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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오해(Jake Howard's Wife)

아름다운 오해(Jake Howard's Wife)

Anne Mather

 

1.

급행열차는 킹즈 크로스에 가까와지면서, 서민용의 고층주택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처음 이 도시를 설계했던 사람이 본다면 필시 못마땅해 할 것이 틀림없는 추한 건물들이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추악한 것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랗게 솟은 초고층 빌딩으로, 콘크리트와 유리덩어리가 사람을 근접 못하게 하는 황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더러워진 세탁물이 줄지어 널려 있는 것에서도 생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만큼 , 아직도 고층 주택 쪽이 더 정답게 느껴진다. 거기에 비해 초고층 아파트는 어느 것이나 모두 같은 모양을 한, 마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신전같이 보인다.

제이크 하워드는 눈앞의 테이블에 흩어져 있는 서류에서 눈을 떼자 , 열차가 달리고 있는 곳을 알아차리고, 런던 -또 요오크를 떠난 지 벌써 두 시간 반쯤 지났다는 것에 약간 놀랐다. 옛날에 비해 요즈음은 어디든지 여행하는 것이 간편하게 되었다. 물론 비행기로 돌아가도 좋았겠지만, 제이크는 기차 여행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기차를 타면 젊었을 때 경험한, 철부지 애송이였던 자신이 처음으로 대도시를 보았을 때의 인상이 생각나곤 했다.

차장이 제이크 전용의 컴파트먼트(간막이가 된 좌석)의 창을 두드렸으므로, 제이크는 거만한 태도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했다.

"하워드씨, 5분 후면 킹즈 크로스에 도착합니다."

차장은 예의 바르게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그 밖에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한잔 더 드시겠습니까?"

제이크는 머리를 흔들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5파운드의 지폐를 꺼내, "이젠, 됐네, 고마우이." 하고 말하면서 차장에게 건넸다. "그 대신에 도착하면 내짐을 차로 운반해 줄 수 있을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쾌적한 여행이셨습니까?"

제이크는 빈정거리듯 회색의 눈을 가늘게 뜨고, "그저 그렇군. 고맙네."하고 내키지 않는 듯 대답했다.

차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물러갔다.

제이크는 흩어진 서류를 가방에 넣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에서 그는 하빌란드사와의 계약에 관한 견적을 끝냈다. 이것으로 더 이상의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빌란드 화학회사는 이제 곧 하워드 재단 것이 된다. 그는 만족스러웠다. 물론 내일 아침 싱클레어와 세세한 협의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지만, 그것은 대부분 형식상의 것이다.

제이크는 서류를 마무리짓고는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고 아무렇게나 불을 붙이고는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었다. 창 밖은 안개가 조금 끼었고, 거리엔 가로등이 현란이 빛나고 있었다.

겨우 일곱 시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 벌써 겨울이 가까운 계절인지라, 해는 완전히 지고 추웠다. 요오크 역에서 제이크가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도 피부를 찌르는 듯한 돌풍이, 그렇지 않아도 추운 10월의 기후에 박차를 가하듯 불고 있었다. 미국 서해안의 따뜻한 기후 속에서 지내고 나니, 이 추위가 더욱 사무치는 것 같았다.

제이크는 히쭉 웃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는데, 그의 귀가 방법은 언제나 같은 코스였다.

글래스고우를 경유해 요오크 역으로 기차를 탄다, 이것은 제이크의 언제나 같은 귀로였다. 영국 귀국후의 첫 밤을 요크셔의 세르비에 계신 어머니와 함께 보내기위해, 그는 꼭 플래스트위크까지 비행기로 가, 거기에 서 남쪽으로 내려가곤 했다.

열차를 내려 고용한 운전사가 운전하는 리무진으로 바꿔 탈 때까지, 제이크는 초조해 하면서도 벨그라비아의 시가지 한쪽에 있는 우아한 집으로 돌아가는 것, 또 아내 헬렌의 곁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몰두해 있었다.

헬렌을 생각하며 제이크는 빙그레 웃었다. 지금쯤은 글래스고우에서 보낸 꽃이 도착되었을 것이다. 헬렌은 나를 맞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제이크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집안을 장식하고 있을 세간살이를 생각했다. 오늘 밤 그런 것에 둘러싸여, 여행이야기로 아내를 즐겁게 해주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는 소유욕을 충족시킨 만족감에 흐뭇해 했다.

헬렌은 언제나처럼 자기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이라고, 그녀를 경멸스런 마음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3년 전에 헬렌이 그의 청혼을 받아들여, 아내가 되어 줄 것을 허락했을 때와 똑같은 자신에 대해 놀라움을 느꼈다.

3년 전 그 때에도 그는 물론 헬렌을 경멸했다. 제이크는 지금까지의 생애에서 스스로 성공에의 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요크셔의 직공의 자식으로 태어난 그는, 낮에도 밤에도 쉬임없이 일을 해서 혼자 힘으로 학교에 다니고, 지위를 얻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한 결과 겨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제이크는 자기의 야망을 달성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했다. 그에게는 타고난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사용했다. 아부하고, 내심으로는 경계하고 있는 상대에게도 쾌활하게 행동했으므로, 남녀 할것 없이 그에게 호감을 보였다.

제이크는 어려서부터 붙임성이 있고 영리했다. 그는 부친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 그 대신 화학을 좋아해, 어릴 때부터 물질과 그 구성을 연구하는 것에 비상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리스 대학에 서 학위를 받고, 그 다음엔 운 좋게도 셀비이 근처의 작은 화학회사 연구소의 조수 일을 얻어냈다.

그의 친구나 친척들은, 좀 더 큰 회사에 근무할 수 있는데도 그런 작은 연구소에서 재능을 썩여 버리는 건 어리석다고 했지만, 제이크는 좀 더 앞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연구소의 전문인 케튼씨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고, 또 그 아내를 완전히 매료시켜 버렸다. 케튼씨가 제이크를 회사의 이사로 기용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제이크는 꾸준한 노력으로 드디어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제이크는 붙박이 재떨이에 재를 떨고, 약간 어깨를 움츠렸다. 사실 그는, 계획적으로 케튼 부부를 자기의 수중으로 몰아넣고 출세의 길을 열었으므로, 그런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비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지만, 제이크는 회사를 없애 버렸는데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조차도 느끼지 않았다.

그 뒤로는 모든 일이 어려움 없이 진척되었지만 만족감은 적었다. 제이크는 언제나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왔다. 그래서 자신의 재단을 이용하여, 100만 파운드 이상의 공채나 주식을 소유하게 된 지금까지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일을 맡기는 것을 싫어했다.

3년 전 제이크는 헬렌을 만났다. 당시 그는 아내-그것도 물론 그에게 어울리는 아내를 찾고 있었다. 그가 정상에 올라설 때까지 이용한 여성은 너무나도 많았다. 회사원, 모델, 동료의 부인.... 그들은 누구나 제이크에게 있어서 소중한 여자가 되고 싶다는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찾고 있었던 것은 양이 아닌 질이였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에 있어서도 최상의 것이 탐났던 것이다. 그럴 때 그는 헬렌 퍼 사이스를 만났다.

그 몇 년 전부터 제이크는 헬렌의 아버지-제렐드 퍼 사이스-를 알고 있었는데, 다소 어리석긴 하지만 비교적 마음에 드는 런던 사교계의 일원이라고 생각했다. 제럴드의 아버지는 엘즈베리에 가까운 머린즈의 준남작 에드윈 퍼 사이스경이었는데, 제럴드는 차남이었으므로 작위는 형이 계승해 버렸다. 그것을 제외한다면, 제럴드 퍼 사이스의 타고난 지위와 기반은 제이크가 바라던 것이었다.

제럴드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죄다 써 버린 것 등은 어쨌든 좋았다. 만약 제이크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물려받은 돈을 이용해 더 많이 벌었겠지만, 그 돈이 없다는 사실도 그에게는 사회적인 지위가 있었으므로 전혀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제럴드가 어느 날 밤 , 카드 게임에서 거액을 잃은 끝에 무고한 자동차 사고로 죽어 버렸다. 그러므로 딸 헬렌에게는 거의 한 푼도 남겨지지 않았다. 그 때 그녀는 스물 셋 이었다.

물론 그녀는 일자리를 찾아낼 수도 있을 거라고 제이크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고로 죽자, 그 뒤 여러 가지 스캔들이 나돌 때까지, 헬렌은 법정 변호인인 죠프리 매너링의 아들, 키이스 매너링과 약혼한 것과 다름없는 사이로,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지냈다. 성모리츠로 스키를 타러 가고, 만추의 바하마 군도를 찾아가고, 겨울에는 런던 사교계의 모임에 연일 나가는 상태였으므로, 그 이외의 생활 등은 헬렌으로서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키이스는 점점 교묘하게 그녀를 피하게 되었다. 결국 헬렌은 외톨이가 되고, 수입이라곤 어머니 쪽의 할머니가 남긴 것이 조금 들어올 뿐이었다. 헬렌은 훌륭한 교육을 받고, 스위스 신부 학교에도 2년간이나 다녔으므로, 수개 국어를 부자연스럽지 않게 구사했다. 하지만 디너 파티를 계획하거나 아버지의 손님을 대접하는 일이 없어졌으므로 그녀에게는 더 이상 할일이 없었다.

제이크는 아주 우연히, 샤프트베리 극장에서 헬렌을 만났다. 제이크가 친구들과 막간에 바아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헬렌이 제이크와 친분이 있는 젊은 부부와 동반해서 들어왔다. 그 부인은 헬렌과 동창생으로, 헬렌을 가엾게 여긴 두 사람이 그 날 밤, 그녀를 초대한 것이었다. 남편 쪽은 찰스 세인트 존이라고 하는데, 제이크의 친한 친구로, 업무상의 동료였으므로 아주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소개 받았다.

제이크는 그 때, 포르투갈 대사관에 근무하는 젊고 이국적인 여성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제이크를 어떻게든지 자기의 것인 양 보이려고 애쓰는 태도를 헬렌은 차가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키가 크고 여위고 탄력 있는 몸매와 푸른 눈을 가진 ,마치 스칸디나비아인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헬렌이, 그런 도발에 열이 오른다는 것을 제이크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제이크는 헬렌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는 물론 헬렌이 처해진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교계의 누구나가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는 헬렌의 그 쪽을 향한 차가운 눈길 속에서 ,도전의 빛을 본것 같았다. 그것은 제이크에게는 귀한 경험이었다. 대부분의 여자는, 제이크의 갈색의 야무진 얼굴 모습에 끌린 것이다. 그러나 헬렌 퍼 사이스는 제이크를 마치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동물을 해부하는 것 같은 눈으로 보았다. 또 제이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북부 사투리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것을 알았다.

다음날 제이크는 헬렌에게 전화해서 ,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리고 몇주 내 같은 상태가 계속되었다.

어느 날 제이크가 전화를 거니, 헬렌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랐다. 뭔가 있는 듯했다. 헬렌은 그 날 밤 제이크와 저녁을 같이하기로 약속했다. 그 자리에서 헬렌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이 팔려 버린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재산도 몽땅 사라져 버리게 되었으므로, 그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처한 입장이었다. 헬렌은 무절제한 생활을 하였으므로, 친족으로부터 추방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헬렌은 친척들에게도 도움을 청할 기분이 아니었다. 제이크는 고통을 호소하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충고를 하거나 동정을 하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말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 후 두주 동안 제이크는 매일 밤 헬렌에게 전화를 하고, 때로는 밖으로 불러내고 또는 방문했다. 헬렌의 태도의 미묘한 변화에서, 제이크는 그녀가 자신의 전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므로 일주일 이상이나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임기응변의 술책과 같았다. 그는 계략을 쓴 것이다. 자기가 회사에서는 다루어 본적이 없는 종류의 인간을 취급하고 있다는 점도 개의치 않았다.

다음에 제이크가 전화를 걸었을 때, 헬렌은 절망스러워 보였다. 이 기회를 잡아 제이크는 그녀에게 청혼했다. 그는 헬렌에게 끌린 것은 아니었다. 만능적인 매력을 즐기는 제이크에게 있어서 헬렌은 차갑고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헬렌은 그의 목적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처음, 제이크에게 구혼 받은 그녀는 동요되었다. 제이크의 아내가 되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미래가 완전히 버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제이크가 내놓은 조건은 치욕적인 것이었다. 제이크는 냉랭하게 , 명목뿐인 아내를 원한다고 알린 것이다. 제이크는 테이블을 장식할 우아한 물건으로서의 헬렌을 원한 것이다. 필요한 때에는 손님 접대를 시키고, 또 여자에 관한 자신의 높은 취향을 모두 에게 과시하기 위해 아내를 구하는 것이다. 이 구혼은 어떤 분명한 효과를 가져왔다. 제이크에 대해 부드러웠던 헬렌의 태도가 다시 경화돼, 그녀는 제이크가 샤프트베리 극장에서 처음으로 만났을 때와 같은 냉랭하고 새침한 여자로 돌아가 버렸다.

물론 제이크가 생각하고 있었던 대로 헬렌은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제이크는 헬렌을 경멸했다. 만약 헬렌이 거절하고, 화를 내고 , 일을 찾기 시작했더라면 제이크는 그녀를 더욱더 좋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헬렌을, 자신의 손을 더럽히며 일을 하기보다는 싫어하는 남자라도 남편으로 받아들이는, 무기력한 속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버렸다.

제이크의 어머니는 무척 놀라와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아직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는 도중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를 런던으로 모시고 와서 자기의 집에 사실 것을 원했지만, 그녀는 남편과 함께 행복한 때를 보낸 추억 어린 집을 떠나는 것이 싫어서 거절했다. 두 사람의 외모나 사회적 지위는 현저히 달랐지만, 제이크는 어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헬렌은 결혼식장에서 처음으로 그의 어머니를 만났다. 결혼식은 상류계급 사람들을 초대해서 치렀다. 물론 그 비용은 모두 전적으로 제이크가 부담했지만, 헬렌의 옛 친구들이 모두 참석하여 축하를 해주었다. 오랫동안 헬렌을 만나지 못했던 것을 유감스러워하는 친구들의 그럴듯한 변명을 헬렌이 정말로 믿고 있는 것인지 어떤지, 또 그녀가 친구들의 번지르르한 감언이설을 믿는 것인지 어떤지, 그에게는 모두 의심스러웠다. 그와의 결혼으로 그녀가 다시 인격보다는 재산을 중시하는, 저 특권층의 사회로 돌아가 버린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제이크가 생각한 대로, 그의 어머니는 결혼식장에서 이미 그녀에게 마음을 털어 놓았다. 하워드 부인은 어떤 일이든 경솔하게 처리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들에게 가장 좋은 상대를 찾아 줄 예정이었다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부인의 노동자로서의 윤리관은, 제이크가 하고 있는 일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인은 제이크가 이 차갑고 오만한 여자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출발이 뒤죽박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략결혼은 잘 되어나갔다. 제이크는 일 때문에 외국에 가는 일이 많았으므로, 3년간의 결혼생활 중 두 사람이 함께 있었던 것은 불과 3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부재를 제외하면, 그가 그녀를 필요로 할 경우 그녀는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두 사람은 변함없이 예의 바른 타인끼리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예의적으로 행동했으므로, 친구로 사귀었을 때 이상으로 서먹서먹했다.

제이크는 인테리어에 대해 그녀가 훌륭하고 좋은 취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벨글라비어의 그의 집은 평범한 명문같이 꾸며졌다. 돈은 얼마든지 있었으므로, 헬렌의 재능은 지금이야말로 생생하게 발휘되기 시작했다. 제이크는 친구들이 교양이 있고 실내 장식에 대해 높은 안목이 있는 아내를 가진 자신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을 알고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열차는 킹즈 크로스 역에 닿으려하고 있었다. 제이크는 일어서서 양피 코트를 집어서 걸쳤다. 그리고 새까만 머리를 아무렇게나 손으로 쓸어 올렸다. 제이크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 체격이 딱 벌어진 남자로 마치 표범 같았다. 핸섬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학창시절의 싸움으로 코를 부러뜨려 모양이 변해 있었고, 40년의 연륜이 눈이나 코언저리에 잔주름이 되어 나타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그에게 끌리는 것 같았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있었다.

브레이크가 차바퀴를 삐걱거리게 하면서 커다란 디젤 엔진이 정지되자, 열차는 끼익끼익 하고 예리한 소리를 내며 멈췄다.

제이크가 가방을 들고 복도로 나오니, 차장이 그의 짐을 들고 오는 참이었다. 고용된 운전사 라테마가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제이크를 보자 예의 바르게 모자에 손을 댔다.

"어서 오십시오.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 고맙네. 라테머. 잘 있었나? 아주머니는?'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대화를 나누면서 플랫폼을 나와 커다란 리무진까지 걸어갔다. 차장이 짐을 들고 와 제이크에게 건넸다.

제이크는 운전석에 앉아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 핸들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런던에 도착했으니까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미국 여행길에 오른 지 벌써 3개월 이상이 되었다.

라테머는 트렁크에 짐을 넣고는 조수석에 앉았다. 그는 차안에서 일할 필요가 없을 때는 자기 스스로 운전하는 것을 좋아했다. 커다란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제이크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샌프란시스코의 회의실에서의 임기응변에 비하면, 런던의 교통체증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일에 관한 것을 모두 잊고 극히 일상적인 것에 전념할 수 있을 것 같아 겨우 마음이 놓였다.

"마님은 뭘 하고 있지?"

소형차가 앞으로 빠져나갔으므로, 제이크는 민첩하게 기어를 저속으로 떨어뜨리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내가 보낸 꽃은 도착했나?"

", 도착했습니다. 마님은 편안히 계십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기후 탓으로 누구나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이크는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자네의 가족은 어떤가? 아들은 어떻게 지내는가? 어느 대학에 갔지? 물리나 화학을 전공할 예정이 아니었나?"

"그러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라테머의 대답에는 열이 깃들여 있었다.

"이제까지는 좋은 성적을 얻고 있는 모양입니다."

제이크는 입가를 조금 심술궂게 일그러뜨려 보였다.

앨렌 라테머도 아버지와 같은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오만했다. 하워드 재단의 연구소에서 일하면 좋겠지만 , 무턱대고 머리를 숙일 아이는 아니었다. 제이크는 앨런의 기력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앨렌은 제이크가 젊었을 때와 비슷했다. 성공에의 야망에 불탔으며, 출세에 대해서 아버지가 품고 있는 예스러운 생각이 그를 억누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이크의 집은 커슬랜드 스퀘어에 있는 존 왕조풍의 높은 건물로, 철로 세공한 장식물이 발코니의 난간에 붙어 있고, 문 옆에는 꽃을 심은 화분이 놓여져 있었다. 주위에 나란히 선 집들도 모두 실업가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집이었다. 라테머의 아내도 가정부 로 일하고 있었으므로, 라테머 일가는 그 집의 지하에 꾸며진 현대적인 집에서 살 고 있었는데. 그들은 친구나 친척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다.

제이크는 문 앞에 리무진을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오늘밤은 볼일이 없으십니까?" 라테머도 차에서 내려 제이크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운 밤 공기에 제이크는 컬러를 세웠다.

"아니, 됐어. 고맙네. 차를 치워 놓게."

""

라테머를 인사를 하고, 제이크는 현관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크는 넣은 현관홀에 발을 들여놓았다. 청색과 금색의 색조를 기조로 한 카페트가 깔려 있고, 벽이 나 천정에는 새하얀 오크판이 붙어 있고, 크리스탈의 샨데리아가 머리위에 매달려 있었다. 그 아름다운 현관에는, 오크로 된 커다란 체스트(상자)가 붙어 있었고, 그 위에는 다알리아를 꽃은 화병이 놓여 있었다. 고개를 속인 다알리아가 벽의 흰색과 조화되어 아름다웠다. 홀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평평하고 큰 나무 문이 있는데, 하나는 응접실로, 또 다른 하나는 제이크의 서재로 통해 있었다. 문은 둘 다 잠겨 있었다. 제이크는 윤기나는 체스트 위에 아무렇게나 가방을 내던지고, 불쾌한 표정으로 코트의 단추를 끌렀다. 헬렌은 어디로 간 걸까? 언제라도 맞아 줄줄 알았는데, 차 소리가 들리지 않은 걸까? 문을 여느 소리도?

코트를 벗자, 제이크는 홀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러자 계단 안쪽의 부엌과 지하로 통하는 문이 열리고, 라테머 부인이 나타났다.

라테머 부인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제이크에게서 코트를 받아 들었다.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어서 오십시오.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제이크는 불쾌함을 억누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좋았어요. 고마워요. 라테머 부인. 별 일 없으시고?'

제이크는 일시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물었지만, 그 순간도 마음이 초조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라테머 부인은 조용히 대답했지만, 그 상냥한 얼굴에는 곤혹스러운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부인은 키가 작고, 그 갈색머리카락에는 흰 것이 간간이 섞여 있는데, 친근감이 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테머 부부는 맏아이를 키워 놓고는 제이크 밑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벌써 10년이 되어간다. 부인인 라테머 쪽은 13년이나 되었다.

두 사람 다 제이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므로, 부인은 제이크가 날카로운 의혹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헬렌은 어디?'

라테머 부인은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일이 있으셔서 나가셨습니다."

"! 나갔다고! "제이크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어디로?"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 말씀도 없으셔서. 매너링씨와 함께라고 들었습니다만..,“

"매너링이라고?" 제이크는 대단히 놀랐다. ", 키이스 매너링?"

"그럴 겁니다."라테머 부인은 어색해 하는 것 같았다. ",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주인님이 먼저 부엌에 들어오시지 않으셨다면...."

제이크는 넥타이를 풀고, 라테머 부인의 말을 가로막았다.

"가르쳐 주게나, 아내는 내가 오늘밤 돌아오는 것을 알고 있었나?" 그의 눈은 차가왔다. "물론입니다. 어젯밤 글래스고우에서 꽃이 도착했습니다."

"그런가? "제이크는 불쾌한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집에 돌아왔다고 하는 안도감 같은 것은 몹시 거친 분노로 싹 지워져 버렸음을 알았다.

"알았어요, 라테머부인. 샤워를 하겠어요. 식사는....."

제이크는 손목에 찬 , 폭이 넓은 금시계를 보고 계속했다. "20분 후에."

", 알았습니다."라테머 부인은 예의바르게 끄덕거렸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이크는 계단을 두간씩 뛰어 올라갔다. 지금이라도 당장 울화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제이크는 침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서서는 문을 발로차서 닫았다. 멋진 방이었다. 초컬릿색의 벽과, 살구색의 침대커버가 새하얀 오크재의 가구와 잘 조화되어 있었다. 커튼은 침대 커버보다 더 짙은 살구색이었다.

침대옆에 놓여진 램프 빛에 비춰지는 그 방은 평상시 같으면 제이크의 기분을 차분하게 해줄 터이였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헬렌이 하필 오늘밤 외출하다니,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출장에서 돌아오면 헬렌은 으례 집에 있었다. 미소 지으며, 제이크가 일 이야기를 하면 언제나 귀 기울이고, 또 필요할때는 조심스럽게 충고도 해주었다. ''하고 제이크는 혀를 찼다. 헤렌은 그런 것을 위해 있는 것이니까. 그 때문에 나는 헬렌을 산 것이다. 저 지긋지긋한 키이스매너링과 사귀게 하기 위한 건 아닌데.

제이크는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서자 샤워마개를 틀었다. 그리고 머리가 젖는 것도 모르고 그 아래 서있었다. 찬물이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것 같았다. 대체 어쩔 셈으로 헬렌은 나간 건가? 하고 제이크는 화를 내면서 생각했다. 내가 없는 사이를 이용해, 그것도 3년 전에 자기를 버린 남자와 염문을 뿌리다니. 친구들은 대체 뭐라고 말할까?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제이크는 샤워를 잠그고, 커다란 목욕 타월을 몸에 감고 젖은 몸을 말렸다. 그리고 머리를 닦고 침실로 되 돌아와 몸에 꼭 맞는 검은 스웨이드 바지와 크림색의 실크 셔츠를 입었다. 바지 밑으로 잘 발달된 근육의 선이 두드러져 보였다, 깔끔한 모습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디너 재킷을 걸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급히 일어서서 제이크는 무도장을 빠져나와 헬렌의 침실 문을 열었다. 불을 켜고, 아름다운 그방을 냉소적인 기분으로 둘러보았다. 발 밑에는 부드럽고 푹신푹신한 하얀 카펫이 깔려 있었고, 같은 색으로 가지런히 정돈된 침대 커버와 커튼은 어느 것이나 옅은 장미색이었다.화장대 위에는 어느 여자의 화장대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인 항아리, 스프레이 등이 어수선하게 놓여 있었다.

침실 바닥에는 아주 얇은 시폰으로 된 옷이 아무렇게나 벗어 버린 채로 있었다. 제이크는 거칠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급히 불을 끄고는 단호한 태도로 문을 쾅하고 닫았다. 제이크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분노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뭔가 폭력을 휘두르고 싶은 강한 충동에 쫓기고 있었다. 헬렌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게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제이크는 한 번 더 생각하면서, 두꺼운 카펫이 깔린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는 누구에 대해서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타고난 센스가 없는, 빈털터리로 부터 정상으로 올라선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인가? 아내가 귀족의 보이 프렌드를 가지는 것에 반대도 하지 않는 무지한 북부 출신의 시골뜨기 바보가? 아니, 신에게 맹세코 나는, 제이크 안소니 하워드는 그런 남자가 아니야. 그것은 모두 내 거다, 내가 손에 넣고 싶은 때만 내 거라고 하는 오만은 아니다. 언제나 내 거로 해두고 싶다.

청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홀을 가로질러 제이크가 들어와 있는 곳은 , 식당에 붙어 있는 천정 낮은 밝은 라운지였다. 라운지는 넓었으며, 천장에는 간접 조명 기구가 붙어 있었다. 방은 청색과 녹색으로 통일되어 부드러운 느낌이며, 깃털이 들어 있는 소파나 암체어가 산뜻하게 놓여져 있었다. 한쪽에 있는 가족용의 그 거실은 홀의 반대쪽 있는 라운지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라운지는 제이크가 객실로 쓰고 있었다. 라운지와 식당을 구분하고 있는 것은 책이나 미술품을 늘어놓은 선반이었다. 헬렌은 비취와 상아를 수집하고 있었다. 식당의 검고 윤이 흐르는 나무 테이블은 티 하나 없이 잘 닦여져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는 검은 목재 의자는 가죽 시트에 등받이가 사다리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라테머 부인은 이미 식기를 정일하고 있었다. 등심초로 짠 런천 매트 위에서는 잘 닦여진 은제 포크와 나이프가 빛나고 있었다.

제이크는 라테머 부인이 식사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을 잠시 동안 물끄러미 보고 있었는데 , 곧 초조해지자 술을 진열해 놓은 장식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독한 스카치를 글라스에 가득 부었다. 그것을 단숨에 죽 들이키고, 한잔 더 글라스에 가득 따라서, 크고 푹신한 암체어 에 몸을 던지고 한쪽 다리를 그 팔걸이 부분에 올려놓았다.

제이크는 불안한 시선으로 방안을 둘러보았으나 편안해지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유리창에 걸린 코발트블루의 벨벳 커튼과 발이 푹 파묻힐 것 같은 호화스런 블루 그린의 카펫은 ,아름다운 조화를 보여 주고 있었다. 잘 닦여진 체크의 장식장에 딱 들어맞는 스테레오 장치가 방의 한구석에 있고, 그것과 마주 보고 있는 쪽에는 커다란 컬러 텔레비젼이 묵직하게 놓여 있었다. 대리석으로 된 벽난로 안에는 모조로 된 장작불이 타고 있었다. 중앙난방을 하는 집에서 진짜 를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난로의 양쪽은 서가였다. 낡은 것과 새것의 미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집은, 제이크에게는 언제나 즐거운 안식처였지만, 지금은 조금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제이크는 분노 때문에 피곤함을 느낄 정도였다. 기대를 안고 집에 들어왔는데, 아내의 무분별함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라테머 부인이 식당 쪽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원하신다면 식사를 드리겠습니다." 하고 부인은 정중하게 물었다.

제이크는 마룻바닥에 발을 꽉 붙이고 날렵하게 일어섰다.

", 좋아요. 지금 가죠."

스카치를 죽 들이켠 제이크는 빈 글라스를 진열장 위에 놓고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혼자 테이블 앞에 앉아서 가정부가 준비해 놓은 식사에 신경을 집중시키려고 했지만, 자기의 부재중에 헬렌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듣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대체 매너링을 몇 번이나 만난 걸까? 매너링은 이 집에도 온 적이 있는가? 제이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매너링이 여기 왔다, 이 집에.....,라는 생각만으로도 그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제이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헬렌이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행동했다. 라테머 부인이 준비한 음식은 제이크가 아주 좋아하는 것이었다. 로우스트 비프와 요크셔 푸딩, 그리고 로즈베리를 달게 조린 것이었으나, 그는 모래를 씹고 있는 듯 전혀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식사를 남겨서 라테머 부인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보르드산 붉은 포도주를 뿌려서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커피를 거실로 가져오게 하고, 라테머 부인을 물러가게 한 후 텔레비젼을 켰다.

제이크가 집에서 텔레비젼을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집에 있는 적도 거의 없었지만, 가끔 있을 때에는 으레 손님을 접대하든가 했다. 평소에도 제이크는 일을 갖고 오거나, 서재에 틀어박혀 일에 몰두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밤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평소대로라면, 식사를 마치고 헬렌에게 여행의 성과를 얘기한 뒤에, 계약서를 대충 훑어볼 예정이었다.

제이크는 헬렌이 돌아오는 것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헬렌이 돌아오면 화를 내고 싶었다. 헬렌에게 는 아내로서 지켜야 할 입장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해 두고 싶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지더라도 그는 꼭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다지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 제이크는 요사이 자주 만났던 젊은 여자를 생각해냈다. 루이스 코넬레의 덕택으로, 캘리포니아에서의 체류는 즐거웠다. 하지만 그게 그거라고 제이크는 자기의 양심을 위로했다. 나는 남자다. 남자에게는 욕망이 있다. 남자가 자기 나라를 떠나, 집이나 친구로부터 떠나 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다. 헬렌은 런던에 있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이 어느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을까?

시간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느리게 흘러갔다. 분노는 지금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텔레비젼의 인터뷰를 꺼 버리고 스카치를 한잔 더 따르고 있는데, 헬렌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빅토리아조 시대의 엄격한 부친과 같이 왜 늦었는가를 힐책하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외교적인 계교에 정통했으므로, 그런 일을 해서 정력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스카치를 다 따라서 반쯤 들이켜고는 남은 것을 손에 들고 대리석 난로 옆에 서서, 한 발을 놋쇠 맨틀피이스에 얹었다.

헬렌은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눈치 챈 것 같았다. 쇼올을 벗은 듯 , 잠시 후에 라운지의 문이 열렸다. 헬렌은 문 입구에 서서 제이크를 보고 있었다. 마치 경계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오늘밤의 헬렌은 아주 아름다왔다.

헬렌이 입고 있는 것은 그가 6개월 전에 일본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 공작색의 소매가 낙낙한 긴 옷이었다. 청색 바탕에 은색의용이 수놓아져 있었다. 세련된 선이 가슴의 풍만함, 허리의 곡선, 가늘고 긴 다리를 눈에 띄게 하고 있었다. 제이크가 아는 한, 헬렌이 지금까지 이 옷을 입은 적은 없었다. 이 옷을 키이스 매너링을 위해 입었다는 생각이 들자, 제이크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은색의 긴 머리는 고대 그리스인처럼 말아 올려져 있었고, 귀밑으로 드리워져 있는 몇 올의머리카락이 뺨과 목덜미에서 부드럽게 나부끼고 있었다. 귀에는 넓적한 금 귀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작년 결혼 기념일에 제이크가 사준 것이었다.

제이크의 시선과 마주치자 헬렌은 눈을 내리뜨고, 떨떠름하게 방으로 들어왔다.

"안녕, 제이크." 반짝거리는 작은 백을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놓으면서 헬렌은 말했다. "건강한 것 같군요. 여행은 어땠나요?'

제이크는 목까지 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 좋았어."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잘 됐군요." 헬렌은 슬쩍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제이크는 그녀의 당황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 미안해요 , 당신이 돌아오실 때 집을 비워서, , 약속이 있어서....."

", 들었어." 제이크는 남은 스카치를 죽 들이마셨다.

헬렌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 라테머 부인이 만든 저녁은 맛있었겠지요?"

"라테머 부인이 뭐라고 했어?" 제이크는 벌컥 화를 냈다.

헬렌은 양손을 모아서 꽉 쥐었다. "제이크, 제발."

"당치도 않은 녀석이군." 제이크는 섬세하게 세공한 얇은 글라스를 손에서 가볍게 놓아 버렸다. "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갔었어?" 헬렌은 한숨을 쉬었다.

"라테머 부인한테서 들으셨잖아요."

"라테머 부인의 말 따위는 흥미가 없어." 제이크가 격하게 말했다. "대체 어디에, 누구랑 있었는지를 알고 싶어."

헬렌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파티에 갔었어요, 키이스 매너링과."

"거기에 멀쩡히 서서 다른 남자와 나갔었다는 말도 잘도 해대는군. 그래, 매너링 따위와 어울려 다녀?"

헬렌은 당연한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뭐가 나빠요?" 하고 그녀는 당당히 물었다.

제이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빈 글라스를 맨틀피이스 위에 올려놓았다.

"뭐가 나쁘냐고?" 그는 격렬한 어조로 되물었다.

"당신은 내 아내야. 이것으로 나쁘다는 의미는 충분히 납득되겠지?"

헬렌은 제이크가 결혼 반지로 사준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눈은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제이크는 별안간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그럼, 당신은 어떻다는 거죠?"하고 헬렌은 차분히 말했다. "그 답은 당신에게도 맞는 건지 모르죠. 당신은 내 남편이라는 점에서..."

제이크는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헬렌은 검은 눈썹이 치켜 올려졌다.

"아실 텐데요. 내가 당신 주위의 여자들에 대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젠 지긋지긋해요."

제이크는 더부룩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뭐라는 거요?" 그는 격렬한 어조로 중얼대고는 , 휙 하고 등을 돌려 불빛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나를, 나의 행동을 구실로 자신의 행실을 무마시키려는 거요?"

"아니에요." 이 한 마디가 제이크를 뒤돌아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제이크는 헬렌을 쳐다보았다. "아니에요." 헬렌은 화가 난 듯 한 번 더 되풀이했다.

"나는 당신과는 달라요. 욕망을 위해서 행동하는 동물은 아니에요"

"나는 그렇단 말인가?" 제이크는 험악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하지만 당신이 왜 내 행동에 시비를 거는지 알 수 없군요. 지금까지 참고 있었지만, 이번 3개월 동안은 정말로 참을성도 한계에 이른 것 같군요. 단지 당신과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왜 내가 친구와의 교재마저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그 친구라는 무리가, 당신의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자 당신을 떠나갔다는 것을 잊은 거요?"

제이크가 빈정대듯 말했다. 헬렌은 마치 제이크에게 한 대 맞기라도 한 듯이 움찔했다. "그 말,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하고 헬렌은 목소리를 떨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제이크는 그 넓은 어깨를 움츠리며, 살피는 것 같은 눈으로 헬렌을 바라보았다. 헬렌이 이렇게 흥분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억제했으므로, 제이크가 어떤 말을 해도 화를 내는 적이 없었다.

"그건 그렇군." 하고 제이크는 입을 열었다. 눈은 변함없이 헬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 다음엔 무슨 말이 하고 싶지? 이런 말을 하는 나는 야비하고 비열한 남자라는 건가? 그래, 매너링 만큼 예의가 바르지 않다는 건가?"

헬렌은 눈을 내리떴다.

"키이스는 신사예요." 하고 그녀는 한마디했다.

제이크는 경멸하듯이 콧소리를 냈다.

"그래? 당신은 어떤 녀석이 신사라는 거야? 칼로 콩을 먹으려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는 남자인가? 사랑을 할 때도 알몸이 아닌 잠옷을 입은 채로 하는 놈인가? 헬렌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어쩜 무뢰한 같으니라고..." 라고 그녀는 혐오감에 떨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이제 잘 거예요."

제이크는 헬렌이 나가려는 것을 재빠르게 가로막았다. 몸집이 큰 사나이치고는 탄력성이 있는 민첩한 몸동작이었다.

"그래?"하고 제이크는 입을 꽉 다물었다. "당신이 자는건 내가 좋다고 했을 때야. 그전에는 안 돼."

헬렌은 믿기 어려운 듯 이 머리를 들었다.

"제발 , 제이크. 지금은 20세기예요. 당신은 나의 파수꾼이 아니잖아요? 늘 내게 자신의 생각대로 모든 것을 시키다니 , 그것은 말도 안 돼요."

"그래?" 제이크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 "내가 당신이라면 그런 것은 기대하지 않겠소."

헬렌이 문 쪽으로 걸어가자, 제이크가 그것을 가로막았다.

"제이크 , 더 이상 이런 이야긴 하고 싶지 않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하고 그는 빈정댔다. "오늘 밤, 당신이 집에 없었던 것에 대해, 네게 책임이 있다는 걸 말해 두고 싶었던 거야."

헬렌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피곤해요. 다른 이야기는 내일 아침에 하기로 해요."

"무슨 의미지?" 제이크는 헬렌을 쳐다보았다.

헬렌은 빈 글라스를 보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것을 후회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에요." 하고 그녀는 어색하게 부정했다.

"내가 취했다고 생각해?" 제이크는 바보 같은 웃음을 띠었다.

"지금까지 내가 취한 것을 본적은 한번도 없잖아?"

"보고 싶은 적도 없었어요. 침대로 가도 좋아요?"

제이크는 옆으로 비켜섰지만 표정은 험상궂었다.

"여행 선물에는 흥미가 없나?"

헬렌은 제이크의 얼굴을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주먹을 움켜쥐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라운지를 나와, 샨데리야가 반짝이는 청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홀을 거쳐 그녀의 방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제이크는 계속 분노에 불타고 있었지만, 맥이 빠져서 헬렌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라운지로 되돌아와, 문을 닫고 뒷짐을 지었다. 제이크가 침대로 돌아왔을 때는 새 스카치 병이 4분의 1이나 비어 있었다.

 

2.

헬렌은 옅은 녹색의 아이섀도우를 발랐다. 왠지 모르게 오늘밤의 외출이 불안했다. 헬렌과 제이크는 아프리카의 신생국 대사관에서 열리는 파티에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일주일 전 제이크가 미국에서 돌아온 후, 두 사람이 함께 나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이크가 미국에 가기 전엔, 두 사람은 자주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이 사업 이야기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까지 어색하게 된 것은 처음 이었다. 그렇게 된 것은 내 책임인가? 혹은...?

헬렌은 손을 멈추고, 화장대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래, 제이크가 내게 소꿉친구와 교제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의 동료나 그 부인들과만 교제하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물론 , 찰스 세인트 죤은 내 친구이지만, 내가 좋아하긴 해도 제이크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그가 경멸하는 사람도 있지.

헬렌은 길고 색이 옅은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하기 시작했다. 키이스 매너링, 그는 제이크가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헬렌은 오랫동안 키이스와 친구로, 한때는 결혼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과거의 일로 , 지금은 단지 좋은 친구일 뿐이었다. 그 이상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데 , 그와 나 사이를 의심하려고 하는 제이크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헬렌은 입술에 무색의 루즈를 칠했다. 그 순간 그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가 강한 빛을 띠었다. 헬렌은 전에 한때는 친한 친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괴로워했었다. 선량한 그녀들은 , 제이크가 다른 여자와 만나고 있는 것을 헬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자기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녀들의 지나친 농담에 굴욕감을 느꼈었지만 , 헬렌은 점점 체념하게 되었고, 지금은 그냥 듣기만 하게 되었다.

헬렌은 화장대 앞에서 일어서서, 자기의 모습을 마치 타인을 보듯이 바라보았다. 길고 하얀 레이스의 네글리제는 , 여자다운 곡선을 나타내면서 도 날씬하고 여윈 몸과 기다란 다리를 드러냈다. 헬렌은 자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겸손해 하지는 않았다. 아름답지 않다면 제이크는 헬렌을 아내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제이크는 늘 최고의 것을 바랐다. 하지만 그른 것이 헬렌에게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헬렌은 한숨을 쉬고 침대 위의 내의를 집어 들고 는 스타킹을 벗었다. 오늘밤의 옷은 심플하지만 우아한, 검은 비단의 튜닉이었다. 허리에는 술이 있는 끈을 맸다. 그 옷은 헬렌의 가슴의 선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깊은 팬 목선은 우윳빛의 아름다운 목을 드러냈다. 다이아몬드로 된 귀걸이를 달고 있을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헬렌은 몸을 바로 세우면서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화장대 거울 속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제이크가 비쳤다. 정장을 한 제이크는 매력적이었다. 깔끔한 모습이었지만, 눈빛은 어딘가 야성적인 맛을 느끼게 했다. 그는 오늘밤의 파티를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 타고난 재능을 시험할 좋은 기회이고, 하나의 도전인 것이다. 오늘밤의 리셉션을 이용해서, 아프리카 대륙에 하워드 재단 진출의 기반을 만들 예정이라는 것을 헬렌은 알았다. 남미와 로디지아에는 이미 연구소가 있고, 하워드 재단의 의약품은 아프리카 대륙에 진출하고 있었다. 이 재단을 쌓아 올린 것은 제이크의 열의였다. 그가 어떤 권력을 가져도, 그 야망이나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는 강한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헬렌은 이것에 반감을 느껴 왔다. 아직까지도 자신이 왜 제이크의 청혼을 받아들였고 제이크 하워드의 아내라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러나 자기주장을 내세울 수 없는 입장이 되어야만 했는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이크의 냉정한 계산적인 성격, 즉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 자기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 이런 모든 것이 헬렌을 불안하게 했다. 제이크에게 마음이 끌린다는 따위는 당치도 않다. 헬렌은 남들이 제이크에 의해 자기에게 퍼붓는 험담을 생각하는 것조차도 피하고 싶었다.

제이크는 헬렌의 모습을 빤히 평가하듯이 바라보았다. 헬렌의 도전적인 태도를 받고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은.... 예쁘군." 하고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것같이 말했다. "물론 스스로 알고 있겠지만."

헬렌은 안심하면서 긴장을 늦추고, "자신이 인정받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죠."하고 말하면서 한쪽 어깨에 부드럽게 달라붙은 실크를 만졌다. 땋아 올린 머리는 보석이 달린 핀으로 꽂았는데, 일부러 조금 남긴 귀밑 머리가 뺨에 부드럽게 늘어져 있었다. 제이크는 주머니에서 크림색의 상자를 꺼냈다.

"당신 선물이야."라고 말하면서 그는 상자 뚜껑을 열었다.

"뭔데요?"

번쩍이는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백금 줄에 다이아와 에메랄드, 루비 등으로 정교하게 꾸며진 것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헬렌은 엉겁결에 조그만 탄성을 발했지만 표정은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고마워요." 헬렌은 겨우 미소 지으면서 그것을 받아 들였다. "걸어 주실래요?"

제이크는 상자를 침대 위에 놓았다.

"좋으실 대로." 제이크는 냉담한 태도로 목걸이를 헬렌의 목에 걸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민첩하게 물림쇠를 채웠다. "좋군. 옷이 돋보인다고 생각하는데, 헬렌은 어때?"

헬렌은 주저하면서 차가운 보석을 살짝 만져 보았다. 그녀의 살갗 위에서 그것은 더욱 아름답게 빛났으며, 크림같이 하얀 목 안쪽에 매달려 따사로움을 발하기 시작했다. 헬렌은 허리에 양손을 얹고 거울 앞을 떠났다.

"멋지군요."하고 헬렌은 쌀쌀하게 말했다.

제이크는 헬렌의 반응을 확인하려는 듯이 오랫동안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 벌어진 어깨를 움츠렸다.

"뉴욕에서 산 것이야. 헬렌의 마음에 들 거라고 생각하는데."

", 마음에 들어요." 헬렌은 핸드백을 들었다. "준비는 다 됐나요?'

제이크는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는 밍크쇼올을 집어 헬렌 쪽으로 내밀었다.

"난 좋아" 라고 말하며 제이크는 헬렌에게 쇼올을 걸쳐 주었다. "라테머가 차를 가지러 갔어. 뭔가 좀 마시는 게 어때?"

헬렌은 제이크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신은?"

"벌써 마시고 왔어." 제이크의 눈에 조소적인 빛이 비쳤다. "당신 취했군."

헬렌은 그 빈정거림을 듣고 소름이 끼쳤지만 그것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문 쪽으로 걸어가자, 제이크는 하는 수없이 그 뒤를 따랐다.

층계 밑의 홀에서 인내심 있게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라테머는 여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두 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식사와 술이 나오게 될 모임에 갈 때는 라테머가 운전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대사관은 본드가에서 한 구획 떨어진 곳에 있었다.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람들이 줄지어 현관의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참이었다. 주차장이 만원이었으므로 라테머는 일단 돌아갔다가 다시 두 사람을 데리러 오기로 했다.

제이크는 차에서 내리는 헬렌의 손을 잡아 주면서 라테머에게 뭔가 말하고 나서 헬렌의 팔꿈치를 가볍게 받쳤다.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가서 넓은 대리석의 홀로 들어갔는데, 거기에서는 제복을 입은 보이들이 손님을 안내하고 있었다. 헬렌은 제이크를 남겨 두고 밍크 숄을 맡기러갔다. 화장이, 집을 나올 때처럼 완벽한가 어떤 가도 알고 싶었다.

대기실은 온갖 피부색을 가진 국적의 민족의상을 걸친 여자들로 가득 찼다. 매끄러운 옷감의 세련된 중국옷도 눈에 띄고, 우아한 사리 차림의 부인도 있었다. 헬렌은 힐끗 자기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고 곧 현관의 홀로 되돌아갔다.

제이크는 헬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뻣뻣한 턱수염을 한 중년남자가 열심히 제이크와 이야기를 하고, 찰스 세인트 존과 아내인 제니퍼가 옆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헬렌은 본 제니퍼가 과장된 몸짓으로 손을 흔들었으므로 헬렌은 기분을 북돋울 생각으로 그 쪽으로 다가갔다.

"헬렌!" 제니퍼는 따뜻하게 헬렌의 뺨에 키스했다.

"정말 오랜만이야. 어떻게 지냈어?"

제이크는 어렴풋이 상기되어 있는 헬렌에게 눈길을 보냈다.

헬렌은 그의 시선을 의식했다. 제이크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혀 다른 것에 전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헬렌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지금 제이크가 어떤 답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았다. 아마 내가 키이스 매너링을 만났다고 대답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겠지. 그래서 헬렌은 언제나처럼 냉담하게 대답했다.

"넌 잊어버리고 있었니? 나도야. 제이크는 방금 미국에서 돌아왔을 뿐...."

헬렌은 생긋 웃으며 변명하고 픈 몸짓을 하고 말끝을 흐렸다. 찰스가 이것을 받았다. "헬렌, 오늘밤은 특히 매력적이군요." 농담같이 말하면서 찰스는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헬렌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번쩍거리는 것은 어디서 샀지요? "찰스는 헬렌의 목걸이를 만졌다. "우르와스 슈퍼마켓에서 사지 않았다는 것은 알지만."

제이크는 중년의 정치가와 이야기를 끝내고, 재미있다는 듯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찰스의 말을 받아 제이크가 물었다. 제이크는 일부러 오랫동안 제니퍼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 일로써, 제니퍼가 제이크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헬렌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제이크는 의미있게 헬렌을 보았다. "완전한 것이라도 더욱 아름답게 하고 싶은 거야." 하고 그는 차갑게 말했다. 헬렌은 자기의 뺨이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이런 이야기는 바보스럽다고 생각지 않아?"하고 헬렌은 급히 제니퍼에게 물었다. "찰스, 저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요?"

찰스는 몇 군데인가의 회사의 중역으로, 광적인 골동품 수집가이기도 했다. 헬렌은 해밀튼 백작 부인의 것이라고 하는 은으로 된 작은 상자를 제이크에게서 선물 받았는데, 그것을 찰스에게 준 것이었다.

찰스는 다시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헬렌과 찰스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제이크가 제니퍼에게 이번 여행 중에 있었던 아주 우스운 일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들렸다.

제니퍼는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헬렌은 무의식적으로 입을 꽉 다물었다. 거의 없는 일이지만, 가끔 헬렌은 풀이 죽어 제이크에 대한 불만을 말하면, 제니퍼는 헬렌의 편을 들면서 가끔 제이크의 태도는 심하다고 말하고 제이크를 경멸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모두 함께 있을 때의 제니퍼의 태도를 보면, 제이크에게 굉장히 매료되고 있는 것 같이 생각 되었다. 오늘밤에야 비로소, 헬렌은 그것에 대해 초조감을 느꼈다.

헬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표정에는 조금도 초조함은 보이지 않았지만, 제이크는 헬렌의 시선을 받자 오랫동안 눈을 그녀에게서 떼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일까,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제니퍼는 발을 헛디뎌서 제이크의 팔을 붙잡았으므로 제이크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헬렌은 그대로 계속 걷고 있었지만 몸이 떨렸다. 제이크는 미국 여행이야기를 내게는 하지 않았다. 사실 제이크가 돌아온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저절로 화가 났다. 찰스가 살짝 헬렌의 머리를 잡아당겨 주의를 끌었으므로, 헬렌은 전에 없이 기분이 나빴지만 그의 쪽을 뒤돌아보며 그 빛나는 웃음으로 그를 현혹케 했다.

헬렌은 필요 이상으로 제니퍼와 제이크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제니퍼가 자기에게 비밀스럽게 한 이야기도 이제 신용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찰스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마음에 두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계단을 올라간 곳에 있는 객실은, 이야기하거나 술을 즐기거나 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턱시도를 입은 집사가 두 사람의 도착을 알렸다. 대사관 직원이 한 명의 장교를 소개했다. 다음 손님이 왔으므로 제이크와 헬렌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크는 흥미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마시고 있는 위스키 글라스의 가장 자리 너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헬렌은 그것을 보고 체념한 듯이 샴페인 칵테일을 입에 댔다. 제이크의 눈매, 그것은 노획물을 잡으려고 노리고 있는 호랑이의 눈매였다. 지금 제이크의 머리속이 사업으로 가득 찬 것을 헬렌은 알고 있었다. 그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제이크는 새로 알게 된 정치가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고는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너무나 순간적인 일로, 어느 누구도 이의를 표할 여유가 없었다. 제니퍼는 불쌍하다는 듯이 헬렌을 보며 심술궂게 말했다.

"이것으로 한두 시간은 남편을 만날 수 없게 됐군. 정말 저 사람은 운이 없는 사람이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헬렌은 고개를 숙이고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는 듯이 글라스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래."

찰스가 두 사람의 팔을 잡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나는 매우 기분이 좋군, 제이크 덕분에 이방에서 제일 아름다움 부인을 두 명이나 차지하게 되었으니."

헬렌은 생긋 웃고, 제니퍼는 지겹다는 듯이 코에 주름살을 만들어 보였다.

"헌데, 우리들은 무엇을 하죠? 혹시 누군가 재미있는 분을 알고 계신가요?"

찰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주의 깊게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루바리 대통령을 알고 있겠지? , 저쪽에 부인과 있을 거요. 캠브리지 대학에 있을 때 동급생이었지. 부인은 아마 간호사였다나 봐. 아주 귀여운 여자지."

제니퍼는 지루한 것 같았다.

"당신을 빤히 보고 있는 저 남자는 누구지? 저 중년 신사 말이에요."

", 바테 바라드, 알고 있지." 그는 한 손을 들고 머리를 숙여 보이면서 말했다.

"바라드경에 대해 이야기 한적이 있을텐데, 제니퍼. 그분은 고가구에 관한 전문가지."

제니퍼는 천장을 바라보며 쌀쌀하게 말했다.

"근사한 얘기로군요. 어쩌면 이 파티에 재미있는 사람은 하나도 오지 않았는지도 몰라. 젊은 사람들은....."

"아니, 있고말고."찰스는 샴페인을 죽 들이마셨다.

"이리 와. 한 바퀴 돌아보지. 누군가 만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헬렌은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따랐지만 마음속으로는 초조했다. 제니퍼가 옳다. 제이크에게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나를 혼자 떨어뜨려 놓을 정도라면,

왜 이런 장소에 데리고 왔을까?

세 사람은 한 시간쯤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녔지만 제이크는 만날 수가 없었다. 헬렌은 넉 잔째의 샴페인을 받아 들고 있는데, 누군가가 헬렌의 팔을 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키이스 매너링이 서 있었다.

"키이스! "하고 헬렌은 엉겁결에 외쳤다. "여기서 뭘 하는 거죠?'

제니퍼와 찰스도 뒤돌아보았다. 찰스는 키이스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은 친숙하게 인사를 나눴다. 제니퍼는 과장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 키이스." 하고 제니퍼는 언제나와 같이 큰소리로 말했다. "만나게 돼서 아주 기쁘군요. 헬렌도 기뻐하는 것 같군요. 헬렌의 남편은 어디론가 사라져 우리들 모두 실망시키고 있답니다."

헬렌은 표정이 굳어진 채 제니퍼를 쳐다보고 있었다. 키이스의 일로 오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헬렌은 키이스를 친구로서 좋아했다. 단지 그뿐이다. 키이스가 추남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핸섬했다. 헬렌보다 약간 연상으로 , 키가 크고 말랐으므로 소년 같은 데가 있었다. 키이스는 몇 명의 여자의 마음을 들뜨게 한 적도 있었는데, 헬렌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키이스는 헬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미소를 지어 말했다.

"나는 헬렌을 만나러 왔어요, 제니퍼 . 헬렌이 가고 싶어 하는 말로의 음악회 티켓 얻었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헬렌은 신중하게 ,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대답을 했다.

"싫어요, 그런 건. 하지만 키이스, 이해할 수 없군요. 왜냐하면 처음 그 음악회 이야기를 했을 때는 제이크는 미국에 있었고.... . 그런데 제이크는 이미 돌아왔거든요. 난 갈만 한 사정이 못돼요."

제니퍼는 초조하게 헬렌의 핑계를 듣고 있다가 큰소리로 말했다.

"어머, 헬렌. 제이크가 어디로 가고 싶을 때, 너를 생각해? 저 사람은 너의 감시자가 아니야. 반항해야해. 자립심을 가져. 너 자신의 친구들을 만들란 말야. 그에게는 그의 친구들이 있잖아."

헬렌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헬렌은 제니퍼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오늘밤의 좋은 예다. 하기는 이 곳에 와서부터 제대로 제이크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나를 에스코트해 준 사람은 찰스였다.

"모르겠어요, 키이스"

헬렌이 입을 여는 순간 키이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뒤돌아보니 제이크가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표정은 마치 크림을 핥은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워 보였지만, 키이스에게 보낸 시선은 날카로웠다. 자기 멋대로 억측을 한 채로 자기만족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여어!"

하고 소리를 내면서 제이크는 동료들 사이에 끼어 들었다. 그리고 헬렌의 부드러운 두 팔을 자기 것인 양 과시하려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붙잡았다. 헬렌은 그것이 지독히도 싫었다.

"매너링이 아닌가? 당신 같은 성실하고 젊은 변호사가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말하고 있는 내용은 무례하지 않았지만, 그 말투는 사뭇 교만스러웠다. 키이스는 제이크보다 키도 작을 뿐더러 체격도 약했으므로, 형세는 키이스에게 사뭇 불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이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조용히 응수하는 그 태도에 헬렌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워드! 나는 당신 부인을 만나러 왔소. 부인이 가고 싶어 하는 음악회 티켓을 얻었거든."

헬렌은 늠름한 표정을 띤 키이스의 얼굴로부터, 남편의 냉랭하고 잔혹한 얼굴 쪽으로 눈을 돌렸다. 헬렌의 팔을 잡은 제이크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키이스의 응수가 제이크를 몹시 놀라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제이크는 당황해 하지는 않았다.

"알았네."

제이크는 찰스로 부터 담배를 건네 받았다.

찰스는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적당한 시기를 보아 담배를 권한 것이었다.

"만일 헬렌이 정말로 가고 싶어 한다면 내가 데리고 갈 거라고 생각지 않나?"

키이스는 잠깐 망설였다.

"하워드씨! 헬렌에게서 들은 바로는 당신은 클래식음악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하던 데요."

이제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제니퍼가 한숨을 쉬었다.

"헬렌이 그렇게 말하던가?"

제이크는 고개를 숙이고 찰스가 꺼내 준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여 몇 모금 피웠다.

"아내가 그밖에 또 무엇을 말했는지 가르쳐 주겠나. 그녀가 내 감상 태도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고 싶네."

"제발, 제이크." 헬렌이 애원하듯이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제이크는 냉담하게 말했다.

"부탁하고 싶은게 뭐지?'

"소란을 피우지 말고....." 헬렌은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이미 키이스의 초대를 거절했어요."

"?"

헬렌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이크, 이제가요."

핸드백을 들고 헬렌은 부탁했다. 제니퍼는 뭔가를 알 것 같다는 표정을 했지만, 찰스는 더욱 동정이 깃들인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키이스는 당황한 것 같았다. 헬렌은 그가 이런 일을 일으킨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제이크가 이런 식으로 까지 행동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키이스는 아직 제이크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 매너링씨가 애써 표를 얻어 오셨다면 같이 갈 수도 있겠지 . 그런데 음악회는 언제지?' 하고 제이크는 헬렌의 태도에 동요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키이스는 어색한 듯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목요일 밤이요. 23.'

긴장한 말투였다. 제이크는 얼굴을 찌푸렸다.

"23? 아아, 생각났다. .24일에 파리에서 회의가 있으니까, 나는 그 날 집에 없으리라고 생각한 거군. 에스코트해 주겠다면 헬렌도 기쁘겠지?"

헬렌은 화가 나서 부르르 떨며 제이크를 보았다. 그녀의 일을 제멋대로 경솔하게 결정해 버리는 제이크가 미웠다. 왜 그런 일을 해! 미국에서 제이크가 돌아온 날 밤 , 키이스와 내가 외출한 것을 알고 그렇게 불쾌해 하고는 왜 키이스와 둘이서 가게 하는 거야? 헬렌은 제이크의 진심을 알 수가 없었다.

제니퍼는 뭔가 유감스러운 듯이 한숨을 쉬고, 찰스는 평화적인 해결이 날 것 같다고 안심하는 것 같았다. 찰스가 먹을 것이 있는 테이블로 가자고 제안했으므로, 키이스는 전화를 걸고 오겠다고 헬렌에게 말했다.

키이스가 가 버리자, 모두 어색한 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맛있는 것이 눈앞에 있는데도, 헬렌은 전혀 아무 것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제이크가 불쾌해 하는 것이 헬렌에게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헬렌과 매너링의 외출을 인정한 것이 제이크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이 입을 다물고 는 이야기를 걸어도 한두 마디 대답할 뿐이었으므로, 모두의 사이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대사가 그들이 있는 곳에 오자, 제이크는 유유자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헬렌은 '휴유'하고 한숨을 쉬었다. 일이 있으면 제이크는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헬렌은 대사가 일 때문에 제이크에게 어떤 협조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네 사람은 예정보다 일찍 리셉션 회장을 나왔다. 제이크는 차를 부르지 않고 택시를 잡았다. 헬렌은 집에 돌아와 제이크와 단둘이 되는 것이 겁이 나, 침묵을 지키고 시트 구석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라테머 부인은 지하실에 있는 자기 거처로 돌아갔다. 제이크가 라테머에게 이젠 일이 없다는 것을 전하고 있는 사이, 헬렌은 신경질적으로 라운지를 돌아보고 있었다.

조명이 약간 어두웠으므로, 집안은 따뜻하고 평안해 보였다. 라테머 부인은 밤참용 샌드위치와 치킨 샐러드를 안락의자 옆 테이블에 놓아두었다. 헬렌은 숄을 벗고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올렸다. 이런 일상적인 일을 해서라도 그녀는 제이크가 만들고 있는 험악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나쁜 일도 자신에게 부끄러워할 일도 하지 않았다 . 왜 가책을 느끼는 건가?

제이크는 전화를 끝내고 , 손으로 검은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이쪽으로 왔다. 슈트 상의의 단추를 끄르고 있는 제이크는 아주 핸섬해 보였다. 헬렌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마음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차가운 표정으로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커피 , 어떠세요?"

제이크는 머리를 흔들고, 장식장 쪽으로 걸어가서 스카치위스키를 글라스에 부었다. 헬렌은 살짝 그 쪽을 보았지만, 제이크는 그녀에게 등을 돌린 채였다. 헬렌은 숨을 죽이며 커피를 따라 설탕을 조금 넣은 뒤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샴페인을 몇 잔 마신 뒤였으므로 향이 강한 커피가 정신을 말게 해주었다. 아직 위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헬렌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이런 배우지 못한 요크셔 출신의 남자에게 져서는 안 된다라고 스스로 타이르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제이크가 배우지 못했다는 건 억지라는 것을 헬렌도 알고 있었다. 제이크가 얼마나 사업에 유능한 인물인가 하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가 제이크의 냉철한 마음을 차분하게 할 수 있을 지 자신이 없었다. 제이크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30킬로나 떨어진 셀비이에 있는 그의 어머니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헬렌은 시어머니에게 부탁할 기분은 아니었다. 시어머니는 자기나 제이크의 생활 방식을 경멸하고 있었다.

헬렌은 두 잔째의 커피를 따르고 있는데, 장식장 쪽으로 부터 제이크가 다가와서 난로 앞에 섰다. 설탕을 넣는 헬렌의 손가락이 떨려, 필요이상으로 힘을 주어 커피를 저었다. 그녀는 제이크 쪽을 보지 않았다. 제이크의 회색 눈동자에 반사되어 보이는 것이 두렵고 그렇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제이크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가까스로 견뎌 왔다. 하지만..., 그녀는 괴로운 듯 생각했다. 지금까지 나는 그이가 말하는 대로 해 왔다. 그는 나를 손님 접대를 위한 호스티스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도록 해 왔다. 이 결혼반지는, 단지 내가 하워드 제이크이 부인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의미밖엔 없다.

헬렌은 섬세한 도제 그릇을 손에 들고 커피의 그윽한 향기를 들이마셨다. 남편 이외의 남자와 우정을 나눌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헬렌은 뜻밖에도 결혼 생활 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을 스스로 파괴시켜 버린 격이 되었다. 제이크는 스카치를 들이마셨다. 그 눈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끼자, 헬렌은 귓불이 화끈거렸다. 헬렌은 잔을 접시에 다시 놓고, 제이크의 화난 표정이 침묵으로 끝날 것을 바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거야?"

헬렌은 관자놀이를 눌렀다.

"피곤해서 쉬려고요."

"당신은 언제나 지쳐 있군." 제이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언제나 그렇더군."

헬렌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불쾌한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신중히 말을 골라서 했다.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아요. 제이크!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당신이 집을 떠나고 난 후의 초조하고 고통스러운 내 마음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키이스와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면, 그것은 당신이 나쁜 거예요."

"내가 나쁘다는 건가? ? 헬렌, 당신은 차가운 여자야. 왜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헬렌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밤은 이미 나를 충분히 망신 주었잖아요. 찰스와 제니퍼가 어떻게 생각할지 개의치도 않고."

"그럴까?" 제이크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무리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거야. 당신은 언제나 인간의 표면 밖에는 보지 못해 . 마음속에서 인간을 움직이고 있는 동기 따윈 모르고 있어."

"무슨 의미죠?" 헬렌은 분개했다.

"말한 그대로지. 가련한 늙은이 찰스는 내 반이라도 좋으니까 잘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고, 제니퍼는 찰스가 패기가 없으므로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어."

헬렌은 고개를 들었다.

"제니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그녀는 당신을 천박하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나와 똑같이 당신을 싫어하고 있어요."

헬렌은 흥분한 어조에 , 제이크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제니퍼가 당신 입장이었다면 어떤 짓이라도 한다는 걸 몰라?"

헬렌은 몸을 바로 했다.

"무슨 뜻이죠?"

제이크는 맨틀 피이스 위에 , 소리를 내어 글라스를 놓았다.

"어리석은 귀족님! 내게 있어 제니퍼를 함락시키는 건 간단해. 이렇게 손가락을 딱 하고 울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구."

헬렌은 숨이 가빠졌다. 검고 부드러운 옷 아래에서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더러울 수가." 하고 헬렌은 반감을 갖고 외쳤다.

"당신이 하는 말 따윈 믿지 않아요. 제니퍼는 그런 인간이 아니에요. 아시겠어요? 당신을 경멸하고 있단 말예요."

제이크는 헬렌 앞에 버티고 서서, 초조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사실을 보여 주지."하고 그는 차갑게 말했다.

헬렌은 한참동안 제이크를 보고 있었는데, 분노로 불타고 있는 제이크의 눈에서 드디어 시선을 떨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 됐어요."

"! 내가 증거를 보여 줄 수 없다는 건가?'

헬렌은 안락의자 위에 있는 백을 집었다.

"이젠 자야겠어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제이크는 피곤한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끝이야." 그는 비웃듯이 말했다.

헬렌은 걸어 나왔다.

"이제 더 이상 할말은 없어요. 당신이 한 말은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가끔 미국에서 돌아온 날 밤 집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내게 트집 잡고, 게다가 당신 멋대로 나를 키이스와 함께 음악회에 가게 하다니."

"내 부재중에 당신은 멋대로 매너링과 외출했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를 생각해 봐. 내가 공공연히 당신과 매너링 두사람을 외출하게 했다면 조금이라도 의혹감은 사라질 거야. 그때문에 이 제이크 하워드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

헬렌은 발을 멈추고 되돌아보았다. 제이크는 맨틀피이스 위에 있는 상자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피곤한가보군. 가도 좋아."

헬렌은 자기를 비웃듯이 위아래로 훑어보는 제이크가 너무도 미워서 부르르 몸을 떨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이젠 가서 자. 당신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난 모르고 있어 . 하지만 필시 알게 되겠지."

헬렌은 제이크의 결점이나 그 무분별한 바람기에 관한 것을 들추어내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무시해 버리자. 이제까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제이크가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 오늘밤은 견디기 어렵게도 싫었다.

 

3.

레스토랑은 마침 혼잡한 시간이었다. 값비싼 의상을 걸친 부인들이 쇼핑하는 짬에 쉬기 위해 들러 이야기하거나 웃거나 하며 유유자적하게 고급스런 분위기와 값비싼 향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 곳은 사교계의 사람들이 잘 모이는 장소였다.

헬렌은 제니퍼 세인트 존과 둘이서 한쪽 구석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제니퍼는 두개 째의 케이크를 먹으면서 자기의 아름다운 몸매를 내려다보았다.

"단것을 너무 안 먹어도 안되지." 하고 제니퍼는 아주 만족스러운 듯이 말하고 케이크를 포크로 잘랐다.

"남을 보는 건 좋아도 난 살찌고 싶지 않아. 지금 유행복은 글래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거란 말야."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 헬렌은 제니퍼 쪽에 눈을 주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넌 아주 스마트해."

제니퍼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은 그렇지. 하지만 이런 것을 먹고 있으면 어떨까?'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학창시절의 일을 생각해? 그 땐 살찌는 것만 골라서 먹어도 괜찮았는데, 왜 나이를 먹으면 살이 찌기 시작하는지 몰라."

헬렌은 커피잔을 접시에 놓았다.

"옛날같이 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야. 필드 하키는 물론 테니스 같은 운동에도 힘이 넘쳤잖았어?"

", 그래, 필드하키지." 제니퍼는 생각하고 미소를 지었다.

"넌 잘하지 않았니? 난 언제나 공을 잘 맞히지 못했어. 내 발을 세게 때리는 것이 걱정이었지."

헬렌은 킬킬거렸다. 학창시절의 일을 화제로 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두 사람은 그 때 아주 사이가 좋았다. 그 무렵은 어쩐지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대화가 도중에서 끊어지자 제니퍼가 입을 열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었다.

"제이크는 잘 있어?'

헬렌은 컵을 집어 들었다.

", 잘 있어. 지금 여행 중이야"

"? 어디에?'

그 말에서는 비양대는 듯한 어조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헬렌은 컵에 씌어진 녹색 글씨를 손가락으로 덧쓰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영국 북부의 노우덤벌랜드야 . 리즈베리에 있는 화학 공장에 갔어."

제니퍼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이 헬렌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그 날 밤 거기서 어떻게 했지? 대사관에서 리셉션이 끝나고 키이스가 별안간 나타나 제이크를 화나게 하진 않았니?'

제니퍼의 눈은 호기심을 빛나고 있었다. 헬렌은 그런 호기심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제이크가 제니퍼의 이야기를 한 이래, 헬렌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제니퍼에 대해 경계하게 되었다. 헬렌은 문득 제이크의 목적이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두 사람의 사이를 틀어 놓고 제니퍼에게 손을 대려는....

헬렌은 그 생각을 부정하고 컵을 놓았다. 지나치게 생각하는 거야. 제니퍼는 단지 친하고 싶어 하는 것뿐이야. 헬렌은 생각하면서 신중하게 대답했다.

"키이스와 나를 음악회에 가게 한 건 그 사람이야. 그런데 왜 화날 일이 생길까?"

제니퍼는 헬렌이 어쩐지 얼버무리려는 것 같아서 "정말 그가 화를 내지 않았어?"하고 되물었다.

헬렌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말하지마. 스스로 약속하게 해 놓고 화내는 것은 우습잖아."

제니퍼는 핸드백에서 얇은 금제의 담배갑을 꺼내 권했지만 헬렌은 거절했다. 제니퍼는 담배를 입에 불고 초조한 듯이 말했다.

"제이크가 살인을 범해도 너는 도망가게 도울 사람이로군. 나는 찰스가 자기 멋대로 명령하는 일 따윈 허락하지 않아."

헬렌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제이크는 명령하지 않아. 우리들은 잘 만났다고 생각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니? 그는 늘 집을 비우고, 너는 집에서 지루해서 항상 안달복달하고 있는데도?'

제니퍼는 콧소리를 냈다. "내가 찰스를 혼자서 그런 식으로 놀러 가게 놔둔다고 생각해?" 그녀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나라면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아. 꼭 따라가지."

"나는 너와는 입장이 틀려." 헬렌은 조용히 말했다.

"너는 찰스를 사랑하고 있어. 그리고 그도 너를...."

제니퍼는 재떨이에 재를 떨고 빈정거리듯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도 그럴까? 의심스러운데." 하고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확실히 옛날에는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했지. 하지만 그런 기분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어. 신혼여행의 찬란함이 퇴색해 버리고 나서는 뭔가 남았다고 생각해? 사랑을 교환할 때는 밤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와 매일매일 함께 사는 거야. 더구나 어두운 곳에서 밖에는 사랑을 하지 않는 거야."

"제니퍼!" 헬렌은 충격을 받았다. 자기의 생활은 불행하더라도 찰스와 제니퍼는 이상적인 부부라고 헬렌은 이제까지 믿고 있었다. 그런데 제니퍼가 이런 말을 태평하게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헬렌은 매우 놀라워했다. 제니퍼는 초조한 모습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헬렌, 그런 얼굴로 보지 말아. 마치 세상이 끝이라도 난 것처럼 생각하지 마.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야. 몇 년 전부터야. 가끔 도망가고 싶었어. 내가 자만하지 않고 사실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가끔 네게 이질감을 느끼고는...."

"그런데 왜?" 헬렌은 이해할 수 없었다.

"너 역시 무엇이나 갖고 있지 않아? 훌륭한 집에 차, 돈도 많이 있고, 그리고 너를 사랑해 주는 남편....."

"난 따분한 거야!" 제니퍼가 초조한 듯이 외치고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알겠어?"

헬렌은 머리를 흔들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제니퍼, 네가 결혼한 지 벌써 5년 이야. 이젠 슬슬 어린애를 낳아도..."

"왜 그런 식의 견해를 갖는지 모르겠군." 제니퍼는 너무나 지긋지긋하다는 몸짓을 하고 말했다.

"어린애라니! 집안에 어린애가 악악거리는 따윈 싫어 . 지금 보다도 책임을 무겁게 할 일을 내가 원하고 있다고 생각해?"

헬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건 상상해 보지도 못했어."

"어린애 따윈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극히 가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때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아. 그렇지 않아?' 제니퍼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편안하게 고쳐 않았다.

"커피 한잔 더 마실까?"

"?" 헬렌은 멍했다. ", 아 그러지."

그녀는 앞으로 몸을 쑥 내밀고는 포트를 들어 두 사람의 잔에 커피를 따랐다. 그리고 제니퍼에게 잔을 건네고 가까스로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이런 우울해지는 이야기가 되었을까? 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보자."

"네 남편의 소문을 들었어." 제니퍼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너는 그가 결점투성이라는 것을 인정해?'

헬렌은 얼굴이 빨개졌다. 아주 가끔 제니퍼는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런 경우다. 함께 커피를 마시러 오지 않을 것을 그랬다고 후회했다. 오전 중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어 지루했었으므로 그녀가 권하자 기쁘게 달려온 것이었다. 헬렌이 대답을 하지 않으므로 제니퍼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어떻게 될 거야, 헬렌. 안됐군. 이제까지 제이크의 일로 그렇게 곤란해 한 적은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기분이 드는 거야?"

"돈이 전부라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어." 헬렌은 발끈해서 말하고는 팔위에 놓았던 손을 꽉 쥐었으므로 손톱이 손바닥으로 파고 들었다. 제니퍼는 초조한 듯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뭔가 말할 때마다 놀라는 것 같은 얼굴이 아니니? 나는 화를 잘 내는데, 가끔 그런 때에 너를 만나게 되거든."

헬렌은 쓰러질 듯한 자세로 커피를 마셨다. 제이크가 제니퍼에 대해서 한 말이 생각나 엉겁결에 이 친구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쳐다보았다. 만약 제니퍼가 바람을 피우고 싶어 한다면? 더구나 제이크와?

헬렌은 손은 땀으로 축축했다. 3년간이나 함께 살아왔으므로 이미 제이크의 성격에는 익숙해 있어야 당연하겠지만, 헬렌은 그렇지 않았다. 제니퍼가 제이크에게 마음이 있다는 따위는 헬렌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제니퍼가...아니! 나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혼자서 예상하고 있을 따름이야. 그렇다 치고, 이미 제니퍼를 지금까지와 같은 눈으로 볼 수 없게 된 헬렌은 뭔가 소중한 것이 파괴되어 버린 것 같이 느껴졌다. 두 사람 사이의 거북한 침묵을 깨려고 헬렌은 필사적으로 화제를 찾았다. 제니퍼는 말하지 않았지만, 헬렌이 오늘 제이크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상해하고 의심스러워했다.

그러나 운 좋게 그 곳에 안면이 있는 젊은 여자가 나타나 두 사람에게 아는 척을 했다. 의원인 아버지를 둔 이메리의 유행복은 사람들의 화제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한바탕 이야기가 끝나자 헬렌은 들어가지 않으면 안될 시간이 되었으므로 그것을 기회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이서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사이에 제니퍼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제이크는 언제 돌아와? 이번에 제이크가 여행가기 전에 두 사람을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었는데."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헬렌은 대답했다.

"고마워, 제니퍼 -주말까지는 돌아올 거야. 공장을 돌아보러 갔을 뿐이니까."

제니퍼 장갑을 끼면서 말했다.

"마침 잘 됐군. 일요일 밤은 어떨까?'

헬렌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 괜찮을걸. 후에 한번 더 연락 할께."

제니퍼는 헬렌의 냉정한 얼굴을 의미있게 물끄러미 보고, "괜찮아, 헬렌?" 하고 급히 물었다. "내가 말한 것이 뭔가 맘에 걸렸어?"

헬렌은 간신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 그냥 두통이 났을 뿐이야. 집에 돌아가서 조금 누우면...."

제니퍼는 한숨을 쉬는 듯했다.

"그렇다면 잘됐어 . 일요일에 꼭 전화해."

", 알았어"

헬렌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두 사람은 레스토랑을 나와서 헤어졌다. 택시에 탄 제니퍼는 손을 흔들면서 사라져 갔고, 헬렌은 옥스퍼드 거리를 걸어갔다. 열두 시가 조금 지났다. 라테머 부인에게 한 시에 점심 식사를 하겠다고 말해 놓았지만, 헬렌은 그다지 공복감을 느끼지 않았다. 제니퍼는 자신의 아픈 상처를 일부러 건드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걸까, 하고 헬렌은 생각했다. 내가 몇 년이나 사귀어도 모르는 것을 제이크는 어떻게 그토록 짧은 시간에 간파하고 있었을까? 헬렌은 자기가 그렇게 아무 것이나 경솔하게 단정 짓는다고 생각지 않았었지만 제니퍼의 결혼생활은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냥하고 뒤끝이 없는 성격인 제니퍼의 남편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한 성격이므로 제이크같이 차고 정략적인 결혼을 계획할 리도 없고, 부드럽다고는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헬렌은 파크 레인을 돌자 충동적으로 길을 가로질러 하이드 파크로 발길을 향했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사이로 가끔 햇빛이 빛나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상쾌한 기분이었다. 머리가 바람에 날리는 것도 기분을 좋게 했다. 그러자 마음이 개운해져서 기운이 북돋아지는 것 같았다. 헬렌은 잔 뒤 위를 힘차게 핸드백을 흔들면서 걸었다.

그러는 사이에, 지금까지의 상황은 일시적인 마음의 고통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제이크와의 관계가 요즈음 전보다 서먹해졌다고 해서 뭔가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되어가는 것은 당연한 인과응보이며, 인생에는 뭔가 변동이 있는 법. 이 생활은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 누구로부터 강요되어 진 것은 아니다. 헬렌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자살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선택을 강요당했다. 이 결혼이 아버지의 친지들에게 준 효과는 헬렌을 충분히 만족 시키는 것이었다.

커슬랜드 스퀘어의 집으로 돌아온 헬렌은 아주 느긋한 기분이 되어 지금까지는 모든 것을 과장되게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라테머 부인이 점심 식사를 한 시간 이나 전에 만들었다는 것에 조금 화가 나서 항의했을 때에도, 그 다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지만, 헬렌은 상냥한 어조로 사과했으므로 부인도 화가 풀렸다.

"조금 전에 전화가 왔었습니다." 헬렌이 식탁에 앉아서 우선 프루츠 칵테일을 맛보고 있는데, 라테머 부인이 말했다.

"매너링 씨였습니다."

헬렌은 숟가락을 놓고 부인을 보았다.

"매너링이?"

"" 라테머 부인은 거드름을 피우며 양손을 끼었다.

"용건은 뭐라던가요?" 헬렌은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지만 아까와 같은 식욕은 없었다.

라테머 부인은 양손을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그냥 돌아오시면 곧 전화해 달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래요? "헬렌은 포도 쥬스를 마시며 말했다. 키이스가 무슨 일일까? 음악회 이야긴가?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헬렌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고, 다시 식사를 계속했다.

"알았어요, 고마워요." 하고 말하고 그녀는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나중에 걸겠어요."

그 일로 맛있는 식사도 엉망이 되고 헬렌은 식욕을 잃어버렸다. 제니퍼와 그런 이야기를 한 뒤였으므로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약 키이스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면 제이크를 실망시키는 것이 된다.

다섯 시경 헬렌은 키이스의 아파트에 전화를 걸었다. 키이스는 헬렌이라는 것을 알고 아주 기쁜 듯한 목소리를 냈다. 인사말을 나눈 뒤에 그는 제니퍼에게서 제이크가 부재중이라고 들었는데 오늘밤 식사하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제니퍼는 아주 재빠르군.)하고 헬렌은 조소적으로 생각했다.

(키이스는 내가 돌아오기 전에 전화를 걸었으니까, 제니퍼가 레스토랑에서 돌아가자 곧 키이스에게 연락했군.)

헬렌은 제니퍼에게 이런 식으로 간섭받는 것에 대해 고통에 가까운 분노를 느꼈지만, 곧 그 생각을 부정했다.

(제니퍼는 필시 내가 키이스와 만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던 거지.) 헬렌은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온 우정을 믿고 싶었다.

"미안해요, 키이스" 헬렌은 의식적으로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밤은 나가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면 기분을 새롭게 바꿔야지." 키이스는 꽤 강경하게 말했다.

"헨리의 새 가게가 있어. 거기서 식사해요. 오래 있고 싶지 않으면 곧 돌아가도 좋았으니까."

헬렌은 오늘밤도 혼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망설였다. 라테머 부인이 일곱 시에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잘 때까지의 몇 시간 동안 나는 외톨이가 된다. 요즈음은 잘 잘 수도 없으니까 빨리 잠자리에 들어도 별수 없고..... 별안간 헬렌은 제이크를 생각했다. 거긴 지금 몇 시나 됐을까? 호텔 방에 혼자 있을까?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다. 한밤중이 되려면 좀 더 있어야 한다.

"좋아요, 키이스 갈게요. 몇 시로 할까요?'

키이스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일곱 시는 빠를까?" 하고 그는 들떠 말했다.

헬렌은 금시계를 보았다.

"그렇진 않아요. 좋아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재빠르게 목욕탕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괜찮다면, 키이스 , 이곳으로 데리러 와 주겠어요?"

"물론. 그럼 나중에."

키이스가 전화를 끊자 헬렌은 별로 내키지 않는 모습으로 수화기를 놓았다. 사실 지금은 어디에도 나가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키이스에게서 전화가 없었다면 필시 텔레비젼을 보던가, 며칠 전에 산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텐데. 그러나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있기를 바라면서,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사소한 문제가 몇 시간을 보내는 약속을 하게 했다. 제니퍼와 마찬가지로 키이스도 그와 헬렌과의 관계가 옛날과는 틀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헬렌은 한 시간 정도 욕실에 들어갔다가 나와 베네치안 레이스로 된 흰 블라우스와 복사뼈까지 내려오는 길고 검은 벨벳 스커트를 입었다. 블라우스는 길고 풍성한 소매가 달린 것으로, 컬러는 둥글고 넓었다. 앞에 단추가 있는 스커트는 밑의 단추를 일부러 풀어 놓았는데, 걸을 때마다 날씬한 다리가 살짝살짝 드러나는 것이 매혹적이었다. 긴 머리를 땋아서 감아 올린 헤어 스타일은 언제나 헬렌을 여인답게 보이게 했다.

현관의 종이 울렸을 때는 이미 준비가 완전히 끝나 있었다. 헬렌에게서 외출한다고 들은 라테머 부인이 문을 열고 키이스를 맞아들였다. 헬렌이 은색 모피로 된 긴 케이프를 걸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있던 키이스는 그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눈을 크게 떴다.

"차라도 한잔 드셨어요?' 헬렌은 케이프를 의자 팔걸이에 걸치면서 물었다.

키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이 집의 가정부는 나를 별로 환영하고 있는 것 같지 않군요. 허락받지 않고 들어왔다고 도둑이라고 쫓아낼 것 같은데, 말려 줘요."

"과장이 심하군요. 무엇을 마시겠어요?'

키이스는 걱정스러운 듯이 주위를 둘러보며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 설마 남편이 돌아온 것은 아니겠지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호랑이 굴에서 호랑이를 만나고 싶지는 않으니까."

헬렌은 조금 불쾌한 듯이 머리를 흔들며 "생각이 지나쳐요." 하고 말하면서 술을 진열해 둔 장식장 쪽으로 걸어갔다.

"뭘로 하시겠어요?'

키이스는 잠깐 망설였지만 스카치가 좋겠다고 말하고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찾았다. 헬렌은 필요없다고 말했으므로 키이스는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는데, 그 손이 조금 떨리고 있는 것을 헬렌은 알았다.

 

키이스가 데리고 간 곳은 강변에 새로 개점한 초현대식 식당으로, 그릇은 모두 유리와 스웨덴식의 목재였다. 아주 개성적인 식당이라고는 생각됐지만 헬렌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좀 더 조촐하고 아담하고 독특한 분위기가 있고,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올 것 같은 식당이 그녀는 좋았다.

하지만 식사는 맛있었고,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키이스는 연극이나 책이나 음악회에 관한 화제가 풍부해서 그런 것에 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이 즐거웠다.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설령 집에 있다 해도 제이크는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 . 오로지 출세만을 위해 살아온 제이크에게는 예술을 즐길 여유가 없었으므로 그의 취미는 조잡하고 세련되지 못했다. 제이크가 좋아하는 것은 관능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숨겨진 상징적인 의미를 찾아낸다고 하는 것은 아주 싫어해서 그런 일은 극히 드물었다. 헬렌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부가되는 가치보다도 그것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열 시 조금 지나 키이스는 헬렌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그는 헬렌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내리려고 하는 헬렌을 바라보며 말했다.

"커피를 마시러 들어가도 좋을까?"

헬렌은 시계를 보고 "아니, 안돼요." 하고 딱딱하게 대답했다.

"저는 너무 늦었어요. 라테머 부인은 벌써 돌아가 버렸을 거예요."

"알고 있소."

헬렌은 한숨을 쉬었다.

"키이스 , 실수하지 마세요. 두 번 정도 함께 외출했다 해서.... ."

키이스는 재빨리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알고 있소, 당신은 결혼했다는 걸. 그러나 그게 어떻다는 거요. 그것이 대체 뭐요. 모두 알고 있소."

"무엇을 모두 알고 있다는 말이에요?" 헬렌은 단호하게 말하고 차 밖으로 나갔다.

"고마웠어요. 음악회일은 내주에 전화하세요."

키이스는 잠시 동안 입을 다문 채였다.

"마음이 바뀌는 건 아니겠지?"

"음악회에 가는 것이 어떻게 ?"

"음악회의 일만은 아니에요. 알고 있을 텐데." 키이스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좋아요. 안녕, 헬렌."

키이스가 가 버리자 헬렌은 문을 열었다. 집안은 어두웠다. 불을 켜고 그녀는 재빨리 라운지며 서재 쪽을 보았지만 어디에도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제이크가 노우덤벌랜드의 여행에서 갑자기 돌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케이프를 벗고 헬렌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라테머 부인이 쓴 쪽지가 있었는데, 커피와 샌드위치를 라운지에 놓아두었다는 것이었다. 헬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부인은 두 사람이 여기에 들어오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헬렌은 그렇게 느끼자 기분이 상했다. 라테머 부인도 자기와 키이스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언짢았다. 제이크는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제이크가 라테머 부인에게 자신의 부재중의 내 행동을 알아내서 후에 보고 하라고 명령했는지도 모르겠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헬렌은 구부리고 앉아 퍼콜레이터의 스위치를 꽂고 작은 물방울이 유리에 부딪쳐 흩어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밤은 왠지 너무나 불쾌했다. 시계를 보니 열 한 시를 조금 넘었다. 지금쯤 제이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디에 있는 걸까?

 

헬렌은 컵에 커피를 따라 우유와 설탕을 넣었다. 왜 이런 것을 생각하는 걸까? 헬렌은 자신에게 화를 냈다. 제이크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지 않은가? 지금까지도 마음에 들어 한 적이 없었는데,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여러 가지 것을 상상하게 되었다. 결혼할 즈음은 이렇지는 않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즈음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픔에 잠겨 있을 때였다. 그 때의 일은, 헬렌에게 커다란 슬픔과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와 둘이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서로 마음을 합해서 행복하게 살아왔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키이스가 자신에게서 떨어져 갔을 때도 그다지 상처를 입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이미 자신의 생활은 끝났던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을까? 헬렌은 스스로 느끼지 못했다. 제이크의 잦은 출장과 귀가가 마치 문장의 구두점처럼 헬렌의 생활의 리듬이 되었다. 그리고 그 리듬이 반복되는 사이에, 조금씩 지금의 생활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헬렌은 조금씩 자기를 되찾게 되었다. 그리고 집을 예쁘게 꾸미고 제이크가 바라는 부인이 되리라고 노력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헬렌은 이런 식으로 제이크와의 유대가 깊어진다고 해서 자기가 그를 의식하게 되는 결과가 되어, 결혼한 이후 굳게 닫혔던 마음, 누구에게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생각했던 마음에 그가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헬렌은 장래의 일을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인간의 본성이 라는 것은 생각에 넣지 않았었다. 그래서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기와 제이크도 보통의 남자와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동요하고 있었다.

헬렌은 커피를 다 마시자, 스테레오 장치를 해 놓은 티크장 쪽으로 걸어갔다. 매끄러운 티크 걸상에 앉아 헬렌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제이크에게 있어서 나는 한낱 장식물일 뿐,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이제까지는 거기에 반항해 본 적도 없었다.

헬렌은 감았던 눈을 뜨고 한숨을 쉬었다. 반항한다 해도 무엇에 대해 불평을 하면 좋을까? 헬렌은 맛있는 음식도, 아름다운 옷도 받았고,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라도 살 수 있었다. 이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을까?

어린애..... 헬렌의 백부는 어린애가 없었으므로 헬렌에게 어린애가 생겨난다면 그 아이는 백부의 사후 머린즈가의 재산도 상속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 백부에게는 불만이었다.

헬렌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헬렌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

헬렌은 누군가가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눈을 떴다. 얼굴을 덮은 머리가 거추장스러워 손으로 쓸어 올리는 순간 헬렌이 본 것은, 침실 입구에 기대서 있는 제이크의 모습이었다. 그는 푸른 양복을 입고 있었다. 밤 사이에 자란 수염이 턱 주위를 희미하게 뒤덮은 , 놀랄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헬렌은 실크 이불 아래서 몸을 떨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이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헬렌이 엉겁결에 취한 그 태도를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몸을 바로 세우며 업신여기듯이 말했다.

"놀랄 거 없어 . 당신을 원해서 뉴캐슬에서 밤새도록 달려온 건 아니야. 너무나 피곤하지만, 자기 전에 당신에게 이야기해 두고 싶은 것이 있어서...."

헬렌은 혼란한 머리를 식히려고 애썼다.

"...., 무슨 이야기?"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제이크는 딱 벌어진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무관심한 태도로 어깨를 내려뜨렸다.

"이번 주말, 둘이서 여행가자."그는 은근하게 말했다.

"어젯밤에 정했어.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더군. 어디 나갔었어?"

헬렌은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이런 식으로 누워 있는 건 불리했으므로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네글리제뿐인 몸이 제이크의 눈에 띄게 될 것이다. 헬렌은 일어나서 발밑의 가운을 몸에 걸칠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이크는 갑자기 방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전날 밤 헬렌이 벗어서 의자에 걸쳐 놓았던 벨벳 스커트에 눈을 멈췄다. 그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값이라도 매기려는 듯이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자 레이스로 된 블라우스가 그 속에서 사르르 떨어졌다.

"어젯밤엔 외출했었어?' 하고 제이크는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어디에 갔었는지 물어도 괜찮아?'

헬렌은 커다랗게 한숨을 쉬고는, "당신은 나의 감시인은 아니잖아요."하고 외쳤다.

"그런가?" 제이크는 불쾌한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 말해봐, 누군지?'

헬렌은 발끈해서 말했다.

"이 방에서 나가요. 난 아직 일어나고 싶지 않단 말에요."

"아니, 그렇게 말하지마." 제이크는 팔짱을 끼고 우뚝 서서 재미있다는 듯이 헬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회색눈동자는 도전적인 빛을 띠고 헬렌을 향해 있었다. 헬렌은 방향을 바꿔 엎드려서, 대들듯이 격렬하게 말했다.

"당신 따윈 대수롭지 않아요. 제이크 하워드."

"그래? 내가 갑자기 돌아와서 매너링과의 쾌락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인가? 어젯밤엔 그 녀석과 나갔었겠지. 아니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알고 있어. 라테머 부인에게서 들었어."

헬렌은 몸을 틀어서 베개에 기댔다.

"라테머 부인을 스파이로 만들었군요. 비열한 인간 같으니라고."

제이크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젯밤에 전화했을 때 아무도 받지 않았어. 그래서 걱정스러웠지. 그뿐이야. 당신이 어디에 갔는지, 라테머 부인에게 전화로 물은 것은 당연하겠지. 걱정스러워서 다시 전화했던 거야."

헬렌의 뺨은 점점 더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하고 그녀는 변명하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말할 참인가?" 제이크는 끼고 있던 팔을 풀었다.

"여하튼 매너링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아.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구." 제이크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우리들이 주말에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지 않은 것 같군."

헬렌은 눈살을 찌푸렸다. 제이크가 아침 일찍부터 방에 들어온 것에 놀라, 왜 그가 예정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는지 묻는 것을 잊고 있었다.

"물론 알고 싶어요. "하고 그녀는 아주 난처해하며 말했다.

제이크는 침대 가까이 와서, 이상한 물건이라도 보듯이 헬렌을 훑어보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어조로 물었다.

"그래? 누다나 부부의 별장이야. 두 사람이 우리 둘을 초대했어."

"누다나?' 헬렌은 되물었다. "그 분은 저...."

"그래, 차바 대사지."

", 당신이 그 때 리셉션에서 이야기한 사람?"

"그래,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겠어?"

헬렌은 관자놀이에 손을 댔다.

", 알았어요. 몇 시에 간다고 약속했어요?"

"오늘밤 저녁 식사 때까지. 네 시경에 가기로 하지."

"알았어요." 헬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주말을 시골에서 보내는 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조금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제이크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군." 하고 발끈해서 말했다.

"매너링과 다른 약속이라도 있는 거야? 내가 내주 초까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헬렌은 몸을 떨며 주저하듯 말했다.

", 다른 약속이 있어요." 그녀는 제니퍼에게서 초대받은 일을 말하고 싶었지만, 제이크는 끝까지 듣지 않고, 화난 듯이 헬렌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구부려 헬렌의 목을 양손으로 꽉 눌렀다. 그 표정은 엄하고 그 눈은 차갑게 헬렌을 응시하고 있었다.

"충고하는 거야." 하고 제이크는 분노로 몸을 떨며 말했다.

"이런 일은 이젠 더 이상 필요 없어. 너는 내 거야. 적어도 몸은 말이야. 결혼식 때 우리들이 맺어지기로 약속하고..... 네가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즉 네가 남자와 육체관계를 갖고 싶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해 볼까? 어때?"

헬렌은 입을 열었다.

"무슨 의미죠?'

제이크는 몸을 일으켰다.

"잘 알고 있을 텐데,"

"이젠 지긋지긋해요." 헬렌은 헐떡이며 말했다.

제이크는 입술을 오므렸다.

"그래, 이 욕망에 팔린 여자야. 그렇게 자신을 과신하면, 스스로 자기의 무덤을 파는 거야."

그런 식으로 모욕당한 헬렌은 훌쩍거리며 울었다. 그리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까지 이런 굴욕을 당한 적은 없었다. 제이크의 굳은 거무스름한 얼굴을 보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

제이크는 문 쪽으로 걸어가려다가 멈췄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 실크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헬렌이 필사적으로 반항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계속 더듬었다. 속이 환히 비치는 얇은 시폰 네글리제만을 걸친 헬렌의 호리호리한 몸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자 제이크는 돌연 문으로 가서, 문을 열어 조소하듯이 헬렌 쪽을 뒤돌아보았다.

"벌거벗은 여자 따윈 내게 얼마든지 있어." 하고 제이크는 냉혹하게 내뱉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헬렌은 가까스로 침대에서 일어날 기분이 되었을 때는 늦은 아침이었다. 라테머 부인이 가져다 준 커피와 토스트가 침대 옆 테이블에서, 손도 대지 않은 채 차갑게 식어 있었다. 헬렌은 전혀 식욕이 없었다. 초대받은 주말의 일을 생각하면 일 초 일초가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아래로 내려오니, 라테머 부인이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인은 헬렌이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하고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헬렌은 한숨을 쉬고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그냥 배가 고프지 않아서. , 그분은 점심 들러 일어나셨던가요?"

"일어나셔요?" 하고 라테머 부인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주인님은 주무시고 있지 않은데요. 아침을 드시고 곧바로 나가셨습니다."

헬렌은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져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언제? 여덟 시경에 잠깐 봤는데....."

", 마님. 그리고 식사하시고 나가셨습니다. 점심때 돌아오시겠느냐고 여쭤 보았습니다만..."

", 그래요." 헬렌은 잘 알 수 없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나 봐요. , 점심은 별로 먹고 싶지 않은데요."

", 마님...." 하고 부인은 말하기 어려운 듯이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헬렌은 물었다.

", 어젯밤, 마님이 매너링씨와 나가셨다는 것을 주인님께 말씀 드린 것이 마음에 걸려서....." 라테머 부인은 얼굴을 붉혔다.

"주인님이 전화를 하셨는데, 마님께 볼일이 있다고 하시길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헬렌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알았어요, 괜찮아요. 별로 비밀스러운 것도 아닌데요."하고 말했다.

라테머 부인은 ''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괜찮지만, 마님."

헬렌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는 라운지로 들어갔다.

장식장 앞에 서서, 거기에 진열된 술병에 눈을 멈췄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싶다고 느낀 적은 이제까지 한번도 없었는데, 지금은 뭔가 마시고 기분을 안정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헬렌은 배 주위에 손을 대보고는 신문을 집어 들고 제목만을 골라 읽었다. 그리고 의자에 깊숙이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숙이 연기를 들이마시며 산만한 신경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아까 제이크는 이제부터 잠잘 거라고 말했었는데, 대체 어디에 간 걸까? 무슨 일로?

헬렌은 담뱃불을 비벼 끄고, 방에 있는 전화기를 들고 하워드 재단의 번호를 돌렸다. 다이얼을 돌리는 헬렌의 손가락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신호가 갔다. 비서는 곧 헬렌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 하워드 부인, 무슨 일이세요?"

헬렌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을 찾고 있는데, 그 곳에 계세요?'

"아니오, 하워드 부인. 오셨다가 벌써 돌아가셨는데요."

", 그래요. 고마워요." 헬렌은 망설이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어디로 갔는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물쇠 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고 제이크가 현관에 들어섰다.

", 이제 오세요." 하고 헬렌은 서두르며 말했다.

"돌아오셨군요. 고마워요."

헬렌은 어색한 기분으로, 수화기를 놓고는 쭈뼛거리며 제이크의 앞에 섰다. 입고 있는 푸른색의 양복은 바뀌지 않았지만, 제이크는 수염을 깎고 셔츠를 새로운 것으로 바꿔 입고 있었다. 눈 주위에 짙은 푸른빛이 감돌지 않았다면, 뉴캐슬에서 하룻밤 내내 차를 달려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이크는 테니스 외에 골프와 요트로 단련한 멋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헬렌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곳에 동행해 본 일이 없었다.

제이크는 기분 나쁜 눈으로 헬렌을 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부산을 떠는 거야? 누구에게 전화하고 있었어?"

전화대에 기대고 있던 헬렌은 몸을 일으켜, 늘어뜨린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면서 라운지 쪽으로 걸어갔다.

"별로 그렇지 않아요. "하고 그녀는 긴장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당신 회사에 전화하고 있었어요. 예정이 바뀌었는지 어쩐지 알고 싶어서요."

"예정이 바뀐다고?" 제이크는 장식장 쪽으로 다가가서,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꺼내 글라스에 부었다. 그리고, 단숨에 반을 마셔 버리고는 헬렌을 향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어째서 내가 예정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지?"

헬렌은 양손을 깍지 끼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침 일 때문에...."

제이크는 비웃듯이 헬렌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팔걸이의자에 털썩 몸을 던졌다.

"아침의 그 대수롭지 않은 오해 때문인가?' 하고 그는 조롱하듯이 어조로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뭐가 바뀌어야 되는 거야?'

"제이크." 헬렌은 재미있다는 듯이 자기를 보고 있는 제이크의 얼굴을 때려 주고 싶었다. 그런 짓궂은 말을 함부로 해 버리는 제이크가 헬렌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이크는 맥주를 마저 마시고는 유리로 된 테이블 위에 빈 글라스를 놓았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는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사이로 헬렌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곧이 듣지 않는군, 헬렌"하고 제이크는 조용히 말했다.

", 당신은 내가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하는 건가요.?" 헬렌은 제이크의 비웃는 듯한 어조에 자극을 받아 큰 소리로 외쳤다. 제이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야. " 제이크는 나른한 듯이 말했다. "여하튼 그 이야기에 관해서는 둘이서 결정하기로 하지."

"이미 당신 편리한 대로 혼자서 정해 버린 게 아닌가요?" 하고 헬렌은 화가 난 듯이 외쳤다.

"그래서 그게 결말이 났다는 거야?" 하며 번거롭다는 듯이 제이크가 말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헬렌은 자기가 무력하다는 것을 느꼈다.

"듣고 싶어요. 제이크 , 또다시 의논을 되풀이한다는 건 싫지만. 무능한 어린애가 돼 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나는 어른이에요. 당신과 결혼했어요. 비록 당신에게 보호받고, 당신의 돈을 쓰고 있긴 하지만, 내게도 가정부를 부릴 권리는 있어요!"

제이크는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헬렌은 그것을 보고 왠지 순간적으로 그에게 동정을 느꼈다. 피로 때문에 눈을 반쯤 감고 있는 제이크가 왠지 아주 상처받기 쉬운 인간같이 보였다. 헬렌은 이제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마음의 동요를 맛보았다. 제이크가 그런 것과는 동떨어진 인간이라는 것이나 , 헬렌에게 동정 따윈 바라지도 않고, 또 그녀를 동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이순간만은 잊고 있었다. 제이크는 상처받기 쉬운 인간이 아니야.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니, 나는 아주 바보로군.....

"알았어." 제이크는 금색 벨벳 의자의 등에 기댄 머리를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면서 말했다.

"이 이상의 의논하는 것은 시간 낭비야."

헬렌은 양손을 맞잡았다. 헬렌이 듣고 싶었던 건 이런 대답이 아니었다. 제이크는 잘도 이야기를 딴 데로 돌려 버린다. 헬렌은 더 이상 제이크를 자극하는 것이 싫었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회한의 기분이, 의지와는 반대로 끓어올랐다. 제이크가 24시간 이상이나 한잠도 못잔 것이 자기의 책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곧 제이크의 속눈썹이 눈을 덮었다. 이럭저럭 제이크는 잠이 든 것 같았다. 헬렌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제이크를 바라보고는 걸어가려고 하다가, 뭔가에 저지당한 듯이 멈춰 서서 한번 더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그녀는 제이크의 잠든 얼굴을 본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 모습은 깨어있을 때와는 아주 달랐다.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은 젊음이 넘치며,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다.

헬렌은 자신이 왜 이러는 지 알 수 없어 하면서도 얼마 동안 제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컬러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주고 싶었지만, 그가 눈을 뜰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망설이고 있었다. 헬렌은 이제까지 제이크와 살을 맞대어 본 적이 없었다. 제이크가 헬렌에게 닿은 것도 아주 가끔, 목에 목걸이를 걸어 줄 때나 옷의 지퍼를 채워 줄 때뿐이었다. 그렇게 타인 같은 관계가 헬렌은 싫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의 헬렌은 그 반대라는 걸 느꼈다.

그녀는 몸이 떨렸다. 이제 까지 제이크의 햇볕에 그을은 탄력 있는 다리나, 윤기 있는 더부룩한 머리를 이렇게 분명히 의식해 본 적은 없었다. 이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고, 갈색의 다리에 맞닿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남자에 대해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왠지 이 기분은 헬렌을 들뜨게 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나 그것을 손에 넣게 위해 체면 따위는 버릴 남자다. 이렇게 교만한 남자를 미워할 의도는 아니었는데....

숨이 막힐 것 같아 헬렌은 방을 나왔다. 제이크에게 동정을 느끼는 한편,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정말 바보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헬렌은 방을 가로질러서 계단 근처로 갔다. 내가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걸 알면 제이크는 얼마나 재미있어할까? 그는 내가 키이스 매너링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화내고 있지만, 나는 사실 차가운 인간이다.

제이크는 헬렌이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 때를 빼고는 , 그녀가 마음속으로부터 뭔가를 느끼는 일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이크는 쭉 내 곁에 있었고, 내 친한 친구들과도 몇 년이나 교제가 있었으니까, 내 몸가짐이 바르고 함부로 남자에게 몸을 대는 따위의 일은 없다는 평판을 그도 듣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아마 그는 나를 아내로 골랐을 거야. 제이크 하워드의 소유물은 모두 완전한 것이 아니면 안되니까. 트집 잡을 데가 없는, 흠이 없는 것이 아니면....

헬렌은 고통스러운 듯이 화장대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스칸디나비아인 같은 아름다움은 오로지 제이크의 거무스름한 얼굴 모습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것일까? 제이크는, 헬렌의 그 하얗고 예쁜 다리를 , 그 얼음같이 차가운 마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그런 여자일까?

헬렌의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다. 헬렌은 거울에서 눈을 돌렸다. 모든 것이 싫어졌다. 내가 어떤 여자일지라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나는 제이크 하워드이 부인이고, 제이크는 자기의 소유물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30분쯤 지났다. 헬렌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여니, 쟁반을 든 라테머 부인이 서 있었다. 부인은 방으로 들어와서, 낮은 테이블 위에 그 쟁반을 놓으며 말했다.

"점심을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님은 라운지에서 쉬고 계셔서.... 마님께 먼저 점심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니 괜찮아요. 됐어요." 헬렌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마침 나도 깨우러 가려고 했어요. 몹시 지쳐 있는 것 같아서...."

", 마님. 그밖에 필요하신 것은 없으세요?"

헬렌은 기운을 내어, 라테머 부인이 갖고 온 것을 바라보았다.

"아니오. 이걸로 됐어요. 고마워요."

헬렌은 쌀쌀하게 말했다. 라테머 부인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고 는 문을 닫고 나갔다.

부인이 나가 버리자, 헬렌은 한숨을 쉬고 시계를 보았다. 한 시간 조금 지났다. 슬슬 짐을 꾸려야겠지 . 제이크는 눈을 뜨면 준비가 다 되어 있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몰라. 제이크이 짐은 라테머 부인이 꾸리고 있을 거야. 그 사람은 제이크가 번거로워 할 정도로 수고를 하니까.

헬렌은 붙박이장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거기에 진열된 옷을 둘러보았다. 시골에서의 주말은 어떨까? 제이크의 부재중에 헬렌은 찰스와 제니퍼의 웨르트셔의 별장에 초대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곳은 마을의 저택사이에다가 호화스럽게 지은 집이었다. 하지만 제이크가 들려준 얘기만으로 누다나의 별장이 어떤 곳인지 상상하는 것은 무리였다. 작지만 잘 꾸며진 집일까 ?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지만, 여하튼 소박한 시골풍의 집일까?

헬렌은 또 한숨을 쉬었다. 가장 좋은 것은, 어떤 경우에라도 곤란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제이크에게 다시 물어 볼 기분은 아니었다. 그런 얘기를 하면 또 말다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테머 부인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을 때도 헬렌은 쟁반 위의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부인은 헬렌이 이브닝드레스를 접고 있는 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일은 제가 할 텐데요, 마님." 하고 부인은 부르짖었다.

"가지고 가실 것을 알려 주시면, 즐겁게 짐을 꾸리도록 하겠습니다."

헬렌은 손을 멈추고 얼굴을 들어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어머나, 시간이 거의 다 되었네. 주인의 여행 준비는 다 되었지요?"

", 오늘 아침, 나가실 때 여쭤 보아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그래요?" 헬렌은 양손을 얌전히 모으고 있었다. "그분은 이제 깨어났나요?"

"모르겠습니다, 라운지 에 계시니까요. 아마 욕식에 들어가셨다가, 식사를 하시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깨우러 가 볼까요?"

헬렌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같으면, 내가 깨울께요. 이미 일어났겠지만....'

그녀는 난처한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정도면 부족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라테머 부인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마님, 단지 이틀인데요. 게다가 랜드라노그인걸요. 산뜻한 것은 그다지 필요 없을 거예요."

"랜드라노그?" 헬렌은 놀라서 물었다. "웨일즈의?"

", 마님.'

", 즉 우리들이 가는 별장이 랜드라노그에 있는 거예요?'

", 마님. 주인님이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헬렌은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아니, 실은 들을 기회를 놓쳤어요. 그 외에 다른 이야기가 있어서." 헬렌은 당황한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랜드라노그. 그렇게 먼 곳까지 가다니, 모르겠군."

라테머 부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멀지는 않습니다. 고속도로로 가시겠지요. 웨일즈에 들어서면 길이 꽤 꼬불꼬불하다고 들었습니다만, 톰과 저는 전에 한번 가 본적이 있어서요. 아주 멋진 곳이었지요."

헬렌은 코에 주름을 지어 보였다.

"여름이라면, 하지만 벌써 10월 인데, 더구나 이런 날씨에는....."

점심때부터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분이 우울해지는 기분 나쁜 날씨였다. 부인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제가 마님이라면 그런 걱정 따윈 하지 않겠습니다. 주인님이 운전하실 텐데요. 아무것도 걱정할게 없을 것 같습니다."

헬렌은, 걱정하고 있는 것은 가는 도중의 일뿐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라테머 부인에게 틈을 보여서는 안 돼. 이 사람은 우선 고용주에게 충실할 테니까. 나를 좋아하고 깍듯이 대해 준다 해도, 나보다는 우선 제이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헬렌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헬렌이 고른 옷은 몸에

꼭 맞는 엷은 보라색 코르덴 슬랙스와 목이 둥글게 팬 검은 스웨터로, 쭉 뻗은 하얀 목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는 크림색의 스웨이드코트로, 컬러와 소매와 옷자락은 금색 모피로 되어 있었다. 라운지에 들어서니 , 마침 라테머 부인이 안락의자 앞의 테이블에 받친 쟁반에 홍차를 놓고 있던 참이었다.

헬렌을 보자 부인을 몸을 바르게 세웠다. 방안 에도 소파 위에도 제이크가 없다는 것을 안 헬렌에게 부인이 말했다.

"주인님이 마님께 홍차를 드리라고 하셔서."

헬렌은 코트를 의자의 팔걸이에 걸었다.

"어머, 고마워요." 노골적인 빈정거림은 아니었는데도, 부인은 헬렌 쪽을 홱 돌아보았다.

하지만 헬렌의 표정에서는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하튼 차는 고마웠다. 두 잔째를 마시고 있는데, 제이크가 들어왔다. 다리 근육선이 도드라지는 딱 맞는 스웨이드 바지와 울니트로 된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전체적으로 크고 음울하게 보였다. 헬렌은 손을 맞잡고, 문득 그에게는 스페인인 피가 섞여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걸 아시면 제이크의 어머님은 화를 내시겠지. 어머님은 요크셔의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혈통을 자랑하고 계신데.)

제이크는 헬렌의 재미있어 하는 듯한 표정을 읽고는 순식간에 얼굴을 찌푸리며, "뭐가 재미있어?" 하고 험상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헬렌은 표정을 바꾸며, "별로" 하고 말하며 잔을 들었다.

"곧 갈 건가요, 그렇지 않으면 홍차를 드시겠어요?'

제이크는 망설이다가, 어깨에 걸친 양가죽 코트에 손을 넣으며, "가지" 하고 말했다.

"가방은?"

"이층에, 몇 개 돼요." 하고 헬렌은 일어서며 웃었다.

"몇 개라고!" 제이크는 의아한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대체 뭘 갖고 갈 건데?"

헬렌은 손바닥을 슬랙스에 비벼 대었다.

"누다나 부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일러 주지 않고, 별장이 웨일즈에 있다는 것도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거기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불편하지 않게 이것저것 준비했어요."

"그래? 헌데, 라테머 부인에게서 이미 들었는가 보군." 헬렌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제이크는 생각에 잠긴 듯이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좋아 , 알았어. 짐을 갖고 내려 올께. 설마 차의 트렁크가 가득 차지는 않겠지?"

"고마와요."라는 말이 헬렌의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그보다 빨리 제이크는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헬렌은 이미 코트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홀에 서서 계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짐을 들고 내려오는 제이크를 보고, 부엌에서 나온 라테머 부인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런 것은 톰이 할 텐데.... 그 사람은 부엌에서 홍차를 마시고 있는데요." 하고 부인은 외쳤다.

제이크는 싱긋 웃어 보였다. 고용인에게는 관대하고 상냥한 그의 성격을, 그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괜찮아요. 나는 아직 그런 나이는 아니오."

그는 그렇게 말하고 헬렌 쪽을 홱 돌아보았다.

"이 밖에 할 일은 없어?"

헬렌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젠 없어요. 어머. 그렇군 . 일요일 저녁 약속, 그것을 취소하지 않으면." 그녀는 바빠서 제니퍼에게 전화하는 것을 잊고 있었다. 제이크의 표정이 험상궂게 되었다.

"일요일에 저녁 식사 약속을 한 건가?' 하고 그는 차갑게 물었다.

제이크의 비웃는 듯한 어투가, 헬렌에게는 혀를 내밀어 보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그래요, 했어요! "하고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제이크는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취소해 버려!" 하고 거칠게 명령하고, 여행 가방으로 힘껏 문을 밀치고는 나가 버렸다. 라테머 부인은 마치 비난이라도 하려는 듯이 헬렌을 보았는데, 헬렌은 상세하게 설명해 줄 기력조차도 없었다.

"내가 전화를 할 테니까, 이젠 괜찮아요. 일요일 저녁에 돌아오는 것, 알고 있지요?"

", 마님." 라테머 부인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만 나가 봐요." 헬렌이 말했다.

"어서"

부인이 나갈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헬렌은 수화기를 들었다. 마침 집에 있었던 제니퍼는 헬렌의 이야기를 듣고 유감스러운 듯했다.

"하지만 헬렌, 이제까지는 없었던 일이잖아." 헬렌의 설명을 듣고 제니퍼는 외쳤다.

"지금까지 너를 여행에 데리고 간 일은 없었잖아!"

헬렌은 한숨을 쉬었다.

"하긴 그렇구나. 하지만 이번은 특별한 경우야. 제이크는 꼭 자기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남에게 과시할 필요가 있거든."

"즐거운 여행이 되리라고 생각해?" 제니퍼는 업신여기는 듯한 투로 물었다.

"그냥, .... 웨일즈에 있는 별장이래. 문명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거야. 대체 어떻게 되는 건지는 나도 몰라."

헬렌이 어쩔 수 없이 맞장구를 치고 있는데, 제니퍼는 또 계속했다.

"너와 제이크가 아주 평범한 부부라면, 물론 문제는 없어. 만약 그렇다면 재미있겠지.그러나 네 남편은? 최악의 일이 아닐까? 대사와 제이크는 무역 이야기에 열중하고, 너는 필시 대사 부인과 둘이 남겨질 거야. 그렇지 않다면 남자 두 사람은 밤에 놀러나가고, 너는 아마 지루해서 손가락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을 거야."

제니퍼는 하품을 하고 나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난 도대체 네가 어떻게 거기에 가기로 한 건지 모르겠어. 제이크가 너를 믿어서 너를 방치해 둔다면 몰라."

제이크가 돌아올 것 같았으므로 헬렌은 급히 말했다.

"미안, 제니퍼! 이제 가야해 . 돌아오면 전화 할게."

제니퍼는 초조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좋아, 헬렌 네가 폐렴이나 동산에 걸려도 내 탓은 아니야. 양쪽 다 걸릴지도 모르겠구나."

"알았어"

헬렌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 제이크가 탐색하려는 듯이 헬렌을 바라보았다. 제이크의 페러리로 두 사람은 출발했다. 그는 시내에서 리무진을 탔지만, 자기가 운전하며 멀리 갈 때는 반짝거리는 스포츠카를 쓰고 있었다. 헬렌은 지금까지 이 차를 여섯 번 정도 밖에는 탄적이 없었는데, 그 것도 아주 짧은 거리였다. 제니퍼가 경멸하듯이 말한 대로 제이크가 헬렌을 동반하고 주말여행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니퍼에게 말한 것처럼, 헬렌이 알 수 있는 이유는 단지 하나였다.

제이크는 건실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누다나씨의 신용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아프리카인 정치가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가정 제일주의자로, 유럽인의 성에 대한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타락의 상징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한 기간은, 제이크는 운전에 열중하느라 헬렌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비가 퍼붓고 러시아워였으므로 주의해서 운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혼잡한 지역을 빠져 나와 고속도로로 나가자, 제이크는 그 큰 키를 바로 해서 느긋하게 자세를 취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아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매너링과는 무슨 얘기를 했어?"

헬렌은 얼이 빠진 듯 무릎 위에 손을 놓은 채로, 녹색 눈동자를 도로에서 떼지 않았다. 그녀는 놀랐다는 듯이 물었다.

"매너링?'

제이크는 그 순간 핸들을 꽉 쥐었다. 그는 곧 즐거운 듯이 말했다.

"내게 그렇게 시치미를 떼면 안돼. 일요일에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수 없다고 당신이 말했을 때, 매너링은 뭐라고 했을까?"

", 그일!" 헬렌은 알았다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 그 일이다." 제이크는 성난 목소리로 돌아가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헬렌 -"

헬렌은 제이크 쪽을 보았다. 그 눈동자는 분노에 불타고 있었다.

"제발, 제이크 . 부탁이에요." 헬렌은 외쳤다. "엄격한 아버지 같은 표정은 그만둬요. 말하죠. 나는 키이스 매너링 따위와는 일요일에 저녁 식사를 함께 할 약속은 하지 않았어요."

"그것을 믿겠다고 말할까?'

"마음대로."

헬렌은 시선을 도로로 돌렸다. 제이크에게 화를 내며 자신이 결백하다는 따위와 같은 말을 해 버린 것이 후회스러웠다.

", 소원이에요." 헬렌은 반항하듯이 제이크를 보았다.

"어째서 내가 누구하고 전화했는지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그것이 어떻다는 거예요. 나는 당신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으니까, 당신도 꼬치꼬치 캐묻지 말아요."

별안간 옆길에서 커다란 트럭이 나왔다. 그 커다란 차가 가로막았으므로 제이크는 급정거를 했다. 그 일로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이 잠시 허물어졌다. 평소라면 스포츠카를 능숙하게 굴리는 그 솜씨를 즐기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헬렌은 눈을 돌리고 창밖을 보았다. 끊임없이 계속 내리는 비가 차 주위를 둘러싸는 벽 같았다. 제이크가 3주전에 미국에서 돌아와서 그와 말다툼을 한 이후로는 그녀는 그의 일이라면 신경질적으로 되어 버렸다. 헬렌은 지금까지, 제이크의 냉혹한 혐오하는 기분을 눌렀다. 하지만 지금은 그 혐오감을 일부러 북돋우고 있었다.

제이크는 이제까지 그녀가 보아 온 남자와는 아주 다르다, 라고 헬렌은 자신에게 상기 시켰다. 그는 조야하고 , 거칠고, 남자로서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소중히 여겨 온 명예나 체면 따윈 그의 안중에는 없다. 게다가 여자의 인격이라는 건 생각지도 않는다.

제이크에게 있어서의 여자란 단지 그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도구일 뿐이다. 그에게서는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다. 아내인 나에게 그는 냉엄할 뿐, 나는 처녀인 채 소중히 보호되고 양육되어 왔다. 그 일말의 관심이나마 끌 수 있는 것은 순종하고 흠 잡을 데가 없는 아내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여자들보다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는 나에 대한 생각을 고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트럭이 옆길로 지나갔으므로 그는 엑셀레터를 밟았다. 기분이 상쾌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잠자코 서로 자신의 생각에 열중해 있었는데, 차가 급히 고속도로를 벗어나 커다란 호텔이 있는 길로 들어섰으므로 더 이상 서로에게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저녁 식사를 하려면," 라고 제이크는 말을 던지고 시트 벨트를 풀었다.

"조금 이른 것 같군. 아직 여섯 시반이니까 . 하지만 나중에 모르는 길에 들어서서 멈추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헬렌은 안심했다는 듯이 끄덕거리며 벨트를 풀고 차 밖으로 나왔다. 다리를 펴니 기분이 좋아졌고, 쉼 없이 내리는 비가 조금도 싫지 않았다. 헬렌은 컬러를 세우고, 부드러운 모피에 얼굴을 묻었다. 제이크가 차를 주차시키는 것을 기다려, 두 사람은 몇 미터 앞에 보이는 밝은 현관을 향해서 걸었다.

건물 내부가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두 사람은 로비에서 코트를 벗고, 잘 꾸며진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아직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벌써 몇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테이블에 앉아 헬렌과 제이크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았다. 제이크는 식사를 하는 동안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헬렌이 식사를 하는 동안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헬렌이 식사를 다 하고 뭔가 말할 때에야 조금 입을 떼었을 뿐이었다. 헬렌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다정한 사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안절부절 못했다.

식사 후, 리쾨르와 커피가 나오고 제이크가 하바나 담배를 맛있게 피우기 시작하자 헬렌은 입을 열었다.

"얘기하고 싶었어요. 내가 전화를 건 상대는 제니퍼에요. 우리들 두 사람을 일요일에 초대하겠다고 한 건 그 애였어요."

제이크의 대답이 없었으므로 헬렌은 초조해서, "들고 있었어요?" 하고 나직이 화난 듯이 외쳤다. 제이크의 긴 속눈썹이 치켜 올려졌다.

"듣고 있어, 헬렌 .아무 말도 할게 없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헬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흘렀다. 나는 도대체 바보인가? 그가 화를 내고 있다고 해서 내가 굽혀야 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또 제이크에게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할 기회를 줘 버리다니, 헬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서서 주저없이 식당을 나왔다. 그리고 로비에 맡겨 두었던 코트를 찾아 어깨에 걸치고, 차가운 바람과 계속 퍼붓는 비에 당황하면서도 밖으로 뛰어나갔다. 헬렌은 코트소매에 손을 넣고 살을 에는 듯한 바람 속을 헐떡거리며 걸었다.

페러리 쪽으로 가 보니 문이 잠겨져 있었다. 열쇠를 갖고 있지 않은 헬렌은 코트를 꽉 여미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추위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태어난 이래 이렇게 비참해 보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호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 뒤돌아보니, 제이크가 헬렌 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냉담하게 헬렌을 보았다. 비에 젖어 말린 모피를 얼굴에 대고 그 가냘픈 어깨를 떨어뜨리고 가련하게 떨고 있는 헬렌을 보고도 제이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문을 열어 헬렌의 팔을 잡고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젖은 검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제이크는 헬렌 쪽을 향해 앉았다. 헬렌은 제이크가 화가 나 트집이나 잡지 않을까 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더 이상 그 긴장을 견딜 수 없게 된 바로 그 때, 제이크는 작은 목소리로, "알았어, 내가 나빴어."하고 말했다.

헬렌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떴다.

"나빴다고? "하고 그녀는 작게 되물었다.

"그래, 그밖에 무엇을 말하고 싶었지? 나는 하여간 비열해. 당신을 믿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믿어."

", 제이크"

헬렌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뺨을 적셨다. 그것을 숨기려는 듯이 얼굴을 양손으로 비비고 있는 헬렌을 보고, 제이크는 주저하다가 차 안의 라이트를 켜고, 깜짝 놀란 듯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원이야," 하고 그는 힘 주어 중얼거렸다. "나빴다고 했잖아. 울지마, 내가 나빴어."

헬렌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됐어요. 괜찮아요."

그녀는 흑흑 흐느끼면서 입에 손을 댔다.

"헬렌 , 여자란..... 마음을 진정시켜." 하고 제이크는 신음하듯이 말하고, 헬렌의 어깨에 팔을 감아 가까이 끌어당겨 자기의 팔 안에 얼굴을 묻게 했다. 제이크에게 이렇게 가까이 한 것은 처음이었다. 헬렌은 잠시 동안 제이크에게 바싹 붙어, 아주 평안한 기분으로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눈물이 그치자, 헬렌은 다른 느낌으로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헬렌은 스웨터 너머로 전해지는 제이크의 체온과, 몸의 강한 감촉 , 청결한 사내다운 내음에 움찔했다. 빨리 몸을 떼고 눈물을 닦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을 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이크의 손이 헬렌의 어깨를 붙잡아 부드럽게 그녀의 몸을 시트에 밀어붙였다. 그는 라이트를 끄고 재빠르게 담뱃불을 붙이고 엔진을 걸었다. 엔진이 걸린 것을 확인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몰았다. 곧 두 사람은 고속도로로 나와 라이트의 물결에 휩쓸렸다.

헬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의 손길이 싫지 않다고 느낀 것에 놀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5.

뱀처럼 구불구불한 길이 비에 젖어 빛나고 있었다. 차는 이미 단조로운 고속도로를 벗어나 기복이 심한 벌판을 향해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근처에는 인가하나 없어, 헬렌은 왠지 걱정이 되었다. 낮이었다면 걱정이 안 될지도 몰라. 비는 지독하게 내리고, 주위가 컴컴한 탓이야. 불안해진 헬렌은 생각했다. 호텔 주차장을 떠난 이후 제이크가 입을 열었던 것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아닌지, 지도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뿐이었다. 제이크가 아까 나에게 부드러운 태도를 취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헬렌은 생각했다. 그는 이미 평소의 험상궂은 얼굴로 돌아가 있었는데, 그 표정에서는 자신에 대한 동정 따위는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어쩌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심한 커브 길에서 차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는 탓인지도 몰라. 그는 때때로 혼자 중얼거리면서 속도를 줄이곤 했다.

헬렌은 아무 탈 없이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이 이상 좁은 차 안, 그의 옆에 있고 싶지 않았다. 신경 쓰이는 그의 곁을 빨리 떠남으로써, 자신을 타락시킨 그에게 쏠리려는 친밀한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이런 자질구레한 생각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길고 짙은 속눈썹, 냉혹하게 보이는 그 옆얼굴, 목덜미의 긴 솜털, 스웨터 소매로부터 나온 팔뚝과 거기에 빛나고 있는 시계, 지금까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녀가 갑자기 몸을 떠는 것을 느낀 듯, 그가 바라보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추워?"

헬렌은 고개를 흔들며,"아니오. 그냥 몸이 떨리는 것뿐이에요." 라고 일부러 밝게 대답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할까요?"

그는 시계를 보면서, "이제 도착할 때가 거의 다 되었는데." 라며 신중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길이 정말 맞는 길이겠지?'

헬렌은 몸을 바로 하며 조수석 앞에 있는 조그만 사물함에서 지도를 꺼내 실내등에 비추어 보았다.

"이 길이 랜드라노그로 가는 길이에요."

"그래?" 그는 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쩌자고 길 이름을 표시해 두지 않을까? 벌써 10마일이나 아무 표지판도 없으니,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

"어두워서 못 봤는지도 몰라요. 게다가 비까지 내리고....." 그녀가 신중하게 말했다.

"알아."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또 전등을 켜고 지도를 살펴보다가, 갑자기 창밖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머, 저기 불빛이 보이네, 저기 보이죠?'

그는 헬렌의 기분을 진정시키려는 듯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여, 하지만 마을이 아니라 외딴집 한 채처럼 보이는군."

헬렌은 허리를 구부리고 "랜드라노그가 틀림없어요. 지도를 봐요." 하며 화난 듯이 소리쳤다.

"알았어. 알았다구." 그는 급커브를 틀어서 우측으로 달렸다. 앞쪽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제이크가 말한 대로 그 수가 적었으므로 마을 같지는 않았다.

"아마 모두들 자는가 봐요." 그녀는 주저하면서 말했다.

"아홉시 반에 ?" 그는 헬렌에게 핀잔하는 눈길을 주며, "그건 이상해."라고 말했다.

"그러면 혼자서 찾아보는 것이 좋겠군요." 제이크의 비웃음에 그녀는 발끈해서 대답했다.

"찾았어." 그는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멈췄다.

"당신도 보일 거야, 저기."

그녀는 물방울이 흐르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가까이 에서 보니 그 불빛은 집 한 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그 집은 길가가 아니라 진흙의 좁은 길을 올라간 곳에 있었다.

"저 집 대문에 이름이 씌어 있을 거예요." 그녀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알았어. 뭐라고 씌어 있는지 보고 올께." 하고 말했다.

헬렌이 끄덕이자, 그는 차 문을 열고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그의 가죽 부츠는 발목까지 진흙탕에 빠져 버렸다. 차 문이 닫히기 전에 그가 화가 나서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렸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그녀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급히 억제했다. 하지만 그가 깊은 진흙탕에 빠지면서도 집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 여행 탓일 거야. 어쨌든 그가 곤란해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즐거워한다는 것을 눈치 채지 않도록 해야 해. 차로 돌아왔을 때는 그다지 화가 나 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 기대는 빗나갔다. 그는 화를 내면서 돌아왔고, 구두의 진흙도 털지 않고 그냥 차에 올라탔다.

"뭐라고 씌어 있는지 알아?' 실내등에 비춰진 그의 표정은 험악했다.

"가르쳐 줄까? 랜드라노그 농장이야. 알아? 랜드라노그- "

헬렌은 어깨를 움츠리며 애교 있게 되물었다.

"그게 우리가 찾고 있는 별장이에요?"

그는 짜증난 얼굴로 대들 듯이 말했다.

"아냐, 저것은 랜드라노그 농장이라고 했잖아. 랜드라노그가 아니야."

헬렌은 입을 반쯤 벌리고 잘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껌뻑였다.

"이 길은 , , 이 길은 랜드라노그로 가는 길이 아니고, 랜드라노그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어요?'

그는 헬렌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

"내가 뭐라고 이야기했든 당신이 지도를 보고 있었으니까 잘 알거야."

그녀는 지도를 무릎 위에 놓고 떨리는 손으로 지나온 길을 더듬어 보았다. 고속도로로 나와서 달리다가 지나쳐 버린 구부러진 길을 곧 찾았다. 분명히 자신이 잘못된 지명을 더듬고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닮은 이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므로 훨씬 전에 꺾어 들었어야 했던 길을 지나와 버린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더듬고 있는 지도를 들여다보는 제이크의 얼굴을 겁먹은 얼굴로 쳐다본 그녀는 , 그의 눈에 격한 분노가 담겨 있는 것을 보았다.

"어느 정도 지나친 거야?' 제이크가 화를 억누르는 듯한 투로 물었으므로 그녀는 재빨리 다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 8, 8킬로미터 정도...." 주눅이 든 목소리로 떠듬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는 한숨을 한번 쉬고, 의자에 기대어 담배로 손을 뻗치면서 "그래?" 하고 기분 나쁜 투로 말했다. "돌아가자."

"미안해요, 정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비슷한 이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제이크는 마치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무뚝뚝하게 "나도야." 하고 말했다.

"당신만을 나무라는 것은 아니야. 나도 도로에 나와 있는 표지를 못 봤으니까."

헬렌은 겨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제이크는 <천만에> 하듯이 고개를 흔들고 엔진을 걸었다. 그렇지만 기어를 넣고 엑셀레더를 밟아도 뒷바퀴는 그 자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기어를 거꾸로 넣어 보았지만, 바퀴가 진흙탕 속에서 헛도는 소리와 엔진의 붕붕거리는 소리들이 섞여서 들려 올 뿐이었다.

"웬일일까?" 그는 핸들을 꽉 쥐었다. "어떻게 해야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헬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전부 내 탓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제이크는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그가 진흙탕 속을 덤벙덤벙하는 소리를 내며 걷고 있는 것을 봐도 재미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제이크는 문을 닫고 차 뒤로 갔다. 그가 화가 나서 타이어를 들어 올릴 것처럼 걷어차자, 차가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돌아온 제이크가 말했다.

"헬렌, 운전석으로 옮겨 앉아서 브레이크를 밟아 줘. 기어를 넣고 <좋아> 하면 액셀을 깊숙이 밟아. 알았어?'

"알았어요" 헬렌은 침착하게 말한 대로 하려고 했지만 발이 페달에 닿지 않았으므로 제이크를 불렀다.

그의 머리는 젖어 있었다.

"?" 그는 짧게 물었다.

헬렌은 다리를 가리켰다.

"시트가 너무 멀어요. 앞으로 내려 줘요."

제이크는 한숨을 쉬고, 시트를 앞으로 옮겨 주었다.

"이제 됐어?"

헬렌은 다시 한번 해 보았다.

"좋아요"

", 간다. 내가 <좋아>하고 하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 헬렌은 침착해졌다.

제이크는 다시 차의 뒤로 돌아갔다. 비로 흐려진 뒷창 너머로 그가 차를 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좋아!" 그가 소리쳤으므로 헬렌은 악셀을 힘껏 밟았다.

그러나 바퀴는 여전히 헛돌았다. 제이크는 욕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제 됐어 . 그만두자"

헬렌은 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 제이크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온몸이 진흙투성이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참고 있던 웃음이 생각지도 않게 그녀의 입가에 나타났다. 그녀는 스스로 놀라서 손을 입으로 가져갔지만, 제이크가 이미 그것을 보고 말았다. 그는 창 옆에 멈춰 서서, 헬렌을 바라보며 심술궂게 물었다.

"재미있어?'

헬렌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젠 중얼거리지도 못하게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당신, 진흙투성이에요."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제이크 . 하지만 우스워 보여요."

"그래?" 머리를 쓸어 올리려다가, 젖어 있는 손이 진흙투성이인 것을 보고 제이크는 말했다.

", 괜찮아. 이번엔 당신 차례야."

헬렌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요? 농담하지 말아요."

"? 당신 탓으로 이렇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당신도 뭔가 하는 거야."

헬렌은 자기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당신을 웃게 하려고 진흙을 뒤집어써야 해요?'

제이크는 잠자코 서서, 랜드라노그 농장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농장 주인이 무슨 도구를 빌려 줄지도 몰라. 아무래도 도랑에 빠진 것 같아."

제이크가 차를 밀도록 강요하지 않을 것 같았으므로 헬렌은 안심하고 말했다.

"그래요, 농장이니까 트랙터나 로프나 뭐든지 있을 거예요. 그러면 차를 빼낼 수 있을 거예요.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제이크는 차 문을 열었다.

"당신도 찬성하리라고 생각했어. , 가서 부탁해봐."

헬렌은 멍청하게 입을 연 채 "내가요?" 라고 다시 한번 외쳤다. "저 농장까지 걸어가서요?"

"그래." 제이크는 두 개비 째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누군가 지나갈지도 모르니까, 난 여기서 기다릴께."

헬렌은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나는 갈 수 없어요. 저 언덕을 올라가라구요? 누군가가 도중에서 나를 덮칠지도 모르는데요?"

"이 심한 빗속에?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제이크는 즐거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설마 진심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헬렌은 한 가닥 희망을 갖고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놀리려고 그러는 거지요?"

"정말이야, 헬렌." 제이크는 천천히 코트의 단추를 끌렀다.

"말한 대로 갔다 오는 거야."

"거절하겠어요. " 헬렌은 반항하듯이 머리를 들었다.

"정말? 진짜로 거절하는 거야?" 제이크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헬렌 쪽으로 손을 뻗어 문을 열고, 그녀를 밀어내고는 손에 코트를 쥐여 준 다음, 문을 닫아 걸었다. 헬렌은 공포에 떨면서 코트를 걸치고는 창문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제이크, 이런 지독한 짓은 그만둬요. 열어요. 다 젖어 버렸잖아요."

", 농장 까지 달려가." 제이크는 다시 소리쳤다.

", 운동을 하는 것도 좋을거야."

헬렌은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제이크가 일단 입 밖에 낸 말은 그대로 실행한다는 것은 헬렌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모르는 사람 집에 가서, 여기까지 와서 차를 도랑에서 꺼내 달라고 부탁해? 게다가 그곳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헬렌은 몸서리를 치며, 지붕이 낮은 스포츠 카 안에서 무심하게 담배를 물고 있는 제이크를 화가 나서 바라보았다. 제이크가 미웠다. 헬렌은 어깨를 펴고 코트 깃을 세우고 어둠 속 언덕 끝에 있는 농장을 바라보았다. 헬렌이 서 있는 곳은 진흙투성이였다. 저 언덕은 어떨까? 동물들이 배회하고 있을지도 몰라. 갑자기 인분 냄새가 나서 헬렌은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 서서 제이크의 마음이 변할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한심해. 제이크가 자신의 이익이 되는 일 외에는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걸. 내가 여자라고 해서 친절할 리는 없어. 헬렌은 마지못해 언덕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분노와 짜증, 거기에 두려움까지 겹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농장은 언덕의 거의 끝에 있었지만, 헬렌은 별수 없이 거기까지 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몇 시간이나 비를 맞고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터벅터벅 언덕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커멓게 괴어 있는 물구덩이는 무엇인지 모르므로, 될수 있는대로 그런 곳은 피해 가면서 걸었다. 머리카락은 바람에 흐트러지고, 옷 속까지 비가 스며들었다. 헬렌은 자신이 정말 불쌍하다고 느껴졌다. 아아, 제니퍼의 충고를 듣고 제이크 혼자서 누다나 부부에게 가게 했더라면 좋았을걸. 헬렌은 비로소 후회했다. 왜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이런 일을 참아야 하는가? 그렇지만 그가 신사적으로 부드럽게 행동해 준다면 아직 참을 수는 있었다. 그런데 제이크는 차 안에 여유 있게 앉아 있고, 자신은 지독한 빗속에 순 진흙탕 길을 필사적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농장 마당에 가까이 가자 옆의 축사에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인기척 때문에 개가 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불안한 것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와 진흙 속을 걸어서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였다. 헬렌은 공포에 사로잡혀 커튼너머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창을 향해 뛰어갔다. 현관에 닿자 누군가가 뒤에서 헬렌의 팔을 붙잡았다. 헬렌이 헐떡이며 뒤를 돌아보자, 제이크가 그녀를 밀어젖히고 앞으로 나가 서서 문을 두드렸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지독해요?" 헬렌은 울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비열하고 지독한 사람이에요. 내 뒤를 따라왔군요."

제이크는 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희미한 불빛에 비춰진 그의 표정은 어둡고 음침했다.

"그래, 설마 당신 혼자 보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하지만, 하지만....."

헬렌은 원망하듯이 어깨를 흔들었다.

", 이리로 오게 했어요? 차안에서 기다리게 해주지 않았어요?"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에 혼자 남아 있고 싶었어? 혼자서? 그런 적막한 곳에?"

"그래도."

"당신에게 교훈을 주려고 생각했어. 그뿐이야."

제이크는 약간 미소를 띠었다.

"그래도 잘 가던데."

", 당신은 정말 싫어." 헬렌은 증오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을 때, 문이 열리고 여러 마리의 개들이 뛰어나와 두 사람의 다리 사이에서 뛰어 놀았다. 문을 연 남자가 날카롭게 명령하자 개들은 모두 집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진흙투성이의 두 사람을 의아스럽게 바라보다가 불쾌하게 물었다.

"뭐요?"

제이크는 현관 지붕 밑으로 다가섰다.

"폐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댁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차가 도랑에 빠져 버렸습니다. 차를 끌어내는데 도와 주셨으면 하는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제이크는 재빨리 계속했다.

"늦은 시각에 죄송합니다만, 보다시피 처와 저는 흠뻑 젖어서...."

남자는 기대어 있는 헬렌의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양을 보자, 갑자기 뒤로 물러서서 두 사람을 불러 들였다.

"어쨌든 들어오시오. 부인에게는 차를 드려야 될 것같으니까."

"감사합니다. " 헬렌은 감격해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표정에는 감상의 마음이 넘쳤다. 중년의 농부는 조심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농부는 나무판이 깔려 있는 홀을 지나 커다란 거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거기에는 장작이 빨갛게 타오르고, 따듯한 공기와 장작 타는 단내가 가득했다. 농부의 처는 작고 통통한, 전형적인 농부의 아내 타입이었다. 두 사람은 모간 부부라고 했다. 제이크와 헬렌도 이름을 대고 한마디씩 인사를 나누자, 모간 부인은 부엌에서 차 준비를 시작했다. 그 동안 모간씨는 제이크에게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그런 일은 당신이 처음은 아닙니다." 제이크가 지명 착오를 이야기하자 모간씨는 싱긋 웃었다.

"착오는 늘 있을수 있는 거니까. 그러나 그보다도....."

모간씨는 얼굴을 찌푸렸다. "차가 도랑에 빠졌다고 하셨지요? 트랙터로 꺼낼 수는 있습니다만 시간이 걸릴 것이고, 당신의 친구는 당신이 도착할 때까지 못 기다릴 거예요.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여기서 하룻밤 쉬어 가시지요. 아침에는 비도 그칠 것이고, 랜드라노그로 가는 길은 찾기도 쉬울 테니까. 지금은 어두워서 또 잘못 찾을지도 몰라요."

제이크는 헬렌을 보았다.

"친절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너무 폐를 많이 끼쳐서는...."

"제 처도 저와 같은 생각일 거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 늙은 농부는 싹싹하게 웃었다.

"손님이 오는 일도 별로 없고, 아이들도 모두 커서 결혼했습니다. 때문에 방도 많이 비어 있고..... 부인께선 이 방에 또 저 길을 돌아가고 싶지는 않으시겠지요?"

헬렌은 입술을 깨물고 뭐라고 대답할까 하고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이제 이 날씨에 나가고 싶지는 않아. 이대로 따뜻한 불 곁에서 푹신한 침대에 들어가 눕는다면 더 이상의 바람은 없어. 하지만 제이크는 어떨까? 서두르고 싶을까? 누다나 부부는 단지 친구는 아니니까.

제이크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는 양털 코트를 벗고 난로의 반대쪽에 서 있었다. 머리는 난롯불에 말라서 이마에 흘러내려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그도 완전히 몸이 녹아, 해이해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할까?

",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헬렌이 입을 열자, 제이크가 말했다.

"서두르고 싶습니다, 모간씨. 폐를 너무 끼치게 되어...."

마침 모간 부인이 홍차와 맛있어 보이는 고기 수프를 들고 왔다. 부인은 제이크이 말을 들으면서 수프를 푸고 있다가 말했다.

"폐랄 것은 없어요. 시인인 오엔이 말했죠? 좋은 친구가 생기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이 밤에 더 이상 가는 것은 무리예요."

헬렌은 제이크를 보며, ", 친구 댁에 전화는 없어요?"하고 딱딱하게 물었다.

제이크이 검은 눈동자가 헬렌의 눈을 향했다.

", 전화는 있어." 그는 짧게 대답했다. " , 모간씨 말씀대로 쉴 수 있을까요?"

헬렌은 겨우 웃었다.

"아침이 별장을 찾기가 쉬울 거예요."

제이크는 입술을 삐죽이며 "그럴거야." 라고 무뚝뚝하게 동의했다.

"단지, 당신이 오늘밤 집에 가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어."

헬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요? 별로. 왜요?"

제이크는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좋아. 가고 싶지 않다면."

헬렌은 안심했다. 제이크는 일부러 내가 결정하는 것에 따르고 있어. ?

"나는 여기에 머물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어요." 헬렌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가방을 가지고 오지. " 제이크는 일어섰다.

"기다리시오." 모간씨가 말렸다. "밖은 비가 굉장해요. 하룻밤 정도는 짐이 없어도 괜찮을 겁니다. 데거스가 부인에게 뭔가 입을 것을 빌려 줄 수 있고, 당신은 내 파자마도 괜찮을 거요."

제이크는 주저했지만 결심한 듯 앉아서 모간 부인이 끓여 온 홍차를 마셨다.

", 친절히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 헬렌?"

헬렌도 끄덕였지만 이렇게 덧붙이고 싶었다. 모간부부에게는 감사하지만 당신의 태도는 마음에 안 들어. 제이크는 나를 조롱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애, 아까까지 난폭했던 제이크의 태도가 지금은 조소하는 듯한 무관심한 태도로 변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모간 부인이 두 사람의 코트를 부엌으로 가지고 가서 말려 주겠다고 했다. 모간씨는 제이크를 전화기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헬렌은 혼자 불 옆에 앉아 있었다. 머리는 거의 말라 불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따스한 것에 만족해 하면서, 돌아온 모간 부인과 자신의 집 이야기와 지독한 날씨이야기 등을 즐겁게 나누었다. 모간 부인도 세 아들과 두딸, 19명이나 되는 손주들의 이야기를 헬렌에게 들려주었다.

제이크가 전화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헬렌은 모간 부부와 함께 가족사진이 들어있는 앨범을 보는데 열중해 있었다.

"좋아." 제이크는 설명하듯이 말했다.

"내일 아침 식사 후에 도착하겠다고 누다나 부부에게 전화했어."

"그거 좋군." 모간씨는 제이크가 내민 담배를 받으면서 유쾌하게 끄덕였다.

모간 부인은 방을 정리하러 갔다. 벌써 열 한 시였다. 헬렌은 깜짝 놀라서 모간씨에게 말했다.

"못 주무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내일 일찍 일어나셔야 되지요?"

모간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옛날처럼 빨리 일어나지 않아요. 힘든 일은 아들들이 해줍니다. 나는 벌써 노인네인걸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웃었다. "이 곳의 여름은 아주 근사해요. 웨일즈 산에 올라가본 적이 있어요?"

"웨일즈는 처음이에요. 하지만 모간씨처럼 친절한 분이 계시니 또 오겠습니다."

모간 부인이 돌아와" 좋으시다면 침실로 안내해 드리지요." 하고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잠옷을 꺼내 두었지만, 물론 사용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부인이 어깨를 으쓱하였으므로, 헬렌은 비로소 상황을 짐작했다. 모간 부부는 우리를 보통 부부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헬렌은 제이크를 쳐다보자 그는 조금 눈을 가늘게 뜨고 헬렌을 바라보았다. 짐승같은 놈이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때문에 아까 비웃듯이 나를 보았던 것이었다. 제이크는 모간 부부가 어떻게 생각할 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데, 왜 자신은 알아 차리지 못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모간 부인이 쉬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므로 헬렌은 할 수 없이 일어섰다. 제이크는 헬렌과 함께 모간씨에게 인사를 했다. 불 옆에 앉은 채 모간씨는 웃으며 끄덕였다. 구부러진 계단에는 꺼끌꺼끌한 카펫이 깔려 있어서 스타킹 밖에 신지 않은 헬렌은 발이 따가왔다. 두 사람 다 진흙투성이의 신발을 계단 밑에 벗어 두었기 때문이다. 침실은 천장이 높은 커다란 방으로, 헬렌이 티크 가게에서 밖에는 본적이 없는 거대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 위에는 헬렌을 위한 헐렁한 잠옷과 제이크를 위한 플란넬 파자마가 놓여 있었다.

"헐렁해서 나쁘지요?" 모간 부인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온수통을 넣어 두었어요. 추우시면 저 소파 밑에 모포가 있으니까," 그리고 모간 부인은 두 사람을 놀리듯이 웃었다.

"춥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렇지요?"

제이크는 빙긋이 웃었다.

"이것으로 충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모간 부인은 또 의미 있는 웃음을 지으면서 방을 나갔다. 비로소 헬렌은 제이크 쪽으로 돌아섰다. 그 얼굴에는 낙담의 표정이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알고 있었지요?" 헬렌은 화가 나서 말했다.

"모간 부부가 우리를 한방에 넣으리라는 것을 ."

실쭉거리는 헬렌의 얼굴을 제이크는 비웃듯이 바라보았다.

"물론 알았어. 당신도 조금만 분별이 있다면 그 정도는 알아차렸을 거야. 하지만 당신은 온기와 행복에 싸여 생각하는 것을 잊고 있었어. 그렇지? 자업자득이야. 같은 방뿐이 아니잖아? 침대도 하나야. 말해 두지만 나는 바닥에서 잘 생각은 없어."

 

6.

헬렌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제이크는 천천히 왔다 갔다 하면서 말했다.

"무슨 말은 무슨 말이야. 잘 알고 있을 텐데."

헬렌은 손을 뒤로 돌려 잡고 간신히 말했다.

"당신은 제 침대를 사용할 생각이에요?"

제이크가 돌아섰다. 침대 옆에 있던 그는 비웃듯이 플란넬 파자마를 집어 들고, 일부러 높이 쳐들어 보였다.

"이건 뭐라고 생각해?"

그는 재미있어하며 물었다. 헬렌은 입을 다물었다.

"부탁이니까, 바보 같은 짓은 그만둬요!"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어떻게 할 거예요?"

제이크는 침대에 걸터앉더니, 놀라서 보고 있는 헬렌 앞에서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는군. 나는 잘 거야. 알고 있는 대로 나는 어젯밤 한잠도 못 잤어. 오늘밤도 새면 곤란해."

"하지만, 제이크!" 헬렌은 어쩌지 못하고 방안을 빙빙 돌았다.

"함께 이 방에서 잘 수는 없어요."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셔츠를 마저 벗었다. 털로 덮인 갈색의 가슴 근육이 드러나자 헬렌은 급히 눈을 돌렸다. 제이크가 헬렌 앞에서 윗몸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휴일에 둘이서 외출한 적도 없었고, 물론 수영복 차림을 본 적도 없었다. 햇볕에 그을은 살갗은, 제이크가 미국에서 회의실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그래서 헬렌은 무심결에 소리치듯이 말했다.

"부탁이니까 파자마를 입어 줘요."

제이크는 덤덤하게 파자마를 침대 발치에 내던졌다. 그리고 머리 뒤를 손으로 받치고, 편한 얼굴로 침대에 풀썩 누워서 느릿느릿 말했다.

"당신이 입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이런 것을 입어 본적이 없어."

헬렌은 매우 난처해져서 말했다.

"당신 설마....."

제이크는 헬렌의 씰룩거리는 얼굴을 옆에서 심술궂게 쳐다보았다.

"설마 뭐야? 설마 벌거벗고 자진 않겠지라는 거야? 당신의 그 청결한 영혼에 까지 쇼크를 줄 생각은 없어."라고 말하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헬렌은 커다란 화장대 앞에 가서 핸드백을 열어 헤어밴드를 꺼냈다. 머리가 부드러운 커튼처럼 헬렌의 얼굴에 닿았다. 그래서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뒤로 잡고,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제이크는 일어나 앉아 하품을 했다.

"목욕하고 싶지?"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으므로 헬렌은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재미있어 해요."그녀는 차갑고 낮은 목소리로 제이크를 힐난했다.

"내 기분 같은 것은 무시하고 있어요."

제이크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고 느꼈을 때, 그는 벌떡 일어서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헬렌, 당신 탓에 이렇게 된 거야. 때문에 당신이 참아야 해."

"하지만 한 침대에서는 잘 수 없어요."

"?" 제이크가 뭔가 뒤지듯이 헬렌의 눈을 봤으므로 그녀의 얼굴은 붉어졌다.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나에게는 당신이 언젠가 말했던 동물적인 욕구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헬렌은 얼굴을 붉혔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잠 자는 일이야."

헬렌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 놓인 잠옷을 집어 들었다. 실크 잠옷은 헬렌이 입기에는 큰 것이었다. 헬렌이 잠옷을 펼쳐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제이크가 비양거리며 말했다.

"당신에겐 파자마가 더 좋을 것 같은데. 끈이 붙어 있어서 그게 더 나을걸."

헬렌은 입을 오므렸다.

"당신은 무엇을 입을 거예요?"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겐 신경 쓰지마. 어떻게든 할 거야."

헬렌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목욕은 필요 없어요. 당신이나 해요, 나는 그냥 잘 테니까요."

제이크는 헬렌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부끄럼장이씨. 하지만 빨리 갈아입어."

문이 닫히는 것을 기다렸다가 헬렌은 서둘러 슬랙스와 스웨터, 양말을 벗었다. 파자마의 바지는 너무 컸지만 제이크가 말한대로 끈이 있었으므로, 헬렌은 가슴 부근에서 꽉 졸라매고 거기에다가 웃옷을 걸쳤다.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지도 않고 헬렌은 침대 커버를 젖히고 커다란 침대 속으로 기어들었다. 헬렌은 기분 좋은 듯 숨을 내쉬었다. 제이크만 없으면 따뜻해서 기분이 최고일 거라고 생각했다. 몇 분 지나서 제이크가 노크도 없이 방으로 불쑥 들어왔다.

"아내 방에 들어오는데 노크 할 필요는 없겠지?" 헬렌이 기분 상해하는 것을 보고 제이크는 그럴 듯하게 변명을 했다. 헬렌이 대답을 하지 않고 돌아누워 버렸으므로,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불을 껐다.

헬렌은 침대 반쪽이 제이크의 무게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헬렌은 제이크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몸을 똑바로 하고 긴장해 있었다. 제이크가 아까 한말은 거짓말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제이크가 숨을 몰아쉬면서 자는 소리가 들려 왔다. 헬렌은 무엇엔가에 기만당한 느낌을 받았다. 제이크는 벌써 잠든 것이다.

헬렌은 아무리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매트에 달라붙은 채 긴장을 풀 수도 없었다. 잠 자고 있는 제이크는 무심하게 뒤척이고..... 그가 그녀 쪽으로 팔다리를 뻗거나 할 때마다, 비록 몸은 닿지 않았지만 헬렌은 점점 신경이 곤두섰다. 헬렌은 눈을 꼭 감고 제이크가 반대쪽으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제이크는 헬렌 따위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헬렌은 참기 어려운 혐오를 느꼈다. 이 사람은 여자와 한 침대에서 자는데 익숙해 있는 거야. 하지만 헬렌에게 있어서 이런 경험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것이었다. 자신이 비참하게 생각되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헬렌은 가만히 그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러다가 굉장히 피곤했던 헬렌은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헬렌이 눈을 뜬 것은 모간 부인이 마침 차를 가지고 왔을 때였다.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제이크에게 몸을 닿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뜬 헬렌은, 자신이 밤새 따뜻하게 푹 잘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밤중에 추위를 느끼자 제이크에게 달라붙어 잤던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까, 그녀는 제이크의 팔에 파고 들어 그의 가슴에 한 손을 두르고 있었다. 헬렌은 너무 놀라서 손을 빼고 신음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일어나 앉자 , 애교있게 웃고 있는 모간 부인에게 미소를 보냈다. 제이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간 부인이 헬렌에게 속삭였다.

"비는 그쳤어요. 잘 잤어요?"

헬렌은 얼굴이 붉어져 헐렁헐렁한 파자마의 웃옷을 꽉 여미면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잤어요." 하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 감사합니다."

모간 부인은 침대 곁에 있는 테이블에 쟁반을 놓았다.

"천만에요. 주인의 아침은 뭐가 좋을까? 계란과 베이컨? 거기에 소시지는 어떨까?"

헬렌은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제이크는 꼼짝도 않다가 몸을 조금 뒤척였다.

", 고맙습니다. "헬렌은 부인이 방을 나가 준다면 제이크가 자고 있는 동안에 침대에서 내려갈 텐데 하고 생각했다.

"파자마는 둘이서 입고 계시는군요." 모간 부인은 이야기를 그치지 않았다.

헬렌은, 모간 부인이 바지는 제이크가 입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느꼈다. 헬렌은 짐작을 했지만 사실을 말하지 않고 단지 웃으며 부인이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인은 좀처럼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커튼을 열거나 화장대 위를 치우거나 하면서 방안을 왔다갔다 했으므로 헬렌은 안달이 나서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헬렌은 할 수 없이 혼자서 뜨거운 차를 들이마셨다.

그러는 동안에 제이크가 눈을 떴다. 그는 헬렌을 보자 한순간 불쾌하게 이마에 주름을 잡았지만, 곧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방안을 둘러보던 제이크는 모간 부인을 발견했다.

"일어나셨군요." 부인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두 분께 차를 드리려고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부인은 아침 식사로 베이컨과 달걀이 좋을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 어떠세요?"

제이크는 졸린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유유자적하게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수염도 깎지 않은 채, 졸린 듯한 얼굴로 있는 것을 처음 본 헬렌의 가슴은 요란하게 뛰었다. 그의 따뜻한 몸이 담요 밑 바로 옆에 있음을 강하게 느꼈다. 제이크는 모간 부인에게 웃으며 말했다.

"마침 먹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모간 부인. 폐가 되지 않는다면...."

"물론 , 그럴 리가 없지요." 모간 부인은 그 굵은 팔로 팔짱을 꼈다.

"푹 잤어요?"

제이크는 헬렌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헬렌은 질문하는 것 같은 시선을 피하려고 몸을 돌려 컵을 테이블에 놓았다. 제이크는 부인에게 적당히 대답했다. 그런데 부인은 두 사람 중 누구든 좀 더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한순간 거북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 다 이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자, 부인은 마지못해 문 쪽으로 걸어갔다.

"30분이면 식사가 돼요. 괜찮지요?"

헬렌이 망설이면서 말했다.

",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는 늘 토스트 한 조각 이면 되는데요."

"그것만?" 모간 부인은 어이없어 했다.

"그래서 그렇게 여위셨군. 아침은 잔뜩 먹어야 해요."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아요." 헬렌은 오늘 아침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쨌든 무리하게 강요하지는 않아요. 토스트는 많이 구워 드리지요. 거기에 내가 만든 마멀레이드를 곁들여서."

"근사해요. " 헬렌은 기분이 좋아졌다. 복잡한 생각을 부인이 흩어 주었으므로 헬렌은 무거운 한숨을 쉬고 일어나려고 했다.

"기다려." 침대에서 빠져나가려는 헬렌의 허리를 제이크가 붙잡았다.

"서두를 것은 없잖아. 침대에서 나가면 추워."

"모간 부인이 왔다가지 않았었으면 좀 더 일찍 침대에서 나갔을 거예요." 헬렌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이크는 헬렌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여유 있게 베개에 기댔다.

", 침대에서 안 나갔어?"

헬렌은 얼굴을 붉혔다.

"모간 부인은 우리들이 파자마를 아래위로 나눠서 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침대에서 나가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들켜 버리고 말지요."

제이크는 웃었다.

"알면 모간 부인이 곤란한가? 그건 말도 안돼."

헬렌은 입을 삐죽이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곤란해요. 손을 풀어 주지 않겠어요?"

제이크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일은 처음이야. 3년 전 결혼한 이래로 같은 침대에서 잔 것은 처음이지?"

헬렌은 화가 나서 제이크를 보았지만 그의 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리임을 알았다.

"당신에게 있어서는 드문 일도 아니겠지요?" 그녀는 경멸하듯이 소리쳤다.

"그래?"

헬렌의 터무니없는 소리를 듣고 제이크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렇지 않아." 헬렌은 허리를 감고 있는 제이크의 손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다.

"왜 내게 있어서는 드문 일이 아니지? 가르쳐 줘." 제이크는 차갑고 분명한 말투로 말했다.

헬렌은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그런 걸 말할 순 없어 . 나는 늘 말하지 않아도 좋은 것을 말해 버리는걸.

"부탁이에요. 제이크. 아파요. 이제 30분 후면 식사를 해야 하니까 서둘러야 해요."

"모간 부인 따위는 그냥 놔둬." 제이크는 팔꿈치에 몸을 기대고 헬렌의 몸을 감은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쓰러뜨리고 냉혹하게 물었다.

"도대체, 별로 순진하다고 할 수 없는 당신이 지금 어떤 식으로 멋대로 상상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헬렌은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 같은 사람도...."그녀는 흥분해서 팔을 크게 흔들었다.

"소리 지를 거예요."

"질러도 좋아. 하지만 당신은 못할 거야. 그런 짓을 하면 모간 부인이 어떤 상상을 할지 생각해 봐."

헬렌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그를 애원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제이크, 부탁이에요. 풀어 줘요. 이런...." 헬렌의 목소리는 가냘파서 말꼬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제이크의 곁에 있다는 의식에 주눅이 든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익숙하게 그와 함께 침대 속에 있는 것은..... 그로부터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이런 식으로, 이성적이고 분별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속의 소리를 헬렌은 듣고 있었다.

제이크는 헬렌의 표정의 움직임을 살피듯이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이런 뭐야?"하고 쌀쌀하게 되물었다.

"이런 마구잡이? 게다가 이런 위험한 이라고 말하고 싶은거야?" 제이크는 냉혹한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헬렌, 지금 누구를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당신의 그 예쁜 머릿속에서 뭘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모르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젯밤, 호텔 주차장에서 당신을 위로해 주었을 때, 당신이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제는 경멸하는 듯한 말투였다.

"여자가 남자에게 흥미를 느끼는 때가 언제인지조차 모를 만큼 내 경험은 얕지 않아. 당신이 이런 식으로 분개하고 있는 것도, 화난 척하고 있는 것도 모두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짓이 아닐까? 목적은 하나일 거야. 당신은 아무래도 나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도 당신을 의식하게 하고 싶은 거야."

헬렌은 졸도할 만큼 제이크가 미웠다.

"어떻게 그런 것을 말할 수있지요?" 그녀는 분노로 자신을 잊고 몸부림을 치며 말했다.

"뭐든지 당신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아줘요."

"어째서?" 제이크는 꿰뚫는 듯한 시선을 헬렌의 얼굴에서 목 그리고 헐렁헐렁한 파자마 밑의 팔에 돌렸다.

"그게 진실이거든."

이 신랄한 평가에 헬렌의 몸은 빨갛게 물들었다. 그때, 제이크가 갑자기 손을 풀고 침대에서 빠져나와 스웨이드 바지를 입었다. 침대 안에서 그가 몸에 걸치고 있던 것은 팬티뿐이었다. 헬렌은 한 팔로 눈을 가리고 침대 옆으로 돌아앉았다. 지리함과 좌절감으로 울음을 터질 것 같았다. 뭐라고 반항해 본들, 제이크이 말은 전부 거짓말은 아니니까. 나는 지금까지 다른 남자에 대해서 갖고 있지 않던 느낌을 제이크에게 품고 있어. 그것을 느끼자 헬렌은 자신이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이것은 질투야.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 말이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헬렌은 잘 알고 있었다. 헬렌은 엎드려서 제이크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이크는 옷을 다 입자, 턱을 문지르며 "수염을 깎아야겠는걸." 이라고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아까까지의 일을 이미 잊고 있는 듯한 그 태도를 보고 헬렌은 밉다고 생각했다. 저 사람은 나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나 봐. 같은 침대에서 자면서 제이크는 나에게 눈도 주지 않고 잠들었지 . 그렇게 생각하면 헬렌의 가슴은 아팠다. 제이크의 바람기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헬렌은 굴욕감을 안 느낄 수 없다. 나도 살아 있는 여자인데. 그렇게 매력이 없을까?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아까 모간 부인은 30분이라고 말했어." 침대 옆에 서서 이불에 반쯤 싸여 있는 헬렌을 내려다보면서 제이크가 말했다.

"일어나고 싶지 않아?"

"나가요." 분명치 않은 목소리로 헬렌이 말했다.

"좋아." 제이크는 아무래도 좋은 듯이 말했다.

"먼저 목욕탕에 들어가고 싶었거든."

"당신 같은 사람은 죽는 것이 낫겠어요." 헬렌은 베개에 머리를 깊이 묻었다.

제이크는 딱 벌어진 어깨를 으쓱하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손잡이에 손을 댄 채 말했다.

", 내 컵에 홍차도 마셔. 모간 부인이 쌀쌀한 부인이라고 느끼지 않도록."

헬렌이 고개를 든 것과 문이 닫힌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녀는 침대 위에 꿇어앉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끝까지 뭐라고 하고 싶은데, 헬렌은 화가 치밀었지만 서둘러 일어나 옷을 입었다. 제이크가 돌아왔을 때에는, 헬렌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그는 그 뒤에 서서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빗었다. 수염을 깎지 않아서, 턱의 선이 여느 때보다 선명하게 강조되고 있었다. 그는 귀밑털을 다듬으며 말했다.

"서두르는 게 좋아. 이젠 시간이 없어."

헬렌은 묵묵히 일어서서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제이크는 침대 커버를 바르게 정돈하기 시작했다. 헬렌이 아까 날뛰었으므로 모포와 시트가 마구 구겨져 있었다. 문을 연 헬렌이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그는 약 올리듯이 말했다.

"잘못 받아들인 편이 미안한 법이야." 제이크를 화나게 할 수는 없다고 깨닫자, 헬렌은 다시 화가 나서 방을 나갔다.

제이크는 아침 식사를 맛있게 들었다. 헬렌과 모간 부인은 서로 다른 생각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단 한조각의 빵과 커피조차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헬렌은, 그가 과일 쥬스, 오트밀, 베이컨 , 계란, 소시지와 토스트, 토스트와 마멀레드, 거기에 홍차를 차례로 모조리 먹어 치우는 것을 보고 속이 메슥거렸다. 나도 그처럼 태연하고 무관심한 마음으로 돌아갈 거야, 라고 헬렌은 생각했다. 헬렌이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제이크의 마음은 단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실 어제 까지 눈 밑까지 밀려들었던 피곤함이 사라진 제이크의 거무스름한 얼굴은 싱그럽게 매력적이었다.

식사를 마칠 즈음에 모간씨가 헛간에서 돌아왔다. 모간 부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세 사람은 언덕을 내려가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아들 데이빗에게 트랙터를 몰고 오게 했지요." 이제 곧 마를 것 같은 진창길을 걸으면서 모간씨가 말했다.

"오늘은 맑고 화창하니까 걱정은 없어요."

제이크는 끄덕이며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덕분에 이 주말이 최고였던 것 같아요. 그렇지 헬렌?"

"." 그녀는 뭔가 열의를 품고 대답했다.

제이크가 헬렌을 힐끗 보았으므로 그녀는 급히 눈길을 돌리면서 생각했다. 함께 여행하겠다고 말하지 않을걸 그랬다고. 어느새 데이빗이 차를 도랑에서 꺼내어 놓았다. 차는 진흙투성이였지만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좋은 차군." 모간씨가 차 안을 들여다보며 웃음을 건넸다.

"이건 속력을 꽤 내겠는걸." 제이크도 웃었다.

"이 길에서? 설마 . 속력을 너무 내서 도랑에 빠졌나?" 제이크는 잠자코 있다가 동의를 구하듯 의미 있게 헬렌을 쳐다보았다.

", 이제 가야지."

제이크가 약간의 돈을 모간씨에게 내놓았지만 그가 완강히 거절했으므로 다시 지갑에 넣었다. 엔진이 걸리자 두 사람은 손을 흔들며 출발했다. 헬렌은 갑자기 힘이 빠지는 것 같아서 시트에 몸을 의지했다. 어쩐지 피로가 몰려왔다. 랜드라노그로 가는 길로 접어들면서도 제이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헬렌은 갑자기 앞으로 일어날 일이 마음에 걸렸다. 누다나 부부가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만약 잘 사귈 수 없다면 어떻게 하지? 제니퍼가 말한 대로 제이크가 대사와 외출해 버리고 나는 부인과 상대해야 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은가? 하지만 제이크는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 있어서 헬렌이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진흙이 튀어서 지저분해졌던 코트는 모간부인이 깨끗하게 털어 주었으므로, 두 사람이 농가에서 하룻밤을 지냈다는 사실을, 제이크의 수염이 자란 것과 헬렌의 얼굴에 화장기가 없다는 것으로 밖에는 알 수 없었다. 차는 골짜기에 파묻힌 듯한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헬렌은 랜드라노그라고 씌어진 팻말을 발견했다.

", 별장은 이 앞쪽일 거야."

차는 마을을 지나 왼쪽으로 돌았다. 화창하고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태양이 구름을 쫓아 버려, 하늘에 푸르름이 펼쳐졌다. 차가운 바람조차도 상쾌했다. 차는 쇠문을 지나서 담장이 덩굴과 덩굴풀 따위가 뒤덮인 작은 집으로 다가갔다. 풀 따위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집 옆에는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물소리는 끊임없는 음악을 연주해 내고 있었다.

", 아름다와." 헬렌이 무심코 소리 지르자, 제이크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침실은 몇 개나 있을까?" 제이크는 능청스러운 말투에 헬렌은 얼굴을 붉혔다.

", 결국 누다나 부부도 우리들의 일...." 헬렌은 놀라서 말을 멈췄다.

제이크가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게 어쨌어? 뭐라 할거야, 어젯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오늘 아침 여섯 시경에 개 짖는 소리에 눈을 뜨니까 당신도 꽤 기분이 좋아 보이던걸."

헬렌은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 때, 문이 열리고 누다나 부부가 나타났다. 그 검은 얼굴은 환영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헬렌이 가지고 있던 누다나 부부에 대한 걱정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드디어 왔군." 누다나 씨가 씽긋 웃으며 차에서 내린 제이크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걱정하고 있던 참이야."

제이크는 누다나 씨와 악수를 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헬렌은 두 사람이 꽤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려운 여행이었소, 루셴." 제이크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자네와 로즈가 아주 노팅검 언덕이나 로빈훗의 숲에라도 숨어 버린 것이나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

루셴 누다나가 쿡쿡 웃었다.

"우리가 언제라도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을 걸?"

제이크가 웃음을 터뜨리자, 로즈 누다나도 웃었다. 불과 한순간이었지만, 헬렌은 소외감을 느꼈다. 제이크는 부인도 잘알고 있나봐 . 저 사람, 그를 장난스럽게 보고 있는걸. 그러나 로즈는 분명히 임신하고 있었고, 제이크에게 보내는 시선은 장난스러울 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때, 루셴이 제이크의 어깨 너머로 헬렌을 보고 웃었으므로 제이크는 생각난 듯이 헬렌을 앞으로 끌어당겨 소개했다. 루셴은 헬렌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이윽고 말했다.

"아름다운 부인이군. 하지만 난 놀라자 않아. 자넨 언제나 최고의 것 밖에는 선택하지 않으니까." 그는 헬렌과 악수하고 있던 손을 한참 만에 풀었다.

"즐거운 주말을 보내실 것을 부탁해요. 일 이야기는 50퍼센트 밖에 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테니까."

헬렌은 약간 미소를 띠며 "틀림없이 즐거울 거예요." 라고 성의 있게 말했다.

"전 이 댁이 맘에 들어요. 아주 근사해요."

로즈 누다나는 거의 잠자코 있었지만 시종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들의 호화로운, 마호가니 나무에 거울이 달려 있고 꽃이 가득한 현관으로 들어서자, 로즈는 루셴이 제이크에게 마실 것을 내오는 동안 헬렌을 방으로 안내하고 싶다고 말했다. 제이크가 헬렌을 쳐다보았으므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좋은 생각이에요. 가방은 나중에 제이크가 차에서 꺼낼 거예요."

"무쟈리에게 시키세요." 부드럽게 말하면서 로즈는 구부러진 나무 계단을 오르며 헬렌을 안내했다.

도중에 헬렌이 뒤를 돌아보니, 제이크가 평사복에 커다란 앞치마를 두른 큰 남자에게 열쇠를 건네고 있었다. 헬렌이 생각하는 것을 짐작하고 로즈가 말했다.

"이 집에서는 무쟈리가 뭐든 다 해요. 그는 훌륭해요. 게다가 보디가드로서도 필요하구요."

헬렌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보디가드가 필요한가요?" 로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임신하지 않았다면 헬렌보다 키도 작고 말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깨 폭은 좁고 화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정치가든 보디가드를 고용하고 있지요. "

로즈가 조용히 말했다.

"반드시 필요하진 않지만, 암살자는 틈을 노리고 있으니까."

헬렌은 다시 놀라서 말했다.

"세상에 무서워라."

"익숙해져 버리는 거지요." 로즈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 여기가 방입니다. 마음에 드세요?" 그녀는 계단을 다 오르자 문을 열고 헬렌에게 먼저 들어가도록 비켜섰다.

그 방은 밝고 넓고 훌륭했다. 가구는 오크로 , 카펫과 침대 커버는 잘 익은 살구색이었다. 그리고 침대는 두 개 있었다. 헬렌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굉장히 멋진 방이군요."

로즈는 기쁜 듯이 웃었다.

"마음에 드신 다니 기뻐요. 그럼, 이제 아이들을 만나러 가요."

"자녀분들?" 헬렌은 무심코 말했다. 헬렌은 로즈가 상당히 젊어서 애들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다.

", 제이크에게서 못 들으셨어요? , 게다가 물론...." 로즈는 자신의 나온 배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헬렌은 갑자기 얼굴이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아뇨. 아무 것도 듣지 못했어요. 어디 있어요, 자녀 분들은?"

"보모 리자와 아이들 방에 있어요. 오세요, 소개하겠어요."

두 사람은 계단 반대쪽 방으로 갔다. 화려하게 꾸며진 애들 방에는 붉은 머리털의 여윈 처녀가 떠들어대는 애들을 점잖게 타이르고 있었다.

"헬렌, 들어오세요." 로즈는 웃으며 말했다. "여기가 리자에요. 리자, 이분은 하워드 부인, 제이크 하워드의 부인이에요."

리자는 몸을 일으켜 헬렌을 보았다. 그녀는 헬렌만큼 키가 컸지만 어깨나 허리는 헬렌 보다도 여위었다. 두 명의 어린애가 아직 리자의 손에 달라붙어 있었다. 겨우 10개월이나 11개월 정도 밖에 안되어 보이는 한 아이는 쓰러질 듯이 서 있었고, 또 한 아이는 세살정도 되어 보였다. 로즈가 방에 들어서자 그녀에게 뛰어온 한 어린애는 네 살이나 다섯 살 정도의 여자애였다.

"처음 뵙겠어요." 리자는 작은 소리로 예의 바르게 말했지만, 그 눈에는 환영하는 빚은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는 적의에 찬 눈길로 헬렌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지, 헬렌은 알 수가 없었다. 로즈는 그런 긴장된 공기를 눈치 채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 스커트에 매달린 여자애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아이가 루이스, 리사와 함께 있는 애가 죠셉이고, 이 아이는 제임스에요."

로즈는 웃으며 제임스를 안아 올렸다.

"안녕, 아가. 울지 않고 잘 놀았지?"

리자의 불손한 눈초리를 받은 헬렌은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매우 귀여운 애들이군요." 정말 애들은 헬렌의 말처럼 까맣고 통통해서 귀여웠다. 로즈는 만족해했다.

"그렇지요? 루셴과 나의 사랑의 결실이에요. 물론 리자의 공도 아주 크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겠군요. " 헬렌은 깔깔하게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오랫동안 누다나 부인과 함께 지내셨어요?"

리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2" 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영국에 오고 나서 쪽-. 우리가 차바에 돌아갈 때는 함께 가 달라고 할 생각이에요. 그렇지, 리자?"

리자는 여주인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온화해지면서 그녀는 "그러고 싶어요."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로즈가 부드럽게 리자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헬렌을 향했다.

", 가시지요. 바깥 분들이 우릴 찾고 있을 거예요."

계단을 내려오면서, 헬렌은 아까 로즈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로즈는 하워드 부인이라고 했었다. 덧붙여서 제이크 하워드 부인이라고. 마치 리자가 제이크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헬렌은 가슴은 납처럼 무거웠다. 리자는 제이크를 알고 있는 걸까? 잘 알고 있는 걸까? 제이크는 전에도 몇 번이나 누다나 부부를 방문했던 것 같은데, 왜 이번만은 나를 데리고 왔을까?

 

7.

두 남자는 거실 난로 앞에서 손에 맥주잔을 들고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쉬고 있었다. 헬렌과 로즈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일어섰으나, 헬렌은 제이크의 시선을 피하면서 루셴 쪽을 보며, 이 멋진 집의 역사를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루셴은 매우 친절했다. 그는 헬렌의 질문에 아주 기뻐하며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 관한, 19세기의 물방앗간을 개조한 것이라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헬렌은 그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제이크가 누다나 부부와 어느 정도 친한가, 왜 그가 자기를 이 곳에 데리고 왔는가가 마음에 걸렸다. 제니퍼가 말하긴 했지만, 제이크는 이 사람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우리 두 사람이 사이좋은 부부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목적인 것 같지는 않은데. 더군다나 지금까지 커슬랜드 스퀘어가에서 정식 디너파티를 연 때 이외에는 제이크는 나를 친구들에게 소개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왜 이 곳에 오게 된 것일까? 어쩌면 그 보모 리자와의 일이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일까? 리자가 다른 여자들처럼 여러 가지를 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헬렌은 입을 꼭 다물고 제이크 쪽을 힐끗 보았다. 제이크는 다른 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화가 나서 그를 뚫어지게 관찰했다. 왜 저 사람은 유아등( 빛으로 벌레를 유인하여 빠져 죽게 하는 장치 ) 처럼 여자의 마음을 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출세하기 위해 일생을 냉혹히 살아온 사람, 자신의 힘만으로 출세의 길을 달려온 사람, 인생의 권모술수가 천성적으로 몸에 배어있는 사람. 만나는 여자 모두에게, 당신에게는 제이크가 매료당할 만한 매력이 있다고 믿게 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남자, 그런 저 사람에게 어떤 마력이 있는 것일까?

헬렌은 몽롱한 상태로 루셴에게서 담배를 받아 들고, 라이트에 불을 붙이려고 몸을 굽혔다.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이면서 그녀는 루셴의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제이크가 그 검은 머리를 로즈 쪽으로 돌린 채 있는 것이 매우 신경에 거슬렸다. 제이크는 로즈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즈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알고 싶어서 헬렌은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로즈를 굉장히 질투하고 있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헬렌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루셴을 돌아보며 말했다.

"집 밖을 돌아보고 싶어요. 날이 개어 있으니까 기분이 좋을 것 같아요. 옛날 물방앗간이었을 때 의 물레방아는 있어요?"

루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있어요" 하고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벌써 많이 파손되긴 했지만, 하지만 만일 산보하고 싶으시면 다 같이 가지 않겠어요?

어이, 제이크 . 자네도 같이 가지 않겠나?"

"좋지요!" 제이크는 소탈하게 말했다.

"로즈, 당신은 어때요?"

로즈는 자신의 배 부분을 두드려 보였다.

"글쎄, 전 그만두겠어요. 점심때까지 난로 옆에 앉아 있겠어요. "

제이크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깊이 쑤셔 넣었다.

"그럼 나도 로즈하고 같이 여기 있도록 하지." 그는 조용히 말했다.

헬렌은 제이크가 자기 쪽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일부러 그 쪽을 보지 않았다. 제이크는 물어 보는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남았으면 좋겠어요, 로즈?"

로즈는 생긋 웃었다. 따스하고 친근한 미소였다.

"귀여운 부인이 계신데, 그건 안돼요." 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제이크는 표정이 굳어졌다.

"그럴 염려는 없어요." 그 말하는 투가 아주 무뚝뚝했다.

"내가 없어도 헬렌은 걱정 없으니까."

"정말 그래요." 헬렌은 기분 좋은 듯이 대답했다. 그거만한 태도에 제이크가 불끈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만족감을 느꼈다. 루셴 누다나는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헬렌이 코트를 입자, 둘은 세찬 바람이 부는, 냉랭하면서도 청명한 가을 날씨를 즐기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필시 재미 없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밖에 나와 보니 아주 재미있었다. 루셴의 말솜씨는 능숙했고, 물방앗간집의 역사와 함께, 중앙아프리카의 고국 차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헬렌은 차바 부족 관습을 무척 재미있게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 도착했을 때, 둘은 아프리카 문화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고 있었다. 무쟈리가 점심 식사를 시중 들어 주었다. 누다나 부부는 그를 마치 가족의 일원처럼 헬렌에게 소개시켰다. 아이들은 다른 데서 식사하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다해서 네 사람뿐이었다. 마침 루셴이 거의 혼자서 떠들어 주었다. 그건 괜찮았는데, 제이크는 때때로 로즈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헬렌 쪽은 전혀 보지 않았다.

(즐거운 일은 아니야.) 라고 헬렌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점심 식사 후, 제이크와 루셴은 서재에 들어가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헬렌은 언제나처럼 식사 후에 혼자 남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을 까지 산책하고, 아이들에게 줄 과자를 샀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걸어 돌아왔다. 마침 차를 들고 거실로 들어오는 로즈와 마주쳤다. 헬렌은 생긋 웃었다.

"잘 쉬셨어요?"

로즈도 미소를 지으며,", 고마와요.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요. 어디 다녀오세요?"

헬렌은 난로 앞의 낮은 테이블에 과자 꾸러미를 올려놓았다.

"마을 가게까지요. 루이스와 조셉 , 제임스에게 줄 과자를 사 왔어요."

"어머나, 친절하시기도 해라." 로즈는 자기 옆에 있는 침대용 의자를 두드리면서 헬렌에게 말했다.

"여기 앉으세요. 우리들은 아직 천천히 이야기도 못했지요? 이야기해 주세요. 아기는 언제쯤 가질 생각이세요?"

헬렌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 , 저희들은 아직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고 그녀는 더듬거리면서 난처한 듯이 대답했다.

로즈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벌써 결혼한 지 3년이지요? 아기를 갖고 싶지 않아요?"

헬렌은 입술을 축이면서 ", 물론, 갖고 싶어요."하고 더듬거리며 재빨리 중얼거렸다.

"다만, , 지금은 , 아직 그럴 형편이 아니어서...."

"어머 왜요?" 로즈는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헬렌은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로즈가 타 주는 홍차를 받아 들고, 신경질적이고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만일 로즈가 우리 결혼의 진상을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왠지 그렇지 않을 것 같이 생각되었다. 로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녀에게 있어서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결혼을 했는데도 아이가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일 거야.

홀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헬렌은 현실로 돌아왔다. 제이크와 루셴이 방에 들어온 것이, 묘하게도 기쁘게 생각되어졌다. 차와 스콘을 보고, 루셴은 눈을 빛냈다.

"때맞춰 왔군." 그는 기쁜 듯이 말했다. "제이크, 스콘을 먹지 않겠나? 무쟈리가 제일 자랑하는 음식이니까"

제이크는 헬렌 옆의 팔걸이의자에 앉아, 스콘과 홍차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받았다. 여기에 온 것은 처음이지만, 제이크는 누다나 부부와 친하고 같이 있을 때는 정말 편안해 하는구나, 하고 헬렌은 생각했다. 루셴은 반대쪽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다음 달에 의회가 열리기 때문에 차바로 돌아가는데, 그 때 제이크도 같이 가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말은 헬렌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제이크가 또 여행을 떠나 버린다고? 로즈는 우아한 동작으로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어느 정도 계시는 거예요. ? 루셴, 아기가 태어날 때는 여기에 계셨으면 좋겠어요."

로즈는 헬렌을 향해 화난 얼굴을 지어 보이면서 "정말, 남자들은...." 하고 소리쳤다.

"끊임없이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하는군요. 혼자 쓸쓸히 기다리고 있는 부인은 생각도 안하고."

헬렌은 마음속으로 동의하고 있었으나 입 밖에 내서 말하지는 않았다. 제이크가 헬렌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헬렌의 시선을 자기 쪽으로 향하도록 하려고 했다.

"그런데 헬렌, 아무 말도 안할 거야?"

헬렌은 어두운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차바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니, 아주 중요한 일이시겠지요? 애교 있는 침착한 대답을 하긴 했지만, 헬렌의 마음속은 노여움과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언제 출발하세요?"

루셴이 기쁜 듯이 웃었다.

"야아, 저것 봐, " 하고 그는 로즈 쪽을 보며 소리쳤다.

"헬렌은 아주 잘 훈련돼 있네. 6주간이나 남편이 아프리카 여행을 한다는데 불평 한마디도 없고. 어떻게 된 거야?"

헬렌은 얼굴이 빨개졌다. 내 태도가 그렇게 받아들여졌을까? 예의 바르고 가정적인 귀여운 부인이 온순하게 남편 말에 순종하는 것처럼! 헬렌은 입술을 꽉 깨물며, 손에 든 홍차 잔에 눈을 떨구었다. 제이크는 한마디도 말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녀는 제이크에게 아직 모욕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로즈는 조금 화가 난 듯이 보였다.

"헬렌은 세 명의 아이들 치다꺼리를 하고 있지 않아요. 그만큼 자유가 있고, 가고 싶은 곳에도 갈 수 있고, 친구와 만나는 것도 자유이고, 그렇죠?"

루셴은 비난하듯이 로즈를 보았다.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리자에게 맡기면 돼. 당신이 집에 틀여 박혀 있어야 할 일은 없잖아."

"갈 수 있겠어요? 이런 몸으로는 예쁜 옷도 못 입잖아요."

루셴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아, 로즈"

그 말에 로즈는 그 이상 반항하는 것을 그만두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잠자코 있었다. 헬렌은 잔을 쟁반에 내려놓았다. 로즈 편을 들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로즈의 노여움을 잘 알 수 있었다. 남편의 생활 속에 완전히 파고 들어 갈 수 없다는 불만은 헬렌도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이니까. 모두가 거북하게 잠자코 있었기 때문에, 헬렌은 살짝 일어섰다.

"욕실을 써도 괜찮을까요? " 하고 헬렌은 로즈에게 물었다.

로즈는 화제를 바꿀 일이 생겨 기쁜 듯이 말했다.

"물론이죠. 무쟈리에게 가방을 방까지 들고 가도록 할게요. 방이 있는 곳은 알죠?"

"" 헬렌은 억지로 미소짓고 방을 나왔다. 제이크가 없는 곳에 갈 수 있어서 기뻤다. 방에 돌아오자, 그녀는 욕조에 물을 채우고, 천천히 물 속에 잠기어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따뜻한 물로 목욕을 즐겼다. 잠시 후면 다시 모두가 있는 곳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

가을 저녁은 빨리 저물어, 밖은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로즈는, 저녁 식사는 8시경에 하고, 그녀와 루셴은 그때까지의 한 시간 정도를 아이들과 지낸다고 했으니까 아직 충분한 시간은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서 헬렌은 타월지의 가운만을 두른 채로 침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침실에는 불이 켜 있고, 제이크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것을 본 헬렌의 뺨은 달아올랐다. 그녀는 문을 잠그고, 무의식적으로 가운의 앞을 여미었다.

", 오래 걸리는군." 하고 제이크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헬렌의 어조도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차가왔다.

"당신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욕실은 두 개 있어.목욕을 하고 싶었으면 다른 쪽을 썼을 거야." 하고 제이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는 당신과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어머 그래요?" 헬렌은 브러시를 집어 들고 소담스런 머리칼을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 무관심한 태도에 화가 난 듯, 제이크가 냉혹한 어조로 말했다.

"어찌 된 거야. 여기에 온 후에 당신이 어떻게 되어 버렸는지 가르쳐 주고 싶군."

그는 다리를 번쩍 들더니 침대에 똑바로 앉았다.

"아프리카 여행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라고는 말 못하겠지 . 그 전부터 당신의 행동은 이상하지 않았어? 게다가 아프리카에 갈지도 모른다는 정도는 당신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겠고."

헬렌은 그를 향해 브러시를 던지고 싶은 기분을 누르고 있었다. 여기에 데리고 온 이유를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주제에, 오히려 내 행동의 이상한 점을 들춰내며 왜 그러냐고 아주 천연덕스럽게 물어보다니!

"그보다 먼저 물어 보겠어요." 헬렌은 엄숙해지면서 물었다.

"왜 나를 이 곳에 데려오고 싶어 했죠? 처음에는 누다나 부부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럼, ? 예방선을 치기 위해?"

"그건 대체 무슨 소리야?" 제이크는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 무엇에 예방선을 칠 필요가 있지?"

헬렌은 그 기세에 겁을 먹었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평온을 가장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를 리가 없잖아요!"

"당신이 무얼 얘기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 하고 제이크는 차갑게 말했다.

"누다나 보모 리자를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거에요?"

제이크는 몹시 얼굴을 찡그렸다.

"리자, 리자, 하이딩? 물론 모른다고는 안해"

헬렌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고 말고요.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겠지요. 이집 사람을 모른다고 당신이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헬렌, 부탁이니 확실하게 말해 주지 않겠어?"

헬렌은 몸을 딱딱하게 하며 분명하게 말했다.

"그 여자는 나를 싫어하고 있어요. 오늘 아침, 처음 만났을 때 금방 알아차렸어요. 그 사람은 나를 미워하고 있어요. 그 이유는 단 하나 밖에 없지 않아요."

"바보!" 제이크는 화를 내며 헬렌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 손가락은 타월을 통해서 살에 박히는 듯이 느껴졌다.

"알았어. 확실히 난 리자를 알고 있어. 두 번 정도 밖에 외출한 적이 없어. 하지만 몇 년 전의 일이야. 사실을 말하면 , 그녀를 누다나 부부에게 소개한 것도 나야. 분명히 얘기해 두지만 , 나는 그 이후 그녀에게 아무런 흥미도 없어."

"내게 그것을 믿으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헬렌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당신은....당신은 누다나 부부를 몇 번이나 방문했었잖아요. 그리고 내가 당신과 여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제이크는 시선을 천장에 못박은 채 이야기했다.

"헬렌, 나는 리자 하이딩 일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겠어? 실은 그런 일로 나를 추궁해서 당신과 그 잘난 척하는 매너링과의 관계를 들춰 낼 수 없도록 만들고 싶은 거지!"

헬렌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는 키이스 매너링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그녀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부정했다.

"과연 그럴까?" 제이크는 비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 녀석은 당신을 껴안은 적도, 키스한 적도 없단 말이지?"

"물론 있을 턱이 없지요." 헬렌의 뺨이 타오르는 것 같이 뜨거워졌다.

"그럼, 어떻게 해서 그를 묶어 두고 있지? 그 녀석은 당신과의 교제에서 무얼 얻고 있지?"

헬렌은 화가 치밀어 올라 자신을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제이크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지금은 노여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성적인 결합이 없어도 남자와 여자가 친해질 수 있다는 걸 당신에게 가르쳐 드리고 싶군요."

제이크의 눈초리가 사납게 변했다.

"정말 그럴까? 그럼 순수하게 지성적인 교재를 하고 있다는 건가?"

"그렇게 얘기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매너링과 사귀어서 당신에게 무슨 이익이 있지? "

헬렌은 부르르 떨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무 것도, 적어도 현실적인 이익은 없어요. 단지 우리들은 의견을 교환하고..."

"침대를 같이하는 대신인가?" 제이크의 눈동자가 위험스런 빛을 띠었다.

헬렌은 뺨을 붉혔다.

"당신은 무엇이든 육체적인 것과 관련시키고 싶어 하는군요." 그녀는 화가 난 듯이 소리쳤다.

"남자와 똑같은 일을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생각할 수 없을 거예요. 지성을 발휘해 토론하는 것은 남자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죠."

"아니, 그렇게는 생각하고 있지 않아. " 하고 제이크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매너링을 잘 알고 있어. 그 녀석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당신과의 플라토닉한 관계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을걸. 당신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헬렌? 그렇게 아름다운 몸매를 갖고 있으면서 왜 정상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싫어하는 거지?"

헬렌은 신음하듯이 흐느꼈다.

"당신은 리자 하이딩 같은 여자와 그런 관계를 갖고 있어요?" 그녀는 경멸하는 듯이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제이크는 모욕당한 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헬렌을 내려다보았다. 가운 안으로 헬렌의 가슴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음울한 기색을 더해 가나 싶더니, 지금까지 헬렌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가락이 그녀의 목을 휘감았다. 헬렌은 움직이려고 했으나, 제이크의 손가락에 목이 눌려 숨도 잘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난 당신에게서 아주 여러 가지 받고 있어." 제이크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헬렌은 흥분되는 기분을 억누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파요." 그 목소리는 속삭이는 듯 작았다.

"그래?" 제이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헬렌은 그 시선에 마주치자, 무릎 밑의 뼈가 녹는 듯이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제이크, 부탁이에요." 헬렌은 숨이 곧 끊어질 듯 중얼거렸다.

제이크는 헬렌에게 다가왔다. 그 건강한 몸이 헬렌의 몸에 닿았다.

"떨고 있잖아? " 그렇게 말하면서, 제이크는 몸을 구부려 헬렌의 목에 입술을 갖다 댔다. " 내가 떠는 것을 멈추게 해주지."

다음 순간, 제이크는 헬렌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아 버렸다. 헬렌은 자신도 모르게 막힌 입술을 열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그러고 나서는 아주 정열적인 키스는 계속되었다. 헬렌은 지금까지 키스란 어떤 것일까 하고 몰래 상상해 본 적이 있으나, 제이크의 앞에 서는 그런 공상 같은 것은 비교할 것이 못되었다.

여자의 마음을 마구 흥분시키는 것은 제이크에게 있어서는 손쉬운 일이었다. 제이크는 헬렌의 등에서부터 엉덩이로 손을 움직이며, 헬렌의 몸을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헬렌은 제이크가 자신을 요구하고 있음을 눈치 채지 않을 수 없었다. 헬렌은 저항하고 싶었다. 제이크이 팔에서 빠져나가 이런 방법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몸에 밀착된 남성적인 건강한 육체의 온기, 굶주린 듯이 자신을 요구하는 입술, 온몸을 더듬으며 애무하는 손, 헬렌은 힘이 빠진 듯이 제이크에게 달라붙지 않을 수 없었다. 팔을 제이크의 목에 꽉 감고, 숱 많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휘감으면서 헬렌은 자신을 경멸하고 있었다. 이제는 시간도 장소도 잊은 채 제이크의 애무를 받으며, 헬렌은 모든 것이 어떻게 되어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있었다. 단지 제이크가 자신을 성급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만이 그녀의 가슴 속을 채우고 있었다. 헬렌 또한 제이크를 원하며 자신의 몸을 달아오르고 있었다. 제이크의 팔에 안겨 침대로 옮겨질 때도 헬렌은 그 감각에 취한 듯이 저항하지 않았다.

침대에 던져진 헬렌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 때 공포에 가까운 전율이 그녀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전까지의 따뜻함이나 흥분은 더 이상 제이크에게는 없었다. 그 눈동자는 냉혹하며 잔인했고, 전혀 타인을 보는 것처럼 헬렌에게 향해졌다. 헬렌은 너무도 놀라고 상처받은 나머지, 몸을 지키려는 듯이 가운을 바싹 여몄다. 힐책하는 듯한 제이크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감아 버리고 싶었다.

"! 얘기해!" 제이크는 몸을 일으키자 헬렌을 심하게 추궁했다.

"매너링은 정말 당신에게 손을 댄 적이 없어?"

헬렌은 고개를 저었다. 몸은 뜨거운데, 그녀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런 일은 없어요!" 그녀는 괴로운 듯 속삭였다.

"매너링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제이크는 한참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헬렌을 보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지?" 하고 그는 거칠게 물었다.

헬렌은 입술을 반쯤 열었다.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에요. 제이크." 그 목소리는 떨렸다.

"그만두지" 그렇게 한마디 하고는, 제이크는 뺨에 손을 대고 한번 휙 돌아보더니 방을 나가 버렸다.

헬렌은 너무도 괴로워 허탈 상태에 빠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제이크가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 방에 되돌아오면 어떻게 하지, 헬렌은 또 그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 일어난 일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헬렌은 조각조각의 생각들을 하나로 정리하려 했으나, 모든 것이 꿈속의 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이크의 부드러운 애무에 몸 속의 불 꽃이 타오르기 시작해 , 지금은 녹초가 되어 모든 것이 멍한 상태였다. , 빨리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돼. 헬렌은 자신에게 타일렀다. 제이크가 돌아와, 내가 침대 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어. 그 사람은 나를 경멸하고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나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 지금까지 사랑 받고 있지도 않으면서 남자에게 몸을 내던지는 여자를 경멸해 온 나, 헬렌 퍼 사이스가 그런 여자들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짓을 해 버리다니. 단호하게 헬렌은 침대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이런 때 자신을 동정해도 별수 없어. 제이크는 설마 내가 싸움을 걸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두고 보아야지 조금 전에 그가 한 것을 내가 추궁하거나 하면 더 비참해질 거야. 지금 30분 동안에 일어난 일을 잊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금까지대로 자신의 껍질 속에 틀어박혀 초연하게 있어야지.

그렇게 생각한 헬렌은 특별히 정성 들여 화장을 했다. 눈까풀에는 엷은 녹색 새도우를 칠하고, 긴 속눈썹을 아이러시 컬로 더 강조하고, 입술에는 무색의 광택만을 내는 립스틱을 발랐다. 그리고 오늘 밤을 위해 준비해 온 드레스를 꺼냈다. 그것은 넓은 칼러의 벨벳 롱 드레스로, 목이 깊게 패고, 통 넓은 긴 소매가 붙어 있었다. 이 드레스를 입는 것은 처음이었으며, 헬렌의 흰 살결이 더욱 두드러져 그녀를 더욱 섬세하게 보이게 했다. 그리고 금 귀걸이와 팔찌를 했다. 금 목걸이가 가슴의 팬 부분에서 상대를 유혹하는 듯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전에 헬렌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실제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지금은 어쨌든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헬렌의 마음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제이크는 아직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헬렌은 아래층에 가서 제이크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모습을 그에게 보여 주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하여튼 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거실에 들어가니 그 곳에는 리자 하이딩이 있었다. 그녀는 붉은 머리에 잘 어울리는 녹색 터키풍의 드레스를 입은 정장 차림이었다. 리자는 헬렌을 보고 깜짝 놀란 듯, 긴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고 그 표정을 헬렌에게 눈치 채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고 결심한 헬렌은, 애교 있게 리자에게 인사했다.

"다른 분들은 어디 계실까요?"

리자는 양손을 쥐었다. 그 겸손한 듯한 태도에는 헬렌에 대한 적의가 분명히 보였다.

"아이들과 함께 계십니다." 리자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주인어른들은 매일 이 시간이 되면 아이들과 함께 보내시고, 그 때에는 당신 남편도 함께 계십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헬렌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요?" 하고 중얼거리며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방안을 둘러보았다.

"잘 몰랐어요"

리자는 코를 벌름했다.

"마실 것을 드릴까요? 제가 권해도 누다나 부인은 그다지 신경 쓰시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

헬렌은 주저했으나 대답했다.

"어머, , 고마와요. 세리를 마실께요."

"단 것이오? 아니면 독한 것? 어느 쪽으로 하시겠어요?"

"독한 것으로 주세요." 헬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누다나 부부 밑에서 일하는 것이 마음에 듭니까?"

리자는 무표정하게 세리를 따라 글라스에 부었다.

", 아주" 그녀는 대답했다.

"이 일은 제이크가 소개한 것입니다."

헬렌은 조금 긴장했으나 리자가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 들었어요."

"어머, 그러세요?" 리자는 의심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제이크에 관한 것은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나는 리즈에서 태어났으니까요. 우리는 10년 전 쯤 리즈의 파티에서 만났어요."

"그렇게 일찍부터?" 헬렌은 놀란 듯이 말했다.

10년 전 이라면 내가 아직 열 다섯 살이었는데.

"." 리자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제이크의 어머니도 알고 있어요."

헬렌은 세리를 조금 마셨다.

"아주 맛있는 세리네, 도수도 알맞고."

리자는 입술 꼭 깨물었다.

"그렇겠지요. 전문가시니까 잘 아시겠지요."

그 말하는 투가 경멸하는 듯했기 때문에 헬렌은 충격을 받았으나, 동요를 감추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넘겼다.

"어머, 천만에요."

리자는 어깨를 움츠리며 비난하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하워드 부인 , 지루하지 않으세요?"

헬렌은 눈을 들었다.

"지루해요? ? 왜 지루해야 하지요?"

리자는 또 어깨를 움찔했다.

"제이크가 그렇게 집을 비우기를 좋아하니, 혼자 남으실 테니까요. 무언가 일이라도 하고 싶지 않으세요?"

헬렌은 조금 얼굴을 찌푸리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때로는 심심해요. 하지만 보통은 그런 일은 없어요. 책을 많이 읽고, 극장이나 미술전람회에 가기도 하고, 할 일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리자는 재빨리 말했다.

"제이크는 많은 여자들 중에서 들의 백합 같은 당신을 고른 셈이군요."

헬렌은 글라스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만지면서, "미스 하이딩, 그건 좀 지나친 이야기 아니에요?"하고 말을 골라가며 이야기했다.

리자는 코웃음 쳤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요. 제이크는 좀 분별이 있어야 했어요. 그의 어머니도 나와 같은 의견인걸요."

"어머 그래요?" 헬렌은 어두운 표정을 하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자식의 부인을 고를 수는 없잖아요? 제이크가 의지가 굳은 사람이란 걸 잊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그 사람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인걸요."

리자의 얼굴이 빨개졌다.

"제이크가 손에 넣고 싶어 한 것은 당신의 집안이에요. 당신이 아니에요."

헬렌은 억지로 냉소하듯 웃어 보였다.

"옛날에는 그랬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

그녀는 일부러 그렇게 말하고 조롱하듯이 조금 미소 지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리자는 화난 듯이 주먹을 꼭 쥐었기 때문에 , 헬렌은 자기가 리자의 공격에 결정적인 반격을 가한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헬렌은 히프에 손을 대고 날씬한 다리 선을 일부러 강조한 자세를 취하고서 천천히 계속해서 말했다.

"말해 주지 않을래요, 이 옷이 나에게 어울려요?"

리자는 무언가 심히 투덜거리며 문밖으로 사라졌다.

헬렌은 떨면서 겨우 안도의 숨을 쉬었다.(적어도 이번만은 나의 승리였어.)

몇 분 후, 루셴과 로즈가 들어와 헬렌이 세리를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즐거운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리자가 주었어요." 헬렌은 글라스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아이들은 이제 잘 준비가 다 되었나요?"

루셴은 미소 지었다.

"리자가 해주지요.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잘 들으니까요."

"그래요?" 헬렌은 생각하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 제이크가 방에 들어왔다. 목욕을 하고, 수염을 깎고 ,검은 양복, 통이 좁은 바지를 몸에 꼭 맞게 입은 제이크는 남자다왔다. 셔츠는 진한 블루로, 거기에 맞는 넥타이를 하고, 단정하게 쓸어 넘긴 검은 머리는 컬러 부분에서 조금 웨이브져 있었다. 정말 너무 남자다운 사람이야. 하고 헬렌은 정색을 하고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너무 긴장을 한 나머지, 복부가 이상해지면서 통증 비슷한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제이크는 별 흥미 없다는 듯이 헬렌을 보았지만, 헬렌은 식사 시간 동안몇 번이나 그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밤이 되어 둘만이 되는 것이 두려웠다. 또 무시당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헬렌은 생각했다. 리자는 저녁 식사하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같이 먹자고 했지만 자기 방에서 먹겠다고 했어요."

로즈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헬렌은 안심했다. 또 리자와 대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루셴과 제이크는 서재에서 체스를 한다고 자리를 떴으므로, 헬렌은 로즈와 둘만이 되었다. 그렇지만 다행히 로즈는 텔레비젼을 보는데 열중해 있었기 때문에 헬렌은 아무 질문도 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날 밤 은 길었다. 헬렌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안절부절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열 시에 무쟈리가 커피와 샌드위치를 가져온 것을 기회로, 이제 쉬고 싶다고 했다. 로즈가 거기에 대찬성인 것 같았다.

"정말 남자들이란," 하고 로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들 일 같은 건 안중에도 없네."

그렇지만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심이 아닐 거라고 헬렌은 생각했다. 목욕탕에서 세면을 끝내고 , 헬렌은 침실로 돌아와 나이트가운을 걸치고 침대에 들었다. 오늘 하루 동안 평소와 달랐던 일이 너무 많아서 금방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제이크가 차바에 여행하게 된 일, 리자와의 대화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있는 듯한 제이크의 태도, 그리고 조금 전에 방에서 제이크에게 당한 일, 그러한 것들을 헬렌은 머릿속에서 바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제이크에게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자기에게도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 사람을 자극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복수로, 내가 무관심하게 있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헬렌은 엎드려서 제이크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나무를 흔드는 바람소리, 시냇물 소리, 밤새 소리 등이 밤의 적막을 뚫고 들려왔다.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그리고 나서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루셴과 제이크가 체스를 끝냈나 보군.

헬렌은 가만히 누운 채로 제이크가 방에 들어오는 소리들 듣고 있었다. 그리고 짐짓 깊은 숨소리를 내며 잠든 체했다. 그렇지만 제이크가 두 개의 침대 사이에 있는 램프를 켰기 때문에 헬렌은 살짝 눈을 떴고, 그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다시 눈을 꼭 감은 헬렌은 제이크가 불을 끄고 자기 침대로 들어가길 기다렸다.

불은 꺼졌지만, 제이크는 자기 침대에 들어가지 않고 헬렌의 침대에 다가와서 어둠 속에서 가만히 헬렌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헬렌은 숨을 죽였다. 하지만 숨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에 잠 자는 체하고 있었던 것이 탄로나 버려, 제이크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리로 가."

헬렌은 신음하는 듯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당신 침대는 저쪽이에요."

"이게 내 침대야." 제이크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하더니 헬렌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제이크의 피부의 온기가 느껴졌다. 헬렌은 당황해서 침대의 반대쪽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제이크의 팔이 그녀를 잡아챘다.

"나에게 거역하지 마." 제이크는 재빨리 울부짖듯이 말하더니 헬렌의 부드럽고 날씬한 목에 입술을 댔다.

"난 오늘밤 당신 때문에 미칠 지경이야. 알아? ! 나는 지금 당신이 필요하단 말야."

헬렌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제이크의 힘은 강했고, 그 위에 헬렌의 내부에 있는 이브의 본성이 금단의 사과를 맛보고 싶어 하였기 때문에. 새벽녘에 제이크는 또 한 번 헬렌을 깨웠다. 제이크의 입술은 뜨거웠고 정열적이었다. 이번에는 헬렌도 저항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제이크에게 지지 않을 만큼 정열적이었다. 나중 일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떻든 이 사람은 나의 사랑스러운 사람, 나의 남편인걸. 헬렌은 전심전력으로 제이크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아침의 금빛 햇살이 방안 가득히 넘칠 때, 제이크는 이미 방에 있지 않았다. 침대 위의 사람이 잤던 흔적만이 제이크가 헬렌과 하룻밤을 같이했던 사실을 말해줄 뿐이었다.

 

8.

헬렌은 나른하게 몸을 뒤척이며 손목시계를 보았다. 놀랍게도 벌써 열 시 반이었다. 서둘러 침대에서 뛰쳐나온 헬렌은 몸은 싸늘한 아침 공기로 부르르 떨렸다. 헬렌은 가운을 집어들자마자 목욕탕으로 뛰어 들어갔다. 샤워를 하니 다시 생기가 돌아다. 그러고 나서 감색 슬랙스와 반소매의 코르덴 웃옷을 입고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서는 무쟈리가 혼자 앉아서 타오르는 불에 장작을 넣고 있었다. 그는 헬렌을 보자 싱긋 웃었다. 헬렌은 조금 주저하다가 물었다.

"무쟈리, 모두들 어디 갔지?"

무쟈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미세스 로즈는 부엌에 있습니다. 미스터 루셴과 미스터 제이크는 나갔습니다."하고 그는 또 한번 미소 지었다.

"미세스 로즈를 부를까요?"

"아니, 됐어요. 난 여기 있을테니까."

그 때 로즈가 천천히 방으로 들어왔다.

"목소리가 들렸어요. 이제 깼어요? 헬렌, 푹 쉬었지요? 제이크가 깨우지 말라고 얘기했다니 말예요."

헬렌의 뺨이 붉어졌으나 로즈는 단지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흔들어 보일 뿐이었다.

"아니, 변명 같은 것 필요없어요. 나는 잘 알고 있는걸요." 하고 그녀는 무언가를 생각해낸 듯 미소를 띠었다.

"제이크는 정말 매력적이에요. 나도 그의 매력에 넘어갈지도 모르겠어요."

헬렌은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 제이크와 루셴은?" 하고 물었다.

로즈는 양손을 벌렸다.

"산책하러 갔어요. 마을을 구경한다나요. 그래도 분명히 사업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루셴은 차바에 제이크의 공장을 세우는 이야기에 아주 열중해 있는걸요. 많은 사람에게 일을 줄 수 있고, 돈도 벌어들이고, 나라도 발전할 수 있을 테니까요." 헬렌은 끄덕였다.

", 루셴은 언제 출발하는지 말씀하셨나요?"

로즈는 모르겠다는 시늉을 했다.

"아마도 수일 내 일 거예요. 왜요? 제이크가 빨리 출발하기를 바라는 건 아닐 테죠?"

헬렌은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자기가 정말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두려웠다. 게다가 제이크의 예정조차 알지 못했다. 우리들 보통의 평범한 부부사이라고 믿고 있는 로즈에게 나의 불안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헬렌은 제이크가 여자에게서 무언가를 요구당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소문으로는 듣고 있었다.

제이크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 준 적은 없어. 나를 갖고 싶다고는 말했지만, 그건 사랑하고 있는 것과는 달라.

일순 헬렌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 제이크의 팔속에서 지낸 몇 시간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헬렌에게 있어서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방식을 기적처럼 깨우쳐준 사건이었다. 헬렌은 이제까지 그렇게 깊은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었다. 로즈는 가만히 헬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윽고 말했다.

"주인에게 여행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거죠? 왜 함께 가시지 않죠?"

헬렌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로즈를 보았다.

"뭐라고요?"

"같이 가시라고 했어요. 왜 안가죠? 당신은 영국에 남아 있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래요, 하지만." 헬렌은 당황해 하며 손가락으로 귀 뒤의 머리카락을 말아 올렸다.

"저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로즈는 또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만일 내가 당신이라면 그렇게 하겠어요. 이것이 없으면." 하고 그녀는 배를 두드렸다.

"이렇지만 않으면, 나라면 총알처럼 날아가겠어요."

"그렇게 하실 수 있으세요?" 헬렌의 목소리는 침울했다.

"그러시겠지요. 차바는 당신에게 있어서는 고향일 테니까요."

로즈는 살짝 눈을 들었다.

"그래요, 내겐 고향이에요. 하지만 나는 루셴을 따라왔어요. 뭐 오지 않았어도 괜찮았겠지요. 우리들 집이 있는 루아냐에 있었어도 좋았을 뻔했지요. 루아냐는 우리나라의 수도이지요. 우리는 거기 남아서 루셴이 가끔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대사 부인인걸요. 당연히 남편과 함께 계셔야 되잖아요."

로즈는 휴 한숨을 쉬었다.

", 그건 어떤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나는 루셴을 내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보내고 싶지 않아요."

헬렌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로즈의 생각은 단순하고 천진난만하군. 이 사람은 처음부터 행복을 타고난 듯이 보이는 내가 얼마나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지 상상도 못할 거야.

점심 식사 시간이 가까워 질 즈음, 헬렌이 혼자 거실에 있을 때 루셴과 제이크가 돌아왔다. 로즈는 점심식사 준비를 시키러 가서 방에 없었다. 먼저 루셴이 추위에 곱은 손을 비비면서 들어왔다.

"잠꾸러기 안녕! "하고 루셴은 명랑하게 말했다.

"몇 시에 일어났어요?"

"열 시 반경에" 하고 헬렌은 면목 없다는 듯이 대답했으나, 한편으로는 제이크가 언제 문 있는 곳에 나타날까 하고 조마조마해 하고 있었다.

"열시 반!" 루셴은 일부러 크게 떠들더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세 가지 덕을 쌓는 것이다, 라는 등의 농담을 했다. 그 때 제이크가 돌아왔다.

제이크는 여행을 떠날 때 입고 있던 검은 스웨이드 바지와 연보라빛 실크 셔츠, 거기에 챠콜 그레이의 스웨이드로 된 느슨한 베스트를 입고 있었다. 그 복장은 그의 탄력 있는 남자다운 풍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으나, 그는 아주 우울해 보였다.

헬렌은 신경질적으로 제이크를 보았으나, 그 표정에서는 아무 것도 눈치 챌 수 없었다. 헬렌은 어떻게 하든 제이크 쪽이 한 수위로, 감정을 감추는 솜씨가 더 능숙했다. 헬렌은 갑자기 어떤 것에 생각이 미치자,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만족감이 몰려들었다. 어젯밤 둘만의 일이 제이크에게 있어서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다니, 나도 어지간히 어리석군.

헬렌은 무릎 위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루셴이 셰리를 건네 준 때에도 내내 눈길을 아래를 향한 채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글라스를 받아 들었다. 루셴이 로즈를 찾으러 나가자, 헬렌은 더욱 긴장했다.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제이크는 어떤 식으로 나를 조롱할 셈이지?

그러나 제이크는 곧 입을 열려고 하지 않고, 맥주를 다 마시고 두 잔째를 따랐다. 그러고 나서 난로 앞에 서서 가만히 헬렌을 내려다보았다. 헬렌이 눈을 들려고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자. 그는 화가 치미는 듯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 나서 거센 어조로 중얼거렸다.

"헬렌, 할 이야기가 있어."

"지금은 싫어요." 하고 그녀는 세리를 조금 마셨다.

", 오늘 아침에는 어디에 가셨었어요?"

"헬렌!" 그 목소리에는 고뇌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때, 리자가 제이크를 향해 웃으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제이크 , 이제 돌아오셨군요. 누다나 부인에게 당신이 주인어른과 산보하러 나갔다고 들었어요. 모처럼 여기까지 오셨는데 잠시도 만날 수가 없다니"

제이크는 변명하는 듯한 몸짓으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짧은 동안이니까. 결국 어제 점심 에 도착해서 오늘 점심식사를 마치면 돌아갈 테니까."

"어머, 제이크." 하고 리자는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그렇지만 다시 런던 집 쪽에 와 주시겠죠? 옛날이야기도 오랫동안 하지 못했고..."

헬렌은 얼른 일어서서 "실례해요." 하고 말했다. 조금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제이크의 손을 스쳐 방을 나왔다. 침실에 가자, 옷을 입은 채로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헬렌은 죽고 싶은 기분이었다.

 

로즈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어렴풋이 듣고 헬렌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식사 준비가 다 된 것 같았다. 헬렌은 싫지만 아래층에 내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식사 시간이 끝이 없게 길게 느껴졌다. 겨우 거기서 해방되어, 무쟈리가 페러리의 트렁크에 슈트케이스를 들어다 줄 때에야 비로소 헬렌은 안심했다.

"그런데, 제이크" 하고 루셴은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만나서 즐거웠어요. 월요일 런던에 돌아가면 전화할게. 그러고 나서 구체적인 것을 결정하지."

"좋아 . 루셴, 로즈, 안녕!"

"안녕, 제이크. 헬렌도 조심해서 돌아가요"

페러리는 미끄러지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헬렌은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시트에 기대어 뺨을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애쓴 나머지 헬렌은 지나치게 긴장해서 그 반동으로 힘이 빠져 녹초가 되었다. 제이크는 입을 다문 채로 있었다. 몇 킬로인가 달려서 큰길이 나오자 그는 입을 열었다.

"이제 얘기해도 되겠지?"

헬렌은 곤란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얘기를 할 게 있어요? "하고 그녀는 얼어붙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이크는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로 불평을 이야기했다.

"가시 돋친 말은 이제 그만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당신은 잘 알고 있을 텐테"

헬렌은 한숨을 쉬었다.

", 전 당신만 괜찮다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

"안 돼!" 제이크는 이를 갈며 사납게 말했다.

"부탁이니 헬렌, 적어도 내가 사과할 수 있게 해줘."

"사과해요?" 헬렌은 뭐가 뭔지 모르는 채 제이크의 옆얼굴로 눈을 돌렸다.

"그래, 사과하겠어. 내가 그때 어떻게 된 건지 나도 모르겠어. 당신이, 그 때 아무도 손을 댄 일이 없는 몸이라고 얘기했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

핸들을 잡은 제이크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은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어!"

헬렌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제이크, 부탁이니까 그런 식의 말은 그만둬요! 나도 어린애가 아니에요. 나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한 일이에요."

"정말 그래?" 제이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 염려를 해서 그런 식의 말을 하지 않아도 좋아. 나는 확실히 바람둥이야. 하지만 그게 자랑스러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어."

헬렌은 무릎 위의 양손을 꽉 쥐었다.

"그만둬요, 바보같이! 이제 와서 그런...."

제이크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로 홱 눈을 돌렸다.

"왜 나에게 욕을 하든지 하진 않는 거지? 난 욕을 먹어도 당연해. 그런데도 당신은 왜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헬렌은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아아,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후에도 둘은 계속 입을 다문 채로 잠자코 있었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제이크는 악셀을 힘껏 밟았다. 자동차는 곧 런던 교외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커슬랜드 스퀘어에 도착하자, 집에는 라테머 부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저녁을 먹었는지 두 사람에게 물었다. 제이크는 고개를 저으며 아직 안 먹었다고 했다.

"하지만 난 필요 없어요. 나갈 거니까."

헬렌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간다고? 어디로? 가지 말아요. 내 곁에 있으면서 나를 사랑해 줘요! 하고 헬렌은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물론 그런 일은 있을 리가 없었고, 그 대신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나도 됐어요. 나는 일찍 잘 테니까, 커피와 샌드위치만 들겠어요"

라테머 부인은 식사를 준비하러 나가고, 제이크는 무언가 주저하는 듯이 홀에 서 있었다. 벌써 슈트케이스는 이층에 운반해 놓았기 때문에 그는 지금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이 헬렌을 쳐다보았다. 그 눈은 어둡고,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이 보였다.

"당신 , 정말 피곤한 것 같아 보여." 하고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이제 그만해요!"헬렌은 언성을 높였다. 제이크가 신경을 써주는 것이 그녀에게는 견딜 수가 없었다.

"부탁이니까, 혼자 있게 해줘요!"

제이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헬렌을 응시했다.

"헬렌, 이런 일로, 정말 엉망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아."

"엉망이 된다고요?" 헬렌은 일부러 제이크에게 상처를 주도록 말했다.

"뭐가 엉망이 된다고 그러는 거죠? 부탁이니까 제이크, 지금이 몇 세기라고 생각하죠? 그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예요. 우리들이 마신 가장 훌륭한 와인 때문이지요. 맛있는 와인이 아니었나요?"

"헬렌!" 제이크의 어조가 무섭게 위업적이었다.

"그만둬!"

"무얼 그만둬요? 정상적인 환경이라면 매일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왜 이제 새삼스럽게 분별있는 체 얘기하는 거죠? 정말 구시대 사람이네. 당신이란 사람, 설마 그런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잘 알았어요."

"헬렌!" 제이크는 헬렌의 어깨를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그만해! 그런 식으로 나를 바보 취급할 셈인가! 내가 한 일은 당신이 얘기해 주지 않아도 알고 있어.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스카치를 뒤집어쓸 정도로 마시는 일이야. 안심하고 있어."

헬렌은 몸을 돌려 다른 쪽을 보는 체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제이크는 가만히 서 있는 채로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할 셈이지?"

"저요?" 헬렌은 지금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듯한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말했죠? 어서 자고 싶어요"

제이크는 어깨를 움츠렸다.

"정말 그럴 거야?"

"왜요? " 헬렌은 난간에 손을 대었다.

"달리 할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죠?"

제이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왠지 헬렌에게는 그가 갑자기 젊고 그리고 약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런 것은 바보스런 생각이야, 하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강하게 자신에게 타일렀다. 제이크 하워드가 상처받기 쉬운 인간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당신이 그러겠다면 할 수 없지"

"물론이에요" 헬렌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차바에는 언제 가죠?"

그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마 수요일쯤에.... 내가 가는 것이 기쁜 건가!"

그 눈은 어두웠다. 헬렌은 상관없다는 듯이 손을 벌렸다.

"당신이 무얼 하건 나에게는 상관없어요." 그녀는 일부러 경멸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제이크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이 홱 뒤돌아서 문을 쾅 닫고 나갔다. 헬렌은 꿈을 꾸었다. 무서운 꿈이었다. 헬렌은 심한 빗속에서 질퍽거리는 길을 모간 농장을 향해 부지런히 가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 보니, 그건 모간 농장이 아니고 커슬랜드 스퀘어에 있어야 할 자신의 집이었다. 왠지 그런 곳에 서 있는 것이었다. 헬렌은 우뚝 서서 머리에 손을 대고 , 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제니퍼의 차가 집 앞에 있는 것을 보고, 헬렌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계단을 뛰어올라가 홀에 서자 이층에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진실을 아는 것이 두려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래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어서 계단을 조용히 올라갔다. 제이크의 침실 문을 살짝 여니, 거기에는 제이크가 여자와 함께 있었다. 뒤돌아본 그 여자는 제니퍼가 아니라 리자 하이딩이었다.

"아니야!" 그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헬렌은 몇 번이나 큰 소리로 괴로운 듯이 소리쳤다.

리자가 적의를 품고 그녀의 어깨를 쥐고 흔들어 댔다.

"헬렌, 헬렌! 진정해 . 괜찮아, 여기는 집이야, 안심해."

헬렌은 겨우 눈을 떴다. 바로 눈앞, 희미한 램프의 불빛 속에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상냥하게 헬렌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그녀는 가위에 눌려 헉헉하고 헐떡이면서 숨 가빠하고 있었다. 그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헬렌은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제이크의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보고 있는 동안 그녀의 숨소리도 차츰 가라앉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하고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제이크는 헬렌을 푹신한 베개에 뉘어 주었다.

"당신은 꿈을 꾸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땀으로 젖은 헬렌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당신은 굉장히 피곤했어. 나는 한순간 강도라도 들어왔는지 알았어."

헬렌에게 웃어 보이는 제이크의 눈길은 지금까지 본적이 없는 부드러운 것이었다.

"난 정말 미안해요." 헬렌은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이런 일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는데..."

제이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알고 있어. 주말의 일 때문일 거야." 그는 초조한 듯 고개를 저었다.

"이제 괜찮아?"

헬렌은 숨을 크게 쉬었다.

"." 그렇게 말한 그녀의 눈은 제이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헬렌은 제이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그의 어떤 조그마한 동작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제이크의 머리는 침대에서 방금 나온 후여서 헝클어져 있었다. 그는 감색 비단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헬렌은(그가 아까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다지 마시지는 않은 것 같아.) 하고 생각했다.

제이크는 일어섰다.

", 나는 가겠어. 잘 자, 헬렌."

"기다려요. " 헬렌은 무릎을 끓고 몸을 일으켜 제이크의 손을 잡았다.

"제이크 , 가지 말아요!"

제이크의 뺨이 붉은 빛을 띠었다.

"이제 괜찮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고 나서 헬렌의 녹색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제이크는 "헬렌, 부탁이니...." 하고 말했다.

"당신은 자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거야."

"알고 있어요." 헬렌은 제이크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러나 제이크는 그것을 휙 뿌리치고 , 재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가 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제이크의 뒤로 문을 잠그는 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제이크에게 거부당한 헬렌의 마음의 공허함을 상징하는 듯이.

 

셀비이 역은 습기 찬 11월의 오후에 올 만한 곳이 못되었다. 헬렌은 따뜻한 양피 코트와 두꺼운 바지를 입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작은 여행 가방 하나만 들고 개찰구를 빠져나가 택시 타는 곳으로 갔다. 크리스마스카드를 가끔 보냈기 때문에 하워드 부인의 주소는 알고 있었다. 운전수에게 주소를 말하고, 헬렌은 차의 한쪽 구석에 몸을 맡겼다. 왜 제이크의 어머니에게 올 마음이 들었을까, 자신도 잘 몰랐다. 아마 제이크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겠지.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도 꿈속에서 느꼈던 불길한 기분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에 자신이 어젯저녁에 한일을 생각해낸 헬렌은 마음이 아파옴을 느끼며, 제이크에게 거절당한 일을 생각하고 굴욕감이 엄습해옴을 느꼈다. 눈을 떴을 때, 이미 제이크가 나가고 없던 것이 다행이었다.

혼자 남게 되자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헬렌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단 하나의 결론은, 이제 더 이상 제이크와 같이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제이크에게 경멸당하고 있음을 안 지금, 더구나 약한 자기가 계속 당하고만 있을 것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이혼을 신청해야지. 틀림없이 성립되겠지. 요즘 시대에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까. 어느 쪽에 잘못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나는 이 곳에 있을 수는 없어. 어딘가 갈 곳을 찾지 않으면 안 되겠지? 하지만 어디로? 누가 있는 곳으로? 단칸방에 처량하게 앉아 있을 자신의 모습을 헬렌은 상상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야. 제이크가 찾아 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돼, 나는 건강하고, 자유로운 어른이야. 할 일을 찾으면 돼. 헬렌은 제이크의 아프리카 여행을 생각했다. 아프리카로 떠날 때까지만 어떻게든 그를 피할 수 있으면, 돌아올 때까지는 자신을 억제할 수있을 거야. 지금은 기분이 너무 불안정해서 이 이상 그와 논쟁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헬렌은 제니퍼에게 전화를 걸어, 그 결의를 이야기했다. 제니퍼는 쇼크를 받은 것 같았으나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의 조언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 헬렌." 그녀는 말했다.

"제이크는 몇 년이나 그런 식이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이혼을 생각했어? 난 그가 무슨 일을 하든 네가 전혀 상관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헬렌은 침을 꿀꺽 삼켰다.

"확실히, 이런 부자연스러운 관계가 이제 싫어진 거야." 하고 그녀는 신중히 말을 골라가며 했다.

"나는 진정한 결혼을 원하고 있는 거야, 아기가 있는"

"어머나, 헬렌! 설마 진정은 아니겠지?"

"왜 안 돼?"

"왜냐고? 하지만 헬렌, 너답지 않아서 그래. 네가 엄마가 되고 싶다니! 게다가 임신을 생각해봐! 점점 보기 흉한 모습이 되어 9개월간이나 그런 모습으로 돌아 다녀야 하잖니!"

헬렌은 수화기를 꽉 쥐었다. 그녀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래!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 거야! 제이크의 아기라면 나는 낳고 싶어!"

하지만 헬렌은 실제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잘 생각해 보자는 제니퍼의 설득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전화를 끊고 한 동안 멍하니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셀비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제이크의 어머니가 있는 곳에 가면, 설마 제이크는 내가 거기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할 거야. 그 곳은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을 테고. 그가 차바로 출발하면 짐을 꾸리고, 변호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자.

물방울이 떨어지는 창밖으로 차분히 가라앉은 바깥경치가 보였다. 어머니와 아이가 가게에서 나와 길을 달려가고, 노동자들이 버스 정류장에 열을 지어 서 있고, 차가 물을 튀기며 달려가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진흙투성이로 만들고 있었다. 이것이 제이크의 고향의 거리. 그가 태어난 곳, 학교에 가고 그 재능이 길러졌던 곳이다.

헬렌은 한숨을 쉬었다. 결혼한 이후 한 번도 이 거리에 온 적이 없다니.... 제이크의 어머니는 어떤 얼굴을 하고 나를 맞아 줄까? 제이크의 어머니에게 할 말은 미리 생각해 두었다. 그렇지만 런던에 있으면 제이크에게 발견되어 계획이 틀어지게 될것 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뭐라고 하실까?만일 지금 제이크가 돌아오라고 하면, 나는 그 청을 아무래도 거절할 수 없는 기분이라는 것도 어머니가 알아주실까? 그리고 제이크가 차바에 가기 전까지 숨어 있다가 돌아올 때까지의 2개월간, 새로운 생활의 준비를 하는 것을 허락해 주실까?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라테머 부인은 여행용가방을 든 헬렌을 이상한 듯이 보고 있었다. 헬렌은 헌책을 병원에 가져간다고 변명했으나, 부인은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으므로 킹즈 크로스 역이라고 택시 운전수에게 말하고, 그것을 아무도 듣지 않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헬렌의 생각은 현실의 풍경으로 돌아왔다. 차는 큰길을 지나 좁은 샛길로 들어섰다. 테라스 하우스가 양쪽에 쭉 늘어서 있었다. 헬렌은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열심히 길의 이름을 읽었다.

드디어 찾고 있던 이름을 발견했다. 해리슨 테라스 37번지. 운전수는 보도에 차를 대었다. 헬렌은 차에서 내려 제이크가 태어난, 입구가 좁은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재빨리 핸드백을 뒤져 1파운드짜리 지폐를 찾아내어, 거스름돈은 사양하고 운전수에게 건네주었다. 운전수는 정중하게 모자에 손을 대고 여행용 가방을 계단에 놓고 차로 돌아갔다. 헬렌은 문을 노크했다. 창에 레이스 커튼이 쳐져 있어서 집안은 보이지 않았다. 헬렌의 가슴은 두려움 때문에 종처럼 울렸다. 그런데, 그 때 문이 열리더니 나이든 부인이 나왔다. 불안한 눈으로 노부인을 바라보고 있던 헬렌은 의지가 강해 보이는 그 노부인이 제이크의 어머니란 것을 알았다.

"?" 하고 정중히 맞이한 제이크의 어머니가 숨을 죽이고 입에 손을 댔다.

"어머나 어머, ..... 헬렌이로군? 무슨 일이 있었어? 무슨 사고라도 있었어? 제이크가 아픈가?"

헬렌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제이크는 제가 여기 온 것을 모르고 있어요. 그는 .... 그는 건강해요."

하워드 부인은 의아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얼른 입구에서 비켜섰다.

"어쨌든 들어오는 편이 좋겠지?"

"감사합니다. " 헬렌은 시어머니 앞을 지나 집 안까지 계속되는 좁은 홀로 들어갔다.

하워드 부인은 현관문을 잠그고, 그 조금 앞에 있는 문을 열었다.

"이리로 들어와요."

통로에 붙은 그 방은, 조금 전에 헬렌이 본 레이스 커튼이 쳐져 있던 방이었다. 불기가 없어서 싸늘한 그 방은 청결하고 산뜻했고, 보통 때는 별로 쓰지 않는 것 같았다.

", 부탁인데요." 헬렌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늘 쓰고 계시는 방에 가면 안 될까요?"

하워드 부인은 주저했다.

"얘기가 긴가?"

헬렌은 한숨을 쉬었다.

", 그래요"

제이크의 어머니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어쨌든 좋아. 부엌에 가자, 거기는 따뜻하니...."

부엌방도 같은 정도 넓이의 방으로, 아주 아늑해 보였다.

난로 앞에 는 소파가 있고, 조금 들어간 작은 방에 싱크대와 가스 오븐이 붙어 있었다. 하워드 부인은 소파 한쪽에 앉도록 헬렌에게 손짓했다. 그 때 처음으로 그녀는 헬렌의 여행용 가방을 들고 있음을 알아차린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차를 마실까?"

헬렌은 생긋 미소 지으며 코트를 느슨하게 하고, 소파에 푹 파묻히듯 앉았다. 갑자기 피로가 확 밀려오는 것 같았다. 이 밝은 분위기의 방이 세상에서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곳처럼 생각되었다. 여기에 있으면 안심이야. 이 사람의 아들 앞에서 , 스스로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고....

물을 끓이러 갔던 하워드 부인이 돌아와 헬렌 앞에 서서, 어떻게 된 건지 물어 보고 싶은 듯, 두 손을 마주 비볐다.

", 무슨 일이 있었나 말해 봐요."

헬렌은 숨을 돌리며 천천히 이야기 했다.

"앉지 않으시겠어요?"

", 좋아요. ..... 이젠 말해 주겠지?"

헬렌은 뭐라고 말을 시작할 것인가 잠깐 망설였다.

"우선 제일 먼저 말씀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저와 제이크가 헤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하워드 부인은 현기증을 느낀 듯 낮게 부르짖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애로부터 그런 얘기를 듣지 못했는데. , 말해 주겠어. 제이크가 동의하지 않는데 어떻게 이혼을 할 수 있는지?"

헬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고 싶어요. 벌써 결정했어요. 어머니도 처음부터 제이크와 저와의 결혼을 원치 않으셨지요? 그게 옳았어요. 우리들은 맞지 않아요."

"그래? "하워드 부인은 물이 끓는가 보고 홍차를 타려고 일어섰다.

"하지만, 왜 이 곳으로 왔지?"

헬렌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어젯저녁, , 어젯저녁에 싸움을 했거든요. 저는 집을 나왔어요. 제이크가 차바로 떠날 때까지 런던을 떠나 있고 싶었어요. 여기라면 그도 찾아내지 못할 것 이라고 생각해서...."

"차바?" 홍차를 타 가지고 돌아오며 하워드 부인이 물었다."그게 뭔데?"

"나라 이름이에요. 중앙 아프리카의 , 제이크는 그 나라의 대사를 알고 있어요."

", 그래, 생각났다. 누다난가 하는 이름이었지? 제이크가 그 사람 집에 리자 하이딩의 일자리를 찾아 주었지, 아마?"

헬렌은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숨이 막힐 것 같은 심정으로 말을 꺼냈다.

", 그래요. , 제이크는 수요일에 차바로 떠나기 때문에 저는, ... 제이크가 출발할 때까지 여기에 있을 수 있으면....."

"여기에?" 하워드 부인은 깜짝 놀란 듯이 말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여기에? 네게는 재워 줄 친구도 있을 거 아냐? 이런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어. 여기 와서 에미인 나에게 자식의 뜻을 거스르며 네 편을 들어 달라니!"

"아니, 그렇지 않아요." 헬렌은 홍차 잔을 옆으로 치웠다.

", 저는 어머님이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해서...."

"? 제이크의 결혼이 깨져서?"

", 저와의 결혼이 말입니다."

하워드 부인은 입을 꼭 다물었다.

"나는 제이크가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어. 여기 오면 그 애는 항상 만족스러운 모습이었으니까."

헬렌은 벌떡 일어섰다.

"그럼 도와주실 수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하워드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난 헬렌을 만류했다.

", 진정해요." 하고 그녀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하지만 갑자기 여기에 와서 그런 폭탄선언을 하면 놀라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겠어? 정말로, 우리들과 같은 이런 시골 사람들은 런던 사교계의 사람들과는 다르니까. 셀비이의 사람들은 결혼을 단지 서약서에 사인하는 것뿐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하워드 부인은 머리를 저었다.

"그렇지만 모르지. 나는 줄곧 네가 제이크와 결혼한 것은 풍족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더 부자인 남자라도 나타났다는 거냐?"

헬렌의 얼굴이 새파래지는 것을 보고 하워드 부인은 자신의 말에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어요. 지금 한 말은 지나쳤어. 하지만 제이크와 결혼했을 때, 네가 그 애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겠지?"

"" 헬렌은 다시 의자에 몸을 던졌다.

"어머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저는 이유가 있어서 제이크와 결혼했어요. 그와 결혼하면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척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헬렌은 얼굴을 들었다.

"아버지는 다른 가족들과는 달랐기 때문에 의절 당했어요. 다른 가족들은 완고한 귀족으로, 전통있는 가문의 재산가들이죠. 제이크는 저의 백부같은 사람과는 정반대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한 거예요."

"그래?" 하워드 부인도 마주 앉아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너는 자유롭게 되고 싶다는 거니?"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말문이 막혔지만 헬렌은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그럼, 왜 제이크가 차바에 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지? 3년 이상 참았다면 하루나 이틀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아니에요!" 헬렌은 단호하게 말했다.

"전 아무래도 집을 나오지 않으면 안 됐어요.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그래야만 했어요."

울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헬렌은 울음 섞인 목소리가 되었다. 하워드 부인은 일어서서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헬렌을 혼자 있게 하기 위해서, 홍차 잔을 치우러 나갔다. 부인이 돌아왔을 때는 헬렌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하워드 부인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가만히 서서 헬렌을 보고 있더니.

"여기에 있어도 좋아요." 하고 급하게 말했다.

"제이크의 방을 쓰도록 해. 이젠 쓰지 않는 방이니까"

헬렌은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괜찮아. 나도 이게 좋은 건지 어떤지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같이 이야기해 볼 상태가 아니니까. 이리로 와요. 방을 보여 주고, 무언가 먹을 것을 준비해 줄 테니까."

헬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워드 부인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강한, 사람을 안심시키는 데가 있었다. 그리고 제이크처럼 솔직했다.

 

9.

플레저양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제이크는 책상에 턱을 괴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주먹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그는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그러한 그녀를 보고도 불쾌함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고, 초조한 듯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플레저양. 좋아." 하고 제이크는 무겁게 말했다. "진짜 못하는군요. , 한 번 더 해 봐요. 화학분석까지는 받아썼어요? 그래요. 좋아, , 거기서부터 하지요." 제이크는 책상 위의 서류를 홱홱 넘기면서 한 번 더 구술하기 시작했다. 마주앉은 여자는 정신없이 속기를 하기 시작했다.

제이크의 비서인 린다 홀랜드가 , 오늘 오전 중은 사적인 일이 있으므로, 대신 총지배인의 비서에게 일을 시키고 있었다. 실러 플레저, 그녀는 그런 대로 괜찮은 비서였지만, 도저히 린다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제이크는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고 초조해했으므로 전혀 관대할 여유가 없었다. 제이크는 벌써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되풀이하고, 화학 물질의 스펠링을 몇 번씩이나 되풀이해서 불러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드디어는 짜증이 나서 실러를 볶아 댔다. 겨우 구술이 끝나자 제이크는 초조한 듯이 서류를 펼쳤다.

"나 대신 메인 바아링씨에게 사인을 받도록" 제이크는 마음이 들떠서 말했다.

"자신이 한 속기니까 하나도 빠짐 없이 알아볼 수 있겠지?"

", 괜찮을 거예요." 플레저양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일어섰다.

"이젠 됐습니까?"

제이크는 무뚝뚝하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그 말에 멍한 얼굴을 들었다.

"? , 좋아요. 이걸로 됐어요.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눈은 차갑고 무관심했다.

실러 플레저는 싱긋 웃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감사했습니다."

끄덕거리며 제이크는 실러가 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 본 후에 급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거대한 사무실 창에서는, 런던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여기는 가장 높은 곳으로 전망이 좋았다.

제이크는 쉴 새 없이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자신의 사무실을 무표정하게 점검해 나갔다. 넓고 밝은, 엷은 청색 카펫을 전면에 깔고, 거무스럼한 마호가니 가구로 장식한 사무실은 , 일터로서의 모든 매력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자신이 제왕과도 같은 권력을 가진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러한 것들이 그에게 조금도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기분이 나쁘고 관자놀이가 욱신욱신하는 것은 어젯밤의 수면 부족의 탓만은 아니었다. 이제까지 그가 원해서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것은 없었다. 권력 , 지위, 성공, . 제이크는 그가 원하는 것은 어느 것이나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손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다.

제이크는 침울한 미소를 띠고 나른하게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헬렌의 영상을 쫓아 버리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지금까지 어떤 것이라도, 어떤 인간일지라도 자신의 뜻대로 다루어 온 이 제이크 하워드가 자신의 결혼에서 이런 바보짓을 하다니.

그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는 , 왜 이렇게 늦어 버릴 때까지 뭔가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아채지 못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미국에서 돌아와 헬렌이 키이스 매너링과 외출한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매우 화가 났지만, 스스로 그것을 단지 분노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헌데 그것이, 지금 생각해 보니 질투에서 생겨난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감정은 그를 격하게 동요시켰다. 그런데도 그는 그 기분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었다.

그는 헬렌을 차갑고, 접근하기 어렵고, 결혼생활의 성적인 면에는 전혀 무관심한 얼음 같은 여자라고 단정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 점차 자신의 기분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헬렌을 주시하고, 그녀를 원하는 강렬한 욕구에 미칠 지경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분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 기분이 일시에 폭발한 것이 지난 주말이었다. 그 결과, 제이크는 자신을 스스로 헤어날 수 없는 곤경으로 몰고 가 버렸다. 제이크의 일련의 행위가 헬렌과 그사이를 간신히 이어 주고 있던 가느다란 인연을 끊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어제 아침, 헬렌의 비난하는 듯한 눈초리를 보고 제이크는 새삼스럽게 자신을 경멸했다.

어젯밤 헬렌이 공포에 부들부들 떨고 있던 모습을 생각하자, 제이크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헬렌은 어떤 무서운 꿈을 꾸었길래 잠에서 깨어나지도 못하고 소리를 질렀을까? 어쨌든 그녀는 자신을 지독한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헬렌이 나가지 말라고 했을 때 그것을 뿌리친 것도, 그녀의 말대로 그 곳에 있었다면 그녀를 또 끌어안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그녀와 함께 있으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제이크는 뺨을 씰룩이며 급히 자리에 서 일어섰다. 이제 이런 곳에는 더 있을 수 없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헬렌을 만나, 자신을 굽히고 무엇이 그녀와의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었는가를 설명해야지. 헬렌과 매너링의 관계를 질투하고 있다고 그녀에게 고백해야 할까? 과거는 어떻든 지금은 헬렌을 사랑한다고, 그리고 헬렌이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그녀에게 말해 버릴까?

이제까지 관계가 있었던 여자들과의 일들을 생각하자, 제이크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래, 헬렌 이외의 여자와는 자지 않았던 것은 물론, 그 외의 여자에게는 눈길조차도 주지 않았다. 이 제이크 하워드가 결코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올가미에 스스로 빠져 들다니.

제이크는 종업원들의 정중한 인사에 마음에도 없는 답례를 되풀이하면서 엘리베이터로 아래층까지 내려왔다. 수위가 차 문을 열어 주고, 존경 어린 마음으로 모자에 손을 얹었다. 무엇 하나 옛날과 변함이 없었지만, 이제는 이런 것들이 제이크의 마음을 즐겁게 하지는 못했다.

스스로 차를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온 제이크는, 현관에 발을 들여놓자, 라테머 부인이 꽃병의 꽃을 바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부인이 일어서서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시계를 본 제이크는 , 이제 열 두시가 넘었다는 것을 알았다.

", 라테머 부인, 마님은 어디에 계시지?" 제이크는 성급하게 물었다.

부인은 그가 벗은 코트를 아무렇게나 접었다.

"외출하셨습니다. 열 두시 경에"

"뭐라구!" 제이크는 화가 나서 말했다.

"어디에 간다고 말하던가요? 언제 돌아온다고?"

"슈트케이스를 가지고 나가셨습니다. 병원에 헌책을 가져간다고 말씀하시면서."

제이크는 그 말을 가로 막았다. 그 눈은 번쩍 번쩍 빛나고 있었다.

"무슨 책을 , 어느 병원으로?"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 맙소사." 제이크는 뒷머리를 만지고, 몸에 꼭 맞는 실크셔츠가 찢어질 정도로 가슴을 펴고 숨을 들이마셨다. 마음속으로부터 불안감이 용솟음치고,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점심 드시겠어요?"

"점심?" 제이크가 되받았다.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 그래요, 샌드위치라면 줘요."하고 라테머 부인의 넓적한 얼굴을 보자, 급히 덧붙였다.

"".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제이크의 코트를 걸고는 문 밖으로 사라졌다.

제이크는 그대로 우뚝 서 있다가 생각난 듯 전화기를 들었다. 수첩에서 제니퍼의 번호를 찾아 조급히 다이얼을 돌렸다. 소녀가 전화를 받고 5초 정도 지나자 제니퍼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머, 제이크 , 어쩐 일이에요? 맛있는 점심이라도 사 주시겠어요? 난 방금 일어났어요."

제이크는 제니퍼의 웃음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려 말을 이었다.

"헬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제니퍼는 어이 없어했다.

"헬렌이요? 함께 있지 않아요?"

"함께 있다면 전화 따위는 하지 않아요." 제이크는 간단하게 말했다.

"그건 그렇군요. 실례했어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군요. 어디에 갔을 까요?"

제이크는 약간 짜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요?"

"무슨 의미죠? 무슨 말이죠, 제이크? " 제니퍼는 얼빠진 듯 물었다.

"아아! " 제니퍼는 부자연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아아> 라니, 당신은 지금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지요?"

"아니, 별로 아무 것도...." 제니퍼는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잠깐."

"뭐가 잠깐이지요?" 하고는 제이크는 제니퍼가 옆에 있었다면 목 졸라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냥, 오늘 아침에 헬렌이 전화로 말한 것이 좀."

"헬렌이 오늘 아침에 전화했다고?"

", 제이크. 듣지 못했어요?"

"나는 그 때 없었소." 제이크가 불쾌하게 대답했다.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군요. 제이크. 하지만 저, 비밀이에요."

"제니퍼, 말해 주는 것이 좋을걸."

제니퍼는 웃었다.

", 제이크. 그 명령하는 말투가 멋지군요! " 그리고 한숨을 쉬고 는 정색한 어조로 되돌아갔다.

"실은, 헬렌은 당신과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어요."

"뭐라고?" 제이크는 믿을 수가 없었다.

"헤어진다는 말에 나 역시 놀랐지요."

제이크는 마음속으로부터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유를 말했소?"

하지만 제니퍼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별로 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요, 제이크. 단지 기분이 침울해져 있는 것 밖에는. 웨일즈에서의 주말이 좋지 않았나봐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이크는 주먹을 쥐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고 모호한 대답을 했다.

"그럼, 당신은 그녀가 어디에 갔는지 모르겠군요."

"전혀, 제이크. 어쩌면...."

"어쩌면 뭡니까?" 제이크는 무뚝뚝하게 물었다.

"어쩌면 키이스가 있는 곳에 있지 않을까 해서요."

"매너링에게?" 분노가 불덩어리처럼 제이크의 몸에 불타올랐다.

"단지 짐작일 뿐이에요, 제이크. 그러나 헬렌은 키이스를 좋아하잖아요?"

"그런가? 몰랐소."

제이크가 차갑게 말했다.

제니퍼는 또 의심스러운 듯이 말했다.

"제이크, 내가 한말에 신경 쓰지 말아요. 어쩌면 미장원에 갔을지도 모르지요."

라테머 부인이 샌드위치를 가지고 오는 것을 본 제이크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렇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짐작이 가는 데가 있으면 가르쳐 줘요." 제니퍼는 제이크의 주위를 끌려고 계속 말했다.

"제이크, 듣고 있어요?"

", 알았어요. 안녕, 제니퍼."

제이크는 화가 나서 더 이상 여유있게 말을 할 수 없어서 전화기를 내려놓고 라테머 부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인은 라운지로 들어가 난로 앞의 낮은 테이블 위에 쟁반을 올려놓고는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오는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부인의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을 보고 제이크는 말했다.

"정말, 어디로 간다고 말하지 않던가요?"

"." 부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점심은 밖에서 드시는 일이 많으니까요."

제이크는 눈썹을 모았다.

"그래요? 누구와?"

"대개는 센트 존 부인이지요. 때로는 저, 매너링씨와...."

"그래, 매너링이라고?" 제이크는 조소를 머금었다.

"당신은 헬렌과 매너링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지요?"

", 주인님?" 부인은 놀란 것 같았다. 제이크는 침울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그런 것을 말씀드릴 입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아요?" 제이크는 어떻게든지 부인의 입을 열게 할 작정이었다.

", 말해 봐요."

"그렇게 친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헬렌이 외박한 적이 있어요?"

"센트존 부인과 웨트셔에 가셨었지요. 그뿐이에요. 전화번호도 적어 놓고 가셨어요."

"그래요?"

제이크는 침착하게 소파에 앉았다. 두통이 심해지면서 머리가 지끈지끈 쑤셨다.

"그럼, 헬렌이 함께 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겠군."

"누구와 말입니까?"

"매너링."

라테머 부인은 몹시 놀란 것 같았다.

"매너링씨와? 왜 그런 말씀을...."

제이크는 머리를 흔들며 "알았어요" 라고 중얼거리고 는 눈두덩을 손으로 눌렀다.

"매우 피곤하군."

"그럼 오후는 쉬세요. 마님이 돌아오시면 깨워 드릴게요."

그 때 전화가 울렸다. 제이크는 라테머 부인보다 빨리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갔다.

"여보세요."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워드입니다."

"제이크? 나 루셴이야."

제이크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 루셴인가?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있나? " 루셴이 걱정스러운 듯이 되물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좋지만, 비서에게 비행기표를 예약시켰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출발은 수요일 오후 일곱 시야."

"루셴, 들어주게 . 어쩌면 나는 그 때 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

"약속을 어길 작정인가?"

"어기다니!"제이크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나 대신에 마친넬을 데리고 가도 되지 않는가?"

"하지만 자신이 공장에 가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루셴은 조금 기분이 상해서 말했다.

"그렇지 ,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그러나 좀 안 좋은 일이 생겼어."

"사업보다 중요한 일인가?"

"...." 제이크는 또 한숨을 쉬었다. "그럼, 말하지, 헬렌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어."

"뭐라고?"

"헬렌이 어디론가 가 버렸다네."

"듣고 있어. 그런데 왜? 무슨 일이 있었나?" 루셴이 놀라서 물었다.

"지금은 말할 수 없어." 제이크는 라테머 부인이 엿듣고 있지 않나 둘러보았지만, 부인은 부엌으로 간 것 같았다.

"마친넬에게 연락해서 잘 이야기해 주게."

"이틀 동안을 꼬박 그에게 빈틈 없는 지시를 하란 말인가?" 라고 루셴이 외쳤다.

"좋아, 제이크. 여행을 연기하지. 2주일 정도라면 문제 없어. 그러나 헬렌의 일은 연락해 주게. 무엇이든 우리들도 도울 수 있으면 좋지 않은가?"

"아니, 괜찮아. 고마와. 감사하네."

"너무 걱정 말게. 제이크"

제이크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서 전화를 끊고 , 잠시 전화기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라운지로 돌아왔다. 샌드위치를 보자 속이 메슥거려서, 스트레이트로 위스키를 들이켜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들어가면서 제이크는 넥타이를 풀었다. 뜨거운 샤워를 하고 나면 머리도 많이 맑아지겠지? 그는 취기가 도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 제이크는 침대의 베개 사이에 한 통의 편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얀 봉투는 앵두색의 침대 위에 있었으므로 금방 눈에 띄었다. 제이크는 손에 들고 있던 위스키를 마저 마셔 버리고는 잡아채듯 편지를 집어 봉투를 쫙 찢었다. 짧게, 요건만 간단히 씌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찾지 말아 주세요. 정해지면

연락하겠어요. 헬렌>

두 번이나 되풀이해서 일고, 제이크는 그것을 조각조각 찢어 버렸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머리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말인가? 제이크의 머릿속에서, 헬렌이 썼던 말들이 뒤섞였다. 헬렌은 예민한 성격이어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해도, 이젠 늦었을지 모르지. 헬렌에게 있어서 나는 앞의 일들은 생각지 않고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나 빼앗는 한낱 약탈자에 지나지 않겠지. 이미 그녀는 나를 믿고 있지 않을 거야.

제이크는 넥타이를 마룻바닥에 던져 버렸다. 다음엔 웃옷과 셔츠를 , 그리고 바지와 내의, 구두와 양말을 마루에 던졌다. 그리고 욕실로 가서 샤워 코크를 틀어, 머리부터 물을 뒤집어썼다. 샤워를 마치고 나자 머리가 맑아졌다. 그래서 좀 더 체계를 세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두통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 이상은 헬렌이 어디에 있는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제이크는 청색 양복으로 갈아입고 층계를 내려왔다. 키이스를 만나러 갈 예정이었다. 헬렌과 키이스와의 관계는 하여튼, 헬렌이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하여 키이스에게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무엇이든 알아보고 싶었다. 키이스는 사무실에 있었다. 비서에게 안내되어 제이크가 들어가자,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님이 계신 곳에 가야 하므로 시간은 없지만,"

하고 키이스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키이스의 말을 가로막으려는 듯이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웨일즈에서 돌아온 후에 헬렌을 만났나?"

"웨일즈? 그런 곳에 간 것조차 모르는데요."

"그래? 그렇다면 믿지." 제이크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가르쳐 주게. 자네는 어떻게 내 처를 사귀게 됐나?"

키이스는 얼굴을 붉혔다.

", 우리들이 친구인 것을 알고 있잖소. 그것뿐이오. 단지 좋은 친구일 뿐이지."

"그래?" 제이크는 깊이 담배를 빨아들였다.

"그 이상의 기분은 아닌 건가?"

"헬렌은 당신의 부인이오." 키이스는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렇지." 제이크는 차갑게, 무관심한 태도로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러고 나서 돌연 태도를 바꾸어 거칠게 키이스의 셔츠 깃을 잡아당겼다.

"내게," 키이스는 화가 나서 말했다.

"당신이 이런 짓을 해도 괜찮은 거요?"

"나는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한다." 제이크는 분명하게 말했다.

"당신이 만약 내 부인에게 손을 댔다면 갈기갈기 찢어 놓을 거다. 알았어?"

제이크가 갑자기 손을 풀었으므로 키이스는 기우뚱했다.

그는 겨우 균형을 되찾자, "폭력을 휘두르는 따위의 행위는 고소해 버리겠소!"하고 분개하여 소리쳤다.

"해봐!" 제이크는 유쾌하게 말하고 총총걸음으로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 날 제이크는 저녁때까지 일을 했다. 사무실로 되돌아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이크는 키이스의 사무실에서 보인 것과 같은 초연한 듯한 태도로 일을 처리했지만, 마음속에는 헬렌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소도 알리지 않고 나간 헬렌을 때로는 저주하면서도, 그녀가 달리 연락할 만한 친구는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니퍼 이외에는 아무도 생각나지 않았다. 헬렌은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그녀가 좋지 않은 무리들과 친하리라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저녁 식사 후, 라테머 부인이 돌아가 버리자 제이크는 혼자 남겨져, 최악의 상태에 도달했다. 그는 집안을 어정어정 걸어다니며 장식물을 들여다보거나 텔레비젼을 켰다 껐다 했다.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집안이 이렇게 빈 듯이 느껴진 적이 없었다. 제이크는 자신이 집에 없을 때 헬렌도 이렇게 느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제이크는 일부러 냉정하게 생각했다. 헬렌은 혼자 있기를 원했을 뿐이다. 나를 버려 두고 나간 것이 증거가 아닌가?

결국, 제이크는 스카치병을 방으로 가져왔다. 피곤에 지친 머리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었다.

 

헬렌은 일말의 불안을 느끼면서 커슬랜드 스퀘어의 집에 발을 들여놓았다. 한번은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제이크가 차바로 출발할 예정일도 한 주일이나 더 지났으므로 괜찮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워드 부인은 헬렌이 집을 나가는 것을 슬퍼했다. 처음에는 서로를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동안에 서로 상대방을 존경하고 좋아하게 된 것이다. 제이크의 어머니 하워드 부인이 이혼을 원치 않고 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헬렌은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 헬렌과 하워드 부인은 제이크의 어렸을 때의 이야기에 몰두하였으므로, 헬렌은 남편의 성격을 전보다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제이크의 어머니는 아들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그 반면에 하나의 확고한 생각- 제이크의 본심은 예전과 같다. 그는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책략을 경멸하고 있지만 그러는 반면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억지로 쓰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헬렌은 제이크의 아버지의 일도, 그리고 그의 양친이 그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얼마나 검소한 생활을 했었는가도 알았다. 그래서 제이크는 자신이 도움을 받았던 재산가들에게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운이 닿았다. 알맞은 때에 알맞은 곳에 있었고, 훌륭한 두뇌를 잘 이용하여 거듭 성공해 왔다. 다른 사람들처럼 실패라는 것에 부닥치지도 않았고, 인생의 지름길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성공에 도달한 것이다. 아주 이따금 하워드 부인은, 제이크와 관계가 있던 여자들의 일도 이야기했다. 상사의 부인이었던 베로니카 케튼이라는 여자가 어떻게 제이크의 마음을 끌어보려고 애썼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었다. 케튼 부부는 아직 이 마을에 살고 있고, 케튼씨는 벌써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그 부인은 아직도 젊은 남자와 차례로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제이크의 성격이나 여인에 대한 관념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제이크는, 여자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줄 때에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자기 스스로 여자를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곳에서 떠나기 전 이틀 동안 , 노부인은 개인적인 일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헬렌이 제이크의 곁을 떠나려는 결심을 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하워드 부인에게도 헬렌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굳은 마음으로 부인의 집을 떠나겠다는 말을 했다. 부인도 그녀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지는 않았다.

헬렌은 현관문을 살짝 닫았다. 짐을 꾸릴 때까지는 라테머 부인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이 싫었다. 헬렌은 우선 가명으로 작은 호텔에 묵고, 그러고 나서 아파트를 찾을 예정이었다.

크림색의 판타롱 바지를 입고 굽이 낮은 구두를 신은 헬렌은, 부드러운 카펫 위를 소리도 내지 않고 걸어 계단을 올라갔지만, 망설이다가 제이크의 방 앞에 멈췄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의 방을 보고 싶어서였다. 문을 연 헬렌은 너무 놀라서 멍청히 서 있었다. 방안은 엉망이었다. 마루 한쪽에 벗어 놓은 옷이 흐트러져 있고, 의자의 등받이나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것도 있었다. 벌써 점심때도 가까운데 커튼은 쳐진 채, 방에는 후덥지근한 담배 연기와 코를 막히게 하는 위스키 냄새가 자욱했다. 헬렌은 머리를 흔들면서 방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때 가시 돋친 소리가 들렸다.

"나가. 말한 대로 나가 버려!"

헬렌은 공포에 질렸지만, 목에 한 손을 대고 더욱 안으로 들어갔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몹시 구겨진 시트가 마루에 흘러내린 것뿐이라고 생각했던 침대에 누군가가 있었다. 제이크가 몹시 구겨진 시트 위에 누워 있었다. 며칠이나 깎지 않은 수염이 턱을 덮고 있었고, 문이 열러 빛이 들어와서인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다가 눈을 떴다.

"나는 ...."그는 갑자기 말을 하려다가 헬렌을 발견하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쩐 일이지?" 제이크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중얼거리듯이 들렸다.

".... 환상이 보이는구나."

헬렌은 잠시 주저하다가 다가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이 제이크를 훑어보고는 "환상이 아니에요." 하고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격한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짓을 하고 있었나요?"

침대 옆에 있는 스카치의 빈 병들과 테이블 위에 나뒹굴고 있는 몇 개의 컵들이 헬렌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녀는 제이크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녀의 제이크를 바라보는 눈에는 동정의 빛이 서려 있었다. 제이크는 눈을 뜨더니, 한숨을 쉬곤 몸을 움직여서 침대 시트를 잡아끌었다. 그의 상반신은 나체였고, 하반신은 면으로 된 팬티만이 허리에 걸려 있었다.

"나가, 헬렌." 그는 격하게 말했다.

"누구든 만나고 싶지 않아. 나가. 이미 여기는 당신 집이 아니야."

헬렌은 잠시 망설이다가. 웃옷을 벗어 의자에 걸치고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젖혔다. 신선한 11월의 햇살이 방안을 환히 비추었다. 헬렌이 창을 열자, 차가운 북풍이 탁한 방안 공기를 쓸어 가 버렸다. 그녀는 베개 밑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제이크를 흔들었다.

"나가라고 말했잖아. 동정은 필요 없어." 그는 화가 난 듯이 말했다.

"동정 따위는 하지 않아요." 헬렌도 입을 열었다.

"뜻하지 않은 여행이었어요. 제이크"

제이크는 몸을 뒤로 젖히고는 눈을 손으로 가렸다.

"커튼을 닫아. 나가!"

"싫어요." 헬렌은 그를 무시하고 마루 위의 옷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층계 아래로 내던지면서, 라테머 부인에게 세탁하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침대로 다가가 그의 허리에 손을 대고, 그를 굽어보면서 말했다.

"일어나세요! 침대를 정리하게요"

", 그래!" 제이크는 발버둥 치며 침대 위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피로와 긴장 때문인지 말이 아니었다.

"헬렌, 하나만 대답해 줘,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거지?"

헬렌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 짐을 꾸리러 왔어요." 하고 정직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벌써 차바에 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어디에 가 있었어?" 제이크는 무서운 얼굴로 헬렌을 노려보았다.

"실은 요크셔에 가 있었어요. 더 자세히 말하자면 셀비이에요. 이제 됐으면 일어나요."

제이크는 어안이 벙벙한 듯이 헬렌을 바라보았다.

"설마 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함께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헬렌은 웃옷을 들고 문 쪽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이야기를 더 하고 싶으면 아래로 내려와요."

"헬렌!" 그의 목소리는 고뇌에 가득 찬 외침이었다.

",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겠지?"

헬렌은 문 앞에 발을 멈추었다. 호소하는 듯한 제이크의 눈을 보고는 스스로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하여튼, 당신이 옷을 갈아입고 나서." 생각 밖으로 부드럽게 말하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라운지에 서서 헬렌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뺨을 누르고 있었다. 가슴 속이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가 없었다. 그녀가 안절부절 못하며 실내를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라테머 부인이었다. "마님!" 부인은 구슬프게 그녀를 불렀다.

"마님, 돌아오시다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헬렌은 생긋 웃었다.

"그래요?"

", 물론입니다." 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헬렌을 바라보았다.

"주인님은 걱정이 되셔서 정신이 돌기 일보 직전입니다." 하면서 턱 밑에 손을 대었다.

"톰과 저는 곁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방에 며칠 동안이나 틀어박히셔서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고, 곯아떨어질 때까지 계속 술만 드시고...., , 마님, 너무하셨어요. 어머님께 알리고 싶었지만, 주인님께서 그런 짓을 하면 해고라고 말씀하셔서......"

헬렌은 부인에게로 다가가서, "너무 했나요?" 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라테머 부인은 울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주인님이 저렇게 걱정하시다가 낙담하셔서, 저런 일로 수명을 단축시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알았어요." 헬렌은 부인의 말에 감동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젠 됐어요. 우리에게 차 좀 내오세요."

", 우리라니요? 마님과 그리고..."

"나요." 하고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제이크가 문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샤워를 한 듯 머리에 물방울이 빛났고, 수염도 말끔히 깎여 있었고, 머리는 빗질이 되어 있었다. 옷은 갈아입지 않고, 정강이 까지 내려오는 타월지로 된 목욕가운을 입고는 같은 천의 벨트를 매고 있었다.

"주인님" 라테머 부인의 목소리는 떨렸다.

"홍차를 가져와요" 제이크가 조용히 말하자 부인은 토끼같이 그들의 앞을 빠져나갔다. 헬렌은 갑자기 초조해졌다. 아까는 무슨 말이든 분명히 할 예정이었는데, 막상 그가 아래로 내려오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제이크는 방으로 들어와 물끄러미 헬렌을 바라보고는 , 테이블 위의 상자에서 담배를 꺼내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몸을 꼿꼿이 새우더니 헬렌을 향해 낮게 명령하듯이 말했다.

"왜 어디에 가 있는지를 알려 주지 않았지?"

헬렌은 머뭇거렸다.

"저는 몸을 숨기려고 했어요. 당신이 차바로 떠날 때까지 몸을 숨길 예정이었는데...."

"?" 그의 목소리는 엄하게 얼굴 근육을 씰룩이면서 이어졌다.

"내가 두려웠던 건가?"

헬렌은 고개를 떨구고는, " ....., 얼마나 마셔 댄 거예요?" 하고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부드럽게 말했다. 제이크는 아무렇게나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의 눈은 차가왔다.

"상관없는 일이잖아?"

"무슨 의미죠?"

"지금의 이 상황이야." 제이크는 물끄러미 불 붙인 담배를 바라보았다.

"샤워를 하면서 생각했어. 이층에서 당신을 보고 놀랐어. 그러나 지금은 왜 당신이 돌아왔는지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해. , 당신은 짐을 가지러 온 거야. 그렇다면 내일은 걱정하지 마, 이젠 괜찮으니까."

"괜찮지 않아요." 헬렌은 격하게 말했다.

"알고 있어요. 라테머 부인이...."

"부인이 뭘? 그 사람은 노인이야."

"그 사람에 대해서는 잘 알아요." 헬렌은 몸서리치면서 말했다. 조금 전의 설레이던 가슴은 찌르는 듯한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그래,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 봐." 제이크는 아무렇게나 담뱃재를 떨었다.

"제이크!" 헬렌은 커다란 아픔과 분노를 느끼며 외쳤다.

"그런 말은 그만해요."

"?" 제이크는 헬렌을 노려보았다."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거지? 이미 모든 것을 예상하고 여기에 몰래 들어왔잖아."

"그렇지 않아요"

"그럼, 왜 우리 어머니에게 갔었지?" 제이크는 입을 씰룩거렸다.

"좋아, 알았어. 당신은 거기라면 내게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설마 자기가 태어난 집에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할 테니까. 당신은 그것을 이용한 거야. 어머니가 나가라고 하시던가?"

헬렌은 한숨을 쉬었다.

"어머님은 아주 친절하셨어요."

"그렇겠지" 제이크는 불쾌한 듯이 담배를 씹었다.

"그리고는 당신은 무슨 이야기를 했지? 도망쳐 온 이유를 어떻게 말한 거야?"

"이유는 말하지 않았어요. 단지 이혼하고 싶다고만 말했어요."

"그런 말을 했다구?" 제이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럼 나는 뭐야? 내겐 아무런 말도 없이 . 당신은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모든 것을 결정한 거야?"

그의 이야기를 듣자, 헬렌은 자신이 얼마나 차갑고 계산적이었나를 생각했다. 헬렌은 아무 말 없이 철썩철썩 밀려오는 분노의 물결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제이크는 담배를 짓이겨서 끄고는 술을 놓아둔 장식장으로 걸어갔다. 헬렌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안돼요." 헬렌은 다급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소원이에요, 들어요"

제이크는 하얀 목욕 가운을 붙잡고 있는 헬렌의 가냘픈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충분히 들었어." 그는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우선 당신은, 제니퍼에게 나와 헤어지겠다고 말했지. 그리고 같은 말을 우리 어머니에게도 했겠지. 이젠 충분해."

"하지만, 그것이 가장 좋으리라고 생각해서...." 헬렌은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이크의 팔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 그는 거칠게 물었다.

"나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인가?"

"아니오, 내가 한 일이," 헬렌이 고통스럽게 말했다.

제이크는 곤혹해 하는 헬렌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한 번 더 말해봐!" 하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을 말이죠?" 헬렌은 힘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 행동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거야?"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매너링과 무슨 관계가 있었던 거야?"

헬렌은 어이가 없어서, "그런 일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 하고 외쳤다.

제이크는 그녀에게 다가오며 손을 휘저었다.

"그럼 대체 무슨 이야기야?"

헬렌은 입술이 바싹 말라서 혀로 입술을 축였다.

", 그날 밤....." 그녀는 슬픈 듯이 말했다.

"당신이 내 방에 와서,"

제이크는 얼굴을 숙였다.

"이 집에서의 일인가?"

"그래요." 헬렌은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 제이크 당신은 알고 있을 텐데요."

제이크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고 있어. 나는 당신에게 굴욕감을 느끼게 했지."

"그 말이 맞아요." 헬렌은 어깨를 움츠리고 중얼거렸다.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서 뺨을 붉혔다. 제이크는 초조한 몸놀림으로 머리에 손을 가져가고 는 거칠게 말했다.

"그러나 헬렌, 나는 남자야, 성인군자가 아니야. 당신은 내게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있는 거야."

헬렌은 고통으로 불타는 눈길로 제이크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건...."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그럼, 이젠 이것으로 끝이에요."

제이크는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인가? 헬렌, 이젠 네가 경멸해도 할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야. 나는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하기는 처음이야."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요?" 그러고는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제이크는 오랫동안 헬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갑자기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헬렌을 거칠게 끌어당겨, 아플 정도로 꽉 부둥켜안고는 헬렌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갖다 댔다. 며칠씩이나 헬렌이 없었기 때문에 쌓였던 울적함이 폭발하듯이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헬렌도 진심으로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제이크의 머리를 부둥켜안고, 그에 따라서 솟구치는 환희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리고 제이크의 허리에 팔을 감고, 자신의 피가 끓는 정열적인 여자라는 것을 증명이나 하려는 듯 꼭 달라붙었다. 겨우 제이크가 머리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고통스러운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당신도 당신이 내게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그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보다 더한 짓이라도 하고 싶지만, 소원이야. 이젠 제발 나가 줘."

헬렌은 제이크를 불쌍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팔은 아직 제이크의 허리에 감겨져 히프를 부드럽게 애무하고 있었다.

"그렇게 간단하게 나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어요" 제이크의 입술 끝에 부드럽게 키스하면서 헬렌이 속삭였다.

제이크는 헬렌을 바라보았다.

"가고 싶지 않은 거야, 헬렌? 놀리지마"

"놀리고 있지 않아요. 당신을 사랑해요." 헬렌은 제이크의 귀밑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말했다.

"모두 오해였어요. 나는 당신에게 거부당한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날 밤 당신 방에서? " 제이크는 견딜 수 없어서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헬렌, 나는 그날 밤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했는지 몰라. 당신이 나쁜 꿈을 꾼 것이 내 탓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주말에 당신을 그냥 자도록 내버려 둔 나를 저주했어. 그러나 다음날 아침, 당신은 냉랭했었어." 제이크는 약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럴 거야. 내 탓이야. 나는 다음날 아침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두 번이나 말하려고 했어. 그런데 당신은 안 된다고 계속 말했지. 나는 미칠 것 같았어."

제이크는 헬렌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헬렌, 이 며칠간은 지옥이었어.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어."

헬렌은 제이크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늘 당신 모습을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아까 당신이 아래로 내려오라는 말을 했을 때는 죽고 싶을 정도였어."

제이크는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은 내 말이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을 거야. 나는 나 자신의 기분을 숨기고 싶었어. 동정 받는다는 것이 싫어서야. 당신이 처음에 내방에 들어왔을 때는 틀림없는 환상이라고 생각했어."

"..... 제이크." 제이크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이 헬렌을 만족하게 했다.

"우리들은 어쩌면 바보였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제이크는 헬렌과 떨어져서 가운의 끈을 다시 묶었다.

", 옷을 바꾸어 입고 둘이서 가장 좋은 고급 레스토랑으로 식사하러 가지."

헬렌은 고개를 흔들며 부드럽게 말했다.

"싫어요.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는 것은. 당신과 단둘이 있고 싶어요. 여기서 식사하고 싶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 소원이에요." 헬렌은 끄덕이다가 갑자기 얼굴을 들고 물었다.

"차바 여행은?"

제이크는 헬렌을 안았다.

"중지야. 그렇지 않으면 함께 가든가. 중앙아프리카로 신혼여행은 어때?" 그의 입술이 헬렌의 목을 애무했다.

헬렌은 몸을 떨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미 신혼여행은 끝났어요."

"아니, 아직." 헬렌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제이크가 말했다.

"이제부터야, 나의 사랑. 이제부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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