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백설의 땅
하바로프스크의 3월은 아직도 하얀 눈 옷을 입고 있었다. 3월이 중순을 지났는데도 도시는 자욱하게 눈에 덮여 있었다. 두껍게 쌓인 눈 속에서 도시는 깊은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그 동안 영하 이삼십 도의 강추위 속에서 내린 눈들이 쌓이고 쌓여 모든 건물들의 지붕을 무겁게 내리누른 채 녹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3월 중순인데도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겨울 그대로였다. 털외투에 털모자 그리고 가죽 장화를 갖춘 사람들이 빙판길을 오가고 있었다. 그래도 3월의 온기는 미약하나마 느낄 수 있었다. 이삼 층 건물들의 양지바른 처마 끝에 굵고 긴 고드름들이 묵직하게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뭘 그렇게 보시오?"
윤철훈이 길 건너편을 올려다보며 걷고 있는 이광민에게 물었다.
"아 예, 저 고드름들이 어찌나 큰지....."
이광민은 고개를 돌리며 멋쩍은 듯 웃었다. 어린애처럼 고드름에 한눈을 판 것이 그는 사실 멋쩍기도 했다. 그러나 어른의 팔뚝보다 더 굵고 장대처럼 긴 고드름들이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눈이 적은 고향에서는 손가락 굵기의 한두 뼘 길이의 고드름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 굵고 큰 고드름들을 보면서 고향 생각에 젖어 들고 있던 참이었다.
"예, 워낙 눈이 많이 쌓인 데다 눈이 녹을 새 없이 날씨가 추워지고 하니까요. 헌데, 이 원동에서 벌써 2년이 넘게 있었는데 저런 고드름을 첨 보나요?"
윤철훈은 의아스러운 얼굴이었다.
"아 예, 그간에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별로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이광민은 이렇게 대답하며 그 동안의 불안했던 생활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예, 그럴 수도 있지요. 앞날 걱정이 바쁜데 저까짓 고드름이 눈에 안 띄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죠."
윤철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인도는 눈과 함께 빙판을 이루고 있었고, 마차들이 많이 굴러다니고 있는 큰길은 검은 흙탕물이 질척거리며 녹고 있었다. 그러나 눈 위를 스치는 바람결은 찼다.
"저기 저 건물에서 바로 한인사회당이 조직되었습니다. 1918년 6월 26일에 이동휘 선생께서 주도하신 거지요."
윤철훈이 걸음을 멈추고 길 건너편을 손가락질했다.
"아, 그렇습니까!"
윤철훈읖 따라 걸음을 멈춘 이광민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넘쳤다.
"저 건물도 이젠 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
윤철훈이 건물을 바라본 채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맥없는 목소리가 왠지 슬프게 들렸다.
"유물이라니요?"
"다 알고 있겠지만 저 건물은 이제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한인사회당은 다음 해에 본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기고 명칭을 고려공산당으로 바꾸었지요. 그것까진 좋은데, 고려공산당은 작년 12월에 코민테른 지시에 의해 해체되어 버리고 코민테른 극도총국 휘하에 꼬르뷰로"고려국"가 설치되지 않았습니까. 고려공산당이 해체되어 버렸으니 저 건물은 유물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 아닙니까."
윤철훈의 말끝에는 한숨이 묻어났다.
"예에......"
이광민은 마음 무거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해체를 당하도록 서로 갈등을 일으킨 것일까. 그들이 애초에 당을 만든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빼앗긴 나라를 찾자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주도권 다툼이 그리도 중한 것이었을까. 그들은 주도권 다툼을 하면서도 당이 해체까지 당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일까. 지금 그들의 심정은 어떨까. 자신들의 행위를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을까. 아니면 서로 먹지 못할 떡이었으니 속 시원해할까.
"가까이 가볼 필요는 없겠지요? 저 건물 전부가 한인사회당 소유도 아니었으니까요."
윤철훈이 걸음을 옮겨 놓았다.
"예, 됐습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지우며 이광민도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건물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러시아풍의 묵직하면서도 아담한 3층 건물은 머리에 눈을 가득 이고 하바로프스크 중앙로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중앙로의 양쪽으로 줄지어 선 이삼 층의 건물들은 거의가 흑적색이었다. 건물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꾸며져 있으면서도 거의 비슷하게 묵직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검붉은 색깔 때문이었다. 음산하게 구름 낀 하늘과 두껍게 쌓인 눈 속에서 그 묵직한 색깔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털옷만큼이나 그 색깔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영하 30도의 한겨울에 입었던 털옷을 날씨가 많이 풀린 3월에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옷뿐만이 아니라 털모자며 가죽장화도 그대로였다. 남녀가 다를 것 없는 그런 치장은 방한복만이 아니라 그들의 겨울정장이었다. 적설이 녹기는커녕 새로 내리기도 하는 3월은 겨울이 분명했다.
이광민은 머리가 후텁지근하고 갑갑한 것을 느끼며 개털 모자를 벗어들었다. 금방 찬바람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파고들며 정신이 말끔해지고 기분이 산뜻해졌다. 이광민은 아직도 털 모자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하 이삼십 도의 추위 속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지만 날씨가 어느 만큼 풀리게 되면 털모자는 머리를 답답하고 묵지근하게 해서 정신까지 흐리멍텅해지는 것이다.
"머리는 차게 해야 몸에 좋다."
이광민이 어렸을 때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러시아 사는 조선사람들은 그 반대의 말을 했다.
"골을 잘 간수하지 않으면 죽는다."
좀 상스럽게 들리는 그 노골적인 말은 머리가 얼어 정신을 잃고 죽게 되는 혹독한 추위에 대한 경고였다. 그런 공포감이 골수에 박인 것인지 러시아인들은 날씨의 변화에도 둔감하게 털모자를 쓰고 잘도 견디어냈다.
"모자가 답답한 모양이지요?"
윤철훈이 이광민을 보며 빙긋 웃었다.
"예, 아직 습관이 안 돼서요."
이광민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얼른 모자를 썼다.
"예, 우리 조선사람들은 처음에는 다 그렇지요. 모자에 자주 손이 가고 안 가고 하는 것으로 러시아 땅에서 얼마나 살았는지 구별할 수 있으니까요."
이광민은 그만 가슴이 뜨끔해졌다. 윤철훈의 말이 러시아 땅에서 그렇게 촌티 내지 말라는 것 같기도 했고, 또 그런 뜻이 아니라 하더라도 러시아인들 눈에 풋내기로 표가 나는 것도 별로 좋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어...... 고려 공산당이 5년 만에 해산당한 것이 꼭 내분 때문이었을까요?"
이광민은 열적음을 면할 겸해서 의문스러웠던 생각을 꺼냈다.
"아니 그럼,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 같은가요?"
윤철훈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글쎄요, 이건 그냥 혼자 생각인데, 혹시 나라가 없어서 무시당한 건 아닐까요? 내분은 빌미가 되고 말입니다."
이광민은 하지 말아야 될 소리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동안 마음에 품어왔던 의문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래요? 그건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젭니다. 나라가 없어서 무시했다......"
윤철훈은 이광민의 말을 되씹으며 골똘하게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윤철훈은 한동안 말이 없이 걸었다. 이광민은 주춤 걸음을 멈추려고 했다. 지게를 진 조선 남자가 지나쳐 갔던 것이다. 이광민은 고개를 돌렸다. 그 남자는 두툼한 한복에 상투를 틀고 머리에는 흰 수건을 동이고 있었다. 지금 바로 러시아 땅에 들어선 것 같은 조선 농부의 모습 그대로였다. 러시아 땅에 언제 왔는데 저런 모습일까. 저 지게는 고향에서 지고 온 것인가, 여기 와서 만든 것일까. 저 사람은 러시아말을 할 줄 알까. 저 지게에 진 것은 무엇일까. 무슨 농작물을 팔려고 시가지에 나온 것일까. 이광민은 이런 생각들을 하며 멀어져 가는 그 남자를 두 번 세 번 돌아보았다.
"글쎄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라가 없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군요. 어쨌거나 내분이 원인인데, 모든 잘못은 이르쿠츠크파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인사회당을 먼저 결성한 건 엄연히 이동휘 선생입니다. 그리고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에 귀화한 자들이니까 이미 한인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자들이 뒤늦게 당을 조직해 한인 행세를 하면서 분파작용을 일으킨 것 아닙니까."
윤철훈의 말은 단호했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의 빛이 드러나 있었다. 이광민은 문득 놀라움을 느꼈다. 한인청년단 간부다운 강한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판단은 예리하고 새로웠던 것이다.
"이형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윤철훈은 분노에 찬 눈길로 이광민을 쳐다보았다.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말씀 듣고 보니 그게 타당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코민테른에 알리지 않았던가요?"
이광민은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왜 안 알렸겠어요."
윤철훈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코민테른이 그 사실을 묵살했다는 대답이 담겨 있었다. 코민테른은 왜 그 사실을 묵살했을까? 이미 러시아에 귀화한 사람들이 뒤늦게 조선인 공산당을 조직하고 나선 의도는 또 무엇이었을까? 의문은 더 가지를 쳤다. 그러나 그건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고려공산당은 이미 해체당하고 없었던 것이다. 이광민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지었다. 또 자유시 참변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어이없고 기막힌 사건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고려공산당의 무모한 파쟁으로 나라를 찾겠다고 나선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이 죽고 다쳤던 것이다. 만주에서 싸워 이기고 일시 피신처를 찾아든 독립군들에게 그건 더욱 분하고 억울한 날벼락이었다. 이광민은 이르쿠츠크파에게 새로운 증오와 분노를 느꼈다.
"저쪽이 아무르강입니다."
윤철훈이 앞쪽을 가리켰다. 중앙로는 널찍한 빈터를 만나면서 끝나고 있었다. 빈터 가장자리로는 발가벗은 듯 키 큰 나무들이 가지를 드러낸 채 줄지어 서 있었다. 그 나뭇가지들 저편으로 하얀 눈밭이 망망하게 펼쳐져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 풍경을 이광민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르강이 그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가는 길목이니 강변까지 가보실까요."
윤철훈이 중앙로와 오른쪽으로 연결되고 있는 길을 건너갔다. 넓은 빈터를 지나 강변으로 가는 나무들의 사잇길 주변으로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깨끗한 눈이 수북수북 쌓여 있었다. 잎없는 나무들과 새하얀 눈 위에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약간 비탈진 그 길은 길지 않았다. 그 길을 벗어나자 높직한 언덕바지 강변이 나타났다. 이광민은 눈앞에 펼쳐진 끝없는 눈벌판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강은 흔적도 없고 눈벌판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 넓고 넓은 눈벌판이 바로 얼어붙은 아무르강이었다.
"저쪽 줄기 보이죠? 저기가 우수리강이 아무르강에 합류하는 지점입니다. 그 건너편이 중국 땅이고요."
윤철훈이 왼쪽을 손가락질했다. 왼쪽 저 멀리 산봉우리 두 개가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양쪽 줄기를 거느리고 의연한 자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오른쪽 봉우리의 산줄기가 끝나는 부분에 다른 강줄기의 흔적이 아슴푸레하게 느껴졌다.
"이쪽에서부터 저쪽 중국국경까지 백 리가 다 됩니다. 겨울에는 장사꾼들이 얼음 위로 왕래하지요."
"아니, 저쪽까지 백 리나 됩니까? 이건 강이 아니라 바다로군요."
이광민은 새삼스럽게 놀랐다. 백 리의 강폭이 얼어붙고 그 위에 눈이 쌓였으니 눈벌판은 끝이 안 보이도록 넓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 소금기 없는 바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중국 사람들이 흑룡강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그럴듯하기도 하지요. 강이 큰 데다가 물이 탁하기도 하니까요. 저어기 보세요,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군요."
정면에 섬이 하나 있었고, 그 가까이에 사람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개미들처럼 작게 보였다. 아 사람이 저렇게 작게 보이다니! 이광민은 강의 장대함에 놀라며 위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일 넓고 넓은 강이 굽이쳐 흐르는 못 보는 것이 아쉬웠다.
"저 오른쪽에 철교 보이지요? 저게 아무르강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철굡니다. 우리가 갈 고려촌은 저 철교 뒤편으로 있고요. 3.1촌은 고려촌과는 반대쪽인 도시의 남쪽입니다. 이게 가볼까요."
윤철훈이 발길을 돌렸다. 이광민은 눈벌판 저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들이켜며 다시 한번 눈길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렸다. 좌우로 펼쳐진 눈벌판도 어찌나 넓은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아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눈벌판은 중국 쪽보다는 우측의 러시아 쪽이 더 아득하고 감감하게 멀어 환상적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별로 멀어 보이지 않는 중국 국경까지가 백3십 리라는데 저 까마득한 벌판의 끝까지는 얼마나 멀 것인가. 내가 왜 여기까지 와 있는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과 함께 서러운 감정이 물큰 솟았다. 이광민은 어금니를 꾹 맞물었다. 이 멀고 낯선 땅까지 흘러와 고생스럽게 살고 있는 조선사람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윤철훈은 인적 없는 눈길을 천천히 앞서가고 있었다. 이광민은 축축해진 감정을 다스리며 걸음을 빨리했다.
"고향 생각이 나셨던가요?"
윤철훈이 나직하게 물었다.
"글쎄요...... 꼭 그런 건 아니고......"
이광민은 자신의 감정을 말로 하기가 민망해서 그저 얼버무렸다. 그런데 윤철훈의 말에 정말 고향 생각이 왈칵 끼쳐왔다.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과 넓은 들녘과 학교 동무들의 모습이 한꺼번에 뒤엉키고 있었다. 많은 얼굴들 중에서 송중원의 모습이 오롯이 남았다. 송중원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사히 피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는지......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벌써 대학을 졸업했을 것이었다. 그와 헤어진 지도 어느덧 5년 세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저어 혹시...... 청산리 전투를 함께 했으면 방대근이나 김시국 동지를 압니까? 두 사람 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니까 지휘관을 했을텐데요."
윤철훈이 담배를 꺼내며 물었다.
"글쎄요,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이 아니고는 잘 모르겠는데요. 연합작전을 해도 병사들이 서로 교류하며 사귈 수는 없었으니까요."
"아 예, 그랬겠군요."
윤철훈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잘 아는 사이십니까?"
"아닙니다. 몇 년 전에 한 번 만났는데, 아주 인상에 남아서 그럽니다. 블라디보스톡 쪽으로 무기를 구하러 왔었는데 두 사람 다 용맹스러워 보이고 언변도 좋았습니다. 함께 투쟁하고 싶은 인물들이었지요. 제가 공산주의 사상에 관심을 써달라고 했었는데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윤철훈은 회상조로 말하며 눈길을 설원 저쪽으로 보내고 있었다.
"공산주의 물결이 만주에 미친 지도 오래됐으니까요."
"글쎄요, 그쪽에는 젊은 사람들 뜻을 막는 나이 먹은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홍범도 장군을 공개적으로 욕해대는 문건들을 보시오. 흑하사변에서 홍 장군이 잘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마치 홍 장군이 일을 꾸며댄 것처럼 욕해대는 사람들이 만주의 주도권을 잡고 있으니 젊은 사람들이 무슨 뜻을 펼 수 있겠어요."
윤철훈의 목소리는 강산 생김대로 뜨거워져 있었다.
"당장은 그럴지 몰라도 끝까지 막을 수야 있겠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나이 든 사람들이 늙어 가면 자연히 주도권이 바뀔 테니까요. 이형은 혁명적 낙관주의로군요?"
윤철훈이 웃었다. 이광민도 그를 마주 보며 웃었다. 얼마를 더 걸어가자 얼어붙은 방판 위에 쪼그리고 앉은 사람들이 멀찍하게 보였다. 물고기를 낚는 사람들이었다.
"강에 고기가 많습니까?"
이광민은 그 사람들의 모습에 추위를 느끼며 물었다.
"예, 많지요. 요만큼씩 큰 메기와 잉어가 드글드글하고, 특히 맛좋기로 이름난 철갑상어는 특산물 아닙니까."
윤철훈은 오른팔을 들어 왼쪽으로 겨드랑이 밑을 짚어 보이며 메기와 잉어의 크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 추위를 참을 만하겠군요."
"저 사람들 다 우리 조선사람들입니다."
망원경을 들이대기라도 한 것처럼 윤철훈이 말했다.
"아니 다 조선사람이라니요?"
그 장담하듯 하는 말이 이상스러워 이광민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예, 우리 조선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지독스럽다는 걸 모르나요?"
"러시아사람들이 놀랄 만큼 농사짓는 기술이 출중하고 부지런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
"하하, 농사만 부지런하게 짓는 게 아닙니다. 우리 조선사람들은 살아나가는 데 보탬이 되면 무슨 일이고 가리는 것 없이 지독스럽게 합니다. 어째서 조선사람들은 바위 위에 올려놔도 살아난다는 말이 나왔겠어요. 러시아사람들은 먹기는 좋아해도 게을러서 저런 힘든 빙판 낚시 같은 것은 할 생각도 안 합니다. 우리 조선사람들은 겨우내 방안에서 노느니 낚시질을 해서 살림에 보태자고 저리 나선 것 아닙니까."
"예, 그렇군요. 헌데 조선사람들은 바위 위에 올려놔도 살아난다는 말은 러시아사람들이 하는 말인가요?"
이광민은 그 말이 너무 가슴 아리면서도 감동스러워 굳이 확인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요. 처음엔 러시아사람들이 하기 시작한 말인데 언제부턴가는 조선사람들끼리 쓰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러니까 뭐랄까요? 우리 조선사람들은 <바위 위에 올려놔도 살아난다>하는 말을 상호 간에 하면서 서로를 격려한다 할까, 서로를 위로한다 할까, 그리고 또 조선인으로서의 자긍심 같은 것을 느낀다고 할까, 그렇지요." "아,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광민은 폭넓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그의 가슴은 먹먹해지고 있었다. 자기 나라를 빼앗기고 남의 나라로 쫓겨와 사는 동포들이 그런 말로 서로를 격려하며 더 열성으로 일하고 서로서로 조선사람이라는 자긍심을 북돋우며 생활을 꾸려간다는 것이 너무 가슴 저리고 눈물겨웠던 것이다. 그러나 더 가슴 아픈 것은 동포들이 이 머나먼 하바로프스크까지 흘러와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만강 건너 녹등"핫산"에서 하바로프스크까지는 2천5백 리가 넘는다고 했다. 그들은 국경이 가까운 연추령은 안되더라도 좀더 떨어진 해삼위나 수청 또는 소학령 같은 곳에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곳에는 앞서 자리 잡은 사람들이 많아 추운 줄 알면서도 북으로 북으로 살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광민은 다시금 발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동포들이 마련해 준 독립자금을 받아 간다는 것이 못내 미안하고도 마음 우울했다. 그들은 강변의 눈길 30리를 걸어 고려촌에 당도했다.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흐린 하늘에서 어스름이 번지고 있었다. 아무르강을 가로지르는 철교가 왼쪽으로 바라보이는 고려촌은 앞으로 강을 두고 되로는 농토를 깔고 앉은 아담하고 한적한 마을이었다. 60여 호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주변으로는 그저 질펀한 눈밭이었다.
"우리 조선사람들 머리 쓰는 것 좀 보세요. 도회지가 가까우면서 강도 가까운 빈 땅을 찾아 마을을 이루고, 집들은 바람을 막으려고 둔덕을 등지고 짓지 않았습니까. 농사도 짓고 고기도 낚고 하기는 더없이 안성맞춤이죠."
윤철훈이 마을 이쪽저쪽을 둘러보며 안내자답게 말했다.
"예, 그렇군요. 여긴 고려촌, 저쪽은 3·1촌......"
이광민은 가슴 아련한 감회에 젖어들며 중얼거렸다. 조선의 마을들과 너무나 똑같은 마을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명칭의 의미가 더욱 절절해지고 있었다.
"예, 우리는 죽어도 조선사람이다 하는 뜻 아닙니까. 어서 들어갑시다. 춥고 배고픈데."
윤철훈은 동네 왼쪽 끝부분에 있는 어느 집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강섭이, 강섭이 있는가?"
윤철훈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판자문이 벌컥 열렸다.
"자네 인제야 오는구만."
반가운 목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불쑥 몸을 내밀다 말고 엉거주춤하며, "아니, 동행이 있으신가?" 하면서 빠른 눈길로 이광민을 훑었다.
"응, 인사하게. 이광민 동질세."
윤철훈이 그와 악수하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조강섭입니다."
"첨 뵙겠습니다. 이광민입니다. "
아무 스스럼 없이 악수를 청하는 상대방의 태도에서 이광민은 러시아풍을 강하게 느꼈다. 러시아사람들이 악수를 나누는 습관은 무척 유별났다. 어떤 사람을 따라 그의 집에 가면 그 집 식구들은 소개를 받기도 전에 악수부터 하기에 바빴고, 혹시 놀러 온 그 집 형제나 친척마저 아무 거리낌 없이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그러기는 남녀가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그러는 것이었다. 그 활달한 친교의 뜻이 고맙고 마음에 들면서도 이광민은 스스로 몸에 익히기가 쉽지 않았다.
"이 동지는 홍범도 장군 부대원이었고 수청지구에서 빨치산투쟁을 했네."
윤철훈이 조강섭을 뒤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며 말하고는,
"조 동지는 빨치산투쟁을 하닥 재작년에 이곳 소학교 선생으로 옮겨 앉았지요. "
그는 이광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광민은 조강섭이가 다리를 절룩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다리는 그가 왜 빨치산에서 소학교 선생이 되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시장하지? 밥부터 먹세. 이 선생님은 안녕하신가?"
조강섭은 두 사람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물었다. 이 선생님이란 이동휘 선생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광민은 짐작했다.
"응, 원체 강골이시니까. 자네한테 안부 전하라는 말씀이 간곡하시데. 그거 내가 할 테니까 자넨 앉아 있게."
"이거 왜 이러나, 여긴 내 집이야. 괜히 다리병신 취급하지 말고 객이면 객답게 점잖게 앉아 있어."
조강섭이 윤철훈을 가로막으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허, 그간에 장가나 좀 갈 일이지. 사방에 널린 게 여잔데 장가도 못 가고 큰소리치기는."
윤철훈은 헛웃음을 치며 물러섰다. 조강섭과 윤철훈은 생김부터가 대조적이었다. 윤철훈은 뼈대 굵은 몸집에 얼굴이 둥글넓적했고 조강섭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얼굴이 갸름좁장했다. 뚝심 세게 생긴 윤철훈과 성질 세게 생긴 조강섭을 바라보며 이광민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남다른 우정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 장가가기 싫어서 안 가는 줄 아나. 말만 하지 말고 쓸 말한 여자부터 구해 와. 러시아년들이야 흔해 빠졌지만 쓸모없이 색이나 밝혀대고, 조선 처녀들이야 어디 있어야 말이지."
조강섭은 찬장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농조로 말했다. 집은 방과 부엌이 따로 구분되지 않은 함경도식 한 칸짜리였다. 한쪽 벽에 세워진 투박한 책꽂이가 유일한 치장물이었다.
"러시아 처녀들 좀 예쁜가. 자네야 여자들이 좋아하니까 하나 잘 골라보지그래. 젖도 출렁출렁한 게 조선 처녀야 댈 게 아니잖나."
윤철훈이 다리를 쭈욱 뻗으며 빙글거리고 웃었다.
"처녀 때 예쁘고 젖만 크면 대순가. 애 하나만 낳고 나면 모두 돼지가 돼버리고, 그놈에 구멍이 맞어야 말이지."
"옳지, 이실직고하는구먼. 그간에 러시아 천들 얼마나 더 버려놨나? 사람이 양심이 좀 있어야지 처녀들 버려놓기만 하고 장가는 안 들겠다니 원."
"허, 남 말하고 앉었네. 과부한테 불어 잡히고, 유부녀하고 그 짓하다가 들켜 빨가벗고 도망친 게 누군데 그래. 이 동지 앞에서 다 까발려놔야 입 다물겠어?"
"어허, 나야 독립자금 긁어내느라고 봉사 투쟁한 거 아닌가. 점잖은 이 동지 물드는데 그만두세그려."
윤철훈이 껄껄대고 웃었다.
"이 동지가 점잖다고? 그렇겠군. 러시아 땅에서 얼마 안 된 데다 투쟁만 하셨으니. 헌데 그것만은 점잖아서 좋을 게 없어요. 그 기계도 안 쓰면 녹이 스니까요. 러시아 여자들이 몸집이 큰 만큼 그 구멍도 크지만 그래도 겨울에 몸풀기는 아주 최고예요. 그 밑이 뜨끈뜨끈하고 화끈화끈한 게 화로가 따로 없어요. 왜 거기가 그리 뜨거운지 압니까? 지독하게 추운 날씨에 냉병 걸리지 말라고 하느님이 그리 만들어준 겁니다. 그 맛과 이 맛을 제대로 알아야 러시아 땅에서 살 자격이 있어요."
조강섭은 웃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하며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그는 술병과 안주를 두 사람 앞에 갖다 놓았다.
"이 사람, 초면에 못 할 소리가 없군. 아니, 이건 철갑상어 아닌가!"
윤철훈이 안주를 보고 반색했다.
"이 동지가 오실 줄 알았지. 밥이 끓기 전에 한 잔씩 하세."
조강섭이 자리 잡고 앉으며 이광민을 보고 빙긋 웃었다. 이광민도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러면서 이광민은 한결 친근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들이 나눈 음담의 효과였다. 그 이야기에는 부처님도 웃더라고 그들의 격의 없는 농담은 사나이들의 첫 대면을 더없이 부드럽게 해주었다. 하나는 고정자금책이었고, 또 하나는 자금운반책이었다. 언제나 긴장하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여유만만하게 그런 농담을 즐기는 것이었다. 이광민은 그 여유와 느긋함에서 긴장이 풀리고 기분이 전환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마음 편하게 대하는 요령을 배우고 있었다.
"보드카에 철갑상어라. 자넨 역시 내 가치를 알아주는군."
윤철훈이 술병을 들며 흡족해했다.
"그래, 2천 리 길 오느라고 수고했네. 술은 내가 따라야지."
조강섭이 술병을 빼앗아 들었다. 세 사람은 술잔을 들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조강섭이 술잔을 내밀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윤철훈과 이광민은 목소리를 맞추며 술잔을 내밀었다. 세 개의 술잔이 부딪쳤다. 그 소리는 잔에 든 술처럼 맑았다. 세 사람은 고개를 젖히며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크으, 맛좋군. 이 맛 때문에 보드카는 혁명을 안 당했지."
윤철훈은 차진 입맛을 다시며 소금에 절인 철갑상어 한 쪽을 집어들었다.
"홍범도 장군도 뒤로 물러나고, 이동휘 선생님도 이젠 늙으셨지."
조강섭의 중얼거림이었다. 그 나직한 목소리에 근심이 배어 있었다.
"걱정 말어. 이 선생님은 이번 조선인군대 결성으로 새 힘을 발휘하실 거네."
"글세, 그래야 될 텐데. 가만있자, 밥이 다 돼가겠지......"
조강섭이 자리를 떴다. 밥은 쌀이라고는 구경할 수 없는 잡곡밥이었다. 반찬은 김치와 고사리나물 간장이었다.
"밥은 이 모양입니다. 이만 위쪽으로는 쌀농사가 안 되는 것 아시죠?"
조강섭이 이광민을 보며 웃었다.
"예, 잡곡밥도 많이만 있으면 좋습니다."
이광민은 마주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면서 이만 위쪽으로는 쌀농사가 안 된다는 처음 아는 사실을 슬쩍 넘겼다.
"자네가 고사리나물도 무칠 줄 아나?"
윤철훈이 철갑상어 쪽들이 가지런히 놓인 접시를 상 위로 올리며 물었다.
"아니네. 하루에 한 가지씩 돌아가면서 해오는 거네."
"그러면 그렇겠지. 선생님 대접 톡톡하게 받고 사네그려. 부러운데."
윤철훈이 숟가락을 들었다.
"어서 드시지요. 시장하실 것 같아 국은 그만 생략했습니다. 어서 드시고, 이따가 또 감자를 삶아 먹도록 하죠."
조강섭은 이광민에게 집주인 노릇을 착실하게 하고 있었다.
"한잔으로는 섭섭하지 않은가?"
윤철훈이 술병을 들었다.
"한 병은 안 섭섭하고?"
조강섭이 눈흘김을 하며 윤철훈이 따르는 술을 받았다. 그들은 다시 술잔을 비웠다.
"이동휘 선생님이 군대 명칭을 조선인군대라고 붙인 건 참 잘하신 일이야."
입술을 훔치고 난 조강섭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르쿠츠크파와 귀화 한인들이 세력을 배제하고, 왜놈들 군대도 철수했으니까 러시아 적군하고도 손을 끊는다는 뜻이지. 이 선생님도 그동안 고생을 너무 많이 겪으시지 않았나."
윤철훈도 진지해져 있었다.
"귀화한 자들은 처음부터 말썽이더니 끝까지 말썽이야. 차르 왕조에 충성하는 백성이 되겠다고 조선을 버리고 러시아 붙은 것은 뭐고, 독립지사들이 연해주에 자리 잡으려고 협조를 구할 때는 싹싹 외면했던 자들이 혁명이 일어나니까 돌변해서 적군에 가담하는 척하다가 뒤늦게 고려공산당을 만들고 나서는 건 또 뭐야. 그놈들 때문에 손해가 얼마나 막심해. 순 박쥐같은 놈들."
"한 번 배신한 자 두 번 배신한다고 하지 않던가. 다 기회주의자들의 작태야. 우선 밥부터 먹세."
윤철훈을 따라 이광민도 밥을 떠넣었다. 조강섭은 숟가락 대신 술병을 들어 자기 잔을 채우며 말했다.
"문제는 그놈들이 계속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것 아닌가. 앞으로 흑하사변 같은 일이 또 벌어질지도 모른단 말일세."
윤철훈은 묵묵히 밥만 씹고 있었다. 이광민은 그 새로운 말을 생각해 보았다. 고려공산당을 해체시킨 국제 공산당에서는 휘하에 고려국을 설치했다. 그리고 위원으로 상해파 이동휘 선생을 비롯해서 이르쿠츠크파들도 임명했다. 그건 세력의 균형을 맞추려는 안배였다. 그러나 그건 말썽의 불씨일 수도 있었다. 양쪽이 협력하지 않고 어느 한쪽이 계속 주도권 장악을 시도하면 또 다른 흑하사변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아마 그런 불상사는 더 없을 걸세."
윤철훈의 무거운 말이었다.
"무슨 뜻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동휘 선생께서 더 이상 주도권에 연연하시지 않을 것 같네. 주도권도 당이 있을 때 이야기니까."
"아니, 그게 사실일까?"
조강섭이 놀라움을 나타냈다.
"생각해 보게. 당도 해제되어 버린 마당에 괜한 주도권 싸움을 해서 또 그런 참변이 벌어지기를 이 선생님이 바라시겠는가? 다름 아니라 조선인군대를 결성하시려는 게 그런 심중을 나타내는 것 아니겠나."
"으음...... 그런 것도 같군."
조강섭이 생각 깊은 얼굴로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헌데 저어...... 이 선생님께서는 독립투쟁의 한 방편으로 공산당을 조직하셨다고도 하는데, 그럼 앞으로는 어찌 될까요? 공산주의하고는 관계가 멀어지게 되는 걸까요?"
이광민의 말이 조심스러웠다.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윤철훈이 고개를 저었고
"아닙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조강섭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의 대화는 여기서 중단되었다. 밤이 되어서 그런지 나뭇가지들이 바람을 타고 소리가 심해지고 있었다. 호롱 불빛이 밥만 먹고 있는 세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일본군들이 철수했는데도 이 동지는 만주로 안 돌아갔군요. 조선인군대 결성에 이렇게 적극 나서신 걸 보니 아주 연해주에 남으실 작정을 한 모양이지요?"
밥을 유난히 빨리 먹은 조강섭이 숟가락을 놓으며 말문을 열었다.
"빨치산 탈락자가 밥 빨리 먹어치우는 버릇은 못 고쳤군."
윤철훈이 밥그릇을 긁으며 픽 웃었다.
"예, 어디서 싸우나 마찬가지니까요."
이광민은 그저 쉽게 대답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그렇게 확실하지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형편의 변동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연해주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빨치산투쟁을 했던 것은 부대가 활동하는 대로 따른 것이었다. 흑하사변이 수습된 다음 안무의 부대는 우수리강을 건너 만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다른 크고 작은 부대들도 지난날의 터를 찾아갔다. 그때 홍범도 장군은 부대원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부대를 따라 만주로 떠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일본군들이 시베리아 일대에서 총질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투쟁지가 꼭 만주여야 될 이유가 없었고, 낯선 다른 부대로 옮기는 것도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시베리아에 일방적으로 몰려든 일본군들은 러시아 혁명군의 적만이 아니었다. 그건 조선의 공동의 적이었다. 밥상을 치운 조강섭이 책꽂이 뒤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모은다고 모았는데 별로 많지가 않네."
조강섭은 기름종이로 싼 두툼한 것을 윤철훈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동포들이 살기도 어려운데...... 자네가 또 중간에서 애를 썼어."
윤철훈의 목소리가 침울한 듯 무거웠다.
"나야 무슨, 우리가 원할 때마다 성심성의 힘을 합쳐주는 동포들이 그저 고마울 뿐이지."
"그래, 동포들의 그런 마음을 느낄 때마다 우리 조선은 망한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는 하지."
윤철훈의 돈뭉치를 움켜잡았다. 이광민의 눈앞에는 수청 일대의 희생적인 동포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이 근방에 사는 동포들이야 소학령이나 수청 근방에 사는 동포들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 아닌가. 그쪽 동포들은 그간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나."
조강섭이 비감한 얼굴로 담배를 빼들었다. 이광민은 문득 놀랐다. 자신의 생각과 조강섭의 생각은 너무나 똑같이 일치했던 것이다.
"그렇지. 우리 빨치산들 먹이고 입히느라고 애쓰고, 일본군들한테 위협당하고 폭행당하고 죽고, 동포들이 겪은 온갖 고생을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면목이 없지."
윤철훈의 목소리가 더 침통해졌다.
"아니, 면목이 없지야 않지. 아직 나라를 완전히 해방시키지는 못했지만 빨치산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고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 결국 왜놈들 군대를 연해주에서 싹 몰아내지 않았는가. 그것만으로도 우리 빨치산들은 체면은 세운 거 아닌가. 이제 연해주 동포들이야 맘 놓고 살 수 있으니까."
조강섭의 말은 다리에 부상을 당한 용사답게 당당했다. 이광민은 조강섭의 말에 동감했다. 일본군들이 작년 10월에 연해주에서 철수한 것은 조선인 빨치산들이 러시아 적군과 협동한 결과였다. 조선인 빨치산들의 활동이 없었더라면 일본군들은 지금까지도 연해주에 버티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조선 빨치산들의 활약에 대해서는 러시아 적국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한테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조선 빨치산들은 러시아 적군과 협동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시베리아 땅을 혁명정부에 되돌려준 동시에 연해주의 우리 동포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공을 세운 것이었다.
"그래, 조선은 아직 해방시키지 못했어도 연해주는 해방시켰다! 자네 말이 맞네. 동포들도 그 공이야 잘 알고 있으니까."
윤철훈이 조강섭의 진정을 잘 안다는 듯 활기차게 말하며 밝게 웃었다.
"일본놈들, 어리석고도 지독한 놈들이야. 몇 년 버티지도 못하고 밀려날 놈들이 시베리아를 다 집어먹을 속셈으로 벽돌로 막사를 지어대다니."
조강섭이 이를 갈 듯이 말하며 술병과 잔들을 옮겨 놓았다.
"당연하지, 7만 병력을 투입했을 때야 꼭 시베리아를 집어삼킬 작정이었지. 러시아 혁명군을 얕잡아보았으니 그런 몽상을 할 만도 하지 않나. 시베리아를 먹어치우면 만주야 더 쉽게 손아귀에 넣을 수 있으니까. 왜놈들의 왜소한 대가리들이 벌인 탁상공론이지."
윤철훈이 코웃음을 쳤다. 이광민은 일본군들의 붉은 벽돌 막사를 떠올렸다. 러시아의 혁명을 방해하려고 시베리아에 밀려든 일본군들은 막사를 붉은 벽돌로 줄줄이 지어댔다. 영국, 프랑스 등과 체결한 조약을 어기고 일방적으로 7만의 병력을 투입시킨 것과 막사를 붉은 벽돌로 견고하게 지어댄 것은 일본의 의도가 무엇인지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수청에서 블라디보스톡, 그리고 우스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 사이의 여기저기 둔덕에는 붉은 벽돌 막사들이 몇 채씩 줄지어 있고는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그 막사들만 러시아의 혁명정부에 헌납하고 시베리아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 막사들을 짓는데 많은 동포들이 끌려가 부역을 당했다.
"참 수청지역에서 왜놈들이 우리 빨치산한테 애 많이 먹고 고전했지. 수청은 산세가 아주 기기묘묘하게 생겼거든."
술잔을 비운 조강섭이 회상조로 말하며 눈이 가늘어졌다.
"빨치산 활동을 하기에 그보다 더 좋은 데가 어디 또 있을까?"
윤철훈도 수청을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제 떠나려나?"
조강섭이 물었다.
"한시가 급하네."
"그렇겠지. 감자나 삶아 먹세."
조강섭의 말이 서운한 듯 괴로운 듯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11. 소작회 결성
길게 뻗어 나간 방죽을 사이에 두고 바다와 맞닿아 있는 간척지는 또 하나의 광활한 벌판을 이루고 있었다. 남쪽 끝에서 북쪽 끝이 아슴푸레하게 먼 그 벌판은 다른 벌판과는 달리 싱싱한 황갈색이었다. 보통의 회갈색 벌판에 비해 그 황갈색 벌판은 한결 곱고도 기름져 보였다. 그 넓은 벌판 어디에서도 흑회색의 뻘밭은 찾을 수가 없었다. 바닷물의 소금기에 절고 뻘밭은 새 흙으로 덮은 것이었다.
그 황갈색 벌판은 불이흥업에서 3년 만에 완료시킨 간척지 2천5백 정보, 7백50만 평이었다. 그 넓은 땅이 동산 하나도 막히는 것 없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벌판 가운데는 동그렇게 색깔이 달랐다. 넓은 마당에 둥근 멍석을 깔아놓은 것 같은 그곳은 묵직한 푸른 색조를 띠고 있었다. 그건 사방의 농토에 물을 댈 저수지였다. 그 넓이는 자그마치 9십7만여 평이었다. 그리고 그 벌판에는 바둑판을 그려 놓은 듯 굵고 가는 선들이 반듯반듯하게 쳐져 있었다. 직선으로 정지와 분할을 한 크고 작은 길들과 논두렁들이었다. 그 벌판은 곧 물을 대고 농사를 지을 것처럼 준비가 다 끝나있었다.
"짜아, 으쩌냐! 저 들판이 다 이 애비 손으로 맨글어낸 것이다."
북쪽 방죽의 끝머리에 선 이동만은 팔을 들어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며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 옆에 선 젊은이는 벌판과 바다를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으째 아무 말이 없냐."
이동만은 작은아들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야아, 굉장허구만이라우."
굉장하다는 말에 비해 젊은이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느낌이 담기지 않고 그저 보통 어간일 뿐이었다.
"그간에 이 애비가 얼매나 심들었겄냐."
이동만의 말은 퉁명스러웠다. 저 넓은 간척지를 보고도 무감동하고, 애비의 고생에 대해서도 먼저 인사말 한마디 없는 작은아들의 태도가 그는 영 마땅찮았던 것이다.
"야아, 고생 많이 허셨구만요."
젊은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경욱아, 저 뻘밭이 요렇타께 농토가 되게 누가 다 측량했는지 알지야?"
"야아......"
"대답이 어째 그리 션찮냐. 느그 성이 해낸지나 알고 있능겨?"
이동만의 목소리가 커지며 눈을 치켜떴다.
"야아, 첨보톰 알었구만이라."
이경욱의 어조가 약간 달라졌다.
"그려, 경재 측량기술이 일본사람덜 찜쪄묵게 좋아서 이 에로운 측량을 다 해낸 거이다. 그렁게 이 넓은 땅얼 우리 부자지간이 맨글어낸 것이다 그 말이여. 니가 동경으로 뜨기 전에 이 너른 간척지럴 꼭 귀경시킬라고 헌 이 애비 맘얼 인자 알겄냐?"
"야아......"
"그려. 헌디, 이 애비넌 요것으로 맘이 차덜 안혀. 무신 말인고 허니, 요것으로넌 우리 집안이 일어났다고 헐 수가 없단 말이여. 우리 집안얼 더 단단허고 여보란 디끼 일어나게 헐라면 니가 기연시 판검사가 돼야허는 것이여. 니가 그리 공부럴 잘허는 것이 바로 우리 집안얼 크게 일으키라고 조상님네덜이 돌보시는 것이다 그 말이다. 이 애비말 알아묵겄냐?"
이동만은 마디마디에 힘을 넣어가며 말했다.
"야아, 명심허겄구만요."
이경욱은 또렷하게 대답했다. 아버지의 말이 길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려, 맘 강단지게 묵고 판검사가 되기만 혀. 이 애비가 학비야 풍족허니 댈 것잉게. 니가 판검사 나으리만 됨사 이 이배넌 시상에서 기룬 것이 아무것도 없겄다. 니가 애비 소원 꼭 풀어주겄지야?"
"야아......"
"그려, 겁묵을 것 하나또 없어. 니 공부넌 항시 이찌방"일등" 아니여? 더 맘 야물딱지게 묵고 동경 가서 공부허면 그까진 고등고시야 눠서 떡 묵기다. 조선사람덜도 판검사가 발써 많이 나오덜 안혔냐. 그라고 말이여, 니가 동경 가서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가차이 혀서넌 안 될 것이 있다. 고것이 먼지 아냐? 공사주의여, 공산주의! 동경에 그 병이 돌림병으로 퍼져 부잣집 아덜덜이 병이 드는갑는디, 그리 되면 끝장이여."
이동만은 작은아들을 응시했다. 그 눈길이 마치 맹세라도 받아내려는 것 같았다.
"그런 일 없을 것이구만요."
이경욱은 또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려, 꿈에라도 그런 일언 없어야 혀. 만에 하나 니가 그런 못된 풍조에 물들면 이 애비도 망허고, 느그 성도 망허고, 아니 여러 말 헐 것 없이 온 집안이 쫄딱 망허는 것잉게 그리 알어."
말을 마치자마자 이동만은 침을 퉤퉤 내뱉었다. 말을 하고 보니 액이 끼는 것 같았던 것이다.
"허, 2백40만 원도 큰돈이다만, 그 돈 딜이고 저만헌 땅 생겼으면 공짜다, 공짜. 나도 인자 저만헌 땅얼 지녔으먼 좋겄는디......"
이동만은 드넓은 간척지를 아슴한 눈길로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품삯얼 많이 안 줬다고 인심이 영 안 좋든디요.’
이 말이 불쑥 나오려는 것을 이경욱은 꾹 눌렀다.
"일얼 시작헐 적에넌 어느 하세월에 될랑가 심란시럽등마, 하여튼지간에 사람 심이 무섭기넌 무선 것이여."
이동만은 감개무량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돌아섰다.
‘맞어요, 저것이 수많은 사람덜 피땀으로 된 것이제 아부지허고 성님 심으로 된 것이 아니란 말이오.’
이경욱은 아버지 뒤를 따라가며 이렇게 속말을 하고 있었다.
"보라, 조선의 사나이 된 자들이, 더욱이 배움을 갖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그건 두 가지 길밖에 없다. 항일이냐, 친일이냐 하는 것이다. 아니, 또 하나 길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항일도 친일도 하지 않고 중간에서 엉거주춤 살아가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건 분명히 친일이다. 다만 적극적이지 않고 소극적이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것이 왜 친일인가? 조선인에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항일을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더욱이 배움을 가진 지식인들은 그 책무가 더 커진다. 그런데 왜놈들의 범죄를 방관하다니. 범죄를 방관하는 것은 범죄를 조장하는 것이고 동조하는 또다른 범죄다. 그러니 그게 친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식민지가 된 이 땅에서 지금 가장 고통받고 고생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배움도 없고 가난한 소작농들과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왜놈들의 착취정책을 피할 능력이 없이 매일매일을 고통에 시달리며 피해를 가장 많이 받고 살 수밖에 없다. 고통과 싸우는 그들의 생활, 그건 바로 항일이다. 다만 적극적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지식인의 방관에 비하면 그건 적극적인 항일이 된다. 그럼 그 수많은 사람들을 어찌할 것인가. 그 사람들을 구할 책임이 바로 지식인들에게 있다. 그게 지식의 대의며 지식인의 사명이다. 그럼 어떻게 그들을 구할 것인가. 지식인은 자신의 지식을 바쳐 그들이 못 배운 바를 일깨워야 하고, 깨달음에서 생성된 힘을 한 덩어리로 뭉치게 해야 한다. 자각한 소작농들과 노동자들의 조직화된 항거, 그건 그들의 해방인 동시에 조선의 해방이다.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아라. 마음을 크게 열고 세상을 대하라. 식자들이 망친 나라는 식자들이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서완 선생의 말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이경욱은 눈을 감으며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고 선생의 유순한 얼굴이 떠올랐다. 고 선생은 얼굴이 언제나 잔잔하고 유순하면서도 마음은 그리도 단단하고 강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경욱은 고 선생에게 말 못 할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고 선생은 자신의 아버지가 요시다 밑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다 알았다. 그런데도 자신을 멸시하거나 경원하지 않고 그렇게 믿어주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이었다. 동료들 사이에서 느끼는 비웃음과 경멸을 고 선생을 은밀하게 만나면서 씻고는 했다. 자신을 아버지와는 별개의 사람으로 대해주는 고 선생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니가 모레 떠난다고 혔냐?"
이동만이 불쑥 물었다.
"야아......"
이경욱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글먼 낼언 선산에 가자."
"야아."
"더 질게 말 안허겄다. 니가 우리 집안 대들보가 돼야 헌다 잉."
이동만은 힘을 꽁 쓰며 다짐했다. 바닷물을 막고 있는 방죽은 끝없이 뻗어 나가고 있었다. 방죽 위에 닦여진 길은 바다 색깔과 간척지의 색깔에 대비되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한쪽으로는 넓고 푸른 바다와 또 한쪽으로는 넓은 황갈색 벌판을 거느리고 끝이 아늑하게 뻗어 나가고 있는 그 길은 무척 낭만적이고 환상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바다와 간척지와 방죽길과 먼 야산이 어우러진 풍광은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간척지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저수지의 남쪽과 북쪽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수지의 남쪽과 북쪽 언저리로는 집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남쪽의 집들은 전부가 움막이었고, 북쪽의 집들은 전부 기와집이었다.
"참말로 기가 차시. 재주넌 곰이 넘고 돈언 왕서방이 다 묵드라고 요것이 무신 꼴이여. 우리가 그리 피땀 흘리고 골빠지게 일해 갖고 결국 왜놈덜만 저리 좀 일 시켰으니, 원퉁히서 못살겄네."
탈진한 모습의 한기팔이가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저 죽일 놈덜이 애당초보톰 우리럴 속이고 든 것이랑게라. 참말로 가심이 터질라고 혀서 못살겄소."
젊은 사람답게 김장섭이 자기 가슴을 치며 열을 내뿜었다.
"그려, 요것이 다 나라없는 설움이여. 전답 뺏길 때보담 더 기맥히고 사람이 죽을 일이구만."
남상명이 멍하니 간척지를 바라본 채 시름겹게 중얼거렸다.
"이럴지 알었음사 머심살이가 더 나샀을 것인디. 다 헛고상덜만 헌 것이여."
김서방이 곰방대를 털며 한숨지었다.
"요런 씨부랄 놈덜이 혀도 혀도 너무 헌당게요. 아무리 즈그 왜놈덜이라고 혀도 땀 한 방울 한 흘린 놈덜헌티 우리보담 열 배가 넘게 논얼 띠주는 법이 시상에 어디 있다요."
김장섭은 더 열이 오르고 있었다.
"다섯 마지기에 예순 마지기먼 열두 배시, 열두 배."
김서방이 손가락을 꼽아 보였다.
"긍게 말이오. 요것얼 그냥 당허고만 있어서야 되겄소?" 마침내 김장섭이 내놓은 말이었다.
"안 그러면 어쩔 것이여?"
한기팔이 맥풀린 눈으로 김장섭을 건너다보았다.
"다 나서서 따지고 대들어야제라. 시방 사방에서 작인덜이 들고일어나는 것도 못 보요?"
"즈그덜 땅 즈그덜 맘대로 허는 것이라고 허면 그만 아니겄어. 또 앞장슨 사람덜만 당허게 되고 말이시."
한기팔이 고개를 저었다.
"장섭이, 자네 분허고 원퉁헌 맘이야 다 아는디, 그런 말 암디서나 허덜 말어. 누가 누군지 몰르는 판에 그나마 쫓겨나는 일 당해서야 되겄능가."
남상명의 나직한 말이었다.
"아이고메, 개좆 겉은 놈에 시상! 한날 한시에 베락얼 쳐불든지, 하늘허고 땅이 딱 맞붙어 다글다글 맷돌질얼 혀불든지 혀야제 더는 못살겄다."
김장섭은 돌을 집어들며 땅바닥을 내려치며 울부짖듯 했다. 불이흥업의 간척사업에 동원되었던 인부들은 다 똑같은 분노와 절망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3년 동안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오로지 한 가지 꿈을 가지고 그 고생을 견디어왔던 것이다. 전체 간척지에서 저수지와 크고 작은 농로를 제외하면 3천여 명 인부들에게 열 마지기씩은 충분히 돌아가게 되어있었다. 방죽의 마지막 물막이를 끝내고, 뻘밭에 새 흙을 퍼다 붓는 공사와 길 닦으면서 논둑 쌓는 공사가 예정보다 닷새 이상 빨리 끝났던 것도 목전에 다가온 꿈을 어서 잡고 싶어 하는 인부들의 신명이 바쳐진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인부들에게 집 지을 장소가 지정되었다. 그 지역은 저수지 남쪽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인부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농가는 으레 농토를 맞바라보는 남향판으로 앉히는 법이었다. 그런데 저수지 남쪽에 집을 짓게 되면 그것이 들어맞지 않았다. 농토를 맞바라보게 앉히면 북향집이 되어버렸고, 남향집이 되게 하자니 농토를 등지게 되는 것이었다. 북향집은 흉가라 말이 안 되는 것이었고, 농토를 등지자니 옷을 거꾸로 입은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집 지을 땅을 왜 남쪽으로 제한하는 것인지 알고 싶어 하며 며칠이 지났다. 그런데 북쪽에 줄줄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 집터는 열 채도 스무 채도 아니었다. 50가구씩 한 동네로 묶어 여섯 동네, 3백 채를 짓는다는 것이었다. 그건 일본 농부들이 건너와 살 집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 3백 가구에게 저수지 북쪽 간척지를 분배해 줄 거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 소문이 퍼지자 인부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그건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저수지 북쪽 땅은 남쪽 땅보다 더 넓었던 것이다. 그 땅을 단 3백 가구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배신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알게 된 농장 측에서는 무장경찰 20여 명을 동원한 가운데 소작농지 분할을 알리게 되었다.
"에에 또, 지금부터 소작지 분할에 대해 발표할 것이니 다들 똑똑히 들어라. 소작지는 일인당 다섯 마지기로 한다. 이에 불만이 있는 자들은 당장 농장을 떠나라. 만약 소란을 피우게 되면 경찰이 가차 없이 처벌할 것이다. 그따위 행동은 총독부가 실시하고 있는 산미증식계획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다들 명심하라. 그리고 소작지의 자세한 위치는 추후 발표할 것이다."
요시다가 한 말의 전부였다. 일본 이주 농민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묻지도 못했다. 무장경찰들은 곧 총을 쏘아댈 것 같은 기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시다가 일인당 다섯 마지기로 못을 박은 이상 절반으로 줄어든 몫이 어디로 갈 것인지는 너무 자명했던 것이다. 그다음부터 농장 측에서는 이주 농민 1가구당 3정보, 60마지기씩 논을 분배한다는 것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3천여 명의 인부들은 하나같이 분노에 떠는 한편으로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대여섯 식구 있는 집에서는 다섯 마지기 소작농사로는 쌀을 다 잡곡으로 바꾼다 해도 살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거기다가 흉년이 들고, 병이 나고, 잡사가 생기면...... 그들은 앞날이 암담할 뿐이었다. 그런데, 낙망하고 있는 그들을 더욱 낙담하게 하는 소문이 들려왔다. 북쪽에 남향받이로 짓고 있는 집들이 100원짜리 기와집인데, 그걸 이주 농민들에게 그냥 공짜로 준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집 지을 엄두는 내지도 못한 채 움막 엮을 돈마저 없어 애들을 태우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머시여! 우리 품삯언 밀려놓고 즈그 왜놈덜헌티넌 집얼 공짜로 지어줘?"
"우리 밀린 품삯으로 고런 짓거리덜 허능 것 아니여?"
"맞어, 그러는갑구마!"
"안 되겄어. 다 들고 일어나드라고!"
그들은 마침내 밀린 임금을 내놓으라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무장경찰들이었다.
"어떤 놈이 그따위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가! 그런 놈들을 당장 찾아내라. 총살감이다. 이주 농민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것은 우리 회사가 아니다. 총독부에서 지급하는 정착금으로 짓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주 농민들에게 집 지어주는 것을 시비하는 것은 바로 총독부의 정책을 반대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놈들이 왜 총살감인지 이제 알겠나! 그리고, 밀린 임금은 좀 더 기다려라. 본사에서 곧 돈이 올 것이다."
요시다의 해명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주 농민들의 집을 짓는 데서 그들을 상대로 일꾼을 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불난 데 부채질이냐며 사람들은 욕을 해대고 분을 터뜨렸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서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간척 일에 비하면 일도 별로 힘들지 않고 날마다 일당을 쳐주는 데다 점심도 푸짐하게 먹여준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남모르게 품팔이를 다닌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슬금슬금 그 일터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어쩌겄어. 밀린 돈얼 차일피일 미루기만 허고, 당장 급헌디."
"그려, 움막 질 돈이라도 벌어야제."
"속이야 터지제만 우리가 일 안 나간다고 안 질 집도 아니고."
품팔이를 나선 사람들의 변명이었다. 그곳으로 돈벌이는 나서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열흘쯤 지나자 칠팔백 명이 그쪽으로 줄을 지었다. 이제 그들은 누구 눈치도 보지 않았고, 그만큼 집도 빠른 속도로 지어져 갔다. 그러나 끝끝내 그 돈벌이를 외면한 사람들은 3천여 명 중에서 2천 명이 넘어 돈벌이를 나선 사람들보다 서너 배는 더 많았다. 그들 사이에 어떤 충돌은 없었지만 보이지 않는 금이 그어지고 있었다. 북쪽에는 3백 채의 기와집만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모여서 놀기도 하고 회의도 할 수 있는 큼직한 집합소가 지어졌는가 하면, 조선사람들로서는 경험한 적이 없는 남녀 공동목욕탕이 지어졌다. 그리고 4월이 되자 이주 농민들이 몰려와 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주 농민들이 다 찼을 즈음에 또 다른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차지한 60마지기 논은 소작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논값을 4년이 지난 다음부터 해마다 얼마씩 갚아나가기로 하고, 각 개인 소유로 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건 이주하자마자 중농으로 만들어준 셈이었다. 간척사업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은 완전히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농장 측에서는 어서 논에 물을 대고 간기를 빼야 한다고 야단이었지만 사람들은 맥이 풀려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일덜 열성으로 안 하러 것이여? 되았어, 꾀부리고 게을른 놈덜언 다 내쫓게 헐 것잉게 알아서 혀. 소작 얻을라는 사람덜언 줄얼 잇대고 있응게."
눈을 부라린 농감들의 으름장이었다. 그러나 그건 괜한 으름장만이 아니었다. 총을 들이대고 내쫓는 데야 쫓겨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자리를 채울 소작인들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또 그들의 맥을 빼는 소문이 들려왔다. 60마지기씩 지닌 이주 농민들이 머슴을 두셋씩 부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중농 지주다운 짓들이었다.
"아이고 이 드런 눔에 시상. 눈도 개리고 귀도 막고 입도 봉허고 바보 멍청이로 살아야제. 글안허고 애간장이 수백 발이라도 다 녹고 삭아 어찌 살겼어. 어찌 이런 놈에 시상이 태였능고."
"그려, 자알덜 한다. 60마지기 농새면 머심만 부리겄냐. 쪼깐 있다가 넌 더 편케 살겄다고 작인덜 부리고 나슬 거이다. 참 좆겉은 시상이다."
사람들의 탄식이고 체념이었다. 그러나 불이농장의 간척지 소작인들은 그대로 주저앉은 것이 아니었다. 소작지의 위치에 따라 움막을 치고 마을을 형성하게 된 그들은 몇몇 사람씩 내통하며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재, 오늘 밤에 그 선상님 만내로 가는 날이요."
김장섭이가 남상명에게 속삭였다.
"알었네. 우리 둘이만 간가?"
남상명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스쳤다.
"아니구만이라. 옆동네서 나서방허고 둘이 더 갈 것이구만이라."
"그려, 하여튼지 간에 고마운 분네덜이네."
"그렇제라. 자기덜헌티 생기는 것도 없는디. 이따가 뫼시로 오것소."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비해 김장섭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남상명은 그 생기가 불안스러웠다.
"어이, 일이 다된 것이 아닝게 언행 조심여야 되네 이."
"아재, 지도 인자 나이 묵을 만치 묵었고, 노모에 동상덜이 줄줄이요."
김장섭이 정색을 하며 눈을 똑바로 떴다.
"알겄네. 그럴 때넌 똑 자네 춘부장 어런이네그랴."
남상명은 김장섭의 어깨를 치며 지긋하게 웃었다.
"체, 지가 더 나슬 것인디요?"
김장섭이 씨익 웃으며 돌아섰다. 어둠이 짙어지자 남상명은 김장섭을 따라나섰다. 한참을 가다가 개울목에서 세 사람과 합류했다. 그들은 발 빠른 걸음으로 20리 남짓 걸었다. 그들은 어느 기와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다들 초면이지요? 인사 나누세요."
군산 영명중학교 선생 고서완이 그들에게 옆에 앉은 사람을 가리켰다.
"어서들 오시오. 어두운데 오느라고 수고들 하셨소. 저는 정도규라고 합니다."
정도규는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했다. 김장섭과 그들은 당황하며 이마가 방바닥에 닿는 큰절을 했다.
"지넌 김장섭이라고 하능구만이라우."
허리를 펴며 김장섭이 인사말을 했다. 그것이 시범이라도 되는 듯 나머지 사람들도 똑같은 식으로 자기들의 이름을 밝혀나갔다.
"정 선생은 저의 선배이시고, 우리 일을 총괄하시는 분입니다. "
선하고 차분한 인상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소완이 말했다. 그들은 긴장되고 주저하는 눈길로 정도규를 다시 쳐다보았다. 정도규는 웃음 띤 얼굴로 그들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그럼 지금부터 정 선생님 말씀 먼저 듣고 여러분들과 의견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고서완은 회의의 사회격이 되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예,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여러분에 대해서는 고 선생한테 이야기 다 들어서 구면이나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한가지 생각으로 한길을 가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동지입니다. 동지끼리는 신분이 높고 낮음의 차이가 없고, 학식이 있고 없음의 차이가 없고, 재산이 많고 적음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뜻이 같고 행하는 것이 같으니까 아무런 차등 없이 평등하며, 무엇이든 잘 모르고 모자라는 것은 서로가 배우고 도와 가는 것입니다. 소작회 결성에 대해서는 그동안 고 선생한테 여러모로 이야기 많이 들었을 것이니 따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왜 소작회를 결성해야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건 간단합니다. 모두가 단결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한덩어리로 뭉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동안 몇 차례나 밀린 임금을 달라고 요구했었지요? 그런데 그때마다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무장경찰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단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 수만 많았지 힘이 없었던 것이고, 힘이 없으니 경찰들이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한 덩어리로 뭉치면 힘이 생깁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면 무지무지한 힘이 생깁니다. 그 힘이 어떤 힘인지 아십니까? 바로 여러분들이 바닷물을 막고 뻘밭을 논으로 만든 그 힘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무시무시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 그 힙을 발휘할 때 열댓 명 무장경찰들이 뭐가 무섭단 말입니까. 오히려 그놈들이 여러분들의 힘에 눌려 꼼짝을 못 하게 됩니다. 아니, 그놈들이 총을 쏘면 어쩌냐고요? 그건 염려할 게 전혀 없습니다. 그놈들은 절대로 총을 쏘지 못합니다. 지금은 3·1운동 때 하고는 다릅니다. 총을 쏠 수 없도록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또, 소작인들의 정당한 요구는 3·1운동 하고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명심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소작회를 결성하는 것을 절대 겁내지 마십시오. 소작회는 벌써 다른 여러 지방에서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 곳에서 소작인들이 들고일어나고 있는 소문 듣고 있지요? 그게 다 소작회로 단결해서 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한테 경찰이 총을 쏘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놈들은 총을 쏘지 못합니다. 왜 그런지 압니까? 만약 총을 쏘아 누구를 죽이면 전 조선의 소작인들이 들고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만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천지에 있는 소작인들 모두가 여러분들의 동지입니다. 이건 그저 막연하게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면, 작년 7월에 한성에 본부를 둔 조선노동공제회란 단체에서 <소작인은 단결하라>는 결정을 발표한 뒤로 조선 전역에 소작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럼 왜 소작인들을 그렇게 중히 여기는 것일까요? 거기엔 분명한 까닭이 있습니다. 조선사람들의 여러 가지 생업 중에서 소작인들이 가장 많기 때문이고, 또 소작인들이 왜놈들 치하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입고 고생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문제 중에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바로 소작인들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소작인들이 좀 더 배불리 먹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 소작회를 결성하는 것일까요? 단지 그것만이 아닙니다. 조선 전역의 소작인들이 한덩어리로 뭉치는 것은 왜놈들에게 맞서 싸우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생활도 낫게 만들면서 독립운동도 하는 일거양득이 된다 그겁니다. 그러니 어찌 소작회를 결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제가 한 말을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잘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도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용어는 신경 써 가며 일절 섞지 않았다. 소작쟁의를 일으킨 다음에 뒤따를 수사에 대비하기 위해서였고, 아직 학습이 안된 소작인들에게 어렵고 생소한 말은 머리만 혼란하게 할 뿐이었던 것이다. 김장섭은 가슴이 벌떡벌떡 요동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정 선생의 말이 가슴을 들끓어 오르게 하고 있었다. 조선 전역에 퍼져 있는 동지들...... 그것이 바로 독립운동......, 김장섭은 당장 소리쳐 일어나고 싶은 충동에 휩쓸리고 있었다. 3·1만세 때 총 맞아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빼앗긴 땅을 찾으려고 애쓰다가 그리도 억울하고 허망하게 돌아가시고 말았다. 자신에겐 땅을 찾을 일만 남은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원수도 갚아야 했다. 소작회 결성에 열성으로 나서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일이기도 했다. 남상명은 가슴 떨리는 감격을 느끼며 소작회 결성에 발 벗고 나서기로 작심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언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정 선생의 말은 마디마디가 새롭고 지당했다. 말만이 아니었다. 양반에다 학식 든 사람이 그렇게 겸손하고 다정할 수가 없었다. 고 선생이나 정 선생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정 선생님 말씀 다들 잘 들으셨지요? 혹시 의문이 있거나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질문들 하세요."
고서완이 그들을 둘러 보았다. 그들은 어색하고 쑥스러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방 가운데 놓인 등잔 불빛에 큰 그림자들만 벽에 드리우고 있었다.
"예, 질문이 없으면 됐습니다. 우리는 계획대로 열흘 후에 소작회를 결성함과 동시에 밀린 임금을 내놓으라는 전체 집회를 벌일 것입니다. 그에 대비해서 여러분들이 맡은 일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무슨 어려움은 없습니까?"
고서완이 다시 그들을 둘러보았다.
"저어, 한가지 걱정이 있는디요. 사람덜언 쉰 명으로 묶는 것언 에로울 것이 없는디, 서너 달 전에 왜놈덜 집 짓는 디 생김서 돈벌이 헌 물건덜이 뒤섞여 있구만요. 그 사람덜얼 믿을 수가 없당게라."
김장섭의 말이었다.
"그렇구만이라. 그 사람덜언 간사시러서 무신 말얼 허기가 겁이 난당게라우."
나서방이 김장섭의 말을 받았다.
"아, 그 사람들 말이군요. 그건 여러분들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걱정을 했습니다. 허나, 그건 별로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도 밀린 임금 받기를 원할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 수가 얼마 안 되니까 미리 말하는 것을 피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고서완의 설명이었다.
"야아, 그 말씸도 맞기넌 헌디, 즈그덜 걱정언 그 염치도 체면도 없는 사람덜이 그냥 귀경만 허고 떡얼 얻어묵는 것이야 존디, 그러덜 안코 우리 일얼 망치고 들지 몰라 맘이 안 놓이는 것이구만이라우."
남상명의 말이었다.
"예, 여러분들이 그렇게 신중한 것은 우리 일을 성공시키는 데 아주 필요한 점입니다. 그리고 이런 조직을 짜는 데 꼭 갖추어야 할 좋은 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너무 의심하거나 미워하진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자기들만 왜놈들의 집을 짓는 데 돈벌이를 나선 것은 분명 비겁하고 치사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누구나 사정이 급하다 보면 사리를 따지기 어려워지고 실수를 하게 됩니다. 어디 도적놈이 따로 있습니까. 너무 배가 고프다 보니 도적질을 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들은 그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여러분들과 함께 간척지 공사에서 피땀을 흘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러분들과 함께 그 농토에서 농사를 지을 사람들입니다. 그 인연은 바로 동지가 될 수 있는 끈입니다. 백 리 밖의 열 동지보다 바로 옆의 한 동지가 더 힘이 되는 법입니다. 그들은 여러분과 같은 아픔, 같은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충분히 동지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한번의 실수는 용서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그들의 실수를 용서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들을 동지로 맞아들이도록 다같이 노력합시다."
정도규의 말이었다. 그는 아까보다 더 진지하고 심각해져 있었다. 그들 다섯 사람은 모두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고서완은 정도규의 그런 대처에 내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그 문제는 처음으로 대한는 것이 분명할 터인데 정도규는 그렇게 신속한 대응을 하는 것이다.
"정 선생님 의견을 여러분들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고서완이 그들에게 물었다.
"야아, 옳으신 말씸이구만이라우."
남상명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야아. 그리허겄구만이라우. 즈그덜언 그런 생각꺼정 못혔구만요."
김장섭의 대답을 따라 나머지 세사람도 같은 생각이라는 의미의 대답을 했다.
"다른 의견들 또 말씀하세요."
방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머...... 다른 일이야 없구만요."
나서방이 뚜벅 말했다.
"예, 그럼 밤도 늦었으니 두 가지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각자가 맡은 50명 중에서 소작회에 가입시킬 수 있는 사람들을 최소한 20명씩을 확보하여 그 명단을 다음 모임까지 제출할 것. 둘째, 사람들에게 밀린 임금을 바다야 한다는 것으 적극적으로 이야기해 나갈 것. 이상입니다. 다음 모임은 닷새 뒤에 갖겠습니다."
고서완이 마무리를 지었다.
"예, 갈 길들이 먼데 어서들......"
정도규가 몸을 일으켰다. 그들도 따라서 일어났다.
"자아, 우리 모두 단결합시다!"
정도규가 낮으나 힘찬 목소리로 말하며 남상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상명은 얼떨결에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정도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한 사람, 한 사람 악수를 해나갔다. 그들은 별빛들만 또렷또렷한 밤길을 소리 없이 빨리 걸었다. 짚신 걸음은 아무리 빨리 걸어도 소리가 나지 않아 좋았다. 어두운 들녘에서 뜸부기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지기럴, 발써 뜸부기가 우네."
누군가의 감회 젖은 목소리였다.
"뜸부기가 운들 우리야 무신 소양이여. 설된 논에 간기나 빼야 허는 신세니."
인가 멀어진 들녘인 것을 아는지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나 참, 양반에다 학식 든 사람덜 헌티 그런 존대발언 내 생전 첨 받아봤네. 시상이 달라진 것이여, 그 사람덜이 별난 사람덜이여?"
"시상이사 망쪼고, 그 사람덜이 별나제."
"양반 상놈도 없고, 부자 가난뱅이도 없고, 유식 무식도 없이 모다 공평허다는디, 그 사람덜 혹시 녹두장군 환생이 안리랑가?"
"그려, 그럴란지도 몰르제."
"난세에넌 하늘이 끝도 없이 인물얼 점지해 낸다는 옛말이 드른 디가 하나또 없당게. 그런 사람덜이 녹두장군 몫얼 허고 나스는 것 아니라고."
"그렇기도 허시. 좌우지간 밑어세 우리덜이 잘히야 헐 것 아니라고."
"하먼, 잘히야제. 우리가 빙신질허먼 그 양번덜이 얼매나 심 파허겄어."
"심만 파허겄능가. 꼬라지 뵈기 싫여 다시넌 돌아다도 안 볼 것이네."
일주일이 지나 고서완은 정도규를 찾아갔다.
"모레 쟁의가 일어납니다. 모든 계획은 차질이 없으니 당분간 여길 뜨시지요."
"그럴 필요가 있겠소. 트집잡힐 냄새는 일체 풍기지 않았는데."
"만일을 위해섭니다. 요새 쟁의 배후자는 무조건 공산주의자로 몰아 감옥으로 보냅니다. 한성에 볼일 없으신가요?"
"볼일은 좀 있소만...... 나만 피하면 고형은 어쩌려고?"
"저야 크리스찬 학교 선생 아닙니까. 크리스찬이 공산주의자일 리 없고, 학교 측에서 울타리가 되어줍니다. "
"그거 위장치고 완벽한 것 같소. 됐소, 고형 의견을 따르기로 합시다."
정도규는 그날로 한성행 기차를 탔다. 지난 3월 24일 개최한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참석하고, 30일에 당이 경무국의 강압으로 해산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성에 발길을 못 했던 것이다. 간부들의 검거가 잇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전차에서 내린 정도규는 보도로 올라서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정면 건물의 벽에 나붙은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윤심덕과 한성기의 성악회가 YMCA에서 열리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젠장, 태평세월이로구나.
12. 1923년 9월 1일
후텁지근한 더위 속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영대교 아래로는 진한 흙탕물이 흘러내려 가고 있었다. 다리 건너 빈민굴인 본소구가 비에 젖고 있었다. 한눈에 표가 나는 빈밀굴은 빗발 속에서 그지없이 초라하고 남루해 보였다.
"무슨 놈의 비가 이리 질질 오고 이래. 올려면 확 쏟아지고 말 것이지. 이틀씩이나 이 모양이니 저 사람들 어쩌라는 거야."
종이우산을 함께 받친 두 남자 중에 하나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그러게 말이네. 공치면서 애들이 타겠군. 쉬는 것도 쉬는 것 같지도 않을 거고."
다른 남자의 침울한 대꾸였다.
"그나저나 이 비가 그치면 가을이 오는 것 아닌가? 안사람이 서운해하지 않겠어?"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야. 사람 참 싱겁기는."
헛웃음을 홀린 남자는 송중원이었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 덕보지 말라고 했지만, 자네도 어지간해. 처가에서 보태주는 학비 마다하고 학비 버느라고 방학에 집에도 안 가니 원."
그 남자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러는 자네는 어떻고?"
"나야 처가에서 돈을 안 보태주니까 현해탄을 건너가고 싶어도 건너갈 도리가 없잖은가."
"됐네, 그 얘긴 그만하게. 우리가 쪽 학비만 벌자고 귀향선을 안 탄 건 아니니까."
송중원의 어조에는 찬기가 서렸다.
"이 사람, 문하부로 옮긴 사람이 감상도 없이 어찌 그리 냉정해."
송중원의 어조에는 찬기가 서렸다. 송중원은 더 말이 없이 다리를 건넜다. 아내나 아이보다는 어머니의 생각이 더 간절했다. 그 간절함은 그리움이 아니었다. 외로운 분을 뵙지 못하는 죄송스러움이었다. 처가에서 반 부담하는 학비를 받지 않기로 한 것에는 어머니도 찬성했다. 장인의 형편도 넉넉하지 못한 데다 공부 뒷바라지를 해야 할 처남이 있었다. 모자라는 학비는 고학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돈벌이만을 위해서 집에 가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고학생학우회에서 은밀하게 실시하는 사상학습을 받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집에 갓 주재소의 감시를 받게 될 것도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동기 방학 때 주재소에서 나흘 동안 겪은 고초는 참 어이없는 것이었다. 그 일로 애를 태운 어머니는 심한 몸살을 앓았고, 장인께는 또 폐를 끼쳤던 것이다. 어머니도 이제 표나게 늙어 있었다. 외로운 마음고생이 어머니의 얼굴에 주름살로 잡히고 있었다. 주재소에서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는데 어머니가 또 그런 마음고생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흥, 비가와도 저 공장들은 돌아가는군. 배곯는 것은 날품팔이 우리 동포들뿐이야."
허탁의 말에 송중원은 고개를 들었다. 빈민굴과는 대조적으로 큼직큼직한 공장들의 굴뚝에서는 진한 연기가 솟기고 있었다.
"어쩔 수 있나. 저건 주로 여자들을 쓰는 제사공장이고 방직공장들인 데다가 그나마 기술이 있어야 하니까."
송중원의 말은 울적했다.
"빈밀굴에 안 어울리게 웬 공장들이 저리 많아."
"그야 사업가들이 머리 쓴 것 아닌가. 땅값 싸겠다, 싼 노동력 많겠다, 당연히 공장들이 들어서게 돼 있지."
"그게 그렇게 돌아가나?"
"약삭빠른 사업가들을 누가 당해."
본소구의 좁고 지저분한 골목들은 물이 제대로 빠지지 못해 질퍽거렸다. 그리고 퀴퀴하고 찝찔한 악취가 후텁지근한 더위 속에 진동하고 있다. 소문난 빈밀굴다웠다.
"긴자가 몇천 리나 된다고 동경에 이런 빈민굴이 있으니 원. 천국과 지옥이 한 지붕 밑에 있는 꼴이야."
허탁이 코웃음을 쳤다.
"이게 대일본제국의 위대한 모습 아닌가. 그러니 공산주의가 퍼지는 것을 막으려고 혈안인 거지."
"누가 듣겠네."
"내 목소리보다 빗소리가 더 크네."
그들은 골목을 돌고 돌아 어느 허름한 집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계십니까, 안에 누구 계십니까?"
허탁이 찌그러진 문을 두들겼다.
"누가 온 긴가? 뉘신교?"
문이 삐긋 열리며 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 안녕하세요. 일전에 찾아왔던 학생들입니다."
송중원이 그 남자에게 인사했다.
"아이고 뉘시라꼬. 뻐떡 드이소. 안 그래도 오늘이나 오실랑가 했구마요."
얼굴 꺼칠한 남자가 반색을 하며 문을 활짝 열었다. 문을 들어서면서 바로 다다미방이었다. 천장이 낮고 침침한 방에는 여러명의 남자들이 웅크리고 누워있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기도 했다. 집 시늉만을 해놓은 싸구려 합숙소에 들어 있는 조선 노동자들이었다.
"보이소, 우리 공치는 날 온다 캤든 대학상들이 왔는 기라요."
그 남자는 여러 사람들에게 알렸다.
"머시라, 그 대하상들이 와."
"다덜 일어나드라고, 귀헌 손님 오셨는디."
"아따, 짭짭허든 참에 잘되았네.'
사람들이 바쁘게 앉을 자리를 골라 나갔다. 낡은 다다미방은 사람들이 수에 비해 너무 좁았다.
"빈손으로 오기가 뭐해 이걸 좀..........."
허탁이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술병을 꺼내놓았다.
"아이고, 학상덜이 무신 돈이 있다꼬...."
"허, 돈벌이넌 우리가 허는디...."
"긍께말이여, 우리 겉은 인종덜 찾어오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디." 사람들은 민망해하고 겸연쩍어 했다. 그러면서도 둘러앉은 자리에는 금방 화기가 감돌았다.
"비도 오고 다들 출출하실 건데 술부터 한잔씩 하시지요."
송중원보다 비위가 좋은 허탁이 술병마개를 땄다. 안주도 없이 술잔이 돌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꿀을 핥듯이 작은 정종 잔을 맛있게 비워나갔다.
"귀헌 대학상덜이 짐승만도 못 헌 우리덜얼 요리 찾어옹께 너무 화감혀서 기가 맥히요."
한사람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들도 고학을 하는 처지라 따로 돕지는 못하고 이렇게 고생들을 하시는데 마음만 쓰일 뿐입니다."
허탁이 겸손하게 말을 받았다. 만일을 생각해서 자신들의 신분을 일절 밝히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실태조사니 뭐니 하는 말도 쓰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그저 같은 동포로서 정을 나누는 것으로 해두었다. 경찰에서는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의 접촉을 예민하게 노리고 있었다.
"어떻게, 돈들은 좀 벌었나요?"
허탁이 넌지시 물었다.
"말도 마이소. 이기 지 살 파목기지 하로 품 70전으로 무신 돈얼 벌겠능교. 한심한 기라요."
아까 문을 열었던 남자가 고개를 내둘렀다.
"어허, 그리 멋대가리 없이 무질러서 말해 불면 어찌 알아묵어지간디. 그 70전이 어찌어찌 깨지고 이러저러허니 날라간께 돈벌기넌 글른 것이다 허고 조단조단허니 세세허게 말해야제."
옆의 남자가 퉁을 놓았다.
"그렇나, 자네가 그리하소."
"맞다, 자네가 말재주가 안 좋나."
다른 남자도 거들었다.
"이, 나가 야그허능 것이야 존디, 그 야그가 잠 질덜 안 혀?"
그 남자는 목을 쓰다듬으며 짭짭 입맛을 다셨다.
"헤, 술 한 잔 더 묵고 잡다 그것이제?"
"맞다, 술 한 잔 더 묵으라."
그 남자는 능청스럽게 술을 받아 홀짝 마셨다. 그리고 입을 훔치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긍께 어째 돈얼 못 버냐먼 말이요 이, 하로 70전얼 받어 갖고 여그 합숙소에 숙식비로 뜯기고 나면 30전이 못남으요. 근디 그 돈으로 신얼 사신제, 담배럴 사야제, 이발도 해야제, 배탈나고 중기 생기면 약도 사제, 그러다 보면 술 한 방울 입에 안 대도 돈이 솔래솔래 다 없어져뿌요. 근대 일이나 한 달 내내 안 쉬고 허먼 그래도 돈이 잠 모타지기라도 헐 것인디, 요리 염병 허고 비가 꾸질 꾸질 와불먼 그대로 공치고 만당게라. 거그다가 몸이나 아파 불면 영축없이 빚을 짊어지고 말구만요. 요런 꼬락서니니 무신 돈얼 벌겠소. 애초에 왜놈덜 말 믿고 배럴 탄 우리가 병신 팔푼이덜이제."
그 남자는 역시 입담 좋게 술술 말을 풀어놓았다. 그 남자의 말은 그들의 몰골이 왜 그리 메마르고 초췌하며 입성이 왜 그리 후줄근하고 남루한지를 잘 설명하고 있었다. 중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밥속소 밥이 배에 찰리 없었고, 옷이 아무리 헐어도 옷을 사 입을 여유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일본 노동자들도 품삯이 그런가요?"
송중원이 입을 열었다.
"아닌 기라요. 그 사람들이사 우리 곱쟁이로 안 받능교."
"우리 허고 똑겉은 일얼 허닌디도 그놈덜헌티넌 두 배럴 준당께라. 같은 왜놈덜이라고 즈그덜 찌리 싸고도는 것인디, 참 기가 차요."
"그렁게 누가 나라 뺏기라고 혔어."
송중원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공장에서도 그렇게 임금 차별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노동판에서까지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으로 올 때 왜놈들이 속였던가요?"
허탁이 괴로운 얼굴로 물었다.
"말도 마이소, 돈벌이가 기맥히게 좋다꼬 사람덜얼 안 모아딜였능기요. 대판에 떨어져 갖고야 속은 줄 았았능기라요."
"개잡놈에 새끼덜, 선대금 띠고 밥값 디고 해감서 우리 살껍데기꺼지 다 빗게묵을라고 헌 놈덜이요."
"처음에는 대판으로 오셨군요?"
허탁이 확인하려는 듯 되물었다.
"야아, 대판부두에서 일얼 혔는디, 그놈에 선대금 다 갚고 풀려난께 수중에 돈이 있어야제라. 집으로 가자도 배삯이 없고, 처자식덜이 돈벌어 어기럴 눈 빠지게 기둘리는디 맨주먹으로 갈 수도 없는 일 아닝게라. 근디 동경이 더 품삯이 낫다는 소문이드만요. 그려서 동경으로 온 것인디, 여그도 사람 못살 지옥이기넌 매일반이구만요."
송중원은 소리 죽여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면서도 뜨거운 가슴을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경상도 전라도 분들이 많으신 데, 다른 도 분들은 안 계십니까?"
담배를 말아 불을 붙인 허탁은 질기게 임무 수행을 하고 있었다.
"경상도 전라도가 가차우니께네 그리된 것 아니겄능교. 충청도 황해도 사람도 더러 있심더."
"예에, 그렇겠군요. 헌데 고향에서는 무슨 일들 하고 사셨던가요?"
"그야 다덜 땅 파묵는 농새꾼덜 아니겄소. 근대 그놈에 토지조산가 염병인가로 농토 뺏긴 사람덜이 태반이제라. 하로아칙에 전답 뺏겼제, 소작살이도 뜻대로 안 되제, 그냥 굶어 죽을 수 없응께 배럴 탄 것이구만요."
"내사 마 잘못 생각했능기라. 맘 독허니 묵고 화전얼 일궜어야 하는 긴데. 화전얼 일궜으면 요런 꼬라지야 안됐을 거 아이가."
한 남자가 한숨을 풋 쉬었다.
"허, 속편헌 소리 허고 앉았네그랴. 화전이라고 우리 맘대로 일굴 수 있간디. 왜놈덜이 막고 나스는 것 몰라서 허는 소리여?"
"그려, 화전 해묵기도 글렀고, 어찌어찌 배삯이나 벌아갖고 집 찾어가면 처자석 끌고 민주 땅이나 찾어가야제. 만주 땅서야 못살겠다고 되짚어 오는 사람들이야 없응게."
"아이고, 만주당이고 벨수 있겄능교. 거도 마 되놈 지주덜이 몬 살게 헌다쿠든데."
한 남자가 또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 빌어 묵을 팔자덜이다. "
다른 한숨이 이어졌다. 송중원은 허탁의 다리를 남들 모르게 찔렀다. 더 알아볼 것이 없었던 것이다. 허탁이 송중원에게 눈길을 돌렸다. 송중원은 가만 가자는 눈짓을 했다.
"돈이 모아지면 다들 고향으로 돌아가실 거지요?"
허탁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몇몇이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노 놀러 오도록 하고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들 건강하세요."
허탁이 인사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예, 몸들 조심하세요."
송중원도 사람들을 둘러보며 인사했다. 그들은 모두 비가 추적거리는 밖에까지 따라 나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고마움과 서운함이 함께 어려 있었다.
"우리 고학생활은 댈 게 아니로군."
전찻길에 이르러 허탁이 시름겹게 말했다.
"글쎄, 우리 고학이야 어디 고학인가. 우리야 반 고학이니 말할 것이 못 되고, 진자 고학하는 학생들 고생은 노동자들 못지않지."
"그렇긴 하지. 헌데, 저 사람들 만나본 느낌이 어떤가?"
"느낌이랄 게 뭐 있나. 비참하고 절망적이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해."
"모두가 무사히 돌아가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돌아가면 뭘 하나."
송중원은 참고 있던 한숨을 토해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말이 끊어졌다. 전차에 올라서도 그들은 말이 없었다. 송중원은 빗방울들이 쉴 새 없이 부딪혀 깨지고 있는 흐린 창문 저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비에 젖은 동경의 모습이 활동사진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언제나 낯선 도시, 일본의 심장부. 새로 지어지는 서양식 건물들과 더불어 언제나 생동하고 있는 것 같은 도시. 개명과 문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듯이 날로 번창해 가고 사람들이 불어나고 있는 도시. 송중원은 그 부유한 도시의 모습 위에 남루한 조선 노동자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동경은 다름 아닌 일본의 모습이었고 일본의 실체였다. 그리고 조선 노동자들은 조선의 모습이었고 조선의 실체였다. 송중원은 눈을 질근 감으며 신음을 씹었다.
송중원은 고학하는 시간을 쪼개가며 허탁과 함께 며칠 동안 조선 노동자들의 실태보고서를 작성했다. 송중원은 그 일에 공부하는 것과 다름없는 열성을 바쳤다. 물론 그 일은 어떤 해결책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유학생들 몇십 명의 힘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사상학습을 구체화시키는 첩경임을 깨닫게 되었다. 송중원은 보고서를 챙겨 가지고 학교로 갔다. 개학식에 참석할 마음보다는 어서 만나보고 싶은 얼굴들이 많았던 것이다. 개학식이 끝나자 송중원은 허탁과 홍명준 셋이서 이야기할 장소를 찾아 나셨다. 교정은 끼리끼리 짝을 지은 학생들로 왁자했다.
"자네들 돈벌이 많이 했나?"
좀 작은 키에 얼굴이 해사한 홍명준이 송중원과 허탁을 번갈아 보며 웃었다.
"암, 자네 학비도 대줄 만큼 벌었지."
허탁이 헛기침을 했다.
"아이고, 황공하여이다. "
홍명준이 상감 앞에 읍하는 것 같은 시늉을 하고는, "자네 자당님께서 서운해하시는 눈치시데. 괜한 고생 사서 한다고." 그는 허탁에게 눈총을 쏘았다.
"어허, 이 사람 참. 그러게 우리 집은 왜 찾아가고 그래. 자넨 그놈의 양반예절 좀 털어버리는 게 좋아. 자네 예절에 우리 어머님 심사는 어찌되나."
허탁은 화가 난 척 목청을 높였다.
"저 배짱 좀 보게. 불효 저질러놓고도 큰소리는."
"모르겠네. 불횬지 어쩐지. 몰락한 양반 집안의 장자 심정을 그 누가 알리."
"또 저 소리. 자네 자당님 말씀대로 자네가 좀 편히 공부를 마친 담에 돈벌이해서 동생들을 공부시키면 될 거 아닌가."
"됐네, 됐네. 그 얘긴 관두세."
허탁은 손을 내젓고는, "자네 돈은 두둑이 받아왔나? 우리 두 빈민이 술맛 못 본 지가 오래네." 그는 씨익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말도 말게. 이번엔 아주 단단히 곤욕을 치렀네."
홍명준이 쓰게 입맛을 다셨다.
"아니, 왜? 흉년이 들었다는 말도 없던데. 흉년이 좀 들었다고 해도 만석|꾼 부자가 끄떡할 리도 없고."
"사람 참 속편하긴.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놈에 고등고시가 문제란 말일세. 졸업하기 전에 꼭 고등고시에 합격해야 한다고 어찌나 성화신지 돈을 받아올 맛이 나야 말이지. 세상이 바뀐 것은 생각지도 않고 당신이 벼슬 못한 한을 나한테서 풀려고 하시니 원."
홍명준의 해사한 얼굴이 일그러지며 짜증이 드러나고 있었다.
"난 또 무슨 소리라고. 그 고민이야 간단하게 해결하라니까. 일단 판검사가 돼서 우리 조선사람들을 위해 판검사 질을 하란 말일세. 그럼 자네 춘부장 어른 소원 풀어드리고 조선사람들 보호하고, 일거양득 아닌가. 내가 잡혀 들어가면 무죄로 풀어주고, 좀 좋아?"
허탁이 농담하듯이 말하며 홍명준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 사람아, 자네 일 아니라고 말 그리 쉽게 하지 말어. 왜놈 판검사들 등쌀에 무슨 수로 조선사람들을 보호한단 말인가. 그거야 총독부 밑에서 조선사람들이 자치하자는 것이나 똑같지."
홍명준이 내쏘았다.
"아니 이 사람아, 그건 전적으로 다른 문제야. 자치를 하자는 건 일본의 지배를 합법적으로 인정해 주는 동시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걸 자인하는 또 하나의 매국 행위야. 그러나 판검사가 돼서 최선을 다해 조선사람들을 돕는 건 적의 옷을 입고 적진 속에서 적과 싸우는 거란 말일세. 그걸 잘만 하면 그건 또 다른 독립투쟁의 방법이 될 수 있다니까. 자네 생각은 어떤가?"
허탁은 농담기 없이 진지해진 어조로 말하며 송중원을 쳐다보았다.
"법학부에 다니는 조선 학생들이 전부 그런 생각을 갖는다면 그야 큰 힘이 되겠지. 일본법을 아는 건 적을 아는 첩경이니까."
송중원은 판검사가 되겠다고 법학부에 다니는 조선 학생들을 경멸했다. 그러나 그들이 색다른 의식을 갖추기를 기대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됐네,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얘기들인가. 가서 점심이나 먹세."
홍명준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막음을 했다.
"이 사람아 겁내지 말게. 교정은 아직도 어지간한 비밀장소보다 더 안전하네."
허탁이 피식 웃었다.
"자네가 한번 큰코다쳐야 그놈에 유들유들한 배짱이 졸아들 거야."
"그래, 명심하지. 점심이나 푸짐하게 사게나."
허탁의 이 말에 송중원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한양 토박이인 허탁과 홍명준은 중학교 동창답게 허물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들의 우정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건 두 집안의 재력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 그렇지 않았다. 그건 엄밀하게 따져보면 의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었다. 허탁은 홍명준을 언제나 스스럼없이 <점심이나 푸짐하게 사게>하는 자리쯤에나 놓아두고 있었다. 허탁이 홍명준에게 의식을 불어넣고자 하는 것은 <조선사람들을 위한 판검사가 돼라>는 정도였다. 홍명준 역시 새 사상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이 친구들에게 밥 사고 술 사는 것을 즐기며 그저 평범한 대학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허탁 씨, 허탁 씨이-"
여자의 외침에 그들 셋은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 그렇게 불렀는데도 못 들은 척하면 어떡해요. 목 다 터지겠어요."
허탁 앞에서 뛰기를 멈춘 여자가 숨을 할딱거리며 쏟아놓았다.
"이거 정애 씨 아니시오. 방학 재미있게 보냈소?"
허탁이 밝게 웃었고, 여자는 거침없이 손을 내밀었다.
"네에, 명사십리랑 금강산에랑 갔었는데 별 재미는 없었어요."
여자는 허탁의 손을 잡은 채 좀 헤프다 싶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안녕하세요, 홍명준 씨."
허탁과 악수를 끝 낸 여자는 홍명준에게 악수를 청했다.
"예, 안녕하시오."
홍명준에 어색하게 웃으며 여자의 손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송중원 씨."
"예, 오랜만입니다."
송중원은 자기 차례가 횐 박정애의 손을 잡으며 역겨움을 느꼈다. 그러면서 뜻밖에 작고 부드러운 박정애의 손에 멈칫 놀랐다. 얼굴보다는 손이 훨씬 더 곱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정애씨, 더 예뻐졌소. 그 모자하고 옷도 아주 잘 어울리고."
허탁이 호인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박정애를 훑어보았다.
"어머, 그래요? 역시 허탁 씨는 신사세요. 제가 기분 좋아 런취를 사겠어요. 다들 가시죠."
박정애는 손바닥을 찰싹 맞때리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런 박정애는 유백색 바탕에 연보랏빛 동그라미 무늬가 찍힌 후레아 원피스에 보라색 리본을 두른 망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짙은 화장에 뾰족구두를 신고 있었다.
"런취가 뭐요?"
홍명준의 말이 퉁명스러웠다.
"런취를 모르시나요? 점심이죠."
박정애의 목소리가 튕겨졌다.
"그럼 점심이지 런취가 뭐냔 말이오"
"호, 왜 저리 센스가 둔하실까. 약식으로 사겠으니까 런취죠. 한마디 하면 탁 알아들어야 되는 것 아녜요?"
"허 참...."
어이없다는 듯 홍명준이 헛웃음을 흘렸다.
"가요, 허탁 씨. 비프스테이크를 맛있게 하는 아주 멋진 까페가 새로 생겼어요. 노래를 부를 수도 있는데, 이번에 제가 홍난파 작곡 봉숭아를 완전히 배워 갖고 왔거든요."
박정애는 곧 허탁의 팔을 잡아끌 것 같은 기세였다.
"너무 그러지 마쇼. 아무리 종로 상원을 주름잡는 거상의 딸이라고 해도 남자 셋이서 여자 밥을 얻어먹게 생겼소. 내가 점심을 사려던 참이었으니 정 할 일이 없으면 날 따라오시오."
홍명준의 말은 차가웠다.
"아니, 그 말뜻이 뭐죠? 왜 우리 아버지 직업은 더럽다고 그러는 거지요? 홍가 허가 송가는 양반이라 상인 딸년하고는 상대할 수 없다 그건가요? 천한 상인의돈이라 밥을 안 얻어먹겠다 그거예요? 이거 왜 이래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박정애는 화난 고양이가 되어 홍명준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아, 아, 그게 아니고, 그게...'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홍명준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 지 몰라 그저 더듬거렸다.
"정애씨, 정애 씨, 내 말 들어보시오. 홍형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남자 체면을 말하는 것 아니겠소. 우리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그동안 정애 씨를 상대나 했겠소? 생각해 보시오. 그동안 우리가 서로 얼마나 격의없이 대해 왔는가. 홍형 말이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게 됐지만 그렇다고 정애 씨가 오해를 하면 되겠소? 홍형 뜻을 이해하시오."
허탁이 능란하게 사태를 수습하고 나섰다.
"됐어요, 그럼 내가 홍명준 씨에게 직접 확인하겠어요."
박정애는 긴 머리카락을 내치듯 어깨 뒤로 넘기며 몸을 돌렸다. 허탁은 홍명준에게 빠르게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홍명준 씨, 허탁 씨 말이 맞나요?"
박정애의 독 오른 눈초리가 홍명준에게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렇소, 오해했다면 그 말 취소하겠소."
똥이 무서워서 피한다더냐 하는 심정으로 홍명준은 이렇게 말을 해치웠다.
"아, 역시 최고 신사는 홍명준이야. 자아, 숙녀의 호의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것도 신사도가 아니니까 우리 다같이 비프스테이크로 런취를 먹도록 하지. 제2의 윤심덕 박정애 씨의 쏘프라노 독창도 가망할 겸 말이야. 자아, 정애 씨가 앞장서시오."
허탁이 얼렁뚱땅 너스레를 떨었다.
"좋아요. 분명히 말해 두지만 신사는 홍명준 씨가 아니라 허탁 씨예요."
박정애는 쏘듯이 말하고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홍명준은 떫은 감을 씹은 얼굴로 쓴 입맛을 다셨다.
"우리 배고픈 양들을 위해 좀 좋은 일인가. 저것도 다 우리 동포 아닌가."
허탁이 나직하게 말하며 홍명준의 등을 밀었다. 송중원은 걷기 시작하며 허탁이란 사나이를 또 생각하고 있었다. 성품이 좋은 것인지, 도량이 넓은 것인지, 아니면 생각이 깊은 것인지 딱히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합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성악을 한다는 박정애의 언행이 꼴사납고 역겹다가도 <저것도 다 우리 동포 아닌가>하는 허탁의 말에 그런 감정은 가만 허물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들은 박정애가 하는 대로 택시를 탔고 그녀를 따라 긴자에서 내렸다. 2층에 있는 카페는 서양식 치장이 호화로웠다. 바닥에는 빨간 융단이 깔려 있었고, 하얀 벽에 걸린 서양 그림들이며 조각품 같은 의자들이 서양 냄새를 물씬물씬 풍기고 있었다. 허탁이나 송중원은 말할 것도 없고 홍명준까지도 두리번거리고 쭈뼛거렸다. 박정애는 그런 그들을 옆눈질로 훑으며 묘하게 웃고 있었다.
"뭘들 드시겠어요?"
박정애가 생글 웃으며 물었다.
"우린 다 비프스테이크."
잔소리 말라는 듯 허탁이 말했다.
"이거 이래 가지고 장사가 되나?"
손님이 별로 없는 실내를 둘러보며 홍명준이 중얼거렸다.
"아직 점심시간이 이르잖아요."
박정애가 냉큼 말을 받으며 팔목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금빛 시계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음식 주문을 박정애가 도맡아서 하는 동안 세 사내는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박정애가 주문을 끝냈는데도 말을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 봐요, 손님들 많잖아요."
박정애가 턱짓을 했다. 일본말들을 하며 서넛씩 두 패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홍명준에게 한 말인데도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정애 씨, 이태리 유학 간다는 건 어찌 됐소?"
허탁은 고심 끝에 찾아낸 이야깃거리를 꺼내놓았다.
"어쩜, 그걸 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박정애는 두 손을 맞잡으며 화들짝 반가워하며,
"가야죠, 꼭 가야죠. 근데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그 먼 나라까지 가는데 동행자가 없잖아요. 든든한 동행자만 있으면 당장에라도 떠나겠어요."
박정애의 목소리는 슬픈 듯 쓸쓸한 듯 야릇하게 변했다.
"든든한 동행자라면 남자를 말하는 거요?"
홍명준이 불쑥 물었다.
"예, 그런 셈이죠."
"허, 남녀평등 부르짖는 신여성답지 않게 그 문슨 소리요? 무서운 것 없이 일본까지 왔으면 이태리도 당당하게 혼자 가야 신여성이지."
홍명준은 노골적으로 야유하고 있었다.
"흥, 모르는 소리 말아요. 누가 무서워서 그러는 줄 알아요? 든든한 동행자를 곰처럼 기운 센 남자로 생각하나 보죠? 천만에요. 내 예술을 이해하고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될 수 있는 멋진 남자와 예술의 나라 이태리에서 로맨스도 즐기며 공부도 하겠다는 뜻이에요. 알아들었어요?"
박정애의 날카로운 반격이었다. 홍명준은 직격탄을 맞고 머쓱해졌고, 송중원은 씁쓰름하게 웃고 있었다.
"허허허...... 역시 구 남성은 신여성을 못 당하는군."
허탁은 어깨를 들먹이며 웃었다.
"다들 그 고리타분한 생각들 좀 바꾸세요. 춘원 이광수 선생이, 남자들이 바람을 피우면 여자들도 바람을 피워 보복할 수 있어야 하고, 여자도 자기 의사로 사랑을 선택해야 하며, 사랑의 감정도 자유롭게 표현해야 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여기 동경에서 한 것이 언젠 줄 아세요? 벌써 10년도 넘었어요. 춘원 선생 같은 분이 열 명만 있었어도 우리나라는 획기적으로 달라졌을 거예요."
박정애는 제물에 열이 올라 그렇지 않아도 성악을 한다는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높아져 있었다.
"예, 이광수 같은 사람이 열 명쯤 더 있었으며 우리나라 꼴 참 볼만하게 됐겠죠. 민족개조론이 열 개는 더 나왔을 것이고, 그 힘으로 지금쯤 친일파들의 자치가 착착 진행되고 있을 테니까요."
송중원이 뽑아 든 칼이었다. 그는 가슴속 깊이 아로새겨진 이광수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토해내고 말았다.
"난 그런 것까진 골치 아파 잘 몰라요."
박정애는 상을 찌푸리며 손바닥을 홰홰 내저었다. 그때 종업원이 수프를 내왔다. 박정애는 시범이라도 보이듯 그 많은 식사 도구들 중에서 스푼을 집어 들었다.
"자아, 부담 없이 맛있게들 드세요."
박정애는 수프를 드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 기세 당당한 얼굴에는 묘한 웃음이 어려있었다. 세 남자는 모두 편치 못한 기색으로 스푼을 집어 들고 있었다. 그들이 수프를 몇 숟가락씩 떠놓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땅이 불끈 속기는 것 같은 충격이 가해져 왔다. 몸이 들썩 솟는 기분이었다. 다음 순간 땅이 푹 꺼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위아래로 솟겼다가 꺼지고 다시 솟겼다가 꺼지는 등 요동이 재빠르게 반복되었다. 그 걷잡을 수 없는 요동에 집이 마구 흔들리며 삐꺽거리는 비명을 질렀고, 식탁과 그릇들이 한꺼번에 펄쩍 뛰어올랐다가 식탁은 식탁대로 떨어지고 그릇들은 제각기 흩어져 굴러가고 깨졌으며,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나뒹굴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상하의 흔들림이 바뀌었다. 좌우로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집이 곧 무너져 내릴 듯이 뒤흔들리고, 물건이란 물건들은 죄다 떨어지고 구르고 부딪치고 깨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쓰러지고 하며 아우성과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집채 여기저기서 우지끈 삐꺽 나무들이 부러지고 어긋나는 소리가 요란하고, 바깥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야단법석이었다. 마구 내둘러대던 좌우의 요동이 가라앉았다. 처음의 상하요동이 키질이라면 다음의 좌우 요동은 체질이었다. 그 갑작스럽고 사정없는 키질과 체질 속에서 사람들이고 물건들이고 한갓 낱알이거나 가루에 지나지 않았다.
"이게...... 이게 뭐예요?"
바닥에 쓰러져 있던 박정애가 몸을 일으키며 더듬거렸다. 잔뜩 공포에 질린 그녀는 울고 있었다.
"아마 지진인 것 같소, 지진......"
허탁도 넘어져 있던 바닥에서 일어나며 어물거렸다. 어리둥절한 그의 얼굴에도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송중원도 홍명준도 멍하고 어리벙벙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서워요, 어서 여기서 나가요."
박정애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울먹였다. 그녀가 쓰고 있던 예쁜 모자는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예...... 잠깐 좀......"
허탁이 두리번거리며 어물거렸다. 그런데 돌발사태가 또 일어났다. 창문들을 마구 뒤흔들어대며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강진을 동반한 돌풍이었다. 그 세찬 바람 소리와 함께 물건들이 굴러가고 부딪치고 깨지는 소리들이 다시 요란해지고 있었다. 카페의 손님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서성거렸다. 그런데 유리창이 와지끈 깨지며 무엇인가가 날아들었다. 어지러운 융단 바닥에 떨어진 것은 어디선가 날아든 기왓장이었다. 사람들은 그 기왓장이 폭풍에 날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기왓장을 날려 보낼 만큼 위력이 큰 폭풍에 사람들은 그만 기가 질리고 있었다.
"불이야, 불! 불이야!"
주방 쪽에서 터져 나온 외침이었다. 그리고 네댓 사람이 허둥지둥 뛰쳐나오고 있었다.
"뭐야, 불?"
"아니, 저기 봐 저 연기!"
손님들이 소리쳤다. 주방 쪽에서 밀려 나오는 연기가 천장을 타고 퍼지고 있었다.
"다들 피해요. 불이오, 불!'
종업원은 다급하게 외쳤다. 손님들이 우루루 출입구로 몰려갔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머, 엄마!"
여자의 비명이 울렸다. 그리고 박정애가 곤두박였다. 뾰족구두가 계단에 걸리면서 발을 헛디딘 것이었다. 그 뒤를 따르던 두서너 사람이 뒤엉키며 박정애를 덮쳤다.
"멈춰, 멈춰! 사람이 넘어졌다!"
허탁이 일본 말로 외쳤다. 송중원과 허탁이 뒤엉킨 사람들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박정애는 계속 비명을 지르고, 연기는 벌써 계단까지 자욱하게 퍼지고 있었다. 위에 있는 사람들이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송중원과 허탁은 박정애를 부축하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거칠게 불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정신없이 큰길로 내달았다.
"안돼요, 안돼요. 나 발 아파 못 가겠어요."
박정애가 울면서 주저앉으려고 했다.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던 허탁과 송중원도 뛰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 구두, 내 구두......"
박정애가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그때서야 허탁과 송중원은 박정애가 구두가 벗겨진 맨발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다리시오, 내가 갔다 올 테니까."
허턱이 몸을 돌렸다.
"가면 뭘해. 벌써 다 불붙었을 건데."
숨을 몰아쉬며 홍명준이 내쏘았다. 그러나 허탁은 카페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길거리는 수라장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두서없이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온갖 물건들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날아가고 있었고, 가로수 가지들이 찢어지거나 부러져 있었고, 여지저기서 불길이 솟고 있었다. 허탁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어머, 난 어떡해요.'
박정애가 선 자리에서 종종걸음을 쳤다.
"그러게 그놈의 뾰족구두는 왜 신고 다녀요."
홍명준이 버럭 내쏘았다.
"뭐라구여!"
박정애가 맞받아 소리쳤다.
"허이 이 사람이 왜이러나."
허탁이 홍명준에게 눈짓했다.
"아무 신이나 어디서 사야 할 것 아닌가?"
송중원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긴 해야겠는데 이 난리통에 이거......"
허탁이 바람을 등지며 난처해했다.
"나 집에 좀 데려다주세요. 온몸이 아파서 꼼짝을 못 하겠어요."
박정애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계단에서 곤두박이면서 어디에 씻긴 것인지 박정애의 왼쪽 볼에는 서너 줄의 긁힌 상처가 나 있었다.
"빌어먹을, 재수가 없을라니까...... 나 먼저 가겠네. 또 만나세."
홍명준이 벌컥 화를 내며 돌아섰다. 허탁과 송중원은 아무말도 못하고 바람 속을 걸어가고 있는 홍명준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흥, 꼴보기 싫어. 뭐가 잘났다고 저 모양이야."
박정애가 이를 앙다물었다.
"자아. 우선 신발가게를 찾아보도록 합시다. 헌데, 그 맨발로는 못 걸을 텐데 내 양말이라도 신겠소?"
허탁이 박정애를 쳐다보았다.
"허탁씨 발 부르트면 어쩌게요?"
"내 걱정은 마시오. 몇십 리 걷는 것도 아니니까."
"예, 그럼 주세요. 제가 열 켤레로 갚아드릴게요."
박정애는 아야야야 신음소리를 내가며 허탁의 양말을 꿰신었다.
"아까처럼 부축을 할까요?"
"아니에요, 제가 두 분 팔을 붙들겠어요."
허탁과 송중원은 박정애가 원하는 대로 팔 하나씩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박정애는 가운데서 두 남자의 팔짱을 끼고 걸으며 연상 가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계단에서 그리됐으니 다치기는 다쳤겠지. 그래도 이게 맹랑하다니까. 신여성 물을 먹어도 단단히 먹었어. 요런 게 머리가 좋은 데로 들면 좀 좋은가.’
허탁이 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무슨 놈의 여자가 영 부끄러운 것을 몰라. 자유연애를 좋아해서 남자들의 팔을 많이 끼어봤나? 아니지, 이런 여자가 숫처녀이기나 할까? 처녀 아닌 처녀가 수두룩하다고 하던데.’
송중원이 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신발가게는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바람은 좀 약해지는 듯했는데 거리는 더 소란스럽고 복잡해지고 있었다. 크고 작은 보퉁이를 든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불길을 피해 집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바람은 세차게 불고 집들은 판자로 지은 것이라서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었다.
"어머, 저 전차 좀 보세요."
박정애가 놀라서 외쳤다.
전차가 불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피신을 했는지 전차는 텅 비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란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바람을 탄 불길들이 거센 파도를 일구고 있었고, 불 냄새 뿜는 연기가 거리마다 자욱하게 퍼지고 있었다. 소방차들이 숨 가쁘게 경적을 울려대며 달려가고 있었다. 동경이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들은 불길을 피하며 사람들을 헤치고 한 시간 이상 헤매다닌 끝에 신발가게를 찾아냈다. 유리문이 깨지고 운동화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주인 없습니까?"
허탁이 몇번이고 목청을 높였지만 전혀 기척이 없었다.
"별수 없네. 그냥 하나 실례해야지."
송중원의 말이었다.
"자아, 맘대로 하나 골라보시오. 지금부터 주인은 나니까."
허탁이 장수 시늉을 내며 헤벌쭉하게 웃었다. 이런 경황 중에서도 그리 느긋한 허탁을 보며 송중원은 얄밉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박정애는 허둥지둥 운동화 하나를 꿰신었다.
"여기다 돈을 놓고 가면 어때요?"
박정애가 허탁을 쳐다보았다.
"그 양심은 좋지만, 그렇게까지 양심 차릴 것 없어요. 왜놈들이 우리 것 뺏어간 게 얼만데. 자아, 갑시다."
허탁이 박정애의 등을 밀었다. 전차는 통행이 완전 중단되어 있었다. 불탄 전차들이 많으니 시설이 망가지지 않을 리 없었다. 택시도 보이지 않았고 인력거들도 굴러다니지 않았다.
"어떡하면 좋죠?"
박정애가 울상을 지었다.
"불편해도 참고 걸어야조."
허탁이 얼른 팔을 잡으라는 시늉을 했다. 바람은 그 기세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너훌거리고 휘감기고 널름거리는 불길들은 오히려 더 기세가 맹렬해져 있었다. 길거리에도 사람들이 더욱 혼잡하게 들끓었으며 뒤엉키고 있었다. 여자들의 울음 섞인 외침이 긴 꼬리를 잇고 있었다. 잃어버린 아이들을 찾고 있는 울부짖음이었다.
"아이고 죽겠다. 저 물이나 좀 마시고 갑시다."
허탁이 물이 솟구치고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건 무슨 물이죠?"
박정애가 다리를 절룩이며 물었다.
"수도관이 터진 모양이오."
허탁의 추측은 맞았다. 세 사람은 손 바가지로 물을 받아마셨다. 거침없이 솟구치고 있는 수돗물은 길 한쪽으로 물줄기를 이루며 흘러가고 있었다.
"아이고, 물배를 채웠으니 담배나 한 대씩 피우고 가세."
허탁이 인도에 털퍽 걸터앉았다.
"이거 이러다가 동경 시내 다 잿더미 되는 것 이닌가."
송중원이 담배를 받아들며 말했다.
"그래도 아까울 것 없지. 당연히 받아야 될 천벌을 받는 거니까."
허탁이 성냥을 칙 그어댔다. 박정애는 곧 터져 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참아냈다. 허탁의 서슬이 너무 섬뜩했던 것이다.
‘그건 너무 심한 말이잖아요.’
괜히 이 말을 했다가 허탁의 서슬에 불을 붙여서는 안 되었다. 당장 혼자 두고 떠나버리는 것도 큰일이었고, 앞으로 미움을 사게 되면 더 큰 일이었던 것이다. 허탁의 그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젊은 남자로서 그런 창창한 오기를 품고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 믿음직스럽기도 했다. 그들이 박정애의 하숙집에 도착한 것은 해거름이 다 되어서였다.
"어머, 우리 집은 불이 안 났군요."
박정애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그럼 불이 났을 줄 알았소?"
허탁이 픽 웃었다.
"네에. 속으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자아, 어서 들어가요."
생기가 난 박정애는 허탁과 송중원을 잡아끌었다.
"아니, 여학생 하숙집에 남학생이 들어가서야 됩니까."
허탁이 놀라며 정색을 했다.
"어머, 또 케케묵은 구식 소리. 여긴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에요. 점심도 굶고 얼마나 배고플 텐데 어서 저녁을 먹어야 되잖아요."
"아니, 여학생 하숙집에서 저녁까지 먹어요? 얼마나 흉잡히고 욕 먹을려고."
허탁이 더욱 놀랐다.
"그런 걱정 안 해도 돼요. 여긴 일반 하숙집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하고 거래하는 상인 집이니까 얼마든지 밥을 먹어도 된단 말에요."
"춘부장께서 딸의 안전조치를 하신 모양이군요."
송중원의 말이었다.
"맞아요, 센스가 빨라서 좋네요.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어서 들어가세요. 어디서 밥을 사먹을 데도 없잖아요."
박정애는 다시 두 사람을 잡아끌었다. 허탁과 송중원은 마지못한 척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배가 너무 고팠고, 날은 어두워지는데 영업을 할 식당이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박정애의 말마따나 그 집 주인은 허탁과 송중원을 환대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하마터면 밟혀 죽을 뻔한 자기를 구해 주고 여기까지 데려다주었다는 박정애의 설명을 듣고는 집주인은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다. 허탁과 송중원은 마음 편안하게 박정애의 방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자신들의 옹색한 입장을 금방 편안하게 만들어준 재치에 송중원은 박정애가 역겨운 여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느낌에는 박정애의 또 하나의 모습이 겹쳐져 있었다. 주인 없는 신발가게에서 굳이 돈을 놓고 나오려는 마음이었다.
"많이 많이 드세요. 점심 굶은 것까지 다 드세요."
박정애는 두 사람의 밥공기가 비기 바쁘게 밥을 퍼담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이고, 숨 막힌다."
허탁이 배를 쓸며 밥상에서 물러나 앉았다. 송중원도 양껏 배를 채웠다. 자취생활에 비하면 반찬이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던 것이다.
"이거 배 터지게 먹고 나니 슬슬 졸음이 오네."
담배를 뻐끔거리는 허탁의 중얼거림이었다.
"그래요, 여기서 주무시고 가세요."
박정애가 불쑥 말했다.
"예에에?"
허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뭘 그리 놀라세요. 여긴 그냥 하숙집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빈방이 있으니까 걱정없어요. 날은 어두워지고 전차도 안 다니는데 어떻게 가실려고 그래요. 차나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낼 아침에 가시면 좋잖아요."
박정애의 말은 그냥 인사가 아니었다.
"아니, 됐소. 사람이 차릴 체면은 차려야지. 어이 중원이, 가세."
허탁은 담배를 비벼끄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럼 차나 들고 가세요."
박정애가 당황스런 몸짓을 지었다.
"더 늦기 전에 가야겠소."
허탁은 매정하다 싶게 방을 나섰다. 그 뒤를 따라가며 송중원은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건 허탁의 또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밤거리는 여전히 북새통이고 수라장이었다. 밤이라서 불길들의 난무는 더욱 선명하고 거센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람결은 아주 약해져 있었다. 허탁과 송중원은 밤이 늦어서야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작은 부엌과 비좁은 방 안에는 온갖 것들이 엎어지고 흩어져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박정애 말대로 이 집은 불타지 않아서 그나마 천만다행이군."
허탁이 흩어진 물건들을 발로 밀치며 피식 웃었다.
"가난한 동네 덕 봤지."
"무슨 소린가?"
"아, 가난한 사람들이 따로 점심 해 먹자고 불을 피웠을 리가 있나."
"그게 그렇게 되나? 맞어, 그 까펜지 식당인지가 그래서 불이 났었군 그래."
"이걸 다 어쩌지?"
송중원이 흩어진 물건들과 허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적당히 밀쳐놓고 잠부터 자세."
"그게, 좋겠어. 너무 고단하군."
그들은 다음날도 새벽 4시에 어김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과자 공장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보나마나 오늘 배달은 못 할 거야."
허탁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래도 얼굴은 내밀어야지. 하루 공짜로 넘어갈 수는 없을 거고, 아마 뒤죽박죽된 공장을 치워야 되지 않을까 싶네."
"귀신! 나도 그 생각을 했는데."
둘이는 마주 보며 흐흐거리고 웃었다. 역시 그들의 예상은 틀림이 없었다. 과자 공장은 물건들만 엉망으로 뒤섞이고 흩어진 것이 아니었다. 공장 한쪽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석탄불을 피워놓고 일하는 공장이 요행히 화재를 모면한 흔적이었다. 송중원과 허탁은 서로 마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공장이 타버렸더라면 또 일자리를 구하느라고 애를 먹을 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옷을 벗어부치고 공장 치우기에 나섰다.
"배달이 없으니 그냥 가도 되는데 일을 도와줄려고?"
공장에서 밤을 지새느라고 잠을 못 잔 주인이 반색을 했다.
"당연하지요. 이렇게 화를 당하셨는데요."
허탁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고, 송중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장이 전처럼 정리되려면 아직 멀었던 것이다.
"아이고, 고맙소 고맙소. 조선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예절 바르고 남을 돕는 의리가 강하고, 이찌방이오, 이찌방!"
주인은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고학생 배달원을 뺀 과자 공장의 직공들은 20여 명이었다. 그런데 출근을 한 사람은 일곱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화를 많이 입었으니 큰일이군."
주인의 걱정이었다. 그들은 모두 힘을 합쳐 공장을 치워나갔다. 직공들은 허탁과 송중원에게 평소와는 다른 호감을 나타냈다. 그런데 점심때가 되어서였다.
"여보, 큰일 났어요. 어제 사방에서 불난 것 있잖아요. 그게 다 불령선인들이 한 짓이래요."
밥을 해 가지고 나온 주인의 아내가 한 말이었다.
"아니, 뭐라고?"
주인이 깜짝 놀랐다. 다른 직공들도 놀라는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송중원과 허탁은 놀라움을 넘어 그만 소스라쳤다. 송중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허탁은 머리가 핑 울렸다.
"아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주인이 버럭 소리쳤다. 그는 허탁과 송중원을 의식하고 있었다.
"신문 호외에 났다는 거예요. 불령선인들이 그전부터 구역을 나눠 분필로 암호를 표시해 가며 방화를 하려고 노리고 있다가 어제 지진이 일어나자 때는 이때다 하고 일시에 불을 질러댔다는 거예요. 우물에 독약도 풀고요."
허탁과 송중원의 눈길이 날카롭게 마주쳤다. 그들이 직감한 것은 조직적인 조작이고 날조였다.
"그 호외 가져왔어?"
"아니오, 말만 들었어요. 틀림없이 그렇게 써 있더래요."
"신문 호외가?......"
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탁과 송중원은 직공들의 눈길이 자기들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어, 더 큰 일이 또 있어요. 그 소식을 들은 경방단 자경단 재향군인들이 들고 일어나 조선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다는 거예요."
허탁은 가슴에서 화끈 불이 붙는 것을 느꼈다. 송중원은 눈앞이 아뜩해지는 걸 느꼈다.
"그건 거짓말이오. 뭐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오."
허탁의 외침이었다.
"맞아요. 조선사람들이 불을 지른 게 아니오. 어제 우리가 식당에 있었는데 지진이 나자 곧 주방에서 불이 났어요. 우리 공장도 저쪽 벽이 타다 만 것은 석탄을 피워놓고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모든 물건들이 엎어지고 뒤집어지는 판에 불붙은 숯덩이고 석탄덩이고 장작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잖습니까. 그 불덩이들이 다 흩어져 불이 난 거란 말입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송중원의 말이었다.
"맞소, 그 말이 맞소. 우리 공장도 그랬으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많아 불을 껐으니까 다행이었지. 다른 집들은 불을 못 끄고 당한 거야. 다 판잣집들인 데다 바람이 그리 세게 불어댔으니 불이 좀 잘 번졌겠다. 그래 그 말이 맞아."
주인이 중얼거리듯이 말하며 연상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신문 호외는 그럴까요?"
주인의 아내는 머쓱해진 채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신문이라고 어디 다 맞나. 어서 밥이나 차려."
주인이 짜증스럽게 내쏘았다. 다른 직공들도 주인의 말을 믿는 기색이었다. 허탁과 송중원은 일단 한시름을 놓았다. 그러나 제대로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들 몇 사람에게만 사실을 납득시킨 것일 뿐 조선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오, 여길 나가선 안 되오. 분하고 억울해도 지금 당장 어쩌겠소. 지금 나갔다가 개죽음당하지 말고 우선 참고 몸보존 했다가 다음에 모든 걸 밝히시오."
주인은 허탁과 송중원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날 밤부터 허탁과 송중원은 꼬박 이틀 동안 공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인은 그들과 숙식을 같이했다. 사흘째 되는 날 허탁과 송중원은 학교로 가지 않고 고학생동지회로 갔다.
"말도 말아요, 대학살이오. 일본말을 잘 못 하는 노동자들이 거의 다 죽었소. 아마 6천여 명이 되는 모양이오."
노동자들과 가난한 조선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무더기로 죽어간 참상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학살에 앞장선 것은 경방단과 자경단, 그리고 재향군인들만이 아니었다. 헌병사령부에서는 조선사람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연병장에 가득 모아 놓고 주변에 총소리가 울리지 않게 하려고 총검으로 다 찔러 죽였다고 했다. 헌병들만이 아니라 경찰들도 골목골목에서 일본말이 서투른 사람들에게 무작정 니뽄도를 휘둘러댔다는 것이었다. 자경단의 대창이 등에 업힌 아이와 엄마를 한꺼번에 찔러 죽이고, 재향군인의 칼에 임신한 여자의 배가 찢겨 태아가 길바닥에 흩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제일 참혹하게 죽은 것이 영대천 옆의 빈밀굴에 몰려있던 노동자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온갖 흉기로 무장한 경방단이나 자경단들에게 쫓겨 영대천으로 뛰어들었다가 헤엄을 치지 못한 사람들은 서로 뒤엉켜 빠져 죽고,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들은 다시 강변으로 기어올랐지만 몽둥이로 머리가 깨지고 대창에 가슴이 찔려 물귀신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영대천에서 죽은 노동자들은 수천 명으로, 시체에 시체가 걸려 산더미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송중원과 허탁은 얼마 전에 만났던 그 노동자들을 생각하면서도 그 빈민굴로 찾아가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13. 긴 기다림의 끝
대나무숲이 사운거리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기미라고는 없는데 대숲이 소곤거리듯 읊조리듯 사운거리고 있었다. 어둠이 드리워지면서 작은 새들의 지저귐도 그쳐 대숲에는 정적이 깊었다. 깊은 정적 속에서 여리고 보드랍게 여울 짓는 대숲의 사운거림은 어떤 소리가 아니라 무슨 향내 같기도 했다. 어쩌면 다른 나무숲에서는 들을 수 없는 특이한 사운거림은 대숲의 체취인지도 몰랐다. 키 큰 대나무들은 반팔 간격이 멀다 하게 촘촘히 무리 지어 밭을 이루고, 위로 올라가면서 가느다랗고 낭창거리는 긴 가지들을 마디마다 길러내고 있었다. 그 수많은 가지들은 겨울에도 시드는 일 없는 청청한 잎들을 피워내며 서로서로 어깨동무도 하고 손잡기도 했다. 그러니 이파리들을 서로 한 몸처럼 어우러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빳빳하면서도 가벼운 이파리들은 미세한 바람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서로서로 몸을 비비댔다. 대숲의 어둠은 유난히도 짙었다. 마디마다 뻗친 가지들이 서로 엇갈리며 대나무들은 몇 층인지 모를 숲을 겹으로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대숲에는 낮에도 햇빛이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그 그늘이 짙었다.
바스락, 바스락......
어두운 대숲의 정적을 깨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들고양이나 살쾡이 같은 날쌘 짐승들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 소리는 순간적이고 재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조심스러우면서도 느리게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여...... 월엽이여?"
억누를 대로 억누른 남자의 소리가 어둠 속 어디에선가 들렸다.
"야아...... 나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낮고 가느다란 목소리가 화답했다.
"여그여, 여그......"
좀 다급해진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대나무 가지들이 쓸리는 소리가 갑자기 일어났다.
"아이고, 거그 그대로 있으랑게라. 그러다가 들키겄소."
여자의 황급한 소리였다. 그러나 대나무 가지들이 쓸리는 소란스런 소리는 멎지 않았다. 그 갑작스러운 소란에 놀란 참새들이 짹짹거리고 푸득거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어째 이리 늦었는감?"
남자가 여자 앞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다소 숨결이 거칠어진 남자는 차득보였다.
"아이고, 들키면 어쩔라고 이러요."
몸이 단 월엽이의 타박이었다.
"어쩌기넌 어쩌. 죽기 아니면 장개들기제."
차득보의 뚱한 대꾸였다.
"사람 피 보트게 헐라고 작정혔소?"
월엽이가 차갑게 내쏘았다.
"아니여, 아니여. 너무 반가와 그런 것이제. 저짝으로 가드라고."
차득보는 월엽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애기도 안님서......"
월엽이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반가움을 참아내지 못하는 차득보의 마음을 능히 헤아리고 있었다. 자신의 속마음도 그렇게 차득보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만약 차득보가 그리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너무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월엽이는 차득보의 손을 가만히 마주 잡으며 대나무들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달이 곧 뜰 때가 됐는디......"
한발 앞서 걸으며 차득보는 구시렁거렸다. 그건 월엽이를 염려하는 마음이었다. 그들은 대밭 거의 끝머리까지 걸어갔다. 집 쪽에서 한 발짝이라도 더 멀어지려는 것이었다.
"월엽이, 참말로 나럴 두고 시집얼 갈 챔이여?"
자리를 잡고 앉으며 차득보가 한숨과 함께 토해낸 말이었다.
"......"
월엽이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나 환정얼 혀서 죽겄는디 말 짐 히보랑게."
"......인자 와서 어쩌겄소......"
"아니여, 우리 이대로 당허지 말고 어디로 도망얼 가드라고."
차득보는 월엽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미쳤소, 우리 아부지 죽소."
월엽이는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손은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차득보가 월엽이를 덮치고 들었다.
"아이고메 엄니! 어째 이러요, 어쩔라고 이러요."
당황한 월엽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나가 그간에 얼매나 참었는지 알어. 딴 디로 시집 못 가. 나도 오기가 있는 사내자석이여."
차득보는 월엽이를 타고 누르며 목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인자 와소 어찌 이러요. 혼처 다 정해졌는디 요것이 머시다요."
월엽이는 몸을 버둥거리며 차득보의 어깨를 떠밀었다.
"빌어묵을 혼처가 다 무신 소양이여. 당장 각시 맨그는 놈이 임자제."
차득보의 손의 월엽이의 치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 소리 질를라요, 소리!"
월엽이는 두 다리를 단단히 꼬아 붙이며 곧 소리를 지를 것처럼 목청을 높였다.
"그려, 동네 사람덜 다 듣게 소리 질러. 글먼 동네 사람덜 앞이서 나가 월엽이럴 나 각시 맬들어 부렀다고 광고헐 것잉게."
차득보의 손은 속곳을 더듬고 있었다. 월엽이는 그만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엄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죽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고 집안은 망하는 것이었다.
"공허 시님, 공허 시님 말 잊어부렀소."
월엽이는 있는 힘을 다해 차득보의 어깨를 다시 떠밀었다.
"공허 시님이고 머시고 다 헛소리여. 중이 나 타는 속얼 어찌 알어."
차득보의 손이 불두덩 아래로 파고들고 있었다.
"옥녀럴, 동상 옥녀럴 누가 요리 신세 망쳐놔도 좋겄소."
월엽이는 차득보의 머리카락을 잡아 흔들며 울먹였다.
"머시여?......"
차득보의 눈앞에는 여동생 옥녀의 모습이 번뜩 떠올랐다. 발버둥 치고 울며 놀이패에게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수백 번도 더 꿈에서 보았던 모습이었다. 차득보는 전신에 맥이 빠지고 있었다. 월엽이는 옥녀와 동갑이었고, 늘 옥녀를 걱정해 죽고는 했던 것이다.
"......"
차득보는 월엽이를 풀어주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월엽이는 얼른 몸을 일으키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가슴에서 뜨거운 바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이 솟구쳤다. 정말 어디로 도망을 가버릴까! 차득보가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확인과 함께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러나 또 밀려드는 것은 아버지 얼굴이었다.
대숲의 어둠이 많이 묽어져 있었다. 보름이 며칠 지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창 죽순들이 돋고 있는 대숲에는 봄내음이 아련했다. 차득보는 전혀 말이 없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월엽이는 할 말이 가슴에 가득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딴 데로 시집을 가야할 처지에 다 부질없는 말이었다. 차득보의 부탁을 받은 공허 스님은 아버지에게 혼사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아버지는 냉정하게 고개를 젓고 말았다.
"진작에 혼처럴 정해 논 디가 있구만요."
이건 공허 스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아버지가 점잖게 한 말일 뿐이었다.
"니가 몸가짐 맘가짐얼 어찌했으면 그런 말이 나오드란 말이냐. 시상이 지아무리 변혀도 그리넌 안될 일이다. 오늘보톰 열흘 안에 방에서 나오덜 말거라."
자신을 꾸짖은 이 말이 아버지의 본심이었다. 지체가 달라 혼인을 시킬 수가 없었다. 그건 어길 수 없는 법도였다. 애초에 지체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준 자신이 잘못한 것이었다. 차득보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공허 스님을 따라 떠나갔다. 넉 달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차득보는 열흘 간격으로 대밭을 찾아들었다. 자신도 차득보를 안 보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열흘에 한 번씩 만나기로 약조를 했던 것이다. 그런 눈치를 채기라도 한 듯 아버지는 서둘러 혼처를 정했다.
"그려...... 인자 혼삿날이 너댓새 남었제."
차득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
월엽이는 그 말을,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나는 것이지, 하는 것으로 듣고 있었다.
"그려... 공허 시님 말씸대로 우리야 애초에 인연이 아니었제."
차득보의 목소리가 잠겨 들고 있었다.
"......"
월엽이는 손에 잡히는 대로 풀을 쥐어뜯고 있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움이 사무치고, 아버지가 끝없이 원망스러웠다. 공허 스님 일을 맡고 나섰을 때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사가 되리라 믿었었다. 아버지는 언제부터인가 상민을 천시하지 않았고, 차득보도 자식 대하듯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상투를 자르지 않았듯 마음이 다 개명된 것은 아니었다.
"그려...... 잘살어."
차득보는 더디게 몸을 일으켰다. 월엽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했다. 다급하게 일어나며 차득보를 끌어안았다.
‘우리 도망가요. 당장 나를 끌어가요. 당신 없이는 난 못살아요. 어서 날 끌고 가라니까요.’
월엽이는 속타게 부르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가슴속에서만 들끓고 있을 뿐 월엽이는 차득보를 더 꼭꼭 끌어안는 것으로 그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차득보도 월엽이를 끌어안으며 부르르 떨었다. 차득보는 여동생을 찾아야 될 일만 아니면 이대로 월엽이를 끌고 도망쳐 버리고 싶은 충동에 또 휘말리고 있었다.
"저어...... 담배쌈지 그대로 지니고 있제라?"
월엽이의 말은 울음범벅이었다.
"이잉......."
차득보는 고개까지 끄덕였다. 월엽이는 차득보 생일날 베겟모에 소 놓는 두 마리 학을 담배쌈지에 수놓아 선물했던 것이다. 그 쌈지를 평생 지니고 나를 보듯 하라는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득보는 거울을 잘 지니라는 말을 월엽이에게 하지 않았다. 월엽이가 담배쌈지를 만들어 주기 전에 차득보는 월엽이에게 손거울을 사주었던 것이다. 한 덩어리가 된 두 사람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달빛이 젖어 들고 있는 대숲에는 어둠 대신 숲 그늘이 은은히 번져 있었다. 대숲 위에는 대나무 가지들이 휘어지도록 푸른 달빛이 넘치고 있었다.
"현생에서 짧아 못 맺어진 인연은 후생에 가서 맺어지는 법이니라. 그간에 맺은 인연만도 귀허고 소중헌 것잉게 더 욕심부리지 말고 그 인연이나 고이 간직해라."
공허 스님의 말이었다. 차득보는 고개를 저었다. 후생이라면 죽은 다음이었다. 죽은 다음에 저승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후생에서 인연이 맺어진다 하더라고 그건 너무 막막하고 아득한 일이었다. 그러나 공허 스님이 나서서 안 된 일을 다른 누가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몇 년 동안 월엽이와 지내온 것을 생각하면 꼭 꿈만 같고, 월엽이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월엽이와 정이 통하기 시작하면서 농사일이 전혀 힘드는 줄을 몰랐었다. 월엽이는 밥만 수북수북 고봉으로 퍼담는 것이 아니었다. 힘든 것을 이겨내며 샛밥도 손수 내왔다. 밥맛보다는 논두렁에서 월엽이와 단둘이 즐기는 재미가 더 고소했다. 풀꽃반지를 만들어주었던 일이며, 짚단을 부엌으로 옮겨주다가 처음 손을 잡았던 일이며, 물뱀으로 놀려대다가 울렸던 일이며, 한겨울밤 고구마를 구워 먹던 일이며, 부모님이 친척 혼인집에 간 날 처음 안았던 일이며, 그 뒤로 식구들 눈 피해 가며 몰래몰래 대밭에서 만났던 일이며...... 월엽이는 손을 잡거나 끌어안는 것까지만 했다. 더 욕심을 부려 젖가슴을 만지려다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 월엽이는 펄쩍 뛰며 인정사정없이 손을 물어뜯었던 것이다. 혼인하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더러더러 만내지겄제."
한숨과 물기에 젖은 차득보의 말이었다. 월엽이는 차득보의 가슴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득보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차득보도 월엽이를 보듬고 있던 팔을 풀었다. 월엽이가 흑 울음을 터트리며 돌아섰다. 차득보도 울컥 목이 메었다. 월엽이는 대나무 사이사이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차득보는 월엽이의 걸음걸음이 눈물인 것을 느끼고 있었다. 월엽이의 모습이 어릿어릿 흐려지고 있었다. 차득보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날아가는 기러기야 이 편지를 우리 아버지께 전해다오 한 자를 쓰고 한숨짓고 두 자를 쓰고 눈물이 떨어지니 글자가 모두 수묵이 되어 언어가 도착이로구나......’
심청가 중에서 심청이가 아버지를 그리는 심정이 애끓는 가락에 실리고 있었다. 여자의 목청은 맑은 듯 톱지고 청아한 듯 구성진 애원성으로 한스런 그리움을 절절히 풀어내고 있었다.
"자알헌다아!"
고수가 추임새를 넣었다.
"은냐 되았다. 거그서 막음혀라."
눈을 지그시 내려 감고 있던 남작 접은 쥘부채로 허공을 짧게 치며 눈을 떴다. 다음 소리를 내려던 여자가 문득 소리를 받치느라고 힘을 써 상기된 여자의 얼굴에 안도와 불안이 순간적으로 엇갈렸다. 치마 속으로 한쪽 무릎을 세워 단정하게 않은 여자의 등 뒤로는 긴 머리채가 드리워지고 그 끝에는 빨간 댕기가 핏빛으로 선연했다.
"그려, 니가 인자 실헌 소리꾼이 되았구나. 그간에 고상 많이 혔다."
아랫목에 앉은 초로의 남자가 먼 데를 바라보는 듯한 눈길로 처녀를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는 대견해하고 흡족해하는 마음이 넘치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옥녀 소원풀이 혔고나. 소리 날개 달고 구만리 장천얼 훨훨 날게 생겼으니 얼매나 좋냐. 선상님 앞에 얼렁 큰절 올려야제."
고수가 신바람이 나서 북을 퉁 울렸다. 옥녀의 눈에는 눈물이 핑그르르 돌아 있었다. 실로 몇 년의 고생 끝에 듣게 된 말이었다. 옥녀는 감격의 눈물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옥녀는 두 손을 모아 이마에 올리고 온 정성을 다해 소리 스승이며 양아버지 앞에 큰절을 올렸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동안의 고생과 고마움이 눈물로 솟고 있었다.
"그려, 장허고 장허다. 그간에 니가 소리 공부허는 고상 이기기도 에로운디 밭농새 일에 집안일 꺼정 해감서 소리꾼으로 틀을 잡었시니 참 고상 많이 혔다. 인자 이 애비넌 잊어불고 니 오빠 찾어서 떠나그라."
옥녀의 양아버지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웃음 띤 얼굴에는 서운한 기색이 스치고 있었다.
"성님, 아까 옥녀가 채린 술상이 있는디 한 잔 허셔야 안 쓰것고?"
고수가 추임새를 넣듯 말했다.
"그렸등가? 그것 좋제."
옥녀의 양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고, 옥녀가 일어나려고 했다.
"아니여, 아니여. 어디 고수가 명창헌티 고런 일 시킬 수 있간디. 앉어서 아부님 말씸 들어."
고수가 손을 내저으며 잽싸게 방을 나갔다.
"니넌 그냥 앉그라."
옥녀의 양아버지는 손짓을 하고는, "니넌 인물도 그만허먼 되았고, 청 "목청"이야 타고난 것이고, 총기 좋은디다가 맘 강단지고, 양친 잃고 오빠 생이별 헌 한할라 짚은께 소리꾼으로야 구색이 꽉 째인 거이다. 근디 시상 울리는 명창이 되자면 그런 구색만으로넌 안되는 거이다. 그저 자나깨나 앉으나 스나 독공얼 해야 쓴다. 독공. 명념혀라."
그는 옥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야아, 명념하겄구만요."
옥녀는 머리를 조아렸다.
"자아, 옥녀가 선상님께 술얼 한잔 따라올려야제."
고수가 술상을 들고 들어왔다. 옥녀는 양아버지와 고수의 술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요것이 옥녀 독음주에 이별주 아니라고. 술맛이 달고 시고 허겄는디."
고수가 고수답게 사설을 엮어댔다. 옥녀의 양아버지도 고수도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양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며 옥녀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니가 여그 보성에 온 것이 엊그제 겉은디 세월이 발써......"
옥녀의 양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옥녀는 4년 전을 생각했다. 보성이 가깝다는 것을 알고 죽어라 도망을 쳤던 것이다. 놀이패에게 끌려다니는 것이 지긋지긋했고, 소리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보성에 명창이 있다는 소문이었다.
"어허, 청이야 타고난 청인디 못된 놈덜헌티 끌려 댕기니라고 오만 잡소리 때가 꾸질꾸질허니 많이도 쪘구나. 그놈에 땟국물 다 빼내자면 멧년이 걸릴란지 몰르겄는디 어쩐다냐. 그 타고난 청이 아깝기넌 헌디 말이여......"
옥녀의 소리 한 자락을 들어본 보성 명창은 혀를 차다가 입맛을 다시다가 했다.
"소리꾼언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디, 나가 니 맘얼 어찌 믿겄냐?"
보성 명창은 엄하고도 냉정한 얼굴로 열네 살 옥녀의 눈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죽기 한허고 허겄구만이라우, 죽기 한허고 허겄구만이라우."
옥녀는 온몸의 힘을 모아 말했다. 오로지 그렇게 마음이 굳어져 있어서 그 말밖에는 다른 말은 할 것이 없었다.
"죽기 한허고 허겄다고?...... 그려, 작심혀서 안될 일이 없제. 그간에 고상도 많이 혀봤응게 심지가 굳겄제."
그래서 소리 공부의 허락을 받았다. 소리 공부를 하러 오는 사람들은 매달 공부 돈을 냈다. 그런데 옥녀는 돈은커녕 먹고 자고 입는 것까지 선생님 댁의 신세를 져야 했다. 옥녀는 그 값을 할 작정으로 몸을 사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니가 영판 야물고 부지런허다 잉. 없는 살림에 혹뎅이가 붙은지 알었등마 복뎅이가 굴러들어온 것이랑께."
두 달이 못 되어 명창 부인이 옥내를 다독거리며 한 말이었다.
"니가 엄니 아버지가 안 기시고, 이리 한 식구로 살게 되았응게 니가 우리 수양딸이 되는 것이 어쩌겄냐?"
어느 날 명창 내외가 꺼낸 말이었다. 옥녀는 그 말이 너무 고마워 눈물을 떨구었다. 그건 자신이 명창 내외의 마음에 들었다는 기쁨이기도 했다. 명창 내외를 아버지 어머니로 호칭하게 되면서부터 옥녀는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새 세상을 사는 것 같은 즐거움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일은 더 열성으로 했다. 텃밭 농사는 말할 것도 없고 밭농사도 도맡다시피 했다. 소리 공부는 아침 일찍이 한번, 저녁에 한 번이었다. 아침에 양아버지가 대문을 들려주면 몇 번을 따라하고, 저녁에 다시 양아버지 앞에서 부르는 것이었다. 아침에는 배우는 것이고 저녁에는 시험을 치르는 것이었다. 그 시험에서 양아버지가 "조오타!"하며 쥘부채를 쫙 펼치게 하려면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도 빨래를 하면서도 김을 매면서도 아침에 배운 대문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오면서 부지깽이로 부엌 바닥을 치거나 숟가락으로 설거지통을 치거나 빨랫방망이로 빨랫돌을 치거나 호미로 밭이랑을 찍어대며 장단을 맞추는 것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그리 열심히 연습을 하는 것은 어서 소리꾼이 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소리 공부를 마쳐야 오빠를 찾아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오빠와 헤어진 뒤로 단 하루도 오빠를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어쨌그나 소리꾼이 되는 것언 다 팔자소관이니라. 옛적보톰 소리꾼덜언 천시 괄시 당험스롱도 소리허능것 좋아서 지 팔자 이기지덜 못허고 평상얼 지멋에 취해 살았제. 허기넌 소리꾼덜도 한시절 사람 대접받어감서 벼슬도 허고 살았니라. 대원군께서 우리 소리럴 좋아허신 덕으로 소리꾼덜이 궁중 출입을 허게 되고, 그 아드님이신 고종 임금님도 그담으로 순종 임금님도 소리럴 연차로 좋아허시게 되야 소리꾼덜이 벼슬얼 허게 된 것이제. 헌디 그것도 잠시잠깐이고, 왜놈덜 시상이 됨서 왜놈덜이 우리 소리럴 몰아대는디다가, 왜놈덜 노래 밀려들제, 양악이 판치제, 활동사진 돌아가제, 좌자 항렬 붙은 각단덜 야단이제 헝께 자꼬자꼬 밀리고 시드는 판이다. 그렁께 소리꾼덜 고상이 날로 달로 심해지느 것이야 다연지사제. 어째 꾸척시럽게 요런 말 허능고 허니, 니가 한평상 소리 지키고 살라면 맘 야물딱지게묵어야 헌다 그 말이다."
옥녀의 양아버지는 옥녀를 쓰다듬듯 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야아, 명념하겄구만이라우."
"그려, 니넌 맘 강단지고 야문께 잘헐 것이여. 근디 니 보냄서 줄 것이 있다. 이름얼 옥비라고 혀라. 날 비, 옥 겉은 소리가 날아올라 하늘에 닿게 소리럴 잘허라는 뜻이다."
옥녀 양아버지의 담담한 말이었다.
"아부님, 황감허구만요."
옥녀는 머리를 조아렸다. 말만이 아니라 정말 너무 황감하여 눈물이 솟았다. 옥비- 그 이름의 뜻이 너무 컸고, 양아버지 아닌 선생님이 자신의 소리를 그리도 대단하게 여겨주는 것에 놀라고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자 떠나면 언제나 보게 될라는지 몰르겄구나."
"자주 찾어뵙도록 허겄구만요."
"아니여, 니넌 인자 소리허고 혼인헌 것잉께 친정허고넌 멀수락 좋니라. 역부러 올라고 말어."
옥녀 양아버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옥녀는 90리 밖 순천으로 넘어가 기차를 탔다. 기차표는 이리까지였다. 기차표를 끊으며 옥녀는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어금니를 맞갈았다. 이런 날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고대했는지 몰랐다. 옥녀는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원한이 전시에서 뻗쳐 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오빠가 애타게 그리우면서도 보성에서 4년 세월을 보낸 것은 꼭 실한 소리꾼이 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어서 나이 먹어 기운이 드세어지기를 기다린 것이기도 했다. 물동이 임질이며 밭농사 같은 힘겨운 일들을 고달프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소리 공부 값에 밥값을 해내려 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일들은 몸에 기운이 실리게 하는 데 너무 좋았다. 소리는 목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강건한 몸에 실린 기운으로 떠받쳐 올려야만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또 따로 쓸 데가 있었다.
옥녀는 작은 보퉁이를 꼭 끌어안고 달리는 기차의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딱히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은 아니었다. 눈앞에는 오빠의 모습이 어려 있었다. 어느덧 11년의 세월이 흘러 있었다. 그런데 오빠의 얼굴은 헤어질 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스물한 살 먹은 오빠의 얼굴을 그려보았지만 허사였다. 지금쯤 어디에 있는 것인지...... 어디서 마주치게 되더라도 서로 못 알아보게 되는 것은 아닐지...... 옥녀는 다시 불안스러운 조바심에 가슴이 떨리고 있었다.
대답허소 대답허소 오라버니 대답허소
십년이라 긴긴 세월 하로겉이 불러대도
어느 골 어느 들얼 떠돌아댕기기로
동풍에도 답이 없고
서풍에도 소문 없고
이내 몸 피 보타서 돌로 굳히겄네
봄이면 나비 보고 소식 묻고
여름이면 은하수에 소식 띄우고
가을이면 달빛 보고 애원을 허고
겨울이면 바람결에 애원성 실어보내도
야속해라 무정해라 그리운 오라버니
비바람에 몸 적시고
설한풍에 몸 얼어도
이 세상 그 어디에
살아서만 있어주소
지성이면 감천이라 만내질 날 있을 거네 만내질 날 있을 거네
옥녀는 자작한 이 노래를 또 속 터지게 부르며 눈물을 씹고 있었다. 밭에서 김을 매거나 사람 없는 빨래터에서는 소리쳐 부르곤 했던 노래였다.
"아이고, 작인놈덜 등쌀에 풍년 들면 머허겄소. 그 잡것덜 꼬라지 뵈기 싫여 던답얼 싹 다 꼬실라부렀으면 속이 씨언허겄소."
"맞소, 그리만 됨사 나도 그래 불겄소. 그놈덜이 배때지럴 탈탈 곯아 뒤지게 돼야 우리 지주덜 고마운 덕 알 것잉께."
"그나저나 그 빌어묵을 놈에 소작쟁인가 머신가가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염병 퍼지대끼 허는 연고가 머시요?"
"그야 식자 잘못 든 못된 놈덜이 신식 개명바람얼 믹잉께 그런 것 이니겄소."
"식자 든 인종덜이면 거지반 다 지주집 자석덜 아니겄소."
"긍께로 기가 찰 일 아니겄소. 즈그 애비덜 가심에다 칼 꽂는 불효새끼덜 이니요."
"그것 참 신식공부란 것이 병통이오. 순천서 일어난 불이 전라도 사방팔방으로 안 퍼지는 디가 없으니 원."
"암태도 겉은 섬에서꺼정 일어나니 참 난리판굿이오, 쯧쯧쯧쯧......"
"근디 우리 전라도 땅만이 아니고 저 우에 평안도꺼정 잠잠헌 디가 없다는디, 요러다가 또 갑오년 난리 만내는 것 아니겄소?"
"에이, 고런 숭헌 말이야 마씨요."
"듣기 숭헌 말이라고 피허기만 해서야 쓰겄소. 판이 위태허니 돌아가는디."
"그런 소리가 아니요. 일본 심이 떡 버팅기고 있응께 그놈덜이 지아무리 꺼들대봤자 아무 소양이 없다 그런 말이오, 나 말언."
"아, 고런 말이구만이라. 맞소, 우리가 믿을 것언 그 심밖에 없소."
옥녀는 언제부턴가 맞은편에 앉은 두 남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의 열 받친 목소리가 너무 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비위에 거슬렸던 것이다. 옥녀는 2년 전에 처음 목격했던 낙안면의 소작쟁의를 떠올리고 있었다. 어느 지주 집의 환갑잔치에 부름을 받은 양아버지를 모시고 따라갔다가 보게 되었던 것이다. 소작인들 수백 명은 무서운 기세로 소작료를 낮추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의 기세는 지주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금방 무너트려 버릴 것만 같았다. 수백 명이 이루고 있는 물결은 너무나 커 보였고, 지주네 기와집은 너무나 작아 보였다. 지주 앞에서는 꼼짝을 못 하는 소작인들이 그리 당당하고 것이 놀랍고도 신기했다. 혼자서는 힘없는 사람들도 많이 뭉쳐지면 그렇게 힘이 생긴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옥녀는 그 사람들을 보며 아버지를 생각했다. 집에는 논이 조금밖에 없어서 소작 농사도 지어야 했다. 아버지는 지주네 집에 갔다 오면 언제나 속이 상해 술을 마시고는 노랫가락을 뽑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몇 마지기 안 되는 논마저 토지조사사업으로 빼앗기게 되자 홧김에 지주 총대인 나기조를 병신이 되게 때린 죄로 왜놈들 손에 죽게 되었다. 그 일은 일곱 살 때 당한 것인데도 꼭 어제 일처럼 기억이 생생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그리울 때도, 어쩌다 아버지 비슷한 사람을 보아도 그때의 일은 너무나 또렷하게 떠오르고는 했다. 옥녀는 다음날 밤이 늦어 주막을 찾아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밤이 늦기를 기다린 것이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잠자리 있소?"
옥녀는 주인 여자의 방문을 흔들었다.
"머시다냐...... 거그 누구다요?"
잠기가 묻은 것 같은 목소리였다.
"길 가든 사람인디, 잠자리 찾으요."
옥녀는 한쪽에 끼고 있던 작은 보퉁이에 손을 넣으며 부르르 떨었다.
"한밤중에 무신 여자가 간도 크시.....'
구시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안에 불이 밝혀졌다.
"야아, 주막 찾어서 걷다봉게 요리 늦었구만이라."
옥녀는 상대방이 안심하도록 슬쩍 받아넘기며 보퉁이 속에서 그것을 더듬어 틀어쥐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는 만큼 전신에서 힘이 뻗쳐올랐다.
"방이야 빈 것이 있소."
문고리가 벗겨지며 방문이 열렸다.
"이년아, 꼼지락 말어. 지랄치면 모가지럴 팍 따불 것잉게."
옥녀는 방을 나서는 여자의 저고리 앞섶을 재빨리 틀어잡아 가슴팍을 떠밀며 목에다 칼을 들이댔다.
"아, 아, 아니......"
여자는 방안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힝, 못된 짓 험서 잘 처묵고 살어서 벨로 늙지도 안혔구나. 나가 누군지 알겄냐?"
여자의 목에 칼을 더 바짝 들이대는 옥녀의 목소리는 또렷하고도 싸늘했다.
"누, 누구신게라. 모, 몰르겄소. 돈, 돈 저그 있소."
옥녀를 곁눈질하며 주인 여자는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이년아, 정신채리고 나 얼굴 똑똑허니 봐. 니년이 알어야 될 얼굴이여."
옥녀는 틀어잡고 있는 옷섶을 앞뒤로 마구 짓쳐댔다. 그 기운에 여자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둘렀다.
"자, 참말로 몰르겄는디요. 나가 무신 잘못얼 큭다고 이러신당게라."
주인 여자는 옥녀를 바로 쳐다보면서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요런 뻔뻔헌 년 잠 보소. 하도 못된 짓얼 많이 허고 산께 무신 잘못얼 혔는지도 몰르겄지야. 니년언 죽어야 써."
옥녀는 이를 뿌드득 갈며 칼을 더 바싹 디밀었다. 칼끝이 여자의 살을 파고들었다.
"아이고메, 살려줏씨요!"
여자가 부르짖었다.
"이년아, 나가 누군지 아냐? 니년이 11년 전에 팔아묵은 옥녀다, 옥녀. 오늘 밤이 니년 지삿날이여!"
"머시여, 옥녀! 아이고 진작에 오제."
여자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머시여?......"
느닷없는 소리에 옥녀는 그만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오빠가 기둘리고 있구만. 자네 소식얼 발써 년 전보톰 기둘리고 있단 말이시. 나도 자네 소식얼 알아낼라고 백방으로 애럴 쓰고 말이시."
주인 여자는 한달음에 쏟아놓았다. 여자의 말끝은 어느새 낮추어져 있었다.
"아니, 고것이 무신 소리다요?"
옥녀는 그 이야기를 종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고, 요 칼 잠 치우고 차근허니 말허세. 자네가 요리도 이쁜 큰애기로 변해 부렀시니 나가 알아볼 수가 있어야 말이제."
주인 여자는 재빠르게도 여유를 찾아 <이쁜 큰애기>라고 옥녀의 비위까지 맞추고 있었다.
"또 나럴 속일란 생각언 마씨요 이. 칼 없이도 죽일 수 있응게."
옥녀는 칼을 거두며 주인 여자를 노려보았다.
"아이고, 말 안혀도 아네. 어디서 무신 일얼 허고 살았간디 기운이 그리 장산가. 그냥 보기로넌 얄상헌 몸맨디."
주인 여자는 고개를 내둘렀다.
"밥언 어쨌능가?"
주인 여자는 피가 가늘게 흘러내린 목줄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런 걱정 헐라말고 얼렁 그 이야기나 허씨요."
옥녀가 차갑게 내쏘았다.
"어이, 어이, 그로 앉세."
옥녀는 주인 여자를 마주하고 자리 잡았다.
"긍게 고것이 어찌 되았능고 허먼 말이시, 년 전에 자네 오빠 득보가 어떤 시님허고 느닷없이 와서 자네럴 찾아내라고 왈기는디, 그 시님이 얼매나 독허고 기운이 씨든지 간에 나가 죽는지 알었네. 그적에 나가 아는 자네 소식이야 머시가 있어야제. 어쨌그나 자네럴 꼭 찾아주기로 약조허고 죽음을 면했네. 근디 그후로 자네 소식얼 알아봉게 어디로 도망얼 가부렀다는 것이고, 그런 말로넌 나가 죽게 생긴 판이라 무신 수럴 써서라도 찾아내라고 잡죄댄게 어디 숨어서 소리럴 배울 것이라고 안그러등가. 우선에 자네가 어디든지 간에 살아있다는 것얼 알었응게 사방팔방으로 찾아보자고 혔는디, 그간에 나가 얼매나 피 보탔는지 아능가. 서너 달 간격으로 자네 오빠하고 시님언 찾아들어 사람얼 왈기고 잡죄대게, 자네가 어디 숨었는지는 알아내기 감감허제, 나가 시상사는 낙얼 잃어분졌구만. 성제간에 서로 얼렁 만내고, 나가 죽사리 안 치고 살게 되었을람사 자네가 진작에 이리 찾아왔어야제. 안그런가?"
주인 여자는 비위 좋고 입담 좋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글먼 우리 오빠가 어디 사는지 안다 그것이요?"
옥녀는 의심을 풀지 않고 물었다.
"하먼, 여그서 십리 안되네. 낼 당장 나허고 만내로 가세."
주인 여자가 환하게 웃었다.
"장개넌 들었습디여?"
"어디가. 자네 찾니라고 정신이 하나또 없는 판인디."
"근디 멀허고 산다드라요?"
"세세허니 말 안헝게 잘 몰르겄는디, 함께 걸음 허는 시님이 어떤 집에 있게 혀서 편케 지내는 눈치등마."
"그 시님언 누구다요?"
"아이고 이 사람아, 사람 숨 넘어가겄네. 어찌 그리 사또 문초허디끼 물어대고 그런당가."
"아, 얼렁얼렁 대답이나 허제 무신 딴 새살이요, 새살이. 나럴 팔아묵어 성제간 생이별시킨 죄럴 몰라서 시방 고런 새살 까고 앉었소!"
표독스럽다 싶게 내쏘는 옥녀의 목소리가 쨍 하니 높아졌다. 그런 옥녀의 태도는 금방이라도 주인 여자의 앞섶을 또 낚아챌 것 같은 기세였다.
‘아이고, 저것이 에랬을 쩍보톰 소리럴 야물딱지게 해대등마 그간에 떠돌아 댕김서 아조 독허고 무섭게 되았네그랴.’
주인 여자가 슬쩍 풀어놓으려던 마음을 다잡으며 한 생각이었다.
"아니시, 아니여. 나가 나 잘못 다 알고 있네. 긍게로 고것이 말이시이, 나가 겁나서 물어보던 못혔는디, 자네 오빠가 자네 찾을라고 떠돌아 댕기닥 어찌 가다 오다 만나게 된 눈치등마."
"우리 오빠넌 여그서 언제 떠났소?"
옥녀가 여자를 꼬나보았다."
"자네 가고 금방 떠났네."
주인 여자는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그리되었다.
"밥 아까외서 쫓아냈제라!"
옥녀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터졌다.
"아니시, 아니여. 나 몰르게 지가 도망얼 가부렀네."
여자는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거짓말 말어. 나넌 팔아묵고 오빠넌 쓰잘디 없응게 내쫓은 것이제."
옥녀의 목소리는 더 날이 섰다.
"아이고, 아니란 말이시. 오빠 만내보면 금세 알 일인디 어찌 될라고 그런 거짓말얼 허겄능가?"
만약 오빠를 쫓아내기만 했다면 옥녀는 다시 여자에게 보복을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오빠는 팔려간 자신을 찾으려고 주막에서 도망친 것이었다. 옥녀는 새삼스럽게 가슴이 찡 울리며 목이 메었다.
"오빠가 여그 언제 찾아왔습디여?"
"이, 그것이야 낙 똑똑허니 기억허는디, 그 만세난리 일어난 담이시."
"만세난리......"
그 해가 자신은 보성에 자리 잡고 소리 공부를 시작한 때였음을 옥녀는 상기했다. 그전까지 육칠 년을 오빠는 자신을 찾아 어디를 떠돈 것일까. 자신이 팔려갔는데도 그저 주막에서 밥이나 얻어먹고 있을 오빠가 아니어서 자신도 떠돌아다니는 곳에서마다 오빠를 찾아내려고 그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얼렁, 옷 챙게 입으씨요."
이렇게 말하며 옥녀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오옷?......"
주인 여자가 어리둥절해서 옥녀를 올려다보았다.
"오빠 집으로 앞장 스란 말이오!"
옥녀가 빠락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 사람아, 이 한밤중에...... 자고 낼 아칙 일찍 떠도 점심때 임시에넌 대갈 것인디......"
"꼭 말을 씹힐라요. 나야 한시가 급허다는디."
옥녀가 여자에게 달겨들었다.
"알겠네, 알겠네. 옷 입음세."
여자가 옥녀를 피해 앉은 채 옆걸음질을 치며 다급하게 말했다. 주인 여자가 사립을 나서며 은근한 소리로 물었다.
"명창 소리 듣게 소리 공부넌 다 끝막음했능가아?"
"쓰잘 데 없는 소리넌 꺼내덜 마씨요."
옥녀는 매정하게 잘라버렸다. 깊은 밤의 별들이 하늘 가득 반짝거리고 있었다. 옥녀는 그 별들을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보며 가볍고 빠른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그 별들이 비로소 고와 보이고 가슴 벅찬 기쁨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어제까지만 해도 그 별들은 눈물이고 슬픔이었다. 별들만이 아니었다. 달도 그리움이고 서러움이었다. 혼자 별과 달을 바라보며 오빠를 얼마나 목메어 불러왔는지 몰랐다.
"이 사람아 쬐께 찬찬히 가세. 사람 숨넘어가 죽겠네."
어둠 뒤에서 들리는 숨 가쁜 소리였다. 그러나 옥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옥녀는 오빠의 얼굴을 생각하며 걷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헤어질 때의 얼굴이 떠오를 뿐 어른이 된 오빠의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옥녀는 길을 걸어갈수록 새로운 걱정이 커지고 있었다. 오빠도 자기도 서로를 못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옥녀는 오빠와 헤어지고 나서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니며 갑자기 오빠를 불러대면서 내뛰곤 했었다. 그러나 그 사내아이들은 옆 모습이나 뒷모습이 오빠 비슷할 뿐이었다. 그런데 삼사 년이 지나면서부터 그런 일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오빠와 비슷한 아이들을 보고 가슴이 울렁했다가도 오빠가 그 아이들보다 더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했다.
"우리 오빠가 많이 변했습디여?"
옥녀는 기어이 이 말을 묻고 말았다.
"어찌 그려? 못 알아볼랑가 몰라 걱정된가? 벨걱정 다 허네. 핏줄은 서로 땡긴께 핏줄인 법이시."
새벽닭이 울면서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완연한 주인 여자가 한 집을 손가락질했다.
"오빠, 오빠, 나 왔소. 옥녀 왔소!"
옥녀가 마당을 가로지르며 소리쳤다.
"득보 오빠, 나 왔당게. 옥녀가 왔소!"
"머, 머시여! 오, 옥녀라고!"
방문이 벌컥 열렸다.
14. 모자의 이별
"다들 더욱 새로운 각오로 가일층 분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거요. 특히 지금부터 하는 말을 정신 바짝 차려서 듣고 똑똑히 기억하도록 하시오. 그러니까 현재까지의 국내외 상황을 직시할 것 같으면, 사정이 악화됐으면 악화됐지 호전된 건 아무것도 없소. 총독부는 작년(23년) 10월에 소위 독립운동가라는 불령선인들의 국내 잡일을 막기 위해 경기도와 함경도에 외사경찰과를 신설했소. 또한 우리 국경수비대도 더욱 강화시켰소. 왜냐하면 경신년 대토벌 직후 잠잠했던 불령선인 집단들이 그다음 해 우리의 만주 출병군이 퇴각하자 다시 출동하기 시작했소. 그동안 그놈들이 벌인 작태가 어떠한가! 총독부의 집계로 살펴보도록 하겠소. 그놈들이 21년에 도발하여 우리 일본군과 교전한 횟수가 만주에서 73건, 국내에서 87건, 경찰관서 습격이 91건이오. 그리고 22년에는 만주 59건, 국내 89건, 경찰관서 습격이 13건이오. 이건 약간 줄어든 것 같소. 그러나 23년에는 도발이 엄청나게 늘어났소. 국내외 합해 4백 54회이고, 경찰관서 습격이 12건이오. 그러면 왜 그렇게 갑자기 도발이 많아졌는가! 그건 주지하다시피 만주의 불령선인 집단들이 다시 조직을 정비함과 아울러 새로운 폭력단체들을 편성했기 때문이오. 그중에서도 특히 주시해야 할 것은 의열단이라는 폭도들이오. 그 폭도들은 21년부터 금년까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경성에서 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고, 상해에서 우리 육군대장을 저격하려다 체포되고, 종로에서 투탄하는가 하면, 상해에서 국내로 대량의 폭탄을 밀반입하다가 적발되었소. 이렇게 날로 악화되어 가는 사태를 봉쇄하기 위해 총독부에서는 외사경찰과를 신설했던 것인데, 그후의 사정은 어떤가! 사태는 조금도 호전됨이 없이 오히려 악화일로에 있소. 다시 말하면 의열단 폭도들은 마침내 본토의 동경에까지 침투해 이중교에 폭탄을 투척하는가 하면, 만주에서는 남만주에서 참의부 의군부라는 불령선인들의 단체가 생겨나더니만 금년에는 우리가 장악하고 있는 이 북간도 지역을 피한 북만주 일대에서 신민부가 또 생겨났소.
그리고 금년이 반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놈들의 도발이 벌써 2백 건을 넘었소. 이렇게 되면 금년에도 작년과 동일한 도발사태가 일어날 것이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사태를 더욱더 악화시키는 악질집단들이 또 생겨나기 시작했소. 그게 뭐냐! 그건 바로 신사상이라고 하는 공산주의에 물든 놈들의 준동이오. 만주 땅에서도 그놈들의 암약이 시작되었지만 국내 조선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놈들의 준동은 심각한 상태요. 조선 땅에서는 근래 삼사 년 동안 소작쟁의와 노동쟁의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데 그게 거의가 그놈들의 사주에 의한 거요. 그런데 여기서 똑똑히 알아야 될 사실이 있소. 그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는 단순히 소작료 인하나 임금인상의 요구가 아니라는 점이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그 사회주의자라는 놈들은 소작료 인하와 임금인상으로 소작인들과 노동자들을 충동질하면서 뒤로는 배일과 반일을 촉구하고 있다 그거요. 그러니까 그놈들은 새로 나타난 불령선인 집단이고 폭도조직이란 말이오. 자아, 여러분들은 이런 복잡한 사태 앞에 직면해서 어찌해야 되겠소. 방법은 단 한 가지, 앞서 아까도 말했지만 가일층 분발하여 활동하는 길뿐이오. 더욱 적극적으로, 더욱 맹렬하게 임무들을 수행하시오. 그 공적에 대한 보상은 반드시 돌아갈 것이오. 이만, 질문들 있으면 하시오."
참모장이 매서운 눈길로 장내를 휘둘러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아무도 말이 없었다. 명령과 지시만을 받도록 되어있는 사람들로서 질문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질문이 없으면 다들 각오가 단단히 되었다는 것이오?"
참모장이 다시 장내를 훑었다.
"옛!"
모두가 힘차게 목소리를 맞추었다.
"좋소, 이만 해산하겠소."
참모장이 단상을 내려갔다. 양치성은 긴장을 풀며 무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그러다가 그만 오른쪽 가슴을 싸안으며 가느다란 신음을 물었다. 그러나 남들의 눈에 띌까 봐서 그는 가슴을 싸안았던 두 손을 얼른 수습했다. 또 그 증상이었다. 분명 오른쪽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으면서 맞바람이 통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이상야릇한 증상은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이내 사라지고 없었다.
"별로 걱정하지 마시오. 그건 착각이고 환각입니다. 아직 피해를 당한 공포나 두려움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겁니다. 일종의 피해망상증이죠. 그런 일을 당한 대부분의 환자들이 한동안 보이는 증상인데, 그 기억을 빨리 잊어버리도록 노력하세요. 그건 스스로 치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의사의 진단이고 처방이었다. 그러나 양치성은 그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칼을 꽂고 도망간 수국이를 생각하면 증오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그년이 감히 누구를......
그는 아슬아슬하게 살아난 것을 생각할수록, 이불이 덮여 있지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죽었을 거라는 것을 생각할수록 수국이를 잡아 죽이고 싶은 증오감으로 이를 갈았다. 그런데 밤에는 가슴에 칼이 꽂히는 꿈을 자주 꾸었다. 꿈에서 칼은 언제나 가슴을 꿰뚫고는 했다. 그래서 그런지 갑자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맞바람이 통하는 듯한 증상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일은 그냥 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수국이를 죽여 없애야만 잊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양치성은 가슴이 들끓는 대로 그 일을 해치울 수 없는 것이 더 분통 터지고 있었다. 수국이가 도망간 곳은 보나 마나 뻔했다. 서간도, 그전에 살던 곳일 것이었다. 그러나 성질대로 뒤쫓아갈 수가 없었다. 수국이가 그곳으로 도망간 것이 틀림없다면 그곳은 이제 변장이 통하지 않는 위험지대였던 것이다.
아, 그년이 내 정체를 다 알았구나!
수국이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양치성의 머리를 친 생각이었다. 그 외에 자신을 죽이려고 할 만한 다른 이유는 찾을 수가 없었다. 양치성은 병원에 누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수국이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지 짚이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런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그동안 얼마나 철저하게 단속을 해왔는지 몰랐다.
양치성은 나남의 군병원 까지 옮겨져 두 달 가까이 치료를 받으면서 수국이의 행위를 곱씹고 곱씹어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생각을 해볼수록 그 계집년이 독하고 끔찍스러워졌다. 자신을 해친 날짜며,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것이며, 언제부턴가 야들거리며 돈을 타낸 것이며, 그날 밤 유독 끈끈하게 색정을 피우던 것이며, 어느 것 하나 계획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 계획은 모두 자신의 정체를 알고 나서부터 꾸며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죽일 생각을 품고서도 정이 들어가는 척 자꾸 살갑게 대하며 몸을 섞은 계집. 여자는 요물이다! 그는 이 말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폐를 다치지 않아 천행입니다. 이게 왼쪽이었으면 심장이 치명상을 입었을 것입니다. 기습을 당하고도 참 잘 피해서 다행입니다."
의사의 말이었다. 술에 취해 자다가 마누라 삼은 계집에게 당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독립군으로 의심이 가는 놈을 미행하다가 골목에서 기습을 당했다고 둘러댔다.
"맞어, 단오절을 틈타 그놈들이 숨어든 게 틀림없군. 그놈 어떻게 생겼어? 내가 잡아서 자네 원수를 갚아주지."
임 형사가 의심 없이 쉽게 속아 넘어갔다. 양치성은 그동안 서간도 쪽으로 옮겨갈 궁리를 여러 번 해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이 노출된 이상 안전을 도모할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감정을 앞세워 그곳에 숨어들었다가는 수국이를 잡기 전에 오히려 자신이 당할 위험이 더 컸던 것이다. 밀정들에 대한 처단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간도에서는 그전의 독립군 단체들이 통합하여 새로운 자치조직과 군사조직을 강화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양치성의 마음에는 수국이를 꼭 잡아 죽여야 한다는 증오만 불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국이가 자신의 정체를 알기 전에 고향 쪽으로 떠날 수 없었던 것이 큰 안타까움으로 남아 있기도 했다. 용정을 진작 떠나버렸더라면 자신의 신분을 더 오래 감출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는 동안에 아이를 낳게 되면 별일 없이 한평생 살게 되었으리라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각을 뭉개며 증오심을 키워나갔다.
한편, 수국이는 아들을 중국 사람 진씨 집에 보내기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이 없는 진씨가 아이를 보고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이었다.
"니 저것 보내고도 생각 안 나겄냐?"
필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수국이는 필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길에는 무슨 새삼스러운 소리냐는 힐책이 담겨 있었다. 그동안 송수익 선생이며 지삼출이 아이를 보낼 만한 집을 물색해 왔었던 것이다.
"음마, 저 눈 잠 보소. 이쁜 꽃이 독헌 까시 품었다등마 저것이 똑 그짱이랑게."
필녀가 입을 삐쭉이며 눈길을 피했다.
"꼭 말얼 해야 맛이여."
수국이가 고개를 돌렸다. 필녀는 수국이의 말을 되씹어보았다. 그러나 그 말은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가슴 아프니 그런 말을 꺼내지 말라는 것인지, 어차피 원수의 자식인데 그런 말은 왜 하느냐는 것인지 딱히 알 수가 없었다.
"낼 보낼라먼 당장 입을 옷언 챙게야제."
필녀는 또 책잡힐까 봐서 말이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야 키운 엄니가 알어서 허면 될 일 아니여."
수국이의 말은 쌀쌀하기만 했다.
"그려, 그 집 가면 중국옷 해입힐 것잉게 똑별나게 챙기고 자시고 헐 것도 없제. 잘해 입힌 옷도 아닝게......"
필녀는 수국이의 옆모습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며 일어섰다. 필녀는 '키운 엄니'라는 말에 가슴이 찡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 말하는 수국이의 심사가 얼마나 쓰리고 아프랴 싶었던 것이다. 사실 자기는 아이를 '키운 엄니'였고 수국이는 '낳은 엄니'였다. 수국이는 서간도로 온 다음 달부터 입덧을 하기 시작했다. 장성한 처녀야 뜨물에도 애기 서고, 가지밭에 오줌만 눠도 애기 서더라고 수국이가 입덧 하는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덜 헛눈 팔지 말고 잘 지켜야 헐 것이오. 갸가 겉보기허고넌 달릉게."
지삼출이 여자들에게 귀뜸한 말이었다. 여자들은 그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수국이가 또 목을 맬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필녀는 수국이가 다시 목을 매달지는 않으리라고 자신했다. 아무리 마음에 없는 아이를 배게 되었더라도 제 목숨까지 끊을 수국이가 아니었다.
"니 우리 엄니가 어쩌크름 죽은 지 아냐. 나넌 죽을 때꺼정 우리 엄니 웬수럴 갚을겨. 양치성이 그놈 한나로넌 심이 안 찬게. 그날 엄니랑 함께 죽은 사람덜이 얼매라고."
수국이는 잠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며 부르르 떤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필녀야, 우리 총 쏘는 것 새로 야물딱지게 안 배울래?"
이런 말을 불쑥 하기도 했던 것이다. 역시 수국이는 죽을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아이를 지우려고 들었다.
"웬수 놈에 새끼럴 멀라고 날 것이냐."
수국이는 이를 빠드득 갈아붙이다가 느닷없이 제 아랫배를 퍽퍽 쥐어지르는 것이었다.
"아이고메 가시네야, 애 떨어지기 전에 배창시 터져 니가 먼저 죽겄다."
필녀는 질겁을 하고는 했다. 그런데 수국이는 무슨 약인가를 먹고 곧 숨이 넘어가는 것처럼 소리치며 굴러대다가 혼절을 하고 말았다.
"잘 지키라고 그리 당부혔는디 멋덜 허고 앉었었능겨!"
지삼출이 울화를 터뜨리며 의원을 부르려고 내달았다.
"밑이 실한 젊은 여자들이 애 없애려고 독한 약 먹었다가 제 목숨 잃는 일이 허다하지요. 애만 없애는 신통한 약 없으니 괜히 흉한 일 당하지 말고 애를 낳게 하시오. 애를 낳아 자식 없는 집에 주면 아이도 산모도 자식 없는 집도, 삼자가 두루두루 그 아니 좋소. 하늘의 순리를 따라야지요."
의원의 말을 듣고 송수익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국이는 날이 새면서 깨어나기는 했지만 며칠을 앓았다. 수국이가 몸을 가누게 되자 송수익이 발걸음을 했다. 송수익의 타이름을 들으며 수국이는 눈물만 떨구었다. 역시 의원의 말은 맞았다. 수국이는 헛고생만 한 것이었다. 배는 다달이 불러 오르고 있었다. 수국이는 몸을 풀었다. 핏덩이는 고추를 달랑 달고 있었다. 그런데 수국이는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아이를 받은 세 사람 중에 아무도 아들이라도 알리지를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국이는 아이에게 아예 젖꼭지를 물리려고 하지 않았다. 고개를 딱 돌리고는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하이고, 참말로 독허기도 독허시."
"긍게 말이시. 사람 겉 보고 몰른당게."
여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아니여, 기왕지사 생이별헐 인연잉 저것이 잘허는 것이요. 젖 뽈리기 시작허먼 정붙어 띠기만 에로와진게."
"그렇기넌 허제. 핏줄 땡기기 시작허먼 그것도 속씨린 일잉게. 근디, 그런 것 다 알고 젖 안 뽈리는 것일랑가?"
"하먼, 그 똑똑헌 사람이 그런 것 몰르겄능가. 하여튼지 간에 엄니 죽은 원한이 가심에 서리서리 맺혔구만."
"그나저나 저러다가 저 애기 넘 집에 가기 전에 굶어서 죽는 것 아니여?"
"그럴 수야 있간디요. 그 에린 것이 무신 죄가 있다고." 필녀가 세차게 고개룰 흔들었다.
"자네가 젖 믹이라고 권해 볼랑가?"
"나 말이라고 듣간디요."
"글먼?......"
"나가 키울라요."
"무신 수로? 자네 젖 구시젖 되야분 지가 언젠디."
"아따, 심청이가 동냥젖 묵고 큰 것 몰라서 그러요?"
"아이고, 수국이나 필녀나 독허기가 땅벌이고 독새여." 필녀는 갓난아이를 안고 나섰다.
아이를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수국이의 괴로움을 덜어주어야 했다. 필녀는 동냥젖을 얻어 먹이게 되면서 수국이와 한방 쓰는 것도 피했다. 수국이는 그런저런 일에 전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필녀는 그런 수국이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자식에게 정이 쏠리면서도 참아내고 있는 것인지, 정말 어머니 죽인 원수의 자식으로 꼴도 보기가 싫은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동냥젖 얻어 먹이기가 쉽지 않아 필녀는 아이에게 매달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 고달픔은 농사일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아재, 어찌 돼간다요?"
이 물음이 날이 갈수록 잦아졌다.
"어이, 자네 고상이 너무 많네마는 쬐깨 더 참소. 시방 눈에 불씨고 사방팔방으로 찾고 있는디 고것이 생각보담 수월털 않구만."
지삼출이 난처하고 미안해했다.
"지야 고상일 것이 없는디, 애기가 배곯아 고상이고 수국이가 속 아프제라."
"그려, 기왕지사 보낼 것이면 하로라도 빨르게 보내는 것이 존디, 어떤 집언 살림이 궁히서 그렇고, 어떤 집언 남자는 좋다는디 여자가 강짜럴 히서 그렇고, 또 어떤 집언 다 존디 아아가 젖이나 떨어져야 키우제 당장 어찌 키우겄냐고 한단 말이시."
어렵사리 동냥젖을 얻어먹이고 밥국물로 때우고 해가며 백일을 넘겼다.
"지랄허고 커갈수록 지 애비럴 떡판에 찍어냈당게. 누가 웬수놈에 새끼 아니라고 헐성불러."
어느 날 수국이가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필녀는 곧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참아냈다.
‘체, 겉눈언 감은 칙허고넌 속눈으로 볼 것은 다 보능구마.’
이 말을 해서 괜히 수국이의 속을 아프게 할 것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를 낳은 다음부터 수국이의 얼굴에는 그늘이 더 진해져 있었다. 그리고 수국이가 가끔 아이를 훔쳐보는 것도 다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백일이 지나면서 아이는 젖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어느 만큼 커서 젖동냥을 할 체면이 어려워졌고, 하루라도 빨리 젖을 떼서 밥살을 올려야 했던 것이다. 새벽녘이면 아이는 더 보채고 들었다. 필녀는 어찌할 수 없이 자기 젖꼭지를 물리고는 했다. 아이는 빈 젖꼭지나마 빠는 것이 나은지 덜 보채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필녀는 젖꼭지를 빨리게 되면서 아이에게 쏠리는 정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혼자 놀라곤 했다. 그냥 이대로 키우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자기도 이런 아들을 하나 낳고 싶다는 욕심이 동하기도 했다. 그 욕심에 스스로 당황해 달아오르는 얼굴을 치마폭에 묻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선하게 떠오르는 얼굴이 감히 송수익 선생이었다. 그런 생각을 품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남편이 죽은 다음부터는 마음이 한사코 쏠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송수익 선생의 씨를 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몇 년 전 서로군정서가 안도현 쪽으로 이동을 했을 때 그런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한번은 대원들을 앞서 보내고 단둘이 산길을 가다가 폭우를 만나게 되었다. 비를 피할 데가 없어 그대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가 심해지면서 산에는 구름까지 낮게 퍼지고 있었다. 온몸이 물구덩이가 되어 걷다 보니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거친 빗속을 아무리 헤매도 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지칠 만큼 헤매다니는 동안 비가 그치기는 했지만 산속은 어느덧 어두워지고 있었다. 산속인 데다가 밤이 되자 냉기가 끼쳐왔다. 비에 젖을 대로 젖은 몸은 한기가 들기 시작했다.
"서, 선상님, 추워서 죽겄는디요......"
필녀는 턱을 떨어대며 말했다.
"옷이 다 젖었으니...... 그래도 어디 집이 있나 찾아보면서 걸어야지 이대로 주저앉아서는 더 큰 일 나."
"저어, 물이라도 짜 입으면 잠 낫덜 안컸능게라."
"으음, 그거 좋은 생각이군."
커다란 바위를 서로 등지고 비에 젖은 옷을 벗어 짜기 시작했다. 그때 필녀의 머리를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은 때가 어디 있는가!
필녀는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벌떡거리고 요동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불길이 일고 있었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때를 얼마나 고대해 왔던 것인가. 필녀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선상님, 얼어 죽겄구만이라우."
필녀는 정신없이 송수익에게로 내달았다.
"아니, 아니......"
윗옷을 벗어 짜느라고 상체가 알몸이 되어있던 송수익이 당황하며 더듬거렸다. 그런데 송수익이 어찌할 틈도 없이 필녀는 송수익을 끌어안았다. 그런 필녀도 저고리를 벗은 채였다.
"아니 필녀, 필녀......"
"선상님, 선상님......"
필녀는 가슴이 훨훨 타는 불길을 주체하지 못하고 송수익의 가슴으로 자꾸 파고들었다.
"필녀, 내가 자네 맘 진작 다 알고 있네. 자네 맘에 늘 고마워하고 있어."
송수익이 필녀는 꼭 보듬으며 나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
선상님, 나 맘 다 알면 나가 바래는 대로 혀주시오. 여그 누가 있소. 쥐도 새도 몰르는 일인디.
필녀는 이 말을 속으로만 부르짖으며 송수익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댔다. 송수익이 한숨같이 진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필녀, 생각해 보게. 우리가 이 만주 땅까지 왜 왔지. 내가 자네 맘을 잘 간수함세. 그러면 되지 않겠나."
송수익이 또 진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필녀는 그때서야 그 숨소리에든 뜻을 알아들었다. 자신은 송 선생님을 괴롭히고 있었다. 송 선생님은 마음이 불붙지 않게 하려고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필녀는 자기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과 함께 선생님이 앞으로 나를 못된 년으로 박대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필녀는 가슴의 불길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선상님, 지가 잘못혔구만이라. 지가 미친 년이구만이라."
필녀는 울음이 솟고 있었다.
"아니시, 자네 맘 내가 잘 감수함세."
"선상님, 용서럴 빌겄구만요."
"아니야, 아니야, 잘한 일이야."
송수익은 필녀를 보듬은 팔에 힘을 주었다.
"선상님 추우시구만요."
필녀는 송수익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며 그의 가슴팍에서 얼굴을 뗐다.
"그래, 필녀도 고뿔 앓아선 안되지."
송수익도 필녀를 보듬었던 팔을 풀었다. 필녀는 후다닥 돌아섰다.
필녀는 그때의 기억을 무슨 소중한 보석처럼 간직해 왔다. 수국이에게도 그 이야기만은 하지 않았다. 송 선생님의 체면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해버리면 송 선생님과 자기와의 관계에 더러운 것이 묻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필녀는 자기가 송 선생님한테 보듬겼다는 것만으로도 황감하고 황홀했다. 자기도 송 선생님도 위는 맨몸이었으니 잠자리를 같이한 것이나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혼자 아슬아슬한 생각도 많이 해보았다. 그때 조금만 더 늦게 바위를 돌아갔으며 어찌 되었을 것인가...... 자기도 속곳을 짜고 선생님도 속옷을 짜고...... 발가숭이로 그리 되었더라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아이고 미친년, 그리헐 것이제.
필녀는 제 머리를 쥐어박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아쉬운 후회는 꿈에서 풀고 또 풀었다. 그러나 알몸으로 서로 끌어안았을 뿐 꿈에서도 그 일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송 선생님은 꿈에서도 요지부동이었다. 다음 날 아침 지삼출이가 필녀네 거처로 들어섰다.
"어쩐고?"
지삼출은 필녀를 보며 수국이의 방을 눈짓했다.
"속이야 좋을랍디요마는 겉보기로야 암시랑토 안허구만이라."
필녀가 수심 깃들인 얼굴로 혀를 찼다.
"그려, 웬수놈에 자석이라 맘 악착시리 묵음서 독얼 부리는 것이제 그 속맘이 오직허겄능가. 아무리 웬수놈에 새끼라 혀도 지 피가 절반이 섞인 핏줄인디."
지삼출이 먼 산을 바라보며 쌈지를 꺼냈다.
"그나저나 저것얼 보낼랑게 맘이 영 안 좋구만이라."
필녀는 새로 단정하게 빗은 낭자머리를 쓰다듬으며 혼자 놀고 있는 아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렇겄제. 자네야 운 정이 짠득짠득 들었응게. 자석이야 낳은 정보담 키운 정이 더 아프다고 안혀."
"아이고, 아재가 나 맘 알아주시요 이. 나 밤에 한숨도 못 잤소." "그 집에 안 주고 그냥 키우고 잡았겄제?"
"아이고메 아재, 어찌 그리 쪽집게 점쟁이다요?"
필녀가 과장되게 손바닥을 맞때렸다.
"허,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 앞이서 거 무신 소리여. 척허먼 3천 리제."
지삼출은 능청스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저것이 인자 뙤놈 되야불겄제라?"
"그러겄제......"
"불쌍한 것, 그 잘난 인물이 아깝다."
필녀는 또 혀를 차댔다.
"다 지 팔자제. 엄니 인물 목단꽃에 동백꽃으로 춘향이 찜쪄묵게 생겼겄다. 즈 애비라는 것도 심뽀가 나빠 그렇제 낯짝이야 그만허면 상질 아니드라고. 씨 좋고 밭 좋은 게 과실이야 더 볼 것 머시가 있다고. 허나 인물치레 말고 팔자치레허란 옛말이 그른 디가 없네."
"그 집서 잘 키우기넌 허겄소?"
"걱정 말소. 골르고 골른 집잉게. 오갈 질이 솔찬헌디 그만 나서야제?"
지삼출이 곰방대를 털며 일어났다. 필녀는 조그만 보퉁이와 함께 아이를 안았다. 아이가 좋아라 하며 방글방글 웃었다.
"가자, 차돌아. 새엄니한티 가자아."
필녀는 토방을 내려서며 일부러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수국이의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얼렁 가자, 차돌아. 새엄니가 기둘린다."
필녀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그래도 수국이의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필녀의 눈치를 안 지삼출이 손을 저으며 그냥 가자는 눈짓을 했다.
"아이고, 징허고 징헌 년. 저리 독헐지넌 몰랐네."
필녀가 중얼거리며 사립을 나섰다.
"그려, 저리 독허니 맘묵어야제. 그리 안허고야 어찌 핏줄이 끊어지겄어."
지삼출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필녀와 지삼출이 동제를 벗어나고 있을 즈음이었다. 수국이가 방에서 뛰쳐나왔다. 짚신을 꿰 신은 수국이는 허둥지둥 사립 쪽으로 내닫고 있었다. 수국이의 눈길은 필녀와 지삼출을 쫓아 날아가고 있었다. 필녀와 지삼출은 아득하게 멀어져 있었다. 수국이는 사립을 붙들며 흑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낌과 함께 어깨가 흔들렸다. 울음소리가 진해지며 허리가 흔들려. 그리고 온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송수익은 지삼출에게 수국이의 아들이 양자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그 일을 그저 지켜보았다. 지삼출이 일을 잘 매듭짓고 있었고, 자신이 무심한 척하는 것이 수국이가 더 편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송수익은 더 큰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또 통의부와 의군부 사이에 유혈 충돌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 유혈 충돌이란 단순히 주먹다짐이나 패싸움이 아니었다. 그건 충을 앞세운 군사력의 대결이었다. 그러니 충돌이 일어나면 피 흘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고, 더 심해지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송수익은 그 문제로 이틀째 행정구 회의에 나가고 있었다. 분명 문제점은 있으면서 해결책은 불투명한 대책회의였다. 벌써 2년 동안 충돌이 생길 때마다 똑같은 내용의 회의가 되풀이되었지만 마땅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유혈 충돌은 처음부터 감정대립에서 야기된 것이 아니라 의식대립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다들 모이셨으니 그러면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결말을 못 본 전덕원 일파에 대해서 고견들을 내주시기 바랍니다."
회장이 방에 둘러앉은 다섯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들 여섯 사람 중에 셋은 지역 행정구의 대표였고, 다른 셋은 각 행정구의 치안을 맡고 있는 경호 대장들이었다. 통의부는 통화현을 중심으로해서 여러 현에 걸쳐서 열대여섯 개의 지역 행정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행정구마다 50여 명씩의 경호대를 두고 있었다. 행정구의 대표는 비교적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맡았고, 경호 대장은 거의가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떤 중대사가 발생하면 세 개의 행정구씩 의견을 모으고, 그런 다음 대표 한 사람이 중앙회의에 참석하도록 되어있었다. 공화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통의부의 민주적 의결방식이었다. 그리고 회의의 회장은 행정구의 대표에 한하여 맡되,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회의 때마다 돌아가면서 맡는 윤번제였다. 나이 사십 중반이 다 된 송수익은 회의가 열릴 때마다 세월의 무상을 느끼고는 했다. 대개 삼십 대 초반인 경호 대장들과 자리를 함께하면서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더 실감하게 되는 것이었다. 분명 행정구 대표는 경호대를 관할하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가 대접받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나이 먹어 밀려났다는 생각이 더 드는 것이었다.
아아, 만주에서 15년이 다 되도록 해놓은 일이 무엇인가. 이루어 놓은 일 아무것도 없이 세월만 허망하게 보낸 것이 아닌가.
송수익은 혼자 있을 때도 이런 자괴감에 빠지고는 했다. 무슨 일인가를 끊임없이 해왔으면서도 손에 잡히는 것이라곤 없는 허망감을 떼칠 수가 없었다. 다만 자위할 수 있는 건 그동안 최선을 다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자신할 수 있는 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었다.
"전덕원 일파를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눈 부리부리한 경호 대장이 긴 침묵을 깨며 말했다. 그의 말은 경호 대장답게 과격성을 띠고 있었다.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니, 그게 무슨 뜻이오?"
회장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예, 전덕원은 이제 나이 들어 별로 쓸모도 없으면서 그 고집불통의 복벽주의로 왜놈들을 무찌르기 전에 자기와 뜻이 다른 독립군들을 적으로 삼아 계속 난동을 부리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더 이상 전덕원이 활동을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통의부의 힘을 총동원해서 전덕원을 만주에서 몰아내든지, 붙잡아다 발을 묶든지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전덕원 하나만 그렇게 해버리면 의군부는 저절로 무너집니다."
광대뼈 불거진 경호 대장의 찬동이었다.
"글쎄에...... 그 일이 그리 쉽겠소? 그러자면 그야말로 큰 충돌이 일어날 터인데, 또 우리 독립군들끼리 죽이고 죽는 살상이 벌어지지 않겠소?"
회장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한번 겪는 게 낫지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두고두고 충돌이 생겨 사람은 사람대로 상하고 독립투쟁은 독립투쟁대로 안 됩니다."
첫 번째 경호 대장의 말이었다.
"예, 꼭 정면공격만 생각할 게 아닙니다. 전덕원을 활동 중지시킨다는 원칙만 정해지면 그 일을 추진하는 은밀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경호 대장이 말을 받았다.
"글세...... 그게 합당한 방법인지...... 이 의견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회장이 송수익과 또 한 사람의 대표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것 참, 전덕원의 보황주의를 공화주의로 바꾸게 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로군요."
송수익과 마주 앉은 대표의 말이었다. 그건 의견 개진이 아니라 의견 회피였다.
"송 선생 의견은 어떠십니까?"
회장이 송수익을 쳐다보았다.
"예, 경호 대장들의 의견이 한 가지 방법일 수는 있습니다. 허나 심사 숙고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임금을 다시 받들어 모시기 위해 독립투쟁을 한다는 전덕원 중심의 복벽주의는 분명 민권을 중시하는 시대조류에도 역행하는 것이고, 우리 상해 임정의 공화주의 국체에도 위배되는 것입니다. 허나 세상의 변화에 따라 복벽주의와 공화주의가 상호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피치 못할 사정입니다. 왜냐하면 유생들의 보황주의며 복벽주의는 조선조 5백 년의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다, 처음 우리가 만주로 이동했을 때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복벽주의 세력이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허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형편은 완전히 반전되었습니다. 복벽주의는 이제 잔영에 불과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호충돌을 일으키는 반면에 복벽주의자들도 독립투쟁에많은 공적을 세워왔기 때문입니다. 국체는 서로 달라도 왜놈들과 투쟁한 공통점을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시점에서 상대방에 맞서서 적대감을 자꾸 키워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의군부만 우리한테 적대감을 가져왔습니까? 아니,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얻어진 게 무엇입니까? 아까운 독립군들의 희생을 자초했고, 동포들에게 신망을 잃었고, 독립군들이 파벌싸움으로 망해 간다는 왜놈 밀정들의 모함과 이간책동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 우리 쪽에서 먼저 적대감을 버리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는 길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송수익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렇게 되면 전덕원은 더 가관이 될 것입니다. 그 고집불통을 모르십니까?"
광대뼈 불거진 경호 대장이 불쑥 말했다.
"복벽주의가 잔영이라고 하셨는데 그러니까 싹 밀어붙여서 더 우환이 없게 해야 합니다."
눈 부리부리한 경호 대장의 말이었다.
"그럴 수도 있소. 허나 개도 막다른 골목으로 몰지 말라고 했소. 그리고 이제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는 건 복벽주의가 아니오. 세상이 급변하면서 확산되고 있는 신사상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할 거요."
"공산주의 말씀인가요?"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세 번째 경호 대장이 송수익을 쳐다보았다.
"그렇소."
"선생님 보시기에는 그게 어찌 도리 것 같습니까?"
"글세, 지금으로서야 뭐라고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이모저모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복벽주의자들을 구태의연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그 사람들이 또 우리를 그렇게 보지 않을까 싶소."
"에에...... 그러면 두 가지 의견을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회장이 이야기가 샛가지 치는 것을 막고 나섰다. 여러 가지로 이야기가 오갔지만 두 가지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표결을 했지만 3대 3이었다. 두 가지 의견에 행정구 대표와 경호 대장 한 사람씩이 서로 엇갈리게 찬성을 한 것이었다. 그 결과를 그대로 중앙회의에 올리기로 하고 회의를 끝냈다.
송수익은 집으로 돌아오며 전덕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유인석의 문하답게 철저한 복벽주의자로 여지껏 상투를 틀도 다녔다. 그러나 투지나 용맹이 걸출해 의병투쟁에서 독립투쟁까지 공을 많이 세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상이 변화하는 필연적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이 공화주의로 바뀌고 임시정부가 공화주의를 내걸고 수립되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임금 숭앙만을 고집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젊은이들이 반발하며 휘하에서 이탈하는데도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모처럼 남만주의 독립군 단체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 발족시킨 대한통의부가 또다시 조각나게 된 것은 바로 전덕원의 주도였다. 일본군들이 만주에서 철수하자 그동안 이동 투쟁을 해왔던 독립군 단체들은 다시 남만주에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런데 곧바로 제기된 것이 단체들의 통합론이었다. 그건 일사불란하게 조직된 일본군들을 본격적으로 대적해 본 다음에 나온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래서 1922년 6월에 환인현에서 조직된 것이 대한통군부였다. 그리고 조직을 더욱 확대 강화하면서 2개월 후에 대한통의부로 개칭하게 되었다. 그때 전덕원은 참모부 감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취임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통의부는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으며 공화주의를 내세우고 있었고, 따라서 복벽주의자들은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덕원은 직책의 취임 거절로 끝나지 않고 휘하의 무장대를 동원하여 통의부 본부를 포위하는 도발 행위를 저질렀다. 그때부터 독립군들의 유혈 충돌은 야기되기 시작했다. 서너 차례의 충돌 끝에 전덕원은 1923년 2월 환인현 대황구에서 복벽주의자들로 구성된 의군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송수익은 굳어진 생각이라는 것이 그리도 무서운 것인가를 전덕원을 보며 또다시 느끼고는 했다. 그런 전덕원의 모습은 흡사 임병서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복벽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전덕원이 양반으로서의 양반의 지위를 고수하려는 고집이라면, 임병서는 중인으로서 양반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욕심이었다. 그들의 그런 생각 앞에서 자신이 오늘 회의에서 내놓은 의견은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송수익은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 송수익은 예고없이 찾아온 손님 셋을 맞이했다.
"중앙회의에서는 의군부를 웅징하기로 결정했답니다."
어딘가 긴장되고 상기된 것 같은 기색의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불쑥 내놓은 말이었다.
"또 유혈사태가 생기게 생겼습니다."
"그리되면 의군부에서는 또 가만히 있겠습니까?"
"언제까지 이 모양들을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가는 우리끼리 다 죽고 말겠습니다. 참 한심스럽습니다."
"무슨 대책을 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세 사람은 차츰 열이 오르고 있었다. 송수익은 느낌이 이상해서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다.
"선생님, 좌시하지 말고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예,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중앙회의 결정인데 무슨 대책이 있겠소?"
송수익은 더디게 고개를 들었다.
"대책이 있습니다. 우리끼리 싸우는 것을 반대하는 동지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여 새로 조직을 만들면 됩니다."
송수익은 머리가 쿵 울리는 충격을 느꼈다. 송수익은 눈을 감고 있다가 한참 만에 떴다.
"다들 들어보시오. 나라를 빼앗기고 만주에서 독립군 단체들이 서로 분산되어 많이 생겼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소. 나라가 없으니 구심점이 없어 그리 된 것이오. 그러다가 분산투쟁이 실효가 적다는 것을 깨달아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소. 그 과정에서 의군부의 이탈이 생기고 충돌이 일어난 것이오. 헌데 그 충돌이 보기 싫다 하여 새로 단체를 만드는 건 일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오. 그건 단체를 다시 분산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둘이 하던 싸움을 셋이 하게 되는 우를 범하는 일이오. 의군부를 완전제압해 버릴 수만 있다면 중앙회의의 응징 결정이 한 방법일 수도 있소, 우리는 하나로 뭉쳐야 하오. 분열을 절대 막아야 하오. 그건 자멸이오."
그러고 나서 달포쯤 지났다. 송수익은 통의부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참의부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송수익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시대 변화에 따른 독립투쟁의 방책에 대해 깊은 고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15. 갈림길
신한촌 앞에 펼쳐진 블라디보스톡만에 봄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만은 그 폭이 어찌나 넓은지 건너편 산들이 섬처럼 아득하게 보이고, 길이는 너무 길어 아예 끝이 보이지 않아 마치 넓고 넓은 바다 같았다. 만 가득 햇살의 반짝거림이 눈부시게 넘치고 있었다. 보드라운 봄바람을 타고 이는 잔물결 위에 따스한 햇살은 현란한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 햇살의 반짝거림은 노을이 물든 것과는 사뭇 달랐다. 노을에 물든 빛이 환상적이고 황홀하다면 그 반짝거림은 약동적이고 찬란했다. 노을에 물든 빛이 광택 없이 스러져 가는 빛이라면 그 반짝거림은 광택 넘치게 용솟음하는 빛이었다. 그리고, 노을에 물든 빛이 소리 없이 짓는 다소곳한 웃음이라면 그 반짝거림은 발랄하게 터뜨리는 낭자한 웃음이었다. 그 햇살의 무수한 반짝거림이 유난스레 투명하고도 현란한 것은 바닷물이 맑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블라디보스톡 앞바다는 언제나 청록색으로 맑기 그지없었다. 반 길이 넘는 물속의 모랫바닥에서 해삼이 가물거리고 조개들이 입 벌리고 있는 것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신한촌의 산비탈에서는 어디서든지 그 넓은 만이 시원스레 바라다보였다. 그 풍광 그윽하고 소담한 만은 마치 신한촌 사람들의 전용 공원 같았다. 신한촌의 조선사람들은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들으면 잠이 들고 파도 소리 들으면 잠이 깨는 이국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광민은 독립문 거리에 서서 봄볕 충만한 만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만의 왼쪽으로 나아가면 바다가 열렸다. 그 바다를 따라 하루 뱃길이면 원산에 닿는다고 했다. 원산에서 한성까지 기차로 하루, 한성에서 이리까지 또 하루, 사흘이면 집에 당도할 수 있다. 집을 떠나온 지가 벌써 몇 년인가. 어느덧 24년이니 6년 세월이 흘러간 것이었다. 이광민은 바닷물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들녘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고향 생각과 함께 고향 들녘이 선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들녘의 그 아련하고 그윽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 냄새와 함께 식구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순서는 언제나 똑같았다. 이광민은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고향을 떠나오기 전에는 어느 때 한번 눈여겨본 적이 없는 들녘이었다. 그런데 막상 고향을 떠난 다음부터 들녘은 마음속에서 생생히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고향이란 그런 것인가......
이광민은 뒤늦게 사람만이 그리움이 아닌 것을 깨닫고는 했다.
"여기 계시는군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어떤 여자가 다가서는 기척에 이광민은 고향 생각에서 깨어났다.
"아니 선숙 씨 아니시오?"
"이 독립문 앞에 서 계시니까 젊은 투사답게 아주 잘 어울리시네요?"
윤선숙이 서글서글한 큰 눈에 웃음을 담았다. 그 말에서는 전라도 어투가 묻어나고 있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이광민은 쑥스럽게 웃으며, "벌써 학교 수업이 다 끝날 시간입니까?"
여기 어쩐 일이냐고 묻고 있는 이광민의 말에서 전라도 어투가 묻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광민은 윤선숙이가 우연히 지나가던 걸음이 아니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오늘 반공일이거든요."
"아, 그런가요. 이거 원......"
"오빠가 급한 일로 수청에 가셨다가 내일 오신대요. 쉬고 계시라고 하더군요."
이광민은 고개만 끄덕였다. 예정된 일을 뒤로 미룰 정도로 급한 일이면 그만큼 중대한 일일 것이고, 그런 일을 윤철훈이가 여동생에게 말했을 리 없었던 것이다.
"저보고 잘 모시라고 했어요."
윤선숙이 또 큰 눈에 웃음을 담으며 자기의 용무가 다 안 끝났음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던가요......"
이광민은 어색스럽게 웃으며 독립문을 올려다보았다.
"이 독립문도 돌로 바꿔야 하는데......"
윤선숙도 독립문을 올려다보았다. 세 갈래 길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독립문은 목조였다. 3.1 만세의 물결에 따라 신한촌 동포들도 만세를 외치고 3월 말에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돈이 모자라 나무로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립문 주변은 아담한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나뭇가지들에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 있었다. 노인들 네댓이 모여 앉아 무슨 이야기인지 열심히 하고 있었고, 아이들 몇 명이 손 장난을 하며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면 노인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특히 여름에는 나무 그늘이 노인네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었다.
"다른 볼일 있으신가요?"
윤선숙이 짧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질하며 물었다. 그녀는 러시아식 치장을 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이광민은 어물거렸다.
"그럼 저쪽으로 산보하면 어때요."
윤선숙은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이광민은 윤선숙을 따라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 윤철훈을 만날 때까지 시간 보내기가 막연해진 판이었다.
"저분들이 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작쟁의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윤선숙이 공원을 벗어나며 말했다.
"예. 노동쟁의도 그렇고, 국내에서 새로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문제지요?"
장에 어울리게 공원에 모여 앉은 노인들은 거의가 나라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의견이 엇갈려 고성을 지르는 일도 있었다.
"저 아이들이 그런 이야기를 알아듣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르스카야로 길을 잡은 윤선숙이 오인들 옆에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예. 다 알아듣지는 못하더라도 자꾸 듣는 것이 중요하지요. 자꾸 들으면서 저희들도 모르게 깨달아가니까요."
"네. 그런 면에서는 저분들이 좋은 선생님이에요."
"그렇지요. 아주 자연스런 애국 선생님들이죠."
"애국 선생님요?"
윤선숙의 큰 눈이 반짝하며 이광민을 쳐다보았다.
"뭐, 마땅한 말이 없어서......"
이광민은 또 어물거리며 윤선숙의 눈길을 피했다. 이광민은 윤선숙의 러시아식 활달함에 부딪힐 때마다 문득문득 당황하고는 했다.
"아니에요, 너무 잘 어울리는 말이에요."
윤선숙의 목소리가 쾌활했다. 그녀는 조선이나 다름없는 신한촌의 큰길을 대낮에 남자와 나란히 걸어가는 것을 개의치 않는 것은 물론 자기의 기분도 주저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신한촌의 남자들은 아직도 상투를 튼 남자들이 훨씬 많았고, 남녀가 내외하는 것이 그대로 지켜지고 있었다.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이 러시아식 옷차림을 하는 것도 아주 드물었다. 그런데 윤선숙이 옷치장이나 언행이 남다르게 러시아식인 것은 겉멋이 든 탓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윤선숙은 이곳 해삼위(블라디보스톡)에서 태어나서 러시아인 학교를 다닌 것이었다. 그만큼 아버지가 일찌감치 연해주로 이주했던 것이다. 바구니를 낀 젊은 여자 둘이 곱지 않은 눈길을 자기들에게 쏘며 지나가는 것을 이광민은 느꼈다. 두 여자한테서 비린내가 풍겨왔다. 이광민은 옆 눈길로 그 여자들의 등에 빨간 댕기가 드리워진 것을 보았다. 생선 비린내가 풍기는 것처럼 두 처녀의 한복 입성은 낡고 후줄근했다. 그 쳐녀들이 어디로 가는지 이광민은 알았다. 선창에 품팔이를 하러 가는 것이었다. 그물에서 정어리를 떼어내는 품팔이는 가난한 조선 여자들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일거리였다. 정어리는 쉽게 상하는 생선이었다. 그래서 배가 닿자마자 그물에서 한시라도 빠르게 떼어내느라고 사람 손을 많이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일에는 덤이 따랐다. 그물에서 떼어내다가 대가리가 떨어진 정어리나 눈알이 붉어지기 시작하는 정어리를 덤으로 받을 수 있었다. 대가리가 떨어진 정어리는 이미 상품 가치가 없었고, 눈알이 붉어지기 시작하는 정어리는 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쪽 서울 거리를 가실까요."
윤선숙이 왼쪽으로 꺾어 돌았다. <서울스카야>라고도 하는 그 길은 산비탈을 따라 내려가며 해변으로 맞뚫려 있었다. 신한촌은 7개의 큰길 중에서 그 길만이 유일하게 <서울>이라는 조선말이 붙어 있었다. 그건 조선사람들의 집단촌이기 때문에 러시아 관광청에서도 어쩔 수 없이 그 명칭을 허용한 것이었다. 나머지 길들은 모두 러시아의 지명을 따서 붙인 이름이었다. 야산의 아래서부터 개발되어 집들이 위로 지어져 올라가고 있는 신한촌에는 5개의 큰길이 산을 감아 돌 듯하며, 가로로 뻗어 있었다. 그리고 2개의 큰길이 산자락 아래서부터 위로 뻗어 올라가며 5개의 길들과 교차하고 있었다. 그 2개의 세로길 중에 독립문 쪽의 것이 서울 거리였다. 신한촌 야산에는 이제 거의 빈터가 없었다. 야산을 타고 돌아가며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5천여 가구의 집들 사이에 예배당 4개도 제각기 자리 잡고 있었다.
"혁명가들은 결혼을 안 하는 게 원칙이라고 생각하나요?"
윤선숙이 불쑥 내놓은 말이었다. 신한촌 사람들은 대개 독립운동가를 혁명가라고 했다. 그건 러시아혁명의 영향이었다.
"글쎄요......"
이광민은 또 대답을 어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물음이 갑작스럽고 맹랑해서만이 아니었다. 그 물음은 이광민 자신이 총각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철훈이 오빠는 그걸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것 같은 태도예요."
"그야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은가요?"
"어머, 그러세요? 전 이 선생도 오빠와 같은 생각인 줄 알았거든요."
윤선숙은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이광민은 아차 싶었다. 자신은 그저 지나치는 말로 했을 뿐인데 윤선숙은 엉뚱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해도 이만저만한 오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은 결혼한 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광민은 감정이 복잡해졌다. 그 말과 함께 윤선숙이 자신에게로 바짝 다가선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윤철훈의 사촌 동생인 그녀는 윤철훈의 집에서 몇 번 만나면서부터 자신을 대하는 눈치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아휴 시원해."
윤선숙은 철길을 건너면서 두 팔을 약간 들어 숨을 들이켜고 있었다. 갯바람과 함께 바닷물이 찰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길을 건너면 바로 해변이었다. 만을 따라 멀리 뻗어가고 있는 철길을 건너면 바로 해변이었다. 만을 따라 멀리 뻗어가고 있는 철길을 이광민은 잠시 바라보았다. 철길을 따라 마음은 순식간에 하바로프스크까지 뻗치고 있었다. 그 철길은 모스크바로 해서 유럽까지 이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또 일어났다. 그곳에 가면 혁명의 성공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자주 와보셨어요?"
윤선숙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고른 치아가 하얗게 드러나고 있었다.
"아, 아니요, 첨입니다."
이광민은 당황스럽게 대답했다. 그의 가슴은 벌떡거리고 있었다. 하얗게 드러나는 고른 치아를 보는 순간 그는 가슴이 꿈틀 요동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치아가 예쁘다는 것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치아가 성감을 자극하는 것은 더욱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아유, 조국 혁명도 급하지만 좀 휴식할 줄도 알아보세요. 강철은 강하지만 계속 압력을 가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휴식은 활력이에요."
인텔리 여성, 학교 선생답게 윤선숙이 말했다. 이광민은 윤선숙을 쳐다보며 씩 웃고 말았다. 그 얼굴을 새삼스럽게 눈에 담았다. 동그스름한 얼굴이 예쁘다기보다는 총명해 보였다. 얼굴 가운데서 예쁜 것은 서글서글하게 큰 눈이었다. 아니, 그리고 또 있었다. 구김살 없는 웃음과 함께 드러나는 하이얀 치아. 이광민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미친놈! 하고 있었다.
"그럼 저 모래밭에 해삼이랑 조개들이 많은 것도 모르시겠네요?"
해변의 비탈을 달리듯 빨리 내려가며 윤선숙의 목소리가 발랄하게 커지고 있었다.
"그거야 들어서 알지요."
이광민도 바다의 힘에 이끌리듯 비탈을 달려 내려가며 절로 목청이 커졌다.
"알면 뭐해요. 총 들고 싸워보지 않고 입으로만 혁명을 떠벌리는 거나 같지요."
이광민은 말문이 막히면서도 기분이 산뜻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윤선숙의 말 재치는 언제나 비약하고 회전하며 정곡을 찌르고 들었다. 그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지식과 총명이 어우러져 나오는 것이었다.
"저 애들은 뭘 하는 건가요?"
이광민은 저쪽 물가의 모래밭에 흩어져 있는 아이들을 가리켰다.
"어디 한번 맞혀보세요."
윤선숙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글쎄요, 헤엄치기는 아직 이르고......"
"후후후...... 바지만 걷어 올리고 뭘 잡고 있잖아요."
윤선숙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해삼하고 조개를 잡는 겁니까?"
"네, 맞혔어요. 쟤들이 점심 요기하러 나온 거예요."
"점심 요기요?"
이광민은 되묻다가 그 말뜻을 깨달았다.
"점심을 굶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그런 것들을 잡아 점심을 때우는 거예요. 영양가는 조밥보다 낫지 않겠어요?"
"예, 밥을 굶는 것보다는 낫겠군요."
이광민은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런 아이들 집에서도 독립성금을 내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쳤다. 신한촌에서 독립성금을 안 내는 집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형편에 따라 그 액수가 다를 뿐이었다.
"이 바다는 우리 조선사람들한테 보물이에요. 경치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이렇게 말 들어주고 저렇게 먹을 것도 대주거든요. 저녁이면 어른들도 저걸 잡아다가 반찬거리를 해요."
"예, 그렇군요. 헌데 해삼이나 조개가 많습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에요. 저하고 잡아 보도록 하자구요."
또 윤선숙의 엉뚱함이었다.
"그러지요. 우리도 해삼과 조개로 점심을 때웁시다."
배고픈 아이들이 먹는 것을 한 끼나마 같이 먹어보고 싶었고, 그리고 윤선숙보다 한 수 높게 나가려고 이광민은 이렇게 대꾸했다.
"네, 그 생각 참 좋네요. 산에는 동삼, 바다에는 해삼이라고 했잖아요."
윤선숙은 팔딱 뛰듯이 좋아했다. 이광민은 그만 두 손을 다 들고 말았다. 부잣집 딸인 윤선숙이가 그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으레껏 놀라서 피할 줄 알았고, 그러면 아이들이 먹는 것을 선생이 못 먹어서야 되느냐고 훈계를 해가면서 골탕을 먹이려고 했던 것이다. 윤선숙은 신바람이 나서 먼저 모래밭으로 들어서며 구두를 벗어들었다. 이광민도 구두를 벗어들며, 저 여자도 어렸을 때 해삼을 잡아먹은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걸 묻고 싶지는 않았다.
"바지를 걷어 올리세요."
치마를 거머잡아 무릎까지 올린 윤선숙이 바닷물로 걸어 들어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광민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윤선숙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외간남자 앞에서 종아리를 내보이는 그 거리낌 없는 행동이 천진한 어린애 같기도 하고, 예절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자란 것 같기도 해서 어떻게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광민은 물가에 구두를 놓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어서 오세요, 어서. 여기 봐요, 여기!"
윤선숙은 빠르게 손짓하며 목소리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바지를 다 걷어 올리고 고개를 든 이광민은 문득 윤선숙의 모습에 사로잡혔다. 종아리를 바닷물에 담그고 있는 윤선숙의 모습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짙푸른 바다와 옅푸른 하늘을 반반씩 배경으로 하고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리도 신선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아이, 어서 오라니까요. 뭘 하세요."
"예, 뭐가 많습니까?"
이광민은 자기 감정을 들킬까 봐 일부러 목청을 높이며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거 보세요. 이거. 발로 모래를 살살 헤집어보세요. 해삼이고 조개고 막 나온다니까요."
윤선숙이 신명 나고 있었다. 이광민은 윤선숙을 따라 살살 모래를 헤집기 시작했다. 발가락에 걸리며 먼저 나온 것이 조개였다. 이광민은 얼른 손을 뻗쳐 집어 들었다.
"잡았소, 조개!"
이광민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윤선숙 앞에 손을 내밀었다.
"에계, 그건 그냥 놔주세요. 다른 큰 걸 잡아야지요."
윤선숙이 픽 웃으며 눈을 흘겼다.
"아니, 이것보다 더 큰 게 있소?"
이광민은 놀라면서 자기 손바닥 위에 놓인 주먹 절반만 한 조개와 윤선숙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건 열한두 살짜리예요. 스무 살짜리는 그보다 배는 커요. 됐어요, 됐어요, 이거 보세요."
윤선숙은 소매가 물에 젖거나 말거나 아랑곳않고 조개를 집어 올렸다.
"와아, 정말 그렇군요."
이광민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를 지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이광민을 보며 윤선숙이 까르르 웃었다. 이광민도 자기가 너무 소리를 크게 낸 것이 우스워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햇살 부서지는 바다 위로 펴져 가고 있었다.
"해삼도 어떤 것이 스무 살짜린지 보여 드릴께요."
"예, 선생님!"
윤선숙이 호호거리며 웃었다. 해삼도 조개도 정말 놀랄 만큼 많았다. 이광민은 어렸을 때 가끔 해변가에 놀러 갔던 것을 생각했다. 서해안은 물이 맑지 않았고, 모래밭에서는 잡을 것이 별로 없었다. 어쩌다 조개를 잡아도 큰 것이라고는 없었다.
"이건 잡는 게 아니라 그냥 막 줍는 것이로군요. 참 이상하군요, 이게 왜 이렇게 많을까요?"
이광민의 목소리는 흥겨웠다.
"러시아사람들은 이런 거 안 먹거든요. 우리가 해삼 먹는 걸 보면 흉보고 이상하게 생각해요."
"그런가요? 고사리 먹는 것만 흉보는 줄로 알았는데."
"아니에요, 러시아사람들은 먹을 줄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다시마도 못 먹는걸요. 참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그때 이광민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예, 그 말이 맞아요. 안 먹는 게 아니라 먹을 줄을 모르는 겁니다. 그게 이상할 게 없어요. 그건 바로 그 사람들이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는 증겁니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침략해 오며 원주민들을 몰아낸 그들의 역사를 말해 주는 거라 그겁니다."
"어머, 그게 그렇게 되나요?"
윤선숙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허리를 폈다.
"바다 없는 대륙에서만 살았으니 해산물은 고작 물고기 종류밖에 먹을 줄 모르는 것 아닙니까?"
"맞아요, 맞아요. 전 여태 그런 생각을 못 해냈어요."
윤선숙은 연상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스러운 눈길로 이광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원래는 우리 땅이었는데......"
이광민이 중얼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아아, 저 남자!......
새롭게 깊고 커 보이는 그를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에 윤선숙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해삼 네 마리와 조개 네 개를 잡아 가지고 모래밭으로 나왔다.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어떤 유식한 사람이 뭐랬는지 아세요? 어떤 무식한 사람이 왜 여길 해삼위라고 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점잖게 하는 말이, 바다에서 해삼이 많이 나서 해삼위라고 한다, 그랬대요 글쎄."
윤선숙이 까르르 웃었다. 이광민도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유식한 사람의 한자풀이가 너무 무식했던 것이다.
"저 애들은 이걸 그냥 먹나요?"
"쟤들도 음식 맛 고루 즐길 줄 아는 조선 아이들이라구요."
윤선숙은 눈을 곱게 흘기고는,
"시큰한 초고추장에 싱싱한 해삼을 찍으면 생각나는 게 뭐죠?"
그녀는 마치 이골난 술꾼처럼 물었다.
"그야 술이죠."
"가요. 제가 해삼 점심에 술 반찬을 사드릴게요."
"허!......"
그 재치에 이광민은 또 가슴에 시원한 바람이 스치는 걸 느끼며,
"해삼 점심에 보드카 반찬이 어울릴까요?"
그는 이렇게 응수했다.
"걱정마세요. 여기 신한촌은 조선 소비에튼 걸 아시죠? 저 선술은 뭐든지 다 있어요, 저쪽 술집에."
윤선숙이 철길 건너를 턱짓했다.
"아, 그렇군요. 헌데, 술집에 안주 가져가서 미움 안 받겠어요?"
"그 집 안주도 해삼하고 조개뿐인데, 다 공짜로 줘요."
윤선숙이 킥킥대고 웃었다. 두 사람은 철길로 올라섰다.
"그냥 철길로 걸어가요."
윤선숙이 말했다.
"그러지요."
"조개잡이 어땠어요?"
"예, 기분이 아주 상쾌합니다."
이광민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종아리를 타고 전신으로 퍼지던 바닷물의 시원함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맑은 물속에 잠겨 있던 윤선숙의 하얀 종아리와 해맑은 웃음소리가 상쾌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맛본 즐거움이었다.
"철길을 걸으면 기분이 어떠세요?"
윤선숙이 안개 낀 듯한 어조로 물었다.
"글쎄요, 어딘가로 떠나고 싶달까......, 내 앞길은 어디일까 하는 생각이 든달까..... 뭐 막연하고 그렇죠."
"어머, 저하고 어쩜 그리 비슷해요? 저는 인생을 생각해요. 끝없이 뻗어간 철길을 바라보고 있으면 허무해지고 너무 슬퍼져요."
윤선숙의 목소리가 정말 슬픈 음조를 띠고 있었다. 철둑가에서는 파릇파릇한 잎들과 함께 작은 꽃들이 봄볕을 함빡 받으며 피어나 있었다. 이광민은 불현듯 꽃을 꺾어 윤선숙이에게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 감정을 꾹 눌렀다. 러시아사람들은 남자가 여자에게 꽃을 주는 것은 무조건 사랑의 고백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더 심하게는 결혼하자는 뜻으로도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윤선숙은 러시아풍습이 몸에 밴 여자였다. 술집에서도 드넓은 만은 훤히 잘 바라다보였다. 아무런 치장이 없는 술집에는 막벌이 노동자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이광민은 소주를 시켰다. 블라디보스톡에서 해삼 안주에 소주를 마신다고 생각하니 묘한 감회가 일어났다. 손질한 해삼과 조개 안주와 함께 술이 나왔다. 이광민은 주전자의 술을 잔에 따르려고 했다.
"그게 무슨 멋이에요. 이리 주세요."
윤선숙이 손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됐습니다......"
"그 고리타분한 조선식 좀 버리세요. 좋은 것만 남겨놓고 허식은 버리는 게 어때요. 왜 술은 꼭 기생만 따르는 것이고, 다른 여자들이 술을 따르면 천해진다고 생각하죠? 신식 혁명가가 그리 구식이어서야 되겠어요? 어서 이리 주세요."
운선숙은 주전자를 빼앗듯이 가져갔다.
구식, 맞는 말이었다. 이광민은 윤선숙을 놓고 자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놈의 구식 생각이 신식인 윤선숙의 언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훼방 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 무정해라. 혼자만 마실 거예요? 저도 반찬을 주셔야죠. 방금 지도를 했는데도 효과가 없군요."
빈 술잔을 든 윤선숙이 아동을 나무라듯이 이광민을 빤히 쏘아보고 있었다.
"아 예에, 워낙 열등생이라......"
술주전자를 드는 이광민의 표정은 당황스러운 것도, 씁쓰름한 것도, 어색스러운 것도 아닌 복잡미묘한 것이었다.
"너무 염려하진 마세요. 그냥 기분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술을 받으며 윤선숙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멍청한 놈이죠. 세상에 반찬 없는 밥이 어디 있겠습니까."
윤선숙이 쿡 웃었다.
"자아, 건배합시다."
"어머, 금방 우등생이 됐네요."
둘이는 술잔을 부딪쳤다. 그러면서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부라의 바다를 바라보면서 술을 마시는 기분이 어떠세요?"
술을 찔끔 입에 댔다가 진저리를 치고 난 윤선숙이 물었다. <부라>는 블라디보스톡을 러시아인들이 줄여서 부르는 말이었다. 하바로프스크는 <하바>라고 했다.
"글쎄요, 감개무량하다고 해야 하나요? 여길 밤에만 숨어서 접근했던 때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상상을 못 했었지요."
이광민의 뇌리에는 이삼 년 전의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부라에 정이 드셨어요?"
"글쎄요. 우리 같은 사람은 어디에 정들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광민이 반 남은 술잔을 비웠다.
"오빠와 똑같은 말씀이시군요. 곧 어디로 떠나시게 되나요?"
이광민은 윤선숙의 말이 날카롭게 허를 찌르고 든다는 것을 느꼈다.
"아닌데요, 아직 별다른 계획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광민은 아주 덤덤하게 대꾸했다.
"절 속이시는 거죠? 저도 알 만큼은 알고 있는데."
윤선숙은 이광민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었다.
"글쎄요, 우리가 하는 일을 선숙 씨한테 다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지금 물은 것을 속이고 있지는 않습니다. 헌데,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시죠?"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일본군들을 연해주에서 다 몰아냈고, 두 달 전에 여기서 오르그뷰로(조직국)가 결성되지 않았어요? 그게 이르쿠츠크파가 핵심을 장악했으니까 이동휘 선생은 더 궁지에 몰린 것 아니겠어요?"
그럼 이동휘 선생 휘하에 있는 당신네들은 무슨 변동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은 생략되어 있었다. 아니, 윤선숙은 빤히 쳐다보는 강한 눈길에 그 말을 담고 있었다. 이광민은 가슴이 뜨끔한 것을 느꼈다. 그러나 학교 선생을 하고 있는 윤선숙이가 그런 정도의 사실을 알고 있고, 그런 예상을 할 수 있는 것은 놀랄 만한 것이 아니기도 했다.
"예, 잘 보셨어요. 이동휘 선생의 입지가 자꾸 어렵게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요. 허나 아직 무슨 변동이 생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이광민은 벽을 치고 있었다. 이미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변화가 구체적이지 않을 뿐이었다. 그럴수록 그 낌새가 외부에 비쳐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이 선생은 조선 혁명을 위해 싸우시죠?"
이광민은 그저 웃었다.
"당에 가입하셨나요?"
이광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여기서 더 할 일이 없으시잖아요."
이광민은 비로소 윤선숙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궁금증을 찾아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주가 옆에 붙어 있는 한 연해주에서는 여전히 할 일이 많습니다."
이광민은 마음속의 복잡한 생각과는 달리 이렇게 말했다.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네, 알았어요. 편히 쉬게 해드린다고 해놓구선 제가 괜히 골치 아픈 얘길 꺼냈나 봐요. 오빠한테 야단맞겠어요."
윤선숙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밝게 웃으며 해삼토막을 찍어 들었다.
"오빠한테 일러야지요."
이광민은 술잔을 들었다.
"아이, 그러시면 전 어떡해요."
윤선숙은 큰 눈을 흘기며 어리광부리는 아이 같은 목소리를 냈다. 이광민은 누가 들을까 봐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밖에서 싸우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소리는 중국말이었다. 이광민과 윤선숙의 눈길은 밖으로 쏠렸다. 물지게를 진 중국 사람 둘이서 대거리를 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가 물장사를 방해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 사람들은 왜 나라를 뺏긴 것도 아니면서 여기까지 와서 저러는지 몰라."
윤선숙이 얼굴을 찌푸리며 내쏘았다.
"되놈들 밤낮 저렇지비."
밖을 내다보던 주모가 침을 뱉으며 돌아섰다. 중국인들은 신한천의 야산과 시내로 넘어가는 고개 사이의 저지대에 작은 움막마을 이루고 살았다. 그들은 천한 일을 도맡아가면서 생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신한천을 생활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신한촌의 변소 치우는 일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다음 많은 것이 물장사였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염소 젖꼭지처럼 대륙에 붙어 있는 블라디보스톡에는 물이 귀했다. 야산인 신한촌에서 우물을 파도 짠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신한촌의 공동수도는 철도변에 박혀 있었다. 그 거리는 신한촌 사람들이 비탈길을 내려가 물을 받아 가지고 다시 올라오기는 너무 멀고 고생스러웠다. 그래서 살림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중국 물장수들에게 물을 사 먹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중국인들이 조선사람들이 좋아하는 콩나물을 대량으로 길러 팔았고, 러시아인들은 먹지 않는 생선인 가자미만 팔고 다니는 사람도 몇이 있었다. 그런 중국인들은 신한촌에서 천덕꾸러기였다.
"다 잘살아 보겠다고 타국까지 온 것 아니겠소. 우리도 저 사람들한테서 생활력 한 가지는 배울 게 있어요."
이광민은 밖을 내다본 채 말하고 있었다.
"네, 그렇기는 해요. 우리 조선사람들은 체면을 많이 따지는데 저 삶들은 돈벌이야 하면 체면이고 뭐고 없어요."
"이제 나가볼까요?"
이광민이 불쾌해진 얼굴로 미적거렸다.
"아니, 벌써 술 다 마셨어요?"
윤선숙의 큰 눈이 더 커졌다.
"맘 놓고 편히 쉬라면서요? 그래 맘 놓고 편히 마셔버렸습니다."
이광민이 거침없이 웃어댔다.
아, 멋있어. 장부다워.
윤선숙은 회오리바람을 재우려는 듯 빠르게 말했다.
"아니 무슨 소립니까? 기껏 밥을 먹고 또 먹으라니요?"
"그건 농담이었잖아요."
"아니, 진담이었습니다."
이광민이 몸을 일으켰다.
"큰일 하실 분이 때를 거르면 되나요? 몸을 보존해야죠."
윤선숙이 정색을 하며 이광민의 소매를 잡아 앉히려고 했다.
"혹시 소문 들으셨어요? 신채호 선생 같으신 분은 북경에서 사나흘씩 굶으며 글을 쓰신다는 거."
"네에? 여기서 권업신문 만드신 분 아니세요?"
"맞아요. 그런 분에 비하면 난 지금 너무 잘 먹었어요."
이광민은 걸음을 떼어놓았고, 윤선숙은 이광민의 소매를 놓으며 일어섰다. 해가 꽤나 기울어져 있었다. 북행 기차가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뿜은 연기가 실구름처럼 맑은 하늘로 흩어져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윤선숙은 이광민이 일으킨 거센 바람에 휘둘리고 있었다. 그렇게 단호한 면이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니야, 그러니까 독립투쟁에 나설 수 있는 거지. 하지만...... 하지만.......
이광민은 앞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어느 길로, 어떤 장소에서 투쟁을 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윤철훈이 어째서 갑자기 딴 일에 나서게 되었는지 불안하기도 했다. 이광민은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 참 재미있게 잘 쉬었습니다."
윤선숙은 이광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술집을 나서던 얼굴 그대로였다. 윤선숙은 하려던 말을 접고 말았다.
어디 가실 데 있으세요?
뭐 별로......
그럼 저 철길을 걸어요.
이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광민의 얼굴은, 예 갈 데가 좀 있어서요, 해버릴 것 같았다. 그건 안될 일이었다. 그런 일을 당할 수는 없었다.
"네, 다행이에요."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윤선숙은 먼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광민은 그대로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현듯 유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두노동자로 위장해 있었던 유씨의 최후가 또 가슴을 눌러왔다. 이렇게 해삼위를 통해 자유로워지면서 유씨의 생각은 더욱 지울 수가 없었다. 윤철훈도 그런다고 했다. 그건 유씨가 남달리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고서도 너무 어이없고 황당한 일을 당한 때문이었다. 유씨는 바다에 던져서 죽어갔을까, 불길 너훌거리는 화통 속에 떠밀려 들어가 죽어갔을까. 이광민은 다시 가슴이 벌떡거리는 것을 느꼈다. 결국 부두 노동자들은 밀린 임금을 떼어먹히고 말았다. 그리고 유씨까지 죽었다. 어차피 왜놈들이 떼어먹기로 작정한 임금인데 유씨가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건 사후 약방문인 결과론일 뿐이었다. 유씨는 옳았다. 당시의 정의를 지키고 싸우기 위해 유씨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그리고 유씨가 조선 노동자들의 대표로 배에 올라간 것은 단순히 임금을 받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부두의 정보를 탐지해 냈던 유씨는 조선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이 나서는 것이 또 하나의 독립투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함경도에서 3·1 만세를 주도했다가 체포를 피해 해삼위로 온 사람이었다. 그동안 동지들의 죽음을 숱하게 보아왔다. 그러면서도 유난히 유씨의 죽음이 안타깝고 잊혀지지 않는 것은 왜놈들의 야비할 교활에 속아 넘어 갔기 때문이었다. 그 피할 수도 있었던 죽음이 잊혀지지 않을수록 이광민의 가슴속에서는 왜놈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더욱 뜨거워지고 더욱 커지고 있었다. 다음날 이광민은 독립문 거리로 다시 나갔다. 뜻밖에도 윤철훈의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어쩐 일이십니까?"
이광민의 머리는 순간적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윤철훈은 어제 수청을 간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일본군이 없어지면서 교통이 한결 원활해지기는 했지만 하루 사이에 수청을 왕복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동지, 대강 짐작은 했겠지만 어제 수청을 간 게 아니었소. 선숙이 모르게 하려고 그냥 수청에 간다고 한 것이지."
윤철훈이 미안쩍어했다. 이광민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으로 묻고 있었다.
"갑시다, 어디 좀 조용한 것으로."
"저쪽 공원은 어떤가요?"
"그럽시다, 거기가 좋겠소."
그들은 신한촌 건너편의 언덕바지에 있는 공원으로 가려고 비탈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시내 쪽 큰길로 나가는 지름길인 그 오솔길은 경사가 꽤나 심해 내려갈 때는 자연히 뜀박질을 하게 되었다. 윤철훈이 얼마쯤 내려가다가 뛰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이광민이도 뛰었다.
"어떻게, 어제 좀 재미있게 지냈소?"
큰길에 다 내려간 윤철훈이가 이광민을 돌아다보았다.
"예,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아이들처럼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이광민은 어제의 조개·해삼잡이가 너무 상쾌하게 떠올라 그 기분을 그대로 드러내며 말했다.
"아이들처럼 재미있게? 혹시 선숙이가 이 동지를 소학교 아동 취급한 거 아니오?"
"예, 저를 아동 취급해서 조개잡이 해삼잡이를 시키더군요."
이광민은 기분 좋게 웃었다.
"저런 놈에 일이 있나, 위대한 투사한테. 선숙이가 장난이 심해서."
윤철훈도 웃으면서도 좀 어색해했다.
"아닙니다, 함께 잡았는데 아주 즐거웠습니다. 싱싱한 회로 술도 한잔하구요."
"아, 그건 참 잘했소."
별다른 꾸밈이 없이 긴 나무 의자들이 드문드문 놓인 공원은 한적했다. 신록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기운이 공원 안에 가득했다. 윤철훈은 의자에 자리 잡으며 이광민에게 담배부터 권했다.
"어제 오르그뷰로에 호출을 받고 갔었소."
윤철훈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
이광민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다름이 아니고 우리가 그간에 염려했었던 문제가 결국 목전에 닥쳐왔소."
윤철훈이 또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
이광민은 두 갈래 갈림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코민테른에서는 연해주 지역의 모든 단체는 이곳 오르그뷰로 아래로 통일을 이루라는 지시를 내렸소."
"코민테른에서야 당연한 지시겠지요. 그런데 이동휘 선생께서는 어쩌실 작정일까요?"
"이동휘 선생인들 다른 방도가 없으셨던 모양이오. 그 지시를 따르기로 하신 것 같소."
이광민은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서 우리 조직도 오르그뷰로의 통일조직이 되도록 준비하라는 것이오."
윤철훈의 말이 끝난 셈이었다. 이광민은 고개를 떨군 채 담배만 빨고 있었다. 윤철훈은 새 담배에 연거푸 불을 붙였다.
"결국 코민테른에서는 이동휘 선생을 완전제거한 셈이로군요."
이광민은 담배꽁초를 구두 끝으로 사납게 비비대며 말했다.
"우리가 걱정했던 그대로요."
"코민테른이 아주 잔인합니다. 22년에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통합을 지령하고, 이르쿠츠크파가 열세에 몰리자 퇴장을 해서 통합을 무산시키고, 그걸 방지해서 고려공산당의 해체 명령을 내린 다음 코민테른 산하에 꼬르뷰로를 설치해서 이동휘 선생은 견제하더니만, 당시 작년 12월에 꼬르뷰로를 해체하고 금년 들어 오르그뷰로를 결성시켜 결국 이동휘 선생을 완전 제거하고 말았습니다. 이건 너무 조직적입니다."
이광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 단계를 보면 틀림없이 그렇소. 그게 어쩌면 이동휘 선생의 운명인지도 모르겠소."
"이동휘 선생이 운명이 뭐지요? 왜 코민테른은 이동휘 선생을 결국 제거했지요?"
이광민의 목소리는 격해지고 있었다.
"그야 더 말하면 뭘 하겠소. 코민테른에서는 모든 민족주의 색채나 민족주의 성격은 배격하고 용납하지 않으니 어쩌겠소."
"그러니까 그건 이동휘 선생만의 운명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모두의 운명이지요."
이광민의 목소리가 더 격해지며 얼굴까지 상기되었다.
"그게 문제요. 우리도 이젠 우리의 생각을 점검할 단계에 온 것 같소."
"점검하다니, 뭐가 잘못됐다는 뜻인가요?"
"아니오, 잘못됐다기보다는 안목을 넓혀 우리의 독립문제도 생각하고, 공산주의도 생각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뜻이오."
"그게 그럼 민족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이 동지, 우리 이 자리에서 무슨 결론을 내리려고 하지 맙시다. 나도 이 동지와 똑같이 머리가 혼란스럽고,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소. 이 문제는 앞으로 여러 사람들이 모여 토론을 해가면서 풀어나가도록 합시다. 갑시다, 밥때가 다 됐는데 어디 가서 밥이나 먹으면서 앞일을 궁리해 봅시다."
윤철훈이 이광민의 어깨를 감쌌다. 이광민은 그만 허탈해지고 말았다. 자신의 고민이 바로 윤철훈의 고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오, 울이가 직시해야 할 사실이 있소. 이동휘 선생이 오늘에 이른 것은 꼭 민주주의 성향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오. 이 동지도 알겠지만, 이동휘 선생이 20년에 코민테른으로부터 60만 루블을 받지 않았소? 그런데 그 자금 사용에 부정이 있다 해서 말썽이 일어나고, 사용 용도를 공개하라는 요구까지 대두했는데 이동휘 선생은 어찌했소. 끝내 공개를 거절하지 않았소. 그래서 이르쿠츠크파는 지원자금 횡령으로 코민테른에 고발하고, 상해 임정은 정부자금 횡령이라는 포고를 내렸소. 그 결과 코민테른에서는 이동휘 선생의 구속을 고려하고, 임정에서는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것 아니오. 코민테른의 불신은 그때부터 뿌리가 깊어진 것이란 말이오. 이동휘 선생을 존경하면서도 그 대목은 영 이해가 안 된단 말이오."
윤철훈이 길을 걸어가며 말했다.
"예, 그거야 이동휘 선생의 불찰이지요. 저는 이동휘 선생을 무조건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그분이 새로 결성하는 조선인군대 업무에 참여했던 것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연해주에서 그분보다 더 열성인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이르쿠츠크파를 싫어하는 건 공산당의 문제만 앞세웠지 조선의 독립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광민의 말은 분명하고도 단호했다.
"이 동지의 말이 백번 맞소. 조선인군대에 소속된 사람들이야 다 그런 생각을 갖지 않았겠소."
두 사람은 더 말이 없인 걸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이광민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생각의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바다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