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민이냐 노예냐
"다 왔다, 미국에 다 왔다아!"
누군가가 어둠침침한 선실로 뛰어들며 외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너무 감격에 겨워 마치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
"뭐라고?"
"무시기?"
"참말이여?"
여기저기서 갖가지 말투가 튀어나왔다 아무렇게나 눕고 기대고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똑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의 귀를 의심하는 얼굴들이었다.
"아 육지가 바로 눈앞에 다가왔소. 이 눈으로 똑똑히 봤소. 못 믿겠으면 다들 나가서 보시오."
그 남자는 들뜬 목소리로 외치며 문밖을 향해 힘차게 팔을 뻗쳤다.
"야아, 이제 살았다아!"
"나가세에!"
이런 환성이 터지면서 사람들은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앞을 다투어 문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에서 펄펄 솟는 기운은 조금 전까지 늘어지고 처져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기운 뻗치는 그들의 속에 방영근도 섞여 문 쪽으로 떠밀리고 있었다. 그도 가슴 벅찬 기쁨과 함께 새 기운이 솟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기쁨은 미국 땅에 당도했다는 기쁨이 아니었다. 오로지 배에서 내리게 되었다는 기쁨이었다. 방영근은 배타기에 지칠 대로 지쳐 날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배타기에 넌덜머리를 내고 지긋지긋해 했다. 누구 하나 어질병에 시달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매일 뱃멀미에 시달리는데다가 음식까지 입에 맞지 않아 어질병을 더 심하게 앓아야 했던 것이다. 인천에서 일본 고베까지는 그나마 견딜 만했었다. 그런데 고베에서 무슨 병이 없나 신체검사를 받은 다음 배를 갈아타면서부터는 생전 보도 듣도 못한 해괴한 음식이 나왔던 것이다. 심심하고 느끼하고 맺힌 데 없는 서양음식을 끼니마다 받아들고 그들이 간절하게 그리워한 건 밥이요, 김치요, 고추장이었다. 입이 짧거나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음식을 받아놓고 구역질부터 하고, 억지로 넘기고 나서는 토해내기가 일쑤였다. 그런 사람들은 나날이 사람의 꼴을 잃어가며 어질병을 심하게 앓았다. 방영근은 끼니때마다 무슨 싸움을 하듯이 마음을 가다듬고 음식을 넘겼다. 속이 비게 되면 더 멀미가 났고, 혼자 몸으로 병이 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굳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20여 명은 삽시간에 갑판으로 몰려나왔다. 과연 그들의 눈앞 저 멀리로는 육지가 바라다보였다.
"와아, 육지다 육지!"
"맞어, 이제 정말 살아났네그려."
"얼씨구나 좀도 좋다!"
그들은 다함께 기쁨의 소리들을 질러댔다. 서로 얼싸안는가 하면,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고, 만만세를 부르거나 눈을 훔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백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하와이가 그저 육지라고만 생각하며 갑판을 떠날 줄 몰랐다. 얼마 전가지만 해도 갑판에 나서기를 그리도 꺼리던 그들이었다. 갑판에 나서면 사방팔방 보이는 것이라고는 숨이 막히도록 끝없는 망망한 바다뿐이었다. 그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배는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 바다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면 어질병은 더 심하게 도졌다. 배가 섬에 차츰 가까워지면서 은빛 날개들을 느릿하게 휘저으며 나는 새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갈매기다, 갈매기."
누군가가 외쳤다.
"아하, 저걸 보니까 땅냄새가 나네."
누군가의 신명난 목소리였다. 뱃전을 선회하는 갈매기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배가 고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뿌우웅- 뿌우웅-> 긴 뱃고동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선실로 발길을 서둘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들은 제각기 보퉁이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짐을 다 챙겨들고 다시 갑판으로 나왔을 즈음에 배는 느린 몸짓을 지으며 항구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제일 먼저 띈 것은 외줄기로 뻗은 키 큰 나무였다. 사람키의 열 곱이 넘는 그 끝에 부챗살같이 갈라진 잎들이 엉성하게 붙어 있는 그 나무가 그들에겐 너무 눈설었다.
"아니, 저 나무가 어찌 저리 생겼소?"
"저것이 나무기는 나무요?"
"허 참, 고것 요상허게도 생겼네. 털 다 뽑고 꽁지만 남은 달구새끼 꼴 아니라고?"
"참, 나무치고는 어지간히 못났네."
그건 바로 야자수였다. 배가 부두에 가까워지면서 그들에게 눈선 것은 그 키 큰 나무만이 아니었다. 멀찍이 보이는 산 모양새며 나무숲도 눈설었고, 집들도 눈설었으며, 사람들과 그 차림새도 눈설었다. 그러다보니 하늘도 눈설고 햇볕이며 바람까지도 눈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은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와 기후가 다른 하와이는 하늘색과 바다색이 달랐으며, 햇볕의 강도나 바람의 감촉이 달랐고, 따라서 나무들 종류도 달라 숲 모양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이나 감각은 정확했던 것이다. 그들은 배에 오를 때처럼 줄 세워져 배에서 내려졌다. 그들의 몰골은 하나같이 후줄근하고 추레해서 궁상스러워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랜 뱃길의 어질병에 시달려 지칠 대로 지친 데다가, 삼베입성들은 선실에서 줄곧 입고 뒹굴어서 땀이 차고 때가 절어 있었고, 그동안 베개 삼았던 보퉁이를 하나씩 들고 짚신발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눈에 보이는 것마다 낯설고 눈설어 그들은 갑판에서 환호하던 때의 생기를 다 잊어버린 채 잔뜩 긴장하고 겁질려 있었던 것이다. 인원점검이 끝나고 그들은 다짜고짜 주사를 두 대씩 맞아야 했다. 그리고 종이에다가 무작정 손도장들을 눌렀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으니 무슨 주사인지 알 수가 없었고, 종이에 가득 적힌 꼬부랑글씨가 무슨 내용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저 하는 대로 내 맡기고 손짓하는 대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손도장을 누르고 사무실을 나온 그들은 갑자기 바뀐 상황 앞에서 눈치 빠르게 정신을 가다
듬어야 했다.
"갓댐, 스티기 애니멸! 허리 업, 허리 업!(야이 냄새 나는 짐승새끼야! 빨리 해, 빨리!)"
가죽장화에 차양 둥근 모자를 삐딱하게 쓴 몸집 큰 백인들이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치고 있었다. 채찍으로 사람을 갈기지는 않았지만 채찍들이 제 몸을 치며 허공을 찢는 소리들이 소름 끼치게 울려댔다. 거기다가 거구의 백인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소리치고 있어서 분위기는 살벌하기만 했다. 그들은 백인들이 외쳐대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모른 채 앞사람을 따라 부산하게 트럭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백인들이 외치는 소리가 욕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외침 중에서 귀에 익은 한마디가 있었던 것이다. <갓댐>이었다. 그 말은 배를 타고 오는 동안에 수없이 들었던 것이다. 선원들은 걸핏하면 눈을 부라리거나 화를 내며 <갓댐>을 내뱉었으므로 그것이 욕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아차렸다. 다만 그것이 조선말로 무슨 욕인지만 모를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우스개삼아 그 말을 써먹기도 했었다. 그들이 최초로 배운 영어이기도 했다. 그들 120여 명은 트럭 세 대에 빽빽하게 실려졌다. 트럭은 곧 출발했다. 빼곡하게 서로 붙어 앉은 사람들은 두렵고 겁난 얼굴들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트럭들은 시가지를 한동안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스쳐 지나가는 시가지 모습들을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초가집이나 기와집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반듯반듯하게 날이 서고 각이 진 집들만 말끔하게 줄을 서 있었다. 일본의 고베와는 또 다른 그 생소함에서 그들은 마침내 머나먼 타국 땅에 외톨이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트럭들은 시가지를 벗어나 키 큰 풀들이 무성한 벌판으로 접어들었다. 그들의 눈에 무성한 풀밭으로 보이는 것은 사탕수수농장이었다. 사람대접 받고 살기는 다 틀렸구나. 두 번째 트럭에 앉은 방영근은 멍한 눈길을 하늘로 보낸 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놈들이 사람 대하는 게 영 틀려먹지 않았소?"
"글세 말이오. 초장부터 안 좋구만요."
"이거 잘못 온 것 같시다. 고생길이 훤히 열렸시오."
"첨이라 기죽이라고 그러는 것 아니겄소?"
"글쎄요, 하는 짓들이 아주 몸에 익었는데...... 두고 볼 일 아니겠소."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소곤거리고 있었다. 방영근은 그 소곤거림에 귀가 열려 있었지만 말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트럭은 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트럭에는 포장이 쳐져 있지 않아 그들은 뙤약볕을 그대로 받고 있었다. 햇볕은 이상하게 눈이 부셨고, 두꺼운 느낌이었으며, 바늘 끝처럼 따끔거렸다. 차가 달리고 있어서 바람이 일어나는데도 그들은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그 이상스러운 햇볕과 예사롭지 않은 더위에서 그들은 어떤 불길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건 속았다는 깨달음이기도 했다. 사시사철 기후가 좋아 일하기 편하고 살기 좋은 땅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던 것이다. 트럭이 차례로 정거했다.
"허리 업! 갓댐, 허리 업!"
차에서 뛰어내린 백인들이 다시 채찍을 휘두르며 외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두러 트럭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모두 민첩한 동작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비탈에 줄지어 서 있는 똑같은 모양의 판잣집들이었다. 판잣집들은 시내를 거쳐 오며 얼핏얼핏 보았던 집들과는 딴판으로 한눈에 허술하고 엉성해 보였다. 그들은 그 볼품없는 집들이 자기네 거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 집들은 저 멀리 솟은 우람한 산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그 꼴이 더 초라해 보이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산줄기는 그 생김부터가 사뭇 기이했다. 산줄기는 으레껏 물줄기가 흐르듯 높은 봉우리가 낮은 봉우리들을 거느리면서 뻗어가게 마련인데 그 산줄기는 어떻게 된 것이 느닷없이 땅속에서 불끈 솟아오른 것처럼 낮은 봉우리라고는 붙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깎아지른 급경사에 억센 등줄기들이 마치 주름을 잡은 것처럼 수없이 아래로 뻗어 내리고 있었다. 어떤 거대한 손으로 아무렇게나 담을 높게 쌓아올린 것 같은 그 산줄기는 억세고 험한 생김만큼 사람의 접근을 꺼리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런데 생김만이 그렇게 묘한 것이 아니었다. 산 색깔도 이상야릇한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그 초록빛에는 무슨 연기나 안개가 엷게 끼어 있는 것 같아서 환상적이고 몽환적으로 보였고, 주름 잡힌 등줄기의 그늘에도 무당집이나 상여움막 같은 데 떠도는 그 음산하고 괴이스러움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그 산줄기는 생김도 특이한데다가 색깔가지 그렇듯 묘해서 험준함과 신비스러움이 합해져 한결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저 산줄기가 영판 요상허덜 않으요? 산신령이 살아도 한둘이 사는 것이 아닐 것 겉은디요?"
한밑천 잡겠다고 뱃길을 나선 주만상이가 겁 실린 눈으로 말을 걸어왔다.
"모르겄소, 어쩌는지."
방영근은 싫은 내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데다가 좀 주책스러운 그 사람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백인들은 아까보다 훨씬 살벌한 기세로 연상 갓댐을 외쳐대고 채찍을 휘두르며 줄을 세워나갔다. 사람들은 행여 채찍을 맞을까봐 재빠른 동작으로 한 줄로 늘어서고 있었다. 그러는 틈에도 한 고향사람끼리 앞뒤에 서려고 눈치싸움들을 벌이고 있었다.
"갓댐, 스팅키 애니멀!"
한 백인이 고함을 지르며 뒤쪽으로 내닫고 있었다. 그리고 곧 비명이 터졌다.
"아이구구......"
모든 사람의 눈길이 일시에 그쪽으로 쏠렸다.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고, 백인은 사정없이 채찍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채찍이 몸을 휘감을 때마다 그 남자의 몸뚱이는 풀쩍풀쩍 솟기듯 했고 비명이 자지러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의 바지는 엉덩이가 반쯤 보이게 흘러내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 남자가 급한 용변을 보다가 매질을 당하게 된 것을 알았다. 그들은 채찍이 그 남자의 몸뚱이를 물어뜯을 때마다 부르르 몸들을 조이고 기가 죽어들며, 용변 본 것이 뭐가 잘못이라고 저리 혹독한 매질을 당해야 하는 것인지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채찍질은 열 번이나 가까워져서야 멎었다. 그 남자는 신음소리를 낼 뿐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사람들 쪽으로 돌아선 백인은 그 남자를 손가락질해대며 뭐라고 길게 떠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떠들어대는 소리가 아무데서나 용변을 봐서는 저렇게 맞게 된다는 뜻으로 알아 새겼다. 매질당한 남자는 두 사람의 부축을 받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의 한쪽 볼에는 불에 덴 것처럼 핏줄기가 길게 돋아 있었다. 채찍에 맞은 자리였다. 사람들은 채찍의 위력에 질리며 주눅이 들었다. 그들은 10명씩 잘리어 막사마다 밀려들어갔다. 비바람이나 겨우 가릴 수 있도록 판자막이를 한 허술한 막사는 안에도 아무런 치장이 없었다. 마룻바닥엔 공동침상이 깔려 있어고, 그 옆의 빈자리에 긴 나무걸상이 두 개 놓여 있을 뿐이었다. 아니, 유일한 치장물이 하나 있기는 했다. 출입문 위에 낡은 불알시계 하나가 걸려 있었다. 침상에 걸터앉은 방영근은 그 시계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시무룩하고 침통한 얼굴들로 말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거름이 되었다. 그들은 줄을 서서 식당으로 갔다. 거기서 조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식당일을 하고 있는 그들이 자신들보다 먼저 하와이에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모두 반가움이 넘쳤으나 그러나 서로 말 한마디 걸 수가 없었다. 백인들의 눈초리가 여기저기서 번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밥 한 그릇과 국 한 그릇씩을 퍼주고 받으면서 눈으로 말을 주고받고 웃음으로 정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식당일을 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물기가 서린 듯했고, 웃음에는 서글픔이 서려 있음을 새로 온 사람들은 거의가 깨달았다. 밥과 국을 받아들고 돌아서는 그들은 하나같이 우울하고 침통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밥 한 그릇에 국 한 그릇씩을 받아가지고 긴 나무식탁에 앉자마자 허겁지겁 밥들을 먹기 시작했다. 시장해서만이 아니었다. 손에 든 것은 쌀밥이었고 식탁에는 김치그릇들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배를 타고 오면서 밥에 김치를 얼마나 고대했었던 것인가. 그들은 게걸들린 사람들답게 김치와 밥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러나 국을 달게 먹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양배추와 양파가 섞인 고깃국이었는데 국물에 된장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된장이 풀리지 않은 쇠고기국은 배를 타고 오는 동안에 느끼한 고기에 질린 그들에게는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밥을 먼저 먹고 나나 사람들 쪽에서 연거푸 비명이 터지고 있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채찍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백인들의 채찍은 오랜만에 김치와 밥을 배불리 먹고 난 포만감에 젖어 맘 놓고 트림을 해대는 사람들을 찾아 날아가고 있었다. 말 한마디도 할 수 없는데다가 트림마저 할 수 없는 식당에서 벗어난 그들은 부산하게 자기네들 막사를 찾아갔다. 걸핏하면 날아드는 채찍에 그들은 완전히 주눅 들고 기 질려 있었다. 그들은 막사 안으로 들어와서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이 서성거렸다. 누군가 담배를 꺼내 피워서야 겨우 한마디가 나왔다.
"담배 피운다고 또 맞는 것 아니오?"
"여기 재떨이가 있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소."
긴 걸상 위에 판자 쪽을 엉성하게 짜 맞춘 재떨이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방영근은 침상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가슴이 담배연기로 적셔지며 정신이 아슴하고 아른해졌다. 그나마 밥에 김치를 먹었다고 담배 맛이 오랜만에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는 김치를 생각하며 담배를 거푸 빨아들였다. 배추라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던 것이다. 칼질을 했다고는 하지만 줄기도 입도 구별이 안되고 색깔도 그저 허옇기만 했다. 맛도 조선배추와는 달리 싱거운 데다가 짤깃하게 씹는 맛도 없었다. 궁한 판이라 소금기에 고춧가루가 뿌려져 있으니까 그나마 허겁지겁했던 것이다. 지놈덜 생김대로 배추도 그 모양이로 허연허구만. 이런 생각을 하는데 트림이 괴어올랐다. 방영근은 어찌해야 할까를 퍼뜩 생각했다. 소리 나지 않게 내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는 막사였다. 순간적으로 오기가 돋아 올랐다. 에라이 잡새끼덜아, 트름도 맘대로 못허고 사는 시상이 워디가 있냐. 이런 생각과 함께 그는 맘껏 트림을 터뜨려버렸다. 사람들이 일제히 방영근을 쳐다보았다.
"여그는 집 안이오. 떨 것 없소."
방영근의 한마디였다.
"그렇지. 집 안에서야 트림을 하든 방구를 뀌든 우리 맘대로지"
"맞어, 그것을 몰랐구만."
이런 맞장구가 돌고 이내 서너 사람이 끄윽끄윽 트림을 해댔다.
"아이고 억지로 해대지는 마시오. 오랜만에 먹은 김치 토하겠소."
누군가의 말에 모두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데 말이오, 오줌을 눠도 매질이고 트림을 해도 매질이고, 이래가지고서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소. 우리가 이런 꼴 당할려고 여기 온 게 아니잖소."
한 남자가 정색을 하고 꺼낸 말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휘둘러보았다.
"그러게 말이오. 내일부터는 또 무슨 일로 매질을 할지 모를 일 아니오?"
"우리보담 먼첨 온 사람덜도 이리 매타작 당해감스로 살았을랑가요?"
"그런데, 그 코쟁이들은 대체 뭐요? 아주 악질들이던데."
그들은 자연스럽게 모여앉아 있었다.
"우리가 개돼지도 아니고 이런 생지옥에서 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처음의 남자가 말에 힘을 주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백인 하나와 조선인 하나가 들어섰다. 백인이 뭐라고 외치며 채찍으로 침상을 내리쳤다.
"다 침상으로 똑바로 올라앉으시오."
조선사람의 말이었다. 그들은 짚신을 벗고 침상으로 우르르 올라갔다. 그리도 다들 똑바로 앉았다. 백인이 뭐라고 한참 떠들어댔다.
"오늘은 첫날이라 특별히 저녁밥을 대접한 겁니다. 내일 아침부터는 하루에 한 막사에서 두 명씩 식사당번을 뽑아 밥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내일부터 일을 시작합니다. 기상은 매일 새벽 4시, 하루 노동은 10간입니다. 앞에 두 사람, 나오세요. 내일 식사 준비를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빨리 자도록 하세요. 이상입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두 사람은 돌아섰다. 그 뒤를 식사당번으로 지적당한 두 사람이 엉거주춤 따라 나갔다. 아까 처음에 말을 꺼냈던 남자가 팔을 들어 올렸지만 말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팔을 도로 내리며 투덜거렸다.
"못된 새끼들, 숨 돌릴 새도 안 주고 부려먹을려고."
"이것 참 기분 나쁘고 이상하지 않소. 우리를 꼭 종놈 다루듯 한단 말이오."
다른 남자가 성질을 냈다. 방영근은 더 참을까 하다가 군소리들이 자꾸 길어질 것만 같아 입을 열었다.
"배 타기 전에 왜놈헌티 20원 받았지라?"
"예, 받았지요."
"그러면 종놈이 된 것이오."
"무슨 소리요?"
"생각혀 보시오, 왜놈덜이 우리가 머시가 이쁘다고 논 닷마지기 값인 20원식이나 줬겄소. 허고, 그 돈이 어디서 나왔겄소. 바로 이 양사람덜이 내놓은 것 아니겄소? 우리는 다 종으로 팔려온 것이다 그 말이오."
방영근은 일부러 매몰찬 기분으로 말했다. 분위기는 사늘하게 굳어졌다. 벌레 우는 소리만 가늘게 들려올 뿐 아무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막사 안에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방영근은 담배를 피워물고 창가로 갔다. 어두운 하늘에 별들이 드문드문 돋아나고 있었다. 아아...... 여기서도 별들은 똑같구나...... 방영근은 코허리가 찡 울리는 것을 느끼며 담배를 깊이 빨았다. 어머니의 얼굴과 동생들의 얼굴이 밀려들었다. 어떻게 여름을 넘기고들 있는지...... 생각하기만 하면 가슴 먹먹해지는 핏줄의 당김이고 아픔이었다. 편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생각보다는 어려운 생활이 펼쳐질 것 같았다. 무슨 어려움이든 이겨내고 어머니와 형제들 곁으로 돌아가리라고 그는 이를 사리 물었다. 사람들이 한둘씩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리고 금방 코를 고는 사람도 있었다. 방영근은 그동안 며칠이 흘러갔는지를 생각해 내려고 했다. 그러나 막연하게 보름이 넘어갔다는 것뿐 정확하게는 계산해 낼 도리가 없었다. 바다 가운데 떠서 그날이 그날이기도 했지만 어질병에 시달리느라고 지나가는 날을 꼬박꼬박 꼽을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도 자리를 잡고 누웠다. 막상 눕자 몸이 한정도 없이 꺼져내리는 것같이 무거웠다. 오랜만에 흔들림 없는 잠자리에 누운 안정감이 포개지고 있었다. 그는 바닷물에 꼴깍 잠기는 착각과 함께 진한 잠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딸랑 딸랑 종소리가 다급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멀어지다 가까워지다 하는 그 귀선 종소리에 쫓기며 방영근은 잠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꼭꼬오오옥 꼬옥! 어디선가 닭이 목청 뽑는 긴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방영근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한 동작으로 윗몸을 일으켰다. 막사 안에는 아직 어렴풋한 어둠이 남아 있었다. 닭은 연이어 목청을 뽑고 있었고, 종소리도 계속 딸랑딸랑 울리고 있었다. 아아, 여기서도 닭이 우는 소리는 똑같구나! 방영근은 가슴을 친 생각이었다. 그 생각과 함께 고향집이 눈앞에 쑥 밀려들고, 집안의 냄새도 물큰 풍겨왔다. 서러움과 그리움이 가슴 가득 차며 목이 메어왔다.
"허! 저놈에 닭이 사람 잡네."
누군가의 한숨 섞인 중얼거림이었다.
"게랍, 게랍! 갓댐, 게랍!"
이런 외침과 함께 백인이 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그들은 허둥지둥 침상 아래로 내려서고, 아직 잠이 안 깬 사람을 흔들어대고 했다. 그들은 백인을 따라 나가 그가 손짓으로 시키는 대로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막사 주변을 청소했다. 청소를 끝내고 곧 식당으로 갔다. 어둠이 아직 땅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식당 앞에서는 또 채찍질이 가해지고 있었다. 채찍질소리와 비명이 뒤범벅되고 있었다. 더운 탓에 저고리를 벗어버려 맨몸이거나 짚신을 신지 않아 맨발인 사람들을 골라내 채직질을 하는 것이었다. 채찍을 맞은 사람은 뒤늦게 그 까닭을 알아채고는 질겁을 해서 막사로 내뛰고, 미리 그 눈치를 첸 사람들은 오던 걸음을 되돌리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식당을 출입하는 규율은 엄했다. 저고리 옷고름이 풀어지거나 짚신을 질질 끌어도 채찍이 날아왔다. 그러니 큰소리로 떠들거나 누구를 외쳐 부르는 행위가 용납되지 않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까다로운 단속이 서양 사람들의 예법에 맞춘 것이라는 걸 그들이 알기까지는 꽤 여러 날이 걸렸다. 식사시간은 30분이었다. 밥을 타느라고 기다리고, 각자 그릇을 씻고, 집합 전까지 담배라도 한 대 피울 짬을 내려면 밥을 먹으면서 옆 사람과 말 한마디 나눌 틈도 없을 지경이었다. 낯을 씻는 시간이나 변소를 가는 시간 같은 것은 따로 빼주지 않았으므로 제각기 눈치껏 요령껏 할 수밖에 없었다. 행동이 굼뜬 사람은 그저 채찍질당하다가 골병 들게 되어 있었다. 담배 한 대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그들은 집합당했다. 트림을 하고 싶은 사람은 담배를 피우는 동안에 다 해치우는 영리함을 보였다. 그들은 하나하나 주머니털이를 당하게 되었다. 담배를 전부 압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일하는 동안에 담배를 피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암담함에 그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속만 앓았다. 백인감독은 익숙한 솜씨로 열심히 주머니 뒤짐을 해나갔고, 그들은 굳어진 듯 뻣뻣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야릇한 소리가 새나왔다. 뾰오오요옹...... 누군가 방귀를 뀌고 있었다. 그냥 <빵>도 아니고 <뿡>도 아닌 그 소리는 묘한 가락으로 비꼬이며 길게 늘어졌다. 여기저기서 킥킥거리고 쿡쿡거리는 웃음이 터졌다.
"가앗댐!"
어느 때 없이 크게 터진 백인의 외침이었다. 웃음소리들이 뚝 멎었다. 백인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갓댐 후즈 댓! 캄온 허리 업, 허리 업!(어떤 놈이야! 당장 나와, 당장!)"
백인은 채찍으로 갈겨대며 악을 쓰고 있었다. 120여 명은 꼼짝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백인은 거푸 소리치며 채찍으로 땅바닥을 후려갈겼다. 그때마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일어났다. 백인의 기세로 보아 방귀 뀐 사람이 나서지 않고서는 사태가 마무리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낌새를 느꼈던 것인지, 아니면 전체에게 미칠 위험을 느낀 주위사람이 밀어낸 것인지 한 남자가 주춤주춤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썬 오브 빗취!(개새끼)"
이런 외침과 함께 채찍이 그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어쿠!"
그 남자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무너졌다. 백인은 짐승 같은 소리를 질러대며 나뒹구는 남자를 향해 쉴 새 없이 채찍을 휘둘러댔다. 그 매질은 어제 소변을 보다 당한 사람한테 가해진 것 보다 훨씬 더 심했다. 그들은 몇몇 사람의 웃음이 사태를 그리 험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귀소리가 묘하고 길었던 것은 참고 견디다 못해 나온 것이기 때문임도 알고 있었다. 그 남자는 얼굴이 피범벅이 채 늘어져 막사로 들려갔다. 채찍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사람들은 하루가 다 못되어 익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금기사항이 무엇인지도 빠르게 익혀가고 있었다. 점심과 물통, 연장 같은 것들을 실은 마차 두 대를 앞세우고 그들은 일터로 나갔다. 어둑새벽의 들판 길을 걷고 있는 그들의 발길은 무겁기만 했다. 배를 오래 타 지쳐 있는 탓만이 아니었다. 작업장 도착은 5시 직전이었다. 출발할 때 보이지 않던 백인들이 말을 타고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말을 탄 백인들이 저쪽 멀리 깃발을 꽂고 있었고, 아까 채찍을 휘둘렀던 자가 그 깃발들을 가리키며 뭐라고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오늘 일을 거기까지 해내야 한다는 것임을 눈치로 알아들었다. 20명씩 조가 나눠지고, 연장이 분배되었다. 호루라기가 울리면서 정각 5시에 일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은 농사 짓기가 아니었다. 농토를 만들기 위한 개간 작업이었다. 개간해야 하는 땅은 평지라고는 하지만 열대성 잡초들과 나무들이 뒤헝클어져 원시림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것들을 뿌리까지 전부 뽑아내서 농사지을 땅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었다. 제각기 연장을 든 그들은 일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들의 의식 속에는 조금 전에 보았던 깃발들이 꽂혀 있었다. 그 책임량을 다하지 못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몸 사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일손을 부지런히 놀려야 했다. 이제 믿을 건 자신들의 몸뚱어리뿐이었다. 그러나 작업효과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거의가 개간 작업을 해본 경험이 없는데다, 열대 야생식물들은 난생 처음 대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그것들을 요령 있게 다루는 방법을 몰랐고, 뿌리의 생김이나 깊이 같은 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해가 떠오르게 되자 더위에 파묻히고 말았다. 열대의 7월은 눈이 시도록 부신 밝은 빛을 내쏘았다. 또한 햇살은 무수한 바늘 끝으로 내리꽂히면서 두꺼운 햇볕의 장막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눈부시고 따갑고 후끈거리는 열대의 태양은 그들을 희롱하듯 괴롭히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도 고통스러운 폭염 속에서 그들은 원시의 야생식물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삼베옷들은 금방 땀으로 맥질이 되었고, 그들은 하나같이 기운을 쓰지 못하고 헉헉거렸다. 오랜 배타기의 피곤이 회복되지 않은 탓만이 아니었다. 어제 맞은 예방주사로 모두 열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몸은 물먹은 백설기처럼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래 가지고는 죽도 밥도 안되고 다 병나 죽게 생겼소. 이러지 말고 반씩이든 다섯 사람씩이든 돌아가면서 쉬어 기운을 차리는 것이 어떻겠소. 그래야 사람도 살고 일도 될 것 아니겠소."
누군가가 불쑥 내놓은 의견이었다.
"글쎄요, 그래 가지고 맡은 일을 다 끝내게 되겠소?"
누군가의 대꾸였다. 말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다 일손을 멈추었다.
"이렇게 모두가 기운 못쓰고 일이 안되는 것보다는 쉬어가면서 기운차려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소."
"그것 좋은 생각이오."
또 다른 사람이 찬성하고 나섰다.
"우리 맘대로 그리혀서 괜찮을랑가?"
주만상의 걱정스러운 말이었다. 방영근은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자신들 마음대로 정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상관없소. 어쨌든 우리가 맡은 일만 해내면 될 것 아니겠소."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이 자신 있게 주만상의 걱정을 무질러버렸다. 사람들은 어느덧 그 남자의 말을 따르는 기색이 역연했다. 방영근은 반대를 할까 하다가 자신의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벌써 절반 가까이는 아예 연장들을 놓고 주저앉거나 몸을 부린 형편이었다. 결국 그 사람의 주도로 반씩 쉬기로 결정이 났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막사 사람들 10명이 먼저 쉬게 되었다. 그들 10명은 가까운 그늘을 찾아들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가롭게 압수당한 담배타령을 하고 있었다. 잠시 뒤였다. 말발굽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귀에 익은 외침이 들려왔다.
"갓댐, 스팅키 애니멀!"
그리고 말을 탄 백인이 채찍을 휘두르며 들이닥쳤다. 그늘에서 쉬고 있던 10명은 혼비백산 튕겨 일어났다. 그러나 백인이 마구 휘둘러대는 채찍을 맞고 순식간에 서너 명이 픽픽 쓰러졌다. 나머지 사람들은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백인은 잽싸게 말을 몰아가며 채찍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한 사람씩 비명을 지르며 거꾸러지고 나뒹굴어졌다. 백인의 채찍질 솜씨는 그야말로 날쌔고 귀신같았다. 10명에 대한 채찍질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말에서 뛰어내린 백인은 그들을 나란히 줄을 세웠다. 그리고 다시 채찍질을 시작했다. 채찍은 한 사람의 몸을 3번씩 휘감고 물어뜯고 잡아챘다. 첫 번째의 채찍을 맞고 그대로 서서 버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채찍이 몸뚱이를 물어뜯는 소리와 사람의 비명이 뒤엉켜 따갑고 무더운 땡볕을 한동안 흔들고 있었다. 매질을 당한 그들이 연장을 들고 일을 시작하는 것을 보고 백인은 다시 말에 올라탔다. 그의 목에는 어제 볼 수 없었던 물건이 걸려 있었다. 그들 중에서 그 물건이 자신들을 감시하는 망원경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점심을 먹으라는 호루라기 소리가 울릴 때까지 허리 한번 제대로 펼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은 11시 반부터 30분 동안이었다. 마차에 싣고 온 점심을 뙤약볕 아래서 받아먹었다. 마음대로 그늘을 찾아들 수가 없이 식당에서처럼 뙤약볕 속에서 줄을 맞춰 앉아 먹어야 했다. 그 어떤 것이든 제약이고 통제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러나 감독인 백인들은 저마다 손잡이 달린 바구니에 따로 장만해 온 점심을 그늘에 낮아 떠들어대고 웃어대며 먹었다. 그 모습이 소풍이라도 나온 사람들같이 한가롭고 즐거워 보였다. 점심을 끝낸 다음에야 사람들은 그늘에서 쉴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되었다. 그때서야 정해진 장소에서 소변도 볼 수 있었다.
"자지도 놀래부렀능가 어째 오짐도 덜 매러우네그려."
"이보시오, 자지가 놀라고 눈치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담을 너무 많이 쏟아서 오줌으로 나올 물이 없는 거요."
"허! 그게 그리 되는감?"
"여름보다 겨울에 오줌이 더 자주 마려운 게 그 이치 아니오?"
소변을 보면서 나누는 말이었다. 그늘에서 쉬는 그들의 공통적인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담배를 피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요것 참 사람 환장헐 일이시. 저 잡새끼덜언 식후불연이면 소화불량이라는 것도 몰르는가."
"이거 정말 안되겠는데. 사람을 짐승처럼 부렸으면 밥 먹고 나서 담배나 한 대씩 피우게 해얄 것 아냐."
"이런 법을 대체 어떤 놈이 만든 거야."
"어떤 놈이 따로 있소. 다 저놈들이 마음대로 하는 거지."
"저, 저, 인정사정없는 놈덜 보소. 우리는 담배 못 피게 맨들어놓고 즈그놈덜언 저리 맛나게 꼬실러대고 있네."
"빌어먹을,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들도 이런 꼴을 당하고 살았을까?"
"목숨 부지하자면 별수 있었겠소. 그나저나 생지옥이 따로 없소. 그저 앞날이 캄캄하오."
"그러게 말이오. 바다가 막혔으니 내뛸 수도 없고, 기가 막힐 노릇이오."
사람들의 입에는 결국 한숨만 물렸다. 방영근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며 풀줄기를 자근자근 씹고 있었다. 역시 밥을 먹고 나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 간절함을 이겨내기 위해 풀줄기를 씹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이런저런 말들이 다 부질없이 느껴져서 아예 끼어들지를 않았다. 다만 어서 돈을 벌어가지고 다시 바다를 건너가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만을 굳게 붙들고 있었다. 오고 싶어 온 땅이 아니었고, 싫어서 떠난 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바다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맞바라보이는 바다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모래밭 언덕이 강한 햇살을 되쏘며 눈부시게 흰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바닷물이 암벽에 부딪히며 하얀 물꽃을 쉴 새 없이 피워내고 있었다. 갈매기 떼가 그 물꽃들을 따먹기라도 하려는 듯 아래로 쏟아져 내리다가는 슬쩍 비켜가며 다시 솟구쳐 오를 때면 무수한 날개들이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해변에 가까운 바다 색깔은 단조로운 푸른빛이 아니었다. 물 깊이에 따라 여러 종류의 푸른 빛깔 천을 펼쳐놓은 것처럼 층을 이루어나가고 있었다. 맑은 옥빛, 밝은 백옥빛, 진한 청옥빛, 좀더 진한 초록빛,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남빛. 그것은 마치 가지가지 푸른빛들로만 이루어진 현란한 무지개 같았다. 갈매기들이 낮게 날 때면 그 색색의 바다 색깔이 배경이 되어 갈매기의 자태는 한층 또렷해지고는 했다. 외줄기 키 큰 야자수들은 그런 해변가에 외로운 듯 서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매기들은 암벽에는 더러 내려앉아도 야자수에는 한 마리도 내려앉지 않았다. 그래서 야자수들은 더 외로워 보이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풍광은 좋다만 사람이 살 땅은 아니다. 가늘게 한숨을 쉬며 방영근이 한 생각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때 호루라기 소리가 귀따갑게 울리기 시작했다. 무거운 몸을 일으킨 사람들은 물통으로 몰려가 물을 마시기 바빴다. 오전에 목마름을 겪은 터라 미리 대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적응력을 길러내고 있었다. 일손을 잡자마자 또 담이 솟기 시작해 그동안 약간 말랐던 옷들을 다시 적시고 들었다. 오후에도 잠시의 휴식이라고는 없이 노동이 계속되었다. 오후의 더위는 어전보다 갑절은 더 심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잡담 한마디 못하고 일손을 놀려야 했다. 등뒤에서 느닷없이 허공을 찢는 채찍소리가 싸늘하게 퍼지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전체의 일과는 정해진 시간인 4시에 끝나지 않았다. 모두 일손이 서툴러 책임량을 다 마칠 때까지 2시간을 더 일해야 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방영근네 조는 제일 늦어 어둠이 짙어질 무렵까지 헉헉댔다. 오전에 매질을 당하느라고 시간을 까먹은 데다가 매 맞은 사람들이 힘을 제대로 못썼던 것이다. 식당을 거쳐 9시가 넘어 막사에 들어선 그들은 퍽퍽 쓰러지며 잠이 들었다. 기상을 알리는 종소리는 어김없이 새벽 4시에 울려 퍼졌다.
"아이고 씨부랄 것, 나럴 아조 죽여도라. 더는 못살겄다."
주만상이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몸을 뒤흔들며 울부짖고 있었다.
"어허, 한밑천 톡톡허니 잡겄다고 자진혀서 여그 온 사람이 하로 살아보고 그래서야 쓰겄소."
관에 미움을 사 끌려오게 된 남용석이가 비웃음 어린 얼굴로 오금을 박았다.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 웬일인가 싶어 방영근은 그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불난 가심에 부채질이요, 시방?"
주만상의 고까운 대거리였다.
"불나면 어서 물 묵으시오. 어지께 보니 물 묵는 것이야 매질 안헙디다."
남용석은 상대방의 속을 더 것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주만상은 더 대거리가 없었다. 완력으로 이겨낼 만한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백인감독이 들이닥치기 전에 밖으로 나와 청소를 시작했다. 그들은 백인의 꼴을 보는 것이 싫었고, 욕먹는 것이 더러웠던 것이다.
"참, 다른 것언 다 몰라도 담배럴 못 태우는 신세가 질 드럽소."
변소에 앉아 남용석이 한 말이었다. 그는 이따가 못 피우게 될 담배를 미리 피워두려는 것처럼 열심히 담배를 빨아대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오. 몰악시런 놈덜이 담배 태우는 짬꺼정 뺏어 일 부려묵자는 것인갑는디, 참 이리 살기 험헐지는 몰랐소."
옆칸에 앉아 방영근도 담배를 깊이 피우며 대꾸했다. 변소라는 것은 막사보다 훨씬 더 허술하고 날림이었다. 겨우 비를 가릴 정도로 판자지붕을 얹었고, 칸 사이사이는 앉은키 정도의 높이로 막는 시늉을 해놓고 있었다. 물론 칸마다 문이라고는 달려 있지 않았다. 그러니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하기는 편했다.
"그나저나 어서 집으로 가야 헐 날이 와야 될 것인디......"
남용석이 한숨 섞인 입맛을 다셨다.
"맞소, 이런 디서 병나불면 끝장나요. 그놈덜이 낫게 혀줄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식당으로 가기 전에 옷단속부터 하느라고 부산스러웠다.
"이놈에 흙이 왜 이리 안 털려."
"안 털리는 것이 아니라 흙이 시뻘건 색이라 그리 표가 많이 나는 것이오."
"맞소, 땀 찬 올 사이에 그 뻘건 흙가루가 낀 것이니 털어도 소용없소."
"무신 웬수 졌다고 흙꺼정 그리 시뻘건 색이여. 지집년덜이 전부 그냥 땅에다 대고 월경피럴 싸대는 것도 아니겄고."
"흐흐흐흐...... 그 말 그럴듯하네. 땅이 확실히 피 색깔이었어."
"피 색깔이고 꽃 색깔이고 간에 이대로 갔다가 또 매타작 당허는 것 아니겄소?"
"제놈들도 이거야 어쩌겠소."
어제 땅을 파보고 사람들은 누구나 흙 색깔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흙은 온통 붉은 색이었던 것이다. 붉은색이되 진하고 탁한 자줏빛이었다. 흙은 피를 머금고 있는 듯이 붉었고, 일부러 물이라도 들인 것처럼 붉었던 것이다. 파헤쳐진 붉은 빛깔은 원시림의 진한 초록빛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고 싱싱한 핏빛으로 보였다. 그 붉은빛은 강렬한 햇빛과 함께 사람들을 더욱 덥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 생전 처음 보는 붉은 흙 위에 피만큼 진한 땀방울들을 뚝뚝 떨구어가며 원시림과 싸웠던 것이다. 절벽처럼 경사가 급하면서 억센 주름이 많이 잡힌 산줄기나, 핏빛으로 붉은 흙이나 모두 화산 폭발 때문인 것을 그들이 알 까닭이 없었다. 그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식당에 들어갔지만 백인감독은 옷에 붉은 흙먼지가 낀 것을 시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백인은 커다란 코앞에다 손부채질을 해대며 <갓댐 스팅키 애니멀>이란 소리를 연상 씨부려대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고리타분한 땀 냄새와 시큼텁텁한 쉰 냄새가 풍겨나고 있었다. 그건 몸과 옷에서 한꺼번에 나는 냄새였다. 배를 타고 오는 동안에 목욕을 한 일도 없었고 옷을 빨아 입은 일도 없었다. 그런데다가 어제 하루 종일 땀으로 맥질을 하고도 몸을 씻거나 옷을 갈아입지 않았으니 악취가 풍길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모두 일과시간 안에 책임량을 마치지 못해 땅거미를 밟고 막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식사를 마친 그들은 다같이 환호성을 질렀다. 다음날이 일요일이었던 것이다. 일요일에는 일을 나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밤마다 권총을 찬 백인감독 하나가 숙직을 하듯 일요일에도 한 사람이 일직을 하며 그들을 감시했다. 그들은 숙소에서 내려다보이는 큰길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 통제가 없었더라도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큰길을 넘어갈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그들은 백인세상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몸이 지칠 대로 지쳐 잠자는 것이 급선무였다. 점심때가 다 되도록 어느 막사에나 사람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난 그들은 다시 잠에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난 그들은 백인의 지시에 따라 빨래를 하러 갔다. 일터와는 반대편인 산줄기 쪽의 나무숲 우거진 데로 얼마를 걸어가지 물 맑은 개울이 나타났다. 빨래를 끝낸 그들은 목욕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무도 물속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채찍질의 공포에 완전히 질려 있었던 것이다. 그저 백인의 눈치만 보며 담배들을 빨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저기 살피던 백인이 바위 위로 올라서며 큰소리로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리고 옷 벗는 몸짓에다가 헤엄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때서야 그들은 기쁨의 소리를 지르거나 손뼉을 쳐대며 옷들을 벗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어린애들처럼 앞 다투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원함은 이내 가셔지고 말았다. 그들 사이에 채찍질을 당했던 사람들의 상처 입은 알몸이 띄엄띄엄 섞여 있었던 것이다. 얼굴을 맞은 사람들의 피 돋은 상처를 보아 채찍질이 얼마나 무서운 매질인지는 진작 알았었다. 그러나 채찍질을 심하게 당했던 사람들의 알몸을 보자 그 끔찍스러운 상처에 그들은 새로운 전율과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채찍을 맞은 자리마다 피멍 든 줄이 죽죽 그어져 있었다. 피멍이 잡힌 살은 부풀어 올라 있었고, 어느 부분은 살갗이 찢어져 피가 말라붙어 있기도 했다. 그 피멍 잡힌 살에 물려 있는 아픔을 사람들은 가슴 아리게 느끼고 있었다. 묵은 때를 밀어내고 있던 그들은 뜻밖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백여 명이 또 빨래를 하러 온 것인데, 그들은 작년에 하와이로 온 사람들 중의 일부였다. 그들은 서로 반가워하며 금방 어우러졌다. 그런데 두 백인은 저희들끼리 이야기하기에 바빠서 그러는지 어쩌는지 그들의 어우러짐을 간섭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반가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 조심조심했던 것이다. 그들은 몇 명씩 모여앉아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댁네덜도 그리 맞고 사셨소?"
남용석이 내놓은 첫 번째 말이었다.
"여부가 있겠소. 우리야 다 일하는 짐승인데."
얼굴이 핼쑥한 남자는 빨래를 주무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여기가 천국이라더니 왜놈들한테 완전히 속았소. 이걸 어쩌면 좋소?"
다른 남자의 감정이 솟기는 어조였다.
"천국인 줄 알고 돈벌러 온 모양이구려. 생각 바꾸시오. 여긴 생지옥이고, 우린 흰둥이 미국 놈들 종으로 팔려온 거요. 당신네들도 검둥이들 봤지요? 그 검둥이들을 흰둥이 미국 놈들이 끌어다가 종으로 부려먹었다는 거요. 그걸 노예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노비라는 말하고 같은 거요. 그런데 그 검둥이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법으로 금한 것이 몇십년 됐답디다. 우리가 바로 그 검둥이 노예나 똑같단 말요. 우리는 색깔이 다르니까 노란둥이 노예란 것이 다를 뿐이오. 알아듣겠소?"
처음 남자의 옆에 앉은 남자가 비웃음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게 말이 되나요? 나라에서 붙인 방에는 종놈이 된다는 말은 하나도 없었소."
"나라? 우스운 소리 마시오. 우리도 여기 와서야 알았으니 그런 답답한 소리 하는 건 당연한 일이오. 내 말 잘 들으시오. 우리는 모두 이 농장에 100딸라씩 빛을 지고 있소. 그 돈이 뭔가 하면, 배 타기 전에 왜놈한테 받은 20원에다 여기까지 배 타고 온 뱃삯이오. 그 100딸라를 갚지 못하고서는 종놈 신세를 면할 도리가 없게 되어 있소. 다 지장들 눌렀지요? 그 종이가 바로 그렇게 하겠다는 계약서요."
"100딸라가 얼매나 큰 돈이다요?"
남용석이 다급하게 물었고, 방영근은 꾹 입을 다물고 있었다.
"들어보시오. 여기서 한 달에 받는 돈이 15딸라요. 밥은 먹여주니까 일곱 달이면 종놈 신세 면할 것 같지요? 그건 계산상 그럴 뿐이오. 그 짚신은 십년 가고, 그 삼베옷은 백년 가는 거요? 그리고 몸은 쇳덩어리요? 술은 한 방울도 안 마시오? 땅 파 뒤집는 거친 일에 짚신은 열흘을 못 가고, 흙먼지 뒤집어쓰고 팥죽 땀 흘리다보면 삼베옷은 한 달을 넘기기가 어렵소. 병 안 나고, 술 한 방울 입에 안 댄다고 해도 신 사 신고 옷 사 입다 보면 그놈에 15딸라는 부서지지 않을 수가 없소. 종놈 신세 벗어나자면 감감한 세월이오."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들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100딸라라는 돈 속에넌 왜놈덜이 따로 챙긴 이문도 들어 있는 것 아니겄소?"
방영근이 입을 열었다.
"그놈들이 사람 팔아먹는 장사 했으니 당연하지 않겠소?"
얼굴 핼쑥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돈이 얼맨지 아시오?"
"이보시오, 분하더라도 참으시오. 왜놈들하고 미국 놈들하고 거래한 것인데 우리가 알 도리가 없는 것이고, 알았다고 한들 왜놈들한테 송사를 걸겠소 어쩌겠소. 그런 것 다 잊어버리고 종놈 신세 어서 면할 궁리나 하시오."
두 번째 남자가 빨래를 짜며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방영근의 가슴에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바다를 다시 건너가겠다고 굳게 먹었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으며 속입술을 깨물었다. 식구들의 얼굴이 밀려들었다.
"빌어먹을, 팔자 망쪼 들었네. 그런데 말이오. 우릴 날마다 개 잡듯 패는데, 언제까지 그리 맞어가면서 그 힘든 일을 하겠소. 무슨 수를 내얄 것 아니오?"
방영근의 옆에 앉은 남자의 낮은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수는 무슨 수가 있겠소."
얼굴이 핼쑥한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나라에서 붙인 방에는 법의 혜택을 받는다고 했지 매타작을 당한다는 말은 없었단 말이오. 여기 법이 사람을 무작정 패라고 돼 있진 않을 것 아니오."
"아까부터 자꾸 방을 다지는 걸 보니까 글줄을 읽을 줄 아는 모양이오만, 그러면 왜놈들한테 팔려간다는 것도 방에 씌었습디까? 나라고 방이고 다 소용없는 소리고, 법이니 뭐니 하지 말고 저놈들은 다 제놈들끼리 시켜먹자는 건데, 안 맞고 일 적게 하겠다고 나서면 무슨 법이 우리 편을 들어주겠소. 어림없는 소리는 하지도 마시오."
두 번째 남자의 냉정한 말이었다. 방영근은 그 남자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방에 쓰인 대로 되었으려면 나라에서는 왜놈들이 아예 설쳐대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관리라는 것들이 왜놈들과 한패거리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래서 팔려온 이상 어디에도 등 기댈 데는 없었다.
"저 흰둥이들은 무신 인종덜이 그리 악독헌지 모르겄습니다 이."
남용석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것들이 다 미국으로 흘러 들어온 지 얼마 안되는 독일이나 폴투칼이라는 나라 놈들이라고 합디다. 저것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돈벌 생각밖에 없는 놈들이오. 우리한테 일을 많이 시키면 그만큼 돈을 많이 받으니까 그 지랄들인 거요."
"잡새끼덜, 즈그도 고용살이험스로."
"다 차차 알겠지만 농장주인 놈들이 더 나쁘오. 그 백인 놈들은 뒤에 앉아서 돈을 걸어놓고 그놈들을 자꾸 악독하게 만들고 있단 말이오. 루나 놈들 중에서 작업 실적을 제일 많이 올린 놈을 매달 골라내 상금을 주고, 일 년 통틀어 일등을 한 놈한테는 세계일주 여행을 시켜주는 판이오. 그러니 루나 놈들이 눈에 불을 켤 수밖에 더 있소."
"루나가 뭐요?"
"아, 여기 하와이말인데, 감독이란 말이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저놈들 입에 항시 붙어 있는 그 갓댐 스팅, 거 뭐라는 소리는 무슨 말이오?"
"아, 갓댐 스팅키 애니멀 말이오? 그게 저놈들이 우릴 부르는 이름 아니오. 냄새 나는 짐승이란 뜻인데, 우리한테서 김치냄새 마늘냄새 땀 냄새가 난다고 그리 업신여겨 부르는 거요."
"개겉은 놈덜! 즈그놈덜헌티서넌 그 지독헌 노린내에 쉰내가 안 나간디."
방영근이 격하게 내뱉었다. 호루라기소리에 따라 방영근네는 먼저 빨랫감을 들고 대오를 지었다. 하와이 이민은 노동력 충당을 위해 하와이 사탕수수농장협회에서 주한미국공사 알렌을 통해 교섭하게 한 것이었다. 고종은 1902년 11월에 수민원을 설치하게 하고, 12월 22일 인천항에서 121명을 떠나 보냈다. 그러나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뜻인 수민원은 처음부터 그 직무를 유기하고 있었다. 이민자 121명 중 반 이상이 미국 선교사 존스의 <대한사람이 인간의 천국인 미국에 이민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설교에 회유된 영동교회 교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도 여러 선교사들이 각 개항장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집하러 다녔다.
6. 돈바람, 땅춤
두 남자가 야산을 오르고 있었다. 소나무와 잡목들이 섞인 숲속에서 매미가 한낮의 더위를 즐기듯 목청을 높일 대로 높이고 있었다. 말없이 산을 오르고 있는 두 남자의 겨드랑 밑이며 등판에는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야산의 경사는 완만하지만 한낮의 더위인데다가 그들은 유난히 빨리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됩니다. 힘들지 않으십니까?"
앞서 걷던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말은 일본말이었다.
"아니 괜찮소. 어서 올라갑시다."
뒤따르던 남자가 어서 올라가자는 손짓을 했다. 그 대답도 일본말이었다.
그들은 곧 야산의 정수리에 올라섰다.
"다 올라왔습니다."
앞장섰던 사내가 옆으로 비켜섰다.
"아 역시 여름은 여름이군."
뒤따라 걷던 사내가 이마의 땀을 훔쳐 뿌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살펴보시지요."
"하아 참 시원하군, 시원해!"
앞으로 한 발짝 나선 두 번째 사내가 두 팔을 허리춤에 걸치며 토해낸 감탄이었다. 그의 눈길은 앞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원하다는 감탄은 산마루에 올라서서 바람기를 느낀 탓이 아니었다.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는 푸르른 들녘이었다. 8월을 앞둔 들녘의 푸르름은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색깔이 너무 짙어 검은 기마저 감도는 그 초록의 들판은 단순한 초록색이 아니었다. 살찐 벼들의 부피감으로 하여 보드랍고 폭신하고 두툼하고도 묵직한 질감의 초록색이었다. 거기에 햇빛까지 가미되어 초록색은 싱싱하고 풋풋하고 싱그러움이 생동하고 있었다. 어느 화가가 그런 생명감 넘치는 생동적이고 약동적인 색깔을 낼 수 있을까. 그건 인위적인 색깔이 아니라 자연의 색깔이었다. 그러한 색감에다가 그것이 모두 식량이라는 생각까지 곁들이게 되면 그 초록색 들판은 누구에게나 한없이 넉넉하고 푸짐하면서도 경건하고 겸손한 마음까지 품게 했다.
"두루두루 다 살펴보십시오."
첫 번째 사내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며 아첨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과연 기가 막히오, 기가 막혀! 조선땅에 이런 기막힌 평야가 있다니!"
두 번째 사내는 이마에 손차양을 만들어 대고 몸을 느리게 돌리며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저어기 저어 끝이 지평선입니다."
"그렇지! 수평선이 아니라 지평선이지. 그 끝이 바로 바다와 연결되는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계속 걸어가면 바로 바다가 나옵니다."
"됐소! 우리가 이 일대를 전부 차지해야 하오."
두 번째 남자가 주먹으로 허공을 치며 불현듯 외쳤다. 그 목소리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참 좋겠지요."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미온적으로 하는 거요.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 하오."
두 번째 사내가 고개를 홱 돌려 첫 번째 사내를 쏘아보았다. 그 서슬에 첫 번째 사내가 멈칫 당황했다.
"예,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요시다, 내 말 잘 들으시오."
두 번째 사내는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길게 내뿜고는,
"우린 지금 일생일대의 막중한 사업 앞에 서 있소."
저 광활한 들판은 우리의 앞길을 환하게 여는 사업장이면서 우리 일본인들의 쌀 창고요. 이 일대를 손아귀에 넣기만 하면 우리 사업은 승승장구인 동시에 우리 일본의 쌀 부족도 거뜬하게 해결되는 것이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손아귀에 넣도록 하시오. 요시다, 그 대가가 뭔지 알겠소? 당신은 바로 농장의 총지배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거요"
하는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옛, 모리야마 상무님. 말씀 명심하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요시다보다는 몸집이 큰 모리야마가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저어...... 바다가, 아니 항구가 가까워서 그러는 것 아닙니까?"
요시다의 아주 조심스러운 반문이었다.
"바로 그거요, 그거!"
모리야마가 손가락으로 닥 소리를 내며 더없이 흡족하게 웃었다. 모리야마는 요시다에게 담배를 권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요시다는 황송한 몸짓을 지었다.
"어서 한 대 뽑으시오."
모리야마는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눈짓했다.
"역시 요시다 당신은 총지배인 자격이 충분하오. 이 옥구 김제 일대의 땅을 차지하게 되면 쌀 운반이 그만큼 쉬워진단 말이오. 그러면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농장들에 비해 운반비가 그만큼 절약되고, 시간 또한 절약하게 된다 그거요. 운반비만 돈이 아니오. 시간도 돈이오. 시간절약은 곧 시장선점에 직결된다 그 말이오. 일거양득, 무슨 수를 서서든 이 일대를 장악해야 하오."
모리야마의 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예, 잘 알겠습니다만...... 그러나......"
요시다는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며 무슨 말인가를 입 안에서만 굴리고 있었다.
"무슨 말이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기탄없이 하시오."
모리야마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예, 이렇게 어려운 걸음 하신 기회에 애로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애로점을 대별하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토지구입에 우리 일본인들끼리 너무 난립해 경쟁을 하고 있는 점입니다. 둘째는 조선 놈들의 콧대가 날로 높아져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명하신 상무님께서는 금방 눈치 채셨겠지만, 첫 번째 애로점 때문에 두 번째 애로점이 야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선 땅에 진출하고 있는 것은 개인 사업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아울러 일본제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견지에서 보자면 우리 일본인들끼리 과당 경쟁을 벌이는 것은 토지 값만 자꾸 올려 조선 놈들 배불리면서 일은 일대로 어렵게 만드는 국가적 손실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서로 경쟁을 피해 지역을 분할해도 조선 놈들의 콧대가 높아질 판인데, 이것 참 예사 문제가 아닙니다. 이 점을 어떻게 좀 관권을 동원해서 해결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요시다는 몸집은 작았지만 다부진 생김 그대로 말에 빈틈이 없었다.
"아 그것 참 중대한 문제를 알려줬소. 내가 이번에 일부러 나온 건 단순히 토지매입 상황만 살피려는 것이 아니었고 바로 그런 문제점들을 알아내려는 것이었소. 조선 놈들을 배불리면서 콧대를 높여주고 정작 제국의 손해를 자초하는 바보 같은 경쟁을 하다니! 그런 멍청한 짓들은 초기에 당장 뜯어고쳐야 하오. 제국의 손해가 걸려 있는 문제니까 그건 당장 해결할 수 있소."
문제해결의 열쇠가 <제국의 손해>라는 것을 포착한 모리야마의 말은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현재까지 토지를 제일 많이 확보한 사람이 누구요? 개인이나 회사나 통틀어서."
"그거야 물론 우리 회사지요."
"그러면 더 말할 것 없이 그 문제는 해결 났소. 뭐 다른 애로사항은 없소?"
"예, 다른 문제는 조선 놈들을 상대로 해서 일어나는 것들인데, 그건 그때 제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소. 요시다, 당신은 조선 토지가 일본토지에 비해 얼마나 헐값인지 잘 알고 있지요?"
"예, 대개 열 배 이상 쌉니다."
"아니오, 지역에 따라 서른 배까지 싸니까 평균을 내도 열다섯 배 이상 싼 거요. 황무지가 아니라 현재 알곡이 생산되고 있는 농지가 그렇다 그것이오. 세상에 이런 별천지가 어디에 또 있겠소. 논이란 논은 닥치는 대로 다 사들이시오. 무슨 회유책을 써도 좋으니까. 내가 이번에 섭외비용을 배로 늘리도록 하겠소."
"하! 감사합니다, 상무님."
요시다는 고개를 꺾었다.
"보시오, 요시다. 이 일대를 우리가 장악해서 일본인들 중에서 최대 규모의 농장을 세울 수 있도록 이번 기회에 공을 한번 세워보시오. 그 농장의 총지배인은 바로 당신이오!"
모리야마는 상기된 얼굴로 요시다의 눈앞에 팔을 뻗쳤다. 그의 태도는 상대방을 당장 총지배인으로 임명하는 것 같았다.
"예, 분골쇄신하겠습니다."
요시다는 땀이 진득거리는 얼굴을 또 깊이 숙였다.
"자아, 그만 내려갑시다."
모리야마는 몸을 돌려세웠다. 그는 투자이윤이 연간 2할 5부를 넘어 3할까지도 넘을 거라는 속셈을 하고 있었다. 산을 내려가면서 올라올 때와는 반대로 모리야마가 앞서고 요시다가 뒤따르고 있었다. 길안내가 필요 없게 되자 요시다는 깍듯하게 상하서열을 지키는 것이었다.
"에에 또, 조선 놈들을 상대하는 데 무슨 특별한 애로사항은 없소?"
모리야마는 가볍게 옮기는 발걸음만큼 기분 좋은 어조로 묻고 있었다.
"예, 누구나 값을 좀더 올려 받으려고 눈치보고 몸을 사리고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애로점은 없습니다."
논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런 것들을 구구하게 늘어놓았다간 업무에 대해 불평을 하는 것으로 오해받거나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게 만들까봐 요시다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대답을 해놓고 보니 아무런 애로사항이 없다면 놀고먹는다는 인상을 줄 우려도 있었다. 그거야말로 자신의 장래에 불리하게 작용할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주 고약한 문제가 있긴 합니다."
요시다는 혀까지 차며 말했다.
"고약한 문제? 그게 뭐요?"
모리야마는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고개를 뒤로 홱 돌렸던 것이다.
"예, 다름이 아니라 조선 놈들 중에 농토를 우리 일본사람에게 팔지 말라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놈들이 있습니다."
"아니, 뭐라고?"
모리야마는 목청을 높이며 갑자기 몸을 돌려세웠다. 그런 상황을 전혀 예기치 못한 채 걷고 있던 요시다는 하마터면 모리야마와 맞부딪칠 뻔해서 부리나케 뒷걸음질을 했다.
"그런 악질분자들이 많소?"
모리야마의 왜놈답지 않게 넓적한 얼굴이 고약스럽게 구겨져 있었다.
"아닙니다. 많지는 않습니다만 가끔 있습니다."
요시다는 모리야마의 너무 심한 반응에 당황하며 사실대로 말했다.
"그런 놈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소?"
"예에?......"
요시다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처리>라는 말이 언뜻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럼, 그동안 그런 놈들에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방임해 뒀단 말이오?"
모리야마의 얼굴은 더욱 심하게 구겨지고 있었다.
"아닙니다. 회유하고 제지하고 했습니다."
요시다는 얼렁뚱땅 말을 꾸며대고 있었다. 속으로는 괜한 말을 꺼냈다고 후회막심이었다.
"당신 힘으로 말이오?"
"예, 조선고용인도 동원해섭니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요!"
모리야마가 버럭 소리 질렀다. 요시다는 흠칫 놀라며 뻣뻣이 굳어졌다.
"도대체 주재소는 왜 있는 거요. 그런 놈들은 주재소에 처넣어야 해. 무슨 트집을 잡아서라도 주재소에 처박아 다시는 그따위 소릴 지껄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말이오."
모리야마는 거침없이 내쏘고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요시다는 연상 꾸벅거렸다.
"요시다, 내 말 똑똑히 들으시오."
모리야마는 목소리를 낮추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그 동안 우리 제국정부가 왜 온갖 장애를 이겨내며 오늘날 조선의 치안권까지 장악하느라고 분투해 왔는지 모르겠소? 그건 오늘날 조선 땅으로 진출하는 모든 일을 쉽고 편하게 하자는 것이었소. 그런데 당신은 그 취지도 모르고 주재소의 협조를 안 받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그는 자못 훈계조였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요시다는 그저 머리만 조아렸다. 그러나 누가 주재소를 이용할 줄 몰라서 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간혹 있어도 일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어서 주재소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늦게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그는 난처하고 옹색해져 있었다.
"앞으로는 주재소를 최대한 이용해 가면서 농토 확보에 박차를 가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바다가 가까워 갯논이 많은 게 좀 문젭니다. 갯논은 수확이 떨어지거든요."
"수확이 떨어지면 값이 그만큼 싸니까 하등 문제가 없소. 또, 간척사업도 하는 판인데 갯논을 상답으로 바꾸는 기술쯤 아무것도 아니오. 논이면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사시오."
모리야마의 단호한 명령이었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요시다도 새로운 각오로 부동자세를 취해 보였다. 모리야마가 옥구 김제 일대의 들녘을 살펴보고 떠나간 며칠 뒤부터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대감이 논얼 전부 왜놈헌티 팔아넘기겠다는 것이 참말이여?"
"글씨 말이시. 나도 그 소문얼 듣기넌 들었는디, 어찌 된 것인지 세세허게는 잘 모르겄구마."
"어허, 사람덜이 어째 그려. 요시다 쪽으로 넘어갔다는 말 내 귀로 똑똑허니 들었당게로."
"말이야 다 귀로 듣제 코로 듣는 법도 있간디? 그 말얼 누구헌티 들었느냐가 문제 아니라고? 대체 누구여, 그 말얼 헌 사람이. 요시다여, 요시다 심바람꾼이여, 고것도 아니면 이 대감댁 마름이여? 이 셋 중에 누구 한나든 돼야 그 말얼 믿어줄 것 아니겄어?"
"저 사람, 셋 중에 아무도 아닌갑네. 똥묵은 상호 허는 것 봉게로."
"아, 그 셋 중에 한 사람헌티 안 들었으면 어쩌. 방구 안 꾸는디도 냄새 나고, 밤일 안허고도 애 배는 법 봤는감? 무신 일이 저질러졌응게 그런 소문이 퍼지는 것이제."
"허기넌 그려. 이적지 아무 소리 없다가 그런 소문 퍼지는 걸 보면 무신 일이 있기넌 있었든 것일 거로구만."
"근디, 이 대감 논이 대체 마지기나 되는 것이여?"
"3천 석이라 허기도 허고 5천 석이라 허기도 허고, 대중이 없제."
"그것이야 이 대감 당자허고 마름이나 알제 작인덜이라고 어찌 다 알겄어."
"이 대감이 어찌 왜놈 손에 그 많은 논얼 팔아넘겠는고. 여그 관찰사로 일헐 적에넌 왜놈들헌티 그리 엄하게 혀놓고. 그간에 맘이 변혔는가?"
"맞어, 여그 감사로 있음서 왜놈덜언 전주성 안에는 얼씬도 못허게 엄히 다스렸제. 그려서 왜놈덜언 서문 밖에서 살문서 고상들깨나 안했드라고."
"그리 엄허게 혀서 이 대감이 인심얼 많이 얻었제."
"지기럴, 그런다고 인심 후허게 쓴 사람덜이 반편이제. 관찰사 노릇 얼매나 했다고 뒤로는 진봉면 그 좋은 상답얼 다 몰아잡고 있었는디."
"어허, 못쓰겄다 저 주딩이!"
누군가가 꾸짖었다. 오가던 말이 뚝 끊기며 그들 대여섯 명 사이에는 주위의 어둠만큼 진한 침묵이 내리덮였다. 모깃불만 매캐한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고, 연기를 피해 날아다니는 모깃소리가 침묵의 깊이를 확인시키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이 대감은 현직 학부대신인 이완용이었다. 그가 관찰사 시절에 아무리 부정하게 치부를 했다 하더라도 현직이 현직인 만큼 험담이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가까운 관청에 그 소식이 들어갔다 하면 당장 잡혀 들어가 요절이 날 판이었다. 이완용은 7년 전에 전라북도 관찰사로 전주에 부임해 왔었다. 그 1년 전에 이완용은 이범진과 함께 임금의 안위를 빙자하여 임금을 러시아공관으로 옮기게 한 아관파천을 주도했었다. 해가 바뀌어 임금이 다시 궁중으로 돌아오고, 국호를 바꾼다 어쩐다 하면서 새 정치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완용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고 지방 근무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그는 철저한 친로파로 친일파들을 제거하고 일본을 궁지에 몰아대고 있던 판이라 일본사람들을 전주성 안으로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중앙관직으로 옮겨가면서 정치상황이 달라져 러시아가 자꾸 일본에 밀리게 되었다. 그 상황을 따라 이완용도 친일파로 변해 간 것을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 사람들이 알 까닭이 없었다.
"그나저나 우리는 논얼 어째야 헐 것인고? 팔아야 혀, 말아야 혀?"
누군가가 침묵을 깨고 나섰다.
"이 대감 겉은 양반이 파는 걸 보면 우리도 팔아도 되는 것 아니겄어?"
"아닐 것인디, 그 양반이야 농사꾼이 아니고 우리는 농사꾼이란 말이여."
"그도 그렇구만. 논 팔아 돈 받아쥐면 머헐 것이여. 그 돈 솔래솔래 까묵음서 편히 살어? 그담에넌?"
"아이고 참말로 어지럽네."
그들은 거의 매일 밤 모여 앉아 같은 문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야기는 언제나 제자리걸음이었다. 요시다의 사무실 앞에는 한낮인데도 농부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벼 사이의 잡초들을 파 뒤집는 논갈이는 다 끝날 시기였지만 논의 진기를 사정없이 빨아대는 피를 뽑자면 농부들은 한가할 틈이 없는 때였다. 햇볕에 검게 그을은 그들의 얼굴은 흥분기를 띠고 있었고, 끼리끼리 낮춘 소리로 무슨 말들인가를 나누고 있었다.
"요시단지 저시단지가 더우묵어 정신이 어찌 된 것 아니여?"
"정신이 어찌 되기넌. 눈만 초롱초롱허고 말만 또록또록허등마."
"근디 어째서 갯논얼 그리 비싼 값으로 사겄다는 것이까? 요상허덜 안혀?"
"이사람, 걱정도 팔자시. 우리야 돈 많이 받고 팔아묵으면 그만이제."
"그야 그런디, 그려도 이적지 돌아다도 안 보든 갯논얼 갑작시리 비싼 값으로 사겄다고 나서니 요상시럽단게로."
"요상헐 것 하나도 없네. 요시다라는 물건이 왜놈 중에서도 똑똑헌 왜놈이여. 다 즈그 손해날 일 허겄어?"
"그야 아는디, 그려도 애만 믹이는 그놈에 갯논얼 그리 비싼 값으로 사겄당게 영 믿기덜 안혀서 허는 소리 아닌감."
"그놈이 땅에 환장혀서 그러는 것잉게 지놈이 갯논을 떠안고 떡얼 치든 죽얼 쑤든 지놈 알아서 헐 일이고, 우리야 그 애물단지 팔아없애고 돈만 챙기면 되는 것이로구만."
"그나저나 시상 살다보니 별 횡재럴 헐 날도 다 있네 이. 우리찌리야 1원 50전은 새로 1원에도 살지말지 헌 갯논얼 3원씩이나 쳐준다니. 왜놈 덕에 팔자 피는 시상얼 다 만내보기도 허네그랴."
그들은 요시다가 풀어놓은 거간꾼이나 바람잡이들에게 갯논 한 마지기에 3원씩 사들인다는 말을 분명히 듣고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사실을 믿기가 어려워 서로가 그 까닭을 알아내려고 들었다. 논의 쓸모에 비해 그 가격은 너무 많았던 것이다. 김제, 만경 들판의 논 값이 득달같이 뛰어오른 것은 일본사람들이 논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논값은 갑자기 배로 치솟아 상답이 5원 정도였고, 평답은 4원 정도였다. 그건 조선 사람들이 약삭빠르게 올려부른 것이 아니었다. 바람잡이 고용인이나 거간꾼을 앞세운 일본사람들이 먼저 그런 가격을 놓고 사람들의 마음을 흘려댔던 것이다. 논마지기나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논값이 느닷없이 배로 오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이변이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그럴싸한 말을 믿고 농사를 지어먹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농사 이외에는 별달리 생계를 꾸려갈 만한 마땅한 직업이 없는 세상에서 농사는 그야말로 천직일수밖에 없었다. 농사에서 손을 떼고 다른 생계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경우 경험이 없어 안게 되는 위험에다가, 그 어떤 직업이든 농업보다 천시 받는 것뿐이었다. 세상에서 신분이 천해지는 것을 바랄 사람이 있을 리 만무였다. 따라서 거래가 빈번하지 않는 농토 값은 언제나 변동이 없이 고인 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사람들 때문에 논 값은 출렁거리기 시작하고, 그 난데없는 바람은 김제, 만경 들판에서부터 시작되어 호남평야 전부를 휩쓸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일본사람들은 돈바람을 일으키며 논들을 마구잡이로 사들이면서도 그동안 갯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감은 감이되 똘감이 감 축에 들지 못하듯 갯논도 논은 논이되 논 축에 들 수 없었던 것이다. 논값이 뛰자 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뜨고 신명나 했지만 갯논 가진 사람들은 예외가 되어 썰렁한 가슴을 쓸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시다 쪽에서 이삼일 전부터 갯논을 3원씩에 사들인다는 새 바람을 일으키고 다녔던 것이다. 잠방이 한쪽을 무릎 위에까지 걷어 올린 농부 한 사람이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의 광대뼈 불거진 그을린 얼굴은 벙글벙글 웃고 있었다.
"어이, 참말로 3원씩 쳐주등가?"
누군가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 그려. 참말이드란 말이시."
그 농부가 신바람나게 외쳤다. 열서너 명의 농부들이 금방 그를 에워쌌다.
"어디, 돈 잠 귀경허세."
한 사람이 그 농부 앞으로 고개를 쑥 뺐다.
"귀경언 무신. 자네도 곧 받을 것인디."
그 농부는 고개를 외로 꼬았다.
"김판돌이, 누구요?"
사무실에서 다음 사람을 불렀다.
"야아, 나 여깄소."
한 사람이 허둥지둥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 먼첨 가볼라네."
그 농부가 옆사람에게 말하고는 에워싼 사람들을 헤쳤다.
"어허 자네 인자 그 애물단지 없애고 횡재혔응게 오늘 밤 자네 마누래가 태와주는 호시가 기맥힐 것이로구만."
"뗏끼놈!"
그 농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만 질렀다. 다른 농부들이 다같이 흐뭇한 얼굴로 허허대며 웃었다.
"참말이제 귀신이 곡헐 노릇이시. 어찌서 그 간기 짭짤허게 배는 쓰잘디없는 논얼 3원씩이나 내고 사는고?"
한 사람이 다 들으라는 듯 말하며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그 속이야 알 것 머 있겄소. 우리야 논 같지도 않은 논 팔아묵기만 허면 됐제. 왜놈들이 그 땅 짤라내서 즈그 나라로 갖고 가지야 못헐 참인게 거그다가 나락얼 심궈묵든 삼얼 심궈묵든 다 즈그 맘대로 아니겄소?"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듯 한 남자가 마땅찮은 기색을 드러낸 어투로 말했다.
"맞구만. 그 말 한분 씨언허시."
다른 사람이 맞장구를 쳤다.
"그려 그놈에 갯논, 혹 띠낸 것만치나 속 시언허구마."
또 다른 사람이 헛트림을 해댔다. 군산포구에 끝을 대고 있는 바닷물은 밀물 때가 되면 그 센 기운으로 강경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드센 힘으로 강물을 밀어올리는 바닷물이 금강 양쪽으로 가지치고 있는 크고 작은 개울들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힘이 약한 개울들은 바닷물에 떼밀릴 수밖에 없었다. 폭넓은 금강이 그런 시달림을 당하는 처지에 만경평야의 가운데를 순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만경강이 그 고역을 면할 도리는 없었다. 금강이 구렁이라면 만경강은 실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목숨 줄을 이어야 하는 사람들의 절박한 욕구는 그 바닷물이 거슬러 오르는 수많은 물줄기 여에까지 벋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닷물이 미치지 않는 좋은 논을 아예 가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가기 전 땅에다가 논을 일구게 되었다. 그것이 갯논이었다. 바닷물을 막아내려고 그들 나름대로 둑을 싸고 방비를 하는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바닷물은 억센 힘으로 하루 두 차례씩 거슬러 올라와서 느긋하게 쉬다가 내려가고 하는 바람에 간기가 배드는 것을 완전히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물이라는 것이 스며들지 못하는 데가 없고, 벼라는 것은 간기와는 상극이었다. 간기를 없애려고 날이 날마다 물갈이하기에 허덕거렸지만 바다와의 싸움에서 사람들은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 증거가 벼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간기를 머금은 벼들은 무슨 병이라도 앓는 것처럼 언제나 시들거리며 제대로 자라나지 못했고, 이삭이라고 나와 봐야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배곯아 시들어버린 아이의 몰골이 따로 없었고 비루먹은 말의 형상이 따로 없었다. 갯논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힘을 곱절로 바치고도 소출은 보통 논의 반도 건지기가 어려웠다. 그것도 하늘이 까탈을 부리지 않고 너그럽게 넘어갔을 경우였다.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그들은 도리없이 빈손을 털어야 했다. 가뭄을 제일 먼저 타고 홍수에 제일 먼저 무너 앉는 것이 갯논이었던 것이다. 갯논 가진 사람들은 후레자식 둔 사람이나 똑같은 신세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갯논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된 소원은 어서 갯논에서 벗어나 평답을 가져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일 리가 없었다. 갯논 서 마지기하고 평답 한 마지기하고 안 바꾼다는 말은 하루이틀 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소출만을 비교한 것이 아니라 농사짓는 힘겨움까지 합쳐서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요시다가 그들의 소원을 풀어주고 나섰던 것이다.
"그놈에 혹 띠내불고 알토란 겉은 돈을 받기는 받었는디, 자네넌 어쩔챔이여?"
한 남자가 주머니 속에 든 돈을 만지작거리며 옆사람에게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약간 불안기가 서려 있었다.
"우선 급헌 디보톱 쓰고 봐야제."
"단 논 안 사고?"
"딴 논 값이 다 올랐는디?"
"허면, 어쩔 심판이여?"
"왜놈 소작얼 부쳐묵어도 갯논지기보담 낫게 생겼응게 아무 걱정 말드라고."
상대방은 갯논을 팔아없애 아주 속 시원하다는 투였다.
"참말로 갯논지기보담 나슬랑가?"
그러나 그 남자는 미심쩍어 하며 마른 입맛을 다셨다.
"자네넌 그 콩알만헌 간에 호박뎅이만헌 의심얼 품고 사는 것이 병이여. 아, 생각혀 보소. 소작얼 삼칠제로 혀서 내준다니게 말이시, 상답언 그만두고 평답얼 얻어 부친다고 혀도 한 마지기에 쌀 양석 빼묵는 것이야 아그덜도 다 아는 일 아닌감. 거그서 우리가 칠얼 묵으면 한 석 반 가차이럴 묵는 것 아니여? 허고, 세금도 우리가 안 낸단 말이시. 그러니 갯논지기보담 얼매나 큰 이문인지 답이 다 안 나왔능가. 갯논에 목매달고 죽어라고 고상혀 봤자 한 마지기에 한 석 소출이고, 거그서 세금 뜯기고 농비 털고 나면 얼매나 얻어묵어지든가. 좌우간 거짓말 쬐깨 보태 말허자면 평답 소작 부치고 사는 것이 세배는 이문이란 말이시, 세 배."
상대방은 손가락 세 개를 꼿꼿하게 펴서 그 남자의 눈앞에다 흔들었다.
"나도 그런 셈이야 다 허는디, 딴 걱정이 있어서 그렇제."
"딴 걱정?"
"이, 왜놈덜이 참말로 소작얼 삼칠제로 내놀 것인지, 우선 논 사딜이기 급헌게 입에 발린 소린지가 걱정이고, 또 한나는 이리 니나 나나 논얼 팔아대는 판에 소작얼 꼭 평답으로 얻어부칠 수 있을란지도 걱정 아닌가?"
"원 사람 참말로 별 새 날아가는 걱정 다 허고 앉었네. 왜놈덜 즈그가 손수 농사 짓지 못헐 것이야 정헌 이친디, 우리 손 빌리자면 삼칠제로 안허고 어쩔 것이여. 혹여 반타작으로 허겄다고 말을 뒤집으면 그때야 똑겉은 반타작에 같은 조선사람 소작얼 얻제 누가 왜놈덜 소작얼 얻을라고 헐 것이여. 그리 되면 왜놈덜이 별수있겄어? 허고, 평답 얻어 부치는 것이야 그때 가서 눈치 빨르게 허면 다 될 일이시. 아무 걱정 말소."
상대방이 그 남자의 어깨를 쳤다.
"허, 자네 말대로만 됨사 무신 걱정이 있겄능가. 아먼, 그리 돼야겄제."
그 남자는 비로소 안도하는 웃음을 피워냈다. 열네댓 사람을 상대로 한바탕 논 매매계약을 치르고 난 요시다는 이마에 끈적하게 내밴 담을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그는 흡족한 마음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푸우 소리를 내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이상, 앞으로도 계속 오늘같이 논을 사들일 수 있도록 하시오. 그럼 내가 이상한테 특별 상금을 내리겠소."
요시다는 윗몸을 뒤로 젖히며 들뜬 듯 유쾌한 목소리였다.
"예, 예, 알겠습니다."
얼굴에 늙은 그늘이 자리 잡기 시작한 사십 중반의 남자가 굳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굽실거렸다. 비굴한 웃음까지 짓고 있는 그의 양쪽 눈꼬리에는 여러 줄의 주름이 잡혔다. 어딘가 글줄이나 읽은 것 같은 냄새를 풍기는 인상에 그 비굴한 웃음은 영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일본사람 밑에서 일하는 사람답게 머리를 짧게 깎고 있었다. 일본사람들은 상투라는 것을 싫어했고, 저희들이 부리는 조선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상투를 자르게 만들었다. 그 남자의 나이와 한복과 짧은 머리가 조화되지 않고 어색스럽기만 했다. 단발은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나이든 축에서는 거부당하고 있었고, 대개 나이가 스무 살 아래서부터 느리게 해나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는 요시다 바로 아래서 다른 조선고용인들을 부리고 있는 이동만이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갯논 가진 사람들을 회유하도록 하시오. 가격을 알리는 건 물론이고, 소작을 삼칠제로 한다는 걸 꼭 선전하도록 하시오. 그게 아주 효과적이니까."
"예, 예, 그러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이오, 오늘부터 새로 시작할 일이 한 가지 있소. 그게 뭔고 하니, 우리가 돈을 아주 싼 이자로 빌려준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시오. 조선 사람들은 이자를 으레껏 1할씩 받지 않소? 허나 우린 5부밖에 안 받겠소."
"예에? 그렇게 싸게요?"
이동만의 눈이 휘둥글해졌다.
"하! 역시 놀랄 만큼 싸지요?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소. 돈은 얼마든지 빌려주는데 그 대신 담보를 꼭 잡혀야 하오. 담보물은 반드시 논이오. 무슨 뜻인지 알겠소?"
요시다는 이동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예, 그 뜻 잘 알겠습니다."
이동만은 맺힌 데 없이 풀린 인상의 얼굴로 히죽 웃어 보였다.
"됐소, 아랫것들에게 지시해 곧 선전하도록 하시오."
요시다가 다부지게 명령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저어...... 정재규는 어제 제가 만나보긴 했는데 저어...... 소장님은 언제 만나보실 생각이신지요."
이동만은 말을 더듬거리며 해나갔다. 말이 좀 길어지자 그의 일본말이 서툴다는 것이 금방 표가 났다.
"아참, 그 정가는 뭐라는 거요?"
요시다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저어...... 팔 마음은 있는데 아직은 어렵다는 겁니다."
"또 아버지가 죽어야 된다는 그 소리를 하는 거요?"
요시다의 짜증스러운 말이었다.
"예, 그렇기는 한데......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그게 뭐요? 빨리빨리 말하시오."
요시다는 부채를 집어들어 방정맞을 정도로 빨리 부쳐대기 시작했다.
"저어...... 소장님이 직접 만나 술을 한잔 사시면서 저어...... 그러니까 논 한 마지기당 50전 정도 더 쳐주겠다고 하고 저어...... 우선 논을 담보잡고 돈을 빌려주겠다고 해보면 어떨까 싶은데요."
마음이 다급해진 이동만은 말을 더 심하게 더듬거렸다.
"응, 미리 한쪽 다리를 잡아두자 그건데, 그거 과히 나쁜 방법은 아니로군."
요시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고쳐앉고는,
"그자의 논이 전부 얼마라고 했소?"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상답 평답 합쳐서 천 마지기지요."
"조선 놈들 계산이야 엉터리니까 천 마지기를 다 믿을 수는 없고, 하여튼 그 논을 다 우리 손에 넣어야 하니까, 좋소, 내가 만날 테니 그자를 술집으로 끌어내기만 하시오. 그런데 그자가 술하고 게집을 좋아하나?"
"예, 아주 소문난 한량이지요."
이동만은 또 히죽 웃어 보였다. 그럴 때면 그의 맺힌 데 없이 허여멀쑥한 얼굴은 천진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약간 모자라는 것 같기도 했다.
"그거 참 잘됐소. 내가 일본 가이샤들 맛을 한번 톡톡히 보여주지."
요시다가 입을 오므라뜨렸다. 작은 입이 더 작아지고 있었다.
"히히히...... 그거 좋지요."
이동만은 약간 처진 듯한 어깨가 들먹일 정도로 히히대며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요시다의 경멸적인 눈초리가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이상!"
"예예......"
이동만은 후다닥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일본기생을 끼고 한바탕 술 마실 생각을 하고 있다가 그 생각을 황급히 털어내고 있었다.
"거, 논을 팔지 말라고 바람 넣고 있는 놈들을 찾아내는 일 말이오!"
"아 예, 아랫것들한테 단단하게 일러놨고, 저도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마로만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아시오. 그런 놈들이 누군지 곧 내 앞에 이름을 가지고 와야지."
요시다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눈은 이동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예, 곧 찾아내게 될 것이구만요. 며칠만 기다려주십시오."
이동만은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얼굴이 웃음을 지을 때보다 더욱 천진스럽기도 하고 모자라 보이기도 했다.
"이상, 당신 자리를 탐내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간다는 걸 알고 있소?"
요시다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이동만에게 일격을 가하고 있었다.
"예, 예, 소장님 마음에 들게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며, 며칠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그런 놈을 꼭 찾아내겠습니다."
느닷없이 급소를 찔린 이동만은 말을 더욱 더듬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저따위 게 양반의 자손이라고, 조선 놈들의 양반, 한심하구나! 요시다는 담배연기를 더 거칠게 내뿜으며 상대를 맘껏 비웃고 있었다.
"됐소, 이상을 믿을 테니 열심히 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 정가 일은 오래 끌 필요가 없소. 오늘 저녁에 당장 만나 결판을 내야겠소. 빨리 정가를 찾아가시오. 길이 좀 머니까 인력거를 태워가지고 오도록 하시오."
"예, 그럼 당장 데려오겠습니다."
이동만은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사무실을 나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가 마음 급하게 찾고 있는 인력거는 보이지 않았다.
"어허! 기생년덜이 대낮보톰 어디럴 싸돌아 댕기는가 원. 쯧쯧쯧쯧......"
그는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길 위아래로 고개를 바쁘게 돌렸다. 그가 기생들을 욕해대는 건 괜한 트집이 아니었다. 기생들은 밤출입 때만 인력거를 많이 타는 것이 아니었다. 밤출입 때 들인 버릇 탓인지 아니면 천대받는 신분에 대한 앙갚음의 심사에서인지 그녀들은 나들이를 나섰다하며 인력거를 타기가 예사였다. 그래서 인력거 앉을깨에 기생 년들 지린내 배고, 기생 년들 등쌀에 인력거 차지를 양반이나 일본사람들 발바닥에 물집 잡힌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어허 참, 덥기넌 원!"
그는 연상 혀를 차며 쥘부채를 짜증스럽게 펼쳤다. 그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나자 비로소 어떤 남자다움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더워할 만도 했다. 그가 걸치고 있는 두루마기는 모시가 아니라 무명이었던 것이다. 무명도 낡고 풀기가 없어서 두루마기를 걸친 그의 모습은 후줄그레했다. 그러나 손목을 까딱 하는 것으로 쥘부채를 쫙 펼치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더위를 무릅쓰면서도 무명두루마기는 걸쳐야 하고, 쥘부채 멋들어지게 펼치는 솜씨가 한마디로 그의 고상한 신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상한 신분의 격을 여지없이 손상하는 것이 짧게 깎은 머리모양새였다. 머리가 그리 체통없이 된 연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 낡은 무명두루마기였다. 여름햇볕 아래 드러난 낡은 무명두루마기의 남루함에는 가난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동만의 모습은 그 누구의 눈에나 뼈다귀만 남은 양반의 배4고픈 허세를 금방 느끼게 했다.
"이리 오너라아, 거 인력거 이리 오너라아!"
이동만은 쥘부채를 접어 손짓하며 저 멀리 나타난 인력거를 향해 점잖은 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그의 그 여유만만한 태도는 요시다 앞에서 굽실거리던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니, 저, 저......"
급하게 내뱉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이 그만 일그러지고 있었다. 골목에서 튀어나온 남자 하나가 인력거를 잡아타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저런 못된......"
그의 욕은 시작되다 말고 끊어져 버렸다. 인력거를 잡아탄 것이 일본사람인 것을 그는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한동안 서 있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인력거를 잡았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번질거렸다.
"어디로 가시는게라우?"
인력거꾼이 손잡이를 잡고 허리를 펴며 뒤에다 대고 물었다.
"만경으로 가세."
이동만의 점잖은 말이었다.
"만경이라고라?"
인력거꾼이 놀라며 재빨리 손잡이를 다시 땅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의 눈길은 인력거에 의젓하게 앉아 있는 이동만의 몰골을 살피고 있었다.
"아, 어서 가, 급헌디."
이동만은 아무 눈치도 못 채고 그저 팔을 내둘렀다.
"만경은 그냥 가는 삯만 받고는 못 가는디요. 그 먼 길 되오는 삯꺼정 쳐줘야 되겠구만이라."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꼰 인력거꾼의 말이었다. 30리가 넘는 만경까지 인력거를 타고 가는 사람은 좀체로 없었고, 왕복 인력거 비를 내기에는 이동만의 몰골은 너무 추레했던 것이다.
"아, 알어. 어서 가기나 혀!"
이동만은 또 팔을 내저었다.
"가고 오고 합친 삯이 10원인디, 미리 줘야 쓰겄는디라우."
인력거꾼이 목에 걸친 수건으로 이마를 쓱 문지르며 한 말이다.
"네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시건방구진 소리럴 허고 자빠졌냐. 인자 보니 니놈이 나럴 안전이라고 고런 시건방구진 소리럴 허고 자빠졌냐. 인자 보니 니놈이 나럴 무시보고 잔말얼 해댄 것이로구나. 인력거나 끌어묵는 상놈이 감히 양반헌테! 니놈이 당장에 끌려가 덕석말이럴 당해야 지정신이 나겄냐 어쩌겄냐. 요런 불상놈아, 여깃다 10원!"
이동만은 불호령을 놓으며 인력거꾼을 향해 무언가를 내던졌다. 백동전 서너 개가 여기저기 떨어졌다. 인력거꾼은 덜컥 겁이 나서 무릎을 꿇었다.
"아이고메, 지가 잘못혔구만이라."
"고이얀 놈, 잘잘못은 이따가 따지기로 허고, 만경 정 진사댁으로 인력거나 어서 몰아라."
이동만은 쥘부채로 앉을깨를 치며 호령했다. 그의 기세는 양반의 체통을 살리기에 아무 손색이 없었다.
"야아, 야아, 잘못혔구만이라."
인력거꾼은 허둥지둥 땅바닥에 떨어진 백동전들을 집어 들고는 인력거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는 마음 같아서는 뺑소니를 치고 싶었다. 상대방이 인력거에 올라앉아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 추레한 행색으로 보아 틀림없이 빈털터리인 줄만 알았던 것이다. 몰골이야 어찌됐든 간에 양반을 무시하고 들었으니, 덕석말이를 돌리면 당할 수밖에 없었고 물볼기를 치면 맞을 도리밖에 없는 일이었다. 종문서가 다 없어지고 백정이 갓을 쓸 정도로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양반들의 위세는 펄펄 살아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문서만 없어졌지 양반집마다 종들은 그대로 있었고,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상것들이 덕석말이를 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만경까지 가는 동안에 무슨 수를 써서든 환심을 사야 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인력거는 곧게 뻗은 들녘 길을 굴러가고 있었다. 인력거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긴 이동만은 푸르른 들녘을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들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딴생각에 젖어들고 있었다. 나도 이제 멀지 않아 내 돈으로 인력거를 타고 다닐 날이 올 것이다. 족보가 어디 밥 먹여주고, 뼈대가 어디 옷 입혀주더냐. 헐벗고 굶주리는 것도 한도가 있지, 아이들을 다 굶겨죽일 수야 없는 일이지. 아버지야 저승에서도 펄펄 뛰시겠지만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남들은 왜놈한테 붙어먹는다고 손가락질하고 욕하는지 모르지만, 입들 놀릴 테면 놀려봐라. 난 헛껍데기 양반 질 집어치우고 배부르고 실속있는 양반이 되기로 했다. 내 신세 펼 날도 멀잖았으니 어디 두고 봐라. 인력거는 어느 들마을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숨이 찬 인력거꾼은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어르신, 물 한 모금 얻어묵고 가면 안 될랑가요?"
인력거꾼이 땀을 훔치며 물었다.
"머시라고, 물?"
이동만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야아, 쩌그 앞이 샘인디요."
인력거꾼은 단내를 내뿜으며 침찌꺼기가 말라붙은 입술을 혀로 축였다.
"물이야 묵어야제."
이동만의 허락이었다.
"고맙구만이라, 어르신."
인력거꾼은 꼬박꼬박 <어르신>이었다. 그 소리는 이동만의 귀에 달게 고이고 있었다. 인력거꾼은 우물 가까운 나무그늘에다 인력거를 조심스럽게 세웠다. 그늘을 드리운 큼직한 나무가 서 있는 것은 마을이기 때문이었다. 논들만 질펀한 들녘에는 나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논에 그늘을 내리는 나무는 농사에 피해를 끼칠 뿐이었던 것이다. 농부들은 한 톨의 쌀이라도 더 건지려고 뙤약볕 속에서 일을 하다 잠시 쉴 수 있는 그늘 하나도 들녘에는 만들지 않았다.
"어르신, 목 축이시제라."
인력거꾼이 이동만 앞에 바가지를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햐, 이놈이 눈치 빠르게 나대네. 어디 어쩌는가 보자.
"목 타는디 자네가 먼첨 마시소."
이동만의 은근한 말이었다.
"아이고 어르신, 무신 말씸이신게라우."
인력거꾼은 펄쩍 뛰었다.
"그려? 허면 내가 먼첨 묵제."
이동만은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바가지를 받아들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인력거꾼에게 가졌던 노여움이 물과 함께 넘어가고 있었다. 힝! 나럴 허방에 빠쳐볼라고? 나도 눈칫밥만 묵음서 시상 살아가는 놈이여. 인력거꾼은 물을 마시고 있는 이동만을 눈흘김 하며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인력거꾼은 물을 양껏 마시고, 낯을 씻고, 수건에 물을 적시고 하느라고 좀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적당히 목을 축인 이동만은 나무그늘의 시원함에 취해 가며 아슴아슴 졸음에 젖어들고 있었다.
"어르신, 어르신."
인력거꾼이 인력거를 조심스럽게 흔들며 이동만을 깨우고 있었다. 그 뒤에는 세 여자가 주저스런 얼굴로 서 있었다.
"으? 머, 머시여?"
이동만은 잠이 담뿍 담긴 거슴츠레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어르신, 이 아줌니덜이 어르신헌티 무신 부탁이 있다고 허느만요."
인력거꾼이 옆으로 비켜서며 서둘러 말했다. 그는 선잠을 깬 상대방의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을 눈치 채고 미리 피하자는 속셈이었다.
"아줌니덜이? 이, 무신 부탁이여?"
이동만은 눈을 부비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러는데 하품이 나와 그의 입이 있는 대로 다 벌어졌다. 그 바람에 담뱃진 검게 낀 이빨 뒷면까지 다 드러났다. 여자 하나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킥 웃었다.
"아, 무신 부탁이냐고 묻덜 안혀. 나 갈 길이 바쁜 몸이여."
이동만은 잠이 지워진 눈으로 여자들을 내려다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저어, 부탁이라는 것언 다른 것이 아니고라, 우리 아그덜이 돌아감스로 학질얼 앓아대는디요, 오래됐는디도 영 낫덜 않는구만이라. 우리 새끼덜 불쌍허니 생각허셔서 지니신 금계랍얼 잠 노놔주십사 허는 청이구만요."
두 손을 앞으로 모아잡은 여자가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간곡하게 말했다.
"금계랍얼?"
이동만의 눈이 약간 찡그려지며 세 여자를 새삼스럽게 살펴보았다.
"양, 쬐깨썩만 주시면 어린것덜이 고상얼 면허겄구만이라우."
다른 여자가 주저하는 몸짓으로 말했다.
"당신네덜 논 가진 것 있능가?"
이동만의 말이었다. 그 갑작스러운 물음에 세 여자는 의아스런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허, 농사짓는 논이 몇 마지기썩이나 있냐 그 말이여."
이동만이 무시하는 투로 내쏘았다.
"저어, 다 소작 부치고 사는디요."
부끄러운 듯한 여자가 얼굴이 붉어지며 대답했다.
"나가 지닌 금계랍언 아무나 퍼주는 물건이 아니여. 황토현꺼정 나갈 것 없이 군산에도 약국이 생겼응게 사다가 믹이드라고."
이동만이 내던진 말이었다. 그가 말하는 황토현이란 5년 전에 그곳에 일본사람이 처음으로 문을 연 양약국 일신의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세 여자는 어이없는 얼굴로 이동만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허고, 약 사묵을 돈이 없으면 아그덜 모기 뜯기지 않게 혀얄 것 아니겄어. 길 잡어라, 나 바쁘다!"
이동만은 쥘부채로 인력거를 치며 고개를 꼬아 돌려버렸다. 곰방대를 물고 한가롭게 눈을 팔고 있던 인력거꾼은 화들짝 놀라며 인력거의 끌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지체없이 인력거를 끌기 시작했다.
"하이고 참, 그 위세 한분 당당허다."
한 여자가 눈총을 쏘며 내뱉었다.
"이, 왜놈헌티 붙어묵는 것이 큰 벼슬이시. 참말로 꼴사납네."
"대대로 나라 벼슬 못해묵은 집구석잉게 그 드러운 벼슬이라도 혀야겄제."
"오살헐 놈이 금계랍얼 안 줬으면 그만이제 아그덜 모기 뜯기지 말라는 주딩이넌 어째 놀리고 지랄이여. 어떤 년이 모기 뜯기고 잡아 뜯기는 연도 있간디. 그놈에 아가리럴 쫙 찢어놨으면 속이 시언허겄다."
"하 금메 누가 군산에 약국 생긴 것 몰르고, 돈있음사 누가 약국 찾어갈지 몰를 것이여. 육시헐 놈이 사람 가심에 천불을 놓네그랴."
"지도 주렁주렁 새끼덜 키우는 놈이 맘보 한나 드럽게 쓰네 이."
"생긴 것은 꼭 염생이 새끼로 생겨갖고."
"그 생김에 또 주색잡기넌 둘지 가라면 서러워허게 능허다등마."
"에라이 드런 놈, 가다가 인력거나 논바닥에 찰팍 엎어져 부러라."
세 여자는 들녘길 저쪽으로 멀어져 가고 있는 인력거를 향해 감정이 풀릴 때까지 온갖 험담을 다쏘아대고 있었다. 학질에 특효약인 키니네를 이동만이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널리 퍼진 소문이었다. 요시다는 키니네만이 아니라 회충약도 지니게 했다. 그 약은 논 가진 사람들을 회유하는 데 쓰는 선심용이었다. 일본사람들이 밀려들면서 퍼지기 시작한 그 양약들은 무척이나 효과가 좋아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7. 일진회 지부
8월이 중순을 넘기면서 호남평야의 더위는 표정을 바꾸었다. 한낮의 햇볕이 따갑기는 했지만 논배미나 봇도랑의 물에는 거품이 잡히지 않았다. 7월의 더위 속에서 논배미의 물에 거품이 보글보글 일게 만들고, 봇도랑에 붕어가 배를 뒤집고 떠오르게 했던 위세는 이제 완연히 한풀꺾여 있었다. 호남평야의 가마솥더위는 유별났다. 불볕은 땡땡 내리쬐고, 잎줄기가 너무 부드러워 갓난아기의 입김에도 흔들릴 정도인 버드나무 잎도 까딱하지 않도록 바람은 불지 않고, 불볕에 익을 대로 익은 땅은 열기를 되뿜어내고, 따끈따끈한 불볕과 후끈후끈한 지열은 뒤헝클어져 마침내 숨이 막히도록 푹푹 쪄대는 더위를 만들어냈다. 그 더위 속에서 한나절 논일을 하고 나면 누구나 얼굴이 부어오르고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러면서도 모든 농부들이 그 고통을 달게 견뎌내는 것은 그 가마솥더위 속에서 벼들이 쑥쑥 자라나고, 알을 배고 하는 것을 나날이 확인해 가는 까닭이었다. 호남평야의 숨막히는 무더위는 가을에 알곡을 약속하는 것이었으므로 농부들은 그 더위를 <가마솥더위>라 이름 붙여 부르며 묵묵히 논일을 해나가는 것이었다.
거품이 일지 않는 논배미의 물은 이제 벼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벼들은 자랄 대로 다 자라 낱알들을 영글게 할 시기에 이르러 있었다. 농부들은 논물을 빼내면서 봇둑 여기저기에 새보기 움막을 지었고, 벼들은 한낮의 따가운 햇볕 속에 스미기 시작하는 바람결에 여유롭게 몸을 씻으며 알곡을 익혀가고 있었다.
8월 중순을 넘기면서 더위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하늘색도 변했고, 물 빛깔도 달라졌으며, 아침저녁으로 선들바람이 일었고, 메뚜기나 민물새우도 알을 배기 시작했다. 그런 계절의 변화에 맞추기라도 하듯 나라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
"마침내 우리가 고대하던 일이 성사됐소. 이제야말로 때가 온 것이오."
영사관 서기 쓰지무라는 주먹을 부르쥐며 눈을 빛냈다.
"그렇습니다. 고문정치의 시작으로 조선을 지배하는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하야가와는 쓰지무라의 비위를 맞추듯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소, 조선의 통치권을 명실공히 장악하게 된 이번 협정체결이야말로 경사 중에 경사요. 그러나 우리는 그저 기뻐하고 있을 때가 아니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금부터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쓰지무라는 힘이 뻗치는 눈길로 하야가와를 응시했다.
"옛, 명심하고 있습니다."
하야가와가 턱을 바짝 끌어당기며 힘있게 대꾸했다.
"이번 협정은 중대한 것이지만, 우리의 원대한 목표로 볼 때에 주춧돌을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하오. 겨우 주춧돌을 놓았으니 집을 완성하자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남아 있는지 알겠지요? 그 일들을 아무 사고 없이 차근차근 해나가기 위해서 우린 더욱 총력을 다해야 한다 그 말이오."
"예, 있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쓰지무라는 담배 한 개비를 뽑아 왼쪽 엄지손톱에 톡톡 치며 뜸을 들이다가는,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이 한 가지가 있소"
하며 아래로 내리고 있던 눈길을 들었다.
"예, 무슨 일입니까?"
하야가와는 무슨 일이든 명령만 내리라는 듯 민첩하게 반응했다.
"에에 또,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의 반대세력만 색출할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우리의 지지세력을 광범위하게 조직하려는 계획이오. 어떻소?"
"아, 그것 참 좋은 계획입니다. 아주 시기적절한 계획인 것 같습니다."
하야가와는 일본사람 특유의 몸짓으로 상체를 깝신거렸다.
"그 계획에 따라 우리 군산에서도 시급히 조직을 짜서 중앙에 맞추어 지부를 결성시켜야 되겠소.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그 모임의 회장을 누굴 시키느냐 하는 점이오. 누구 마땅한 사람 없소?"
"아 예에... 어느 정도의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 건지요..."
너무 갑작스러운 말 앞에서 하야가와는 당황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우리를 적극 지지하는 자여야 하오. 둘째는 이 지역에서 이름이 좀 알려져 있어야 하오. 셋째는 행동에 적극성이 있어야 되겠소. 넷째는 학식이 좀 들었으면 좋겠소."
"예에... 그런 사람이..."
하야가와는 마음만 급했지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아 몸이 달고 있었다.
"자아, 차나 한잔 더 들면서 여유 있게 생각해 봅시다. 일이 중대하고 급할수록 마음은 여유 있게!"
쓰지무라는 엷은 웃음을 지으며 찻주전자를 집어들었다. 하야가와는 황급히 제 찻잔을 받쳐들었다.
"어떤 전문가한테 들으니까 조선 땅에는 차도 잘된다던데..."
쓰지무라는 차를 따르며 그 맛이라도 음미하듯 나직하게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하야가와는 빈틈없이 상대방의 말에 관심을 드러내 보였다.
"남쪽 해안지방에서 나는 게 맛이 아주 일품이랍디다."
"예, 기후가 알맞는 모양이군요."
"아마 그런 것 같소. 허나 남쪽 해안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고 전라남도 해남지방에서 난다는 거요."
"그렇군요. 이 전라도 땅은 참 묘합니다. 평야가 넓어 쌀도 많이 나고, 맛좋은 차까지 나니 말입니다."
하야가와는 말을 하면서도 <해남지방의 차>를 머릿속에 새겨 넣고 있었다. 쓰지무라는 유달리 차 마시기를 즐겼던 것이다.
"잘 봤소. 이 전라도 땅은 조선 땅 중에서 보물 중에 보물이오. 이곳 평야에 비하면 북쪽의 평야는 있으나마나요. 기후 차이로 북쪽에선 쌀이 거의 안 난단 말이오. 우리가 이 보물의 땅에 근무하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오. 따라서 책임도 그만큼 막중한 것 아니겠소?"
쓰지무라는 능란하게 말꼬리를 돌려 아까의 본론에다가 이어 붙이고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하야가와도 이야기가 본론으로 돌아왔음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쓰지무라의 말에 대꾸를 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자신과 선을 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 네 가지 조건에 부합되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찾아내느라고 의식의 작동은 끊일 새가 없었다.
"자아, 그럼 그 일에 누가 마땅한 인물인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쓰지무라는 앉음새를 고치며 담배를 빼들었다. 하야가와도 어깨를 추스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예에 또, 누구 한 사람만을 생각하지 말고 서로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두세 사람씩 내놓고 그 중에서 제일 마땅한 사람을 골라내도록 합시다."
쓰지무라의 제안이었다.
"예, 그렇게 하시지요."
"어디 먼저 말해 보시오."
쓰지무라는 하야가와를 힐끗 쳐다보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예, 제가 생각한 것은 두 사람인데... 하나는 문수환이라고 재산을 꽤 가진 부자고, 그 다음은 백종두라고 현직 이방을 지내고 있는 잡니다."
하야가와는 숨죽인 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하고는 쓰지무라의 눈치를 살폈다.
"하! 역시 하야가와상은 사람을 보는 투시력이 있소. 백종두를 골라내다니 말이오. 나도 그자를 꼽고 있었는데 딱 일치가 됐소. 우리 의견이 일치됐으니 다른 자들은 더 따져볼 필요도 없소. 백종두, 그래 그자가 아주 적임자요."
쓰지무라는 밝은 웃음까지 지으며 만족스러워했다. 하야가와는 비로소 큰 짐을 벗은 안도감으로 어깨의 힘을 뺐다.
"그런데 백종두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문제? 그게 뭐요?"
"현직 관리가 그런 일에 나서도 되는지가 좀..."
"아 그건 별로 염려할 게 없소. 만약 형식상 곤란하다면 관리직을 내놓게 하면 되는 거요."
"그러려고 할는지..."
"됐소. 그런 건 다 나한테 맡기시오. 그리고 그자를 내일 당장 만나도록 합시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쓰지무라의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제가 연락을 할까요?"
"아니오. 그자가 하야가와상의 휘하조직이 아닌 이상 조금이라도 의심받을 일은 할 필요가 없소. 연락과 접촉은 내가 다 알아서 하겠소."
"예, 알겠습니다."
"자아, 담배."
두 사람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번 협정은 우리 일본제국을 위해 중차대한 것이오. 우리도 가일층 임무에 충실하도록 합시다."
쓰지무라는 엄숙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 기쁨에 넘치는 고문정치의 시작이란 제1차 한일 협약이었다.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재빨리 군대를 한양에 진입시킨 다음 무력의 위협 아래 한일의정서를 조인하여 조선 안에 군사기지를 확보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그것이 2월의 일이었다. 그 뒤로 러시아군을 계속 궁지로 몰아넣으며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게 되자 그들은 그 기세를 조선정부로 확대시켰다.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초빙하라는 강요였다. 결국 정부는 그 강압에 굴복하여 협정서 체결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1904년 8월 22일이었다. 그 협정에 따라 재정고문에 일본인 메가다가, 외교고문에는 미국인 스티븐스가 앉게 되었다.
그것은 곧 나라의 재산권을 넘겨준 것이었고,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문 배치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본은 계속해서 경무고문, 군부고문, 궁내부고문, 학정참여관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그 네 부문의 고문은 원래 협정에서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그 엄연한 위약조차 막아내지 못했다. 결국 나라의 모든 힘을 빼앗겨버린 것이었고, 반도땅은 꼼짝없이 일본의 실질적인 식민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서쪽하늘은 아직 붉게 물들어 있는데 시가지에는 어스름이 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바다로 빠진 해가 오래도록 서쪽하늘에 그 잔영을 남기고 있어서 군산의 밤은 언제나 들녘 쪽에서 밀려오는 듯싶었다. 해가 떨어지고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면 한낮의 더위는 자취가 없어지고 이내 소슬한 기운이 감돌았다. 인력거들의 움직임도 그 무렵부터 한결 경쾌해지는 것 같았다.
인력거 한 대가 물안개 번지듯 하는 어스름 속을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그 위에 거만스럽게 앉아 있는 것은 백종두였다. 그는 별로 보잘것없는 수염을 자꾸 쓰다듬고 있었다. 수염이 탐스러워지기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무슨 깊은 생각을 할 때 그가 곧잘 하는 버릇이었다. 그가 거만해 보이는 것은 몸을 유별나게 뒤로 젖혀서가 아니라 수염을 쓰다듬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좀 만나도록 합시다."
쓰지무라의 말은 그것뿐이었다. 물론 서너 마디가 더 오가기는 했다. 그러나 그 말들은 그저 별 뜻 없이 주고받게 되는 인사치레일 뿐이었다.
"무슨 일이시오?"
"아, 만나서 얘기합시다."
이렇게 되었으니 쓰지무라가 한 말은 <만나자>는 한마디뿐이었던 것이다. 그 뒤로 몇 시간 동안 아무리 머리를 짜보아도 왜 갑자기 만나자는 것인지 짚이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해본 결과 간추려진 것은 한 가지였다. 결코 나쁜 일은 아닐 거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연걸려 자신이 부탁했었던 것을 쓰지무라가 들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쓰지무라가 무슨 부탁인가를 자신에게 할 거라는 예측이었다.
그런 추리에 도달한 근거는 두 가지였다. 쓰지무라가 먼저 연락을 해온 것과, 만나자는 장소가 일본기생집이었던 것이다. 그 콧대 세우기 좋아하는 쓰지무라가 먼저 만나자고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슨 다급한 부탁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부탁일까?...
생각은 여기서 막혀 한 치도 더 뚫리지 않았다. 수염뿌리가 얼얼하도록 수염을 쓰다듬어도 막혀버린 생각은 제자리에서 맴돌이질을 할 뿐이었다.
"동매관 다 왔구만이라우."
인력거꾼의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이! 그려..."
백종두는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로 지은 말끔한 집들이 어스름에 잠기고 있었다.
"어험, 흠, 흠..."
백종두는 동매관으로 들어서기 전에 두루마기를 털고 갓을 바로잡으며 헛기침을 네댓 번이나 계속했다. 그건 습관적인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쓰지무라를 대하는 데 그 전과는 달리 어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백종두는 동매관 마당으로 들어섰다.
"아이 어서 오세요, 백상."
그가 마당 중간쯤에 이르렀는데 벌써 기모노 차림에 화장 짙은 기생이 쪼르륵 달려 나오고 있었다.
"쓰지무라 상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옆걸음을 치며 걷는 기생이 생글생글 눈웃음을 굴리며 말했다. 입을 꾹 다문 백종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뭐라고? 쓰지무라가 먼저 와서 기다려! 역시 내 생각이 틀림없구나. 어디 만나보자. 백종두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또 헛기침을 해댔다. 백종두는 구석방으로 안내되었다.
"아 어서 오시오, 백 상. 기다리고 있었소."
담배를 피우고 있던 쓰지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백종두를 맞이했다.
"늦어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백종두는 일본말로 인사하며, 쓰지무라가 자기를 일어나서 맞는 것을 지나치지 않았다. 그것도 전에 없던 행동이었던 것이다.
"아니오. 자아 앉읍시다."
쓰지무라는 연상 웃는 얼굴로 자리를 권했다. 백종두는 점점 더 긴장을 느끼면서도 쓰지무라의 그런 달라진 행동에 어떤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요새도 일어학원에는 나가십니까?"
쓰지무라가 담배를 권하며 물었다.
"나가기는 합니다만 말이 늘지를 않습니다."
백종두는 담배를 뽑으며 비식 웃었다.
"아닙니다, 백상은 이제 학원에 안 다녀도 되겠습니다. 워낙 열성으로 하니까 그렇겠지만, 일본말 하는 게 아주 일취월장입니다. 요오코, 안 그런가?"
쓰지무라는 문 옆에 무릎 꿇어앉은 기생에게 눈길을 돌렸다.
"네에,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 일본사람하고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기생은 눈치 빠르게 대꾸하며 백종두에게 눈웃음을 쳐 보였다.
"허허허허... 아직 멀었어요."
백종두는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그 언행은 겸손일 뿐 그는 그들의 말을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사실 그대로라고 믿고 싶어 했다. 그동안 기를 쓰고 매달린 효과가 커서 자신이 생각해도 일본말이 놀랄 만큼 늘었던 것이다. 듣는 것이야 진즉에 해결된 것이고 말하는 것도 거의 막히는 데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아무한테나 자랑하고 싶고, 확인받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요오코, 부를 때까지 기다리게."
쓰지무라가 기생에게 일렀다.
기생은 민첩하게 방을 나갔다. 백종두는 숨을 들이쉬며 침을 삼켰다.
"백상, 이번에 세상이 크게 달라진 걸 알고 있지요?"
쓰지무라는 백종두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문초빙 협정서 체결 말인가요?"
"그렇소." 쓰지무라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그걸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물었다.
"글쎄요... 저 위에서 한 일인데 내가 감히..."
백종두는 말을 조심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쓰지무라가 자신의 마음을 떠보려고 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로서는 그런 정도의 함정을 건너뛰고 피하는 데는 얼마든지 자신이 있었다. 그는 다음 말을 기다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백종두의 말을 듣고 나서 쓰지무라는 자신의 물음이 너무 막연하고 정확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내 말이 좀 모호했던 것 같소. 다시 말해서 말이오, 그 고문정치에 따라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백상은 잘 알고 있지요?"
백종두에게 눈길을 박고 있는 쓰지무라의 얼굴에는 묘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그 말과 웃음이 가슴을 예리하게 찌르는 것을 백종두는 느꼈다. 그는 반사적으로 직감했다.
"예에... 그 고문이라는게, 그게 자문이라는 것과 같은 뜻이고, 그러니까 서로 협조하는 정도가 아닌가요..."
백종두는 고문제도에 대해서 머리를 빨리 돌려 다시 생각해 보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는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병신 같은 녀석, 제법 눈치 빠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줄 알았더니 네 놈도 별 수가 없구나. 아무리 지방 하급관리라고는 하지만 그따위로 멍청해서야 원. 네놈이 그 정도니 다른 것들이야 더 말해 뭘해. 좋게 말해 순진하고, 나쁘게 말해 전부 바보 허깨비들이야. 관리라는 것들이 저 모양으로 돼먹었으니 우리가 조선 땅을 먹어치우는 것이야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
쓰지무라의 그 묘한 웃음은 조소로 바뀌고 있었다.
"백 상, 백 상의 생각은 틀렸소!"
한동안 말이 없던 쓰지무라가 불쑥 내던진 말이었다.
"예? 무슨 소리요?"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가지고 있던 백종두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글쎄요, 백상의 생각이 틀렸다면 그 다음은 백상이 알아서 생각할 문제지 내가 무슨 말을 더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쓰지무라는 능란하게 꼬리를 사렸다.
"말 나온 김에 다 하시오. 우리 처지에 단둘이 있는데 못할 말이 없잖소."
백종두는 긴장이 너무 심해져 감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글쎄요, 백상이 그만한 걸 생각하지 못할 사람이 아닌데요."
쓰지무라는 빙긋 웃으며 차를 홀짝 마셨다.
"어허 이것 참. 어디 봅시다, 내 생각이 틀렸으면, 그럼 고문정치라는 것이 협조가 아니라는 말인데, 협조가 아니면, 그렇다면 일본사람들이 직접 정치를 한다는 뜻이오?"
생각을 정리하느라고 백종두는 말을 많이 더듬었다.
"그렇소!"
쓰지무라는 회심의 웃음을 지었다. 의도대로 백종두의 입에서 그 말을 끌어냈던 것이다.
"아니 그럼, 세상이 뒤집힌 것 아니오!"
눈을 휘둥글하게 뜬 백종두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뭘 그리 놀라고 그러시오. 눈치빠른 백상은 이런 날이 올 것을 미리 다 알고 있지 않았소?"
쓰지무라는 백종두를 쓰다듬듯 하는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2단계로 백종두를 몰기 시작했다. 백종두는 정신이 멍했다. 고문초빙 협정이라는 것이 그렇게 엄청난 일인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정치가 일본놈 마음대로 되면 내 신세는 어찌 되는 것인가...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가 순간적으로 휩싸인 불안이었다. 그동안 사또가 수없이 바뀌고, 동학난리를 겪고 한 것과는 생판 다른 세상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요... 그게, 글쎄..."
백종두는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엉덩이를 들먹거렸다가 손을 맞잡아 부비다가 하고 있었다. 쓰지무라는 그 불안에 찬 모습을 재미있는 구경거리 보듯 주시하고 있었다.
"백상, 아무 염려 마시오.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도 백상의 처지는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오. 그 점이 쓰지무라가 보증하겠소."
쓰지무라는 백종두의 심장을 정통으로 찌르고 들었다.
"예에? 그게 정말입니까!"
배고픈 붕어가 미끼를 덥석 물어버리듯 백종두는 너무 쉽게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소." 쓰지무라는 손가락 마디마디를 꺾어 똑똑 소리를 내가며 한참 뜸을 들이더니, "그래서 내가 백상한테 중요한 일을 한 가지 맡길까 하는 참이오."
그는 새로운 눈길로 백종두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데요."
백종두는 성급하게 말을 뱉어놓고 금방 후회했다.
응, 마침내 본론이 나오는구나.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너희들 이익을 위한 일일시 분명하니 내가 몸 달아 할 것이 하나도 없지. 그럼, 내가 급하게 굴 것이 없고말고.
그는 인력거를 타고 오면서 먹었던 마음을 회복하려고 턱을 끌어당기고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예, 그건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중앙에서부터 조선인 중심의 거국적인 단체를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 계획에 따라 여기서도 지부를 결성해야 하는데 내 마음에 그 회장으로 백상이 적임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선인 중심의 거국적인 단체? 그런데, 뒤에서 영사관이 움직인다? 옳아, 이것이 예삿것이 아니로구나!
일단 마음의 고삐를 잡은 백종두의 머리는 빠른 회전을 하며 과녁을 정확하게 맞히고 있었다.
"글쎄요, 나같은 사람이 뭘 알아야 말이죠."
친일단체 구성이라는 윤곽을 파악한 백종두는 손익계산을 따지기 위한 시간벌기 작전을 시도하고 있었다.
"아, 무슨 겸손의 말씀을, 내가 보기엔 백상을 당할 적임자가 없습니다."
쓰지무라는 백종두가 겸손해하는 줄만 알고 선뜻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백종두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나머지 너무 성급하게 속을 털어놓고 있었다. 이제 백종두의 수에 쓰지무라가 말려들고 있었다.
"아니 과분한 말씀입니다. 여러모로 나보다 자격이 넘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지요."
일단 시간여유를 갖기로 작정한데다가 쓰지무라의 속마음까지 알게 된 백종두는 느긋한 마음으로 이제 제 값을 올리는 엉덩이빼기 작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다 보면 사람은 많아도 적임자를 고르기는 쉽지 않은 법입니다. 그만 겸손하시고 회장직을 맡아주시지요."
쓰지무라는 앞에 구덩이가 파였는지 덫이 놓였는지 모르고 자꾸 발을 내딛고 있었다.
"아닙니다. 겸손해서가 아니고 난 사실 무슨 단체 같은 것을 해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부적격하지요."
쓰지무라는 그만 신경질이 솟겼다. 말 한마디면 감지덕지할 줄 알았는데 판이 영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으레 먹을 밥이면서도 세 번까지는 사양해야 한다는 이자들의 그 속 뻔한 예절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고역을 참아냈던 것인데 정작 상대방의 태도는 그것과도 상관이 없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는 신경질을 꾹 누르며 담배를 빼물었다. 성냥을 그어대는 손끝에 신경질이 묻어났다.
저것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이렇게 시간을 끌며 부탁하는 꼴이 돼서는 안 되지? 아주 노골적으로 밀어대 버려?
그는 오늘 회장을 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단체결성의 구체안까지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이 조급했던 것이다. 백종두는 백종두대로 계산을 따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표 나지 않게 세상이 뒤집어진 판에 영사관 세력에 업혀? 그거야 더 말할 것 없는 득세지. 그런데 남 먼저 친일단체 회장으로 깃대를 들어? 그러면 그게 어떻게 되나? 세상을 겉만 보고 속을 못 보는 사람들은 욕을 바가지로 퍼대겠지? 헌데, 욕하고 대세하고... 그야 언제나 대세를 따르는 게 신상에 유익하고 편한 법이지. 그렇지만 이 문제가 한두 가지 복잡한 것이 아니니 원...
그는 속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자아 백상, 길게 이러고저러고 할 게 없소. 우린 일이 바쁘고, 우리가 물색해 둔 회장 후보자는 여럿이오. 어떻게 할 건지 앗싸리하게 대답하시오."
태도가 돌변한 쓰지무라는 <앗싸리>에다 특히 힘을 주어 말했다. 그는 사무라이 종족답게 닛본또를 내려치듯 백종두의 정수리를 여지없이 갈긴 것이었다. 그 느닷없는 정면공격에 백종두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백종두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궁지에 몰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위협하는 것은 후보자가 여럿이라는 말이었다. 그건 협박이고 허풍일 수 있었다. 그 말에 몰리지 말고 요령 좋게 대응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예, 일이 바쁘고, 후보자고 여럿이겠지요. 허나 그 단체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또 회장이 할 일은 무엇인지 등등 설명이나 하고 회장을 맡으라고 하는 게 순서일 것이고, 나로서도 회장을 맡으면 현직은 어찌 되는 것이며, 또 장래는 어찌 될 것인지 등등을 생각해야 할 여유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중하고 급한 일일수록 신중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본책에도 그리 적혀 있더구만요. 어찌 생각하십니까?"
백종두는 정면으로 박치고 든 쓰지무라를 여유만만하게 업어치기 하고 있었다. 숨을 잔뜩 들이켠 상태처럼 긴장하고 있던 쓰지무라는 그만 어깨가 처져 내리도록 맥이 빠지고 말았다. 상대방의 말은 틀리지도 흠잡을 데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상대방의 요구대로 말해 줄 필요를 느꼈다.
"맞는 말이오. 그러나 신중이 지나쳐 실기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말도 적혀 있다는 걸 잊지 마시오. 그럼, 백상이 원하는 대로 간략하게 말하겠소. 그 단체가 하는 일은 우리 일본이 반도땅에 진출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오. 그리고, 회장은 우리와 동격의 유대를 맺고, 모든 편의와 혜택을 제공하고, 그 장래는 전적으로 우리가 보장하오. 이만하면 됐소?"
쓰지무라는 두 팔을 뒤로 받쳐 윗몸을 젖혔다. 굶주린 짐승 앞에 독이든 고깃덩이를 던져놓고 기다리는 포획자의 여유고 거만이었다. 백종두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쓰지무라가 한 말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것이었다.
동격의 유대, 모든 편의와 혜택, 장래의 전적인 보장,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고문정치가 시작된 바에야 조선관직은 더 빛바랠 것이고, 그리 되면 자기 쪽에서 매달리게 될 판인데 오히려 그런 상상할 수도 없는 조건이 앞에 놓인 것이었다. 그 조건 앞에서는 시간벌기 작전이고 값 올리기고 다 필요 없는 것이었다. 그 이상을 요구할래도 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종두는 동요할 대로 해버린 감정 속에서도 그들이 하필이면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았다. 그는 영리하게도 그 사실을 붙들고 군침 질질 흐르는 먹이를 허겁지겁 무는 추태를 부리지 않고 체면을 차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아, 진작에 그리 다 말씀하셨더라면 이야기가 길어질 필요가 없었겠군요. 말씀하신 게 사실이라면 회장을 기꺼이 맡도록 하겠습니다."
백종두는 쓰지무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남달리 반들거리는 그의 눈이 더욱 반들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아, 잘 됐소 백 상!"
쓰지무라는 뒤로 받치고 있던 두 팔을 당겨 기운차게 손바닥을 맞때리며,
"지금부터 기분 좋게 축하주를 마십시다"
하면서 그는 정말 기분 좋은 듯 환하게 웃었다.
"예, 한잔해야지요."
백종두도 맘 놓고 웃었다. 쓰지무라가 손뼉을 쳐 기생을 불렀다.
"여기 음식도 특찬으로, 술도 특주로 올려라."
쓰지무라가 일렀다.
"기생도 특기로 올리고."
백종두의 맞장구였다.
"으하하하... 그렇지, 그렇지."
"허허허허..."
마주보고 웃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뒤섞이며 방안을 울리고 있었다.
"곧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기생이 날개 접는 나비같이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자아, 담배."
쓰지무라가 권했고, 백종두는 담배를 뽑았다.
"불 여깄습니다."
백종두는 재빨리 성냥을 그어 쓰지무라 앞으로 내밀었다. 쓰지무라는 친근한 눈인사를 보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저어,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술상이 들어오기 전에 그 단체에 대한 전체 계획을 대충 설명하겠습니다."
쓰지무라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 백종두도 얼결에 앉음새를 고쳤다.
"이번에 조직하게 될 단체는 그 규모가 전국적이며, 회원은 다다익선으로 무제한이고, 자금지원은 각 영사관을 통해 하게 됩니다. 사업은 아까 말한 대로 일본의 진출을 선봉에서 대대적으로 지지하고 환영해서 그것이 대중들에게 파급되게 하는 겁니다. 현재 중앙에서 책정된 일차적인 자금이 5만원입니다. 그 자금을 토대로 조직을 짜고 사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필요한 자금은 지방 영사관에서 지원하게 됩니다. 대충 이런데 더 궁금한 것 없습니까?"
"아 예, 회원들은 회장이 모집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회장도 많은 회원을 모으기 위해 노력을 하는 건 좋은 일입니다만, 그 기본 인원은 주재소며 기타 조직을 이용해서 확보하게될 겁니다."
"단체의 명칭은 뭔가요?"
"중앙에서 정해져 내려올 겁니다."
"술상 준비됐습니다아."
방문 밖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지금까지 한 얘기는 일체 비밀입니다. 이제부턴 술자립니다."
쓰지무라가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백종두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안주들이 옮겨 놓이는 동안에 백종두는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5만원이란 자금을 계산하고 있었다. 상답이 5원이니까 5만원이면 논이 1만 마지기였다. 그리고 논 한 마지기에 두 석을 잡으면 모두 2만 석이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일차적인 자금이라고 했다. 그는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백종두는 심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앞은 흐릿한 채 바싹 마른입 안은 껄껄하고 머리는 욱신욱신 아팠다. 그리고 자신의 숨결에서 맡아지는 술 냄새가 진득거리는 게 너무 지독스러웠다. 이런, 술을 마셔도 너무 많이 마셨구나. 그는 눈을 부비며 숙취 다음에 으레 따르는 늦은 후회를 씹었다.
어어, 여기가 어딘고?
그는 눈을 껌벅였다. 방안이 영 낯설었던 것이다.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옆에서 웬 여자가 자고 있었다. 그 여자가 어젯밤 옆에 앉았던 기생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때서야 그는 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속이 느글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는 방문 가까이에 놓인 주전자를 향해 기어갔다. 기어가면서 생각해 보았지만 어떻게 해서 여기서 자게 되었는지 영 기억이 없었다. 쓰지무라와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낭패로군. 내가 너무 마음을 풀어버렸던 게로군.
그는 또 다른 후회와 함께 무슨 실수나 저지르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는 주전자 째로 물을 들이켰다.
"어머, 깨셨어요?"
기생이 일어나 앉으며 옷을 여몄다.
"내가 왜 여기서 잤지? 기억이 하나도 없는데."
백종두는 주전자를 입에서 떼며 다급하게 물었다.
"여기서 꼭 주무시겠다고 했잖아요."
기생이 살짝 눈을 흘겼다.
"쓰지무라 상은 어찌 됐고?"
백종두는 요 위로 다시 기어오르며 물었다.
"가셨지요."
"뭐라고, 여기서 안 자고?"
백종두의 얼굴은 난감하게 변하더니,
"내가 뭐 실수한 건 없나?"
하며 짭짭 입맛을 다셨다.
"네, 아무 실수도 안하셨어요."
기생은 잔잔하게 웃음 지으며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내가 여기서 자고 간다니까 쓰지무라 상이 뭐라고 안했어?"
"네, 그냥 잘 모시라고만 하셨어요."
기생은 앳된 얼굴을 숙이며 말했다. 백종두는 그때서야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앞에 앉은 속옷 바람의 기생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생긴 동그스름한 얼굴이 가슴을 꿈틀하게 만들었다.
"그래 나를 잘 모셨느냐?"
백종두는 기생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전부터 마음먹어 왔던 밥상이 차려져 있는데 그냥 물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불안이 가신 그의 가슴에서는 색정이 거침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이 참..."
나 어린 기생은 맑은 눈동자를 굴려 눈흘김을 하며 몸을 꼬았다. 그 눈짓이며 몸놀림에서 교태가 지르르 흘렀다. 그의 새벽음기는 불길로 변하면서 숙취가 남긴 머리아픔이나 속거북함을 금방 태워버렸다.
"이리 와, 어서 이리 와..."
목소리만큼 다급하게 그의 손이 기생의 속옷을 벗기고 있었다. 기생은 쓰지무라의 명령을 따르듯 옷을 쉽게 벗기도록 몸짓을 짓고 있었다. 탄력 좋고 티 없이 깨끔한 여자의 알몸이 드러났다. 여자는 부끄러움으로 몸을 조그맣게 오그렸다. 무릎을 세워 팔로 감싼 그 사이로 젖가슴이 살며시 드러났다. 젖가슴의 싱싱한 탄력을 느끼자 그의 욕정은 거센 불길로 변했다. 그는 속옷을 벗어던지고 작게 웅크린 여자의 몸을 끌어안았다. 나 어린 몸이라서 그런지 살내음이 짙고도 상큼했다. 그는 물건에 기운이 뻗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뜨거운 손길에 여자의 몸은 요 위로 허물어졌다.
"왜년덜 그것언 전부가 밑으로 처졌다고 헙디다."
여자의 몸을 덮치는 순간 그의 머리를 친 소리였다. 그리고 옥향이의 알몸이 눈앞을 가렸다.
그는 멈칫했다. 참말로 요것이 그럴랑가? 불쑥 솟긴 의문이었다. 그리고 백 뭐하고 하면 3년 재수 없고, 밑 뭐하고 하면 5년 재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는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볼 것도 없이 그의 물건도 풀 죽어 들었다. 그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제가 맘에 안 드세요?"
어느새 눈을 빠끔하게 뜬 여자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야, 술이 덜 깨서 그래."
그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몸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조선말로 내뱉었다.
"허, 옥향이 그년이 산 귀신이시!"
백종두는 하루 종일 께적지근하고 찜찜한 마음으로 보냈다. 싱싱한 꽃을 보고 덤벼들었다가 꺾지 못하고 물러선 것은 최초의 일이었던 덧이다. 꽃줄기에 가시가 돋친 것도 아니었다. 이불깃으로 몸을 감싸며 짓던 기생의 그 야릇한 웃음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정신없이 벗어 던졌던 옷을 꿰입으려다가 왈칵 느낀 것은 모독감이고, 열패감이었다. 남자로서의 체면이 박살나 버리는 그 감정은 견딜 수가 없었다. 여자를 다루는 솜씨는 어느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 솜씨라는 건 입으로, 돈으로, 권세로 여자를 홀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따위 것들은 다 젖혀두고 잠자리에서 정력으로 여자를 제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상대해 온 여자치고 그 누구든 꼴딱 숨넘어가게 만들지 못한 여자라고는 없었다. 성감이 좀 예민한 여자라면 연거푸 서너 차례씩 그 숨 자지러지는 고개로 발딱발딱 넘겨주는 위력을 과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일본기생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창피하고 또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씻겨 내려가지 않는 그 감정의 찌끼기는 떨떠름하기도 하고 텁텁하기도 한 것이 영 지랄 같았던 것이다.
그런 기분에 합해지는 또 하나의 무거운 생각이 있었다. 그 결정은 과연 잘한 것인가 하는 심적인 부담이었다. 정치가 그 꼴이 되면 나라가 망하는 건데 내가 그래서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어젯밤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였다. 밤 생각과 낮 생각의 차이였다. 밤에는 느끼지 못했던 나라라는 것이 낮이 되자 눈앞으로 다가들었던 것이다. 자신은 나라의 녹을 먹고 살아온 명색이 관리였다. 그것이 관리로서 할 만한 일인가. 내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닌가. 그런데 한양의 대감이란 사람들은 뭔가. 상감은 또 무얼 하는가. 고문 초빙은 다 그 사람들이 결정한 것 아닌가. 그 높으신 양반들이 그런 결정을 내렸는데 나같은 말직이 그렇게 나선다고 무슨 죄가 되겠는가. 말직이야 하늘같은 상감이요 대감들이 결정한 대로 따라가는 것 아닌가. 그래도... 너무 서둘러 앞으로 나서는 것 아닌가. 아니지, 기왕 나설 판이면 먼저 숟가락을 들어야 한 술이라도 더 뜨고, 먼저 말뚝을 박아야 한편이라도 더 넓게 터를 잡지. 그런데 상감이고 대감들은 어쩌자고 그런 막가는 결정을 내린 것일까. 일본놈들의 힘이 그렇게도 센 것인가. 아라사가 일본에게 지고 있는 판이기는 하지만, 상감과 대신들은 앞으로 어쩔 셈인가. 이제는 청국이 아닌 일본을 섬겨 신하 노릇을 할 것인가...
그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엎었다 뒤집었다 하며 지루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쓰지무라한테 연락이 왔다. 저녁때 만나자는 것이었다. 모든 걸 비밀에 부치기로 했기 때문에 이쪽에서도 용건을 묻지 않았고 그쪽에서도 아무 내색이 없었다.
"백 상, 백 상이 회장직을 맡아준 기념으로 내가 선물을 하나 드려야겠소. 자아, 이것 받으시오. 거류지 내의 일급지 땅문서요."
쓰지무라가 봉투를 불쑥 내밀었다.
"아니!..."
백종두는 너무 놀라 입을 헤벌린 채 상대방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목을 맸던 소원이 너무나 뜻밖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공매 낙찰도 아니었고 송두리째 공짜로 굴러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 어서 받으시오."
쓰지무라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봉투를 더 내밀었다.
"가, 감사합니다. 이 과분한 선물을... 천천히 주시잖고..."
봉투를 받는 그의 손도, 인사를 하는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어허허허... 기왕 드릴 선물 하루라도 빠른 게 좋지 않습니까. 앞으로 잘 좀 해주시오."
"아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 팔로 봉투를 끌어안은 백종두는 갓 쓴 머리를 깊이 숙였다. 하루 종일 묵지근했던 그의 마음은 가뿐하고 말끔해지고 있었다.
"백상, 회장을 하자면 그 갓부터 벗어던져야 합니다."
쓰지무라의 느릿한 목소리였다.
"예에? 갓을?"
눈이 휘둥그레진 백종두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아하, 뭘 그리 놀라시오. 당신네 상감에서부터 모든 대신들이 전부 상투를 잘라버린 지가 벌써 언젠데 정작 아랫사람들은 지금까지 상투를 틀고 있다니. 그건 엄연히 단발령이라는 국법을 어기고 있는 범법행위란 말이오. 내 말이 틀렸소?"
쓰지무라는 백종두를 노려보듯 쳐다보며 입이 약간 비틀리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글쎄요, 그게..."
백종두는 대꾸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어물거리기만 했다.
"뭐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이번 기회에 상투를 잘라서 상감 앞에 충신이 되시오. 어허허허..."
쓰지무라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백종두는 봉투를 매만지며 억지웃음을 지어내고 있었다.
"칠문아, 여러 말 헐 것 없다. 어여 가서 니 이름 올리고 오니라."
장덕풍이 아들의 어깨를 밀었다.
"근디, 앞길언 앞길이고, 당장 돈벌이가 대륙회사만 헐랑게라?"
장칠문이 사탕을 우물거리며 아버지를 옆눈길로 힐끗 보았다.
"아이고, 일본사람덜이 맨입으로 무신 일 시키는 것 봤냐. 그 경우 바른 사람덜이. 허고, 만일에 손에 잽히는 돈이 당장에는 좀 작다고 허드라도 그것이 무신 걱정이냐. 앞으로 살날이 구만리 겉은 나이에 앞길 훤헌 쪽으로 붙어야제. 안 그려?"
장덕풍의 말은 꽤나 정겨웁고 은근했다.
"나럴 높은 자리 한나 시켜주는 것언 틀림없는 게라?"
장칠문은 아버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야 이 애비만 믿어."
장덕풍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것만 확실허면 이름얼 올리겄소."
"이, 나가는 질로 그리혀라. 허고 말이여, 니 나이또래 아그덜도 얼롱얼롱 모아디래라. 일이 급허다."
장덕풍은 새로운 말을 내놓았다.
"딴놈덜 존 일 시켜주게라?"
장칠문의 목소리가 꼬이며 눈째가 고약해졌다.
"아이고 이눔아, 무신 앞 맥힌 소리여. 몸띵이 없고 꽁지 없는 대가리 봤냐. 니가 웃자리에 앉자면 아랫것덜이 있어얄 것 아니여. 일본말로 거머시냐, 거,거, 안 있냐..."
장덕풍은 답답해서 자기 머리를 툭툭 쳤다.
"꼬붕 말이다여?"
"이 맞어, 꼬붕! 그렁게 말이여, 니가 꼬붕얼 삼어야 쓴게 아그덜얼 모아디려도 니보담 나이 많고 완력이 씨거나 머리 잘 돌아가는 놈언 꼭 피해야 혀."
장덕풍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런 것언 말 안혀도 미리 다 아요."
장칠문은 픽 코웃음을 쳐버렸다.
"온냐, 온냐, 니 똑똑타. 어여 가서 이름 딱 올리거라."
장덕풍이 아들의 등을 떠밀었고, 장칠문은 마지못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속에서는 새로운 희망이 부풀고 있었다. 여태까지 부림만 당해 온 신세를 면하고 <꼬붕>들을 거느리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울렁거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선창이나 나무전, 인력거창 같은 데는 새로운 바람으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니 거그 청년횐가 머신가 들었어?"
"아니, 아직 생각 중인디."
"야, 느그덜 거그 들면 무신 이문이 있는지 아냐?"
"금메, 돈도 주고, 주재소허고 가차이도 지내고, 하여튼지 이문이 많다는 것이여."
"거그서 허는 일이 먼디?"
"새로 일어나기 시작허는 군산얼 위해 일헌다고도 허고 말이 많은디 아직은 잘 모르겄어."
"딴 젊은 놈덜이 다 들어가고 있다는디 우리 이러고 있다가 자리 다 뺏기는 것 아니겄어?"
"그려, 들라면 얼렁 들어야제."
"일본말얼 헐지 알면 더 쳐준담시로?"
농사일하고는 거리가 멀게 옷들을 말쑥하게 빼입은 젊은것들이 서너 네댓씩 모여 나누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은 선창가를 배돌며 촌사람들을 왈기거나 물건을 빼돌려 술값을 장만하고, 나무전을 어슬렁거리며 텃세를 뜯어내 노름 돈을 만들고, 인력거창을 맴돌며 주먹질을 해대 계집질할 돈을 챙기며 건들건들 살아가는 패거리였다. 그렇다고 그들은 완력으로 생계를 삼는 본격적인 주먹패도 못되었다. 그들은 거의가 집안은 세끼밥 먹고 살 만하면서 신분으로는 양반이 못되고 공부도 하기 싫은 아전급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9월이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영사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널찍한 빈터에서 무슨 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커다란 차일이 쳐진 앞으로는 60여명 젊은이들이 도열해 있었고 그 양쪽 옆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있었다. 그런데 도열한 젊은이들은 단출한 차림에다가 똑같이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밀짚모자 아래로 드러난 짧은 머리칼은 그들이 모두 단발을 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다음은 회장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차일 밑에서 나와 단상 앞에 선 것은 백종두였다. 그의 상투는 간 곳이 없었다.
그건 다름 아닌 일진회 군산지부 발단식이었다.
8. 차라리 죽자
해가 기우는가 싶으면 소슬바람이 일었다. 가을이 달음박질쳐 오고 있었다. 감골 댁은 지친 걸음으로 사립문을 들어섰다. 머릿수건이며 삼베적삼에 먼지가 부옇게 앉아 있었다. 하루 종일 품팔이 밭일을 한 흔적이었다. 집 안에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스산한 바람결에 나뭇잎 몇 개가 토방아래 구르고 있는 집 안은 썰렁하기만 했다. 좁장한 마루를 가운데 두고 방 둘에 부엌 하나가 딸린 그 흔한 초가삼간은 짙은 회색빛 지붕을 인채 외롭게 가을추위를 타고 있었다.
"대근아아--"
감골 댁은 머릿수건을 벗으며 막내아들을 소리 내어 불렀다. 네 아이들 중 그 누구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감골 댁은 집이 빈 것을 알면서도 막내아들을 불렀던 것이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런데 큰아들 영근이가 집을 떠난 다음부터는 그 소리가 좀더 커지고 진하게 변하게 되었다.
"요것덜이 다 어디로 갔는고."
감골 댁은 중얼거리며 머릿수건으로 옷을 털기 시작했다. 먼지가 해거름의 햇살 속으로 뽀얗게 피어올랐다. 감골 댁은 먼지 털던 손짓을 문득 멈추었다. 그녀의 눈길은 한곳에 박혀 있었다.
"어쩌그나, 가을이 코앞으로 닥쳤네!"
한숨과 함께 감골 댁의 어깨가 처져 내렸다. 그녀는 누렇게 고스러지고 있는 토담 위의 호박잎을 보고 있었다. 절기가 바뀌고 있음은 진작부터 느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치기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감골 댁이 가슴 서늘하게 느낀 것은 가을이 아니었다. 가을 뒤에 숨어 있는 겨울이었다. 봄이 그렇듯 가을도 오는 듯 가버리는 계절이었다. 건 듯 스쳐가는 짧은 가을 다음에는 긴 겨울이 닥쳐오는 것이다. 겨울은 있는 사람들에게나 살 만한 계절이었지 없는 사람들에게는 몸 춥고 마음 아린 시절일 뿐이었다. 감골 댁은 겨우살이 걱정으로 가슴이 내려앉고 있었다.
"영근아..."
감골 댁의 입에서 큰아들의 이름이 신음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들이 떠나버린 다음에 새로 생긴 버릇이었다. 그리울 때도 외로울 때도 답답할 때도 괴로울 때도 감골 댁은 무시로 큰아들을 불렀다. 땅뙈기라고는 아예 없는 신세였지만 그래도 큰아들이 집을 지키고 있을 때는 겨울양식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었다. 큰아들과 둘이서 가을 품을 팔아대 겨울 날 준비는 어찌어찌 갖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없고 보니 혼자 힘으로는 다섯 입에 나날이 풀칠하기에도 쫓길 지경이었다. 큰딸 보름이가 품팔이를 나선다고는 했지만 장정 힘에 비하면 새다리 놀리기이니 품삯도 하품 나오는 것이었다. 품삯도 품삯이고 다 큰 처녀가 품팔이를 나서는 것도 못할 일이라서 앞을 막았지만 큰딸은 한사코 듣지 않았다. 감골 댁은 먼지 내려앉은 툇마루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먼지를 훔칠 마음도 없었고 기운도 없었다.
"감골 댁, 와 있소?"
머리 희끗희끗한 여자노인네가 사립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어여 오게라, 봉산 댁."
감골 댁이 인사했다. 그러나 그녀는 몸을 일으키는 시늉도 하지 않았고, 얼굴도 반기는 기색이라고는 없이 심드렁할 뿐이었다.
"아그덜언 다 어디 갔소?"
봉산 댁이 살피듯이 집 안을 둘러보았다.
"다 어디럴 싸돌아댕기는지..."
감골 댁은 마지못한 듯 혼잣말처럼 하며 자리를 권하지도 않았다.
"이, 마침 잘 되았소."
봉산 댁은 상대방의 표나는 냉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색을 하며 마루에 엉덩이를 걸쳤다.
"감골 댁, 오늘 아조 존 소식얼 갖고 왔소."
봉산 댁은 목을 쑥 늘여 과장되게 침을 삼키며 감골 댁 옆으로 다가앉았다.
"들으나마나 헌 소리, 또 그 이얘기면 꺼내지도 마시게라."
감골 댁은 팔장을 끼며 몸을 사렸다.
"아이고, 말 들어보도 않고어찌 이려. 요것이 나 혼자 좋자고 허는 일도 아니겄고, 이 늙은 것이 왔다리 갔다리 허는 수고럴 생각히서라도 말 듣기 전에 그리허는 것이 아니시."
마침내 봉산 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말도 반말로 놓고 있었다.
"나이 대접 안 헐라는 것이 아니고 그 일언 애당초 뜻이 없다고 안혔소."
감골 댁은 팔짱을 풀며 봉산 댁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이고 아이고, 물 다 엎질러진다."
"그렁게 살살 걸어, 살살."
두 계집아이가 구김살없이 떠들며 사립을 들어서다가 멈칫했다.
"어민, 언제 왔능가!"
물이 반나마 담긴 두레박을 든 작은 계집아이가 반갑게 소리치며 종종 걸음을 쳤다. 감골 댁의 셋째 딸 수국이었다.
"피이!"
물동이를 인 둘째딸 정분이가 봉산 댁을 알아보고 내뱉은 소리였다. 그리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부엌 쪽으로 발길을 돌려버렸다. 땅바닥을 팍팍 차지르는 발걸음에 토라진 성미가 묻어나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방울들이 동이를 넘쳐나고 있었다.
"하이고, 언제 봐도 딸내미덜 중에서 인물언 니가 질이다. 셋째 딸 값 허니라고 그러냐 어쩌냐. ㅁ년 지대로 묵어 처녀로 피면 꽃이 따로 있겄냐. 그 눈에, 그 입에, 꽃이라면 무슨 꽃이 되것다냐. 그려 니 이름 그대로 복시럽고 향내 진헌 수국 아니겄냐. 느그 아부지가 어찌 그리 이름얼 딱 맞게 지었을끄나."
봉산 댁이 수국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수국이는 부끄럼을 타며 배시시 웃었고, 감골 댁은 그 말이 좋게만 들리지 않아 막내딸을 슬그머니 끌어당겼다.
"그러니 나가 헐라는 말언..."
"아이고 어찌 이러요."
감골 댁은 봉산 댁의 말을 자르며 질색을 했다. 감골 댁은 빠르게 부엌으로을 눈짓하고 막내딸을 손가락질했다.
"으쩌까? 헐 말언 혀야는디."
봉산 댁은 비위장 두껍게 그냥 돌아갈 눈치가 아니었다.
"안 되겄소. 얼렁 방으로 듭시다."
결국 감골 댁이 밀려 지게문을 열었다.
"참말로, 찔기기도 허요 이."
짚자리가 깔린 방바닥에 앉으며 감골 댁이 원망조였다. 짚자리는 그나마 낡아 엮음매듭이 여기저기 터지고, 크고 작은 보푸라기들이 일어나 있었다.
"하먼, 중신애비 찔긴 것이야 삼줄이 못 당허제."
봉산 댁이 능청맞게 말을 받았다.
"중신도 헐 중신이 따로 있제."
감골 댁은 혀를 차며 눈을 흘겼다.
"아니, 처녀 총각 중신만 중신이간디. 홀애비 중신도 스고, 과부 중신도 스고 혀야 시상이 어울러지고 설클어지고 허는 것이제. 중신애비가 더운밥 찬밥 가래묵어 갖고야 시상이 지대로 되겄소?"
"아이고, 존 일 헌다고, 말 잠 살살 허랑게라."
감골 댁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알겄소. 근디 말이요, 김 참봉이 맘을 크게 썼소. 논얼 닷 마지기로 올렸단 말이요, 닷 마지기."
목소리를 낮춘 봉산 댁은 감골 댁 옆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펴 보였다. 다섯 마지기! 감골 댁은 가슴이 꿈틀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큰딸 보름이의 얼굴이 쑥 밀려들었다. 감골 댁은 속입술을 깨물었다. 시퍼런 처녀를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닷 마지기 아니라 열 마지기라도 안 되겄소."
감골 댁은 냉정하게 잘랐다. 그건 상대방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무신 소리여, 시방? 논이 닷 마지기나 되는디도?"
봉산 댁은 감골 댁의 반응에 놀라는 한편으로 어이없어 했다.
"더 여러 말 허덜 마시게라. 처녀럴 첩질로 내놓을 수야 없응게."
"허 참, 영판 배불른 흥정이시. 아 처년께 논얼 닷 마지기나 내놓겄다는 것이제 과분디도 그러겄어. 안직도 배가 덜 고푼 모냥이로구마."
봉산 댁이 것지르고 나왔다.
"더 곯아도 별 수 없소."
감골 댁은 고개를 틀어 돌렸다.
"꼭 그리 될랑가 몰라? 감골 댁은 나날이 늙어가제, 새끼덜언 주렁주렁 딸렸제, 기운 쓰는 장정언 없제. 그런 형편에 논 닷 마지기가 뉘 집 개이름이여? 셋이나 되는 딸에 눈 딱 감고 한나 내놓고 남치기 식구 배불리 살면 좀 좋을 것이여. 그까진 딸자석 한나가 머시가 아깝다고 그래싸. 허고, 보름이도 해넘기면 열야닯, 꽃으로 치자면 시들기 시작허는 꽃잉게 논 닷 마지기넌 어림없는 소리여."
"아, 시끄럽소. 우리 아덜 돈벌어 오면 다 풀리요."
감골 댁은 힘주어 말했다.
"하이고, 헛꿈 꾸덜 말드라고 잉. 한분 떠난 사람언 영영 못 돌아온다는 소문 들어보도 못허고 사는감?"
봉산 댁이 힝 코방귀를 뀌었다.
"아니, 고것이 무신 소리랑게라?"
감골 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엉덩이를 들었다가 그대로 방아를 찧었다.
"무신 소리기넌, 말 그대로제."
봉산 댁이 감골 댁을 의아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런 소리 누구헌티 들었소?"
감골 댁은 봉산 댁을 다잡듯이 물었다. 그 눈빛이 변해 있었다.
"누구헌티 듣기는 누구헌티 들어. 소문이란 것이 본시 대가리있고 꼬랑댕이있고 그런 것이간디? 요상허시, 마누래가 딴 배 맞추면 그 집 서방만 그 소문 몰르드라고 감골 댁이 똑 그 짝 났네그랴. 귀 막고 사는 것도 아닌 것인디 어째 그 소문이 감골 댁 귀만 피해 댕겠을꾜?"
봉산 댁은 감골 댁을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능청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시상에나... 그 무신 얄궂은 소문인고..."
중얼거림과 함께 감골 댁의 입에서는 한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감골 댁은 몸이 흐물흐물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 꿈 생각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거의 밤마다 꾸는 꿈이었다. 아들은 바다 저쪽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아들은 생시와는 달리 헤엄을 치지 못하고 물속으로 잠겼다 솟았다 하며 팔을 휘저어대고 있었다. 이쪽에서 사생결단 아들에게로 헤엄을 쳐갔다. 잔잔하던 바닷물이 철렁거리기 시작했다. 더 기를 쓰며 헤엄을 쳤다. 물결은 더욱 거칠어졌다. 파도에 따라 아들의 모습이 지워졌다가 나타났다가 하고 있었다. 아들을 불러대며 물결을 헤쳤다. 그러나 파도는 더 거칠게 솟구치고, 끝내는 아들도 자신도 시퍼런 바닷물에 파묻히고 말고는 했다.
그 흉악한 꿈을 깨고 나면 가슴은 벌떡벌떡 뛰고 있었다. 꿈은 생시하고는 반대라니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 꿈 다음에는 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세상 그 어디에다 대고 물은들 아들의 소식을 알려줄 데는 없었다. 그 회사를 찾아가 볼까도 생각해 봤었다. 그러나 살갑게 대해 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 진저리쳐지는 꿈에 시달리면서도 한 가닥 붙들고 있었던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 아들이 돌아오리라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집 떠난 자석 일이야 돈벌어 갖고 오면 왔는갑다 헐 일이고, 지끔이야 당장 눈앞에 붙은 불보톰 끄는 것이 이치에 맞덜 안컸소. 그냥 기분으로만 뻗질르지 말고 차근허니 생각혀 봇시오. 딸 한나 치워서 좋고, 논 닷 마지기 생겨서 좋고, 이보담 더 존 일이 요새 시상에 어디가 또 있겄소. 논 닷 마지기면 남은 네 입이 배 안 곯고 묵고 살고, 두 딸이야 소원대로 총각헌티 시집보낼 수 있덜 않으요. 심청이야 즈그 아부지 한나럴 보고 죽을 길로 나섰는디, 보름이야 네 목심얼 위허는 일이고, 또 죽을 길로 가는 것도 아니단 말이오. 그저 넘 앞살이라는 것이 쬐깨 마음에 씨이기는 혀도, 어쩌겄소. 땡전 한닢 없어 시집보낼 처지도 못되고, 또 어찌혀서 총각헌티 시집간다고 허드라도 쫄쫄이 굶어감서 사느니 부잣집에 들어가서 평생 배불리 묵고 사는 것이 낫덜 안컸냔 말이오."
품팔이에서 돌아온 보름이는 부엌 쪽 벽에 몸을 반쯤 숨기고 서서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다 듣고 있었다. 그녀의 곱상한 얼굴은 수심이 차서 핼쑥했고, 두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몰르겄소, 몰라. 다 듣기 싫은 게 인자 가랑게라, 가!"
감골 댁의 눈물 머금은 소리였다. 어머니의 그 목소리에 보름이는 속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목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보름이는 주체할 수 없는 서러움 속에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오빠를 불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딴 세상 사람이었고 오빠는 그 어딘지 모를 곳에 너무 멀리 있었다.
"이, 날 어둡기 전에 나도 가야 쓰겄소. 김 참봉 어른이 보름이럴 이쁘게 봐서 큰맘 쓰고 논 닷 마지기럴 내놓는지나 아시오. 이쁜 처녀가 한둘인 것도 아니고, 김 참봉 눈이 딴 디로 팔렸다 허는 날에넌 애걸복걸해도 다 소양 없는 일잉게, 보름이허고 의논지게 이얘기혀서 김 참봉 맘 변허기 전에 얼렁 맘 정해야 헐 것이오. 나 가보겄소."
보름이는 재빨리 몸을 돌려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 늙은이 간가?"
짚불을 때고 있던 정분이가 언니를 올려다보았다. 보름이는 살강 쪽으로 돌아서며 고개만 끄덕였다. 동생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저 잡놈에 늙은이, 헐 일도 어진간히 없는갑네. 저런 뻔뻔헌 할망구럴 지리산 호랭이넌 칵 안 물어가고 멀허고 있는겨. 염병헐 놈에 늙은이!"
정분이는 부지깽이로 부엌바닥을 내리쳤다.
"아이고, 듣겄다."
보름이가 발을 굴렀다. 밥물이 솥전으로 굴러 내리며 피시식거리기 시작했다. 젖빛의 밥물을 받느라고 끼니때마다 수선을 피우곤 하던 정분이는 밥물이 줄줄이 흘러내리는데도 그것을 받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투덜거리고 있었다. 밥물은 살결이 고와지는 데 좋다고 해서 정분이는 숟가락을 대고 애써서 받은 밥물을 얼굴에 찍어 바르고 했던 것이다. 정분이는 밥물에만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상 투덜거리며 부지깽이 끝으로 부엌바닥에 봉곳봉곳 솟은 흙군살을 마구 찔러대 부서뜨리고 있었다. 흙이 날이 날마다 발에 자근자근 밟혀 다져지면서 결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겨난 흙군살들은 그 도드라진 모습이 갓 솟기기 시작하는 젖망울처럼 예쁜 생김이었다. 그것이 많이 솟으면 솟을수록 부자로 살게 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정분이는 그 말을 믿어 언제나 크고 작은 흙군살들을 밟기 즐거워했고, 어느 때는 어서어서 더 많이 생기라고 소리내어 말하기도 했었다. 보름이는 눈물 흔적을 지우며 밥상을 서둘러 차리고 있었다. 점심을 건너뛰는 생활에서 배가 고프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 막내 대근이는 언제나 배가 고파 게걸거렸다. 조금 전에도 마당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부엌문부터 먼저 열어보았던 것이다. 밥을 하나 안하나 살피는 것이었다.
다섯 식구가 밥상에 둘러앉았다. 보리밥에 풋김치와 간장 한 종지가 전부였다. 그러나 아무도 반찬투정을 하지 않고 숟가락들을 들었다. 밥을 제일 먼저 떠 넣은 것은 역시 막내 대근이었다. 그 다음이 수국이었다. 보름이는 밥상을 들여오면서부터 어머니를 바로 보지 못했다. 마치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동생 정분이에게 그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단단히 일렀던 것이다. 감골 댁은 감골 댁대로 큰딸 보름이의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시집갈 나이가 다 차도록 배곯키고 헐벗겨 키웠을 뿐인데 제짝을 찾아주지 못하고 그런 흉한 말이 오가고 있으니 가슴에 피가 맺힐 일이었다. 밥이라는 것을 제 입으로 씹어 넘기게 되면서부터 이제까지 정말로 쌀 한 말을 제대로 먹였을지 말지 한데 작년 봄에 꽃을 보게 해주었을 때 그 얼마나 고맙고 대견했던가. 동백꽃잎처럼 붉던 핏방울을 보고 사무쳐 오던 설움은 어찌 그리 진하고 매웠던가. 기어이 눈물을 떨구며 저 세상의 남편에게 했던 약속이 실한 짝을 제대로 찾아주겠노라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큰아들이 옆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돈 2원만 탈 없이 받아냈더라도 맘 놓고 중매쟁이를 놓았을 것을... 감골 댁은 또 부질없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을 털어내며 밥숟가락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숟가락을 놀리지 않는 것도 보름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 싶었던 것이다. 감골 댁은 밥을 씹었다. 그러나 이빨에 씹히는 건 모래였고 눈물이었다.
"누나, 나 물."
대근이가 숟가락을 놓으며 보름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눈길은 어머니의 밥그릇을 힐끔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여, 나가 떠올라네."
보름이보다 빠르게 정분이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히! 작은누나가 나 말얼 다 들어주네."
대근이가 정분이를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정분이가 알밤 먹이는 시늉을 하며 눈을 흘겼다.
"아나 대근아, 더 묵어라."
감골 댁이 밥을 떠서 막내의 그릇에 옮겼다. 그런데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숟가락에 가득가득 퍼서 세 번이나 덜어주었다. 그렇게 되니 대근이의 그릇에는 밥이 반나마 차올랐다. 대근이의 입이 그만 헤벌어졌다. 눈길을 떨군 보름이는 그런 것을 다 살피고 있었다. 밥을 그렇게 많이 덜어주는 어머니의 마음이 쓰리게 느껴져 왔다. 어머니는 입맛을 잃어 그러는 것만이 아니었다. 신세를 한탄하고, 오빠를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 아들인 막내에게 마음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막내는 눈치 없이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대근아, 기둘려."
보름이는 대근이의 밥그릇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반을 어머니의 그릇에 덜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밥을 한 숟가락 떠서 대근이의 그릇에 담았다.
"어째 이러냐."
감골 댁의 말이었다.
"그리 안 잡수먼 병난단게라."
여전히 눈길을 떨군 보름이의 말이었다. 감골 댁은 더는 말이 없었다.
"엄니, 나도 핵교 댕기고 잡은디."
입에 밥을 가득 담은 채 대근이가 뚱하게 내놓은 말이었다.
"핵교? 그려..."
막내를 쳐다보았다가 도로 눈길을 떨구는 감골 댁의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뜸금없이 핵교넌 무신 놈에 핵교여."
숭늉을 떠가지고 들어오던 정분이가 어이없다는 듯 퉁을 놓았다.
"핵교 안 댕기면 장헌 사람 못된다는디. 나도 핵교 댕겨 후제 장헌 사람 되고 잡단 말이여."
대근이의 또릿한 말이었다.
"그려, 그려. 어여 밥이나 묵어."
감골 댁의 목이 잠겨들고 있었다. 벽의 말코지에 걸린 쇠고리에서는 가느다란 관솔불이 타고 있었다. 관솔불은 긴 그을음을 피워 올리는 것에 비해 그 불빛은 미약했다. 불빛 언저리만을 피해 선 어둠에 포위당해 있는 형국이었다. 벽지라고는 붙어있지 않은 흙벽에는 오래된 그을음이 검게 끼어 있었다. 방바닥에 짚자리를 엮어 깔고, 벽에 벽지를 붙이지 못하는 살림살이에는 관솔불은 으레껏 제격이었다. 촛불은 아예 엄두를 낼 수가 없었고, 일본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흔해진 석유라는 것도 넘볼 수가 없었으며, 그렇다고 참기름이나 동백기름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 한 방울이라도 목에 넘길 참기름이 급한 판에 태워 없앨 수 없는 노릇이었고, 명절 때 찍어 바르는 것도 조심스러운 동백기름에 아무나 불 댕길 심지를 담그지 못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관솔개비에 불을 댕겼다. 그러나 큰 산이 먼 들녘이라서 관솔도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아무리 밝은 눈으로도 바느질을 할 수 없도록 흐린 관솔불마저 맘 놓고 댕겨놓을 수는 없었다. 관솔불빛 옆에 보름이는 오두마니 앉아 있었다. 한쪽이 그늘진 얼굴에는 무거운 수심이 가득했다.
"나가 언니맨치 이쁘지 못헌 것이 한이시."
손을 닦으며 정분이가 불쑥 내놓은 소리였다. 방구석 어둠에 하염없는 눈길을 보내고 있던 보름이는 눈길을 거둬 동생 정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 됐으면 그 영감탱이가 나럴 좋아혔을랑가 모를 일 아니여."
정분이가 잇댄 말이었다.
"무신 소리여!"
낮지만 힘이 들어간 보름이의 말이었다.
"그 할망구보고 나가 어쩌겄냐고 나서보면 안 될랑가."
"니 미쳤냐!"
보름이가 소스라치며 동생의 팔을 붙들었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언니넌 안돼야, 맘이 온순허기만 허고 대가 약혀서 안돼야. 나야 언니허고넌 다르제."
놀란 언니를 아랑곳하지 않고 정분이가 차분하게 한 말이었다.
"그 무신 숭헌 소리냐, 니 나이가 멧살이나 됐다고."
보름이는 울먹였다.
"나도 인자 다 큰 처녀여."
꽃도 아직 안 비친 열네살짜리 정분이의 철 든 것 같은 말이었다.
"안 되겄다, 얼렁 자그라."
보름이는 관솔불을 훅 불어 껐다. 어둠 짙은 방에 적막이 밀려들었다. 보름이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정분이는 더는 말이 없었다. 보름이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울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서러움이 가슴을 넘쳐나 그대로 눈물이 되고 있었다.
그 노인네의 말이 생생하게 다시 들리고 있었다. 심청이... 논 다섯 마지기... 어머니와 세 동생... 자신이 마음을 작정하기만 하면... 그러나 늙은 김 참봉... 김창봉의 아내... 온갖 구박과 눈치와... 사람들을 바로 볼 수 없는 부끄러움... 허지만 어머니는 자꾸만 늙어가고 동생들은 커가고... 가난은 갈수록 심해지고... 그걸 면하자면 결국... 첩살이... 온몸이 오그라붙었다.
동생 정분이는 언제부턴가 가르릉 가르릉 가늘게 코를 골고 있었다. 논 닷 마지기를 받고 차라리 심청이처럼 죽을 수가 있다면... 논 닷 마지기, 네 식구가 배곯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아니, 막내동생의 소원도 풀어줄 수 있을 것이었다. 정분이가 그리 강단지게 마음을 먹는데... 나는, 나는 언니가 아닌가..
보름이는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가을벌레의 울음 소리가 서러운 가락으로 가슴을 후벼 파고 들었다. 몸을 뒤척이고 또 뒤척였다. 우리는 어찌 이리 가난한가.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그 빚으로 오빠까지 떠나게 되어 집은 더 가난하게 되었다. 애초에 아버지가 동학군으로 나섰던 게 탈이었다. 그럼, 그게 잘못된 일이었던가. 그렇지는 않다. 동학군으로 나섰다가 죽은 사람은 아버지만이 아니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사람들은 다 장한 일을 하려고 나섰던 장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남은 건 더 심해진 가난뿐이었다. 그때 죽은 사람들의 집안도 다 우리처럼 가난할 것이다. 그 집안들은 어찌 살아가고 있을까. 나 같은 처지에 빠진 처녀들도 더러 있겠지. 세상은 어찌 이러는가... 내가 첩살이를 하면 오빠가 돌아와 뭐라고 할까... 어머니를 원망하고 나를 야단칠까... 그런데 오빠는 언제나 오는 것일까. 첩살이... 첩살이... 보름이는 헝클어진 마음으로 밤새껏 몸부림을 쳤다. 새벽닭이 울고 있었다.
감골 댁도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온갖 생각들에 시달리며 지샌 밤은 짧았다. 봉창이 밝으면서 감골 댁은 한 가지 생각을 굳게 붙들었다. 온 식구가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딸을 그런 식으로 팔아먹지는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그건 어미로서 못할 짓이기에 앞서 남편에게 죄 짓는 일이었다. 비록 가난할망정 한평생을 곧게 살려고 했던 남편이 자식 팔아먹는 그 흉한 짓을 용서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김 참봉은 남편하고 원수지간이나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동학군으로 나섰던 것은 김 참봉 같은 사람들을 미워해서였고, 김 참봉은 피란을 했다가 돌아와 하인과 마을사람 하나를 동학군에 내통했다고 하여 덕석말이로 죽였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병을 앓고 있던 남편은 김 참봉에게 빚돈을 쓰고 있는 줄 몰랐었고, 김 참봉은 남편이 동학군으로 나섰던 것을 몰랐던 것이다.
꼭 한 가지는 큰아들을 생각해서 그 짓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 짓을 했다가 큰아들이 돌아오면 무슨 면목으로 대할 것인가. 큰아들도 심지가 굳기는 남편 못지않았던 것이다. 있는 사람들에게 굽히고 사는 것을 속 아파했고, 특히나 동생들에 대한 사랑이 두터웠다. 돈에 팔려 첩살이를 시키느니 함께 배곯으며 처녀로 늙히고 말겠다며 감골 댁은 마음을 단단히 도사렸다. 오죽하면 첩살이를 하느니 차라리 기생질이 낫다는 말이 있을 것인가. 딸에게 기생질만도 못한 첩살이를 시켜 창자를 채우느니 차라리 온 식구가 굶어죽는 게 낫다고 작정했다. 감골 댁은 어떻게 하면 보름이를 시집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신 근심 있으신게라?"
지삼출의 아내 무주 댁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니시, 별일 없네."
감골 댁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서로 마음을 터놓고 사는 사이였지만 무주 댁에게도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감골 댁은 그 이야기가 퍼지는 것조차 싫었다.
"아아헌티서 무신 나쁜 소식이라도 왔능게라?"
무주 댁은 근심 서린 감골 댁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무신 궂은 소식이라도 있으면 좋게? 뱃길 만리라등마 은제나 소식이 올라는지 원. 참, 근디 말이시, 자네 혹여 우리 영근이맨치로 배 탄 사람덜이 영영 못 올 것이란 소문 들었능가?"
감골 댁은 불현듯 그 생각이 떠올라 다급하게 물었다.
"그려라? 그런 소문이 있등게라?"
무주 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얼마 전에 그런 소문을 얼핏 듣고도 감골 댁에게는 숨겨왔던 것이다.
"그놈에 할망구가 헛소리 지절댔구만."
감골 댁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그러나 얼굴에는 웃음이 엷게 번지고 있었다. 무주 댁은 누가 그런 소리 하더냐고 묻지 않았다. 혹시 이야기를 더 길게 끌어 감골 댁이 의심을 품게 될까 싶어서였다. 아는 게 병이라고 그 소문은 감골 댁에게 병이 될 뿐이었다.
"지서방헌티서넌 아무 소식이 없제?"
감골 댁은 무주 댁을 대할 때마다 묻는 말을 또 물었다. 죄스러운 마음을 씻을 길이 없어서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제라."
무주 댁의 대답도 한결같았다.
"나가 큰 죄인이제..."
감골 댁의 똑같은 중얼거림이었다.
"근디 요상시런 소문이 퍼졌등마요."
"무신?"
"어떤 철길공사장서 왜놈덜허고 일꾼덜 간에 패쌈이 벌어져 갖고 사람이 죽고 상허고 혔다드랑게라."
무주 댁의 시름에 찬 말이었다.
"그려 거그가 어디랑가?"
놀란 감골 댁의 얼굴에서 아까의 근심기가 싹 걷혔다.
"몰르겄구만요."
"가만있어 보소. 왜놈덜허고 패쌈혀서 죽고 상허고 혔으면 고것이 예삿일이 아니시. 그런 큰일언 필시 그 머시냐, 신문이란 것에 적혀 나왔을 것이네. 우리 송 선상얼 찾아가 보도록 허세."
감골 댁이 민첩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 됐을랑게라?"
"어이, 나 말이 얼추 맞을 것이네. 이따가 저녁에 가보도록 허세."
감골 댁은 어루만지듯 하는 눈길로 무주 댁을 바라보았다.
"고맙구만이라. 아그덜 아베가 원체로 왜놈얼 싫어허는디다 더러운 꼴언 못참는 성미라 행여 그 쌈에 앞장스고 나슨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는만요."
무주 댁은 입술에 울음을 물었다.
"아닐 것이네, 아녀. 돼지 아범이 왜놈 싫어 허고 마음이 곧아도, 또 진중헌 사람이시. 감추고 사는 처지 생각허고 또 어린 새끼덜 생각혀서 그리 마구잽이로 허지넌 안혔을 것이네, 아먼 안혔제."
감골 댁은 무주 댁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돼지>는 지삼출의 젖먹이 아들의 별명이었다. 돼지처럼 무엇이든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라고 젖먹이 아이들에게 흔하게 붙여 부르는 별명이었고, 진짜 이름은 <만복>이었다. 서당 선생이 지어준 이름은 천복이었다. 그런데 지삼출이 하는 말이, "에이, 천복이가 머시여 천복이. 기왕지사 복얼 받으라 허는 이름이면 인심 푹 써서 만복이라고 혀야제. 나가 인심 푹 썼다, 만복이여 만복이"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서당 선생이 지어준 이름은 한자로 <천(하늘 천)복>이었지 <천(일천 천)복>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절대권 행사 앞에서 그의 아들은 <만복>이가 되고 말았다.
"허고, 또 한 가지 일이 있구만요."
"말허소."
"혹여 우리 쥔집에서 논얼 처분헐란 지도 모르겄소. 어지께 왜놈이 왔다 갔소."
무주 댁이 속삭였다.
"머시여? 그런 눈치가 뵈등가?"
감골 댁의 놀란 얼굴이 금방 낭패스럽게 변했다.
"안짖 모르겄구만이라, 어찌 될란지."
"글씨, 그리 되면 큰탈이시. 그런 일 없어야 헐 것인디."
감골 댁은 거친 손을 맞부비댔다. 지삼출이 돌아오기 전에는 그런 변통이 생기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주인집에서 논을 팔아없애면 무주 댁네 생계가 당장 막막해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나설 일도 못되어 감골 댁은 그저 몸이 달 뿐이었다.
"너무 걱정 마시게라. 더 두고 볼 일잉게."
무주 댁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논덜얼 하도 쉽게 팔고 사고 허는 시상이니 원."
감골 댁의 그늘진 얼굴이 울상이었다.
저녁설거지를 서둘러 끝낸 무주 댁은 만복이를 들쳐업고 감골 댁집으로 갔다. 무주 댁을 기다리고 있던 감골 댁은 곧 집을 나섰다.
"아이고, 발써 가는 가을이시. 돼지 잘 단속허소."
감골 댁은 섬뜩 끼쳐오는 찬 기운에 몸을 떨며 무주 댁에게 일렀다. 서늘한 밤공기는 삼베옷 속으로 거침없이 파고 들었던 것이다.
"야아, 철이 이른가 어쩐가 썬들썬들허구만요. 고약시럽게..."
무주 댁은 만복이를 추슬러 업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가 삼킨 말은 <객지에 나간 사람이 있는디>였다. 그 말이 감골 댁 마음에 짐으로 얹힐까봐 얼른 삼켜버린 것이다.
송선생은 집에 있었다.
"어두운디 어쩐 걸음이시오. 어서 들어오시오."
송 선생은 그들을 스스럼없이 맞이했다. 그들이 <선생>이라고 불렀지만 그의 웃음 띤 얼굴은 스물대여섯 살밖에 안되어 보였다. 한복 차림인 그는 상투머리가 아니었다. 감골 댁과 무주 댁은 주저하며 방문을 넘어섰다. 장판에 벽지가 붙은 방안은 말끔했다. 대나무 모양으로 깎은 촛대 위에서 촛불이 방안을 밝히고 있었다. 아랫목 구석에 사방탁자가 학 다리처럼 가늘고 긴 네 개의 기둥으로 균형을 잡으면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아 담담하게 보이는 문갑이 한 짝 놓여 있었다. 아랫목에는 방석 하나와 책 몇 권이 놓인 작은 책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윗목 벽에는 서너 개의 말코지에 옷가지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간소하고 조촐한 방안의 차림이었다. 그러나 그 세간들에는 대물림한 세월의 숨결이 흐르고 있었다.
감골 댁과 무주 댁은 허리를 반쯤 구부려 옆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짚신을 꿰었던 자신들의 깨끗하지 못한 맨발을 치마 속에 감추려는 것이었다.
"편히들 앉으시오."
송 선생이 자리를 잡으며 그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저어... 이리 찾아뵌 것언 다른 것이 아니고라, 저어... 어떤 철길 공사판서 왜놈덜허고 일꾼덜허고 패쌈이 벌어져 사람이 죽고 상허고 혔다는 소문인디, 혹여 거그가 우리 지서방 있는 디가 아닌지.. 선상님이 거그가 어딘지 아시는지 싶어 요리.."
감골 댁이 어렵게 말을 해나갔다.
"아아, 그 사건 말이구만요."
"워메, 알고 기신게라"
무주 댁이 불쑥 말을 내놓았다.
"예, 걱정하실 것 없구만요. 그것은 철도공사장에서 일어난 패쌈이 아니고 저어 한양 근방하고 그 위쪽에서 일어난 일인 게요."
송 선생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 머시냐, 신문이란 것에 그리 적혔는 게라우?"
감골 댁은 좀 더 확실하게 알고자 했다.
"아 예, 신문에 그리 낫구만요. 어디 봅시다, 그 신문이 저기 있겄지요."
송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춘하추동을 그린 산수화가 붙은 벽장문을 옆으로 밀었다. 그는 신문뭉치를 들고 돌아섰다.
"예, 바로 여기 있구만요. 그러니까 이것이 두 가지 사건이군요. 걱정이 되시는 모양이니 내가 이얘기를 해드리지요."
송 선생은 촛대를 끌어다가 신문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감골 댁과 무주 댁은 서로 마주보며 안도하는 얼굴이 되었다. 감골 댁은 무주 댁의 등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만복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아, 이얘길 들어보시오. 첫 번째 사건은 경기도 시흥에서 벌어진 것으로, 그 이민이라는 것 때문에 일어난 분란이구만요. 사연인즉, 왜놈들이 이민자를 모으는데 관청에서 중간에 끼여들어 행악질을 했어요. 어찌 행악질을 했는고 하니, 관청이 백성과 왜놈들 중간에 서서 왜놈들이 원하는 이민자들을 강제로 뽑아냈고, 왜놈들이 이민 떠나는 사람들에게 주는 20원씩을 가로챘드라 그것이구만요. 거그다가 또 이민자가 생긴 동네마다 이민자 위로금이라 해서 백성들한테 돈을 거둬들여서는 그 돈까지 다 관에서 먹어버렸구만요. 그래 그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들고일어나게 되었어요. 한쪽에서 일어나게 되니까 여기저기서 백성들이 따라서 일어나 사람 수가 수천 명으로 불어나고 말았구만요. 그 많은 사람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군청으로 몰려간 거지요. 그리헌데 군수는 마침 한양에 가고 없었고, 군청에는 서기 등속만 있었어요. 그 난리가 일어난 소식을 전해 듣고 군수가 한양에서 부랴부랴 내려오기는 왔는데, 군수는 그 문제를 순리로 해결지은 것이 아니라 외려 왜놈군대를 끌어다가 사람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려고 들었다 그것이구만요. 형편이 그리 되니 분통이 터진 백성들이 왜놈군대를 치받고 군청으로 쳐들어가고, 싸움판이 벌어졌지요. 결국 군수와 왜놈 두 놈이 백성들 손에 맞아죽었어요."
송 선생의 자상한 이야기였다.
"또 한바탕 갑오난리가 일어났네."
무심결에 말을 해놓고 감골 댁은 그만 찔끔해져 송 선생을 후딱 쳐다보았다.
"그리 된 셈이지요."
송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단정한 얼굴에 괴로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담 이얘기넌 머신게라?"
무주 댁이 주저하며 물었다.
"아 예, 또 하나 사건은 저 위에 평안도 곡산에서 벌어진 것으로, 왜놈들하고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터진 싸움이구만요. 그 싸움이 어찌 된 것인고 허니, 왜놈들이 철도라는 것을 놓는데, 한양하고 부산 사이를 잇대는 경부선 철도만 놓는 것이 아니고 한양에서 시작해서 저 위쪽인 압록강가의 신의주라는 곳까지 잇는 경의선 철도도 놓고 있지요. 우리한테 소문이 많이 난 것은 경부선 철도고, 왜놈들은 북쪽에다 경의선 철도도 놓아, 이 땅을 우리 몸으로 치자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 일자로 잇자는 생각이구만요. 그 경의선 철도공사에서도 일손이 모자라니까 왜놈들은 우리 조선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일을 시키게 됐어요. 사람들을 끝없이 강제로 끌어가니 참다못한 사람들이 들고일어나게 되었지요. 한곳에서 일어나니까 동네마다 사람들이 따라서 일어나게 되었구만요. 그 싸움에서도 백성들 수천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힘을 뭉쳐 나섰는데, 왜놈들 일곱에 앞잽이로 나선 조선놈 하나가 맞아죽었다고 되어 있어요."
송 선생은 들고있던 신문을 한쪽으로 치웠다. 그것은 <황성신문>이었다.
"선상님, 고맙구만이라우."
감골 댁이 머리를조아렸다. 무주 댁도 따라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근디 저어... 핵교넌 인자 안 여시는게라"
감골 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씨요... 나라에서 사사로이 학교를 못 열게 허고, 법대로 맞추자니 우리 집 재산이 보잘 것이 없고... 형편이 그리 되어 있구만요."
송 선생은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막내 대근이가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가망이 영 없어지는 것 같아 감골 댁은 한숨을 입에 물었다. 감골 댁과 무주 댁은 방을 나오면서도 맨발이 보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참말로, 송 선상님언 은제 봐도 지대로 된 양반이요 이. 나이도 젊은디."
"하먼, 드물고 귀헌 진짜배기 양반이제."
"저런 양반만 있음사 시상이 요리 팍팍허덜 않을 것인디라."
"그러제. 사람 차등얼 허나, 유식헌 티럴 내나, 저런 양반이 재산이 많혀 핵교럴 새로 세와야 허는 것인디."
"맘씨가 그리 고우니 큰 재산얼 지닐 수가 있겄소. 문중서도 실없이 산다고 욕묵는다드만이라."
"그럴 것이네. 그려도 저 양반이 질로 알지게 사는 것이네. 인심 얻고 떠받들림서 사는 것인디."
감골 댁은 송 선생이 다시 학교를 열 수 없게 된 아쉬움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또, 어째서 사사롭게는 학교를 못하게 막는지 나라법이라는 것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송 선생이 그대로 학교를 계속했더라면 대근이는 돈 없이도 신식공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송 선생은 사랑채를 다 비우고 학교를 차려 공짜로 아이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런데 2년이 다 못되어 억지로 문을 닫아야 했다. 대근이는 그 학교에 신바람 나게 다니다가 정처를 잃게 되었다. 서너 달째 갈 곳이 없어진 대근이는 놀기도 지쳤는지 걸핏하면 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라댔다. 십리 밖 김제에 버젓한 학교가 세워진 것을 알지만 돈 한푼 없는 처지로서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질래 공부 못시킬 처지였음사 애초에 핵교에 발걸음얼 못허게 혔어야는디. 입맛만 베래놨으니..."
감골 댁은 혼잣말을 하며 혀를 찼다.
"대근이 말이다요?"
"그렇구마. 새끼가 핵교 보내도라고 시시때때로 졸라대는디, 빚쟁이헌티 졸리는 것보담도 더 심든단 말이시."
감골 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것이야 가심 찢어질 일이제라. 시상언 참 너무 공평허덜 못허요."
무주 댁도 한숨을 쉬웠다.
"이놈에 시상 공평허지 않은 것이야 어디 하로이틀 된 일이라야제."
"그려도 혀도 너무허는구만이라. 요 넓디나 넓은 벌판에 깔린 것이 논인디. 있는 사람언 수백 수천 마지기썩 갖고 배가 터지고, 없는 사람언 한 뙈기도 없이 배럴 탈탈 곯으니, 요것이 어디 사람 사는 시상이겄소. 시집오기 전에넌 무주 산골짝서 사니라고 요런 놈에 시상이 있는지도 몰랐는디, 들판으로 시집오고 보니 요런 숭헌 시상이 있드랑게요. 참 사람 못살 시상이제라."
무주 댁은 어둠의 힘을 빌려 속에 든 말을 털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무주 댁은 지삼출을 따라나선 것까지 후회하지는 않았다. 총각 지삼출은 왜놈들 총에 쫓겨 산을 타고 다니며 싸우는 신세로 몇 차례인가 밥을 얻어먹고 갔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불쑥 나타나서 엉뚱한 소리를 내놓았던 것이다. 당신네 딸한테 장가 들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아버지가 자신을 따로 불러 앉히고 한 말은 짧은 한마디였다. 사람 하나 쓸 만하다는 것이었다. 어글어글하게 생긴 그 총각의 느닷없는 말에도 놀랐지만 아버지의 말에는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그 한마디는 <혼사를 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는데, 아버지는 그 총각이 동학당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마음을 정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속으로 동학당을 좋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아차리게 되었다. 전에 밥을 먹여 보내고 할 때는 그저 인정상 그러는 것인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고나서 아버지는 한마디를 더 보탰다. 처자 밥 굶길 놈은 아니다. 남자가 곰보나 언청이가 아닌 이상 그 말 앞에서는 다른 말이 더 필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다행인 것은 그 총각의 생김에 별달리 흠잡을 데가 없었고, 심성도 무던하고 인정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먹고 사는 어려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사내다움에 끌려 마음을 정하고 말았다. 그런데 들판을 찾아나와 보니 땅 없는 고생과 설움이 겹쳐서 몰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감골 댁도 어둠을 믿어 무주 댁의 그 입바른 듯한 말을 탓하지 않았다. 사람이라는 것이 제아무리 속 깊고 참을성이 있다고 해도 때에 따라 속을 털고 마음을 헹구지 않고서는 살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남모르게 퍽퍽 울어대는 것도, 새 보는 척하며 목 터져라 소리소리 질러대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이었다.
"무주 댁, 그 친정동네에 어디 그닥잖은 신랑감 한나 없을랑가?"
감골 댁은 그저 지나치듯 말을 꺼내보았다.
"야아, 보름이가 나이가 다 찼제라 이."
무주 댁은 발 잘 맞춰 널뛰기하듯 제때 화답을 해왔다.
"그렁마. 헌디, 우리가 땡전 한닢 없이 아무것도 갖춘 것이 없으니 어디 중신애비를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처녀귀신 맨글 수도 없고, 이리 답답헐 수가 없단 말이시. 어찌 밥이나 안 굶고 살 자리만 있으면 좋겄는디."
"당장 혼례비가 없어서 그렇제 보름이야 신부감으로 어디가 모지랜 디가 있소. 인물 잘났제, 행실 바르제, 성정 온순허제, 솜씨 엽렵허제, 빠지는 것이 머시가 있소. 어디 마땅헌 자리가 있는가 알아보도록 허겄구만이라."
"잉, 그래 주소. 불쌍헌 것이 지 한나 잘났으면 멀혀. 에미 애비럴 잘 못 만났시니..."
감골 댁은 또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젖혔다. 하늘에 별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여름별들과 달리 별빛이 맑고 깨끗해져 있었다. 별들이 가을을 품고 있었다.
무정허기도 허시오. 멀허고 있소, 집안 잠 안 돌보고. 보름이 짝이나 잠 점지해 주시오.
감골 댁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남편에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결에 벌레 우는 소리가 실리고 있었다.
감골 댁은 구름 낀 마음으로 이틀을 보냈다. 보름이의 일은 마음을 단단히 작정했으므로 더 마음 무거울 것이 없었지만 대근이의 학교일이 마음에 구름을 일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학교에 보낼 길을 없었던 것이다. 딸들이야 까막눈 신세를 면할 수 없다 하더라도 막내 대근이만은 눈을 틔워주고 싶었다. 대근이 제 말대로 장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세상은 무섭게 변해 가는데 면무식은 해야 사내로서 제 앞감당은 해나갈 수 있으리라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 작은 욕심마저 채울 길은 막막할 뿐이었다.
그때 나서지만 안했음사 이리는 안됐을 것인디... 또 그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을 부러뜨렸다. 그 생각이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로 부질없어서가 아니었다. 그 생각을 마음에 품는 건 남편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었다. 시상얼 원망허덜 말어. 나럴 원망허덜 말어. 그 쌈에 나슨 것은 옳은 일이었응게. 원망허고 미워헐 놈덜언 따로 있어. 우리럴 속인 놈덜이여. 허고, 혼자 당헌 일이라고 생각허덜 말어. 죽어간 사람이 수없이 많은 게... 남편이 눈감기 며칠 전에 숨 헐떡거리며 힘들여 한 말이었다. 남편의 그 말을 가슴 한복판에 심고 살아왔었다. 그러면서도 어려운 고비가 닥칠 때마다 그 후회스런 생각은 불쑥 고개를 치켜들고는 했다.
"그려, 우리럴 속인 놈덜이 못쓸 놈덜이제. 근디 그놈덜언 다 배불르고 떵떵거림서 잘사니... 빌어묵을 시상이제..."
감골 댁은 무슨 주문이라도 외우듯 중얼거리며 고샅을 걸어가고 있었다.
"감골 댁, 인자 오요?"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감골 댁은 그 생각을 덮으며 고개를 돌렸다. 봉산 댁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들고 있었다.
"아이고 감골 댁, 참 자알 생각혔소. 김 참봉도 너무 좋아라고 허드랑게로."
봉산 댁은 곧 춤이라도 출 듯이 몸을 야단스레 놀리며 감골 댁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무신 소리 허요, 시방?"
감골 댁의 목소리가 쨍 울렸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봉산 댁의 손을 뿌리쳤다.
"아니, 맘 정했다고 혀놓고 어째 이려. 미쳤당가!"
얼굴이 차게 변한 봉산 댁이 바락 소리쳤다.
"미친 것언 당신이여. 헛소리 허고 있는 당신이 미쳤제 나가 머시가 미쳐!"
감골 댁이 맞받아 소리 질렀다.
"머시여! 보름이헌티 말 일러보낸 것언 누구여, 도깨비여 귀신이여?"
"보름이?"
그때서야 감골 댁의 머리가 휘돌았다. 보름이가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감골 댁은 정신이 아뜩해지는 걸 느꼈다.
"감골 댁이 딴소리럴 혀도 소양 없어. 당자가 맘 정헌 것잉게 끝난 일이여. 김참봉헌티도 말 전해 부렀고."
봉산 댁이 말뚝을 박고 들었다.
"머시가어찌고 어쩌! 내 목얼 쳐도 그 일언 안돼야!"
감골 댁은 부릅 뜬 눈으로 봉산 댁을 노려보며 이를 갈아붙이듯이 말을 내뱉고는,
"내 그년 가쟁이보톰 찢어놓고 말 것이여!"
일부러 딸을 험하게 욕하며 휙 돌아섰다.
"아이고 무셔라. 저 사람 저리 독헌 거 첨 보겄네."
감골 댁의 서슬에 기가 질려버린 봉산 댁은 고샅을 내닫고 있는 감골 댁을 멍하니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엄니, 나 한나 그리 살면 집안이 다 필 것 아니겄소. 심 필 가망이 없는디 언제꺼정 이러고 살겄소. 엄니허고 동상덜이 편히 살아진다먼 나한나 고생언 아무치도 안허요."
보름이가 느껴 울었다.
"미쳤냐, 니 미쳤냐. 새끼 팔아 배 채우는 부모 봤고, 언니 누님 팔아 호식허는 동상덜 니 어디서 봤냐. 느그 아부지가 저 시상서 피럴 토헐 일이고, 느그 오빠가 타국서 환장허고 죽을 일이다. 니가 그리허겄으면 내 목에 칼얼 박고 그리혀라. 우리넌 굶어도 함께 굶고, 죽어도 함께 죽어야 헌다."
감골 댁이 눈물 떨구며 결연하게 한 말이었다.
"엄니이-"
보름이가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감골 댁도 울었다. 정분이가 어머니의 팔을 붙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수국이도 대근이도 어머니를 붙들며 울음을 터뜨렸다. 감골 댁은 두 팔을 있는대로 다 벌려 아이들을 싸안았다.
9. 어떤 양반
후여어- 후우여어-
훠어어 후우여어-
깨갱깽깽 깽깽깽...
들녘은 온통 황금빛으로 넘치고 있었다. 여름의 그 짙은 초록빛은 다 어디로 바래고 끝간데없는 들녘은 정말 금을 녹여 붓기라도 한 것처럼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황금빛에는 진짜 금빛이 품고 있는 현란하면서도 고아하여 거만스럽고 도도해 보이는 그 이상야릇한 광택은 없었다. 광택이 없는 들녘의 황금빛은 수수하고 친근했으며 푸짐하고 넉넉했다.
하늘은 사람의 목숨 줄을 이어가는 알곡의 소중함을 일깨우려고 그런 황금빛 포장을 한 것일까. 아니면, 하늘은 진짜 금이라고는 만질 기회가 없는 가난한 농부들의 마음을 헤아려 그런 황금빛을 흠뻑 내리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여름의 폭염 속에서 농부들이 수없이 떨군 피땀을 벼들이 빨아들여 피땀에 숨겨진 붉은색이 초록색과 섞이게 되면서 초록색은 서서히 황금색으로 변하게 된 것이었을까. 그러나 정작 농부들은 그 누구도 그런 이상한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저 들녘의 여름 옷은 초록색이고 가을옷은 황금색이겠거니 여기며 무감한 듯 가을걷이 준비를 할 뿐이었다. 그들은 자연과 계절의 변화에 순응할 뿐이지 초록색이 왜 황금색으로 변하는지 그 까닭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황금색으로 치장한 벼들은 알곡을 익힐 대로 익혀가며 제 무게에 겨워 고개를 하나같이 다소곳이 수그리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스쳐갈 때마다 들녘에는 느리고 묵직한 황금물결이 끝없이 여울지어 일어나고는 했다. 그 묵직한 출렁임은 곧 알곡들의 무게였고, 농부들의 노동의 무게였다. 들녘의 여기저기에서는 새 쫓는 소리들이 길게 길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내아이의 쉰 목소리, 계집아이의 카랑한 목소리, 컬컬한 남자의 목소리, 쉬다 못해 팬 여자의 목소리가 얽히고설키며 새떼들을 쫓고 있었다. 그러나 새떼들도 이제 영악해질 대로 영악해져 있었다. 알곡이 여물기 시작할 무렵부터 눈치싸움을 하기 시작한 새떼들은 처음과는 달리 소리지르는 것쯤 들은 척도 안하게끔 배짱이 두둑해져 있었다. 그래서 깨진 꽹과리가 동원되고, 돌팔매질을 쉴 새 없이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새떼들이 돌팔매질을 무서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돌이 떨어지면 수십마리의 참새들은 마지못한 듯 나지막하게 날아올라 빙그르 선회하다가는 다시 가까운 논으로 내려앉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사내아이나 계집아이들은 참새 떼가 자기네 논에 내려앉지 못하게 하려고 논두렁을 달음박질치며 소리소리 질러대고는 했다. 참새 떼와의 싸움은 거의가 아이들이 맡은 고단할 일거리였다. 참새떼가 기승을 부려대는 것과는 달리 제비떼는 차츰 모습을 감추어갔다. 서늘한 바람결에 밀려 제비들은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참새떼는 진저리치며 미워하면서도 제비들이 떠나가는 것은 못내 아쉬워했다. 제비들이 빨랫줄이며 토담 위에 수십 마리씩 모여앉아 조잘거리며 분주해지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제비와의 이별이 가까워진 것을 알았다. 아이들은 흥부와 놀부를 생각하며 제비들이 떠나가는 것을 꼭 보고 싶어 했다. 제비들이 떠나갈 때 손을 흔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가슴에 간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나 보면 제비들은 흔적도 없이 떠나버리고 없었다. 아이들은 그 허전함과 아쉬움을 들녘에 나와 참새 떼를 미워하고 욕하는 것으로 다 풀었다.
"날이 저무니 나그네 발길은 정처 없고, 가을이 깊으니 가난한 이 수심도 깊어라, 북풍에 실려 날아든 철새는 둥지를 트나, 인간사 헐벗고 배고픔은 그 누가 가려주랴. 자네 혹시 이 시 누구 것인지 기억허나?"
송수익은 들녘에 눈길을 둔 채 옆에서 걷고 있는 정재규에게 물었다. 새 쫓는 아이들의 쉰 목소리가 가슴에 담겨오며 문득 떠오른 시였는데 정작 지은이가 누구인지는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궁상맞은 시로구만. 자네가 모르는 것을 내가 어찌 알었어."
정재규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에이 이놈에 갓, 답답해서 원" 하며 두 손끝으로 갓전을 잡아 흔들며 짜증을 부렸다.
"원, 사람허고는. 그리 답답하면 나 모양으로 상투를 잘라내면 될 것 아닌가."
송수익이 상투없는 짧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질해 보이며 허허대고 웃었다.
"자네야 춘부장 어른이 안 계시니 그리했겄지만 나는 어림도 없네. 우리 영감이 저 세상으로 뜨기 전에는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단 말이시."
정재규는 두루마기 자락을 내쳤다. 송수익은 그의 거친 말이 귀에 거슬렸다. 그러나 탓하지 않기로 했다. 일부러 버릇없이 말하고 있는 그의 뒤틀린 심사를 건드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만한 예절쯤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고, 병든 아버지의 외고집에 억눌려 사느라고 쌓이고 있는 반발심을 이해할 만도 했던 것이다.
"자넨 요새도 글 읽고 사는 모양이시?"
정재규가 불쑥 물었다.
"모르겠네, 세상이 하 뒤숭숭해 진서 읽고 앉었을 마음은 없고, 신문이나 그저 열성으로 읽고 사는 것이제."
송수익의 심드렁한 대꾸였다.
"그놈에 신문이란 물건을 열성으로 읽어서 멀허나."
정재규는 코웃음을 흘렸다.
"무슨 소리여, 자네?"
송수익은 들녘으로 보내고 있던 눈길을 정재규에게로 돌렸다. 아까 시를 읊조렸을 때 궁상맞다고 했던 그의 말이 신경에 걸렸으나 그냥 지나쳤었다. 그러나 신문을 읽어서 무얼 하느냐는 코웃음까지 또 그냥 지나 칠수는 없었던 것이다.
"세상이 갈지자걸음 걷는 판에 그놈에 것 읽어봐야 정신만 더 산란해 진단 말이시."
정재규는 화가 난 듯한 말투 뒤에 또 코웃음을 달았다.
"모를 소리로세. 세상이 뒤숭숭허고 조석변이니 정신을 바로 차리자면 신문을 똑똑히 읽어야 허지 안컸는가."
송수익은 좀 어이없는 기분으로 정재규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 마음이 틀어진 것인가, 그위태한 한량기가 동했는가,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시장스런 소리 말소. 벼슬 차고 앉은 양반님네들이 다 제 입맛에 맞게 나라 말아잡숫고 있는 판에 이런 촌구석에 백혀 날짜 지낸 신문인지 구문인지나 뚫어지게 읽는다고 무슨 수가 생기겄나? 벼슬 없는 촌양반의 우국충정이고 비분강개는 추수 뒤의 샛바람만도 못한 것이시."
정재규는 쓴웃음을 지었다. 송수익은 투명한 갓그늘이 내려앉은 정재규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의 속마음이 무엇인지를 뜯어보려는 것이었다. 눈 코 입이 흠잡을 데 없이 생긴 얼굴이었다. 적당한 몸집과 함께 흔히 말하는 귀골이었다. 굴곡 없이 반반하게 자리 잡은 이마가 뼈대를 말하고 있었고, 눈꺼풀 얇은 눈에 재주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혈색 붉은 작은 듯한 입에 여색을 탐하는 도색기가 묻어 있었고, 턱뼈 드러나지 않은 매끈한 얼굴에는 한량기가 서려 있었다. 그 복잡한 얼굴에서 그의 진심을 캐내기란 쉽지가 않았다.
"자네 말도 틀리지는 않네."
송수익은 정재규의 속마음 알아내는 것을 일단 뒤로 미루어두기로 했다. 그가 가자는 대로 술집에 가 자리를 잡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제 다왔네. 뒤뚱뒤뚱허는 세상, 술이나 마시는 것이 속 편허네."
정재규는 잰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김제가 가까워지자 술맛이 동하는 듯이.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석양빛 속에 펄럭이는 정재규의 비단두루마기 자락을 보며 송수익은 마음이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를 찾아온 것이 헛걸음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괸해 찾아온 것 아닌가... 송수익은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정재규가 세상 돌아가고 있는 것에 절망감을 느끼고, 스스로 아무 힘도 없다는 허탈감에 빠져 그런 억지소리를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여기까지 내친걸음이니 술자리까지 가보자고 생각하며 그는 걸음을 빨리 해 정재규를 따라잡았다.
해가 지고 있는데도 새 쫓는 소리들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해거름이 되면 새들은 용케도 논을 떠나 잠자리를 찾아갔다. 그런데 해질녘까지 줄기차게 울리고 있는 새 쫓는 소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알곡을 한 톨이라도 더 지키려는 안간힘인지도 몰랐다.
김제는 군산과는 달리 아직 일본사람들의 꼴이 자리 잡지는 않았다. 송수익은 그것을 무엇보다도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언제 일본사람들이 김제에도 밀려들어 집을 지어댈지 모를 일이었다. 일본사람들이 배고픈 개 설쳐대듯 닥치는 대로 논을 사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럴날도 머지않았다는 것을 그는 짐작하고 있었다. 군산이나 호남평야만이 아니라 조선천지가 일본사람들에게 야금야금 먹혀 들어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마치 자신의 몸 부분 부분이 잘려져 나가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과 분노를 느꼈다. 한사코 군산에 발걸음을 안 하는 것도 그런 감정이 한층 심해지기 때문이었다. 정재규는 집을 나서면서 군산으로 나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길이 멀다는 핑계를 대서 김제로 발길을 돌리게 했던 것이다.
"자아아, 오랜만에 만났으니 우리 술이나 한잔 걸판지게 마셔보세."
정재규가 호기를 부리며 자리 잡았다.
"그러세, 술을 마신 지도 오래네."
송수익은 정재규의 호기를 맞받으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까지 흔쾌한 것은 아니었다. 정재규의 호기가 기생을 옆에 낀 술 한상의 호기였지 자신의 계획에 선뜻 찬동하고 나설 장부의 호기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떼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와 교분을 튼 10여 년 동안 서로 술 인심에 인색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계획은 후한 술 인심 정도로는 해결할 수 없는 너무나 큰 계획이었다.
"술상 들기 전에 소리나 한자락 들으실랑게라우?"
기생어멈이 정재규를 보고 눈웃음을 쳤다.
"일없네. 우리 할 이얘기가 있으니."
송수익은 얼른 말을 받았다.
"그리허소. 술상이나 걸게 봐서 어서 올리게. 소리는 이따가 듣세."
송수익의 갑작스러운 대꾸에 기분이 머쓱해진 정재규는 이렇게 말을 잇댈 수밖에 없었다.
"무슨 긴한 이얘기가 있는 모양이시?"
기생어멈이 방을 나가자 정재규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응, 자네허고 의논헐 일이 한 가지 있어서..."
정재규가 긴장한 것을 눈치챈 송수익은 옹색스러움을 느끼며 담배쌈지와 곰방대를 꺼냈다.
"아니 자네, 그것이 머시여! 곰방대 아니라고?"
눈을 크게 뜬 정재규의 목소리를 너무 컸다.
"그러네, 곰방대네."
송수익은 곰방대를 들어 보이며 뭐가 잘못되었느냐는 얼굴로 정재규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자네, 장죽을 들고 댕기기 거북허면 궐련을 피울 일이지 그것이 무슨 꼴인가. 궐련 여깄네."
정재규는 담뱃갑을 꺼내 송수익 앞으로 쭉 밀었다.
"상것들이 쓰는 것이라 양반 체통이 떨어진다 그런 뜻인가?"
정재규를 쳐다보는 송수익의 눈길이 곱지가 않았고, 입언저리에 쓴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두말하면 머허나. 그리 안해도 상것들이 고개를 치켜세우고 대드는 세상에 양반 체통은 양반이 지켜야 할 것이 아니겄는가."
정재규는 불쾌한 표정에 흥분기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그거 모를 소리로군. 곰방대로 담배 피워서 나는 무시당한 적이 없네. 보게, 담뱃대로 양반 상놈 지체 가르던 세상은 지나가지 않았나. 장죽이 길어 점잖으니 양반 체통이 서고 곰방대는 짧아 방정맞으니 상놈들이나 쓰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리 따지자면 이 궐련은 어째서 돈 많은 양반들만 골라가면서 태우나. 길이가 손가락만치 짧으니 방정맞기로 치자면 곰방대 몇 곱절이니 양반들이 피울 것이 아니라 상놈 중에 상놈인 백정들이나 피워얄 것 아니겄는가. 서양 놈들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값비싼 물건이니 궐련은 예외로 쳐주는가?"
송수익은 정재규의 고리타분한 생각이 마땅찮아 말고삐를 바짝 죄었다.
"자네 그 말 따지고 드는 솜씨는 더 늘었구만."
정재규는 떫은 입맛을 다시고는,
"참, 말이 났으니 생각났네. 자네가 아랫것들헌테 존대를 쓴다는 소문이 있든디, 그것이 참말인가?"
그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 소문이 났던가? 상투를 잘라내면서 그리허기로 작정을 했는데 실은 입버릇이 잘 고쳐지지 않아 애먹고 있네."
정재규를 쳐다보고 있는 송수익의 대답은 분명했다.
"자네 미쳤는가! 상투를 자른 건 머리 편허고 신식을 따르자는 것이 아니라 양반 지체를 똥통에 처박고 상것이 되자는 것이었는가. 세상이 지 아무리 변해도 양반은 양반이고 상놈은 상놈인 것이여. 난 자네가 무슨 생각을 허고 있는지 당최 속을 모르겄네."
얼굴을 붉힌 정재규는 마구 혀를 차댔다. 송수익은 어떤 벽을 느꼈다. 그러나 바로 단념할 수는 없었다. 정재규는 아직 생각을 바꾸지 못한 흔한 양반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보게 재규, 그 신식을 따른다는 게 무언가. 서양 놈, 일본 놈 흉내를 내서 멋을 부리자는 것이 아닐세."
송수익은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정재규는 못마땅한 얼굴로 궐련을 뽑아 물고 성냥을 칙 그었다. 궐련은 인천의 영미 합작공장에서 생산되는 것이었고, 성냥은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었다.
"상투를 자르고 신식을 따르자는 건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구태를 벗어 좀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것 아닌가. 물론 사람이 오래 습관 되어 내려온 생각을 바꾼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아네. 그렇다고 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네. 양반들이 생각을 못 바꾸는 건 자기네들이 양반으로서 취한 이익을 지키자고 하는 욕심과 계속 호의호식하며 살려고 하는 탐욕 때문인 것일세. 자넨 양반과 상놈이 애초부터 인간 종류가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아니 그러면, 자넨 양반이고 상놈이고 다 똑같은 인종이란 말인가? 양반하고 상놈은 애초부터 그 피가 다르단 걸 자넨 어째서 모르는가. 양반하고 백정하고가 어떻게 같은 인종이란 말인가."
정재규가 송수익의 말을 토막치고 들었다. 송수익은 연민의 웃음을 흐릿하게 흘리며 정재규를 바라보았다.
"알겠네. 자넨 상것들이 예의범절도 모르고 표리부동하고 무식하고 금수와 같다고 말하려는 거지. 그거야 양반들이 입만 열면 내놓는 말이니까. 허나 좀 생각해 보세. 양반의 자식들을 태어나자마자 상놈의 자식들과 똑같이 먹이고 입히고 하면서 글도 가르치지 않고 막일만 시켜대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랬는데도 그 아이는 커서 양반이 될 수 있겠는가? 자네와 나를 그리했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말일세. 우리도 더 볼 것 없이 무식한 상놈일 것이네. 양반과 상놈은 인종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는 아주 못된 제도로..."
"다 듣기 싫네. 자네가 말허는 좋은 세상이란 결국 양반이 상놈으로 떨어지는 것인가? 그런 세상이라면 나는 죽을 때까지 상투를 안 자르겄네."
정재규는 또 말허리를 자르며 내쏘았다.
"그래,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 허나 자네도 몇 년 전에 나와 함께 글공부를 하면서 개화를 마음에 두었고, 만인평등사상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때의 생각을 다르게 먹지 말고 자꾸 키워나는 것이 우리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네."
"자네 시방 정신이 있나 없나. 김옥균이 역적으로 참형을 당헌 것이 언제라고 아직도 그런 생각을 품고 있어. 다 소싯적에 철모르고 마음 쏠렸던 것이지 나 그런 생각 버린 지 오래네."
정재규는 차갑게 말했다. 송수익은 벽이 더 두꺼워지는 것을 느끼며 말을 더하고 싶은 의욕을 잃었다. 그러나 상대는 늙은이가 아니었다. 한때 글벗이었고 술벗이었고 지금도 허물없이 술자리를 마주할 수 있는 사이였다. 다만 신분에 대한 생각에 간격이 나 있을 뿐이었다. 그 생각을 고쳐먹게 하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큰일이었고, 또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는 다시 마음을 추슬렀다.
"여보게,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게. 역대에 사약을 받고 참형을 당한 것이 어디 꼭 역적이라서 그러던가. 옳은 생각, 곧은 소리를 고집하다가 정적들에게 몰려서 죽은 충신들이 얼마나 많던가. 김옥균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야. 그래, 김옥균을 내놓고 옳다고 할 수 없는 세상이니 그 사람을 제쳐놓고 생각해도 좋네. 그 만인평등사상이라는 건 앞으로 갈수록 커지게 될, 옳고 바른 사상이라는 걸 깨달아야 허네. 공맹지도만으로는 더 다스려지는 세상이 아니란 말일세. 그러니 우리 양반이란..."
"아 알겄네, 알겄어. 그놈의 곰방대 땀새 이얘기가 헛길로 샜네. 어서 자네가 헐라든 이얘기나 허소."
정재규는 또 말을 잘랐다. 그의 얄팍한 얼굴에는 짜증이 배나고 있었다. 송수익은 그의 경박한 듯한 무례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시 누르며 진중하고자 했다.
"지루한 모양이구만. 허나 지금까지 한 이얘기가 내가 하려는 이얘기와 무관하지 않네. 내가 자넬 찾아온 건 말일세, 그러니까 다름이 아니고, 자네하고 나하고 힘을 합쳐서 학교를 하나 세워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네."
"학교?"
정재규는 흠칫 놀랐다. 그러나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웃음을 지었다.
"응, 학교. 세상이 이렇게 앞뒤를 가릴 수 없게 뒤숭숭하고 어지러울 때 학교를 세워 많은 사람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는 것은 우리 젊은 사람들이 해볼 만한 일이 아니겠나. 돈이 좀 들겠지만 그래도 돈을 값지게 쓰는 일이고 말이네."
송수익은 절실한 심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그 생각이야 존디, 재산을 내 맘대로 헐 수가 있어야제."
정재규는 꼬리를 사렸다.
"아네, 그러니 당장 시작허자는 것이 아니고 마음부터 먼저 정하는 것이 중헌 일이네."
송수익은 정재규를 주시했다.
"글씨... 그것이 한두 푼 드는 일도 아닐 것이고..."
정재규는 싫은 기색이 역력해진 얼굴로 짭짭 입맛을 다셨다.
"이사람아, 많은 재산 다 어디다 쓰나. 좋은 일에 써야 되지 않겠나?"
송수익은 마른침을 삼켰다.
"신학문은 양반 자제한테만 가르치나?"
"그래서야 쓰나. 모든 아이들을 공평하게 가르쳐아지."
"무슨 소리여! 내 금싸래기 겉은 돈 퍼내놓고 상것들이 더 치받고 들으라고 공부를 가르쳐? 나 그런 짓 안허네!"
정재규는 단호하게 잘라버렸다.
"진정인가?"
"두말 헐 것 없네."
"우린 생각이 너무 다르구먼. 나 그만 가봐야겠네."
입을 꾹 다문 송수익이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이사람아, 어찌 그러는가."
정재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송수익은 들은 체도 않고 방문을 밀쳤다.
"이사람 수익이, 내 말 좀 듣소."
정재규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송수익의 소매를 잡았다.
"양반 체통 살려서 자네나 기방놀음 잘허소."
고개를 돌린 송수익의 싸늘한 말이었다. 견고한 느낌의 얼굴에는 경멸의 쓴웃음이 서려 있었다.
"내 말이 어디가 잘못됐다고 그러는가."
정재규가 따지듯이 말했다.
"자네 말이 잘못된 것이야 없지. 우린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이네. 이것 놓소!"
송수익은 고개를 되돌리며 팔을 뿌리쳤다. 그의 서슬에 눌린 정재규는 더 무슨 말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저놈이 미쳐도 되게 미쳤네. 세상이 혼란스럽게 돌아가니까 멀쩡헌 놈도 미치나. 하기는 저것이 글방에서 글 읽을 때부터도 좀 요상시럽기는 혔제. 마음씨가 고운 것 같으면서도 고집이 세고, 공맹지도보다는 실학을 더 중히 여기는 눈치였고, 갑오년 난리 때도 관리들의 탐학을 욕해대며 은근히 농민들을 싸고돌아 눈총을 받지 않았나. 왜놈이야 하면 치를 떨어대고, 계집도 아닌 사내가 언문은 또 그리 좋아하고, 속이 어찌 된 물건인지 참 별난 종자야. 저것이 양반 탯줄 타고났어도 저 모양인데 상놈 탯줄 타고났더라면 전봉준이가 따로 없을 판이었제. 만인평등이고, 학교를 세워 상놈도 공평허게 가르쳐? 어림없는 소리다. 누구 좋으라고 그 짓이냐. 내가 요시다라는 놈한테서 돈 백 원 빌려쓰고 있는 걸 알면 저놈은 기절초풍을 하겠지. 그 돈으로 술이나 한번 걸판지게 사주려고 했더니. 멍청한 놈, 곰방대나 차고 다니면서 실컷 신역 고되게 살아봐라. 무슨 영화가 오는지, 양반 뼈대는 아무나 보존한다더냐.
정재규는 송수익의 모습이 사라져 버린 대문 쪽을 바라본 채 비웃음을 흘리고 서 있었다. 송수익은 빠른 걸음으로 김제를 벗어나며 떫게 웃고 있었다. 들녘에는 어스름이 엷은 회색빛으로 내리고 있었다. 새 쫓는 소리들이 간곳없는 들녘에는 저녁의 고요가 어스름의 두께를 따라 깊은 적막으로 쌓여가고 있었다. 어스름에 쫓기듯 참새 떼들이 부산스러운 날갯짓을 해대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송수익은 해질녘의 그 아늑하면서도 슬픔인 듯싶은 들녘의 정경을 가슴 가득 안으며 숨을 들이켰다. 벌써 벼를 베어낸 자리가 무슨 흠집이나 흉터처럼 드문드문 드러나 보였다. 그런 자리가 눈에 띌 때마다 송수익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자리는 어느 배고픈 사람들이 서둘러 낫질을 한 것이 아니었다. 항시 배불러 입맛이 까다로운 어느 양반들이 올벼쌀을 만들고, 남 먼저 햅쌀을 먹으려고 한 짓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양반 지체를 똥통에 처박고..."
아직 뇌리에 남아 있는 정재규의 말의 찌꺼기였다. 송수익은 곰방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는 정재규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정재규는 흔한 양반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자신이 그를 찾아갔던 것은 아는 얼굴들 중에서 그나마 말이 통하리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잘못은 그를 그렇게 생각한 자신에게 있었다. 그가 물려받게 될 재산 중에서 반의 반 정도만 털어놓게 되면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예 말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글방에서의 그가 아니었다. 글방공부를 마친 다음 장가를 들고, 아버지가 아파 직접 재산관리를 하게 되고 한 몇 년 동안에 그는 세상의 흐름과는 담을 쌓은 탐욕스럽고 지엄한 양반님네가 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상놈들도 차등 없이 고루 가르친다는 학교를 세우려고 양반의 권세 중의 하나인 재산을 내놓지 않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학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에게 할 말은 많았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그에게 무슨 말이든 다 부질없는 소리일 뿐이었다. 송수익은 외로움을 느꼈다. 그건 학교를 세울 가망이 없는 안타까움이기도 했다. 벌판이 넓은 만큼 부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찾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가진 재산이라고는 논 40마지가 고작이었다.
송수익은 동네 어귀에 있는 주막으로 들어섰다. 술 한 잔을 하지 않고서는 집으로 들어갈 기분이 아니었다.
"아이고 선상님, 어서 오시게라우."
혈색 좋은 주모가 반색을 하며 송수익을 맞이했다. 주모는 말인사로는 부족한 것인지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허리가 반으로 접히도록 깊은 절을 했다. 그 공손한 예절차림은 주막의 주모한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장사는 잘되시오?"
송수익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그가 쓰는 존대 또한 주모한테 쓰는 말로는 좀체 듣기 어려운 것이었다. 평민들도 주모를 상대할 때는 반말이 예사였다. 그는 테 큰 갓을 쓰지 않았지만 두루마기에서 그의 신분이 금방 드러났다.
"야아, 그냥저냥 묵고 살지라우. 날이 써늘헌디 얼렁 방으로 드시제라."
주모가 옆걸음을 쳤다. 마루에는 두 남자가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동길이는 공부 잘허는가요?"
"야아, 선상님 덕분에 자알 허능마요."
주모는 허리를 굽실거리며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한때는 자신의 아들을 차별 없이 가르쳐주었고 그 뒤로도 아들을 꼭꼭 기억해 주는 송 선생이 그녀는 이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사람이었다.
송수익은 술 사발을 기울이며 정재규를 생각했다. 그는 지금쯤 기생을 끼고 술타령이 한창일지 아니면 그냥 집으로 돌아갔을지 궁금했다. 아마도 기왕 내친걸음이고, 술상을 차리게 했으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돌아가려 해도 영악한 기생어멈이며 기생이 그냥 놓아주었을 리가 없었다.
"아, 내게 그 재산만 있었더라도..."
송수익은 술 사발을 놓으며 탄식했다.
"재산을 더 모을라고 허지 말라. 땅으로 재산을 모으는 것은 결국 농부들의 살을 깎고 피를 빠는 일이다. 세상에 그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느냐. 재산을 탐하면 마음이 썩는다. 마음이 썩으면 죄짓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죄짓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가 어찌 바르게 살 수 있겠느냐. 내가 남기는 전답을 주색잡기 하지 않고 간수만 제대로 하면 네 권속 입고 먹는 것은 족하다. 재산을 탐하지 말고 바르게 살도록 마음을 가꾸기에 게을리 하지 말라. 그것이 바른 사람의 길이고, 옳은 양반의 길이다."
그 탄식을 꾸짖기라도 하듯 쟁쟁히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송수익은 눈을 내리감았다. 아버지가 떠나신 뒤로 그 말씀을 지키며 살려고 애써왔었다. 그런데 학교를 세우려는 뜻이 막히게 되자 불현듯 재산 많은 자가 부러워진 것이었다.
그렇지, 탐욕이 컸으니 많은 재산을 모았을 것이고, 재산이 많은 만큼 마음이 썩었을테니 좋은 일에 돈을 쓸 리가 없지.
송수익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떴다. 그리고 사발에 천천히 술을 따랐다.
"어허, 내 말얼 믿으란 말이시. 소작언 틀림없이 삼칠제고, 종자대고 세금이고 다 요시다 쪽서 물기로 헌당께로. 논값도 내가 들어서 20전씩 더 받게 맹근 것 아닌가."
밖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송수익은 술을 따르다 말고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 대꾸하는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이사람아, 의심이 병이여. 왜놈이다고 다 거짓말허간디? 그것이 거짓말이먼 내 손꾸락에 장얼 지짐세. 어찐가, 낼 거래 마치드라고 잉."
송수익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 마루로 나섰다.
"거기 뉘시오!"
송수익은 두 남자쪽으로 걸어가며 대뜸 이렇게 말을 던졌다.
"아, 아니, 선상님 어쩐 일이신게라우. 안녕허신가요?"
한 남자가 송수익을 알아보며 몸을 일으켰다.
"아, 아랫말 이서방 아니시오."
송수익도 그 남자를 알아보았다.
"듣자 허니 이서방 논을 팔라고 허는 모양인디. 이서방은 어쩔 생각이오?"
송수익은 다른 한 남자를 묵살해 버린 채 이서방에게 바로 물었다.
"글씨요... 벨로 맘에 없는디 자꼬 팔아넴기라고 해싸서 당최 이거..."
이서방은 말을 어물거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당신 누구여! 당신이 먼디 넘 일에 끼들고 이려."
버럭 소리지르며 몸을 일으킨 남자가 송수익에게 삿대질을 했다.
"나 송수익이라는 사람이오. 댁은 뉘시오?"
송수익은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서, 아서. 선상님헌티 이래서넌 안 되는 거이여."
이서방이 재빨리 그 남자를 막아섰다.
"허! 말허넌 거이 논얼 못 팔게 헐라고 그러는 모양인디, 넘 잔치에 어찌서 배 놔라 감 놔라여. 양반이먼 점잖허니 있을 일이제 공연시 넘일에 훼방 놓고 들다가넌 안 존 일 당헐 것잉마."
그 남자는 술기운인지 어쩐지 불량기를 피워내며 거침없이 소리를 질렀다. 송수익은 저놈이 왜놈을 믿고 저리 기를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것이 무신 일이여, 선상님 앞이서 이 무신 버르장머리 없는 말질이당가 말질이. 아무리 술이 취혔어도 상하넌 알아봐얄 거 아니겄소. 가시오, 얼렁 가!"
주모가 그 남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누가 술이 취혔다고 이려. 넘 일얼 망칠라고 든 거넌 저짝이란 말이여. 어찌서 넘이 애씀서 해논 일얼 망치고 드는지 따질 것은 따져야제 가기넌 어디로 가!"
그 남자는 주모의 팔을 뿌리쳤다.
"이런 못된 놈아, 따지겠으면 어디 따져봐라. 세상에 할 짓이 없어서 왜놈 앞잽이 질이나 해묵는 놈이 뭐가 잘났다고 주둥아리를 놀리는 거냐. 이놈아, 당장 앞으로 나서라! 마당에 패디기를 치고 말 것이다."
송수익의 호령이었다. 그러나 그는 상대방의 기를 꺾기 위해 큰소리를 친 것이 아니었다. 정말 패대기를 치려는 듯 두루마기를 벗어젖히고 있었다.
"아이고 선상님, 참으시제라. 주모, 어서 그 사람 내치랑게."
이서방은 송수익을 막아서랴 주모에게 이르랴 정신이 없었다.
"아, 얼렁 가시오 얼렁. 여그가 어쩐 동네라고 눈치 없이 나대고 그렁게라."
주모가 그 남자의 팔을 마구 잡아끌었다. 그 남자는 송수익의 서슬에 기가 질렸는지 더는 군소리가 없이 토방을 내려섰다.
"헹, 양반 우세 얼매나 큰지 어디 두고 보드라고 잉."
그 남자가 어둠이 짙어진 사립 밖으로 나서며 큰소리로 내뱉은 소리였다.
"못된 놈, 고이얀 놈!"
송수익이 두루마기의 옷고름을 매며 진득거리는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선상님, 논언 안 팔겄구만이라. 지가 진작에 안 판다고 했는디도 어찌 성가시게 쫓아댕기는 바람에 여그꺼정 나오게 되었구만이라우."
이서방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송수익의 눈치를 살폈다.
"잘 생각했소. 농사꾼이 논을 팔아서야 되겠소. 그건 큰일 날 일이오."
송수익은 이 서방을 바라보며 웃었다.
"우선 묵기넌 꼬깜이 달드라고 논덜 팔아묵는 것 보먼 이년 가심이 다 땁땁해징마요. 논 팔아 광목 떠서 식구대로 옷 해입고, 석유지름 사서 불씨고, 아그덜 박하사탕 사믹이고, 그리 풍청풍청 돈 다 씨고 그담에넌 어찌덜 살란지 모를 일이랑게라."
술상을 새로 내온 주모가 이서방 들으라는 듯 푸념조로 하는 말이었다. 마루에 자리잡은 송수익은 주모의 눈 밝은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서방은 논이 몇 마지기나 있소?"
송수익은 곰방대에 담배를 재며 물었다.
"양, 열두 마지기인디라우."
"자식은 몇이나 뒀소?"
"넷이구만이라."
"그 논에 그 자식이면 형편이 넉넉허지는 못하겠구만요. 자식들은 커나는데 논을 더 사 붙이지는 못해도 그 논을 잘 간수하도록 허시오. 왜놈들이 우선 듣기 좋은 말로 이런저런 소리들 하지만 그것이 어찌 다 믿을 수 있는 말이겄소. 내 생각으로는 사람들이 생각 짧게 다 속고 있는 것이오."
송수익의 말은 차분하고 다정했다.
"야아, 명념허겄구만요. 그런디, 왜놈덜헌티 땅얼 팔아묵는 것은 어찌 보먼 그만치 나라럴 팔아묵는 거이 아닐랑가요?"
이서방의 말에 송수익은 문득 놀랐다. 자신이 해주고 싶었던 말을 그가 먼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맞는 말이오.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오."
"그런디 어찌서 나라서넌 왜놈덜이 그 짓얼 못허게 안 막는게라우."
그건 예상하지 못한 물음이었다. 송수익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임금의 무능과 대신들의 사욕에 찬 망동과 무력을 앞세운 왜놈들의 교활한 술책에 대해서 할 말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말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라에서 왜놈들을 막아주기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선에 사람들이 눈 크게 뜨고 자기들 재산을 지키는 것이 더 중헌 일이오. 나라가 가난 구제 못하더라고 자기 재산 자기가 지키는 것이 상수 아니겠소."
맥 빠지고 한심한 소리인 줄 알면서도 송수익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 무식해 논게 귀만 얇고 머시가 먼지럴 알아야제라."
이서방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허나, 내가 그간에 여기저기 알아보니 논을 판 사람들은 거의가 딱한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었소. 귀가 얇아 논을 판 사람은 열에 한둘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간에 빚에 쪼들려 살아온 사람들이었소. 논 값이 올랐으니 빚을 갚고도 돈을 좀 쥐게 된다 그 말이오. 애초에 논은 얼마 안되고, 자식들은 생겨나고, 이런저런 잡세는 많고, 빚돈 이자는 높아 빚은 늘어가고, 다 세상이 잘못되어 그런 딱한 사람들이 생겨났으니 논을 팔았다고 해서 그 사람들만 나무랄 수도 없는 일 아니겠소."
송수익은 한숨 대신 끄응 힘을 쓰며 술잔을 들었다.
"아이고 선상님언 속사정얼 훤허니 다 알로 기시느만이라우."
이서방은 감탄하듯 말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이고, 우리 선상님이 몰르시는 거이 머시가 있다요. 양반님네덜이다 우리 선상님만 같음사 시상이 얼매나 살기 좋고 편안해지겄소."
주모가 말을 거들고 나섰다.
"무슨 그런 말을..."
송수익은 쑥스러워하며 자리를 고쳐 앉고는,
"나는 그간에 동네사람들한테 논을 팔아넘기지 말라고 당부해 왔소. 이서방도 아는 사람들이 논을 팔려고 하거든 내 일이거니 생각하고 말리는 게 좋겠소. 서로가 그리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소."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말했다.
"야아, 알겄구만이라우."
"난 이만 가봐야겠소. 잘 쉬었소."
송수익은 이서방과 주모에게 눈인사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어둠 속에 희붐하게 드러나는 들길을 밟으며 그동안 삼사 년 사이에 김제 만경을 비롯한 호남평야 일대에서 왜놈들의 손에 넘어간 땅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막상 얼마 정도가 될 것인지 어림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막연히 엄청나게 많으리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관청에서도 제대로 모를 일을 개인이 알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가슴이 답답하게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날이 갈수록 위로는 정치권력이 왜놈들 손아귀에 쥐여잡히고 아래로는 땅이 왜놈들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건 국권과 국토의 동시적 상실이었다. 그 두 가지가 계속 팽창되다 보면 결국 나라는 없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국운이 풍전등화... 그는 신음을 씹었다. 그건 상상하기조차 무섭고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밀어닥쳐 오고 있는 위협이었다.
왜놈 앞잡이는 주막에서 술을 받아주기까지 하면서 논을 팔라고 회유하고 있었다. 그자는 일진회를 결성한 송병준이나 이용구에 비하면 좀벌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좀벌레가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 수백 마리인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큰 기둥도 밑에서 좀벌레들이 슬어대면 무너지게 마련이었다. 그런 자들 수백명이 계속 설치고 다니면 호남평야는 결국 왜놈들에게 장악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개인적으로 자작농이 소작농 신세로 전락하는 것이었고 전체적으로는 조선 사람들의 목숨 줄이 돈 많은 왜놈들의 손아귀에 틀어 잡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는 송병준이란 놈이 하필이면 <송가>인 것에 또 수치와 분노를 느끼며 집 앞에 이르고 있었다.
송수익은 간밤에 설친 잠으로 몸이 묵지근한 것을 느끼며 오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신문을 뒤적거리면서도 학교 세울 궁리에 빠져 있었다.
"여그가 송수익이 집이제. 송수익이 어딨어, 당장 나와!"
갑자기 밖에서 들려온 외침이었다. 송수익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는 불쾌감과 동시에 불길함을 느꼈다. 누가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마구잡이로 불러대는 호령을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송수익이, 있어 없어! 있으먼 당장 나오랑게로!"
더 커진 고함이었다. 송수익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관청에서 나왔을까? 그럴 만한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었다. 관청에서 나왔더라도 저런 식으로 무례하고 거침없이 기를 세울 리는 없었다. 자신은 명색이 양반이었던 것이다.
"감히 어떤 놈이냐!"
송수익은 방문을 열어젖히며 호령했다. 상한 감정이 폭발하는 그의 굵은 목소리는 쿠렁하게 울려 퍼졌다. 마루로 나선 송수익의 눈에 잡힌 것은 일본헌병 둘과 통변이 분명한 조선 놈 하나였다. 방자하게 소리를 지른 것이 틀림없는 조선 놈을 그는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송수익이여?"
고개를 치켜든 통변의 말이었다.
"너 이놈, 어디다가 입을 함부로 놀려대는 거냐!"
송수익이 팔을 쭉 펼치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노기는 곧게 뻗은 검지 손가락을 타고 화살이 되어 통변에게로 날아가고 있었다.
"힝! 죄진 양반도 양반이여? 죄인헌티 존대 쓰는 법 없는겨."
통변은 코웃음을 치며 두 헌병에게 고갯짓을 했다. 헌병 둘은 지체 없이 송수익을 향해 내달았다. 장총을 들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헌병을 보고 송수익은 전신에 팽팽한 긴장을 느꼈다. 그리고 정재규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무슨 감정보복을 하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러나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두 헌병이 구둣발인 채 마루로 뛰어올랐다.
"이놈들아, 물러서!"
송수익이 고함을 질렀다. 그의 부릅뜬 눈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주춤하는 것 같던 두 헌병이 달겨 들었다. 그는 조금 앞선 헌병의 가슴을 떠다 밀었다. 기습을 당한 헌병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바가야로!"
다른 헌병이 소리치며 총을 뒤로 빼는 듯했다가 총 끝으로 송수익의 복부를 일직선으로 찔렀다.
"윽!"
송수익은 막힌 소리를 토하며 허리를 접었다. 그때 몸을 바로잡은 첫 번째 헌병이 개머리판으로 송수익의 어깻죽지를 내리쳤다. 송수익은 다시 신음을 토하며 마루에 푹 고꾸라졌다.
"아이고 서방님, 서방님!"
그때서야 안채 쪽에서 쫓아 나온 머슴이 정신없이 달겨 들고 있었다.
"바가야로!"
헌병 하나가 또 소리치며 머슴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머슴은 뚝 멈춰서는가 싶더니 눈이 희게 뒤집어지며 댓돌 옆에 나동그라졌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헌병은 익숙한 솜씨로 송수익의 두 팔을 모아 쇠고랑을 채우고 있었다. 송수익은 반항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배가 비비틀리고 아파 전혀 기운을 쓸 수가 없었다. 헌병이 송수익의 허벅지를 툭툭 차며 뭐라고 지껄였다. 그때까지 비식이 웃으며 구경만 하고 있던 통변이 입을 열었다.
"송수익이, 인자 가보드라고 잉."
송수익은 이빨을 악물며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그는 헌병 놈들보다 통변에게 더 강한 증오를 느끼고 있었다.
바로 너 같은 인간 말종들이 있으니 왜놈들 기세가 날로 커지는 것이다. 이 어리석고 불쌍한 종자들아!
헌병 둘이서 송수익을 일으켜 세웠다. 얼굴이 일그러진 송수익은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배창자가 꼬이고 비틀리는 통증을 이겨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엄살허지 말고 착착 걷드라고."
통변이 비웃음을 날리며 돌아섰다. 송수익은 또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송수익은 겨우겨우 걸어 대문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정신을 잃은 머슴은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송수익이 동네를 벗어날 즈음에 동네사람들이 그의 쇠고랑 찬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들길을 오 리쯤 걷고서야 송수익은 허리를 제대로 펼 수 있었다. 억지로나마 몸을 움직이자 뱃속의 뒤틀림이 차츰 가라앉으면서 기운이 회복되었던 것이다. 몸에 기운이 돌기 시작함에 따라 송수익의 걸음은 빨라지고 있었다. 두 팔을 등 뒤로 엮어 쇠고랑을 차고 일본헌병들에게 잡혀가는 자신의 흉측하고 수치스러운 꼴을 한시라도 빨리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송수익은 다시 정재규를 생각해 보았다. 술자리를 거절해 버린 것을 그가 모독으로 받아들였다 해도 주재소에 어떤 모함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제 자신이 했던 말 중에서 악의를 가지고 확대하거나 왜곡시키면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재규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송수익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왜 쇠고랑을 차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통변 놈에게 그 이유를 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놈을 더 방자하게 만들어줄 수는 없었다. 새 쫓는 소리들은 여전히 들녘을 울리고 있었다. 송수익은 그 힘겨운 소리들을 들으며 오늘의 모독과 분노를 가슴 벽에 각인하고 있었다.
"당신 언제부터 동학 잔당과 내통해 왔어."
이름을 확인하고 난 주재소장의 첫 번째 물음이었다. 송수익은 자신이 엉뚱한 덫에 차이고 있음을 직감했다. <동학 잔당과 내통>이라는 죄목은 곧 목숨과 맞바꾸는 죄목이었다. 최근까지도 그 죄목은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어금니를 맞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런 일 추호도 없다."
송수익은 주재소장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의 각이 진 눈에서는 분노의 불꽃이 튀고 있었다.
"잔소리 마라! 우린 증거를 다 가지고 있어."
주재소장은 카랑하게 째지는 소리를 지르며 굵은 막대기로 책상을 내리쳤다.
"난 조선 사람이다. 왜놈한테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겠다."
이 말을 내쏜 송수익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뭐라고? 왜놈! 이자식이 어디다 대고 그따위 말버릇이야. 그래도 양반이라고 점잖게 대해 줬더니 이거 영 틀려먹은 놈이로구만!"
화가 치솟긴 주재소장을 책상을 마구 내리쳤다. 그러나 고개를 숙여버린 송수익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개 들어. 이자식아, 고개 들라니까!"
그러나 송수익의 숙인 고개는 조금도 움직임이 없었다.
"고개 들으란 말이여."
통변이 송수익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너 언제부터 동학당과 내통했냐니까!"
주재소장의 얼굴은 험상궂게 변해 있었다. 고개를 숙일 수 없게 된 송수익은 이제 눈을 감아버렸다.
"아자식아, 뼈가 부러지게 맞어야 정신 차리겠나!"
제 말에 힘을 넣듯이 주재소장을 또 책상을 내리쳤다. 그러나 송수익의 눈은 뜨이지 않았다.
"이놈 이거 악질이로구만. 다른 일 바쁘니깐 우선 갖다 처넣어."
주재소장이 침을 내뱉었다.
송수익은 유치장에 갇혀서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그런 가당치도 않은 모함을 한 것인지 짐작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동학과의 내통>이라고 하니 정재규는 더구나 아니었다. 그는 동학에 대해서 생각했다. 지난번 일진회 결성에 이용구가 앞으로 나섬으로써 동학은 완전히 반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한때 동학군 장수였던 이용구가 변절해 경의선 철도공사에 북쪽 동학도들을 20만이 넘게 동원하면서부터 동학은 반 동강이 나기 시작했고, 민심을 잃게 되었다. 이제 이용구가 일진회의 거두가 되었으니 그 영향력 아래 있는 동학도들은 고스란히 일진회 회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북쪽의 동학은 더 이상 동학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뿌리가 남은 것은 남쪽이었다. 나라가 망하자니 이용구 같은 흉물이 나타나 동학의 정신을 정반대로 뒤집어 이용해먹는 변고까지 생기고 있었다.
송수익은 더 취조를 받지 않고 저녁때 국밥 한 그릇을 얻어먹었다.
"송수익, 일어나. 얼렁 일어나랑게."
그는 눈을 껌벅였다. 잠이 안 오던 밤이 어느새 밝아 있었다.
"당신네 문중을 봐서 이번엔 특별히 눈감아 주기로 했소. 앞으론 일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방해하고 다니지 마시오. 그건 동학당이나 마찬가지 짓이오."
주재소장의 말이었다.
뭐라고!
그때서야 송수익의 머리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젯밤 주막에서의 일이었다. 자신이 어떤 경로를 거쳐 잡혀오게 되었는지 일직선으로 연결이 되었다. 그 신속함에 그는 전신이 저릿거리는 전율을 느꼈다. 논을 사들이고 있는 왜놈들은 그저 돈 많은 개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놈들은 주재소와 연결되어 있고, 주재소의 무력은 조직적으로 그놈들을 비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으며 그는 무릎이 꺾이는 절망을 느꼈다.
송수익은 주재소를 나와서야 문중회의가 열렸다는 것을 알았다. 문중의 압력으로 쉽게 풀려나긴 했지만 그는 기분이 영 찜찜했다. 문중 어른들은 자신이 상투를 자른 것이며 그 밖의 행위에 대해서 고깝고 마땅찮게 여기고 있었다. 양반이란 신분을 지키고자 하는 문중 어른들의 집요함은 정재규의 생각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양반 중에서도 얼마나 품격 높고 질 좋은 양반인가에 대해 끝도 없이 강조했다. 따라서 조상들이 대대로 얼마나 높은 벼슬들을 해내려 왔는지를 수없이 되풀이해서 자식들이 그 사실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암기하기를 강요했다. 그들은 문중 자랑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다 보니 정작 자기 스스로는 무위도식하는 신세이면서도 어느 때는 우의정이 되고 어느 때는 평양감사가 되고 어느 때는 영의정도 되는 착각과 혼란에 빠져 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위도식을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창피스러워할 줄을 몰랐고, 오로지 문중의 내력을 미화시켜 자손들에게 전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할 일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만족해했고 또 확신하고 있었다. 그 외에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면 선대에서 물려받은 재산을 더 늘려 가세를 더욱 번창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문중 어른들 앞에서 상투를 자른다느니, 상것들을 존대한다느니 하는 것은 참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문중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망동이었고, 족보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만행으로 지탄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간에 어른들 앞에 불려가 호된 책망을 들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주재소 출입까지 하는 소란을 피웠으니 회의에서 좋은 소리가 오갔을 까닭이 없었다.
송수익은 집으로 가기 전에 아랫마을 이 서방부터 먼저 찾아갔다.
"왜놈들한테 논 팔아먹지 말라는 말을 내놓고 허지는 마시오. 그저 눈치껏 하면서 말조심하는 게 좋겠소."
그가 이 서방한테 이른 말이었다. 만약 이 서방이 잡혀 들어갔다가는 그놈들이 밀어 넣는 함정에 꼼짝없이 빠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 서방은 재력은 물론 문중의 힘도 허약했던 것이다. 그런 그를 한시바삐 위험 앞에서 비켜 세워야 했다.
이건 이제 내 나라, 내 땅이 아니로구나...
집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는 송수익의 심정은 비감할 뿐이었다. 잡혀가지 않으려고 저항했다가 폭력 앞에서 어이없이 허물어지고 만 자신의 몰골이 자꾸만 곱씹히고 있었다. 그런 식의 저항이란 백의 백 사람이 해보았자 똑같은 꼴이 될 뿐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는 괴롭게 신음했다.
해가 기울면서 집집마다 파아란 연기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매캐하고도 쌉싸름한 연기냄새가 땅바닥을 기며 퍼지고 있었다. 땅거미를 밟으며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달랑 든 그 남자의 행색은 체구에 비해 너무 남루했다. 철 지난 삼베옷은 낡을 대로 낡아 흐물거릴 지경이었고, 발에 꿰고 있는 짚신도 칡넝쿨을 둘러 묶고 있었다. 때 전 수건을 동인 상투머리도 헝클어진 채 지푸라기 같은 것들이 붙어 있었다. 작은 보따리 대신 바가지를 들었더라면 영락없는 거렁뱅이였다.
"만복아아- 마안복아아-"
그런데 고샅으로 접어들며 그 남자가 거침없이 외치기 시작한 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볼품없는 행색과는 달리 당당하고 어기찼다.
"만복아아- 만보가아아-"
그 남자는 철도공사장에서 돌아오고 있는 지삼출이었다. 지삼출의 목소리를 먼저 알아들은 것은 그의 아내가 아니라 감골 댁이었
다. 그의 집은 아직 멀었고, 집이 가까운 감골 댁의 귀에 그의 목소리가 먼저 잡혔던 것이다.
"아이고 아이고, 요것이 누구여! 자네, 자네, 만복이 아범 아니라고!"
허둥지둥 사립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는 감골 댁의 반가움에 겨운 외침이었다.
"아이고 아줌니, 어찌 지내셨는게라우!"
아들을 불러대느라고 정신이 없던 지삼출도 감골 댁을 보자 금방 얼싸안을 듯이 반가워했다.
"이, 자네 몸이나 성헌가, 몸이나 성헌가... "
감골 댁은 지삼출의 몸을 쓰다듬는 것처럼 손짓하며 그 눈길은 얼굴에서부터 온몸을 훑어 내리고 있었다. 그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고 있었다.
"야아, 몸이야 성허고말고라."
지삼출은 보란 듯이 가슴을 쫙 펴 보였다. 그의 검게 그을은 얼굴은 넉넉하게 웃고 있었다.
"그간에 얼매나 고상이 심혔능가..."
고개를 떨구는 감골 댁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고상언 무신 고상이다요. 영근이헌티서넌 소식 왔능게라."
지삼출은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감골 댁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소식이 없다는 말인게라우."
감골 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이 어쩐 일이당가요?"
"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제 머."
감골 댁이 눈물을 훔치며 겨우 한 대답이었다. 그 대답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주 댁이 자신에게 했던 것이었다.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니시. 얼렁 집으로 가야제. 그간에 무주 댁 가심이 숯 다 되었네. 어여 가세."
감골 댁은 앞서 발길을 잡았다.
"숯언 무신 숯 되고 말고 혀라, 다 한땅에 있는디."
지삼출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그나저나 영근이가 요상허시. 떠난 지 다섯 달이 다 차가는디 어째 소식이 없능고."
그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주 댁도 아그덜도 다 무사허시."
이번에는 감골 댁이 말머리를 돌렸다. 지삼출은 아무 반응 없이 발걸음만 옮겨놓고 있었다. 방영근의 소식을 어떻게 알아야 할 것인지 그는 막막할 뿐이었다. 지삼출이 작은 보따리에서 꺼내놓은 것은 엿 예닐곱 가락이었다. 그는 엿 다섯 가락을 따로 싸서 감골 댁 앞에 내놓았다.
"아그덜 하나썩 맛이나 뵈시오."
"아니시, 아니여. 만복이허고 곱단이나 믹이소. 우리 아그덜이야 다컸응게."
감골 댁은 엿을 되밀어놓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것은 그냥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감골 댁은 그 엿이 얼마나 힘들게 모아진 돈으로 산 것인지 다 아는 터라 진정으로 사양했다.
"입이야 다 똑같으요. 얼렁 챙기시게라."
지삼출은 엿을 다시 밀었다.
"나 인자 가볼랑마."
감골 댁은 서둘러 일어났다.
"어허, 어찌 그래싸시오."
지삼출이 엿을 들고 따라 일어섰다.
"밥이 다됐넌디 한술 뜨고 가시지라우."
무주 댁이 부엌에서 나오며 말했다.
"아니시, 아녀. 집이 가서 묵을라네."
감골 댁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서로 없는 살림에 한 끼 밥이라도 축내는 것, 그것처럼 눈치 없고 속빈 짓도 없었던 것이다.
"밥이야 어쩌그나 이 엿언 꼭 가지가야 허요."
지삼출이 엿을 감골 댁의 손에 들려주었다. 감골 댁은 가슴이 찡 울렸다.
"이 귀헌 것얼... 자알 묵겄네."
감골 댁은 엿 뭉치를 가슴에 품듯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지삼출이가 그 돈 2원에 대해 묻지 않은 것을 더없는 다행으로 여겼다. 그 돈을 받아내려다가 끌려가 넉 달이 넘게 고생하고 돌아온 사람 앞에서 그 돈을 결국 못 받았다는 말을 꺼내기는 그 얼마나 면목 없는 일인가. 지삼출은 자기가 헛고생한 것을 알면 속이 뒤집힐 것이었다. 그 일을 그냥 덮고 넘어갈 수는 없다 하더라도 될 수 있는 대로 늦게 알게 하고 싶었다. 지삼출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금방 퍼져나갔다. 그가 그토록 소리를 질러대며 고샅을 누볐으니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없었다. 지삼출이 숟가락도 놓기 전에 서너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는 동네 사랑방으로 행차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풀 먹인 옷을 갈아입은 그의 모습은 이제 사람 꼴을 갖추고 있었다. 사랑방에 네댓 명이 빼곡하게 모여 앉았다. 관솔불빛도 흐린데다가 담배를 피워대니 연기가지 가득 차 방안은 더욱 어둠침침했다.
"철길공사넌 다 끝난 것이당가?"
누군가가 물었다.
"사람 억지로 끌어내 놓고 맨입으로 이얘기 듣자는 것이여?"
지삼출의 대꾸 아닌 대꾸였다.
"마누래 품고 돌아갈 것얼 훼방 놓고 있는 판이니 그럴 수야 있간디? 곧 술 오리고 혔네."
"이, 아까 말이시 저 사람 마누래가 미운 눈으로 내 뒤꼭지럴 꼬나보드랑게로."
"어찌 안 그러겄어. 넉 달이나 독수공방이였는디. 자네덜 인자 원수샀네."
"이놈덜아, 느그덜언 뒤꼭지에도 눈 달고 댕기냐? 느그덜언 우리 마누래헌티 미움 사 인자 3년 재수 없게 생겼다."
지삼출의 능청스러운 말에 모두는 와아 웃음을 터뜨렸다.
"문 열어, 술이여 술."
밖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방안의 사람들은 모두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술동이가 방 가운데 놓였다. 술동이에는 조롱박 하나가 긴 목을 동잇가에 걸친 채 가볍게 떠있었다. 김치가 봉우리를 이룬 사발 하나가 술동이 옆에 놓였다 .그리고 방문이 닫겼다. 올 것이 다 온 것이었다.
"짜아, 오늘이야 삼출이가 진객이니께 나이넌 다 접어두고 삼출이보톰 쭈욱 한잔!"
바른말 잘하고 나서기 좋아한다고 <초라니>라는 별명을 가진 임덕구가 조롱박의 손잡이를 잡고 술을 휘저으며 신명나는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조롱박에 막걸리를 넘쳐흐르게 떠서 지삼출에게 건넸다.
"아니여, 무신 베슬허고 온 것도 아닌디 나이 순으로 히야제 될 말이랑가?"
지삼출은 조롱박 받기를 주저하며 아랫목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아니시, 아녀. 저 초라니가 가다가 옳은 말 혔구만. 얼렁 들소."
"그간에 얼매나 고상혔능가. 어여 들어."
지삼출보다 서너 살쯤 많아 보이는 두 남자가 웃음으로 술을 권했다.
"인사 치렀응게 얼렁 마셔, 얼렁. 술 어서 들오라고 다덜 목구녁서 당그래질허고 난리시 시방."
임덕구가 빠르게 말하고는 손가락으로 김치 쪽을 집어 날름 입에 넣었다.
"아이고 저 초라니 방정. 당그래질허는 것언 바로 니놈 목구녁이다."
누군가가 내질렀고, 방안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임덕구도 김치를 씹으며 속 좋게 웃고 있었다. 지삼출이 조롱박을 기울이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넘어갈 때마다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꿀럭꿀럭 소리내며 오르내렸다. 누군가의 입맛다시는 소리가 섞이기도 했다.
"맛나게도 마시네. 그간에 술 한 모금도 못 얻어묵고 살었는가부네."
큰 눈이 툭 튀어나와 <왕방울>이란 별명이 붙어 있는 주성춘이가 큰 눈을 껌벅거리며 혀를 찼다.
"아이고, 삼출이가 짠히서 저 왕방울 눈에 눈물 맺히겄다. 술독에 눈물 떨어져 술 짜지는디 뒤로 나앉어."
것지르고 대지르는 말에 이골난 손판석의 말이었다. 그는 성질이 강하고 고집이 세서 <판석>이가 아니라 <돌석>이라고 불리었다. 이름 끝자가 돌 석자니까 별명을 한글로 풀어놓으면 <돌돌>이 되는 셈이었다.
"어 씨언허다!"
입을 한 번도 떼지 않고 조롱박을 다 비운 지삼출이 숨을 토해냈다. 그는 손등으로 입을 쓱 훔치고 나서 손가락으로 김치를 가득 집어 입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바지의 엉치께에 씩씩 문질렀다. 조롱박은 나이순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조롱박을 따라 정이 오가고, 술기운을 따라 사랑방에는 화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철길이 다됐응게 우리도 인자 신식으로 살기가 좋아질랑가? 자네 생각언 어쩐가, 삼출이."
임덕구가 술기운 도는 눈으로 지삼출을 쳐다보았다.
"그런 소리 허덜 말어. 그거이 다 왜놈덜이 지어낸 헛소리고, 넋 빠진 조선 놈덜이 맞장구 치는 소리여. 철길이야 조선 사람덜이 골 빠지고 새빠지게 일혀서 왜놈덜 발에 발통 달아준 것이제, 우리헌티넌 손해가 났으먼 났지 아무 이문도 없는 일이란 것얼 알아야 쓰네."
지삼출의 대답은 냉담했다.
"그거이 무신 소리당가?"
아랫목에 앉은 남자가 관심을 드러냈다.
"더 두고 볼 일인디, 우선에 왜놈덜이 기차라는 것얼 공짜로 태와주는 것이 아닝게 왜놈덜 돈벌이 시켜주는 것이고, 또 왜놈덜이 철길얼 이 나라 뺏어묵는 일에 써묵게 된다 그것이여."
"철길이 총이간디 그리 써묵어?"
주성춘이 큰눈을 껌벅껌벅했다.
"답답허시. 총만 총이간디? 철길얼 사방팔방으로 깔아놓고 즈그 군대럴 빨르게 실어날르고, 즈그가 좋아허는 물자 여그서 모아 일본으로 실어가기 쉽게 써묵고, 그리 될 것이다. 그 말이여."
"이, 그 말이 맞을 상싶은디."
"그려. 그리 되먼 예삿일이 아니시."
방안 사람들은 모두가 긴장했다.
"그거이 자네 혼자 묵은 생각이여?"
손판석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아니시, 나도 공사판서 듣고서야 그 속얼 알었구만."
"공사판 사람덜언 그런 속얼 다 안가?"
아랫목의 남자가 고개를 빼며 물었다.
"쉬쉬 허는 속이서 퍼진 말잉게 거지반 다 알겄지라 이."
"우리도 내놓고 헐 소리가 아닌디."
누군가의 중얼거림이었다.
"하먼. 송 선상도 그리 험허게 잡아가는 판잉게 우리 같은 것덜이야 더 말 헐 거이 없네. 다덜 속으로만 알아두소."
아랫목의 남자가 좌중을 훑어보았다.
"어이, 가만 잠 있어보소. 송 선상이 잽혀 들어갔다는 소리가 먼 소리랑가? 무신 일이 났등가?"
지삼출이 놀란 얼굴로 초라니 임덕구에게 물었다.
"이, 자네넌 안직 모르고 있겄구마. 송 선상이 두 팔 뒤로 엮여 쇠고랑 차고 왜놈헌병덜헌티 잽혀갔는디, 그 일이 어찌 된 것잉고 허니..."
임덕구는 목을 늘여 마른침을 삼키며 자리를 고쳐앉고는,
"여그 징게 맹갱 들얼 미친년 널뛰딧기 험서 마구잽이로 사딜이는 왜놈덜 중에 요시다라는 놈이 있는디, 그놈 심바람꾼 하나가 저그 저 궁뎅이 큰 예펜에 주막집서 아랫말 이서방헌티 술얼 받어줌스로 논얼 즈그헌티 팔아넴기라고 조청 발르고 깨소금 치고 콩가리 묻힌 말로 사리살살 꼬디기고 있드라그거시여. 헌디 방안이서 술얼 묵고 있든 송 선상이 그 달착지근허고 꼬시고 고소롬헌 말얼 다 듣다봉게 그거시 모다 귀 간질간질허게 맨글고 간 사리살짝 녹게 맨글고 허파에 바람 팅팅 차게 맨그는 거짓말이라. 그리서 송 선상이 방문 차고 나옴서 벽력같이 호통얼 치넌디, 너 이놈아 당장 베락맞어 뒤질라고 어디서 그런 싯뻘건 거짓말얼 허고 자빠졌냐. 당장에 물러가그라, 혔지. 그런디 그 심바람꾼 놈이 즈그 왜놈상전얼 믿고 시건방구지게 송 선상헌티 대듬서 헌다는 말이, 당신이 먼디 넘 일에 배 놔라 감 놔라 허고 그냐. 어디 잠 따져보자, 험서 턱쪼가리럴 치올렸겄다. 그리 ㄷ게 부애가 터진 송 선상이, 너 이놈 잘 만냈다. 그래 따져보자, 험스로 그놈얼 맥살잽이혀서 마당에다 패대기럴 쳐뿐 것이여. 그리 ㄷ게 그놈언, 아이고메 아부지 성님 찾음서 붕알에서 방울소리야 나그라 발바닥서 불이야 나그라 허고 뽕빠지게 달아나 부렀어. 헌디 하룻밤이 지내고 날이 훤허니 밝았는디 주재소 헌병 두 놈허고 통변 한 놈이 송 선상얼 잡을라고 들이닥친 것이여. 왜놈헌병놈덜이 진 총얼 들고 송선상헌티 뎀비넌디, 송 선상이 그대로 잽히덜 않고 앞서 오는 놈 면상얼 보기 좋고 씨언허게 주먹으로 내래쳤어. 그렁게 왜놈언 더 볼 것 없이 팍 꼬구라졌넌디, 그담에 들이닥친 놈이 송 선상얼총으로 무지막지허게 팬 것이여. 그리 디게 송 선상도 안 꼬구라질 수가 있어야제. 쇠고랑얼 차게 되었제. 송 선상이 잽혀가기넌 혔어도 양반인디다가 문중이 원체로 끄리끄리헝게 주재소놈덜도 담날 안 풀어줄 수가 없었구만. 그런디 말이여, 논 사딜이는 왜놈덜허고 주재소 헌병놈덜허고넌 다 한통속으로 돌아가는 한패라넌 것잉게 그거럴 똑똑허니 알아야 써."
말재주 좋은 임덕구의 말은 가닥을 타고 넘으려 막힘이 없이 줄줄이 이어져 듣기에 아주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부분 부분이 과장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 과장을 지적하거나 고치려 하지 않았다. 송 선생에 대한 대목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지삼출은 사람들이 묻는 대로 공사판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 나갔다. 그러면서 밤이 깊어갔다.
"술도 더 나오기넌 틀렸고, 삼출이 마누래헌티 더 미움 사기 전에 삼출이 그만 보내드라고잉."
손판석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모두 그 뒤를 따랐다.
"자네 일진회라는 것 몰르제?"
단둘이가 되자 손판석이 말을 꺼냈다.
"일진회?"
지삼출은 어둠 속에서 손판석을 쳐다보았다.
"이, 얼매 전에 새로 생긴 단첸디, 자네허고 나허고 들먼 좋을 상 싶어서."
"거그서 무신 일얼 허는디?"
"이런저런 존 일얼 헌다는디, 그중에서도 질로 맘에 드는 것이 있구만. 그거이 말이시, 백성 못살게 괴롭히넌 악질 관리고 양반얼 쳐없앤다는 것이네. 자네 맘에넌 어쩐가?"
"어디서 꾸미넌 단첸디 그런 소리럴 맘놓고 허고 그런고?"
지삼출은 가슴이 푸득 떨리는 것을 느꼈다. 갑오년 그때가 확 다가들었다.
"거 머시냐, 일본영사관서 뒤럴 받쳐준다고 허데. 든든허덜 않은가?"
지삼출은 깜짝 놀랐다.. 왜놈영사관이 왜 그런 짓을 허고 나서? 무신 일인고? 그는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드는 것을 느꼈다.
"낼 날이 밝으먼 더 생각혀 보세. 나가 시방 너머 고단허시."
지삼출은 어둠을 이용해 감정을 쉽게 감출 수 있었다.
"더 생각허고 말고 헐 것도 없네. 못된 관리고 양반얼 쳐없애면 얼매나 속시원헌 일이것는가. 가서 푹 쉬소."
손판석이의 들뜬 것 같은 목소리였다.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자는 잠은 깊고도 달았다. 그러나 잠을 깨자 한 잠도 안 잔 것처럼 손판석의 말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지삼출은 일진회가 무엇이며, 일본영사관이 왜 그런 짓을 시키는 것인지 또 골똘히 생각했다.
"일진회란 거이 생겼다는 말만 들었제 지 겉은 거이 그 속이야 알간디요."
아내의 대답이었다. 지삼출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송 선생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되오. 일진회란 더 말할 것 없이 왜놈들의 앞잽이 단체요."
송선생의 분명한 말이었다.
"그런디 어찌서 그런 말얼 내걸고 그러넌게라우."
지삼출은 좀 더 앞으로 다가앉았다.
"자아, 들어보시오. 일진회를 만들면서 그자들이 내건 사대 강령이라는 게 있소. 첫째가 왕실의 존중, 둘째가 백성의 생명과 재산 보호, 셋째가 시정 개정, 넷째가 군정과 재정의 정리요. 첫째와 둘째는 쉬운 말이고, 셋째는 백성을 위해 잘못된 관청일을 고친다는 뜻이고, 넷째는 군대살림과 나라살림을 바로잡는다는 뜻이오. 그 네 가지에 왜놈들 앞잽이 노릇 하겠다는 말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덜 않소. 다 백성들이 바라는 것들만 골라냈소. 왜 그렇겠소? 백성들이 왜놈들을 싫어허는 판에 왜놈들 앞잽이로 나선 것을 표냈다가는 몰매 맞어 죽게 생겼으니 그리 속임수를 쓴 것이오. 그러고도 모자라 악질 관리고 양반을 쳐 없앤다는 말로 사람들을 속여 회원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오. 그게 다 못되게 영리한 왜놈들이 하는 짓이오."
"그러니 선상님겉이 유식헌 분이나 그 속얼 알제 무식헌 사람덜이야 그 말에 귀 솔깃혀서 속아넘어가덜 안컷는가요. 어찌야 헌당게라우?"
"참 어지러운 세상이오. 왜놈장사치들은 날로 늘고, 철도는 완성되고, 일진회 놈들은 날뛰고, 할말은 못하게 되고... 무슨 도리가 없는 세상이 돼가고 있소..."
송수익의 한숨은 진하고 길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더 말이 오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