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겨울 들녘
들녘의 겨울이 깊을 대로 깊어져 있었다. 끝없이 펼쳐져 나가다가 하늘과 맞닿으며 아슴푸레하게 지평선을 이루어내고 있는 들판은 진한 회색빛이었다. 마치도 눈을 품은 겨울하늘이 그래도 내려앉은 듯한 넓고 넓은 회색빛 들판에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벼 그루터기만 남은 들녘에는 사람의 모습 하나 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들녘은 더 쓸쓸하게 넓어 보였고 적막은 태고의 신비로움을 품고 사무치게 깊었다.
그 깊고 깊은 적막을 헤집으며 정연한 대오를 지은 기러기 떼들이 바다 쪽의 하늘 가장자리를 가끔씩 날아가고는 했다. 기러기들은 그 유연한 날갯짓에 맞추어 맑으면서도 서러운 음조로 끼륵끼륵 울었다. 그러나 그 소리들은 그들의 날갯짓이 허공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하듯이 들녘이 품은 적막에 실금도 내지 못했다. 적막에 빨려들어 여음도 남기지 못하는 그 소리들은 적막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어렴풋이 보여줄 뿐이었다.
들녘은 그 깊은 적막을 덮고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진회색이라서 잠도 회색빛일 듯싶은 광막한 들녘에서 맘껏 호기를 부리는 것은 북쪽에서 불어 닥치는 찬바람뿐이었다. 추위를 실어오는 찬바람은 허허로운 벌판에서 아무런 거칠 것이 없이 달음박질치고 휘돌고 맴돌았다. 그런데도 들녘은 그다지 황량하거나 살벌하지는 않았다.
드넓은 들녘에 드문드문 자리 잡은 야산들은 소의 앉음새처럼 듬직했고, 그 야산들을 바람막이해서 모여 앉은 집들이 오순도순 했고, 그 집들은 아침저녁으로 파아란 연기를 피워 올리고는 했던 것이다. 집집마다 파아란 연기들이 피어오르는 속에 개 짖는 소리가 멀리 울리고, 아이들 부르는 아낙네들의 정겨운 소리가 길게 여울져 퍼지는 때면 회색빛 들녘에는 생기가 돌고, 거침없이 활개치던 찬바람도 멈칫대는 것 같았다. 해거름이 되면서 한집 두 집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며칠째 추웠던 뒤끝을 짓듯이 흐린 하늘에서는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눈발이 날리는 속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마을들과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정경은 화평스럽기 그지없었다.
"방도 다 식고 했는디 불이나 쬐깨 때그라."
감골 댁의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 낮은 말에는 진한 시름이 묻어 있었다. 동생들의 해진 옷을 깁고 있던 보름이는 일감을 방구석으로 밀어놓고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지게문을 밖으로 밀며 보름이는 어머니를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머니를 보았다간 그대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어머니의 말에는 다른 뜻이 담겨져 있었다. 그 말을 감추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쓰리고 아플 것인지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음마, 눈이 오네!"
마루로 나선 보름이는 문득 중얼거렸다. 흩날리는 눈발을 보자 순간적으로 마음이 반짝하는 반가움이 솟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마음은 시무룩하고 무거워져 버렸다. 보름이는 짚신에 발을 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살이 느껴지는 하늘에서 눈송이들은 탐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송이들을 바라보며 보름이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것이 다 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부질없는 생각에 더 마음 무겁고 서러워지며 보름이는 부엌 문지방을 넘어섰다. 쌀독이 비어비린 것처럼 부엌 안도 썰렁하기만 했다. 보름이는 밥을 짓는 것처럼 솥뚜껑을 소리내서 열고 물동이에서 물을 세 바가지 퍼다 부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가 남자이기만 했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남자로 머슴질만 할 수 있어도 빈 솥에 불을 지펴 밥하는 시늉은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보름이는 짚단을 끌어다가 불을 지폈다. 짚단도 얼마 남이 있지 않았다. 온 식구가 이러고 사느니 차라리... 또 그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배 쫄쫄이 곯음서 면체면 헐라고 소두방 소리 나게 열었다 닫었다 허니라고 기운 더 파허겄네."
정분이가 부엌으로 들어서며 내뱉은 오기 받친 소리였다.
"아이고, 누가 들으먼 어쩔라고 그냐."
보름이가 동생을 보며 질색을 했다. 정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살강의 그릇들을 금이 가지 않을 만큼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게 하고 있었다. 밥을 끓이지 못하면서도 끼니때에 맞춰 연기를 피우거나 설거지소리를 내는 것은 그저 체면치레를 하자는 것만이 아니었다. 서로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신경 쓰지 않게 하려는 예절이었다. 밥 때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이웃들은 서로 죽이나마 끓이는 것이겠거니 생각했고,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으면 그 집이 굶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되었다. 어느 집이나 땔감보다는 끼닛거리가 먼저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게 되면 그 집은 벌써 사나흘은 굶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그 소식은 곧 가까운 이웃들에게 돌았고, 죽이나마 끓이고 있는 사람들은 보릿가루든 밀기울이든 한줌씩 추렴하는 마음을 모았다. 그런 이웃의 덕으로 연명을 해낸 사람은 그 고마움을 말로 표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바쁜 농사철에 일품으로 갚아나갔다.
"저녁도 굶기먼 대근이가 눈 뒤집을 것인디 싸래기 너물이라도 무치먼 어쩐가?"
"그리히서넌 안되는디... 겨울이 안직도 멀었응게..."
보름이는 커다란 바윗덩이를 떠미는 심정으로 힘겨웁고 괴롭게 동생의 말을 막아냈다.
"염병허고, 묵자것도 없는 눈만 저리 퍼붓으로 저렁고."
정분이는 괜한 날씨를 타박하고는 바가지로 찬물을 떠서 들이켰다. 보름이는 찬물을 마셔대는 동생을 막지 않았다. 동생은 점심을 굶은 허기만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의 불을 끄고 있었던 것이다. 시래기도 이제 몇드름 남아 있지 않았다. 동생의 말대로 시래기나물이나마 무칠 수 없는 것이 보름이는 언니로서 면목 없고 속 쓰릴 뿐이었다. 그러나 겨울준비는 어머니를 도와 힘이 닿은 데까지 다한 것이다. 솥전에 물방울이 굴러 내리기 시작했다. 보름이는 손에 쥐고 있던 한 움큼의 짚마저 아껴 뒤로 밀쳐놓으며 동생에게 일렀다.
"얼렁 사발 챙게라."
뜨거워진 물 한 사발씩을 마시는 것이 저녁밥이었다. 어두워지면서 눈은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머리에 눈꽃을 이고 남자들이 하나둘씩 사랑방으로 모여들었다.
"어허, 올해 농새가 풍년 들랑가 눈이 아조 푸지시."
왕방울 주성춘이 방문을 열며 방안 사람들에게 인사삼아 하는 말이었다. 그의 손에는 반쯤 짜나가고 있는 짚신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사랑방에 모이면서도 제각기 잔일거리를 가지고 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누구는 도끼자루를 다듬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망태기를 엮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많이 가져오는 일거리가 짚신 짜기였다. 짚신 짜기는 우선 자리를 넓게 차지하지 않았고, 짚신은 농사일이 시작되면서 농기구만큼 긴요한 물건이라서 겨울 동안에 미리미리 짜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눈이 자고 더 많이 오능감네?"
"밥이나 묵었능가?"
방안 사람들이 인사했다.
"이, 밥이야 배터지게 묵었제."
주성춘이 건트림을 해 보이며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의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 푸지게 와서 풍년 들먼 속터질 사람덜 많응게 내놓고 풍년 좋아허덜 못허게 생긴 시상이시."
손판석이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무신 소리여?"
지삼출이 눈을 껌벅거렸다.
"무신 소리기넌. 논 팔아묵은 사람덜 안 있능가. 그 사람덜이야 풍년들먼 들수록 속이 얼매나 씨리씨리허겄능가."
지삼출은 무심한 듯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어찌서 초라니가 안 오능고. 밥 굶고 누었는 거시 아닐랑가?"
주성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안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어허, 이놈으 눈에 노루고 퇴깽이고 심심찮이 저승질로 가겄네."
그때 문밖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허, 호랭이가 지 말 헝게 딱 오네그려."
손판석이 무릎을 쳤다.
"호랭이 지 말 혔으먼, 내 숭이라도 꼬시게 봤등 거 아니여? 글안해도 옴스로 귓속이 간질간질 해쌓등마."
초라니 임덕구가 방문을 열어젖히며 으름장 놓는 시늉을 했다. 눈을 뒤집어쓴 그는 무슨 그물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하이고, 밤일허다가 설사똥얼 지렸다등가, 닭다리 뜯다가 이빠지가 빠졌다등가, 무신 숭거리라도 있으먼 좋겄네."
누군가가 퉁을 놓았다.
"어쩐 그물이여?"
주성춘이 왕방울 눈을 더 크게 떴다.
"왕방울눈 뒀다가 멀혀? 척 보면 삼천리, 일어났다 허먼 삼만리제. 이리 눈 오지게 오넌 밤에 썩는 내 나는 사랑방서 씬 담배덜만 꼬실릴 챔이여? 우리 아까운 양석 돌라묵고 살찐 참새새끼덜 사냥 나서야제."
임덕구가 어떠냐는 듯 방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어허, 저 초라니가 살림꾼이랑게."
"어찌서 늦능고 혔드만."
"참새 꿉어 탁주 한잔, 조오체."
방안에는 금방 화기가 돌았다.
"참새새끼덜이 자울를라먼 안직도 멀었응게 앉기나 허소. 죽 묵은 배덜이나 꺼치고 실실 나서야 헝게로."
지삼출이 곰방대에 담배를 우겨넣으며 자리를 좁혀 앉았다. 눈이 오는 밤에 참새몰이는 제격이었다. 기름 자르르 흐르는 참새구이를 소금에 꾹꾹 찍어 차가운 막걸리 한 사발씩 쭈욱쭉 비우는 시원함이란 겨울 사랑방의 더할 수 없는 맛이었다. 얼음 잡힌 생두부에 배추김치를 쭉쭉 찢어 걸친 안주도 어금니 사이사이에 신침 흘러내리게 하는 맛이었지만 그래도 참새구이에는 당할 바가 아니었다. 참새몰이는 단순히 술타령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농사에 해만 끼치는 얄미운 것들을 없앤다는 뜻이 작용하고 있었다. 제비가 오는 것을 반기고 귀찮다는 생각 추호도 없이 해마다 제비집 밑에 똥 받침대를 해주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 일거양득인 참새몰이는 농부들이 겨울을 나면서 즐겁게 하는 일이었다.
"그런디 말이여, 금산사 미럭불이 통곡혔다넌 소문 들었능가덜?"
임덕구가 자리에 앉자마자 꺼낸 말이었다. 말 좋아하는 그의 입술에 침이 반드르르 발라져 있었다.
"또 그 무신 숭헌 소문이당가?"
아랫목의 나이든 축에서 물었다.
"야아, 다 못 들었능갑응게 이얘기허지라우. 그거이 긍게로 한 보름 전에 일이란디, 밤이 짚은 참에 요상시런 곡성이 자꼬 딛기드랑마요. 여자소리도 아니고 남자소리도 아닌 곡성에 놀래서 중덜이 다 잠얼 깼넌디, 잠얼 깨고도 무섬징 시로 중덜언 아무도 바깥으로 나거덜 못히서 벌벌 떨기만 혔다등마요. 그런디 그 곡성은 사흘 밤얼 내리 울림서 자꼬 커지드래여. 사흘
찌 되넌 밤에 가서야 주지시님이 알아냈넌디, 그 곡성언 미럭불이 운 거이라고 허드랑게요. 날이 새고 봉께 미럭불 얼굴에 눈물 흘른 자꾹도 있드랑마요."
이야기를 끝낸 임덕구의 얼굴에는 두려운 빛이 드러나 있었다.
"이 삼동에 은진미럭이 땀얼 흘렸다는 소문 들은 지가 얼매 안되넌디 금산사 미럭불이 사흘 밤이나 통곡얼 혔으먼 무신 큰탈이 나기넌 날 징조 아니라고. 시상이 큰일이시."
아랫목에 앉은 사람이 자리를 고치며 침통한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얼굴은 침울해져 있었다.
"그런디 말이시, 임진란 나기 전에도 그 미럭불이 곡성얼 냈다고 안그러등가."
손판석의 말이었다.
"이, 그랬다넌 말이 있제. 그적으 은진미럭도 땀얼 흘렸다고 허고."
누군가의 대꾸였다.
"좌우당간 왜놈덜이 저리 설레발얼 쳐대는 판굿인디 그 영험 많기로 소문난 미럭불덜이 어찌서 가만이 있겄어."
지삼출의 말이었다. 아무도 더는 말이 없었다. 흐린 관솔불빛으로 어둠침침한 방안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문풍지 떠는 소리가 유난스레 크게 울리고 있었다.
"무신 탈이 나는 것이야 그때 일이고 오늘 저녁에넌 참새새끼덜이나 사냥히얄 것 아니드라고?"
임덕구가 그물을 집어들며 방안의 우울한 분위기를 휘저었다.
"그리허세. 근심 걱정 미리 끌어댕게서 허먼 몸에 빙 되는 법잉게."
손판석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참새몰이를 나섰다. 어둠 속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눈을 맞으며 대밭을 찾아 잰걸음 질을 치기 시작했다.
"자네 저그 건너말 동식이허고 봉두가 일진회에 든 것 안가?"
손판석이 지삼출 옆으로 붙어서며 물었다.
"모른디. 언지 그랬는고?"
지삼출은 놀라면서 되물었다.
"한 열흘 됐는갑데."
"거그 들먼 못씬다는 거럴 몰랐능가?"
"이, 그 사람덜도 쉑인 것이등마."
"쉑인 것 알었으먼 얼릉 발얼 빼야제."
"자네 속편허시. 한분 발얼 딜에노먼 지맘대로 못헌디여."
"허허 그 사람덜 탈났네그랴."
"우리야 송 선상 덕에 재수좋게 피해 섰는디, 그리 속 모르고 탈 만낸 사람덜이 한둘이 아니시."
"그렁게 말이여. 그놈덜이 믹여살리는 것도 아닌디 대창 들고 따라댕기는 신세가 됐시니 다 큰탈이제."
"왜놈 앞잽이로 죄 짓는 것은 어디허고."
"그것이야 더 말할 거이 없제."
"왜놈덜, 간 빼묵을 놈덜이여."
"백여시가 따로 있간디. 아조 무선 시상이 됐잉게 정신채려야 헝마."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대밭 다 왔응게 두 패로 갈르드라고. 다 아는 일인디, 새럴 쫓일 때 꺼지넌 숨도 쉬덜 말고 소리 죽이드라고 잉."
임덕구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긴장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눈 오는 밤의 어둠은 진했다. 그러나 비 오는 밤의 어둠과는 달랐다. 비오는 밤의 어둠은 그냥 먹물일 뿐인데 눈 오는 밤의 어둠은 그 바닥에 희붐하고 어렴풋한 빛이 서려 있었다. 내려서 쌓이고 있는 눈빛에 밑바닥의 어둠이 삭고 있었다.
두 패로 갈린 그들은 발소리 죽여 가며 대밭으로 접근해 갔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만 어둠을 간질이고 있었다. 바람기는 별로 없는데도 대밭이 가까워지자 대나무 잎들이 서로 몸 부비며 서걱거리는 소리가 무슨 슬픈 흐느낌처럼 흐르고 있었다.
새몰이 쪽에 낀 지삼출은 대숲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찬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켰다. 대숲에 가까이 설 때마다 그는 전신이 팽팽해지는 긴장을 느끼고는 했다. 색깔 푸르른 대창을 꼬나들고 나섰던 그날의 가슴 뜨거움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대창이 싱싱하게 푸르른 만큼 적을 향해 나서는 마음은 핏빛으로 붉었었다. 흰옷 입은 농군들이 손에 손에 푸르른 대창을 꼬나 잡고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나아갈 때 무서움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새 세상을 향해 뻗쳐오르는 힘뿐이었다. 그런데 대창을 거꾸로 돌려 땅에 박고 나서 숨어 살게 된 다음부터 대숲이 우는 소리는 그때 죽어간 사람들의 울음소리로 들리게 되었다. 그 한 맺힌 혼령들이 대통 속을 집으로 삼고 대숲에 모여 사는 것만 같았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든 다음부터 그는 그 사실을 아주 믿어 버렸다.
대밭 저쪽에서 불빛이 반짝반짝 했다. 그물을 다 쳤다고 부싯돌을 치는 것이었다. 그 신호에 따라 세 사람은 대밭으로 뛰어들며 막대기로 대나무를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대밭에는 난데없는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나무 치는 소리, 얻어맞은 대나무가 흔들리며 잎들이 쓸리는 소리, 거칠게 몰아대는 사람들의 소리. 댓잎아래서 눈을 피하며 추운 잠을 자고 있던 참새들은 혼비백산하여 무작정 반대쪽으로 날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당황해서 일직선으로 날아가던 참새들은 주둥이부터 그물에 걸려 퍼득거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숲에서는 새로운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참새들이 짹짹거리고 푸득거리며 날기 시작한 것이다. 신바람이 난 세 사람은 더욱 거칠게 대나무들을 후려치며 새들을 몰아대고 있었다. 댓잎에 얹혔던 눈덩이들이 머리로 쏟아져 내리고 목덜미를 파고 들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저쪽에서 횃불이 두 개 밝혀졌다. 미리 준비했던 짚 묶음에 성냥을 그어댄 것이었다.
"얼렁얼렁 모가지 삐틀드라고, 다 잡어 놓고 놓치는디. 한 사람 앞이 열 마리썩언 묵게 될랑가 어쩔랑가."
임덕구가 신바람 나게 외쳐대고 있었다. 설을 고비로 추위가 고개를 떨구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초라한 설상을 조상 앞에 차려놓고 절을 올리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설을 쇠는 것으로 춥고 배고픈 겨울을 무사하게 나게 되었다고 안도하는 때문이었다. 설을 고비로 추위가 물러가는 것을 사람들이 감지하는 것은 피부의 촉감으로써가 아니었다. 그 확연한 느낌은 미각에서 비롯되었다. 땅에 묻은 김치를 꺼내보면 그 맛이 거짓말처럼 변해 있었다. 며칠 사이에 군내를 풍기는 김치는 땅김이 더워지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땅김이 더워지면 먹을 수 있는 싹이 돋을 날도 머지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설 다음에 오는 대보름을 반기는 것은 그때부터 농사절기가 시작되는 까닭이었다. 부자들이 장리쌀을 슬슬 풀어내는 것도 그 무렵부터였고, 서너 달만 어찌어찌 살아내면 푸성귀나마 흔해지는 철이 오게 되어 있었다.
동네마다 뒷산에서 달집을 태우며 달맞이를 하는 것은 묵은 액을 불사르고 새해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는 기원이었고, 동네끼리 총각들이 힘 모아 돌싸움을 벌이는 것은 미리 힘겨룸을 해서 풍년을 자기네가 이루겠다는 마음다짐이었다. 그런데 해충을 태워 없애는 아이들의 쥐불놀이야말로 본격적인 농사일 중의 하나였다. 자칫 잘못하면 아이들의 하잘것없는 불놀이로 비칠 그 쥐불놀이는 불장난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불놓기를 맡겨 놀잇감도 주고 농사일 한 가지를 해결하는 어른들의 오랜 슬기였다.
넓디나 넓은 들녘에서 이루어지는 쥐불놀이는 장관이었다. 쥐불놀이는 논둑의 마른풀을 태우는 것이 아니었다. 해충은 논둑의 풀섶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논의 벼 그루터기에도 숨어 있었다. 그래서 짚단을 묶어낸 다음 남은 짚 덤불을 논바닥에 깔아놓았다가 보름을 맞아 불지르면 알에서 깨어날 참인 해충은 해충대로 죽고, 그 재는 재대로 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논에 짚덤불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논이 많지 않아 가난한 사람들은 짚 덤불마저 다 걷어다 때며 겨울을 나야 했다. 그러니까 짚 덤불이 깔린 논들은 거의가 부잣집들의 논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누구의 논이든 가리지 않고 불을 놓았다. 보름날 밤의 넘쳐 휘들어진 달빛 아래 드넓은 들판 가득 너훌너훌 춤추며 일어나는 불길, 그것은 들이 넓은 곳에서 펼치는 보름날의 제일가는 잔치였다.
짚 덤불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아이들의 할 일이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정작 아이들이 오줌 질금질금하도록 신바람 나는 놀이는 그다음부터 시작되었다. 불길이 한 마지기 논에 다 번지며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은 이쪽 논두렁에서 저쪽 논두렁으로 불속을 가로질러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번만이 아니었다. 설을 쇠고 한 살 더 먹은 나이만큼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부스럼도 안 나고, 학질도 안 걸리고, 고뿔도 안 앓고, 꼬치도 제대로 여물어진다고 했다.
아이들은 두 주먹을 꼬옥 말아 쥐고, 숨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불길 속으로 내달아서는 건너편 논두렁에 올라서서 제각기 하나씩 보태지는 횟수를 외쳐대고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리고, 긴장과 신명이 범벅되어 있었다. 열한 살짜리인 감골 댁의 막내아들 대근이도 여러 아이들 사이에 섞여 불
길 속을 뛰고 있었다.
"일고옵!"
노두렁에 올라선 대근이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또 불길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대근이는 논 중간쯤을 달리다가 마주 달려오던 어떤 아이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두 아이는 우뚝 멈춰 섰다. 그러나 불길 속이었다. 뜨거운 데다가 금방 비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노린내가 풍겼다. 대근이와 그 아이는 질겁을 해서 다시 내닫기 시작했다.
불길 속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대근이는 논두렁에 쓰러지며 기침을 토하기 시작했다. 뛰기를 멈추는 바람에 연기를 들여마신 것이었다. 대근이는 눈물을 찔끔거려 가며 매운 기침을 계속했다.
"대근아, 대근아, 니 눈썹이고 머리고 다 꼬실라졌다. 똑 걸뱅이 꼴이여."
한 아이가 대근이를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대근이는 아까 불길이 확 끼쳐오며 노린내가 났던 것을 생각했다. 두 손바닥으로 얼른 얼굴을 훔치고 머리를 매만져보았다. 그러나 얼마나 심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근이는 덜컥 겁이 났다. 그리고 까닭 모르게 서러워졌다. 타죽었으면 어찌 됐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어머니와 누나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아이들한테 놀림당할 생각도 떠올랐다. 대근이는 그만 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은 연상 불길 속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대근이는 눈물 속으로 얼비치는 불길과 아이들을 보며 울고, 높아진 달을 올려다보며 울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대근이는 울면서도 아직 세 번이 더 남았다는 것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 마음은 나지 않았다. 대근이는 사타구니를 훔치고 내려다보며 새로운 울음을 추슬렀다. 세 번을 다 채우지 않아 꼬치가 제대로 여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거리 때문이었다.
들녘에 너훌너훌 번지는 불꽃 춤을 멀리 바라보며 당산나무 아래서나 타작마당에서 총각들이 벌이는 놀이는 따로 있었다. 그건 들돌들기였다. 열일곱 여덟 먹은 총각들이 어른들 앞에 모여섰다. 그들은 차례로 나서서 커다란 돌덩이를 불끈 들어올렸다. 그것을 머리 위에까지 받쳐 올려 등 뒤로 던져야 했다. 그 돌덩이는 쌀 한 섬 무게였다. 돌덩이를 거뜬하게 등 뒤로 내던진 총각들은 어른들이 떠주는 술 한 사발을 받아 마시며 치하를 들었다. 그건 뼈대 잡힌 장정의 여부를 따지는 시험이었고, 상일꾼이 될 수 있나 없나를 가리는 자격분류였고, 맞술을 마셔도 된다는 성인으로서의 인정이었다. 술 사발을 받은 총각들이 일등 신랑감으로 꼽히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동네끼리 벌이는 돌싸움이 단체 힘겨루기라면 들돌들기는 개인 힘겨루기였다. 들돌을 거뜬하게 들어 던지지 못하고서는 들녘에서 살아내기가 어려웠다.
당산나무 아래에는 30여 명의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커다란 돌덩이를 가운데 두고 그 사람들은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열서너 명으로 수가 적은 쪽이 들돌을 들어 올릴 총각들이었다.
"자아, 그리허먼 인자보톰 들돌들기럴 시작허겄넌디, 총각덜이 들어올리기 전에 기운 씬 어런덜 두엇이 먼첨 히보일팅게 총각덜언 자알 봐뒀다가 몸 상허지 안토록끔 혀!"
나이 제일 많은 강 영감이 앞으로 나서서 총각들에게 일렀다. 총각들은 낮게 대답을 하기도 했고, 고개를 약간 숙여 보이기도 했다.
"누가 먼첨 허겄능가? 판석이여, 삼출이여?"
강영감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네 먼첨 허소."
지삼출이 손판석의 등을 밀었다.
"그러세, 매도 먼첨 맞는 매가 낫당게."
손판석이 선뜻 앞으로 나섰다.
그는 돌덩이를 붙들고 약간 들었다가 놓았다. 힘을 모으는 것이었다. 당산나무 가지들 사이사이로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사람들은 숨소리를 멈추었다.
"으라아쳐쳐!"
외침과 함께 손판석이 돌덩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가슴께까지 치오른 돌덩이가 잠깐 멈추는가 싶더니 두 팔이 쭉 뻗치며 머리 위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돌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쿵 하고 둔중하게 올렸다.
"어허 참 자알혔다."
"씨언허게 자알헝마."
사람들이 입을 모으며 손뼉을 쳤다.
"담언 삼출이!"
강 영감이 손짓했다.
지삼출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손바닥에 번갈아 가며 침을 튀겼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돌덩이를 붙들었다.
"읏차라!"
그의 외치모가 함께 돌덩이가 그대로 머리 위로 솟겼다. 그리고 그의 등뒤로 떨어지며 쿵 소리를 냈다.
"저놈으 기운 잠 보소."
"쌀 두 섬 올리는 어깬디."
사람들이 다시 손뼉을 쳐댔다.
"자아, 잘덜 봤제? 이자보톰 총각덜이 시작이여. 누가 먼첨 헐티여.?"
총각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지신밟기를 끝낸 처녀들이 먼발치에서 당산나무 아래로 눈길을 모으고 있었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서부터 소작인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마음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소작을 떼이는 것이 아닐까, 좀 더 좋은 논을 얻어 부칠 수 없을까 하는 마음들로 지주네 집 문간을 얼씬거리고 마름을 찾아다니고 했다. 그러나 기왕에 소작을 부치고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약간은 느긋할 수 있었다. 그들에 비해 새로 소작을 얻어야 하는 사람들의 불안과 조바심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건 몇 년 전부터 새로 생겨나기 시작한 변화였다. 그전에는 소작을 떼이거나 작인이 바뀌는 일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더러 작인이 바뀌는 경우는 한정되어 있었다. 작인 집에서 무슨 변을 당해 큰 일손인 가장을 잃어버리게 되면 지주는 논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작인이 게을러서 수확이 표 나게 줄거나, 타작 때 눈속임을 하다 들키면 소작을 떼이게 되었다. 그런 경우가 아니고서는 소작은 계속 이어 부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논을 사들이게 되면서부터 소작인들이 자꾸만 새로 생겨나게 되었다. 논을 팔아먹은 사람들이 소작논을 구하려고 나서다보니 모든 소작인들은 서로가 불안감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요시다의 사무실 앞에는 날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가 논을 팔아넘기고 나서 소작을 얻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어이 보소, 농사비용허고 세금얼 작인헌티 물린다는 말이 참말이랑가?"
"그런감마."
"아니, 인자 와서 그거이 될 소리여? 논 사딜임서 머시라고 혔간디?"
"그렁게 말이시."
"아니, 떡 묵딧기 농사비용이고 세금이고 다 즈그덜이 물고 소작 내놓는다고 새가 닳게 이얘기 안혔다고?"
"그렁게 말이시."
"어허 이사람아, 답답히서 못살겄네. 자꼬 그렁게 말이시만 되씹지 말고 무신 속시언헌 말얼 잠 히보소."
"이사람아, 내 속도 시방 풋감 묵고 얹힌 거맨치로 깝깝허당게."
"말히서 머헌다요. 우리가 다 둘린 것잉게 입만 아프요."
다른 남자가 말을 받았다.
"우리럴 쉑였다고? 근다고 이리 당허고만 있어야 쓰겄소?"
"글안허면 어쩌겄소?"
"따지고 들어야 헐 것 아니겄소. 어찌서 한입으로 두말허냐 험스로 모다 하나가 돼서 따져야 헌당게라."
"다 따지고 대들고 혔어도 아무 소양이 없드라요."
"아무 소양이 없다니?"
"어허, 영판 답답허요 이. 소작 안 부치겄으면 그만두라고 배짱으로 나오는디 거그서넌 무신 말로 더 따지고 들랑게라? 나럴 쉑여묵었시니 내 논 물러도라 허고 돈얼 착 내놓기 전에야 그놈덜이 칼자리 쥔 것 아니겄소."
또다른 남자가 말을 받고 나섰다.
"하 이거 사람 환장헐 일이시."
처음의 남자가 발로 땅을 차며 고개를 젖혀 한숨을 토해냈다.
"인자 와서 아무리 속태와도 다 죽은 자석 붕알 맨지기고, 삼칠제가 반타작으로 벤허지 않은 거이나 다행으로 생각험스로 속상허덜 마시오."
"이 많은 사람덜이 왜놈 하나헌티 그리 둘림서도 당허기만 히서야 쓰겄소. 다 나서서 그놈 버르장머리럴 고쳐야제."
"아니, 시방 술취혀서 허는 소리다요 꿈꿈서 허는 소리다요? 오시다라는 놈이 어찌서 그리 씬 배짱으로 나오겄소? 그놈언 혼자가 아니라 뒤에는 든든헌 주재소럴 짊어지고 있응게 잘못 생각허덜 말드라고라."
두 번째로 말을 받았던 남자가 떫은 입맛을 다셨다.
"아이고, 사람 죽겄네!"
처음의 남자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새 날아가는 소리에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넌 허덜 말어. 아무도 말길 사람 없응게 삼칠제가 싫으먼 반타작허는 조선 지주덜 찾아가랑게. 우리야 당신 아니라도 소작 돌라넌 사람덜이 십리고 이십리고 줄얼슨 판이여."
요시다 옆에서 이동만이가 자신만만하게 하는 말이었다. 그가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는 삼칠제 조건 앞에서 소작논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그건 분명 조선 지주들이 하고 있는 반타작보다는 나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상답을 얻지 못하고 갯논을 소작하게 되는 사람들은 그대로 굶어죽은 판이었다.
"때리는 시엄니보담 말기는 시누가 더 밉드라고 요시다 그놈보담 더 미운 것이 이동만이 놈이랑게."
"말히서 멀혀. 그놈 놀아나넌 꼬라지럴 참음서 보자닝게 눈이 시어 봉사 되겄고 속에서 천불이 일어 피가 다 보트겄네."
"나잇살이나 처묵은 놈이 얼매나 살겄다고 그리 더럽게 나대고 그렁고?"
"나이도 나인디다가 명색이 양반이라넌 물건이 그 모양이랑게."
"하이고 양반 싸다. 똥구녁으로 바람 너서 배 터쳐 쥑일 놈."
"양반이란 것이 왜놈 똥구녁이나 핥아댐스로 권세 부리는 꼬라지 허고, 양반도 인자 상놈만도 못허게 밴헌당게."
"아, 옛적보톰 개 돼지만도 못헌 양반이 어디 한둘이간디? 예나 지금이나 인종 못된 짓 질로 잘허는 것이 다 양반덜 아니여?"
"맞는 말이시. 이동만이 그놈도 사람이 아니여"
"그런 놈이 바로 염병얼 내리 삼대럴 앓음서 땀 못 내고 뒤질 놈이제."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입을 맞추는 험담이었다. 그러나 이동만은 그런 험담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기세가 날로 승해 가기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세에 격을 맞추기라도 하듯 그의 살림살이도 기름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동만은 낮보다는 오히려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을 더 바쁘게 살고 있었다. 남들의 눈을 피해 가며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지무실 것인디 늦게 찾어와서... 얼릉 한말씸만 디리고 가겄구만이라우."
이동만 앞에 머리 조아리는 사람들은 잔뜩 기죽어 있게 마련이었다.
"야심허기넌 허시. 무신 말일랑가?"
다리를 꼬고 앉아 눈을 내리뜬 이동만은 양반의 지체에 어울리도록 거만하고 냉정했다.
"저그 머시냐... 지헌티 소작얼 상답으로 쬐깨 내래주십사 허고..."
"사앙답? 그거이 어디 나 맘대로 되는 일이간디..."
"아이고 어러신, 그거시야 어러신 맘묵기에 달린 것얼 시상이 다 아능마요. 누구헌티 줘도 줄 소작잉께 지헌티 내래주시먼..."
<어러신>이란 호칭을 들으며 이동만은 그 호칭에 걸맞게 끄음끄음 된 소리를 냈다. 그런 그의 근엄하고 묵직한 모습은 요시다 앞에서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럴 때면 그의 손바닥은 으레 때에 전 버선바닥을 문질러대고 있었다.
"알었응게 가보소. 나 몸이 곤허시."
이동만은 한 사람을 오래 만나지 않았다. 누가 또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요거 벤벤찮은디 우선에..."
"멀 그런 것얼..."
빈손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저녁어둠에 몸을 감추고 찾아오는 사람이거나 새벽어둠을 틈타 찾아드는 사람이거나 한 가지 물건은 다 내놓고 갔다. 그의 집에서는 닭을 자주 잡게 되었고, 생달걀로 아이들의 밥을 비벼 먹이는 것이 예사가 되었으며, 아이들은 조청보다는 꿀이 더 맛있다고 입맛을 가리게 되어갔다. 그는 아이들의 살 오르고 윤기 흐르는 얼굴을 가늘게 뜬 눈으로 그윽이 바라보면서 가장으로서의 떳떳함과 흡족함을 맘껏 맛보고 있었다. 가장으로서의 충족감은 아이들의 그런 변화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전과 다르게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 뿐만 아니라 서로 아버지에게 이쁨을 받으려고 다투는 것이었다. 아아, 권세와 돈의 힘이란 이런 것인가... 그는 새삼스럽게 깨닫는 것이고 그리고 마음을 더 단단히 먹고는 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히는 것은 마누라의 변화였다. 언제나 찡등그려져 있었던 얼굴이 활짝 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얼굴을 대할 때마다 먼저 방실방실 웃었다. 달라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잠자리에서의 마누라는 완전히 딴 여자였다. 전에는 먹일 것도 없이 아이만 만든다고하여 팔을 내치며 퉁을 놓기가 일쑤였고, 어떻게 억지 쓰다시피 몸을 합쳐도 마누라는 그저 장작토막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마누라는 떡판에서 잘 매질된 뜨끈뜨끈한 찰떡덩어리였다. 마누라는 제 몸만 뜨겁고 보드랍고 찰지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남편이 달고 꼬시고 맛나게 하게 하려고 갖은 예쁜 짓을 다 하고 들었다.
하이고, 요거시 내 마누래당가!
그는 놀랍고도 또 놀라워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마누라가 태워주는 황홀경 속에서 새 세상을 사는 맛과 함께 남편으로서의 당당함을 만끽하곤 했다. 이동만은 아침마다 아내의 방글거리는 웃음과 아이들의 공손한 인사를 받으며 집을 나서는 것이 더없이 느긋하고 행복했다. 그는 마음속에 굴리고 있는 이런저런 계획이 많았다. 집도 널찍한 것으로 장만해야했고, 아이들도 신식공부를 시켜야 했으며, 재산도 남부럽지 않게 지녀야 했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그는 주위의 눈총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요시다에게 더욱 신용을 얻을 수 있도록 애쓰고 있었다.
"이상, 만경 정가의 기한이 언제요?"
요시다가 책상에 다리를 내뻗은 채 물었다.
"예에, 이틀 남았구만요. 모레지요."
이동만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잘 기억하고 있어서 좋소. 그런데, 그자가 돈을 제대로 갚을 것 같소?"
"글쎄요, 논을 팔기 전에는 어려울 텐데요. 아직 어디다 논 팔았다는 소식은 못 들었습니다."
"이상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뇨?"
요시다는 눈동자만 굴려 이동만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쪽에 확실한 선을 대놓고 있습니다. 그 점은 믿으셔도 됩니다."
이동만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가 그렇게 주저 없이 말하는 건 그쪽에 배치해 둔 사람을 믿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일본사람들의 기질을 몇 가지 파악하고 있었다. 사람을 의심하기 잘하고, 대개 성질이 급하며, 자기 잇속을 차리는 데 밝고, 무슨 일이든 간단간단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요시다가 좋아하도록 자신 있게 대답했던 것이다.
"이상이 아직 실수한 것이 없으니까 그 말은 믿어도 좋겠고... 혹시 그자가 우리한테 논을 팔아넘길 눈치 같은 건 없었소?"
"예, 그런 눈치는 아직 없었습니다. 기왕 논을 처분하려거든 우리한테 하면 값을 잘 쳐주겠다고 진작에 말해 놓았습니다."
"이제 그럴 필요 없소. 사라고 찾아와도 안 사겠어."
요시다는 책상에 내뻗고 있던 다리를 내리며 의자에서 등을 뗐다.
"예에?"
이동만은 무슨 말인지를 몰라 눈을 크게 떴다.
"이상은 집안에 무슨 급한 일 없지요?"
"예에, 별일 없습니다."
이동만은 바짝 긴장했다. 이런 종잡을 수 없는 경우를 당할 때마다 상대방의 속생각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이동만은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뜨거워졌다.
"이상은 나하고 한 이틀 어디를 다녀와야겠소."
"예에, 알겠습니다."
이동만은 그저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런 그는 혀끝에 물렸던 두 가지 말을 목구멍으로 되넘기고 있었다. 첫 번째 나가려고 했던 말이, 정가한테 돈 받을 일은 어떻게 하시라고요, 였다. 두 번째가, 무슨 일 생겼습니까, 였다. 그러나 요시다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말을 내놓는 것은 하나도 이익 될 게 없었던 것이다. 헛짚는 말을 잘못했다가는 어리석게 보이거나 무시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런 위험을 피해 제일 안전하고 본전을 유지하는 방법은 그저 상대방의 말을 적당히 수긍하는 체하는 것이었다.
"하룻밤만 자고 오면 되니까 뭐 특별히 준비할 건 없소."
"예, 언제 떠나시는가요?"
"내일 아침 일찍이오."
"예, 알겠습니다."
"참, 오늘 저녁에라도 말이오, 정가가 찾아와 땅을 사라느니 뭐니, 무슨 소리를 하든 이상은 일체 모른다고만 하시오."
"예에, 그리하겠습니다."
이동만은 대답을 하면서도 머릿속은 점점 더 혼란해져 가고 있었다. 요시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동만은 다음날 아침 요시다를 따라 일본사람의 장삿배에 올랐다. 그 배는 밀물에 얹혀 금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강경에서 내려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거기서 하룻밤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늦어서야 다시 배를 타고 군산으로 돌아왔다.
일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터졌다. 이동만이 사무실에 나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정재규가 나타났다. 아무리 부잣집 아들이라고 해도 만경에서 군산의 인력거를 불러들여 타고 나왔을 리는 없었다. 그러자면 하인이 인력거를 부르러 군산으로 나오고, 빈 인력거가 만경으로 들어가고 하는 소란을 피우는데다 시간도 많이 걸리게 마련이었다. 만경에서부터 걸어 군산에 그리 일찍 당도하자면 신새벽에 집을 나선 것이 틀림없었다. 정재규가 얼마나 몸 달아 있는지 이동만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지께 어디럴 갔었소?"
정재규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물은 말이었다.
"아 예, 화급허니 볼일이 생게서..."
이동만은 상대방을 보지 않고 눈길을 떨군 채 어물어물했다. 무슨 난처하거나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고개를 숙임막해 가지고 눈길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맥이 다 빠진 소리로 어물어물하는 것은 이동만 특유의 모습이었다.
"사람을 그리 헛걸음질치게 하는 법이 어딨소. 돈을 갚자도 사람이 있어야 갚을 것 아니겄소. 자아, 돈 받으시오."
정재규는 화가 난 얼굴을 풀지 않은 채 돈이 든 봉투를 책상 위에다 던졌다. 이동만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나넌 모릉게로 쬐깨 기둘리시오. 요시다상이 금시 나올 거싱마요."
이동만은 당황한 나머지 말이 좀 분명해졌다.
"화급헌 일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오?"
어쩔 수 없다는 듯 정재규가 의자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거 머시냐, 그거시 그렁게... 아조 화급헌 일인디... 그리서 댕게오니라고... 그러다봉게 그리 됐구만요..."
이동만의 목소리는 다시 맥이 빠지더니 어물어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무슨 말이 그 모양이오. 좀 똑똑허니 말을 하시오."
정재규의 얼굴이 불쾌하게 변하며 목소리가 커졌다.
그때 요시다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이제 나오십니까. 밤새 편히 주무셨습니까."
일본말도 유창하게 이동만이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요시다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무표정하게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정재규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일부러 못 본 척하고 있었다.
"여ㄱ소, 돈 받으시오."
정재규는 돈봉투를 요시다의 책상 위에 놓았다. 그는 일본말을 하지 못했다. 이동만이 통변으로 나섰다.
"기한이 지났소."
요시다가 차갑게 내쏜 한마디였다. 그 순간 이동만의 머리는 번쩍 밝아졌다. 그때서야 요시다의 속셈을 깨달으며 그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뭐라고! 난 어제 돈을 가지고 왔었소. 사무실을 비운 건 당신 아니오."
정재규가 소리를 질렀다.
"쓸데없는 소리, 기한이 지났다니까."
요시다가 정재규를 노려보았다.
"아니, 당신 미쳤어. 사무실을 비울라면 미리 말을 했어야 될 것 아니오."
"그건 당신이 미리미리 알아서 할 일이지 내 책임이 아니오. 당신 때문에 내 급한 일을 안 볼 수는 없으니까."
"야 이 도적놈아, 그걸 말이라고 해!"
정재규는 부들부들 떨었다.
"억울하면 법으로 따져."
요시다는 창 쪽으로 돌아앉아 버렸다. 정재규는 세 명의 젊은이들에게 떼밀려 사무실에서 쫓겨났다. 그는 100원의 돈을 빌려 쓰느라고 40마지기의 논을 담보했었다. 100원에 해당하는 논은 20마지기였지만 담보는 그 배로 설정해야 한다는 조건에 따른 것이었다. 그 대신 논이 전부 상답이니까 보통 기한보다 두 배인 여섯 달로 빌렸던 것이다. 그동안 술타령을 하기에 100원은 너무 모자랐고, 여섯 달은 너무 빨리 닥쳐왔다. 갚아야 될 돈은 없고, 그렇다고 논을 팔수도 없었다. 궁리 끝에 다른 데에 또 논을 잡히고 돈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 차이로 논 40마지기를 고스란히 떼먹히게 되고 말았다. 그는 송사를 할 자신이 없었다. 소문이 무서웠고, 이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요시다가 고의적으로 사무실을 비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11. 혼탁한 물결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군산포구를 드나드는 배들이 부쩍 늘어났다. 파도가 거센 겨울 동안에는 줄어들었다가 날이 풀리면서 파도가 잔잔해지기 시작하자 다시 작년 가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그 배들은 거의가 일본인들의 장삿배였다. 그 배들이 실어나르는 것은 하나같이 소비상품이었다. 광목을 비롯해서 석유 성냥 남포등 잡화 같은 것들이었다. 그 물건들은 날이 갈수록 조선사람들 사이에 넓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양등>이라고도 불리는 남포등은 어찌나 탐내는 사람들이 많은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기다란 목에 배가 불룩한 모양의 얇고 맑은 유리 등피가 씌워진 남포등은 그 생김새부터가 희한하고 특이했다. 그러나 그것이 색다른 생김새만으로 잘 팔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 묘하게 생긴 유리 꺼펑이는 바람을 막아내 불이 꺼질 염려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불빛을 밝게 해주는 이중의 실용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밝기로나 바람에 안전한 것으로나 재래의 접시등잔은 말할 것도 없고 촛불마저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모양새까지 색다르고 보니 사람들은 다투어 남포등을 갖고자 했다. 돈푼이나 있는 집들은 으레 남포등을 방마다 갖추는 것이 새로 일어난 바람이었다. 그건 밝고 편리하다는 이유와는 또 다르게 재력을 과시하는 사치인 동시에 신식생활을 향유한다는 멋 부리기요 자랑이었다.
그러나 남폿불은 그냥 켜지는 것이 아니었다. 석유를 잇대어 부어야 했고, 불을 붙일 때마다 성냥을 켜대야 했다. 그러니까 남포등이 잘 팔리게 되면 석유와 성냥은 더욱 잘 팔리는 물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물건들은 잘 팔릴수록 값이 조금씩 조금씩 올라갔다. 그렇다고 일단 남포 불빛에 길들여지기 시작한 사람들이 다시 접시불이나 촛불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궐련에 맛들려 서 마지기 논 팔아먹고, 남폿불 눈 호사에 초가삼간 살라먹을 놈."
궐련이라고는 입에 댈 수 없고 남포등은 아예 엄두를 낼 수 없는 평민들 사이에서 새로 생겨난 말이었다. 그런 소비상품을 실어온 배들은 그냥 돌아가지 않았다. 배마다 쌀을 가득가득 싣고 떠나갔다. 결국 남폿불이 환하게 타오르는 것은 쌀을 태워 없애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돈푼깨나 있는 사람들은 눈앞의 편리와 돈의 과시욕에 취해 그런 것쯤 아랑곳하지 않았다. 날로 배가 불러가는 것은 일본장사꾼들이었고, 없이 사는 사람들의 춘궁은 더욱 가혹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러신, 요새 쌀금이 지리산 천왕봉 몰랭이맨치 높아졌구만이라우. 이적에 얼렁 쌀얼 푸시는 거이 좋겄는디요."
장덕풍은 무릎 꿇은 앉음새로 상대방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으흠, 흠, 자네 눈에넌 지리산 천왕봉이 질로 높아 뵌가?"
백종두는 상대방을 눈 아래로 깔아보며 별로 볼품없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는 일진회 회장이 되면서 상투를 잘라냈으면서도 수염은 그대로 남겨놓았던 것이다.
"무, 무신 말씸이신게라우?"
장덕풍은 언뜻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당황했다.
"어허, 그리 쉬운 말귀도 못 알아듣다니, 사람이 그리 무식히서야 원, 쯧쯧쯧..."
백종두는 노골적으로 장덕풍을 무시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야아, 야아, 지야 원체로 무식헝게로 에롭게 말씸허시면 못 알아듣는 거이 당연지사 아니겄는게라우."
장덕풍은 히죽히죽 웃으며 연상 굽실거렸다. 그렇다고 속까지 히죽거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일 전을 벌기 위해서도 물밑으로 50리를 기는 장사꾼의 기질을 발휘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모독이나 모멸을 당하든지 간에 백종두가 깔고 앉아 있는 쌀가마니를 빼먹는 것이 목적이었다.
"무식헌 거 안게 다행이시. 눈얼 크게 뜨고 보소. 지리산보담 높은 산이 금강산도 있고 백두산도 있네. 무신 말인지 인자 알아듣겄능가?"
백종두는 반들거리는 눈을 가늘게 떠서 장덕풍을 옆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이, 쌀금이 자꼬 더 올를 거이다 그런 말씸이신게라우?"
장덕풍은 그때서야 말귀가 뚫려 눈을 올려 뜨며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인자 알었으먼 되았네. 가보소."
백종두의 말은 냉정했다.
"지가 그런 뻔헌 이치럴 몰라서 요새 쌀얼 풀으라고 허넌 소리가 아니구만이라우. 지헌티 기맥히게 존 생각이 있응게 허넌 소리지라우."
장덕풍은 무릎 꿇은 앉음새를 고치며 씨익 웃기까지 했다. 그 웃음은 자못 여유 있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눈치 빠른 백종두가 그 웃음을 놓칠 리가 없었다.
"나 바쁜 몸잉 거 자네 알제?"
백종두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장덕풍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쓸데없는 소리는 아예 하지 말라는 으름장이었다.
"하먼이라."
장덕풍은 자신있게 침을 삼키고는,
"앞으로야 쌀이 날 때 꺼정언 쌀이 자꼬 귀해짐스로 쌀금이 뽀작뽀작 올른다는 거이야 시 살묵은 아그덜도 다 아넌 일이구만이라우. 그런디 나락가마니럴 오래 쟁에둘수록 서생원덜이 축내고, 날 풀려감서 더우가 오먼 습해서 밑언 상허기도 허능만요. 그런저런 손해 빼고 나먼 쌀금이 올라도 이문이 얼매겄는게라우. 그런디 그런 손해럴 하나도 안 보고 쌀보담도 이문이 큰 일이 눈앞에 떡으로 떨어졌구만이라."
그는 말을 멈추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입이 말라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마른침을 삼키는 척하면서 빠르게 백종두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어흠, 흠, 흠..."
백종두는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말을 독촉함과 아울러 체면을 차리고 있었다. 그는 속마음 같아서는 그 돈벌이가 뭐냐고 금방 묻고 싶었지만 애써서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긍게 그 떡이 멋잉고 허니 석유지름이랑게라우. 쌀금이 이리 솟았을 적에 살얼 풀어불고 그 대신으로 석유지름얼 쟁에노먼 식유지름도 날로 달로 올르겄다, 석유지름 뽈아묵는 쥐새끼덜이야 없겄다, 더우가 와도 석유지름이야 습해지덜 안컸다, 그리되먼 손해 보는 것 하나도 없이 이 문이 쏙 빠지덜 안컸는게라우?"
장덕풍은 어떠냐는 듯 허리를 약간 세우며 백종두를 바라보았다.
"그리 이문 톡톡헌 일이람사 자네가 먼첨 차지헐 것이제 어찌서 나헌티꺼정 찾아왔능가."
백종두는 서슴없이 상대방의 심장을 쑤시고 들었다.
"그야 지가 큰돈만 있음사 열 번도 더 지가 차지허지요 이."
장덕풍 역시 거침없이 되받아쳤다. 거간으로 나서고 있는 장덕풍의 수가 백종두에게 뒤질 리가 없었다. 백종두는 그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이며 궐련을 뽑아들었다. 장덕풍이 잽싸게 성냥을 그어 불을 받쳐올렸다. 백종두는 상투를 자른 다음부터 그 외모에 어울리게 궐련을 피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본사람들과 자주 상대하게 되면서 궐련은 더욱 필요했고, 그 맛 또한 잎담배 같은 것은 댈 것이 아니었다.
"그리허먼, 나가 지닌 나락이 쉬찮은디, 그 돈냥맨치 석유지름얼 갖고 온 자가 있다는 것잉가?"
"야아, 마침맞은 사람이 있구만이라우."
"일본땅에도 시방 쌀언 다 떨어져 가는 판이시. 사람이 굶고넌 못살아도 밤에 불 안 씨고넌 사네. 무신 말인지 알어듣능가!"
백종두는 못을 치고 있었다.
"야아, 쌀이야 금이고 석유지름이야 구리 아닝게라우. 쌀금얼 톡톡허니 치게 허겄구만이라우."
장덕풍은 일을 성사시킨 기쁨에 이마가 방바닥에 부딪도록 허리를 굽혔다.
"가서 일 야물게 허고, 자네 아덜 칠문이 보내소."
백종두는 자못 엄하게 일렀다.
"야아, 알겄구만이라우."
장덕풍은 환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백종두의 입에 자기 아들의 이름이 오르는 것이 너무나 영광스러웠다. 어쨌거나 아들을 일진회에 가담시킨 것은 생각할수록 잘한 일이라 싶었다. 그 다음부터 백종두와 아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백종두는 쌀을 비싸게 처분해서 석유를 싸게 확보하게 된 것을 흐뭇하게 생각했다. 지난 1월부터 실시된 화폐조례 때문에 어차피 일본물건을 많이 확보하려고 했던 참이었다. 화폐조례에 따라 국고를 전부 일본제일은행에서 취급하게 되어 있었다. 그건 나라살림이 모두 일본사람들 손으로 넘어간 것만을 뜻하지 않았다. 그동안 써왔던 돈을 전부 일본 돈으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그 은밀한 계획을 미리 알아낸 것은 영사관을 통해서였다. 돈이 모두 일본돈으로 바뀌게 되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그만큼 손해를 보게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묵주장이들이 만들어낸 가짜 돈은 돈 취급을 못 받고 그대로 똥값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새로 나올 일본돈의 돈값에 맞추어 손해를 보지 않으려면 일본물건들을 확보해 두는 것이 최선의 방법
이었다.
"인자 날베락 맞을 멍청헌 물건덜이 많고 많제."
수염을 쓰다듬어 내리며 혼잣말을 하고 있는 백종두의 입가에는 야릇한 웃음이 는적거리고 있었다. 돈푼이나 있는 자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돈을 끼고 앉았다가 당할 것을 생각하면 그는 지금부터 몸 속 그 어딘가가 간질간질하고 스물 스물한 것이 그렇게 깨소금 맛일 수가 없었다.
"거간놈덜 거짓말이야 중매쟁이 거짓말 빰따구 치제."
백종두는 끄응 힘을 쓰며 궐련을 빼들었다. 장덕풍을 다 믿을 수 없으니까 쌀값이며 석유 값을 직접 탐지해 볼 작정을 하고 있었다.
"저어, 회장님 기시넌게라우?"
밖에서 들려오는 젊은 목소리였다.
"어험, 험, 누구여?"
백종두는 자리를 고쳐앉으며 목소리를 묵직하게 냈다.
"저그, 장칠문이구만이라우."
"기둘리고 있었네. 얼렁 들소."
허리를 반으로 접다시피 한 장칠문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일진회 간부답게 일본군복과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만 계급장만 붙어있지 않았다. 그는 회장 백종두 앞에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네, 나가 일른 일언 어찌 되고 있능가?"
백종두가 엄한 어조로 물었다.
"야아, 쓸 만헌 회원덜얼 골라내고 있구만이라우."
장칠문은 고개를 수그린 채 대답했다. 그의 기죽은 듯한 태도는 제 아버지 앞에서와는 딴판이었다.
"아니, 다 골라내서 훈련얼 시키고 있는 거이 아니고 안직도 골라내고 있다 그런 말이여?"
백종두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지며 꼬였다.
"아니구만이라우. 다 골라냈는디요."
장칠문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무신 소리여 시방. 이짝이여 저짝이여? 똑똑허니 답혀."
백종두의 목소리가 좀더 높아졌다.
"야아, 다아 골라내 갖고 훈련얼 시킴서 잘못허넌 놈 한둘썩얼 바꾸고 있구만이라우. 우리 군산얼 질로 낫게 맹글라고 그리허는 것잉마요."
장칠문은 얼른 백종두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참말이여?"
"야아, 누구 앞이라고 거짓말허겄는게라우."
"나가 조사 나서도?"
"하먼이요."
장칠문은 자신있게 대답하며 다시 백종두를 올려다보았다. 백종두는 그 눈빛으로 거짓말이 아닌 것을 확인했다.
"나가 자네럴 믿음세. 그리허고, 일 시작헐 날이 얼매 안 남었응게 훈련 잘 시키도록 허소. 모다 용맹시럽게 잘히야제 글안허고 빙신맨치로 히서넌 내 체면에 똥칠잉게. 그리 되면 자네 어지 되넌지 알제?"
"야아, 명심허겄구만이라우."
장칠문은 허리를 굽혔다.
"자네가 잘만 험사 내가 상얼 후허니 내릴 것잉만."
백종두는 금방 목소리를 바꾸어 부드럽고 나긋하게 말하고 있었다.
"야아, 영축없이 잘허겄구만요."
"됐네. 요것 넣고, 가보소."
백종두는 백동화 몇 개를 장칠문 앞으로 밀었다.
"아니구만요. 그만 물러가겄구만이라우."
장칠문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어허, 무신 짓인고! 애쓴다고 어런이 내리넌 돈인디, 고마운 맘으로 받고 일 더 잘허는 거이 바른 예절이제."
턱을 끌어당긴 백종두가 근엄하게 나무라는 말이었다.
"야아 회장님, 그러면..."
장칠문은 황송해하며 다시 무릎 꿇어 백동전을 집어 들었다. 백종두는 흐뭇한 기분으로 방을 나가는 장칠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건 애비보다 더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며.
무슨 흠집이 잡혔는가 싶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백종두 앞에 복배했다가 자신을 믿는다는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뜻밖의 용돈까지 받게 되어 장칠문은 기분이 달뜨고 있었다. 이제 조마조마했던 마음은 깨끗이 없어지고 그는 그 돈을 어떻게 쓸까를 궁리하고 있었다.
장칠문은 회장 백종두의 부름을 받을 때마다 먼저 마음의 불안부터 느꼈다. 그는 일진회 간부로 살아가면서 그만큼 뒤가 캥기는 일을 많이 저지르고 있었다. 일진회의 돈도 슬쩍슬쩍 빼먹었고, 포구에서 협박질을 놓아 심심찮게 돈을 갈취했고, 부하들을 몰고 다니며 이 술집 저 술집에서 공짜 술을 마셨다. 만약 그런 일들이 말썽거리가 되면 둘러댈 변명이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은근히 뒤가 켕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지가 오야붕 노릇 멋 떨어지게 허겄다고 돈얼 턱 내논 거이제? 그리허먼 나도 요 돈얼 아까와라 말고 꼬붕덜헌티 아싸리허게 써야 멋떨어진 오야붕이 될 것 아닝감? 하먼, 단단헌 오야붕이 될라먼 주먹도 씨야허고 돈도 기마이 좋게 써야 허는 것이여!"
그는 소리내어 하던 혼잣말을 마치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그의 말에는 일본 말투성이였다. 그런 말투는 남들하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부러 그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건 그 혼자만의 짓이 아니었다. 그가 상대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그런 말투를 흉내 내려고 애썼다. 그들은 일본말을 많이 섞어 쓸수록 신식으로 개명하는 것이고 유식해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군산바닥에서부터 퍼져나가고 있는 새 풍조였다.
장칠문은 부하들 대여섯을 모아 술집에 자리 잡았다.
"오늘 나가 느그덜헌티 배가 터지게 술얼 받아줄 것잉게 느그덜언 맘 턱 놓고 코가 삐틀어지게 묵어부러. 그런디 말이여, 술이야 코가 삐틀어지고 눈깔이 돌아불게 묵어도 존디 한 가지 잊어불어서넌 안 되는 일이 있구만. 긍게로 우리가 대창 꼬나잡고 나슬 날이 인자 코앞으로 닥쳐왔다 그것잉마. 우리가 모다 맘얼 하나로 합쳐갖고 그 일얼 시언허고 깨금허니 히서 공얼 세우자넌 뜻으로 받아주는 술잉게 그리덜 알드라고."
자못 엄숙한 표정으로 장칠문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한 말이었다.
"야아, 우리 부장님이 질이여!"
한 사내가 두 팔을 뻗치며 환성을 올렸다.
"항, 우리 부장님 기마이 당헐 사람이 누가 있간디?"
다른 사내가 맞장구를 쳤다.
"하먼, 우리 대장님이 얼매나 아싸리허다고. 시상이서 질이랑게."
또 다른 사내는 <부장님>을 <대장님>으로 바꾸고 있었다.
"이, 되얏응게 어서 술이나 푸지게 마심서 기운 돋구드라고."
장칠문은 더없이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부하들을 둘러보며 거드름을 피웠다.
장칠문을 따라 그들은 모두 술잔을 비웠다. 스무 살 안팎인 그들의 목덜미며 어깨에는 탄력적인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런디, 전주 양반덜이 우리럴 성안으로 못 들어오게 막을라고 젊은 놈덜얼 모으고 있다넌 소문이 참말이당게라?"
한 사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장칠문을 쳐다보았다.
"그렁게, 겁나는겨?"
장칠문이 대질렀다. 고약해진 그의 눈이 사내를 꼬나보고 있었다.
"무신 소리다요. 그냥 소문이 참말잉가 아닌가 알아보잔 것이제."
사내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의 태도에서는 겁나는 느낌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악질 관리고 못된 양반놈덜얼 치고 들어간당게 똥구녁 쿠린 양반놈덜이 미리서 겁묵고 돈 써감서 젊은 놈덜얼 끌어 모으고 있넌디, 훈련도 안된 그런 물건덜이야 다 우리 밥이여."
주먹 쥔 팔을 내두르며 장칠문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 되먼 전주성에 들어가기 전에 쌈판이 벌어지겄넌디?"
한 사내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좋제, 들판 넓겄다 한바탕 가운 써서 그놈덜 다 때려잡고 전주성으로 치고 들어가먼 기분이 얼매나 시언허겄어."
"허, 전봉준이가 따로 없네."
"그려, 그려. 얼렁 술 묵고 기운 돋구드라고."
그들은 자신감에 넘쳐 다시 술잔을 들었다.
3월은 어김없이 봄이었다. 마른풀을 태워 거뭇거뭇 그을은 논두렁에서는 새싹들이 파릇파릇 돋아났고, 들녘에는 봄기운이 뽀얗게 서려 있었다. 들녘 사방에는 죽거리를 캐는 처녀나 아낙네들의 쪼그려앉은 모습이 점점이 찍혀 있었다.
전주 군산을 비롯한 가까운 군들의 일진회 회원들이 한곳에 집결되었다. 그들은 삼사백을 헤아렸다. 그들에 맞서 전주부민 오륙백 명이 나서고 있었다. 양쪽 사람들이 마주친 곳은 황토현이었다. 일진회원들은 대창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전주부민들은 대창과 농기구로 무장하고 있었다. 넓은 벌판에 그들은 양쪽으로 진을 치고 있었다.
"이놈덜아, 질얼 비켜라! 썩은 관리, 못된 양반놈덜 쳐없애로 가는디 괸리도 양반도 아닌 것덜이 어찌서 질얼 막냐."
일진회 쪽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요런왜놈 앞잽이, 친일파놈덜아! 느그놈덜 거짓말에 누가 속을지 아냐아."
전주부민 쪽에서 맞받아 외쳤다.
"요런 빙신 팔푼이덜아, 느그넌 시방 못된 관리고 양반 놈덜헌티 속고 있는 것이여! 우리넌 느그덜 살기 존 시상 맨글라고 나슨 충신덜이다아."
"소가 웃겄다, 이놈덜아. 잔소리 말고 썩 물러가그라아!"
"참말로 질얼 안 비키먼 피럴 본다. 끝으로 한번만 더 말허겄다. 질얼 비켜나그라!"
"이놈덜아, 뎀베라!"
"와아아-"
일진회 쪽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그리고 대열이 앞으로 내달으며 돌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전주부민들 쪽에서도 함성이 터지며 대열이 흩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들도 곧 돌을 맞던지며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돌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각자가 지닌 돌들이 몇 개씩 안되었기 때문이다. 서로 마주보고 내달린 사람들은 금방 뒤엉켜지고 말았다. 천여 명의 사람들은 벌판에서 뒤죽박죽이 되어 싸우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싸움판이었다.
"쥐겨라, 쥐겨!"
"저놈 잡어라!"
"아이고메!"
"으악!"
비명과 아우성이 뒤엉키고, 엎어지고 나뒹굴어지며 피가 튀었다. 서로 뒤헝클어지다 보니 대창이고 농기구는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주먹과 주먹이 오가고, 붙들고 메다꽂는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육박전에서는 수가 적은 쪽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이 길어지면서 수가 절반밖에 안되는 일진회 쪽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밀리게 되자 전주부민들의 기세가 표 나게 달라졌다.
"저놈덜이 도망친다아!"
"잡어라, 다 잡어쥐겨라!"
"왜놈덜 앞잽이, 다 쥐겨!"
일진회원들은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전주부민들은 제각기 소리 높여 외치기만 할 뿐 그들의 뒤를 더 쫓지는 않았다. 황토현에는 한바탕 싸움이 지나가고 양쪽의 부상자 백여 명이 신음소리들을 내며 즐비하게 엎어지고 넘어져 있었다. 그들은 하필이면 갑오년에 농민군과 관군이 최초의 싸움을 벌였던 그곳에서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교롭거나 우연이 아니었다. 전주성을 막아내는 입장에서나 전주성을 치는 입장에서나 황토현은 싸움판을 벌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진회원들이 부패한 관리와 악한양반들을 척결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주로 밀고 들어가려고 한 것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였다. 첫째 군산과는 달리 서문 밖에서만 배돌아야 하는 일본사람들의 열세를 모면하고 일시에 성내로 진입하는 계기를 잡자는 것이었다. 둘째 일본사람들의 힘이 약하니까 일진회도 힘을 펴지 못했으므로 일본사람들이 성내로 진입함과 동시에 일진회의 세력 확장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그 감추어진 목적이 어쨌거나 간에 일진회원들이 그런 명분을 내걸고 전주성으로 몰려드는 판에 전주의 관리며 양반들이 좌시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임시변통의 사병을 모았다. 양반들은 돈을 부려 사람들을 사들이는 한편 관리들은 친일파를 없애자는 명분을 내세워 사람들을 모으는 데 관권을 동원했다. 그 어이없는 한판 싸움은 다음날부터 <전주부민들의 일진회 배척소요>라고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일진회원들의 패배로 속이 뒤집히고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백종두였다. 그는 회원들이 전주성으로 밀고 들어가면 쓰지무라 앞에서 회장으로서의 능력을 맘껏 과시하려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능력 과시는커녕 얼굴도 못 들게 되고 말았다. 그는 속이 뒤집히는 데로 하자면 장칠문 이놈을 당장 끌어다가 요절을 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도 못하는 것이 장칠문 이놈은 등짝에 부상을 입고 업혀와 엎어져 있는 판이었다. 대창에 찔린 것인지 괭이에 찍힌 것인지 알 수는 없으되 부상이 심해 꼼짝을 못한다는 놈을 상대로 더 무슨 속 풀이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종두는 문병을 가지 않는 것으로 속 풀이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쓰지무라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먼저 왔다.
"빌어묵을 놈덜, 에이 빙신 겉은 놈덜..."
백종두는 사무실 안을 오락가락하며 혀를 차대고 수염을 훑어대고는 했다.
"이거 원... 당최 뵐 면목이 없습니다. 꼭 이길 줄 알았는데..."
백종두는 쓰지무라 앞에서 아예 고개를 들지 않고 굽실거리기부터 했다.
"그게 그리 된 것이 기분 좋게 이긴 것만은 못하지요."
쓰지무라가 던진 말이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랫것들이 시원찮아서 그만..."
백종두는 고개를 더 깊이 숙이면서도 자신의 불찰이라고 하지 않고 <아랫것들>의 뒤로 피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허나, 한번 실수는 다 병가지상사요."
쓰지무라는 허허대고 웃었다. 그 뜻밖의 말에 백종두는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걸 느끼며 얼른 고개를 들었다.
"예에?..."
백종두의 반들거리는 눈은 쓰지무라의 기색을 빠르게 살피고 있었다.
"백 상, 너무 그렇게 걱정할 것 없소. 이번 일은 그 정도면 효과가 충분했어요. 사람들이 좀 다치기는 했지만 죽은 사람 없으니 뒤가 시끄럽지 않고, 그만하면 일진회의 힘도 과시했고..."
쓰지무라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일인들의 성내 거주문제도 해결이 됐다는 건가요?"
백종두는 영리하게도 쓰지무라가 감추고 있을지도 모를 사항을 한 발 먼저 넘겨짚고 들었다.
"그런 뜻이 아니오. 일인들의 성내 거주는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오. 전주는 군산과는 다르지 않소. 옛날부터 군산이 해변가 한촌이었다면 전주는 전라도사람들의 한양이나 마찬가지요. 그래서 전주는 양반세가 강해 함부로 하기가 어렵고, 또 일반사람들도 우리 일인들이 억지로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면 자기네들 안방을 뺏기는 것으로 생각해 반발이 커진단 말이오. 세상사란 서둘러서 될 일이 있고 안될 일이 있소. 성안에는 출입도 못했던 몇 년 전에 비하면 출입이 자유로워진 지금은 성안에 사는 거나 별로 다를 게 없소. 그런데 이번 일은 그걸 앞당기는 효과를 발휘했소. 나는 그것으로 만족이오. 싸움에 졌는데도 그 효과가 충분하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오. 만약 일진회원들이 싸움에 이겨 성안으로 들어갔더라면 어찌 됐겠소? 그땐 관가의 포졸들하고 싸움이 붙었을 것 아니겠소? 그리 되면 골치 아픈 말썽이 생긴단 말이오."
백종두는 쓰지무라의 말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싸움에 이겨 성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그렇게 안 된 것이 다행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쓰지무라 상은 싸움에 꼭 이기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소."
"그런데 지금 하시는 말씀은..."
"으아하하하하... 역시 백상은 문사 쪽이지 무사 쪽은 아니오. 총으로 싸우는 싸움이 아니고 대창이나 몽둥이 들고 싸우는 싸움에서 수가 적은 쪽이 이기는 법도 봤소? 그리고 미리 싸움에 지라고 해서야 그 싸움이 어디 진짜 싸움이 될 수가 있겠소?"
"예에!"
백종두는 맘 턱 놓고 기대고 있던 지게가 와락 넘어지며 곤두박이는 기분이었다. 결국 자신은 쓰지무라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손오공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불쾌감과 함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일진회를 배척하는 군중모임은 그 뒤로 평안남도 덕천이며 맹산 같은 데서도 잇따라 일어났다. 그런데 그 속사정이 전주의 경우와 같은지 어쩐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집단행동을 따라 일진회의 마각이 대중들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등에 부상을 입은 장칠문은 날이 갈수록 짜증이 늘어나고 있었다. 괭이에 찍힌 상처가 깊은데다 덧나기까지 해서 열흘이 넘게 앓고 있었다. 욱신거리고 화끈거리는 상처의 아픔도 아픔이었지만 마음대로 싸돌아다니지 못하는 것이 더 화가 나서 장칠문은 걸핏하면 짜증을 부리고 욕을 해댔다. 장칠문은 뒷문을 열고 엉기적거리며 가게로 들어섰다. 그는 느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얼굴을 찌푸렸다. 상처부위가 울리고 당기기 때문이었다. 물건들을 바로 놓고 있던 장덕풍이 아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 음질얼 앓는 것도 아닌디 걸음걸이가 어찌서 그리 엉그적엉그적허냐. 넘덜 보기 숭허다."
장덕풍이 퉁을 놓았다. 그는 아들이 가게로 나오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아들이 가게에 나올 때마다 무슨 물건이든 축이 났으면 났지 보태지는 것은 없는 탓이었다.
"아부지넌 시방 누구 속에다가 불 처질를라고 그요? 이리 살살 걸어도 등판이 쿵쿵 울리고 쫙쫙 땡김서 사람이 죽을 판인디, 넘덜 보기 조라고 땅 팍팍 참서 걸을게라?"
장칠문이 눈을 부라리며 목청을 돋우었다.
"이놈아, 그리 걷기가 심들먼 방안에 얌전허니 눠 있을 일이제 멀라고 나댕김서 말얼 씹히고그려."
장덕풍은 아들을 위하는 척하며 자신의 속셈을 살짝 돌려서 말하고 있었다.
"아니, 아부지 눈에넌 나가 편허니 눠 있는 신세로 뵈등게라? 옆으로 눕기도 에로와 찰팍 엎어져 허리가 똑 뿌러지게 고상험서 지낸 지가 발써 열흘이 넘었는디도 그 꼬라지가 눈에 안 뵈요?"
얼굴에 화가 돋은 장칠문은 노골적인 시비조였다. 장덕풍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들의 그 버릇없음을 꾸짖기보다는 아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더 급했다. 아들은 그저 예삿일로 다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알었다 알어. 니 고상 다 안게로 일로 앉어서 얼렁 사탕 묵어라."
장덕풍은 혹을 떼려다가 오히려 붙인 격이 되어 자기 손으로 사탕병 뚜껑을 열며 얼렁뚱땅 넘기고 있었다.
"빌어묵을, 일진회넌 잘못 들어갔소."
장칠문은 퉁명스럽게 내쏘며 쪽마루에 걸터앉았다. 상처부위가 당기면서 아파 그는 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거이 먼 소리다냐? 그런 소리 허덜 말어라."
깜짝 노란 장덕풍은 서둘러 아들의 손에 눈깔사탕 하나를 쥐어주었다. 그는 아들이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었다. 자신의 장사를 위해 아들은 어쨌거나 일진회에 자리잡고 있어야 했다.
"벨로 묵자것도 없음서 이리 몸이나 상허고, 일진회라면 정이 싹 떨어지요."
장칠문은 아버지의 속을 다 알고 있어서 일부러 것지르고 나왔다.
"아, 그런 소리 허덜 말라닝게. 니도 대륙회사 없어진 것 다 알지야? 니가 일진회에 안들고 거그서 이적지 있었으먼 무신 꼴이 되았겄냐. 그것이야 더 말헐 것 없이 쉰 보리밥뎅이 아니겄어?"
장덕풍은 아들의 입을 야무지게 틀어막아야 된다는 생각에서 그 말을 끌어다 댔다.
"치이, 대륙회사야 진작에 미꼬미가 없는지 알았응게 일진회가 아니라도 딴 자리럴 구했겄제라."
굳이 <미꼬미>라는 일본말을 섞어 쓰며 장칠문은 떫은 얼굴로 아버지를 외면했다. 아들의 어조가 금방 수그러드는 것을 보며 장덕풍은 속으로 손뼉을 쳤다.
4월 들어 하와이와 멕시코의 이민 아닌 노예수출이 금지되었다. 그 조처에 따라 대륙시민회사도 문을 닫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륙식민회사가 마지막으로 한 일이 3월에 1,033명을 멕시코에 노예로 팔아먹은 것이었다.
"니가 당허는 고상 이 애비가 다 안다. 헛일허는 거이 아닝게 쬐깨 더 참거라. 날로 살기 존 시상이 돼가고 있응게 그 고상이 다 공으로 씌여간다."
장덕풍은 정겹게 말하며 아들의 어깨를 다둑거렸다. 봄이 무르익어 가면서 백종두의 즐거움도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의 나날의 즐거움은 집 짓는 현장에 나가 날마다 집이 조금씩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일본식 집이 차츰차츰 모습을 갖추어갈수록 그의 즐거움도 자꾸 커져가고 있었다.
백종두는 땅이 풀리자마자 곧 집짓기를 시작했다. 급한 마음 같아서는 작년에 쓰지무라한테서 땅을 받은 즉시로 시작하고 싶었지만 집을 완성하기 전에 겨울이 닥치게 되어 있었다. 어찌할 수 없이 겨울이 지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집짓기가 시작된 다음부터 백종두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차례는 어김없이 현장에 나갔다. 뒷짐을 진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현장을 지그시 바라보고는 했다. 그럴 때면 그의 눈앞에는 2층짜리 일본집이 훤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집을 2층으로 짓기로 했다. 그러나 아래층에 한해서 방은 온돌을 놓기로 했다. 다다미방에서 겨울을 날 자신이 없어서 궁리 끝에 고안해 낸 방법이었다. 일본식 몸뚱이에 창자 일부가 조선식인 그 희한한 집은 군산에서는 물론이고 조선땅 전체에서도 최초의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남다른 생각을 해낸 자신의 머리에 그는 더없이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백종두는 인력거에 올라앉아 현장으로 가고 있었다.
"백 회장, 일진회 조직을 한층 강화해야 되겠소. 한성에서 대항세력이 생겨났단 말이오. 그게 바로 헌정연구회란 것이오. 이준이란 자가 중추요."
백종두는 쓰지무라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피식 웃어버렸다. 이준이가 어떤 얼빠진 자인지는 모르나 그 신세도 곧 최익현과 마찬가지가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최익현이라는 자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지난 3월에 일본의 침략 위험을 상소했다가 일본헌병대에 체포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준이란 자도 정신없이 나대다가는 일본헌병이 그냥 둘 리가 없었다.
백종두는 <헌정연구회>가 아니라 <반일돌격대>가 조직되었다. 해도 아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일본헌병의 힘을 굳게 믿고 있었다. 쓰지무라가 가끔 그런 말을 던지는 것은 괜히 사람을 긴장시키려고 그러는 거라고 그 속을 짚고 있었다.
그가 더 관심 쓰는 것은 용산과 신의주 간의 경의선이 이미 운전 개시되었고, 경부철도도 곧 개통되리라는 소식 같은 것이었다. 철도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그는 경의선도 타보고 싶었고 경부선도 타보고 싶었다. 신식 멋쟁이가 되자면 누구보다 먼저 철도를 타보아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아니, 저것이 누구여!"
그런 한가한 생각에 빠져 있던 그는 뒤로 맘껏 부리고 잇던 상체를 갑자가 일으켰다. 그 바람에 인력거가 요동하면서 인력거꾼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인력거 첨 타요!"
인력거꾼이 버럭 소리 질렀다.
"인력거 세워, 인력거."
백종두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의 눈에 잡힌 것은 아들 남일이었다. 술에 취한 것이 분명한 아들은 어떤 놈과 멱살잡이를 하며 싸우고 있었다. 일어학원에 박혀 있어야 할 놈이 한낮 대로상에서 싸움판이었다. 백종두는 눈이 뒤집혀 인력거에서 뛰어내렸다.
"이놈아, 남일아 이놈아!"
그는 고함을 지르며 내달았다.
두 젊은이의 얼굴이 동시에 백종두 쪽으로 돌려졌다 그들은 서로의 멱살잡이를 재빨리 놓았다. 그리고 서로 반대쪽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이놈아, 스거라!"
백종두는 아슬아슬하게 아들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이놈아, 이 못된 놈아!"
백종두는 소리치며 아들의 뺨을 여지없이 갈겼다. 그는 치솟는 분으로 이빨을 뿌득뿌득 갈고 있었다. 백남일은 술 냄새를 훅훅 내뿜으며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그러나 취한 몸이라 제대로 기운을 쓰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가자, 이놈. 당장 죽이고 말 거싱게!"
백종두는 또 아들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끌기 시작했다. 백남일의 코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보시오, 보시오, 삯전이나 내놓고 가드라고요 잉."
인력거꾼이 백종두 앞을 가로막듯이 하며 내쏜 말이었다.
"이, 인력거!"
백종두는 그때서야 자신을 태우고 왔던 인력거가 아직 그대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놈아, 타그라. 인력거럴 타!"
백종두는 방향을 바꿔 아들을 인력거 쪽으로 밀어댔다. 그는 코피 흐르는 아들을 보자 새로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건 단순한 화가 아니라 애비로서의 애증이었다. 백남일은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더는 버둥거리지 않고 순순히 인력거로 올랐다.
"인력거에 피 떨어지오!"
인력거꾼이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이놈아, 얼렁 콧구녁 막어라."
백종두는 인력거꾼의 말에 응대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백남일은 두 손으로 코를 싸잡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백종두는 인력거가 집에 당도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화가 부글부글 끓는 가슴으로 도대체 이놈을 어찌해야 할까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은 달라져 가고 있는데 사람 노릇을 제대로 시키려면 무슨 방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전부터 막연하게 생각해 왔던 그 방도를 적극적으로 찾을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인력거에서 아들을 끌어내리자 꾹꾹 누르고 있었던 백종두의 화는 맘 놓고 폭발하고 말았다.
"이놈아, 니가 사람이냐. 허라는 공부넌 안허고 뻘건 대낮에 술 처묵고 대로상이서 쌈질이나 허는 니놈이 사람으 새끼냐. 집안 우세, 애비우세, 사람 노릇 못헐람사 진작에 디져라, 디져!"
백종두는 소리소리 지르며 매타작을 놓았다. 쓸모없이 된 담뱃대로 내갈기고, 주먹으로 패고, 발길로 걷어차며 그는 한바탕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의 외침으로 아들이 잘못한 사연을 알게 된 그의 아내는 애타는 종종걸음만 칠 뿐 감히 말리려 들지를 못했다. 아들의 잘못이 워낙 큰데다가 남편의 불붙은 서슬이 너무 무서웠던 것이다. 남편의 화가 한풀 가라앉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놈아, 집 안에 꼼지락 말고 백혀 있어라. 대문얼 넘어섰다 허먼 그때넌 다리몽뎅이럴 작씬 분질러불 것잉게."
백남일에게 내려진 금족령이었다. 백남일은 매일 마누라한테 눈총을 받으며 지루하게 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닷새째 되는 날 저녁이었다. 그는 아버지 앞에 불려가 무릎을 꿇었다.
"니넌 군산에 있어서넌 안되겄다. 경성으로 뜰 작정을 허고 맘 단단허니 묵어라."
백종두가 거두절미하고 내놓은 말이었다. 그 느닷없는 말에 그의 아내고 아들이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아는 놈덜 많은 여그서넌 암 것도 안 된다. 아는 낯이 아무도 없는 경성으로 가서 신식공부럴 착실허니 허는 것이여."
백종두의 설명이었다.
"글먼 메누리도 항께 간당가요?"
그의 아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미쳤능가! 공부허로 가는 놈이 지집 끼고 댕기게."
백종두가 벌컥 화를 냈다. 그의 아내가 흠칫 놀라며 눈을 흘겼다.
"그리 허것냐 못 허겄냐!"
백종두는 아들을 노려보며 매섭게 쏴 질렀다.
"예에... 그리허것구만이라우."
백남일의 대답은 입 안에서 굴렀다.
"똑똑허니 답혀! 어쩔 챔이여?"
백종두는 담뱃대로 놋재떨이를 내리쳤다. 담뱃대의 쓸모는 아직 남아 있었다.
"예, 그리허것구만요."
백남일은 경성으로 떠나는 것이 나쁠 것 없다 싶어 또렷하게 대답했다. 방문 밖에서 그의 아내가 헛주먹질로 가슴을 치고 있는 것을 그가 알 리 없었다.
사흘 뒤에 백남일은 아버지를 따라 집을 나섰다. 그는 그동안 밤마다 아내에게 허벅지를 꼬집혔다. 함께 떠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내라는 아내의 투정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그 허락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고 또 굳이 그런 허락을 받아내고 싶지도 않았다.
"새 시상이 열리넌 판인디 신식공부럴 안 허고넌 입신출세럴 못헌다. 어찌서 신식학교가 그리 많이 생기겄냐. 명념혀라."
백종두가 아들에게 다진 말이었다.
아들을 양정의숙에 입학시키고 나서 백종두는 마음이 홀가분해질 수 있었다. 아들이 심기일전하여 신식공부에 전념하리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그런 기대는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순히 장소를 옮긴 것만으로 아들이 마음을 바꿔먹고 공부에 전념하리라고 믿을 만큼 백종두는 순진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백종두가 마음 홀가분한 것은 우선 아들의 그 빙충맞은 꼴을 눈앞에서 안 보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못된 친구 놈들과 떼어놓은 게 속 시원했다. 또한 공부는 제대로 안하더라도 경성살이에서 넓은 세상 구경을 하는 것만으로도 손해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공부는 그저 서당 개 노릇만 해도 안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접어두었다. 그는 아들이 못된 짓 하는 것을 막는 방법으로 돈 보내는 것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타향에서 돈이 빠듯하고서야 멋대로 놀아날 도리가 없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아들 걱정을 일단 잊은 백종두는 별로 하는 일 없이 바쁘게 여름을 넘겼다. 6월에 백동화 교환사업이 개시되어 세상이 떠들썩할 때 미리 방비를 다 해둔 그는 여유만만하게 새로 지은 일본식 2층집으로 이사 갈 준비를 했다. 그는 2층 다다미방에서 여름을 나며 다다미가 풍기는 쌉싸름하면서도 향그러운 풀냄새에 맘껏 취했다. 높직한 2층에 네 활개를 펴고 누워 더위를 식히며 방귀를 뿡뿡 뀌어대는 맛이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세상살이의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일삼아 아랫배에 힘주어 가며 방귀를 뀌어댔다.
9월 들어 13도 유림대표들이 일본의 14개 죄목을 열거한 공함을 각국공사관에 보내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사건으로 백종두는 또 바빠졌다. 무슨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그렇듯 쓰지무라가 일진회 강화를 지시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쓰지무라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가 지정한 장소는 자주 가는 일본기생집이었다.
"백 상, 인사하시오. 이번에 일로전쟁을 승리로 장식하고 우리 군산에 기항한 군함을 타고 오신 분이오. 일로전쟁에서 통변을 맡아 혁혁한 공을 세우신 하시모토 상이시오."
쓰지무라가 마주보고 앉은 남자를 소개했다.
"아, 그러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백종두라고 합니다."
백종두는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러나 그의 빠른 눈길은 차갑게 상대방을 훑고 지나간 뒤였다. 군인냄새는 안 나면서도 어딘가 냉혹한 느낌을 주는 인상. 서른이 되었을까말까 한 나이에 비해 침착한 태도. 백종두는 예사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일부러 백 상을 소개하는 건 다른 게 아니오. 우리 하시모토 상이 여기 군산이 마음에 들어 자리를 잡아볼까 하는 의향이 있어서 믿을 만한 현지인으로 백 상을 소개하게 된 것이오. 자리를 잡자면 여러 가지 필요한 게 많을 테니까 백 상이 특별히 신경 써서 적극적으로 돕도록 하는게 좋겠소."
쓰지무라의 말을 들으며 백종두는 또 빠른 눈길로 하시모토를 훑었다.
건방진 놈, 군산땅에 발 디딘 지 며칠이나 됐다고 마음에 들고 말고냐.
백종두는 아니꼬운 생각부터 들었다.
"아 예, 그러십니까. 우리 군산이 마음에 드신다니 무한 영광입니다. 미력이나마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군산의 무엇이 마음에 드셨는지요?"
백종두는 속마음은 싹 감추고 겸손을 가장해서 이렇게 말했다.
"예에, 군산은 풍광도 좋고, 발전일로에 있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더 마음에 드는 것은 군산이 아니라 군산 뒤로 자리 잡고 있는 넓고 넓은 들판입니다. 그 들판은 말로만 듣던 것보다도 훨씬 더 좋습니다."
하시모토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넓은 들판이란 것이 첫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자꾸 보면 싱겁고 지루합니다. 좋은 구경거리는 못되지요."
백종두는 상대방의 의중을 캐내려고 일부러 말덫을 놓았다.
"어허, 누가 들판을 구경거리로 삼아 살겠다는 거요. 그 들판을 무대로 농장을 차리겠다는 뜻이지."
쓰지무라의 성급한 답변이었다.
"저도 그런 뜻인 줄 알았습니다."
백종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12. 우리 어찌 살거나
군산포구에 밀려드는 일본장삿배들은 소비상품만을 부려놓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사람들을 몇 명씩 떨구어놓고 떠나갔다. 그 숨어들 듯 묻어들 듯 하는 일본사람들로 날이 갈수록 군산은 인구비율마저 뒤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군산 앞바다에 군함이 나타나면서 일본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군함이 수백 명을 토해놓은 것이다. 그들은 거의가 군인이었다. 그 군인들은 다시 군함을 타고 떠나가지 않았다. 일로전쟁을 시작하면서 그랬듯 그 군일들은 각기 대역을 지어 여러 방향으로 떠나갔다.
"저 왜놈군대덜이 아라사럴 이겼담서?"
"그렇다고 허데."
"아라사가 청국맨치 큰 나라람서 어쩐 일이까?"
"글씨 말이시, 청국이고 아라사고 장마철 호박맨치로 크기만 혔제 사람덜이 물컹물컹 매운 디가 없는 것이제."
"그건 그렇고, 저놈덜언 쌈에서 이겼으먼 즈그 나라로 갈 일이제 어찌서 우리 땅으로 밀려들어 또 어디로덜 저리 가는고?"
"말허나마나 뻔헌 것 아니여. 아라사고 청국이고 다 몰아냈응게 인자 즈그가 이 땅 쥔 노릇 허겄다는 것이제."
"참말로, 나라 다스린다넌 대감이고 양반덜언 멀허고 앉었는겨?"
"아이고, 자다가 봉창 뚜둘기는 소리넌 허덜 말어. 그것덜이 모다 진작에 왜놈덜헌티 밑구녁 다 내준 잡년에다가 늘어진 붕알 틀어 잽힌 잡놈들인 거 몰라서 허는 소리여, 시방?"
사람들이 두려움과 근심 서린 얼굴로 나누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해괴한 소문들이 끝없이 떠돌았다. 금산사 미륵불과 은진미륵이 통곡을 했다는 소문만이 아니었다. 사명당의 비석이 땀을 서 말이나 흘렸다고 했고, 지리산 음양샘에서 선지피가 흘러내린다고 하는가 하면, 무주 구천동 골골이 밤마다 귀신들의 울음으로 가득 찬다고도 했다.
그런 흉흉한 소문들이 떠도는 가운데 일진회에서 한일보호조약 체결을 찬성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것이 또 소문이 되어 바람보다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회오리를 일으켰다. 그 소문은 그전의 다른 소문들에 비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일진회 놈덜이 그거 사람이 아니시. 헐 소리가 따로 있제 어찌 그런 소리럴 다 허고그려."
"무신 소리여? 그놈덜이야 애시당초 왜놈덜 앞잽이로 나슨 말종덜인디."
"아무리 말종 아니라 개종자라도 낯짝이 있는 것이제, 즈그놈덜도 명색이 조선 놈덜인디 그런 소릴럴 그리 내놓고 허는 법이 어디 있냔 말이여."
"그놈덜이야 왜놈덜헌티 나라가 넘어가면 즈그덜 시상이 된께 무신 소리럴 못허겄능가. 왜놈덜허고 손발이 척척 맞는 것이제."
"맞구만, 왜놈덜이 저리 기세 뻗치는 것도 다 일진회 놈덜맨치로 앞잽이질 허는 놈덜 땜시여."
"그런 인종들이야 항시 있는 법잉게."
"똥통에 처박을 놈덜이네."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소문을 확인하고 시국을 근심했다. 그런데 마침내 을사보호조약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것이다. 비분에 찬 그 글은 먼저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의 가슴을 쳤고, 그런 사람들의 입을 통해 글을 먼저 글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동양 삼국의 평화를 솔선주선하기로 나선 이토가 천만 꿈밖에 어찌 오조약을 내놓았는가. 개가죽을 쓴 우리 대신들은 일신의 영달만 위해 황제폐하와 2천만 동포를 배반하고 4천년 강토를 외인에게 주었도다. 슬프다! 우리 2천만 동포여, 살아야 할 거나 죽어야 할 거나.
그 논설문의 요지였다. 장지연이 그날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는 소문은 사람들을 더욱 분통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비로소 그 온갖 흉흉한 소문들이 왜 떠돌았던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인심이 불안하고 술렁거리는 속에 <을사오적>이라는 새로운 말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나라를 왜놈들에게 팔아먹은 다섯 역적이라는 말이었다.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그들이었다.
송수익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으로 이틀을 서성거렸다. 가슴에서는 장지연의 글에서 받은 비분이 절망감으로 가라앉기도 하고 저항감으로 솟구치기도 하면서 끓고 있었다. 송수익은 생각 끝에 신세호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정재규는 이미 말상대가 아니었고 이런 경우에 서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것은 신세호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세호와 생각의 방향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세호는 전통적인 유생의 길을 지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단발 같은 것은 아예 용납되지 않았다. 신세호는 초가의 사랑방에서 먹을 갈고 앉아 있었다.
"어서 오시게, 수익이. 내가 자넬 찾아가 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네 발길이 더 빨랐네그려."
신세호는 약간 웃음지은 얼굴로 송수익을 예절 갖추어 맞아들였다.
"그간 잘 지냈는가. 세속을 멀리하고 묵향 속에 묻힌 몸이라, 과시 선비다운 모습이로세. 무슨 글을 짓던 참인가?"
송수익은 자리를 잡고 앉으며 벼루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큼직한 벼루와 조그만 연적이 눈에 익었다. 방안에는 먹내음이 그윽하게 담겨 있었다.
"글은 무슨 글... 마음이 시끄러워 그저 먹을 갈고 있었지."
신세호는 벼루를 약간 옆으로 밀어놓으며 나직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예고 없이 찾아들어 마음이 더 시끄러워지는 것 아닌가?"
송수익은 신세호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아니, 사사로운 일로 그러는 게 아니네. 자네 맘도 잠잠허지가 못헌 것 아닌가? 자네 잘 왔네."
신세호가 흐리게 웃음지었다. 그 쓸쓸한 웃음에는 슬픈 기색이 깃들여 있었다.
"그래, 자넨 이번 일을 어찌 생각하나. 무슨 방책이 있나?"
"글씨... 나라가 망한 일이니 더 무슨 생각이 있겄능가. 사흘 전에 우리 유생들이 대한십삼도유약소의 이름으로 상소를 올리기는 했네만... 그것이 무슨 방책이 될라는지..."
신세호의 얼굴은 말하는 것에 따라 점점 침통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상소라... 상소라..."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며 송수익은 중얼거렸다.
"어찌 그러나. 자네 생각엔 상소가 별무 효과일 것 같은가?"
신세호의 물기 없이 단정한 얼굴에 불안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십삼도 유생들의 뜻을 모아 신속허니 상소를 올린 것이야 얼마나 고맙고 잘한 일인가. 그리허나..."
송수익은 밀려나오려는 말을 중단하고 말았다. 상대방은 <불충>을 가장 큰 죄로 치고 있는 유생이었던 것이다.
"어찌 말을 끊는가.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있등가?"
신세호는 상대의 마음을 꿰뚫는 듯한 눈길로 송수익을 지켜보았다.
"자네 앞에서 불충한 말을 할 수야 없지 않은가. 나를 대죄인으로 관가에 고하는 괴로움을 자네한테 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송수익이 빙긋 웃었다.
"이사람아, 상감도 안 듣는데서는 욕먹는다는 말이 괜시리 있능가. 억지소리는 빼고, 있는 대로만 말해 보게. 자넨 나보다 신식이니 어디 자네 생각을 들어보세."
신세호는 앉음새를 고치며 전과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러니께 말이시, 상소라는 것은 상감께 직접 글을 올려 무슨 일을 해결하자는 것 아닌가. 헌데, 지금 상감께서 그럴 만한 힘을 지니셨느냐가 문제 아니겠나. 자넨 어찌 생각하나?"
송수익은 직설을 피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꼭 신세호를 생각해서만이 아니었다.
"상감께오서 대역 대신 놈들한테 어수어족이 묶여 현군의 치정을 펼치시지 못하는 것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그리허나 이 위태한 국난에 처해 상감께 상소를 올리지 않고서야 달리 무슨 방도가 있어야 말이지."
신세호는 얼굴이 비통해져서 뭉텅이진 한숨을 토해냈다.
"신문을 보면 지금 한성에서는 종로상인들이 보호조약 반대로 상가를 철시하고, 각급 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고 있는 모양이네. 내 생각으로는 유생들의 상소는 상소문 이름만 거창했지 그 효과에 있어서는 상인들이나 학생들의 행동에 비해 어림이 없네."
송수익의 말은 냉정했다.
"그것이 아니면 달리 무슨 방도가 있다는 것인가?"
신세호는 송수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 가장자리가 미세하게 경련하며 눈동자가 불그스름한 물기로 젖고 있었다. 그건 눈물이 아니라 비분의 분출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말이네, 힘이 없어진 상감께 여기저기서 자꾸 상소를 올려대는 건 옳은 일이 못되네. 상감께 피를 마르게 하는 고통을 드리는 일일 뿐 무슨 해결이 되는가. 그러고, 왜놈들은 상소로 철회할 조약이었으면 처음부터 체결하지를 않았을 것이네. 왜놈들은 막강한 무력으로 이 땅을 장악한 다음 위협과 강압으로 조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네. 왜놈들의 무력은 실제로 총을 든 군대만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하네. 우리 눈앞에 있는 군산을 보게. 군산을 중심으로 날로 퍼져가고 있는 왜놈들의 민간세력도 결국은 무력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군산에 비해 부산 인천 목포 원산 같은 데의 왜놈 세는 두 배에서 세네 배까지 세다는 것 아닌가. 그리고 개항된 항구는 마산 진해 진남포 등등으로 이 반도 땅 전부가 왜놈세로 둘러싸인 형국일세. 어디 그뿐인가.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경부선과 경의선으로 일직선으로 뚫려 있네. 그건 왜놈들의 또 하나의 무력이네. 조선 사람들의 태반은 철도가 놓이는 것을 신식개화라고 믿고 있네만, 그 주인이 누구고 그 쓸모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야만 하네. 왜놈들이 우리를 편히 살게 해주려고 철도를 놓았겠는가. 다 어림없는 소리네. 모두가 제 놈들의 이익을 위해서고, 조선 사람들은 멋모르고 속고 있는 것이네. 결국 이 땅은 왜놈들의 무력으로 꽁꽁 묶인 형편이 되고 말았네. 그런 무력을 앞세워 체결한 조약을 철회시키거나 파기시키자면 어찌해야 되겠나? 종이에 글씨나 쓴 상소문으로 될 것 같은가?"
송수익은 신세호에게 거푸 묻고 있었다. 신세호의 입에서 보다 적극적인 방안을 끌어내고자 하는 의도였다.
"글씨... 자네 말이 아조 심중헌 말인디... 상소문말고 다른 방도가 어떤 것이 있을랑가..."
눈길을 내리깐 신세호는 상체를 좌우로 조금씩 흔들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건 책읽기가 몸에 밴 전형적인 양반 유생의 모습이었다. 송수익은 그런 신세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신세호가 일부러 대답을 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인지 송수익은 얼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이 나라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왜놈들 발밑에 갈린 속국이 돼버린 셈인데 거기다가 보호조약까지 체결됐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상소문이라는 건 태산을 손으로 떠미는 격이고, 소 잡겠다고 바늘 들고 나서는 격 아닌가. 이런 지경에 다른 무슨 방도가 있을꼬..."
신세호는 앉음새를 고치며 괴로운 신음을 가늘게 흘렸다.
"생각을 달리하면 왜 방도가 없겠는가. 조약을 체결한 조정대신들이란 물건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왜놈들 주구가 아닌가. 우리에겐 조정이 없어져 버린 거란 말일세. 조정이 없어졌으니 국권이 없어지고, 국권이 없어졌으니 나라가 없어진 것 아닌가. 나라가 없는데 상소문은 어디다 올린단 말인가. 이리 생각하면 다른 무슨 방도가 생기지 않겠나?"
송수익은 여전히 신세호의 말을 유도해 내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아아, 자넨 나라를 완전히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구먼. 그렇지, 나라를 강도질 당한 것이지. 나라를 강도질 당한 것은 위로 상감께 더없는 불충이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체면이 땅에 떨어진 것이니 우리 양반들이야 더 살기를 바랄 수가 없게된 몸들이네그려. 자네 생각이 이런 것이가?"
신세호는 비감한 눈길로 송수익을 바라보았다.
"그리 생각할 수도 있네. 허나, 나라를 빼앗겼는데 개개인이 죽는 게 능사가 아니지 않는가. 나라를 빼앗겼으면 되찾는 것이 제일 중한 일이 아니겠는가?"
송수익은 어금니를 물려 신세호를 똑바로 쏘아보듯 했다.
"나라를 되찾아? 그러면... 왜놈들에게 맞서 싸울 의병이라도..."
긴장한 신세호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네. 그 길밖에 또 무슨 방도가 있나."
송수익의 말은 단호했다. 그리고 결연한 의지가 드러난 그의 얼굴을 견고한 양쪽 턱이 받치고 있었다.
"자네가 그런 생각을... 그런 생각을 품고서..."
신세호의 눈길은 느리게 아래로 내리깔리고 있었다. 그 눈길을 따라 목소리도 차츰차츰 가늘어지더니만 말끝은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고개는 보일 듯 말 듯 좌우로 흔들렸다.
송수익의 눈에는 신세호의 마음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그러나 움츠러드는 그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한 사람씩 동조자를 늘려가야 했던 것이다.
"왜 그러나. 그 방도가 맘에 안 드나?"
송수익은 앞으로 조금 다가앉으며 곰방대를 꺼냈다.
"글씨... 나야 자네에 비해서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잘 모르긴 하네만, 이제 와서 의병을 일으켜가지고 싸운다고 무슨 가망이 있겄능가?"
송수익을 바라보는 신세호의 눈에는 슬픔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싸워보지도 않고 그것이 무슨 소린가."
송수익의 어조는 짱짱했다.
"자네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왜놈들 세력이 우리를 꽁꽁 묶고 있다고. 나도 왜놈들의 세력이 날로 늘어나고, 이번에 군산항으로 군대가 또 밀려들었다는 것도 알고 있네. 내가 하는 말은, 갑오년 그때에 비해 지금은 왜놈들 세력이 몇 배로 늘어나지 않았나. 그때도 사람만 수없이 상하고 말았는데 왜놈들 힘이 몇 배로 커진 지금이야 더 말할 것 없지 않은가 말이네."
"응, 자네 말은 틀림이 없네. 왜놈들 세력은 갑오년 대보다 몇 배가 강해졌지. 그렇다고 해서 손발 묶고 앉아 상소문 쪼가리나 올리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강도가 집 안에 들었으면 식구들이 총력을 다해 강도를 몰아내고 물리치려고 일어나는 것이 도리인가, 아니면 강도가 힘이 세니 미리부터 겁먹고 주저앉아 당하기만 하는 것이 도리인가. 이기고 지는 것은 싸운 다음에 따질 문제네. 힘의 강약을 따지기 전에 싸워야 할 때에 싸우는 것이 바른 사람의 도리네."
일단 본심을 털어놓기 시작하자 송수익은 가슴의 뜨거움이 배에까지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 뜨거움은 싸움에 나서고자 하는 열기가 아니라 상대방의 현명한 척하는 뒤에 감추어진 나약함에 대한 노여움이었다.
"자네 말도 일리는 있네. 허나 승산없는 싸움을 해서 수많은 인명만 상하고 마는 무모함을 저지르기보다는 다른 무슨 방도를 강구해 보는 것이 더 좋지 않겄능가."
"이사람아, 그 방도가 대체 무엇인가. 우리의 상대는 흉기를 든 강도라는 걸 잊지 말고 말하게. 강도한테 그냥 물러가 달라고 사정을 하겠는가, 무릎을 꿇고 빌겠는가. 강도를 대하는 데 무슨 다른 방도가 있다는 건가."
"자네 생각이 틀리지는 않네만 너무 급하고 격하네. 급할수록 돌아가랬다고 좀 더 두고 차근차근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겠나."
신세호는 두어 번 마른 입맛을 다시고는 팔을 뻗쳐 벼루를 끌어당겼다. 그 몸짓이 이야기를 그만 끝내자는 것임을 송수익은 알아차렸다. 배신감이 왈칵 끼쳐왔다.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신세호는 또 팔을 뻗쳐 연적을 집어왔다. 그리고 먹물이 마른 벼루에다 몇 방울의 물을 떨어뜨렸다. 송수익은 뜨거운 감정을 지그시 눌러 식히며 그 한가하기 이를 데 없는 몸짓을 지켜보고 있었다. 꼭 어린애 장난질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 생각이 자네 맘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허나, 끝으로 한마디만 하고 가겠네. 자넬 위시한 모든 유생들이 다 자네같이 생각하고 있다면 자네들이 하늘처럼 떠받들고 우러러 뫼시는 상감마마, 아니 황제폐하께오서 땅을 치고 통곡을 하실 것이네."
송수익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아니, 그 무슨 불경한 소린가!"
신세호가 고개를 치켜들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상감의 심중은 모든 유생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싸우기를 바라신다 그 말이네. 그것이 바른 충신의 길이기도 하고, 어쩐가, 내 말이 틀렸는가? 잘 있게."
송수익은 비웃음 담긴 얼굴을 돌렸다.
"아니, 저어..."
신세호는 몸을 반쯤 일으켰다가 도로 주저앉고 있었다.
날이 새면 새로운 소문이 떠돌고, 다시 날이 새면 또 새로운 소문이 떠돌았다. 바람이 불 듯 그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소문들은 하나같이 불길하고 흉흉한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잔뜩 기죽고 풀죽어 그 소문들에 자꾸만 움츠러들고 있었다. 서로 눈치 보며 수군거리고, 조금만 낯선 사람이라도 경계했다.
"이랫말 꽃예 아부지가 헌병대에 잽혀갔담시로?"
"이, 그랬다등마."
"어찌서 잽혀가?"
"음마, 자네넌 안직도 몰르고 있능가? 주막서 술짐에 왜놈덜 욕얼 했드랑마. 근디 낯모르는 사람이 있는 거럴 조심 안헌 것이제."
"글먼, 그 낯모르는 인종이 왜놈 앞잽이란 것이여?"
"더 말허먼 멀혀."
"아이고메 무셔라. 이놈에 시상얼 어쩔꼬."
"왜놈 앞잽이덜이 쫘악 깔렸다고 허등맘 그것이 참말이네 이."
"헛말이 그리 돌 리가 있능가. 인자 사람 무서와 살기 심든 시상이 되았네."
"참말로, 사람이 사람 무서와험서 입 봉허고 살아야 될 망헌 시상이시."
주위를 흘끔거리며 아낙네들이 우물가에서 수군거리는 이야기였다. 임금을 호위하던 시종무관장 민영환이 할복자결을 했다. 전 의정부대신 조병세가 자결했다. 전 참판 이명재가 자결했다. 그 연이은 자결의 소문은 겨울바람을 타고 산지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배를 갈라 붉은 피 쏟으며 죽었다는 그 소문들은 그전의 어떤 소문들보다 뜨겁고 거센 파도가 되어 사람이 사는 곳이며 퍼지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 소문들은 단순히 나라 잃은 비분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민영환이 흘린 피는 방을 넘치고 마루를 흘러 토방으로 떨어져 내렸는데 그 자리에 푸르른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했고, 조병세가 목숨을 끊자 그가 기르던 난초들이 일제히 꽃을 피웠다고 하는가 하면, 이명재가 숨을 거두면서 뜰의 매화나무가 사흘 밤을 통곡했다는 것이었다. 그건 충절을 상징하는 매 난 국 죽에 근거를 둔 이야기들이었다. 누가 지어 붙인 이야기든 간에 죽음에 곁들여진 그 이야기들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층 비감케 했고 더욱 충동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이완용이고 이근택이고 뒤져야 헐 놈덜언 안 죽고 어찌서 아까운 애맨 사람덜만 자꼬 죽는고."
"긍게 역적 따로 있고 충신 따로 있는 법이제."
"양반이란 것덜이 다 나라 망쳐묵는 역적덜인지 알었등마 그래도 안직은 충신이 남어 있었든 것이여."
"역적보담 충신이 많덜 못혀서 그렇게 사람 사는 시상에 충신이 씨가 몰를 리가 있능가."
"근디 충신덜이 저리 줄줄이 죽어가다 보먼 무신 일이 나도 나겄제?"
"충신덜이 역부러 피흘림서 죽어가는 뜻이 그런 것 아니라고."
"하먼, 난국에 흘리넌 충신덜 피넌 항시 사람덜얼 불러 모으는 법잉게."
"이, 자네덜 혹시 그 말 들었능가?"
"무신 말?"
"어지께 어떤 중이 주막거리럴 지내감서 의병얼 모은다고 허드라는디."
"머시여! 의병?"
"어허, 이사람아! 더 크게 소리 질르소. 주재소꺼정 다 딛기게."
"이, 헛소리가 아닐 것이여. 그냥언 못 지내갈 시국잉게."
"일이 시작되고 있는갑구만."
"근디 그 중언 어디로 가부렀능고? 무신 세세헌 것도 안 알리고."
"눈 피해 허는 일인디 첫술에 그리허는 법 있간디. 사람덜 맘 채비시키자고 그리 운만 띄우고 뜬 것이네. 두고 보소. 무신 소식 또 올 것이니."
"그것이 진짜 중이었을랑가?"
"아닐란지도 몰르제."
"그나저나 참말로 의병얼 모으먼 우리넌 어찌야 허능고?"
"그 이얘기 그만 허세."
사랑방에 모여 앉은 남자들이 긴장 속에서 나직나직 주고받는 말들이었다.
겨울은 깊어가고 있었다. 흰옷 속에 몸을 웅크린 사람들은 그저 예년과 다름없이 추운 겨우살이를 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깊은 속은 달랐다. 장덕풍은 어둠에 몸을 감추고 하야가와를 찾아갔다. 하야가와한테서 밤중에 오라는 명령이 내렸던 것이다. 그 명령은 말이나 쪽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었다. 우체국의 소사가 성냥 세 갑을 사가는 것이 그 명령이었다. 그건 그들 둘 사이에 미리 약속해 둔 방법이었고 열네 살짜리 소사로서는 그저 심부름을 하는 것뿐이었다.
"요새 장사는 어떻소?"
장덕풍이 주눅 든 모습으로 엉거주춤 자리를 잡고 앉아 하야가와가 불쑥 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딱딱하다 싶게 무표정했다. 언제나 웃음이 감도는 부드러운 그의 얼굴은 간 곳이 없었다.
"야아, 덕분에 잘 되는구만이라오."
장덕풍은 비위 맞추는 웃음을 헤벌레 지어 보이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돈버는 재미에 정신이 팔려 그 임무는 다 잊어버렸소?"
냉기 끼치는 하야가와의 목소리였다.
"야아?..."
장덕풍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하야가와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어허, 내가 맡긴 임무는 이제 잊어버렸냔 말이오."
하야가와는 짜증스럽게 내쏘았다.
"아, 아니구만이라우. 눈에 불씨고 열성으로 허는구만요. 아랫것덜도 물이 못 나게 잡지고라."
당황한 장덕풍은 한달음에 말을 쏟아놓았다.
"물이 못나게? 그게 무슨 말이오?"
하야가와는 올려뜬 눈으로 장덕풍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어, 긍께로 머시냐... 시암에 물얼 막 퍼내고 또 퍼내고 허먼 물이 미처 괼 새가 없덜않능가요. 그만치로 거 머시냐... 그렁게 이랫것덜얼..."
장덕풍은 손짓까지 해가며 끙끙거렸다.
"그러니까 아랫것들을 정신없이 닦달하고 있다 그런 말이오?"
"야아, 바로바로 그 말이구만이라우."
장덕풍은 그만 속이 확뚫리는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며 얼른 앉음새를 바로잡았다.
"물이 못 나게... 물이 못 나게..."
하야가와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또 한 가지 조선말을 머릿속에 새겨 넣고 있었다. 그는 일본인 중에서 조선말을 잘하기로는 자신이 일급에 든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투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많은데다 은어나 속담 같은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면 전혀 해득이 안 되는 것이다.
"장 상도 세상이 달라진 것 다 알고 있지요?"
하야가와는 얼굴을 좀 부드럽게 바꾸며 장덕풍을 주시했다.
"야아, 우리 일본시상으로 변헌 것 다 알고 있구만이라우."
장덕풍은 아부지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렇지만 보호조약을 맺었다고 해서 일이 다 끝난 것이 아니오. 우리가 할 일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오. 그러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되게 돼 있소."
"야아, 알겄구만이라우."
"무슨 말인고 하면, 조선 놈들이 보호조약에 반대해서 이 겨울 동안에 의병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이오. 겨울 동안에 의병을 모아 봄이 되면 일어난다는 말인데, 우리가 할 일이 얼마나 중해졌는지 생각해 보시오. 여러 말 할 것 없이 장상의 아랫사람들을 정신 바짝 차리게 만들어 어디어디서 의병을 모으는지 꼭 탐지해 내게 하시오."
"야아, 그리허겄구만이라우."
"장상, 이제 기회가 왔소. 저희들이 아무리 비밀리에 일을 꾸민다고 해도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냄새를 풍기게 되고, 꼬리가 밟히게 마련이오. 이 좋은 기회에 공을 세워 장상의 소원을 풀도록 하시오. 장상이 공을 세우기만 하면 내가 당장 장상의 소원을 풀어주겠소."
하야가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장덕풍을 바라보며 묘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아아, 꼭 공얼 세우도록 허겄구만이라우."
장덕풍은 힘있게 말하며 허리를 깊이 굽혔다. 그의 눈앞에는 목 좋은 데 있는 상점이 환하게 떠오르고, 부자가 된 자신의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 기회에 아무 공도 못 세우면 곤란해요."
"야아?"
"나와는 관계가 끝난다 그 말이오."
"아, 알겄구만이라우."
장덕풍은 표 나게 말을 더듬거렸다.
어둠 속에 불빛 하나가 추위를 타며 깜빡거리고 있었다.
"맘도 썰렁헌디 날꺼정 지독시리춥네. 저그서 무신 꼬타리럴 잡게 될랑가?"
"맘 급허니 묵덜 말어. 속만 탄게."
"그런지 암스로도 덕풍이성님이 그리 숨넘어가게 몰아대는 디야 어쩌겄어."
"덕풍이성님이 풍이 잠 씬 것이여."
"덕풍이성님도 왜놈허고 우리 새중간서 맘고상이 예사가 아닐 것인디?"
"그러기도 허겄제. 좌우간 즈그덜이 움직기리기 시작혔으면 꼬랑지가 잽힐 날이 있을 것잉게."
방태수와 김봉구는 일부러 밤늦게 주막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주막에는 술꾼들이 없었다. 두 사람은 기둥에 걸린 흐린 불빛 아래서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어디서 오는 질인디 이리 늦당게라?"
주모는 두 사람을 알아보고 반색했다.
"자네가 독수공방험서 춥게 자는 것이 짠히서 따땃허니 품어줄라고 늦었는디도 이리 왔네."
방태수가 더부룩하게 돋은 숱 많은 수염을 문지르며 능청스레 말을 걸쳤다.
"하이고, 어쩐 일이랑가요. 그냥 자고 가지도 않던 사람덜이 한이불꺼정 필라고 허니. 해가 서산서 솟을 일이시."
기름기 도는 얼굴에 아직 젊은 기가 남아 있는 주모가 가벼운 코웃음을 치며 상대방의 말을 객쩍은 소리로 돌려버렸다.
"허, 시방 우리럴 돈 없다고 무시혀서 허는 소리여, 부처님 가운데토막 맨치로 점잖허다고 허는 소리여?"
정색을 한 방태수가 주모에게 비릿한 눈길을 보냈다.
"저 등집 속에 든 것이 돌뎅이가 아닌디 돈 없단 말 못헐 것이고. 보부상 색질이 노소귀천얼 안 개리넌 것이야 시상이 다 아는 것인디 그리 말허면 날아가든 새가 웃소."
"아조 지대로 암스로 어찌서 콧등으로 웃고 긍가."
김봉구가 무지르고 들었다.
"나가 허는 말언 돈얼 벌지만 알었제 쓸지넌 몰르는 쫌팽이들이란 말이오."
주모가 째지라고 눈을 흘겼다.
"머시여? 우리가 화대 아까와 공짜로만 헐라는 인종들로 뵈는 모양이시. 공짜가 따로 있제, 요것 참 드럽네."
김봉구가 빈대코를 찡그려 붙였다.
"어디 오늘 밤에 보드라고, 우리가 쫌팽인가 아닌가. 우선에 술상보톰 딜이소."
방태수가 다리를 꼬며 헛기침을 했다.
"언년이넌 머허고 있능가?"
김봉구가 담배쌈지를 꺼내며 물었다.
"자요."
"조갑지 푹 퍼지라고 자빠져 자기넌. 언년이넌 낸 차진께 얼릉 깨와."
"음마, 참말로 오늘 밤에 만리장성 쌀랑갑네?"
주모가 눈웃음을 치며 일어났다. 그 눈꼬리로 음기가 지르르 흘렀다.
"헛돈질허는 것이 아닐랑가?"
김봉구가 곰방대를 물며 중얼거렸다.
"첫술에 배불러? 오늘 밤이야 밑져봐야 본전이고, 우리 편 삼으면 되는 것이제."
방태수의 나직한 대꾸였다.
주모는 열대여섯 살 나 보이는 처녀에게 술상을 들려가지고 들어왔다.
"언년이 얼굴에 잠기가 없는디?"
김봉구가 술상을 내려놓는 처녀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이고, 속 태우덜 마시게라. 살짝 들었다 깬 잠잉게."
주모가 눈을 흘기며 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주모가 따른 술을 한 사발씩 단숨에 비웠다.
"요새 여그 장시넌 어찐가?"
방태수가 젓가락을 들며 물었다.
"보는 대로 아니요, 시상이 시끌시끌허면 돼묵는 술장시 밥장시야 없는 법 아니겄소. 외상만 늘고, 죽을 판이오."
조무가 고개를 내저었다.
"여그도 왜놈덜이 원수시?"
김봉구가 눙치고 들었다.
"거그야 왜물건으로 덕보덜 않으요."
조무가 입을 삐쭉 비틀었다.
"아니시, 우리도 장시가 그늘지고 지랄이시. 왜놈덜헌티 해 입기야 자네나 매일반이네. 속상허는디 술이나 치소."
방태수가 술사발을 들며 빠르게 눈짓했다. 그런 이야기를 더 꺼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인자 언년이가 술얼 쳐라. 니가 코만 그리 안 얽었어도 괜찮헌 인물인디 이."
김봉구가 처녀를 쳐다보며 혀를 찼다.
"살짝곰보가 왜 값나가는지 몰라서 그런 소리 허요? 요것이 우리 집 보밴디."
조무가 퉁을 놓았다.
"남자 코가 크먼 물건이 실허고, 여자 눈 가상사리가 까무잡잡허먼 조갑지가 찰지다는 말언 그냥 알아묵을 만헌디, 살짝곰보 조갑지가 쓸 만허다는 말언 무신 소린지 모르겄당게로."
김봉구가 주모와 언년이를 번갈아 보며 코를 큼큼거렸다.
"하이고, 이적지 그리 쉬운 것도 몰름서 주막잠 자고 댕겼소? 손님 살짝 앓음서 거그도 살짝 익어서 찰지게 된 것 아니오. 그리 뻔헌 이치도 몰르고."
주모가 거침없이 말하며 눈을 흘겼고, 언년이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떨구었다. 방태수는 빙긋이 웃고 있었다.
"살짝 익어서 찰지게 돼야? 글먼 빡빡곰보넌 더 좋겄네, 까실까실 익었응게."
김봉구는 침까지 삼키며 응수하고 들었다.
"아이고메, 저리도 몰르까? 너물얼 살짝 디쳐야 지맛이 나제 푹푹 삶아불먼 어찌 돼요? 빡빡곰보덜이 더러 애기럴 못 낳는 것이 어찌 그런지 아요? 손님 심허게 앓음서 애기보가 타부러서 그러요. 무신 말인지 알아듣겄소?"
주모의 말은 생김만큼 야무졌다.
"애기보가 타부러? 글먼 남자 빡빡곰보넌 어찌 되는 것이여?"
김봉구는 멀뚱한 얼굴로 눈을 껌벅거렸다.
"그야 붕알이 타겄제."
방태수가 뚱하게 던진 말이었다.
"맞소, 맞소. 명답 중에 명답이구만이라."
주모가 손바닥을 맞때리며 깔깔대고 웃었다. 방태수와 김봉구도 따라 웃었고, 언년이는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자넨넌 아는 것도 많네. 글먼 염병을 앓으면 어찌 되능가?"
김봉구가 주모에게 물었다.
"염병?"
주모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아, 손님이고 염병이고 다 똑겉은 열병 아니냔 말이여."
김봉구가 술잔을 들며 퉁을 놓았다.
"그것이야 나도 몰르겄소. 그런 것꺼정 알라 말고 오늘 밤에 우리 언년이나 이뻐허고, 저 살짝 얽은 자리 개리게 향 좋은 분이나 한 곽 줏시요."
"내 말 잘 듣고 맘에 들게만 험사 분 한 곽뿐이여? 옷도 히주고, 금가락지도 히주제."
김봉구는 방태수를 옆눈질하며 호탕한 척하고 있었다.
"그리 못헐 것도 없제. 술도 얼큰허고 밤도 늦었는디 인자 자보도록 허드라고."
방태수가 한껏 기지개를 켰다.
"짜아, 그리허면 화대보톰 착 내놔야 잠자리가 편허고 호시가 좋겄제?"
김봉구가 손발이 착착 맞게 반죽을 해대며 돈을 꺼냈다.
"참말로 오늘 밤에 임도 보고 뽕도 따는게비네."
주모는 음기 실린 웃음을 환하게 피워내며 돈을 잽싸게 받아 챙기고는
"언년아, 얼릉얼릉 술상 치우고 잠자리 피고 허그라."
언년이의 어깨를 치며 수선을 피웠다. 방태수는 주모를 품고 한바탕 일을 치렀다.
"생긴 거맹티로 기운이 씨요 이."
그를 끌어안은 채 주모가 뜨겁고 끈끈한 소리로 말했다.
"한 번으로야 자네도 심에 안 차겄제? 기둘리소, 서너 번은 더 남었네."
방태수의 숨길 거친 소리였다.
"음마, 나가 임자 만내부렀네."
주모가 그의 몸뚱이를 더 힘주어 끌어안으며 바르르 떨었다.
"담배가 한 대 꼬실리고."
방태수는 두 팔로 방바닥을 밀었다. 비스듬히 누운 방태수는 왼쪽 팔로 주모를 안고 곰방대를 빨았다.
"그나저나 시상이 이리 시끌시끌히서넌 암것도 되는 일이 없넌디..."
"그렁게 말이오."
"왜놈덜이 원수여."
"그런 소리 허면 큰탈나요."
"자네 앞잉께 믿고 허제."
"그러요, 왜놈덜이 원수요."
"나라가 망헌 판에 안되는 장시나 해묵자고 등짐만 지고 댕게서 쓸랑가?"
"글먼 어찌겄소?"
"의병이라도 나갔으먼 쓰겄는디. 의병 모은다넌 소문만 있제 어디서 모으는지 알어야 들고 말고 허제."
"음마, 대장부가 따로 없소 이."
"당연지사제, 나라가 망혔는디. 이 근방서 의병 모으는 디 없능가?"
"안직 그런 소리 못 들었소. 그런 소문 들으면 갤차줄 게라?"
"이, 꼭 그리허소. 나서서 싸와야제."
"아이고메, 장허고 장헌 거."
한편, 송수익은 신세호가 소개한 임병서와 내밀하게 접촉하느라고 삼동의 추위도 잊고 지내고 있었다. 임병서와 비밀리에 만나는 것은 의병을 조직해 나가기 위해서였다.
"자네가 의병에 뜻을 두고 있듯이 이 사람 병서도 자네 같은 사람을 찾고 있어서 소개하는 것이네. 서로 한뜻이니 마음을 합치면 힘이 커지지 않겠나."
신세호가 임병서를 소개하며 한 말이었다. 그때도 신세호는 의병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뒤로 물러선 입장이었다. 송수익은 그런 신세호를 탓하지 않았고, 임병서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입을 떼지 않았다. 송수익은 오히려 임병서 같은 사람을 소개해 준 것을 고마워했다. 임병서 또한 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 그다음부터는 신세호를 빼고 송수익과 임병서는 단둘이만 만나게 되었다. 송수익은 임병서의 설명을 듣고 나서부터 구체적인 행동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최익현과 임병찬이 뜻을 합쳐 의병을 일으키고자 계획하고 있으며, 임병서는 임병찬의 문중으로 동생뻘이었다. 최익현은 그 강직과 기개가 익히 알려진 인물이었다. 작년 3월에 누구보다 먼저 일본의 침략 위험을 알리는 상소를 올렸다가 헌병대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고,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또 오적을 규탄하고 조약 최소를 직언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최익현은 상소로 만족하지 않고 마침내 의병을 일으키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유생이되 오랜 세월 가부좌를 틀고 앉았던 다리를 풀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줄 아는 색다른 유생이었다. 그 나이를 개의치 않는 기개에 송수익은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양반만 가지고는 일이 어렵습니다. 양반들 수가 많지도 않은데다, 떨치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탓이지요. 일이 성사되자면 천상 농민들의 호응을 얻어야 합니다. 허나 농민들의 호응을 얻는 데 두 가지 어려움이 있지 않은가 합니다. 하나는, 나라는 양반들이 망쳐먹고 싸움은 우리더러 나서라 하느냐 하는 배척감이지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봉기 대까지 비밀유지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임병서의 말이었다.
"예, 그런 어려움이 있기는 합니다만, 농민들에게도 우국충정은 따로 있습니다. 특히 왜놈들에 대해서는 갑오년 그때에 당한 원한이 깊지요. 그 원한을 갚으려고도 농민들은 많이 호응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비밀유지는 믿을 만한 사람들을 골라 결속시키는 거니까 최대한 조심하면 별 탈이 없지 않을까 합니다."
송수익의 대답이었다.
송수익은 약속한 불이암으로 갔다. 임병서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일은 진척이 있는가요?"
임병서가 부리부리한 눈에 힘을 모으며 물었다.
"예, 예정대로 되어가고 있는 편입니다."
송수익은 나직하게 대답했다.
"참 다행입니다. 송 선생께서 워낙 덕을 쌓으셔서..."
임병서가 입을 꾹 다물며 신뢰에 찬 웃음을 묵직하게 지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송수익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어 다름이 아니고, 봉기는 해동이 되면 하기로 최종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추위도 추위고, 자금문제 같은 것이 좀더 시일을 요하고 있습니다."
"그러겠지요, 군비 없이야 싸울 수 없는 일이니까요."
"통감부가 개청되었으니 일은 점점 급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임병서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통감부가 개청되면서 해외의 조선인에 대한 보호권이 왜놈들 외무성으로 넘어갔습니다."
"뭐라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임병서의 눈이 고정되었다.
"사실입니다. 작년부터 각국에 나가 있던 공사들이 철수하더니 결국 그 지경까지 되고 만 겁니다."
"그건 속국보다 더한 작태가 아닌가요. 조정대신 놈들, 정말이지 개가죽을 둘러쓴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오. 그놈들을 어찌 죽여야 하겠소."
임병서는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부르쥐었다.
"기왕 망친 나라, 그놈들을 다 잡아죽인다고 해서 되돌려질 일이 아니지요."
송수익이 임병서를 응시했다.
지삼출은 사람들과 함께 사랑방을 나섰다. 사람들은 제각기 어둠 속으로 흩어져 갔다. 지삼출도 혼자 고샅의 어둠을 헤쳐 나갔다. 얼마를 걷던 그는 왼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과는 반대방향이었다. 그는 걸음을 좀 더 빨리 했다.
"누구여, 삼출인가?"
어둠 속에서 들린 숨죽인 목소리였다.
"이, 나시. 자네 날르게 왔네."
지삼출이 대꾸했다. 상대방은 함께 사랑방을 나섰던 손판석이었다.
"송 선상님이 보자는 것이 무신 달라진 일이 있어선가?"
손판석이 지삼출 옆으로 붙어서며 말했다.
"글씨, 무신 일이 있기넌 있겄제."
지삼출은 몸을 부르르 떨며 대꾸했다.
"근디 말이시, 자네 덕구는 어쩔랑가?"
"그놈에 입이 초라니 방정이라서."
"입말고, 그 자석이 요상시러운 것 말이시. 인자 뒤럴 캐야 안 쓰겄어?"
"쬐깨 더 두고 보세. 확연헌 꼬타리도 잽히는 거 없이 뎀빌 수야 없응게."
"나 눈에넌 그 자석이 영축없이 앞잽이랑게로. 나가 잘못 생각허는 것이까?"
"사람 한번 의심허먼 그리 되제."
"사람 의심허는 것도 못헐 일이시. 이 일 시작허고 나서보톰 자는 마누래도 요상허게 뵌당게."
"그리 되는 법이시. 너무 맘 급허니 묵지 말소. 덕구 앞이서넌 입조심만 허면 대게."
두 사람은 더 말이 없이 송수익의 집 쪽으로 고샅을 꺾어 돌았다. 송수익은 신문을 펼쳐놓고 있다가 두 사람을 맞아들였다.
"무신 일 있으신게라우?"
지삼출이 송수익의 눈치를 살피며 자리를 잡았다.
"아 예, 오늘 밤에 만나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고 한 가지 알릴 일이 있어서요. 그간에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해 왔던 문제인데, 우리 의병은 해동이 되고 거사하기로 결정이 났소. 어찌 그러냐 하면 날이 추워 싸우기가 어렵고, 또 싸움에 필요한 군비를 장만해야 하기 때문이오. 그러니 그간에 사람들을 더 많이 모으도록 애쓰는 게 좋겠소."
송수익이 두 사람을 번갈아 눈길을 돌렸다.
"그리 되면 좋고도 나쁘겄구만이라우."
손판석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예, 들어봅시다."
송수익이 손판석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렁게 형편이 그리 되면 사람얼 많이 모으기야 존디, 말이 새나가는 것얼 막기넌 자꼬 에로와지겄구만이라."
"그렇지요, 그런 걱정도 있지요."
송수익은 자신도 그런 염려를 하고 있어서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야 무신 다른 방도가 있간디. 더 믿을 만헌 사람덜 골라내 감서 입단속시키게 히야제."
지삼출의 낮고 묵직한 말이었다.
"그야 그렇제. 근디 왜놈덜 앞잽이넌 누가 누군지 몰르게 날로 늘어나제, 사람 짚은 속 알기넌 에롭제 헝게 걱정이 안되는가."
손판석의 말도 신중했다.
"맞는 말이오, 우리 상대가 왜놈들이라 여간 어려운 게 아니오. 허나 다른 도리가 없지 않겠소. 어려울수록 조심조심 일을 해나가야지요."
송수익은 손판석을 바라보았다.
"야아, 그 수밖에 없겄지라우. 앞잽이덜보담 앞잽이 아닌 사람들이 훨썩 더 많은 게라."
손판석의 힘준 말이었다.
"고맙소. 그리 맘 단단허니 먹읍시다."
두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 송수익은 눈으로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말이여, 쥐도 새도 몰르게 속으로 뼈대럴 짜갖고 일얼 탁 터치먼 그때 사람덜이 와아 모여드는 법이시. 갑오년 때 보소. 그 많은 사람덜이 어디 다 미리미리 연줄이 맺어졌간디. 한쪽서 일얼 딱 시작허고 나승게 평소에 그런 일 일어나기럴 고대허고 있든 사람덜이 와아 들고일어남서 맘얼 합치고 한덩어리가 된 것 아니드라고."
지삼출의 말이었다.
"맞는 말이오, 일은 그리 되는 법이오. 언제나 중한 것은 민심이오. 요새 왜놈들을 생각하는 민심은 어떻소?"
송수익의 목소리에 약간 생기가 돌았다.
"갈수록 왜놈덜얼 미워허게 되제라."
손판석의 대답이었다.
"잘되고 있는 것이오. 어쨌거나 갑오년에 일어났던 사람들을 찾아내도록 하시오."
송수익의 말에 지삼출과 손판석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13. 장례식
"아이고메 엄니, 나 죽네.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나 잠 살래주소오, 엄니이."
어둠 속에 번지고 있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아픔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몸부림치는 울음이고 신음이었다. 어둠 속에서는 그 고통에 찬 신음소리만 울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각기 그 음조가 다른 코고는 소리들이 함께 섞이고 있었다. 코고는 소리들은 그지없이 태평스럽고 느긋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신음소리는 더욱 절박하고 외로웠다.
"아이고고 엄니, 나 죽네, 엄니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는 신음소리에는 몸이 비틀리고 꼬이는 고통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방영근은 어렴풋이 무슨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끈끈한 잠에 취해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흐리멍덩해서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무슨 신음소리 같기도 했던 것이다. 그 기분좋지 않은 소리가 자꾸만 들리고 있어서 그는 잠을 깨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 일은 쉽지가 않았다. 무거운 삭신은 끝없이 아래로만 가라앉고 잠이 어찌나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지 잠을 깨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엄니, 나 죽네에... 아으아으, 나 잠 살래주랑게로, 엄니이!"
무엇을 쥐어뜯는 듯한 울부짖음이 더욱 커졌다. 방영근은 그때서야 그 소리가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나 생각뿐이었다. 아래로만 처지고 잠기는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몸을 꼼짝 못하게 뒤덮고 있는 잠을 가까스로 떠다 밀었다. 잠이 떼밀리는 만큼 몸을 일으키면서 그는 주만상의 병세가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고메 나 죽네, 엄니이, 엄니이..."
이를 뿌득뿌득 가는 신음이었다. 방영근은 마침내 잠에서 깨어났다.
"만상이, 어찌 긍가? 다리가 더 아파졌능가?"
방영근은 주만상을 더듬어 찾았다.
그런데 주만상은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인지 어쩐지 계속 어머니를 부르는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방영근은 주만상의 얼굴에 손이 닿는 순간 깜짝 놀랐다. 손바닥에 동시에 느껴진 건 뜨거움과 축축함이었다. 열에 들뜬 얼굴은 땀으로 맥질되어 있었던 것이다. 방영근은 겁이 났다. 병이 심해져도 많이 심해진 것이라 싶었다. 방영근은 남용석을 깨울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곤하게 자고 있는 그를 깨운다고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우선 혼자 어찌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어이, 만상이! 나시, 나 영근이여. 어디가 어찌 아픈가?"
방영근은 주만상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주만상은 아무런 대꾸 없이 연상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열이 심해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만 마음이 다급해졌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불부터 켤까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을 다 깨울 수는 없었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 시계는 보이지 않았다. 몇 시쯤 되었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방영근은 머리맡을 더듬어 수건을 찾아들었다. 주만상의 얼굴부터 조심조심 닦아냈다. 땀은 얼굴에만 난 것이 아니었다. 온몸이 땀범벅이어서 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온몸이 불덩어리였다 .예삿일이 아니라 싶어 남용석을 깨우기로 했다.
"어이 용석이, 일어나소, 얼렁 일어나."
방영근은 목소리를 별로 크게 내지 않는 것에 비해 남용석의 어깨는 세게 흔들어댔다.
"으응, 끄응, 머시여, 냅둬..."
잠에 취한 남용석은 팔을 내젓고 빈 입맛을 짭짭 다시며 돌아누웠다.
"용석이, 얼렁 일어나. 만상이가 큰 탈나게 생겼당게. 아 얼렁 일어나!"
목소리를 좀 더 높인 방영근은 남용석의 어깨를 마구 흔들어댔다.
"어찌 이려, 만상이가 머시라고?"
남용석이 잠에 취한 소리를 했다.
"만상이 몸이 펄펄 끓고 지정신이 아니란 말이시. 큰 탈나것어."
"머시여! 만상이가 큰 탈났어?"
남용석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 정신 채리고 여그 만상이 얼굴 잠 맨져보소. 몸띵이가 불뎅이고 말도 못 알아듣네. 다리 아픈 것이 도지고 속병이 덧친 것인갑네."
방영근은 자기 나름의 진단을 하고 있었다.
"어디 보세. 기연시 탈이 나부렀능가..."
남용석이 중얼거리듯 하며 주만상 쪽으로 몸을 옮겼다. 주만상은 그때까지도 끊임없이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고메, 몸이 불뎅이 아니라고! 땀언 어찌 이리 또 맥질이고."
잠이 완전히 걷힌 남용석의 목소리였다.
"그렁게 말이시. 병이 짚어도 예사로 짚은 것이 아닝갑네."
방영근의 근심스런 목소리였다.
"시방 멫시나 됐능고?"
"몰르겄네. 시계가 봬야 말이제."
"이래 갖고넌 큰탈 만내겄는디. 숙직허는 루나헌티 알려야 쓰덜안컸능가?"
남용석이 서둘렀다. 그들은 백인감독을 <감독>이라 하지 않고 하와이 본토 말인 <루나>라고 불렀다.
"그런다고 무신 소용 있겄능가. 그 몰인정헌 놈덜이 이 밤중에 병원에 델고 갈 리도 없고."
방영근의 시무룩한 대꾸였다.
"글먼, 이리 보고만 있을랑가?"
"곧 날이 샐 것 겉응게 땀이나 ㄸ아내고 물이나 잠 믹임서 우리가 어찌 히보는 것이 어쩐가."
"그려... 그리헐 수밖에 없겄네."
그들 두 사람은 문 쪽 침상에 놓인 물주전자를 가져오고, 땀을 닦아내고 하며 한참이나 간호에 마음을 쏟았다. 주만상은 물을 조금씩 받아먹으면서 신음소리를 낮추게 되었다.
띠잉 띠잉 띠잉
불알시계가 언제나처럼 느릿하고 둔한 소리로 세 번을 울렸다. 두 사람은 땀이 끈적하게 내배는 걸 느끼며 담배를 한 대식 빼물었다. 담배는 궐련이었다. 이틀에 한 갑씩 배급이 나와서 곰방대는 이미 쓸모없이 된지 오래였다. 대개의 사람들은 곰방대를 다 내버렸다. 그러나 방영근은 곰방대를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을 내버리는 것이 꼭 고향을 내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간직하는 것은 고향에 꼭 돌아가리라는 다짐이기도 했다.
"우리가 지닌 것언 몸띵이뿐이고, 믿을 것도 몸띵이뿐인디..."
남용석의 착 가라앉은 말이었다.
"그러제, 이 타국서 몸띵이 성허덜 못해서야 아무 가망도 없응게..."
방영근도 착잡한 마음으로 담배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저 사람 만상이가 보기 허고넌 달르게 속이 허헌게비여. 여그 와서 일얼 못 이기고 날이 갈수록 골골기림서 병이 짚어지덜 안혔다고. 거그다가 다리꺼정 상혔시니 결국 저리 된 것이제."
"글씨... 그런 모양이시..."
방영근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주만상은 원래 몸이 허한 사람이 아니었다. 상심으로 마음병이 생겼고, 마음병으로 속병을 얻기 시작한 것이었다. 돈을 벌어 한밑천 잡겠다고 나섰던 길인데 막상 하와이에 와서 보자 돈벌 가망은 전혀 없고,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상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방영근은 웬일인지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 남용석의 말을 그냥 수긍하고 말았다.
"다 성헌 몸으로 고향얼 찾어가야 헐 것인디, 저 사람 저러다가..."
남용석은 그만 말을 끊었다. 방영근은 남용석한테서 눈길을 돌리며 못 들은 척했다. 방영근은 그런 막다른 걱정을 하는 남용석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은 고향사람이었고 그동안 1년 반이 넘게 함께 살아오면서 정이 깊어져 있었던 것이다. 잠들어 있는 여덟 사람 중에서 굳이 남용석을 깨웠던 것도 그 까닭이었다.
"날이 새면 루나가 병원에 데래다 줄랑가 몰르겄네"
자신의 입바른 말을 얼버무리듯 남용석이 어물어물 말했다.
"즈그도 사람새낀 게 보면 알겄제."
방영근은 창 밖으로 눈길을 보냈다. 묽어진 어둠 저편으로 하늘이 희붐하게 열리고 있었다. 새벽마다 바라보는 하늘이었지만 언제나 낯설고 서먹한 하늘이었다.
딸랑 딸랑 딸랑...
멀리서 기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숨 가쁘게 울리기 시작했다. 불이 켜지면서 막사 안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조금 전까지 입을 불어대고 코를 골며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 싶게 일제히 잠을 깼다. 그건 습관이라기보다는 반사작용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종소리와 호루라기 소리를 몸서리치게 싫어했다. 그러면서도 그 두 가지 소리를 들었다 하면 하나같이 행동이 민첩해지고 동작이 기민해졌다. 종소리와 호루라기소리는 곧 채찍질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하품을 하거나 투덜거리며 뒤늦게 잠이 깬 일곱 사람은 그때서야 한 막사의 동료가 중태에 빠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우르르 주만상을 에워쌌다.
"아니, 이거 어찌 된 거요?"
"이런, 기어코 큰 병이 나버렸구나."
"쯧쯧, 사람이 반쪽이 돼버렸네."
"루나가 뭐라고 할꼬?"
"루나라고 별 수 있나. 병 앞에 장사 없는 법인데."
그들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주만상을 들여다보며 한마디씩 했다. 눈이 꼭 감긴 주만상은 파삭 탄 입을 헤벌린 채 단내 묻어나는 가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눈자위가 꺼지고 볼이 패어 검게 탄 얼굴에는 병색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러고 있어서 되겄소? 루나헌티넌 이따가 알리도록 허고, 우리 헐 일이나 얼렁얼렁 헙시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방영근이 말했다.
"그래야겄제. 이러고 있다가 싹 다 매타작 당헐 것인디."
남용석이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침상을 내려섰다. 주만상을 혼자 버려둔 채 그들은 아침일을 서둘렀다. 막사 안팎을 청소하고 변소와 세면장을 거쳐 식사까지 마치자면 눈코 뜰 새가 없는 아침시간이었다.
"만상이넌 어찌야 헝고?"
빗자루를 든 남용석이 땅바닥을 건성으로 쓸며 방영근을 쳐다보았다.
"이따가 루나가 순시럴 헐 적에 끌어다가 봬야 안허겄능가."
방영근의 시무룩한 대답이었다.
"근디, 자네나 나나 말이 통해야 말이제."
남용석의 얼굴이 옹색스러워졌다.
"언제라고 말이 통해서 살았등가. 지놈도 눈구녁으로 보먼 알겄제."
방영근이 떫게 웃었다. 그들은 누구나 무슨 일이 생겨 루나앞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될 때면 두려움부터 가졌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1년 반이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어느 누구도 영어를 할 줄 몰랐다. 아무도 영어를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고, 그들이 상대하는 사람이란 오로지 루나들뿐이었다. 그들은 그저 매일 똑같은 몇 마디씩의 고함에다 채찍을 휘두를 뿐이었다. 사람들은 루나들이 외쳐대는 고함은 다 알아들었다. 그러나 그건 대부분 욕설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식당으로 바삐 몰려가는 것을 보면서 방영근과 남용석은 막사 문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루나가 청소검열을 겸한 이탈자 색출을 위해 막사들을 한 바퀴 돌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불안이 차 있었다. 저쪽에서 곰이라는 별명을 가진 덩치 큰 루나가 겅중겅중 걸어오고 있었다. 방영근과 남용석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방영근이 무슨 각오를 하듯 입을 꾹 맞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루나, 루나!"
방영근이 외치며 루나를 향해 뛰었다.
"루나, 저어... 주만상이가... 저어..."
루나 앞에 선 방영근은 막사를 가리키고, 손짓 발짓에 온갖 몸짓을 다해가며 사람이 아파서 누웠다는 시늉을 열심히 해대는데, 그의 입에서 토막토막 잘려서 나가고 있는 것은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는 조선말이었다.
"넷스 고, 넷스 고!"
눈치를 알아챈 루나가 채찍으로 땅바닥을 치며 앞장섰다. 방영근은 서두러 주만상의 장딴지를 풀어 보였다. 검붉은 색으로 부어 오른 장딴지는 허벅지 굵기만 했고, 헝겊을 찢어 붙인 상처부위에서는 피고름이 흘러내리면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손으로 코를 막은 루나는 뭐라고 소리소리 질러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주만상은 연상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고, 방영근과 남용석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소리치는 루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루나의 손짓발짓 끝에 방영근이 환자의 밥을 타와 막사에 남게 되었다. 방영근은 숟가락 등으로 밥알을 으깨기 시작했다. 죽을 만들자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밥을 반 이상 덜어낸 밥그릇에 국 국물만 따라 그렇게 죽을 만들어 주만상에게 먹이자는 것이었다. 힘을 꽁꽁 써가며 숟가락을 빨리 놀리던 방영근은 문득 손놀림을 멈추었다. 갑자기 주위가 썰렁해진 이상한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만상은 여전히 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낡은 시계는 변함없이 제자리에서 게으르게 불알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 없이 그 시계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방영근은 그때서야 바깥에서 들려오던 왁자한 사람들의 소리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영근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창문으로 갔다. 창 밖 저 멀리 줄지은 사람들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방영근은 불현 듯 그들을 따라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상한 마음이었다. 날마다 일터로 끌려가며 넌덜머리를 냈었는데 막상 혼자 있게 되자 그 지긋지긋한 일터로 가고 싶은 것이었다. 방영근은 비로소 혼자 남겨지는 것은 쉬는 것도 편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동안 고통을 이겨내며 살아온 것도 혼자의 힘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이나 빠졌시니 일이 영 심들겄는디."
까마득하게 멀어진 대역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방영근을 중얼거렸다.
"아이고 엄니!..."
갑자기 커진 신음소리에 놀라 방영근은 얼른 몸을 돌렸다. 주만상의 몰골은 눈물이 날 지경으로 초췌하고 아파 보였다. 날이 밝아지면서 그의 모습은 더욱 보기 딱하게 변했던 것이다. 방영근은 마음이 다급해져 다시 밥알을 으깨기 시작했다. 주만상은 하룻밤 사이에 저리 꼼짝을 못하고 앓아 누울 몸으로 어제까지 일터에 나갔었다. 물론 그의 일몫을 여러 사람들이 감당해온 것은 열흘이 넘었다. 그러나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며 먼 일터를 오가는 것만도 그에게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다리의 상처를 내보이며 며칠 쉬게 해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가시에 찔린 상처 정도로 쉬게 해줄 루나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루나들은 나무둥치에 치여 옆구리를 다치거나 연장에 찍혀 상처를 입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을 일터로 내몰았던 것이다.
"보소, 만상이. 이것 잠 받아묵소."
방영근은 주만상이 알아듣는지 어쩌는지 알 수가 없는 채 어설프게 만든 죽을 그의 입에 디밀었다. 그러나 주만상은 상을 찡그리며 죽을 뱉어냈다.
"이 사람아, 어찌 이려. 묵어야 살제, 묵어야."
방영근은 뱉어낸 것을 닦아내고 다시 죽을 떠 넣었다. 그러나 되뱉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아, 정신 채리랑게. 아무것이나 묵고 살아나야 집이 갈 것 아니라고."
방영근은 안타깝게 말하며 또 죽을 떠 넣었다. 그러나 주만상은 죽을 넘기지 못했다.
"이 사람이 어쩔라고 이러는고... 참말로 큰 탈이시 이거."
방영근은 그릇을 놓으며 한숨을 토해냈다. 언뜻 불길한 생각이 스쳐갔다. 곡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큰일 당하게 된다는 어른들의 말이었다. 그는 서둘러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생각을 지우기라도 하듯 연거푸 담배를 빨아댔다. 방영근은 국물만 떠서 다시 주만상의 입에 흘려넣었다. 그러나 그의 혀는 국물마저 밀어냈다. 그 혀에는 백태가 허옇게 끼어 있었다. 방영근은 점점 더 애가 달고 있었다. 차라리 일터에 나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언뜻언뜻 스쳐갔다.
검은 가방을 든 의사가 온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그 뜻밖의 손님이 너무 반갑고 고마워 방영근은 그저 고개를 꾸벅거리며 몇 마디 할 수 있는 영어 중에서 골라낸 <탱큐> 만을 되풀이했다. 주만상의 장딴지를 풀어본 의사는 고개를 내두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무슨 말인가를 방영근에게 자꾸 물었다. 그러나 방영근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채 고개만 저었다. 의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진찰기를 목에 걸었다. 방영근은 피고름 흘러내리는 주만상의 장딴지를 울상이 되어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에 붙인 것은 비누에 담뱃가루를 섞은 고약 아닌 고약이었다. 의사는 주만상의 옷을 펼치고 가슴에 청진기를 대보고 또 대보고 했다. 그러면서 자꾸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방영근은 주만상의 가슴을 보며 새삼스럽게 놀라고 있었다. 그간에 골골대면서 몸이 쇠약해진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심한 줄은 몰랐었다. 뼈 마디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난 주만상의 가슴은 너무나 빈약했던 것이다. 그런 몸으로 사시장철 뙤약볕 속에서 그 지독한 개간노동을 여지껏 견디어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방영근은 자신이 그동안 주만상에게 얼마나 무심했었던가를 뉘우쳤다. 셋이는 한 고향인데다가 나이도 어슷비슷해 서로 말을 놓고 지내며 마음을 의지해 왔었다. 그러나 남용석에 비해 주만상에게 가는 자신의 마음은 한 가닥이 접혀 있었다. 그 마음은 군산을 떠나면서부터 접힌 것이었다. 그가 한밑천 잡겠다고 배를 타는 것이 어쩐지 실없어 보이고 마땅찮았던 것이다. 그런 감정을 갖기는 남용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주만상에게 마음을 덜 쓰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이 생겼다. 방영근은 미안한 마음으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수그렸다.
의사는 주만상의 눈을 까보고 입도 벌려 보았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자꾸 갸웃거렸다. 그 고갯짓에 따라 방영근은 가슴이 차츰차츰 조여드는 답답함과 두려움을 느꼈다. 의사는 주사기를 꺼내들며 또 무슨 말인가를 방영근에게 물었다. 난색이 된 방영근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오케이, 오케이."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 지었다. 방영근은 비식 마주 웃었다. 그는 의사의 웃음이 인정스러우면서도 슬픈 기색이라고 생각했다.
선상님, 만상이럴 꼭 낫게 히주시게라우.
이 말을 영어로 속 시원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방영근은 그렇게 갑갑하고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의사는 주만상의 팔에다 주사를 놓았다. 그리고 피고름 흐르는 장딴지를 약솜으로 닦아냈다. 피고름에 닿은 약이 지글지글 끓듯하며 흰 거품을 일으켰다.
"아이고메나 죽네! 엄니, 엄니이!"
주만상은 갑자기 소리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방영근은 잽싸게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땡큐, 땡큐."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또 웃었다. 그 엷은 웃음은 여전히 슬픈 듯이 보였다. 의사는 팅팅 부어오른 주만상의 종아리에다 붉은 물약을 발랐다. 그리고 조심조심 붕대를 감았다. 주만상은 끊임없이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붕대를 다 감은 의사는 가방을 챙겼다. 가방을 다 챙긴 의사는 방영근에게 수건을 물에 적셔 짜서 환자의 이마에 올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예스, 예스."
방영근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방을 든 의사는 막사를 나갔다. 방영근은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의사가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땡큐, 땡큐."
방영근은 몇 번이고 깊은 절을 했다. 의사는 웃음으로 답을 하고 돌아섰다. 방영근은 멀어져 가는 의사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흰둥이들 중에도 저리 인정 있는 사람도 있구나 생각하며. 방영근은 주만상의 이마에다 물수건을 열심히 갈아 얹었다. 그러는 사이사이에 죽 국물을 떠 넣어 보았지만 주만상은 여전히 뱉어내기만 했다.
띵 띵
시계가 두 번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방영근은 시장기를 느꼈다. 그는 아침에 타다 놓은 밥을 끌어당겼다. 밥은 아무 맛도 없었다. 방영근은 억지로 밥을 넘겼다. 밥이 그리도 맛이 없고 목에 걸리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혼자 먹는 밥이 톱밥 씹는 맛이라는 것을 방영근은 비로소 경험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묘한 외로움과 슬픔까지 섞여 있었다.
"무울, 엄니이, 무울..."
방영근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눈을 반쯤 뜬 주만상이 혀를 약간 내밀고 있었다. 방영근은 왈칵 반가움이 솟았다.
"이 만상이, 정신이 든가! 물 여깄네."
방영근은 주만상의 곁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죽 그릇을 들었다.
"...여그가 어디여? 엄니가 금방 있었넌디... 집인지 알았등마..."
겨우겨우 말을 잇고 있는 주만상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만상이, 자네가 꿈얼 꾼 것이네. 몸이 많이 아픈갑는디, 자네 자는 새에 의사가 댕게갔응게 자네 아픈 거 금시 나슬 것잉마. 긍게 입맛 없드라도 밥 잠 뜨고 기운채리소."
방영근은 밝은 얼굴로 더없이 다정하게 말했다.
"아니여, 아니여... 나넌 집이 못 가고 여그서 죽을 것이여... 여그서..."
주만상의 메마르고 병색 짙은 얼굴이 씰그러지며 울음이 터졌다.
"만상이, 그거이 무신 소리여. 자네나 나나 기연시 집이 가게 되네! 맘이 병이란 말 자네도 알제. 맘 단단허니 묵소, 맘!"
방영근은 주만상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말에 어찌나 힘을 넣었는지 방영근의 말은 마치 외치는 것 같았다.
"영근이, 나 잠 집이 딜다주소. 여그서... 여그서 죽기넌 싫은디... 나 딜다주소... 집이 ... 집이 잠..."
주만상은 방영근의 손을 잡으며 숨 가쁘게 말했다.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는 주만상은 방영근의 손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방영근은 자신의 손이 아플 정도로 가해져 오는 힘에 놀라고 있었다. 주만상의 아픈 몸 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만상이, 걱정 말소. 우리 다항께 집이 가는 것이네. 다항께 가."
방영근은 주만상의 손을 맞잡으며 절실한 심정으로 말했다.
"아니여, 아니여... 나넌 여그서... 여그서 죽을 것이여..."
방영근의 손을 잡은 주만상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그리고 눈이 내리감기며 어깨가 처졌다.
"만상이, 만상이!"
방영근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소리쳤다. 그리고 한쪽 귀를 주만상의 코끝에다 들이댔다. 가늘면서도 거친 숨소리가 귓속을 울렸다. 방영근은 그 숨소리를 눈물 겹게 들으며 안도하고 있었다. 주사의 덕인지 계속 물수건을 이마에 얹은 덕인지 주만상의 몸은 끓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신음소리를 내지 않고 깊이 잠이 들었다. 방영근은 눈물자국이 남은 주만상의 검게 찌들리고 앙상하게 메마른 얼굴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짐승처럼 일에 시달리면서 보낸 지난 세월이 떠오르며 가슴에 눈물이 괴고 있었다.
자신들보다 먼저 하와이에 끌려온 사람들에게 들은 그대로 돈은 모아지지 않았다. 밥만 겨우 먹여줄 뿐이어서 옷을 사 입고 신발을 사 신어야 했다. 겨울이라고는 없이 줄기차게 뙤약볕 속에서 땀을 흘리게 되니까 옷은 너무나 빨리 삭고 낡아졌다. 신발 또한 거친 원시림의 개간 작업에 시달려 금방금방 찢어지고 망가졌다. 그런데 옷값이며 신발값은 턱없이 비쌌다. 루나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매점의 물건 값은 어느 것이나 비싸지 않은 것이 없었다. 루나들이 제멋대로 올려붙인 가격이었다. 그러나 시내의 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들로서는 그 비싼 물건들을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한 달에 15달러씩을 모아 빚 100달러를 갚고 농장을 벗어난다는 것은 까마득한 일이 되어갔다. 사람들의 마음은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들은 한 가닥 희망을 걸 수 있는 소문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기만 하면 채찍 맞는 강압에서 벗어나 두세 배의 벌이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첫해에 하와이로 끌려온 사람들 중에서 열 명이 넘게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는 것이었다. 지독스럽게 돈을 모은 사람들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건너가기만 하면 기후도 좋은데다가 철도공사장이며 탄광이나 금광 같은 데에 일거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했다. 방영근은 악착같이 그 꿈을 이루자고 마음먹었다. 집에 돌아가는 뱃삯을 마련하는 길은 그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만상처럼 낙심해서 마음병을 얻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땅거미와 함께 일터에서 사람들이 돌아왔다. 방영근은 루나의 손짓대로 그를 따라갔다. 루나가 손가락질을 한 것은 벽에 세워진 들것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루나와 함께 막사로 다시 돌아왔다. 루나는 들것에 주만상을 옮기라고 손짓했다. 방영근과 남용석은 주만상을 들것으로 옮겼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앞뒤에서 들것을 들어올렸다. 들 것을 따라 나머지 일곱 사람이 우르르 막사 밖으로 따라 나왔다. 루나가 꽥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걸음이 일시에 멈춰지며 시름에 찬 얼굴들이 금방 두려움의 빛을 띠었다. 그리고 아무도 더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말았다.
"죽일 놈들, 사람이 저리 다 죽게 돼서야 병원으로 옮기다니."
누군가가 진한 한숨을 토해냈다.
"우리가 어디 사람인가, 짐승이지."
다른 사람의 맥이 다 빠진 소리였다.
"흰둥이 놈들, 인간 말종들이야."
약간 격앙된 목소리였다.
"그러게 말이오. 우리가 언제까지 이리 천대받고 살아야 되겠소. 참는 것도 한도가 있는 일이지."
좀 더 강해진 목소리였다.
"말이야 그렇지만 무슨 도리가 있는가. 저놈들이야 울뢰바고 총이고 다 지녔는데 우리야 맨주먹이니 안 참고 어쩌나. 허고, 뺑뺑 둘러 바다니 무슨 일을 저지르고 도망갈 데가 있어야 말이지."
"자네들 애썼네. 이리 앉아서 담배나 한 대씩 피게."
그들 중에 나이 많은 사람이 방영근과 남용석에게 담배를 권했다.
그들은 다시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나 아무도 주만상의 병세에 대해 의사가 뭐라더냐고 묻지 않았다. 의사가 뭐라고 했건 간에 방영근과 남용석이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병이 쉬 나아야 할 건데..."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네, 걱정이구만."
분위기가 침통하게 가라앉았다.
"낮에도 왔었는디, 의사가 딴 흰둥이덜허고넌 달르게 인정도 있고 맘씨고 곱게 생겼응게 잘 히줄 것잉마요. 인자 딴 이얘기덜 헙시다. 우리 들어올 적에 허든 이얘기가 무신 재미진 것이오?"
사람들의 기분을 바꾸려고 방영근은 일부러 밝은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 그 새로 온 왜놈 루나 얘길 하고 있었는데, 자넨 오늘 벌어진 일을 아직 모르지?"
나이 많은 사람이 방영근을 쳐다보았다.
"그 쪽제비가 무신 못된 짓 혔소?"
방영근은 자리를 고쳐 않으며 약간 과장되게 관심을 내보였다. 그러나 한 달 전에 새로 온 왜놈 루나 족제비에 대한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어서 듣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놈 족제비가 오늘 어떤 사람한테 무지막지하게 매타작을 놓았네. 그래 그놈 얘길 하던 참이었네."
"그 왜놈이 어찌서 그랬는디요?"
방영근의 낯빛이 싹 달라졌다.
"참 기가 찰 일이지. 어떤 사람이 배탈이 나서 똥을 누느라고 점심 먹고 나서 시작하는 일에 좀 늦어진 것이네."
"저런 죽일 놈 봤능가!"
방영근이 눈을 부릅떴다.
"인자 왜놈한테까지 매타작 당하는 신세들이 됐으니 원..."
한 사람이 말끝을 흐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사람 꼴이 말이 아니지 뭐."
다른 사람의 탄식이었다.
"왜놈이 그리 나대는 걸 보니까 분통이 더 터진단 말이오. 그놈을 잡아 죽일 수도 없고, 무슨 방도가 없는가요?"
"그놈도 루난지 감독인지넌 매일반인디 우리 겉은 신세에 방도넌 무신 방도가 있겄어. 나라 안이서 넋 빠지게 헝게 우리꺼정 그런 꼴 당허는 것인디."
남용석의 말은 화가 난 것처럼 퉁명스러웠다.
"맞는 말이네. 양반이란 것들이 안에서 나라 망치고 있으니 타국에 나와 있는 우리 같은 것들이야 더 천대받지."
분위기가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어둠 속에서 두꺼비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인자 다들 그만 자드라고. 내일 일이 또 있잖은가."
나이 많은 사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방영근은 새 담배를 빼들었다. 남용석이 손을 내밀었다. 방영근은 담뱃갑을 건네주었다. 남용석이 담배를 뽑으며 머뭇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만상이가 괜찮헐랑가?"
"글씨... 자네 보기넌 요상헌가?"
"의사 눈치가 요상허덜 안튼가?"
남용석은 그동안 참아왔던 말을 남들이 못 듣게 낮은 소리로 꺼내고 있었다.
"별일 없을 것이네. 사람 목심이 찔긴 것잉게."
방영근은 낮에 있었던 일을 입에 올리지 않고 덮어버렸다. 주만상이 했던 말들을 다시 꺼내는 것이 그에게 무슨 해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찔기기도 허고 허망허기도 헌 것이 사람 목심잉게..."
남용석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망연한 눈길을 어두운 창밖으로 보냈다.
"우리도 자세. 자네 곤헐 것인디."
방영근은 담배를 비벼 끄고 일어났다. 방영근은 평소보다 더 무거워진 몸을 자리에 뉘었다. 하루 종일 노동을 하는 것보다 애를 태우는 일이 더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은 무거운데 머릿속이 수선스러워 잠이 오지 않았다. 주만상의 걱정에 왜놈 루나의 생각이 뒤얽히고 있었다. 왜놈 루나는 하와이에 온 지 20년이 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영어를 아주 잘 씨부려댔다. 마흔이 다 되었을 것 같은 그자는 백인 루나들보다 조선말을 훨씬 더 잘 알아들었다. 백인 루나들은 욕 한두 가지를 알아듣는 정도인데 그자는 욕이 섞인 짤막한 말들까지 알아들었다. 그런 줄을 모르고 맘놓고 루나들에게 욕설과 험담을 털어놓던 사람 여럿이 그자에게 채찍질을 당하게 되었다. 그자가 포악하기는 백인 루나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그자는 농장노동자로 하와이에 건너와서 루나까지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또한 왜놈들을 루나로 쓰게 된 것은 조선이 일본의 힘에 눌리게 되면서 외국에 조선 사람들의 관리도 일본이 하게 된 탓이라는 말도 퍼지고 있었다.
방영근은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다.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만 자꾸 크게 들렸다. 방영근은 호들갑스러운 종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머리는 묵지그리하고 몸은 찌뿌드드해서 잠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밤새도록 종잡을 수 없는 어지러운 꿈에 시달린 탓이었다. 그러나 방영근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휩쓸려 눈코 뜰 새 없는 또 하루의 일과 속으로 떼밀려 들어갔다.
해가 기울어져 가면서 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이었다. 갑자기 농장 주인이 나타났다. 가끔씩 모습을 나타내는 그 백인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두 마리 말이 끄는 호사스러운 치장의 마차를 타고 있었고, 뒤로는 서너 사람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루나들은 생판 딴사람으로 변했다. 가까이 있는 루나들은 그 사람 앞에 쫓아가 깊은 절을 해대며 쩔쩔맸고, 멀리 있는 루나들은 호루라기를 더 거칠게 불어대며 열성을 부리는 척 설치고 돌아갔다. 일을 하는 사람들은 농장 주인이 가끔씩 나타나는 것을 은근히 좋아했다. 루나들의 그 굽실거리고 아부하는 꼴들이 좋은 구경거리였던 것이다.
"저, 저, 저것 봐! 저 왜놈 좀 봐!"
누군가가 억누른 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일손을 계속 놀리는 척하고 있던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그들 눈에 들어온 것은 너무 놀라운 장면이었다. 왜놈 루나가 마차 옆에 무릎과 팔굽을 꺾어 엎드려있었고,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던 농장 주인이 그 등을 밟고 땅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저 왜놈 징헌 것 보소!"
남용석이 불현 듯 토해낸 말이었고, 방영근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 간사한 놈이 사람 여럿 잡겠네."
누군가의 중얼거림이었다. 그날 밤과 다음날까지 그 왜놈 루나의 남다른 아부는 그들의 입에서 씹히고 또 씹혔다. 그리고 소문이 되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다음날 그들이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소식이 있었다. 주만상의 죽음이었다. 그 소식은 그들의 막사마다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막사에서 막사로 사람들이 오가고, 막사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죽었나?"
"맞은 것이 탈이 나 죽은 거 아닌가?"
사람들이 처음에 나타낸 의문이었다. 심한 노동으로 몸에 병이 생긴데다가 가시에 찔린 다리를 치료받지 못한 채 노동에 시달리면서 그 상처는 자꾸 깊어지고 몸은 더 쇠약해져 결국 죽게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이놈들이 생사람 잡은 거 아닌가!"
"그렇지. 병원에 빨리 데려다가 치료했으면 죽을 사람이 아니지."
"이놈들이 결국 사람 이리 죽일 줄 알았어. 어디가 아파도 병원 한번 보내준 일 있었어. 다 죽일 놈들이야."
"우리 이러고 있어서 되겠소?"
"글쎄... 어째야 좋겠소?"
"사람이 죽었는데 우선 병원으로 가봐얄 것 아니오? 함께 고생하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인데."
"그래, 그 말이 맞소."
막사마다 이런 식의 의견이 오가고 있었다. 그런데다 방영근과 남용석이 막사마다 돌고 있었다. 그들 막사의 아홉 명은 병원을 찾아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아홉 명만으로는 루나를 당해낼 힘이 약했다. 그래서 막사마다 사람들을 더 모으러 나선 것이었다.
"주만상이넌 우리허고 항께 한배럴 타고 끌려와 한솥밥 묵음서 항께 고생헌 한식구요. 근디 아픔스롱도 일찍허니 병원에 못 가 결국 원통허게 타국 땅서 죽어부렀소. 그려서 우리 막사에서넌 다 문상얼 가길 혔소. 여그서도 우리허고 항께 갔으먼 좋겄는디, 생각덜이 어쩌시오?"
방영근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했다.
"그럽시다. 다같이 갑시다."
"좋소. 그래야만 숙직하는 루나가 못 막을 것이오."
사람들은 지체 없이 찬동했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 앞에서 사람들은 상기되어 있는데다가 방영근의 <한 식구>라는 말이 그들의 감정을 더 흔들었던 것이다. 방영근은 사람들의 호응에 더없는 기쁨과 만족을 느꼈다. 여러 사람들 앞에 나서서 그런 말을 해보기는 생전 처음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방영근네 막사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 웅성거림을 숙직하는 루나가 모를 리가 없었다.
"홧스 메러, 홧스 메러!(무슨 일이야, 무슨 일)"
채찍을 휘두르며 루나가 달려왔다. 그의 옆구리에는 권총까지 매달려 있었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은 평소와는 다른 얼굴로 루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는지 루나는 한 발짝 물러서며 외쳐댔다.
"갓댐, 홧스 메러!"
"루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방영근이었다. 방영근은 손짓 몸짓으로 사람이 죽은 시늉을 해 보이고, 뒤에 모인 사람들을 가리킨 다음 병원 쪽을 손가락질하며 절하는 시늉까지 했다.
"갓댐, 썬 오브 빗취!"
욕설과 함께 루나가 채찍을 휘둘렀다. 방영근은 민첩하게 피해 섰다.
"마더 빠끌!(씹새끼)"
루나는 다시 채찍을 내리쳤다. 그런데 이변이 벌어졌다. 방영근이 채찍을 그대로 맞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낚아 잡은 것이었다. 루나와 방영근 사이에서 채찍은 팽팽해졌다.
"와아-"
사람들의 외침이 터졌다.
"저놈 죽여라!"
"저놈 몰매를 쳐!"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 방영근은 버팅기고 있던 채찍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외쳤다.
"저놈이야 냅두고 우리 병원으로 갑시다!"
"그럽시다. 병원으로 갑시다!"
여러 사람들이 목소리를 합쳤다. 그리고 그들은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스톱, 스톱!"
루나는 권총을 빼들며 외쳐댔다. 그러나 그들은 앞으로 밀고 나갔다.
탕!
갑자기총소리가 진동했다. 루나가 공포를 쏜 것이다. 주춤했던 그들은 다시 앞으로 밀고 나갔다. 총 소리는더 울리지 않았다. 어둠살이 번지고 있었다.
주만상은 침대에 하얀 천을 쓰고 누워 있었다. 의사는 그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말없이 하얀 천을 벗겨 보였다. 뼈만 남은 주만상의 얼굴은 우는 듯 찡그려진 느낌이었다. 옷깃을 여민 그들은 차례로 주만상과 작별해 나갔다.
"사람이 저 시상으로 가는디 저리 그냥 보내서야 되겄소?"
남용석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말이 되간디? 저리 죽은 것도 원통헌디 장례나 지대로 치레야제. 빈소도 채리고, 상여도 꾸미고 말이여. 다덜 안 그러요?"
방영근이 사람들을 휘둘러보았다. 그들 두 사람은 어느덧 주동자가 되어 있었다.
"맞는 말이오. 다들 자리 잡고 앉아서 그 일을 상의하도록 합시다."
누군가가 큰소리로 대꾸했다. 병원은 비좁아 그들이 다 앉을 만한 데가 없었다. 그들은 전등을 내걸고 마당에 나앉기로 했다. 의사는 눈치 빠르게 그들의 일을 돕고 나섰다. 그들은 빈소를 차리고, 3일장을 하되 이틀 밤은 20명씩 빈소를 지키고, 상여도 꾸미는데 그 비용은 농장주가 내게 해야 한다는 결정을 보고 있을 즈음이었다. 루나들 넷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루나들은 제각기 권총을 빼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갓댐, 고 웨이 바라크!"
곰이란 별명의 루나가 외쳤다. 사람들은 꼼짝을 하지 않고 루나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루나가 외치는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게 막사로 돌아가라는 말인 것을 거의 알아들었다.
"갓댐, 고 웨이 바라크!"
루나가 권총을 휘두르며 또 외쳤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긴장이 팽팽해져 있었다. 그때 의사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의사는 루나들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기 시작했다. 방영근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의사가 자기네들에게 해롭게 하지는 않으리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의사와 루나들은 한동안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루나 하나가 어둠속으로 바삐 사라졌다.
"씻다운 프리스, 씻다운.(앉으세요, 앉아)"
의사가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손짓했다. 사람들은 의사의 손짓에 따라 앞에서부터 다시풀밭에 앉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일이 풀려가게 되리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세 루나는 권총을 든 채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도 긴장 속에서 루나들을 살피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별들이 또렷또렷 빛나고 있었다. 낮에와는 다른 서늘바람 속에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 속에는 도마뱀들의 울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흡연욕은 빠른 전염성으로 퍼져 그들은 거의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렇게 되자 루나들도 권총을 권총집에 넣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루나가 한 남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그 남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조선 사람으로 그들이 어쩌다가 보게 되는 얼굴이었다.
"당신네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주시오."
그 남자가 그들 쪽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사람들의 등을 떼밀어 방영근은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영근은 아까 결정한 것들을 차근차근 말해 나갔다. 그 남자가 루나들에게 그 말을 전했다. 루나들이 언성을 높이며 뭐라고 떠들어댔다. 그 남자가 다시 돌아섰다.
"장례는 자기네들이 다 알아서 한다고 당신네들은 간섭 말고 돌아가라는 거요."
"생사람 죽인 놈덜이 무신 잡소리여. 우리넌 죽어도 그리 못혀!"
남용석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맞어, 죽어도 그리 못혀!"
방영근이 외치며 땅을 박차고 일어났다. 그 뒤를 따라 사람들이 와아 함성을 지르며 몸들을 일으켰다. 루나들이 반사적으로 권총을 빼들었다. 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통역을 하던 남자가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의사가 다시 루나들에게로 다가갔다. 또 한참이나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더니 루나 하나가 어둠 속으로 급히 사라졌다.
다음날이 토요일이니 일을 쉬고, 장례는 일요일에 치른다. 다른 모든 것은 원하는 대로 들어준다.
농장주인의 결정 통보였다.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들은 아침밥을 먹고 나서 곧바로 상여를 만들기 시작했다. 루나들은 재목이며 연장을 요구하는 대로 실어왔다. 농장주인의 결정이 신효하기는 신효했다. 그러나 그들은 농장 주인에게 털끝만큼도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자신들의 단합된 힘이 얼마나 센 것인가를 그들은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상여는 점심나절까지 그럴듯하게 꾸며졌다. 사람들이 많다보니 목수 일을 흉내 내는 사람도 여럿이었고, 색종이로 꽃술을 만들 줄 아는 사람도 더러 섞여 있었다. 한지를 구하지 못해 색색으로 물들인 한지꽃술을 만들지 못하고 서양 색종이를 쓸 수박에 없었다. 그보다 더 아쉬운 것은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없는 점이었다. 상여에 호사스러운 채색치장을 할 수가 없어 그 대신 꽃술을 푸짐하게 달기로 했다.
루나들이 그들의 요구대로 응해 주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술이었다. 술을 주기는 주되 조금밖에 주지 않았다. 그것도 농장주인의 결정이라는 것을 그들은 꿰뚫고 있었다. 술이 취해 무슨 일을 저지를까봐서 미리 막자는 의도였다. 그 속셈을 간파한 그들은 굳이 더 술을 요구하지 않았다. 루나들은 하루 종일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관은 그대로 서양 사람들 관을 쓰기로 했다. 조선식으로 짜보았자 나무에 칠을 해서 말릴 여유도 없고, 솜씨까지 서툴러 관이 빨리 썩고 쉽게 내려앉을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버쩍 마른 시체가 관으로 옮겨지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눈시울을 적셨다. 반쯤 벌어진 시신의 입에 쌀알이 가득 찼고, 그 가운데 동전 하나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가슴팍 옷깃에는 10불짜리 종이돈 석장이 반쯤 보이게 끼워져 있었다. 30불 10센트, 그건 주만상의 유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그동안에 모은 돈 전부였다. 고향에 가져가려고 모은 그 돈을 그는 이제 저승노자로 쓰고 있었다. 입에 가득 찬 쌀알들은 검게 탄 얼굴 가운데서 무슨 보석인 것처럼 새하얗게 돋아 보이고 있었다.
날이 새고 하와이의 해가 이글이글 돋아 올랐다. 사람들은 다같이 새 옷을 갈아입었다. 상여는 10시에 저승걸음을 시작했다.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가네가네 나는가네
육십이라 한평생을
반도 못채우고 나는 가네
어으허으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엄니엄니 우리엄니
불효자식 용서하소
미국땅 하와이가 이내원수요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저승길이 멀고험해
고향서도 어둔발길
타국땅 수만리서 어찌갈거나
상여는 앞으로 두어 걸음, 뒤로 한 걸음, 물결 굽이치듯 대밭 출렁이듯 느리게 흔들리고 묵직하게 움직이며 서러운 하소연인 듯 사무치는 흐느낌인 듯 퍼지고 있는 길닦음소리에 부축 받고 있었다. 그 소리는 회한에 찬 사람들의 저 깊은 속에서 솟아올라 터지는 것처럼 길게 늘어지면서 탄식이 되고 감기면서 원한이 되고 다시 풀리면서 한숨이 되었다가 휘감겨돌며 원성이 되어 저승길로 가는 넋을 통곡하고 있었다. 제자리걸음을 하듯 하는 상여의 느린 행보는 겉보리죽만 먹고 살아도 이승이 낫다는 말처럼 선뜻 저승길 나서기를 저어하는 망자의 마음을 나타냄이었고, 이제는 그 어디인지 모를 저승길의 길동무가 되어줄 도리가 없어 죽은 자를 홀로 떠나보내야 하는 산 자들의 애닯고 죄스러운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런 까닭을 알 리 없는 루나들은 상여행렬을 뒤따르며 연상 투덜대고 있었다.
눈이 시도록 밝고 바늘 끝처럼 따가운 햇살 속에 개간된 땅은 핏빛으로 붉은 속살을 벌겋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땅을 일구면서 그 처연한 색깔만큼 진한 피땀을 쏟아낸 사람들이 마음 합쳐 부르는 길닦음소리가 그 땅 켜켜이 스며들고 있었다. 길닦음소리가 끝나면서 상여가 조금 빨리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노래를 시작했다.
아아리라앙 아아리리앙 아아라아리요오
아아리리앙 고오개애로 너머어가안다아
노래는 이내 합창으로 어우러졌다. 구성지고 눈물 겹고 서럽고 사무치고 한스러운 가락을 이끌며 상여는 붉은 벌판 끝으로 느리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14. 횃불 횃불 횃불
들녘에 봄기운이 아련하게 어렸다. 그 아련함은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자욱했다. 그 환상적인 자욱함은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아른아른 피어오르고 꼬물꼬물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건 겨울이 풀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었던 산천만 풀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몸도 풀리고 있었다. 몸이 풀리기를 기다려 제일 먼저 몸을 일으킨 곳이 충청도였다. 안병찬이 의병의 깃발을 세운 것이다.
송수익은 임병서와 향교 뒤뜰에서 만나고 있었다. 감시의 눈을 피해 만날 때마다 장소를 바꾸었다.
"충청도 의병 소식 들었습니까?"
임병서가 무거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왜, 잘못 되었습니까?"
송수익은 불길한 느낌을 감추지 않고 나타냈다.
"예, 왜놈들 군대와 접전에서 패했다는 소식입니다."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임병서의 얼굴은 침통했다.
"패했다면...... 의병들이 전멸했다는 건가요?"
송수익은 엄습해오는 절망감을 떠밀어내며 물었다.
"그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임병서는 된 숨을 쉬고 나서,
"워낙 무기가 비교가 안되는 판이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렇기도 하지만, 너무 서둘러 봉기한 것이 아닌가요?"
송수익은 첫 싸움에서 패배를 좀더 근본적인 데서 찾고자 했다.
"예 그럴 수도 있지요."
"제 생각으로는 그 패인이 여러 가지로 사료됩니다. 애초에 무기의 우열이 현저한 형편인데다가 이쪽의 사전준비 부족, 전투에 능한 왜군을 상대로 한 병법 미숙 같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송수익의 지적에 임병서가 떨구고 있던 고개를 얼른 돌렸다. 송수익을 바라보는 임병서의 얼굴에는 놀라는 기생이 완연했다.
"그리 보시는 게 여러모로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들을 우리가 하는 일에도 교훈으로 삼아야 되겠군요"
임병서는 주저함이 없이 송수익의 판단을 수긍함과 동시에 한 발을 더 내딛고 있었다. 그런 임병서의 도량에 송수익은 새로운 신뢰를 느꼈다.
"예, 제 생각으로는 또 한 가지 긴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의병을 일으킴에 있어서 지방마다 산발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왜군들은 일사불란하게 조직을 갖추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 조직력이 없이 지방마다 소규모로 일어났다가는 번 번히 희생만 커지고 힘이 부난되어 항쟁의 효과가 없어질 게 아닙니까. 물론 일을 비밀리에 추진하는 거니까 타지방과 연결해서 합심한다는 것이 용이한 일은 아니겠지요. 그렇더라도 힘을 합치도록 노력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합니다"
"예, 옳은 말씀입니다. 그 점을 웃어른들께 말씀 여쭙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임병서는 폭넓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요새 세상 돌아가는 형국은 어떤가요? 이등박문이란 자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왔다지요?"
하며 언짢은 얼굴이 되었다.
"논을 사들이는 왜놈들은 날로 늘어만 가고, 왜 물건들도 점점 더 범람해 가는 판인데 결국 이등박문이란 놈이 통감이 되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놈이 부임해서 첫 번째로 한 짓이 참으로 가관입니다. 그놈은 정부한테 일본 흥업은행에서 천만 원을 차관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 막대한 빚을 얻게 해가지고는 통감부가 그 돈을 가로채서 무슨 일을 한 줄 아십니까? 경성이나 인천, 부산등지에 제 놈들 거류민을 위해 수도시설을 하는데 써먹었습니다."
"수도라니요?"
"예, 문자 그대로 물길을 만드는 거지요. 샘물은 더러우니까 깨끗한 물을 먹겠다고 해서 쇠통으로 집집마다 물길을 대신 신식시설을 말합니다."
"아니, 왜놈들한테 그 큰 빚을 내서 왜놈들을 위해 물길을 만들다니, 그 빚더미는 결국 조선 사람들이 떠안는 것 아니오!"
"그리 된 거지요."
"조정대신 놈들, 정말이지 다 쳐 죽여야 할 놈들이오!"
임병서가 주먹을 부르쥐었다.
"어차피 왜놈들 주구 아닌가요."
송수익이 쓰디쓴 웃었다. 그 얼굴에 증오의 빛이 돋아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같이 목소리들은 마치 즐거운 노래라도 부르는 것처럼 율동적이고 탄력적이었다. 송수익은 손이 닿는 대로 파릇하게 돋고 있는 쑥 잎을 뜯어 입에 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발랄한 목소리들에 실리고 있는 한문이 역겹고 괴롭게 들렸던 것이다
"무슨 심사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시오?"
임병서가 송수익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저 아이들 글 읽는 소리가 귀에 들어와서...... 세상이 이리 급변하고 있는데 태평세월로 아이들한테 한문이나 읽혀대고 있는 것이 답답하고 마땅찮기도 해섭니다. "
송수익은 잘근잘근 씹고 있던 쑥 잎을 뱉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입안에 쌉싸름하고 씁쓰름하면서도 싱그럽고 화한 쑥의 그 독특한 향내가 가득했다. 그는 숨을 한껏 들이켰다. 진한 쑥 향기에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렇지요. 저 아이들에게 어서 신신 공부를 시켜야 옳지요. 저러다가는 세상 돌아가는 것하고는 정반대로 애늙은이들이나 만들뿐이지요."
"향교에서 이런 말을 하다니, 고루한 유생들이 들으면 경을 칠 일입니다."
"저도 아직 구태를 다 못 벗은 처집니다. 아버님 눈치가 봬서......"
임병서는 갓을 매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의관이야 무슨 상관입니까. 마음이 중한 거지요"
송수익은 신뢰를 담은 눈으로 임병서를 응시했다.
"고루한 생각 버리고 마음을 바로잡으려고 애쓰고는 있습니다."
임병서는 또 멋쩍게 웃고는
"헌데, 왜놈행상들이 거의가 헌병대나 주재소 앞잽이라는 건 알고 계시지요?"
그는 화제를 바꾸었다.
"예, 눈치를 채고 있습니다. 그놈들이 혼자가 아니라 꼭 둘씩 붙어 다니는 것이 그 근거지요. 신변의 위험을 막으려고 혼자서는 안 다닙니다"
"그놈들이 골골이 파고 다니면서 우리조선에 입히는 피해가 이중 삼중으로 막대합니다. 제놈들 물건 퍼뜨리지, 민심이고 비밀 탐지하지, 아주 못된 종자들입니다."
"그놈들만 그런 못된 짓 하는 건 아닙니다. 이 땅에 기어든 모든 왜놈들이 다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될 겁니다. 다 헌병대나 주재소의 보호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오. 특히 행상들의 행위를 대원들에게 다 알려 피해가 없도록 하라는 언명입니다."
"예, 그리해야지요."
"다음으로, 충청도의 봉기소문으로 대원들의 언행이 경해지거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단속에 철저를 기하라는 점입니다."
임병서는 낮은 소리로 한가지씩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예, 그렇게 하지요."
송수익도 하달되는 사항 하나하나를 정중하게 받드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윗분들께 전할 말씀이 있으면 하시지요."
"뭐 별다른 건 없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타지방과 연결이 가하면 서로 힘을 합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겁니다."
"예, 꼭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헌데, 혹시 요새 일진회 놈들이 더 불어난 것 같지는 않습니까?"
"글쎄요, 그런 눈치는 못 챘고, 전부 다는 아니지만 총으로 무장하기 시작 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일진회 놈들한테까지 총을 쥐어주다니, 헌병대 놈들도 좌불안석인 것만은 틀림없는 거지요. 그나저나 우린 돈이 있어도 총을 구할 수가 없는 형편이니 원......"
임병서가 말끝을 흐렸다. 임병서의 흐려진 말이 송수익의 가슴에서 금방 먹구름으로 변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말이 끊겼다. 새소리가 맑게 울리고 있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요."
송수익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임병서가 송수익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놈들 적을 탈취하는 겁니다. "
송수익의 말은 결연했다.
"탈취?......그건 너무 위험하고 무모한 것 같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임병서와 헤어진 송수익은 들길을 혼자 걸으며 이런 저런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는 전라도 땅의 봉기도 차츰 임박해 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일단 불을 당기기 시작한 충청도의 봉기는 전라도와 경상도로 파급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지방에서 제각기 의병거사를 준비해 온 사람들이 자극되지 않을 수가 없고, 해동을 기다려온 그 시기도 우연찮게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이란 거의 비슷하게 마련이었다. 보호조약 체결과 함께 우국의 자결이 태풍을 일으켰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서는 세상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침묵은 보호조약의 시인이 아니었다. 조약 체결사실의 망각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건 항쟁을 위한 준비의 침묵일 뿐이었다. 강이 얼었다고 하여 물고기가 다 얼어 죽는 것은 아니었다. 얼어붙은 것은 강 표면일 뿐이고 얼음 아래로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물고기들은 엄연히 살아서 봄이 오기를 기다니 는 것이었다. 충청도의의병은 비록 패배했다고는 해도 왜 겨울 동안 침묵했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였다. 일본도 그 봉기를 결코 단순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송수익은 각 지방의 의병들이 연합하는 것이 꼭 좋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다른 측면에서 하고 있었다. 조직이 잘 짜여진 일본군들과 싸우면서 정면대결이란 무료한 병법일 수도 있었다. 그들은 무력이 강하고 전투술이 좋을지 모르나 그 대신 지리에 어둡고 호응하는 민간인들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지리가 밝은 것을 이용해 산병전으로 그들을 괴롭히고, 민간인들을 결속시켜 가면서 그들을 고립상태로 몰아넣는 것도 좋은 병법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총의 탈취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그건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목숨의 위험이 너무나 컸다. 그러나 총은 꾹 필요했다. 사들일 길이 없다면 목숨을 내걸고라도 총을 탈취하러 나서는 방법밖에 없었다. 총 앞에 대창이나 연장을 들고 나서봐야 백전백패일 뿐이었다. 일본군들 외에 총을 가진 것은 조선 군인들이었다. 총을 탈취하지 않으려면 그들을 의병으로 돌아서도록 설득시키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총을 탈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총을 용이하게 탈취할 수 있을까...... 송수익은 골똘히 궁리해 보았다. 기습, 유인, 유혹 등 몇몇 가지 방법이 떠올랐으나 위험하기만 할 뿐 신통하지가 않았다.
그 막막함 때문에 송수익은 신음을 씹었다. 문장이 최우선이요 기술이란 모두 천하다는 그 잘난 제도에 다시금 혐오를 느꼈다. 그는 얼마 전에 군산에 나갔다가 군함이라는 것을 본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그 배의 크기가 어마어마한 데 놀랐고, 그것도 온통 쇠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더더욱 놀라고 말았던 것이다. 쇠는 당연히 물에 가라않기만 하는 물건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그 엄청나게 큰 쇳덩어리가 물에 둥둥 떠다니는 것이었다. 그것도 대포며 식량 같은 것에다가 사람까지 수백 명씩 싣고서 말이다 그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쇳덩어리 배를 왜놈들이 손수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만 기가 질리고 말았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 하는 낙담이고 탄식이었다. 그는 여지껏 그 총격에서 벗어날 수 가 없었다.
"맘만 묵음사, 못헐껏도 없지라우."
지삼출의 힘진 대꾸였다.
"한바탕 히보면 좋겄는디요."
손판석도 맞장구를 쳤다.
"무슨 좋은 방법이 있소?"
너무 쉬운 대꾸에 송수익은 어이가 없어 두 사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죽이고 뺏는 것이제라."
지삼출의 주저 없는 대답이었다.
"안죽이고야 이쪽이 죽응게요"
손판석이 자신있게 거들었다.
송수익은 그만 쿡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 웃으신당게라우?"
지삼출이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속이 시원해서 그러는 거요. 허나 좀 더 생각해 봅시다. 그런 방법으로는 너무 위험하군요. 뒤도 시끄러워질 거고."
"뒤야 잠 시끄럽게 되거씨자라우."
지삼출이 뚱하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리며 입맛을 다셨다.
백종두는 뒷짐을 지고 서서 포구와 바다를 폭넓게 조망하고 있었다. 포구는 왁자지껄하고 시끌덤벙한 소란 속에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배들은 통통거리고 택택거리는 엔진 소리들을 내며 부두로 밀려들기도 하고 포구를 빠져나가기도 했다. 갯내음과 함께 부둣가를 술렁이게 하고 들뜨게하고 있는 왁자함과 시끄러움은 도착한 배에서 물건을 부리고, 떠나는 배에 물건을 싣느라고 사람들이 끼리끼리 외치고 부르고 하는 소리들이 얽히고설키고 있는 것이었다.
전보다 부쩍 더 심해진 소란스러움에 백종두는 은근히 놀라고 있었다. 그건 보호조약 다음에 눈에 띄게 달라진 현상이었다. 보호조약의 효과가 그처럼 표 나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거만스럽고 냉엄한 얼굴을 한 백종두는 그런 번잡과 소란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눈길을 멀리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그의 마음은 온통 부둣가로 쏠려 있었다.
이거 위만 올려다볼 일이 아니로군, 아래도 내려다보고 살아야지. 보호조약으로 위만 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도 저리 야단법석 아닌가. 위에만 정신을 팔다간 아래를 놓치게 되는 것이지. 위가 명으로 벼슬이라면 아래는 이로 돈이렷다. 사람 일생에 세 가지가 뜻대로 이루기 어렵다고 했으니, 자식이 그렇고 명리가 그렇고 수명이 그렇다고 했겠다. 헌데 나는 어떤가? 자식은 신식학교에 떠밀어 넣었으니 더 두고 볼 일이고, 수명이야 마흔 고개 넘어서도 무병에다 정력 펄펄하니 철따라 보약으로 보해가면 앞으로 30년이야 맡아논 당상이고, 남은 것이 명리 아닌가. 시켜주기만 하면 상감인들 못하랴만은 과욕은 금물이고, 내가 마땅찮으면서도 일진회 회장을 맡으면서 아전자리를 벌린 것은 다 훗날을 기약하고 내일을 내려다 봐서가 아니더냐. 세상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어가고 있으니 쓰지무라 불알만 붙들고 늙어지면 군수자리 하나야 못 차지할까. 그렇지, 아무리 못해도 군수자리는 차고앉아야지. 명 다음에 이가 남았구나. 벼슬은 높을수록 좋고 돈은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벼슬이야 평생 아전일 것을 군수로 뛰어오르면 이무기가 여의주 얻어 용으로 승천하는 격이니 더 욕심 부릴 것 없고, 돈은 얼마쯤이나 있으면 좋을까. 어쨌거나 만석꾼은 돼야 돈 있단 말 듣고, 어디서나 큰기침하며 배 내밀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만석꾼...... 그리 되자면 아직 멀었지? 일본 것들 상대로 가장 손쉽고 배짱 튕겨가며 하는 돈벌이가 쌀 많이 지니는 것 아니던가. 돈 많은 일본 것들이 논을 그리 마구잡이로 사들이는 것도 다 돈벌이가 손 쉬워 그런 것인데...... 그렇지만 그것들이 논 값을 다 올려놔 버렸으니 나는 한 발 늦었지! 에에이 빌어먹을, 나도 눈치 빠르게 초장에 나섰어야 하는 건데, 아니다, 가만있자, 하시모토 같은 젊은 놈이 이제 대드는 판 아닌가! 논은 아직도 얼마든지 남아 있고, 그런 놈이 대드는 판에 나라고 보고만 있을 수 있나. 그래, 이제라도 일본 것들 하는 대로 따라서만 하면 제일 안전한 돈벌이다. 사람이야 새끼치고 또 쳐서 늘어나지만 땅이야 늘어날 리 없으니 쌀이야 갈수록 귀한 물건이지. 맞다, 논을 사들이자. 돈이란 돈을 다 긁어모아 논을 사들여서......
"백 상, 백 상!"
새로 도착한 배에서 내린 한 남자가 먼발치에서 손을 흔들며 외쳤다. 그러나 몸이 달아오른 백종두는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백 상, 하시모토 여깄소, 여기."
가까워진 그 남자가 다시 소리쳤다. 그때서야 백종두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는 <하시모토>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아이고 하시모토 상! 어서 오십시오. 원로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상대방을 먼저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백종두는 과장되게 반가움을 표하며 하시모토에게로 내달았다.
"안녕하셨습니까, 백 상.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고 계십니까."
하시모토의 꼬집는 듯한 말이었다.
"아 예, 저 새로 시작된 축항 공사를 보고 대 일본제국의 막강한 힘을 생각하느라고 그만......"
백종두는 거침없이 둘러 붙였다.
"아 그랬군요. 저 정도를 가지고 뭘......"
하시모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창 축대를 쌓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정도라니요, 뻘 밭에다 축대를 쌓는 일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저리 대대적으로 공사를 시작해서 척척해나가고 있으니, 대 일본제국의 힘이 아니고선 조선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그러믄요."
백종두는 손짓까지 해가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는 길에 봤는데 부산 축항 공사에 비하면 저건 아무 것도 아니오. 그리고 저 축항 공사는 원산, 청진, 진남포, 신의주, 목포 등지의 여덟 개 항구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어요. 조선의 항구들이 비로소 항구다운 꼴을 갖추게 되는 것이오. 그건 다 보호조약의 책임 아래 우리 일본제국이 조선한테 베푸는 은혜요."
하시모토의 당당하기 이를 데 없는 말에 백종두는 그만 머쓱해지고 말았다. 하시모토가 처음 했던 말이 겸손인줄 알고 너스레를 떨었던 것인데 알고 보니 그 반대로 자만에서 나온 말이었던 것이다. 일본말을 한다고 했지만 가끔 그렇게 헛짚는 경우가 생겼다.
"왜, 내말이 기분 나쁜가요?"
하시모토는 매정한 듯 날카로운 듯한 얼굴을 돌려 백종두를 주시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대일본 제국이야 우리 조선한테 끝없이 은혜를 내리는 대국이지요. 청이다 아라사다 다 몰아내 주었고 철도를 놓아주었고, 또 저리 축항공사까지 대대적으로 해주시니 그 은혜가 백골난망이지요."
백종두는 헤헤 웃어가며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그의 의식 속에는 상대방이 쓰지무라하고 선이 닿아 있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백 상은 역시 우리와 친화할 만한 인물이오. 조선 사람들이 전부 백 상처럼 생각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 부류들도 있단 말이요. 나 같은 사람이 조선에 자리 잡기로 한 것도 다 조선 농촌을 위해서요. 조선은 좋은 땅을 가지고서도 농법이 미개히서 탈이오. 난 조선의 농법개량을 위해 일할 참이오. 내 생각이 어떻소?"
"아 고맙고 고마운 일이지요. 하시모토 상 같은 분들이 많이 오실수록 우리 조선은 살기 좋은 개명천지가 되는 거지요. 그렇고말고요."
야이 도적놈아, 니놈이 바로 쥐 생각해주는 괭이로구나. 독헌 생김대로 맘보도 느자구라고는 없구나, 호로자석!
백종두는 겉말과는 다르게 속으로는 욕을 퍼대고 있었다. 그로서는 처음 느끼는 아니꼬운 왜놈이었던 것이다.
"쓰지무라 서기님은 안녕하신가요?"
하시모토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예 편안하십니다. 하시모토 상을 마중 나온 것도 쓰지무라 서기님 말씀을 듣고 오시는 걸 안 것이지요."
쓰지무라의 이야기가 나오자 백종두의 마음은 재빠르게 뒤집혔다. 순간적으로 가졌던 하시모토에 대한 아니꼬운 생각이 깨끗하게 지워졌다. 두 사람은 인력거를 잡아탔다.
"일진회는 번성하고 있는가요?"
하시모토가 담뱃갑을 꺼내들며 물었다.
"예, 그런 대로 돼가고 있습니다. "
백종두는 가슴이 찔끔해지며 대답했다.
"이 중대한 시기에 회원이 배가돼야 할텐데, 그렇게 되고 있습니까?"
백종두는 또 가슴이 찔끔해졌다. 그 말은 쓰지무라가 만날 때마다 하는 말과 떡판에 찍어낸 듯 똑같았던 것이다.
"예 그리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얼른 대답을 해놓고 백종두는 그만 기분이 싸악 나빠졌다. 자신의 대답도 쓰지무라 앞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이놈이 대체 무얼 하는 놈인가. 필시 예삿것이 아닌 게 분명한데......어디 두고 보자.
백종두는 목젖이 당기도록 마른침을 삼키며 먼데로 눈길을 돌렸다.
"백 상, 오늘 저녁에 바쁘신가요?"
하시모토는 말머리를 돌렸다.
"아닙니다.. 별일 없습니다."
"잘됐군요. 이따가 저녁에 내가 술을 한 턱 내지요. 쓰지무라 서기님도 한자리에 모실 테니까."
"서기님을 지금 뵈러 가십니까?"
"아니오. 우선 여관에 가서 목간부터 하고, 인사는 전화로 올릴 거요. 장소는 그 집, 사쿠라요."
백종두는 또 의문에 싸였다. 젊은 놈이 전화로 인사를 해?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가 기울기를 기다려 백종두는 약속한 기생집으로 갔다. 늑장을 부린다고 부렸는데도 쓰지무라는 물론이고 한턱을 낼 당자인 하시모토도 와있지 않았다. 백종두는 기분이 멋쩍기도 하고 언짢기도 해서 마루로 올라서지 않고 머뭇머뭇했다. 어디로 나갔다가 다시 와서 체면을 차릴까 어쩔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갈만 한데가 마땅치 않았다. 또 나갔다가 쓰지무라보다 늦어지게 되면 낭패였다.
"어서 올라오세요, 백 상. 연락 받고 특실을 비워두었습니다. 먼저 차나 한잔하시면서 사다코하고 화투놀이나 한판 하면 곧 오실 텐데요 뭘. 어서 오르세요."
주인 요오코가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볼우물이 살짝 잡혔다가 사라졌다.
저년이 사람 잡네. 저년언 꼭 박하사탕 맛맨치로 웃는당게. 여자 색감은 웃음이 바로 거그 맛인 것인디, 저년 조갑지 맛언 박하사탕맨치로 화아헐란 것잉가? 젠장, 화아 아니라 싸아혀도 멀혀. 저년이야 쓰지무라 차진디. 기생년 조갑지에 임자가 따로 있는건 아니다만 우선에 참아두제.
"어찌 그래 볼까......"
백종두는 짭짭 입맛을 다시며 못 이기는 척 마루로 올라섰다. 사다코가 차를 한잔 따르고, 몇 마디 음담을 걸치고 있는데 하시모토가 들어 왔다. 백종두는 그를 맞아들이며 요오코의 말을 들은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쓰지무라 서기님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요."
하시모토가 주저앉으며 내뱉었다.
"아니 왜요?"
백종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모르겠소,.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오."
하시모토의 눈이 고약해져 있었다. 백종두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 일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술맛 더럽게 되었다며 그는 소리 내지 않고 입맛을 다셨다. 하시모토도 더 말이 없이 담배만 뻑뻑 빨아대고 있었다.
"이거 원, 조선 놈들은 영 골칫덩어리야. 은혜를 베풀어도 고마워할 줄을 모르고 오히려 덤벼든단 말이야, 빌어먹을."
방으로 들어서며 쓰지무라는 큰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건 종종걸음으로 뒤따라오고 있는 오요코에게 하는 말로는 목소리가 너무나 컸다. 방안 사람들이 다 듣도록 일부러 큰소리를 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쓰지무라 서기님."
하시모토는 벌떡 이러나 쓰지무라에게 절도 있게 인사하고는,
"조선 놈들이 또 무슨 말썽을 일으켰습니까?"
민첩하게 상대방의 말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자극하고 있었다. 백종두는 또 어디선가 의병을 일으킨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열적이고 면목이 없었다.
"이번엔 또 경상도에서 정용기라는 자가 의병을 일으켰소. 삼남의 진군이라고 이름까지 거창하게 내걸었소."
쓰지무라는 몹시 언짢은 기색이었다.
"삼남의 진군이 아니라 조선의 진군이라고 이름 붙였어도 하나도 염려하실 게 없습니다. 조선 놈들은 중국 놈들을 흉내 내서 무슨 이름이든지 거창하게 붙이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하시모토가 듣기 좋게 단 말을 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소. 삼남이라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말하는 것인데, 지난번에 충청도, 이번에 경상도에서 일어났으니 다음엔 여기 전라도에서 일어나게 될 거라는 뜻인데, 그놈들이 정말 서로 내통이 되고 있는 것인지 어쩐지 모르겠단 말이오."
쓰지무라의 얼굴은 심각했다.
"예, 그놈들이 서로 내통하고 있다고 해도 노무 심려치 마십시오. 우리에겐 청국과 러시아를 물리친 막강한 군대가 있잖습니까. 러시아군대에 비해 조선의병이라는 건 개미떼에 불과 하지 않습니까. 단숨에 박멸 할 수 있습니다."
"그건 그런데...... 그래도 일단 의병이 일어나면 골치 아프오. 일반대중에게 파급효과가 생기고, 진압하더라도 민심을 잃게 될 염려가 있소."
"어차피 한번은 거쳐야 될 과정 아닌가요? 그것들도 사람인데."
"그렇긴 그러호. 백상! 내일부터 일진회원들을 몰아치시오. 여기 전라도에선 사전에 탐지해 내야 한단 말이오."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백종두는 그저 굽실거렸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백종두는 일진회원들을 모아놓고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닦달해대고 있었다.
"나가 일찍허니 의병 모으는 것얼 탐지해 내라고 일렀넌디, 이날 입때꺼정 이많은 인종덜이 꼬타리 하나 알아내덜 못허고 있으니 다덜 날이 날마동 몰허고 돌아가는겨! 부두서 노름밑천이나 뜯고, 술집마동 돌아댕김서 꽁짜술이나 퍼마심서 세월아 네월아 가그라 허고 원성이나 사는 것이 일이여? 시방 충청도서 의병이 일어난다. 경상도서 의병이 일어난다 허는 판에 자네덜이 그리 넋 빼고 살 헹편이여. 충청도고 경상도서 의병이 일어났으면 그 담엔 어디서 일어나겄어. 바로 여그 전라도 땅이여! 자네덜 붕알 밑이서 불이 붙는지도 몰르고 그리 넋 빼고 흘룽할룽 살다가 붕알이 타들어야 정신 채리겄어. 그ㄸ넌 때가 늦은 것이여. 우리 전라도 땅에서넌 의병인지 옘병인지가 대가리 들고 일어나기 전에 우리가 먼첨 찾아내서 씨럴 몰려부려야 히여. 긍게로 오늘보톰 회원덜언 한 사람도 빼지 말고 전부가 나서서 어느 어느 골에서 의병을 모으는지 알아내라 그말이여. 내 명 안 듣고 군산 바닥서 훌룽할룽하는 놈언 당장에 주재소에 처박어 뼉다구가 노골노골허게 맹글어줄 챔이여. 무신 말인지 알아 들어! "
제물에 흥분한 백종두는 발까지 굴러댔다.
"야아."
"알겄구만이라우."
잔뜩 긴장한 일진회원들은 고개를 바로 들지 못한 채 대답들을 했다. 사실 회원들은 그렇게 화가 나고 열이 오른 회장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회원들 중에서도 제일 몸이 다는 것은 장칠문이었다. 간부로서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함께 자칫 잘못하다가는 감투가 날아갈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던 것이다. 장칠문은 회원들을 둘씩 짝 지웠다. 그리고 동네를 지정해 나갔다.
"회장님 말씸 잘덜 들었제? 오늘로 다 군산얼 떠서 죽으나 사나, 무신수럴 쓰든지 간에 그 소식얼 알아내 갖고 와약 것이여, 안 그러면 우리년 다 막판잉게로. 다 알아듣겄어!"
장칠문은 비장한 얼굴로 외쳤다.
"그려어."
"알겄구먼."
시무룩해지고 기 꺾인 회원들의 대답이었다. 그들은 큰 근심을 앓는 얼굴들로 소로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폈다. 그들은 지정받은 동네를 향해 흩어져 갔다. 아랫입술을 깨문 장칠문은 총을 불끈 쥐고 서서 그들은 지켜보고 있었다.
"참 용허시. 회장님이 어찌케 우리가 꽁짜 술 묵는 것도 아는고?"
"그 귀에넌 말뚝 박았간디?"
"근디 어찌서 그간에넌 암말 안혔능고?"
"그냥 몰른칙기 히준 것이제."
"속도 넓네."
"긍게로 회장 해묵제."
"헌디, 우리넌 요것이 머시여. 총도 없이 맨손으로."
"긍게 말이여. 장칠문이 허고 가차운 놈덜만 총맛얼 보제."
"총이란 거이 참 좋기넌 좋등마. 손에 척 든게 듬직헌 것이 시상에 무서운 것이 없드랑게로."
"근디 징상허기도 허제. 그 한 방으로 사람얼 죽인다고 생각허먼."
두 사내가 군산을 벗어나며 나누는 이야기 였다.
"어이, 어이, 저것덜이 멋잉고?"
퇴비지게를 받쳐놓고 숨을 돌리느라고 답배를 빨고 있던 손판석이가 낮춘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머시가 멋이여? 자네넌 눈감고 있능가?"
바지를 까내리고 오줌을 누고 있는 지삼출은 곰방대를 입에 문채 되물었다.
"아따 오짐발도 질기넌 지네. 얼렁 누고 저것 잠 보소. 옷입은 것이 일진회 놈덜 같은디, 저것덜이 어찌서 총얼 미고 나섰는지 몰르겄네."
"머시여, 초옹?"
지삼출은 금방 목소리가 달라지며 고개를 휙 돌렸다. 두 남자 중에 하나가 총을 메고 멀찍이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지삼출의 눈에도 그들은 분명 헌병이 아니라 일진회 회원이었다. 지삼출은 그만 마음이 다급해 바지를 끌어 올렸다. 그 바람에 끝마무리가 안 된 오줌이 옷 속에서 찔끔거렸고, 오줌이 오른쪽 허벅지를 주루룩 타고 내렸다. 그는 급히 논두렁으로 올라서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저총 참 입맛 나게 생겼네 이."
지삼출이 손판석 옆에 앉으며 속삭였다. 그는 정말 입맛까지 다셨다.
"아서 아서, 군침 돈다고 여그서 딴맘 묵덜 말어. 대낮 인디다가 동네가 너무 가차웅게 뒤탈 못 면허."
손판석도 속삭이며 고개를 내돌렸다. 총을 빼앗고 싶은 마음이 동해 지삼출은 그 황소기운에다가 불끈하는 성미로 당장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으쩌까? 한 주먹감인디......"
지삼출은 담배를 급하게 빨았다.
"저놈덜이 눈치 채겄네. 딴전이나 침서 그냥 보내고 생각허세."
"이, 그리허드라고"
지삼출은 눈을 찡긋하고는,
"어허어어 어어라아, 춘삼월이라 호시적이 오기넌 왔다아마는......"
그는 곰방대끝으로 돌맹이를 치며 육자배기 가락을 늘여 빼기 시작했다. 그 능청스러움은 조금 전과는 전혀 딴사람이었다.
"여보시오, 당신네덜 저그 저 동네 사요?"
총을 맨 사내가 불쑥 물었다.
"야아, 그, 그렁마요 어찌 그요?"
노랫가락을 뚝 멈춘 지삼출이 더듬거렸다. 곁눈질을 치고 있는 그의 얼굴까지도 잔뜩 겁 질려 멍청해 보였다. "그 옆에서 손판석도 주눅 든 듯 눈만 껌벅껌벅하고 있었다.
"그리 겁 묵지 마시오. 우리가 당신덜 잡으로 온 것이 아닝게."
총 맨 사내가 옆의 사내에게 눈짓을 하며 두 사람 옆에 앉았다. .
"아이고매, 가차이 오덜 말드라고라. 그놈에 총만 보면 붕알이 오르가붙소."
지삼출은 연상 곁눈질을 하며 옆으로 피해 앉았다.
"어허 참, 촌 사람언 촌 사람이시."
총 맨 사내는 만족스러운 듯 경멸 하듯 웃고는
"자아, 궐련이나 한 대씩 맛볼라요?"
하며 담뱃갑을 꺼내 그들 앞에 내밀었다.
"하이고, 아 귀헌 것얼!"
손판석이 반색을 하며 얼른 한 개비를 뽑아 들었다.
"히히, 촌놈 입맛 베리것는디"
상대방의 눈치를 보며 담배를 뽑는 지삼출의 히히 웃는 얼굴은 천상 무지렁이 농군의 모습이었다. 총을 안 가진 사내가 성냥을 칙 그어 두 사람의 담배 끝에 들이댔다. 두 사람은 황송한 듯 궐련에 불을 붙였다.
"올해 농사 잘 되겄소?"
총맨 사내의 말이었다.
"그야 하늘이 정헐 일잉게 두고 봐야겄제라 이."
손판석의 심드렁한 대꾸였다.
"하늘서 비 잘 내려줘도 농꾼덜이 딴맘 묵고 있으면 농사 다 망치요."
총 맨 사내가 손판석을 힐끔 쳐다보았다.
"하늘이 돌보는디 딴맘 묵다니요, 그리 되면 베락 맞제라."
손판석이 뚱하게 말했다.
"듣자닝게 딴 맘 묵은 농꾼덜이 많다는 소문이던디."
"무신 소리다요? 농꾼이 딴 맘 묵으면 장시로 나스겄소, 바다에 배럴 띄우겄소?"
손판석이 무슨 맥 안 닿는 소리냐는 듯 상대방을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어허, 그런 소리가 아니고 거 머시냐 의병인가 머신가로 나슨다고 딴 맘 묵은 사람들이 많다는디......"
총 맨 사내는 제 답답증을 못 참아 속마음을 너무 쉽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 그런 소문이 있기는 있제라."
지삼출이 멍청한 듯 내놓은 말이었다.
"아니, 그런 소문 들었소?"
총 멘 사내가 지삼출 옆으로 붙어 앉았다.
"야아, 듣기넌 들었는디......"
"자아, 궐련, 그 소문 어디서 들었소?"
총 멘 사내가 담뱃갑을 지삼출의 손에 쥐어주며 눈을 반짝거렸다.
"글씨이......그런 말 히서 될라능가 몰르겄네."
지삼출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자아, 요것도 받으시오. 거그가 어디요?"
총을 안멘 사내가 재빨리 돈을 꺼내 지삼출의 손에 쥐어주었다. 지삼출을 쳐다보고 있는 손판석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벌떡거리고 있었다.
"거그가 쬐깨 먼디, 말로 히서 찾아가질랑가 몰르겄네"
"이, 요것 더 받고, 둘이서 앞장서!"
총 멘 사내가 또 돈을 꺼냈다.
"무신 소리다요,, 대낮에 앞장섰다가 쥐도 새도 몰르게 죽을라고라."
눈을 뚱글하게 뜬 지삼출의 멍청한 듯한 말이었다.
"이, 알겄어. 해 떨어지자먼 얼매 안 남었응게 어둔 담에 암도 모르게 갑시다."
총 멘 사내의 들뜬 망이었다.
"근다고 괜찮헐랑가......밤말언 쥐가 듣고 낮말언 새가 듣는다고 그런 일헌 것이 소문 나불먼 자네나 나넌 그날로 저승질인디......"
지삼출은 어눌하게 말하며 돈과 담뱃갑을 도로 두 사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돈이 작아서 그요? 여그 또 있소."{
총을 안 멘 사내가 얼른 돈을 꺼냈다.
"우리 넷이만 아는 일인디 소문언 무신 소문이 나겄소. 우리야 입 딱 봉헐팅게 아무 걱정 마시오."
총을 멘 사내도 또 돈을 꺼내 보테며 다짐했다.
"글먼 해가 떨어질 때꺼정 어디 있을라고 그요?"
지삼출이 마지못한 척 돈과 담뱃갑을 다시 챙기며 물었다.
"여그 어디 주막 안 있소"
총 멘 사내의 예사로운 대꾸였다.
"무신 소리다요? 눈 많은 주막서리 우리가 만내불면 어찌 되겄소. 동네방네 소문내서 누구 죽일라고 작정혔소!"
지삼출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돈과 담뱃갑을 내팽개치듯 했다.
"맞는 말이오, 맞어. 글먼 딴디 어디서 기둘리겄소. 어디 존 디 없소?"
총 안 맨 사내가 서둘러 말했다.
"글씨...... 사람들 눈에 안 띄자먼 따로 존디가 어디 있다요. 쩌그 저 집없는 야산자락에 가서 한숨 자고 있으식라. "
지삼출은 멀찍하게 마주 건너다보이는 야산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것이 좋겄네, 가세."
총 안 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해 떠러지는 데로 금세 와야 허요."
총멘 사내가 지삼출과 손판석에게 눈다짐을 하며 일어났다. 두 사내가 멀어지자 손판석이 휴우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이고메, 간이 콩알만 히졌네. 자네 어쩔 심판으로 그려?"
"돈벌이도 허고 총도 뺏고 헐라는 심판이제 어째, 궐련이나 한 대씩 꼬실리세."
지삼출은 씨익 웃으며 담뱃갑을 내밀었다.
"자네 참말로 영 쑹허네 이."
손판석은 어이없는 얼굴로 지삼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그런 지삼출의 모습이 너무나 뜻밖이었던 것이다.
"성냥도 얻을 것얼 잘못혔네 그려."
지삼출은 부싯돌을 치며 배짱 두꺼운 소리를 하고 있었다. 손판석은 그만 헛웃음을 치고 말았다.
"자네 이따가 어찌헐랑가?"
"자네넌 나가 허는 대로 따라만 허소. 오래 쉬었응게 등짐이나 지세."
지삼출이 궐련을 뻑뻑 빨아대며 지게 쪽으로 걸어갔다.
지삼출과 손판석은 거름내기를 마친 다음 저녁까지 먹고 아무렇지도 않게 집을 나섰다. 그들은 어둠을 밟고 고샅을 돌아 당산 나무 아래서 만났다.
"자네 그것 챙겠능가?"
"이, 골마리에 찼네."
두 사람은 걸음을 서둘러 어둠을 헤치기 시작했다. 밤의 서늘함 속에 땅의 훈기가 식고 있었다.
"누구여!"
어둠 속에서 들린 소리였다.
"이, 아까 만낸 사람잉마요."
지삼출이 대꾸했다.
"안오는지 알었소."
"말이 되간디라. 얼렁뜹시다."
"배가 고파 큰 탈인디."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아 참어, 안죽응게!"
처음의 목소리가 퉁을 놓았다.
네 사람은 어둠 속을 빨리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뜸부기가 어디선지 울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 나타난 야산 가까이를 걷고 있었다.
"아이고 목도 타고, 쉬었다. 가드라고."
"당아 멀었소?"
"쬐깨 더 가야 ㄷ마요"
그들은 담배 한 대짬을 쉬었다.
그들은 두 번째 야산자락에서 다시 다리쉼을 했다.
"당아 멀었소?"
"얼추 다 와가요."
"얼마나 걸었소?"
"한 20리가 넘었을랑게라......"
그들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동네의 불빛이 멀리 보였다.
"오짐이나 누고......"
지삼출이 몸을 일으켰다.
"나도 눠야 쓰겄구마."
손판석이 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뒤쪽으로 몇 걸음 옮겨가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돌아서 한사람씩을 덮쳤다. 태평스럽게 앉았다가 기습을 당한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는 크지도 길지도 못했다. 그들의 목은 뒤에서부터 올가미에 걸렸던 것이다. 그들은 다리를 버둥거리고 팔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씨부랄 눔덜!"
화답하듯이 손판석도 내쏘며 상대방의 얼굴을 갈겨댔다. 그들은 있는 힘껏 목을 조여대면서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살이 살을 치는 둔한 소리가 어둠속에 빨려들고 있었다. 몸부림과 발버둥이 멈춰지면서 상대방의 몸뚱이가 처져 내렸다.
"뒤졌구만."
거친 숨소리와 함께 지삼출이 말했다.
"이놈도 꼴딸하네."
숨을 토해가며 손판석이 말을 받았다.
"얼렁 파묻세."
"그래야제."
두 사람은 어깨에 시체를 하나씩 떠 맸다. 그리고 나무가 많은 데로 올라갔다. 마땅한 장소를 찾아낸 그들은 시체를 부려놓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호미를 빼들었다.
"요것 갖고 언제 파낼꼬?"
손판석이 혀를 찼다.
"맨손보담이야 낫제. 조상 묘 쓰는 것도 아니겄고, 두자 짚이로만 파면 된 게 금방이시."
지삼출이 손바닥에 퇴퇴 침을 튀겼다. 두 사람은 철 이른 땀을 흘리며 밤이 이슥해서 야산을 뒤로 했다. 총은 지삼출이 매고 있었다.
"외짝 팔이 안직꺼정도 요상스럽네."
"무신 소리여?"
지삼출의 말은 무뚝뚝했다.
"그놈이 살아나 보겄다고 내 팔뚝얼 쥐어뜯고 잡아채고 발광이었는디 안직도 그 기운이 팔뚝에 찌릿찌릿허고 서물서물허니 남었단 말이시."
"원 사람, 사삭시럽기넌. 그리 맘이 얇아갖고 어디 의병진 허겄능가."
"그것덜도 사람인디...... 자네넌 아무치도 않은가?"
"다 잊어부러, 개만도 못한 인종덜 없앤 것잉게. 개야 잡으면 포식이나 허제. 자네가 첨이라서 그런디 자꼬 히보면 덤덤혀지게 되네."
"자네넌 많은 했등가? 갑어년 그때 보톰이여?"
"어허! 그런 말 자꼬 허는 것이 아니시. 이따가 집이 가서 마누라하거 아물딱지게 한바탕 허고 푹 자불소. 그러고 깨끔허니 잊어부러."
사나흘 뒤부터 통변을 앞세운 헌병들이 마을마다 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탐문수사였다. 일진회원들도 눈을 희번득이며 여기저기 갈고 다녔다. 지삼출도 헌병들 앞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자알, 모르겄는디라우."
지삼출은 좀 모자란 듯 멍청한 듯한 모습으로 이 말만 되풀이 했다. 손판석도 그런 지삼출을 그럴싸하게 흉내 내고 있었다.
"춘향아아 어와 이내 사라앙아아 이내 가심에에 불얼 놓고오오......"
지삼출은 먼발치로 일진회원들을 힐끔거리며 지겟목발 장단을 맞춰 멋대로 된 가락을 뽑아대고는 했다. 헌병과 일진회원들이 설치고 다니는 가운데 경상북도에서 신돌석이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퍼졌다. 닷새가 넘게 소란을 피우고 다니던 헌병과 일진회원들은 제물에 지쳤는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논농사가 시작되는 5월에 접어들어 충청도에서 민종식이 또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늘어진 쇠붕알이라넌 충청도가 저 난린디 여그 전라도넌 머허고 있능겨. 오뉴월에 축 늘어진 말자지가 될랑가? 답답혀서 못살겄네."
지삼출은 손판석과 단둘이 마주앉으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5월 중순이 넘어 민종식의 의병대가 홍주성을 일본군에게 되 빼앗겼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지삼출이 송수익한테 연락을 받은 것이 그 즈음이었다.
"우리도 기병하게 됐소."
지삼출과 손판석을 눈여겨보고 난 송수익의 짧은 한마디였다.
"언젠게라우?"
어금니를 맞물었다가 풀며 지삼출은 침착하게 물었다.
"나흘 뒤요. 대원들에게 속히 알려 기병에 만전을 기하도록 해야 되겠소."
"어디서 기병헝게라?"
긴장된 얼굴로 손판석이 물었다.
"그건 나도 아직 모르겠소. 임박해서 또 연락이 올 것 이오."
"딴말씸 없으신게라우?"
지삼출은 곧 일을 시작해야 되겠다는 눈치를 보였다.
"웃어른이나 안식구한테 알리더라도 말이 안 나가게 단속하는 게 좋겠소. 특히 유념할 것은 아이들이 알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오. 주재소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까요."
"야아, 명념 하겠구만이라우."
"편히 유허시게라우."
지삼출과 손판석은 함께 일어섰다.
두 사람을 배웅하고 난 송수익은 정좌하고 눈을 감았다. 마음에 물결이 일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작정되고 다짐되었으면서도 새삼스럽게 마음에서는 뜨거운 물결과 차가운 물결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건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대의 앞에서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한번은 겪지 않으면 안 되는 괴로움일 것이었다.
뜨거운 물결에 실리는 것은 노모와 아내와 세 자식 그리고 막내동생이었다. 출가외인이라고 둘러친 담 때문인지 세 여동생은 전혀 마음에 걸 탓만은 아니었다. 이제 노모와 아내와 막내 동생에게는 집을 떠나게 된 연유를 알려야 될 시각이 닥쳐와 있었다. 그간에 식구 누구에게도 의병을 추진하는 일에 대해서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아내가 눈치로 모를 리 없었지만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장부가 하는 큰일을 아녀자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양반의 법도를 아내는 지면 어머니의 엄격함에 눌려 아내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못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막내 동생이 아직 두 살로 어린것이 다소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직 정정하셨고 아내는 조신하고 참했다. 어머니가 끌고, 아내가 받치고, 막내 동생이 거들면 집안이야 별 탈이 없을 것이었다. 세 아이들 중에 둘이 아들이니 장자의 몫은 어느 만큼은 한 셈이었다. 남자의 나이 스물 다섯, 죽기는 아깝지만 큰일에 나서기는 더없이 적합한 나이였다. 이미 큰일은 여러 곳에서 벌어져 있었다. 그 길이 옳은 것은 두말할 것이 없었다. 옳은길을 가는 것, 그것은 당연한 사람의 도리였다. 이기고 지는 것, 죽고 사는 것, 그런 것은 모두 그 다음의 문제였다.
송수익은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곧게 사셨던 동생과 한자리에 마주앉을 시각이 다가와 있었다. 송수익은 무릎을 짚으며 더디게 몸을 일으켰다. 지삼출은 밤이 늦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바느질감을 안은 채 흐린 불빛 아래서 졸음에 젖어 있었고, 두 아이는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어이, 잠 깨소, 헐 말이 있네."
지삼출은 아이들 옆에 앉으며 아내에게 불쑥 말했다.
"안자요, 무신 말인디 그요?"
무주 댁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앉음새를 고쳤다.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참아냈다.
"딴말이 아니고 말이여......"
지삼출은 아들 만복이의 조그만 손을 감싸 잡으며
"사흘 뒤에 모다 의병으로 나슬것이네. 그리 알고 옷이랑 챙길 것 챙기소."
그는 한달음에 말해 버렸다.
"아니, 그 무신 뜸금 없는 소리다요!"
무주 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뜸금 없기넌. 나만 나스는 거이 아닝게 자네도 맘 단단허니 묵소."
"아니고, 저 새끼덜 딜고......"
무주 댁은 마구 흘러넘치는 말을 애써 되삼켰다. 한번 마음 정한 남편 앞에서 다 부질없는 소리였던 것이다.
"자네가 고상이 되겠제. 그려도 혼자 허는 고상이 아닝게 참아내소"
지삼출은 아내의 손을 꼬옥 잡았다. 나흘 뒤에 최익현과 임병찬은 전북 태인에서 봉기했다. 6월 4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