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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2-6

20. 책 바람 서당 바람

소슬바람이 싸늘바람으로 바뀌면서 들녘에서는 가을걷이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손 바쁜 계절에 듣도 보도 못했던 얄궂은 바람이 동네마다 불고 있었다. 물산공진회 바람이 잠잠해지는가 했더니 그 바람 끝에서 다시 일어난 고무신 바람이었다. 고무신 바람에 들린 것은 특히 여자들이었고, 여자들 중에서도 처녀들이었다. 한마을에서 고무신을 신은 사람은 한둘에 지나지 않았다. 그 새로 나온 희한한 물건은 값이 너무 비싸 부자가 아니고서는 가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그 귀한 물건은 그야말로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거리였고 구경거리였다. 그 누구나 고무신을 손에 쥐었다 하면 이리저리 매만져보고, 엎어서 밑바닥을 보고, 고개를 돌려가며 코안을 들여다보고, 주인의 눈길을 피해 잡아 늘여보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랑말랑하고 보들보들하고 매끈하게 생긴 고무신을 신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나 처녀들로서는 고무신 바람에 들릴 만도 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손가락마다 봉선화 물을 들이는 처녀들에게 고무신은 너무 욕심나는 물건일 수밖에 없었다. 고무신은 우선 그 매끈하고 맵시 고운 생김만으로도 짚신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건 비단과 무명의 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겉 맵시만이 처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었다. 고무신의 말랑말랑하고 보들보들한 부드러움은 억세고 뻣뻣한 짚신에 비해 발 매듭 매듭을 흉잡이게 하거나 군살이 박이게 하지 않을 것이 자명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발도 편하고, 물도 스며들지 않으니 탐을 내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일본 세상이 된 다음에 그런 바람은 여러 차례 불어왔었다. 석유와 함께 불어닥친 호롱 바람, 무명을 똥값으로 만든 광목 바람, 엿을 천한 먹거리로 몰아붙인 눈깔사탕 바람, 가마를 조롱거리로 삼은 인력거 바람, 윷놀이를 싱겁고 맥빠지게 만든 화투 바람, 걷는 것을 한없이 따분하게 만든 자전거 바람 같은 것들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 바람들은 그래도 고무신 바람처럼 거세지는 않았다. 고무신 바람은 여자들이 가세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세차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갑순이 혼인날 받았담서?"

"그런갑네."

"고무신 받게 된디야?"

"피이, 지 팔자에 그런 호강 어찌혀."

어느덧 처녀들 사이에서는 그런 말이 오가게 되었다. 고무신은 어느새 체단의 곁다리 물목으로 올라 있었고, 고무신을 받는 것이 시집 잘 가는 호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처녀들은 친정에서 얻어 신지 못한 고무신을 시집가면서나 얻어 신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고무신 바람이 추수철과 맞물려 더욱 거세질수록 살판이 나서 덩실거리는 건 장사꾼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덕풍은 손님들이 고무신을 찾을 때마다 우거지상을 해가지고 돈 버는 것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가 일본 상품이 많이 팔려 조선사람들의 돈이 일본기업을 살찌우게 되는 것을 못마땅해해서 그러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거기에는 아무에게나 털어놓을 수 없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장덕풍은 물산 공진회에서 고무신을 보자마자 눈에 불이 환하게 켜지는 것을 느꼈다. 앞을 훤하게 비춰주는 그 불빛은 등잔 불빛은 물론 아니었고 그렇다고 심지 돋운 호롱불빛도 아니었다. 그 밝은 불빛은 바로 경성에서 보게 된 대낮같이 밝은 전등 불빛이었다.

저것을 잡으면 떼부자가 되겠다!

사람들이 한두 켤레를 사느라고 법석을 피우는 속에서 그의 장사꾼 촉수는 순간적으로 떼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고 있었다. 그가 일순간에 내린 판단은 군산지역 도매상 독점권을 갖는 것이었다. 그 생각은 다음 순간 전북지역 전체를 장악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 부푼 꿈의 확대에 따라그는 가슴이 벌떡거려 숨을 쉴 수조차 없을 지경이 되었다. 전북지역 독점 도매권만 따내게 된다면 거부가 될 길은 훤히 내다보였던 것이다.

그래, 돈 놓고 돈 먹기다!

그는 선돈은 얼마를 내든지 간에 기어이 도매권을 차지할 작정을 하고 그날로 고무신 회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의 설레고 부푼 꿈은 일본사람의 단 한마디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도매상은 조센징에겐 안 맡긴다."

물론 장덕풍은 그 한마디를 듣고 그냥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돈은 얼마든지 내겠으니 자기 하나만 어찌 봐달라고 사정했다. 전북 전역이 안 되면 그럼 군산만이라도 허락해 달라고 애걸했다. 그래도 안 되어 뒷돈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꿈은 끝내 깨지고 말았다.

"요런 날강도 겉은 왜놈에 새끼덜아, 느그놈덜만 똘똘 뭉쳐 수워케 돈 묵겄다 그것이제. 요런 순 개좆겉은 쪽바리 새끼던, 날베락이나 맞어 다 꼬드라져라."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장덕풍은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구 소리를 질러대며 그 건물을 향해 에엑 퉤! 카악 퉤! 침을 뱉어대고 있었다. 장덕풍은 일본인 도매상에서 고무신을 받아다가 팔기는 하면서도 고무신 바람이 잦아들 줄 모르고 거세질수록 남모르게 배알이 뒤틀리고 있었다.

"우선 신기 편허다고 고무신덜 너무 좋아허지 마시오. 우선 묵기넌 꼬감이 달드라고 없는 돈에 과허니 고무신덜 사 신으면 누구 부자 맨들어 주는지 아시오? 일본 사람덜만 배불리는 것이오."

아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신세호가 간곡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신세호의 그 말은 한낱 강풍에 휩쓸려 날아가는 하나의 나뭇이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지치지 않고 그 말을 하고 또 했다. 공허의 말마따나 총을 들고 싸우는 것만이 독립투쟁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사람, 한사람이 정신을 똑바르게 차리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힘이 곧 독립투쟁이고 나라 찾는 지름길이라고 믿었다. 신세로는 생활 속에서 그런 정신을 일깨워 나아가는 것이 자신이 해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만주에서 고생하고 있는 송수익에게 면목이 서고, 최소한이나마 사람 노릇이 될 겄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신세호가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하고 있는 큰일은 따로 있었다. 그는 낮에 가을걷이를 하느라 상리꾼의 일을 해내면서도 밤에는 또 늦게까지 불을 밝혀놓고 있었다. 그는 벌써 몇 개월째 밤잠을 줄이고 있었다.

"요것이 이번 걸음에 챙개온 책덜 중에 한나요. 송 장군님이 특히 신선생님께 일독얼 권허신 책이구만요. 헌디,아조 에로운 부탁얼 디레야허겄는 디 어쩌실란지......다른 것이 아니라. 이 책덜얼 산지사방에 널리 퍼쳐야 되겄는디 왜놈덜 감시가 신해 많이 갖고 들어올 수가 없는 처지 안닌게라. 요 한 권얼 널리 퍼치는 방도야 딱 한 가지, 필사본얼 맨드는 것뿐인디요. 어치께, 신 선생님께서 도와주실 수가 있으실랑가 어쩔랑가......"

만주를 다녀온 공허가 책 한 권을 내놓고 몹시 어려워하며 꺼낸 말이었다.

"그래야지요, 허고말고요."

신세호는 흔쾌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종이에 싸인 책을 풀어보았다. 책의 제목은 <시한독립사>였다.

"만주서 이런 책도 맨드는구만요. 이런 책얼 누가 짓고, 어디서 맨드는가요?"

신세로는 책장을 조심스럽게 넘기며 물었다. 그제목과 한께 손끝에서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야아, 신채호 박은식 겉은 여러지사덜이 짓고, 대종교서 비용러 댄다드만요. 대종교서 대는 비용이야다 만주서 고상허는 동포덜이 한 푼, 두 푼 낸 돈덜이 모타진 것이체라."

", 그렇구만요, 참말로 이 책언 예사 책이 아니로구만요."

신세호는 책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아 감회 어린 얼굴로 내려다보다가는,

"이런 책얼 스님 아니 딴사람덜도 딜여오고 있는가요?"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야아, 각지에 골고로 퍼지게 허고 있다드만이라. 압록강이고 두만강 넘나드는 사람들 중에서 왜놈 앞잽이에 밀정도 많제만 나라 찾겄다고 나슨 사람덜도 수두룩헝게요"

공허는 언제나처럼 두둑하고 넉넉하게 웃어 보였다.

그날 이후로 신세호는 밤마다 책을 베끼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써 내려가며 정성을 다했다. 그 필사본으로 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조선의 역사를 젊은이들에게 가르치게 된다는 것이었다. 총독부가 모든 학교에서 조선의 역사를 일체 가르치지 못하게 강압하고, 일본말을 국어라 해서 조선말보다 두 배 이상 교육시킨 지는 이미 5년이 넘은 일이었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그건 두말할 것 없이 조선사람으로서의 넋을 말살하여 독립 의지를 갖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모든 조선사람의 얼을 빼버리고 그 대신 일본 것들을 주입시켜 저희들에게 순종하는 종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총독부는 겉으로는 총칼을 휘둘러 조선사람들을 위협하고 속으로는 교육을 통해서 조선의 정신을 말살시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역사책의 필사본을 은밀하게 만들고 있었다. 신세호는 농사일로 쌓은 피곤과 졸음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에 더없는 보람과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신세호는 만일에 대비해서 날마다 쓴 것을 철저하게 간수했다. 헛간 잿더미 뒤에 상자를 숨겨놓고 그날그날 쓴 것을 거기다 감추었다. 그리고 밤마다 필사할 때는 방문을 잠그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책상에는 한문책을 펼쳐놓고, 방바닥에는 한문을 반쯤 써 내린 한지를 펼쳐놓았다. 언제 누가 들이닥치더라도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게 되어 있었다.

추수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석류들이 무슨 절박한 소리라도 지르듯 쩍쩍 벌어져 있었고 감나무 높은 가지에 매달린 감들이 농익어 있었다. 낙엽과 함께 지푸라기들이 날리는 바람결에 겨울이 묻어나고 있었다. 신세호는 추수를 마무리하면 딸 하엽이의 혼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가을걷이를 마치고 혼인을 시키자고 양쪽 집안에서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그 정혼을 하는데 또 문중 어른한테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너는 왜 순탄한 길을 다 두고 꼭 험하고 비뚤어진 길만 골라서 살려고 하느냐고 꾸중이었다. 그 어른들은 서당을 하다 잡혀 들어갔던 일이며, 영 마땅찮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의병대장으로 나서서 주목받고 있는 집, 굳이 애비가 없는 집안과 사돈을 맺을 까닭이 무어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신세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또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것으로 해결책을 삼았다. 신세호는 딸을 혼인시키기 전에 세 권째의 필사를 끝내려고 밤 깊어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신세호는 똑같은 일을 세 번째 하면서도 전혀 지루한 것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안광이 지배를 철한다>는 말의 의미를 깊이 실감하고 있었다. 필사를 해 갈수록 역사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깊어지며,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들을 다시 발견하게 되면서 역사를 조망하는 눈이 자꾸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즐거움이고 참맛이 아닐 수 없었다. 천 번 써서 익히지 못할 글자가 없고, 백번 읽어 해득이 안 될 책이 없다는 말은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말이었다. 그 훈계에 따라 천자문을 익히고 논어며 맹자를 읽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책들을 읽는 것은 지고한 말씀들의 암기일 뿐이었지 스스로가 쑥쑥 자라나는 즐거움이나 눈이 환히 열리는 기쁨은 맛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송수익이가 왜 자신에게 그 책을 읽으라고 했는지도 신세호는 깊이 깨닫고 있었다.

"신선생님, 신 선생님......"

봉창이 둔하게 울리면서 억누른 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시오?"

신세호는 공허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에서는 이런 소리가 나갔다. 책의 행간을 따라가며 넓게 펼쳐져 있던 생각을 수습하는 상에 입버릇이 먼저 나갔던 것이다.

"지 공허구만요."

"예에 , 어여 드시지요."

신세호는 문고리를 벗기며 오늘이 그믐께이거나 초순께일 거라고 무심히 보내고 있는 날짜를 되짚어 보았다. 공허는 언제나 달빛마저 피해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실한 몸으로 먹물 같은 어둠을 밟으면서도 발소리라고는 내는 일이 없었다. 호랑이가 하룻밤에 2백 리를 뛰면서도 나뭇잎 하나 스치지 않는다더니, 신세호는 공허에게서 그런 경이를 느끼고 있었다.

"이 밤중에 ......진지넌 어찌셨느가요."

신세호는 공허를 맞아들이며 밥걱정부터 했다.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사람들은 으레 끼니를 거르기가 예사였다.

"그간에 무고허신 게라? 아무리 땡초라도 밤중 예절언 갖추고 댕기능마요."

공허는 배를 약간 내밀어 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예에, 어여 자리 허시지요."

신세호는 방바닥에 펼쳐놓은 한지를 치우며 자리를 권했다.

"아이고, 이 야심헌 시각꺼정 저걸 쓰시니라고, 지가 선생님헌티 너무 과중헌 일얼 부탁혀 갖고 원......"

공허는 자리를 잡고 앉으며 돌덩어리 같은 느낌의 빡빡머리를 송구스럽다는 듯 문질렀다.

"무신 말씸얼 그리......추수철이 인자 제우 세 권얼 끝내가고 있으니 스님 뵐 면목이 없구만요."

"아니, 시방 무신 말씸이시다요? 세 권이나 끝내가고 있다고라?"

바랑을 벗던 공허의 동작이 멎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 이삼일이면 세 권째가 막음되느만요."

"아이고, 신 선생님, 요것이 어쩌크름 된 일이시당가요. 한 권만 부탁디린 것인디 세 권써기나 허셨으니 그간에 얼매나 많이 밤잠 못 지무시고 고상허셨는게라. 이 땡초가 필얼 잡았드라면 한 권도 못했을 것인디, 참말로 기맥히구만요. 신 선생님언 독립군이 압록강변 수비대 초소 불 질른 것보담도 큰일얼 허셨고, 총 수십 자리럴 구해 온 것보담도 더 큰일얼 허셨구만이라. 너무 놀래서 통 믿기덜 않는구만요."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 채 상기된 공허의 얼굴에는 감격이 넘치고 있었다.

"너무 과찬이시구만요."

신세호는 공허의 그 감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간에 고생해 온 보람을 확인하는 동시에 가슴이 찡 울리는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저 승려는 어찌 저리도 감격하는가......자기의 잇속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일에 진정으로 감격하는 그 모습에서 신세호는 난생처음으로 가을하늘처럼 맑고 신새벽의 바람결처럼 신선한 인간의 순수를 느끼고 있었다. 그 감동과 함께 떠오르는 또 하나의 얼굴이 송수익이었다. 송수익이 떠오르는 순간 신세호는 어김없이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 일얼 송 장군님이 아시면 얼매나 좋아라 허시고 고마워 서시겄능게라."

고허는 아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구만요. 목심 내걸고 나슨 분덜 앞이서 지가 웅색시러우니 그만 과찬얼 거두시지요."

신세호는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으로 차 있는 자신의 마음을 꼬집히는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야아......근디, 슬픈 소식이 있구만이라."

공허는 앉음새를 고치고는

"채응언 장군이 결국 그저께 사형얼 당했구만요."

그의 목소리가 침통했다.

"결국 그리 됐구만요......"

신세호의 어깨도 처져 내렸다. 신세호가 놀라지 않는 건 채응언 장군이 지난 7월에 성천에서 체포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의병장의 체포는 곧 사형이었다. 국내에 남았던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 장군은 7월에 체포되어 114일에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참 그 양반 속얼 알 수가 없는 일이제라. 방이 나붙었을 적에 압록강얼 건넜어야 헐 일인디, 무신 생각얼 허다가 일 되는 것인지......"

공허는 채응언 장군이 체포되었을 때 했던 말을 또 중얼거리고 있었다. 신세호도 공허의 생각에 동감이었다. 그러나 말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분이 현상금 걸린 방이 나붙은 것을 몰랐을 리 없고, 목숨이 내걸린 문제 앞에서 그분이 압록강 건너는 것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체포의 위기를 피하지 않은 그분의 깊은 속뜻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요것 보시게라."

공허가 바랑에서 책을 꺼내 신세호 앞에 내밀었다.

", 한국통사......?"

"야아, 박은식 선생께서 작년에 지으신 것이 금년에 상해서 찍혀 나온 것이라는디, 메칠 전에 거그서 배 타고 숨어든 사람헌티 받었구만요."

"이 책도 필사허능가요?"

"아니구만이라. 우선 신 선생님보톰 읽으시고 딴 디로 돌릴 참이구만요."

"이리 귀헌 책얼 구해다 주셔서 지 눈얼 크게 뜨게 혀주시닌 고맙기 한량없구만요."

신세호는 <한국의 아픈 역사>라는 제목을 다시 음미하며 인사를 갖추었다.

"아이고, 고맙기넌 무신...... 지가 당연허니 헐 일인디요. 근디, 다 쓰신 필사본언 오늘 밤에 가지갈 수 있겄는 게라?"

"이리 오실지 모르고 안직 책으로 매지럴 못혔느디요."

신세호는 당황하고 미안쩍어 했다.

", 그것이야 걱정 마시게라. 책 매는 것이야 절밥 얻어묵은 이 땡초가 잘 허는구만요. 글씨야 선생님보담 어림없어도 기운이야 지가 더 씨고라."

공허는 또 넉넉하게 웃음 지었다.

"예에. 그러시면 아조 잘되었구만요. 헌디, 그 책얼 젊은 사람덜헌티 어찌 갤칠라는지......"

신세호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야아, 근년에 서당도 온 나라 안에 엄청시리 생개나고, 야학이란 것도 생기기 시작허덜 않는게라. 그 선생덜 중에 젊고 뜻이 굳은 사람덜이 연줄로 째여 있구만요. 서당도 겉보기만 서당이제 속이야 예날 서당이 아닝게 그런 사람덜이 잘 갤칠 것이구만이라."

"예에......학교로야 손얼 뻗칠 수 없응게 천상 그 방도럴 택해야는디......그것이 얼매나 비밀이 유지될라는지......"

신세호는 자신의 경우를 생각하며 근심이 깊어지고 있었다.

"고것이 질로 에로운 일이라 선생덜이 수완얼 잘 부리게 혀야제라. 사랑방서 옛날 이얘기 허디끼 표 안 나게 살살 풀어서 갤치는 방도가 생기겄지요. 그러다가 들키먼 잽혀 들어가고, 또 담 사람이 이어받아서 갤치는 것이고라"

공허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꿋꿋한 투지가 넘치고 있었다.

"그나저나 왜놈덜 기세넌 날이 갈수록 사나와지고, 생각 짜른 사람덜언 편히 살겄다고 왜놈 편으로 돌아스니 앞잽이덜언 불어나고, 뜻 굳은 사람덜 앞날이 그저 가시밭길이지요."

신세호는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왜놈덜이 아무리 가시밭길 아니라 훨훨 타는 불길얼 맨글어도 조선얼 아조 죽이지넌 못허는구만이라. 시방 죽어있는 조선이야 껍데기 조선이제 알갱이 조선언 펄펄 살아있덜 않은감요. 조선사람덜이 두 눈 똑바라지게 뜨고 사라있응 게 조선이야 죽은 것이 아니제라. 왜놈덜이 친일배 빼놓고 조선사람덜얼 다 죽여야 조선얼 영영 죽이는 것인디, 고것이야 참말로 영영 안 되는 일 아니겄능가요?"

신세호는 문득 긴장했다. 조선사람이 다 죽어야 조선이 죽는다.! 그 말은 무쇠보다 굳은 의지인 동시에 근원이 확고한 투쟁 사상이었던 것이다.

"스님 말씸이 백번 옳구만요. 지넌 그리넌 생각지 못허고 있었구만요."

신세호는 가망보다는 절망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그건 스스로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는 것인 동시에 그 생각을 바꾸고자 하는 욕구이기도 했다.

"그 생각이야 지 혼자서 똑별나게 해낸 생각이 아니구만이라."

공허는 겸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글먼 독립투쟁에 나슨 분덜언 다 그리 생각허시는가요?"

"야아, 거지반 그리 생각허제라. 그래야 심이 솟고 믿을 디가 생기니꼐요."

신세호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런 확고한 믿음이 없이는 하나뿐인 목숨을 내걸 수 없을 것이었다.그러나.......그 믿음은 또 어디서 발원하는 것인가.......그는 다시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이만 떠야겄구만요."

공허는 바랑을 집어드렁ㅆ다.

"예에, 필사본언 헛간에다 모셔놔서......"

신세호는 바삐 일어나며 공허에게 앉아 있으라는 손짓을 하고는 방을 나갔다. 신세호는 곧 큼직한 나무상자를 안고 들어왔다. 상자 안에는 잔글씨 적힌 종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신세호는그 종이들을 세 덩어리로 해서 하나씩 공허에게 넘겼다. 공허는 그것을 받아 바랑에 눌러 넣었다. 세 덩어리는 바랑이 팽팽해지도록 가득 찼다. 공허가 그렇게 배부른 바랑을 진 것은 드문 일이었다. 공허는 바랑에서 밀려 나온 목탁과 목탁채를 집어 들었다. 공허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사립을 나섰고, 신세호도 어디로 가냐고 묻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공허는 한달음에 김제 포교당으로 갔다. 자정이 넘은 어둠 속에 포교당의 풍경만 청아한 울림을 내며 깨어 있었다. 공허는 거침없이 담을 넘었다.

"도림, 도림!"

공허는 승방문을 질벅거렸다. 풍경소리만 맑고 가녀리게 달그랑거릴 뿐 방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이런, 어떤 과부 꿈얼 꾸는가 어찌능가......"

공허는 투덜거리고는,

"어이 도림, 도림!"

그는 목소리를 약간 높이며 방문도 좀 더 세게 흔들었다.

"누구여, 누구시오?"

"이 야심헌 밤중에 여그 찾어든 말허는 즘생이 누구겄어."

", 공허 아니라고!"

잠 걷힌 소리에 반가움이 묻어났다. 곧이어 문고리가 벗겨졌다.

"염불 도적질얼 얼매나 허고 살면 중놈이 이리 문고리 걸어야 잠이 오는고."

어두움 방으로 들어서며 공허는 걸쭉하게 쏟아놓고 있었다.

"아이고, 저놈에 입. 시상이 자꼬 험헤 간 게 도적놈덜이 절담이고 여염집 담이고 구별얼 안 헌단 말이시."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대꾸하는 말이었다.

", 도적도 중생이여. 그런 맘 작고 중생 제도허겄다고 포교당에나 앉어 있는 것이여? 자네도 갈 디 없는 땡초시."

"아이고, 득도 대사 공허 시님 사한이시구만이라. 이 땡초 죽비 곤장으로 벌허시옵소서."

방안에 불이 확 밝아졌다. 그 성냥 불꽃 앞에서 승려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그간에 무고헌가?"

공허가 배부른 바랑을 벗으며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느 넋 나간 여자헌티 무신 객소리럴 혔간디 바랑이 그리 애럴 뱄당가?"

공허와는 다르게 몸집이 가는 편이고 얼굴이 잔잔해 보이는 도림이 등잔에 불을 당겼다.

", 어떤 부잣집 맏메누리가 시집온 지 3년이 넘도록 아럴 못 밴다고 걱정이 태산이라 목탁 한바탕 쳐주고 쌀얼 반 섬이나 받았네."

공허는 능청스럽게 받아넘기며 바랑 아가리를 열었다.

"그려, 배만 불렀제 무겁게 뵈덜 안 혀 그것인지 알었구만."

도림은 바랑을 끌어당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을 얼렁 책으로 매야 쓰겄네."

"아이고, 명필인디, 누구여?"

바랑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본 도림은 놀란 눈으로 공허를 쳐다보았다.

"그런 것 묻는 것 아니라닝게"

공허는 매정하다 싶게 잘라 말했다.

"그려, 아는 것이 병이라고 혔제."

도림은 머쓱해져 다시 글씨를 들여다보면서,

"요런 명필도 인자 소양 없이 되았구마."

마치 잘 쓴 글씨를 시샘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무신 소리여?"

"무신 소리기넌. 공허 자네가 원허는 등사기 살 목돈이 생겼단 것이제."

"머시여? 그런 목돈이 어디서 생겨?"

공허가 화들짝 반가워했다.

"자네 말대로 아그 못 낳는 부잣집 맏메누리 백일 불공 들어왔네."

도림이 씨익 웃었다.

"이 사람 보소, 날 탁해가능가 깅건 소리 살살 잘허네. 영험 있다고 소문난 바우뎅이도 없고, 몸 크신 부처님 뫼신 큰절도 아닌 요런 손바닥만헌 포교당에 무신 생남 백일기도여?"

", 절 등진 지 언제디도 눈치 한나넌 빨라갖고......"

도림은 친근한 눈흘김을 보내고는,

"일이 될라고 부잣집 사십구재가 둘이나 들었단 말이시. 등사기 살 욕심으로 돈얼 짱짱허니 불렀제. 극락왕생 비는 자손 정성이야 동 안 애끼고 불공 올리는 것 아니겄냐고 살살 겁 믹여 감서 말이시."

"옳여, 허든 중에 아조 잘헌 일이네그려. 자네도 인자 중질 지대로 허네."

공허는 무릎을 치며 웃었다.

"이 사람아, 그것이 바로 더 볼 것 없는 땡초질이제. 잘허기넌 머시가 잘혀. 부처님이 내래다보시고 지옥 보낼 점 한나 또 찍으셨제."

"어허 이 사람아, 그 정바대시. 도림이 저놈이 나라 휘허고 동포 위허니라고 애 많이 쓴다고 허는 부처님 말씸이 나 귀에넌 다 딛기는디?"

"그리 좋아라 헐 일만이 아니여. 고약시런 일이 생겼응게."

"고약시런 일!"

공허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

"불교 핵교가 한양에 생길 것이란 소문 자네도 들었제?"

"그것이야 지랄 겉은 소문이제."

공허는 쏘아보듯 하고 있었다.

"그 핵교가 불교중앙핵교란 이름으로 인가가 났다네."

"근디......?"

"헌디 말이시, 본사서 나보고 그 핵교에 가서 공부허라고 지목혔당게."

"머시여? 그려서 머시라고 혔능가?"

공허는 벌컥 화를 냈다.

"무신 소리여 시방? 우리 겉은 말짜 처지에 본사에 대고 찍소리나 헐 수 있게 되야 있능가?"

도림은 어이없어하며 반문했다.

"참말로 고약시럽게 되았네, 그거. 불교진흥횐지 불교 망쪼흰지가 결국 다 된 우리 잔치에 코 빠치고 나스네. 빌어묵을, 중질 엎어뿔 수도 없고, 이 일얼 어찌야 쓸랑고?"

공허는 점점 더 화가 기어올라 숨을 씩씩거렸다.

"안직 여유가 있응게 더 두고봄서 어찌 바져나오는 방도럴 찾어보드라고. 근디 말이시, 빠질라고 애럴 써도 안될 수가 있응게 자네넌 딴 도반얼 새로 찾아보도록 허고."

"차암, 요것이 다 자네가 너무 착실허니 공부 열성으로 히서 생긴 탈이시. 자네가 나 반만 나대고 걸렁기렷어도 그런 디 뽑힐 리가 있겄능가."

공허는 어깨를 부리며 한숨을 쉬고는,

"몰르겄네, 자네가 맘에도 없는 그 핵교럴 갤칠라고 들먼 어쩔 것이여."

그는 도림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것이야 안직 몰릉게 그때 가서 보드라고. 나도 우리 불교가 왠놈 식으로 변해 가는 것언 죽어도 싫은 게."

"그것이야 보나 마나 뻔헌 일 아니여. 왜놈덜이 즈글덜 절여 그저그 지어대는 것이야 때래부시지 못헌다고 허드라도 사찰령얼 공포했을 적에 중덜이 한 덩어리로 뭉쳐갖고 들고 일어나얄 것 아니겄어. 근대 찍소리도 안 허고 총독부가 시키는 대로 따라감서 토지조사사업으로 절마동 땅부자가 되지 안 했냔 말이여. 돈 받아묵은 놈 큰소리 못 치드라고 그리 뒷다리 잽혀서 큰절 주지덜이 맨글어낸 것이 불교진흥회니 그것이 일진회허고 머시가 달를 것이 있어. 그것으로 볼장 다 본 것이제. 거그서 돈 모아갖고 세운 핵교서 배일얼 갤치겄어, 친일얼 갤치겄어. 나라 망허고 인자 불교꺼정 망허는 판이시."

공허는 또 짙은 안개 같은 느낌의 한숨을 도해냈다.

"아서, 아서, 불교진흥회가 총독부 놀음인 거시야 자명해도 그것얼 일진회허고 똑같이 말허는 것언 과헌 일이시. 불교진흥회가 어찌 돌아간다고 히도 중덜 전부가 친일배로 놀아나는 것언 아닝게. 두고 봄서 우리 헐 일얼 해 나가먼 될 것잉마. 어찌 보먼 진흥회가 생겨나서 먹물 옷 걸치고 우리겉은 일 허기가 더 쉴허고 안전헐란지도 모를 일 아니겄어?"

"그려, 그러기도 허겄제."

공허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자 한숨 자소."

도림이 목침을 공허 앞으로 밀었다.

"등사기넌 언제 구허제?"

공허는 아직 잘 생각이 없다는 듯 목침을 허벅지 밑에 받치며 물었다.

"돈이야 있응게 낼이라도 사딜이먼 되제. 자네 오기럴 기둘린 것잉게 낼이라도 나가 나가서 사오먼 안괘겄능가. 전주고 군산 나가먼 있을 것 아니라고."

"거 무신 태평헌 소리여? 전주고 군산서 구했다가넌 큰탈 나네."

공허가 펄쩍 뛰었다.

"무신 큰탈이 나?"

도림이 어리둥절해서 공허를 쳐다보았다.

"허어 이 사람, 항시 말혀도 목탁 치는 기분에 취해 있단 말이여. 전주고 군산에 등사기가 있어봤자 한두 대일 것이고, 그 비싼 등사기럴 사먼 금세 표가 나고 의심 살 것 아니냔 말이시."

"장사꾼덜이야 비싼 물건 팔아묵어 이문 크게 냄기먼 됐제 그렇게꺼정 머리가 돌란가?"

"딴소리 말어. 이 시상에 믿을 놈 하나또 없응게. 등사기개나 갖춘 놈이먼 왜놈이고 조선놈이고 거상에 들 것인디, 그런 놈덜언 싹 다 왜놈 앞잽이로 생각허먼 실수가 없네."

"글먼 어디서 구허제?"

"어디넌 어디여, 그 잘난 경성이제."

"경성? 누가 가제?"

"돈만 내놓소. 그 덕에 이 땡초가 총독부 귀경 한 분 더 헐랑게."

공허는 목소리에 가락을 넣으며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장삼이나 벗고 자소."

"어허, 저 사람 상시럽기넌. 요 안 깔고 이불 안 덮고 자는 잠도 있등가."

도림은 픽 웃으며 공허의 바랑을 끌어당겼다. 그는 종이뭉치 세 개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한 뭉치가 책 한 권 분량이라는 것을 그는 금방 알아챘다. 도림은 등잔을 가까이 끌어당겨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겨 갔다. 세필로 쓴 잔글씨 하나하나에는 더할 수 없는 정성이 깃들어있었다. 잔글씨인데도 획 하나 흐트러진 데가 없었고, 선 하나 뭉개진 것이 없었다. 도림은 전신이 찌르르 울리는 전율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는 수없이 많은 목판이 떠올랐다. 합천 해인사에 봉안된 팔만대장경의 목판들이었다. 칠팔 년 전 행각을 나서서 팔만대장경의 목판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전신을 휩쓸고 돌던 전율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글씨들의 균형 잡힌 미려함도 놀라웠고, 그 글씨들을 어느 한군데 흠내지 않고 나무판에 새긴 그 정교한 솜씨야말로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자를 모두 양각한 것에 탄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양각을 하되 그냥 나무판을 파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글자들의 행간과 행간 사이사이를 마치 밭고랑 치듯 양쪽 글자에서 행간의 중간지점으로 비탈지게 깎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유심히 들여다보면 행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위아래 자간은 물론이고 한 글자의 획간까지 빠짐없이 비탈 깎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바탕을 직각으로 깎아낸 보통 인장과는 그 모양이 전혀 달랐다. 그 어려운 비탈 깎기를 한 연유가 기막혔다. 목판이 서로 씻기거나 부딪쳐도 비탈진 바탕의 힘을 받아 글자의 획들이 금가거나 깨져나가는 것을 막고, 또 판본을 찍어낸 때마다 글자들이 받게 되는 압력을 비탈진 바탕이 떠받치게 해서 글자들의 획 하나하나가 누르는 힘을 고루 받고, 쉽게 마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그 지혜도 놀라운 데다가 한층 더 놀라운 것은 비탈 깎기를 한 솜씨였다. 칼질을 직각으로 한 다음 나머지 바탕을 파내버리는 것보다 행간, 자간, 획간의 중간지점을 잡아 양쪽에서 비탈지게 깎아내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 비탈의 어느 한 군데에도 나무 부스러기가 붙어 있거나 흠집이나 있지 않았다. 두 번 손대지 않고 단 한 번의 칼질로 끝낸 것처럼 매끈하고 말끔한 비탈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행간과 행간의 양쪽 비탈들은 매끈한 칼자국들이 마치 잔물결치듯 하며 나뭇결과 함께 고아한 무늬로 드러나고 있었다. 글씨에서부터 새김까지 그건 단순히 기술이거나 솜씨라고만 할 수가 없었다. 기술이라면 신기요, 솜씨라면 신술이라고 해야 옳았다. 그러나 그건 엄연히 사람의 손으로,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건 다름 아니라 사람의 온 정성을 다 바친 정성의 덩어리였다. 수많은 필생들과 각수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있는 정성을 다 쏟아부은 모습이 7백 년의 세월을 넘어 글자 한자, 한자에 생생히 살아있었다. 그 세월을 뛰어넘은 정서의 생동감이 섬뜩섬뜩 전율을 일으켰다. 그들이 목판에 쏟은 정성은 바로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염원이었다. 도림은 바랑에서 꺼낸 필사본에서 똑같은 염원을 느꼈던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적어 내려간 그 글씨들에는 너무나 진한 정성이 배어 있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기계인쇄로 책들이 찍혀 나오고, 간편한 등사기로도 같은 내용을 세 차례씩이나 쓴 것이 아닌가. 그 미련할 만큼 독한 정성에 도림은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나라 되찾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어느 선비가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바친 정성을 도림은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도림은 필사본 뭉치들을 정성스럽게 안아 벽장으로 옮겼다. 그리고 말코지에 걸린 수건을 내렸다. 새벽예불 시각이었다. 공허는 코를 드렁드렁 골고 있었다. 공허는 느직하게 일어나 아침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자네 저녁밥 굶었든갑제?"

도림은 신세호가 필사한 것을 책으로 매면서 공허에게 눈길을 돌렸다.

"실답잖기넌, 나가 예불언 걸러도 끄니 걸르는 것 봤능가?"

공허는 태연스럽게 대꾸하며 끄윽 트림을 했다.

"저 징헌 놈에 배통. 절밥 그리 축내먼 결국 허리 휘는 것언 누구여?"

"누구넌 누구여, 중생이제."

공허는 씨익 웃으며 단 입맛을 다셨다.

"몰르면 밉지나 않제."

"아니제, 그리 다 암서 옳은 일에 기운 쓴 게 이쁘고 또 이쁘제."

"허 참, 자네 입얼 누가 당혀."

도림은 헛웃음을 흘리고는,

"근디, 사람덜 살기넌 날로 달로 에로와져 가는디 무신 가망이 있기넌 있는겨?"

그는 손놀림을 멈추며 진지하게 물었다.

"어째, 자네 맘이 바람얼 탄가?"

공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냉엄해졌다.

"무신 소리여, 답답헝게 묻는 것이제."

도림이 공허를 쏘아보았다.

"답답할 것없는 일이구마. 큰 강이 얼어붙었다고 그 밑으로 물이 안 흘르등가? 이치가 다 그런 것이여. 거죽만 얼어붙은 것이제 속으로야 다 살어서 움직기리고 있단 말이여. 왜놈덜이 어찌서 자고 경찰주재소고 헌병 파견소럴 늘궈 나가고 있겄능가? 조선사람덜이 다 순종허는 디도 그러겄어? 방방곡곡에서 자네나 나겉이 표 안 나게 싸우고 있는 사람덜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얼 한시도 잊어불지 말어. 답답해허먼 맘이 급해지고, 맘이 급해지먼 일얼 망치는 법잉게."

"그려, 자네 말이 맞기넌 헌디...... 근디 말이여, 자네넌 항시 아실아실허고 위태위태헌 일얼 허고 댕김스로도 어찌 그리 유들유들허고 태평시러운지 알 도리가 없단 말이여."

도림은 공허를 두고 신세호와 다름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허, 참새가 어이 대붕에 뜻얼 알며, 땡초가 어이 득도승에 경지럴 알랴."

공허는 헛기침을 하며 수염을 쓰다듬는 시늉을 하고는,

"보소, 퇘깽이럴 잡을 때허고 호랭이럴 잡을 때허고가 달른 법이고, 뒷간에 가는 것 허고 천리 길얼 가는 것 허고가 달른 법 아니드라고. 호랭이럴 잡으로 나슨 포수가 느긋허니 맘 묵고 숨죽이고 소리 죽임서 찔기게 참덜 못허고 퇘깽이몰이 허디끼 성질 급허게 소리질름서 방정맞게 나대면 어찌 되제. 지 성질에 지 심만 파허고 호랠이헌티 지가 어디 있는지 갤차줘서 호랭이 밥이 되고 만단 말이시. 천리 길얼 나슨 사람도 매일반이여. 급허니 뒷간 가디끼 설레발 쳤다가넌 10리도 못 가서 발병 나는 것이네."

그의 말은 그저 담담했다.

", 도사가 따로 없네. 근디, 만주 쪽에서넌 무신 일이 되기넌 되는가?"

"글씨, 고상덜이 말로 다헐 수가 없제. 싸울 만헌 사람덜언 의병으로 나서서 태반이 죽었응게 남은 사람덜 모아 한편 짝에서 싸우고, 또 한편 짝으로넌 군대럴 길러내고 있는디, 그러잔게 질로 다급헌 것이 군자금 아니겄어. 천상 이 짝에서 돈얼 구해야허는디, 부자 놈덜이 선서히 내놔야 말이제. 원체로 욕심 많은 게 부자 된 놈덜인디다가, 토지조사 통에 다 친일파로 돌아섰으니"

도림은 고개를 무겁게 주억거렸다. 공허는 점심을 먹기 전까지 도림과 함께 책을 맸다. 그리고 점심을 뚝딱 먹어치우고는 곧 네 활개를 펴고는 잠이 들었다. 도림이 깨워서야 눈을 뜬 공허는 저녁밥을 또 맛있게 먹어댔다.

"인자 살살 움지기려 볼끄나......"

밥상을 물리며 공허는 중얼거렸다.

"돈 여그 있네."

도림이 돈을 꺼내놓았다.

"요 돈으로 경성 진고개 왜년 기생집 찾어가서 한바탕 회포나 풀어야 쓰겄다."

공허는 돈을 덥석 집으며 시부렁거렸다.

"하먼, 좋제. 하로밤 득도허는 맛보기로야 톡톡헐 것잉마."

도림이 공허를 마주 보며 웃었다. 공허는 두 권의 두툼한 필사본을 바랑에 챙겨가지고 일어섰다. 박은 어둠이 짚어져 있었다. 밤바람이 썰렁한 속에 풍경소리가 애잔했다.

"일이 잘 안 풀려 자네가 뜨게 되먼 뒤에 올 당주승얼 듯 맞는 사람으로 골르는 것에 맘 써야 되덜 안컸어?"

공허는 포교당을 나서기 전에 도림에게 낮고 묵직한 소리로 말했다.

"그려, 나도 그리 생각허고 있네. 가먼 언제나 보게 될랑고?"

"요분에야 금세 와야제. 돈 안 띠묵은 것 물건으로 딱 봬야 쓴 게."

"그려, 항시 조심허고 이."

도림은 공허의 어깨를 툭 쳤다.

공허는 전주 쪽으로 길을 잡았다. 신작로를 따라가지 않고 용지면과 이서면을 가로지르는 달구지길을 택했다. 공허는 밤에도 신작로를 이용하는 법이 없었다. 어떤 위험이든지 미리 막고 피하자는 것이었다. 경찰 주재소나 헌병파견대는 신작로 가까이에 많았다. 더구나 오늘 전주로 나가는 데 달구지길은 신작로보다 절반이나 가까운 지름길이었다. 공허는 내일 전주에서 한양행 기차를 타기 전까지 해야 할 일들을 이미 정리해 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은 반대쪽 죽산면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또 하시모토가 떠올라 있었다. 그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그는 하시모토를 없애버릴 작정을 했던 것이다. 자신의 일행을 함정에 빠뜨린 그 교활한 놈을 그대로 살려둘 수가 없었다. 그놈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농토를 차지하고, 조선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왜놈 지주만이 아니었다. 그놈의 흉계로 그날 밤 동지 하나가 죽어갔던 것이다. 그놈이 동지 하나를 죽였으니 그놈도 마땅히 죽어가야 했다. 그러나 그동안 기회가 맞아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놈은 송아지만 한 개를 집 앞뒤에다 키우고 있었다. 제 놈이 한 짓을 잊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용지면으로 들어선 공허는 부교리의 최유강을 찾아갔다. 공허는 최유강의 사랑채에 불이 밝혀진 것을 확인하고는 고샅 양쪽을 살폈다.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토담을 넘어갔다.

"최 선생 기신가요? 공허 왔구만요."

공허는 마루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이내 방문이 열렸다.

"시님, 오셨구만요. 어여 오르시지요."

반가움이 넘치는 낮은 소리였다.

"그간 무고허신가요? 갈질 멀어 그냥 이대로 가야겄구만요."

공허는 빠른 동작으로 바랑을 벗었다.

"아이고 시님, 이런 법이 있능가요. 오래 안 기시게 헐 것이니 잠시만 올랐다 가셔야제, 이거 서운히서......"

최유강이 무작정 바랑을 끌어당겼다.

"오늘 질이 아조 먼디 이거......"

공허는 중얼거리면서도 바랑을 따라 마루로 올라설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윽하고 은은하게 번져있는 차 향기였다. 그러나 모든 미약한 향내가 그렇듯 차 향기도 방으로 들어설 때 언뜻 스칠 뿐 다시 맡으려고 하면 이미 자취가 없었다. 최유강은 차를 무척이나 즐겼다. 담배가 차 맛을 해친다 하여 담배를 입에 대지 않을 정도였다.

"가실 질이 멀수록 차나 한잔허셔야 갈증도 안 생기고, 노독도 덜허시지요."

탕건을 단정하게 슨 최유강이 보료 위에 자리 잡고 앉으며 잔잔하게 웃었다.

"노시님덜허고넌 달르게 소승언 차맛얼 잘 몰르는구만요."

공허는 방석에 앉으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최유강의 단정한 모습처럼 언제나 말끔하게 정돈된 방이었다.

"시님께서넌 일찍허니 고난에 길로 나스셨으니......이 에로운 시절에 차나 마시고 있는 지 겉은 사람이 죄인이기도 허지요."

최유강이 놋쇠 화로 위에 올려놓은 무쇠 주전자를 내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이고 원, 무신 말씸이신 게라. 최 선생님겉이만 허시면야......"

잘못했다가는 덜된 양반들을 싸잡아 욕을 하게 될 것 같아 공허는 말을 얼버무리며 바랑을 풀었다. 그리고 필사본 한 권을 꺼냈다.

"시님, 차가 따끈허구만요."

최유강이 찻잔을 공허 앞으로 옮겼다.

"아이고, 황송시럽게......"

공허는 찻잔을 받아 앞에 놓고는,

"요것이 만주서 새로 들어온 역사 책이구만요. 아그덜헌티 갤차주시라고......"

필사본을 내밀었다.

"예에, 이 귀헌 책얼......열성으로 읽어 아그덜허티 전허겄구만요."

정중하게 책을 받아든 최유강은 천천히 한 장씩 넘겼다. 그의 입이 차츰 굳게 다물리면서 평소에도 단단해 보이는 얼굴에 강단기가 드러났고, 미간이 좁혀지면서 유독 짙은 눈썹이 꼬리를 세우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양반들 절반만 저 사람 같았어도......공허는 그를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었다.

"시님, 차 식는구만요."

최유강은 책을 문갑 서랍에 조심스럽게 넣고는 공허에게 차를 권했다. 공허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찻잔을 기울일 때 벌써 코끝에 스민 향기가 입속에서 번지는 향기와 어우러지고 있었다. 떠름한 듯 쌉싸래하고 달큼하면서 풋풋한 향그러움이 그윽하고 은은하고 아슴하게 퍼지며서 정신을 아늑하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요것도 해남 대흥사 것인가요?"

다산의 책을 탐독하고 다산을 높게 받드는 최유강은 차도 다산이 즐겨 마신 해남 대흥사 것을 제일로 쳤던 것이다.

", 대흥사 차도 인자 왜놈덜 등쌀에 다 망쳐지고 있구만요. 왜놈덜언 대흥사만이 아니고 이 땅에 쓸 만헌 것언 남아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요."

최유강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제라, 들판서 쌀 훑어가고, 산중서 큰 나무덜 찍어가고, 산속 파헤쳐 금 캐내 가고, 개성 인삼에 남도 차꺼정 다 즈그덜 맘대로 아니겄능가요."

공허는 찻잔을 비웠다. 최유강이 차를 따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왜놈덜이 천시럽게 녹차, 녹차 해댐서 우리 차에 환장헐 만도 허지요. 조선허고 일본허고넌 애초에 기후가 달른디다가, 짐에 쩌내는 일본 차허고 불에 덖어내는 조선 차허고넌 그 맛이 천야지차닝게요. 왜놈덜, 상시럽게 녹차라니......"

최유강은 차를 일본사람들이 <녹차>라고 부르는 것이 못내 마땅찮은 모양이었다.

"예에......서당에 아그덜언 많이 모여드는가요?"

", 한문만 억지로 갤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지 아그덜이 자고 늘고, 언문고 산술도 잘덜 개치는디다가, 역사 이얘기럴 질로 좋아허는구만요."

근년에 새로 생기는 많은 서당들은 옛날의 서당이 아니었다. 젊은 선생들이 한글은 물론이고 산술과 역사가지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 신식서당이 도처에서 생겨나고 있는 것은 새로 일어나고 있는 물결이었다. 공허는 그 물결을 따라 믿을 만한 선생들에게 역사책을 공급하고 있었다.

"소승 이만......또 뵙겄구만요."

공허는 양반의 격식에 맞추어 꾸면진 최유강의 사랑을 나섰다. 문갑 위의 필통이며 난초, 사방탁자의 책들이며 귀풍스러운 백자기, 비단 보료와 방석 같은 것들이 신세호의 사랑과는 너무 대조적이엇다. 그 현격한 차이는 바로 재산의 차이였다. 그러나 최유강은 소작인들에게 인심을 얻을 만큼 후한 지주였다.

"시님, 요거 얼매 안 되는디 노자에......"

최유강이 공허의 손에 돈을 쥐여주었다.

"아니, 올 때마동 이러시먼......"

"시님이 어디 사사로이 쓰시는가요."

발 빠른 공허는 바로 이서면으로 접어들었다. 텅 빈 들녘의 어둠 속에 찬바람만 가득했다. 모둠모둠한 먼 불빛들이 별들처럼 깜빡거리고 있었다. 공허는 금평리 안재한의 집을 찾아들었다. 안재한의 집은 최유강의 집에 못지않게 규모가 컸지만 지붕은 기와가 아니라 초가였다.

"시님, 아무리 가실 질이 멀어도 담배 한 대짬만 들었다가 사셔야지요."

"손님얼 슨 자리서 뜨게 허는 인정이 어딨능가요."

안재한은 공허를 막무가내로 잡아끌었다. 정 많은 성품 그대로였다. 공허는 또 마음이 허물어지며 마루로 올라섰다.

"시님 오시기럴 기둘리고 있었구만요."

안재한은 둥글넓적하고 편안하게 생긴 얼굴에 웃음을 담으며 문갑 서랍을 열었다. 최유강과는 다른 인상이었다.

"지 발로 얼추 맞친 것인디 시님 발에 어쩔랑가 몰르겄구만요."

안재한이 내놓은 것은 고무신이었다.

"아니, 이 비싼 것얼!"

너무 뜻밖이라 공허는 깜짝 놀랐다.

"요것이 왜놈덜 물건이라 시님이 싫어하실지 암스로도 샀구만요. 요것언 호사허자는 것이 아니고, 삼동언 닥치고 시님언 많이 걸으시는디 물새고 발 시림 짚세기로 발에 일음 백히고 히서 발병이 나먼 어찌 되겄는가요. 아무리 왜놈 물건이라 해도 유용허게 잘만 써서 우리가 목적허는 바럴 성취해 나가는 것이 더 현명헌 처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저리른 일이구만요."

안재한은 공허가 고무신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그 나름의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다. 공허는 좌선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내려뜬 채 묵묵히 앉아 있었다. 공허는 그 말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건 일본군 수비대나 주재소를 습격해 탈취한 총으로 일본놈들을 다시 죽이고 있는 것이나 별로 다를 것 없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야아......생각 짚으신 말씸이구만요."

공허는 안재한에게 웃음을 보내며 고무신을 끌어당겼다. 공허는 때 전 버선발을 고무신에 밀어 넣었다. 고무신은 낙낙하게 잘 맞았다.

"똑 잰 것맨치로 잘 맞는구만요."

공허는 안재한의 세심한 마음씀에 가슴 뭉클한 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고, 처만다행허니 잘되았구만요."

안재한은 너무 좋아하며 안도의 숨을 푹 내쉬었다. 그 숨결에 잘 맞지 않았을까 봐 그동안 마음졸였음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새로 온 책이구만요."

공허는 안재한에게 필사본을 내밀었다.

"예에, 기둘리고 있었구만요."

"소승 염치없이 이 고무신 신고 떠날랑마요."

고무신을 들고 일어나며 공허가 한 말이었다.

"그래 주시먼 더 고마울 것이 없구만요."

안재한이 더없이 흡족하게 웃었다. 고무신을 신은 공허는 다시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빨리 걸으면서도 공허의 신경은 두 발에 쏠려 있었다. 무엇을 자꾸 헛딛는 것도 같고, 발이 계속 휘뚝거리는것도 같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낯선 어색함과 함께 새롭게 느껴지는 기분도 있었다. 짚신에 비해 가뿐하고, 맺히는 매듭매듭이 없고, 발이 한결 편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고무신은 짚신보다 모양새가 더 멋지고 예뻤다. 그리고 물이 안 새들면서 질기기도 훨씬 질기다는 것이었다.

이거 참 큰일났구나!

공허는 새로운 절망감을 느꼈다. 모양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실용성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날이 갈수록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게 되어있었다. 그 파장은 인력으로 가로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더 문제는 고무신이 무쇠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번 고무신에 길들여진 발이 다시 짚신을 신을 리 없는 일이었다. 결국 조선사람들의 돈이 끝도 없이 일본사람들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가게 되어있었다. 조선사람들이 고무신 만드는 기술을 터득하지 못하는 한 가격도 일본사람들 멋대로 매길 판이었다. 아니, 조선사람들이 그 기술을 터득한들 무엇하겠는가! 회사령이 미리 공포되어 있었다. 조선사람들이 아무리 회사를 차리려고 해도 총독부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공염불이었다. 그런데 고무신 한 가지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 고무신처럼 희한한 물건들이 얼마나 많이 생겨날지 모를 일이었다. 조선사람들은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속까지 파먹히며 일본을 부강하게 만들어주게 되어있었다. 공허는 암담한 심정으로 한숨을 토해냈다. 조선사람들아, 정신차리고 일본 물건들을 사지 마라! 그의 가슴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부르짖음이었다. 공허는 전주를 휘돌아 지나쳤다. 내일 전주에서 기차를 탈 작정이었다. 이리는 일부러 피해 다녔다. 이리는 호남선 철도공사를 하면서 만들어낸 도회지라 군산과 똑같이 일본사람들 판이었다. 그리고 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그런지 경찰과 헌병들의 검문도 심했다. 전주를 지나자 동쪽으로 나타나는 산들이 나지막하면서도 줄기를 이루기 시작했다. 소백산맥 큰 줄기에서 가지 쳐 뻗어 내려온 실가지들이었다. 공허는 검게 웅크린 낮춤낮춤한 산들을 벗 삼으며 20여 리 남짓 걸어 죽절리에 당도했다.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 시작에 불이 밝혀져 있을 리 없었다. 공허는 발소리 죽이며 걸어 마루에 무릎을 대고 지게문을 가만가만 흔들었다. 잠이 깊은지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다시 문틀을 똑똑 두들겼다.

"누구요? 오시었소?"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나요, 나왔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서로 그렇게 주고받게 된 말이었다. 공허는 고무신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방안의 온기와 함께 비릿풋풋한 살내음이 물큰 풍겨왔다.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불 쓸 것 없소."

공허는 바랑과 함께 옷을 벗어댔다. 금방 알몸이 된 공허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홍씨를 싸안았다. 바르르 떨리는 홍씨의 몸도 달라져 있었다. 공허는 홍씨의 잠자리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홍씨도 거드는 몸짓을 했다. 오목조목한 홍씨의 알몸을 끌어안았다.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여자의 몸에서 살내음이 진하게 풍겨났다. 공허는 부르르 떨며 여자를 뉘었다. 공허의 성급한 몸짓을 받아안으며 여자의 몸은 뜨거운 꽃으로 벙그러졌다.

"아으......으응......"

무슨 진액이 묻어나는 것 같은 여자의 뜨겁고 꾼꾼한 소리와 여자의 속살에서 휘도는 현란한 발에 실리며 공허는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여자가 공허를 끌어안았다.

"인자 가지 말어요, 가지 말어요......"

여자의 숨 가쁜 소리였다.

"그려, 그려......"

공허의 헉헉거리는 소리가 화답했다.

"참말로 가지 말어요, 가지 말어요......"

여자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그려, 그려......"

그 울음에 공허의 몸은 더욱 타오르고 있었다. 타오르다가 마침내 폭발했다. 공허의 몸은 여자 위에 재로 부서져 내렸다. 공허는 찬물 한 사발을 들이켜고 알몸인 채로 자리에 누웠다. 옆에 눕는 홍씨는 물을 떠 오느라 잠자리옷을 입고 있었다. 공허는 그 옷을 벗겨버렸다. 그리고 홍씨를 감싸안았다. 잠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자리라서 그런지 그때마다 목마르고 아쉬웠다. 홍씨는 몸을 작게 오그리며 공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공허는 귀엽고 작은 새가 보듬기는 느낌을 받으며 팔로는 부족해 다리로도 홍씨의 포동한 몸을 정겨웁게 싸안았다.

"저어......지가 시조럴 한 수 지었는디......들어보실랑가요?"

홍씨가 주저하며 속삭인 말이었다.

"시조? 그려, 재주가 어찐가 더디 읊어보드라고."

공허는 문득 놀랐다가 다음 순간 장난스런 기분으로 대꾸했다.

바람이 머문 자리 민들레꽃 피어나네

무심탄 바람도 인연의 씨 심었는데

임 머문 이부자리야 일러 무삼하리오

몸이 나른하게 녹아내리면서 마음도 아슴하게 풀려가고 있던 공허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고것이 무신 소리요?"

불현듯 공허가 토해낸 말이었다. 그러나 그건 물음이 아니었다. 그 말과 함께 공허의 가슴은 쿵 내려앉고 있었다. 홍씨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공허가 놀라서 홍씨의 어깨를 젖히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는 약간 벌어져 있었다. 홍씨는 공허의 등을 감싸 안으며 자신의 몸을 꼭 붙여왔다. 공허는 그것이 대답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공허는 그때서야 퍼뜩 깨달았다. 아까

몸을 섞으면서 자꾸 가지 말라고 되외었던 말이었다. 그때 무심결에 들어넘겼던 말이 또 헤어져야 할 정이 아쉬워 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은가......공허는 암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이사럴 해야 되겄구만요......"

홍씨의 가느다란 소리였다.

"무신 소리여?"

"이 동네서넌 몸얼 못 푸니게요."

"......"

"아무도 몰르는 동네로 가면 유복자가 되는구만요."

"......"

"아무 말씸 안 디리고 그냥 뜰라고도 생각혔었는디......그리 되먼 시님 맘 질정 없어 허시는 일에 해럴 입힐랑가도 모르고......영영 생이별얼 허기 싫은 욕심도 동허고......"

"......"

홍씨의 말을 따라 공허는 홍씨를 점점 더 세게 끌어안고 있었다.

"이 일에 아무 맘도 쓰시지 않어도 되는구만요. 지가 바래는 것언 그저 지끔꺼지 뵈것맨치로 앞으로도 뵙는 욕심분이니게요."

"......"

"시님언 업보럴 맨들었다 생각허덜 마시고, 지헌티 큰 보시 허신 것잉게 맘 훌훌 털으시씨요. 지넌 평상얼 의지하고 살 핏줄을 얻어 부처님 가피럴 입었응게요."

"어디, 이사 갈 동네넌 물색혔소?"

공허는 목이 메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공허는 자신을 송두리째 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야아, 말씸디리겄구만요."

홍씨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21. 만주벌에 뜨는 샛별들

장닭이 홰를 치며 우렁차게 목청을 뽑기 시작했다. 감골댁은 그나마 실핏 들었던 잠을 깼다.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온갖 생각들이 그대로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 생각들은 마음대로 털어낼 수도 없고 잊어버릴 수도 없는 근심의 샘으로 가슴 깊이 고여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소에는 잊은 듯 지냈지만 어젯밤에는 두레박질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오늘 길 떠날 일을 앞두고 지난날들의 온갖 맺히고 엉킨 일들이 줄지어 엮어졌던 것이다. 감골댁은 수국이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가만가만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엄미, 더 자제 멀라고 발써 일어나고 그렁가. 채비넌 나가 다 헐 것잉마."

수국이가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 잠기운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음마, 니 깨 있었디냐?"

감골댁은 얼결에 이렇게 말하며, 수국이도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국이는 동생 대근이가 군관학교에 다니는 것을 더 없이 자랑스러워해 왔었다. 그런데 오늘이 바로 대근이가 군관학교를 졸업하는 날이니 잠을 제대로 잤을 리가 없었다.

"엄니, 더 눠 있으소. 나가 다 알아서 챙길 것잉게."

수국이는 어머니를 눕히려고 했다.

"아니다, 아니여. 딴 집서덜 먼첨 나스먼 그것이 무신 염치다냐. 필녀가 당장 들이닥칠란지도 몰른다."

", 그럴란지도 몰르겄네. 필녀넌 대근이가 군관 되는 것얼 나보담도 더 좋아라 허닝게."

수국이는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몰르겄다, 그 일이 좋아허기만 허게 잘헌 일일란지 어쩔란지......"

감골댁은 관솔에 불을 당기며 하르르 한숨을 쉬었다.

"엄니, 이적지 그 맘 못 없애고 지니고 있능가. 송 장군님이 들으시먼 엄니 아조 이뻐라 허시겄는디."

수국이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아니, 아니여. 입에나 몰르는 구녕이 뚫렸다냐 어쩐다냐. 어찌 그리 헛말이 새고 그런지 몰르겄다......."

감골댁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간 말에 놀라며 이렇게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건 마음에 없는 헛말이 아니었다. 간밤에 지나간 여러 가지 일들과 함께 제일 마음 쓰며 되작거렸던 생각이었다. 그 근심스러운 생각이 마음에 가득 차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넘쳐났던 것이다. 감골댁은 딸 보기에 민망해서 얼른 방을 나섰다. 새벽 냉기가 선뜩하게 목을 감았다. 감골댁은 얼른 팔짱을 끼고 부르르 떨며 만주 냄새를 물큰 맡았다. 만주 냄새는 끈적한 노린내 같기도 했고 느끼한 기름내 같기도 했다. 그 비위 거슬리는 이상야릇한 냄새를 처음에는 누구나 다 맡았다. 그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반년이 가고 1년이 넘고 하면서 사람들은 그 냄새를 맡지 못하게 변해 갔다. 나이가 젊을수록 더 빨리 변했다. 그러나 감골댁은 3년이 되도록 그 냄새를 처음과 다름없이 맡고 있었다. 감골댁은 4월이 되어도 봄을 느낄 수 없이 진눈깨비가 내리는 만주 땅이 싫었고, 그 역겨운 냄새는 더욱이나 싫었다. 감골댁은 찬물에 머리를 감았다. 땔감을 아끼느라고 등골 서늘해지는 차가움을 참아냈다. 남들까지 경사 났다고 좋아하는 일에 에미가 머리를 안 감을 수는 없었다. 막내 대근이가 어느덧 장성해서 군관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경사는 경사였다. 그러나 왜놈들하고 맞대거리하며 싸워야 하는 독립군 군관이라는 것이 마음 무거웠다. 큰아들하고 생이별이 된 마당에 대근이는 막내이면서 장자였다. 남편을 그리 잃고, 큰아들도 그렇게 빼앗겼는데 막내아들마저 왜놈들 앞에 내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장가들어 농사나 지으면서 집안 지켜나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그런 속마음은 드러낼 수가 없었다. 돌아가는 형편이 여자의 좁은 소견머리라고 흉이나 잡히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장본인도 군관학교에 들어가기로 딱 작정을 했고, 송 장군부터 시작해서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손뼉을 쳐댔다. 여자들도 그보다 더장한 일은 없다며 입을 모았고, 심지어 수국이까지도 대근이의 기를 돋우고 나섰던 것이다. 어젯밤까지도 그 일이 잘된 것인지 어쩐지 남편에게 수없이 물었지만 남편은 아무런 응답이 없는 채 닭이 울었다. 감골댁은 머리를 빗질하며 또 한숨을 지었다. 자신의 팔자가 생각할수록 시름겨울 뿐이었다. 남편이 제 명대로 살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자식들마저 제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가슴 아렸다. 큰아들 생이별에, 큰딸 보름이는 과부가 되었고, 막내딸 수국이는 몸을 망쳐버린 처녀 아닌 처녀였다. 거기다가 막내아들까지 장가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고 총을 들고 나서게 생겼으니 마음은 조마조마하고 위태위태했다. 다섯 자식들 중에 궁하나마 그저 모양 갖추고 사는 것은 둘째 딸 정분이 뿐이었다. 감골댁은 막내아들 대근이의 일은 또 그러려니 하며 접어둘 수도 있었다. 만주 땅으로 떼 밀려온 조선사람들은 한 가지 생각만은 다 똑같았다. 어서 왜놈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젊은 사내들은 그 일에 앞장서나서야 한다는 게 만주 땅에 퍼져 있는 기운이었다. 내 자식 보존할 욕심으로 그 물결을 가로막고 나설 염치는 없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대근이가 남편의 원수를 갚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수국이를 생각하면 앞날이 암담할 뿐이었다. 너나없이 봇짐 지고 떠도는 신세들이라 마땅한 혼처도 없었지만 수국이는 아예 혼인 말을 비치지도 못하게 했다. 몸을 망친 것을 큰 죄로 생각하고 있었고, 남자라면 겁부터 내면서 진저리를 쳤다. 얼마나 험하게 당했으면 저러랴 싶어 감골댁은 딸이 한없이 가엾고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홀몸으로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대로 시집을 보냈으면 아이 셋은 낳았을 스물세 살 나이가 되어있었다. 이만저만 쇤 죽순이 아니었다. 이대로 일이 년을 보내면 총각한테 시집가기는 영 틀릴 판이었다. 감골댁은 빗질을 멈추며 손바닥으로 가슴을 눌렀다. 그 생각을 하자 또 가슴이 벌떡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국이가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감골댁은 그런 심란한 생각을 털어내며 서둘러 쪽을 쪘다.

"수국아, 인자사 서러지여?"

언제나 목청 높은 필녀가 어두운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니넌 다 끝낸 것이여?"

수국이는 관솔 불빛 아래서 반색했다.

"끝내기넌 머시가 끝내라. 선머시매맨치로 그냥 방구석에 처박아뒀제."

아내 필녀의 뒤를 따르고 있는 배두성이가 마땅찮은 어조로 흉잡듯 했다.

"하이고 참, 벨 꼬라지 다 보겄네. 남정네 못난 것이 지 예편네 넘헌티 숭보는 것이라등마 그 말이 딱 들어맞네그랴. 나가 헐 일 그러그나 말그나 무신 간섭이여, 간섭이."

필녀는 구슬이라도 또르르 굴리는 것처럼 카랑카랑한 소리로 한달음에 말을 해치웠다. 좀 늘어지는 것 같은 배두성의 말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조심성 전혀 없는 필녀의 그런 말을 듣고도 배두성은 더 이상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말로 이길 재간이 없는 데다가 필녀의 기분이 꼬여 있어서 배두성은 미리 알아서 피하고 있었다.

"아줌니, 얼매나 좋으시요, 맘이 둥둥 드제라?"

방으로 들어선 필녀는 감골댁에게 인사를 차렸다.

"몰르겄네, 존지 어쩐지. 요리덜 앉소."

감골댁은 웃음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것이 얼매나 장헌 일인디요. 에롭기로 소문난 고초 다 이겨내고 당당허니 군관이 된 것인디. 중도에 작파헌 못난 물건에 비허먼 대근이야 장허고 장헌 남자제라."

필녀는 대근이만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사람 누군가를 흉잡고 있었다.

"말 그리 고약시리 허덜 말어. 그 골머리 아픈 공부 안 허고도 총만 잘 맞히고 밀정놈덜 잘만 잡아낸게."

배두성이의 불뚱스러운 말이었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필녀가 바락 내쏘았다.

"그런 멍청헌 소리 허덜 말어, 모지래게!"

배두성이는 대근이와 함께 신흥중학교에 들어갔었다. 그러나 배두성이는 중도에 공부를 잘파하고 말았다. 나이 들어 공부에 흥미도 없는 데다가 내용이 너무 어려워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편의 그 못난 짓이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창피스럽고 부끄러워 필녀는 한동안 병을 앓듯 했었다. 그 일로 필녀는 남편을 더욱 싸늘하게 대하게 되었다

"필녀야......"

수국이가 필녀를 나직하게 부르며 눈짓했다. 수국이와 눈길이 마주친 필녀는 배두성이 쪽으로 눈을 흘기며 무슨 욕을 하는지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두성이네가 발써 왔능갑네?"

지삼출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얼렁 가드라고, 대장님 기둘리신디."

필녀가 발딱 몸을일으켰다. 언제나 송수익을 끔찍하게 받드는 필녀다운 행동이었다.

"그려, 그것이 좋겄구만......"

곰방대를 빼들고 앉으려다 말고 지삼출은 엉거주춤 다시 허리를 폈다. 그들은 모두 일어섰다. 흐린 불빛 속에서도 그들의 차림은 모두 말쑥했다. 입던 옷이나마 다 새로 빨아 입었던 것이다. 만주로 건너와서 송수익이 변한 것을 보고 따라서 상투를 잘라버린 지삼출은 어엿하게 무명 두루마기까지 차려입고 있었다.

"지샌언 두루매기 있었습디여?"

그냥 조끼 바람인 자기 차림이 마음에 걸리는지 배두성이가 뚜벅 물었다.

"어디가, 거 평안도 박샌허티 빌래 입은 것 아니라고."

", 그런 깅견이 나와야 말이제."

앞서 방을 나서고 있는 필녀의 옹이 박힌 말이었다.

"지기럴, 살짝 잠 갤차줄 일이제."

배두성이는 혀를 차며 궁시러거렸다.

"아니시, 자네야 젊은 게 이대로가 더 좋구만 그러네. 맘쓰지 마소."

감골댁은 일부러 이렇게 말하며 배두성의 넓은 등짝을 두어 번 쳐주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송수익은 그들과 함께 곧 길을 나섰다. 아직도 목청을 뽑고 있는 장닭들이 있는데 어둠이 묽어지면서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밤이 아득하도록 긴 겨울을 지나 날이 빨리 새는 계절로 바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방대근이의 졸업식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송수익이 그들을 만류하고 이해시켰다. 그러지 않아도 왜놈들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들의 감시가 심해지고 있으니 너무 표를 내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런 형편을 누구나 잘 알고 있어서 사람들은 대근이가 집으로 돌아오면 만나기로 하고 아쉬움을 달랬다. 지삼출은 대근이네와 한집안처럼 절친해서 뽑혔고, 배두성이는 대근이와 함께 입학했었던 연고로 뽑히게 되니 송수익과 감골댁, 수국이를 합해서 다섯 사람이 되었다. 6인승 마차를 타기로 했는데 한 자리가 남았을 뿐이었다.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나선 것이 필녀였다. 자기가 대장님을 모시고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필녀의 그 당당함에 다른 사람들은 두말없이 물러서고 말았다. 필녀가 대장님을 위하겠다고 나서면 그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송수익은 또 난처하고 쑥스럽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한 자리를 필녀에게 넘겨주었다. 통화에서 또 북쪽으로 합니하 물줄기를 따라 학교가 있는 황림까지는 백여 리였다. 그 길을 걷자면 꼬박 왕복 이틀에 여관비도 써야 했다. 그 돈에 좀 더 보태서 마차를 타게 되면 날짜도 하루 줄이고 걷는 고생 없이 모처럼 호강도 한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송수익은 감골댁을 위해서 그렇게 마음을 썼다. 그러나 그건 아들을 독립군으로 내놓은 감골댁의 마음에 비하면 너무 작고 하잘것없는 성의일 뿐이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송수익은 감골댁에게 더없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방대근이가 아무리 신흥중학에 가겠다고 나서도 어머니인 감골댁이 사생결단 가로막았더라면 일이 어려웠을 터였다. 그런데 감골댁은 평소에 말수 적은 대로 별다른 말이 없이 아들을 학교로 떠나보냈던 것이다.

신흥중학은 이름 그대로 겉보기로는 그저 흔한 조선인 학교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름을 그렇게 평범하게 붙인 것은 일본 밀정들이나 중국관청의 주목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속으로는 독립군을 양성해 내고 있는 <무관학교>라는 것을 알 만한 조선사람들은 말 없는 속에서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신흥중학의 숨겨져 있는 진짜 이름은 <신흥무관학교>였던것이다. 그 내막을 알고 있는 어떤 부모들은 신흥중학에 가겠다는 자식들의 뜻을 완강하게 꺾고 나서기도 했다. 신흥중학에 간다는 것은 바로 독립군으로 나선다는 것이었고, 독립군이 되는 것은 곧 하나뿐인 목숨을 내건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 다투듯 걸음이 빨랐다. 희끄무레한 어둠살이 안개발 스러지듯 사라져 가면서 푸릇푸릇 봄기운 돋는 들과 산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들녘에 드문드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스름도 미처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에 들에 나선 사람들은 보나마나 조선사람들이었다. 논갈이를 하려고 나온 것일 터였다. 밭농사를 지을 줄밖에 모르는 만주 사람들은 그렇게 일찍 들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나무들은 아직 꽃도 잎도 피울 기색이라고는 없는데 풀들이 먼저 봄인 것을 알고 돋아나고 있었다. 감골댁은 나이가 제일 많으면서도 팔을 휘둘러대며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감골댁의 걸음이 빠르기도 했지만그 누구도 감골댁을 앞지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엄니 참 기운 좋다. 백 살꺼정언 식은 죽 묵기겄다."

팔녀가 감골댁을 턱짓하며 히히 웃었다.

"그것도 아니여. 만주 온 뒤로 기운이 많이 떨어져 부렀어. 밤이먼 얼매나 앓는 소리럴 한다고. 농새일도 심들고 근심도 많고 히서 그럴 것이여. 시방 저것이야 아덜 만내로 간당게 헛기운이 솟는 것 아니겄냐."

수국이는 슬픈 기색의 한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필녀는 그만 더 말을 못 하고 들녘 멀리 눈길을 보냈다. 그들은 해가 뜨기 직전에 통화에 당도했다. 송수익이 나서서 마차 삯을 흥정했다. 편도가 아니라 왕복을 한다는 조건으로 송수익은 돈을 마구 깎아댔고, 마부는 하루벌이가 톡톡하게 된 판이라 밀리고 있었다.

"좋소, 그리합시다. 중국말을 잘해서 깎아주는 줄이나 아시오."

이렇게 토를 단 마부는 누런 이를 드러내고 꼭 말처럼 헤벌쭉하게 웃었다. 송수익도 마주 보고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만주에 오자마자 중국말과 일본말을 배우기로 작정하고 나섰던 송수익의 중국말 실력은 이제 의사소통에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일본말은 말 상대가 없어서 별로 진전이 되지 않았다.

마차는 합니하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면서 줄기차게 달리고 있었다. 유하현 동쪽 지역을 북에서 남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합니하는 하사코 논농사를 지으려고 하는 조선사람들을 유하현에 묶어두는 한몫을 하는 강이었다. 마차는 한나절을 달려 황림에 도착했다. 초원에 넓게 자리잡은 학교에는 벌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모두가 한복 차림인 조선사람들이었다. 졸업식은 정오에 시작되었다. 먼길을 와야 하는 학부형들을 생각해서 정한 시간이었다. 졸업생은 40여 명에 학부형들은 2백 명도 넘었다. 교실 두 개를 터서 만든 강당이 넘쳐 사람들은 복도에까지 빡빡하게 들어찼다. 식단 위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제일 먼저 연단에 오른 사람은 교장 여준이었다. 그는 오늘이 신흥중학 제5회 졸업식인 것을 환기시키면서 먼저, 귀한 자식들을 신흥중학에 보내준 부모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신흥중학의 운영을 위해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교육회비를 내준 만주의 모든 동포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런 다음, 졸업생들에게 자립 자강을 강조하면서 민족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당부했다. 일찍이 오산학교와 북간도 용정의 서전의숙 교사를 거쳐 여기까지 온 교장 여준이 졸업생들에게 하는 말은 별다른 생각 없이 들으면 그저 평범한 훈화일 뿐이었다. 그러나 장차 독립군 구관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들으면 그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돋쳐 있었고 칼날이 번뜩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축사를 했다. 그들의 말에도 무관학교니 독립군이니 하는 말은 한마디도 섞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말도 유심히 들으면 날이 서 있었고, 피 냄새가 묻어나고 있었다.

교가 합창으로 졸업식이 끝났다. 유별나게 꾸민 것 없이 조촐하면서도 숙연한 졸업식이었다.

졸업생들을 따라 학부형들은 운동장으로 몰려나갔다. 졸업생들이 해산을 하자 마침내 야단법석이 일어났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학부형들이 자기네 자식이며 형제를 찾아 얽히고설키며 이름들을 외쳐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기쁨에 넘친 소란은 오래가지 않고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졸업생들은 가족에게 이끌려 제각기 점심 먹을 자리를 찾아 흩어져 가고 있었다. 방대근이는 감골댁의 차지가 되었다. 감골댁은 자신의 왼손으로 아들의 왼손을 잡고 오른팔로는 아들의 등을 싸안 듯 해서 걷고 있었다. 그런데 방대근이의 몸이며 키가 감골댁에 비해 곱절 가까이나 커서 감골댁의 걸음걸이는 꽤나 어색하고 불편스러워 보였다. 그러면서도 감골댁은고개를 젖혀 그저 아들을 쳐다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런 감골댁의 상기된 얼굴에는 웃음 반, 울음 반인 감격이 넘쳐흐르고 있었고, 눈시울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뒤를 묵묵히 따라가고 있었다.

"아줌니, 인자 맺혔든 정 다 풀렸소?"

넓은 운동장 가에 자리 잡고 앉으며 지삼출이가 감골댁 앞으로 고개를 쑥 빼며 물었다.

"......그려......"

감골댁은 어물거미며 멋쩍은 듯 부끄러운 듯 웃었다.

"아따, 니가 인자 장부가 되야부렀다이. 인자 공허 시님도 만만허겄는디?"

지삼출이가 방대근의 넓은 등짝을 철퍽 쳤다.

"그리 될랑가? 공허 시님이 기셨으면 존 귀경거리가 생길 판이었는디."

필녀가 생글거리며 말을 받았고, 방대근이는 턱을 쓸며 씨익 웃고 있었다.

"주딩이 놀리덜 말고 일이나 거들어!"

배두성이가 필녀에게 불쑥 내질렀다. 감골댁과 수국이는 밥 보퉁이를 끌러 새싹 움터 오르는 마른 풀밭에다 밥상을 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필녀는 남편에게 눈을 째지게 흘겨대며 수국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방대근이는 공허 스님을 생각하고 있었다. 2년 전에 반팔을 잡히고도 팔씨름에 졌던 것이다. 그때의 창피스러움은 아직까지도 선하게 남아 있었다. 공허 스님의 기운이 놀랍기도 했었다. 공허스님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이 못내 서운했다. 이제 반팔이 아니라 맞잡고도 겨룰 자신이 있었고, 그보다는 인정 많고 마음 넓은 스님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자아, 배고픈디 얼렁덜 묵제."

감골댁은 사람들을 둘러보다가는,

"아니, 선상님언 어디 기신겨?"

그때서야 송수익이 없는 걸 알아차리고 있었다.

"아이고, 일찍허니도 찾고 이. 교장 선상님 만내로 가셨구만이라."

지삼출이 다가앉으며 대꾸했다.

"글먼 진지넌?"

"거기서 드신다등만이라."

"아이고, 으쩌까! 선상님 디릴라고 닭얼 한 마리 따로 잡어 왔는디."

신분을 감추기 위해 송수익의 호칭은 <선생님>이었다. 사실 그는 대종교에서 운영하는 소학교 선생이었다. 그러나 그 직업마저도 신분 위장의 목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잘 되았소. 대근이나 많이 믹이씨요. 그간에 배 곯코 살았고, 백두산 바우뎅이가 들어가도 삭힐 나잉게."

"섭허시......, 식기 전에 얼렁덜 묵어."

"더 식으면 얼음뎅이 되라고라."

배두성이가 뚱하게 내놓은 밀이었다.

그 말에 사람들이 와아 웃음을 터뜨렸다. 음식들은 식을 대로 다 식어 있었고, 감골댁의 말은 그저 입에 붙은 말 습관이었던 것이다. 감골댁까지 웃어대는 가운데 필녀만은 싸늘한 얼굴로 배두성이에게 눈총을 쏘고 있었다. 그들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은 조밥도 수수밥도 아니고 하얌 쌀밥이었다. 모두들 참으로 오랜만에 구경하는 쌀밥이었다. 감골댁은 남편의 제삿날에나 짓는 쌀밥을 오늘 지어왔던 것이다. 감골댁은 자기는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아들에게 닭고기를 뜯어주랴, 아들이 좋아하는 반찬을 숟가락 위에 놓아주랴,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수국이는 그런 어머니와 밥을 탐스럽게 먹고 있는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수국이는 오래간만에 마음이 푸근해지고 따스해지는 행복감을 느끼며 동생이 그런 어머니의 시중을 창피해하거나 성가시게 생각하지 않고 달갑게 받아들이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이 들고 남들 앞이라고 해서 동생이 어머니의 시중을 최하거나 면박이라도 주었다면 어머니는 얼마나 서운해하고 서러워했을 것인가. 그들이 밥을 다 먹었을 즈음에 송수익이 돌아왔다.

"아이고, 선상님 진지넌......"

감골댁이 치마를 털며 황급히 일어났다. 감골댁은 송수익 같은 귀한 양반님네가 지기 아들을 위해 먼 길을 와준 것이 그저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 교장 선생님하고 먹었구만요."

송수익은 방대근이 옆에 자리 잡고 앉으며 일어서 있는 모두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모두 동그랗게 자리 잡았다.

"교장 선생님께서 우리 대근이 치하가 자자허시드구나. 학과공부도 열성이지만 특히나 군사, 아니 체조 실기가 타에 모범이 된다고 기꺼워하시더라."

송수익은 <군사훈련>이라고 나오려는 말을 재빨리 체조 실기로 바꾸며 방대근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아이고메, 교장 선상님이 다 우리 대근이럴 아시등게라?"

눈이 휘둥그레진 감골댁은 곧 손바닥이라도 칠 것처럼 반색했다. 어머니와 송수익 사이에 앉아 있는 방대근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더할 수 없이 기쁘고 떳떳했다. 교장 선생님과 송 선생님에게 칭찬을 듣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더없는 영광이고 자랑이었던 것이다.

"쟈가 체조 실기럴 남보담 똑별나게 잘헌 것언 공허 시님 도술 억얼 톡톡허니 본 것인갑구만."

지삼출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체에, 수싯대 풀딱폴딱 뛰어넘고 돌뎅이 요리저리 들어 날르는 것이 머시가 도술이다요. 고런 것이 도술임사 나야 도사 열 번도 외았겄소."

필녀의 입을 삐죽거리는 말이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그 말이 우스운 것이 아니라 억지소리를 하는 필녀가 우스웠던 것이다. 공허와 잘못 사귄 필녀는 공허의 이야기만 나오면 트집을 잡거나 시비를 걸었다. 필녀가 송수익에게 너무 지나칠 만큼 마음을 쓰는 것을 마땅찮아 하면서도 그것을 정면으로 막을 수 없으니까 공허는 엉뚱한 것을 찌르고 들었다. 여자답지 못하게 덜렁댄다느니, 수국이를 본받아 좀 얌전해지라느니 하는 식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 감정을 꾸밀 줄 모르는 필녀 아니더라도 그 어떤 여자든 좋아할 까닭이 없는 일이었다.

"사람이 미와도 말언 바로 히야제. 공허 시님이 챌차준 그것이야 참말로 지대로 된 신체 단련술이고 무술인 것이여."

배두성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내를 공격하고 들었다.

"에계계, 저 문자 쓰는 것 잠 보소."

필녀는 남편에게 비웃음을 뿌렸다. 그러나 필녀는 더 응대할 다른 말이 없기도 했다. 공허가 가르쳐준 수숫대 넘기와 돌 옮기기의 효과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방대근이는 만주로 오자마자 스님처럼 기운이 세고 몸이 날래게 되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졸랐던 것이다. 방대근이는 군산에서 중국 노동자들과 패싸움을 벌이고서 서무룡이는 멀쩡한데 자신만 다친 것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남자로서 서무룡이처럼 기운차게 싸움을 잘하고 싶은데 왠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운 무섭고 한 길이 넘는 담을 예사로 뛰어넘는 공허 스님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만주로 오게 된 것이었다. 방대근이는 꼭 공허 스님처럼 되고 싶었다. 공허가 가르쳐준 것은 수수가 싹이 돋을 때부터 키가 다 자라 수수 알을 달고 고개를 숙일 때까지 하루도 빼지 말고 날마다 100번씩 넘으라고 했다. 그리고 목침 크기의 돌이 한섬 크기의 돌이 될 때까지 날마다 돌을 키워가며 50보 이쪽에서 저쪽으로 하루에 100번씩 옮기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방대근이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다 웃어버렸다. 너무 하찮고 미련스럽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 비웃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허는 껄껄 웃으며 떠나가 버렸다. 그런데 웃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송수익이었다. 송수익은 공허가 떠난 다음 방대근이를 불러 앉혔다.

"니가 진정 기운을 키우고 몸이 날래지기를 바라면 스님의 가르침대로 따라라. 그 깊은 뜻을 몰라서 웃는 것이지 스님 말씀대로 어김없이 열성으로 하기만 하면 너도 반년 만에 스님처럼 되는 것이다. 내가 아침저녁으로 지켜볼 것이니 그리하겠느냐!"

송수익의 말음 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다음 날부터 방대근은 송수익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아침에는 한 뼘 높이의 수수대를 넘고, 저녁에는 목침 크기의 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답답하고 미련한 짓을 보고 누구도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름이 되자 수수대는 키 큰 남가 팔을 뻗어 올린 높이로 자라났다. 방대근이는 그것을 날 듯이 뛰어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방대근이가 들어 옮기고 있는 돌도 보통 자정 둘이서 들어야 할만큼의 크기로 변해 있었다. 그 변화에 굳어진 얼굴을 떨군 것이 처음 웃었던 사람들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먼 하늘을 바라보며 더없이 흡족하게 웃고 있는 사람은 송수익이었다.

"사람이 기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라. 힘을 기른 열성으로 공부도 해야만 문무를 겸비한 쓸모있는 사람이 되는 법이다. 그리할 수 있겠느냐?"

가을도 겨워 수수깡을 뽑고 나서 송수익이 방대근이를 다시 불러 앉히고 한 말이었다. 방대근이는 신식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송수익은 손수 방대근이를 데리고 신흥중학을 찾아갔던 것이다.

"이 기쁜 날을 맞아 내가 대근이한테 선사 헐 것이 하나 있다."

송수익은 손바닥만 하게 접은 한지를 방대근이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은 방대근이는 조심조심 펴기 시작했다. 세 마디를 펴고, 다시 반으로 접힌 것을 펼쳤다. 하얀 종이 위에 큼직한 붓 글씨 두 자가 드러났다. 한문으로 쓰인 그 글자는 <()()>였다. 그 글자를 보는 순간 방대근이는 전신이 찌르르 울리는 전율과 함께 현기증 같은 것을 느꼇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낮으면서도 무거운 송수익의 물음이었다.

"예에......백두산 호랭이맨치로......"

"그래, 백두산 호랑이같이 용맹스럽고 지혜롭게 살아가라는 뜻이다. 그 이름을 하나 더 지니고 있으면 앞으로 요긴하게 쓸 때가 있을 것이다."

감골댁은 소리 없이 긴 숨을 내쉬며 가슴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아들의 대답이 틀릴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선생님, 이리 과헌 이름얼......."

상기된 얼굴로 말끝을 맺지 못한 방대근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선생님, 절 받으시게라우."

하더니 송수익에게 넙죽 큰절을 올렸다.

"그래, 그래, 우리 대근이 장허다."

송수익은 감회 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감골대과 수국이는 눈시울이 젖고 있었다. 감골댁은 선생님이 그리 큰 뜻의 이름을 지어주신 것이 그지없이 고마운 데다가 아들이 제가 알아서 인사를 차리는 것이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고, 수국이는 동생의 당당하고 어엿한 모습이 꼭 아버지가 살아 돌아온 것만 같아 눈물겨웠던 것이다. 지삼출은 기분이 좋아 연상 벙글거렸지만 배두성은 시무록해져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아이고, 나넌 대근이가 부러바 죽겄다. 어찌서 이 핵교넌 여자럴 안 받는가 몰르겄어. 입으로넌 만민평등이라고 해댐스로 말이여."

필녀의 느닷없는 말이었다.

"차암, 바랠 것이 따로 있제. 자네도 총 들고 사스겄다는 것이요?"

지삼출이 어이없어하며 헛웃음을 쳤다.

"못할 것도 없제라. 시켜만 줌사 션찮은 남자 두 모가치 허겄소."

필녀는 정색을 하며 응대하고 나섰다. 수국이는 계면쩍은 얼굴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필녀의 허벅지를 질벅이고 있었다. 송수익은 곰방대를 빨며 빙긋이 미소짓고 있었다. 그 옆에서 방대근이는 웃음을 참아내는 얼굴로 필녀를 손가락질하고 있었고, 감골댁은 찡그린 얼굴로 나무라는 손짓을 해대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배두성이는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반응도 없었다. 아내 필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그런 말을 처음 듣는 것이 아니라는 태도 같기도 했다.

"어허, 여자넌 여자가 헐 일이 따로 있제. 어서 땡글땡글헌 아덜이나 한나 낳아갖고 대근이맨치로 장허게 키울 생가이나 혀."

지삼출의 웃음기 가신 말이었다.

", 그것언 다 글러분 일이구만이라. 멍석이 있어야 나락얼 널고, 뽕밭이 있어야 임얼 딸 것 아니겄어라우?"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배두성이가 화난 목소리로 한 말이었다.

"하이고, 씨 부실혀 낳아봤자 또 뒤질 것인디 멀라고 낳고 말고 혀!"

필녀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배두성이를 노려보고 있는 필녀의 눈에서는 독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필녀는 잠자리의 일을 여러 사람 앞에서 까발리는 배두성이를 와득와득 쥐어뜯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색하고 민망해져 말을 잃고 있었다. 그들은 그때서야 배탈 설사 지독한 만주 병이 작년 가뭄에 크게 번져 아이를 잃은 뒤로 필녀가 고의로 잠자리를 피해 온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 저그 지허고 친헌 동무덜이 오는구만요. 아까보톰 선생님께 인사 디리겄다고 준비했었는디요."

마침 방대근이가 새 말거리를 찾아냈다.

", 그런가. 어서 오라 이르게."

송수익이 반가운 기색으로 대꾸했다. 송수익은 젊은이들에게 인사를 받는 것보다는 옹색한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반가웠던 것이다. 방대근이는 몸을 일으켜 이쪽으로 오고 있는 네 동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손을 마주 흔들며 뛰어오기 시작했다.

"선생님, 그간 무고하신지요. 연전에 한 번 뵈었던 윤주협입니다."

넷 중에 한 학생이 송수익에게 인사했다. 둥그래한 얼굴에 코가 큼직했다.

"어서오게. 윤군. 축하하네."

송수익은 일어서서 학생과 악수를 했다.

"안녕하신교, 선생님. 지도 이나디랬는데 기억허실란지 모리겠심더. 김시국임더."

키가 큼직하고 검스레한 얼굴에 광대뼈가 불거진 학생이었다.

"알고말고, 김시국군. 졸업 축하하네."

"선생님, 첨 뵙겠습니다. 권력도라고 합니다."

두상이 커 보이는 학생이 평안도 어조로 인사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권혁도라, 반갑네. 자네도 축하하네."

송수익은 악수를 하며 얼굴을 잊지 않으려는 듯 학생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저는 노병갑이라고 합니다."

키가 약간 작으면서도 몸집이 단단해 보이는 학생이 끝으로 인사했다.

"노병갑군, 자네도 평안도 안니가. 그래, 졸업을 축하하는 바일세."

송수익은 그 학생도 찬찬히 쳐다보았다.

그려, 인물덜언 다 고만고만헌디, 근디, 우리 대근이 당헐 인물언 없덜 안혀? 나 자석이라 그런 것이 아니고 방대근이가 질이로구만. 그려, 우리 산상님이 인물 딸 알보시고 <백호>라고 이름 지어주신 것 아니겄냐!’

학생들을 하나한 뜯어보며 감골댁은 이렇게 속으로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학생들이 끼어들면서 둘러앉은 동그라미가 커졌다. 학생들과 마주 보게 된 수국이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반쯤 돌려 앉게 되었다. 그런데 필녀는 오히려 동그란 눈을 반들거리며 학생들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어......마침 자네들 생각을 들어볼 일이 한가지 있네."

송수익은 학생들을 한 눈길로 훑고는,

"다름이 아니고 말이네, 요새 북경 쪽에 있는 지사들 중에 몇 분이 황제 폐하를 북경으로 모셔다가 나라의 법통을 세우자는 발의를 시작한 모양인데, 자네들은 이 문제를 어찌 생각하는지, 어디 허심탄회하게 의견들을 말해 보게나."

그의 눈길은 다시 학생들을 훑고 지나갔다.

당연지사제, 상감얼 뫼실 수만 있음사 당연허니 뫼셔야제.’

감골댁은 이렇게 생각하며 몸이 달고 있었다. 대근이가 남들 먼저 그렇게 답하기를 발고 있었다.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나라는 모든 백성의 나라지 임금이나 왕족의 나라가 아닙니다. 나라의 법통은 없어진 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보존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노병갑이었다. 송수익은 속으로 옳거니! 했다.

"제 생각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나라를 망친 왕조를 다시 받들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독립된 새 나라는 조선도 대한제국도 아니어야 합니다."

경기도 말씨인 윤주협의 대답이었다.

"맞심더, 우리가 독립 투쟁하는 기 나라 잃은 동포덜 위해서 하는 기지 임금 자리 찾아줄라고 하는 기 아이라요."

김시국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제 상감이고 페하고 다 소용없습니다. 그런 얼빠진 사람들이 지사연하는 것이 한심스럽습니다."

권혁도의 단호한 말이었다.

", 중국 사람덜언 청나라 왕조럴 자력으로 없애고 중화민국을 세운 지가 3년인디, 우리는 또 나라 망친 왕얼 그 북경에다 모신다는 것언 말이 안 되는만요."

인사를 차리느라고 방대근이는 맨 끝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아이고, 아이고, 어쩌끄나. 쟈가 지 생각대로 안 허고 즈그 동무덜 따라서 생뚜헌 소리를 허고 앉었네.’

감골댁은 그만 가슴이 내려앉고 있었다.

"여러분, 대답들 아주 잘했고. 내 가슴이 다 후련하오. 여러분들이 자신만만하게 임금을 배척하고 부인해 버릴 수 있는 그 정신이야말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원천적인 힘이고,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한 무기인 것이요. 헌데, 임금을 배척하고 부인해 버린 자리가 비어 있소.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되겠소? 그런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우리 동포들일 것이오. 우리 동포가 나라의 주인이고, 나라를 구하는 것은 곧 동포들을 구하는 것이오. 오늘 여러분에게 졸업의 영광을 안겨준 것은 누구요? 바로 타국땅 만주에서 온갖 역경을 참고 견디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동포들입니다. 우리 동포들이 이 만주 땅에서 얼마나 힘겹고 눈물겹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여러분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 피땀 흘려 번 돈을 왜 동포들이 여러분의 교육비로 아낌없이 내놓겠소? 그건 오로지 하나, 나라를 되찾아 다시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소원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동포들이 베풀어준 그 은혜와 부탁을 어느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여러분은 기필코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투철한 정신과 뜨거운 동포애로 그 부탁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동포들의 은혜에 보답해야 합니다. 앞으로도 동포들은 피눈물 나는 돈들을 모아 여러분들을 끝없이 도울 것이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짐은 갈수록 무거워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동포들 없이 여러분은 있을 수 없고, 여러분들은 언제, 어는 때나 동포들과 함께 투쟁하고 있다느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끝으로 여러분에게 당부할 말은 자중, 겸양, 용맹입니다. 말이 너무 길어진 것 같소."

송수익의 목소리는 시종 담담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신념과 열의가 넘치고 있었다. 송수익의 말이 끝났는데도 학생들은 긴장되고 숙연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학생들이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굳어진 모습이었다.

"자아, 편안하게들 얘기 나누게. 내가 괜한 소릴 한 것 같구먼."

송수익이 곰방대를 물며 학생들에게 손짓했다. 그러나 송수익은 학생들의 그 순수하고 진지한 모습이 마음 뿌듯하고 믿음직스러워 좋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마치 싱그러운 햇과일이 주렁주렁 달린 것을 보는 것처럼 기분 상쾌하고 마음 흡족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은 동포들이 정성 들여 키워낸 과일이기도 했다. 만주 동포들이 거의 빠짐없이 돈을 내서 운영하는 학교로서 군왕주의나 복벽주의를 배격하고 공화주의를 교육함과 아울러 동포애를 고양시켜 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이 그토록 확고하게 생각이 잡혀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송수익은 기쁘고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건 만주의 세월이 헛되지 않고 새로운 힘으로 크게 확장되어 나가고 있는 너무 확실한 증거였던 것이다. 이제 만주에서 형성되고 있는 독립군 세력은 지난날의 의병이 아니었다.

감골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상감을 그렇게 마구잡이로 몰아쳐도 괜찮은 것인지, 송 선생은 왜 그러는 학생들을 옳다고 하는 것인지, 무어가 무언지 알 수가 없는 채로 머리가 혼란스럽기만 했다. 만주에 온 뒤로 임금을 함부로 생각하고 양반을 우습게 아는 사람들을 꽤나 자주 보게 되었다. 그러나, 남대문에서 뺨 맞고 한강 건너서 눈 흘기더라고 만주 땅에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 그러려니 했었다. 그런데 송 선생이 학생들에게 그럴 줄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나무 당당하게 임금을 모셔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그리 가르친 것인가......? 감골댁은 더 어지러워지기만 했다.

"자네덜언 집덜이 다 요 근방으로, 통화니 유화니 그렇겄제?"

지삼출이가 학생들에게 말을 걸었다.

"아닙니다. 저는 길림입니다."

윤주협이 웃으며 대답했다.

"길림? , 쫴깨 멀리서 왔구마. 거그, 김시국이 자네넌 집이 어디여?"

", 예에. 지 말인교?"

김시국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가 자꾸 수국이 쪽을 힐끔거리는 것을 보고 지삼출은 느닷없이 물었던 것이다.

", 자네 말이시."

", 통화현 소만구라요."

진땀이라도 나는지 김시국은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건너다보며 필녀는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그런데 필녀의 다른 손은 수국이의 발목을 아프지 않을 만큼 꼬집고 있었다.

"야 이 가시네야, 나 말이 으쩌냐. 니헌티 정신없이 누질허다가 삼출이 아재헌티 들켜갖고 시방 쌩똥 싸고 있는 꼴 잠 봐라. 꺼무끄름허니 생긴 얼굴대로 아조 음큼허다 이."

필녀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수국이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고, 얼굴이 꽃빛으로 붉어진 수국이는 팔꿈치로 필녀의 옆구리를 박아대고 있었다. 수국이는 작년 일까지 겹쳐져 더 몸달고 있었다. 작년 여름방학이 되어 동생은 집에 돌아오면서 두 학생을 데리고 왔었다. 집에 가는 길목이라 들렀다는 두 학생은 바로 김시국하고 윤주협이었다. 그들은 하룻밤을 자고 떠났다. 그런데 김시국은 윤주협하고는 다르게 첫 눈길부터 이상했던 것이다. 그 이상한 눈길을 느끼는 순간 수국이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리고 퍼뜩 떠오른 것이 정미소집 아들 백남일이었다. 자신을 덮치고 들었던 백남일의 눈빛과 김시국의 눈빛은 너무나 흡사했던 것이다. 수국이는 자신이 잘못 생각하는 거라고 마음먹으며 그 느낌을 지우려고 했다. 동생의 동무들은 동생인데 설마 누나뻘인 여자한테 그런 마음을 품으랴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밥상을 들여갔을 때도, 물동이를 이고 들어오다가도, 장독대에서 간장을 떠가지고 돌아서다가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 눈길과 마주쳤던 것이다. 윤주협은 정말 누나를 대하듯 선하게 웃으며 마음 편하게 하는데 김시국이가 떠난 다음에도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덮어버리고 말았다.

"야 이 가시네야, 의뭉 떨지 말어. 니헌티 홀딱 반헌 눈치여. 사람 저만허먼 안 괜찮허냐? 본다, 본다, 또 본다!"

신바람이 나서 목소리가 커지던 필녀는 갑자기 신음소리를 내며 옆구리를 싸안았다. 수국이가 사정없이 옆구리를 내질러 버렸던 것이다.

"아재, 야럴 깔아보다가넌 큰코 다칭마요. 야가 몸집어 작은 것 겉애도 박치기가 번개치기로 무섭고, 기운 씨기가 황소랑게라. 야 우섭게 보다가 당헌 아그덜이 한둘이 아니구만요."

", 평안도 박치기! 고거 명났제. 그려, 몸집 크다고 강단 있는 것 아닌디, 노병갑이가 한가닥 야물게 허게 생겼어."

쑥스러워하는 노병갑에게 지삼출은 눈웃음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학생들은 다시 모여야 할 시간이 되었다며 다같이 자리를 떴다.

"무신 일이 또 남은겨?"

감골댁이 대근이를 붙들고 물었다.

"야아, 앞으로 헐 일얼 정허는 것이 남았구만요. 시방 소학교 선생으로 모셔 가겄다고 사방에서 와 있구만이라."

"소핵교 선상님? 글먼 나도 선상님이 되는 것이여?"

감골댁이 화들짝 반색했다.

"아매 지넌 아닐 것이구만이라."

"어찌서 그려?"

"지넌 선생에 안 어울링게라."

감골댁은 그만 시무룩해졌다. 당장 독립군으로 투입되지 않는 졸업생들은 만주 각처에서 생겨나고 있는 동포들의 학교에서 최소한 2년 동안 근무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졸업식날에는 가까운 봉천 근방이나 길림은 물론이고 멀리 북간도의 훈춘이며 왕청형 같은 데서도 선생님을 모셔가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글먼 집에넌 은제 온다냐?"

"모레 갈 것이구만이라."

"그려, 모레넌 꼭 오니라 이"

감골댁은 아들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들은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각이었다.

 

 

22. 난데없는 지주들

총독부에서는 사립학교에서도 일본국가를 부를 것을 명령하는 가운데 한 해가 저물었다. 그런데 그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비밀결사 자립단 사건이 세상을 흔들었다. 함경도 단천에서 조직되어 활동하던 19명이 검거된 것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결사체에게 독립군 자금을 모으다가 박제준 권영목 유명수 등 6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그 독립군 자금이 만주로 건너갈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총독부에서는 그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들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다 대서특필했다. 일망타진이니 완전색출이니 하는 말들이 동원되는 그 보도의 의도는 어디선가 또 활동하고 있을지 모르는 다른 비밀결사체에 대한 협박이고 모든 조선사람들에게 겁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은 그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서로서로 수군대며 오히려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끼고는 했다. 그건 아직도 왜놈들과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위안인 동시에 어떤 보복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논밭을 빼앗기고 소작인 신세가 되어 개떡은 고사하고 시래기죽으로도 세끼를 때우지 못하면서 춘궁기를 맞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소식은 분명 힘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소식을 뒤덮으며 농민들에게 몰아쳐 오는 거친 바람이 있었다. 그 바람은 허기진 농민들을 밭으로 내몰았다. 이장을 앞세운 면 직원들이 동네마다 쓸고 다녔다.

"자아, 잘덜 들으시오. 요것얼 논허고 평지 밭만 빼놓고넌 비탈밭이란 비탈밭에넌 다 심구고, 또 아무리 손바닥만헌 빈터라도 싹 다 찾아내서 심궈양 혀요. 요것언 총독부서 내린 엄중헌 지신께 만에 한 사람이라도 명얼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엄벌을 받을 것잉게 그리덜 아시오. 허고, 심군 낭구가 못 살고 죽어도 명얼 어긴 것이 된 게 이장 책임하에 벌 받지 안케끔 잘덜 허란 말이오. 사흘 뒤에 조사 나올 것잉게."

동네 사람들을 당산나무 아래 모아놓고 면서기가 으름장을 놓았다. 면서기가 떨어뜨려 놓고 간 것은 뽕나무 묘목들이었다. 그러나 거의 두 자 가까이 되는 그 외줄기 뽕나무들은 묘목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속성수인 뽕나무를 그 길이가 되도록 어디서 본격적으로 재배하는 데가 있는 모양이었다. 벌써 사오 년 전부터 날만 풀리면 그만한 길이의 뽕나무를 가져와 심으라고 사람들을 몰아댔던 것이다. 면서기가 바삐 단 동네로 사라지자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 이장님, 요것이 말이요 머시요. 밭이란 밭에넌 다 요 잘난 뽕나무럴 심궈불먼 우리넌 인자 굶어 죽으란 말 아니겄소? 원 시상에 이런 법도 있소."

성질 칼칼한 하봉수가 더는 참아내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니, 그 무신 돼지 멱따는 억지소리여? 뽕잎 따먼 다 돈 계산 해주는 디."

"아니, 고것도 말이라고 허요? 작년 재작년에 즈그덜 맘대로 묘목값 제허고 아그덜 엿값도 못되게 돈 쳐주는 것 뻔허니 보고도 그런 낯뚜꺼운 소리 허고 앉었소."

박건식이가 말을 받고 나섰다. 뽕나무를 강제로 심게 하면서도 그 묘목은 공짜가 아니었다. 면사무소에서는 뒤늦게 뽕잎을 따는 인건비를 지불하면서 그 값을 멋대로 제해 버렸던 것이다.

"아니시, 나 시방 서 있네."

대꾸할 말이 궁색해진 이장은 제 나름으로 농담을 해서 화살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에 웃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마동 억지 춘향이로 뽕나무 심구게 히서 밭 농새 못 지묵게 된 땅이 발써 얼매요. , 그리했으먼 돈이나 농새 짓는 것맨치로 쳐줘야 사람이 목구녕에 풀칠험서 살 것 아니냔 말이오. 근디, 그리도 안 해서 우리덜 배곯케 맨글어놓고 금년에넌 한 수 더 떠서 온 밭에다가 요 잡것얼 심구라니, 요것이 다 굶어 죽으라는 것이 아니고 머시요?"

"어허, 자네 참말로 똑똑허시. 그리 잘난 사람이 아까 똑 뿌러지게 다질 일이제 어찌서 아무 심도 없는 나럴 잡고 뒷북 치고 긍가?"

"이장이먼 동네 사람덜 편도 잠 들어보라 그것이오. 우리가 다 굶어 죽어불먼 이장 자리도 날라가분 게라."

"나 이장 못해 묵는 것 걱정헐라 말고 따질 것이 있으먼 자네가 가서 따지소."

"참마로 요런 환장헐 일이 있당가. 팍 죽어서 누에로 환생헐 수도 없는 일이고, 굶어 죽기 전에 요 빌어먹을 고장얼 떠야 되겄구마."

어느 여자가 진저리치며 외쳤다.

"그려, 그 말도 맞는 말이여. 이리 조여갖고야 여그서 어찌 더 살겄어."

다른 여자가 맞장구를 쳤다.

", 안직도 시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캄캄허구마. 그려, 말기는 사람 없응게 맘대로 딴 고장으로 떠보드라고. 어디 간다고 뽕나무 안 심구는 디가 있능가. , 저 아래 남도땅으로 가먼 되겄구마. 거그넌 뽕나무 안심궁게."

이장은 느물느물 웃었다.

"아니 시방 불난 집에 부채질허고 있소. 여그보담 더 더운 남도땅에서 뽕나무 대신 목화씨 뿌리라고 볶아친다는 것이야 시상이 다 아는 일인디. 무신 말얼 해도 잠 골라감서 허씨요."

어느 남자가 벌컥 화를 냈다.

"그려, 아조 잘 아는구만그랴. 긍게로 어디로 뜨니 마니 허는 씨잘디 없는 소리 꺼내덜 말고 시키는 일이나 얌전허니 허란 것이여."

이장은 헛기침을 하며 염소수염을 쓰다듬었다.

", 알다가도 몰를 일이여. 일본 사람덜언 문딩이고 동냥아치 새끼덜헌티도 비단 옷얼 입힐랑가 어찌서 갈수록 뽕나무만 심구라고 사람얼 이리 들볶음서 환장허게 맨드는 지 몰르겄어."

어느 여자가 한숨을 내뿜었다. 그 여자는 이장 앞이라서 입에 붙은 말인 <왜놈>을 쓰지 않고 <일본사람들>이라고 고쳐서 말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살고 있는 일본사람들은 관리고 일반인이고 할 것 없이 왜놈이라는 말을 제일 싫어했고, 또 왜놈이라는 말을 제일 잘 알아들었다.

"좌우간에 그것덜언 눈치 한나넌 백여시여. 조선 뽕에서 존 비단실이 나오는지넌 어찌 그리 알고, 땅짐 후끈후끈헌 남도땅서 목화가 걸게 잘 되는 것얼 어찌 그리 귀신겉이 아냔 말이여."

다른 여자의 맥빠진 소리였다.

"자아, 다덜 한바창 사설 풀었으면 맥힌 속도 터쪘을 것잉게 얼렁 이덜 시작허드라고. 뼈대봐야 넘 동네로 넘어가질 일도 아닝게."

이장은 능란하게 사람들을 다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깨가 처져 내리고 시름겨운 얼굴들로 한숨을 쉬거나 혀를 차고 있었다.

"이장님, 한나 물어졸 것이 있구만이라."

과부인 금산댁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허, 또 머시여! 이러다가 해 서산에 빠져불겄구만."

이장이 상을 찡그리며 짜증을 부렸다.

"견사 공장서넌 어찌서 사람얼 멧달썩이나 가둬놓고 안 내보내고 그런다요?"

"그것이야 첨보톰 거그서 먹고 자고 허기로 안혔소."

"그 적에 열흘 간격으로 하로썩 내보내준다고 히놓고 발써 멧달인디 얼굴 귀경얼 헐 수가 없단 말이어라."

"그야 일이 바쁜 게 안 그러겄소. 근디 나헌티 그런 소리 멀라고 허요?"

", 이장님이 가운데서 다리 논 일잉게 어찌 된 것인지 잠 알아봐 돌라는 것이제라."

"나가 그런 일꺼정 챙기고 나스자면 몸얼 열 개로 쪼개도 모질르요. 성헌 두 다리 뒀다가 어디 쓸라요? 하로 날 잡아 금산댁이 공장 찾어가서 속시언하게 알아보면 될 일 아니겄소."

"누가 그것얼 몰르요. 그런 디 찾어가 봤자 우리 겉은 것언 사람으로 대허지럴 않은 게 허는 소리제라."

"금산댁 가정산께 나넌 몰르겄소."

이장은 매정하게 잘라버렸다. 기름기라고는 없어 얼굴이 비쩍 마른 금산댁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발을 굴렀다. 옆에서 서너 여자들이 뭐라고 수군수군했다.

", 몸덜 후딱후딱 놀려! 주재소에 끌려가 쇠좆매 맞고 정신 들지 말고."

이장이 목청껏 소리치고 있었다.

"아이고, 염병헌다 저놈."

한 여자가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잡것이 주딩이 놀리는 것 허고넌."

다른 여자가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어이 금산댁, 너무 걱정 말소. 달막이 혼자가 아닝게 밸일 없을 것이네."

한 여자가 넋이 빠져 서 있는 금산댁의 팔을 끌었다.

"나도 그리 생각허라고 허는 디 원체로 소문이 사나운게 맘얼 놀 수가 있어야제."

금산댁이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눈물을 훔쳤다.

"소문이 더디 다 맞간디. 그러고 달막이야 지가 똑똑허고 야무진 게 지 몸 간수야 탈 없이 잘헐 것이네."

"나가 미친녀이여. 굶거나 묵거나 간에 옆에 끼고 있어야 허는 것인디. 동상덜 생각히서 지가 돈벌이 나스겄다고 하도 발싸심혀서 못 이기는 척 말 들은 나가 미친년이여. 딸 팔아 묵은 미친년이여."

손으로 입을 막았는데도 금산댁이 흐느끼는 소리는 흘러나왔다.

"이 사람아, 어찌 이러능가. 달막이가 그리 나스고, 자네가 달막이럴 보내고 헌 것이야 남정네 없는 집안 형편에 누구라도 그리허게 돼 있었든 것이여. 글고 그때야 초장이라 견사 공장이 어쩐지 누가 알았간디. 자네가 넘덜 보는디 이러면 달막이가 참마로 무신 일 당헌 것으로 소문나네이."

금산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 많은 세상에 그럴 수도 있는 일었다. 금산댁은 손등으로 번갈아 가며 눈물을 훔치고 자꾸 솟는 울음을 되삼켰다.

"허고 말이시, 이장 저것헌티 의지허지 말고 자네가 공장얼 한 분 찾어가 보소. 견사 공장이야 밤샘으로 일얼 해도 다 못허게 바쁘다는 소문잉게 집으로 딜고 와서 재워 보낼 수는 없어도 잠시 만내보는 것이야 안 되겄능가. 잠시라도 얼굴 맞대허고 무사헌 것 알먼 맘 걱정 풀리는 것 아니여?"

"왜놈덜이 그리라도 만내게 해줄랑가?"

금산댁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하먼, 그것이야 허겄제. 지 아무리 승악헌 왜놈덜이라고 혀도 자석얼 부모가 찾어갔는디 잠시럴 안 만내주게 허겄능가. 자네가 찾어가는 것이 상수시."

", 그리혀야 되겄구마."

금산댁은 마음을 다잡으며 양쪽 손으로 치마말기를 힘차게 끌어올렸다. 해마다 뽕나무를 많이 심게 되면서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는 견사 공장도 큰 도시 가까이에 생겨나게 되었다. 그 공장들은 돈을 앞세워 여직공들을 모집했다. 20원 정도의 목돈으로 유혹하며 그들이 모으는 것은 열다섯에서부터 스무 살까지의 처녀들이었다. 합숙을 시킬 수 있고, 젊어서 작업능률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잘살든 못살든 상관없이, 지체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 여자의 순결과 정절은 곧 여자의 생명으로 결정지어진 땅에서 처녀의 외박이란 아예 용납되지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인 견사 공장들은 터무니없게도 처녀들만 고르고, 그것도 집을 떠나 합숙까지 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 어려운 장벽을 깨는 데 그들이 동원한 무기가 돈이었다. 죽을 끓이는 끼니마저 걸러야 하는 처지에서 목돈 20원이면 어마어마한 거금이었다. 대충 잡아 쌀 다섯 가마 값이었다. 그리고 먹여주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사람들은 <합숙>이라는 악조건을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세 끼를 먹여준다>는 것으로 은폐시키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입을 하나라도 줄이려고 별로 내키지 않고 그리 탐탁치 않은 경우에도 딸을 시집보내는 삶을 오랜 세월에 걸쳐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세 끼를 먹여준다>는 것은 또 하나의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병 앓이로 아버지를 잃고 세 동생들이 배고파서 허덕이는 형편에서 달막이는 그 두 가지 유혹을 횡재라 생각하고 잡으러 나섰던 것이다. 금산댁은 정말 내키지 않으면서도 나머지 세 자식을 위해 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열흘에 한 번씩 집에 다녀가게 한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그건 그래도 일이 바쁘겠거니 하면서 참아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흉흉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공장 안의 처녀들은 모두 일본인 감독이며 작업반장들의 밥이라는 것이었다. 미선소와 다를 바 없는 소문이었다. 금산댁은 그 소문을 듣고는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딸이 꼭 무슨 일을 당한 것만 같은 걱정으로 밥맛도 없었고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공장을 찾아가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말도 안 통하는 일본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공장을 찾아가기로 작정한 금산댁은 달막이가 아무 일 없기만을 빌고 있었다. 그런데 금산댁은 한 대목 안심하는 데는 있었다. 달막이가 눈치 빠르고 야무지기도 하지만, 남자들 눈을 끌 게 잘생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밀어내는 걱정이 있었다. 달막이는 몸이 실했던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금산댁은 새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장이 시키는 대로 네 명씩 패를 짜서 흩어졌다.

"하이고, 이늠으 시상이 갈수록 태산이여. 요런 드런 놈에 시상이 어찌 잠 팍 안 엎어질랑가."

"시장시런 소리 허덜 말소. 하늘이 무너지기럴 바래는 것이 낫제."

"글먼 요런 빌어묵을 시상얼 언제꺼정 살어야 헌다는 것이여?"

남상명과 한기팔의 기운 없는 한숨을 밀치며 하봉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얼 자네가 알겄능가 나가 알겄능가. 저 한르이나 아실 일이제."

남상명이 또 한숨을 쉬었다.

"참말이제 이래 갖고넌 더는 못 살겄는디. 어찌 무신 수가 없을랑가?"

박건식이 괭이를 내던지며 밭두렁에 주저앉았다. 그를 따라 나머지 세 사람도 밭두렁에 몸들을 부렸다.

"아이고, 이장 놈 멀어졌응게 담배나 한 대썩 꼬실리고 보세."

"그려, 우리가 무신 왜놈덜 충신이라고."

박건식이 부싯돌을 치고 다른 사람들은 곰방대에 담배를 재었다.

"그나저나 이놈덜이 왜 이리 뽕나무럴 심구라고 지랄발광이여?"

부싯돌 불똥이 옮겨붙은 쑥에 입김을 불어 불씨를 키우던 박건식이가 갑자기 화가 솟는 듯 말했다.

"자네 그 소문 못 들었능가? 비단 짜서 저그 저 서양에다 팔아묵어 큰 돈벌이 헌다는거."

"나도 그 소문이야 귓등으로 들었는디, 그것이 참말일게라?"

박건식은 가느다란 연기가 푸르스름하게 피어오르는 쑥을 옆 사람에게 건네며 고개를 갸웃했다. 향긋한 쑥 냄새가 봄기운 속에 퍼지고 있었다.

"헛말이 아니겄제. 돈벌이가 얼매나 좋으먼 갈수록 이 난리굿이겄능가."

"왜놈덜 참 징허고 무선 놈덜잉여. 어찌 그리 이문 날 일언 하나또 안 빼놓고 골골이 파고드는고."

"헤에! 그래도 목포로 실어내는 목화에 비허먼 비단 짜서 서양 돈벌이 하는 것이야 양반이시. 조선서 똥값으로 실어간 목화로 광목 맨글어 도로 조선에다 금값으로 팔아묵는 것 생각덜 히보드라고. 그놈덜이 얼매나 백여신가."

", 그 말 듣고 봉게 그러시. 긍게로 재주넌 곰이 넘고 돈언 왕서방이 묵는 꼴이 딱 요런 것 아니라고?"

"어허, 곰이 들으면 서우해헐 소리 허덜 말어. 곰이야 재주넘으면 바이야 배불리 얻어묵는 신센게."

"허 참! 그도 그렇네."

아무도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들은 담배만 뻑뻑 빨아대고 있었다. 시름 깊은 한숨처럼 그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담배 연기만 창공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연분홍 진달래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춘궁의 배고픈 아이들을 부르기라도 하듯, 작은 새들이 또르르 굴러가는 해맑은 소리로 지저귀고, 어디선가 풀꾹새의 구성진 가락이 울려오고 있었다.

"근디 마링여, 시상이 어찌 뒤집어지기럴 바래는 것언 꿈만 같은 일이고, 이대로넌 더 못 살겄는디, 돔벌이 될 만헌 디로 떠보는 것이 으쩌까?"

한기팔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글씨, 가난헌 사람치고 그런 생각 안 드는 사람이 없을 것인디, 아까 이장 말대로 어디럴 가나 왜놈 시상잉게 달를 것이 머시가 있겄어."

"그것이야 또 땅만 파묵을라고 헝게 그렇제. 소문 듣기로넌 강원도 쪽으로 가먼 산판도 있고. 그 우로 함경도 쪽으로 가먼 광산도 있다든디."

"그려, 그런 디 가먼 돈벌이가 이놈으 따엥 목매는 것보담 훨썩 낫다으마."

"그런 것 다 헛소문이여. 산판이고 광산이고 다 품 팔아무그는 것이고, 그 임자라는 인종도 다 왜놈덜인디 낫기던 머시가 낫겄어. 아랫말 한서방 보소, 군산이 돈벌이 좋다고 쌀짐 지로 갔다가 거그서 재미 못 본 게 목포로 가서 목화 짐 지다가 어찌 되았어. 돈언 한 푼도 못 벌고 병만 얻어 갖고 오덜 아혔어."

"그려, 자네 말도 맞네."

"그렇다고 만주로 뜰 수도 없는 일이고, 앞뒤가 콱콱 맥혁네그랴."

"아니, 그거 멋덜 허고 앉었어. 당장 끌려가 쇠좆매 맞을 챔이여!"

이장이 소리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듣고 있는 소문은 사실 그대로였다. 일본은 뽕나무를 심고, 그것으로 누에를 치고, 누에고치에서 생사를 뽑는 일까지만 조선에서 했다. 질 좋은 원료를 값싸게 확보한 그들은 일본에서 비단을 짜 가지고 서양과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군산항에서 주로 쌀을 실어내는 것처럼 목포항에 집결시켜 실어가는 목화도 이익 많이 남기는 장사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총독부에서는 뽕나무 실기와 목화씨 뿌리기를 해가 갈수록 더 다그치고 있었다. 뽕나무 심기는 며칠에 걸쳐서 매듭이 되었다. 그러나 노동비는 단 한 푼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걸 요구하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아예 주지 않을 돈을 달라고 나선다고 줄 리가 없었고, 되지도 않을 일에 나섰다가 괜히 미운털만 박혀 언제 해코지를 당할지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뽕나무 심기가 끝나자마자 금산댁은 이리 근처에 있는 견사 공장을 찾아갔다. 금산댁은 공장 앞에서 기부터 죽었다. 높은 굴뚝이 치솟은 공장은 엄청나게 컸고, 공장 둘레로는 키보다 훨씬 높은 담이 둘러쳐져 있었던 것이다. 금산댁은 굳게 닫혀진 큰 대문 앞을 서성거리며 문틈 사이로 공장 안을 기웃기웃하고 있었다.

"어이, 어이, 당신 누구여!"

느닷없는 고함에 금산댁은 소스라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고함이 조선말이라서 금산댁은 우선 반가움을 느꼈다.

"저어, 여그서 일허시는게라오?"

금산댁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디, 어찌 긍가?"

뒷짐을 진 젊은 사람은 금산댁을 눈 아래로 깔아보면서 반말질을 했다. 아들뻘밖에 안 되는 것이......금산댁은 그 말투에 비위가 상했다. 그러나 목마른 것은 이쪽이었다.

"여그 달막이라고......김달막이가 우리 딸인디, 잠 만내볼라고 왔는디요 이."

금산댁은 벌써 애원조가 되고 있었다.

"안돼야, 일헐 적에넌 천하 없는 사람이 와도 못 만내. 여러 말 허덜말어."

젊은 사람은 샛문 앞에 버티고 서서 거만스럽게 반말지거리였다.

"그저 후딱 얼굴만 보고 갈랑게 어찌 만내게 히주씨요. 50리 질이 넘게 멀리서 왔응게 소원풀이 잠 히주시게라."

금산댁은 10리를 더 보태며 이제 완연히 애원하고 있었다.

"어허, 안 된다니께 그려!"

젊은 사람은 버럭 소리 질렀다.

"보시게라. 질게도 안 바래고 딱 얼굴만 보고 갈랑게 사정 잠 봐주씨요."

금산댁은 두 손을 합장하듯 해가지고 울상으로 애걸하고 있었다.

"참말로 성가시게 할껴."

젊은 사람은 눈을 부릅뜬다.

"알겄소, 소리 질르지 마씨요. 일이 언제 끝나든지 간에 그때꺼정 기둘리겄소."

금산댁의 얼굴은 금방 냉정해졌다.

"무신 미친 소리여, 시방. 천하 없는 사람도 면회가 안 된다닝게."

"그것이야 일헐 적에만 그런다고 아까 말허덜 안혔소."

금산댁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요런 말귀도 못 알아묵는 무식헌 예펜네 보소. 여그넌 직공덜 면회시키는 법이 애초에 없다. 그것이여. 알아들어?"

젊은 사람은 곧 후려치기라도 할 것처럼 기세가 사나워졌다.

"나야 죽으나 사나 우리 딸 만내고 갈 것잉게 어디 누가 이기나 보드라고."

금산댁은 공장 대문 앞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사람 환장허겄네 요거. 저리 못 나가? 끌어내기 전에 나가!"

젊은 사람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금산댁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 요것 보소. 에라이 잡것!"

젊은 사람이 금산댁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때 금산댁은 대문 밑부분을 틀어잡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이고메 사람 죽이네에. 이이고메 사람 죽이네에......"

"아니, 요런 미친년 잠 보소!"

금산댁을 잡아끌던 젊은 사람은 침을 내뱉더니 정말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금산댁의 비명은 그야말로 쨍쨍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사람이 나오더니 소리 질렀다. 그건 일본말이었다. 금산댁은 이때다 싶어 벌떡 일어나 그 일본사람을 향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우리 달막이, 김달막이 못 만내게 허먼 나 여그서 죽을겨. 당장에 김달막이 불러와. 어찌서 열흘에 한 분썩 내보낸다고 허고넌 거짓말이여. 김달막이 안 불러오먼 여그서 죽는단 말이여!"

왜놈이 딸 이름이라도 알아들으라고 연상 김달막이를 외치는 것이었다. 문지기 놈이 자기 말을 왜놈한테 옮기라고 금산댁은 죽는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상을 찡그린 채 젊은 사람의 말을 듣고 난 일본사람이 짤막하게 뭐라고 하고는 돌아섰다.

"되았응게 그만 발광혀, 이 예펜네야."

젊은 사람이 침을 내뱉으며 말했다.

", 머시라고라? 머시라고 혔소?"

금산댁은 분명히 들었으면서도 잘못 들었나 싶어 이렇게 물었다.

"빌어묵을, 보기보담 독헌 예펜네시."

젊은 사람이 궐련을 꺼내물려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귀먹었소!"

당당해진 금산댁은 바락 소리쳤다.

"일 끝낼 때 꺼정 기둘려!"

금산댁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일이 언제 끝나는지는 묻지 않았다. 일이 언제 끝나든 기다리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딸은 의외로 빨리 나왔다. 점심시간에 내보내 준 것이었다. 금산댁은 대문 옆에 붙어 있는 좁은 문지기 방에서 딸을 얼싸안았다.

"면회시간언 10분이여"

젊은 사람이 옆에 서서 말했다.

"10분이면 어찌 된다냐?"

금산댁이 걱정스레 딸에게 물었다.

", 그것이 긍게......얼추 담배 한 대 필 짬이여."

어머니 손을 잡은 채 달막이가 대답했다. 그 눈에 눈물이 번져 있었다.

", 그만허먼 아순대로 되았다."

금산댁의 얼굴이 밝아졌다.

"엄니 아픈 디는 없고? 동상덜언?"

"아이고, 집에넌 아무 찰 없응게 니넌 암 말도 말어."

금산댁은 딸을 나무라는 손짓을 하고는,

"니 혹여 무신일 당헌 것 아니지야?"

목소리가 낮아지며 눈기링 딸의 아랫배로 갔다.

"아이, 엄니넌. 아니여."

달막이는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소문이 짜아헌디, 참말이여?"

"아니랑게. 다 헛소문이여."

달막이는 또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었다. 자신은 당하지 않았을 뿐 얼굴 예쁘장한 아이들은 여럿이 몸을 망쳤던 것이다. 그러나 문지기가 옆에서 지키고 있었다.

"어디 아프 디넌 없냐?"

"하먼, 나야 언제 아픈 때가 있었간디."

"그려도 안색이 벨라 안 좋은디?"

"아니여, 일허다 나와서 그런겨."

"일이 많이 심들지야?"

"아니여, 심써서 허는 일이 아닝게."

"근디, 일언 무작시리 많이 시키는 것 아니다냐? 집에 안 내보내 주는 것 보먼 말이여."

"아니여, 일많이 밀렸응게 조럴 짜서 돌아감서 허니라고 집에 나갈 새가 없는 것이제."

이것도 적당히 얼버무리는 거짓말이었다. 하루 2교대 12시간씩 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돌아가면서 식사 당번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면 자기 빨래 해 입을 짬이 없을 지경이었다.

"묵는 것언 어쩌냐?"

", 배불르게 묵어."

"반찬언 지대로 히주고?"

"하먼, 집에서보다마 잘 묵어."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중국산 조에다가 보리를 섞은 잡곡밥은 12시간의 노동을 견디기에는 너무나 적은 양이었다. 모두 배가 고파서 쩔쩔맸다. 반찬도 언제나 된장국에 일본 다꾸앙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다꾸앙도 많이 먹을 수도 없이 바 위에 딱 세 쪽씩 놓여졌다.

"잠자리넌 으쩌냐?"

", 일본 다다미방인디 아조 좋아."

"이불도 안 모지레게 있고?"

"하먼, 넉넉허니 있어."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나무로 지은 집단숙소는 군대 막사와 똑같은 형태로 나무 침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불이라는 것도 손바닥만 한 것 한로 두 사람씩 덮게 되어있었다.

"아이고, 그냥저냥 살 만허당게 인자 잠 안심이 된다. 니럴 못 만내볼 적에넌 니가 무신 숭헌 일 당헐 것 겉고 똑 죽겄드라. 그나저나 존 일헌다고 한 달에 한 분만이라도 내보내주먼 좋겄다."

"차차 그리 되겄제. 엄니, 나 걱정언 말어. 인자 쬐깐 더 일허먼 선돈 받은 것 다 까고 새로 벌게 된게 살림에 도 보탤 수 있구만. 엄니 신수가 너무 안 존디, 돈 애끼지 말고......"

"십부운! 시간 다 되았어"

헌 벽시계를 보며 젊은 사람이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려, 몸성허게 잘 있거라 이."

"엄니이...... 편히 가시씨요 이."

달막이의 목이 메었다.

"자아, 얼렁얼렁 들어가드라고."

젊은 사람이 달막이의 등을 떼밀었다.

"엄니이......"

달막이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뽕나무 심기 소란이 가라앉으면서 사람들은 논농사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야산자락을 연분홍으로 물들였던 진달래꽃들이 지고, 개울가의 개나리들이 샛노랗게 피어나고 있었다. 이름마저 <사쿠라>로 바뀌어 <왜놈들 꽃>으로 구박덩이가 된 벚꽃들도 그 환한 모습으로 낭자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이즈음이면 붉은빛 선연한 객토 더미가 논바닥에 모둠모둠 놓이거나, 거름더미가 쌓이기도 했다. 소가 없는 사람들은 조금이라고 한가할 때 소 차지를 하려고 빠른 논갈이를 하기도 했다.

"아부지, 아부지! 누가 우리 논얼 쟁기질허고 있는디, 쟁기질."

동화가 마당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숨을 할딱거리는 아이의 손에는 샛노란 꽃들이 촘촘히 달린 긴 개나리꽃 가지가 들려 있었다.

"니 시방 무신 소리여?"

쇠스랑으로 두엄더미를 파헤치고 있던 박건식은 허리를 펴며 아들을 멀뚱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참말이여, 누가 우리 논에 쟁기질허고 있단 말이여."

아버지가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을 눈치챈 동화는 말에 힘을 넣었다.

"니가 잘못 본 것인갑는디?"

박건식은 쇠스랑을 두엄더미에 찌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가 바보간디? 우리 논도 몰르게."

동화는 울상이 되며 발을 굴렀다. 마음이 급하기도 하고, 자기 말을 믿지 않아 분하기도 했던 것이다.

"맞소, 동화가 우리 논얼 모르간디라?"

마루에 걸터앉아 채소 씨앗을 고르다가 남편과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반월댁이 아들의 편을 들었다.

"그려, 그냥 있을 일이 아니구마."

박건식은 손바닥을 털며 나섰다. 동화는 아버지의 뒤를 쪼르륵 따랐다. 반월댁은 아들을 부를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제가 알아온 일인 데다가, 사내아이들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다니며 무엇이든 보고 배워야 했던 것이다. 당산나무를 지나며 박건식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느라고 깡충거리며 뛰던 동화는 돌부리에 발이 걸려 몸이 앞으로 쏠렸다. 곧 넘어질 듯 넘어질 듯하다가 동화는 가까스로 몸을 바로 세웠다. 동화는 뒤를 돌아보며 욕을 한마디 내뱉고는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개나리꽃 가지를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동화는 약간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꽃가지를 내던져버렸다. 그러고는 두 팔을 가볍게 내두르며 뛰기 시작했다. 박건식은 멀찍이에서도 자기네 논에 누가 쟁기질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설마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박건식은 머리가 핑 돌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무슨 병통이 생겼구나!

그의 머리를 친 생각이었다. 자기의 논도 결국 어느 일본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는 충격이었다.

"아부지, 아부지, 어찌 그려!"

뒤쫓아온 동화는 두 손으로 머를 싸잡고 서 있는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옷깃을 잡아 흔들었다.

", 아니여, 아니여......"

박건식은 정신을 다잡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이 넘어왔다. 앞이 막막함과 함께 주체할 수 없는 분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버지까지 돌아가시게 한 땅이었다. 그 땅이 동척에서 어떤 개인에게로 넘어가 버렸다면 그만큼 되찾을 감은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안 될 말이었다. 박건식은 이를 뿌드득 갈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땅언 목심에 근본이여. 땅이 있어야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어야 나라가 있는 법이다. 나라 뺏기고 땅꺼정 뺏기면 무신 수로 목심얼 보존하고, 무신 수로 나라럴 되찾을 것이냐. 나가 죽고 없드라도 니 평상얼 걸고 땅얼 찾어야 헌다. 땅 잃으면 다 잃는 것잉게."

박건식은 아버지의 말을 쟁쟁하게 듣고 있었다.

" 당신 누군디 넘 논에 쟁기질이여."

"박건식의 뜨거운 감정이 폭발하고 있었다.

"야아, 전에 이 논 임자셨소?"

소를 멈추게 하고 쟁기질하던 사람은 아주 공손하게 물었다.

"그러요, 우리 논이요."

박건식은 <전에 임자>였느냐는 말에 묘한 기분을 느끼며 이렇게 대답했다.

"참 미안시럽게 됐구마니아라 이."

그 남자는 옹색스러운 얼굴로 이마에 두른 수건을 풀어 땀을 닦았다.

미안시러?......박건식은 순간적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떤 왜놈이 시키는 대로 논갈이 품을 파는 사람이겠거니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공손한 태도며 예를 갖추는 말씨며가 이상했던 것이다.

"저어, 올해보콤 여그 논 몇 마지기럴 나가 소작 부치기로 됐구만이라."

", , 멋이라고!"

박건식의 입에서 터져나간 소리는 고함도 외침도 아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부르짖는 비명 같은 것이었다.

"그간에 달라진 사정얼 안직 몰를고 있는 갑제라?"

그 남자가 옆 눈길로 박건식의 눈치를 살피며 무척 난처해했다.

"대체 요것이 무신 소리요?"

박건식은 사태의 내막을 알기 위해 애써 감정을 누르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야아, 세세헌 것언 잘 몰르겄고, 동척에 잽혀 있든 여그 논덜이 하시모토란 사람헌트로 넘어갔다드만이라. 그려서 거그서 소작얼 얻어 부친 것이구만요. 묵고 살자고 소작얼 얻어 부치기넌 하넌디, 전에 임자럴 만낸 게 영판 미안시럽고 죄진 것 겉고 맘이 얄궂구만이라."

박건식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대로 논두렁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 으레 하는 것처럼 일본에서 이주해 온 어떤 농민에게 자신의 논이 넘겨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땅 부자로 소문난 하시모토에게 넘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하시모토란 자는 소작까지 딴사람으로 바꾸고 말았다. 땅을 찾기는커녕 동척의 소작인 신세에서 그나마 소작까지 떼인 신세가 되고 만 것이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어찌 이리 쥐도 새도 모르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가, 이놈들을 다 어째야 하는 것 아닌가......’

이를 앙다문 박건식은 주먹을 부르쥐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의 소낭구에는 마른풀들이 뜯겨 쥐어져 있었다.

"요것 참 미안시럽구만요. 묵고 살라다봉게......요것이 그냥......"

그 남자는 연상 옹색스러워하고 난처해했다.

음머어-

소가 논갈이를 독촉하는 듯 쿠렁한 소리로 길게 울었다. 봄기운 가득한 들녘으로 그 소리가 정다고 한가로운 느낌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박건식은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그 남자에게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그 남자가 계속 미안해하니까 어떻게 감정풀이를 할 수도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남자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터덕터덕 걷고 있는 박건식의 뒤를 아들 동화가 종종거리며 따르고 있었다. 동화는 아버지가 왜 저렇게 기운이 빠져서 그냥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 쟁기질하는 사람을 기운차게 몰아낼 줄 알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왜 그 사람을 몰아내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기운이 달린 것인가? 아닌데, 그 사람이 더 기운 없어 보였는데. 이제 그 논은 우리 논 다니면서 메뚜기를 잡아주던 우리 논이었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이 논을 깔까...... 동화는 알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아부지, 어찌서 그 사람얼 안 몰아내고 그냥 가아?"

동화는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어서 입을 열었다.

"......"

"아부지, 인자 그 논언 그 사람 논이 된 기여?"

"......"

"아부지, 인자 그 논언 우리 논이 아니여?"

"시끄럽다, 이놈아!"

박건식은 고개를 휙 돌리며 소리쳤다. 동화는 소스라치며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리고 빼액 울음을 터뜨렸다. 화난 아버지의 얼굴이며 눈이 너무 무서웠던 것이다. 울음을 터뜨리면서 떠오른 것이 할아버지의 정다운 얼굴이었다.

"애앵......할아부지헌티 일를겨......"

울음 섞인 아들의 이 말을 듣자 박건식은 가슴이 찡해졌다. 그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동화야, 니가 더 크면 다 알게 돼야."

박건식은 아들을 집으로 가게 하고 자기는 남상명의 집 쪽으로 고샅을 돌았다. 혼자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상명은 헛간 옆에서 쟁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는 육자배기 가락을 흥얼거리면서 박건식이 들어선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 손질헐 것 없소, 쓸디 없응게."

박건식의 퉁명스러운 말이었다.

"? 이이, 자네 거 먼 소리여?"

박건식을 알아본 남상명의 얼굴이 의아스럽게 변했다.

"큰탈 나 부렀소."

박건식이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또 무신 큰탈이 나?"

"우리덜 논이 하시모토 앞으로 넘어가고 작인도 새로 붙였소."

", 머시여!"

남상명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선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마치 실성한 것 같았다. 그는 도로 털썩 주저앉으며 무엇인가를 울컥 토해내듯 말했다.

"인자 다 틀렸네. 우리넌 망헌 기여."

박건식은 문득 후회했다. 남상명의 논이 어찌 되었는지는 아직 모르는 것이었다. 다만 빨리 힘을 모으려고 짐작으로 그렇게 말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되짚어 생각해 보아도 남상명의 논이라고 무사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남상명이 생각보다 심하게 놀라는 바람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든 것뿐이었다.

"이 일얼 어째야 쓰겄소?"

"어쩌기넌......다 글렀당게. 인자 다 굶어 죽을 일만 남은 것 아니라고."

남상명은 멍한 눈길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박건식은 호자 있을 때보다 낙담이 더 커졌다. 남상명이 이처럼 심하게 충격을 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가 줄줄이 딸린 식구들이 많기는 했다. 무슨 의논은 고사하고 자신이 오히려 위로를 해야 할 판이었다.

"호랭이헌티 열두 번 물려가도 정신만 채리먼 살아난다고 안 그럽디여. 맘 갈앉히고 있으씨요, 난 내촌 춘배아재헌티 가보고 올랑게."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박건식은 마음을 다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촌 대표인 김춘배를 만나보면 그쪽 사정도 알게 되고, 무슨 방도도 생길지 모른다 싶었던 것이다.

"어이, 어이, 나도 갈라네."

박건식은 사립을 나서다가 고개를 돌렸다. 남상명이 허겁지겁 달려 나오고 있었다. 그 뒤를 노란 햇병아리가 쪼르륵 따르다가 멈춰서며 두리번거렸다. 들마을은 빤히 바라다보이면서도 멀었다. 들판을 가로지르면서 두 사람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박건식은 드넓은 들녘을 새삼스럽게 이쪽저쪽 살피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그 들녘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뛰어다니고 동네에서 사방 20리 안쪽은 어디가 누구네 논인지도 알 정도였다. 그런데 이 넓고 넓은 들판에 자기네 논이라고는 한치도 없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가슴에서 찬바람이 일며 들녘이 낯설어지는 것이었다.

"아부님, 용 일얼 어찌해야 좋당가요."

박건식은 벌써 몇 번째 아버지를 부르고 있었다.

"글안해도 자네덜얼 보로 갈라든 참이었구마. 일이 짐작허든 대로여."

김춘배의 첫마디였다.

"요 일얼 어찌해야 좋당가요?"

박건식의 입에서는 속으로 곱씹었던 말이 그대로 나왔다.

"나도 어지께 늦게사 알고 밤샘서 생각해 봤는디도 묘수가 없네. 그렇다고 그냥 앉어서 당헐 수만도 없는 일이고, 안자보콘 의중얼 모아보세."

김춘배는 곰방대로 마루 끝을 내리쳤다. 나이는 50이 다 되었지만 그 눈빛이며 어조에서는 남다른 담력이 묻어나고 있었다. 박건식은 역시 춘배 아저씨를 찾아오기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 될 때 안되더라도 그렇게 힘있게 말하는 춘배 아저씨를 대하니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근디, 하시모토란 사람언 어찌서 우리헌티 말 한마디 없이 소작꺼정 딴사람덜로 갈아부렀을게라?"

남상명의 기운 없는 물음이었다.

"그것이야 당연지사 아니겄어. 그놈이 볼 적에넌 우리가 다 땅 찾겄다고 뎀비는 말썽꾼덜 아니여. 자네가 그놈이라면 그리 안허겄능가"

김춘배의 말은 냉정했다. 남상명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요런 일언 다 토지조사국서 허는 것이제라?"

박건식은 을을 해결해야 할 방도를 찾으려고 매듭을 짚어내고 있었다.

"그것이 꼭 거그만이 아니여. 총독부 법이란 것얼 앞세와놓고 토지조사국에다 동척에다 관청꺼지 얼키설키 짜고 돌아가는 것이제."

"근디, 조사국 넘덜언 맨날 토지심사럴 허닝게 기둘리라고 혀놓고 인자와서 엉뚱한 놈헌테 땅얼 넴게준 것언 그것으로 토지심사럴 끝냈다는 것인게라?"

"아닛, 꼭 그런것만이 아니여. 이주헌 즈그 농민덜헌티 노놔준 땅얼 보먼 알제. 그 땅 임자덜이, 어찌서 심사 중인 땅얼 일본사람덜헌티 넴기냐 허고 따지고 나슨 게 조사국놈덜 허는 말이, 심사넌 허는 중인디 심사가 끝날 때꺼정언 총독부 땅이라 총독부 법대로 이주민헌티 농사짓게 허는 것잉게 잔말 말고 기둘려라, 허는 것이제."

"그먼, 칼자리 쥔 놈덜언 그놈덜인디, 심산지 지랄인지럴 부지하세월로 질질 끌어갈 것 아니겄소."

"것이야 뻔허제. 지끔꺼정 그리 해온 것 아니드라고."

"글먼 땅 찾기넌 들른 것이제라."

"아니제, 왜놈덜이 끌어가는 대목언 딱 한 가지여. 느그 땅인 것이 확실헌 서류럴 내노라는 것 아니드라고? 그 서류럴 찾고 또 찾어댕김서 누가 이기는지 보자 허고 싸와나가야제."

"언제꺼정 그래야 헌디요?"

그때까지 담배만 빨고 있던 남상명이 불쑥 물었다.

"4년이고 5년이고!"

"소작도 다 띠인 판에 그간에넌 흙 파목고 살고라?"

"어허 이사람아, 남자 심지가 어찌 그리 수양버들이여. 소작질 해묵을 땅이 어디 그뿐이여? 무신 짓얼 히서라도 목구녕에 풀칠해 나감스로 5년 아니라 10년이 걸려도 땅얼 찾어야제 왜놈덜헌티 이기는 것이제."

힘진 김춘배의 말에서 박건식은 생전의 아버지를 느끼고 있었다.

"소작 못 얻어 고향 뜨는 사람덜 봄서도 그리 말씸허시요?"

남상명은 그만 울상을 지었다.

"이 사람아, 왜놈덜 집구석에 머심살이럴 히서라도 참아내야 혀!"

김춘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일본 이주 농민들은 농사철 일이 한창 바쁠 때는 조선사람들을 날품팔이로 불러다 쓴 지는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그런데 붙박이로 머슴을 두는 집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었다. 그건 더 말할 것 없이 그들이 차지한 농토가 그만큼 많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는 <똥뼉 대주는 놈들>이라는 점잖지 못한 말이 심심치 않게 오가고 있었다. 그건 바로 일본 농민들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욕이었다. 그러나 붙박이 머슴이라고 해서 일본 농민들은 한집에 재우는 일은 절대 없었다. 낮에 일만 부려먹을 뿐이지 속을 믿지 않는다는 뜻도 되었고, 한집에 재울 만큼 사람대접을 하지 않는다는 뜻도 되었다. 인력거꾼에서부터 시작해서 일본사람들을 상대로 돈벌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도 유독 머슴살이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심한 욕을 하는 건 그 욕 속에 땅을 빼앗긴 원한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듣자 허니 토지조사사업이란 것도 얼추 끝나가는 모냥이여. 그렇게 그간에 마구잽이로 몰아잡었든 땅덜얼 관청 놈덜 맘에 드는 놈덜헌티 노놔믹이고 있는 판인 것이제. 긍게로 하시모토 겉은 크고 작은 왜놈 지주덜이 여그저그서 불거질 것이로구만. 용지면에서도 그간에 열댓 마지기 짓든 놈이 느닷없이 100마지기가 넘게 차지허고 지주로 둔갑했다는 것이여. 헹펜이 요리 고약시럽게 꾀여 돌아갈 적에 정신채려야 허는 것이여."

김춘배는 남상명에게 소리 지른 것을 미안해하듯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다.

"참말로, 속 타는 사람덜이 수도 없이 많겄구만이라."

"자작농이 하로아칙에 소작농으로 처백히고, 인자 그도 못해 쪽박 신세가 되게 생겼제. 참 기맥힐 일이여."

김춘배의 한숨이 먹구름처럼 짙었다.

"글먼 우선에 사람덜얼 뫄야겄제라?"

"그래야제. 당장 오늘 저녁에 우리 집서 만내기로 허세. 오래 끌 일이 아닝게."

"야아, 그리 알겄구만이라.

김춘배의 집에서 열린 회의에서 결저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모두가 토지조사국에 찾아가서 원상회복을 요구한다. 둘 째, 그것이 효과가 없으면 하시모토를 찾아가 동처와 같은 조건의 소작권 반환을 요구한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내촌과 외리 중간 지점에서 만나 토지조사국으로 출발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그전에 땅을 빼앗겼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겉보기만 같을 뿐 속은 달라져 있었다. 우선, 대표였던 박병진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리고 몽둥이질을 잘못 당해 성불구가 되어 딴 남자와 도망간 아내를 찾아 헤매다가 죽어간 김용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가혹한 몽둥이질로 몸을 상한 네댓 사람들이 다리를 절룩이며 걷고 있었다. 그들이 토지조사국에 도착했지만 다나카는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나타난 것은 총을 겨눈 주재소 순사들이었다. 다나카가 주재소에 연락한 것이 뻔했다. 순사들이 나타나서야 다나카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일은 나도 모르는 것이오. 그건 상부에서 하는 일이지 내 소관이 아니니까 딴 데로 찾아가시오."

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나카가 한 말이었다. 이 한마디를 던지고 다나카는 다시 사무실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알았으면 다들 해산해, 해산!"

"다 잡아넣기 전에 빨리 해산해!"

순사들이 총대를 휘둘러대며 그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갑시다. 일단 돌아습시다."

김춘배의 말에 따라 그들은 순수히 돌아서서 흩어졌다. 순사들은 서로 웃음을 나누며 흩어지고 있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리 계획한 대로 순사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다시 모였다. 그들은 하시모토의 집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다나카가 말한 상부를 찾아가기 전에 하시모토와 소작권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하시모토 역시 대문을 열지 않았다. 개 짖는 소리만 컹컹 울려 나왔다. 그런데 그 짖어대는 소리로 보아 개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한동안 극성스레 짖어대던 개들이 잠잠해졌다.

", 하시모토가 나오는갑다."

반색을 하는 누군가의 말이었다.

"그려, 지가 안 나오고 어찔 것이여."

다른 사람이 느긋한 어조로 장단을 맞추었다. 그때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쏟아져 나온 것은 시커먼 개들이었다. 개들은 그대로 사람들을 덮치고 들었다.

"으악!"

"아이고메!"

"아야야야....."

대문 앞에 섰던 사람들이 비명을 토하며 쓰러지고 나둥그러지고 있었다. 송아지 만큼씩 큰 개들은 어찌할 줄을 몰라 서로 소리 지르며 우왕좌왕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따앙

그때 총소리가 진동했다. 순사들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베쓰, , 메리! 베쓰, . 메리! 잘했다. 이리 와, 이리 와!"

대문 안쪽에서 이렇게 목청을 돋우고 있는 것은 하시모토였다. 양쪽 손을 허리에 받쳐 올린 채 버티고 선 그는 여유만만하게 개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리도 사납던 세 마리의 개는 꼭 거짓말처럼 사람들을 물어뜯던 것을 멈추고 뒷걸음질을 하며 하시모토에게로 가고 있었다. 그놈들은 몸집 큰 셰퍼드였다.

"그놈들 말야, 다시는 이따위 짓 못 하게 다 잡아넣어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라구. 내가 소장한테 단단히 말해 놨으니까!"

하시모토가 대문을 닫기 전에 순사들에게 내쏜 말이었다. 사람들은 개에게 물어뜯겨 옷이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세 사람을 에워싸고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라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 새끼들, 해산하라니까 우릴 속이고 이쪽으로 와! 한 놈도 빠짐없이 주재소로 이동한다. 빨리 해, 빨리!"

순사들의 위협 속에 그들은 개에게 물린 세 사람을 업고 받치고 했다. 주재소로 떼밀려 들어간 그들은 차례로 이름을 대고 손도장을 눌렀다. 개에게 물린 사람들도 부축을 받아가며 손도장을 눌러야 했다. 다시는 그런 집단난동을 부리지 않겠다는 각서였다.

"모두 태형감이지만 개한테 물린 사람들이 있어서 특별히 훈방 조처한다. 다시 또 이따위 집단난동을 부릴 시에는 그때는 전원 가차 없이 징역을 살릴 테니 모두 정신 똑똑히 차려라. 알겠나!"

주재소장은 마룻장을 구르며 소리쳤다. 그들은 개에게 물린 김춘배, 박건식, 하봉수를 몇 사람씩 번갈아 업어가며 마을로 돌아왔다. 김춘배와 박건식은 양쪽 마을 대표로 앞에 사서 있었으니까 개한테 물리는 것은 피할 수 없었던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또 하봉수가 횡액을 당한 것이었다. 하봉수는 그전에 당한 몽둥이질로 절름발이에 성불구까지 된 몸이었다. 그는 결기 강한 성질에 앞으로 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몸이 불편해서 그랬는지 어쩐지 셋 중에 제일 심하게 상처가 나 있었다. 세 사람을 뺀 나머지 열아홉은 동네에 당도하자 죄인이 된 심정으로 개에게 물린 데 신효한 약을 구하려고 허둥거렸다. 그런 때는 으레껏 온갖 풍상 다 겪은 노인네들이 한몫을 하고 나섰다. 노인네들은 신효한 처방을 이것저것 다 내놓았다. 생지황즙을 내서 하루에 세 차례 공복에 한 숟가락씩 먹고, 그걸 짓찧어 물린 데 갈아붙이면 미친개 병도 말끔하게 막아낼 수 있다. 생칡뿌리를 틉 지게 달여서 하루 세 차례 공복에 반 사발씩 마시고, 그걸 짓찧어 붙이면 신효하게 낫는다. 두꺼비 뒷다리를 회를 치거나 구워서 먹이면 한 번으로 직효다. 호랑이 뼈를 갈아 가루를 한 숟가락 물에 타서 마시고, 물린 자리에 붙인다. 그리고 호랑이고기를 태워 재를 만든 다음 식초에 개어 붙이면 더욱 좋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더 있었지만 구하기 손쉬운 생칡뿌리로 결정을 보았다. 그런데 무슨 약을 쓰거나 간에 당장 끓인 소금물로 물린 자리를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다름 아닌 소독이었다. 그러나 생살을 물어뜯긴 상처를 소금물로 씻어내면 그 아픔이 어떨 것인가. 세 사람은 칡즙을 마셔가며 며칠째 앓아누워 있었다. 물린 상처도 상처였지만 놀라움도 커서 그들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특히 하봉수는 밤마다 헛소리를 하며 식은땀을 쏟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그 이야기들을 간추리면 두 가지였다. 어차피 땅 찾기는 틀렸으니 더 늦기 전에 딴 살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쪽과 땅을 찾을 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든 버텨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땅찾기를 포기한 쪽이 서너 명이 더 많았다. 그들의 말은, 소작까지 빼앗기고 당당 처자식을 굶길 판인데 무슨 수로 버티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어디로 살길을 찾아가야 할 것인지는 난감해했다. 남상명은 땅을 찾는 쪽에 서 있기는 했지만 속마음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버티자니 살아갈 일이 막막했고. 떠나자니 갈 곳이 막막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밥상머리에서 큰아들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아부지, 나 동상허고 돈벌이 떠날라요."

"뜸금없이 무신 소리여?"

이렇게 말하면서도 남상명은 놀라지 않았다. 큰아들 만표가 벌써 서너달 전부터 그런 냄새를 풍겨왔던 것이다.

"뜸금없는 것이 아니제라. 인자 소작도 띠이고, 땅 찾을 가망도 없응게 우리가 돈벌이 나슬라는 것 아닌감요."

"야아, 넘 집 머심살이보담 낫제라."

작은 아들 만기가 덩달아 나섰다.

"돈벌이 헐 디가 어디 마땅허니 있는 것도 아니고, 느그덜이 안직 타관으로 돈벌이 떠날 아니도 아니다."

정곡을 찌르고 드는 두 아들의 말에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어 남상명은 이렇게 말막음을 하려고 했다.

"아부지, 시상이 개명험서 농사말고도 묵고 살 돈벌이가 쌔고 쌨다는 그 흔헌 소문 들어보도 못 허셨는게라?"

만표는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고, 나호고 나이가 똑겉은 양반집 자석덜이 다 장개들어 요렇타께 아그덜 애비가 되야부렀구만요."

그러니 돈벌이 떠나기에 뭐가 이냐는 열여덟 살짜리 만기의 공박이었다. 남상명은 할 말이 없었다. 위로 두 딸을 시집보내고 큰아들은 스무 살이 꽉 차도록 장가보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논을 빼앗기면서 일어난 병통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작은아들마저 장가들일 나이가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느그 생각에넌 나이가 다 든 것 같애도 배움 없는 사람덜 돈벌이란 것이 몸띵이 험허게 궁굴려 기운 팔아묵는 것인디, 그러기에넌 안직 설익은 것이여."

"아이고 아부지, 농새 지묵을 기우니먼 천하에 못헐 일이 머시가 있간디요."

"나도 쟁기질도 헐지 아는디요."

남상명은 또 말문이 막혔다. 벌써 이삼 년 동안 농사일은 두 아들이 도맡다시피 해왔던 것이다. 나락 두 섬을 지거나 쟁기질을 할 수 있으면 상일꾼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을 작은아들은 일깨우고 있었다.

"아부지넌 동생덜 키움서 편헌 맘으로 땅 찾는 일이나 끈허니 허시씨요."

"하먼이라, 아부지넌 인자 늙었응게 호강만 허시먼 되는구만이아."

남상명은 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자식은 딸 둘에 아들 하나가 더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나이는 어느덧 마흔 고개를 넘어 절반에 이르고 있었다. 사실 서른다섯만 되었더라도 왜놈들이 판치는 세상 박차고 만주로든 어디로든 떠날 작정을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열다섯 살 때부터 농사일을 익혀서 30여 년간 부려먹은 몸은 늙었다는 말을 들어도 서러울 것 없을 만큼 기운 쓰기가 마음 같지 않았던 것이다.

"더 두고 생각혀 보자."

남상명의 입에서 더디게 나온 말이었다. 얼굴이 밝아진 만표와 만기는 서로 마주보며 눈이 반짝 빛났다. 남상명은 다음날도 박건식이에게 문병을 갔다. 박건식은 여전히 침울해 있었다. 땅찾기를 포기하고 어딘가로 떠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부터 박건식의 얼굴에는 그늘이 서렸던 것이다.

"저어......한 가지 의논헐 일이 있는디 말이시. 우리 만표허고 만기가 돈벌이럴 떠너겄다고 저리 발싸심인디......"

"글먼 아재도 뜨시게라?"

박건식이의 다급한 물음이었다.

"아니여, 나넌 나이가 안 있능가. 여그 앉어서 끝꺼정 땅얼 찾어야제."

"갸덜도 장개들 나이가 다 찼는디 어찌 생각이 없겄소. 시상언 시시각각 변호고, 소작도 띠인 판이니 무신수로 잡아 앉혀 두겄소. 즈그덜 마만 강단지면야 보내는 것도 괜찮허겄제라."

남상명이 뜨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안도하며 박건식은 이렇게 응답했다.

"몰르겄네, 즈그덜이 무신 돈얼 벌지."

이렇게 말하면서도 남상명은 두 아들의 말을 들어주기로 마음 굳히고 있었다.

"근디, 뜰라고 맘 정헌 사람덜언 어찌 되고 있소?"

"글씨 오가는 말덜이 분분헌디, 만주로 뜨것ㅆ다는 사람덜이 예닐곱 되고, 화전 일구로 들어가겄다는 사람이 두엇에, 식구덜언 여그 두고 타지로 돈벌이럴 나스겄다는 사람이 두엇이고 그렇구마."

"그려도 만주로 뜨겄다는 사람덜이 질로 많구만이라 이. 어쩌겄소, 우리덜 심이 준다고 못 뜨게 말길 수도 없는 일이고. 그나저나 우리맨치로 당헌 사람덜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인디, 사방서 그리 만주로 뜨다보먼 만주 땅도 인심이 사나와지고 그러겄구만이라......"

박건식이 팔뚝의 상처 부위를 긁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 긁지 말소. 긁으먼 덧나네."

남상명은 박건식의 손을 떼 내고는,

"어쩌겄능가, 땅 파묵든 사람덜이 땅 찾아가야제. 좌우간에 왜놈덜 지주 새로 불거지는 판에 동네마동 만주로 안 뜨는 집이 없는 헹펜인디, 만주 땅이 아무리 넓다 해도 사람덜이 그리 몰켜가먼 인심이 안 변헐 수가 없겄제. 사람이고 물건이고 많고 흔해지먼 천해지는 법잉게."

"그 사람덜언 언제 뜬다등게라?"

"안직 똑똑허니넌 몰를겄구만. 인자 채비덜 시작혔응게 보름이야 걸리덜 안컸다고. 옆동네로 이사허는 것도 아닝게."

"농사 절기로 보면 영 고약시럽소. 기와 뜰람사 하로라도 앞댕기는 것이 좋제. 근디, 그 사람덜 뜨기 전에 이별자리라도 맨글어야 허지 안컸소?"

"하먼 그래야제. 그간에 살아온 정리가 있는디 막걸리 한 잔썩이라도 나눠야제."

"참 기맥힌 시상 되야부렀소."

박건식은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토했다.

 

신세호네 동네에서도 똑같은 사건으로 네 가구가 중국으로 떠날 준비를 다 끝내놓고 있었다. 다만 새로 생겨난 일본인 지주가 다를 뿐이었다. 그들 네 가구 사람들은 벌써 열흘이 넘게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동네 사람들은 그들이 계속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았지만 실은 신세호가 은밀하게 붙들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신세호는 그들이 당한 일이 너무 안타까운 데다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만주로 떠난다고 하자 더 가슴이 아파 무언가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송수익에게 소개를 해주자는 것이었다. 너무 고마워하는 그들을 붙들어놓고 신세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공허였다. 그러나 공허는 이쪽에서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나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나 바람이듯 왔다가 뜬구름이듯 떠나는 사람이었다. 다만 올 때가 머지않았다는 육감만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신세호는 하루하루가 그냥 지나갈 때마다 애가 타들고 있었다.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날마다 할 말이 없어 궁색하기 짝이 없고, 그럴수록 초조와 조바심만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간에 송수익에게 가는 길목길목을 세세하게 알아놓지 않은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공허는 열나흘 만에 나타났다. 신세호는 너무 반가워 아이고, 부처님!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좋고말고요. 그리허제라."

공허의 시원한 응답이었다. 그러나 공허는 소개장 같은 것은 쓰지 않았다. 말로만 자세히 가르쳐주라고 했고, 송수익의 이름도 감춘 채 지삼출이란 사람을 찾으라고 했다. 그 주도면밀함에 신세호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야 왜놈덜이 토지조사사업얼 시작헐 적보콤 다 작정되었든 일 아니겄는가요. 분허고 원통해도 어쩌겄는게라. 허나 많은 사람덜얼 그리 분허고 원통허게 맨글수록 결국 우리헌테 졸 것이구만요. 그 분허고 원통한 맘덜이 쌓이고 쌓이면 왜놈덜한테 원수갚음 헐라는 뜻으로 뭉쳐져 터질 날이 올 것잉게라."

공허가 남기고 떠난 말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별잔치할 돈을 추렴했다. 신세호는 그 돈을 네 가구의 노자에 보태게 했다. 그리고 이별 잔치는 자신의 집에서 차리기로 했다. 잔치준비에 동네여자들이 거의 다 모여들어 거들었다. 지난해 초겨울에 올렸던 딸 하엽이의 혼례준비 때보다도 한결 많은 여자들이었다. 물론 그때는 아내가 음식솜씨 가진 사람을 골랐을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 많은 여자들을 보면서 신세호는 이별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아침부터 준비한 잔치는 해질녘에 시작되었다. 마당에 덕석을 넓게 깔고 떠나는 사람들 보내느 사람들이 둘러앉은 잔치 자리는 침통하기만 했다.

"저어......지가 못허는 말이라도 한마디만 허겄구만요. 긍게 머시냐, 즈그덜 겉은 상것덜이 동네럴 뜨는디도 선상님 겉으신 양반 어러신이 이리 잔치상얼 채래주신께 황송허고도 아즘찮허고도 또 아즘찮히서 무신 말얼 디래야 헐란지 가심만 답답허구만이라우. 이 은혜 평상 안 잊어볼고 맘속에 짚이짚이 간수험서 은혜 갚을 날 오기럴 기돌리고, 이승서 못 갚으면 저승에 가서라도 꼭 갚도록 허겄구만이라우. 양반님네헌티 요런 대접 받아보는 것언 즈그덜 평상에 첨잉게요. 선상님, 아즘찮이 아즘찮이 또 아즈찮이구만이라우."

넷 중에 연장자인 문서방이 목이 메며 신세호 앞에 허리를 깊이 숙였다. 문득 자리가 조용해지며 착 가라앉는 기분이 밀려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따 저 사람, 말 못헌다디만 말만 청산유수고, 한마디만 헌다등마 치렁치렁 열두 발이시. 참 숭헌 사람이네 잉."

무거운 분위기를 깨려는 그 재치를 눈치채고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와앙 웃음을 터뜨렸다. 그 기회를 이용해 신세호는 몸을 일으켰다.

"나가 변변찮은 자리를 맨들었응게 먼첨 술얼 한 잔씩 따러야 도리가 지대로 되는 것 겉은디, 어이, 말 잘 못허는 숭헌 사람, 문서방보콤 한 잔썩 받소."

"아이고, 참마로 좋구만이라우."

"우리 선상님이 질이시여."

사람들이 뜨겁게 손뼉을 쳐댔다. 신세호는 한사람, 한사람 돌아가면서 조롱박으로 술잔을 채웠다. 송수익이 개화꾼으로 주변 양반들의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당해 가면서도 신분 낮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려고 굳이 자신을 낮추었던 뜻을 신세호는 다시금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인간관계에는 자기를 낮춘 만큼 진정한 믿음이 오가고 도타운 정을 나누는 기쁨과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일찍이 깨닫고 실천한 송수익은 역시 한발 먼저 가는 선각이었다. 그런 정신을 가진 그는 만주에서도 남다른 독립군 대장으로 자리 잡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에게 사람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그가 더 그리워졌다. 그는 이제 벗만이 아니라 사돈지간이었고, 장자의 혼인을 보지 못한 그의 심정을 생각하면 죄스러운 마음이 자꾸 커질 뿐이었다. 술잔이 쉴 새 없이 돌고 어둠살이 퍼지며서 사람들은 술기운이 거나해져 가고 있었다. 마당 양쪽에는 어둠도 밝히고 밤중 냉기도 가시게 할 겸해서 모닥불이 지펴졌다. 그즈음부터 여자들도 한쪽에다가 살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어이, 자네덜 말이여, 거그 만주 땅에 가서 살 만허먼 우리도 불러야혀. 자네덜만 오지게 재미보덜 말고."

누군가각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하이고, 그 심뽀 한분 드러우네. 먼첨 고상 안허고 그저 넘 덕만 볼라고."

"냅둬, 저 사람언 만주가 극락이라도 못 가 살어. 여그서도 삼동이먼 응신얼 못허는 빙신인디 만주야 오짐발이 바로 고드름 된담시로."

술취한 웃음들이 걸판지게 엉클어졌다. 서운함과 슬픔을 농담인 양 감추며 이런 이야기들이 무성해지는 가운데 어둠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여자들도 어둠을 방패 삼고 핑계 삼아 술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술이 취허먼 가무가 따라야 지맛이 나느 것 아니드라고? 나가 노래 한 자락 허겄는디, 워띠여?"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려, 그려, 공자님 말씸이여."

"어이, 아조 틉지고 서럽게 불러야 혀."

여자들까지 합세해서 손뼉을 쳤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느냐

날 두고 가시는 님 가고 싶어 가느냐

 

아리랑 가락이 설움으로 휘늘어지고 사무침으로 휘감기면서 한스러움으로 애간장을 녹이고 있었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아리랑 끙끙끙 아라리가 났네

 

이 대목의 가락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남녀 합창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외쳤다.

"뎌자덜 소리가 어찌 저리 매가리없는고. 심 잠 돋과!"

 

만주로 가는 것이 좋아서 가나

전답얼 뺏갰응게 울면서 가제

 

"얼씨구 조오타, 자알헌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아리랑 끙끙끙 알라리가 났네

 

"인자 여자덜이 받으소!"

한사람이 춤을 벌렁거리며 외쳤다.

 

물 좋고 산 좋은 데 일본놈 살고

논 좋고 밭 좋은 데 신작로 난다

 

"얼씨구나, 그 소리 한 분 맵다."

 

눈물길 만주길 언제나 오려나

무자 돼서 온다고 약조럴 허세

 

"그려, 그려, 서럽고 눈물 난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아리랑 끙끙끙 아라리가 났네

 

그들은 어느덧 거의 모두가 일어나 서러운 가락에 맞추어 괴로움을 삭이는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이 가락에 ㅈ치고 춤에 겨웠을 때 모닥불도 사위어져 가고 있었다. 그들은 밤 깊은 어둠을 밟고 흩어져 갔다. 동네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해가 떠오를 즈음 당산나무 아래에 모였다. 네 가구 사람들은 크고 작은 집들을 이고 지고 있었다. 문서방이 당산나무 앞에 무릎 꿇고 호리병에 든 술을 사발에 가득 따랐다. 네 가구 스물한 명이 짐들을 내려놓고 다 같이 절을 올렸다. 고향 땅에 올리는 작별 인사였다. 그들이 다시 짐들을 이고 지고 떠날 채비를 했다.

"가만, 가만있어 보드라고."

그때 신세호가 허둥거리는 몸짓으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는 당산나무 아래 가장자리 땅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 뜻을 알아차린 서너 사람이 함께 땅을 파헤쳤다. 신세호는 네 사람의 가장에게 흙을 한 주먹씩 건넸고, 그들은 머리에 동인 수건을 풀어 흙을 받아 감쌌다.

 

 

23. 민심의 노래

"이눔아! 다리 빙신맨치로 그리 삐닥허니 스덜 말고 똑바라지게 서!"

늙은 거지가 벌컥 소리치며 싸리 회초리로 방바닥을 내리쳤다. 짚 깔개가 다 낡아 흙이 드러나는 방바닥에서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

"나넌 동냥아치가 아니랑게라. 우리 동상 찾으로 댕긴다 말이오."

꾀죄죄하게 때 절고 남루한 차림은 천상 거지일 뿐인 소년이 울상이 되어 발을 굴렀다. 그 아이는 여동생 옥년을 찾아 헤매다니는 득보였다.

"알어, 이눔아. 그 소리 발써 열 분도 더혀서 귀에 못이 백혔다."

늙은 거지가 회초리 끝을 까딱거리며 똑바로 설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긍게로 장타령 갤칠라 허덜 말고 그냥 보내도란 말이오."

득보는 회초리가 무서워 똑바로 선 채로 말은 당차게 하고 있었다. 득보는 내빼고 싶어서 죽겠으면서도 그 생각은 단념하고 있었다. 아까 잡혀 오면서 늙은 생김과는 다르게 거지 아범이 몸이 빠르고 기운이 센 것을 겪어 보았던 것이다.

"요놈으 자석아, 쌔넌 짤라도 침언 질게 뱉고 잡구나. 니 맘만 동냥아치가 아니제 니 고라지넌 숭악헌 거렁뱅이 새끼여. 니가 느그 동상 찾을 때꺼정언 천상 동냥질 히서 묵고 살어야 할 것잉께 그 쬐깐헌 주딩이 늘리덜 말고 시키는 대로 장타령이나 자알 배와 갖고 떠나도록 혀."

때며 검댕이 덕지덕지한 주름진 얼굴로 늙은 거지는 득보를 달래듯 히죽이 웃어 보였다.

"장타령 안 불르고도 그간에 밥만 잘 얻어묵었단 말이오."

", 시끄럿!"

늙은 거지가 소리치며 득보의 바로 발 옆을 내리쳤다. 득보는 질겁을 해서 팔딱 뛰었다.

"저늠으 새끼가 주딩이만 살아서 따곡따곡 말대답이여, 말대답이. 야 이놈으 새끼야, 니놈얼 딱 봉께 솔찬이 똑똑헌 것 같은디, 그렁께 나가 허는 말 똑똑허니 잘 들어. 이눔아, 나가 니헌터 역부러 장타령 갤칠라는 것언 니가 수월토 편하니 밥 빌어묵으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여. 글먼 어찌 그런지 아냐? 동냥 주는 사람덜헌티 고마와허라고 그러는 것이여. 니 이 말이 무신 소린지 알아묵겄어!"

늙은 거지가 끝 대목 말을 갑자기 소리치듯 하며 회초리 끝으로 득보의 눈을 겨누었다. 득보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보랑게, 아무것도 몰르는 놈이 시건방구지게 나대, 나대기럴. 이눔아! 고것이 무신 말이고 허먼 말이여, 장타령언 나 배고파 죽겄응게 밥 한술 보태줏씨요 허는 뜻으로 부러대는 것이 아니고 말이여, 아이고 어러신네들, 심지게 농새짓고 애써서 버신 돈인디 지가 못 불르는 노래라도 한 자락 불러올릴 것잉께 최허지 마시고 들어주시고 귀헌 밥 한술 보태주시면 고맙게 묵겄구만이라우, 요런 뜻이다 그것이여, 알겄어!"

다문 입을 쑥 내민 득보는 눈만 꿈벅꿈벅하고 서 있었다.

"야 이눔아, 대답얼 혀! 고런 뜻얼 알고 있었어, 몰랐어!"

", 몰랐구만이라우......"

득보는 고개까지 저으며 대답했다. 장타령이 그저 동냥 달라고 거지 떼들이 떼쓰는 소린 줄 알았지 그런 뜻이 있는지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눔아, 잘 들어라. 장타령 한 자락도 안 험스로 지끔꺼정 얻어묵고 산 니놈언 순전허니 도적놈 심보로 산 거시이. 도적놈하고 동냥아치하고 머시가 달른지 아냐? 도적놈덜언 넘덜 귀헌 물건이고 돈얼 억지로 뺏는 놈덜이여. 그러다가 들키먼 사람얼 마구잽이로 죽이기도 허고. 근디, 동냥아치덜언 그것이 아니여. 장타령을 험스로 한술 주기럴 기둘리고, 밥얼 다 묵어불고 없다먼 담에 또 오기로 허고 그냥 돌아스고 그러는 것이란 말이녀. 그렁께 넘덜 물건얼 돌르도 않고, 사람 목심얼 해칠 일도 엇고 그렇제. 그러고, 장타령으로 사람덜 맘얼 풀어주고 밥얼 얻어묵는 것만이 아니고 잔칫집이나 상가집서넌 잡일 궂은일 다 히주고 배불르게 얻어묵는 것이 도리여. 니넌 그리 안 하고 순전허니 꽁짜배기로 얻어묵고 사었응꼐 도적놈허고 머시가 달르냐? 그럼스로도 머시여? 나너 동냥아치가 아니라고? 에레기 순 속 씨커먼 도적놈아, 나 손에 맞어죽어라!"

늙은 거지는 벌떡 일어나더니 곧 목을 조를 것처럼 두 손을 펴 가지고 득보에게로 달겨들었다.

"아니구만요, 아니구마요, 장타령 배울랑마요."

뒤로 쫓기다가 벽에 막히 ㄴ득부가 다급하게 외쳤다.

", 참말이여?"

"야아, 참말이구만이라우."

득보는 늙은 거지를 치켜 올려다보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 아까 육재기 허디끼 그리 정신 써서 잘허겄냔 말이여!"

"야아, 아까넌 그냥 나오는 대로......,아부지가 허든 것 들은대로헌......"

"되았어 그런 맘으로 허라 그것이여"

"야아, 알겄구만이라우."

", 거그 편허니 앉거라."

늙은 거지는 다시 뒤로 물러섰다. 득보는 슬슬 눈치보며 아까 서 있었던 자리를 어림해서 주저앉았다.

"아나, 요것 묵어라."

늙은 거지가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득보 앞에 던졌다. 득보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곶감이었다. 득보는 신 침을 꼴깍 삼키며 얼른 곶감을 집어 들었다.

"니 허는 말 뽕께로 느그 아부지가 소리럴 잘했는갑제?"

"야아, 동네서 질로 잘했구만요."

", 니가 아부지 재주 탁했는갑다."

"아닌디요. 아부지 탁해서 소리 기맥히게 잘허는 것언 동상 옥녀고, 아부지가 나보고넌 재주가 없다고 혔는디요."

"쥐꼬리 재주도 재주넌 재주여."

"......?"

득보는 곶감을 우물거리며 치켜뜬 눈길로 늙은 거지를 빠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소리 잘허는 아부지가 어찌 돼서 니가 이꼬라지럴 하고 댕기냐?"

"......"

"소리에 미쳐서 새끼덜 내불고 바람 따라 어디로 가부렀냐?"

"......"

"야 이눔아, 어런이 물으먼 얼렁얼렁 답얼 혀!"

늙은 거지는 도 회초리를 내려치고는,

"못된 자석이 대꾸 안 헐 말에넌 따곡따곡 말대답이고 대답헐 말에넌 꿀 묵은 벙어리여."

그는 득보를 꼬나보며 어서 대답하라고 또 회초리 끝을 까딱거렸다.

"왜놈덜헌티 총 맞어 죽었구만이라."

"머시여? 워째서?"

늙은 거지의 윗몸이 빳빳해졌다.

"우리 논 뺏을라는 이장얼 아부지가 홧짐에 패대기쳤는디 이장이 꼼지락 못허게 다쳐갖고......"

"어허, 그려서 환장헐 일 당혔고나. 근디, 엄니넌?"

"......"

득보는 고개를 떨구며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그려, 슬프고 서러우면 울어야 가심이 풀린다. 억울허니 당헌 이갸그도 자꼬 해야 속병이 안되는 것이여. 그려서, 엄니넌 어찌 되았다냐?"

"정신이 나가서 밤이고 낮이고 아부지 묏등 찾아댕기다가 저수지에 빠져......"

"아이고메 어쩌끄나, 줄초상이 나부렀네. 왜놈덜이 느그 집안 철천지 원수로고나. 그려서 어찌 외았냐?"

늙은 거지는 이야기를 독촉하느라고 회초리로 방바닥을 톡톡톡톡 쳐댔다.

"동상이 소리 잘 허는 것 듣고 낯 몰르는 주막집 아줌니가 배불르게 믹에살려 주겄다고 히서 따라갔는디, 메칠 있다가 동상얼 놀이패덜이 억지로 딜고 가부러서 동상 찾을라고......"

"아이고, 그런 가쟁이럴 쫙 찢어놀 홀 개잡년이 늑그 공상얼 소리값 받고 폴아묵어 부렀구나. 근디 거그가 어디냐?"

"우리집서 얼매 안 먼디요."

"느그 집이 어딘디?"

"김제 죽산면인디요."

"머시여, 김제?"

늙은 거지는 눈을 휘둥글하게 뜨더니,

"참말로 기맥힐 일이다. 니 시방 여그가 어딘지나 알고 앉었냐? 여그넌 같은 전라도라도 남도 허고도 끝인 장흥땅이여. 니가 동상 찾겄다고 그 쪼깐헌 발로 여그꺼정 걸어서 왓단 말이제? 니가 대체 몇백 리럴 걸었겄냐? 아니여, 아니여, 니가 신작로 따라 쫘악허니 온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 질이나 따라 흘러흘러 왔을 것이니 몇백 리가 아니고 몇천 리럴 걸었는지 모르덜 안컸냐. 아이고, 아이고 요놈아, 장타령 한자도 못험스로도 용허니 얻어묵어 감서 여그꺼정 왔다 이. 왜놈덜 땀시 아무리 살기 에로와졌어도 안직도 시상 인심언 따숩구나."

늙은 거지는 득보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곶감을 얻어먹은 데다가 자기의 속사정을 다 털어놓고 나자 득보는 슬그머니 친근감이 생기는 걸 느꼈다. 더구나 왜놈들과 주막집 여자를 미워하고 자신의 편을 들어 분해하는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이리 오니라. 니 이야그럴 듣고 봉게 나가 니럴 억지로 끌고 온 것이 참말이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가 니럴 억지로 끌고 온 것언 니가 육자배기 가락얼 솔찬이 잘허길래 새로 생긴 장타령을 듣기 좋게 갤쳐볼라고 그런 것이여 근디 니가 그리 가심에 맺힌 사연꺼정 지녔응게 아조 더 잘되았다. 시방 나가허는 소리가 무신 말인지 잘 못 알묵겄지야?"

늙은 거지는 득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정답게 물었다. 득보는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려, 그럴 것이여, 든디, 먼첨 한 가지 묻자. , 왜놈덜이 니 왠수겄제?"

"야아."

득보는 꼬옹 힘을 쓰며 대답했다.

"후제 커서 어쩔 것이여?"

"아부지 엄니 웬수 갚아야제라."

"그려, 고런 맘 없음사 자석새끼도 아니고, 붕알 달고 있을 것도 없제. 글먼 나가 지끔보콤 허는 말 잘 들어야 써."

늙은 거지는 궐련 꽁초를 서너 개 까서 종이에 말았다. 그리고 귀한 성냥으로 불을 붙여 담배를 맛있게 빨았다. 득보는 아가 개울가에서 끌려오던 때를 생각했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고 해서 개울로 내려가 물을 실컷 마셨다. 언제나 배가 고플 때 물을 많이 마시면 당장은 기운이 더 까라지면서 바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동생을 생각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하도 답답하여 흘러나오는 대로 노래를 불렀다. 말 물어보자, 말 물어보자, 저기 가는 저 기러기야......옛날에 아버지가 구성지게 부르던 노래였고, 동생을 찾을 길이 막막하고 답답할 때면 부르고는 하는 노래였다. 그런데 누군가가 뒤에서 장단을 맞추는 것이었다. 놀라서 돌아다보니 늙은 거지가 헤벌레 웃고 서 있었다. 거지 주제에 그러는 것이 같잖아서 고개를 되돌려버렸다. 그런데 그 거지가 갑자기 팔을 낚아채며 잡아끌었다. 자기네 구역에 들어와서 동냥질한다고 또 끌려가서 얻어맞게 될까 봐 팔을 뿌리치고 내뛰었다. 그동안 떠돌아다니면서 그런 일을 심심찮게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달아나지 못하고 잡혀 이 오두막집으로 끌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머시냐, 동냥아치덜이 워째 장타령얼 허는지넌 아까 다 말했응께 똑똑허니 알아들었지야?"

"야아."

"허먼 지끔보콤언 장타령이 머신지럴 일러줄팅께 똑똑허니 들어. 긍께, 장타령언 그저 밥 한술 도라고 지 맘대로 되나케나 씨불려대는 소리가 아니여. 넘덜이 귀헌 밥 귀헌 돈이 아까운 생각 안 들고 적선허게 헐라먼 그 속에 짚은 뜻이 있는 말로 엮어져야 된다 그것이여. 그 짚은 뜻은 머시냐! 바로 사람덜 맘 속에 들어 있는 앞고 씨림서도 내놓고 말로는 못허는 사연덜얼 담어야 된다 그런 말이다. 우리가 그런 사연얼 잘 엮어서 장타령으로 한바탕 읊어대먼 사람덜언 가심에 맺힌 것이 확 풀림서 속이 씨언해지는 기분으로 밥도 돈도 안 아까와라 허고 적선허는 것이여. 긍께로 사람덜이 말로 못허는 것얼 우리가 대신해서 속 풀어주는 것이 장타령이다. 그런 말이다. 알아듣겄냐?"

"사람덜이 말로 못허는 것이 머신디요?"

득보는 의아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려, 요새 조선사람덜이 질로 미와험스로도 내놓고 욕 못허는 인종덜이 누구제?"

"고것이야 왜놈덜이제라."

"아이고, 독똑타!"

늙은 거지는 득보의 등을 토닥거려 주고는,

"바로 고것이단 말다. 오샛 시상에서 왜놈덜헌티 당헌 사람덜이 얼매나 많고, 그 분헌 맘덜이 얼매나 속에서 끓겄냐. 근디도 차마 말로넌 못 허고 모다 끙끙 앓고만 안 있냐. 고 분헌 맘 원통헌 사연얼 장타령으로 엮어 틉지고 한시럼 소리로 읊어대먼 사람덜이 얼매나 속이 씨언해허겄냐!"

그는 제풀에 신명이 오르고 있었다.

"글먼 왜놈덜 욕허는 말도 들었고 그런게라?"

"하먼, 못된 짓 헌 것이 다 들었제."

"글먼 나도 배울랑마요."

득보는 눈이 또릿또릿 해져 말했다.

"오냐, 오냐, 니넌 더군다나 왜놈덜헌테 웬수 갚는 맘으로, 아부지 엄니 가심에 맺힌 한얼 풀어디린다는 맘으로 잘 배와야 써. 담배 한 대 더 꼬실리고 나서 시작허자 잉."

늙은 거지는 담배를 말려다 말고 주머니 속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득보 앞에 불쑥 내민 손바닥 위에는 쪼골쪼골한 대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아까는 곶감에 이번에는 대추, 득보는 이상해서 늙은 거지를 쳐다보았다.

"묵어, 이눔아. 인심 그닥잖은 2천 석꾼 상가집서 얻어온 것이여."

득보는 대추를 얼른 집어 들었다.

"느그 동상이 소리럴 잘 했는갑제?"

종이에 만 담배에 침을 흠뻑 바르며 늙은 거지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야아, 아부지가 큰 소리꾼 맨근다고 험서 동네에 소리꾼 오먼 딜고 댕기고 그랬구만이라. 무신 소리고 한분 들으면 잘히서 아부지가 영판이뻐라 혔고라."

득보의 눈앞에는 아버지와 옥년의 모습이 삼삼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 전라도 땅서 태어난 목심에, 한 분 들으면 무신 소리고 숭낸럴 내다먼 고것이 아조 지대로 타고난 재준갑다."

늙은 거지는 담배를 맛있게 빨아대며 혼잣말하듯 하고 있었다.

"근디, 놀이패넌 이 시상 어디고 안 댕기는 디가 없담시오?"

"그렇제. 바람 다러 구름 따러 떠돌아댕기는 것이 놀이패 한평상잉계."

늙은 거지의 무심한 말에 득보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슁었다.

"죄깐헌 놈이 무신 함숨이여? , 느그 동상 못 찾는 걱정에? 아무 거정 말그라. 동상이야 찾아질 것잉께."

"야아? 고것 참말인게라? 은제 찾아지는디요? 할아부지가 어찌 아시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며 득보는 연거푸 묻고 있었다.

"니가 시방 몇 살이다냐?"

"야아, 열시 살인디요."

"그려? 급허니 생각허덜 말어. 다 클 맨치 커야 헝께."

늙은 거지는 손가락으로 잡을 수도 없을 지경으로 타 들어간 공초를 빨며 얼굴을 타고 오르는 연기에 한쪽 눈을 찡그려붙이고 있다가는,

"니가 재수가 좋음사 이리 떠돌다가 낼모레라도 만낼 것이고, 정 재수가 없음사 늦어도 열칠 팔에넌 만내게 될 거이다."

"열칠팔 살? 할아부지가 점도 보요?"

"에이, 점얼 보기넌. 무신 말인고 허니, 니가 어서 완력이 씨져야 헌다 그것이여. 열칠팔 살얼 묵어 완력이 씨지먼 그 못된 주막집 예펜네럴 찾어가서 그 놀이패 대가리가 누군지, 그 놀이패가 댕기는 질목이 어딘지 대라고 목얼 졸르란 말이여. 그년이야 환히 알고 있을 것잉께. 지끔이야 찾아가도 그 못된 썩을 년이 니할라 폴아묵을라고 들 것 아니겄냐?"

득보는 그때서야 눈앞이 환히 열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맥이 빠지고 말았다. 열칠팔 살......앞으로도 사오 년을 더 있어야 했다.

"이눔아, 금방 웃다가 어찌 도 금방 울사이여?"

"열칠팔 살이먼 당아당아 멀었는디요......"

득보는 시름겹게 중얼거렸다.

"긍께 아까 나가 머시라디냐? 재수가 좋음사 낼모레, 한 달 안에도 만낼 것이고, 열칠팔 살이야 재구사 아조 드러울 때럴 말허는 것이여. 헌고, 재수가 아조 옴붙어서 아 오 년 후에나 만낸다고 쳐, 그것도 죽을 나이 아니고 커나는 나잉게 암것도 아녀. 그렁께 맘 넉넉허니 묵고 장타령이나 잘 배와갖고 쬐깐 쉴케 얻어묵음서 동상 찾아댕기라 그것이여. 알어듣겄냐?"

늙은 거지는 빽 소리를 질렀다.

"야아, 알겄구만이라우."

득보는 이제 놀라지 않고 늙은 거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짜아, 글먼 시작혀 보자. 쩌어그 가서 똑바라지게 스는디, 스는 것만 똑바라지게 스는 것이 아니고 맘도 깨금허니 잡생각얼 허먼 안되는 것이여. 나가 시방 부처님 앞에 합장허고 시 었다 허는 맘으로, 나가 시방 신령님 앞에 절허고 있다 허는 깨끔헌 맘얼 지니라 그것이여. 그리 정신이 똑바라지게 들어야 가락이 귀에 지대로 잽히고, 그래야 입으로 소리가 지대로 나옹는 것이다. 알아듣겄지야?"

"야아!"

득보가 몸을 곳꼿하게 세우고 앞을 똑바로 보며 야무지게 대답했다.

"옳제 잘헌다. 글먼 니가 먼첨 사설이 무신 뜻인지 알어야 헝께로 듣기 수월허게 나가 찬찬히 읊을 것이다. 니넌 겉귀 속귀 활짝 열고 자알들어."

늙은 거지는 깨진 박지를 끌어다가 발 굵은 소금을 손가락끝으로 집어 입에 털어넣고는 어험 큼큼 목청을 다듬었다.

 

짜아 시구시구 들어가는디이, 어얼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저얼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어절시구 들어간다아 저절시구 들어간다아, 푼파바푼파바 자리헌다아 푸부품파 자리헌다아, 어허어 작년에 왔든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도 왔네, 어절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저리절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일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아 일본놈에 시상 되어 10년 세월 다 돼가니, 이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이 시상이 지옥살이 2천만이 통곡헌다, 삼자나 한자나 들고 봐아 3천 리랄 금수강산 토지조사로 묶어놓고, 사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4년이고 5년이고 땅뺏기에 혈안이라, 오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아, 오지겄다 왜놈덜아 그 맛이 꿀맛이겄다. 푼파바 푸파바 자리헌다아 푸부품파 자리헌다아, 어얼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저얼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품바 품바 들어간당, 육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야 육십 영감 분콩터져 감나무에 목얼 내고, 칠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칠십 할멈 절통혀서 저수지에 뛰어드네, 팔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아 팔자에 없는 만주살이 떠난느 이 그 누군가, 구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구만리 장천에 기러기도 슬피 우네, 십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세 10년이야 넘겄느냐 왜놈덜이 두고 보자, 어허 품바 자리헌다.

 

방바닥을 토닥거리며 장단을 ㅋ추던 회초리를 크게 끊어치며 늙은 거지는 장타령을 끝냈다.

"으쪄냐?"

타령을 할 때와는 다르게 허리가 구부정해진 늙은 거지는 흐릿하게 웃으며 가늘게 뜬 눈으로 득보를 올려다보았다.

"할아부지! 그것 허다가넌 잽혀가서 죽기 독 좋겄구만이라."

득보는 겁도 나고 불만스럽기도 한 얼굴로 뿌루퉁해져 있었다.

", 되았어 되았어. 니놈이 귀구녕얼 지대로 열어놓고 있었구만그려."

늙은 거지는 좋아서 어깨를 들썩이며 키들키들 웃어대더니,

"그려, 목심이 천하라는디 장타령 한 분으로 죽을 수야 있간디? 그려서 다 방비책얼 세와놓고 있덜 안컸냐. 자아, 어떤 장터서 사람덜도 좋아라 허고, 여그저그서 어얼싸 잘 넘어간다 험서 장단도 맞치고, 그 바람에 얼씨구나 신바람이 나서 타령이 날개럴 달고 날르는 판인디 저짝서 순사고 헌병 놈이 온다 허먼 그때넌 겁묵덜 말고 숨 한 분 넉넉허니 쉬고 사설얼 바꾸는디, 춘삼월 호시절에 춘향이허고 이 도령이 광한루서 눈 맞추고, 공양미 3백 석에 심청이넌 몸얼 폴아 아부님께 효도허니, 요로크름 사리살짝 바꿀거시 얼매든지 있는져. 고것이야 이따가 시 놈이 밥 얻어갖고 오먼 어찌허는지 들어보먼 알제."

"항부지, 그 사설언 할아부지가 지셨느게라?"

"하이고 요런 이쁜 자석아, 나가 고런 기맥힌 사설얼 질지 알먼 요런 꼬라지로 여그 앉었겄냐."

늙은 거지는 또 키들거리고 웃더니,

"그것언 딱 누구 한 사람이 진 것이 아니여. 이 사람, 저 사람, 수많은 사람덜 맘이 모타져 지어낸 것잉제. 니 민심이란 말 아냐? , 똑똑타. 그 민심이란 것이 이리 궁굴고 저리 궁굴고 험서 한 매디썩 맨글어진 것이다."

"글먼 왜놈덜이 다 없어지먼 새 장타령이 맨글어지는감요?"

"아이고, 아이고, , 저 영특헌 것이 딱 내 손지새기시! 하먼, 새 장타령이 맨글어지고말고. 고것이 민심이여."

"나넌 그리 새로 생긴 아리랑얼 불를지 아는디요."

"그러여? 어디 한분 불러봐라."

 

아아리랑 아아리라앙 아아라리요오

아아리랑 고오개로오 너머어간다아

밭은 털려서 신작로 되고요

집은 털려서 정거장 되네에

아아리랑 아아리라앙 아아라리요오

이 대목에서 목소리가 합쳐졌다.

아아리랑 고오개로오 날 넘겨주소오

 

"또 한자락이 있다아, 나가 불를란다."

 

문전옥답 털려서 신작로 되고오

말깨나 허는 놈 감옥소 간다아

아아리랑 아아리라앙 아아라리요오

아아리랑 고오개로오 날 넘겨주소오

 

늙은 거지와 득보는 얼싸안았다. 득보는 제 또래의 세 아이가 얻어오는 밥을 먹어가며 날마다 장타령을 배웠다. 아침나절에 열 번이 넘게, 점심나절에 열 번이 넘게 불러야 했다. 그리고 밤에는 세 아이들하고 맞추어 네댓 번을 불렀다. 너무 지루해 어쩌다가 정신을 팔면 여지없이 회초리가 날아와 종아리를 쳤다.

"이눔아, 정신채려! 명창덜이 불르는 춘향가나 적벽가만 소린지 아냐. 요것도 뜬뜬허고 냉랭헌 사람덜 맘얼 흔들고 울리고 웃기고 그려서 가심에 맺힌 것얼 풀어줘야 허는 소리여. 그리 한눈 폴아갖고 목구녕서 그런 소리가 나오겄냐."

늙은 거지의 사정없는 호통이었다.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되자 쉰 목이 잠겨버렸다. 그때쯤에 득보는 어깨춤과 바가지를 두들기는 장단과 가락을 한 덩어리로 어우러지게 하는 묘미를 깨닫고 있었다.

"그려, 겉소리가 쉬어터져 차악 가라앉고, 그것얼 뚫고 속소리가 터져 올라야 지대로 되는 거이다. 짜아, 똑바라지게 서서 새로 불러라!"

목이 잠겨도 늙은 거지는 사정을 보아주지 않았다. 깨진 바가지에 담긴 발 굵은 소금을 입에 찍어 넣게 하고는 회초리를 꼬나 들었다. 득보는 너무 힘들고 지겨워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한두 번 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거지 할아버지가 따뜻하게 잘해 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말대로 지금부터 아버지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 건 왜놈들을 욕해대는 장타령을 많은 사람들에게 퍼트리는 것이기도 했다.

"배가 고프다고 도적질언 허덜 말어. 도적질이 손에 익으면 결국 지명대로 못사는 법잉께."

"애써서 장타령얼 다 혔는디도 동냥얼 안 준다고 욕허덜 말어. 그것언 사람 도리가 아니고 지 발등 지가 찍는 것잉께."

"나가 장타령 갤차줬다고 니보고 평상 동냥아치질 허란 것이 아니여이. 이 말언 안 해도 될 말이겄지야?"

늙은 거지는 장타령을 하지 않을 때는 득보에게 이런 말들을 하기도 했다.

"느그 동상이 이쁘다냐?"

어느 날 늙은 거지가 불숙 물었다.

"아부지넌 이뻐서 죽었구만이라."

"그것이 아니고 넘덜 보기에 어쩌냐 그것이제. 넘덜이 머시라고 혔냐?"

"긍게로......다덜 소리넌 기맥히게 잘헌다, 타고났다, 혔는디 얼굴이 이쁘단 말언 벨로 안했구만이라."

"그려? 그것 다행헌 일이다."

"어찌서 다행헌디요?"

"이눔아, 말 죄도 니넌 안직 몰라."

"아니구만이라, 머시고 다 안게 얼렁 말허씨요. 어찌서 다행헌게라?"

득보는 할아버지의 팔을 마구 흔들며 매달렸다.

"이눔아, 소리 타고난 디다가 인물거정 이뻐봐라. 돈푼깨나 있는 오만 잡놈덜이 다 크기도 전에 어지 혀불 것 아니냐. 그리되먼 니허고 다시 만내지기가 에롭제. 근디 인물이 그저 그럼사 그런 걱정이야 던다는 말아니야. 헌디, 동상 맘언 어쩌냐? 순허고 겁 많고 잘 울고 그러냐?"

"아니구만이라. 고집이 씨고, 아그덜허고 쌈허먼 안 지고, 밤에도 안 무서워하고 그런디요."

"하이고, 고것 참 잘되았다. 니가 꼭 동상얼 만내기넌 만내겄다."

"야아?"

"니가 아무리 찾아댕게도 동상이 원체로 맘 약허고 물르면 온갖 풍상 못 이기고 낙심혀서 무신 일 저질룰 수도 있는 일이제. 근디 니 말 들어봉게 똥상도 맘 강단져서 니럴 찾을라고 애쓰고 있을 것잉게 걱정없다 그말이다."

"야아, 동상언 나보담도 더 나럴 찾을라고 애쓰고 있을 것잉마요."

여동생의 성질을 잘 아는 득보는 이 말을 자신 있게 했다.

"그려, 꼭 만내야겄제. 에리디에린 느그덜이 무신 죄가 있냐."

늙은 거지는 득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득보는 또 그 말을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 눈길을 돌렸다. 그동안 몇 번이고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사는지를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육자배기를 잘했던 것처럼 그 할아버지는 차령만이 아니라 다른 소리도 너무 잘했고, 아는 것도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버릇없다고 호통만 맞을 것 같아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열흘 째 되는 날 늙은 거지가 말했다.

"인자 되았다. 낼 아칙에 가그라."

 

하늘 가장자리는 불그스름하기도 하고 누르스름하기도 한 색조를 띠고 뿌옇게 흐려 있었다. 중국 대륙과 만주 쪽에서 불어오는 흙바람으로 봄이면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 안개처럼 뿌옇게 끼어 있는 것은 넓은 중국 땅을 휩쓰는 바람에 실려 온 흙먼지가 가라앉고 있는 것이었다. 그 황사현상 속에서 하얀 꽃잎들이 무수하게 나부끼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흰 잎들의 무수한 나부낌은 함박눈이 퍼붓는 것 같기도 했고, 무슨 애절한 흐느낌같이 슬프기도 했다. 며칠 간 만발해 있던 운동장 가의 벚꽃들이 무더기로 지고 있었다. 송중원은 그 잎들이 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을 적셔드는 슬프게 아름다운 감정과는 달리 송중원은 저 꽃을 미워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벚꽃은 필 때도 그 많은 꽃송이들이 기쁜 함성이라도 지르듯 하룻밤 사이에 한꺼번에 활짝 피어나고, 질 때도 무슨 통곡할 슬픈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무리 지어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벚꽃은 필 때는 가슴이 환해지는 기쁜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고, 질 때는 가슴이 스산해지는 슬픈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왜놈들은 그 피고 지는 아름다움을 마치 자기네 것인 것처럼 꾸며 대일본제국을 찬양하라고 강요했다. 송중원은 아침에 얻어맞은 볼기짝의 통증을 아직까지도 느끼며 학생들이 거의 다 돌아간 빈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이놈 조심해! 앞으로 한 번만 더 그따위 짓 하면 퇴학이야. 넌 폭도 괴수 송수익의 아들이란 걸 잊지 말어!"

몽둥이로 불기짝을 스무 번 후려치고 난 훈육 주임의 말이었다. 그러나 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본국가를 열 번이나 소리쳐 불러야 했다. 조회시간에 일본국가를 목소리로 부르지 않고 입술로만 부르다가 들켰던 것이다. 만주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왜놈들이 떠받드는 꽃 사쿠라가 전멸하듯 한꺼번에 떨어지고 있었다. 송중원은 그 바람에서 아버지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 어서 독립군들과 함께 진공해 저 사쿠라 꽃잎들이 떨어지듯 왜놈들을 쳐 없애주십시오. 이미 그 꽃은 이 땅의 제주도가 원산지인 벚꽃이 아니라 왜놈들의 꽃인 사쿠라일 뿐이고, 그 꽃잎들의 나부낌도 슬픈 아름다움이 아니라 왜놈들이 망해 무너져 가는 통쾌한 승리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송중원은 생각하고 있었다.

"멀 그리 생각하고 있냐?"

이 말과 함께 누가 어깨를 쳐서 송중원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고 있던 이광민 선배가 웃고 있었다. 송중원은 미처 감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어색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분분헌 낙화럴 봄서 새각씨 생각허고 있었냐?"

"사쿠라럴 봄서 왜 각씨럴 생각혀?"

송중원은 이광민에게 눈총을 쏘았다.

"그려, 그것언 말이 잘 안돼네. , 니 노래 안 불러 몽딩이찜질 당했다는 말 들었다. 맞은 자리넌 어찌냐?"

", 소시도 에진간히 빨르네."

송중원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드러났다. 그건 자신을 훈도용으로 써먹으려고 사방에 떠벌리고 다녔을 훈육 주임에 대한 감정이었다.

"훈육 주임이 니럴 모법생으로 선전허고 댕기니게 니가 출세헌다. 근디 그 일 말인디, 노래 안 불른다고 왜놈덜이 망허는 것도 아닌디 그리 표내서 매벌이 허덜 말고 담보톰언 욕해질르는 기분으로 넘덜보담 곱쟁이로 크게 불러대먼 어쩌겄냐?"

이광민이 장난이 아닌 얼굴로 말했다.

"그려?......그것도 괜찮언 방돈디?"

잠깐 생각하던 송중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광민을 쳐다보았다.

"그리 오기 부리면 지놈이 무신 수로 트집얼 잡겄냐. 공연시 매벌이 자꼬해서 몸 멍딜이는 것언 현명헌 일이 아니여. 그런 일에 쓰고 말 몸이 아닐 것잉게."

이광민은 무척 어른스럽게 말했다. 한 학년 차이밖에 나지 않으면서도 퍽 선배인 것처럼 말하는 이광민을 송중원은 빤히 쳐다보았다.

"나 얼굴에 밥풀때기 묻은 것도 안니디 멀 그리 빤허니 쳐다보냐? 선배님이 옳은 말씸 허시먼, 예명심허겄스빈다. 허고 따르먼 됐제."

이광민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더욱 선배인 척 송중원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찌서 만내자고 헌 기여?"

"니 떨어져 살먼 각씨 생각 안 나냐"

이광민이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학생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깨가 좁짱하고 얼굴이 희묽은 것이 한눈에 일본 학생이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누가 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송중원은 지체없이 말을 받았다.

"생각나서 밤마동 끙끙 몸살 앓어."

조선 학생들은 너나없이 이런 상황에 대비하는 데 이골나 있었다. 일본인 선생들은 물론이고 학생들도 어지간한 조선말은 다 알아들었다. 그리고 조선 학생들은 일본 학생들까지 제2의 경찰이나 헌병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흐흐흐흐흐.......그래 갖고 공부가 되겄냐."

이광민은 능청스럽게 흐흐거렸다.

"공부고 뭐고 여자가 질이여."

일본 학생이 지나가고 있었다. 송중원은 속 빈 건달인 것처럼 말했다.

"당연허제. 공부야 골머리만 아픈디 여자야 고것이 얼매냐 꿀맛이드냐."

이광민은 한술 더 떠서 난봉꾼처럼 말하고 있었다. 사실 이광민도 장가를 든 몸이니 그런 말쯤 예사로 못할 것도 없었다. 조선 학생들은 무슨 중요한 이야기일수록 이렇게 한적해진 교정에서 만났다. 괜히 눈길 없는 장소를 택했다가는 오히려 눈총을 받기가 쉬웠던 것이다.

"니 참마로 니 각씨가 이쁘냐?"

이광민은 꾸미는 것이 아닌 말로 물었다. 그 물음이 너무 갑작스러워 송중원은 그저 멋쩍게 있었다.

"생김얼 말허는 것이 아니고 니 맘에 드냐 그 말이여."

"글씨......잘 몰르겄어."

송중원은 대답을 얼버무리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사실 그대로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그러는지 어쩌는지 대여섯 달이 지났는데도 그저 어색스럽고 서먹서먹하고 그럴 뿐이었다.

"니도 부모덜 뜻대로 정혼헌 것이지야?"

"그것이야 그 잘난 양반더링 지키는 철칙 아니여? 어찌, 형은 각씨가 안 이쁜갑제?"

묻지 않아도 눈치가 환한데도 송중원은 홍시를 손가락으로 찔러 터뜨려버리고 싶은 것 같은 묘한 심사가 동해 일부러 물었다.

"니넌 각씨 나이가 몇 살이냐?"

"동갑."

"이이고, 니넌 극락이다. 나넌 네 살이 더 많으다."

"그것이야 참마로 양반 법도 그대로시."

"아이고, 그늠으 양반. 나러러 맨날 업어준 시집간 누님이 나허고 세 살 차이여. 근디 각씨란 것이 그보담 더 많으니 요것언 각씨가 아니라 누님에 누님이니 원......"

"요런 말 헐라고 만내잔 거여?"

"아이고 참, 말이 엇나가도 한참 엇나갔네. 근디, 그런 이얘기도 그냥 헤픈 소리만이 아니여. 시상이 어지 변해 가고 있는디 장본인덜 의사는 완전 무시된 구식얼 따라야겄냐. 요것언 이땅 모든 청년들이 처해 있는 중대사여."

"나도 중대산지넌 알어. 허나, 형허고 나허고넌 인자 해당이 안 되는 일잉게 다른 헐 이얘기나 혀."

이광민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 불만스러움으로 송중원을 쏘아보았다. 송중원이 비식 웃자 이광민은 짧게 한마디 했다.

"저녁에 예배당으로 나오니라."

"무신 일이여?"

"새 창가가 나왔응게."

"요분에넌 어떤 창간디?"

"독립군 찬양허는 것이라드라."

"글먼 만주서 온 것 아니라고"

"필경 그런 것 아니겄냐."

", 만주서넌 허는 일도 많다. 만주가 없었으면 우리넌 머시가 되을랑가?"

송중원은 혼잣말하듯 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주가 없었으먼 맹탕이제 머. 저녁 묵고 금방 늦지 않게 나와야혀."

"근디, 예배당 말고넌 딴디 어디가 없을랑가?"

송중원이 떫은 입맛을 다셨다.

"어찌 그려?"

"어찌 그러기넌. 형은 그 미국 선교산가 목사가 맘에 차든가?"

"윌리암스 목사가 뭐라고 하디?"

"나보고 머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럴 대허는 것이 아조 기분 상해. 무시허는 것도 아니고 불쌍해허는 것도 아니고, 그 위에서 밑얼 내래다보는 것 겉은 거만헌 태도가 아조 비우짱 상해."

송중원의 얼굴에 화가 돋고 있었다.

"그려, 잘 본 것이여, 윌리암스 목사가 그런 디가 있제. 그 머시라고 허냐......, 백인 우월감 겉은 것이 있어."

이광민이 씁쓰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이 무신 하느님의 박애럴 실천해. 사람얼 색깔로 귀천얼 따지는 그런 인종언 박애허고넌 애시당초 맞덜 않는 인종인다."

"근디 어쩔 것이냐. 풍금이 있는 디넌 거그허고 보육원뿐인디. 보육원이야 호랭이굴이나 마찬가진게 더 말헐 것 없고, 그러고 나먼 예배당 신세 져야지 벨수 있다냐."

"풍금없이넌 창가 못 배우능가. 그 질고 진 판소리넌 풍금없이도 잘만 배우는디."

"야야, 오런 조선 촌놈아, 서양 창가허고 조선 판소리가 똑겉으냐? 니겉은 아가 신식공부 잘해 나가는 것 보먼 참 용허다 이."

이광민은 어이없어하며 송중원을 바라보았다.

"어쨋그나 창가도 풍금 없이 배울 수 있단 마리여. 우리가 아그덜헌티 갤칠 때도 풍금 없으 그냥 허잖여."

"그것이야 궁여지책이제. 긍게 갤치기가 에롭고, 그담에 들어보먼 아그덜이 지 말대로 불르고 그러제. 우리가 풍금으로 창가럴 배우는 것이야 속빠르고 정확허니 배우자는 것 아니겄냐. 풍금 없이 우리보톰 음이 다르게 배와놓면 그 창가가 아그덜헌티로 옮겨질 적에넌 어떤 골이 되겄냐."

"그도 그렇제."

"윌리암스가 백인이 인종덜 중에 왕이라고 허든지 말든지, 우리럴 무시허든지 불쌍허니 생각허든지 우리는 그저 우리헌테 이문 되게 윌리암스럴 써묵으먼 되는 것이여. 첨보톰 우리허고 윌리암스넌 그렇고 그런 사이로 맺어진 것 아니겄냐? 윌리암스야 우리 학생덜얼 잡어 지 선교업적 올리라는 거싱고, 우리야 풍금 빌려씀스로 서양 종교 위세로 우리 조직 보호허잔 것이었응게. 우리 목적만 달성허먼 된게 단 생각허덜 말어."

"그것이야 누가 몰르간디. 그런 것 다 암스로도 윌리암스넌 꼴이 뵈기 싫으니 탈이제."

"참어라, 우리가 헐 일이 더 중헌 게. 근디, 니 일본 유학 갈지 어쩔지 정했냐?"

"나넌 안직 멀었는디 머. 형은 정했는가?"

", 아부지가 결국 허락허셨제."

"어떤 과럴 택했는디?"

송중원은 부러움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말에 맥이 빠지고 있었다.

"그것이야 안직 여유가 있응게. 니도 미리미리 맘얼 정허는 것이 졸 것이여."

겉으로는 여유가 있는 척하고 있었지만 송중원은 마음이 무겁기 이를 데 없었다. 집안 형편으로 보아 일본 유학은 어렸웠던 것이다. 자기 혼자라면 모르지만 잇따라 공부시켜야 할 동생이 있었다. 장인은 자기도 학비를 보탤 테니 일본 유학을 작정하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건 마음의 부담일 뿐이었다. 처가의 덕을 본다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인데 더구나 처가 갈림은 풍족한 것도 아니었다.

"니 그 소식 알고 있지야? 경찰에서 창가 보급이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얼 눈치채기 시작혔다는 거."

"발서 냄새 맡었능가?"

"원체로 앞잽이덜이 많은 게. 이다가 올 적에도 조심혀. 행여 뒤럴 밟히는지도 유념혀서 살피고, 어쨌그나 경찰서 그리 눈독딜이는 것언 우리가 해온 일이 효력이 있다는 증거여. 나 급헌 일이 또 있응게 인가 가봐야 쓰겄다."

", 이따가 만내세."

송중원이는 책보자기를 집어 들었다. 창가 보급회는 지난해 10월경에 조직한 것이었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국민정신에 달려 있고 국민정신을 감발시키는 것은 가곡이 제일>이라는 취지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창가 보급회에서 서단과 야학의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창가는 모두 반일의식을 충동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것들이었다. 대한혼, 조국생가가, 안중근찬양가, 독립군가 같은 노래들을 부르면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애국심을 키워 나라를 되찾는 독립투쟁에 나서게 하자는 것이었다. 송중원은 창가 보급회에 아무런 주저 없이 가입했었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가족에게는 일체 입을 떼지 않고 비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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