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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1-9

34. 덧나는 상처

아침저녁으로 소슬한 바람이 일어났다. 하늘은 맑은 물로 날마다 씻어내는 듯 해맑은 푸르름으로 지향 없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황금빛으로 풍성했던 들녘은 하루가 다르게 황량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들녘의 황금빛은 단순한 황금빛이 아니었다. 볏잎들이 지닌 질감으로 그 황금빛은 폭식폭신한 느낌으로 들녘을 아득하게 덮고 있었다. 그 폭신함과 질펀함이 누구에게나 푸근함과 넉넉함을 품게 했다. 황량하게 변해 가는 들녘에는 그리도 극성을 부리던 참새 떼들도 이제 보이지 않았다. 바쁜 일손들을 따라 들녘의 황금빛은 날마다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 황량함은 물이 가득 실려 듬직하고 그득해 보이던 포구가 썰물이 되면서 갯벌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허리를 펼 짬이 없도록 바쁜 일손을 놀리고 있는 농군들 중에는 들녘의 황금빛을 멀리 바라보면서 느꼈던 푸근함과 넉넉함을 그대로 가슴에 간직하며 고된 한해살이에 보람과 만족을 느끼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들은 얼굴이 부어오르도록 허리를 굽혀 바삐 일순을 노리며 들녘을 황량하게 만들어가는 것처럼 그들의 가슴도 황량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아무리 애써 가을걷이를 해보았자 자작농이 아니고서는 배고프고 추운 겨울만 앞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빼앗긴 농토를 찾으려고 면사무소로 몰려갔던 내촌과 외리 사람들은 소작인들보다 더 심하게 가슴에 찬바람이 일고 있었다. 확실한 자기 논에 농사를 짓고서도 소작인 꼴로 곡식을 빼앗겨야 하는 억울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모두 엉덩이가 터지고 으깨지도록 몽둥이질을 당해서도 아니었다. 주모자로 잡혀 들어간 박병진과 김춘배가 여지껏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전주로 넘기고서도 재판도 하지 않고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그 일만이 아니었다. 몽둥이질을 당한 사람들 중에서 여섯이나 불구자가 생겨났던 것이다.

내촌에서는 두 사람이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에 비해 외리에서는 네 사람이나 불구자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 넷이 전부 절름발이가 아닌 것이 문제였다. 절름발이는 두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절름발이에 성불구가 되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겉모양은 멀쩡한데 성불구가 된 것이었다. 해가 뉘엿뉘엿해지면서 들마을에는 저녁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박건식은 들길을 터덕거리며 걷고 있었다. 마을이 가까워지자 그는 더 맥이 빠지고 있었다. 점심도 굶고 하루종일 걸은 걸음이었다.

"어이, 자네 건식이 아니라고?"

멀찍이 떨어진 논에서 볏단을 묶고 있던 사람이 목청을 길게 뽑았다.

"야아, 안직도 일허시오?"

박건식은 껄껄한 소리로 마지못해 대꾸했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다. 더구나 마음이 암울해서 그 누구하고도 말을 엮고 싶지가 않았다.

"아부지넌 어쩌시등고? 몸이나 성혀?"

논을 멋어난 그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박건식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냥 그렇제라."

박건식은 또 건성으로 대꾸하며 몸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자네가 기운이 다 파했구마. 담배나 한 대 태우소."

그 남자가 혀를 차고 박건식의 옆에 앉으며 쌈지를 꺼냈다. 박건식은 썰렁하게 변해 가고 있는 들녘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이 걷힌 들녘에는 서늘한 바람이 꼬리를 세우고 있었다.

"재판인지 머신지넌 어찌 된다등가?"

곰방대에 담배를 재며 그 남자는 박건식의 눈치를 살폈다.

"몰르겄구만요. 다 즈그덜 맘대롱게."

박건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면회에서도 알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재판이 언제 열릴 것인지는 아무데서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참말로 사람이 미치고 환장헐 일이시 이. 이놈덜이 사람을 멫달석 가둬놓고 피 보타 죽이자는 것 아니겄어."

그 남자가 결기를 세웠다. 그러나 박건식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이제 그런 결기를 세운 말이 그에게는 아무런 위안도 힘도 되지 않았다. 다 부질없고 맥 빠지는 소리로만 들렸다.

"엄니가 애타는지, 나 그만 가볼라요."

박건식은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그려, 얼렁 가보소. 이따가 사랑방에 나올라능가?"

"야아, 그래 보제라."

박건식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터덕터덕 걷기 시작했다.

"참말로 피 토허고 죽을 놈에 시상이다. 생짜로 땅 뺏기고 옥에 갇히고, 저 젊은 것 가심에 을매나 땁땁허고 천불이 일 것이여. 아이고메, 요런 빌어묵을 놈에 시상이 은제나 끝날랑고."

그 남자는 우는 얼굴로 박건식의 뒷모습을 바라본 채 담배를 뻑뻑 빨아대고 있었다. 박건식은 고샅으로 접어들며 기운을 추슬렀다. 자신의 낙담하는 모습을 보여 밤낮없이 애를 태우고 사는 어머니의 가슴에 새 불덩이를 올려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가 없는 집안에 니가 인자 어런이다. 아무리 애가 카고 속이 상허드라도 맘 묵직허니 묵고 식구들헌티 속맘얼 다 내보이덜 말어야 쓴다. 딴 식구덜보담도 엄니헌티넌 궂은 소리럴 한마디도 허덜 말어라. 근심 걱정이 되는 말얼 갤지 않고 히서 부모 속얼 상허게 허는 것언 새끼밥얼 지대로 봉양 못허는 것보담 더 큰 불효다."

아버지의 다짐이었다. 박건식은 활기 찬 몸짓으로 사립을 들어서며 큰기침을 했다.

"아이고, 인자 오시오."

단번에 기척을 알아들은 아내가 부엌에서 뛰쳐나왔다.

"어디, 아범 왔다냐!"

거의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리며 어머니도 방에서 뛰쳐나왔다.

"야아 엄니, 잘 댕게왔구만이라."

박건식은 밝게 웃으며 어머니에게 인사했다.

"아부지 몸은 어떻트냐?"

긴장된 얼굴로 대목 댁이 물었다.

"아무 탈 없으시등마요. 아부지야 원체로 짱짱허신게라."

박건식은 마루에 걸터앉으며 밝은 어조로 말하고는,

"나 물 잠 주소."

아내에게 눈길을 돌렸다.

"참말로 무병허신 겨?"

"야아, 무병허시고 입맛도 그대로라 진지도 잘 잡순다고 허시등마요."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었다. 옥살이가 바로 지옥살이라는 말대로 아버지의 신수는 많이 상해 있었다.

"근디, 무신 존 소식이 있드냐?"

대목 댁의 물음은 잠시도 쉴 새가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들이 남편을 면회 갔다. 오면 언제나 그랬다.

"야아, 요분에 새로 들은 말인디, 재판이 늘어지는 것이 존 징조라고 허등마요. 무신 말이냐 허먼 말이요 이, 죄가 무건 사람덜보톰 골라내서 재판얼 허니께요. 긍게로 아부지 재판이 늘어지고 있다고 히서 애달아헐 것 없구만이라."

엉뚱한 말을 지어내느라고 박건식은 아내가 떠온 물을 마실 짬도 내지 못한 채 물 사발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 그의 아내 반월 댁은 남편이 들고 있는 물 사발을 쳐다보고 시어머니를 곁눈질 하면서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말 듯 하고 있었다.

"고것이 참말이여? 아부지보담 죄가 더 중헌 사람들이 그리 많혀?"

대목 댁은 아들 옆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하먼이라. 우리가 소문 들어 알디끼 땅 뺏긴 사람덜이 여그저그서 수없이 안 들고일어났소. 그런 사람덜 중에넌 토지조사국 왜놈덜 두들겨 패고 패대기 친 사람덜도 있소, 면사무소럴 때래부신디다가 면직원덜얼 몰매 친 사람덜도 많다고 허드랑게요. 그런 것에 비허먼 아부지 죄야 죄도 아니랑게라."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땅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패를 짜서 행동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도 자꾸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그려, 그 사람덜도 아부지보담 중허기넌 중허구마. 근디 그런 사람덜언 재판이서 벌얼 얼매썩이나 받을랑고?"

"목 타는디 물보톰 묵고 나서 이얘기허시게라."

반월 댁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감정을 눌러온 터라 그 목소리는 의외로 크고 퉁명스러웠다.

", 그려그려. 나가 맘이 급허다봉게 물 믹일 정신도 없었다."

대목 댁은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소문에넌 벌이 클 것이라 허등마요."

박건식은 내키는 대로 대답을 하고는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물을 단숨에 마셔버리는 아들을 보면서 대목 댁은 비로소 아들이 몹시 시장해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아가, 아범 시장허겄다. 밥 어찌 되았냐? 당아 멀었다냐?"

대목 댁은 며느리에게 거푸 묻고 있었다.

"야아, 시방 뜸딜이고 있구만이라."

"어허, 진작진작 해뒀닫가 딱 밥상 받게 헐 것이제. 배고픈 것이야 나랏 상감도 못 참는 법인디. 얼렁 혀라, 얼렁."

대목 댁은 손까지 저어가며 뒤늦게 답치고 들었다. 며느리 반월 댁은 입이 뿌루퉁해져 돌아섰다. 부엌으로 들어서며 반월 댁은 결국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참말로, 늦은 밥 묵고 새북장 가네. 물도 못 묵게 잡질 때넌 은제고 뜸딜이넌 밥 얼렁얼렁허라는 억지넌 또 머시여. 자석 배고픈 것이 그래 애타먼 앉어서 말만 허덜 말고 어서 나서서 아궁지에 부채질얼 해대등가 입으로 불어대등가 히서 듬얼 딜여보제."

밥을 허겁지겁 먹어치운 박건식은 숭늉을 두 사발이나 들이켰다. 허기 못지않게 갈증도 심했던 것이다. 숨쉬기가 거북할 지경으로 배가 차자 담배를 말아피울 수도 없이 전신이 늘어지고 퍼졌다. 그리고 하루 종일 먼 길을 걸어온 피곤이 한꺼번에 잠으로 몰려왔다.

"땅언 목심이여. 논밭얼 수백 마지기썩 지닌 부자 양번덜헌티야 땅언 재산이제만 우리겉이 열댓 마지기로 자작허는 사람덜헌티넌 땅언 바로 목심이다 그것이여. 그 땅 잃어불먼 바로 저승이 눈앞으로 닥친 게 무신말얼 더허겄냐. 땅언 기연시 찾아야 써."

박건식의 아버지의 말을 생각하며 눈을 비벼댔다. 그러나 마음처럼 눈은 쉽게 띄어지지 않았다. 잠이 끈끈하게 달라붙으며 전신을 흐물흐물하게 녹이고 들었다. 땅을 기어코 찾으려면 사랑방에 나가야 했다. 가서 하나로 뭉치게 해야 했다. 박건식은 감당하기 어렵게 덮쳐오는 잠을 떠밀어내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 곤허먼 그냥 자제 멀라고 또 일어나냐."

대목 댁은 안쓰러움으로 혀를 차며 아들을 부축했다.

"아니구만이라, 사랑방에 나가야제라. 땅얼 찾어야 헝게, 땅얼..."

잠이 담뿍 든 눈을 뜨지 못한 채 박건식은 잠꼬대하듯 하고 있었다.

"그놈에 사랑방에 나간다고 무신 땅 찾을 길이 열린다냐. 다 맥아리 빠지는 헛소리만 까발리고 앉었는 판인디. 혼자 잽혀 들어간 느그 아부지만 분허고 원통헌 일이제. 그 사람덜이야 인자 신간 편케 지냄스로 느그 아부지 고상이야 생각허는지나 아냐. 다 즈그덜 편허고 배 땃땃허먼 그만인 것이제."

대목 댁은 성난 얼굴로 목소리가 거칠었다. 박건식은 잠이 확 걷히는 것을 느꼈다.

"엄니, 고것이 무신 소리다요!"

박건식은 앉음새를 똑바로 하며 어머니에게 정색을 했다.

"어째, 나가 틀린 말 혔냐. 느그 아부지가 즈그덜 대신으로 잽혀 들어가 그 고상 허는디 즈그덜이 헌 일이 머시가 있냐. 즈그가 느그 아부지 내노라고 나서보기럴 혔냐, 땅얼 찾겄다고 새 일얼 꾸미기럴 혔냐. 그저 즈그덜 묵고 살겄다고 농새짓기에 정신팔았제 헌 일이 머시가 있냔 말이여."

대목 댁의 언성은 더 높아지고 있었다. 박건식은 어머니의 말이 다른 때와는 달리 푸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그 말이 과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건 또 내놓고 할 말은 아니었다. 그들도 제각기 태형을 맞고 나와 똥물을 먹느니 약초를 붙이느니 해가며 앓을 만큼 다 앓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없는 돈을 염출해서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했고, 줄곧 마음들을 써오고 있는 처지였다.

"엄니, 엄니 타는 속 다 아요. 근다고 그리 말허먼 되겄소. 그 사람덜도 그간에 저저끔 고상험스로 아부지 일에도 헌다고 허고 있응게 엄니가 쬐께 참으씨요. 엄니가 속탄다고 그런 말 내놓고 혔다가넌 그 사람덜허고 이나요. 시방 우리 편이 그 사람덜말고 어디 또 있소. 허고, 그 사람덜러고 심 합치란 것이 아부지가 항시 허는 당부랑게라."

대목 댁은 남편의 당부라는 말에 그만 더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가든지 말든지 니 알아서 혀."

대목 댁은 돌아앉아 버리고 말았다. 박건식은 트림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박건식은 마당으로 나서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늘함 기운이 섬뜩하게 옷 속을 파고들었다.

"아이고메, 가을이 이리 영글었능가."

박건식은 팔짱을 끼고 몸을 웅숭그리며 사립을 나섰다. 어둠 어디에선가 가을벌레소리가 가녀리고 투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 사무치는 흐느낌 같은 애잔한 소리에 박건식은 불현듯 마음까지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가을벌레가 밤 깊은 줄 모르고 울어대면 찬바람이 타고 기러기 떼가 날아오고, 기러기 떼가 끼륵끼륵 울어대며 하늘가를 줄지어 날면 울긋불긋 단풍 든 나무들은 잎들을 떨구기 시작하면서 겨울이 닥쳐왔다. 그 절기 변화를 따라 벼를 베고 타작을 하고 볏단을 쌓는 가을걷이가 이루어졌다. 나락 섬을 차곡차곡 쌓다보면 가을걷이의 힘겨움도 몰랐고, 미처 갈아입지 못한 삼베옷을 파고드는 추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가을은 떠나고 없었다. 논을 빼앗기게 되면서 마음은 가을걷이를 하기 전부터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애써서 가을걷이를 해보았자 수확의 절반은 빼앗기고 말았다. 절기보다 먼저 가을이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벌써 몇 년째였다.

사랑방에는 네댓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박건식을 보자 하나같이 그의 아버지 박병진의 안부를 물었다.

"몸이 아프신 디넌 없다고 허시는디, 축나기넌 많이 축났드만이라."

박건식은 그들에게만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들은 아버지가 겪고 있는 고생을 알아야 될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버지의 고생을 통해서 마음을 더 단단하게 뭉쳐야 될 사람들이었다.

"어찌 안 그러겄어. 그 양반 앞이서야 우리가 다 죄인이제."

한 사람이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근디 재판언 어찌 된다등가?"

다른 사람이 물었다.

"똑같은 소리 여러 번 허게 맨들지 마라고 이따가 다 뫼이먼 한 번에 듣세. 저 사람 속상허고 심드는디."

그 옆 사람의 말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침한 등잔불빛 속에서 곰방대만 빨아대거나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염벙허고, 날이 썬들썬들해징게 긍가 어쩐가 궁뎅이가 찌릿찌릿 속으로 찔름스로 허리가 묵지그리허니 아프다가 콕콕 쏘다가 헌당게로."

누군가가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어허, 자네도 그러다가 일 만내는 것 아니여?"

다른 사람이 얼른 말을 받았다.

"일언 무신 일?"

"용철이맨치로 연장이 말 안 들어부는 것 아니냔 말이여."

"머시여! 재수대가리 없이 무신 잡소리여, 잡소리가."

그 남자가 벌컥 화를 냈고, 이 사람 저 사람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이 그냥 잡소리가 아닐란지도 몰르는디? 용철이 겁보기야 멀쩡헌디 연장이 빙신 된 것 아니드라고."

다른 사람이 뚱하게 말했다.

"아니, 나도 좆대감지럴 못쓰게 되기럴 바래는 것이여 시방?"

그 남자가 눈을 부라리며 덤볐다.

"어허, 누가 기팔이 자네 연장이 못쓰게 되기럴 바래겄어. 서로 걱정이 된게 허는 소리제."

"내 연장 어찌 될랑가 걱정하지 말고 저저끔 연장이나 걱정허드라고. 내 좆대감지야 초저녁에도 짱짱허니 스고 새북에도 빳빳허니 스고, 잘만 스고 잘만 구녕 판게."

"대낮에너너 꼿꼿허니 안 슨가?"

", 인자 봉게 초저녁에도 한바탕, 새북에도 한바탕, 그놈얼 너무 일시키다봉게 허리도 궁뎅이도 그리 아픈 것이로구마."

"맞어, 맞어. 방애찧기럴 과허게 히서 그리 된 것이여."

"아이고 말덜 말어.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나가 동네북이시."

한기팔이는 팔을 내저었다.

"장난밀이 아니라 용철이 그리 되야분 것 보먼 우리도 어찌 될랑가 몰라 영 겁나고 안심이 안 된당게로."

누군가가 어눌한 소리로 말했다.

", 말 났응게 말인디, 나도 영 맘이 껄쩍지근허당게."

"어허, 실답잖은 소리. 다 맘이 병인 것잉게 그리 맘 묵덜 말어."

"그려, 그짝으로 맘이 쏠리먼 그것이 자꼬 쫄아드는 것 같드랑게로."

김용철의 사건에 그들은 마음의 일치를 보이고 있었다. 김용철이가 성불구가 된 것은 그들에게 그만큼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함께 태형으로 입은 상처를 앓고 났을 때 김용철은 말짱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달포쯤 지나자 이상한 말이 그들 사이에 오가게 되었다. 김용철이의 그것이 못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놀라움과 함께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용철익 그렇게 된 것은 두 번째였다. 그보다 앞서 하봉수의 그것이 쓸모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 퍼졌다. 그러나 그들은 하봉수의 재수 없음을 마음 아파했을 분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하봉수는 절름발이가 되도록 살 속 깊이 다쳤으므로 그때 그것도 상하게 된 것이려니 짐작했던 것이다. 그들이 의아스러워했지만 김용철의 성불구는 사실로 드러났다.

"사람 환장허고 죽을 일이랑게. 맘언 환헌디 그 잡놈에 것이 영 말얼 안 듣는단 말이여. 나넌 인자 끝장나분 목심이여. 자석새끼 없는 몸으로 끝장나분 드런 놈에 팔자라닝게."

술이 취한 김용철이가 눈물까지 찔찔거리며 털어놓은 말이었다. 옛날부터 태형을 잘못 맞아 앉은뱅이가 되거나 절름발이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런 것보다 흔하지는 않아도 그것을 못 쓰게 되는 일도 더러 있었다. 태형을 받게 되면 곤장 치는 형리에게 따로 뒷돈을 쓰는 까닭도 그런 뒤탈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태형 50대라고 다 똑겉은 50대간디. 곤장 따라 틀리고, 형리 따라 틀리는 법이제. , 똑겉은 형리라도 돈얼 묵고 안 묵고에 따라 매질이 하늘허고 땅 차이로 달라지는 법잉게. 근디 자네덜이야 독올른 왜놈덜헌티니 전부가 저름발이 안되고, 전부가 그것 못쓰게 안 된 것이 천행이라먼 천행이여."

동네 노인들의 말이었다. 그나마 앉은뱅이가 생기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지경이었다. 김용철은 의원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침을 맞기도 하고, 약을 지어다 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효과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봉수보다 김용철에게 더 관심을 쓰는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기도 했다. 김용철이가 하봉수보다 열 살이 더 젊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봉수는 아들 둘에 딸이 둘이었고, 김용철은 자식도 없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근디 말이여, 용철이가 요상시럽게 변해 간당게. 사람얼 실실 피허고, 맞대허고 앉어도 통 말얼 안허고 말이여."

"어디 그뿐이간디. 혼자서 술얼 퍼마시고 댕기는 것이야 다 아는 일이고, 술만 마시고 들어오먼 마누래럴 볶아친다등마."

"볶아치다니?"

"그 안 있능가. 안 되는디도 헐라고 야단얼 쳐대고, 그러다가 결국 안됨너 마누래럴 틀어잡고 니 한눈 포는 것 아니냐, 어떤 놈 맘에 두고 지내는 것 아니냐 험스로 욱대기고 허능 것이 똑 미친 사람 같다등마."

"그것 참 생사람 잡을 일이시. 그 사람이 맘얼 그리 묵어서넌 안될 것인디."

"그 사람이라고 그러고 잡아 그러겄어. 몸 성헌 우리덜이야 아무 헐 말이 없제."

"허기넌 그려. 우리가 존 소리라고 혀봤자 그 사람 화만 질를 것잉게."

"오늘도 여그 안 오겄제?"

"그럴 것잉마."

"가만히 있어라 보자아, 인자 얼추 다 뫼덜 안혔다고?"

연장자인 남상명이가 방안을 들러보았다. 그의 말을 따라 그들은 서로 옆 사람을 확인해 나갔다.

"하샌허고 강샌이 안 왔구만이라."

한기팔이 남들보다 먼저 두 사람을 찾아내고 있었다. 하샌이란 절름발이에 성불구가 된 하봉수였고, 강샌이란 그냥 절름발이가 된 사람이었다.

"하샌이야 안 올 사람이고, 강샌이야 올 것인디..."

남성명은 중얼거렸다. 그러나 강샌을 빼놓고 회의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그가 절름발이인 탓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도 김용철이나 하봉수처럼 떨어져 나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와따메, 이놈에 담배연기 잠 보소."

그때 방문이 열리며 얼굴을 디미는 사람이 있었다. 강샌이었다.

"어허 참 용허시. 호랭이 지 말 헝게 딱 불거지네그랴."

누군가가 입빠르게 말했다.

"호랭이 지 말혀? 요놈으 못된 주딩이덜이 뫼앉아 무신 숭덜 봤능고? 요놈에 쩔뚝발이가 어째 요리 늦는다냐. 쩔뚝발이 꼬라지에 어디서 술 처묵고 오다가 엎어졌다냐 잦혀졌다냐 험스로 숭봤능가?"

강 서방은 방으로 들어서며 입심 좋게 쏟아놓고 있었다. 그는 다리를 절게 된 뒤로도 그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 없이 활달했던 것이다.

"고까짓 것이 무신 숭이여 숭언. 더 지독시런 숭얼 보든 참이구마."

"그보담도 더 지독시런 숭이 머시까? 어디 잠 들어보세."

강 서방은 사람들이 좁히며 내준 자리에 주저앉으며 느긋하게 웃었다.

"자네가 밥상 물리기 바쁘게 한바탕 떡 치니라고 넋 빠져 여그 오는 것도 잊어분 것이라고 쌔가 닳게 숭보니라고 시끌시끌혔당게."

한기팔의 능청스런 말이었다.

"와따, 다덜 어찌 그리 귀신이까? 떡 치는 소리가 여그꺼정 다 딛긴 것 아니라고? 나 그럴지 알았구마. 우리 각시도 그럴지 알고 이따가 한밤중에 허잔 것얼 나가 참을 수가 있어야제. 어찌 된 놈에 것이 쩍뚝발이 된 담보톰 염치체면도 없고 눈치코치도 없고 시도 때도 없이 나 배고파 죽겄응게 얼렁 떡 주소 험스로 생 지랄발광이랑게. 그러니 나라고 어쩔 것이여."

강 서방은 넉살좋게 받아넘기고 있었다.

"아이고 저놈에 입, 무당 사설 찜쪄묵겄다."

"중놈 염불 외디끼 술술 잘도 나오네."

"아니 강샌, 그것이 참말이여 머시여?"

누군가의 엉뚱한 말이었다.

"참말인지 아닌지넌 자네가 쩔뚝발이 돼보소. 누가 담배 한 대 적선허제."

강 서방이 말을 튕겨버렸고, 여기저기서 혀 차는 소리가 낮게 들렸다. 그 바람에 방안이 어색해지고 말았다.

"저어... 다덜 뫼었응게 병진이아재 면회 갔다가 온 건식이 말얼 듣기로 허겄소. 어이 건식이, 인자 아부님 소식 전허소."

남성명이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자리를 고쳐 앉거나 낮은 기침소리를 냈다.

"저어... 가서 면회럴 허기넌 허넌디, 전허고 달라진 것이 암것도 없구만이라. 안직도 재판이 언제 열릴란지 몰릉게라. 근디 아부지가 전허라는 말이 있구만요. 인자 더 패 짜서 나스지넌 말라고라. 사람덜이 사방서 들고 일어난 게 왜놈덜이 점점 더 씨게 몰아친께요. 그렇다고 손끝맺고 앉아서넌 안된아고 허시등마요. 땅얼 찾자먼 맘얼 한 덩어리로 뭉쳐서 열흘이나 보름거리로 토지조사국에 땅 도로 내놓으라는 문서를 자꼬내야 헌다고 당부허시등만이라."

박건식은 우울한 음성으로 말을 마쳤다. 한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담배들만 피워대고 있어서 방안은 더욱 어둠침침했다.

"저어, 아재 말씸이 백번 옳으요. 우리 대신 갇힌 아재 고상이야 우리가 평상 갚어야 헐 빚이고, 아재 말씸대로 토지조사국에 문서럴 물이 못 나게 내는 것이 상책이오. 문서럴 내는 디 헌병이고 경찰이고 잡아딜일 수가 없고, 끝없이 문서럴 받다보먼 조사국 놈덜도 입에서 씬물이 나 무신 수럴 내게 될 것잉게."

남상명이 마무리를 지었다.

"근디, 우리가 당허고 난게 여그 가차운 동네 사람덜언 짠득 겁 묵고 꼼지락달싹을 못허는디 다른 먼디 사람덜은 우리맨치로 들고일어난다는 소문이 참말인갑제?"

누군가가 의문스럽게 물었다.

"야아, 어떤 디서넌 토지조사국원이 반 죽게 맞기도 허고, 또 어디서넌 헌병이고 순사가 몰매질얼 당허기도 혔답디다."

박건식이 대답했다.

"그것 참 속씨언허시. 근디 그리 일 저질른 살람덜언 어찌 되는 것이여?"

그 사람이 뒤미처 놀라움을 나타냈다.

"그려서 재판서 사형 받은 사람덜도 더러 있다고 허등마요."

"글고 보먼 면장 백가 놈이 우리헌티 인심쓴 것 아니겄어? 매타작허고도 싹 다 옥에 가둬도 그만인디."

"긍게 말이여. 그리 생각허먼 그렇기도 허단 밀이시."

"그리 생각허는 사람도 많기는 허제."

", 듣다봉게 백가놈이 금세 부처님 되야부요 이. 허나 그리덜 생각허는 것언 영판 잘못 생각허는 것이구만이라. 그놈이 바로 왜놈덜 앞장서서 우리덜 땅 뺏어가게 맨든 숭악헌 놈이란 밀이오. 면직원 놈덜허고 멱살잽이헌 것 갖고 아재덜이 각단지게 몽딩이질 50대썩 당허고, 그 골병으로 이런저런 빙신 생기고, 아부지가 잽혀 들어가고, 그것이 죄닦음으로 과했으먼 과했제 머시가 인심 쓴 것이다요. 아재덜이 옥에 갇힐 죄에 속덜 마씨요. 백가 그놈언 병 주고 약 주고 허는 숭악헌 백여신게라."

박건식의 열 받친 말이었다.

"그려, 그 백가 겉은 놈덜이 산지사방에 자리 틀고 앉어서 땅내력을 뻔허니 암스로도 왜놈덜헌티 국유지로 문서 다 넴겨준 것이여."

"건식이 저 사람 말이 맞구만. 백가 놈이 모시가 아수운 것 있다고 우리 편얼 들겄어. 우리가 백여시헌티 홀린 것이제."

"그렇제, 백가 놈이야 왜놈이 못돼서 환정헌 놈인디. 그나저나 건식이가 아부지 안 기신 새에 와짝 어런이 되야부렀다?"

남성명이 대견해하며 박건식을 건너다보았다.

"건식이 자야 아그적보톰 재앙시럼스로도 영판 똑똑허덜 안혔소. 동네 호박에 말뚝은 다 박고 댕김서도 예닐곱 살에 천자문 다 딘 똑똑인디."

한기팔이가 얼른 토를 달았다.

"하이고, 기억도 총총허시. 똑똑헌 건 건식이가 아니라 자네시."

누군가가 퉁을 놓았다.

", 고런 말언 자주 헐수록 좋네. 요놈에 시상살이 재미없고 심드는디 똑똑허단 말이나 더러 들어야 살아지제."

한기팔이가 능청맞게 받아넘겼다.

"저어 머시냐, 또 한가지 중헌 일얼 알릴 것이 있소. 우리가 어지께 오늘로 나락이야 다 비었는디, 낼 모레 새에 타작헐 채비럴 다 끝내야겄소. 글피보톰 사날 같에 타작얼 허게 될 것잉게. 그놈에 동척인지 서척인지서 사람덜이 나오기로 되야 있소."

남상명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침울하게 말했다.

"지미 씨펄놈으 것, 타작도 지 맘대로 못헌 것이 발써 멫년이여 이거."

한 사람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아, 열내덜 말소. 요것이 다 조상 잘못 둔 탓이고, 나라 뺏긴 죈게. 그리 열내봤자 명만 짧아지네."

누군가가 한숨을 길게 토했다.

"나라 뺏긴 것이야 우리 잘못이 머시가 있어. 우리야 골병 들게 땅 파서 오만 세금이란 세금 우로 바치고 아래로 뜯김서 산 죄뿐인디. 다 양반이란 놈덜이 우리헌티 알궈가고 뜯어간 세금으로 배꼽이 요강꼭지가 되게 배때지 불리고, 백리고 이백리고 땅 늘쿼감스로 세금이라고넌 땡전 한 닢 안 내고 사는 것도 모지래서 나라꺼정 팔아묵은 것 아니여. 근디 시상이 이리 뒤집어졌어도 양반이란 것덜언 땅얼 한 치도 안 뺏기고 지화자 얼씨구나 태평세월로 잘만 살아가덜 않냔 말이여. 어찌 보먼 왜놈덜보담 더 못된 종자덜이 양반이여, 양반."

"그것이야 소도 알고 강아지도 아는 일 아니드라고. 그런 소리 우리가 아무리 히봤자 입만 아프고 기운만 파헝게 그저 조상 잘못 둔 죄라고 생각허소."

", 양반 아닌 조상 욕허자니 눠서 침뱉기고, 이리 밟히고 저리 채이고 험스로 살어갈 앞날얼 생각허먼 아무 가망도 없이 팍팍허고 캄캄허제."

방구석에서 누군가가 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진장맞을, 다 부자지럴 짤라서 새끼덜얼 안 깠으먼 몰라도 모다 새끼덜이 주렁주렁 딸린 몸으로 그런 앞 짜르고 기운 까라지는 소리덜 허덜 말어. 어쨌그나 못 죽고 살어야 될 목심잉게 맘덜 강단지게 묵고 땅 찾을 궁리나 똑바라지게 허얄 것 아니겄어."

쏘아지르듯 하는 한기팔의 목소리가 유난스럽게 컸다. 그 바람에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려, 한샌 말이 맞제. 병진이아재 생각험스로 맘덜 강단지게 묵드라고. 인자 오늘 이얘기 다 끝난 심이구만."

남성명이 약간 물러나 앉았다.

"지넌 먼첨 가볼랑마요. 몸이 곤히서..."

박건식이 눈을 부비며 일어섰다.

", 자네 얼렁 가서 쉬소."

"그려, 곤헌 몸에 너무 오래 있었네."

사람들이 좁혀 앉고 등을 굽히며 길을 내주었다. 그들은 이틀 동안 담배 한대 느긋하게 피울 짬도 없이 바삐 돌아쳤다. 볏단을 묶어 논두렁에 줄가리 해서 세웠고, 손닿는 대로 여기저기 멍석을 끌어 모았고, 쇠홀태를 꺼내 녹을 닦아 다리에 끼웠고, 갈퀴며 함지박 같은 것도 미리미리 챙겼다. 타작을 하자면 소용되는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꼭 얼레빗처럼 생긴 쇠홀태는 사오년 전부터 일본에서 들어오기 시작한 농기구였다. 그전의 벼홅이를 열서너 개 잇대어놓은 것 같은 쇠홀태는 나락을 훑어내는 데 한결 일순을 빠르게 해주는 기구였다. 동척에서는 쇠홀태를 소작인들의 집집마다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그건 공짜가 아니었다. 다음해 추수 때 그 값을 나락으로 쳐서 받아갔다. 쇠홀태와 같은 시기에 들어온 것이 <가마니> 짜는 기계였다. 그 기계가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농가에서는 그 기술을 익혀야 했다. 일본사람들은 조선의 <>을 없애고 자기네들의 <가마니>로 곡식의 수량단위를 통일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가마니>라는 일본말은 어느덧 일상용어처럼 조선사람들의 입에 붙게 되었다. 동척 사람들은 타작날 아침 일찍 들이닥쳤다. 박병진의 집으로 들어선 그들은 다짜고짜 집뒤짐을 시작했다. 집식구는 아이들까지 모두 마당 가운데로 내몰렸다. 마당 가운데 쪼그리고 앉은 박건식은 쓴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담배만 뻐끔뻐끔 빨아대며 제멋대로 설쳐대고 있는 여섯 사람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박건식은 그들 여섯 사람 중에 동척 직원은 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일본말을 지껄여대는 것이 아니더라도 옷차림으로 쉽게 표가 났다. 다른 네 명은 손쉽게 돈벌이 하자고 나선 건달패들이었다. 박건식은 저것들이 일진회 찌꺼기들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한 명은 서류철을 들고 있었고, 나머지 다섯 명은 죽도며 목검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방이며 부엌이며 헛간을 뒤지고 돌아갔다. 며칠 전에 베 낸 볏단 어디다 숨겼을지도 모르니 찾아내자는 것이었다. 그런 식의 집뒤짐은 인심 사나운 지주가 으레껏 타작 직전에 하는 행태였다. 그러나 자작농인 박건식네로서는 그런 볼썽사나운 짓이 한 발 건너에서 벌어지는 언짢은 일일 뿐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이제 그런 꼴을 당하고 있었다. 주색잡기로 재산을 날려 소작인이 된 것도 아니었다. 왜놈들에게 느닷없이 논을 빼앗기고 왜놈들에게 도둑놈 취급까지 당하는 수모였다.

"아부지... 아부지..."

네 살짜리 아들이 겁먹을 얼굴로 자꾸 소매를 잡아당겼다.

"괜찮혀, 괜찮혀. 겁내덜 말어, 아부지가 있응게."

박건식은 아들을 품에 끌어안으며 다독거렸다. 아직도 젖비린내가 아른하게 풍기는 아들의 작은 몸이 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들을 더 꼭 끌어안으며 박건식은 어린것에게 차마 견디기 어려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어금니를 맞물었다. 가슴을 휘도는 분노와 함께 이빨이 맞갈렸다. 그들은 죽도와 목검을 멋대로 휘둘러대며 장독대의 큰 항아리까지 다 열어보고야 집뒤짐을 마쳤다.

"딴 디 어디 숨킨 디 없제?"

죽도를 든 사내가 불량스럽게 턱을 치켜 올리며 윽박질렀다.

"골빠지게 진 농새 절반이나 뺏기는 판에 드럽게 나락 멫단 숨키는 쫌팽이넌 아니로구만."

박건식은 고개를 틀어 돌리며 내뱉었다.

"젊은것이 말에 풀얼 빳빳허니 믹였네."

상대방이 눈꼬리를 치세웠다.

"다 뒤졌으면 인자 나갔씨요, 나가! 누구럴 도적놈으로 알고 아칙보톰 요것이 무신 경우 없는 쌍놈에 짓거리여!"

대목 댁이 삿대질을 해대며 소리쳤다. 더 이상 의심받을 것이 없게 되자 그녀는 집주인의 권리를 행사하며 상대방의 기를 꺾고 들었다. 그들은 더 대꾸하지 않고 서둘러 사립을 나갔다. 그들은 기가 꺾인 것이 아니라 다른 집들로 갈 일이 바빴던 것이다. 그들은 서너 집을 거쳐 한기팔이네 집에 이르렀다. 식구들과 함께 마당으로 내몰린 한기팔이는 먼 하늘을 바라본 채 큼큼 헛기침을 하고 서있었다. 뒷간까지 다 뒤진 그들은 마당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가만있어 보드라고. 쩌그가 잠 요상시러운디?"

한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텃밭 쪽으로 걸어갔다. 그 사내의 눈길은 텃밭 끝 울타리 구석에 수북하게 쌓인 짚덤불에 박혀 있었다. 그 짚덤불에는 마른풀들도 섞여 있고 해서 얼핏 보면 거름을 하려고 모아놓은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텃밭을 무질러간 그 사내는 목검으로 짚덤불을 헤쳐댔다.

"찾었다, 여그다 여그!"

사내가 기운차게 외쳤다.

"머시여? 볏단이 거그 있다고?"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얼굴이 질린 한기팔이 주저앉고 있었다. 그의 뒷덜미를 어떤 손이 낚아챘다.

"바가야로!"

죽도를 든 동척 직원이 틀어잡은 뒷덜미를 거칠게 잡아채며 내뱉었다.

"봇씨요, 얼렁 도망가씨요!"

세 아이를 한품에 끌어안은 그의 아내가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그 순간 한기팔이 몸을 힘껏 내둘렀다. 그 억센 힘에 끌려 동척 직원의 몸이 흔들리며 잡고 있던 뒷덜미를 놓쳤다. 그때 다른 동척 직원이 구둣발로 한기팔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뒷덜미를 놓친 동척 직원이 내려친 죽도가 한기팔의 머리를 갈겨댔다. 한기팔은 신음을 물며 그 자리에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이고메 병구 아부지!"

그의 아내의 울부짖음과 함께 아이들의 울음수리가 터졌다. 한기팔은 머리를 맞는 순간 아뜩해졌던 정신을 아이들 울음소리를 들으며 되잡고 있었다. 한기팔의 앞에는 흙투성이가 된 볏단들이 던져지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한기팔은 두 주먹을 말아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일고 있었다. 그건 쌀을 탐내서 욕심을 부린 것이 아니었다. 절반을 그냥 뺏기는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저지른 일이었다. 열 단이나마 감춰야 앙갚음이 되고 속이 풀릴 것 같았던 것이다.

"그따위 짓 하지 말라고 미리 다 경고했는데 열 단씩이나! 저 새끼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라."

서류철을 든 직원이 한기팔에게 침을 내뱉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둘러섰던 네 사내가 죽도며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죽도와 목검은 휙휙 허공 가르는 바람소리를 내며 한기팔의 몸뚱이를 난타했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핏빛으로 자지러지고 있었다.

이놈덜얼 다 찍어죽이고 나도 즉어부러! 여섯 놈 죽이고 죽으먼 원될 것도 없는디. 드런 놈에 시상 더 살먼 머헐 것이여. 그러나 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생각을 싸늘하게 식히는 것이 있었다. 세 아이들의 발버둥치는 울음소리였다. 그려, 나가 죽어불먼 느그덜이 어찌 되겄냐. 그려, 참아야제. 이 고비럴 넴기고 참아야제.

그는 울음이 복받치고 있었다. 그의 질끈 감은 눈꼬리로 눈물이 삐어져 나오고 있었다. 잔뜩 웅크려져 있던 한기팔의 몸뚱이는 몰매질을 견디지 못해 차츰차츰 풀어져 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처절한 가운데 동네사람들이 사립 앞에 몰려들고 있었다. 한기팔의 몸이 땅바닥에 완전히 풀려버리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서야 그들의 매질은 멈추어졌다.

또 한사람이 한기팔과 똑같은 매질을 당했다. 그 사람은 다섯 단을 감추었다가 그렇게 되었다. 홀태질은 각자의 논에 멍석을 잇대어 깔고 시작되었다. 땅을 빼앗긴 다음부터 새로 생긴 타작법이었다. 동척 사람들은 볏단을 집으로 옮기지 못하게 했다. 볏단이 축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동척 직원 둘은 다른 동네로 옮겨갔고, 건달패 넷이서 기세등등하게 이사람 논 저사람 논을 갈고 다니며 타작을 독촉하고 감독했다.

"홀태질얼 싹싹 혀, 싹싹!"

그들은 홀태질이 끝난 짚단을 마구 헤집어대면서 살벌하게 소리치고는 했다. 눈속임으로 홀태질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홀태질을 덜해 이삭에 낟알을 조금씩 남겼다가 모자라는 양식을 벌충하는 방법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몰매를 맞은 두 사람은 타작에 나설 수가 없었다. 그들의 아내가 나서기는 했지만 타작이 여자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말없이 두 집의 타작을 떠맡았다. 그들의 마음에는 두 사람에게 가해지는 몰매를 막아내지 못했다는 죄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다그쳐대는 소리에 쫓기며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했다. 건달패들은 밤에도 돌아가지 않고 홀태질된 나락을 지켰다. 그러니 그들의 밥까지 돌아가면서 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허리가 끊어지도록 일을 해서 이틀 만에 타작을 끝냈다. 동척에서는 그 절반을 그날로 실어가고 말았다. 그들은 건달패의 세끼 밥을 이틀간이나 해먹인 것뿐만 아니라 나락을 실어가는 가마니까지 대야 했다. 그건 이미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첫해에 그들은 가마니 내놓기를 거부했다. 그랬더니 동척에서는 타작을 끝낸 짚단까지 반을 가져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동척에서는 못된 조선지주가 하는 행티를 그대로 하려고 들었다. 짚단 절반을 빼앗기느니 가마니를 내놓는 것이 나았던 것이다. 짚단 절반을 빼앗기고 나면 지붕의 이엉을 갈아입힐 수 없거나 삼동의 땔감이 모자라 고생할 것이 뻔했던 것이다. 결국 동척에서는 그 힘겨운 물 농사에 손 한번 적신 일 없이 수확의 절반을 고스란히 빼앗아 갔다. 동척이 바로 총독부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이빨을 맞갈 뿐 더 이상 어쩌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고, 삼포댁도 지옥살이가 따로 없당게. 하로이틀도 아니고 원."

한 여자가 두레박의 물을 물동이에 쏟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무신 일 또 났등가?"

두레박을 끌어올리고 있던 여자가 손을 멈추며 제때 말장단을 맞추었다.

"또 남정네 강짜가 벌어진 모양이제?"

힘을 쓰느라고 아랫입술을 물고 물동이를 반쯤 밀어올리고 있던 여자가 물동이를 도로 내려놓으며 말참견을 했다.

"아이고 자네, 머 묵자것 있다고 물동우 이다 말고 이리 뎀빈가. 쓰다만 기운 아깝게."

먼저 말장단을 맞췄던 여자가 눈을 흘겨댔다.

"하이고, 넘 말 허고 지 숭 몰르는 것이 머리 검은 짐승이제. 자네나 헛심 빼지 말고 얼렁 그것이나 끌어올리소."

물동이를 내린 여자가 머리에서 또아리를 들며 눈을 마주 흘겼다.

"아이고 저 주딩이..."

그 여자가 멋쩍음을 히히거리는 웃음으로 지우며 두레박을 부지런히 끌어올렸다.

"금메 말이시, 어지께 밤에넌 진짜배기로 난리판굿이 났드란 말이시."

"진짜배기먼, 삼포댁이 참말로 딴 남정네허고 눈얼 맞쳤간디?"

"에이, 눈 맞칠 남정네가 어디 그리 흔칸디. 김샌이 또 생강짜 험스로 생사람 잡은 것이제."

"아니시, 아니여. 이분에넌 생트집이 아니드마. 꼬타리가 잽혀도 요상시럽게 잽혔드란 말이시."

"음마, 눈 밑 까무잡잡한 삼포댁이 참말로 딴 남정네허고 눈얼 맞쳤간디?"

"아이고, 이얘기 톰가치지 말고 가만있으랑게."

"긍게 말이시, 김샌이 어지께 밤에넌 딴 때허고 달르게 삼포 댁얼 반죽게 패서 나랑 점예 엄니랑 가서 뜯어말기니라고 혼이 났구마. 그냥 부부 쌈이라고 히서 냅뒀드라먼 삼포 댁이 맞어죽었을 것잉마. 근디 김샌이 그리 눈에 불키고 난리판 굿얼 꾸민 것언 삼포 댁이 방물장시럴 집 안으로 끌어딜였다는 것이여."

"아이고 어쩌끄나!"

"어메 일판났네!"

이른 아침의 싸아한 추위에 몸을 웅숭그렸던 여자들은 이제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헌디 삼포 댁 말언 그것이 아니등마. 방물장시가 지 발로 걸어 들어와서 물건 사라고 허길래 살 물건 없응게 나가라고 혔당마. 긍게 방물장시가 물이나 한 사발 얻어묵고 가자고 허드랑 것이여. 물 인심이야 즘생헌티도 후허게 써야 허는 인심이라 물 한 사발얼 떠줬다는 것이여. 삼포 댁이야 물 한 사발 떠준 죄밖에 없는디 김샌이 그 말얼 믿어야 말이제."

"시상에, 못 믿겄으먼 글먼 밑구녕얼 딜다보제."

"음마, 딜다보면 무신 소양 있간디? 한강에 배 지내가기란 말이 어찌 생겼는디?"

"글먼, 자네넌 삼포 댁이 대낮에 배럴 맞춘단 것이여?"

"어따, 어따, 쌩사람 잡을라고 허네. 말얼 그리 틀어돌리면 어쩐당가."

"방물장시야 아무 집이나 지멋대로 드나드는 물건덜이고, 물 인심이야 문딩이헌티도 야박허니 못허는 것인디, 그나저나 삼포댁 앞날이 감감허고 캄캄혀."

"참말로, 잠자리 재미 못 줄람사 맘이나 곱게 써야 살제. 삼포 댁이 무신 죄여."

"삼포 댁이 그리 당허다가 오기로라도 무신 일 저질르는 것 아닐랑가? 삼포 댁도 안직 시퍼런 나인디."

"하먼, 그럴란지도 몰르제."

"아이고, 자네덜 그런 소리 말어. 김샌이 들었다가넌 자네덜이 난리 당헐 것잉게. 김샌이 지정신이 아니여."

먼저 이야기를 꺼냈던 여자가 질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우리가 무신 못헐 말 혔간디. 과부야 과부닝게 산다고 쳐도 과부 아닌 과부 신세로 살게 된 것도 어디헌디 그저 사흘거리로 애맨 소리에 억지소리 해댐스로 머리끄뎅이 끄들어대고 개 패디끼 패대니 사람이 무신 수로 살겄소. 삼포 댁이 무신 죄가 있다고."

물동이를 이다 만 여자가 푸르르 성질을 돋우었다.

"누가 아니랴. 서방 구실 못허게 빙신이 되았음사 각시헌티 미안시럽게 생각허고 다둑다둑허고 살어도 젊은 여자가 한평상얼 맘붙이고 살자먼 에로운 판인디, 똥싼 놈이 큰 치허드라고 그리 사람얼 볶아치고 패대고 허니 어찌 살아지겄오. 김샌 그 사람도 사람이 사는 이치럴 눈꼽만치도 몰르는 팔푼이여. 지가 밤일 안된다고 그리 발광지랄이먼 즈그 각시넌 밤일 안되는 것얼 좋아라 허는지 아는갑제? 삼포 댁이 참말로 일 저질러부러야지 정신 채릴 것잉만."

두레박을 끌어올리다가 멈추었던 여자가 자기가 말할 차례라는 듯 거침없이 쏟아놓았다.

"자네덜 시방 불난 집에 부채질이여, 금간 물동우 내붇치기여? 알고보먼 김샌도 재수 없고 불쌍허게 된 사람인디 빈말이라고 그리 모지락시럽게 히서야 쓰겄능가."

"아 그것이야 누가 몰르간디. 긍게 동내사람덜헌티 존 말 듣고 위함받음서 살라먼 속맘 눌러감서 마누래 다둑이고 새끼덜 감싸감서 살어얄 것 아니여."

"빌어묵을, 마누래 그리 팰 기운 있음사 지럴 빙신 맨든 왜놈덜이나 패죽일 것이제. 지 웬수헌티넌 꼼지락도 못허는 짜잔헌 물건이 그저 마누래 잡고 분풀이 허는 꼬라지 허고넌. 그 체신 아깝다."

"그려, 자네덜 말이 틀린 디야 없는디, 김샌도 막막헌 팔자가 됐제. 몸이 그리 됐을람사 나이나 젊지 말든지, 나이가 젊으먼 아덜이나 한나 있든지. 이도 저도 아니니 그 사람이 환장허게도 되덜 안컸어. 어쨌그나 찾지도 못헐 땅 찾겄다고 면사무소고 떼거지로 몰켜간 것이 이런저런 탈얼 불렀구만."

처음 말을 꺼냈던 여자가 두레박줄을 감으며 우물을 떠날 채비를 했다.

"음마, 자네 집이야 논 안 뺏겠다고 그리 말하덜 말드라고 이. 그 남정네덜이 어디 앞뒤없이 그리 나섰간디? 왜놈덜이 말허는 대로 순리로 헐라고 문서럴 다 챙겨 냈는디도 그놈덜이 영 땅얼 되돌려줄 생각얼 안헝게 참다 참다 못히서 나슨 것이제. 첨보톰 끝꺼정 죽일 놈덜언 왜놈덜이란 말이시."

물동이를 내려놓았던 여자가 또아리로 우물가를 치며 싸움을 걸듯 하는 기세로 몰아댔다.

"아이고, 그것이야 누가 몰르간디. 하도 일이 꾀이고 덧나가고 헝게 답다히서 허는 소리제."

"허나마나 헌 소리덜 그만두소. 어쨌그나 김샌이 못난이고 쫌팽이여. 하샌언 다리가 빙신 된디다가 남정네 구실꺼정 못허게 되았어도 그런 말썽 안 부리고 살아가덜 않는다고."

"꼭 그런 것도 아니구마. 하샌도 쪼깐썩 요상허니 변해 간다고 허드랑게. 걸핏하먼 성질얼 부리고, 쥐꼬리만헌 일에도 트집얼 잡고, 마누래 마실도 못 돌게 닦달해대고 말이시."

"염병헌다, 거그도 못된 병이 도지는갑네 이. 남자덜 속이 어찌 그리 쥐창아리만헝고."

"참말로, 시상이 빌어묵게 됨스로 죄없는 여자덜이 베락맞네그랴. 여자 강짜 헌는 것이야 짠허기도 허고 더러 이쁘기도 헌디 한눈 폰 일도 없는 여자 놓고 남자가 허는 강짜넌 영 추접시럽고 징혀서 못 보겄네 이."

"금메 말이시, 씨엄씨덜이 앙심묵고 시키는 맵고 짠 시집살이 설움이야 서방이 밤마동 품어주고 호시 태와주는 재미로 녹아내리고 삭아내링게 살아지는 법인디 서방이 살리는 그런 애맨 시집살이넌 분허고 원통히서 무신 수로 풀고 살아질랑고?"

"그 못난 남정네덜 병 착착 고치는 명의넌 어디 없을랑가?"

"아이고, 시장시런 소리 말고 나락 절반 뺏기고 배고프게 삼동 날 걱정이나 허소. 그것도 다 넘 잔치시."

"그려, 우리 코가 석 자닝게."

세 여자는 제각기 물동이를 이었다.

 

 

35. 아버지와 아들

검은색의 육중한 체구에 기적소리까지 요란하게 울려대며 기차가 돌진해 오고 있었다. 사람이라고는 얼씬거리지 않는 곧게 뻗은 철길을 거침없이 달려오고 있는 기차의 모습은 확실히 위압적이고도 저돌적이었다. 쇳덩어리로 뭉쳐진 그 생김은 크고도 이상스러운 데다가 색깔까지 시커메 험상궂었고, 검은 연기를 내뿜고 달리며 기적소리까지 뛔엑 뛔엑 질러대는 모습은 꼭 성난 짐승 같았다. 거기다가 기운 또한 엄청나서 사람이고 쌀이고 수백 명 수백가마니를 한꺼번에 태우고 싣고는 달구지보다 몇 십 배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그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차가 하얀 김을 아래로 내뿜으며 역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역 건물 양쪽으로 쳐진 긴 가시울타리에는 사람들의 얼굴이 겹으로 매달려 있었다. 앞에는 아이들이 서 있었고 뒤에는 어른들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누구를 마중 나온 것이 아니라 구경꾼들이었다. 기차가 떠나고 도착할 때마다 구경꾼들은 어김없이 그렇게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가시철사에 긁히고 찍히면서도 한사코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었다. 그 아이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소리를 들으며 연상 재잘거려댔다. 그들의 재잘거림은 거의가 어른들한테서 귀동냥한 것들을 부풀려가며 아는 척하는 것이었고, 그들이 똑같이 지니고 있는 소망은 기차를 한번 타보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인 같은 구경꾼인 어른들과 다른 점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 가며 기차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기차가 역 구내로 달려 들어오면 아이들은 환성을 지르고 손뼉을 쳐댔다. 그런 그들의 반짝이는 눈에는 신기해하는 빛과 선망이 함께 담겨 있었다.

", 말 듣든 대로 징상스럽게도 생겼네 이. 무작시리 크기도 허고."

"그나저나 저것이 요상스런 물건 아니라고? 어찌 그리 기운이 씰꼬?"

"석탄인지 흑탄인지럴 때는 화차라서 그렇제"

"그것이야 누가 몰르간디. 석탄인지 흑탄인지럴 때먼 어찌어찌히서 그리 엄청시리 씬 기운이 생기게 되냐 그것이제"

"그런 것얼 다 알먼 나가 진작에 전라감사 해묵었게."

"빌어묵을, 저놈에 기찬지 불찬지 땀세 조선 사람덜만 녹아나고 골병 들었제."

"무신 소리여? 저 기차 덕에 조선천지가 기차만치 빨르게 개명되고, 천릿길도 하로 이틀로 왔다 갔다 허게 편해지고, 먼 탄관 물산덜이 서로 쉽게 자리 바꿈얼 헝게 그만치 살기가 좋아진다고 안 그러등가."

"이 사람이 참말로 넋 나간 소리 허고 앉었네 시방. 이 사람아, 그런 새 날아가는 소리야 철길 놓기로 작정헌 왜놈덜 덕보고 사는 놈덜이 입에 달고 댕김서 헌 소리고, 조선 사람덜 중에서도 왜놈덜 덕보고 사는 놈덜이나 논 많이 깔고 앉은 부자양반들이 창아리 없이 허는 소리 아니여. 우리겉이 근근이 묵고 사는 사람덜이 그런 덕본 것이 머시가 있능가. 재수 없는 사람덜은 전답얼 철길로 다 뺏기고 거지꼴이 되고, 철길공사판에 끌려 나가 골병 들게 일헌 사람덜이 얼매나 많은가. 근디, 그 살람덜얼 돈 없이 공짜로 저놈에 기차럴 태와준가? 어림도 없는 소리 아니라고. 글고, 쩌그 저 화찬지 짐잔치에 꽉꽉 찬 것이 머신지 알겄제, 자네? 쌀가마니여, . 저것이 군산포구서 어디로 실려 가는지 알겄제? 근디도 우리가 덕얼 보는감?"

"글씨...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옳고, 저 말 들으면 저 말이 옳고..."

어른들이 거창하게 지어진 역 건물을 등지며 나누는 이야기였다. 완전히 멈춘 기차가 가쁜 숨을 토해내듯 쉬익쉭 소리를 내며 김을 내뿜고 있었다. 객차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객차는 앞으로 서너 개 달려 있었고 나머지 열서너 개는 모두 화차였다. 객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의 차림은 거의가 신식이거나 일본식이었고, 네모로 각진 커다란 가방들을 들고 있었다. 40여 명 중에 한복 차림을 한 사람은 네댓에 지나지 않았다. 넓은 대합실을 사람들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개찰구 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마중을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수는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에 비해 너무 많았다.

"치성이성! 엄니 성 왔네 성!"

한 아이의 목소리가 왁자한 소란 속에서 카랑하게 울려 퍼졌다.

"머시여? 어디 보자, 어디여!"

허름한 차림의 여자가 남들 눈치 볼 것 없이 반가움이 넘치는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 뒤를 처녀와 사내 서넛이 우르르 따르고 있었다.

"서엉! 치성이 서엉!"

열서너 살쯤 먹어 보이는 아이가 역원에게 기차표를 내고 있는 남자를 향해 목청껏 외쳐댔다.

"! 니 막둥이구나."

기차표를 내고 큰 가방을 추슬러 들던 그 남자가 반가움 넘친 얼굴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젊은이답게 맨 먼저 개찰구를 지나 대합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이고메 치성아, 어서 오니라!"

대합실로 들어선 그 젊은이를 아까 소리쳤던 여자가 얼싸안듯 했다. 그 바람에 젊은이는 큰 가방을 대합실 바닥에 놓아야 했다.

"엄니... 엄니꺼정 멀라고 나오셨소."

여자를 바라보는 젊은이의 눈자위가 금세 붉어졌다.

"나가 안 나오면 누가 나온다냐. 어찌, 몸언 성허냐?"

여자는 눈물 밴 소리로 말하며 눈이 부신 듯 젊은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느그덜도 다 나왔네? 그간에 잘덜 있었냐"

그는 자신의 앞을 에워싼 네 명의 동생들을 둘러보며 더없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신식 차림새는 형제들간의 입성과는 너무나 차이가 났다. 그들을 옆엣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거그, 뒷사람 생각해서 질 잠 틔우라고. 반가운 인사야 쩌그 널른 마당에 나가 뽕빠지게 허드라고."

소란 속에서 누군가가 걸찍하게 외쳤다.

"저것 우리보고 허는 소리다. 얼렁 질 틔우고 나가자."

그 젊은이가 서둘러 가방을 들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섰던 사내가 재빨리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요상허시? 차림새가 학상 겉은디 식구덜허고는 영 안 어울리덜 안혀?"

"글씨 말이시, 식구덜언 가난이 질질 흐르는디. 저런 집서 무신 수로 높은 핵교 보내고, 이 비싼 기차 타고 댕기게 허능고?"

"저 나이에 학상이 아니면 머시것어. 지가 총독부 관리도 아니것고."

"몰르제, 하도 요상시런 시상잉게."

사람들 사이로 멀어져 가는 그 젊은이를 보며 두 남자가 나직하게 나누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의심은 정확했다. 그 젊은이는 우체국장 하야가와의 주선으로 일본에 유학을 간 급사 양치성이었다. 다만 그들은 그 내막을 모를 뿐이었다.

"성언 아조 하이칼라 멋쟁이가 되야부렀네 이."

양치성의 막내동생이 형의 손을 잡고 깡충거리고 걸으면서 형을 부러운 듯 자랑스러운 듯 올려다보며 입을 놀렸다.

"아이고, 니가 하이칼라라는 말도 다 헐지 아네?"

양치성은 놀라움과 대견함이 뒤섞인 얼굴로 막내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나 딴 일본말도 많이 아는디?"

막내동생은 형을 올려다보며 눈을 빛냈다. 어디 한번 해보라고 하면 금방 말을 쏟아놓을 듯한 기세였다.

"상근아, 하이칼라라는 말언 일본말이 아니라 저그 저 서양말이다. 일본 사람덜이 빌려다 쓰는 것잉게 일본말인지 알면 안 되제. 구루무라는 말 니 알지야? 그 말도 서양 말얼 빌려다 쓰는 것이여. 무신 말인지 알것냐?"

양치성은 정겹게 막내 동생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쥐방울만헌 것이 주딩이만 발랑 까져갖고. 에이, 토란대가리야!"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도록 큰 가방을 들고 가던 사내가 막내 동생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어째 때리고 지랄이여. 작은 성도 그런지 알았간디?"

상근이는 빽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얻어맞은 것이 아프기도 했고, 토란대가리라는 놀림이 분하기도 했던 것이다. 양치성은 막내 동생의 머리로 눈길을 옮겼다. 가위로 깎아나간 동생의 머리에는 가위질의 흔적이 무슨 테를 빙빙 둘러놓은 것처럼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이 마치 토란껍질의 무늬 같아서 아이들은 가위로 갓 깎은 머리를 서로 <토란대가리>라고 놀려댔다. 그건 이발소를 갈 수 없는 가난의 흔적이기도 했다.

"니 토란대가리라고 놀림 당혀서 싸다. 나가 끝손질히 주겄다고 그리 달개도 말 안 듣고 발싸심해대등마. 씨엉쿠 잘됐다."

양치성의 여동생이 변명하듯 말하며 양치성의 눈치를 빨리 살피고 나서 막내 동생에게 눈을 흘겼다.

"치이, 누나넌 암것도 몰름스롱 말만 잘혀. 대가리 쳐백히서 머리 깎이기가 얼매나 심드는지 알어? 가우가 살얼 씹어대제, 터럭까시가 옷 속으로 기들어 몸얼 찔러대제, 목언 뻣뻣허니 아 , 말만 말고 누나도 한분 머리털 깎여보제. 나가 깎아줄팅게로."

상근이는 응원을 청하듯 큰형 양치성이를 올려다보고 누나를 째려보고하며 야무지게 입을 놀려댔다.

"니 머리 깎이기만 심들고 머리 깎는 사람언 무신 깨 쏟아지는 재미가 있는지 아냐. 머리털 깎자면..."

"아서, 아서. 저놈 억지소리에 이길 장사 없응게. 저놈 주딩이야 밤송이 한 삼태기라도 깔 주딩이 아니냐. 지놈 말대로 놀림얼 당혀도 지가 당허고, 한 열흘 지내면 표가 안 나게 된다는 배짱인디 우리가 어쩌겄냐."

양치성의 어머니가 손을 내저었다.

"우리 상근이 배짱이 아조 쓸 만헌디. 남자야 그런 배짱이 있어야제."

양치성은 막내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꽤나 흡족하게 웃었다.

"봐라, 봐라. 큰 성이 딱 나 편이제."

행여 야단을 맞을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던 상근이는 누나에게 가슴을 내밀어 보이며 기를 세웠다.

"하이고 야, 니 인자 살판났다 이. 엄니나 나도 심 안들어 좋게 생겼응게 앞으로야 진짜배기 토란대가리럴 맨글어줄란다."

누나가 상근이에게 웃음 담긴 눈흘김을 보냈다. 양치성이와 함께 식구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양치성은 식구들의 웃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지고 있었다. 여섯 식구가 아무 탈 없이 이렇게 얼굴 마주보며 웃을 수 있다는 것. 그건 그로서는 가슴 저리는 슬픔인 동시에 가슴 벅차는 감동이었던 것이다. 우체국 급사 노릇을 하며 그동안 여섯 식구가 근근이 살아 있다는 것이 오히려 꿈만 같았다.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가 죽어버린 집안에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 낡은 초가집마저 병치레 빚돈으로 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아버지가 남겨놓고 간 것은 다섯 형제간들뿐이었다. 어머니가 진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품팔이를 나다녔지만 하루 한 끼를 먹기가 다급했다. 다섯 형제는 날마다 배가 고파 허덕거렸다. 눈들을 희번득이며 먹을 것을 찾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동생들은 물배만 채우다가 지쳐 쓰러지고는 했다. 동생들을 먹여 살리려고 어느 집에 꼴머슴으로라도 들어가려 했지만 아직 물뼈라며 아무데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세 살짜리 막내 동생이 배가 고파 울어대다가 흙을 파먹었던 것이다. 다음날로 어머니 모르게 구걸을 나섰다. 어머니가 입 닳아빠지게 되풀이하는 <집안의 기둥>이라는 장남으로서 어머니를 돕고, 아버지 몫을 대신하고, 동생들을 굶기지 않는 길은 그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바가지를 들고 잘사는 집을 찾아다니며 밥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 대상이 일본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찾아 발길은 자연스럽게 부두로 향했다. 부두 근방에 많이 오가는 일본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며 굽실거렸다. 그러나 거지들이 쉽게 하는 <한푼 줍쇼> 하는 말은 목을 넘어오지 않았다. 생각대로 그 말이 나오기까지는 사나흘이 걸렸다. 그 말을 되풀이하다 보니 희한한 생각이 떠올랐다. 한푼 줍쇼를 일본말로 하자는 것이었다. 부두 근방에는 일본말을 지껄여대는 조선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에게 머리를 쥐어 박히고 걷어차이고 하면서 <메군데 구다사이>란 말을 알아내느라고 이틀이 걸렸다. 손을 내밀고 굽실거리면서 그 말을 들은 일본사람들은 놀라기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하고 재미있어 하기도 하면서 동전들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주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우체국장 하야가와였다.

"메군데 구다사이라고? 너 다른 일본말도 할 줄 아느냐?"

하야가와가 놀라서 물었다. 양치성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내둘렀다. 일본사람이 틀림없는데 거침없이 조선말을 했던 것이다.

"그 일본말은 언제 배웠지?"

"...저어, 동냥 많이 얻을라고라."

"누가 그러라고 시켰지?"

양치성은 도리질을 했다.

"그럼 너 혼자 생각이란 말이냐?"

양치성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 이놈 보게. 너 몇 살이냐?"

하야가와는 허리를 더 굽히며 양치성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열세 살 인디요."

"열세 살..., 너 혼자서 사나?"

양치성은 다시 도리질을 했다.

"그럼, 부모가 다 있어?"

"아니구만이라. 아부지넌 죽고 엄니허고 동상덜이 넷인디요."

양치성은 상대방의 부드러운 인상과 조선말을 잘하는 것에 이끌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동냥질을 나섰구나. 너 내가 취직시켜줄까?"

"취직이오?"

양치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상대방을 의문스럽게 쳐다보았다.

", 취직이 뭔지를 무르는구나. 이렇게 거지 노릇 하지 않고 옷 깨끗하게 입고 편한 일 해서 돈벌이를 하는 거다."

그 취직이란 것이 싫을 까닭이 없었다. 하야가와는 월급만 주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도 거르는 일 없이 매일 일본말을 가르쳐주었다. 월급은 어머니의 품팔이 벌이보다 많았다. 그 월급과 어머니의 벌이를 합치면 여섯 식구가 굶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말끝마다 하야가와 국장을 은인이라고 받들었다. 그리고 꿈에라도 그 은공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도 꼭꼭 덧붙였다. 밤마다 잠을 설쳐가며 일본말을 열성으로 공부한 것은 순전히 하야가와가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하야가와가 그날 가르쳐준 것은 밤에 달달 외워버렸다. 다음날 하야가와 앞에서 막힘없이 외대면 하야가와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하야가와가 원하는 것을 빈틈없이 해내는 것만이 여섯 식구가 굶어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었다.

"니 그간에 타국서 고상 많앴지야?"

양치성의 어머니는 새삼스럽게 아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니구만요, 나야 돈 걱정 없이 공부만 했는디요. 아그덜하고 엄니가 고상이 많었제라?"

양치성은 어머니의 주름 잡힌 얼굴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니여, 아니여, 나야 무신 고상혔간디. 국장님이 착착 보내준 니 월급으로 시상에 편케 살았제. 그나저나 하야가와 국장님언 이 하늘 아래 둘도 없는 분이시여. 묵고 자고 공부헐 비용 다 대서 니럴 일본꺼정 보내준 것도 기맥힌 일인디 거그다가 또 우리 식구 살리니라고 니 월급꺼정 꼬박꼬박 주셨으니 그리 고마운 일이 시상에 어디 또 있다냐. 그 은공이 높기가 태산이고 넓기가 대해닝게 니 평상 갚아도 모지랠 거이다. 니 바로 인사허로 가야지라?"

"야아, 이 질로 바로 가야지라."

양치성은 바지춤을 추키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하야가와를 생각하기만 하면 그는 언제 어느 때나 몸이 곧바로 서는 긴장을 느꼈다. 양치성은 우체국 쪽으로 길을 잡았다.

"아이고 참, 니 빈손으로 가서 되겄냐?"

양치성의 어머니는 서둘러 아들에게로 달려오며 물었다.

"빈손이 아닝게 걱정 마시게라."

양치성이 어머니를 바라보며 어색스러운 듯한 웃음을 지었다.

"인사가 될 만헌 물건이여?"

"야아, 걱정 말라닝게요."

"그려, 니가 알아서 허겄제. 어런 앞에 절 짚이 허고 잉!"

"아이고 참, 엄니도."

그때서야 양치성의 어머니는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하며 돌아섰다. 양치성은 한동안 걷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리저리 깡충거리며 걷고 있는 막내 동생의 모습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아직도 기계이발을 시킬 수 없도록 집안은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굶는 것을 근근이 면해 온 생활이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쬐깨만 더 기둘려. 느그덜 다 호강시킬 날이 있을 것잉게.

양치성은 이런 속다짐을 하며 돌아섰다. 여지껏 부드러운 웃음이 감돌고 있던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웃어라, 항시 웃어라.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얼굴을 붉히지 말고, 아무리 힘들고 속이 상하는 일이 있어도 얼굴을 찡그리지 말고 웃어라.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곧 숨을 서너 번씩 깊이 들이마시면서 웃을 일을 생각해 내라. 그걸 자꾸 연습하면 웃음 속에 내심을 감출 수 있게 된다. 남자는 마음에 층이 많을수록 크게 된다."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 하야가와의 가르침이었다. 그 말은 언제나 순서가 없이 한 장의 사진을 한눈에 보는 것처럼 일시에 떠올랐다. 아니 그 말뿐이 아니었다. 하야가와가 반복했던 말들은 아무리 길다고 해도 길이에 상관없이 일시에 떠오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야가와 아래서 보낸 세월이 10여 년이었다. 하야가와가 가르치고 원하는 대로 되려고 애쓰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변해 갔다. 평소에도 물론이고 아무리 화가 나도 일단 화를 누르며 웃을 수 있었고, 아무리 속이 상해도 일단 한숨을 돌리며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말을 적게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서 얻은 별명이 <애늙은이>였다. 그 별명이 붙자 가장 흡족해한 것이 하야가와였다. 그러나 겉으로 웃는다고 화가 삭거나 속상하는 것이 그냥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속에는 따로 먹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너는 이제부터 공적으로는 천황폐하의 충직한 신하인 동시에 사적으로는 나의 아들이다."

일장기 앞에 무릎 꿇고 앉아 혈서를 썼을 때 하야가와가 준엄하게 한 말이었다. 그 말은 백지 위에 적힌 넉 자의 새빨간 글자와 함께 가슴 벽에 깊이 아로새겨졌다. 그리고 우러러보고 있는 일장기의 붉은 동그라미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되면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그 이글거리는 불덩이 속으로 자꾸 빨려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10여 년 동안 아침마다 일장기를 향해 경례를 올려왔었지만 그 붉은 동그라미가 그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어리로 보인 적은 없었던 것이다. 피로 쓴 皇國忠誠 네 글자와 함께 붉은 동그라미는 뜨겁고도 눈부신 불덩어리가 되었다.

"황국에 충성을 맹세했으니 이제 황국이 베푸는 은혜를 받으러 떠나라."

일본유학이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집안 식구 생계를 걱정할 것도 없이 바다를 건너가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오사카 그리고 도쿄... 일본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별천지였다. 조선은 도저히 비교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일본이 고대광실 기와집이라면 조선은 헛간에 지나지 않았다. 겉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속이 더 문제였다. 일본의 개명된 신식문물 앞에서 기가 꺽여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조선이 왜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아니,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장님, 방금 돌아왔습니다. 그간에 별고 없으셨는지요."

양치성은 허리를 반으로 꺾어 깊은 절을 올렸다.

"그래, 어서 오너라. 몸은 건강하고?"

하야가와는 더없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예에, 염려해 주신 덕분에..."

어깨를 움츠린 양치성은 방아깨비처럼 연상 허리를 굽실거렸다.

"자아, 저쪽으로 앉자. 그간에 몸이 더 실해졌구나."

하야가와는 양치성을 감싸 안듯 하며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저어... 이것 약소합니다만..."

양치성은 안락의자에 앉기 전에 속주머니에서 조그만 물건을 꺼내 두 손으로 받쳐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이게 뭔가?"

"저어, 국장님 시계가 너무 오래돼서... 마음에 드실란지..."

"시계? 그 비싼 것을 자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하야가와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제 용돈을 아꼈습니다. 자식으로서 아버님에 대한 마음입니다."

양치성은 하야가와의 엄한 눈길을 피하지 않으며 또렷하게 말했다.

"뭐라고?"

하야가와의 얼굴에 문득 긴장의 빛이 스치더니,

"학업에 열중해 일등을 한 것으로 내 체면은 충분히 세웠고, 아들 된 도리도 다한 것 아닌가. 그런데 이런 것까지 사오다니..."

그는 웃음을 환하게 살려내며 시계갑을 집어 들었다. 포장지를 뜯은 하야가와는 시계갑을 열고 말없이 시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계를 사기 위해 양치성이가 얼마나 많은 용돈 궁한 생활을 했는지를 그는 가슴 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 참 고맙구나. 그럼 이건 내가 차기로 하고, 내 것은 자네가 차도록 하지."

하야가와는 자기 팔목의 시계를 풀어 양치성에게 내밀었다.

"아니 이걸..."

놀란 양치성은 몸을 엉거주춤 일으켰다.

"어서 받아. 자네도 이젠 시계가 필요한 나이야. 새 것을 사줄 수도 있지만 이게 더 의미 있는 일이야."

하야가와는 양치성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야말로 의미 깊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 고맙습니다..."

양치성은 말을 더듬으며 두 손을 받쳐 시계를 받아들었다. 그는 가슴 두근거림과 함께 뜨거운 정을 느끼고 있었다.

"나를 생각하는 자네 맘은 잘 알지만 앞으로 이런 짓을 해서는 절대로 안돼. 자네한테 주는 용돈은 풍족하지도 않고, 그 돈은 이렇게 쓰라는 게 아니야. 그 돈은 일본을 알고 배우는 데 유용하게 쓰라는 거야. 가끔 연극도 구경하고, 운동시합도 구경하고, 술집도 가보고 말이야. 그게 다 세상공부고, 자네가 하는 공부에도 도움이 되는 거니까. 앞으로 남은 일 년은 틀림없이 그렇게 해야 돼. 알겠나?"

"예에,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학교공부도 중요하지만 뛰어난 정보원이 되려면 세상을 샅샅이 아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걸 잊어선 안 돼. 하여튼 자네가 공부에 매진할 줄은 알았지만 1등을 할 줄은 몰랐다. 1등이란 문무를 겸한 게 아니냔 말야. 장한 일이야, 장해. 난 한없이 기쁘다."

"황송합니다."

줄곧 손을 앞으로 모아잡고 앉은 양치성은 하야가와의 넘치는 칭찬에 달아오르는 얼굴을 수그렸다. 그러나 1등을 하기까지는 정말 힘겨웠었다. 언제나 모자라는 것이 잠이었다. 책공부와 무술공부가 반반인 나날의 생활 속에서 잠은 초저녁부터 퍼부어졌다. 그 잠과 싸워가며 자정이 넘도록 책공부를 해야 하는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잠의 굶주림은 마치도 어린 시절의 배고픔처럼 질기고 쓰라리게 몸을 괴롭혔다. 그러나 일본학생들에 비해 기초공부가 모자라는 것을 극복해 내자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스스로도 1등을 하겠다는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다만 꼴등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채찍질했을 뿐이었다. 잠에 시달리는 흐린 눈앞에 어릿거리는 것은 일장기의 이글거리는 불덩이도 아니었고 하야가와의 웃음 담긴 부드러운 얼굴도 아니었다. 잠을 이겨내게 하는 것은 어머니와 네 동생들의 가난에 찌든 모습이었다.

"자네한테 내가 한 가지 맡길 일이 있네."

하야가와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

", 무슨 일이신데요."

양치성은 더 똑바로 바로잡을 것도 없는 앉음새에다 함을 넣었다.

"그게 뭔고 하니 말이야, 몇 달 전부터 부두노동자들의 움직임이 심상찮아. 그자들이 서로 좋은 일거리를 차지하려고 패싸움을 벌이는 것까지는 좋은데 말이야, 그중에서 몇 십 명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정보거든. 그건 좀 문제야. 왜냐하면 노동조합 결성 목적이 일거리 학보나 임금협상 같은 단순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단 말이야. 상인조합에서는 일 시켜먹기 힘들게 돼간다고 신경을 쓰고 있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우리가 주시해야 하는 건 그 속에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정치적 목적이야. 위병세력은 일소된 게 아니랴 다만 약화되었을 뿐으로 지금도 산발적으로 출몰하고 있잖나. , 그 잔당들이 지하로 숨어들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일이야. 그러니 자네가 1년 동안 닦은 솜씨로 그 노동조합 내부를 비밀리에 파헤쳐 보란 말이야. 알겠나?"

웃음기 가신 하야가와의 얼굴에서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 조속한 시일 내에 내리신 임무를 철저하게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양치성은 뜻밖의 지시에 긴장하면서도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는 의미까지 포함된 그 지시에 우선 결연한 의지를 보일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일이라면 1년 동안 배운 기술과 요령으로도 별로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너무 급하게 서두를 건 없고, 잘 처리해 봐. 먼 여행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제 그만 가서 쉬도록 해."

하야가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체국을 나온 양치성은 비로소 짓눌리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하야가와는 언제나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고 높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앞에서는 언제나 긴장이 되었고, 커다란 바윗덩이에 눌리는 것 같은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나게 되자 그 도는 더 심해졌다.

"그려, 공부넌 무신 공부럴 허는 것이다냐? 공부럴 끝내면 니도 우체국장 같은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는 기여?"

양치성의 어머니는 기대에 찬 눈으로 아들에게 물었다.

"야아, 그리 되겄제라."

양치성은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대답했다. 그 거짓말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그 필요한 거짓말부터 가르쳤다. 신분의 노출은 첫 번째 금기였다. 어머니까지도 자신이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알 필요가 없었다. 자신은 하야가와의 추천을 받아 그 학교에 들어간 것이지만 이미 하야가와하고는 직장의 관계가 끊어진 셈이었다. 그 학교를 마치게 되면 다시 하야가와 밑에서 우체국 일은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니가 우체국장님이 되면 얼매나 좋것냐, 그리만 됨사 우리 집안이 목단꽃 피디끼 활짝 피는 것잉게. 니 손에 성제간덜 팔자도 달렸응게 고상이 되드라도 참고 참어야 쓴다 잉."

양치성의 어머니는 목이 메며 아들의 등을 어루만졌다. 입을 꾹 다문 양치성이는 고개만 무겁게 끄덕였다.

"서엉, 저어... 나도 어디 자리 한나 봐주소."

양치성의 둘째동생은 형의 눈치를 살피고 머뭇거리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자리? 효남이 니가 멫살이제?"

양치성은 피곤이 끈적거리는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성언 나 나이도 몰르능가... 발써 열일곱 살 아니여."

효남이는 금방 볼이 부어오르며 불뚱스럽게 말했다.

"열일곱 살... 무신 일얼 바래는디?"

". 작은 성언 순사나 헌병 질이 허고 잡아 죽능당마."

막내 상근이가 잽싸게 대답했다.

"순사나 헌병 질? 니 참말이여?"

효남이가 쑥스러운 듯 옆 눈질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쟈가 쌔넌 짤라도 침언 질게 뱉고 잡은가부시. 열일곱 나이 갖고 무신 수로 순사질이고 헌병 질이냐?"

양치성은 직감적으로 마땅찮은 생각이 들어 이렇게 말이 나가고 말았다.

"긍게로 누가 정식으로 순사고 헌병얼 시켜도란 것이간디. 성맨치로 소사로 들어가서 차차로 올라가는 것이제."

효남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치성의 외침이 터졌다.

"머시여, 소사! 소사가 무신 장헌 벼슬인지 아냐. 오런 빙신 겉은 놈아, 한집안서 줄줄이 소사질로 나서? 니가..."

"아서, 아서, 어째 이런다냐. 참어라, 참어. 효남아, 니 주딩이 놀리지 말고 얼렁 나가그라, 나가."

그 갑작스러움에 놀라고 당황한 양치성의 어머니는 큰아들을 제지하랴 작은 아들을 내보내랴 정신이 없었다. 효남이는 제 누나에게 등이 떠밀려 밖으로 나가면서 무슨 소린가를 투덜거렸다. 양치성은 숨을 몰아쉬며 몸을 벽에 부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저것이 철이 없어 헌 소린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부러라."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양치성은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웃는 연습을 해오면서 어느 만큼 자신감도 갖게 되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 것이었다. 소사를 하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했던 것이다. 동생이 소사를 하겠다는 것, 그것이 왜 그렇게 불길로 터져 올랐는지 자신도 딱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은 분명 용납할 수가 없었고 다시 생각해도 화가 치솟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건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고, 잊어버리고 싶은 과거였다. 그 누구에게도 내보이고 싶지 않은 흉한 흉터 같은 것이었다. 그건 단순히 창피스럽고 부끄러운 것만이 아니었다. 사환 노릇을 하며 겪은 말못할 고생이 지긋지긋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환 노릇을 했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가치에 큰 흠집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었다. 정작 사환 노릇을 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었다. 남들에 비해 무언가 모자라는 것 같고, 무언가 비어 있는 것 같은 감정은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자꾸 커지기만 했다. 그런 생각은 남들에게 꼭꼭 감추어야 하는 괴로움이 되었고, 스스로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야아 야, 니 어찌 그리 화럴 내냐. 효남이가 못헐 소리 헌 것도 아닌디."

양치성의 어머니는 큰아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놈에 소사 질이 머시가 좋다고 자청허고 나스고 그러냔 말이어라."

양치성의 말은 어느 때 없이 퉁명스럽고 거칠었다.

"아니여, 그렇덜 안혀. 니가 일본으로 떠나자 사람덜이 니럴 얼매나 부러바덜 혔는지 아냐. 자수성가허게 되았다고 입 달린 사람이면 모다 칭찬이 자자허고, 즈그 자석덜도 소사자리 얻고 잡아 친 생키고 그래쌓당게. 긍게 효남이가 공연시 그런 말 꺼낸 것이 아니란 말이여."

"엄니, 소사질언 나 하나 헌 것으로 족홍게 다시넌 나 앞이서 그 말 못 꺼내게 단속허씨요. 아시겄소?"

양치성이는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어머니를 쏘아보듯 하며 못을 박았다.

"그려... 그러제."

그의 어머니는 미심쩍은 얼굴을 풀지 못한 채 마지못해 대답을 어물거리며,

"효남이도 인자 나이가 다 들었는디 언제꺼정 빈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지 앞 감당헐 무신 자리럴 얻어야헐 것인다..."

그녀는 기죽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이야 나가 차차로 알아서 허겄소."

양치성은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방바닥에 길게 누워버렸다. 팔베개를 한 그는 곧 잠이 들었다.

"얼렁 이불허고 비개 내래라."

측은한 얼굴인 그의 어머니는 앉은걸음을 하며 큰 딸에게 일렀다.

"그려, 그려. 낯설고 물 설은 타국서 얼매나 고상이 많았겄냐. 돈으로 맥질허는 천석꾼 만석꾼 자석덜도 타국 공부가 심든다고 야단덜인디 지돈 땡전 한닢 없이 넘 돈으로 공부라고 허자닝게 눈치코치에 맘고상, 돈 푼푼허덜 못혀 몸고상, 니가 헌 첩첩 고상얼 니 못난 에미가 어찌 다 알겄냐, 넌 먼첨 저승객 된 무정헌 니 애비가 알겄냐. 그려, 그려, 니넌 이 집안 기둥이고 대들보여. 눈칫밥 코칫밥 얻어묵음시로도 이리 몸이 실허니 효자가 따로 없제. 장혀, 장혀. 니가 질로 장혀."

양치성에게 베개를 받쳐주고 이불을 덮어주고 하면서 그의 어머니는 눈물 젖은 소리로 속 풀이를 하고 있었다.

"엄니, 큰 성이 작은 성얼 미와헝가?"

그때까지 방구석에 붙어 앉아 찍소리가 없었던 막내 상근이가 속삭이듯 물었다.

"아니여, 아니여. 작은 성이 밑도 끝도 없이 큰 성 맘에 안 드는 소리럴 히서 그렇제. 큰 성도 이 엄니맨치로 느그덜얼 다 골고로 이뻐라 허제이."

그의 어머니는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상근아, 큰 성언 소사 질얼 징허게 생각허는 것이여. 근디 작은 성이 또 소사질얼 시켜도랑게 속이 뒤집어진 것이제."

상근이의 누나가 말을 덧붙였다.

"치이, 나도 소사 질히서 큰 성 맨치로 출세허고 잡었는디."

상근이가 입을 뿌루퉁하게 내밀었다.

"아서, 아서. 야덜이 줄줄이 난리판굿 꾸밀라고 드네. 니넌 허라는 공부나 열성으로 혀."

그의 어머닌 막내에게 눈을 부라렸다.

오랜만에 편안하고 아늑한 잠을 흡족하게 잔 양치성은 아침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어제와는 딴판으로 허름한 그의 차림은 흡사 노동판의 노동자였다. 집에서 멀찍해지자 양치성은 단정하게 넘어간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댔다. 그렇게 되자 그의 모습은 한결 더 막일꾼 같아졌다. 양치성은 곧바로 부두로 나갔다. 부두 일대는 아침부터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고, 사방에서 떠드는 소리로 시끌덤벙했다. 그들은 거의가 노동자들이었다. 하루 일을 시작하느라고 그들은 바쁘고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부두 가까이에는 여기저기 쌀가마니들이 산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육중한 무게감을 지닌 그 덩어리 하나하나가 쌀 몇백 가마니로 이루어진 것인지 눈짐작으로는 쉽지가 않았다. 그 많은 산 덩어리들은 부두 주변에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몰려 소란스러운 것인지를 한마디로 설명하고 있었다. 양치성은 느린 걸음으로 부두 근방을 돌아보고 있었다. 떠나 있었던 동안 변한 것이 많았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엄청나게 큰 쌀 창고들이 부쩍 불어난 것이었다. 양치성은 쌀창고가 의외로 많이 생긴 것에도 놀랐지만, 그 창고를 지은 재료를 보고 더 놀랐다. 새로 자리잡은 창고들은 모조리 시멘트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쪽의 커다란 문도 모두가 철문이었다. 일본사람들은 무슨 건물이든 거의 나무로 짓기를 좋아했다. 집이란 집은 2층집까지도 나무로 지었고, 창고 같은 것들도 태반이 나무였던 것이다. 너무 높고 크게 짓다보니까 나무로는 안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 지워졌다. 오래오래 쓰려고 튼튼하게 벽돌과 시멘트로 지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그 생각은 또 다른 생각과 일치를 이루었다. 개명된 일본의 이모저모를 보면서 연속적인 충격을 받았었고, 그 충격에 어덜리고 기죽어 가면서 조선은 일본의 보호 속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막연했던 생각이 견고하고 육중한 쌀 창고들을 보게 되자 사실로 확인되는 것이었다.

저 쌀 창고들이 얼마나 오래가게 될 것인가... 백년, 2백년... 그 세월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벽돌과 시멘트는 돌보다 더 강하다고 했다. 일본은 앞으로도 끝없이 조선을 40여 년... 그때까지도 저 쌀 창고들은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양치성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히 내쉬었다.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가. 앞길이 신작로처럼 환하게 열렸는데. 그는 새롭게 안도하는 동시에 가슴 뿌듯하게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거렁뱅이 신세로 평생을 살아야 될 판이었는데... 그 생각을 하자 안도감과 만족감은 더욱 크게 팽창되고 있었다.

기차선로 여섯 개로 이루어진 쌀가마니 하치장을 보고 양치성은 두 번째로 놀랐다. 하치장의 규모도 놀라웠지만 그런 효율적인 하치장을 만들어낸 일본사람들의 머리와 기술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 개의 선로에는 이미 꼬리에 꼬리를 문 화물차들이 차 있었고, 하나의 선로에는 화물차를 끌고 온 기차가 흰 김을 내뿜으며 머물러 있었다.

쌀가마니들이 쌓인 곳에는 어디든 막노동자들이 웅성거리고 북적거렸다. 양치성은 느린 걸음을 옮기며 그 무리들에게 눈총을 쏘고 있었다. 노동조합은 그 많은 무리들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저것들이 노동조합으로 한 덩어리로 뭉쳐진다? 골치 아픈 일이었다. 아니, 그건 차후의 문제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떤 놈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먼저 그 놈을 찾아내야 했다. 그러자면 노동조합 조직부터 그물질을 시작하는 것이 순서였다. 인부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고,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길을 더듬고, 그 길을 찾기만 하면 일은 끝내는 셈이었다.

"가만 있거라, 요것이 누구여?"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려던 순사가 양치성을 아는 체하며 자전거를 멈추었다.

", 맞구만. 니 치성이 아니여!"

자전거에서 내린 장칠문이는 양치성의 어깨를 철퍽 쳤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양치성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 행동은 무척이나 민첩했다. 양치성은 몸을 돌리는 짧은 순간 어느새 상대방의 팔을 낚아 잡은 상태였다. 그 기민한 동작은 하루도 빠짐없이 1년 동안 연마한 무술의 결과였다. 유도에서 검도와 격투까지 온갖 종류의 무술을 다 익혀야 했다. 그리고 사격도 중요시되었다. 오전에는 정보활동에 관한 이론학습이었고, 오후에는 무술연마였다.

"아니, 장 순사님 아니신 게라?"

양치성은 공격태세를 풀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나 속으로는 귀찮은 자를 잘못 만났다는 낭패감으로 당황스러워지고 있었다.

"니 일본서 언제 왔는디 여그 이러고 섰냐?"

장칠문은 의아스런 눈길로 양치성의 몰골을 위아래로 훑었다.

"한 사날 됐구만요. 기운도 길르고 돈벌이도 허고 헐라고 겸사겸사해서 이리 나와봤구만이라. 장 순사님언 신수가 영판 더 좋아지셨는디요."

양치성은 눙치고 들었다.

"우체국 일언 어쩌고?"

장칠문은 그래도 순사라고 양치성의 그런 한마디로 의문을 풀어버리지 않았다.

"우체국에야 지가 헐 일이 없어진 지가 언제라고라. 초년 고생이야 서서도 허는 것잉게 부두에 나가 등짐얼 져보라고 시킨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하야가와 국장님이시여?"

장칠문이 재빠르게 장단을 맞추었다.

"와따, 순사라 기맥히시요 이. 어찌 그리 딱 찝어내신다요? 귀신이 따로 없소."

양치성은 놀라는 시늉을 해가며 장칠문을 치켜 올려 주었다.

", 그리 된 것이로구마. 국장님이 시키신 일이람사 자네야 허기 싫어도 별수 없제."

장칠문은 그제야 의문이 풀린다는 듯 얼굴에 웃음기를 띠며,

"근디 자네가 저 판 속에 끼들어 돈벌이 허기넌 에로울 것인디?"

그는 담뱃갑을 꺼내며 묘하게 웃었다.

"몸띵이 성헌디 머시가 에로와라."

", 그리 말헐지 알었제. 헌디, 나가 헐라는 말언 고런 뜻이 아니여. 저 판이 그냥 보기로넌 니나 나나 다 뎀베들어 등짐질만 허먼 돈벌이가 되는지 알어도 정작 속얼 알고 보면 그것이 아니여. 다 즈그덜찌리 꾸미가 째어져 있고 갈라져 있어서 거그에 못 끼면 쌀가마니에 손도 못대는 것이야 오래된 일이고, 근자에 들어서넌 노동조합꺼정 생겼다는 것얼 알아야 혀. 무신 말인지 알아묵겄어?"

양치성은 신경에 확 불이 당기는 걸 느꼈다. 그러나 어눌한 척 물었다.

"노동조합이 머시다요?"

"그려, 자네넌 몰르겄구만. 저 막일꾼 놈덜이 꼴 사납고 되잖게 신노동조합이란 것얼 얼매 전에 맹글었단 말이시. 일거리 놓고 즈그덜 패 잇속 챙기잔 것이제."

담배연기를 훅 내뿜으며 장칠문은 코웃음을 쳤다. 그 일을 하찮게 생각하는 것이 양치성은 오히려 다행스러워했다.

"글먼 나도 일거리럴 얻자면 그 조합에 들어야 되덜 안컸소? 그 조합 사무실이 어디다요?"

"자네 꿈꾼가? 저런 놈덜이 사무실언 무신 사무실. 즈그덜 떠도는 디가 사무실이제."

"허먼, 그 조합얼 꾸민 조합장언 있을 것인디, 그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어허 순사가 그리 헐 일 없는 사람인덜 아능가, 자네? 조합이란 것이 즈그놈덜 잇속 챙기니라고 패럴 짠 것이랑게."

같은 말을 반복하는 장칠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알것구만요. 어쨌거나 등짐얼 지자먼 그 조합얼 찾아가먼 되겄구만요."

"아니시, 심들게 그럴 것 머 있능가. 자네 일인디 나가 당장 말해 주제."

장칠문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듯 시원스럽게 말했다. 그 예기치 못한 반응에 양치성은 그만 당황했다.

"아니구만요, 그리 급헌 일도 아닌디 나가 알아서 허겄구만요. 그런 짜잔헌 일에 나스먼 순사님 체면도 깎이는디요. 그러고 국장님이 아셔도 안 좋고라."

양치성은 급하게 이말, 저말을 끌어다 붙였다.

"그려...? 그렇기도 허겄는디, 글먼 말이여, 째보선창 쪽으로 가보소. 거그가 일꾼덜 집합손께."

"야아, 알것구만이라."

장칠문은 자전거에 올라탔다. 양치성은 <째보선창>을 수확으로 챙기고 있었다.

 

 

36. 호랑이 아가리

미선소는 정미소 창고 옆에 붙어 있었다. 2층집 높이의 정미소와 창고가 비슷한 크기였고, 미선소는 높이나 크기가 그 절반만 했다. 검정색 판자벽을 둘러친 순 일본식 건물인 미선소 양쪽으로는 커다란 정문이 나 있었다. 그 두개의 문에는 옆에 있는 창고문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주먹보다 큰 자물통이 걸려 있었다. 어찌 된 것인지 사람들이 안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 문이 열려 있어도 그 흉물스럽게 생긴 자물통은 어디로 치워지지 않고 언제나 쇠고리에 걸친 채 잠겨 있었다. 문이 열려 있거나 닫혀 있거나 간에 언제나 잠겨 있을 줄밖에 모르는 그 시커먼 쇳덩어리는 마치 우락부락하게 생긴 기운 센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도 같았고, 성난 개가 위아랫니를 드러내고 험상궂게 으르렁거리는 것도 같았다.

미선소 안은 칸막이 없이 통째로 트여 있었다. 긴 마룻바닥의 가운데를 통로로 해서 양쪽으로 두 줄씩, 여자들이 네 줄로 정연하게 앉아 있었다. 가운데 통로를 향해 줄을 맞춰 앉은 여자들 앞에는 겸상 크기만한 상들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상들은 생김새가 특이했다. 상판이 나무가 아니라 밑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유리였던 것이다.

여자들은 한 줄에 스물다섯씩이었다. 제각기 유리상 앞에 붙어 앉은 백 명의 여자들 사이에서는 말 한마디 들리지 않았다. 살얼음이 잡히도록 바깥날씨가 추운데도 불기라고는 없는 실내의 추의 속에서 여자들은 모두 얼어붙은 것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말소리라고는 없는 적요한 실내에 맑으면서도 가녀린 소리들이 좌르륵 좌르륵 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미충에 울리는 풍경소리가 산사의 적막을 오히려 더 깊게 할 뿐이었다. 좌르륵거리는 그 맑고 가녀린 소리들은 조롱박에 담긴 쌀을 상 위에 쏟을 때 쌀알들이 유리판에 부딪치며 내는 소리였다. 여자들은 함지박에 담긴 쌀을 조롱박으로 떠서 유리판에 부었다. 그리고 그 쌀을 한 움큼씩 끌어다가 유리판에 쫙 펼쳤다. 한 움큼의 쌀은 두 손의 빠른 손놀림 아래서 어느 한 부분도 포개지는 법 없이 고르게 펼쳐졌다. 그런 다음에는 두 손 열 손가락이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으로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들의 기민한 움직임 속에서 돌은 돌대로, 싸라기는 싸라기대로, 피는 피대로 골라지고 있었다. 열 손가락은 제각기 지네발처럼 빠르게 움직이면서 정확하게 그런 것들을 쌀알과 구분해 내고 있었다. 잡물들과 분리된 토실토실한 쌀알들은 손바닥 끝부분에 밀려 유리판 아래 받쳐놓은 함지박으로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무슨 기계처럼 재빠르고 빈틈없이 움직이고 있는 여자들의 마디 굵은 손가락에는 쌀겨가 희게 묻어나고 있었다. 여자들은 웅크리고 앉은 채 그 일을 반복하고 있어서 얼핏 보면 아무 일도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미선소 안에는 두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한쪽씩을 맡아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고 다니며 다 골라진 쌀을 거둬 가마니에 담고, 새 쌀을 함지박에 부어주고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리상 아래서 함지박을 끌어낼 때마다 귀에 꽂은 몽당연필을 뽑아 치부책에다가 자를 만들어나갔다. 함지박 하나의 양이 소두 한 말이었던 것이다. 그들 두 사람을 여자들은 십장이라고 불렀다.

"거그, 거그! 멫번이여? , 48, 일어나, 일어나! 후딱 일어나서 아가리 짝 벌려!"

통로의 중간쯤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십장 하나가 느닷없이 고함을 질러대며 오른쪽으로 뛰고 있었다. 여자들이 하나같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여자들의 고개는 다시 떨구어지고 말았다. 한눈을 팔았다가는 당장 날벼락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 이년아, 48! 빨딱 일어나 아가리 짝 벌리랑게!"

마룻장이 쿵쿵 울리는 소리와 함께 십장의 고함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수국이는 눈을 내리감으며 소리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가 또 쌀을 몰래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들킨 것이었다. 수국이는 꼭 자기가 그런 것처럼 가슴이 벌떡거리고 있었다. 뒷줄 오른쪽 구석 세 번째의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어깨가 잔뜩 움츠러든 그 여자의 몸은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고, 겁에 질린 얼굴은 씰룩거리며 울고 있었다. 여자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다급하게 위아랫니들을 훑어대며 침을 삼키고 있었다.

"이년아, 얼렁 손 띠내고 아가리 짝 벌려, 아가리!"

십장이 소리치며 그 여자에게 덤벼들었다. 십장의 팔이 뻗쳐지면서 그 여자의 머릿수건이 벗겨졌다. 그리고 십장의 우악스러운 손이 그 여자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아이고메 엄니, 나 죽네!"

그 여자의 몸이 휘청 꺾이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년아, 니 에미가 관음보살이냐. 일로 나와, 일로."

십장이 여자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끌어댔다. 허리가 반으로 접힌 여자의 목은 길게 늘어졌다.

"아닌디요, 아니랑게라... 아니어라."

여자는 통로로 질질 끌려 나가며 울음으로 범벅 된 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년아, 아가리 짝 벌려!"

여자를 통로에 세운 십장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안 묵었는디요, 쌀 안 묵었는지요."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애타게 말하는 여자는 두 손을 싹싹 비벼댔다.

"느그년덜이 언제 쌀 묵었다고 혔냐! 넘 좆대가리 물었던 씹구녕이야 못 가래내도 쌀 씹어댄 주딩이야 가래낼 수 있응게 얼렁 아가리 벌려. 안 벌리겄으먼 주딩이 깨부실 챔이여!"

십장이 주먹을 불끈 치며들었다.

"말로 헐 것이 머 있간디. 한분 말히서 안 들으면 바로 주먹얼 써야제."

다른 십장이 담배연기를 훅 내뿜으며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이년아, 아가리 못 열겄어!"

그때 십장의 주먹이 여자의 볼을 후려쳤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지체 없이 십장의 손이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이년아, 엄살 떨지 말고 일어나!"

십장이 머리채를 끌어올리는 대로 여자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여자의 입은 반쯤 벌어져 있었다. 그건 주먹질을 당한 아픔으로 벌어진 것인지 여자 스스로가 벌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년아, 더 짝 벌려, !"

십장이 머리채를 마구 휘둘러댔다. 눈을 질끈 감은 여자의 입이 좀 더 벌어지면서 이빨들이 드러났다. 그때 십장의 투박한 손가락이 거침없이 여자

의 윗입술을 밀어 올렸다.

"이년아, 이런디도 쌀얼 안 묵었어! 넘 좆대감지 물었다 논 씹구녕이야 이빨이 없응게 낄 것도 없다만 아가리에넌 이빨이 있응게 지아무리 씹바닥으로 핥아대도 이빨로 씹어댄 것이 잇새에 다 낀다 그것이여."

증거를 잡은 십장이 자신에 넘쳐 말했다. 그 여자의 이빨 사이사이에는 작은 쌀가루들이 끼여 있었다.

"잘못혔구만요. 하도 배가 고파서 싸래기럴, 싸래기럴 쬐깨 묵었구만이라. 잘못혔응게, 잘못혔응게..."

여자는 <싸래기>를 되풀이하며 두 손을 모아 정신없이 빌었다.

"이년아, 싸래기넌 쌀이 아니여? 싸래기 반쪽이라도 입에 처 넣었으먼 안 된다는 말 다 까묵었냐. 요런 도적년아!"

십장이 잡고 있던 머리채를 사정없이 휘둘러 뿌리쳤다. 여자가 마룻바닥에 곤두박질 쳐졌다.

"이년아, 니넌 당장에 끝장이여, 끝장."

십장이 숨을 씩씩거리며 여자의 어깨며 허리를 마구 짓밟았다.

"잘못혔구만이라, 잘못혔구만이라..."

여자는 발길에 짓밟힐 때마다 절박한 소리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떤 년이 또 참새 새끼질얼 헌 것이여? 어떤 느자구 없는 년이여?"

저쪽에서 걸걸한 소리가 느릿하게 들려왔다. 창고 쪽의 문 옆에 달린 칸막이 방에서 한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그 방은 한쪽 구석에 바짝 붙어있어서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방에서 나온 것은 십장 윗자리인 감독이었다.

"야아, 48번 년이 그랬구만이라."

십장이 발길질을 멈추며 얼른 대답했다.

"48? 쌍판때기가 어찌 생긴 년이여?"

뒷짐을 진 감독이 걸어오며 말했다.

"이년아, 쌍판 들어!"

십장이 여자의 턱을 치켜 올렸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지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감독을 올려다보고 있는 여자의 눈은 간절하게 타고 있었다.

", 빙신이 육갑허드라고 못난 쌍판에 미운 짓만 골라감서 허능구만! 당장에 몰아내부러."

감독이 매정하게 내뱉고는 돌아섰다.

"아이고메 감독님, 나 잠 살려주시게라."

여자가 울부짖으며 감독의 한쪽 다리를 붙들었다.

"요런 잡년이 요거!"

놀란 감독이 소리치며 다리를 빼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는 더욱 힘껏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보시게라 감독님, 지가 안 벌먼 애비 없는 우리 새끼덜 다 굶어죽으요. 다시넌 안 그럴 것잉게 불쌍헌 우리 새끼덜 생각히서 나 잠 살래주씨시오."

여자는 통곡을 하고 있었다.

"요것 안 띠내고 멀혀!"

감독이 십장을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요런 미친년이!"

십장이 여자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여자의 몸이 들썩하는 것 같더니 축 늘어지고 말았다.

"에이 재수대가리 없이."

감독이 내뱉으며 바짓가랑이를 툭툭 털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러갔다.

"어이, 일어나, 일어나."

십장이 여자의 허벅지께를 툭툭 찼다. 그러나 여자는 움직임이 없었다.

"어이 보소, 요것 들어내세."

십장이 여자의 팔을 잡으며 동료를 턱짓으로 불렀다.

두 십장이 여자를 양쪽에서 붙들어 일으켰다.

"잘못혔구만이라, 지가 잘못혔구만이라..."

여자는 질질 끄려가면서 실성한 듯 똑같은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두 십장은 여자를 문밖으로 끌고 나갔다. 여자들 사이에서는 그때서야 긴 한숨소리가 흘러나오고, 코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수국이도 소리 없이 울며 자꾸만 흘러내리는 코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자기가 벌지 않으면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 굶어죽게 된다는 그 여자의 애원이 귀에 쟁쟁히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과부인 그 여자가 예쁘게만 생겼더라도 쫓겨나는 것은 면했으리라고 수국이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수국이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여자들이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감독은 예쁜 여자들을 밝혔고, 얼굴이 좀 반반하게 생긴 여자들이 저지르는 잘못은 어물쩍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 어물쩍이 남들의 눈앞에서 어물쩍이지 감독은 잘못을 저지른 여자들에게 기어코 대가를 받아낸다는 것이었다. 그 대가라는 것이 끔찍스러웠다. 몸을 내주는 것이라고 했다. 만약 그 요구를 거절했다가는 다음날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이었다. 수국이는 그 수근거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기보다 먼저 일을 해온 여자들이 다 그렇게 믿고 있어서 혼자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끔찍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털끝만큼의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금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을 하면서 옆 사람하고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일을 시작하면 점심때까지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졸아서는 안 된다. 책임량을 다 채우지 못하면 일당은 절반으로 깎는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하루 책임량을 꼬박꼬박 채우자면 어길래야 어길수도 없는 규칙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제일 엄하게 금하고 감시하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쌀을 한 톨이라도 입에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어겼다 하면 인정사정없이 불벼락이 떨어졌다. 알곡이건 싸라기건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쌀을 입에 넣었다가 들켜 십장들에게 그리 험하게 두들겨 맞고 쫓겨나는 것을 보면서도 사흘이 멀다하고 그런 사람들은 또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국이는 어느 순간 문득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했다. 자신도 어느 때 불현듯 쌀을 한 입 가득 넣고 와득와득 씹고 싶은 충동에 휘말리는 것이었다. 그런 때는 대개 점심때가 한참 지나 속이 쓰릴 만큼 배가 고플 때였다. 쌀을 먹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면 어금니 사이에서는 신 침이 스물스물 나오면서 정신이 아릿거리기까지 했다. 쌀이 김나는 밥으로 보이면서. 일단 생쌀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배고픔은 견딜 수 없이 심해졌다. 그리고 엉뚱한 생각은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면서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생각은 거센 힘으로 십장에게 두들겨 맞게 될 두려움을 잡아먹었고, 일자리를 잃게 될 무서움도 잡아먹었다. 그리고 나만은 틀림없이 들키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 그 자신감을 어서 쌀을 한입 가득 넣으라고 부추기고 충동질해댔다. 그 유혹의 고비를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 유혹은 떨쳐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끈끈하게 달라붙으며 십장들이 어디 있는지 살피게 만들었고, 손이 떨리게 만들었다.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누구나 쌀을 입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안아 일을 하면서 그래도 잠시 쉴 수 있는 것은 점심때였다. 점심때라고 했지만 제대로 먹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고구마 한두 개나 개떡 한두 쪽을 싸오는 사람마저도 열이 될까 말까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물배를 채우고 그저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물도 마음놓고 마실 수가 없었다. 뒷생각없이 많이 마셨다가는 일을 하는 도중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고, 더는 참다못해 배탈이 났다고 둘러 붙여서라도 뒷간을 다녀오게 되면 자칫 책임량을 채우지 못해 일당을 반으로 깎일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수국이로서는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쌀을 고르는 힘겨움보다, 배고픔에 시달리며 쌀을 입에 넣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는 것보다 더 견뎌내기 어렵고 괴로운 일이 있었다. 그건 날마다 받아야 하는 몸 조사였다. 몸 조사는 그 누구도 피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아무리 쌀을 훔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십장이나 감독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 결백은 몸 조사를 받고 나서야 인정될 뿐이었다. 몸 조사는 매일 일을 끝내고 미선소를 나가면서 받게 되어 있었다. 여자들은 번호 순서대로 감독의 칸막이 방을 거쳐서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몸 조사는 감독 혼자서 도맡아했다. 몸 조사란 여자들이 쌀을 훔쳐 옷 속에 감춰가지고 간다고 해서 하는 것이었다. 옷 속에 작은 주머니를 달아 쌀을 훔쳐내는 여자들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 주머니를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감독은 제 마음대로 여자들의 온몸을 더듬어댔다.

", 쌈빡허시!"

첫날 칸막이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감독이 눈을 빛내며 불쑥 한 말이었다. 그 순간 두근거리고 있던 수국이의 가슴은 딱 얼어붙었다. 묘한 눈빛으로 수국이를 바라보는 감독의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수국이는 그 눈빛과 웃음이 무서워 고개를 숙였다.

"어디 보드라고."

감독의 손이 양쪽 겨드랑이를 더듬는가 싶더니 이내 젖가슴을 덮쳐왔다. 수국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신에 찬 기운이 찌르르 퍼지며 소름이 쭉 끼쳤다. 온몸이 굳어지고 오그라들고 있었다. 젖가슴을 떠난 감독의 손은 허리를 더듬어내려 아랫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손이 치마 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수국이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감독의 손은 속곳의 앞뒤를 더듬어대고 있었다. 치마 속에 입은 것이라고는 삼베 속곳 하나뿐이었다. 감독의 손길이 여지저기 닿을 때마다 수국이는 섬뜩섬뜩 놀라며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옷이 다 벗겨져 알몸이 되는 것 같았고, 온몸이 뱀에게 친친 감기는 것 같았고, 지네가 스물스물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그 창피스러움과 징그러움과 소름끼치는 고통에 떨며 수국이는 두 다리를 꼭 붙이고 서 있었다. 넓게 트인 속곳 밑으로 그 손이 금방 들어올 것 같았던 것이다.

"쌈빡헌 인물에 뭄도 탱탱허시."

감독이 짭짭 입맛을 다시며 손을 뗐다. 수국이는 정신없이 문을 박차고 나왔다. 감독이 금방 덮칠 것만 같았던 것이다. 밖으로 나온 수국이는 눈물을 훔쳤다. 눈물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눈물은 자꾸 삐질삐질 흘러나오고 있었다.

"울지 말어. 다 그리 사는 것잉게."

앞서 나와 있던 부안 댁이 한숨을 내쉬며 수국이의 등을 다독거렸다.

"아줌니..."

수국이는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부안 댁의 말을 듣자 참고 있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창피스러움과 분함과 서러움이 뒤범벅되어 복받쳐 오르는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었다.

"울지 말랑게. 그리 울먼 운 티가 날 것 아니라고. 엄니헌티 그 말 헐 챔이여? 일 안 나댕길라먼 오늘 당헌 일 이얘기히도 되겄제."

부안 댁의 이 말에 울음이 뚝 멎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일을 다니게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동생 대근이가 다 나을 때까지는 밥벌이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내 맘 나가 다 알어. 그래도 참아야제 어쩔 것이여. 다 맘 묵기에 달린 것잉게. 맨살이 닿는 것도 아닌디."

부안 댁이 나직하게 말하며 수국이의 손을 꼭 잡았다. 수국이도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으며 부안 댁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면서 부안 댁의 말을 되씹고 있었다. 그려, 맨살이 닿는 것도 아닌디... 그러나 가슴에서는 그 말을 휘몰아가는 찬바람이 일고 있었다.

", 일이 눠서 콩떡 묵기보담 ㅅ트랑게. 재미지기도 허고 말이시."

수국이는 어머니에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어머니는 더 묻지 않소 시름 겨운 얼굴을 돌렸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지만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여지저기가 결리고 쑤시면서 몸이 무겁게 처져 내렸다. 표를 내지 않으려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앓는 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오려고 했다. 뻣뻣하게 굳어진 목이 쏙쏙 쑤셨고, 양쪽 어깨가 뻑적지근하게 아팠고, 허리가 묵직하게 눌리면서 등짝 전부가 갈라지는 것같이 뻐근했고, 옆구리는 잡아당기는 것처럼 결리고 있었다. 아픈 데는 그런 데만이 아니었다. 방을 나서서 걸어보니 엉덩이는 엉덩이대로 아프고, 무릎은 무릎대로 시큰거리며 쑤시고, 장딴지는 장딴지대로 부어올라 있었다.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 그렇게 전신을 아프게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건 삼복더위 속에서 밭매기보다 힘 드는 일이었다.

"하이고 야, 똑 아새끼 낳고 난 담 같당게. 차차로 몸에 익겄제."

부안 댁이 등을 퍽퍽 두들겨대며 머리를 내둘렀다. 수국이는 비식 웃으며 차차로 몸에 익을 것이란 말을 믿자고 생각했다. 수국이는 날마다 일이 끝나는 것이 두렵고, 칸막이 방에 들어가는 것이 진저리가 처졌다. 그러나 그 일을 모면할 길이라고는 없었다. 두 번째 그 일을 당하고 나와서 수국이는 눈물을 보일 수가 없었다. 부안 댁도 전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일을 모른 척했다. 매정하다싶은 그 냉랭함이 수국이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약속이 되어버렸다. 누구누구는 쌀을 훔쳐내다가 들켜 감독에게 몸을 내맡기고 날마다 속주머니를 채워가지고 간다고도 했다. 점심때면 수군거리는 그런 소리들을 들

어가며 수국이는 나날이 자꾸 괴로워져 가고 있었다.

", 춘향이 절개 지키잔 것이로구만."

감독은 이런 말을 투덜거리며 날이 갈수록 심하게 몸을 더듬고 드는 것이었다. 젖가슴에 너무 오래 머무르는 손을 뿌리치고, 불두덩 아래로 파고들려는 손을 쳐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부안 댁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로에 한 되라도 존게 니 맘대로 가지가란 말이여."

어느 날 감독이 느닷없이 달겨 들어 속곳 밑으로 손을 넣으려고 했다. 수국이는 감독을 떠다 밀며 밖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는 감독을 피하려면 한 가지 길밖에 없었다. 동생이 어서 나아야 했다. 그런데 동생은 쉽게 낫지가 않았다. 다 나았다고 우기면서 일을 나가더니만 그날 밤부터 비실비실 앓아 누웠다. 머리는 말끔하게 나았는데 옆구리 다친 것이 도진 것이었다. 어머니는 보약을 먹일 수 없는 궁색한 살림살이를 한탄했다.

동생은 하루 일을 나갔다가 닷새를 앓아 눕는 식으로 그동안 몇 차례 어머니의 속을 태웠다. 수국이는 어머니보다 더 안타깝게 동생의 몸이 낫기를 고대했다. 감독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생이 시름시름 오래 앓게 되니까 서무룡이가 마음 놓고 드나들 수 있는 빌미가 되었다. 서무룡이는 동생 대근이의 병문안을 열성으로 오는 것 같았지만 속셈은 그것이 아니었다.

수국이는 언제부턴가 그 속셈을 알아차리게 되자 처음에 지녔던 고마움까지 사그라들고 말았다. 수국이는 서무룡이가 남자냄새를 풍기며 다가드는 것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툭 불거졌으면서도 고약스럽게 째진 눈이 자신의 몸을 훑을 때면 전신이 오싹해지고는 했다. 그의 눈에는 언제나 섬뜩한 기운이 서려 있었고, 웃는 얼굴에서도 불량기는 가셔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날이 갈수록 남자냄새를 짙게 풍기는 것이 딱 질색이었다. 동생 대근이한테는 인정스러운 지 모르지만 남자로서는 정붙이는 데가 아무데도 없었다. 사람이 싫기로 친다면 서무룡이가 미선소의 감독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감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서무룡이의 발길을 막으려면 동생이 어서 낫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새로운 일이 생겼던 것이다. 말로만 들어왔던 정미소 주인의 아들을 감독의 방에서 맞딱뜨리게 되었다. 칸막이 방으로 들어서니 감독의 자리에 헌병이 버티고 앉아 있었고 감독은 그 옆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 헌병이 정미소 주인의 아들이라는 것을 수국이는 금방 알아보았다.

"와따, 요것이 무신 꽃이다냐!"

헌병이 의자에서 등을 떼며 토한 말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그는 백종두의 아들 백남일이었다.

"! 요것이 춘향이 환생 아니라고..."

고개를 숙인 수국이를 올려다보며 백남일은 언제 춘향이를 보기라도 했던 것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요런 알짜배기럴 두고, 니가 발써 입맛 다셔부렀지야!"

백남일은 느닷없이 일어나며 옆에 서 있는 감독의 다리를 걷어찼다.

"아이쿠메, 아닌디요. 쌩쌩허니 그대론디요. 아이고 죽겄네..."

갑자기 정강이를 걷어차인 감독은 한쪽 다리를 싸잡고 돌며 몸을 비비 틀고 있었다.

"그 소리럴 어찌 믿어!"

백남일은 또 발길질을 하려고 했다.

"아이고, 아이고, 당자헌티 물어보면 될 것 아니겄소."

두 팔을 뻗어 백남일을 막으며 감독은 뒷걸음질을 쳤다.

"잡새끼, 안직 꼬타리가 안 잽혀 나헌티넌 숨킴서 손얼 못 댔겄제. 니 고런 맘뽀 쓰먼 어찌 되는지 알지야?"

백남일은 곧 후려칠 듯이 팔을 치켜들었다.

"아니구만요, 아니구만이라..."

감독은 평소의 위세는 다 잃어버리고 몰골 초라하게 구석으로 밀리고 있었다.

"되았어. 그냥 나가."

백남일이 말했다. 그러나 겁 질린 수국이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어니 시악씨, 됐응게 그냥 나가라고."

그때서야 수국이는 자기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부리나케 내달았다. 물론 몸 조사를 당하지 낳고 나온 것을 부안 댁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건 덮어야지 자랑거리가 아니었고, 몸조사를 하지 않고 내보내주었다고 해서 고마움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 아들은 감독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고, 그의 선심이 오히려 무서웠다.

"춘향이 환생이시여? 그냥 나가시드라고, 닌장맞을..."

다음날 감독은 눈을 치뜨며 비아냥거리를 투로 말했다. 비틀리는 그의 입술에는 떫은 웃음이 묻어나고 있었다. 수국이는 칸막이 방을 나서며 주인 아들의 손이 전신을 더듬어 내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끔찍스러움에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어지께 조사 당혔어?"

감독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묻는 말이었다. 수국이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주인 아들이 웃고 서 있었다. 수국이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나가."

수국이는 쫓기고 억눌리는 기분으로 문을 밀었다. 차라리 감독에게 조사를 당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어디론가 마구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도망갈 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첫날처럼 자꾸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딸랑 딸랑 딸랑...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하루 일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휴우우..."

"아이고메 나 죽겄다..."

"아이고, 아이고, 허리야...."

여자들은 종소리를 따라 한숨을 길게 토해내고, 신음 같은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켜고, 허리나 어깨들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놈에 팔자 언제나 면헐랑고. 자네 모가치 다 혔제?"

부안 댁이 등을 두들기며 물었다.

"야아, 아줌니도 다 채왔제라?"

수국이도 부안 댁을 바라보며 인사삼아 물었다. 매일 일을 끝내며 나누는 말이었다.

", 어찌어찌 채우기넌 채왔는디, 이놈으 일언 어찌 된 것이 늘품이 없이 갈수록 짠뜩 심이 든당게."

부안 댁이 한숨을 쉬며 스산하게 웃었다. 수국이는 날이 갈수록 기미가 많이 돋으면서 풀기가 없어져 가고 있는 부안 댁의 지친 얼굴을 보면서 아무 할 말이 없었다. 다리가 부러진 손샌이 언제 자리를 털고 일어날지 기약이 없었다. , 손샌이 걷게 된다 하더라도 다리가 그전처럼 성성할 것인지 어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근심까지 품고 마음이 삭아 내리고 있는 부안 댁에게 나날의 일이 힘겹지 않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여자들이 몸 조사를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수국이도 번호 순서대로 맞춰 부안 댁의 뒤에 섰다.

"아이고 징헌 거. 같은 조선 사람이 허는 정미소서나 이 짓얼 말아야제."

어느 여자가 억누른 소리로 말하며 혀를 차댔다.

"하이고, 큰 것도 바래네. 못된 짓얼 왜놈덜헌티 배와갖고 됩데 왜놈덜 찜쪄묵게 해대는 판 아니여."

"그려, 돈 있고 권세 있는 것덜이 어디 조선 사람이간디. 맘이야 발써 다 왜놈 되야부러 우리 겉은 가난허고 못난 인종덜이나 조선 사람으로 남었제."

"참말로, 목구녕언 어찌서 밥얼 처넣고 처넣고 히도 맥히덜 않는고. 목구녕이 포도청이 아니라 목구녕이 웬수여."

"죄없는 목구녕 타박하덜 말어. 목구녕 맥히먼 황천길잉게."

"이리 근천시럽게 살라먼 황천길이 낫제. 요것이 어디 사람 사는 꼬라지랑가."

"그리 각다분서니 생각허덜 말어. 나 혼자 살자고 요런 꼴 당허는 것이 아닌게. 얼매든지 더듬고 주물러대라고 혀. 맘만 딱 강단지게 묵어불먼 즈그놈덜이 아무리 더듬고 주물러도 우리 살 닳아지는 것 아닝게."

십장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오자 여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여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수국이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았다. 여자들은 날마다 비슷비슷한 말들을 푸념하듯 넋두리하듯 주고받았다. 그 말들은 부질없고 하잘것없는 것 같으면서도 듣다보면 마음의 찬바람을 가시게 해주기도 했고, 막막한 생각을 고쳐먹게 하는 힘을 주기도 했다.

"오늘도 쌀언 한 알갱이도 안 지녔겠제? 그리 똑똑허니 정절 지킨다고 어사도 부인 될지 아는감? 꼴 보기 싫은 게 얼렁 나가부러 얼렁."

담배를 피우고 있던 감독은 사나운 눈으로 수국이를 노려보며 신경질을 부렸다. 수국이는 주인 아들이 와 있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잽싸게 칸막이 방을 벗어났다. 해가 짧아져 밖은 어둑어둑했다.

"얼렁 가세."

기다리고 있던 부안 댁이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한걸음이라도 더 빨리가서 저녁밥을 해야 하는 부안 댁의 처지가 수국이는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가 저녁밥을 맡고 있는 자기에 비하면 부안 댁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국이는 부안 댁과 함께 부지런히 큰길을 건넜다.

"어이, 방대근이가 니 동상이제?"

한 남자가 불쑥 앞을 막아섰다.

"어메!"

수국이와 부안 댁은 소스라쳤다.

"니 동상 맞제?"

", 그런디요..."

수국이는 말을 더듬으며 어둑한 속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방대근이가 잽혀갔다. 니도 가자."

"야아? 무신 일인디요?"

"그야 가보먼 알어. 얼렁 따라와!"

남자가 수국이의 팔을 잡아챘다.

수국이는 순간적으로 지삼출을 떠올렸다. 그저께 밤인가 지삼출이 말했었다. 누군가가 자기 뒤를 캐고 다니는 냄새가 난다고. 그러면서도 지삼출은 태평스럽게 웃었던 것이다. 자기가 의병 한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면서. 우악스러운 힘에 끌려가면서 수국이는 지삼출이가 잡혀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생은 왜 잡아가고, 자기는 왜 또 잡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의병을 한 지삼출을 따라 밤에 도망친 것이 죄가 되는지 어쩐지 모를 일이었다. 수국이는 가슴이 벌떡거리고 머릿속이 뒤헝클어져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아이고 어쩌끄나, 저 일얼 어쩌끄나..."

부안 댁은 어둠 속으로 묻혀가는 수국이를 보며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다. 수국이는 남자가 잡아끄는 대로 어느 집으로 끌려 들어갔다. 몇 걸음을 옮기다가 수국이는 발을 멈추었다.

"여그가 어디다요!"

어두컴컴한 속의 느낌으로도 경찰서나 헌병대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잔말 말고 따라와. 느그 동상이 기둘리고 있응게."

남자가 거칠게 팔을 잡아챘다. 수국이는 좁고 긴 마루를 지나 어느 방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어메 엄니!"

수국이는 소스라치며 외쳤다. 바로 눈앞에서 웃고 있는 것은 동생 대근이가 아니라 정미소 주인의 아들이었다. 속았다는 생각이 번뜩 스쳐갔다. 수국이는 다급하게 돌아서며 문을 밀쳤다.

"꼼지락 말어!"

문이 미쳐 열리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어깨를 덮쳐왔다.

"아이고메 사람..."

수국이는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나 남자의 손이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수국이는 입이 틀어 막힌 채 번쩍 들렸다. 백남일은 오른팔로 수국이의 허리를 감고 왼손으로는 수국이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수국이는 입을 막고 있는 손을 떼내려고 하면서 발버둥질을 쳐댔다.

"온냐, 온냐, 꽃언 고와야 허고, 고운 꽃에넌 까시가 있어야 더 뿐지를 맛이 나는 법이다. 얼싸절싸!"

백남일은 신바람을 내며 수국이를 요 있는 쪽으로 옮겨갔다.

"나 말만 들어. 춘향이보담 더 호강시켜 줄팅게."

백남일은 벙글거리며 수국이를 요 위에 내려놓았다.

"아야얏!"

백남일이 소리쳤다. 수국이가 그의 손을 물어뜯은 것이다.

"아야야! 이년아, 이거..."

백남일의 몸이 기우뚱거리며 소리가 더 커졌다. 수국이는 입을 떼며 백남일을 떠다 밀었다. 백남일이 뒤로 벌렁 넘어갔다.

"어이고메 사람 죽이네에!"

수국이는 목청껏 외쳐대며 문 쪽으로 내달았다.

"요런 죽일 년이!"

문밖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수국이를 백남일이 덮쳤다. 수국이는 더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백남일이 머리채를 잡아채는 바람에 고개가 뒤로 넘어갔던 것이다. 화가 치솟은 백남일은 머리채를 사정없이 잡아끌었다. 머리카락이 다 뽑혀져 나가고, 얼굴껍질까지 다 벗겨져 나가는 것 같아 수국이는 더 이상 버둥거리지를 못하고 질질 끌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엄니..."

갑자기 머리채를 위로 잡아채는 바람에 수국이는 신음을 물며 몸을 일으켰다.

"어디 또 물어뜯어 봐라!"

독이 시퍼렇게 오른 백남일이 수국이의 얼굴을 후려쳤다. 수국이는 그대로 요 위에 무녀져 내렸다. 수국이는 정신이 까마득하게 멀어지면서 속이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의 손을 붙들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자꾸 멀어져 가고 있었다. 백남일은 서둘러 방문을 닫았다. 그의 손가락들 사이에 끼여 있던 헝클어진 머리카락들이 다다미방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수국이는 요 위에 족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백남일은 비리치근하고도 축축한 웃음을 피워내며 옷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곧 알몸이 된 그는 수국이를 향해 발을 떼어놓았다. 한쪽 무릎을 꺾고 수국이를 가랑이 사이에 넣은 그는 아래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국이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내린 얼굴을 요위에 박고 있었다. 울음이 담긴 듯 약간 찡그려진 그 고운 얼굴은 마치 낙하하면서도 꽃잎들이 흐트러지는 일 없이 꽃송이 그대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붉은 동백꽃 같았다. 혀로 입술을 핥은 백남일은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수국이의 저고리 옷고름을 풀었다.

"흐흐흐... 참말로 이쁘시 이. 통째로 칵 씹어도 비린내도 안 나겄당게. 하여튼지 간에 나가 여자복언 있는 놈이여. 흐흐흐..."

백남일은 연상 칙칙한 웃음을 흘려가며 수국이의 저고리를 벗기고 있었다. 저고기가 벗겨지고, 치마 말기가 풀어 헤쳐졌다. 뽀얀 속살과 함께 젖무덤이 드러났다.

"크크크... 젖팅이도 얼굴맨치로 이쁘시. 크도 작도 않고 종지기만 헌 것이 어찌 이리 탱글허니 이쁠그나. 쪽쪽 뽈먼 단물이 짤끔짤끔 나오겄다. 나가 여자복언 있는 놈이랑게. 크크크..."

백남일은 더욱 색정이 는적거리는 얼굴로 불그딕디그리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두 개의 젖가슴은 조그마하면서도 동그랗게 다듬어올린 예쁘장한 봉분 같았다. 그 윤곽 선명한 봉분 가운데 적갈색의 젖꽃판이 유난히 도드라진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뽀얀 봉분 가운데 찍힌 싱그러운 적갈색 젖꽃판은 무슨 꽃잎을 오려붙인 것 같았다. 그 젖꽃판이 한가운데 자리를 마련하여 젖꼭지를 받치고 있었다. 젖꽃판에 받쳐진 앵두 알만한 젖꼭지는 곧 꽃을 패워낼 듯한 꽃망울이었다. 치마가 요 위에 허물인 듯 벗겨져 나가면서 속곳이 드러났다. 수국이의 입술이 달싹거리고 있었다. 백남일은 숨길이 더 거칠어지며 찰지레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다급하게 속곳을 끌어내렸다. 그대로 알몸이 드러났다. 그 순간 백남일의 눈에 불이 붙었다. 그의 얼굴도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씩씩거리며 여자의 알몸을 덮쳐눌렀다.

"엄니, 엄니!"

그때 수국이는 눈을 번쩍 떴다. 희미하게 되돌아오고 있던 정신이 몸을 누르는 압박에 확 깨어났던 것이다.

"아이고메, 엄니!"

수국이는 질겁을 했다. 자신이 알몸이었던 것이다. 아니 남자도 알몸이었다. 그 남자와 자신의 살이 맞붙어 있었다. 수국이는 남자를 떠다 밀었다. 그러나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시 힘을 모아 떼밀었다. 그때 저 아래를 쳐올리는 압박을 느꼈다. 그 섬뜩한 느낌은 머리를 찡 울렸다. 몸은 요동치며 발버둥질을 해댔다. 그러나 그 징글맞고도 끔찍스러운 압박감은 떨쳐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었다. 수국이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마구 흔들어댔다. 그런데 수국이는 눈에서 불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다. 저 아래 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전신으로 쫙 퍼지고 있었다.

"엄니... 아으, , ..."

살 찢어지는 아픔이 점점 더 깊어지는 걸 느끼며 수국이는 움켜잡았던 남자의 머리카락을 놓고 있었다. 날개 펼친 학 한 쌍이 수놓인 베갯모 두 개가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통곡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다 깨어지고 부서지고 찢어지는 것을 느끼며 수국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쪽 눈에서 흐른 눈물이 콧등을 타고 넘어 다른 눈의 눈시울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그리고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한줄기로 합쳐져 방울방울 떨어지며 요를 적시고 있었다. 짐승처럼 요동치며 불바람을 일으키던 백남일이 죽어 넘어지듯 잠잠해졌다. 그리고 제풀에 허물어져 이내 요 위로 굴러 내려갔다. 수국이는 갑작스럽게 밀려든 홀가분함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잡히는 대로 옷을 끌어당겼다. 그때 백남일의 손이 수국이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어찌 이려?"

"나 인자 갈라요."

"가먼 멀혀. 니넌 인자 헌지집이여. 헌지집이 가먼 어디로 갈 것이여?"

그 말은 수국이의 정수리를 쳤다. 헌계집-정신이 아찔해지며 온몸의 맥이 쭉 빠졌다. 듣고 보니 자신은 틀림없는 헌계집이었다. 어깨가 처져 내리면서 허리가 접혀졌다. 수국이는 옷을 끌어당겨 앞을 가리면서 얼굴을 묻었다. 새로운 울음이 복받쳐 올랐다. 몸을 벌떡 일으켰을 때는 집으로 가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집으로 가서 어머니 등 뒤에 숨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헌계집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한시라도 빨리 이 방을 벗어나고 싶었던 무서움증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 대신 몰려든 것은 앞을 가로막는 절망감이었다. 헌계집, 그건 두말이 필요 없이 끝장이었다. 헌계집은 정말이지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 몸이었다. 과부는 과부니까 할 말이 있지만 헌계집은 헌계집이라서 한마디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머니인들 한마디 변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굴을 묻은 수국이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길게 땋아 내린 머릿단 아래 묶인 빨간 댕기가 흐느낌을 따라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빨간 댕기는 아무리 살림이 가난한 집에서도 딸이 첫 꽃을 보면 어머니가 사다가 매주는 것이었다. 장성한 처녀라는 표식이었고, 순결한 처녀라는 증명이었고, 시집보낼 뜻이 있으니 중매를 서도 좋다는 자랑이었다.

"인자 니넌 내 것잉게 딴 디 갈란 생각 말어. 니가 아무리 숨키고 덮을라고 히도 아무 소양이 없어. 낼이먼 소문이 쫘악 퍼질 것잉게. 아니여, 지끔도 소문이 퍼지고 있을란지 몰르제?"

눈을 거슴츠레하게 뜬 백남일이 담뱃갑을 끌어당기며 느물느물 말했다. 수국이는 또 가슴이 내려앉고 있었다. 미처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까 감독이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쏘아댄 말이었다.

"그리 똑똑허니 정절 지킨다고 어사또 부인 될지 아는감?"

니까짓 것이 그리 잘나 칙해 봐야 백남일이 첩질밖에 더 허겄냐!

뒤늦게 들려오는 감독의 말이었다. 감독의 그 밑도 끝도 없던 말과 신경질을 부리던 태도... 감독은 그때 이미 백남일이가 꾸미고 있는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수국이는 발등을 찍고 싶었다. 그때 눈치를 알아챘어야 했던 것이다. 자신이 몸을 더럽힌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감독 말고도 또 있었다.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남자였다. 그들의 입으로 벌써 소문이 퍼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치마로 앞을 가린 수국이는 벌떡 일어났다. 가슴속에서 불길이 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죽지 첩질을 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소문이 퍼지기 전에 여기를 나가야 했다.

"머시여, !"

담배를 입에 문 채 졸음에 취해 들고 있던 백남일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그리고 옷을 입고 있는 수국이의 팔을 거머잡았다.

"일 다 끝났응게 인자 나가게 히줏씨요."

수국이가 우는 얼굴로 사정했다.

"무신 소리여, 시방. 나가 오십 영감인지 알어? 한분이야 맛배기고, 일언 인자보톰 시작이여. 니가 나럴 몰라서 허는 소린지, 나가 하룻밤에 너댓 번언 예사로 허는 가운뎃다리 장사여. 니겉이 이쁘고 단물 질질 흘르는 새것하고넌 열 분이라도 허제. 하먼 열 분이라도 허고말고, 짜아 욜로 와, 한분 또 맛보드라고."

백남일은 수국이를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점심에 저녁까지 굶은 수국이는 그 기운을 이기지 못해 다시 요에 쓰러졌다.

"아니, 요것이 머시여? , 핏방을 아니라고. 그려, 그려, 아다라시 처녀라 그것이제. 흐흐흐... 기분 쪼옷구마, 쪼아."

콧잔등에 주름이 잡히는 소웃음을 웃으며 백남일의 고개는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수국이가 몸을 바짝 오그려 붙이고 있는 요 위에는 피가 번져 있었다. 하얀 천 위에 찍힌 그 선연한 붉은빛은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같기도 했고, 무슨 처연한 슬픔의 조각 같기도 했다.

"흐흐흐... 아다라시 처녀라서 그랬능가 맛이 아조 짠득짠득허니 꼬시드란 말이여. 그려, 그려, 니넌 인자 볼 것 없이 내 것이여."

백남일이 다시 수국이에게 덤벼들었다.

"니넌 인자 신작로맨치로 팔자가 훤허니 열린 것이여. 나 말만 잘 들으먼 평상 호강시켜 줄팅게..."

백남일은 열기 묻어나는 끈끈한 소리로 중얼거리며 미처 다 입지 못한 수국이의 옷을 다시 벗기고 있었다. 수국이는 이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저 아래 속살의 쓰라리고 욱씬거리는 통증이 몰아오는 절망감에 휘말리며 속울음을 울고 있었다. 백남일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하나도 귀에 담기지 않았다.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머니 앞에 얼굴을 내밀 면목이 없었다. 사람들의 눈총과 손가락질이 무서웠다. 그렇지만 혼자 죽고 싶지는 않았다. 당한 만큼 원수를 갚고 싶었다.

"음냐, 니넌 보물이여, 보물..."

옷을 다 벗긴 백남일은 색정 돋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수국이를 덮쳤다. 수국이는 몸서리를 치며 반사적으로 백남일을 떠밀었다. 몸이 오그라들면서 두 다리가 꼬였다.

"아니, 뱃질 한번 트기가 에롭제 기왕 티인 뱃질얼 어째 이리 막고 이런당가? 이 맞어, 요것이 아다라시란 표식이것제? 그려, 니가 이럴수록 나럴 더 입맛 나게 맹그는 것이여."

백남일은 음산한 웃음을 흐흐거리며 어깨를 떠밀어 올리고 있는 수국이의 두 팔을 쳐냈다. 팔굽이 꺾이며 수국이의 두 팔은 요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팔을 백남일의 두 손이 재빨리 붙들었다. 그리고 그의 입이 수국이의 한쪽 젖가슴을 물었다. 뜨거운 열기가 젖꼭지에 닿는 순간 수국이는 진저리를 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나 그건 마음뿐이었다. 상대방의 무게에 눌려 머리만 약간 들렸다가 말았다.

"으흥, 으응 응, 흐흠 으응..."

백남일은 연상 끈끈한 콧소리를 흘려가며 젖가슴을 핥아대고 있었다. 뜨거운 기운이 점점 더 심하게 젖가슴에 퍼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수국이는 몸을 파먹히는 징그러움에 떨었다. 백남일의 입은 다른 젖가슴으로 옮겨갔다. 숨길은 점점 더 뜨겁고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의 무릎이 수국이의 두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국이의 두 다리는 단단히 꼬여 있었다. 힘의 강도가 달라지며 그의 무릎이 두어 차례 허벅지 사이로 비집고 들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가 된 허벅지는 완강하게 무릎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자 무릎이 번쩍 드리는가 싶더니 허벅지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그 무릎은 방앗공이가 아니면 도끼처럼 매몰차게 허벅지에 내리박혔다.

"아이고 엄니이..."

몸이 들썩하며 수국이가 비명을 토했다. 무릎이 다시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미 두 다리는 풀려 있었다. 기운이 빠져버린 수국이의 두 다리는 억센 남자의 다리가 조정하는 대로 휘둘리고 있었다.

"엄니, 아하... 아으, , ..."

수국이는 이를 악물고 몸을 비비 틀었다. 처음보다 훨씬 더 아픈 고통이 저 아래서부터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다. 불몽둥이가, 이글이글 타고 있는 불몽둥이가 아랫배를 파고들고 있었다. 그 불몽둥이를 피해야 했다. 힘껏 몸을 위로 밀어 올렸다. 몸이 약간 올라가는 것 같았다. 다시 힘을 썼다. 그러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등 밑으로 파고든 남자의 두 손이 양쪽 어깨를 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순간 불몽둥이는 더 뜨겁고 거세게 속살을 지져대기 시작했다. 그 아픔을 도저히 견뎌 낼 수가 없어서 수국이는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 뜯었다. 그녀의 손에 잡힌 것은 남자의 등짝이었고, 그녀의 손가락은 그 등짝을 긁어대고 있었다.

", , 자리헌다. 생긴 대로 색질도 잘허능구마. 그려, 그려, 긁어대, 박박 긁어대."

숨을 헉헉대는 백남일의 요동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려, 울고 잡은 대로 다 울어불고 낼보톰언 새 맛으로 사는 것이여. 니만 팔자가 핀 것이 아니라 느그 식구덜도 팔자가 활짝 핀 것잉게 서러울 것 하나또 없어. 처녀시집이라고 가서 평상얼 똥구녕이 째지게 가난허니 살먼 무신 소양이 있다냐. 그 인물만 아깝제. 나가 평상 호강시켜 줄팅게 그리 알어. 나가 얼매나 부잔지 니 몰르지야? 전답에, 돈에, 정미소에, 헌병으로 또 평상 벌어딜일 것이니 니넌 얼매냐 좋아졌냐."

마리를 팔로 받치고 옆으로 누운 백남일은 담배를 빨며 나긋나긋한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치마로 앞을 가리고 그와 반대쪽으로 돌아 누운 수국이의 몸은 달팽이 모양으로 조그맣게 웅크러들어 있었다.

"우리 아부지도 다 늙었응게 살날이 얼매 안 남었어. 그리 되먼 보나마나 나가 우리 나이또래서넌 군산 질가는 부자고, 일본사람 조선사람 다 합쳐서도 열 손꾸락 안에 들 것이여. 긍게 나 말만 사분사분 잘 들음사 니넌 인자 마나님 팔자 된 것이여."

그러나 수국이는 여전히 국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배가 고픈디 인자 밥얼 묵어보드라고. 진 밤 재미지게 보낼라먼 배가 든든혀야 된게."

백남일이 옷을 입기 시작했다. 수국이도 정신없이 옷을 입었다. 옷을 다 입은 수국이는 다시 보내달라고 애걸했다. 그러나 백남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밥상이 들어왔다. 수국이에게는 눈에 선 밥상이었다. 눈에 익은 것이라고는 흰쌀밥밖에 없었다.

"요것이 비싼 일본음석이여. 당장에 호강시키는 것잉게로 많이 묵어."

백남일이 능글맞게 웃었다. 수국이는 속이 쓰라리게 배가 고팠다. 그러나 전혀 입맛이 없었다. 입속은 바싹 마른 채 쓰디썼다. 설령 입맛이 있었다 해도 그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가 않았다. 그 꼴을 당하고 그와 마주앉아 배를 채운다는 것은 치가 떨리는 일이었다. 백남일은 분주하게 밥을 먹으면서 몇번이고 밥을 먹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수구이는 주전자의 물을 따라 마셨을 뿐 끝내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와따, 인물값 허니라고 긍가 어찐가 성질머리 한분 깔깔허고 뻐시시. 배고픈 디야 양반 없고 체면 없는 법잉게 알아서 혀. 낼 아칙이먼 그놈에 고집도 야들야들 보들보들혀질 것잉게."

백남일이 콧방귀를 뀌었다.

수국이는 새벽녘까지 그 일을 세 번이나 더 당했다. 백남일은 코를 골아 대며 잠에 곯아떨어졌나 싶다가도 불현듯 잠이 깨서 몸을 감고 들고는 했다. 그 지긋지긋한 일을 당하면서 수국이는 큰언니 보름이와 작은언니 정분이를 생각했다. 두 언니도 이런 꼴을 당하면서 사는 것일까 싶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참고 살아지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남일은 코를 드렁드렁 골면서 자고 있었다. 방문 창호지에 새벽빛이 희붐하게 어리고 있었다. 수국이는 마음을 다져먹고 백남일을 떼밀었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좀 더 세게 떼밀었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더욱 세게 떼밀었다. 그러자 백남일은 짜증을 부리며 돌아누웠다. 쉽게 잠이 깰 것 같지는 않았다.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살금살금 기어서 문 쪽으로 갔다. 몸이 하나 겨우 빠져나갈 만큼 문을 밀었다. 백남일의 코고는 소리가 더 커지고 있었다. 수국이는 방문을 빠져나왔다.

먼동이 터오고 있는 새벽추위는 살 속을 파고들었다. 수국이는 걷기에도 거북하면서도 마구 뛰고 있었다. 그 남자가 머리채를 잡아챌 것만 같았던 것이다. 인적 없는 거리에 새우젓장수의 쉰 목소리가 길게 끌리고 있었다. 얼마를 뛰다가 기침을 하며 수국이는 주저앉았다. 숨이 가쁘면서 속이 뒤집혔다. 헛구역질이 솟으면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차가운 땅바닥을 짚고 숨을 몰아쉬며 수국이는 그놈을 그대로 살려두고 왔다는 생각에 부딪혔다. 왜 그놈을 죽일 생각을 못했는지 스스로가 원망스럽고 미웠다. 그러나 되짚어 생각해 보아도 손수 죽일 자신감은 생기지 않았다. 수국이는 오한을 느끼며 일어섰다. 눈물과 함께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질정 없이 솟고 있었다. 수국이는 <엄니, 엄니>를 부르며 걷고 있었다. 수국이는 집 앞에서 머뭇거렸다. 어머니를 대하기가 무서웠다. 그러나 또 못견디게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수국이는 울음을 추스르며 거적문을 들었다.

"누구여? 수국이냐!"

수국이는 섬찟했다. 잠기라고는 전혀 없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수국이는 그만 돌아서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어머니가 뛰어나왔다.

"수국아, ..."

감골 댁은 말을 잇지 못하고 굳어지고 있었다. 딸의 어지러운 몰골에서 모든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엄니이..."

수국이는 어머니의 품으로 달겨 들었다. 감골 댁은 울음이 터지는 딸을 힘껏 보듬었다.

"... ... 일 당혔지야?"

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얼굴을 부비대며 감골 댁은 울음으로 막히는 목소리를 힘겨웁게 밀어내고 있었다. 그 말은 묻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묻기도 어렵고 대답하기는 더욱 어려운 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짐작으로만 넘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 가닥 기대가 남아 있었다. 어떻게든 변을 피했기를 바라는 질긴 마음이었다.

"어엄니이... 어엄니이..."

흐느낌이 격렬해지며 수국이는 어머니의 가슴을 더 파고들었다. 그 뜨거운 몸 대답에 감골 댁은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며 딸을 더 꼭꼭 끌어안았다.

"그놈이 누구드냐. 부안 댁 짐작대로 정미소집 아덜이 맞디냐?"

감골 댁은 숨길이 거칠어지며 물었다. 울음을 걷잡지 못하며 수국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려... 일이 결국 그리 되았구만. 늑대아가리 피허고 여시아가리 피허니라고 야반도주 해왔등마 호랭이아라시가 기둘리고 있었구나. 그런 오살육시럴 헐 눔!"

감골 댁은 부르르 떨며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어머니의 몸 떨림을 가슴으로 느끼며 수국이는 비로소 아늑함에 젖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따라 어금니를 맞물었다.

"되았다. 그만 울고 들어가자. 우선에 대근이넌 눈치 못 채게 허고."

감골 댁은 팔아름을 풀며 딸을 부축했다.

그때까지 밖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방대근이는 후다닥 제 잠자리로 돌아 누웠다. 그리고 잠자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가슴에서는 천둥이 울리고 푸른 불꽃이 번득거리고 있었다. 그놈, 정미소집 아들놈을 당장 때려죽이고 싶은 증오로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고 있었다. 그 주체할 수 없는 격분으로 숨소리가 자꾸 거칠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말아 쥐며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치솟기는 감정대로 했었다면 조금 전에 그놈이 바로 정미소집 아들인 것을 알았을 때 곧바로 박차고 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그 충동을 간신히 참아냈던 것은 어머니와 누나 때문이었다. 일을 마음먹을 대로 틀림없이 해내야 했다. 그러자면 우선 모르는 척하는 것이 상수였다. 어머니와 누나가 알았다가는 방해가 될 뿐이었다.

어제 저녁 부안 댁의 말을 전해 듣고 누나를 찾으러 나섰을 때부터 그런 변고는 예상됐었던 것이다. 군산바닥을 다 뒤지다시피 하면서, 그리고 헛걸음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놈이 누구든지 간에 가만두지 않겠다는 마음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그 일을 맡고 나설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아버지도 없고 형도 없는 집안에 남자는 오로지 자신 하나였다. 형이 멀고 먼 타국으로 떠난 것은 큰누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제 자신은 수국이 누나를 위해 나서야 될 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 예뻤던 수국이 누나는 언제나 자신의 자랑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바로 손위 누나와 걸핏하면 싸움질이었지만 자신은 거의 싸우지를 않았다. 정말 화가 나서 어쩌다 싸우게 되더라도 얼굴을 때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수국이 누나를 다른 누나들보다 유독 좋아했던 것은 얼굴이 예뻐서만은 아니었다. 바로 꽃 이름인 누나의 <수국>이라는 이름 탓이기도 했다. 누나가 태어난 날 마당가의 수국 꽃이 만발했다는 것이었다. 아들 하나를 낳고 딸을 내리 셋을 낳게 되자 할머니는 너무 서운해 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당가에 활짝 핀 수국 꽃 덩어리가 부처님 얼굴로도 보이고 관세음보살님 얼굴로도 보이더라는 것이다. 할머니는 곧 합장을 하고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꼭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수국 꽃 덩어리가 그리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인 모습으로 보일 때 축원을 올리면 틀림없이 소원성취가 된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래서 누나의 이름도 수국이라고 지었고, 그 덕에 자신이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그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듣고 자라면서 수국이 누나와 더욱 정이 깊어졌던 것이다.

날이 밝아 사람들 오가는 소리가 들이게 되자 방대근은 잠이 깨는 척하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는 한쪽에서 잠들어 있었다.

"아니, 누나가 왔네. 언제 왔당게라?"

방대근은 놀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발써 왔제."

감골 댁은 얼굴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어찌 된 일이라등게라?'

", 벨일 아니드란다. 어떤 놈이 사람얼 잘못 보고 끌어갔다는 것이여."

방대근은 여기서 말을 끝내려다가 혹시 의심받을지도 모른다 싶어 좀 더 안전하게 하려고 한마기를 더 물었다.

"그 말이 참말이제."

"하먼, 참말이제."

끝내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엉성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어머니가 가엾고 안쓰러워 방대근은 새롭게 이를 악물며 밖으로 나갔다. 아침밥을 하고 있던 감골 댁은 걱정스런 얼굴로 들어서는 부안 댁에게 눈짓을 해가며 밖으로 밀어냈다.

"새북에 왔는디, 그놈이 맞네."

감골 댁의 말은 차고 짧았다.

"아이고 어쩌끄나..."

"우선에 입 봉해 두소."

지삼출과 무주 댁이 찾아들었을 때도 감골 댁은 그들을 밖으로 밀어냈다.

"그런 개자석..."

지삼출은 울컥 터져 나오는 말을 여기서 뚝 끊었다. <좇대감지럴 확 뽑아부러야 혀!> 그가 삼킨 말이었다. 수국이의 자리가 비어 있는 미선소에는 벌써 그 소문이 다 퍼져 있었다. 점심때 여자들은 그 이야기로 배를 불리고 있었다.

"그 시악시가 위태위태허등마 기연시 일 당해부렀구마."

"그 인물 아까와 어찌까이."

"그런 인물 갖고 요런 디 나슨 그 큰 애기가 애초에 잘못혔제."

"꼭 잘못이랄 것도 없는디. 인자 팔자 늘어진 것 아닐랑가?"

", 그렇기도 허구마. 평상 호강허고 살게 생겼제. 이 집 재산이 얼맨디."

"어따, 첩살이 호강이 무신 놈에 호강이여. 지아무리 칠칠이 호강혀도 첩살이 설움언 따로 있는 것인디."

"평상 배곯고 사는 본처살이 고상언 안 생각허고? 누가 가지밭에 안엎풀채 줘서 한이제 짐에 가지 따묵는 것이야 다 지 복 아니겄어."

"아이고, 말도 숭허게는 허네."

이런 말들을 들으며 부안 댁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소문이 빨리 퍼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삼출은 점심나절까지 전혀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행여나 행여나 하며 대근이를 기다리느라고 자꾸 한눈을 팔게 되었다. 그러나 대근이는 점심때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지삼출은 점심을 먹으러 가며 대근이를 더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이제 돌아올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공사판에서 아침나절 일을 빼먹고 저녁나절 일을 한다고 해서 일당 절반을 쳐주지 않는다는 것은 대근이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지삼출은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대근이가 꼭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던 것이다. 대근이는 아침에 공사판으로 나오는 길에 어디를 잠깐 들렀다 가겠다고 했다. 그때 무심코 지나쳤던 것이 잘못이었던 것 같았다. 아니, 그때만 해도 감골 댁의 말대로 대근이가 그 일을 모르고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니 대근이가 그 일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대근이는 그런 속 깊은 데가 있었고, 그렇지 않고서야 일을 나오다 말고 어디를 갈 데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지삼출은 더욱 불안해졌다. 만약 대근이 혼자서 그놈을 상대하려 들어갔다가는 꽤나 위태로운 일이었던 것이다. 상대방은 명색이 헌병으로 긴 칼을 차고 다니는데다 순사나 헌병이면 으레껏 익힌다는 무술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 것이었다. 그런데 대근이는 서무룡이만큼 싸움에 능하지를 못했고 몸도 아직 다 낫지 않은 형편이었다.

"무신 근심 있으신게라?"

줄곧 지삼출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서무룡이 입을 뗐다.

"아니시, 벨일 아니여."

서무룡이가 알아서는 일이 불붙듯 할 것이 뻔해서 가볍게 웃어 보이기까지 하며 시침을 뗐다. 서무룡이는 수국이를 너무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뒷조사가 심해지는 게라?"

"아니여. 큰아가 잠 아파서 그러시."

지삼출은 나오는 대로 둘러 붙였다.

"야아, 없는 살림에 걱정되제라."

서무룡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삼출은 오후의 일을 작파했다. 대근이를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방대근이는 하루 종일 백남일의 뒤를 밟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기를 쓰고 뛰었고, 음식점으로 들어가면 길 건너편에서 기다렸고, 목욕탕으로 들어가면 샛골목에서 한정 없이 기다렸다. 백남일은 미행당하는 줄도 모르고 목욕탕에서 나와 바로 여관으로 갔다. 몸이 피곤하고 잠이 와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침에 늦잠을 잤는데도 온몸이 찌뿌드드하면서 나리지근했고, 코에서는 피냄새가 풀풀거리며 시간이 가도 가시지 않았다. 목욕을 했지만 몸은 개운해지지 않고 오히려 잠이 퍼부어지고 있었다. 요상허시, 작년꺼정만 해도 다섯 번 정도야 암시랑토 안혔는디. 보약얼 잠 묵어야 쓸랑갑네. 백남일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요에 눕자마자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방대근은 또 여관 샛골목 귀퉁이에서 여관 문을 지키고 있었다. 목욕탕이라는 것도 여관이라는 것도 그에게는 생소한 곳일 뿐이었다. 들어가 보기는커녕 한 번도 눈여겨본 적도 없는 곳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일본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생겨난 것이었고, 일본사람들만 드나드는 곳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백남일 같은 조선 놈도 거침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방대근은 끝이 뾰족한 돌을 만지작거리며 목포쯤으로 도망가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다. 목포부두에도 군산만큼 일거리가 많다는 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안전하게 만주로 갈 수도 있었다. 농토를 빼앗긴 사람들이 만주로 떠난다는 소문이 부쩍 심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로 가든 어머니와 의논해야 될 문제였다.

백남일은 심부름하는 아이가 깨워서 눈을 떴다. 한숨도 잔 것 같지 않은데 부탁해 놓은 한 시간이 지나간 것이었다. 백남일은 선잠을 깬 짜증을 애써 눌러가며 몸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급한 대로 셋방을 하나 얻어야 했던 것이다. 그 예쁘고 달디 단 것을 당장 들어앉히자면 집을 장만하기 전까지 그런 임시변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남일은 아침에 부탁해 놓은 영감을 찾아갔다. 방을 두 개 구해 놓았고 했다. 무조건 큰 것으로 결정하고 그는 돈부터 내밀었다. 그 싱싱하고 나긋나긋한 것을 매일 품을 생각을 하니 있는껏 기분이 달뜨고 있었다. 백남일은 새로 세상 사는 맛에 취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헌병대로 가고 있었다. 방대근은 그 뒤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 방대근의 모습이 마침내 지삼출의 눈에 잡히게 되었다. 오후 일을 작파하고 방대근이를 찾아 나선 지삼출은 벌써 서너 시간째 헤매 다니고 있던 참이었다. 지삼출은 대근이를 찾은 순간 자신의 예상이 적중한 것을 알아챘다. 그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휴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몸을 숨겼다. 대근이를 보호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놈을 노리고 있는 대근이를 말릴 생각은 없었다. 말린다고 들을 대근이가 아니었고, 또 말려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놈에 대한 자신의 마음도 대근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대근이가 앞뒤를 재지 않고 너무 서둘러대는 것이 걱정이었던 것이다. 그놈을 어떻게 하고 나면 군산바닥에서는 더 살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디로 뜰 것인지 마련도 없이 대근이는 그저 내닫기만 하고 있었다. 나이 탓이리라 싶었다. 어쨌거나 대근이를 이제 찾아냈으니 그가 하는 일이 빈틈없이 되도록 도울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뜨는 일은 그다음 문제였다. 먼저 일을 해치운 다음 어디로 뜨는 것도 별로 어려울 것은 없었다. 멀리 피할 시간이 촉박해서 그렇지 짐을 싸들고 나서기에는 양쪽 집 다 단출했다. 살림살이라는 것이 겨우 밥 끓여먹는 것 정도인데, 그런 것들이야 다 버리고 가도 별로 아까울 것이 없었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져서 백남일은 헌병대에서 나왔다. 그는 자전거를 느리게 몰아가고 있었다. 방대근이가 그 뒤를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지삼출도 대근이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백남일은 자전거를 천천히 몰며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그는 큰길에서 벗어나 좁은 길로 방향을 틀었다. 좁은 길 양쪽으로는 일본식 주택가였다. 길에는 사람들이 적잖이 오가고 있었다. 백남일은 골목으로 꺾어들었다. 방대근은 마구 뛰기 시작했다. 백남일이 사라진 골목으로 급하게 꺾어 돌던 방대근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쳐서 몸을 숨겼다. 숨을 몰아쉬는 방대근의 이마에는 진땀이 내배고 있었다. 백남일을 놓칠까봐 그렇게 빨리 뛰었던 것이다. 그런데 백남일은 바로 눈앞에서 자전거를 내리고 있었다. 방대근은 백남일이가 자전거를 내린 것이 두 번째 집 앞이라는 것을 뒤늦게 확인하고 있었다. 백남일은 대문을 두들기며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방대근은 돌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주면서도 온몸에 맥이 풀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 너무 가까웠고, 날이 아직 덜 어두웠고, 더구나 집 안에서 사람이 곧 나올 판이었다. 예상대로 곧 대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백남일이 무슨 말인가를 하며 자전거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방대근이는 막힌 숨을 토해냈다. 하루 종일 온몸에 팽팽하게 차 있었던 긴장이 한꺼번에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방대근은 몸을 추스리며 다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천천히 걸어서 그 집 앞까지 갔다. 대문에는 문패가 붙어 있었다. 문패에 쓰인 이름은 백종두였다. 방대근은 문패를 뚫어지도록 응시한 채 그 이름을 곱씹고 있었다. 문패라는 것도 세상이 바뀌면서 붙이기 시작했다. 관청이 나서서 시키는 일이었다. 조선 사람들에 비해 일본사람들은 문패달기에 열성이었다. 그들은 집을 지었다하면 어김없이 문패를 달았다. 그들이 그러는 것은 관청의 지시를 잘 따르려는 것이기보다는 자기네 나라와 편지 내왕이 잦은 까닭인지도 몰랐다. 누군가가 골목으로 들어서는 인기척이 들렸다. 방대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방대근은 너무나 놀랐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람은 지삼출이었던 것이다.

"이 집으로 들어갔는갑제?"

지삼출이 대문을 흘낏 살피며 혼잣말하듯 했다. 그 한마디에서 자신의 속셈이 다 들통 났다는 것을 방대근은 깨달았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해서 그는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가자, 오늘언 글렀응게."

지삼출이 나직하게 말하며 방대근의 어깨를 감싸 잡았다. 방대근은 어깨를 미는 지삼출의 지긋한 힘을 느끼며 걸음을 떼어놓았다. 방대근은 언제나 지삼출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어느 때나 감싸고 돌보아주는 것이 큰형님 같았고 때로는 아버지 같기도 했던 것이다.

"니 혼자 혀서넌 위태허다. 뒷일도 생각혀야 허고."

골목을 벗어나며 지삼출이 말했다.

"엄니넌 나가 몰르는지 아는디요."

어머니에게 비밀을 지키라는 말을 방대근은 이렇게 했다.

"알겄다 아무도 몰르는 것이 좋제."

지삼출은 방대근의 어깨를 감싸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방대근은 그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돌을 슬그머니 놓아버렸다. 갑자기 신장이 풀리면서 배고픔이 몰려들었다. 저녁을 먹은 지삼출은 손판석을 찾아갔다. 그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은 병문안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느 때 없이 마음이 무거웠다. 다른 날과는 달리 병문안이 아닌 까닭이었다.

"그놈으 일얼 어찌해야 헝고?"

얼굴이 수척한 손판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삼출은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고것이 말이시 예삿일이 아니구마. 그놈얼 해치울라고 대근이가 오늘 당장 나섰단 말이시."

"머시여? 일 저질러부렀능가?"

"안직 아니여, 때럴 못 잡았응게. 허나 메칠 새로 원수야 꼭 갚겄제."

"근디 말이여, 그것이 엎어진 물이고 깨진 옹구 아니겄어?"

손판석이 지삼출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삼출은 손판석의 말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처녀가 몸을 버리면 누구나 으레껏 그렇게 생각하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당자넌 더 말헐 것도 없고 감골 댁 맘도 대근이 맘허고 같을 것잉마."

지삼출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 되먼 일이 커지는디?"

"긍게 말이시. 대근이 혼자 심으로 될 일이 아닝게 나도 나서야 되겄단 말이시."

"머시여? 글먼 나넌 어쩌고?"

손판석은 혼자 남겨진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자네넌 다리나 어서 낫도록 허소. 뒷일언 나가 다 알아서 헐 것잉게."

지삼출이 손판석의 손을 잡았다.

"그려... 고런 놈에 첩으로 살 수야 없는 일이제 고런 놈언 다 죽여야 혀."

손판석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낼이고 모레고 일이 되는 대로 뜰 것잉게 그리 알고 있으소. 근디, 아무도 몰르는 것이 좋을 것잉마."

지삼출은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알었구마. 그나저나 요놈에 다리가 어찌 될란지 모르겄당게. 이대로 빙신이 되야불면 으쩌까.?"

손판석이 또 뻣뻣하게 뻗친 다리를 붙들며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런 걱정 말고 맘 간단지게 묵소. 지금꺼정 잘 참나앴응게 쬐깨만 더 참소. 자네야 원체로 몸이 실헝게 아무 탈 없을 것이구마."

지삼출은 또 비슷한 내용의 위로를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언제나 걱정이었다. 누구나 부러진 다리가 제대로 낫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손판석만 대하면 그때 패싸움을 벌였던 것이 자꾸 후회로 곱씹히고는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패싸움은 잘한 것이었다. 그 효과가 여러모로 컸던 것이다. 중국노동자들이 함부로 얼씬거리지 못했고, 조선노동자들이 일거리에 따라 서로 힘을 합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회사에 취직해 있는 조선사람 감독이나 십장들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게 되었다. 결국 손판석은 몸을 사리지 않고 너무 열심히 싸웠던 것이고, 그 싸움을 이기게 한 공로자였던 것이다. 그간에 한차례 다녀간 공허 스님도 손판석이 몸을 상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공은 장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긍게로 아그덜도 눈치 못채게 뜰 채비 히두소. 낼 아칙에 감골 댁헌티도 살짝허니 귀뜸해 두고."

지삼출은 잠들기 전에 아내에게 군산을 떠야 할 사정을 대충 설명했다. 무주 댁은 잠자코 있기만 했다. 수국이의 일 때문만이 아니라 남편이 뒷조사를 당하고 있다는 데는 아무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수국이넌 어쩌등고?"

"딴 맘 묵을랑가 몰라 감골 댁이 옆에 딱 붙어 있응게 하로 내내 눠 있제라."

"딴 맘?"

", 바닷물에 풍덩 해불든지 낭구에 목얼 매불먼 어쩔 것이요."

지삼출은 끄응 된소리를 내며 돌아 눕고 말았다. 감골 댁은 수국이의 허리에 묶은 끈을 자신의 손목에 감아 잡은 채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다가 수국이가 조금만 몸을 움직이는 기척이 있어도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뜨고는 했다. 감골 댁은 딸의 신세가 망쳐진 것이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큰딸 보름이는 겨우겨우 지켜냈고, 작은딸 정분이는 별로 눈에 안 띄는 인물이라 별일없이 시집을 보냈다. 그런데 결국 막내딸은 지켜내지 못하고 만 것이다. 그건 순전히 자신의 잘못 때문이었다. 하루 한 끼를 죽으로 때우더라도 그놈의 돈벌이를 내보내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다. 남편에게 되를 지어도 큰 죄를 진 것이었다. 남편의 당부를 지켜내려고 그간에 겪어온 온갖 고생이 다 허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에미로서 할 일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몸 망친 처녀야 사람 취급을 않는 세상이었지만 딸의 목숨은 지켜야 했다. 자신이 죽기 전에 딸이 먼저 죽는 꼴은 볼 수 없었다. 수국이는 자는 척하면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 딴생각이 엇갈리고 있었다. 기왕 망쳐진 몸 어머니하고 동생이나 편히 살게 할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하면 짐승 같은 그놈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지고, 또 죽을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죽게 되면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게 되고..., 그런 못할 짓을 하느니 차라리... 수국이는 결말을 낼 수 없는 생각의 쳇바퀴만 돌리며 속울음을 울고 있었다. 다음날 점심 무렵에 한 남자가 감골 댁을 찾아왔다.

"수국이가 딸이오?"

"근디요. 누구다요?"

감골 댁은 그 남자를 경계했다.

"나 미선소 감독이오. 뫼시고 갈랑게 얼렁 나오라고 허씨요."

남자의 아투는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가기넌 어디로 가!"

순간적으로 감골 댁의 눈빛이 변하며 반말이 터져나갔다.

"다 암스로 멀 그러요. 우리 쥔이 딜고 오라고 허요. 인자 이 집 식구덜 다 팔자 피게 생겼소. 얼렁 딜고 나오씨요."

"머시여 이놈아! 느그덜이 사람이여!"

감골 댁이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그리고 다급하게 거적문을 들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감골 댁의 몸놀림은 마치 젊은 사람처럼 재빨랐다. 거적문을 들치면 바로 부엌이었다. 감골 댁은 눈에 띄는 대로 부지깽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마음에 차지 않아 내팽개쳤다. 감골 댁은 눈을 번뜩이며 여기저기를 살폈다. 도마와 함께 칼이 눈에 들어왔다. 감골 댁은 칼을 집어 들었다.

"이놈아, 니 잘 왔다. 니놈 배때지보톰 갈라야겄다!"

칼을 꼬나 잡은 감골 댁이 거적문을 제치고 뛰쳐나오며 외쳐대고 있었다. 그런 감골 댁의 눈에는 파란 불이 켜져 있었다.

"아니, 아니, 어째 이러시요. 딸 망친 놈언 따로 있는디 어찌 이런당게라?"

당황한 감독은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이놈아, 니 죽고 나 죽자!"

감골 댁은 곧 칼을 휘두를 기세로 감독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 요상허시. 기왕지사 신세 망친 것 팔자나 고칠 일이제 그리 나댄다고 하분 찢어져뿐 밑구녕이 지대로 돌아가지간디. 헌지집 끌어안고 있음서 어디다 써묵을라고? 겉보기넌 숭년에 죽얼 쒀묵을 것이여, 살찐 되야지니 잔치에 잡아묵기럴 허겄어."

망신을 시키자는 듯, 화를 지르려는 듯 감독은 큰소리로 외쳐대며 발빠르게 뒷걸음질 쳐대고 있었다.

해거름이 되어 서무룡이가 방대근의 집을 찾아왔다. 방대근이가 공사장에 안 나온 것은 그려려니 했지만 지삼출까지 나오지 않아 그는 하루 종일 마음이 뒤숭숭했던 것이다. 그는 방대근의 잡에 들어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방대근이가 집에 없었던 것이고, 감골 댁의 기색도 평소와는 너무 달랐던 것이다. 자신이 모르고 있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그는 알아차렸다. 그는 지삼출의 집으로 갔다. 지삼출도 그의 아내도 없고 두 아이만 거적 깔린 방안에서 놀고 있었다.

"곱단아, 감골 댁집에 무신 일 났지야?"

", 사람덜이 그러는디 수국이 언니가 신세 망쳤디야, 정미소 아덜헌티."

"머시여! 수국이가..."

서무룡은 머리가 쿵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툭 불거진 눈에서 살기가 뻗쳤다. 그는 손판석의 집으로 달려갔다. 한편 지삼출과 방대근은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떡으로 저녁을 때우고 있었다. 온종일 백남일의 뒤를 밟다가 어두워지면서 술집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술 처묵는 것이 아조 잘되았소."

방대근이가 추위에 떨며 속삭였다.

"그려, 한 주먹감이제."

지삼출이 떡을 삼키며 대꾸했다.

백남일은 밤이 깊어서야 술집에서 나왔다. 그도 또 한 사람도 비틀거리며 골목을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들 뒤에서 일본여자들이 배웅하고 있었다.

"니 나가 허는 말 았겄제? 낼언 무신 수럴 써서라고 끝내란 말이여."

"야아, 아무 걱정 마시랑게요. 낼언 딱허니 신방 채리게 맹글 것잉게라."

두 사람의 혀 꼬부라진 말이었다. 미선소 감독과 헤어진 백남일은 혼자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밤늦은 길에는 오가는 사람이 드물었다. 한참을 걷던 백남일은 어느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는 전봇대 앞에서 바지 단추를 끌렀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요런 씨부랄 놈아. 니가 우리 누나 신세럴 망쳐놨지야!"

"! 그것이 아니고..."

그때 방대근의 주먹이 백남일의 얼굴을 후려쳤다. 백남일은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풀 고꾸라졌다. 방대근의 주먹은 그냥 주먹이 아니었다. 그의 손아귀에는 언제처럼 뾰족한 돌이 쥐어져 있었다. 방대근의 주먹은 몇 번이고 연거푸 백남일의 얼굴을 내려찍었다. 백남일은 저항 한번 못하고 나가뻗었다. 방대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백남일의 사타구니를 마구 걷어차고 짓밟아댔다.

"아서, 아서, 죽이지넌 말어. 그만 혀."

그때까지 지켜보고만 있던 지삼출이 방대근을 붙들었다.

"그만허먼 되았응게 얼렁 가자."

지삼출이 방대근을 잡아끌었다.

그들은 한달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나만 내뿔고 가는 것이 아니제?"

손판석이 절박하게 물었다.

"나럴 못 믿능가? 자네넌 그저 몰른칙끼 허소."

지삼출이 손판석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지삼출네와 방대근이네는 밤길을 잡았다. 매서운 바람이 들녘을 달리고 있었다.

 

 

37. 파장과 진동

양치성은 뒤늦게 허방을 짚은 것을 알았다. 백남일의 얼굴을 그렇게 떡을 만들어놓고 도망간 것이 바로 지삼출이라는 자였다.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놈을 잽싸게 잡아채지 못한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놈은 틀림없는 의병 잔당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헌병을 그 지경으로 두들겨 팰 수가 없는 일이었고, 또 그리고 재빨리 자취를 감추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 배짱이며 민첩성을 생각할수록 그놈이 의병이었다는 심증은 굳어졌다. 지삼출이라는 자를 보았을 때 그 의심은 직감적으로 들었던 것이다. 그 눈빛이며 인상이 흔한 막노동꾼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막노동꾼들의 눈은 대개 멍하거나 순했고, 얼굴은 무덤덤하거나 시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자의 눈은 똑바로 박혀 생기를 띠고 있었고, 얼굴은 어떤 무게감과 함께 반항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자를 바로 잡아채지 않았던 것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줄기와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백남일이라는 자는 헌병 옷을 입었을 때부터 별로 신통치 않게 여겨왔었는데 결국 그런 빙충맞은 짓을 저질러 중대한 일까지 망치고 들었던 것이다. 양치성은 백남일에게 미움을 넘어서 증오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하야가와의 그 지시는 첫 번째 시험이었던 것이다. 그 문제를 보기 좋게 해결해 자신의 능력을 확실하게 입증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백남일이가 느닷없이 똥칠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하야가와에게 결과 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난처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탐사해 본 결과 의병 잔당의 침투는 없었다고 할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곧 지우고 말았다. 그런 거짓말을 하야가와는 그 일을 자신에게만 맡긴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야가와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복선배치 방법은 정보활동의 기초이기도 했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거짓말은 금방 들통나게 마련이었다. 어설픈 거짓말로 신세를 망치느니 차라리 사실 그대로 보고하는 것이 발뺌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사실대로 보고하면 모든 책임을 백남일에게 떠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책임을 모면한다고 하더라도 백남일에 대한 증오심은 가실 것 같지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를 망쳐버린 그 괘씸함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괘씸한 만큼 앙갚음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백남일이가 예쁜 처녀를 제멋대로 범한 것을 생각하면 또다른 감정이 뒤틀려 올랐다. 보잘것없는 중인 놈의 자식새끼가 약삭빠른 애비 덕에 헌병 옷을 걸치고 안하무인으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아전에서 면장이 된 그 애비 놈의 거드름도 아니꼬운 것이었지만 헌병 옷을 걸치고 설쳐대는 그 아들놈의 꼬락서니는 더욱 눈꼴시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애비 놈은 재산까지 많이 모아 정미소에다 미선소까지 차려놓았고, 그 아들놈은 미선소 여자들을 제 마음대로 범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인 놈들이 놀아나는 꼴이 궁녀들을 거느린 상감이 부러울 것 없는 판이었다. 그 꼴을 도저히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헌병의 제복을 입고 그런 짓을 하는 건 대일본제국의 위신을 더럽히는 것이며, 거룩하신 천황폐하께 불충을 저지르는 일이라고 사료됩니다."

양치성은 몇 번이고 연습했던 이 말을 기어이 하야가와 앞에 내놓았다. 보고를 받는 동안 불쾌한 기색이 역연했던 하야가와의 얼굴이 양치성의 그 말을 듣자 심하게 찡그려졌다. 그리고 그는 곧 정색을 하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그런 자격 미달인 자들은 현직에서 다 몰아내야 돼. 그런 작자들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민심을 잃어서야 될 일인가!"

".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양치성은 절도 있게 허리를 반으로 굽혔다. 그러면서 자신이 목적한 과녘에 화살이 명중되는 짜릿한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자낸 역시 판단력이 정확해. 그만하면 됐어."

하야가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양치성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헌데, 도망간 그놈들 말고는 의병 잔당이 더 없을까?"

그는 허점을 찌르듯 말머리를 급하게 돌렸다.

", 그래서 계속 탐사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놈들뿐일 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여유를 주십시오."

양치성은 엉겁결에 말을 꾸며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도 이미 그런 의혹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당황하거나 말을 더듬지는 않았다.

", 잘하고 있구만. 한번 시작한 일이니까 뿌리를 뽑아야지."

하야가와는 자리를 털고 있어났다. 양치성은 국장실을 물러나오며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예정했던 대로 일을 망친 책임을 백남일에게 떠넘겼고, 거기다가 그자가 몸이 낫더라도 다시는 헌병 노릇을 못해먹게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칭찬까지 받았던 것이다. 양치성은 뿌듯하면서도 홀가분한 기분에 이끌려 경찰서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하야가와에게 보고를 끝낸 이상 자신이 맡은 일은 다 마무리를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다른 일들은 흥미로운 구경거리일 뿐이었다. 몸을 심하게 다친 백남일이가 어떤 꼴이 될 것인지, 도망간 두 놈이 잡혔는지 어쨌는지, 구경거리로서는 다 괜찮은 것들이었다. 양치성의 흥미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남일이 한번 범한 처녀가 얼마나 예쁜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소문이 퍼진 대로라면 예쁘기는 예뻤던 모양이었다. 예쁜 처녀를 총각도 아닌 놈이 망치고 들었느니 그렇게 호되게 두들겨 맞은 것은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처녀를 한번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동하기도 했다. 하야가와를 만나고 나서 마음이 느긋해지면서 생기는 엉뚱한 생각이었다.

"아 그것이야 헌병대에 가서 물어보소. 잡아묵든 삶아묵든 즈그덜 일 즈그덜이 알아서 헐 것 아니겄어."

장칠문은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참 요상허요 이. 뛰는 호랭이 눈썹도 뽑고, 날아가는 새 똥구념도 맞힌다는 헌병대서 어찌 이적지 두 발로 걷는 그 놈덜얼 못 잡고 있다요?"

양치성은 일삼아 장칠문의 심통을 긁어대고 있었다.

"그런 헛소리 말어. 헌병대 즈그덜이야 몰악시런 것 빼먼 머시가 볼 것 있간디. 도망간 놈덜 잡을람사 우리 경찰 손얼 안 빌리먼 안되제."

장칠문은 그래도 경찰이라고 헌병대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래도 헌병대 체면이 있제, 아무 꼬타리도 못 잡아서야 어디 낯이 스겄소?"

", 자네 말이 맞네. 헌병대서 면체면 헐라고 엉뚱헌 놈얼 잡아딜였당게로."

장칠문은 코웃음을 쳤다.

"그놈이 누구요? 두 놈 중에 한 놈이다요?"

"어허, 자네도 말귀럴 어찌 알아들어? 면체면 헐라고 엉뚱헌 놈얼 잡아딜였당게로."

"그놈 이름 아시요?"

"몰르겄어. 서 머시기라고 허등마 어쩌등마. 말 듣자닝게 그놈이 백남일이가 망쳐 논 큰 애기럴 좋아했다등마. 헌병대서넌 그놈헌티 죄럴 다 뒤집어씌울라고 허능갑디, 애맨 사람 한나 잡는 것 아니라고."

"애맨 사람얼 잡다니, 죄 없는 사람얼 잡아서야 쓰겄소? 그 사람이 죄럴 졌음사 진작에 두 놈 따라 달아났을 것 아니겄소."

"바로 그 말이여. 이치가 그리 뻔헌디, 결국에넌 백남일 이놈이 죽일 놈이여. 백남일이가 허는 말이, 지럴 팬 너뎃 놈 중에 하나가 바로 그놈이라고 했시니 그 젊은 놈이야 꼼지락달싹 못허고 황천길로 가게 생겼제."

"아니, 백남일이넌 그날 밤에 술이 취했드람서 어찌 너뎃 놈 중이서 그 사람 얼굴얼 기억한다요? 그리허고, 백남일이가 일 당헌 고샅에넌 불도 없이 캄캄했을 것 아니겄소?"

", 자네 말 듣고 봉게 그렇기도 허시. 그나저나 다 소양 없는 소리여. 초록언 동색이라고 헌병대서 누구 편 들겄어."

양치성은 마음을 공글렸다. 백남일에 대한 새로운 보복감이 꿈틀대고 있었다.

"백남일이넌 잠 느쩌요? 병원에넌 또 가봤능게라?"

양치성은 새로운 정보를 얻어 마음이 조급하면서도 또 다른 정보를 탐하고 있었다.

"그 사람 멋모르고 낯짝 이쁜 년 조갑지 까묵었다가 시방 골창 빠지게 고상허능 것이제. 그놈에 그놈에 붕알얼 어칫깨나 심허니 채였든지 간에 팅팅 부어올른 것이 요만허니 호박뎅이만허드랑 말이시. 좌우간에 그리 다친 붕알이 새로 써묵어질랑가 물르제?"

담배를 빼 무는 장칠문의 입가에는 차가운 비웃음이 어리고 있었다.

"씨묵을 연장이야 따로 있제 어디 붕알얼 써묵는다요?"

삐딱하게 돌아가고 있는 장칠문의 심보를 환히 들여다보며 양치성은 피식 웃었다.

"자내 시방 무신 소리여? 써묵을 연장이야 따로 있다고? , 붕알이 빙신인디, 좆대감지만 스먼 멀헐 것이여. 붕알이 바로 씨주머닌디, 그것이 빙신 되야 씨럴 못 담으면 좆대감지 혼자서 백날 꺼떡꺼떡헌다고 새끼가 까질 것이여? 글고 말이여, 붕알이 빙신 되야불먼 좆대감지라고 잘 서지간디? 무신 말이냐먼, 붕알 딸로 좆대감지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그것 둘언 한몸이다 그것이여. 좆대감지가 스먼 늘어진 붕알이 짜악 올아붙고, 붕알이 짜악 올라붙음서 좆대감지넌 하늘도 뚫게 짱짱해지고 말이시. 자네 똑똑헌지 알았등마 어찌 이리 쉰 이치도 몰르까? , 그려 그려, 인자 봉게 총각이라서 그렇구마. 나가 총각헌티 못헐 소리 혔는감마. 그려도 다 미리미리 귀동냥혀 둬서 손해날 것이야 없응게."

장칠문은 무슨 맛있는 것이라도 먹는 것처럼 입맛을 다시며 입을 훔쳤다. 그 거침없는 음담이 쑥스러워 양치성은 눈길을 돌리고 있다가 장칠문의 말이 끝나자 곧 다른 말을 물었다.

"눈 다친 것언 어찌 된다드랑게라."

", 그덕에 그 사람 일본 귀경하게 생겼등마."

"일본 귀경이요?"

", 여그서야 고칠 기술이 없응게 눈깔 한짝 곯아서 외눈깔 빙신 안 될라먼 일본 아니라 아라사꺼정이라도 가야제 어쩌겄어."

이것은 또 새로운 정보였다. 양치성은 그것을 마음의 갈피에 담았다.

"눈이 그리 심허니 다쳤구만이라 이."

"몰르제, 눈알이 무신 연장엔지 찍혀 터졌는지 깨졌는지 그랬당게 일본으로 간다고 나사질란지. 어쨌그나 그 사람 죽지 않은 것이 천행이여. 맘보넌 드럽게 쓰는디도 명언 질게 타고났제."

"언제 일본으로 간다등게라?"

"날이야 하로가 급헌디, 붕알이 팅팅 부어올라 있느니 어쩔 것이여. 급헌 불보톰 꺼야제."

"헌병대서넌 그 사람보고 무신 말이 없다요?"

"글씨, 의병 허든 놈 잡은 것도 아니고 헌병대 불 질르라고 허든 놈 잡을라다 그리 된 것도 아닌디 좋아라 헐 리가 있겄어. 그나저나 인자 그놈도 한 팔 떨어져 나간 신세가 될 것이여. 헌병 노릇 다시 해묵기넌 에로울 것잉게."

"아니 무신 소리댜요?"

양치성은 자신도 모르게 정색을 했다.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정보활동에 있어서 일차적 금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여유가 없었다. 정칠문의 말은 분명 자신이 의도하는 바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이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백남일이가 헌병대에서 잘려나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영향력 때문이어야 했던 것이다.

"무신 소리기넌? 그놈이 일본 가서도 눈이 못 낫고 외눈깔이 되야불먼 무신 스로 헌병 노릇 해묵어지겄어. 지놈이 헌병자리만 떨어져 나가불먼 그때야 더 보잘것없는 허깨비 신세제."

장칠문은 언제부턴가 <그 사람><그놈 저놈>으로 바꿔가며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글씨요... 헌병 노릇 못헌다고 허깨비 신세야 되겄소? 정미소다 미선소다 그 재산이 얼매라고."

양치성은 장칠문의 적대감을 이해하면서도 그 허풍스런 과장을 꼬집었다.

"어허! 자네 시방 우리 집안얼 어찌 보고 허는 소리여? 우리도 얼매 안 있어서 정미소고 미선소 채릴 참이여."

"야아? 무신 소리다요?"

양치성은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어찌 그리 놀래고 긍가? 자네도 우리 집안얼 시퍼본 모양이제?"

장칠문이 눈꼬리를 고약하게 세우며 양치성을 노려보았다.

"아니구만이라, 아니어라. 하도 뜸금 없는 소리라 놀랬구만요. 그 소리 듣고 안 놀랠 사람 누가 있겄소."

양치성은 서둘러 변명을 해대고 있었다. 그는 이중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대로 들낸 것이 당황스러웠고, 장칠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또한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장칠문이네가 정미소와 미선소를 차릴 거라는 그 뜻밖의 말에는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 똑똑허니 들어. 우리가 정미소에 미선소럴 세웠다 허먼 우리 집안 재산이 그놈 집안 재산보담 많다는 것얼 알어야 써. 어찌서 그냐! 우리 집안에넌 또 사탕공장에다가 상점이 있다 그것이여. 그런디다가 그놈이 헌병질 못해묵게 되고 나넌 그대로 순사질얼 해묵으먼 그 꼴이 어찌 되제? 그때 그놈 꼴이 허깨비가 아니고 말 탄 장술랑가아?"

턱을 치켜들며 말꼬리를 길게 비틀어 올리는 장칠문의 얼굴에는 자만에 찬 비웃음이 는적거리고 있었다. 양치성은 그런 장칠문을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놈이, 지까짓 놈도 양반 붕알 밑에 고개 처박고 찝찌름허고 시큼털털헌 꼬린내 맡고 산 아전놈에 새끼가 나럴 보부상 자석이라고 항시 눈아래로 깔아봄스로 콧등얼 뀌었제. , 지놈이 헌병질만 못해묵게 되야봐라, 지놈이 내 붕알 꼬린내 맡어야 될 것잉게."

장칠문은 말을 질겅질겅 씹듯이 하며 곧 백남일에게 앙갚음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다. 양치성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할 말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세상이 변하면서 장칠문이 아버지 장덕풍이가 요령껏 눈치껏 돈벌이를 해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돈이 많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양치성은 감정이 몹시 뒤틀리고 있었다. 세상이 뒤바뀌니까 아전 놈이 날뛰어 양반 행세고, 장사꾼 놈이 설레발을 쳐서 떼 부자가 돼! 아니꼽고 더러워 못 봐주겠구나.

"장 순사님 원대로 일이 되았으먼 좋겄소. 나 인자 가볼라요."

양치성은 바위 상하는 것을 싹 감추고 이렇게 가시 돋친 말을 하며 일어섰다.

"두고 보소. 영측없이 그리 될 것잉게."

장칠문은 상대방의 심증은 전혀 모른 채 힘 뻗치는 장담을 해 보였다.

한편 서무룡은 꼼짝달싹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그는 이제 목숨을 포기한 상태였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수록 심하게 가해지는 것은 매질뿐이었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맞아서 죽는 고통이나 당하지 말자고 마음을 바꾸었던 것이다. 서무룡은 그날 정신없이 대근이네 집으로 내달았던 것을 수없이 후회했다. 그러나 그 후회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후회를 할 때마다 수국이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생각이 거듭될 뿐이었다. 수국이가 어떤 놈한테 당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그놈을 죽이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자정이 넘도록 지삼출과 대근이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잠에서 깨자마자 다시 수국이네 집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수국이의 집에도 지삼출의 집에도 사람의 자취라고는 없이 횅댕그렁하니 비어 있었다. 잠시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고 있다가 손판석을 생각해 냈다. 손판석을 찾아가면 밤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던 것이다. 지삼출의 집을 뛰쳐나왔다. 그런데 총구멍이 앞을 가로막았다. 몸을 피할 겨를도 없이 개머리판에 턱을 얻어맞고 정신을 잃었다. 꼼짝못하고 헌병대로 끌려갔다. 발버둥을 쳐댔지만 매만 벌었다. 헌병대에서 다시 병원으로 끌려갔다.

그때서야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방대근이와 지삼출이 어젯밤에 저놈을 두들겨패고 도망을 갔고, 저놈이 바로 수국이를 범한 헌병 그놈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공범자라는 엉뚱한 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을. 서무룡은 아무리 생각해도 원망스러운 것이 지삼출과 방대근이었다. 딴사람 일도 아니고 수국이가 당한 일을 두고 어쩌면 그렇게 자신을 따돌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서운하면서도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간에 남다른 정을 나누며 가까이 지내온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는 일이었다. 거칠고 힘든 노동판에서 서로 의지하며 힘이 되었고, 의기투합해서 중국노동자들과 싸우면서부터는 의형제 같은 정이 얽혔던 것이다.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 믿으며 돕고 산다는 것에 새로운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친 사람들 뒷바라지에 앞장서 나서며 돈이 아깝지 않았던 것도 다 그런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을 감쪽같이 따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도 딴사람 일이 아니라 수국이가 당한 일이었다. 그랬으면 틀림없이 자신에게 알렸어야 할 일이었다. 배신감과 원망은 방대근이보다는 지삼출에게 더 컸다. 수국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지삼출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국이를 각시 삼게 해달라고, 중매를 좀 서달라고 지삼출에게 얼마나 졸라대고 매달렸는지 몰랐다. 그런데 수국이가 그런 흉한 일을 당했으면 의당 자신에게 알려 그놈을 죽이고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도망도 함께 갔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을 빼놓고 둘이서만 일을 하느라고 그놈을 죽이지도 못했고, 자신을 이 꼴로 만든 것이었다.

지삼출의 마음을 되짚어 생각해 보기도 했다. 수국이가 몸을 망쳐버려 시집가기는 틀렸으니까 자신에게 그 일을 숨긴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대목만 생각하면 그만 미칠 것만 같았다. 자신의 마음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수국이가 몸을 망친 것은 분명 몸을 망치지 않은 것만 못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처녀가 아니라는 마음 찜찜함은 그놈에게 원수를 갚는 것으로 씻어버릴 수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그놈을 죽여 없애기만 하면 수국이를 얼마든지 새 각시로 맞이할 수 있었다. 수국이가 그놈에게 마음을 두는 것도 아닌데 처녀고 처녀가 아니고는 아무 흠이 아니었다. 미친개한테 잘못 물린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고, 첫날밤에 소금물로 씻어버리면 기분 말끔해질 일이었다. 그리고 수국이가 그 일로 다치게 된 마음을 감싸고 쓰다듬어주면서 얼마든지 깨 쏟아지게 잘살 수 있었다. 이런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지삼출이 자신을 빼돌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고 속이 타 머리를 벽에 박치고 죽고 싶었다. 그 절박한 심정과 함께 수국이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사무치고 있었다.

헌병대에서는 지삼출이하고 방대근이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대라고 두들겨댔다. 오로지 수국이를 다시 만나야 된다는 생각으로 그 매질을 견디어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나야 했다. 살아나서 수국이를 찾아야 했다. 수국이는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었다. 마음도 얼굴만큼 고왔다. 그 고운 마음을 쓰느라고 미선소에 다니다가 그 꼴을 당한 것이었다. 그런 수국이를 각시로 삼아 알뜰살뜰하게 아끼며 한세상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헌병대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 수국이를 망친 그놈의 말 한마디가 바로 목을 달아매는 동아줄이었던 것이다. 그 한마디 앞에서 자신의 결백은 송두리째 거짓말이 될 뿐이었다. 그놈이 어째서 그런 엉뚱한 거짓말을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서무룡은 고개를 젖혀 머리를 벽에 기댔다. 이대로 죽어가야 한다는 절박함 앞에서 그는 숨이 막히고 있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유치장을 탈출할 방법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줄기차게 유치장을 탈출할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그것만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백남일은 서무룡이가 자기를 해친 자가 아님을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 동료들에게 했던 말과 맞추기 위해서 공범자로 지목하고 말았다. 범인들을 잡기 위해 백남일은 동료 헌병들에게 사건 당시를 진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술이 취한데다 사방이 어두워 범인들의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만 순간적으로 깨달은 것은 그들이 둘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료들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체면문제였다. 그래서 네댓 놈에게 당한 것이라고 둘러 붙였다. 백남일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술이 취했다고는 하지만 단 두 놈에게 그렇게 다쳤다는 것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남자로서의 체면도 그렇고, 헌병으로서의 체면은 더욱 그랬다. 백남일의 진술에 따라 헌병대에서는 범인들 검거에 나섰다. 제일 먼저 덮친 것이 방대근이네 집이었다. 그러나 집은 이미 비어 있었다. 잠복조를 남긴 헌병대에서는 부두노동판 조사와 동시에 전화망 수사를 펼쳤다. 그런 것을 모르고 방대근이네 집으로 정신없이 내달아간 서무룡이는 잠복조에게 덜컥 붙들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가 그 짓얼 혔음사 그 사람덜하고 진작에 도망갔제 머 묵자것 있다고 남어 있었겄소."

서무룡은 매질을 당하면서도 이 말을 피를 토하듯 외쳐댔다. 그 말은 일번헌병들에게도 어느만큼 먹혀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서무룡이가 그 처녀를 처지였는데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것이라는 사연이 덧붙여져 헌병들은 그 점을 백남일에게 알리며 사실 확인

을 하고자 했다. 그때마다 백남일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놈이 틀림없다니까! 같은 헌병인 내 말을 안 믿고 그놈 말을 믿겠다는 거야 뭐야."

백남일의 이런 우격다짐에 헌병들은 더 말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백남일은 처음과는 달리 새로 생긴 감정으로 그자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자가 수국이를 좋아한 놈이라는 것이 몹시 감정을 상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당한 분풀이를 몽땅 그놈한테 해버리고 싶었다.

"다 조사고 뭐고할 것 없어. 그놈이 틀림없으니까 다른 놈들 못 잡으면 그놈부터 당장 총살시켜 버려."

백남일은 동료들에게 거침없이 내뱉고는 했다. 백종두는 군산부청에부터 들러 쓰지무라에게 문안을 올린 다음 병원으로 인력거를 몰았다. 병원으로 가면서도 그는 못내 마음이 언짢았다. 아들놈이 일으킨 말썽이 더없이 속상하고 창피스러웠던 것이다. 아들이 눈병신이 될지도 모르고, 남자 구실을 못하게 될지도 모를 만큼 심하게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도 바로 올라오지 않은 것은 사무가 바쁜 탓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심하게 봉변을 당한 내막을 듣고 나자 그만 속이 뒤집히고 말았던 것이다.

병신 같은 놈의 새끼! 차라리 뒈질 것이지!

감정은 이렇게 치받쳐 올랐다. 토지조사사업 실시를 위해 일이 정신없이 바쁘기도 했지만 그 감정을 다스리느라고 일부러 며칠을 보냈다. 남일이 놈은 헌병대에 들어가면서 좀 사람 노릇을 하는가 싶었다. 헌병 노릇도 곧잘 해내는 것 같았고, 정미소며 미선소 관리도 썩 잘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탈을 내고 만 것이다. 그것도 다른 일이 아니고 계집 하나를 잘못 건드려 큰일을 다 망치고 드니 더욱 기가차고 한심스러웠다. 그 계집이라는 것이 양갓집 규수라면 또 몰랐다. 기껏해야 미선소에서 일하는 하찮고 천한 계집 하나를 건드려놓고 그런 봉변을 당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계집은 천할수록 다루기가 쉽고, 사내는 천할수록 부리기가 쉬었다. 미선소에서 일하는 계집이라면 더 볼 것이 없었다. 천하기로 더 바닥일 수가 없고, 가난하기로 더 심할 수가 없을 터였다. 그런 처지의 계집 하나 요령 좋게 다루지 못한 아들놈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내 나이 몇이라고 그런 요령도 없는 것인지 안타까울 뿐이었다. 자신이 아들 놈의 나이 적에는 그 어떤 계집이든 계집 다루는 요령은 통달해 있었던 것이다. 백종두는 생각할수록 속이 상해 연상 혀를 차댔다.

"빙원 다 왔구만이라우."

인력거꾼의 외침이었다. 백종두는 인력거에서 천천히 내렸다. 아들을 대하더라도 화를 내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미우나 고우나 자식이었고, 어쨌거나 몸이 다쳐 고생하고 있는 건 아들이었던 것이다. 간호원을 따라 병실로 들어서던 백종두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아니, 니가... 니가 남일이여?"

백종두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눈앞에 있는 건 아들의 얼굴이 아니라 온통 붕대뭉치였던 것이다. 붕대 사이로 드러난 것은 눈 하나와 입뿐이었다. 코마저도 붕대로 가려져 있어서 눈 하나와 입만으로는 도저히 아들인 것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 남일이구만요. 일 바쁘신디 멀라고 오셨능게라."

백남일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집에서 미리 통고도 없이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나자 그는 너무 당황하고 겁 질려 있었다. 그는 평소부터 아버지 앞에서는 주눅 들고 쭈뼛거리는 처지였다. 그런데 이번에 저지르고 당한 일들이 떳떳치 못해 더욱 기가 죽고 있었다.

"이놈아, 요것이 무신 꼬라지여!"

백종두는 벌컥 소리를 질렀다. 화를 내지 말자고 미리 마음을 다졌으면서도 생각보다 많이 다친 아들을 보자 그만 울화가 치솟고 말았다. 백남일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아무 면목도 없었고 겁도 났다. 아버지는 화가 났다 하면 때를 가리지 않고 긴 담뱃대를 휘둘러댔다. 여기서는 담뱃대가 없으니까 바로 주먹질을 해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놈아, 지집질이고 첩질이고 헐라먼 야물딱지게 헐 일이제 요것이 무신 꼬라지냔 말이여. 몸 상허고 망신 사고, 요것이 어디 나잇살이나 묵은 사내자석이 헐 일이냐. 쯧쯧쯧쯧..."

빠르고 세차게 혀를 차대는 소리에 백종두의 역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소리에 따라 백남일의 고개는 더 수그러들고 있었다.

"니 눈언 빙신 되는 것이다냐?"

백종두는 담배를 거칠게 뽑으며 아들의 속을 것질러대는 투로 물었다.

"잘 모르겄는디... 일본에 가먼 지대로 나슬 수도 있다등마요."

"헹 팔자에 없는 일본 귀경허게 되야서 아조 쪼엇컸구나!"

백종두는 담배연기를 후욱 소리나게 내뿜었다. 주먹이 날아오지 않는 것만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백남일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었다.

"니럴 해꼬지헌 놈덜언 잡었다냐?"

백종두가 묻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니었다. 순서대로 하자면, <니 붕알 다친 것언 어찌 된다드냐>였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을 물을 수는 없었다. 서로 민망하고 옹색스러운 일이었다.

"저어... 한 놈언 잡았고 다른 놈덜언 안직..."

"그나저나 일본얼 갈라먼 하로라도 얼렁 가얄 것 아니다냐."

백종두의 어조는 약간 누그러지고 있었다.

"예에... 긍게로... 병원서 허라는 대로... 메칠 있다가..."

백남일은 어물거리고 더듬거리며 슬금슬금 대답을 피하고 있었다. 불알의 부기가 가라앉아야 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근디, 니가 손댄 그 가시네넌 대체 뉘집 딸년이간디 이 난리굿이냐."

"저어... 애비넌 없고 동상 놈이 한나 있는디, 그놈이 부두 막노동꾼이라..."

"아니, 애비도 없는 집구석이먼 째지게 가난헐 것인디, 미선소에 나댕기넌 꼬라지에 니가 손얼 댔으먼 감지덕지가 아니고 박찼다는 것이여? 그년이 그거 어찌 생게묵은 년이다냐!"

백종두는 어느덧 아들의 편이 되어 열이 오르고 있었다.

"그 수국이란 년이 원체로 인물이 이쁜디다가..."

"머시여? 니 시방 머시라고 혔냐, 수국이?"

백종두는 깜짝 놀라며 언성을 높였다.

"예에, 그년 이름이 수국인디요."

백남일은 멀뚱하게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년이 죽산면서 살았지야?"

"그것언 잘 몰르겄는디요."

"이 얼빙아, 지집얼 손댈라먼 그년 내력보톰 소상허니 알아얄 것 아니여!"

백종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수국이는 흔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리고 얼굴이 예쁘고, 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보면 하시모토가 몸 달아 했던 바로 그 처녀가 틀림없을 것 같았다.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버려 하시모토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그리도 난처하게 만들었던 그 처녀가 군산으로 숨어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처녀를 아들놈이 손댄 것이었다. 이 일을 하시모토가 알면 어찌 될 것인가. 백종두는 그만 가슴이 서늘해졌다. 보나마나 하시모토와의 관계는 끝장나는 것이었다. 하시모토는 한동안 그 처녀에게 홀딱 반해 마누라가 일본에서 건너오는 것까지 막고 있을 지경이었고, 요즘도 가끔씩 입맛을 다시며 그리워하는 형편이었다. 자신이 <수국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하시모토가 그 어설프고 서투른 소리로 날마다 되풀이해댄 탓이었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아들놈이 그 처녀를 범하고 말았으니 이걸 하시모토가 알아서는 절대 안 될 일이었다. 하시모토가 얼마든지 오해할 수도 있었다. 자신이 그 처녀를 빼돌려 남일이 놈에게 붙여줬다고 한들 꼼짝없이 그 오해를 뒤집어쓰게 될 판이었다.

", 수국인지 먼지 허는 그년 이름 아무헌티나 까발리고 그러지야?"

백종두는 아들을 험상궂게 노려보았다.

", 아닌디요..."

"니 큰 탈 안 만낼라먼 지끔보톰 다시넌 그년 이름 주딩이에 담덜 말러. 알아듣겄어!"

"예에... 근디 무신 일인디요? 수국이럴 아부지도 아시능게라?"

"이놈아, 또 수국이여!"

백종두는 버럭 소리치며 주먹을 치켜들다 말고 입을 앙 다물더니,

"이 모지래넌 놈아, 시키는 대로나 혀. 니놈이 주딩이 놀려대서 그 소문이 죽산꺼정 퍼지는 날에넌 우리 집안 폭싹 내래앉을 것잉게 그런지나 알어."

그는 마구 혀를 차대며 돌아서 버렸다. 백남일은 병실을 나가는 아버지를 한쪽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요상허시. 저 영감탱이가 어째 저렁고? 그려, 그랬을 것이여. 수국이럴 눈독 딜였다가 놓친 것일 기여. 근디 나가 탁 입맛 다셔부러서 저리 분해허는 것 아니라고. 영감탱이가 늙어감스로도 욕심이 끝이 없어.

백남일은 아귀가 딱 맞게 아버지의 마음을 점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키들키들 웃어대고 있었다.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이 기분이 통쾌했던 것이다. 그건 난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아버지에 대한 승리감이었다. 수국이의 그 고운 얼굴과 함께 요 위에 번져 있던 빨간 피가 눈앞에 어릿거리고 있었다.

이틀이 지나 서무룡이는 헌병대에서 풀려났다. 헌병대를 나오는 그는 기운이 하나도 없이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얼굴에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사람다운 생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서무룡이는 큰길가에 멍하니 서서 눈을 껌벅거리고 있었다. 그는 며칠만에 다시 보는 거리가 영 눈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젯밤에 겪은 일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일은 분명 생시에 겪은 일인데도 어느 순간에는 꿈에서 겪은 일인지 생시에 겪은 일인지 모르게 혼란이 일어났다. 어젯밤 잠을 자다가 한밤중에 끌려나갔다. 뒤로 쇠고랑이 채워져 헌병대를 나갔다. 총을 든 헌병들이 양쪽과 앞뒤를 지키며 걸었다. 죽으러 가는 길일 것을 금방 깨달았다. 도망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도망갈 마음을 먹을 수도 없었다. 힘이 빠진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걸어 해변가에 이르렀다. 어둠이 진해 바다는 보이지 않았고, 갯내음과 함께 물결치는 소리가 바닷가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차가운 먼 하늘에 별들이 초롱초롱했다. 여기서 홍살시키려는 것인가... 눈물이 흘러내렸다. 홀로 살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다.

니가 첩에 자석이라 아부지도 성제간도 없는 것이여. 존 각시 얻어 니가 새끼덜 많이 낳고 잘살먼 그고적헌 설움 다 갚는 것이제. 이 에미 한도 풀리는 것이고.

어머니가 눈감으며 남긴 말을 눈물과 함께 씹으며 해변가를 한동안 걸어갔다. 배에 떠밀려 올라갔다. , 바닷물에 처박아 죽일라는 구나! 그 생각과 함께 불끈 힘이 솟구쳤다. 그렇게 죽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양쪽 어깨로 헌병들을 떠다밀고 머리로 박치기를 해댔다. 그러나 몰매를 맞고 쓰러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쇠고랑이 채워진 몸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노 젓는 소리만 삐끄덕거리며 찬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고기밥이 되는 것이 기가 막혔다. 아니, 그보다도 장가 한번 들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너무 억울하고 원통했다. 수국이, 수국이를 목이 타도록 불렀다. 수국이를 안아보는 것은 바라지도 않고 손을 한번만 잡아보았더라도 그렇게 억울할 것 같지는 않았다. 수국이의 누치만 보다 만 것이 너무 안타깝고 후회스러웠다. 싸움을 할 때처럼 힘있게 덤벼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수국이는 정녕 가시 좆친 꽃이고 냉기 서린 꽃이었다. 그런 마음을 먹었다가도 수국이의 싸늘한 눈길을 보면 그만 마음이 움츠러들고 말았다.

노 젓는 소리가 멎었다. 헌병들이 달겨 들었다. 헌병들은 다리와 몸통을 묶으려 들었다. 소리소리 지르며 발버둥질을 쳤다. 묶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배를 엎을 작정이었다. 배가 엎어지면 그놈들하고 함께 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을 당할 도리가 없었다. 몸통과 다리를 묶였다. 그리고 커다란 돌이 두 개 매달렸다. 바다로 던지기만 하면 그대로 가라앉을 판이었다.

"서무룡, 끝판인디 헐 말 있으면 혀."

나직한 조선말이었다. 서무룡은 깜작 놀랐다. 헌병 넷은 모두 왜놈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목소리의 주인은 아까 배에 떠밀리면서 스쳤던 사공 아닌 또 한 사람이었다. 서무룡은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어둠에 묻힌 그 사람의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담배, 담배 한대만 주시게라우."

"담배넌 안되겄구만."

"..."

"헐 말이 없는갑제."

"..."

"글먼 괴기밥이 되야겄제."

"아니, 아니, 헐 말이 있소. 긍게 말이요 이, 나넌 너무 원통허요. 죄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디 이리 죽이는 법이 어디 있다요. 나 잠 살래줏씨요, 나 잠 살래줏씨요."

"죄진 것이 없응게 살래돌라고?"

", 누구신지 몰라도 살래만 줌사 그 은공 평상 갚겄구만이라. 무신 짓얼 히서라도 평상 갚겄구만이라."

"무신 짓을 히서라도 평상 갚어?"

"야아, 살껍데기럴 빗겨서라도 그 은공얼 갚겄구만이라우."

"살껍데기럴 빗긴다고? 글먼 못헐 일이 없겄어?"

"하먼이라, 하먼이라."

그 목소리가 뭐라고 일본말을 했다. 그러나 헌병들이 우르르 달겨 들었다. 몸이 번쩍 들렸다.

"아이고메, 살래줏씨요. 죽어도 맘 안 변헐 것잉게 살래줏씨요오!"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지만 바닷물에 내던져지고 말았다. 손도 발도 움직일 수가 없는 채 몸은 가라앉고 있었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어 숨을 토해냈다. 짠물이 왈칵 밀어닥치며 숨이 막혔다. 그리고 기억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배 위에 누워 있었다. 못 견디게 추운 것을 느끼며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니가 맘이 변허먼 어찌 되는지 알겄지야?"

"야아, 알겄구만이라."

"살래주먼 무신 일이든지 다 헌다고?"

"야아, 똥도 묵겄당게라."

"되았어, 니럴 살래주겄다."

그동안 있었던 일은 구 누구한테도 발설을 하지 않겠다는 약조가 쓰인 종이에 손도장을 누르고 헌병대에서 풀려났다. 서무룡은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났다는 기쁨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두려웠고, 앞으로 무슨 일을 시킬 것인지 두려웠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언제든지 죽게 된다는 것이 두려웠다.

"서무룡씨, 배고프제라?"

서무룡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바로 어젯밤의 그 목소리였다. 서무룡은 무서움증으로 고개를 뒤로 돌리지 못했다.

"갑시다, 밥 묵으로."

서무룡은 화들짝 놀랐다. 그 사람이 팔을 잡았던 것이다. 그 목소리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젯밤보다 부드러워진 것이었고, 존대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서무룡의 무서움증은 어젯밤과 마찬가지였다.

"겁내지 말고 얼렁 갑시다."

그때서야 서무룡은 조심스럽게 눈길을 돌렸다.

"아니..."

서무룡은 자신의 팔을 붙들고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또 놀랐다. 그 사람은 자기 나이 또래밖에 되지 않았고, 키도 자신보다 약간 작았으며, 곱상하게 생긴 얼굴은 부드럽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서무룡의 상상 속에 들어 있던 그 사람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나이가 듬직한 그 사람은 몸집이 씨름꾼같이 크고 얼굴은 우락부락하게 생겨있었다. 한마디로, 절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저그 밥맛이 아조 존 디가 있소."

그 사람은 여전히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서무룡은 웃어지지가 않았다. 웃으려고 했지만 얼굴 전부가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서무룡은 그 사람에게 끌려가듯 걸음을 옮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서무룡은 다시 그 젊은 사람을 흘낏 훔쳐보았다. 그 키나 몸집이나, 싸우기로 들자면 한주먹감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젊은 놈을 한주먹으로 때려눕힐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온몸에 맥이 다 풀려버려 손가락 하나 오그릴 힘이 없었다. 자기보다 몸집이 작은 사람 앞에서 이처럼 기가 꺾이고 맥을 쓸 수 없는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두 눈으로 상대방을 똑똑히 보고 있으면서도 그가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험상궂게 생긴 사천왕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젯밤의 일은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나 양치성이라고 허요. 맘 편허니 묵으시요."

음식점 구석방에 자리 잡자 그 남자가 담배를 권하며 말했다.

"야아, 지넌 서무룡이..."

얼떨결에 이름을 대던 서무룡은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상대방은 이미 자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헌병대에서는 며칠 동안 별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묻고 기록했던 것이다.

"백남일이란 사람얼 잘 아요?"

"아니구만이라. 요분 참에 말로만 들었제 얼굴도 몰르는디요."

그건 헌병대에서 물었던 것과 똑같았다. 서무룡은 잔뜩 긴장했다.

"수국이란 시악씨허고넌 서로가 좋아라 허고 지냈소?"

"긍게 머시냐... 그런 심이제라."

이건 헌병대에서 물었던 말이 아니었다. 술직하게, 지 혼자 짐칫국 마신 것이제라, 하려다가 말을 바꾸었다. 순간적으로 창피스럽고 반발심이 생겨 그렇게 대답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얼매나 좋아혔소?"

"금메요, 장개 들고 잡았는디라."

"그 시악씨도 그리 맘 묵었소?"

"그 맘이야 잘 모르겄구만이라."

"글먼 백남일이가 웬수 같겄소 이?"

서무룡은 그만 쭈뼛해졌다. 자신의 마음 한복판을 찌르는 그 말에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맘이 좋기야 허겄소."

서무룡은 슬쩍 마음을 감추었다.

"죽이고 잡았지라?"

서무룡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아까의 말이 나뭇가지로 찌르는 것이라면 이번 말은 쇠꼬챙이로 찌르는 것이었다. 이 양치성이라는 사람은 헌병들보다 더 날카롭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에서 천불이야 올랐어도 엎어진 물이고 깨진 사발인디라..."

서무룡은 또 어물어물 마음을 감추려고 했다. 다시 조사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장개 들라고 맘 묵었든 짝얼 망쳐뿐 놈얼 죽일 생각이 없음사 그것이야 사내자석이 아니오. 근디 백남일이야 인자 안 죽여도 되게 생겼소. 지가 못된 짓 헌 죄로 빙신이 되게 생겼응게. 그리고, 당신언 앞으로 중헌 일얼 헐 것잉게 백남일이 일이야 깨금허니 잊어부러야 허요. 그리헐 수 있겄소?"

양치성은 정색을 하고 서무룡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서무룡은 어젯밤의 약속이 퍼뜩 떠올랐다. 그리고 바닷물로 내던져지던 공포가 몰려들었다.

"야아, 시키는 대로 허제라."

서무룡은 상대방의 매운 눈길에 주눅 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되았소. 인자보톰 나가 허는 말 잘 들으시요. 시키는 일만 지대로 허먼 팔자가 필 것잉게. 앞으로 헐 일이 무신 일이고 허니, 노동조합에 든 사람덜 중에서 누가 의병일얼 했는지 골라냈시요."

양치성은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의병이라고라?"

서무룡은 무슨 말인지 몰라 상대방을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 나가 허는 말 잘 들으시요. 무신 말인고 허니, 의병질 허든 놈덜이 몸얼 피해 노동판에 숨어들어 가조 그 조합원덜 틈에 끼였을란지도 몰르요. 그런 놈덜얼 쥐도 새도 몰르게 찾아내라 그것이오. 무신 말인지 알겄소?"

"의병질 허든 놈덜이라? 그러제라."

서무룡은 가볍게 대답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긴장이 풀렸던 것이다.

"자아, 요것 받으시오."

"요것이 머시다요?'

"돈이오. 일얼 허자면 더러 술도 묵어야 헐 것잉게."

"..."

"요분 일만 잘허먼 막일 안허고 편허니 살게 맨글어줄팅게."

서무룡은 점심을 먹고 양치성과 헤어지자마자 사람 없는 뒷골목을 찾아 들었다. 아까 받아 넣은 봉투를 찢었다. 거기서 나온 돈은 20원이나 되었다. 서무룡은 믿을 수가 없어 다시 세어보았다. 그러나 그 돈은 틀림없이 20원이었다. 서무룡은 돈을 재빨리 주머니에 감추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서무룡은 뒷골목을 벗어나 큰길까지 나오면서도 가슴이 벌떡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꼭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큰 목돈을 만져본 일이 없었다. 그 돈은 돌을 고른 일등미 두가마니 값이었고, 한 달 내내 뼈 빠지게 막노동해야 하는 품값이었다. 그러나 계산이 그럴 뿐이지 제아무리 열성으로 노동판에서 일을 해보았자 그런 목돈은 만질 수가 없었다. 품값이 일당인 데다가 비가 오고 눈이 오면 공치는 날이었다. 일당은 푼돈으로 바스러지게 마련이고, 공치는 날이면 또 까먹고 해서 20원 목돈을 쥐기란 평생 가도 어려운 일이었다.

서무룡은 눈앞이 훤히 열리는 기분이었고, 세상이 뒤바뀐 느낌이었다. 분명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뒤바뀐 세상이었다. 꼭 죽는 줄만 알았었는데 목숨이 살아나고 이런 큰돈까지 얻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다. 어젯밤 몸이 묶여 돌덩어리가 매달렸을 때 살려주기만 하면 정말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똥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먹으라면 먹을 수 있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시킨 일은 똥을 먹으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큰돈까지 주었다.

"요분 일만 잘허먼 막일 안허고 편허니 살게 맨글어줄팅게."

살 껍질을 벗겨서라도 살려준 은공을 갚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쪽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 사람은 두렵고 무서우면서도 고맙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정말 편하게 살 팔자가 열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동판에서 평생을 굴러보아야 잘살 가망이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앞길이 열리는 것도 같았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시키는 일을 열성으로 하는 것뿐이었다. 서무룡은 마음을 새롭게 다잡았다. 그는 뒤로 미뤄두었던 수국이의 일을 다시 생각했다. 잘살 수 있게 된다면 수국이는 더욱 필요했다. 수국이를 호강시켜 가며 알뜰살뜰 살고 싶은 욕심이 불현듯 강하게 일어났다. 그는 손판석의 집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허허, 자네가 쌩고살얼 당했네그려. 그래도 이만허니 풀려났으니 얼매나 다행인가. 쯧쯧쯧쯧..."

그동안 겪었던 서무룡의 이야기를 듣고 난 손판석을 못내 안쓰러워했다. 그러나 서무룡은 자신이 겪은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젯밤보터 오늘까지 일어난 일은 완전히 빼버리고, 헌병대에서 더 조사할 것이 없으니까 풀어준 것으로 어물어물 때워 넘겼다.

"근디 말이오, 인자 나가 수국이럴 찾어야 될 판인디, 다덜 어디로 갔는지 갤차주시게라."

"그것이야 나도 몰르는구마."

'아니, 아재도 몰라라?"

", 니도 수국이가 그리 당했다넌 대목꺼정만 알았제 그리 일 저질르고 급작시리 뜰 줄이야 몰랐당게."

손판석이도 한 가닥은 접고 있었다.

"참말이다요?"

"허먼 참말이제."

서무룡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토해냈다.

 

밤 깊은 산골짜기에는 솔바람소리가 가득했다. 솔바람소리에는 추위가 실려 있었다. 그믐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달이 하늘 한쪽에 오롯이 박혀있었다. 반 넘게 몸을 깎아먹히면서 시나브로 빛을 잃어가고 있는 달은 창백했다. 사위어가는 달빛은 산골짜기에 도사린 어둠을 제대로 사르지 못한 채 산줄기들의 육중한 윤곽만 드러내고 있었다. 솔바람소리에는 간간이 이상한 소리가 길게 섞이고 있었다. 추위를 타는 산짐승들의 울음소리였다. 솔바람소리는 바람결을 따라 사무치는 울음이듯 드세지다가 자지러지는 흐느낌이듯 잦아들다가 다시 몸부림하듯 억세지고는 했다. 산골짜기를 끊임없이 비질해대는 그 솔바람소리에 씻겨 내려가 달빛은 골짜기에서 더 흐린지도 몰랐다. 솔바람소리에 가끔 산짐승들의 울음소리만 길게 섞이고 있는 골짜기에서 인적이라고는 느낄 수가 없었다. 흐릿한 달빛 아래서 바람막이 하느라 일부러 낮춰 지은 화전민의 집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산골짜기의 둔덕 아래 옴폭한 자리에는 집 두 채가 작게 웅크리고 있었다. 불빛이라고는 없는 그 두 채의 집은 얼핏 보아서는 나뭇더미 같을 뿐이었다.

한쪽 집 방문이 조금 열렸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 나왔다. 솔바람소리가 거친 물굽이처럼 솟겨 있어나고 있었다. 치마가 바람에 펄럭여댔다. 여자가 잠시 머뭇거리듯 하다가 걷기 시작했다. 사립을 벗어난 여자가 펄럭이는 치마를 여몄다. 그리고 산비탈을 빠르게 올랐다. 세찬 바람결에 길게 땋아 내린 머리채가 한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산짐승의 울음이 슬픈 가락이면서도 섬뜩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자의 걸음걸이에는 주춤거림이 없었다. 여자는 비탈을 조금 더 오르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여자의 머리 위로는 굵은 소나무가 솟아 있었다. 나이든 소나무는 실한 가지들을 옆으로 뻗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손에 감아쥐고 있던 끈을 풀었다. 끈이 길게 풀리면서 바람을 탔다. 여자는 발뒤꿈치를 들고 팔을 있는 껏 뻗쳐 끈을 소나무 가지에 걸쳤다. 소나무 가지에 걸쳐진 하얀 끈의 한쪽 끝이 바람에 나부꼈다. 여자는 그 끝을 가까스로 잡아 다른 쪽 끝과 묶었다. 끈은 하얀 고리가 되었다. 여자는 고리를 한 손으로 잡은 채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뒤돌아선 여자는 몇 걸음을 옮겨 큼직한 돌 하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힘들여가며 돌덩어리를 소나무 아래로 옮겼다. 여자의 가쁜 숨소리가 솔바람소리에 실려 가고 있었다. 여자는 돌 옆에 짚신을 나란히 벗었다. 잠시 짚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여자는 버선발로 돌 위에 올라섰다. 긴 머리채 끝에 묶인 빨간 댕기가 몸부림치듯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수국아... 수국아..."

감골 댁은 잠결인 채 옆자리를 더듬었다.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아이고메, 수국아! 수국아!"

감골 댁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잠이 깬 눈에도 딸은 보이지 않았다.

"어찌 그러시요?"

지삼출의 아내 무주 댁이 눈을 부비며 일어나 앉았다.

"어이, 수국이가 없네, 수국이가!"

감골 댁은 절박하게 소리치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소피 보러 나갔겄제라 이."

잠에 젖은 필녀의 말이었다.

"아닌디, 나가봐야 쓰겄소."

무주 댁이 치마 말기를 끌어올리며 일어섰다. 감골 댁은 벌써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이고 참, 사람이 죽기가 그리 쉽간디? 잠덜도 안 자고 무신 난리여."

무겁게 몸을 일으킨 필녀는 이렇게 툴툴거리며 머리를 득득 긁어댔다.

"수국아아! 수국아!"

감골 댁은 다급하게 딸을 불러대며 부엌으로 뒷간으로 내닫고 있었다.

"예 말이오, 만복이 아부지! 얼렁 일어나 봇씨요. 수국이가 없소, 수국이가!"

무주 댁은 남편을 깨우느라고 방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누나가 어쨌다고라?"

방에서 먼저 뛰쳐나온 건 방대근이었다. 그 뒤를 이어 지삼출과 배두성이가 허둥지둥 밖으로 나왔다.

"아이고메, 이년이 기연시 일 저질러부렀능갑네. 대근아, 이 일얼 어쩔끄나!"

감골 댁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다덜 얼렁 찾아내드라고!"

지삼출이 사립 밖으로 내닫고 있었다. 그들은 우루루 지삼출의 뒤를 따랐다. 뒤늦게 방에서 나온 필녀는 사람들이 밖으로 몰려나가는 것을 보고야 정신이 들었다.

"음마, 참말로 일 저질렀능갑네."

필녀는 날쌘 동작으로 마당을 벗어났다.

"수국아아... 수구욱아아!"

감골 댁이 딸을 목 놓아 부르는 소리가 바람 부는 골짜기를 울리고 있었다.

"수국아, 수국아아!"

"수국아 어딨냐, 수국아아-"

다른 사람들도 사방으로 흩어지며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저그다, 저그! 수국이 저그 있어!"

앞장섰던 지삼출이가 외쳐댔다.

"머시라고! 어디라고?"

"어디여, 어디?"

사람들은 허둥지둥 지삼출이 쪽으로 방향을 바꿔 달리기 시작했다. 지삼출이가 달려 올라가고 있는 그쪽 소나무 가지에 사람의 몸뚱이가 측 늘어져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그 모습을 보았다.

"아이고 이년아, 수국아..."

감골 댁은 비틀비틀하다가 쓰러졌다.

"아줌니, 왜 이러요. 정신채리씨요."

무주 댁은 남자들을 뒤따라 뛰려다 말고 쓰러진 감골 댁을 붙안았다. 그 옆을 지나쳐 필녀가 비탈을 치올라가고 있었다.

"얼렁 받쳐라, 받쳐!"

수국이의 하체를 받쳐 올리고 있는 지삼출이 막 소나무 아래 다다른 방대근과 배두성이에게 외쳐댔다. 수국이의 몸은 세 남자들의 손에 받들려 내려졌다.

"죽어부렀다요?"

울음덩이 같은 방대근의 말이었다.

"아니여, 안직 온기가 있어. 얼렁 업고 내래가자."

지삼출과 배두성은 수국이를 방대근의 등에 업혀주었다. 방대근은 양쪽으로 지삼출과 배두성의 부축을 받으며 정신없이 아래로 뛰기 시작했다.

"어찌 되았소?"

필녀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러나 배두성은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

"참말로, 보기보담언 맘이 독허시. 그 인물 아깝고 물쌍혀 으쩌까이."

필녀는 목이 메며 발길을 돌렸다.

"아이고메 수국아, 이년아아!"

무주 댁에게 붙들려 있던 감골 댁은 통곡을 터뜨리며 딸에게 매달리려고 했다.

"안직 맥이 있응게 가만있으씨요."

지삼출이 감골 댁을 막았다. 그의 말은 <온기>에서 <>으로 바뀌어 있었다.

"머시라고, 수국이가 살았다고?"

"안직 몰릉게 가만있으랑게라."

지삼출의 말은 어느 때 없이 퉁명스러웠다. 감골 댁은 더 말이 없이 딸을 업은 아들의 뒤를 허둥거리며 따랐다.

"아이고, 부처님. 산신님, 관세움보살님, 살래주십소사. 우리 불싼헌 새끼 살래주십소사. 평상 시집 못 가고 혼자 살아도 존께 살래주십소사. 존 일 헌다고 지가 눈감기 전꺼정언 살래주십소사. 이년아, 이 무정한 년아, 이 에미 두고 니가 먼첨 갈라는 것이 어디서 보배운 것이여. 니 먼첨 보내고 이 애미가 어찌 살아질 것이냐. 니 따라 이 애미 죽어불먼 대근이넌 혼자 어찌 될 것이냐. 이년아, 야속한 년아, 아무리 앞질이 각다분혀도 거그꺼정언 생각히야제. 아이고, 부처님, 산신님..."

감골 댁은 손바닥을 맞비비며 실성한 것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이, 찬물 한 그럭 떠오소."

지삼출이 마당으로 들어서며 아내 무주 댁에게 일렀다.

"방 좁은 게 여자덜언 들어오지 마씨요."

물 사발을 받아 든 지삼출의 냉정한 말이었다. 나도? 하는 얼굴로 감골 댁이 지삼출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지삼출은 매정하다 싶게 돌아서 방으로 들어가더니 방문을 닫아버렸다.

흐린 불 아래 수국이는 반듯이 뉘어졌다. 지삼출은 수국이의 치마 말기를 풀었다. 그리고 수국이의 발뒤꿈치를 번갈아 가며 쳐댔다.

"코에 귀 대고 있어봐라."

지삼출이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는 방대근이에게 일렀다. 방대근이는 잽싸게 무릎 꿇어 앉으며 제 누나의 코에 귀를 갖다 댔다. 지삼출은 방대근의 반응을 살펴가며 계속 수국이의 뒤꿈치를 쳐댔다. 그러나 방대근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래 갖고넌 안 되겄다."

지삼출은 벌덕 일어나더니 수국이의 배 위에 걸터앉듯 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지삼출을 가슴을 눌렀다가 손을 탄력 있게 재빨리 떼고 다시 누르고 하는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건 동학군과 의병생활을 하면서 익힌 치료법이었다. 어지간한 약초들은 식별해 내고, 그 쓰임새를 알게 된 것도 그때의 경험이었다.

"무신 소리갸 나는 것 같으요!"

방대근이가 소리쳤다.

"그려? 더 똑똑허니 들어봐."

지삼출의 목소리도 활짝 피어났다. 지삼출의 이마에는 진득한 땀이 내배고 있었다.

"이 맞소, 숨이 티였소. 숨얼 쉬요!"

방대근이의 생기 넘치는 외침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머시여, 수국이 숨길이 티였다고!"

방문이 벌컥 열리며 감골 댁이 뛰어들고 있었다.

"엄니, 누나가 살아났소!"

"아이고메, 꿈이냐 생시냐!"

감골 댁과 방대근이 얼싸안았다.

"아이고, 그나저나 집 나간 것얼 금세 알아낸 것이 천행이여."

지삼출이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휴우 한숨을 토해냈다.

"아이고, 자네가 우리 수국이 살래냈네. 자네 은공이 하늘이시."

감골 댁이 지삼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니구만이라. 아줌니가 수국이 나간 것얼 금세 알아챘응게 그리 됐제라. 쬐깨만 늦었음사 될 일이간디요. 무신 꿈이라도 꿨습디여? 그리 용케 알아내지게."

", 꿈얼 꿨구만. 금메 말이시. 쟈덜 아베가 뜸금 없이 뵈등마. 화럴 냄스로 나럴 막 나무래는 것이여. 무신 일로 그런지넌 몰르겄는디, 그러고넌 후딱 어디로 가부렀다. 그래 놀래서 잠얼 깨봉게 수국이가 없드란 말이시."

감골 댁은 고개를 끄덕이며 쌈지를 꺼냈다.

"우리 인자 들어가도 되겄소?"

방문을 빠끔하게 열고 고개를 디밀며 무주 댁이 남편의 눈치를 보았다.

"들어오기넌 오는디 정신없이 시끄럽게 해서넌 안 될 것잉마. 배 서방, 우리 나가서 담배나 한 대썩 꼬실리세."

지삼출이 몸을 일으켰다. 그때까지 무슨 일을 해야 좋을지 몰라 마음만 다급해서 우왕좌왕했던 배두성은 비로소 긴 숨을 내쉬며 방을 나섰다.

"산중이라서 긍가 한겨울이시. 닌장맞을, 또 한해가 가네그려."

담배연기를 바람에 날려 보내며 지삼출이 중얼거렸다.

"저리 아슬아슬허게 살아났는도 또 딴 맘 묵으면 어쩐다요?"

배두성이가 지삼출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걱정스러워했다.

"글씨, 에진간히 맘이 독허지 않음사 그리 못헐 것잉마. 죽는 무섬증에 정얼 띠게 된께로."

"근디, 사람 맘얼 어찌 안당가요. 저 큰 애기도 이쁜 얼굴만 봄사 그리 독헌 일 저지를지 누가 알었겄소."

"그렇기도 허제. 인자 더는 딴맘 못 묵게 옆에서덜 다둑다둑 잘히야제."

솔바람소리는 여전히 골짜기를 훑어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흐린 달빛이 서린 건너편 산줄기를 바라보며 담배만 빨아대고 있었다.

"자네넌 안직 소식 없능가?"

지삼출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소식이라고라?"

"장개들었으먼 애비가 돼얄 것 아니냔 말일시."

"흐흐흐... 밤일얼 헌다고 허는디 안직 그 소식언 없는디요."

"이 사람아, 그리 징허게 웃덜 말어. 장닭도 아니고 밤일 너무 재미지게 히서넌 그 소식 듣기 에로울 것잉게 알어서 혀. 금실 너무 좋아불먼 자석 귀허다는 말이 바로 그 말잉게로."

", 만주 갈람사 그 소식 없는 것이 더 나슬 것인디요."

"긍게... 그렇기도 허시."

"그나저나 공허 시님이 언제 오실랑고. 하매 오실 때가 되았는디."

배두성이는 아내 필녀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필녀는 이상하게도 만주로 떠나는 것을 고대하고 있었다. 자기보다도 밤일 재미를 더 좋아하는 것 같은 필녀가 더없이 예쁘다가도 만주로 떠나고 싶어 할 때면 슬그머니 미워지려고 했다. 필녀와 함께 사는 이 산골에서 한평생 살고 싶은 마음이 언제부턴가 살살 고개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공허 시님도 바쁘겄제. 진작 소식 접했을 것잉게 곧 오시겄제."

지삼출은 몸이 부르르 떨리는 한기를 느끼며 곰방대를 갈 작정이었다. 공허를 빨리 만나기 위해서였다. 일부러 금산사 사하촌의 김판술을 찾아간 것도 공허에게 하루라도 빨리 소식을 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하촌을 떠나면서 생각하니 연화사로 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연화사는 공허가 자리 잡고 있는 절이 아니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이라도 공밥을 얻어먹기에는 자기네 입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시주가 많은 큰절도 아니었고, 자기네 입들이 의병대장 송수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천수동이네 화전골로 방향을 바꾸었다. 화전골에 당도하자마자 곧 연화사로 혼자 떠났다. 예상했던 대로 연화사에 공허는 없었다. 주지승에게 이야기를 전해 놓고 되돌아왔던 것이다.

"아이고야 수국아 이년아, 나다 나! 나 에미여, 에미!"

방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이었다.

", 정신이 들었는갑소."

배두성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려, 인자 되았구만. 근디..."

지삼출은 무겁게 몸을 일으키며 시름 겨운 한숨으로 뒷말을 얼버무렸다. 수국이가 마음을 제대로 잡을 것인지 어쩐지, 수국이의 한평생이 어찌 될 것인지, 그지없이 마음 무거웠던 것이다. 지삼출은 불끈 화가 솟기면서, 그놈을 죽여 버리지 않고 살려둔 것이 괜한 인정을 베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수국이가 살아났기에 망정이지 만약 죽어버렸다면 대근이한테 톡톡히 원망을 들을 뻔했던 일이었다.

수국이는 제 어머니말고는 아무도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방에 들어갔던 지삼출도 그 기색을 알고는 그냥 되돌아 나왔다. 지삼출로서는 차라리 그것이 낫다 싶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수국이한테 무슨 말이든 한 마디 했어야 할 텐데 마음에 차는 마땅한 말이 없었던 것이다. 맘 야무지게 먹고 새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자니 너무 입에 발린 소리였고, 병으로 부모 앞서가는 것도 불효인데 손수 목숨을 끊는 것이야 더 말할 것 없으니 다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자니 너무 사람 속 몰라주는 앞뒤 막힌 소리였고, 하여튼 쓸 만한 말이 마땅찮았던 것이다. 그런데 수국이가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며 한정 없이 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수국이는 말을 제대로 못했고, 목을 움직이지 못했다. 목이 매달리는 바람에 목을 다친 것이었다. 감골 댁은 종종걸음을 치며 줄곧 눈에 눈물을 담고 있었다.

"저것이 저러다 빙신이 되야불먼 어쩌겄능가, 죽느니만 못헐 일이제."

감골 댁은 딱할 지경으로 애를 태웠다.

"아니구만이라. 약얼 구허고 있응게 너무 걱정 마씨요. 젊은 삭신잉게 금세 깨끔허니 나슬 것잉마요."

지삼출은 감골 댁을 대할 때마다 위로했다. 그건 말만이 아니었다. 목이 매달렸다고는 하지만 되살아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으니 그리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필녀는 자기네 친정에 웅담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지삼출은 필녀와 배두성이를 따라 산등성이를 넘어갔다. 날이 새고 나서야 밤새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을 알게 된 천수동이와 강기주도 약을 구하려고 나섰다.

"장인언 그냥 한집서 살자고 허는디 저 물건이 고집얼 세왔당게요. 시집얼 갔응게 친정얼 떠야 헌다고라. 말이야 그런디 속이야 나가 즈그 친정 밥 공짜로 파묵을랑가 무서와 그런 것이제라."

날랜 몸놀림으로 산길을 타며 앞서가고 있는 필녀를 부며 배두성이가 불만스러운 듯 하는 말이었다.

"허허허... 그것 똑똑헌 생각이구마. 아무리 봐도 자네가 마누래헌티 꼭 쥐여 사는 것 아니라고?"

지삼출이 불쑥 말했다.

"와따, 속 질르지 말게라. 한 주먹감도 안 되는 저런 것헌티 누가 쥐여 산다요."

배두성이는 불퉁스럽게 내지르며 그 두꺼운 입술에 잔뜩 심통을 물었다.

"웅담언 없어졌고, 이 멧돼지 쓸개럴 갖다 믹이 씨요. 웅담만언 못해도 요것도 뼈매디 다친 디넌 직방잉게라. 더군다나 큰 애기 몸이먼 효험이 금방 날 것이구만이라."

필녀의 아버지는 조금도 싫은 기색이 없이 선선하게 약을 내주었다. 멧돼지 쓸개는 역시 약효가 컸다. 몰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은 것을 칼로 갉아내서 그 가루를 찬물에 녹여 마셨다. 누르스름한 그 물은 진저리쳐지도록 쓰디썼다. 수국이는 어머니의 우격다짐으로 그 쓴물을 마셔가며 이틀 만에 목을 가누게 되었다.

"시님, 저것이 또 딴 맘 안 묵게 무신 존 부처님 말씸얼 잠 히주시게라. 우리야 무식해논께 무신 말로 저것 맘얼 돌릴 것인지 몰르겄구만요. 시님 말씸이먼 저것도 맘얼 달리 묵고 새 기운얼 채릴 것 같구만이라우. 시님 저 불쌍헌 것얼 어찌 잠..."

감골 댁은 공허가 승려인 것을 알게 되자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간절하게 합장하며 이런 부탁을 했다. 초면인 것을 가리지 않는 것을 평소에 마음 깊이 기도해 온 부처님에 대한 신심 탓이었다. 아무리 없이 사는 살림살이였어도 탁발 나온 스님이 사람 앞에 발을 멈추면 그때마다 쌀 한줌, 보리 한 보시기라도 올리며 합장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우러렀던 것은 부처님 모습이었지 스님들의 얼굴이 구면인지 초면인지 다지지 않았던 것이다. 죄 많은 중생은 누구나 다 똑같은 마음으로 신심을 키웠고, 그런 신심 앞에 모든 승려는 마음을 의지하고 쉴 수 있는 기둥이고 숲 그늘이었다.

"예에, 소승이 아는 것이 없어도 보살님 원이 그리 절절헝게 부처님 말씸얼 전해 보도록 허겄구만요."

아직까지도 머리모양이며 입성이 농사꾼 그대로인 공허가 감골 댁의 뜻을 정중하게 받아들였다. 공허는 수국이와 마주앉았다.

"소승의 꼴이 이러헌 것언 중 행색으로 순사 두 놈얼 죽였기 땜시 임시로 왜놈 순사덜 눈얼 피허기로는 이 방도가 질이라서."

공허는 일삼아 이 말부터 꺼냈다. 고개를 약간 수그린 수국이는 다소곳이 앉아 있기만 했다.

"부처님에 많고 많은 가르침 중에서 질로 크고 중헌 것이 둘이 있소. 그 첫 번찌가 탐욕얼 없애고 자비럴 행허라는 것이고, 그 두 번째가 목심 있는 것얼 살생허지 말라는 것이오. 근디, 나넌 명색이 중으 몸으로 순사럴 둘썩이나 목 졸라 죽였소. 요것이 살생이겄소, 아니겄소?"

이 갑작스러운 물음에 수국이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공허와 눈이 마주쳤다. 수국이는 공허의 눈을 쳐다본 채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살생 같기도 하고, 살생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스님의 물음이라 대답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쪽을 골라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수국이는 대답을 고르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살생이라고 생각허시오?'

공허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저어... 임진란 때 큰 시님덜이 나라럴 구헐라고 나섰다는 얘기럴 많이 들었는디, 그 생각얼 허먼 살생이 아닌 것도 같고... 잘 모르겄구만요."

수국이는 겨우 대답을 만들어냈다.

"맞소, 바로 맞혔소. 부처님이 말씸허신 살생이란 내 탐욕으로 눈이 멀어 남에 목심얼 앞뒤없이 죽이는 것얼 말허는 것이오. 허고, 살생얼 안 당헐라고 대들어 싸우다가 상대럴 죽이는 것언 살생이 아니오. 그것언 살생헐라고 뎀빈 놈덜이 응당 받게 되야 있는 인과응보다 그것이오. 무신 말인고 허니, 시상 이치럴 잘못 알먼 병이 되고, 지대로 잘 알먼 약이 되다 그 말이오. 요런 이얘기가 있소. 옛날에 두 큰 애기가 있었는디, 봄이 되야 너물얼 캐니라고 산에 들었는디, 너물 캐는 재미에 취해 자꼬 산중 짚이 들어가는 것얼 몰랐소. 그러다가 산도적덜헌티 덜컥 잽히고 말었소. 두 큰 애기넌 더 볼것 없이 몸얼 더럽히고 말었소. 목심이 살아나기넌 혔는디 한 큰 애기넌 금방 목매달아 죽어부렀고, 다른 큰 애기넌 죽는 것이 큰 죄라고 생각허고 삭발이나 허고 살라고 절얼 찾아갔소. 근디, 목매달아 죽어뿐 큰 애기넌 목심얼 경시헌 죄에다, 사람 노릇 다안허고 부모 가심에 못박은 죄로 자기 집 소로 환생혔소. 그래 평상얼 소로 일험서 그 죄닦음을 다혔소. 그런디 절얼 찾아간 딴 큰애기넌 머리도 못 깎고 백일기도럴 올렸소. 시님이 머리럴 안 깎아주고 기도만 올리라고 헌 것이오. 그 큰애기넌 날마동 더러운 몸얼 거둬주십소사 험스로 지극정성으로 기도럴 올리는 도리밖에 없었소. 그러다가 기도가 끝나는 날 관음보살 현몽얼 허고, 담날 신랑감얼 만내게 됐소. 장원급제허고 집으로 가다가 산길얼 잃어불고 몸이 다친 양반집 총각이었소."

수국이는 죄스럽고 면구스러워 고개를 더 수그렸다.

"그 총각언 큰 애기럴 보자말자 깜짝 놀랬소. 어찌서 그랬냐! 질얼 잃어분디다가 높은 디서 떨어져 몸꺼정 닻니 판이라 살아날 가망이 없어진 총각언 낙망얼 해부렀소. 산속서 죽게 된 자기 신세럴 생각래 봉게 총각언 기가 맥혔소. 바래고 바래든 과거급제럴 혔응게 인자 이쁜 각시 얻어 가난헌 집안 일으킴서 한바탕 늘어지게 살아볼 작정이었는디 그리 되야 부렀단 말이오. 그대로 죽기가 서러와 총강언 하늘얼 올려다봄스로 간절허니 빌었소. 지가 무신 죄럴 지어 이리 벌얼 내리신당가요. 지가 몰르고 지은 죄가 있으면 평상 종 일 험스로 갚을 것잉게 살 길얼 열어주십소사. 그리 빌다가 잠이 들었는디, 꿈에 이쁜 여자가 구름얼 타고 나타나서 따라오라고 손짓얼 혔소. 근디 그분언 감수로 병얼 든 관음보살님이었소. 너무 놀래서 잠얼 깨봉게 관음보살님언 간 디가 없고, 꿈에 관음보살님이 손짓허든 쪽에서 무신 소리사 가늘게 들려오고 있었소. 가만히 들어봉게 목탁소리였소. 총각언 그 서리럴 따라 걸어가서 절얼 찾아낸 것이도. 근디 총각이 물얼 떠내온 큰애기럴 보고 깜작 놀랜 것언, 그 큰애기 얼굴이 바로 꿈에서 본 관음보살님 얼굴허고 똑같었단 말이오."

수국이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가슴에 얹으며 고개를 들었다. 바로 눈앞에 잔잔하지만 젊은 생기가 초록빛인 양 내비치고 있는 스님의 눈이 있었다. 수국이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스심의 눈이 자신의 마음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총각허고 큰 애기넌 서로가 관음보살님이 점지헌 짝인 것얼 알아봤소. 이심전심이었든 것이오. 총각언 큰 애기헌티 청혼얼 했고, 큰애기넌 그 답으로 총각으 다친 몸얼 지성껏 돌보았소. 그래 두 사람언 혼인허고, 아들딸 많이 낳고 평상 잘 살었소. 부처님언 설허시기럴 몸언 맘얼 담는 그럭이라고 허셨소. 그렁게 알맹이넌 맘이고 껍데기넌 몸인 것이오. 그런 이치로 사람이 죽는다는 것언 맘이 껍데기인 몸얼 벗어불고 극락왕생허는 것이라고 말씸허신 것이기도 허요. 긍게로 중헌 것언 맘이제 몸이 아닌 것이고, 그 큰 애기덜 둘이 도적 놈덜헌티 몸얼 더럽힌 것언 너물얼 캐다가 손얼 까시에 찔리고, 벌얼 돌에 채이고 헌 것이나 하나또 다를 것이 없소. 흔헌 말로, 시상사 다 맘 묵기 달렸다는 말이 바로 부처님의 그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오. 허고, 목매달아 죽은 큰 애기가 소로 환생히서 평상 죄 닦음얼 헌 것언 첫찌로 목심얼 경시헌 죄요. 부처님이 말씸허시기럴 이 시상이서 질로 에로운 일이 만상 중에서 사람으로 몸얼 짓고 태어나기가 질로 에롭고, 그담으로 에로운 것이 바른 마음 지닌 불자 되기가 에롭다고 허셨소. 사람 하나가 죽고 새로 사람이 되어 태어나자면 만년에 만년으 세월이 흘러야 된다고 설하셨소. 그리 에롭게 태어난 목심얼 경시허는 것언 질로 큰 죄요. 그담이 함부로 목심 끊어 부모헌티 불효허는 죄요. 그런 죄넌 다 몸이 맘보담 중헌지 잘못 알고 저질른 어리석음이오. 이런 부처님의 말씸얼 명심허는 것이 좋겄소."

공허는 입에 침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이야기를 끝냈다. 늘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송구한 마음일 뿐이었는데 그런 말을 하자니 무척이나 힘이 들었고, 무슨 효력이 있을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수국이가 조용히 합장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공허로서는 너무 뜻밖이었다. 그는 마주 합장하며 기쁨이 어린 소리로 염송했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수국이는 속으로 공허의 염송을 따라서 했다. 그러면서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고, 사람에게 알맹이는 마음이고 몸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말이 가슴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수국이로서는 스님과 그렇게 가깝게 마주앉은 것이 처음이었고, 그런 뜻 깊은 말을 듣기도 처음이었다. 몇년 전 초파일에 어머니를 따라 금산사에 간 일이 있었다. 어머니는 오빠가 무사하게 돌아오기를 빌려고 등을 달려고 갔다. 그때 노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그런데 너무 어려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공허 스님의 법문은 못 알아들을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맺힌 데를 풀어주는 다정함과 아픈 데를 어루만져 주는 따스함에 젖게 했던 것이다. 수국이의 태도가 달라졌다. 밥을 제대로 먹었고, 얼굴에 가끔 웃음기도 드러났다. 감골 댁은 공허만 대하면 그저 합장을 했다. 공허의 호칭이 바뀌었다. 지삼출은 능청스럽고 짓궂게도 <공허 대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수국이의 마음을 돌려놓는 신통력을 발휘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공허는 그 소리만 들으면 질색을 했다. 지삼출과 공허는 다른 대원들과 함께 둘러앉아 앞일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인자 송수익 대장님허고 약조헌 대로 만주로 뜰 시기가 되았소. 뜨기 전에 우리가 헐 일이 있고, 상의해거 정헐 것도 멫가지가 있소."

공허가 제일 먼저 내놓은 것은 자금조달 문제였다. 그건 송수익이가 만주 땅 통화를 중심으로 터를 잡는 동안에 공허는 이쪽에서 추수철을 지내고 겨울로 접어들면서 쌀이 돈으로 바뀌는 것을 틈타 대원들하고 장만하기로 진작 결졍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 문제에 대한 의논이란 실행 날짜만 정하면 되는 것이었다.

"날자야 빨를수록 안 좋겄소. 그보담도 누구 집얼 털 것이냐가 더 중헌 일 아니겄소?"

지삼출의 신중한 대응이었다.

"맞소. 그간에 나가 쓸 만헌 집얼 멫집 골라놨소. 인심사잡고 왜놈덜헌티 홀딱 넘어간 놈덜 집으로."

공허의 여유 있는 대답이었다. 그다음에 의논이 오간 것이 만주로 떠나는 것에 대해서였다.

"긍게로... 만주넌 여그보담 서너 배는 춥고, 농사철이 되자도 안직 멀었응게 아그덜 미리 딜고 가서 고상시켜서야 쓰겄소. 근다고 남자덜만 우루루 나스먼 헌병놈덜헌티 의심 사기 딱 좋고, 그렁게 아그덜없는 집안보톰 뜨는 것이 어쩔랑가 모르겄소."

공허가 내놓은 의견이었다.

"근디, 국유지 조산지 먼지로 전답얼 뺏긴 사람덜이 달수록 많이 만주로 뜬다는 소문이든디, 우리가 늦게 갔다가 차지헐 땅이 없는 것은 아닐랑게라?"

천수동이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먼첨 뜨는 사람언 낮잠 자간디?"

지삼출의 웃음 담긴 말이었다.

"그 말이 맞소. 앞서간 사람덜이 그런 일이야 다 알아서 챙길 것이오."

"그러면 걱정 없겄소. 근디, 딴 의병덜도 우리맨치로 이리 짜갖고 만주로 뜨는 대가 있을게라?"

강기주가 공허를 보며 물었다.

"있고말고라. 북쪽으로 갈수록 압록강 두만강 넘은 의병덜이 많으요."

그 문제도 결정을 보았다. 그 결정을 제일 반가워한 것이 필녀였다. 아이가 없는 필녀네가 먼저 뜨는 가구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혔던 것이다.

"아니, 나주에 감너 금이 있어 돈이 있어. 여그보담 서너 배가 춥기만 허다는디 머시가 좋아서 그 야단이여!"

배두성이가 역정을 부렸다.

", 왜놈덜하고 쌈허기가 겁나는갑제? 맘이 변한 것이여 머시여?"

필녀는 야무지게 따지고 들었다. 그 기세에 밀리며 배두성은 어물거렸다. 감골 댁은 만주로 뜨는 문제를 놓고 고심했다. 만주로 뜨는 것은 군산으로 떴던 것과는 너무 달랐던 것이다. 만주로 뜨는 것은 큰아들. 큰딸. 작은딸 세 자식과의 이별이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자니 작은 아들이 쫓기는 몸이었다. 쫓기는 아들과 몸 버린 딸을 데리고 어디서 살아야 할 것인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대근이는 말할 것도 없었고 수국이도 만주로 뜨는 것을 바라는 눈치였다. 몸 버린 땅을 떠나고 싶은 것인지 어쩐지, 그 속마음을 알듯 말듯 했다. 그러나 캐 물을 수는 없었다.

"만주로 뜰라먼 그전에 느그 언니덜헌티 소식이나 전해야 허겄지야?'

"그러제라. 메칠 안 걸릴 것잉게."

수국이의 반색이었다. 감골 댁은 만주로 뜨기로 마음을 정하고 수국이와 함께 두 딸을 찾아보러 나설 수밖에 없었다. 공허와 지삼출은 다른 사람과 함께 일 떠날 준비를 갖추었다. 부잣집을 털러 떠난다고 해서 무슨 표 나는 무기를 가진 것이 아니었고 주먹밥을 싸고 짚신을 바꿔 신는 정도였다.

"시님언 인자 영 속인 되야 부렀소?"

지삼출이 짚신을 묶으며 물었다.

"요분 일 끝내고 빡빡 밀어불라요."

공허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들의 뒤를 방대근이도 따라나섰다.

"대근아, 니넌 안직 뼈가 덜 여물었다."

지삼출이 방대근의 앞을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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