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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1-5

20. 침묵하는 땅

10월을 보내고 있는 하늘은 지향 없이 넓고 시리도록 맑고 사무치게 깊고 서럽도록 푸르렀다. 가을걷이를 하고 있는 농부들은 그 높푸른 하늘을 가끔 우러러보다가 고개를 떨구며 시름겨운 한숨을 길게 흘리고는 했다.

"하늘도 무심허시제......"

어떤 아낙네들은 한숨 섞인 푸념을 실바람에 띄우기도 했다. 그들은 두 달 동안에 벌어진 수많은 죽음의 끔찍스러움에 마음병이 들어 있었고, 의병의기세가 불 꺼지듯 잦아들어 버린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속마음으로 의지하고 믿은 건 의병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번에도 갑오년 때와 다를 것 업는 감정의 엇갈림을 겪고 있었다. 그때 가슴속에 품었던 기대가 무너진 자리에 밀려든 것은 허망감이었다. 그 막막하고 두려운 허망감에서 그들은 헤어날 길이 없었다. 그러나 10월은 그렇게 무심하게 끝나지 않았다. 저 먼 북쪽 만주 땅에서 천둥 치듯 들려온 소식이 있었다. 이등박문의 죽음이었다. 초대 통감 이등박문을 모르는 조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는 아이들도 호랑이 대신 그 이름을 들으면 울음을 그칠 정도였다. 그 사람이 그냥 죽은 것이 아니었다. 조선 사람이 총으로 쏘아 죽인 것이었다.

"그 사람이 누구여?"

"안중근이란 사람이라등마."

"안중근...... 참말로 장허고 장허시."

"그 양반도 의병이었을랑가?"

어느덧 안중근은 <양반>으로 존대 받고 있었다. <양반>이란 말은 족보와는 상관없이 장한 일을 한 사람이나 남다른 일을 한 사람을 진심으로 받들어 부르는 별칭이었다.

"그야 잘 모르겄는디."

", 의병이 따로 있능가. 바로 그 양반이 똑별난 의병대장 아니라고."

", 그렇기도 허구마. 그 천하럴 울리든 이등박문 이럴 즉사시켜 부렀시니 의병대장 중에 의병대장이시."

"총질솜씨도 참말로 귀신 아니라고. 어찌 그놈에 가심에 정통으로 뚫어부렀능고."

"긍게로 말이시. 그 연전에 미국사람 죽인 장 머신가 허는 양반이나 이 양반이나 다 기맥힌 분네덜이제."

"하먼, 다 하늘이 점지헌 분덜이제. 그나저나 어찌 그 무선 이등박문이럴 죽일 맘얼 묵었을꼬?"

"그야 미국사람 쏴죽인 것 보고 그리 맘묵었을란지도 모르제. 사람이야 서로 보고 배우는 것 아니드라고?"

", 그럴 법도 허시, 좌우당간 옷대가리덜얼 그리 차근차근 죽여나가면 결국 왜놈덜얼 몰아내게 안 되겄다고?"

"아이고, 입 봉허소. 큰탈날 소리시."

"아따 그 사람, 죽기럴 작정허고 총질얼 헌 사람덜도 있넌디 간도 에진 간히 작네그랴, 근디 말이시, 미국사람얼 쏴 죽인 소문이 퍼진 담에 의병덜이 와짝 더 불어났었는디 이분에도 그리 될랑가?"

"그럴란지도 모르제."

사람들이 모여 앉은 곳이면 어디서나 그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 소문의 파고는 미국사람을 주였을 때보다 훨씬 높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총 맞아 죽은 사람이 이등박문이었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장소도 바다 건너 멀리가 아니라 걸어서도 갈 수 있는 만주 땅 하얼빈이었다. 먹물 옷이 남루한 중 하나가 장텃거리며 주막에서 그런 소문을 들으며 묵묵히 앉아 있고는 했다 중은 차양이 큰 삿갓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성한 데라고는 거의 없이 덕지덕지 기워 입은 먹물 옷을 보고 사람들은 그 중의 수도생활이 오래 라는 것을 짐작할 뿐 더는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의 그런 무관심은 이미 속세와 절연한 모든 중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그런 무관심의 덕으로 그 중은 새로운 소문을 넉넉하게 귀에 담고 있었다. 그 중은 시주를 받으려고 어느 집 앞에서 목탁을 두들기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저 때가 되면 주막에 들러 밥 한 끼를 청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밥을 얻어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귀동냥한 중은 다시 주막을 나서서 빠를 것도 느릴 것도 없는 걸음걸이로 들녘 길을 걸어가고는 했다. 그 중이 어느 들 마을로 들어섰다. 삿갓을 약간 들어 올려 마을을 살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스적스적 걸어 어떤 집 앞으로 다가갔다. 중은 팔을 뒤로 돌려 바랑에서 목탁을 꺼냈다. 그리고 거침없이 치기 시작했다.

"마하바냐 바라밀다......"

중은 목탁소리에 맞추어 반야심경을 독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목탁소리며 독경소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시주승들의 목탁소리는 으레 작고 느리게 마련이었으며, 그 소리에 맞추어 독경소리도 낮고 맥없었던 것이다. 그런 목탁소리나 독경소리는 그저 시주승이 문밖에 와있다는 표시에 지나지 않았다. 시주를 얻느라고 먼 길을 걸어 지쳐서 그러는 것인지 시주를 얻자니 미리 눈치 보며 기가 꺾여 그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울리고 있는 목탁소리는 제물이 크게 든 대법당의 예불 때 울리는 목탁소리처럼 울림이 크고 힘이 실려 있었다. 북소리의 신명에 소리꾼의 소리가 이끌리듯 목탁소리에 맞추어 독경소리도 쿠렁쿠렁하게 울리는 것이 아주 기운찼다. 마치도 종지 쌀은 싫고 말 쌀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고메, 어느 절 시님이신지 목탁도 시원시원하게 치시고 독경도 시원시원하게 잘 허시오. 이 집안이 근심이 다 깨끔허니 씻겨지는 것 같구만이라우."

놋양푼에 쌀을 그득하게 받쳐 든 여자가 대문 밖으로 나서며 너스레를 떨었다.

"소승 문안이오. 나무관세음 보살......"

중이 허리를 굽히며 나무관세음보살에 맞추어 목탁을 똑똑똑 똑또그르하고 구슬 굴리듯 하는 소리로 쳤다.

"시님, 어느 절에 기신다요?"

마흔 줄의 여자는 놋양푼을 내밀며 삿갓 속에 감추어진 얼굴을 보려는 듯 고개를 약간 옆으로 숙이며 눈을 올려떳다.

"중이야 어디든 드는 절이 지 집이고 절얼 나스먼 뜬 구름이구만요. 헌디 어인 시주가 이리 많은게라?"

중의 차분한 말이었다.

"야아. 우리 주인마님언 항시 이리 시주허시능마요."

"고마우신 불심이고 공덕이싱마요. 허나 시주란 천인 만인으 공덕얼 모으는 것이제 ㅁㅁ 사람으 후헌 인심얼 얻자는 것이 아닝마요. 그리허고 소승이 이 댁 앞에 발질얼 멈춘 것언 시주럴 얻자는 거이 아니라 이 댁 지붕 우로 자욱허니 서린 액운이 사납고 흉기가 고약헌 땀시구만이라."

"아이고 시님, 아니 도사님, 어찌 그리 딱 알아맞히시는 게라."

여자는 화들짝 반색하며 목청 크게 외치듯 하고는 ,

"쬐깨 기둘리시게라우, 쬐깨"

하며 허둥지둥 돌아서 집안으로 내달았다. 중은 느리게 몸을 돌려세웠다. 삿갓이 보일 듯 말 듯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삿갓 속에서 중의 눈길은 예리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시님, 시님, 주인마님이 안으로 모시라고 허능구만요. 얼렁 드시게라."

놋양푼을 두고 나온 여자가 곧 중의옷자락을 잡아 끌 것처럼 서둘러댔다. 중은 묵직한 몸놀림으로 대문을 넘어섰다. 앞장선 여자의 발걸음이 바빴다.

"마님, 시님 모셔왔구만이라우."

여자는 사랑채 앞에 나서 있는 두 여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소승 광덕, 문안 아뢰능구만요. 나무아미타불......"

중이 목탁 쥔 손을 모아 합장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두 여자가 합장을 했고, 나이든 여자가 지극한 소리로 관세음보살을 염송했다. 몸에 깊이 스민 소리였다.

"시님 말씸 전해 들었구만요 누추허지만 잠 오르시지요."

나이든 여자가 옆으로 비켜섰다. 그 여자는 송수익의 어머니 이 씨였고, 그 옆에 선 여자는 송수익의 아내 안 씨였다. 중은 삿갓의 댓 살 사이사이로 두 여자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랫사람덜언 물려주시게라우."

중이 마루로 올라서며 이 씨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중은 삿갓을 벗었다. 그때 드러난 얼굴을 공허였다.

"소승이 아까 액운이니 흉기 운운한 것은 다 헛소리옵고, 실은 소승이 아드님과 함께 의병생활얼 허고 있는 처지라 아드님 소식얼 전허고자 발걸음얼 한 것이구만이라."

"아니! 무신 변고가 있능가요?"

당황한 이 씨가 안색이 변하며 황급히 물었다. 옆에 앉은 송수익의 아내는 옷고름을 입에 물었다.

"아니옵니다. 다리에 총상얼 입긴 혔으나 다행히 상처가 경미혀서 치료럴 허고 있는 중이구만요."

공허는 두 여자를 바라보며 잔잔하게 웃었다.

"나무관세음보살......"

이 씨가 합장을 하며 눈을 내리 감았다.

"상처가 경미허다면......"

동요하는 빛을 감추지 못한 안 씨가 시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사렸다.

"예에, 원체 천운얼 타고나신 분이라 뼈가 상허지 안혀 치료가 순조롭구만이라. 크게 심려지 않으셔도 곧 회복이 되실 것잉마요."

공허의 정중한 대답이었다.

"다 부처님 가피가 크신 덕이구만요."

감정을 안정시킨 이 씨는 차분하게 예의를 갖추고는,

"그간에 귀를 열어 들은 소문으로넌 의병게가 거전 다 소진 되었다고는 허는디, 앞으로 어찌헐 것인지 시님께서넌 아시는지요."

하며 이 씨는 공허를 바라보았다.

", 그간에 의병세가 크게 꺾인 것언 사실이구만요. 허나 전도럴 어찌 헐 것인지넌 아직 소승이 아는 바가 없구만이라. 소승이 찾아뵌 것언 왜놈덜에 눈귀럴 속일 작정으로 송 장군께서 별세허셨다는 소문얼 역부러 퍼뜨리고 있는디 혹시 집안이서 그 소문이 참말인줄 알고 낙심낙담헐란지 몰라 걱정허고 계싱마요 . 그간에 무신 변고넌 없으신지......?"

공허는 자신이 말은 임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이 씨는 승려의 말에서 아들이 쉽게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 씨는 그런 느낌을 마음의 기둥에 묶으며 애써 되묻기를 피했다.

"안 들음만 못헐 이애기요만, 9월에 퍼지기 시작헌 괴질로 끝손녀 딸얼 잃었구만요. 이 늙은 것이 가야 허는디 순서가 뒤바뀌었으니...... 다 이 늙은 것으 불찰이구만요."

이 씨의 목소리가 잠겨들고 있었다. 이 씨는 그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며느리의 마음을 헤아려 입에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어머니의 말만 듣고 있는 안 씨는 옷고름 끝으로 소리 없이 눈을 훔치고 있었다.

"나무관세음보살...... 그 놈으 호열자가 이 댁에도 횡액이었구만요."

공허는 굵은 목덜미를 쓸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것이 우리만 당헌 횡액이 아니었응게 그만허기 다행이구만요. 한집이서 서넛씩얼 잡아가기가 예사였응게요."

이 씨는 옷매무새를 바로잡으며 약간 찬기가 도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며느리에 대한 소리 없는 꾸짖음이었다. 아무리 승려라 해도 외간남자가 분명한 이상 눈물을 내비치는 며느리의 몸가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안 씨는 시어머니의 그런 눈치를 알아채고는 앉음새를 고치며 얼굴을 떨구었다. 몇 년째 상면을 못하고 있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어린 자식을 괴질로 잃은 설움이 맞부딪치며 가슴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놈에 호열자꺼정 퍼져서 사람덜얼 잡아가고 있으니 원, 이 나라 국운이 쇠헐 대로 쇠헌 모양이구만요. 소승 이만 물러가겠사온데 무신 전 허실 말씸이 있으시면......"

공허는 일어설 채비를 하며 이 씨와 안 씨를 번갈아 보았다.

"부디 몸 보존 잘 허라고 전해주시고......"

이 씨는 무슨 변동이 있으면 당장 중을 따라나서 남편을 찾아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 바랑이 늘어지도록 쌀을 받아 진 공허는 다시 삿갓을 눌러쓴 채 마을을 떠나고 있었다. 서너 집 사립에는 솔가지를 끼운 새끼줄이 쳐져 있었다. 돌림병인 호열자를 앓고 있는 집들이었다. 9월 들어 퍼지기 시작한 그 몹쓸 병은 아직 까지도 물러가지 않고 있었다. 토하고 설사를 해대며 열이 오르는 그 병은 전국적으로 기승을 부렸다. 하루에 스무 번쯤 설사를 하거나 토하면서 이삼 일 앓게 되면 숨이 넘어가기 예사였다. 그리고 한 사람이 알게 되면 집안 식구 모두가 돌아가며 앓게 되었다. 병을 이겨내지 못하는 건 대개 노인네들이나 어린아이들이었다. 산에서 벗어난 공허는 그 괴질의 피해가 얼마나 큰지를 직접 확인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붉은 묘가 너무 않았던 것이다. 젖빛 진액을 토하거나 설사를 해대다가 허망하게 죽고 마는 호열자라는 병은 마른 풀 숲에 번지는 불길처럼 무서운 기세로 퍼져나갔다. 병이 한창 기승을 부리게 되면서 이상한 소문이 함께 떠돌았다. 그건 다름 아니라 호열자를 일분사람들이 옮겨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병을 무서워하는 만큼 일본사람들을 새롭게 미워하고 증오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소문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작년 가을 무렵부터 금년 여름에 걸쳐서 일본사람들은 전과는 딴판으로 떼 지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개항지에 자리 잡는 것이 아니라 농촌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은 작년에 동양척식주식회사라는 것이 생기고 통감부가 이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각 지방으로 퍼진 일본사람들 중에 호열자 보균자들이 없으란 법이 없었다. 그런 사람들과 한 우물을 마시게 되고 이런 저런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호열자에 감염되기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말마저 맘대로 내놓고 하지 못했다. 그런 말을 잘못했다가는 의병이나 그 연고자로 몰려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이다. 일본에 해가 되거나 일본사람을 욕하는 말은 그 어떤 말이든 전부 죄가 되는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백종두는 쓰지무라의 연락을 받고 집을 나섰다. 인력거를 잡아탄 그는 맘놓고 몸을 뒤로 뉘었다. 찬 갯바람이 불고 있는 바깥에 비하면 인력거인 아늑하기 그지없었다. 눈을 사르르 내려감은 그는 인력거의 가벼운 흔들림을 즐기고 있었다. 바람 없이 아늑한 인력거 안처럼 자신의 마음도 편안한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인력거의 한들거리는 맛을 즐기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의병이란 화적떼들을 소탕하게 되면서부터 비로소 되찾은 안정이었다. 일진회장 자리를 차고앉아 그동안 겪어낸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그는 입에 쓴 물이 기는 것을 느꼈다. 쓰지무라를 대할 때마다 면목 없고 옹색해서 견디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필이면 전라도 땅에서 그 화적 때들이 갈수록 드세게 일어나 군수자리 청탁이란 아예 입에 올릴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백종두는 어금니를 맞물며 끄으음 된소리를 냈다. 의병이라는 것이 이제 완전히 뿌리가 뽑혔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신감이었다. 안중근이란 물건이 그 엄청난 일을 저지른 지도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의병은 다시 일어나는 기색이 없었다. 그 일로 의병이 새로 일어나게 될까봐 쓰지무라든 누구든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워 왔던 것이다. 의병이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뿌리 뽑혔다는 것은 백종두로서는 더 없는 기쁨이었다.

"백회장, 곧 경성으로 올라가야겠소."

백종두가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쓰지무라가 던진 말이었다.

"예에?......"

백종두는 어리둥절해졌다.

"마침내 백회장이 회장으로서 임무를 수행 할 기회가 닥쳐왔소."

쓰지무라가 빠르게 말했다. 백종두는 쓰지무라가 느닷없이 <백 회장>이라고 부르는 말에 어리둥절해졌던 것인데, 쓰지무라는 상대방의 어리둥절함을 왜 갑자기 경성으로 올라가라고 아느냐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무슨 임무 수행인지요?"

백종두는 말을 느리게 하며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럴 때면 그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고, 감각의 촉수는 상대방의 마음을 헤집고 들었다.

"여기서 말할 건 없고, 일단 본부로 찾아가시오."

쓰지무라는 백종두의 촉수를 거침없이 부러뜨려 버렸다.

"...... 알겠습니다.

백종두는 그만 무색해지고 말았다. 쓰지무라는 백종두를 명령대상으로 여겼지 말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명백함 앞에서 백종두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느끼고 있었다.

"뭐어...... 의병에 대한 무슨 새로운 정보는 없소?"

쓰지무라가 윗몸을 뒤로 젖히며 담배를 빼들었다.

",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안중근이란 자의 소문도 별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백종두는 굳이 안중근까지 끌어대서 대답을 만들었다.

"안중근, 그 개자식!"

뒤로 젖히고 있던 윗몸을 불끈 세우며 쓰지무라가 내뱉었다. 그의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독기가 돋아 올랐고, 눈에서는 증오가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백종두는 괜히 안중근을 입에 올렸다고 후회했다. 안중근이 눈앞에 있으면 곧 잡아먹을 것처럼 무섭게 화를 내는 쓰지무라 앞에서 자신이 안중근과 같은 조선 사람인 것이 못내 마음 켕겼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 화가 자신을 덮칠지도 몰라 오금 조였던 것이다. 안중근이 그 일을 저지른 것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쓰지무라는 마치 제 아버지 죽인 원수나 대하는 것처럼 지치지도 않고, 안중근이란 말만 나오면 치를 떨어대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본사람이란 저리 독한 것들인가 싶어 그는 속에 서늘한 바람이 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예에, 안중근이는 못된 종잡니다. 재판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요?"

백종두는 쓰지무라의 눈치를 살피며 한껏 비위를 맞추고 들었다.

"무슨 정신 나간 소리요!"

쓰지무라는 버럭 소리치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백종두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 천하에 둘도 없는 약질 개종자한테 재판은 무슨 놈에 재판이야. 그놈은 오살 육시도 모자라. 천 토막, 만 토막 내서 죽여야 해!"

눈에 벌겋게 열이 오른 쓰지무라는 백종두를 노려보며 이빨을 뿌드득 갈아붙였다.

", 옳으신 말씀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

백종두는 자신에게로 덮쳐오고 있는 화를 피해 서느라고 허둥거리고 있었다. 재판이란 말을 꺼낸 것은 분명 긁어 부스럼이었던 것이다.

"의병이나 안중근이나 다 똑같은 불한당들이오. 그따위 은혜를 모르는 종자들은 한시바삐 씨를 말려야 하오."

쓰지무라는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푸우 내뿜었다.

", 그렇습니다. 대 일본 제국의 은혜는 백골난망이지요. 그런 배은망덕 놈들은 다 없애야 하고말고요."

백종두는 허리를 굽실거렸다.

"조선인들이 다 백 회장만 같으면 얼마나 좋겠소. 어서 경성으로 가서 맡은 바 임무를 잘해 주시오."

쓰지무라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 곧 다녀오겠습니다. 그간에 편히 지내십시오."

백종두는 깊이 인사했다. 한성에서 열린 것은 일진회 비상임시총회였다. 회의에서 결정한 것은 한일합방 건의 성명을 채택한 것이었다. 회의라고 해보았자 무슨 의견이 오간 것도 아니었다. 모두 미리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지부회장이나 간부들은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만 쳐대면 되었다. 백종두는 사람들 틈에 끼여 앉아 그저 박수를 쳐대면서 단상 높이 올라앉은 회장 이용구가 부러울 뿐이었다. 아무 거칠 것이 없이 회의를 마친 본부에서는 한성 구경을 시켜주었다. 첫 번째로 구경을 간 곳이 지난달에 새로 문을 연 창경원의 동물원과 식물원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여러 가지 동식물들은 썩 볼 만한 구경거리였고 눈요깃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궁중을 동시에 구경할 수 있는 재미가 합쳐져 더 좋았다. 그러나 백종두는 어느 순간,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역대 임금님들이 나라를 다스리던 궁전이 짐승들의 똥오줌으로 더럽혀져도 되는 것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건 아무래도 마땅찮고 잘못된 일인 것 같았다. 그는 옆 사람에게 그 말을 꺼낼까 하다가 또 다른 생각이 떠올라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건 엄연히 통감부가 알아서 한 일이었던 것이다. 입을 잘못 놀렸다간 통감부를 욕하는 것이 될 판이었다. 그러나 통감부가 왜 하필이면 궁중에다가 짐승들의 놀이터를 만들었는지는 마음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두 번째가 전차 타기였고, 끝으로 찾아간 곳이 남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통감부였다. 백종두는 통감부가 경복궁을 맞바라보고 앉아 있는 것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들이 결의한 합방이 이루어지면 통감부는 어디로 옮겨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구경은 이것으로 마치고 저녁에는 일본기생집에서 석별연을 벌이도록 하겠습니다."

안내를 맡은 본부의 간부 말에 지부회장들이 와아 환성을 질렀다. 아이고, 통감부가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든 덕수궁을 깔고 앉든 내가 알 게 무어냐. 백종두는 실속 없는 생각을 털어 내고 한성을 게이샤들과 술 마실 기대에 휩쓸려들었다. 며칠이 지나 일진회장 이용구는 합방청원서를 황제와 통감, 그리고 이완용에게 제출했다. 그에 대한 파문이 즉각적으로 일어났다. 대한 협회 같은 단체가 단성사에서 회합을 열어 한일합방론을 통박하도 들었다. 뒤따라 기독교계에서 합방을 반대하는 <성토 일진회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에 맞서 보부상 같은 단체가 합방을 찬성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나섰다. 그런 맞붙질이 12월의 추위 속에서 뜨겁게 일어나면서 소문의 파장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세상이 어느 때 없이 뒤숭숭해지고 있는 가운데 이용구를 죽여 없애려는 계획이 탄로되어 동경유학생 두 명이 체포되는가 하면, 을사오적의 거두 이완용을 찔러 죽이려고 칼질을 한 이재명이 상처만을 입히고 실패하는 사건이 잇따랐다. 신문은 사건을 보도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대한매일신보><한일합방론자에게 고함>이란 논설을 써 압수당하기도 했다. 또한 평북 영변에서는 합방반대 국민대회가 열리는가 하면, 대한협회 같은 단체에서는 국민대회연설회를 개최하며 합방 반대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일진회를 해산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는 한편에서는 중추원 의장 김윤식을 비롯해서 송병준 이용구 같은 자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소리도 드높았다.

"무슨 색다른 움직임은 업소?"

쓰지무라는 백종두를 만날 때마다 똑같은 말을 물었다. 그는 짐짓 태연한 척하며 지나치는 말처럼 묻는 것이었지만 백종두는 그의 얼굴에 감추어진 불안을 낱낱이 찾아내고 있었다.

"예 염려 마십시오. 별일 없습니다."

백종두는 매번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우선 쓰지무라의 마음에 들게 대답할 필요가 있었고. 만약 의병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그건 자신이 도맡아 책임질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방임은 금물이오."

", 명심하고 있습니다. 허나 두고 보십시오,. 이제 의병은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간에 사납고 독한 놈들은 다 죽었고, 의병에 못나서고 뒤처져 있는 것들은 모두 겁쟁이들이니까요."

백종두는 그럴듯하게 단 말을 발라 맞추었다.

"백상 말도 일리는 있는데......"

쓰지무라는 만족을 느끼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종두는 겉으로는 그런 큰소리를 쳤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의병 때문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의병이야 언제나 멀리 있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의 불안은 언제 누구한테 당하게 될지 모를 신변의 위협에 있었다. 이용구 회장을 죽여 없애려 하고, 이완용 대감이 칼질을 당하는 판국이었다. 자신이 경성의 이용구는 못되더라도 군산 일대의 이용구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형편이 그러한데 어떤 고약한 놈에게 언제 당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일단 그렇게 상황판단을 한 백종두는 어디고 혼자 나 다니는 것을 피했다. 외출을 할 때는 무장한 회원 두 명이 멀찍이 뒤따르며 경호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밤에는 집 앞뒤로 보초를 세워야만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쓰지무라 서기님, 합방은 언제쯤이나 성사되겠습니까?"

백종두는 넌지시 물었다.

"글세...... 그게 확실하지가 않소. 왜 그러시오?"

쓰지무라가 옆 눈길을 보내며 물었다.

"기왕지사 성사시킬 일이면 빨리 할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일진회가 운을 띄워놓고 그냥 날이 가기만 하니 자꾸 더 시끌시끌해지는 것 아닙니까?"

백종두는 일삼아 일진회의업적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업적이기 때문이었다.

"백상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오. 합방을 빨리 해치우고 떠들어대는 것들은 다 잡아채면 되는데......"

쓰지무라는 약간 불평스럽게 말하더니,

"하여튼 모든 건 상부에서 잘 알아서 처리할 것이오."

하며 급히 태도를 바꾸었다. 백종두는 그 말을 꺼낼까 말까하고 망설였다. 합방과 함께 꼭 차지해야 하는 것이 군수자리였다. 그러나 자리가 마땅찮아 그 말을 다시 꾹 눌렀다.

한편, 상처를 어느 정도 회복하고 신변위험을 넘기게 된 송수익은 공허의 알선으로 피신처를 세 번째로 옮겼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겨울은 깊어져 가고 있었다. 송수익은 깊어져 가는 겨울을 보며 가슴속의 고심도 깊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고심이 깊어갈수록 겨울의긴 밤은 더 길어지기만 했다. 지삼출과 공허를 통해서 듣는 소식들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기만 했다. 지삼출은 주로 의병투쟁에 대해 알려왔고, 공허는 대부분 통감부를 중심으로 새로 발생하는 사건들을 모아 가지고 왔다. 토벌이 약해지긴 했지만 토벌대는 계속 의병들을 뒤쫓고 있었다. 회복의기미가 없는 의병의 힘은 점점 약해져 가고 있었다. 앞으로 어찌할 것인가...... 송수익은 이 문제에 가로 막혀 있었다. 일본이 막강한 무력을 앞세워 몰아붙이고 있는 합병은 이제 끌 수 있는 미친 불길이었고 막아낼 수 없는 성난 파도였다. 일본의 침략만행에 정면으로 맞섰던 의병들이 무너진 이상 그 불길을 잡을 또 다른 힘이나 그 파도를 이겨낼 새로운 방파제란 있을 수 없었다. 합방 반대 성토문으로 될 일이 아니었고, 합방 반대 국민대회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런 저항은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일본이 일으키고 있는 불길 앞에서는 한낱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았고, 몰아쳐 오는 파도 앞에서는 볼품없는 돛단배에 불과할 뿐이었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얼마 남지 않은 의병으로 끝까지 싸우다가 타 죽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슨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것인가, 다른 방법이라면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송수익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많은 생각들은 가지에 가지를 쳐서 뒤엉킬 뿐 간추려지지 않았다. 날마다 고심의 깊이는 더해 가고 겨울밤은 외롭게 길었다. 송수익은 그렇게 마음을 앓으며 공허를 통해 집안 소식을 들었다.

"이 땡초가 백일 기도럴 올릴 정성언 없고, 오는 질에 지극 정성으로 여식의 극락왕생얼 빌었구만요."

딸아이의 죽음을 알리며 공허가 한 말이었다.

"고맙소이다, 스님."

송수익은 공허를 굳이 <스님>이라고 물렀다. 딸아이의 죽음이 일으킨 순간적인 목멤 공허가 베풀어준 진정한 위로가 겹쳐지면서 새삼스럽게 공허가 승려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그건 이 세상에서 제 명대로 살지 못한 어린것이 좋은 세상으로 가기를 바라는 아비의 마음이었다. 어둠 속에 울려 퍼지는 솔바람 소리가 차가웠다. 송수익은 밖에 나서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솔잎들이 거센 바람에 떨고, 바람이 날카로운 솔잎들 끝에 찢기면서 일어나는 소리, 그것이 솔바람이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슬픈 울음소리로도, 괴로운 신음 소리로도 들리고 있었다. 송수익은 솔바람소리에서 어린것이 병에 시달리다 못해 숨이 넘어가는 울음소리와 신음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직 젖먹이였을 때 두고 온 아이였다. 다섯 살에 세상을 떠난 아이인데도 여전히 젖먹이 모습만 떠오를 뿐이었다. 세월의 벽 때문이었다. 그 아이의 모습 옆에 아내의 모습과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송수익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떨구었다. 그 두 얼굴 앞에 그저 면목이 없을 뿐이었다. 어머니께는 죄송했고 아내에게는 미안했다. 손녀의 죽음을 지켜보며 어머니는 얼마나 황망했을 것이며, 딸애의 죽음을 감싸 안고 아내는 얼마나 참담했을 것인가. 아무리 대의에 몸바치고 있다 하나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과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은 대의로 상쇄되는 것도 보상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다만 대의를 위해 억누르고 희생시키는 감정일 뿐으로 언제나 가슴속에서는 대의와는 별개로 살아 있었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송수익은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그는 잽싸게 몸을 도사리며 신경을 세웠다. 바람 속에 섞이는 분명한 인기척이었다. 송수익은 대원들 중에 누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을 감추었다. 혹시 적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에 똑 똑 똑 돌을 치는 소리가 바람소리 속에서 선명하게 들렸다. 송수익은 안도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기 누구요!"

"야아, 지삼출이구만이라우."

어둠 속에서 들리는 다급한 소리였다.

", 지 대장! 어쩐 일이오."

송수익은 반가움이 넘쳐 몸을 일으켰다. 뒤따라 지삼출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삼출은 혼자가 아니었다. 네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다.

"대장님, 무소허셨구만이라우."

지삼출이 어깻숨을 쉬며 말했다.

"어쩐 일이오, 이 밤중에."

송수익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 채며 지삼출의 뒤에 선 대원들을 눈짓했다.

"야아, 얼렁 여그 뜨셔야 겄구만요. 왜놈덜이 이짝으로 오고 있응게요."

지삼출의 느닷없는 말이었다.

"이쪽으로?"

"야아, 남은 대원덜얼 중간에 풀어 그놈덜얼 막게 혀놓고 지가 앞서 왔구만이라우."

"알겠고, 뜨도록 합시다."

송수익은 급히 몸을 돌렸다. 더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토벌대의수색이 이쪽 방향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을 지삼출이 미리 간파한 것일 터였다. 송수익은 서둘러 옷을 챙겨 입으며 또 지삼출에게 뜨거운 동지애를 느끼고 있었다. 지삼출은 대원들을 이끌고 싸우면서도 언제나 자신의 둘레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송수익은 지팡이에 의지해 가며 아픈 것을 표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송수익은 또 앞으로의 투쟁에 대해서 생각을 모았다. 토벌대는 언제부턴가 작전을 바꾸고 있었다. 잔존하는 의병들을 마저 없애기 위해 깊은 산속까지 파고드는 수색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 과감한 행위에 맞서기에는 의병들의 힘은 너무나 모자랐다. 승산 없는 싸움에 맞서는 것은 무모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었고, 무모한 죽음을 피하자니 군대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기를 벌써 서너 달째 해오고 있었다. 송수익은 어떤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될 시기가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산을 몇 굽이인가 넘어 지삼출이 발을 멈춘 곳은 어느 골짜기의 화전민 집이었다.

"여그꺼정언 왜놈덜도 발걸음얼 못헐 것이구만이라우."

지삼출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수고했소. 헌데, 화전 일구는 살림에 내가 너무 짐이 되지 않겠소?"

송수익은 화전민 살림들이 빠듯하다 못해 궁색한 것에 신경이 쓰였다.

"아니구만요. 이 집 쥔이 원체로 부지런히서 살림살이가 째이덜 않구만요. 그러고 쥔이 대장님 겉은 분 뫼시게 된 것얼 생광으로 생각헐 것인디요. 이 사람도 동학군이었응게라."

목소리를 낮춘 지삼출은 신경 써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식량을 따로 대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삼출은 사립도 없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오래지 않아 집주인이 지삼출을 따라 나왔다.

"아이고 송대장 어르신, 이리 뵙다니 기맥히기만이라우."

집주인은 송수익 앞의 땅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큰절을 했다.

"이거, 이거, 어서 일어나시오."

송수익은 당황해서 집주인의 팔을 붙들어 일으켰다. 빈천한 사람일수록 땅바닥이고 진창이고 가리지 않고 큰절을 해야 한다는 법도가 송수익은 질색이었던 것이다. 송수익은 마당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는 사이에 주인남자가 다리를 저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지삼출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다리가 동학군으로 나섰다가 다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지넌 또 대원덜얼 만내로 가야 되겄구만이라우. 아무 걱정 마시고 편헌 맘으로 지내시먼 좋겄구만요."

지삼출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수고가 많소. 내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아까 절을 떠나오면서 말을 남기긴 했소만 공허 스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시오. 우리가 한자리에 모여 의논할 것이 있소."

송수익의 말은 무거웠다.

"야아, 알겄구만이라우."

지삼출이 송수익의 얼굴을 눈여겨보며 몸을 일으켰다. 이틀이 지나 공허는 지삼출과 함께 나타났다. 공허의 왼쪽 볼에는 무엇에 긁혀 찢어진 상처가 길게 나 있었다.

"아니 어쩐 일이시오?"

송수익은 가슴 섬뜩함을 느끼며 물었다.

"벨일 아니구만요. 대장님 보신시켜 디릴라고 산돼지허고 씨름 한바탕 혔구만이라."

공허는 씨익 웃으며 볼을 쓰다듬었다. 그건 능청일 뿐이었다. 그는 토벌대에 쫓기다가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다친 것이었다.

"남자가 씨름얼 헐라면 곰허고나 한바탕 헐 일이제. 그래야 웅담이나 얻제. 산 돼지털 하나 못 얻고 얼굴이 그리 됐시니 어디 중노릇 새로 해 묵어지겄소?"

지삼출이 일부러 공허의 속을 질러대느라고 퉁을 놓았다.

"모르는 소리마시오. 중노릇이야 목탁으로 허고 말재주로 허는 것이 네 낯짝으로 허는 것이 아닝게. 허고, 중놈으 흉진 낯짝이 흔헌 거이 아니니 말 지어붙이기에 따라 도사로도 둔갑하고 산실령으로도 둔갑히서 쌀섬 쉽게 얻고 속곳 쉽게 벌리게 허는디 잘 써묵을 것잉게 두고 보시오."

공허는 오히려 지삼출을 떠받고 들었다.

"아이고 참. 고기만 묵는 땡촌지 알았등마 속곳 속도 더듬는 아조 숭헌 땡초요 이."

지삼출이 어이없어 했고, 송수익은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것이 다 중생얼 위허는 보시오."

공허는 능글맞게 웃고는,

"대장님, 다른 절로 가시제라. 여그넌 절보담 위태헝게요."

갑작스럽게 말했다.

"아니, 절에서 피해 오신 것인디 여그보담 안 위태헌 절이 어디 또 있다요."

지삼출도 장난기 싹 가신 얼굴로 거부감을 나타냈다.

"들어보시오. 절이야 백두산서보톰 지리산꺼정 수도없이 많으요, 허고, 절에넌 숨을 디도 많소. 아니, 대장님이 인자 거동얼 허시니께 절에서넌 숨을 것도 없소. 왜놈덜이 들이닥치드라도 선비가 글공부 하로 와있는 것으로 행세허먼 그만이오. 허나 여그서 왜놈덜헌티 둘러쌔이면 의심얼 피할 길이 없소. 그리허고 왜놈덜도 절에 들면 함부로 허지 못헌단 말이오."

내 말이 어쩌냐는 듯 공허는 지삼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삼출은 재빨리 송수익을 살폈다. 송수익은 별다른 표정이 없었지만 공허의 말을 수긍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장님 뜻대로 허시는 것이 좋겄구만이라."

지삼출은 옆으로 비켜섰다.

"대장님, 오래 생각허실 것 없구만요. 소승이 헛소리가 아닝게요. 어서 뜨도록 허시게라."

공허의 얼굴은 송수익을 일으키고야 말겠다는 듯 고집스러워 보였다.

"아무래도 화전 살림보다야 절 살림이 더 낫기는 하겠지요."

송수익의 나직한 말이었다.

"이르다 뿐인게라. 화전민덜이야 비탈농사에 골이 빠진 살림살이고 절이야 그늘서 목탁 쳐서 거둬들인 재물인디요."

공허의 반색이었다. 화전민 손 씨와 그 가족들은 송수익과의 이별을 못내 아쉬워했다. 밥상 시중을 들어주었던 큰딸 필녀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산 생활을 하는 처녀답게 사냥을 잘한다는 그녀는 곧 산토끼를 잡아 맛있게 반찬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내가 산토끼고기를 얻어먹으러 다시 오겠소."

송수익은 필녀의 눈물에 대한 응답으로 한마디를 남겼다. 필녀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아버지 손 씨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골짜기를 벗어나면서 공허가 불쑥 말했다.

"선남선녀 정분 끊자니깨 땡초 가심이 영 씨리씨리헌디 이."

"지옥이야 맡아논 당상이오."

지삼출이 대질었다. 송수익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지팡이를 옮겨놓고 있었다. 산굽이를 두 번 돌아 양지에서 다리쉽을 했다. 송수익은 가슴에 묻어 두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저어...... 그간에 많이 생각해 왔는데, 우리가 앞으로 어찌 했으면 좋겠소?"

공허는 언뜻 놀라는 기색이다가 무표정해지며 아무 말이 없었다. 지삼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송수익은 두 사람의 침묵의 의미가 무엇인지 언뜻 파악할 수가 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라 당황하는 것인지, 그들도 예상하고 있던 문제라 수긍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두 분도 다 알고 있을 것이오만 우리가 처해 있는 입장이 여러모로 곤궁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전라도 의병대가 큰 타격을 입은 처지에서 제일 큰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의병세를 확대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새로 의병장으로 나설 만한 사람들이 없는 것이고, 백성들도 의병에 가담하기 어려운 것은 또한 마찬가집니다. 이런 형편에서 계속 싸울 것이냐 아니면 어떤 다른 방도를 찾을 것이냐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두 분 생각이 있을 테니 중지를 모아보도록 합시다."

송수익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하기를 권했다.

"저어...... 소승이야 병법언 모르기넌 혀도 이대로 싸우다가넌 성사되는 것 없이 다 죽게 되는 것이야 자명헌 이치구만요. 그렇다고 합방이 목전에 닥쳐와 있는 형편에서 가망없는 싸움이라고 남은 의병얼 해산헐 수도 없는 일 아닌게라. 그렇다면 다른 방도럴 찾아야 허는디 소승으로선 그 방도럴 찾기가 막막헐 뿐이구만이라."

공허는 의병을 해산할 수 없다는 대목에 힘을 주었다.

"지야 배운 것 없이 무식히서 잘 모르기넌 혀도 그냥 무식헌 대로 말허자면 지끔 형편이 꼭 갑오년 그때허고 같은디, 그때도 싸울 때꺼정언 다 싸우다가 심이 진해질 때꺼지 진해진 담에야 지절로 해산이 됐구만요. 똑별난 다른 방도가 없음사 이대로 싸워야 허겄지요. 지끔 해산얼 혀도 아무도 고이 집 찾아 들어갈 수는 없응게라."

공허보다 더 강한 느낌을 주는 지삼출의 말이었다. 송수익은 비로소 두 사람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들의 의지가 새삼스럽게 가슴을 뭉클하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내 생각도 대원들을 값없이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우리 의병대를 해산할 마음은 없소. 허나 이대로 싸우다보면 귀한 목숨들이 자꾸 죽어가게 되니까 괴로움을 견디기 어려워 말을 꺼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오."

송수익은 괴로운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참 대장님, 이 방도넌 어쩔랑가 몰겠구만요. 우리 전라도 의병세가 크게 꺽인 대신 경기도 강우너도 경상북도 황해도 등지서 의병싸움이 활발허게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이구만이라. 우리가 그 어느 한쪽으로 힘얼 합쳐 싸우는 것언 어쩔랑가요."

공허의 의견이었다.

"글씨요...... 그 생각도 나쁘던 않는디, 땅도 설고 사람도 선 타관에 가서 쌈이 지대로 되겄는게라. 의병쌈이라는 것이 서로 정 통허는 사람덜이 알게 모르게 뒤럴 받쳐쥐야 싸와지는 것인디요, 허고, 우리 전라도 땅에 진얼 친 왜놈덜언 어쩔 것이오. 긍게로 그냥 여그서 싸와감서 의병얼 더 모와가는 것이 어쩔랑가 싶은디오."

지삼출이 내놓은 반대의견이었다.

송수익은 두 사람의 의견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두 분 생각은 다 일리가 있습니다. 허나 의병이란 것이 나라에서 녹은 받는 군대가 아니라 백성들이 나라를 구하자는 뜻으로 지방마다 자진해서 일어난 군댑니다. 그러다 보니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계통이 서기도 어렵고, 자기들 지방을 떠나서 활동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왜놈들 군대와정반대인 셈이지요. 그 까닭에 힘이 흩어져 손해도 많이 보았지요. 허나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지 대장의 의견대로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합니다. "

송수익의 말은 조심스러웠다.

", 그러면 그리 결정혀야제라."

공허의 흔쾌한 동의였다.

", 그러면 좋습니다. 앞으로 일을 그렇게 결정하기로 하고, 형편에 따라 또 의논들 하기로 합시다."

송수익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임병서를 생각했다. 임병서가 최익현이 생포될 때 함께 잡혀 3년 징역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3년 징역이면 이제 그는 풀려난 몸이 아닐까 싶었다. 송수익은 몇 년 사이에 세월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때만 해도 의병 도기였고, 대한 제국 정부의 힘이 그나마 남아 있어서 대소 의병장들에게 징역형이 내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조처가 내려진 데는 그들이 족보를 지닌 양반이라는 사실이 작용했던 것이다.

"공허 스님, 한 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다름이 아니라 태인에 사는 임병서라는 분을 좀 찾아줬으면 좋겠소. 그분이 나와 함께 의병을 시작했다가 사로잡혀 3년 징역형을 받았지요. 그간에 세월을 꼽아보니 옥에서 풀려난 것이 몇 달되었을 상 싶은데, 그분이 다시 어쩌하자 해도 그간에 선이 다 끊겨 운신하지 못할 처지에 놓여 있을 것이니 말이오."

송수익은 걸으면서 말했다.

"태인에 임병서 양반이라고요...... 믿을 만헌 분인게라?"

공허의 신중한 어조였다.

"오랜 친교는 없었어도 뜻이 굳은 분으로 알고 있소. 장부다운 기개에 우국 정신도 강건한 분이오. 그분은 어쩌면 우리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오."

", 곧 수소문허도록 허겄구만요."

공허가 안내한 절은 아담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흔히 말사라고 부르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여그서 맘놓으시고 모필이나 휘두름서 선비 행세럴 허시면 무사하실거구만요."

공허가 송수익을 보며 씽긋 웃었다. 공허와 지삼출 일행은 날쌘 바람이듯 절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송수익은 그들이 사라져 간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그 동안 죽어간 많은 대원들의 얼굴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먹먹해지고 있는 그의 가슴은 눈물로 젖고 있었다. 그들은 용맹스러웠다. 보잘 것 없는 무기로 신식무기를 갖춘 적들과 맞서 싸웠다. 모두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어갔다. 누가 강제로 끌어낸 것도 아니었고, 싸움에 이긴다고 무슨 보장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은 죽음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싸우다가 죽어갔다. 그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사람대접이라고는 받아보지 못하고 살아온 하층민들이었다. 대대로 빼앗기고 무시당하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구하려고 목숨을 내걸고 나섰던 것이다. 그들의 지고한 마음과 뜨거운 용맹 앞에서는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 비해 임금은 무엇이고, 벼슬아치들은 또 무엇이었는가. 임금은 왜놈들에게 손발 묶인 허깨비였고, 모든 벼슬아치들은 왜놈들의 앞잡이요 매국노들이었다. 결국 나라의 참된 주인은 왜적과 맞서 싸우다 죽어간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뒤에서 도운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적과 싸우다가 수없이 죽어간 그들의 피는 이 땅의 산하를 적시었건만 나라는 구해지지 않고 합방의 위기는 목전에 닥쳐와 있었다.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송수익은 백 번 생각해도 장하고 장한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어서 방으로 드시잖고 어찌 여적 이러고 계신가요."

송수익은 고개를 돌렸다. 아까 인사를 나눈 주지승이 가까이 와 있었다.

"......절 구경을 하느라고 좀......"

송수익은 고개를 약간 숙여 보이며 말을 얼버무렸다.

"성치 않으신 몸에 날이 안직 찬디요."

주지승은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운봉아, 귀인 얼 안으로 뫼시거라."

그는 붉은색 바리때를 받쳐 들고 뒤에 서 있는 아기 중에게 일렀다.

"예예...... 어여 안으로 드시지라우."

승복과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쪼르륵 앞으로 나선 아기중이 송수익 앞에 머리를 조아 렸다. 아기중이 받쳐 든 바리때에는 색색의 유과가 소담스럽게 담겨 있었다. 송수익은 그 유과에서 집 냄새를 물큰 맡았다. 배고픈 자의 식욕처럼 강하게 마음을 자극해 오는 집 냄새였다. 아기중이 바삐 마루로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어서 오르시지요."

예를 갖추는 주지승에게 답례를 하려고 송수익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송수익의 눈길은 주지승의 뒤쪽 대웅전께에 멎었다. 대웅전으로 소복한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이 산 깊은 절에!...... 송수익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의문을 떼 치듯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서 그는 주지승의 눈치를 살폈다. 주지승은 자신이 순간적으로 한눈을 판 것을 눈치 채지 못 한 것 같았다. 송수익은 다행으로 여기며 마루로 올라섰다.

"저녁예불이 끝나자면 시장하실 것인디 이걸 잠 드시지요."

아기중이 놓고 나간 바리때를 주지승이 집어다가 송수익 앞에 놓았다.

", 본시 절 유과는 맛이 유별나지요. 어머님이 절에 다녀오실 때면 가끔 맛을 보고는 했습니다."

송수익은 예를 갖추어 말했다.

"아 예에, 자당님께서 불자시로구만요. 인연이 깊습니다. 헌데, 시절이 그래도 태평허든 몇 년 전꺼지만 해도 절에서 유과를 만들 여유가 있기도 했지만 왜놈들이 흉악하게 나댄 담보톰언 그럴 여유가 없어졌지요. 큰절들은 살림 형편이 좀 나슬란지 몰라도 우리 겉은 작은 절에서 유과 만들어 불전에 올리기는 어렵구만요. 이 유과는 속과에서 만들어 시주 들어온 것입지요. 마침 인연 오랜 댁에서 불공이 들어서......"

주지승이 스산한 웃음을 지었다.

"예예, 세상이 변하니 절 형편도 어려워지게 되는군요."

송수익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절덕이 속세를 떠나 있다 허나 인연의 고리야 다 한세상 아니든가요. 그나저나 왜놈들 허고 합방이 된다는 풍문이 자자헌디, 그리 되면 세상이 생지옥 아니란가요?"

주지승이 근심 깊은 얼굴로 송수익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 주인인 우리를 종으로 삼겠다고 대드는 것이니 생지옥이 아니기는 어려운 일이겠지요."

"탈도 큰 탈이구만요. 의병으로 그리 많은 목숨덜이 죽어가도 조정이 다 썩었으니 아무 소용이 없는 일 아닌가요. 장군님 흉중이 기맥히시 것습니다. 소승도 젊었으면 공허겉이 나섰을 것인디...... 맘 편히 잡숫고 몸보존 잘하셔야 헙니다. 장군님 같으신 분이야 앞으로 세사에 더 중헌게요."

주지승은 한숨을 길게 쉬며 더디게 몸을 일으켰다. 주지승의 말이 송수익의 가슴에 긴 요운을 남기고 있었다. "...... 앞으로 세상에 더 중헌게요......" 그러나 자신은 앞날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모르고 있는 형편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송수익은 옥신거리는 다리를 따끈따끈한 방바닥에 대고 누워 누군가를 사무쳐 부르는 것도 같고, 그 무슨 한스러운 흐느낌 같기도 한 솔바람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 사방에서 숨막히게 총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포위망을 뚫을 데라고는 없었다. 총소리는 더 심해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옆에 있던 대원들이 간 곳이 없었다. 허둥지둥 대원들을 찾았다. 그때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가슴을 싸잡았다. 가슴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가슴에 총을 맞은 거시었다. 송수익은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밖에서 목탁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 목탁소리가 잠결에 총소리로 바뀌어 들린 것임을 깨달았다. 송수익은 식은땀 밴 이마를 훔치며 쓴 입맛을 다셨다. 다리에 부상을 입은 다음부터 비슷비슷한 꿈을 자주 꾸었다. 포위를 당한 것은 언제나 같은데 총을 맞는 자리는 같지가 않았다. 그 기분 나쁜 꿈을 마음에서 몰아내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송수익은 소변이 급한 것을 느끼며 그 목탁소리가 새벽예불을 울리는 것이란 걸 알았다. 그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어둠과 함께 냉기가 끼쳐왔다. 희끄무레하게 빛바래고 있는 새벽어둠을 밟고 변소를 다녀오던 송수익은 대웅전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점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언뜻 소복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잘못 보았나...... 그는 스스로에게 멋쩍어졌다. 그러나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소복한 여자는 탑을 따라 돌고 있었다. 탑돌이를 하는 것이었다. 저 여자가 아직도 절에 있는가...... 송수익은 어제 얼핏 보고 지나쳐 버린 여자의 모습을 다시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서원이기에 여자가 절에서 자면서 까지 불공을 드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법당에서 목탁소리는 계속 울려 나오고 있었다.

"어르신, 편히 주무셨는게라우?"

뒤에서 들린 소리였다. 송수익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기 중이 제 몸피만한 나뭇단을 등에 업고 있었다. 엉성하게 묶은 솔가지들이었다.

"어찌 여그 기신가요?"

송수익이 인사말을 건네기도 전에 아기 중이 배식 웃으며 물었다.

", 목탁소리를 듣고 있었소."

송수익은 상대가 열 살 남짓한 아이인데도 그 몸에 걸쳐진 먹물 옷 때문에 저절로 존대가 나왔다. 법복을 입은 사람 앞에서는 무조건 예를 갖춰야 한다는 오랜 관습 탓이었다.

"목탁 소리넌 귀로 듣는 것이제 눈으로 보는 것이간디요?"

아기 중이 송수익을 빤히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 무슨 소리여?"

송수익은 아기 중이 절밥 값 하느라고 선문답을 흉내 낸다고 느꼈다.

"소승언 어르신이 탑돌이럴 귀경허시는지 알았구만이라우."

아기 중은 씩 웃고는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

송수익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법당 앞에서 낯모르는 여인에게 눈 팔고 있었다는 부끄러움과 마음을 감추려다가 어린 중에게 들켜버린 면구스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송수익은 서둘러 돌아섰다. 아기 중의 천연덕스러운 웃음이 어릿거렸다. 송수익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담배를 빨며 헛웃음을 흘렸다. 어제고 오늘이고 자신의 눈앞을 스친 것은 소복일 뿐이었다. 산사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소복에 눈길이 머문 것뿐이지 여자의 얼굴은 전혀 보지를 못했다. 어제는 먼발치로 뒷모습을 보았을 뿐이고, 오늘은 새벽에는 어둠으로 얼굴이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아기 중에게는 괜한 오해를 사게 된 셈이었던 것이다. 아침을 먹으며 몇 번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기중은 장난스럽게 쌕쌕 웃었다. 송수익은 그저 정이 그리워 그러는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웃음을 받아주었다. 송수익이 방으로 돌아와 무거운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데 아기 중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운봉 스님은 어떠시오?"

송수익은 점잖은 소리로 되물었다.

"지넌 아직 시님이 아닌디요. 운봉이야 속명얼 써서는 안 된께 받은 것이고라."

아기중은 부끄러운 듯 딴말을 했다. 이런저런 말이 오가는 중에 송수익은 무심코 바리대를 아기 중 앞으로 옮겨놓으며 유과를 권했다. 그러자 아기 중은 새 이야기를 꺼냈다.

"이 유과넌 아침에 탑돌이 허시든 신도가 시주헌 것이구만이라우. 그 신도넌 참 짠허구만요. 남편이 3년 전에 죽어 탈상허니라고 이렛재럴 지내는디, 재럴 올릴때마동 울고 또 우는 것이 영 안됐구만요. 젊은 나이에 자식도 없으니 큰일이람서 주지스님언 혼자 걱정허시고라. 이기지도 못헐 의병 쌈에 나서서 죽어뿐 그 남편이란 사람이 영판 요상허단게요. 의병에 안 나섰으먼 그리 불쌍허니 안됐을 것인디......"

송수익은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소복한 것을 보고 무슨 상을 당했으리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그 여자가 처녀인지 청상인지도 구분하지 못했었다. 조금만 눈여겨보았더라면 머리모양새로 그 정도 구분은 금방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운봉, 나 좀 생각할 게 있으니 이따가 또 만나도록 합시다. "

송수익의 말에 아기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수익은 눈을 감고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는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벼루를 끌어 당겼다.

다친 몸 은신하려 산사에 드니

나보다 깊은 상처 지니신 분 있거니

소복의 한이 구천에 맺혀 서러워라

위로의 말 따로 없어 가신 이 명복을 비네

송수익은 생각의 가닥을 아무리 잡아도 더 이상은 쓸 수가 없었다. 쓰고 나니 또 망설여졌다. 그러나 그 사연을 안 이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송수익은 아기 중을 찾아 꼭꼭 접은 종이를 들려주었다. 짐작대로 아기중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장난삼아 왜 회답을 받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송수익은 그만 마음을 바꾸었다. 괜히 싱거운 소리를 했다가 본의가 뒤틀리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싶었던 것이다. 상대가 아이라서 농담을 농담으로 삭이기가 어려웠고, 혹시 그 말을 곧이곧대로 여인에게 전하게 되면 그때는 본의가 영락없이 뒤틀리고 마는 것이었다.

"운봉이 애썼소. 이 유과 다 먹으시오."

송수익은 유과가 얼마 남지 않은 바리때를 아기 중 앞으로 밀어놓았다.

"저어...... 어르신 글보고 그 새댁이 울든디요."

아기 중은 왜 아무 말도 묻지 않느냐는 듯 유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송수익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송수익은 아기 중의 마음을 알면서도 불필요한 말이 오가는 것이 달갑지 않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송수익이 말없이 곰방대에 담배를 재자 아기중은 살살 눈치를 살피다가 잽싸게 바리때를 들고 방을 나갔다. 송수익은 아기 중의 뒷모습을 보며 싱긋이 웃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난 송수익은 다리운동을 겸해 갑갑증을 풀려고 절 뒤의 산줄기를 걸어 올랐다. 며칠 사이에 응달에 남아 있던 눈마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어느 나무에도 아직 싹은 돋지 않았는데 봄기운이 산에 가득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을기운이 소슬한 적막이라면 봄기운은 훈훈한 약동이었다. 송수익은 가슴을 펴며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봄기운을 따라 자신의 다리에도 새살이 빨리 돋아 상처가 완치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단순한 기분이 아니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인 이상 몸의 기능도 자연의 변화와 일치한다는 것을 그는 믿고 있었다. 그가 우선 바라는 건 다리의 완치뿐이었다. 그는 끝없이 뻗어나가고 있는 산줄기들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산줄기들의 꿈틀거리는 기상은 줄기찬 힘이었다. 몇 천 년이고 몇 만 년이고 그리 장엄한 자태로 굳세고 억센 힘을 드러내고 있는 산맥을 바라보며 그는 참담한 심정이 되고 있었다. 그 힘을 닮지 못해 결국 강산을 다 빼앗길 형편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저 산줄기들은 북으로 북으로 뻗어 백두산에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 강산을 빼앗겨버리게 되면 저 산줄기를 따라 두만강이든 압록강이든 건너가야 되는 게 아닐까...... 송수익은 산줄기들이 일깨워주듯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해가 기울어 송수익은 절로 돌아왔다. 사리탑을 지나 꺾임 길을 따라 돌던 그는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소복한 여인이 개울가에서 그릇을 씻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데로 피해 갈 길이 없어 송수익은 낮은 기침으로 인기척을 냈다. 그러자 여자는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잠시 맞쳐다보았다. 송수익은 목례를 보냈다. 여자는 눈길을 떨구며 옆으로 길을 비켜섰다.

"어제 글을 드린 송수익이라고 합니다."

송수익이 여자 쪽으로 걸어가며 낮고 굵은 소리로 말했다.

"......"

여자가 약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인사도 없이 글을 드린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같은 일을 하던 처지라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위로를 드린 것입니다."

송수익은 여자 앞에 잠시 멈추어 정중하게 말하고 있었다.

"네에......"

고개를 좀 더 숙여 보이는 여자의 입에서 가늘게 흘러나온 소리였다. 송수익은 한쪽 다리가 약간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그대로 치마를 조심스럽게 감싸며 개울가에 다시 앉았다. 송수익은 그날 밤 꿈에 그 여자를 보았다. 개울가엣 만난 장면 그대로였다. 그런데 서로 오래오래 마주보다가 꿈이 깼다. 수심 깃들인 파리한 얼굴에 비해 그 눈빛은 이상하게도 생기를 품은 것도 같았고 열기를 품은 것도 같았다. 송수익은 그 순간적인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이틀 뒤에 절을 떠났다.

"머슴허고 정지살이 아줌니가 시주 갖고 옴시로 모시로 왔구만이라우."

아기 중의 설명이었다.

 

 

21. 해가 진 나라

도로공사에 투입되었던 의병들은 공사가 끝난 다음에도 풀려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죽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앞날을 알 수 없는 옥살이와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나날을 보냈다. 그들은 헌병대의 빈틈없는 감시 속에서 주로 도로의 보수공사에 동원되었다. 어찌 된 셈인지 길은 허물어지고 패고 무너지는 데가 끊임없이 생겨났다. 비라도 오게 되면 그런 곳이 훨씬 더 늘어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건 길을 잘못 만든 것이 아니라고 했다. 새로 닦은 길이 제대로 길 노릇을 하려면 비바람과 우마차 그리고 사람들 발길로 삼사년은 다져지고 굳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해낸 보수공사 중에서 가장 힘겨웠던 것이 나무심기였다. 백오십 리에 걸친 신작로 양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를 심어나가는 일은 단순한 보수공사가 아니라 대대적인 식목공사였다. 길 양쪽에 일삼아 나무를 심는 것은 행인들을 위해 그늘을 만들어주거나 경치가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것은 다 부수적인 것이었고 그보다 앞서 길둑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나무를 심어 산사태를 막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런데 거기에 심은 나무가 문제였다. 그 나무는 흔히 보는 소나무도 참나무도 아니었다. 일본말로 <사쿠라>라고 했고, 그 꽃은 일본사람들이 받드는 나라꽃이라는 것이었다. 헌병들이 그 나무를 받드는 정성은 실로 대단했다. 처음에 나무심기를 나선 사람들은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두 자 남짓한 길이의 묘목은 별로 보잘 것도 없고 대수로울 것도 없는 어린 나무일 뿐이었다. 그래서 예사로 나뭇단을 내던지거나 넘어 다녔다. 그런데 그때마다 헌병들의 욕설과 함께 개머리판이 날아들었다. 살기등등한 헌병들에게 아무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고 걷어차인 다음에야 그들은 통변을 통해 그 나무에 얽힌 사연을 듣게 되었다. 의병 출신인 그들은 비감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사쿠라>를 심어나가지 앉을 수가 없었다.

"참말로 우리 신세가 드럽소 이."

대원들이 헌병들의 눈 피하고 귀 피해 가며 토하는 탄식이었다.

"참세, 이보담 더 드럽고 속 터져도 참고 이겨내야 허능겨."

손판석이 뇌는 말이었다. 그들은 머리를 박박 깎인 채 강제노동을 하며 신작로를 오가는 것들을 서글프고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신작로를 오가는 것들을 서글프고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신작로를 오가는 것은 모두가 발통 달린 것들이었다. 달구지들이 그렇고,인력거가 그렇고, 새로 생긴 승합마차라는 것이 그랬다. 거기다 가끔 보이는 것이 앞뒤로발통이 둘 달려 생김이 신기한 <개화차>였다. <개화차>란 사람들이 마음대로 지어붙인 자전거의 별명이었다. 발통이 넷 달린 자동차라는 것이 신작로를 달릴 거라는 풍문은 계속 풍문일 뿐이었다. 신작로가 뚫리면서 전주와 군산의 내왕은 전보다 훨씬 더 빈번해졌다. 전주사람들을 순산으로 빠르게 실어 나르는 것이 새로 생겨난 승합마차였다. 네 사람에서 여섯 사람까지 태우는 그 쌍두마차는 일본사람들이 독점하고 있는 장사였다. 전주상인들은 전에 강경으로 가던 장걸음을 그 마차를 타고 군산으로 돌렸던 것이다. 군산은 더욱 번창해 가고 있었다. 신작로를 제일 많이 오가는 것이 소와 말이 끄는 달구지였다. 그 달구지들은 볏섬을 가득가득 싣고 군산으로 줄을 이었다. 추수가 끝나고 서너 달 동안은 달구지 행렬이 이삼십 리씩 이어지기가 예사였다. 그 볏섬들은 모두 군산에서 정미되어 일본으로 실려 가는 것이었다. 볏섬을 부린 우마차들은 다시 일본 물건들을 실어내다 장사꾼들에게 배달하기도 했다. 의병들의 기세가 꺾이면서 그런 내왕들은 표 나게 활발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의병의기세가 한창 드높았을 때는 해변의 일본 배들이 습격당하는 일도 흔했고, 대부분의 상인들은 언제 피해를 입을지 몰라 위축당해 있었던 것이다.

"쌀얼 저리 실어내니 배곯는 건 누구여."

"우리가 새로 심얼 찾어야 헐 것인디. 참말로 난리시."

손판석과 그 주변 사람들은 근심 깊은 한숨들을 내쉬고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올가미에 얽혀들었다. 5월 들어 마침내 호남선이 착공 되었다. 그들은 지체 없어 철도공사장으로 투입되었다. 호남선 철도공사는 삼사년 전부터 소문으로만 떠돌다가 흐지부지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몇 달 전부터 소문이 왁자하게 다시 일어났다. 그 시끄럽게 오가는 소리들은 무관심한 귀로 들으면 그저 철도공사에 대한 소문일 뿐이었다. 그러나 조그만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들어보면 그건 그냥 소문이 아니라 철도노선을 놓고 다투는 이권 싸움이었다. 호남평야를 관통하는 그 철도를 놓고 일본사람들은 두 세력으로 갈라져 서로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건 군산의 세력과 일본의 대재벌 미쓰비시와의 싸움이었다. 군산의 세력은, 군산은 호남의 관문이기 때문에 호남선은 필히 군산을 경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륙년 전에 벌써 호남선 철도공사를 독점하기 위해 조치원에서 목포까지 측량을 마쳤고, 전주 일대의 벌판에 대 농장을 확보하고 있는 미쓰비시에서는 군산의 동떨어진 위치와 철도공사의 비효율성을 내세워 군산의 주장을 꺾으려 하고 있었다. 그들 두 세은 서로 이익을 앞세워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지만 그러나 철길을 깔아 호남평야를 장악한다는 그 목적이 일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난데없이 끼어 든 또 하나의 세력이 있었다. 그건 전주 양반님네들이었다. 그들은 철도의 전주 통과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 이유인 즉은 오랜 양반 고을에 그런 상스러운 것이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극히 단순하여 어리석기까지 한 주장이었다. 그런데 그 어이없는 주장의 손뼉 쳐 반긴 것이 통감부 철도관할 부서였다. 군산과 미쓰비시의 맞걸린 주장을 원만하게 조정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그것은 더없이 좋은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조선 사람들의 반대가 일어나고 있는 전주로 철도를 통과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고 비능률적으로 철도를 군산으로 돌릴 수도 없다. 그러니까 그 중간지점을 택해 철도역을 신설하기로 한다. 단 군산은 호남선의 지선으로 연결시키기로 한다. 이것이 통감부에서 내린 해결책이었다. 그 해결책에 따라 선택된 중간지점이 넓고 넓은 들판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마한 동네 <솜리>였다. 그 동네를 비켜가며 철길이 놓이고, 기차역이 생기면서 붙여진 이름이 이리였다. 철도공사장의 노동은 도로공사장의 노동보다 몇 갑절 힘들었다. 쌓아올려야 하는 둑의 높이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이미 몇 년 전에 부산에서부터 신의주까지를 경부선과 경의선으로 관통시켜 버린 일본사람들은 이번에도 호남선만 착공한 것이 아니였다. 경원선도 함께 착공시켰다. 그러니까 대전에서 목포까지 이어지는 호남선은 평야지대를 관통하면서 산림과 지하자원을 장악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한양을 중심으로 해서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경원선은 입을 벌린 가위 모양으로 반도 땅을 서로 엇갈리며 관통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종착역은 모두 항구였던 것이다. 사람이 부리는데 이골이 난 십장들의 채찍은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서운 채찍 아래서 의병 출신들은 한갓 마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8월의 뙤약볕 속에서 허덕거리고 있는 그들에게 한 가지 커다란 소식이 들려왔다. 한일합방조약이었다.

"인자 끝장나 부렀소."

"인자 죽도 밥도 아니구만이라."

대원들이 낙담하고 허탈에 빠졌다.

"무신 싱건 소리덜이여, 정신덜 채리드라고. 올 것이 온 것잉게."

손판석이 대원들을 하나하나 꼬나보듯 하며 못을 친 말이었다. 매천 항현이 자결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지난날 벼슬살이를 했던 양반들이 자결했다는 소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왜덜 그 난리여, 난리가. 구름 안 찐 마른하늘서 뜸금 없이 베락티고 턴둥 울리는 것 봤능감! 참 양반이란 사람덜 심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여. 의병쌈언 지대로 안 허고 피헌 사람덜이 인자 와서 혼자씩 따로따로 죽으면 멀혀, 그런다고 왜놈덜이 눈썹 한나 까딱 허간디. 기왕 죽을 바에야 의병으로 나서서 싸우다 죽어야제. 왜놈덜얼 하나라도 죽이고 죽어야제."

대원들과 둘러앉은 손판석이 어두워지는 하늘을 응시한 채 말하고 있었다.

1910829일 한일합방조약이 공포되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총독부가 서둘러서 한 일이 일진회를 비롯해서 대한협회 같은 열 개의 정치단체에 해산령을 내린 것이었다.

"백상, 총독부의 해산령에 따라 일진회군산지부도 해산하게 됐소. 백상이 그간에 수고가 많았소이다."

백종두를 불러들인 씨지무라가 거두절미하고 내던진 말이었다.

",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그 누구보다 입술이 얇아 말하는 데는 자신이 있는 백종두로서도 말을 더듬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아니, 백상같이 눈치 빠른 사람이 그 쉬운 말을 못 알아 듣소? 총독부의 해산령에 따라 일진회가 해산됐다 그 말이오."

쓰지무라는 여전히 찬바람 도는 냉랭한 얼굴로 말하는 것이었다.

"예에, 압니다. 제 말은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저어...... 일진회가 그렇게 빨리 해산되면......"

백종두로서는 일진회가 해산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일진회장으로서 그간의 노고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 쓰지무라의 냉담한 태도가 문제였던 것이다. 저놈이 이대로 입 씻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어지자 백종두는 마음이 다급해지고 헝클어져 말이 자꾸 더듬거려지며 빗나가도 있었다.

", 일진회를 빨리 해산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소. 보나마나 대한협회 같은 반일단체들이 합방 반대운동이니 뭐니 해서 시끄럽게 들고일어날 거 아니겠소. 그런 말썽 많은 단체들을 없애버리자면 먼저 일진회부터 앞세워 없애야만 그 자들이 시비를 못 건단 말이오. 공평하게 친일단체부터 없앴는데 그놈들이 할 말이 뭐가 있겠냔 말이오. 어떻소, 총독부의 조처가."

쓰지무라는 일부러 백종두를 묵살해가며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예에,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래야 반일단체들이 꼼짝을 못할 것은 당연지사지요, 암 그리해야지요."

백종두는 그저 건성으로 입을 발라 맞추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머리가 빨리 돈다지만 자신의 일에 급급한 나머지 총독부가 반일단체들의 제거를 빙자해서 이미 쓸모없이 된 일진회까지 청소해버리는 양수겸장 치는 솜씨까지는 미처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총독부의 조처에 따라 우리 이사청도 폐지하게 됐소."

쓰지무라가 불쑥 던진 말이었다.

"? , 그럼 쓰지무라 서기님은 어찌되시는 겁니까?"

벡종두는 무릎이 휘청 꺾이는 것을 느끼며 쓰지무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는 완전히 정지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난 지금 사무정리가 바쁘니 이삼 일 있다가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쓰지무라가 거만스럽게 말하며 의자를 돌렸다. 그의 꾹 다문 입에는 경멸스런 웃음이 물려 있었다. 이사청이 폐지되고 쓰지무라가 없어지면 나는 뭔가. 그간에 욕먹고 손가락질 당해 가면서 헛고생만 한 거 아닌가! 군수자리를 탐해 온 백종두의 머리는 그 생각에 정지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조금만 여유를 가졌더라면 이사청의 폐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그 답은 너무나 쉬웠던 것이다. 그때 공사관은 통감부로 간판을 바꿔 달았던 것이고, 각 영사관들은 이사청으로 간판을 바꿨던 것이다. 합방이 되면서 통감부는 다시 총독부로 간판을 바꿔 달게 되었다. 그러면 이사청의 폐지는 곧 간판이 바뀐다는 뜻일 뿐이었다.

"저어...... 진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오늘 저녁에 좀......"

백종두는 두 손을 모아 잡았다.

"내가 바쁘다니까요. 이삼 일 있다가 차분하게 만납시다."

쓰지무라가 상을 찌푸렸다.

"저어...... 떠나시기 전에 뵙고......"

"백상, 무슨 말을 그리 못 알아 듣소. 내가 떠나긴 어디로 떠난단 말이오. 이사청이 내일부로 부청이 된다 그 말이오, 군산부청!"

쓰지무라가 짜증스럽게 내쏘며 서류철을 탁 덮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백종두는 환하게 웃었다.

"예에, 군산부청! 인자 알았습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환하게 피어나는 웃음처럼 그의 마음에 끼었던 구름도 활짝 걷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일시에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랫것들 괜히 시끄럽지 않게 단속 잘하시오."

깊이숙인 백종두의 뒷꼭지를 때리는 쓰지무라의 말이었다.

"예에, 그거야 소인이 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백종두는 펴던 허리를 다시 굽혔다. 뒤늦은 깨달음으로 사무실을 나오면서 백종두는 등 뒤가서늘하고 허전한 것을 느꼈다. 그건 어제 까지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뭔가. 백종두가 부딪친 생각이었다. 반사적으로 <똥 친 작대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가래를 돋워 올리며 그 생각을 짓뭉갰다.

"퉤에!"

그는 가래를 힘껏 내뱉었다. 가랫덩이는 휙 날아가 동백나무 잎 위에 얹혔다. 윤기 나는 진초록의 잎 위에 얹힌 가래는 더욱 더럽고 비워 상해 보였다. 그러나 백종두는 그런 것쯤 개의치 않고 이사청 마당을 박차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사청 안에서 감히 저지를 수 없는 짓이었다. 가래를 내뱉었지만 백종두는 자신이 똥 친 작대기가 되었다는 생각을 떼칠 수가 없었다. 이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진회 회장 자리는 쓰지무라의 한마디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일진회를 처음 결성할 때를 생각하면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때는 거창한 결성식을 올렸던 것이다. 그랬으면 해산할 때는 해산식을 올려야만 옳은 일이었다. 또 해산식을 열기 전에는 그간의 공로에 대한 응분의 보답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쓰지무라가 하는 짓은 무엇인가. 백종두는 뒤늦게 화가 치밀고 있었다.

"!"

정문 앞의 보초가 받들어 총을 하며 힘차게 소리쳤다. 백종두는 허리를 곧바로 펴서 경례를 받으며 정신이 번쩍 들고 있었다. 그래, 어쨌거나 다시 감투를 써야 한다. 왜놈 헌병들이 이렇게 경례를 붙이는 것이 뭐냐. 다 감투의 힘이 아니야. 쓰지무라가 사나흘 뒤에 만나자고 했지. 합방으로 새 세상이 됐으니 사람을 바꿀 감투는 얼마든지 있다. 이번 기회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수를 차지해야 한다. 아아, 군수...... 군수...... 백종두는 가슴이 벌떡거리고 숨이 거칠어졌다. 어떻게 해서 군수자리를 차지할까 하는 생각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한 머릿속에는 쓰지무라한테 무시당했다는 불쾌감 같은 것은 말끔히 지워지고 없었다.

"어라 어라, 살살 밀어, 살살!"

"틀어, 얼렁 틀어. 넘어가는 쪽으로 손잽이얼렁 틀어."

", 가요, . 얼렁얼렁 발판 돌리씨요."

신바람 나는 소리들이 왁자하게 뒤엉키고 있었다. 길을 건너려던 백종두는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자전거에 매달린 청년 셋이서 길바닥을 제멋대로 휘저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자전거타기를 배우느라고 서너 달 전부터 어느 길에서나 벌어지고 있는 소란이었다. 백종두는 세 청년을 알아보았다. 자전거에 올라앉은 것은 일진회 간부 장칠문이었고, 뒤에서 자전거를 밀고 붙들고 하는 두 청년은 그의 부하였다. 저것도 신기술인디! 불현 듯 이 생각을 하는 백종두의 머리에는 아들 남일이가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남일이는 저걸 탈 줄 아는가 하는 질투가 솟았던 것이다. 자전거는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며 굴러가고 있었다.

"음마, 음마, 저것이 바로 그 말 듣든 신식 가마로구마."

어떤 여자의 반가움 넘친 목소리였다.

"무신 소리여, 무식허니. 개화차라고 허는 것이구마."

남자의 점잖은 대꾸였다. 백종두는 고개를 돌렸다. 촌티 나는 노인 둘과 노파 하나가 신기하다는 듯 자전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가, 이륜거가 옳제."

다른 영감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다 틀렸소, 쇠당나구요, 쇠당나구!"

백종두가 것지르며 길을 건너갔다. 일진회 사무실로 돌아온 백종두는 의자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그는 전신이 축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의자에 몸을 부리고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이 사무실도 이제 쓸모가 없게 됐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마음은 더욱 착잡해졌다. 그리고 새로운 걱정거리가 떠올랐다. 일진회 해산을 부하들에게 어떤 식으로 알리느냐 하는 것이다. 백종두는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방법은 두 가지뿐이었다. 해산식을 해서 알리는 것과 그냥 간부를 통해서 시달해 버리는 방법이었다. 쓰지무라도 거들떠 보지 않는 형편에서 해산식을 한다는 것은 아무 이득도 없고 자신의 꼴만 초라해지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쓰지무라가 자신에게 그랬듯 자신도 장칠문이를 불러 해산을 명령하면 그만이었다. 간편하게 마음을 정리한 백종두는 사환아이를 불러 장칠문이를 찾아오라고 일렀다. 백종두는 사무실을 두리번거리며 다시 불안해지고 있었다. 쓰지무라 그놈이 인정사정없이 안면을 바꾸면 어쩌지? 아니야, 그간에 세운 공이 있는데 설마 그러지야 못하겠지. 허나 처음에 땅을 주었던 것으로 모든 값을 치려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나오면 어찌해야 하나. 그놈 목을 비틀 수도 없고, 원수 갚자고 의병이 될 수도 없고, 그놈이 그럴 수도 있는 놈인데 그렇다고 군수자리를 놓칠 수야 없지. 좋다, 돈을 걸고라도 그 자리는 따내야 한다. , 그간에 괜히 굽실거리며 살았더냐, 백종두는 주먹을 말아 쥐며 이를 사리 물었다.

"회장님, 불르셨는게라우."

사무실로 다급하게 들어온 장칠문이 힘찬 목소리로 거수결례를 붙여 올렸다.

", 불렀구마."

백종두는 궐련에 불을 붙이고는,

"저어 경성 통감부서 하달해 온 명령인디, 인자 합방이 되았응게 우리 일진회럴 해산허라는 것이네. 그리 알고 회원덜헌티 다 전허소."

그는 일부러 팔을 쭉 뻗쳐 올려 경성 아닌 천장을 가리키며 자신은 슬쩍 비켜서고 있었다.

"아니, 일진회럴 해산허라고라우?"

예상대로 장칠문은 눈을 휘둥글하게 뜨며 놀랐다.

"통감부서 그리 하달이시."

백종두는 이야기를 길게 끌고 싶지 않아 또 통감부를 앞세웠다.

"통감부서 그리 영얼 내렸음사 벨 수 없겄제라."

장칠문은 금방 기가 꺾이더니,

"글먼 지넌 어찌 되는 감요?"

눈을 껌벅거리며 백종두의 눈치를 살폈다. 백종두는 그만 가슴이 뜨끔해졌다. 그러나 그는 아주 태연하게 응수했다.

"자네가 어찌 되기넌?"

"긍게 머시냐...... 첨에 일진회를 들 적에 헌 약조가 어찌 되는지......"

장칠문은 몸이 달아오른 만큼 기가 죽어들고 있었다.

"약조라니?"

백종두는 먼눈을 팔며 시침을 뗐다. 백종두의 너무 엉뚱한 반응에 장칠문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속았다는 생각이었다.

", 일진히서고 상허먼 나중에 정식으로 헌병도 시켜주고 관리로도 써주고 히서 출세길얼 열어준다고 약조 안혔등가요."

장칠문의 기세와 어조는 딴판으로 달라져 있었다.

"옳아, 그 약조 말인가. 그야 약조대로 되겄제. 다른 사란언 다 몰라도 자네야 그리 돼야겄제. 자네 일이야 나가 다 알아서 헐 것잉게 맘 놓고 있으소."

장칠문의 속마음을 재빨리 눈치 챈 백종두는 얼렁뚱땅 귀에 단 말을 꾸며대고 있었다. 젊은 것을 자칫 잘못 상대했다가는 망신을 당할 지도 모른다 싶었던 것이다.

"그 말씸 믿고 있겄구만이라우."

장칠문은 야무지게 다짐을 놓았다.

"걱정말고 회원덜헌티 말이나 잘 전허소."

백종두도 자신 있게 말했다. 일진회가 말썽없이 해산을 하게 된다면 장칠문이 하나쯤은 어떻게 해줄 수도 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지 일만 잘 됨사 말 전허는 것이야 지가 다 알어서 허겄구만요."

장칠문이 백종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 자네만 믿겄네."

백종두가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백종두는 뒷일은 네가 다 알아서 하라는 듯 곧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장칠문은 무엇에 쫓기고 있는 것 같은 백종두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몰골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백종두의 모습이었다. 그도 통감부의 위력을 또다시 실감함과 동시에 심환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써막을 대로 다 써막고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장칠문은 신분보장 없이 무작정 일진회를 해산하라는 조처에는 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건 혼자 생각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부하들을 이끌고 통감부를 상대로 항의하거나 대항한다는 것은 아예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렇게 했을 때의 결과는 보나마나 의병들 꼴이 나는 것이었다. 바윗덩어리에 머리 박치기였고 총알 앞에 가슴 들이대기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었다. 백 종두가 당장 갓끈 떨어진 신세가 되었지만 그가 갓 끈을 더 질기고 튼튼한 것으로 갈아맸으면 맸지 그냥 갓을 날려 보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백종두가 예삿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별 수 없다. 아버지처럼 던적스럽게 장사꾼이 안 되려면 백종두의 불알이라도 잡고 늘어져야 한다. 권세만 있으면 돈이야 저절로 굴러드는 것 아니더냐. 권세를 잡자면 백종두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장칠문은 깨끗하게 처리할 필요를 느꼈다.

"통감부서 내린 엄명으로 일진회가 해산되는 것잉게 그리덜 알드라고. 우리가 속이 상해도 통감부 엄명이라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여. 통감부 엄명 앞에서 너너우리 회장 어르신도 꼼짝얼 못허넌 형편이구만."

소대장들을 불러 모은 장칠문은 백종두보다 한술 더 떠서 통감부의 엄명을 강조해댔다. 과연 그 효과는 커서 소대장들은 기가 푹 꺾여 있었다. 일진회는 의병토벌에 본격적으로 동원되면서 완전히 군대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근디 말이여, 통감부 엄명도 좋고 헌병대 엄명도 존디, 우리허고 헌 약조넌 어찌 되는 것이여?"

소대장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장칠문은 상부터 찡그렸다.

"나도 그 일이 걱정인디 안직 잘 모르겄어. 우선 해산이나 해놓고 나서 처분얼 기둘려야 겄제."

장칠문은 막연하고 모호하게 말을 얼버무려 넘기고 있었다.

"처분만 기둘리다가 시심사심 약조가 안 지켜지면 어찌고?"

다른 소대장의 조금 커진 목소리였다.

"그런다고 우리가 통감부헌티 대들겄어, 헌병대허고 싸우겄어?"

장칠문은 정면으로 치고 들었다.

"빌어묵을, 합방되면 살판날지 알고 좆빠지게 고상험서도 참아왔등마 요것이 무신 오장육부 뒤집는 소리여."

또 다른 소대장이 침을 내뱉었다.

"긍게 말이시. 우리럴 개좆만치도 못허게 아닝께 그리허는 것 아니겄어. 우리도 총 지녔겄다, 한바탕 붙어부러도 그만이여."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장칠문은 제동을 걸 필요를 느꼈다.

"다덜 그냥 뚫린 구녕이라고 막가는 소리 내뱉덜 말어. 그런 소리 헌줄 알먼 될 일도 안 된게 정신덜 채리드라고. 회원덜 다넌 몰라도 간부인 자네덜꺼지야 어찌 될란지도 모르는 일인디 입 그리 방정맞게 놀리면 되겄어!"

장칠문은 낚싯밥을 던지며 소대장들을 휘둘러보았다. 장칠문의 야릇한 말은 소대장들을 제각기 분열시키는 효과를 나타냈다. 소대장들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간에 헌병대고 순사덜이고 친해논 것이 얼매나 큰 재산인지 알어, 그것만 잘 써묵어도 일진회서 고상헌 값이 톡톡헐 것인디."

장칠문은 말꼬리를 묘한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소대장들의 얼굴은 제각기 차이가 나고 있었다. 합방을 계기로 정치단체만 해산된 것이 아니었다. 언론계에도 된서리가 내렸다.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꾸어 총독부의 기관지로 만들었고, <황성신문><한성신문>으로 이름을 고치게 했다가 곧 폐간시키고 말았다.

"모든 조선인들은 일본의 법률에 복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할 것이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의 부임 일성이었다. 장칠문은 박하사탕을 와삭와삭 씹어댔다. 그의 얼굴은 달고 화아한 맛이 나는 사탕을 먹고 있는 사람답지 않게 잔뜩 보아가 치민 얼굴이었다. 그는 씹던 것을 넘기는 가 싶더니 유리병에서 박하사탕을 꺼내 또 와삭와삭 씹기 시작했다.

"코찔찔이 아새끼도 아니고 머허고 앉었냐. 어여 일보로 나가그라."

뒷짐을 지고 어슬렁 거리던 장덕풍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아들이 박하사탕을 네 개째 씹어대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부지넌 시방 누구 화 질르시오. 일진횐지 지랄인지가 없어져 부렀는디 무신 일얼 보로 나가라고 그요."

장칠문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벌컥 화를 냈다. 벌써 며칠째 갈 데가 없어진 그는 꼬약꼬약 괴어오르는 부아를 박하사탕을 씹어대며 누르고 있던 참이었다. 일진회가 없어져 버렸는데도 그는 여전히 제복을 걸치고 있었다.

"이놈아, 애비헌티 그 무신 버르장머리여. 이 애비가 그놈에 일진회 없앴냐."

장덕풍이 노기 띤 얼굴로 아들을 노려보았다.

"일진회에 억지로 등 밀어댄 것이 누구였능게라. 아부지가 아니고 귀신입디여?"

장칠문은 아버지의 노기를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맞대거리를 하고 들었다.

"이놈아 애비 원망허기 전에 백종두헌티 대들어라. 그놈이 약조헌 것잉게 죽으나 사나 그놈 붙들고 늘어져. 어서 당장 그놈얼 찾아가!"

속이 찔끔해진 장덕풍은 삿대질까지 해대며 책임을 백종두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 백종두도 똥 친 작대기요. 붙들고 늘어져 봤자 손에 묻을 것언 똥 찌끄레기뿐이란 말이오."

장칠문이 코웃음을 쳤다.

"이놈아 주딩이 멋대로 놀리덜 말어. 부자가망해도 3년 묵을 것 있고, 호랭이가 죽어도 가죽이 남는 법이여. 백종두넌 여시 중에 백여시고, 모사 중에 상모사여. 가서 헌병보조원이라도 시켜도라고 졸라. 백종두가 그런 것 하나 시켜줄 심언 안직도 짱짜허다."

장덕풍의 어조는 어느덧 타이르듯 바뀌어 있었다.

"아이고, 아부지넌 속도 참 편허요. 헌병 보조원덜도 짤라내고 솎아내고 있는 참이다요. 나도 기문이 맨치로 사탕공장에나 댕길 것인디 잘못혔소."

장칠문이 쓴 입맛을 다셨다.

"이놈아 넋나간 소리 말어 니넌 이 집안 장남잉게 그리넌 안되야. 어쨌그나 권세럴 잡아야 혀, 권세!"

장덕풍은 마치 부르짖듯 했다. 큰아들 권세를 갖게 하여 앞장세우고, 작은 아들은 기술을 갖게 하여 뒤를 받치게 하는 것. 그건 그가 오래 간직해 온 꿈이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합방이 되면서 일이 더 잘 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꼬이고 있었다. 그는 성질 같아서는 자신이 직접 백종두를 찾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종두도 쉰밥 신세가 되어 있는 판이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아들한테는 백종두의 값을 높이 쳐서 말했지만 속으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백종두가 다른 어떤 감투를 쓰지 못하고 그대로 끝나버리게 되면 아들의 신세는 실 끊어진 연이었다. 그건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다. 아들은 그간에 의병토벌은 하느라고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겨가며 공을 세울 만큼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 대가 없이 끝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맘 상허덜 말고 쬐깨 더 기둘려보자. 정 일이 안 풀리면 이 애비가 나슬 참잉게."

장덕풍은 힘주어 말했다.

"아부지가 나서라?"

장칠문이 의아스럽게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이 애비도 다 심이 있다."

장덕풍은 우체국의 하야가와를 입에 올리는 것을 피했다.

"성님, 무고허신게라우?"

한 남자가 가게로 들어서며 꾸벅 인사를 했다

"멀라고 또 왔능가."

장덕풍은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했다.

"야아...... 저더, 그냥......"

얼굴이 부슥부슥 부어올라 병색이 완연한 남자는 기가 푹 죽어 있었다. 그는 빈대코 김봉구였다.

"어허, 이사람 참 알ㄱ네. 등짐 지고 오기 전에넌 다시안 오기로 허덜 안혔어. 영 못쓸 사람이시."

장덕풍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혀를 차댔다.

"성님, 지도 그리헐라고 혔구만이라우. 근디 이 잡놈에 병이......"

", 듣기 싫네. 거렁뱅이 장타령이야 가락이나 있제만 그놈의 소리는 맨날 궁상이라 재수 옴붙네."

장덕풍은 상대방이 얼굴에 마치 침이라도 내뱉듯 사정없이 쏴질러버렸다.

"성님, 누가 아프고 잡아 아프간디요. 지도 얼렁 병 낫어 당당허니 등짐 지고 저 문턱 넘을 라고 혔군만이라."

얼굴이 부슥부슥한데다 안색까지 검푸르게 칙칙한 김봉구는 울상이 되어 그저 굽실거리기만 했다.

", 똥독 올라 탈난 사람이 병 고쳤단 말 못들었소. 똥독 빼는 약이 없는디 무신 수로 나슬라요?"

장칠문이 느닷없이 것지르고 나섰다. 그는 화풀이를 할 만한 입맛 도는 시빗거리를 찾았다는 투였다.

"자네 그 무신 야박헌 소리여. 나가 죽기라도 바라고 허는 소리 같네이."

맥이 다빠진 김봉구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서려 있었다.

"말이야 있는 그대로 똑바라지게 헌 것잉게 공연시 감고 들지 맙시다. 나 요새 속 터지는 일 많애서 애맨 소리 받아줄 처지가 못된게."

장칠문은 불량스럽게 김봉구를 노려보았다. 그 눈길이 금방 주먹이라도 날릴 것 같은 위험을 품고 있었다. 장덕풍은 아들의 그 기세를 고소해하고 있었다. 김봉구가 그 기세에 눌려 쫓겨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아무리 그려도 헐말이 따로 있제. 나가 아프고 잡어 아픈 것도 아니고......"

김봉구는 눈길을 떨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짙은 병색만큼이나 입성도 후줄근하고 초라한데 기마져 꺾이고 보니 그의 몰골은 참으로 볼품이 없었다. 방태수와 함께 금가락지를 내놓고 저울질을 다투던 때의 펄펄하던 기세는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 나맨치로 총 들고 의병덜허고 맞대거리허고 나섰드라먼 똥통 오짐독에 곱쟁이로 올라 극락왕생허기 정신없었겄소 이."

장칠문은 코웃음을 쳐대며 김봉구의 속을 뒤집고 있었다.

"이 사람아, 당해 보덜 않고 그리 막말허는 것이 아니시. 자네야 총 들고 멀찍허니 덜어져서 피헐 자리 챙게감서 싸우는 것이고, 나야 총도 없이 혼자서 베락치기로 당헌 일이란 것을 알어야 써. 자네도 그리 당혔으먼 똥통에 머리보톰 박었을지 누가 알어."

김봉구는 아직도 한 가닥 오기는 남아 오금을 박고 있었다.

"머시여! 사람얼 멀로 보고 허는 소리여 시방."

장칠문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 질렀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분명 반말이었다. 김봉구는 그 반말이 가슴을 심하게 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어금니를 꾹 맞물었다. 더럽고 치사했지만 약값을 빌리기 위해서는 참는 도리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나가그라, 나가. 니가 나서서 이럴 일이 아니다."

장덕풍은 달래는 눈짓을 하며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만하면 아들은 김봉구의 질긴 비위를 풀죽게 하는 역할을 잘한 셈이었고, 아들 성질에 주먹이라도 한 방 날려버리면 자신의 입장이 난처하게 될 판이었던 것이다.

"성님, 한분만 더 도와주시게라우. 몸 다 나스먼 곱쟁이로 갚을랑게."

손을 맞잡은 김봉구가 우는 듯 비굴한 얼굴로 장덕풍에게 머리를 숙였다.

"이 사람아, 한분 한분이 발써 멫분이여. 나도 장사넌 안되고 죽을 맛이랑게."

"아능마요, 사람 잠 살레주시게라우."

김봉구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김봉구는 자신이 똥독을 앓게 되면서 수월찮은 돈을 빌려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갈수록 냉대가 심해지고 있었지만 빈손으로 내몰지 않는 것이 그나마 고마울 따름이었다.

"인자 이것으로 끝이여. 여그다 표시허소."

장덕풍이 동전 몇 개와 함께 장부를 내밀었다. 김봉구느 허겁지겁 동전을 몰아 잡았다. 그러면서 그는 또 그 주모 년을 잡아 죽일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백종두는 끼니마다 먹는 것이 소화가 안 되었다. 마땅히 나갈 데도 없었고,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할지도 몰라서 그는 나흘째를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의 집안 식구들은 날마다 잔뜩 긴장한 채 살얼음 걷듯 하고 있었다. 그는 걸핏하면 짜증을 내고, 사소한 일에도 트집을 잡고 들었던 것이다. 식구들 중에 그의 눈치를 전혀 안 보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헌병보조원으로 긴 칼을 철그럭거리며 차고 다니는 그의 아들이었다. 백남일은 비로소 제 할 일을 찾은 양 헌병제복과 긴 칼에 어울리게 활기차고 당당해져 있었다. 물론 전처럼 대낮부터 술주정하는 일도 없었고, 노름에 넋 팔아 밤샘하느라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일도 없었다. 백종두는 아들이 새사람이 된 것이 너무나 대견하고 흡족스러웠다. 그리고 아들을 헌병보조원으로 떠밀어 넣은 자신의 혜안과 결단에 더 없는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백종두는 아들이 그처럼 훌륭하게 사람노릇을 하게 되자 그때 쌀가마니깨나 없앤 것도 전혀 후회가 되지 않았다. 일진회원들과 마찬가지로 헌병보조원들도 의병토벌에 동원되고 있을 때 그는 아들을 ㅃ돌리느라고 헌병 대장한테 수시로 뒷손을 썼던 것이다. 일진회원이고 헌병보조원이고 길안내니 적정탐지니 해서 언제나 앞장세우는 바람에 그 위험은 컸다. 공을 세워야 장래를 보장한다는 말에 떠밀리며 앞장섰다가 죽어간 일진회원이며 헌병보조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는 것으로 그뿐이었다. 아들이 그런 개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백종두는 뒷손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종두는 쓰지무라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엉뚱한 사람이 찾아들었다. 지난날 함께 이방 노릇을 했던 김삼수였다.

"자네가 우리 집에 어쩐 일이여?"

백종두는 마지못해 김삼수를 맞아들일 뿐이었다. 함께 이방 노릇을 하면서 서로 견제하고 살피던 사리였지 믿거나 의지했던 사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인자 참말로 헐 일도 없어지고 히서 그냥저냥 걸음힛구마."

백종두에 비해 투박한 생김인 김삼수가 멋쩍게 웃으며 자리를 잡았다.

"그려, 시상이 달라져도 천지개벽얼 헌 것이제."

상대방의 솔직한 말에 마음이 조금 열린 백종두는 무심결에 손을 턱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턱 끝에서 잡히는 것은 없고 헛손질이 되고 말았다. 그는 상대방의 갓 쓴 모습에 탐스러운 수염을 보자 잊혀졌던 손짓이 자신도 모르게 나왔던 것이다. 백종두는 자신의 변모를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그건 일찌감치 관직을 버린 사람과 거덜이 날 때까지 관직에 매달린 사람과의 차이였다.

"맞네, 시상이 천지개벽얼 허고 난게 어질어질히서 정신 하나또 없네."

김삼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시상 변헐지 몰랐간디?"

백종두가 어처구니없어 했다.

"이리 찰팍 엎어질지야 몰랐제."

백종두는 소리 나지 않게 코웃음을 쳤다. 말상대가 되지 않는 위인이었다. 두 사람사이에는 잠시 말이 끊어졌다.

"자네 요새 어찌 산가?"

김삼수가 백종두의 눈치를 살폈다.

"어찌 살기넌. 그냥저냥이제."

백종두는 대답과는 달리 바짝 긴장했다. 그리고 그의 촉수는 상대방이 왜 자기를 찾아왔는지 알아내기 위해 기민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저어...... 말이시, 앞으로 새로 판얼 짜는 부청이서 자네가 큰 자리럴 차지헐 것이란 소문이든디......"

"머시여! 누가그려?"

백종두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아니시, 아니시, 그냥 들은 소문이시."

당황한 김삼수는 손까지 내저었다. 백종두는 그 느닷없는 말에 너무 놀라 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던 것이고, 김삼수는 백종두의 그런 반응을 감추고 있던 인사비밀이 드러나자 화를 낸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백종두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벌떡거리고 울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는 화끈화끈 열이 오르고 있었다. 부청 큰 자리? 그게 어떤 자릴까? 소문이라, 대체 어디서 시작된 소문일까? 소문은 틀릴 ㄸ보다 맞을 때가 더 많다. 하여튼 불을 때야 연기가 나고, 바람이 불어야 나무가 흔들리는 것 아닌가! 백종두의 생각은 좋은 쪽으로만 몰려가고 있었다.

"어쩐가, 소문이 맞기넌 맞제?"

김삼수는 무척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씨, 소문얼 다 믿을 수 있간디."

백종두는 다리를 야무지게 꼬고 앉으며 대답을 아주 모호하게 흐려놓고 있었다. 그런 식의 애매한 응답은 관청 밥을 오래 먹으면서 익혀온 것이었다.

", 북이 공연시 소리 나는 법 아니제."

김삼수도 관청 밥을 오래 먹기는 매일반이라 그런 애매모호한 답을 해득하는 눈치는 빨랐다. 그는 자기 좋은 대로 소문을 사실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저어...... 우리사이에 말덫 놓고 말꼬리 틀고 헐 것이 없이 탁 터놓고 말헐리네. 무신 말인고 허니, 이 참에 부청 새로 판얼 짤 적에 자네가 다리 놔서 심 잠 써주소. 비용이야 드는 대로 내겄네."

정색을 한 김삼수는 정말 탁 터놓고 말을 해버렸다. 백종두는 한쪽 입꼬리가 삐딱하게 처져 돌아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어쩐가, 그리 히주겄제!"

김삼수는 자리를 고쳐 앉으며 다급한 속을 다 드러내고 있었다.

"두고 보세. 예정이야 잊으라등가."

부드럽고도 느긋한 백종두의 대꾸였다.

"하먼, 물건이야 새 물건이고 사람이야 옛정 맺은 사람 아니드라고."

김삼수는 드디어 얼굴 풀리는 웃음을 지어냈다. 김삼수가 돌아가고 나자 백종두는 더 마음이 불안하고 좀이 쑤셨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어쩐지 알아봐야 직성이 풀리겠는데 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며칠 있다가 연락하겠다고 한 쓰지무라를 불쑥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백종두는 하시모토를 생각해 냈다. 하시모토한테 부탁해서 알아내게 하는 방법이 그럴듯했던 것이다. 백종두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백종두는 인력거에 앉아서 그 생각을 되작되작 하다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시모토가 움직이는 것은 자신이 직접 찾아가는 것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었고, 하시모토에게 폐끼치는 일이면서 속 내보이는 것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도와주기만 하면서 쌓아올린 공을 그 정도 폐 끼치는 것으로 허물어뜨릴 수는 없었다. 보다 더 큰일을 내놓고 되받아야 했다. 백종두는 인력거를 세웠다. 그러나 집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요오코를 찾아가서 술이나 취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쓰지무라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백종두는 옥향이를 찾아가기로 마음 정했다.

"하이고 백 회장 나으리, 무신 바람이 불었당게라우?"

옥향이가 눈을 흘기고 돌아갔다.

"자네 냄새가 나럴 끌어댕기데."

백종두는 옥향이의 볼기짝을 철썩 쳤다.

"옴마, 기생환갑 꼴딱 지내뿐 년헌티서 냄새넌 무신 냄새가 풍기겄소."

옥향이는 백종두를 가끔 만날 ㄸ마다 잊지 않고 하는 말로 또 오금을 박았다.

"니넌 아직 오월 작약이여"

"하이고, 시월 단풍이란 소리나 마시게라."

옥향이가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무신 일로 혼자 술이시오?"

옷향이가 술상 옆에 앉으며 물었다.

"그리 됐네. 요새 일본 사람덜 더 늘었겄제?"

백종두는 말머리를 돌렸다.

"늘으나마나, 그 사람덜 정 떨어지요."

"어찌서?"

"술 마시는 것 상시럽고 잠자리서 야시러운 것이 짐승 한가지요."

"잠자리서 야시러울수록 재미가 존 것 아니드라고?"

"아시럽기만 허면 머헌다요. 각단지게 문점나 더럽히는 빙신덜인디."

"흐흐흐흐...... 자네 말대로 허자면 일본여자덜인 그것이 밑으로 쳐져서 빙신이고, 일본남자덜인 급히 싸질러서 빙신이고, 탈났네그려."

백종두는 술잔을 기울여가며 기분이 풀리고 있었다. 그날 밤 백종두는 시들기 직전의 흐드러진 꽃이고, 떨어지기 직전의 농익은 과실인 옥향이의 알몸을 풀었다. 늦잠에서 깨어난 뱍종두는 점심나절이 다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쓰지무라의 연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허겁지겁 되돌아섰다.

"이따 저녁에 사쿠라에서 만납시다."

쓰지무라의 무뚝뚝한 한마디였다. 백종두는 눈치 빠르게 돌아섰다. 그는 들뜬 가슴으로 그러나 아랫배에 힘이 그득한 걸음걸이로 군산 여기저기를 살피며 오후를 보냈다. 큰 자리...... 어제 김삼수가 찾아온 것은 소문을 제법 제대로 들은 것이라 싶었다. 그런데 그가 말한 큰 자리가 어떤 것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쓰지무라도 부윤자리를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니 부윤일 리는 없고, 쓰지무라의 그다음 자리쯤일 터였다. 그 위세에서 전주를 덮어 누르기 시작한 새로 일어나는 도시 군산부가 대단하긴 대단하지만 군산부청에 자리 잡는 것이 군수자리를 따로 차고 나가는 것보다 나을지 어떨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쓰지무라의 직속이 되는 것보다 좀 떨어져 있는 것디 낫지 않을까. 용꼬리보다는 닭벼슬이 아니던가. 백종두는 아예 자신을 군수자리에 올려놓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김삼수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김삼수와 관청 밥을 먹는 것은 지난날로 족했지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술자리에는 뜻밖에도 하시모토도 동석이었다. 무슨 까닭이 있으리라는 것은 직감하여 백종두는 싫은 내색은커녕 다른 때보다 더 반겼다.

"아직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이오만 우리끼리니까 털어놓겠소. 합병에 따른 이번 개편으로 우리 백상이 김제군 죽산면 면장으로 확정됐소."

쓰지무라가 흔쾌하게 웃으며 내놓은 말이었다.

"면장, 면장이라고요?"

허리를 곧추세우는 백종두의 목소리가 거칠었다. 얼굴도 사나웠다.

"아니 백 상, 왜그러시오?"

하시모토가 놀란 얼굴이었다. 쓰지무라의 얼굴은 불쾌하게 싹 변했다.

"내가 몇 년 동안 바친 고생이 얼만데 그까짓 면장이라니, 사람을 뭘로 보는 거요!"

백종두는 정면으로 들이댔다. 쓰지무라한테 최초로 드러내는 도전이었고, 무례였다. 백종두는 막판을 보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그럼, 백 상이 원하는 자리가 뭐요?"

쓰지무라가 픽 웃으며 물었다.

"군수자리는 하나 줘야지요."

백종두는 확실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쓰지무라가 화를 내지 않고 웃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군수, 그것 원하면 못 줄 것 없소"

쓰지무라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백상, 내 말 똑똑히 듣고 결정하시오. 이젠 조선시대가 아니라 대 일본제국의 시대요. 따라서 행정조직도 일본식으로 대폭 개편했소. 앞으로 지방행정의 기본은 면단위이고, 행정권도 각 면에 전적으로 부여되어 있소. 조선 땅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조처요. 그러니까 군 단위는 형식상 있는 거고, 군수는 이름뿐인 허깨비요. 조선시대하고는 반대요."

그는 백종두를 빤히 쳐다보았다. 백종두는 가슴이 철렁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쓰지무라 서기님. 제 경솔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하하하...... 백상은 참 앗싸리해서 좋아요. 우리 일본사람하고 비슷해요."

하시모토가 거들고 나섰다.

"백 상, 남자다워서 좋소. 오늘 술은 백 상이 사시오."

쓰지무라가 관대한 척 껄껄 대고 웃었다.

"예에, 영광이옵니다."

백종두는 두 번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

"백 상은 이 하시모토 상이 백상을 적극 천거했다는 거나 알아두시오"

쓰지무라의 말이었다.

"아 예, 명심하겠습니다."

백종두는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백상, 자아 잔 받고, 내 말 잘 들으시오. 에 또, 우리가 착수할 거대한 사업이 있는데, 백 상도 각오를 굳게 하시오."

쓰지무라가 거만스럽게 술을 따랐다.

"예에, 무슨 사업이신지요?"

잔을 받쳐 든 백종두의 손이 떨렸다.

"자세한 것은 실시되면서 알 거고, 토지조사사업이라는 거요."

", 토지조사사업......"

"자아, 술 듭시다. 이제 조선의 해는 없어졌소. 그러니 조선에는 아침도 없소. 앞으로는 일본의 해가 조선 땅을 비춰줄 것이오. 백 상도 일본제국의 충신이 되기를 맹세하시오."

하시모토가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22. 미로

"어찌서 가을이 되면 하늘이 더 파래짐서 높아지고, 나뭇잎덜도 단풍이 져서 떨어지는감요?"

아기 중 운봉이 조그맣게 쪼그리고 앉아 무릎 위에 팔굽을 받쳐 턱을 괸 채 물었다. 그의 눈길은 소슬바람에 잎들을 떨구고 있는 나무숲과 그 뒤의 먼 하늘을 헤매고 있었다.

"!......"

그 물음이 나주 맹랑하고 대답은 더욱 난감하여 송수익은 하늘을 얼핏 쳐다보고는,

"가을이라 그리 되는 것인지."

바른 대답이 아닌 줄 알면서도 옹색스럽게 대꾸했다. 그동안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언제부턴가 존대는 쓰지 않게 되었다.

", 어르신도 선문답허시능마요."

아기 중이 또랑한 소리로 쏘아댔다.

"선문답? 누가 또 그런 선문답을 했지?"

그런 엉터리 대답이 나올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의미에다 실망까지 함께 나타내는 아기 중의 말재주가 귀엽고, 여지없이 무안당한 것이 겸연쩍어 송수익은 허허대고 웃었다.

"누구넌 누구다요, 주지스님이시제."

"옳아, 도가 높으신 주지스님이 그리 말씀하셨으니 내 말도 말이네."

"맞가넌 머시가 맞어라. 솔방울 떨어진 자리서 솔이 나고, 바람이 불어야 나뭇잎이 흔들린다, 그런 것언 모다 대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말허는 허나마나 헌 소리제라."

아기 중의 야무진 비판에 송수익은 난감해서 입술을 훔치고 또 훔쳤다.

"운봉, 내 말을 들어봐. 이 세상에는 말이야, 말로는 해설할 수 없는 것들이 많고도 많지. 왜 별은 밤에만 보이는가, 왜 물은 아래로만 흐르는가, 왜 겨울에는 눈이 내리는가, 왜 사시는 바뀌는가, 그런 것들이 끝도 없이 많아. 나도 운봉만한 나이 적에는 그런 것들이 왜 그러는지 말로 들어 속 시원히 알고 싶었지. 그런 대답을 속 시원하게 못하는 어른들이 이상해 보이고 말이야. 헌데 어른이 되면서 차차 알게 되거든. 거 뭐라고 해야 하나. , 불가에서 도를 깨친다고 하지? 스님들이 수도를 자꾸 해서 도를 깨치는 거야. 그러니까 운봉도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해."

송수익은 아기 중과 엇비슷한 또래인 아들을 생각하며 성심껏 설명하려고 했다. 아들도 그런 것들에 대해 묻는지 모를 일이고, 그런 물음을 받고 아내나 어머니는 어찌 대답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움과 고적감이 슬픔처럼 가슴을 흔들고 지나갔다.

"글먼 의병덜이 어찌서 왜놈덜하고 싸우는지도 말로 안되는감요?"

아기중은 마땅찮은 얼굴로 불쑥 묻고는 위아랫 입술을 쑥 내밀었다.

"아니지, 그건 말로 되지."

"그 이 얘기 잠 히주실랑게라?"

아기중은 얼굴이 환해지며 송수익 옆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송수익은 그 얼굴에서 산사에 떨어져 사는 아이의 외로움을 느꼈다. 어떤 사연으로 절밥을 먹게 되었을까.....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생각이었다.

"이야기 좋아하면 자다가 오줌 싸는데."

"거짓말, 가난허게 산다는디요."

"그렇군. 가난하게 살면 어쩌지?"

"증언 본시 공수래 공수건디요."

"아하하하......"

송수익은 그만 아가 중을 얼싸안았다. 아기 중은 품안에 안긴 채 가만히 있었다. 송수익은 문득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기 중의 마음이 속세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싶었다.

"자아, 내가 이야기해 주지."

송수익은 품을 허물었다.

"의병들이 왜놈들하고 싸우는 건 말이다,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빼앗으려 했기 때문이란다. 무기를 들고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왜놈들은 칼 들고 안방에 뛰어든 도적놈하고 똑같다. 도적놈이 안방에 들어오면 어째야 되지? 도적님 어서 오시오 하고 반겨야 하나, 도적놈이 무서워 식구들이 모두 무릎 끓고 처분만 바라야 하나, 식구들이 다 힘을 합쳐 도적놈하고 싸워야 하나, 어느 것이 옳아?"

"도적 놈허고 싸워야제라."

"그렇지, 도적놈하고 싸워 도적놈을 몰아내야지. 그래서 사람들이 의병으로 나서서 왜놈덜하고 싸우기 시작한 거다. 헌데, 온 백성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 힘을 합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힘얼 안 합친 사람덜이 누구디요?"

이기중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벼슬살이를 해먹는 사람들이 그랬지."

"양반덜이요?"

"그렇단다. 벼슬한 양반님네들이 왜놈들 편을 들고 나섰지."

"양반덜이 귀허고 존 사람덜인지 알았등마......"

아기중은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좋은 양반도 더러 있지만 나쁜 양반들이 훨씬 더 많다. 양반들이 그런 못된 짓을 하니 백성들 속에서도 왜놈들 편을 드는 사람들이 생겼단다. 형편이 그리 못쓰게 됐어도 의병으로 나선 사람들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의병들은 사오 년 동안 용맹스럽게 싸웠다. 허나 의병들은 왜놈들이 가진 신식무기를 당해 내지 못해 수없이 많이 죽고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의병으로 나서서 싸우다 죽은 사람들은 다 장한 사람들이다. 누구든지 그 사람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왜놈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다시 찾을 수가 없다. 나라를 못 찾으면 모든 백성들이 왜놈들의 종 노릇을 하며 살아야 된단다."

"그려서 공허 시님도 나섰구만이라우?"

"그렇지"

"지도 담에 커서 그리 헐랑마요."

"장한 생각이야. 허나 운봉이 걱정 안 해도 괜찮아."

"어찌서요?"

"그전에 나라를 찾게 될 테니까. "

"야아......"

아기중의 눈에서 빛이 스러지며 어깨가 처져 내렸다. 송수익은 그런 아기 중을 보며 가만히 웃음 짓고 있었다.

"운봉아, 운봉아아........"

어디선가 목소리가 길게 울리고 있었다.

"아이고메, 진법 시님이시. 공양 지을 나뭇단얼 안 옮겼네."

아기 중이 놀라 튕겨 일어났다. 아기 중이 다람쥐처럼 쪼르륵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색색의 낙엽들이 따라서 굴러가다 멈추고 다른 잎들이 다시 구르고 했다. 송수익은 혀를 차며 멀어져 가는 아기 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산골짜기 골짜기에 어둠살이 내리고 있을 무렵 공허와 지삼출이 나타났다. 그들은 앞뒤에서 두 사람의 동행자를 보호하고 있었다. 송수익은 임병서와 함께 나타난 것은 전혀 뜻밖이었던 것이다.

"세호 자네가 어쩐 일인가."

신세호와 손을 맞잡는 송수익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선 단순한 반가움만이 아니었다. 신세호의 소극성을 잘 알고 있는 송수익으로서는 그가 산속까지 들어온 것에 색다른 고마움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가 살아 있단 말 듣고서야 안 나설 수가 없었지. 애초에 임형을 자네한테 소개한 것도 나고."

신세호도 반가움이 넘쳐 목이 잠긴 듯한 소리로 말했다.

"한 일 없이 모질게 살아 있기만 하네."

"무슨 소린가, 천년장수께서. 못난 나도 아이들이 그 노래를 부르면 속으로 따라 부르고 했었네. 자넬 살아서 만나니 꿈이 따로 없네그려."

평소에 말수가 적은 신세호의 이런 말에서 송수익은 그가 산을 찾아든 마음의 깊이를 헤아리고 있었다. 그들 셋은 몇 년 만에 한자리에 둘러앉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삼십객의 문턱에 선 세월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제가 몸도 회복이 덜됐고, 또 산을 벗어나기도 위험한 형편이라 무례인 줄 알면서도 험한 길 오시게 했습니다."

송수익은 임병서에게 인사를 차렸다.

"아니올시다. 저도 대형의 전사 소식을 듣고 슬픔과 낙망에 빠져 있던 중에 생존 소식을 전해 듣고 어찌나 놀라고 반갑던지 불러주시지 않았어도 제가 먼저 뵈러 왔을 것입니다."

임병서도 예를 갖추었다.

"제가 대형을 뵙고자 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의병은 의병대로 쇠진하여졌고, 나라는 나라대로 빼앗겨버린 마당에 앞일을 어찌할까 황망하던 차에 대형과 의논하면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대형께서는 옥고를 치르시면서 남달리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이고, 원래 우국의 굳은 의지를 지니셨으니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침 신형도 합석하여 모처럼 뜻있는 자리가 되었으니 고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송수익은 정중하게 운을 뗐다.

", 그리 말씀하시면 저로서는 너무 황송할 따름입니다. 고난에 처한 나라를 구해야 된다는 일념으로 나서기는 했었습니다만 싸움다운 싸움도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잡힌 몸이 되어 허송세월만 했으니, 그간에 악전고투 속에서도 혈전승리를 이룩해 오신 대형 앞에서는 차마 얼굴 들 면목이 없습니다. 대형께서 저 같은 사람을 그런 중차대한 일의 의논상대로 흉중에 두셨다니 무한 영광입니다만, 그 일이 중한 만큼 어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두서를 잡기가 어렵습니다."

임병서는 송수익이 말머리를 풀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 다 아시는 바대로 의병들이 왜놈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이 오륙 년째입니다. 그 전쟁은 전국에 걸친 규모로 보나, 동원된 의병들의 소로 보나, 의병 과 백성들이 희생된 것으로 보나, 임진왜란 이후로 가장 큰 왜놈들과의 전쟁이었습니다. 다만 임진왜란 때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대는 상감과 더불어 조정과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싸웠다는 점이고, 이번에는 상감과 조정은 왜놈들 편에 서서 위병을 역적시하며 해산령을 내리거나 매도하는 가운데 백성들이 자발로 나서서 싸운 것이 크게 다른 점입니다. 의병들이 무수한 희생만 내고 결국 오늘과 같은 비통한 궁지로 몰리게 된 데는 이러저러한 원인들이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제일 큰 원인이 바로 상감과 조정의 망발입니다. 임진왜란 때처럼 상감을 위시해서 이길 정도로 무력을 갖춘 왜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낼까말까 한데 상감과 조정이 그런 망동을 저질렀으니 의병들이 이길래야 이길 도리가 없는 일 아닙니까. 그 다음에 지적되어야 할 중대한 패인으로는 의병 전체의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세우지 못하고 지방별로 지역별로 분산된 점과, 왜놈들의 신식무기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의병들도 신식무기를 가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를 못한 점입니다. 헌데 그 두 가지의 패인도 결국은 상감과 조정의 망발에서 연유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의병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력을 다해 싸웠고, 백성들도 또한 생명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병들을 도왔습니다. 의병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에 걸쳐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도처의 백성들 먹을 것을 대주었고, 입을 것을 대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수만 명의 의병들과 백성들의 피가 강산을 물들였고, 수없이 많은 가옥들의 불탄 연기가 이 땅을 자욱하게 덮었습니다. 허나 나라는 결국 왜놈들에게 뺏기고 말았습니다. 또한 의병세도 쇠진할 대로 쇠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여기서 싸움을 중단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정작 싸움은 지금부터 더욱 맹렬하게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라를 빼앗겼다고 하여 싸움을 중단하거나 포기해 버리면 빼앗긴 나라는 언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나라를 찾을 때까지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합니다. 그러자면 어찌해야 할 것인지, 그 좋은 방도가 어떤 것인지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의논했으면 합니다."

송수익의 강한 눈길이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네 어찌 그리 무엄한가. 의병장이라고 해서 그런가."

신세호의 노기 띤 말이었다.

"아니, 갑작스런 무슨 소린가?"

임병서가 말을 받을 줄 알고 있었던 송수익은 신세호의 그 느닷없는 말에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더구나 그 저돌적인 어조는 평소의 신세호답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소리냐니, 자넨 의병장으로 총을 들고 몇 년 살더니 하늘 무서운 줄도 모르나. 상감마마를 그리 능멸하다니, 그러고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건가!"

신세호의 얼굴은 하얗게 변해 있었고 갓끈을 늘리고 있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런 신세호를 건너다보며 송수익은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송수익은 상감에게 불경을 보태게 되기 때문이 아니라 신세호의 체면을 생각해서 헛웃음을 참아냈다.

"상감을 능멸한 죄를 범했다고? 이보게, 나라가 없어져 버린 마당에 상감이 어디 있는가. 왜적의 평을 들어 백성을 오히려 적으로 삼소, 그러다가 나라를 뺏긴 상감도 상감인가."

송수익의 말은 화살로 날아갔다.

"아니, 자네, 자넨 대역죄인 중에 대역죄인 아닌가. 감히, 감히 어찌 그런 끔찍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며, 어찌 또 그런 말을 그리도 거침없이 입 밖에 낼 수 있단 말인가."

신세호는 떨리는 입술로 말을 더듬어대고 있었다. 송수익은 적과 맞설 대와 같은 묘한 전의를 느끼고 있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뿌리를 뽑고 싶었다. 오래 전부터 가슴에 품어왔던 생각을 속시원히 털어내서 유생 신세호의 고리타분하고 때에 전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싶었다. 임금에 대한 유생들의 맹목적인 굴신경배사상도 나라를 망치는 못된 병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었던 것이다.

"자네 진정하고 내 말 듣게. 내가 대역죄인 중에 대역죄인이라고 했는데, 그게 진정 사실이라면 삼대 아니라 육대까지 능지처참을 당해도 좋네. 자네가 어서 내려가 나를 대역죄인이라고 거하게. 난 자넬 원망하지 않겠네. 허나 보게, 자넨 어디다가 대역죄인을 고하려나? 관가? 그런 것 다 없어진 지 오래네. 그렇다고 왜놈들 관청에 가서 고하려나. 왜놈들은 총독이나 천황을 능멸한 죄인이나 잡아들일 걸세. 그게 바로 나라가 없어졌다는 증거네. 우리에게 나라가 없으니 상감이 있을 리 없고, 상감이 없으니 대역죄가 있을 리 있나. 그리허고, 나라는 대체 누가 망쳐먹었고 누가 뺏겼는가? 백성인가? 너무나 빤한 사실을 똑바로 바라보게. 그래야 백성 노릇이 제대로 될 것 아니겠나."

"나라를 망쳐먹고 팔아먹은 놈들은 조정대신 놈들이지 상감마마가 아니야. 상감께서는 그런 못된 놈들한테 둘러싸이고 왜놈들 총칼 앞에 위협당해 어찌할 수가 없었던 거 아닌가. 상감께서는 그런 곤궁에 처해 계시면서도 헤이그에 밀사까지 보내지 않았나. 상감께서는 나라를 구하려고 최선을 다하시다가 강제 양위의 비운까지 당하셨네. 헌데 자네는 어지 감히 상감이 없다고 망언을 일삼는가."

"자네 말은 석 그럴듯하네. 자네만이 아니라 모든 유생들은 그렇게 말해서 백성들의 원성이 상감께 돌아가지 않게 막고 싶겠지. 허나 상감께서 갖추어야 하는 나라에 대한 책무는 그렇지가 않네. 보세. 상감을 둘러싼 못된 조정대신 놈들은 애당초 누가 임명한 인종들인가? 이 대목에서 또 당파나 파당을 내세워 상감께서는 어찌하실 수가 없었다고 비호하려 들겠지? 그건 유생들의 교활이고 술수네. 하늘에 닿는 권력을 가지고서도 나라를 망치는 신하들을 쳐 없애지 못하고 오히려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허깨비 노릇만 한 상감, 그 무능에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는가. 그러고 말일세, 나라가 망하는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상감이 짊어져야 할 책무가 더 큰 것인가, 아니면 신하고 백성이 짊어져야 할 책무가 더 큰 것인가.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신하들이 줄줄이 자결하고, 백성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도처에서 의병을 일으켰네. 그때 상감은 무엇을 했는가. 구중궁궐에서 비통 통분해했는가. 그것으로 상감의 책무가 다 되는 것인가? 또 그와 반대로 매국노 중신 놈들의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고 의병해산령에 옥새를 찍어 윤허하는 것이 상감의 책무인가? 헤이그에 밀사를 보낸 것을 자네는 상감이 수행할 수 있는 최상의 책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네만, 그거야말로 한 나라 상감으로서 얼마나 비굴하고 무책임한 처사인가. 무기를 들고 쳐들어온 놈들을 수만리 밖에 있는 딴 나라 사람들에게 물러가게 해달라고 부탁하다니, 그런 답답할 노릇이 어디 또 있겠는가. 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때 실기를 했으면 그다음 강제 양위를 당했을 때 상감은 만백성을 향해서 외쳤어야 하네. 백성들이여, 나와 더불어 왜적들과 싸우자 하고 말이네.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앞장섰어야 했네. 그러면 왜놈들이 곧 죽이고 말았을 거라고? 죽이면 죽여야지. 그게 나라 뺏긴 상감이 책무를 다하는 길이네. 상감이 해산령을 내려도 나라를 구하겠다고 의병으로 나서서 수만 명씩 죽어가는 백성들인데 만약 상감이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가 왜놈들의 총칼에 죽었다면 백성들은 어찌했겠나. 이 땅에 합방이란 없었네. 상감은 그 책무를 피한 덕에 지금 연명은 하고 있으나 진즉에 죽은 목숨이고, 그 초라한 몸에 걸쳐진 것은 백성을 버려 나라를 망친 죄, 치정을 그르쳐 사직을 망친 죄가 있을 뿐이네. 어떤가!"

송수익은 속이 후련함을 느끼며 신세호를 응시했다.

"자넨 나라와 상감을 위해 의병을 일으킨 제 아니라 역모를 피하기 위해 역도들을 거느린 게로군."

신세호가 송수익을 노려보며 내쏘았다. 입을 꾹 다문 임병서는 무거운 표정으로 담배만 빨고 있었다.

"그 무슨 억지소린가?"

"억지소리기는. 자네가 그런 말을 아랫것들한테 했을 것이니 상감을 상감으로 알지 않는 그 총 든 무리들이 역도가 도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 염려는 말게. 이런 말을 입 밖에 낸 것은 오늘이 처음일세. 오늘도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없었네만 자네가 나를 탓하는 바람에 이야기가 샛가지를 치게 된 것이네."

송수익 입언저리에 자조적인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자네가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물들어 유학을 등진 것은 알고 있네만 그렇다고 하여 나라의 중심이요 중추며 만백성의 어버이이신 군왕에 대하여 그리 불충 불경한 언사를 하는 것은 그냥 들어 넘길 수가 없네. 자네는 어리석고 방자하게도 지엄하신 군왕을 일개장수로 폄하하는 무엄함을 범하고 있네. 아무리 국난이 닥쳤다고 하여 어찌 군왕이 앞장서 나서서 군대를 이끈단 말인가. 국난이 우심할수록 군왕의 옥체는 더욱 존귀하게 받들어지고 지켜져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 옥체에 변고가 생기면 국난은 더욱 어지러워져 나라의 존폐는 백척간두로 몰리게 되네. 군왕이 건재하셔야만 백성들은 군왕을 중추로 하여 힘을 모으게 되고, 그래야만 국난도 이겨내게 되는 법일세. 자네 말대로 상감께서 앞으로 나서셨다가 변고를 당하게 되었더라면 이 나라 꼴이 어지 되었을지 아니? 왜놈들의 만행은 더욱 흉포해지고 백성들은 중심을 잃어 갈팡질팡하면서 나라꼴은 바위에 내붇친 옹기그릇 꼴이 되었을 것이네. 비록 형세가 여의치 못하여 합방을 당했다고 하나 지금 나라가 이만한 것은 다 두 분 상감께서 엄존해 계시기 때문이네. 또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나라를 잃었다고 해도 상감께서 엄존해 계시는 한 그 법통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니 실상은 나라를 잃은 것이 아니네. 잃은 것은 다만 겉이요 속은 잃은 것이 아니란 말일세. 자넨 그 점을 망각하고 있으니 자네의 잘못된 생각을 어서 바꾸세."

신세호도 송수익 못지않은 기세로 공박을 가하고 있었다. 송수익은 서로가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고 있었다.

"됐네, 이건 몇날 며칠 얘기한다고 될 일이 아니네. 자네와 나는 생각이 너무 다르니 말일세. 자네는 나라의 주인이 임금이고 백성들은 그 종이라고 생각하는 거고, 난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고 임금은 백성들을 위해 치정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의 차이일세. 그 생각의 차이는 내가 위병으로 나선 것과 자네가 의병으로 나서지 않은 것과의 차이 같은 것 아니겠나. 이 얘긴 이쯤 해서 덮어두세."

송수익이 스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참 자넨 별난 사람이야.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자네 말고 이 세상에 누가 또 있겠나."

신세호가 맥 빠져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 말하진 말게. 자네도 신문을 읽어온 사람이 그리 말하면 되나. 신문에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고, 나도 신문을 통해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나. 천에 하나, 만에 하나에 불과할 뿐인데 그런 소수의 생각을 주장한다면 세상이 달라지나?"

신세호는 입가에 비웃음을 물었다.

"그리 단정하지 말고 두고 보세. 세상은 달라지고 있는데 유생들의 몇 백 년 묵은 생각으로는 이 나라를 되찾기는 어려울 걸세. 자네가 마흔이 넘었으면 모르겠는데 이직도 젊은 나이니까 앞으로 넓게 생각해 보라는 말만은 꼭 당부하고 싶네. , 자네 신채호 라는 분 알지? 자네완 항렬이 같은 문중 아닌가. 그분이 우리보다 두세 살 많은데도 그 생각이 투철하게 앞서 있네. 그분한테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데 자네도 그분 글을 구해서 유심히 읽어보게나."

송수익이 나직한 말이었다.

", 신채호 그분 존중할 만한 분이지요. 그분이 재작년엔가 지으신 성웅 이순신이나 을지문덕 같은 책들은 특히나 소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야기책을 짓되 외적을 물리친 두 분 장수의 이야기를 지은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왜놈들을 물리치고 이 난세를 이겨나가는 데 있어 이순신 장군이나 을지문덕 장군 같은 분들을 본받아 모두가 분발케 하고 또 우리 동포의 거룩함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 아닌지요."

그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임병서가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옳습니다. 그분은 책을 짓는 것으로 또 다른 의병싸움을 하시는 거지요."

송수익의 대꾸였다.

", 그렇군요. 저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맞습니다, 글이라고 다 똑같은 글이 아닌데, 그분의 의병들의 용맹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글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 큰 깨달음입니다."

임병서는 깊은 생각이 담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 사람이 정신이 바로 서지 않고서야 행동도 올바르게 할 수 없는 법 아닙니까. 생각을 바로 갖게 하고 정신을 무장시키는 그런 책들의 힘이란 병사 얼마의 힘과 맞먹는다고 저울질할 수가 없는 법이지요. 그러니 그런 책들은 어른들이 읽고 말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읽어 주는 것이 더 중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송수익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 옳은 밀씀입니다."

신세호는 두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이야기를 수긍하는 것이 마땅찮았다. 송수익과의 이야기가 아직도 미진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채호의 글은 가끔 읽어보았지만 유생답지 않은 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더구나 <성우 이순신>이나 <을지문덕> 같은 이야기책은 읽어보지 않아서 그들의 이야기에 끼여들 수가 없었다.

"아까 이야기가 다 안 끝나고 딴 이야기가 시작됐는데 말일세, 자넨 송형이 아까 한말들을 어찌 생각하나?"

얼굴이 희고 가녀리게 생긴 신세호가 그 나름의 고집스러움을 드러내며 말했다.

"? 아까 송형의 말?"

입병서가 자리를 고쳐 앉으며 신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네, 자네도 생각이 있을 것이니 자네 생각을 좀 말해 보게. 그게 어디 예사로 넘길 얘긴가."

얼굴 생김과는 달리 신세호의 눈빛은 차고 맵게 느껴졌다.

"글쎄 말이네...... 그걸 뭐라고 해야 하나. 그게 참 한마디로 하기가 어려운 문제인데, 유생의 입장에서 보면 송형의 말은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개화된 입장에서 보면 송형의 말이 타당하기도 하고 그런 것 아닌가."

임병서는 주저해가며 말했다.

"아니, 무슨 말이 그런가, 자넨 그럼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단 말인가?"

신세호의 얼굴빛이 변했다.

"뭐 그렇다기보다는...... 뭐랄까. 의병으로 나서서 목숨을 내걸고 싸워 온 송형의 입장에서는 그리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닐까 싶고......"

"그리 모호하게 말하지 말고 자네 생각을 말해 보라는 걸세, 자네 생각."

신세호는 짜증스러워 하며 입병서의 말허리를 잘랐다.

"사람 참 다급하기는...... 송형의 말을 듣기 전에는 상감께 향한 생각이 나도 자네와 다를 것이 없었지. 헌데. 그렇다고 송형의 말이 꼭 옳다는 것은 아니고, 그건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니까 좀 더 두고 생각해 봐야 될 것 같구먼 그래."

임병서는 신세호와 송수익의 눈치를 살피며 희미하게 웃었다.

"사람 참 답답하기는."

신세호는 마땅찮은 듯 혀를 찼다.

"사람의 생각이란 다 같을 수가 없는 일이니까 자네도 임형처럼 더 두고 생각해 보게. 우리가 더 왈가왈부한다고 상감이 어찌 될 리도 없고, 뺏긴 나라가 찾아질 리도 없으니 말이세. 밤도 깊어가는데 정작 해야 할 얘기가 뒤로 물러나 있네. 이제 그 얘기나 좀 했으면 좋겠네."

송수익은 의도적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밖에서는 밤이 깊어서야 날개 짓을 하는 올빼미의 울음소리가 먼 울림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 하실 말씀하시지요."

입병서가 앉음새를 고치며 두르마기 자락을 바로잡았다. 신세호는 끄으음 된소리를 입에 물며 눈을 꾹 감았다.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왜놈들과의 싸움은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 시작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형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혹시 어떤 복안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옥에서 풀려난 뒤로 무위도식하고 지냈을 뿐입니다. 처음 의병에 나섰을 때와는 형편이 많이 달라져서 왜놈들의 기세는 사방에 뻗치지 않은 데가 없고, 백성들은 기기 꺾일 대로 꺾여 있고, 뜻을 합칠 만한 사람들은 떠나가고 해서 어찌할 방도를 모르고 지낸 셈입니다."

임병서는 면구스러운 듯 겸연쩍은 듯 낮아지는 소리로 말했다.

", 그런 형편 능히 이해합니다. 합방이 되고서는 의병들이 그전처럼 다시 기세를 올릴 수 없는 연유가 바로 대형께서 지적하신 그런 사실들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왜놈들이 이 땅을 완전히 장악한 형편에서 의병들이 전처럼 다시 일어나기가 어렵고, 일어난다 해도 또 왜놈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안타까운 되풀이가 될 뿐입니다. 새로 싸움을 시작하되 새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 제가 곰곰이 생각한 바로는 의병들을 이끌고 만주 땅으로 건너가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됐습니다. 물론 이건 새로울 것 없는 생각입니다. 벌써 만주 땅으로 옮겨간 의병들이 적지 않고, 그 중에서도 홍범도부대의 활약상 같은 것을 전해 들으면서 새로운 투쟁 방도로 그것이 좋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된 것입니다. 그래 대형께 의논하고 싶었던 것은 대형께서는 의병을 모아 저와 함께 만주 땅으로 가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만주 땅으로요?"

임병서가 허리를 곧게 세우며 놀라움을 나타냈다.

"예에, 만주땅으로요."

송수 익은 분명한 목소리로 말을 되받으며 임병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입병서가 눈을 아래로 뜨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랫입술이 윗입술을 덮었다. 송수 익은 곰방대를 끌어당겼다. 그들 사이에서는 말이 중단되었다. 촛불이 약간씩 흔들리며 타고 있었다. 밖에서는 바람결에 가랑잎 구르는 소리들이 무슨 애절한 음조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만주 땅이면 수천 리 밖 타국 아닌가요? 다른 방도는 없을까요?"

임병서의 무거운 말이었다.

"타국이면서 타국 아닌 땅이 만주지요. 그게 최선의 방도라 여겨집니다."

송수익의 대답 또한 무거웠다.

"물이 있어야 고기가 살지요. 누구 도움으로 싸움을 합니까?"

임병서의 어두운 말이었다.

"만주땅에는 오래 전부터 동포들이 많이 삽니다. 새로 건너가는 사람들도 많구요."

송수익의 밝은 대답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또 말이 끊겼다. 솔바람소리가 먼 메아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소리였다.

"나라 안에서는 다른 방도가 없을까요? 무슨 방도가 있을 텐데요."

임병서의 의문스러운 말이었다.

"총을 들고 싸우는 한 없습니다. 결국 둠벙에 든 고기 골이지요."

송수익의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실은 저도 병자 찬자 형님을 모시고 어떤 일을 모색 중에 있습니다. 그 일도 나라의 독립을 위한 일이니 이 문제는 그 형님께 상의를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 병자 찬자 어른하고. 그러시면 그렇게 하셔야지요."

송수 익은 마음을 닫았다. 임병찬은 최익현 선생과 함께 대마도로 끌려가 옥살이를 하고 돌아온 분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철저한 유생이었다. 송수익은 새로 모색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의병활동은 어떻습니까."

임병서가 새삼스럽게 물었다.

"겨우 생명을 보존하며 허송세월이지요. 허송세월을 안 하고 제 값을 하려면 만주로 뜨는 길밖에 없습니다."

송수익의 말은 냉정할 만큼 단호했다. 다른 두 사람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야심한데 그만 유하시지요."

송수익이 몸을 일으켰다. 임병서와 신세호는 제각기 생각에 잠겨 앉아 있었다. 요도 이불도 없는 잠자리였다. 윗목에는 목침 네댓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요와 이불이 없는 대신 군불을 넉넉하게 때서 방안은 훈훈했다.

"스님들의 고행살이라 이것뿐입니다."

송수익이 두 사람 앞에 목침 하나씩을 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세 사람은 조금씩 간격을 두고 나란히 누웠다. 송수익의 손바닥바람이 촛불을 끄자 방안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송수익은 솔바람소리를 듣고 있었다. 멀리 불어가는 솔바람에 실려 마음은 북쪽으로만 가고 있었다. 임병서는 송수익을 생각하고 있었다. 북행길만이 길인 것인가, 다른 길은 또 없는가. 나라를 찾는 길......, 그 길은 한두 가지가 아닐 터인데...... 신세호도 송수익을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힘겨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부정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세 사람은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고 새벽 목탁소리와 함께 잠자리를 거두고 일어났다. 송수익을 따라 그들은 개울가로 가서 낯을 씻었다.

"물속은 벌써 겨울이군."

신세호가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인간사 유심에 세월은 무심하네."

송수익이 한숨을 쉬듯 대꾸했다.

"자넨 언제 북행길을 잡으려나?"

"아직 다급하지 않네.

"자네 너무 곧게만 생각하는 것 아닌가?"

"글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너무 곧으면 부러지네."

"그런가? 부러지지 않고 구부러진다고 될 일인가?"

"그간에 수없이 부러지지 않았나. 그래서 안됐으면 구부러지는 게 옳지 않은가?"

", 수없이 부러져서도 안될 일이 구부러져서 될 리가 있겠나."

"그러나 하루 이틀로 될 일이 아니네. 구부러져서 다시 곧아질 때를 기다려야지. 가망 없이 부러지기만 하는 건 능사가 아닐세."

"자네다운 여유고 언변이네 그려. 구부러져 허송하다 보면 구부러진 그대로 굳어지고 마네. 그건 상대방이 바라는 것임을 잊지 말게. 상대방은 꾀와 총검을 함께 가진 교활하고 흉악한 도적떼란 말일세."

거기서 말이 끊겼다.

"대형께서는 북행이 나라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절로 발길을 돌리며 입병서가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

"글쎄요, 유일하다기보다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차선의 길도 있다는 말씀인데. 차선을 택해 보시는 게 어떤가요?"

"차선은 최선의 보조일 뿐입니다. 최선을 두고 차선을 택하는 건 옳은 순서가 아니지요."

"권속들도 생각하셔야지요."

"그거야 의병으로 나설 때 진작 생각을 끝낸 문제가 아니던가요?"

임병서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신세호와 임병서는 아침을 먹고 곧 절을 떠났다. 송수익은 낙엽이 떨어지는 길로 멀어져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앞뒤에 서 서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의 길은 서로 같지 않았다. 한 가지 문제를 놓고 세 사람이 각기 다른 길, 그렇지만 최종적으로 옳은 길은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셋 다 미로를 앞에 두고 있다고 송수익은 생각하고 있었다.

신세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신채호가 쓴 <성웅 이순신><을지문덕>을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문관에서 발간한 <십전총서>중에 들어 있는 그 책은 구할 수가 없었다. 책 종류를 가리지 않고 값이 모두 10전씩이라서 <십전총서>였다.

"모르겠구만이라우. 그 두 책언 헌병덜헌티 싹 뺏게부렀응게요."

장터에 책들을 펼쳐놓고 앉아 있는 책장수의 퉁명스러운 대꾸였다. 신채호가 지은 그 이야기들이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고 하여 총독부에서 압수령을 내렸다는 것을 신세호는 뒤늦게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각급 학교에서 조선인들이 지은 교과서가 몰수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신세호로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였다. 신세호는 총독부의 그런 처사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대방은 꾀와 총검을 함께 기진 교활하고 흉악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책을 압수하거나 교과서까지 몰수한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총검으로 나라를 빼앗은 왜놈들은 재빠르게 꾀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꾀는 생각할수록 무서웠다. 왜놈들의 신문을 저희들 마음대로 만드는 것은 조선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려는 것이었고, 이야기책이나 교과서를 없애는 것은 조선 사람들의 정신마저 빼앗으려는 흉계였다.

신세호는 이런 깨달음과 함께 나는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살아왔는가 하는 생각에 부딪쳤다. 송수익이나 입병서가 사람들을 이끌고 의병으로 나서고, 의병들이 산지사방에서 일어나 왜놈들과 싸우고, 왜놈들의 토벌로 의병들의 기세가 꺾이면서 나라를 빼앗기게 된 그 격랑의 사월 동안 무엇을 했던가. 나름대로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고 여러 가지 괴로움에 시달렸었다. 나라가 태평하기를 빌고, 왜놈들이 망하기를 고대했었다. 마음이 걱정과 시름으로 차서 하루도 편히 보내본 날이 없었다. 그러나 나라는 결국 빼앗기고 말았다. 송수익의 생각과 언변대로 냉정하게 따지자면 자신은 구경꾼이었을 뿐이고 방관자에 지나지 않았다. 고작 한 일이 있다면 무거운 마음으로 한서를 뒤적거리는 나날 속에서 자식 둘을 더 낳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상감을 거침없이 질타해대는 송수익의 말이 당장 듣기에 고깝기는 했어도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틀린 말도 아니었다. 송수 익은 어렸을 때부터 고집이 센 편이고 간담이 큰 편이었다. 그러나 착실하게 진서를 읽고 글재주도 꽤나 갖춘 그에게서 무인의 기질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남보다 먼저 의병에 나섰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새로운 사상이라는 것이었다. 거침없이 상투를 잘라 버리면서 그렇게 생각이 달라진 송수익을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송수익보다 이해하기 더 이해하기 어렵고 곤란한 것이 신채호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가 성균관 박사로 골수유생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가 성균관 박사까지 된 골수유생의 머리에 어떻게 새로운 생각이 비집고 들 틈이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유생의 생각을 새 생각으로 바꿀 수 있었을까. 그런 변화는 자신의 상상으로서는 가능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신채호 같은 사람이 잘못 판단하거나 경솔해서 그렇게 생각을 바꿀 리는 없었다. 그분은 백성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해서 왜놈들을 몰아내는 데 힘을 뭉치게 하려고 이야기책을 짓기는 했어도 아직 송수익처럼 노골적으로 상감을 묵살하거나 죄인시하는 글은 쓰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합방이 되자. 그분은 나라를 등지고 북쪽으로 떠났다는 풍문이었다. 송수익의 북행 결심도 그런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처자식을 버려둔 채 단행하는 행장들이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나도 무슨 결심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신세호는 날마다 밤이 너무 길었다.

"무신 심려가 있으신 가요."

밥상을 내갈 때마다 아내가 조심스럽게 묻고는 했다.

"아니오, 밥맛이 좀 없어서......"

신세호는 아내의 눈길을 피하고는 했다. 밤이면 자신도 몇 번이고 행장을 꾸리고 나서면서도 날이 새면 그 마음은 허물어지고는 했다. 밤사이에 죽었던 의문들이 날이 밝으면서 되살아나고는 했던 것이다. 신세호는 며칠 동안 수소문하고 다녀 신채호의 이야기책들을 가까스로 구하게 되었다. 그는 며칠에 걸쳐 그 책들을 열성으로 탐독했다. 그 영웅전들을 신채호라는 사람이 왜 굳이 썼는지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래, 나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신세호는 어떤 깨달음으로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비록 북행은 하지 못하더라도 능력으로 그 일은 충분히 해낼 수 있을 수 같았던 것이다.

 

 

23.검은 파도

기름진 땅에서 햇빛을 풍족하게 받으며 맘껏 자란 사탕수수는 마치 키 큰 나무 같았다. 사람 키 두길 높이로 웃자란 키에 한팔 길이의 긴 잎들을 치렁치렁 달고 있는 사탕수수는 싱싱하게 돋아 오르는 진초록 색이었다. 키가 큰 만큼 굵은 줄기는 대나무처럼 곧게 뻗어 있었다. 그런 사탕수수는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긴 잎들이 서로 얼크러지고 설크러지며 촘촘하게 밀집되어 있었다. 길고 억센 잎들이 어찌나 무성하게 얽혀있는지 몇 걸음도 헤집고 들어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밀집된 사탕수수들이 십리고 이십리고 질펀하게 펼쳐져 있었다. 끝이 아슴푸레하게 보일 정도로 넓고 넓은 사탕수수밭은 그대로 초록빛 바다였다. 그 초록빛 싱그러운 바다는 벼들이 싱싱하게 자라난 8월의 들판과 흡사했다. 그러나 짙은 초록빛과 아득하게 넓은 것만 닮았을 뿐 그 전체적인 감도는 같지가 않았다. 벼들이 가득한 들판이 포근하고 아늑하고 보드라운 느낌이 든다면 사탕수수들이 질펀한 벌판은 두껍고 묵직하고 거칠거칠한 느낌을 주었다. 바람이 불면 벼들은 소리 없이 잔물결을 이루는데 사탕수수들은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큰 물결을 이루었다. 바람을 탄 사탕수수는 잎들이 서로 몸을 부비대며 서걱거리는 소리들은 마치 대지의 읊조림처럼 신비스러웠고, 큰 물결을 짓는 수많은 잎들이 햇빛을 되쏘아내 초록빛 벌판은 눈부시게 현란했다. 그 넓은 벌판을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냈다는 것은 얼핏 상상하기도 어렵고 믿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광활한 초록빛 발판 사이사이로 핏빛으로 붉은 길들이 곧게 뚫려 있었고, 그 길로 연장을 든 사람들이 작은 모습으로 오가는 것을 보게 되면 그제서야 그 벌판이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와이의 붉은 땅은 사탕수수들의 초록빛으로 더욱 선연한 핏빛으로 돋보였고, 사탕수수들은 땅의 붉은색에 대비되어 더욱 싱싱한 초록빛을 띄었다. 검붉을 정도로 진한 붉은 땅에 뿌리발을 한 사탕수수가 붉은 모습이 아니라 정반대의 진초록 빛으로 치장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붉은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끌며 하루 일을 마치고 막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지쳐서 발걸음이 칙칙 끌리고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보자기를 손에 늘어뜨려 들거나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머리에 올리고 있기도 했다. 그 보자기는 일할 때 눈만 남기고 얼굴을 감싸는 것이었다. 사탕수수 잎들이 억세고 날카로워 자칫 잘못하면 살을 찢어대서 보자기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보자기를 쓴다고 해도 잎에 찢기고 줄기에 찔려 얼굴 한두 군데에 흉이 안 난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얼굴은 손에 비하면 성한 편이었다. 보자기로 감쌀 수 없는 손은 흉터투성이였고, 흉터 위에 또 실피가 맺히는 상처가 쉴새없이 나고 있었다. 손바닥은 연장을 다루느라고 마디마디에 못이 박이고, 손등은 사탕수수의 잎과 줄기에 찢기고 긁혀 흉터와 상처가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그들의 손이 유별나게 두껍고 큰 것은 어려서부터 힘든 농사일을 하다 보니 기형적으로 변한 것이었다.

그들이 막사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먼저 돌아온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들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이 금방 눈에 띄었다. 손에 종이를 들고 있는 두 사람은 농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양복 차림이었던 것이다.

"어쩐 양복쟁이덜이여?"

남용석이 방영근을 보며 물었다.

"글씨, 잘 모를 일이시."

방영근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람들이 양복차림의 두 사람을 향해 무슨 말들인가를 해대고 있었다. 그 왁자한 소리와 삿대질을 해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분 좋은 일 같지는 않았다. 방영근 일행은 자연히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뭐야, 왜놈들이 뭔데 나서서 간섭이야, 간섭이!"

한 남자의 외침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놈들, 몰매를 쳐야겠어!"

다른 남자가 소리쳤다. 그 말에 맞추듯 사람들이 양복 입은 두 사람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왜들 이러시오, 왜들."

양복 입은 한 남자가 뒤로 물러서며 외친 말이었다. 그 말은 조선말이었다.

"저 못된 놈부터 죽여라!"

"맞아, 왜놈한테 붙어먹는 저런 놈부터 없애야 돼!"

"죽여라, 죽여!"

어떤 사람이 양복 입은 사람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것이 신호이거나 한 듯 사람들이 와아 소리치며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어쩐 왜놈이까?"

남용석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인구조사란 것 나왔는갑네. 얼렁 가서 말기세."

방영근이 남용석의 팔을 잡아끌었다.

"항께 몰매 치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아, 맘이야 그렇지만 그러다가 왜놈 죽이면 어찌 될라고? 얼렁 뛰소."

방영근에게 끌려 남용석이 뛰기 시작했다.

"고만 허시오, 고만. 이러다가 왜놈 죽이면 우리도 탈 만내요. "

방영근은 뒤엉킨 사람들을 헤집고 들며 큰소리로 외쳤다.

"조선 사람덜 맛 따끔허니 뵈였으먼 됐소. 그만덜 헙시다. "

남용석도 목청을 돋우며 사람들을 뜯어말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화가 받쳐 있으면서도 물러섰다. 두 양복쟁이는 붉은 흙바닥에 나뒹굴어져 있었다. 두 사람의 양복은 흙투성이였고, 주먹질당한 얼굴이며 잡아 뜯긴 머리카락이며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한 남자는 코피가 터져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더 맞기 전에 얼렁 가시오. "

방영근은 발로 땅을 구르며 외쳤다. 두 남자는 후다닥 몸을 일으키더니 흩어진 종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앞을 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놈들아, 발바닥에서 불나겠다."

", 불알에서 딸랑딸랑 종소리 나네."

"어허허허.... "

사람들은 달아나고 있는 두 양복쟁이를 바라보며 속 시원하게 웃어대고 있었다. 아까부터 루나 둘이 멀찍하게 떨어져 그들이 벌이는 일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동양인들끼리 벌이는 주먹다툼을 그들은 속편하게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왜놈 앞장서서 다니는 조선 놈은 어찌 돼먹은 종자야?"

"어찌되기는 뭘 어찌 돼. 몸 편하게 먹고 살자고 저 짓이지."

"저런 못된 인종들은 쳐 죽여야 하는데 괜히 살려 보낸 것 아닌가."

"두고 보소, 저 짓해서 오래 몬살 끼니. 누구 손에 죽어도 죽을 기요."

사람들이 입을 모으고 있었다.

"저 왜놈이 인구조사란 것 나왔등가요?"

방영근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맞소, 영사관에서 나왔다고 합디다."

몸집 큰 남자가 대답하며 침을 내뱉었다. 몹시 언짢은 기색이었다.

"참 왜놈들 뻔뻔스런 행투 속 터져 못 볼 일이오. 미국 땅에서까지 우리 상전 노릇을 하여 들다니."

"그렁게 나라럴 뺏기덜 말았어야제. 우리 신세도 인지 팍팍허게 되야 부렀소."

남용석이 쓴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모여 섰던 사람들도 시무룩하고 어두운 얼굴들이 되며 막사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소식은 하와이에도 신속하게 전해졌다. 대한국민회 하와이지역 총회에서는 지체 없이 그 소식을 각 농장마다 알렸다. 그리고 91일에는 동포들을 모아 일본 성토와 궐기대회를 열었다.

우리는 대한의 국호와 국기를 영원히 보장한다.

우리 강토에서 왜적의 무리를 내쫓을 때까지 829일을 국치일로 선포한다.

우리는 왜적에 대한 적개심을 해마다 새롭게 한다.

우리는 왜적의 이해와 협동을 일절 거부한다.

우리는 반일운동을 자손만대에 유산처럼 남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고 왜적의 피를 가진 자를 멀리하고 우교를 단절한다.

우리는 세계만방에 왜적의 야비성을 누누이 비방하고 왜적과 대결할 실력을 배양한다.

그 대회에서 가결한 일곱 가지 투쟁방안이었다. 그 대회에는 하와이의 여러 섬에 거주하는 42백여 명의 동포 거의가 참석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 대회는 음울한 분위기였다. 그러면서도 뜨거운 열기가 넘쳐났다. 그건 슬픈 분노였다.

그 대회는 곧바로 일본영사관을 자극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영사관은 잔뜩 긴장해 있던 처지였다. 합방을 계기로 해외 조선인들을 철저하게 관할하라는 본국의 훈령을 받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와이에 있는 조선 사람들의 반일 궐기대회는 그들이 예상할 수 없도록 신속하게 열렸고 규모 또한 엄청났던 것이다. 영사관에서는 조선 사람들의 배일행위를 근절시킴과 동시에 관할권을 행사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첫째가 정보원의 확대와 강화였고, 둘째가 조선인들의 정확한 인구조사였다. 일본영사관에서 조선 사람들에 대한 인구조사를 실시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국민회에서는 그 조사에 응하지 말 것을 선전하고 나섰다. 그 맞불질에 일본영사관은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그 인구조사라는 것은 단순히 사람 수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었다. 개개인의 자세한 신상파악이 목적이었다. 그러니 한 사람, 한 사람이 입을 열지 않고서는 조사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사람들의 입을 열게 하려면 강압적인 무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미국 땅에서 일본영사관은 조선 사람들을 위협할 수 있는 무력을 갖출 도리가 없었다. 일본영사관에서는 농장노동자들보다는 시내에서 개인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부터 접촉했다. 그러나 그 조사에 입을 가볍게 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영사관에서는 농장으로 찾아들었다. 영사가 직원들을 대동하고 직접 나섰다. 아주 적극적인 홍보작전을 펼치자는 것이었다.

"에에 또 우리 대일본제국과 조선은 이제 사이좋게 살게 된 한나라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영사관에서는 타국에서 고생하시는 여러분들을 돕고 보호하고 관리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 형제로 살기 위해서는 인구조사가 꼭 필요합니다. 서로 돕고 보호하더라도 누가 누군지 알아야 돕고 보호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여러분들은 일본과 조선의 화합을 위해, 그리고 여러분들의 편안한 생활을 위해 인구조사에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에봐 농장에 찾아온 일본영사 아오게의 연설이었다.

"야 이 도적놈아! 나라를 강제로 뺏은 놈들이 무슨 뻔뻔한 소리냐."

어떤 사람이 주먹 쥔 필을 치뻗으며 외쳤다.

"혓바닥을 잡아 빼라!"

누군가가 응원을 보냈다.

"맞어, 어디다 대고 개 짖는 소리냐. 저놈들을 다 때려죽이자!"

어떤 사람이 소리치며 돌을 던졌다.

"와아- 죽여라, 죽여."

사람들이 한꺼번에 소리 지르며 그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돌멩이들이 마구 날아가기 시작했다. 일본영사는 혼비백산 달아나기 시작했다. 직원들도 영사를 에워싸며 도망질치고 있었다.

"저놈들 다리 작신 분질러라!"

"저놈덜 똥구녕에다 간짓대 박어라!"

사람들은 소리소리 지르고 돌을 던져대며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 일본영사가 줄행랑친 소문은 말이 보태지고 부풀어져 이 농장 저 농장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영사 아오게가 돌에 맞아 머리가 터졌다고 하는가 하면, 주먹다짐을 당해 코피를 흘리며 뺑소니를 쳤다고도 했다. 그 소문이 퍼진 다음부터 농장에는 낯모르는 조선 사람들이 가끔씩 나타났다. 그들은 어슬렁거리고 다니며 막사 안을 기웃거리기도 했고, 사람들에게 시답잖은 말을 걸다가 자취를 감추고는 했다. 처음에 그들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그저 일거리를 구하러 다니는 게으름뱅이 실업자겠거니 생각했다. 농장의 강제계약기간이 끝난 다음부터 그런 실업자는 부쩍 늘어났던 것이다. 고된 농장일은 하기 싫고, 편한 일거리는 쉽게 잡히지 않고, 게으른 사람은 실업자로 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게 되면 다시 농장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게으른 실업자가 아니라 일본영사관의 끄나풀인 것이 밝혀진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떤 사람이 국민회의 서류를 훔쳐내다가 붙들린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자가 훔쳐낸 서류가 회원들 명부였다. 그 명부는 일본영사관이 필요로 하는 인구조사와 비슷하게 꾸며져 있었던 것이다. 국민회 간부들은 그자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이름이 뭔가."

"최에......순용입니다."

"직업은 뭔가."

"......"

"직업이 뭐냐니까."

"......없습니다."

"없는 게 아니라 왜놈 스파이지."

", 아닙니다, 아닙니다."

"잔소리 마라! 그럼 직업도 없이 뭘 먹고 사나."

"......"

"이 서류 왜놈영사관에 넘기려고 훔친 거지? 영사관의 누가 시켰는지 대라."

"아닙니다, 아닙니다. 뭔지도 모르고 그냥 종이가 필요해서......"

"거짓말 마! 일부러 서랍을 뒤져 이 서류를 골라냈잖아."

"아닙니다. 그냥 책상 위에 있었습니다."

"이놈아, 뻔뻔한 거짓말 하지 말어. 이 서류는 책상에다 마구 굴리는 서류가 아냐. 이런 못된 놈, 너 당장 오늘 밤에 바다에 처넣기 전에 바른 대로 대. 한번만 더 거짓말하면 그땐 정말 숨통을 끊어놓고 말 거다. 대답해, 너 저걸 영사관에 넘기려고 했지!"

간부 하나가 최순용의 멱살을 조이며 다그쳤다.

", 살려주십시오.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최순용이 버둥거리며 내놓은 말이었다.

"저걸 영사관에 넘기려고 했지."

"......"

"언제부터 스파이 노릇 했나."

"저어...... 서너 달 됐습니다."

"왜놈들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게 조선 사람으로서 제일 못된 것이라는 걸 몰랐나!"

", 죽을 죄를 졌습니다. 마땅한 일자리는 없고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최순용은 눈물을 떨구었다.

"함께 그 짓 하는 사람이 누군지 대."

"없습니다, 저 혼잡니다."

"잔말 말고 어서 대라니까."

"참말입니다, 저 혼잡니다."

"열 번 죽어 마땅한 인종이군."

"선생님들, 한번만,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그 짓 안하겠습니다. 다시는 안하고 열심히 일해서 살겠습니다. 새사람이 되겠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최순용은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며 눈물을 흘렸다. 그 애걸 앞에 국민회 간부들은 미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같은 실수였고, 속죄를 하는 남자의 눈물을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최순용 씨,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짓 하지 마시오. 이곳 동포들이 고생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누가 있소. 우리가 한 덩어리로 똘똘 뭉쳐도 뺏긴 나라를 다시 찾기가 어려운데 그런 짓을 해서야 쓰겠소. 지난 잘못은 개심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갚도록 하시오."

최순용이 훈방되면서 들은 말이었다. 그런데 서너 주일이 지나 최순용은 칼을 맞고 죽었다. 그는 교회마다 돌아다니며 교인명부를 훔쳐내다가 죽은 것이었다. 그의 가슴에 칼을 꽂은 것은 이상린이란 사람이었다. 이상린은 최순용의 첩자행위 소문을 듣고 찾아다니다가 죽이게 된 것이었다. 그 사건은 쉬쉬하는 속에서 덮어졌다. 이상린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사건은 동포들 사이에서 소리 없는 바람이 되어 퍼져나갔다. 방영근은 그때 이상린이란 사람을 만나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었다. 그런데 자신은 오늘 최순용이와 똑같은 놈을 살려 보낸 일에 앞장선 것이 되어 영 마음이 께름칙했다. 왜놈을 죽이거나 중상을 입혀서는 이쪽도 화를 입게 될 것이기에 몰매치기를 말렸던 것인데 그 덕이 그만 조선 놈 염탐꾼에게로 다 돌아간 셈이었다. 최순용이 칼을 맞아 죽었는데도 또 똑같은 놈이 생겨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신 생각이여? 또 갈 가망 없어진 집 생각이여?"

남용석이 식당을 나서며 물었다.

"아니시, 아까 그 조선 놈얼 살려보낸 것이 영 찜찜허니 지랄 같구만."

", 그런 디넌 술 한 잔이 약이시. 가세, 나가 한잔 살랑게."

남용석이 눈을 찡긋해 보이며 어린애처럼 웃었다. 그도 언제부턴가 술 마시는 재미에 들려 있었다.

"술 마신 지 메칠이나 됐다고......"

방영근은 눈총을 쏘며 고개를 돌렸다.

"누가 자네 돈 쓰라등가, 나가 산당게로. 물어봤자 합방이요 가봤자 왜놈 종질인디 술이나 묵제 머허겄어."

남용석이 가락을 넣은 뒷말에 맞추듯 건들거리며 헤식게 웃었다.

"그 말 잠 그만 허소. 그것이 무신 신통헌 염불이라고 니나 나나 읊어 대니 원, 인자 듣기도 싫네."

방영근은 납용석에게 등을 돌린 채 담배를 뻑뻑 빨아댔다.

"기둘리소 기둘리소 쬐깐만 기둘리소. 이래도 한 평상 저래도 한 평상, 속상해서 한잔 묵고 기분 좋아 두잔 묵고, 고단헌 인생살이 스리슬슬 넘어가세......"

남용석은 누가 전라도사람 아니라고 할까봐 즉흥적으로 콧소리 섞은 가락에 신명을 실어 어깨를 덩실거리며 침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방영근은 물어봤자 합방이요 가봤자 왜놈 종질이라는 말을 되씹고 있었다. 그 말은 합방이 되면서 생겨나 무슨 노래처럼 사람들 입에 붙어 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경우 틀린 일에도 가망 없는 일에도 속상한 일에도 잘못된 일에도 멋쩍은 일에도 그저 그 말을 갖다 붙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은 그때마다 그럴듯한 변명으로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 말은 게으름을 피우는 데도 술을 마시는 데도 노름을 하는 데도 계집질을 하는 데도 모두 그럴싸한 변명거리가 되었다. 그 말은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물어봤자 합방이요 가봤자 왜놈 종질을 곱씹다보면 앞이 가로막히는 낙망과 끝없는 슬픔이 기슴을 축축하게 적시는 것이었다. 그 낙망과 슬픔이 말을 하는 쪽의 마음이나 듣는 쪽의 마음을 모두 허물고 눈물겹게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 요상허네. 요것이 어쩐 일이여. 돈이 어디 갔어, 내 돈!"

뒤에서 들린 다급한 소리였다. 방영근은 후딱 고개를 돌렸다.

"요것이 어떤 놈 짓거리여, 요것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남용석이 보퉁이의 옷가지들을 마구 흩뜨려대고 있었다. 방영근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돈이 남의 손을 탄 것이 분명했다. 어쩌자고 돈을 보퉁이에 두고 다녔는지 모를 일이었다.

"누구여, 내 돈에 손댄 놈이 누구여!"

남용석은 뒤집힌 눈으로 막사 안의 사람들을 노리며 부르짖었다. 사람들의 눈길은 모두 남용석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가지가지였다. 놀란 얼굴이 있는가 하면 어이없어 하는 얼굴도 있었고, 난처해하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멍한 얼굴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들 중에서 어떤 얼굴에도 도둑이라고 씌어 있지는 않았다.

"누구여, 내 돈에 손댄 놈 당장 나와, 당장!"

너무 소리를 질러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는 남용석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방영근은 난감했다. 흥분한 남용석은 앞뒤 없이 같은 막사 사람들을 도둑으로 몰고 있었다. 그건 안될 일이었다. 다른 막사 사람들도 자유롭게 오가는 생활이었다. 설령 돈을 훔쳐간 사람이 같은 막사 사람들 중에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순순히 나설 리가 없었다.

"이 사람아, 이래서넌 안 되마, 앉소, 앉어서 맘보톰 잡어."

방영근은 남용석을 붙들었다.

"내 돈 40달러 어떤 놈이 가지갔어, 어떤 놈이! "

남용석은 방영근을 뿌리치며 날뛰었다.

"이 사람아, 정신 채려. 우리 막사에넌 딴 막사 사람덜도 맘대로 오간단 말이시."

방영근이 남용석의 어깻죽지를 쳤다.

"머시라고!"

남용석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얼굴이 창백해지며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그때까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나타났다.

"보소 용석이, 우리덜 열이야 다 한 식군디 그런 못된 짓 헐 리가 있능가. 필시 딴 막사 사람이 헌 짓일 것이네. 40달러면 우리헌티 하늘 겉은 돈이제만 어찌겄능가. 한분 손탄 돈 찾을라는 것언 죽은 자석 붕알 맨지기네. 돈이야 나허고 갈라 쓰면 된게 맘 추스르소."

방영근은 간곡하게 말했다.

"아이고메, 사람 환장해 가심 터져 죽겄능거. 그 돈이 어쩐 돈이여, 피 보트고 살 깎아낸 모질고 모진 돈 아니냔 말이여. 그런 돈얼 도적질 헌 놈언 지에미허고 붙어묵다가 좆대감지럴 못 빼고 뒤질 놈이여."

남용석은 돈을 잃어버린 분을 걸찍한 욕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맞네, 그런 놈언 오살육시럴 히서 뼉다구럴 따로 추릴 놈이시. 그 돈으로 노름을 허면 손꾸락이 썩어들 것이고, 그 돈으로 술타령을 허면 목구녕이 맥힐 것이고, 그 돈으로 색질을 허면 좆대감지에 음질이 붙어 석달 열흘 피고름을 쌀 것이시."

방영근은 한술 더 떠서 악담을 퍼대고 있었다. 그건 남용석을 위로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런 험악한 저주를 하는 것은 방영근의 진심이기도 했다. 돈을 훔쳐낸 놈이 결국은 노름을 하거나 술타령을 하거나 색질 하는 것으로 그 돈을 써 없앨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던 것이다.

"저 사람 얌전한 줄 알았더니 실은 그것이 아니네.

한 사람이 낮게 속삭였다.

"저 사람도 전라도사람 아닌가. 욕이야 조선팔도 중에서 전라도 당할 데가 없잖은가."

옆 사람이 귓속말을 했다.

"어떤 놈이 돈을 훔쳤는지 몰라도 저 욕 들으면 당장 내놓고 말겠네."

"어쨌거나 큰일이네. 피나게 모은 남의 돈 훔쳐내 못된 짓 하는 데 쓰는 풍조가 생겨서야 어찌 살겠나. 서로 믿고 의지해도 살기가 힘드는데."

두 사람은 함께 한숨을 쉬었다.

"가세, 한잔 묵고 속 풀어야제."

방영근은 남용석의 팔을 끌었다.

"일어나게 나도 한잔 사겠네."

두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김칠성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이고 드런 놈에 팔자, 인자 거렁뱅이가 따로 없네."

남용석이 허탈한 한숨을 토해냈다. 세 사람은 막사를 나섰다. 처음의 강제노동기간이 끝나고 농장에서 다시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저녁시간은 자유로워졌다. 루나들도 그전과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어지간해서는 채찍을 휘두르지 않았고 욕도 함부로 내뱉지 않았다. 그건 노동자들을 위한 태도변화가 아니었다. 자기네들의 이익 때문이었다. 이제 채찍질을 당하고 욕을 먹어가며 일할 노동자가 없었다. 그런 횡포를 하면 그날로 다른 농장으로 옮겨가면 그만이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아무 농장에서나 환영이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부지런하게 일을 잘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어디나 마찬가지로 한 달에 15달러였다. 일본노동자들은 몸집이 작아 기운이 떨어지고 끈기가 모자랐다. 중국 노동자들은 기운은 그런대로 쓰나 행동이 굼뜨고 게을렀다. 조선인 다음으로 이주해 온 필리핀 노동자들은 기운도 보잘 것 없는데다 게으르면서도 성질이 거칠었다. 또한 일본노동자들과 중국노동자들은 곧잘 집단적인 저항을 감행했다. 특히 일본노동자들이 집단행동을 벌이면 으레 영사관이 뒤따라 움직였다. 필리핀노동자들은 일하는 요령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저희들끼리 쌈질이 잦았다. 그러나 조선노동자들은 기운을 잘 쓰고 부지런할 뿐만 아니라 집단행동으로 농장을 망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조선노동자들은 끈질기게 참고 견디면서 그야말로 황소처럼 일해 그런 대접이나마 받게 된 것이었다.1905년 이후 조선 사람들의 유입이 끊기고 하와이에 있던 사람들마저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게 되면서 그 값은 더욱 오르게 되었다.

"속상허는 것이야 어찌 말로 다 허겄능가. 그려도 다 잊어불소. 그것이 약이시."

방영근이 남용석의 어깨를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도적질이 생겨나는 것이 큰일이네. 주색잡기 패가망신이드라고 이리 맘들이 변해 가다가는 우리끼리도 살기 힘들어지고 농장에서 신용도 떨어지고 할 텐데........"

김칠성의 어두운 어조였다.

"주색잡기만이 아니고 아편쟁이도 있네. 내 돈도 어떤 노름꾼이나 아편쟁이 놈이 도적질헌 것일 기여. 다 망쪼 들어가는 판이구만, 빌어묵을!"

아직도 열기 받친 남용석의 말이었다.

"어쨌그나 그리되는 사람덜만 나무랠 일이 아니시. 나라 망헌 담보톰 부쩍 심해지고 있응게. 우리도 전보담 많이 달라지덜 안혔다고. 술도 자주 묵고 중국지집 년덜도 더러 찾아가고 말이시."

방영근이 침울하게 말했다.

"맞는 말이네. 나라라는 것이 뭔지 모르겠어. 나라가 성했을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딱 망했다고 하니까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사지에 맥이 풀리고 앞이 막막해지면서 살맛이 안 난다니까. 그러고 보니 나라가 큰 힘이었던 모양이라."

김칠성이 먼 바다 쪽으로 눈길을 보내며 쓸쓸한 느낌으로 말했다.

"타국에서 살수록 나라가 심이고 바람맥이 아니드라고. 나라가 망허게 되자 우리가 심 빠진 대신에 왜놈덜이 우리 앞이서 기세 피는 것이 다 머시간디.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우리 신세닝게."

방영근이 긴 한숨을 쉬었다. 세 사람은 더 말이 없이 회색빛 흐린 어둠살을 밟으며 걸었다. 어디선가 도마뱀들의 울음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도마뱀들은 어두워지면서 소리를 냈고 몸집 큰 두꺼비들은 새벽녘에 모습을 드러냈다. 방영근은 사림들의 마음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쯤부터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그랬듯 아마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지 못하게 되면서부터가 아닌가 싶었다. 새로운 돈벌이를 찾아가지 못하고 하와이에 완전히 갇히게 되자 사람들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기운에 끄려 중국 창녀촌에도 발길을 했다. 술로 마음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사람들은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노름에 손을 댔다. 그러다가 합방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 심하게 술을 마시고, 더 자주 계집질을 하고, 더 큰판으로 노름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들과 선이 닿아 아편에 빠지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은 허름한 중국집에 자리를 잡았다. 중국음식점은 시내 번화가의 고급에서부터 농장 부근의 싸구려까지 종류가 많았다. 조선노동자들은 술을 마시게 되면 거의가 농장 가까이 있는 중국음식점을 찾아들었다. 값이 싸고 술이 독해 취하기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음식점에 발길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음식이 매운맛 짠맛이 없이 게심심하고 덤덜큼한데다가 술마저 싱거워 전부터 별로 출입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합방을 하자 그나마 깨끗하게 발을 끊은 것이다. 그들은 궐기대회 때의 결의를 어김없이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다.

"자아 술 드세. 술 취해서 싹 잊어부러. 그간에 우리가 당해 온 고초에 비허먼 그것이야 암것도 아닝게."

방영근이 술잔을 들며 남용석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럼, 돈이야 또 벌면 그만이니까 맘 상하지 말아야지."

김칠성이 옆에서 거들며 술잔을 들었다.

"그려, 돈에 땀 찰까 무서와 보퉁이에 두고 댕긴 나가 미친놈이제."

남용석이 쓰고 떪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세 사람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독한 중국술이 목에 확 불을 질렀다.

"닌장맞을, 돈 없어진 것 잘도 알고 술맛이 달시."

남용석이 어이없는 얼굴로 헛웃음을 쳤다.

"많이 묵소. 내 돈이 자네 돈잉게."

방영근이 씩 웃으며 술잔을 건넸다.

"자네들 혹시 그 소문 들었나?"

김칠성이 입맛을 다시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방영근이 무슨 소문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그 파인애플농장 소문 말이네."

", 듣기넌 들었는디........"

방영근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대체 그 파인애플이란 것이 머시여?"

남용석이 뚱하게 물었다.

"나도 어디 본 일이 있는가. 말 듣기로는 과실의 한 종류인데, 달고 맛이 있어서 서양 사람들이 좋아한다더군."

김칠성이 매끈한 경기도 말로 대답했다.

"빌어묵을, 코 큰 서양 놈덜 묵으라고 또 우리 노란둥이덜이 골 빠지게 농새 짓는 것이로구만."

남용석이 퉁명스럽게 내쏘고는 술잔을 입에 대고 발딱 엎었다.

"새로 시작허는 파인애플농장에서 일꾼들을 빼갈려고 돈을 더 많이 주는 것이 틀림없는 일 아닌가?"

김칠성은 아무래도 그쪽에 구미가 당기는 눈치였다.

"소문이야 그런디, 일이 어쩔란지 아능가?"

방영근의 말이 침착했다.

"무슨 말인가?"

"무신 말이기넌, 코 큰 놈덜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제. 새로 시작허는 일인디, 한 달에 5달러를 더 주고넌 일얼 곱쟁이로 시키먼 어쩔 것이여."

", 맞네. 20달러를 주고 개간인지 지랄인지럴 시키먼 일이 꼭 그리 되네. 30달러를 받아도 개간일이야 헐 일이 아니제."

남용석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맞어, 그럴 수도 있겠구만......."

김칠성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꼭 개간만 말허는 것이 아니시. 파인애플농사라는 것이 먼지도 모르고 뎀베서는 안 된다. 그 말이시. 파인애플 농사라는 것이 거 멕시코 동포덜이 애묵고 있는 애니깽농사 같은 것이먼 어쩔 것이여. 여그넌 우리 땅이 아닝게 정신채려야 헌단 말이시."

방영근이 김칠성과 남용석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자네 말이 맞네. 코 큰 놈들이 우리가 어디가 예쁘다고 돈을 더 주겠는가. 알아볼 것은 알아봐야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김칠성의 눈에서는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하와이의 농장주 중에서는 사탕수수농사를 파인애플 농사로 바꾸려고 이미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남미 쪽에서 대량생산을 하는 바람에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사가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파인애플농사를 새로 시작하게 된 농장에서는 몸이 실하면서 말썽 없이 일 잘 하는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다. 그들의 구미에 당기는 건 조선노동자들 뿐이었다. 그래서 돈을 미끼로 조선 사람들을 낚으려고 그들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네들 우리 옆 바라크에 있는 충청도 씨름꾼이 맞선 본 얘기 들었나?"

김칠성이 기분을 바꾸려는 듯 새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얼굴에는 벌써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충청도 씨름꾼이라면 누구나 웃기부터 하는 사람이었다.

"그 미런헌 물건이 결국 맞선을 봤는갑네? 여자 앞이서 또 방구나 뿡뿡 꿔댄 것 아니여?"

술기운이 도는 남용석이 관심을 드러냈다.

"조선사람 체면이 있는데 방구야 아무데서나 뀌나. 그 사람이 말이야, 루나를 업어치기를 해서 꼼작을 못하게 만든 것처럼 아주 야무진 한마디로 맞선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니까."

술기운으로 얼굴이 불콰해진 김칠 성이 히물히물 웃었다.

"그 미런헌 물건이 무신 야무진 소리럴 헐 것이 있었을랑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남용석의 얼굴이 의아스러워하고 있었다.

"들어보소. 하와이 여자는 그 사람을 보자마자 결혼을 하자고 덤볐다는 거야. 허나 그 사람은 애초에 토종여자하고는 혼인할 맘이 없이 루나가 졸라대니까 어쩔 수 없이 끌려 나간 판 아닌가. 헌데 여자가 덤비니 야단나지 않았나. 그래 한다는 소리가 어쨌는고 하니, 나는 힘이 세서 일은 남 두 몫을 하는데 실은 고자다. 기운이 센 것도 고자라서 그런다고 했다지 않나. 그러니 맞선이 어찌 됐겠어."

김칠성이 키들키들 웃었고, 방영근이 빙긋이 웃고 있었다.

"화아, 그 미런헌 물건이 어디서 그런 꾀가 났을까? 아조 똑똑허시."

남용석은 놀랐다는 듯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었다.

"그담에 한 말이 더 재미있네. 그 여자 인물은 별로 볼 것이 없는데 젖통은 어찌나 큰지 풍년 박덩이 두 개가 달린 것만하더라네. 그 큰 젖통을 보자 맘이 동해 아랫것이 불끈 성을 내는데 환장하겠더라지. 농장까지 돌아오는데도 그 놈이 가라앉지 않아 주머니에 손을 넣어 붙들고 오느라고 혼이 났다는 거야. 농장에 돌아오자마자 뒷간에 가서 용두질을 두 번이나 쳐서 그놈을 겨우 달랬다니, 그런 물건을 가지고 고자라고 거짓말을 했으니 그 맘이 어쨌겠어."

방영근도 남용석도 한참이나 소리 내서 웃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충청도 씨름꾼이면서 방귀대장이란 별명을 가진 그 사람의 이런 저런 모습이 선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농장 주인들이 우리를 토종여자들하고 억지로 혼인 시킬라는 것도 틀려먹은 수작이야."

김칠성이 불쑥 말했다. 그의 맑은 웃음은 쓰게 변해 있었다.

"그 잡새끼덜이 우리럴 천시히서 하와이 지집허고나 붙어묵어라 그것이제. 개자식덜, 중매럴 슬라먼 즈그덜 흰둥이 지집헌티나 슬 일이제."

남용석이 담배연기를 훅 내뿜었다.

", 토종여자헌티 중매스는 것도 고마와허소. 그놈들이 매긴 등급으로 치자면 하와이 토종덜이 우리보담 한참 위니께."

방영근이 떫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그놈의 등급이란 것 도대체 어떤 놈들이 매긴 것인가. 목욕탕 얘길 들으면 영 재수가 없어."

김칠성이 꽁초를 잉끄리며 역정을 냈다.

"백인 놈덜이 즈그덜 맘대로 지어낸 것이제 어째. 그려도 우리 뒤에 필리핀 놈덜이 있응게 그리 속상해허덜 말소."

남용석이 술기운 밴 눈을 껌벅거렸다.

"이 사람이 그간에 고향엘 갔다 왔나, 밤낮 잠만 자고 살았나. , 합방이 된 담부터 필리핀 놈들하고 우리하고 순서가 뒤바뀐 걸 모르나. 우리가 제일 꽁지네, 꽁지."

김칠성이 화난 얼굴로 목청을 높였고,

"머시여!"

남용석이 놀라며 곧바로 앉았다.

"놀래고 말고 헐 것 없네. 왜놈덜 종놈이 됐다고 그리 된 것잉게 당연지사 아니라고."

방영근이 술잔을 비우고 얼굴울 잔뜩 찡그렸다. 그 구겨진 얼굴이 술의 독기 때문인지 하와이에 사는 인종들 중에서 제일 멸시를 당하고 있는 것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목욕탕 이야기란 이랬다. 어느 해 하와이에 가뭄이 심하게 들어 세숫물도 아끼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자니 목욕을 마음대로 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탕의 목욕물로 여러 사람이 목욕을 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첫 번째로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은 영국계 사람이고 두 번째가 프랑스계 사람이고 세 번째가 러시아계 사람이고 네 번째가 독일계 사람이고 다섯 번째가 이태리와 그 외의 유럽 사람들이었다. 여기까지가 탕에 들어앉을 수 있는 순서였고 그 다음부터는 그나마 탕 안에는 발도 넣지 못한 채 뗏국물을 떠서 쓰도록 되어 있었다. 탕을 더럽힌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여섯 번째가 흑인이었고 일곱 번째가 하와이사람이었고 여덟 번째가 일본사람이었고 아홉 번째가 중국 사람이었고 열 번째가 조선 사람이었고 열한 번째가 필리핀사람이었다. 그런데 합방이 되면서 조선 사람이 열한 번째로 밀려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천시 당할수록 하와이 여자들하고는 혼인하지 말아야 해. 그래야 농장주인 놈들이 우리 무서운 것 알지."

김칠성이 입을 야무지게 훔쳤다.

"그 씨름꾼이 그런 꾀럴내서 피했는디 다른 사람덜이야 걱정 안해도 될 것이네."

방영근이 술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술잔에 어리는 얼굴을 보고 있었다. 수줍게 배시시 웃고 있는 오월이의 동그스름한 얼굴이었다. 혼인 이야기가 오가자 떠오른 얼굴이었다. 독신인 젊은 노동자들의 주색잡기는 그대로 노동력 저하로 나타났다. 그리고 노름판은 빈번한 싸움판이 벌어지게 했다. 또한 거친 집단행동도 홀몸의 열기 탓이 컸다. 주색잡기를 막고 집단행동을 못하게 하는 족쇄로 농장주들이 생각해 낸 것이 원주민 여자들과 결혼을 시켜 가정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그 일차 신랑감으로 뽑힌 것이 기운 세면서도 좀 미련스럽게 보이는 충청도 씨름꾼이었다. 그는 처음 농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방귀를 뀌다가 채찍질을 당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몸집 큰 그는 채찍을 맞고도 금방 쓰러지지 않았다. 화가 난 루나는 채찍을 더 거칠게 휘둘렀다. 참다 못한 그는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루나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루나의 혁대를 붙드는가 싶더니 번개 치듯 땅바닥에 패대기를 치고 말았다. 루나는 신음을 토하며 버르적거릴 뿐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놈아, 방귀는 뀌라고 생긴 것이여."

그가 루나를 내려다보며 내뱉은 말이었다. 루나는 허리를 다쳐 병원으로 실려 갔고, 그 사건은 농장 주인에게까지 알려졌다. 농장 주인이 내린 심판은 방귀뀌는 사람들에 대한 구타 금지였다. 씨름꾼이었다는 그의 한바탕 업어치기 덕에 노동자들이 얻은 자유였다. 그런데 그는 또 농장주가 채우려는 족쇄에서 빠져나오는 새로운 공적을 세운 것이다.

"하와이 지집년덜도 다 미친년덜이여. 미친년덜이 즈그 사내새끼덜허고 붙어묵을 일이제 어째 우리 조선 사람덜헌티 붙을라고 환장이여, 환장이 그년덜이 이쁘기럴 혀, 말이 통허기럴 혀. 살만 띵띵허니 쪄갖고 게을르디 게을른 년덜이."

남용석의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모르는 소리 말어. 그것들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저희들이 게으르니까 편히 살자고 조선남자를 고르는 거라고. 조선남자들이 부지런해서 돈벌이 잘하겠다. 거기다가 연장 기운 짱짱하다는 소문까지 쫙퍼져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 아닌가."

김칠성이 풀린 눈으로 느물거리는 웃음을 입가에 물었다.

", 잡년덜, 즈그 조갑지 물텅물텅허고 헐렁헐렁헌 것 안 생각허고 조선남자 빳빳허고 짱짱헌 연장맛만 꼬시게 보고 살겄다는 것이여? 잡년덜, 사시장철 푹푹 찌는 더운 땅짐으로 퍼지고 늘어진 헐렁 보지 갖고 뻔뻔허고 낯짝 뚜겁게 뎀비는 심뽀 드럽네. 공짜로 줘도 그년덜 것 안 묵어."

남용석이 침을 퇴퇴 튕겼다.

"흐흐흐... 술기운이라고 거짓말은 말소. 공짜라면 나는 아이고 하느님 하겠네."

김칠성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공짜? 공짜............? , 참말로 공짜라면 왜년 것도 묵어야제. 돈 내고 그 짓거리 허는 것이 질로 아까운게."

남용석이 쓸쓸한 듯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영근은 남용석이 취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만 일어나야 될 시각이었다. 내일은 할 일이 많았다.

"훈련이 내일 밤 맞제?"

방영근이 김칠성에게 눈짓을 했다.

"맞네. 내일 밤 훈련 잘 받자면 그만 일어나야 되겠네. 자알 마셨구만."

김칠성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비틀거리며 앞서 걸어갔다.

"아니시, 술값언 나가 내네, 나가."

방영근도 비틀거리며 그 뒤를 쫓았다.

"걱정 말게, 내가 한잔 산 거야."

김칠성이 허리춤에서 돈을 꺼냈다.

"무신 소리여, 자네넌 담에 사소."

방영근이 완강하게 김칠성을 떠밀었다.

"이 사람아, 아무나 사면 어때."

김칠성이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 했다. 남용석은 뒤에서 두 사람의 실랑이를 넋놓고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방영근이 돈을 치르고 세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어떤 놈이여, 골통을 바숴놀팅게 당장에 나와. 그 돈40달러면 지집얼 사도 시무 번언 사고, 술얼 먹으면 서른 번언 묵고, 옷얼 사입어도 열 벌언 사입는다. 국민회에 기부허면 양반대접 받고, 30달러만 더 보태면 집에 가게 되는 돈이여 어떤 놈이여, 나와, 나와!"

남용석은 고개를 젖히고 소리소리 질러댔다. 그러다가 끄윽끄윽 울음을 터뜨렸다. 참고 참았던 분함과 허망함이 술기운과 함께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어허, 다 잊어불랑게."

방영근이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럼, 우리가 옆에 있잖은가."

김칠성이 다른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려, 그려........... 나가 빙신이여, 몸에 안 지닌 나가 빙신이여."

남용석이 어깨를 들먹이며 투박한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세 사람은 어둠 속을 걸으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들은 제각기 어둠 저편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난히 커 보이는 하와이의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하와이의 자연에는 계절감에 따른 변화나 애상이 없이 그저 풍성하고 싱싱함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애상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별이었다.

"우리는 언제까지 목총만 갖고 훈련을 하는 건가."

김칠성이 불평스러운 투로 말했다.

"기둘려야겄제, 인자 시작인디. 당장 총 살 돈이 어디 있겄어."

방영근의 한숨 섞인 대꾸였다. 그들이 목총을 메고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한 것이 열흘쯤 되었다. 각 농장마다 젊은 사람들을 모아 부대를 편성했던 것이다. 국민회에서 주동이 되었고, 노동자들 중에 섞여 있는 구 한국군 출신들이 교관으로 나서게 되었다. 일본 세에 밀려 배를 탄 군인들이 3백여 명이었던 것이다. 훈련은 하와이에서만 실시된 것이 아니었다. 클레어먼트에 한인 군사훈련반이 조직되었고 룸포크에 의용훈련대가, 캔자스시티에 소년병학원이 창설되었다. 군사훈련은 하루거리로 일주일에 세 번씩 저녁시간에 실시되었다. 부대편성을 받은 젊은이들은 농장노동의 고단함을 무릎써 가며 열성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보수를 받는 군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돈을 내고 있는 군인들이었다. 그들이 메고 있는 목총은 그들이 국민회에 낸 기부금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 사람들의 군사훈련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루나나 농장주들이었다. 밤의 군사훈련이 낮에 집단행동으로 나타날지도 모를 위험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내놓고 방해하지도 못했다. 일과가 끝난 다음의 자유시간에 하는 일인데다가, 잘못 방해를 하려고 들었다가는 민족감정을 다치게 되어 그야말로 집단행동을 야기시키게 될 판이었던 것이다. 농장주들은 그런 고민을 국민회에 알리게 되었다. 국민회에서는 그런 모든 문제는 국민회서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통보와 함께 협조를 부탁했다. 그리고 국민회 간부들은 각 농장을 돌며 정신교육을 곁들이게 되었다. 훈련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의 열성은 일요일에 교회를 나가는 것과는 비교가 안되게 적극적이었다. 목사들은 그동안 몇 년에 걸쳐 노동자들을 상대로 꾸준하게 전도를 해왔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반수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농촌 출신들에게는 예수교가 낯설었고, 젊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인도보다는 낮잠이 더 절실했고, 국민회의 기부금에다가 교회의 헌금까지 보태지면 그만큼 술값이 축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군사훈련이 시작되자 젊은이들은 다투어 목총을 메고 나섰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느님보다는 조국이 더 가까웠던 것이다.

하와이 여자들과의 결혼 문제는 계속 심심찮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성사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자꾸 맞선을 보이네 어쩌네 하다 보니 괜히 젊은 사람들 성욕만 자극하게 되어 중국인 사창가에 돈을 보태주고 있었다. 조선남자들은 하와이 여자하고만 혼인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 여자는 더 말할 것이 없었고 중국여자하고도 혼인이란 통하지 않았다. 오로지 조선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머리를 내저었다. 그 막무가내를 농장주들이나 루나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중매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조선남자들의 마음을 알게 된 농장주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국 국민회를 찾아갔다. 그들이 내놓은 방안은 조선여자를 데려오자는 것이었다. 그 묘방은 국민회의 구상과도 맞아 떨어졌다. 국민회에서는 합방을 계기로 조선 사람들이 크게 낙망하고 의기소침해 진 것을 알고 있었고, 그에 따른 방황이 방탕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을 걱정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신속하게 시작한 군사훈련을 통해서 정신교육을 시키고 있었지만 그건 근본적인 치유책이 될 수가 없었다. 해결의 묘책이 없던 차에 뜻밖에 농장주들에게서 그런 제안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여자들을 데려와 결혼을 시키게 되면 생활안정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동포들의 수가 늘어나 동포사회가 그만큼 튼튼하고 강해질 수가 있었다. 그건 바로 독립운동기지의 강화였던 것이다.

농장주들과 국민회 사이에서 논의 된 결론이 <사진결혼>이었다. 그 문제에 따른 모든 행정관계의 일은 농장주들이 해결하기로 했다. 국민회의 보증으로 결혼을 하러 오는 여자는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다는 결정이 곧 내려졌다. 하와이의 경제권은 농장주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농장생산을 위한 노동력 안정과 신장이라는 명분 앞에서 그런 결정이 쉽게 내려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사진결혼의 소문이 농장마다 퍼져나가면서 나이든 총각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고, 잊을 수 없는 고향 병을 더욱 도지게 했다. 그런데 여자들의 비자 없는 입국은 조선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혜가 아니었다. 농장주들은 그 방법을 일본, 중국, 필리핀 사람들에게도 확대 실시하게 했던 것이다. 사진관의 문턱이 닳아질 지경이 되는 가운데 최초의 조선 신붓감이 하와이에 도착하게 되었다. 국민회 회장 이대수가 시범을 보이듯 신붓감을 맞아들인 것이다. 전라도 처녀 최사라가 일본 배 지양환을 타고 호놀룰루 항구에 닿은 것은 1910122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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