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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1-7

27. 뻘밭

이동만의 집 앞에는 네댓 사람이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의 꺼칠하게 마른 얼굴이며 낡고 후줄근한 입성에서는 궁기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그들의 궁상스런 몰골과 큼직한 무쇠문고리가 달린 대문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닌장맞을, 어찌서 요리 오래 걸리는고? 새로 논얼 맹글어 부치는 것도 아니겄고."

한 사람이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이얘기가 꾀이는감만."

옆 사람이 마른 입맛을 다셨다.

"몰를 일이지라. 잘 풀리니라고 길어지는지."

유난히 삐쩍 마른 사람이 대문을 올려다보며 기운 없는 소리고 말했다.

"그나저나 가관이시, 멫년 새에 사람팔자가 요리 달라질 수도 있드랑가."

또 다른 사람이 높은 담을 꼬나보며 옆구리에 찌른 곰방대를 뽑았다.

"긍게 사람이 팔자럴 고치자면 눈치가 싸야 허는 법이여. 이 물건이 왜놈 앞잽이로 나서서 논 사딜이고 댕길 적에야 누가 미리 팔자가 필지 알았간디?"

"긍게 말이여. 그 째지게 가난허든 집구석 살림이 이리 고래등으로 변했시니 왜놈덜 심이 씨기넌 씬 거이로구만."

"무신 소리여? 다 우리 작인덜 깔고 앉어 애믹이고 피 뽈고 히서 악허게 모은 재산이제."

"어허! 그 소리 담 넘겄소."

"아이고메, 그나저나 탈 아니라고. 인자 와서 소작얼 띠이면 무신 수로 살란 것이여 잡것."

한 남자가 한숨을 푹 쉬며 돌담 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이래 속고 저래 속고, 애당초 논 팔아묵은 우리가 다 빙신이제 머."

다른 남자가 쓴 입맛을 다시며 담배쌈지를 꺼냈다.

"죽지도 사지도 못헐 망헌 놈으 시상이여, 어째야 좋을랑고......"

삐쩍 마른 남자가 한숨을 토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랑방에서는 역시 가난기가 흐르는 한 남자가 이동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사또 행차 나팔 분 지가 은제라고 인자 와서 뒷북 치덜 말고 썩 물러 가그라."

보료 위에 올라앉은 이동만은 고개를 외로 꼰 채 싸늘하게 내쏘았다. 당당한

말소리와 함꼐 그의 말소리는 여지없는 '......해라'였다. 요시다 앞에서 제대로 들지 못하는 눈길을 질정 없이 두리번거리며 말을 더듬거리고 어물거리는 빙충맞은 태도는 찾을 길이 없었다. 이동만은 언행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풍채 또한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누르끼리하게 궁상기 들었던 얼굴은 간곳이 없고 두 턱이 되도록 살이 찐 혈색 좋은 얼굴에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었다. 그 얼굴은 오두막이 기와집으로 변한 것만큼이나 뚜렷한 변화였다. 얼굴에 살이 찐 것처럼 몸에도 살이 올라 그의 몸집은 전보다 배로 커보였다. 거기다가 낡고 후줄근한 무명두루마기가 아니라 비단 바지저고리에 호박장식 달린 마고자까지 걸쳤으니 그 풍채가 가히 양반족보 자랑해도 좋을 만큼 당당하고 위압적이었다.

"어르신, 그거이 아니구만이라우. 논얼 팔 적에 평상 소작얼 부치겄다고 약조 안허셨는게라."

울상이 된 남자는 이동만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가 기어들고 있었다.

"어허! 또 그 소리."

이동만은 버럭 소리 지르며 긴 담뱃대로 놋재떨이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재떨이에서는 궐련꽁초 두어 개가 튕겨져 나와 방바닥에 굴렀다. 이동만의 앞에는 궐련갑과 성냥통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맛좋은 궐련을 피워오고 있었다. 그런데 긴 담뱃대는 오두막을 벗어나 초가일망정 큼직한 집으로 옮기면서 일삼아 장만한 것이었다. 지긋지긋한 가나을 벗고 마음대로 족보를 자랑해도 좋을 만큼 되었는데 양반 체통에 어울리는 긴 담뱃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담뱃대도 장터에 그냥 내다 파는 흔해빠진 것이 아니었다. 지리산 언저리에서 나는 10년 묵은 시누대를 고르고, 거기다가 인두 지짐으로 이태백의 시를 새겨 넣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물부리는 천한 백통으로 하지 않고 옥돌을 깎아 끼웠던 것이다. 그는 체통을 과시하거나 권위를 부릴 필요가 있을 때면 일삼아 그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워 물고는 했다.

"저어......긍게 머시냐......"

잔뜩 주눅이 든 남자는 눈을 힐끔거리며 그래도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허, 더 잔소리 말어. 무슨 소리럴 히도 소양이 없응게."

이동먼이 사정없이 무질러버렸다.

"참말로 이리 될지 알었음사 논얼 안 팔았을 것이구만이라."

원망스러운 얼굴로 남자가 토해낸 것은 말이 아니라 차라리 울음이었다.

"무신 새 날아가는 소리여, 시방! 그간에 5년 넘게 소작얼 내준 것도다 일본사람덜이 인정이 깊어서 그리 된 것이여. 그 은혜에 고마워허기넌 새로 인자 와서 느자구없이 소리여, 소리가. 그려, 니놈 돈 도로 내줄팅게 당장 사딜이겄어? 사딜이겄으면 사!"

"아이고메......"

이 말을 신음처럼 흘리며 남자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어금니를 어찌나 세게 맞물었는지 옆볼 아래로는 성난 이뿌리들이 드러나 보였다. 남자는 가슴에서 솟구치는 불덩이를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그 뱃속을 뒤집는 억지소리를 참아내지 못하면 그나마 일은 끝장이었다. 소작에 처자식들의 목숨 줄이 걸려 있었고, 이동만은 그 소작을 떼고 붙이는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것이다.

"어르신, 글먼 금년 1년만이라도 소작얼 부치게 히주시게라. 그간에 무신 방책얼 세울랑마요."

남자는 바싹 탄 입술로 애원했다.

"어허, 참말로 그 사람 벽창호시. 일본농꾼덜헌티 줄 논도 모지랜다넌 말을 멫분씩이나 혀야 알아듣겄어."

이동만은 또 담뱃대로 재떨이를 내려치며 눈을 부릅떴다.

"글먼 우리보고 어찌 살으라고 그러시능게라."

남자는 울부짖듯이 했다. 방바닥을 짚고 있는 거칠고 마디 굵은 두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허, 답답허고 앞뒤가 칵칵 맥힌 사람이시. 사람 사는 방도가 어디 농사만 짓고 사는 것잉가. 농사 아니라도 군산이다 목포다 부두럴 찾아가먼 쌀짐이다 목화짐이다 일거리가 태산 아니냔 말이여. 허고, 정 농사럴 짓고 살 판이먼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얼 일굼서 살아도 될 일 아니라고. 화전얼 허먼 해마동 소작 띠고 부치고 헐 걱정 없겄다, 이런저런 잡세 띠낄 걱정 없겄다, 신간 편털 안컸어. 고것이 맘에 안 들면 쩌어그저 만주로 가. 만주로 가먼 여그 징게 맹갱보담 열배고 시무배고 너른 들판이 늘핀허다는 소문 아니드라고? 거그서야 말뚝만 박으먼 내 땅이랑게 거그로 찾어가는 것이 좋겄구마."

이동만은 빙글빙글 웃으며 과한 친절까지 베풀고 있었다. 어금니를 악문 남자는 두 주먹을 부르쥐며 몸을 일으켰다. 주먹으로 이동만의 면상으로 후려치지는 못하더라도 욕이라도 속 시원하게 퍼부어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동만은 이미 옛날의 이도안은 아니었다. 머슴을 서넛씩이나 거느리고 있는 세도 당당한 양반이었고, 거기다가 일본 헌병대와 주재소까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일본인 대농장의 주임이었다. 소작인이 지주양반에게 대들었다가는 당장 덕석말이 몰매질을 당하는 판에 이동만의 위세는 그보다 몇 갑절이 컸던 것이다. 대문이 큰 체신을 과시하듯 나무끼리 맞갈리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반쯤 열리는가 싶더니 어깨가 처져 내린 그 남자가 밀려나왔다.

", 인자 나옹마."

"어찌 됐능가?"

"틀어진 것 아니라고?"

밖에서 서성이고 있던 사람들이 그 남자에게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일이 틀어져분 것 아니오?"

삐쩍 마른 남자가 다급하게 물었다.

"다덜 가세. 하늘이 내래앉어 부렀네."

그 남자는 헛것을 보는 것 같은 다 풀어진 눈으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 인종이 머시라고 혔는디? 세세하니 말 잠 히보소."

다른 사람이 그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세세허니 말허먼 멀혀. 속이서 천불만 일어나제. 없는 논에 농사 지묵을 생각 말고 군산이고 목포고 부두 찾어가 등짐 져묵고 살라대. 정 농사짓고 살고 잡으면 화전얼 일궈묵든지 만주로 봇짐 싸먼 될 일 아니냔 것이여."

그 남자는 비칠비칠 걸어가며 헛소리하듯 말하고 있었다.

"머시가 어찌고 어쩌!"

"에라이 순 개상녀러 자석!"

"날베락맞어 꼬드라질 놈겉으니."

"아이고, 어찌 저런 놈덜이 의병 손에 안 뒤졌능고."

사람들은 저마다 욕질을 해대고 침을 내뱉으며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들이 소작농사마저 짓지 못하게 된 것은 일본이주민들 때문이었다. 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와짝 밀려들던 일본이주민들은 의병의 기세가 드높아지면서 뜸해졌다. 그러다가 합방이 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다시 밀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농사꾼들은 큰 농장마다 자리를 잡았다. 농장에서는 그들에게 논을 우선적으로 배당했다. 결국 일본의 이주농민들이 늘어나는 만큼 조선 사람들은 소작을 잃고 땅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다덜 화롯가에 엿 놓고 왔능가. 이리 발바닥에 불나게 걷는다고 수가 생기는겨?"

서로 아무 말이 없이 걷기만 하고 있던 그들 중의 한 사람이 걸음을 멈추며 퉁을 놓았다.

"그려, 저그 앉어서 담배나 한 대썩 꼬실리고 보드라고."

다른 남자가 그늘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길가의 둔덕으로 무겁게 발길을 옮겼다. 시름에 찬 그들의 모습은 더 초라하고 궁색스러워 보였다.

"그나저나 우리 신세가 인자 똥 친 작대기가 되야부렀는디, 무신 수로 목구녕에 풀칠얼 허제?"

한 남자가 맥 빠진 탄식조로 말했다.

"자네 귀먹었능가? 이동만이 놈이 다 갤차줬는디 무신 딴소리여. 부두서 등짐질에, 산속서 화전질에, 만주꺼정 가라고 갤차줬는데 얼매나 고마운 일이여."

"고런 씨부랄 놈. 그리 말허자먼 못해묵을 것이 머시가 있어. 머심질에 인력거꾼에 도적질꺼정 쌔고 쌨제."

"말이 좋아 등짐질이제 그것도 일자리 얻기가 쉴털 않다는 소문이여. 그간에 소작 띠인 사람덜이 다 몰리는 판잉게."

"근다고 화전질이라고 해묵어지겄어. 화전질이야 죄짓고 막판에 드는 질인디."

"옛적 이얘기 말소. 이리 우습게 변해뿐 시상에서 안 굶어 죽을라면 벨 수 있간디."

"어이 말이여, 우리 싹 다 만주로 뜨면 어쩔랑가? 거그로 가는 사람덜도 더러 있다는 소문이든디."

"근디, 거그넌 참말로 임자 없는 땅이 그리 많을랑가?"

"김칫국 마시지 말소. 거그도 사람 산 지가 수백 년인디 임자 없는 땅이라먼 그것이 어디 농사 지묵을 땅이겄어."

", 그도 그렇네. 임자 없는 빈 농토가 우리 오기럴 기둘릴 리가 없제."

"어허, 그런 말이 아니구만. 사람이야 오래 살았어도 땅이 원체로 넓어 금세 농사질 수 있는 평지가 많다고 그러드랑게. 여그서 등짐질 험스로 시낭고낭 살고, 소출도 작은 화전질 험스로 산짐생으로 사느니 만주로 가서 왜놈덜 꼬라지 안 보고 배불리 묵고 사는 것이 질로 안 나슬랑가?"

"글씨, 거그가 타향도 아니고 타국인디 꼭 그리 안되먼 어찌고?"

"그려, 다 생사가 걸린 일잉게 차근허니 생각히야겄제. 급허다고 바늘허리에 실 매서 써지는 법 없응게."

여기서 말이 끊기고 그들은 더 어두워진 얼굴로 담배만 빨아댔다.

"그런 개아덜놈얼 그냥 놔둬서야 쓰겄어."

한 사람이 불쑥 내뱉었다.

"누구?"

", 누구넌 누구여. 이동만이 놈이제."

"그냥 안 두먼 어찌겄어?"

"사람덜이 다 그리 생각허고 당허기만 헝게 그놈이 점점 더 무선 것이 없이 맘대로 나대는 것이여."

"글먼 어찌라고?"

"아조 쓴맛얼 봬야제 어째."

"쓴맛얼 뵐라면 진짜배기 요시다가 놈얼 봬야제 이동만이 놈이 무신 소양 있어. 이동만이야 요시다가 시키는 대로 허는 놈인디."

"그 말도 맞는디, 이동만이 놈이 따로 꾸미는 못된 짓이 쌔고 쌨단 말이시. 우리 일도 다 그 놈이 꾸민 것이여."

"그놈 쓴맛 뵈자면 우리도 무사허덜 못헐 것잉게 쉽게 생각헐 일이 아니시."

"아서, 아서, 밤말 쥐가 듣고 낮말 새가 듣 법이시. 그만들 가세."

한 사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려, 그냥 지내갈 일이 아니여."

다른 사람이 중얼거리며 마른풀을 와드득 잡아 뜯었다. 이동만은 군복과 흡사한 근무복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여봐라아, 누구 없느냐아."

마루에 버티고 선 이동만은 집 안이 다 울리도록 목청껏 호령해냈다. 그는 이 호령을 할 때마다 집안을 번듯하게 일으킨 자신의 능력을 맘껏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짐하고 있었다. 이보다 열 배는 더 부자가 되리라고.

"야아 여그 있그만요, 어르신."

몸집 좋은 머슴이 황급히 달려와 허리를 굽혔다.

"얼렁 자전거 대령허그라."

이동만은 헛기침을 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때 안채에서 그의 아내가 바쁜 걸음으로 건너왔다. 그의 아내도 비단옷으로 휘감고 있었다.

"또 작인덜이 찾어왔드람서요?"

그의 아내 박씨가 조심스레 물었다.

"찾어오나마나, 성가신 것덜."

이동만은 댓돌 위의 구두를 신었다.

"참말로 성가시럽구만요, 하로이틀도 아니고, 그려도 척 안 지게 잘허시씨요."

박씨는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즈그놈덜이 나허고 척지먼 어쩔 것이여. 쓰잘디 없는 소리 말소."

이동만의 말버릇은 그가 좋아하는 뼈대있는 양반답지가 못했다. 남편의 듣기 싫어하는 눈치를 알아챈 박씨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사람은 똑같은 사람인데도 남편은 예전의 남편이 아니었다. 살림이 펴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남편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기눌리고 하는 것이었다. 부자로 호의호식하게 된 대신 가난할 때 남편에게 마름대로 대들고 속편하게 굴었던 것을 잃은 셈이었다. 머슴은 창고에서 자전거를 꺼내 안듯이 받쳐들고는 대문 밖으로 나갔다. 자전거의 바퀴에는 흙 한 점 묻어 있지 않았고, 바퀴테며 바퀴살은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그 자전거는 이동만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물건이었다. 아무리 흙을 묻혀가지고 들어오더라도 다음날 아침에는 말끔하게 닦여 있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머슴은 날마다 자전거를 신주단지 모시듯 해가며 물로 씻고 마른걸레로 닦고 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자전거라는 것이 귀한 물건이기는 했다. 일본에서 건너오는 물건들 중에서 그만큼 비싼 것이 드물었다. 군산바닥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은 돈푼이나 만지는 일본상인들이었고, 그 수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동만은 그 자전거라는 것이 바퀴 두 개로 넘어지지 않고 굴러가는 것이 그지없이 신기했다. 그리고 인력거보다 훨씬 빠른데다가, 인력거가 못 다니는 좁은 길까지 마음대로 다니는 편리한 물건이었다. 이동만은 그 신통한 물건을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하고 아꼈다. 그는 아들들이 손대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자전거를 굴리고 다니면서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동시에 자신이 진짜 개화꾼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었다. 보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슬슬 일기 시작한 개화바람은 합방이 되면서 거세게 불어 닥치고 있었다. <얼개화꾼>이라는 말도 그 바람과 함께 생겨난 말이었다.

"으흠, 소제넌 잘됐겄제."

이동만은 손잡이를 잡으며 자전거를 빠르게 훑었다.

"야아."

머슴이 허리를 굽실했다. 이동만은 자전거 발받침에 왼발을 올려놓았다. 그런 그의 살찐 얼굴은 턱없이 거만스러워 보였다.

"편히 댕게오시씨요."

박씨가 뒤에서 인사했다.

"어르신, 편허니 댕게오시게라우."

머슴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동만은 익숙한 솜씨로 자전거를 몰아나갔다. 자전거의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봄기운 가득한 바람이 상쾌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동만은 귓전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처럼 기분이 상쾌하지가 않았다. 그 일이 걱정스럽게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논을 사들였던 사람들한테서 강제로 소작을 거둬들이는 것도 골치 아픈 문제인데 요시다는 또 소작료를 올리려고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작료 인상은 물론 요시다 혼자 생각이 아니라 모든 농장들의 뜻이 모아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이 내려지는 날에는 또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 판이었다. 소란이 벌어져 봤자 소작인들이 별수가 없겠지만 그러나 중간에서 또 시달리게 될 일이 지겨웠던 것이다.

"이 주임, 왜 이리 출근이 늦소."

사무실로 들어서던 이동만은 찔끔 해서 멈춰섰다. 요시다의 성깔 묻은 눈초리가 자신을 꼬나보고 있었다.

"아 예, 아침부터 그놈의 소작인들이 또 열서너 놈이나 몰려들어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그리 됐습니다."

이동만은 자기의 정당한 입장을 내세우기 위해 어물거리는 것 없이 재빨리 말을 해치웠다. 그는 거침없는 일본말로 소작인의 수를 배 이상 불리는 거짓말을 꾸며대고 있었다.

"그것들 참 골치 아프군. 그래, 어찌 됐소?"

요시다의 눈빛이 풀리며 목소리도 좀 부드러워졌다.

", 아무 염려 마십시오. 제까짓 것들이 떼거리로 몰려온다고 별 수 있습니까. 다 꼼짝 못하게 해서 물리쳤지요."

이동만의 어조는 분명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시다 앞에서 굽실거리는 몸짓은 잊지 않고 있었다.

"생계에 직결되는 문제니까 그것들을 잘 다루도록 하시오."

요시다는 평소에 하는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그건 네 임무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아야 돼 하는 다짐인 동시에 네가 그 일을 잘못 처리하면 모가지가 달아날 줄 알아 하는 협박이기도 했다. 요시다는 이동만을 그런 골치 아픈 일들을 처리하는 방패막이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이동만의 표나는 치부도 모르는 척 눈감고 있었다. 그의 치부가 농장의 재산을 축내는 것이 아닌 한 그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소작인들의 등을 치든 어쩌든 간에 그런 잇속을 챙길 수 있어야만 더욱 충견이 되기 때문이었다.

"에에 또, 내가 이 주임을 기다린 건 다른 것이 아니라 회의에 가기 전에 미리 알려줄 게 있어서요."

요시다는 의자에 몸을 부리고 앉으며 거만스럽게 말을 꺼냈다.

"예에, 말씀하십시오."

이동만은 손을 앞으로 모아 잡으며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그게 뭔고 하니, 오늘 회의에서 그동안 논의되어 왔던 소작료 인상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될 거요."

", 예에......"

이동만은 순간적으로 솟은 놀라움을 잽싸게 누르며 버릇이 된 몸짓으로 허리를 굽실거렸다.

"아니, 왜 그리 반응이 시원찮소. 이 주임은 소작료 인상이 싫소?"

요시다는 가차 없이 찔러대며 이동만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 , 아닙니다. 당연히, 당연히, 인상시켜야지요. 회사가 잘되는 것이 회사 이익이, 그러믄요, 제가 바라는 것이지요. 소작인 제까짓 것들이, 그러믄요, 회사가 베풀어주는 은혜가 얼만데, 예에 제까짓 것들이 감지덕지해야 하고말고요."

이동만 특유의 더듬거리고 어물거리고 두루뭉수리가 되는 말버릇이 구사되고 있었다. 저 음흉하고 약아빠진 놈. 제놈이 시달리고 귀찮아지게 되니까 일단 싫다 이거지. 이놈아, 네놈을 괜히 주임자리에 앉혀놓고 잘 먹고 잘살게 하는 줄 아냐. 요시다는 입가에 쓴웃음을 바르며 이동만의 속셈을 헤집고 있었다.

"됐소, 이 주임이 그리 생각하면 됐어. 이 주임은 앞으로 소작인들에게 소작료 인상을 신속하고도 효과적으로 알릴 준비를 하시오. "

요시다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채찍으로 책상을 내리치고는,

"첫째 그 동안 5년이 넘게 조선인 지주들보다 소작료를 싸게 해서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 둘째 곧 개통될 군산, 강경 간의 철도공사에 회사가 막대한 돈을 희사하게 된다는 것, 특히 그런 막대한 돈의 희사는 전적으로 조선 땅의 발전과 조선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선전하도록 하시오. 알겠소!"

그는 미리 준비한 말을 연설조로 쏟아놓았다.

"예예, 명심하겠습니다."

이동만은 그저 머리를 주억거렸다.

"난 그만 회의에 가야겠소."

요시다는 말채찍으로 손바닥을 치며 걸음을 옮겼다.

"저어...... 한 가지 여쭤볼 말씀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저어, 일본인들도 소작료를 올려내게 되는 겁니까?"

"당신 지금 정신이 있어 없어! 일본인이 조선 놈들하고 똑같아."

눈을 부릅뜬 요시다의 고함이었다.

"예에, 예 잘 알겠습니다. , 그렇고말고요. 회의에 편히 다녀오십시오."

요시다의 서슬에 기가 질린 이동만은 문까지 열어주며 굽실거렸다. 그런 이동만을 사환아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야 이놈아, 요것도 소제라고 했냐. 더 깨끔허니 혀, ."

이동만은 의자에 털퍽 주저앉으며 엉뚱하게 사환아이를 호통 쳤다. 사환아이는 몸을 돌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담배에 불을 붙인 이동만은 연기를 거칠게 내뿜었다. 빌어먹을 놈, 거짓말도 어지간히 자빠졌네. 애초에 호남선을 군산으로 끌어 들일라고 한 것도 제놈들 이익 때문이었고, 그것이 안 되니까 군산에서 강경으로 철도를 이어붙인 것도 다 제놈들 쌀 실어내기 편하라고 한 짓들 아닌가. 또 군산역에서 부두로 철길을 연장시키는 것도 다 제놈들 잇속 챙기자는 게 아니고 뭐냐. 그러면서도 뭐가 어쩌고 어째? 그런 막대한 돈을 희사하는 건 전적으로 조선 땅의 발전과 조선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라고? 그래서 소작료를 올린다니, 에라 이 순 도적놈들아 거짓말을 해도 좀 곧이들릴 거짓말을 해라. 이놈들 참 낯짝 뻔뻔하기가 개가죽을 둘러썼다니까. 이동만은 또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시달릴 일을 생각하며 요시다를 위시한 농장지배인들을 욕해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욕은 건성일 뿐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마음쓰는 데는 따로 있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소작료를 인상시켰을 때 자신에게 미칠 영향이 어떨 것인지 따지고자 했다. 소작료가 오르면 그만큼 작인들이 살기가 어려워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보다 소작다툼이 줄어들면서...... 여기까지 생각한 이동만은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부벼껐다. 소작을 얻으려고 소작인들끼리 서로 다툼이 심하게 벌어져야만 자신의 재산이 불어나게 되어 있었다. 그동안 몇 년 사이에 재산을 듬직하게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일본농장의 소작료가 조선 지주들의 소작료보다 다소 낮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차이가 없어지게 되면 참으로 난리였다. 재산을 늘릴 계획은 아직 창창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빌어먹을, 형세가 좋아져도 마음이 급한 판에 이게 무슨 꼴인가. 그래, 이걸 어쩐다? 무슨 좋은 방도가 없을까...... 그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연거푸 빨아댔다. 담배연기 속에 아내와 자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앞으로야 개화시상이닝게 신학문얼 안허고넌 출세고 머고 못헌다. 느그덜언 이 애비가 다 일본 유학얼 시킬 것잉게 열성으로 공부나 허그라."

자식들에게 큰소리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식들에게 신식공부를 가르쳐 어엿한 벼슬살이를 시켜야만 비로소 가문이 제대로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 계획이 순풍에 돛 단 듯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고약하게 꼬일 판이었다. 그러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가만있자, 빚돈 이자를 올려? 그의 머리를 번뜩 스친 생각이었다. 이동만은 제물에 신이 나서 무릎을 쳤다.

"소작료가 올랐으니 빚돈 이자도 올린다! 그려, 그려, 아조 존 방도로시."

그는 연상 고개를 주억거리며 끼들끼들 웃어대고 있었다. 이동만은 재산을 불리면서도 절대로 논을 사들이지는 않았다. 논이 탐이 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가난했던 설움을 생각하면 징게 맹갱 들판을 다 가져도 속이 안 찰 판이었다. 그러나 논을 갖는다는 것은 요시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었다. 요시다는 끝없이 농장을 늘리려는 욕심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거기에 맞서는 짓을 했다가는 그날로 끝장이 날 것은 뻔했다. 그래서 논을 갖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돈놀이를 시작했던 것이다. 돈놀이를 하다가 기한을 넘겨 잡아채게 되는 논은 그대로 요시다에게 넘겼다. 그리 되면 돈 제때 받아내고 업무실적 오르고 양수겸장이었다.

"그려, 그려, 다 방도가 있는 법이여. 하먼 내 생각얼 누가 당헐 것이여."

이동만은 침침한 웃음을 흐흐거리며 사무실을 나서고 있었다.

송수익과 헤어진 지삼출은 보름이 넘게 산에 머물러 있었다. 예정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책임진 여섯 명의 대원중에 두 명이 화전을 일구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이 먼저 한 일은 밭을 일굴 수 있는 마땅한 터를 찾는 일이었다. 물이 가까우면서 비탈이 심하지 않아야 했고, 남향바지로 햇볕이 잘 들어야 했다. 그리고 먼저 자리잡고 있는 화전민의 터를 다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터를 잡은 다음에는 모두가 힘을 합쳐 두 집안이 거처할 수 있는 움막집을 지었다. 화전민의 집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비바람과 추위를 막아내기 위한 움막에 지나지 않았다. 천장이 낮고 흙벽을 두껍게 친 모양새는 그저 집 시늉에 불과했다. 그러나 명색이 사람의 거처였고, 한 채가 아니라 두 채를 짓는 것이라서 시일이 꽤나 걸렸다. 그들은 집 두 채를 마무리 짓느라고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애덜 쓰시오. 이리 울타리꺼정 둘러놓고 봉게 아조 궁궐인디요."

한 남자가 집을 끼고 돌며 쿠렁하게 큰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 뒤로는 동이를 인 처녀가 따르고 있었다.

"아이고 손 씨, 어여 오시게라. 울타리나마나 다 시늉이구만요."

지삼출이 반색을 하며 그 남자를 맞았다. 다른 사람들도 일손을 멈추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시늉이라니, 울타리 치기 참 잘혔소. 하로밤얼 잘라도 만리성얼 쌓드라고 은제 또 뜰지 몰를 화전살이라도 사람 사는 집이먼 울타리가 있어야 집 같은 법이오. 고라니고 산돼지 막는 것이야 그담 일이고."

남자는 흡족한 얼굴로 나뭇가지 울타리를 흔들어보았다. 그는 몸 다친 송수익에게 잠시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던 손 씨였다.

"아니, 딸꺼정 딜고 어쩐 일이다요?"

손판석이 처녀가 이고 있는 동이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오늘이 집이 다되는 날 아닝게라. 그려서 미리 담근 술얼 잠 걸러갖고 왔는디, 맛이 어쩔랑가 몰르겄소."

"어허, 우리 손 씨덜 인심이 요리 기맥히당게."

손판석은 과장되게 손뼉을 쳐대며

"어이 두성이, 총각이 눈치없이 멀허고 있는겨. 큰애기 목 다 빠지능구마."

한 남자를 향해 주먹질을 해 보았다.

", 나넌 저것이 물동운지 알었제 술동운지 알았드랑게라."

그들 중에 유일한 총각인 배두성이가 크고 두꺼운 입술을 헤벌리며 처녀에게로 뛰어갔다.

"진작에 술동우라고 혔으먼 목이 덜 빠졌제라."

배두성이가 동이를 받쳐 잡으며 처녀에게 눈웃음을 보냈다.

", 말 한분 정붙게 허네. 물동우머 목이 빠지게 냅둘라고 혔능갑만."

처녀가 눈을 흘기며 맵게 쏘아댔다.

"맞어, 우리 필녀 말이 맞어. 총각 놈 말이 귀싸대기 맞기 딱 좋구만."

손판석이 같은 성씨라는 것을 과시하듯 처녀를 역성들고 나섰고, 다른 사람들은 와아 웃음을 터뜨렸다.

"저것이, 저것이, 다 커갖고 부끄럼 탈 줄도 몰르고 은제나 철이 들란지 원."

손 씨는 민망한 듯 멋쩍은 듯 딸을 쳐다보며 끌끌 혀를 찼다.

"치이, 아부지넌. 부끄럼언 아무나 보고 탄다요. 나가 미친 것도 아닌디."

필녀는 입을 삐죽하며 홱 돌아섰다.

"하이고, 두성이넌 필녀헌티 장개가기넌 다 글렀구나."

"필녀 눈에 두성이넌 퇴짜여 퇴자."

이런 말이 다시 터진 웃음에 뒤섞이고 있었다.

"술맛이 어쩔란지 모르겄소. 마침 퇴깽이고기가 생겼응게 한 점썩 험스로 술맛덜 보시게라."

손 씨가 작은 바가지로 술을 휘저었다.

"어쩐 퇴깽이고기다요?"

"쟈 필녀가 덫질얼 히서 잡았다요."

"어허! 요것언 우리가 묵을 것이 아니로구먼. 대장님이 잡수셔야 헐 고기여. 필녀가 대장님헌티 그리 약조헌 것얼 들었는디."

송수익과 작별하며 필녀가 했던 말을 지삼출은 순간적으로 떠올렸던 것이다.

"저 기억 총총헌 물건언 누구여. 그리 알고나 묵응게 밉지나 않네."

지삼출의 말을 등 뒤로 들으며 필녀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필녀는 송 대장을 생각하며 울타리의 생나무껍질을 자꾸 벗기고 있었다.

"없이 사는 살림에 멀라고 술꺼정 담고 그러시오."

지삼출이 손 씨에게 인사를 차렸다.

"우리겉이 없이 사는 사람덜일수록 잔정 나눔서 살아가야 맘이나 따땃헌 것 아니겄어라우."

손 씨가 술이 찰랑찰랑하게 담긴 애바가지를 지삼출에게 내밀며 인정스런 웃음을 지었다.

"참말로 고마우요. 밭터 잡는디도 앞장서 주고, 집 짓는 디도 발벗고 나서주고, 손 씨헌티 입은 덕이 너무나 크요."

지삼출은 술바가지를 받아들며 진심으로 고마움을 나타내 보였다.

"아이고, 그까징 것이 덕언 무신 덕이라고 그런 말씸을 허고 그러시오. 댁덜이 헌 고상에 비허면 나가 헌 일은 암것도 아닌디요. 나이만 들어부러서 뒷전에 쳐져 있음스로......"

손 씨는 민망해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 말씸허덜 마시라게. 갑오년에 나서서 싸운 것이 얼매나 장한 일 허신 것인디요. 허고, 그간에 우리럴 얼매나 많이 도왔는디요. 앞에 나서서 총질허는 것만 싸우는 것이간디요. 뒤에서 믹요주고 입혀주고 재와주넌 사람덜이 없음사 의병덜이 어찌 그리 오래 쌈얼 헐 수 있었겄소. 앞에 나선 사람덜이나 뒤에서 도운 사람덜이나 다 똑같이 싸운 의병이 아니겄능게라."

지삼출은 손 씨의 마음을 헤아리며 분명하게 말했다. 그건 손 씨가 듣기 좋아라고 하는 겉치레 인사말이 아니었다. 송수익의 일깨움을 통해 확실하게 마음에 담게 된 생각이었다.

"아이고, 그리 말씀허시먼 더 쥐구녕얼 못 찾겄구만이라우. 얼렁 술잔 돌리시씨요. 안주가 맵짜히서 묵을 만헌디."

손 씨는 그 말이 고맙고 마음 뿌듯해져서 발게 웃었다.

"술 잘 묵겄소."

입맛을 다신 지삼출은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술 넘어가는 소리가 꿀꺽꿀꺽 시원스러웠고, 그 때마다 툭 불거져 나온 목울대가 박자를 맞추듯 오르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둘러앉은 사람들은 무심결에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크으, 술맛 참 기맥히시."

지삼출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탄성을 토해냈다. 사람들이 제각기 군침을 굴떡꿀떡 삼켰다. 손등으로 입술을 쓱 문지른 지삼출은 손가락으로 산토끼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술잔은 빠르게 옆으로 옆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산그늘이 내리고 있는 가운데 술잔이 돌고 술잔에는 산그늘과 함께 서로의 정이 담기고 있었다.

"인자 집이 다됐응게 곧 뜨시겄제라?"

손 씨는 아쉬운 얼굴로 지삼출과 손판석을 쳐다보았다.

"글씨요, 오란 디넌 없어도 가기넌 가야겄제라 이."

손판석이 쌈지를 꺼내며 대꾸했다.

"근디요, 더러더러 내래가 보먼 시상이 날로 살기가 에로와지는 갑든디, 어디서나 에롭게 살 판이먼 맘이나 편헌 것이 안 좋겄는게라. 산골이야 많고 많은디."

손 씨는 주위의 산을 둘러보며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고마운 말씸이기넌 헌디, 살기가 에로와도 내래가기넌 가야제라. 에로운 속에서 부대낌스로 시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럴 알아야 헝게요."

신중한 지삼출의 대꾸였다.

"묵고 살기만 에로운 것이 아니라 긍게 머시냐...... 그간에 헌 일얼 숨키기도 에로운 일이라......"

손 씨는 말끝을 얼버무리며 상대방의 눈치를 살폈다.

"야아, 갑오년에 다 당헌 것맨치로 아는 얼굴덜 있는 디서야 어디 살어지겄소. , 아는 사람 없는 디로 숨어들어서 살길얼 찾어야제."

지삼출은 말에 어울리지 않게 빙긋 웃기까지 했다. 그 유유한 배짱에 손 씨는 그만 기가 질리고 있었다.

"근디...... 묵고 살 일언 정해 뒀소?"

그래도 걱정스러워 손 씨는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아무리 험헌 왜놈덜 시상이 됐다고 성헌 몸띵이 있넌디 산 입에 거무줄이야 치겄소?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험스로 살다보면 살아지는 것이제."

지삼출은 마음에 담고 있는 생각을 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아, 한잔 더 허시게라."

옆사람이 술잔을 내밀었다.

"안직 술이 남었능가?"

"허기넌 산속서 비탈밭이나 파묵고 사는 것이야 사람 사는 것이 아니제라. 그저 진 죄가 무서와 이리 피해 살기넌 허는디, 자석덜 전정 생각허먼 앞이 막막허구만요. 자석덜이야 무신 죄가 있다고......"

손 씨는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허 참, 무신 생각을 그리 갑갑허니 묵고 그러요. 시상은 다 맘 묵기에 달렸응게 생각얼 딱 고쳐묵으씨요. 손 씨나 나가 동학군으로 나슨 것언 백번 잘헌 일이제. 하나또 죄가 아니오. 우리럴 죄인으로 잡아죽일라고 허는 놈덜이 죽일 놈덜이제. 허고, 자석덜 전정이 걱정시러우먼 맘 강단지게 묵고 아랫시상으로 내래갔시오. , 그리 못허겄으먼 자석덜이 크는 대로 내래보내서 살리씨요. 자석덜이 입다물면 아무 탈 없이 살아질 것잉게."

지삼출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평소부터 굳히고 있는 생각인데다가 손 씨의 마음을 돌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자 말에 힘이 팽팽해졌던 것이다.

"글씨요, 나야 이리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과만헌디, 자석덜이 사람꼴 못허고 산속서 한평생 살 것얼 생각허먼 불쌍히서......"

"하이고, 왜놈덜 시상에서 니나 나나 사람 꼴 허고 살기넌 다 글렀고, 왜놈덜 앞잽이로 배불리고 출세허고 사는 인종덜보담이야 여그 산속서 밤이먼 퇴깽이허고 발바닥 대고 자고 낮이먼 비탈 밭이나 가는 것이 훨썩 더 사람 꼴로 사는 것이오. 허고, 정작 사람 꼴로 사는 길언 딱 한 가지가 있소."

손판석은 손 씨 앞에 검지손가락을 똑바로 세워 보였다.

"고것이 먼디요?"

손 씨가 금방 반응을 나타냈다.

"고것이 먼고 허니, 아덜덜이 크는 대로 의병으로 내보내시게라."

손판석의 말은 좌중의 눈길이 모두 모아질 만큼 엉뚱했다. 그런데 손 씨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나 예상이 빗나갔다는 기색 없이 입을 열었다.

"글먼 의병쌈이 다 끝막음헌 것이 아니랑게라?"

"그야 왜놈덜헌티 뺏긴 나라럴 찾을 때꺼정 끝내서야 되겄소? 우리가 이리 갈라지는 것언 더 씬 심으로 새로 뭉칠라는 임시변통이오."

지삼출의 설명이었다.

", 그렇구만이라. 그리 되먼 얼매나 좋겄소. 나가 말언 못혔어도 이리 갈라지는 것얼 봄스로, 갑오년에도 아까운 목심덜만 죽고 헛일이고 또 의병도 귀헌 목심덜만 바치고 헛일이구나 싶어 맘이 내래앉고 말았구만이라. 새로 일어나기만 험사 내 자석도 의병으로 나스게 뒤럴 밀겄구만요. 나가 왜놈덜헌티 쌓인 원한이 얼맨디. 근디, 왜놈덜 시상이 얼매나 오래가겄소?"

"그것이야 더 말헐 것도 없이 우리 조선 사람덜이 허기에 매인 것 아니겄소. 니나 나나 다 맘 강단지게 묵고 왜놈덜 몰아내자고 나스먼 오래 갈 택이 없는 일이고, 니나 나나 겁 묵고 눈치 봄서 왜놈덜 무서와 벌벌 떨면 영영 왜놈덜 시상 되야불고 조선 사람덜이야 왜놈덜 종살이만 대대로 허는 것 아니겄소."

지삼출은 송수익에게 듣고 배워서 마음속에 차곡차곡 담아둔 생각을 차분하게 풀어냈다.

"맞는 말씸이오. 어쨌그나 다 우리가 헐 탓이겄제라."

손 씨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날이 어두워지는디 인자 그만 넘어가야 안되겄소?"

손판석이 손 씨를 일깨웠다.

"야아, 어두워지나마다 산짐생 다 됐응게라. 근디 은제 뜨실랑가요?"

손 씨가 쪼그려앉으며 엉덩이를 털었다.

"일이 다 끝났응게 낼이라도 떠야겄소."

지삼출이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어허, 글먼 이 술이 낙성주가 아니라 이별주가 되야부렀네."

손 씨는 얼굴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아닌디요, 낙성주에 이별주꺼정 겸했으니 그 아니 좋소."

손판석이 눈치 빠르게 받아넘겼다.

"참말로, 이리 허망허니 이별이면 서운히서 어쩔께라?"

손 씨의 주름 잡힌 얼굴이 쓸쓸해졌다.

"또 만낼 것인디요. 잘 기시씨요."

지삼출은 손 씨의 손을 잡았다. 다른 사람들도 손 씨와 작별인사를 해나갔다. 필녀는 어느새 빈 동이를 들고 울타리 밖에 나가 있었다. 그들은 아쉬운 술기운에 젖어 저녁밥을 끓여 먹었다. 대충 설거지가 끝나자 그들은 관솔불빛 아래 둘러앉았다.

"이리 다 들어앉고 봉게 아늑헌 것이 겉보기허고넌 달른디요. 불도 잘 딜여 방바닥도 따땃헌 것이."

총각 배두성이가 새삼스럽게 방안을 둘러보며 흡족해했다.

"자네도 우리허고 여그 눌러앉제. 옆에 큰 애기도 딱 있겄다. 신방 채리면 더 좋아 뵐 것인디."

집주인이 된 천수동이 빙긋 웃으며 농을 걸었다.

"아까 봉게로 그리 되기는 에롭겄든디. 그 큰 애기 쌀쌀허기가 얼음장이등마."

다른 사람이 얼른 말을 이어받았다.

"나도 그런 시악씨넌 맘에 없소. 얼굴이 이뿌기럴 허요, 행실이 얌전허기럴 허요. 무신 놈에 처녀란 것이 내외헐 줄도 몰르는디다가 선머심 애맨치로 덫질이나 허고 댕기니 그것얼 각시 삼아 어디다 써묵겄소."

"하이고 이사람, 쌔넌 짤라도 침언 질게 뱉고 잡은갑네. 자네 인물에 비허먼 그 큰애기 인물이야 떠오르는 달뎅이고 날개옷 입은 선녀여. 그러고 산속에 삼스로 덫질 잘허는 것이야 서방헌티 고기 믹여 잘 모실 장헌 솜씨제 어디 숭거리야 되간디. 못 묵을 떡이라고 오기 부리덜 말어."

손판석이 엇지르고 나왔다. 사실 배두성은 뚝심은 세게 생겼어도 두꺼운 입술에 큰 입이며 뭉툭한 코며, 인물은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와따, 종씨라고 체면도 없이 편역들고 나스요 이. 나 퇴깽이고기 안 묵어도 존게 그런 선머심애넌 싫소."

배두성은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고 고개를 내둘렀다.

"이 벽이야 그닥잖은디 이놈에 짚방석이 너무 얼금얼금히서 원......"

지삼출은 방바닥에 깔린 짚깔개를 매만지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사반 벽은 종이 한 장 발라지지 않은 흙 그대로였고, 방바닥에는 엉성하게 엮어진 짚깔개 사이사이로 흙바닥이 들여다보였다. 벽에 바른 흙은 그래도 옷에 묻어나거나 쉽게 바스러져 내리지 못하도록 찰흙을 파다가 되게 이겨 바르는 정성을 들인 것이었다. 그런데 짚은 넉넉하게 구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엉성하게 엮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이고, 싸움서넌 맨흙얼 구들 삼고도 잤는디요. 이만허먼 양반집 안방 안 부럽구만이라우."

천수동은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다. 밭터를 구해 준 것뿐만 아니라 집까지 지어준 것에 대해 그는 더없이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에 이리 나고 내년에 짚 넉넉허니 구해 새로 짜도록 허시오."

지삼출은 책임자답게 마음을 썼다.

"야아, 근디 낼 뜨실랑가요?"

"그래야 되겄소."

"글먼 은제나 또 만나게 될랑가요?"

"나도 잘 몰르겄소. 뒷일언 공허 시님이 다 알아서 헐 것잉게 천씨넌 그저 농사나 열성으로 져서 배 안 곯게 몸보존이나 잘허시요. 강씨도 그리허고."

"야아, 명념허겄구만이라우."

천수동 옆에 앉은 강기주가 대답했다.

"그리허고, 식구덜 옮길 적에 쥐도 새도 몰르게 혀야 헐 것이오."

"야아, 그리허겄구만요."

"그담에 낼 아칙에 여그럴 뜸서 서로 작별혀야 헝게 미리서 말해 두는 것인디, 김씨 말이오......"

지삼출의 눈길이 그 옆의 세 사람에게로 옮겨지자 그들은 얼른 앉음새를 고치며 바르게 앉았다.

"김씨가 책임 맡어 한 동에 걸러 한 사람씩 자리 잡고, 서로가 몰르는 사람으로 넘덜 눈 피허는 것 잊어불지 마시오. 무신 변동이 있을 적에넌 넘덜이 눈치 못 채게 김씨헌티 알리고."

"야아, 알겄구만요."

세 사람은 함께 대답했다. 그들은 연고없는 곳으로 숨어들어 농사를 짓기로 되어 있었다.

"무신 다른 헐 말들 있으시오?"

지삼출은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서로서로 쳐다볼 뿐 별달리 할 말이 없는 얼굴들이었다.

"글먼 재미진 이얘기나 허다가 잡시다. 그냥 자기 서운헝게."

지삼출이 조금 물러나 앉으며 말했다.

"근디 말이여, 그간에 우리 손으로 죽인 왜놈덜이 얼매나 될랑게라?"

기다렸다는 듯 배두성이가 꺼낸 물음이었다. 관솔불이 긴 그을음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들길을 걷고 있는 지삼출과 손판석은 그저 흔한 농군일 뿐 의병냄새는 어디에도 묻어 있지 않았다. 들녘에는 이미 논일이 시작되고 있어서 그들의 모습은 더 묻혀들고 있었다.

"대낮에 이리 태평시럽게 들판얼 걸어강게 영 요상시러운디."

손판석이 사방을 휘둘러보며 말했다.

"하먼, 자네야 나보담 중죄인잉게 가심이 통게통게헐 것잉마. 사방팔방 잘 망봄서 걷소."

지삼출의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그거이 무신 소리여? 왜놈얼 죽여도 자네가 나보담 서너 배넌 더 죽여놓고."

손판석이 지삼출에게 눈총을 주었다. 사실 지삼출은 총을 잘 쏘고 싶어서 짬만 생기면 포수들에게 요령을 배우려고 애썼던 것이다. 결국 그는 포수들이 놀랄 만큼 총질을 잘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처자만 없었더라면 총을 그대로 들고 포수들을 따라나섰을 것이다. 그는 총을 놓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었다.

"그런 말이 아니시. 자네야 철길 공사장서 도망 나온 몸잉게 자네 얼굴얼 알아볼 왜놈덜이 많을 것 아니라고."

"옛끼, 재수 없는 소리 말소. 근디, 공허 시님언 인자 중질 안허는 것잉가?"

"그 편헌 중질얼 어째 안혀. 우리 일이 잘 되게 헐라먼 더 열성으로 중질얼 히야제."

"근디 바른 말로 히서 공허 시님언 머리 깎고 중옷만 둘렀제 순 엉터리 땡초 중에 땡초여. 술도 묵고 괴기도 묵고, 속인허고 똑겉은디, 여자넌 안 보능가 몰르제."

"그리 말허자면 왜놈 죽이넌 것언 살인이시? 살인꺼정 해대닝게 아조 왕땡초로구마. 이사람아, 알라먼 똑똑허니 알소. 그 사람이 진짜배기 도통헌 시님이여. 시상이야 어찌 돌아가든 도 닦는다고 눈 내리감고 앉어서 자울자울허먼 신간 편케 살아질 몸인데 목심 내바침서 싸우로 나슨 사람이란 말이시. 절밥에 길든 몸으로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간디. 그리 목심 내논 중잉게 도통헐 것이 따로 없고, 도통헌 시님이 묵는 술언 술이 아니라 곡차고, 괴기넌 산삼이고, 여자럴 보는 것언 보시여. 자네가 속인 중에 속인이라 숭잡고 그러는 것이제."

"아이고 참말로, 자네넌 의병 나온 담보톰 어찌 그리 유식해져 부렀능가. 이 말이고 저 말이고 청산유수로 잘도 둘러붙인단 말이시."

"서당개 3년이면 풍월얼 읊는다는디 자네넌 귀 봉허고 살었능가?"

지삼출은 픽 웃음을 흘렸다.

"자네야 나보담 입심이 존게로."

손판석이 씁쓰름하게 웃었다.

"근디, 자네 논이 멫 마지기나 남었능가?"

"아니 무신 자다가 봉창 뚜딜기넌 소리여? 서 마지기 있등 거 왜놈덜이 집에 불질러 움막 새로 장만허니라고 팔아묵고, 아새끼덜 병치레허니라고 팔아묵고, 솔래솔래 다 팔아묵어 진작에 손털고 맨주먹 아니드라고."

"헹펜이 그리 된 줄이야 몰랐는디. 그려, 험헌 세월 사니라고 그리 된 것이제. 식구덜 고상이 말이 아니겄네."

지삼출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대장님댁 망헌 것에 비허먼 우리 집이야 암것도 아니제."

손판석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려, 우리가 이리 살어 있는 것만도 천행으로 생각허세. 몸 성헌게 식구덜 믹여살리는 것이야 걱정없네."

지삼출은 목소리에 힘을 넣으며 손판석의 어깨를 쳤다.

"하먼, 산 입에 거무줄이야 칠라등가. 그나저나 이리 뿔뿔이 갈라졌다가 얼매나 새로 만내질랑가?"

손판석도 기분을 바꾸며 지삼출을 쳐다보았다.

"몰르제. 공허 시님이 이리저리 끈얼 대서 단속헐 참잉게 두고 볼 일이제."

"그려, 두고 볼 일이여."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없이 걸었다. 쟁기질로 흙이 뒤집어지고 있는 들녘에는 생흙냄새가 자욱했고, 논두렁마다 파릇파릇 돋고 있는 풀들의 싱그러움이 꽃보다 고왔다.

"인자 얼매 안 남은 것 아니라고?"

손판석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감마. 담 주막서 저녘 묵음서 어둡기럴 기둘리세."

지삼출이 이마에 손차양을 대고 멀리 살펴보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이 들판에 왜놈이라 섬놈덜이 설레발얼 쳐대니......"

손판석이 타령조로 읊조렸다. 밤 깊은 어둠에 싸여 지삼출과 손판석은 동네 어귀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서도 키 크고 가지 많은 당산나무의 자태는 어렴풋이 드러나고 있었다. 어둠 속을 걸으며 손판석이 연상 큼큼거렸다.

"자네 콧병났능가."

지삼출이 속삭이는 소리로 손판석을 나무랐다.

"자네넌 냄새가 안 난가?"

손판석이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안 나기넌 어찌 안 나. 발소리넌 죽임서 콧소리넌 그리 크게 내면 무신 소양 있어. 냄새럴 맡는다고 꼭 그리 소리럴 내야 맛잉가?"

", 딴 동네 지낼 적에넌 안 나든 냄새가 우리 동네에 들어슨게 확 풍기는디, 그거이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뒤죽박죽인 것이 쌉싸름 허기도 허고 알큰허기도 허고 시큼털털허기도 허고, 하도 요상시럽고 얄궂응게 나도 몰르게 콧소리가 나옹구마."

"그리 말허자먼 한도 없제. 들치근허기도 허고 떱떠름허기도 허고 쿵쿵허기도 허고 비리치그리허기도 허고, 그런 것이 다 동네 두엄냄새기도 허고 집집마동 밴 사람냄새기도 허고 마누래 몸 냄새기도 허고 새끼덜 발냄새기도 허시."

"긍게 개만 집 찾는 냄새 맡는 것이 아니랑게."

"실답잖은 소리 말고, 우리 동네에도 왜놈덜 앞잽이가 다 백혔을 것잉게 맘놓덜 말드라고."

지삼출은 다시 다짐했다. 동네가 가까워져 있었다.

"알겄네. 어디서 만낼꼬?"

"첫닭 울면 만경 나가는 질목 다리께서 만내세."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고샅길을 찾아 헤어졌다. 지삼출은 담 옆으로 붙어 서서 발뒤꿈치를 바짝 들고 걸었다. 짚신을 신은데다 발끝걸음이라 소리라고는 나지 않았다. 그동안 몸에 밴 걸음걸이였다. 그는 불현듯 몇 년 전 철도공사장에서 돌아오던 때를 생각했다. 그때는 대낮에 동네로 들어서면서 아들의 이름을 고래고래 소리쳐 불렀던 것이다. 보따리에는 엿이 몇 가락이나마 들어 있었다. 그나마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서글픔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만 해도 나라가 엎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몇 년 동안 목숨을 내걸고 싸우며 눈비 속에서 자고 굶고 다치고 했으면서도 결국은 밤고양이처럼 어둠에 숨어 살금살금 집으로 찾아들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기가 막혔다. 부귀영화를 바라서 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사는 것이 옳다는 생각으로 갑오년에 나섰던 마음 그대로 다시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왜놈들에게 쫓기는 것으로 결말이 났고 지금도 또 왜놈들에게 쫓기는 것으로 막음하고 있었다. 그간에 고생고생 시킨 아내를 대할 면목이 없었고, 애비 없이 배곯고 큰 두 자식에게 더없이 미안했다.

"그저 살어만 있으씨요. 우리가 머럴 더 바라겄소."

그간에 서너 차례 얼굴만 보고 지나갈 때마다 아내가 애타게 한 말이었다. 아내가 바라던 대로 살아서 돌아오기는 했지만 막상 내보일 것 없이 쫓기는 몸으로 집에 가까워지고 보니 새삼스럽게 면구스러움과 미안함만이 앞을 가로막았다. 지삼출은 걸음을 멈추며 숨을 들이켰다. 어둠 속에 웅크린 듯한 집이 바라다보였다. 그 집을 보자 가슴이 찡 울렸다. 자신이 의병으로 나서게 되자 아내와 아이들은 주인집 문간채에서 그 집으로 옮겨 앉은 것이다. 주인은 왜놈들에게 당하게 될지도 모를 위험을 미리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인에게 서운한 생각은 없었다. 주인은 그래도 낡아빠진 오두막이나마 장만해 주었고 그 뒤로도 아내에게 물일을 시키며 두 자식을 굶겨죽게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왜놈들의 물불 가리지 않는 험악한 행투를 생각하면 주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기도 했다. 머슴놈이 의병을 나갔으니 집주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지삼출은 조심스럽게 지게문을 질벅였다. 방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다시 방문을 가만가만 두들겼다.

", 누구여!"

아내의 겁 실리고 눌린 목소리였다.

"어이, 나시 나."

낮은 지삼출의 목소리는 뜨거웠다.

"아이고메 만복이 아부지!"

무주 댁의 목소리도 뜨거웠다. 문고리가 벗겨지고 방문이 열렸다. 한 손에 짚신을 벗어든 지삼출은 아내가 나서기 전에 방으로 몸을 디밀었다.

"어쩐 일이시오?"

어둠 속에서 무주 댁의 목소리가 떨렸다.

", 아조 산에서 내래왔네."

지삼출은 아내를 쓸어안으며 말했다.

"야아? 그거이 무신 소리다요?"

무주 댁은 놀라며 남편의 가슴팍을 떠밀었다.

"놀랠 것 없네. 그대로 있으소, 그대로."

지삼출은 아내를 더 꼭꼭 끌어안았다. 몸을 맡긴 무주 댁은 그 품안에서 작게 작게 졸아 들고 있었다. 지삼출은 아내의 머리에 얼굴을 마구 부비댔다. 치자냄새 같기도 하고 탱자냄새 같기도 한 아내의 냄새가 가슴을 휘돌고 있었다. 총을 들고 아내를 안았을 때는 맡을 수 없었던 냄새였다. 그 싱싱하면서도 아련한 냄새는 첫날밤에 맡은 그대로였다. 무주 댁은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있었다. 뜻 모를 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반가움도 아니고 서러움도 아니었다. 야속함이나 원망은 더구나 아니었다. 남편의 억센 팔이 몸을 조여올 때마다 가슴에 가득 찼던 시름이며 근심이며 아픔들이 녹아내리고 삭아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눈물은 자꾸만 쏟아지고 있었다. 살아온 남편이 그저 고맙고, 남편의 힘이 이리도 큰 것인가 싶었다.

"다덜 몸 성헌가?"

지삼출은 손바닥으로 아내의 등을 더듬고 매만지며 물었다. 그런 그의 가슴 벽은 눈물로 젖어 내리고 있었다. 옛날의 실팍하던 느낌은 간곳이 없고 손바닥에 닿는 아내의 등은 얇고 좁았다.

"야아, 얼렁 아그덜 보시게라."

무주 댁은 눈물을 추스르며 남편의 가슴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그려, 불쌍한 새끼덜."

지삼출은 아내와 함께 앉았다. 두 아이는 서로 자고 있었다. 에미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잠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지삼출은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몸집이 더 작은 아이의 손부터 잡았다.

'참말로 용허기도 허네. 어두운디도 아덜언 용케도 알아보네. 그려, 핏줄언 그리 땡기는 법잉게.'

무주 댁은 마음 흐뭇해하며 남편이 아들을 품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들 만복이의 손을 잡은 지삼출은 허리를 굽혀 귀를 아들의 코 가까이 갖다 댔다. 아들의 작은 손은 따스했고 깊은 숨소리는 골랐다. 무병하고 건강하다는 증거였다.

'이놈아, 무병허니 잘 커서 장혀.이 애비가 못된 짓 허고 댕긴 것 아닝게 원망언 말어. 니도 사내꼭진게 알아둬야 헐 일이여.'

지삼출은 깊은 속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딸 곱단이의 손을 어루만지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나 첫닭 울면 떠야 헝게......"

지삼출은 조심스레 윗방문을 밀쳤다. 무주 댁은 이불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몇 년 만의 잠자리였다. 지삼출은 불덩어리가 되어 아내를 품었고, 무주 댁도 불덩어리로 남편을 끌어안았다. 그 뜨거운 만남 속에서 세월의 간격도, 겹겹의 고생도, 말 못한 사연도 다 불붙어 스러지고 있었다. 불길이 꺼지고 나서도 지삼출은 아내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인자 어디로 가신다요?"

무주 댁의 가느다란 소리였다.

"......, 군산으로 가볼라네."

지삼출은 두 팔로 방바닥을 떠밀어 무거워진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군산이오? 거그서 멀헐라고."

"듣자니께 소작살이도 영 에로와지고, 이 나이에 어디 가서 머심질 해묵기도 틀린 일 아닝가. 군산에 가먼 쌀짐 지는 일이 많허당게 그 일얼 혀볼 참이시. 안직 쌀 두 가마니 질 기운이야 남었능게. 허고, 군산에넌 타관사람덜이 들끓어 몸얼 숨키기도 좋네."

"그러기도 허겄는디, 등짐질이 심들어서......"

"아니시, 머심질보담 낫네."

"글먼 우리넌......"

", 나가 먼첨 가서 자리 잡고 곧 불를 것잉게 자네넌 나가 댕겨간 표식 내지 말고 기둘리소."

"살기가 자꼬 더 팍팍해지느만이라."

"걱정말소. 나 한숨 자야겄네."

지삼출은 아내의 알몸을 다시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곧 잠이 들었다. 무주 댁은 첫닭 울기를 기다리며 잠이 멀어지고 있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들녘에는 끝없이 펼쳐진 초록빛이 하늘 끝과 맞닿아 있었다. 그 푸르름의 단조로움을 조화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봉분 닮은 야트막한 야산들이 마을을 품고 띄엄띄엄 엎드려 있었다. 그 야산들은 푸르른 바다에 잠길 듯 솟아 있는 작은 섬들 같았다. 넓고 넓은 푸른 들판에 또렷또렷하게 표가 나는 희고 작은 점들이 있었다. 그건 일손을 놀리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었다.

"아하, 그 풍광 한번 좋다."

말 위에 올라앉은 요시다가 가늘게 뜬 눈으로 들판을 바라보며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는 윤기 번들거리는 말을 탄 것만이 아니라 왼쪽 옆구리에는 긴 칼까지 차고 있었다. 얼핏 보면 그의 모습은 군인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예에, 풍광만 좋은 것이 아니라 금년에도 풍년입니다."

자전거에 올라앉은 이동만은 잽싸게 발라맞추었다.

"풍년, 그거 좋지. , 풍년이 들어야지."

요시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흐흐거렸다.

"소작료도 올렸겠다, 금년에 풍년이 들면 지배인님 공이 하늘에 닿겠습니다."

이동만은 요시다의 귀에 단 말을 연상 이어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단순한 아첨만이 아니었다. 소작료 인상에는 자신의 공로가 있다는 것을 요시다에게 상기시키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었다.

"이 주임, 소작료 인상이 작인들에게 완전히 통했다고 안심하지 마시오. 가을에 소작료를 말썽 없이 다 거둬들여야만 그 일은 완료되는 것이오."

요시다의 말은 싸늘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동만은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말이냐니. 지금은 소작인들이 수그러들었지만 정작 가을에 가서 인상된 소작료를 내기가 아까워 집단적으로 말썽을 부릴지도 모른단 말이오."

이동만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염려가 없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끝까지 방심하지 말고 작인들 동태를 잘 파악하란 말이오. 갑시다, 한바퀴 돌아보게."

요시다는 가볍게 채찍질을 하며 말을 몰기 시작했다. 이동만은 그 뒤를 따라 자전거 발판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동만이 윤기 나는 자전거에 올라앉았지만 그 모습은 말위에 버티고 앉은 요시다에 댈 것이 아니었다. 우선 그 높이부터가 비교가 되지 않았고, 적갈색 말의 풍채 앞에서 자전거의 크기는 왜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대조적인 모습으로 그들은 날마다 한차례씩 농장을 돌았다. 소작인들의 농사일을 독려할 겸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 일을 위해 요시다는 일부러 말을 일본에서 실어오기까지 했던 것이다. 혈통이 대단하다는 그 말의 족보 자랑이 시작되면 요시다는 입에 침이 마를 지경이었다. 그들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면 소작인들은 먼발치에서부터 미리미리 몸을 사렸다. 담배 한 대를 피우다가도 서둘러 담뱃대를 털었고, 점심때면 주위에서 누가 낮잠이라도 자지 않는지 살피고는 했다. 괜한 트집을 잡혀 욕먹는 것이 더럽고 비위 상했던 것이다.

"어이, 저 원수 놈덜이 또 오네. 책 안 잽히게 일덜 잘허소."

한 농군이 주위를 둘러보며 시름 겨운 탄식조로 말했다.

"아이고, 지리산 덕유산 호랭이넌 멀 묵고 사는고. 저놈덜 칵 안 씹어가고."

건너편 논두렁에서 다른 농부가 말을 받으며 논으로 들어섰다.

"호랭이넌 아무나 묵간디. 저놈덜 창새기넌 곰쓸개보담 써서 호랭이도 안 묵네."

또 다른 농부가 피를 뽑아들며 그들 쪽으로 침을 내뱉었다. 말발굽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모습은 곧 가까워졌다.

"이건 누구 논인가, 누구!"

요시다가 말을 멈춰잡으며 소리쳤다. 이동만이 그 말을 조선말로 바꾸었다.

"야아, 지 것이구만이라우."

두 번째 농부가 어물어물 나섰다.

"이 논은 색깔이 왜 이 모양이야. 게으름피우지 말고 거름을 더 쳐, 거름."

요시다가 채찍끝으로 농부를 겨냥하며 날카롭게 외쳤다.

"이리 농사지먼 소작 띠일 것잉게 정신 똑똑허니 채려."

이동만이 옮겨놓은 말이었다. 그리고 요시다는 채찍을 휘둘러 다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동만은 기를 쓰며 자전거를 몰아대고 있었다.

"저런 개아덜놈덜. 당장 날베락이나 쳐서 칵 꼬드라져라."

멀어져 가는 그들을 노려보며 두 번째 농부가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나무래는 씨엄씨보담 말기는 시누가 더 밉다는 말언 저 이동만이 놈 두고 헌 말이여."

세 번째 농부가 주먹질을 해댔다.

"소작료럴 올리고도 저리 큰소리 탕탕 치니 참말로 사람 환장헐 일이시. 반타작 소작질에 목얼 매고 살어야 허는 우리 신세넌 천상 종놈 신세 다 되야분 것이여, 빌어묵을!"

첫 번째 농부가 논두렁으로 올라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이리 당허고만 있어서야 되겄어. 저것덜얼 쳐죽이든지 어쩌든지 무신 수럴 내야제."

두 번째 농부도 논두렁으로 올라섰다.

"글씨 말이여, 맘이야 다 그런디 우리가 믿는 디가 있어야 소리도 질러보고 기댈 디가 있어야 뎀베보기도 헐 것 아니라고. 저놈덜언 헌병이야 순사야 등에 지고 나대는 판인디 우리덜언 머시가 있어야 말이제. 의병도 다 꺼져가는 불이니."

세 번째 농부의 탄식이었다.

"그려, 우리 편언 눈 씻고 찾어도 없제. 있는 사람덜이야 그제나 이제나 배불리 묵고 살겄제만 우리겉이 없는 사람덜이야 앞으로 살아나가기가 뻘밭에 빠져 허부적이는 꼴일 것이로구만."

첫 번째 농부가 쓴 입맛을 다시며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았다.

"그러겄제. 갈수록 살기가 팍팍헐 것이여."

세 번째 농부도 곰방대를 빼들며 논두렁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더 말이 없이 담배만 뻐끔뻐끔 빨았다. 푸르른 들녘에는 따가운 햇살만 내리쬐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 깊은 밤이었다. 짙은 어둠속에서 그림자들이 담을 넘고 있었다. 소리없 이 움직이고 있는 그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담을 다 넘은 네댓 개의 그림자들은 재빠르게 움직여 사랑채 쪽으로 몰려갔다. 그림자들이 사랑채 앞에서 멈춰 섰다. 하나의 손짓에 따라 그림자들은 두 패로 갈라졌다. 한 패는 사랑채 앞에 늘어섰고, 다른 한 패는 마루로 올라섰다. 그림자들은 제각기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마루로 올라선 세 그림자 중의 하나가 문고리가 잡아당겼다. 방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허술한 지게문이 아니라서 안으로 걸린 문고리를 밖에서는 벗길 수가 없었다. 그림자가 문을 흔들었다.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림자는 더 거칠게 문을 흔들어댔다. 그 소리가 어둠 속의 적막을 깨고 있었다.

", 누구여! 누구여!"

방안에서 흘러나온 겁 질린 소리였다.

"밤중에 찾어온 것이 누구넌 누구겄어, 밤손님이제. 돈만 내노면 된게 얼렁 문 열어."

그림자의 대꾸였다. 이동만은 와들와들 떨면서도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문을 열어주었다간 벽장 안에 모셔놓은 돈궤의 돈을 고스란히 빼앗길 판이었다. 기운 쓰는 머슴이 둘이나 되는데 그런 억울한 꼴을 당할 수는 없었다. 농사도 안 지으면서 머슴을 둘씩이나 먹여 살리는 것은 몰려드는 소작인들을 막아내고 이럴 때 써먹자는 것이었다. 문을 열어주지 말고 머슴들을 깨우면 될 일이었다. 이동만은 방문 쪽으로 살금살금 기었다. 그리고 문고리를 붙들었다.

"도적이야, 도적이야! 판돌아, 갑동아, 얼렁 일어나그라아. 도적이야, 불이야!"

이동만은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어어, 난리시. 으쩌까?"

그림자 하나가 당황했다.

"다덜 정신 채려. 저놈얼 죽여야 혀!"

다른 그림자의 짱짱한 목소리였다.

"판돌아, 갑동아, 도적이야, 살인이야!"

너무 소리를 질러 이동만의 목소리는 패고 있었다. 그림자들이 뒤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몸으로 방문을 떠다밀었다. 나뭇가지들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부서져 나갔다. 어둠 속에서 그 소리는 너무나 요란스러웠다.

"판돌아, 갑동아, 이놈덜아......"

방문이 떼밀리는 바람에 이동만은 방바닥에 나뒹굴어지며 소리치고 있었다.

"작인덜 피 빨아대는 이 웬수놈얼 죽여!"

이 말과 함께 그림자들이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이고메 나 죽네. 살인이여, 살인!"

이동만은 몽둥이를 피해 어둠속을 허우적거리며 외쳐대고 있었다.

"죽여라, 죽여!"

"골통얼 깨, 잡새끼!"

"어쿠......아이고메......"

어둠 속에서 퍽 퍽 하는 둔한 소리에 맞물리는 날선 비명이 뒤엉키고 있었다.

"어떤 놈덜이여, 때래 잡어!"

", 저그, 저그여."

두 머슴이 사랑채로 달려오고 있었다.

"머심놈덜이다, 저놈덜 패죽여!"

사랑채 앞을 지키고 있던 그림자들이 두 머슴과 맞붙었다.

"에라이 잡녀러 새끼덜!"

"아이고, 윽윽......"

"더런 놈덜, 다 죽여 다!"

방은 방대로, 마당은 마당대로 비명이 터지고 있었다. 그 때 안채 쪽에서 불빛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들의 외침이 어둠을 찢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어, 살인 났네, 살인!"

"다 듣소오, 사람 죽이네, 사람 죽여!"

"어이, 지집년덜이 불얼 들었네."

마당에서 다급하게 소리쳤다.

"머시여! 다덜 내빼."

방에서 그림자들이 튀어나왔다. 그림자들은 삽시간에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불빛과 여자들의 외침이 사랑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놈덜 잡아라, 저놈덜. 저것덜이 도적이 아니라 작인 놈덜이다. 당장 잡어!"

이동만은 허둥지둥 방에서 나오며 외쳐대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마루 아래 토방에서 마당으로 곤두박였다. 조금 있다가 호롱불빛이 사랑채 마당을 비추었다.

"아이고 영감, 요것이 어쩐 일이당게라."

호롱불을 든 부인 박씨가 질겁을 했다. 얼굴이 피범벅인 이동만은 죽어버린 것처럼 마당에 널브러져 있었던 것이다.

"영감, 영감, 정신 채리시오."

호롱불을 부엌데기에게 넘긴 박씨는 울먹거리며 남편을 흔들었다.

"나 다, 다리......다리가......"

무슨 심한 고통을 참는지 얼굴을 찡그릴 대로 찡그린 이동만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다리가 어쨌다는 것잉게라?"

박씨가 두서없이 남편의 다리를 붙들었다. 그 순간 이동만의 윗몸이 벌떡 일으켜지며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이동만의 윗몸이 내던져지듯 뒤로 넘어갔다. 그때서야 박씨는 남편의 다리가 부러졌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고 죽겄네, 아이고 허리야."

불빛이 흐린 마당 한쪽에서 들리는 앓는 소리였다. 그리고 또 다른 쪽에서도 신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저것이 무신 소리여?"

박씨가 놀라서 물었다.

"매타작 당헌 머심덜이구만이라우."

호롱불을 머리 위로 치켜 올린 부엌데기가 그쪽으로 눈길을 모으며 대답했다.

"아이고 저런 못난 반편이덜. 엄살떨지 말고 얼렁얼렁 일어나 쥔어런 방으로 뫼셔. 느그덜이 사람이여."

박씨는 몸을 발딱 일으키며 표독스럽게 쏘아 질렀다. 곧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두 머슴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하나는 머리와 얼굴이 터져 피를 흘리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 채 다리를 절룩이고 있었다. 그 몰골을 보자 분이 끓어오르던 박씨의 가슴도 약간 누그러졌다.

"쥔어르신이 이리 되도록 멋덜 혔어."

그러나 박씨는 남은 분을 내뿜었다.

"그놈덜이 한둘이 아니라 열 놈이 다 됐구만이라. 죽을 힘얼 다혔는디도......"

머리가 터진 머슴의 기죽은 대꾸였다.

"어르신이 다리가 분질러졌응게 조심히서 방으로 뫼셔."

네 사람이 받치고 들고 하는 가운데 이동만은 계속 숨넘어가는 비명을 질러댔다. 방에 눕히기까지 어찌나 소리를 질러댔는지 이동만의 목은 쉬어버렸다.

"어쩐 독헌 도적 놈덜이 사람얼 끌어내다가 다리꺼정 분질르능고......"

혼수상태에 빠진 남편의 얼굴에서 피를 닦아내며 박씨는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그들이 소작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동만은 일단 겁이 없어졌다. 몽둥이질을 당하면서도 한 놈만 잡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욕심으로 정신없이 뒤를 쫓다가 마루에서 허방을 딛으며 굴러 떨어져 다리를 부러뜨리게 된 것을 박씨가 알 리 없었다. 하늘이 휘붐하게 트이자마자 이동만은 병원으로 실려갔다. 급히 연락을 받고 달려온 요시다가 앞장선 입원이었다. 군산에 하나밖에 없는 병원은 일본인 전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병원은 의병을 토벌하다 부상당한 일본군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일종의 후송병원이었다. 그러다가 <남한 대토벌>이 끝나면서 일반병원으로 모습을 바꾸게 되었다. 체를 하면 소금 한 주먹을 털어 넣거나 된장을 물에 풀어 한 사발 마시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꺽꺽 건트림을 해대며 견디고, 하루거리로 열이 올라 어금니가 마주치도록 부들부들 떨며 여름 내내 학질을 앓으면서도 금계랍 몇 알을 사먹을 수 없는 가난한 조선 사람들로서는 아예 그 병원 앞에 얼씬거린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바가야로! 칙쇼!"

옷이 벗겨진 이동만의 몸뚱이를 보며 요시다는 험악한 얼굴로 연거푸 욕을 내뱉고 있었다. 이동만의 살찐 몸뚱이는 여기저기 멍투성이였다. 그 피멍들에 어울리게 이동만의 입에서는 연상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답답한 일이 있나. 아니 그래 그놈들 중에서 얼굴 아는 놈이 한 놈도 없단 말이오?"

요시다가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 말은 이동만의 화를 지를 뿐이었다.

", 캄캄한 밤에 무슨 수로 얼굴을 알아봅니까."

이동만이 거침없이 쏘아 질렀다. 요시다 앞에서 그리 당당하게 기세를 편다는 것은 평소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동만의 배짱은, 내가 네놈 대신에 이 꼴이 된 것이다 하는 시위를 겸해 공을 과시하자는 것이었다.

"죽일 놈들이 다리까지 부러뜨리다니. 그놈들을 내가 꼭 잡아내고 말테니까 이 주임은 치료나 잘 받으시오."

요시다의 이 말에는 아무 대꾸 없이 이동만은 앓는 소리만 더 크게 냈다. 다리가 부러진 이유를 사실대로 발설했다간 아무래도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에에 또, 이 주임한테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을 알려줄 게 있소. 바로 며칠 전에 미개간지 이용법이 공포됐소. 이건 지난 4월에 공포된 토지 수용령과 함께 우리한테는 그야말로 유리한 법이란 말이오. 땅을 더 많이 늘려갈 수 있는 법이니까. 총독부에서는 이 달 6월에 들어 벌써 어업령 임업령까지 공포하고 또 미개간지법까지 공포해 준 것이오. 이렇게 우리 앞길을 착착 열어줘서 할 일이 많아졌으니 이 주임은 어서 빨리 완쾌하도록 하시오. 범인은 내가 꼭 잡을테니까."

요시다는 이동만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동만은 그만 가슴이 찡 울렸다. 이동만이 다리가 부러지도록 소작인들에게 몰매질을 당했다는 소문은 한나절이 못 가 농장 안에 쫙 퍼졌다.

"아이고, 그놈이 칵 뒤졌어야 허는디 아깝게 되야부렀구마."

"그놈이 앉은뱅이나 돼불먼 씨언허겄다."

"그나저나 하늘이 도왔네. 잽힌 사람이 하나또 없당게 말이시."

"그 간 큰 사람덜언 대체 누구까?"

"누구넌 누구여. 우리보담 잘난 사람덜이제. 아조 잘헌 일이로구만."

"근디 그 사람덜이 작인 이름 내건 의병덜이 아닐랑가?"

"글씨, 그럴 법도 헌디?"

그러나 이런 입 모음들도 잠깐이었다. 소작인들은 차례로 농장 사무실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농장 사무실에는 헌병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사무실은 헌병대 수사실로 변해 있었다. 헌병들은 소작인들에게 무작정 매타작을 놓았다. 범행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그 매타작은 나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범인들의 흔적은 끝내 찾아지지 않았다.

"매타작얼 당혔어도 그 작인덜이 안 잽혀서 한나도 아프덜 않구마."

", 나 맘도 그렇단 말시."

"우리가 또 매타작얼 당허드라도 존게 담에넌 요시다놈 다리럴 분질렀으먼 좋겄네."

", 저 입방정 보소."

소작인들은 끼리끼리 모여 '범인'이 잡히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동시에 고소해했다.

"그놈들이 아마 소작을 떼인 놈들일 거요. 이번에 작인 놈들한테 쓴맛을 보였으니까 앞으론 더 기가 꼼짝을 못할 거요. 그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본 셈이오. 그게 다 이 주임 공이오."

요시다는 자기가 큰소리쳤던 것을 변명하기 위해 이동만을 공 치하하기까지 했다. 이동만은 큰소리만 쳐댄 요시다가 당장 꼴 보기 싫었지만 앞일을 생각해서 그런 감정은 내비치지 않았다.

"그놈들을 잡을려고 지배인님도 수고 많이 하셨지요."

이렇게 속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은 다리 때문이었다. 몽둥이에 맞은 타박상들은 별문제가 아닌데 다리 부러진 것은 네댓 달 동안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리를 뻗치고 누워 몇 달 동안 꼼짝을 못하게 되면 요시다가 자리를 갈아치워 버리는 것이 아닐까. 이동만은 그 걱정으로 몸이 달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왕에 잡지 못하게 된 범인들이 소작을 떼인 놈들 중에 있건 지금 소작을 짓고 있는 놈들 중에 있건 그건 관심이 없었다. 그가 후회를 곱씹고 있는 것은 괜히 그놈들 중에 하나라도 잡으려고 욕심 부렸던 일이었다. 이동만은 열흘쯤 지나 퇴원을 했다. 그러나 전혀 기동을 할 수는 없었다. 석고를 해붙인 왼쪽 다리가 뻣뻣하게 내뻗쳐 있었던 것이다. 이동만은 푹푹 쪄대는 삼복더위를 땀 삐질삐질 흘려대며 앉은 자리에서 나야 했다. 호남평야는 들판이 넓어 논농사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들판이 넓으면서 기후가 벼농사에 꼭 알맞았던 것이다. 벼는 물을 좋아하고 쨍쨍한 햇볕을 좋아하고 낮이 긴 것을 좋아하면서 반면에 바람은 싫어했다. 그런 기후란 비가 많이 오면서 햇볕이 따가운 데다 바람이 불지 않으니 햇볕 속에 나서면 끈끈하고 숨이 막힐 지경이 되고, 그늘에서도 눅눅하고 후텁지근할 수밖에 없었다. 벼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살기에는 고약한 기후였다. 혼자 기동도 못하는 병자의 몸으로 그런 한여름을 나자니 이동만은 괜한 일에도 짜증을 내고 아무에게나 소리를 질러대고는 했다.

"아이고메, 큰 벼슬 허고 앉었다, 벼슬."

그의 비위를 맞추고 눈치보기에 지친 그의 아내 박씨는 아랫사람들 앞에서도 신경질을 감추지 않게 되었다.

"흐흐흐흐...... 마침내 조선교육령이 공포됐소. 이제 본격적으로 일본어교육을 실시해 조선사람들을 그야말로 대일본제국의 신민을 만든다 이거요. 그 얼마나 잘 생각해 낸 묘책이오, 흐흐흐흐......"

한 달에 한번쯤 얼굴을 내밀고 가는 요시다가 8월에 와서 한 말이었다.

"우리가 기다리던 미간지 조사가 드디어 착수됐소. 땅 넓힐 기회가 왔으니 이 주임도 어서 낫도록 하시오."

요시다가 9월에 와서 한 말이었다. 그 즈음에 이동만은 양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고 집 앞까지는 나다니고 있었다. 이동만은 넉 달 만인 10월에 다리에서 석고를 떼냈다. 금방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기분도 잠시뿐이었다. 석고를 떼내고 걸어보니 다리가 절름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 다리가 어째 이러요. 나가 절름발이 되야분 것 아니오!"

이동만은 일본의사에게 조선말로 울부짖었다. 의사는 처음이라서 그럴 거라고 했다. 걸음걷기 연습을 자꾸 해나가면 차차 정상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이동만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동만은 힘드는 것을 참아가며 밤낮없이 걷는 연습을 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절름거리는 것은 고쳐지지 않았다. 의사는 태연하게, 부러진 뼈가 다시 붙으면서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동만은 눈앞이 캄캄해지며 정신이 아뜩해지는 걸 느꼈다. 평생 절름발이 신세였던 것이다. 며칠을 낙망에 빠져 있던 이동만은 뿌드득 이빨을 갈아붙이며 일어섰다. 이대로 주저앉아 버렸다간 작인놈들이 바라는 대로 된다는 생각이었다. 작인 놈들에게 원수를 갚기로 이를 앙다물었다. 이동만은 자전거를 버려둔 채 지팡이를 짚고 사무실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아이들이 먼발치에서 놀림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절름발이 절름발이 딸랑딸랑 절름붕알 이리 절름 이리 딸랑 저리 절름 저리 딸랑

절름거리는 다리로 뛸 수도 없고, 멀찌막하게 떨어진 아새끼들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고, 이동만은 가슴에 끓는 천불을 들판에다 토해낼 수 밖에 없었다. 황금빛으로 변한 넓고 넓은 들판을 느릿한 부드러움으로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28. 변신의 굴레

날마다 바다끝은 보이지 않았다. 바다 저편은 누르스름하면서도 희끄무레한 색조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그 칙칙하고 음산한 색감의 휘장은 하늘까지 이어져 있어서 수평선과 맞닿아 있는 하늘 끝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누르칙칙한 휘장은 햇살을 모두 잡아먹고 해마저 빈혈 앓는 모습으로 만들어놓았다. 해는 날마다 생기 잃은 커다란 동그라미로 자취를 감추고는 했다. 그 희멀건하게 붉은 해가 현란한 빛으로 충만한 노을을 거느릴 리 없었다. 살아서 뛰는 빛과 싱싱하게 반짝이는 색들로 현란함의 극치를 이루는 바다노을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바다에 끼어 있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휘장은 안개가 아니었다. 그건 저 먼 대륙에서부터 날아오고 날아오는 흙먼지였다. 반도의 서쪽바다를 예로부터 '서해'라고 하지 않고 굳이 '황해'라고 이름 지은 까닭은 대륙을 관통해서 흘러내린 길고 긴 강들이 누런 흙탕물을 바다에 쏟아내 그 색깔을 누렇게 물들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해의 생기를 빼앗을 만큼 진하게 날아오는 흙먼지들도 서쪽바다에 떨어져 내리며 '황해'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바닷가인 군산은 그 흙먼지가 한층 심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새로 지은 건물들이 즐비한 시가지가 충충해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날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군산은 잔치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넓게 뚫린 번화가의 길목마다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고, 나무신인 게다짝 딱딱거리는 소리가 더 요란해진 가운데 일본사람들은 현수막을 가리키고 서로 손을 맞잡아 흔들기도 하면서 껄껄거리고 목소리가 높았다. 가게마다 일본식 붉은 지등을 내걸었는가 하면, 상인들은 자전거를 거칠게 몰아대며 피할 사람이 없는데도 연상 찌릉찌릉 종을 울려댔다.

경축 군강선 철도 개통 경축 군산부 철도 완공

현수막에서 펄럭이고 있는 글씨였다. 현수막에 쓰인 글씨 그대로 군산과 강경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었던 것이다. 철도 개통으로 군산 전체가 떠들썩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철도가 개통됨으로써 군산은 마침내 육로 수로 철로 세 가지 길이 합쳐지는 교통의 요충이 됨과 아울러 다른 부들보다 앞질러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철도 개통의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았다.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경에 이르는 뱃길에서 소모하는 시간을 단축시키기는 동시에 수송량을 대폭 늘릴 수 있는 이점만이 아니었다. 그 철도는 엄연히 호남선의 일부였다. 따라서 군산의 세력은 항구로써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륙으로 뻗치게 되어 있었다. 힘을 뻗칠수록 일본물건들을 많이 팔아먹고 조선 물건들을 많이 내갈 수 있어서 군산을 그만큼 번창할 수밖에 없었다. 전주까지 신작로를 닦아 호남평야의 쌀을 신속하게 실어내게 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승합마차까지 달리게 되니 강경장으로 찾아가던 상인들이 군산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 신작로가 일으킨 이변이었다. 그런데 달구지보다 몇 배나 빠르고 힘이 센 기차가 달리게 되었으니 또 생겨날 이변은 얼마든지 있었다. 철도 개통식날도 3월의 하늘은 칙칙하게 흐리기만 했다. 그러나 군산역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가 일본사람들이었다. 군산을 휘어잡고 있는 관리들과 재력가들이었다. 그런데 재력가란 사업가들이기보다는 각 농장을 대표하는 농장조합원들이었다.

"호남선 전 구간에 걸쳐서 우리 군산, 강경선이 제일 먼저 개통을 보다니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이오."

손가락 등으로 수염 끝을 밀어 올리며 쓰지무라가 껄껄대고 웃었다.

"그게 다 부청에서 애쓰신 덕분이 아닙니까."

요시다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아니오, 아니오. 우리 관청에서야 한 일이 뭐 있나요. 다 농장에서 애써서 이런 좋은 결실을 맺었지요."

쓰지무라가 겸손한 척해 보였다.

"과분하신 말씀이십니다. 저희들이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저어, 앞으로 이 역에서 부두까지 철도를 연장시키는 것이 시급한 문제데, 그 일도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요시다는 아첨을 서슴지 않았다.

"돕지요, 돕고 말고요, 그게 다 대일본제국의 융성을 위하는 일이 아닙니까."

쓰지무라는 시계금줄 늘인 배를 내밀며 흡족하게 웃어댔다. 그들 옆에서 몸을 약간 돌려 세운 하시모토는 손수건으로 눈을 문지르며 쩔쩔매고 있었다.

"아니 하시모토 상, 왜 그러십니까?"

백종두가 눈치 빠르게 가까이 다가섰다.

"빌어먹을 눈에 티가 들어갔소. 무슨 놈의 흙먼지가 이따위로 지독해."

하시모토가 눈을 부비대며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불쑥 내뱉은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주위 사람들의 눈길이 그에게로 쏠렸다.

"아히, 하시모토 상 하늘에 미움 산 일이 있나. 그게 그냥 티가 아니라 흙가루니까 자꾸 문지르지 말고 눈물을 흘려 씻겨나가게 하시오."

쓰지무라가 경험을 자랑하듯 여유 있게 말했다.

"맞습니다. 자꾸 문질러대면 흙가루가 눈알에 박혀 더 탈이 생기지요. 하시모토 상이 아직 조선생활에는 초년병이라."

요시다가 말끝을 묘하게 비틀며 맞장구를 쳤다. 하시모토는 요시다의 말에 울컥 화가 솟았다. 초년병이라니...... 불난데 부채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화를 지그시 눌러 참았다. 자리도 자리였고, 아직까지는 요시다와 맞대결할 시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초년병? 예에, 맞는 말씀이지요. 초년병이야 언제나 노년병의 말을 잘 들어야 덕을 보는 거지요."

하시모토는 겸손한 척 말했다. 그러나 말투에는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었다.

"글쎄요, 하시모토 상도 이젠 초년병을 넘어선 것 아닌가요? 조선말을 거의 다 알아 들을 정돈데. 조선말은 요시다 상보다 하시모토 상이 더 잘하는 것 아닌가요?"

우체국장 하야가와가 그 웃음 머금은 듯한 얼굴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요시다를 찌르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그는 그간에 출장소장에서 우체국장으로 직위가 달라져 있었다.

"어허허허...... 그러고 보니 그렇군. 하시모토 상도 초년병이야 아니지."

쓰지무라가 은근히 하시모토를 편들며 껄껄거리고 웃었다.

"그까짓 조선 놈들 말 잘 알아듣고 떠듬거리며 흉내 내는 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통변이 있으면 됐지."

요시다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니 요시다 상,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설마 그렇지 않겠죠?"

하야가와가 정색을 하고 요시다를 쳐다보았다. 그 얼굴에는 언제나 감도는 웃음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요시다는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금방 깨달았다. 조선말을 가능한 한 빨리 익히고, 통변을 전적으로 믿지 말라는 것은 관청에서 암암리에 내리고 있던 지시였던 것이다. 그 지시는 한 사람당 열 명의 정보선을 독립적으로 확보하라는 지시와 맞걸리는 것이기도 했다.

"아닙니다, 농담입니다. 하시모토 상만큼 조선말을 못하니까 해본 농담이지요.

하시모토 상이야 워낙 통변 출신이니까 어학에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 아니가요. 그 재주로 치자면 하시모토 상을 당할 사람이 없겠지요?"'

요시다는 다른 사람들을 싸잡아 하시모토와 비교하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고 있었다.

"아마 그럴 거요. 하시모토 상이야 재주도 좋은데다가 열성이니까."

쓰지무라가 고개를 끄떡이고는 다른 말을 꺼내게 되어 요시다는 일단 안심하게 되었다. 하시모토를 좀 밟아주려다가 오히려 자신이 궁지에 몰릴 뻔 했던 것이다. 젊은 놈이 제 농장을 갖겠다고 설쳐대는 꼴이 더욱 아니꼽고 껄끄럽게 느껴졌다. 그때까지도 눈에서 티를 빼내지 못한 하시모토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속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어디 보자, 요시다 이놈아. 네놈이 농장이 제일 크다고 지금은 까분다만은, 네놈은 어디까지나 월급쟁이일 뿐이야. 두고 봐, 머잖아 네놈이 앉아 있는 회장 자리를 나한테 내놓게 하고 말 테니까. 어서 많이 까불어라.

"이래서는 안 되겠는데요. 눈꺼풀을 뒤집어 확 불면 티가 나가는데요."

백종두가 하시모토 옆으로 다가섰다.

"아니오, 괜찮소."

"아닙니다. 제가 확 불어드릴게요."

백종두는 눈치 없이 더 바짝 다가섰다. 역 주변은 온통 잔치기분으로 들떠 있었다. 신식 악대가 붕짝붕짝 흥나는 가락을 울려대고, 울긋불긋한 깃발들이 수없이 줄에 매달려 팔랑거리고, 넓은 마당을 가득 채운 구경꾼들은 북적거리고, 사탕장수며 엿장수들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손님을 불러대느라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저놈덜 저것, 해논 것 잠 보소."

역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지삼출이 앞을 바라본 채 중얼거렸다.

"머 말이여?"

손판석도 눈길을 앞쪽으로 보냈다.

"저 시뻘건 핏뎅이 말이시."

지삼출이 세차게 혀를 찼다.

", 저것이 불뎅이제 어디 핏뎅이간디. 일장기, 해란 말이시, ."

손판석은 곧이곧대로 말을 받았다.

"아따 자네 잘났네. 나 눈에넌 핏뎅이로만 뵈는구만. 나야 무식헝게."

지삼출이 퉁을 놓았다.

"아니구만, 자네 말도 맞어. 사람 죽이기 좋아하는 저놈덜 맘보 같기도 허시."

손판석은 지삼충의 마음을 헤아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씨부랄 놈에 것만 보먼 속이 확 뒤집어짐서 전신이 떨린당게."

지삼출은 뿌드득 이빨을 갈았다. 새로 지은 역건물의 가운데 지붕은 삼각형으로 뾰족이 높이 솟아 있었고 그 꼭대기에 세운 높은 깃대에서는 커다란 일장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새하얀 바탕에 새빨갛게 찍힌 동그라미는 하늘이 흐려서 그런지 유난히 붉고 크게 보였다. 지삼출은 그 깃발을 볼 때마다 진한 피비린내를 맡았다. 그리고 전신 부르르 떨리는 전율과 함께 당장 그 깃발을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감정은 일본군 토벌대를 대하면서 느낀 그대로였다.

"나도 속 뒤집어지는디 얼렁 지나가세. 인자 즈그 땅이라고 저 염병지랄인디, 당장이야 안 보는 것이 상책이제."

손판석이 쓴 입맛을 다시며 먼저 걸음을 떼어놓았다.

", 저 꼬라지 보먼 나보담도 자네가 더 속 뒤집어지겄구마. 저놈에 철길공사에 자네 피땀도 서너 바가지넌 들었을 것 아니라고?"

지삼출은 뒤늦게 손판석이 철도공사장에서 도망쳐 나왔던 일을 생각해 냈다.

"말도 마소. 나넌 요새도 헌병 놈덜얼 보면 가심이 통개통개허시. 날 알아보는 놈이 있을랑가 싶어서 말이시."

"그런 걱정 말소. 우리가 왜놈 보면 그놈이 그놈이대끼 왜놈덜도 우리 보면 다 어슷비슷헐 거싱게. 자네넌 그적에야 빡빡 중대가리였는디 시방이야 신식 왜놈머리 아니라고."

지삼출은 손판석의 마음속에 들어앉은 남모를 걱정을 없애주려고 머리 모양이 달라진 것까지 일깨웠다. 손판석은 포로로 잡혀 상투머리를 잘린 다음부터는 단발을 하게 되었다.

"그럴 법도 허시. 인자 자네도 그놈의 상투 짤라붙소. 답답하고 근지럽고 냄새 나고, 좋을 것이 머시가 있능가. 머리가 이리 짤막헝게 시언하고 가뿐허고 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네."

손판석은 보란 듯이 두 손으로 손가락 빗질을 해넘겼다.

"나야 싫네. 자네맨치 억지로 당혔으먼 멀라도 나 뜻으로 상투 짤라 왜놈덜 숭내낼 맘이야 없응게."

지삼출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놈에 고집통 머리. 허먼, 평상 상투 틀고 살 참이여?"

손판석이 눈을 흘겼다.

"두고 보세. 아직은 짤를 맘이 없응게."

손판석은 더 말하지 않았다. 지삼출의 고집을 잘 아는 탓이었고 그러다가도 어느 때 마음만 먹으면 상투쯤 쉽게 잘라버릴 지삼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허 시님이 그간에 만주 댕게왔을랑가?"

손판석이 새 이야기를 꺼냈다.

"몰르겄는디. 그 사람 뚝뚝헌 얼굴만 보고야 통 맘을 짚을 수가 없응게. 쬐깨 빨르게 걷세. 그 사람이 기둘리게 히서넌 안된게."

그들의 걸음은 빨라졌다. 공허는 그저께 바람처럼 나타나서 만나자는 말 한마디를 남겨놓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던 것이다. 포교당에서는 공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간에 고생덜이 많았겄지요."

공허가 비로소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즈그덜이야 몸에 익은 일인디 고상언 무신...... 근디 시님언 그간에......"

지삼출은 말 끝을 사리며 공허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다음 말은 눈에다 담고 있었다.

"예에, 모시고 댕게왔구만요."

공허가 나직하게 말하며 엷게 웃었다.

"무사허셨구만이라우."

"거그가 어딘게라?"

지삼출과 손판석은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앉으며 한꺼번에 입을 열었다.

", 무사허니 통화라는 땅에 당도허셨는디, 거그서 어디로 옮기실란지넌 소승도 잘 몰르겄구만요. 거그 헹편에 따라 정허실 일이닝게."

그들은 '대장님'이니 '만주'니 하는 말은 생략하고 있었다. 공허가 송수익과 함께 만주로 동행했다가 돌아온다는 계획을 아는 것도 대원들 중에 몇 사람 되지 않았다.

"어찌...... 거그넌 조선 사람덜이 많이 건네와 있등게라?"

지삼출이 마른침을 삼켰다.

"우리 조선 사람덜이 많기로넌 거그 서간도보담 북간도 용정 쪽이 더 많다고 헙디다."

"글먼 잘못 가신 것 아닝게라?"

"그러지넌 않구만요. 거그도 사람덜이 뫼들고 있는 참이고, 나라 찾을 일로 뜻얼 합치고 있는 중입디다. 북간도허고도 내왕이 잦고."

"땅언 넓등게라?"

손판석이 물었다.

"나가 보고 온 것언 한 구석지뿐이라 머시라고 말허기가 난헌디, 땅이 씨커먼디다가 들판에 논이라고넌 없응게 영판 요상허등마요."

"우리넌 어찌야 허능게라?"

지삼출이 쌈지를 꺼내며 물었다.

"안직 더 기둘러야겄소. 거그서 일얼 짜기로 혔응게."

"시님이 큰 고상허셨구만요."

"고상이 무신 고상이오. 중놈이 기차란 것 타고 산천유람 잘혔제. 올적에넌 압록강에 철다리가 완공돼서 더 편허게 왔소."

"글먼 기차란 것이 조선 땅허고 만주 땅얼 맘대로 왔다갔다 허능게라?"

손판석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예에, 작년 11월보텀 그리 됐소."

"왜놈덜 참말로 징한 놈덜이시. 거 머시라드냐. 그 무신 연락선얼 하로에 두 번썩 부산허고 일본 어디허고 왔다갔다 허게 맨근 것이 작년 12월 아니라고? 그 배에서 내려 기차럴 갈아타면 만주꺼정 대체 메칠이 걸리는 것이여? 밤낮 이틀이먼 안되겠다고. 그 연락선인가 먼가 띄운 것이 그 철다리 놓는 것허고 맞춘 것 아닐랑가?"

지삼출의 생각 빠른 머리가 그렇게 돌고 있었다. 군산에서는 한때 관부연락선 정기운항 소문이 파다했던 것이다.

"그 관부연락선이란 것 말이구만이라. 듣고 봉게 그런디, 왜놈덜이 그리 머리 썼을 것이오."

공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허 핵교 선상덜꺼정 군대옷 입히고 칼 차게 히서 조선 사람덜 꼼지락달싹 못허게 맨들어놓고 왜놈덜이 인자 만주 땅도 집어묵을라는 심뽀 아니여?"

손판석이 부싯돌을 치며 말했다.

"개자석덜이 그런 심뽀로구만. 그리 되먼 거그서도 의......"

지삼출은 말을 멈칫했다가는,

"우리 헐 일도 다 틀리는 것 아니여?"

말을 바꾸며 화가 난 얼굴로 담배를 뻑뻑 빨았다.

"나도 와서야 알었는디, 핵교 선상덜얼 헌병 맨들어넌 것 보고 앞이 캄캄해져 부렀소. 그려도 거그야 여그허고넌 달른게 맘 급허니 묵지 마시오."

공허가 위로하듯 말했다. 그들이 말하는 학교 선생들의 문제는 총독부가 작년 11월부터 공립보통학교 선생들에게 군인제복을 입게 한 것이었다.

"근디 여그서 살기넌 어쩌요?"

공허가 마음이 쓰이는 듯 약간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작저작 살 만허구만요."

지삼출은 가볍게 대꾸하며 웃어 보였다.

"식구덜언 어찌 되았소."

"인자 날도 풀리고 헝게 차차로 딜고 올라능마요."

공허는 마음이 무거워 눈길을 방바닥으로 떨구었다. 아직도 식구들과 떨어져 살고 있는 것은 그들의 노임이 형편없다는 증거였던 것이다. 토굴살이를 하지 않고서야 군산 같은 도회지로 식구들을 쉽게 옮겨올 수 없는 일이었다.

"딴사람덜언 어쩌고덜 있등게라?"

손판석이 담뱃재를 털며 물었다.

"다덜 자리 지키고 있드만요."

공허의 목소리가 착잡했다.

"다덜 맘 강단지게 묵어야 헐 것인디. 날언 자꼬 가고, 살기넌 에롭고......"

지삼출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그것도 걱정언 걱정이오. 나가 그저 부지런허니 찾아댕김서 단속허겄소."

공허가 바랑을 끌어당기며 일어날 채비를 했다.

"인자 어디로 가시능게라?"

손판석이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중놈 행보야 오란 디넌 없어도 갈 디넌 많은게요."

공허는 빙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중놀이가 공허 시님 같은지 알었음사 나도 진작에 머리 깎었을 것인디."

손판석이 뚱하게 말하며 일어났다. 지삼출이 혀를 차며 눈총을 쏘았다.

"땡초놀음이 볼 만헌갑제라? 중도 속도 아니란 말이 나 겉은 놈 두고 난 말잉게 중놀이가 다 이렇다고 생각지넌 마시요 잉."

공허는 돌덩이 같은 느낌의 머리를 뒤로 젖히며 호쾌하게 웃어댔다. 지삼출과 손판석은 포교당을 앞서서 나왔다. 주위를 둘러본 그들은 뒤를 돌아보는 일 없이 내처 걸었다.

"자네 부두로 철길 빼는 일 어쩔 참이여? 날이 다 차가는디."

한참 걷고 나서 손판석이 말을 꺼냈다.

"자네나 나나 팔자 사납게 철길공사판 일얼 익힌 몸이기넌 헌디, 품삯이 등짐질보담 알매나 많을랑고?"

"우리야 한 푼이 급헌 헹펜잉게 그것이야 따질 것이 없고. 눈앞에 돈보고 공사판으로 옮겨앉었다가 그 공사 끝나불먼 십장헌티 미움 사 등짐질 못허게 될란지도 모른다 그 말이시."

"그것이야 걱정 말소. 우리가 부두 등짐질에 평상얼 말뚝 박을 것도 아니고."

지삼출은 잘라 말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시. 글먼 사람덜이 넘칠란지도 몰릉게 당장 가서 이름 올리세."

"괜찮허시, 사람이라고 다 받아주간디. 기운 쓰는 것 봐감서 골른다는 말 못 들었능가. 왜놈덜 야박헌 인심에 우리가 덕보게 생겼네."

지삼출이 쓰게 웃었다. 군산역에서 부두까지 연장하는 철도공사는 오로지 쌀만을 운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공사비도 농장과 상인들이 부담하고, 노동자들의 임금도 다른 철도공사와는 달리 낮게 준다는 소문이었다. 길거리의 현수막은 여전히 펄럭거리고 멀리서 뙈액 땍 기차가 소리 지르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아리들은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투어 뛰어가고 있었다. 개통식을 마치고 기차가 강경으로 떠나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빌어묵을, 돼지 멱따는 소리시."

손판석이 소리나는 쪽으로 침을 뱉었다.

"조선 놈덜 개명시키고 편히 살릴라고 철길 깔아준 것인디 그 은혜에 고마워허덜 않고 그 무신 호로시런 짓이여."

지삼출이 정색을 하고 말했고,

"아이고메, 잘못혔구만이라. 지가 원체로 무식히서 그런지 몰랐구만요. 다시넌 안 그럴팅게 용서허시씨요."

손판석은 비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마주보며 헤식은 웃음을 흘렸다.

"근디, 자네 언제 집에 걸음 헐랑가?"

손판석이 시름겨운 소리로 물었다.

"위태위태허니 걸음만 허먼 머헐 것잉가. 어서 다 딜고 와야 헐 것인디."

지삼출의 얼굴에 그늘이 스쳤다.

"나 말도 그 말인디. 꼬랑지가 질먼 밟히드라고 실속 없는 걸음 그만 허고 싹 딜고 오는 것이 어쩐가. 그 무신 법인지가 새로 생겨 인자 곧 맘대로 잉겨살지도 못허게 헌담시로."

"긍게 말이시. 근디 나넌 또 한 식구가 딸레서 더 걱정이로구마."

"무신 소리여? 첩 뒀간디?"

"어이, 첩에다 자석이 열이시."

지삼출은 픽 웃음을 흘리고는,

"거 영근이네 말이시. 검골댁이 따라나슬라고 애가 달았다니께."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영근이넌 영영 못 올 사람으로 쳐부렀능가?"

손판석이 의아스러워했다. 그러나 지삼출은 감골 댁의 딸 수국이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집 자석덜이 다 컸제?"

"둘다 시집 장개 갈 나이제."

"글먼 무신 걱정이여. 즈그 밥벌이 톡톡허니 헐 나인께로 아덜언 부두서 쌀짐 지게 허고, 딸언 미선소서 일자리 잡으먼 우리보담 더 낫게 살겄는디. 그 감골 댁이 자네허고넌 원체로 한집안겉이 살어서 그러는갑구만."

"그려, 그런 것이제."

지삼출은 그저 그런 것으로 얼버무렸다.

"긍게 더 지체헐 것 없덜 안혀?"

"그려, 거적얼 쳐서라도 비바람만 막으먼 살아지는 것잉게."

지삼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살림 가난험서 인물 잘난 것도 큰 탈이랑게라. 보름이도 에미 속 태우등마 수국이넌 보름이보담 더 고와분게 그 값 허니라고 왜놈꺼정 입맛 다시고 들어서 감골 댁이 딸년 지키니라고 정신이 하나또 없단 말이오."

지삼출은 아내의 몸 달아 하는 말을 다시 듣고 있었다. 달포 전에 갔을 때 아내는 그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감골 댁네도 함께 뜨게 해달라고 마음이 급했다. 아내가 그러지 않아도 감골 댁이 원하는 것이면 자신은 언제라도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다. 감골 댁네는 자신의 마음에서 전혀 남이 아니었고, 정 많고 인물 좋았던 아저씨를 생각하면 그 가족에게 잘해 주지 못한 것이 언제나 죄스러웠다. 보름이와 수국이는 하필이면 아버지를 닮은 인물이었다. 두 아들이 아버지를 닮았더라면 감골 댁이 그렇게 속 태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왜놈까지 수국이를 탐내고 드는 판이니 감골 댁이 딴 고장으로 뜰 작정을 할만도 했던 것이다.

"이참에 가서 일 저질러불랑가?"

손판석이 지삼출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세, 어채피 야반도주헐 신센께."

두 사람은 부두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다 쪽은 여전히 뿌옇게 흐려 있었다. 한편 감골 댁은 중매쟁이 봉산 댁에게 매일이다 싶게 시달리고 있었다. 감골 댁이 아무리 화를 내고 냉대를 하고 막말을 해도 봉산 댁은 끄떡도 하지 않고 찾아들고 또 찾아들었다. 봉산 댁은 새로 찾아들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들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저쪽에서 내세우는 조건이 달라져 있는가 하면, 이쪽의 약점을 용케 알아내 새 조건을 걸고 들기도 했다. 큰딸 보름이를 못살게 굴었던 할망구가 죽지도 않고 또 수국이한테까지 달라붙어 삼줄처럼 질기게 실랑이질하고 있는 것이 감골 댁은 지긋지긋하고 몸서리가 쳐졌다. 거기다가 난데없이 일본사람까지 덤벼들게 되자 감골 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왜놈이 딸을 눈독들인 그 황당한 일을 당하게 되자 감골 댁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을 번뜩 떠올리게 되었다.

"인물이야 꽃 중에 꽃이다마넌, 작약이라고 어디 다 궁궐서 놀아지디냐. 다 똑겉은 작약이라도 타고난 시와 때가 지각각이라, 난시궁처에 피어나면 그 팔자 호박꽃보담도 못허니라. 눈타고 손타서 고이 필 꽃이 어디 있드냐. 양귀비야 일색으로 천하나 엎었다마넌...... 아까운디, 참말로 아까와."

수국이가 아홉 살이었던가, 떠돌이 점쟁이가 복채도 놓지 않았는데 흘려놓은 말이었다. 감골 댁은 너무 기막히고 겁이 나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점쟁이에게 매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살이나 시키먼 될랑가......"

이 한마디를 남기고 점쟁이는 후적후적 떠나가고 말았다. 물동이를 이고 사립을 나간 수국이가 무엇에 쫓기듯 되돌아 들어오고 있었다.

"어찌 그냐, 수국아."

토방에서 배추를 다듬고 있던 감골 댁은 가슴이 섬뜩해져 딸을 불렀다.

"그 할망구가 또 오요."

수국이가 물동이를 내리며 진저리를 쳤다. 옆볼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아이고메 징허고 징헌 할망구. 저승사자는 멀허고 있능고."

감골 댁은 탄식하듯 하며 배추를 옆으로 밀치고 몸을 일으켰다.

", 자네가 그리 빌어준게 저승사자가 와도 ㅁ년 있다가 온다등마."

봉산 댁이 굽어진 허리에 왼손을 올리고 마당을 질러오며 비위장 좋게 말을 받아넘기고 있었다.

"그 나이에 다릿심만 존지 알었등마 귀도 총총허기도 허요. 저승사자가 올라먼 10년은 더 있어야겄소."

감골 댁은 말을 함부로 한 미안함 같은 것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 낯 두꺼운 뻔뻔함이 미워 또 험한 소리를 대질러버렸다.

"하먼, 하먼. 욕얼 많이 묵어야 오래 살고 악담얼 많이 들어야 명이 질어지는 법이시. 긍게로 자네가 고마운 사람이 아니고 머시여."

그러나 봉산 댁은 노여움을 타거나 화를 내는 일이라고는 없이 이렇게 능글능글 감고 들었다. 오히려 맥이 빠지는 것은 감골 댁이었다.

"말 다 끝냈는디 멀라고 또 왔능게라."

징그럽게 웃는 늙은 얼굴이 싫어 감골 댁은 고개를 돌리며 쏘아붙였다.

"어이 보소 ,자네 아덜 대근이가 신식 공부허고 잡아 발싸심이람시로?"

봉산 댁은 감골 댁의 치마귀를 잡아끌며 은근한 소리로 물었다.

"무신 새 날아가는 소리다요. 갸가 그리 넋이 안 나갔소."

감골 댁은 이것이 또 새로운 덫이다 싶어 야멸차게 내쏘았다.

"아따 자네 벌통얼 삶아묵은 것도 아닐 것인디 어찌 그리 톡톡 쏘고 긍가. 서로 좋자고 허는 일잉게 나 말 차근허니 들어보소."

봉산 댁은 감골 댁의 치마를 더 세게 끌어당겨 마루에 앉히려고 했다.

", 벌 중에서도 땅벌통얼 삶아묵었소. 드럽고 징헌게 여그 놓씨요."

감골 댁은 치마를 낚아챘다. 그러나 봉산 댁은 치마를 놓치지 않았다.

"보소, 보소, 나 말 들어보랑게. 자네 집에 인물 나서 집안이 크게 일어나게 생겼단 말이시. 대근이럴 한양이고 일본이고 다 보내서 신식 공부꺼정 시키겄다고 헌다니께. 자네 알아들어?"

봉산 댁은 숨 가쁘게 말을 해치우며 감골 댁 앞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인자 벨 드런 놈으 소리 다 듣겄소. 무신 소리럴 히도 소양 없소."

감골 댁은 매서운 눈으로 봉산 댁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 뜻밖의 말이 마음 한구석을 파고들었다. 대근이와 수국이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부엌에 있는 수국이가 봉산 댁의 말을 못 들었으면 싶었다. 대근이가 신식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건 그저 개명바람을 탄 것이었다.

"어이 보소, 논 닷 마지기에다가 한양이고 일본이고 보내서 신식 공부럴 시키겄다는 것이네. 이리 큰맘 쓰는 사람이 시상에 어디 있겄능가. 시상만사 맘묵기에 달린 것이란 말이시. 눈 딱 감고 수국이만 김 참봉 앞으로 보내먼 수국이 지 평상 손 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비단옷 칠칠이 감아감서 얼매나 호강허고 살고, 자네도 논 닷 마지기 깔고 앉으먼 머심 하나 척 부림서 이래라저래라 호령만 허먼 쌀가마니가 척척 쌓일 것이니 늙발에 그 팔자가 얼매나 배불르게 늘어지는 것이고, 대근이야 원체로 똑똑헝게 뒤대주는 돈으로 지가 원허는 대로 한양이고 일본이고 좋을 대로 댕김서 신식공부 열성으로 허먼 지 출세 길 훤히 열리고, 다 찌그러진 집안 크게 일으키먼 그 얼매나 좋고 존 일이여. 나야 수국이 겉은 딸만 있음사 열 분이라도 더 팔자 고치겄네. 나 말이 어찐가?"

봉산 댁은 침 마른 양쪽 입꼬리를 혀로 빠르게 핥으며 감골 댁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이라도 한나 낳씨요."

감골 댁은 콧방귀를 뀌었다.

"어허 참, 오기 받친 말이라도 헐 말이 따로 있제. 그려, 나가 시방 나이 서른이고 수국이 아부지가 살아만 있음사 무신 수럴 써서라도 씨럴 받겄네."

봉산 댁은 파르르 기를 세우며 되받아치고 들었다.

"아이고메 시상에나...... 시상에나......"

감골 댁은 어이없는 얼굴로 봉산 댁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쓰잘디없는 잡소리 치우고 말이시, 자네 너무 그리 콧대 세우럴 말드라고 잉. 꽃이 피먼 시들고, 과실이 익으먼 떨어지는 법 아니드라고. 자네 딸이라고 미색이 천년만년 갈지 아능가? 수국이도 이팔청춘 넴기고 인자 열아홉이여. 열아홉 큰애기야 더 볼 것 없이 만개해 흐드러진 꽃이고 살 실퍽허니 올라 사각사각헌 죽순인디, 만개헌 꽃언 금세 시들고 살찐 죽순언 금세 쉔다는 것얼 알어야 헐 것잉만. 지끔이 질로 시세 나가는 때라 그 지독뱅이 김 참봉도 돈 아까운지 몰르고 그리 후헌 값 친 것잉게 때럴 놓치덜 말란 말이시. 이러다가 시물이 빨딱 넘어보소 . 김 참봉이야 코똥도 안 뀔 것이고, 늙은 큰 애기 거렁뱅이헌티도 시집 못 보내네."

봉산 댁은 걷어 올린 소매 속에서 궐련꽁초를 꺼내 물었다.

"야아, 다 늙어빠진 영감탱이헌티 첩살이 보내느니 젊은 거렁뱅이헌티 처녀시집 보낼라요."

감골 댁은 매몰차다 싶게 쏘아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말이 씨 된다고 자신의 말이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어이, 자꼬 오기만 부림서 뻗대지 말고 앞뒤럴 조단조단 따짐서 생각혀 보소. 보름이 때허고 달르게 강짜허고 독 품을 본마누래가 있능가. 자석덜이 다 컸으니 뒷수발헐 일이 있능가. 그대로 들앉으먼 본처에다 안방마님......"

"아이고메 시끄럽소!"

감골 댁은 더 참지 못하고 바락 소리를 질렀다. 감골 댁의 성질 돋은 눈은 봉산 댁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자네, 어찌 긍가?"

연상 웃음 짓고 있던 봉산 댁의 얼굴도 좋지 않은 기색으로 변했다.

"아무리 중신애비 거짓말 바지게거짓말이라고 히도 입술에 침이나 볼르고 거짓말허씨요. 김 참봉이 보름이 일이 어긋난께 딴 첩질 시작헌 것이야 시상이 다 아는 일인디 머시가 어찌고 어째라? 본처에다 안방마님이라고라? 첩에 첩이제 머시가 본처고 안방마님이오."

감골 댁은 어느 때 없이 야무지게 따지고 들었다.

", , 그려서 성질 터져올랐구먼그랴. 그럴 법도 허기넌 헌디, 근디 자네가 앞뒤럴 잘 몰라서 역정 낸 것이네. 무신 소린고 허니 말이시, 김 참봉이 그 첩헌티 정 식은 지가 한참이시. 발걸음 뜸해진 지가 오래랑게. 그 여자가 낯짝만 반반혔제 방정맞고 성미가 지랄이나 소문 안 났드라고. 김 참봉이 수국이만 품게 됨사 그 여자야 당장에 차내뿔 것이네. 그리 되먼 첩살이에 첩살이허는 얄궂은 꼴 안 당허고 편안허니 본처에 안방마님 놀이 허게 된다닝게."

"쌍첩이고 홀첩이고 다 싫은게 그만 말허씨요. 봉산 댁 입만 아프요."

"아니씨, 일없네. 나야 말허는 것이 재미진 사람잉게로."

봉산 댁은 입술에 침을 발라 입을 손바닥으로 야무지게 훔치고는,

"어이 나 잠 보소, 자네 고집이 어찌 이리 쇠고집이고 똥고집인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사람 한평생 살다 가는 것인디 배불리 묵고 등 뜨시게 살다 가야제 손틉이 자라날 날 없이 일허고 골창 다 빠지게 고상고상 혀도 쫄쫄이 배곯고 덜덜 떰스로 살다 꼬드라지는 것이 서럽고 원통허지도 않능가. 딸자석 특출난 미색이라고 자네 처지에 정승사우 볼 것잉가, 이도령 겉은 사우 볼 것잉가. 이도 저도 다 틀린 일잉게 눈 딱 감고 가시네 새끼 한나 처분히서 다 팔자 피게 맨글소. 이것이 하늘이 점지헌 자네 복이랑게."

봉산 댁의 말은 너무 간곡해 흡사 애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벨 숭헌 소리 다 듣겄소. 심 봉사가 지 눈 뜨자고 심청이 팔아묵었으먼 그 눈이 떠져겄소. 베락맞어 죽었제."

감골 댁은 이렇게 말을 해놓고 기분이 너무 흡족했다. 봉산 댁이 더는 꼼짝 못하게 입을 봉한 것이라 싶었던 것이다.

", 자네 말 참 잘혔네. 우리찌리 이래 갖고넌 십년이 가도 결판이 안 날 일잉게 당장 당자럴 불르소. 심청이혀고 맞대면혔응게 공양미 삼백 석으로 결판이 났제 심 봉사허고 말거래혔음사 이적지 입씨름만 허고 앉었을 것이네. 자네넌 심 봉사께 뒤로 물러나 앉고, 나허고 수국이허고 맞대면허세. 나가 어째 요리 존 생각얼 진작에 못혔제. 나가 수국이허고 결판내먼 자네나 나나 두말없기시. 수국이가 그리 못허겄다허먼 나도 다시넌 이 집 사립문 안에 발 안 디딜 것잉게 얼렁 수국이 불르소. 수국이 정재에 있제? 수국아아, 얼렁 요리 나오니라."

봉산 댁은 기세등등해서 부엌 쪽에다 대고 수국이를 불러댔다.

"아니 미쳤소, 미쳤소."

당황한 감골 댁은 봉산 댁의 입을 틀어막으려 들었다. 감골 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봉산 댁이 그렇게 말을 뒤엎으며 되잡고 덤벼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저 할망구는 자신이 당할 수 없는 백년 묵은 여우다 싶었다.

"아니 어찌 이려? 유식허니 심청전 끌어댐스로 나 말 막을라고 뎀빈 것이 누구였간디. 그려, 두말 말고 심청전맨치로 히서 깨끔허니 결판내자니께. 나도 나잇살이나 묵은 것이 다리품에 말품 팔로 댕기기도 인자 노곤해진 참잉게로."

봉산 댁은 생기 도는 눈으로 감골 댁을 똑바로 쳐다보며 몰아대고 있었다. 감골 댁은 수국이가 부엌에서 뛰쳐나올까봐 가슴이 벌떡거리고 있었다. 어린 것이 생각 짧게 제가 심청이 되겠다고 나서면 큰일이었던 것이다.

"나갔시요, 당장 나가! 넘 새끼 갖고 그러덜 말고 봉산 댁 손지딸년이나 어서 키워 줄줄이 첩년으로 팔아묵어 호의호식허고 살랑게라. 나가란 말이오, 당장!"

감골 댁은 숨을 씩씩거리면 봉산 댁의 팔을 잡아채고 등을 떠밀어댔다.

", 완력으로 허먼 늙은 것이 밀리제. 일언 다 안 끝났응게 그리 알드라고."

봉산 댁은 사립 밖으로 밀려나며 할 말은 다 하고 있었다. 수국이는 부엌에서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벌써 반년이 넘도록 실랑이해 오고 있는 문제였다. 봉산 댁과 어머니가 줄다리기하고 있는 사이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여 애 졸이며 견뎌온 나날이었다. 봉산 댁과 어머니가 그동안 밀고 당기던 싸움은 자신의 두 팔을 양쪽에서 하나씩 나눠 잡고 서로 끌어당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고통 속에서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다. 울 때마다 보름이언니를 생각했다. 몇 년 전에 보름이 언니가 당했던 고통을 생각하고, 시집을 갔지만 혼자가 되어 버린 언니를 생각했고, 자신과 언니의 팔자는 결국 같아지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제일 많이 엎고 뒤집은 생각은 김 참봉에게 가는 것이었다. 늙은 김 참봉을 생각하면 구렁이에게 몸이 감기는 것처럼 무섭고 징그러웠지만 어머니와 동생 대근이를 생각하면 그런 것쯤 참아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 생각에 매달리다 보면 어머니가 원망스러워지기도 했다. 어머니가 못 이기는 척하면 자신이 마음을 정하고 나서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생결단 안되는 일로 말뚝을 박아놓고 있었다. 차라리 굶어죽는 게 더 낫다는 것이었다. 진정을 말하자면 그런 어머니가 더없이 고맙고 우러러보였다. 봉산 댁의 말마따나 끝도 한정도 없이 찌든 가난과 골 빠지는 고생을 면하고 팔자를 고치게 되는 판에 딸자식 하나 내놓는 것은 예사인 세상이었다. 상것이 양반의 첩살이로 들어앉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벗어날 가망이 없는 고생을 하면서도 어머니가 어떻게 그렇게 강단진 마음을 먹고 살 수 있는 것인지 놀라울 뿐이었다.

"수국아, 수국아, 니 우냐?"

감골 댁이 딸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니, 엄니......"

수국이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할망구가 돈 멫 푼 얻어묵자고 노망이다. 그 할망구가 헌 말 두 귀로 들을 것 없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부러라. 다 인간 말종덜이 막가자고 씨부리는 소린게."

"엄니, 오늘 말언 잠 생각혀 보는 것이 어쩌겄소. 우리 대근이 소원이 풀리는디."

수국이는 몸을 일으키며 사정하듯 말했다. 눈물 젖은 눈매와 함께 슬픔이 깃들인 얼굴은 애잔하고 함초롬한 것이 더 고와 보였다.

"니 미쳤냐! 꿈에도 그런 소리 말어라. 혹여 대근이헌티도 입놀리지 말고."

감골 댁은 얼굴에 찬바람이 돌도록 엄하게 딸을 꾸짖고는,

"니 맘 다 알어. 그 맘이먼 다 되았어. 니가 그리 맘쓰는 것 보고 저승서 느그 아부지가 고마워헐 기여. 나가 니나 느그 언니럴 죽으나 사나 지킬라고 허능 것언 나 뜻만이 아니고 느그 아부지 뜻인 것이여. 아부지넌 이 시상 사람이 다 공평허단 것얼 믿었고, 그런 시상얼 맹글라고 싸우다가 죽은 것이여. 긍게 사람얼 돈으로 흥정허고 허는 것얼 아부지넌 질로 못된 짓으로 생각혔제. 가난이야 죄가 아닌게 니도 아부지 그런 생각얼 맘에 짚이 담고 살아야 혀."

감골 댁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엄니, 엄니! 그 할망구 또 집에 왔었제라."

바지게를 한쪽 어깨에 걸친 대근이가 마당으로 들어서며 목청을 높였다.

"어디서 만냈드냐?"

감골 댁은 수국이에게 나오지 말라고 손짓하고는 부엌을 나섰다.

"그 할망구가 당산나무 돌아가는 것얼 봤구만이라."

대근이는 기분 나쁜 기색이 역연했다.

", 또 왔다가 갔다."

"빌어묵을 할망구, 오늘은 또 머시라등게라?"

"말도 못 꺼내게 허고 막 몰아내 부렀다."

"아이고 잘허셨소. 나가 나서서 패대기럴 칠 수 없응게 엄니가 몰악시럽게 내쳐서 정띠게 허씨요."

", 에미가 다 알어서 허겄다."

감골 댁은 아들에게서 듬직한 힘을 느끼며 웃어 보였다.

"근디, 그 왜놈헌티서넌 또 사람이 안 왔등게라?"

"그 뒤로 아직 안 왔는디."

"드럽게 왜놈꺼정 지랄이여, 지랄이. 그놈이 오먼 패대기럴 쳐뿔까?"

"아서, 아서. 그것도 나가 알어서 혀."

감골 댁은 당황해서 팔을 내저었다.

백종두는 며칠 동안 밀린 서류들을 끌어당겼다. 상부에서 하달된 서류들만 해도 손아귀를 넘쳐나는 분량이었다. 그는 선하품을 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새로 내려오는 서류들만 보면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고 골치가 아팠다. 총독부에서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새로운 법을 만들어 공포해대고 있었다. 공문으로 하달되는 그 법들은 종류가 어찌나 많은지 내용은 고사하고 제목도 미처 기억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각급 기관장들은 해당 법문 내용을 숙지하라는 지시도 있고 해서 공문을 대충대충 훑어보기는 하지만 영 머리에 담기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래도 면장 노릇을 해먹자면 법문 내용은 차차 '숙지'하더라도 제목은 다 알아야 될 것 같아서 제목만 따로 적어 암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싱싱한 계집들 엉덩이 쓸어대며 술 마시는 것에 비하면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일본세상이 된 후의 면장 노릇이란 옛날의 이방 노릇과는 생판 달랐던 것이다. 법조문이라는 것부터가 옛날에는 보도 듣도 못했던 것들이 수두룩했던 것이다. 사무실 문이 열리며 하시모토가 들어섰다. 그는 가볍게 인기척을 냈지만 백종두는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 움직임이 없었다.

"백 면장님, 뭘 그리 열성으로 하시오."

", 아니 하시모토 상, 어서 오십시오."

몸을 벌떡 일으킨 백종두는 거리감이 생긴 눈의 초점을 맞추느라고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좋은 일이오?"

하시모토가 의자에 앉으며 백종두의 책상을 흘끗 살폈다.

"아이고, 좋은 일이긴요. 새로 하달된 법조문들을 훑어보고 있었지요. 새로 공포되는 법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백종두는 엄살을 섞어 말하며 하시모토에게 궐련을 권했다.

"그래요? 좋은 일 중에 좋은 일을 하고 있었군요. 총독부에서 계속 새 법을 만들어 공포하는 것은 아주 잘하는 일입니다. 그동안 조선은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법이 없이 너무 적당히 살아왔어요. 그러다보니 사회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웠지요. 총독부의 그런 조처는 다 조선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겁니다. 백 면장님도 그 점을 잘 알고 새로 만들어진 법들을 파악해 나가야만 면장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게 될 것이오."

하시모토는 자못 심각한 태도로 말했다. 백종두는 그 훈계하듯 하는 말투에 그만 비위가 꼬였다.

', 조선의 발전을 위한 조처? 이놈아,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구나. 조선 사람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얽어매느라고 날이면 날마다 법을 만들어 내고 있는 놈들이 말 한번 뻔뻔하게 잘하네. 저놈도 저거 아주 흉악한 놈이라니까.'

그러나 백종두는 그런 속마음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었다. 어차피 세상은 일본세상이었던 것이다.

"예에, 그래서 날마다 이 고생 아닙니까. 그런데 벌써 3월 들어 조선 민사령, 형사령, 감옥령에다가 조선 부동산등기령, 부동산증명령, 등록세령 그리고 또 경찰범처벌규칙 등등 끝이 없으니 정신을 차리기가 어렵지요."

백종두는 공문더미를 밀치며 고개를 내둘렀다.

"그건 그렇고, 그 일은 어찌 됐지요?"

하시모토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무슨 일 말이지요?"

백종두는 얼른 잡히는 것이 없어 잠깐 생각하느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하, 아무리 공문 하달이 많다고 백 면장, 내 일에 너무 무심한 것 아니오?"

하시모토는 백종두의 변명거리를 미리 잡아채며 정색을 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하시모토 상 일을.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그럴 뿐이지요."

백종두는 옹색스럽게 웃었다.

"백 면장도 그럴 때가 다 있소? 그 처녀 문제 말이오."

하시모토가 한쪽 다리를 꼬아 올리고 헛기침을 했다.

"아아 예, 난 그저 땅 문제에 정신이 팔려서 그 문제는 잠시 깜박했군요. 그야 그담에도 또 사람을 보냈지요. 그런데도 그 에미가 영 말을 들어먹지 않아요. 고집이 보통이 아니라니까요."

백종두는 사실 그대로 말했다.

"아니, 지지리 가난한 조센징이 그런 호조건에도 말을 안 듣는단 말이오?"

하시모토의 눈째가 고약해졌다.

", 죽어도 딸을 첩으로 내놓지 않겠다고 에미가 고집을 부린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가난한 조선 사람들은 딸을 부잣집에 첩으로 넘기는 건 예사로 하는 일 아니오. 그런데 쌀 50가마니 돈이 싫다니, 내가 일본사람이라 그러는 것 아니오?"

하시모토의 눈은 한층 사나워져 있었다. 백종두는 하시모토의 그 눈치 빠른 짐작이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수긍하자니 이상하게 자신의 입장이 곤궁해질 것 같았다.

"아닙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난해도 딸을 첩으로 보내는 걸 집안의 수치로 아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또 처녀 당사자들도 가난하게 살더라도 정식으로 혼인해서 사는 것이 제일가는 팔자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아니, 양반들이나 집안 찾고 수치 찾지 양반도 아닌 주제에 집안의 수치는 다 뭐요."

하시모토는 짜증스럽게 꽁초를 잉끄렸다.

"글쎄요, 상민은 상민들대로 또 그런 체면을 차리는 게 있지요. 조선 사람들은 그게 아주 심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그럼 쌀 열가마니 값을 더 올리면 어떻겠소?"

이렇게 내뱉은 하시모토를 백종두는 흘깃 쳐다보았다. 몸이 달아도 예사로 단 것이 아니었다. 50가마니 값이 되기까지 벌써 두 번을 더 올렸던 것이다. 다시 열가마니 값을 더 올리겠다는 것을 사람을 또 보내보라는 뜻이었다.

"그러지요, 사람을 곧 보내도록 하지요."

백종두는 시원스레 대꾸했다.

"그런데 말이오, 그 심부름꾼이 재주가 없는 것 아니오?"

하시모토는 백종두 쪽으로 돌아앉으며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그런 일에는 이골 난 사람으로 골랐는데요."

백종두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이거 참, 값만 자꾸 올려놓고 이번에도 안 되면 곤란한데......"

하시모토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중얼거렸다.

"그 처녀가 미인은 미인인 모양이지요?"

백종두는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이번에 안 되면 무슨 좋은 수가 없겠소? 좀 다른 방법으로 말이오."

하시모토는 몸을 바로잡고 앉았다. 백종두는 그 엉뚱한 말이 대답치고는 명답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방법이라...... 글쎄요, 좀 생각해 봐야 되겠는데요."

"나한테 한 가지 좋은 생각이 있긴 있소. 다른 게 아니고 마음에 있는 여자를 밤중에 몰래 자루에 넣어 업어오는 조선풍습이 있잖소. 그 방법을 쓰면 어떻겠소. 하룻밤 자버리면 꼼짝없이 내 여자가 되는 것이고, 돈이야 그다음에 전하면 되잖소."

"아이고, 그건 큰일 납니다. 그 방법이야 과부한테 쓰는 거지 처녀한테 쓰는 게 아닙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백종두는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아니, 뭐가 그리 큰일 난다는 거요? 과부나 처녀나 다 똑같은 여잔데."

"아니지요, 아니지요. 과부하고 처녀는 천양지차지요. 과부야 헌계집이고 처녀야 깨끗한 몸 아닌가요. 만약 처녀를 그랬다가는 온 마을사람들이, 아니 우리 면민들 전부가 들고일어날 겁니다. 조선 사람들은 처녀 순결을 목숨처럼 귀히 여기니까요. 하시모토 상은 앞으로 우리 면에다가 대농장을 꾸밀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일이 지금 착착 진행되고 있는데 괜히 그런 일로 인심을 잃어보세요. 그 일이 잘 되겠습니까?"

백종두는 가차 없이 하시모토의 가슴팍을 찔러댔다. 그건 하시모토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를 빙자한 자기방어였다. 만약 하시모토가 그 짓을 해서 면민들이 들고일어나기라도 한다면 그 불똥은 자기한테까지 튈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왜놈이 처녀를 업어다가 첩으로 삼았다...... 그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 소문은 짚더미에 불붙이기였다. 가뜩이나 일본사람들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판에 사람들에게 감정풀이 한바탕 하라고 멍석 깔아주는 격이었다. 백종두는 그런 일로 면장자리를 다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 참 고약하네. 선녀가 따로 없던데."

하시모토는 짭짭 입맛을 다셨다. 백종두는 하시모토가 그리 반해 버린 처녀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동하고 있었다. 그건 호기심이 아니라 욕심이었다.

"백 면장, 만약 이번에도 성사가 안 되면 말이요, 마지막으로 백 면장이 한번 나서주시오."

하시모토가 불쑥 꺼낸 말이었다. 백종두는 순간적으로 감정이 뒤집히며 '아니, 뭐라고요!'하는 말을 곧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라서 그 말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감정도 눌렀다. 저자식이 면장을 뭘로 보고 ...... 하는 감정이 가슴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내가 죄인은 많이 다뤄봤어도 중매쟁이 노릇은 해본 일이 없어서...... 하시모토 상은 조선 땅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조선여자도 좋아합니다그려. 예쁜 여자라면 권번에 넘어오는 것도 수두룩하고, 쌀 스무 가마니 값이면 처녀로 탈탈 고를 수 있는데요."

백종두는 묘하게 웃으며 빈정거리고 있었다.

"예쁜 여자라고 다 맘에 드는 건 아니잖소. 내가 백 면장보고 나서달라는 건 중매쟁이가 되라는 게 아니오. 거 있잖소, 면장님의 권한으로 멋지게 해결해 버리라는 거요."

몸이 단 하시모토는 빈정거림도 빈정거림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면장님의 권한이라...... 어디 일이 돼가는 걸 차차 두고 봅시다."

백종두는 딱 잘라 거절은 못하고 미적지근하게 어물거렸다.

"다른 사람을 보내보고...... 어쨌든 백 면장님만 믿겠소."

하시모토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더니,

"나 군산 좀 나갔다 오겠소. 쓰지무라 과장님한테서 연락이 와서."

그는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그러나 그건 즉흥적으로 꾸며댄 거짓말이었다. 백종두도 그 말이 미심쩍었지만 무슨 일이냐고 따져 물을 수가 없는 처지였다. 다만 '과장님'으로 힘이 더 막

강해진 쓰지무라가 하시모토의 배경이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너무 염려 마시고 다녀오세요."

백종두는 아니꼬움을 싹 감춘 채 환한 웃음을 피워내며 하시모토를 문밖까지 배웅했다. 하시모토는 면사무소를 나오며 또 그 처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곱고 매혹적이던 모습이 곧 잡힐 것처럼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갖기가 어려우니까 더욱 갖고 싶은 욕심이 발동하고 있었다. 그 처녀는 그냥 예쁜 꽃만이 아니었다. 예쁘면 야하기가 쉽고, 고우면 되바라지기가 쉬웠다. 그런데 그 처녀는 그런 속기가 전혀 없었다. 화사한 듯하면서도 단아했고 선정적인 듯하면서도 다소곳했고 맑은 듯하면서도 슬픈 기가 사려 있었다. 석양 햇빛을 받고 있는 그 처녀를 보는 순간 가슴에서 일어난 회오리바람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인물 잘생긴 여자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처럼 일순간에 마음이 뒤흔들린 일은 없었다. 며칠 동안 마음에서 지우려고 애를 써보았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하잘것없는 조센징이라고, 마늘냄새 고추장냄새 지독하게 몸에 밴 조센징이라고 자신을 타이르고 일깨웠다. 그러나 갖고 싶은 욕망은 조금도 묽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 욕망에 밀려 아내에게 더 준비가 필요하니 기다리라는 거짓편지를 띄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 처녀 집에 사람을 보내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손쉽게 갖게 될 줄 알았었다. 그런데 갈수록 애만 태우게 만들었다. 자꾸 액수가 올라가는 것도 아까웠지만 부질없이 날짜만 까먹는 것은 더욱 아까웠다. 아내가 건너오기 전에 실컷 재미를 보려고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새삼스럽게 사람과 짐승이 다르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시다가 말을 타고 농장을 누벼대는 꼴이 아니꼽고 눈꼴시어 자신도 말을 사들이기로 작정했었다. 그 일은 한번 가격을 정하는 것으로 깨끗하게 끝이 났다. 말은 지금쯤 배에 실려오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말 구입보다 먼저 시작한 처녀의 일은 돈만 가지고 해결이 되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한번 마음먹은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들보다 먼저 러시아로 갔던 것도, 거기서 사업을 확장시키면서 정보원으로 성공했던 것도, 부잣집 딸을 마누라로 삼은 것도 뜻대로 다 된 일이었다. 그런데 조센징 계집애 하나가 속을 썩이고 있었다.

"두고 봐라, 내가 누군데!"

눈꼬리에 독이 오른 하시모토는 침을 내뱉으며 걸음을 빨리 했다.

 

지삼출과 손판석은 밤이 늦어 마을로 숨어들었다. 농사철이 시작되어서 그런지 어둠 속에 두엄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야기에도 서늘한 느낌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맘이 영 지랄 겉은디."

손판석이 중얼거렸다.

"어찌 안 그러겄어. 태 묻고 커나고 장개들어 새끼덜 낳고 산 땋인디."

가라앉은 어조로 지삼출이 대꾸했다.

"어찌까, 첫닭 울먼 나서?"

"아니시, 여자에 아그덜꺼정 있응게 자정 임시에 나서야 해뜨기 전에 만경강이라도 건느제."

"글먼 바뿌시. 어디서 만내?"

"나가 자네 집으로 가겄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고샅길을 잡았다. 지삼출은 방으로 들어서서 앉지도 않고 아내에게 일렀다.

"얼렁얼렁 짐 챙기소. 금새 떠야 헝게."

"무신 번갯불에 콩 볶아묵는 소리다요. 챙길 짐이 한두 가지가 아닌디 메칠 전에 일라줘야제라."

"자네 시방 태평세월이시. 나가 벼슬히서 한양 행차 허는 줄 아능겨? 메칠 전에 일러줘서 짐 싸는 소문나먼 우리 식구 다 어찌 되는지 몰라서 허는 소리여?"

지삼출의 낮은 목소리에는 노여움이 묻어 있었다.

"지가 잘못 생각혔그만요. 근디 우리만 드는게라?"

"아니시, 다가 시방 감골 댁헌티 댕게올라네. 근디 자네 말이여, 농사 지묵고 살 것 아닝게 암것도 챙길 것 없네. 옷허고 이불, 밥그럭만 딱 챙기소. 솥단지도 챙기지 말어. 알었능가!"

"야아, 얼렁 댕게오시게라."

무주 댁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남편의 등을 밀었다. 지삼출은 한달음에 감골 댁의 집으로 갔다. 사립을 밀치고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문득 영근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움이 가슴을 흔들었다. 돈벌어 꼭 돌아오겠다던 세월이 9년이나 흘러 있었다. 그렇게 끌려가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함께 의병으로 나섰을 것이다. 지삼출은 코허리가 매운 것을 느꼈다.

"아짐씨, 아짐씨, 나 삼출인디요."

지삼출은 지게문을 가만가만 흔들었다.

", 누구여? 만복이 아부지?"

잠기운이 없는 소리였다.

"불언 키지 마시게라."

방으로 들어서며 지삼출이 말했다.

", 어쩐 일이여. 이 밤중에."

감골 댁은 몇 달 만에 다시 만나는 지삼출의 팔을 더듬어 붙들었다. 그때도 어둠 속에서 잠깐 만났을 뿐이었다. 대금이와 수국이가 어둠 속에서 인사를 했다. 지삼출은 대근이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며 또 세월의 흐름을 실감했다.

"오늘 밤에 곧 뜰라능마요. 아짐씨도 얼렁 짐 챙기시게라."

"어디로 가는디?"

"군산이구만요."

"거그서 묵고 살아질랑가?"

"여그보담 못헌 디가 있간디요."

"아이고메, 자네가 우리 은인이시. 글안해도 엊그적께 왜놈헌티서 또 사람이 왔었는디. 좋은 말로 헐 때 안 들으먼 가만 안 둔다고 얼매나 겁얼 주든지. 인자 우리 수국이 살아났네."

감골 댁의 목소리가 울먹였다.

"짐언 옷허고 이불허고 밥그럭만 챙기씨요. 딴것언 아까와라 말고 다 내뿔고. 나 금세 또 오겄구만이라."

", 아까운 물건 암것도 없네."

지삼출은 감골 댁의 말을 들으며 다급하게 방을 나섰다. 잠이 깬 두 아이가 어두운 아랫목에 붙어앉아 있었다. 지삼출은 두 아이를 한아름에 안고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아직도 젖비린내가 남아 있는 것 같은 아이들의 체취 속에서 말로 다 못할 온갖 감정이 뒤엉키고 있었다. 지삼출은 짐을 지고 집을 나섰다. 아내와 아이들은 당산나무 아래에 두고 손판석의 집으로 갔다. 손판석의 식구들과 함께 감골 댁네로 갔다. 감골 댁 식구들은 마루에 나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발소리 숨소리를 죽이며 당산나무 아래까지 왔다. 밤은 깊을 대로 깊어져 있었다.

"느그덜 엄니 손 꽉 잡고 걸어야 혀. 걷다가 엎어져도 울어서넌 안되고. 울먼 왜놈순사 칼에 우리 다 죽응께."

지삼출이 두 집 아이들에게 다졌다. 세 집 식구들은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밤 깊은 어둠은 그들의 모습을 잘 감싸주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들이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29. 탐욕의 소용돌이

배를 약간 내민 듯한 장덕풍은 왼쪽 팔은 뒷짐을 지고 오른쪽 팔은 맘껏 휘둘러대며 활기차게 걷고 있었다. 그 뒤를 등짐 진 두 사내가 바쁜 걸음으로 따르고 있었다. 한 발 앞서고 있는 사내는 빈대코 김봉구였고, 뒤의 사내는 새로 짝을 맞춘 나보길이었다.

"아이고 성님, 한복판 존 디 다 두고 어찌 해필허고 요런 구석지에다 공장얼 채렸소. 사람 잔뜩 애묵게."

김봉구가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자네 아직 똥독이 다 안 빠졌는갑구만? 요까짓 것 걷기가 심들먼 그놈에 다리 다 삭았응게 보부상질 걷어치워." 장덕풍은 매정하다 싶게 면박을 주고는 "가겟방이 아니고 공장인디 비싼 돈 딜여 군산 한복판에 채린다고 장사가 잘 되간디? 사탕만 맛나게 맨들면 소매상덜이 다 지 발로 찾어오는 것이여. 허고, 시방이야 여그가 구석지라도 사오 년만 지내봐. 여그도 한복판이여. 그때 가먼 여그 땅값이 얼매가 될란지 알어? 자네넌 나이 헛묵었어."

그는 자신의 치부 수완을 과시하는 동시에 상대방을 조롱하는 양수겸장을 치고 있었다.

", 이런 디가 어느 세월에 한복판이 되겄소. 성님 저 시상으로 간 뒤에나?"

김봉구도 당하고만 있지 않고 뒤틀리는 배알을 그대로 드러냈다.

"! 눈 뜬 봉사가 큰소리치네. 조선 사람이먼 거렁뱅이 새끼도 안 살든 갯가 뻘밭이 그리 비싼 땅이 될란지 자네 땅짐이나 혔등가!"

김봉구는 그만 입이 닫히고 말았다.

"저그 다 왔네."

장덕풍은 걸음을 멈추고 앞을 손가락질했다.

"아니 저것이 무신 공장인게라? 다 허물러져 넘어가는 집구석이제."

김봉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장덕풍을 쳐다보며 헛웃음을 쳤다. 그 옆의 나보길이도 실망스러운 얼굴이었다.

", 자네덜이 그럴지 알었제. 껍데기만 뻔지르르허기럴 바래는 실속 없는 자네덜언 평상 그놈에 등짐 신세 못 면헐 것이여. 풋감 묵고 체해 선하품 허는 놈겉이 그런 상호덜 허고 있지 말고 일차 안으로 들어가 보고 말혀."

장덕풍은 두 사람에게 경멸적인 눈흘김을 보내며 혀를 차댔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이 실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장소도 시가지에서 너무 떨어진 변두리인데다가 명색이 사탕공장이면 어찌 모양이나마 갖추었어야 할 텐데 눈앞에 놓인 것은 허름한 초가 한 채였던 것이다. 좀 색다른 것이 있다면 새 판자들을 잇대어 널따랗게 울타리를 둘러 친 것이었다. 곧 송진 냄새가 풍길 듯이 판자들이 새것인데다가 그 둘레가 너무 넓어 초가는 더 작고 초라해 보였다.

"짜아, 자네덜 요것 잠 일어보소."

장덕풍은 문 앞에 떡 버티고 서서 크고 느긋한 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요것언 또 머시오? 간판 아니라고. 무신 놈에 간판이 이리 크고 야단시럽소?"

김봉구는 대문기둥에 걸린 내리닫이 간판을 쳐다보며 어이없어 하고 있었다. 넓고 두꺼운 판지에 큼직큼직한 한문자를 박아놓은 간판은 허름한 초가에 비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간판의 크기도 크기였고 그 상호는 더욱 허풍스러웠다.

"어허, 무신 잔말이 그리 많혀. 어서 읽어보기나 허라닝게."

장덕풍이 그만 노기를 띠었다.

"장풍제과사업소"

나보길이 얼른 읽어 내렸다.

"장풍제과사업소? 장풍이야 성님 이름서 따온 것이고, 제과에 사업소넌 머시오? 사탕공장이란 말언 어디 가고."

김봉구는 눈치 없이 입을 놀렸다.

", 저 무식허기넌. 짚이 배운 것 없으먼 눈치나 빨라야 정신없이 변허는 시상서 지 밥이나 찾어묵고 살아질 것 아니겄어. 제과가 사탕이나 과자럴 맨든다는 말이고, 사업소가 공장이란 뜻임스로 더 윗질인 말이여. 자네덜이야 그제나 이제나 등짐 지고 돌아치는 신센께 변헌 것 없이 장돌뱅이제만 나 겉은 사람언 인자 장사꾼이나 장사치가 아니여. 글먼 머시냐! 이런 장사럴 사업이라 허고, 나 겉은 사람얼 사업가라고 허는 것이여. 시상이 변혔응게 인자 자네덜도 명념혀. 나넌 사업가여, 사업가!"

장덕풍은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퍽퍽 치며 결연하게 외쳤다. 그 기세에 눌려 김봉구와 나보길은 옴짝달싹 못하고 기가 꺾이고 있었다.

"여러 말 말고 자네덜도 코가 있으먼 맡아보소. 여그서보톰 단내 꼬신 내가 안 난가?"

장덕풍은 코 끝에 잔뜩 힘을 넣어 콧구멍을 키운 채 뻐기고 있었다. 김봉구는 그 못생긴 빈대코를 큼큼거렸고, 나보길은 코를 벌름거리며 대문 안을 기웃거렸다. 말을 듣고 보니 단내가 풍기는 것도 같았고, 꼬신내가 스치는 것도 같았던 것이다.

"여그서 백번 돼지코 맨들어봤자 소양 없어. 들어가서 사탕이고 과자가 어찌 맨들어지는지 봐야 혀. 백문이 불여일견잉게로 말이여."

장덕풍은 문자까지 써가며 앞장서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초가집에 가까워지자 단내와 고소한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그리고 무슨 동그란 것들이 얇은 쇠판을 구르는 소리들이 다그르르 자그르르 들려오고 있었다. 장덕풍이 큰기침을 하며 판자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김봉구와 나보길은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가 집안은 밖의 볼품없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우선 초가집 안은 완전히 한통으로 트여 있었다. 지붕을 받친 기둥들만 가운데 몇 개 서 있어서 그 넓이가 꽤나 넓어 보였다. 그 확 트인 속에 단내와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고, 네댓 사람이 여기저기서 제각기 일손을 바삐 놀리고 있었다.

"자아, 날 따라서 맘놓고 귀경덜 허드라고."

거만스런 웃음을 입가에 문 장덕풍은 두 사람을 눈 아래로 훑었다. 두 사람은 완전히 주눅이 들어 어느새 손들을 앞으로 모아잡고 있었다. 등짐을 진 채 손을 앞으로 모아잡게 되니 자연히 목이 길게 빠져 그 모습이 꼭 무슨 죄라도 진 것 같은 등신 꼴이었다. 구워낸 과자를 간추리는 사람, 밀가루반죽을 하고 있는 사람, 사탕들을 양철판 상자에서 좌우로 굴리고 있는 사람, 석탄불 위의 기계에서 과자를 구워내는 사람, 엿가락처럼 긴 것을 실로 토막토막 자르고 있는 사람을 그들은 차례로 구경했다. 김봉구와 나보길은 등짐을 진 채였고, 장덕풍은 짐을 벗어놓으란 말도 하지 않았다. 장덕풍은 엿가락처럼 긴 것을 실로 토막 내고 있는 사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장덕풍은 그 젊은 사람의 손놀림을 더없이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젊은이는 실 한쪽 끝을 입에 물고 다른 끝을 오른손에 잡고는 왼손으로 받쳐든 엿가락처럼 긴 것을 실을 한 바퀴씩 돌려 잘라대는데, 오른손의 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손을 그렇게 빨리 놀릴 때마다 토막들은 연상 톡톡톡톡 떨어져 내리는데, 그 크기가 눈으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다 똑같은 것이었다. 그 젊은이가 일손을 멈추자 장덕풍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기문아, 새로 온 손님덜이다. 수인사혀라. 어이, 우리 작은아덜이고, 이 사업소 지배인에다 공장장이시. 자네덜 인사 트소."

장덕풍은 득의만만하게 작은아들을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

"지넌 장기문이라고 허능구만이라."

젊은이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문지르며 꾸벅 인사를 했다.

", 나넌 자네 아부님얼 성님으로 뫼시고 등짐장사럴 배운 김봉구라고 허능구마. 자네넌 참말로 시상에 둘도 없는 재주를 지녔네, ."

김봉구는 부러운 듯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재주가 아니라 기술이시, 기술!"

장덕풍은 마땅찮은 얼굴로 김봉구에게 눈총을 쏘며 내질렀다. 그는 등짐장사를 자신에게 배웠다는 김봉구의 말에 비위가 뒤틀렸던 것이다. 그는 언젠가부터 보부상의 과거를 덮고 싶고 감추고 싶어 했던 것이다.

"지넌 나보길이라고 허능마요. 참 장헌 솜씨럴 지녔구만요."

나보길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저쪽으로 가서 짐덜 벗고 사탕이고 과자고 맛덜 봄서 쉬시씨요. 지넌 일이 바쁜게 이얘기야 아부지허고 허시고."

장기문이 인사치레를 하고 돌아섰다.

"그려, 저짝으로 가서 짐덜 벗세. 사탕이고 과자고 다 맛얼 보는디, 한 가지에 하나썩만 맛얼 보소. 많이 묵을수록 맛이 덜해지는 것잉게."

장덕풍이 다시 활갯짓으로 앞장서며 턱없이 큰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뒤따르고 있는 김봉구의 눈이 고약하게 치뜨이고 입이 비틀려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는 까닭 모르게 분하고 역정이 나고 있었다.

"장사야 묵어없애는 장사가 질인디, 사탕이고 과자넌 신식인디다가 저리 솜씨 존 장헌 아덜 두고 일찍허니 공장얼 채랬시니 금세 부자 되시겄구만이라우."

나보길이 등짐을 벗으며 장덕풍의 귀에 단 말을 내놓았다.

", 자네넌 젊은디 눈치가 빨르시? 그려, 어느 시상에서나 한밑천 잡을라먼 눈치가 빨라야 허는디 더군다나 이리 무섭게 변허는 시상에서넌 더 말허잘 것도 없는 일이여. 자네 이름이 보길이, 보배 보에 길헐 길자겄제. 그만치 눈치가 빨름사 이르대로 되겄는디. 보배 보에 길헐 길, 아조 존 이름이시."

장덕풍은 유식한 척 이름풀이까지 해가며 푸짐하게 말 인심을 쓰고 있었다.

"닌장맞을, 보길이가 무신 놈에 존 이름이요, 존 이름은. 보길이 대길이 만길이 복길이 천복이 만복이 수복이, 다 째지게 가난헌 촌놈덜 이름이제. 김봉구, 봉황 봉자에 아홉 구, 봉황이 한 마리도 아니고 아홉 마린디 그런 촌놈덜 이름에 비허먼 얼매나 좋소. 근디도 나 꼬라지 봇시오. 이름이 다 무신 소양이 있다요."

김봉구는 갑자기 열을 내고 들었다. 그는 괜히 속이 답답해지는 화풀이를 그렇게 하고 있었다.

"! 자네넌 그놈에 이름 땜시 안되는 것이여. 봉황 아홉 마리가 훨훨 날아서 어디로 가제? 저 끝도 한도 없는 하늘 아니여? 자네넌 지아무리 용얼 써도 재물이 하늘로 풀풀 날아가는 수다 그것이여. 이려도 소양이 없능가아?"

장덕풍은 쭉 늘여뺀 고개를 틀어 올리며 김봉구의 화를 질렀다.

"성님언 나가 잘된다는 것이 그리 배아프요? 참 섭허구만이라 잉."

시무룩해진 나보길의 얼굴에는 서운한 기색이 역연했다.

"아니시, 아니시. 헛말 듣고 뜬구름 잡을라다가넌 맘만 허해징게 헌 소리시."

김봉구는 서둘러 둘러 붙이느라고 장덕풍의 재수 없는 말에 공박할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나이 어린 공원이 작은 함지박에다가 과자며 사탕을 고루고루 담아가지고 왔다.

"자아, 요것덜 맛이나 보소."

장덕풍이 함지박을 그들의 앞에다 놓았다. 김봉구는 과자를 얼른 집어 들었다.

"염병헐, 그 개잡년만 아니었어도 내 신세가 요 꼴언 아닐 것인디. 그년얼 잡기만 허먼 가랭이럴 열두 갈래로 찢어발기고 말 것이로구만."

김봉구는 과자를 와삭 깨물었다.

"이 사람아, 인자 그 소리 그만 허랑게. 다 과거지사란 말이여. 그적에 자네가 태수겉이 죽어부렀으먼 어쩔 것이여. 이리 살아 있는 것얼 천행으로 알고 앞일만 생각허란 말이시. 자네가 원수 갚음 허겄다고 그 일얼 안 잊으면 맘이 딴 디로 가 앞일얼 못 본단 말이여. 그래 갖고넌 돈벌기넌 다 틀린 일이랑게. 나 말 알아묵어!"

장덕풍은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같은 말을 벌써 몇 번이나 했는지 몰랐다.

"잊어불라고 히도 잘 안 되는디 어쩔 것이요. 성님이야 큰아덜이 정식으로 순사가 되야 권세 짱짱해졌겄다, 작은아덜이 여런 신식기술 배와 공장 떡허니 채랬겠다, 앞으로야 떼부자 될 일만 남었응게 그리 속편허니 말허제라. 성님언 인자 이쁜 첩만 하나 얻으먼 양반이고 머시고 부러울 것이 머시가 있소."

"이 사람아, 무식허니 첩이 머시여. 소실이라고 허소, 소실. 글안해도 시방 쓸 만헌 것얼 골르고 있는 참이시."

김봉구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장덕풍을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보길은 두 사람의 말에는 전혀 귀를 팔지 않고 사탕이며 과자를 이것저것 부지런히 집어다가 맛을 보기에 바빴다.

"맛이 으쪄?"

장덕풍이 나보길의 눈치를 살폈다.

"야아, 맛이야 일본사람 공장 것이나 달블 것이 없는디요. 값얼 쬐께라도......"

나보길은 말끝을 얼버무렸다.

"하먼, 하먼. 자네덜이야 누구라고. 자네넌 과시 눈치가 빨르당게. 시상 변헌 디에 맞쳐서 물건도 착착 바꿀지 알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벌써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감정을 수습하지 못한 김봉구는 마지못한 듯 박하사탕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와드득 깨물었다.

"자네넌 안직 맛도 다 안 봤능가?"

장덕풍이 끌끌 혀를 찼다.

"맛이야 보나마나. 나도 저 사람 허는 대로 허겄소. 눈치 없는 놈이야 눈치 빨른 사람 따라가야제 어쩌겄소."

김봉구는 오기 받친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그들은 장덕풍이 제과공장을 차리는 것을 계기로 상품품목 하나를 더 추가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등짐에 실리는 품목은 10여 년 세월 동안 알게 모르게 자리바꿈을 해왔다. 무명베가 광목으로 바뀌었고, 일제 화장품이 자리를 차지했고, 궐련과 끼어드는가 하면, 화투가 차지하는 자리가 넓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변하다 보니 이제 그들의 등짐은 거의가 일본물건들로 채워졌다.

"다 아는 소린디 말이여, 돈벌이럴 잘 허는 것이야 외상얼 안 띠이는 것이고, 그담이 싸게라도 많이 팔아대는 것잉 거 알제? 양반 미투리 짜는 놈허고, 상놈 짚신 짜는 놈허고, 짚신 짜는 놈이 결국에 큰 부자 됐다는 말 명념덜 허드라고."

장덕풍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 말은 장사의 기본 상술인 박리다매를 새삼스럽게 일깨우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물건을 싸게 주는 만큼 싸게 팔아넘기고 자주 오라는 말을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는 사탕공장을 어서 키우기 위해 은근하게 영업적 발언을 하는 ㅅ이었다.

"터럴 아조 널찍허니 잡으셨구만이라 이."

공장을 나선 나보길이 빈터를 둘러보며 부러운 눈치였다.

"여그다가 크담허니 공장얼 질 작정허고 돈푼 잠 썼구만."

장덕풍도 빈터를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어느 세월에 이 공터에 다 찰 만치 큰 공장얼 세우겄소. 부두 옆에 쌀창고럴 짓는 것도 아닌디."

김봉구가 옹이 박인 말을 뱉어냈다.

"자네 시방 나헌티 화풀이허자는 것이여, 나가 잘되는 것이 배가 아퍼서 그러는 것이여. 듣자 듣자 허닝게 듣기에 영 뻐시고 깔끄라운디."

장덕풍은 성질 돋아오른 얼굴로 김봉구를 노려보았다.

"아니, 아니구만요. 성님이 하도 겁나게 말씸허싱게 믿기덜 안히서 그렇제라."

정곡을 찔린 김봉구는 너무 당황해서 정신없이 둘러댔다. 장덕풍에게 밉보였다가는 자신의 신세는 그나마 기댈 데 없이 막판이 되는 것이었다.

"떡 치는 옆이서 헛기운이라도 써주는 시늉얼 혀야 귀쪽 떡 한 쪽이라도 얻오묵자는 것이여."

장덕풍은 가소롭다는 듯 한마디 오금을 박고는,

"어디 보드라고, 나가 3년 안에 공장얼 짓나 못 짓나. 허고, 나가 땅얼 이리 널찍허니 잡은 것이 사탕공장만 질라는지 아는감? 사탕공장이야 반에 반만 짤라서 짓고 남치기 땅에다넌 정미소럴 질 챔이여, 정미소."

그는 상대방을 더 배아프게 만들어주려는 듯 정미소 이야기까지 꺼냈다. 김봉구는 온몸에서 맥이 빠지며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건 장덕풍에 대한 가위눌림이었다. 장덕풍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돈이 많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정미소까지 세울 꿈은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정미소는 큰돈이 들어서 그렇지 세우기만 하면 돈을 삼태기로 긁어모은다는 소문이었다.

"그려요, 성님 허는 일이 모다 불겉이 일어나서 군산서 질가는 부자가 되시게라. 그리 되먼 나 같은 놈도 성님 그늘서 떡고물이라도 집어묵고 살 것 아니겄소."

김봉구는 마침내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려, 맘얼 그리 써야제. 인자 가세."

장덕풍은 다시 앞장을 서서 걷기 시작했다. 기운 좋게 내달아가고 있는 장덕풍을 바라보며 김봉구는 한없이 초라한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참말로 저 장덕풍이놈 운수대통허니라고 왜놈덜 시상이 왔당게. 저놈언 떼부자가 되는 판인디 나넌 꺼꿀로 더 찌그러든 신게 아니라고. 나 이름이 참말로 재무리 풀풀 날아가는 이름일랑가......

김봉구의 마음은 자꾸 절망의 비탈로 굴러 내려가고 있었다. 장덕풍은 자기 가게 앞에 사람이 탄 인력거가 멈춰서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을 더욱 빨리 서둘렀다. 인력거에 올라앉은 사람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으나 갓에 한복 차림인 것으로 보아 얼핏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 갔길래 사람을 일 오래 기둘리게 허고 이러나."

장덕풍이 어느만큼 가게에 가까워졌을 때 인력거에서 먼저 호령이 떨어졌다. 그때는 장덕풍도 상대방이 만경 부자 정재규라는 것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의 짐작은 그대로 들어맞았던 것이다.

"아이고 만경 어런, 행차허셨구만요. 손덜이 있어서 사탕공장에 잠 댕게오니라고...... 이 한디서 오래 기둘리셨는게라우?"

손을 앞으로 모아잡은 장덕풍은 있는 겸손을 다해 굽실거렸다.

"양반 체면에 곤란해서 갈라든 참이네."

정재규의 어조는 싸늘했다.

"아이고 이거 죄송시럽구만요. 만경 어런 행차허실지 알었음사 자리럴 안 뜨는 것인디...... 지가 실수가 됐구만요."

장덕풍은 그저 모든 것을 자기 잘못으로 덮어쓰며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려고 들었다. 유별나게 양반 행세하기를 좋아하는 정재규인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처지에 그까짓 입으로 발라맞추는 것쯤 장덕풍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사람을 기다리면서도 인력거를 보내지 않고 그대로 타고 앉아 있는 것이 정재규의 남다른 양반 행세 중의 하나였다. 인력거를 잡아두는 돈보다 양반 행세가 먼저였던 것이다. 그런 정재규가 자신에게 맘껏 양반 행세를 하게 해주는 것은 자신이 끝없이 굽실거려 주는 것임을 장덕풍은 잘 알고 있었다. 이런저런 돈벌이를 위해서도 정재규한테는 얼마든지 굽실거려 필요가 있었다.

"저어...... 나락얼 내실라는가요?"

장덕풍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시. 이리 가차이 오게."

나이 많은 장덕풍은 재빠른 동작으로 젊은 정재규가 타고 앉은 인력거 옆으로 붙어 섰다.

"에에...... 나락이야 차차 내고, 나 오늘 급전이 있어야겄네."

정재규의 나직한 말이었다.

"야아, 얼매나 올리먼 되는디요?"

장덕풍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또 노름판이 벌어진다는 것을 직감했다.

"우선 50원얼 챙기게."

"야아, 어디로 가시는디요?"

"국향으로 가네."

"야아, 금방 보내겄구만이라우."

"가자, 인력거 잡아라."

정재규는 호령하며 인력거 등받이에 몸을 뒤로 눕혔다.

"그려, 니가 화투노름에 미쳐 돌아가는구나. , 많이많이 미쳐 돌아가그라. 니가 미쳐 돌아가야 내 재산이 불어난께. 애비 없어져뿐 만석꾼 부잣집 자석이 주색잡기 말고 헐 짓이 머시가 또 있겄냐."

멀어져 가는 인력거를 바라보며 장덕풍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아니, 성님 시방 낙지 잡으요?"

김봉구가 가게를 나서며 궁금증을 드러냈다. 장덕풍은 순간적으로 웃음을 싹 감추고 돌아섰다.

"들어가세, 딴 물건 챙게야제."

"저것이 만경 부자 정 아무개 아닝게라?"

"아니, 자네가 어찌 그걸 다 알어?"

장덕풍이 놀란 눈으로 김봉구를 쳐다보았다.

"어허, 나도 장돌뱅이로 발바닥에 군살 백인 지가 10년 빨딱 넘어 20년이 다 차가요. 나가 내왕허는 디야 어디 부자 누구가 멫 석 허는지야 쪼르륵 다 알제라. 글고 저 만경 정부자네야 인심 사납기로 소문난 집구석 아니드랑가요?"

김봉구는 장덕풍이가 정부자와 친한 것이 또 배가 아파 것지르고 들었다.

"자네넌 그놈에 입이 초라니 방정이여. 입방정으로 복 까바시지 말고 잠 진득허니 닫아둬."

장덕풍은 세차게 혀를 차댔다.

"근디 성님, 상님허고 허능 것얼 봉게로 영판 가차운갑는디, 정부자 겉은 부지허고도 무신 거래헐 것이 있소?"

김봉구는 미친 척 달라붙었다.

"글씨, 자네넌 시상얼 맹탕으로 헛산다니께. 저런 부자덜이 일본사람헌티 쌀얼 팔아묵자먼 새중간에 사람이 들어서얄 것 아니여?"

"글먼 성님언 거간군도 허능게라?"

"밑천 안 딜이고 목돈 잡기 그보담 더 존 일이 어디 또 있는감?"

김봉구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자기는 도저히 장덕풍을 당할 도리가 없다는 절망이었다.

"얼렁얼렁 물건 챙기세."

장덕풍은 필요 없는 말을 끊느라고 바쁜 척 허풍을 떨어댔다. 김봉구는 장덕풍이 양반 노름꾼들에게 노름빚을 대주고 그 이자는 보통 빚돈의 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모르고 넘어가고 있었다.

"아 멀 그리 넋 놓고 섰능가. 인자 들어가 집안일 허제."

장덕풍은 가게 한쪽에서 서성이고 있는 아내에게 거칠게 내질렀다. 자기가 들어온 지가 언젠데 그때까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는 아내의 둔함이 그는 영 마땅찮았던 것이다.

"물이 못 나게 불러댈 때넌 무신 초친 맛이고 점방 지킨 공 몰르고 저리 정내미 떨어지게 허는 것언 또 무신 경우여, 경우가."

그의 아내는 다 들으라는 듯 거침없이 투덜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 저 무식헌 예펜네가!"

장덕풍이 눈을 부라리며 결기를 세웠다.

"아이고 성님, 참으씨요. 아짐씨도 나이가 얼매라고 넘덜 앞이서 성님이 잠 과혔소."

김봉구는 눈을 꿈벅거렸다.

"저 물건이 나이들어감서 저리 미련 떨고 뚝뚝허니 대들고 헝게 나가 보드랍게 살붙게 허는 소실감얼 안 찾게 생겼어, 빌어묵을."

장덕풍은 광목다발을 내리며 꼭 필요한 것도 아닌 말을 하고 있었다. 김봉구는 곧 터지려는 말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하이고, 등짝 근지러운 소가 둔덕 찾았고나. 니 마누래가 그리 된 것언 다 니 못된 행투 땜시여. 니가 돈 잘 범서 돈얼 푼푼히 주기럴 허냐, 옷감 산데미로 쌓아놓고 옷얼 지대로 혀주기럴 허냐. 부래묵을 것 다 부래묵음서 천덕시럽게 대허는디 어떤 년이 좋아라 허겄냐. 그려, 자고로 인종 못된 것이 돈벌고 출세허먼 가차운 사람 하시허고, 마누래 뒷전 치고 첩질허능 거이다. , 첩질 많이많이 히서 재산 찰팍 엎어묵고 좆대감지나 썩어 내래앉어라.

그들이 물건을 거의 다 챙겼을 즈음에 순사 하나가 가게 앞에 자전거를 세웠다. 그 순사가 가게로 들어서는 것을 먼저 본 나보길이 흠칫 놀랐다. 잘못한 것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헌병이나 순사를 보면 덜컥 겁부터 나는 것이었다.

"아이고메, 요것이 누구여! 우리 칠문이 아니라고. 와아, 참말로 기맥히시."

뒤늦게 장칠문을 알아본 김봉구는 환성을 지르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허, 아재. 칠문이가 머시다요, 칠문이. 나도 인자 나이가 서른이 넘고, 정식 순사란 말이오. 사람 체면 그리 막 깎덜 마씨요."

장칠문은 냉정하게 말하며 김봉구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어허, 긍게...... 머시냐......"

그저 반가움만으로 대들었다가 그렇게 면박을 당한 김봉구는 무색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장덕풍은 아들의 그런 언행을 모르는 척하며 딴전을 피우고 앉아 있었다.

"하야가와 국장님이 아부지 잠 보자고 허시오."

장칠문이 박하사탕을 꺼내며 말했다.

"무신 일인디?"

장덕풍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잘 모르겄는디요."

", 잘 되았다. 급허니 나갈 일이 있었는디, 니가 나 잠 태와다도라."

"글씨요, 아부지가 너무 무거운디......"

장칠문은 사탕을 씹어대며 자기 아버지와 자전거에 번갈아 눈길을 보냈다.

"일 다 끝냈응게 자네덜이야 인자 어서 뜨소."

장덕풍은 두 팔을 저어 김봉구와 나보길을 몰아내듯이 하는 손짓을 하고는,

"어이 보소, 가게 비네. 얼렁 나와서 가게 보소."

안쪽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히고 소리를 질러댔다. 김봉구와 나보길이 등짐을 인사를 했지만 장덕풍은 마음이 급해 건성으로 인사를 받았다. 김봉구는 장칠문을 묵살했고 장칠문도 김봉구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애비에 그 새끼여......"

가게 모퉁이를 돌아서며 김봉구는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다시넌 안 불러낼지 알었등마 아까 헌 말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어찌 또 난리판굿이여. 뻔뻔허니 낯뚜껍기가 곰발바닥이랑게."

장덕풍의 아내가 가게로 들어서며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장덕풍은 아내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아들의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앉았다.

"얼렁 가자, 국향 술집보톰."

"무신 일인디요?"

"알 것 없다."

장덕풍은 자전거가 굴러가는 맛을 간지럽게 느끼며 하야가와가 왜 오라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딱히 마음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의병이 씨가 말라들고 있다고 해서 그와의 관계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야가와는 의병이 일어나기 전에는 동학당 뿌리를 캐내야 한다고 성화더니 이제는 의병들의 뿌리를 도려내야 한다고 다그치고 있었다. 그 지치지도 않는 지독한 끈기에는 그저 기가 질릴 뿐이었다. 그의 말로는, 의병들이 그렇게 무서운 기세로 일어난 것은 뭐니뭐니 해도 동학 잔당들이 보이지 않게 숨어서 새끼를 치고 또 새끼를 쳐서 그리 된 것이고, 이젠 살아남은 의병들이 산지사방으로 다시 숨어들기 시작했는데 그것들을 이 잡듯 모조리 없애지 않으면 또 새끼에 새끼를 쳐서 언젠가는 또다시 들고일어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 좀 억지 같기도 하고 좀 허풍 같기도 했었는데, 아들 칠문이의 출세를 보고는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칠문이는 거지처럼 떠도는 사람 하나를 잡았는데 그게 바로 의병을 하다 숨어든 자였다. 그 공으로 칠문이는 제꺽 정식 순사가 되었다. 총독부까지 그 일을 그렇게 크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하야가와한테 찾아가 아들을 군산으로 좀 옮겼으면 좋겠다고 한 마디 했더니 그것도 금방 해결이 되었다. 하야가와가 그렇게 속 빠르게 손을 써준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지시하는 일을 더욱 은밀하게 잘하라는 뜻임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는 돈벌이 재미에 더 마음이 팔리지 그 일에는 별로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야가와가 보자는데 늑장을 부려 마음을 들킬 필요는 없었다. 관청에 통하지 않는 데가 없이 힘이 대단한 하야가와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군산 온께 순사질 헐 만허냐?"

아들의 허리를 붙든 장덕풍은 턱없이 큰소리로 물었다. 자전거가 빨리 달리고 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하먼이요, 인자 숨통이 터지능마요. 어쨌그나 큰 괴기넌 큰 물서 놀아야제라."

장칠문의 말소리도 컸다.

"지랄헌다, 니까정 것이 머시가 큰 괴기여. 인자 새끼순산 것이."

"허 아부지 어째 이러시오. 두고 봇씨요. 나가 아부지 생전에 꼭 경찰서장 해묵고 말 것잉게라."

"아따, 그리 되먼 효도허는 것이제. 근디 공 세우겄다고 욕심 과허게 부리덜 말어. 군산이야 오만 잡것덜이 다 뫼들어 들끓는 잡탕인게 몸조심히야 혀."

"나도 다 안께 걱정 마시게라."

자전거의 속도를 따라 5월의 바람이 얼굴을 시원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결에 눈을 가느다랗게 뜬 장덕풍은 경찰제복을 입은 아들의 허리를 안고 번화한 군산의 대로를 달리는 달뜬 기분을 맘껏 즐기고 있었다. 그 기막힌 기분이야말로 세상의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양반도 부럽지 않았고, 그 어떤 관리도 부럽지 않았다. 칠문이 놈이 어렸던 자신의 장돌뱅이 시절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고, 군산 변두리에 가게를 차릴 때만 해도 오늘날과 같은 팔자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세상이란 참으로 요술방망이 같은 희한하고 고마운 세상이었다. 10년만 더 젊었더라도...... 재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날수록 그 아쉬움은 더욱 커져갔다.

"아부지, 국향 골목 다 왔구만이라."

", 고상하다."

장덕풍은 아들의 등을 두들겨주고 자전거에서 내렸다. 그는 손바닥에 느껴진 듬직한 느낌을 음미하며 아들 둘은 참 잘 뒀다는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그리고 큰아들을 일진회에 넣고, 작은 아들을 사탕공장에 넣은 자신의 판단력에 또다시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큰아들은 순사에 딱 알맞게 세고 배포도 두둑했다. 그런가 하면 작은 아들은 기술자에 어울리게 몸집이 아담하고 눈썰미가 좋았다. 큰아들이나 작은아들이 빈대코 김봉구 같았더라면 큰아들은 순사보가 되지도 못하고 일진회원 때 벌써 똥통에 빠져 똥독이나 앓았을 것이고, 작은아들은 고급기술자가 되어 공장을 차릴 생각도 못하고 지금도 양철판에 사탕이나 굴려대는 신세를 못 면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면 두 아들 농사는 풍년에 풍년을 거둔 것이었다. 그는 그런 것들이 다 큰 덕에 풍년 풍자인 자기 이름 덕이라고 믿고 있었다. 장덕풍은 일본기생집 국향 앞에서 잠시 쭈뼛거렸다. 정재규나 다른 몇몇 양반에게 노름빚을 대주느라고 고급 기생집들을 꽤나 드나드는 데도 그 호화로운 치장이나 윤기 나는 말끔함은 전혀 익숙해지지도 편안해지지도 않았다. 다시 기생집 앞에 설 때마다 언제나 새잡이로 낯설고 어둘리고 주눅 들고 어색하고 옹색스럽고, 어쨌거나 그 기분은 관청에 발을 디미는 것만큼이나 지랄 같았다. 어찌 된 놈의 것이, 마당에 깔린 자갈은 그냥 밟고 다녀도 되는 흔한 자갈일 뿐인데도 짚신발에서 흙이라도 묻을까바 마음이 쓰였고, 가끔 마루 끝에 엉덩이를 걸치게 되면 옷에서 무엇이라도 묻어나 그 번들거리는 마루를 더럽히게 될까봐 마음이 조이고 하는 것이었다. 나도 재산이 많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당장 이런 데 와서 술을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해가며 그런 마음을 없애려고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기도 양반들 못지않게 큰 호령 해가며 일본기생들을 끼고 술을 질탕하게 마실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가 바로 장풍제과 사업소를 다시 짓고 정미소를 세우는 날이었다. 그때만 되면 돈을 아무리 퍼 써도 재산이 축날 리 없었던 것이다. 사탕공장이 커지고 정미소까지 갖게 되면 만석꾼 논부자는 하품 나오는 것일 뿐이었다. 만석꾼은 일년에 한차례 만 석을 걷어 다음 1년 동안 파먹고 사는 것이지만 사탕공장이나 정미소는 사시장철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었다. 정재규는 색질에 노름질로 돈을 파먹는데다가 형제간에 재산다툼까지 벌이고 있으니 그 앞날이야 빤히 내다보이고 있었다. 정재규같이 정신 못 차리는 것들 재산 좀 몰아 잡았다가 그런 것들이 망해 넘어지는 꼴들을 보면서 느긋하게 기생집을 출입할 작정이었다. 세상은 급속하게 돈이 말하는 세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이젠 돈으로 양반족보를 사는 놈이 미친놈이 될 정도로 양반 값은 떨어졌고, 앞으로는 돈이 많으면 양반이 되는 세상이 오고 있었다. 정재규 같은 것들이 거덜이 나면 그때 가서 한판에 백 원짜리 술판을 벌이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었다. 두고 봐라, 다 내 발 밑에서 기게 될 것이니. 장덕풍은 입에 괸 침을 꿀떡 삼키고는 옷을 털며 위아래로 자신의 몰골을 살폈다. 기생집 문을 들어서기 전에 자신도 모르게 하게 되는 몸짓이었다.

"하이, 장 상!"

장덕풍이 조심스럽게 자갈 깔린 길을 중간쯤 걸어가고 있는데 기생 하나가 마루에 서서 빨리 오라고 손을 까불어대고 있었다. 퇴기냄새가 풍기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장덕풍은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자 자갈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커졌다. 그는 그 소리도 마음이 쓰였다. 장덕풍이 서너 개의 돌계단을 다 올라서는데 정재규가 기생의 뒤를 따라 나왔다. 정재규는 손부터 내밀었다. 장덕풍은 아무 말 없이 돈을 내밀었다. 돈을 받아 든 정재규가 돌아서려고 했다.

"만경 어런."

장덕풍의 나직한 소리였다.

"여그 손도장......"

장덕풍은 손바닥만 한 종이묶음을 넘기며 역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지끔 급헌디 담에 눌르세."

정재규의 얼굴이 짜증스러웠다.

"그리넌 안되겄는디요."

목소리가 완강해지며 장덕풍의 투박한 두 손은 동그란 다식 크기만 한 백통으로 된 인주 통을 열었다. 백통그릇에 담긴 인주의 새빨간 색깔은 마치 완강한 장덕풍의 목소리 같았다.

"어디여, 어디."

정재규는 신경질을 부리며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손가락에 인주가 묻고, 한지 위에 지문이 선명하게 찍혔다. 바로 위에도 지문이 두 개나 더 찍혀 있었다. 지문이 찍힌 데마다 서툰 글씨로 금액과 날짜가 적혀 있었다.

"가게에 있겄구만이라우."

장덕풍이 돌아서며 남긴 말이었다. 노름하다 돈이 더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뜻이었다. 화투는 석유호롱보다 더 드센 기세로 퍼지고 있었고, 정재규는 그 가지가지 놀이에 깊이 빠져 있었다. 종이묶음과 인주 통을 주머니에 잘 넣은 장덕풍은 서둘러 골목을 벗어났다. 장덕풍은 우체국 뒷문에 이르러 표 나지 않게 좌우를 살폈다. 별로 신경 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장덕풍은 국장실 뒷문을 똑똑 똑똑똑 하는 식으로 두 차례 두들겼다. 하야가와하고 약속되어 있는 신호였다. 하야가와는 여간 급하거나 중한 일이 아니고서는 낮에 사무실로 부르는 일이 드물었다. 그래서 장덕풍은 궁금증과 긴장감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혹시 무슨 흠잡힐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우체국으로 오는 동안에 찬찬히 되짚어보았지만 그럴 만한 일은 잡히지 않았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면서 얼굴처럼 부드러운 하야가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국장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사무실로 들어선 장덕풍은 유창한 일본말과 함께 허리를 깊이 숙였다.

", 저쪽으로 앉으시오."

하야가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든 장덕풍은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아니, 왜 그리 놀라시오? 내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했소."

하야가와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아니고, 저어...... 국장님도 무관복을 입으셔서......"

장덕풍은 한쪽 손을 뒷머리로 가져가서 히줏 웃었다.

"총독부 지시로 모든 관리들이 무관복을 착용하게 된 것 아니오."

", 그것이야 알지요."

"헌데, 내가 무관복 입은 건 처음 본다 그거요? , 안 어울리오?"

하야가와는 옷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아닙니다, 아주 잘 어울리는데요."

"잘 어울린다니 좋소. 앉읍시다."

하야가와는 먼저 의자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상대방의 입에 발린 소리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 어깨가 좁고 몸이 가는 편인 자신에게는 군복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을 그는 굳이 탓하지도 않았다. 사람이란 으레 그런 식의 말을 예의나 예절이라고 이름붙여서 입술에 바르고 살도록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헌데 저어...... 어째서 보통학교 선생님들한테도, 관리들한테도 무관복을 입으라는 건가요?"

의자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친 장덕풍은 의문스런 얼굴로 물었다.

", 그거야 다 조선을 위해서요. 조선이 너무 문란하고 어지러우니까 관리나 선생들이 무관정신으로 협동 단결해서 조선의 기강을 바로잡고 살기 좋게 만들어주려는 것이오."

"예에, 아주 고마운 일이로군요."

장덕풍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속은 석연찮았다. 온통 헌병 천지가 되어버린 것 같아 보기에도 좋지 않고 왠지 으스스한 한기를 느꼈던 것이다.

"가게에 드나드는 손님들한테도 그 점을 잘 설명해 주시오."

기색이 달라진 하야가와는 장덕풍을 주시하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예에, 명심하겠습니다."

하야가와를 오래 대해 온 장덕풍은 그의 강도에 맞추어 힘 있게 대답했다. 이런 경우 하야가와는 상대방의 느낌이나 생각 같은 것은 아예 묵살해 버렸다. 무엇이든 주입이 필요한 경우에는 말을 강하게 하고, 같은 말을 몇 번씩이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확신에 찬 강조가 반복되는 동안에 상대방이 품고 있는 의혹을 죽이고 의심을 무찌르고 의문을 없애면서 믿음을 싹트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말이 발휘하는 신묘한 마력이고 신기한 최면력이었다. 말은 무기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지배력이었다. 어느 인간집단이든 완벽하게 지배하려면 일차적으로 무력을 동원해야 하고, 이차적으로 말을 동원해야 하는 것이었다. 탁월한 정치술이란 그 두 가지의 조화였다. 별다른 구속력이 없는 것 같은 상태에서 인간을 무한히 지배하고 있는 종교나 미신이나 지식이라는 것은 바로 말의 힘이었다. 무력이 보이는 힘이라면 말은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총독부의 무관복 착용 조처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젠 말의 힘을 이용할 단계이지 관리들마저 무관복을 입어 거부감과 위화감을 조성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에에 또, 내가 장상을 보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좋은 일......"

하야가와는 말에 뜸을 들이느라고 궐련을 반쯤 뽑아 장덕풍에게 권했다.

"아이고 이거......"

잔뜩 긴장하고 있던 장덕풍은 엉덩이를 번쩍 들며 황송한 몸짓으로 손을 내밀었다. 담배를 뽑는 마디 굵은 손가락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좋은 일이 한 가지 생겼소. 그게 뭔고 하니, 장학후원회를 결성하기로 한 것이오. 장학후원회란 더 말할 것 없이 대일본제국과 조선의 번성을 위해 매진할 인재를 공부시키는 데 유지들이 힘을 모아 보조금을 대주는 것이오. 돈을 조금씩 쓰는 것이지만 이 얼마나 좋은 일이오. 이 좋은 일에 장상도 회원이 되었으면 하는데, 장상 생각은 어떠시오?"

"아 예, 여부가 있습니까. 그런 좋은 일에 저 같은 것을 끼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돈이야 말씀하시는 대로 다 내겠습니다."

장덕풍은 더없이 흔쾌하게 대응했다. 그건 결코 속배 아픈 아부만이 아니었다. 장덕풍의 그런 대응에는 진심이 훨씬 더 많았다. 우선 그를 기분좋게 한 것은 자신을 '유지' 대접을 해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일로 하야가와하고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돈을 주고받는 사이로 말이다. 그건 하야가와의 뒷다리를 잡는 것이 아니라 부자지를 한꺼번에 잡는 것이었다. 돈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한 물건이었다. 도둑을 맞지 않는 한 돈은 헛쓰이는 경우가 없었다. 받는 사람은 약해지고 주는 사람은 강해지며, 가면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그 상대가 관리이면 더욱 틀림이 없었다. 살살 이권을 뽑아내면 10월을 주고 100원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였다.

"하하하하...... 장상은 역시 호남아요, 그렇게 솔직하게 대답을 해주니 내 마음이 다 시원하오. 돈이야 1년에 두 번쯤 내면 되는데, 그리 많은 액수는 아닐 거요. 내가 고마운 뜻 잊지 않고 차차로 갚아나가도록 하겠소."

하야가와는 아주 유쾌하게 웃어댔다. 그가 그렇게 소리 내어 웃는 것은 좀체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아니 뭐...... 제까짓 게......"

장덕풍은 두 손으로 맞비비며 겸손한 듯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런데 그는 속으로 황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자신의 예상이 너무나 빨리 그리고 너무나 정확하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차차로 갚아준다니......, 솔직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야가와였던 것이다.

"사업은 잘되지요?"

용무를 끝낸 사람의 여유를 보이며 하야가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예에, 덕분에 잘됩니다."

"돈벌이에 정신 팔려 그 일을 잊어버리는 건 아니지요?"

"아이고,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게 말이오, 찾아내지 못해서 그렇제 이 군산바닥 노동자들 속에도 그놈들이 숨어 들어와 있을 거이오."

"그러니 그걸 어떻게 찾아내지요."

"그건 염려할 게 없소. 꼬리를 흔들며 움직일 때를 기다리면 되니까."

그놈들이 그리 혼이 나고도 또 움직일까요? 하는 말이 곧 나오려는 것을 장덕풍은 황급히 눌렀다. 하야가와 앞에서 그런 말을 내놓는다는 것은 제 도끼로 발등 찍기였다. 그러나 선생이고 관리고 군복을 입고 군인이 다 된 것을 생각하면 그런 마음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자아, 바쁠 텐데 그만 일보시오."

하야가와가 일어났다.

"예에, 돈을 언제까지 가져오면 되나요?"

", 그건 내가 다시 연락하겠소."

하야가와가 아주 친근한 웃음을 보내며 뒷문을 열었다. 장덕풍은 춤을 추고 싶은 기분으로 우체국 뒷문을 나섰다. 사탕공장을 새로 짓고 정미소를 차릴 날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든 것 같았던 것이다. 큰길로 나온 장덕풍은 잠시 망설였다. 집에까지 걸어가기는 너무 멀었다. 아니 정재규한테서 또 연락이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조급했다. 그렇다고 칠문이를 찾아가 또 태워다 달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공무로 바쁠지도 모르고, 경찰서에 dqjtdj 헛걸음을 할지도 몰랐다. 그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어이, 어이, 인력거!"

장덕풍은 인력거는 아예 타는 물건이 아닌 것으로 젖혀두고 살았다. 그런 돈 잡아먹는 호강은 아편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오늘만은 달랐다. 장덕풍이 인력거에서 내리는데 한 남자가 가게에서 달려 나왔다.

"아이고 장샌, 우리 집 어런 어디 가시당게라?"

그 남자는 장덕풍을 붙들었다.

"아니 요것이 누구여, 강 서방 아니라고? 어쩐 일이여?"

장덕풍은 마뜩찮은 얼굴로 그 남자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지금 부아가 치밀고 있었다. 아까운 돈 없애가며 굳이 인력거를 타고 온 것은 돈을 더 빌려달라는 정재규의 연락을 받기 위해서였지 정재규를 찾아 나선 늙다리 머슴의 상판을 보자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집 어런 얼렁 뫼셔가야 허는디, 시방 어디 기신게라?"

강서방은 애달은 얼굴로 장덕풍의 뒤를 종종걸음 치고 있었다.

"또 마누래가 강짜여?"

장덕풍이 거칠게 내쏘았다.

"아니구만요, 큰 마나님이 찾으싱마요."

"하이고 옘병허고 자빠졌네. 저 잡것이 인자 인력거 타고 댕김서 양반 숭내내기로 작정혔능갑네. 저 인력거삯이먼 광복 치매저구리가 한 벌 아닐 것이여. 예펜네넌 요리 꾸지레허니 맨들어놓고 잘허고 댕긴다."

가게를 지키고 있던 장덕풍의 아내는 이렇게 투덜거리며 뒷문을 밀치고 있었다.

"무신 일 났능가, 큰 마나님이 찾게."

장덕풍은 가게로 들어서며 귀가 솔깃해지고 있었다. 정재규네 집안일이 그동안 어떻게 시끄러워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건 남의 집 불화를 구경하는 단순한 재미 때문만이 아니었다. 정재규와 쌀거래 돈거래를 하는 처지에서 다 미리미리 알아둬야 할 일이었다.

"한양서 끝에 되련님이 내래오시고, 가운데 서방님이 오시고 히서 그렁마요."

"거그 앉소. 세찌넌 공부나 안허고 멀라고 내래왔능고? 첫찌가 지 몫아치 재산 팔아묵기라도 헐라능 것인가?"

장덕풍은 살살 말을 꼬여내려고 시도하며 박하사탕 하나를 꺼내 강 서방에게 불쑥 내밀었다.

"아니구만이라, 아니어라. 얼렁 우리 집 어런 기신 디나 갤차주씨요."

강서방은 손을 내저으며 물러섰다.

"자네 집 어런 오늘 본 일 없응게 어디 기신지도 몰르고, 먼 걸음 했응게 사탕이나 한나 입맛 다시란 것이여."

"아닌디요, 어런 찾으러 또 딴 디 가봐야제라."

"그려? 딴 디 갈 디 있으먼 가보드라고. 군산바닥 기생집얼 다 더트든지, 고샅 고샅 댕김서 소리럴 질르든지, 그것이야 자네 맘대롱게."

장덕풍은 콧방귀를 뀌며 박하사탕을 도로 유리병에 던져 넣어 버렸다. 그는 강서방이 더 이상 찾아갈 데가 없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었다.

"꼭 뫼시고 가야는디, 으쩌꼬?......"

주름진 얼굴이 일그러지며 강 서방은 장덕풍을 바라보기만 했다.

"긍게 사탕이나 한나 묵음서 다리 쉬어 가란 것 아니여. 못 찾고 간다고 자네가 덕석몰이 당헐 것도 아니고, 여자가 허는 동네마실도 아닌디 그리 쉽게 찾어지간디. 앉소, 앉으랑게."

장덕풍은 다시 박하사탕 하나를 꺼냈다.

"에라 나도 몰르겄다. 이리 싸대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강서방이 쪽마루에 몸을 부려버렸다.

"묵소, 입 안이고 목구녕이고 화아헌 것이 묵을 만허시."

장덕풍은 강 서방의 손에 사탕을 쥐어주고는,

"두찌 세찌가 큰 마나님허고 뫼앉었으먼, 재산다툼을 인자 끝장보자 그것잉가?"

그는 아주 은근한 소리로 물었다.

"글씨요...... 세찌 되련님이 내래오신 것이야 그 일허고는 연관없이 큰 마나님 성화로 선볼라고 오신 것인디, 가운데 서방님이 들이닥쳤응게 결국에넌 또 그 다툼이 벌어지겄제라."

강 서방은 사탕을 우물거리며 말을 풀어내고 있었다.

"근디, 칼자리 쥔 것언 장남 아니라고? 장남이 틀어쥐고 안 내놀라는 칼자리럴 두찌 세찌가 잡게 되겄어?"

"그야 두고 봐야제라. 큰마나님도 그짝 편인디다가, 세찌 되련님이 장개럴 들게 되먼 판이 달라질 것잉게라. 큰마나님이 세찌 되련님얼 막둥이라고 끔찍허니 아는디다가, 세찌 되련님도 나이가 갤치는지 전허고넌 눈치가 달르든디요."

"그 세찌가 똑똑허다고 안혔어?"

"야아, 세 아덜 중에 인정도 질로 많고 공부도 잘허제라."

"! 정재규도 에롭겄는디."

장덕풍은 무심결에 이렇게 말을 토하고는 흠칫 놀라 강 서방을 빠르게 훔쳐보았다. 정재규라고 이름을 함부로 불러버린 것이 실수였고, 자신의 생각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도 실수였다. 그러나 강 서방은 사탕을 맛있게 빨 뿐 무심한 눈치였다.

"자네 생각에넌 판이 어찌 되겄능가?"

장덕풍은 그래도 자신의 실언을 지우기 위해 얼른 다른 말을 꺼냈다.

"글씨요, 우리 아랫것덜이야 배불른 쌈 귀경이나 허는 처진디, 그 쌈이 그리 쉽게 풀리지넌 않을 것 겉은디요. 부모가 자석덜 생각허는 맘허고 성제간덜이 성제간 생각허는 맘이 원체로 달릉게라. 돈이고 재산이라는 것이 먼지, 그놈에 것 앞에서넌 성제간 정이고 머시고 다 끊기고 딴 넘이 된당게요. 글로 보먼 우리맨치로 없이사는 것도 속편허요."

강 서방은 입을 훔치며 쓰게 웃었다.

", 딴 넘만 되먼 다행이게. 끝장에넌 원수지간이 되네. 근디 그것이 어찌 근지 알어? 부모허고 자석언 일촌이고, 성제간찌리넌 이촌이란 말이시. 근디다가 넘 식구인 지집덜이 각단지게 하나썩 붙는단 말이시. 그리 되먼 이촌이 사둔네 팔촌 되야분다 그것이랑게."

"아매 그런갑소. 나 인자 가볼라요. 근디 행여 우리 집 어런 어디 기신지 암스로도 안 갤차주는 것언 아니겄제라?"

강 서방이 몸을 일으키며 장덕풍을 빤히 들여다보듯 했다.

"옛끼 이사람아, 무신 숭헌 소리여. 질 먼디 얼렁 가고, 자주 만내세."

"아이고메, 자주 만내서 사탕 얻어묵는 것이야 존디, 그리 되먼 우리 집 재산 다 날라가뿌요."

강 서방이 가게를 나서며 손을 내저었다.

"이 사람아, 그것이 자네 재산이여."

장덕풍은 소리치고는 허허대고 웃었다. 강 서방은 마음이 무거운 것과는 달리 잰걸음을 치고 있었다. 사람을 찾지 못했으면 늦지나 말아야 했던 것이다. 가운데 서방님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오금이 조였다. 정재규의 두 동생 정상규와 정도규는 강 서방을 기다리며 안채의 대청에 나앉아 있었다. 가는 봄이고 오는 여름의 길목인 5월 하순이라 한낮의 햇발은 더위를 품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정재규의 어머니 최씨가 보료 위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다. 최씨의 혈색없는 얼굴에는 병색이 드러나 있었다.

"도규야, 나 인자 더 말헐 기운도 없다. 이 에미 죽기 전에 니럴 장가 드릴라는 것언 이 에미 욕심만이 아니랑게. 니가 장가 가겄다고 맘얼 정해야 니 몫얼 당당허니 찾게 된단 말이다. 니 큰형님 오기 전에 얼렁 맘얼 정해라. 그러고 큰형님 앞이서 니 입으로 그 말얼 허고, 재산얼 아부님 유언대로 분할해 도라고 당당허니 말허란 말이다. 그래야 이 에미도 당당허니 나슬 것 아니냐. 어찌냐, 맘 정했제!"

최씨는 기운없는 소리로 그러나 간곡하게 막내아들 정도규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을 내려뜬 정도규는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야 도규야, 니넌 어찌 그리 말귀럴 못 알아듣냐. 장가넌 장가고 공부넌 공부랄 말이다. 장가럴 들어 각시야 여그 집에다 살리고 니넝 경성서 공부럴 허면 공부에 무신 지장이 있다는 것이냐. 니 몫 재산이야 안 찾을라먼 안 찾아도 좋은디. 어무님께 그리 불효혀도 되겄냐? 얼렁 맘 정해라."

정상규는 짜증스럽게 갓전을 밀어 올리며 성질 돋은 눈길로 동생을 쏘아보았다. 정도규는 눈을 내리감으며 또 생각해보았다. 혼인에 불효라는 문제가 연결되면 그만 할말이 없어졌다. 그건 어머니가 자신에게 바라는 유일한 소원이었다. 인습적인 효, 불효에 얽매여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끝자식인 자신에게 베풀어준 사랑은 흉거리가 될 만큼 유별났다. 그런 어머니가 당신의 살아생전에 바라는 혼인을 공부를 내세워 거부하기란 너무 괴로웠다. 또한 공부욕심이 앞서서 아직 결혼할 마음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따져보면 어머니가 자신의 혼인을 바라는 건 어머니만을 위한 소원이 아니었다. 그건 막내자식에게 베풀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사랑이었지 결코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 사랑 속에 재산문제까지 다 포함시켜 놓고 있었다. 그 사랑을 거부하기란 너무 힘겨웠다.

", 어머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정도규는 눈을 뜨며 말했다.

"아이고 고마워라, 우리 아덜. 나 인자 맘놓고 눈감겄다."

최씨가 정도규의 손을 붙들었다. 그 눈에 금방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그려, 아조 잘 생각혔다. 그래야 효도도 허고 니 일도 잘 풀리제."

정상규도 비로소 웃음을 띠며 동생의 어깨를 두들겼다. 정도규는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다.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로 했으면서도 그는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노쇠와 함께 병이 깊어가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큰형이나 작은형은 똑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산을 탐하는 마음은 둘 다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2년이 넘게 두 형은 재산다툼을 해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재산의 반을 큰형에게, 나머지 반씩을 작은 형과 자신에게 분배한다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그런데 장례를 치르고 난 큰형은 아버지의 유언을 묵살하고 들었다. 재산은 장자 상속인데 아버지가 병환으로 정신이 흐려져 실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재산을 분배해 줄 수는 없고 매년 수확을 그 비율로 나누어주겠다는 주장이었다. 아버지는 평소부터 그런 뜻을 가지고 계셨지 실언이 아니라고 어머니가 나섰고, 불효막심하고 형제우애 끓는 짓 하지 말고 당장 재산을 분배하자고 작은형은 대들었다. 그러자 큰형은 어머니는 아버지와 마찬가진데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동안은 재산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효도지 서둘러 분배해서 집안이 졸아드는 형국을 만드는 것은 불효라는 것이었다. 그런 묘한 주장에 작은형은 더욱 열을 내고 덤벼들었다. 그 다툼은 두 형 사이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두 형수들까지도 소리 안 나는 다툼을 하게 되었다. 다투는 소리가 담을 넘고, 아랫사람들의 입단속을 시켰지만 소문은 퍼져나갔다. 창피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다 작은형은 자기편을 들어 함께 나서지 않고 뭘 하느냐고 성화였다. 구런 재산싸움이 창피스럽기만 한데다가 자신은 큰형과 나이 차이가 너무나 많아 작은형처럼 그렇게 대들 수도 없었다.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한성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큰형은 즉석에서 환영을 했다. 그런데 작은형은 전주의 학교가 뭐가 모자라서 한성으로 가느냐며 펄펄 뛰었다. 둘 다 자기 잇속 때문이었다. 작은형은 결국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싸움을 대판 벌이고는 자기 식구들을 데리고 딴살림을 나가고 말았다. 그건 어머니 힘으로 막을 도리가 없는 사태였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어머니의 발병은 아버지를 잃은 상심 탓이었고, 병세가 심해진 것은 두 형 사이에서 애를 태운 때문이었다.

"이 에미 큰성님 기둘리기 심드는디 인자 재미진 한성 이얘기나 좀 해라."

최씨는 막내아들을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었다.

"뭐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야지요."

그러면서도 정도규는 어머니를 즐겁게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더듬고 있었다.

"촌인 군산이고 강경이 저리 날로 달로 변허는디 한성이야 더 말헐 것 있겄냐. 나가 한성 구경헌 후로 얼매나 달라졌는지 모르겄다."

어머니의 말에서 정도규는 이야기의 실마리를 잡았다.

", 달라진 것이 있어요. 3년 전에 한성 구경을 가실 적에 기차를 타셨지요?"

"탔제, 솜리서 탔제."

", 경성서는 전차도 타셨지요?"

"탔제, 근디 그것 싱겁드마. 기차 한칸얼 도회지에다 띠다논 것 아니드냐."

", 그렇기도 하지요. 헌데 기차는 석탄을 때서 가고, 전차는 전기로 가는 것이 다르지요."

"그 이치야 모르겄고."

"그 때 자동차라는 것도 보셨지요?"

"그 발통 네 개 달린 거?"

", 그렇지요. 그 자동차는 못 타보셨지요?"

"그것이야 귀헌 물건이라 일본고관덜만 타는 것이라고 허든디. 그저 인력거만 많이 탔제."

"그 자동차를 이제 민간인들도 아무나 돈만 내면 탈 수 있게 됐어요. 인력거하고 똑같이 된 거지요."

"그것이 엄칭이 비씨다든디 어찌 그리 흔해졌능고? 그간에 많이 변했네."

이야기에 이끌리고 있는 최씨의 웃음 담긴 얼굴에는 약간 화색이 돌고 있었다.

", 어떤 일본사람이 회사를 차려서 그런 장사를 시작한 거지요. 그 돈을 받고 사람을 태워다주는 자동차를 닥구시라고 불러요. 삯전을 받는 차라는 뜻이지요."

"닥구시? 이름도 요상시럽네. 그것도 일본 말이겄제?"

"아닙니다. 저 서양 사람들 말이지요. 본시 삯전 받고 자동차로 사람을 태워다주는 장사가 서양에서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그 이름도 따라서 온 거지요."

", 니가 멫 년 전에 신기허니 생각허고 열성으로 배우든 그 꼬부랑꼬부랑헌 말 말이지야?"

", 그 영어로 닥구시예요. 어서 어무님 몸이 쾌차하도록 하세요. 제가 모시고 그 닥구시를 태워드릴게요."

"그려, 그려. 나도 타보고 잡다. 우리 막둥이 이얘기도 재미지게 잘도 허제. 어디 또 한나 히봐라."

정도규는 가슴이 찡 울리는 것을 느꼈다. 별로 재미있을 것도 없는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어 하는 어머니가 안쓰럽고 딱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그런 정도의 이야기를 재미있어 하며 얼굴에 웃음이 도는 건 그만큼 마음이 외롭고 적적하다는 표시였다. 두 형은 재산다툼에 정신이 팔려 어머니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두 형이 그런 지경이니 며느리며 손자들이 어머니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드릴 리 없었다. 결국 아버지가 재산을 많이 남긴 것이 탈이었다.

"이번엔 운동시합 얘길 한 가지 할게요. 이건 조선 땅에서 처음 열린 운동시합인데요, 이름을 권투라고 하기도 하고 영어로는 뽁싱이라고도 해요. 개화 물이 든 젊은 사람들은 뽁싱이라는 말을 더 많이 씁니다. 그 운동도 서양에서 건너온 것이라 이름이 그런 겁니다. 그 운동이 단성사에서 열렸는데, 참 볼 만했어요. 어떻게 하느냐면 말이지요, 높직한 단상에다 동아줄 세 가닥씩으로 네모진 울타리를 쳐놓았어요. 그 넓기가 이 대청마루보다 곱절 정도 될 거예요. 그 안에서 두 선수가 호박덩이만큼 큰 가죽장갑을 끼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거지요. 그래서 주먹 권자, 권투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 싸와서 뭐하게?"

"하하하...... 그게 운동시합인데요, 서로 치고받고 해도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니예요. 이런저런 규칙이 있고, 심판이란 사람이 그 울타리 안에서 돌아다니며 두 선수가 규칙을 잘 지키나 안 지키나 감시를 하지요."

"에이그, 그래도 치고받고 허다보면 코피도 터지고 다치기도 헐 것 아닌고."

", 코피가 터지는 건 예사고, 눈도 찢어지고, 심하면 얻어맞고 넘어져서 기절을 하기도 해요."

"저런, 저런. 순 쌍놈덜 운동이로구만. 씨름겉이 양반 운동이 아니여. 사람 베리는디 그런 것 보덜 말어."

". 나이 잡수신 어른들은 그리 말씀하시면서 좋아하지 않아요. 헌데 젊은 사람들은 아주 좋아합니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아슬아슬하고 기운이 절로 나는 것이,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마구 두들겨주는 기분이 들거든요. 좀 거칠고 사납기는 해도 그냥 구경하기는 속이 시원하기는 해요."

"그 짓얼 허는 사람덜언 왜 해?"

최씨는 끔찍스러워하면서도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잘하는 선수는 유명해지고 돈도 벌거든요. 구경 가는 사람들이 입장료를 내잖아요."

"별난 시상 다 왔다. 사람얼 잘 패서 옥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유명해지고 돈도 벌다니."

"다 일본사람들이 세상을 변하게 만들고 있지요. , 황금정에도 전찻길 공사를 한창 하고 있어요."

"황금정이라먼......"

"아니, 어찌 혼자서 들어스느냐!"

정상규가 느닷없이 고함을 질렀다. 최씨와 정도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리 수소문허고 찾어도 어디 기신지 몰......"

"닥쳐라, 이 등신 겉은 놈아!"

정상규가 눈을 부릅뜨며 대청바닥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 불호령에 놀라 부엌에서고 행랑에서고 사람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형님, 참으세요. 강 서방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성질 과격한 작은형이 강 서방에게 손찌검이라도 할까봐 정도규는 얼른 일어섰다. 최씨가 눈을 내리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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