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벽 그리고 벽
먼 산이며 가까운 들이 싱그럽고도 두툼한 초록빛으로 온통 물들고 있었다. 뻐꾹새 울음이 구슬프게 시작될 때만 해도 나뭇잎들이나 들풀의 초록빛에는 노란색이 연하게 감돌고 내비쳤다. 어린 버들잎에만 연노란색이 보드랍고 아련하게 돋아올라 유록색이라 이름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라는 나무의 어린잎들은 모두 노르스름한 빛을 초록색 속에 품어 또 다른 유록색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다만 버들의 얼린 잎이 치장하고 있는 연초록색이 유난히 곱고 그 자태가 유독 빼어나 <유록색>이라고 두루 부르는 것이었다. 연초록색의 어린 나뭇잎들은 햇병아리의 솜털처럼 보드랍고, 젖내 나는 아기의 발가락들처럼 앙증스럽고, 부끄러움 많은 처녀의 속살처럼 신비스러웠다. 나무들마다 감도가 다른 연초록 잎들이 뻐꾹새의 틉 진 울음을 따라 차츰차츰 무성해지면 산들은 더할 수 없이 오묘한 환상의 옷을 입게 된다. 산마다 울리는 뻐꾹새의 틉 진 울음소리가 구성지다 못해 사무쳐 자지러지면서 보리 이삭이 패고, 나뭇잎들도 차츰 연초록색에서 진초록색으로 모습을 바꾸어갔다. 그즈음부터 한낮의 햇살은 따갑기 시작하고, 나무숲 그늘은 녹음이라 불러야 제격이었다. 산과 들녘에 초록빛이 짙어질수록 그와는 반대로 누른빛이 진해지는 데가 있었다. 보리밭이었다. 보리밭은 하루가 다르게 색깔이 황금빛으로 변해가며 타작을 재촉하고, 여름 양식 장만해서 논농사를 시작해야 할 고비에 찾아드는 명절이 단오였다. 녹음 풍성한 속에 단오가 왔건만 그 어디에서도 명절 기분이라고는 느낄 수가 없었다. 동네마다 높고 실한 나뭇가지에 매는 그네를 찾기가 어려웠고, 장터마다 벌이는 씨름판은 더구나 찾을 수가 없었다. 공허는 험악해진 세상살이를 다시금 절감하면서 햇볕 속을 바삐 걷고 있었다. 추석만큼 중히 여기는 단오 명절이 이렇듯 썰렁하게 그냥 지나가는 것은 전에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추석이 쌀농사의 수확을 고마워하고 자축하는 명절이라면, 단오는 보리농사의 수확을 기뻐하고 여름 농사를 더 잘 짓자고 힘을 모으는 명절이었다. 사람들이 단오 쇠기를 작파해 버린 것은 다 토지조사사업 탓이었다. 땅을 마구잡이로 빼앗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의 목숨까지 마구잡이로 죽여대는 판이니 그 누구든 명절을 쇨 신명이 날 리가 없었다. 공허는 길 왼쪽으로 발길을 옮겨가며 걸었다. 앞길 오른쪽 나무 그늘에서 농사꾼 내외가 점심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남의 밥상을 넘볼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서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승려에게 동냥하는 것을 공덕으로 삼고 있는 세습에 눈치 없이 밥 먹는 사람들 옆으로 다가가면서 마음의 부담을 주는 것은 중이 할 짓이 아니었다.
"시님, 시님! 여그 잠 보시제라."
그들 내외를 지나쳐 네댓 걸음 옮기고 있을 때 남자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공허는 못 들은 척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보나 마나 내외가 짧게 의논했을 것이고, 여분 없는 자기네들 밥을 줄여 점심 공양을 시키자는 것일 터였다. 힘든 농사꾼들에게 그런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시님, 시님! 여그 잠 보시랑께라."
다시 들려오는 소리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공허는 걸음을 멈추었다. 인사라도 하고 떠나야 예의였던 것이다. 공허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시님, 찬언 없어도 여그 진지럴....."
내외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고, 남자가 어려워하며 말끝을 흐렸다.
"나무관세음보살, 소승언 아칙 공양얼 느직이 헌 참이라 안직 시장털 않구만이라. 보살님네나
많이 드시씨요."
공허는 합장을 해 보였다.
"아니구만이라. 꼭 진지만 드시란 것이 아니고 여쭤볼 말씸이 있어서 그러는구만요. 저어 머시냐....."
이번에는 여자가 머릿수건을 풀고 합장하며 말했다. 그 여자는 곧 이쪽으로 걸어올 것 같은 몸짓이었다. 공허는 여자의 말에서 남자와는 다른 재치를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어허, 무신 말씸이간디....."
공허는 빙그레 웃으며 그들에게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보시행을 실행해야 하는 중은 중생의 지극한 보시를 외면하거나 묵살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시님, 여그 그늘로 좌정 허시게라. 즈그가 막 밥술얼 뜨든 참인다, 쌀밥언 아니라도 시님도 한술....."
"야아, 그것만이 아니구만이라우. 즈그덜이 요분참에 가심 터질 원통헌 일얼 당혔는디 그 일얼 어째야 좋을란지 여쭤볼라고....."
남자의 말을 여자가 재빨리 고쳐잡으며 자리를 권했다.
"이거 참, 지내가는 땡초 하나 그냥 몰른 척허실 일이제. 시장허신다 어서덜 진지 잡수시씨요."
공허는 그늘진 풀밭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두외를 바라보았다.
"시님, 시장허신디 여그....."
여자는 삼베보자기 귀에다 씩씩 문지른 숟가락을 쑥 내밀었다.
"아니구만이라. 아까 말씸디린 대로 소승언 아칙공양얼 느직허니 허고 질얼 나슨 참이라 하나또 시장허덜 않구만요. 소승얼 불러 앉힌 그 맘으로 배가 터지게 불른게 소승 걱정 마시고 두 양반이나 얼렁 드시게라."
공허는 손만이 아니라 고개까지 저으며 사양했다. 시장하기야 했지만 아예숟가락을 들지 않기로 작정하고 되돌린 걸음이었던 것이다. 먹물 옷을 걸친 자의 길은 어차피 고행의 길이었고, 모내기나 가을걷이의 새참이 아닌 농사꾼의 여분 없는 점심을 축낸다는 것은 고행자의 도리가 이니었다.
"아니 시님, 씨커먼 보리밥에 찬이 없어서 그러시는 게라?"
민망해하는 남자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드러났다. 작은 소쿠리에 담겨 있는 보리밥에는 쌀 한 톨 섞여 있지 않은 채 그 색깔은 거무칙칙했다. 그리고 반찬이라고는 된장에 풋고추가 전부였다. 그 눈에 익고 입맛 동하는 밥과 반찬에 공허는 오히려 군침 도는 식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공허는 짐짓 식욕을 누르며 호리병으로 눈길을 돌렸다.
"소승언 도럴 통허지넌 못했어도 음식얼 개래감서 묵고 안 묵고 허는 간시시런 입언 안 지녔구만요. 참말로 속이 시장허덜 않고, 밥언 묵은 것이나 진배없응게 저그 곡차가 있으면 그것이나 한잔했으면 좋겄구만요."
공허는 호리병을 손가락질했다.
"야아, 여그 곡차가 있구만이라우."
여자가 호리병을 얼른 집어 들었다. 여자는 절에 발길이 잦은 것인지 어쩐지 술이라고 하지 않고 눈치 빠르게 곡차라고 말을 받았다.
"예에, 그것 한잔이면 소승이야 족허구만요. 근디, 마늘 뽑니라고 바쁜 참인다, 마늘 농새넌 잘 되았는게라?"
공허는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하이고, 농새고 머시고 그놈에 토지조사에 휘둘리다봉게 농새 꼴이 하품 나오게 되야부렀구만요. 밑이 실허지도 못헌 것얼 그저 단오마늘이나 맨들어보자고 이리 뽑고 있구만이라우."
남자는 푹 한숨을 쉬었다. 단오마늘이란 단옷날에 맞추어 수확하는 마늘을 말하는 것이었다. 단옷날 한낮에 마늘을 뽑으면 마늘의 약효가 커진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래서 단오마늘을 약마늘이라고도 불렀다. 쑥도 단옷날 뜯어말리면 다른 날 뜯는 것보다 약효가 크다 하여 단옷날 전후로 약쑥을 뜯는 일손들이 바쁘기도 했다. 사실 단오 임시가 되면 진초록으로 키가 커진 쑥은 향내도 더없이 진해져 있었다.
"시님, 약마늘얼 까서 곡차 안주럴 허먼 어쩌겄는가요?
"여자가 토실한 마늘통 하나를 골라 들며 말했다.
"아 예에, 소승이 먼첨 입 다셔서 괜찮헐랑가요?"
공허는 입맛을 다시며 반색했다.
"하먼이라. 시님이 먼첨 잡수시먼 우리 집에 복 내릴 일이제라."
여자는 환하게 웃음 지으며 서둘러 마늘을 까기 시작했다.
"토지조사로 시상이 난리판굿인디 무신 송해넌 안 보셨소?"
공허는 남자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이고, 이 난리에 손해 안 볼라는 것이야 장마비에 몸 안 적실라고 허는 것 아니겄는 게라우. 지도 배 터지게 있는 전답 반이 넘게 날라가게 생겼응게 앞날이 막막허구만요."
남자는 떫은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아이고메, 속에서 불 나는디 그 얘기 꺼내덜 마씨요. 시님, 들어봤자 속상허실 것잉게 어여
곡차나 드시제라."
여자가 공허에게 호리병을 건넸다. 잔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공허는 호리병의 긴 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 팡팡하게 퍼진 아랫도리를 받치며 병을 조심스럽게 기울였다. 아랫도리를 받쳐 올리며 병을 조심스럽게 기울였다. 아랫도리를 받쳐 올리며 병을 기울임에 따라 고개를 자연히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호리병을 바로 입에 대고 술을 마실 때면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조심스러웠다. 호리병은 목이 길고 잘쏙해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데다, 무게로도 술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쉽게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조심성없이 함부로 병을 기울였다가는 술 벼락을 맞기가 십상이었다. 병을 급하게 기울이게 되면 둥글넓적하고 팡팡하게 퍼진 아랫도리에 담긴 술이 좁고 긴 목으로 사정없이 쏟아지게 마련이었다. 공허는 호리병의 팡파짐한 아랫도리의 감촉을 손바닥에 느끼며 또 묘한 생각을하고 있었다. 감촉 보드랍고 탄력 팽팽한 여자의 둥글고 투실투실한 엉덩이를 만지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호리병은 그 생김이 영락없이 벌거벗고 앉아 있는 여자의 몸매였다. 둥글넓적하면서 팡팡하게 퍼진 아랫도리는 실팍하고 튼실한 여자의 엉덩이였고, 가늘고 길면서 곧게 뻗은 목은 낭창거리고 잘쏙한 여자의 허리였다. 어떤 말쟁이는 그것이 허리가 아니라 여자의 목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호리병의 주둥이를 여자의 입이라고도 했다. 그리되면 호리병을 바로 입에 대고 술을 마시는 것은 발가벗은 여자의 알몸을 매만지면서 입술을 빨아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공허는 천천히 술을 넘기며 그런 음탕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은 천상 갈 데 없는 땡추라고 자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건 자신이 저지른 죄가 아니었다. 애초에 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하필이면 그런 음한 마음을 품고 술병을 그리 야릇하고 묘한 모양새로 빚어낸 도공이란 사람들의 잘못이었고, 또 그런 야한 생김의 술병에 술을 담아 마시면서 아릿아릿 취해오는 술기운과 함께 여자의 알몸을 매맨지는 기분을 은밀하게 즐겨온 사람들의 잘못이었다. 그런데 그 잘못도 어느 쪽에서 먼저 저지른 것인지 딱히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장난기 승한 도공이 장난삼아 그런 모양을 빚어냈는데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자 다른 도공들도 따라서 그 모양새로 빚어내게 된 것인지, 아니면 어느 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런 모양의 술병을 원해서 도공이 만들어주게 되면서 널리 퍼지게 된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이 있었다. 평민들이 쓰는 호리병보다 양반들이 쓰는 호리병이 훨씬 더 여자의 알몸을 닮아 있었다. 그 차이는 아랫도리 생김에서 금방 표가 났다. 평민들의 호리병은 아랫도리가 거의 동그란 모양이면서 아랫받침이 작은 데 비해 양반들의 호리병은 아랫도리가 거의 반원에 가깝도록 펑퍼짐하면서 아랫받침이 넓적했다. 평민들 것에 비해 태깔도 유백색으로 고운 그 아랫도리는 영락없이 희고 토실한 여자 엉덩이의 편안한 앉음새였다. 그러고 보면 양반들이 첩질 잘하듯 술병으로 음행을 더 즐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호리병이 그런 모양으로 빚어진 것은 꼭 남자들의 음심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목이 긴 것은 들기 편하고 잡기 알맞게 하려는 것이었고, 아랫도리가 둥글면서 팡팡하게 퍼진 것은 술이 많이 담기면서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쓰기 편하고 간수하기 좋도록 만들어진 호리병에서 여자의 알몸을 연상하는 것은 음탕한 남자들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공허는 그런 남자들의 마음을 나쁘거나 죄 된다고 속단하고 싶지는 않았다. 음탐이란 중생들이 갖는 자연스러운 마음이었고, 술병에서 그런 느낌을 즐기는 것은 중생들의 사는 재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못된 죄인으로 남는 것 자신뿐이었다. 먹물 옷을 걸친 자가 속에는 중생의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병 밑이 하늘을 향하도록 공허는 고개를 발딱 젖히고 있었다. 목을 넘어간 술이 한 사발이 되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공허는 아쉬움을 느꼈다.
"아이고 어쩔께라? 시님이 생기신 대로 술얼 영판 잘 허시는구만이라이."
여자가 미안스러운 얼굴이었다.
"어허, 사람 참....."
남자가 아내에게 눈총을 쏘았다.
"어참, 시언허니 잘 묵었구만요."
공허는 손등으로 입을 쓱쓱 문질렀다.
"여그 안주 드시제라."
여자가 싱싱한 마늘쪽들을 내밀었다.
"아이고, 고맙구만요. 시장헌디얼렁 진지덜 드시씨요."
공허는 희고 곱게 생긴 마늘쪽 하나를 집어 들어 된장을 듬뿍 찍었다. 술맛 젖어 있는 입안에 신 침이 지르르 흘렀다. 공허는 마늘쪽을 으석으석 씹었다.
"맛이 으쩌신게라?"
여자가 흐뭇한 웃음을 머금었고
"마늘맛이 마늘맛이제 으쩌."
남자가 숟가락을 들며 뚱하게 말했다.
"하아, 맛이 기맥히구만이라. 매큼허고 쌉싸름허고 톡 쏨스로 쌈빡허고 알큰헌 것이 아조 지대로된 약마늘이구만요. 단오술에 약마늘로 안주꺼정 했으니 이 중놈 금년 한 해 무병허게 나게 되았소. 덕분에 단오치레 톡톡허니 했구만요."
공허는 마늘쪽을 또 하나 집어 된장을 듬뿍 찍었다. 그저 입에 발린 단맛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맛을 지닌 햇마늘의 그 싱그러운 맛이 더없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럴지 알았음사 나가 술얼 덜 묵었어야 허는디."
남자가 밥을 우물거리며 중얼거렸다.
"하이고, 나가 안 말갰드람사 한 방울이라도 남았겄소. 말이 좋아 왜 놈순사 보기 전에 뱃속에 털어 넣어야 된다고 헌 것이 누구요?"
여자가 입을 삐쭉이며 눈을 흘겼다.
"허허허..... 헌디, 순사덜이 술 단속을 힘허니 허능갑제라?"
공허는 강아지풀 줄기를 뽑으며 물었다.
"아 글씨, 집이서 술 담가 묵는 것얼 아조 뿌리럴 뽑을라고 대든당게라. 빌어묵을 놈덜이 베라벨 법얼 다 맨들어 사람 살맛 떨어지게 볶아치고 지랄발광이제라."
남자는 밥을 뜨고 말고 금방 목에 핏줄이 서도록 화를 냈다.
"남정네덜 술 덜 묵게 허는 것잉게 그 법언 잘 맨들었소."
여자가 오금을 박고 들었다. 그건 전매법에 따른 밀주 단속이었다. 총독부에서는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는 모든 방안을 강구해 나가고 있었다.
"시님덜언 앞날얼 내다보고 사시는 분네덜인디, 그나저나 요 팍팍헌 시상이언제나 끝나질라는 게라?"
남자가 기운 풀린 눈길로 공허를 바라보았다. 공허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글씨요..... 중덜이 그런 것얼 어찌 다 알간디요. 머시냐..... 이놈에 시상이 당장에 끝나기넌 에로와도 서로가 참고 살다 보먼 오래가기야 허겄는가요."
공허는 될 수 있는 대로 막연하게, 그러나 낙담은 하지 않게 말을 하려고 신경을 썼다. 사실과는 전혀 다른 위안적인 거짓말을 하면서 공허는 송수익과 마주 앉았을 때보다 더 막막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왜놈들은 우리 힘으로 몰아내지 않고는 물러갈 놈들이 아니오. 헌데 우리의 힘은 거의 소진된 상태요. 이제부터 다시 힘을 모으고 키워야 하오. 이모저모로 총독부 놈들의 핍박이 자심한데, 거기에 맞서는 힘을 키워나가자면 우리 모두가 꽤나 긴 세월 동안 고생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오."
송수익이 침통하게 한 말이었다. 작년 11월에 만주에서 경학사를 토대로 하여 부민단을 조직한 것이 그 시발이라고 했다. 또한 앞으로도 그런 조직체들을 많이 만들어 일본을 물리칠 힘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근디 말이제라 시님, 땅 뺏긴 사람덜이 어러지도 저러지도 못헐 형편잉게 살길얼 찾어 만주로 간다는 소문들인디, 거그 가먼 살길이 열릴께라?"
여자가 기대와 주저가 엇갈리는 눈길로 물었다.
"어허 이사람아, 시님이 만주 땅얼 안 가보고 그런 것얼 어찌 알 것이여. 예펜네가 만주 귀신이 들렸능가 어쩌능가....."
남자가 혀끝이 떨어져 나가도록 혀를 차재며 풋고추를 된장에 푹 찔렀다.
"음마, 시님네덜이야 얹어서 삼천리, 서서 삼만리 내다본다는 것도 몰라서 그런 소리허고 앉었소 시방?"
여자가 앙칼지게 내쏘았다. 그 남자는 공허를 힐끔 살피고는 마누라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공허는 내외간에 대립되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만주야 청국 땅잉게 왜놈덜헌티 설움 안 받고 살기로도 여그보담 낫제라. 허고, 땅도 한정 없이 널르고라."
공허는 정말 앉아서 삼천리, 서서 삼만리 내다보는 도사처럼 묵직하고 느릿한 설법조의 목소리로 여자 편을 들었다.
"어허 참, 시님언 어지께 만주 땅 딱 보고 온 것맨치로 소갈머리 없는 예펜네가 심에다 헛바람 넣고 그러시오 이."
남자는 영 못마땅해하며 공허의 허점을 찌르고 들었다. 공허는 그 공격에 역습의 필요를 느꼈다. 다시 힘을 일으키자면 만주 땅에 조선사람들이 많이 건너갈수록 좋았고, 이제 곧 헤어지면 그만일 사람들에게 만주를 다녀온 사실을 밝힌다고 무슨 문제 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저어, 소승 말얼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존디, 소승언 진작에 만주 땅얼 돌아보고 온 몸이구만요."
공허는말을 끝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메 어쩌끄나! 여자가 찰싹 손바닥을 맞때리면서, 나가 첫눈에 딱 봉게 예삿 중이 아니여, 아니여, 예삿 시님이 아니다 싶등마 참말로 만주 땅꺼지 댕개오신 장헌 시님이시구마. 근디도 또 헐 말이 있소? 시님 뜨실라는디 헐 말 있으먼 얼렁 히보시오."
여자가 넘치는 기세로 남편을 향해 손짓까지 해대고 있었다. 고개를 틀어 돌린 남자는 끄응 힘을 쓰며 뭉그적거리고만 있었다.
"술 잘 묵고, 잘 쉬었다. 가능마요. 매도 먼첨 맞는 것이 낫드라고 맘 묵은 일이먼 늑장부려 졸 것이 없을 것잉마요. 늦을수록 땅 차지허기가 에로울 것잉게라."
비틀거리는 남자의 다리를 단단히 감아 돌려 완전히 메다꽂는 기분으로 말하며 공허는 밭둑을 내려섰다.
"시님, 시님, 요것 잠 지니시제라."
여자의 다급한 소리가 공허를 붙들었다. 공허 앞에 내민 여자의 손바가지에는 실한 마늘통 네댓 개가 들어 있었다.
"아니, 되았구만요."
공허는 난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중생이 허는 보시럴 퇴허는 법언 없응게라."
여자는 바랑을 잡아끌면서,
"마늘이야 원기 돋구는 디 좋고, 내장 실허게 허는 디 좋고, 횟배 아픈 디 좋고, 입맛 돋구는 디 좋고, 시님맨키로 먼 질댕김서 입에 침보트는 디도 존게 심시허먼 까잡수시씨요."
여자는 정겨웁게 말을 해가며 바랑에 마늘을 넣고 있었다. 공허는 여자의 키에 맞춰 무릎을구부리고 선 채 가슴 훈훈한 따스함을 느끼고 있었다. 공허는 어둠이 깃들이기를 기다려 신세호의 집을 찾아들었다. 송수익의 집과는 동네가 다르고 그동안 몇 달이 지나기는 했지만 다시 승복을 입고 있어서 경계를 소흘히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헌병이나 경찰의 눈은 어느 동네 어느 고샅에나 빈틈없이 박혀 있다고 보는 것이 좋았다.
"아이고 스님, 그간에 무고허셨구만요. 그 일 후로 종무소식이라 무사럴 믿음서도 더러 걱정도 됐구만요."
신세호는 공허의 손을 덥석 잡을 만큼 반가워했다. 신분을 가리지 않는 그 언행에서 공허는 신세호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진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송수익이 마음을 맡길 만한 벗이라는 것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예에, 저녁얼 안직 뭇 묵었구만요."
공허는 빈말로 사양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저녁밥을 청했다.
"저어, 송 장군께서 안부럴 전허시등만이라."
"아, 그간에 만주럴 댕개오셨구만요?"
목소리를 낮춘 신세호가 반색을 했다.
"예에, 송 장군께서넌 건재허시구만요. 헌디, 송 장군께서 신중허니 맘 쓰심서 전허시는 말씸이 있구만요."
공허는 표정 없이 무거운 얼굴로 신세호를 건너다보았다.
"무신 말인지 어서 히시오."
신세호는 자신도 모르게 앉음새를 고쳤다. 그는 전신에 긴장을 느꼈다.
"예에, 무신 말씸인고 허니, 송 장군께서넌 장군님 큰아덜허고 신 선생님 큰 따님허고 혼인얼맺었으먼 어떨란가 허는 맘이신디, 그 뜻얼 전허라는 것이구만이라."
공허는 송수익의 뜻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말을 꺼냈다.
"아니,그것이 진언이오?"
신세호는 너무나 뜻밖의 말에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전혀 예기치 않았던 마음의 일치였다. 자신은 벌써 그런 뜻을 마음에 품고 있었으면서도 밖으로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자 쪽 입장인 데다가 송수익이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 선생님 의향언 어쩌신지....."
"이심전심이 따로 없구만요. 소생도 똑같은 생각얼 품어온 지가 오래됐구만요."
신세호는 송수익에게 더없는 고마움을 느끼며 밝게 웃었다. 그 고마움은 딸자식을 가진 부모로서 느끼는 단순한 고마움이 아니었다. 송수익은 서로 사돈 맺기를 제안하는 것으로 자기 집안일 전부를 부탁하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건 우정을 넘어선 마음의 표현이었고, 자신과 함께 행동하지 않았던 것조차 포용하는 마음이기도했다.
"그러시구만요..... 만상의 인연이 우연인 것언 하나도 없다고 설허신 부처님 말씸이 이리 매듭지니....."
공허는 큰 짐을 벗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밥상이 들어왔다. 점심을 건너뛴 공허는 시장할 대로 시장해 있었다.
"이거 원, 순 보리밥에 소찬이라서....."
신세호는 공허 앞으로 밥상을 밀듯 하는 몸짓을 지으며 민망해했다.
"여름에 보리밥, 겨울에 쌀밥이야 순리 아니겄는가요. 죄짓지 않고서야 여름에 쌀밥 묵어지는 것이 아니제라."
공허는 시원스레 말하며 밥상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그 활달함에 신세호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었다. 맨손으로 순사 둘을 때려죽인 그 시운만큼 마음도 화통하게 열려있었던 것이다.
"그리 넓게 생각허시니 드리는 말씸인디, 이 보리가 소생이 난생처음으로 농사진 곡식이구만요. 많이 드시지요."
"예에? 선생님이 손수.....?"
숟가락 가득 밥을 뜬 공허는 눈이 휘둥그레져 신세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예, 시장허신디 어서 드시씨요."
신세호는 밥을 권하며 멋쩍은 듯 웃고는
"나라는 없어지고, 너나없이 살기가 에로와진 세상에 장부가 헐일얼 못험서 졸부로 무위도식꺼지 허자니 죄가 따로 없드만요. 농사라도 순수 지어야 사람 노릇이 될 것 같애서....."
그는 부끄러운 듯 말꼬리를 흐렸다.
"아아.....그러셨구만이라."
공허는 더 무슨 말을 못 한 채 놀라움이 가득한 얼굴로 신세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건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양반이라고 해서 손수 농사를 짓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양반들은 가세가 몰락할 대로 몰락해 손수 농사를 짓지 않으면 굶어 죽을 지경으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었다. 신세호는 부자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머슴을 부려 농사를 지어온 처지였다. 그런대로 체면을 차리며 살 수 있는 양반이 어찌 손수 농사를 짓기로 작심하고 나설 수 있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공허는 신기하고도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신세호를 새롭게 느끼고 있었다. 난세를 만나 그나마 장부로서 할 일을 하려고 손수 농사를 짓기 시작한 마음이 귀하고 믿음직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땅에 그런 작심을 한 양반이 몇이나 될 것인가. 공허는 고마움과 함께 새로운 유대감까지 느꼈다. 누구보다도 송수익 대장이 반기고 흡족해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송 대장은 신세호라는 사람의 그런 심지를 알고 있어서 사돈을 맺고 집안일을 부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국 식는디 어서 진지 드시지요."
신세호는 공허의 뜨거운 눈길을 피하며 다시 식사를 권했다.
"아 예에..... 그 뜻 새김서 맛나게 잘 묵겄구만요."
공허는 의미 깊은 웃음을 지으며 밥이 그득 담긴 숟가락을 입으로 몰아넣었다.
"헌디..... 부처님 영험이 내리신 것인지 스님께서 아주 마땅허니 오셨구만요. 어디서 연락얼 취해야 좋을란지 몰라 맘만 급해지고 있든 중이었는디요."
공허는 볼이 미어져라 밥을 씹으면서 숟가락으로는 또 밥을 뜨면서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예에.....혹시나 임병서란 분얼 아시는지 몰르겄는디, 그 양반이 만주로 송 장군얼 찾아갈라고 메칠 전에 여그럴 댕개갔었지요."
"무신 일인디요?"
공허는 밥 씹기를 멈추며 긴장했다.
"그러닝게송 장군이 문주로 무대럴 옮겨간 후로 임병서 그 양반언 임병찬 대장얼 모시고 독립의군부서 활약했었지요. 독립의군부넌 여그 전라도 땅에 본부럴 두고 그간에 전국적으로 조직얼 확장해 나가는 동시에 지난 달에넌 임병찬 대장님이 총독부 경무 총감얼 면담허고 국권 반환얼 요구했구만요. 헌디, 총독부서넌 독립의군부 간부진 일부럴 체포허기 시작했구만요. 그려서 임병서 그 양반언 만주로 피헐 생각으로....."
신세호의 침울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가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있는 독립의군부의 운명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 같았다.
"글먼 형평이 아조 급박허구망요. 그 양반얼 어렁 만내는 것이 좋겄는디요."
공허의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신세호는 공허의 그 신속한 결정에서 선방의 승려가 아닌 결단력 있는 무인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목숨을 내걸고 의병투쟁을 한 사람다운 태도였던 것이다. 신세호는 송수익한테서 느끼는 체취를 공허한테서도 문득 느끼고 있었다.
"예, 멀찍허니 피해 있느니 급허게 사람얼 뇌도 이틀 뒤에나 만내게 되겄구만요."
"알겄구만이라. 그리 연락얼 취허시는 동안에 소승언 딴 일얼 잠 보고 욜로 다시 오겄구만요. "
공허는 아예 밥숟가락을 놓은 채 그 일에 정신을 쏟고 있었다.
"아이고 이런, 어서 진지럴 드셔야제..... 허먼 소생이 차질없이 연락얼 취허도록 허지요."
신세호는 공허에 걸맞게 자신의 태도도 분명하게 하고 싶은 용구로 말에 힘을 주었다. 공허는 더디게 숟가락을 다시 들며 입을 열었다.
"의병이란 의병이 다 씨가 몰라가는 판인디 독립의군부라고 성헐 리가 있간디요. 날로 달로 왜놈덜 세력언 태산이 돼가고, 마구잽이로 총칼얼 휘둘러 농사꾼덜 땅꺼지 뺏어대는 놈덜 보고 국권얼 반환허라고 헌다고 나라가 되찾아지겄는 게라. 그것이야 퇴깽이 잡아채 입에 문 늑대보고 퇴깽이 도로 살래도라고 사정허는 꼴이제라. 앞뒤가 콱콱 맥혀가는 판에 그리 꿈 겉은생각해서넌 사람언 사람대로 다치고 무시넌 무시대로 당헐 일 아니겄능가요."
공허의 얼굴에는 괴로운 빛이 허망함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예에..... 송 장군이 만주로 떠난 뜻얼 임병서도 인자사 깨달은 것 아니겄는가요. 헌디 만주 사정은 어찌 돼가고 있든가요?"
신세호는 지난날 자신이 임병서에게 독립의군부가 추진하려는 국권 회복 운동을 비판했던 사실을 아예 입에 올리지 않았다. 공허 앞에서는 그런 말이 다 하잘것없는 군소리였고 또 면목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만주라고 일이 쉽덜 않구만요. 안직 조선 삶덜이 터럴 잡지 못헌디다가, 거그꺼정 왜놈덜 세가 짱짱허니 뻗치고 있응게요. 타국살이가 심 드는디다가 왜놈덜이 목얼 졸르고 드는구만이라. 무신 소린고 허니, 왜놈덜언 청국에다가 한일합방이란 것얼 내밈서 만주에 사는 조선 사람덜얼 즈그가 다스려야 헌다고 허고, 청국서넌 왜놈덜 비우안 거실릴라고 그러라고 해부렀시니 우리 조선 사람덜언 만주 땅에서도 왜놈덜헌티 모가지가 틀어잽힌 꼴이 되야부렀다 그것이구만이라. 헌디, 왜놈덜 행투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구만요. 그놈덜언 조선 사람덜이 만주 땅얼 사딜이지 못허게 허는 법얼 맨들으라고 청국을 압박허고 외유했구만이라. 그려서 이번 5월에 봉천성 의회에서넌 조선 사람언 만주 땅얼 사도 팔도 못허게 허는 토지매매 금지안얼 법으로 맨들었구만요. 왜놈덜이 어째 그러는지넌 더 말 헐 것이 없제라. 허나, 왜놈덜이 그리 악독허고 고약시럽게 나대도 우리야 밑으로 헐 일언 다 해내고 있구만요. 독립운동 단체럴 엮어감스로 조선 사람덜 동네럴 맨들고, 만주 서넌 조선 사람덜이 질로 많이 사는 북간도 용정 근방허고도 은밀허니 연락험서 서로 결속허기로 해나가도 있구만요. 다덜 애쓰고 있응게 일이 잘 풀릴 것이구만이라."
공허는 일부러 앞날을 밝게 이야기했다.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용기를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덜 그 고상덜인디....."
신세호는 너무 면목이 없어서 면목이 없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밥 참 맛나게 잘 묵었구만요."
신 모양으로 고봉이었던 밥을 말끔하게 비운 공허는 목젖이 떨릴 만큼 걸찍하게 트림을 했다. 그건 자연스러운 생리현상만이 아니라 식객으로서의 인사이기도 했다.
"찬도 없는디 고맙구만요."
신세호는 주인으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저어, 소승이 송 장군님댁에 가기가 에로운 게 이 글발얼 잠 전해 주시면 좋겄구만요. 소승언 또 갈디가 있어서..... "
공허는 봉투를 내밀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이 야밤에 어디럴 가실라고?....."
그 느닷없음에 신세호는 황망하게 따라 일어났다.
"소승이야 이짝으로 발길 허먼 야행허는 박쥐 신세 아니등가요. 약조대로 이틀 후에 다시 뵙도록 허겄구만요."
공허는 마치 박쥐 신세를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씽끗 웃으며 방을 나섰다. 신세호는 그 야릇한 웃음이 섬뜩한 찬바람으로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묘한 기운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생각이 엇갈리게 했다. 어쩌면 천진무구한 어린아이 웃음 같아서 세속의 번뇌를 초탈해 버린 승려의 모습 그대로인가 하면, 또한 두려움도 묵살해 버리는 자신만만한 웃음 같기도 해서 기운 세고 배포 큰 장부로 보이기도 했다. 그런 기 질리고 뒤로 밀리는 것 같은 기분은 송수익한테서도 더러 느끼는 것이었다. 신세호는 문득 그 찬바람 같기도 하고 불길 같기도 한 기를 부러워하며 어둠이 맥질된 마당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공허는 아무 말 없이 사립을 나섰다. 신세호도 아무 말 없이 공허를 배웅했다. 빠른 걸음의 공허는 곧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어둠으로 가득 찬 들판은 적막했다. 어둠 저 멀리 별똥별의 모둠들처럼 작은 불빛들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 불빛들이 그나마 들판의 어두운 적막을 이겨내고 있었다. 공허는 그 미약한 불빛들을 보면서 또 이 나라 백성들의 앞날을 생각했다. 그 가물거리고 깜박거리는 불빛들이 꼭 이 나라 백성들의 암담하고 기약 없는 앞날 같아 목이 메고 서러워지는 것이었다. 그건 만주벌판에서 맞닥뜨렸던 감정이었다.
"그 반대로 생각합시다. 저 불빛들이 언젠가는 이 어둠을 살라 먹게 될 것이오."
송수익의 말이었다.
"언제꺼지 이러고 댕길 것이냐. 인자 중 노릇이나 진득허니 허도록 해라."
큰스님이 이번에 불러 앉히고 마침내 꺼낸 말이었다.
"안직 헐 일이 다 안 끝났구만요. 그만허먼 중으로 헐 일언 다 끝났다."
"형편언 자꼬 더 에로와지고 있는디요."
"중이먼 중으로 헐 일이 따로 있느니라. 아수라 지옥이 따로 없는디"
"중도 이 나라 백성이구만이라."
"니 혼자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지 혼자가 아니구만요."
"벽창호로구나. 기울르는 달언 새로 차올르기럴 기둘려야 허고, 쇠헌 기운언 다시 실해지기럴 기둘려야 허니라. 니가 승군으로 나섰든 그때로 한때가 니내갔니라."
"그러다가 어느 세월에 이 지옥이 끝나겄는가요. 이러다가넌 다 귀신 밥이 되겄는디요."
"어리것은 자 맘이 급허고 아둔한 자 몸얼 급히 놀리는 법이니라. 급해서 얻는 것언 인명손실뿐이니라."
"아니구만이라. 당장 싸울라는 것이 아니라 새 심얼 모을라는 것이구만요."
"어허, 심얼 모을라고 헌다고 모아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바람이 불어야 구름이 모이고, 그름이 모여야 비가 오는 거시 아니드냐. 때럴 기둘려라."
"시님, 날이 날마동 사방천지서 사람덜이 죽어감서 살기 에로운 지옥이 돼가는디 무신 바람이 불고 무신 구름이 모인다는 말씸이신 게라."
"저런 봉사에 귀먹쟁이 놈얼 봤능가. 지끔 사람덜이 죽어가는 소리가 피바람이 아니먼 머시고, 겁 묵고 있는 사람덜 맘 속에 이고 있는 분이 구름이 아니먼 머시냐. 사람이 짐승허고 달른 것이 머신지 아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건 눈이 열리고 귀가 뚫리는 깨달음이었다. 그렇다고 목탁을 치며 그때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아니, 그 사실을 알았으니 더욱 굳건하게 송수익 같은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해야 했다.
"업보로다, 업보로다."
큰스님은 탄식하듯 체념하듯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고개는 보일 듯 말 듯 끄덕거려지고 있었다. 공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업보를 외친 큰스님의 목소리가 외로움을 몰아오고 있었다. 그 외로움은 슬픔을 건너뛰어 바로 증오가 되고 있었다. 집이 타던 불길 그대로 가슴에서는 증오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 증오의 불길이 약해질까 봐 복수의 기름을 들이부어 왔었다. 어머니의 기억이 퇴색하지 않는 한 그 기름은 마를 날이 없었고, 불길이 타오르는데 목탁만 칠 수는 없었다. 공허는 하늘을 올려다본 채로 긴 숨을 토해냈다. 들녘이 넓은 만큼 하늘은 넓었고, 어둡고 넓은 하늘만큼 가슴은 막막하고 답답했다. 달빛 없는 어두운 하늘에 초여름 별들은 곧 쏟아져 내릴 것처럼 휘늘어져 반짝거리고 있었다. 공허는 가슴 가득 별을 안았다. 그는 별들의 무수한 반짝임을 보면서 서로 다른 두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무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간고였다. 절밥을 먹은 다음부터 하늘을 올려다보면 무상감에 몸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고는 했다. 목탁소리며 염불소리에서 막연하게 풀려나오는 그 감정은 끝도 한도 없이 넓은 하늘을 보는 순간 생생한 느낌으로 온몸을 덮쳐오고는 했다. 그 넙디나 넓은 하늘 아래 나 하나는 어찌할 수 없는 티끌이라는 깨달음이 반짝 불을 켜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를 통하지 못한 탓이었을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수하게 반짝이는 초롱초롱한 별들이 다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 별들이 이 세상 사람들로 느껴지면서 무상감에 빠진 마음은 다시 세속을 행해 고개를 들었다. 무상감은 순간이었고 세속으로 열린 마음은 무상의 진리를 잡아먹었다. 피눈물 나고 쓰라리고 아픈 나날의 세상살이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인생은 무상한 것이라고 가르치며 고개를 돌리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중생은 외적의 온갖 횡포 아래 죽어가고 피 흘리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데 중들이 목탁 치며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고 목청 높여 염불을 왼다고 하여 외적이 물러가고 중생들이 편안해질 리가 없었다. 그건 억지고 눈가림이었다. 태평세월 속에서 편안하게 한평생을 보낸 인생살이는 우주의 수억 겁 세월에 견주어 무상하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흉악한 외적의 총칼 앞에 목숨을 내놓은 채 날이면 날마다 짓밟히는 지옥살이를 새야 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이 어찌 무상일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나날은 너무 긴 고통의 유상이요 괴로움의 유상이요 절망의 유상인 것이었다. 공허는 큰스님 앞에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은 역시 옳았던 일이라고 되짚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속의 외로움은 더 커지고 있었다. 송수익에게 장담했던 일이 성사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승려들을 다시 모으는 것은 생각처럼 여의치가 않았다. 중이 무사는 아니고..... 중도 사람 아니라고..... 거의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며 더욱 단단하게 가부좌를 틀려 하거나 뒤로 물러나 앉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처럼 겁먹은 채로 무상이란 울타리로 친 도피처에 안주하면서 목탁을 열성으로 치는 것이 중의 할 일이라는 명분을 세우고 있었다.
"재작년에 공포된 사찰령얼 몰르는가? 인자 우리도 우리 맘대로 못허고 사는 신세덜 아니라고."
어떤 승려는 사찰령을 내세우며 그 뒤로 몸을 감추려고 했다. 사실 공허는 사찰령이란 것이 공포된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러나 사찰령은 승려들의 행동을 억압하거나 통제하는 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법은 뒤로 절 재산을 확대시켜 주고 승려들이 더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혜택을 감추고 있었다. 총독부는 조선의 불교를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시키는 동시에 전국의 큰절을 지역별로 선정하여 30개 본사로 정하고, 작은 절들을 그 휘하에 속하게 했다. 그런 일사불란한 조직체계를 갖추게 한 것은 바로 조선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지고 있는 종교를 장악하자는 것이었다. 그건 지배세력인 양반계층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회유하고 유인해 가며 자기네들 편을 만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수법이었다. 공허는 여기저기서 앞을 가로막는 많은 벽들에 부딪히고 있었다. 의병은 뿌리가 뽑힐 대로 다 뽑혔고, 만주의 형편도 여의치 않게 변하고 있었고, 대중들은 억울하고 분하게 땅을 빼앗기고 있었고, 양반 지주들은 재산을 지키기에 급급해 친일파가 되어가고 있었으며, 승려들은 승려들 같은 조직까지 깨져나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공허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를 앙다물었다. 형편이 어떻게 변해가든 그 계획만은 실현시키고 싶었다. 의병투쟁 때도 그랬지만 지금 만주에서도 필요한 것은 사람과 자금이었다. 그런데 사람보다 더 급하게 조달해야 하는 것이 자금이었다. 자금이 비축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큰 뜻도 허황한 꿈이었고 아무리 단단한 계획도 물거품일 뿐이었다. 그런데 자금이 급한 만큼 조달은 쉽지가 않았다. 물론 조선 땅에 부자는 많았다. 들녘이 넓은 전라도 땅에는 천석꾼이니 만석꾼이니 하는 지주들이 수두룩했고, 한양이며 개성에는 수십만 냥을 자랑하는 거상들도 많았다. 그러나 돈은 돈을 끌어당기고, 돈에 흘리면 부모 자식도 몰라본다는 말은 역시 공자님 말씀인지도 몰랐다. 부자들은 나라가 어찌 되고 세상이 어찌 되든 간에 솔선해서 돈을 내놓는 법이 거의 없었다.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의병들이 모자라는 군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화적떼처럼 부잣집들을 털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순전히 그들의 인색 때문이었다. 의병들의 목이 사흘 거리 눈앞에 내걸리는 판에도 손수 돈을 내놓지 않았던 부자들이 이제 와서 돈을 내놓을 턱이 없었다. 그들은 어쩌면 의병들의 흔적이 없어진 것을 은근히 좋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지주들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서 자기네들 논밭을 오히려 늘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상인들은 벌써부터 신식 일본상품들을 좇아 서로 앞을 다투어 부나비 떼가 되어 있었다. 공허는 그런 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을 작정이었다. 그 방법으로 계획하고 있는 것이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인원을 소수로 제한하고 극비리에 활동하여 효과를 크게 하자는 것이었다. 만경 들판을 가로지르고 대야 들판을 건너 공허는 자정이 지나 군산 언저리를 밟았다.
"손판석이가 어찌 되았는지 모르겄네. 약도 지대로 못쓰고....."
지삼출의 근심 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삼출은 무슨 일을 열심히 하다가도, 여럿이 모여앉아 쉬다가도 불현듯 그 말을 중얼거리고는 했다. 공허는 손판석네 움막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일부러 밤을 틈타 왔으면서도 막상 찾아들기는 밤이 너무 깊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군산이라고 해서 마음 놓을 수는 없었다. 공허는 염치불구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손샌, 손샌! 자요? 손샌!"
공허는 낮으면서도 힘이 들어간 소리를 내며 움막을 질벅거렸다.
"누구여, 거그 누구여?"
이직 잠이 안 들었던 것인지, 잠귀가 밝은 것인지 지체없이 안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거그, 손샌이 맞소?"
"근디요. 거그넌 누구요?"
"이, 나 공허요. 땡초 공허!"
공허는 그만 반가움에 넘쳐 <땡초 공허>에 힘을 넣었다.
"아이고메 시님, 요것이 어쩐 일이다요."
왈칵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는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 목소리는 손판석이가 몸을 벌떡 일으키는 모습을 환히 보여주고 있었다. 공허는 그런 느낌과 함께 콧등이 찡 울리고 있었다.
"무신 소리다요..... 시니임?"
"어렁 일어나 자리 치우소, 얼렁."
방안의 수선스러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공허는 미안쩍어 하늘로 눈길을 보냈다. 은하수도 북두칠성도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시님, 어여 오시게라우."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공허는 후딱 고개를 돌렸다. 손판석이가 밖으로 걸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이고 손샌, 다리넌 어찌 되았소?"
공허는 다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손판석은 분명 지팡이도 없이 똑바로 서 있었던 것이다.
"다리야 머..... 빙신 못 면했구만요."
손판석의 목소리가 금방 시무룩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무신 소리요?"
이렇게 말이 나가는 순간 공허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있었다.
"안으로 드시제라."
손판석이 돌아섰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공허는 가슴이 컥 막히는 것을 느꼈다. 한 발짝을 옮기는데 한쪽 어깨가 휘뚱 기울어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모습은 역력하게 보였다. 지삼출의 애태우던 걱정이 적중한 것이었다. 뼈가 상하고서야 몸이 성하기를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공허는 심한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인자 암디도 써묵을 디 없는 쩔뚝발이가 되야부렀구만요."
불구가 된 몸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앞서 방으로 들어선 손판석이 공허를 돌아보며 말했다.
"......"
공허는 손판석을 응시하기만 했다. 막힌 가슴이 더욱 답답해질 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욜로 앉으시제라. 돼지울 같애서......"
등잔에 불을 댕기고 난 부안댁이 옆걸음질을 하며 자리를 권했다. 공허는 손판석의 아내에게 목례를 했다. 표현할 길 없는 미안함이 가슴을 휘돌았다.
"앉으시씨요. 다덜 무고헌 게라?"
손판석은 먼저 주저앉으며 물었다.
"지샌이 손샌 걱정얼 많이 했는디......"
공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삼출이야 나가 이 꼬라지 될지 알었겠제라. 나도 다 짐작헌 일인디요."
손판석은 맥이 다 풀어진 소리로 말하며 담배쌈지를 펼쳤다. 공허는 또 말이 막혔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할 말은 많으면서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주로 가기는 틀려버린 사람 앞에서 많은 이야기는 다 부질없는 것이기도 했다. 손판석 앞에는 불구로 살아가야 할 평생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이 일얼 어째야 좋소."
위로의 말마저 하기가 옹색해진 공허는 이렇게 탄식했다.
"다 운수 소관이제라. 죽어 극락보담 살아 지옥이 낫다는디, 그간에 수없이 죽어간 사람덜에 비허먼 요것도 상팔자 아니겄는 게라우."
손판석이 마른 입맛을 다시며 공방대를 입에 물더니 담배통을 등잔에 갖다 댔다. 등잔 불빛을 받은 그의 얼굴이 씁쓰름하게 웃고 있었다. 그가 곰방대를 빨자 등잔 불꽃이 휘어져 담배통으로 빨려들며 곧 꺼질 듯 잦아들었다. 담배를 빠는 그의 숨결을 따라 등잔 불꽃은 자지러지듯 작아졌다가 소스라치듯 커지고는 했다. 마치 불꽃을 들이마시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공허는 한층 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가 체념적으로 한 말은 차마 이쪽에서 먼저 꺼낼 수 없었던 위로의 말이고 격려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이쪽에서 먼저 꺼냈을 때는 자칫 몸 성한 자가 속 편하게 지껄이는 무책임한 소리로 오해될 소지가 큰 말이었다. 어쨌거나 죽어 극락보다 살아 지옥이 낫게 하려면 그가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그런데, 다리가 불구인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거리가 무엇일까...... 공허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있었다.
"손샌이 먼첨 그리 말허니 나가 더 헐 말이 없소. 근디...... 손샌이 목고 살 일자리럴 구해야 헐 것인디...... 그냥 급허니 생각나서 허는 말이요마는, 나가 어떤 절에 잡일 허는 자리럴 구해 보면 어쩌겄소. 그작저작 일허먼 심도 벨로 안 들고 아그덜도 배 안 곯코 키울 것인디."
공허는 손판석의 눈치를 살펴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아니, 그리 안 해도 되겄구만요. 창고지기 자리나 십장자리가 곧 생길 판잉게라."
손판석의 급한 대꾸였다. 창고지기나 십장 자리? 공허는 직감적으로 되물었다. 그 뜻밖의 말에 불길한 생각이 번뜩 스치고 있었다.
"야아, 누가 그런 자리럴 시방 구허고 있구만이라."
손판석을 살피는 공허의 눈길이 예리했다. 그러나 손판석은 별다른 낌새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공허는 손판석의 그런 예사로운 반응이 더 의심스러워졌다. 창고지기나 십장 자리? 그건 분명 다리가 불구인 사람에게 알맞은 자리였다. 그러나 그런 자리는 아무나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자리는 군산 부두노동판에서 가장 편하면서도 세도를 부리는 자리였다. 그만큼 누구나 군침 흘리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손판이한테 그런 자리가 돌아온다고......? 공허는 의심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아, 그것 참 잘 되았소. 헌디, 그 자리럴 차지허기가 쉽덜 않을 것인디, 누구 잘 아는 사람이라도 있소?"
공허는 속마음을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넌지시 물었다.
"아아, 서무룡이라고, 지샌이랑 다 한패로 등짐 지든 총각이 있구만요."
공허는 무엇인가 빗나가는 것을 느꼈다. 손판석을 의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손판석은 전혀 주저하는 기색 없이 사람의 이름까지 대고 있었다. 만약 마음이 변했다면 그렇게 솔직하고 담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공허의 의심은 서무룡이라는 인물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그 이름은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방대근이가 가끔 입에 올리곤 했었다.
"서무룡이도 만주로 같이 왔으먼 좋았을 것인디요. 쌈얼 기맥히게 잘헌당게라. 시님, 시님도 쌈얼, 아니 참, 도술얼 기맥히게 잘허신담서요? 저도 서무룡이맨치로 쌈얼 잘허고 잡은디요......"
공허는 그 서무룡이에게 손판석이가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무룡이 그 사람, 지끔 무신 일얼 허고 있소?"
"그냥 그대로 막노동허고 있제라."
손판석은 아무런 기색 없이 곰방대를 뻐끔거리고 있었다.
"손샌, 그 사람이 성제간이요?"
"아아? 무신 말씸이신 게라......?"
손판석은 그때서야 곰방대를 입에서 떼며 눈을 바로 떴다.
"성제간도 아닌 넘넘인 사이에 지넌 심든 막노동험스로 손샌헌티 그 편헌 일자리럴 구해 주겄다 그것이오?
"......"
손판석은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이며 공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비로소 그 눈과 얼굴에 의혹의 기색이 드러났다.
"허고, 지가 무신 재주로 그 존 일자리럴 구해주겄다고 허겄소?"
"글먼, 그놈이 헛방구 뀌댐서 사람 가심에 헛바람만 채우는 갑네요?"
손판석은 엉뚱하게 헛짚고 있었다. 공허는 그만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꾹 눌러 참았다. 손판석의 짧고 무딘 생각에 속이 상했지만 그건 또 그의 순박하고 착한 마음 탓이기도 했던 것이다.
"손샌, 그리만 생각허지 말고 쮜깨 더 눈얼 크게 뜨고 그 사람얼 살피시오. 창고지기고 십장 자리넌 아무나 차고앉는 자리가 아니덜 않소? 근디 그 사람이 구해 주겄다고 나섰다 그 말이오."
"워메, 글먼 그 사람이 왜놈덜......"
불쑥 튀어나온 여자의 목소리였다. 손판석의 아내 부안댁은 자신도 모르게 쏟아진 말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놈에 예펜네가 무신 소리여!"
손판석은 언성을 높이면서도 눈은 멀뚱하게 공허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의혹에 찬 자신 없는 눈은 공허에게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요, 아짐씨 말이 맞소. 십중팔구 그 사람언 왜놈덜 끈일 것이오."
공허는 허리를 곧게 세우며 말에 힘을 주었다.
"그놈이 왜놈덜 앞잽이......? 그놈이 왜놈덜 끈이여......?"
당황한 손판석은 헛소리하듯 중얼거리며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뺐다 하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금메, 인자 생각히 봉게 요 근자에 그 사람 돈 씀씀이가 전보담 헤퍼지덜 안혔소. 입성도 달버지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은 부안댁은 낮게 억누른 소리로 말했다.
"그려...... 그리 생각허고 봉게 그놈이 요상헌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닝마...... 나가 새끼덜허고 묵고 살 생각에 맘만 급해서 그런 뻔헌 것도 못 본 봉사가 되야부렀는갑네 이."
손판석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자기 아내를 향해 허탈하게 말하고 있었다.
"금메 말이오, 열 질 물속언 알아도 한 질 사람 속언 몰른다고 허둥마...... 지도 미선소 안 나댕기게 될 것만 좋아서 눈이 멀었었구만요."
부안댁은 공허 스님의 눈치를 살피며 이렇게 말했다. 남편의 잘못을 덮어내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공허는 손판석의 급했던 마음도, 부안댁의 들떴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어떤 것이든 욕심이 앞서면 누구나 마음의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님, 지가 깜빡 잘못 생각혔구만요. 지가 다리 빙신으로 비렁뱅이 짓얼 허고 살았으면 살았제 어찌 왜놈덜 앞잽이 노릇얼 허고 살겄는 게라. 시님 말씸대로 어떤 절에 일자리럴 구해주시먼 그리로 가겄구만요."
손판석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리 생각헐 일이 아니오. 그 사람이 손샌 행적얼 아요, 몰르요?"
"행적이라니, 의병헌 것 말인 게라?"
"그러요. 아이고, 지 모가지가 둘이간디요? 고것이야 쥐도 새도 몰르제라."
손판석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어, 그러면 잘 되았소. 그 일얼 이리 헙시다."
공허는 장삼 자락을 뒤로 내치며 앉음새를 고치고는,
"어찌허능고 허니 말이오, 첨 생각대로 손샌이 창고지기든 십장 자리든 되는 대로 차고 들어가도록 허시오."
그는 마치 의병을 할 때처럼 말했다.
"아야? 고것이 무신 소리다요?"
손판석의 눈이 커졌다.
"머 놀랠 것 없소. 손샌보고 왜놈덜 앞잽이 노릇이나 해묵으란 것이 아닝게. 손샌언 창고지기든 십장이든 해묵음시로 헐 일이 따로 있소."
"이 짝 끈이 되라 그것인감요?"
손판석은 정곡을 찌르고 들었다.
"맞소, 바로 그것이오. 겉보기로넌 왜놈덜 좋아라 허게 험스로 속으로 넌 우리 쪽에 이문이 되게 허라 그 말이오."
"워메, 그리 살얼음 걷다가 들키먼 어쩔라고......"
부안댁의 겁먹은 소리가 침침한 어둠 속에서 가늘고 조심스러웠다.
"어허, 남정네덜 허는 일에!"
손판석이 왈칵 내질렀다. 공허는 그만 가슴이 뜨끔해졌다. 그리고 손판석의 아내에게 더없는 미안함을 느꼈다. 그런 위험이 따르는 일을 어느 여자나 좋아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손판석의 아내는 몇년 동안에 몸 고생 마음고생을 겪을 대로 겪은 처제였다. 당연히 말조심을 했어야 하는데 그만 마음이 급하다 보니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아짐씨, 의병 허든 것에 비허먼 아주 수월허고 표 안 나는 일잉게 그리 맘 안 써도 될 것잉마요."
공허는 면목 없는 마음으로 정중하게 합장을 했다.
"야아, 지가 입방정이구만요."
부안댁은 황급히 마주 합장을 했다.
"시님, 여자란 것언 다 그런 물건덜잉게 맘 쓰시덜 말고 어여 허실 말씸이나 허시제라."
손판석은 아내에게 눈을 째지게 흘겨대며 곰방대를 쌈지에 디밀고 있었다.
"저어...... 시상이 다 알고 있는 일로, 왜놈덜이 조선천지 골골이 즈그덜 앞잽이럴 얼매나 많이 박아놓고 있소. 그놈덜이 그리혀서 우리럴 꼼지락 달싹 못허게 잡을라는 판에 우리가 그놈덜허고 싸와 이길라면 우리도 그놈덜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 된단 말이오. 그렁게 손샌언 맘 단단허니 묵고 그 자리보톰 차지허는 것이 좋소. 그리만 되먼 손샌이 헐 일이 많으요. 서무룡이가 무신 짓얼 허는지 감시허고, 우리 쪽에 이문 되는 비밀얼 알아내고, 우리 일꾼덜헌티 잘해 주고, 그럼서 우리 편 사람덜얼 늘려가고 허는 것이오. 의병이 뿌리가 뽑힌 판에 왜놈덜얼 엎으자면 헌병대고 경찰서고 면사무소고 우리 쪽 사람덜이 파고들어야 허는 것인디......"
공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근디, 서무룡이 그놈이 참말로 왜놈덜 앞잽이먼 어쩔께라?"
손판석이 이맛살을 찡그렸다.
"그야 당장 어쩔 것이 없소. 무신 짓얼 허는지 살피고, 누구허고 끈이 맺어졌는지 알아내고 험스로 잘 지내기만 허먼 돼요. 어찌 허는 것이야 그담에도 얼매든지 헐 수 있응게. 시님이 한번 만낼 날이 올 것이오."
공허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참 뻔뻔허니, 속언 그리 검은 물건이 수국이럴 찾게 해도라고 발싸심이니."
부안댁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수국이럴...... 무신 소리요?"
공허가 손판석을 쳐다보았다.
"야아, 서무룡이 놈이 수국이헌티 반해서 시시때때로 수국이럴 찾아도라고 졸르고, 소식 없냐고 물어쌌고, 영 성가시게 나대고 있구만이라."
손판석이가 담배를 빨며코 웃음을 쳤다.
"아니, 그놈이 수국이럴 찾는 시늉 험스로 지샌이나 대근이 거처럴 알아낼라고 허는 심뽀 아니오?"
"글씨요...... 그놈이 수국이 인물에 미친 것언 틀림없는디, 글먼 꽁 묵고 알 묵고 헐라는 것인지도 몰르겄는디요."
손판석은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수국이의 곱고 참하면서도 우수가 어린 얼굴이 떠올랐다. 공허는 그 얼굴을 지우며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가실라고라? 여그서 우허시제......"
서둘러 일어나는 손판석을 따라 부안댁도 몸을 일으켰다.
"닭 울기 전에 여그럴 떠야겄소. 자주 연락헐 것잉게 몸 성허니 잘허시오."
공허는 바랑을 지며 거적문을 밀쳤다.
"만주넌 언제 또 가신당게라?"
"잘 모르겄소, 하도 멀고 험헌 질이라. 인자 자주 안 가질 것이오. 만주보담 여그가 더 중헝게."
공허는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만주로 향하고 있는 손판석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야아, 글먼 자주자주 소식 주시게라."
"그럽시다. 맘 강단지게 묵으씨요. 다리 그런 것이야 숭이 아니라 장허게 산 표식잉게."
공허는 손판석의 손을 잡았다.
"시님......"
손판석은 공허의 손을 맞잡으며 힘을 주었다. 손판석이 힘을 주는 만큼 공허도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맞잡힌 두 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손판석은 팔을 타고 오르는 떨림이 가슴을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이겨낼 수 없었던 절망감이 가셔져 가고 있었다. 그동안 시달려왔던 고적감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온몸에 새 힘이 솟고, 새 믿음이 열리고 있었다. 머리를 박박 깎인 채 철도공사장에서 고생하다가 대원들과 함께 도망쳐 의병부대를 찾아가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처럼 눈앞이 환해지고 새 기운이 뻗치고 있었다. 공허는 다시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손판석을 찾아갈 때와는 달리 그는 가슴이 후련하고 발걸음이 가벼운 것을 느꼈다. 손판석의 문제는 뜻밖에도 흡족하고 홀가분하게 해결된 것이었다. 지삼출은 손판석이 불구가 되어 만주로 데려오지 못하게 될까 봐 못내 걱정했었다. 물론 손판석이 다리를 절름거리게 된 것은 딱한 일이었다. 그러나 만주로 떠난 사람들과 다름없이 중한 일을 하게 된 것은 더없이 기쁜 일이었다. 공허는 미약하나마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마음먹고 있는 일이 손판석의 일로 실마리가 풀리고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공허는 줄기차게 걸으면서 어깨가 눅눅하고 발등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름이면 습기 많고 후덥지근하기로 이름난 징게 맹갱 들판에 밤이슬이 내리고 있었다. 꼭꼭꼬오옥 꼬옥...... 어둠 저편 멀리서 장닭의 울음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있는 껏 목청을 뽑아 올린 컬컬하면서도 맑은 그 소리가 새벽 들녘의 정적을 흔들며 긴 여운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어기차면서도 부드러운 가락인 그 울음소리는 새벽의 싱그러운 기운 속에서 상쾌하고 정겹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 울린 소리의 여운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다른 쪽에서 새 울음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공허는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문득 피로감을 느꼈다. 새벽닭이 우는 소리는 세속의 소리였다. 그 세속의 소리는 어김없이 어린 날이 떠오르게 했다. 어린 날은 그리움이면서 눈물이었다. 공허는 밤새도록 걸은 피로감을 털어내며 걸음을 더 빨리했다. 날이 밝기 전에 당도해야 할 곳이 있었다.
"시님, 시님언 참 야박허고 인정도 없으시오. 그것도 다 부처님이 말씸허신 인연인디, 그 보살님 소원 안 들어주먼 지가 찾어갈라요."
아기 중 운봉이 제법 협박조로 들이댔던 것이다.
"이놈아, 나보고 첩질시키는 못된 중신애비가 되라는 것이냐 머시냐."
이렇게 호령을 하기는 했지만 그 여자를 생각하는 아기 중의 외로음 타는 마음을 묵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공허는 어둠이 걷히고 있는 들녘의 안개 밭을 헤치며 그 동네로 들어섰다. 기와집은 하나뿐이라서 집을 찾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공허는 대문 앞에 이르러 바랑에서 목탁을 꺼냈다.
‘요런 집서 시부모도 없이 청상과부가 혼자 살기넌 에롭기넌 에럽겄는디. 시부모가 오래 못 살고 죽은 것이 탈이로구마. 근디 임언 몇천 리 밖에 있으니 어쩔 심판인 것이여......’
공허는 대문을 올려다보며 독경 대신 이런 생각을 하면서 목탁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목탁을 미처 열 번도 두들기지 않았는데 대문이 열렸다.
"시님!......"
부끄러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얼굴로 젊은 여자가 합장을 했다. 공허는 그 젊은 여자가 바로 홍씨인 것을 알아보았다.
"시물너댓이 됐다냐 어쩌다냐......"
공허는 나이를 가늠해 보며 숙임막한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랫것덜이 있을 것인디 대문얼 손수 여시는 게라?"
대뜸 이렇게 나가는 공허의 어조는 묘하게 꼬이고 있었다.
"목탁소리라서......"
얼결에 대꾸하던 홍씨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승려의 야릇한 눈길과 그 묘하게 꼬이는 말뜻이 자신의 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소승, 운봉 부탁으로 걸음 했구만요."
공허는 피식 웃음 지었다.
"예...... 안으로 잠 드시씨요."
홍씨는 옆으로 비켜섰다.
"갈 질이 바쁜디 안으로 들고 말고 헐 것 머 있간디요. 운봉이 부탁헌 것이나 알리고 그냥 가야제라."
바랑을 한쪽 어깨만 벗어 목탁을 넣으며 공허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저어...... 장삼이고 짚신이고 다 젖은 것일 봉게 밤질얼 오래 걸으신 모양인디, 아침 공양 드심서 다리도 잠시 쉬고 옷도 몰리는 것이 좋겄는디요."
공허는 그만 마음이 동했다. 밤길을 오래 걸어온 것을 금방 알아보는 그 눈치 빠른 영리함이 제법이다 싶었고, 아침밥을 먹으라는 말에 왈칵 시장기가 일면서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글먼 아침 공양이나 험스로 이얘기럴 허도록 헐게라."
공허는 바랑을 추스르며 대문 문지방을 넘어섰다. 공허는 하루 세 끼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었다. 그건 부모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고 불경에 나오는 계율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루 세끼를 꼭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어린 날 배곯고 살아온 설움이 뼛골에 사무친 까닭이었다. 그런데다 의병에 나서면서부터는 그 생각이 더 확고해졌던 것이다. 기운 좋게 잘 싸우자면 굶는 일이 없어야 했고,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만이 건강을 지키는 길이었다. 그리고 건강이 유지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큰 뜻도 허황한 꿈일 뿐이었다. 절밥을 먹으면서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고기도 의병투쟁을 하면서 다시 입에 대게 되었다. 고기를 입에 대게 되니 큰스님들 눈을 피해 홀짝거렸던 술도 말술이 되고 말았다. 땡초라는 놀림을 피할 수 없게 되었지만 승려의 계율을 어겼다는 죄진 마음은 별로 없었다. 도통한 대선사가 될 욕심보다는 당장 눈앞의 일이 더 급하고 중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저 대청으로 올르시씨요."
홍씨는 서두르는 몸짓으로 공허를 안내하고는,
"말분아, 밥 얼렁얼렁 해라. 어멈언 안직 안 일어났냐."
하품을 하며 부엌에서 나오고 있는 처녀를 덥쳤다.
공허는 대청으로 오를 생각도 하지 않고 마당 가운데 서서 집을 둘러보고 있었다. 집은 사랑채와 안채가 구분되어 있었지만 별로 큰 규모는 아니었다. 족보는 양반이지만 몇 대 안에 큰 벼슬을 못한 것 같았고, 재산은 한 삼사백 석이나 될까 하고 공허는 어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랫것들을 거느리고 있다고 해도 젊디나 젊은 과부가 간수하기로는 큰 집이고 큰 재산이었다. 그런데 젊은 과부는 이미 마음을 딴 데 팔고 있으니......
"시님, 요것 잠......"
뒤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공허는 멈칫하며 속생각을 털어냈다.
"아침 공양 되기 전에 요 꿀물얼......"
홍씨는 대청마루에 앉아 꿀물을 타며 공허가 어서 오르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시상언 어지럽고 농사철언 되고......"
공허는 타령하듯 하며 대청마루에 털퍽 걸터앉았다.
"여것 드시고 잠시 쉬시먼 금세 아침 공양 올리겄구만요."
홍씨는 공허 앞으로 사발을 밀어놓고는 부산하게 몸을 일으켰다. 공허는 진하게 타진 꿀물 한 사발을 단숨에 비웠다. 꿀물을 마시고 나자 기운이 생기기는커녕 온몸이 나른하게 처져 내리기 시작했다. 밤새껏 걸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이었다. 공허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졸음은 바람 탄 비구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공허는 졸음에 파묻히며 꾸벅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은 대청에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등에 깔린 바랑에서 목탁이 옆으로 불룩 튕겨졌다. 공허는 금방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음마, 숭해라."
밥상을 든 처녀가 뾰로통해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했다.
"입 조심허고, 얌전허니 시님얼 깨와라."
홍씨는 엄하게 일렀다.
"시님, 시님, 진지 잡숫시오. 얼렁 일어나 진지 잡숫시오."
밥상을 마루 끝에 놓은 처녀가 공허 옆으로 다가서며 야무지게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입을 해벌린 공허는 아무 반응 없이 코를 골아대고 있었다.
"시님, 시님, 얼렁 일어나 진지 잡수랑게라. 국 다 식는단 말이오."
공허 옆으로 바짝 다가선 처녀는 더욱 차고 맵게 소리쳤다.
"어엉?...... 머시여, 머시여......"
공허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잠이 흥건하게 젖은 흐리멍텅한 눈으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쿡! 큭큭큭......"
처녀가 터지는 웃음을 손으로 막으며 고개를 돌렸다.
"못된 것, 물러서라!"
홍씨가 처녀를 꾸짖었다. 그러나 홍씨는 처녀가 소리를 지르면서 토방 위에 놓인 공허의 발등을 짓밟아 비틀어버린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이고, 요거 죄송시럽구만이라. 잠 귀신이 어찌케나 찰지게 달라붙든지 간에......"
공허는 낯을 훔쳐대고 맨머리를 쓰다듬고 하며 면구스러워했다.
"다 장헌 일 허시니라고 고상이구만요. 찬이 변변찮은디 얼렁 진지럴......"
홍씨는 밥상을 공허 앞으로 약간 밀어놓았다. 공허는 밥상으로 다가앉으며 홍씨를 힐끔 쳐다보았다. 장한 일한다는 홍씨의 한마디가 이상하게 가슴을 찔러왔던 것이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홍씨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공허는 나직하게 헛기침을 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처음으로 똑바로 쳐다본 홍씨의 얼굴이었다. 여자를 흔히 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꽃으로 눈에 반짝 띄는 여자란 그다지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홍씨의 얼굴은 담박 꽃으로 여겨질 만큼 고운 편이었다.
"애기중 운봉헌티 송 장군 기신 디럴 알아도라고 허신 모냥인디, 거그가 만주 땅 통화라는 디구만요."
공허는 밥이 가득 찬 입으로 어물거렸다. 여자의 열기 서린 눈이 그 소식을 알아보고 싶어 했으리라고 생각했다.
"통화..... 시님언 언제 또 만주럴 가실라는 가요?"
여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소승이 헐 일이 거지반 다 끝났응게 언제 발길 허게 될란지 안직 모르겄구만요."
공허는 일부러 시치미를 떼며 밥만 정신없이 먹어댈 뿐 여자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여자의 글발 심부름쯤 못 해줄 것도 없었지만 정작 송대장이 달가워할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송 대장은 오로지 독립군을 일으키는 데만 몰두해 있었지 언제 한번 농으로라도 여색에 대해 입에 올린 일이 없었다.
"만주로 간 조선 사람덜언 어찌허고덜 사는 게라?"
"글씨요..... 물도 설코 낯도 선 타국잉게 조선 사람덜찌리 한 동네럴 맨듬서 살라고 애쓰고 있구만요."
"살 만은 허등가요?"
공허는 그만 가슴이 뜨끔해졌다. 여자가 만주로 떠날 생각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여자의 야무진 듯하기도 하고 고집스러운 듯하기도 한 인상이 그런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 싶었다.
"어디요, 죽지 못해 사는 것이제라. 농토넌 새로 맨들어야 허고, 긴 겨울은 여그보담 열 배는 더 춥고, 지옥이 따로 없구만이라."
"송 장군님언 쭉 혼자 지내시겄지요?"
공허는 가슴이 쿵 울렸다. 절에서 송 대장을 기어이 만났던 것도 여자 특유의 당돌함이 발동된 결과였다. 그 당돌함이 만주로 뻗치지 못하라는 법이 없었다. 홍씨는 자식도 시부모도 없는 몸에 재산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니구만요. 거그 형편이 자리가 쨉히는대로 식구덜이 옮겨가기로 되야 있구만요. 나라럴 되찾자먼 언제꺼지 거그 있어야 될란지 몰르는 디다가, 여그 사는 식구덜도 왜놈덜 등쌀에 날로 살기가 에로와지고 있응게요. 때가 오면 소승이 식구덜얼 옮길 작정이구만요."
공허는 얼렁뚱땅 거짓말을 꾸며댔다...... 공허는 밥을 떠넣으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는 홍씨를 훔쳐보고 있었다. 쌀밥 한 그릇을 달게 먹어치운 공허는 곧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더 할 이야기도 없었지만 표나게 실망하는 홍씨에게 미안스럽기도 했던 것이다.
"소승, 오다가다 더러 문안디려도 괜찮헐랑가요?"
대문을 나선 공허는 작별인사를 겸해 그저 인사치레를 했다.
"아매 곧 이사럴 허게 될 것이구만요."
그 뜻밖의 말에 공허는 홍씨를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 팔자 박복히서 사촌 시동상헌티 이 집얼 내주고 딴 동네로 떠야허게 생겼구만요."
공허는 그 물기 젖은 목소리의 말뜻을 금방 알아들었다. 제사 지낼 혈육을 갖지 못한 여자는 문중이 정한 양자에게 밀려 쫓겨나는 신세가 된 셈이었다. 제주를 낳지 못한 여자로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공허는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았다. 여자의 마음이 만주로 쏠렸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여자에게 엉뚱한 거짓말을 한 것이 더 미안해졌다. 그러나 그 거짓말을 바로잡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여자를 만주로 가게 하는 것은 송 대장의 일을 방해하는 것인 동시에 그 부인에게 죄짓는 일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송대장과는 바른 인연이 아니었다.
"언제 어디로 가시는디요?"
"요번 가실 끝내고 나서..... 어디로 갈란지넌 안직....."
여자의 논도 목소리도 눈물이었다. 공허의 가슴은 그만 찌르르 울리고 있었다. 여자가 더없이 측은하고 가여웠다. 그늘에 핀 한 송이꽃 같은가 하면 비 맞은 한 마리 새 같기도 했다.
"다 부처님 인연잉게 또 만내게 되겄지요. 처지가 옹색헐수록 상심허먼 안 되는구만요. 항시 부처님 염송허시먼 맘에 기둥이 슬 것잉마요. 나무관세음보살....."
공허는 합장을했다.
"시님..... "
합장하며 숙이는 여자의 얼굴에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공허는 짙은 어둠을 타고 신세호의 집으로 찾아들었다. 신세호는 의관을 차려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얼렁 밥상 내오니라."
신세호는 공허에게 묻지도 않고 안에다가 일렀다.
"아니구만요. 어둡기럴 기둘림서 주막서 미리 배불르게 묵었구만요."
공허는 신세호의 의관 차림을 보며 미리 밥을 먹고 오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참말이신가요? 자고로 중놈덜 공짜배기 좋아허기로 소문난 중에 체면 없고 비우짱 두껍기로 이놈이 질일 것인디요? 푸지게 배 채웠응게 얼렁 질이나 잡으시씨요."
공허의 걸쭉한 말에 신세호가 싱그레 웃으며 부채를 들고 일어났다. 두 사람은 전혀 말이 없이 어둠 속을 빨리 걸었다. 어둠 속에 서린 풀냄새가 풋풋했다. 가늘고 맑은 벌레 소리들도 여름을 알리고 있었다. 임병서는 향교 뒤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인사가 끝나자마자 임병서는 만주 이야기를 꺼냈다.
"신형한테서 만주 사정은 대충 건네 들었소이다. 어찌, 송형을 찾아가면 내 한 몸 의탁하면서 장래 일을 도모할 수 있겠소?"
공허는 임병서가 신변의 위협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음을 느꼈다.
"예, 돈이 궁해서 탈이제 돈만 있음사 피신이고 장래 도모고 여그 보담이야 편허고 낫겄지요."
공허는 상대방을 안심시키려고 느긋한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그러면 잘됐소. 나를 송형이 있는 데까지 안내를 좀 해주면 좋겠소."
공허는 그만 비위가 상하는 것을 느꼈다. 그 말투는 완연히 명령조였고 하대였다. 임병서는 인사를 나눌 때부터 거만기를 드러냈다. 양반이면 으레껏 피우게 마련인 거드름을 얼굴에 바르고 있었다. 송수익은 말할 것도 없었고 신세호한테서도 느낄 수 없는 인상이었다.
"예, 그것이야 벨로 에로울 것이 없는 일이구만요. 근디, 독립의군부가 의병으로 나서서 총질얼 허고, 왜놈덜얼 때래죽이고 헌 것도 아닌디 꼭 만주꺼정 피해야 헐 만치 왜놈덜이 씨게 몰아치고 어쩌고 허겄능가요?"
공허는 상대방의 면상을 박치기해 버리는 기분으로 말을 해치웠다.
"아니, 독립의군부를 어찌 보고 하는 소리요. 그건 상감에 대한 불령이오!"
임병서의 노기띤 외침이었다. 목소리에 걸맞게 화가 돋은 임병서의 얼굴이 촛불에 숨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무신 말씸이시다요?....."
공허는 어리둥절해서 임병서를 바라보았다. 느닷없이 상감을 들이대는 것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슨 말이냐니! 독립의군부가 어떤 연고로 생긴 줄이나 알고 말을 그리 함부로 하고 어쩌고 하는 거요? 독립의군부는 상감께오서 우리 병자, 찬 자 대장님께 밀명을 내리시어 결성하게 된 것이오. 또한 독립의군부는 그간에 상감마마의 뜻을 받들어 총독부를 상대로 국권반환 운동을 맹렬하게 전개하는 한편으로 전국 각지로 조직을 확대해 왔소. 따라서 독립의군부의 세력이 확대일로를 걷게 되자 결국 총독부에서는 두려움을 느끼고 간부들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조직을 파괴하는 탄압을 자행하기 시작한 것이오. 이런 독립의군부의 활동을 비하하는 것은 바로 상감께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오!"
임병서의 말은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공허로서는 독립의군부가 상감의 밀명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러나 공허는 그 사실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독립의군부가 상감의 밀명을 받았다고 해서 그 활동이 새삼스럽게 달라져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상감께 불경을 저질렀다는 자못 준엄한 지적도 이젠 아무런 죄목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독립의군부도 그간에 큰 일얼 해냈고, 총독부가 독립의 군부럴 없앨라는 것도 당연지사일 것이오. 인자 당면헌 일언 간부덜이 한 사람이라도 더 다치지 않게 허는 것 아니겄소."
딱히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신세호의 나직한 말이었다. 공허는 옆 볼에 닿는 눈길을 느끼며 고개를 약간 돌렸다. 신세호의 눈이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그 눈길은 무언가 만류의 뜻을 담고 있었다. 공허는 그 의미를 금방 알아차렸다. 그건 임병서와 말씨름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공허는 수긍의 뜻을 눈으로 나타내 보였다.
"그야 그렇구만요. 다 우국충정으로 나슨 분덜인디 다쳐서야 되간디요."
공허는 둥글둥글 넘어가기로 작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임병서와 말씨름을 해보았자 외다리도깨비와 씨름하기였던 것이다. 양반들이 허깨비가 된 임금을 떠받드는 그 요지부동의 생각은 밤새도록 넘어뜨려도 끝없이 일어나 앞을 가로막는다는 외다리도깨비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임병서 같은 사람은 왜놈들이 베풀어주는 혜택 속에서 땅이나 탐하는 숱한 양반들에 비하면 그래도 월등히 나은 편이었다. 신세호는 공허 모르게 임병서에게도 눈짓을 하고 있었다. 임병서는 신세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눈앞에 앉아 있는 중놈은 당돌하고 시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중놈이었다. 그러나 저것이 실실 동냥이나 다니면서 눈치 빠르게 과부를 덮쳐 재미나 보는 그런 막가는 땡초가 아니었다. 의병으로 나서서 목숨을 내걸었던 것이고, 지금까지도 송수익과 내왕을 하고 있는 보기 드문 위인이었다. 출신은 알 수 없으되 중놈으로서 그런 당돌한 생각을 갖고 있는건 보나마나 송수익의 영향일 것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것이 상감의 뜻은 아닐지라도 나라를 빼앗긴 이상 그 책임을 상감이 완전히 면할 길은 없었다. 송수익의 말마따나 을사오적을 대신으로 임명한 것은 바로 상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지주인 양반이 눈속임을 하는 아래 소작인들을 마음대로 취죄할 수는 있어도 상감께 불경을 저지르는 죄인을 다스릴 법은 없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천한 중눔과 논쟁을 해보았자 이쪽 체면만 깎이는 일이었고, 당장 중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위기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스님 말이 맞소. 의병이나 독립의군부나 도탄에 빠진 나라를 건지자는 뜻은 다 똑같소. 더구나 독립의군부의 간부 태반은 초기에 의병에 나섰던 분들이오. 허나 이제 형세가 여의치 못하게 됐으니 장소를 옮겨 일을 새롭게 도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단 말이오."
임병서는 공허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공허는 속으로 코웃음 치고 있었다.
‘초기에 의병에 나서? 뻔뻔허기가 쇠가죽 낯짝이시. 다 도망질헌 물건덜이!’
"새로 일얼 도모허지자면 송 장군님얼 만내보시는 것이 상책이겄제라이. 지가 송 장군님얼 찾어가시게 질얼 세세허니 일러 디리겄구만요."
공허는 슬쩍 발뺌을 했다. 양반 콧대나 과시하는 사람한테 하시를 당해 가며 길잡이 할 마음은 전혀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스님이 동행을 안 하겠다는 거요?"
임병서의 말투는 곱지가 않았다.
"동행얼 안 허겄다는 것이 아니구만요. 저어, 송장군님허고 의논헌 것인디, 지가 여그서 조급허니 꾸밀 일이 있어서 그렁마요. 허고, 통화라는 디가 만주 땅이기넌 해도 압록강서 엎어지먼 코 닿게 가차운 디다가 벨로 크도 넓도 안 해서 말만 세세허니 허먼 금세 찾아지능마요."
공허는 임병서의 기색은 모르는 척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사실 비밀조직을 만드는 일이 급하기도 했다.
"그 일이 대체 뭐요?"
임병서의 말투는 마치 같은 조직의 상급자가 따져 묻는 식이었다.
"글씨요..... 고것이 긍게..... 송 장군님이 은밀허니 허라고 당부허신 일이라..... 아조 중헌 일인디..... "
공허는 일부러 송수익을 팔아가며 살살 꼬리를 사리고 있었다.
"어허, 이런 놈에 일이 있나! 그래, 나를 못 믿겠다 그런 말이오?"
임병서는 벌컥 화를 냈다. 심한 모독감으로 화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공허 스님, 중헌 일일수록 입 무겁게 해감서 은밀허고 진중허니 해야 되겄지요. 허나 여그 있는 사람덜 맘이 송 장군 뜻이나 다를 것이 없응게 말어 해도 탈이 없을 것이고, 또 말얼 듣고 보면 서로 돕게 될란지도 모르니 말얼 허는 것이 어쩌겄소."
신세호가 또 다리를 놓고 들었다.
"글씨요, 그 말씸도 맞는 말씸이기넌 헌디요이."
공허는 짭짭 입맛을 다시며 뭉그적거리고는,
"거 머시냐, 무당이 굿얼 허자도 떡이 있어야 허고, 소가 등얼 비비자도 둔덕이 있어야 하는 거시 아니겄는 게라. 같은 이치로 만주서새 일얼 도모허자도 맨손으로야 될 일이 아무것도 없구만요. 폐일언허고 자금이 있어야 허는디, 그 자금얼 구헐 조직얼 은밀허니 짜야 되는구만요."
그는 신세호와 임병서를 번갈아 보았다.
"자금조달을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한다 그 말이오?"
임병서의 빠른 반응이었다.
"그렇구만이라."
"그것참 좋은 생각이오. 마침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내가 소개를 하면 어떻겠소?"
임병서가 반색을 하며 하는 말이었다. 그 뜻밖의 말에 공허는 다소 당황하고 멋쩍어졌다. 그리고 임병서라는 사람이 금방 달라져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있으먼 좋고 말고라."
공허는 마음이 벽을 허물어내며 흔쾌하게 대답했다.
"그거 잘됐소. 내가 곧 소개하기로 하겠소. 그 사람도 독립의군부에 속해 있던 사람인데, 이번 검거를 당하게 되면서 생각을 달리 먹게 된 사람이오. 왜놈들에게 맞서자면 공개된 조직이 아니라 비밀조직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오. 틀림없이 믿을 만한 사람이니 함께 손을 잡으면 실효가 클 것이오."
임병서는 자기 일은 잊어버린 듯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러면..... 그 사람언 비밀결사럴 조직해서 왜놈덜허고 싸우겄다는 것인가?"
신세호가 의아하게 물었다.
"글쎄, 조직이 비밀결사니까 싸워도 내놓고 총질이야 하겠는가. 일을 어찌 해나갈 것인지 소상하게 알 수는 없어도 비밀리에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걸세. 어찌 됐거나 그런 비밀조직이 필요할 때가 되었네."
신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허에게 눈길을 돌렸다.
"공허 스님, 이만허먼 말 본전은 찾으신 것 같으니, 임형 일언 어쩌실랑가요?"
"아이고 본전이 아니라 이문얼 툭툭허니 봤구만요. 임 선생님이야 지가 당연허니 뫼셔다 디려야지라."
공허는 뒷머리를 긁으며 비식비식 웃음을 흘렸다.
"참 인심사납소. 나 혼자 찾아갈 것이니 세세허니 일러만 주시오."
임병서가 화가 난 척 것질렀다.
"허, 송 장군님이 노허시라고요?"
공허가 손을 내저었다. 그들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음 짓고 있었다.
4. 오누이
"따다다탕! 아부지이!"
어둠 속에서 졸고 있던 옥녀는 아버지를 외치며 화들짝 놀라 자이 깼다. 밤마다 꾸는 똑같은 꿈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당산나무에 묶인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어머니도 오빠도 자신도 일본사람들에게 붙들렸다. 식구들은 당산나무 밖으로 사정없이 끌려갔다. 모두 발버둥을 쳐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무 아래 동네 사람들은 많고 많았다. 그러나 아무도 대들어 말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총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목이 터지라고 아버지를 불렀다. 언제나 꿈은 여기서 끝났다. 한꺼번에 울리는 총소리들은 숨 막히고 가위눌렸다. 너무 무서워 아버지를 목 터지게 부를 수밖에 없었다. 꿈을 꿀 때마다 아버지를 부르는 자신의 소리에 놀라 소스라쳐 잠이 깨고는 했다. 옥녀는 언제나처럼 벌떡거리는 가슴을 왼손으로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허둥지둥 방바닥을 더듬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빠, 오빠, 일어나소! 엄니가 또 나갔네, 얼렁 일어나."
옥녀는 뒤로 돌아앉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오빠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오빠아, 얼렁 일어나랑께! 엄니가 또 나갔단 말이여어."
옥녀는 오빠의 몸이 잡히는 대로 힘껏 꼬집어 비틀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잠이 깨지 않는 오빠였다.
"아야아야, 어째 염병이여!"
득보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염병언 무신 염병! 엄니가 또 나갔응게 정신 채리란 말이시."
옥녀의 목소리에는 그만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머시여, 엄니가 또!"
득보는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얼렁 엄니 찾으로 나가세."
옥녀는 오빠의 팔을 붙들었다.
"아이고,엄니넌 어찌 그리 정신얼 못 채리는지 모르겄다. 인자 또 어디로 찾으로 간다냐."
득보는 짜증스럽게 눈을 부비댔다.
"오빠는 엄니가 불쌍허지도 안 헌가."
"니또 그 소리여! 그 소리 다시넌 허지 말라고 혔잖여."
득보는 누이동생이 붙들고 있는 팔을 내치며 빠락 소리 질렀다.
"알어, 알어. 나가 잘못혔네."
옥녀는 금방 오빠의 비위를 맞추고 들었다. 오빠가 짜증을 부리는 것이 서운해서 저절로 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오빠가 화내는 것을 막으려면 잘못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믿을 사람은 오빠밖에 없으니까 어쨌거나 오빠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오빠는 그까짓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음대로 놀리기도 했고 화를 질러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때리려고 덤벼들면 아버지 뒤로 숨어버렸다. 아버지는 오빠를 제때제때 막아주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총살을 당하고 어머니마저 실성을 해버리자 오빠는 금방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나이도 키도 똑같은데 갑자기 집안의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오빠는 아버지가 농사를 지어 집안 식구들을 먹여 살렸던 것처럼 어머니와 자신을 먹여 살리는 일부터 했다. 열 살인 오빠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으니까 끼니마다 바가지를 들고 밥을 얻으러 다녔다. 오빠는 그 일을 창피해하지 않았다. 그런 오빠가 마치도 아버지처럼 든든하게 여겨졌다. 오빠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처럼 간지럼 태우며 장난을 걸지도 않았고, 재미나는 이야기도 해주지 않은 채 실성한 어머니를 지키고 있었다.
"가보자, 당산나무 아래보톰."
득보는 누이동생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옥녀는 손을 잡아주는 오빠한테 고마움을 느끼며 말없이 따라나섰다. 바깥은 방보다 어둡지 않았다. 마당에는 흐린 달빛이 깔려 있었다. 하늘가에 반달이 비스듬하게 걸려있었다. 달빛을 밟고 마당을 가로지르며 옥녀는 오빠의 손을 더 꼭 잡았다. 밤에 당산나무 아래로 간다는 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아버지가 총살당한 다음부터는 낮에도 당산나무 아래로 가는 것이 무섬증이 들었다. 동네 아이들도 당산나무 아래서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무리 불쌍해도 오빠가 없으면 혼자서 어머니를 찾으러 당산나무 아래로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옥녀는 불현듯 꿈 생각이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옥녀는 꿈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망설였다. 오빠한테 꿈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무섬증이 덜할 것도 같았다. 그러나 입을 열지 않기로 마음을 공글렸다. 해가 뜨기 전에 꿈 이야기를 하면 액이 낀다고 했다. 할머니나 어머니한테 어려서부터 들은 말이었다. 그리고 오빠는 그날 일어난 일을 다시는 듣기 싫어했다. 언젠가 꿈 이야기를 꺼냈다가 이야기를 미처 다 하지도 못하고 아주 혼난 일이 있었다.
"오빠넌 꿈 안 꾼가? 나넌 밤마동 꿈얼 꾸는디."
"무신 꿈?"
"그날 당산나무....."
"시끄러, 시끄럿!"
오빠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 질러댔다. 한마디만 더 하면 곧 두들겨 팰 것 같은 무서운 기세였다. 그렇게 화가 난 오빠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화가 나지 않았을 때도 오빠의 주먹맛은 맵기가 고춧가루 맛인데 화가 났으니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꼼짝을 못 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옥녀는 오빠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느라고 숨이 가빴다. 오빠는 잠을 깨며 짜증을 부릴 때와는 달리 집을 나서기만 하면 언제나 그렇게 빨리 걸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어머니를 빨리 찾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었다. 밤이 깊어 사방은 너무나 조용했다. 초저녁에 와글와글 바글바글 울어 대던 개구리들도 잠이 든 모양이었고, 푸르스름한 등을 켜고 어지럽게 날아다니던 반딧불들도 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가끔 모깃소리만 에에엥 울리며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득보는 급한 마음 같아서는 어머니를 소리쳐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이 싫어할까 봐서 그러지를 못했다. 동네 사람들은 실성한 어머니를 딱하고 불쌍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가까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히물히물 웃다가 느닷없이 소리 지르며 덤벼들고는 했던 것이다. 어머니 눈에는 동네 사람들이 그날의 왜놈들로 잘못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동네 사람들은 모두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끼니때마다 어느 집에서나 눈치 하지 않고 밥을 보태주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은 돈을 추렴해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좋은 세상으로 가라고 당산나무 아래서 무당굿을 해주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실성을 하게 되자 의원에게 데려갔고, 또 굿을 해주었다. 아버지의 혼을 달래서 극락으로 보내고, 악독한 왜놈들 허수아비를 불태우는 굿을 했지만 어머니는 정신을 되잡지 못했다. 그때 어머니가 제정신을 찾게 해달라고 손바닥이 뜨겁게 빌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가 총살당하고, 논도 빼앗기고, 어머니도 실성을 해버려 당장 굶어 죽을 형편이었다. 하루를 꼬박 굶었다. 실성한 어머니는 호박잎이고 뭐고 닥치는 대로 뜯어 먹었다. 누이동생은 물만 마시다가 쓰러졌다. 더 창피한 생각만 할 수가 없었다. 바가지를 들고 옆집부터 찾아갔다.
"아이고, 금쪽 겉은 아덜 자석 꼴이 하로아칙에 요것이 머시다냐."
아주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밥덩이를 바가지에 담아주었다.
‘다 왜놈덜이 이리 맨들었제라.’
쏟아지려는 눈물을 이를 악물어 참으며 이렇게 속 대답을 했다.
"어쩌끄나, 요것이 무신 일이다냐. 느그가 무신 죄가 있다고 요리 험헌 팔자가 되았다냐."
다른 아주머니도 울상이 되며 얼른 밥을 가지고 나왔다.
‘다 왜놈덜이 이리 맨들었제라.’
슬픔과 창피스러움을 참아내며 또 똑같은 대답을 속으로 씹었다. 밥은 집집마다 차례로 얻으러 다녔다. 그러나 이장 집이나 지주 총대 집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왜놈들과 함께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이었다. 아이들도 밥을 얻으러 다니는 자신을 놀리지 않았다. 그리고 실성한 어머니를 놀리지도 않았다. 아이들도 그날 당산나무 아래로 끌려나가 아버지가 당하는 것을 다 본 탓일 것이었다. 누이동생 옥녀는 생각할수록 가엾었다. 일곱 살밖에 안 먹은 것이 어머니가 실성한 다음부터 어른 노릇을 해내야 했다.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와야 했고, 빨래도 했고, 자신이 밥을 얻어오면 밥상을 차려야 했다. 빼빼 마른 누이동생이 그런 고생을 하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속마음으로는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일들을 도와주었다가는 아이들에게 영락없이 놀림을 당할 것만 같았다. 그런 것들은 여자가 할 일이었지 남자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할머니나 어머니는 남자가 부엌에 드나들거나 우물가에 가면 불알이 졸아든다고 꽤나 자주 말하고는 했다. 누이동생의 고생을 덜어주는 것도 좋았지만 불알이 졸아드는 일을 한다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기도 했다. 이래저래 누이동생은 고생이었다.
큰길로 나서자 곧바로 당산나무가 나타났다. 당산나무의 울창하고 큰 숲은 흐린 달빛 속에서 검게 보였다. 누이동생이 손을 더 꼭 잡으며 바짝 붙어섰다. 득보는 누이동생의 손을 꼭 마주 잡아주었다. 옥녀가 당산나무 아래 가는 것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거기 가는 것은 너무 무섭고 싫었다. 그러나 누이동생 옥녀를 생각해서 생침을 삼켜가며 가까스로 참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찾으려면 어쩌는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밤이 깊어지면 꼭 집을 뛰쳐나갔다. 누이동생과 자신이 깜빡 잠이 든 틈을 타 집을 나간 어머니는 으레껏 당산나무를 찾아갔다. 사람들 말로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혼백이 어머니를 부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당산나무만 찾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당산나무를 끌어안고 꺼이꺼이 울기도 하고 키들키들 웃기도 하다가 여기저기 다른 곳을 헤매다니기도 했다. 득보는 뛰듯이 걸음을 빨리했다. 당산나무가 가까워졌는데도 사람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득보는 그만 겁이 났다. 너무 늦게 나와 어머니가 딴 곳으로 가버렸는지도 몰랐다.
"엄니, 엄니이!"
마음이 급해 득보는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는 그 누구의 말도 안 들었지만 자신의 말은 곧잘 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실성은 했어도 핏줄은 땅기는 모양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당산나무 아래 없었다.
"인자 으쩌까!"
옥녀의 목소리가 울음이었다. 득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는 또 아버지의 묘를 찾아갔기가 쉬웠다. 전에도 아버지 묘 앞에 쓰러져 있는 어머니를 날이 밝아 데려온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당산나무를 거쳐 찾아가는 데는 아버지 묘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엉뚱한 곳에서 찾아온 것도 한두 변이 아니었다. 득보는 울고 싶도록 답답했다. 어머니가 틀림없이 아버지 묘를 찾아갔다 하더라도 거기까지 갈 용기는 없었다. 거기는 무서워서 도저히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길도 멀었고 귀신들이 우글거린다는 묘지가 많은 산이었다.
"그냥 가자, 집으로."
득보는 축 처진 소리로 말했다.
"엄니..... 엄니이....."
옥녀가 걸음을 떼어놓으며 흐느꼈다. ‘뜸북 뜨뜸북 뜸북’ 멀리서 뜸부기 소리가 약간 슬픈 듯한 가락으로 들려왔다. 더 기울어진 반달이 무성한 당산나무 잎사귀들 사이사이로 조각나 있었다.
"울지 말어. 곧 날 밝을려."
득보는 옥녀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득보는 지금 총소리를 듣고 있었다. 낮이나 밤이나 당산나무 아래에 오기만 하면 들리는 총소리였다. 누이동생을 달래기보다는 그 끔찍스러운 총소리를 지우려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옥녀는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아버지의 묘로 가자고 오빠를 조르고 싶었다. 그러나 밤에는 어른들도 가기를 무서워한 다른 곳이었다. 막상 오빠가 가자고 해도 무서워서 갈 수가 없었다.
"아부지, 인자 엄니럴 정신들게 해주씨요. 우리가 불쌍허덜 않으요."
옥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다. 득보는 어머니가 집에 돌아와 있기를 고대했다. 당산나무를 찾아와 헛걸음을 하고 돌아설 때마다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바람은 번번이 빗나가고 말았다. 역시 텅 빈 집은 흐린 달빛이 지키고 있었다. 득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니 자그라. 나가 지킬 것잉게."
득보는 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아니여, 오빠가 자소. 나가 지킬라네."
헛걸음질을 하고 돌아와서는 언제나 똑같이 되풀이하는 말이었다. 득보와 옥녀는 마주 보고 벽에 기대앉았다. 행여나 어머니가 돌아올지 몰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닭이 울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닭이 울면 곧바로 아버지의 묘로 가야 했다. 득보는 또 앞일을 생각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 정신이 안 돌아올 것인가. 평생 정신이 안 돌아오면 어찌 될 것인가. 이제 밥을 얻으러 다니기도 낯이 없었다. 아직 싫은 기색을 하는 아주머니들은 없었지만 자꾸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다섯 살만 더 먹었더라도, 아니 세 살만 더 먹었더라도 좋을 것 같았다. 열세 살만 되었더라도 어느 집에 꼴 머슴살이는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밥을 얻어먹지 않고도 어찌어찌 살아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열세 살이 되자면 설을 세 번이나 더 쇠어야 했다. 그동안에 줄곧 밥을 얻어먹으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밥을 얻어먹을 수 없으면 어떻게 되나. 동네를 떠나서 정말 거렁뱅이가 되어야 하나.....득보의 생각은 여기서 막혔다. 실성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데리고 비렁뱅이가 되어 여기저기 떠돌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컥 막히고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그전에 거지 아이들을 보면 무턱대고 놀려먹고 돌을 던지고는 했었다. 그때 그 아이들은 나면서부터 거지인 줄 알았다. 집안이 망하면 어떤 아이들이나 거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옥녀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득보는 누이동생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누워서 자게 하고 싶었지만 그대로 두었다. 어머니가 돌아오기 전에는 누워서 잘 누이동생이 아니었다. 괜히 잠만 깨우고 싶지 않았다. 누이동생은 고집이 센 편이라서 자신과 곧잘 싸우기도 했다. 한 대만 얻어맞으면 누이동생은 그 쨍쨍한 목소리로 마구 울어대며 아버지를 찾았다. 그렇게 되면 야단을 맞는 건 보나 마나 자신이었다. 아버지는 누이동생을 무척이나 예뻐했고, 그 대신 어머니는 자신을 제일로 쳤다. 아버지가 누이동생을 유독 예뻐하는 데는 까닭이 있었다. 누이동생은 노래를 표나게 잘했던 것이다. 그건 아버지 내림이었다. 아버지의 육자배기 가락은 소문이 나 있었다. 땡볕 속에서 논일을 할 때 막걸리 한잔 보다도 아버지의 육자배기 한 가락이 더 낫다고들 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신은 노래 솜씨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누이동생을 감싸고 도는 것을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가시내가 목청 좋아 졸 것이 머시가 있소. 팔자 사나우라고."
어머니는 누이동생이 노래 잘하는 것을 영 마땅찮아 했다.
"어허, 무신 소리여. 나가 재주가 모지래 한 말이 못 되고 닷 되라 명창이 못된 것이 한인디. 우리 옥녀 재주가 한 말이 빨딱 넘어 시상 뜨르르허게 허는 명창이 됨사 이 애비 한 풀어주는 것이제."
아버지는 누이동생을 무릎에 앉히고 이렇게 역성을 들었다.
"하이고, 꿈도 오지게 커서 덕유산 지리산 다 말아묵겄소. 닷 되짜리 애비 재주 타고난 년이무신 수로 한 말 재주럴 빨딱 넘겄소. 지까진 년이 기껏 돼봐야 두되 가웃이제."
"저, 저, 예펜네 주딩이 허고넌!"
어머니는 이 대목에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무슨 말을 더 했다가는 아버지의 성미가 터져 오를 판이었다. 어떤 일에나 아버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면 화가 치밀고 있다는 표시였다. 동네에 소리꾼이나 놀이패가 들면 아버지는 꼭 옥녀를 데리고 구경을 나섰다. 옥녀도 노래 구경이야 하면 신바람이 났다. 옥녀는 정말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재주가 한 말을 빠딱 넘는지도 몰랐다. 한번 구경을 하고 오면 무슨 소리고, 노래고 흉내를 잘도 냈다. 자신도 옥녀의 곱고 구성진 노랫소리를 들을 때면 누이동생이 자랑스럽고 마음이 느긋했다. 옥녀는 고개를 꾸뻑 떨구었다가 몸을 바로잡고 하면서 세상모르고 졸고 있었다. 득보는 누이동생한테서 눈길을 돌리며 눈물을 삼켰다. 실성한 어머니를 자신이 붙들고, 바가지를 든 옥녀가 노랫가락 아닌 장타령을 불러대는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던 것이다. 득보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기운이 없고 눈이 씀벅거려 머리를 벽에 기댔다. 그때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오, 오빠, 가세!"
옥녀가 화들짝 놀라 몸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언제 졸았냐 싶게 그 목소리는 또렷하고 맑았다.
"쬐깨 더 자제 그러냐."
득보는 느리게 눈을 떴다.
"얼렁 일어나소. 엄니 기둘린디."
옥녀는 벌써 방을 나서고 있었다. 득보는 모래가 든 것 같은 눈을 비비며 누이동생의 뒤를 따랐다. 흐린 달빛은 사라지고 있었다. 아직 어둠 살이 남아있는 사방에는 안개 기운이 자욱하게 서려 있었다. 장닭들은 여기저기서 목청을 뽑아대고 있었다. 옥녀는 오빠가 따라오거나 말거나 앞장서서 사립을 나섰다. 닭이 울면 귀신들이 다 도망간다고 했다. 아직 어둑어둑했지만 귀신들이 없어진 그까짓 어둠쯤 이제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조금만 있으면 사람들도 오갈 것이었다. 옥녀와 득보는 다투듯 빨리 걸었다. 금방 마을을 벗어나 아버지의 산소 쪽으로 길을 잡았다. 동녘 하늘이 희번하게 열리고 있었다. 어둠 살이 가셔져 가면서 자욱한 안개 밭이 드러났다. 안개가 어찌나 짙고 두껍게 끼었는지 풀잎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옥녀는 종아리를 넘어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안개를 헤치며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득보는 마음이 급하면서도 누이동생을 앞서지 않았다. 고집이 센 데다가 샘도 많은 옥녀를 생각해서였다. 한없이 넓은 안개에 묻힌 옥녀의 키는 더 작아 보였다. 누이동생의 그 모습이 슬퍼 보였다. 득보는 또 안개가 슬픔처럼 그리고 한숨처럼 느껴졌다. 안개를 헤치고 어머니를 찾아다니게 되면서 그런 생각이 들게 되었다. 험상궂은 얼굴을 한 장승이 서 있는 마을을 지나고 개울을 두 개나 건너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산에 이르렀다. 누이동생은 뛰기 시작했다. 득보는 뛰어가기가 겁이 났다. 어머니가 여기 없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앞을 막았다. 그러나 다리가 먼저 뛰기 시작했다.
"엄니, 엄니!"
옥녀는 숨을 할딱거리며 다급하게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엄니이, 엄니이....."
득보도 힘껏 목청을 돋웠다. 아버지의 산소에는 안개가 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엄니가 없네. 엄니이....."
옥녀는 쓰러지듯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맥이 빠진 득보는 누이동생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아래 입술을 안으로 당겨서 꼭 물고 있는 입언저리에는 울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누이동생의 헐어빠진 짚신이며 다리가 이슬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누이동생의 짚신이 헐거워지도록 낡은 법이 없었다.
"가자, 해가 뜨면 오시겄제. 가서 밥 얻어다 놔야제. 엄니 배고픈디."
득보는 울고 있는 누이동생을 감싸 안았다. 누이동생은 어깨를 들먹이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더 가볼 데가 없었고, 밥 때가 지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멀고 팍팍했다. 득보는 누이동생의 손을 잡고 걸었다. 밥을 얻어왔는데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해가 뜨고 안개가 다 걷혔는데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니 밥 묵어라. 배고픈디."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앉아 누이동생은 사립 쪽에 눈을 박은 채 도리질을 했다. 벌써 두 번째 하는 말이었지만 옥녀의 고집이 꺾일 리 없었다. 그리고, 꼭 옥녀에게 밥을 먹이려고 하는 말도 아니었다. 어머니가 걱정되는 마음을 덜려다 보니 그저 나오는 소리였다. 들로 일 나가는 어른들이 사립 앞을 지나가고,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고샅에서 왁자하게 되었는데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엄니이..... 엄니이..... "
기다리다 지친 옥녀가 삐질삐질 울기 시작했다. 득보는 또 몇 번째인가 뒷간으로 갔다. 꽁꽁 힘을 썼지만 오줌은 서너 방울 떨어지고 말았다.
"야덜아, 느그 집에 있었구나. 얼렁 나서라, 얼렁. 느그 엄니 탈났다."
어떤 아주머니가 마당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울엄니가 어찌 됐간디요? 시방 어디 있는디요?"
득보는 정신없이 물었다.
"묻고 자시고 헐 것 없다. 가보먼 안께 얼렁 가기나 허자."
아주머니는 어서 가자고 팔을 내저으며 허둥지둥 사립을 나갔다. 옥녀는 짚신을 질질 끌며 벌써 아주머니 뒤를 쫓고 있었다. 득보는 더 물어볼 생각을 못 하고 바지를 추켜올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벌떡벌떡 뛰고 눈앞에 노란 별똥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아버지의 산소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야산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옥녀는 숨을 할딱거리면서 걸음이 뒤처졌다. 득보는 누이동생을 붙들고 걸으며 땀을 자꾸 훔쳐냈다.
"느그 놀래덜 말어라 이. 알겄냐?"
비탈을 오르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돌아서며 둘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줌니, 울 엄니가 죽었제라!"
옥녀가 느닷없이 내쏜 말이었다.
"아이고메 숭헌 것. 가보먼 안다."
아주머니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얼른 돌아섰다. 옥녀가 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득보는 눈앞이 노래지며 숨이 막혔다. 옥녀의 말은 바로 자신의 머릿속에 꽉차 있었던 말이었다. 어머니는 그 야산자락의 조그만 저수지 가에 거적으로 덮여 있었다. 뻣뻣한 어머니를 붙들고 몸부림치던 옥녀는 하얗게 까무러치고 말았다.
"옥녀야, 옥녀야!"
눈물이 범벅 된 득보는 누이동생을 끌어안으며 울부짖었다.
"어찌 여그넌 왔으꼬? 서방 묏등 찾어간다는 것이 질얼 잘못 들었겄제라."
"그까? 서방이 이리 불러 딜여간 것아닐랑가?"
"그럴란 지도 몰르제. 그나저나 뱃속에 든 것이 안됐구마. 배가 뽀속허니 불른 것 봉게로 예닐곱 달언 됐든디. 예닐곱 달이먼 차서방 씨인 것이야 영축없는디, 그것이 유복자로 태어났으먼 또 어찌 되았겄소."
"허기넌 그러요. 그나저나 저 에린 것덜 둘이가 탈 아니요."
"어쩌겄소, 다 팔잔디. 산 목심잉게 어찌어찌 살아지덜 안 컸소."
동네 사람 네댓 명이 혀를 차고 한숨을 쉬어가며 침통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묻혔다. 장례가 끝나자 옥녀는 그날 밤으로 앓기 시작했다. 몸은 손을 대기가 무섭게 뜨거웠고, 질정없이 헛소리를 해댔다. 득보는 누이동생마저 어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몸이 달고 애가 타서 이집 저집을 찾아다녔다. 이런저런 약을 얻어다 먹이고, 식은 보리밥을 다시 끓여 죽을 만들어 먹이고는 했다. 누이동생은 닷새를 넘게 앓고 가까스로 기운을 차렸다. 그런데 옥녀는 그전과는 표가 달라지게 되었다. 조잘거리던 말도 없어졌고, 방싯거리던 웃음도 없어졌다. 슬픔이 가득 찬 얼굴로 먼 데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는 가끔 입속에서 울리는 소리로 노랫가락을 풀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소리는 상여소리보다도 더 슬프고 서러운 가락이었다. 그리고 밤에 잠을 잘 때는 꼭 손을 잡자고 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불쑥 이런 소리도 했다.
"오빠, 나 내빌고 혼자 도망가지 말어."
"무신생뚱헌 소리여?"
"꿈에 나 내빌고 도망갔단 말여."
슬픈 기에 젖어 있던 옥녀의 눈에는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 찼다.
"아이고 반편아, 그건 개꿈이여, 개꿈. 니랑 나랑언 평상 꼭 붙어살 것이여."
"참말로?"
"하먼, 참말이제."
옥녀는 와락 안겨왔다. 득보는 누이동생을 꼭꼭 보듬었다. 쏟아지려는 눈물을 삼키느라 목이 메었다. 득보는 날이 갈수록 끼니때가 되는 것이 걱정스러워졌다. 바가지를 들고 나서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이었다. 먼저 달라진 것은 아이들의 눈치였다. 아이들은 눈을 흘기거나 입을 삐죽이는 것으로 싫은 기색을 나타냈다. 저희들도 배불리 못 먹는데 밥이 축나는 것이 좋을 리 없었다. 아주머니들 입에서도 어머니 걱정이 없어졌고, 그저 덤덤하게 밥덩이를 보태줄 뿐이었다. 눈치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득보는 언제까지 얻어먹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발길은 더 내키지 않아 하루에 한 끼만 돌게 되었다. 그렇다고 옆 동네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 되면 영락없는 거지였던 것이다.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살 수는 없었다. 핏기없이 말라가는 누이동생이 가엾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친했던 어른들을 찾아다녔다.
"아서라, 니가살인디 넘 집얼 살겄냐. 붕알 더 영글 때꺼정 그냥저냥 얻어묵음서 살어라. 쬐깐헌 것이 생각이야 여물다만 그 새다리로 무신 꼼머심이나 허겄냐. 밥만 죽인다고 받을 집 없제. 한 입이 아니라 두 입이라 중살이럴 가자도 못 갈 판인디 넘 집살이럴 어찌 가겄냐. 그냥 그대로 지내봐라."
아무도 살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겨우 하루에 한 끼만을 먹게 되자 옥녀는 시래기처럼 마르고 비틀려 갔다. 그전 같았으면 앙탈에다 성화가 요란했을 옥녀는 슬픈 가락을 기운 없이 읊조릴 뿐 배고프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 누이동생을 지켜보며 득보는 걱정이 심해지고 있었다. 겨우 그렇게 풀칠을 해가다가 자기도 누이동생도 끝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득보는 뼈가 앙상한 손을 부르쥐었다. 그렇게 시들시들 말라죽을 수는 없었다. 피떡칠이 된 아버지의 시체가 선하게 떠올랐다. 물에 젖어 눈을 뻔히 뜨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러나 자신의 주먹은 너무나 작았다. 말라 죽지 않고 주먹을 돌덩이처럼 단단하고 크게 만들려면 끼니마다 밥을 먹어야 했다. 끼니마다 밥을 먹으려면 다른 동네로 밥을 얻으러 다녀야 했다. 득보는 마침내 다른 동네로 밥을 얻으러 다니기로 결심했다. 그건 진짜배기 비렁뱅이로 나서는 길이었다. 당장 창피스러운 일이었지만 누가 뭐라고 놀려대도 창피를 먹지 않기로 작정했다. 피떡칠된 아버지가 꿈에서 상아나 이르고 있었다.
"이 애비 원수럴 갚아라!"
어머니가 물에서 걸어나오며 다짐하고 있었다.
"니가 옥녀럴 잘 거둬야헌다. 알겄지야."
창피해해서는 아버지 어머니의 뜻을 따를 수가 없었다. 그런 못난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의 말대로 불알을 달고 세상에 나왔으면 불알 값을 톡톡히 하고 싶었다. 득보는 누이동생옥녀 모르게 다른 마을로 밥을 얻으러 나갔다. 그런데 데꺽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남의 집 사립 앞에 그냥 서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밥을 좀 달라는 말을 해야 했던 것이다. 얼굴을 다 아는 자기 동네에서는 필요가 없었던 말이었다. 거렁뱅이들이 흔히 하는 <밥 한술 주웁쇼>라거나 <묵다 남은 밥 한뎅이 보태주웁쇼>를 외쳐야만 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너무나 하기가 어려웠다. 마음과는 달리 목구멍에 꽉 걸려 나오지를 않았다. 거렁뱅이들을 놀려먹으면서, 아이들과 거렁뱅이 흉내 놀이를 하면서 놀 때는 거침없이 뽑아댔던 가락이었다. 그런데 정작 바가지를 들고 나서자 목구멍은 딱 막히고 말았다. 낯설은 동네인 데다가 밥 좀 달라는 말까지 못 하게 되자 밥 얻기가 무척 어려웠다. 서너 집을 거쳐야 한 집에서 얻을까 말까였다. 거렁뱅이들은 으레껏 사립을 들어서며 <밥 한술 주웁쇼>를 가락 넣어 척 뽑아대면서 꾸벅 절을 하고, 아무 기미가 없으면 좀 더 큰소리로 한마디를 보태고, 그래도 기미가 냉랭하면 바가지를 손바닥으로 쳐대며 장타령을 걸찍하게 풀어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득보는 엉덩이를 뒤로 뺀 채 목만 길게 늘여 사립 안을 기웃기웃하다가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저어......저어......>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밥 다 묵고치웠다. 없어, 우리 묵을 밥도 모지랜다."
이런 차가운 말 앞에서 득보는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다른 동냥아치 같았으면 그때부터 장타령을 한바탕 늘어놓아야 할 판이었다.
"이, 니가 첨 나슨 모냥이구나. 쯧쯧쯧, 니가 무신 일로 쪽박 신세가 되았는갑구나."
이런 살가운 말과 함께 밥을 보태주는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득보는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그건 고마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냉정한 말을 듣고 애써 참아냈던 무참함이 마침내 서러움으로 사무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갑게 내치는 말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같은 또래 아이들의 놀림이었다. ‘거지 거지 땅거지 미나리밭에 거머리’ 아이들이 뽑아대는 노랫가락이었다. 그럴 때면 득보는 이를 앙다물고 땅바닥만 보며 걸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아니여, 아니여, 나넌 그지가 아니여. 거렁뱅이가 아니여. 왜놈덜이 느그덜 아부지럴 죽이먼 느그덜도 벨수 없어.’ 그러나 득보는 이 동네 저 동네로 부지런히 밥을 얻으러 다녔다. 아무리 창피스럽고 무참한 일을 당하더라도 누이동생을 굶기지 않게 된 것으로 그런 것은 다 참고 이겨낼 수 있었다.
"옥녀야, 얼렁얼렁 많이 묵어."
득보는 언제나 누이동생 앞으로 바가지를 바짝 밀어놓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상을 차리지 않고 그냥 바가지째로 밥을 퍼먹었다. 그러자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
"아니여, 오빠 많이 묵어."
옥녀는 오빠 앞으로 바가지를 밀어놓았다.
"나넌 밥 얻으로 댕김서 많이 묵었어."
득보는 다시 옥녀 앞으로 바가지를 밀었다.
"오빠, 나도 오빠허고 댕길라네."
"무신 소리여! 니넌 안돼야."
"나 심심해서 그런디."
"금메, 니넌 안 된다니께."
득보는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득보는 옥녀의 마음을 다 알았다. 집에 혼자 있기가 심심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슬쩍 꾸민 거짓말이었다. 저도 힘을 보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이동생까지 무참한 꼴을 당하고 놀림을 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날도 득보는 아침밥을 얻어가지고 잰걸음을 치고 있었다. 당산나무를 지나 마을 어귀를 벗어나려고 할 즈음이었다. 둔덕 아래 잡풀 우거진 속에서 두 아이가 불쑥 모습을 나타내며 소리쳤다.
"야 이 쥐좆만헌 새끼야, 거그 서!"
득보는 깜짝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를 우물거리며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두 아이는 얼굴에 때가 덕지덕지 끼고 옷을 누덕누덕 기워입은 진짜배기 거지였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보다 서너 살씩은 더 먹어 보였다. 득보는 자신도 모르게 밥 바가지를 뒤로 감추었다.
"요런 콩알만헌 새끼야, 개씹에 보리알 끼대끼 누구 맘대로 넘 땅에 끼들고 지랄이냐!"
이마 툭 불거진 아이가 눈을 부라리며 내쏘았다.
"야이 니기미 씨펄눔아, 누구 허락받고 그리 시건방구지게 놀아나냐!"
벌렁코 아이가 침을 내뱉으며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니 땅 내 땅이 어딨어."
득보는 바가지를 단단히 잡으며 맞쏘았다. 그들이 덤벼들면 내뛸 참이었다.
"햐! 요런 느자구 없는 새끼 주딩이 놀리는 것 보소. 니 그 여물통 곱게 바치고 물팍 끓고 앉어."
이마 불거진 아이가 손짓을 했다.
"요것언 나가 얻은 밥이여!"
득보는 바가지를 더 꼭 잡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니 다리몽댕이가 작씬 뿐질러져야 정얼 다시겄냐."
벌렁코가 곧 대들 기세였다.
"말로 안 되겄다. 저 새끼 잡아채!"
이마 불거진 아이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득보는 몸을 피해 뛰기 시작했다.
"잡어, 저 새끼 잡어! 온냐, 니 인자 죽었다!"
두 아이가 소리치며 뒤쫓았다. 득보는 얼마 가지 못하고 여지없이 땅바닥에 엎어졌다. 한 아이가 뒤에서 다리를 걷어찬 것이었다. 여지없이 땅바닥에 엎어졌다. 한 아이가 뒤에서 다리를 걷어찬 것이었다. 득보가 놓쳐버린 바가지는 떼구루루 굴러가며 보리 밥덩이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이고메 엄니, 나 밥, 밥....."
넘어진 아픔으로 얼굴이 찡그려진 득보는 굴러가는 바가지를 노려보며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쥐좆만헌 새끼가 뛰어야 벼룩이제."
이 말과 함께 흙먼지투성이인 짚신 발이 득보의 손등을 짓밟았다.
"아야야야..... 아나, 니 밥이다. 많이 많이 처묵어라."
다른 짚 신발이 흩어진 밥덩이들을 마구 밟아대고 바가지도 밟아 깨뜨렸다.
"요새끼 정다시게 맨글어."
"하먼, 다시넌 얼씬도 못허게 혀."
네 개의 다리가 득보를 걷어차고 짓밟기 시작했다. 득보는 맞서 싸워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이동생 얼굴만 떠오를 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떼엑끼 놈덜아, 무신 못된 짓거리냐!"
지게를 지고 일을 나오던 농부가 그들을 보고 소리쳤다.
"재수 드럽다, 그만 가자. 요새끼럴 반 죽여야 허는디, 니 운 좋다. 또 끼들먼 그때넌 알제!"
두 아이는 이렇게 내뱉으며 실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도망가자 득보는 기운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득보는 잔뜩 웅크려 박고 있던 몸을 풀며 땅바닥에 네활개를 펴고 말았다.
"이놈아, 얼렁 코피 닦아라. 보리밥 댓 그럭 묵는다고 그 피럴 당허겄냐."
득보는 힘겹게 눈을 떴다. 혀를 차고 있는 낯모르는 아저씨의 얼굴이 까마득하게 올려다보였다. 득보는 그 아저씨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새끼덜도 독헌 왜놈덜얼 탁해가니라고 저리 무작시러워지능가 어쩐가....."
농부는 혼자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득보는 논가의 실개울에 코피를 닦아냈다. 코피는 개울물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핏방울들은 물에 풀리며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 곱게 풀리는 색깔을 내려다보며 득보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서둘러 쑥잎을 뜯어 비비대서 코를 막았다. 쌉싸름하면서도 화한 쑥내음이 진하게 콧속을 휘돌아 가슴 가득 찼다. 갑자기 배가 고파지면서 쑥버무리 생각이 났다. 쑥버무리는 솜털 많은 어린 쑥잎을 쌀가루에 버무려 쪄내는 떡이었다. 아버지는 쑥버무리를 무척 좋아했고, 쑥버무리를 만드는 어머니 솜씨는 최고였다. 득보는 누이동생의 눈을 피하려고 낯을 두 번이나 씻었다. 그리고 윗도리에 밴 피를 빨아내느라고 낑낑거렸다. 입으로 빨아보고, 돌에 대고 문지르고 해보아도 피 흔적은 말끔히 지워지지 않았다. 득보는 길 위로 올라섰다. 깨진 바가지쪽들과 흙투성이가 된 밥덩이들이 눈에 띄었다. 득보는 분이 솟구쳤다.
"개겉은 새끼덜, 즈그가 그런다고 나가 무서와 헐지 알고!"
또 이 동네로 밥을 얻으러 올 작정을 하며 이빨을 갈아붙였다. 흙범벅인 밥덩이에는 개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득보는 집으로 타박타박 걸어가며 머리를 짜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 바가지가 없어졌는지 둘러 붙일 말이 마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득보는 동네 어귀 개울가에서 코막이 쑥을 빼냈다. 그리고 코밑을 두 번 세 번 씻어냈다. 옷도 털었다. 옆구리며 등이 뜨끔뜨끔 결렸다. 아픔을 참아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빠, 누구헌티 매맞었제?"
사립을 들어서자마자 옥녀가 대뜸 한 말이었다.
"아니여, 니 배고픈게 얼렁 올라고 뛰다가 엎어져 바가지가 깨져분 거이다."
득보는 얼떨결에 이렇게 말했다. 바가지를 어쨌느냐고 물을 것에 맞추어 미리 꾸며놓은 말이었다.
"거짓말이여. 누가 오빠 때랬제?"
눈을 똑바로 뜬 옥녀가 다가들었다. 옥녀가 그것을 어떻게 그렇게 귀신처럼 알아내는 것인지 득보는 얼떨떨할 뿐이었다.
"아니랑게, 참말로 엎어진 것이여."
득보는 고개까지 짤짤 흔들었다.
"아니여, 엎어지먼 물팍이 깨지제 얼굴에 멈이 들간디. 여그, 여그 멍든 것언 누가 때린 자리여. 나 말이 맞제?"
옥녀는 손가락으로 득보의 얼굴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다그치고 들었다.
"쬐깐헌 것이 물르는 것이 없이....."
득보는 더 할 말이 없어 눈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얼굴에 묻은 피만 닦아내면 될 줄 알았지 멍이 든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빠럴 누가 때랬능가. 얼렁 말해 보소."
옥녀는 눈물이 핑 돌며 득보의 옷깃을 마구 잡아 흔들었다.
"암시랑 안헝게 니넌 몰라도 돼야."
"안돼야, 안돼야, 얼렁 말해, 얼렁."
옥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발을 굴러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오냐 오야 하며 키워준 옥녀의 고집이 빳빳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려, 그려, 말 헐팅게 저그 앉자."
득보는 마루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옥녀는 이야기를 따라 옷깃을 비틀고, 입술을 깨물고 하다가 두 아이가 차고 밟고 하는 대목에서는 마침내 엉엉 소리 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빙신, 울지 말어."
득보는 먼 데를 바라보며 뚜벅 말했다. 그 목소리도 눈물에 젖어 있었다.
"오빠, 많이 아프제?"
"아아니, 암시랑 한혀."
득보는 힘지게 고개를 내둘렀다. 코피가 터졌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다.
"아부지가 살았으먼 그놈덜얼 잡아 죽일 것인다."
옥녀의 이 말과 함께 둘이는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잡초가 자라나고 있는 장독대 뒤켠에서 키 큰 접시꽃들이 서로 끌어안고 우는 오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득보와 옥녀에게 슬프면서도 기쁜 날은 아버지 어머니 산소를 찾아가는 날이었다. 산소에는 닷새에 한 번씩 찾아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옥녀는 날마다 집을 나섰다. 득보는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같이 다녔다. 그러나 며칠 다니다가 옥녀는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서로 의논해서 닷새에 한 번씩 가기로 정하게 되었다. 산소에 갈 때는 꼭 옷을 빨아 입었다. 옥녀가 어김없이 하는 일이었다. 더러운 옷을 입고 가면 어머니가 속상해한다는 것이었다. 옥녀는 산소에 찾아가 오빠와 나란히 절을 하고 나서 또 한 가지 하는 일이 따로 있었다. 묘 앞에 단정히 앉아 노랫가락을 뽑는 것이었다. 그건 아버지가 좋아했던 육자배기 가락들이었다. 옥녀는 정성을 다해 가락을 뽑으며 아버지를 만나고 있었다. 든든하고 편안했던 아버지의 무릎에 올라앉아 노래를 불렀던 지난날의 기분이 그대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산소에서 내려온 득보와 옥녀는 언제나처럼 장승거리 나무 그늘에서 다리쉼을 하기로 했다. 옥녀는 그늘에 자리 잡고 앉아 걸어오면서 흥얼거린 노랫가락에 힘을 넣기 시작했다. 득보는 누이동생의 노랫가락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려 장단을 맞추며 강아지풀 줄기를 뽑았다. 털이 숭숭한 꽃술이 크고 길이가 긴 줄기를 골라 뽑은 득보는 논두렁으로 내려서며 메뚜기들을 잡아채기 시작했다. 득보는 헛손질을 하는 법이 없었다. 잽싸게 손질을 할 때마다 손아귀에는 메뚜기가 한 마리씩 잡혀 들었다. 메뚜기의 고개를 살짝 꺾으면 목을 덮고 있는 껍질 사이에 틈이 생겼다. 그 사이로 강아지풀 줄기를 밀어 넣었다. 그렇게 되면 메뚜기는 갈 데 없이 강아지풀 줄기에 꿰어져 대롱대롱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강아지풀 줄기 하나에 메뚜기는 삼사십 마리씩 꿰어졌다. 열 꿰미만 볶으면 둘이서 군 입맛을 다시기에는 괜찮았다.
"에미 죽어 우는 새야 니 갈 디가 어디드냐 애비 죽어 우는 새야 니 어디서 날얼 새냐"
옥녀의 가락은 구슬프고 서럽게 넘어가고 있었다. 득보는 건성으로 고갯장단을 맞추며 메뚜기 잡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메뚜기는 볶아먹기에 약간 일렀지만 배가 고픈데 그런 건 가릴 것이 없었다. 누이동생은 메뚜기 잡기는 서툴러도 볶은 메뚜기는 아주 좋아했다.
"하이고야, 니 재주가 예사가 아니다 이."
한 여자가 나무 그늘로 들어서며 반색을 하고는,
"귀동냥헐 만헌 소리에 나무 그늘도 있응게 떡 본짐에 지사 지내기로 다리잠 쉬어가자."
여자는 수다스럽게 입을 놀리며 머리에 인 보퉁이를 내려놓았다. 갑작스러운 수선에 놀란 옥녀는 노래를 뚝 그치고 여자를 빠끔하게 쳐다보았다. 눈길이 마주치자 그 여자는 생끗 눈웃음을 쳤다.
"니 누구헌티 소리 배우고 있냐, 시방?"
여자의 물음에 옥녀는 고개를 저었다.
"참말이여? 아무헌티도 안 배움서 그리 소리럴 헌단 것이여?"
옥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 나가 귀동냥얼 헐 만치허고 사는 사람인디, 지절로 나오는 소리가 저러먼 저것이 명창감 아니라고."
여자는 옥녀를 새삼스럽게 쳐다보며 혼잣말을 하고는,
"느그 아부지 이름이 머시냐?"
옥녀 옆으로 다가앉으며 물었다. 옥녀는 도리질을 했다.
"무신 말이다냐, 아부지 이름얼 몰라?"
옥녀의 도리질이 커졌다.
"아이고 답답허다, 말로 혀라. 아부지가 없냐?"
옥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얄 어라, 글먼 엄니허고 살겄네?"
옥녀는 다시 도리질을 했다.
"무신 일이다냐. 엄니도 없단 것이여?"
옥녀는 아까보다 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벨일이시. 니 글먼 누구허고 사냐?"
여자는 침을 삼키며 옥녀 옆으로 더 바짝 다가앉았다. 옥녀는 턱 끝으로 논 저쪽을 가리켰다. 그 턱 끝에 매달린 여자의 눈길은 메뚜기를 잡고 있는 득보를 찾아냈다.
"누구다냐? 니 오빠냐?"
옥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느그 둘이서만 사냐?"
옥녀는 고개를 약간만 끄덕였다.
"무신 수로 사냐? 얻어 묵냐?"
옥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쯧쯧쯧..... 배 곯코 사는구나."
옥녀의 고개는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니 우리 집에 가서 살자. 끄니 때마동 믹여줄팅게."
여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옥녀는 몸을 발딱 일으키며 소리쳤다.
"오빠아, 오빠아!"
그 다급한 외침에는 반가움이 아닌 겁이 실려 있었다. 득보는 누이동생의 외침을 듣자마자 고개를 홱 돌렸다. 물뱀이라도 나타났나 싶었던 것이다. 득보는 여러 개의 메뚜기 꿰미를 든 채 마구 뛰기 시작했다. 득보는 큰길로 올라서서야 나무 그늘 아래 낯모르는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득보는 숨을 헐떡거리며 누이동생에게 눈길을 보냈다.
"저 아줌니가 나보고....."
옥녀는 재빨리 득보에게로 옆걸음질을 치며 여자를 눈짓했다.
"이, 니가 오빠로구나. 여그 앉거라. 느그가 엄니 아부지 없이 동냥살이허고 산단 말다 들었다. 니 동상이 노래럴 잘 허고, 느그 신세가 불쌍허고 히서 나가 우리 집에 가서 살자고 혔다. 느그가 우리 집에만 감사 삼시세끼 괴기국만 배불리 묵음서 살아진다, 허먼."
여자는 살 오른 반드르르한 얼굴처럼 말도 거침없이 매끈하게 했다. ‘세 끼럴 괴기국만 묵어라?.....’ 득보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여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느그가 나럴 못 믿는갑제? 나가 주막얼 헝게 국밥 몰 괴기국이 크담헌 솥에서 항시 부글부글 끓는다. 나가 원체로 소리럴 좋아혀서 그렁게 니가 하로에 두어 번 소리만 허먼 느그 둘이 거렁뱅이 짓거리 한허고 삼시세끼 괴기국만 묵고 살게 혀주겄다 그 말이여. 허고, 니넌 사내 자석잉게 장작개비나 실실 날라다 주는 일이나 거들고. 무신 소린지 알아묵겄냐?"
여자의 시원스러운 말이었다. 득보와 옥녀는 반짝 눈이 마주쳤다. 둘이의 마음은 하나로 엉켰다. 그러나 그건 순간이었다. 옥녀는 얼굴이 시무룩해지며 눈길을 산소 쪽으로 돌렸다. 그 속뜻을 금방 알아차리며 득보도 얼굴이 흐려졌다.
"어찌 그냐? 무신 일 있다냐?"
여자는 눈치 빠르게 물었다.
"저어..... 아줌니 집이 여그서 얼매나 되는디요? 너무 멀먼....."
득보는 불안한 눈길로 아주머니를 쳐다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이, 우리 집이 멀랑가 걱정이여? 아니여, 여그서 얼매 안 멀다. 쩌어그 저짝, 김제 나가는 길목잉게 여그서 거그꺼정 한 20리 안짝이다. 느그 걸음으로도 반나절 품이여. 20리라고라!"
득보의 눈에 다시 반짝 불이 켜졌다. 그러나 옥녀는 불안한 얼굴로 득보를 쳐다보고 있었다.
"옥녀야, 아줌니 집꺼지 20리먼 우리 집 가기허고 매일반이여."
득보는 이미 기울어진 마음으로 누이동생을 깊이 바라보았다.
"근디, 집언 어찌고....."
옥녀는 오빠의 마음을 눈치챘으면서도 집이 걱정되었다.
"니 집이 아까와서 그러냐? 그런 맘 묵지 말어. 니도 소문다 들었지야? 아그덜도 무서와 놀로 안 오고. 긍게 아까와허덜 말어."
득보는 속삭이듯 말하며 옥녀의 어깨를 감싸 잡았다. 옥녀는 울 것 같은 얼굴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낸 소문인지는 몰라도 득보네 집은 못 쓰는 집으로 소문나 있었다. 득보 어머니가 죽으면서 생겨난 소문이었다. 집터가 세서 사람들을 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아이들 사이에서는 <귀신 나오는 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어..... 참말로 세 끄니 다 괴기국 믹여줄랑게라?"
득보는 아주머니를 똑바로 쳐다보며 야무지게 다짐했다.
"하먼, 하먼. 느그가 배탈만 안 내먼 세 끄니 아니라 네 끄니라도 묵어라. 그려, 밤참으로 한 끄니럴 더 묵으먼 좋겄다."
여자의 시원시원한 대꾸였다. 득보가 옥녀를 쳐다보았다. 옥녀가 사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득보도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되았다, 가자!"
득보가 고개를 돌리는데 여자는 벌써 보퉁이를 들고 일어서며
"니 그 메뚜기 다 내뿔고 이 짐이나 들어라. 메뚜기가 안직 덜 여물어서 제비나 묵기가 좋제사람이 묵기로넌 풋내만 난다."
여자는 보퉁이를 서슴없이 득보에게 내밀었다.
"야아, 쬐깨 기둘리씨요."
득보는 메뚜기 꿰미들을 손에 잡은 채 땅바닥에 놓더니 짚신발로 밟아대기 시작했다. 날개를 푸득이고 뒷다리를 내뻗치며 몸부림치는 메뚜기들이 발밑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야아 야, 그 무신 징헌 짓거리냐. 그냥 내뿔고 말제."
여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야아? 그냥 내뿔먼 요것덜이 도로다 살아나서 나락 뜯어묵으라고라?"
득보는 허리를 접은 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여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옥녀도 득보와 똑같은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느그 애비가 단단허니 갤찼구나. 얼렁 허고 가자."
여자가 먼저 걸음 옮겨놓았다. 득보는 메뚜기들을 마저 다 밟아 죽인 다음 허리를 폈다. 득보는 아버지한테 치하를 들은 것처럼 마음이 후련했다. 여름에 아이들이 논두렁에 들어서서 어른들에게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일은 메뚜기를 잡거나 물뱀을 잡는 일이었다. 물뱀을 잡는 대신 개구리를 장난삼아 회초리질 해서 죽였다가는 어느 어른이고 호통을 쳤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제비를 귀히 여기듯 개구리들도 귀하게 여겼다. 개구리들은 제비와 똑같이 벼를 갉아 먹고 사는 메뚜기나 다른 벌레들을 잡아먹고 살았다. 그런데 물뱀들은 개구리들을 잡아 먹었던 것이다. 메뚜기들을 다 밟아 죽인 득보는 짚신 바닥을 땅바닥에 두어 번 싹싹 문질렀다. 그리고 앞서가고 있는 아주머니에게로 뛰어가 보퉁이를 받아들었다.
"돌림병이 돈 것도 아닌디 어쩌다가 느그 집안 꼴이 이리 되았냐?"
여자가 머리를 쓰다듬어 넘기며 물었다.
"저어, 긍게로 그것이....."
득보는 아무에게도 하기 싫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충대충 이야기를 해나갔다.
"그려, 그놈에 토지조사사업이 무섭기넌 무섭구나. 뒤집히고 망헌 집이 수도 없응게. 그나저나 농사 안 지묵는 나가 상팔자다."
여자는 피식 웃더니 걸음을 멈추고 치마를 걷어 올렸다. 속에 찬 주머니에서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다. 득보는 놀랐다.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은 많이 보았지만 여자가 궐련을 입에 척 무는 것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돈이 아주 많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주머니의 말은 참말이었다. 주막에 당도하자마자 아주머니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국밥 한 그릇씩을 상에 차려주었다. 그리고 살코기를 따로 한 접시 놓아주기도 했다. 득보와 옥녀는 서로를 멍하니 바라본 채 한동안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배고픈디 얼렁 묵제 머허고 있냐."
여자가 마루에 올라서며 말했다. 그때서야 득보와 옥녀는 꿈에서 깨어나듯 서둘러 숟가락을 들었다. 살코기는 말할 것도 없었고 국밥 국물도 한 방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그리고 김치 한 가닥 남아있지 않고 그릇이란 그릇은 다 말끔하게 비워졌다. 득보도 숨을 씩씩거렸고 옥녀도 숨을 씩씩거렸다. 너무 배가 불러 벽에 등을 기댄 둘이는 더없이 흡족한 웃음을 마주 보며 나누었다. 득보와 옥녀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잠이 들었다. 그들은 부엌데기 아주머니가 깨워서야 잠이 깼다. 그들 앞에는 또 밥상이 놓여 있었다. 저녁밥이었다. 둘이는 또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오빠, 오빠, 나 죽겄네. 배 아파 죽겄네."
옥녀는 뒤틀리는 배를 움켜잡고 오빠를 마구 흔들어댔다.
"머, 머시여? 배가 아프다고?"
득보는 다른 때와는 달리 곧 잠을 깼다. 그도 잠결에 배가 아파 애를 쓰고 있던 참이었다.
"나 배가 째지게 아프네. 똥도 금세 나올라고 혀고."
옥녀는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나도 배 아퍼 죽겄다. 가자, 똥 누러."
득보와 옥녀는 다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배는 꼬이고, 똥은 급하고, 밖은 캄캄하고, 짚신을 찾아 신고 어쩌고 할 여유가 없었다. 둘이는 맨발로 마당을 가로질렀다.
"아이고 엄니, 나 죽겄네."
옥녀는 신음을 하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설사하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요란했다.
"아이고, 나도 못 살겄다."
득보도 바지를 까내렸다. 또 설사하는 소리가 펴져나가고 있었다. 둘이는 신음소리를 내고 끙끙 힘을 쓰고 하며 한바탕 설사를 해댔다.
"오빠, 괴기가 아까와 죽겄네. 괴기야 또 묵으면 되제. 배가 얼렁 나서야 헐 것인디."
"근디 오빠도 나랑 항께 아픈 게 좋네."
"지랄, 좋을 것도 많다. 히히, 요 집에 잘 온 것이제?"
"그려, 아줌니가 고마운 사람이여."
한숨을 돌린 옥녀와 득보는 별들을 바라보며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옥녀와 득보는 날이 밝을 때까지 두 차례나 더 설사를 했다.
"느그가 그 꼬라지 될지 알었다. 배 나슬 때꺼정 괴기국 묵지 마라."
주인 여자가 고깝게 눈총을 쏘았다. 득보와 옥녀는 고깃국 대신 진저리쳐지게 쓴 약초즙을 마셔야 했다. 부엌데기 아주머니가 약초를 찧어서 짜낸 초록색 국물을 주인아주머니가 지켜보는 앞에서 마셨다. 주인아주머니의 눈초리가 매워서 쓰다고 엄살을 떨 수도 없었다. 약을 꼼짝없이 마시고, 고깃국 없는 밥을 적게 먹고 해서 배는 이튿날 다 나았다. 득보와 옥녀는 나날이 더없이 편하고 아늑했다. 끼니때마다 배부르게 먹었고, 하는 일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옥녀는 하루에 서너 번 노래를 불렀다. 주인아주머니가 어떤 손님들 앞에 내세워 부르라고 하는 것이었다. 옥녀는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다가 몇 번 하고 나서는 엉덩이를 뒤로 빼지 않게 되었다. 노래를 들은 손님들마다 잘한다고 칭찬을 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득보는 옥녀에게 노래를 시키는 것이 마땅치 않았지만 주인아주머니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둘이를 세 끼 배불리 먹여주는 밥값치고는 쌌던 것이다. 득보는 할 일이 없어 심심할 지경이었다. 밥때면 장작개비를 부엌 앞에 날라다 주고, 아침저녁으로 마당을 쓰는 일이 전부였다. 아니,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부엌 뒤란의 우물가에서 하는 두레박질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하지 않았다.
"사내자석이 샘가에 가는 것이 아닌디요."
득보는 세게 고개를 내둘렀다.
"하이고 야, 니도 붕알 단 사내꼭지라고 헐 말 다 헌다 이. 그려, 그려, 신세 쪼그라들었어도사내넌 사낸께. 니가 커서 나중에 어찌 될지 몰르는디 나가 쬐깨 편차고 그런 던적시런 일꺼지 시키겄냐."
부엌데기 아주머니가 선선히 받아주었다. 득보도 옥녀도 살이 올랐다. 옥녀는 새 옷까지 얻어 입어 제법 예뻐 보이기도 했다. 득보는 누이동생이 그전처럼 방싯방싯 웃기도 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누이동생은 노래하고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는 눈치이기도 했다. 옥녀는 네댓 명의 손님 앞에서 가락을 뽑고 있었다.
"으쩌요, 타고났제라?"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 앉은 주인 여자가 옆의 남자에게 속삭였다.
"글씨, 더 들어보드라고."
수염이 더부룩한 남자가 곰방대를 빨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아, 척 들어보면 알 일인디, 또 트집 잡을라고 그러제라?"
"또 그놈에 억지소리. 소리허는 디 매듭이 어디 한둘이간디?"
남자가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나도 귀야 빤히 뚫렸는디, 아조 지대로 된 물건이오."
"물건이 지대로 되먼 멀혀. 뒤탈이 없어야 지대로 되는 것이제."
남자가 옆 눈길을 주인 여자에게 쏘았다.
"아따, 걱정도 팔자요 이. 나가 언제 뒤탈 생기게 일허능 것소? 아무 걱정 말고 재주가 어쩐지나 판별허런 말이오."
주인 여자가 야릇하게 눈을 흘겼다.
"재주야 저만허먼 상질인디, 어찌 인물이 빠지덜 않는다고?"
"아이고, 쟈가 시방 이팔청춘이오? 인물 흠잡고 어찌고 허게. 저것이 나이 에린디다가 굶고 살아서 그렇제 이목구비 저만허기도 쉽덜 않으요. 허고, 가시네덜언 커남서 인물이 열 번 되는 것 아닙디여? 상질 재주에 중질 인물이먼 그담 보톰이야 믹이고 꾸미기에 달렸소."
"어허, 나이듬스로 느느니 주름살이고 변설이시."
남자가 뚱하니 말했다.
"아이고, 이쁨받을 소리만 골라서 허요 이."
주인 여자가 부채로 남자를 때리는 시늉을 하며 눈을 흘겼다. 남자가 그 눈흘김을 받으며 음탕하게 웃었다.
"그리 징허게 웃덜 말고 요분에넌 툭툭허니 낼 생각이나 허씨요."
주인 여자가 샐쭉 얼굴을 바꾸었다.
"그놈에 소리 토 안 달면 어디 병나는감, 지기럴."
"언제 뜨실라요? 이대로 그냥 뜨먼 자네 머시기가 서운해헐 것잉게 하로밤 푹자고 낼아칙 일찍 떠야제."
남자가 저쪽 사람들의 눈치를 힐끗 살피며 주인 여자의 엉덩이를 쓸었다.
"하이고, 인심 한분 후허시."
주인 여자가 부채 손잡이로 남자의 손목을 툭 치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남자는 쩝쩝 빈 입맛을 다시며 노랫가락을 한참 높이고 있는 옥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주인 여자는 옥녀를 깨워 일으켰다. 옥녀는 단잠이 깨지는 것이 싫어 어깨를 내두르며 짜증을 부렸다.
"이년아, 정신 채리고 얼렁 옷 입어. 당장 먼 질 떠야 헝게."
주인 여자는 옥녀의 등짝을 퍽 때렸다. 옥녀는 그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아? 어디로 가는디요?"
옥녀는 눈을 끄게 떴다.
"잔소리 말고 얼렁 옷 입고 나오니라."
주인 여자는 방문을 밀었다.
"오빠도 깨와야제라?"
"아니여, 니만 간다."
"야아?....."
그때까지도 오빠는 잠만 자고 있었다. 옥녀는 다급하게 오빠를 흔들고 꼬집었다. 너무 놀라고 겁이 나서 오빠를 소리 내 부르지도 못했다.
"옥녀야, 얼렁 안 나오고 머허냐!"
주인아주머니가 쨍하니 소리쳤다.
"야아, 나가는디요....."
옥녀는 대꾸를하면서 잠이 덜 깨 어벙벙해져 있는 오빠를 꼬집었다.
"얼렁 정신 채려. 아줌니가 나럴 먼디로 보낼라고 헌단 말이여."
"잉? 머, 머시여?"
득보는 그때서야 잠이 확 깼다.
"아 옥녀야, 얼렁 나와!"
주인아주머니의 외침이 또 들려왔다. 옥녀는 울음이 가득한 얼굴로 일어났다.
"옥녀야, 무신 일이여, 무신 일?"
득보는 허둥지둥 옥녀를 뒤따랐다. 어둑어둑한 마당에는 주인 여자와 함께 예닐곱 사람이 서 있었다.
"아줌니, 옥녀럴 어디로 보낼라고라?"
득보는 옥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이, 니가 나슬 일이 아니다. 옥녀가 명창되게 소리 잘 갤차도라고 저 아자씨덜 딸려 보내기로 혔다. 옥녀가명창 돼서 올 동안에 니넌 여그서 살어라."
"아닌디요. 나도 따라갈라요."
득보는 세차게 소리쳤다.
"지랄, 쬐깐헌 것이 말 씹히네."
텁석부리 남자가 침을 뱉었다.
"머허요, 얼렁 들쳐업고 뜨제!"
주인 여자가 빽 소리 질렀다.
"그려, 저놈언 자네가 맡소."
텁석부리 남자가 득보를 제치며 옥녀를 텁석 안아 들었다.
"오빠아아....."
옥녀가 소리치며 버둥거렸다.
"옥녀야, 옥녀야!"
옥녀를 뒤쫓으려는 득보를 주인 여자와 부엌데기가 낚아 잡았다.
"오빠아아....."
옥녀의 울부짖음은 멀어지고 있었다.
"옥녀야, 옥녀야, 옥녀야....."
득보는 두 여자한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숨넘어가게 외치고 있었다.
"오빠아아....."
옥녀의 외침은 안개 속으로 아득하게 멀어져 가고 있었다.
5. 지화자 잘도 논다
백종두는 하시모토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또 궐련에 불을 붙여 성질 급하게 빨아댔다. 이제 믿을 건 하시모토뿐이라서 그는 더 몸이 달고 있었다. 쓰지무라가 하시모토의 부탁까지 퇴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하면서도 불안감은 떼칠 수가 없었다. 그건 그 문제를 대하는 쓰지무라의 태도가 너무 완강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누구의 자신이냐가 문제가 아니오. 그건 대일본제국 헌병의 위신과 체통에 직결되는 문제란 말이오. 불구자는 헌병 근무를 할 수 없다는 건 원칙이고 철칙이오. 그쯤 알 만한 백 면장이 수신제가를 어찌했길래 아들놈이 그런 불상사를 저지르도록 방치했냔 말이오. 헌병 제복을 입은 자가 그런 꼴을 당한 것만으로도 제국 헌병의 위신과 명예를 막대하게 훼손시키고 추락시킨 죄를 저지른 것이오. 그런데 또 근무 복귀를 시켜달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자식놈 수신이나 잘 시키도록 하시오."
쓰지무라에게 거절만 당한 것이 아니라 훈계를 듣는 망신까지 당했던 것이다. 그 창피스러움을 생각하면 남일이 이놈을 당장 요절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아들이 둘만 되었더라도 그렇게 매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일이 놈이 헌병대에서 쫓겨나게 되면 자신의 집안은 권세를 잇지 못하고 볼품없이 되는 것이었다. 계집을 잘못 건드려 신세를 망치는 남일이 놈도 열 뻗치게 미웠지만 아들이라고는 하나밖에 낳지 못하고 뻔뻔스럽게 조갑지들만 줄줄이 넷을 낳아댄 마누라는 더 꼴이 보기 싫었다. 아들 눔을 일본으로 보낼 때만 해도 설마 눈 병신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오히려 거기를 심하게 다쳐 남자 구실을 못 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다. 눈이야 일본에 가서 치료하는 거니까 말끔히 나아 오리라 믿었었다. 그런데 아들놈은 검은자위에 명씨박이 명태눈깔이 되어 돌아왔다. 눈은 얼굴의 중심이요 마음의 거울이라고 했다. 그리 중한 눈 중에 하나가 검은자위가 없어져 희멀건하게 되었으니 그 꼴의 흉하기란 아들인데도 빡빡 얽은 곰보나, 눕지도 엎드리지도 못하게 생긴 앞뒤 꼽추는 댈 것이 아니었다. 남들이 하는 말로 귀신이고 도깨비요, 보기만 해도 재수가 없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 흉한 꼴을 하게 되었으니 헌병대에서 더 이상 제복을 입지 못하게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이었고, 그 자리가 너무나 아까웠다. 아들을 헌병대에 밀어 넣은 것은 다 계획이 있어서였다. 거기서 몇 년을 굴러 경험을 쌓게 한 다음 자신의 뒤를 이어 면장 자리쯤 차지하게 만들어 줄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갈머리 없는 놈이 애비의 그런 뜻도 모르고 색만 밝히다가 제 발등을 찍고 만 것이었다. 대문에 달린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종두는 벌떡 일어났다. 하시모토가 돌아올 때가 되었던 것이다. 백종두가 2층에서 바삐 내려와 마루로 나서는데 하시
모토가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하시모토상. 수고하셨소."
백종두는 아첨기가 역연한 소리로 말하며 하시모토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하시모토는 너무 무덤덤한 얼굴이어서 아무 낌새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하시모토는 2층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백종두는 일이 틀어진 것이라는 예감과 함께 어찌 됐느냐고 묻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아무리 몸이 달더라도 하시모토에게 경박하게 보이거나 무시당해서는 안 되었다. 하시모토는 곧잘 그런 속 모를 얼굴을 해서 나이보다 무게 있고 점잖아 보이는 것이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면장이었고 나이도 훨씬 더 많은 처지였다.
"에에 또.....쓰지무라 과장님께서 한 가지 대책을 강구하는 선처를 베푸셨소."
하시모토는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
"하, 선처를! 역시 쓰지무라 과장님한테는 하시모토상 힘이 제일이오."
백종두는 너무 기뻐 목소리가 들떠 오르고 있었다.
"과찬은 접어두시고, 쓰지무라 과장님께서는 촉탁 근무의 선처를 하셨소."
"촉탁 근무?....."
백종두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예, 그건 아들에겐 최선의 혜택이라 생각하오."
"촉탁 근무? 그게 대체 뭐요?"
백종두의 목소리에는 열기가 묻어났다.
"아니, 촉탁이 뭔지 몰라서 그러시오?"
하시모토는 의아하게 반문했다.
"어허, 누가 촉탁을 몰라서 하는 소리요? 헌병대 촉탁이면 할 일이 대체 뭐냐 그것이오. 촉탁이면 헌병복도 안 입힐 것이 아니겠소."
"그야 그렇지요. 촉탁이고 부탁이고 다 하나 마나 한 소리요. 됐소. 다 그만둡시다."
백종두는 마침내 화가 터지고 말았다. 궐련갑을 집어 들어 다다미 바닥에 떡을 쳤다.
"아니, 왜 나한테 화를 내고 이러시오. 내가 뭘 잘못했소? "
하시모토의 안색이 싹 변했다. 백종두는 아차 싶었다. 하시모토야말로 자신의 부탁을 받고 일부러 군산까지 나와 쓰지무라를 만난 것이었다. 다다미 바닥에 떡을 친 것은 하시모토가 아니라 쓰지무라였다. 쓰지무라는 <촉탁 근무>라는 얄팍한 꾀를 내서 말을 들어주는 척하고 있었다. 그건 중간에 선 하시모토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잔꾀이기도 했다. 그러나 쓰지무라에게 반감을 드러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이오. 내가 하시모토상한테 감사를 해야지 왜 화를 내겠소. 내가 화를 내는 건 못난 내 아들놈한테 그러는 것이오. 그 병신 같은 놈을 농사나 지어먹게 해야 되겠소."
백종두는 능란하게 둘러 붙이면서 감정을 감추려고 성냥을 득 그어 담배에 불을 붙었다.
"그래요? 조선에서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하니 그것도 나쁠 건 없소."
하시모토는 이렇게 질러대고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아니, 왜 일어나시오?"
백종두는 속이 발칵 뒤집히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빈 인사치레를 했다.
"다른 볼일이 좀 있어서 나 먼저 나가봐야겠소."
하시모토는 자기 할 일은 이제 다 했다는 듯 서둘러 방을 나서고 있었다. 백종두도 그를 더 잡아두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군산으로 나올 때는 일부러 인력거를 불러들여 태워가지고 나왔지만 이제 제 놈이 기어가든 굴러가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놈 말하는 뽄새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체한 놈한테 찰떡 먹이고, 설사하는 놈한테 아주까리기름 먹이는 격이었다. 토지조사사업을 하면서 농토를 배 이상 늘리도록 은혜를 베풀었으면 제 놈이 발 벗고 나서서 일을 해결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주동이를 그렇게 놀려대는 것이었다. 백종두는 심한 낭패감과 함께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백종두는 배웅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돌아섰다. 치솟는 성질 같아서는 그놈 앞으로 돌려준 땅을 모조리 뺏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더 남아 있었다. 아들놈 일이 난감하긴 했지만 자신의 일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았소? 일언 잘 풀렸소?"
백종두의 아내가 치마를 거머잡으며 마루로 나서고 있었다.
"풀리거넌 머시가 풀려. 더 엉클어지고 설크러졌제."
얼굴을 고약하게 일그러뜨리며 백종두는 내쏘았다.
"되면 되고 말먼 말제 머시가 또 엉클어지고 설크러지고 헌다요?"
"아, 시끄럿! 집구석에서 새끼럴 어찌 단속히서 요 꼬라지가 되게 맨글었어."
"아이고메, 아이고메, 인자 와서 쌩사람 잡을라고 허덜 마씨요. 다 커서 장개가고 새끼 난 자석얼 나보고 어쩌란 것이오. 그리 행실은 것이야 다 당신 탁헌 것이아니면 머시오."
"아니, 머시가 어쩌고 어쩌! 저 암탉 모강댕이럴 팍 삐틀어서 그냥!"
마침내 백종두의 감정은 폭발하고 말았다. 눈을 부릅뜬 그는 곧 아내의 목을 잡아 비틀 것처럼 두 펄을 뻗치며 마루로 뛰어올랐다. 그의 성질을 잘 아는 아내는 잽싸게 몸을 피해 방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탕 닫았다.
"당장 때래부시기 전에 문 열어, 문! 그놈의 새끼 미런허고 못난 것이 딱 니년얼 탁헌 것이 아니먼 머시냐. 모강댕이럴 작씬 뿐질르고 말 거싱게 문 열어, 문!"
백종두는 목청껏 소리치며 방문을 걷어차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찍소리가 없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죽산면장이 되어 내려간 다음 슬그머니 첩 살림을 차린 것을 그렇게 분풀이한 것이었다. 백종두는 아들의 일로 정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아무 때나 불쑥불쑥 튕겨져 나오는 마누라의 강짜를 미리 억눌러버릴 심산으로 화가 난 것을 더 과장해대고 있었다.
"문 안 열면 때래부실 것이여!"
백종두는 다시 숨길을 돌려 소리치며 방문을 걷어찼다.
"아이고, 나가 다 잘못혔소. 사방팔방 일본 사람덜헌티 넘새스러운디 지발 적선헌다고 참으씨요."
그의 아내는 떨리는 소리로 애원하고 있었다. 백종두는 문득 면장으로서의 체면과 위신을 생각했다. 아내의 말마따나 자신의 집은 일본사람들 집으로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었고, 판자로 된 일본 집은 소리를 지르면 잘도 펴져 나갔던것이다. 백종두는 그쯤 해서 못 이기는 척 돌아서기로 했다. 더 화를 내보았자 실속 없이 기운만 파할 뿐이었다.
"등신 팔푼이 겉은 놈, 지절로 달고 나온 물건이라고 지멋대로 내둘르먼 되는지 알어. 다 요령지게 눈치껏 재주껏 내둘러야 후환이 없는 것이제."
백종두는 투덜거리며 2층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한편, 장덕풍은 아들 칠문이를 통해서 백종두네 집안 사정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장덕풍은 근자에 들어서 세상 사는 맛이 깨소금 맛이 되고 있었다. 그 깨소금 맛이 입안에 와짝 돌기 시작한 것은 백종두네 아들이 미선소 처녀를 잘못 건드려 반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맞으면서부터였다. 장덕풍은 날로 재산이 늘어나면서도 세상 사는 맛이 쓰디썼던 것은 백종두가 느닷없이 면장 자리를 차지했을 때였다.
"아이고, 저놈이 무신 백여시 재주럴 부렸능가 사또가 되야부네!"
장덕풍은 그때 가슴이 내려앉는 충격과 함께 이렇게 탄식했던 것이다. 이방 나부랭이가 면장으로 뛰어오른 것은 이무기가 용 되는 것보다 더한 득세였고, 자신과의 신분 차이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로 까마득하게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이방이었을 때도 그 앞에서는 꼼짝을 못 했었는데 면장이 되어버렸으니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이방인 그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면서도 그래도 한 가닥 오기를 꼿꼿하게 세웠던 것은 재산으로 그 콧대를 꺾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백종두가 면장이 되어버렸으니 제아무리 많은 재산으로도 그 높고 높아진 콧대를 꺾는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앞세운 것이 아들 칠문이의 출세였다. 자신의 재력에다가 다들의 권세를 합쳐서 버티자는 생각이었다. 아들을 순사보에서 순사를 만들려고 뒷손을 쓰고, 정식 순사가 되자마자 군산으로 끌어올리려고 몸살을 댔던 것도 다 그 까닭이었다. 그런데 백종두는 자신의 그런 속셈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한 듯 아들을 헌병보조원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종두는 또 느닷없이 정미소와 미선소를 차리고 말았다. 그때의 충격은 백종두가 면장이 되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컸었다. 백종두가 돈까지 그리 많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돈으로도 백종두를 이길 수 없다는 참담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백종두가 갖지 않은 것으로 자신이 그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사탕 공장과 아들이 셋이라는 것이었다. 자신도 머지않아 정미소를 차리게 된다는 것으로 맥빠진 마음을 지탱해 나가고 있는데 백종두의 아들이 반죽음이 되어 병원에 실려 가는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어허, 고것 참 잘 되았다. 어허, 고것 참 씨어언허다. 삼 년 묵은 체가 쑤우욱 내려간다. 어허, 고것 참 깨소금 맛이다, 깨소금 맛!"
아들 칠문이에게 그 소식을 들은 장덕풍은 곧 춤이라도 출 듯이 신바람을 일으키며 이렇게 외쳐댔다. 그리고 힘을 끙끙 써대며 방귀를 뽕뽕 뀌어댔다.
"아부지, 참말로 사 년 묵은 체가 내래가는 갑소 이. 속이 씨언허시겄소."
장칠문이가 옆에서 장단을 맞추었다. 그런데 장칠문이는 백남일이가 명씨박이 눈병신이 되어 일본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또 아버지에게 알렸다.
"어허, 어찌 그리 일이 잘되어 간다냐, 깨소금에 간처녑 찍어 묵는 맛이다."
장덕풍은 무릎을 치며 웃어 제쳤다. 그다음에 장칠문이가 물어온 소식은 백남일이가 헌병대서 쫓겨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려? 나 짐작이 딱 맞어 떨어졌다. 나가 역부러 그 자석얼 귀경했는디, 그 허연허니 명씨백인 상호가 도깨비 화상이제 어디 사람 낯짝이드냐. 그런 험허고 숭헌 낯짝으로 헌병 노릇 못 해묵제, 하먼 못 해묵고말고. 헌병 체면이 있제, 고것 아조 잘 정헌 일이다."
장덕풍은 이제 자기가 달리는 것은 정미소를 차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건물은 이미 지어놓았으니까 일본에서 기계가 도착하기만 하면 정미소는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정미소가 돌아가는 날에는 자신은 백종두와 맞먹게 되는 것이었다. 아니, 자신이 백종두가 없는 것을 한 가지 더 가지고 있었다. 날로 달로 번창해 가고 있는 사탕 공장이었다. 사탕 공장이야말로 밑천 적게 들고 이문이 큰 알찬 장사였다.
"아부지, 일판 났구만요. 백 면장이 아덜얼 헌병대에 되집어 넣겄다고 신짝 붙이고 나섰구만이라."
장칠문이가 아버지에게 귀띔한 또다른 소식이었다.
"머시여, 백종두 그놈이!"
장덕풍은 가슴이 철렁해서 아들을 쳐다보았다. 아들은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백중두 그 백여시가 또 이리 훼까닥 저리 훼까닥 재주 넘어 아들놈얼 헌병대에 되밀어 넣으면 어쩔끄나? 그것이야 나가 아부지헌티 물을 라든 말이었구만이라우. 그려, 그려, 니넌 일이어찌 돼가는지 눈에 불얼 쓰고 지키거라."
"아부지넌 어쩔라고라? 나넌 따로 헐 일이있응게."
장덕풍은 그러나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 일을 막고 나서는 데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도 마땅찮았고, 만약 그랬다가 그 소문이 백종두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평생 원수가 되는 것이었다. 백종두와 원수지간이 되었다가는 이득 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백종두는 어디까지나 충독부를 업고 있는 면장 나리였던 것이다.
"아부지, 일이 팍 틀어져부렀소."
며칠이 지나 장칠문이가 헤벌쭉 웃으며 터뜨린 말이었다.
"머시여? 고것이 참말이여? 니 잘못 안 것 아니겄제?"
장덕풍은 아들 앞으로 얼굴을 디밀면서 연거푸 풀어댔다.
"야아, 틀림없구만요. 당자가 나 앞이서 털어놓는 말얼 똑똑허니 들었응게라. 무신 재주로? 나가 겉보기로야 친헌 칙험스로 술 받아줌서 살살 걱정허는 말얼 해주먼 그 미런헌 명씨백이가 술술 이얘기럴 다 털어놓는구만요. 잉,"
"아조 잘혔다. 니야 나 아덜잉께."
장덕풍은 눈이 다 감길 지경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들은 그간에 경찰서 밥을 헛먹은 것이 아니었다. 어엿한 순사답게 머리를 쓴 것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장덕풍은 어제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백 면장이 일본사람얼 앞세와 또 그 일얼 해볼라고 했당마요. 근디 헌병대서 허는 말이 정 그러면 촉탁이나 해묵어라 했당마요. 촉탁이나 해묵으라고."
밤늦게 돌아온 장칠문은 술 냄새를 풍기며 키들키들 웃어댔다.
"축탁얼 해묵어? 목탁도 아니고, 고것이 무신 묵자 것이라고 해묵으란다냐?"
장덕풍은 미심쩍은 얼굴로 아들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고 아부지, 누가 듣겄소. 축탁이란 것언 무신 묵을 것이 아니고 관공소서 임시로 일허는 것이란 말이오. 긍게로 헌병대서 백남일이헌티 정식으로넌 헌병얼 못 시켜준게 임시로 일 해묵으라고 혔당께라."
"그려서, 해묵기로 혔다냐?"
"아니구만이라. 축탁이란 것이 헌병덜 심바람꾼도 아니고 꼬붕도 아니고 지랄 겉은 것인다, 칼 차고 헌병질 해묵든 사람이 어찌 촉탁질 해묵어지간디라? 헌병대서 입막음허자고 헌 소리제라."
"글먼 백종두 아덜 놈언 헌병질 해묵기넌 영 글른 것 아니겄냐?"
"인자 꿈에서나 해묵겄제라."
"그려, 그려, 그 명씨백인 눈깔이 죽어서나 지대로 돌아올 것잉게. 크크크....."
장덕풍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어깨를 들썩여대며 웃음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나가 인자 낼 백종두럴 만내로 가야겄다."
장덕풍이 웃음을 그치며 불현듯 한 말이었다.
"야아? 그 앞에 가서 시방 웃디끼 웃어줄라고라?"
장칠문이는 질겁을 했다.
"요런 설익은 놈아, 니나 그래라. 이 애비넌 따로 헐 일이 있니라."
장덕풍은 더 군소리 말라는 듯 나무 재떨이를 들고 돌아앉아 버렸다. 장칠문은 고개를 갸웃갸웃하면서도 그냥 돌아섰다. 모든 일에 셈이 빠른 아버지가 손해날 일은 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장덕풍은 아침밥을 먹자마자 집을 나섰다. 상투를 새로 틀고 갓을 쓰지는 않더라도 옷이나 새로 갈아입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곧 제까짓 놈이 뭔데 하는 반감이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는 것마저 백종두를 윗사람으로 대접해 주는 것 같았던 것이다. 백종두는 집을 나서려고 옷을 챙겨입다가 장덕풍이가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구겨지며 거침없이 내쏘았다.
"그런 불상놈이 식전 댓바람보톰 어디럴 찾아들어. 안 기시다고 내쳐뿌러."
어제부터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있는 백종두로서는 쓰지무라가 찾아왔다 해도 반가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아이고 듣겄소, 마당에 들어서 있는디. 남일이가 기시다고 혔는디 어찌 또 말얼 뒤집겄소."
그의 아내가 울상을 지었다.
"저런 등신 팔푼이겉은 놈!"
"아이고, 말이 씨 되는디 지발 그 등신팔푼이 소리 잠 그만 허씨요. 남일이가 아무 눈치 없이 기시다고 헌지 아시오? 그 집 아덜도 순사로 서로 알고 지내는 처진께 박절허니 못헌 것이제라."
"글먼, 아덜놈덜이 헌병 순사로 니냐 내냐 허고 지냈응게 애비덜도 벗허고 지내도 된다 그 말이여, 시방!"
백종두의 반들거리는 눈에 언뜻 화기가 내비쳤다.
"아이고, 사람 말 업어치고 뒤집어치고 허덜 마씨요. 지체야 하늘허고 땅 차이로 딱 유별허고, 당신이 높은 자리에 있음서 인심 잃으먼 안존께 허는 소리 아니겄소. 거렁뱅이 동냥아치도 경우 없이 내몰먼 실인심허는 법이라는디 장가 그 사람이 상것이기넌 해도 돈도 지녔겄다, 일본 사람덜허고 끈도 닿겄다., 나쁜 소리 해대자면 거렁뱅이 열이 당허겄소 백이 당허겄소."
"그놈에 예펜네 바닥 한번 잘도 놀려대네. 후딱 딜여보내."
백종두는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주며 어험 어험 큰기침을 지어냈다. 그의 아내는 치마 귀를 잡아채고 돌아서며 마구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흥, 정승 판서 지낸 진짜배기 양반이었음사 사람 줄줄이 잡았겄다. 선무당이 사람 잡고, 족보 사딜인 엉터리 양반이 사흘거리 덕석몰미 허드라고 저 물건이 바로 그 짱이여. 참말로, 권세 잡응게 마누래도 달리 대허고 첩질이나 허는 인종인디 넘덜헌티야 더 말헐 것이 머시가 있간디."
그녀는 아들이 야단맞을까 봐 남편을 위하는 척 비위 맞췄던 것이 속상해 마구 욕질을 해대고 있었다.
"아이고 면장 어런, 그간에 별고 엇으신게라우?"
손을 앞으로 모아 잡고 방으로 들어선 장덕풍은 허리를 두어 번 굽실거렸다. 그리고 오라는 말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니, 저놈이 큰절얼 안 허고!"
큰절을 받으려고 버티고 앉아 있던 백종두는 그만 성질이 불끈 솟았다. 또, 그 구지레한 입성과 맨상투도 심히 비위에 거슬렸다.
"나가 바쁘시. 헐 말만 허소."
백종두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찬바람이 홱 돌게 잘랐다.
"야아, 그리 바쁘시먼 헐 말만 딱 짤라서 허겄구만요. 긍게 머시냐, 지가 메칠 있다가 정미소럴 돌리게 되는디, 그날 개업 잔치럴 허게 되능마요. 그 자리에 면장 어런얼 뫼셨으면 허는디, 어찌 그리될라능가 어쩌능가....."
"이 사람아, 버르장머리 없이 그것이 무신 소리여! 면장이 그런 가당찮은 자리에나 나댕기는지 알어."
백종두는 이것저것 싸잡아서 감정을 푹발시켰다. 거기에는 장덕풍이가 정미소를 차리게 되었다는 놀라움도 섰여 있었다.
"아니, 아니구만요. 하야가와 우편국장님도 그 자리에 오시겄다고 히서....."
장덕풍은 슬쩍 하야가와를 내세웠다. 그건 물론 꾸며댄 말이었다. 정미소 차리는 것을 자랑하는 것처럼 하야가와하고 그만큼 친하다는 것을 과시하자는 것이었다.
"되았네, 나넌 그리 한가헌 사람이 아닝게 그리 알고 가소."
백종두는 짜증스럽게 팔을 내저었다. 그는 하마터면 하야가와를 욕할뻔해서 속으로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하야가와 그놈이 미쳤나,’ 하는 말이 혀끝에 달랑달랑했던 것이다.
"야아, 공무에 바쁘신디 그리 알고 가겄구만요. 근디 순사질허는 우리 아덜놈헌티 이얘기럴 듣자니께 면장 어런 자제가 헌병대럴 못 댕기게 되았....."
"어허, 듣기 싫은 게 그 이얘기 허덜 말소."
백종두는 말허리를 잘랐다.
"창창허니 젊은 나인디 맴이 아퍼서 당최..... 글먼 인자 정미소허고 미선소 일얼 맡어 헐랑게라?"
"아, 듣기 싫여! 썩 물러가!"
백종두는 목이 터지라고 불호령을 쳤다. 그의 가슴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고정허시게라우. 소인 물러가능마요."
장덕풍은 호령에 쫓기듯 엄살을 해대며 허둥지둥 2층 계단을 뛰어내리고 있었다. 그의 가슴속은 박하사탕 수십 개를 한꺼번에 씹어 삼킨 것처럼 화아하고 통쾌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마음먹은 대로 다 해치웠던 것이다.
"아니, 어찌 저리 베락얼 치고 야단이다요? 어디 상헌 디나 없소?"
2층으로 올라가려던 백종두의 아내가 장덕풍과 마주치며 성급하게 물었다.
"글씨요, 지도 잘 몰르겄구만이라. 지가 정미소 채리는 잔치에 와주십사 혔고, 아덜이 헌병대에 못 나댕기게 돼서 참 안되 다 허고 인사 디랬는디 저리 역정얼 내고 그러싱마요."
장덕풍은 고개를 갸웃갸웃해 가며 다시 할 말을 다 하고 있었다.
"아니, 장샌이 정미소럴 다 채리요?"
백종두의 아내가 눈을 크게 떴다.
"야아, 그저 쬐깐허니 채리는구만이라."
장덕풍은 그 놀라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짚신에 발을 꿰고 있었다.
"면장님 나리가 요새 남일이 일로 속이 상해서 그러싱게 섭허게 생각지넌 마씨요."
백종두의 아내는 평소의 입버릇대로 <면장님 나리>로 호칭해 가며 남편이 욕먹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면장님 나리>는 백종두가 안팎으로 통일시켜 놓은 자신의 호칭이었다.
"하먼이라, 그러시고말고요."
장덕풍은 마음 넓은 척 웃으며 대꾸하고는 돌아섰다.
"머시가 으쩌고 으쩐다고? 면장님 나리시여? 허, 그 서방 놈에 그 예편네랑게. 느그덜 허는꼬라지에 날아가는 새 똥구녕이 웃고, 목청 뽑든 장닭 동구녕이 웃겄다. 아서라 말어라, 아전 놈이 팔자에 없는 베슬얼 따고 봉게 예편네꺼정 우세시러운지도 몰르고 속곳 가랭이 벌리고 나섰구나. 기왕에 미치기로 나섰음사 면장님 나리로 되겄냐. 거 머시냐, 대감마님 허디끼 면장님 마님이 어쩌겄냐. 아니시 아니여, 더 높으게 떠받드는 말이 있구마. 상감마마서 따다가 면장님 마마로 허능 것이 안 좋겄다고."
장덕풍은 맘껏 야유를 해가며 백종두의 집을 나서고 있었다.
"아부지! 이? 칠문이 니 아니여?"
골목 모퉁이에서 갑자가 아들과 맞부딪친 장덕풍은 어리둥절했다.
"무신 존 일 있는갑제라?"
장칠문은 안심이 되며 건성 물었다.
"존 일언....."
"니가 여그 어쩐 일이여?"
장덕풍은 아들과 여기서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라고 직감하고 있었다.
"야아, 아부지헌티 무신 일이라고 없는가 맘이 찝찌그리히서....."
"하이고, 나가 무신은일 당헐랑가 몰라 여그서 파수 보고 있었다 그 말이제? 와따, 니가 바로 효자 중에 효자다."
장덕풍은 온 얼굴이 씰그러질 지경으로 흡족하게 웃으며 아들의 어깻죽지를 철퍽 치고는,
"나가 은일 당허기넌 새로 백종두 코빼기럴 납짝허니 깔아문대불고 나오는 참이다."
그는 어깻바람을 일으키며 헛기침을 해댔다.
"아부지가 무신 수로?....."
장칠문은 어이없는 헛웃음이 새나오려는 것을 얼굴을 돌리며 참아냈다.
"이놈아, 느그 애비가 누구여. 백종두가 화가나 펄펄 뛰게 맨글어놨다."
"아니, 코빼기럴 납짝허니 깔아문댔담서 화럴 질러 펄펄 뛰게 맨든 것언 또 무신 소리다요? 그 양반 화럴 질러서 이문 될 것이 머시가 있다고."
장칠문은 금방 낯빛이 변했다.
"이놈아, 짜잔허니 겁 묵덜 말어. 백종두 지가 백여시먼 이 애비넌 천년 묵은 호랭이여. 이애비가 누군디 비싼 밥 묵고 손해날 짓거리 허고 댕기겄냐? 니넌 이 애비 걱정일랑 말고 니 헐 일이나 야물딱지게 잘허고 댕겨. 어쨌그나 이 애비가 이긴 줄이나 알고, 얼렁 가자!"
장덕풍은 호기 있게 말하며 또 아들의 어깻죽지를 철퍽 쳤다.
"야아, 그래도 백 면장얼 조심해야 헝마요. 그 양반 오기에다 성질머리가 오뉴월 무구에다 구시월 독새란 것언 다 소문난 것잉게라.
장칠문은 아버지의 말에 마음을 놓으면서도 이렇게 귀를 달았다.
"이놈아, 말끝마동 그 양반, 그 양반 허덜 말어. 백종두야 아전이여, 아전!"
장덕풍은 입안에 바람을 문 마땅찮은 얼굴로 아들을 째지게 눈흘겼다.
"아부지도 참. 나 인자 가볼라요."
장칠문은 픽 웃음을 흘렸다.
"니 시방 어디로 가냐?"
"경찰서로 히서 부두로 가는디요."
"또 누구 잡으로 가냐?"
"아닌디요. 누구 만내로 가능마요."
"안 급헌 일인갑는디 나허고 가자."
장덕풍은 아들의 경찰복 소매를 무작정 잡아끌었다.
"안 급허지도 않은디, 어디 갈라고라?"
"이놈아, 토지조사사업인지 난리판 굿인지도 다 끝났는디 바쁜 칙끼 허덜 말고 이 애비 따라가서 효도도 좀 혀."
장칠문은 그때서야 아버지가 어디를 가자고 하는지 알았다. 또 정미소 공사하는 데를 가자는 것이었다. 장칠문은 서무룡이와의 접촉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요즈음 들어 부두노동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다시 움직인다는 정보가 잡히고 있었다.
"아부지넌 농새 안 지묵고 산다고 참 속편헌 소리 허시오. 이 토지조사사업이 군청이고 면사무소 가차운 평지서나 끝나가제 산골꺼정다 해나가자면 앞으로도 년이 더 걸릴란지 모르는 것이 토지조사사업이다요."
장칠문이는 아버지를 따라 걸으며 제법 아는 체를 하고 있었다.
"나야 돈이면 질이제 땅에넌 욕심없응게 그놈에 토지조사사업이 5년이 더 걸리든지 10년이 더 걸리든지 그것이야 나가 알 배 아니고, 그 토지조사사업얼 험서 딱 한 가지 속시언허게 잘 정헌 것이 있다. 고것이 머시냐! 양반 놈덜도 상것덜허고 똑겉이 세금얼 내게 헌 거이다. 고것언 참말로 총독부가 잘허고 잘헌 일이다. 속이 씨언허니 팍 뚫리는 것이 3년 아니라 30년 묵은 쳇증이 내리는 일이여. 농사꾼이고 장사꾼덜언 쌔빠지고 좆빠지게 일혀서 온갖 잡세럴 이리기고 저리김서 사는디 양반놈덜언 한평상 팽팽 놀고 묵음시로도 세금이라고넌 땡전 한닢도 안 내고 뻥뻥 큰소리쳐 댐서 사는 것얼 생각허먼 나가 오장육부가 비비꼬이고 피가 꺼꿀로 솟는다. 인자 총독부가 내 분얼 풀어줬응게, 이래저래 일본 시상언 잘 온 것이여, 하먼 자알 온 것이고말고."
장덕풍은 제물에 흥분해 목소리가 커질 대로 켜져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그를 힐끔거렸다.
"아부지, 사람덜이 숭보요."
장칠문은 민방해서 아버지의팔을 질벅거렸다.
"아니, 어떤 놈덜이 숭봐? 나 말이 어디 틀린 디가있냐!"
장덕풍은 주위를 휘둘러보며 더 큰소리로 결기를 부렸다.
"아부지말이 다 맞제라. 근디, 일본 시상이 온 것이 잘된 것이란 말언 이리 내놓고 소리질를 일이 아니구만요."
장칠문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그려?..... 이, 니 말이 맞는갑다. 우리 집안에나 좋제 다 존 것이 아닝게."
장덕풍은 멋쩍은 듯 입을 훔쳤다. 사탕 공장 옆에 진작 마련되어 있었던 빈터에 정미소와 미선소 건물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정미소 안에서는 힘 쓰는 사람들의 소리와 쇠를 두들기는 소리들이 울려 나오고 있었다. 한창 기계를 설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장덕풍은 그 소리들을 들으며 한없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번 가을걷이에 맞추어 정미소가 돌아가게 짠 것이었다. 정미소가 돌아가면 돈이 쏟아지게 되어있었다.
"니가 나럴 따라 들어가서 한바쿠 척 돌아라. 인부 놈덜이 그 순사복얼 또 봐야 팔다리럴 재게 놀린다. 일본기술자도 맘 새로 묵고."
장덕풍은 헛기침을 하고 앞장서며 아들에게 눈짓했다. 장칠문은 모자를 바로잡고 옷을 털고는 아버지를 뒤따랐다. 이렇게 효도를 하려고 온 것이 벌써 서너 차례였다. 그는 아버지가 동행을 원할 때마다 귀찮아하지 않고 뒤를 따랐다. 꼭 아버지에게 효도를 하겠다는 마음이 동해서가 아니었다. 군산 바닥에서 돈이 잘 벌리기로 정미소를 당할 것이 없었다. 정미소의 기계는 쌀을 찧는 기계가 아니라 돈을 박아내는 기계라고 해도 과한 말이 아니었다. 기계가 돌아가는 만큼 돈이 벌렸던 것이다. 그런 데다 볏섬들은 부두에 산더미로 쌓여 있어서 기계는 사시장철 쉴 짬이 없었다. 보물이 따로 없는 그 정미소는 언젠가는 고스란히 자신의 것이 될 터였다. 오래가도 탈이 안 생기도록 처음부터 감독을 단단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수고 많으시오. 일은 잘돼 가오?"
장덕풍은 정미소 안으로 들어서며 일본말로 크게 말했다. 그는 일본 기술자를 찾고 있었다.
"아, 일찍 나오십니다. 어서 오세요."
키가 작고 머리를 치켜 깎은 일본사람이 장덕풍 앞으로 달려오듯 하며 일본식 인사로 허리를 깝신거렸다.
"이런, 또 술 마셨소?"
장덕풍은 손바닥으로 코앞을 부채질해대며 얼굴을 찌푸렸다.
"일은 기한 내에 틀림없이 마칩니다."
일본 기술자는 술 냄새를 풍기면서도 자신 있게 말했다.
"기한을 지키는 게 문제가 아니오. 술에 취해 기계가 잘못되면 큰일이니까 그렇지. 무슨 술을 그리.....쯧쯧쯧....."
"그런 것쯤 아무 염려 마십시오. 저는 술을 마셔야 일이 더 잘됩니다. 그동안 수백 번 기계 설치를 했지만 단 한 번도 잘못된 적이 없으니까요."
일본 기술자는 삐뚤삐뚤하게 제멋대로인데다 담뱃진까지 끼인 치아를 드러내며 헤헤거리고 웃었다.
"아이고, 니넌 천상 왜놈이라고 하시 당해도 싸다. 그 주먹뎅이만헌 모집에 그 못난 낯짝에 어찌 기계 척척 맨지는 기술언 지녔을끄나? 왜놈덜언 알다가도 모를 물건덜이여."
뒷짐을 진 장덕풍은 술기운 어린 상대방의 눈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부들은 말 잘 듣소?"
장칠문이 나서며 물었다.
"예, 잘들 하고 있어요. 인부들 애쓰는데 이리 오신 김에 술값이나 좀 주고 가세요. 그러면 기운 더 잘 쓰지요."
기술자가 농담하듯 말했고, 장칠문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장덕풍은 잽싸게 그만두라는 눈짓을 했다. 장칠문은 인부들 쪽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아버지는 10전을 보고 물밑으로 50리를 가고, 마누라는 빌려줘도 돈은 안 빌려준다는 장사꾼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제복을 차려입은 순사였다. 술값 몇 푼을 안 내놓으면 순사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건 기술자가 한 말이었다. 그 말 대접을 하지 않으면 기계 설치를 하면서 어느 대목에서 오기를 부릴지도 몰랐다.
"자네덜 일덜 잘헌담서? 술값 여그 있응게 이따가 한 잔씩 허소."
장칠문은 호기를 부리며 술값을 내놓았다. 인부들이 와아 소리쳤다.
"니 나가 눈치어는 것 꺼꿀로 들었냐?"
"아부지, 나가 애기요? 돈얼 쓴 만치 기계가 잘 돌아간단 말이오."
"짜석, 속에 구렝이가 들앉었네."
장덕풍은 더없이 흐뭇하게 웃었다.
"저그 미선소넌 언제 문얼 연다요?"
"정미소가 돌아야제. 근디, 니넌 미선소 옆에넌 얼씬도 헐 생각 말어."
"야아?"
"아, 몰라서 그려? 백종두 아덜이 하로아칙에 신세 그 꼬라지로 엎어져뿐 것이 미선소 들락날락허다 그리 된것 아니여. 니넌 애시당초 발질얼 말어!"
장덕풍의 어조는 단호했다.
"야아, 그러제라."
장칠문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딴 맘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을 피해 얼마든지 드나들 수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장덕풍은 아들의 접근을 미리 막아버린 것이 더없이 통쾌했다. 따로 첩을 두어 아까운 돈 죽일 것이 없었다. 혼자 드나들며 맘껏 재미를 볼 작정이었다.
6. 역둔토 특별처분령
군산부두는 밀물 때를 따라 활기가 넘치고 시끌벅적해졌다. 밀물을 타고 일본 배들이 다투어 몰려드는 것이었다. 군산 포구 도서해안에 자리 잡은 터라 썰물이 지면 거무튀튀하면서 윤기 나는 뻘밭을 질펀하게 드러냈다. 뻘밭은 차지고 미끄럽고 물컹거렸다. 게나 물새 같은 몸 가벼운 것들이 아니고서는 뻘밭에 발을 들였다 하면 푹푹 빠지게 마련이었다. 몸집이 큰 데다 짐까지 실은 배들은 뻘밭에 얹히면 꼼짝달싹을 못 했다. 그런 배들은 다시 밀물이 들어야 배 구실을 할 수 있었다. 군산항에 드나드는 모든 배들은 밀물을 타고 들어왔다가 썰물을 타고 나가야 했다. 마치 시계바늘이 돌 듯 아침과 저녁으로 어김없이 밀물이 져오면 부두는 크고 작은 배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런데 군산의 중심지를 일본사람들이 장악했듯이 부두에 밀려드는 거의 모든 배들도 일본 배였다. 일본 배들은 화물도 많이 실어왔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람들도 많이 실어왔다. 그들의 대부분은 가족을 거느리고 이민을 해오는 사람들이었다. 이삿짐까지 챙겨든 그들은 더위가 고비를 넘기면서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요상허시, 오늘도 일본 것덜이 저리 많이 쏟아져 들어오덜 않는다고?"
"그려, 저것이 어쩐 일인지 모르겄네. 우리도 자꼬 살기 에로와지는 판에 저것덜이 저리 몰려들먼 어찌 될랑고?"
"글씨 말이여. 넘 땅얼 똑 즈그덜 마당 들어서디끼 헌당게."
"자네덜, 자다가 봉창 뚜딜기는 소리덜 그만혀. 즈그 땅에 즈그덜 식구 디려다 살리겄다는 것인디 무신 실답잖은 말덜이 그리많혀."
"즈그 땅?..... 그려, 그렇기도 허제."
"참말로 요상시럽네. 어째 요새 저리 부쩍 많애질꼬?"
"그 사람 참, 요상시러울 것도 많네. 더운 여름 지내고 묵을 것 많고 살기 존 가실 골라 오는 것이야 당연지사제."
"그려, 우리야 등짐 질 짐 많애진게 좋제 머."
"인자사 말 지대로 허네. 우리야 등짐 많이 지고 돈만 많이 벌먼 그만이여."
"그 사람 참, 속창아리도 없네. 우리가 단 말에 속아 땅 팔아묵고, 종당에넌 소작꺼지 뺏기고 요 꼬라지로 나슨 것이 무신 연곤디. 다 저것덜이 몰려들어 밥통 뺏긴 것 아니냔 말이여."
"아이고, 또 그 소리여? 죽은 자석 붕알 맨지먼 무신 소양이여. 자네 언제꺼정 그럴랑가?"
"내 땅 되찾을 때꺼정 그럴라네."
"자네 평상에 못 찾으먼?"
"아덜헌티 일르고 죽어야제."
"아이고, 저놈에 성미, 찔기기가 삼줄이여."
지게를 진 등짐꾼들이 부두의 울타리 밖에서 서성이며 말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두의 막노동자들 중에서도 가장 처지는 축이었다. 노동자들 중에서 그래도 고정수입을 올리는 축은 볏섬이나 쌀가마를 등짐 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십장이란 사람들 둘레에서 조를 짜 움직였다. 그 속에 끼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날품을 팔려고 일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았다. 그 지게 진 날품팔이들이 부두에서는 제일 천덕꾸러기였고 배고픈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일거리를 찾아 허덕이는 한편으로 쌀가마를 등짐질하는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를 짜서 돌아가는 그들 틈에 끼어들기가 쉽지 않았다. 하시모토는 쌀가마와 소금가마를 가득 실은 배가 밀물에 떠받쳐 오르며 통통통통 발동을 거는 것을 보고 부두에서 돌아섰다. 그는 마음이 뿌듯하면서도 아쉬웠다. 배를 떠나보낼 때마다 느끼게 되는 엇갈리는 감정이었다. 자신의 생산품이 배에 실려 본국으로 간다는 것이 여간 뿌듯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양은 영 셈에 차지 않았다. 쌀의 경우 지금의 열 배, 아니 백배가 되어야 마음에 빈 구멍이 없어질 것이었다. 축산면만 다 손아귀에 넣게 되면 어려울 것이 없는 일이었다. 이번 토지조사사업 덕에 땅이 늘어나긴 했지만 기대했던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 땅 욕심을 가진 양반 지주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앞으로의 난관이고 표적이었다. 하시모토는 이곳에 자리 잡은 자신의 판단에 또 넘치는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서해안의 폭넓고 경사 완만하게 펼쳐져 나간 뻘밭, 그것이야말로 보물단지였고, 도깨비방망이였다. 썰물 때 드러나는 뻘밭은 마치도 바닷속에 숨겨진 평야처럼 질펀하고 드넓었다. 그 뻘밭에 나직하게 둑을 막기만 하면 그대로 소금밭이었다. 그리고 소금의 질 또한 뛰어났다. 그뿐이 아니었다. 바닷물로 돈을 만들어내는 절대조건인 인건비가 일본에 비해 너무나 쌌다. 거기다가 나라의 전매사업으로 철통같이 보호를 받고 있으니 돈은 거저 굴러들어오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쌀에는 비교할 수가 없었지만 소금도 일본으로 실려 가는 것은 질이 좋고 값이 비싸기 때문이었다. 하시모토는 자신의 생산품이 일본으로 떠나는 날에는 어김없이 부두에 나오고는 했다. 그건 관청에서 지시한 것이 아니었고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산품이 배에 가득 실린 것을 보면서 애국하는 보람을 느꼈고, 돈벌이의 재미를 만끽했으며, 사업확장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리고 그때가 군산에 발걸음 하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그는 땅 늘리기에 정신을 팔다가 군산과의 연결이 소홀해지는 것을 언제나 경계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하시모토상! 저 이동만입니다."
"아니 이상, 어쩐 일이시오?"
이동만이가 반가워하는 것에 비해 하시모토는 심드렁한 기색이었다.
"예, 또 이주객들 마중 나왔지요."
"수고가 많소. 헌데, 요새 이주객들이 왜 이렇게 많아지고 있소?"
불쑥 말이 나온 것과 동시에 하시모토는 아차 후회했다. 일개 농감에 불과한 조센징한테 그런 것을 묻는 것은 자신의 체면 손상이었던 것이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다 관청에서 알아서 하는 일 아니겠어요?"
이동만의 일본말은 능란했다.
"아, 알았소. 내가 며칠 전에 듣긴 했는데, 그날 술이 너무 취해서 들은 얘기라 그만 깜빡했었소."
하시모토는 날래게 둘러 붙였다.
"아 예에, 그 연유가 뭔가요?"
"아, 그걸 여기서 발설할 수는 없고, 차차 알게 될 테니 기다리시오."
하시모토는 정말 그 내용을 알고 있는 것처럼 꾸며대며 자신이 관청과 가깝다는 사실을 거만스럽게 과시해 보였다.
"예에, 그렇지요. 관청 일을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요."
이동만은 전혀 의심하지 않은 채 그저 하시모토의 비위만 맞추려 들었다.
"아, 이상 아들은 측량학교에 잘 다니고 있소?"
하시모토는 마음이 찜찜한 것을 지우고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재확인시키기 위해 일부러 이동만의 아들의 안부를 입에 올렸다.
"예에, 하시모토상 덕분에 우리 아들놈 출세길이 훤히 열렸습니다. 그놈이 곧 측량 외업반을 따라나서게 되었습니다."
이동만은 다리를 절름거리는 몸이면서도 그저 허리를 굽실거렸다. 아들이 측량외업반에 편성될 때 또 하시모토의 힘을 빌리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아, 벌써 교육 기간 6개월이 다 돼가는 거요?"
하시모토는 마침내 어깨를 뒤로 맘껏 젖히며 입꼬리 휘어지는 웃음을 지어냈다.
"예, 세월이 유수와 같지요. 하시모토상의 은혜가 백골난망이옵니다."
"아 뭐, 그까짓 걸 가지고. 자 그럼, 난 부청에 들어갈 일이 바빠서......"
하시모토는 굳이 <부청>을 입에 올리며 손을 까딱하고 돌아섰다.
"예, 살펴 가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이동만은 서둘러 허리를 깊이 굽혔다. 그냥 서 있어도 기우뚱한 그의 몸이 곧 넘어질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말에 올라탄 하시모토는 말고삐를 부청 쪽으로 돌렸다. 그는 말발굽 소리가 따가닥따가닥 박자를 맞추도록 말을 속보로 몰며 시가지를 두루 살피고 있었다. 새로 꾸며진 군산은 볼수록 아담하고 정이 들었다. 길들은 넓고 곧게 뻗어 나가며 서로서로 연결되고 있었고, 그 길을 따라 크고 작은 건물이며 집들이 제각기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사통팔달 막히는 데가 없는 그 설계는 서양의 신식도시 그대로였다. 조선사람들이 살아오고 있는 구군산과 일본사람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신군산은그 규모나 모습이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해변가 버려진 땅에다 이런 신식도시를 꾸며내다니! 그는 또 감탄하고 있었다. 그건 위대한 모국 일본에 대한 경의인 동시에 자신이 바로 일본인이라는 뿌듯한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계기였다. 일본이 조선을 집어먹은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일찍이 청나라의 속국이었는데 일본이 청나라를 무찔러 지켜주었다. 그런데 또 러시아가 군침을 흘리며 집어삼키려고 들었다. 일본은 다시 러시아와 싸워 대승하면서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 주었다. 그러나 조선은 자력으로 지탱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일본이 물러가면 다시 러시아의 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 밥상을 차려줄 이유는 없었다. 조선은 일본이 두 번씩이나 싸워서 당연히 차지하게 된 전리품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내가 그 전리품의 극히 일부를 특혜받아 재미를 보는 것 또한 너무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조선의 땅은 꽤나 쓸 만하다. 산이 너무 많은 것이 흠이지만, 산은 산대로 또 쓸모가 있다. 나무들이 울창해 산림자원이 풍족하고, 똑 금이며 석탄도 많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산악지대에는 별 관심이 없다. 평야지대에 비해 위험하고 재미없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돈은 안전하고 신속하고 사는 재미를 즐겨가며 벌어야 한다. 두고 봐라, 앞으로 몇 년만 더 있으면 반드시 내가 이 호남평야를 주름잡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조금씩 굽히며 사는 수밖에 없다...... 하시모토는 말이 뛰는 율동에 몸을 맡긴 채 이런 생각을 하며 부청에 다다르고 있었다.
"요즘 들어 갑자기 이주민들이 불어나고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요?"
하시모토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고는 곧 쓰지무라에게 물었다.
"왜 그걸 오늘에사 묻소? 하루이틀 된 일도 아닌데."
쓰지무라가 서류를 뒤적이며 웃음 담긴 눈길을 힐끗 보냈다.
"예, 처음엔 조금 늘어나나 보다 했는데 자꾸 많아지니까 이상한 생각이 들더군요."
"이상한 생각?"
쓰지무라가 서류를 덮고 돌아앉으며 담배를 빼물었다. 하시모토는 재빨리 성냥을 켜댔다.
"예에, 이렇게 많이 몰려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관청에서는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인가, 혹시 뭐가 잘못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오르지 않습니까."
하시모토는 무엇인가를 탐지해 내려는 눈빛으로 상대방의 응답을 쉽게 유도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거 자네다운 의문이군그래."
쓰지무라는 양쪽 끝이 비비 틀려 치켜 올라간 콧수염을 쓰다듬고는,
"허나, 자네 눈엔 총독부가 그리 시원찮게 보이는가?"
하며 담배 연기를 훅 내뿜었다.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시모토는 너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자신의 말이 쓰지무라에게 그런 느낌을 갖게 했다면 그건 너무 입장 난처한 오해고 큰일이었던 것이다.
"아 뭐, 그리 놀랄 건 없고. 내 말은 말이야, 대일본제국의 현신들이 모인 조선총독부가 자네가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계획하고 무책임하지 않단 말일세. 허허허허......"
"그거야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전 그저 이주민들이 너무 많이 물려오니까 궁금해서 그런 거지요."
하시모토는 쓰지무라의 헛웃음에 안심하며 비위 맞추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주민들이 너무 많이 몰려온다? 그 생각에 바로 문제가 있네. 자네 생각엔 지금까지 내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대략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
"글쎄요오......그게 그러니까...... 한 10여 만에서 15만 정도......"
"됐네, 그 정도면 대충 맞힌 셈이네. 헌데, 동양 제일의 정치가이시고 정략가이시며 조선의 초대 통감이신 이토 히로부미각하께서 일찍이 뭐라고 설파하신지 아나? 내지인 이주에 대해서 말이야."
"예에, 뭐라고 말씀하셨는지요?"
알아도 모른다고 할 판이었는데 마침 모르는 문제라서 하시모토는 그저 가르쳐주십시오 하는 태도로 공손하게 말했다.
"어허, 자네같이 똑똑한 사람이 그런 중대한 것을 몰라서야 되나."
"에에 또, 그러니까 말이야. 이토 각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선을 제대로 통치하려면 내지인을 2백만 정도 이주시켜야 한다고 하셨네. 현재까지 이주민을 대략 15만으로 잡더라고 2백만까지 가려면 아직 얼마나 더 남았나? 자네, 이토 각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모르진 않겠지?"
쓰지무라는 하시모토를 빤히 쳐다보았다.
"예, 알겠습니다. 백년대계로 내다보면 행정력이나 경찰력만을 가지고는 안된다는 뜻 아닌가요?"
"맞았네, 역시 자넨 영리해서 좋아. 우린 앞으로도 계속 2백만이 될 때까지 내지인을 이주시켜야 하네. 그건 우리의 기본 정책이야."
"예, 조센징들을 꼼짝 못하게 다스리자면 그렇게 돼야 하겠지요. 헌데 그 많은 이주민들의 생활대책이 무엇인지...... 저는 그게 걱정이라서......"
하시모토는 <궁금>하다고 하지 않고 <걱정>이라고 했다. 남보다 먼저 정보를 알아내고 싶은자신의 속셈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자네 그게 궁금해서 날 찾아온 모양이지?"
하시모토는 그만 가슴이 뜨끔해졌다. 쓰지무라는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촉수 예민한 공무원이었다.
"아닙니다. 오늘 출항하는 날이라 배 떠나는 것 보고 찾아뵐라고 했었습니다. 헌데 마침 이주민들이 너무 많이 하선하는 것을 보고 걱정이 돼서 찾아뵌 김에 여쭤보는 겁니다."
"아, 오늘 또 출항하는 날인가?"
쓰지무라는 별 관심 없는 척 눈길을 천장으로 돌리며 대꾸했다.
"저어, 이거......"
하시모토는 양복 속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며 문 쪽을 빠르게 살폈다. 그리고 책상 옆에 달린 서랍 하나를 약간 빼내 봉투를 밀어 넣었다. 그 동작은 민첩하게 이루어졌다.
"자아, 담배 피우게. 자네 신수는 항시 좋구만. 말은 계속 잘 달리나?"
쓰지무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시모토에게 담뱃갑을 내밀었다.
"예, 이젠 길이 익숙해져 저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아까도 부두에서 여길 오는데 제 놈이 다 알아서 부청 앞에서 멈추지 않겠습니까. 어허허허......"
"그놈 참 기특하군. 말은 역시 개에 못지않은 영물이라니까."
"예, 영물이고말고요."
하시모토는 쓰지무라를 따라 헛웃음을 쳤다. 그 웃음은 봉투를 건네고 받을 때마다 나누는 것이었다. 그들은 상호 고마움과 유대감과 신뢰감 같은 것을 그 웃음에 담아내고 있었다. 하시모토는 배가 뜰 때마다 부두에 나왔고, 그때마다 쓰지무라를 찾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업을 확장시켜 나가는 데는 쓰지무라는 총독보다 더 긴요하고 효과적인 실무자였다.
"자네 말이야, 아까 이주민에 대한 생활대책을 걱정했는데 말이야. 자네가 공무원으로 앉았다면 어떤 방법을 강구하겠나?"
쓰지무라는 하시모토에게 옆 눈길을 보내며 넌지시 물었다.
"글쎄요, 저 같은 우생이 알 도리가 있습니까. 저는 애당초 공무원 자질이 없는 위인인걸요."
하시모토는 그저 못난 척 겸손한 척해 보였다. 섣부르게 입을 놀렸다가는 잘난 척하는 것이 되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가 십상이었고, 그렇게 되면 귀띔해 주려고 했던 정보마저 놓쳐버릴 위험이 있었다.
"글세, 자넨 공무원보다 사업가가 더 어울리기는 하지."
쓰지무라는 앉음새를 고치며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내 지인들을 그렇게 이주시키면서 총독부가 속수무책일 리가 없지. 대책을 세우긴 했는데 그게 얼마나 효과가 날지는 잘 모르겠군."
그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시모토는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드디어 자신이 알고 싶어 했던 정보가 나올 참이었던 것이다.
"자네 가까이 좀 오게."
하시모토는 잽싸게 쓰지무라 옆으로 다가앉았다. 쓰지무라는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입을 꾹 다문 하시모토의 눈은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쓰지무라의 속삭임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 사실이 발설돼서는 안 되네."
쓰지무라가 허리를 펴며 하시모토의 눈을 응시했다.
"천황폐하께 맹서합니다."
하시모토의 결연한 선언이었다.
"됐네. 난 회의에 들어가야 하네."
"예, 다시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하시모토는 부청을 나오면서 새로 떠오른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쓰지무라가 귓속말로속삭여 준 그 대책이란 전혀 예상 밖의 조처였다.
‘아니, 그걸 땅을 늘리는 데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퍼뜩 떠올린 생각이었다. 하시모토는 말이 걷는 대로 흔들리며 그 생각에 골똘히 빠져들고 있었다.
‘이주민들에게 우선적으로 토지를 대여해 준다...... 대여는 어디까지나 대여로 이주민들은 경작권을 갖게 되는 것이고...... 주인은 총독부나 동척 그대로지...... 그렇지만 대여료가 아주 싸겠지...... 이걸 어떻게 이용하는 방법이 없을까...... 그리고, 그리고 말이야, 대여가 일정기간을 경과하면 소유권 이전이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이것이 제일 중요한 문젠데......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일이 뜻대로 풀리는 건데...... 훠어이, 훠어이, 내 땅이여, 내 땅!’
이런 외침과함께 말이 히히힝 코를 불며 앞다리를 치켜 올렸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하시모토는 질겁을 해서 고삐를 잡고 늘어지며 굴러떨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모면하고 있었다.
"아하하하......"
"으어허허허......"
"저, 저, 저, 저것!"
"히야, 공짜 구경났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웃어대고 일본말로 소리치고 있었다. 그때서야 하시모토는 그곳이 군산역 광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말은 습관대로 죽산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훠어이, 훠어이, 내 땅이여, 내 땅!"
한 남자가 말 앞으로 팔을 휘젓고 달려들며 또 외치고 있었다. 말이 또 요동치려고 했다. 고삐를 틀어쥔 하시모토는 말을 다독거리며 안심시켰다.
"어허허허...... 잘한다, 잘해!"
또 사람들이 일본말로 소리치고 있었다. 하시모토는 일순간에 화기 치뻗어 오르고 있었다. 미친 조선놈이 말에게 덤벼드는 바람에 자신은 사람들 많은 역 앞에서 완전히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가야로!"
하시모토는 욕을 내뱉으며 거지꼴인 미친 남자를 말채찍으로 내리쳤다. 미친 남자는 얼굴을 가리며 비척거렸다.
"칙쇼!"
하시모토는 이빨을 갈아붙이는 험악한 얼굴로 다시 채찍을 내리쳤다. 채찍은 또 미친 남자의 얼굴을 갈겨댔다. 미친 남자는 더 심하게 비틀거렸다. 하시모토는 기민하게 말을 몰아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채찍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삽시간에 구경꾼들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그들을 에워쌌다. 미친 남자는 얼굴이 찢어지고 귀가 찢어져 피를 흘리면서도 도망을 가지 않고 한사코 덤벼드는 몸짓을 하고 있었다. 하시모토는 연상 욕을 내뱉어가며 채찍을 휘둘렀다. 미친 남자는 결국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미친놈의 새끼, 재수 없게 누구 앞에서 지랄발광이야!"
하시모토는 침을 내뱉고는, 다들비켜! 사람들에게 외치며 채찍으로 말 볼기짝을 쳤다. 말 앞쪽에 서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틔웠다.
"빌어먹을, 조선 것들은 사내고 계집이고 왜 저렇게 미친 것들이 많아."
하시모토는 말을 세게 몰기 시작하며 또 침을 내뱉었다. 하시모토는 그 미친 남자의 생각을 지워버리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미치게 된 사연이 자꾸 떠올랐다. 그 남자는 언제나 역 주변을 맴돌면서 똑같은 소리를 외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 별명도 그가 외치는 소리인 <훠어이, 훠어이>로 역 주변의 일본사람들에게 통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역 일대에 농토를 가졌던 농부라고 했다. 그런데 철도공사가 벌어지게 되고 역이 들어설 자리가 정해지면서 그 남자는 농토를 전부 수용당하고 말았다. 억울함을 참지 못한 그는 그때부터 약간씩 이상해지기 시작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역이 다 지어지고 그 주변에 일본사람들의 상점이며 집들이 들어서게 되면서 완전히 미친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철도가 놓이지 않거나 역이 들어앉지 않은 땅을 조금도 되돌려받지 못하고 일본사람들이 다 차지해 집을 지어버렸던 것이다. 그 남자는 관청이고 어디고 쫓아다니며 자기 땅이라고 주장해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건 이미 법적으로 일본사람들의 땅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관청에서는 기차역 부지를 아예 몇 배 넓게 수용한 다음 공사를 끝내고 나서는 나머지 땅을 일본사람들에게 싼값으로 불하해 주는 특혜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건 군산에서만 특별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본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어느 것에서나 사용하는 똑같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역이나 관청주변 같은 요지는 손쉽게 일본사람들의 차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흥, 별수 없지. 누가 나라를 뺏기랬나."
하시모토는 코웃음을 치며 말 볼기짝에 채찍질을 가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께름칙했다. 그 미친놈의 별명인 <훠어이, 훠어이>가 무슨 찌꺼기처럼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훠어이 훠어이란 조센징들이 나락을 까먹으려고 논에 내려앉은 새들을 쫓으려고 외쳐대는 소리라고 했다. 그럼 그 미친놈이 팔을 휘저어대며 훠어이, 후어이 외치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놈은 일본사람들을 참새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정신이 돈 미친놈이 그렇게 멀쩡할 수가 있는가! 그놈이 혹시 정신이 멀쩡하면서도 괜히 미친 척하는 것이 아닐까? 글세...... 미치지 않은 놈이 그렇게 오래 미친 척을 하며 살 수가 있는 것일까? 하시모토는 말을 향해 무작정 덤벼들던 그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무모한 행동은 정신이 성한 자로서는 할 수가 없는 짓이었다. 그는 눈길을 멀리 보내며 미친놈을 그만 잊어버리기로 했다. 미친 것이 분명한 바에야 그건 구경거리일 뿐이었지 장애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들녘 저편으로는 일본 집이 네댓 채 장난감처럼 작게보였다. 그 친근한 생가를 보는 순간 하시모토는 문득 향수를 느꼈다. 들녘 군데군데에 일본 집들이 자리 잡게 되면서 불현듯 향수를 느낄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일본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집들은 묘한 마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 땅을 틀림없이 차지했구나 하는 확신을 느끼게 했다. 그건 군산 같은 도회지에 밀집되어있는 여러 가지 건물들에서 그렇게 진하게 느낄 수 없었던 또다른 감정이었다. 그런 감정을 되새겨보면 이토 각하의 2백만 이주정책의 발상은 그야말로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었다. 2백만을 이주시켜 조선 땅 방방곡곡에서 살게 해야만 그것이 뿌리가 되고 울타리가 되어 조선 땅은 영원히 일본 것이 될 것이었다. 하시모토는 넓고 넓은 들녘 여기저기에서 적으면 서너 채, 많으면 예닐곱 채씩 모여 새로운 일본인 부락을 형성해 가고 있는 일본 집들을 보며 가슴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일본인 부락들은 조선 마을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 집 모양도 달라서 금방 구별할 수 있었다. 일본 농가들은 반듯반듯하고 날렵하고 산뜻한 데 비해 조선 농가들은 둥그스름하고 둔하고 우중충해 보였던 것이다. 하시모토는 집 하나만 보더라고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늦더위가 가시고, 진저리치듯 쥐어짜듯 울어대던 매미 소리도 사라졌다. 해맑게 푸르러지기 시작한 하늘가로 새하얀 구름덩이들이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하얀 천이 스치기만 해도 금방 초록물이 들 것처럼 짙푸르던 들녘에도 어딘가 노르스름 한기가 실바람 스치듯 내비치고 있었다. 가을걷이도 머지않았는데 이 동네 저 동네에서는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본사람들의 집을 짓는 일 때문이었다. 외리에서도 두세 사람이 눈에 불을 달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법석이었다.
"저놈덜이 기연시 우리 밭에다가 말뚝얼 박아부렀소. 이 일얼 어째야 좋겄소."
한기팔은 주먹으로 마룻장을 내리쳤다.
"저런 죽일 놈덜이......"
남상명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당허고만 있어야 되겄소?"
이빨을 뿌드득 가는 한기팔의 목소리는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참말로, 저것얼 어째야 쓸랑고......"
남상명의 목소리는 더 힘이 없어졌다. 한기팔이가 자신을 찾아온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박병진이 감옥에 갇힌 다음부터 나잇값을 해내느라고 사랑방에 모여앉을 때면 좌장 노릇을 한 탓으로 한기팔은 제 밭에 왜놈들이 집 짓는 것을 막아 달라는 것이었다. 한기팔의 애가 얼마나 타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말로 해서 들을 사람들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 그전처럼 모두 들고 일어나 막을 수도 없었다. 만약 그렇게 나서게 되면 결말은 보나 마나 뻔한 것이었다. 총을 들이댄 순사들에게 끌려가 또 죽도록 매타작이나 당하게 될 뿐이었다.
"그놈덜이 집얼 지어불먼 그 땅언 영영 못 찾게 되야분단 말이오."
한기팔의 절박한 말은 그대로 뜨거운 핏덩이였다.
"참말로, 미치고 환장헐 일이 따로 없네. 이리 등신맨치로 당허고만 살아야 허니......"
남상명은 다 같이 들고일어나자고 할 수도 없고, 그냥 참으라고 할 수도 없어서 또 알맹이 없는 소리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한기팔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난감한 형편을 알아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한센, 여기 기셨구만요. 나럴 찾으로 왔드람서요?"
사립 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남상명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박건식이가 들어서고 있었다. 남상명은 실한 짐꾼을 얻은 기분으로 박건식이가 반가웠다.
"이, 자네 어디 갔었등가!"
한기팔이는 반색을 하고 들었다.
"땅이나 파 묵고 사는 놈이 가먼 어디럴 갔겄소. 소작질 해묵는 논에 나갔제."
박건식의 대꾸에는 심통이 차 있었다. 농토를 빼앗기고 도로 자기네 논을 소작지기 하고 있는 분한 감정이 그 말 속에는 퍼렇게 살아 있었다.
"여그 걸치소."
남상명이 자리를 권했다.
"어이 보소, 자네 우리 밭에다가 집 질라고 왜놈덜이 말뚝 박고 지랄발광 시작헌 것 안가, 모른가?"
한기팔의 목소리는 뜨거웠다.
"나가 봉사가 아닌 게라."
박건식의 심드렁한 대꾸였다.
"이, 자네야 야물딱진께 누가 안 갤차줘도 다 알고 있구만. 근디 말이시, 그 일얼 어찌야 쓰겄능가?"
"야아? 어쩌기넌 머럴 어째라?"
박건식은 한기팔을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이사람아, 왜놈덜이 집얼 지어불먼 그 땅언 영영 못 찾게 될 것 아니냔 말이여. 근디도 당허고만 있어야 되겄어?"
한기팔은 목소리가 높아지며 자기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 쳤다.
"아이고메, 간 떨어지겄소. 나가 한샌 말얼 못 알아묵는 것이 아니오. 왜놈덜이 즈그덜 맘대로 땅얼 뺏고, 즈그덜 맘대로 집도 짓고 허는 것인디 어떤 장사가 나서서 그 일얼 막겄소."
박건식의 말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남상명은 역시 젊은 사람이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엇다. 그러나, 자신이 해야 될 말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한기팔을 너무 서운하게 할까 봐 마음이 불안하기도 했다.
"아니, 자네 시방 불난 디 부채질허잔 것이여 머시여!"
한기팔이 핏대를 세우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무신 섭헌 소리다요. 땅 뺏긴 사람덜 모두가 당장이라도 나서서 집 못 짓게 헐 수도 있소. 근디, 그러면 판이 어찌 되겄소. 주재소서 순사놈덜이 총꼬나잡고 득달겉이 나와서 다 집어갈 것 아니겄소. 잽혀 들어가먼 어찌 되겄소. 보나마나 또 반 죽게 매타작덜 당허고, 한샌언 우리 아부지맨치로 감옥에 갇힐란지도 몰른단 말이오."
"허, 말이야 청산유수로 뻔드르르허시. 다덜 즈그덜 논밭 성헝게로 손끝 맺고 앉어 귀경이나 허잔 심뽐시로 겉보기로만 날 위허는 칙허덜 말란 말이여. 다 그러덜 겁나고 무서우먼 나 혼자서도 얼매든지 왜놈덜 몰아낼 수 있응게 걱정말드라고."
얼굴이 벌겋게 들뜬 한기팔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이 한서방, 그 무신 앞짜른 생각이여. 일로 앉어보소."
남상명이 다급하게 일어나 맨발로 토방을 밟으며 한기팔을 붙들었다.
"다 소용없소, 넘넘잉게!"
한기팔이 남상명의 팔을 내쳤다. 그 바람에 남상명은 곧 넘어질 듯 비틀거렸다. 한기팔은 열기 묻어나는 숨을 씩씩거리며 사립을 벗어났다.
"차암, 우리만 땅얼 찾은 것도 아닌디......"
남상명이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
"냅두씨요,화 다 토해내게."
박건식이 혀를 차며 쌈지를 꺼냈다.
"저 사람 저러다가 참말로 무신 일 저질르는 것 아닐랑가?"
"아니구만이라. 술 한잔 걸치고 자고 나먼 화도 까라지고, 앞뒤럴 잼서 참자고 맘 묵게 될 것이구만요."
"근디 말이시, 저리 집얼 지어분 전답언 한서방 말대로 찾기가 에로와 지는 것 아닐랑가? 집
덜얼 헐어낼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시."
"그렇기도 허겄제라. 헌디, 집 안 진 논밭도 언제 찾아질란지 몰르는 일 아닌게라?"
"그려, 그도 그렇제. 칼자리야 왜놈덜이 틀어쥐고 있는 판이니."
남상명은 곰방대를 물며 한숨을 푹 쉬고는,
"그나저나 오뉴월 갈치 창새기에 쉬포리덜 몰리디끼 왜놈덜이 어찌 저리 몰아닥치는지 몰르겄네. 자네 혹여 무신 소문 못 들었능가?"
그는 박건식을 넌지시 건너다보았다. 아버지를 면회하려고 전주 걸음을 자주 하면서 행여 무슨 소식을 못 들었는가 해서였다.
"글씨요, 왜놈덜이 조선 사람덜언 죽어도 안 믿응게 즈그 백성덜얼 불러 딜여다가 조선 사람덜얼 꼼지락 달싹 못 허게 맨들라고 그런다는 소문도 있고, 조선이 일본보담 꿉꿉허덜 않고 살기 존께 그리 실어 날른다는 말도 있고, 머 그렇구만이라."
박건식도 무언가 속 시원하게 아는 것이 없어서 전주를 오가며 귀동냥한 것들을 그저 옮겨놓았다.
"그려, 그렇기도 헐 것이여. 근디 말이시, 그 많은 사람덜이 멀 해묵고 살게 헐라는지 모르겄당게로."
"그것이야 뻔허제라. 면사무소고 주재소 근방에다 집얼 짓덜 않고 들판 여그저그다 집얼 지어대는 것얼 보먼 왜놈 농사꾼덜이 농사 지묵고 살라는 것 아니겄능가요."
"그야 그런디..... 그 많은 사람덜이 농사질 농토넌 어디서 나고?"
"아이고 참 아재도 답답허시오 이. 왜놈 농장덜이 그간에 몰아 잡은 농토가 얼매나 많은디 그러요. 그 농장덜서 조선 작인덜얼 왜놈덜로 사정없이 갈아치우덜 안혔소. 농장마동 작인덜얼 다 왜놈으로 바꿔치기 헐라먼 왜놈 농사꾼덜이 지끔보담 몇 배나 더 건너와야 헐 것인디요."
"판이 그리 될라능가? 그나저나 조선 사람덜만 죽사리 치게 생기덜 안 했다고. 어쩔 것이오,"
"다 나라 뺏긴 죄제."
두 사람은 함께 한숨을 쉬었다. 밤이 이슥하게 깊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을을 부르는 풀벌레 소리만 스산하고 슬픈 가락으로 가늘게 울리고 있었다. 지게를 진 사람이 어둠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거운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지게에서는 무엇인가가 묵직하게 꿀렁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와 장단을 맞추듯 지게 진 사람의 된 숨소리가 어둠 속에 흩어지고 있었다. 지게 진 사람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약간 비탈진 길을 오르고 있었다. 지게 위에서 꿀렁거리는 소리도 좀 더 커지는 것 같았다. 비탈을 다 오른 그 사람은 지게를 받쳤다. 그리고 긴 숨을 내뿜었다. 휴우하고 터져 나오는 소리는 마치도 휘파람 소리처럼 정적 깊은 어둠 속을 울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끙끙 힘을 써가며 지게에서 짐을 내렸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주 고약한 냄새가 금방 어둠 속에 퍼졌다. 어둠 속에 진동하고 있는 냄새는 오줌과 뒤섞여 썩을 대로 썩은 똥 냄새였다. 그 사람은 똥장군을 끌고 다니며 똥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침밥을 먹은 농부들이 들로 일을 나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이장을 앞세운 순사 두 사람이 고샅길을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고샅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은 총을 든 순사들을 보는 순간 하나같이 얼굴이 딱 굳어지고 질리며 놀이를 멈추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잘 훈련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양쪽 담으로 바짝 붙어서며 고샅을 넓게 틔웠다. 어떤 아이는 아예 담 쪽으로 돌아서 얼굴을 묻었고, 또 어떤 아이는 비실비실 옆걸음질을 치고 있었고, 나머지 아이들은 어깨를 움츠린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아이들은 벌써 오래전부터 일본 순사들이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호랑이는 할머니 이야기 속에서만 사람을 잡아먹을 뿐이었지만 순사들은 바로 눈앞에서 아무나 죽이고 두들겨 패고 잡아가고 했던 것이다. 그때 이미 울며 떼쓰는 아이들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말이 바뀌어 있었다. 그전에는 <호랭이 온다, 호랭이!>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순사 온다, 순사! 순사가 니 잡으로 온다>로 바뀌었던 것이다. 어디서나 말이 그렇게 바뀐 것은 그만큼 효력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장과 순사들이 멀어져 가자 아이들의 겁 실렸던 눈들은 금방 의문과 호기심을 담아냈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서로서로를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소리 없이 눈짓 말들을 빠르게 주고받으며 곧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순사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장과 순사들은 어느 집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마당에서 모이를 쪼고있던 닭들이 놀라 꼬꼬댁거리며 저희들 둥지 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한기팔이 나와, 한기팔이!"
이장이 목청을 돋우었다.
"한기팔이? 누굴찾으신디요."
부엌에서 나온 여자가 머릿수건을 벗어 손을 닦으며 어리둥절해했다.
"아니, 서방 이름도 몰르요? 한기팔이가 서방이제 누구넌 누구요."
이장이 경멸하는 투로 쏴 질렀다.
"이, 그렇구만이라. 하도 부르고 사는 이름이 아니라 논게....."
여자는 멋쩍은 듯 쑥스러운듯 어물거리며 힐끗힐끗 순사들을 살폈다. 그 눈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차 있었다.
"어쨌그나 한기팔이 어딨소."
"무슨 일인디라?"
"어허, 딴소리 말고 어디 있는지나 얼렁 대란 말이오!"
이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노, 논에 일 나갔지라....."
여자가 수건 끝을 입에 물며 울상이 되었다. 수건의 다른 끝을 비비 틀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갑시다, 앞장 스시오!"
이장이 턱짓을 했다.
"우리 아덜 아배가 무신 잘못얼 했다고 그런다요?"
여자의 목소리가 눈물에 젖어 있었다.
"어허, 말 그만 씹히고 얼렁 앞장이나 스란 말이오. 순사덜 화나기 전에."
이장이 눈을 부릅뜨자 여자는 입술을 속으로 맞물며 걸음을 떼어놓았다. 울음을 참느라고 입술 언저리며 볼이 씰룩씰룩 떨리고 있었다. 한기팔은 논두렁에서 꼴을 베다가 붙들렸다. 그는 총을 겨눈 순사들을 멀뚱히 바라보며 낫을 떨어뜨렸다.
"봇씨요, 무신 일이다요?"
쇠고랑으로 뒷결박이 되는 그를 아내가 붙들었다.
"아무 일도 아니여. 아그덜이나 잘 챙겨."
한기팔은 아내를 바라보며 억지웃음을 웃어 보였다.
"수고했소. 이젠 돌아가서 쉬시오."
순사 하나가 이장에게 말했다. 다른 순사는 한기팔의 어깻죽지를 쳤다.
"병구 아부지....."
한기팔의 아내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며 논두렁에 주저앉았다.
"사람이 미런허기가 곰 찜쪄묵겄어. 밭 찾지도 못허고 저리 잽혀갈람서 멋났다고 똥언 퍼다 붓고그려. 오기로 일본사람덜 이겨지간디. 시상살이럴 제때제때 눈치코치 봐감서 히야제."
이장이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네놈이 집터에다 똥 퍼다 부었지!"
"아, 아닌디요. 무신 소리다요?"
취조는 이것으로 끝났다. 한기팔은 곧 다른 방으로 끌려가 아랫도리가 벗겨져 열 십자 형틀에 묶였다. 한기팔은 어젯밤 마누라도 모르게 똥을 퍼다 부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빼앗긴 밭을 되찾으려고 똥을 퍼다 부은 것이 아니었다. 그 땅에 집을 짓고 살 왜놈들을 망하게 하려고 한 일이었다. 옛날부터 묏자리 난 집터는 으레 명당에 잡는 것이었다. 명당에 서린 길운은 그 집안을 복되고 흥하게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명당을 남에게 빼앗겨버리면 길운도 그쪽으로 넘어가 이쪽에 액운이 끼치고 망한다는 것이었다. 명당의 기를 꺾고 길운이 돌아가는 것을 막는 데는 똥을 퍼다 붓도록 되어있었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다 묘를 쓰거나 집을 짓게 되면 그 집안은 틀림없이 망조가 든다고 했다. 옛날부터 잦은 묏자리 시비가 일어날 때마다 똥통이며 똥장군이 동원되었던 것은 다 그 까닭이었다.
"이새끼, 똥을 퍼다 부었지!"
이런 외침과 함께 순사는 긴 채찍을 휘둘렀다.
"아야야야....."
엉덩이가 들썩 솟기며 한기팔은 비명을 질러댔다. 어찌나 아픈지 눈에서 불꽃이 일고 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새끼,어서 불어!"
또 채찍이 예리한 소리로 허공을 가르며 맨살인 엉덩이를 후려쳤다.
"아우쿠쿠쿠....."
한기팔은 몸을 비비 틀며 아까보다 더 크게 비명을 토해냈다. 그의 비명이 엄살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엉덩이 두 군데에서는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찌 된 것인지 채찍을 내려칠 때마다 생살이 찢어진 것이었다.
"이새끼, 똥 퍼다 부었지!"
채찍이 또 볼기짝을 물어뜯었다.
"아이고메, 엄니이!"
한기팔의 절박한 외침이었다.
"이새끼, 어서 불라니까!"
채찍이 네 번째로 볼기짝을 휘감았다.
"나가 그랬소, 똥 퍼다 부섰소."
한기팔은 더 견디지 못하고 실토하고 말았다. 그 아픔이 어찌나 지독한지 그전에 몽둥이질을 당할 때와는 댈 것이 아니었다. 채찍질을 당할 때마다 눈에서 불꽃이 튀며 정신이 아찔아찔해지도록 고통이 극심했던 것이다. 한기팔은 형틀에서 풀려나서야 엉덩이가 피범벅인 것을 알았다. 네 군데나 생살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기팔은 그때서야 자신이 말로만 들었던 쇠좆매를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쇠좆매 30대면 볼기짝이 다 찢어지고 갈라져 피걸레가 되고, 50대면 살이 파헤쳐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 속뼈가 드러난다고 했다. 옛날 곤장 10대와 쇠좆매 한 대가 맞먹는다고도 했다. 그리고, 쇠좆매를 심하게 맞고 나면 찢어진 속살에 납독이 올라 살이 썩어들어 죽게 된다는 말도 있었다. 쇠좆매는 말 그대로 소 자지로 만든 채찍이었다. 소를 잡을 때 소 자지의 굵고 긴 뿌리까지 고스란히 뽑아내 그늘에서 바싹 말렸다. 통풍이 잘되는 그늘에서 말려진 소 자지는 길이가 길 뿐만 아니라 보들거리고 야들야들하면서 질기기가 그대로 채찍이었다. 그것으로 사람을 치면 가죽 채찍의 아픔은 댈 것이 아니었다. 가죽 채찍은 뻣뻣하고 가벼워서 살을 치고 튕기는데 소 자지는 보들거리면서 묵직해서 살을 착착 감고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쇠좆매는 그 끝에다 삼각지게 깎은 납덩이까지 매달았다. 그 납덩이는 쇠좆채찍을 후려칠 때마다 생살을 찢고 뜯었다. 그리고 매질이 심해질수록 속살을 파헤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그러니까 매를 맞는 사람은 쇠좆으로 맞는 것과 동시에 생살까지 찢겨지는 고통을 이중으로 하게 되었다.
"건방진 자식, 감히 어디다 똥을 퍼다 부어. 당장 송살을 시켜버려야 마땅하나 자애로우신 천황폐하의 은전을 베풀어 태형 30대로 감한다!"
주재소장은 자못 엄숙하게 말했다. 한기팔은 통변을 통해 그 말을 알아들었다.
"태형 30대면 멀러 때린다요? 머넌 머시여. 쇠좆매제."
통변이 매정하게 쏘아질렀다.
"아이고메, 사람 살래줏씨요. 잘못했응게 나 잠 살래줏씨요. 다시넌 안 그럴 것잉게 말잠 해주시게라우."
한기팔은 통변을 붙들고 늘어졌다.
"나가 말헌다고 무신 소양 있간디. 고런 미런헌 짓허덜 말아야제."
통변이 팔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한기팔은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다시 끌려가 형틀에 묶이게 되었다. 기합 소리를 대신하는 일본 욕지거리와 함께 한기팔은 새로운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비명은 10번을 넘기지 못하고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한기팔의 아내는 점심나절이 되어 남편을 데려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주재소로 부랴부랴 달려간 그 여자는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혼자 되돌아왔다. 혼자 힘으로는 남편을 데려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남편은 걷기는커녕 엎어져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들것에 싣지 않고는 옮길 도리가 없었다. 남상명과 박건식은 어쩔 수 없이 들 것을 만들어가지고 주재소로 갔다. 한기팔을 들 것에 그대로 엎었다. 피투성이가 된 양쪽 볼기짝이 어찌나 많이 찢어지고 헐었는지 바로 누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징허고 독헌 놈덜....."
박건식이 어금니를 맞물었다.
"참말로, 쇠좆매가 무섭기넌 무섭네."
남상명이 고개를 내둘렀다.
"얼렁 뜹시다, 드런 놈에 시상."
박건식이 주재소 쪽에다 침을 내뱉었다. 동네로 가는 동안 한기팔은 끊임없이 신음소리를 냈고, 그의 아내는 연신 훌쩍거렸다. 들녘에서는 가을걷이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었다. 드높은 하늘, 선들거리는 바람, 논두렁 따라 하늘거리는 구절초 무리, 황금빛 질펀한 들에서 일손이 바쁜 농부들. 멀리서 바라보자면 그런 것들은 조화롭게 하나로 어우러져 그지없이 아름답고 풍성한 농촌의 가을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일손을 바삐 놀리고 있는 대부분의 농부들 마음에는 시름이 실려 있었다. 역토나 둔토였던 논밭을 국유리로 빼앗겨버린 사람들은 여전히 소작인 신세로 감시받는 타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잃은 사람들이 또 소작인 아닌 소작인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들은 그래도 일손의 힘겨움을 덜어보자고 오랜 세월에 걸쳐 불러왔던 육자배기 노랫가락을 뽑기도 했다. 그러나 노랫가락에는 그전 같은 신명이 연출되지 않고 어딘가 서글픈 기운이 서려 있었고, 추임새를 넣는 소리들도 어기차게 힘이 뻗치지 못하고 탄식이 스며들고 있었다. 조선 농부들이 겉배만 부르고 속배는 고픈 추수를 하고 있는 가운데 바다를 건너온 일본 이주민들은 들녘 여기저기에 새로 지은 집들로 이사를 들어가고 있었다. 그 집들은 총독부가 아주 싼값으로 지어주고, 두고두고 갚아나가게 하는 특혜가 베풀어져 있었다. 그런데 들녘에 이상한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소문은 바로 농부들의 땅에 직결된 것이라서 그 어떤 소문보다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머시여? 역토고 둔토럴 즈그덜 이주민덜헌티 노놔주는 법얼 맨들었다고?"
"그렇트란 말이시. 아니, 아니, 고것이 무신소리여? 우리가 시방 서류럴 내놓고 따지고 있는 판인디 누구 맘대로 넘땅얼 노놔주고 말고 혀."
"이 사람아, 태평치고 서류타령 허덜말어. 총독부가 맘대로 헌다는디 누가 머시라고 헐 것이여."
"워메, 총독부놈덜 사람 잡네. 그리 되먼 땅언 영영 찾을 가망이 없어져 분 것 아니라고?"
"그려, 죽은 자석 된 심이제."
"맞어, 인자 봉게 속으로 고런 일 꾸며감서 즈그 농꾼덜얼 그리도 만히 끌어딜인 것이로구마. 그렇구마, 집덜얼 논이고 밭이고 안 개리고 지어댄 것도 다 그런 야로가 있었든 것이여. 근디, 우리가 이리 당허고만 있어서야 쓰겄어!"
"안 그러면 어쩔 것이여. 총 이기는 장사가 어디 있등가?"
농부들의 이야기는 대개 이런 식으로 끝나고는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다. 총독부에서는 <역둔토 특별처분령>이라는 것을 공포했던 것이다. 그것은 총독부가 무력을 앞세워 빼앗아 국유리로 편입시켜 버린 조선사람들의 역토나 둔토를 일본 이주민들에게 대여의 우선권을 부여해 주는 특혜법령이었다. 그건 이민정책을 활성화시켜 이민을 많이 오게 하는 조건 마련인 동시에 조선사람들의 생계를 위협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소작이나마 얻으려고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지배술책이었다. 땅을 빼앗긴 외리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남상명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다 맥빠지고 침통한 얼굴들이었다. 마음이 답답하여 모여앉기는 했지만 아무도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침침한 등잔불가에 둘러앉아 애 은 담배들만 뻑뻑 빨아댔다.
"니기미 씨부랄눔에 것, 이리 당허기만 혀서 더는 못 살겄는디 무신 수럴 내야 허는 것 아니겄어."
누군가가 불쏙 말했다.
"실답잖은 소리 허덜 말어. 니나 나나 의병 일어날 적에 뒷전 친 쫌팽이덜인디 인자 와서 무신 수럴 내겄다는 것이여. 초장에 못 몰아낸 도적놈덜인디."
누군가가 사정없이 대질러버렸다.
"그려, 죽으나 사나 초장에 전부가 나섰어야 헐 일인디. 그적에 실실 눈치만 본 우리덜이야 입이 열이라도 헐 말이 없고, 이리 당해서 싼지도 몰르제."
다른 사람이 한숨을 푹 쉬었다. 글안해도 심 파허는 판에 그런 낯뜨건 소리덜언 허덜 말드라고. 서로 못헐 일 아니라고. 그려, 우리가 못난 것얼 알먼 된게 서로 가심에 못질 허지넌 말세."
남상명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근디, 우리넌 인자 어째야 허는 것이여? 땅 찾기럴 작파혀?"
"작파허고 말고가 어딨어. 왜놈덜이 안 주겠다고 딱 작정해 부렀는디."
"어허 참, 일이 이리 되고 보니 저 사람 어러신만 헛고상이시네그려."
그 말에 사람들의 눈길이 박건식에게로 쏠렸다. 박건식은 입을 꾹 다물며 눈길을 떨구었다.
"병진이 아재가 이 일얼 알먼 참 기가 맥힐 것인디..... "
남상명이 쓴 입맛을 다셨다.
"근디 말이여, 왜놈 농꾼덜이 각단지게 땅을 차지해 불먼 우리넌 인자 소작도 못 부치게 되는 것 아니겠어?"
"그리 되는 것이야 두말허먼 잔소리제."
"글먼 어찌 살으라고?"
"아이고, 답답허기넌. 총독부에 핑 가서 어찌 살라고 그러냐고 물어보소. 이사람아,"
"이 호시절에 어찌 살란지 걱정일랑 말소. 땅만 파묵는 것이 어디 살 길이라등가. 군산이다 목포다 부두에 나가먼 등짐 져서 묵고 살고, 강원도다 함경도다 산골로 들어가먼 광산 판에서 돈벌이 허고, 톱질에 도끼질이 능험사 산판얼 찾아가서 한몫 잡고, 이도 저도 다 싫고 땅만 파묵고 살겄다먼 만주로 봇짐 싸고, 이래도 한평상 저래도 한평상인디 아조 신간 편케 살아불
라먼 마누래 팔아묵고 딸래미 팔아묵어도 되는 요리 존 시상인디 무신 걱정이여, 걱정이."
어떤 사람이 판소리 사설 엮듯 가락을 맞추어가며 비아냥거렸다. 그 말은 그가 지어낸 것이아니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떠돌아다니고 있는 말이었다.
"옳여, 참 빌어묵게도 살기 존 시상이 되았구마. 허먼, 살기 존 시상이제."
어떤 사람이 헛웃음을 쳤다.
"참말로, 우시 신세도 인자 쪽박 신세가 다 되야부렀구만."
"왜놈 시상이 된다고 이리 드런 꼴이 될지넌 몰랐는디."
누군가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 없는 백성이고 부모 없는 새끼덜이고 다 끝장이제 별수 있간디요. 나넌 그만 가볼라요."
박건식이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쟈가 글줄 읽은 티내네. 자네, 아부지헌티넌 언제 가볼 챔이여?"
남상명이 올려다보았다.
"한 사날 있다가 갈랑마요."
"그려, 나가 낼이라도 자네 집으로 감세."
남상명이 눈짓말을 보냈고, 박건식은 방문을 밀쳤다.
"우리도 인자 일어나제. 이리 뫼앉었다고 무신 일이 풀릴 것도 아니고 술푸렴헐 맘덜도 못되는디."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일어날 기미를 보였다. 남상명은 박건식을 따라 그의 아버지 면회길에 나섰다. 사정이 못쓰게 변했는데 그 소식을 아들이 전하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리고 박병진을 만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도 듣고 싶었다. 남상명에게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박병진은 눈을 내리감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감옥살이로 수척해진 얼굴에 괴로움이 서리고 있었다.
"여러 말 헐 것 없네. 다덜 맘 강단지게 묵으라고 혀. 사정이 어찌 되든 우리 땅언 우리 땅잉게 끝꺼정 찾어야 헝께."
박병진의 차갑고 매서운 눈빛이 남상명과 아들의 눈을 쏘고 있었다. 그 눈빛만큼 그의 낮은 목소리는 질기고 완강했다.
"우리만 살고 끝내는 목심이 아니여. 그 땅언 새끼덜 것잉게 찔기게 물고 늘어져야 혀, 찔기게."
더 낮아진 박병진의 목소리에는 끈끈한 힘이 묻어나고 있었다.
"야아, 명념허겄구만이라우."
남상명은 가슴이 저릿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수그렸다. 새 힘이 솟기는 반면에 그동안 상심하기만 했던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아부님이 허시고 잡은 말씀얼 다 못허신 것이겄제?"
남상명이 형무소를 나서며 물었다.
"그렇제라. 속으로넌 왜놈덜이 천년 만년 가는 것이 아닝게 찔기게 참음서 기연시 땅얼 찾으라고 허고 잡았겄제라. 자네가 어찌 안가?"
"그전보톰 그리 말씸허셨응게라."
"그려, 그려, 그 말씸이 맞네. 근디, 곧 삼동이 닥치먼 고상이 크실것인디....."
서늘한 바람 속에 시월이 저물고 있었다. 1913년도 황혼이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