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밤 기차
땅거미가 어스레하게 퍼지고 있는 거리에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맵싸한 바람에 거칠고 칙칙한 구름이 두꺼운 것으로 보아 많이 내릴 눈이었다. 몸을 움츠린 행인들이 잰걸음질을 치고 있었고, 인력거꾼들이 채찍이라도 맞는 듯 다급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눈이 와도 많이 올 기민디......"
도림이 누더기 승복의 깃을 여미며 하늘을 흘낏 올려다보았다.
"눈이라도 많이 와야제 내년 농사가 지대로 되제."
공허의 뚱한 말이었다.
"누구 존 일 시키라고."
"아니여, 큰 잔치에 속이야 아프지만 잔치가 커야 콩너물 대가리라도 더 얻어묵드라고 풍년언 아니라도 평작언 돼야 불쌍헌 작인덜헌티 한 됫박이라도 더 돌아가제."
"자네 도 다 통했네그랴."
"뜸금없이 무신 소리여?"
"없이사는 불쌍헌 사람덜 그리 생각허는 맘얼 늘 품고 사니 그것이 부처님 맘이 아니고 머시여."
"체, 싱건지 묵고 트림허는 소리 말어. 부처님이 박장대소허실 것잉게."
"나넌 그런 생각이 맘에 들었덜 않으닌게 허는 소리제."
"그런 생각이야 다 때때로 들고나고 허는 바람이시. 자네도 금강산으로 뜰라고 맘묵은 것만으로도 중질 지대로 허고 있는 것이여."
"몰르겄네. 금강산으로 가봐도 조선 안에 절이기넌 매일반 아니겄어."
"그려도 풍광만으로도 이놈에 한성인지 경성인지보담이야 낫겄제."
"어디서 요기나 허고 가야제?"
"아니시, 역전에 가서 헐라네."
"이 사람, 참말로 오늘 갈 참이여?"
도림의 목소리가 커졌다.
"나가 언제 두말허는 것 봤능가."
공허의 나직한 대꾸였다.
"자네, 아덜놈 보고 잡아 그러제?"
도림은 억지소리를 것질러댔다.
"어디가, 마누래 보고 잡아 그렁마."
공허는 이렇게 받아넘기며 능글맞게 웃었다.
"나가 말얼 말아야제." 도림은 어이없어 하는 웃음을 흘리고는, "어이, 그러지 말고 나 말 다시 한 분 생각해 보소. 유신회에넌 안 들어도 만해 시님얼 한 분 만내보는 것이야 나쁠 것이 머시가 있능가." 그는 은근하게 말했다.
"체, 자네도 이놈에 경성서 수돗물잉가 쇠대롱물잉가 년 묵등마 말솜씨가 아조 미끈덕허니 잘도 넘어가네, 이. 화적대장인 삼촌 만내로 갔다가 화적 되드라고 나넌 맘이 약혀 만해 시님만 만내보고 몸얼 뺄 재주가 없는 사람이시."
"머시여? 자네가 맘이 약혀?"
도림이 기가 막혀했다.
"이 사람, 어째 말이 금세 달라지고 이려? 불심 지닌 중놈이 맘이 안 약허면 누가 맘이 약허겄능가?"
"자네넌 어찌서 유신회도 안 들겄다, 만해 시님도 안 만내겄다 그렁가? 자네 맘얼 알 수가 없단 말이시."
"잡새가 봉황에 뜻얼 어찌 알랴."
장삼깃을 펄럭이며 공허는 후적후적 걷고 있었다. 어스름에 실린 눈발은 더 촘촘해져 있었다.
"딴소리 말로 말이나 속 시언허니 혀봐."
도림이 팔꿉으로 공허의 팔을 툭 쳤다. 일본 여자와 남자가 조센징 어쩌고 하며 종종걸음으로 그들의 옆을 지나쳐 갔다.
"저년이 저거 우리 욕허능 거 아니여?"
공허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좌측통행을 안 지킨다고 흉보네."
도림이 공허의 팔을 끌며 말했다.
"좌측통행? 그것이 머신디?"
"문자 그대로 질얼 왼짝으로만 댕기라는 것이네. 석 달 되았능가, 9월보톰 실시헌 것잉게."
"참 왜놈덜, 벨놈에 짓 다 시키네."
공허는 침을 내뱉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스먼, 저것덜얼 멱살이라도 잡을 챔이였등가?"
"우리보고 욕얼 허는디 그리 못헐 것언 머시여."
"그럼서도 맘이 약혀?"
"허 이사람, 고것허고 요것허고 어디 같으간디?"
공허가 피식 웃었다.
"내년보톰 한성에 오면 좌측통행 잘 지키소. 요새야 계몽 기간인 게 괜찮혀도 해가 바뀌고 위반허먼 벌 받는다네. 승복 입고 왜놈헌티 벌 받는 꼬라지가 어쩌겄능가? 그것 가관 아니겄어."
도림이 키득키득 웃었다.
"벌? 무신 벌얼 주는디?"
공허의 목소리가 곤두섰다.
"볼기럴 치든 길바닥에 꿇어앉히든 그야 나가 알겄능가. 궁금허먼 경무청에 가서 알아보소."
"드런 놈덜, 인자 질도 지맘대로 못 댕기게 맨드는구만."
공허는 또 침을 내뱉었다.
"침이 보약 중에 보약이란 말 못 들었능가. 그리 뱉아낸다고 왜놈덜언 끄떡도 안 헝게 아까운 침 아끼소."
"침이 무신 놈에 보약이여."
공허가 벌컥 화를 내듯 했다.
"사람 무식허기넌. 동의보감에 그리 적혀 있네."
"어이, 자네 유식허시!"
공허는 또 침을 내뱉었다.
"공연시 그놈에 좌측통행 통에 이얘기가 샛길로 흘렀네. 어여 그 대답이나 허드라고."
"원 그사람 참 찔기기넌. 불 유신회고 불교 뜯어고치기고 뜻이야 다 존디, 만해 시님이 헛기운 빼는 일이란 말이시."
"그리 무시 짤르디끼 밑도 끝도 없이 말허덜 말고 차근허니 말해야 이 땡초가 알아들을 것 아니겄어."
"이 사람아, 조선 중놈덜 썩은 꼬라지 더 못 보겄어서 금강산으로 들어간다고 험스로 나 말 못 알아묵어? 만해 시님이 아무리 불교유신회 맨들어 불교계 정화럴 하고 청정허니 헐라고 혀봤자 똥바다에 일엽편주 띄우기란 말이시. 다 괴기맛 보고 환장덜 혀부렀는디 만해 시님이라고 무신 재주로 불교계 친일을 막을 것이여. 사명대사 서산대사가 환생얼 혀도 틀려묵은 일이네."
"그려도 젊은 중덜이 막고 나스면 썩어도 덜 썩을 것 아니겄어?"
"몰르겄네. 나야 왜놈덜헌티 죄진 것 많은 몸이라 부엉새맨치로 밤에만 댕기는 처진께 그런 표나는 단체에 낄 입장도 아니시."
도림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공허는 또 만세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여지껏 피해 다니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만주를 오가고 있는 공허에게 불교계의 정화란 하찮게 보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공허와 만해 한용운 같은 분이 뜻이 합해지면 좀 큰일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다. 만해는 마침 불교유신회 창립을 위해 사람을 모으고 있었다.
"만해 그 양반 총 맞은 자리넌 더 탈이 없능가?"
공허가 뚜벅 말했다.
"어디, 또 삼동이 됐응게 그 자리가 시리고 절리고 허겄제. 평상 목이 삐딱허니 틀어져 살아야 허는 고상도 고상인디다가 삼동만 되면 뼛속꺼지 아픈 것도 얼매나 큰 고상이겄어."
"그 몸으로 고문당허고 감옥살이꺼정 허셨으니 장헌 분이시제. 좌우간 그만허기 천행이제 그적에 숭헌 일 당했드라먼 어쩔 분혔어."
공허는 쯧쯧 혀를 찼다.
"그러고 보먼 부처님 가피란 것이 있기넌 있는 것 아니여?"
"글씨......"
그들이 하는 말은 한용운이 십여 년 전에 만주에서 독립군의 총에 맞은 사실을 일컫는 것이었다.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게 되자 한용운은 만주로 건너갔다. 봉천이며 여기저기를 살피고 다니넌 한용운은 유하현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에는 1년 전에 이주해 온 이회영 형제들이 경학사를 만들어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한용운은 거기서 며칠 머물고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런데 혼자 고갯마루를 넘는 한용운을 잠복경계를 하고 있던 독립군이 쏘고 말았다. 혼자인 그를 밀정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사실 그 지역에 오는 사람은 압록강 건너 안동에서 다 선이 닿아 연락하게 되어 있었고, 단독으로 오가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용운은 그런 것도 모르고 혼자서 왔다가 혼자서 떠나는 길이었다. 한용운은 수술을 받고 요행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러나 삐딱하게 틀어진 목은 다시 바르게 되지 않았다. 한용운이 3·1운동의 민족대펴의 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자 이회영이 그 얼굴을 알아보고, 이런 큰 인물을 그때 죽였으면 어떻게 됐겠느냐고 소스라쳤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이 짝으로 가세. 그 짝언 자네가 싫어허는 진고개 본정통이시."
도림이 공허의 장삼자락을 잡았다.
"지기럴, 눈도 오는디 피해 갈 것 머 있다고. 그냥 질러가세."
공허의 퉁명스러운 말이었다.
"본정통얼 질러가면 전등불도 밝고 혀서 좋기넌 헌디, 자네가 침 막 뱉어댈 것이 걱정이구마."
"거 또 무신 소리여?"
"거그야 왜놈덜 모자리판잉게 자네 눈꼴실 일이 천지고, 자네가 침 퉤퉤 뱉어대면 왜놈덜헌티 조선사람 욕 믹이게 된단 말이시."
"조선사람얼 욕 믹여? 그렇다면야 침 안 뱉어야제. 아무 걱정 말소."
"어디 보세."
일본사람들이 제멋대로 이름 붙인 혼마찌 "본정통"의 전등 불빛은 진고개에 이르기 전부터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일본사람들은 통감부와 그 부속기관들이 자리 잡은 남산 아래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진고개 일대에 제일 먼저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이 일본 상인들이었다. 사람들이 자꾸 불어나면서 상권이 형성되자 통감부에서는 진고개를 중심으로 한 남산 아래를 집중적으로 개발했던 것이다. 그리고 진고개 중심가에는 30여 개의 가로등까지 가설하여 그야말로 불야성을 만들어놓았다. 그것이 1901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합방을 시키고 총독부가 제멋대로 붙인 이름이 혼마찌였다.
한성에 산다 해도 조선사람들은 등잔불도 아껴 쓰느라고 급급하는 형편에 가로등을 달고 20년이 넘는 세월을 번창해 온 진고개가 왜색 일색으로 흥청거리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진고개에는 특히 고급 요릿집들과 환락가가 번창해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눈송이들의 난무가 날이 밝을 때보다 더 곱고 선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바람결을 따라 휘돌고 휘감기고 뒤엉키고 흩어지는 어지러운 춤을 추며 눈송이들은 전등 불빛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난장맞을, 눈발도 전등 불빛얼 받응게 아조 근사허니 뵈네그랴. 눈언 푸지게 오고 술맛 나게 생긴 밤이시."
공허가 쩝쩝 입맛을 다셨다.
"여그 소문난 요릿집에 기생집덜이 수두룩헌디 한잔 걸게 마시제 그려."
도림의 능청스러운 말이었다.
"그랬으면 좋겄는디 나가 시방 배탈이 나부렀단 말이시."
공허가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사람 참, 이리 늦게 오면 어쩌나."
"미안허이, 길을 잘못 들어서......"
"하야시상이 먼저 와 기다리면 큰일 아닌가."
"이거 참 자네가 말 좀 잘하게."
양복을 빼입은 두 남자가 공허와 도림의 앞을 가로질러 다급하게 샛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 조선놈덜이 왜 저리 똥줄이 타?"
공허가 그들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그들이 가고 있는 널찍한 샛길은 더 휘황찬란했다. 유리문을 큼직큼직하게 단 상점들은 불빛이 눈부시게 밝았고, 일본글씨의 크고 작은 간판들이 요란하게 붙어 있었다. 그리고 이쪽과 이어진 저쪽 샛길로 인력거들이 부산스럽게 오가고 있었다. 밤인데도 오히려 활기가 넘치고 있었고, 그 어디에서도 조선 티나 냄새는 찾을 수가 없었다.
"보나마나 아니여? 어떤 왜놈헌티 술상 바치로 가는 것이제."
도림이 걸음을 옮겨놓으며 말했다.
"자알덜 헌다."
공허가 침을 내뱉었다.
"자네, 침 안 뱉기로 혔음서!"
"어? 나가 그랬능가?"
"어디서 새든 바가지 어디라고 안 새겄어."
공허가 허허 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침 뱉고 말고 헐 것 없네. 술값 비싸기로 소문난 여그서 술판 질로 걸게 벌이는 것언 다 조선놈덜이랑게."
"그려......"
공허는 어금니를 꾹 맞물렸다. 불끈 치솟는 욕을 누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만주 땅의 동포들의 모습과 독립군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여그 송병준이 왜년 첩이 허는 요리집도 있담서?"
공허는 그 모습들을 지우려고 생각나는 대로 불쑥 물었다.
"이, 그 말이 맞을 것잉마."
"못된 놈, 돈얼 얼매나 많이 퍼대면 왜년이 첩으로 붙었겄어. 일진회 해묵은 것도 모지래서 또 조선소작인상조회럴 맨들고 나스다니. 그런 놈얼 못 죽이고......"
조선소작인상조회란 송병준이가 지난 8월에 조직한 또 하나의 친일단체였다.
"그런 소리 말어. 야쿠샤덜이 너댓썩이나 호위하고 댕긴다든디."
"그려, 지도 죽을 날이 있겄제."
공허가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토해냈다.
경성역 앞길에는 불을 환하게 밝힌 전차가 땡땡 종을 울리며 오가고 있었다. 휘날리는 눈발 속을 달리는 전차는 낭만적이었다. 기차가 경적을 울리는 소리도 눈발 속에서 먼 느낌으로 퍼지고 있었다.
"어디서 요기허드라고."
도림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중생덜 앞에서 괴기 든 밥얼 묵을 수넌 없고. 날 따라오소."
공허는 앞장서서 걸었다.
공허는 어둠침침한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얼마 멀지도 않은데 진고개와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공허가 찾아 들어간 음식점은 국숫집이었다.
"이 집 수제비가 묵을 만허시."
공허가 바랑을 벗으며 말했다.
김이 서린 좁은 식당 안에는 예닐곱 명의 손님들이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노동자 형색이었다.
"자네 수제비 묵고 되겄능가?"
도림이 등받이없는 걸상에 앉으며 공허를 건너다보았다.
"부처님 말씸이, 맘이 청정헐라면 어쩌라고 허등가? 저런 심진 일 허는 사람덜도 묵는 음석이시."
"허는 말마동 도통허신 대사시여."
도림이 피식 웃었다.
"아짐씨, 여그 수제비 두 그럭 주시시오."
공허가 깍듯한 존대말로 음식을 시켰다.
"우리도 한바탕 들고일어나야 된다니까."
"그래, 부산처럼 한바탕 해야 돼."
"헌데 우리가 부산 노동자들처럼 그리 단합이 잘될래나?"
"무슨 소리. 다 배가 고픈데."
"그래, 맘들이 다 같으니까 잘될 거야."
구석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였다.
공허의 귀는 그들의 이야기에 쏠려 있었다. 술기운 묻어나는 그들의 목소리가 크기도 했지만, 공허는 그들의 이야기를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부산의 일은 지난 9월 말에 일어났던 부두 노동자들의 총파업이었다. 석탄운반 노동자 5천여 명은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닷새 동안이나 총파업을 일으켰던 것이다. 신문들은 그 사건을 크게 보도했다. 그런 대규모 총파업은 최초로 일어난 일이었던 것이다.
"눈 오시는 날 시님네덜이 오셨으니 우리 집 복받겠사와요,"
주인 여자가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수제비그릇을 탁자에 옮겨놓으며 흥겨워하고 있었다.
"예에, 나무관세음보살......"
공허가 의연하게 합장을 했다. 도림은 푹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눈을 사르르 내려감으며 합장을 하는 모습이라니...... 어쩌면 그리도 능란하고 능청스럽고 비위 좋은지 모를 일이었다. 공허가 그런 식으로 대처할 줄은 자신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승려로서 그보다 더 좋은 대처는 없었다. 나무관세음보살은 여러 가지 군말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주인 여자가 바라는 복을 축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승려로서의 품위도 의연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참, 그런 넉살이 어디서 나오능가?"
숟가락으로 국물을 뜨며 도림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자네 겉은 학숭이야 고상허기만 허제 중생덜 맘얼 멀 알어? 나 겉은 잡승이야 세파에 시달리다봉게 그런 넉살이 몸에 붙응 것이제."
공허는 씨익 웃으며 수제비를 한입 가득 떠넣었다. 도림은 그런 공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왜 저렇게 안되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쪽 사람들은 계속 파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도림은 그 이야기가 자꾸 귀에 담기고 있었다.
"어이, 저 사람덜 이얘기 들은게 생각나는 것인디 말이시, 자네 그 공산주의라는 것이 먼지 아는가?"
도림은 속삭이듯이 물었다.
공허는 수제비를 입에 떠넣다 말고 도림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찌 그려?"
도림이 미간을 찡그렸다.
"누가 자네헌티 손 뻗치등가?"
"아니여, 그냥 궁금해서. 새로 퍼지고 있는 사조라니께 말이시."
"그려? 나도 말로만 들었제 짚은 속이야 몰르네. 인자 알아볼 챔이시."
"고것이 알아볼 만헌 것일랑가?"
"하먼, 알아서 나쁠 것 있겄능가."
"아니, 중 노릇 못헉세 되지넌 안컸냔 말이제."
"참, 구데기 무서와 장 못 담구네. 중 노릇 못허게 되는 것이 무신 대수여? 사람 노릇 잘허는 것이 중 노릇 잘허는 것이제."
"그것언 또 무신 고승 선문답이여?"
"체, 모를 소리가 머시여. 중옷만 걸치고 있다고 중 노릇 허는 것이여? 부처님이 중생 중에서 부처 난다고 안허셨어? 중생도 사람 노릇얼 지대로 허고 살면 부처가 된다는 것인디, 시방 이 지옥살이중에서 사람 노릇얼 지대로 허는 것이 머시겄능가? 알제?"
공허가 목소리를 더 낮추며 빠르게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고, 도림은 씹던 것을 삼키며 고개를 빨리 끄덕였다.
"글먼, 지옥얼 정토로 맨글어야 허는 중덜이 중 노릇얼 지대로 헐라먼 어째야 되겄능가? 임란 때가 따로 없는 것이네. 다 나서야제. 여그서 안 되먼 만주로라도 가야제. 근디 시방 어쩌고덜 있능가? 그런 중 노릇 혀서 멀혀. 안 허니만 못허제. 닌장맞을, 무식헌 놈이 설법허고 앉었네."
공허는 혀를 차며 씁쓰름하게 웃었다.
"허, 연좌(蓮坐)가 없어서 그렇제 설법 중에 명설법이구마."
"흐흐흐...... 부처님도 앉는 자리마동 연좌였응게 따로 연좌 걱정언 말소."
공허는 어깨를 들썩이며 키들키들 웃었다.
도림은 수제비만 연거푸 떠넣었다. 여그서 안되먼 만주로라도 가야제. 공허의 이 말이 쇠북의 울림처럼 가슴에서 파장 짓고 있었다. 식민지 · 종살이 · 지옥...... 수도 · 득도 · 해탈...... 공허가 집어든 화두는 너무나 명쾌하고 분명했다. 그는 이미 중이 아니면서 가장 중다운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성역의 이마에 박힌 크고 둥근 시계는 눈을 맞으면서도 돌아가고 있었다. 눈은 뜸해졌지만 바람은 더 세차게 불고 있었다. 짐들을 이고 진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모여들고 있었다.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는 그 발빠른 움직임들이 밤 기차역의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행상들이 쉰 목소리로 제각기 손님들을 불러대고 있었다.
"인자 들어가소. 금강산에서나 만내질랑가?"
"나가 그리 들어간다먼 어디 만내지겄다고?"
도림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무신 소리여? 산 사람 인연인디."
"자네가 그냥 중이 아닌 게......"
"나도 금강산 귀경이 소원이고, 자네도 금강산서 늙어 죽으란 법 없응게."
"그렇기넌 허제. 중 팔자도 사람 팔잔게 지 맘 묵기에 달린 것이제. 그나저나 몸조심 허소."
"그려, 다 부처님 손바닥 안이시."
공허는 서운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며 도림의 손을 잡았다. 공허는 기차마저도 밤 기차를 타야 안심이 되었다. 만세시위의 주모자로 전주경찰서의 지목을 당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전라북도 일대에 수배령이 내렸으니 야행마저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찰의 수사를 혼란시키고 단념시키려고 전주와 그 근방에다가 공허한 중은 상해로 빠져나갔다느니, 만주로 건너갔다느니 하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었다.
공허는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며 한용운을 생각했다. 도림을 생각했다. 진고개에서 흥청거리는 조선사람들과 항시 모자라는 독립운동 자금을 생각했다. 송수익을 생각했고, 앞으로의 만주 투쟁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기차는 오산 근방을 달리고 있었다. 승객들은 절반 이상이 잠들어 있었다. 승객들은 남자가 많았고, 그들은 거의가 한복에 갓을 쓰고 있었다. 임금이 시범적으로 단발을 하고, 개명상이라는 바람이 분 지도 오래되었지만 옷과 머리 모양을 고집스럽게 지켜내고 있었다. 한 남자가 벌써 서너 차례나 공허의 의자 옆을 지나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그러면서 그 남자의 눈길은 줄곧 공허에게 박혀 있었다. 그 남자가 공허의 의자 옆에 멈춰 섰다. 그리고 갑자기 큰 소리로 불렀다.
"공허 시님, 공허 시님!"
"어, 엉? 누, 누구여!"
공허는 얼떨결에 잠이 깨며 두리번거렸다.
"공허 시님, 나요 나."
"누, 누구신게라?"
"누구넌 누구여, 순사제!"
남자가 외치며 공허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공허는 순간적으로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름을 불러 신원을 확인하는 잔꾀였는데 잠결에 그만 넘어가고 만 것이었다.
"요런 느자구 없는 중넘아, 얼렁 일어나. 그간에 니가 아무리 잘 피해 댕겼어도 결국 이 장칠문이 손에 잽힌 것이여."
그 사복을 입은 남자는 바로 장칠문이였던 것이다. 그는 공허의 멱살을 잡아끌며 자신의 이름을 과시할 정도로 황홀한 기분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잡으려고 해도 못 잡았던 거물 중놈을 자신이 잡았으니 군산으로 영전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공허는 통로로 끌려나가면서 재빨리 좌우의 문을 살폈다. 오른쪽이 훨씬 가까웠다. 공안원이 나타나기 전에 일을 해치워야 했다. 공허는 통로로 나서자마자 몸에 불끈 힘을 모으며 상대방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아크......"
퍽 소리와 함께 장칠문이 비명을 토하며 비틀거렸다. 공허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서 또 퍽 소리를 냈다. 그는 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푹 고꾸라졌다. 공허는 놀란 사람들의 눈길을 등 뒤로 받으며 오른쪽 출입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공허는 통바람과 함께 석탄 냄새가 끼쳐오는 기차 승강대에서 어둠을 응시했다. 들판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공허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시님이 바랑도 모자도 두고 가셨네."
"시님이 무슨 죄를 졌을꼬?"
"그 기운이 황소로구만."
"허랭이도 때래잡겄는디."
여자고 남자고 슬슬 눈치 보아 가며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그런데 통로에 쓰러진 장칠문은 정신을 잃은 채 일어날 기척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입과 코에서는 피가 심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뒤늦게 공안원이 나타나고 사람들은 두서없이 공안원의 물음에 대꾸하고 있었다. 공안원은 사태를 대충 파악했다. 통로에 쓰러져 있는 것은 순사고, 범인인 중은 열차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나, 나 순사요, 순사. 중놈, 중놈을 얼렁 잡아야 허요."
정신을 차린 장칠문은 피가 흐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공안원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그도 공허가 열차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알겠소. 피가 많이 나니까 피부터 막도록 합시다."
공안원이 장칠문을 붙들었다.
"요까진 놈에 피넌 문제가 아니오. 얼렁 중놈얼 잡어야 헌다 s말이오."
장칠문이 소리쳤다. 입에서 핏방울들이 튕겨지고 있었다.
"그야 너무 걱정 마시오. 열차가 정거할려면 아직 멀었소."
공안원의 대꾸는 느긋했다. 그제서야 장칠문은 두 손으로 코와 입 부분을 감쌌다. 욱신거리고 쿡쿡 찌르는 통증이 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창피스럽기도 했다. 장칠문은 공안원을 따라가며 너무 방심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군산으로 영전하는 것에 정신을 팔지 말고 그놈의 허리끈부터 풀어 압수해야 했던 것이다. 그저 영전하는 기분에 들떠 그 수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 불찰이었다. 급한 대로 코를 막고 피를 닦아내고 한 장칠문은 공안원과 보조원 셋이서 열차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거 뛰어내려 버린 것 아니오?"
공안원이 맥빠진 소리로 말했다.
"택도 없소. 지까진 놈이 홍길동이니 도술을 부리겄소, 까마구니 날아럴 갔겄소. 새로 뒤져야 허요."
통증으로 얼굴을 잔득 찡그린 장칠문은 단호하게 말했다.
"중이니 도술을 부렸는지 누가 아오?"
"더 뒤지기 싫다 그것이오? 알겄소, 나 혼자 허겄소."
장칠문은 거칠게 내쏘았다. 그들은 다시 기차 안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역시 중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다.
"이래도 내 말이 틀리오?"
공안원이 장칠문을 쏘아보았다.
"되았소, 지놈이 급헌 짐에 뛰어내리다 뒈졌을 것이오."
장칠문은 피 섞인 침을 내뱉었다.
"그놈 잡을 생각 말고 천안에 내려서 병원에나 가시오. 피가 줄창 나오는데."
공안원이 딱하다는 듯 말했다.
"에이 잡것, 재수가 없을랑게......"
장칠문은 또 피가 목으로 넘어가려는 것을 참아내며 양쪽 코를 막은 종이를 빼냈다. 작은 종이뭉치는 핏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양쪽 코에서는 피가 주루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차 안을 뒤지면서도 종이를 몇 번이나 갈아 피막이를 했는지 몰랐다. 장칠문은 한층 더 콧등과 입안이 욱신거리고 쑤셔대는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콧등은 양쪽의 광대뼈와 거의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부어올라 있었다. 그리고 속 입술이 터지고 앞니들이 욱신거려 말을 하기도 힘들고 입을 다물기도 어려웠다. 피가 멎지 않는 것도 그렇고 견디기 어렵게 아픈 것도 그렇고, 장칠문은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천안에도 병원이 있소?"
"예, 철도병원이 있어요."
"빌어묵을, 피럴 한 말얼 더 쏟은 것 겉소."
"내가 보기엔 코뼈가 부러진 것 같소."
그 말에 놀란 장칠문은 얼른 콧등을 눌러보았다.
"아이구구 나 죽네....."
장칠문은 숨자지러지는 소리를 지르며 허리가 접히고 있었다. 코와 입을 모자로 덮은 장칠문은 천안에서 내렸다. 그는 분하고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다가 그런 실수를 했는지 생각할수록 안타까워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꼭 자신의 실수만도 아닌 상 싶었다. 자신이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그놈이 그리도 기운에 셀 줄은 몰랐던 것이다. 못내 기분 더러운 일이지만,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었더라도 그놈의 공격을 제압했으리라는 자신감은 서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놈을 못 본 척 그냥 지나쳤어야 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저놈이 공허란 놈일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떠오른 순간 얼마나 가슴이 벌떡거리고 눈앞이 환해졌던가. 그건 꼭 잡아야 할 놈이었다. 결국은 경성에 자주 오르내린 것이 병이었다. 뒤늦게 아버지가 야속하고 미웠다. 돈도 벌 만큼 벌었으면서도 아버지는 걸핏하면 자신을 불러댔다. 욕심나는 물건이 잘 확보되지 않거나 무슨 일이 막히고 꼬이면 아버지는 경성에 어서 올라가서 그 일을 해결하라고 성화였다. 돈도 또 하나의 권세이고, 자신이 올라가 주재소 차석임을 은근히 과시해 가며 교섭하면 일이 잘 풀리는데 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경성에서 여자를 맛보는 재미도 고소했던 것이다. 주재소장한테야 돈으로 때우면 며칠 비우는 것쯤이야 출장으로 거뜬하게 해결되었다.
찬바람을 쐬자 통증이 더 심해졌다. 코가 내려앉으면 어떡하나! 장칠문은 덜컥 겁이 났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한족 눈에 명씨박인 백남일이었다. 코가 내려앉으면 나도 백남일처럼 쫓겨나는 것이 아닐까.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장칠문은 이를 맞물었다.
"으으으으......"
장칠문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앞니의 위아래 이뿌리가 어찌나 아픈지 눈에서 불똥이 튀었던 것이다.
‘어디 두고 보자. 나가 니목얼 지옥꺼정 쫓아가서라도 잡고 말 것잉게.’
공허는 왼쪽 발목을 삐어 걷기가 꽤나 힘이 들었다. 겨우겨우 신작로까지 나와 나뭇가지를 꺾어 지팡이를 삼았다. 어둠 속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공허는 민머리에 찬바람을 맞으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나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엉뚱한 생각만 불쑥불쑥 일어났다.
‘여기는 눈이 안 와서 다행이구나. 그놈이 죽었을까 살았을까. 어쩌다가 발목이 삐었지. 중놈이 핏줄을 가졌으니 볼장 다 본 것 아닌가. 그놈이 내 얼굴을 확실하게 알아버렸지.’
공허는 이런 엉뚱한 생각들을 물리치려고 애썼다. 우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지를 정해야 했다. 그다음에 어디다 몸을 숨기고 발목을 치료해야 했다. 그 정도로 그놈이 죽었을 리는 없고, 내일 아침부터라고 이 지역을 수색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이 지역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공허는 발을 절룩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공허의 발길은 아까 기차가 간 방향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은 발길을 거머잡으며 반대쪽으로 돌려놓으려 하고 있었다.
‘돌아서라. 돌아서서 수원까지는 가야 안전하다. 물론 절을 찾아 들어가서는 안된다. 아니야, 다시 한성으로 가는 것이 더 안전하다. 그래야 치료하기도 더 쉽고. 그 마음이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씨름에서 이긴 마음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잔소리 마라. 허를 찔러야 한다, 혀를. 그쪽으로 가는 건 개도 생각해내는 방법이다. 그놈들이 그쪽으로 조사를 나설 건 너무나 뻔하다. 그러니까 그 반대쪽으로 가야 한다. 한성 쪽으로는 이삼백 리를 라도 위험하지만 그 반대쪽으로는 사오십 리만 가도 안전하다. 침은 아무 데서나 다 맞을 수 있다. 공허는 한성 쪽으로 발길을 돌리라는 속삭임을 또다시 뿌리쳤다. 신작로를 따라가면 밤이 새기 전에 기차역이 있는 어느 도회지가 나올 터였다. 거기서 경부선이든 호남선이든 아무것이나 타버리면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공허는 윗저고리의 속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그는 빙긋 웃었다. 돈은 그대로 있었다. 공허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물었다. 수십 개의 긴 바늘로 마구 쑤셔대는 것 같으면서 헛놓이는 듯 힘을 쓸 수 없는 발목은 삐어도 많이 삔 모양이었다. 그러나 공허는 어디 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발목의 아픔을 비웃듯 걸음을 빨리 하고 있었다. 불빛은 뜻밖에도 빨리 나타났다. 한 20리쯤 걸었을까 싶었는데 등잔 불빛이 아닌 크고 밝은 불빛들이 보였던 것이다. 공허는 우선 방향을 잘 잡았다고 생각했다. 이쪽이 불빛에 가까우면 반대쪽 도회지는 그만큼 멀 것이기 때문이다. 불빛 밝은 그곳은 평택역과 그 부근이었다. 공허는 바로 역으로 들어가지 않고 시든 모닥불을 쬐고 있는 행상들에게 열차 시간을 물었다. 호남선은 떠났고 두어 시간 있다가 경부선이 지나갈 거라고 했다.
아이고 부처님, 나무관세음보살!
공허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시장기를 느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국밥집을 찾았다. 배도 채우고 발목도 좀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밤이 깊을 대로 깊었지만 밤 기차를 타고 내리는 손님을 기다리며 문을 열어놓은 국밥집이 두엇 있었다. 공허는 한걸음이라도 가까운 집으로 들어갔다.
"아니, 어디를 다치셨나 보지여?"
어서 오라고 인사를 하고 난 주모가 몸을 일으키며 공허를 새로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예에, 밤눈이 어두와서 허방얼 잘못 딛어 발목얼 삐었구만요."
"에구, 저걸 어쩌나. 부처님도 무정하시지, 시님 발목을 삐게 하시구." 주모는 무슨 방울이 구르듯 빠르게 혀를 차대고는, "발목을 빈 데는 우선 찬물에 담구고 주무르는 게 젤인데." 행주를 집어 들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디, 보살님이 보시 한 분 허실라요?"
공허는 주모의 마음을 낚아챘다.
"아이고, 아녀자가 어찌 시님 발목을......"
주모가 화들짝 놀랐다. 공허는 아차 싶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아니, 그런 말이 아니구만요. 찬물 한 저박지 얻자는 것이제."
공허는 서둘러 말뜻을 밝혔다.
"아 예에, 물이야 얼마든지 드립죠."
공허는 국밥을 후딱 먹어치우고 주모가 떠온 찬물에다 왼쪽 발을 담갔다. 퉁퉁 부어오른 발목은 손을 댈 수가 없도록 아팠다. 그러나 임시방편으로 냉수 찜질이 좋다는 말은 전부터 들어왔던 터라 아픔을 무릅쓰며 발목을 주물렀다.
공허는 대전에서 기차를 내렸다.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공허는 너무 발목이 아파 가까운 여관에 들어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돈이 아까웠다. 여기쯤은 안심할 수 있으니까 포교당을 찾아가야 잠자리도 밥도 공짜였다. 먹물옷을 걸치고 다녀서 좋은 것 중의 하나가 삼천리 땅 어느 절 어느 포교당을 찾아가나 숙식이 거저인 점이었다. 포교당을 찾아가야 침 맞기도 쉽고 편할 것이었다. 공허는 닷새 동안 침을 맞으며 발목을 치료했다. 완치는 되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걸을 만해서 대전을 떠났다. 공허는 밤이 깊어 홍씨네 사립을 살짝 들어서 밀었다. 사립은 소리 없이 열렸다. 홍씨는 언제나 사립을 걸지 않았다. 담을 넘다가 다치니 사립으로 다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립을 걸지 않는 건 언제나 기다림으로 열려 있는 홍씨의 마음이기도 했다. 공허는 뒤란으로 살금살금 걸어 안방의 봉창을 세 번 두들겼다.
"...... 오시었소?"
주저하는 듯한 그러나 잠기 없이 말끔한 목소리가 봉창가에서 낮게 들렸다.
"나요, 왔소."
공허는 언제나 똑같은 말로 대꾸했다. 그리고 다시 뒤란을 돌아 나왔다. 그동안에 방을 나선 홍씨는 토방에 내려서 있었다. 어둠 속에 오롯이 서 있는 그 모습에서 공허는 그녀의 냄새를 물큰 맡았다.
"추운디 멀라고 나왔소."
공허는 홍씨의 어깨를 감쌌다.
"아니구만요, 먼 질 오신......"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홍씨의 어깨가 바르르 떨리는 것을 공허는 느꼈다. 그 떨림 이 공허의 가슴에 뜨거운 파도를 일구었다. 멀리 간격을 두고 있으면 잊혀진 듯하다가도 어쩌다 만나게 되면 새로움으로 가슴을 뒤흔들어 달구는 여자였다. 홍씨는 공허의 발길을 따라 마루로 올라서고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남자의 출렁거리는 가슴을 느끼고 있었다. 그 출렁거림으로 자신의 마음도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문고리를 건 공허는 홍씨를 와락 끌어안았다. 가녀린 몸이 품에 안겨들며 비릿하고도 싸아한 냄새를 상큼하게 풍겼다. 치자 꽃냄새일까, 구절초 냄새일까...... 그 야릇한 냄새를 여전히 꼭 짚지 못하며 공허는 혼곤한 뜨거움에 휩쓸리고 있었다. 공허는 몸이 타는 다급함으로 여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여자는 잔잔하고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옷 벗기는 것을 거들었다. 기약도 없이 어둠을 타고 떠났다가 기별도 없이 어둠을 헤치고 표연히 나타나는 사람. 어디로 가느냐고, 어느 때쯤 오느냐고 물을 수도 없는 사람. 바람이듯 왔다가 구름처럼 떠나버리고는 하는 허망 속에서도 인연의 씨를 뿌려 남편이 된 사람. 그래서 기다림은 더 목마르고 그리움은 더 사무쳐 가슴에서 응어리로 뭉치고, 행여 짐이 될까 하여 그런 마음을 말로 풀어내지도 못하는 처지. 오로지 품에 안기는 그 짧은 밤에 기다림의 목마름도 풀고 그리움의 사무침도 풀어야 했다. 홍씨는 알몸인 채로 서서 알몸이 되어가는 남자를 흐릿한 어둠 속으로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힘에 휘말리고 있었다. 알몸이 된 공허는 두 팔로 젖가슴을 가리고 선 여자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여자의 몸에서 아까보다 훨씬 더 진한 살냄새가 물큰 풍겼다. 여자의 몸을 으스러지도록 꼭 껴안으며 부르르 떨었다. 여자도 진득한 신음을 흘리며 남자의 등을 끌어안았다. 남녀는 한 덩어리로 요 위에 허물어져 내렸다. 남자는 이글거리는 불덩어리였고, 여자는 나비가 앉기를 기다리며 벙그러지고 있는 한 떨기 빨간 꽃이었다. 호랑나비는 긴 침으로 꽁 씨방을 더듬었다. 꽃은 활짝 벙그러지며 씨방 언저리를 넓혔다. 호랑나비의 긴 침은 꽃이 열어놓은 길을 따라 씨방문을 찾아냈다. 침은 씨방의 진액에 빨려들 듯 씨방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으으......"
꽃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으흐, 으흐......"
호랑나비가 큰 날개를 퍼득거렸다. 수없이 많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꽃밭이었다. 아니, 아득하게 넓은 푸르른 들판이었다.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물결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아슴한 바다였다. 꽃밭이었다가 들판이었다가 바다였다가 그것들이 한 덩어리로 뒤엉키며 흔들리고 출렁거리고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홍시는 그 혼미한 황홀함 속에서 기다림의 응어리도 그리움의 응어리도 흔적 없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석류의 신맛도 아니었다. 홍시의 단맛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자의 향그러운 맛도 아니었다. 안개에 묻힌 것인가. 구름에 실린 것인가. 바람을 타고 솟는 것인가. 공허는 형용할 수 없는 맛에 도취하며 어딘가로 붕붕 떠가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억세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였다. 땅을 박차며 뛰는 황소였다. 그 불길에 타는 황홀함이여. 그 물줄기에 부서지는 아련함이여. 그 발굽에 짓밟히는 후련함이여. 더 타올라라, 더 쏟아져라, 더 뛰어라...... 여자는 온몸이 저릿거리고 간질거리고 부풀어 오르는 절묘함에 취하고 또 취하며 남자의 동작에 맞추어 몸짓하고 있었다. 온몸을 태우는 굴이었다.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굴이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굴이었다. 끝이 어디인지 모를 굴이었다. 그 크지 않은 몸에 이리도 깊은 굴이 있을 수 있는가. 남자는 화끈거리고 옴죽거리고 짜릿거리는 굴의 오묘함에 마취되면서 마침내 폭발하고 있었다.
"으흑, 으으으으......"
"......"
그 터져 오르는 불길에 여자는 온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막바지 황홀감에 휩쓸리며 남자를 부둥켜안고 떨었다. 수없이 많은 불똥들이 튀고 있었다. 하얀 천들이 무수히 나부끼고 있었다. 공허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홍씨 위에 무너져 내렸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온몸이 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후련하고 말끔한 기분은 어떤 일에서도 느낄 수 없는 흡족함이었다. 불똥들이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하얀 천들이 시나브로 처져 내리고 있었다. 홍씨는 질긴 아쉬움을 떼치며 공허의 넓은 가슴을 떠받쳐 올렸다.
"편허니 누시제라."
공허의 가슴은 땀으로 끈적하게 젖어 있었다. 그 땀이 자신의 젖가슴을 다 적신 것을 홍씨는 뒤늦게 느끼고 있었다.
이 문풍지 떠는 추운 밤에도 땀이 저리 나는가!
홍씨는 새삼스럽게 그 일이 남자의 몸을 태우고 피를 밝게 하는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 뜨겁게 끓는 힘으로 자신의 몸이 달구어지고 그리 걷잡을 수 없이 불붙어 올랐다는 것도 다시 느끼고 있었다.
"괜찮혀, 쬐깨 더 있다가......"
쉰 듯한 공허의 목소리가 홍씨의 귓바퀴에 담기고 있었다.
"아니구만요, 찬물 잡수셔야제라."
홍씨는 아쉬움이 말끔히 걷힌 마음으로 공허의 가슴을 또 떠받쳤다. 남자의 몸에서 나오는 그것은 피보다도 세네 곱이 더 진한 진액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름 땀은 몸에 좋으나 겨울 땀은 몸에 해롭다고 했다.
"미안혀, 아무 심도 못 되고......"
너무나 뜻밖의 말이었다. 홍씨는 깜짝 놀람과 동시에 가슴이 뭉클한 것을 느꼈다. 그 감격스러움은 눈물로 솟구쳤다.
"아니구만요, 아니구만요......"
홍씨는 울먹이며 공허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한마디 말이 모든 고적감과 수심과 괴로움을 풀어 내리고 있었다. 애초에 짐이 되고자 한 것도 아니었고 짐을 지우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 없는 자식을 키우는 마음에는 탓할 데 없는 고적감이 쌓이고 수심이 깊어지고 괴로움이 커갔던 것이다. 아버지를 모르고 자라나는 아이에게 죄스러움도 자꾸 늘고 있었다. 그런데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니...... 그것만으로 고맙고 흡족한 일이었다.
"그리 생각허지 마시게라. 허시는 일에 우리가 걸거치면 그것이야 지 뜻이......"
욕심으로 붙들어둘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붙들어두려고 하면 오히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이었다. 붙들어두려고 욕심부리지 않는 것은 그나마 오랜 만남을 지키려는 욕심이었다. 홍씨는 그 슬픈 욕심을 슬퍼하지 않았다. 애초에 큰일을 하던 사람이었고, 자신에게 핏줄을 남겨주었으니 그것을 슬퍼하면 불행이 커질 뿐이었다.
"목타실 것인디요......"
홍씨는 또다시 공허의 가슴을 떠받쳤다. 공허의 몸뚱이는 요 위로 뒹굴어졌다. 홍씨는 왈칵 밀려드는 허전함을 떠밀며 윗몸을 일으켰다. 공허는 홍씨가 떠온 찬물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켰다. 이가 시린 찬물에 갈증이 씻겨 내려가면서 온몸의 나른함이 깨어났다. 공허는 이불을 끌어다가 덮으며 홍씨를 품었다. 그리고 홍씨가 걸친 홀치마 저고리를 벗겨버렸다. 공허는 팔다리로 홍씨의 온몸을 가득 끌어안았다. 공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홍씨는 더없이 아늑함을 느끼고 있었다. 공허도 홍씨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말없이 누워 있었다. 방안에는 고요만 가득했다. 방문 창호지 절반쯤에 달빛이 은은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그 위로 처마 그림자가 드리워져 달빛은 더 선연했다. 달빛맞이라도 하는 듯 문풍지가 울고 있었다. 창호지에 젖어든 달빛이 방안을 어렴풋하게 밝히고 있었다. 문풍지 떨리는 가녀리고 애잔한 소리는 방안의 고요에 잔 파문을 일구고 있었다. 홍씨는 문풍지 우는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긴긴 겨울밤을 우는 그 소리에 마음 적시며 잠 못 이룬 밤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 애처로운 소리는 슬픈 울음만이 아니었다. 약하게 떨릴 때는 흐느낌이다가 강하게 떨릴 때는 통곡이 되곤 하는 그 소리는 한정도 없이 마음을 휘감고 들면서 슬픔이 겨워 설움이 되게 했고, 설움이 겨워 탄식이 되게 만들었다. 슬픔으로 가슴 먹먹해지고 설움으로 눈시울 뜨거워지다가 끝내는 탄식으로 눈물 떨구며 기다림과 그리움의 응어리를 키우게 했다. 그러나 그 애절한 울음소리마저 없으면 긴긴 겨울밤을 누구와 동무했을 것인가.
"달이 밝을 때든가......"
공허는 무심하게 말했다.
"예, 그믐달이구만요."
홍씨는 등 돌아누워서도 달을 보고 있는 것처럼 대답했다.
"시절이 어찌 가는지 원......"
"시절이야 절로 가니께요."
"그렇제. 사람 사는 세월이 팍팍허고 답답헌 것이고."
"......"
"아덜언 무병허니 잘큰가?"
"예, 시상천지 몰르고 저리 잘 자덜 않은게라."
"그려, 무병허니 잘 커야제."
"누구 탁했는지 잔병치레허겄소."
"아니여, 자네가 다 건사 잘헝게 그렇제."
공허는 홍씨를 더 꼭 끌어안았다. 홍씨는 콧등이 시큰해졌다. 아들을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 그리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하긴 어글어글한 생김이나 무뚝뚝한 말투에 비해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만삭이 되었을 때 찾아와 불쑥 내밀었던 탱자나무 비녀와 대추나무 노리개. 그것들을 손수 깎은 마음에 얼마나 감복했던가. 그 비녀는 금 수천 냥보다 더 값지고 소중했던 것이다. 혼자서 그것이 혼인예물이거니 생각했었다. 그리고 노리개를 손수 깎은 마음에 보답하느라고 아이는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은 그 노리개를 빨고 핥으며 다른 아이들보다 이빨이 더 빨리 솟았다.
"작인덜언 어쩌는고?"
"그냥저냥 잘허고 있구만요."
"야박허니 혀서넌 안 되제만 단속언 잘혀야 헐 것이여. 여자 혼자라고 간 보고 뎀빌지도 모릉게."
"소작 얻기가 심들어진 시상잉게 그리 못허는구만요."
"사람언 갤쳐야 사람잉게 지끔보톰 그 준비럴 차근허니 혀얄 것이여."
"예, 그리허고 있구만요."
"나가 심언 하나도 못됨서 입만 놀리고 있구만."
"무신 말씸이신게라. 그런 말씸이 다 심이 되고 기둥이 되는구만요."
홍씨는 말에 힘을 주었다. 공허는 팔다리를 풀며 바르게 누웠다.
"인자 주무셔야제라."
홍씨는 이불을 공허의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요새 징허게 많이 잤소."
"허시는 일언 잘되시는가요?"
"글씨, 잘돼얄 것인디......"
"왜놈덜언 자꼬 불어나는디요."
"글씨, 고약시런 일이제......"
공허의 눈앞에는 휘황한 불빛 속에 흥청거리던 진고개가 떠올랐다. 다급하게 샛길로 들어가던 두 조선사람의 모습도 떠올랐다.
"우리 동걸이가 핵교럴 가게 될 적에넌 시상이 바뀔랑가요?"
동방의 큰 인물이 되라고 공허는 아이의 이름을 동걸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그래야 되겄제. 그리 되게 맨들어야겄제. 하먼 그래야제."
공허의 말에는 차츰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공허는 아이가 일본말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끔찍스럽고 치떨렸던 것이다.
"그런 말 그만 허소."
공허는 홍씨 쪽으로 돌아누웠다. 홍씨는 괴로워하는 공허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공허는 이 집에서만큼은 어두운 앞날을 잊고 싶었다. 그는 홍씨의 탐스러운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6. 지주는 왕이다.
"저어 어르신네, 요것이 지리산서 딴 진짜배기 꿀이구만이라우."
무릎을 꿇고 엎드린 한서방은 꿀단지를 조심스럽게 앞으로 밀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어찌나 허리를 바짝 낮추고 머리를 조아리는지 이마가 곧 방바닥에 부딪힐 지경이었다.
"무신 알랑궂인 소리여 시방?"
정상규는 팩 내쏘며 콧방귀를 뀌었다.
"야아? 무, 무신 말씀이신게라우?"
바짝 엎드린 채 고개를 든 한서방의 눈이 휘둥글해져 있었다. 젊은 얼굴에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 실려 있었다.
"느그 애비가 꿀 따서 살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긴 담뱃대를 입에 문 정상규가 또 차갑게 내쏘았다. 상투머리에 헐어빠진 망건을 쓴 그의 얼굴에는 사납고도 거만스러운 기가 끈적이고 있었다. 그가 상투머리에 긴 담뱃대를 문 것은 양반의 체통이나 지주로서 권위를 세우자는 것도 아니었고, 단발을 거부하는 유림의 계율을 지키자는 것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는 비싼 궐련값이 아까워 담뱃대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었고, 단발을 하면 자꾸 들어가야 하는 이발비가 아까워 상투를 자르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니 저어...... 지 아부지넌 진작에 시상얼 뜨셨......"
"그렁게 나가 허는 소리여. 꿀언 부자지간에도 속힌단 말 못 들었어? 요것이 어떤 시러베아덜놈이 딴 꿀인지도 몰름서 진짜배기넌 무신 놈에 진짜배기여."
정상규는 매몰차게 내지르며 발끝으로 꿀단지를 밀쳐버렸다. 꿀단지는 바짝 엎드려 있는 한서방의 머리에 부딪힐 것처럼 주루룩 밀려났다.
"아이고메 어르신네......"
대꾸할 말이 없어진 한서방은 정상규를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꿀단지 아니라 새끼 밴 암소를 끌고 와도 다 끝막음된 일잉게 아무 소양이 없다. 썩 물러가그라!"
정상규는 긴 담뱃대로 놋쇠재떨이를 치며 호령했다.
"아이고메 어르신네, 이놈 잠 살래주시게라우. 다 늙은 노모에 동상덜 새끼덜 혀서 딸린 입이 일곱이구만요. 소작얼 띠이먼 다 굶어 죽을 판인디, 불쌍허니 생각허시고 살펴주시게라우. 소출 더 많이 나게 농사짐서 그 은공 두고두고 갚겄구만요. 어르신네, 손이 발이 되게 빌겄구만요."
울상이 된 한서방은 두 손을 싹싹 비비대며 애걸하고 있었다.
"어허, 다 듣기 싫어. 손이 발이 아니라 대가리가 붕알이 되게 빌어도 소양 없는 일이여. 썩 물러가!"
정상규는 또 담뱃대로 재떨이를 내리쳤다. 그러면서 그는 어깨를 으시시 떨었다. 아랫못에 방석을 깔고 앉아 있으면서도 방안의 냉기가 옷 속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는 아랫목에 앉아서도 방바닥의 냉기를 막느라고 방석을 깔고 있으니 한서방이 무릎을 꿇고 있는 윗목이 얼마나 냉골인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방고래가 탈이 나서 방이 그리 추운 것이 아니었다. 정상규는 만석꾼이 될 꿈을 해가 갈수록 단단하게 다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형한테 재산을 나눠받은 다음 해부터 모든 살림을 맵고 짜게 살아 해마다 농토를 늘려왔던 것이다. 방이 그리 추운 것도 나무를 아끼느라고 군불을 제대로 때지 않은 것이었다.
"아이고메 어르신네, 지가 무신 잘못얼 헌 것도 아닌디 살래주십소사. 지가 헐 수 있는 일이먼 무신 일이고 다 헐 것잉게 소작만 띠지 말아주시게라우. 어르신네, 우리 식구덜 불쌍허니 생각허시고 지발 적선허신다고...... 어르신네...... 어르신네......"
온 얼굴에 울음이 번진 한서방은 계속 빌어대며 목타는 간절함으로써 원하고 있었다.
"시방 머시라고 혔제? 니가 헐 수 있는 일언 머시고 다 허겄다고?"
정상규는 옆눈질로 한서방을 쏘아보았다.
"야아, 무신 일이고 간에 시키시먼 다 해내겄구만이라우. 야아, 해내겄어라우."
금세 얼굴이 밝아진 한서방은 굳은 맹세를 하듯 다짐까지 해 보였다.
"그려어? 고것이 아무리 에롭고 맘에 안 차도 해내겄다는 것이여?"
이번에는 정상규가 다짐을 놓았다.
"야아, 기연시 해내겄구만이라우."
한서방은 마른침을 삼키며 또 다짐했다.
"정 그러면 방서방헌티 가부아."
정상규가 반쯤 돌아앉으며 말했다.
"야아?......"
정상규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서슬에 한서방은 고개를 떨구며 다급하게 대꾸했다.
"야아, 아는구만이라우. 당장 가겄구만요."
한서방은 쫓기듯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절룩이듯 하며 정상규네 대문을 나선 한서방은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냉골에 오래 꿇어앉았던 두 다리는 너무 저려 제대로 걷기가 어려웠고, 옷을 실하게 입지 못해 몸에서는 한기가 돌았다.
"지랄! 당대 천 석언 몰라도 당대 만 석언 죽었다 깨어나도 못 된단 말 듣지도 못혔냐, 그리 불도 안 때고 지독시리 혀봐라. 만 석언새로 오천석도 못 채우고 붕알이 얼어터져 꼬드라질 것잉게."
한서방은 다리를 주무르며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정상규가 만석꾼이 되려고 독하게 자린고비 짓을 하며 사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사시장철 쌀밥이라고는 먹지를 않고, 3월이라 하지만 아직도 끝추위가 남아 있는데 냉골에서 버티는 지경이니 소작인들을 모질게 다루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한서방은 걷기 시작하며 의문이 더 커지고 있었다. 왜 방 영감에게 가 보라고 허는 것인지 영 짚이는 것이 없었다. 방 영감이 마름 노릇을 하게 되었나? 그럴 리가 없었다. 마름 노릇을 하기에는 방 영감은 너무 늙어 있었다. 그리고 의심 많고 그리 인색한 정상규가 방 영감 같은 사람에게 마름을 시킬 리가 없었다. 방 영감은 입이 빠르고 간사스러워 나이대접을 못 받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상규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일이 풀릴 듯한데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는 것일까...... 한서방은 생각을 할수록 아리송하기만 했다. 그러나 아리송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소작을 왜 떼려고 하는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슨 잘못을 한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비위를 거스른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작을 떼고 붙이는 것이야 언제나 지주의 멋대로였다. 꼭 이쪽이 무슨 잘못을 하거나 밉보여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뒷손을 쓰면 엉뚱한 사람이 당하게 되는 것이었다.
"아니 자네가 우리 집 걸음을 다 허고, 어쩐 일이디야?"
한서방은 삐걱거리는 좁은 마루로 올라서며 눈길은 방 영감에게 쏘고 있었다. 그러나 방 영감의 쪼글쪼글 주름진 얼굴에서는 아무런 낌새도 챌 수가 없었다.
"아랫목이라고 혀야 썰렁허기넌 매일반인디, 그려도 욜로 내려앉소."
방 영감이 꾀죄죄하게 때 전 이불을 들치며 자리르 권했다. 그나마 마음 쓰는 것이 정상규보다 낮다고 생각하며 한서방은 방바닥에 털퍽 주저앉았다.
"나 시방 어르신네 집서 오는 질이오."
한서방은 또 무언가 눈치를 알아내려고 이렇게 불쑥 말했다.
"어르신네 집?"
방 영감은 멀뚱하게 한서방을 쳐다보았다. 전혀 아무런 기색도 나타내지 않는 그 얼굴에 한서방은 오히려 어리둥절해지고 당황했다. 그러나 방 영감은 일부러 그렇게 시침을 떼며 능청을 떨고 있었다. 자기로서는 몸달 게 없었고, 뒤에 덤터기를 쓰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 나헌티 어르신네먼 누구겄소. 지주 어런이 영감님얼 찾어가 보라고 허시드랑께라. 나 말 못 알아묵겄소?"
더 이상 눈치를 캐보고 어쩌고 하기를 포기한 한서방은 답답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거 무신 자다가 봉창 뚜딜기는 소리여 시방? 나넌 무신 소린지 통 못 알아듣겄응게 조단조단 말혀 보드라고."
방 영감은 눈곱 낀 눈을 끔벅끔벅하며 곰방대끝을 쌈지를 끌어당겼다.
"아니, 나 소작 띠고 붙이는 일로 우리 지주 어런허고 오고가고 헌 무신 이얘기가 없다는 것인 게라?"
한서방은 목소리가 커지며 방 영감 쪽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무신 소리랴? 그런 지체 높은 양반이 나 겉은 거보고 무신 그런 이얘기럴 허고 그러신당가. 밑도 끝도 없이 그리 말허덜 말고 앞뒤가 맞게 조단조단 말혀 보랑게 그러네."
‘요놈아, 애가 달지야? 그려, 애가 많이 달수록 존게 어여 달아라.’
방 영감은 한서방의 마음을 빤히 들여다보며 속으로 킬킬거리고 있었다.
"참말로 요상시러운 일이시." 한서방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기웃하다가는, "긍게, 고것이 무신 이얘긴고 허니 말이오. 지주 어런이 뜸금없이 나가 짓고 있는 소작얼 올해보톰 띠겄다고 안 허요. 그래 나가 쫓아가서 손이 발이 되게 빔서 살래도라고 통사정얼 허는디......"
"헌디, 맨손언 아니었을 것이고, 멀 싸들고 갔드랑가아?"
방 영감은 말허리를 자르며 삐딱하게 고개를 틀어 한서방을 쳐다보았다.
"와따, 어찌 그리 말얼 토막침서 사람 심얼 요리도 배고 그요."
한서방이 바락 신경질을 부렸다.
"그려, 멀 갖고 갔등가?"
방 영감은 한서방이 기분 나빠하는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비위 좋게 씨익 웃으며 또 물었다.
"몰르겄소."
아무것도 안 가지고 갔다고 할 수는 없고, 한서방은 퉁명스레 내쏘았다.
"이잉, 그런 말도 안헐람서 나넌 멀라고 찾어와."
방 영감은 토라지듯 고개를 돌렸다.
"지기럴, 꿀 한다 가지갔소, 꿀."
한서방의 화난 목소리였다.
"꾸우울? 에이, 사람이 눈치가 있어야제. 그런 양반이 꿀엇어서 못살겄능가. 인삼 녹용얼 내놔도 눈얼 돌릴지말지 헐 것인디."
방 영감은 곰방대 문 입으로 끌끌끌끌 혀를 차댔다. 방 영감은 일부러 말을 중단시켰던 것이고, 그 대목에다 쐐기를 받아 한서방의 기를 꺾고 있었다.
"야아, 영감님 말이 맞구만이라."
한서방의 맥 풀린 말이었다.
"그려서 어찌 되았어?"
"긍게 머시냐, 지주 어런이 꿀얼 퇴험서 안된다고, 물러가라고 호령이 드만이라. 그려서 지가 헐 수 있는 일언 무신 일이고 다 헐 것잉게 소작만 부치게 히도라고 통사정얼 혔구만이라. 그렁게 지주 어런이 아무리 에롭고 맘에 안 차도 참말로 그리허겄냐고 다짐얼 놓드만이라. 나가 그러겄다고 심지게 답헝게 지주 어런 말씸이 영감님얼 찾아가 보라고 허시드랑게요. 지주 어런 대신혀서 영감님이 나헌티 시킬 일이 머시당가요?"
한서방은 내친김에 마음에 답고 있던 말까지 쏟아놓았다.
"그 양반 대신혀서 나가 시킬 일? 글씨이...... 그런 일이 없는디, 고것이 무신 말잉고? 그 양반허고 나허고 자주 내왕험서 사는 사이이기넌 헌디, 자네 일얼 나헌티 맡긴 일언 없구마."
방 영감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완전히 시침을 떼고 있었다. 그건 또 하나의 덫놓기였다. 한서방의 몸을 더 달게 하면서 자기와 정상규가 꾸민 일을 위장하자는 것이었다.
"아니, 그러지 말고 잘 생각혀 보랑게요. 지주 어런이 공연시 영감님 찾어가 보라고 허셨겄소."
한서방은 몸이 단 기색이 역연했다.
"글씨이...... 나가 늙었어도 안직꺼정언 기억이 총총헌디, 그런 일이 없구만."
방 영감은 고개를 짤짤 흔들었다.
"아이고 영감님, 그리 없다고만 말고 찬찬히 생각혀 보란 말이오."
한서방은 한층 더 몸 달아했다.
"글씨이...... 근디 말이시, 그 양반이 아무리 에롭고 맘에 안 차는 일도 허겄냐고 물었다고 그랬능가?"
"야아......"
"아무리 에롭고 맘에 안 차는 일이라...... 고것이 머신고? 고런 일이 머시가 있능고?"
방 영감은 곰방대를 뻑뻑 빨아대며 고개를 이리 갸웃 저리 갸웃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뜸을 들이고 있는 참이었다. 한서방은 담배쌈지를 꺼내려다가 도로 넣고, 입술에 침을 축이고 하면서 애가 타고 있었다.
"아, 그려그려! 그 말이 바로 그것이로구만!"
방 영감은 드높은 목청을 터뜨리며 무릎을 쳤다.
"머시오, 고것이 머시오?"
얼굴에서 근심과 불안이 싹 걷히며 한서방의 목소리도 다급하고 커졌다.
"아니여, 아니여. 그 일이 틀림이 없기넌 헌디, 나 입으로넌 자네헌티 그 말 차마 못허겄구만."
방 영감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신 말인디 그러요. 무신 일이고 다 헐 것잉게 말만 허시게라. 무신 일이요. 얼렁 말허란 말이오."
한서방은 방 영감의 팔을 흔들었다.
"아니여, 사람이 나잇살이나 묵어갖고 헐 말이 따로 있고 안 헐 말이 따로 있제. 나넌 그 말 못혀."
방 영감은 한서방의 손을 뿌리치며 돌아앉았다.
"아이고 영감님, 어째 이러시오. 시방 우리 일곱 식구가 다 굶어 죽을 판인디 나가 듣고 못 듣고 헐 말이 머시가 있다요. 나가 죽는 것만 빼놓고 무신 일이고 다 헐라고 작심혔응게 아무 말이고 다 허랑게라. 나가 듣겄다는디 영감님이 못헐 것이 머시가 있소."
한서방은 방 영감님의 팔을 다시 붙들며 다가앉았다.
"아니여, 나가 공연시 베락 맞을라고."
"무신 베락얼 맞어라?"
"아, 나가 허는 말 듣고 분통이 터져 자네가 나헌티 베락친단 말이시."
"아니, 영감님이 무신 죄가 있다고 그러겄소. 무신 소리럴 들어도 화 안 낼 것잉게 얼렁 말이나 허랑게라."
"참말로 화 안 낼 것이여?"
"야아, 약조허겄구만이라."
"나 타박도 안허고?"
"야아, 약조헌당게라."
"그려, 두 번썩 약조혔네 잉?"
방 영감은 한서방을 똑바로 쏘아보며 다짐을 놓았다.
"야아, 약조혔소."
한서방은 힘찬 소리로 응답하며 어금니를 맞물었다.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되고 있었다.
"요리 가차이 오소."
방안에 단둘이뿐인데도 방 영감은 한서방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한서방의 귀에 입을 바짝 붙였다.
"긍게 말이시, 그 양반이 자네 안사람얼 아조 맘에 있어허드란 말이시."
한서방은 얼핏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 머시여!"
한서방은 가슴에서 치솟는 불길을 그대로 토해냈다. 성난 그의 외침이 좁은 방안을 찌렁 울렸다.
"어, 어, 약조헌 것 잊어부렀능가, 약조."
방 영감이 물러나 앉으며 다급하게 주워섬겼다.
"아이고메에, 떡얼 칠 것!"
한서방이 방바닥을 내려치며 울부짖듯 소리쳤다. 그리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씨부랄 놈에 시상, 팍 엎어 불고 뒤집어 불고 혀야 혀!"
한서방은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다 목구녕이 포도청이고, 한강에 배 지내가긴 게로."
방 영감이 한서방의 뒤에다 대고 느릿한 가락을 뽑았다.
"아이고 개좆 겉은 놈덜, 맷돌 속에 쑤셔박아 다글다글 갈아붙여야혀!"
한서방이 마당을 가로지르며 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얼씨구나 자리헌다. 그런 결기 한 자락 없음사 고것이 어디 붕알 단 사내자석이다냐. 허나 니가 조금이나 가는지 어디 두고 보자 잉."
방 영감은 혼자 중얼거리며 묘한 웃음을 키들거리고 있었다. 한서방은 이틀 동안 애꿎은 외상술만 마셔댔다. 그의 어머니나 아내도 근심 짙은 얼굴로 그의 눈치만 보며 살얼음을 걸었다. 한서방은 아내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꼭 죄진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아내의 예쁘장한 얼굴이 탈이라면 탈이었다. 한서방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살아갈 길은 막막하고 암담하기만 했다. 만주로 뜰까? 그러나 일손이 많지 않으면 굶어 죽기 딱 알맞다는 소문이었다. 논얼 새로 일궈야 하기 때문에 일손이 많지 않고서는 터를 잡을 재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여덟 식구 중에 장정 일손이란 자신 하나뿐이었다. 억지로 아내까지 친다 해도 둘뿐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허리가 꼬부라졌고, 두 여동생이 시집가고 남은 세 동생들은 먹새 좋은 장난꾼들일 뿐이었고, 자신의 두 자식은 젖비린내 나는 어린것들이었다. 산골로 들어가 화전을 일굴까? 그러나 일손이 턱없이 모자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도회지로 나가 막품팔이를 할까? 그러나 입이 많고서는 죽도 못 먹는 형편이고, 제집이 없으면 푸성귀도 사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으로 돈벌이를 가볼까? 그러나 집 팔아 여비를 하면 식구들은 어디서 살며, 돈 벌어 오는 동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그리고 제 입치다꺼리며 옷치다꺼리 겨우 하다가 일이 년 만에 빈주먹으로 돌아오는 것이 예사였다.
사흘째 되는 날 밤 술이 취한 한서방은 방 영감의 집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술 한잔 걸쳤구만. 어서 오소, 어여 봐."
방 영감은 한서방을 반갑게 맞이하며 자기 할멈에게도 눈짓했다.
"하먼, 술도 어서 마시야 지 맛이제. 한서방, 욜로 오소, 욜로. 여그 아랫못이 따땃허시."
잔주름투성이인 얼굴에 웃음을 듬뿍 담으며 할멈이 한서방을 붙들어 아랫목에 앉혔다. 석유등잔도 아닌 접시등을 밝힌 방안은 어둠침침했다. 한서방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가 늘어진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는 풀이 죽을 대로 죽어 있었다.
‘히히히히...... 니가 나럴 안 찾아옥 뱃길 것이냐. 니까징 것이 뛰어야 베룩이고 날라야 포리새끼제.’
방 영감은 터지려는 웃음을 참아내며 또 할멈에게 눈짓했다. 할멈이 마주 눈짓하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다 한강에 배 지내가기고, 금강물에 자갈 던지기여. 자네가 맘만 정허먼 남치기 일이야 이 할망구가 나서서 쥐도 새도 모르게 뚝딱 해치울 것잉마."
한서방은 풀죽어 찾아든 이상 방 영감은 여러 군소리 생략하고 한서방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하먼, 한서방이야 몰른 칙끼 허고 있으면 나가 금산댁 살짝 만내 일이 쫙허니 풀리게 맨글어놓겄구마. 당자덜말고 시상에 아는 사람덜이 누가 있간디. 아조 깨끔허제."
할멈은 빈틈없이 장단을 맞추었다.
"두 번도 아니고 딱 한 번이여. 아부지 눈 띄우자고 심청이넌 목심도 내놨는디, 그 일 한 번으로 온 식구 살게 되면 그보담 더 수월헌 일이 어딨어. 요런 일이야 옛적보톰 있어온 일잉게 맘 쓸 것 하나도 없당게."
방 영감의 사설이었다.
"하먼, 큰애기니 흠이 되겄어, 음행이니 죄가 되겄어. 죽으먼 다 썩어질 살 그리 좋게 한 분 쓰고 목간해 불먼 깨끔허지는 것이제."
할멈이 또 장단을 맞추었다.
"어쩔랑가? 이 할망구가 나스네 이!"
방 영감이 마침내 한서방을 몰아쳤다.
"아이고, 나 죽겄소."
한서방이 황소울음 같은 소리를 토해내며 뒷머리로 벽을 들어 받았다. 흙벽이 쿵 소리를 내며 울렸다.
"이 사람아, 눈 딱 감고 있어. 메칠 새로 일이 안되먼 소작 영영 띠이네. 발써 농새철이 시작 아니여."
방 영감은 마지막 못을 쳤다.
"그려, 그려, 맘 잘 묵었어. 다 살아야제 어쩔 것잉가."
할멈이 한서방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머리를 벽에 기댄 채 눈을 꼬 감고 있는 한서방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이고, 나 미쳐불겄소."
한서방이 방을 뛰쳐나갔다. 늙은 내외는 흐린 불빛 속에서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나흘 뒤에 정상규는 어둠을 밟으며 방 영감네 집으로 들어섰다. 지게문에는 여자의 낭자머리 그림자가 흐릿하게 어려 있었다.
"어험, 으흠......"
정상규는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내며 방문을 열었다. 젊은 티가 묻어나는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헛기침이었다. 윗목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던 여자가 움찔 놀랐다. 여자는 약간 옮겨 앉는 듯했을 뿐 고개는 들지 않았다. 방바닥에는 이불이 깔려 있었고, 다른 때와는 달리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정상규는 이불 한쪽을 젖히고 요 위에 앉았다. 방안에 들어서면서부터 그의 눈길은 여자에게 박혀 있었다. 동그스름한 여자의 얼굴은 예쁜 편이었다. 정상규는 벌써 샅이 뻐근하고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요리 내래오니라."
정상규는 왼손으로 샅을 쓸었다. 무겁게 몸을 일으킨 여자가 옆걸음질로 정상규 가까이 와서 멈추었다.
"에로와헐 것 없다. 요것도 다 연분잉게 맘 푹 놓고 앉거라."
여자는 말에 따라 움직였다. 여자가 앉자마자 정상규는 여자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 여자의 옷고름을 풀었다.
"아니, 저 저 불......"
여자가 소스라치며 옷깃을 여몄다.
"몰르는 소리 말어. 불얼 써놓고 혀야 재미가 더 오지고 맛이 나는 법이여."
정상규는 옷깃을 잡은 여자의 두 손을 헤치며 저고리를 벗기려 들었다.
"이러먼 나 갈랑마요."
여자의 목소리가 울먹였다.
"머시여, 가아? 그려, 니 좋을 대로 히봐. 소작언 소작대로 띠이고, 나허고 배맞쳤다는 소문얼 낼 아칙에 쫘악 퍼지게 히줄팅게."
"엄니이......"
여자가 얼굴을 두 손바닥에 묻었다.
"기왕지사 여그 온 것잉게 나가 시키는 대로 혀. 불 쓰고 허는 꼬신 새 맛얼 봬줄 것잉게."
정상규는 끈적거리는 소리로 말하며 여자의 턱을 받쳐 올렸다. 그리고 저고리를 벗기기 시작했다. 쌀 두 말 없앤 본전을 찾으려면 적어도 네댓 번은 맛을 보아야 한다고 작정하며. 그 일은 쥐도 새도 모르게 한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 달이 못되어 그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건너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속삭임과 수군거림은 다른 소문과는 다르게 아이들의 귀를 피해 가며 어른들끼리만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은 다 알고 있는데도 정작 당사자들만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한서방이나 금산댁을 흉보지 않았다. 그런 일을 당한 것을 딱해하고 안쓰러워했다. 그 대신 정상규에게 욕이 돌아갔다. 어쩌면 그들 자신이 소작인 신세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지 않아도 못된 지주, 지독한 지주로 욕을 먹어오던 정상규는 또 욕거리 하나는 덧붙이게 된 것이었다. 그 소문은 자꾸 퍼져나가 두 달쯤 지나서는 정도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정도규는 너무 믿을 수가 없어서 아내에게 확인을 해보았다.
"야아, 진작 알고 있었구만요."
그의 아내는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그럼 왜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어."
정도규는 화를 냈다.
"다 엎질러진 물인디 알린다고 무신 소양 있간디요. 글고 손웃사람 슝인디닫가, 입에 담기도 싫은 추접시런 일잉게요."
아내의 싸늘한 대꾸였다. 정도규는 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내의 말은 빈틈이 없었고, 더구나 시아주버니를 경멸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규는 아내한테도 창피스러움을 느꼈다.
"작인덜헌티 모질게 혀서 욕묵는 것도 모지래서 그런 슝헌 일꺼정 해대니, 그리 인심 잃어갖고 어찌 살라는지 원. 참 남세시러와서......"
아내가 밖으로 나가면서 중얼거린 말이었다. 아내의 말은 바로 자신의 심정 그대로였다. 정도규는 다시 창피스러움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정도규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아내의 말마따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작은형을 찾아간다고 해서 소문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일이 돌이켜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소문이 얼마나 나쁘게 퍼져 있고, 또 얼마나 심하게 욕을 먹고 있는지 알게 해서 더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해야 될 것 같았다. 큰형이나 작은형을 생각하면 너무 창피스러워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왜 그 지경들로 세상을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큰형과 작은형이 정반대인 것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큰형은 주색잡기로 재산을 탕진하는 버릇을 누구한테 배웠는지 모를 일이었고, 작은형은 만석꾼이 되겠다는 어이없는 욕심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둘이는 하는 짓이 서로 달랐지만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당하고 욕먹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신 바람이 불었드라냐? 니가 우리 집에럴 다 오고."
동생을 대하자마자 정상규는 대뜸 이렇게 내질렀다. 무언가 마땅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형님이 그리워서 왔어요."
정도규는 씁쓰름하게 웃었다.
"헹, 칡덩쿨얼 삶아묵었냐?"
정상규는 그래도 동생의 비꼬는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기왕 삶아 먹으려면 남자가 참대를 삶아 먹어야지요."
정도규는 한 번 더 비꼬았다.
"니 경성으로 이사 간다등마 말씨도 아조 경성놈 다 되야부렀구나?"
정상규는 아니꼬운 얼굴이었다.
"아니, 경성으로 이사는 왜 가요?"
정도규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못 가게 안 헐 것잉게 속힐라고 헐 것 없다. 동경 유학꺼정 혔응게 당연허니 경성 가서 출세허고 살어야제."
정상규는 코방귀를 뀌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나는 꿈도 안 꾸고 있는 일인데."
정도규는 오히려 작은형에게 당하려고 온 입장이 된 것을 느꼈다. 무슨 뜬소문이 돌고 있는 것을 알았다.
"아 글씨, 안 붙들 것잉게 여러 소리 말고 그냥 뜨란 말이여."
정상규는 새 쫓는 손짓을 했다.
"됐어요, 두고 보면 알 일이니까 더 말할 것 없어요."
정도규는 말을 잘랐다. 사실도 아닌 일로 더 이상 부질없는 입씨름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글먼 이사 간다는 것이 헛소문이란 것이여?"
정상규는 그때서야 동생을 의아스럽게 건너다보았다.
"어떤 소문이 퍼졌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고요. 요새 형님 소문이 너무 나쁘게 돌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된 건가요?"
정도규는 제 똥 구린 줄 모르고 남의 뜬소문에 엉뚱한 오해나 하고 있는 작은형이 괘씸해 곧바로 대질렀다.
"나 소문이 퍼져? 무신 소문?"
정상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챘다. 그러나 가슴은 뜨끔했다. 동생이 갑자기 발걸음을 했을 때부터 무언가 낌새가 좋지 않았고, 도규는 동생이면서도 대하기가 만만찮았던 것이다.
"글쎄요, 등하불명일 수도 있지요." 정도규는 작은형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아무리 땅 가진 지주지만 소작인들을 그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걸 똑똑히 알아두세요." 그는 차마 소작인의 아내를 범하지 않았느냐고 직설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형이었고, 그 체면을 짓밟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무신 소리여 시방? 나가 작인 놈덜얼 구러묵든 삶아 묵든 나 알아서 헐 일인디 니가 나서서 어째 배 놔라 감 놔라여? 옳여, 듣자 허니 니가 동경서 신풍조에 물들어 와갖고 경성서도 무신 회럴 조직허고, 이 근동서도 사람덜얼 모아딜이고 그런담서? 니가 그 신풍조에 맞춰서 작인덜얼 곱게 대허라는 것인디, 고런 훈계넌 나헌티 애시당초 꺼낼 생각도 말어. 작인 놈덜이 사람새끼덜인지 아냐. 다 도적놈 떼여, 도적놈 떼! 눈에 쌍불얼 키고 지켜도 논에서 나락 빔서 볏단 빼돌리고, 타작험서 나락 숨키고, 말질로 소작료 받으면 말질 속이고, 저울질로 소작료 받으면 모래 퍼넣고, 고런 도적 떼덜얼 놓고 머시가 어찌고 어찌여? 고런 말 겉지도 않은 소리 더 듣기 싫은 게 당장 가, 나가."
정상규는 두 팔을 휘저으며 몸을 일으켜버렸다. 그는 동생 입에서 소작인 마누라를 범한 이야기가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엉뚱한 것을 트집 잡아 그렇게 퍼부어대고는 자리를 피하려는 것이었다. 정도규는 작은형의 그런 속셈을 들여다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마루로 나오는데 제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정도규의 눈길은 제비를 따라갔다. 제비는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있었다. 제비집은 아직 반도 안 지어졌는데 그 아래로는 벌써 판자 쪽이 붙여져 있었다. 그 판자 쪽은 두어 달 지나서 제비 새끼들의 똥을 받아내는데 필요한 것이었다. 정도규는 쓰게 웃었다. 서둘러 붙인 그 판자 쪽에는 놀부에게 지지 않을 작은형의 심보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작은형은 놀부처럼 금은보화를 바라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길조인 제비가 찾아들어 집을 짓기 시작하니까 재산이 불어날 길운이라고 생각해서 남들보다 먼저 판자 쪽을 붙이는 부지런을 떤 것이 분명했다.
"이것 한 가지는 기억해 두시오. 소작인들은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오. 또, 세상이 변했어요. 소작권 가지고 그렇게 원수지는 짓 했다간 언제 무슨 일 당할지 몰라요. 인심 잃은 지주들이 갑오년 난리 때 어떻게 당했는지 알지요?"
정도규는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야 이놈아, 머시가 어쩌고 어쩌? 신풍존지 지랄인지에 놀아나는 니 겉은 놈덜 땀시 시상이 망쪼가 드는 것이여. 이놈아, 시상이 지이무리 변해도 작인 놈덜이야 지주 종이제 벨수 있냐. 작인놈덜이 지주 덕에 묵고 사나, 개 종자가 주인 덕에 묵고 사나 머시가 달르냐. 빌어먹을 놈이 동경서 못도니 물만 묵고 와갖고 어디다 대고 느자구없는 주딩이 놀리고 나대, 나대기럴!"
정상규는 빈 하늘에다 마구 삿대질을 해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는 동생의 시건방진 말에 화가 나서 그러는 것만이 아니었다. 동생이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하려는 뜻도 있었고, 집 밖을 오가는 소작인들도 들으라고 일부러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정도규는 작은형의 외침을 뒤로 들으며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작은형은 생전에 만석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망건이나 무명옷은 더 낡아 있었고, 발엔 꿴 짚신도 차마 보기 민망할 정도로 헐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2천 석 정도로 분가한 농토는 해마다 불어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부터 그리 지독하게 아끼고 살면서 집안 살림도 지푸라기 한 올 함부로 못하게 닦달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산이 불어나는 가장 큰 몫은 소작료와 장리빚 놀이였다. 작은형네 소작료는 다른 지주들보다 1할이 더 높았고, 장리빚은 그보다 더 이자가 높다고 소문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해마다 농토가 불어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억척을 부려 5천 석이 넘게 되면...... 만석꾼이 되는 것은 결코 꿈이 아닌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만석꾼이 되어서 무얼하겠다는 것인가...... 정도규는 그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들녘에는 논일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논들은 쟁기질이 다 끝나 있었고, 물을 대고 있는 논들도 꽤나 많았다. 머지않아 모내기가 시작될 것이었다. 수많은 제비들이 경쾌하게 날고 있었다. 물 댄 논에서 진흙을 찍어다가 집들을 짓느라고 제비들은 바쁜 날갯짓을 하는 것이었다. 정도규는 흙냄새 풀냄새 물씬거리는 논길을 바삐 걸으며 가끔씩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을 가득가득 채워오는 흙냄새와 풀냄새를 깊이 음미하고는 했다. 들녘은 어렸을 때부터 밟아왔던 그 들녘 그대로였다. 흙냄새나 풀냄새도 달라진 것이 없을 터였다. 그런데 이제서야 흙냄새와 풀냄새를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그전에는 흙냄새가 어떤지 풀냄새가 어떤지 전혀 느껴본 기억이 없었다. 그건 마음이 닫힌 것과 열린 것의 차이였다. 그 차이는 농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전에는 농부들이 들에 있는데도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동경에서 그 책들을 접하게 된 다음부터 농부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개안(開眼)이라는 말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정도규는 유승현네 마을로 들어서며 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잘려버린 당산나무 밑동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어느 동네나 마찬가지지만 그 당산나무도 마을로 통하는 외길목에 있어서 그 처참한 모습을 피해 갈 도리가 없었다. 실히 몇 아름은 될 당산나무 밑동에는 무수한 도끼 자국이 찍혀 있었고, 가운데 부분에는 나무의 윗부분이 넘어지면서 찢겨져 나간 생살이 수십 갈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상처투성이의 당산나무 밑동에는 여전히 빨간 헝겊, 파란 헝겊, 흰 헝겊 들이 끼워진 굵은 새끼줄이 둘러져 있었고, 그 사방으로는 탱자나무 가지들을 기둥 삼아 새끼줄이 드리워져 있었다. 누가 보거나 접근을 금지하고, 불경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 표시였다.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나무인데도 살아 있는 나무와 똑같이 신령스럽게 받들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그 당산나무가 잘린 것은 벌써 4년째가 되었다. 만세사건이 일어나고 서너 달 뒤에 잘린 것이었다. 그 마을 사람들이 만세사건에 많이 가담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때 이미 유승현을 비롯한 열댓 명이 잡혀 들어간 뒤였다. 마을 아낙네들은 울고 불고 야단을 했지만 총을 들어댄 주재소 순사들 앞에서 당산나무를 지킬 수는 없었다. 정도규는 금줄이 쳐진 당산나무 밑동을 볼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가슴에 응어리진 분노와 원한을 절절히 느끼고는 했다. 어쩌면 왜놈들이 당산나무를 잘 자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들에게도 그보다 더 좋은 반일감정의 교육장은 없었던 것이다.
유승현은 책을 읽고 있다가 정도규를 맞이했다.
"당산나무는 여전히 살아 있군 그래."
정도규가 건넨 인사말이었다.
"그래야제. 동네 사람덜이 살아 있으닝게."
유승현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지 말고 나무를 새로 하나 심으면 어떨지 모르겠네."
정도규는 자리 잡고 앉으며 말했다.
"어디가. 왜놈덜 몰아낼 때꺼정 그대로 둬야 허네."
유승현은 자리를 고쳐앉으며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눈썹 짙고 눈매 날카로운 그의 얼굴이 더 강직해 보였다. 정도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죽어버린 당산나무를 그렇게 살아 있는 것처럼 치장시키는 것은 유승현의 뜻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승현은 야학을 하고 있을 때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컸던 것이다. 아니, 당산나무 치장을 그가 종용하지는 않았더라고 마을 사람들의 그런 마음을 옹호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몸은 좀 좋아졌나?"
정도규는 아직도 병색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유승현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이, 언제라고 아팠간디."
유승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훔치며 가볍게 웃었다. 그 말에 어울리는 웃음에서 정도규는 유승현이라는 마음 폭 넓고 의지 강한 사내를 느끼고 있었다. 유승현은 야학을 하다가 잡혀 들어가 고초를 당했고, 만세 사건으로는 2년 6개월 형을 살고 나왔던 것이다. 고문을 심하게 당해 출감할 때는 몸이 무척 쇠약해져 집에까지 달구지를 타고 올 형편이었다고 했다.
"그 책은 다 읽었나?"
정도규는 궐련을 권하며 물었다.
"아니시, 나 안 태울라네. 안직 담배가 안 받네." 유승현은 담배를 사양하고는, "그작저작 다 읽었는디, 머시라고 혀야 헐랑가...... 시상이 생판 달리 보이고, 나가 얼매나 큰 죄인인지럴 알고 밤잠얼 못 잤구만. 아라사 왕가가 어찌서 무너져 부렀는지 알았고, 그 기운얼 어찌서 신풍조고 신사조라고 허는지도 알았네. 자네 덕에 나가 개안헌 것이네." 그는 묻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진지하게 말을 해나갔다.
"덕은 무슨, 아무튼 자네가 개안을 했다니까 반갑고 고맙네. 나도 개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는데 자네 느낌도 나와 똑같군그래."
정도규는 흡족하고도 친근한 웃음을 유승현에게 보냈다.
"이, 개안도 개안이제만 아라사 혁명정부가 약소민족에 해방얼 지원해 준다니께 더 맘이 동허네."
"그렇지, 그게 바로 금상첨화라는 것 아니겠나. 동경유학생들이 자기들의 신분을 초월해 가면서 사회주의에 경도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네."
"그려, 그래야 옳제. 그리 맘묵덜 않으면 조선 젊은 놈덜이 아니제. 우리 젊은 사람덜이 눈얼 뜨나 감으나 생각혀야 할 것이 해방말고 머시가 또 있겄능가. 인자 허는 말이네만, 나넌 자네가 동경 유학얼 떠날 적에 젊은 놈 친일파 한나 또 생긴다 생각허고 동무 한나 없어진 걸로 말얼 닫아불덜 안 했드라고. 근디 일본이 반일파럴 맨들어보냈단 말이시. 그 묘리가 아조 신통허고, 나가 생각이 짧었든 것이네."
유승현의 얼굴에 화색이 돋아나고 있었다.
"맞는 말이네. 그 사상이 없어더라면 친일파가 됐기 십상이겠지. 일본식 공부도 그렇고, 동경이고 대판이고 조선 젊은 놈들 기죽고 주눅들기 딱 좋으니까."
"근디, 유학생덜 중에 그 사상을 가진 학생덜이 많은가?"
"글세, 아직 초창기니까 그리 많지는 않지만 앞으로 몇 년 사이에 많이 늘어날 거네. 유학생들이 자꾸 많아지고 있으니까."
"그러겄구만. 그런디 말이시, 그 사상이 자꼬 퍼져나가는 것얼 왜놈덜이 그냥 보고만 있지넌 않을 것 겉은디?"
"그럴 거네. 재작년에 조선 노동공제회가 생기고, 작년에 서울청년회가 생긴 데다가 금년에 들어 1월에 무산자동지회가 결성되고, 또 2월에 동경에 있는 조선인 고학생동우회 간부들이 경성에 와서 조선일보에 동우회 선언을 발표하지 않았나. 사회주의 단체들의 활동이 그렇게 활발해지게 되니까 경무국에서 본격적으로 단속할 방침을 세우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하네."
"그렇겄네. 왜놈덜이 어떤 놈덜인디 즈그헌티 해로운 것얼 보고만 있겄어. 나럴 고문험서도 불온상 관계 여부럴 캐고 또 캐고 그랬는디."
유승현의 얼굴에 적의가 드러났다.
"서방님, 여그 약 드시라고......"
부엌데기 처녀가 쟁반에 약사발을 받쳐들고 토방 아래 서 있었다.
"그려, 마침 잘 왔다. 손님이 오셨응게 드실 것 내오고, 점심 채래라."
유승현이 처녀에게 일렀다.
"나 요것 잠 마실라네. 안 묵어도 되는디 어무님이 하도 성화시라......"
약사발을 들며 유승현이 어색스러운 듯 민망한 듯 웃음지었다.
"무슨 말인가. 몸이 건강해야 무슨 일이든 하지. 몸이 천하라는 어른들 말씀이 맞네. 천천히 어서 들게."
정도규는 유승현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유승현에게 위로의 뜻을 표하고 싶었고, 그에게는 언제나 죄책감 같은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만세운동 때 자신은 동경에서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위험을 피해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유승현이 약을 마시는 동안 정도규는 마당가의 화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가지 꽃들이 포근한 봄별 속에서 제각기 망울지고 벙글고 흐드러져 어우러지고 있었다. 여러 꽃들 중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것이 수국와 작약이었다. 짙고 옅은 색색의 보랏빛 작은 꽃들이 수없이 모아져 부글부글 거품 일 듯하며 둥글고 큰 하나의 꽃 덩어리를 이루고, 그 온갖 색 보랏빛 꽃 덩어리들이 가지가 휘도록 수없이 달린 수국은 그 아름답기가 그지없이 환상적이었다. 수국은 향기마저 짙어 멀리까지 그 냄새가 아련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작약의 그 붉고 커다란 꽃송이는 고우면서도 넉넉하고 화사하면서도 의연해 그 자태가 더없이 귀풍스러웠다. 한낱 꽃이면서도 꺾기가 주저되는 꽃이었다. 벌과 나비들이 꽃에서 꽃으로 분주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무신 생각얼 그리허고 있나."
유승현이 약사발을 놓고 접시에 놓인 대추를 하나 집어 들며 정도규를 바라보았다.
"아니, 꽃 구경을 하고 있었네."
정도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려, 사람 사는 시상은 변해 살육이 자행되야도 꽃이 사는 시상은 태평세월 호시절이제."
유승현이 가느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부엌데기 처녀가 식혜를 내왔다.
"자아, 목 축이소. 그런디 말이시, 저 책에서 잘 모를 대목이 더러 있든디."
유승현은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그런 나하고 차차 학습을 하세."
"그려, 그리 해주먼 고맙제."
"그런데 말이야, 자네가 만세운동을 벌이면서 어떤 조직을 짰었던가?"
"글씨, 그게 조직얼 짰다고 헐 수도 없고, 안 짰다고 헐 수도 없고 그런디......"
"그레 무슨 소린가?"
"그렁게...... 독립선언서럴 전해 받고, 구호럴 써붙이고, 봉화 올릴 사람덜얼 모으고 허는 망이 있었는디, 그것얼 조직이라고 헐 수 있을랑가 어쩔랑가 모르겄단 말이시."
"그야 당연히 조직이지. 그 조직을 새로 움직일 수 있겠나?"
"글씨...... 당헌 사람덜이 많에서 그간에 맘덜이 안 변하고 그대로 있는지 어쩌는지 잘 모르겄구만."
"그렇기도 하겠지. 다시는 딴맘 먹지 못하게 하려고 왜놈들이 혹독하게 했으니까."
정도규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려도 틀림없이 믿을 수 있는 사람언 이 있네."
"우리 사상을 접한 사람들인가?"
"다 그저 풍문으로 귀동냥허고 있는 것이제 그럴 새가 어디 있었간디?"
"책을 읽고 학습을 받으면 동조할 사람들인가?"
"십중팔구 그럴 거이네."
"십중팔구는 곤란하고, 십중십인 사람들만 골랐으면 하네."
"그렇제, 개무구녕으로 방죽 무너지는 법잉게."
"바로 그거네. 한 사람 잘못 골라 열이고 백이 상하게 되네."
"우선에 일당백 허는 사람 한나럴 소개혀야 되겄네."
"일당백 하는 사람?"
"이, 그런 사람이 있네. 중이시."
"주우웅?"
"공허라고, 아조 무서운 사람이시."
7. 드러난 정체
온갖 나무들의 어린 잎사귀들이 황초록 청초록 연초록으로 피어나고, 포근한 바람이 스칠 때마다 가볍게 하늘거리는 그 잎사귀들 위에서 햇살이 금빛 은빛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화창한 날씨 속에 단옷날이 찾아왔다. 긴긴 겨울 추위가 자취 없이 사라진 만주 들녘을 온갖 풀들이 진초록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많은 풀들 중에서도 쏙은 유난히 짙은 초록빛으로 싱그러웠다. 북쪽 지방의 큰 명절답게 단옷날을 맞이해서 용정도 평시와 다른 활기와 술렁임이 넘치고 있었다. 거리에는 옷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여자들이 부쩍 많이 나들이길을 나서고 있었고, 아이들은 깔깔거리고 뛰고 하면서 신바람이 나고 있었고, 남자들은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흥겨운 것인지 슬픈 것인지 모를 가락을 흥얼거리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단옷날이 추석보다 큰 명절이었고, 또 설에 못지않는 큰 명절로 쇠고 있었다. 남쪽에서 추석을 큰 명절로 치는 것과는 반대였다. 단오가 북쪽으로 갈수록 번성하고 남쪽으로 갈수록 덜하며, 추석이 남쪽으로 갈수록 번성하고 북쪽으로 갈수록 덜한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혹독한 추위에 오래도록 시달린 북쪽사람들은 단오를 맞이하면서 비로소 엄동을 무사하게 넘긴 기쁨과 함께 한 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름이 긴 남쪽에서는 단오면 벌써 더위가 고개를 드는 절기였고, 무더위를 무릅써 가며 논농사를 지어 알곡을 거둬들이는 추석맞이를 단오보다 더 기뻐하고 흥겨워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이 끼리끼리 동무 삼아 그네뛰기 구경을 가네 약쑥뜯기 들놀이를 가네 발길 가볍게 어깨춤이 이는데 수국이는 혼자 외떨어져 명동촌 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어디에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함께 어울릴 사람들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수국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집에 들어앉아 있고 싶었다. 그러나 양치성이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서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흥겨운 듯해 가며 집을 나섰던 것이다. 수국이는 가슴속에 칼을 품고 있었다. 오늘 밤에 양치성을 죽일 작정이었다. 벌써 반년 전부터 벼르고 별러왔던 일이었다. 양치성이가 바로 밀정이라는 것을 안 것은 전혀 뜻밖의 일 때문이었다. 어느 날 이웃집 아주머니가 계란 한 꾸러미를 가지고 찾아왔다. 자기 아들이 술을 마시고 사람을 패서 붙들려 들어갔으니 손을 좀 써달라고, 이웃사촌이니 도와주면 인심 얻고 얼마나 좋으냐고 사정이었다. 그때까지도 수국이는 그 말의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서운해하면서 경찰서일 보고 있는 것이야 이웃들이 다 알고 있는데 뭘 감추려고 하느냐고 했다. 그 순간 수국이의 머리와 가슴에서는 천둥이 치고 있었다. 양치성이가 밀정!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사꾼으로 가장한 밀정은 흔한 일이었다. 다만 이웃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는데 자신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 아주머니를 보냈는지 정신이 없었다. 자신이 지하실에 갇혔던 것과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과 자신이 풀려난 것과 양치성이가 뒤죽박죽이 되면서 너무 어지러워 방구석에 머리를 박았다. 수국이는 하룻낮 하룻밤을 몸을 가누지 못하고 꼬박 앓았다. 온몸이 펄펄 끓고 혀가 말리도록 목이 타면서도 물조차 넘길 수가 없었다. 물을 넘기고 나면 되받쳐 토악질이 일어났다. 수국이는 새벽녘에 꿈을 꾸었다.
"그놈이다, 바로 그놈이여. 그놈이 니 웬수고 이 에미 웬수다. 그놈언 느그 동상도 죽일 놈이여. 웬수럴 갚어라."
어머니는 나무에 묶여 총 맞아 죽은 그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말하고 있었다. 수국이는 어머니를 부르며 소스라쳐 일어났다. 어머니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매서운 겨울바람만 몰아치고 있었다.
"엄니이...... 알겄구만이라. 그놈이 우리 웬수란 것 인자 알었구만이라. 야아, 웬수럴 갚아야제라. 웬수럴 갚아야제라."
수국이는 꺾어세운 두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며 어머니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도 펄펄 끓었던 몸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다짐을 하고 나자 지난날 총쏘기를 배울 때처럼 온몸이 긴장되면서 새 기운이 솟는 것이었다. 수국이는 양치성이가 꾸민 모은 흉계를 거울 들여다보듯 환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자신이 잡혀 온 것부터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것까지 모든 일이 실꾸리에서 실이 풀리듯 자명하게 풀리는 것이었다. 형사 놈이 자신을 범한 것은 그놈이 한패거리인 양치성이를 속인 것임도 밝혀냈다. 그런 인종에게 동생을 찾아달라고 했으니 찾아줄 리가 없었다. 아니, 동생을 찾게 되면 어머니 말마따나 동생도 죽일 놈이었다. 수국이는 치를 떨었다. 꼭 죽이고 말겠다고 이를 앙다물었다. 그런데 문득 또 하나의 사실이 수국이의 머리를 스쳤다.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 김시국이었다. 그 사람도 양치성이가 죽인 것이 아닐까? 이 생각과 함께 수국이는 그때의 정황을 다시 되짚어보았다. 김시국은 자신을 찾아서 간도에서부터 먼 길을 온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다른 데로 갈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동생과 몇 사람이 김시국을 찾아 나섰다. 그는 엄연한 북로군정서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며칠 동안 찾아도 김시국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는 결국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다. 그런데 김시국이가 행방불명 되기 직전에 등짐장수 양치성이가 나타났던 것이다. 양치성이도 김시국처럼 자신을 찾아온 귀찮은 물건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양치성에게 자신의 거처를 알려준 필녀만 얄밉게 생각했었다. 김시국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하면서도 그 누구도 장사꾼 양치성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양치성은 밀정이었다. 그런 놈이라면 자기가 맘먹고 있는 일을 앞질러 방해하고 다니는 김시국을 감쪽같이 죽일 수 있는 놈이었다. 아니, 자신과 어머니에게 한 짓을 보면 그놈은 틀림없이 김시국을 죽인 것이었다. 그런데 수국이는 뒤늦은 안타까움으로 제 가슴을 마구 쳐댔다. 밀정이나 끄나풀들을 색출해 내는 귀신이었던 삼출이 아저씨가 어찌해서 양치성이가 밀정인 것을 밝혀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는지 모를 일이었다. 발가벗기기까지 해서 조사를 했는데도 양치성은 용케도 그 그물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만큼 양치성은 약삭빠르고 빈틈없는 놈이었다. 수국이는 양치성에게 원수를 갚고 도망칠 계획을 냉정하게 세워나갔다. 그놈을 죽이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그 짓까지 한 다음에 잠에 곯아떨어진 그놈을 죽여버리는 것쯤은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잡히지 않고 재빠르게 멀리 도망가는 것이 문제였다. 멀리 몸을 피하자면 먼저 돈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럴 만한 목돈이 없었다. 양치성이가 돈을 넉넉하게 주지도 않았지만, 돈을 달라고 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이 원활한 교통편이었다. 목돈을 가졌어도 마차들이 제대로 운행되지 않으면 멀리 피신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계절은 한겨울이었다. 소가 얼어 죽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말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그런 추위에 눈보라까지 쳐대면 으레껏 마차들은 끊기게 마련이었다. 어차피 목돈을 만들어가면서 남이 풀리기를 기다려야 했다. 수국이는 이렇게 마음을 정한 다음부터 양치성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씩 바꾸어나갔다. 정이 드는 척 부드럽게 웃고 정다운 말도 하고는 했다. 밤일은 더욱 끔찍하게 싫어졌지만 좋은 척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 변화를 양치성은 너무나 좋아했다. 수국이는 기다리고 있었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것저것 살림살이 장만할 돈을 달라고 했고, 옷 살 돈을 달라고 콧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양치성은 좋아죽겠다는 듯 웃음을 벙글거리며 돈 내주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어느 때는 밖에 나가 구해 오기도 했다. 수국이는 철저하게 눈속임을 하느라고 자기가 말한 살림살이들을 다 구해 들이고, 옷도 해 입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돈을 차근차근 모아나가고 있었다.
4월이 되면서 마차들이 끊기는 일 없이 다닐 수 있게끔 날이 풀렸다. 그러나 돈이 아직 마음먹은 대로 모아지지 않았다. 수국이는 단오 때까지 돈을 더 모으기로 작정했다. 단옷날에는 양치성이도 쉬면서 맘껏 술을 마실 것이었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의 눈을 피해 용정도 빠져나가기도 수월할 터였다. 명동촌으로 가는 길은 국자가로 가는 길처럼 달구지 두 대가 서로 편안하게 비켜 갈 만큼 넓었다. 길 왼쪽으로는 나지막한 산줄기가 바로 잇대어져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길폭보다 넓은 육도하가 흘러내리고 그 옆의 잡초 우거진 땅이 낮춤한 산줄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양쪽 산줄기에는 나무들이 울창했고, 길을 따라 곧바로 흐르기도 하고 굽이돌기도 하는 육도하의 물은 무척이나 맑았다. 육도하 옆으로는 수양버들이 줄지어 서서 그 치렁치렁한 가지들을 흘러가는 물에 적실 듯 휘늘어져 있었다. 육도하 건너에는 나들이 나온 여자들이 물가에 자리를 펴놓고 이야기를 하거나 잡초 우거진 데서 무엇인가를 뜯고 있었다. 그건 약쑥을 뜯는 것이었다. 길에는 용정에서 명동천으로 가는 사람들은 드물었고, 명동촌에서 용정으로 나가는 사람들은 심심찮았다. 그 말쑥한 차림새들이 명절 나들이를 가는 것이었다. 그 수양버들 늘어진 길을 버들방천이라고 했다. 수국이는 수양버들 아래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휘늘어진 수양버들나무들이 정답고, 버들방천이란 이름이 꼭 고향 어디의 이름만 같아 가끔 혼자 찾아오곤 하는 길이었다. 파릇파릇 돋아난 수양버들의 잎들이 갓난애의 손가락마냥 귀엽고 예뻤다. 치렁거리는 실가지들과 함께 그 어린잎들이 수국이의 얼굴을 스치기도 하고 목을 간지럽히기도 했다. 그러나 수국이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한 채 무표정하게 굳어진 얼굴로 걸음만 옮기고 있었다. 수국이는 줄곧 오늘 밤에 할 일에 정신이 붙들려 있었다.
갑자기 터진 웃음소리에 놀라 수국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물줄기 건너 저쪽에서 예닐곱의 여자들이 쑥을 뜯다 말고 허리 굽어지게 맘껏 웃어대고 있었다. 오랜만에 맘 놓고 나선 나들이라서 그 웃음소리들도 아무 거침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욕먹고 흉잡힐 그런 짓도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도 탓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먼저 귀 막고 눈 돌리는 것이 단옷날의 풍습이었다. 그래서 속곳이 보이거나 말거나 온몸으로 그네를 굴러대며 맘껏 그네도 탈 수 있는 것이었다. 수국이는 그 여자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필녀의 얼굴과 함께 여러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통화에서 쇠었던 단옷날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기를 써도 그네뛰기를 필녀한테 당할 수가 없었다. 필녀는 산머슴애라는 별명답게 바느질 같은 것은 서툴러도 몸이 날래고 기운 쓰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앞질렀다. 그네뛰기를 잘하는 여자는 일 년 중에 양기가 제일로 승한 단옷날의 양기를 받아 잔병치레를 하지 않고 아들을 낳게 된다는 것이었다. 처녀들은 그 말이 부끄러워 귓볼이 붉어지면서도 그네뛰기는 마다하지 않았다. 시집가기 전에 더 많이 양기를 모아둘 욕심인지도 몰랐다.
수국이는 그 생각이 쑥스러워 엷게 웃었다. 어머니는 그네 탈 나이도 아니었지만 유독 쑥뜯기에 열성이었다. 일년 중에서 양기가 제일 승한 날이 단옷날이고, 단옷날 중에서도 오시(午時)라고 했다. 그래서 단옷날 오시에 뜯는 쑥을 약쑥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점심 먹는 것도 잊고 치마로 몇 보자기씩 약쑥뜯기에 정신을 팔고는 했다. 어머니는 그 쑥으로 아무리 적게라도 꼭 떡을 했다. 그 떡을 먹어야 종기도 나지 않고 더위도 안 먹고 배탈도 안 나며 일년 액운을 물리친다는 것이었다. 그런 효험이야 어쨌든지 간에 그 약쑥떡은 색깔이 고운 데다가 쑥 향내가 어찌나 짙은지 차마 먹기 아까울 지경이었다.
수국이는 길가에 자라난 쑥잎을 하나 뜯었다. 냄새를 맡아보았다. 진한 쑥 내음과 함께 외로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건너편 여자들이 또 까르르 웃고 있었다. 수국이는 자신도 모르게 쑥잎을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뭉개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수국이는 선바위가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었다. 선바위는 이름 그대로 엄청나게 큰 바위가 한쪽을 기대고 서 있는 것처럼 산줄기 끝부분이 뭉툭하게 솟아오르면서 갑자기 뚝 끊겨 벼랑을 이루고 있었다. 그 봉우리로부터 깎아지른 벼랑 아래까지가 어마어마하게 큰 바윗덩어리였다. 선바위 그 안쪽이 조선사람들만 모여 사는 명동천이고 장재촌이었다. 그러니까 선바위는 명동촌으로 들어가는 대문이면서 명동촌과 장재촌을 지키는 수문장이기도 했다.
수국이는 한숨을 쉬며 물가로 걸어갔다. 명동촌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불타 버린 명동학교였다. 작년 가을에 명동촌 나들이를 한 일이 있었다. 경상도 아주머니가 발길 할 일이 있으니 함께 구경이나 가자는 것이었다. 그 아주머니의 길동무를 해줄 겸 구경도 하고 싶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난 명동학교는 불타서 흔적도 없었다. 경신년 대학살 때 일본군들이 불지른 것이었다. 학교는 불타고 없었지만 그러나 수국이는 명동촌이 마음에 들었다. 산줄기가 사방으로 크고 큰 동그라미를 그리며 둘러싸고 있는 명동촌과 장재촌은 그지없이 아늑했던 것이다. 산줄기가 울을 쳐주고 있는 그곳은 한눈에 보아도 사람 살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평지가 넓고 넓었고, 그 한가운데로 폭넓은 개울이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그 물줄기가 육도구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선바위 아래에서 합쳐져 육도하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 개울을 따라 양쪽으로 논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약간 비탈진 데서부터는 밭이 일구어져 있었다. 선바위와 이어진 산줄기는 낮으면서 부드러워 마치 여자 같은 느낌이었고, 맞은편 산줄기는 높직하면서 억세서 흡사 남자 같기도 했다. 두 산줄기가 서로 마주 보며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두 팔을 한껏 벌려 서로 마주 잡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장재촌과 명동촌은 부드러운 산줄기 쪽으로 자리 잡고 있으면서 서로 멀찍하게 떨어져 있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그 두 개의 산줄기에 아늑하게 에워싸여 가까운 논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오붓하게 살아가게 되어 있었다.
버들방천의 길은 선바위를 감도는 물줄기를 건너 장재촌과 명동촌 앞의 개울을 따라 뻗어가다가 남쪽의 억센 산줄기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명동촌 남쪽으로는 첩첩이 싸인 억센 산들이 멀리 바라다보였다. 그 앞줄기의 억센 봉우리들이 오봉이었고 그 뒤로 뻗어 나가고 있는 산줄기가 오랑캐령이었다. 그 너머에 두만강이 있다고 했다. 물가에 다리쉼을 하고 앉은 수국이는 흘러가는 물줄기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풀잎을 뜯어 띄워 보내고 있었다. 제법 빠른 물살을 타고 풀잎들은 잘도 떠내려갔다. 수국이는 지향 없는 슬픔과 그리움에 젖어 들며 풀잎을 자꾸 뜯어 띄웠다.
"보이소 예, 말 쫌 물읍시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느닷없는 경상도 말에 수국이는 후딱 고개를 돌렸다.
"혹시 용정 사시는교?"
머리에 큰 짐을 인 여자가 길을 건너오며 묻고 있었다.
"야아, 그런디요......"
수국이는 치마를 털며 일어섰다. 그런 수국이의 눈길은 여자를 스쳐 길 건너편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었다. 길 저쪽에는 짐을 이고 진 남녀들과 아이들이 열 서넛쯤 몰려서 있었다. 그 행색으로 보아 그들이 고향을 떠나 만주 땅으로 건너오는 것임을 수국이는 금세 알아보았다.
"용정이 여서 얼매나 먼기요?"
"얼매 안 남았구만요. 한 시오린게......"
수국이는 메마르고 기미 낀 여자의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보래, 내가 머라카드나. 다 왔다 안 카드나. 시오리 남았다는 기라."
재빨리 몸을 돌린 여자가 길 건너편에다 대고 소리쳤다. 그리고 몸을 다시 돌려 머리에 인 짐을 내리려고 했다. 수국이는 얼른 그 짐을 받쳐주었다.
"아이고 고맙심더. 저눔에 아이덜이 배고프다 다리 아프다 해싸아서 어데 그냥 가겄능교. 물배라도 채와서 쉬어 가야제."
여자는 때 전 머릿수건을 벗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수국이를 보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밥때가 지냈는디...... 아그덜헌티야 시오리도 먼 질인디요."
수국이는 그 웃음을 받으며 말했다. 아이들을 앞세우고 사람들이 우루루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이 문딩이 새끼덜아, 배고프다꼬 타령 그만 허고 뻐떡 물덜 묵으라. 물배 채와야 남은 시오리 갈 거 아이가."
이런 여자의 말보다 빠르게 네댓 명의 아이들이 다투어 물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이들은 엉덩이를 치켜들며 머리를 물 쪽으로 박았다. 수국이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래도 북간도 물이 서간도 물보다 좋아 끊이지 않고 그냥 마셔도 배탈이 안 나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용정 사신 지 오래됐능교?"
여자가 수국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들한테서 눈길을 거둔 수국이는 여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우째 이리 인물이 좋노. 인물이 고와 그런강, 시집 잘 가 호강하고 사는 갑네요."
머리에서 짐을 내려놓은 다른 여자가 부러운 얼굴로 수국이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수국이는 그저 웃음만 지었다. 그런데 그 웃음은 쓸쓸한 듯 스산했다.
"보이소, 용정 어데 우리가 발붙이고 살 만한 데 없겄능교?"
처음의 여자가 물었다. 그 여자의 눈에는 어떤 기대가 어려 있었다.
"저어, 나넌 잘 모르겄는디, 명동촌서 무신 말 못 들었는게라?"
수국이는 대답하기 난처해서 명동촌을 끌어다 댔다. 그들은 명동촌이나 장재촌에서 하룻밤을 묵지 않았을 리 없었고, 그렇다면 거기서 그런 이야기는 어지간히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듣기야 들었지만도 그 이바구야 다 심 파허는 소리뿐인 기라요. 용정 근동이야 사람이 다 찼으니께네 사오백 리 우로 올라가라카는데, 참 앞길이 막막허고 답답한 기라요."
다른 여자가 어깨를 늘어뜨리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진한 한숨 앞에서 수국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북간도에 와서 알았지만 북간도는 서간도보다 새로 옮겨오는 동포들이 자리 잡기가 훨씬 더 어렵게 되어 있었다. 북간도에는 벌써 사오십 년 전부터 함경도 사람들이 자리 잡고 살아온 탓으로 빈 농토라고는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서간도를 떠나오기 일이 년 전부터 그곳에서도 더 논을 풀 딸이 마땅찮아 새로 옮겨오는 동포들을 길림 쪽으로 올려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글먼 나 먼첨 갈랑게 쉬었다가덜 오시게라."
수국이는 무거운 마음으로 인사했다.
"야아, 살피 가이소. 고맙심더."
처음 여자가 풀섶에 주저앉으며 인사했다. 그 소리에 한숨이 묻어 있었다. 명절에도 저리 고단한 걸음을 해야 하다니...... 수국이는 그들의 가난한 입성과 볼품없는 짐들이 슬프기만 했다. 강물로 배를 채우느라고 엉덩이를 치켜든 아이들의 모습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수국이는 쫓기기라도 하듯 잰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수국이가 집에 들어섰을 때는 해가 서쪽으로 기웃해져 있었다. 아침에 옷을 차려입고 나간 양치성은 집에 돌아와 있지 않았다. ‘그려, 그려, 술얼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라.’ 수국이는 또 이렇게 속으로 뇌며 밤에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가슴이 두근두근해졌다. 수국이는 나무에 묶인 채 숨이 끊어져 있었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사리물었다.
수국이는 다시 돈주머니를 확인했다. 간추린 옷 보따리도 살펴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부엌으로 나갔다. 그때서야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때를 거르지 말고 기운을 모아야 했다. 수국이는 부엌에 선 채로 살강에 놓인 찬밥을 떴다. 그러나 배는 고프면서도 밥맛은 전혀 없었다. 밥에다 물을 말았다. 억지로 몇 숟가락 넘기다가 그만두었다. 저녁밥이나 제대로 먹기로 했다. 수국이는 부엌에서 나와 해를 가늠해 보았다. 저녁밥을 짓기에 아직 일렀다. 지루하고 더디게 가는 하루였다. 양치성은 술이 만취해 밤늦게 돌아왔다. 그는 일본노래를 흥얼거리고 들어오다가 수국이를 보자 뚝 그쳤다.
"저녁 잡수셔야제라?"
수국이는 그가 일본노래 흥얼거린 것을 전혀 못 들은 척하며 생긋 웃었다.
"나 저녁 묵었구만. 자아, 맛난 사탕!"
양치성은 사탕 봉지를 기세 좋게 꺼냈다.
"음마, 멀라고 요런 것얼."
수국이는 눈을 살짝 흘리며 사탕 봉지를 받아들었다. 그 눈언저리에 교태가 사르르 물결짓고 있었다. 양치성의 취한 눈길은 그 교태에 휘말려 들고 있었다.
"아이고, 요, 요 이쁜 것. 그네 많이 탔드랑가?"
양치성은 샅에서 불길이 화끈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수국이를 얼싸안았다.
"야아, 이 탔구만이라."
"그려, 그려, 아조 잘혔어. 단옷날 양기받어 얼렁 내 아덜 한나 낳야제."
양치성은 치마 위로 수국이의 불두덩 아래 깊은 곳을 더듬고 있었다.
"아이...... 불이나 꺼야제......"
수국이는 콧소리를 내며 양치성을 살짝 밀쳤다.
"아이고메 이쁜 거, 요거 이쁜 거."
양치성은 더욱 억세게 수국이를 끌어안으며 아랫도리를 비비댔다. 그는 수국이가 바라는 대로 말려들고 있었다. 발가벗은 양치성은 술 냄새 진동하는 숨을 헐떡거리며 제정신이 아니었다. 수국이는 그런 양치성의 방아찧기를 받아내며 이를 앙다물고 있었다. 귓가에서 꽹꽈리를 쳐대도 모르게 잠에 곯아떨어지게 하려면 술이 취한 것만으로도 불안했다. 일을 끝낸 양치성은 찬물 한 사발을 벌컥거리고는 곧 코를 골아대기 시작했다. 수국이는 가슴에 걸쳐진 양치성의 팔을 뱀처럼 느끼며 그가 더 깊이깊이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난 것이었다. 마지막 남은 한 가지 일만 해내면 되는 것이었다.
엄니이......
수국이는 기도하듯 간절하게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수국이는 그 일이 잘되게 해달라고 어머니에게 빌고 있었다. 가슴이 뛰는 소리는 차츰차츰 더 크게 울리고 있었다. 양치성이가 무슨 잠꼬대를 하며 돌아누웠다. 가슴에 걸쳐졌던 그의 팔이 옮겨지자 수국이는 살 것 같았다. 양치성은 코를 골아대다가, 이쪽저쪽으로 돌아눕다가, 이빨을 갈아대다가, 네활개를 펴고 누웠다가, 입을 불어대다가 하며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수국이는 오래전부터 양치서의 그런 꼴을 지켜보고 앉아서 흘러가는 시간을 어림하고 있었다. 일을 끝내고 먼동이 틀 무렵에 떠나는 첫 마차를 타야 했다. 새벽녘이 가까웠다는 계산을 한 수국이는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옷을 갈아입고 돈주머니를 찼다. 겉옷을 입고 옷 보따리를 꺼냈다. 그리고 숨겨두었던 칼을 찾아들었다. 수국이는 살금살금 양치성에게로 다가갔다. 양치성은 바르게 누워 코를 골아대고 있었다. 팔과 다리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이불을 걷어차고 잤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었다. 그러나 이불을 걷어낼 수는 없었다. 그 순간 잠을 깰 것만 같았던 것이다. 수국이는 가슴을 겨냥하며 칼을 든 두 팔을 치켜들었다.
엄니이!
수국이는 어머니를 외쳐 부르며 칼을 내리찍었다. 양치성의 몸이 꿈틀하며 무슨 소리를 냈다. 수국이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옷 보따리를 집어 들었다. 방을 나서는데 뒤에서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양치성이가 거머잡을 것만 같아 수국이는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수국이는 희붐한 새벽어둠 속을 뛰어 고샅을 벗어났다. 길거리에는 손수레나 들것으로 물건을 옮기는 장사꾼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 수국이는 마차역까지 줄기차게 뛰었다. 수국이는 서간도 쪽으로 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먼동이 터오는 속에 마차는 용문교를 건너 달리기 시작했다. 수국이는 옷 보따리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한편, 방대근은 두 번째로 통화현에 와 있었다. 그는 이번에는 누나만을 찾으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참말로 하늘도 무심허시제. 요 일얼 어찌야 쓰까 잉."
필녀는 이렇게 말하며 목이 메었다. 방대근은 먼 산만 바라보았다. 필녀의 발은 첫 번째와는 정반대였다.
"아니여, 아무 일도 없을 것이여. 수국이가 얼매나 눈치 빨르고 똑똑타고. 필시 여그로 찾아올 것잉게 기둘려."
그리 장담했던 말은 간 데가 없고 필녀는 하늘도 무심하다며 눈물을 글썽였던 것이다. 그 말은 어머니와 누나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건 거의 틀림없는 말이었다. 자신이 통화를 다녀간 작년 10월부터 치더라도 아홉 달이었고, 경신년 대학살 때부터 계산하면 1년 반의 세월이 지난 것이었다. 그동안 걸어서 왔더라도 통화까지는 열 번도 더 올 수 있는 세월이었던 것이다. 방대근은 어머니와 누나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단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려, 어쩔 것잉가. 가심에 한이 맺혀도 우선에 참고, 왜놈덜헌티 더 씨게 웬수갚은 허는 것으로 한풀이럴 삼아야제."
지삼출의 침통한 말이었다. 방대근은 그다음 문제를 생각하기로 했다.
"으음, 의열단이라고?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
송수익은 중국 옷에 무릎을 꿇고 앉은 방대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 지금 형편에서 독립투쟁얼 더 열렬허니 전개허자면 그리허는 것이 첩경이라고 사료되는구만요."
단정한 앉음새만큼 방대근의 대답은 명료했다.
"그래? 지금 형편이라면...... 어떤 형편을 말하는 것인가?"
송수익은 그 짤막한 대답에서 방대근의 정신적 성장을 직감했다. 또한 그 말뜻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판단력을 확인해 보려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예, 서간도넌 어쩐지 모르겄습니다만 북간도넌 동포덜 인심이 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구만요. 독립군에 대한 믿음이 현저허니 약해지고, 협조가 잘 이뤄지지럴 않는구만요. 그 원인이 바로 경신참변에 있다고 생각되는구만요. 독립군헌티 물심양면으로 협조럴 혔는디 결과넌 동포덜이 수도 없이 왜놈덜 손에 학살당헌 것잉게료. 그 일로 동포덜언 두 가지 생각얼 품고 있구만요. 한 가지넌 왜놈덜 세력 앞에 해방이 에롭다는 낙담이고, 또 한 가지넌 독립군덜이 끝꺼정 동포덜얼 보호허지 안했다는 서운함이구만요. 그러니 그전맨치로 협조다 될 리 만무 아니겄는게라. 헌디 독립군덜언 무장이 부실해질 대로 다 부실해져 있으니 새로 무장얼 갖추자면 얼매나 오래 걸리겄능가요. 그려서 생각헌 것이 의열단 입단이구만요."
송수익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방대근이의 판단력은 정확했고, 분석력 또한 명확했다. 그리고 언변도 더 능숙해져 있었다. 송수익은 그런 방대근이가 대견하고도 장해 보였다. 그는 의열단원이 되고자 하는 방대근이한테서 의병투쟁에 나서던 때의 자신을 얼핏 느끼고 있었다.
"그래, 자네의 판단이 정곡을 찌르고 있네. 여기 서간도가 북간도보다 다소 덜할지는 모르나 여기 동포들의 동향도 대동소이하네. 경신년 참변 때 이것 서간도에서도 학살이 자행됐으니까 그런 생지옥을 겪은 동포들이 그리 생각하게 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일세. 그런데 독립군들이 이동을 단행한 것은 무고한 동포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더욱 효과적인 전쟁을 수행하려는 작전계획으로, 이는 어느 나라 어느 군대에서나 취하는 군사행동이지. 그 작전에 왜병들은 당당한 작전으로 맞서지 않고 한다는 것이 양민들을 대량학살한 것이네. 그건 세계 어느 나라 군대에서도 볼 수 없는 비열함이고 잔혹함일세.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이 있네. 그게 무언고 하니, 동포들이 품고 있는 그런 생각이 바로 왜놈들이 대량학살을 자행한 목적이고 노렸던 바란 사실이네. 우리 동포들을 낙담하게 만들고, 공포에 떨게 하고, 또한 독립군을 불신하게 하고, 협조를 못 하게 만드는 술수, 그게 바로 왜놈들이 조작해 내는 이간책동술이네. 그러니까 지금 독립군들이 해야 할 일은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동포들에게 무작정 협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왜놈들의 그런 이간책동을 바르게 알리고 이해시켜 가며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일세. 동포들이 곧 조선이고, 동포들이 없고서는 그 어떤 독립투쟁 단체들도 존속할 수 없으니까."
방대근은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송수익 선생님의 끝부분 말이 마음을 무겁게 눌러왔다.
"예, 선생님 말씀 잘 알아들었구만요. 근디 저어......"
방대근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머뭇했다. 송수익 선생님은 언제나 친근하면서도 어려운 분이었다.
"그래, 무슨 말인데 그러나?"
송수익이 인자하게 웃음 지었다.
"저어...... 선생님 말씀얼 어기자는 것언 아닌디...... 지넌 그냥 작심헌대로 의열단에서 일얼 혀봤으면 허는디요."
"아닐세, 아닐세. 내 말은 자네더러 의열단에 가입하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는 게 아니라 우리 독립군들 전부가 당면한 문제를 얘기한 것뿐이네."
지나칠 만큼 명민하게 말을 받아들이는 방대근을 안심시키려고 송수익은 손까지 저으며 말했다.
"예에, 지넌......"
방대근의 얼굴에 안심의 빛이 드러났다.
"헌데, 의열단하고는 어떻게 연이 닿게 된 것인가?"
"예에, 혹시 기억허실랑가 모르겄는디, 신흥무관학교 졸업식날 선생님께 인사디린 지 동무 넷 중에 윤주협이라고 있구만요."
"그래, 기억하지. 범눈에 고향이...... 가만있자, 경기도라 하지 않았던가?"
"예에, 바로 그 사람이구만요."
방대근은 반색을 했다. 그러나 송수익 선생님의 그 빈틈없는 기억력에 그만 소스라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의열단이던가?"
"아니구만요. 인자 입단얼 헐라고 험서 지보고 항께 허자고 권허는구마요."
"으음, 그럴 만도 하군. 의열단은 창단할 때부터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으니까." 송수익은 한동안 고개를 끄덕이다가, "의열단의 투쟁방법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그는 방대근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예, 대규모의 독립군 투쟁이 왜군덜얼 만주로 끌어들였고, 그려서 동포덜얼 그리 상허게 헌 것 아니겄능가요. 앞으로도 또 그럴 수가 있응게 인자 투쟁방법을 다양허니 바꿔야 헌다고 생각이 드는만요."
방대근은 긴장하며 대답했다. 송수익 선생님의 질문은 그냥 질문이 아니라 시험을 치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래, 일리가 있는 말이로군. 한데, 혹시 의열단에 가입하려는 마음이 어머님과 누나의 흉사로 더 강해진 건 아닌가?"
송수익은 방대근을 주시했다. 방대근은 송수익 선생님이 묻는 말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혹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만큼 의열단의 투쟁은 위험하고 맹렬하기로 이미 소문나 있었던 것이다.
"그 일로 왜놈덜헌티 원한이 더 깊어지기넌 혔어도 그 일로 맘얼 그리 정헌 것은 아니구만요."
방대근은 보태고 뺀 것 없이 사실 그대로 말했다.
"그렇다면 됐네. 의열단에서 활동하도록 하게. 자네 말대로 투쟁을 다양하게 전개할 필요가 있네."
송수익은 마침내 허락이 아닌 동의를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자신에게 그런 의논을 해준 방대근에게 송수익은 고마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방대근이 자신의 곁을 떠나게 되는 서운함이 더 컸다. 방대근한테서는 부하라고 하기보다는 자식 같은 정을 더 강하게 느껴왔던 것이다. 그러나 방대근은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더 적극적인 대의를 선택해 나서고 있었다. 그 길로 가는 것을 북돋워 주어야 할망정 만류해서는 안도는 일이었다. 의열단......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열혈 청년들이 스스로의 몸을 폭탄 삼아 적진으로 뛰어들고 있는 새로운 독립투쟁 단체였다. 1919년 11월에 결성된 이후 3년 동안 조선에서 벌써 여러 차례의 폭탄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송수익은 독립투쟁의 중심세대가 바뀌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의열단에 들어가는 것얼 선상님이 참말로 허락허셨단 말이여?"
지삼출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고 참, 똑겉은 말얼 분썩이나 묻고 그러시오."
방대근이 웃으며 눈을 흘겼다.
"참말로, 니 맘얼 알다가도 몰르겄다 이. 북간도야 사정이 잠 에롭다고 허드라도 여그 서간도서넌 다덜 새로 자리 잡고 그전보담 더 압록강 많이 넘어댕김서 잘덜 싸우고 있응게 니도 여그서 총얼 들먼 될 일이제 무신 초 친 맛으로 의열단얼 찾어간다는 것이냐?"
지삼출은 정색을 하고 따지고 들었다.
"아재, 그것이야 선생님허고 다 따진 이얘긴게 더 말헐 것 없소."
방대근은 송수익을 내세워 매정하다 싶게 지삼출의 말을 막았다.
"허 참, 니가 인자 대가리 여물었다고 이 아재도 눈 밑으로 뵈는갑다잉."
지삼출은 헛웃음을 치고는, "대근아, 니 참 무정허다 와. 우리넌 니 보내고 못 살겄는디 니넌 우리 없어도 살아진다 그 말이다냐?" 그는 이제 인정의 끈으로 대근이를 묶으려 하고 있었다.
"아재, 공연시 그런다고 떠날 기차가 안 떠나는 것 봤소?"
"그려, 대근이가 사내넌 사내다."
필녀가 눈물을 찍어내며 말했다.
"글먼 어디로 가는 것이여?"
지삼출의 맥 풀린 목소리였다.
"북경이구만이라."
아무도 더는 말이 없었다. 수국이는 통화를 도착해서도 필녀를 만날 때까지 사흘이 더 걸렸다. 서로군정서가 이동했다가 되돌아오면서 그전의 조직거점들을 변동시켰던 것이다. 그 계획에 따라 송수익 휘하의 거처도 다른 곳으로 바뀐 탓이었다.
"아니, 요것이 누구여, 요것이 누구여......"
갑자기 수국이를 대한 필녀는 잠시 어리둥절해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여, 나, 수국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리고 있는 수국이의 얼굴도 목소리도 울고 있었다.
"아이고메 이 가시내야, 니가 참말로 살아왔구나, 니가 살아왔구나!"
필녀는 수국이를 와락 끌어안으며 통곡하듯이 울음을 터뜨렸다. 수국이도 필녀를 마주 끌어안으며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근디 어찌서 니 혼자다냐?......"
울음을 추스르며 필녀가 수국이의 눈치를 살폈다.
"소문 들었겄제, 경신년 난리판굿. 엄니넌 그적에 화럴 당해......"
"어쩌끄나, 기엉코 그리 되았구나!"
필녀는 발로 땅을 굴렀다. 그리고 수국이와 함께 새로운 눈물을 흘렸다.
"아니, 니 그간에 시집갔네!"
뒤늦게 수구이의 낭자머리를 알아본 필녀가 반짝 반색을 했다.
"아니여, 이얘기가 질고 진게 그 이얘기넌 이다가 혀."
수국이는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지며 고개를 저었다. 그 차가운 기색에 필녀는 문득 긴장하며 더 말을 묻지 않기로 했다. 그전부터 수국이가 그런 기색으로 입을 다물면 제물에 기분이 풀릴 때까지는 입을 열지 않는 성깔이었던 것이다.
"어런덜헌티 인사디래야제."
수국이가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고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잉, 그래야제. 그려, 인사디래야제."
필녀는 건성으로 대꾸하고 있었다. 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근이의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분 내키는 대로 하자면 그 이야기를 해버리고 싶었지만 막상 수국이가 너무 심란스러워 보여 말을 꺼내기가 주저되기도 했다. 그 이야기도 한두 마디로 될 일이 아닌 데다가, 수국이를 상심시킬 것이 짐스러웠던 것이다. 필녀는 그 이야기를 딴 사람에게 넘기기로 마음 정하고 말았다.
"아재, 혹시 우리 대근이 여그 안 찾아왔등게라?"
그런데, 지삼출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수국이가 꺼낸 말이었다.
"아니, 그 이얘기 안직 안해 줬능가?"
지삼출이 얼른 필녀를 쳐다보았다.
"머시냐, 딴 이얘기덜 허니라고 그럴 새가 없어서......"
필녀는 당황해서 말을 얼버무렸다.
"아이고, 자네가 한걸음 늦어부렀네그랴. 북경으로 떠난 지가 한 열흘 되았는디."
"아이고메 엄미, 우리 대근이가 살았드란 말이다요?"
수국이의 말은 말이라기보다 차라리 울음 섞인 환성이었다.
"아니, 글먼 죽은 지 알었드랑가? 자네 엄니허고 자네 생사럴 알아낼라고 여그럴 두 번썩이나 온 사람인디."
"고것이 어찌 된 일이다요? 잠 세세허니 이얘기해 줏시오."
두 손으로 가슴을 누르고 있는 수국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 고것이 어찌 된 일인고 허니......"
지삼출이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느릿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다.
"아이고메 아재, 그래 갖고넌 밥 타고 솥 타고 애간장꺼정 다 타불겄소. 나가 헐랑게 아재넌 담배나 태우씨요."
필녀가 소매 끝을 걷어 올리며 나섰다. 수국이가 제 동생이 북경으로 떠나버린 것에 상심할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 살아 있다는 것에만 감복하자 필녀는 안심을 하고 그동안의 이야기를 쪼르륵 해나갔다. 수국이가 겪은 이야기들은 저녁을 먹은 다음 모두가 모여앉아 들었다. 이야기 중간중간에 한숨소리들이 섞였고, 여자들은 눈물을 훔쳤다.
"나가 빙신이시. 조사럴 허고도 양치성이 그놈이 그런 줄얼 몰랐시니."
지삼출이 제 가슴을 쳤다.
"그놈이 숨 똑 끊어진 것얼 봤냐?"
필녀가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음마, 그런 정신 어디 있었간디?"
"애썼네. 대근이한테 곧 연락 취험세."
송수익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8. 연해주의 빨치산
블라디보스톡은 일본군에 완전히 장악당해 있었다. 일본군이 출병과 동시에 막대한 병력으로 장악한 또 하나의 도시가 나홋카였다. 그 두 도시의 공통점은 항구였던 것이다. 특히 블라디보스톡에서 동쪽으로 6백 리쯤 떨어져 있는 나훗카 항구는 이중삼중으로 경비가 삼엄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군인들이나 군수 물자의 수송이 대부분 그 항구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나홋카 항구는 블라디보스톡 항구보다 일본에서 더 가까울 뿐만 아니라 한 겨울에도 얼어붙지 않는 부동항이었던 것이다. 나홋카라는 항구 이름부터가 희한했다. 러시아말인 나홋카란 <횡재로다!> 하는 뜻이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오던 러시아군이 마침내 그 항구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항구가 너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부동항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령관이 부르짖은 말이 <횡재로다!>였다. 나홋카항은 그런 부르짖음이 터져나올 만큼 그 생김이 절묘하고 신비스러웠다. 왜냐하면 두 팔로 동그라미를 그리되 두 손끝을 맞대지 않고 손바닥이 서로 약간의 간격을 띄워 엇갈리고 있는 것 같은 형상으로 두 개의 산줄기가 항구를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산들의 모양이 또한 기이했다. 흙이 많아 그저 두루뭉실한 산이 아니고 흙을 거의 털어 내고 날이 서고 각이 선 산들이 제각각 모양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 산줄기에 에워싸여 있는 맑고 푸른 물은 바다라기보다는 커다란 호수 같았다. 산줄기가 바람을 막아 물은 언제나 잔잔했다. 그 잔잔한 물에 온갖 모양의 산들이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그 경치는 감탄할 만큼 절경이었다. 더구나 두 손바닥이 약간 간격을 벌리고 있는 것 같은 그곳으로 배가 드나드는 먼 모습까지 합해지면 그 경치는 절경을 넘어 신묘할 뿐이었다.
그런데 경치만 그리 빼어난 것이 아니었다. 항구로서의 실용성 또한 뛰어났다. 그 항구는 산줄기에 아늑하게 감싸여 있어서 어떠한 폭풍에도 풍랑이 일지 않았고,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어는 일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심이 깊어 큰배들도 마음껏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러니 <횡재로다!>하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러시아 땅을 탐내고 있는 일본군들이 그 천연의 요새인 나홋카항을 철통같이 경비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일본군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요새일수록 일본군과 싸우는 빨치산들도 그곳이 중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곳에는 비밀정보가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빨치산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정보 수집처는 두 곳이었다. 그건 나홋카와 블라디보스톡이었다. 블라디보스톡도 한겨울 서너 달만 얼뿐이지 부두에서 자로 철도가 연결되고 있는 중요한 항구였다. 시베리아 넓은 지역으로 군인과 군수품들을 수송하자면 그 철도가 가장 신속하고 편리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두 개의 항구에 정보원이 침투하게 되면 일본군의 이동상황과 군수품 반입현황을 환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빨치산에서는 그 두 곳에 정보원들을 심어놓고 있었다. 그 정보원들은 부두 노동자로 위장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경비를 철통같이 하면서도 부두의 노동자들을 군인이나 일본 노동자들로 뒤바꾸지 않았다. 그것이 일본군들이 내보인 허점이었다. 그전부터 일해 오던 부두 노동자들은 거의가 조선사람과 러시아사람이었다. 그리고 빨치산조직에서는 그 정보원들과 연결되는 선요원들을 언제나 강화하고 있었다. 선요원들의 선발조건은 까다로웠다. 젊어야 하고, 교육을 받았어야 하고, 몸이 튼튼해야 했다.
이광민이 윤철훈을 만난 것은 수청 "빨치산스크"와 블라디보스톡 "해삼위" 사이에 뻗어 있는 시호테알린산맥의 선요원 훈련소에서였다. 선요원 조직은 1개조 2명이었다. 그런데 이광민과 윤철훈은 같은 조였다. 현지 지리를 잘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안배한 조 편성이었다.
"잘 받들겠습니다."
"아니, 무슨 말씀입니까."
이광민은 첫 대면에서부터 윤철훈을 조장으로 대접했다. 물론 조장이라는 임명제도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윤철훈은 투쟁경력으로나 나이로나 자신이 존대해야 할 사람이었던 것이다. 윤철훈은 일본군이 시베리아에 출병한 1918년 7월부터 벌써 3년 동안이나 선요원으로 활동해 오고 있는 경력자였다. 그런데 이광민이가 윤철훈을 그렇게 대하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광민은 몹시 불안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건 홍범도부대가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이 되면서 생긴 증상이었다.
자유시 참변으로 적군에 소속된 독립군들은 10월에 들어서면서 수청 일대의 빨치산투쟁에 투입되었다. 공동의 적인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적군과 연합하고 있는 독립군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건 홍범도 장군의 은퇴였다. 홍범도 장군은 이미 54세로 빨치산투쟁을 지휘하기는 무리인 나이였다. 그런 줄을 다 알면서도 그러나 부대원들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그런 데다 적군과 혼성부대가 편성되면서 부대원들 일부가 분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실질적인 홍범도부대의 해체나 다름없었다.
이광민은 그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홍범도 장군 없이 전투가 벌어지면 꼭 질 것만 같은가 하면, 어딘가 외톨이로 동떨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만 어디 다른 데로 떠나야 될 것만 같기도 했다. 그 불안감은 떨치려 하고 이기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그런 심정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 불안감은 선요원으로 뽑히면서 더 심해졌다. 그야말로 대원들과 떨어져 외톨이가 되다시피 한 것이었다. 그런데다가 완전히 달라진 임무에 대한 두려움까지 겹쳐지고 있었다. 이광민은 혼자 추스를 수 없는 그런 감정에 시달리다가 윤철훈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광민은 윤철훈을 대하자마자 그 강인한 인상에 이끌렸다. 그의 인상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경력과 잘 어울렸다. 이광민은 그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었고, 그 사람은 자신을 붙들어줄 것 같았던 것이다.
"우리 임무는 정보수집이나 지령 전달만이 아니오. 차차 알게 되겠지만 그때그때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하오. 그러자면 우리가 활동하는 지역의 지리를 빨리 익히는 것이 급선무요. 우리의 활동지역은 대개 여기 우스리스크 "소학령"에서 해삼위를 거쳐 나홋카, 그리고 나홋카에서 수청을 거쳐 우스리스크까지로 보면 될 것이오, 그러나 어떤 때는 여기 두만강변의 연추령 "포시에트"까지 가거나, 중국국경을 넘어 만주에 들어갈 때도 있소. 우리의 임무가 중요한 만큼 위험하기도 하오. 허나 전투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왜놈들을 피해 다니는 거니까. 그러자면 지리를 잘 익혀야 되지 않겠소?"
윤철훈은 지도를 펴놓고 지명을 짚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리를 익히는 첫 번째 일을 합시다. 지금 우리가 있느 곳이 수청이요. 여기서부터 해삼위까지는 4백80리요. 큰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어디쯤에 우리 동포들의 동네가 있고, 어디가 러시아사람들의 동네인지, 또 어디에 샛길들이 나 있는지 익히도록 하시오. 그리고 가다보면 일본군들의 막사가 있는데, 그게 어느 지점에 몇 개씩이나 있는 가도 기억하시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사흘 후에 해삼위에서 나랑 만납시다."
"예에? 그, 그럼 저 혼자 간단 말입니까?"
이광민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허허허......... 뭘 그리 놀라고 그러시오."
윤철훈은 여유 만만하게 웃으며 담배를 권하고는, "아무 걱정 마시오. 대낮에만 큰길을 걷는 데다가 농부 차림을 할 테니까 전혀 위험하지가 않소. 일본군들은 러시아 옷을 입은 조선사람이나, 조선 장사꾼들은 의심해도 농부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소. 농부들은 무식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무시하는 거요. 그러나 만약에 검문을 당하는 경우를 생각해서 대비할 게 있소. 이 동지는 수청 원봉마을에 사는 김상길인데 해삼위 쓰보르스카야 큰형님 댁에 아버지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것이오. 큰 형님 이름은 김상호요."
"아니, 만약 그 거짓말이 들통나게 되면 어찌 됩니까?"
"어허허허.......그게 거짓말 같소?"
윤철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정말이란 말입니까?"
"그렇소. 그 사람들은 지금 엄연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오."
"아, 예에......"
이광민은 그 치밀성에 저으기 놀라며, "그럼 윤 동지는 신한촌의 김상호 씨 집에서 만나게 되는 겁니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시 눈치가 빨라서 좋소. 그 집에서 사흘 후에 만납시다."
이광민은 다음날 새벽에 농부로 치장했다. 허름한 한복만 준비된 게 아니었다. 지게에는 짚신 두 켤레까지 매달려 있었다.
"이건 쌀 닷 되와 콩 두 되요. 제사에 가져가는 제물이오. 그놈들 눈을 쳐다보지 말고 그냥 겁먹은 시늉을 하며 굽실거리시오. 사흘 후 해거름에나 도착하게 될 것이오. 그날 밤까지 안 오면 못 오게 된 것으로 알고 나는 해삼위를 뜨겠소. 만약 다음날 그 집에 도착하면 그 집에서는 이 동지를 아는 척하지 않을 것이오."
찬바람 도는 윤철훈의 말이었다.
"무슨 할 말이 있소?"
"아닙니다. 없습니다."
"됐소. 이건 사흘치 노자요. 최소의 숙식비니까 알아서 쓰시오. 대략 백 리 간격으로 있는 마차역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오. 어두워지면 절대로 걷지 마시오. 검문이 심하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사격을 당할 수 있으니까. 최종적으로 물을 말 있으면 물으시오."
"없습니다."
이광민은 어금니를 맞물었다.
"됐소. 사흘 후에 만납시다."
윤철훈이 손을 내밀었다. 이광민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손아귀에 가해져 오는 힘에 놀라며 이광민은 뒤늦게 힘을 썼다. 이광민은 손아귀에 느껴져 오는 그 거센 힘 속에서 윤철훈의 뜨거운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광민은 지게를 짊어지고 길을 잡았다. 길은 서쪽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그 길 4백 80리를 사흘 만에 걸어가야 했다.
‘다음날 그 집에 도착하면 그 집에서는 이 동지를 아는 척하지 않을 것이오.’
윤철훈의 말이 쟁쟁히 울리고 있었다. 아는 척하지 않는다. 그 표면적 뜻은 조직원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면의 뜻은 그게 아니었다. 그건 바로 제거를 의미했다. 그동안 왜놈들의 앞잡이로 변질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니, 변질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이었다. 그건 잔인함이 아니었다. 이미 서약한 조직의 규율이었다. 그만큼 선요원의 임무가 막중한 탓이었다.
4백 80리를 사흘 동안에 가자면 하루에 1백 60리씩 걸어야 했다. 그것도 빈 몸이 아니라 지게에 곡식 일곱 되를 지고서. 그건 보통 장정의 기운으로 벅찬 일이었다. 그러나 이광민은 그것만은 자신이 있었다. 몇 년 동안에 걷는 단련은 충분히 되어 있었다. 청산리 전투를 끝내고 밀산으로 이동하면서 겪었던 고생은 평생 잊을 수 없도록 뼛속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모두 하복 차림인데 11월의 찬바람은 몰아치고, 하루에 한 끼를 먹기가 어렵고, 일본군들은 추격해 오고, 하루에 2백 리씩의 강행군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혹독한 행군을 무사히 끝내고 나서부터 걷는 데는 자신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이 첫 번째 일이 길을 익히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광민은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선요원으로서의 종합적인 시험이었다. 이 한가지 일로 담력을 보려는 것이었고, 기동력을 보려는 것이었고, 치밀성을 보려는 것이었다. 이광민의 마음속에는 그동안에 느껴왔던 불안감과 두려움 대신 오기와 독기가 채워지고 있었다. 어차피 넘지 않으면 안 될 산이었다. 차라리 혼자 이렇게 내동댕이쳐지게 되니까 오히려 불안감과 두려움이 찾아드는 것 같기도 했다.
이광민은 줄기차게 걷고 있었다. 그런데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윤철훈이가 뒤따라오고 있는 것인가?......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었다. 누구에겐가 의심 살 행동을 해서는 안 되었고, 만약 윤철훈이가 뒤따라오고 있다고 해도 눈에 띄게 할 리가 없었다. 그는 보호자이면서 감시자인지도 몰랐다.
이광민은 점심 요기하는 시간도 아꼈다. 러시아 흑빵과 소금에 절인 생선 두 쪽을 사서 걸으면서 먹었다. 그러지 않고는 해가 짧아져서 하루 양을 다 못 채울지도 몰랐던 것이다. 시호테알린산맥은 하루종일 따라오고 있었다. 거의 왼쪽에서 따라오다가 어느 때는 앞을 가로막아 휘도는 길을 따라 고개를 넘기도 했다. 이광민은 실제로 걸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마침내 느끼고 있었다. 시호테알린산맥이 그저 막연하게 길다고만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비로소 얼마나 긴지를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산봉우리들의 다양한 생김새도 눈에 익히게 되었다. 특히 마을과 산봉우리와 연결시켜 기억에 담는 것은 걷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광민은 어둑어둑해져서 걷기를 멈추었다. 하루종일 걸으면서 검문 같은 것은 당하지 않았다. 일본군들이 타고 지나가는 자동차를 세 대 보았을 뿐이었다. 마차역에 일본군들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이광민은 아무 통제를 받지 않았다. 일본군들은 마차에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에게만 눈길이 쏠려 있었다.
이광민은 반은 졸면서 저녁을 먹었다. 하루종일 쉬지 않고 걸은 피로가 감당할 수 없이 밀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광민은 저녁을 먹었다. 하루종일 쉬지 않고 걸은 피로가 감당할 수 없이 밀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광민은 저녁을 먹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시호테알린산맥은 이튿날 점심 무력가지 따라오다가 슬며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 산맥이 사라지자 길 양쪽으로 평지가 펼쳐졌다. 그러니까 시호테알린산맥은 자그마치 2백40리에 걸쳐서 뻗어 있었다. 그 산맥 때문에 빨치산들이 번성하고, 일본군들이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말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평지에 논이 보이기 시작하면 얼마 가지 않아 어김없이 조선사람들의 마음이 나타나고는 했다. 조선사람들은 러시아 땅에까지 와서도 벼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이었다. 쌀밥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 그것만으로도 한민족으로서의 특색은 충분했다. 조선사람들은 두만강을 건넌 순서대로 정착하기 시작해 땅을 찾아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해삼위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북쪽으로 발길을 돌린 사람들이 우스리스크와 이만을 거쳐 하바로프스크에 이르는 2천여 리에 퍼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동쪽으로 더 나아가 나홋카와 수청 일대에 자리 잡은 것이다.
해거름이 되어 일본군 막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막사들은 높직한 언덕바지에 붉은 벽돌로 큼직큼직하게 지어져 있었다. 이광민은 긴장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붉은 벽돌 막사에서 느끼는 증오감이 훨씬 더 컸다. 붉은 벽돌 막사는 일본인들의 침략야욕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베리아 출병으로 이 땅을 영원히 차지할 작정으로 군인들의 막사부터 붉은 벽돌로 튼튼하게 지어댄 것이었다. 이광민은 저녁을 먹자마자 어제보다 더 심한 잠의 파도에 휩쓸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불안을 안은 채 잠으로 빠져들었다. 제대로 걷고 있는지 불안했던 것이다.
사흘째에는 어둠침침해서 잠이 깼다. 불안감 때문인지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길을 나서고 싶었지만 만일의 사태가 염려되어 그럴 수가 없었다. 어둠이 걷히기를 기다리며 벽에 기대 꾸벅꾸벅 졸았다. 먼동이 트기 시작하자 길을 나섰다. 아침 대신으로 콩 두 주먹을 씹으면서 걸었다. 날콩의 비린내쯤 익숙해진 지가 이미 오래였다. 뱀도 날것으로 먹어치우는 비위에 날콩이야 없어서 못 먹는 영양식이었다. 콩이 덜 볶아져 비린내가 난다고 한입 가득 씹던 인절미를 뱉어냈던 일이 꿈만 같았다. 그게 장가를 들고나서 한 짓이었다. 그 일로 아내는 얼마나 궁지에 몰렸던 것인가. 그러나 아내를 딱하게 생각할 줄을 몰랐다. 누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아내에게 정이 붙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이는 생겨났다. 이광민은 고개를 내둘렀다. 아이의 얼굴은 흐릿한데 아내의 얼굴은 또렷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아내를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으로 지형을 놓치고 지나가면 큰일이었던 것이다. 윤철훈은 이곳저곳의 위치를 물어볼지도 몰랐던 것이다. 붉은 벽돌 막사들은 갈수록 많았다. 초소도 자주 나타났다. 오가는 군인들의 차량도 많아졌다. 해삼위로 차츰차츰 가까워져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해삼위 초입에서 검문을 당했다. 그 검문소에서는 해삼위로 들고나는 사람들을 빠짐없이 검문하고 있었다. 초소도 양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일본헌병은 이광민의 쌀자루와 콩자루를 다 쏟았다. 그리고 옷고름과 바지 끈을 풀게 해서 몸을 샅샅이 뒤졌다.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어서 이광민은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했다. 신한촌에 들어섰을 때는 뉘엿뉘엿한 해가 넓은 만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아,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이광민은 두 팔을 뻗치며 아무 소리나 목청껏 외치고 싶었다.
‘내가 더 빨리 왔을지도 모른다!’
이광민은 새롭게 솟구치는 기운으로 쓰보르스카야로 발길을 서둘렀다. 윤철훈이 가르쳐준 김상호의 집은 쉽게 찾았다.
"형님, 형님, 상길이 왔습니다."
이광민은 암호를 댔다. 이내 방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나왔다.
"윤 나는 철판을 압니까?"
그 남자가 무표정하게 낮은 소리로 물었다.
"예, 훈춘에서 납니다."
이광민은 <윤철훈>이라는 2단계 암호를 댔다.
"수고하셨소. 너무 빨리 와서 놀랐소."
그 남자가 이광민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남자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뒤란으로 돌아갔다. 리고 뒷울타리의 문을 열고 두 집을 옆으로 거쳤다. 그리고 다시 한 집을 위로 지나서 그 옆집에서 발을 멈추었다.
"수청에서 도착했소"
그 남자의 말과 함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얼굴을 내민 사람은 농부 차림의 윤철훈이었다. 이광민은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피로감이 엄습해 왔다.
"이 동지, 수고했소, 수고했소."
윤철훈이 이광민을 얼싸안으며 속삭이듯이 그러나 끈끈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이광민도 윤철훈을 끌어안으며, 당신이 나를 이길 줄 알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동지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소. 내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손님 대접이 이상하게 될 뻔했소."
윤철훈이 방에 자리 잡으며 말했다.
"헌데, 어찌 이리 빨리 오셨습니까?"
이광민은 자신이 어디쯤에서 추월을 당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 나는 다른 볼일이 있어서 나홋카 쪽으로 뚫린 길로 왔소, 그 길을 수청 쪽 길보다 한 30리 가깝소."
윤철훈이 말하는 길은 시호테알린산맥을 가운데 두고 이광민이 걸어온 길과 반대쪽에 있었다. 이광민은 그때서야 자신과 윤철훈이 서로 다른 길에서 경주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서로 길을 바꿨더라면 틀림없이 내가 늦게 도착햇을 것이오. 이 동지가 홍범도 장군 휘하인 줄은 알앗지만, 참 대단하시오."
"원 별말씀을……"
자기를 낮추며 상대방을 칭찬하는 윤철훈의 그 도량과 호탕함에 이광민은 새로운 친근감과 신뢰감을 느끼고 잇었다. 그리고 윤철훈이 그리 만족해할 만큼 일을 해냈다는 자신감이 뿌듯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이광민은 물 한 사발을 마시고 나서야 몸과 마음을 다 풀어놓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이 동지, 이 동지가 길만 익힌 줄 알지요?"
윤철훈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
이광민은 윤철훈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동지는 길만 익힌 게 아니라 또 한 가지 큰일을 해냈소. 그게 뭔지 아시오? 대량의 아편을 운반했소."
"예에?"
이광민은 반사적으로 벽에서 등을 뗐다.
"허허, 놀랄 만하오. 허나 미리 말하지 않은 건 괜히 긴장시켜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였소."
"아니, 그게 어디에 있었단 말입니까?"
이광민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콩알들의 속을 파내고 어찌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동지도 모르겠지요? 그러니 날고 긴다는 왜군 헌병들이라고 알 리 있겠고? 그건 이 동지가 지고 온 지겟다리 속에 들었소. 우리가 새로 강구해 낸 방법이요."
윤철훈이 씨익 웃었고, 김상호라는 남자도 빙그레 웃고 있었다.
"정말 몰랐기 다행입니다."
이광민도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음날 이광민은 혼자서 해삼위를 떠났다. 지게에는 소금에 절인 생선 예닐곱 마리가 얹혀 있었다. 그러나 이광민은 윤철훈이가 부두에서 빼낸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가지고 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광민은 올 때와는 다르게 나훗카 쪽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오후에 미리 지정해 놓은 마차역에서 윤철훈과 합류했다. 나흘 동안에 나훗카까지 6백20리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나훗카 시내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나훗카 시내로는 안 들어가도록 돼 있소. 경비가 너무 삼엄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지 모르는 위험 때문이오."
윤철훈은 나훗카를 얼마 안 남겨놓은 지점에서 샛길로 빠지며 말했다. 논길을 한동안 걸었다. 이미 추수가 끝나 벼그루터기들만 남아 있는 들판에는 회색빛 적막만 가득했다. 드문드문 일손을 놀리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마저도 쓸쓸해 보였다. 가을 없이 빠르게 닥치는 대륙의 겨울이 어느덧 고개를 들고 있었다. 윤철훈은 논가에 볏단을 쌓고 있는 어떤 남자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애쓰십니다."
"어서 옵세, 위기?"
그 남자가 윤철훈의 인사를 받으며 이광민을 빠르게 훑었다. 그때서야 이광민은 그 남자가 노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 새로 보충된 대원입니다."
그들은 노인을 지나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광민은 그런 노인까지 정보원 역할을 하고 있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접선도 아주 그럴듯했다. 그 누가 보거나 동네 사람들끼리 잠깐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마을이 있는 야산을 에돌아 한참을 걷지 머리 보이던 산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얼마 동안 걸었다. 윤철훈은 아름드리 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수북이 쌓인 낙엽들을 헤치기 시작했다. 조그만 돌이 하나 나왔다. 윤철훈은 빠른 손놀림으로 다시 흙을 고르고 낙엽을 덮었다. 아까하고 다를 것이 없이 감쪽같았다.
이광민은 그런 식으로 한 달에 걸쳐서 우스리스크 일대까지 지리를 샅샅이 익혀나갔다. 그러나 선요원은 낮에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이 생길 때마다 위장을 달리 해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움직였다. 이광민은 넉 달이 지나면서 수청 일대의 산악지대를 다 돌면서 빨치산 부대가 50여 개인 것을 알았다. 큰 부대는 인원이 삼사백 명이었고, 작은 부대는 사오십 명씩이었다. 그 부대들의 전체 대원들 중에서 3분의 2정도가 조선사람들이었고, 나머지가 러시아인들이었다. 거의가 두 나라 사람들이 함께 편성된 혼합부대였다. 그런데 부대장들은 조선사람들이 더 많았다. 왜냐하면 일본군이 출병한 1918년부터 20년까지 조선사람들이 독자적으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해 오다가 적군은 그다음부터 합류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 개의 부대는 조선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기도 했다.
그런데 수청이라는 곳은 아주 묘하게 생긴 산악지대였다. 석탄이 많이 나오는 그곳은 굽이굽이 산줄기였고, 첩첩이 산줄기였다. 석탄이 많이 나오는 그곳은 굽이굽이 산줄기였고, 첩첩이 산줄기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겹을 이루고 있는 산줄기들이 별로 높지 않으면서 그만한 높이로 다른 산줄기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 산줄기들은 서로서로 손을 잡듯이 여러 가지 모양의 큰 동그라미를 그려내며 분지를 품고 있었다. 그 모양을 산봉우리에서 바라보면 마치 사방연속무늬가 퍼져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분지마다 조선사람들이 논밭을 일구어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빨치산 부대들은 그 산줄기들을 타고 다니며 일본군들과 싸우고 있었다. 좌에서 치고 우로 빠지고, 동에서 치고 서로 빠지고, 남과 북에서 협공하고, 그보다 더 좋은 빨치산 투쟁지는 없었다. 그곳을 <빨치산스크>로 이름 붙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산세만 빨치산들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사람들이 분지마다 크고 작은 마을들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빨치산의 열렬한 지원자들이었고 충실한 정보원들이었다. 일본군들은 병력이 투입되는 것에 비해 계속적인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고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산속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어느 마을에도 머무르게 되면 수청의 특이한 지형 때문에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으로 빨치산들에게 포위당해 몰살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일본군들은 아침에 밀려들었다가 해가 지기 전에 물러나는 작전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본군들은 분지의 마을들과 빨치산과의 연계를 끊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방법이란 조선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집들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죽은 조선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집들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죽은 조선사람들이 천 명을 넘고 흔적 없이 불탄 마을이 예닐곱 개나 되었다. 그럴수록 빨치산들의 투쟁은 치열해졌다. 대원들 중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그 원한은 전체 빨치산들의 적개심을 더욱 자극했던 것이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일본군들의 공격은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날씨가 춥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산들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해삼위과 수청 일대는 이만이나 하바로프스크 같은 데보다 훨씬 덜 추웠다. 그런 데가 영하 30도일 때 해삼위나 수청은 영하 15도 정도였다. 그런 곳보다 위도가 낮은 데다 바다가 가까운 까닭이었다. 그런데도 계속되는 영하 15도의 날씨는 내리는 눈이 녹지 못하고 자꾸 쌓이게만 할 뿐이었다. 보통 평지가 무릎까지 빠지고 산골에는 아예 산으로 접근을 못 했다. 그렇다고 빨치산들도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입장이 바뀌어 빨치산들이 일본군들을 공격해 들어갔다. 논밭 행군에 단련된 빨치산들은 야간공격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 선요원들은 길잡이로 앞장섰다. 빨치산들은 일본군 부대를 포위한다거나, 한 지점에서 오래 공격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일본군의 기관총 집중사격이나 포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단 일본군 부대를 공격해서 접전이 시작되면 힘이 부치는 척해 가며 슬슬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군들은 공격하는 기세에 말려들어 따라오게 마련이었다. 어느 지점까지 따라온 일본군들은 느닷없이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뒤에서 매복조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빨치산 부대들은 그런 유인 공격만 쓰는 것이 아니었다. 거세게 바람이 불면서 눈이 오는 밤에는 일본군 부대를 정면으로 기습공격하기도 했다. 바람과 눈은 더할 수 없이 좋은 공격무기였고, 방어무기였다. 그리고 눈바람이 거친 날이면 시호테알린산맥 여기저기서 낮에도 일본군 차량들을 공격했다. 이미 다져진 눈이 빙판을 이룬 데다가 눈보라까지 쳐대면 차량 속도는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빨치산들은 길 가까운 산에 매복해 있다가 순식간에 차량을 공격하고는 다시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리는 것이었다. 차량 공격은 여러 가지로 유익했다. 일본군들을 없애는 것은 물론이었고, 뜻밖의 보급품들을 노획할 수가 있었고, 차량들을 불태워 일본군의 기동력을 감퇴시키는 것이었다.
해가 바뀌고 겨울이 끝나가면서 블라디보스톡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나훗카와 마찬가지로 일본군들의 경계가 극심해졌던 것이다.
"경제가 그렇게 심해진 게 요새 떠도는 소문과 관계가 있을까요?"
이광민이 윤철훈에게 물었다. 일본군들이 더 견디지 못하고 러시아 땅을 떠나게 될 거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혁명을 반대하며 저항해 왔던 백군들이 괴멸 상태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형편에 일본군들도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소. 위기에 몰릴수록 방어는 심해지는 것 아니오."
"언제든 물러가게 되면 왜놈들은 헛수고만 잔뜩 한 것 아닙니까?"
"물론이오. 왜놈들은 과욕을 부려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엄청날 것이오. 다 자업자득이고, 제놈들 발등 제놈들이 찍은 것이오?"
"해삼위에 못 드나들면 우리 일이 더 어려워지겠지요?"
"당분간 좀 지장이 있겠지만 나훗카식으로 곧 조직을 이중으로 확대하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오."
윤철훈은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여유를 보였다.
"왜놈들이 여기서 밀려나면 만주에는 어떤 영향이 미칠까요?"
"글쎄요…… 그러니까 그놈들이 어디로 가느냐가 문제 아니겠소. 모두 일본으로 밀려간다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그 일부라도 조선 땅으로 투입되면 금방 문제가 생기지 않겠소."
"그놈들이 그럴 염려도 있지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를 일이오. 시베리아에서 실패했으니까 그 욕심을 만주로 뻗칠지도 모르지 않겠소."
"그렇겠군요……"
이광민은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것에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나저나 왜놈들이 밀려나며 그놈들 믿고 있었던 러시아 부자 놈들 꼴이 볼 만할 것이오."
윤철훈이 비웃음과 함께 코웃음을 쳤다.
"어디로든 도망을 가겠지요."
"맞소, 부자 놈들은 왜놈들이 밀려가기 전에 한발 먼저 돈 보따리를 챙겨가지고 도망을 갈 거요."
"어디 쉽게 갈 만한 데가 있을까요?"
"거기 있잖소. 그놈들의 천국인 만주 땅 하얼빈."
"가, 그렇군요. 러시아 부자들이 금덩이 은덩이를 싸들고 하얼빈으로 도망가 자기들끼리 부자촌을 만들어 산다는 소문 들었어요."
"참 한심한 인간들이오. 아니오, 애초에 착취를 해서 치부한 인종들이니까 그건 당연한 결과요."
윤철훈의 말은 젊은 공산주의자답게 명료하고도 단호했다. 그다음부터 해삼위의 정보는 인근 농가들을 통해서 입수하게 되었다. 어느 때는 정보문건이 어떤 할머니의 치마 말기 속에서 나오기도 했고, 또 어느 때는 어떤 농부의 지게 등받이 속에서 나오기도 했다.
여름이 되면서 일본군들이 밀려간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 되었다. 그 소식과 함께 빨치산들의 활동은 더욱 치열해졌다. 사기가 떨어진 일본군들에게 더 타격을 가해 하루라도 빨리 몰아내자는 것이었다. 빨치산들의 전술이 바뀌었다. 빨치산 부대들은 산을 벗어나 과감하게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밤의 기습공격은 물론이고 낮에도 거침없이 접전을 벌였다. 그런데 일본군들은 전과 다르게 추격을 하지 않고 방어에만 힘을 썼다. 인명손실을 하지 않겠다는 그 소극전술에 빨치산들의 사기는 더 놓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빨치산들은 9월로 접어들면서 모든 전투를 중단하게 되었다. 일본군들이 전면 철수한다는 조건 아래 소련 정부와 전투 중단의 협상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빨치산들은 마침내 일본군들을 물리친 승리감에 환호하며 서로서로 얼싸안았다. 조선사람들은 조선사람들끼리만 얼싸안은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함께 싸워온 러시아인들하고도 얼싸안았다. 조선사람들은 러시아혁명을 완수하는 공을 세운 것이었다. 일본군이 조선과 러시아의 공동의 적이었지만 시베리아가 러시아의 영토인 한 러시아인들이 조선을 위해 세운 공보다 조선사람들이 혁명 국가 소련을 위해 세운 공이 훨씬 더 크고 직접적이었던 것이다. 일본군들은 마침내 1922년 10월에 러시아 땅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우 철훈과 이광민은 마차를 타고 해삼위로 달렸다.
"이 길을 걸어서 다니다니...."
창밖을 내다본 채 윤철훈은 감회에 젖은 소리로 말하고는, "이 동지는 몇 번이나 오갔는지 기억하시오?"
그는 고개를 돌려 이광민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그거 잘 모르겠는데요."
이광민은 모처럼 <모르겠다>는 말을 홀가분하게 해버렸다.
"그럴 거요. 여기저기 너무 많이 다녔으니." 윤철훈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난 가끔 사람의 몸이 강철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느끼오. 제아무리 강한 강철바퀴라 해도 그동안 우리가 걸어 다닌 길을 굴렸다면 다 닳아서 부서지고 말았을 것이오. 그런데 우리는 끄떡없질 않소?"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이광민을 쳐다보았다.
"예, 그렇기도 하군요"
이광민도 새롭게 뿌듯함을 느꼈다.
"오늘 밤엔 맘 놓고 술을 마십시다."
"김상호 동지도 함께하면 좋겠군요"
"아, 물론이오. 그리고 이 동지한테는 멋진 아가씨도 소개시켜 주겠소."
"아니, 무슨..."
"아니, 이 나이에 뭘 그리 부끄러워하시오. 썩 괜찮은 아가씨니까 기대하시오."
윤철훈은 껄걸 웃으며 이광민의 허벅지를 쳤다. 이광민은 쑥스럽게 웃으며 눈길을 창밖으로 돌렸다. 추수 끝난 들녘이 지나가고 있었다. 고향과 별로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다. 그 풍경을 덮으며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내의 물기 젖은 목소리도 들렸다.
"언제나 오시게 될랑가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떠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갔다.
일본군들이 사라진 블라디 보스톡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웠다. 이광민은 다시 신한촌에 발을 디디는 것이 눈물겨웠다.
"이쪽은 내 사촌누이 동생 윤선숙이, 이분이나를 놀라게 하신 투철한 혁명 투사 이광민 선생!"
윤철훈은 흥겨운 목소리로 이광민과 윤선숙을 인사시켰다.
"안녕하세요, 윤선숙이라 합니다."
여자는 고개를 까딱하면서 손을 불쑥 내밀었다.
"이널 이런, 이 동지 이거 이해하시오. 이게 러시아식이라 이렇고. 러시아사람들은 그저 사람을 가까이만 대하면 악수부터 해놓고 보는 것 알지요?"
윤철훈은 설명하기에 다급했다.
"예, 압니다. 저는 이광민입니다."
이광민은 웃으면서 윤선숙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 얼굴은 어딘가 어색했다.
"우리 선숙이가 해삼위에서 태어나서 학교도 러시아인들 학교를 다녀서 러시아식이 몸에 배서 그렇소. 그래도 조선말을 틀림없이 잘하고, 동포학교에서 아이들을 잘 가르치며 봉사하고 있으니 그만하면 장하지 않소?"
윤철훈은 여동생에 대해 덧붙여 설명하고 있었다.
"아 예, 학교에 봉직하고 계시는군요?"
이광민은 새삼스럽게 윤선숙을 쳐다보았다. 그건 여자가 학교 선생을 할 만큼 유식하다는 것보다는 동포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에 대한 관심이었다.
"예, 아동들을 가르치게 되자 함경도 말을 서울말로 바꾸느라고 열성을 부리기도 했어요. 그러느라고 이동휘 선생 같은 분들을 많이 괴롭혀드리기도 했지요."
윤철훈은 여동생을 무척 대견해하는 눈치가 역연했다.
"오빠는 별말을 다......"
윤선숙은 큰 눈으로 윤철훈을 곱게 눈흘김하며 겸연쩍어 했다.
"그래, 그런 거야 앞으로 차차 알기로 하고, 오늘은 아주 맘 놓고 술이나 마시기로 하자. 선숙아, 우리 소원 좀 풀어줄 수 있지?"
"예, 알고 있었어요."
윤선숙이 상큼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말이다, 김상호 동지도 좀 불러오도록 해."
"김상호 동지요?"
"아 그렇지, 넌 그 이름을 잘 모르겠구나. 거 있지 왜, 우리 집 옆에 옆집에서 부두노동 하는......"
"키 좀 큰 유씨 말인가요?"
윤선숙이 놀라며 눈이 더 커졌다.
"그래, 그분이 고생 많이 했지."
"어머, 오빤 모르고 계시군요, 그분 죽었을 거예요."
"머, 머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윤철훈이 소스라쳤고, 이광민은 가슴이 쿵 울리고 있었다.
"왜놈들 군함이 실어갔어요, 왜놈들이 떠나면서 밀린 노동자들의 임금을 안 주고 그냥 떠나려고 했거든요. 그래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며 배를 못 떠나게 막았어요. 그랬더니 왜놈들은 돈을 줄 테니 대표만 배로 올라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러시아사람 둘하고 유씨가 올라갔어요. 그런데 노동자들이 흩어져 안심하고 있는 사이에 배가 떠난 거예요. 노동자들이 부두에서 소리소리 지르며 난리를 쳤지만 떠나가는 배를 어쩌겠어요. 사람들 말이, 왜놀들이 세 사람을 무거운 것에 매달아 바다에 던졌거나, 배 아래 석탄 화구에 밀어 넣었을 거라고 그래요."
이광민은 그 충격에서 오래도록 벗어날 수가 없었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떼어먹고, 거기다가 거짓말로 사람들을 배에 태우고, 끝내는 바다나 불구덩이에 밀어 넣어 죽였을 삼중의 만행은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9. 농장조합원들의 회의
석탄이 타고 있는 무쇠 난로의 불룩한 배가 벌겋게 달아 있었다. 난로 위의 큰 주전자에서는 물이 썩썩 끓어대며 김을 내뿜고 있었다. 세찬 바람에 창문들이 덜컹거리는 추운 바깥 날씨와는 달리 실내는 전혀 냉기를 느낄 수 없이 훈훈했다. 재력 막강한 일본인 농장 대표들의 모임에 어울리는 난방이었다. 회의용 탁자에 둘러앉은 열서너 명의 농장조합원들은 하나같이 양복 차림으로 멋들을 부리고 있었다. 제각기 있는 대로 멋을 부린 그 차림들이 마치 서로가 재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에 또, 그러니까 우리 농장들은 총독부의 산미증식계획에 적극 호응하는 견지에서 내년부터 소작료를 인상하기로 합시다."
회장인 요시다의 밀이었다.
"내년이래야 며칠 남았나요?"
한 사람이 얼른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오늘 인상률을 결정해서 신년이 되면 바로 시행 발표를 하자는 거지요."
요시다가 거만스럽게 말했다.
"예, 산미증식계획이 아니더라도 소작료를 인상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사람은 이 자리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오."그렇지 않는냐는 듯 하시모토는 좌중을 휘둘러보고는, "그러나, 소작료를 인상하는 게 급한 것이 아니라 소작료를 인상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더 급한 문제라고 사료됩니다." 그는 요시다를 향해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하시모토의 발언은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일시에 의아하고 의문스런 얼굴이 된 사람들의 눈길이 요시다와 하시모토를 향해 서로서로 엇갈리고 있었다.
"하시모토상, 그게 무슨 말이오? 그렇게 막연하니 말하지 말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말하시오."
요시다의 말투에 불쾌한 기색이 드러났다. 저놈이 저거 갈수록 시건방지게 까불어댄다니까. 요시다는 하시모토를 바라보며 뒤틀리는 감정을 꾹 누르고 있었다.
"예, 여러분들도 소문 들어서 대강 알고 있겠지만 지금 전남 순천 일대에서는 소작인들의 난동이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요는 소작료를 인하하라는 난동인데, 그건 예사 문젯거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난동이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난동자들도 소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순천군 서면에서 1천6백여 명이 난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이삼일 뒤에 그 옆의 쌍암면에서 1천여 명이 또 난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삼일이 지나 쌍암면 옆의 낙안면에서 8백여 명이 또다시 난동을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어떻게 되어 그 엄청난 소작인들이 연속적으로 난동을 부리는 것인가요? 그게 우발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산전수전 다 겪어 현명하니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럼 왜 그렇게 됐겠습니까? 그건 바로 공산주의자들의 조직이 그 지방에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곳보다 평야가 더 넓은 이 전라북도 우리들의 땅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조직을 뻗쳐가며 암약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들의 농장에서도 언제 그런 난동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겁니다. 문제는 소작료를 인상하기 전에 우리 지역에서 암약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고 그 조직을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무턱대고 소작료를 인상했다가는 난동을 일으키라고 충동질하는 것밖에 안 된다 그 말입니다."
하시모토는 통변 출신답게 막히는 데 없이 말을 해치우고는 선동하듯 좌중을 휘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동의하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에에 또,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그리 염려할 게 없소. 왜냐하면 지난 8월에 벌써 총독부 경무국장이 과격사상과 공산주의에 대한 단속방침을 발표함과 동시에 경찰력이 검거 색출 활동을 시작했단 말이오. 우리 뒤에는 언제나 경찰력이 든든하게 있으니까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소."
요시다의 정면공격이었다.
"예, 그거야 잘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곳에서 대규모 난동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은 왜 그렇습니까? 경찰들이 공산주의자들을 검거 색출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럼 우리 지역에서는 했습니까? 일에는 순서가 있고 선후가 있어야 합니다."
하시모토는 거침없이 맞받아쳤다.
"글세, 그거 곤란한 문젠데......"
"그렇구먼, 함부로 할 일이 아니구만."
이런 중얼거림과 함께 사람들은 하시모토에게 동조하는 기색이 완연해졌다.
"아니, 그럼 하시모토 상은 우리 경찰을 못 믿겠다는 거요?"
요시다가 벌컥 화를 냈다.
"무슨 말을 그리하시오. 여기 증인들이 수두룩하지만 난 그런 말 하지 않았어요."
하시모토가 요시다에게 눈총을 쏘았다. 그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말이 그 말이지 뭐요."
"천만에요. 난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고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따로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는 지금 소작료 인상을 결정할 게 아니라 경찰에서 어서 빨리 공산주의자들을 검거 색출해 달라는 수사 촉구를 결정해야 한다 그겁니다. 우리의 결정을 경찰 측에 전하고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면 수사를 더 적극적으로 할 거 아닙니까. 그놈들을 색출해 내지 못하고 소작료를 인상해서 난동을 당하고 소작료를 못 올리게 되면 그 얼마나 망신입니까. 그러니까 그놈들을 잡아낸 다음 소작료를 인상하는 것이 순서라 그 말입니다."
"아,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그게 좋겠소. 화근부터 없애버려야지."
"그리합시다. 난동이 일어나 소작료도 못 올리고, 농사도 망치고 하면 이중으로 손해 아니겠소."
사람들은 어느덧 찬동을 넘어서서 결정상태로 쏠리고 있었다.요시다는 하시모토에게 당하는 것이 너무나 화가 났다. 그러나 그의 말을 깨부술 만한 다른 묘안이 없었다.
"좋소, 그럼 모두 하시모토상의 의견에 찬성합니까?"
요시다는 애써 감정을 감추며 회원들에게 물었다.
"예, 찬성합니다."
"예, 그렇게 합시다."
요시다와 하시모토를 빼놓고 회원들 모두가 손을 들어 찬성을 표시했다.
"됐습니다. 그럼 소작료 인상은 보류하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경찰에 촉구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이것으로 회의를 끝내겠습니다."
요시다는 치밀어오르는 울화를 억누르며 하시모토의 의견을 결정사항으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하시모토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의견을 낸 것이 하시모토이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었다. 하시모토는 젊은 놈이 갈수록 버르장머리 없이 방자해지고 있었다. 세월 따라 농토가 늘어나고 농장이 커지면서 멋대로 나대는 것이었다. 십이삼 년 전만 해도 말 상대는커녕 가까이 오지도 못했던 놈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맞대거리를 하고 들다니.......요시다는 그런 하시모토를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하게 된 스스로의 처지에 화가 나고 있었다. 회의가 끝났는데도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 공산주의자라는 놈들은 어떻게 생겨 먹은 작자들이오?"
"그게 자칭 우국지사고 독립투사라는 놈들 아니오."
"듣자 하니 그놈들이 다 밥술이나 뜨는 식자 든 놈들이라지 않소?"
"당연하지요. 동경 유학한 놈들이 태반이고, 그놈들이 또 새끼를 친다니까요."
"이것 참, 우리 동경에서 못된 놈들을 길러내고 있는 꼴 아니오?"
"그렇다니까요. 요는 본토에서부터 그놈들을 일망타진해야 해요."
"구름 잡는 소리들 하지 말고 당장 발 밑들부터 살피도록 하시오."
하시모토의 비웃듯 하는 말이었다.
"발밑? 그게 무슨 소리요?"
"어디 경찰만 믿고 있을 수 있나요? 여러분들 농장에 그놈들 조직이 침투해서 소작인들을 병들게 하고 있으면 어쩌겠소? 지금 뭐가 더 급한 문제요?"
"맞소, 동경 타령, 본토 타령 하고 있을 때가 아니오."
"글쎄......그런 이상한 눈치가 있으면 농감들이 보고를 하지 않겠소?"
"아니오, 농감들이 아무 눈치도 못 챌 수 있소. 그놈들은 처자식도 모르게 아주 교묘하게 움직인다던데."
"그것 참 야단나지 않았나. 모두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 되지 않겠소?"
"하시모토상, 무슨 묘안이 없소?"
"글세 올시다. 나도 그 묘안이 없어서 계속 골치만 아프다니까요."
하시모토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시모토가 자리를 뜨자 이야기판이 깨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도 잇따라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외투를 걸친 하시모토는 사람들에게 건성으로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그의 눈길을 요시다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요시다는 천장을 향해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제, 다 늙은 놈이. 네까짓 게 언제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나 보자.’
하시모토는 코웃음 치며 조합 사무실을 나섰다. 요시다는 이미 두려운 존재도 눈치 보아야 할 상대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호남평야에서 제일 큰 일본인 농장의 고용인일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한 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 엄연한 농장주였다. 농장주와 고용지배인, 그건 귀족과 천민의 차이였다. 한 자리에서 회의를 하는 것조차 모독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죽산면을 다 차지할 때까지만 참아주기로 했다. 죽산면을 다 차지하는 날에는 가차 없이 몰아칠 작정이었다. 그때쯤이면 농장의 크기로 보나 남자의 나이로 보나 회장 자리는 자신의 것이었다. 다른 회원들도 요시다와 마찬가지 처지이니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요시다는 이틀 후에 회원 둘을 대동하고 경찰서장을 방문했다. 두 회원 중에 하시모토가 끼어 있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다.
"하 농장조합원들께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십니다그려."
요시다한테 조합의 결정사항에 대한 취지 설명을 듣고 난 경찰서장은 이렇게 일갈했다.
"아니,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 뜻밖의 반응에 요시다와 두 회원은 당황했다.
"예. 농장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염려를 하는 것은 좋으나 경찰의 업무를 간섭하는 것은 월권이란 말입니다."
서장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월권이라니요? 우린 총독부의 산미증식계획에 적극 호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방해꾼들을 조속히 색출해 달라고 건의하는 것뿐인데요."
요시다는 잽싸게 총독부를 들이대며 문서에 <촉구>라고 한 것을 <건의>로 바꾸고 있었다.
"그래요?" 서장은 요시다가 내놓은 문서를 들어 힐끗 살피고 던지듯 하고는 "순천지방에서 야기되고 있는 난동은 오히려 잘된 것이오." 불쑥 내쏘았다.
"뭐, 뭐라고요?"
세 사람은 눈이 휘동글해졌다.
"왜 그런지 다들 똑똑히 들어두시오. 그 난동이 다 어느 농장에서 일어난 줄 아시오? 조센징 지주들 농장이오. 그럼 그 난동을 진압시켜 줄 사람들은 결국 누구요? 우리 일본 경찰이오. 우리 경찰의 힘으로 위기를 넘기고 살아난 조센징 지주들은 어떻게 되겠소? 은혜를 입은 만큼 대일본제국과 총독부에 충성을 바칠 게 아니겠소? 앞으로도 계속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 조센징들 농장에서 계속 난동이 일어나는 것이 좋소. 그럴수록 재력 든든한 친일파들을 자연스럽게 확보해 나가는 거니까. 이제 내 말 알아들었소?"
서장은 입가에 비웃음을 물며 세 사람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렇지만 그 여파가 우리 일본인들 농장으로 파급되는 건 안 생각하시오?"
요시다가 밀리지 않고 공박했다.
"아하, 내 말 아직 다 끝나지 않았소. 그 난동을 진압하면서 또 한 가지 큰 수확이 있소. 아무리 비밀조직이라 해도 일단 난동이 벌어지면 주모자들이 노출되게 마련이오. 숨어 있던 공산주의자 놈들을 그때 다 일망타진한다 그거요. 이게 무슨 전법인지 알겠소?"
서장은 몸을 뒤로 부리며 입꼬리가 처지도록 거만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요시다는 말이 막히고 말았다. 그렇다고 기분이 개운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소작료를 인상해야 될지 안 해야 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난동이 일어나더라도 소작료를 인상하라 그겁니까?"
"그거야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사항이 아니오. 내가 분명히 말해 둘 수 있는 건 만약 난동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우리 경찰이 신속하게 진압을 책임지고 그 주모자들을 일망타진하겠다는 것이오."
"그렇다면 소작료를 인상해야 되겠소."
요시다는 하시모토에게 보복하는 기분으로 말했다.
"좋도록 하고, 이건 다시 가져가시오."
서장이 요시다에게 문서를 내밀었다.
"요시다상, 정말 소작료를 인상할 거요?"
경찰서를 나서며 한 사람이 물었다.
"글쎄……사무실로 가서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그게 좋겠어요."
다른 사람이 말을 받았다.
"그것 참, 골치 아프게 공산주의라는 게 생겨나 가지고 원……"
요시다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그게 부자들 재산 뺏어서 못사는 사람들을 고루 잘살게 하겠다니 소작인 놈들이 환장하게 생기지 않았소."
첫 번째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가래를 돋우어 내뱉었다.
"듣기만 해도 재수 없는 소리요."
두 번째 남자도 침을 내뱉었다. 추위 속에서 행인들이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목부분에 털이 달린 외투를 입은 그들의 걸음도 빨랐다. 허리 굽은 늙은 여자 거지가 그득 앞으로 다가들며 때 전 손을 내밀었다.
"한 푼 적선하시오."
"바가야로!"
요시다가 욕을 내쏘며 얼른 피해 섰다. 그 몸짓이 거지의 손이 옷에 닿을까 봐 피하는 것이었다. 다른 두 사람도 욕을 내뱉으며 늙은 거지를 피해 지나쳤다.
"어떤 좋은 생각들이 떠올랐소?"
요시다가 의자에 몸을 부리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글쎄요, 경찰서장 말대로 하자면 소작료를 인상하고, 공산주의자들 때려잡고 일거양득 아닌가요?"
"내 생각도 마찬가집니다. 하시모토 때문에 괜히 헛수고만 한 거지요."
두 번째 남자는 일부러 하시모토의 이름을 꺼내 요시다의 감정을 자극하려고 했다.
"그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놈이 주둥이만 살아가지고. 좋소, 두 분 의견이 그렇다면 소작료를 인상하도록 합시다."
요시다의 감정 섞인 말이었다.
"그런데…… 형식적이나마 다시 회의를 열어야 되지 않겠어요? 오늘 일도 알려줘야 하고요."
첫 번째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 하시모토가 잘못한 것도 공개석상에서 밝혀야 하니까요."
두 번째 남자는 요시다에게 아부할 겸 양수겸장을 치고 있었다.
"그럽시다, 내일 당장 회의를 엽시다."
요시다는 책상을 쳤다.
한편, 하시모토는 그동안 막연하게 궁리해 오고 있었던 농장 관리체계를 본격적으로 짜기 시작해서 이틀 만에 완료시켰다. 그는 자신의 묘안에 더없이 만족을 느꼈다. 그는 또 도표를 들여다보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똑똑똑 두들겼다.
"거 누구요?"
"예, 부르셨습니까? 장 차석입니다."
"아, 들어오시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장찰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콧등은 누가 보아도 금방 표가 나게 푹 꺼져 있었다. 원래 검은 편인 데다가 두루 뭉실하게 생긴 얼굴이었는데 콧등이 꺼지고 보니 인물은 더 못나 보이면서 인상이 험하게 변해 있었다.
"무슨 시킬 일이 있습니까?"
장칠문은 일본사람 못지 않는 발음을 하면서 거수경례를 붙였다.
"거기 앉으시오."
하시모토는 턱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그의 거만스런 태도는 흡사 사복 입은 상관 같았다.
"그 중놈은 아직도 꼬리를 못 잡았소?"
하시모토는 도표를 덮으며 불쑥 물었다.
"아 예, 아직 못 잡았습니다."
장칠문은 의자에 앉으려다 말고 엉거주춤 섰다.
"그놈 잡기는 틀렸소. 그때가 언젠데."
"아닙니다, 꼭 잡아내고 말 겁니다."
장칠문의 얼굴이 옹색하게 일그러졌다.
"그놈이 왜 안 잡히는 것 같소."
"그야…… 쥐새끼처럼 피해 다니니까……"
"그건 제대로 아는군. 쥐새끼는 주로 언제 활동하오?"
"쥐새끼야…… 밤이지요."
"알 건 다 아는군. 그런데 장 차석은 밤마다 잠을 자면서 그놈을 잡기 바라는 거요?"
"예어?……"
장칠문은 어리둥절해졌다.
"이런, 그놈은 밤에만 활동하는 게 틀림없다 그 말이오."
"아, 예에……"
그제서야 장칠문의 얼굴이 민망해졌다.
"됐소, 그건 그렇고, 요즘에 수상한 자들이 우리 면에 나타나지 않소?"
하시모토의 어조가 거세졌다.
"없습니다.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장칠문은 한 방 얻어맞은 터라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다는 사족까지 붙였다.
"그런 놈들은 야간활동을 한다는 걸 알고 있소?"
"예, 야간경계도 철저하게 합니다."
장칠문은 아까 그 화살이 이렇게 휘돌아 오는 것에 섬뜩 놀라며 임기응변을 하고 있었다.
"자아, 편히 앉아서 내 이야기 들으시오. 무슨 이야긴고 하니, 이면에 농장 관리체계를 군사조직으로 완전히 새로 짰소."
"군사조직이라니요?"
"아, 그건 차차 알게 될 거고. 그 변동에 따라 장 차석이 새로 할 일이 있소."
"예, 말씀하십시오."
"소작인들을 군사조직으로 짜는 건 공산주의자라는 새로운 불령선인들이 소작인들 사이에 침투하는 것을 차단시키자는 것이오. 이것은 내 농장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총독부의 공산주의자들 단속과 산미 증식계획에 호응하기 위해서요."
"아,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장 차석은 다음 두 가지 사항을 명심해서 협조하도록 하시오. 첫째, 우리 면내에서 글줄이나 읽을 수 있는 자들의 명단을 모조리 작성하고, 그 성분을 파악하시오. 둘째, 내 농장 소작인들 중에서 이 인근에 신식공부한 친척이 있는 자들을 빠짐없이 조사하고, 소작인들의 감시를 강화하시오. 이 일들은 빨리 끝낼수록 좋소."
"예, 잘 알겠습니다."
"장 차석이 수고하는 건 잊지 않겠소. 가서 일보시오."
하시모토는 장칠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말은 격려였다. 그러나 협박이기도 했다.
"예, 감사합니다. 곧 보고 올리겠습니다."
장칠문은 절도있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속없는 똥강아지 같은 놈. 그래, 충성을 다 바치기만 해라. 네놈이 환장하는 주재소장쯤 시켜주기야 손바닥 뒤집기다. 하시모토는 사무실을 나가는 장칠문의 뒤꼭지에 눈길을 꽂은 채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장칠문은 하시모토의 사무실을 나서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시모토 앞에만 서면 언제나 경찰서장이라도 만나는 것처럼 긴장되고 주눅이 들었다. 죽산면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만 해도 관청에 발이 넓은 농장주 정도로 알았지 그렇게까지 힘이 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한마디로 죽산면의 왕이었다. 죽산면의 농토를 절반 가까이나 차지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면장이며 주재소장이 완전히 그의 손아귀에 틀어 잡혀 있었던 것이다. 백종두가 무슨 부정을 해서 쫓겨난 줄 알았더니 바로 하시모토의 비위를 거슬러 신세를 망친 것이었다. 하시모토가 죽산면을 다 차지하게 될 날도 머지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눔아, 시상 돌아가는 것얼 넘덜보담 먼첨 알고, 사람얼 지대로 볼지 알어야 출세하는 것이여. 하시모토 고것이 예삿것이 아니여, 나이 젊은 것이 십년 새에 그 넓은 땅 차지허고 앉는 것 봐라. 금산보담 죽산면이 나슨 것이야 두말헐 것 없고, 하시모토가 니 용맹얼 알아보고 끌어갈라는디 그보담 더 존 일이 워딨어. 그 중놈얼 잡지도 못 허고 군산으로 올라는 것언 개도 웃을 일이여. 죽산면에 가서 하시모토 비우 잘 맞치고 있으면 니 출세질이 훤혀."
아버지의 말을 죽산면에 와서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칠문은 공허를 잡으려다 얻어맞아 다친 것을 공무 수행 중 입은 부상으로 공적을 삼아 군산으로 자리를 옮길 궁리를 했다. 그는 코뼈가 부러지고, 이빨까지 두 개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으니 부상치고는 작은 부상이 아니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의병장이었고 만세 사건의 주모자인 중 공허와 격투를 벌였다는 것을 소리 높여 광고해댔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장덕풍이가 인사운동을 맡고 나섰다. 그러나 공허를 잡지 못했으니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장덕풍이가 우체국장 하야가와를 만나러 갔다가 하시모토와 동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 그 악질 중놈하고 싸웠다는 순사가 바로 당신 아들이오? 그렇잖아도 내가 만나보려고 했었소."
하시모토의 반색이었다. 그는 그 저돌적인 충성에 값을 주고 있었다. 하시모토의 호출을 받고 농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다섯 명은 하시모토의 책상 앞에 줄지어 섰다.
"다들 똑똑히 듣도록. 오늘부터 농장 관리조직을 새로 짤 것이다."
하시모토가 농감들을 치올려보았다. 그의 이 한마디에 농감들의 얼굴이 금세 굳어지고 당황하는 빛이 드러났다.
‘병신 같은 놈들, 어지간히 겁들 나는군.’
하시모토는 천천히 담배에 불을 붙이며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소작인들 전체를 군대식으로 편성한다는 말이다. 이말 알아듣겠나?"
손을 앞으로 모아 잡은 농감들은 서로를 힐끗거리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다들 일본군대 맛을 안 봤으니 알아들을 도리가 있나."
하시모토는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표정을 지으며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듣도록. 군대의 최소단위는 분대로, 1개 분대는 인원이 9명이야. 그리고 분대 4개가 합해서 소대가 되고, 또 소대 4개가 합쳐져 중대가 되고, 중대 4개가 합쳐져 대대가 되고, 대대 4개가 합쳐져 연대가 되고, 연대 4개가 합쳐져 연대가 되고, 연대 4개가 합쳐져 사단이 된다 이거야."
그는 숨도 안 쉬는 것처럼 달달 주워섬기고는 어떠냐는 듯 농감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농감들은 잔뜩 주눅 들고 기죽은 기색으로 어리둥절해져 있었다.
"어디 누가 외워볼 사람!"
하시모토는 마치 보통학교 선생이 생도들을 다루듯 팔을 반쯤 올려들었다. 농감들은 반사적으로 목과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돌대가리들이 뭘 하겠어."
하시모토는 담배 연기를 확 내뿜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는 그야말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한 일자 자랑하고 있었고, 호박나물에 이빨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외우는 건 차차 하기로 하고, 요는 지금까지 농감 밑에 그냥 풀어놓았던 소작인들을 앞으로는 9명씩 묶어 분대로 편성한다 그 말이다. 왜 그러느냐! 내가 그동안 누차 말해 왔던 조센징 공산주의자들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냐! 9명 중에 하나를 대표인 분대장으로 지목하고, 그 분대원들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게 되면 9명 모두의 소작을 몰수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의 소대장과 중대장까지 연대 책임으로 소작을 몰수한다. 책임이 그것으로 끝나느냐? 천만에 말씀이다. 농감인 너희들은 이제 연대장이 되는데, 문제가 되는 연대장은 그날로 내쫓을 것이다. 이 점 명심하라. 그러나 겁낼 것 하나도 없다. 사전에 공산주의자들의 침투를 철저하게 차단시키고 조선반도 모든 농장에서 난동이 일어나도 우리 농장에서만은 그런 일이 없다면 너희들의 자리는 죽을 때까지 보장한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나!"
하시모토는 느닷없이 소리치며 발로 마룻바닥을 구르고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예, 예에…"
"아, 알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놀란 농감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그런데 미리 말해 둘 게 있다. 그동안 끄나풀로 박아두었던 자들을 분대장으로 노출시켜서는 안된다. 분대장은 불평불만이 많은 자들을 뽑아 시켜라. 그런 놈들은 빨리 몰아낼수록 좋으니까. 앞으로 이틀 내에 가자 해당 지역의 분대들을 짜 가지고 보고하라. 소대장과 중대장은 나와 의논해서 결정할 것이다. 뭐 물을 말 있으면 물어라."
하시모토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농감들을 휘둘러보았다.
"저어… 그렇게 되면 소작인들이 서로서로 감시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한 농감이 어덜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다들 내 뜻을 알았나?"
하시모토는 입이 벌어지도록 흡족하게 웃었다.
"더 물을 말 없나?"
농감들은 쭈뼛거리기만 했다.
"좋아, 빨리 돌아가 실시하도록!"
하시모토는 깊은 절을 하고 다투듯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하시모토는 입꼬리 돌아가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농감들에게 감추어둔 사실이 있었다. 그 군사조직을 소작 농사와 소작료 징수에도 이용할 작정이었다.
아이들이 토담 모퉁이의 양지바른 빈터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고 있었다. 꾀죄죄한 입성들은 추워 보이고 윤기없는 얼굴들은 배고파 보였지만 놀이에는 신명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의 놀이는 이상스러웠다. 서로 패를 짜서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숨바꼭질처럼 하나가 여럿을 상대하는 놀이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어지러울 만큼 제각기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몸짓들은 특이했다. 두 팔들을 활짝 벌리고 허리를 약간씩 구부리고 뛰면서 양쪽으로 벌린 팔을 높였다 기울였다 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들은 날개 큰 새가 날아가는 것 같은 시늉이었다. 그러나 새가 날개를 휘젓는 것처럼 팔을 휘젓지 않는 것이 달랐다. 그런데 아이들은 신명 나는 뜀질에 맞추어 무슨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다.
떳다 비행기 보아라 안창남
장하다 안창남 조선의 건아
청년들아 본받자 저 높은 기상
장하다 안창남 조선의 건아
아이들의 팔 벌린 몸짓은 바로 비행기 날아가는 흉내였다. 그리고 그 노래는 조선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에서 명성을 떨친 청년 비행사 안창남의 모국방문 비행을 놓고 지어진 것이었다. 아이들은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을 모았을 리가 없었다. 누군가 흉내 잘 내는 사람이 가르쳐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몸짓보다 그 노래가 더 희한했다. 어떤 사람이 빨리도 지어 퍼뜨린 것이었다.
안창남의 모국방문 비행은 12월 10일 여의도에서 벌어졌다. 그 소식은 한성뿐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로 요란하게 퍼져나갔다. 일본에서 유명해진 최초의 조선인 비행사를 신문들이 야단스럽게 선전해서만이 아니었다. 조선 청년이 비행기를 모는 것을 구경하려고 사이토 총독까지 여의도에 나왔다는 것이 또 다른 화젯거리로 덧붙여졌던 것이다. 그런데 안창남의 이야기가 전국 각지를 떠들썩하게 한 것은 단순한 구경거리나 호기심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잘 드러나 있었다. 조선사람들도 일본사람들을 능가할 수 있다는 식민지 백성들의 슬픈 위안이었고,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고무시키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아이들은 그런 뜻을 알고 신명이 나는지 어쩌는지 계속 노래를 부르며 하늘을 날아가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하시모토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고삐를 잡아채서 말이 우뚝 멈춰섰다. 아이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하시모토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는 얼굴이 사나워지며 말머리를 아이들 쪽으로 돌렸다.
"단나사마 곤니치와."
"어르신 안녕하세요."
한 아이가 하시모토를 알아보고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뒤늦게 하시모토를 알아본 다른 아이들도 똑같이 일본말로 인사들을 했다. 그건 하시모토가 자기 소작인들과 그 자식들에게 통일시켜 놓은 인사말이었다.
"너희들 그 노래 아주 잘하는구나. 어디 다시 한번 불러봐라."
조금 전의 사나웠던 얼굴은 간 곳이 없고 하시모토는 부드럽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의 조선말은 유창했다. 아이들은 쭈뼛거리고 주저했다.
"자아, 어서 해야지. 이 어르신이 시키는데 말 안 들으면 되나?"
그 말에 아이들은 서로 눈짓했다. 그리고 입들을 모아 합창을 시작했다.
떳다 비행기 보아라 안창남
장하다 안창남 조선의 건아
청년들아 본받자 저 높은 기상
장하다 안창남 조선의 건아
"요런 못된 놈들! 그 노래 누가 가르쳐주었느냐!"
얼굴이 돌변한 하시모토의 외침이었다. 아이들은 일시에 딱 굳어지며 얼굴들이 파랗게 질렸다.
"너, 누가 가르쳐주더냐!"
하시모토는 왼쪽 첫 번째 아이를 말채찍으로 겨냥했다.
"그냥, 아그덜 따라 그냥 불렀구만이라."
"뭐라고? 그다음 너는!"
말채찍이 두 번째 아이를 겨냥했다.
"야아, 나도 그냥 아그덜 따라…"
"그다음 너!"
말채찍이 세 번째 아이를 겨냥했다.
"나, 나도 아그덜 하는 대로…"
여섯 아이들은 모두 똑같은 대답이었다.
"바가야로!"
하시모토는 말채찍으로 자기 가죽장화를 갈기며 소리쳤다. 아이들이 움찔 놀라며 목이 움츠러들고 몸이 졸아들었다. 어떤 아이는 울먹울먹하고 있었다.
"너, 이리 나와!"
하시모토는 첫 번째 아이를 노려보았다. 몸을 잔뜩 웅크린 아이는 말에 올라타고 있는 하시모토 가까이 다가갔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아이의 키는 하시모토의 장화발에 달락말락했다.
"저 앞을 보고 똑바로 서라!"
아이는 말머리 쪽으로 돌아섰다.
"바가야로 조센징!"
하시모토는 이런 외침과 함께 말채찍으로 아이의 등을 후려쳤다.
"아앙!"
아이가 펄쩍 뛰며 울음을 터트렸다.
"시끄럿!"
하시모토가 외쳤다. 아이는 울음을 뚝 그쳤다. 다른 아이들은 사색이 되어 와들와들 떨면서도 도망갈 줄을 몰랐다. 하시모토 앞에서 도망을 갔다가는 더 큰 일이 생긴다는 것을 아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놈 이리 나와!"
두 번째 아이가 하시모토 장화 아래 섰다. 그 아이의 눈에서는 벌써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채찍이 휘익 소리를 내며 아이의 등을 물어뜯었다.
"엄니이…"
"시끄럿!"
여섯 아이는 소리를 내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하시모토 앞에 똑바로 줄지어 섰다.
"그 노래 다시 불러서는 안 된다. 또 부르다가 들키는 날에는 소작을 뺏고 농장에서 쫓아내 버릴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야아, 다시넌 안 그러겄구만요."
"야아, 알겄구만이라우."
아이들은 눈물을 훔치고 울음을 추스르고 하며 제각기 대답하기에 바빴다. 하시모토는 그 자리를 떠나며 화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놈의 노래가 그 일이 있은 지 한 달도 못 되어 퍼진 것도 그렇고, 불순한 노래 내용도 그렇고, 더구나 자신의 농장에까지 스며든 것을 생각하면 화를 누를 길이 없었다. 그따위 놈의 노래가 농장에 퍼지고 있는 것은 불온한 놈들의 손길이 농장에 미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재소 놈들을 생각하면 더 울화가 치솟았다. 아이들이 그리도 마음 놓고 노래를 불러대는 것을 보면 주재소 놈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른 동네에서라도 아이들이 혼쭐이 났더라면 그 소문은 금방 퍼지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하시모토는 말머리를 주재소로 돌릴까 생각했다. 그러나 군산에 나갈 일이 더 급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채찍을 휘둘러 말 엉덩이를 갈겼다. 말이 코를 불며 내닫기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 걸어오던 어떤 여자가 황급히 길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를 쑤셔 박듯 숙이게 하고는 자기도 허리를 반으로 접어 절하고 있었다. 질주하는 말 위에 올라앉은 하시모토는 그들 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쳐 갔다.
다음날 하시모토에게 호된 추궁을 당한 주재소 순사들은 독이 올라 이 동네 저 동네를 싸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하시모토에게 당한 것만이 아니라 주재소장에게 다시 당해 기분들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특히 장칠문은 중간 책임자로서 겹치기 추궁의 표적이 되다시피 해 이만저만 독이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놈에 안창남인지 바깥창남인지 어디 그놈 노래만 불러봐라. 아새끼덜언 말헐 것도 없고 부모덜꺼정 줄줄이 엮어딜일 것잉게.’
장칠문은 누구든 걸려들기를 바라며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이틀 동안을 발이 부르트게 싸돌아다녀도 그 노래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 노래는 고사하고 어른들 사이에서 한창 나돌았던 안창남의 이야기도 씻은 듯이 들리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죽산면의 호랑이 하시모토가 여섯 아이들에게 채찍질을 해댔으니 그 소문은 이미 쫙 퍼져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하시모토가 소작인들에게 어쨌다는 소문은 그날로 면 전체에 퍼지고는 했다. 장칠문은 하시모토 앞에 기세 좋게 내보일 것을 찾지 못해 내가 달고 있었다. 며칠째 허탕을 치고 돌아다닌 장칠문은 지칠 만큼 지쳐 주막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어이, 자네 배가 따땃헝가아?"
주모를 꼬나보는 장칠문의 말꼬리가 묘하게 꼬여 돌아가고 있었다.
"무신 말씸이시당게라? 요런 놈에 시장시런 장시 혀갖고 배 따땃헐 세월이 언제 있간디요. 평상 입에 풀칠허능 것이 본전이제라."
생김 반닥한 중년의 주모는 장칠문의 눈치를 살피며 너스레를 떨었다. 시비조가 분명한 그 말투가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 알아내려는 것이었다.
"나가 보기로넌 아조 배가 따땃헌 것 겉은디이?"
주모를 노려보는 장칠문의 얼굴은 더 고약해지고 있었다.
"음마, 아니랑게라. 저어 머시냐, 나가 무신 잘못헌 것이라도 있다요?"
무슨 트집을 잡히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주모는 먼저 굽히고 들었다. 관리 나부랭이들 성질 거슬러서는 해먹을 수가 없는 장사였던 것이다.
"이놈에 장시 그만 해묵을 챔이여?"
"아이고메, 고것이 무신 베락치는 소리다요. 지가 차석님헌티 멀 서운허게 혔는지 얼렁 말씸허시씨요. 차석님 맘에남 있담사 이년이야 당장 속곳 벌리고 엎어지겄소."
주모가 주루룩 달려와 장칠문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팔을 붙들었다.
"니년 속곳 벌려봤자 곯아빠진 조갑지 아니여."
장칠문이 팔을 뿌리쳤다.
"음마, 조갑지야 살짝 디친 것이 맛이 질이라고 안헙지여? 생짜야 미끈덕거림서 비우만 상허고, 푹 삶아불면 물기도 없이 찔기기만 허고, 짭조름헌 물기 낙낙험서 짠득짠득 씹히는 맛이야 살짝 디친 것이란 말이오. 서른여섯이먼 닥 그 나이 아니겄소."
주모는 비위장 좋게 생긋 웃으면서 눈가에 음한 바람을 일구었다.
"저녁 안직 멀었는디 잡소리 까덜 말고, 요새 어찌서 쓸 만헌 쏘리럴 한마디도 안 알리는 것이제?"
"글안해도 나도 애가 타요. 요새 무신 바람이 불었는지 술 묵으로 오는 사람덜이 팍 줄어불고, 술얼 묵어도 음담이나 까발리고노름 이얘기나 허제 꼬타리 잽힐 시상 이얘기넌 안 헌당게라. 요것이 어쩐 일일게라?"
근심스러운 얼굴의 주모는 오히려 장칠문에게 근심을 풀려고 들었다.
"빌어묵을, 요것들이 인자 백여시가 다 됐당게…"
장칠문은 담배를 꺼내며 투덜거렸다.
"금메 말이오. 하도 닦달얼 당헝게 느느니 눈치뿐인 것 겉드랑게요."
주모는 비위를 맞출 겸 발뺌을 하고 있었다.
"저어, 안에 누구 기신가요? 말 좀 묻겄는디요."
밖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어디럴 찾소?"
길손에 익숙한 주모는 이렇게 말하며 술청문을 열었다.
"저어, 김 참봉댁얼 찾는디요."
"음마, 말로만 듣든 사각모 쓴 대학상 아니시여? 앉은 자리에 풀도 안나는 김 참봉댁언 저짝으로 두 동네럴 더 가야 허요."
"예, 고맙구만요."
그때 장칠문은 주모가 빼꼼하게 열고 있는 술청문을 활작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어이, 거그 서!"
문이 갑자기 열리는 바람에 넘어질 뻔한 주모는 장칠문의 뒤에다 대고 눈을 째지게 흘기며
뭐라고 욕을 해대고 있었다. 몇 걸음을 옮기던 대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대학생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작은 보자기를 든 것은 송중원이었다.
"어찌 그러시오?"
순사가 갑자기 나타나 놀라면서도 송중원은 침착하게 응대했다.
"어찌 그러는지넌 주재소에 가먼 알게 되겄제."
장칠문은 일부러 표정을 고약하게 지으며 송중원의 혁대를 붙들었다.
"아무 잘못헌 것이 없는디 주제소는 왜 가요."
"말이 많혀. 가자면 가는 것이제!"
장칠문은 송중원의 혁대를 잡아 뺐다. 그리고 바리 앞섶을 양쪽으로 힘껏 잡아챘다. 작은 단추들이 와드득 떨어졌다. 송중원은 반사적으로 흘러내리려는 바리를 붙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앞섶을 여몄다.
"걷어채이지 않을라면 부지런히 걸어!"
장칠문은 송중원의 어깻죽지를 치며 앞세웠다.
"체, 또 쌩사람 잡네, 빌어묵을 놈덜."
주모가 술청문을 쾅 닫았다. 송중원은 바지를 거머잡은 채 빨리 걸을 수밖에 없었다. 주재소든 어디든 자신의 꼴을 한시라도 빨리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저런 인종들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종자들인가. 저런 거들이 바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 저런 종자들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는가. 영원히 일본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믿는 것인가. 저런 놈들한테 꼼짝없이 끌려가야 하는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왜 튀어나온 것인가. 조선인은 허위와 공상과 공론만 즐기고 게으르며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으니 이를 반대 방향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 이광수의 주장이었다. 이광수는 왜 저런 못된 인종들을 질타하고 정신차리게 하지 않고 민족 전체를 비하시키고 흉보고 흠집 내고 있는가. 이광수는 3·1운동을 보지도 않았는가. 아니, 지금도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이 안중에 없는 것일까. 이광수는 왜 그따위 글을 쓴 것일까. 그건 바로 일본놈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광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의도나 저의는 무엇일까.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송중원은 견디기 어려운 모독감과 분노 속에서 요새 읽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곱씹고 있었다. 주재소에 도착한 송중원은 소지품부터 전부 꺼내놓아야 했다.
"요것 공산주의 책이제?"
보자기에서 나온 네댓 권의 책을 흩뜨리며 장칠문이 대뜸 말했다. 그의 눈은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오. 보면 알 것 아니겄소."
송중원은 퉁명스럽게 내쏘면서 자신이 왜 잡혀 왔는지를 알았다. 그러면서 속으로 비웃었다.
‘멍청한 놈, 공산주의 서적을 이렇게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어딨냐.’
지난 8월의 단속령이 내려지면서 유학생들은 공산주의 서적 휴대를 각별히 신경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개벽? 요것덜언 다 똑겉은 개벽이고, 요것언 또 머시여. 또르스또이 인생론? 요것덜언 다 무신 책이여?"
장칠문이 책들을 뒤적이며 물었다.
"개벽은 잡지이고, 톨스토이 인생론은 인생살이 교훈이오. 다 총독부서 허가헌 책이오."
송중원은 빨리 주재소를 벗어나려고 총독부를 앞세웠다.
"머, 총독부? 공산주의 허는 놈덜이 책껍데기 다른 책으로 바꽈치기 혀서 눈속임허능 것 몰르는지 알어?"
장칠문이 송중원을 꼬나보았다. 송중원은 그만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건 유학생들이 쓰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 방법을 이런 시골 순사까지 알고 있는 건 그동안 많이 검거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나야 공산주의에 관심 없는 사람잉게 얼렁 책 조사럴 해보시오."
송중원은 태연하게 말했다.
"요 책덜언 어찌서 들고 댕겨?"
"빌린 것잉게 갖다줄라고요."
<개벽>은 5월호부터 연재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읽어보려고 빌린 것이었고, 톨스토이 <인생론>은 책값이 비싸 빌려본 것이었다.
"김 참봉 아덜허고 친혀?"
"예, 같은 학교 댕긴 동무요."
"그놈이 공산주의 헌다는 소문인디?"
장칠문은 불쑥 내질렀다. 갑자기 넘겨짚어 반응을 탐지하자는 유도 심문이었다.
"허, 지주 아덜이 공산주의럴 혀요? 갸넌 공산주의럴 너무 싫어혀서 탈이오."
송중원은 장칠문의 의도를 환히 들여다보며 여유 있게 비켜섰다.
"탈이라니? 글먼 공산주의럴 혀야 옳다 그것이여?"
마침내 장칠문은 말꼬리를 잡아챘다.
"아니, 그것이 아니고......"
"아니기넌 머시가 아니여. 니눔이 공산주의럴 전헐라고 혀도 안된다 그 말이 아니고 머시여."
"그것이 아니고 공산주의럴 그만치 싫어한단 말 아니겄소."
"잡소리 말어!"
장칠문은 고함과 함께 송중원의 얼굴을 후려쳤다.
"일어나! 니눔이 바로 공산주의자여."
장칠문은 송중원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유치장에 떼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