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양반의 자제들
강경을 출발한 기차는 들판을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정도규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들녘은 어느새 썰렁하게 비어 있어서 더 넓고 황량하게 보였다. 여기저기 물길을 따라 무성하게 자라난 갈대숲만 남아 있었다. 하얗게 피어난 갈대꽃들이 소슬한 바람결에 흐느끼듯 쓸리고 몸부림하듯 나부끼고 있었다. 벼들이 베어져 나가 더 키가 껑충해 보이는 갈대들은 들녘을 한층 더 적막하고 쓸쓸하게 만들고 있었다. 정도규는 바람에 쓸리고 나부끼는 무수한 갈대꽃들이 지향없는 서러움과 한숨으로 가슴에 밀려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업는 허망함과 무상감이 사무쳐왔다. 하얀 갈대꽃들의 흔들림 위로 어머니의 모습이 실려 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오래 앓기는 했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가슴이 텅 비도록 상실감이 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와는 너무나 달랐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서가 아닌 것 같았다. 어머니....., 어머니인 까닭이었다. 어머니....., 그 앞에서는 언제나 마음이 어려지듯이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살아계실 줄 알았었다. 그 막연한 기대, 막연한 믿음이 한꺼번에 무너져 버린 자리에 주체할 수 없는 허망한 상실감만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어머니는 가까이 있으면 따스하고 아늑하면서 멀리 있으면 그리움이고 목 매임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어디에도 없는 어머니는 사무치는 통곡일 뿐이었다. 정도규는 복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두 형을 생각했다. 어머니가 정말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신 것일까 하는 의문에 뒤따라 두 형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쩌면 큰형은 일부러 자신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떼칠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에게 고의적으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면 큰형은 작은형에게도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방해했을지도 몰랐다. 큰형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능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재산을 독차지하려는 큰형의 욕심은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다. 작은형의 괄괄하고 억센 성질도 큰형의 욕심 앞에서는 아무 소득도 얻어내지 못했다. 집안 어른인 어머니의 말도 안 듣는 큰형이 손아래 동생의 성질에 밀릴 까닭이 없었다. 어머니는 큰형을 다스릴 수 없게 되자 문중의 어른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헛수고였다. 정도규는 자신이 장가든 것을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어머니가 자신의 장가를 억지다시피 서둘렀던 것은 당신의 몸이 성치 못해서만이 아니었다. 막내아들을 장가들여 재산분배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런 묘책도 큰형의 뻔뻔한 뚝심 앞에서는 하잘것없는 졸책이 되고 말았다.
"도규야, 니가 입 닫고 있어서넌 안된다. 작은성님허고 심 합쳐 큰성님헌티 졸라대란 말이다."
방학이 되어 내려가면 어머니가 안타깝게 되풀이하는 말이었다.
"요분에도 또 그냥 넘어가먼 어쩐다냐. 나가 살았을 적에 이 일이 순조롭게 풀려야 될 것인디."
방학이 끝나 집을 떠나게 되면 어머니는 조바심쳤다.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자 큰형은 전에 없이 당당해졌다.
"토지조사사업이 먼지나 알어? 정신 잘못 채리먼 재산이 달 날라가는 것이여. 신고 똑똑허니 해야 헝게 찍소리덜 말고 앉어 있어."
작은형도 오랜만에 그 말에는 토를 달지 않고 수긍했다. 그만큼 토지조사사업은 위력이 대단했다. 큰형은 토지조사사업으로 당분간 안전한 피난처를 마련한 셈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고 말았다. 큰형은 제일 강한 적을 물리친 셈이었고, 작은형은 제일 믿었던 장수를 잃은 셈이었다. 자신은 작은형과 입장이 같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언을 묵살하고 재산을 독차지하려는 큰형은 아예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고, 자기 몫의 재산을 찾으려고 발버둥 치는 작은형의 욕심도 좋게 보이지 않았다. 정도규는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두 형이 재산 다툼을 어떻게 벌일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짓눌렸다. 기차가 군산역에 다다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정도규는 다급한 마음으로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아, 등 뒤로 부리고 점잖허니 앉어 있으씨요. 인력거 첨 타보요!"
인력거가 주춤하는 것과 함께 인력거꾼이 버럭 소리쳤다. 정도규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일으켰던 윗몸을 얼른 뒤로 부렸다. 그러면서 손등으로 눈을 눌렀다. 인력거가 동네 어귀로 접어들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담 위로 솟은 차일이었고,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컥 막히면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복받치는 울음과 함께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정도규네 집은 집 앞에서부터 초상집인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느 때 없이 솟을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부산스레 드나들고 있었으며, 대문을 마주 보고 선 아름드리나무 아래로는 거렁뱅이들이 들끓고 있었다. 돈을 던지듯 하며 인력거에서 내린 정도규는 정신없이 대문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대문을 바삐 드나들고 있던 사람들이 정도규를 알아보고 길을 비켜서기도 했다.
"막둥이 서방님 오셨다아-"
누군가가 소리쳐 안에다 알리고 있었다.
"흐흐흐..... 오늘 재수 꿈에서 똥통에 빠진 재수시. 요것 곱쟁이가 아니라고."
생각보다 훨씬 많은 운임을 받은 인력거꾼은 기분이 늘어져 흐흐거리다가,
"머시여, 막둥이 서방님? 으쩐지 기마이가 좋드라 혔제. 요런 부잣집 막둥이럴 태와갖고 왔응
게 나도 밥 한술 얻어묵고 갈 만 안허다고. 출출허든 참인디 배럴 채와야 군산꺼지 기운지게 가제."
인력거꾼은 초상집 앞에서 침을 세 번 뱉는 것을 잊지 않고 퉤퉤퉤 하고는, 대문으로 들어서며 목에 건 때 전 수건 끝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아이고오 어무님, 아이고오....."
빈소 앞에 무릎 꿇은 정도규는 목놓아 서러운 통곡을 하고 있었다. 장자로서 굴건 제복을 한 정재규는 지팡이를 짚고 엉거주춤 서서 상제 몫의 곡을 건성으로 흘리고 있었다. 그 뒤로 멀찍하게 자리 잡은 세 여자가 낭자머리를 풀어 내리고 서로 목소리를 맞추어 곡을 하고 있었다. 문상객이 빈소에 들 때마다 며느리들에게 짐 지워진 눈물 없이 소리만 구슬픈 곡성이었다.
"참말로, 애간장 녹아내리게 서럽게넌 울어대네 이. 인자사 진짜배기곡성 들어보겄구마."
넓은 뒤란 장독대 옆에 번철에다 솥뚜껑까지 뒤집어 걸고 온갖 전들을 지짐질하고 있는 여자들 중의 하나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소문대로 막둥이아덜이 질로 효자넌 효자로구만. 마나님이 인자 지대로 눈감으시겄네. 그려, 인자 집안 체면치레허게 생겼네. 큰아덜 작은아덜 같애서야 어디 양반이라고 본받을 것이 있겄드라고. 상제 노릇 뒷전 치고 재산 쌈이니."
"긍게 말이시. 권세고 재산 앞에 부모고 성제간이고 없다는 옛말이 하나또 그른 디가 없당게. 다 너무 많이 있어서 생기는 우환이여."
"근디, 저막둥이 아덜언 재산 욕심도 벨로 없담시로?"
"그렇타데. 이 집안이 지대로 됐을람사 큰아덜허고 막둥이가 서로 뒤바꽈서 태어났어야 허는 것인디."
"그런 맺힌 디 없는소리 허덜 말어. 하늘이 다 알고 저리 점지헌 것잉게."
"무신 소리당가? 모르겄으먼 말얼 말어. 이 집재산도 큰아덜 주색잡기로 삼대 물리기 전에 끝판나게 생겼응게. 그것이 다 하늘이 알아서 허는 일이여. 이 집서 얼매나 야박허고 독허니 재산 모은지야 자네덜도 다 아는 일 아니라고?"
"그려, 겉보리 한말 장리에 한 마지기 논 뺏고, 나락 한 말 장리에 집 뺏고, 쌀 한 말 장리에 딸 뺏은 인심이야 몰르는 사람이 어딨어. 아이고, 어디 이 집만 그리 몰악시럽간디. 막선꾼치고 그리 안헌 사람덜이 어디 있어야제."
"그려, 그리독허게덜 안 허고서야 만석꾼 부자 누가 맨들어주간디."
"아서, 아서. 어쩌다가 말꼬랑댕이가 그리 흘러간당가. 이러다가넌 싸엄씨죽고 3년 만에 뱃창시에 지름기 잠 올릴라다가 됩데 볼기짝 맞고 쫓겨나겄네."
"그려, 마해 봤자 우리 입만 아프고, 요런 날 쉽게 안 올 것잉게 눈치껏 배덜이나 채우드라고. 소작으로 뺏긴 것 여그서 볼충 안허먼 언제 헐 것이여."
여자들은 서로 힐끔힐끔 눈짓말들을 나누며 입을 다물었다.
"자아, 자아, 그만허먼 되았다. 어무님이 다 알아들었을 것잉게 인자 상복 갈아입고 절 올려야제."
"하먼, 하먼, 출상꺼지 남은 날이 많은디 단번에 심 파허먼 안되제."
문중 어른들이 만류하고 일으켜서야 정도규는 풀어놓았던 감정을 수습했다. 정도규는 상복을 갈아입고 절을 올리고 나서야 큰형 옆에 작은형이 없는 것을 알았다. 아니, 작은형이 안 보이는 것을 안 것은 빈소에서 물러나면서였다. 그때는 잠시 자리를 비웠겠거니 생각하며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그런데 상복을 갈아입고 절을 올리고 나서도 보이지 않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저께 저녁 진지럴 잘 잡쉈는디 밤새 유명얼 달리허셔 부렀다....."
막내 동생을 마주 대하고 앉은 정재규의 말은 짤막했다. 정도규는 큰형의 입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를 더 기다렸다. 그러나 입은 더 열리지 않았다.
"오래 앓으심서 기운이 진해지신 것이제. 지무시데끼 편허니 가셨다."
문중 어른의 덧말이었다. 정도규는 그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자신이 듣고 싶은 건 문중 어른의 그런 능란한 덧말이 아니었다. ‘그럼 아무도 임종을 못 지켰단 말인가요!’ 이 말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정도규는 이를 사리물었다. 그것이 사실인 것이 뻔한데 이제 와서 그 말을 꺼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밤새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타박이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것이고, 영전에서 감정을 드러내 시끄러운 소리가 오가게 되는 것도 자식 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형님은.....?"
정도규는 불안한 마음으로 큰형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임종을 못 지킨 것은 큰형에게는 유리할지 모르지만 작은형에게는 불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작은형은 어머니의 유언으로 자기의 재산권을 다시 확인받을 기회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혹시 그 일과 작은형이 안 보이는 것과 연관된 것이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몰르겄다. 코가 삐틀어지게 술얼 처묵고 사랑방인가 어디서 자빠져 잘 것이다. 찾지 말고 냅둬라."
큰형이 눈에 독기를 품으며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쯧쯧쯧.....느그덜이 이래서넌 안 되는디. 집안 체통이 먹칠허는 짓덜 말아야제. 넘덜 눈이 무서운디."
문중 어른이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그 어른의 말투는 무슨 말을 묻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러나 정도규는 고개를 약간 수그린 채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다. 들으나 마나 두 형 사이에 무슨 말썽이 일어났던 것이 분명했다. 그건 재산 다툼인 것이 뻔해 굳이 묻고 싶지가 않았다. 형들에 대한 혐오감만 커지는 것이 싫었고, 자신까지 끼어들어 어머니를 욕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만 가득할 뿐이었다.
"하먼, 우리 문중이 어떤 양반이라고, 양반 체통얼 꼿꼿허니 지켜야제. 아부님 말씸대로 재산얼 분배허기 전에넌 어무님 장례럴 못 치르게 허겄다고 저리 나자빠져 있는 상규 고집이야 과헌 것이제. 상것덜헌티도 손꾸락질 당허고 웃음거리 될 일잉게."
다른 어른의 말에 정도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는 가슴에서 불길이 확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작은형에 대한 증오감이었다. 결국 작은형은 어머니의 시신을 담보로 잡고 흥정을 하겠다는 심보였다.
"작은형님 어디 있습니까!"
정도규는 부르르 떨었다. 화를 내뿜고 있는 그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아서라, 아서. 니가 그리 화냄서 맞대거리해서넌 안 된다. 니넌 지끔 형편이 그리 된줄이나 알고 뒤로 물러나 있그라. 니가 나슨다고 말 들을 작은성도 아니고, 또 시끄러와지면 어무님 욕뵈이는 것 아니냐. 문중 어런덜이 시방 방도럴 짜고 있응게 니넌 그저 상제 노릇이나 착실허니 잘해라."
정도규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토해냈다. 큰형이고 작은형이고 돈에 미친 짐승 같기만 했던 것이다.
"니 일어나그라. 문상객 오셨다."
정도규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어디선가 어머니 냄새가 물큰 풍겨오며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누런 상복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실감과 함께 비감한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떠난 텅 빈 자리에 삼형제는 제각각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꼴이었다. 셋이서 마음을 합해도 어머니가 떠난 자리를 메울 수 없을 터인데 셋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형들에겐 돈만 보이고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없는 것일까. 그는 눈물과 함께 비감을 씹으며 형들에게 정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어, 상규넌 어디럴 갔는갑지요?"
문상을 마친 두 사람 중에 하나가 머뭇거리며 정재규에게 물었다. 그들은 정상규의 벗들이었던 것이다.
"그 사람 시방 술이 취해서 자네."
정재규의 무뚝뚝한 대꾸였다.
"예에? 상제가 무신....."
그들은 그만 눈이 커졌다.
"아니, 상심이 커서 술이 좀 과해진 겁니다. 곧 깨울 것이니 우선 저쪽으로 자리하시지요."
정도규는 얼른 말을 꾸며댔다. 그러면서 앞뒤 없이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큰형에게 경멸을 느끼고 있었다. 서로 다투다가도 남들이 나타나면 감정을 감추어야 하는 것인데 큰형은 오히려 반대로 하고 있었다. 양반의 체통이니 뭐니는 그만두더라도 글은 무엇하려고 읽었으며 나이는 어디로 먹었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성제간이 질인 거이다. 존 일에넌 넘이고 은 일에넌 성제간이라고 혔는디, 그러자먼 그저 우애가 짚어야 쓴다. 성제간이야 한 나무서 뻗어 나간 가지덜잉께, 뼈도 피도 살도 다 한가지다 그 말이제. 성제간에 우애 없으먼 넘덜 숭거리고, 집안 망헐 징조니라."
어머니가 늘상 이른 말이었다. 큰형도 작은형도 그 말을 진작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작은형은 저녁밥 때가 되어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저녁 제를 올리는데도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작은형님을 불러와야지요?"
정도규는 처음으로 큰형에게 말을 걸었다.
"냅둬라."
정재규의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시오. 어쨌거나 사람 도리는 해야 되잖아요. 생전에 어무님이 이리 가르쳤던가요."
목을 꼿꼿하게 세운 정도규는 큰형을 노려보았다. 그 독 오른 눈에서 증오가 타고 있었다.
"니가 감히 어디다 대고....."
정재규는 속으로 당황하면서도 겉으로는 눈을 부라리며 막내 동생을 억누르려고 했다. 무언가 켕기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도 그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가 없어요. 작은형을 데려와야겠어요."
정도규는 큰형을 묵살하고 돌아섰다. 정상규는 네 활개를 펼친 채 사랑방에서 자고 있었다. 맨 상투머리가 헝클어져 있는 그는 상복 차림이 아니었다. 정도규는 그런 작은형의 꼴을 한심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지껏 상복을 입지 않고 있는 것과 재산을 분배하지 않으면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다는 말이 직결되고 있었다. 작은형은 자기 몫의 재산을 찾기 위해 자식 된 도리고 남부끄러운 체면이고 다 내동댕이치고 나선 판이었다. 정도규는 화가 나다 못해 무릎이 꺾이는 것을 느꼈다.
"작은형님, 작은형님, 일어나시오!"
정도규는 작은형의 어깨를 세게 흔들었다. 그의 목소리와 손아귀에는 그대로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음냐, 에이 참....."
정상규는 침 버캐 낀 입을 쩝쩝거리고 팔을 내저으며 돌아누웠다.
"작은형님, 나요, 도규. 일어나란 말이오."
정도규는 작은형의 등짝을 쥐어질렀다.
"어엉! 머, 머시여? 누구라고?"
정상규는 잠에 적셔진 소리를 내면서 후닥닥 몸을 일으켰다. 정도규의 성난 주먹질이 그의 잠을 깨우기도 했지만 더 효력을 나타낸 것은 <도규>라는 소리였다.
"니 누구여? 도규 니 언제 왔냐?"
놀란 정상규는 눈을 비비댔다.
"온 지 얼마 안 됐소."
"아아니, 근디 니 어쩔라고 상복보톰 입었냐. 요런 멍청아, 정신 채려!"
정상규는 오히려 자기가 정신이 번쩍 들어 소리쳤다.
"모르겠소, 누가 멍청인지. 내가 들은 말로는 허방에 빠질 사람은 바로 작은형님입니다."
정도규의 비웃음에 찬 대꾸였다.
"머시여? 무신 말얼 들었는디?"
술 냄새를 풍기는 정상규는 눈을 치떴다.
"문중 어른들 말씀이, 작은형님이 재산을 분배받기 전에는 어무님 장례를 못 치르게 하겠다고 상복도 안 입고 이러고 있다면서요?"
"그려, 이리 버팀서 니가 오기럴 기둘리고 있든 참이다. 요것이 머시가 잘못돼서 나가 허방에 빠진다는 것이냐?"
정상규는 동생의 말뜻을 생각하느라고 기가 약간 수그러들고 있었다. 언제나 생각이 깊은 편이고 사리를 잘 따지는 동생의 말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작은형님, 한번 생각해 보시오. 나라에 짓는 가장 큰 죄가 머시오? 불충 아니오? 또, 부모님께 짓는 가장 큰 죄는 머시오? 불효 아니오? 불효 중에서도 막된 불효로 치는 것이 늙은 부모 굶기는 것이고, 병든 부모 돌보지 않는 것 아니든가요. 헌데 그보다 더 흉하게 치는 불효가 있잖아요. 그게 바로 부모님 장례 지성으로 치르지 않는 것이란 말이오. 작은형님이 지금이 덫에 꼼짝없이 걸려 있어요. 작은형님이 아무리 옳은 주장을 해도 어무님 장례를 막고 나서면 어찌 되지요? 작은형님의 주장은 다 묻혀버리고 천하에 둘도 없는 볼효자식으로 몰리게 돼요. 저런 볼효자식은 재산을 한 푼도 주지 말어라. 저런 불효자식은 문중에서 몰아내라. 문중 어른들이 이렇게 들고일어나면 어찌 되겠어요. 큰형님은 얼씨구나 하고 재산을 다 차지해버리고, 작은 형님은 빈주먹에다가 불효자식이란 죄까지 뒤집어쓰게 된단 말이오. 벌써 문중 어른들 눈치가 큰형님을 편들고 작은형님은 나쁘게 보고 있어요. 이래도 허방에 빠지는 게 아니오?"
정도규는 작은형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나지막한 소리로 몰아대고 있었다.
"그 영감탱이덜, 언제고 장자 편만 드는 물건덜 아니냐. 근디, 장례럴 치르고 나서 큰형이 말얼 안 들으먼 어쩔 것이냐."
정상규는 이미 마음이 흔들려 있었다.
"작은형님 혼자가 아니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정도규는 비로소 작은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려? 니도 인다 나허고 한패로 나스겄다 그것이여?"
정상규는 반색을 하다가는,
"글씨 니가 또 뒤물르게 어물어물허는 것 아니여?"
동생을 믿을 수 없다는 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어무님도 안 계시고, 나도 장가든 몸이오."
정도규는 결의를 나타내 보였다.
"참말이여? 믿어도 되겄어?"
"나도 살아야 되겄당 게라."
정도규는 일부러 전라도 말로 다부지게 대꾸했다.
"되았어. 상복얼 입도록 허제!"
정상규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
"작은형님, 대체 무슨 수로 장례를 못 츠르게 하려고 했소?"
정도규는 작은형의 생각이 하도 엉뚱하고 가당찮아 무릎을 짚고 일어나며 물었다.
"수야 많제. 상여가 대문얼 못나서게 잡고 늘어지고, 그래도 안 되먼 상여 앞에 번 듯이 드러눕고 말이여."
"참, 작은형님도. 몰매 맞어 죽든지 밟혀 죽을 뻔했소."
정도규는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건 역시 성질이 급한 대로 앞뒤를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작은형다운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으로 정도규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사태가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 수라장을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도규 니 재주 용타?"
정재규는 대청마루로 올라서는 두 동생을 외면하며 질렀다. 정도규는 큰형의 얼굴에 경계의빛이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도규 재주 용헐 것 없소. 나가 나 헐 일언 다 해놓고 따질 것언 따로 따지자고 맘 고쳐묵은 것잉게."
정상규는 문중 어른들까지 다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맞대거리 하고 나섰다.
"그려, 그려, 그래야제. 니가 효자다. 그렇제, 양반 뼈가 달리 양반 뼈간디."
문중 어른들이 반색을 하며 방에서 대청마루로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정도규는 한쪽으로 비켜서며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작은형이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해버리지 않은 것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작은형은 그래도 자기 체면을 살릴 줄 아는 요령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셋은 빈소 앞에 나란히 서서 문상객들을 맞이했지만 서로의 감정은 거끌거리고 삐그덕거렸다. 정도규는 큰형의 적대하는 눈길 속에서 큰형과 작은형이 부딪치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어찌어찌 하루씩을 넘기고 5일장을 치러냈다. 산소에서 돌아오면서부터 벌써 정재규와 정상규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 정상규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도 있었는데 정재규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정도규는 형들의 그런 모습을 보며 새삼스럽게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동안 이모저모 생각해 보았지만 다툼이 벌어지지 않고 일을 조용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문중 어른들의 힘을 동원한다고 해보았자 큰형이 말을 안 들으면 그만이었다. 큰형은 어머니 앞에서도 전 재산의 장자 상속을 주장해 오면서 몇 년을 끌어온 사람이었다. 큰형이 그 억지 주장을 꺾고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지 않는 한 시끄러운 다툼은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정도규는 자신의 입장을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자신도 재산이 필요했다. 앞으로 대학공부도 해야 했고, 아이들도 태어날 것이고, 마음에 두고 있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큰형이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작은형과 한 덩어리가 되어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무슨 방법이 있는가..... 생각은 언제나 여기서 막히고는 했다. 결국 원망스러운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당신 뜻대로 재산을 나눠놓고 떠나셨더라면 이런 말썽은 일어날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노환을 앓으면서도 완쾌되어 일어난다고 생각했지 돌아가신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운명 직전에 겨우 유언을 남긴 것이었다. 아버지가 그랬으면 어머니라도 강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랐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장자를 남편 버금가게 어려워하며 눈치보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성님, 인자 나 논문서 내줏시오!"
정상규가 대청마루에 걸터앉으며 토해낸 말이었다. 크고 힘이 들어가 있는 그 말에는 오랫동안 참고 견디어온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정도규는 작은형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니가 사람이냐. 삼우제나 지내고 나서 말얼 꺼내야제."
정재규가 버럭 소리 질렀다. 큰형의 그 대꾸에 정도규는 가슴이 더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큰형은 어리석게도 날짜만 뒤로 미룰 생각만 하는 것이었다. 욕심만 컸지 그 욕심을 채울 무슨 방도는 강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인자 와서 또 뒤로 밀자는 것이요? 그런 드런 뱃보 가진 성님언 사람이오!"
정상규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쳐댔다. 그 기세가 곧 멱살잡이라도 할 것 같았다.
"머시라고! 니놈이 그리 일어나면 어쩔 것이냐."
정재규가 맞소리를 질렀다.
"당장 땅문서 안 내노면 가만 안 있겄소."
"못 내놓컸다. 어쩔 것이냐!"
"머시여!"
"아이고 성님덜, 어째 이러시오. 저 아랫것덜이 다 보고 있소."
정도규는 황급히 두 형 사이로 들어섰다. 하마터면 작은형이 큰형에게 덤벼들 뻔했던 것이다. 집 안을 치우고 있는 하인들은 아무 기척 없이 일순들을 놀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감은 것은 겉눈이었을 뿐 속눈으로는 볼 것을 다 보고 있었다.
"아서라, 아서. 헐 이얘기덜 있으먼 숨이나 돌리고 차근허니 방에 들앉어서 의논지게 혀라."
갈 길이 멀어 하룻밤 묵어가기로 한 문중 사람 네댓이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저녁이나 묵고 나서 보자."
정재규가 침을 뱉으며 돌아섰다.
"지기럴, 욕심대로 안될 것잉마."
정상규도 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틀었다. 정도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양반의 위신이고 체통이고 다 더러워지고 깨져나가고 있었다. 옆에 말리는 사람들이 없으면 마구 치고받고 할 판이었다. 정도규는 암담한 심정으로 대청 끝에 털퍽 주저앉았다. 이런 식으로 서로가 맞서다가는 형제간의 관계고 뭐고 산산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 말로만 들어왔던 이런저런 재산분쟁의 풍문들이 이제 남들의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서로 다투다가 형제간의 의가 끊어졌다거나, 형제간들이 원수같이 되었다거나 하는 말들이 떠돌아다니고는 했다. 왜 그런 망신스러운 일들을 저지르는 것인지 이제야 그 속사정을 알 것 같기도 했다. 재산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재산이 없으면 제아무리 걸쭉한 양반족보를 타고났더라도 양반의 위신이나 체통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재산만 많으면 양반 족보마저 사들이는 시절이 있었다. 그건 곧 재산은 사람값이고, 이 세상에서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는 반증이었다. 돈의 마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친 일은 아예 몸에 익히지도 않았고, 평생 손에 흙 묻히고 살 생각이 없는 양반에게 재산이 없다는 것은 바로 굶어 죽게 되는 막다른 길이었다. 그러니까 돈은 곧바로 목숨이기도 했다. 그런 돈의 마력에 휩쓸려 서로 탐심을 부리면 결국 형제끼리 반목하고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정도규는 자기네 삼형제가 그런 사나운 꼴을 벌여가면서까지 아버지 유언대로 재산을 나눠 갖기를 원하지 않았다. 무슨 해결책이든 찾아내서 서로 원수처럼 되는 흉한 꼴만은 피하고 싶었다. 정도규는 낯부터 좀 씻으려고 상복을 벗고 뒤란 우물로 갔다. 마당에 비질을 하고 있던 나이 많은 머슴 강서방이 눈치 빠르게 앞서 우물로 달려갔다.
"이것으로 됐네. 자넨 가서 딴 일 보게. 딴 일도 너무 많이 밀렸잖은가."
정도규는 두레박의 물을 물통에 쏟고 있는 강서방에게 일렀다.
"아니구만이라우. 서방님이 어찌....."
"됐어, 가서 딴 일 하라니까."
그때 정상규가 다급한 걸음으로 우물가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도규는 강서방에게 눈짓을 했다. 강서방은 황송해하며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도규 니 어쩔 심판이냐."
우물가에 듬성듬성 놓인 돌을 깔고 앉으며 정상규가 따지듯 물었다.
"글쎄요, 묘안을 생각 중이오."
"묘안언 무신 놈에 묘안. 제갈공명이 나서도 묘안이고 묘수넌 없다. 장비맨치로 앞뒤 보덜 말고 사정없이 몰아치는 수밖에 없는겨."
"그리되면 우리 형제들은 막판이 나는 거요. 그럴 수는 없어요. 니 시방 잠뜻허냐? 그리 안허먼 우리 땅문서 찾아질 것 겉으냔 말이여. 니넌 잔소리 말고 나가 허는 대로 따라오기만 허먼 된 게 시키는 대로 혀."
"내가 궁리를 하고 있으니 좀 기다려봐요. 땅이 썩는 물건 아니니까."
"궁리넌 무신 궁리냐. 날만 자꼬 보내먼 우리헌티 이로울 것이 암 것도 없다."
"알아요, 오래 끌지 않아요."
"니넌 맘이 어찌 그리 강단지덜 못허냐. 거렁뱅이로 살고 잡어?"
정도규는 그저 피식 웃었다. 더 말대꾸를 하고 싶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자마자 정상규는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여러 말 헐 것이 없소. 아부님 유언대로 반에 반언 내 모가친께 당장 땅문서 내놓으시오."
"니 귀 먹었냐? 아까 말헌 대로 삼우제나 지내고 보잔 말이여. 참말로 이럴 것이여!"
정상규는 버럭 소리치며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내리쳤다. 방안의 분위기가 금방 살벌해졌다.
"큰형님, 한 가지만 묻겠어요. 지금도 전답 전부를 큰형님이 갖고, 작은형님과 저는 반의반에 해당하는 소출만 받으라는 큰형님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요?"
정도규는 차분하게 물었다.
"그것이 순리고 이치에 맞다."
정재규의 당당한 대꾸였다.
"글쎄요, 아부님이 유언을 안 하셨으면 장자 상속에 맞추어 그리하는 것이 순리도 되고 이치에 맞을 수도 있겠지요. 허나 아부님께서는 어무님이나 우리 형제들이 다 듣게 농토의 절반을 큰형님께, 나머지 절반의 반반씩을 작은형님과 저에게 상속한다고 유언하셨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그 유언대로 하는 것이 순리를 따르는 것이고 이치에도 맞지요. 헌데 큰형님은 아부님의 듯을 거역하면서도 순리고 이치를 내세웁니다. 그것을 바로잡자면 작은형님과 제가 힘을 합쳐 문서를 뱃을 수도 있습니다."
"머시라고! 니, 니 누구럴 협박허는 것이냐, 시방."
정재규는 막내 동생의 말허리를 자르며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고함을 질렀다.
"그러지 말고 말이나 다 들어보고 화를 내든지 어쩌든지 하세요."
정도규는 냉정한 눈초리로 큰형을 쏘아보았다.
"그따우 버르장머리없는 소리 들으나마나 아니여!"
정재규는 겉으로는 목청껏 소리를 높이면서도 속으로는 실수를 깨닫고 있었다. 막내 동생의 싸늘한 눈초리가 자신을 비웃거나 업신여기는 것이 분명했고, 그 말도 그렇게 하겠다는 단정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가정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다 들어보세요. 그러니까 간략하게 말해서, 저는 재산을 놓고 형제간들이 싸우고, 서로 원수지간처럼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리해서 제가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 냈어요. 그게 뭔가 하면, 아부님께서 유언허신 제 몫 중에서 반을 큰형님한테 드릴 것이니 이 문제를 원만하고 조용하게 결말지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큰형님 생각은 어떠세요?"
정도규는 여전히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끝냈다.
"니 그것 참말이여?"
정재규는 놀라서 되물었고,
"도규야, 니 미쳤냐!"
정상규는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예, 참말이지요. 허나 작은형님한테까지 그런 조건을 요구하진 마세요. 허고, 제가 이렇게 큰형님을 대접했는데도 또 일을 뒤로 미루면 그땐 아까 말한 대로 작은형님하고 힘을 합칠 수밖에 없어요."
정도규는 앞뒤로 말뚝을 박았다.
"그려, 니 생각이 아조 좋다."
이 말은 정재규가 한 것이 아니라 장상규가 한 것이었다. 정도규는 작은형이 너무 속을 드러내는 것이 경멸스러워 눈길을 돌렸다. 정재규는 궐련을 피워물며 막내 동생의 제의를 생각해 보았다. 문제는 막내 동생이 제 몫의 반을 내놓겠다는데 받아들이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전에 없이 완강해진 막내 동생의 태도가 문제였다. 막내 동생이 작은동생과 뜻을 합쳐 덤벼들면 더는 피할 길이 없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재산 분배를 하지 않고 끌어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막내 동생 덕이었다. 막내 동생은 그동안 처분만 바라는 태도도 작은 동생과 한 덩어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막내 동생의 마음이 착하고 성질이 순한 편인 데다가 신식공부에 정신을 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이가 덜 차고 장가를 들지 않아 미처 재산에 눈을 뜨지 않았던 일면도 있었다. 그런데 막내 동생은 그저 마음이 착하고 성질이 순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좀체로 화를 안 내면서도 어쩌다 화가 났다. 하면 제 팔을 물어뜯고 부들부들 떨 정도로 무서운 데가 있었고, 무슨 일로 한번 마음이 틀렸다 하면 그 사람하고는 아예 외면을 하고 마는 독기도 품고 있었다. 열 살 무렵이었다. 중국을 다녀온 아버지의 친지 앞에서 글을 읽고 치하와 함께 중국산 황모붓을 선사받게 되었다. 막내 동생은 그 붓을 누구에게나 자랑하며 애지중지 여겼다. 그런데 작은 동생이 제 동무들과 모여앉아 그 붓을 훔쳐내 심하게 붓장난을 하다가 들키고 말았다. 막내 동생은 제 형에게 덤벼들어 팔을 물고 늘어졌다. 작은동생은 죽는다고 소리치고, 그 누가 뜯어말려도 막내 동생은 이빨을 풀지 않았다. 작은동생의 동무들은 다 뺑소니쳐 버리고, 아버지가 나서서 달래서야 막내 동생은 겨우 입을 벌렸다. 작은동생의 팔은 살점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막내 동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제 형의 동무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녔다. 그리고 덤벼들어 아무 데나 물어뜯었다. 결국 작은 동생의 동무들은 황모필 하나씩을 물어주고서야 막내 동생한테서 풀려나게 되었다. 아버지 말년에 잠자리 동녀를 구해 온 것은 작은고모였다. 그 예쁘장한 계집아이는 집에 데려오기 전에 벌써 이빨이 다 빠져 있었다. 잠자리 동녀 노릇을 해야 하는 계집아이들의 이빨을 다 뽑아 버리는 것은 내시들의 불알을 다 까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치였다. 그런데 막내 동생은 생짜로 이빨을 다 뽑힌 계집아이를 난생처음 본 것이었다. 막내 동생은 그 계집아이를 못내 불쌍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작은고모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내 동생은 작은고모를 속으로만 미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식으로 노골적이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어머니가 그러고 말라고 타일러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끝내는 작은고모를 생이빨을 다 뽑은 악독한 사람으로 몰아세우고 말았다. 막내 동생은 작은고모가 손수 이빨을 뽑은 것으로 알았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작은고모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발길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쓸모가 없어진 동녀는 내보내게 되었다. 그때 막내 동생은 어머니를 졸라 벼 서른 섬을 그 계집아이와 함께 실어 보내게 했다. 그런 막내 동생이 마음을 바꿔먹고 작은동생과 합세를 하게 되면 판이 어떻게 돌변할지 정재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막내 동생은 이제 장가를 든 몸이었고, 어머니를 잃은 슬픔까지 보태져 있었다. 그런저런 감정이 덧나는 날에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될 터였다. 그동안 재산을 분배하지 않아 만석 소출을 혼자 독차지하고 맘껏 쓸 수 있었던 것은 막내 동생이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덕이었다. 그러고 보면 작은동생도 어지간히 참아온 셈이기는 했다. 이제 더 욕심을 부려서는 형편이 곤란할 거 같았다. 어머니가 떠나가 버린 마당에 자신의 바람막이를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참 묘한 위치에 서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재산을 나눠주기를 바라면서도 동생들이 자신에게 버릇없이 거칠게 덤벼드는 것을 막아주고는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창이면서 동시에 방패인 셈이었다. 이제 두 동생이 힘을 합쳐 땅문서를 뺏으려고 덤비는 경우에는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동생들에게 망신당할 것 다 당하면서 땅문서를 빼앗기느니 차라리 막내 동생의 제안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그러나 한 가지 미련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작은동생도 막내 동생과 같이 제 몫의 반을 내놓겠다고 한다면 일을 당장 결말낼 수도 있었다. 아니, 반의 반이라도 내놓게 하지 않고서는 일을 끝낼 마음이 없었다.
"그려, 도규니 말언 잘 알아들었다. 근디, 토지조사사업얼 당해 전답 안 뺏기고 지키니라고 반년이 넘도록 얼매나 애럴 쓰고 비용도 얼매나 많이 들었는지 상규 니도 잘 알 것인니? 나도 인자 재산얼 분배헐 맘이 있는디, 니도 무신 생각이 있어얄 것 아니겄냐?"
정재규는 작은 동생을 향해 뻔뻔스럽도록 여유 있게 투망을 던지고 있었다.
"머시오? 나보고도 도규맨치로 절반얼 내노란 것이요!"
정상규는 기운 센 가물치가 물을 박차는 것처럼 튀어 올랐다.
"꼭 절반얼 말허는 것이 아니다."
정재규는 투망을 급히 끌어당기지 않고 느긋하게 어르고 있었다.
"절반이 아니먼, 글먼 절반에 절반얼 내노란 말이오?"
정상규는 성질 급하게 푸득거리면서 오히려 투망에 감겨들고 있었다. 정재규는 속으로 무릎을 치면서도 짐짓 감정을 눌렀다.
"그것이야 나가 말허고 잡지 안허다. 거그꺼정 생각이 돌았으먼 니가 알어서 맘얼 정헐 일이다. 밤새 더 생각히서 낼 아칙에 결말 짓도록 허고, 느그나 나나 다 곤헌께 그만 자도록 허자."
정재규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는 어느새 투망을 다 끌어당긴 셈이었다.
"더 생각허고 말고 헐 것 없소. 나넌 한 마지기도 안 내놀 것잉게!"
정상규는 부르르 떨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정재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방을 나가버렸다.
"요런 등신아, 니넌 어찌 그리 뒤가 물르냐! 니땀세 나꺼정 되갱기게 생기덜 안했냔 말이여."
정상규는 화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동생 도규를 타박했다. 정도규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큰형은 그저 미련하고 경우없는 욕심쟁이만이 아니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토지조사사업까지 끌어다 대는 머리를 쓰고 있었다. 글줄이나 읽은 머리를 그렇게 쓰는 것이 가소로울 뿐이었다.
"작은형님, 화내지 말고 들어요. 절반의 절반을 내놓고라도 어서 결말을 짓는 것이 이득입니다. 왠지 아세요? 큰형님 손에 문서가 오래 있을수록 주색잡기로 땅은 자꾸 축나고 있어요. 땅이 다 없어질 때까지 고집만 부릴 건가요?"
정상규는 동생의 말에 가슴이 섬뜩해지는 걸 느꼈다. 사실 형의 주색잡기는 진작부터 소문이 난 터였고, 근자에는 노름질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려, 근자에 주색잡기 중에서도 질로 고약헌 노름질에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이야 나도 다 안다. 근디, 아무리 노름에 미쳤다고 혀도 나락 소출이 얼매라고 땅꺼지 축내고 그럴 거나?"
정상규는 불안한 마음을 떼치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싶은 마음으로 동생의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작은형님은 참 속 편하시오. 큰형님은 아부님이 살아 계실 적부터 아부님 모르게 땅 축내서 왜놈들 손에 넘겨주고 한 것 잊어버렸소? 아부님이 살아 계실 때도 그랬는데 아부님이 안 계신 그간에 땅을 얼마나 없앴는지 누가 알겠소. 저러다가 만석꾼 재산 당대에 다 거덜낼 거라는 소문 작은형님은 듣지도 못했소?"
정도규는 일부러 작은형의 신경을 자극해대고 있었다.
"그리 중헌 말얼 어째 인자사 허냐."
정상규는 벌컥 화를 내며 궐련을 짜증스럽게 뽑았다.
"작은형님이 바보요? 그러니까 여러 말 할 게 없어요. 절반의 절반이 아니라 그 절반의 절반을 내놓고라도 어서 일을 결말짓는 것이 상책이란 말이오. 땅문서를 작은형님 손에 쥐어야 그게 형님 재산이지 고집만 부리고 있다간 헛껍데기만 남게 돼요. 어서 작은형님 몫을 찾게 되면 그것으로도 만석꾼 재산 또 만들 수도 있잖아요."
정도규는 작은형이 큰형과 타협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넌지시 일깨우는 한편 만석꾼의 꿈까지 꾸도록 작은형의 욕심을 긁어주고 있었다.
"근디 말이여, 절반에 절반이 아니고 그 절반에 절반으로 일이 끈나질끄나?"
정상규는 동생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 맘만 정하면 내가 나서서 일을 결말짓도록 하겠소."
정도규는 작은형의 심증을 꿰차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재산을 분배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든 논을 한 마지기라도 더 움켜쥐려는 큰형의 탐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겄다, 그리 맘 정허겄다.!"
정상규는 화투짝을 치듯 궐련갑으로 방바닥을 쳤다.
"잘 생각했소. 구슬이 서 말이라도 뛔야 보배라고 하지 않던가요."
정도규는 큰 짐을 부려놓는 기분으로 작은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규야, 근디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몸을 일으키던 정도규는 다급한 작은형의 말에 엉거주춤한 채로 작은형을 쳐다보았다.
"금년 소출은 어쩔 것이냐. 그것도 몫몫이 잘르는 것이제?"
정도규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 계산 빠른 욕심이 놀랍고도 한심스러웠던 것이다.
"작은형님, 그건 그냥 눈감고 넘깁시다. 타작하기 전에 벌써 노름빚으로 다 잡혔는지도 모르는데 그것까지 건드려서는 될 일도 안 되지 않겠소? 그까짓 한해 소출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내년부터 알지게 챙기도록 합시다."
정도규는 다시 자리 잡고 앉아 작은형을 달래듯 했다.
"억울허기야 허다만 니럴 봐서 참기로 허겄다. 어디 두고 보자. 나가 기연시 만석꾼 재산 맨들어 장남으로 장남으로 못 태어난 설움 꼭 갚고 말거싱게."
정상규는 뽀드득 소리가 나게 어금니를 맞물었다.
"인자 그만 잡시다."
정도규는 얼굴을 훔치며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정도규는 작은형의 그 원한에 찬 듯한 결의를 탓하지 않았다. 듣기가 거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은형의 문제였던 것이다. 작은형이 만석꾼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결코 허황되게 들리지는 않았다. 작은형은 어렸을 때부터 큰형과는 달랐다. 큰형의 욕심이 헤프게 써 없애기 위한 욕심이라면 작은형의 욕심은 차곡차곡 쌓기 위한 욕심이었다. 그래서 큰형한테서는 푼돈을 얻어쓸 수 있었지만 작은 형한테서는 한지 한 장 빌리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작은형은 장가를 든 다음에도 술은 곧잘 마셨지만 색과 잡기는 전혀 가까이하지 않았다. 작은형은 만석꾼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정도규는 아침 일찍 큰형을 따로 만났다. 작은형이 마음먹은 바를 미리 귀띔해 일을 쉽게 처리하자는 것이었다.
"상규가 그리 생각헌다먼 나도 더 여러 말 허지 않겄다. 니가 새중간서 애럴 쓰기도 허고."
정재규는 아무 표정이 없는 채 마지 못한 척 대꾸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적이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자신이 바라던 대로 일이 풀려 있었던 것이다.
"금년 소출도 당연히 모가치대로 갈라야 이치에 맞는 것인디도 그냥 덮고 넘어가는 것잉게 우리 내년 일 년 묵고 살 쌀이나 톡톡 허니 내놔야 되겄소."
마침내 땅문서를 손에 넣은 정상규는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사족을 달았다.
"알겄다. 작년보담 2할얼 더 주겄다."
정재규는 말이 길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얼른 대답했다.
"되았소. 오늘 당장 실어갈라요."
"알아서 혀."
그들 사이에서는 잠시 말이 끊어졌다. 정도규는 자신의 앞에 놓인 땅문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어, 도규 니넌 일본으로 유학 갈 생각언 변허지 안 했냐?"
정재규가 말머리를 바꾸었다.
"예, 가야지요."
정도규는 고개를 들어 큰형을 바라보았다.
"일본 유학이면 일이 연도 아니고, 그간에 니 재산언 천상 나가 맡아줘야 되겄구나?"
정도규는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큰형이 자신에게 순수하게 관심을 쓰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예, 그리 걱정해 주시는 건 고맙지만 제가 따로 관리하겠어요. 저도 이제 그만한 나이는 됐으니까요."
정도규는 완곡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잘라서 말했다. 어물거리다가 큰형에게 말려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허먼, 처가에 맡길 것이냐?"
안색이 변한 정재규는 장가든 남자를 제일 모독하는 말을 거침없이 내쏘았다.
"처가에 재산 맡기는 미친놈도 있나요. 제게 다 방도가 있어요."
정도규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큰형을 향해 맞쏘았다.
"알었다, 니 알어서 해라."
정재규는 궐련갑을 들고 일어나버렸다.
"도규 니 참말로 야물다 이. 어무님이 저승서 편안허니 눈 감으시겄다."
정상규는 방을 나가고 있는 형의 뒤에다 눈총을 쏘며 동생의 귀에 대고 흐흐거리고 있었다.
"제기랄, 이제 소원성취했으니 작은형님이나 야물게 하시오."
정도규는 작은형의 어깨를 밀쳤다.
"그려, 눈 똑똑허니 뜨고 두고 봐라. 나가 만석꾼이 되나 못되나. 니, 나가 재산 맡아준다고 혀도 나도 안 믿겄지야? 능구렝이 겉은 놈!"
정상규는 동생을 쥐어박는 시늉을 하고는 바삐 밖으로 나갔다. 정도규의 가슴에서는 삭풍이 휘돌고 있었다. 혼자 외따로 떨어져 버린 고적감이 밀려들고 있었다. 남부끄러운 말썽이 일어나지 않고 이렇게나마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이 그저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재산을 나눠 갖고 나자 형제로 연결되어 있던 어떤 끈이 끊어져 버리고 제각기 뿔뿔이 흩어진 것 같은 외로움과 삭막함에 목이 메었다. 가난한 형제 사이에 우애 나고 부잣집 형제 사이에 동티 난다는 옛말이 하나도 그른 데가 없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생전에 그리도 바랐던 돈독한 우애는 이미 깨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작은형은 큰형을 상대로 만석꾼이 될 오기를 품고 있었고, 자신은 큰형의 면전에다 대고 당신을 믿을 수 없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나타냈던 것이다. 그리고 큰형이 작은형이나 자신을 미워할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정도규는 또 시름 깊은 한숨을 흘리며 땅문서를 챙겨 들었다. 그만 마음을 정리하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길이었고, 자신은 이제 독립된 삶을 살 수밖에 없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가장 노릇보다 지주 노릇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지 마음 무거울 뿐이었다. 정도규는 방을 나섰다. 사랑채 쪽으로 일꾼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대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작은형이 창고에서 쌀을 내가고 있는 것이었다. 정도규는 드림줄을 잡고 무겁게 다리를 댓돌로 내리며 눈을 감았다. 작은동생이 내년 날쌀까지 실어가 버리자 정재규의 심정은 그야말로 시원섭섭해졌다. 다소 섭섭한 기분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동안 꺼림칙하고 찜짐하게 남아 있었던 문제를 해결해 버린 홀가분함은 양쪽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는 것 같았다. 이제 재산을 어떻게 하고 무엇을 하든 눈치 볼 사람도 신경 쓸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정재규는 홀가분한 기분에 붕붕 떠서 두루마기 자락에 바람을 일으키며 군산으로 나갔다.
"나나왔네. 나락 처분할 참이시."
장덕풍의 가게 앞에 잠깐 발을 멈춘 정재규가 던진 말이었다.
"아이고, 행차허셨는 게라우 나리. 야아, 요새 금세가 아조 좋구만요. 왜상덜도 드글드글허고라우."
장덕풍은 정말 코가 땅에 닿을 지경으로 굽실굽실하며 귀에 단 말을 풀어내고 있었다.
"나 사쿠라에 가 있겄네."
정재규는 장덕풍의 입에 발린 장사치의 거짓말을 탓하지 않고 돌아섰다. 추수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나락 섬들이 한참 쏟아져 나올 때라 시세가 좋을 리 없었던 것이다.
얼매나 처분허실랑게라?"
장덕풍은 허리 굽힌 채 따라붙으며 정재규를 치올려보았다. 욕심에 찬 그 눈이 묘한 빛을 내쏘며 희번득였다.
"시세 따라서 조절혀야제."
정재규는 걸어가면서 대꾸했다.
"시세야 양에 따라 저울질되는 디요."
장덕풍은 어금니 사이사이로 지르르 흘러내리는 신 침을 꿀꺽 삼켰다. 정재규의 만석을 통째로 삼키고 싶은 욕심이 발동하고 있었다. 정미소도 차렸겠다. 미곡상도 겸하게 된 마당에 예전처럼 거간꾼 노릇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정재규에게는 미곡상을 시작했다는 말은 싹 감추었다.
"자네 말대로 금세가 좋기만 험사 한자리서 다 치울 수도 있제."
정재규는 그동안 몇 년 해본 솜씨로 슬쩍 미끼를 던졌다.
"알겄구만이라우. 금 놓직허니 질르는 놈덜로 서넛 골라 후딱 갈 거싱게 구전이나 톡톡허니 내리씨요이."
장덕풍은 말꼬리에다 꽁 힘을 박으며 꼽추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만석을 통째로 삼킬 방도가 짜여지고 있었다. 예년과 다름없이 미곡상 셋을 차례로 선보인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자신의 말대로 움직이는 바람잡이들로만 채운다. 값은 차례로 조금씩 올림질하며 어르다가 세 번째 바람잡이가 배짱 놀음으로 값을 높이게 해 정재규가 만석을 한꺼번에 토해내고 돈을 덥석 물게 할 작정이었다. 시세보다 값을 좀 더 쳐주더라도 만석을 한꺼번에 몰아잡아 네댓 달만 묵혀 놓으면 빚돈 이자보다도 더 돈이 남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직접 정미소까지 하는 마당에 거기서 또 이문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재규도 나락은 묵힐수록 금값이 된다는 것쯤 다 알고 있었다. 어쨌거나 만석은 다 안되더라도 그 반이라도 빼낼 작정으로 장덕풍은 숨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정재규는 집에도 가지 않고 고급술집에 진을 치고 앉아 이틀 동안이나 미곡상들과 밀고 당기는 흥정을 했다. 그는 낮에도 스무 가지가 넘는 안주가 즐비하게 펼쳐진 술상을 받고 앉아 미곡상들을 그 앞에다 무릎 꿇게 했고, 밤이면 <아다라시>라고 해서 값이 따로 붙은 일본기생을 품고 잤다. 그는 나락 흥정에 정신이 팔리고, 술과 일본 계집에 취해 상제 노릇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장덕풍의 손에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5천 석의 거래를 끝낸 그는 돈 보따리를 인력거에 싣고 술집을 떠났다. 거래액의 절반은 보름 뒤에 은행에서 찾기로 한 어음이고, 나머지는 현찰로 안고 인력거의 반동에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는 그는 천하를 다 얻은 기분이었다.
"큰형님, 대체 어찌 이럴 수가 있는 건가요!"
정재규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막내 동생의노기에 찬 얼굴과 맞닥뜨려야 했다.
"니넌 여러 말 말어라. 다 장남 노릇 지대로 헐라고 나락 처분허니라고 그리 됐다. 돈얼 장만해야 산소 치장이고 머시고 해나갈 것 아니겄냐."
정재규는 인력거를 타고 오면서 생각해 둔 말을 능청스럽게 늘어놓았다.
"어디 장남 노릇 잘해 보시오!"
정도규는 거칠게 내쏘며 돌아섰다. 창백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는 증오가 타고 있었다. 위아래를 무시해 버린 막내 동생의 언행이 몹시 속을 뒤집었지만 정재규는 마음이 켕겨 막상 상대할 말이 궁했다. 그저 이야기가 더 길어지지 않고 거기서 끝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어둠 속에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찬바람에 낙엽들이 쓸리는 소리만 밤의 정적 속에서 가냘프고 외로웠다. 검은 그림자들이 정재규네 높은 담을 넘고 있었다. 그 그림자들은 마치도 바람을 타고 오르내리는 것처럼 가볍고 소리 없이 담을 넘어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그림자들은 사랑채 마루로 성큼성큼 올라섰다. 그림자 하나가 방문을 질벅였다. 방문은 안으로 걸려 있었다. 그림자는 방문을 더 세게 잡아 흔들었다.
"누, 누구여, 누구여!"
겁 질린 소리가 방에서 울렸다.
"누구넌 누구여, 밤손님이제. 정재규, 얼렁 방문 따!"
낮으나 위압적인 그림자의 말이었다.
"불이야아, 불이야아!"
갑자기 방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도적이야 하면 사람들이 숨고 불이야 하면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도둑이 들면 불이야 해서 사람들을 불러모아야 한다는 것을 정재규는 그 위급함 속에서도 생각해 낸 것이었다.
"잘덜 지켜!"
그림자가 명령하며 어깨로 방문을 떠다밀었다. 방문이 우지끈 떠밀리며 열렸다.
"아이고메 나 죽네!"
방에서 울린 절망적인 소리였다. 방으로 뛰어든 그림자가 방구석으로 몰려 있는 정재규의 멱살을 틀어잡으며 칼을 들이댔다. 다른 그림자 하나가 또 방으로 들어섰다.
"얼렁 돈 내놔! 없는디요, 돈 없는디요."
"모가지 팍 도리기 전에 얼렁 내놔. 나락 처분헌 돈 있는 것 다 알고 왔어."
그림자가 칼끝을 목에 디밀었다.
"사, 살려줏씨요. 저그, 저그, 벽장에....."
칼끝이 목에 닿는 섬뜩함에 정재규는 있는 대로 목을 늘여 빼 뒤로 젖히며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돈 보따리는 고스란히 그림자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두 그림자는 익숙한 솜씨로 정재규를 뒤결박 짓고 다리까지 묶었다. 그리고 입도 틀어막아 묶어버렸다. 정재규는 방 한 가운데에 옆으로 쓰러진 채 돈보따리를 가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림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녘에야 하인들의 손으로 결박이 풀린 정재규는 뒤늦게 열이 뻗쳐 펄펄 뛰었다.
"됴런 등신 팔푼이덜아, 나가 불이야 불이야 소리 질러도 못 듣고, 도적놈덜이 방문얼 때래부셔도 몰르고 잠덜이나 자빠져 자! 느그덜이 사람 새끼덜이냐 짐승 새끼덜이냐! 그래 갖고도 삼시세끼 비싼 밥덜 처묵고 살어! 나가, 당장 다덜 짐 사들고 나가!"
정재규는 하인들을 곧 잡아 죽일 것처럼 눈에 불을 켜고 날뛰었다. 그런 큰형을 불쌍하다는 듯 정도규는 멀찍이서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재규는 아침밥도 먹지 않고 군산으로 내달았다.
"니놈이 변심해서 어지께 밤에 도적떼로 화했지야! 나가 나락 처분헌 것 니놈밖에 몰른다. 당장 내 돈 내놔라!"
정재규는 다짜고짜 장덕풍의 멱살을 틀어잡으며 소리쳤다. 장덕풍은 어젯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직감했다.
"나리, 어째 이러시오. 미곡상이 셋썩이나 붙은 판에 나리가 5천 석 처분헌 것이야 군산 바닥에 쫘악 퍼진 소문인디 어째 안다고 이러시오."
솟기는 성질대로 하자면 같이 멱살잡이를 하고 싶었지만 장덕풍은 뒤를 생각해서 꾹 눌러 참으며 이렇게 응대하고 있었다.
"이놈아, 잔말 마라. 영축없이 니놈이 헌 짓이여. 가자, 경찰서로 가!"
"경찰서요? 갑시다."
정재규는 장덕풍을 경찰서로 끌고 가서 어젯밤에 들었던 도둑놈의 목소리와 장덕풍의 목소리가 똑같다고 고발했다. 장덕풍은 일단 유치장에 갇혔다. 정재규는 홧김에 또 일본 술집 사쿠라로 갔다. 집을 뛰쳐나올 때는 장덕풍이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경찰서를 나오면서는 왠지 그 생각에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장덕풍은 두어 시간 만에 풀려났다. 무혐의에다가 아들이 경찰이었다. 그는 경찰서를 나서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장덕풍은 정재규에게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나머지 5천 석을 다시 몰아 잡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
8. 떼도둑의 소문
토지조사사업은 숱한 사고와 말썽을 일으키면서도 줄기차게 진행되어 나아가고 있었다. 각면소재지로부터 시작된 그 사업은 해가 바뀌면서 변두리 지역이나 산골 오지 같은 데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세상은 뒤숭숭했고, 일본 헌병과 순사들의 기세는 갈수록 등등해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으거나 흩어지거나 그저 한숨이었다. 어른들의 시름 깊은 한숨이 겨울 찬바람 아래로 깔리는 데 비해 아이들의 노랫소리는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헌병이나 순사들 몰래 부르는 노래는 작년에도 불렀던 장수 탄생가였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시름겨운 마음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머지않아 명산의 정기를 타고난 여덟 장수들이 나타나리라는 노래를 지치지도 않고 부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기운 센 여덟 장수들이 꼭 나타날 것을 믿고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이었다. 헌병이나 순사들의 눈을 살살 피해 가는 재미로 그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이었다. 왜놈들이 미워서 그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를 부르면 어디선지 모르게 기운이 돋았다. 그리고, 어른들이 은근히 그 노래 듣기를 바라고 겉으로는 꾸짖듯 하면서도 속으로는 대견해 한다는 것을 아이들은 문틈을 들여다보듯 빠꼼하게 알고 있었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마음은 언제 어느 때나 그렇게 교류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갑오년 그때에 농민군이 쇠해 가면서 아이들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불렀고, 의병들의 세력이 드높을 때는 <의병장들의 노래>를 부르며 자라났던 것이다. 여덟 장수의 노래와 함께 삭풍을 타고 퍼지는 소문이 있었다. 떼도둑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었다.
"어이, 보소 보소. 그 이얘기 들었능가?"
"어허, 숨넘어가네. 어지께 밤에 자네가 윗뜸 과부허고 붙었다는 이얘기?"
"이 사람아, 소금값도 비싼디 싱건 소리 말고."
"그 떼도적덜이 또 만경 정부자 집얼 털었다드랑게."
"머시여? 그것이 은제여? 아니, 아니, 쬐깨 있어보드라고. 시상이 살기 에롭고 뒤숭숭헝게 도적떼가 생기는 것이야 당연지산디, 자네넌 어째 그 도적떼가 그 도적떼라고 딱 못 치고 나슨가? 자네가 점쟁이여, 순사여?"
"저저 잘난 인종, 또 걸고 넘어간다. 아니, 딱 바라보니 지리산 천왕봉이요, 풍덩 빠지고 보니 똥통이드라고 그 도적질허는 모양새럴 보먼 모르고 자시고 헐 것이 머시가 있어. 그 수가 너댓으로 떼럴 진디다가, 짤막헌 칼덜얼 들었고, 만석꾼 부잣집덜만 골라서 터는디, 나락섬얼 처분히서 돈 지닌 것얼 딱 알고 찾아든다 그것이여. 이런디도 딴 도적떼여? 소문이 같은 도적이라고 쫘아악 퍼졌응게 자네넌 잘난 칙끼허덜 말고 귀동냥이나 푸지게 혀두는 것이 딴 자리 가서 잘난 칙허기가 좋을 것잉마."
"아이고, 저놈에 주딩이. 되로조고 말로 받네그려."
"긍게로 나서덜 말어. 자네넌 항시 꽹매기 칠 자리서 징 치고 그려서 탈이여."
"보소, 정부자네가 은제 당혔어?"
"한 사날 됐다등마."
"얼매나 뺏겠다등가?"
"이, 만석에 절반 5천 석얼 처분헌 돈뭉텡이럴 몽창 털렸다대."
"워따메 아까운 거!"
"아이고메 씨어언헌 거! 저 사람 저 창아리 없는 것 잠 보소.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날 정가가 자네헌티 땡전 한 닢도 안 줄 것인디 머시가 아까와. 속이 씨언허제."
"좆겉이 말트집 잡덜 말어. 도적놈덜이 그 많은 돈 다 묵을 것 생각헝게 아깝다는 것이제 누가 정가놈 편역드는 것이여?"
"맞네, 자네 말도 맞어. 근대, 그 떼도적이 찬바람 나고 부잣집만 골라 턴 것이 여러 번 아니라고?"
"긍게 말이시. 익산 무부자, 부안 최부자에 만경 정부자꺼정 아닌가. 고것 참 맹랑허시. 도적질로 떼부자 되잔 것일랑가? 허는 짓짓이 예사 도적언 아닌갑는디....."
"이, 그 도적놈덜이 우에서보톰 훑어 내래오고 있구마. 쬐깨 더 내래오먼 우리 동네 김부자가 당허게 생기덜 안했다고. 김부자 붕알이 바짝 쫄아 붙겄는디."
"어허, 자네넌 인자 날라리 불어댄가. 김부자고 머시고 이얘기에 옆물꼬 트지 말고 가만이 잠 있으소."
"그려, 예사 도적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드마. 그전에 거 동학군덜이 산으로 쫓겨들어가 맨든 활빈당이니 머니 허는 것덜 안 있드라고. 이번에넌 의병허든 사람덜이 그리 나슨 것이라는 소문이여."
"허! 그리만 되았음사 장허고 장헌 일이제. 시상이 이리 숨 맥히고 팍팍헌디 그런 말만 들어도 살 것 겉으네. 근디, 그 사람덜이 그런 사람들임사 왜놈덜 농장얼 털어야제 어째 조선 사람덜만 골라감서 터는고?"
"다 헛소문이여. 아이고, 또 잘난 칙해도 자네가 헛짜시. 왜놈 농장 쥔덜 집얼 못 봐서 허는 소리여? 총칼 든 놈덜이 지키제. 황소만헌 개덜얼 마리 썩 풀어났제, 자네나 그런 불구뎅이로들어가소. 어디 그뿐이라고. 왜놈덜이 당했다고 허먼 헌병이고 순사덜이 눈에 불얼 쓰고 나슬 판인디, 긁어 부시럼이제. 허고, 조선 부자 양반덜이사 어디 인자 조선 사람이간디. 요분 토지조사 당험스로 싹 다 왜놈덜 되야 부렀제. 고런 양반님네덜 차근차근 당해서 싸고말고."
"그려, 그 떼도적이 활빈당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인심 사나운 부자덜이 당허는 것언 아조 꼬소롬허시."
이런 말들은 바람만큼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들까지도 그 소문에 입을 모았다. 그 도둑들이 뺏은 돈이 전부 얼마나 될까. 그 도둑들이 과연 예전 활빈당 같은 것일까. 다음에는 어디 부자가 당하게 될까. 대개 이런 말들을 엮어갔다. 그런데 남자나 여자들의 입 모음에는 공통적인 것이 있었다. 그 도둑들이 잡히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이었고, 부자들이 당한 것을 고소해하는 점이었다. 어른들의 관심이 큰 만큼 아이들도 그 소문에 한몫 끼어들고 있었다.
"그 도적덜이 나쁜 도적이 아니라 존 도적이라는 것이여."
"그려, 그려. 부자덜 돈만 털어서 우리겉이 가난헌 사람덜얼 골라 도와준다고 허드라."
"참말로? 글먼 밤에만 살짝살짝 찾아댕기겄지야?"
"요런 욕심쟁이야, 미리보톰 춤 꼴딱꼴닥 생키덜 말어. 목젖 떨어지겄다."
"근디 말이여, 그 도적덜이 무지무지허게 재주럴 잘 부린다는 말 느그덜도 들었냐?"
"이, 아무리 높은 담도 손 안 짚고 넘고, 방문얼 아무리 단단허니 잠과도 그냥 팍팍 열어 불고, 축지법얼 써서 하로밤에 백 리럴 간다고 허드라."
"피이, 거짓말 말어. 홍길동이나 그런 재주 부리제 아무나 부린다냐?"
"이 새끼야, 거짓말언 머시가 거짓말이여. 홍길동이맨치로 존 도적이게 그런 재주럴 부리는 것이제."
"니기미, 욕허지 말어. 니가 재주 부리는 것 봤냐, 봤어?"
"그려, 우리 아부지가 그러드라. 어쩔래?"
"아니여, 아니여. 그런 재주 부리는 것이야 틀림없어. 그런 재주 잘 부린 게로 왜놈 헌병이고순사덜이고 다 못 잡는 것 아니겄냐."
"아참, 니 말 맞다. 그 사람덜이 재주럴 기맥히게 잘 부린 게 말 타고 총 지닌 헌병이고 순사덜이 그 사람덜얼 못 잡는 것이여. 으쩌냐 이새끼야, 또 헐 말 있냐! 새끼....."
"넘어 다 갤차준 말 갖고 뎀비고 지랄이여..... 근디 말이여..... 그 사람덜이 혹시 명산 정기 타고난 장수덜 아닐끄나?"
"머시여? 우리가 노래 불르는 그 야닯 장수 말이여?"
"이, 그려. 그럴란지도 몰르겄다!"
"피이, 아니여. 그 장수덜임사 당당허니 왜놈덜허고 싸와야제 어찌서 밤에만 댕기겄냐, 못나게."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조잘거림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신세호는 생각 깊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돌아섰다. 아이들의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고, 세상을 바르게 사는 길은 항시 아이들의 마음을 지니는 것이란 말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아이들의 조잘거리는 말에는 아이들다운 호기심이 넘치는 반면에 어른들을 앞지르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아이들이 여덟 장수를 기다리는 마음은 왜놈들을 무서워하면서도 미워하는 마음이었고, 어서 왜놈들을 몰아내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또 어른들이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일깨우는 가르침이기도 했다. 송수익과 공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공허의 말도 들렸다.
"송 장군님 말씸대로 조선사람 전부헌티 질로 중허고도 화급헌 일이 강도질당헌 나라럴 되찾는 일아니겄는 게라우. 근다고 빈손 맨주먹으로 다 나슬 수야 없는 일이제라. 화승총에 죽창 든 의병덜이 절딴 나는 것으로 환허니 뵈었응께요. 인자 새로 싸울 채비럴 단단허니 해야제라. 선생님이 허실 일언 따로 있응게 소승이 허는 일에넌 맘 쓰지 마시고 몰른칙끼 허시씨요."
비밀결사를 조직한 공허가 한 말이었다. 물론 그는 비밀결사가 몇 명이고 어떤 사람들인지 전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비밀결사니까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공허는 또다른 뜻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그 일에 연관시키지 않고 안전하게 해주려는 뜻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공허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간에 자신도 그 일에 가담하겠다고 나섰어야 했다. 그런데 공허의 말을 따라 그야말로 모른 척하며 넘어갔던 것이다. 어차피 의병에도 나서지 못한 주제였지만, 사람을 고르는 공허의 엄격하고 단호한 태도 때문에 그런 뜻을 밝힐 엄두도 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임병찬이란 사람이 김개남 장군얼 생포헌 공으로 입신출세 했담서요?"
어느 날 밤에 나타난 공허가 눈을 이글거리며 불쑥 내놓은 뜨거운 말이었다.
"그런 말 어디서 들었소?"
신세호는 그 물음이 갑작스럽기도 하고 뭐라고 대답하기도 난처해서 이렇게 되물으며 어물거렸다.
"어디서 누구헌티 들었냐가 중헌 것이 아니구만요. 그 사람이 참말로 그런 일얼 했냐 안 했냐가 중헌 일이제라."
공허는 숨까지 거칠게 쉬었다.
"그랬소, 태인서....."
신세호는 신음하듯 말을 흘렸다.
"김개남 장군 목얼 친 집안 사람덜허고넌 아무 일도 못허겄구만요. 우리 아부지도 동학군으로 죽었고, 나넌 개발바닥만도 못헌 쌍놈잉게요."
공허는 냉정해진 얼굴로 입가에 비웃음을 물었다. 신세호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동학군들은 두말할 것 없이 역적으로 몰렸던 것이고, 기세가 꺾인 동학군들의 뒤를 쫓은 양반 벼슬아치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난리를 을으킨 역적들을 잡아 죽이는 것은 그들의 임무였고 그리고 자구책이었다. 다만 공허는 임병찬이란 사람이 한 일을 뒤늦게 안 것뿐이었고, 임병찬은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동학군의 삼대 거두 중의 한 사람인 김개남을 생포해서 처형한 탓에 두드러질 뿐이었다. 그러나 동학군의 처지에서 보자면 그런 양반들은 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공허의 아버지가 동학군으로 죽었다니..... 공허가 어째서 머리를 깎게 되었고, 그리고 장삼을 걸친 몸으로 의병에 나서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임병찬이란 사람이 김개남 장군얼.....> 이 한마디로 공허의 심중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공허는 그 이름도 들먹여서는 안 되는 김개남을 <장군>으로 받들고 있었고,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을 동학군이 말년에 내걸었던 구국을 실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상 싶었다.
"갑온년에 선친얼 잃은 스님 흉중이 어떨지 짐작허기가 에롭지 않으요. 허나 나라럴 되찾자는 마당에 그때 일언 서로가 덮고 잊어감서 맘덜얼 합해야 대사가 이루어지덜 안컸소."
신세호는 공허의 감정을 다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야아, 그것이야 당연지사제라. 헌디, 임병서 그 양반이 소개헌 사람언 그것이 아니드랑게라. 즈그덜 집안 족보 자랑이나 줄줄이 엮어 내림서 콧대만 잔뜩 높여 갖고 지럴 대장으로 모시고 일얼 꾸미라는 것 아니겄능게라우. 그것도 다 존디, 허겄다는 일이 양반덜 보선발 문대고 앉었는 격으로 하품 나오는 소리만 허드만요. 나야 양반이고 백정 놈이고 간에 군자금 모을 일에 목심 내걸고 나슬 사람이 필요헝게 그런 젠체 허는 양반덜언 열이고 백이고 있어도 다 소양이 없구만요. 그나저나 송 장군 겉은 양반이 어디 흔허간디요. 임병서 그 양반 속언 어쩐지..... 만주길 내왕헌 일이 헛일이나 아닌지 모르겄구만요."
공허는 쓰게 웃었다. 그때서야 신세호는 자신이 공허의 마음을 헛짚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도 공허에게 비웃음이나 당할 협량한 양반 부스러기라는 사실에 얼굴이 뜨거웠다. 공허는 자기가 만주로 데려다준 임병서까지 못 미더워하며 떠난 뒤로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서너 달이 지나면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 떼도둑의 소문이었다. 신세호는 그 떼도둑이 바로 공허가 이끄는 비밀결사일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저 짐작만이 아니라 틀림없이 공허일 거라고 믿게 되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만석꾼 부잣집들만 골라가면서 터는 것이었다. 그건 공허가 다급해 한 군자금 조달을 하기 위함일 터였다. 그리고 그 대담성과 기민성이었다. 그 대담성은 공허의 성품에 어울리는 것이었고, 그 기민성은 하루에 2백 리를 걷는다는 의병들의 재빠름과 흡사했다. 그런데 신세호는 소문만으로 알 수 없는 일이 한가지 있었다. 그 부잣집들이 꼭 몇천 석씩을 처분해 큰돈이 생기고 나서 떼도둑이 들었다는 점이었다. 그건 우연일 리가 없었다. 공허는 어떻게 해서 그런 소식을 용케 알아내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린애 마음처럼 그런 궁금증을 떼치지 못한 채로 공허가 기다려졌다. 그러나 공허를 쉽게 만나기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공허는 정처가 어디인지 모르게 떠도는 사람이었고, 꼭 긴요한 일이 있을 때만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큰일을 벌인 데다 그 일에 자신은 아예 관계하지 못하게 했으니 언제나 만나게 될지 모를 사람이었다. 신세호는 찬바람이 스며드는 옷깃을 여미며 야릇한 힘의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공허는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홍길동이가 되고, 나라를 구할 전설의 장수도 되고 있었다. 천진하고 순박한 아이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으며 사는 삶, 그것이 장부의 옳고 바른 삶의 길이리라 싶었다. 수없이 많은 왜놈들의 앞잡이가 어디에 박혀 있는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 남의 집 담을 넘고, 돈을 빼앗고, 몸을 숨겨야 하는 그 숨 가쁜 긴장이 전신으로 저릿저릿 퍼지고 있었다. 그건 묘한 유혹이었다. 자신도 그런 박진감 속에서 사나이답게 살아보고 싶었다. 나라를 잃은 처지에 그 길은 역시 장부가 가야 할 길이었다. 그러나 신세호는 고개를 떨구었다. 목숨을 내거는 그 험난한 길을 나설 힘도 기백도 자신에게는 너무 모자랐다. 신세호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혐오하며 공허가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한편, 공허는 어둑발을 타고 군산 언저리로 접어들고 있었다. 들녘을 휘모는 바람이 세차고 매웠다. 공허의 폭넓은 장삼 자락이 무슨 기폭처럼 펄럭거렸다. 불빛들이 여기저기 돋을 만큼 어둠살이 진해지고 있는데 고군산으로 뻗은 신작로에는 볏섬을 그득그득 실은 우마차들이 느리게 움직여가고 있었다. 공허는 재빠른 눈짓으로 주위를 훑고는 어느 초가로 들어갔다.
"아이고 시님, 오시능마요."
장독대 옆 수채에서 그릇을 부시고 있던 여자가 공허를 반겼다. 그런데 반가워하는 것과는 달리 여자의 목소리는 눌려있었다.
"무고허셨소, 손샌언 왔소?"
공허의 목소리도 낮았다.
"야아, 드시제라. 시방 밥 묵고 있구만요."
여자가 서둘러 앞장섰다 그 여자는 손판석의 아내 부안댁이었다.
"아짐씨 고상이 덜해 좋구만요. 야아, 덕분에....."
공허가 한 말은 움막 신세를 면하고 헌 초가삼간이나 집을 장만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공허는 지난번에도 같은 말을 했었다. 그 말에서 그간에 자신이 겪은 고생를 스님이 진정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음을 부안댁은 느끼고 있었다. 그 마음 씀이 너무 고맙고 황송스러웠다.
"아이고 시님, 이리 오실지 알었음사 지가 밥얼 쬐깨 있다가 묵어야 허는 것인디. 어이, 얼렁 밥 갖고 오소, 시님 시장허신디."
손판석은 밥을 먹다 말고 몸을 일으키며 아내에게 서두르라는 손짓을 했다.
"한저녁일 것인디 미안스러서....."
공허는 중얼거리며 주저앉았다.
"아니구만이라, 밥이 있구만요."
부안댁은 부산하게 돌아섰다.
"어여 밥보톰 묵으씨요."
"아니구만요. 금세 밥이 들어올 것인디요. 근디, 만경일도 잘 되셨는게라?"
"아조 깨금허니 잘되았소."
"그런지넌 알었구만요. 헌디, 그 집서 또 5천 석얼 처분허기로 되았는디요."
공허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그넌 인자 안 좋은갑제라?"
밥을 먹다 만 손판석은 자신도 모르게 단 입맛을 다셨다.
"개도 물린 자리럴 두 번 물리덜 않소."
"글먼 거그서 무신 방책얼 쓸게라?"
"그야 뻔헌 일 아니겄소. 또 당헐랑가 무서와 돈얼 은행에다 기기가 쉽소. 그리되면 영축 없이 허방 딛는 것 아니겄소. 그리 안 허고, 니나 나나 양복 입기가 서툴디끼 은행 믿기가 껄찌근히서 집에 돈얼 둔다 허드라도 하인덜 잠 못 자게 해감서 파수 세울 것 아니겄소."
"이러나 저러나 그 집도언 인자 꼭지 떨어져뿐 홍시감이고, 강 건네가뿐 임이요."
공허는 고개를 더 세게 저었다. 부안댁이 밥을 가지고 들어왔다. 고봉으로 담긴 밥은 그릇 부분보다 위로 솟긴 것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급해 논께 밥도 있는 대로 보리밥에다가 비린 것 한 가지도 없이....."
부안댁이 밥상머리 인사를 했다.
"나가 아무리 땡초라도 암디서나 비린 것 입 다시고 그런다요. 벨로 허는 일도 없이 요런 상머심 밥만도 과만허요."
공허는 지체없이 숟가락을 집어들었다.
"워메, 시님 앞이서....."
부안댁은 말실수를 깨닫고 입을 가렸고, 손판석은 아내에게 눈을 흘겼다. 공허는 숟가락 등으로 밥을 다지듯 하는 익숙한 솜씨로 숟가락 가득 밥을 펐다. 그것도 밥그릇에 담긴 밥처럼 고봉이었다. 그 많은 밥이 어떻게 입으로 다 들어갈까 싶었다. 그러나 공허의 입이 쫙 벌어졌고 밥알 하나 떨어지지 않고 숟가락은 입속으로 쑥 들어갔다가 나왔다. 공허의 양쪽 볼은 곧 미어터질 듯이 불룩해졌다. 그런데 그는 젓가락을 쓰지 않고 왼손으로 배추김치 한 줄기를 집어 들었다. 그는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며 입을 벌렸다. 긴 배추 줄기가 순식간에 입으로 다 들어갔다. 꼭 구렝이가 왕개구리를 한입에 집어삼키는 격이었다. ‘참말로, 밥도 오지게넌 잘 묵네 이!’ 부안댁은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깜짝 놀랐고, 자신도 모르게 스친 생각에 얼굴 뜨거워지며 얼른 방을 나섰다. 불현듯 스친 그 생각과 함께 불두덩 저 깊은 속이 찌리릿 우리던 느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니년이 집도 장만허고 배때지도 뜨뜻해징케 못 허는 생각이 없구나.’
부안댁은 스스로를 힐책했다. 그러나..... 집을 장만하고 미선소에 나다니지 않아도 끼니 걱정이 없게 되어서 그런 생각이 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편은 다리를 절름거리게 된 다음부터 표나게 잠자리가 멀어졌던 것이다. 남편의 품이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푸는 데는 그보다 좋은 약이 없었다.
"어허, 참 맛나게 자알 묵었다."
공허는 숟가락을 놓으며 시원스럽게 트림을 해올렸다.
"찬 없는 밥얼 그리 맛나게 잘 잡솨주신 게 지 맴이 편쿠만이라우."
손판석이 숭늉 그릇을 건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우리가 지닌 것이 머시가 있소. 몸띵이덜 뿐인디 밥맛 잊어불먼 그날이 산송장 되는 날 아니겄소."
숭늉 그릇을 받으며 공허는 씩 웃었다.
"아까 그 집 말고도 또한 집이 큰돈 되게 처분허기넌 허는디....."
손판석은 곰방대를 집어 들었다.
"머시가 깨끄름허요?"
공허는 눈치 빠르게 손판석의 말꼬리가 흐려지는 것을 잡아챘다.
"야아, 한 5천 석 낸다고넌 허는디, 고것이 왜놈이란 게라."
"왜놈?"
공허의 허리가 곧추섰다.
"야아, 저그 머시냐, 김제 옆뎅이 죽산면에다 터 잡은 하시모토란 놈이 그 놈이구만이라."
"하시모토고 할애비 토시고, 그 놈덜 이름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고..... 농장 채린 왜놈이 즈
그 연줄로 쌀얼 실어내덜 않고 미곡상에 처분헌다는 것이 무신 소리요?"
공허의 얼굴에는 의심의 빛이 역연하게 드러났다. 그는 그 정도의 상식은 이미 갖추고 있었다.
"야아, 그 놈언 큰 회사서 채린 농장 지배인이나 농장장이 아니라 지가 혼자서 농토럴 장만해 감서 지주놀이럴 해묵고 있는 놈이구만요."
"혼자 자작으로 지주놀이럴 혀? 고놈 참 뱃보 좋고, 별종이시?"
공허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순사도 아니고 헌병도 아닌 거시 떠억허니 말도 타고 댕기구만요."
손판석은 아니꼽다는 듯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코웃음을 쳤다.
"말 타고 댕김서 우리 조선 작인덜 닦달허잔 것잉가? 그놈 참 느자구없는 놈이시. 그려, 작년 여름이든가 언제든가 죽산면 짝신작로로 신바람나게 말얼 몰아대든 놈이 었었는디, 그놈이 바로 그놈이었을랑가?"
공허는 기억을 더듬는 얼굴이었다.
"맞구만요. 총칼 안 차고 혼자 말얼 몰아댔으먼 바로 그 놈이구만이라."
"그러먼 그 놈이 맞는갑소. 근디 그놈이 땅이야 허먼 허천 들린디끼 사죽얼 못쓰고, 작인덜헌티도 고약시럽게 헌다고 소문이 짜아허등마요."
"그놈이 처분허는 날이 은제요?"
공허는 얼굴을 모르는 그자에게 순간적으로 적개심을 느꼈다.
"오늘 미곡상덜 접허기 시작했다게 낼 안으로야 일이 끝막음 되겄제라."
"되았소. 요분에넌 그놈이오!"
공허의 힘 뻗치는 말이었다.
"괜찮헐게라? 왜놈인디..... 왜놈덜도 맛얼 배야 허요. 조선 땅서 난 쌀언 다 조선 사람덜 것잉게."
"혀도 잘 살피도록 허시씨요,"
손판석의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그는 공허가 군자금 모을 집을 정할 때마다 자신이 다리 병신이라는 비애를 사무치게 느꼈다. 걸어다니고 십장 노릇을 해 먹기에는 별다른 불편이 없었지만 공허와 함께 밤일을 나설 형편을 못되었던 것이다.
"알겄소. 서가놈언 잘 놀아나고 있소?"
공허가 말하는 서가는 서무룡이었다.
"야아, 부두가 지 시상이제라."
"그래도 그놈이 지도 몰르게 세우는 공이 크요. 그놈이 활개 치고 잘 놀아날수록 써묵을 디다 많애진께 더 얼크러짐서 한패가 돼야 허요."
"알겄구만요. 염병헐 놈이 수국이 소시얼 불쑥불쑥 묻는 통에 간이 철렁철렁 허능마요."
"허! 수국이헌티 반허기넌 오지게 반했는갑소."
"나 이만 뜰라요."
공허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하롯밤이라도 지무시고 가시먼 졸 것이딘. 지가 사람 노릇얼 못히서....."
공허를 따라 일어서는 손판석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고것이 무신 소리요. 손샌이 없음사 우리가 이 일얼 어찌허겄소. 송장군님이 들으시먼 손샌 공얼 크게 치하허실 것이디요."
공허는 손판석의 손을 잡았다. 손판석도 공허의 손을 맞잡았다. 둘이는 서로의 손을 힘껏 움켜잡았다. 밖에는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바람끝이 매웠다. 손판석은 사립 앞에서 공허를 말없이 배웅했다. 공허의 먹물 옷은 곧 어둠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손판석은 자기보다 젊고 뚝심 좋은 공허가 부럽다는 생각을 하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었다. 부러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몸이 성한 것이 부러웠고, 매인 데 없이 훌훌 떠돌아다닐 수 있는 중이란 거도 부러웠다.
"이리 사라다가 삼출이고 송 대장님언 영영 못 만내보는 것이랑가....."
손판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움과 함께 가슴이 먹먹해졌다. 부두에서 십장 노릇을 하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 십장 자리는 아무나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막일꾼들의 상전인 십장자리를 차지하려면 부두에서 다진 발판이 있어야 했고, 주먹도 남다르게 세야 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 더 필요한 것이 든든한 뒷줄이었다. 서무룡이가 아니고서는 십장 자리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일이었다. 서무룡이는 다리를 절룩이는 자신을 하루아침에 십장 자리에 앉혀주었던 것이다.
"다리 고런 것이 무신 숭이다요. 뙤국놈덜하고 싸우다 다친 것잉게 되레 넘덜보담 용맹시럽고 쌈 잘헌다는 표식이고 자랑거리제라. 아자시도 주먹심 씨기로야 넘덜 뒷처지라고 허먼 서러워헐 양반잉게 아무 걱정 말고 십장질 당당허니 허씨요. 글고 말이오, 혼자 안 될 무신 일이 생김사 나가 있던 않은 게비요. 나말 으쩌요?"
서무룡이는 주먹 힘보다는 뒷줄이 훨씬 더 든든했던 것이다. 그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했을 때 슬그머니 물어보기도 했다.
"몰르는 것이 약이오, 약."
서무룡이는 번쩍 정신이 드는 눈을 희뜨며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서무룡이는 경찰서와 헌병대 양쪽에 다 선이 닿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등짐조의 십장도 아니었고 창고지기도 아니었다. 예전과 다름없이 막일꾼일 뿐이었다. 그러나 너무 달라진 것이 있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제멋대로 일터를 바꾸는 것이었다. 쌀가마니를 부두에서 배로 옮기는 등짐판에 끼기도 했고, 나락섬을 열차에서 하역하는 판에 끼였는가 하면, 쌀가마니를 창고에서 부두로 져내는일꾼들 사이에 섞여 있기도 했다. 그러니까 서무룡이는 부두의 일판들을 제 마음대로 휘젓고 다는 셈이었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막일꾼들은 20명이나 30명씩으로 조가 짜여 십장이나 창고지기 아래 묶여 있었고, 무슨 일이 생겨 그 종에서 떨어져 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가 없었다. 부두 밖에는 부두의 일자리를 구하려고 날품팔이 지게질을 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드글드글했던 것이다. 그렇게 일터를 옮겨 다니며 서무룡이 무슨 일을 하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발넓게 돌아다니는 것만큼 아는 것도 많았다. 언제 어떤 배에 쌀이 얼마나 실릴 거라는 큰 것부터 누가 누구하고 어느 술집에서 계집을 다투다가 싸웠다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고 다녔다. 그러니 어느 날, 어느 부자의 나락 몇 섬이 거래되어 어느 쪽 창고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건 쌀이 배에 실리는 것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문제였던 것이다. 물론 그런 소식은 서무룡이만 아는 것은 아니었다. 몇천 석 거래에 거간꾼이 붙게 되면 그 소식은 벌써 십장과 창고지기들 사이에 쫙 돌았다. 미곡상들은 그 많은 양을 빨리 옮겨 정미하고, 잘 보관하기 위해 미리 인부들과 창고를 확보할려고 다투었던 것이다. 그러나 큰 거래라고 해서 십장과 창고지기들이 다 아는 건 아니었다. 다른 일거리에 몰려 바쁜 십장들이나 빈 창고가 없는 창고지기들은 모르고 지나가기도 했다. 혹시 그럴 경우를 생각해서 서무룡이에게 슬쩍 물어보면 모르는 것 없이 다알게 되고는 했다. 서무룡이는 부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자기가 환히 알고 있다는 것을 꽤나 자랑스러워하고 뻐기기도 했다.
"이짝 속만 안 들키면 오래오래 써묵을 수가 있응게 그놈언 단 앞잽이덜 보담이야 그래도 나슨 놈이오. 못된 행투 미운 것이야 우선 접쳐두고 우리 이문 되게 써묵으면 왜놈덜헌테 됩데똥 퍼붓는 것이 아니고 머시오."
이런 공허의 말대로 서무룡이는 역시 쓸모가 있었다. 그러나 서무룡이와 친근하다는 것이 차츰 주위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서무룡이가 끄나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같았던 것이다. 잘못하면 자신도 서무룡이와 같은 사람으로 손가락질 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은 공허에게 꺼낼 수도차 없었다. 공허가 하는 일에 비하면 그런 것은 너무 하찮은 일일 뿐이었다. 공허와 함께 떼도둑의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를 생각하며 손판석은 사립을 들어섰다. 의병싸움을 했던 일이 까마득한 기억처럼 떠올랐다. 그때도 군자금을 구하려고 부잣집들을 가끔 털었었다. 의병이라고 밝히는 데도 돈을 선뜻 내놓는 부자들은 거의 없었다. 협박을 하고 총을 들이대고 해서야 마지못해 내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토벌대들이 뒤쫓게 만들었다. 그때도 그랬는데 의병이라고 밝히지도 못하면서 공허가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손판석은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공허도 그들이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건 의병을 할 때부터 몸에 익힌 것이었다. 다만 그들이 의병을 하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일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잡히면 죽을 일에 나설 사람을 구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기백 있는 사람들은 갑오년에 한바탕 죽어갔고, 십이삼 년의 세월이 흘러 새로 생겨난 기백 있는 사람들은 의병으로 또 한바탕 죽어간 것이었다.
"이 밤중에 어디럴 그리 부산허게 가신다요? 땅짐도 못허게 어둔디."
부안댁은 은근슬쩍 말을 걸쳤다.
"나도 몰르겄네. 이불이나 피소."
손판석은 언제나처럼 딴전을 피웠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 넷이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밤이 깊을 대로 깊어서 잎 떨어진 실가지들을 울리는 바람소리만 차가웠다. 담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고 기민하게 이동하던 그림자들이 어느 집 모퉁이에 멈춰 섰다.
"요 집이오. 아까 말헌 대로 여그넌 주재소고 면사무소가 가차운 게 더 정신 채리고 조심해야 허요."
그림자 하나가 숨가쁜 듯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다른 그림자들이 억누른 소리로 대답했다.
"자아, 시작합시다. 왜놈 집이라 울타리가 판자울잉게 소리 안 나게 잘해야 허요."
그림자들은 차례로 판자 울타리를 넘기 시작했다. 판자가 삐걱이거나 울리는 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았다. 하나같이 몸놀리이 날렵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무턱대고 판자 끝을 잡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판자 울타리의 네 모퉁이에 박은 실한 기둥을 이용해서 울타리를 타 넘고 있었던 것이다. 네 그림자는 마당 쪽으로 나섰다. 그리고 집 앞으로 신속하게 다가가고 있었다.
"땅! 꼼지락말어, 순사다! 오고꾸나 웃쏘!(꼼짝 마라쏜다.)"
공허는 함정에 빠졌음을 직감했다.
"내빼, 내빼, 내빼!"
공허는 정신없이 외쳐대며 내닫기 시작했다. 다른 그림자들도 후닥탁탁 튀며 흩어지고 있었다.
"쏴라, 쏴라! 탕, 타당 탕탕....."
총소리들이 어둠을 뒤흔들었다. 여기저기서 개들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공허는 판자 끝을 잡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려 울타리를 넘었다.
"아이고메!....."
절박한 비명소리가 터졌다. 내달리려던 공허는 주춤했다. 누군가가 총을 맞은 것 같았다.
"탕탕, 타당 탕....."
총소리에 막혀 공허는 다시 울타리를 넘어갈 수가 없었다. 어둠 저만치에서 누군가가 달아나고 있는 기척이 들렸다. 그때 판자 울타리 사이사이로 불빛이 번뜩거렸다. 불붙어 타오르기 시작한 횃불이었다. 그리고 골목으로 뛰어나오는 구둣발 소리들이 요란하게 울렸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공허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주저하는 마음을 짓밟으며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저그다, 저그 도망간다! 잡아라! 쏘라, 쏴!"
조선말과 일본말의 외침이 총소리와 함께 뒤섞이고 있었다. 공허는 어둠을 방패삼아 줄기차게 내달리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그런 덫에 걸리게 되었는지 어쩐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총소리가 계속 뒤를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공허는 그 다급함 속에서도 일직선으로만 달리지 않았다. 총알을 피하고 쫓아오는 놈들을 따돌리기 위해 방향을 바꾸며 달렸다. 매운 북풍을 마주 보고 달리는 것도 그놈들을 빨리 지치게 하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오래 달렸는지 모른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면 그놈들과는 꽤나 거리가 멀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놈들은 총을 쏘지 않고 뒤쫓아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의병 토벌에서 한두 번 당한 것이 아니었다. 공허는 속도를 줄였을 뿐 뛰기를 멈추지 않았다. 날이 밝기 전까지는 아무리 못해도 50리 밖으로 벗어나 있어야 했다. 먼동이 트기 시작하면 그놈들은 가까운 동네들부터 뒤질 것이 분명했다. 공허는 그 생각과 함께 한숨을 토해냈다. 대원들에게 그 사실을 주입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저런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들은 가르쳤지만 그런 식의 함정에 빠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후 집결지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위험 속에서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의 일들이 너무 순조로웠던 탓이었다.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순사놈들이 먼저 매복을 하고 있다니..... 다소 여유를 찾은 공허는 계속 뛰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어제 낮에 그 집을 둘러볼 때만 해도 아무 낌새가 없었다. 왜놈 지주들 집에 흔한 개도 한 마리 없었고, 머슴같은 남자 하인들이 눈에 띄는 것도 아니었다. 건성으로 스치면서 본 것이 아니라 반나절이나 배회하면서 살폈던 것이다. 마음 놓고 일을 시작하기에 딱 알맞았다. 순사들은 돈을 털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하시모토란 놈이 5천 석을 처분한다는 것부터 거짓말이었던 것이 아닌가! 이 깨달음과 함께 머리를 찡 울리는 충격을 받았다.
‘글먼, 손판석이가 나럴 둘린 것인가?..... 아니겄제, 아니여, 손판석이도 그놈덜 거짓말에 둘린 것이겄제. 하먼, 손판석이야 지삼출맨치 믿을만헌 사람이제. 손판석얼 의심허먼 나가 죄 받을 일이여.’
왜놈들이 자신들을 붙잡을 작정으로 그런 간계를 꾸민 것을 생각하니 그 함정을 빠져나온 것이 너무 아슬아슬하여 가슴이고 등골에 찌릿찌릿 전율이 일어났다. 손판석이에게 하시모토란 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긴 의문은 한 가지였다. 그가 왜놈인데 5천 석을 처분한 그 많은 돈을 조선 지주들처럼 집에다 둘까하는 점이었다. 돈깨나 있는 조선사람들이 은행이라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며 돈을 선뜻선뜻 맡기지 않는 것에 비해서 일본사람들은 누구나 은행을 찰떡처럼 믿고 돈을 맡긴다는 것이었다. 일본 것들이 조선사람들을 개명하지 못했다고 비웃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중의 하나가 은행을 못 믿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시모토의 집을 털기로 결정했던 것은 전액을 다 은행에 넣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왜놈의 집을 털어 본때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어둠 속에서 물소리가 가늘게 들려오고 있었다. 공허는 숨을 몰아쉬며 뛰기를 멈추었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목이 껄껄하도록 갈증이 심했다. 물소리를 따라 둔덕을 더듬어 내려갔다. 공허는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을 실컷 들이켠 그는 낯을 씻었다. 낯이 미끈덕거렸다. 땀이 많이 내밴 탓이었다. 낯을 씻고 나자 정신이 말끔해지고 새 기운이 솟았다. 그때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 하시모토란 놈이 5천석 지주라는 것도 거짓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건 미처 의심해 보지도 않았던 문제였다. 그러나 공허의 뒤늦은 의문은 적중하고 있었다. 하시모토가 올해 수확한 것은 3천여 석이었다. 공허는 머리에 동였던 수건을 풀어 낯을 닦으며 둔덕 위로 올라섰다. 혹시 중이라는 것이 드러날까 봐서 일을 나설 때는 언제나 민둥머리가 다 가려지도록 수건을 둘렀다. 그리고 옷도 농사꾼 옷으로 갈아입었다. 공허는 소건을 다시 머리에 동여매며 사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디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한 삼사십 리 달려온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금산사가 멀지 않았다. 그러나 금산사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내일 하루 동안이면 순사들의 발길이 충분히 미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리고 자신의 변복이 문제였다. 농군 옷을 입고 갑자기 나타나면 금산사의 그 많은 중들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광고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제 중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의병들이 한창 일어날 때만 해도 중들은 거의가 우국충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중들만으로 의병대를 만들 수도 있었고, 다른 의병대들이 산간 절에서 이모저모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의병세가 쇠잔해져 가면서 총독부의 위세가 천하를 흔들게 되고, 재작년에 사찰령이 공포되면서 중들의 태도는 달라지게 되었다. 절마다 수도에 용맹정진한다는 바람이 불면서 중들은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며 득도정진에 열성인 척했던 것이다. 그리고 주지들은 노골적으로 총독부가 베푸는 혜택을 받으려고 나섰던 것이다.그 혜택은 바로 토지조사사업에서 나타났다. 양반 지주들이 우선적으로 보호를 받은 것처럼 모든 절들의 사답도 보호를 받았다. 그리고 그것뿐이 아니었다. 총독부가 강탈한 역둔토까지 암암리에 배당받게 되어 절들은 오히려 재산이 불어나고 있었다. 총독부는 농토를 미끼로 불교계를 장악해 나가고 있었고, 중들은 배가 불러가는 대신 왜놈들을 위해 목탁을 치는 친일배들로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공허는 어디로 갈까를 생각했다. 먼동이 트기 전에 이삼십 리를 더 벗어나 일단 몸을 숨겨야 했다. 그렇지, 거기를 찾아가면 되겠구나! 공허는 불현듯 그곳을 생각해 냈다. 그곳은 이삼십 리를 더 가야 했다. 순사들의 수사망에서 벗어나 몸을 숨길 수 있는 안전한 곳이었다. 그러나 공허는 잠시 망설였다. 마음 한구석에서 앞을 가로막는 손이 불쑥 나왔던 것이다. 그 손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손이었다. 그는 그 손을 바로 내칠 수가 없어서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어둠 속 저 멀리서 겨울별들이 유난히 또렷또렷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삼천대천세계로 보자면 사람의 한평생은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 하나의 물방울이요 한 덩이 뜬구름이니.....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인연을 맺지 마라, 인연은 괴로운 것이다. 그리운 사람은 만나지 못해서 괴롭고, 원수는 만나서 괴로우니라. 그저 지당할 뿐인 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대로 하자면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때 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불심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에 있다. 그 마음에 따라 금덩이도 돌로 보이고 아무리 미색인 여자도 목석으로만 보이게 된다. 그려, 나도 절밥 죽인 만치 불심이 있응게로! 공허는 그곳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두 손바닥에 침을 뛔뛔 튀긴 공허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비명을 질렀던 대원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비명소리만으로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총을 맞은 것이라면 무사할 가망은 거의 없었다. 붙잡힌 그는 총상의 고통에다가 고문까지 당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 막다른 처지에서 그가 조직의 비밀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조직의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약속해 왔던 것이다. 죽어도 혼자 죽어가게 되어있는 것이 첫 번째 강령이었다. 나는 그럴 수 있는가? 공허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럴 수 있다는 대답이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왔다. 그 대답과 함께 눈앞에는 불길이 휩싸인 집이 꼭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 물음은 의병으로 나설 때 자신에게 물었던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시 절간으로 들어가 편한 밥을 먹을 수 없는 것도 그 마음 때문이었다. 목탁을 두들기고 앉아 있는 것이 헛사는 것 같은 생각은 고쳐지지도 떼쳐지지도 않았다. 큰스님은 <업보로다, 업보로다>하는 말로 자신이 택한 길을 목인해 주었다. 공허는 스스로의 생각에 문득 놀랐다. 짧은 생각이 퍼뜩 스쳐갔던 것이다. 차라리 즉었으면 좋겠다. 이 생각이 순식간에 스쳤고, 너무 잔인한 자신에게 놀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을 다시 곱씹어보았다. 그것이 꼭 잔인하고 몰인정한 것인가..... 어차피 순사놈들은 그를 살려주지 않을 것이었다. 고문을 할 대로 다 해서 모든 비밀을 알아낸 다음 그를 죽일 것은 뻔했다. 그렇게 당할 고생 다당하고 죽느니 차라리 총에 치명상을 입고 죽는 것이 편한 죽음이었다.
‘그놈 멱얼 따야 헐 일이여!’
공허는 하시모토라는 놈을 죽이고 싶은 살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간계를 꾸민 그놈은 집을 비우고 주재소에나 피해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놈은 순사나 헌병들보다도 더 고약하고 악랄한 놈이었다. 지주라는 놈이 농사에나 마음 쓰지 않고 그런 일까지 꾸미는 걸 보면 예삿것이 아닌 상 싶었다. 그건 순전히 관에 잘 보이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런 악랄한 놈은 그냥 살려둘 수가 없었다. 그런 놈이 소작인들에게 어떻게 할지는 보나마나 뻔한 것이었다. 어디선가 닭이 울고 있었다. 공허는 반사적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쪽하늘에 새벽빛이 어리고 있었다. 어둠도 꽤나 묽어져 있었다. 그곳까지는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집에 들어갈 때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공허는 더욱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겨울이어서 다행이었다. 장닭들이 한바탕 울어댔는데도 동네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공허는 초가 뒤에서 뛰기를 멈추며 숨을 몰아쉬었다. 묽은 어둠에 묻힌 초가에서는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공허는 나지막한 토담을 뛰어넘었다. 바로 눈앞에 조그마한 봉창이 나 있었다. 방문 앞으로 가는 것보다는 그 봉창을 두들기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봉창을 두들기려던 공허는 얼른 몸을 낮추었다. 발자국소리가 고샅을 지나가고 있었다. 낮은 담은 담에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거나 인기척이 담을 넘으면 큰일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모습도 감추어야 했고, 젊은 과부 집에서 남자 기척이 들린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발자국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공허는 봉창을 두들겼다. 방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나지 않았다. 공허는 봉창 틀을 좀 더 세게 두들겼다.
"거그 누구다요!"
잠기라고는 전혀 없이 긴장된 목소리는 낮고 빨랐다.
"땡초 공허구만이라우."
잔뜩 억눌린 목소리는 쉰듯하며 갈라져 나왔다. 공허는 심하게 목이 말라 있었다.
"아이고메, 시님이!"
여자의 놀라는 목소리는 잠자리를 황급히 차고 일어나는 모습을 환히 느끼게 했다. 공허는 드문드문 박힌 새벽 별들을 바라보며 여기를 찾아오기 잘한 것인가 어떤가를 그저 덤덤한 마음으로 되짚고 있었다. 산속 절까지 들어가자니 너무 멀었고, 자신이 하는 일을 알면서 몸을 숨겨줄 만한 사람들은 없었다. 홍씨는 자신이 만주를 오가는 것까지 알고 있는 처지였고, 이래저래 서로 믿음이 싸여 있었던 것이다. 홍씨 집으로 발길이 이어진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송수익의 식구들이 전부 만주로 옮기기로 했다는 자신의 지어 붙인 말에 홍씨는 몹시 낙담하는 기색이었다. 그 미안함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지나는 길에 문안을 했더니 홍시는 예상 밖으로 반가워했었다. 그 반가워했음이 머지않아 이사를 가게 된 것을 알릴 수 있게 되어 그랬다는 것을 늦게사 알았다. 홍씨가 이사를 가는 것은 자식 없이 홀로 된 청상이 시부모도 없는 시집과 절연한다는 뜻이었다. 그 신세 기박함이 가슴 아파 이사한 동네로 또 문안을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녀 아이 하나만을 데리고 기와집에서 초가집으로 옮겨 앉은 홍씨는 전보다도 더 반가워했다. 무엇보다도 다행이었던 것은 송수익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 쉽게 잊었을 리 없건만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모습이 정갈하고 고와 보였다.
"시님, 방문 땄구만요."
봉창으로 흘러나오는 홍씨의 다소곳한 목소리였다.
"야아, 앞으로 가겄구만요."
공허는 빠른 걸음으로 집을 안고 돌며 사립께를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공허가 방 앞의 토방에 서자 방문이 먼저 열렸다.
"아니, 시님....."
홍씨가 놀랐다. 그러나 곧 무엇인가를 알아차리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야아, 쫓기는 몸이 됐구만요."
공허는 머리에 두른 수건을 풀며 멋쩍은 듯한 웃음을 지었다.
"어여 들어 오시씨요, 어여."
홍씨는 마루로 나서며 손짓까지 했다. 공허는 밝아오는 새벽빛에 떼밀리듯 방으로 들어섰다. 온기와 함께 물큰 풍겨오는 냄새가 있었다. 그 야릇한 냄새에 공허는 가슴이 찡 울리는 것을 느꼈다. 젖 내음처럼 비릿한 것도 같고, 치자 꽃냄새처럼 쌉사름한 것도 같고, 수국 꽃냄새처럼 어리러운 것도 같은 그 냄새는 바로 혼자 사는 여자의 냄새였다. 공허는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그 아랫목으로 앉으시씨요."
공허의 짚신을 윗목 구석에다 놓으며 홍씨가 자리를 권했다.
"야아....."
공허는 당황하며 아랫목이 아닌 방 한쪽에 주저앉았다.
"땀이 많이 나셨는디....."
홍씨가 수건을 내밀었다.
"저어, 찬물 한 그럭....."
공허는 몹시도 목이 타서 물을 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홍시는 들릴락 말락 가늘게 대답하며 방을 나갔다. 공허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홍씨의 옷매무새가 그렇듯 방안 어디에도 잠을 자다 일어난 흔적이라고는 없었다. 이불과 요를 서둘러 갠 것이었다. 공허는 그 냄새를 다시 맡으려고 코를 벌름거렸다. 그러나 냄새는 흐려져 있었다.
"이놈아, 환장허덜 말고 정신 채려. 저것언 금뎅이가 아니고 돌멩이고, 여자가 아니라 목석인 것이여."
공허는 벽에 등을 기대며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스스로의 마음에 매질을 했지만 효과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초가집 지붕을 뚫을 기세로 물건은 빳빳하게 곤두서 있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음심이 동하는 마음을 다른 마음이 매질하니까 음심을 품은 마음은 금방 말귀를 알아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런데도 물건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마음과 물건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제각기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었다. 마음이 시키지 않고서는 육신은 그 어떤 마디도 움직이지 않게 되어있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음심을 품은 마음은 한쪽으로 매질의 가르침을 따르는 듯하면서 또 한쪽으로는 음심을 그대로 품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면서도 그 갈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불심이 수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는 증좌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밤새껏 잠 한숨 못 자고 몇십 리를 내달아오느라고 기운은 다 빠졌는데도 어찌 된 것인지 그것만은 펄펄 살아서 독오른 뱀 대가리가 되어있었다.
"남자 연장이 질로 짱짱허니 참나무토막이 되는 때가 언젠지 알어? 오륙십 리 질얼 똥줄 따게 걸은 담이여. 어째 그냐! 똥구녕살허고 좆뿌랑구 허고넌 한통속으로 고리가 째여 있는디, 사람이 싸게싸게 걸을수록 똥구녕언 지절로 옴죽옴죽 험스로 심얼 받고, 그 옴죽옴죽허는 심이 좆뿌랑구로 살짝살짝 전해진다 그 말이여. 오륙십 리럴 걸음서 그리 모타진 심이 걸음얼 딱 끝내먼 어찌 되냐! 볼 것 없이 하늘로 뻗침서 좆대감지가 나 여 다 허고 서리 질르게 맨들제. 아, 나 말이 안 믿기먼 다덜 당장 용두질 쳐갖고 똥구녕이 옴죽기리게 심덜 써봐. 좆대감지가 더 짱짱해짐스로 디딜방아럴 찧나 안 찧나. 헌디, 그 이치가 남자만 그러는 것이 아니여. 여자 그것이 짠득짠득험스로 넉글넉글허고 축축험서 따땃허니 질로 맛나는 것이 언젠지 알어? 여자도 사오십 리 싸게 걸은 담이여. 여자 똥구녕허고 거그도 문고리 두 개가 붙은 것맨치로 살이 서로 꿰여 있는디, 여자덜이 큰 방뎅이럴 흔들어댐서 걸어가먼 심받은 꽁구녕이 어찌되겄어. 보나마나 옴죽옴죽 아니겄어. 근디 서로 살이 꿰여 있으니 똥구녕이 옴죽기리먼 거그넌 어찌 되제? 그려, 거그도 옴죽옴죽이제 머. 앞 옴죽 위 옴죽, 앞 옴죽 뒤옴죽, 이리 장단 맞침서 사오십 리럴 걸어대먼 어찌 되겄어. 꼰꼰허니 땀 뱀서 따땃해졌겄다, 속살이 서로 씻겨댐서 축축허니 젖었겄다, 앞뒤로 옴죽기림서 찰겨졌겄다, 지 아무리 큰소리로 나 여 다고 소리질르는 좆대감지도 거그 물리먼 꼼지락달삭 못혀. 근디 각시가 남정네럴 몸 깨끔허니 히서 대허겄다고 거그럴 찬물로 씻거불먼 도로아미타불이여. 긍게로 내우간에 서로가 구름 우에 붕붕 뜨는 진짜배기 맛얼 보자먼 어찌허먼 되냐! 장날마동 서방 각시가 장얼 보로 댕긴다 그것이여. 왔다 갔다 몇십 리럴 걷고 그날 밤에 붙으먼 판이 어찌 되겄어. 그 집 구들장 다 내래앉은 것이제."
의병을 하면서 음담 잘하는 어느 대원한테 들은 이야기였다. 나도 몇십 리를 뛰어서 이런 것인가..... 그러나 공허는 그 말쟁이의 말을 전적으로 수긍할 수는 없었다. 다소 그럴 수는 있는 일이지만 결국 마음이 문제였다. 자신의 마음이 이렇듯 쉽게 흔들리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내심으로 홍씨를 좋아하고 있었던가? 홍씨는 고운 편이었을 뿐 꼭 그렇지는 않았다. 공허는 한 가닥 실마리를 찾아냈다. 자신의 그 고질병이 도진 것이 아닐까 싶었다. 전부터 어떤 급박한 형편에 처해 초조하거나 긴장하게 되면 엉뚱하게도 성욕이 동하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남들은 슬픔에 겨워 있는 초상 당한 집을 보게 되거나, 주먹을 부르쥘 만큼 분한 꼴을 당하게 될 때도 이상하게 성적 충동이 일어나고는 했다. 아무에게도 말 못 할 묘한 증상이었다. 방문이 열렸다. 공허는 후닥닥 앉음새를 고쳤다.
"여그 꿀물 타왔구만요."
여자의 가늘고 하얀 손이 사발을 받쳐 잡고 있었다. 여자의 몸에서는 싸아한 냉기와 함께 아까 그 냄새가 물큰 풍겨왔다. 공허의 가슴에서는 불길이 확 일어났다.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여자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이되 발가벗고 있는 여자였다. 공허는 손을 뻗쳤다. 그 손이 덥석 잡은 것은 사발이 아니라 여자의 손목이었다. 놀란 여자의 숨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사발에서 물이 넘쳐 방바닥으로 쏟아졌다. 공허의 손은 물이 엎질러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여자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손목을 비꼬며 반대쪽으로 힘을 썼다. 그 실랑이 속에서 사발의 물은 잘도 넘쳐나고 있었다.
"시님, 어째 이러시오. 시님!"
홍씨는 상대를 정신 차리게 하느라고 <스님>을 두 번씩이나 불렀다. ..... 그러나 공허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손목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홍씨는 손목을 끌어당기는 힘이 오히려 더 강해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시님, 이러먼 안 되는 디요. 시님!"
홍씨는 오른손에 쥐여진 사발을 왼손으로 옮겨 잡으며 공허를 쳐다보았다. 홍씨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눈은 이미 승려의 눈이 아니었다. 평소의 그 편안하고 잠잠하던 눈은 흔적도 없었다. 오로지 남자의 열기만을 내뿜고 있는 눈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그 열기에 홍씨는 숨이 막혔다. 그 열기가 자신의 가슴에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그 저 방에 아가 깨는디요."
홍씨는 조금씩 끌려가면서 애달은 소리를 했다. 그 속삭임 같은 소리는 공허의 열기를 식히지 못했다.
"이따가, 이따가..... 밤에....."
홍씨의 말은 다급했다. 그러나 공허의 귀는 먹어 있었다. 아니, 그런 말들이 오히려 공허의 열기에 부채질을 해대고 있었다. 공허는 여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저 방문이나 걸고....."
홍씨가 공허의 어깨를 떼밀었다. 그러나 공허는 여자의 가는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홍씨는 옆 볼에 훅훅 끼쳐 오는 남자의 거칠고 뜨거운 숨결을 느꼈다. 그 숨결에는 소나무의 송진 냄새 같은 남자의 냄새가 진하게 섞여 있었다. 홍씨는 너무나 오랜만에 맡는 남자 냄새에 정신이 혼곤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방문을 잠가야 한다는 생각에 홍씨는 상대의 어깨를 자꾸 밀어댔다. 그럴수록 남자의 힘은 더욱 억세게 몸을 압박해 올 뿐이었다. 그 기운 또한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것이었다. 가슴이 불붙고 몸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홍씨는 그대로 마음을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누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설 것만 같았던 것이다.
"방문이나, 방문이나 걸고....."
그때 홍씨는 몸이 번쩍 들리는 것을 느꼈다. 공허가 홍씨를 안은 채 몸을 일으킨 것이었다. 홍씨는 자신도 모르게 공허의 목을 끌어안았다. 서너 걸음을 옮긴 공허가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 순간 홍씨는 저 아래가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회오리바람에 휘말리며 어지럼증을 느꼈다. 공허는 다시 주저앉았다. 홍씨는 이불을 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치마가 걷혀지는가 싶더니 남자의 손이 속곳 밑들 헤집고 들었다. 홍씨는 그때서야 자신이 두 다리를 벌려 남자 무릎 위에 올라 앉아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공허가 안고 일어났다가 다시 앉는 사이에 그렇게 자세가 변한 것이었다. 홍씨는 너무 놀라 남자를 떼밀었다. 그러나 남자는 절벽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고, 속곳 밑이 양쪽으로 확 벌어지면서 남자의 손이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홍씨는 신음을 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다음 순간 홍씨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거기를 치받는 짜릿하고도 뜨끈한 압박을 느꼈다. 홍씨는 그것이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허는 문고리를 걸고 다시 앉기 전에 바지끈을 풀어버렸던 것이다. 근이 풀린 바지가 흘러내리면서 공허의 아랫도리가 알몸이 된 것을 안겨 있었던 홍씨가 알 까닭이 없었다. 공허는 이제 불덩이가 되어있었다. 홍씨도 그 불덩어리 속에 갇힌 숯덩어리였다.
"아으..... 으음....."
홍시는 공허의 목을 다시 끌어안으며 부르르 떨었다. 홍씨는 전신을 휘돌기 시작한 뜨거운 바람에 휘감기면서 불덩어리가 되고 있었다. 뜨거운 밤은 굵고 크게만 느껴지는 불기둥이 속살을 파고드는 순간순간마다 회오리치며 불어오고 있었다. 홍씨는 그때마다 전신을 떨며 공허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얄 어라, 얄 어라, 요리 화합되는 수도 구마..... 이불도 안 피고 요리 되는 수도 있구마.....’ 공허에게 실려 공허가 하는 대로 흔들리며 정신이 아른아른해지는 속에서 홍씨는 이런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꿀물이고 인삼 물이고 다 소양 없고 찬물로 주시오, 찬물."
일을 다 끝낸 공허가 숨을 몰아쉬며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홍씨는 물그릇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 품에 더 오래 안겨있고 싶은 아쉬움과는 달리 부끄러움이 앞을 막았다. 홍씨는 방문을 조금 열고 물사발을 디밀어놓았다. 물을 단숨에 들이켠 공허는 네 활개를 펴고 벌렁 드러누웠다. 그는 곧 코를 골기 시작했다. 코 고는 소리가 밖에까지 흘러나오게 되자 홍씨는 몸이 달아 조바심을 했다. 홍씨는 토방을 서성거리며 윗방 쪽을 살피다가 사립 쪽을 살피다가 하고 있었다. 일하는 아이가 잠을 깨서 나오는 것도 문제였고, 누군가가 불쑥 찾아들어도 문제였던 것이다. 그 걱정은 이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고 말았다.
"마님, 저것이 무신 소린게라?"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방을 나서던 처녀 아이가 눈을 휘둥글하게 떴다.
"소리 낮추그라. 새북길에 공허 시님이 오셔서 지무신다."
홍씨는 꾸짖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누구라는 것을 안 알릴 도리가 없었고, <공허 스님>이라는 것을 못 박으면 그런대로 의심은 받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아이고 참말로 뻔뻔헌 시님이시오 이. 추운디 마님얼 요리 내쫓아 놓고 드렁드렁 코럴 곰서 잠이 오는지 몰르겄소."
처녀 아이는 안방 쪽에다 대고 째지라고 눈을 흘겨댔다.
"못 쓰겄다, 그 입! 딴 입 놀리덜 말고 얼렁 아침밥이나 해라!"
홍씨는 엄한 얼굴로 눈총을 쏘았다. 처녀 아이는 그 매운 눈초리에 서린 뜻을 알아채고는 부엌 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공허는 아침밥을 먹고 다시 잠이 들었다. 홍씨는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사립 밖 멀리를 살피고 있었다. 공허가 순사나 헌병들의 발이 미치지 못하도록 여기를 찾아온 줄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불안했다. 홍씨는 무슨 일로 쫓기고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 물음은 아녀자가 지켜야 할 범절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허라는 사람이 쫓길 짓을 했다면 물으나마나 의병 같은 일일 것이 뻔했다. 공허는 점심을 먹고도 또 잠이 들었다. 쫓기는 사람 같지 않은 그 태평함에서 홍씨는 커다란 바윗덩이 같은 실하고 든든한 남자를 느끼고 있었다. 그 느낌은 속살을 파고들며 치뻗어 오르던 불기둥의 느낌과 맞통하고 있었다. 그 불기둥은 아랫배를 뚫고, 윗배를 뚫고, 가슴을 뚫고, 목에까지 치받쳐 올라 입이 딱 벌어지며 혀가 쑥 빠져나오게 만들었던 것이다. 난생처음 겪은 그 뜨겁고도 현란한 느낌은 아직까지도 뱃속 전체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공허는 고봉으로 푼 저녁밥도 남김없이 다 먹었다.
"전답언 묵고살 만허니 받었소?"
숭늉을 가지고 들어간 홍씨에게 공허가 불쑥 물었다.
"예....."
홍씨는 그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시님이 그냥 이대로 눌러앉아도 평상 배 안 곯케 받었구만요,’ 하고 있었다. 그 속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공허가 뚜벅 말했다.
"나 곧 떠야 되겄소."
홍씨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공허를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새벽에 불쑥 나타났던 승려 공허가 아니었다. 그저 머리를 깎았을 뿐인 보내고 싶지 않은 남자였다. 속살을 섞기 전까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생각이었다.
"나 또 오겄소."
공허가 몸을 일으켰다. 따라 일어서는 홍씨를 공허는 왈칵 끌어안았다. 공허가 떠난 다음 홍씨는 경대 서랍에서 마를 대로 마른 작은 솔가지를 꺼내다가 아궁이 속에 버렸다. 그건 송수익이가 만주로 떠나가며 무심히 떨구었던 그 솔가지였다.
한편 죽산면 주재소장은 잔뜩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이틀 동안이나 인접한 면들의 주재소와 협동작전으로 수색을 펼쳤지만 범인들의 자취는 흔적도 없었던 것이다. 이틀 동안 사방 사오십 리 안팎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꼬리가 잡히지 않은 범인들은 더 이상 잡을 가망이 없다는 것이 각 주재소장들의 결론이었다. 그날 밤으로 범인들은 수사망을 벗어나 멀리 도주한 것이라는 의견이 덧붙여졌다. 형편이 이렇게 되자 독 안에 든 쥐를 하나도 잡지 못하고 다 놓친 책임을 죽산면 주재소장은 혼자 뒤집어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넷인 범인들 중에서 하나를 잡기는 잡았다. 그런데 그 범인은 복부 관통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날이 새기 전에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 범인이 경상을 입고 죽지 않았어야만 나머지 범인들도 일망타진하게 되었을것이다. 그러나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니 총을 난사해서 넷 중에 하나를 죽인 것을 공으로 내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거야말로 그물 속에 잉어도 아니고 손바닥 안에 든 사탕이었어요. 일을 그렇게 완전하게 꾸며줬는데도 그걸 놓치다니, 대일본제국의 경찰 위신이 이거 말이 됩니까?"
하시모토의 공박은 아주 노골적이었다. 그 공박 앞에서 주재소장은 한마디 대구도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하시모토상, 이거 참 면목 없이 되었소. 그놈들이 그리 날샐지 누가 알았겠소. 허나, 하나는 죽여 없앴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주재소장은 솔직하게 하시모토에게 굽히고 들어가며 도움을 청했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 내가 관할 서장도 아니고 경찰청장도 아니잖소."
하시모토는 냉담하게 외면했다. 하시모토는 이미 그 일을 도모할 때의 하시모토가 아니었다. 주재소장은 절망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듣고 그 일에 나섰던 것을 후회했다. 새로운 상황을 맞으면서 하시모토는 신속하게 새로운 생각을 꾸며내고 있었다. 승진을 꿈꾸었던 주재소장은 이제 문책을 면할 길이 없게 되어 있었다.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는 모르지만 주재소장 자리가 바뀌게 될 것만은 분명했다. 그 자리에 자기와 친한 사람이 올 수 있도록 손을 쓸 작정이었다. 처음에 도둑놈들을 잡기로 일을 꾸미면서는 실패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도둑놈들을 집 안까지 끌어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였지 일단 집 안으로 끌어들인 놈들을 놓친다는 것은 예상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
"하시모토상의 재간으로 그놈들이 울타리만 넘게 만드시오. 그다음은 내가 제까닥 해치울 테니. 으흐흐흐....."
주재소장은 하시모토가 바람을 넣은 대로 승진할 꿈에 들떠서 큰소리를 쳐댔다. 하시모토는 어떻게 하면 역둔토를 불하받을 수 있을지 골몰해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소문 시끄러운 도둑놈들을 잡아 그 공을 이용하자는 생각이 문뜩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그 기막힌 생각을 곧 실천에 옮겨 부두 일대에 헛소문을 퍼뜨리는 동시에 주재소장을 끌어들였다. 하시모토는 자신의 일을 망쳐놓은 주재소장이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공을 내세우면서 쓰지무라 과장의 도움을 업으면 주인 없는 땅이나 마찬가지인 역둔토를 욕심껏 불하받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럴듯한 명분만 있으면 쉽게 차지할 수 있는 것이 국유화된 역둔토였다. 하시모토는 자신의 일을 망친 보복감 때문에도 주재소장이 무사하게 되는 것을 방관할 수가 없었다. 하시모토는 이번 기회에 주재소장까지 자기편 사람으로 바꿔 이 일로 본 손해를 차차로 복구해 나갈 심산이었다. 그는 마음을 굳히자 지체 없이 말을 군산으로 몰았다. 사흘째 되는 날 주재소장은 전화를 받았다. 김제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바로 그 사건에 대한 조사고 추궁이었다. 주재소장은 연상 전화통에다 대고 굽실거리면서 쩔쩔맸다.
"당장 본서로 오시오!"
이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출두 명령이었다. 아이고, 이제 망했구나! 주재소장은 수화기를 떨어뜨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9. 뿌리 뽑힌 나무
"이놈덜아, 주구 맘대로 넘 땅에다 말뚝 박고 지랄이여어! 이놈덜아, 느그 죽고 나 죽자."
괭이를 꼬나든 오 영감은 눈이 뒤집혀 치달아가고 있었다.
"아니, 저 영감탱이가 이리 쫓아오덜 않소?"
"그런디요. 괭이럴 꼬나 잡았구만이라. 정신 나가서 무신 일 저질르는 것 아니겄소?"
"걱정 마시오. 분김에 저래 보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오. 저리 기럴 세우다가도 우리허고 딱 맞대허먼 풀이 죽어 그냥 돌아스게 되야 있소."
밭 가장자리를 따라 말뚝을 박아 나가고 있던 네 사람이 저쪽에서 달려오고 있는 오 영감을 바라보며 말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인부였고 다른 두 사람은 면서기와 이장이었다.
"이놈덜아, 당장 우리 땅서 물러가그라. 글안허먼 느그 죽고 나 죽기다!"
오 영감은 어기차게 외치며 그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허, 허, 이놈에 영감탱이야 주재소로 잽혀가기 전에 헛소리 말고 정신채려. 누가 기한 내에 신고서 안 내라고큭어. 요것언 총독부가 허는 일이여, 총독부. 무식헌 영감탱이가 총독부럴 알기나 혀, 어쩌?"
한 남자가 뒷짐을 지고 버티고 서서 오 영감을 향해 호령조로 목청을 뽑고 있었다. 그 면서기는 상대방의 기를 꺾기 위해 입에 익어있는 엄포를 놓고 있었다.
"이놈아, 그 땅언 내 피고 살이여. 그 땅 뺏는 놈언 다 내 웬수여어! 이놈아, 어디 죽어봐라!"
면서기의 계산은 오산이었다. 오 영감은 이렇게 외쳐대며 내달아온 기세 그대로 괭이를 내리찍었다.
"어쿠쿠쿠....."
가슴팍을 찍힌 면서기는 숨넘어가는 비명을 토하며 그 자리에 곤두박였다.
"아이고메 사람 잡네."
인부 하나가 들고 있던 말뚝을 내동댕이치며 내빼기 시작했다.
"참말로 미쳐부렀네."
다른 인부도 커다란 나무망치를 내던지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놈아, 니놈도 내 웬수여!"
오 영감은 우왕좌왕하고 있는 이장에게로 덤벼들었다. 그 눈에는 푸른 살기가 어려 있었다.
"아이고, 나넌 아니여."
질겁을 한 이장은 후닥닥 도망치기 시작했다.
"요런 도적놈아, 저그 서, 거그."
오 영감은 이장을 뒤쫓았다. 그러나 젊은 이장과의 사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아부니임,아부니임."
아까 오영감이 왔던 쪽에서 여자가 목청을 뽑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죽일 놈덜이여. 베락얼 맞어 뒤질 놈덜이여. 손바닥만헌 종우 쪼가리 한 장 내던지고넌 말 한마디 없다가 고것 안 냈다고 땅얼 뺏어? 숭악헌 날도적놈덜이여. 땅 뺏으면 목심 뺏는 것인디, 아무리 숭악허기로 어디 그런 인심이 있는법인가....."
어깨가 늘어진 오 영감은 울 듯이 일그러진 얼굴로 터덕터덕 걸어가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면서기는 신음을 흘리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니가 안 뒤지고 안직 살었냐!"
오 영감의 두 눈에 다시 살기가 확 피어났다. 동시에 괭이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면서기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아부님, 아부님, 안 되능마요. 참으시씨요, 아부님."
여자가 숨 가쁘게 외치며 오 영감 앞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여자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도 오 영감이 내려친 괭이는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는 면서기의 머리나 등을 찍게 되어있었다.
"냅더라, 저놈 죽이고 나 죽을란다."
오 영감은 며느리에게 잡힌 팔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 여자는 보름이었다.
"아부님, 삼봉이 허고 지넌 어찌 살으라고 그런 말씸얼 허시는 게라."
보름이의 목이 메었다.
"아니여, 어채피 저놈얼 찍었응게 나가 성키넌 다 틀린 것이여. 기왕지사 죽을 목심 저놈이나 죽이고 죽어야 써."
"아부님, 죽이먼 안 되는구만이라. 삼봉이럴 생각히서 참으시씨요."
보름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삼봉이....."
오 영감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삼봉이가 집이서 기둘링마요."
보름이는 그저 아들 삼봉이를 앞세웠다. 시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애지중지하는 것이 삼봉이었다. 삼봉이라는 이름도 집과 마주 보고 솟아 있는 세 봉우리에서 따서 시아버지가 지은 것이었다.
"그려, 삼봉이헌티 가야제."
오 영감은 주름두성이인 얼굴을 찡그리며 먼 데를 바라보았다. 굵은 주름살은 말할 것도 없고 자디잔 실 주름살 가닥 가닥에도 괴로움과 슬픔이 흐르고 있었다.
"아가, 니 알지야? 우리 밭뙈기덜이 어쩐 땅인겨."
"야아, 아부님 피고 살이구만이라우."
보름이는 또렷한 소리로 대답했다. 시아버지가 그러기를 바라서만이 아니었다. 시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그 밭들을 일궈낸 눈물겹고 쓰라린 곡절을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곧게 서고는 했다.
"그려, 니넌 똑똑헝게 이 애비 맘얼 잘 알 것이여. 저 땅언 우리 삼봉이 것이제 아무도 손 못 대. 나가 없어져부러도 니 맘 강단지게 묵고 삼봉이 잘 키워야 한다 이. 알겄지야?"
"아부니임..... "
보름이는 시아버지를 원망조로 부르며 눈물을 훔쳤다.
"니 알겄지야!"
오 영감은 좀 더 힘이 들어간 소리로 다짐했다.
"아부님, 그 사람얼 죽인 것이 아닝게 벨일 없을 것이구만이라."
보름이는 시아버지보다도 더 힘주어 말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고, 시아버지를 안심시켜야 했던 것이다.
"얼렁 대답혀라. 니 알겄지야!"
오 영감은 우뚝 멈춰서며 며느리에게 눈길을 쏘았다. 그 얼굴이며 눈이 엄하기 그지없었다.
"야아....."
보름이는 고개를 떨구며 겨우 대답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완강하게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시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세상살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보름이는 시아버지의 말이 자꾸만 걸려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마음 쓴 것이 들어맞았다. 미처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순사들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니 알지야? 우리 삼봉이....."
등을 떠밀려가는 시아버지가 몇 번이고 고개를 돌리며 다짐한 말이었다.
"더 따라오덜 말어!"
순사보인 조선 남자가 개머리판으로 칠 것 같은 몸짓을 했다. 보름이는 업고 있는 삼봉이가 다칠까 봐 부리나케 뒷걸음질을 했다.
"아가, 가그라. 어여 집으로 가."
오 영감은 고갯짓을 했다. 보름이는 이른 저녁밥을 해가지고 주재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주재소에서는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만내덜 못허먼 이 밥이나 잠 전해 주시씨요."
보름이는 몇 번이고 애걸했다. 그러나 순사는 끝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밥 때가 조금 지나서 오 영감은 마을로 끌려왔다. 하룻밤 사이에 오 영감의 몰골은 말이 아니게 상해 있었다. 수척해진 얼굴 여기저기에 피멍이 잡혀 있었고, 상투머리도 어지럽게[ 헝클어져 있었다. 그리고 걸음도 엉그적거리고 있었다. 오 영감이 심한 매질을 당했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순사들은 동네 사람들을 다 모이게 했다. 보름이는 동네 사람들 속에서 서럽게 느껴 울고 있었다.
"에에 또, 잘들 들으시오. 토지조사사업 하는 데 있어서 토지신고서를 기한 내에 안 내는 것도 죄를 진 것이오. 헌데 이 오영길이는 그런 죄를 진 데다가 공무를 집행하는 관리를 괭이로 찍어 죽이려 했소. 총독부가 추진하는 중대 사업을 방해하고 관리를 살해하려고 한 이런 흉악범은 총독부의 법에 따라 엄벌에 처해야 하오. 일벌백계하기 위하여 범인 오영길을 총살형에 처함!"
주재소장이 카랑카랑하게 말했다.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가 꺾여 얼어붙어 있었다.
"저쪽 둔덕으로 끌고 가!"
주재소장이 손가락질하며 명령했다.
"아부님, 아부님! 우리 아부님얼 살래주시씨요, 살래주시씨요."
보름이는 주재소장에게 매달리며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바가야로, 조센징!"
주재소장은 사정없이 보름이를 떠다밀었다. 보름이는 그대로 나뒹굴어졌다.
"살래주시씨요, 살래주시씨요....."
허둥지둥 일어난 보름이는 다시 주재소장에게 매달렸다.
"칙쇼, 바가야로!"
주재소장은 고함을 지르며 구둣발로 보름이의 어깻부들기를 내질렀다. 보름이는 여지없이 곤두박질쳐졌다.
"살래주시씨요, 우리 아부님 살래주시씨요. 무신 죽을 죄럴 졌다고....."
허겁지겁 몸을 일으킨 보름이는 또다시 주재소장에게 매달렸다. 낭자머리가 풀어지고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동네 여자들은 울상이 되어 발을 동동거리거나 안절부절못했고, 남자들은 고개를 떨군 채 한숨을 짓거나 먼데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고노아마메, 고로시데야루조!(이년, 죽여버리겠다)"
열이 치받친 주재소장은 니뽄도를 홱 뽑으며 소리쳤다. 햇빛을 번쩍 내쏘며 치켜 올려진 긴 칼은 곧 아래로 내리쳐질 기세였다.
"아니구만이라, 아니구만이라."
어느 여자가 부리나케 달려가 보름이를 주재소장한테서 떼어냈다. 그러는 사이에 오 영감은 둔덕 위의 소나무에 묶여 있었다. 주재소장은 칼을 휘두르며 둔덕으로 올라갔다. 수건으로 오영감의 눈이 가려졌다. 순사 둘이 옆에 총을 하고 나란히 섰다.
"준비이잇, 발사!"
"땅 땅 타당 탕"
"삼봉아아아....."
총소리에 휘말리는 오 영감의 외침이었다.
"아부니이임....."
사람들에게 붙들려 몸부림치고 있는 보름이의 울부짖음이었다. 산골을 뒤흔든 총소리들은 겹겹인 산줄기를 따라 울리고 되울리는 긴 메아리를 지으며 감감하게 멀어져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떨군 채 굳어져 있었다. 어느 산에선가 소쩍새가 푸풀꾸 풀꾹 서러움이 사무치는 쉰 소리로 울고 있었다. 장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비명횡사라 시신을 집 안에 들여 놓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보름이는 동네 사람들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억울하고 원통하게 돌아가신 것이니 시아버지를 더욱 정성스레 모셔다가 장례를 치르고 싶었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펄쩍 뛰었다. 산 사람들한테 액이 끼친다는 것이었다. 원한을 품은 망자의 혼백일수록 빨리 저승으로 보내야지 그러지 않고 옆에 붙들어두면 그 혼백은 생전에 제일 좋아했던 사람에게 붙으며 원수를 갚아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혼백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산 사람은 그때부터 실성기를 보이며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고 했다. 보름이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들 삼봉이에게 횡액이 끼치게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다음날로 출상을 했다. 보름이는 몸을 가눌 수가 없도록 서럽고 서럽게 통곡했다. 시아버지를 생각하는 서러움과 스스로를 생각하는 서러움이 얽히고설켜 겹겹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나 보름이는 곧 서러움의 물결에서 헤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농사철이 다가왔는데도 농사지을 땅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집들과는 달리 보름이네는 빼앗긴 받을 소작으로 내주지도 않았다. 죄인의 집이라는 것이었다. 그 산골 마을은 서너 채씩 모여 집을 전부 합해야 스무 가구 남짓이었다. 그 마을에 종이쪽 한 장씩 돌려진 것은 네댓 달 전이었다. 아무 설명도 없이 돌려진 그 종이쪽을 한문이라고는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취급해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귀한 종이 구경을 하게 되자 비싼 궐련 피우는 흉내를 내느라고 담비를 말아 피웠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오랜만에 거기 호강시키느라고 뒷간에서 요긴하게 써 없앴다. 기껏 간수 잘한 사람이라고 해야 마루 기둥 옆 처마 아래 댓살 사이에다가 찔러두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마을 사람들 모두의 밭뙈기들을 날아가게 만든 흉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밭을 빼앗기게 된 다음에야 그 종이쪽지 이름이 토지신고서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혼자 나스먼 멀혀. 긍게 말이여. 그냥 참었어야제. 긍게로. 그리 죽는 사람만 불상허제."
"무신 소리여. 죽어뿐 사람이야멀 알간디. 뒤에 남은 식구덜이 앞날 캄캄허니 불쌍허게 생겼제."
마을사람들은 단체로 항의를 하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이 오 영감이 참살당하는 것을 보고는 그만 기가 질려 그런 뒷소리들만 소곤거렸다. 그리고 그들은 하루아침에 소작인 신세가 된 것을 속으로만 앓고 있었다. 그들은 어쩌면 보름이네처럼 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는지도 몰랐다.
"어이, 소작도 못 얻으먼 어찌 살랑가. 토지조사국이란 디럴 찾아가서 어찌 잠 히도라고 사정얼 혀보소."
여자들이 보름이를 걱정하며 내놓은 의견이었다.
"산 입에 거무줄 치겄소."
보름이는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찾아가서 애걸을 한다고 소작을 부쳐줄 왜놈들이 아니었다. 시아버지한테 저녁밥도 전해 주지 않은 채 그리도 몰악스럽고 허망하게 시아버지를 죽인 놈들이었다. 남편을 죽이고 시아버지까지 죽인 그놈들은 철천지원수였다. 굶어 죽었으면 죽었지 그런 놈들을 찾아가 소작을 부쳐달라고 애걸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 짓을 하면 시아버지가 저승에서 틀림없이 대로하리라 싶었다.
"나가 여그 산골로 도망질해 온 것이 열일곱 살 적이여. 느그 시엄니럴 쥔 아덜놈이 망칠라고 드는디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있었간디. 서로가 눈 혼약얼 헌 사인디. 나락 두 섬 지는 기운으로 패대기럴 쳐뿌렀시니 살 길얼 찾어얄 것 아니겄냐. 이 골짝으로 찾아들기넌 혔는디 지닌 것이야 몸띵이덜뿐인게 안 굶어죽을라먼 어쨌그나 농새질 땅얼 맨들어낼 수밖에 없었니라. 밤낮으로 땅얼 파고 파고 또 팠제. 나무고풀 무성헌 산비탈얼 밭으로 맨들자는 것이여. 논이야 생각지도 못 허는 것이고. 나무뿌랑구덜언 짚으제, 돌뎅이이덜언 많제, 연장언 부실허제, 그 고상이야 말로 다허기가 에롭다. 밭 한 뙈기럴 일굴라먼 그 땅 한치마동 쏟은 피땀얼 다 힙치먼 몇 말썩언 될 것이여. 그 피땀이 몰르지만 안 했음사 땅이 척척허니 젖었겄제. 무신 말인고 허먼, 그 밭뙈기덜언 넘덜 눈에넌 보잘 것이 없드라도 이 시애비 피고 살인 심이여."
남편이 죽고 나서 시아버지가 먼 산줄기를 바라보고 앉아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런 다음부터 산밭농사 짓기 어려운 것을 차근차근 일깨워주고는 했다. 보름이는 밤잠을 잃은 채 앞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소작도 부쳐주지 않는 것은 굶겨죽이려는 것이든지 아니면 동네에서 몰아내려는 수작이었다. 농토가 없다고 꼭 굶어 죽으란 법은 없었다. 산채를 뜯거나 약초를 캐서 어찌어찌 살아갈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어린아이를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깊은 산으로 들어가야 하는 약초 캐는 일은 여자 혼자의 몸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나면 밥벌이할 것이 없었다. 제 농사를 질 때 도서로 품앗이로 일을 했는데 이제 모두가 소작질을 하게 되면 하루 날품에 한 끼 밥 얻어먹을 데도 없을 판이었다. 그러면 살길을 찾아 산골을 떠나야 하는가..... 그러나 이내 앞이 가로막혔다. 시아버지, 남편, 그리고 시어머니의 산소가 있는 곳이었다. 떠나고 싶어도 마음대로 떠날 수도 없었다. 또한, 막상 떠난다고 하더라도 찾아갈 만한 데가 마땅하지도 않았다. 친정은 진작 만주로 떠나고 없었다. 떠나기 전에 들렀던 어머니는 가서 자리잡히는 대로 소식 전하마고 했었다. 그런데 여지껏 아무 소식이 없었다. 찾아가자고 해도 만주 어디인지 알 길이 없었다. 친정 말고 찾아가 볼 데는 딱 한 군데가 있었다. 다리를 다쳐 만주로 못 뜨고 군산에 주저앉았다는 판석이 아재 집이었다. 군산에는 일거리도 많고 돈벌이도 수월하다는 풍문이었다. 보름이는 밤마다 잠을 설치면서도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소작이나마 농사일에 매달려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절기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농사일이라서 어찌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보름이는 앞길이 너무 막막하여 아들을 데리고 시아버지 산소를 찾아갔다. 질정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며 실컷 울다가 내려왔다. 밤에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다. 꿈에 시아버지가 나타났다.
"가그라, 떠나그라. 삼봉이 잘 키울 디로 떠나. 우리 걱정 안 해도 된 게 삼봉이나 잘 키워. 나가 바래는 것언 그것뿐잉게로 어여 더나. 나 니만 믿겄다, 삼봉이 잘 키워라 이."
하얀 옷을 입은 시아버지는 서운한 기색이면서도 연상 떠나라는 손짓을 했다. 보름이는 시아버지를 부르며 달려갔다. 그 순간 시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보름이는 소스라쳐 잠이 깼다. 삼봉이만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마치 시아버지가 옆에서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꿈에서 들은 목소리는 너무나 생생하게 울리고 있었다. 날이 밝자 보름이는 아들을 데리고 시아버지 산소를 찾아갔다. 아들과 나란히 산소 앞에 서자 마자 난데없이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그 바람은 삼봉이를 감싸듯 휘돌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인지 모르게 꿈에서 들었던 시아버지의 말이 들리고 있었다. 보름이는 몸을 웅크리고 서서 마을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보름이는 산소에서 내려오는 길로 집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그 채비라는 것은 이삿짐을 꾸리는 것이 아니었다. 집을 맡길 마땅한 사람을 찾자는 것이었다. 그건 집이 아까워 빌려주었다가 되찾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집만 못한 집에 사는 사람 누구에게나 물려주고 그 대신 시아버지의 산소를 돌보아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보름이의 뜻이 전해지자마자 서너 사람이 나섰다. 보름이는 그들 중에서 김서방네를 골랐다. 재작년에 이 마을로 들어와 어물어물 자리 잡은 김서방네는 아직도 움막살이나 다름없이 집이 변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건 다른 사람들을 서운하게 하지 않으려고 겉으로 내세운 이유였다. 김서방은 이 마을로 들어오기 전에는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입을 뗀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마을사람들 사이에서 조심조심 돈 말은 그가 의병을 했다는 것이었다. 젊은 나이에 비해 도무지 말이 없는 그 사람은 부지런하고 신실한 편이었다. 그러나 너무 늦게 들어와 땅이 마땅하지가 않아 고생하는 만큼 밭뙈기를 일궈내지 못했다.
"김샌은 시아버지 장례 때도 궂은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지가 자주자주 올라고 맘언 묵겄지마는 아부님 산소럴 잘 부탁허겄소."
보름이는 집을 떠나면서 몇 번이고 다짐했던 말을 또 했다.
"야아, 지 아부님이라 생각허고 잘 뫼시겄구만이라. 그 어러신이 생전에도 지헌티 잘해 주셨구만요."
시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무엇을 잘해 주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보름이는 김서방의 가식 없고 얄팍하지 않은 눈빛을 보고 그 언약을 믿었다.
"그려, 시아부지가 점지허신 질잉게 가란대로 가야제. 하먼, 하먼. 시상 어디 가서 살아도 요 산골짝만 못헌 디가 어디 있겄능가. 우리도 산소 돌볼 것잉게 정만 두고 가제 맘꺼정 두고 가지넌 말소. 맘만 자주 오제 몸도 자주 오겄능가마는 그려도 더러 걸음 허소 이."
동네여자들은 모두 눈물 글썽이며 보름이를 떠나보냈다. 보름이는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하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산골 어귀에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이 두 번째였다. 처음은 시집올 때 산골로 들어서며 친정 쪽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한정 없이 눈물을 훔쳤던 것이다. 그때나 이때나 두고 떠나는 정이 눈물의 샘이었다. 보름이는 낯모르는 동네에서 헛간 잠을 자고 다음 날 친정 동네를 지나게 되었다. 몇 번 망설이다가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아는 얼굴들이야 많았지만 어머니가 없는 동네가 친정일 리가 없었다. 괜히 자신의 초라해진 몰골만 구경시키게 될 뿐이었다. 동생 정분이를 차차 만나기로 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신세 기박하게 된 언니가 동생네를 기웃거리는 것은 사돈집에 흉이고 흠을 보이는 것이었지 자랑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름이는 동무 오월이는 만나러 가기로 했다. 서로가 진작 신세 험하게 된 처지였고, 지나는 길목인데 그냥 지나치면 언제 또 만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보름이는 오월이가 동무라서 마음이 쓰이는 것만이 아니었다. 오빠가 하와이로 떠나지만 않았더라면 오월이의 신세도 그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영 시들지 않고 괴로움이 되고 있어서였다.
"아이고메, 요것이 누구여어. 무주 산골년 보름이가 무신 바람이 불었다냐아."
아이를 들쳐업고 마당에서 빨래을 널고 있던 오월이는 손바닥을 맞때리며 뛸 듯이 반가워하면서 전혀 조심성 없이 목청껏 소리를 내질렀다.
"아이고, 니 미쳤냐! 무신 난리 당헐라고 이려."
보름이는 질겁을 하며 안방 쪽을 향해 빠른 눈짓을 했다.
"체에, 니도 똑똑헌지 알았등마 헛짜시. 나가 전에 없이 맘 놓고 말얼 해불고, 빨랫줄에 빨래가 이리 늘어지고 처지게 많이 걸린 것얼 척 보먼 니가 금세 무신 일 일어난 지 알지 알었는디."
오월이는입가에 비웃음도 쓴웃음도 아닌 미묘한 웃음을 피워내며 보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글먼...... 느그 시엄니가 바람 맞었다냐?"
보름이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려도 눈치넌 그만허시. 풍이 아니라 노망잉게 사람 잡제."
오월이는 한숨을 쉬며 쓰게 웃었다.
"심허냐?"
"이 줄줄이 걸린 빨래럴 보먼 몰르겄냐? 싸고 뭉개고 볼르고, 아이고 말도 말어라. 한 가지 존 것언 사람도 못 알아보고 말귀도 못 알아듣는 거이다."
오월이는 피식 웃고는,
"니 허리 뿐질러지겄다. 아그보톰 내래라."
보름이의 등에서 자고 있는 삼봉이의 볼기짝을 토닥거렸다.
"니가 인자 임금님이다 이."
보름이는 처녀 때처럼 활달해지고 기가 살아난 오월이에게 눈을 흘겼다. 찾아오기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하이고, 날이 날마동 똥빨래허는 임금님도 있다디냐. 그나저나 똥빨래허는 고상이야 혀도 인자 사람이 살겄다. 시상에 만상에 시집살이가 맵고 짜고 독허다고 혀도 어디 우리 시엄니 겉은 사람이 이 시상에 또 있을끄나 이."
오월이는 입심 좋은 여편네들처럼 맘 놓고 말을 퍼질러 놓고는 혀끝을 톡톡 튀기듯이 짯짯 혀를 차면서 고개를 내둘렸다. 그 유별나게 짧고 차지고 당찬 소리에는 그동안 당했던 시집살이의 서러움과 분이 응어리져 있었다.
"느그 시엄니가 시집살이럴 오지게 당허고 살었을 거이다. 니나 담에 그러덜 말어라."
"니 시방 정신이 있냐 없냐. 요 잡것이 머시매가 아니라 가시네여, 가시네!"
오월이는 입이 튀어나오도록 마땅찮은 표정을 지으며 업고 있는 아이를 이쪽저쪽으로 마구 내둘렀다.
"아이고, 나가 그만....."
보름이는 헛나간 말을 쓸어 담을 수도 없는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아이고메, 말도 마라. 요놈에 가시네 땀세 새 이로 시집살이 당헌 것 생각허먼 자다가도 치가 떨린다. 요것이 꼬치럴 달고 나왔어도 그랬을 것이냐. 요것이 조갑진 것얼 보고 나등마 니년이 샛서방질헌 것 아니냐 허는 표럴 더 심허게 내는디, 그 분허고 원통허기가 사람이 도구통얼 싸안고 자빠져 죽을 일이고, 맷돌얼 허리에 달고 둠벙에 뛰어들어 죽을 일 아니었겄냐. 나가 니맨치 이쁘기럴 허니 샛서방질얼 허겄냐, 느그 오빠가 여그 있기럴 허니 샛서방질얼 허겄냐. 그 사람 피 보트게 허는 시집살이가 새잡이로 시작된 것얼 따지먼 순전히 그 못난 물건땀시여. 그 물건이 돌림병도 못 이기고 뒤질람사 씨나 지대로 뿌리고 뒤져얄 거시 아니겄냐. 넘 먼첨 뒤져 고상시키고, 자갑지나 까게 혀서 또 못살 일 시키고, 어디 웬수가 따로 있다냐. 아니여, 아니여, 니 욕심이 과헌 것이제. 돌림병 못 이기고 뒤진 빙신이 어찌 꼬치 씨럴 뿌릴 수 있겄냐. 조갑지씨 뿌리는 것이야 당연지사제."
오월이는 씁쓰레한 웃음을 흘렸다. 보름이는 그동안 부쩍 말이 많아진 오월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소문나게 심한 시집살이를 하면서 가슴에 맺히고 얹혔던 말들이 그렇게 터져나오는 모양이었다. 죽은 남편에 대해서도 아무 정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 보름이는 오월이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면목이 없었다. 오월이가 그러는 것은 하와이로 떠난 오빠를 못 잊어 하기 때문이었다. 오월이의 남편은 돌림병으로 죽으면서 오월이의 배에 씨를 뿌렸던 것이다. 뒤늦게야 임신이 된 것을 알았는데 매사에 트집인 시어머니는 오월이를 의심하는 눈치를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딸아이를 낳게 되자 그 의심이 더 심해졌으니 오월이가 얼마나 속울음을 울고 가슴을 치며 살았을지 알 만하기도 했다.
"니 겨도 그 딸래미라도 태와준 것이 얼매나 다행헌 일이냐. 저러다가 시엄니 시상 떠불먼 니혼자 고적허니 어찌 살판이었냔 말이여."
보름이는 오월이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하이고, 넘 속도 몰르는 소리 허고 앉았네. 이 가시네 새끼 없었음사 활활 털어불고 바다 건너 하와이로 사진결혼 떠나제."
"머시여?"
보름이는 너무나 놀라는 것과 동시에 야릇한 반감을 느꼈다. 오월이가 10년이 가까워오는 동안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은 이야기를 그토록 대담하게 하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시집을 가서 이미 더럽혀진 몸을 가지고 오빠를 찾아가려고 하는 그 생각에 더욱 놀랐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반감은 그 체면 모르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무리 친한 동무라 해도 몸 더럽혀진 오월이를 올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 불꽃처럼 튀었던 것이다.
"니 어째 그리 놀래고 그냐? 처녀도 아닌 것이 느그 오빠 찾어갈랑가 무서와서 그러지야?"
오월이는 보름이의 가슴 한복판을 정통으로 찌르고 들었다.
"아니, 아니여. 니가 하도 안 허든 소리럴 급작시리 내논 게 누가 안 놀래겄냐."
보름이는 당황스런 기색을 애써 감추며 얼버무리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약지 못한 실수를 후회하고 있었다. 딸아이가 엄연히 등에 업혀있는 형편에 그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가슴에 담겨 있을 뿐인 소원이었고 또 오월이 같은 처지에서는 그런 말이나마 해야 팍팍한 세상살이의 고단함이 다소나마 풀릴 수 있는 일이었다. 오월이를 위로했으려면 오월이의 그 말에 그저 맞장구를 쳤어야 했던 것이다.
"그려, 나가 미쳤다냐. 느그 오빠럴 찾아가게. 요 가시네 안 태이고, 나가 혼자가 되고, 느그 오빠가 핀지 보내 나럴 불렀다고 히도 나가 무신 낯짝으로 느그 오빠헌트로 가겄냐. 맘 기댈 디 없고 묶을 디 없응게 그냥 실답잖은 소리 히보는 것 아니겄냐. 그런 실답잖은 소리도 안 허는 것보담이야 나슨게."
오월이는 한숨을 가느다랗게 내쉬며 쓸쓸하게 웃었다.
"그려, 니넌 그래도 나보담 낫다. 그리 가심에 묻어두고 두고두고 생각헐 사람이나 있고."
보름이는 오월이의 딸아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신 소리여? 니야 참말로 영감이고 총각덜이고 쌔고쌨덜 안 혀? 니럴 보고 홀까닥 반허지 않은 남정네덜이 어디가 있냐. 늙다리 김 참봉이야 징헝게 치덜 말고, 앞동네 박부자 아덜, 웃뜸 최부자 동상, 한동네 갑수, 이 글고 하와이로 사람 끌어가든 군산 놈..... 워메, 그놈 이름이 머시드라..... 거 안 있냐 와, 그 징헌 놈 낯짝언 환헌디 이름이 영 생각 안 나네. 나도 인자 늙었능가 어찐가, 그놈 이름이....."
"아이고, 실답잖은 소리 그만허고 느그 시엄니나 잠딜다 보는 것이 사람 노릇 허능 거 아니겄냐."
보름이는 말머리를 돌려버렸다. 오월이가 기억해 내려고 하는 그 사내의 이름이 장칠문으로 또렷하게 떠올랐지만 마당에 비질을 하듯 지워버렸다.
"아서, 아서, 아까 나가 헌 말 까묵어부렀냐. 사람얼 아무도 못 알아보는 디다가 그 방에 들어가먼 쿠린내에다가 찌린 내, 늙은이 냄새꺼정 진동해서 속 다 뒤집어진다. 니 사람 노릇 잘못헌다고 나무랠 사람덜 없응게 절로 가서 편허니 앉기나 허자."
오월이는 손을 내젓고 머리까지 흔들며 마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니가 애 많이 묵겄다. 그려도 니가 잘해야제 어쩌겄냐. 시부모도 부몬게."
보름이는 그냥 오월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잘 아는 사람도 못 알아보는 형편이라면 어쩌다가 대했던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리 없었던 것이다.
"아이고 말도 마라. 나가 시집살이 당헌 만치 갚아주고도 잡은디, 그리되먼 넘덜헌티 욕 묵고 숭 잽히는 것이 무서와 더 잘해 주게 된당 게로, 열병허고."
"그려, 다 니가 복 받을 일이제."
"그나저나 니넌 무신 바람이 불어 이리 뜸금없이 걸음 했다냐? 농사철이 코앞으로 닥쳤는디."
이제 오월이가 말머리를 돌렸다.
"우리 시아부님이 돌아가셨다."
"머시야? 무신 병으로? 병이 아니여. 왜놈덜 손에....."
"어쩌끄나! 무신 일인디?"
오월이는 눈이 휘둥그레지게 놀라며 보름이 옆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참말로 기맥힌일이여....."
보름이는 벌써 목이 메며 눈물을 훔쳤다. 보름이는 시아버지만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지려 했고, 그 억울함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뜨거움이 들끓어 올랐다. 보름이는 연상 눈물을 훔치고 가슴을 눌러가며 시아버지가 당한 이야기를 해나갔다. 무슨 수로든 시아버지의 원한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속 다짐해 가면서.
"아이고메 엄니, 어쩌끄나!"
보름이의 시아버지가 총 맞아 죽는 대목에서 오월이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글썽이고 있던 눈물을 쏟았다. 보름이도 이야기를 있지 못하고 흐느꼈다.
"아나, 찬물이나 한 사발 묵고 나서 남치기 이얘기 더 해라. 니 속이 얼매나 원통허고 천불이 얼겄냐."
오월이는 잽싸게 부엌으로 가서 바가지에 떠내온 물을 제가 먼저 벌컥거리고 나서 보름이에게 내밀었다. 입으로는 <찬물이나 한 사발>이면서 내민 것은 긴 금이 가서 실을 굵게 꼬아 꿰맨 헌 바가지였다. 보름이는 바가지의 찬물을 받아 천천히 마시며 물맛을 달게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냥 물맛이 아니라 오월이의 정맛이었던 것이다.
"글먼 시방 군산으로 가든 참이여?"
오월이는 제가 먼저 이야기를 마감했다. 보름이는 쓸쓸한 얼굴로 보일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얼 어쩌끄나. 우리 집이라도 농사가 푼푼허먼 니랑 나랑 함께 살 것인디. 근디 니도 다 알디끼 우리 시집이 애초에 째지게 가난헌 집구석 아니여?"
"알어, 말만이라도 고맙구먼."
"빌어묵을, 빈말 백날 고마우먼 멀혀."
오월이는 제풀에 돋는 성질에 짜증을 내면서,
"그나저나 니나 나나 무신 놈에 팔자가 요리도 꾀이고 틀리고 요 모냥일끄나? 우리 아부지덜이 묏자리 잘못 쓴 것 아니겄냐?"
오월이는 시름겹게 보름이를 바라보았다.
"글씨, 우리맨치로 팔자 뒤틀린 젊은 여자덜이 어디 한두이다냐. 다 시상이 잘못 돌아가다 봉게 그리되는 것이제."
보름이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맞어, 왜놈덜 시상만 안 됐어도 느그 오빠가 하와이로 팔려갔을 택이 없제."
오월이의 그 재빠른 대꾸에 보름이는 또 가슴이 뜨끔해졌다. 오빠 이야기만 비쳤다 하면 언제나 죄지은 것처럼 가슴이 찔리는 것이었다. 보름이는 뭐라고 대꾸할 말이 마땅찮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느그 오빠도 인자 사진 결혼인지 머신지 했을끄나?"
오월이가 느닷없이 물었다. 보름이의 가슴에서는 서리 맞은 모과 떨어지는 소리가 쿵 울리고 있었다. 그 말은 오월이가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보름이는 난처하고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신이라고 먼먼 데 떨어져 있는 오빠가 그동안 어찌했는지 알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그간에 아무 소식이 없었는디 그런 짓이야 혔겄냐. 그랬으먼야 무신 소식이 있었겠제."
보름이는 자신이 없으면서도 자신이 있는 척 말했다. 우선 오월이의 가슴을 허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글먼 이적지 혼자 몸으로 살끄나? 여자인 나도 혼인얼 혔는디."
오월이는 풀죽은 소리로 말했다.
"금메, 우리 오빠가 혼인얼 혔으먼 거그서 영영 살아분다는 것인디, 오빠넌 그리 헐 사람이 아니여. 무신 일이 있어도 꼭 똘아오겄다고 혔응게."
보름이는 이제야말로 자신이 생겨 말에 힘을 넣었다. 어머니는 만주로 떠나면서도 오빠가 꼭 돌아올 것을 믿었다. 그래서 자신과 동생 정분이에게 친정 동네에 더러 발길 해보기를 당부했던 것이다. 오빠가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것은 자신도 믿고 있었다.
"사진결혼이라는 것이 생길지 알었음사 친정서 아무리 못살게 몰아댔어도 시집얼 안 갔을 것인디."
오월이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려, 나 인자 가봐야 쓰겄다."
보름이는 마음 무겁게 일어섰다.
"니 미쳤냐, 밥이나 한 끄니 묵고 가야제. 니 나가 이 집 임금님인 거 알지야?"
오월이는 보름이의 치마를 잡아끌었다. 보름이는 오월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월이의 얼굴에는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기색이 어느 때 없이 진하게 드러나 있었다. 보름이는 가슴 찡한 정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니 시집살이 벗어났다고 니 맘대로 허다가넌 살림 망쳐묵는다."
보름이는 눈을 곱게 흘기며 도로 마루에 앉았다.
"하이고, 그런 걱정 안 해도 돼야. 이 집구석 살림살이가 아무리 궁상이라도 니헌티 밥 한 그럭 믹였다고 안 망허고, 이 집 보리쌀 한 알갱이라도 누가 다 쌔빠지게 농새진 것인디?"
오월이는 다부지게 말했다.
"그려, 니 고상이야 나가 다 알제. 헌디, 니나 나나 혹뎅이가 하나썩 붙었응게 앞으로가 더 걱정이여. 보리쌀 한 알갱이, 지푸랑구 한 가닥이라도 애낌서 맵고 짜게 살아야제."
"쟈 잠 보소. 니넌 복뎅이가 붙은 것이고 나만 혹뎅이가 붙은 것이여. 고상고상 히감서 가시네 새끼 키우먼 머헐 것이냐. 시집가 불먼 도로아미타불이고 빈 확돌이제. 가시네먼 잠 이쁘게나 타고 났으먼 또 몰라. 즈그 애비 탁해서 인물도 요리 꼴짜로 생겨묵었시니 키우는 재미도 없단 말이여. 요것언 이래저래 애물단지고 두통거리여."
오월이는 딸아이에게 눈 흘기며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아서, 아서. 아그덜도 말문 떨어짐서 눈치가 환해지고 알아들을 말다 알아듣는디. 글고, 그 인물이 어쩐다고 그리 말허고 그러냐. 아그덜언 커남서 열 번 변헌다는 말도 못 들었냐."
보름이는 진정으로 나무라는 눈짓을 보내며 고개를 저었다.
"치이, 느그 아덜 그 쪽 빠진 인물에 비허먼 이년 낯짝언 머시매 새끼라고 히도 못나 빠진 모과뎅이제 머시다냐. 느그 아덜언 니럴 탁해서 그리 깎아논 밤톨맨치로 잘생긴 것이제. 근디 저어....."
오월이는 금방 넘어오는 말을 문득 되삼키고는,
"아이고, 이놈으 정신 잠 보소. 이예기에 넋 배다가 밥때 다 지내가겄다. 쬐깨 기둘려라 이. 나얼렁 밥 안치고 올텅게."
서두르는 몸짓으로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무신 밥얼 따로 안 치고그러냐. 식은밥 있으먼 한술 뜨고 없으먼 말고 그러제."
보름이는 거북하고 옹색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오월이는 보름이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오월이는 부엌 문턱을 넘어서며 그 말을 하지 않고 참은 것이 잘했다 싶었다. 서로 사돈을 맺자는 말이 곧 튀어나오려고 했었다. 그러나 보름이가 어찌 생각할지 모른다 싶어 어렵사리 참아냈던 것이다. 자신은 보름이 오빠와 인연을 맺지 못했으니 딸이나마 보름이 아들과 짝지어 줘 한을 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욕심일 뿐이었다. 인연이란 저절로 맺히고 얽히는 것이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월이가 해 내 온 밥은 쌀이라고는 구경할 수 없는 보리 잡곡밥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에 3월을 넘기면서 그런 밥이나마 내놓는 것에 보름이는 폐스러워 마음이 쓰였다.
"니 나 땀세 너댓 끄니 죽거리 다 없앴는갑다."
"아이고, 궁상떨지 말고 얼렁 맛나게 묵기나 혀라. 나 죽 묵고 안 산다."
오월이가 숟가락을 들어 보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오월이의 말은 그저 듣기 좋은 거짓말이었다. 보름이는 더 말이 없이 밥을 떴다. 밥을 본 삼봉이가 염치없이 덤벼들고 있었던 것이다.
"참, 니 올 적에 기차 탔디냐?"
"뜸금없이 기차넌?"
아들에게 밥을 떠먹이던 보름이가 의아하게 오월이를 쳐다보았다.
"이, 호남선인가 머신가가 다돼서 목포서 한성꺼지 왔다 갔다 헝게 살기 편해졌다고 요새 야단덜잉게."
"고것이 그리 빨르게 놓였능가..... 아무리 편허고 빨르먼 멀혀. 우리 겉은 것덜헌티야 그림에 떡이제."
"그려, 철길이 깔림서 개명 시상이 되네, 일본 덕에 편케 살게 되았네 해쌌는디 결국 애쓰고 고상고상 헌 것이야 가난허고 불쌍헌 조선 사람덜 아니겄냐."
"긍게 말이여. 죽은 사람덜도 많다는 소문이든디 얼매나 죽었을랑고?"
"고것얼 누가 알 것이여, 죽인 왜놈덜이나 알 일이제."
"그렇겄제. 조선 사람덜만 땅 뺏기고 골 빠지고, 징헌 눔에 시상이여."
보름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밥맛 떨어지는디 그 이얘기 그만허자. 나가 실없는 주딩이 깠다."
오월이가 떫은 웃음을 짓고는 밥을 한입 가득 퍼넣었다.
호남선은 착공된 지 3년 10개월 만에 개통되었다. 총독부에서는 그 빠른 작업속도를 대일본제국의 또 다른 능력으로 과시하는 동시에 막대한 돈을 들여 철도를 놓는 것은 순전히 조선사람들에게 살기 좋고 편한 개명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라고 일본의 은혜를 선전해댔다. 신문에 기사를 써대는 것은 물론이었고, 각급 학교마다 학생들에게 주입시켰고, 관리들은 관리들대로 일반인들을 상대로 선전원 노릇을 했다. 그 일방적인 선전 앞에서 총독부가 왜 그렇게 줄기차게 철도공사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인지 그 저의를 꿰뚫어 보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우선 기차라는 그 해괴하게 생긴 물건을 신기한 구경거리 삼기에 바빴고, 말에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빠른 그 속도에 현혹되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볼 때는 분명 개명 세상은 오고 있는 것이었고, 걸어서 열흘이 넘게 가야 할 길을 하루에 가버리니 일본의 은혜가 아니라고 할 수가 없기도 했다.
"니 군산 가먼 묵고 살아지겄냐?"
사립 밖으로 따라 나오며 오월이가 근심스럽게 물었다.
"가봐야 알제."
보름이는 고개를 저으며 스산한 웃음을 지었다. 오월이는 아직도 예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보름이의 그 쓸쓸한 얼굴이 가을 찬바람 속에 핀 들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려, 쥐도 군산 쥐넌 배가 터지게 불르고 지름기도 자르르 흘른다고 허드라. 농새 못 지묵게 된 사람덜이 다급허니 찾어가는 디가 군산이고, 그그서덜 어찌어찌 묵고 살아지는 갑드라. 니넌 밤질 더듬는 것이 아니고 손샌얼 찾아가는 것잉게 어찌 되덜 안컸냐. 니 가서 자리 집히먼 나도 좀 불러도라. 우리 시엄니도 오래 살것 겉지넌 않은디, 시엄니시상 떠불먼 여그서 멀 바래고 혼자 살겄냐."
오월이의 말은 갑작스러웠다. 그러나 그 어조며 얼굴이 그냥 지나치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려, 그런 존 일자리가 생기먼 좋겄다. 나 얼렁 갈랑게 더 나오덜 말어."
보름이는 업고 있는 아이를 추슬렀다.
"이, 해 떨어지기 전에 집얼 찾아들어 가야겄제. 어렁 가그라, 얼렁."
오월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보름이는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저 인물에 양반 피를 타고났으면 저것 팔자가 두고두고 춘삼월 호시절이었을 것인디. 새끼넌 딸리고 저것 팔자도 인자 첩첩산중 아니라고."
멀어져 가는 보름이를 바라보며 오월이는 눈시울이 젖어 들고 있었다. 보름이는 손판석의 집을 찾느라고 애를 먹었다. 너무나 몰라보게 변해버린 군산이 낮설어서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손판석네 집은 움막동네였다. 그런데 손판석은 그동안 십장 자리에서 일하게 되면서 집을 구해 동네를 옮겨 앉았던 것이다. 길을 묻고 또 물어 보름이가 손판석네를 찾아든 것은 어둑어둑해진 다음이었다.
"아이고메 요것이 누구다냐! 꽃순이 아니라고, 꽃순이. 무신 바람이 불어 무주골서 여그까지 왔능고."
부안댁은 보름이를 끌어안으며 반가워했다. 부안댁이 부르는 꽃순이라는 이름은 보름이가 꽃처럼 예쁘다고 하여 동네 여자들이 어렸을 때부터 불렀던 별명이었다.
"그려, 그 산골서 어찌 살겄어. 오기는 잘 왔구먼. 자석 키움서 살어야 헝게 돈벌이를 허기넌 히야겄제. 어디, 일자리럴 찾아보도록 허드라고."
보름이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손판석은 분을 참아내는 얼굴로 말했다.
"하먼, 자석얼 잘 키와야제. 어디 존 자리럴 후딱 잠 구허씨요 이."
부안댁은 마음을 놓으며 남편에게 다짐했다. 남편이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괜히 눈치가 보이며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그래야제. 구해 보먼 어디 쓸 만헌 자리가 있겄제. 다 한집안 식군디."
손판석이가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그가 잘도 자네 자네도 곤헐 것인디 아무 걱정 말고 푹 자소."
부안댁이 잠든 삼봉이를 안았다. 보름이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살갑게 대해 주는 손샌 내외가 너무 고마웠다. 찾아오긴 하면서도 얼마나 마음이 쓰였는지 몰랐다. 그리고 앞날이 두렵고도 걱정스러웠다. 친정을 떠나 무주 산골로 들어갈 때보다도 마음은 한결 더 움츠러들고 찬바람이 일었다. 아까 어둠살이 내리는 속에서 얼핏얼핏 보았던 낯선 도회지가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저어...... 근디 말이오, 미선소넌 안 되겄제라?"
어둠 속에서 천장만 올려다보고 누웠던 부안댁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놈의 미선소넌 말도 꺼내덜 마소. 보나 마나 손탈 인물에다가, 저네 살밖에 안 묵은 아그넌 어쩌고 미선소 나댕기겄능가."
퉁명스럽게 대꾸한 손판석은 끄으응 된소리를 물며 돌아누웠다. 부안댁은 더 이을 말이 없었다. 미선소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어서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하나 싶어 말을 꺼냈던 것이다. 남편은 수국이가 미선소에서 당한 일을 잊었을 리가없었다. 미선소가 아니라면 또 어떤 밥벌이가 있을까...... 아이까지 딸려 있으니 더 마땅한 일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편한테 다시 말을 걸어볼 수도 없었다. 남편이 된소리를 내며 돌아누워 버린 것은 말하기 싫으니 귀찮게 굴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 때 말을 걸어보았자 버럭 소리를 지르기가 십상이었다. 남편도 보름이 일을 궁리하느라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남편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부안댁은 소리 나지 않게 돌아누웠다. 손판석은 어젯밤에 이어 하루 내내 생각해 보았지만 보름이에게 마땅한 일자리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부두 근방에서 여자가 돈벌이를 할 만한 일거리가 흔하지 않은 데다가 보름이한테는 어린아이까지 딸려 있어서 더 문제였다. 십장으로 미선소 일자리를 구하기는 너무 쉬었다. 그러나 그 일자리는 아예 외면해 버렸다. 수국이가 당한 일도 일이었지만, 미선소에서 여자들의 몸을 샅샅이 더듬어대는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던 것이다. 자신이 다리가 아파 있을 때 아내도 그 꼴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언제든지 열이 뻗치어 올랐다. 그때 몰랐기에 망정이었고,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런 인간 말종들이 도사리고 있는 소굴로 보름이를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미선소를 접고 나면 막상 여자가 돈벌이할 자리는 찾기가 어렵게 되어버렸다. 부두에도 드나드는 여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돈벌이하는 일자리를 얻은 것이 아니라 십장들의 묵인 속에 거렁뱅이 노릇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낙미쓸이 라고도 하고 참새떼라고도 부르는 여자들과 창고쓸이라고 하는 여자들은 차마보기가 딱할 지경이었다. 낙마쓸이는 말 그대로 땅에 떨어진 쌀알들을 쓸어모으는 것이었다. 정미된 쌀가마니를 창고에서 배로 옮겨 싣게 되면서 쌀알들이 몇 개씩이라도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하루에 몇십 가마니가 아니고 수천 가마니씩 실어내다 보면 그 양도 수월찮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 쌀알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숨 가쁘게 뛰고 돌아가는 수많은 인부들의 발에 짓밟히고, 그런 다음에는 밤에 쥐들을 포식시키게 되었다. 어느 여자가 처음에 그 쌀알들을 쓸어가는 대신 부두 청소를 해주겠다고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루 동안 그 많은 쌀가마니들을 실어내면 부두는 청소를 하지 않을수 없게 지저분해지게 마련이었고, 떨어진 쌀알들을 방치해 쥐새끼들을 불러들여 부두를 더 더럽게 만드느니 낙미쓸이들을 두면 청소부를 따로 두고 비용을 없앨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창고쓸이를 하는 여자들도 마찬가지 이유로 쌀창고를 드나들 수 있었다. 그 여자들은 나락이든 쌀이든 떨어지기가 무섭게 쓸어 담기 때문에 창고바닥은 언제나 깨끗했다. 급하니까 흙이든 검불이든 가릴 새가 없이 쌀알과 함께 쓸어 담는 그 천한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끼리 구역도 정해져 있었다. 손판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아내가 맡아준다 하더라도 보름이에게 차마 그 짓을 시킬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찌, 쓸만한 일자리가 있습디여?"
부안댁은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다 못해 잠자리에 들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허, 일자리럴 찾았음사 말얼 안 내놓겄능가. 초라니 방정떨지 말고 진득허니 기둘리소. 어찌 되기야 허겄제."
손판석의 퉁명스러운 대꾸에는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부안댁은 말을 더 걸지 않기로 했다. 남편의 건짜증은 그만큼 애를 쓰고 있다는 표시였던 것이다. 손판석은 다음날도 인부들을 단속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일거리 찾기에 마음을 팔고 있었다. 삼출이를 보나 감골댁을 보나 보름이가 살아갈 방도는 의당 자신이 마련해 줘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아도 마음에 드는 일거리는 보이지 않았다. ‘잡것, 눈 딱 감고 창고쓸이로 들앉혀서 한밑천 잡게 해부러?’ 손판석은 문득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건 그럴듯한 계략이었고 마음 동하는 유혹이었다. 단둘이만 짜는 것이니까 한밑천 톡톡허니 잡게 해서 감쪽같이 해치울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맡고 있는 창고에 보름이를 창고쓸이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만큼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보름이가 매일 한 됫박 정도의 쌀을 몸에 지니고 나가게 하는 것도 자신의 뜻에 달려 있었다. 네댓 달만 그렇게 하면 단출한 장사밑천은 마련할 수 있을 터였다. 창고쓸이 여자들이 마음만 돌려먹으면 창고 하나에서 쌀 한 됫박 정도씩을 빼내 가기란 너무 손쉬운 일이었다. 창고 하나에 사오백 가마니씩 쌓이고 허물어지고 하는 판에서 한 가마니에 한 주먹, 아니 한 담배 통씩만 빼내도 한 됫박이 넘을 것이었다. 그런 손버릇을 한다고 해서 어떤 십장들은 미선소와 마찬가지로 불시에 몸을 더듬기도 했다. 어느 십장은 여자의 몸을 더듬어 내리다보니 속곳 사타구니 사이에 달린 주머니에 담겼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여자가 옷을 훌렁훌렁 벗어댔다는 것이다. 여자는 얼굴보다 몸이 더 고와서 십장은 그만 마음이 동하고 말았다. 길이 그리트이고 보니 여자는 마음 놓고 주머니에 쌀을 채우려고 들었다. 과부인 그 여자는 꿩 먹고 알 먹고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십장은 그 여자에게 휘말리다가는 끝내는 자기 밥줄이 떨어질 것을 무서워해 그 여자를 몰아내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아니고도 창고쓸이 여자들의 얼굴은 심심하게 바뀌었다. 그러나 다른 십장이나 인부들도 그 곡절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물으나마나 손버릇을 나쁘게 한 것이 뻔했던것이다. 어쩌다가 십장의 음흉한 손길을 뿌리쳐 쫓겨나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여자들마저 십장들 입에서는 손버릇 나쁜 년들이 되고 말았다.
"아재, 무신 걱정거리 있으시오?"
손판석이 창고문을 단속하는데 서무룡이가 건들거리고 다가서며 물었다.
"이, 자네여? 걱정은 무신 걱정."
눈치 하나는 빠르다고 생각하며 손판석은 짐짓 시치미를 뗐다.
"에이, 어지께보톰 아재 눈치가 요상시러운디라? 무신 근심 있제라?"
서무룡이는 그 툭 불거지고 불량기도는 눈으로 손판석을 빤히 쳐다보았다.
"요놈에 다리가 살살 아파서 그렁마."
손판석은 눙치고 들며 얼굴을 찡그렸다.
"체에, 눈치껏 살살 허씨요, 살살."
손판석은 어물어물 서무룡을 따돌렸다. 서무룡을 믿지 않는 한 아무리 사소한 것도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았다. 손판석은 집으로 돌아오며 그 일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 방법만이 가장안전하고 그리고 빠르게 보름이의 앞길을 열어주는 겄이었다. 마음을 작정하고 나자 손판석은 자신이 십장 노릇을 하고 있는 것에 또 다른 보람을 느꼈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을 재운 다음 손판석은 그 이야기를 꺼냈다.
"......긍게로 그 일얼 도적질이라고 생각헐 것이 없다 그것이여. 왜놈덜언 자네 친정 아부지럴 죽인 심이고, 자네 서방에 시아부지꺼정 죽였제. 글고 땅도 다 뺏어 자네럴 요 모양으로 맨들었네. 긍게 그일언 왜놈들헌티 원수 갚음허는 것이다. 그 말이여. 나 말 알아묵겄능가!"
손판석의 말은 단호하고 힘찼다.
"야아......"
"그냥 야아가 아니고 야물게 허겄어?"
"야아, 야물딱지게 허겄구만이라우. "
보름이의 목소리에도 힘이 짱짱했다.
10. 국민군단의 깃발
꼬꼭꼬오옥 꼬옥.....
컬컬한 듯하면서도 맑은 소리가 탄력 좋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장닭이 어디선가 맘껏 목총을 뽑아대고 있었다.
"지기럴, 저눔에 달구새끼....."
방영근은 잠에 취한 소리를 하며 돌아누웠다. 아침마다 장닭들이 어기차게 목청을 뽑아대는 소리를 들으며 씨부렁거리게 되는 소리였다. 장닭의 울음소리에서는 어김없이 고향 냄새가 물큰 풍겨왔다. 그리고 고향 집의 모습도 순간적으로 스쳐 갔다. 어떻게 된 것인지 장닭의 울음소리는 고향의 것과 너무나 똑같았다. 한 마리가 목청을 뽑기 시작하면 다른 놈들도 질세라 줄줄이 목청을 뽑아대는 것마저 똑같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하늘도 흙도 바람도 그리고 나무들이며 풀들도 고향의 것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신새벽마다 듣게 되는 장닭의 울음소리만은 어찌 그리도 똑같은지 이상하고도 묘한 일이었다. 10년 세월 동안 들어온 그 소리에는 이제 둔감해질 만도 했다. 그런데 장닭의 울음소리는 아침마다 잠을 깨우는 것과 동시에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고향 그리움이 식을 줄을 몰라서 장닭 울음소리가 마냥 새롭게 들리는 것인지, 장닭 울음소리가 고향 것과 똑같아서 아침마다 고향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방영근은 한층 요란해지고 있는 장닭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끈적끈적 달라붙는 잠을 뜯어냈다. 새벽잠은 끈끈하고 찰지기가 언제나 뻘밭이거나 찰흙 반죽 같았다. 어서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원 다음의 것이 몇 날 며칠이고 허리가 내려앉도록 실컷 자보는 것이었다. 방영근은 맘 놓고 소리를 내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팔다리를 아무리 내뻗으며 기지개를 켜도 몸이 찌뿌드드한 것은 다 풀리지 않았다. 나날의 고된 노동에 비해 잠이 모자라는 탓이었다. 방영근은 언제나처럼 몸뚱이를 이쪽저쪽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이고 뒹굴게 되면 잠도 떼쳐지게 되고 찌뿌드드한 기운도 풀리게 되었다. 방영근은 마음대로 몸뚱이를 굴리며 독방생활을 하는 자유스러움을 즐기고 있었다. 그전의 바라크 생활에 비하면 독방생활은 집 한 채를 지닌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코를 골아대고 자든,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기지개를 켜든, 몸뚱이를 굴리는 것만이 아니라 머리를 박고 거꾸로 서든 누구 눈치볼 것도 없고 누가 말질을 하지도 않았다. 형편이 이 정도 풀린 것도 파인애플농장으로 옮긴 덕이었다. 아니 그건 잘못된 말이었다. 조선 노동자들이 다른 나라 노동자들보다 부지런하면서도 일솜씨가 뛰어난 때문이었다. 조선 노동자들은 독방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파인애플농장으로 옮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파인애플 농장주들은 어쩔 수 없이 바라크식으로 길게 지은 건물에다가 칸막이를 해서 독방들을 만들었다. 방영근은 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왔다. 흐끄무레한 새벽 어둠 속에서 산뜻하고 싱그러운 시원함이 느껴졌다. 비가 한바탕 쏟아진 다음에 오는 느낌이었다. 방영근은 그때서야 간밤에 폭풍우가 요란을 떨었던 것을 생각해 냈다. 집 주위로는 샌달우드 나무 잎들이 비에 젖어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빗물이 여기저기 고여 있기도 했다. 간밤의 폭풍우도 꽤나 극성을 떨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별로 느낌이 없었다. 처음과는 달리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에는 둔감해지고 말았다. 하와이의 폭풍우는 밤에는 세상을 뒤엎을 것처럼 요란하고 극성스럽다가도 날이 해면서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기가 일쑤였다. 처음 얼마동안은 누구나 잠을 설치게 마련이었다.
"저놈에 이파리덜 추우자먼 또 한 일이시....."
방영근은 마땅찮은 생각을 하며 물구덩이를 피해 뒷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이 깜짝이야!"
갑작스러운 여자 목소리에 방영근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어찌 요리 일찍허니....."
방영근은 앞쪽에 선 여자가 말녀인 것을 알아보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아저씨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어젯밤에 무서워 한잠도 못 잤어요."
댕기머리인 처녀는 부끄러운듯한 몸짓을 하면서도 야릇한 눈웃음을 지었다.
"첨에넌 다 그러요."
방영근은 퉁명스레 말하며 빠른 걸음으로 처녀 옆을 지나쳤다.
"오늘도 일찍 일 나가나요?"
처녀가 얼른 말을 걸었다. 그 목소리는 야릇한 눈웃음만큼 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방영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흥, 귀가 먹었나."
처녀는 제풀에 토라져 방영근의 뒤꼭지에 째지게 눈을 흘겨대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 바람에 검은 머리채와 함께 빨간 댕기가 그네를 뛰었다. 약이 오른 처녀의 목소리는 방영근의 귀에 환히 들렸다.
"지랄, 물으나마나 헌 소리 멀라고 허고그려. 늦게 일 나가먼 지가 밥 믹여줄 것이여? 무신 놈에 처녀란 것이 비우짱이 저리도 존고....."
그래서 사진결혼을 하겠다고 그 멀고 먼바다를 건너왔을 거라고 생각하며 방영근은 뒷간으로 들어갔다. 또 오월이의 생그레 웃는 모습이 밟혀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말녀라는 처녀가 가까이 있게 되면서부터 방영근은 거의 밤마다 오월이를 꿈에서 만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꿈은 생시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험하고 흉하게만 꾸어졌다. 오월이를 자주 생각하게 된 것은 사진결혼 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가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오월이의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방영근은 고개를 젓고는 했다. 오월이는 이미 오래전에 남의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그간에 아이들을 낳았어도 네댓은 낳았을 거라고, 다 지나가 버린 일이니 부질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스스로를 일깨우고는 했다. 방영근은 오월이가 진작 남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집안끼리 서로 혼인을 언약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무도 모르게 뽕밭이나 보리밭 신세를 진 관계도 아니었다. 그저 남들 눈 피해가며 조심조심 눈길을 맞추고 마음을 나누었던 것이다. 그런 여자에게 칠팔 년이 지나도록 편지 한 장 띄우지 않았으니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갔을 것은 보나 마나 빤한 일이었다. 그때 오월이의 나이 열여덟이었으니 오월이가 마다해도 집안에서 시집을 안 보냈을 리가 없었다. 오월이는 고사하고 집에도 소식 한번 전하지 못하고 보내버린 칠팔 년의 세월은 지긋지긋하게 긴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이없이 허망하기도 했다. 중노동에 시달리는 하루하루는 그렇게도 지겹고 지루했는데 어떻게 해서 칠팔 년의 세월이 지나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세월언 다 그런 것이여. 허허 참 기막힐 노릇이네. 그러니 한평생 일장춘몽이라 했지."
사람들은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허망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집에 아무런 소식을 전하지 못한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런데 그들이 소식을 보내지 못한 이유는 거의가 비슷비슷했다. 그들은 우선 머지않아 돌아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매일매일 채찍질이 난무하는 중노동에 휘말려 들었다. 채찍질을 당하지 않고 하루를 넘기기에 정신이 없었고, 잠자리에 쓰러지면 고향 생각이고 뭐고 할 짬도 없이 소나기 잠에 빠져들고는 했다. 그러면서 보낸 세월이 2년이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서 달라진 건 한 가지뿐이었다. 누구나 마음대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다를 건너온 뱃삯을 갚았을 뿐 바다를 건너갈 뱃삯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머지않아 돌아가게 된다는 생각을 새롭게 마음에 심으며 중노동과 싸웠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세월이 너무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얼핏얼핏 느꼈다. 그때마다 소식을 전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글을 쓸 줄을 몰랐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더러 있었지만 그들도 쓰는 것은 서툴기만 했다. 글을 막힘없이 잘 쓰는 사람을 찾자면 일삼아 교회까지 가야 했다. 교회를 찾아가는 것도 망설여지는 데다가 그 신세도 그냥 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신세를 지게 되면 그다음부터 교회에 나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짐스러움을 당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편지를 부친다는 일이 전혀 몸에 익지 않은 생소한 일이었다.
"에이,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뭐. 그려그려, 우리가 어디 애기간디. 맞어, 곧 가면 되니까."
그들에게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은 더 없이 좋은 약이었다. 그들은 그 말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고 위안받았다. 다시 2년이 흘렀지만 뱃삯은 모아지지 않았다. 뱃삯이 모아지려면 더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인환 사건이 터졌다. 왜놈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왜놈들이 조선을 빼앗으려는 일을 거든 미국 사람을 쏘아죽인 그 사건은 그들을 흥분시켰다. 그들은 미국땅에서 그동안 당한 온갖 고통과 서러움이 다 풀리는 것 같은 통쾌함을 맛보았다. 애국자 장인환을 살리자! 재판비용을 대기 위한 대대적인 모금 운동이 벌어졌다. 그들은 주저하지도 않고 아까워하지도 않고 돈을 냈다. 나라를 구하려고 장한 일을 한 사람을 살려내야 한다는 뜻이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렇게 모아진 돈이 자그마치 7천 달러가 넘었다. 장인환은 사형을 면하고 25년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그 대신 그들은 또 몇 년인가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25년이나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장인환을 생각하며 농기구를 잡은 손에 새 힘을 모았다. 그리고 농장들마다 조선 노동자들이 부지런하고 일 잘한다고 해서 서로 끌어가려고 하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다시 2년 가까이 일을 해서 목돈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라를 완전히 빼앗겼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들은 낙담하고 절망했다. 너나없이 술들을 부쩍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노름도 심해지게 되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자! 국민회가 다시 나서서 소리 높이 외쳤다. 농장마다 군사훈련이 실시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모금운동이 일어났다. 나라를 빼앗긴 실감은 금방 나타났다. 일본영사관에서 인구조사를 나서며 조선사람들의 주인 행세를 하려고 들었다. 그리고 하와이의 인심이 조선사람들을 일본사람이나 중국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필리핀 시람들보다도 더 천대하게 되었다. 그런 사태의 돌변 속에서 그들은 주저할 것 없이 군사훈련을 받으러 나섰고, 모금운동에 속주머니의 돈들을 털어냈다. 고향으로 돌아갈 바닷길은 다시 멀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새로운 고향길이 열려있었다. 모두 군사훈련을 열성으로 받아 만주로 건너가서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왜놈들을 무찌른다는 것이었다. 국민회에서 세운 그 계획에 그들은 흥분하고 긴장했다. 총을 멘 군인이 되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왜놈들을 무찔러대며 고향으로 간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꿈만 같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그들은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낮에는 농장일을 하고 밤에는 힘드는 줄도 모르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목총을 들고 하는 군사훈련이 몸에 익어가고, 속주머니에 돈이 조금씩 불어나는가 싶더니 또 2년 동안에 모아진 돈은 그전에 비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국민회에 돈 낼 일이 자주 생긴 탓이었다. 빼앗긴 나라를 꼭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자극하고, 돈을 아까운 줄 모르고 내게 충동하는 여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바로 사진결혼을 하려고 태평양을 건너오는 신부감들이었다. 각기 다른 지방에서 오는 처녀들은 그동안 일본사람들에게 당한 일들을 총총한 기억력으로 이야기했던 것이다. 아니, 아무리 말수가 적거나 말재주가 없는 처녀라 하더라도 자기네가 보고 겪은 일들을 낱낱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국의 소식에 굶주린 그들에게 에워싸여 이야기를 엮어내지 않고는 견딜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처녀들의 입을 통해서 의병들이 일본군들에게 얼마나 참혹하게 죽어갔는지 알게 되었고,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 천지가 된 다음에 학교 선생들까지 칼을 차고 다닐 정도로 조선사람들이 짓눌리며 사는 것을 알았고, 토지조사사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농토를 빼앗기고 거지 신세가 되고 있는지도 알았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들은 분풀이하듯 국민회에 기부금이고 성금을 냈다.
"나 먼첨 와 앉었는 화상이 누구라고. 잘 잤능가?"
남용석이 뒷간으로 들어서며 인사했다.
"자네 그 왕신단지 어쩔 참이여?"
방영근은 불쑥 대질렀다.
"왕신단지넌 무신 왕신단지? 말녀 말이시, 말녀. 말녀럴 나보고 어쩌라고?"
"아, 그 가시네럴 밑깔개럴 삼든지 딴 디로 내보내든지 히얄 것 아니여. 언제꺼정 탱탱 놀림서 아까운 밥만 축낼라고 헝가."
"이 사람아, 어찌서 나보고 그려? 맘이 동허먼 자네나 밑깔개 삼소."
"머시여? 저 가시네럴 딜고 오자고 헌 것이 누군디."
"어어, 사람 잡네, 자네가 먼첨 불쌍허다고 혔제 나가 언제 그렸어."
"어허 이 사람, 참말로 사람 잡네. 먼첨 따라오라고 말헌 것이 누구여. "
"이 사람, 인자 봉게 재판 걸어야 헐 사람이시."
"재판 걸어보나 마나 나가 이기제. 자네가 나보담 술 잘 못 마시는 것이야 시상이 다 안께. 그날 자네가 술이 너무 취해 자네가 헌 말얼 나보고 혔다고 허는 것이여. 재판 걸티먼 걸어."
남용석은 징그럽도록 능청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반칸막이 너머로 방영근을 빤히 쳐다보았다.
"요런 능구렝이. 어쨌그나 나넌 그리 개명허고 똑똑헌 여자 싫은 게 자네가 구어묵든 삶아묵든 알아서 혀."
방영근은 바지를 치켜 올리며 일어섰다.
"허참 그 사람, 2백 딸라 애끼고 지절로 굴러들어온 신부감얼 마다네 그랴. 평양 감사도 지 싫으먼야 그만잉게 벨 수 없는 일이제. 나가 백 딸라에 어디다 팔아묵어도 속씨레 허지넌 말드라고 이."
남용석은 방영근의 뒤에다 대고 능글능글하게 말 엮음을 해대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2백 달러는 사진결혼을 하기 위해 신부감이 하와이에 도착하기까지 드는 비용이었다. 방영근은 눈부시게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집은 그쪽이 아니라는 데도 아침마다 찬란하게 뻗쳐오르는 햇살을 보며 집 생각을 하고는 했다. 하와이는 햇살도 고향의 것과 달랐다. 하와이의 아침 햇살은 언제나 하와이의 꽃들처럼 화사하면서도 금빛 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현란하게 빛났다. 간밤에 비가 온 아침이면 햇살은 더욱 찬란하고 황홀했다. 대낮의 햇살이 지긋지긋한 반면에 아침 햇살은 그지없이 곱고 눈부셨다. 간밤에 폭풍우가 지나가서 와이키키 해안을 감싸고 불어오는 바람도 한결 시원하고 싱그러웠다. 그 바람결에 향기 짙은 하와이 꽃들의 향내가 실려 오고 있었다. 방영근은 자신의 나이가 어느덧 서른이 꽉 찬 것을 되짚고 있었다. 살았다고 할 것이 없이 흘러간 10년이었다. 사진결혼을 해서 바다를 건너오는 처녀들에게 고국의 이런저런 소식들을 들으며 다시 또 흘려보낸 2년 세월이 그나마 실속있었던 것은 파인애플농장에서 일하게 된 때문이었다. 파인애플은 하와이 여러 섬들에 새롭게 퍼지기 시작한 농사였다. 농장주들은 사탕수수보다 수익성이 좋은 파인애플 재배에 열을 올리게 되면서 일 잘하는 노동자들을 경쟁적으로 구하고 나섰다. 조선 노동자들이 그 대상이었고, 고용조건도 달라지게 되었다. 그 새로 생긴 고용조건이 청부 농작법이었다. 그건 쿠바의 사탕수수농장에서 쓰고 있는 방법을 도입한 것으로, 소출량에 따라 임금을 조정하여 지불하는 계약제였다. 농장주는 일정한 면적을 노동자들에게 맡겨 농작물을 자작시키고 그 소출량에 따라서 임금을 계산하는 일종의 소작제였다. 농장주들로서는 그전의 강압적인 방법에 비하면 수입이 줄어드는 달가운 방법이 아니었지만 세상이 달라졌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노동자들은 모두가 그 방법을 환영했다. 일을 하는 만큼 수확이 느는 것이 농사였고, 수확이 느는 만큼 임금이 많아지니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농사를 자작하게 되니까 루나라는 인종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조선 노동자들은 그 청부 농작법에 맞추어 열다섯이고 스물씩 서로 가까운 사람들끼리 조를 짜서 사탕수수농장을 떠나 파인애플농장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루나들의 감시와 간섭도 없고, 판자 칸막이일망정 독방생활을 하게 된 그들은 비로소 사람처럼 살아보는 맛을 즐기게 되었다. 일할 신명이 저절로 솟았다. 이미 조선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부지런히 일하고, 더 알뜰하게 절약하고, 더 많이 배우자는 뜻이 뭉쳐져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다음부터 퍼져나간 소리 없는 구호였다. 방영근네 작업조 20명도 그런 마음으로 파인애플 농사에 달라붙게 되었다. 감독인 루나들이 없어진 것은 노동자들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농장주들의 입장에서는 루나들에게 지출되던 일체의 경비가 절약되었고, 루나들의 횡포로 발생했던 크고 작은 충돌과 말썽들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집단농장 시절에 노동자들이 일으키고는 했던 충돌과 말썽들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집단농장 시절에 노동자들이 일으키고는 했던 집단시위 같은 것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많은 소출을 하려고 자기네들끼리 힘을 합쳐 일에 열성을 바쳤던 것이다. 그 청부 농작법은 자연스럽게 사탕수수농장으로도 퍼져나갔다. 사탕수수농장의 노동자들이 파인애플농장에서 시행하는 농작법을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파인애플에 비해 사탕수수는 수익성이 낮아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들의 수입이 파인애플농장 노동자들의 수입과 같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조선 노동자들의 수입은 다른 나라 노동자들의 수입을 앞지르고 있었다. 하와이말로 할라 카히키라고 부르는 파인애플은 그 열매의 별명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파인애플 열매를 사람들은 <황금의 열매>라거나 <돈 덩어리>라고 불렀다. 통조림을 만드는 파인애플은 그 맛이 너무 좋아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고 했다. 호놀룰루시 와하아와에 있는 제임스 돌(Dole)의 통조림공장은 어마어마하게 컸고, 그는 하와이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영어를 전혀 모르는 노동자들도 여기저기 농장에 내걸려 있는 빨간 글씨의 Dole이란 간판만은 금방 알아보았다. 파인애플농장에서 수입이 좋아지게 되자 사진결혼이 전보다 훨씬 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 자꾸 나이들은 먹어가고, 결혼비용은 비축되고, 남들의 결혼생활이 부럽기도 하고..... 그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거기에다가 국민회에서 나간 교회에서는 사진결혼을 적극 권하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은 젊은 사람들이 피하기 어려운 생활의 방탕과 돈의 낭비를 막자는 것만이 아니었다. 모두 결혼을 해서 노동력을 확대시킴과 동시에 조선 동포 사회를 안정되게 형성하자는 것이었다. 그 최종 목적은 독립군 기지의 구축이었다. 국민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만주와 연해주에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생활여건이 변하면서 노동자들도 차츰 결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파인애플농장으로 옮기고서도 식사는 그전처럼 당번제로 해나갔다. 그런데 결혼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가면서 그 문제가 곤란하게 되어갔다. 여자들의 반찬 솜씨에 남자들의 솜씨는 아예 비교가 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남의 아내들을 식모처럼 부려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난처함을 피하려고 결혼한 사람들은 따로 숙식을 하게 되었다. 집단생활에서 차츰 개인 생활로 바뀌어가는 것이었다. 그건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몰랐다. 그들의 단란한 가정생활만이 결혼을 충동질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농가 생활이 그렇듯 여자들도 머릿수건을 두르고 농장일에 나서는 것이었다. 두 사람 벌이가 한 사람 벌이의 두 배일 뿐이면서도 생활을 꾸려가는 데 있어서는 세 배도 되고 네 배도 되는 묘술을 부렸던 것이다.
"자네 맘언 어쩐가?"
달빛 속에 담배 연기를 내뿜은 남용석이 울적한 듯한 소리로 물었다.
"무신 맘이 어쩌?"
방영근은 슬프도록 밝은 푸르른 달빛을 멍하니 바라본 채 되물었다.
"아, 장개들 맘이 어쩌냐 그 말이제. 자네넌 맘이 동허는 갑제?"
"아니여, 그냥 물어보는 것이구만. 나 눈치 볼 것 없어. 자네 맘이 동허먼 장개드는 것이 좋제."
"참 사람, 어찌 그리 무정허니 말허고 그려. 동무 따라 강남 간다는 말도 몰라서 말 인심이 그리 야박헌가?"
"글먼, 나가 장개 들먼 자네도 장개 들겄다 그런 말이여 시방?"
"아니제, 나가 장개 들먼 자네도 장개 들겄냐 그런 말도 되제."
"아짜, 자네 말재주 늘었네그려. 나넌 죽으나 사나 집 찾어 갈라네."
"장개 든다고 집에 못 가간디?"
"넋 나간 소리 말어. 늙다리덜이 어째서 빚내 감서 허천나게 장개 드는디? 심든 일 해묵기 에로운 게 일꾼 하나 딜여서 여그 영영 주저앉자는 심뽀제."
"그런 시커먼 심뽀 지닌 사람이야 얼매나 되간디. 집 찾어가 봤자 왜놈덜 밑에서 여그보담 살기가 에롭당게 우선 여그서 자것이나 낳고 보자허는 것이제."
"그것언 혼자 맘이여. 한 다리 마누래헌티 잽히고 또 한 다리 저석 새끼덜헌티 잽히먼 무신 수로 집얼 찾어가. 꼼지락 달삭 못허고 하와이 귀신 되는 것이제. 나넌 죽어도 그리 못혀."
"그 똥고집 춘향이 절개시. 염병허고, 달언 징허게 밝고 맘언 싱숭생숭허고 앞길언 막막허고 히서 자네 맘 더본 것잉게 나가 장개 들지 몰은다고 걱정허지 말소."
남용석이 담배꽁초를 멀리 튕기며 피식 웃었다.
"물르겄네, 그간에 기부금이고 머시고 돈 낼 일에넌 눈 딱 감고 한 푼도 안 내고 돈 꿍쳐 갖고 집 찾어간 사람들이 잘헌 것인지 잘못헌 것인지."
방영근은 한숨을 푹 쉬며 담배를 뽑아 물었다.
"에이, 고런 느자구 없고 싹수 머리 없는 인종덜 이얘기넌 꺼내지도 말어. 발등에 떨어진 불 몰른 칙끼 해감서 즈그덜 잇속만 챙긴 인종덜이 조선 땅에 가서 또 무신 짓거리덜 허고 살겄어. 보나마자 즈그 잇속 따라 왜놈덜헌티 붙어 묵겄제."
"그려, 그럴 것이여. 꼭 돈 내야 헐 일에 낮작 딱 돌리고 몰른 칙기허는 것도 다 타고나야 허는 재주여. 그려도 그런 못된 인종덜보담 안 그러는 사람덜이 훨썩 더 많은 게 이 시상이 그작저작 살맛도 생기는 것 아니여."
"공자님 말씸이제."
그동안 그런 식으로 돈을 챙겨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를 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남용석은 그 뒤로 사진결혼에 대해서는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방영근은 그가 사진결혼에 마음이 솔깃해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 것으로 그의 마음을 가로막으려고 했다. 창녀를 찾아가 돈을 없애느니 결혼을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창녀를 찾아가면 돈만 없애는 것이 아니었다. 재수없이 성병이 걸려 고생하면서 치료비로 목돈을 없애는 수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방영근은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하와이에 주저앉게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아니, 자네 밥 당번임스로 여그 서서 멀혀?"
뒷간에서 나온 남용석이 허리띠를 조이고 다가서며 큰소리로 외쳤다.
"해 구경허네."
"무신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여. 날이 날마동 사람 잡는 저놈에 징헌 해럴 무신 구경이여. 실답잖은 소리 말고 얼렁 가서 밥혀."
남용석이 방영근의 등을 밀었다.
"밥이야 말녀가 있는디 무신 걱정이여."
"잉? 자네 각시 삼기로 해부렀어?"
남용석은 펄쩍 뛰며 놀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라도 부려 묵어야 밥값이라도 빼제. 공밥 얻어 묵기 염치 없응게 지가 걷어붙이고 나스기로 허고."
"허, 알고 봉게 자네 독허시 이. 근디 저 여자 서방언 어째 찾으로도 안 댕기능고? 살기넌 글른 년이다 허고 아조 작파해분 것잉가?"
"아매 그럴란지도 몰르제. 여자가 저리 도망 나와 살기럴 작파해뿐 남자덜이 한둘이 아닝게. 열흘이 다 돼가는디....."
"저것 골칫덩어리시."
남용석이 떫은 입맛을 다셨다.
"어찌 되겄제. 가세, 밥 다 됐을 것인디."
방영근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어찌 될 거라고 한 것은 그저 막연하게 한 소리가 아니었다. 며칠 안으로 말녀와 남용석이를 부부로 맺어주게 할 작정이었다. 말녀는 첫날부터 남용석의 말을 듣고 따라나선 것이니 더 말할 것이 없었고, 남용석이도 내놓고 내색을 못할 뿐이지 은근히 말녀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말녀는 어지간한 남자가 있으면 몸을 맡겨야 할 처지였고, 남용석은 작년부터 사진결혼에 마음을 써 왔던 것이다. 뜸만 들면 되는 밥이었고, 꼭지 간댕거리는 홍시였다. 다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법이니까 옆 사람들이 풍악을 울려주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날 밤은 유독 술맛이 달았다. 한쪽 밭에서 파인애플을 따내고 임금을 받은 데다가 머지않아 국민군단이라고 이름 붙인 군인부대가 정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속상해 마시는 쓴 술맛이 많았지 기분 좋아 술맛이 달기는 드물었다. 다른 때보다 한결 더 취해 노래를 부르며 야자수 길을 비틀거리며 걸었다. 아아리라앙 아아리라앙 고오개로오 너어머가안다아 나아러얼 버어리거오 가시는니 으므은 시입리도 모옷가서 바알벼엉 난다아아 그들은 진정으로 그리움이 사무쳐 몸부림이 일어나는 것처럼 아리랑을 목놓아 구성지고 서럽게 불러댔다. 술이 취하면 누구나 아리랑을 불렀다. 불러도 목놓아 불렀다. 목놓아 부르다 보니 가락은 제멋에 겨워 더 늘어지며 슬퍼지고 넌출져 휘감기며 처연해지고, 술에 젖은 가슴은 그 가락을 못 이겨 허물어지며 더 서러워지고 녹아내리며 한스러워져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가락에는 끝내 물기가 묻어나고는 했다. 그들은 통곡을 대신해 그 가락을 목놓아 부르고, 분을 삭이려고 목놓아 부르고, 외로움을 달래려고 목놓아 부르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이고,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살려줘요, 잘못했어요."
숨넘어가는 여자의 울부짖음이 비명과 함께 울리고 있었다.
"엉? 저것이 무신 소리여! 조선 여자 소리 아니라고!"
방영근과 남용석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노래를 뚝 그치며 그 자리에 멈춰섰다.
"아야야야, 살려줘요, 잘못했어요."
한 여자가 머리채를 잡혀 휘둘리고 있었고, 한 남자가 악을 써대며 주먹을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자의 머리끝에 빨간 댕기가 선명했다. 그리고 남자의 화난 외침은 일본말이었다.
"왜놈이 어째 조선 여자럴 패고 저려."
남용석이 눈을 사납게 부릅떴다.
"안 되겄네, 가보세."
방영근이 침을 내뱉었다. 날이 늦어서인가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여자가 주먹질을 당하고 있는 조그만 가게 앞에도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머시여, 어째 이려, 이거!"
남용석이 버럭 소리 지르며 주먹질하는 남자 앞으로 나섰다.
"어째 조선 여자럴 패고 이려!"
방영근이 더 크게 소리치며 나섰다.
"어머 아저씨들, 나 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들이 조선사람인 것을 알아본 여자가 황급히 소리쳤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앳돼 보였다. 주먹질하던 남자가 뭐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어느새 거머잡고 있었던 여자의 머리채를 놓은 상태였다. 남용석과 방영근은 그가 떠드는 일본말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영어가 그렇듯 일본말도 그들은 용지거리 몇 마디를 아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찌서 이리 맞고 있소?"
남용석이 자신의 옆으로 바짝 붙어서서 떨고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예에..... 배가고파서, 너무 배가 고파서 저 떡을 하나 훔치다가....."
처녀는 주루룩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울음을 추슬러 올렸다. 처녀가 떡이라고 한 것은 빵이었다.
"허어 참 사진결혼 헐라고 바다 건너온 시악씬 갑는디, 서방언 어쩌고 배가 고프다고 도적질이다요."
남용석이 어처구니 없어 하며 헛웃음을 쳤다. 방영근은 처녀를 물끄러미 지켜보며 수국이가 저 나이 또래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꼬박 이틀을 굶어서..... 아무리 참을라고 참을 수가 없어서....."
처녀는 얼굴을 감싸며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가게주인인 일본 남자는 연상 뭐라고 떠들어댔다.
"하우 머취?"
영어라도 잘하는 것처럼 남용석은 기세 당당하게 가게주인에게 물었다. 그런 그의 왼손은 빵을 가리키고 있었고, 오른손은 돈을 꺼내느라고 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었다. 빵값을 물어주겠다는 뜻이었다.
"노오, 노오."
가게주인은 성난 얼굴로 고개를 내두르고 손을 저었다. 그리고 일본말로 뭐라고 해대며 처녀를 잡아채려고 했다.
"이놈이 경찰서로 보내겄다고 허는 말인갑는디?"
방영근의 얼굴에 화가 돋아올랐다.
"그렇제? 요런 씨부랄 눔이!"
남용석이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동전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는 손이 속주머니로 옮겨졌다.
"헤이, 완 딸라!"
남용석은 1달라 짜리 종이돈을 가게주인 앞에 흔들어 보이며 사정하는 웃음을 지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방영근은 두 가지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술기운인지 어쩐지 영어가 술술 잘도 나오는 데다, 너무 큰돈을 내밀고 흥정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식 웃고 말았다. 아는 영어래야 그 정도로 동이 난 판일 것이고, 경찰서로 끌려가는 것을 막자면 한 개에 이삼 센트밖에 안 하고 더 비싸 보았자 5센트일 빵값을 1달러라도 내는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오, 노오!"
일본 남자는 아까보다 더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전화통 손잡이를 잡았다. 경찰서로 연락을 하려는 것이었다.
"빠가야로!"
남용석이 돈을 내던지며 가게 안으로 뛰어들더니,
"야 이씨부랄 눔아, 대갈통이 반으로 짝 갈라져야 정다시겄냐!"
일본 남자의 떡살을 틀어잡고 곧 박치기를 해버릴 기세였다.
"어이, 참소 참어. 그놈 박아불먼 우리 신세 끝장이여."
방영근은 허둥지둥 남용석을 붙들었다.
"냅둬, 요런 놈언 쓴 맛얼 봬야 혀."
남용석이 방영근을 뿌리치려 했다.
"요놈 겁 묵은 낯짝얼 보소. 자네가 물러스먼 나가 알아서 허겄네."
과연 일본 남자는 얼굴색이 변하도록 겁에 질려 있었다. 조선사람들의 박치기는 그 위력이 무섭기로 널리 소문나 있었다. 10여 년의 세월에 걸쳐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지면서 조선사람들은 한 방에 코피를 터뜨리게 할 수 있는 박치기의 위력을 잘 보여주었던 것이다.
"좆겉은 놈, 수박 쪼개디끼 대갈통얼 두 짝으로 팍 쪼개부러야 허는디."
남용석은 큰소리를 쳐대며 못 이기는 척 가게를 떼밀려 나갔다.
"헤이, 쏘리, 쏘리, 아이 엠 소리."
방영근은 웃는 얼굴로 돈을 일본 남자의 손에 쥐여주며 어깨를 다둑거렸다.
"예스, 예스, 땡큐."
일본 남자는 언제 고개를 내두르며 전화를 걸려고 했느냐 싶게 나긋나긋해져 허리까지 굽실거렸다. 그도 다른 일본사람들처럼 박치기는 질색인 모양이었다. 세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처녀가 가끔 떨리는 소리로 울음을 추스르고는 했다. 어느 가게 앞에 이르러 남용석이 불쑥 말했다.
"자네, 묵을 것 잠 사소, 이 시악씨 뱃가죽 등에 붙게 생겼응게."
"이, 그러제. 돌른 것 묵어보도 못 허고 당허기만 했을 것잉게."
방영근은 이제 자신이 돈을 쓸 차례인 것을 알고 가게로 들어갔다. 그들은 가까운 해변가로 가서 자리 잡았다. 밤바다의 파도소리가 속삭임처럼 연하고 부드럽게 찰싹거리고 있었다. 반쪽도 안 된 달이 곧 바다로 빠질 것처럼 기울어 있었다.
"배고픈디 얼렁 묵으씨요."
방영근은 처녀에게 봉지를 내밀었다.
"고, 고마워요..... 고마울 것 없소, 같은 동포라서 그런 것잉게. 얹힌디 꼭꼭 씹어묵기나 허시오."
남용석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담배에 붙을 붙이고는,
"대체 무신 일로 이틀썩이나 굶고 그런 꼴얼 당허요?"
처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어..... 징그럽고 무서워 못 살겠어서 도망을 나와서....."
"누가, 서방이?"
남용석은 이미 그 사연을 짐작하며 이렇게 이야기의 맥을 짚고 들었다. 방영근이도 벌써 처녀가 어떤 처지에 빠진 것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일은 다른 처녀들이 진작 당하고 말썽이 일어나고 해서 조선사람들치고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진얼 안 봤소?"
방영근은 남용석의 허벅지를 질벅였다. 빤한 이야기를 두고 남용석의 짓궂음이 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은 젊고 그리 안 생겼었는데....."
빵을 너무 많이 몰아넣어 처녀의 목소리는 메어 있었다.
"사진언 젊고 잘 생겼었는디, 와서 만나봉게 늙고 문딩이 상호로 생겨 묵었드라 그것이오?"
"예에, 꼭 그랬어요. 여필종분디, 그런다고 여자가 도망얼 나와서야 쓰겄소!"
남용석이 느닷없이 목청을 높였다.
"아니에요, 혼례식도 안 올리고 초야도 안 지냈으니까 여필종부가 아니에요."
처녀는 변명하듯 재빨리 말했다.
"머시여? 초야도 안 지냈으먼 글먼 빨간 댕기 그대로 안직 숫처녀란..... 아이쿠메 엄니!"
남용석은 술기운에 취해 나오는 대로 지껄이다 말고 숨 막히는 소리를 토했다. 처녀는 듣기 민망한 말이라 방영근이 팔꿉으로 옆구리를 내질렀던 것이다. 처녀는 아무 대꾸를 못한 채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이 사람아, 말로 히도 다 알아들을 것인디 사람 잡자는 것이여 머여."
남용석은 옆구리를 매만지며 볼멘소리를 했다.
"헐 소리가 따로 있제, 자네넌 술 묵으먼 탈이여."
방영근은 퉁을 놓고는,
"보시오 시악씨, 원님 앞이서 무신 문초 당허는 것도 아니겄고, 답답허고 벌떡 징나게 한마디 묻고 한마디 답허고 허덜 말고 집이 어디고 어찌히서 배럴 타고 그담에 어찌 된 것인지 첨보톰 끝꺼정 쫘악 이얘기럴 혀부시오."
그는 남용석이가 헛소리하는 것을 막으려고 처녀에게 이렇게 일렀다.
"이 그려, 고것이 좋겄구마. 근디 이얘기럴 허기넌 허는디 설렁설렁 해불지 말고 할무니덜이 장화홍련전이고 심청전 이얘기허디끼 조단조단허니 맛나고 찰지게 허란 말이여."
남용석은 어느덧 편안하게 말을 낮추어 하고 있었다. 처녀는 먹다 만 빵을 손에 든 채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찬찬히 빵 묵어감스로 이얘기 허시오. 여그서넌 멀 묵음서 이얘기허는 것이 하나또 숭이 아닝게."
방영근이 말해 주었다.
"예에..... 저는 집이 황해도 해주고, 아버지는 곡물상에 건어물상을 하시고, 저는 일남오녀 중에 넷째딸로 이름이 김말녑니다. 소학교는 해주에서 예배당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는 외삼촌이 사는 인천에서 다녔습니다. 중학교를 나와서 일본사람이 하는 병원에 취직해서 간호원 노릇을 하는데....."
"쬐깨 기둘려, 빼묵고 지내가는 것이 있구마. 이름 담에 나이럴 대야제, 나이."
남용석이 팔을 내저었다.
"어허, 자알 나가는디 어째 토막치고 이려. 그것이야 이따가 말허먼 되제."
방영근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아, 이얘기럴 허자먼 순서가 착착 맞어야 허능것 아니드라고. 그 중헌 걸 빼묵고 지내가먼 맘이 껄쩍지근히서 담 이얘기가 귀에 안 들어옹게 그러제."
"그려, 되았네. 시악씨, 나이 대고 나서 이얘기 잇대시오."
방영근은 남용석의 옆구리를 질벅이며 처녀에게 말했다.
"저어..... 나이는 열아홉이에요. 으음..... 간호원 노릇을 하는데 밤에는 너무 심심했어요. 언니 동생들은 없고, 예배당도 밤마다 여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구경 다닌 것이 활동사진이에요. 활동사진은 볼수록 재미있었어요. 심심하지도 않고, 활동사진마다 새 이야기가 나오니까 사람을 유식하게 해주는 거예요. 미국이란 신식나라를 구경한 것도 활동사진에서였어요. 미국사람들이 신식으로 사는 것이 너무 좋아 보이고 부럽고, 저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영어를 배우려고 미국 목사님이 영어를 가르쳐주는 예배당으로 옮겼어요. 그런데 몇 달이 지나서 제 꿈이 이루어졌어요. 목사님이 사진결혼을 해보라고 권하신 거예요. 여러 사람들의 사진 중에서 하나를 골라 집으로 가지고 갔지요. 아버지는 처음에 안된다고 아셨지만 제가 어머니를 졸라 서류에 아버지 도장을 받았어요. 아버지는 딸자식이 많으니까 하나 없는 셈 친다고 하셨어요. 배를 타고 고생고생 해서 하와이에 내렸는데 저를 마중 나온 사람은 사진의 그 사람이 아니라 엉뚱한 노인네였어요. 늙고 얼굴이 울퉁불퉁 흉 천지였어도 사진의 그 사람하고 닮은 데가 있어서 그 사람 아버지구나 했어요.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까 그 늙은이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거예요. 나이가 서른아홉이라는데, 우리 아버지가 마흔하나예요. 조선에서는 나이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얼굴은 사진하고 딴판이고, 저는 그때서야 속은 걸 알았어요. 그런데..... 혼례식도 뭣도 올리지 않고 그날 밤부터 잠자리를 함께하자는 거예요. 너무 징그럽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런 흉하게 생긴 늙은이하고 사느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는 게 낫다 싶었어요. 그래서 그 길로 도망 나온 거예요. 아무리 돌아다녀 봐도 집으로 돌아갈 길은 막막하고, 죽어버릴 수도 없고, 배는 고프고....."
처녀는 훌쩍거리며 울었다.
"그놈에 활동사진 좋아허다가....."
방영근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입안에 가눈 말은 <신세 망쳤구먼>이었다.
"고것이 시악씨럴 역부러 속히잔 것이 아니고 다 알 만헌 쪼여. 좌우간에 인자 어쩔 심판이여?"
남용석이 꺼억 트림을 하며 물었다.
"몰라요....."
처녀는 두 남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체에, 활동사진으로 멋쟁이 양코배기덜만 봐 온 시악씨 눈에넌 우리도 나이 묵은 늙다리에 문딩이 상호일 것인디멀 그리 쳐다보고그려?"
남용석의 어조가 비꼬이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 사람보다 훨씬 좋고 얼굴도 흉하지 않은데요 뭘. 그 사람도 이랬으면 도망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처녀는 얼떨결에 말을 해놓고 부끄러운지 고개를 떨구었다. 남용석이 방영근의 무릎을 툭 치며 씨익 웃었고, 방영근이도 떨떠름하게 웃었다.
"저것 불상허니 되았제?"
남용석이가 고개를 돌리고 속삭였다.
"불쌍허기야 허제. 저것얼 딜고 가먼 어쩌겄능가?"
"어쩔라고?"
"여그다 띠내뿔고 갈 수도 없는 일이고, 집으로 가자도 지 몸띵이 놀려 돈얼 벌어야헐 것인디,"
"지가 따라나스겄다먼 딜고 가야 사람 도리가 아니겄냐 그 말이시."
"그도 그렇제. 자네가 물어보소."
남용석은 담배에 불을 붙여 서너 모금 빨고 나서 입을 열었다.
"시악씨, 나가 허는 말 잘 들어야 되겄구만. 시악씨가 당헌 일이 어찌 그리 되았는지넌 차차로 알게 될 것이고, 시악씨가 도로 집으로 가자도 손수 돈벌이럴 히얄 것인디, 우리럴 따라서 농장으로 가먼 우리가 그 벌이넌 허게 맨들어줄 것잉마. 그럴 맘이 없으면 우리넌 인자 가야 헝게 여그서 작별얼 혀야 허고. 어쩔 것이여?"
"아니에요, 따라가겠어요, 따라가겠어요."
처녀는 이쪽에서 떼어놓기라도 하는 것처럼 먼저 몸을 일으켰다. 말녀를 농장으로 데리고오자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사진결혼으로 하와이에 건너온 여자들 태반이 남편을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사흘거리 불화가 일어나는 집안이 많고, 1년 남짓 살다가 갈라서는 부부가 더러 있는가하면, 남편을 마땅찮아 하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여필종부라는 어찌할 수 없는 올가미 때문에 마지못해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첫날밤에 도망 나온 신부를 눈앞에서 맞대하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남용석이네 조에서 말녀를 노골적으로 꺼려하는 건 이미 장가를 든 세 남자였다. 그와 반대로 말녀를 반색하며 반긴 건 그들의 아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들은 말녀로 하여금 자신들의 입장이 새삼스럽게 곤궁해지고 난처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아내는 자신들과는 다르게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를 박차고 나온 말녀를 만나게 되면서 평소에 참아왔던 속임수 결혼에 대한 불만과 푸념을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말녀는 마음 의지할 데 없던 참에 세 여자들과 금방 친해졌다. 나이도 비슷비슷한 데다가 고향을 떠나 타국에 와 있는 심사도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말녀는 낮에는 빈둥거리며 놀다가 밤이면 농장일을 끝내고 돌아온 여자들과 모여앉아 입놀림하기에 바빴다. 남용석도 방영근도 농장일을 시작해서 돈벌이를 하라고 밀어대지는 않았다. 너무 야박스럽게 몰아대지 말고 말녀가 마음을 정할 때까지 며칠 쉬게 하자는 것이었다. 말녀는 여자들과 모여앉게 되면서 왜 사진과 실물이 그토록 다른지를 알게 되었다. 세 여자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같이 자기들을 속였다고 분해하고 눈물까지 떨구었다. 말녀도 그 어이없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이야기를 들으며 또다시 자신의 꿈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들이 사진을 부쩍 많이 찍게 된 것은 물론 사진결혼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전부터 나비넥타이에 양복 차림으로 사진을 한 장쯤 박는 것은 그들이 즐기는 최고의 호사였다. 타국생활을 하는 그들이 특별히 쇠는 명절이라고는 없었다. 풍속이 달라져서만이 아니었다. 남의 농장 고용살이를 하는 신세에 추석을 쇨 이유가 없었고, 정월 대보름이 따로 있을 수가 없었다. 해가 바뀌어 새해가 왔지만 그건 고향에서 쇠던 설이 아니었다. 계절의 변화가 없이 봄인듯하면서 여름이고 가을인 듯하면서 여름일 뿐인 하와이의 기온 탓에 고국의 명절은 더 멀어지기만 했다. 추수감사절이니 크리스마스니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백인들의 명절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쇠는 명절 아닌 명절이 꼭 하나 있었다. 자신들의 생일이었다. 그들은 고생에 지친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틀림없이 생일을 쇠었다. 물론 생일을 쇤다고 하여 무슨 큰잔치를 벌이는 것이 아니었다. 잔치를 벌일 돈이 없는 처지들이라 가까운 몇몇 사람들에게 술 한 잔을 사며 오늘이 자신의 귀빠진 날이라는 것을 알리는 정도였다. 그러면 술대접을 받는 사람들은 손바닥에서 불이 나도록 손뼉을 쳐대며 넘치고 늘어지게 생일을 축하해 주고 건강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새 술자리를 벌여 답례를 겸해 다시 한번 생일을 축하했다. 사진관을 찾아가는 것은 그런 다음날쯤이었다. 물론 누구나가 생일 사진을 박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진관을 찾아가는 사람은 그래도 생일을 잘 쇠는 축에 들었다. 그들이 사진관에 들어갈 때는 부스스하게 헝클어진 머리칼에 허름하고 볼품없는 노동복 차림이었다. 그런데 며칠 만에 찾은 사진에는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머리에 앞가리마를 타고, 하이칼라 나비넥타이에 검정 양복을 입은 어엿한 신사로 둔갑해 있었다. 사진사가 요술을 부리거나 신통술을 부린 것이 아니었다. 사진관에서 머릿기름을 발라 빗질을 해주었고, 나비넥타이며 양복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어느 나라 노동자들이나 그런 멋들어진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고향에 보내고 싶어 했으므로 사진관에서는 재빨리 그런 것들을 준비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에는 그들의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만 달라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얼굴 생김도 실물보다 훨씬 젊고 미남으로 나와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사진사가 요술 아닌 기술을 부린 것이었다. 사진사가 기다랗고 뽀족하게 깎은 연필심으로 필름을 기막히게 수정해서 억센 사탕수수잎이나 날카로운 파인애플 가시에 긁히고 찔려서 생긴 크고 작은 흉터는 말할 것도 없고 어려서부터 잡힌 이마의 주름살 같은 것까지 말끔하게 없애버렸던 것이다. 사진결혼을 하려는 사람이 그 당장 사진을 찍어 조선으로 보내도 반년 후에나 하와이에 도착하는 신부감이 기름기라고는 없이 부스스한 머리칼에 허름한 노동복을 걸친 후줄근한 모습으로 마중을 나간 흉터 많은 신랑감의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오 년 전이나 칠팔 년 전의 생일기념으로 찍은 사진을 보냈을 경우는 어떠할 것인가. 세월이 흘러 늙은 데다가 긁히고 찔려 흉터는 더 많이 생겼으니 신부감이 자기 시아버지 될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이 든 신랑감들일수록 나중에 신부감들이 낙담할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장가들 욕심만 앞세워 될 수 있는 대로 젊었들 때 찍은 사진을 보내려고 했다. 뒤늦게 그런 곡절을 다 알게 된 말녀는 자신이 덤벙대다가 빠진 허방이 너무 깊은 것을 느끼며 밤새도록 소리죽여가며 울었다. 그러나 아무런 해결책이 없었다. 기왕 엎질러진 물인데 그 남자를 다시 찾아갈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진절머리나게 다시 보기가 싫었다. 그 흉측하게 생긴 얼굴도 얼굴이었지만 아버지뻘이나 되는 나이 많은 사람하고 산다는 것은 너무 징그럽고 끔찍스러웠다. 어쩌면 자신을 구해준 두 남자 때문에 그 생각은 더 심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 두 남자 중에 하나라면 그저 정을 붙이고 살 만도 하다는 생각이 스쳐 스스로 놀라기도 하며 밤을 밝혔다. 말녀는 그날 아침부터 밥하는 일을 거들고 나섰다. 여자가 남자들이 하는 밥을 무작정 얻어먹기가 면목이 없었고, 자기도 여자 몫의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도 싶었던 것이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나서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다시 하루 일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어둠기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햇발에서는 벌써 더운 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커다란 불덩어리로 이글거리며 수평선 저 멀리서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다덜 보이소. 오늘 밤에 서쪽 밭 파인애플 따내는 거 알지러. 오늘 낮일이야 밤일 채비허는, 다 아는 일 아닝교. 오늘도 그리그리 잘덜 허입시더."
나이가 제일 많아 조장인지 좌장인지를 떠맡고 있는 구상배가 언제나처럼 투박하고 어설프게
말했다. 그는 스스로가 무식하고 말주변이 없다고 해서 앞으로 나서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나이대접을 해서 모두가 그를 앞자리에 세웠다. 그는 언제나 일을 앞장서서 하고 마음이 무던해 조장 노릇을 착실히 해나갔다. 나이가 서른아홉인 그는 재작년에 사진결혼을 했는데 아직 아이가 없어서 투덜거리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이제 스물이었는데 언제나 얼굴에 불만이 차 있었다. 열여덟에 하와이 땅을 밟은 그 여자는 마산이 고향이었다. 그 처녀도 사진과 너무 다른 늙어빠진 신랑감을 보고는 질겁을 해서 도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소동을 부렸던 것이다.
"이놈으 가스나, 팍쌔래 뭉카뿌까!"
늙은 신랑감 구상배는 처녀의 목을 조이며 정말 때려 뭉개버릴 것처럼 눈에 불을 켰다는 것이었다. 처녀는 정말 죽일지도 모른다 싶어 주저 물러앉았고, 그나마 같은 경상도 사람이라 정을 붙여보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구상배야말로 굼벵이 궁굴 재주하더라고 장가들 욕심에 6년 전에 찍은 사진을 떡하니 보낸 사람이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들은 일을 하다가도 걸핏하면 <팍 쌔래 뭉카뿌까!>를 소리쳐 외치고는 했다. 처음 얼마 동안 구상배는 <어허, 그 소리가 그리도 좋나. 얼라덜맹쿠로>하며 멋쩍은 듯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고 하다가 끝내는 자기 힘으로 그 외침을 막을 수 없다고 단념했는지 그저 사람 좋게 웃어넘기고 말았다. 결국 그 투박한 경상도 말은 그의 별명으로 굳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그런 무던함을 좋아하며 화목을 이루어나갔다.
"참말이제 얄 데이. 우에아럴 몬 배노. 저 가스나 밑이 쳇밑 아이가."
몇 달 전부터 구상배가 불현듯 구시렁거리고는 하는 소리였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했다. 그의 끝말 한 마디가 얼핏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이 바로 체질을 할 때 가루가 흘러내리듯 자기 아내의 그것이 실하지 못한 것을 타박하는 것임을 알고 사람들은 배꼽을 잡았다.
"머시라카노, 동네 개가 다 웃을 일 아이가. 내사 마 솥밑인 기라. 늙어빠진 지가 쭉찡이지."
그의 젊은 아내 마산댁의 거침없는 반격이었다. 사람들은 또다시 배꼽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양쪽의 그 우스운 말을 놀림감으로 삼지는 않았다. 아이 얻기를 바라면서 한쪽에서는 밭이 부실하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씨가 부실하다고 하는 그 공방은 뒤에서 웃을 수는 있어도 면전에 대놓고 웃음거리를 삼을 수 없는 자못 심각한 가정사였던 것이다. 그들은 일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방영근은 남용석의 눈치를 살피며 구상배 옆으로 다가갔다.
"성님, 의논헐 말이 있는디요."
"의논? 무신 이바구고?"
"중매 잠 서야 쓰겄소."
"중매라니?....."
"아이고, 용석이가 듣겄소."
방영근은 빠르게 남용석이 쪽을 살피고 나서,
"저그 머시냐, 성님이 나서서 용석이허고 말녀럴 맺어주먼 좋겄소. 용석이도 그렇고 말녀도 그렇고, 서로가 좋아허는 눈치기넌 헌디 즈그가 살겄다고 나스지넌 못허고 있구만이라."
나직나직하게 말했다.
"그기 참말잉강? 그 가스나도 엉치에 뿔 돋친 물건 아이가?"
구상배는 뭐를 잘못 안 게 아니냐는 눈길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가 다 알고 허는 말잉게 성님언 얼렁 중매나 스란 말이오."
"허, 그기 그리 됐나? 서로 맘에 있다카믄 못 나슬 기 머꼬."
"뜸 딜이고 어쩌고 헐 것 없는디요."
"알긋다, 오늘 당장 해치울 끼다. 중매 술이나 톡톡히 내라 그만."
구상배는 시원한 대답 그대로 해가 지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짓고 말았다. 자기는 남용석을 맡아 밀어붙였고, 말녀는 자기 아내에게 맡겨 대답을 받아냈던 것이다. 구상배는 저녁밥을 먹기 직전에 모두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축하를 보냈다.
"용석이 저 사람 참 요령 좋네. 1딸라 쓰고 2백 딸라를 벌었네그려. 우짜믄 좋노. 나넌 우에 그런 재수가 안 걸려드노.“
"그 돈 혼자 다 챙기면 배탈나네. 반만 뚝 잘라서 혼인 잔치를 벌여."
"이, 허다가 그 말 한 분 잘혔구마. 그 돈이먼 소도 잡제."
모두들 정겹게 말꼬리를 잇대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남용석은 그저 벙긋거리기만 했다. 그들이 말하는 2백 달러란 사진결혼을 하기 위해 남자가 부담하는 일체의 비용이었다. 여자가 하와이로 타고 오는 뱃삯은 70달러였다. 그런데 일본을 경유하게 되면서 숙식비 보건비 입출국 수속비 같은 명목으로 나머지 돈이 추가되었다. 일본 경유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을 건너자면 먹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미국 배 퍼시픽 메일이 있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아 이용하기가 어려웠다. 사진결혼을 하려면 남자 쪽에서 먼저 사진과 생업을 적어서 보냈다. 그러면 사진으로 남자를 고른 여자 쪽에서 다시 사진과 호적등본 그리고 부모의 동의서를 보냈다. 그것을 받아본 남자가 신부감이 마음에 들면 비용과 동의서를 보내는 것으로 사진결혼은 성사되었다. 하와이에서 그런 일들을 맡아 도와주는 곳이 국민회와 교회였다. 특히 교회에서는 그들의 조직을 활용해 신부감까지 소개해 주고 있었다.
"자네가 그리 맘 쓸지넌 몰랐는디....."
밤일을 나서는 길에 남용석이 어색스럽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중이 지 머리 못 깎는 법잉게."
방영근이 남용석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씨익 웃었다.
"자네헌티 고맙기도 허고 미안시럽기도 허고....."
"벨소리 다 허네. 다 하늘이 점지헌 것잉게 아덜딸 많이 낳고 잘 살어야 혀."
"글씨..... 나넌 무식허고 여자넌 유식허고..... 껄쩍찌근헝마....."
"지가 유식허먼 얼매나 유식허겄어. 여자야 다 남자가 채잡기에 매였응게 그런 걱정 허덜 말고 꽉 틀어잡소."
방영근은 코웃음까지 치며 손아귀를 쥐어 보였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도 그 대목이 꺼림칙하게 걸렸다. 말녀는 다소곳이 오므린 꽃이 아니라 되바라지게 열린 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더 마음에 안 드는 것은 그녀가 신식물을 너무 먹었다는 점이었다.
"용석이 저 사람은 복도 많아. 장가 비용 쓰라고 제때 파인애플도 따내게 되고."
파인애플밭이 가까워지며 누군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엎어져도 가지밭에만 엎어지는 과부 재수가 붙은 것이제."
누군가의 맞장구에 사람들이 와아 웃었다. 파인애플밭에는 전깃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파인애플을 따내기 좋게 하려고 통조림공장에서 가설한 이동시설이었다. 파인애플은 언제나 밤에만 따도록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통조림을 만들면서 그 신선도와 단맛을 최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파인애플이 가장 싱싱하면서도 맛좋게 익은 시기에 맞추어 따내는 날짜를 정하는 것은 통조림공장에서 나온 감독관들이 하는 일이었다. 경험이 많은 감독관들은 식별능력이 남달라 파인애플을 맛보지 않고 색깔만 보고도 언제 따내야 할지 척척 알아냈다. 파인애플은 조금만 과하게 익어도 씹기에 질기고 맛이 시어졌다. 그런 열매로 통조림을 만들면 질기고 신맛은 더 심해졌다. 그건 상품으로서 치명적인 흠이었다. 그럼 실패를 예방하기 위해서 감독관들이 신경을 곤두세워 수확 날짜를 정하면 노동자들은 어김없이 그날 밤으로 야간작업을 시작했다. 낮에 따게 되면 트럭에 싣고 공장으로 옮기고 하는 동안에 강렬한 태양열에 익어 맛이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파인애플 열매를 따내는 일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가시투성이인 잎들이 우산살을 뒤집어놓은 것처럼 쭉쭉 벌어져 있는 데다가, 그 한가운데 달린 커다란 열매도 억센 가시로 에워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 가시들은 길이만 약간 짧을 뿐이지 탱자나무 가시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이 억세고 날카로웠다. 파인애플을 키울 때부터 따낼 때까지 노동자들은 무시로 그 가시들에 긁히고 찔리고 곪고 덧나고 하면서 손이고 얼굴이 흉터투성이가 되어갔다. 백인들은 파인애플을 <황금의 열매>니 <돈 덩어리>니 하고 불렀지만 노동자들은 <가시 돋친 쇠불알>이라고 불렀다. 그 열매의 크기는 모과나 참외는 댈 것이 아니었고, 정말 오뉴월 한낮에 축 늘어진 황소의 불알만 했던 것이다. 손과 얼굴을 아무리 감싸고 작업을 한다고 해도 해가 뜨기 전까지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될 작업량은 언제나 벅차기 때문에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고 조심하고 할 틈이 없었다. 열매를 따내는 데는 먼저 밑줄기에 칼질을 한 다음 손으로 받아냈다. 그 큰 열매의 무게 탓으로 손바닥이 가시에 찔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평소에는 말할 것도 없었고 수확을 하면서도 파인애플 맛을 볼 수가 없었다. 파인애플은 한 그루에 열매가 하나씩만 달리기 때문에 몰래 따먹으면 금방 표가 났고, 그 껍질이 두껍고 가시까지 촘촘히 박혀서 그런지 어쩐지 무슨 벌레가 먹은 것도 없었다. 노동자들은 칼질을 해나갈수록 더 진하게 번지는 달콤한 향기만을 밤참 대신해서 실컷 들이켰다. 남용석과 말녀는 며칠 뒤에 오는 일요일에 혼례를 올리기로 했다. 말녀는 교회에서 풍금 울리며 신식예복을 입고 혼인식을 하기 원했다. 그러나 도망 나온 처지에 그렇게 남들 눈에 띄도록 판을 벌였다가 혹시 무슨 말썽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모아져 그냥 농장에서 조촐하게 치르기로 한 것이다. 혼례는 더운 한낮을 피해 아침나절에 올리기로 했다. 가지들이 넓게 퍼지고 두꺼운 잎들이 무성해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샌달우드 나무 아래 조선식 혼례상이 차려졌다. 조선의 당산나무와 흡사하게 생긴 샌달우드 나무는 하와이 토착민들이 신성시해서 제를 올리고 굿을 하며 받드는 나무였다. 그러나 상차림은 조선식일 수가 없었다. 조선 과일 대신 하와이 과일이 올랐고, 떡 대신 빵이 올라 있었다. 쌀이야 있었지만 다른 기구들이 없었던 것이다. 초와 촛대도 서양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것과 똑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술잔에 묶여 길게 늘어진 청실홍실이었다. 신랑과 신부도 예복을 갖추어 입을 수가 없었다. 신랑은 평상복을 새로 사 입었고, 신부는 신랑이 준 돈으로 한복을 새로 해 입었다. 호화로운 예복은 입지 않았어도 새 옷으로 단장한 신랑 신부는 평소하고는 딴판으로 잘 나고 고와 보였다.
"보래 보래, 무신 절 인심이 그리 고봉으로 후하노. 저 사람 저렇게 배꼽이 땅에 닿게 절하다가 딸만 열 낳겠다."
"긍게 말이여. 시악씨 귀허다고 남자 우세 혼자서 다 시키네."
둘러선 남자들이 다투어 짓궂은 말들을 한마디씩 걸쳤다. 혼례 기분을 돋우어가는 그 말장난에서 조선 혼례장다운 흥이 살아나고 있었다.
"저런, 저런, 고개를 더 푹푹 숙여야 이쁨 받고 아들 줄줄이 낳지. 각시 허리에 대나무가 들었다냐 어쩐다냐. 고것언 큰절이 아니고 반절이여, 반절. 더 팍팍 숙여. 신부 절하는 걸 보니까 또 딸만 열 낳겠다. 어허, 양쪽을 합치면 딸만 스물이네 스물!"
남자들은 한층 흥이 나서 신부의 흠을 잡고 기를 꺾으려 하고 있었다. 청실홍실을 묶은 술잔이 신랑과 신부에게로 왔다 갔다 하게 되면서 혼례식 기분은 한껏 흥겹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긴 청실홍실이 하나로 얽히고설킨 것처럼 오래오래 다정하고 다복하게 살아가라는 덕담들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혼례식이 끝나고 곧 잔치가 벌어졌다. 그들은 나무 그늘에 푸짐하게 차려진 잔칫상에 둘러앉아 맘 놓고 술들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의 왁자지껄함은 흥겹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입에서는 슬픔에 찬 노래들이 흘러나왔고, 어떤 사람은 꺼이꺼이 울기도 했다. 몸을 가눌 수 없도록 곤죽이 된 신랑은 밤이 늦어서야 신방으로 옮겨졌다. 기다리다 지친 신부가 졸고 있었다. 남용석은 다음날부터 이런저런 놀림감이 되었다. 남들보다 조금만 늦게 일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밥맛이 없어 해도, 걷다가 하품을 해도, 일손이 약간만 떠도, 점심을 먹고 나무 그늘에서 졸아도 늦장가 든 재미에 빠져 그렇다는 놀림거리였다. 그러나 남용석은 벙긋벙긋 느물느물 웃어가며 온갖 짓궂은 놀림들을 잘 받아냈다. 날이면 날마다 바늘 끝처럼 내리꽂히는 따가운 햇살과 숨이 막히도록 후끈거리는 폭염 속에서 고되고 지루한 노동을 하는 그들에게는 흔쾌하게 웃을 일이 드물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놀림거리가 생기기만 하면 스스로 싫증 나고 물릴 때까지 말질을 일삼으며 웃음 자리를 만들었다. 남용석이보다 먼저 결혼한 세 사람도 한동안씩 웃음거리가 되는 곤욕을 달게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남용석이 남자들 사이에서 장가든 벌을 서고 있는 뒤편에서 말녀는 여자들에게 빈축을 사면서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말녀는 혼인을 하고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도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농장에 일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들이 농장일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세 여자의 고까워하는 빈정거림은 자연히 남자들 사이에도 퍼지게 되었다.
"나참, 사람 환장헐 일이시. 저 잡것얼 으째야 쓰까?"
저녁을 먹고 나서 방영근을 찾아온 남용석이 화가 묻은 얼굴로 한숨을 토했다.
"잡것이 누구여?"
방영근은 짐짓 모르는 척했다.
"누구넌 누구겄어, 말녀 그 느자구 없는 것이제. 자네도 발써 귀동냥했을 것인디, 저 잡것이 농장 일언 죽어도 못허겄다고 뻗대니 어째야 쓰겄능가?"
"글씨..... 너무 잡지지 말고 쬐깨 더 있어보소. 맘이 변헐란 지도 몰릉게."
"아니여, 변헐 맘이 아니녀. 그 잘난 것이 머시라는지 아는가? 국민회고 교회 겉은 디서 필 놀림서 돈벌이 허겄다고 주딩이 깐단 말이시. 쬐깨 배우고 개명헌 티럴 그리 내능마, 차암!"
남용석은 기가 찬다는 얼굴로 하늘에다 헛웃음을 토했다.
"그려?....."
방영근이도 금방 코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누르며,
"그런 일자리만 생김사 나쁠 것이 없제."
"그 빌어묵을 농장일에 처백히기넌 배운 것이 아깝기야 안허다고. 허고, 농사일 평상 안해 봤응게 겁도 나덜 안컸어."
"너무 욱대기덜 말고 짠허니 생각험서 더 잠 두고 보세. 당장 일 안 나슨다고 누가 굶어 죽는 것도 아니겄고."
그는 속이 꼬이면서도 남용석의 마음을 헤아려 좋은 쪽으로 이야기를 돌리려고 애썼다.
"짠헌 맘이 들기도 헌디, 우선에 사람덜 앞에 넘세시러서 살겄능가."
남용석의 기색이 약간 밝아지는 것 같았다.
"넘세시럽기넌 머시가 넘세시러. 고것이 넘 못헐 일 시키는 죄도 아니겄고. 사람이야 다 지각각 사는 법잉게 넘덜 눈치 너무 보고 어쩌고 헐 것 없네."
"그래도 될라능가?....."
"걱정 말소. 나가 옆이서 거듬세."
방영근은 웃으며 남용석의 어깨를 두들겼다. 남용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쉽게 풀어지는 남용석을 보며 방영근은 그의 진심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남용석은 겉으로 말하는것과는 다르게 아내 말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 말을 거칠게 하는 것은 남들 대하기가 거북하고 눈치 보이니까 자기가 마땅찮아 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남용석의 속마음이 그렇다 하더라도 방영근은 무언가 께름칙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남용석을 위로한 것과는 다르게 저것이 예삿일이 아니로구나 하는 걱정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 방영근은 말녀의 일 정도는 잊어버리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길도 새로 생긴 일에 일제히 쏠리게 되었다. 그들만이 아니라 하와이에 있는 조선사람들 전체의 관심이 집중된 그 일은 다름 아닌 국민군단의 창설이었다. 국민회에서 독립군 부대를 정식으로 발족시킨다는 소문은 진작부터 나 있었다. 농장마다 밤에 군사훈련을 실시하게 되면서부터 그 이야기는 생겨나게 되었다. 그건 괜한 풍문이 아니라 조선사람이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사람들은 회비며 기부금 같은 것을 꾸준히 내왔고, 국민회에서는 그 준비를 계속 추진시켜 왔던 것이다. 국민군단은 마침내 6월 10일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공식 명칭은 대조선국민군단이었다. 그날 수많은 조선사람들은 호놀룰루 서북쪽에 드높이 솟아 좌우로 억센 줄기들을 거느리고 있는 콜라우 산봉우리 아래 마후마누 파인애플농장으로 모여들었다. 박용만이 이끄는 국민군단의 창설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훈련병들의 병영과 훈련장이 들어설 그 파인애플농장은 국민회의 소유였다. 그동안 조선 노동자들이 푼푼이 모은 돈들을 회비며 기부금으로 내놓아 사들인 것임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우리는 오늘 왜 이 자리에 이렇게 많이 모였습니까. 여러분들께서 너무나 잘 알고 계시다시피 우리는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대조선국민군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왜놈들에게 강탈당한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군인을 양성하는 동시에 왜놈들을 무찌를 전투의 선봉에 나설 부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조선의 독립을 쟁취할 독립군 기지이며 독립군 부대들이 바로 대조선국민군단입니다. 경애하는 동포 여러분! 오늘의 대조선국민군단은 누가 창설한 것이며, 어떻게 창설된 것입니까. 이 사실 또한 여러분들께서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대조선국민군단은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을 포함하여 하와이의 여러 섬들에 살고 계신 6천여 동포 여러분들의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거룩한 마음과 뜻이 모아져 창설된 것입니다. 그리고 동포 여러분들께서 사탕수수농장과 파인애플농장에서 생살을 찔리고 찢기며 중노동으로 번 돈들을 아낌없이 희사하여 오늘의 대조선국민군단은 창설된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희사하신 돈은 그저 돈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피요 살이요 고통이요 눈물인 것을 우리 모두는 다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생살을 찢기며 얼마나 많은 피를 이 하와이 땅에 뿌렸으며, 날마다 불볕 속에서 중노동을 하며 또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고 살을 태웠습니까. 그러하기 십개 성상, 그동안 여러분들께서 참고 견디어온 고통이 그 얼마이며,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산천을 그리며 뿌린 눈물이 또 그 얼마입니까. 그런 귀하고 소중한 돈들을 여러분은 아낌없이 희사하여 영광된 오늘을 맞이할 수 있게끔 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강탈당한 나라를 되찾겠다는 거룩한 일념으로 이런 장한 일을 해내신 여러분들께서는 모두가 장인환 선생이나 안중근 선생의 뒤를 이어가는 애국자들이시며 구국 투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나라를 왜놈들에게 팔아먹은 이완용 일당인 을사오적이나 지금도 왜놈들 앞잡이 노릇을 하며 호의호식하고 있는 친일 역도들에 비하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장한 애국자들이며, 얼마나 당당한 구국 투사들입니까. 만장하신 동포 여러분! 우리는 어찌하여 왜놈들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것입니까. 그건 한마디로 말해서 힘이 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강도 왜놈들한테서 나라를 되찾으려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왜놈들을 무찔러 조선 땅에서 완전히 몰아낼 군인을 길러내고 군대를 갖추는 길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국민군단은 용맹스러운 군인들로 막강한 군대를 만들어 만주로 건너갈 것입니다. 그리고 만주에서 더 많은 부대들과 힘을 합쳐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왜놈들을 무찌르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자원자가 수백 명이었지만 아직 시설이 부족하고 우선 젊은 청년들부터 훈련을 실시해야 하기 때문에 인원을 130명으로 제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이가 조금씩 많아 뽑히지 못한 분들은 조금도 섭섭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차로 다 훈련을 받게 될 것이며, 하와이의 동포 모두는 국민군단의 대원들인 것입니다. 경애하는 동포 여러분! 지금 조선 땅에서는 약간의 의병들이 평안도에서 왜놈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홍범도부대가 만주 땅에서 두만강을 넘나들며 왜놈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또한 만주와 연해주에는 작은 규모의 무관학교가 몇 개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동포들이 구국의 뜻으로 혈전을 모아 군단을 창설한 것은 우리가 최초입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당당한 일입니까. 이런 여러분들의 장한 뜻은 앞날에 길이길이 빛날 것입니다."
박력 있고 격정에 넘치는 박용만의 연설이었다. 발 디딜 틈이 없이 식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상기되고 흥분되고 비장감 어린 얼굴로 그들은 뜨겁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눈시울이 붉어져 어금니의 뿌리가 옆 볼에 드러나도록 입을 꾹 다문 사람들도 많았다. 그칠 줄 모르고 우렁차게 울려대는 박수 소리는 굽이치는 파도가 되어 원시림을 흔들어대면서 콜라우 산줄기로 퍼져갔다. 깎아지른 듯 경사 급한 산줄기의 암벽에 부딪힌 박수 소리는 되울리고 되울리는 반향을 일으키며 멀리멀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오오 우리의 대한 국민군 소년 자제 건장한 대한 건아들 모두 나와 한목소리로 대한국민군 군가 부르자 산 너머 물 건너 백만 적군 한칼로 후려쳐서 승리하고 드높이 외치자 대한국민군 군가 부르자 흑룡강 맑은 물 남북 만주 푸른 물 넓은 벌판에 우리의 말안장을 벗기어라 대한국민군 군가 부르자 부르자 국민군 군가 드높이 외치자 건아의 목소리를 잠든 자 깨어나고 죽은 자 일어나도록 우리 모두 국민군 군가 부르자"
훈련병들이 다같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힘차고 씩씩하게 부른 국민군단 군가였다. 나팔 12개와 드럼 7개가 장단을 맞추어 군가는 더욱 박력 있고 감동적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국민군단의 창설은 국민회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박용만이 주도한 것이었다. 네브래스카 대학에서 군사학을 전공한 박용남은 2년 전에 하와이로 옮겨와 국민회 기관지 <신한국보>의 주필을 맡으면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무장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해 왔다. 국민군단의 창설은 바로 그 무장투쟁론의 첫 단계 실현이었다. 열여덟에서 스물두 살까지로 제한된 국민군단의 신병들은 130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건너와 자라난 젊은이들이었다. 그리고 군단이 갖춘 장비는 사관용 45구경 단총 39정, 장도 10벌, 목제 총 350정, 나팔 12개, 드럼 7개, 미합중국 보병학교 교재 28종 등속이었다. 원래 미국통치령 내부에서는 외국인들의 군사훈련이나 군사 활동은 일절 금지되어있었다. 그러나 하와이 군사령부에서는 국민군단의 창설을 묵인했다. 그건 국민회의 교섭능력만이 아니라 조선인 노동자들이 각 농장에서 발휘하고 있는 노동능력의 영향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해에 미국 국무장관 브라이언이 발표한 이례적인 성명서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어느 점에서도 일본인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따라서 언제나 조선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조선인 교포단체와 교섭하여 결과를 해결지을 것이며 일본인의 간여를 허가하지 않을 것이다.> 국무장관 브라이언이 굳이 이런 성명을 발표한 데는 그럴 만한 하나의 사건이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작년 6월에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지역의 헬미트 과수원에서 자두 따는 노동자들을 모집했다. 그 광고를 보고 조선인 노동자 11명은 후한 임금에 끌려 기차를 탔다. 그런데 농장 가까이 있는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그들은 백인노동자들에게 시비를 당하게 되었다. 냄새나는 난쟁이 노란둥이 놈들은 얼씬거리지 말고 당장 없어지라는 협박이었다. 미국 땅 어디에서나 당하는 인종차별이었다. 그 시비가 커지는 것을 막으려고 농장주인이 그들의 왕복 차비를 물어주었다. 그들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지나 그들에게 양복을 빼입은 두 사람이 찾아왔다. 그들은 로스앤젤레스 일본영사관의 직원이었다.
"이번에 우리 일본 사람들이 헬미트 농장에서 집단적으로 인종차별을 당해 취직을 못한 것을 우리 영사관에서는 중대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영사관에서 법적 조치를 취해 여러분들의 손해 보상을 받아주려고 합니다."
친절이 넘치는 두 남자의 말이었다. 조선 노동자 중에서 영어를 잘해 그들의 대표격인 최순성은 두 남자가 왜 그런 친절을 베푸는지 금방 간파했다. 자신들이 조선사람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일본영사관 직원들은 <우리 일본사람들>이라고 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우린 일본사람이 아니라 조선사람이오. 그리고 왕복 기차요금을 받아 가지고 왔으니까 손해 본 건 아무것도 없소."
최순성은 그들의 의도를 꼬집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영사관 직원들이 돌아가는 것으로 일은 끝나지 않았다. 일본영사관에서는 그 일을 사건화시켜 자기네들 신문에다 크게 보도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건은 미국과 일본의 통상조약 위반이라는 거창한 이유를 붙여 미 국무성에 항의 각서를 띄우게 되었다. 그때서야 샌프란시스코 국민회에서는 사건의 내용을 알게 됨과 동시에 일본영사관이 왜 그런 일을 꾸미고 있는지 그 의도를 금방 파악했다. 국민회에서는 곧바로 그 사건에 뛰어들었다. <로스앤젤레스 일본영사관에서 헬미트 사건을 기화로 미국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고 있으나 그것은 결코 우리가 원하지 않는 협조인 것이며, 일본영사관에서는 미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까지 보호책을 쓰려고 함인데 그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우리는 한일합방이 되기 전에 대한 제국의 국적으로 미국에 온 것이므로 절대로 일본국민이 아닙니다. 또한 일본사람들과는 국가적, 정치적, 민족적인 면에서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영사관이 조선인의 문제를 가지고 미 국무성에 끈질기게 정치적 교섭을 벌이는 것을 인정할 수 없으며, 또한 미국 정부에서 그 사건을 의뢰받아 조사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 바입니다.>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총회장 이대위가 국무장관 브라이언 앞으로 보낸 공문이었다. 뒤따라 미국 땅에서조차 조선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일본의 보호정책을 부정하는 미 국무장관의 성명서가 발표되었던 것이다. 호놀룰루에서 발행되는 일간신문 <스타불레틴>은 국민군단의 창설을 크게 보도했다. 그 내용은 단순한 사실보도가 아니었다. 그 기사는 국민군단이 왜 창설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성과 필연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건 편집국장 릴리 알렌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알렌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국민군단 군가는 동포들 사이에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아이들은 병정놀이를 하며 군가를 소리 높여 불러댔다. 오가는 어른들의 칭찬을 받으며 아이들은 더 신명이 오르고는 했다. 국민군단의 창설은 동포들만 더욱 단단하게 뭉쳐지게 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조선사람들의 힘을 과시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반응은 이곳저곳에서 나타났다. 농장 관리인들이 먼저 관심을 드러내며 태도가 부드러워지는가 하면, 중국음식점에서는 한결 친절을 베풀며 조선사람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고, 네댓 명씩 패거리로 맞서게 되었을 때 일본 노동자들은 전보다 더 조선 노동자들과 시비가 일어나는 것을 피하려고 했다. 드높이 솟은 험준한 콜라우 산봉우리는 어디에서나 잘 보였다. 조선사람들은 누구나 그 산봉우리를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사람이 오르지 못하도록 급경사의 억센 모습과 언제나 푸르스름한 색깔에 감싸여 신령스럽게 느껴지는 그 봉우리 아래 나라를 되찾을 장정들이 밤낮없이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훈련병들을 자랑스러워하며 <산너머 총각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콜라우 산줄기가 거대한 톱니처럼 날카로우면서 깎아지른 암벽으로 험준한 것은 화산의 폭발로 이루어진 탓이었다. 그리고 산줄기 전체가 신비스러운 푸르름으로 감싸여 있는 것은 자주 몰려오는 폭풍우를 막아서며 습기가 많이 찬 때문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그 일대를 템페스트 존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그곳은 폭풍우 지대였다. 안개나 구름이 중턱을 휘감았을 때는 푸르른 색깔의 산봉우리들은 마치 바다에 뜬 섬들처럼 더욱 신비스러웠다. 만년의 정적에 묻힌 그 산줄기 아래서 매일 아침 6시면 젊은이들의 우렁찬 노래가 울려 퍼지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