조심 남용석에게 충고도 하고 위로도 했다. 그러나 남용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방영근의 말조차 귀담아듣지 않는 남용석에게 다른 사람들은 아예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대신 남용석을 꺼리는 눈치들이 차츰 심해져 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남용석은 점점 더 기가 꺾이고 벙어리가 되어갔다. 그들은 밤늦게까지 이승만을 욕해대고 울분을 토하고 하다가 흩어졌다. 삭일 길 없는 분노가 끓고 있는 그들의 가슴에 밀려드는 것은 배신당한 허탈뿐이었다.
"고것 아조 꼬시게 잘된 일이로구마."
단둘이 걷게 되었을 때 남용석이 불쑥 한 말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오랜만에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머시가 잘돼야?"
방영근은 무슨 말인지 언뜻 종잡지 못했다.
"아, 이승만이가 돈 띠묵은 것 말이시."
"아니, 무신 소리여?"
방영근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승만이가 돈 띠묵고 망쪼 들었응게 인자 나가 살판나게 생겼단 말이시."
"머시여? 자다가 봉창 뚜딜긴가 시방?"
방영근은 의아해했다.
"어허, 생각히 보소. 그 잡년이 누구 믿고 그리 날친지 알어? 이승만이 망혔응게 그년도 인자 나헌티 꼼지락달싹 못허게 생겼단 말이시. 알아묵겄능가?"
남용석의 목소리에는 더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남용석의 말이 영 엉뚱했지만 방영근은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선미라는 여자는 자기가 이승만 박사와 가깝다는 것을 언제나 과시하고 다녔던 것이다. 남용석은 자기가 경찰서에 갇히고는 했던 것이 이 박사가 선미 편을 들어서 그리된 것으로 믿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오랜만에 생기를 되찾은 건 이제 더는 위자료를 안 주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런 기분을 깨는 것도 차마 못 할 일이었다.
사람들은 며칠이 지나도 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농장일도 마지못해서 하는 시늉만 할 뿐 모여앉으면 그저 이승만에 대한 욕이고 험담이었다. 농장마다 뒤숭숭하고 살벌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들의 분풀이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이젠 혈세고 독립자금이고 더는 낼 것 없어."
"그야 당연지사지. 어떤 개아들놈들 좋은 일 시키라고 또 돈을 내."
"두말하믄 잔소리 아이가. 사람이 한 분 속제 두 분 속나."
"인자 어떤 놈덜이고 또 돈내라고 나스먼 그런 놈덜 아가리럴 쫙쫙 찢어부러야 혀."
마치 결의라도 한 것처럼 농장마다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분풀이는 또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야 문딩아, 요런 때 술 안 묵으믄 언제 묵나 말다, 뻐뜩 가자, 뻐뜩."
"그려, 그려, 세금 안내고 술 묵을 돈 생게서 좋구마. 잉, 얼렁 가드라고."
"맞었어. 더는 죽 쒀서 개 좋은 일 시키지 말고 우리 실속이나 채워야지."
사람들은 끼리끼리 술타령을 시작했다. 그 바람도 돌림병처럼 농장마다 번져나가고 있었다. 방영근도 그런 바람에 휩쓸려 날마다 술을 마시러 다녔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해 해변가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면 분이 다소 풀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분노와 허탈이 또 가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또 술을 마시러 갔다. 방영근은 그 광풍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바람에 휩쓸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만이 분풀이하고 앙갚음하는 길로 여겨졌다. 그러지 않고서는 가슴에서 들끊는 온갖 감정들을 다스릴 도리가 없었다. 여럿이 모여 술에 취하며 욕을 해대고 지난날의 고생을 이야기하고 고향을 그리워하고 하다보면 서로 위안도 되고 분이 풀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술타령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돈들이 바닥나기 시작했고, 농장 지배인들이 일손 소홀해진 것을 눈치채고 나섰던 것이다. 방영근은 아무리 마음을 추스르고 다잡으려 해도 일손이 전처럼 놀려지지 않고 무겁기만 했다. 마음을 넓게 먹고 이승만이란 사람을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그 소행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범과 사실 다섯 가지를 되짚어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도 피치 못해서 그렇게 됐겠구나 싶은 것이 없었다. 그 범과들은 모두가 지난날 벌였던 말썽들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최고로 많이 배워 박사라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아니,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독립운동이란 자기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는 일 아닌가? 그 일이 어렵고 장해서 뼈 빠지게 번 돈을 아낌없이 내놓지 않았던가? 우리같이 무식한 것들도 다 아는 그 일을 이승만이란 사람을 몰랐는가? 그 유식하고 유식한 사람이 몰랐을 리가 있는가? 그런데 왜 독립자금을 제멋대로 범포해 버린 것일까? 그게 도대체 어찌 된 맘보일까? 그 사람은 독립운동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입신출세를 위해서 한 것인가? 어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많이 배우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중에 이승만 같은 사람은 또 없을까? 개는 믿어도 사람은 못 믿을 짐승이라고 하던데 그게 정말 아닌가? 사람을 어디까지 믿어야 한단 말인가?
방영근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회의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회의 속에 여러 가지 후회가 휘감기고 있었다. 가장 큰 후회가 애초에 눈 딱 감고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었다. 나라가 망하게 되었거나 말았거나 모금을 딱 외면하고 돈을 모아 태평양 건너가는 배를 탄 사람들이 수백 명이었다. 그때 그들은 제 욕심밖에 못 차리는 인종 못된 것들로 취급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사람들이 똑똑했다는 생각이 들고 부러워지는 것이었다. 그 뒤늦은 후회는 여러 고비를 거치면서 자꾸 커졌던 것이다. 집에 두 번이나 편지를 했지만 아무 소식이 없자 그 후회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애써 떠나지 않았다. 좀 더 진작 편지를 보내지 못했던 후회와 함께 나날이 커지는 금심은 병이 될 지경이었다. 그 근심이 커질수록 애국 성금을 내느라고 하와이를 떠나지 못했던 후회도 커져갔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만주로 건너가는 것이었다. 어차피 일본 땅 되어버린 조선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하와이의 조선사람들은 조선의 조선사람들과는 달리 일본의 지배를 받지 않는 진짜 조선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일본 여권을 가져야 하는 조선 땅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만주로 가서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고향을 찾아가기로 네댓 사람이 뜻을 모았다. 그러나 그 일도 가로막히고 말았다. 나라가 없으니 여권이 없어 딴 나라로 여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좌절 앞에서 그 후회는 더욱 커졌다. 아주 이름난 독립운동가들이 오가는 것은 특별한 경우라고 했다. 그러나 방영근은 그런 후회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독립자금을 꼬박꼬박 냈다는 떳떳한 긍지감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 사건으로 그 긍지감마저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자기들이 낸 독립자금이 상해임시정부에 전해져 무기를 사들이고, 그 무기로 만주의 독립군들은 왜놈들을 무찌르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방영근은 일요일 날 아침 늦잠에서 깨어났다. 잠을 깨운 구상배가 마루 겸 침상에 걸터앉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이 헛묵었네. 무신 늦잠이 그리 늘어지노?"
구상배가 빙긋이 웃었다.
"차암 성님도, 공일날 늦잠 자는 낙도 없음사 무신 재미로 살겄소. 나가 크리스찬이니 예배당얼 나가겄소, 처자석이 있으니 어디 놀이럴 가겄소."
방영근은 꾸무럭거리고 일어나앉으며 입이 찢어져라고 하품을 해댔다. 댕큐나 굿모닝 같은 말이 그렇듯 <크리스찬>도 세월 따라 입에 붙은 말이었다. 전도사들이 농장을 찾아다니며 뻔질나게 쓰는 말이었고, 자꾸 늘어나는 예수교인들의 입에도 붙어 있는 말이었다.
"옳지러, 자네 말 한분 지대로 하느마는. 그러이 인자 여러 말 말고 처자석 보는 재미로 살으락카이."
구상배의 어조에 다잡듯이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이고 성님, 또 그 이얘기 헐라고 왔소. 그럴람사 얼렁 가씨요, 가!"
방영근은 금방 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보래, 요분 일 당허고도 생각이 안 달라졌다 그기가?"
구상배가 정색을 하고 방영근을 쳐다보았다. 전과 달리 그 눈길에 꾸짖음이 담겨 있었다.
"나가 장개드는 것허고 요분 일허고가 무신 상관이 있다고 그러시오?"
방영근은 여전히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구상배의 달라진 기색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어데, 자네야 생각 짚은 사람잉께네 이바구 잠 해볼라나? 요분 일 당허고 어떤 생각이 들더노? 거 독립이고 해방이라카는 기 쉬 올 것 겉드나, 그기 아니먼 감감헐 것 겉드나? 그기 감감헌 일인 기라. 독립자금얼지 피맨크로 무섭게 생각험서 알뜰살뜰 써도 독립이라카는 기 에로블 긴데 감투 쓴 인종이 그 꼬라지 해갖고야 어는 세월에 독립이 되겄노? 그라고 말다, 그 꼬라지 허능 기 어데 그 작자 한나뿐이겄나? 그러이 다시루에 물 붓긴 기라. 보래, 우리가 여게 하와이땅에 온 지 몇 년이나 됐는지 아나? 20년 아이가, 20년! 그 누가 이리 허망허게 세월이 갈지 알었드나? 그리 긴 세월이 흘러도 독립이 안될지 그 누가 알었나 말이다. 내년에넌, 내년에넌 허고 믿다가 이리 된 거 아이가. 그러이 보래, 만주로도 몬 가고, 독립도 감감허고, 여게서 발 묶여 또 20년 세월이먼 자네 우짤 끼고? 그 늙어 꼬부라진 나이에 우짤 끼고 말이다. 그러이 이자라도 뻐뜩 장개들어 늙은 삭신 의지헐 디 맨들어야 된다캉. 우예, 내 말이 틀리나?"
구상배는 양쪽 입꼬리에 침버캐가 끼도록 간곡하게 말했다. 방영근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구상배의 세월이 흘러갈 줄 몰랐었다. 앞으로 또 20년이 그렇게... 설마 그러랴 싶었다. 그러나 자신 있게 구상배의 말을 꺾어버릴 수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번에 일을 당하고 보니 독립은 너무 멀고 감감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성님, 나가 시방 몇 살인지나 아시요?"
방영근은 담배를 빼 들며 스산스럽게 웃었다. 그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다.
"마흔 나이가 우쨌단 말고?"
"차암, 지대로 장개들었음사 손지새끼덜 볼 나이란 말이오."
"그래, 그거사 누가 모르나. 마흔에 손지새끼덜 보는 것만 알고 환갑에 자석 보는 것언 몰르능강?"
"아, 마흔에 장개드는 것허고 환갑에 자석 낳는 것허고 똑겉소? 마흔에 장개들어 깐 새끼럴 어느 세월에 키우겄소."
방영근은 짜증스럽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무신 소리 하노. 환갑에 시물 자석이먼 됐제 우떻탄 말고? 열대여섯 보톰 기운 쓰고 일할 긴데 머시가 늦노. 여러 말 말고 내 말 듣거라마."
"그러고 나도 용석이 꼴 안 나고 잡소."
"어허, 또 그 소리가. 그기야 시상 여자가 어데 다 그렇나. 한줄기에 여는 호박도 다 지각각이라 안카드나. 그 여자는 심성 좋고, 예절 알고, 몸 실허고, 나무랠 디가 없는 기라. 흠이라카먼 총각 신랑에 과부라는 기흠이제. 허나 자네도 말만 총각이제 이 여자 저 여자 다 본 엉터리 총각인꺼네 손해날 것도 서운할 것도 없는 거 아이가. 내가 자네헌티 따구시 대 맞기로 허고 사람이사 보장허꾸마. 뜸 그만 딜이고 뻐떡 예식 올리자 그만."
구상배는 방영근의 무릎을 잡아 흔들었다.
"알겄소, 생각혀 보겄소."
"또 말 피할라카나?"
"아니구만이라. 나도 요분 일 당허고 생각이 많애졌구만요."
"와 아이라. 우쨌그나 독립이 쉬 될 끼라고 믿어서넌 안된대이. 그거 믿다가 또 20년 허송했다카믄 자네 노년이 고적허고 서러블 낀께로. 사흘 안으로 답해야 되능 기라. 알긌나!"
구상배는 버럭 소리쳤다. 그 얼굴에는 저으기 만족스러운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와따, 귓청 떨어지겄소."
방영근은 맞받아 내질렀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침울하기만 했다. 구상배가 돌아간 다음에도 방영근은 담배만 빨며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이제 와서 장가를 들다니.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고향에 돌아가리라는 단 한 가지 생각으로 미루고 미루어온 결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때와는 달리 구상배의 말을 강하게 무지를 수가 없었다. 그건 독립이 언제 올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구상배의 말마따나 20년 후에까지 나라를 되찾을 수 없게 된다면ㄲ 너무 암담하고 끔찍스러운 일이었다. 정말 하와이에서 환갑을 맞게 될 수도 있었다. 아니, 그전에 죽을 수도 있었다. 여자들에 비해 남자들은 환갑을 못 보고 죽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방영근이 밥맛없는 밥을 뜨고 있는데 밖에서 말방울 소리가 울려왔다. 그리고 쉰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컬컬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한 달에 두 차례쯤 일요일을 골라 찾아오는 김칠성의 행차였다. 방영근은 반사적으로 눈길을 밖으로 꼬났다. 김칠성의 기척만 들어도 곤두서는 고까움이었다.
결국 저놈이 실속 잘 차린 놈이로군.
순간적으로 스친 생각이었다. 방영근은 자신의 그 갑작스러운 생각에 놀라며 숟가락을 놓아버렸다. 자신의 심정을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약아빠진 김칠성에 대한 고까움이나 경멸은 변함이 없으면서도 어찌 그런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 이승만 사건이 병통이었다.
아니, 저놈도 제가 잘나고 똑똑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뒤따라 떠오른 이 생각에 방영근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약삭빠르게 처신한 김칠성은 능히 그런 생각을 할 위인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김칠성은 누구나 내게 되어있는 인구세조차 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니 다른 성금이고 후원금을 낼 리가 없었다. 그가 왜 그렇게 마음이 변했는지 가까운 사람들은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남달리 돈을 선선하게 잘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남들이 하는 만큼 기부금을 내고는 했던 사람이었다. 남의 술 얻어먹으면 갚을 줄도 알았고, 어느 때는 먼저 기분을 내는 술 인심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사람들의 눈치를 받으면서도 무슨 까닭인지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세금이나 후원금을 안 내는 것만이 아니었다. 술도 전혀 마시지 않았고, 여자 집에도 드나들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함께 어울렸던 방영근과 남용석하고도 자꾸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저 사람 왜 저리 변했지?"
"돈에 환장헌 거 아이가."
"사람 맴이 변허먼 죽는다든디."
"와 아이라. 날이 날마동 땀 빼고 심진 일 허고 사는 사람이 술 한 잔 안 묵고 저리 해서 어디 지 명대로 살아지겄나."
사람들의 이런 뒷말은 기우릴 뿐이엇다 꼬박 1년을 그렇게 버텨낸 김칠성은 어느 날 농장을 떠나갔다. 그리고 보름쯤 지나 다시 나타난 그는 비루먹은 말을 앞세우고 있었다. 말잔등에는 이런저런 물건들이 실려 있었고, 그는 눈에 익은 행상으로 변해 있었다.
"되지도 않을 독립 바라고 언제까지 파인애플 가시에 찔려가며 살겠소."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김칠성이가 마침내 한 말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아주 당당한 모습이었다.
"인자 봉게 자네 영판 잘난 사람이시 잉."
방영근이 혀를 차고 돌아섰다.
"그기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잘 모르겄네."
구상배가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사람들은 김칠성이가 더는 얼굴을 내밀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헛짚은 생각이었다.
"내 물건은 1쎈트라도 더 싸고, 외상도 드리겠소. 기왕이면 같은 조선사람 물건 팔아줘야지 양키나 뙤놈들 물건 팔아줘서 좋을 게 뭐 있소."
김칠성이가 물건들은 내밀며 비위 좋게 늘어놓은 말이었다. 사람들은 그 말에 더 면박을 주지 못했다. 김칠성이는 2년 동안에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럴듯한 그의 말이 다른 농장의 조선사람들에게도 안 먹힐 리 없었던 것이다.
"머라꼬 예? 와 이리 늦는고 했더마넌 또 아덜 봤능교? 김씨년 목이 칠칠이 늘어졌구마는."
어떤 여자의 목청 높은 수선이었다.
"본시 안 그렇나. 되는 사람언 엎어져도 금뎅이에 코 깬다 안카드나."
다른 여자의 맞장구였다.
"맞다, 김씨맨치 팔자 존 사람이 시상에 어디 또 있겄노. 돈 잘 벌이고, 봤다카믄 아덜이고."
또 다른 여자의 풀무질이었다.
"누가 아이라. 일찌감치 실속 채린 김씨가 질인 기라. 혈세고 후원금이고 꼬박꼬박 바친 우리 남정네덜 꼬라지가 머꼬."
"닭 쫓든 개 꼬라지제 머꼬. 다 눈치코치없는 멍청구리덜잉 기라."
"보소, 김씨넌 우예 그리 실속 채릴 눈치가 빨랐능교?"
"허허허허.. 그야 다 아는 법이 있지요. 그때야 다들 날 욕하고 흉보고 했지만 이젠 누가 옳았는지 알 거요. 허허허허..."
방영근은 벌떡 일어나며 담배꽁초를 내팽개쳤다. 그리고 문을 박차고 나가며 소리 질렀다.
"요런 뻔뻔시런 놈아, 대골통 깨지기 전에 당장 나가! 나가!"
여자들이 질겁을 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눈을 부릅뜬 방영근은 무서운 기세로 김칠성을 향해 내닫고 있었다.
"이랴, 이랴!"
놀란 김칠성은 말고삐를 잡아채며 내뛰기 시작했다. 김칠성은 그저 방영근에게 잡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방영근의 불뚝 성질은 무서웠다. 평소에는 입 무겁고 참을성 많고 순진했지만 일단 화를 냈다 하면 황소 기운을 쓰며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초창기 강제노동을 당할 때 루나가 휘두르는 채찍을 감아 잡고 덤빈 유일한 사람이 방영근이었다.
"개좆만도 못헌 놈... 이놈아, 시상이 열두 번 뒤집어져도 혈세 낸 일언 옳은 일인 것이여."
비루먹은 말을 끌어대며 허둥지둥 멀어지고 있는 김칠성을 바라보며 방영근은 감정을 억누를 질긴 음성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방영근은 김칠성을 못 따라가서 발길을 멈춘 것이 아니었다. 남용석과 셋이서 나누었던 지난날의 정이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땡볕 속에서 나날이 노동에 시달리면서 그 사건에 대해 성토하고 욕하기도 지쳐가고 있었다. 그들은 실망과 허탈의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가기 위한 노동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건으로 일어났던 폭풍이 차츰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건으로 부풀어 올랐던 남용석의 기대는 헛꿈이 되고 말았다. 남용석은 어느 날 또 경찰서로 붙들려 들어갔다. 정해진 날짜에 위자료를 부치지 않아 또 선미에게 고발을 당한 것이었다.
"요런 개잡년 보소, 즈그 웃대가리가 동포덜헌티 진 죄가 얼맨디 이년이 안직도 정얼 못 다시고 나대는 것 보소. 요런 가쟁이럴 찢어죽일 년, 나가 요분이넌 니년얼 기연시 죽이고 말 거이다. 아이고메, 사람 미치겄능거!"
남용석은 다른 때와는 달리 몸부림치고 소리치며 잡혀갔다.
"참 독하기도 독한 년이다. 언제까지 저리 피를 빨 작정인고."
"그년 독헌 기야 사나 열 잡아묵을 기지만도, 미국법이 애당초 틀려묵었능기라. 와 못된 지집덜만 역성드노 말이다. 사나덜만 못살 시상인 기라."
"긍게로 조선 땅이 질 아니드라고."
사람들이 언짢아하고 혀를 찼다. 그런 말들을 들으며 방영근은 자신이 구상배의 우격다짐을 끝내 이겨내지 못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남용석은 또 위자료를 경찰서에 내놓고 이틀 만에 풀려났다.
"요런 빌어묵을 놈에 일이 이승만이가 권세 떨어진 것허고넌 아무 상관이 없덜 안혀?"
풀이 줄어 경찰서를 나선 남용석이 뭉텅이진 한숨을 토해냈다.
"그야 자네가 잘못 생각헌 것이제."
방영근의 냉정한 듯한 대꾸였다.
"아이고메, 나이넌 묵어가고나 이리넌 더는 못살겄네."
"다 팔자시."
"아니여, 그년이 나 철천지웬순디, 그년 죽이고 나 죽을 참이시."
"사람 못나기넌."
"고런 개잡년 믹에살리니라고 늙어감서 고상고상 허는 것보담이야 낫제."
남용석은 연거푸 이틀 동안이나 일을 나가지 않고 술에 취해 다녔다. 방영근이가 소리치고 구상배가 달래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이승만 사건으로 자기 문제도 풀리리라고 너무 큰 기대를 건 것이 분명했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농장이 발칵 뒤집혔다. 무장경찰들이 차를 타고 들이닥쳐 집집마다 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경찰에서 찾는 것이 남용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남용석이가 간밤에 집을 비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파인애플밭까지 다 뒤지고도 헛걸음을 한 경찰이 남기고 간 소식은 너무 뜻밖의 사건이었다. 간밤에 선미가 살해되었다는 것이었다.
요런 미친놈아, 요런 미친놈아...
방영근은 주먹을 부르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게 그저 홧김에 하는 소리인 줄 알았지 전혀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찰차는 수시로 농장에 들이닥쳤다. 그러나 남용석은 이틀 동안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방영근은 그 누구에게도 말을 못 한 채 밤잠을 자지 못했다 남용석이 살아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선미를 죽이고 자기고 죽겠다는 말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와이는 남용석이가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는 섬이었고, 숨어 살 만한데도 마땅찮은 곳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남용석의 시체를 와이키키 해변 끝의 벼랑 아래서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그쪽이 바로 조선 쪽이었다.
22. 꺾이지 않는 꽃
등잔불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등잔 불빛은 밝지도 못하면서 한쪽 벽에 사람의 그림자를 크고 진하게 찍어놓고 있었다. 그림자는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밤의 정적이 깊었다. 저 멀리서 소쩍새 울음소리가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지고 있었다. 그 쉰 듯하고 떨리듯 하는 소리는 멀고 감감해서 더 애달프고 서럽게 사무치고 있었다. 조서에서는 4월이면 시작될 소쩍새 울음이 철이 늦은 만주에서는 6월에야 시작되고 있었다.
송수익은 또 문장 하나를 써놓고 한정없이 앉아 있었다. 한 문장을 써놓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고, 또 한 문장을 써놓고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고는 했다. 될 수 있는 대로 짧게 써야 하는데 너무 오랜만에 필을 드니 할 말은 많고, 짧은 편지에 마음을 다 담자니 글 엮기가 더디었다.
중원이 모친 전
무심히 흐른 세월이 십오개 성상이오. 세월은 무심하였으나 인간사는 유심하였으니 그 간에 심고신고가 얼마나 많으시었소. 대의를 지킨다 하여 그간에 지아비 노릇은 전무하였으니 그 죄가 바다를 덮고 하늘에 이름을 너무 잘 알고 있소. 당신과 권속들은 무사 평안한지요. 이 몸은 당신의 염려지덕으로 무사무병하게 지내고 있소. 그간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믿고 일절 편지 쓰는 것을 삼가며 더러 인편에다 소식 전하다가 이렇게 필을 들게 된 것은 못 잊을 연고가 가슴에 맺힌 까닭이오. 당신이 더 잘 기억하리라 믿소만 우리가 더불어 부부지연을 맺은 것이 금년으로 꼭 30년이오. 화평한 세상이었으면 얼마나 큰 잔치를 벌였겠소. 허나 그냥 검기기 애달파 조그만 정표로 여기 만주산 호박 반지를 인편에 보내면서 몇 자 적는 것이라오. 부부지연 30년 세월을 헤아려보니 그 절반 15년을 만 리로 헤어져 살았구려. 그 세월 동안 당신 그리움으로 흉중에 쌓인 말을 어찌 다 하리요. 둥근 달을 당신인 듯 바라본 것이 그 얼마이여,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에게 항정을 실어보낸 게 또 얼마이리요.
송수익은 이 대목에서 글이 막혀 처음부터 몇 번이고 또 읽었다. 막상 글을 시작하고 보니 오랜 세월 동안 억누르고 억눌러왔던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봇물로 터져 흐르고, 온갖 고생이고 괴로움을 혼자 겪고 이겨냈을 가엾음이 가슴 미어지게 했던 것이다. 이러길래 마음을 풀어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만 편지를 마감해야 된다고 생각하며 송수익은 감정의 고삐를 조였다.
중원이하고 가원이가 효를 알되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는 장부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소. 헤아려보니 중원이가 대학을 졸업했을 터인데, 이 아비의 뜻을 전해 주시오. 회신하려고 하지 마시오. 당신의 무강과 집안이 두루 평안하기를 빌겠소. 이만 총총.
송수익은 처음부터 다시 편지를 읽어보았다. 편지의 행간마다 아내의 이 모습 저 모습들이 어리고 있었다. 호박 반지는 금. 은. 옥 같은 것들보다 훨씬 헐값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청옥 쌍가락지를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호박을 몸에 지니면 온갖 잡귀를 막아주고, 잔병 없이 건강을 지켜주고, 장수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송수익은 호박 반지에 다 자신의 그런 마음까지 곱절로 담았던 것이다.
송수익은 다음날 일찍 지삼출과 함께 길을 잡았다. 대종교 시교당 회의가 있었다.
"공허 시님이 늙어간게 근가 어찐가 발질이 영 뜸허구만이라 잉."
지삼출은 논둑에 싱싱하게 돋아오른 쑥을 뜯어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그 나이가 늙기는..., 아마 그쪽에서 할 일이 많을 거요. 소작쟁의 일으키도록 농민회들 조직하랴, 형평사 사람들하고 관계라랴, 몸을 몇 개로 쪼개 쓰고 있을 것이오."
송수익의 말이 나직했다.
"허기넌 공허 시님 나이가 질로 젊제라 나가 그 나이만 되았어요.."
지삼출은 머리에 손가락빗질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송수익은 무심결에 지삼출을 쳐다보았다. 지삼출의 머리가 더 많이 희끗희끗해진 것 같았다. 지삼출과 공허와 자신의 나이를 생각해 보았다. 지삼출이 자신보다 세 살이 더 많아 마흔여덟이었고, 공허가 서른아홉인가 그랬다. 지삼출도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중늙은이가 되어있었다.
아, 벌써.. 그간에 해놓은 일이 무엇인가..
송수익은 불현듯 밀려드는 허탈감에 싸였다. 그리고, 이 나이에 무엇을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실의가 겹쳐왔다. 그런 감정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마흔은 넘기면서부터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기 시작했고, 평소에는 애써 피하려고 했던 감정들이었다.
아니야, 이상룡 선생 같은 육십 객도 건재하는데, 그런 분에 비하면 나는 청년 아닌가!
송수익은 정의부 중핵인 이상룡 선생을 떠올리며 그런 퇴영적 감정을 묵살했다. 그러나 자꾸 나이 들어가는 안타까움은 비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줄기차게 싸워온 효과도 없이 일본세력이 자꾸만 커져 만주까지 위협해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 비감은 더 쓰라리고 아팠다.
"저어... 만복이는 어찌하고 있소?"
송수익은 길을 가로지른 물줄기를 건너뛰며 물었다. 그 물줄기는 쟁기질 끝난 논으로 이어져 있었다.
"아, 그놈으 새끼가 누구 탁해서 그런지 겁도 많고 기운도 못 쓰고, 사람 노릇 허기넌 영 글러묵었구만이라우. 고런 빙신 팔푼이 겉은 새끼가 여자도 쏘는 총얼 무서와라 벌벌 떨고, 그 쉬운 훈련도 못 이기고 비실비실허니, 고것이 애비 우세시키고 낯짝에 똥칠허자고 태인 빙신이제 어디 사내새끼랑가요. 고런 못난 쫌팽이새끼넌 팍 엎어 자근자근 볼ㅂ아부러야 허는디."
지삼출은 굵은 목덜미가 벌겋게 부풀고 이마에 핏줄이 솟도록 화를 내며 카악 가래를 돋우어 내뱉었다.
"아니오, 그리 외골수로만 생각할 일이 아니오. 만복이가 공부는 잘하잖소."
송수익은 지삼출의 절망스러운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이제 만복이의 일에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참, 조선 놈이 만주서 총질 잘허고 기운 잘 써야제 질이제 책이나 파고들어서 고것얼 어디다 써묵겄능게라. 지눔이 과거급제 베슬헐 것도 아니고."
지삼출이 코방귀를 뀌며 담배쌈지를 꺼냈다.
"그렇지가 않소. 사람은 다 제각각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오. 우선 만복이가 꼭 독립군이 되길 바라는 지 동지 생각을 바꾸도록 하시오."
"글먼 멀허고 살게라? 그놈언 기운도 못 써서 농새 지묵기도 틀렸당게라 지가 아덜농새넌 찰팍 엎어부렀구먼요."
지삼출은 곰방대를 입꼬리에 물며 한숨을 토해냈다.
"보시오 지 동지, 어디 독립운동을 독립군만 하는 것이오? 이 만주 땅에 조선 농부들이 없고서야 독립군들이 어찌 있을 수 있고. 농부들이 피땀 흘려 뒷바라지하니까 독립군들이 앞으로 나서서 싸울 수 있는 것 아니오. 그러니 내가 늘상 하는 말이지만, 농부들도 독립운동을 하는 거란 말이오. 다만 앞으로 나선 것하고 뒤에 있는 것하고 차이가 있을 뿐이오. 또, 독립운동이 어디 한두 가지요? 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소학교 선생을 하겠소? 우리 대종교 활동은 또 뭐요? 친일모리배들을 빼놓고는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모두가 독립운동을 하고있는 것이오. 그러니 만복이도 제 능력에 맞춰 일을 고르면 될 것 아니겠소. 공부에 더 열중하게 해서 소학교 선생을 시켜도 좋고, 대종교 일을 보게 해도 좋지 않겠소?"
송수익은 잔잔하게 웃으며 지삼출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야아.. 그렇기넌 허구만요.."
지삼출은 반가운 기색이 도는 얼굴로 멋쩍은 듯 웃고는,
"지기랄, 방대근이럴 반언 못 따라가도 반에 반만 따라가도 그 꼬라지넌 아닐 거구만이라. 천수동이 아덜 상길이넌 떡 허니 독립군이 되았는디 그놈으 새끼가 그리 빙신질이니 지 체면에 먹칠 똥칠 다 해부렀구만요."
그는 아무래도 아쉬운 듯 빠르고 세차게 혀를 차댔다.
"그런 생각 마시오. 만복이가 더 큰 공을 세울 수도 있는 일이니까."
송수익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지삼출의 복잡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거느렸던 천수동의 아들은 당당하게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정작 가지의 아들은 그렇지 못하니 지삼출의 심정이 어떠할 것인가.
"지 속이서 어찌 고런 새끼가 불거져 나왔는지 원..."
지삼출은 곰방대를 뻑뻑 빨아댔다.
"지 동지,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요. 사람이 뱃속에서 타고나는 것도 중하지만 자라면서 겪고 당하는 일들이 더 중할 수도 있소. 만복이가 예닐곱 살 때던가.. 크게 경기를 앓은 적이 있지 않소?"
"야아, 마적떼가 들이닥쳤을 적에 총질에 놀래 그리 됐제라. 근디 어칙게 선상님이 그런 일꺼정..."
지삼출은 눈이 휘둥글해졌다.
"그때 심히 앓아 몸이 허약해지고, 그 탈로 설사병까지 앓지 않았소. 애 잃는 것이 아닌가 걱정들을 많이 했는데, 그 피골이 상접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오. 만복이가 그때 몸도 마음도 상해 기운도 약하고 겁도 많고 그럴 것이오. 그러니 너무 애 타박만 말고. 지 동지 입장만 생각하지도 말란 말이오."
"아이고메 대장님..."
지삼출은 자신도 모르게 <대장님>이란 말을 쏟아놓았다. 그 오래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해 주는 고마움에 가슴이 벅차올랐고, 못난 자식을 업신여기지 않고 감싸주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 목이 메고 있었다. 그대 아들을 무사하게만 해달라고 빌며 남모르게 울었던 것도 여러 번이었다. 철이 들어 운 것도 그대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지삼출은 송수익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만복이는 정말 그때 몸도 마음도 상하게 된 것 같았다. 잘 자라던 나락이고 남새도 심한 가뭄을 타고 나면 끝내 제구실을 못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내의 푸념이 괜한 수다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내는 죽을 고비를 넘긴 만복이에게 보약 한 첩 먹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안쓰러워했던 것이다. 그놈이 그나마 공부마저 보잘 것이 없었더라면 어쨌을까 싶었다. 지삼출은 송수익이 말한 대로 아들의 앞길을 바꾸기로 작정했다.
마차역에 다다른 송수익과 지삼출은 무송으로 가는 마차를 탔다. 무송은 통화나 유하에 비해 지형지세가 험해 아직은 안전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곳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가 없어 지삼출이 동행하고 있었다. 통화나 유하 같은 도회지들은 진작에 위험지대로 변해 있었다. 중국 관헌들이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노리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중국 관헌들을 매수하는 것과 동시에 도회지마다 밀정들을 대량으로 투입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밀정들은 다시 현지인들을 상대로 앞잡이와 끄나풀 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 밀정들이 노리는 현지인이란 물론 가난한 조선사람들이었다. 도회지에서 행상을 하거나 날품팔이를 하는 가난한 조선사람들에게 밀정들이 은밀하게 내미는 돈은 더없이 좋은 낚싯밥일 수밖에 없었다. 밀정들은 그런 보이지 않는 조직을 짜놓고 독립운동가들의 공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건 그전의 소극적인 탐지활동과는 정반대의 양상이었다. 일본세력은 그런 식으로 거미줄을 치며 만주를 장악해 들어오고 있었다.
무송의 회의장 둘레에는 젊은 무장독립군들이 경계를 펴고 있었다. 각 시교당의 시교사들은 단순히 대종교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대종교단이 또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인 듯 그들도 어느 독립운동 단체에든 속해 있는 간부급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회의의 주제는 답보상태에 빠진 교세 확장에 대한 대책이었다.
".....우리 대종교는 앞서 제시한 바대로 창종 이후 가장 지난한 국민에 처해 있습니다. 만주 포교 이후 날로 번창해 왔던 우리의 교세가 이삼 년 동안 전혀 확장되지 않고 답보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입니다. 이는 우리 대종교 자체의 위축을 두러워함이 아니올시다. 우리 대종교의 목표는 상실된 국권을 회복하여 강건한 한배님의 배달의 나라를 세우는 것인즉, 대종교의 교세가 확장되지 않는 것은 바로 독립군의 세력이 신장되지 않는 것을 뜻하므로 우리는 우리를 금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시교사님들이 포교 활동을 등한히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세 확장이 안 되는 것은 우리가 이미 파악하고 있다시피 러시아에서 불어닥치는 신풍 때문입니다. 그 공산주의라는 새 바람에 청년층들이 휩쓸리면서 우리 대종교에 입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대종교인이었던 젊은이들마저 탈교하는 현상까지 야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좌시할 수 없는 중대 사태인바 그 대책을 숙의하고 강구하기 위해서 본 회의를 소집하게 된 것이올시다. 또한 최근에 발생한 중대 사태를 이에 첨가하고자 합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 6월 11일에 봉천성 경찰청장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사이에 아주 고약한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협정은 총독부 경무국장 삼시궁송의 성을 따서 삼시협정이라고 했는데, 그건 재만 불령선인들의 취체(단속)를 강화함에 있어서 상호 간에 긴밀히 협조한다는 내용입니다. 왜놈들이 지칭하는 불령선인이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바로 우리들과 우리의 동지들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그 협정으로 우리의 독립항쟁은 더욱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난제가 중첩된 전도를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지 고견들을 기탄없이 발의하여 주시기 바라 마지않습니다."
한법린이 시종 심각하고 침통한 얼굴로 연설을 마쳤다. 송수익은 한법린의 조리정연한 연설을 들으며 자신이 지적당하는 것 같은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벌써 오래전부터 시교사의 직무를 유기해 온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마음 한쪽에 무정부주의가 담기면서부터 의식이 난무가 시작되었고, 그 갈피를 정리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러 있었다.
"공산주의 풍조는 재고의 여지 없이 무조건 차단시켜야 합니다."
"글쎄요, 무조건 차단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그리 담을 치듯 용이한 일일까요? 그보다 먼저 청년들이 어째서 공사주의에 경도되고 있는지 그 원인부터 규명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 제가 무조건 차단을 먼저 주장하는 것은 공산주의는 그 어떤 종교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 그 말씀 맞습니다. 공산주의는 우리 대종교의 적인 셈입니다."
종교인이 되느냐 그겁니다. 또, 우리가 무조건 차단하고 나선다고 공산주의 풍조가 막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풍조라는 말뜻이 무엇입니까. 바람 풍에 밀물 조자 아닙니까. 바람과 밀물을 그 어느 장사가 막겠습니까. 그러니까 먼저 청년들이 공산주의에 경도되는 원인을 규명해 낸 다음 우리도 그에 상응하는 묘책을 내놓아야 하지 않느냐 그겁니다."
"그 말씀이 지당한 것 같습니다. 헌데 청년들이 공산주의에 쏠리는 연고가 대체 무엇인가요?"
"그야 신풍조라니까 젊은것들이 그저 놀아나는 거지요."
"아닙니다. 청년들을 그리 경박하게 속단할 것이 아닙니다. 제가 대강 알기로는 공산주의가 내건 두 가지 큰 주장이 있습니다. 첫째가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들을 부자나 지주들의 속박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이고, 둘째가 열강들로부터 지배당하고 있는 세계 약소민족들의 독립을 적극 지원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 동포 청년들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양수겸장이 아닐 수가 없지 않습니까. 나라도 찾고 가난도 면하게 된다는데 그쪽으로 쏠리게 되는 건 당연지사가 아닐까 합니다."
"예,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럼 우리 대종교에서 부재한 게 가난에서 구제한다는 것이로군요. 그 점을 교리에 추가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예에? 부자나 지주들을 원수로 삼아 쳐 없애자구요?"
"아니, 그건 큰일 날 소립니다. 그리되면 밥술 좀 뜨는 사람들은 다 탈교에 배교를 하고 말 것입니다."
"그건 너무 조급한 의견이시고, 이런 방책은 어떻겠습니까? 공산주의가 약소민족의 독립을 지원한다니까 그 대목에서 상호협조를 강구하는 것 말입니다."
"그건 너무 조급한 의견이시고, 이런 방책은 어떻겠습니까? 공산주의가 약소민족의 독립을 지원한다니까 그 대목에서 상호협조를 강구하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야 동상이몽 아닙니까. 모든 종교를 부인하는 공산주의하고 무슨 협조가 된다는 겁니까."
"아니, 그리 속단할 게 아니지요. 러시아 공산주의자들하고는 협조가 안 될지 모르지만 같은 동포끼리 나라를 찾자는 공동목표를 두고 협조가 안 될 것도 없는 일이지요."
"글쎄요, 그건 내 소견으로도 몽상 같습니다. 대종교도가 대종교를 부인하는 부류들과 협조를 한다는 건 우리 자신이 대종교를 부인하는 배교 행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아니, 그건 너무 극단적인 생각이라고 사료됩니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인 독립을 달성시키기 위해 협조를 시도해 볼 수도 있다는 것이지 배교하자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예, 목표 달성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시해야 하는 건 근본이지요. 근본이 서로 다른데 어느 한 부분이 같다 하여 근본을 훼손할 수야 없는 일이지요."
난상토의라 많은 의견들이 오갔다. 송수익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의견은 이미 두 가지로 대립되어있었다. 공산주의자들과 협조를 모색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그것은 쉽사리 결론이 날 문제가 아닐 것 같았다.
회의는 다음 날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마땅한 대응책은 나오지 않았다. 두 가지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 상태에서 소모적인 입씨름만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회의는 교세 확장의 답보상태에 대한 문제점만을 공식화했을 뿐 그 대비책은 북만주지역과의 협의를 종합하기로 하고 뒤로 미루었다. 송수익은 독립운동이 또다시 어려운 고비를 맞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건 부정적으로 보자면 독립운동 세력의 새로운 분산이었고, 긍정적으로 보자면 독립운동 세력의 새로운 대두였다. 그런데 대종교가 종교인 한 공산주의 세력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것은 필연이 아닐까 싶었다. 물과 기름같이 서로 섞일 수 없는 본질적 숙명. 그건 복벽주의와 공화주의의 필연적 대립과 똑같은 성질의 것이었다. 복벽주의와 공화주의가 끝내 합일체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은 너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걸 독립운동 전선의 분열이라거나 독립운동 세력의 파쟁이라고 하는 것은 몰상식한 공론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뿐인 목숨들을 내걸고 나라를 되찾자는 것은 나라를 탈취한 자들만 원수로 삼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긴 자들의 잘못까지도 단죄하자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목숨 바쳐 되찾은 새 나라의 국체는 마땅히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공화주의가 아니고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복벽주의자들은 또 나라 빼앗긴 죄인들의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용납 되어서는 안 되는 망동이었다. 상해임시정부가 탄생한 절대적 의미는 국체를 공화주의로 세운 것이었다. 만주까지 온 임병서를 단호하게 결별했던 것도 그가 한사코 복벽주의를 고집한 때문이었다. 그를 전덕원의 세력권으로 안내해 주면서도 아쉬움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와 헤어진 것도 10년 세월인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송 선생께서는 전혀 의견 개진을 하지 않으시던데, 어인 일이신지요.."
단둘이 마주하게 된 한법린이 송수익을 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예, 그 문제가 그러니까 복벽주의와 공화주의의 대립 같은 성질인 탓에...."
송수익은 가슴이 섬뜩해지면서도 이렇게 말막음을 했다.
"예, 대안이 없다고 파악하셨군요. 젊은이들이 좀 진중해야 할 터인데..."
한법린이 억누른 한숨을 쉬었다.
"저어, 제 소견으로는 청년들이 급속하게 공산주의에 경도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한법린이 그게 무엇이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예, 제가 청년들을 접해 본 바로는 그들은 우리의 독립을 단순히 우리 민족만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공산주의가 제창하느나 국제동맹의 힘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다시 말하면 공사주의 대열에 서면 힘이 큰 나라인 소련과 중국 사람들을 투쟁의 동지로 확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헌데, 청년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꼭 공산주의의 선전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 먼저 청년들이 느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투쟁해 온 결과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줄기차게 싸워왔지만 왜놈들은 오히려 힘이 더 커져 만주까지 위협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청년들은 우리 동포들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예에, 그럴 수도 있겠구먼요, 그럴 수도 있겠어요...."
한법린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침통하게 흐려지고 있었다.
"허나 아직 초보 단계니까 어떤 묘안을 찾을 여유는 있습니다. 우리 대종교는 여타 종교와는 다른 호소력와 결집력이 있지 않습니까."
"예,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새 길을 열도록 고심해야 되겠지요."
한법린은 그 생각에서 벗어나듯 앉음새를 고치고는,
"송 선생의 머리에도 낙엽이 지는군요."
그는 부드럽게 웃음지으며 담배를 권했다.
"예, 성취해 놓은 일 없이 세월만 무상합니다."
송수익은 허허롭게 웃었다.
"그렇지요, 어찌 보면 무상하고 어찌 보면 유상하고 한 게 만주 세월이지요. 무정한 세월 속에 느느니 나이고.."
한법린의 얼굴에 쓸쓸함이 스쳐갔다.
"저어, 혹시 강 건너갈 발길이 있는지요?"
송수익은 낮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주시지요. 빈틈없이 전하도록 단단히 이르겠습니다."
"저어, 편지만이 아니고 빈지도 하나 있습니다. 금년이 안사람과 혼인한 지 30년이라 그냥 넘기기 서운해서 호박반지 하나를 장만했습니다."
반지를 보이기 전에 송수익은 미리 털어놓았다. 뒤늦게 설명을 붙이는 것이 구차스럽게 보일까봐서였다.
"아, 그리되셨습니까. 참 잘하셨습니다. 헌데, 기왕 장만하시면서 옥반지로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한법린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저 정표인데, 구리나 백통에 비하면 그도 너무 과하지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인께서 그동안 홀로 겪으신 고생들에 비하면 너무 약소하지요. 어서 주십시오."
송수익은 속주머니에서 편지와 반지를 꺼내 한법린 앞으로 밀어놓았다.
"편지에도 썼지만 회신 받아올 것 없다고 일러주십시오. 신변 위험이 큰데 두 차례씩 내왕해선 안 되니까요."
"그리하지요. 첫 서신이신가요?"
"간간이 인편에 안부는 전했습니다."
"참 어지간하시군요. 부인에게 지은 죄가 막중하십니다."
한법린이 나무라듯 말했고, 송수익은 낮은 소리로 웃었다. 송수익과 지삼출은 나흘 만에 돌아왔다. 그런데 마을에는 큰 사고가 벌어져 있었다. 천수동의 아내 솜리댁과 수국이가 행방불명된 지 이틀이 지나 있었다.
"뒷산으로 너무 뜯으로 가갖고넌 함흥차사여."
애를 태워 입술이 파삭 탄 천수동이의 말이었다.
"그려서 넋 빼고 않었능겨?"
지삼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 말어. 여그저그 경호대가 다 나서서 사방팔방 뒤져대는디도 워디로 갔는지 그림자도 안 비친단 말이시."
천수동은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푸드득 떨어댔다.
"잡것, 대낮에 호랭이가 물어간 것도 아닐 것이고, 필시 어떤 밀정 놈의 소행일 것이여."
지삼출이 뿌드득 이를 갈아붙였다.
"밀정 놈이 멀라고 여자덜얼 잡아갈라능가 몰라. 귀신이 곡헐 일이여."
천수동이 가슴 무너져 내리는 한숨을 토해냈다. 성질이 느긋한 편인 천수동이었지만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얼굴은 너무 축나 있었다.
"그려! 그놈이 왔을 것이여. 바로 그놈이 수국이 잡으로 온 것이랑게."
지삼출은 갑자기 이렇게 외치며 송수익 쪽으로 후딱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않느냐고 묻고 있었다.
"아마 그런 것 같소. 그놈이 직접 오지 않았더라도 누군가 딴 놈을 시켰을 것이오."
송수익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들은 양치성이란 자가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것을 방대근한테 들었던 것이다. 송수익은 그만 암담해졌다. 방대근이가 떠나면서 제 누나를 잘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참으로 면목 없는 일이었다.
"장,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출동 준비하고 경호대로 갑시다."
송수익은 급히 돌아섰다.
한편, 수국이와 솜리댁은 벌써 사오백 리 밖의 안도현에 다다라 있었다. 그들은 어느 중국집의 골방에 따로따로 갇혔다. 수국이는 이틀 동안 마차에 실려 오면서 두 가지 생각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하나는 옆동네 하서방 생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서방이 밀정의 끄나풀이었다니... 그건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분명히 일을 당했으면서도 꼭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벙글거리고 아이들하고도 장난질을 잘하는 하서방은 사람좋기로 동네마다 소문이 나 있었다. 좋은 목청으로 신식노래를 잘해 여자들도 흉허물없이 좋아했다. 그러나 좀 게으르고 일손이 더딘 것이 흠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런 흠을 흉잡지 않고 덮어 넘겼다. 술 한잔 걸친 그가 슬프디슬프게 부르는 <울밑에 선 봉선화야..>를 아꼈기 때문이었다.
"솜리댁, 솜리댁, 뭘하고 있소. 천서방이 뙤놈 순사한테 잡혀가고 있소."
솜리댁과 함께 하서방을 따라 뛰었다. 산나물이 바구니에서 쏟아지는 것을 추스를 겨를이 없었다. 옆 동네 쪽으로 등성이를 넘어 산비탈을 뛰어 내려가는데 바위 뒤에서 두 남자가 불쑥 뛰쳐나왔다. 농사꾼 차림인 그들의 손에는 단총(권총)과 칼이 들려 있었다.
"아이고메, 하서방 당신이!"
솜리댁이 소스라치며 부르짖었다.
"뒤탈 안 나게 하시오. 나는 그만 가도 되지요?"
하서방은 솜리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돌아섰다.
"조심허소 잉. 그놈이 살었응게."
수국이는 동생 대근이의 말이 머리를 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단총 구멍은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 산을 타고 걸으며 동네들을 다 피했다. 마차역에 이르러 중국 경찰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중국 경찰과 친한 사이였다. 마차에는 넷이만 탔다.
"우리럴 어디로 잡아간당게라? 우리 여자가 무신 죄가 있소. 보내주싯씨요."
솜리댁은 손일 맞비비고 울면서 애원했다.
"잔소리 말어!"
주먹코의 사내가 솜리댁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들은 마차를 타기 전에 장사꾼 차림으로 옷을 바꿔 입었던 것이다. 솜리댁은 한참을 흐느끼며 떨다가 또 입을 열었다.
"예 말이오, 같은 조선 사람찌리 어째 이런게라? 보내주싯씨요."
"아가리 못 닥쳐!"
이번에는 뱀눈의 사내가 솜리댁의 뺨을 후려쳤다. 수국이는 표나지 않게 솜리댁의 옆구리를 질벅거렸다. 그다음부터 솜리댁은 연상 울면서 떨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수국이는 그저 도망갈 궁리에 몰두해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지 살아나야 했다. 짐작대로 양치성에게 붙들려가는 것이라면 영락없이 죽을 길이었다. 어머니의 원수갚음도 못하고 자기마저 그놈 손에 죽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하서방은 그놈 때문에도 살아서 돌아가야 했다. 그놈이 변함없이 사람 좋은 척, 약간은 모자란 척 벙글거리고 다니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상하게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틀 동안 도망칠 수 있는 허술한 틈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밤에는 손발을 묶어버렸고, 변소에 갈 때도 밖에서 꼭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그때 실수했던 후회가 발등을 찍고 싶도록 커지기만 했다.
"아이고메, 어찌끄나! 엄니가 저승서 눈얼 못 감으시겄다. 나가 꼭 죽일라고 혔는디 어쩌크롬 된 일이다냐. 어쩌다가... 요런 팔푼이가...."
양치성이가 살아났다는 동생의 말을 듣고 너무 놀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여, 누나가 팔푼이라 그런 것이 아니여. 누구든지 사람 죽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구만. 누나가 엄니 웬수 갚자고 독헌 맘 묵은 것이 밀정 놈덜 가심에 칼 꽂는지 아능가? 아니여, 시방도 가심이 방매이질이고 팔다리가 후둘기린단 말이시. 근디 그놈 죽이겄다고 칼을 든 누나가 어쨌겄어. 단박에 죽게 찔르지 못헌 것이야 당연지사제. 어쨌그나 그놈 죽일라고 맘 묵은 것이 간보 큰 것이고, 그놈 가심팍에 칼 박은 것으로 큰일 헌 것이로구만."
동생 대근이의 말이었다. 사실 그놈을 죽이자고 마음은 독하게 먹었지만 어떻게 찔렀는지는 기억이 혼미했다. 방에서 뛰쳐나와 골목을 벗어나면서도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놈을 몇 번이고 찔러 완전히 죽이지 못한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두 사내는 소리댁이 갇힌 골방에서 솜리댁을 어르고 있었다.
"그 말만 하면 살려준다니까."
뱀눈의 사내가 말했다.
"저쪽 방 여자가 다 털어놨어. 어서 대란 말야."
주먹코의 사내가 윽박질렀다.
"야아? 수, 수국이가...."
잔뜩 겁 실린 솜리댁의 눈이 휘둥글해졌다.
"그래, 수국이가 다 말했으니까 너도 어서 말해."
주먹코가 담배 연기를 훅 내뿜었다. 정말일까? 수국이가 정말 말했을까. 아니야, 이놈들이 날 속이는지도 몰라. 아니, 아니, 수국이가 살아 날려고 말했는지도 몰라. 솜리댁은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수국이가 말혔으먼 됐덜 않은감요."
솜리댁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이년이 말이 많아. 저년이 거짓말한지도 모르니까 네 말을 들어봐얄 것 아니야."
뱀눈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자아, 이 돈을 줄 테니까 어서 한마디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 애들이 기다리잖아? 말 안하고 저 칼에 찔려죽을 건 없잖겠어?"
주먹코가 손아귀 속의 동전들을 흔들었다. 뱀눈은 칼을 흔들고 있었다. 솜리댁의 눈앞에는 네 아이들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막내의 후는 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어서 말해! 그놈 본명이 뭐야."
뱀눈이 느닷없이 칼을 들이댔다.
"아이고메, 소, 소, 송수익."
솜리댁은 자신의 입을 얼른 막았다.
"그래, 송수익. 거짓말 안 했으니 바로 집에 보내주지."
주먹코가 싱그레 웃고는,
"이봐, 바로 마차 태워서 보내줘."
뱀눈에게 턱짓하고 일어섰다.
"일어나, 가게."
뱀눈이 칼을 허리춤에 꽂으며 솜리댁의 팔을 낚아 잡았다.
"수국이도 함께 보내주는 것이제라?"
솜리댁의 목소리는 떨리면서 들떠 있었다. 겁에 질렀던 얼굴에도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그년이야 더 조사할 게 있으니까 너나 먼저 가."
뱀눈의 퉁명스러운 대꾸였다. 다음날 수국이는 주먹코에게 이끌려 마차를 탔다. 뱀눈과 솜리댁이 보이지 않아 너무 놀랐다.
"그 아줌니넌.."
"걱정 말어 필요없어서 보냈으니까."
수국이는 머리가 핑 울리는 충격에 부딪혔다.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솜리댁이 돌아가면 하서방이 끄나풀인 것이 금방 들통나는 것이었다.
솜리댁을 죽였구나!
그러나 수국이는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어쨌든 살아나야 한다는 생각이 더 절박해졌다. 수국이는 예쁘게 보이자고 작정했다. 마차에서 내려 점심을 먹기 전에 변소를 갔다. 머리를 풀어 손가락으로 여러 번 빗질을 했다. 그리고 가리마 자리에서부터 양쪽으로 침을 바라나갔다. 뒷머리는 손바닥으로 꼭꼭 눌러 숨을 죽였다. 그런 다음 온 정성을 다해 낭자를 틀었다. 그리고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고루고루 문질렀다.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질 때까지 세게 문질렀다. 그뿐만 아니라 위아랫입술에 번갈아 침을 바라가며 빨았다. 끝으로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고쳤다. 과연 변소를 나선 수국이는 아까와는 딴판으로 예뻐 보였다. 가리마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헝클어졌던 머리는 동백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말끔하게 단아했고, 핏기없이 근심 서려 핼쑥했던 얼굴은 발그레한 화색과 함께 사르르 웃는 듯 화사했고, 특히나 윤기 도는 붉은 입술은 도드라진 색정마저 품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일부러 주먹코에게 눈길을 보낸 수국이는 눈길이 마주치자 부끄러운 듯 몸짓하며 눈길을 휘감아 돌려 피했다. 그 야릇한 눈짓에서 색정이 지르르 흘러내렸다. 주먹코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처음부터 쓸 만하게 생긴 줄은 알았지만 저리도 색정 뜨끈하게 예쁜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저것이 저리 환장하게 생겼으니까 양치성이가 어서 잡아오라고 안달이었구나. 하, 인물 볼 줄 아네. 주먹코는 가슴이 찌르르 울리면서 입안에 신침이 도는 것을 느꼈다. 중국음식점에서 주먹코와 마주 앉아 점심을 먹으면서도 수국이는 사르르 웃음기 도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처럼 눈길을 맞추지는 않고 눈을 살포시 내려뜨고 있었다. 너무 표나게 했다가는 의심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하, 저게 나이도 듬직한 게 볼수록 입맛 나게 생겼구먼. 저걸 분 발라서 비단옷 입혀놓으면 얼마나 더 예쁠까그래. 저게 아주 쫄깃쫄깃하게 생겼는데, 양치성이 하고는 어떤 사일까? 마누라일 리는 없고, 양치성이가 반해서 남의 여편네를 뺏는 것인가? 좌우간 기생들도 많이 봤다만 저리 단맛 나게 생긴 것은 첨인데. 아다라시야 좆기운 한물간 놈들이 좋아하는 것이고, 진짜 계집 맛이야 사내 맛 몇 년 본 조갑지가 최고지.
주먹코는 건성으로 빵을 우물거리며 잔뜩 부풀어 오른 샅을 슬슬 쓸어대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한동안 가다가 주먹코가 불쑥 말했다.
"양 형사하고 어떤 사이야?"
"양 형사라?...."
수국이는 양치성이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전혀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양치성이 몰라, 양치성이."
"아이고메, 시방 나럴 그 사람헌트로 딜고 가시요?"
수국이는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울먹거렸다. 그러면서 양치성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 모르는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어떤 사이냐니까!"
"그냥 넘넘인디... 자꼬 항께 살자고..."
"네 서방이 있는데도?"
".....병들어 죽었구만요."
수국이는 주먹코가 안심하고 덤벼들 수 있도록 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었다.
흥, 김동수의 본명을 알아내라는 건 결국 이따위 사적인 일을 시키기 위한 눈가림이었다 이거지.
주먹코는 양치성에 대한 심사가 뒤틀리고 있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서 마차는 멈추었다. 수국이는 주먹코를 따라 여관으로 들어갔다. 주먹코와 여관 주인이 말하는 것을 듣고 수국이는 깜짝 놀랐다. 겉보기로는 중국여관인데 주인은 조선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주인이 밀정들과 내통하고 있는 끄나풀이거나 붙박이 밀정일 거였다.
"먼지 많이 둘러썼는데 몸부터 씻어."
주먹코가 수국이의 등을 밀었다 수국이는 큰 나무통들이 있는 욕실로 밀려 들어가며 어금니를 맞물었다.
헌계집, 한강에 배 지나가기지. 제년이 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고.
주먹코는 성냥을 척 그어댔다. 수국이는 마지못한 척 술을 따르고, 싫은 척 뿌리치다가 허벅지를 내주었고, 술잔을 비울 때마다 부지런히 잔을 채웠다. 술 취한 주먹코가 마침내 덤벼들었다. 수국이는 또 어금니를 맞물며 그 일을 치러냈다. 주먹코는 곧 코를 골아댔다. 수국이는 잔뜩 웅크리고 누워있었다. 아직 밤이 깊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주먹코는 놀란 듯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또 수국이를 덮치고 들었다.
그려, 잘헌다 이눔아...
수국이는 어금니를 더 세게 맞물며 무겁기만 한 사내의 몸을 받아냈다. 주먹코는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런데 얼마가 지나자 또 잠이 깼다. 그리고 다시 수국이를 덮쳤다.
아이고메, 이놈이 밤새도록 이러다 날이 새면 어쩐댜.....
수국이는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려, 많이 개지랄 쳐라. 니가 쇳덩어리가 아닌디 요분에야 팍 꼬꾸라지겄제.
수국이의 생각은 용케도 들어맞았다. 건드려보아도 밀어보아도 전혀 잠이 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살금살금 기어가 사내의 등짐을 풀기 시작했다. 보자기를 풀자 바로 권총과 칼이 드러났다. 수국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당연히 칼을 써야 했다. 권총은 쏘아본 적이 없었고, 소리가 울리면 끝장이었던 것이다. 수국이는 알몸인 채 칼을 꼬나 들었다. 그리고 알몸인 사내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한번이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내리찍었다. 수국이는 그 사내가 양치성으로 보이고 있었고, 나무에 묶여 늘어져 죽은 어머니의 모습도 생생하게 보이고 있었다. 수국이는 주먹코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몸에 묻은 피를 이불에 닦아냈다. 자신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수국이는 그때서야 알았다. 사내의 옷을 뒤져 돈을 찾아냈다. 여관은 깊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수국이는 안간힘을 해가며 담을 넘었다.
23. 삼 형제
추수가 끝난 들녘에는 사늘한 바람만 스산하게 차 있었다. 썰렁하게 비어 있는 들녘 여기저기에 짚검불 아닌 메마른 볏대들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추수가 ㄱ난 들판은 으레 쓸쓸하고 적막하면서도 말끔하고 정갈해 보이는 법이었다. 벼들을 다 베어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들판은 금방 비질 끝낸 절 마당처럼 말끔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추수가 끝났는데도 낫질을 당하지 않은 볏대들의 흔들림은 건성으로 쓸다가 만 마당의 비저분함 같았고, 이상스러운 불길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 메마른 볏대들은 수해를 심하게 입어 알골을 키워내지 못한 것들이었다. 아무 쓸모가 없게 버림받은 그 볏대들은 계속 설한풍에 시달리다가 보름날에나 아이들의 불놀이로 태워져 한 줌 거름이나 되어야 했다. 들녘에 낫질되지 않은 볏대들이 많은 것은 지난 7월의 홍수 피해가 얼마나 켰었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상규는 그런 들길을 씩씩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는 양반이고 지주답지 않게 여전히 갓 없는 망건에다 두루마기도 걸치지 않은 동저고릿바람이었다. 거친 숨소리만큼 걸음걸이도 빨랐다. 그의 오른손에는 보통 때와 달리 손잡이가 키 높이로 긴 살포가 들려 있었다. 그의 뒤로는 대여섯 사람이 종종걸음을 치며 따라가고 있었다. 정상규 일행은 30여 채의 초가집들뿐인 마을로 들어섰다. 귀가 처져 내린 검은 개 한 마리가 옆 뒷걸음질을 치며 컹컹 짖어대다가 그들의 기세에 밀려 고샅으로 도망을 쳤다.
"앞뒤 사정 볼 것 없어. 집집마동 다 글어내!"
정상규가 몸을 획 돌리며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그의 눈과 얼굴은 무섭게 노기를 내뿜고 잇었다.
"야아, 알겄구만이라우."
앞장선 남자를 따라 나머지 사람들이 첫 번째 집으로 우루루 몰려 들어갔다. 정상규는 그 뒤를 느릿하게 따랐다.
"이 서방, 이 서방 나와!"
앞장선 남자가 마당을 무지르며 외쳤다.
"누군디 그리 소리질르고 그러요?"
마뜩찮은 여자 소리와 함께 지게문이 열렸다.
"어찌 그려, 나여 나!"
앞에 선 남자가 몽둥이 끝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아이고메 엄니!" 여자는 소스라치더니, "봇씨여, 난리 터졌고." 절박하게 소리치며 방문을 탁 닫았다.
"이 서방 있는겨, 없는겨."
그 남자가 또 외쳤다.
"이놈아, 이서방 찾어서 꿔묵을래 삶아 묵을래. 나락이나 당장 글어내, 나락!"
뒤에서 터진 고함이었더 정상규는 그 고함에 맞추어 살포로 마당을 내리찍고 있었다. 정상규의 서슬에 놀란 남자들은 다투듯 토방으로 뛰어올랐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뛰쳐나왔다.
"어째 이러시오."
집주인인 그 남자는 사람들을 막아내려는 몸짓으로 두 팔을 벌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고 얼굴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잡소리 말어, 이놈아! 니 죄 니가 몰라서 물어? 요놈 쳐내뿌러."
앞장선 남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머지 남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집주인을 잡아챘다. 집주인은 쪽마루에서 토방으로 곤두박였다. 그의 등을 한 남자가 짓밟았다. 다른 남자들은 재빠르게 위아랫방의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아이고메에 동네방네 다 듣소오! 나락 뺏으로 왔네에, 나락 뺏으로 왔네에."
언제 밖으로 나왔는지 주인 여자가 수챗구멍 옆에 있던 놋 요강을 집어 들어 방망일 마구 두들겨대며 기를 쓰고 외치고 있었다.
"아니, 저년이 저거......"
정상규는 깜짝 놀라며 엉거주춤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눈에서 불꽃이 일며 여자에게로 내달았다.
"동네 사람들아 얼렁 오랑게에! 나락 뺏으로 왔당게, 나락 뺏으로......"
여자의 카랑카랑한 외침은 여기서 끝나고 말았다. 정상규가 휘두른 살콧자루가 여자의 등줄기를 여지없이 후려쳤던 것이다.
"잡것이 염병허고!"
정상규는 쓰러진 여자의 옆에다 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살폿자루를 한쪽 어깨에 기대놓고 손바닥을 터는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는적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상규의 만족감은 금방 깨어지고 말았다. 무슨 외침과 함께 꽹과리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외침이 여러 갈래로 퍼지는가 싶더니 징소리까지 뒤엉키기 시작했다.
"어? 요, 요것이 먼 소리여?"
"글씨, 여째 요상시럽덜 안혀?"
윗방에서 가마니를 끌어내던 남자들이 어리둥절해졌다.
"멋덜 혀! 얼렁얼렁 끌어내."
정상규가 빽 소리 질렀다. 그런데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뜀박질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깨짓 놈들이! 하면서도 정상규는 신경이 거슬리고 있었다. 곧 동네 사람들이 밀어닥쳤다. 초가삼간의 넓지 않은 마당이 거의 찰 지경이 되었다. 남자들만 몰려온 것이 아니었다. 여자들도 뒤따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자기네 지주 정상규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물론 정상규도 꽹과리 소리와 징 소리의 의미를 즉각 확인하고 있었다. 소작인들은 그 새로 생긴 말인 "소작료 불납동맹"만을 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강제징수까지 막기로 미리 짜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단단히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정상규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놈덜 마침 자알 왔다. 니놈덜도 이 꼬라지 당허기 전에 얼렁 가서 나락 가마니 다 내놓고 기둘려!"
노기에 찬 정상규의 호령이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집주인 내외가 동네 사람들 쪽으로 재빠르게 옮겨왔을 뿐이다.
"귀덜 멀었어! 존 말로 헐 적에 얼렁얼렁 들어."
정상규가 살포로 마당을 찍으며 다시 호령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듯 대여섯 명의 남자들은 몽둥이와 괭이들을 꼬나잡고 있었다.
"우리도 여러 말 씹히고 잡은 맘 없는디, 소작료럴 감해 주먼 당장 말 듣겄구만이라우."
누군가가 앞쪽에서 말했다.
"잡소리 말어. 또 그 소리여!"
정상규가 버럭 소리 질렀다.
"7월 대홍수야 우리덜 잘못이 아니덜 안혀요."
다른 사람의 말이었다.
"글먼 나 잘못이냐! 그놈에 잡소리 자꼬 허덜 말고 하늘이나 원망혀."
정상규가 싸늘하게 내쳤다.
"농새럴 절반으로 망쳤는디 소작료 안 감해 주먼 우리 다 굶어죽으요."
어느 여자의 울먹이는 외침이었다.
"어허, 굶어죽기넌 어째 굶어 죽어. 장리 쌀 얻어묵으먼 될 일 아니여."
정상규의 느긋한 대꾸였다.
"워메, 워메, 저놈 심뽀 보소."
"아이고 저런 오살육시헐 눔."
여자들이 수군거렸다.
"막둥이 되련님네넌 감해 줬는디 어째 우리만 안 감해 주고 그런다요. 한 성제간에 똑겉이 히야제라."
어느 여자의 또랑한 외침이었다.
"어시여! 도규 그놈이 그 지랄얼 혔어?"
정상규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지는가 싶더니, "여봐라, 저것덜얼 싹 다 몰아치고 집집마동 끌어내그라! 얼렁 몰아쳐!" 그는 자기가 먼저 살포르르 휘두르기 시작했다.
정상규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여섯 명은 일시에 몽둥이와 괭이들을 휘두르며 동네 사람들을 향해 내달았다. 그건 그저 위협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동네사람들이 와르르 사립 밖으로 몰려나갔다.
"여자덜언 뒤로 빠져, 뒤로!"
"이대로 당허먼 끝장이여!"
"겁 묵지 말고 작정대로 허능겨!"
남자들이 길로 쏟아져 나오며 외치고 있었다. 그들의 위를 몽둥이와 괭이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아이쿠메!"
"아이고, 나 죽네!"
남자들의 비명소리가 터졌다.
"다덜 돌아서, 돌아서!"
"저놈덜얼 일곱뿐이다. 다 죽여라!"
"가자, 죽이나아!"
동네 남자들이 뒤쫓아오는 사내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들의 얼굴은 변해 있었다. 긴장된 얼굴마다 적개심이 드러나 잇었다. 그들의 기세에 뒤쫓아오던 사내들이 엉거주춤 멈추어 섰다.
"멋덜 혀! 싹 몰아쳐뿌러!"
뒤에 선 정상규가 외쳤다. 사내들이 다시 몽둥이와 괭이들을 휘두르며 동네 남자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저놈덜 죽여라아!"
"와아아 -"
동네 남자들이 한꺼번에 소리 지르며 사내들을 향에 대들었다. 삽시간에 싸움판이 벌어졌다. 비명과 외침, 서로 패고 치는 소리가 살벌하게 뒤엉키고 잇엇다. 맨주먹들과 무기의 싸움이 한동안 어지럽게 이어졌다. 그러나 몽둥이와 괭이도 사람 수에는 못 당했다. 대여섯 명을 다 때려눕힌 동네 남자들이 정상규를 향해 내달으며 소리쳤다.
"저놈 잡어라아!"
"저 악독헌 놈 죽여라아!"
정상규는 살포를 내던지며 마구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서, 아서. 저놈얼 상허게 허먼 안돼야."
누군가가 사람들을 제지했다. 성난 사람들답지 않게 그들은 곧 발길을 멈추었다.
"순사 불러라아, 순사. 순사 다 워딨냐, 순사아."
정상규는 망건이 벗겨져 나가는 줄도 모르고 들판을 뛰면서 이렇게 외쳐대고 있었다. 정상규는 그 길로 동생 도규제 집으로 들이닥쳤다.
"도규 이놈 당장 나오니라."
정상규는 계수의 인사도 받지 않고 호령을 해댔다.
"집에 없구만요."
정도규의 아내 김씨가 대꾸했다.
"이놈 어디 끼대갔고."
"잘 모르것구만요, 낮에 집에 있간디요."
김씨의 태도는 공손했지만 말뜻은 곱지가 않았다.
"빌어묵을 놈이 또 공산당질 허로 사돌아 댕기겄제."
정상규는 침을 내뱉었다.
"무신 그리 숭헌 말심얼......"
김씨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반년 전인 지난 5월에 생긴 치안유지법이라는 것은 공산주의 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엄하고 엄한 법이라고 했다. 그런데 둘째 시아주버니의 말은 바로 남편을 감옥에 보내자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으흠, 흠......" 정상규는 계수 앞에서 약간 멋쩍어 헛기침을 하고는, "도규 그놈이 소작료럴 감해 줬다는디, 그것이 참말이오?" 그는 다시 언성을 높였다.
"예, 홍수로 농새가 많이 망쳐졌응게......"
"아아니, 요요요, 요런 팔푼이 겉은 놈! 요런 못난 놈 땜시 내 신세꺼정 망쳐진당게로. 요런 빙신 겉은 놈!"
정상규는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 동생도 없는 빈방 쪽에다 대고 마구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아그덜 듣는디 자꼬 이놈 저넘 안허셧으먼 좋겄구만요."
김씨의 태도는 여전히 공손했지만 그 어조는 싸늘했다.
"흥, 지주 노릇 지대로 못 해묵는 팔푼인디 이놈 저놈 안 허게 생겼고. 당장 우리 집에 오라고 허씨요."
정상규는 또 침을 내뱉으며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
"찬말로, 만석 욕심에 상놈이 따로 없내. 어찌 저러고도 양반잉고,"
김씨는 정상규의 뒤에다 대고 눈을 희게 흘겼다. 정도규는 저녁에 아내의 말을 전해 듣고도 작은형 집에는 가지 않았다. 논 욕심, 돈 욕심에 관한 한 작은형을 사람 취급하지 않은 지가 오래였다. 작은형이 소작료를 깎아주지 않아 소작인들의 불납동맹에 부딪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혀 관심 쓰지도 않았다. 작은형이 그런 일을 당하는 건 너무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지난 7월의 홍수 피헤는 엄청난 것이었다. 특히 중부지방이 심해 한성의 용산과 뚝섬 일대가 완전히 침수되었고, 경부선 열차가 열흘이나 불통될 지경이었다. 신문들은 전국적으로 사람들이 697명이나 죽었고, 1만여 채의 가옥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그러니 농사 피해가 얼마나 막대했는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농사 피해에 대해서 소작료를 깎아주지 않은 것은 작은형만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지주들이 예년 그대로의 소작료를 내라고 들었다. 심지어 개인이 아닌 동척까지도 천재지변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건 곧 소작인들보고 굶어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지주들이 그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그렇게 몰아대는 것은 두 가지 욕심을 한꺼번에 채우자는 심보였다. 첫째는 자기네들의 예정된 수입에서 절대 손해를 안 보려는 것이었고, 둘째는 식량이 떨어진 소작인들에게 장리 쌀을 풀어 재산을 늘리자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지주들은 그 욕심을 쉽사리 채울 수 있는 무서운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소작인들의 목숨을 담보 잡고 있는 소작권이었다. 소작료를 제대로 바치지 않으면 내년 소작을 뺏겠다고 그들은 위협을 일삼았다. 그 위협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소작인은 없었다. 그 마찰 사이에 부식시켜야 하는 것이 농민조직이었다. 소작인들이 공동으로 처한 위기는 바로 힘의 조직화로 연결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그 노력의 결과가 소작료 불납동맹이었다.
"에이, 쯧쯧쯧쯧...... 사람덜이 짜잔허기넌 어찌 그리덜 짜잔혀. 각단지게 몽딩이고 괭이 들었음시롱도 맨주먹인 그놈덜헌티 요 꼬라지로 당혀! 나가 자내덜 믿고 어디 만석꾼 굼꾸겄어?"
정상규는 밤이 늦는 줄도 모르고 마름들을 타박해대고 있었다. 여기저기 깨지고 터진 마름 셋은 고개를 들며 상전의 눈치를 살폈다.
"저......쩌그 머시냐......"
마름 하나가 슬며시 고개를 들며 상전의 눈칠를 살폈다.
"시방 된똥 싼가!"
정상규가 내쏘았다.
"야아, 긍게 머시냐, 그 다친 시 사람 약값이라도 잠......"
"뭐시야! 일 다 망쳐뿔고넌 무신 뻔뻔시런 소리여. 자내덜 마름질 그만둘 챔이여, 시방!"
정상규는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치며 천장이 흔들리게 고함을 질렀다. 그는 상대방의 돈 이야기를 일거에 몰아치기 위해 화난 것을 과장하고 있었다.
"아, 아, 아니구만이라우......"
"즈, 즈그가 알아서 허겄구만이라."
"하먼이라, 하먼이라."
마름 셋은 황급히 말을 다투었다. 일당을 주기로 하고 데려갔던 세 청년의 약값을 자기들이 물기로 한 것이다.
"다친 것 그대로 잘 보존히서 낼 아칙 일찍허니덜 와, 갈 디가 있응게."
정상규는 마름들에게 가라고 손을 내저었다. 다음 날 아침 정상규는 다친 마름들을 데리고 주재소를 찾아갔다. 그래도 체면을 세우느라고 그는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차려입었다.
"아이고, 말도 마시게라. 그놈에 소작쟁인지 불납동맹인지가 어디 한두 간디서 터져야 말이제라. 난리통에 봉화 올르디끼 허고, 가을산에 산불 나디끼 허는 판인디, 시방 동척이고 일본사람덜 농장서 일어나는 것도 다 못 막아내서 난리판 굿이랑게요, 놉얼 사들가 어쩌들가 지 발 등에 붙은 불 저저끔 알아서 끌 일이제 우리 바래덜 마씨요."
조선인 순사는 머리를 내두르며 그저 정상규를 밀어내려고만 했다.
"머시여? 세금 몽창몽창 받아갈 때넌 은제고 일 터진께넌 이리 냉더허기여? 좋다, 정 이리 나오면 나도 방책이 있다. 소잘료 감해 주고 세금 안 낼 것이여."
정상규는 납세자 보호를 주장하는 동시에 납세 거부로 경찰을 위협하려 하고 있었다.
"어허, 세금얼 안 내등가 띠묵등가 그것이야 그짝 맘대로 허씨여, 우리야 소관이 아난 일잉게."
순사는 냉정하게 외면해 버렸다.
"어허 참. 저런 잡녀러기새끼덜얼 믿고 세금을 꼬박꼬박 바치다니, 요런 환장헐 일이 또 있능가."
정상규는 주재소에서 밀려나와 제 가슴을 쳤다. 그는 주재소를 찰떡같이 믿었던 것인데 이제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소작인들이 발밑에 밟히는 개미 새끼들인 줄 알았는데 힘을 합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싸리회초리 쉰 개면 몽둥이가 못 당하더라고 그것들이 뭉쳐지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근디, 그것들이 어찌 그리 변했능고?
정상규의 눈앞에 문득 떠오르는 억굴이 있었다. 동생 도규였다. 도규같이 신식 공부한 놈들이 공산주의를 하고, 그런 놈들이 뒤에 숨어서 소작인들을 살살 꼬드긴다는 것이었다. 그건 불씨에 부채질해 주기고, 가려운 데 긁어주는 격이었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다. 그런데 공산주의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고, 식자 든 놈들이 어쩌자고 소작인들 편드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논마지기나 지닌 부잣집 아들 놈들이 기껏 신식 공부라고 해서 집안 망칠 짓들만 하고 있었다.
도규 그놈보텀 경찰서에 팍 고해뿌러?
그러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형제간인데 감옥행을 시킬 수는 없었다. 정상규는 그 생각을 할수록 더운 동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경찰에 들통이 나서 잡히게 되면 감옥살이까지 한다는데 왜 그놈의 짓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즈그얼언 어찌헐게라우?"
뒤따라오는 마름들 중에 하나가 물었다.
"가서 어떤 놈덜이 소작인횐지 머신지로 일얼 꾸미고 돌아가는지 알아내란 말이여! 동네마동 그런 놈덜이 꼭 백혀 있응게."
정상규는 눈을 부라리며 내쏘았다. 군산으로 뻗은 신작로에는 볏가마니들을 가득가득 실은 우마차들이 줄지어 가고 있었다. 그것만 보면 농사가 마쳐진 것도 같지 않았고, 소작인들이 불납동맹을 일으키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정상규는 그 우마차들을 바라보며 또 부르르 떨었다. 어서 만석꾼이 되고 싶은 역심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시상에 사람 한 평상 사는 것이 머시다요. 지삿날 잘 묵자고 석달 열흘 굶을 것이오. 새끼덜 이리 잘못 믹여 골병들게 맨글어놓고 만석꾼 되면 머헐 것이요."
아내의 앙칼진 소리가 그 뜨거운 욕심에 찬물을 끼얹었다.
"느그만 반찬 없는 밥 묵고 사냐. 나도 매일반 아니여."
졍상규는 아내의 면상에 내뱉듯 카악 가래를 돋우어 내뱉고는 상점들 쪽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아이고메, 의관얼 채리셨구만이라. 어디 군산 걸음 허실랑게라우?"
대서방이 호들갑스럽게 정상규를 맞이했다.
"논 더 나온 것 없능가?"
정상규는 상대방의 인사를 무지르며 제 용건만 불쑥 내밀었다.
"참말로, 작은 서방님도. 큰 서방님이 아무리 미두에 미쳐 돈이 딸린다고 히도 요새가 어떤 땐게라우? 새앙쥐도 배터지게 묵고 팔자 늘어지는 추수철 아닌감요. 여유 돈 있으시면 우선 빚놀이 허시제라? 이자 톡톡허니 받을 디가 있는디요."
대서방이 눈웃음을 치며 간살스럽게 웃었다.
"논이나 나오먼 기별혀."
정상규는 내치듯 하고 돌아섰다.
"참, 성제간에 자알덜 논다. 성놈언 미두에 미쳐서 쌀이야 논이야 꼬라박고, 동상놈언 깍쟁이 깍쟁이 돌깍쟁이질 히감서 성놈 논얼 사딜이고."
대서방은 멀어져 가는 정상규의 뒤에다 대고 사설 엮듯 입질을 하고 있었다. 정재규는 오늘도 군산 본정통 강룬에서도 재일 중심지인 미두장 언저리에 진을 치고 있었다. 몇 년 동안 화투놀이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건 4두 동생에게 재산분배를 해 준 다음부터였다. 그는 재산이 줄어들어 못내 배아파 하다가 미두장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큰돈을 손쉽게 벌려면 미두만큼 좋은 게 없다는 말에 그는 귀가 솔깃해졌던 것이다. 그즈음 그는 화투놀이에도 차츰 싫증이 나고 있던 참이었다.
"화투는 백석지기 노름이요 미두는 만석군 노름이다."
이 말은 군산 바닥에서 돈깨나 기세 좋게 쓸 줄 안다는 한량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이었다. 정재규는 이래저래 미두장으로 자리바꿈을 하게끔 되어있었다. 그러나 화투놀이에서도 그랬듯이 정재규눈 미두놀이에서도 돈만 자꾸 잃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한 해 곡식 처분한 돈만 잃는 것이 아니라 논까지 축나가고 있었다. 큰돈 손쉽게 벌어 만석 재산 채우려다가 오히려 재산이 줄어드는 판이었다. 역시 미두는 화투보다 큰 노름판이었던 것이다. 논까지 축나가기 시작하자 정재규는 본전이라도 채울 심산으로 더욱 미두에 혈안이 되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노름꾼의 형태였다. 그러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들어가는 법이었다. 정재규는 해마다 논을 처분하는 양이 늘어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논을 처분할 만큼 쌀 수확량이 줄어들어 노름밑천이 적어지니 또다시 논을 팔아 충당하는 것이었다. 정재규가 논을 처분한다는 소문을 듣고 무릎을 친 것은 동생 상규었다. 정상규는 형의 논을 몰래 사들이기로 작정했다. 그건 일종의 복수심 발동이었다. 그래서 정상규는 대서방을 중간에 내세웠다. 미두는 본격적인 투기 놀이였고 규모가 큰 도박이었다. 규모가 크니까 그만큼 큰돈을 벌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큰돈을 잃을 위험성도 있었다. 그래서 큰돈을 노리는 큰돈 가진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그 사람들은 오로지 큰돈 벌 꿈에만 취해 있었지 큰돈 잃을 위험은 생각하지 않았다. 인천 미두와 함께 군산 미두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미두란 이름 그대로 쌀 시세를 놓고 벌이는 투기였다. 다시 말하면 3개월 단위로 미리 쌀값을 예측해서 쌀을 팔고 사는 행위였다. 돈을 미리 내는 선불 매매로 이루어지는 그 거래는 그야말로 덫 놓인 덤풀 속을 걸어가야 하는 누기였다. 1만 석을 샀다가 석달 후에 값이 폭락하면 그 차액만큼은 고스란히 손해였다. 제일 먼저 생긴 18 은행에서부터 작년에 생긴 군산 무진금융주식회사까지 8개의 은행들이 몰려 있는 미두장 주면에 미두꾼들이 성시를 이루는 것은 대개 추수철 직후부터였다. 위로는 충청남도에서 아래로는 전라남도까지 재산깨나 지닌 사람들이 허리에 전대를 차고 몰려들었다. 그 돈들이 쌀을 처분한 것임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 무리들 중에는 편히 놀고 먹으면서 큰돈을 쉽게 벌고 싶어 마음이 들뜬 지주의 자식들이 많았다. 그들은 겨울 서너 달 동안 전대의 돈을 풀어대며 미두장과 중매점(미두회사)을 뻔질나게 오가다가 거의 다 빈털터리가 되어 군산을 떠나갔다. 그러나 이듬해 추수철이 끝나면 그들은 또 철새처럼 군산으로 몰려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으레껏 작년에 손해 본 돈까지 벌충하고야 말겠다고 큰소리를 쳐댔다. 갈색 줄무늬 양복에 스틱가지 들고 한껏 멋을 부린 정재규는 미두장에 들어가지 않고 중매점들을 천천히 돌고 있었다. 군산 미곡취인소라고 간판을 붙인 목조 2층 건물은 바로 미두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이었고, 그 미두장을 중심으로 중매점들이 큼직큼직한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미두꾼들은 일단 그 중매점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거래원으로 삼아야만 그 2층 건물에 드나들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그 미두꾼의 자격은 중매점에 보증금이라 하여 50원을 내는 것으로 얻어졌다. 그러니까 그 미두회사들은 미두꾼들의 관리소이면서 거래대행소였다. 미두 거래는 쌀 백 석(2백 가마니)을 단위로 했고, 거래라 성립되면 미두회사는 백 석당 7원씩의 수수료를 받았다. 그리고 먼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미두 거래가 서툴러 회사 직원들이 나서서 일을 보아주었다.
"아니 정 선생, 장이 섰는디 워째 요리 태평시러우시다요?"
역시 양복으로 멋을 부린 한 남자가 바삐 걸으며 아는 체를 했다. 서로 구면인 나주 부잣집 아들이었다.
"오전 장이야 고수놀음이 아니오."
정재규의 말투는 거만스러웠다.
"그려라? 이 하수는 오전 장에서 고래 잡으요."
그 남자는 아니꼽다는 듯 받아치며 정재규 앞을 지나쳐 갔다.
"미친놈, 썩은 고래 많이 잡아라."
정내규는 침을 내뱉었다. 그러나 마음 한쪽이 흔들렸다. 오전 10절 장에서 정말 고래가 걸리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다. 그러나 정재구는 마음을 꾹 눌렀다. 오늘 일진에 똥칠한 아내의 악담이 귀에 쟁쟁했던 것이다. 오전 장을 고이 보내고 오후 장을 보아도 늦을 것이 없었다.
미두시장은 하루에 17절씩 열렸다. 오전에 10절이었고, 오후에 7절이었다. 그런데 그 시세는 일본 대판의 시세에 준하는 것이었다. 군산과 대판 사이에 전화 연락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멋이야 물 찬 제비다만, 저 물건도 인자 한물 갔제?"
중매점 앞에서 한 사내가 정재규를 건너다보며 턱짓했다.
"더 말허먼 잔소리제. 찌울기 시작헌 달잉개 낼모레 우리 꼴 날 것이여."
옆의 사내가 코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절치기균이라고도 하는 하마꾼들이었다. 그들은 돈이 없어 미두장에는 반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미두장이나 중매점들 앞을 맴돌면서 저희들끼리 푼돈 내기를 하는 부류들이었다. 미두장에서 절이 바뀔 때마다 그 시세를 알아맞히기 하면서 50전이고 1원씩을 걸었다. 그래서 철치기꾼이라고도 했다. 후줄그레한 입성에 게을러 보이기까지 하는 그들은 큰 잔칫집에 몰려든 거렁뱅이 같은 존재들이었다. 아니, 그 거렁뱅이들은 손님들의 상물림만 가지고도 배를 불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하마꾼들에게는 돈 많은 사람들이 흘려주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한때 기세 좋게 미두장을 드나들다가 그 꼴이 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어디 조금이나 더 가는가 봅시다. 달랑 족박 찰 날 코앞잉게."
정재규는 아내의 서릿발 선 이 말이 영 께름직하게 달라붙어 활기를 낼 수가 없었다. 오전 장은 작파했으니까 어디 가서 기분전환을 하고 싶었다. 그는 카페 긴자를 생각해 냈다. 거기 가서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기분을 말끔하게 씻고 싶었다. 그는 커피의 그윽한 향기와 함께 씁쓰레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에 어느덧 반해 있었다. 그 카페는 군산 최초의 극장인 군산좌가 금년에 생기면서 그 옆에 문을 열었다. 일본 여자가 주인인 그 카페가 문을 열자마자 군산 멋쟁이들은 다 드나들었다. 커피 맛을 모르고서는 신식 멋쟁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재규는 따끈한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담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남은 세 자석덜언 동냥아치 낸글라요, 둘도 아닌 외아덜 전정얼 어찌 낸글라고 이러시오."
아내의 말이 또 울려왔다. 정재규눈 커피를 꿀꺽 삼키고는 신음을 씹었다. 아내는 오늘 아침에 나락 처분한 돈 절반을 내놓으라고 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아내와 다툼은 잦아졌다. 그러나 아내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돈을 내놓으라고 덤빈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인자 못허는 소리가 없네. 1년 묵고 살 쌀 곳간에 쟁여놨으면 되았제 고것이 무신 버르장머리없는 소리여."
그런 생각의 뿌리를 뽑아야 된다고 생각한 정재규는 무섭게 화를 냈다.
"인자 더는 안되겄구만요. 다 알거지 되기 전애 절반얼 지가 간수혀야 되겄구만요."
양반의 법도가 몸에 밴 것인지 윤씨의 목소리는 싸늘하면서도 낮았다. 작은 편인 몸집에 동그란 얼굴이 영특하면서도 다부진 인상을 풍겼다.
"그런 걱정 말어. 나가 다 알아서 간수허고 있응게."
윤씨의 얼굴은 더 차갑고 단단하개 굳어지고 있었다.
"암탉이 울먼 집안 망허는 것 몰라."
정재규는 그만 방문을 박차고 나섰다.
"어디 조금이나 더 가는가 봅시다. 달랑 쪽박 찰 날이 코앞잉게."
윤씨는 이 말을 하면서도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았다. 정재규는 그 악담이 서늘하게 목을 감는 것을 느꼈다. 불끈 화가 치솟았지만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잘한 일이라곤 한 것이 없는 처지에 아내가 또 이것저것 들춰대면 입장만 난처해지는 것이었다. 어리숙한 데라고는 없이 눈치빠르고 성미 꼿꼿한 아내 눈앞에서 어서 벗어나는 것이 상수였다. 정재규는 무심결에 한숨을 내쉬다가 멈칫 놀랐다. 그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고는 커피잔을 들었다. 아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도 속을 앓아온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재작년부터 논을 조금씩 축내기 시작하면서 불안감도 차츰 커져갔다. 그즈음부터 아내는 부쩍 손을 떼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러나 손을 떼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다. 잃은 돈을 찾지 않고서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동안 줄 탄 돈을 잃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큰돈을 몰아 잡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화투든 이두든 노름이란 참 묘한 것이었다. 아슬아슬하고 될 듯 될 듯하면서도 빗나가고 엇나갔다. 그동안 재산을 많이 축내기는 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그것을 다 복구할 자신이 있었다. 그 정도 재산으로 지금까지 버티어온 것도 자신의 수가 짱짱하기 때문이었다. 하수로 만석 재산 거덜내기는 이삼 년이 걸리지 않았다. 언젠가 운이 붙는 날에는 잃은 것을 다 찾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정재규는 반나마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시며 다시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윤씨는 며칠 동안 망설이며 생각하다가 막내 시동생을 찾아나섰다.
"예, 헌데 어떻개 소작료는 빨리 받으셨군요."
정도규는 의아스런 눈치를 보였다.
"긍개 돈 얼렁 슬 욕심애 작인덜이 원허는 디서 절반으로 소작료럴 감해 줬구만요"
"예, 그리 됐군요, 큰형님 마음이야 어찌 되었거나 그건 잘한 일이군여."
정도규는 이렇게 말을 내놓고 나서 큰형수가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어째그나 이러다가넌 조금 못 가 집안이 내래앉게 생겻는디, 서방님이 나스셔야 되겄구만요."
"예예......제가 형님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정도규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건 큰형수님에 대한 예의일 뿐이었다. 큰형의 주색잡기는 아버지 어머니도 막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깊은 고질병이 되어있었다.
"그러고 저어, 내년이먼 우현이가 상급핵교럴 가야 되는다. 어디로 가서 무신 공부럴 히야 될 것인지......"
윤씨는 이런 의논을 시동생한테 해야 하는 것에 비애를 느끼고 있었다.
"예, 우현이가 벌서 그리 됐군요, 대학공부는 장본인의 의사가 중요한데, 우현이는 뭐라고 하지 않던가요?"
"지가 월 알간디요. 인자 갸가 애비 덕보고 살기넌 틀렸응게 요 험헌 시상 지 심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부럴 허게 골랐으먼 좋겄구만요."
정도규는 큰형수의 말에서 가슴 아린 슬픔을 느꼈다. 그러나 큰형수가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는 것이 퍽 마음에 들기도 했다.
"예, 왜놈들 밑에서 밥벌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직업이 있습니다. 그런 쪽으로 생각해서 우현이하고 의논하도록 하지요."
"작은 아부지도 바쁘신디 요런 부탁꺼정 혀서......"
윤씨는 진정 고마움을 느꼈다.
"아니, 제가 응당 해야 할 일이지요."
정도규는 큰조카가 벌써 그렇게 된 줄을 모르고 있었던 것에 민망함을 느끼고 있었다. 정도규는 큰형을 만나볼까 어쩔까 몇 번 생각하다가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괜히 시간 낭비해 가며 서로 감정이 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큰형수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조카의 일에나 신경을 쓰기로 했다. 큰형 일을 마음에서 접어버린 정도규는 나날을 바삐 움직였다. 날마다 여러 곳의 조직책 회의에 참석하는 동시에 조직 확대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동척 농장들과 일본인들 농장에서 연쇄적인 소작쟁의를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소작료 불납동맹을 강화하여 소작료 인하를 실현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데 11월 22일자 신문에 너무나 뜻밖의 사실이 보도되었다. 조선공산당 핵심간부들 다수가 검거된 것이었디 그들은 다름 아닌 김약수 박헌영 임원근 등이었다. 정도규는 조선공산당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신문 보도만으로는 왜 그런 사내가 발생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규는 모든 일을 고서완과 유승현에게 맡기고 한성으로 올라갔다. 사태도 파악할 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피신할 필요도 있었던 것이다. 정도규는 기차에서 줄곧 생각해 보았지만 어찌해서 핵심간부들이 그렇게 검거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조직의 비밀이 전부 노출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직의 비밀을 알 수 있는 누군가의 배신이거나, 경찰 끄나풀의 침투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정도규는 몇 달 전에 조직을 통해서 연결되었던 송중원의 자취방에 머물렀다. 송중원의 말단 세포라서 안전했고, 잡지사 기자라 정보를 신속히 알아낼 수 있는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신의주 어느 음식점에서 회식을 하던 당원들이 변호사까지 낀 사복형사들과 시비 끝에 싸움을 벌인 사건의 발단이라고 합니다."
송중원의 말애 정도규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그 미숙하고 철없음이 너무 어이없고 기막혔던 것이다. 검거는 중간간부까지 백여 명애 이르렀다. 그런 조선공산당의 와해였다. 정도규는 1925년이 저물어가는 찬바람 속에 남행열차를 탔다. 그는 며칠 지난 신문을 펼쳐 들었다. 11월 26일 나주의 동척 농장 소작인 1만여 명이 소작료 불납동맹의 쟁의를 일으켜 경찰들과 충돌했다는 기사가 큼직했다. 그것이 꼭 김제. 만경 평야에서 일어난 것처럼 뿌듯하고 기뻤다.
당은 다시 재건된다!
정도규는 숨을 들이켜며 어금니를 맞물었다.
24. 회오리바람
2월 중순의 추위는 아직 매웠다. 그러나 이동만의 기와집 넓은 마당에는 차일이 높게 쳐져 있었다. 부침개질하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집 안을 넘쳐 온 동네에 퍼지고 있었다. 이미 죽거리도 바닥나 으레껏 점심을 굶어야 하는 가난한 집 아이들은 그 환장할 기름 냄새에 군침을 삼키다 못해 이동만네 대문 앞에서 쭈뼛거렸다. 그러나 더 배만 고플 뿐 아이들은 부침개 하나 얻어먹을 수가 없었다. 차일 네 귀퉁이에는 장작이 수북수북 쌓여 있었다. 잔치가 시작되면 모닥불을 지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차일 아래에 반듯반듯하게 귀를 맞춰 깔아놓은 멍석들 위에도 화로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머릿수건을 쓴 여자들과 소매를 걷어붙인 남자들이 자기네 일거리를 가지고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어험, 험......"
안방에서 나온 이동만은 대청마루에 뒷짐을 지고 서며 헛기침을 했다. 한쪽 다리를 절름거리는 그는 선 자세도 약간 삐딱했다. 마당을 굽어보고 있는 그는 위아래 윤기 반드르르한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은행알만 한 금단추 두 개가 달린 진자줏빛 마고자에 연회색 바지는 아주 그럴싸하게 잘 어울렸다. 이동만은 쉰다섯 살 생일을 이렇듯 거창하게 차릴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몇십 번이고 되씹고 곱씹어 생각해도 자신이 장하고 대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지긋지긋하던 가난을 면하고 이렇듯 거부가 된 것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이고 힘이었다. 요시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아예 논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빚놀이로 구르고 있는 돈이 자그마치 2만 5천여 원 아니냐. 그 2만 5천여 원이면 얼마냐. 논값이 오르지 않았더라면 바로 만석꾼이 될 액수다. 이제 논값이 좀 올랐지만 7천 석 잡이는 넉넉했다. 이래저래 벌기도 많이 벌어들였지만, 돈이 돈을 낳는 그 빚놀이 돈장사야말로 신통술 중에 신통술이었다. 쉰다섯 살 생일이라고 해서 별날 것도 없는데 돈 아깝게 생일잔치를 벌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2월 들어 요시다가 갑자기 본사로 불려 들어가더니 그 길로 면직이 되고 말았다. 나이 60이 명통이었다. 요시다가 없어진 것은 그야말로 시원섭섭했다. 그는 은인이면서도 거북살스러운 상전이었다. 그가 없어지지 않는 한 발샅의 때라도 핥을 듯 굽실거렸던 자신의 과거를 지울 수도 벗어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또 돈 있는 표도 낼 수가 없었다. 그가 없어진 것에 소리 없이 만만세는 불렀다. 새로 오는 지배인이 누구든 그건 자신의 밥이었다. 속보인 것도 없고 책잡힌 것도 없겠다, 이쪽 실정에 어두울 것은 뻔하니 마음대로 휘어잡고 흔들며 돈을 긁어모을 수 있는 판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신년 신구점을 보아 왔다. 쉰다섯이 길수이니 생일잔치를 환갑잔치처럼 걸게 차리고 풍악을 울려 이웃을 대접하면 평생 운수 대통하여 부귀영화가 구름처럼 일고, 수명 장수하여 구십 수를 누리리라는 것이었다. 하, 요시다가 없어져 양쪽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으려는 판인데 그 점괘 한 번 신통방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 많은 부귀영화에 아흔 살까지 수명장수라니 돈 아까울 것이 없었다. 이경욱은 사랑채에서 형 경재의 비꼬인 말투에 시달리고 있었다.
"니가 대학 교복얼 떠억허니 입고 앉었응게 인물이 훠언헌 것이 나넌영 똥덩어리다 잉, 니 집이서도 꼭 그리 교복얼 입어야 쓰었냐?"
살이 찐 이경재는 이불더미에 반쯤 기대 누워 동생 경욱이에게 턱을 까딱거렸다.
"다 아부지 뜻이여."
문 쪽으로 고개를 틀어돌린 이경욱의 대꾸는 퉁명스러웠다.
"형, 대일본제국 대학상 아덜얼 여봐라 허고 귀경시키고 자랑허겄다 그것이제? 그려, 그려, 많이 귀경시키고 자랑히야재. 대학상도 그냥 대학상이냐. 장래 판검사감이신디. 하먼, 나 겉은 칙량쟁이야 똥 친 작대긴께로."
이경욱은 그만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꾹 눌러 참았다. 대학공부를 하지 못한 형의 심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자신을 일깨웠다.
"고들고시가 하늘에 별 따기로 에몹다든디, 니 합격헐 자신이 있냐?"
이경욱은 대답을 하지 말까 생각했다. 그러나 술을 한잔하고 트집을 잡자고 나오는 판에 꼬리를 잡혀서는 곤란했다.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망쳐지는 것은 아버지 생일잔치였다. 형은 돈벌이 좋고, 술 많이 마시고, 계집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측량기사에 만족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대학에 진학하자 태도가 달라졌다. 그때는 집안 형편이 일본 유학을 시킬 수 없었는데도 꼭 아버지가 편애해서 대학을 안 보내준 것처럼 나오고 있었다.
"시험얼 쳐봐야 알재."
"그려, 니넌 공부가 이찌방잉게 아부지 말대로 찰푸닥 붙을 거이다. 근디 말이다. 니가 판검사 나으리 딱 되먼 우리 집안 꼬라지 참 볼 만허겄다. 와. 왜놈 농장 주임님 아부지데다가, 왜놈 관청 칙량사 큰아덜에다가. 왜놈 관청 판검사 작은아덜에다가. 줄줄이 친일파 아니여. 불령선인 독립투사덜헌티 육혈포 안 받게 친일파 삼부자 조심히야 쓰겄다."
"아조 딱 맞는 말이구마."
이경욱은 쓴웃음을 지었다.
"큰 서방님, 작은 되련님, 나오시랑마요."
밖에서 들려온 늙은 목소리였다. 살았다 싶어 이경욱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닌장맞을, 환갑도 아님스로 무신 놈에 생일잔치럴 동내잔치로 벌림서 사람얼 요리 붙드러놓고 이려. 왜놈 농자엥 붙어묵음서 돈 많이 돌라묵고 작인덜 피 만힝 뽄 것 자랑허자는 것이여 머시여. 지기럴, 환갑도 되기 전에 노망이여, 노망이."
이경재는 뚱뚱한 몸을 뒤척거려 더디게 일어나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차일 아래에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문 쪽에서는 연상 손님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언제 불을 붙였는지 차일의 네 귀퉁이에서는 모닥불들이 활활 타오르고 있엇다. 한낮이라 추위가 많이 누그러진 데다가 그 너풀거리는 불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고 있었다. 축하객들의 차림은 하나같이 말쑥하고 단정했다. 한눈에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로 보였고, 일본사람들도 적잖이 섞여 있었다. 그 일본 사람들 중에 하시모토의 모습이 보였다. 다 요시다가 없어져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점괘는 분명 이웃을 대접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손님들 중에 가난한 이웃 사람들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동만은 처세에 필요한 사람들만을 신경써서 가려 뽑았던 것이다. 앞으로도 친분을 돈독히 하는 동시에 자기를 과시하는 기회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이동만이가 특히 모시려고 애를 쓴 사람이 군산경찰서 사찰과장이었디 사찰과장이 자기 생일잔치에 오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좋은 과시용이었던 것이다.
축하객은 모두 40여 명이었다. 그중에서 10여 명이 상좌인 대청에 비단 방석을 깔고 자리 잡았다. 그 상좌 중의 상좌에 하시모토와 사찰과장이 앉혀졌다. 그리고 기생을 차지한 사람은 다섯이었다. 기생들이라고 해서 온 것은 분명 여섯이었는데 남자들 옆에 자리 잡은 것은 다섯뿐이었다. 나머지 한 여자는 기생이 아니라 소리꾼이라고 했다. 기생들의 권주가로 잔치가 시작되었다. 한바탕 권주가로 잔치 흥이 돌았다. 그 흥을 타고 자식들이 절 올리는 순서가 이어졌다. 큰아들 이경재가 아버지 앞에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하객들에게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칙량기사 큰아덜 경재구만요."
이동만은 커다란 소리로 큰아들을 소개했다. 형이 물러나자 이경욱도 아버지 앞에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하객들에게 인사했다.
"조도전대학 법학부데 댄기는 작은아덜 경욱이구만요."
이동만의 목소리가 분명 아까보다도 커지고 있었다. 사찰과장은 날카로운 눈길로 이경욱을 훑고 있었다. 그가 이동만의 간청을 묵살하지 못하고 이 자리에 온 것은 순전히 이경욱 때문이었디 이동만을 농장의 농감으로 천대했다가 그의 둘째 아들이 삼사 년 후에 판검사가 되는 날에는 그것처럼 고약한 일이 없을 거였다. 밥때에 맞춰 손님들은 모두 술을 곁들여가며 점심을 먹었다. 일꾼들은 바삐 오가며 모닥불에 새 장작을 넣고, 대청과 멍석의 화로에 이글거리는 불덩이들을 날랐다. 여자들은 술과 음식을 잇대느라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끼리끼리 나누는 이야기가 왁자한 속에 웃음소리가 터지고, 생일잔치는 흥겹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여흥이 시작되었다. 차일 아래 한구석에서 딴 상을 받고 앉아 있던 한 쌍의 남녀가 걸어 나와 대청을 마주 보며 섰다. 그들의 발밑에는 한 번도 쓰지 않은 개 멍석이 깔려 있었고, 두 개의 비단 방석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방석 옆에는 불덩이 이글거리는 화로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두 남녀는 나란히 서서 대청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여자는 빨간 댕기 드린 처녀였고, 남자는 얼굴에 굵은 주름이 잡히기 시작하는 사십 객이었다. 처녀는 폭 넓은 쑥색 치마에 유백색 저고리를 받쳐입었는데, 옷고름과 끝동을 쑥색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갓에 연옥색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는 오른손에 북채와 북을 들고 있었다. 그 북이 소리꾼 일행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처녀는 대청을 바라보고 멍석 가운데 단정히 섰고, 남자는 방석을 멍석 끝으로 옮겨 자리 잡고 앉았다.
퉁, 타닥!
북장단이 울렸다.
함평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려 허고
재주 어선 빌려타고 해남으로 건너갈 재......
"어, 얼싸!"
"어허, 좋다!"
단가 첫 대목에서 추임새가 터지고 있었다. 그건 남도 사람들이면 누구나 즐겨 부르는 호남가라고 하는 단가였다. 단가는 소리꾼들이 본 소리에 들어가기 전에 목 다듬이로 부르는 것이었다.
흥양에 돋은 해는 보서엥 비쳐 있고
고산의 아침 안개 영암을 들러 있다.
"얼싸 좃다!"
"어와, 잘헌다.!"
추임새에서 흥이 터지고 있었다. 쉰 듯 우렁차고 구성진 듯 활달한 처녀의 소리는 대청이며 차일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때까지 대청의 말석에 지루하게 앉아 있던 이경욱은 귀가 번쩍 띄었다.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듣고 흉내도 낸 노래인데 그렇게 잘 부르는 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자를 내려다보는 순간 이경욱은 눈앞이 번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자의 자태가 너무나 곱고도 우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도 자태 못지않게 단아하고 예뻤다. 이경욱은 가슴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휘도는 바람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슴이 화끈거리면서 벌떡벌떡 뛰고 있었다. 여자를 보고 그런 감정이 돌발한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요자는 춘향가 중에서 춘향이가 변 사또 앞에서 곤장 맞는 대목인 십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전라도 사람들치고 춘향가 안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었지만, 십장가 대목은 특히 남자들이 좋아했다. 춘향이가 곤장을 맞아가면서도 일편단심 정절을 지키겠노라 맹세하는 내용 때문인지도 몰랐다.
일짜로 아뢰리다. 일편잔심 먹은 마은. 일부종사 하올지아. 일편서거 우리 낭군, 일각삼추 보고지고. 일호변개 하오리까 가망없고 무가내지.
매우 쳐라앗......에에이이......딱! 둘째 낱을 딱 붙이니, 이짜로 아뢰리다. 이월요도 맺을 가약 이성지합 분명하니, 이부불경 이내 마음 이심을 두오리가. 이팔청춘 춘향정곡 이천명촉 하옵소서, 셋째 낱을 딱 붙이니, 삼짜로 아뢰리다. 삼생구사 하드래도 삼강을 잊으리까. 삼광같이 빛난 마음 삼종지의 품었읜 삼생가약 중한 몸을 삼월화류 알지 마오......
"얼싸 잘헌다!"
"얼씨구나 잘 넘어간다!"
"옥비 명창이 질이다!"
흥애 겨운 청중들의 추임새가 저마다의 가락으로 흐드러지고 있었다. 아아......, 저 여자 이름이 옥비로구나! 옥비, 옥비, 무슨 뜻일까...... 이경욱은 소리에 열중하고 있는 여자를 넋 놓고 바라보며 애타는 신음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가락의 흐름에 따라 쥘부채를 쫙 펼쳤다가 반으로 접고, 다시 펼쳐 나부시 가슴께를 가리듯 하고, 다 접어 다소곳이 두 손으로 잡았다가 느닷없이 휘돌려 허공을 쳤다. 그 자태는 애절하고 구성지고 서럽고 한스러운 곡조와 어우러지며 나비인 듯 아름다웠고 학인 듯 청결하고 유아했다. 이경욱은 어질거리는 황홀감 속에서 여자에게 완전히 매료되고 있었다. 소리를 마친 여자가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잡으며 몸가짐을 다듬었다. 그리고 처음처럼 대청을 향해 인사를 했다.
"재청이요, 재청!"
"옥비 명창 재청이요!"
"사랑가 재청이요!"
차일 아래 사람들이 열렬하게 박수를 치며 외쳐댔다. 언제부터인지 열댓 명의 여자들이 부엌 쪽 마당가에 모여서 있었다.
"재청언 쫴깨 있다가 받고, 여그 올라와서 귀인덜헌티 술 한 잔썩 올리그라."
박수소리를 가르며 대청에서 날아온 호령이었다. 그건 이동만의 목소리였다. 이경욱은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옥비는 고개를 약간 숙이는 듯했다. 다음 순간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청중들의 뜨거운 환호에 피어났던 웃음이 싸늘하게 걷힌 얼굴이었다.
"죄송시럽구만요. 소인언 소리꾼이재 기생이 아니구만요."
또렷하고 카랑한 목소리였다.
아아......
이경욱은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아버지가 어떻게 할지 몰랐던 것이다.
"아이 어르신, 소리꾼은 예인이옵니다. 어르신 같으신 분이 예인을 귀히 여겨주셔얍지요."
이동만 옆에 앉은 예쁘장한 기생이 서울말을 흉내 내며 날렵하게 말했다.
"예에, 고종 황제께오서도 소리꾼을 예인 대접했구만요. 술언 지가 이이쁘게 따라올리겄구만요."
하시모토 옆에 앉은 기생이 잽싸게 말을 받으며 눈웃음을 쳤다.
"허! 고종 황제께서? 그, 그......"
이동만은 혀끝까지 나온 금시초문이라는 말을 황급히 삼켰다. 무식을 탄로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고종 황제라는 말에 그만 마음이 달라졌다.
"그려, 그려. 황제께서 허신 일얼 나가 범헐 수야 없제."
이동만은 호탕한 척 말했다. 그리고 그는 사찰과장에게 낮은 소리로 설명을 했다.
"소우데스까네?"
"그렇다구요오""
아니꼽다는 듯 사찰과장의 얼굴이 떫게 변하고 있었다. 이경욱은 반쯤 내려뜬 눈으로 그런 사찰과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술을 따르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사찰과장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옥비는 고수와 눈길을 나누며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환갑이든 생일이든 즐거운 잔치에다 소리 속을 아는 청중들의 열렬한 갈태가 있으면 흔쾌하게 술 한 잔 못 따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귀인이라고 말하는 상좌에 앉혀진 것들은 가당찮게도 왜놈들이 태반이었다. 그것들에게 술한 방울이라도 따를 수는 없었다. 가슴에 총을 맞은 아버지의 부르짖음이 지금도 귓속에 쟁쟁했다. 그동안 왜놈들이 낀 술자리에서 소리를 한 것은 여러 번이었지만 왜놈들에게 술을 따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었다. 옥비는 삼청까지 받고 물러섰다.
"아니"
이경욱은 얼떨결에 이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그의 눈에 확대되어 오는 건 검은 머리채 끝에 물려 있는 핏빛으로 붉은 빨간 댕기였다. 그의 가슴에서는 활활 불길이 일고 있었다 정면으로만 보아서 그 여자가 처녀인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이재 처녀인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의 동요는 더 심해지고 그 얼굴이며 자태가 한층 더 아름답고 황홀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빨간 댕기의 강렬함과 술 따르기를 거부한 그 당당한 모습이 강한 인상으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었다.
옥비의 소리가 끝나면서 잔치는 새 판으로 바뀌었다. 사찰과장이며 하시모토가 바쁘다며 자리를 떴고, 사람들을 끼리끼리 술판을 벌였다. 대청에서도 기생들을 희롱하기 시작하자 이경욱은 슬그머니 댓돌로 내려섰다. 이경욱은 가슴이 화끈거리고 출렁거려도 일부러 옥비가 있는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당으로 내려서서 차일을 따라 왼쪽으로 돌았다. 그러면서 그는 옥비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옥비는 고수가 북을 보자기에 사는 것을 보는지 마는지 함초롬하게 앉아 있었다. 거리가 차츰 가까워지면서 이경욱의 눈길은 더욱 강렬하게 옥비의 얼굴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경욱의 마음이 통한 것일까, 옥비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이경욱은 흡!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옥비가 황망하게 눈길을 떨구었다. 이경욱은 요동치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며 옥비를 지나쳤다. 그런데 그는 속 후련한 만족감으로 긴 숨을 토하고 있었다. 옥비에게 자신의 얼굴을 알게 한 것이고, 그리고 그 일을 성공시킨 자신이 그렇게 장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것 참 인명은 모를 것이여. 이완용 대감이 메칠 전에 죽었다니 말이여."
"실답잖기넌. 시상에 워디 안 죽는 목심이 있간디? 송병중이야 발써 작년 1월에 죽었고, 거 일진회장 이용구는 10년이 다 되덜 안혀? 고것이 다 생자필멸인 것이여."
"어허 참, 문자 몰르는 사람 서러와서 어디 살겄다고? 나가 허는 말언 생자필멸이 아니라 인생무상이시, 인생무상! 그리 다 허망허니 가는디 너무 욕 많이 묵개 살 것도 아니다 그런 말이여."
"그야 그렇기도 허재. 당자넌 가도 잘못헌 욕언 남는 법잉게."
"체에, 사람언 다 지 똥 쿠린지 몰르는 법이여, 시방 여그 앉은 사람치고 손꾸락질 안 당허고 욕 안 묵는 사람 어디 있어?"
"저런, 저런 입방정 허고넌. 그렁개 욕덜 덜 묵개 살잔 것 아니겄더."
"와따메, 부처님 환갱이시."
"기왕에 똥 묻친 제겐덜이 무신 실답잖은 소리덜이여. 지난달에 총독부 청사가 완공되야 이사럴 혔당개 날 더 풀리면 살살 귀경이나 나스드라고. 신식으로 아조 크담허니 잘 지었다등마."
"잉, 순전히 돌로 백년묵기로 잘 지었담스로?"
"순전허니 돌인디 백년만 가겄어."
"글시 말이여. 그 속뜻이 멋일랑고?"
"딱 보먼 몰러? 해뜨니 동똑이고 어사또라 허니 이도령이제."
"고것이 존 것이여 나쁜 것이여?"
"아따 걱정도 팔자시. 우리야 그냥저냥 살다 죽으면 그만이제."
차일 아래서 오가는 술기 젖은 이야기들이었디 대청에서도 남자들과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낭자하게 얼크러지고 있었다. 이경욱은 이튿날까지도 가슴의 불길을 끄지 못하고 옥비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간밤에는 온통 옥비의 꿈으로 황홀하기만 했다. 자신이 옥비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고, 옥비도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반겼고, 서로 한동안 사랑을 나누었고, 그리고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건 너무 순조로운 꿈이었고, 자신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밥을 지내놓고 보니 첫 매듭부터가 풀리지 않았다. 이경욱은 옥비를 어떻게 다시 대면할 수 있은 것인지부터 난감했다. 전주 기방으로 찾아가야 하는가, 집을 알아내야 하는가......이 문제로 엎치락뒤치락 고심하고 있다기 이경욱은 전화를 받았다.
"아, 날세. 학교에 나와 일 좀 거들어주지 않겠나."
고서완 선생이었다. 그 말은 아지트로 나오라는 암호였다. 이경욱은 정신이 번쩍 들어 옥비의 생각에서 벗어났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자네도 내용을 알아둬야겠네. 동경 조직을 통해서 서로 연결이 됐는지 모르겠는데, 자네 혹시 선배 되는 송중원이라고 아나?"
언제나 차분한 목소리로 고서완이 물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이경욱의 뇌리에는 지성적이고 사색적인 송중원의 모습이 금방 떠올랐다.
"음, 그 법안이 지금 곤궁에 처했네. 다시 말하자면 송 동지 춘부장께서는 이 근동에서 이름 높았던 의변당 수 자 익 자 어른이신데, 그분은 당세에 세상을 뜨신 것으로 되었네. 나도 그리 알았고. 헌데 그분은 돌아가신 게 아니라 만주로 밀행하시어 여지껏 독립투쟁을 전개하신 거네. 그 사실이 얼마 전 만주에서 탐지되어 이쪽 경찰서로 연락이 왔고, 그 사실을 숨겨왔던 가족들이 다 체포되었다네. 그 일로 자네 전주 좀 급히 다녀와야겠네."
"예, 알겟습니다. 헌대 저어, 송 선배 어르신께서는?......"
이경욱은 뒤늦은 충격으로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송중원의 아버지가 지금까지 만주에서 투쟁을 하고 있었다니! 이경욱은 자기와 너무 다른 가정환경에 또 심한 열등감과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그분을 체포했다고 경찰에서 떠들지 않는 것을 보니까 무사하신 것 같군. 자아, 이 편지를 이태준 변호사께 전해 드리게. 주소 잘 보고."
고서완이 반으로 접은 편지봉투를 내밀었다.
"예, 다녀오겠습니다."
이경욱은 무언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은 감정을 누르며 지체없이 일어섰다.
"이 변호사와 안면을 익히자는 뜻도 있네. 우리 전도를 위해서 말야."
고서완이 이경욱의 어깨를 잡으며 덧붙인 말이었다. 가택수색과 함께 송수익의 아내 안씨가 잡혀 들어간 것은 벌써 5일 전이었다. 안씨는 남편이 만주에 살아 있다는 것을 꼼짝없이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보내준 편지가 농 속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송중원은 한성의 자취방에서 체포되었다. 안씨가 매에 못 견딘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아들의 주소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며느리한테까지 화가 미치는 것을 막아야 했던 것이다. 며느리마저 잡혀 들어오면 그 피해는 곧바로 어린 손자에게로 뻗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송중원은 혼자만 체포당한 것이 아니었다. 밤중에 급습을 당하여 사상학습을 시키고 있던 세포조직원 다섯까지 체포되고 말았다 학습용 책자들이 결정적 물증이었디 그 돌출사태로 송중원은 군산경찰서로 이송되지 않고 종로경찰서에 묶이게 되었디 종로경찰서에서는 자기들이 발견한 범죄의 중대성을 내세워 이송을 거부했던 것이다. 체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송수익의 사돈인 신세호가 쇠고랑을 찼고, 고등보통학교 졸업반인 송중원의 동생 가원이까지 끌려갔다. 그 사건은 양치성이가 출장을 와서 터뜨린 것이다 그는 수사를 지켜보면서 초반에 벌써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공적으로 두 가지를 노렸던 것이다. 물론 송수익의 생존시실 확인이 첫째였고, 둘째는 송수익과 내통해 왔던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송수익의 큰아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수확을 얻게 된 것이었다. 송수익의 큰아들 수사에서 공산당 하부조직이 줄줄이 드러나게 된다면 그것처럼 큰 공적이 없었던 것이다. 양치성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공적으로 챙기기 위해 출장보고서를 치밀하게 짤 계획을 세우고 있
었다. 양치성은 원산은 떠나오기 전에 이미 처리한 일이 있었다. 송수익과 수국이의 살해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수국이를 잡아오게 했던 것은 그년한테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은 똑똑히 보여주고, 마지막으로 그년을 실컷 맛보고, 그리고 자기가 찔린 바로 그 자리를 찔러 그년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년은 이번에 또 정보원을 난자해 놓고 도망간 것이었다. 예쁜 꽃에 가시가 있더라고 그년은 예사로 독한 년이 아니었다. 여자 악담에는 오뉴월에도 서릿발이 치고, 여자 독기에는 무쇠도 녹아내린다고 했다. 그런 재수 없는 년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대로 살려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송수익이란 자도 생포할 수 없을 바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없애는 것이 상책이었디 대종교 시교당을 맡고 있는 김동수가 자신이 그 옛날 정보학교 시절부터 찾고 있었던 송수익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진작 죽여없앴을 거였다. 대종교 시교당을 맡은 자들이 모두 독립운동 단체에 속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의병장 송수익이가 그렇게 위장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놈은 그렇게 위장을 한 채 부하들도 농민으로 위장시키고 그동안 우리 정보원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을 것인가. 경력으로나 지금까지 건재해 있는 것으로나 그놈은 독립운동 단체의 거물이 틀림없었다. 그런 놈을 정보원 한둘의 힘으로 생포하기란 불가능이었디 그렇다고 신원이 확인된 이상 그대로 살려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보원 몇 명이 희생되더라도 반드시 죽여없애야 했다. 양치성은 이번에야 비로소 군산이 자기 고향이라는 아늑함과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정년을 앞둔 우체국장 하야가와가 2년 전에 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하야가와가 버티고 있을 때는 왠지 불편하고 거북했던 것이다. 그의 은혜사 고마운 것과는 또 다른 김정이었다. 하야가와 떠나버려 거칠 것이 없게 된 군산으로 어서 전근해 오고 싶었다. 이번 사건을 공적으로 잘 이용하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군산으로 옮겨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도 평생 고생만 하고 살아온 늙은 어머니를 편히 모시고 싶었다. 그리고 고향 땅에서 멋들어지게 행세를 해보고 싶었디 거지 노릇을 하며 헤맸던 군산 바닥을 칼 찬 경찰 제복을 입고 활보하고 싶었다.
"그놈덜 뿌랑구가 짚어도 엄청시리 닢을 것이요 잉. 무신 수럴 써서라도 줄기줄리 고구마 캐디끼 그 뿌랑구럴 확 파뒤집어야 헐 것이오."
양치성은 수사에 압력을 가해대며 원산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서히 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종로경찰서도 들러야 했던 것이다.
"니 장개도 들고 혔는디 어쩔라고 정미소넌 나와무렀냐?"
밥상머리에서 양치성은 동생 효남이를 건너다보았다.
"일만 부래묵고 월급언 쥐꼬랑댕이맨치 주고, 미꼬미가 없단 말이시."
잔뜩 주눅든 양효남이는 형의 눈치를 뚱하니 말했다. 그의 말에도 일본말이 예사로 섞이고 있었다.
"그려, 나도 못 댕기게 히무렀다."
양치성의 어머니가 얼른 끼어들었디 어머니는 동생을 위해 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을 양치성은 알고 있었다.
"글먼, 인자 머 해묵고 살라냐?"
양치성의 어머니 눈길이 큰아들과 작은아들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긍게 머시냐......나가 배운 것도 없고 헝게 점방이나 한나 열었으먼......"
"장사럴 허겄다는 것이여?"
양치성의 어조가 달라졌다.
"이, 야아가 전보톰 그것이 원이고 한이단다. 야아가 비우도 좃고 계산속도 빠르고 헝게 잘 안허겼냐."
양치성의 어머니가 또 끼어들었다. 양치성은 꼬이려는 성질을 다독이며 묵묵히 밥을 씹었다. 생각하면 동생도 불쌍한 놈이었디 어렸을 때부터 배곯고 살았고, 배운 것이라고는 없이 나이를 먹은 것이었다. 자신이 닦달을 해서 겨우 글을 깨치고 구구법을 욀 수 있는 것이 배운 것의 전부였다. 자신이 고정수입을 갖게 되면서 막내 동생 상근이는 제대로 공부를 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니 효남이의 앞길이 문제이기는 했다.
"무신 점방얼 헐라는지 맘묵은 것언 있냐?"
마침내 양치성이 입을 열었다.
"이, 자전거포 겉은 것이야 돈이 많이 든개 안 되고, 목 존 디서 잡화상얼 열먼 망헐 걱정 없이 재미가 쏠쏠헐 것잉마."
양효남은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잡화상......양치성의 뇌리에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장덕풍이었다. 그도 보잘것없는 잡화상이었다. 그런데 이제 거부가 되어있었다.
"그려, 잡화상 허는 것이야 존디, 나가 시키는 대로 혀. 그렁게, 장사라는 것도 기술잉게 나가 취직시켜 주는 상점에 들어가서 반년만 기술을 배우는겨. 그럼서 어디가 목이 존지도 찾아보고. 어째, 그리허겄냐?"
"하먼, 그래야제. 그러고말고."
양치성의 어머니는 다급하게 응답하며 작은아들에게 빠른 눈짓을 하고 있었다.
"야아, 그리허겄구만이라."
"그려, 그간에 나가 돈얼 장만허제."
"하이고, 아즘찮이 아즘찮이 또 아즘찮이다 와. 장자가 부로 맞재비란말언 니럴 두고 헌 말이여."
양치성의 어머니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큰아들의 등을 쓸고 또 쓸었다.
"상근이 니 공부 잘히야 혀. 공부만 잘허먼 큰성이 대학꺼정 보내줄것잉게."
양치성은 가슴 먹먹해지는 감정을 밀어내며 막내동생에게 눈길을 보냈다.
"야아, 큰성 고상허는 것 생각험서 열성으로 허는구만이라우."
당황한 상근이는 눈이 뚱글해져 대답했다.
"우리 상근이야 늘 일이등얼 다툰게로."
양치성의 어머니는 자신있게 말하고는,
"근디 큰아야, 니 장개넌 어쩔라고 그러냐?"
주름진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야아, 인자 자리도 잽히고 혔응게 곧 장개럴 들어야겄구만요."
"하면, 그래야제. 이 에미가 장손지럴 보듬아보고 죽어야제."
양치성의 어머니 얼굴에는 더없이 흐뭇한 웃음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한편, 송수익의 아내 안시는 며칠 동안 고문을 당해 거의 실신상태에 빠져 있었다. 얼굴은 피멍투성이였고, 구겨지고 더러워진 치마저고리에도 피얼룩이 범벅이었다.
"대라니께, 얼렁 대!"
"몰르요, 나난 몰르요."
며칠 동안 이 말의 끝없는 반복이었다. 그때마다 사정없는 고문이 가해졌다. 싸리 회초리와 대껍질회초리로 매질을 당했고, 코로 물을 부어대는 고춧가루 물고문을 당했고, 구둣발로 정강이를 수없이 차였고,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도록 따귀를 맞았다. 남편이 조직해 놓은 단체를 대라고 했다. 남편과 내통하고 있는 자들을 대라고 했다. 안씨는 그 어느 것 하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경찰은 전혀 믿어주지 않았다.
"뻘뻘허니 살아 있는 놈얼 그리 오래 죽었다고 거짓말해 온 년이 또 무신 거짓말얼 안허겄어.징헌 년, 대, 얼렁 대!"
날마다 심해지는 고문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대고 싶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안씨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게 한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아무것도 대는 것이 없으니 더 의심을 받는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안씨는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남편이 아니었다. 그건 손자 준혁이의 얼굴이었다. 솜털 보송송한 얼굴이 방싯 웃고 있었다. 안씨는 이를 맞물며 부르르 떨었다. 그 어린 것을 두고 죽을 수는 없었다. 신세호는 안씨보다 훨씬 더 심하게 당하고 있었다. 송수익과 사돈이고, 남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놈이 아조 숭헌 놈이오. 고놈만 잘 비틀어대면 고구마넌 줄줄이 나올 것이오. 근디 조심혀얄 것이오. 거짓말얼 찰떡 묵디끼 잘허는 놈잉게."
양치성이가 특별히 못을 박은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옛날에 속아 넘어간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신세호도 안씨와 똑같은 추궁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세호 역시 실토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째 계속된 혹독한 고문으로 신세호도 초주검이 되어있었다.
"어이, 자네 안사둔 말이 서로 사둔 맺을 적에 송수익이허고 합의 했담시로?"
형사가 그저 지나치는 말처럼 물었다.
"예에......"
상처투성이인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신세호의 대답은 들릴락말락했다.
"되었어, 그놈이 누구여!"
형사가 책상을 내리치며 환성을 터뜨렸다. 신세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꼼짝없이 유도심문에 걸려든 것이었다. 공허 스님의 얼굴이 크게 확대되어왔다.
"얼렁 대! 니놈허고 송수익이 놈허구 새럴 왔다갔다헌 놈이 누구여!"
더는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러나 자기 입으로 공허 스님 이름을 대다니. 신세호는 덮쳐오는 죄의식을 느꼈다. 스님, 이 못난 것이...... 신세호는 신음을 씹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름을 대더라도 공허 스님은 잡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었다.
"못 대겄어!"
형사가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공허 스님이라고......"
"머시여? 공허 시님? 중놈 아니여? 아니, 중놈이먼 그것이......"
이렇게 되어 신세호는 더욱 궁지로 몰리게 되었다. 그동안 경찰에서 노리고 노려왔으면서도 잡지 못했던 바로 그 승려와 연결된 것이니 경찰의 의심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지가...... 지가 헌 일언 조선통사라는 책얼 한 번 필사혀 준 것뿐이구만요. 그 시님언...... 밤에만 왔다가 훌쩍 뜨고 혔응게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통 몰르는구만요. 다른 일언 나헌티 더 시키지도 안혔고......"
이 사실까지 실토한 신세호는 기절하고 말았다.
"머시오? 우리 아부지가 살아 기신다고라! 거그가 만주 어디요?"
송수익의 작은아들 가원이가 부르짖듯 한 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의아스러움과 반가움이 엇갈리고 있었다.
"이놈 보소. 만주 어디먼 어쩔 끼여?"
형사가 어이없어했다.
"어쩌기넌 어째라. 찾어가야지라."
송가원의 거침없는 말이었다.
"이놈이 미쳤능가. 가서 멀헐라고?"
"미치기넌 머시가 미쳐라. 돌아가신지 알었든 아부지가 살아 기신다는디 자석이 찾아가는 것이야 당연지사 아니오."
송중원과 달리 어글어글한 생김에 건장한 몸집인 가원의 태도는 당당하기만 했다.
"이놈아, 느그 애비넌 불령선인인디도 찾아가!"
"기것이야 일본사람덜이 볼 때 그렇고 나헌티야 한나뿐인 아부지요."
"하 이놈, 똑똑헌 것인지 팔푼인지 몰르겄네."
이렇게 되어 송가원은 따귀 서너 대 맞고 이튿날 바로 풀려났다. 지하실에 갇힌 송중원은 얼이 거의 다 빠져 있었다. 속 반바지만 입혀진 그의 온몸은 청보랏빛 칠을 해놓은 것처럼 피멍으로 뒤덮인 채 퉁퉁 부어 있었다. 그는 몽둥이질에, 고춧가루 물고문에, 전기 고문까지 당하면서 잠 안 재우는 고문까지 겹쳐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흰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뻘겋게 핏발이 선 눈은 게게 풀린 채 눈곱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리고 헤벌어진 입에서는 는적거리는 침이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놈아, 한 놈만 대, 한 놈만. 그럼 당장 재워줄 테니까."
"......"
송중원의 눈꺼풀이 어느 사이엔가 내려앉아 있었다.
"이 새끼, 눈떠!"
세 줄기 싸리회초리가 송중원의 피멍든 목을 후려쳤다.
"으으응응......"
송중원이 가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매의 강도에 비해 신음소리는 너무 가늘었다.
"빨리 한 놈만 대. 그럼 당장 재워준단 말야."
"아니오, 나...... 나 혼자......"
송중원의 입에서 간신히 흘러나온 가늘고 쉰 소리였다.
"이 미련한 놈아, 비밀을 지켜주겠다잖아. 어서 한 놈만 대고 자라니까."
형사의 싸리회초리로 송중원의 볼을 ㅊㅊㅊㅊ 때리며 소리쳤다. 송중원의 혼탁한 의식 속에서는 허탁의 얼굴이 커졌다 작아졌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고 있었다.
안돼, 안돼, 안돼...... 아부지, 아부지, 아부지......
송중원은 허탁의 얼굴을 떠밀어내며 아버지를 붙들려고 안간힘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고 허탁의 얼굴만 더 커지고 있었다.
"아니, 이 새끼 눈떠!"
형사가 또 회초리로 목줄기를 갈겼다. 송중원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시멘트 바닥으로 나뒹굴어졌다. 몸이 완전히 퍼져버린 송중원은 죽은 것 같았다.
"이 새끼 또 기절이야, 이거. 이게 보기보다 독종일세. 이만하면 불 고비가 훨씬 넘었는데. 이놈 말대로 혼자 좋아서 그 짓을 한 것인가? 아닌데, 그럴 리가 없어.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형사는 양동이의 물을 송중원의 머리에다 퍼부었다. 물을 뒤집어쓴 송중원의 눈꺼풀이 더디게 뜨여졌다.
"이새끼야, 빨리 일어나!"
형사가 송중원의 복부를 걷어찼다. 송중원의 몸이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오그라들었다.
"이새끼, 너 안 불면 여기서 죽어 나가. 여기서 죽어 나간 놈들이 한 둘인 줄 아냐. 이러나 어서!"
형사가 송중원의 손가락을 짓밟았다. 송중원은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연상 아버지를 부르고 있었다. 고문을 당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를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 몰랐다. 그건 도와달라는 뜻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아버지를 생각하라는 일깨움이었다. 굴복하고 말면 어찌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송중원은 하루를 더 고문당해 일주일을 채우고서야 지하실을 벗어나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가누지 못하는 몸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며 그는 비로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와 피멍으로 팅팅 부어오른 그의 얼굴은 웃는지 우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25. 아리랑
단성사 앞은 엄청나게 몰려든 사람들로 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밀고 당기며 소리치고 다투었고, 기마 경찰들이 여기저기서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무턱대고 극장 쪽으로 밀려오는 사람들을 차단시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종로의 양쪽과 비원 쪽에서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란을 부추기기라도 하는 듯 극장의 악대는 빰빠라 빰빠빰빠라빰 빰빠빠라빰빠 신바람 나게 울려대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줄을 서지 않고 앞다투며 난장판을 이루는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극장에 지정 좌석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인원 제한도 없었다. 그리고 활동사진을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두 차례 돌렸지만 평일에는 한 차례밖에 돌리지 않았다. 그러니 구경꾼들은 누구나 남보다 먼저 들어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욕심부렸고, 극장 앞에서 멀찍하게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걸상 차지는 고사하고 맨바닥 구경도 못 하고 헛걸음 칠까 봐서 기를 쓰는 것이었다. 장안의 모든 극장은 일주일 간격으로 새 활동사진 간판을 바꿔 달았다. 그걸 사람들은 "사진이 바뀐다"고 말했다. 그런데 단성사에서는 이번 활동사진에 구경꾼들이 너무나 몰리는 바람에 일주일을 넘기고도 10일이나 더 연장하게 되었다. 돈벌이의 호기를 잡기도 해서였지만, 장안의 사람들이 "사진을 바꾸지 말라"고 성화가 대단했던 것이다. 활동사진 돌리기를 열흘이나 연장했는데 구경꾼들은 날마다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단성사 이마에 높이 나붙은 활동사진의 간판은 "아리랑"이었다. 10월 1일부터 상영된 "아리랑"은 이제 16일째를 맞고 있었다. 허탁과 박정애 일행은 체면이고 염치고 없이 앞으로만 밀고 나갔다. 그러지 않고 점잔을 피우다가는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매표구 앞에 다다른 허탁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1원 20전을 작은 구멍으로 디밀며 소리쳤다.
"넉 장이오."
"허탁 씨, 돈 여깄어요!"
박정애가 사람들 속에 파묻힌 채 저만치에서 외쳤다. 허탁은 들은 척도 않고 표를 받아가지고 입구 쪽으로 돌아섰다.
"어머, 뭐예요, 제가 초대했잖아요."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허탁 가까이 온 박정애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그럼 결사적으로 앞서가서 표를 샀어야지요."
홍명준의 말이 불퉁스러웠다.
"어머, 여자 힘으로 그레 가능해요?"
박정애가 파르르 눈꼬리를 세웠다.
"이런 땐 남녀평등이 아닌가요?"
"어허, 이 판국에서도 언쟁이신가. 어서 앞서세요."
허탁이 박정애와 김정하에게 손짓했다. 홍명준은 허탁에게 마땅찮은 기색으로 눈을 흘겼다. 허탁이 진득하게 웃음지으며 눈을 꿈적거렸다.
"저거 아주 돼먹잖았어, 어디다 대고 양반 행세야, 양반 행세가."
앞서 극장으로 들어가며 박정애가 거침없이 내쏘았다.
"어머 얘, 다 듣겠다."
뒤따라가던 김정하가 질색을 하며 박정애의 등을 쳤다. 극장 안에는 이미 빈자리가 없었다. 흔히 "호떡집 걸상"이라고 부르는 등받이 없는 걸상들에는 빈틈없이 사람들이 다 붙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통로도 벌써 절반이 넘게 사람들 차지가 되어있었다.
"자아, 빨리 저 가운데 통로에 가 앉읍시다. 어물거리다간 저 자리도 뺏기고 화면 뒤에 가서 봐야 되니까."
허탁이 박정애화 김졍하에게 신문지를 한 장씩 내밀며 서둘렀다.
"어디서 받았어요, 이건?"
신문지를 받아들며 박정애가 반색했다.
"미리 준비한 거 아니오."
"역시 멋져. 남자가 이 정도는 돼야지."
김정하가 또 박정애의 옆구리를 찔렀다. 사람들은 왁자지껄 소란을 피워가며 곧 통로까지 다 채웠다. 그런데 통로마저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무대로 올라가 영사막 뒤에까지 자리 잡고 있었다. 영사막 뒤에서는 영상의 좌우가 바뀌어 보이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쯤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었다. 말뜻을 있는 그대로 풀자면 "만원이 넘쳤다"는 말인 "초만원"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빰빠라 빰 빰빠......
무대 아래서 악대소리가 울리며 전등이 일시에 꺼졌다. 그때까지 와글거리고 바글거리던 소란이 뚝 그쳤다. 한 줄기 불빛이 어둠을 뚫고 무대로 뻗쳤다. 활동사진의 시작이었다. 농촌풍경을 담은 화면을 따라 악대의 연주가 느릿하면서도 구슬픈 가락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화면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글씨가 찍혀나오면서 악사석에서 여가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눈물겹고 서러운 가락으로 노래가 끝나면서 변사의 해설이 시작되었다.
"......평화르르 노래하고 있던 백성들이 오랜 세월에 쌓이고 쌓인 슬픔의 시를 읊으려고 합니다....... 서울에서 철학공부를 하다가 3.1운동의 충격으로 미쳐났다는 김영진이라는 청년은......"
미치광이 김영진은 낫을 휘두르며 오기호를 쫓아간다. 오기호는 이 마을의 악덕지주 천가네의 머슴이면서 일본경찰의 앞잡이인 것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눈엣가시로 미워하는 오기호를 미치광이인 김영진도 그처럼 증오한다. 그리고 김영진은 일본 경찰과 마주쳐도 곧 찔러 죽일 듯이 낫을 휘두른다. 한편, 김영진에게는 영희라는 여동생이 있는데, 그는 광인 특유의 내정으로 여동생을 아끼고 감싼다. 어느 날 서울에서 김영진의 대학동창생 윤현구가 친구를 찾아 이 마을로 온다. 그러나 김영진은 친구 윤현구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희가 오빠를 대신해서 그를 맞이한다. 영희화 윤현구는 김영진의 불행과 앞날을 함께 걱정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된다. 그런데 마을에서 풍년 농악제가 열린 날 또 무엇인가를 염탐하려는 듯 이 집 저 집 기웃거리고 다니던 머슴 오기호가 혼자서 집안일을 하고 있는 영희를 발견하고는 겁탈하려고 덤벼든다. 두 사람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힘 약한 영희가 위기에 몰리고 있을 때 윤현구가 집으로 돌아온다. 윤현구와 오기호는 마침내 격투를 벌이게 된다. 그런데 김영진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정신 이상인 그의 눈에는 두 남자의 격투가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보이는 것인지 그저 히죽히죽 웃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김영진은 문득 환상을 본다. 사막에 쓰러진 한 쌍의 연인이 지나가는 대상에게 물을 달라고 애원한다. 그런데 상인은 물 한 모금 대신 여자를 끌어안는다. 그 순간 김영진이 낫을 번쩍 들어 후려친다. 대상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김영진의 낫에 찔려 쓰러진 것은 오기호였다. 이때 김영진은 오기호가 흘린 피를 본 충격으로 맑은 정신을 되찾는다. 그 자리에 김영진의 아버지, 교장 선생, 지주 천가, 그리고 일본 경찰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런데 김영진의 손에는 포승이 묶여진다. 김영진은 자기를 바라보고 오열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말한다.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이 몸이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떠나는, 떠나려는 이 영진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여러분 눈물을 거두어 주십시오......"
김영진이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면서 악대가 연주하는 아리랑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오......
그 연주에 맞추어 앞쪽에서 합창이 시작되었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아......
그 합창은 마치 물결치듯이 뒤로 뒤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벌병난다아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합창의 물결애 휩쓸렸다. 합창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화면은 사라지고 극장 안에 불이 켜졌는데도 관객들은 나가지 않고 모두 일어나 다시 아리랑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얼굴 얼굴은 숙연하고도 비감했으며, 그 합창은 서러우면서도 장중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소리내 흐느끼는 여자들도 있었다. 합창이 막 끝났을 때였다.
"대한독립 만세에!"
어느 남자의 부르짖음이었다.
"대한독립 만세에!"
화답하듯 여기저기서 터진 외침이었다. 그때 호루라기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댔다. 극장 안이 금방 싸늘해졌다. 만세소리는 더 울리지 않았다. 극장을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침울하고도 숙연했다. 기마 경찰들이 일본도를 빼들고 살벌한 기세로 줄지어 서 있었다. 허탁 일행은 묵묵히 종각 쪽으로 걸었다. 박정애와 김정하의 눈자위에는 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디 가서 차나 한잔합시다."
파고다 공원 앞에 이르러 허탁이 말을 꺼냈다.
"네, 조금 더 가면 괜찮은 까페가 있어요."
박정애가 말을 받았다. 그들은 길을 건너 카페로 들어갔다. 일본사람들에 의해 명동 일대와 황금정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던 카페는 언제부턴가 해로운 유행업종으로 조선사람들도 종로통에 많이 차려놓고 있었다.
"그것 참 이상해......"
홍명준이 담배갑을 꺼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허탁이 담배를 뽑으며 쳐다보았다.
"대채 그런 영화가 어떻게 총독부 검열을 통과했지?"
"어쩜, 아직 그것도 모르고 있어요? 나운규는 그걸 미리 피하느라고 일본사람을 감독으로 내세우고 자기 이름을 뺀 거예요."
박정애는 아까의 분풀이라도 하듯이 한달음에 쏟아놓았다.
"아, 그러신가요. 아시는 게 많으시군요."
박정애의 노골적인 공격을 맞받아치듯 홍명준의 어투는 비아냥조였다. 총독부에서는 3개월 전인 지난 7월에 활동사진 필름 검열규칙을 공포했다.
"활동사진이란 게 참 묘하군. 그게 눈물 짜는 연애 얘기나 엮어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까. 그 많은 사람들 가슴을 그렇게 흔들어놓고, 마음을 한 덩어리로 뭉치게 하다니. 그것 참 대단한 힘이야."
허탁이 담배를 깊이 피우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나도 동감이네. 이 살벌한 세상에서 어찌 그런 활동사진을 만들어낼 생각을 했는지 원. 젊던데 몇 살인지 몰라."
홍명준은 고개를 갸웃거렷다.
"한 스물대여섯 살 됐을까? 홍범도 장군 부대에서 독립투쟁을 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 영화를 만들어냈는지도 모르지."
"얘 정하야, 너 뭘 하고 있는 거니? 이런 때 실력 발휘를 하잖고"
박정애가 커피를 마시려다 말고 김정하에게 눈짓하고는,
"정하가 가사과 출신이지만 사실은 배우 지망생이에요. 그래 나운규에 관해서는 박사니까 알고 싶은 건 다 물어보세요."
그녀는 허탁에게만 눈길을 보냈다.
"아이, 넌 애가......"
갸름한 얼굴애 눈매가 곱상하개 생긴 김정하가 부끄러워하며 박정애의 팔을 꼬집는 시늉을 했다.
"아, 그렇지요 참. 사람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거니까 어서 아는 대로 말씀 좀 해주시죠. 나운규 같은 사람은 이 시대의 젊은 층을 대표할 수 있는 새로 등장한 인물 아닙니까. 우리 젊은이들이 알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허탁이 진지하게 말했다.
"봐라, 어서 얘기해 봐."
박정애가 김정하에게 정다운 눈길을 보냈다.
"네에, 별로 아는 건 없는데요, 그분은 올해 스물네 살이시고, 북간도 명동 중학을 다니시다 왜놈들의 강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만주의 독립군을 찾아 나서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떤 독립군단체에 속해 독립투쟁을 하시다가 청희선 터널 폭파 미수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감옥살이를 지내고 23년에 출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독립군 단체가 홍범도 장군 부대인지는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체포되었을 당시에 홍범도 장군 부대는 만주에 있지 않고 러시아 땅 연해주로 이동했었거든요. 그분은 출감하신 다음 뜻을 바꾸어 24년에 부산에서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되자 부산으로 내려가 연구생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조선키네마가 제작한 운영전에 단역인 가마꾼으로 첫 출연해 연기력을 인정받으신 결과 25년 백남프로덕션의 제1회 작품인 심청전에서 주역인 심봉사 역을 맡아 큰 배우로 인정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농중조애 출연하여 절찬을 받으면서 마침내 명배우가 되신 것입니다. 허나 그분은 배우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직접 활동사진을 만들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원작 각본을 직접 쓰고 감독도 주연도 직접 맡아 만드신 영화가 바로 아리랑입니다. 그러니까 아리랑은 그분이 씨나리오 작가로, 감독으로 대뷰하신 첫 작품인 것입니다."
김정하는 차분하면서 막힘없이 아야기를 해나갔다.
"과연 나운규애 관해선 박사시군요. 헌데, 무척 존경하는 모양이지요?"
홍명준은 김정하가 말끝마다 최대 존칭을 붙인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존경이 뭐예요? 우상이지요."
박정애가 톡 쏘았다.
"스물넷에 그런 큰일을 해내다니......"
허탁이 중얼거리며 커피잔을 들었다. 그 말에서 묻어나는 자괴감과 함께 그의 얼굴을 어두워져 있었다.
"배우 지망생은 나운규를 우상으로 살고 있으면 제대로 된 건데, 성악가 지망생은 오늘 가슴 찔리게 느낀 게 뭐 없소?"
홍명준이 박정애를 향해 말을 튕겼다.
"아니, 가슴 찔리다니요?"
박정애가 금방 눈꼬리를 세웠다.
"이거야 원, 뜻도 제대로 모르고 싼타루치아나 물러대고, 김우진이하고 윤심덕이하고 현해탄애 투신 정사한 것이나 멋지다고 수선을 떨어대니 무슨 느낌이 있을 게 뭐요."
"말조심하세요!"
박정애가 앙칼지게 내쏘았다.
"내 말 다 안 끝났소. 고추장 된장 먹고 사는 처지에 이태리 유학이니 뭐니 어설프게 헛바람 잡지 말고 아까 그 여가수처럼 우리 노래나 잘 부르도록 정신 차리는 게 어떻겠소?"
"흥! 그리 말하고 앉았는 홍명준 씨는 뭐죠? 왜놈들 주구로 독립운동가들 물어뜯자는 것 아닌가요?"
"아니, 뭐요?"
홍명준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내 말 다 안 끝났어요."
박정애는 홍명준이가 했던 똑같은 말로 내지르고는,
"그 잘난 양반들이 나라 팔아먹은 것도 모자라서 이제 양반 자제께서는 왜놈들 법 달달 외워 판검사라는 똥개 노릇을 나설 참인데, 사나이로 태어나서 정 할 짓이 없으면 아편이나 피우는 게 어떠시올지?"
그녀는 거침없이 공박해댔다.
"그래요?"
홍명준은 피식 웃고는,
"내가 미리 말할 이유가 없어서 말을 안 했던 건대, 말리 나온 김이니 한 마디 해두겠소. 난 판검사가 되려고 고등고시를 보는 게 아니오. 변호사가 되려고 그러는 것이오, 더구나 오늘 활동사진을 보고 느낀 게 많으니까 하루빨리 변호사가 되도륵 해야겠소. 이래도 아편이나 피우리까?"
그는 박정애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넌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흥, 잘났군요. 난 악착같이 이태리 유학을 갈 거예요."
박정애는 오기를 부렸다. 그러나 의식 속에서는 아까 들은 노랫소리가 쟁쟁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 새로운 가락의 아리랑은 벌써 장안에 일대 유행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자기가 그 여가수만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 한 번 노래를 불러 그렇게 유행시킬 수 있다는 것은 너무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두달 전에 극작가 김우진과 성악가 윤심덕이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고 현해탄에 투신 정사한 것을 놓고 희대의 낭만적이고 멋진 사랑이라고 들떴던 분위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휩쓸렸던 것이 못내 부끄럽기도 했다. 그때 나운규라는 젊은 사나이는 조선사람들 전부의 가슴을 뒤흔들고 눈물 흘리게 할 활동사진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괜한 억지소리 마시오. 박정애 씨도 아까 울던걸."
그때까지 말없이 듣고만 있던 허탁이 앉음새를 고치고는,
"박정애 씨, 혹시 아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오, 아까 그 아리랑 노래가 전에 듣던 것하고 좀 다르지 않아요? 소문에는 신판 아리랑이란 말도 있던데."
그는 박정애를 음악 전문가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네, 귀가 아주 밝으시네요. 그건 이번에 새로 편곡된 거예요. 그러니까 뭐랄까, 그전에 있던 가락을 바탕으로 해서 활동사진의 분위기에 맞게 약간씩 변곡을 한 거지요."
박정애가 밝아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아리랑이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는데 또 한 가지가 생긴 셈이로군요."
"네, 그런 거예요."
"그리고 저어......또 한 가지 달라진 게 있어요. 가사 중에서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하는 건 이번에 새로 지으신 거예요. 나 선생님께서......"
김정하는 수줍은 듯 낱꽃 좃게 미소지었다.
"아, 그게 그렇습니까?"
홍명준이 놀라는 반응을 보였고, 허탁은 또 무슨 생각인가를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디 가서 저녁이나 하실까요? 아까 표를 제가 못 샀으니까요."
박정애가 허탁에게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우린 또 다른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합니다."
홍명준은 재빨리 대답을 가로챘다. 그는 박정애가 넘스럽게 구는 것을 더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이세요?"
박정애는 다그치듯 물었다.
"송형 집안일로 만날 사람이 있소."
허탁은 엉겁결에 꾸며댔다.
"저도 가면 안 되나요?"
"우리 또 만납시다."
허탁이 쓰다듬듯 박정애를 바라보았다. 박정애는 또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 눈길을 받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연했다. 그들은 카페를 나와서 헤어졌다. 박정애는 홍명준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가버렸다.
"자넨 어쩌자고 박정애한테 그리 관대하나? 자네가 그러니까 저게 꼭 첩처럼 나대잖나. 자넨 사람을 너무 안 가리는 게 큰 탈이야."
홍명준이 낙원동 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불쾌해했다.
"이 사람아, 내가 탈이 아니라 자네가 탈이야. 자네도 그 사람 차별하는 습관 좀 없애. 박정애가 겉멋이 좀 들긴 했어도 본심은 순박하고 정이 많아. 이번에 보게, 박정애가 아니었으면 누가 송중원이 면회를 그리 열성으로 다녔겠나. 박정애가 나한테 첩처럼 나대는 게 아니라 자기가 송중원의 일에서 제외되는 게 서운해서 그런 태도를 보인 거 아닌가. 같은 심부름만 시켜놓고 다른 일에서는 빼버리니 누가 기분 좋아 하겠어."
"그렇게 둘러대도 왜 하필 송중원이 일이라고 하나 그래."
"이 사람 보게, 느닷없는 거짓말로 사람 궁지에 몰아놓고는 되레 큰소리야."
"좌우간 중인 딸년들 일본물 먹고 신여성이라고 꺼들대는 꼴 비위 틀려 못 봐주겠어. 어떻게 된 게 여자들 일본 유학이야 하면 태반이 중인 딸년들인가 그래."
"원 새삼스럽긴 점잖고 고매하신 양반님네들이야 금가고 깨질까 봐 귀한 따님들을 어찌 밖으로 냐돌릴 수 있어야 말이지. 중인들이야 생각이 양반들보다 활달하겠다, 재력이 든든하겠다, 세상이 달라진 걸 보고 딸자식가지 다 신식공부를 시키는 거 아닌가. 두고 보게, 앞으로 세상 판도가 달라질 거네. 여성 제위께서 세상 진출이 많아질 것이고, 그 여자 세상을 중인 따님들이 장악할 테니까. 그때 가서 당황하지 말고 사람 차별하는 자네 생각을 어서 바꾸게."
"자꾸 차별 차별 하지 말게. 그것들이 제 할 일이나 하면 누가 뭐래나. 자구 우리와 맞먹으려구 나대니까 그리되는 거지."
"글세, 그게 시대에 안 맞는 고리타분한 양반의식이란 말일세. 지금은 임금이 다스리던 시대가 아니잖나. 상해 임정이 공화주의를 채택한 게 벌써 몇 년 전인가? 공화주의의 근본 정신이 뭔가? 만민평등에 주권재민 아닌가. 자네도 변호사님 제대로 되려면 그놈의 차별의식 어서 버리고 모두 우리 동포거니 하고 큰맘으로 대하도록 하게."
"모르겠네. 오랜만인데 저기 가서 술이나 한잔하세."
"그러지. 여기 탑골애 걸음 한 지도 참 오랜만이군."
"빌어먹을, 탑골이라는 말 들으니까 어째 기분이 이상하군. 왜놈들 참 못된 놈들이야. 왜 동네 이름들까지 제멋대로 바꾸나그래. 낙원동이 뭐야, 낙원동이."
"흐흐흐흐......그러지 말게, 총독님 치하가 좀 좋은 낙원인가. 술이나 마시자구."
허탁의 흐흐거리는 웃음이 소슬한 저녁바람 속에 흩어지고 있었다. 낙원동은 골목골목 술집 많기로 유명했다. 기생들을 둔 고급술집에서부터 싸구려 선술집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진고개가 일본사람들의 유흥가라면 낙원동은 조선사람들의 유흥가였다. 홍명준이 앞장서는 대로 허탁은 슬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어차피 술값은 홍명준이가 내게 되어있어서 허탁은 어떤 술집이든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ㄱ자로 된 아담한 한옥의 끝방에 자리 잡았다. 좁장한 방이 술마시며 이야기 나누기는 안성맞춤이었지만 술집 분위기가 허술하지 않아 허탁은 술값에 좀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번거로운 빈말을 하기 싫어 그저 잠자코 있었다.
" 이제 자넨 위험을 완전히 면하게 된 건가?"
홍명준이 담베를 권하며 물었다.
"글세, 1차 위기는 모면했는데 아직도 송중원이 면회도 못 갈 형편이니 원."
허탁이 담배를 뽑으며 씁쓰름하게 웃었다.
"6.10만세 운동 같은 걸 어찌 생각하나?"
"무슨 뜻인가?"
"그러니까 말이야, 그레 사전에 탄로되지 않고 성공했더라도 말이야, 자네 생각엔 무슨 효과가 있었을 것 같은가?"
"자넨 아무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렇잖은가. 그게 3.1운동처럼 거족적으로 일어나지 못할 바에야 무슨 효과가 있겠나. 3.1운동도 결국은 무수한 희생만 치르고 실패했는데."
"글세, 그거야말로 시각의 차이고 생각의 차이가 아닌가 싶네. 3.1 운동을 성취로만 직결시켜서 따진다면 분명 실패지. 그러나 그걸 그렇게 단순화시켜서 보아서는 곤란하지. 3.1 운동의 가장 큰 성과는 우리 민족 전체에게 일본과는 투쟁헤야 한다는 것을 각성시켰고, 또한 우리가 뭉치면 얼마나 큰 힘을 낼 수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확인시켰다는 점이네. 그리고 3.1 운동을 계기로 해외의 독립투쟁이 얼마나 치열해졌던가. 문제는,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네. 그게 당장 독립을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실의에 빠진 대중들에게 희망을 주고, 고통당하고 있는 인민들에게 위안을 주고, 체념에 빠져드는 전 민족에게 새롭게 각성하는 계기를 만들게 되거든. 그런 의미에서 6.10 만세운동도 손실만 있었던 건 아닐세."
"허지만 실페가 주는 대중의 좌절감도 있고, 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압박이 강화되는 건 안 생각하나?"
"저어, 술상 딜여갑니다아."
술상이 들어오는 동안 허탁은 변소를 다녀왔다. 그는 자꾸 떠오르는 송중원의 모습을 지우려고 애썼다. 걸직하게 차려진 술상 옆에는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허탁은 얼굴이 찌푸려지며 홍명준에게 눈총을 쏘았다.
"아무 걱정 말게. 이 사람도 3.1 운동 때 만세를 부르다가 반년 옥고를 치른 절개 푸르른 투살세. 우리보다 나은 경력을 지녔으니까 자네도 알고 지내는 게 나을걸."
홍명준이 비죽비죽 웃었다.
"앉으시지요. 퇴기 설죽이옵니다."
여자가 상긋 웃으며 허탁을 올려다 보았디 서른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살이 포동하게 오른 여자의 흰 얼굴에는 화류계의 풍상을 겪어온 완숙미가 어려 있었다.
"예, 허탁이라고 합니다."
허탁은 그 경력에 인상까지 마음에 들어 빙긋 웃으며 주저앉았다.
"아이구 황송하시리, 말씀 낮추시지요."
설죽이 고개를 약간 숙이며 잔잔하게 웃었다.
"저 친구는 인간 차별을 없애려고 하는 막스보일세."
홍명준이 쏟아낸 말에 허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막스보이"란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유행어였다.
"그리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소책자 몇 권은 읽어보았으니까요."
설죽이 허탁을 바라보며 그윽하게 웃었다.
"허, 설죽이란 이름값을 하는 겁니까?"
허탁은 멋쩍은 듯 웃음을 흘렸다. 그때서야 그는 홍명준이가 왜 굳이 이 술집을 택했는지 깨달았다.
"첫 잔은 제가 따라 올릴 테니 그다음부턴 두 분께서 편히 드십시오."
설죽은 앉음새를 고치며 꽃무늬 고운 사기 주전자를 들었다.
"자네 달리 봐야겠군. 이런 술집을 다 알고."
설죽이 나가고 나자 허탁은 술잔을 들며 씨익 웃었다.
"흥, 그 웃음 묘하네. 술이나 많이 들게. 피해 다니느라고 술맛이나 어디 봤겠어."
홍명준이 술잔을 비웠다.
"피해 다니다 보니끼 세상이 어찌 그리 좁은지 원. 그동안 운동해 온 분들이 새삼스럽게 우러러보이더군."
"거 자넬 불어버린 그자는 풀려났나? 어떻게 그런 인간이 다 있어?"
"고문을 못 이긴 거겠지."
"이런. 송중원이는 끝까지 버텨서 아무한테도 피해를 안 입히지 않았나. 혹시 그자가 얼치기 막스보이 아냐?"
"그럴 수도 있지."
허탁은 연거푸 술잔을 비우며 말을 아끼고 있었다.
"여보게, 난 국외자로 바라보고만 있는 입장이지만 말야, 이번에도 공산당 간부 등이 135명이나 구속되지 않았나. 난 그걸 이해할 수가 없어. 그게 다 행세꾼인 얼치기 막스보이들 때문이 아니겠나?"
행세꾼 막스보이나 얼치기 막스보이란 신사상의 풍조에 편승해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냄새를 풍기는 신지식인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사상이 동경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진보적이고 선진적인 의식을 갖추는 것이 지식인의 조건처럼 되어있었다. 그런데 사회주의 사상은 새로운 독립운동의 길이라는 의미까지 덧붙여져 막스보이 행세꾼들은 자꾸 불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글세, 그게 다는 아니고 다른 이유들이 또 있겠지."
"그게 뭔가?"
"뭐랄까, 먼저 내부적 문젠데, 조직관리가 철저하지 못한 점이고, 아직 조직원들의 의지나 투지가 강하게 단련되지 못했지. 그리고 왜놈들의 고문이 살인적으로 혹독한 거지."
허탁의 말은 침울했다.
"그렇게 많이들 잡혀 들어갔으니 공산당은 재건하자마자 또 무너진 것 아닌가."
"그런 셈이지."
"실패한 6.10 만세가 공산당까지 잡아먹었군."
허탁은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조선공산당은 1월에 2차로 조직되었다. 재건된 공산당에서는 순종의 국장일인 6월 10일을 기하려 대규모 만세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추진했다. 고종의 국장일을 택한 3.1 운동과 똑같은 방법이었다 그런데 천도 교회관에 감추어둔 인쇄 격문을 호기심에 찬 여직원이 두 장을 빼내 집으로 가져갔다. 그걸 몇 사람이 돌려보는 과정에서 경찰의 끄나풀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결국 6.10 만세는 서울 시내에서 청년 학생들이 독립 만세를 외친 소규모 집회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허탁은 학생조직을 지도하고 있다가 체포의 위험이 닥치자 황급히 피신했던 것이다.
"공산당은 이번으로 끝난 것 아닌가?"
"그런 소리 말게. 또 재건되네."
허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얼치기 행세꾼들은 겁나서 다 흩어지고, 내부 파벌싸움은 심하고, 그게 가능할까?"
"행세꾼들은 빨리 없어질수록 좋고, 파벌싸움은 조직의 통일을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네. 강철은 두들길수록 강해지고 공산당은 시련을 겪을수록 강해진다는 걸 알아두게."
"흔, 레닌의 유명한 말이로군. 자네한테 그런 소리 하는 내가 잘못이지. 자아, 잔이나 받게."
홍명준은 허탁의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밖에서는 가야금 뜯는 소리가 은은하게 울리고 있었다.
"1년 6개월이면 송중원이 얼굴 볼 날도 아직 멀었군."
홍명준이 말머리를 돌렸다.
"형기가 문제가 아닐세. 박정애 말을 들으니까 건강이 아주 형편없는 모양이더군."
허탁이 짙은 한숨을 토했다.
"고문당한 게 회복이 안 되는 건가?"
"그런 거지."
"나도 당장 면회를 가봐야 되겠군. 헌데, 그 사람이 부친에 대해선 자네한테도 한마디 없었던가?"
"음, 나도 전혀 몰랐어."
"참 지독한 친구야."
"그야 그래야지. 그게 얼마나 중한 문제라구."
"그 집안도 편치 못할 것 아닌가."
"말해 뭘 하겠나. 모친에 장인어른까지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네."
"실형 받았나?"
"아니, 송수익 선생의 생존을 숨겨온 것 말고는 다른 혐의가 없어서 무죄로 풀려났네. 허나 두 분 다 고문으로 몸을 상해 운신을 못하는 형편이네. 특히 중원이 모친은 왼쪽 팔다리가 마비된 중병을 얻으셨네."
"저런 놈의 일이 있나!"
홍명준이 술상을 쳤다. 허탁이 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송중원이는 그 소식을 아나?"
"아니, 알리지 못하게 했네."
"그거 잘했네. 알면 병이니까 그나저나 집안이 불시에 쑥밭이 됐으니 그런 우환이 없지 않은가."
"......"
허탁은 술잔을 비우고 손수 술을 따라 또 잔을 비웠다. 홍명준은 멍하니 앉아 담배 연기만 내뿜고 있었다, 새 손님이 들었는지 밖에서는 남녀의 목소리들이 왁자하개 울리다가 가라앉았다. 홍명준이 방문을 열고 술을 더 시켰다.
"자아, 잔 받게. 무슨 생각을 하나."
홍명준이 잔을 내밀었다. 벽에 등을 시댄 채 눈길을 위쪽으로 보내고 있던 허탁이 더디게 앉음새를 고치며 술잔을 받았다.
"무슨 생각 하느냐고? 아리랑을 생각하고 있었지. 아리랑, 아리랑, 그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고 있었어. 그리고 관중들의 합창을 생각하고 있었어. 아리랑에서 팔을 묶여 끌려가던 그 사나이가 누군지 아나? 그게 주인공 김영진이라고? 아니야, 아니야. 그건 바로 송중원이야. 송중원이고, 또 다른 송중원이고, 또 다른 송중원이고...... 그리고 그 열렬한 관중들의 합창은 수많은 송중원에게 보내는 지지고 기대고 열망이야. 나는 이번에 놀랐어. 아리랑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아리랑 노래가 그렇게 선풍적으로 유행하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어. 나는 도망 다니면서 사람들이 독립을 다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다 왜놈들의 종으로 살기로 돌립을 포기해 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고 회의했었어. 허나 그건 외로움과 두려움에 몰리고 있는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어. 아리랑을 보고 내 잘못을 깨달은 거지. 활동사진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노래가 그렇게 퍼져나가는 건 뭘 말하는 것인가. 그건 바로 조선사람들이 가슴 가슴마다 독립의 염원을 뜨겁게 품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평소에는 다만 표를 내지 않았을 뿐이야, 그 뜨거운 염원이 있는 한 송중원은 외롭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끝없는 용기를 발휘하게 되는 거야. 어때, 내 말이."
"드디어 술이 제값을 하는군, 과연 허탁다워."
허탁은 술을 단숨에 비우고 잔을 내밀었다. 그는 따르며 그 누구에게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자네도 피해 다니면서 외롭기도 하고 두럽기도 했던 모양이지?"
홍명준이 빙긋이 웃으며 허탁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사람아. 관우 장비도 무서움을 느낄 때가 있고 나폴레옹도 눈물을 흘린 적이 있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말야, 내가 도망 다니면서 외운 시가 한 편 있는데 들어보겠나? 아리랑만큼 감동적인 명편일세."
"어디 읊어보게. 누가 지은 건데?"
"이상화 시인이 지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지. 자아, 잘 들어보게.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리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걸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해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나리던 곱은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들 마을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신명이 접혔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봄조차 빼앗기겠네......
봄조차 빼앗기겠네......
"봄조차 빼앗기겠네!"
홍명준의 목소리가 합창을 이루었다.
"그렇지, 그래. 이 시 어떤가?"
술기운 돋은 허탁의 눈이 홍명준을 응시했다.
"끝에 되풀이한 구절은 내 멋대로 그리한 거네."
"응, 나도 그런 줄 알고 따라한 거지. 어쨌든 자네가 도망 다니면서 외울 만한 시로군그래. 자네 심정 그대로였을 테니."
"그렇지, 아주 큰 힘이 됐어. 문학이 독립투쟁의 무기가 된ㄹ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네. 송중원이가 왜 문학을 하려고 하는지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됐고."
"어디 문학뿐인가. 아리랑을 보게. 활동사진이고 문학이고 다 독립운동에 매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나저나 자넨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가?"
"글세......"
허탁은 느린 동작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중국으로 가야 할지 어쩔지를 생각하고 있네."
그의 목소리는 얼굴만큼 무거웠다.
"중국이라니? 여기선 그리 견디기 어렵겠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중국 공산당을 돕는 지원대가 구성되어 있어서."
"아니, 그건 무슨 소린가? 우리 발 등에 떨어진 불 끄려고 중국의 지원을 받아도 시원찮을 판에 이쪽에서 중국을 돕다니?"
홍명준은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얼핏 생각하기엔 그럴 수도 있네. 허나 전체적인 상황을 종합하면 그렇지가 않네. 무슨 말인고 하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제공산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우리가 중국공산당을 먼저 돕고, 중국혁명이 성취되면 그대 우리도 도움을 받자는 거지. 왜냐하면 지금 중국은 국내문제로 아주 복잡한데, 봉건군벌. 국민당 정부. 공산당으로 갈라져 있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군벌들을 타도하기 위해서 서로 힘을 합쳐 "국공합작"을 한 상태네. 그런데 중국공산당은 군벌들을 타도하는 싸움을 전개하는 동시에 공산혁명을 추진할 계획을 세우고 있네. 그러자면 자력이 부족해 국제적인 협조가 필요한 형편이지. 그 일을 우리가 도와 중국 대륙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달성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힘이야말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거지. 그 힘으로 우리의 독립을 돕는 건 너무 쉬운 일인 거야. 어째, 이해가 되나?"
"은, 그럼 법하긴 한데......허나 중국에서 혁명이 성취될까?"
"그야 러시아를 보게."
허탁의 말은 신념에 차 있었다. 두 사람은 밤이 깊어 술집을 나섰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엇다. 서로 몸을 의지하자는 것이었다. 큰길로 나서면서 누가 노래를 시작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곧 합쳐졌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그들의 합창은 밤거리를 울려대고 있엇다. 인적 드문 거리에 인력거들이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26. 한곳으로 모아지는 힘
"이놈아, 니가 시방 정신이 있냐 없냐. 우에서 금허는 공산주의에 물든 죄도 어디 헌디 집꺼정 떠나겄다는 것이 정신나간 옴 짓거리가 아니고 머시냐. 엄니도 업슨 집구석에 동상덜만 저리 오르르 남은 것이 안 뵈냐."
늙은 그늘이 서리기 시작한 천수동의 얼굴에 노기가 드러나 있었다. 그는 아내 솜리댁을 잃은 뒤로 웃는 일이라곤 없이 너무 표나게 늙어가고 있었다. 며칠 만에 살아 돌아온 수국이의 말을 듣고 동네 사람들은 솜리댁이 밀정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시체조차 찾으러 나설 수가 없었다. 수국이도 솜리댁과 떨어지게 된 곳이 어디인지 어림짐작만 할 뿐 꼭 찍어서 알지를 못했다.
"아부지도 참. 공산주의도 나라 찾자고 허능 것인디 죄넌 무신 죄당게라. 심진 나라덜이 우리나라 독립얼 도와주겄다고 허먼 손잡고 나스는 것이 옳제. 쇠고집만 부린다고 이문이 머시당게라? 글고, 지야 진작에 총 들고 나슨 몸인디 엄니 안 기신다고 집안일에 한눈 폴고 그럴게라?"
무릎을 꿇고 앉은 천상길은 차분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립 군복을 단정하게 입은 그의 몸집은 약간 작은 듯하면서 얼굴은 차돌 같은 인상이었디 몸집은 천수동이고 얼굴은 솜리댁을 닮은 그는 말씨까지 부모를 그대로 빼박고 있었디 만주에서도 고향의 생활풍습을 그대로 지녀오고 있는 것과 똑같았다.
"옳은 것이 말대답이라고 니 애비 앞이서 따곡따곡 말대답 다 헐라냐? 이 애비 무식허다고 깐보능겨?"
아들의 말이 빈 구석이 없어서 천수동은 억지소리로 밀어붙이고자 했다. 특히 아내를 끌어대 아들의 발목을 잡으려고 했던 것은 처음부터 억지를 부린 것이었다.
"아이고메 아부지, 그 무신 말씸이신게라. 지가 효자넌 못되야도 어칙게 아부지럴...... 아부지, 그것이 아니고요 잉, 저그 쏘련허고 동무럴 헌 공산주의 나라덜언 우리나라 겉이 심 약헌 나라덜얼 돕기로 나섰는디, 우리가 먼첨 중국 공산당얼 도와주고 그담에 쏘련허고 중국이 우리럴 도와주먼......"
"아 시끄러. 여러 잔말 말고 딱 짤라서 답혀. 갈 것이여, 안 갈 것이여?"
"저어......백 분 생각히도 그것이 옳은 길잉게 가야 쓰겄구만요."
"니 안 되겄다, 가자!"
천수동은 아들의 팔을 잡으며 일어섰다.
"어, 어디럴....."
천상길은 어리둥절해졌다.
"어디넌 어디여. 송 선상님헌티제."
천수동은 스스로 판단할 수가 없었고, 천상길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송수익 선생은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분이었던 것이다. 천상길의 말을 다 듣고도 송수익은 눈을 내려뜬 채 담배 한 대를 다 피우는 동안 말이 없었디. 천상길은 담배가 타들어 감에 따라 점점 불안이 커져 가고 있었다.
"그래, 어디로 가나?"
송수익이 눈을 들어 천상길을 바라보았다.
"예, 광동이구만요."
"얼마나 됐나, 공산주의를 접한 게?"
"한 3년 되았구만요."
"중국이 혁명되리라고 믿나?"
"예에......"
"어째서?"
"저어, 군벌덜언 전부 부패해서 백성덜얼 착취허고, 백성덜언 새 시상이 오기럴 바래고 있구만요."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나?"
"아니구만요."
"왜?"
"지넌 조선 사람이제 중국 사람이 아니구만이라."
"여기 만주 3부(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에서는 공산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데 앞으로 어찌하려나?"
"저어......간부덜이 생각얼 바꽈 공산주의허고 손얼 잡어야 할 것이구만요. 상해임시정부가 초기에 연합혔든 것맨치로......"
"이놈 시건방구지게 주딩이 놀리는 것 잠 보소."
천수동이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치켜들었디 송수익이 진득하게 웃으며 천수동이에게 가만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것이 안 되면?"
"우리럴 배척헐 것잉게 천상 따로......"
"얼마나 떠나나?"
"한 삼사백......"
"그래, 떠나게."
"아니, 서, 선상님......"
천수동이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가서 몸조심하고.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해두게."
"예. 뜨기 전에 또 뵙겄구만요."
"그러세. 가서 일 봐."
천상길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밖으러 나갔다.
"아니 선상님, 말리시라고 딜고 왔등마......"
천수동은 멀거니 송수익을 바라보았다.
"아니오, 무작정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오. 세상이 또 한고비 변하고 있소."
송수익은 그저 담담했다.
"아무리 시상이 변해도 저 어린 것덜이 머럴 안다고......"
"천 동지, 아들이 젊은 거지 어리덜 않소. 천 동지가 의병에 나섰을 때하고 지금 아들하고 몇살 차이나 나지요? 그때 천 동지가 철이 없어서 의병에 나섰소? 그렇지 않지요? 다른 사람들보다 철이 더 빨리 들고 용맹이 있어서 의병에 나선 것이오. 헌데 그때하고 지금하고 총을 견주어 보시오. 얼마나 많이 변했소. 그게 다 세사이 달라져서 그런 것이오. 사람 생각도 그리 변하는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근디 어찌서 우에서넌 금허능게라?"
"그건 나이든 사람들하고 젊은 사람들하고 차이요. 허나 양쪽 다 나라를 찾자는 생각은 같으니까 과히 염려할 건 없을 것이오. 가다 보면 서로 손을 잡을 날도 있지 않을까 싶소."
"얼렁 그리 되먼 좋겄구만요."
천수동은 자기와 아들이 갈라지는 것 같아 이렇게 말했다.
송수익은 며칠이 지나 회의를 소집했다. 지삼출을 중심으로 예닐곱 사람이 둘러앉았다. 송수익은 무심한 듯 그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나이는 속일 수 없어 그 얼굴마다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 주름살마다 만주의 고단하고 험한 세월이 담겨 있었디 농사를 지으며 싸워온 세월이었다. 물론 농사보다는 싸우는 것이 먼저였지만 부대를 위장하고 동포들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농사도 게을리 하지 않았디 그러나 논일을 하다 말고 밀정을 쫓아 수십 리를 헤쳐야 했고, 큰 작전이 벌어지면 며칠씩 집을 비우게 되었다. 그럴 때면 농사 뒷감당은 으레껏 집안 식구들이 해내야 했다. 여인네들은 상일꾼이었고, 사내아이들도 열 살이면 벌써 학교 다니는 틈틈이 지게질을 했다. 새삼스럽게 그런 회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송수익의 가슴은 축축히 젖고 있었다.
"오늘 전하게 된 소식이 좋은 소식인지 어쩐지 모르겠소. 몇 달 전부터 물색해 왔던 땅이 길림 가까이에 구해졌다는 전갈이 어저께 왔소."
송수익은 여기서 말을 끊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순간적으로 그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송수익이 짐작했던 대로였다.
"땅은 60만 평이 넘으니 그만하면 될 것 같고, 시기가 한두 달 빨랐더라면 아주 제격이었을 텐데, 추위가 시작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을지 의논을 좀 해보도록 합시다."
송수익은 그들의 감정을 짐짓 모르는 척하며 사무적인 말을 내놓았다.
"아이고, 인자 참말로 퇴물이 되는갑구만이라 잉!"
지삼출이 어깨가 축 늘어지도록 한숨을 토해냈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저기서 한숨에 잇달아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허!우리 신세가 발써 그리 되았능가."
"기운 펄펄허니 만주 땅에 온 것이 꼭 엊그저께 겉은디."
"나기 마흔다섯 넘은지넌 꿈에도 몰랐는디."
"지기럴, 증늙은이넌 따로 있는지 알었등마."
송수익은 그들의 탕식을 다 새겨듣고 있었다.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자신의 감정 그대로였다. 그들은 이미 땅을 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나이가 더는 총을 들고 나서기는 어려운 처지라서 새로운 일을 꾸리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땅이 구해졌다고 하니까 그들의 감정은 새롭게 사무치고 있었다.
"근디, 우리 새끼덜얼 보먼 세월이 꼭 허망헌 것만언 아니여."
지삼출이 마음을 추스르듯이 말했다.
"허기사 그렇제. 우리 늙어가는 세월 자석덜이 받아묵고 컸응게."
"그려, 세월보고 무정타고 타박허능 것언 사람 욕심이기도 허겄제."
"새끼덜이 커서 총 들고 앞으로 나스고 있응게 우리가 뒤로 물러스는 것이야 순리 중에 순린디, 맴언 그렇들 않으닝게 탈 아니여."
"금매 말이시, 물러슨다고 생각헝게 무신 중헌 것얼 뺏기는 것맨치로 맴이 서운헌 것이 엉 지랄 같구마."
"그려, 그런 맴이야 다 똑겉은게 인자 앞일이나 의논해 보드라고."
지삼출이 말막음을 하고 나섰다. 그때까지 송수익은 잠잠히 담배만 피우고 앉아 있었디.
"삼동이 닥치는디 무신 일얼 허겄어?"
양승일이가 뚱하니 말했다.
"글씨, 총 드는 일임사 얼음장 타고 압록강 넘나들기 딱 좋은 시절이제만 농새 일이라 논께 헐 일이 멋일랑고?"
겨울철이면 활동이 맹렬해졌던 지난날을 회상하듯 김판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허, 그리 앞짜른 소리덜 말드라고. 농새 일이야 내년 봄보톰 헌다드라도 비바람 막을 잠자리덜언 어쩔 심판인디? 솥단지 안 걸고 밥 입에 들어가는 법도 있고?"
말재주 승한 강기주가 집 짓는 문제를 이렇게 꼬아 돌리고 있었다.
"그려, 당장 집보톰 얽어야 쓰겄구마. 식구덜이야 여그서 삼동 나고 차차로 오드라도."
천수동이가 말을 받았다.
"그 말 옳구마. 저어, 그리히야 안 되겄은게라우?"
지삼출이 송수익에게 눈길을 돌렸다.
"글쎄요, 그게 좋기는 하겠는데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니......"
송수익이 옹색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그것이야 암시랑토 않구만요. 총 들고 싸우든 것에 비허먼 신선놀음이제라. 낭구 흔허겄다, 불 피워놓고 허는 일잉게 아무 걱정 없구만요."
지삼출이는 다른 말들을 막으려는 듯 힘주어 말했다.
"글먼 하로라도 얼렁 시작혀야 쓰겄구마."
김판술이 말을 거들고 나섰다.
"하먼, 낼이라도 당장 떠야제."
강기주가 결정 내리듯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럼 다 뜻이 모아졌으니 내일 하루 채비해서 모레 떠나도록 합시다."
송수익이가 최종적으로 말했다.
"저어, 땅언 쓸 만헐랑게라?"
양승일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길림 쪽은 여기와 달라서 수잭리가 허허벌판이오. 만주벌판이란 말은 바로 그쪽을 두고 하는 말이오. 물길도 그리 멀지 않고 논을 풀기 합당한 땅이오."
"근디 60만 평이 넘으면 우리가 아무리 욕심대로 논얼 차지혀도 남는 땅이 더 많을 것 겉은디요?"
강기주가 벌써 배가 부르다는 듯 묘하게 말했다.
"우선 여러분들이 농사를 지을 만큼 논을 풀고, 나머지는 믿을 만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로 합시다. 거기엠 밀정 놈들이 얼씬도 못 하게 해야 하니까."
송수익은 지난번 사건에 충격을 받아 굳이 밀정 이야기를 덧붙였다. 만약 수국이가 살아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밀정의 끄나풀은 지금까지도 찾아내지 못했을 거였다. 옆 동네에 밀정의 끄나풀이 박혀 있어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송수익은 전혀 상상 못 하고 있는 일이 또 하나 있었다. 그 사건으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고, 그 결과 자신의 집안이 절단 나고 있다는 것을 캄캄하게 모르고 있었다. 공허의 발길이 오래 끊어져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지삼출 일행이 떠나는 날 아침 짐을 챙겨 들고 따라나선 여자가 있었다. 수국이었다. 남자들도 그렇고 여자들도 다 놀랐다. 미리 그런 낌새를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거그넌 집도 절도 없이 여자가 살 만헌 디가 아니여."
김판술이가 혀를 찼다.
"잉, 거그 가서 우리 밥해 줄라고 허능 것이야 아즘찮인다. 고상이 심헐 것잉게 그냥 여그서 따땃허니 삼동 나도록 혀."
강기주가 농조로 말재주를 부렸다. 그러나 수국이는 물러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재!......"
수국이가 누군가를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지삼출이었다. 지삼출을 쳐다보고 있는 수국이의 눈에는 두려움과 애원이 엇갈리고 있어서 지삼출은 그런 수국이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남자들이 몇 남지 않은 마을에 있기를 무서워하는 것이었다. 지삼출은 아내가 조심스럽게 알려줬던 말을 떠올렸다. 수국이는 그 일을 겪고 난 다음부터 치마 속에 칼을 차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밀정이 또 자기를 잡으러 올 거라고 믿고 있다는 거였다. 수국이는 그것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전에도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는데 더울 말을 하지 않았고, 얼굴에는 화색이 바래면서 찬 기운 도는 그늘이 끼게 되었디 그리고 잠꼬대하지 않는 밤이 드물고, 빨간색을 보면 진저리를 친다고 했다.
"그려, 함께 가자."
지삼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수국이를 송수익은 딱하고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수국이보다 먼저 따라나서려고 했던 여자가 있었다. 그건 필녀였다. 그러나 송수익만은 곧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물러나 앉았던 것이다. 송수익은 길림 쪽으로 길을 잡으며 마음이 홀가분하면서도 뿌듯했다. 땅을 소작료가 아닌 저렴한 사용료를 내면서 장기간 빌리게 된 것은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게 된 것이었다. 나이든 대원들의 안정된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었고, 경제적으로나 위치로나 안전한 운동기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길림 근방은 만주의 중앙이면서 조선국경으로부터 후방이었다. 투쟁의 일선에서 물러난 대원들을 중심으로 옥립 마을을 건설하고 그곳을 새로운 투쟁사업의 거점으로 삼을 작정이었디 그 땅을 좋은 조건으로 빌리는 데 전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대종교의 한법린이었다. 그는 중국인 율사(변호사)까지 내세워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런 넓은 땅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길림 쪽의 광활한 벌판에 비해 아직 사람들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만주의 행정 중심지인 봉천 근방에 밀집해 있었고, 조선사람들은 한사코 국경이 가까운 지역에 발을 붙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 지주들도 지역에 따라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길림 쪽 지주의 경우 못 쓰는 땅으로 버려둔 넓은 습지를 논으로 바꾸는 데 개간비를 들이기는커녕 세까지 받게 되었으니 만족스러워한 것이었다.
윤선숙은 조강섭의 편지를 또 한 번 읽었다. 절절히 사랑을 호소하고 있었다. 중간을 넘어가면서는 어서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미자고 쓰고 있었다. 함께 아동들을 가르치는 부부 교사로 일하면 얼마나 보람되고 행복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동포들의 생활도 나아져 봉급이 올랐으니 결혼생활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도 했다. 윤선숙은 조강섭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겹쳐지는 얼굴이 있었다. 이광민의 얼굴이었다. 겹쳐진 두 얼굴은 오래가지 않았디 이광민의 얼굴에 밀려 조강섭의 얼굴은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윤선숙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편지는 두 손아귀 안에서 무참하게 구겨져 있었다.
내가 왜 이럴까. 강섭이 오빠한테 이래서는 안 되는데......
윤선숙은 자신을 꾸짖으며 편지를 다시 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철훈이 오빠를 생각해서라도 조강섭의 편지를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마음이 조강섭의 편지를 다시 펴는 것을 권하지 않았다. 그 편지를 다시 펴게 되면 이광민을 잃을 것만 같았다. 윤선숙은 그 편지를 더 세게 짓구기고 말았다. 철훈이 오빠의 절친한 동무인 조강섭을 오빠라고 부른 것은 오래되었다. 조강섭도 누이동생을 대하듯 흉허물이 없었디 그런데 조강섭이 부상을 당해 하바로프스크의 소학교 선생으로 가면서 편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쯤 오던 편지는 차츰 자주 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편지 색깔이 달라지고 있었다. 사랑의 냄새를 풍기는 그 색깔이 싫지 않았다. 그런데 그즈음에 이광민을 만나게 되었다. 이광민이 마음을 차지하는 면적이 넓어져 가면서 조강섭에게 답장 보내는 일이 소홀해졌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조강섭의 편지는 갈수록 열도를 더해 결혼을 독촉하기에 이르러 있었다. 윤선숙은 짓구긴 조강섭의 편지를 떨어뜨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윤선숙은 그만 울고 싶었다. 조강섭의 편지를 구겨버린 것만큼 이광민과 무슨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마음을 내비쳐도 이광민은 언제나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싫은 기색을 하는 것도 아니었디 철훈이 오빠의 말로는 그게 러시아 남자들하고는 다른 조선 남자들의 점잖음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광민은 마음만 저만치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몸은 더 멀리 수백 리를 넘어 천 리 밖에 떨어져 있었다. 그는 철훈이 오빠와 함께 국경을 넘어 다니며 만주에서 공산당 운동을 하고 있었다. 3개월에 한 번 정도 와서 며칠 머물다가 훌쩍 떠나고는 했다. 그 며칠 동안도 사업보고니 뭐니 해서 바삐 나돌아 차분하게 얼굴 맞대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어머니는 남의 속도 모르고 어서 시집을 가라고 성화였다. 여자 나이 몇 살인데 선생질에 미쳐서 그 모양이냐며 중매쟁이가 가져온 이 남자 저 남자를 들이댔다. 러시아에 귀화한 양반이 촌스럽게 조선식으로 이게 뭐냐며 사정없이 면박을 주었고, 자신은 러시아식으로 애인을 골라 곧 결혼할 테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를 치곤 했다. 한 번은 철훈이 오빠에게 숨김없이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오빠, 저를 위해 중매쟁이 노릇 좀 해 주세요. 너무 답답하고 지루해요."
"이런, 선숙이한테 실망인걸. 기술이 그렇게도 없어?"
"너무 점잖은 조선 남자라 기술을 써볼 수도 없다니까요."
"허허허...... 사랑한다는 말도 못 해 봤단 말이야."
"아니, 사랑한다는 말 다 뭐예요. 손도 한 번 못 잡아봤는걸요."
"저런, 저런, 네가 기술을 부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광민이 기술에 말려들고 있구나."
"어머, 그러나 봐요. 그 사람은 이상하게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어요.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사랑한다는 말 간은 게 나오질 않게 돼요."
"그게 바로 사랑의 마력이라는 거다. 우리 똑똑한 선숙이도 별수 없이 홀딱 반했구나. 구리 반했으면 결혼하자고 직접 덤벼야지 중매가 뭐냐 중매가."
"오빠아, 농담할 게 아니라니까요. 여자가 그런 식으로 나가면 그 남자는 어떻게 하겠어요. 질겁을 하고 도망갈 거 아니에요. 점잖은 조선 남자가."
"글세, 그렇기도 하겠는데. 어디 내가 한번 말해 보지."
"혹시 그 사람도 오빠처럼 혁명 독신주의 아니에요? 어찌 보면 그런 것도 같아요."
"글세.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이 조국의 해방운동에 몰두해 있고 고향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는 거야 사실이지."
"저도 그건 알아요. 그레 지나치면 혁명 독신주의가 되니까요. 그것부터 좀 확인해 보세요."
"알겠다, 살다 보니 중매쟁이가 다 되고. 허허허허......"
"농담이 아니에요. 알았죠?"
그러나 철훈이 오빠가 그다음에 던진 한마디는 너무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동지끼리 중매쟁이 노릇 하기 곤란하더라. 그쪽에서 조선식으로 답답하게 나오면 넌 러시아식으로 시원시원하게 밀어붙여라."
윤선숙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자기도 모르게 흐른 눈물이었다. 이광민이 그리웠다. 심한 목마름처럼 그가 보고 싶었다. 조강섭의 편지를 받고 나자 그가 더 간절한 그리움이 되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심사였다. 철훈이 오빠가 이런 자신을 알면 못내 서운해하고 기분 나빠 할지도 몰랐다. 오빠와 조강섭과의 우정은 혈연이나 진배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강섭에게 죄의식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조강섭이 딱히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남자다운 용모를 지녔고, 용기 있는 투사였고, 선생을 할 만큼 지식도 갖추고 있었다. 만약 이광민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을지도 몰랐다. 그와 이광민은 이런저런 조건들이 거의 엇비슷했다. 그런데도 어찌 된 일인지 마음은 한사코 이광민에게 쏠리고 말았다. 윤선숙은 이광민이 떠난 날을 헤아려 보았다. 손가락으로 꼽아나가던 윤선숙은 얼굴이 밝아졌다. 어느덧 석 달이 다 되어있었다. 윤선숙은 조강섭이에게 편지를 쓸까 말까 며칠을 망설였다. 자신은 애인이 생겼으니 더 이상 그런 편지 보내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차마 그런 편지를 쓸 수가 없었다. 편지를 쓰려고 하면 조강섭의 절름거리는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불구가 된 그에게 그런 편지까지 보내는 것은 너무 모진 짓 같았다. 혁명을 위한 빨치산투쟁을 하다가 총을 맞은 그의 불구는 분명 만성적이고 영웅적이었다. 그런데도 왜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 고민을 이광민이가 해결해 주었다. 이광민이가 돌아오자 윤선숙은 그 일을 깨끗이 잊어버렸던 것이다. 윤선숙은 몸단장을 하기에 바빴고, 이광민을 단둘이 만날 기회를 엿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이삼일이 지나도 단둘이 만날 틈은 생기지 않앗다. 윤철훈과 이광민은 다른 때보다도 훨씬 더 부산하게 돌아다녔고, 밤에도 술이 취해 늦게 돌아오고는 했다.
"진짜 정말 그러기예요."
윤선숙은 참다못해 윤철훈에게 정면으로 들이댔다.
"뭘 말이냐?"
밥을 먹던 윤철ㄹ훈은 어리둥절해졌다.
"꼭 말로 해야 되겠어요? 그럼 그러죠. 이광민 씨 좀 그만 끌고 다니고 해방시켜 주세요."
"해방? 내가 억압하고 구속한 적 없는데. 먼 길 떠날 준비로 서로 바빠서 그러는 거지."
"먼 길 떠나요?"
윤선숙의 눈이 커졌다.
"응, 아직 말 안 했던가? 중국 광동으로 떠난다."
"중국 광동? 거기가 어딘데요?"
"저어 중국 남쪽이지."
블라디보스톡에서 광동까지의 먼 거리를 나타내듯 윤철훈은 턱끝을 들어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반 바퀴를 돌렸다.
"거기까지 얼마나 멀어요?"
윤선숙은 눈을 빛내며 마른침을 삼켰다.
"글세,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아마 만 리는 될걸"
"어머 만 리요?"
윤선숙은 눈이 휘둥글해지며,
"그 먼 데까지 뭘 할려고 가지요?"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뭘하긴, 산천유람 가겠냐?"
윤철훈은 퉁을 놓듯 하고는 한입 가득 밥을 떠넣었다.
"조선 혁명 하러 간단 말이에요?"
윤선숙의 목소리가 더 날카로워졌다.
"혁명은 혁명인데 중국혁명이다."
"아니, 중국혁명인데 왜 조선사람들이 가요."
"이런, 인텔리겐챠가 공산주의 국제연대도 모르시나?"
"그래서 또 싸우러 간다 그거예요?"
윤선숙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싸워야지, 조선이 해방될 때까지는."
"......"
윤선숙은 오빠를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오빠의 그 단호한 말에 대응할 말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게 혁명가는 사랑하는 게 아니야. 정 혁명가를 사랑하겠으면 혁명하듯 사랑을 실천하든지. 혁명가들이 왜 스스로 사랑을 단념하는지 아나? 여자들이 어리석게도 평화 시의 모든 것을 원하기 때문이야."
윤철훈은 사촌 여동생을 안쓰러운 듯 가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윤선숙은 오빠의 말이 가슴을 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삼일 있다기 송별회를 하자."
윤선숙은 말없이 자리를 떴다.
정 혁명가를 사랑하겠으면 혁명하듯 사랑을 실천하든지.
윤선숙은 이틀 동안 이 말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었디 혁명하듯 실천하는 사랑...... 그것은 자신의 몫이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오빠의 말 끝부분에 밝혀져 있었다. 평화 시의 모든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이광민에게 그 모든 것을 원했던 것인가?
윤선숙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혁명가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각오를 하는 한편으로 남들과 다름없는 결혼생활을 꿈꾸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랑. 그것이 혁명가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자격이었다. 오빠의 말대로 하자며, 그동안 이광민이 저만치 떨어진 채 거리감을 좁히지 않았던 것은 자신을 그런 자격이 없는 어리석은 여자로 취급했기 때문이었다.
송별회는 부두 앞의 번화가에 있는 아담한 카페에서 열었다. 2층 창밖으로는 항구와 기차역이 한눈에 내다보였다. 배들이 정박해 있는 저편 멀리로는 짙푸른 바다가 금속성 질감으로 무겁게 펼쳐져 있었고, 시베리아를 거쳐 모스크바까지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의 시발점인 기차역은 초록빛 돔과 함께 중세식 건물의 중후한 품위를 지니고 바다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윤선숙은 창밖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정박한 배에 달린 울긋불긋한 작은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고, 날개를 펼친 갈매기들이 연처럼 바람을 타며 여유롭게 노닐고 있었다. 아담한 항구의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윤선숙은 그 눈에 익은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숙아, 너 무슨 생각을 그리하고 있냐? 딴사람 생각은 하지도 않고."
윤철훈은 담뱃불을 끄며 여동생을 일깨웠다.
"네에, 맞혀보세요."
윤선숙은 순간적으로 감정을 바꾸며 방긋 웃음 지었다. 그녀는 평소보다 진한 화장에 러시아풍의 흑자색 드레스를 화사하게 입고 있었다.
"난 자신 없어, 또 엉뚱한 소리 할 거 아닌가."
윤철훈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광민 씨가 맞혀보세요."
윤선숙이 이광민을 보며 생긋 웃었다. 그동안 이광민에 대한 호칭이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이 선생님"이었는데 이재 "광민 씨"로 변해 있었다.
"나도 미리 백기를 들겠소. 선숙 씨 재치를 한 번도 당해 본 적이 없으니까."
이광민이 웃으며 윤선숙에게 눈길을 주었다. 양복 차림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을은 그의 얼굴은 나이가 듬직해 보였다
"피이, 혁명가들이 뭘 그리 소심해요. 무슨 생각을 했느냐면 말이에요, 나도 따라가기로 했어요."
"하하하하.... 그렇게 엉뚱할 줄 알았다니까."
윤철훈이 거침없이 웃어댔다.
"그거 잘됐군요. 마침 한 사람이 모자라던 참이었어요."
이광민의 태연한 대꾸였다.
"놀리지 마세요, 나 정말 갈 거예요."
윤선숙이 정색을 하며 이광민을 빤히 쳐다보았다
"예에, 가요. 누가 거짓말이라고 합니까."
흐트러지지 않는 이광민의 응수였다.
"안 되겠는데, 선숙이가 졌다."
윤철훈이가 판정을 내리듯 말했다. 그때 식사와 술이 옮겨져 왔다. 말을 해놓고 보니 윤선숙은 불현듯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조선 여자들 중에서는 군복을 입고 싸운 빨치산들이 있었다. 그러나 윤선숙은 기가 꺾이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도저히 그런 용기는 없었다.
"자아, 우리 한 잔씩 하지."
"철훈이 보드카 잔을 들었다. 이광민과 윤선숙도 잔을 들었다 셋이는 잔을 부딪쳤다.
"조선 혁명과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하여."
윤철훈이 이광민과 윤선숙을 빠른 눈 놀림으로 쳐다보았다.
"조선해방을 위하여."
"오빠, 고마워요."
이광민과 윤선숙의 말이 겹쳐졌다.
‘죽으라 사나 조선해방밖에 모르는군.’
윤선숙은 이 말을 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지럼처럼 느끼고 있었다.
"입장 곤란하게 왜 이래."
이광민은 거북함을 면하려고 독한 보드카를 단숨에 들이켰다.
"좋아, 오늘 맘껏 마십시다. 모레부터는 보드카하고도 한참 이별일 테니까."
윤철훈이 이광민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너도 술 좀 마셔라. 러시아 멋을 즐기는 것보다는 러시아 술맛을 익히는 게 더 실속있다. 또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니까 말야."
윤철훈이 여동생에게 눈을 찡긋하며 우었다. 그리고 술을 단숨에 비우고 잔을 이광민에게 내밀었다.
"아니, 저어......"
이광민이 주저했다.
"괜찮소. 우리 조선사람끼리 있으니까 조선식으로 합시다. 술은 권커니 잣거니 해야 술맛 나는 것 아니오."
윤철훈은 그렇지 않느냐는 듯 씨익 웃고는, "이제 선숙이 네가 술 좀 따라라. 거 우리 조선말에 근사한 말이 있지. 거 뭐라더라? ......그래, 술은 장모가 따라도 여자가 따라야 술맛 난다고 말이야. 역시 조선사람들은 사람 사는 멋을 안다. 어서 따라."
그는 키득키득 어깨 웃음을 웃었다. 창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모든 풍경을 지워버린 어둠이 작은 불빛들만 남겨놓고 있었다. 밤 기차의 기적소리가 멀게 들려왔다.
"그 상투 튼 한약방 영감 있잖아요. 얼마 전에 밤새 도망을 갔어요. 근데 방마다 웃목이 파헤쳐져 있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금덩어리 감춰놨다가 파간 거래요."
윤선숙의 이야기였다.
"그놈, 불쌍한 조선사람들 돈 다 긁어갔군. 도 하나의 브라의 탈출자라. 그놈은 어디로 도망갔나. 그놈도 하얼빈으로 갔나?"
잔을 채우기가 바쁘게 술을 마셔대는 윤철훈이가 술기운 거나해서 말했다. 브라의 탈출자란 일본군이 물러가고 백군이 궤멸되면서 혁명의 물결이 시베리아까지 완전히 휩쓸게 되자 블라디보스톡의 부자들은 보석류만 챙겨가지고 밤을 틈타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그런 탈출극은 큰 도시에서마다 벌어졌다. 그들이 도망간 곳은 대개 중국의 국경도시인 하얼빈이었디
"근데 말이에요, 그 영감이 없어지자 우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래요."
"뭐? 그게 다 정을 통한 여자들이라는 건가?"
"네에, 흉칙하게."
"아하하하...... 그 영감 그거 그 대목은 쓸 만하군. 안 그렇고, 이 동지? 자아, 술잔 받으시오."
윤철훈을 따라 이광민도 쿡쿡거리고 웃었다.
"연추령 포시에트에서 있었던 일이데 말야 한 영감이 독하고 고집 세기가 어느 정도냐면, 동상 걸려 썩어 들어오는 왼손을 도끼로 직접 자르고,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중국 국경까지 마차 한 번 타지 않고 10년 넘게 걸어 다닌 사람이야. 독립운동가들이 걸어 다니는데 자기도 걸어야 한다는 고집이지. 그런데 그 사람이 부리는 고집 중에 또 하나가 상투를 죽어도 안 자르는 거야. 그걸 자르면 조선사람의 혼백이 없어진다는 거지. 그런데 혁명 문화사업으로 청년회에서 봉건 잔재 일소 운동을 시작했단 말야. 조선사람들의 상투도 거기에 해당되는 거 아니겠어. 그런데 그 황소고집이 말을 들어야 말이지. 차라리 자기 목을 치라고 대드는데. 청년회에서는 하다 못 해 그 집 아들에게 특별 명령을 내렸어. 자기 집부터 정화하지 않고 어떻게 사회를 정화하겠다는 것이냐. 네가 책임지고 아버지 상투를 잘라라. 그 청년은 어쩔 수 없이 기회를 노리게 되었지. 그런데 어느 날 잔칫집에서 술을 마신 아버지가 취해 낮잠을 자는 것이 아닌가.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들은 가위로 아버지의 상투를 싹뚝 잘랐지. 헌데, 한잠 늘어지게 자고 난 영감이 일어나 앉자마자 온 머리카락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 아닌가. 아이크, 이게 뭐냐! 놀란 영감이 정수리를 만져보니 상투가 온데간데없는 거라. 영감이 방안을 허둥지둥 돌며 "아이고, 내 상투! 아이고, 내 상투!" 외쳐대는 소리가 꼭 통곡하는 것처럼 집 안을 울려댔어."
"호호호호......."
윤선숙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광민의 눈에는 그 모습이 너무 청순하고 예쁘게 보였다. 문득 또 하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해삼잡이를 할 때 바다와 하늘을 반반씩 배경으로 하고 웃고 있던 모습이었디 하야말간 종아리를 물에 담근 그 모습은 꿈에서도 더러 보였다. 그런데 어느 때는 윤선숙이가 알몸으로 서 있기도 했다. 이광민은 그 생각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술잔을 비웠다
"이거 속 편하게 웃을 일이 아니야. 그다음에 난리판이 벌어졌는데."
"아들을 죽였나요?"
윤선숙의 재치가 비약하고 있었다.
"들어봐. 아들놈이 그 짓을 한 줄 알게 된 영감이 도끼를 들고 나섰지 아들은 그럴 줄 알고 미리 도망가 버렸고. 영감은 며칠 동안 사방을 돌아다녔지만 아들을 못 찾았지. 그러던 어느 날 자기 아내가 밥을 숨겨가지고 나가는 걸 보았어. 뒤를 밟아보니 아들은 산속 토굴에 숨어 있었는데 그 꼴이 형편없이 수척했지. 그런데 영감은 다음날부터 아들이 있는 반대쪽 동네로만 아들을 찾아다니며 한다는 말이 "그놈을 용서할래도 낯짝을 봐야 할 것 아닌가"하는 거였어."
"어머머,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자식 이기는 부모 없더라고 자기 체면 세우면서 동네 사람들의 권에 못 이기는 척 아들을 용서한 거지. 그게 조선식이야."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술이 취해 갔고, 밥이 깊어갔다.
"어어, 취하는군. 나 잠깐......"
윤철훈이 비틀거리며 자리를 비웠다. 이광민도 많이 취해 있었고, 윤선숙도 웃어가며 한 모금씩 넘긴 술이 꽤나 취해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윤철훈은 돌아오지 않았다. 변소에 가보갰다며 이광민이 일어났다. 그의 걸음걸이는 윤철훈보다 더 비틀거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의리 없는 사람인걸. 술값까지 내고 먼저 가버렸소."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하며 이광민이 두 칼로 탁자를 짚었다. 그는 술기운을 이기지 못해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윤선숙은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처음부터 이광민에게 술을 많이 먹인 것이며, 오빠는 오늘 밤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래, 혁명하듯 사랑을 실천하고 말 거야!’
윤선숙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독한 술에 흘러내려 가며 속이 화끈거렸다.
‘그래,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있는데 사랑을 아껴서 뭘 해.’
윤선숙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우리도 나가요, 광민 씨."
윤선숙은 눈앞에 어릿거리는 술기운을 느끼며 이광민의 팔짱을 끼었다.
"이, 이봐요, 윤, 윤철훈이 찾아......나, 날 두고......이거 말야......"
잠에 취한 듯 눈이 풀린 이광민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윤선숙은 이광민을 부축하고 밖으로 나왔다. 짙은 어둠 속에 밤바람이 싸늘했다. 부두 쪽 저 멀리 작은 불빛 몇 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밤배가 떠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하고 바다에 빠져 죽을래요?"
윤선숙이 불쑥 말했다.
"뭐라고요? 바다에?......그, 그거 꽤 낭만적이긴 한데 사, 사양하겠소이다. 할 일 많은 청춘을 그리, 그리 끝낼 수야 업쟎소. 재수 없게 그런 말을......"
이광민이 팔을 뿌리쳤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농담이에요."
윤선숙은 다시 팔짱을 끼며 이광민을 붙들었다. 몸을 못 가누게 취했으면서도 나라 위하는 정신은 멀쩡한 데 윤선숙은 놀라고 있었다. 조금 걷다가 이광민은 주저앉으려고 했다. 속이 괴로운지 앓는 소리를 냈다.
"광민 씨, 어디 아파요? 내, 광민 씨."
"아니......,아니......"
"됐어요., 조금만 더 걸어요. 저기......"
윤선숙은 호텔이 있다는 말은 차마 못 하고 삼켜버렸다.
"여, 여기가 어디요?"
호탤 방에 들어선 이광민이 비틀거리며 눈을 껌벅거렸다.
"내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윤선숙이 이광민 앞에 다가섰다. 이광민이 술 취한 눈으로 이윽이 쳐다보았다.
"알지, 윤철훈의 여동생 윤선숙!"
"그리고 또요?"
"당신의 머지요?"
"나아?"
이광민이 비틀거렸다.
"당신을 사랑해요."
윤선숙이 이광민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순간 이광민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이 떠나올 때 눈물 젖었던 그 모습이었다.
"난, 난......"
"괜찮아요, 말 안 해도 괜찮아요."
윤선숙의 입술이 이광민의 입을 막았다. 윤선숙의 입맞춤은 뜨겁고 질겼다. 아내가 있다는 말을 중지당한 이광민은 윤선숙의 뜨겁고 질긴 입맞춤에 휘감겨들고 있었다. 그는 윤선숙을 끌어안으며 온몸이 불붙어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침대로 무너졌다. 이광민은 윤선숙의 옷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는 바다와 하늘을 반반씩 배경으로 하여 웃고 있는 알몸의 윤선숙을 향해 덤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