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가랑잎 내리는
가물거리는 그 이름
가을
가을비
가을 편지
가을 하늘
강아지
개구리의 명상
개울
거리를 두고
겨울
겨울 편지
결혼식장
경춘 하이웨이
경칩
곁에 없어도
계절
고데치아
고독과 그리움
고독하다는 것은
고독한 마음의 자리처럼
고승과 시인
고요한 귀향
고요한 사랑
고요한 아침
고향의 봄
곤충들의 신음소리
공적한 집
공존의 이유
구라파의 소
구름
구름 기둥 불기둥
국도 45번
굴암사(龍德寺)
굿바이
귀가 커서 내가 슬픈가 보다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럼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리움은
그림에 붙인 단상
그 자리에 서 계시옵니다
그저 그럴듯한 상상처럼
그저 그립다, 말 한마디
기다림
기다림은 아련히
기우(杞憂)와 희망
긴 편지
긴 회고
길
길은
깊은 밤에
깊은 밤 잠자리에서
꽃과 고양이
꽃, 베고니아
꽃비
꽃을 버릴 때처럼
꽃 앞에서 – 외로운 사람에게
꿈
꿈의 귀향
나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에게
나는 긴 인생을
나는 어머님께
나는 지금까지 – 나의 사원(寺院)
나도 그랬듯이
나 돌아간 흔적
나루터 근처에서
나무
나무에 올라갈수록
나무의 철학
나에게 잃어버릴 것을
나에게 있어서
나의 노래
나의 마지막 꿈은
나의 생애
나의 수학
나의 시는
나의 유산(遺産)
나의 육체
나의 일생은
나의 존재
나의 죄와 벌
나일강
낙엽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을 밟으며
낙타의 울음소리
난
난롯가에서
난실리, 내 고향
난주(蘭州)
난주(蘭州)를 떠나면서
남남
낮과 밤
낮달
낮은 목소리로
낯설은 전화
내가 시를 쓰는 건
내 마음에 사는 너
내 마음은
내 몸의 열매들
내일
너는 내 생각 속에서 산다
너와 나는
너의 마음에
너의 사랑은
넌
널 위해서 시가 쓰여질 때
노래를 불러도 소리를 잃은 피리
노아
노을
눈 내리는 밤엔
눈물
눈물 한 방울이
눈에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
눈이 하늘에서
늘, 혹은 때때로
다도해
다시 굿샤로호((屈斜路湖)를 지나며
단 하나의 소원
달
달팽이의 사랑
당나귀
당신은
당신의 사랑이 그러하듯
당신이 그렇게 생각을 하면
대서양
도화사(道化師)
돈
돈황 – 막고굴에서
돈황의 해바라기
돌부처
동방살롱 – 명동 소묘
되돌아온 머플러
두절된 전화
들꽃처럼
떠남 – 낙엽을 밟으며
라벤더
라일락
럭비를 하던 꿈
레바논의 백향목
마라케시의 여인
마음의 터전이 무너지듯이
마지막 노자
만고일월(萬古日月)
만남과 이별
말과 글
맑은 고독
망매한 세상에서
매미
먼 곳에서
먼 곳에서 온 편지
먼 그 약속
먼 날, 어느 한 날
먼 어제의 소리 – 연길에서
먼 여행
먼 윤회의 길을 가며
멸망하고 있습니다
모로코의 소녀
목련(木蓮)
몽마르뜨르 성당
묘지공원
무더운 여름밤
무제
묵은 사진첩을
물
물은 흘러감에 다시 못 온다 해도
미세스와 토오스트
미지의 영혼으로 – 교향악 예찬
민들레꽃
바다
바다는
바다 모래밭에 앉아서
바다에 비가 내리며
바다에서의 엽서
밤
밤에 내리는 봄비
밤의 이야기
방황과 구원(救援)
배신
백담사
벗
벽난로에 장작을 지피며
별
벗
보석
봄비
봄은 솔개의 눈알 속에서
봄이 오락가락하는 계절
봄이여, 사월이여
부끄러움
부다페스트 옛 궁전
부처님
비
비는 내리는데
비 내리는 나리다 공항에서
비 내리는 북경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빈 날, 빈 세월
빛
뻐꾸기의 독백
사람도 자연이어서
사람은 누구나
사람이 늙으면
사람이 한번 작별을 하면
사랑
사랑은
사랑의 계절
사랑의 노숙(露宿)
사랑하면
사랑, 혹은 그리움
사막
사월이 머물 무렵
사이공
산과 바다
산다는 거
산사의 가을
산책
살구나무
샘터
생명은 하나의 소리
생존
서산나귀
서산나귀의 독백(獨白)
서시
서울로 가는 도야지들
서울 한구석
석가의 날
섬
세월
세월은
세월의 벌판에서
세월의 숲속을 벗어나며
소년에게
소라
소라의 초상화
소리 없이 밤이 내리면
소망
소망이여 서서히
속도에 떠서
솔개
송이
숙명
술이여
술 취한 영혼
숨어서 우는 노래
스카이라운지
슬픈 바람을 주는 여인
시간
시간 배당
시간은 마냥 그 자리
시간이 몰린 길목에서
시는 – 캄캄한 인도 하늘을 날으며
시는 영혼의 자연이어서
시는 영혼의 화석
시를 쓰면
시의 뿌리
시인의 일생
신(神)과 사람은
신(神)의 존재를
아름다운 여인
아, 나의 고독은
아리산(阿里山)의 소저(小姐)
아직도
아직은 하늘 아래서
아파트의 추석날
아파트의 침묵
안개
안개로 가는 길
안녕하신지요
약사여래
약속 시간을 몰라
약한 것들의 힘
어느 나그네의 예언
어느 노인의 모노로구
어느 노인의 회고
어느 대화
어느 밤의 기도
어느 밤중
어느 부부
어느 생애
어느 생존
어느 소원
어느 여행자의 독백
어느 일요일
어느 존재
어느 천성
어느 하이웨이에서
어느 해결
어머니 홀로
어머님
어머님, 당신은 지금
어머님에게 드리는 선물
어제 내가 나에게 하는 말
언양 미나리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언젠가 그 눈물
업보
여행 보고
여행을 앞두고
역(驛)
연회(宴會)가 끝나면
열매
영원(옛 엽서) - 국도 1081에서
오산 인터체인지
오후 일곱 시
오히려 비 내리는 밤이면
옥상으로 오므려
왕부정가(王府井街)
외로운 영혼의 섬이
요즘 나의 일과는
우주의 하이웨이
운명을
유리의 성채 – 사진을 정리하며
유서
은어
은혜
을숙도(乙淑島)
의자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미지 단상
이별
이별이
이부스키
이승에 단 램프
이승의 짐을 덜어내며
이제 작은 열매일지라도
인간
인간관계
인간의 무늬
인생
인생은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인생은 혼자라는 말 밖엔
인생이 그러하듯이
인생합승(人生合乘)
인연
일몰
잃은 시간 속에서
임해 교실
입원 일기
입춘
잎 떨어진 나무와 같이
자술서
자유
작은 들꽃
작은 보따리
잠 오지 않는 밤
장미가 피는 해안
장미와 도적
장마의 계절
재방서안(再訪西安)
전쟁
절길로 접어들며
조각구름의 집
조국
조국으로 가는 길
조롱의 새
조선족 어느 여인
조춘(早春)
존재
존재, 그 순간
종달새
종로 네거리
종말 부근에서
주점
죽음으로
죽음은 마지막 예술
죽음처럼 허탈이
중국(中國) 소수민족(小數民族)의 목소리
지각
지구 위에서의 작은 여행
지금 나는 다시 소라로
지금 내 마음은(병상에서)
지루함
진눈깨비
진달래
차창
착각
참회
천상과 지상
천적
천지(天池)
천지(天池)로 가는 길
철학 교수 강(姜)박사의 죽음
첫닭 소리
첫사랑
청춘에 기를 세워라
초상
초상 국화 옆에서
추억
추억을 추억하며
축복
출발
칼칼한 동반
코르시카 산정
타향에서 핀 작은 들꽃
팔려 가는 소
편운재 기(片雲齋 記)
편지
편편화심(片片花心)
평화
풍화작용
하나의 꿈인 듯이
하늘은 항상 하나
하루만의 위안
하루하루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학(鶴)
한 노인이
한 떨기 요란스러운
한 송이 꽃
한식 이후
한 인간의 생애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해
해마다 봄이 되면
해변
해인사(海印寺)
햇까치
행복
행복은
행복한 보석
헛되고 헛된 것
헤어져야 할 날이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헤어진다는 것은
혜화동 로터리
혜화동 로터리 분수공원
혜화동 뻐꾸기
혜화동 우체국 아가씨
혜화동 우체국 우체부
호수
호올로
혼자라는 거
황혼
황혼의 노래
황홀한 모순
황홀한 순간
회상
후조
흐르는 것은
흙을 사는 사람들
3월
4월
9월
9월의 시
가난은
조병화
가난은 언제나 슬픈 거
어디서나 애절한 거
누구에게나 가련한 거
그것은 불쌍하다는 말을 넘어서
그대로 마음에 젖어드는 까닭 없는 눈물
찌릿 찌릿한 거
쩌릿 쩌릿한 거
모로코, 마라케시 근교
모래 바람 부는 시골 장터에서
야윈 나귀를 팔고 있던
아랍의 여인, 그 까만
굶주린 깊은 눈동자를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그건 혁명 같은 거
사랑 같은 걸 넘은
혈육 같은 찐득 찐득한 거
그것을 더 넘은
비극의 미학 같은
사막의 사랑 같은
나의 눈물이 아니었던가
아, 그와도 같이
가난은 언제나 슬픈 거
어디서나 애절한 거
누구에게나 가련한 거
가랑잎 내리는
조병화
가랑잎 내리는
오후의 잡초원 같은 내 가슴에
실망하기 쉬운 엷은 마음을 내리고
흐린 날이 머물렀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이미 내 것이 아니올시다.
깊은 산중
검은 열매와 같이 남모르게 익어 가는
마음과 마음을 그대로 당신에게 안기기 위하여
우수수 가랑잎 내리는 내 우울이
가슴에 소리 없이 고여들어야 했습니다.
당신은 깊은 내 어둠의 거울
밤이 내리면
나 호올로 이 지구 먼 한 자리
남아 있으면
별이 흐리다 개이고
별처럼
나와 내가 님에 비춰듭니다.
님이여.
우모(羽毛)와 같은 님의 손으로
내 오랜 녹슬은 마음의 유리창을 열어 주십시오.
열린 유리창 안에
나와 가까이 오시어
나에 안겨
님의 비밀을 술술술 이야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랑을 가난한 나에게 담아 주십시오.
찬 겨울 눈 깊은 한밤중
온 인생이 소리없이 사라지면
검은 장갑을 벗고
아름다울수록 허전해지는 마음의 거울을
이렇게 빈 가슴에 비춰 보는 것을
님은 알으십니까.
행복은 내 것이 아니올시다.
충돌과 인내의 긴 인생을
세월에
수레를 몰고
청춘이
사랑이
사업이
모조리 지나간 빈 자국을
이렇게 둘둘둘 굴러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님이여 보십시오
검은 밤
훨훨 타오르는 마지막 이 가슴의 불꽃
황홀해지는 내 거울에 비춰
이글이글 이글거리는 내 육체를 보십시오.
인생이 지나가면 회상이 남는다.
님이여
가랑잎 내리는 오후의 잡초원 같은
내 가슴에
영 흐리지 않을 마음의 겨울을 비춰 주십시오.
실망하기 쉬운 내 가슴에
영 타오르는 마음이 불꽃을 비춰 주십시오.
가물거리는 그 이름
조병화
만남이 뜸하면
그 얼굴도 멀어지고
그 이름도 뜸해진다
둥근 가을달처럼 떠오르는
그 얼굴
가물거리는 그 이름
그립던 마음도
사무치던 마음도
까칠까칠, 저무는 바람아
저물수록 온 몸에 가득히
떠오르는 둥근 그 얼굴
아, 지금은.
가을
조병화
1
어려운 학업을 마친 소년처럼
가을이 의젓하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푸른 모자를 높게 쓰고
맑은 눈을 하고 청초한 얼굴로
인사를 하러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더웠었지요"하며
먼 곳을 돌아 돌아
어려운 학업을 마친 소년처럼
가을이 의젓하게 높은 구름의 고개를 넘어오고 있습니다
2
전투는 끝났다.
이제 스스로 물러날 뿐이다
긴 그 어리석은 싸움에서
서서히, 서서히, 돌아서는
이 허허로움
아, 얼마나 세상사 인간 관계처럼
부끄러운 나날이었던가
실로 살려고 기를 쓰는 것들을 보는 것처럼
애절한 일이 또 있으랴
가을이 접어들며 훤히 열리는
외길, 이 혼자
이제 전투는 끝났다
돌아갈 뿐이다.
3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 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 거
가을은 구름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가을비
조병화
무슨 전조처럼 온종일
가을비가 구슬프게 주룩주룩 내린다
나뭇잎이 곱게 물들다 시름없이
떨어져서 축축히 무심코
여기 저기 사람들에게 밟힌다
순식간에 형편 없이 찢어져서
꼴사납게 거리에 흩어진다
될대로 되어라, 하는 듯이
그렇게도 나뭇가지 끝에서
가을을 색깔지어 가던 잎새들도
땅에 떨어지면, 그뿐
흔들이 버리고 간 휴지조각 같다
아, 인간도 그러하려니와
언젠가는 나의 혼도 그렇게 가을비 속에
나를 버리고 어디론지 훌쩍 떠나 버리겠지,
하는 생각에 나를 보니
나도 어느새, 가을비를 시름없이
촉촉히 맞고 있었다.
가을 편지
조병화
돌아오고들 있습니다
훨훨 손털고
빈손으로 돌아오고들 있습니다
여기저기로
뿔뿔이
겨울에 떠났던 내가, 내게로
다시
돌아오고들 있습니다
구름 밖에서
바람 보는 곳에서
수초 가에서
먼 봉우리 고갯길에서
빈 바닷가에서
도달치 못한 소망의 종점에서
상한 가슴으로
소리 없는 생각으로 내가, 다시
텅 빈 내게로
돌아오고들 있습니다
떠날 때 품었던 거
풀지 못하고
떠날 때 찾으려던 거
찾지 못하고
떠날 때 그리던 거
채우지 못하고
다시 이 홀로
가을 이 귀향(歸鄕)
깔린 햇살
묵묵히
여기저기서
내가 내게로 다시 돌아오고들
있습니다
이제 버려야지요
피곤합니다
이 가을엔 버리며, 버리며
돌아온 나와 내가
다시 떠날 겨울 채비
그 가벼운 여장을 추려야지요
그 혼자를.
가을 하늘
조병화
아침 집을 나올 때마다 마당에서
하늘을 향하여 깊은 심호흡을 한다
하늘을 향하여 깊은 심호흡을 하면
거기 올려다뵈는 무량한 하늘
가을이면 그 무량한 하늘이 끝없이 깊이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사람은 죽어서 저곳으로 간다고 했던가
홀가분할수록 저곳으로 간다고 했던가
가벼울수록 저곳으로 간다고 했던가
아무런 미련이 없는 사람일수록 그곳으로 간다고 했던가
그렇다고 한들 어떻게 저곳까지 가리
혼자 중얼거리며 대문을 따고 나오면
거기 우글거리는 사람의 냄새
언제 나는 이 냄새를 벗어날 수 있으리
아침 집을 나올 때마다
바라다보는 저 저 하늘
사람은 죽으면 그곳으로 간다고 했던가
사람 냄새 없을수록.
강아지
조병화
지금 내가 임시로 기거하고 있는
명륜동 1가, 나산빌라 현관에
언제부터인지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매어져 있다.
보기가 측은해서
저녁 집에 돌아올 때마다
먹을 것을 사다 주었더니
내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꼬리를 흔들면서
나를 보며 이리저리 뛰며 걩걩 짖는다
아침에 집을 나갈 때도
나의 발자국 소리를 분간해서
꼬리 저으며 이리저리 뛰며 걩걩 짖는다
밤새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을까,
집 밖에서 저 작은 것이,
하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 측은스럽다
먹을 것을 몇 번 사다 주었다고,
자기를 알아본다고,
저렇게 나의 냄새를 알아보다니,
아, 저 미물이, 하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돈다.
하기야 이 세상 눈물 아닌 게 어디 있으랴
거 몇 번 먹을 것을 주었다고,
꼬리 흔들며 걩걩.
개구리의 명상
조병화
1
나의 사투리를 아는 사람은
다만 나의 고향 사람들뿐이옵니다
아, 그와도 같이
나의 시를 아는 사람은, 오로지
나의 눈물의 고향을 아는 사람들뿐이옵니다.
2
유월 초여름 밤 천지를
개구리들은 세상모르고 웁니다
하늘이 주신 하늘의 모고리로
한낱 거리낌 없이 청명하게
온 천지를 진동시킵니다
그 소리에 취해 어느덧 나도
나도 모르게 소리 나지 않는
고열로 울고 있었습니다
오, 천진무구한 약한 자들의
티 없는 목숨들이여
3
네가 그렇게 울어대면
난들 어떻게 하라고
네가 그렇게 울어대면
난들 어떻게 하라고
아, 네가 그렇게 흐느껴 울어대면
난들 어떻게 하라고
네게 그렇게 울어대면
난들 어떻게 하라고
난들 어떻게 하라고.
4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쏟아지는 소리
물 밀리는 소리
벽 무너지는 소리
퀄, 퀄, 흙탕물 몰아치는 소리
사방이 물, 물, 물
번쩍 하늘이 갈라지는 빛, 치자
꽝,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비,
그제도 비,
어제도 비,
오늘도 비,
아, 내 마음도 비.
16
사랑하며 배우며 가르치며
비바람 심한 이 거센 세월을, 서로
잠시 비켜서 쉬어가기 위하여
외로움, 즐거움, 그리움, 서로 주고 받으며
살아가옵니다.
살아가면서 사랑이 서로를 갖고 싶을 정도로
사무치게 짙어지면, 서로 괴로워지니
서로 갖고 싶은 마음 애달프게 쓸쓸해지면
마음 아파도 그저 빙그레 웃으시오
사랑은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서로 살아가면서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랑이 외로워지면 질투하는 마음으로 어두워지고
질투하는 마음이 고이거든
마음 공허하더라도 숨어서 혼자 울으시오
사랑은 질투가 아니기 때문에
아, 살아가면서 서로가 한없이 사랑이 뜨거워지면
서로 소유하고 싶은 마음, 질투하는 마음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잠시도 견디기 어려운 마음,
어찌 생기지 아니하리오만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고
한없이 곱고 뜨거운 그리움이어서
그리운 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그저 그만큼 그리움으로 숨어서 우는 일이옵니다.
25
죽음은 누구에게나
차례가 되면은 오는 것,
그리 서둘 것은 없지 않은가
미리미리 서둘면서, 이 세상을
그저 빈틈없이 살아온 나의 생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음까지를 서둘 것은 없잖는가
서둘지 않아도 죽음은, 때가 되면
차례차례 순서대로 오는 것,
서둘러서 되는 일은 아닌 게 아닌가
미리 겁은 먹어서, 스스로
스스로의 마지막까지를 더 큰 불행이 오기 전에
정리하고 떠나려는 그 심사, 그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견디는 것이다
어머님이 나에게 주신 마지막 고통까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고통하면서
“어머님, 이제 저의 고통 다 했는지요”
살면서 여쭈어보면서,
27
6월은 장미
타오르는 생명
작열하는 태양
냉랭한 푸른 하늘
투명한 영원
아, 나의 6월은 보이지 않는 희열
목숨으로 타옵니다.
들에서, 울타리에서, 너의 가슴에서
너울거리는 사랑의 향기
잡히지 않는 그리움
황홀한 모순으로 타옵니다.
오, 장미여
6월의 얼굴이여.
35
문을 닫고 사는 자네가
사람이 만드는 외로움에서
어찌 외롭지 않으리
세상은 사람과 사람, 서로 오가면서
싫으나, 좋으나, 서로 어울려서
살아가게 마련인 것을
자네같이 마음의 문을 꼭 닫고
한세상을 혼자서 살아가니
어찌 외롭지 않으련가
사람은 각자 살아가게 마련
이렇게 사는 것도 한세상
저렇게 사는 것도 한세상
어찌 자네만 같은 인생에 바라리
꽃이 핀다 한들 자네 뜻인가
꽃이 진다 한들 내 뜻인가
세월 훨훨 가는 세상
문을 닫아도
문을 열어도.
39
하얀 원고용지에 발자국을 남기며
나의 어린 시가 하얀 모래사장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바닷물이 밀려들 때마다 나의 시의 어린 발자국은
바닷물에 지워져 가며,지워져 가다 남은
반쯤 남은 발자국엔 작은 게가,밀리다
자리를 잡고 놀고 있습니다
게가 자리 잡고 놀고 있는 반쯤 남음 발자국 물에
푸른 하늘이 가득 고이고.
지나가다 머문 시간이 목욕을 하고 있습니다
아, 나의 편지를 실은 원양선은, 겨우
수평선을 멀리 지나가면서.
53
담쟁이덩굴이 여름 내내 부지런히
흰 벽을 타고 기어오르다가
이젠 기운이 지쳐서
그 걸음을 멈추어 버렸습니다
내 몸속을 흐르는 혈관에도
혈액이 줄어든 듯이 혈맥도 고요해지고
대기에는 햇빛이 줄어들어
천지간 만물이 마냥 생기를 잃고
고요하기만 합니다
시든 햇빛을 타고 잠자리 한 마리가
어디선지 날아왔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또 어디로인지
소리 없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저 내 주위는 텅 비어 가기만 합니다.
56
사는 날까지 그저
살아야 하는 겁니다
떠나는 것을 미리 서둘러서 생각하지도 말고
차례차례 다가오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근심스러워하지도 말고
조바심을 치지도 말고
무서워하지도 말고
어머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대로
사는 날까지 그저 공손히
차례차례 보내며
차례차례 맞으며
그저 사는 날까지 살아야 하는 겁니다.
개울
조병화
개울에 손을 담그며
지나는 마음으로 띄우는 말이
온 세상 인간의 개울
사랑아 마르지 말라
사랑아 머물지 말라
사랑아 상하지 말라
사랑아 어둡지 말라
사랑아 처지지 말라
사랑아 돌아서지 말라
사랑아 조바심치지 말라
사랑아 노쇠하지 말라
빛으로 어둠으로 빛으로
오로지 내일로 흐르는 시내
강이 되고
바다가 되려니
사랑아
저 하늘에서까지
거리(距離)를 두고
조병화
밤이 쏟아져 오는 내 유리창
건너편
고층 빌딩 한구석에
등불이 호올로 밝다
등불이 있는 곳엔 사람이 있을 텐데
사람이 있는 곳에
사람은 호올로 떨어져 있어야 하나 보다
등불 아래 가는 손이
가슴을 지우고 지우고
길어 갈수록 시원치 않은 긴 편지를 쓰고 있나 보다
창문이 점점 밝아 간다
기어코 다 태 버린 재를 밟고
창문에 기대어
유리창을 쳐다보고 있나 보다
나는 저 창 안에 등불이 꺼지기 전에
어두운 층계를 내려가자
사람이 있는 곳에
사랑은 호올로 떨어져 있어야 하나 보다
겨울
조병화
침묵이다
침묵으로 침묵으로 이어지는 세월,
세월 위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지나가면서
적막한 노래를 부른다
듣는 사람도 없는 세월 위에
노래만 남아 쌓인다
남아 쌓인 노래 위에 눈이 내린다
내린 눈은, 기쁨과 슬픔,
인간이 살다 간 자리를
하얗게 덮는다
덮은 눈 속에서
겨울은 기쁨과 슬픔을 가려 내어
인간이 남긴 기쁨과 슬픔으로
봄을 준비한다
묵묵히.
겨울 편지
조병화
눈 속을 걸어서 편지가 왔다
하얀 눈 내리는 시골길
눈 속을 걸어서 편지가 왔다
하얀 봉투
먼 먼 나라에서 길을 물어 물어
이곳 외진 산골까지
눈 속을 걸어서 편지가 왔다
겉봉 뜯자 뭉클한 가을 냄새
먼 그곳은 지금 단풍이 한창이라한다
노란 잎새들이 하늘을 가득히
덮고 있다고 한다
그리운 거 없이 그리운 하늘이라 한다
고국의 말소리가 문득 생각나서
편지 보낸다고 한다
옛일들이 생각나지만 덮어둔다고 한다
내내 건강히 오래 사시라고 한다
암, 건강은 해야지,하며
난로에 긴 장작을 지피니
사방은 적막산중
온종일 눈이 내려 소리가 없다
생각이 난들 덮어둔들,지금은
한없이 간 세월
눈 내리는 구만리 밖
아주 산장을 덮을 양
산중에 눈이 내린다
결혼식장(結婚式場)
조병화
여자(女子)들이 모두 빨간 입술들을
긴 목 위에 앉혀 놓고
만국기(萬國旗) 아래 상품들처럼 나열한다.
남자(男子)들은 모두 도야지 같은 입술들을 다물고
햇빛을 두려워하는 짐승처럼
목을 숙인 채 여자(女子)들을 마주 본다.
신부와 신랑은 혼야(婚夜)의 예절을 생각하고
귀빈(貴賓)들은 축사(祝辭)를 길게 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크레오파트라보다 호사한 신부와
와이샤쓰가 커서 거북한 신랑을 위하여
빨간 입술들도
도야지 입술들도
금속제 훈장을 다는 가슴에
종이꽃들을 얌전히 달고
시인(詩人)이라는 사람이
소용이 없는 시를 읽는다.
이미 나에겐 그리운 것은 없지만
과자(菓子)를 흘리는 아이들에 끼어
만국기(萬國旗) 속에
남미제국(南美諸國)의 소식(消息)을 듣고 싶어 한다.
경춘 하이웨이
조병화
강원도 산들이 묵은 가슴을 확 털어놓은 것처럼
훤히 뚫린 경춘 하이웨이는
막힌 곳이 없는 곧은 길이다
산이 뚫리고, 강 위에 다리가 놓이고,
곧고, 넓고, 시원시원하기만 한 하이웨이
구름도 바람도 우물쭈물할 자리가 없다
그곳은 쏜살같이 달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손
이걸 인생이라고 할까,
살아 있는 사람의 그리움이라고 할까
봄은 아직 숨어서 먼 곳에 있고
청평을 지나고, 가평을 지나고,
강촌을 지나고, ......,
잔설에 덮인 산들이 구비구비
멀리, 가까이, 말없이 강물에 어린다.
경칩
조병화
후끈한 목욕탕에 들어앉아
손등의 때를 민다
온몸에서 겨울을 밀어 낸다
어디선지
꾸, 꾸꾸, 꾸꾸꾸
대지가 열리는 소리.
곁에 없어도
조병화
길을 다하여 먼 날
우리 서로 같이 있지 못해도
그 눈 나를 찾으면
그 속에 내가 있으리
목숨 다하여 먼 날
우리 서로 같이 있지 못해도
그 생각 나를 찾으면
그 속에 내가 있으리
계절
조병화
어렵게 개나리가 피더니
목련이 진다
개나리가 피다 지면
아카시아, 장미가 피고
아카시아, 장미가 지면
단풍 낙엽의 계절이 되겠지
그러다간 어느새 또
눈 내리고 바람 부는 엄동설한이 되겠지
세월 빠르다
아, 사랑아
나는 지금 계절의 특급을 타고
정신없이 네 곁을 달리고 있다.
고데치아
조병화
당신은 어느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화신인가요
어떻게 그렇게도 탐스럽고
피부가 곱고 보드라운가요
불그스레한 당신 얼굴이, 가는 목에
참으로 우아하고 잘도 생겼소
내가 당신과 같이 젊은 나이라면
단번에 구혼을 하겠소
내일 시들더라도
고독과 그리움
조병화
쓸쓸합니다.
쓸쓸하다 한들 당신은 너무나 먼 하늘 아래 있습니다.
인생이 기쁨보다는 쓸쓸한 것이 더 많고,
즐거움보다는 외로운 것이 더 많고,
쉬운 일보다는 어려운 일이 더 많고,
마음대로 되는 일보다는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더 많고,
행복한 일보다는 적적한 일이 더 많은 것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외롭고 쓸쓸할 땐 한정 없이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이러한 것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감정이라 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당신이 그립습니다.
참아야 하겠지요.
견디어야 하겠지요.
참고 견디는 것이 인생의 길이겠지요.
이렇게 칠십이 넘도록 내가 아직 해탈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고독'입니다.
살기 때문에 느끼는 그 순수한 고독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로 무서운 병은 고독입니다.
그 고독때문에 생겨나는 '그리움'입니다.
'고독과 그리움',
그 강한 열병으로 지금 나는 이렇게 당신을 앓고 있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앓고 있는 '고독과 그리움'이
얼마나 많은 작품으로 치료되어왔는지 당신은 알고 계실 겁니다.
지금 그 견디기 어려운 '고독과 그리움',
그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고독과 그리운 사연'을 당신에게 보냈습니다.
세월 모르고. 멀리 떨어져 있는 당신에 대한 내 이 열병 치료는
오로지 '고독과 그리움'을 담아 보내는 이 나의 말들이옵니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심하게 생겨나는 이 쓸쓸함,
이 고통이 나의 이 가난한 말로써 먼 당신에게 전해졌으면 합니다.
만분지 일이라도.
어지럽게 했습니다. 난필(亂筆)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많이 늙었습니다. 미안합니다.
고독하다는 것은
조병화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 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고독한 마음의 자리처럼
조병화
고독한 마음의 자리처럼
편안한 자리는 없다
고독한 마음의 자리처럼
자유스러운 자리는 없다
아, 고독한 마음의 자리처럼
너그러운 자리는 없다
고독한 마음의 자리처럼
한없이 아늑한 자리는 없다
이쯤 살았어도.
고승과 시인
조병화
고승이 절간에서 도를 닦는 일이나
시인이 속세에서 시를 닦는 일이나
끝내는 죽음을 가볍게 통과하려는
그 마음을 닦는 일이려니
죽음을 가볍게 통과하여
허허로운 저 세상에서
허허로운 不在가 되려 함이러니
아, 허허로운 부재(不在)가 되어
무한한 소멸로 소멸함이러니
고요한 귀향
조병화
이곳까지 오는 길 험했으나
고향에 접어드니 마냥 고요하여라
비가 내리다 개이고
개다 눈이 내리고
눈이 내리다 폭설이 되고
폭설이 되다 봄이 되고 여름이 되고
홍수가 되다 가뭄이 되고
가을 겨울이 되면서
만남과 이별이 세월이 되고
마른 눈물이 이곳이 되면서
지나온 주막들 아련히
고향은 마냥 고요하여라
아, 어머님 안녕하셨습니까.
고요한 사랑
조병화
나의 기도로는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신이 있습니다
나의 힘으로는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하늘이 있습니다
나의 사랑으로는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당신이 있습니다
아, 나의 세월로는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나의 사랑이 있습니다.
고요한 아침
조병화
겨울이 다가오는 고요한 아침.
들창에 비쳐드는 밝은 햇살 아래서.
무료한 나머지, KBS FM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밝은 음악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먼저 세상 떠난 옛사람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땅속에 모여
베토벤, 슈베르트, 모짜르트,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슈만, 멘델스존, 드볼작, ……,
지하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소리, 소리,
아, 생전의 고독, 빈곤, 번뇌, 등은 아랑곳없이,
자유롭다
얼마나 고독했던가 그 생애
얼마나 빈곤했던가 그 생애
얼마나 고생스러웠던가 그 생애
애절하게 고민스러웠던 그 고귀한 생애
예술가의 일생은 이러한 것인련가
신神이여, 당신의 뜻대로이옵니다
고요한 아침
겨울 앞에, 저는 이곳에 있습니다
어머니.
고향의 봄
조병화
언제나 말이 없는 고향산천은, 내가 없어도
왕조시대의 조강지처처럼 긴 인내로
해마다 봄이 되면 이렇게
활활 꽃으로 만발하여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긴 세월을 외지에서 뜬구름으로
거센 풍설에 쇠진되어, 나는
힘없이 고향길을 오르락내리락하누나
이젠.
곤충들의 신음소리
조병화
신유항 교수의 저서,
한 눈으로 보는 {한국의 곤충}의,
정밀한 사진첩을 들쳐 보고 있노라니
어린시절에 손쉽게 보고 놀던 곤충들이
보이질 않는다
멸종한 것이리
그 많던 곤충들이 앙상하게 남아
추려서 나열되어 있는 사진들,
가련하여라
지구는 이제 살 곳이 못된다
살아 남을 수 있는 땅이 아니다
머지않아 인류도 이렇게 멸망하리니
사랑이다, 그리움이다, 꿈이다,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
오, 신神이여
천재를 내려주소서
지구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당신의 복음을 내려주소서
지금도 곤충들의 신음소리가 애절합니다.
공적한 집 – 편운제 일기(片雲齊 日記)
조병화
지금 나의 집은 한참
빨간 장미로 가득합니다
낮이면 꾀꼬리 만산에 울고
밤이면 개구리 목놓아 울고
계절은 녹음으로 제한없이 우거져가고
울타리마다 싱싱하게 피어 돋는
빨간 장미
그러나 나의 집엔 아무도 없습니다.
공존의 이유
조병화
1
인간은 혼자서 죽는 것
인간은 혼자서 죽는 것
생각을 하며
죽는 것을 사는
인간들
휘몰아치는 이 광장을
보아라
15원, 20원 얻어 앉은
거리의 의자, 소란한 음악
서로 마주 앉아서
갈 것이 없다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한다 하며
서로 손을 잡아도
모든 것 서로 다 알아
할 말이 없다
"우리들이 살아야 하는 까닭은?"
"우리들이 쓸쓸히 하는 까닭은?"
서로 묶여서 갈 곳도
없는, 우울한 이 장소
행동은 위선이며
언어는 기만이다
고독한 자여! 가진 자여
고독한 자여! 잡은 자여
고독한 자여! 지키는 자여
하늘 아래 이 세상
마냥 자유한 곳
하고 싶은 것이
없다
너의 말대로 모든 것
그게 그것
쓸쓸한 의자에서 쓸쓸한 마음
쓸쓸한 조국
입 속에서 하지 않는
말이
우릴 키운다
태양이여! 행로를 바꿔라
빛을 피하는 이름들에게
빛을 주어라
캄캄한 대낮
밝아서
무용한 자유
손잡고 무력한 가난이여
무지한 욕망
빛은 많아도
피곤한 공간
먼지처럼
먼지처럼
2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적막할 뿐이다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공허할 뿐이다
외로와하는 것이 아니다
허전할 뿐이다
죽은 자가 고민하는 것을 보았는가
죽은 자가 후회하는 것을 보았는가
죽은 자가 외로와하는 것을 보았는가
하고 싶은 것이 많으면서
하고 싶지 않는 것이 많으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욕망할 따름
스스로를 죽이며
상식을 떠난다
오 욕망이여
고독이여
네가 있을 뿐
네가 있을 뿐
3
고민하지 않을 것을
고민하는 것은 무엇인가
너와 내가 마주 서있는 곳은
황량한 풀밭
공허해서 공허해서 손을 잡지만
실로 살고 싶은 것은 사람이다
신성이요 진리요 자유요 사랑이요
순결이요 아름다움이요
찾아온
..........5,000여 년
너와 내가 고민하지 않을 것을
고민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냥 가득히 빛을 도는
태양 아래
너와 내가 고민하지 않을 것을
고민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냥 가득히 빛을 도는
태양 아래
너와 내가 서로 마주 봄에
실로 너와 내가
어두워지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순수한 모순
인간은 순수한 모순
4
뻔한 것은
세상사
뻔한 속에서
뻔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서로 만나서 있는 동안
'사는 것'을 이야기하고
'죽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사랑한다는 말처럼
어려운 말은 없다
실로 허허한 것은 '영혼'
허허하기 때문에
'영혼'은 혼자서 살 수가 있는 것
날개를 타고 하늘을 돌다
빈 집으로 돌아오는
솔개처럼
별 가득한 밤
허허허 허허허 사는 영혼의 이유
뻔하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은 무엇인가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는
이 '간격'을,
고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솔개처럼, 솔개처럼
하늘을 돌다,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솔개처럼
5
때때로 너의 앞에선
무언해진다
"곁에 있고 싶기 때문이다"
때때로 너의 앞에선
비참해진다
"곁에 있고 싶기 때문이다"
때때로 너의 앞에선
참혹해진다
"겉에 있고 싶기 때문이다"
때때로 너의 앞에선
눈을 감고 싶어진다
6
네가 있어야 한다 곁에 있어야 한다
머리 한구석 들리지 않는 소리
투시된 적막 속에
허망한 거리
밤을 걸으며
설계가 없다
설계가 없는 곳에서 시작을 한다
실망을 하지 않기 위하여
실망한 자리에
자리를 펴자
욕망이 없는 자리
가장 높은 자리
밑에
날 묻자
밤은 차가운 자릴 비워 주며
"잘 가게"
사색은 시장한 채로
태평로
국민 회당
시청 모퉁이
네가 있어야 한다 곁에 있어야 한다
머리 한구석 들리지 않는 소리
7
지구에서
세상에서
온 인간 천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인간이어서
사람이어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받아야 할 일이라면
지구에서
세상에서
인간이여
쓸쓸한 자여
혼자서 있을 것을
혼자서 있을 것을
8
'잘못'이 무엇인가
별은 친구가 못 되어
물어봤댔자 소용이 없다
너는 가장 가까운 벗
지하 5미터 너의 자리
썩은 나무 조차
내가 누워 있는 자리
나다! '조'가 찾아왔다
인생에 '잘못'이 무엇이던가
"있던가"
멀리서 들리질 않는다
인생에, '잘못'이 무엇이던가
항구한 것이 없어서
변하는 대로, 바뀌는 대로
놓치는 대로
날 아직 버리지 못하여
널 찾아왔다
별은 친구가 못 되어
별은 친구가 못 되어
'잘못'이라는 것이 무엇이던가
'잘못'이라는 것이 있었던가
9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내년 이맘 때면
무덤엔
새파란 풀들이 모여서 소곤거리며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낄낄낄
혼자서 가난히 살다 간
사람들
같은 것은
까마득히 잊어 버리고
태양 가득히
웃고들 있을 것을
가난하다는 것은, 다만
만날 것을 만나지 못한 것을
말할 뿐
오늘은
비어 있는 내일
우린 서로 곁을
지나고 있었을 뿐
되도록이면 가벼운 여장으로
되도록이면 싸구려 식당으로
되도록이면 귀찮은 친구가 없는 곳으로
인생을 구경하려던, 어제들
어제는 다만
불귀의 오늘을 말할 뿐
아무것도 아니었는걸
내년 이맘때면
무덤엔
새파란 풀들이 모여서 소곤거리며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낄낄낄
인생을 혼자서 가난히 살다 간
사람들 같은 것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태양 가득히
웃고들 있을 것을
10
'진리'라는 것이 있소?
'영원'이라는 곳이 있소?
사람으로서
그곳에 가 본 사람이 있소?
사든 것은 푸른 딱지
그곳으로 가는 차표
차를 갈아타며
몇 차례
길을
잃은 자리
혹시나 가짜는 아니오?
잘못 탄 것은 아니오?
별은 낮과 밤을 돌고
지구는 어디나
사람들의 무덤
가다 모인 사람들의 무덤
"보소! 길 좀 뭅시다"
'진리'라는 것이 있소?
'영원'이라는 곳이 있소?
혹시나 가짜 표는 아니오?
잘못 산 표는 아니오?
11
가짜 표는 아니오
잘못 산 표도 아니오
어제 것이오
이 '역'을 떠나는 차엔
그 자리표가 없소
그러나 당신이 내리고 싶은 곳까진
갈 수는 있소
저 칸에 타시오
자리표 없는 칸이지만
당신과 같은 분이 있을 거요
가득하겠지만.
12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 하지
않기로 하세
너만이라든지
우리들만이라든지
이것은 비밀일세라든지
같은 말들은
하지 않기로 하세
내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어디메쯤 간다는 것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올 때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을 하며
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하세
(깊이 사랑하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헤어짐이 잦은 우리들의 세대
가벼운 눈웃음을
나눌 정도로
지내기로 합시다.
우리의 웃음마저 짐이 된다면
그때 헤어집시다.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도록 합시다.
당신을 생각하는 나를
얘기할 수 없음으로 인해
내가 어디쯤에 간다는 것을 보일 수 없으며
언젠가 우리가 헤어져야 할 날이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합시다
우리 앞에 서글픈 그 날이 오면
가벼운 눈웃음과 잊어도 좋을 악수를 합시다.)
13
시새움일세
시새움일세
너와 나를 가로 막은 것은,
시새움일세
층층계를 내려가세
종소리 울리는 마을
날새 집처럼
달려 있는
나의
방
그곳에서
너를 생각한다
지금 너는 잠을 자고 있겠지
생각이 많은 채로
태양이 잠을 깨우더라도
일어나질 말라
아침은 새들께 주어라
가진 자 옆을 지나지 말라
종소릴 울리며
종소릴 울리며
도시는 샌다
시새움일세
시새움일세
14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alone'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together'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들의 열매는
어딘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밖엔
우리들도
생각할 수밖엔
아웃사이드로
아웃사이드로
'alone'하는 이유
너와 내가 공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황폐한 인간들의
고향에서
'together' 하며
'alone'하는
악수
너를 사랑하며
사랑하지 못하는, 이
고독의
자유
alone
in
together
alone
to
alone
alone
with
alone
나의 '정신의 수입'속에
네가 주는, 이
'alone'
의
뜻
은
무엇인가?
with-in
or
not
with-out
or
not
'alone'
속
의
이
'alone'
은
무엇인가?
eternal - e
horizon - h
communication - c
영원한 지평선
속에
이
c
는
무엇인가?
쓰러진
c
나의 주소
는
어딘가?
alone.
구라파의 소
조병화
어차피
끝내는 도살장을 거쳐서
정육점으로, 혹은 통조림 공장으로
산산이 흩어져 사라져 갈 생애이지만
떠가는 흰구름 아래
구라파 푸른 목장에서
온종일
비옥한 목초를 배불리 씹으며
유연히 누워 있는 소들은
지상에서 천복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낳아서 죽을 때까지
근심 걱정 하나 없이
평안하게 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운수 좋게 타고난 한평생이랴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세월에
같은 시간에
온종일 허기져
타는 황무지만 뒤적이고 있는
모로코의 나귀와 양떼들아
끝내는
어차피 도살장을 거쳐서
정육점으로 혹은 통조림 공장으로
산산이 흩어져 사라져 갈 운명이지만.
구름
조병화
내가 네게 가까이 하지 않는 까닭은
내겐 네게 줄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네게서 멀어져가는 까닭은
내가 감내할 수 없는 것을
너무나 많이 너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영 너를 잊고자 돌아서는 까닭은
말려들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에서
어지러운 나를 건져내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혼자 내가 떨어져 있는 까닭은
가진 것도 없고, 머물 곳도 없지만
한없이 둥둥
편안하게 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터무니없이 오만한 너의 인간의 자리
허영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너의 거드름을 피하여
이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
아,이 무구 무한한 하늘
내가 너를 멀리하고자 하는 까닭은
가진 것도, 머물 곳도 없어도
홀로 마냥 떠 있을 수 있는
넓은 그 하늘이 있기 때문이다
그지없이 외롭다 해도
한없이 적막하다 해도
맥없이 넓은 이 자유
내가 영 너를 잊고자 하늘 까닭은
네게 줄 아무것도 내겐 없기 때문이다.
구름 기둥, 불기둥
조병화
……광야 끝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향하게 하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애급기 제13장)
지금 나는 너의 광야 끝에 장막을 치고
떨어진 생명의 보따릴 베고 주야를 샌다
그리운 사람아, 망설이는 사람아
지금 네가 찾고 있는 것은 뭐냐?
생명은 하나를 찾아 헤매는 것이라지만 먼 고향
보이지 않는 곳에 네가 있다
구름 기둥으로 너는 나를
불 기둥으로 나는 너를
비치며, 인도하며
서서히 가자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자리
서로 지켜서 가는 자리
캄캄한 밤이면
손을 잡자
`생명은 밝으며 쓸쓸한 것'
지금 나는 너의 광야 끝에
장막을 치고, 발을 씻지 못한 채
떨어진 생명의 보따릴 베고
낮과 밤을 샌다.
국도 45번 -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
조병화
혹시나 내 생각이 들거던
우선 서울 코리아로 날아오시오
서울에선 영동고속도로를 타시오
타고 달리다가 용인 인터체인지에서 빠지시오
빠져선 국도 45번을 남으로 달리시오
계속 달리다가 송전에서 좌회전
넓은 저수지를 오른쪽으로 보면서
얕은 고개를 하나 돌아 넘으시오
넘다 보면 긴 장승이 서 있는 마을
‘꿈’이라는 깃발이 파닥이는 시골 정거장
그곳에서 내리시오
서울에서 자동차로
용인까지 50분, 용인서 20분
이곳이 지구 위의 내 고향 난실리
어머님 묘소 쪽으로 창을 낸 片雲齋
거기서 지금 내가 여생을 지내오
여름 철새가 지나다 들러서 뜨면
가을, 겨울
겨울 철새가 지나다 들러서 가면
봄, 여름
후회 없이 외로웠던 세월들
마음 한 번 주지 못한 세월들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젠 그저 그리워지는 건
헤어진 얼굴들
지금은 어디서 뭘 할까
먼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혹시나 내 생각이 나거던
대한민국 국도 45번을 타시오
타시다가 난실리에서 내리시오.
굴암사(龍德寺)
조병화
옛날 송전공립보통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원족을 갔던 굴암사,
사푼사푼 잘도 올라갔던 생각이
다시 찾아든 산길
하두 험하고 가파라서 쉬엄쉬엄 오르매
옛날은 까마득하다
허이허이 오르는 산길
절은 하늘 위에 있다
아, 어머님, 어머님은 너무나 높은 곳에
계십니다
할 때, 한 소년이 사푼사푼
내 곁을 앞질러 오른다
나를 힐끗 뒤돌아보며.
굿바이
조병화
지금 무수한 내가 흐트러진 채
내 옆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파리의 골목 골목에서
런던의 공항에서
로마의 분수가에서
혹은 아테네 돌 위에서
……
나와 헤어진 무수한 내가
지금 나를 찾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코리아 나의 하늘 아래 있습니다
코리아는 아시아 동쪽 나의 영주지
눈물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지구엔 어디나 인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정된 시간들 속에서
지구엔 어디나 인간들이 기다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생각을 해 보면 나의 인생처럼
다시는 올 수 없는 자리들
지금 무수한 내가 흐트러진 채
지구 그 자리
시간 밖 저쪽에서 나를 찾고 있습니다
시인이란 만인의 벗이라는데
나의 가슴은 이렇게 어리고 가난합니다
빠이 빠이
귀가 커서 내가 슬픈가 보다
조병화
귀가 커서 내가 슬픈가 보다
산토끼의 귀를 가져 놀라길 잘하나 보다
갈나무 잎새가 지는 소리에도
산머루 가지에 눈 뜨는 소리에도
왜 가슴은 이리 안정할 줄 모르나
아마 귀가 커서 내가 슬픈가 보다
사귀긴 쉬우나 오지는 않는 사람들의 말 마디가
귀 안에 늘 머물러
내일이나 모레나 혹은
내 앞에 쌓여 있는 어느 날에
꼭 만날 듯한 낯없는 먼 나라의 회화 소리들이
가는 파동을 쉴새 없이 귀에 전해 주어
지금도 서운한 나 혼자의 날이 지나간다
나 호올로 남기고 돌아간다
오지 않는 사람만 기다리게 하는
그러한 사람의 자리에
우리 어머님은 나를 놔 두시고 가셨나 보다
나의 작은 육체 어느 구석구석에
슬플 줄 모르는 혈액이 흐를까
기다릴 줄 모르는 가는 골격이 끼여 있을까
귀가 커서 내가 슬픈가 보다
산토끼의 귀를 가져 놀라길 잘하나 보다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조병화
눈을 뜨면 문득 한숨이 나오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
불도 켜지 않은 구석진 방에서
혼자 상심을 삭이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정작 그런 날 함께 있고 싶은 그대였지만
그대를 지우다 지우다 끝내 고개를 떨구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지금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사랑한다
사랑한다며 내 한 몸 산산이 부서지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할 일은 산같이 쌓여 있는데도
하루종일 그대 생각에 잠겨
단 한 발짝도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럼
조병화
"콘크리트 같은 적막 속을
고독이 전율처럼 지나갑니다.
무료한 시간이 무섭게 흘러갑니다.
시간의 적막 속에서
속수무책, 온몸이 무너져내리고 있습니다.
아, 이 공포,
콘크리트 같은 적막 속을
고독이 전율처럼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조병화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일이 어려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오늘이 지루하지 않아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늙어가는 것을 늦춰서 기쁘리
이러다가 언젠가는 내가 먼저 떠나
이 세상에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것으로 얼마나 행복하리
아,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날이 가고 날이 오는 먼 세월이
그리움으로 곱게 나를 이끌어 가면서
다하지 못한 외로움이 훈훈한 바람이 되려니
얼마나 허전한 고마운 사랑이런가.
그리움은 - 젊은 시인에게
조병화
외로운가? 그럴 때가 허다하지
참게나
쓸쓸한가? 그럴 때도 허다하지
참게나
한도 없이 그리운가? 그럴 때 많지
참고 참게나
불안스러운가? 그럴 때가 왜 없겠는가
참게나
참고 참고 참고,홀로
참는 너의 영혼의 눈물이 소리 없이
맑게 고여들 때
너의 시는 내쳐 오르려니
시가 그러하거니
시인의 길이 그러하거니
외로워하지 말라
쓸쓸하지 말라
불안스러워하지 말라
그리움은 시가 살고 있는 곳이로니
시인의 영혼이 살고 있는 고향이로니.
그림에 붙인 단상 –김후연(金厚淵) 씨에게
조병화
1
봄은
무서운 겨울을
얼어붙은 나뭇가지에 숨어 있었다
아, 그처럼
그리움은 너의 가슴 속에
어지럽게 숨어 있었다.
2
길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사람이 있는 곳으로
사람은 그리움이 있는 곳으로
그리움이 있는 곳으로
3
산성은
사람들이 싸우다 죽은 자리,
죽은 자리에 오늘은 눈이 내리며
멀리 봄냄새 나는 해가 비친다
누군가가 꽂아 놓고 간
꽃 한 송이
이보다 더 큰 봄이 있으랴.
그 자리에 서 계시옵니다 - 길모퉁이에 서 있는 어느 순경에게
조병화
당신의 눈은 온 나라를 밝게
하여 주시옵니다
당신의 귀는 온 나라를 편안케
하여 주시옵니다
그리고 당신의 신경은 온 나라를 한 집안으로
하여 주시옵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 봉사는 온 나라를 굳게 태안케
하여 주시옵니다
비바람 쏟아지는 밤에도 그 자리
서 계시옵니다
눈보라 치는 밤에도 그 자리
서 계시옵니다
캄캄한 추운 밤에도 그 자리
서 계시옵니다
조국의 밤 지키며
겨레의 잠 지키며
형제 자매들의 그 웃음, 그 사랑, 그 내일 지키며
그 자리 서 계시옵니다
비바람 쏟아지는 밤에도
눈보라치는 밤에도
캄캄한 추운 밤에도
가난 참아 가며
어려움 참아 가며
위험 속 그 속에서
당신의 눈은 온 나라를 밝게
하여 주시옵니다
당신의 귀는 온 나라를 편안케
하여 주시옵니다
그리고 당신의 신경은 온 나라를 한집안으로
하여 주시옵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 봉사는 온 나라를 굳건 태안케
하여 주시옵니다
비바람 쏟아지는 밤에도
눈보라 치는 밤에도
캄캄한 추운 밤에도.
그저 그럴듯한 상상처럼
조병화
1
만약
무엇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풀벌레들의 요란스런 지지귐처럼
창조주가 존재하여
한 인간을 빚어내었다 한다면
삶이란 배가 우연히 나를 실어
다만 일상적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 나를 슬쩍 끼워 넣은 걸까
아, 그럼 마치 난파된 것처럼
몰래 배를 뒤집고 마는 거지
그저 그럴듯한 상상
껍질 속에 껍질만 있는 그런 환상
이 모든 것
이 부질없는 착각 속에서
내 가슴속 허한 달걀을 꺼내
우습지도 않게 바위를 부셔버릴 수도 있는 거야
파라독스를 마시고 사는 왜곡된 동화처럼…
2
만약
아무렇지도 않게 상상할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소설의 줄거리처럼
나의 인생도 굳이 그려봐야 할 이유가 없다면
힘없는 나의 사랑
색조불변의 나의 기억도
그저 운 없이 정해진 삶의 열차에 갇힌 채
정거장 확인하는 편도여행에 합류된 것일까
아, 그럼 마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과감하게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마는 거지
제법 그럴듯한 영웅
온통 영웅들밖에 없는 그런 세상
이 모든 삶
이 부질없는 시나리오 속에서
나의 대본 속 짧은 대사를 지우고
관객 없는 무대위 옴니버스 무언극을 올릴 수도 있는 거야
실어증에 걸린 천재처럼…
3
만약
주소불명의 소인이 찍힌
되돌아 온 편지가 안겨주는 허탈함처럼
이제 더이상 너의 곁으로 다가갈 수 없다하여도
수많은 풍선에 실어 날려보낸
우리가 남긴 흔적들 모두
제각기 서로 다른 시간들 속에 편집된 영상처럼 되살아 나게될까
아, 그럼 나의 가슴을 온통 불살라
모든 기억 재만 남기고 마는 거지
단지 착각뿐인 아름다움
조각 조각 부식되어버린 그런 진실
이 모든 추억
이 당혹스런 기억의 환생 앞에서
나의 시간속 짧은 만남을 오려내고
아무도 없는 간이역에 내려 새로운 얼굴들을 그릴수도 있는 거야
기억상실증에 걸린 화가처럼…
4
만약
나를 키우며 자라나는 나의 삶이
그 어떤 방법으로도 풀려지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예정된 불안감이 기다리고 있는
비켜갈 수 없는 문 앞에 서게 된다면
이 벽아닌 벽에 그만 주눅이 든 채
나는 한없이 작아지게 되고 마는 걸까
아, 그럼 마치 고루함을 비웃기나 하듯
문을 부셔버리고 마는 거지
어설픈 믿음 속에 있는 자만
출구 없는 미로 속에 존재하는 그런 확신
이 모든 허상
이 깨어지지 않는 교만 속에서
내 방황속 이카루스의 날개를 달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비상을 할 수도 있는 거야
삶이란 의미가 증발되어버린 현실 앞의 시지프스처럼…
그저 그립다, 말 한마디
조병화
나의 밤은 당신의 낮,
나의 낮은 당신의 밤,
세월을 이렇게 하루 앞서 사는 나의 세월
그 만큼, 인생이라는 세월을
당신보다 먼저 살아가는 세월이어서
세상의 쓰라린 맛을
먼저 맛보고 지나가는 세월이지만
당신에게 전할 말이란 한 마디뿐이옵니다.
그저 그립습니다.
세상엔 천동벼락이 하두 많아서
하루아침에 천지가 변하는 수도 있어
한치 앞을 모르는 인생을 살아가는 나로소
어찌, 소원 같은 것을 하겠습니까만
내게 남은 말 한 마디는
그저 당신이 그립습니다.
그저 당신이 그립습니다.
기다림
조병화
기다리는 게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비밀인가
가쁘게 목타게 살아가는 나날을
이어주는 숨은 지하수가 아닌가
먼 곳에서 아물아물
가물거리며 다가오는 듯한
기별 같은거, 소식 같은거
기다리는 게 있다는 건
얼마나 아련스러운 위안이랴
사방천지 모두 차단된거 같은
멍멍한 이세상에서, 엄동설한에
겨울 물처럼 숨쉬고 있는
기다림 같은 게 있다는 건
얼마나 애절스러운 사랑이랴
무수한 사람들에게 채여
얼 얼 방향을 잃고 허둥거리는
이른봄 벌레처럼 처진자리에
아찔 아찔 아찔거리는
기다림 같은 게 있다는 건
얼마다 보살같은 따사로움이랴
보일 듯이,잡힐 듯이,들릴 듯이
가까운 어느 곳에
기다림 같은 것이 아롱거리는 건
얼마나 잔인한 그리움이랴
아, 기다림이 있다는 건
얼마나 고독한 긴, 긴, 벌인가
기다림은 아련히
조병화
이제,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인생의 겨울로 접어들면서
기다림은 먼 소식처럼 아련해지며
맑게 보다 맑게
가볍게 보다 가볍게
엷게 보다 엷게
부담 없이 보다 부담 없이
스쳐 가는 바람처럼 가물가물하여라
긴 생애가 기다리는 세월
기다리면서 기다리던 것을 보내며
기다리던 것을 보내면 다시 기다리며
다시 기다리던 것을 다시 보내면
다시 또다시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어라. 하면서
이 인생의 겨울 저녁 노을
노을이 차가워라
기다릴 것도 없이 기다려지는 거
기다려져도 아련한 이 기다림
노을진 겨울이거늘
아, 사랑아
인생이 이러한 것이어라.
기다림이 이러한 것이어라.
기우(杞憂)와 희망
조병화
20세기는 가고
21세기는 눈앞으로 다가온다
21세기가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이 불안, 이 불안은 무엇일까
20세기가 와선
"신神은 죽었다"(니체) 했는데
21세기에선 혹시나
"인간人間은 죽었다"라고 하지나 않을까
이러한 예감으로, 나의 머릿속에선
지구는 황폐해 가고 인간은 상실해 가고
기계문명은 돌고 인류는 멸망해 간다
먹고 살고 번식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은 자연을 죽이고,
죽어가는 자연은 지구를 죽이고
죽어가는 지구는
인간, 스스로 죽어가는지도 모르게
인간을 죽여가고 있다
오,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면
인류에게 새로운 꿈이 있다면
그 해답이 문제이로다.
긴 편지
조병화
고독은 꺼지지 않는 내 안의 별,
직선 방향으로 팽팽히
나를 이끌어 준 강력한 인력이었습니다.
이곳까지.
긴 회고
조병화
이곳까지 오면서
잊은 것, 잃은 것, 많았지만
헤어지기 어려운 사람과 아리게
헤어져야 할 때가 더 많았구나
어쩔 수 없이
길
조병화
산을 넘어도 산
고개를 넘어도 고개
개울을 넘어도 개울
길은 그저 묵묵히 간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사방 텅 비어 있는 우주
끝이 보이지 않는 길
길은 그저 묵묵히 이어진다.
길을 따라 나선 마음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도
그저 길을 따라 가고픈 마음.
산을 넘어도 고개를 넘어도
개울을 넘어도 산을 넘어도
그저 묵묵한 길.
길은
조병화
길은 가는 사람,오는 사람이 있어
있는거
그리운 것이 있을 상싶어
있는 거
설사 그리운 것이 없더라도
그저 멀리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있는 거
나는 일생, 그 길을 살아왔다
어디로 가는 것이며
어디까지 가는 것인가
그리고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 목숨인가
길을 보면 설레이는 마음
어제나,오늘이나,
해 저문 지금이나,
머지않아 어둠이 내리려나.
깊은 밤에
조병화
깊은 밤에 잠이 깨면
무심코 생각나는 그 사람
그분은 지름 어떻게 지낼까
고마운 사람아
캄캄한 밤에 잠이 깨면
무심코 그리워지는 그 사람
그분은 지름 어떻게 지낼까
아직은 같이
이 이승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같이는 할 수 없는 한 자리
아, 고독한 사랑아
바람이 불고, 여기저기
세월이 날이는 이 가을, 깊은 밤
언제 이 한마디 말을 전하지
아직도 사랑한다고.
깊은 밤 잠자리에서
조병화
요즘 나의 꿈엔
산 위에 올라 하늘을 보는 내가
자주 나타난다
하늘은 오를 수록 무한으로 넓어지며
나는 보이질 않는다
내가 보이질 않는 곳에서
나는 구름으로, 바람으로
아, 이 무한 공간
이 무한 공간에서
나의 고독도 공기가 되려나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꽃과 고양이
조병화
서생원들이여, 안심하고 내곁을 지나가십시오
꽃 나무가지에 안겨 본인은 이렇게 만사태평올시다.
따지고 보면 본인도 양순한 놈이 올시다
서로 등지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피차간에 다만 배고픈 죄 올시다
삼사월 꽃 그늘에 누워 한없이 게을러진 나도
양순한 고양이 한가족이 올시다.
꽃, 베고니아
조병화
오, 베고니아
온실을 지날 때마다 기웃거린다
이슬 찬 유리창 안에
너는 귀여운 소녀--
연지같은 볼을 가는 목에 고이고
나날이
너는 왜 말이 없어 가느냐
지나간 일요일 네가 숨겨 준
빨간 연서는
내 가슴에 안은 채 날을 샌다.
나는 너의 보캐부러리를 알고프다
그러나 교실에 갈 시간은 이미 늦었다
아, 베고니아
내가 너를 사랑하기엔 너무나 나이 넘은 고독이다.
꽃비
조병화
꽃비는 소리 없이 술술 내린다
살살 내린다
촉촉히 내린다
내리면서 멍울진 꽃봉오리들을
톡 톡, 가만가만 터뜨린다
이렇게 밤이 지나가고, 낮이 지나가는 사이
어느새 대지는 노랗게, 붉게, 파랗게 물들고
내 마음에서 하얀 브라우스를 걸친 한 여인이
슬피, 목련화로 변신하여 저 멀리
하늘을 떠나가고 있다.
꽃 앞에서 - 외로운 사람에게
조병화
외로운 사람아,
외로움의 그 한계까지 내려가선
마음을 돌려라, 그 곳에 끝이 없나니
낮과 밤, 해와 달이 그러하듯이
해와 달은 돌고 돌며
밤이 되고 낮이 되고
밤과 낮은 돌고 돌며
봄, 여름, 가을, 겨울, 다시 봄이 되어
다시 꽃이 피오 세월로 이어지듯이
외로운 사람아,
외로움의 그 한계까지 내려가선
너의 외로움이 밤과 낮, 달과 해
봄, 여름, 가을, 겨울, 세월이 되어
네 앞에 고운 꽃으로 있어라.
꽃을 버릴 때처럼
조병화
꽃을 뻘릴 때처럼
잔인한 마음이 있으리
아직도 반은 살아 있는 꽃을
버릴 때처럼
쓰린 마음이 있으리
더우기 시들은 꽃을 버릴 때처럼
애처로운 마음이 또 있으리
한동안 같이 살던 것들
같이 지낸 것들
같이 있었던 것들을
버릴 때처럼
몰인정한 마음이 있으리
아, 그와도 같이
버림을 받을 때처럼
처참한 마음이 또 있으리
꿈
조병화
1
내 손길이 네게 닿으면
넌 움직이는 산맥이 된다
내 입술이 네게 닿으면
넌 가득 찬 호수가 된다
호수에 노를 저으며
호심으로
물가로
수초 사이로
구름처럼 내가 가라앉아 돌면
넌 눈을 감은 하늘이 된다
어디선지
노고지리
가물가물
먼 아지랭이
네 눈물이 내게 닿으면
난 무너지는 우주가 된다.
2
우주는 허망한 광맥
너는 그 속에 숨어 있는
미세한 보석
보이지 않는 빛으로 나를 이끈다
꿈의 귀향 - 묘비명
조병화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나
조병화
산다는 건 고독하다는 걸
신념으로, 종교로 살아 오는데
오늘따라 내가 왜 이렇게도
약하고, 외로운가
실로 외로운 맥주를 혼자 마시고 있는
코르푸 힐튼 호텔 108호실의 이 고독
나는 지금 본연의 나와 만나고 있는 거다
캄캄한 이 고독, 이것이 나였을 걸.
나는 지금까지-나의 사원(寺院)
조병화
나는 지금까지
의지할 만한 신도 사람도
종교 같은 것도 없이
오로지 혼자 안에서 혼자를 지켜
혼자에서 의지하여
혼자를 살아온 것이 아닌가
그 혼자 안에서, 아름 아름
믿음과 예감, 마음의 의지 같은 것이 있었다면
먼 곳, 어느 곳에
나를 기다리고 계실 듯한 어머님의 자리
나도 그곳으로 가는 거다, 하는
투명한 신앙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어머님, 저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주신 목숨을
당신의 뜻인 듯한 생애를 찾아 더듬으며
당신의 약속대로 당신의 길을
당신에게 가까이
이렇게 혼자 살아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멀리 성당을 바라다보며, 사찰을 보며
하늘로 뾰죽뾰죽 솟아오른 예배당을 보며
먼 그 거리(距離)
외톨로
혼자 가는 길
나는 지금까지
의지할 만한 신도 사람도 없이
오로지 혼자 안에서 혼자를 지켜
혼자에 의지하여
혼자를 살아온 게 아닌가
어머님이 기다리고 계실 듯한 그 확신
먼 자리, 그 약속의 자리
아름 아름
그 생각에 의지하여
나무에 올라갈수록
조병화
나무에 높이 올라 갈수록
혼자가 된다
순간, 무서워진다
살던 땅이 멀어지기 때문이다
정든 것들이 점점 멀어지며
보이던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던 것도 들리지 않고
모두가 아득해진다
나만 남고 아득히 아득히 비어간다
아, 산다는 것은 이러한 것일까,
나무에 높이 올라 갈수록
혼자가 되는 것을.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에게
조병화
쓸쓸합니다.
쓸쓸하다 한들 당신은 너무나 먼
하늘 아래 있습니다.
인생이 기쁨보다는 쓸쓸한 것이 더 많고,
즐거움보다는 외로운 것이 더 많고,
쉬운 일보다는 어려운 일이 더 많고,
마음대로 되는 일 보다는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더 많고,
행복한 일보다는 적적한 일이 더 많은 것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외롭고 쓸쓸할 땐 한정 없이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이러한 것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감정이라 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당신이 그립습니다.
참아야 하겠지요.
견디어야 하겠지요.
참고 견디는 것이 인생의 길이겠지요.
이렇게 칠십이 넘도록 내가 아직 해탈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고독'입니다.
살기 때문에 느끼는 그 순수한 고독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로 무서운 병은 고독입니다.
그 고독 때문에 생겨나는 '그리움'입니다.
'고독과 그리움'
그 강한 열병으로 지금 나는 이렇게 당신을 앓고 있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앓고 있는 '고독과 그리움'이 얼마나 많은 작품으로 치료되어왔는지
당신은 알고 계실 겁니다.
지금 그 견디기 어려운 '고독과 그리움'
그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고독과 그리운 사연'을 당신에게 보냈습니다.
세월 모르고. 멀리 떨어져 있는 당신에 대한 내 이 열병 치료는
오로지 '고독과 그리움'을 담아 보내는 이 나의 말들이옵니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심하게 생겨나는 이 쓸쓸함,
이 고통이 나의 이 가난한 말로써 먼 당신에게 전해졌으면 합니다.
만분지 일이라도.
어지럽게 했습니다. 난필(亂筆)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많이 늙었습니다.
미안합니다.
나는 긴 인생을
조병화
나는 당신을 만난 것을
후회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한 것을
후회합니다.
그리고 당신과 헤어진 것을
후회합니다.
그리고
당신과 만난 것을 고마운 인연으로,
당신과 헤어져서 잊지 못하는 것을 사랑으로,
이렇게 오래 긴 세월을
하늘의 은총으로 살고 있습니다.
인생이 그런 것처럼.
나는 - 어머님께
조병화
나는 약한 벌레와 같이 살아가는 미미한 존재이오나
누구에게도 열 수 없는 외로움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약한 벌레이오나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나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아, 그와도 같이
미미한 인생이오나
나는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외로움 하나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나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나도 그랬듯이
조병화
머지않아 그날이 오려니
먼저 한마디 하는 말이
세상만사 그저 가는 바람이려니,
그렇게 생각해다오
내가 그랬듯이
실로 머지 않아 너와 내가 그렇게
작별을 할 것이려니
너도 나도 그저 한세상 바람에 불려가는
뜬구름이려니, 그렇게 생각을 해다오
내가 그랬듯이
순간만이라도 얼마나 고마웠던가
그 많은 아름답고, 슬펐던 말들을 어찌 잊으리
그 많은 뜨겁고도, 쓸쓸하던 가슴들을 어찌 잊으리
아, 그 많은 행복하면서도 외로웠던 날들을 어찌 잊으리
허나, 머지않아 이별을 할 그날이 오려니
그저 세상만사 들꽃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생각을 해 다오
행복하고도 쓸쓸하던 이 세상을
내가 그렇게 했듯이.
나 돌아간 흔적
조병화
세상에 나는 당신을 만나러 왔읍니다.
작은 소망도 까닭도 없읍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읍니다
아세아 동방 양지바른 곳
경기도 안성 샘 맑은 산골
산나물 꿀벌레 새끼 치는 자리에
태어나
서울에 자라
당신을 만나 나 돌아가는 흔적
아름다움이여
두고 가는 것이여
먼 청동색 이끼 낀 인연의 줄기줄기
당신을 찾어 세상 수만 리나 찾어 왔읍니다
까닭도 가난한 소망도 없읍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읍니다
이 세상은 사랑의 흔적
두고 가는 자리
사랑이 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에 당신이 사라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수만리
소망도 까닭도 없이
그저 당신 곁에 잠시 나 있으려 나 찾어 왔읍니다.
나루터 근처에서
조병화
이제, 드디어 긴 세월을 걸어서
어머님이 약속하신
그 나루터 근처까지 왔다
건너야 할 피안(彼岸)은 아득히
짙은 안개로 뿌옇게 하늘만 열려 있고
인기척 하나 없어라.
나무
조병화
나무는 태어난 자리에서, 한평생을
하늘만 바라보며 자라 오릅니다
나무는 곁의 나무들을 보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늘만 보며 솟아오릅니다
한 치, 한 치, 하늘이 주시는 치수대로
무리함이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나무는 다른 나무에 의지하는 일이 없이
봄, 여름, 가을 없이
겨울에도 숨어서
한평생을 하늘만 보면서 스스로를 솟아오릅니다
오로지 태어난 자리에서.
나무의 철학
조병화
살아가노라면
가슴 아픈 일 한두 가지겠는가
깊은 곳에 뿌리를 감추고
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사는 나무처럼
그걸 사는 거다
봄, 여름, 가을, 긴 겨울을
높은 곳으로
보다 높은 곳으로, 쉬임 없이
한결같이
사노라면
가슴 상하는 일 한두 가지겠는가
나에게 잃어버릴 것을
조병화
나에게 잃어버릴 것을 잃어버리게 하여 주시고
나에게 남을 것을 남게 하여 주십시오
와글와글 타오르던 무성한 여름은
제 자리 자리마다 가라앉아
귀중한 생명들을 여물게 하였읍니다.
보시다시피
이젠 담당할 수 없이 숨찬 계절이었읍니다.
이제 돌아갈 것을 돌아가게 하여 주시고
총총히 서 있는
잎 떨어진 나무 수리를 지나는 바람에도
생명을 알알이 감지할 수 있는
소리 없는 가을을 나에게 주십시오
기름진 미운 얼굴을 거두고
기도를 울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수수 세월이 지나가는 나의 자리
검은 수림처럼 그대로 말없이
잃어버릴 것을 잃어버리게 하여 주시고
나에게 남을 것을 남게 하여 주십시오.
나에게 있어서
조병화
나에게 있어서
시는 고통스러운 숙명을 사는 기쁨이며
사랑은 고통스러운 목숨을 이어 주는
어쩔 수 없는 숨은 기쁨의 형벌이옵니다
그렇게 나에게 있어서는
꿈은 살아야 하는 먼 고독한 순례의 길이오며
사랑은 고통스러운 그 순례의 길을 이어주는
구걸스러운 따뜻한 숨은 동냥이옵니다.
나의 노래
조병화
오욕의 우물을 피하며
바람으로 구름으로
생명을 깎으며
생명을 이어 온 나의 노래
오늘도 바람 속에서
구름 속에서
어느 누구 가슴에 머물다
사라질 것인가
아, 세월이여
덧없는 존재의 무궁한 허공이여.
나의 마지막 꿈은
조병화
허공에 아무런 흔적이 없듯
바람이 지나도
구름이 지나도
새가 지나도
낙엽이 펄펄 날리다 사라져도
허공은 그대로 하나 흔적도 없듯
만고의 허공으로 그저 비어 있듯
태풍이 지나도
폭풍우가 지나도
번개 천둥이 지나도
허공은 그대로 하나 흔적도 없듯
만고의 허공으로 그저 비어 있듯
팔십의 세월
인생 희비애락이 지나간 나의 생애
빈 허공으로
그저 아무런 흔적 하나 없이 허공으로 있길
애착도, 욕망도, 미련도, 애욕도, 미움도, 후회도, 아쉬움도,
하나 흔적 없는 빈 허공으로 있길
만고에.
나의 생애
조병화
일본이 제국주의로 한판 칠 때
나는 태어나, 가난했고
한국이 대중주의로 판을 칠 때
나는 방황하며, 슬펐고
세계가 돈주의로 판을 칠 때
나는 고독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나의 수학
조병화
나는 수학을 배웠지만
그 수학은 지금 내겐 아무 소용이 없고
슬픔과 기쁨의 수학으로 인생을 산다
슬픔의 영역과 기쁨의 영역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서서
내 사색의 균형을 가감하면서
나의 고독으로 나를 적분한다.
고독의 변수는 운명.
나는 수학을 배웠지만
그 수학은 지금 내겐 아무 소용이 없고
슬픔과 기쁨의 수학으로 인생을 산다
슬픔의 영역과 기쁨의 영역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서서
내 사색의 균형을 가감하면서
나의 고독으로 나를 적분한다.
고독의 변수는 운명.
나의 시는
조병화
하얀 솜털 날개를 타고
바람에 날아다니던 민들레의 씨앗이
따스한 대지에 내려 뿌리를 내리고
노란꽃으로 다시 피어나듯이
봄 가을 겨울 없이, 긴 세월을
가난한 시에 숨겨
덧없이
길을 떠난 나의 그리움이
어느 쓸쓸한 가슴에 머물어
잠시라도 따스한 위안이 되어
환한 만남으로 솟아났으면
아, 그렇게
나의 외로운 시들이
어느 쓸쓸한 가슴 가슴에
보이지 않는 만남의 기쁨으로 스며들어
그 영원이었으며
나의 시는
나의 유산(遺産)
조병화
어머님, 제가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것은
실로 고독뿐이옵니다
어머님이 제게 주신 고독은
너무 많아서
부끄러울 정도로 흥청지게 써왔건만
쓰고 쓰고 다 못 쓰고 남기는 것은
고마운 이 고독뿐이옵니다
인생보다도 아리고 무거운.
나의 육체는
조병화
나의 육체는
자학과 번뇌,고독이 긴 세월을 숨어서
부패 발효되어 스스로 짙게
가라앉아 고인
독한 맑은 술이옵니다.
짙은 독한 맑은 그 술이 긴 세월을 숨어서
스스로 증류되어 고인 맑은 눈물이옵니다.
스스로 취하는
나의 일생은
조병화
어느 호텔이었던가
스카이라운지에서 내려다보던
해운대 잔잔한 비이치는, 흐린 시야에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이오니아 바다의 해안을
떠오르게 하고
실내에서 돌고 있던 아침 음악 소리는
감미로운 사랑을 호소하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
텅 빈 아침에, 나는
두고 온 어제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일생은, 한 마디로
외박으로 이어진 긴 여행
아, 무엇 때문에 나는 그렇게 살아야 했을까.
나의 존재
조병화
바람이 집이 없듯이
구름이 거처가 없듯이
나는 바람에 밀려가는
집 없는 구름이옵니다
나뭇가지에 간혹 의지한다 해도
바람이 불면
작별을 해야 할 덧없는 구름이올시다.
나의 죄와 벌
조병화
한량없이 시를 담아 올려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이 무한
아, 이 무한을 다 퍼 올리면
나에게도 휴식이 있을는지,
퍼 올리면 올릴수록
더 맑게 깊어지는 이 외로움
이 외로움은 무슨 벌인가요
보이는 것이 무한한 하늘,
충만한 것이 무한한 시간,
다 풀 수 없는 것이 무한한 허무,
나는 이곳에서 생존의 무기수올시다
사형수보다 무거운.
나일강
조병화
그저 사정도 인정도 없이
그저 흘러내리는 나일 강은
그저 토색물투성이 붉은 흙의 물결
그저 기운만 센 산골 청년처럼
그저 멋모르고 도시로 내달리는 문맹 청년처럼
이디오피아 청년처럼
그저 나일 강은 흘러내리는 강물
그저 거센 토색물투성이 붉은 흙의 투성이다
인간의 적은 지혜처럼 물결을 골라
범선은 기슭을 따라 강을 기어올라도
나의 작은 머리가 지식을 다하여
유역을 더듬어
강을 따라 강을 끼고 흐르던 일들을 더듬어 기어올라가도
무식처럼 캄캄한 강물의 깊이
나는 한 마리 새처럼
지중해를 건너선
아프리카 다리목에 앉아
`영혼의 불멸'처럼 미지한 흙에 취한다
나일 강은 그저 사정도 인정도 없이 흐르는 물결
그저 기운만 센 산골 청년처럼
그저 글 한 자 모르는 거센 이디오피아 손님처럼
그저 사정도 인정도 없이 내리닥치는 강물
그저 생생한 토색물투성이 붉은 흙의 물결이다
낙엽
조병화
당신 생각만 했지요
당신께만 할 이야기가 많았지요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지요
초록색 몸차림을 하고 단장을 하고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당신 생각만 했지요
어느 날 당신이 내 그늘 아래 쉬었을 때
그때 내 마지막 그 말을 당신에게 주는 걸 그랬어요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헤어진다는 것은 아주 잊어버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 생각만 했어요
당신께만 할 말이 많았어요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도 먼 이 자리에서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어요
낙엽끼리 모여 산다
조병화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낙엽을 밟으며
조병화
낙엽을 밟고 간다
낙엽의 가슴을 밟고 간다
언젠가는 그 누구가
나의 무덤 나의 잔디
나의 가슴을 이렇게 밟고 가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가을비 축축한
낙엽을 밟고 작업실로 간다
아침 여덟 시
언제나 그 시간
혜화동 로타리 주유소 마당
춘하추동 근 사십 년
혜화동 같은 세월, 축축한 인생
나를 밟고 간다
나의 가슴을 밟고 간다
돌아오지 않는 세월을 밟고 간다.
낙타의 울음소리
조병화
이곳은 중국대륙의 오지, 사막의 초원
그 옛날 실크로드의 주막거리 돈황
돈황에 와서 내가 처음으로 듣는 낙타의 울음소리
울음소리가 아니라 저주의 절규였다
아, 세상에서 이처럼
처량한 울음소리가 또 있으리
가슴 찢어지는 슬픈 울음소리가 또 있으리
우람한 슬픈 울음소리가 또 있으리
이처럼 슬프고도 처량한 동물을 나는 본 일이 없다
천대를 받으며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하는 불쌍한 동물을 나는 본 일이 없다
나는 낙타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한다
하물려 어떻게 이 슬프고도 가련한 동물을 타고
그 사막을 유람하리
낙타는 타는 사막 모래 위에서
채찍을 맞을 때마다 소리쳐 운다
아 -악, 아 -악,
한없이 넓은 허망한 하늘을 보며.
난
조병화
스스로
스스로의 생명을 키워
빛이 있는 곳으로 가지를 늘려
잎을 펴고
빛을 모아 꽃을 피우듯이
추운 이 겨울날
나는 나의 빛을 찾아모아
스스로의 생명을 덥히고
그 생명을 늘려
환한 내일을 열어가리
난롯가에서
조병화
난롯가에 훌훌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우고 있다
피어오르는 불꽃은 작은 열을 내며
언 마음을 풀어준다
늙어 갈수록 가난해지는 마음
외로워지는 마음
그리워지는 마음
허전해지는 마음
텅,비어가는 마음
약해질대로 약해진 마음
가랑잎처럼 애련해진 마음
난로는 온종일 훌훌
열을 내며,하나 하나
그 마음들을 덮혀준다.
혹시나 눈이라도 내리나
창밖을 내다보니
바람이 훅,훅,지나간다
어디로 가는지
난실리, 내 고향
조병화
고향에 와서 무슨 말이 있으리
먼 조상들이, 그리고 아버지 어머님이
희로애락 같이 사시며 우릴 키우신 곳
자연과 세월이 바뀐들
흙이야 바뀌리
아, 이 흙이 나의 살, 나의 피, 나의 뼈,
나의 얼이로다.
난주(蘭州)
조병화
늙은 황토물의 黃河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양쪽으로 시가지가 늘어서 있었습니다
"황하지모상(黃河之母像)"이라는 큰 돌조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어린애를 안고 있는
큰 돌조각이었습니다
길가로는 버드나무들이 가로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를 회교족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회교족들, 몽고족들, 한족들, 소수민족들이
흙처럼 어울려 살고들 있었습니다
난주(蘭州)는 황하가 흐르고 있는 큰 도시였습니다.
난주(蘭州)를 떠나면서
조병화
작은 보따리를 풀곤 하루 묵고
작은 보따리를 풀곤 하루 묵고
이렇게 지나가는 중국대륙이 여행길
참으로 많이도 돌았다
이젠 갈 길만 남은 나의 여정
다시 서울로 돌아가겠지만
이 이승을 돌고 있는 나는, 이제
이 이승을 떠나선 어디로 갈 것인가,
하면서 긴 내 생애를 생각해 본다
순간, 멀리서 고마웠던 얼굴이 몇몇
지나간 비행장의 등불처럼 반짝거린다.
남남
조병화
1
푸른 바람이고 싶었다
푸른 강이고 싶었다
푸른 초원이고 싶었다
푸른 산맥이고 싶었다
푸른 구름
푸른 하늘
푸른 네 대륙이고 싶었다
남남의 자리
좁히며
가까이
네 살 닿는 곳
따사로이
네 입김이고 싶었다
네 이야기이고 싶었다
네 소망이고 싶었다
네가 깃들이는
마지막
고요한 기도의 둥우리이고 싶었다
흙바람 개인 날 없는
어지러운 너와 나의 세월
마른 내 목소리
푸른 네 가슴이고 싶었다
푸른 네 목숨이고 싶었다
너와 날 묻은
푸른 대륙이고 싶었다.
2
날 뽑아버려라
심은 날 뽑아버려라
깊이 내린 뿌리만큼 날 뽑아버려라
아픈 사랑만큼 날 뽑아버려라
그리고 그날이 오면
널 뽑아가거라
아픈 사랑만큼 널 뽑아가거라.
3
넌 하나를 내세우고
난 아홉을 내세운다면
서운하겠지
그럼, 넌 둘을 내세우고
난 여덟을 내세운다면
그래도 서운하겠지
그럼, 넌 셋을 내세우고
난 일곱을 내세운다 하자
그래도 서운하겠지
그럼, 넌 넷을 내세우고
난 여섯을 내세운다 하자
그래도 서운하겠지
그렇다면 절반 절반
너도 다석 나도 다섯, 같이 내세운다 하지
그래도 서운해 할런지
그렇다면 넌 여섯을
난 넷을 내세운다 하지
그래도 시원치가 않을는지
그렇다면 넌 일곱을 내세우고
난 셋을 내세운다 하지
그래도 시원치가 않을는지
그것도 저것도 다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그럼 이렇게 하지
넌 열을 다 내세우고
난 네 앞에 공으로 돌지
그래도 넌 서운하겠는가.
4
강의실 구석에서
귀뚜라미 한 마리 불, 불, 떨고 있다
11월 아침
햇빛이 느린 강의실 구석에서
귀뚜라미 한 마리 불, 불, 떨고 있다.
5
나뭇가지 끝에 나뭇잎 한 잎 남아
지나는 가을 바람에 툭, 툭, 채이고 있다
하늘로 솟다 만
나뭇가지 끝에 나뭇잎 한 잎 남아
호, 호,
지나는 가을 바람에 툭, 툭, 채이고 있다
불붙고 있는
가난한 지구
겨울이 오는 문턱에서
나뭇가지 끝에 나뭇잎 한 잎 남아
때를 잃어
지나는 찬 바람에 툭, 툭, 채이고 있다
6
나의 언어는
너의 대륙에 뿌려진
꽃씨
만발하여 헤아릴 수 없는 군화(群花)의 무리
한없는 공허
난 주야로 그걸 가꾸는
충실한 들지기
오, 자유(自由)여
난 네 순수한 언어, 그 꽃.
7
사람은 누구나
각자
스스로 스스로의 운명이 아닌 운명을 숨겨 품고
각자
스스로 스스로의 밑도 끝도 없는 永遠을 향하여
길을 떠나
각자
스스로 스스로의 해를 가며
각자
스스로 스스로의 죽음의 장소로 가까이 가는 거
기쁨도 한때
슬픔도 한때
하늘에 뜬
갈갈이 구름
때를 파도치는 네 가슴
숙(宿)이여
사람은 누구나
각자
스스로 스스로의 죽음의 장소에서
나머질 버리는 거.
8
너와 같이 술을 마시면
깊은 술이 된다
어젤 이야기하며
오늘을 이야기하며
내일을 이야기하며
아, 이 강렬한 태양
너로 하여 너에 타며 끝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각자
그 끝없는 걸 남기고 사라져가는 거
사라져가는 거에 타며
날 마신다
오, 파도여.
9
지금 난 죽음의 연장을 살고 있는 거다
그 죽음의 연장을 살고 있는 거다
그 죽음의 연장에서 널 만난 거다
그 네게서 나와 흡사한 널 본 거다
그 널 대고 있는 거다
널 만지고 있는 거다
날 만지고 있는 거다
그 죽음을 만지고 있는 거다
화염의 이 계절
잠시
네 호흡으로 하여
조금은 더
죽음의 그 연장을 호흡하고 있는 거다.
10
네 대륙이 되고 싶어라
자유로이 비상할 수 있는 네 하늘이 되고 싶어라
울타리도, 칸막이도
경계도 없는
넓은 넓은 네 대륙이 되고 싶어라
있는 건 오로지
생명, 희열, 영광, 무한, 사랑과 신뢰
끝없이 피어 만발한
빛의 물결
네 그 대륙이 되고 싶어라
피곤에 지친 영원한 네 휴식
그 푸른 풀과 바람
그 둥우리가 깃들어 있는
넓은 넓은 네 대륙이 되고 싶어라.
11
호놀루루 공항까지
이 곳 하와이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심광웅군과
우리들 인간은 누구나 [路上에 있는 거]라는
마아틴 하이데거의 말을 작별의 말로
프리 하이웨이
밤 열한 시 오 분 발 괌, 홍콩, 방콕행
판. 암의 승객이 되어 장 장 일곱 시간
태평양, 별의 여행
이곳 괌의 로우컬 시간
아침 두 시 삼십 분, 열기 뜨거운 흙을 밟는다
검게 타버린 피부, 그 깊은 곳에 배 있는
고향의 말 소리
오, 평화여! 온 인류에게 골고루
아아, 불안이란 무언가
보내는 사람도
떠나는 사람도.
12
지금 전하는 이 담록(淡綠)의 보석은
하와이 빅 아일랜드
키라우에아 화산의 여신
펠레의 눈물이라는 전설의 돌
[애인을 언니에게 뺏긴 화산의 여신 펠레는
절망한 나머지 대 분화를 일으켜
애인도 언니도 하늘도 땅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지금은 홀로 피어있는 가련한 빨간 꽃
오히아]
그 펠레의 옛 눈물
그 담록의 깊은 태평양 파랑(波浪)의 애수를
담아
나를 보내옵니다
전설도 전설이지만
그리움과 사랑은
신(神)들의 시대부터 이렇게 극렬한 거
지금 나는 그 극렬이 타서
말과 언어가 되는 이 영혼
그 순수를 보내옵니다
오, 담록의 펠레여
빨간 오히아여
잠들지 못하는 나의 宿이여.
13
캄캄한 밀림 속에서
널 부른다
좌절한다
길이 없다
네가 필요하다
빛이 흐르는 길까지 빠져나가려면
너의 산소가 필요하다
아, 난 너의 새
총에 맞아 있다.
14
불꽃을 본 일이 있겠지
기도와 같은 그 불꽃을 본 일이 있겠지
나의 山莊을 닮은 공적한
먼 그 불꽃을 본 일이 있겠지
때론 神도 찾아드는 깊은 밤에
혼자서 타고 있는 그 불꽃을 본 일이 있겠지
순수를 태워선 투명한 눈물이 되는
무구한 그 불꽃을 본 일이 있겠지
시인의 혼을 태워선 말의 비를 내리는
고열한 그 불꽃을 본 일이 있겠지
산림의 빼앗긴 맹수와 같은 나의 혼에게
먼 옛집처럼 멀리 비치는
그 불꽃을 본 일이 있겠지
어두운 이 지구 인간세계에서
스스롤 태워서 스스로 꺼가는
종교와 같은 그 불꽃을 본 일이 있겠지
中世의 기도처럼 검은 상옷을 두르고
밤이 새도록 찬 겨울밤을 눈을 뜨고
혼자서 타고 있는
가는 그 불꽃을 본 일이 있겠지
아, 그와도 같이 변하는 세상에서
영원을 울고 있는
갈망과 같은 그 애련한 불꽃을 본 일이 있겠지
그게 너
그 불꽃을 탄다.
15
너도 변하는 거다
나도 변하는 거다
변하면서 서로 타고 있는 거다
그 인간존잴 타고 있는 거다
영원불멸한 건 실로 시간일 뿐
그 영원 그 침묵일 뿐
너와 나
그 속에서 부침(浮沈)을 하며
때론 가까이
때론 멀리
마냥 죽음의 자리로 변해가고 있는 거다
죽는다는 건 저 세상에로 이사를 하는 거
주거질 옮긴다는 거지만
그때까진 하는 수 없이
변화무상 이 애절을 타야한다
때론 소유하면서
때론 상실하면서
그 허망을 갈망하면서
아, 이 변화무상
별의 가슴아
너도 변하는 거다
나도 변하는 거다.
16
영원무궁, 삭지 않는 시간 속에서
삭는 이 존재의 세계
너와 나는
나날이 삭아가는 인간의 목숨으로
그 쇠진(衰殘)을 노래한다
아, 지금 지구는 사람의 번식으로 망가져 가는
꽃밭
인간 사막에 떠도는 공적한 시간이여
내가 찾는 곳에 넌 없다
어디선지 정살하는 벌레소리
찌,
지.
17
오늘과 내일, 그 사이에
지금
너와 나는 있지
[오늘을 감사하지만]
[내일을 기도할 수 없는]
그 중간에
지금
너와 나는 있지
너의 오늘과 나의 오늘은, 지금
지구의 같은 시간을 통과하고 있지만
다른 장소, 서로 떨어져서
멀리
지금, 너와 같이 있지
이러다가 불원간
너의 내일과 나의 내일은
필경
이승과 저승을 넘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월경(越境) 수속을 하겠지만
난 네게 너무 비어 있었지
마냥 보내도 아직 차지 앟은 채
너와 나
하늘이 버린 밤을
아직 네 불을 켜고 있지.
18
네 곁에서 한잔하고 싶어라
시간을 잃고, 장소를 잃고, 세상을 잃고
젖어서
네 가슴에서 마냥 취하고 싶어라
별을 흐르는 그 피곤도
변화무상한 인행 풍경에 떠서
숙명의 씨앗을 품고 앓는
보이지 않는 네 빛나는 맑은 눈물을
내 공적한 가슴에 채워
한 방울 남김없이 마시고 싶어라
하늘이 인간에게 떨어뜨린
뜨거운 새영의 번개를
너와 타서
흔적도 없이 말려버리고 싶어라
그리하여
때로
네게만 보이는
태양의 사막
그 연한 샘이 되고 싶어라.
19
편운재(片雲齋)에서
온종일 파란 하늘을 구르는
꾀꼬리 소리만 듣다
저녁노을에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시골 뻐스의 땀 냄새
난 먼 한국에 있습니다.
20
비밀의 장소에서 만나세
절망이라는 이름의 비밀의 장소에서 만나세
차표는 내가 마련하세
거스름돈 다 치뤄
되도록이면 먼 그 정거장에서 만나세
철학 이야기란 이제 그만두세
종교 이야기란 이제 치우세
형이상학의 이야기란 아예 말기로 하세
가슴의 이야길 하세
시간의 이야길 하세
시들어가는 풀들의 이야길 하세
별들의 이야길 하세
그리고 너와 나의 뜨거운 시의 이야길 하세
그리고 최초의 악술 하세
그리고 최초의 입술을 대세
그리고 구름이 되세
그리고 바람이 되세
그리고 하늘이 되세
그리고 사랑스러운 들이 되세
그리고 한 그루 장미가 되세
그리고 끝없는 시간이 되세
그리고 언젠가 이곳을 찾는
상한 시인의
마르지 않는 긴 긴 노래가 되세.
21
하늘로 향한 열두 개의 창 중에서
한 개의 창을 열고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만지작거리며
널 그린다
넌 고요한 사원(寺院)
기도로 가득 찬
적막한 눈동자
생각하다 버리는
맑은 시간의 쪼각
아, 떨어져 있는 이 자리
고독한 나날을
넌
내 귓가에서 솔솔거리는
작은 산새
먼 그 복음이다.
22
네 파란 들이 되고 싶어라
알알이 꿈을 밴 말들이
멋대로 꽃을 피워
파란 하늘이 물결치는
빛의 바람의, 들이 되고 싶어라
인간의 괴로움, 슬픔은 도시에
인간의 외로움은
군중 속에
그리하여
인간의 일체의 욕망에서 훨 훨
벗어나
풀과 꽃의 사랑이 되어
망설이는 네 길이 되고 싶어라
때를 꽃피우는 들이 되고 싶어라
그리하여
마지막 내 그 밤은
널 위하여 비는
온 하는
제 별밭이 되고 싶어라.
23
묵은 사전 책갈피 속에 고이 접어둔
지중해(地中海) 섬 꽃을 보내옵니다
코르시카의 산꽃입니다
해발 이천삼백 미이터
그 피이크에 피어 있었읍니다
가냘픈 작은 꽃입니다
노란 머리카락을 쉬임없이
검푸른 바닷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읍니다
내 세상 가장 태양이 가까운 봉우리
그곳에서 이 꽃을 만났읍니다
이름은 모릅니다
유럽의 하늘 보조개
먼 이곳, 한국에까지 올 줄이야
했겠지요
오 년 전 여름의 일입니다
지중해 먼 그 물결이
지금도 이 꽃에 파도치고 있읍니다
내 청춘처럼
검푸른 지중해에
뜬
태양의 이 사랑을 보내옵니다.
24
너의 하얀 가슴에 나의 씨앗을 뿌렸으면
끝도 없는, 구름도 닿지 않는,
너도 돌보지 않는, 먼 먼 그곳
하얀 너의 변두리에
한 평이라도 좋겠읍니다
네 밭을 빌려서
나의 보이지 않는 그 씨앗을 뿌렸으면
바람에도 날리지 않는
홍수에도 떠내리지 않는
한냉에도 얼지 않는
가뭄에도 타지 않는
세월에도 시들지 않는
그 편로(遍路)의 씨앗을 뿌렸으면
그리고 열매들이 이곳저곳에서 하늘을 품는
가을을 네게
먼지 하나 없이 안겨 주었으면.
25
널 위하여
잘 열리는 사과나물 키워 놓겠어요
해충이 들지 않게
나무들의 피부들도 잘 보살펴 놓겠어요
긴 긴 겨울, 적막한 날이 계속될 땐
파이프의 향기로 따뜻이 어루만져 놓겠어요
뿌리도, 줄기도, 가지도, 향기도, 모두
강렬한 내 고독처럼 건강히 성장하도록
날 그 뿌리 밑에 묻어 놓겠어요
흐르는 세월 바닥 깊은 곳에
철새처럼 찾아드는 네 소식을 기다리며
나무 밑에 핀 꽃과
아무도 모르게 뜨거운 숨을 나누겠어요
그리하여 또다시 가을이 돌아와
가지가지에 열매들은 남겨논 채
그저 사라지면
아린 가슴을 바람에 던지고
먼 여행을 떠나겠어요
그리고 네게서 가장 먼 장소에서
생각을 버리겠어요.
26
나의 자화상(自畵像)
버릴 거 버리고 왔습니다
버려선 안 될 거까지 버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27
네게 필요한 존재였으면 했다
그 기쁨이었으면 했다
사람이기 때문에 지닌 슬픔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번뇌라든지, 일상의 그 아픔을
맑게 닦아 낼 수 있는 네 그 음악이었으면 했다
산지기가 산을 지키듯이
적적한 널 지키는 적적한 그 산지기였으면 했다
가지에서 가지로
새에서 새에로
꽃에서 꽃에로
샘에서 샘에로
덤불에서 덤불로
골짜기에서 골짜기에로
네 가슴의 오솔길에 익숙턴
충실한 네 산지기였으면 했다
그리고 네 마음이 미치지 않은 곳에
둥우릴 만들어
내 눈물을 키웠으면 했다
그리고 네 깊은 숲에
보이지 않는 상록의 나무였으면 했다
네게 필요한, 그 마지막이었으면 했다.
28
널 위해 시가 씌여질 때
난 행복했다
네 어둠을 비칠 수 있는 말이 탄생하여
그게 시의 개울이 되어 흘러내릴 때
난 행복했다
널 생각하다가 네 말이 될 수 있는
그 말과 만나
그게 가득히 꽃이 되어, 아름다운
시의 들판이 될 때
난 행복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너와 나의 하늘이
널 생각하는 말로 가득히 차서
그게 반짝이는 넓은 별밤이 될 때
난 행복했다
행복을 모르는 내가
그 행복을 네게서 발견하여
어린애처럼 널 부르는 그 목소리가
바람이 되어
氣流 가득히 네게 전달이 될 때
난 행복했다
아, 그와 같이, 언제나
먼 네가 항상 내 곁에 있는 생각으로
그날 그날을 적적히 보낼 때
空虛처럼
난 행복했다.
29
오해로는 떠나질 마세
오해를 남기고선 헤어지질 마세
오해를 지닌 챈 갈라지질 마세
내가 널 얼마큼 고마와했는지
내가 널 얼마큼 아파하고 있는지
내가 널 얼마큼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네가 날 얼마큼 고마와했는지
그리고 네가 날 얼마큼 아파하고 있는지
그리고 네가 날 얼마큼 생각하고 있는지
혹은 너와 내가 날 얼마큼 알았는지
혹은 너와 내가 날 얼마큼 알고 있는지
혹은 너와 내가 날 얼마큼 깊이 가지고 있는지
너와 날
너와 내 자리를
너와 내 그 하나인 그 서로를
서로 알기 전엔 떠나질 마세
서로 모르고선 헤어지질 마세
서로 미지근히는 갈라지질 마세
아쉬우면 아쉬운 만큼
서운하면 서운한 만큼
아프면 아픈 만큼
서로 오해로는 떠나질 마세
서로 오해를 남기고선 헤어지질 마세
서로 오해를 지닌 챈 갈라지질 마세
이 하늘
하늘까지.
30
깊은 내 외로움은 널 모르게 한다
깊은 내 노여움은 널 모르게 한다
상하기 쉬운 내 깊은 하늘은 널 모르게 한다
그러듯
깊은 네 외로움은 날 모르게 한다
그리고 네 깊은 노여움은 날 모르게 한다
그리고 상하기 쉬운 네 깊은 하늘은 날 모르게 한다
열어도 열어도 모자라는 마음
보여도 보여도 모자라는 마음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는 마음
아, 너와 나의 깊은 외로움은 너와 날 모르게 한다
너와 나의 깊은 노여움은 너와 날 모르게 한다
너와 나의 상하기 쉬운 깊은 하늘은
이렇게 너와 날 모르게 한다.
31
나의 적막은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너의 적막을 고루 감싸질 못한다
나의 적막은 너무 칼칼하기 때문에
너의 적막을 고루 다듬질 못한다
나의 적막은 너무 옹색하기 때문에
너의 적막을 고루 만지질 못한다
나의 적막은 너무 메말라 있기 때문에
너의 적막을 고루 적시질 못한다
나의 적막은 너무 허황하기 때문에
너의 적막을 고루 보질 못한다
나의 적막은 너무 적막하기 때문에
너의 적막을 채우질 못한다
아, 나의 적막은 너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너의 적막을 메꾸질 못한다
32
겨울이 가면
풀은 다시 봄을 만나지만
한번 보낸 세월
사람은 다시 만나질 못한다
별은 총총
해와 달은 무궁
우주의 먼지처럼 떠 있는 지구
작은 풀밭에
이슬 같은
목숨
목숨에 묻힌
너와 나의 언어
너와 나의 언어는
침묵
침묵이 마르면
작별이 온다
침묵을 사는 거다
그 사연을 사는 거다
그 따사로움을 사는 거다
그 아픔을 사는 거다
그 감사를 사는 거다
그 엉김을 사는 거다
그 비밀을 사는 거다
겨울이 가면
봄은 다시 나뭇잎을 만나지만
한번 보낸 말
사람은 다시 만나질 못한다.
33
네 눈에서 날 본다
네 말에서 날 듣는다
네 숨에서 날 쉰다
네 몸에서 날 만진다
널 모르면서
날 모르면서
따로
따로
이 존재
이 존재에 기거하며
보이지 않는
너와 나
네 눈에서 날 본다
네 말에서 난 듣는다
네 숨에서 날 쉰다
네 몸에서 날 만진다
작별 속에서 날 추린다.
34
새벽 세 시
성당(聖堂)의 종소리
숲속의 비둘기 몰고 나오면
믿는 자, 믿지 않는 자
인간의 마을
높은 벽을 넘어서
아침은 온다
밤 속에 돌던 혼자를 거두고
커텐을 열면
뿌연 안개
떠나는 자와 머무는 자
분주한 거리
난 아직 떠나질 못한다
이 생각 저 생각
마냥 캄캄한 생각, 내키지 않는 배회
이걸 돈다
성당의 종소리
새벽 네 시
숲속의 비둘기 몰고 나오면
믿는 자, 믿지 않는 자
너와 나
인간의 마을, 아직
난 네 곁에서 돈다.
35
하룰 날 몰고
사방을 갈다가
해가 져서
넌 너의 잠자리로
난 나의 잠자리로
돌아가면
밤은
막막한 우주
수만리 통로 없는 곳에
혼자 있는 생각
생각에 불을 당기고 손을 녹인다
결국은 뭔가
그게 뭔가
부질없는 생각으로 파이프를 물면
허연 연기
연기 속에 감도는
상봉과 이별
별거 없는 너와 나의 존재
아침이 되고
밤이 되고
작별이 되고
망각이 되고
넌 너대로 날 다는 모르는 거리
난 나대로 널 다는 모르는 거리
그러한 존재의 안개 속에서
동행타 서로 갈라질
종말
적막한 건 사귄 정이다
네게 가까이한 만큼
네게 기대인 만큼
네게 매낀 만큼
네게 날 던진 만큼
널 그리워한 만큼
36
사막의 모래알들이
물을 그리워하듯이
너와 나, 남남사이
난 널 그리워한다
타는 사막의 모래알들이
각각 떨어져서 목마르게 타듯이
너와, 나 남남사이
난 널 탄다
사막에 깔린 수만억의 모래알들이
각각 혼자서
물 없는 자리 떨어져서 있듯이
삼십오억 깔린 인간의 세계
서로 남남
너와 나
인연의 자리 떨어져 있다
비가 내려야 서로 손을 만져보고
한동안 젖어
같이 살아가는 사막의 모래알들처럼
서로 남남
너와 나의 사이
말이 있는 동안
한몸 되어 순간을 이어간다
아, 사막의 모래알들이
물을 그리워하듯이
타는 사막 수만억의 모래알들이
비를 타듯이
삼십오억 깔린 인간의 세계
서로 남남
난 널 탄다.
37
너의 차례 먼저 될는지
나의 차례 먼저 될는지
모르나
칼칼한 이 이승의 정거장에서
헤어져 뜨면
넌 어디로
난 어디로
하늘인지 별인지 구름인지 산인지 계곡인지
들인지 물가인지 개울인지 풀인지
나무인지 열매인지
혹은 어느 작은 벌레의 쉬엄 끝인지
네가 가 있을 곳은 어디고
내가 가 있을 곳은 어딜까
도는 거다
먼저 뜨신 어머니 말씀대로
아, 이 우주 망망
도는 거다
하더라도 넌 어디로 돌고
난 어디로 돌고 있을 거지
먼 망각으로
너와 나 남남
아린 생각
이걸 살며
남남의 거리(距離)
지금 잠시 마주 본다.
38
사람은 누구나 서로 남남이지만
난 너의 숙소
넌 나의 숙소
인간 서로 끼리끼리의 존재의 숙소로
서로 그 증인이 되어
생각을 통로로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그만큼
가까이 멀리 서로 맞살고 있지만
너, 나, 떠나면
누가 널, 날, 이야기하리
사람은 누구나 서로 남남이지만
너와 난
아직은 같은 이 우주의 역전마을
만나면 이야기 되고
떨어지면 아쉼 되는
인간의 자리
만나며 헤어지며 다시 만나며
가까이 멀리 서로 맞살이 하고 있지만
너 없고 나 없는
아주 먼 훗날이면
누가 널, 날, 이야기하리
한 달이 지난다
일 년이 지난다
십 년이 지난다
백 년, 천년이 지나면
너와 나, 묘연한 흔적
돌 하나 여기요, 한들 그게 영원하리.
39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세상에로
우리 서로 따로 이살 떠나면
우린 서로 주소도 모르리
지상에서 서로 편질 띄우던 거처럼
혹은, 달아서
훅, 찾아가던 거처럼
한동안 정하고 거처하던 자리
간혹 이동을 한다손치더라도
어떻게 어떻게
기별 길 있을 수 있던 장소
그런 주소는 저 세상엔 있을 리 없으리
하늘인지, 땅인지, 별인지
나무가지인지
까마득한 이 우주
한번 뜨면 그뿐
다시 상봉할 길 다시 없으리
주소가 없는 곳으로 떠나고 있는 거다
길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있는 거다
말도 필요없는 곳으로 떠나고 있는 거다
눈물이고, 정이고, 기쁨이고, 고통이고
이 세상 인연
다 풀고
주소가 없는 곳으로 이살하고 있는 거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세상에로
서로
따로
매일.
40
네가 내게 있듯이
네가 내게 가까이 있듯이
네가 내게 멀리 있듯이
네가 내게 달이듯이
네가 내게 해이듯이
네가 내게 별이듯이
네가 내게 밤이듯이
네가 내게 마을이듯이
네가 내게 이야기이듯이
네가 내게 남남이듯이.
41
어젠 그 얼굴 그 얼굴이
안경을 스쳐가더니
오늘은 그 얼굴 그 얼굴이
머릴 지나간다
그리고, 지금은
그 얼굴 그 얼굴이
고요한 생각을 어지러논다
눈에 보이는 나를, 이제
눈밖에 모두 내던지고
추려서, 보이지 않는 나를 사는
내게
교대로, 혹은
범벅이 되어, 혹은
무리를 져서, 혹은
혼자서 나타나는
얼굴
이자릴 내가 뜨면
어디로 몰려들 갈까
지금쯤, 먼저 뜨신 어머님은 어디 계실까
그곳에서, 지금도
내 얼굴을 기억하실는지
내일이나
모래, 혹은
다음날 그곳을 내가 지날 때
얘,
대번 이렇게 알아보실는지
나와 인사가 있는 사람아
안면이 있는 사람아
이야길 한두번 나눈 사람아
한번 한자리 같이한 사람아
손을 댄 사람아
세월을 수삼년 같이 세월하던 사람아
차례로 떠난 얼굴들
바쁜 작별을
서금서금, 혹은
아프게, 혹은
가볍게, 혹은
시원히, 혹은
그렇게
어젠 그 얼굴 그 얼굴이
안경을 스쳐가더니
오늘은 그 얼굴 그 얼굴이
머릴 지나간다
그리고, 지금은
그 얼굴 그 얼굴이
아주 먼 거리에서 아주 사라져 간다.
42
때로 이름을 알고픈 사람이 있다
한동안 간직하고픈 이름이 있다
그러다가
무지개 사라지듯, 하늘에서
그렇게 잊고픈 생각이 있다
3만6천 피이트
태평양 구름 상공 위를
마냥 같이 나르다가
사라진 미소
호놀루루
아로아
하와이안 기타
나른한 살결
따가운 햇빛 가루
속에
오가는 길손
서로 사라지며
때론 이름을 알고픈 사람이 있다
한동안 간직하고픈 이름이 있다
그러다가 세월 사라지듯, 혼자서
그렇게 잊고픈 생각이 있다.
43
너의 말이 들리지 않는 곳에
나는 있다
너의 마음이 닿지 않는 곳에
나는 있다
너의 상념이 미치지 않는 곳에
나는 있다
존재에 취하며
밝음에 취하며
너무나 가혹한 이 부재
살을 대며
넌 날 감지하지 못한다
호,
호,
네가 마신 공기 밖에
나는 있다
네가 묻은 바람 밖에
나는 있다
네가 닿는 하늘 밖에
나는 있다.
44
- 꽃피는 계절에
지끈거리는 어지러움을
산다
바스라지는 황홀을
산다
아찔거리는 기별을
산다
하늘에
대지에
그건
발가벗은 향연
그건
휘몰아친 빛의 행렬
그건
무지개의 추락
그건
생명의 봉기
그건
온 중생의 축제
눈이 먼다
귀가 먼다
입이 먼다
말이 먼다
어지러운 이별을
산다
45
웃어본 일이 없다
하늘 아래
이 맑은
정
그 웃음
웃어본 일이 없다
봄 씨앗 하늘 나르듯
벌나비 하늘 나르듯
구름 바람 빛속 흐르듯
기별처럼 떠 있는
이 맑은
정
그 웃음 웃어본 일이 없다
널 생각하면 아스라지는 상념
분출하는 굴욕
아린 핏줄
날 풀 길 없다
날 열 길 없다
날 놓을 길 없다
남남으로
남남으로
너무나 남남으로
이 싸늘한 동행
얼음을 산다
불을 산다
포길 산다
벌레여
빌딩에서
찌,
찌,
아, 가슴아
난 너와 웃질 못한다
난 너와 같이 하질 못한다
난 너와 회활 못한다
웃어본 일이 없다
아, 하늘 아래
이 맑은
정
너와 웃질 못한다.
46
- 푸리지아 꽃 앞에서
넌 바람을 모른다
넌 구름을 모른다
넌 초원을 모른다
넌 개울을 모른다
넌 호수를 모른다
넌 흙바람을 모른다
나의 테마는 죽음
나의 소재는 죽음
나의 노래는 죽음
넌 언 들판의 밤을 모른다
넌 언 들판의 길손을 모른다
넌 언 길손의 손을 모른다
그 손에 흐르는 가는 혈액을 모른다
넌 피곤한 자의 하늘
행복한 자의 눈물
멍,
물러나는 자의 악수
넌 사랑이
어떻게 식어가는 걸 모른다.
47
네가 내게 이야기한 말을
그대로
네게 돌려보내기 위하여
가는 바람
난 좀더 이 자리에 있어야 하겠다
네가 내게 내던진 말을
그대로 하나하나 묶어
네게 돌려보내기 위하여
난 좀더 이 자리에 머물러야 하겠다
생각해서건
생각 안 해서건
네가 내게 마구 퍼부었던 말을
하나하나 말끔히 씻어
네게 보내기 위하여
난 좀더 이 자리를 견뎌야 하겠다
지금 내 머린 네가 만든 가시밭
지금 내 가슴은 네가 만든 사막
지금 내 심장은 네가 만든 화산
바람 속에서 이 분노
구름 속에서 이 망각
푸른 초원에서 이 겨울
밤
낮
네 말을 돌며
뚫리지 않는 내 가슴
네가 내게 심은 말을
뽑아
그대로
네게 다 돌려보내기 위하여
가려진 시간
잃은 혼자
좀 더 이 자리에 묵어야 하겠다.
48
고독을 이야기하기엔
세상 너무 변했지만
절여드는 이 외로움
이 고독
숨기며 떠난다
空港을 벗어나면
곧장 하늘
줄곧 말이 필요없는 구름 위
해는 쨍, 쨍,
떠나나 머무나
내리나
머릿속은 항상 캄캄
개이지 않는 한 곳
너와 나, 천리 밖에서
나를 앓는다
고독을 이야기하기엔
세상 너무 변했지만
출발이 고독
종착이 고독
떠서
돈다.
49
다 네걸로 하자
그대로 뭘 더 원하는 게 있는가
다 네걸로 하자
그래도 뭘 더 바라는 게 있는가
비켜서 비켜 서서
사는 빈 이 자리
다 네걸로 하자
그래도 뭘 더 따질 게 있는가
피해서 떠도는
절인 이 가슴
다 네걸로 하자
그래도 뭘 더 캐낼 게 있는가
내게 필요한 건 네게 하나도 없다
네게 필요한 건 내게 하나도 없다
훨훨 털고 죽음을 기다리는
황막한 이 마음
떠남을 앓지 않기 위하여
오늘을 앓는
아린 이 생각
네게 다 던지고 사는 빈 자리
그래도 뭘 원하는 게 있는가
그래도 뭘 더 따질 게 있는가
그래도 뭘 더 캐낼 게 있는가
그래도 서운한 게 있는가
더 바라는 게 있는가.
50
인생은 몇편의 단편으로
이루워지는
장편
눈물과 웃음이 같이 흘러서
심심치 않은 이야기
마르지 않는 곳에
네가 있다
나의 생애는 그 속에 깔려
살아서 무덤
죽어서 무덤
무덤 속에서 죽음을 감도는
이 혼자
너와 나의 거리는
이웃이며
천리다
우주공간
빙 빙
떠서 노상 떠날 생각
보이는 게 모두 무색이다
인생은 몇 편의 단편
으로, 이루워지는
장편
그 한 줄을 산다.
51
홀로 있는 곳에
하늘이 있다
홀로 있는 곳에
땅이 있다
홀로 있는 곳에
시간이 있다
골목길을 돌다
비켜서면
멍
무한한 부재
홀로 있는 곳에
목소리가 있다
비굴해질 거까진 없지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해서
있을 거까진 없지
홀로 있는 곳에
우주가 있다
홀로 있는 곳에
일월이 있다.
52
바람이 부는 계절에
나는 나무였다
뿌리로 모여드는
마음
가지 위엔 노상
어지러운 바람이었다
하늘은 신라 고구려
푸른 옷고름
깔린 치마
목화 구름 띄엄
띄엄
뜬 만리
말 잃은 시간
머리 속엔 노상
칼칼한 바람이었다
봄 여름
세월 없이
바람 부는 계절
뿌리로 숨어드는
생각
가지 끝엔 노상
닿지 않는 하늘이었다
잡은 자와 잡힌 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먹는 자와 먹히는 자
밝은 산천
사방
바람이 부는 계절에
나는 나무였다
뿌리로 뻗어드는
가슴
가지가지엔
검은 바람이었다.
53
목숨은 마시다 토하는 공기
육체는 공기 머무는 의지간
인정만이
외톨이다
생각은 이곳 저곳 떠도는
허기진
선비
스스로 밝게
스스로 사그러진다
인간은 비치다 사라지는
무지개
맑게 떠있는
미소
산다는 건
변한다는 거
빛 속에서
바람 속에서
서로의 입김 속에서.
54
노형(老兄), 지금 이 벌판은 어딥니까
어디쯤 됩니까
어느 곳이지요
노형이 있는 곳이지요
노형이 지나고 있는 곳입니다
노형이 동행하고 있는 자리지요
노형은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노형이 태어나신 곳은
어디신가요
노형이 오신 곳이지요
노형이 태어나신 곳
그 이웃입니다
노형은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이십니까
어느 쪽
어느 곳으로
가시는 노상이신가요
노형이 지금 가시는 곳이지요
그쪽
그곳으로
가는 노상입니다
눈보라
바람치는
겨울
밤 길고 캄캄한 들
노형과
노형
잘못 생각한 건 아닌가
잘못 떠난 건 아닌가
잘못 들은 건 아닌가.
55
떠나는 자
머무는 자
세상은 그렇게 놓여진
상봉과 작별
무량한 시간
순간의 장소
사랑도 미움도
일순
동행 동숙하며
작별
하룰 산다
하룰 죽는다
실로 생명은 우연한 결합
남남
마주 통하여
정들어 정붙이다 목숨 끊어지면
그뿐
떠나는 자
머무는 자
영원
남는 자는 외롭다
인간이여
남남의 동행이여.
낮과 밤
조병화
1
나뭇잎 속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너는 내 머릿속을 지나간다
나뭇잎 속에서 잠을 자는 새처럼
너는 내 머릿속에서 잠을 잔다.
2
날 뽑아버려라
심으 날 뽑아버려라
깊이 내린 뿌리만큼 날 뽑아 버려라
아픈 사랑만큼 날 뽑아버려라
그리고 그날이 오면
널 뽑아가거라
아픈 사랑만큼 널 뽑아가거라.
4
바람만이 맞춘 너의 입술
너의 입술가에서
목욕을 한다
시간은 서둘러
자릴 걷우고
나는 아직
내 자리가 없다
바람만이 맞춘 너의 입술
바람만이 맞춘 너의 입술
7
욕망은 쓸쓸한 벗
가난한 육체에 기거하며
어둠을 산다
한적한 곳에서 담배를 물고
하는 말이
“너는 빈 놈이다”
종소리 울리는 마을에
아침이 없는 방
혼은 문턱에서
혼은 문턱에서
11
너는 너의 어항
속에 있다
너는 나를 자유로이 하나
갈 곳이 없다
자유는 때때로 그리운 고향
넓은 하늘이어도
혼자선 무용한 장소
생명이 그러하듯이
생명이 그러하듯이
14
인간은 혼자 죽는 것
인간은 혼자 죽는 것
인간은 혼자 죽는 것
깊은 산 속의 작은 벌레처럼
15
널 보았기 때문에
널 보았기 때문에
널 보았기 때문에
마침내
열매를 먹은 것처럼
열매를 먹은 것처럼
16
너를 보고 싶던 내 눈은
지금 너를 보고 있지만
너를 보고 싶던 내 눈은
지금 너를 보고 있지만
너를 보며 네가 없다
너를 보며 네가 없다.
20
혼자서 살다가는 길을,
알으켜 다오.
혼자서 있다가는 길을,
알으켜 다오.
22
절벽에 집을 짓는 새처럼
나는
너의 절벽에 집을 짓는다.
31
시간을 본 사람이 있느냐
시간을 만져 본 사람이 있느냐
나뭇잎이 바람을 만져 보듯이
너의 마음은
깊은 시간
보이지 않는 자리로
보이지 않는 자리
35
등불을 빌려준 사람이 있다
접어든 마을
우물가
길을 물음에
“이 마을엔 당신이 찾는
길은 없소”
37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다만
멀 뿐이다
너를 잃은 것이 아니다. 다만
멀 뿐이다
마음이 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멀 뿐이다.
42
나의 말은, 아직
날 찾아내질 못한다.
나의 말은, 아직
날 이야기하질 못한다.
나의 말은, 아직
네게 날 전하질 못한다.
낮달
조병화
세월이 잃고 간 빚처럼
낮 하늘에 달이 한 조각 떨어져 있다.
낮은 목소리로
조병화
1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옵니다
나에게 주어진 가장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옵니다
먼 목소리로 이야기하옵니다
2
가장 많은 하늘을 가지고 계시옵니다
가장 많은 하늘 아래 빈 그 자리
아름다움이며 슬픔이며 사람이 사는 곳
가장 많은 눈물을 가지고 계시옵니다
3
혼자 계시옵니다 항상 혼자 계시옵니다
가장 많은 것 다 가지고 혼자 계시옵니다
이 세상 웃음이고 이야기고 벗이고 많은 것
실은 혼자 계시옵니다 항상 혼자 계시옵니다.
6
보이옵는 자리에 항상 계시옵니다
보이지 아니하옵는 자리에 항상 계시옵니다
얼굴, 눈, 코, 귀, 목, 몸, 나직이 보이시오며
보이지 아니 하옵는 자리에 항상 계시옵니다
15
주어진 내 자린,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아니옵니다
보이옵는 세계도 보이지 아니 하옵는 세계도 아니옵니다
존재의 세계와 부재의 세계를 떠돌며
항상 옆 자리 뵈옵는 자리, 바람의 자리옵니다
18
반복이옵기 때문에 하늘 아래 하나를 갖고 싶어 하옵니다
반복이옵기 때문에 하늘 아래 가장 먼저 걸 갖고 싶어 하옵니다
반복이옵기 때문에 하늘 아래 단 하나 나를 갖고 싶어 하옵니다
반복이옵기 때문에 하늘 아래 단 하나 갖고 싶어 하지 아니 하옵니다
40
생각을 항상 주시옵는 자리에 계시옵니다
생각을 항상 비쳐 주시옵는 자리에 계시옵니다
생각을 항상 자리잡게 하여 주시옵는 자리에 계시옵니다
생각 속에 항상 이 목숨 다하여 주시옵는 자리에 계시옵니다
42
가진 거 없으올 때, 찾아뵈옵니다
빈 마음이 올 때, 찾아뵈옵니다
젖은 거 없으올 때, 찾아뵈옵니다
빈 바람이 올 때, 찾아뵈옵니다
43
아름다운 것은 실로 외로움이옵니다
지혜로운 것은 실로 외로움이옵니다
평화로운 것은 실로 외로움이옵니다
은혜로운 것은 실로 외로움이옵니다.
45
시간은 마냥 한 자리에 있는 것이옵니다
유구히 마냥 한 자리에 있는 것이옵니다
변하오며 지나가옵는 것은 사람이올 뿐
시간은 유구히 마냥 한 자리에 있는 것이옵니다
68
갖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묶는다는 것이옵고
소유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상실한다는 것이옵고
풍만하다는 것은 스스로를 빈곤케 한다는 것이옵고
잃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갖는다는 것이옵니다
69
이 ‘보이옵는’ 세상, 거리를 갖는다는 것은
그리움을 갖는다는 것이옵고
이 ‘보이옵는’ 세상, 그리움을 갖는다는 것은
목숨을 갖는다는 것이옵니다
70
잊게 하옵소서
상실케 하옵소서
버리게 하옵소서
가깝게 하옵소서.
81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옵니다
주시옵신 가장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옵니다
참으로 `위대'하옵니다 그 마지막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그 `있음'
낯설은 전화
조병화
선생님예, 오늘 아침 텔레비죤
잘 보았습니더, 그런데예
집의 아이가예, 대학 일학년인데예
사람을 싫어하고, 말을 하지 않고,
혼자만 있고, 지금은 병상에 있는데예
우짜면 좋을까요,
선생님도 혼자서 고독하게 작업만 하신다는데요,
이러한 한 여인의 낯설은 전화 소리에
나는 "글쎄요" 하면서
내 마음은 순간 한없이 그 학생에게
가 있었다.
내가 시를 쓰는 건
조병화
내가 시를 쓰는 건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나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하나를 쓰고 그만큼
둘을 쓰고 그만큼
셋을 쓰고 그만큼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에게 편질 쓰는 건
언젠가 돌아올 너와 나의 이별
그것을 위해서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너와 작별을 하기 위해서다
아무렇게나 버리기엔 너무나 공허한 세상
소리없이 떠나기엔 너무나 쓸쓸한 우리
그냥 작별하기엔 너무나 깊은 인연
내가 시를 쓰는 건
하나 하나 나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나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나를 잊기 위해서다
그와 같이
내가 네게 편질 쓰는 건
머지않아 다가올 너와 나의 마지막
그 이별
그걸 위하여
하나 하나 너를 버리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너를 떠나기 위해서다
하나 하나 너를 잊기 위해서다
내 마음에 사는 너
조병화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너는 먼 별 창안에 밤을 재우고
나는 풀벌레 곁에 밤을 빌리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잔다
너의 날은 내일에 있고
나의 날은 어제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세월이다
문 닫은 먼 자리, 가린 자리
너의 생각 밖에 내가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있다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내 마음은
조병화
내 마음은 숨어서 내리는 봄비
칠십이 되어도 게이는 날이 없구나
꽃은 피었다 가고
바람은 불다 가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세월은 돌아도
나무는 한 자리, 정한 자리에서
평행을 말이 없다
어느덧, 올해도 가지가지에
노랗게 솟아오르는 먼 산수유
봄이 오는 문턱에서
봄비는 부슬부슬 숨어서 내린다
아, 오늘도 내 마음은 젖어 내리는 봄비.
내 몸의 열매들
조병화
지금 나의 몸은 가을로 한창이다
지나간 세월들이 세월대로 익어
제자리, 제자리, 가지, 가지
주렁주렁 열매들을 매달고 있다
혼자서 익은 열매
같이 익은 열매
쭉정이로 익은 열매
벌레로 익은 열매
지금 나의 몸은 가득히
알알이 익은 열매로
떠날 채비를 한 가을로 한참이다
빨리 서두는 이 겨울 앞에서
사는 거만큼 익어, 드리는 이 열매들
어머님, 너무나 죄송하옵니다.
그중의 하나만은
아직도 아물지 못한 상처이옵니다.
내일
조병화
걸어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바다가 있었습니다
날개로 다는 날 수 없는 곳에
세월이 있었습니다
꿈으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세월이 있었습니다
아, 나의 세월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내일이 있었습니다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조병화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너는 먼 별 창 안에 밤을 재우고
나는 풀벌레 곁에 밤을 빌린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잔다
너의 날은 내일에 있고
나의 날은 어제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세월이다
문 닫은 먼 자리, 가린 자리
너의 생각 밖에 내가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있다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너와 나는
조병화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하여야 한다
떼어버린 카렌다 속에, 모오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또 하나 행복한 날의 기억을 위하여서만
눈물의 인사를 빌리기로 하자
하루와 같이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와도 같이 보내야 할 인생들이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이 돌아간
샨데리아 그늘에 서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작별을 해야 한다
너와 나는.
너의 마음에
조병화
나의 말이 너의 마음에
자릴 잡지 못한다 해도
나의 말이 너의 마음에
집을 짓지 못한다 해도
나의 말이 너의 마음에
새겨지지 못한다 해도
나의 말이 너의 마음에
바람처럼 바람처럼
지나간다 해도.
너의 사랑은
조병화
하늘에서 밤마다 무수히
반짝이고 있는 별들이 제각기, 제자리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듯이
나무 줄기에서 무수히 피어나 있는
꽃송이들이 제각기 제자리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듯이
바람 부는 넓은 들판에서 무수히
생글생글 고개 흔들며 피어 있는 작은 들꽃들이
제각기, 제자리 자리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듯이
이 세상 만물들이 태어나서부터
제각기, 자기가 태어난 자리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듯이
아, 그렇게
너의 사랑은 이 어두운 우주에서
너만이 간직하고 있는 절대적인 빛이 아닌가.
넌
조병화
넌 그 자리에서 좋은 거다
그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좋은 거다
지금 이곳에서
널 생각하고 있는 거리만큼
머릿속에서
먼 그 자리에서 좋은 거다
때론 연하게, 때론 짙게
아롱거리는 안개
밋밋한 자리
감돌며
밤낮을 나보다 한 발 앞자리
허허
떠 있는 그 '있음'
넌 그 자리에서 좋은 거다
그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좋은 거다
지금 이곳에서
널 생각하고 있는 거리만큼
충만히
머릿속에서
넌 그 거리에서 좋은 거다
항상
널 위해서 시(詩)가 쓰여질 때
조병화
널 위해서 시가 쓰여질 때
난 행복했다.
네 어둠을 비칠 수 있는 말이 탄생하여
그게 시의 개울이 되어 흘러 내릴 때
난 행복했다.
널 생각하다가 네 말이 될 수 있는
그 말과 만나
그게 가득히 꽃이 되어 아름다운
시의 들판이 될 때
난 행복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너와 나의 하늘이
널 생각하는 말로 가득히 차서
그게 반짝이는 넓은 별밤이 될 때
난 행복했다.
행복을 모르는 내가
그 행복을 네게서 발견하여
어린애처럼 널 부르는 그 목소리가
바람이 되어
기류(氣流) 가득히 네게 전달이 될 때
난 행복했다.
아~~그와 같이 언제나
먼 네가 항상 내 곁에 있는 생각으로
그날그날을 적적히 보낼 때
공허(空許)처럼
난 행복했다.
노래를 불러도 소리를 잃은 피리
조병화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나 돌아가
영 나를 잃어버리는 순간
그날까지는 나를 내가 잃어버릴 수가 없듯이
그냥 이대로 당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목마른 가슴의 아픔입니까
나뭇잎이 그 무성한 가지에서 떨어져
산산이 흐트러져 바람에 날리어 눈에 덮이듯이
향기에 아지랭이 핀 푸른 당신의 가슴을
그냥 이대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얼마나 참혹한 세월의 아픔입니까.
노래를 불러도 소리를 잃은 피리
먼 아지랭이 피어오르고 당신의 연한 눈.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나 돌아가
영 당신을 두고 당신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 날까지는 내 가슴에 아지랭이 그대로 끼듯이
아지랭이 속에
당신은 영 피어오르는 내 마음의 봄.
노아
조병화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方舟)를 지어라……(창세기 제6장)
사랑하는 사람아
이 `밤의 홍수' 속에서
너와 나는 사랑으로 방주를 짓자
사랑해도 사랑해도 사랑이 모자라면
나머지는 그리움으로 짓자
형제들의 홍수 속에서
카인(=얻음)과 아벨(=사모)의 홍수 속에서
이 `잔인의 홍수' 속에서
입술을 마주 댄 사람아
너와 나는 그리움으로 방주를 짓자
방주가 부서지면
마주 가라앉자
깊은 자리로
깊은 자리로.
노을
조병화
해는 온종일 스스로의 열로
온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여놓고
스스로 그 속으로
스스로를 묻어간다
아, 외롭다는 건
노을처럼 황홀한 게 아닌가
눈 내리는 밤엔
조병화
-- 비가 쏟아져 오면 우울한 남자의 가슴을 디디고
소리 없이 지나가는 듯 한데 --
아 오늘과 같이 눈 내리는 밤엔
여인(女人)의 따뜻한 가슴 안에 귀여운 아해처럼
내가 안겨 있는 듯한 무슨 일일까
난로 앞에선가
혹은 물 끊는 화롯가 어디선가
오늘 밤엔
로만스의 기쁜 소식이 오락가락
나도 헤아릴 수 없는 기다림에 잠이 오락가락 --
나는 가까워오는 봄이 싫어
눈 속으로 멀리 도망하고 싶다
뒤떨어진 세월의 시인(詩人)이래서가 아니건만
팽창하는 시절이 두렵다
외투깃을 여미고 유리창을 내다본다
아 오늘과 같이 눈 내리는 밤엔
여인(女人)의 따뜻한 가슴 안에
내가 귀여운 아해처럼 안겨 있는 듯하다
눈물
조병화
1
눈물은 와 그리 나노
이 세상 눈물이 아닌 기 어데 있노,
하며 살끼지
와 그리 슬피 우노
그리 슬피 울면 난 우짜라고
니도 더 살아보면 알끼지만
이 세상 만사 눈물이 아잉 기 어딘노
슬프다케서 우째 다 우노
이 많은 세상을
눈물은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위안
난 이 나이까지 속으로 속으로 숨어서
그걸 살아왔니라.
2
눈물을 주는 시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죄인 줄 알면서도
나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주는 시를 많이 써왔습니다
혼자서 이 세상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편안한 인생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외로움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저 어쩔 수 없이, 무상히
눈물을 주는 시를 많이 써왔습니다
그것이 죄라면 죄이겠지만
살아가는 것이 하두 외로워서
그저 무상히 그립고, 그립던 것을 어찌하리
눈물을 주는 시는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죄인 줄 알면서도
그저 나는 나를 잊기 위해서
눈물을 주는 시를 많이 써왔습니다.
눈물 한 방울이
조병화
그 많은 어제들 속에서
나의 추억은 깊은 바다를 이루어
바다 밑에서, 보이지 않는 눈물 한 방울이
바닷물과 섞이지 않고, 홀로
잠자지 않는 빛을 보내고 있습니다
해가 가고, 달이 가고, 얼마나 갔을까.
또 얼마나 갈 것인가, 하는 긴 긴
이 세월 속에서
한 방울의 눈물은 깊이
추억의 바다 밑에서
다른 물과 섞이지 않고, 홀로
잠자지 않는 빛을 보내고 있습니다
눈물은 흐린 내 영혼을 맑게 씻어
서툴게 살아온 어제들을 뉘우치게 하고
밤이나 낮이나 어디에서나, 나의 생각을
이렇게 숨어서 가만히 축축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어제들 속에서
눈물 한 방울은 추억의 바다를 이루어
아, 깊고 넓은 이 인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없이 언제나 나를
영혼의 눈을 뜨고 살게 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
조병화
눈에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옵는 저 세상에
훅, 떠나신 지
어언 수삼 년
당신의 말씀 그 목소리
얘, 그 뭐 그리 생각하니
사는 거다
그냥 사는 거다
슬픈 거, 기쁜 거
너대로
다 그냥 사는 거다
잠깐이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눈에 보이옵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옵는 저 세상에
흑, 떠나신 지
어언 수삼 년
당신의 목소리 그 말씀
얘, 너 뭐 그리 혼자 서 있니
사는 거다
그냥 사는 거다
슬픈 거, 기쁜 거다
너대로 그냥 사는 거다
그게 세상
잠깐이다.
눈이 하늘에서
조병화
눈이 하늘에서
그 먼 먼 길을 걸어서 내려 온다
걸어내려 오다가 달음박질치며 걸어내려 온다
달음박질치며 걸어내려 오다가 서서히
점잖게 점잖게 선비 걸음으로 걸어내려 온다
걸어내려 와도, 걸어내려 와도
진종일 걸어서 내려 와도
못다 내려 오는 긴 긴 행렬
그러나 이곳은
살기 힘든 뜨거운 땅
사람들의 거센 목소리, 입김만으로도
금새 간 곳 모르게 가버릴
무서운 인간의 땅
눈이여, 알고나 내려 오너라
이곳에선 금방 없어질 것을
금방 밟을 것을
밟혀서 자취도 없이 없어질 것을
멋도 모르고 긴 긴 행렬을 쳐서
하얗게 먼 먼 하늘에서
쉬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끈질기게 걸어서 내려 온다
온종일을
늘, 혹은 때때로
조병화
늘,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 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 그러한 네가 있다는 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노을인가.
다도해
조병화
여기는 바다가 아니올시다
그대로 수록색 치는 호수올시다
기암 절벽이 아니올시다
그대로 바가지를 엎어 띄운 섬들이올시다
저것이 어째서 풍선으로만 보인답니까
날개를 활짝 편 나비들이올시다
장미꽃 도미와 보라색 도미가
수심 벌판에 뜨고
나를 실은 백조호는
방금 작별한 요양원의 소녀처럼
해초원에 각혈을 계속합니다
이곳에선 너절거리는 철학독본이
필요치 않습니다.
어란과 같이 연한 눈을 하고
그대로 수록색 치는 호수에 뜨면 됩니다
여기는 바다가 아니올시다
어디선가 남양의 열매처럼 익어가는 그대로 호심이올시다.
다시 굿샤로호(屈斜路湖)를 지나며
조병화
굿샤로 굿샤로 굿샤로
굿샤로 굿샤로 굿샤로
굿샤로 굿샤로 굿샤로 굿샤로, ……,
물소리 물결소리 옛 그대로인데
그 사람은 떠나고 빈자리
낙엽이 이리저리
바람이 차다
아, 이 무상(無常),
어찌 탓하랴
굿샤로 굿샤로 굿샤로
굿샤로 굿샤로 굿샤로 굿샤로, ……,
이 무한(無限).
단 하나의 소원
조병화
사람이 육십 대에 들어서면
사형선고를 받을 사람들 대열에 끼고
칠십 줄에 들어서면
사형 집행을 받은 사람들 대열에 낀다고들 하는데
지금 나는 날로 그 날짜가 궁금해진다
아, 칠십 평생을 달음박질로 살아온 것 같은 인생,
무엇 때문에 나는 그렇게
칠십 평생을 공연히 그리 바쁘게 살아왔을까
떠남을 거듭하며 살아온 생애,
실로 나의 인생은 오해, 와 포기, 와 도피, 와
이별, 과 고독.
그 순수 고독을 살아오며, 그 순수 허무를
같이 살아온 거다
지금 이 자리 아무런 후회는 없으나
칠십을 넘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날로 궁금해지는 것은
사형 집행을 받을 그 날짜만이다
어머님, 저는 지금 기진맥진
단 하나 소원으로, 어머님 곁에 와 있습니다
확, 단숨에 집행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달
조병화
1
기다리다 시간 되어
먼저 떠납니다
식사는 이인분
남강의 초밥으로 마련했읍니다
당신 오실 땐
따끈한 청주, 한 홉
가슴 속에 부탁합니다
고요의 바다에서 기다리겠읍니다
먼저 도착하는 즉시
다음 표, 미리 마련해 놓겠읍니다
서둘며 한자 꽂아 놓고
시간에 몰려
먼저 떠납니다
조심조심 오십시오.
2
달은 서서히 산들과 작별을 하고
중천에 솟아오를수록
옳은 길로 접어들면서
그제서야 정월 대보름 달로
제 모습을 차려 갖추고
그쯤 높이에서 지상을 비치고 있는 모습이
먼 신라, 고려, 조선,
시가에 나타나고 있는
선비들의 세월 같구나
굽어보는 강물은 구비구비 하얗게
달빛을 안고
밤에 안겨서, 나는
신라, 고려, 조선, 그 달을 본다
아, 세월아
미세한 존재로서의 이 희비애락,
어찌 벌레 같은 이 몸이
그 유구한 세월을 다 헤아릴 수 있으리
지금 달은 중천 높이 솟아오르며
정월 대보름 달, 그 모습으로
만고 세상을 밝힌다.
달팽이의 사랑
조병화
아, 나의 사랑은 사랑을 해도 외롭고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욱 외로워.
당나귀
조병화
아이야 그렇게 미워하질 마십시오
그렇게 마구 때리질 마십시오
낙엽이 솔솔 내리는 긴 숲길을
아무런 미움이 없이 나도 같이 갑시다
어쩌다가 멋모르고 태어난 당나귀
나 한 마리
살고 싶은 죄밖엔 없읍니다
이렇게 저렇게 살고 있는 죄밖엔 없읍니다
외로움이 죄라면 하는 수 없이 죄인이올시다
낙엽이 솔솔 내리는 저문 이 길을 보십시오
나도 함께 소리 없이 끼어 갑시다.
당신은
조병화
당신은
빛을 내는 아름다운 고독
종교와 같은 힘으로
나를 감지시키는 그 아름다운 고독
캄캄한 방 가득히 차갑게
충만하고 있는
촛불
기도와 같은
조용한 사랑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그러한 사랑의 아름다운 고독으로
나를 포용해 주시옵소서
당신은
아름다운 고독을 내는
나의 빛
항상 먼 하늘에 있으시옵니다
당신의 사랑이 그러하듯
조병화
씨를 뿌리는 사람은
생명을 뿌리는 사람이어라
나무를 심는 사람은
지구에 세월을 심는 사람이어라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는 사람은
생명을 뿌리고, 세월을 심는 사람이어라
아, 그것은
스스로로는 다 걷을 수 없는 꿈을 심는 일이어라
스스로로는 다 볼 수 없는 세월을 심는 일이어라
내게 당신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내게 당신이 그러하듯
생명의 씨를 뿌리고, 세월의 나무를 심는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심는
사람일겁니다.
다 걷을수 없는 꿈과 다 볼수 없는 세월
내게 주시는 당신을 나 또한 무한히
사랑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을 하면
조병화
당신이 그렇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는 가만히 있어야 하겠습니다.
변명이 자라면 자라날수록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예 오해를 가진 채
이 길을 서로 걷지 않기 위하여선
오랜 세월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 추운 겨울밤
이대로 내가 가면
당신이 긴 이야길 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는 긴 세월
이렇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대서양
조병화
성에서 내려보는 테제 강
그리고 그 하구에 펼쳐 있는 대서양
십자탑과 나 사이에 하늘이 있다.
옛날을 그리는 대포들 띄엄띄엄
그 자리들에 있고
성안에서 입을 맞추는 관광객
비둘기가 난다
내려다보면 가득한 지붕 지붕
하늘과 바다에 닿고
항구에 모여든 국적 다른 배들
기폭에 기폭에 여수를 날린다
지구는 둥근 거
돌고 돌고 돌다 목숨 떨어지면, 그뿐
인간은 가는 나그네
변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변하는 인간을 산다
하늘은 멀다
바다는 푸르다
공작이 꼬릴 편다.
도화사(道化師)
조병화
오히려 이국인들끼리 다정한 거리에 태어났소
그것이 과오의 제1원인인가 보
―아무려면 어떤가
인간에서 절연된 인간이랍니다
거리마다 이면(二面)의 표정이오
거리상(距離上)의 도화사들이오
지도를 펼치면 다 나의 향토
향토 밖에 서서
잃어 버린 엄마 엄마의 이름을 부르오
누구의 아들이기에 나는 이리 약할까
미련이 있으나마
단번에 부정해 버릴 수 있는 그러한 것에
나는 나의 삶을 봉사해 왔소
제전(祭典) 끝에 남은 것은
아 찬란한 공허
전율이라오
내일을 황홀히 기다리는 절망 속에
내일의 도래를 두려워하는 심사라오
돈
조병화
돈은 이 세상에서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죽는 사람에겐
휴지에 불과한 거
하루를 더 살기 위하여
지금 이 사람은 저녁을 벌고 있다
잡답한 파리 뒷골목
석양 거리에서
돈황(敦煌) - 막고굴(莫高窟)에서
조병화
돈황은 사막으로 이루어진 산맥의 분지
작은 초원, 그 옛날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줄지어 늘어진 끝없는 직선 도로,
포플러 가로수 그늘을
나귀가 달구지에 사람과 짐을 실고
달랑, 달랑, 달랑거리며 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사람들이
평화롭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길을 버스로 달려서 나는 푸른 가로수와 사막을 지나
막고(莫高)라는 곳에 있는 무수한 동굴로 왔습니다.
동굴마다 부처님과 부처님에 관한 벽화들이
몇천 년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러한 사막에 이러한 사람들의 행동
그 옛날, 어떻게 있었을까, 하고
나는 놀랐을 뿐이었습니다
그저 나무아미타불.
나무 그늘에 쉬며.
돈황(敦煌)의 해바라기
조병화
기운산맥(祈運山脈)이라고 했던가, 천산산맥(天山山脈)이라고 했던가,
일년 내내 눈에 덮인 높은 산에서부터
눈이 녹아내리는 물을 받아서
사막에 수로를 이끌어내어
사막을 초원으로 만들어 놓고 사는
돈황(敦煌)엔, 넓은 들에 노랗게
해바라기가 피어 있었습니다
들을 벗어나면 한없이 따가운 햇볕의 모래사장
사방으로 뚫린 포플러 가로수 길을
그늘로 그늘로 타박타박
나귀가 야채를 실고, 사람을 실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엄청나게 높고 파랗고
내리쪼는 햇빛에 귀가 멍멍했습니다
멀리 외떨어진 낮은 막고향(莫高鄕) 돌산엔
부처님들이 들어 계시는 굴들이 무수히
잇달아 있고
사람이 보이지 않는 따가운 햇볕 들판엔
여기저기 온종일 노랗게
해바라기가 피어 돌고 있었습니다.
돌부처
조병화
참으로 오래 한 자리에, 계십니다
오래 한 자리에, 견디고 계십니다
오래 한 자리에, 참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한 자리에서
백 년, 천 년 만년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세월 속에 그렇게 혼자
한 모습으로 앉아 계십니까
무슨 지켜야 할 약속이라도 있으십니까
무슨 지켜야 할 절개라도 있으십니까
무슨 지켜야 할 정조라도 있으십니까
참으로 의젓하십니다
참으로 숭고하십니다
참으로 대단한 인내이십니다
어떻게 그 오랜 만고 세월,
변화무상한 세월 속에서
한 얼굴, 한 마음, 한 모습으로, 그렇게
초연히 혼자 앉아 계십니까
지치기 쉬운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수절이옵니다.
동방살롱 – 명동 소묘
조병화
동방살롱은 한국의 예술가들이 모이는 다방이다
예술가들은 담배를 많이 피운다
예술가들은 돈을 귀찮게 생각한다
예술가들은 오로지 사랑에 산다
예술가의 사랑에선 커피 냄새가 난다
예술가들의 애인들은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예술가들은 밤을 새워서 슬픔을 마신다
예술가들은 밤을 새워서 슬픔을 나른다
동발살롱엔 방울새 같은 소녀가 차를 나른다
동방살롱엔 까만 스웨터를 입은 소녀가 차를 따른다
동방살롱엔 어머니 같은 부인이 우리를 기른다
동방살롱 오후 다섯 시 자욱한 연기
동발살롱은 한국의 예술가들이 모이는 그리운 다방이다
되돌아온 머플러
조병화
추우면 목에 감으라고 보낸 머플러가 되돌아와
옷걸이에서 먼지를 맞고 있기에
바람을 쏘일 겸 목에 말고
쌀쌀한 바람이 지나가는 거리로 나갔습니다
고궁으로, 공원으로, 한적한 도시의 자리를 찾아서
오래간만에 햇빛을 걸었습니다
햇빛은 겨울을 다 녹이지 못하고, 앙상하게
나뭇가지에서, 긴 돌담 밑에서, 얼어붙은 실개천 위에서
하늘이 풀릴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다보며 잠시 길을 멈추고 있는 나를
되돌아온 머플러는 나의 목을 감고
슬프게 나를 녹여주고 있었습니다
눈물처럼.
두절된 전화
조병화
오래간만에 전화를 걸어도
받는 사람이 없다
아무리 벨은 울려도, 일분, 이분, 삼분, ……,
수화기를 귀에 댄 채 기다려도 기다려도
받는 사람이 없다
순간, 불길한 생각
그 나이로 벌써 세상을 접는가,
그 나이로 세상 접을려면
한마디 남기고 접을 것이지, 하는
서운한 마음
한평생 인연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수화기를 힘없이 내리고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니
푸른 하늘을 시원시원히
떠가는 작은 흰 구름 한 쪽,
아, 저렇게 떠가고 있을까
한평생이 한 조각 구름이요, 바람이어라
간단없는 불안이어라.
들꽃처럼
조병화
들을 걸으며
무심코 지나치는 들꽃처럼
삼삼히 살아갈 수는 없을까
너와 내가 서로 같이 사랑하던 것들도
미워하던 것들도
작게 피어난 들꽃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산들산들
삼삼히 흔들릴 수는 없을까
눈에 보이는 거, 지나가면 그뿐
정들었던 사람아, 헤어짐을 아파하지 말자
들꽃처럼, 들꽃처럼, 실로 들꽃처럼
지나가는 바람에 산들산들
아무것도 없었던 거처럼
삼삼히, 그저 삼삼히.
떠남 -낙엽을 밟으며
조병화
떠납니다
말 죽이며 떠납니다
떠난다, 라는 말처럼
슬픈 말이 있으랴
가슴 저리는 말이 있으랴
그토록 애절한 말이 또 있으랴
떠납니다
아, 너와 나의 이 만남
떠남처럼 무서운 말이 있으리
만나면 떠남이 있음이 이 이승이라 하지만
떠남처럼 아픈 철학이 있으랴
어찌 이 날이.
라벤더
조병화
라벤더는 아름다워라
라벤더는 향기로워라
라벤더는 사랑스러워라
라벤더를 좋아하는 나의 사랑은
라벤더보다
아름다워라 향기로워라 사랑스러워라
라벤더는 지중해 연안이
그 원산지라 했던가
지중해 물결로 물들은
남보라색 의상으로 피어나서
바람에 날리는 우아한 향기
아, 라벤더를 좋아하는 나의 사랑과
라벤더를 보는 것은
순수무구한 행복이어라.
라일락
조병화
여보,라일락꽃이 한창이요
이 향기 혼자 맡고 있노라니
왈칵,당신이 그리워지오
당신은 늘 그렇게 멀리 있소
그리워한들 당신이 알 리 없겠지만
그리운 사람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족하오
어차피 인생은 서로서로 떨어져 있는 거
떨어져 있게 마련
그리움 또한 그러한 것이려니
오,그리운 사람은 항상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련가
여보,지금 이곳은
라일락꽃으로 숨이 차오.
럭비를 하던 꿈
조병화
어느 날, 밤
나는 한국럭비선수단에 끼어
멀리 스코트랜드로 원정을 갔었습니다
정확하게 밤 한 시
스코트랜드 팀이 먼저 킥.업을 했습니다.
공은 하늘 높이 스코트랜드 하늘에 떴다가
내려오자마자 내 가슴으로 안겨들었습니다
안겨든 공을 안고 나는 무아경이 되어
적진으로 돌진을 했었습니다
돌진하다보니 공은 바람이 되다가, 구름이 되다가,
나를 하늘로 하늘로 끌고 올라가다간
땅으로 내려뜨려 버렸습니다
순간, 나는 잠에서 떨어져서
멍청히 천정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밤 세 시, 실로 황홀과 무서움이
혼전하던 두 시간
침대가 축축히 젖어 있었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
조병화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 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사사기 제 9장)
나의 영혼은 가난하되
너를 위하여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너의 "영혼의 집"을 지으리
나의 손은 가난하되
너를 위하여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너의 "영혼의 집"을 지으리
나의 말은 가난하되
너를 위하여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너의 "영혼의 집"을 지으리
마라케시의 여인
조병화
가난은 언제나 슬픈 거
어디서나 애절한 거
누구에게나 가련한 거
그것은 불상하다는 말을 넘어서
그대로 마음에 젖어드는 까닭없는
눈물.
짜릿짜릿한 거
쩌릿쩌릿한 거
모로코, 마라케시 근교
모래 바람부는 시골 장터에서
야윈 나귀를 팔고 있던
아랍의 여인, 그 까만
굶주림 깊은 눈동자를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그건 혁명 같은 거
사랑 같은 걸 넘어
혈육같은 찐득찐득한 거.
그것을 더 넘은
비극의 미학같은
사막의 사랑같은
나의 눈물이 아니었던가
아, 그와도 같이
가난은 언제나 슬픈 거.
어디서나 애절한 거.
누구에게나 가련한 거.
마음의 터전이 무너지듯이
조병화
당신이 어느 한 자리 의지할 곳이 없듯이
나에게도 인생 어느 한구석 의지할 곳이 없었읍니다.
당신이 당신의 외로움을 풀어놓을 곳이 없듯이
나에게도
나의 외로움을 풀어놓을 곳이 없었읍니다.
적막.
당신의 마음의 터전이 무너지듯이
내 마음은 무너지고
가을이 깃들은
비내리는 마음
당신이 어느 한 자리 의지할 곳이 없듯이
나에게도 인생 어느 한구석 의지할 곳이 없었읍니다.
마지막 노자
조병화
이제 이곳부터는
사람하곤 멀리할 일이려니
듣는 것, 보는 것, 말하는 것
모두 멀리할 일이려니
특히 말을 멀리 할 일이려니
무거운 말은 삼가 할 일이려니
이제부턴 네가 살 곳은
텅 빈 우주이려니
말 없는 자연이려니
비정한 세월이려니
오로지 제가 간직할 것은 사랑하던 일이려니
이별하던 일이려니
이 비밀은 네 마지막 노래이려니
만고일월(萬古日月)
조병화
이 바람 부는 산천에서
얼마나 적막했길래
그는 만고일월(萬古日月), 이라 했을까
실로 세월을 만고일월
인체만물이 흥망과 성쇠, 명멸로 이어지며
그 허망을 산다
오, 생존이여, 가련한 먼지여
희로애락은 인간이 느끼는 바람일 뿐
어찌 그것을 영원이라 하리.
만남과 이별
조병화
만남의 기쁨이
어찌 헤어짐의 아픔에 비하리
나를 기쁘게 한 사람이나
나를 슬프게 한 사람이나
내가 기쁘게 한 사람이나
내가 슬프게 한 사람이나
인생은 그저 만났다간 헤어지는 곳
그렇게 만났다간 헤어져가야 하는
먼 윤회의 길
지금 새로 기쁨으로 만났다 한들
머지 않아 헤어져야 하는 슬픔
어찌 이 새로운 만남을 기쁘다고만 하리
눈물로 눈물로 우리 서로 눈물로
숨어서 울며, 웃으며 헤어져야 할
이 만남과 헤어짐
정이 깊을수록 더욱 마음이 저려지려니
이 인생의 만남을
어찌 그 헤어짐의 아픔에 비하리
말과 글
조병화
옛날,
대학에서 어려운 것들을 찾아서
가르치던 그 많은 말과 글이
세월처럼 하나 하나 잊혀져가면서
머리에 아직은 남은 몽롱한 말과 글까지도
이젠 긴가민가 어렴풋이
지워져가면서
부끄러움 없이 무식해진다
머지않아 이것마저도 이래저래
아주 잊혀져가면서
끝없이 무식해지려니
"어머니", "고맙습니다."
이 말과 글까지, 이랴.
맑은 고독
조병화
평생을 시만 쓰다
수입도 없는 인생을 살다 간
벗들,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이 그리 곰곰이 생각할 것이 많아서
가슴을 앓아 가면서까지
골몰하며 골몰하면서
돈이 될 수 없는 시만 만지다 간
벗들,
왜 그랬을까
존재한다는 것은 신비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을
소원한다는 것은 허망한 것을
인간을 산다는 것은 외로운 것을
풀리지 않는 인간의 이 고뇌를
가난히 시만 쓰다 간
벗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맑은 고독을 씹으며.
망매한 세상에서
조병화
망매한 세상에서
너를 찾음에
네가 그 자리에 있더라
진실로 망매한 이 세상에서
깃들일 곳 찾음에
네가 그 자리에 있더라
그림자 같은 이 세상
망매한 자리
너를 찾음에
네가 그 자리에 있더라
이 세상, 잠시 깃들일 곳 찾음에
맑은 자리, 고인 자리
네가 있더라
매미
조병화
매미가 이산 저산 이 나무 저 나무에서
온종일 울어댄다
인류의 종말을 예언이나 하듯이
생명을 가진 온갖들에게 마지막 인사나 하듯이
맴맴맴맴맴맴맴 맴맴맴맴맴……
온 몸 다 태우며 뜨겁게 뜨겁게
하늘을 태운다
맴맴맴 맴맴맴 맴맴맴맴맴맴맴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
지구는 그저 부패해가며
인간은 그저 황폐해가며
이산 저산 이 나무 저 나무에서
매미는 맴맴맴맴맴맴 맴맴맴맴맴맴
스스로를 태운다
따갑게.
가 이산 저산 이 나무 저 나무에서
온종일 울어댄다
인류의 종말을 예언이나 하듯이
생명을 가진 온갖들에게 마지막 인사나 하듯이
맴맴맴맴맴맴맴 맴맴맴맴맴……
온 몸 다 태우며 뜨겁게 뜨겁게
하늘을 태운다
맴맴맴 맴맴맴 맴맴맴맴맴맴맴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
지구는 그저 부패해가며
인간은 그저 황폐해가며
이산 저산 이 나무 저 나무에서
매미는 맴맴맴맴맴맴 맴맴맴맴맴맴
스스로를 태운다
따갑게.
먼 곳에서
조병화
이젠 먼 곳들이 그리워집니다
먼 곳에 있는 것들이 그리워집니다
하늘 먼 별들이 정답듯이
먼 지구 끝에 매달려 있는 섬들이 정답듯이
먼 강가에 있는 당신이
아무런 까닭 없이 그리워집니다
철새들이 날아드는 그곳
그곳 강가에서 소리 없이 살아가는
당신이 그리운 것 없이 그리워집니다
먼먼 곳이 날로 그리워집니다
먼 하늘을 도는 별처럼
먼 곳에서 온 편지
조병화
포르투갈, 어느 오지, 그 산골에서
이곳, 서울 혜화동 107번지까지
잘도 찾아들은 편지 한 통,
사연인즉, 내 시를 감동으로 읽었다는 이야기,
"무슨 시를 읽었을까",
하는 생각도 생각이지만
어찌, 내 시가 그곳까지 잘도 갔을까,
신비스러운 즐거움
따뜻한 마음,
참으로 세상은 좁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
불현 듯 만나보고 싶은 마음,
하늘이 멀다
나의 시란, 한 인간의 고뇌이요,
아련한 꿈, 그 그리움, 그 외로움,
보이지 않는 내일이었거늘
그 보이지 않는 내 모습이
그곳까지 가다니
읽고, 읽고, 해도
그분의 마음, 다는 알 길 없어라
아, 이것이 시라는 지름길이던가.
먼 그 약속
조병화
그때 그 약속이
이렇게 빗나가고, 늦어버렸습니다.
이승에서 가장 귀한 나의 말들로
가득히 담으려 했는데
이렇게 초라한 바구니로 되어버렸습니다.
내 온 생애를 다 드린다 한들
이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너무나 오래 떨어져 있는 자리
이러다가 영 사라질 자리
그저 그렇게 봐주시길.
먼 날, 어느 한 날
조병화
먼 날, 어느 한 날이라도, 그 자리
너와 같이하는 날 있으면
"지금"을 추억함에 흐르는 물 같고
생명의 날 다했을지라도 맑게 밝고
어둠이 있을지라도 아침과 같으리
먼 날, 어느 한 날이라도, 그 자리
너와 같이하는 날 있으면
"오늘"을 추억함에 흐르는 물 같고
소망의 보람을 하여 든든하고
두루 살펴보며 편히 쉬리
먼 날, 어는 한 날이라도, 그 자리
너와 같이하는 날 있으면
"지금"을 추억함에 흐르는 물 같고
지금의 어둠으로 하여 더욱 밝고
지금이 견딤으로 하여 더욱 기쁘리
먼 날, 어느 한 날이라도, 그 자리
내가 찾음에 그 자리 네가 있으면
"오늘"을 추억함에 흐르는 물 같고
젊음으로 하여 다 못 다함 네게 주리
애증으로 하여 다 못 다함 네게 주리
그리하여
긴 소망의 보람 다하여
두루 살펴보며 편히 쉬리.
먼 어제의 소리 – 연길(延吉)에서
조병화
깊은 밤, 요기(尿氣)가 돌아 잠을 깨니
어디선지 들려오는 소리
삐걱, 삐걱,
달구지가 지나간다
어디서 오는 사람들일까
먼 어제 일제를 피해
이곳으로 온 사람들이 일구어 놓고
그 자손들이 자리 잡고 살아오는 이곳
긴 세월 뒤에 내가 와서
지금 그 달구지 소리를 듣는다
객사 밖엔 비가 내리고
내 마음엔 먼 세월이 내린다.
먼 여행
조병화
이제부턴 나를 찾거든
없다고만 해라
'어딜 갔느냐'고 묻거든
'그저 멀리 갔다'고만 해라
'언제 돌아오느냐'고 묻거든
'그저 모른다'고만 해라
'그저 멀리 갔다'고만 해라.
먼 윤회의 길을 가며
조병화
지나간 날 이곳을 떠날 땐
다시는 올 수 없겠지, 했는데
오늘 다시 이곳에 왔구나
아, 이승에서 저승엘, 이렇게 쉽게
오고 갈 수는 없을까, 하고
온 상해(上海)가 아직 잠 속에 있는 호텔 꼭대기에서
이렇게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아득한 윤회 길에서.
멸망하고 있습니다
조병화
멸망해 가고 있습니다
지구 위의 모든 생명들이
서로 멸망해 가고 있습니다
인류는 돈으로 멸망해 가고
동식물들은 돈을 만드는 사람의 공해로 멸망해 가고
지구는 생명이 서식할 수 없는
오물의 폐허로
서서히 멸망해 가고 있습니다
그 옛날
공룡이 이 지구를 지배했다는 이야길
전설처럼 듣고 있었습니다만
머지않아 이 지구엔
인류가 지구를 지배했었다는 이야길 할
그날이 올 겁니다
누가 마지막의 인류가 될까요,
비참하게 죽어가고들 있습니다
서로 살려는 것이
서로를 죽여가고 있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모로코의 소녀
조병화
일본 NHK TV 화면,
"내 마음의 여로",
모로코 기행,
베루베루 부족의 소녀 이야기
보면서 문득 그곳에서 옛날 내가 만난 소녀들
내가 만난 소녀들은 지금 어머니들이 되고
지금 보고 있는 소녀들은
그 어머니들의 딸들이겠지만
지금도 그 때 그 모습 흙에 묻혀 살면서
원색 피부, 원색 옷차림, 원색 흙먼지,
항상 경이로운 그 큰 검은 눈동자들
아, 원시는 얼마나 먼 천년이던가
환영하는 인사가 베루베루,
송별하는 인사가 베루베루, 손 흔들며
붉은 혀가 나발나발
빨리 나발나발 움직이며 내는 소리
베루베루 부족의 소녀들은
사랑은 몰라도 나이 차면 어린애를 낳는다
이곳은 먼 아프리카 높은 아트라스 산맥
깊은 사막 오지 마을 오아시스
오아시스는 베루베루 부족이
붉은 흙에 싸여 파란 계곡을 산다
태고의 물줄기를 타고.
목련(木蓮)
조병화
천사의 흰 브라우스처럼
나무 가지가지에 걸려 있는
순결한 꽃송이들
바람에 웃음을 날리며
목련화
조병화
철학개론이랑 말라
면사포를 벗어 버린 목련이란다
지나간 남풍이 서러워
익쟎은 추억같이 피었어라
베아트리체보다 곱던 날의 을남이는
흰 블라우스만 입으면 목련화이었어라
황홀한 화관(花冠)에
4월은 오잖은 기다림만 주어 놓고
아름다운 것은 지네 지네
호올로
몽마르뜨르 성당
조병화
어제 밤의 일을 다 고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는 고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신부님 앞이라 해도
묘지공원
조병화
아, 얼마나 많은 침묵의 행렬인가,
이곳에선 발언하는 사람 하나 없다
그저 믿는 마음만큼
편안하게 안식하고 있을 뿐이어라
만고를 불평 없이.
무더운 여름밤
조병화
무더운 여름밤
밤에 익은 애인들이 물가에 모여서
길수록 외로워지는
긴 이야기들을 하다간
밤이 깊어서
장미들이 잠들어버린 비탈진 길을
돌아들 간다
마침내 먼 하늘에 눈부신 작은 별들은
잊어버린 사람들의 눈
무수한 눈알들처럼 마음에 쏟아지고
나의 애인들은 사랑보다 눈물을 준다
내일이 오면 그날이 오면
우리 서로 이야기 못한 그 많은 말들을
남긴 채
영 돌아들 갈 고운 밤
나의 애인들이여
이별이 자주 오는 곳에 나는 살고
외로움과 슬픔을 받아주는 곳에 내가 산다
무더운 여름
밤이 줄줄줄 쏟아지는 물가에서
이별이 서러운 애인들이 밤을 샌다
별이 지고
별이 뜨고.
무제
조병화
고민하면 고민하는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안개 속을 더듬어 갈 때 나오는 결정체
시인은 방황하는 존재이다.
길을 찾는 이정표.... 시에는 영혼이 있어야 한다.
순수 고독...인간을 크게 이끌어 주고 살아 나가는 힘, 외로움
을 알고 피하지 말고 고독을 키워나가라.
고독한 영혼 꿈이 강할수록 외로움은 크다.
이것을 강철처럼 크게 키워나가야 한다.
묵은 사진첩을
조병화
묵은 사진첩을 들추고 있노라니
까닭 모르는 슬픔이
왈칵, 내 몸에 배어 옵니다
기쁜 얼굴도 그렇고
웃고 있는 얼굴도 그렇고
가만히 입 다물고 있는 얼굴도 그렇고
슬픈 얼굴은 더욱
슬프게 다가옵니다
기억 밖에 아주 묻혀 버린 얼굴들
기억 내에 아직 머물고 있는 얼굴들
어렴풋이 그때 그 시절, 생각나는 얼굴들
사진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눈물이 핑 돕니다.
물
조병화
상선여수(上善如水)라는 말이
나이 들어갈수록 선명해진다
아직은 완전히 물이 되지는 못하지만
꿈이 되고자 하는 마음
맑은 한줄기이다.
외곬수였던 세월
외고집이었던 세월 혼자만이 외로워하던 시절
타인과 섞이지 않으려던 시절
혼자서 독야 청청하던 시절
실로 부질없던 세월들이 아니었던가
물처럼 살아가는 거다
가을 물처럼 살아가는 거다
도도히 흐르는 물속에서
천고한 가을 물처럼
맑게 투명하게 눈을 뜨고 흘러가는 거다.
졸졸졸 별을 굴리며.
물은 흘러감에 다시 못 온다 해도
조병화
헛되고 헛된 것이 생이라 하지만
실로 헛되고 헛된 것은
그렇게 생각을 하는 생각일 뿐
언젠가 너와 내가
강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물은 흘러감에
다신 못 온다 해도
강은 항상
그 자리 흐르고 있는 것
이 세상 만물 만사가
헛되고 헛된 것이라 하지만
생은 다만 자릴 바꿀 뿐
강물처럼 그저 한자리 있는 것이다
너도 언젠가는 떠나고
나도 떠날 사람이지만
언젠가 너와 내가 같이 한 자리
강마을 강가 이야기하던 자리
실로 헛되고 헛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그 사실이다
해는 떴다 지며
떴던 곳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감에
사람은 혼자서 살다가 가면 그뿐
그 자리엔 없다 해도
실로 헛되고 헛된 것은
그렇게 생각을 하는 생각일 뿐
강물은 흐름에 마르지 않고
너와 내가 떠남에 실로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너와 내가
강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언젠가 너와 내가 강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세스와 토오스트
조병화
직업 부인 미세스 최가
쇼윈도우 안에서 밀크와 토오스트를 든다.
채권이 찻종 옆에 와 놓인다.
미세스 최는
전쟁을 연상하기엔 너무나 귀여운 채권이라고 생각한다.
플라타너스 그늘에
햇빛이 조는 유월(六月) 어느 오후(午後)
하루의 지출과 일급(日給)이
오래간만에 밀크와 토오스트를 대접한다.
입을 벌린 나이롱 핸드백 속에서
싸아젠루이스와 담배를 물고 찍은
남편의 사진이
미세스 최의 얼굴을 기웃거린다.
군우리(里) 전투에 쓰러진 남편의 소식을
미세스 최는 가끔 잊어버린다.
슬픈 기억은
하루만 견디면 사라진다.
플라타너스 그늘에
햇빛이 조는 유월(六月) 어느 오후(午後).
직업 부인 미세스 최가
쇼윈도우 안에서 밀크와 토오스트를 든다.
전쟁이
온종일 토오스트 집 쇼윈도오에 기대선다.
미지의 영혼으로 - 교향악 예찬
조병화
교향은 신비스러운 우주에서 들려오는
미지의 영혼의 유혹
그 유혹으로 나의 영혼은 어디로인지
멀리 나를 떠난다
보다 순결하고, 순수하고, 숭고하고, 오묘한
영감으로 이어지는 나의 영혼,
들리는 것이 도취이요, 희열이요, 존재이요,
새로운 신비
나는 그곳에서 나를 잃는다
아, 교향은 영혼과 영혼이 속삭이는
맑고 투명한 메시지
정확한 전달로 나의 영혼은 이어진다
영원히.
민들레꽃
조병화
요란하지 않아서 좋다
화려하지 않아서 마음이 놓인다
평범해서 정이 간다
평범하고 요란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아서 평안하다
민들레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씨가 머무는 곳에서
강하게 강인하게 피어난다
피어나서
요란하지 않아서 좋다
화려하지 않아서 좋다
수줍어하며 수줍어하며
나를 안아 주어 편안하다
바다
조병화
1
사랑하는 사람아
그리운 사람아
먼 곳에 있는 사람아
바다가 우는 걸 본 일이 있는가
바다가 흐느끼는 걸 본 일이 있는가
바다가 혼자서 혼자서
스스로의 가슴을 깎아내리는
그 흐느끼는 울음 소리를 들은 일이 있는가
네게로 영 갈 수 없는
수많은 세월을
절망으로 깨지며 깨지며
혼자서 혼자서 사그라져 내리는
그 바다의 울음소리를 들은 일이 있는가
2
바다는 푸른 띠를 두른 세계주의자
지구를 하나로 안으려 한다.
바다 모래밭에 앉아서
조병화
검은 밤을 하얀 파도를 몰고
바다가 밀려온다
검은 밤을 하얀 파도를 몰고
바다가 밀려 다시 돌아간다
밀려왔다간 밀려가고
밀려갔다간 밀려오며
검은 바다는
사람의 자취를 지워 버린다
아, 이렇게 우리의 자리도, 언젠가는
지워져 버리려니
이승과 저승 사이를 이렇게 바다처럼
오고 갈 수는 없을까
검은 밤을 하얀 파도를 몰고
바다가 밀려온다
검은 밤을 하얀 파도를 몰고
바다가 밀려 다시 돌아간다
밤을 세워서.
바다는
조병화
바다는 그곳에,
그때 그대로 있었습니다
밀려 오는 허연 파도 물결도
밀려 가는 허연 파도 물결도
모래사장도
아, 바다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병들어가며, 혼자 신음하면서
나도.
바다에서의 엽서
조병화
이렇게도 황홀한
바다 노을을
혼자서 본다는 건
낭비입니다
너울너울 물결치며
출렁거리는 바다와
흐르는 구름과
하늘
타도록 빨간
저녁노을을
혼자서 본다는 건
벌이옵니다.
가물거리는 먼 수평선에
걸려 있는
어선 한 척
그것에서 인생을 느끼는
이 소식
아름다운 절경을
혼자서 느낀다는 건
실로 이것이 인생의 적막이옵니다
밤
조병화
밤은 편안하옵니다.
옥에서 풀려 남 몰래 출옥한 사람의
오랜 휴식처럼 편안하옵니다.
아무도 곁에 없어도
한없이 고적해도
있는 것이라곤
그저 캄캄한 어둠뿐이어도
생존하는 자들의 고독처럼
밤은 그저 편안하옵니다.
들리는 것이 영원,
생각하는 것이 영원,
소망하는 것이 영원,
삶과 죽음이 한자리에 모여
소곤소곤 시간을 이어 가는
깊은 정적뿐이옵니다.
세월은 흐르고
숙명은 남고.
밤에 내리는 봄비
조병화
밤새 창밖에서
봄비는 서투른 솜씨로 타자를 친다
탁탁 탁, 탁 탁탁 탁, 탁, ......
무슨 사연이 저렇게 구성지게 길까,
평생을 후회,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밤을 새워서 치고, 지우고, 치고, 지우고,
서툴게 타자를 친다
나는 자다 깨고, 자다 깨고, 하면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을 멍하니
혼자 견디며.
밤의 이야기
조병화
1 - 1
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네, 죽음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네, 죽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네, 죽음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가?
네, 죽음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제 너의 눈은 무엇을 보았는가?
네,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제 너의 눈은 무엇을 보았는가?
네, 눈물을 보았습니다
어제 너의 눈은 무엇을 보았는가?
네, 슬픈 나라를 보았습니다
어제 너의 눈은 무엇을 보았는가?
네, 당신을 보았습니다
지금 너의 눈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네, 마지막 그 눈을 보고 있습니다
1 - 2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인생의 변두리
시가 가끔 찾아 주는 곳
참나무 소나무 머루 다래
싸리꽃이 총총히 피어 있는
잡나무 숲
당신도 한 번은 찾아 줄 수 있는 곳이다
사람이 그리워지는 곳
십 리 이십 리 삼십 리 뜸뜸이 떨어져서
아침을 기다리는 곳
울타리 나직이 불을 피고
밤을 새워서도 이야기가 남는 곳이다
세상을 걷고 떠나는 사람이
하늘로 직행을 하는 곳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보다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곳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인생 변두리
하늘에 가장 가까운 자리
밤과 낮이 소곤소곤
헤어지다 만나곤 하는 곳이다
밤의 이야기
조병화
1 - 3
밤은 모든 것을 낳는다
이유도
까닭도 없이
밤은 낳는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없이
낳아선 없어질 때까지
밤은 그저 낳는다
괴로운 것은 인생일 뿐
밤은 아픔을 낳는다
그리고 밤은 바꾼다
이유도
까닭도 없이
밤은 바꾼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없이
바꾸어선 없어질 때까지
밤은 그저 바꾼다
괴로운 것은 인생일 뿐
밤은 모든 것을 바꾼다
없는 자에겐 없는 대로
있는 자에겐 있는 대로
괴로움과 아픔
- 어둠을 같이 재워 주고
밤은 너와 나의 생각을
같이 하여 준다
2 - 1
묵은 역사처럼 밤이 내리면
나의 밤은
가라앉은 잠수함처럼 고요하다
고장난 엔진과 녹슬은 철판 사이를 더듬어
기어오르는 바닷고기처럼
빌딩과 계단을 내려
적적한 사색
지하실 입구를 돌아 나오면
휘어진 안테나
걸린 시그널.
수없이 피를 흘린 인간의 지성은 지금
묵묵히 스스로 스스로의 피를 흘리며
밤은 시간에 몸을 풀어놓는다
어둠에 싸인 나의 시력은
가라앉은 고성능 프리즘
잠망경처럼 때때로 긴 목 위에 솟아올라도
비쳐드는 풍경은 어두운 공동 묘지
(아니면)
쓸쓸한 밀회 장소.
뜨거운 수명에 스스로 매몰해 간 고독한 천재들은
냉랭한 별들의 운석처럼 입을 다물고
드문드문
부엉새 같은 등불들이 비에 젖어서
인기척 적적한 도시의 거리
- 밤은 나에게 잠을 주지 않는다
밤이여! 만민의 어머니 같은 어두운 가슴이여
- 없는 자의 소유여
- 누구의 소속도 아닌 이 생존의 위안처여
어둠은 내리어
- 묵은 역사처럼 밤이 밀리면
부엉새 같은 등불 아래
- 적적한 사색
- 시간과 사람은 바뀌어
나의 밤은 가라앉은 잠수함처럼 고요하다
3
진실로 슬픈 것은
너와 내가 돈을 따지게 된 거다
그리고
너와 내가 소속을 따지게 된 거다
그리고
그런대로 너와 내가 서로
서로를 모르는 채 살다간 헤어져야 한다는 거다
봄 여름 시시하게도 다 지내고 말았구나
너와 내게 한 번 주어진 이 인생, 이 시간
모두 새 버리고
지금은
가을
지내온 시간 저쪽
기억의 장소에서
수시로
너와 내가 짤막한 악수를 하다간 헤어지는
지금 이 자리
진실로 쓸쓸한 것은
너와 내가 서로의 것도 아닌 돈을 따지게 된 거다
그리고
너와 내가 서로의 것도 아닌 소속을 따지게 된 거다
그리고
그런대로 너와 내가 서로
한세상
서로를 모르는 채 살다간 헤어져야 한다는 거다
4
어느 날 내가
종로 네거리 하늘 꼭대기 양지다방 한구석에서
불교를 이야기해주는 선생과 같이
밤 깊이 도통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가을은 남아서 곁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불교를 이야기해주던 선생은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따짐을 가리지 않는 사람일수록
도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밤 깊이 마음의 자리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가을은 남아서 곁에 나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종로 네거리 하늘 꼭대기 양지다방 서울 한가운덴
실재처럼 시간이 자옥이 모여 있는 것도 아니고
상실처럼 일체가 텅 비어 있는 것도 아니고
유리창 속엔 날개 접은 생명들이 끔벅거리고 있었는데
일체의 허(虛)를 이야기해주고 있던 선생의 웃음소리
밤은 이미 그 잘릴 잡아 침전하고 있었는데
가을은 남아 곁에 잎새를 추리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종로 네거리 구름다리 꼭대기
가을이 지나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일체의 득실을 걷고 있었는데
시간은 이미 내 자릴 일어서고 있었다.
7
육체는 소멸하며
생각은 자란다
나의 생애는 한낱
스스로의 어둠을 지켜서의 부질없는
도피
창가에서
악수로 비킨
수없는 얼굴
육체는 소멸하며
생각은 자란다
아, 역사여
사색의 무덤이여
침침한 회랑이여
불행한 자들의 기록이여
인간은 죽음을 위하여
사색을 하는 거
사상의 사상은
죽음뿐이다
8
실은 맨손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단 말이다
이곳에선 외롭긴
누구나 매한가지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외로움이란
- 이루 말할 수 없다
헤세의 말을 빌면
인간은
깊은 안개 속에서
서로의 Sein
- 서로를 모르는 채
그저 서로 Sein하고 있는 것이라 하지만
생존은 너무나 허허한 자리
실로 이상한 건
살고 있다 – 하는 마음이다
무욕해질수록 가득 차 가는 마음
바람에 집을 둔 마음
입김처럼 순한 이 외로움
생명이여
떠나는 것이여
이곳에선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매한가지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빈 마음이란
- 이루 말할 수 없다
10
내가 어느 날
하늘에서 나뭇잎이 떨어지는 세종로
저녁 광장 옆에서
가을의 지혜와 악수를 나누고 있을 때
철학과 사색은 담배를 물고
비각 모퉁일 돌고 있었다
생은 아침 일어나서부터 저녁 잠들 때까지
그저 있었다 가면 그뿐
비석은 석공의 수입을 위하여 세워지고
동상은 철물상의 거래로 끝이 나는 거
역사는 한낱 사학 교수의 생활을 위하여 있고
의사당은 아버지를 위하여 있는 거
세상은 몽땅 상사거래
존귀한 것도 없고 비천한 것도 없다
내가 어느 날
서울 모퉁이 나무 아래서
빈자의 지혜와 악수를 나누고 있을 때
지폐는 가랑잎처럼 날리고 몰리고
조국은 마냥 동양의 하늘
낄낄이 손을 잡으며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어느 날
하늘에서 나뭇잎이 떨어지는
후방 사십 리 어느 시장 부근에서
사자의 지혜와 생자의 지혜를 잡고
악수를 나누고 있을 때
밤은 가을을 안고 골목을 걷고 있었다.
12
잔인하도록 쓸쓸히 사는 거다
너와 나는 하나의 인연의 세계에서
같이는 있다곤 하지만
차가운 겨울밤을
빈손을 녹이며
잔인하도록 쓸쓸히 그저 사는 거다
육체는 소모해 가며 없는 자에게 지혜를 주며
생명은 노쇠해가며 가는 자에게 시간을 준다.
사랑과 미움은
인간의 역사를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며
끝이 없는 거라 하지만
너와 나는 사랑도 미움도 없이
어두운 다릿목에서
그저 마주 서 있는 거다
아 아침이여
따스한 입김이여
사랑스러운 눈물이여
잔인하도록 쓸쓸히 사는 거다
너와 나는 하나의 인연의 세계에서
같이 있다 하지만
차가운 긴 밤을
빈손을 녹이며
잔인하도록 쓸쓸히
- 그저 사는 거다
15
상실한다는 것은 현명해진다는 거다
포기한다는 것은 자유로워진다는 거다
고독하다는 것은 풀려진다는 것
적적한 장소에서 스스로를 기다린다는 거다
너와 내가 서로 같이 살고 있으면서
너와 멀어지지도 않고
너와 가까워지지도 않고
이대로 서로 마주 거리를 지니고 있는 것은
내일을 서로 간직함이요
내일을 서로 가벼이 하기 위함이요
스스로를 서로 덜기 위함이다
그리고 끝으로 하나
너와 내가 해야 할 일은
작별을 하는 일
어쩔 수는 없어도
영 만나지 않을 그 일을
내일의 길목에서 해야만 하는 일
너와 나의 문답은 그때까지다
상실한다는 것은 현명해진다는 거다
포기한다는 것은 자유로워진다는 거다
고독하다는 것은 풀려진다는 것
적적한 장소에서 스스로를 기다린다는 거다
17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지하 五(오)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 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캄캄한 걸 살아 온 거다
미움도 사랑도 모두
가난한 풀밭 머리에서 가난한 풀만 뜯다
가난히 쫓겨 다니며
아까운 정들을
캄캄히 살아온 거다
이긴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잡은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가진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죽음으로 직행을 하는 거다
지하 五(오)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 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19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떠나는 날엔
평소에 내가 그러했듯이
쓸쓸히 혼자서 떠나련다.
너에게 더 가까이 말을 전하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작별을 하는 날엔
평소에 내가 그러했듯이
나의 시와 같이 쓸쓸히 떠나련다.
진실로
한 번도 가져 본 일이 없다.
진실로
한 번도 주어 본 일이 없다.
진실로
한 번도 나를 풀어놓은 일이 없다.
내게 숨은 소망을 이제 내게 말하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떠나는 날엔
평소에 내가 그러했듯이
쓸쓸히 비가 내렸으면 한다.
길고 짧막한 인간의 골목
피해서 살다가는 나의 골목
평소에 내가 그러했듯이
이 세상 뉘에게도 신세로움 없이
쓸쓸한 빗소릴 들으며 혼자서 떠나련다.
20
고독하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나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 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나아 있다는 거요.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21
술이여! 쓸쓸할 때 너는 나를 찾아주어 좋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언제나 너를 찾아갈 수 있어 좋다
너는 공산주의도 아니요 자본주의도 아니요
아무런 주의도 아니어서 좋다
너는 당적이니 호적이니 등록이니 하는 것이 없어 그저 좋다
아무런 수속이 없어 좋다
너는 그저 너의 자리에 있는 것 백년 천년 몇몇 천년을
그저 너의 자리에 소리 없이 있는 것
가장 이야기가 많으며 가장 없는 것
가장 쓸쓸하지 않으며 가장 쓸쓸한 것
가장 가난하지 않으며 가장 가난한 것
가장 잊어지지 않으며 가장 잊어지는 것
깊은 자리로 깊은 자리로 항상 혼자케 하여 주어 좋다
거처가 없는 자의 벗이여
떠나는 자의 벗이여
내일을 두고 가는 자의 벗이여
스스로 스스로에 취해 스스로를 찾아 스스로를 버리는
아! 이 자유여
너는 내곁에 언제나 있어 주어 좋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속 없이 따짐 없이 두려워함 없이
너를 내가 찾아갈 수 있어 좋다
24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떠나는 날엔
평소에 내가 그러했듯이
쓸쓸히 혼자서 떠나련다
너에게 더 가까이 말을 전하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작별을 하는 날엔
평소에 내가 그러했듯이
나의 시(詩)와 같이 쓸쓸히 떠나련다
진실로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진실로
한 번도 주어 본 일이 없다
진실로
한 번도 나를 풀어놓은 일이 없다
내게 숨은 소망을 이제 내게 말하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떠나는 날엔
평소에 내가 그러했듯이
쓸쓸한 비가 내렸으면 한다
길고 짤막한 인간의 골목
피해서 살다 가는 나의 골목
평소에 내가 그러했듯이
이 세상 뉘게도 신세로움 없이
쓸쓸한 빗소릴 들으면서 혼자서 떠나련다
25
밤은 소리 없이
너와 나를 이어 준다
까마득히 먼 그곳
구석구석
밤은 소리 없이 너와 나의 말
밤은 너와 나를 이어 준다
인간은 서로 같이 살고 있다 하지만
끝도 없이 쓸쓸한
거리(距離)
자리 자리에서
끝끝내
눈 감고 가는 외로움
인간은 외로은 것을 사는 거다
보아라 이 캄캄한 어둠
밤마다 흐르는
밤의 소리
밤은 별 아래
너와 나를 멀리 잠 뜨게 한다
36
지금 그늘 속에서 뚝 뚝 떨어지고 있는 것은
여름들이다
그리고 지금 어둠 속에서 낄낄거리고 있는 것은
바람들이다
그리고 지금 바람속에서 소근거리고 있는 것은
나뭇잎들이다
그리고 너와 나의 텅 빈 하늘을 지나가고 있는 것은
마냥 구름들이다
구름은 지나가며 비를 내리고 눈을 내리고
나뭇잎을 키우고
열매를 익혀
다시 돌아오지만
가면 못 오는
인간의 구름
아세아 허 허
가시망 벌판
지금 그늘 속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은
너와 나의 눈물이다
그리고 너와 나의 눈물 속에서 흐느끼고 있는 것은
너와 내가 서 있는 땅덩어리다
그리고 너와 내가 서 있는 땅덩어리 속에
가득히 괴어 있는 것은
번식과 빈곤
.........악수 없는 너와 나의 긴 밤이다.
39
내가 어느 날 취해서
어느 동리
골목길 깊이
달 아래 혼자서 돌고 있을 때
라일락은 가득히
달 아래 피어오르고 있었다
행복한 사람들은
보금자릴 찾아서 돌아들 가고
취중처럼 적적한 나의 골목
달은 번져서
하늘에 가라앉고
텅 빈 가슴을 혼자서 머물고 있었다.
마침내 가난한 나라의 길 잃은 시인처럼
남은 골복
뿌옇게 취해서
마냥 꽃 아래
혼자서 있었다.
내가 어느 날 밤 깊이 취해서
어느 동리
골목길 깊이
달 아래 혼자서 돌고 있을 때
라일락은 달에 젖어
가득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47
지금 너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은
죽어간 사람들이 다하지 못한
그 시간이다
그리고 지금 너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오늘은
죽어간 사람들이 다하지 못한
그 내일이다
아! 그리고 너와 나는
너와 내가 다하지 못한 채 이 시간을 두고
이 시간을 떠나야 하리
그리고 너와 나는
너와 내가 다하지 못한 채 이 오늘을 두고
이 오늘을 떠나야 하리
그리고 너와 나는
너와 내가 아직도 보지 못한 채 이 내일을
두고
이 내일을 떠나야 하리
오! 시간을 잡는 자여
내일을 갖는 자여
지금 너와 내가 마시고 있는
이 시간은 죽어간 사람들이 다하지 못한
그 시간
그리고 지금 너와 내가 잠시 같이하는
이 오늘은 우리 서로 두고 가
- 그 내일이다
방황(彷徨)과 구원(救援)
조병화
"방황(彷徨)"이라는 말이 있었지,
"사람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방황하는 것이다"
라는 글이 있었지
이 말과 글(파우스트)을 읽으면서
아, 얼마나 흥분을 했던가
왜 그랬었을까
사범학교 사학년 시절
"구원(救援)"이라는 말이 있었지,
"노력한 자는 노력한 만큼 구원을 받는다"
라는 글이 있었지.
이 말과 글(파우스트)을 읽으면서
아, 얼마나 마음이 아늑했던가
왜 그랬었을까
사범학교 사학년 시절
내 이 인생이 "방황"이었던가
"구원"이었던가
방황과 노력, 그 구원이었던가
지금 내 나이 팔십
찾은 건 무엇이고
못 찾은 건 무엇인가
방황이고 노력이고
시(詩)라는 이 고요한 구원.
배신
조병화
지구는 춘하추동 잠시도 쉬지 않고
인간들을 살찌게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죽어서 지구의 좋은 거름이 되어 달라고
그러나 그 인간은 지금,
백담사
조병화
1
산들은 솟아오르고
백담사는 산에 둘러싸여 가라앉아 있고
더 가라앉은 자리에
돌 깎인 긴 계곡, 물줄기가 힘차더라
백팔번뇌가 무엇인가, 묻는 말에
"냉수나 한 잔 마시고 가게."
2
밤이 깊어지니
별들이 하늘에 내려와
목욕을 하더라
하늘은 너무나 넓어서
물장구를 치는 애기 별도 있더라
만해도 별이 되어
백담사도 시도 벗어 던지고
하늘로 목욕을 하러 떠났더라
멀리 한양에서 찾아온 이들,
아랑곳없이.
벗
조병화
1 - 제5회 醇和會(순화회)에서, 아타미 赤尾(적미) 호텔
벗은 존재의 숙소이다
그 등불이다
그 휴식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먼 내일에의 여행
그 저린 뜨거운 눈물이다
그 손짓이다
오늘 이 아타미 해변
태양의 화석처럼
우리들 모여
어제를 이야기하며 오늘을 나눈다
그리고, 또
내일 뜬다
2 -고향의 친구 C의 죽음을 들으며
네 죽음을 들으며
갑자기 유년시절이 잘려 나가는 생각,
세월의 뿌리가 잘리는 허허로움
벗은 존재의 숙소,
너는 그 숙소의 마지막 등불이 아니었던가
아, 이제 어린 시절은 바람에서 찾아볼 것인가,
구름에게나 물어볼 것인가,
세월은 뿌리 없이 떠서
마냥 무량하여라.
벽난로에 장작을 지피며
조병화
지나가는 바람이나 들렀다 갈까,
사람의 소리 하나 없는 산장에서
팔십 평생 타향에서 살아온 도시생활을 생각하니
어제와 같어라,
그 수라장 속에서 용케도 잘 살아왔어라
잘못한 것도 있고, 아슬아슬한 것도 있고,
위태로운 것도 있고, 아찔한 것도 있고
가끔 즐거웠던 것도 있었으나
이것이 인생이어라, 이 혼자.
가끔 지나가는 바람이나 들렀다 갈까,
산장은 마냥 고요한 자연이어라
어제도, 오늘도.
별
조병화
1
멉니다
아련하옵니다
불가사의 합니다
신비롭습니다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저 수많은 별들 중에서
사람이 사느 별이 있을까
하는 순간, 한 눈물이 떠올랐습니다
반짝, 반짝.
2 - 산다는 거
무수한 별 사이에서 태어났다가
무수한 별 사이에서 사라져가옵니다
태어났다가 사라져가는 시간은
백년을 넘지 못하나
시로서 다 잡을 수 없는 기다림을
천년, 만년, 억년을 살면서 사라져가옵니다
별은 너무나 멀리 아득하고,
기다림은 너무나 멀리 들리지 않아서
그저 그리움 남기고 자취없이 사라져가옵니다
반짝, 반짝,
무수한 별 사이에서 태어났다가
무수한 별 사이에서 사라져가옵니다.
벗
조병화
벗은 존재의 숙소이다
그 등불이다
그 휴식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먼 내일에의 여행
그 저린 뜨거운 눈물이다
그 손짓이다
오늘 이 아타미 해변
태양의 화석처럼
우리들 모여
어제를 이야기하며 오늘을 나눈다
그리고, 또
내일 뜬다
보석
조병화
허영찬 여인일수록
화려한 고독을 줄줄 달고 다닌다
목에, 손목에, 팔뚝에,
보석처럼 차가운 고독이
어디 있으랴.
봄비
조병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온종일 책상에 앉아, 창밖으로 멀리
비 내리는 바다만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노라면
문득, 거기 떠오르는 당신 생각
희미해져 가는 얼굴
그래, 그동안 안녕하셨나요
실로 먼 옛날 같기만 합니다
전설의 시대 같은
까마득한 먼 시간들
멀리 사라져 가기만 하는 시간들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
그 속에, 당신과 나, 두 점
날이 갈수록 작아져만 갑니다
이런 아픔, 저런 아픔
아픔 속에서도 거듭 아픔
만났다가 헤어진다는 거
이 세상에 왜, 왔는지?
큰 벌을 받고 있는 거지요
꿈이 있어도 꿈대로 살 수 없는
엇갈리는 이 이승
작은 행복이 있어도 오래 간직할 수 없는
무상한 이 이승의 세계
둥우리를 틀 수 없는 자리
실로 어디로 가는 건가
오늘따라 멍하니 창밖으로
비 내리는 바다를
온종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왈칵, 다가서는 당신의 얼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봄은 솔개의 눈알 속에서
조병화
봄은 솔개의 눈알 속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봄은 쓸쓸한 솔개의 눈알 속에서
겨울을 기거하고 있었다
온 하늘 푸른 곳
사방이 없는 자리
바람이 날개를 기르는 자리
눈을 기르는 자리
빈 것이 생명을 기르는 자리
봄은 시장한 솔개의 눈알 속에서
겨울을 기거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체온을 이어서
황량한 시간
작별을, 기거하고 있었다
2월이 오고, 3월이 오면
솔개는 홀로 하늘에서 쓸쓸하다
마침내 스스로의 이름으로 하여
쓸쓸한 천사처럼
봄은 솔개의 눈알 속에서
온 겨울, 때를 기거하고 있었다
인간이 영원을 그리며
한동안
쓸쓸한 몸속에서
생을 기거하고 있듯이.
봄이 오락가락하는 계절
조병화
우수절을 넘은 계절은
공연히 봄을 미리 당겨놓고
다시 오므렸다가, 다시 확 풀다가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긴 겨울이 아니었던가
어떻게 이 무섭던 겨울 참아냈던가
참으로 이 몸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오는 봄이
그리 쉽사리 기운을 차리겠는가, 하는
혼자 생각에 멀리 창을 내다보는 곳에
버드나무 가지가지가 흔들려 있고
흔들리는 가지가지에
푸스레한 생기가 어리고 있다
아, 봄은 어김없이 머지않아 쉬 오겠지만
이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지나가며, 다시 겨울이 오면
나는 이 몸으로 어찌 견디리
창밖에선 맥이 없어진 눈이 좌왕우왕하며
내렸다간 금세 자취를 감추고
멀리 봄 냄새나는 바람이 불어온다.
봄이여, 사월이여
조병화
하늘로 하늘로 당겨오르는 가슴,
이걸 생명이라고 할까,
자유라고 할까,
해방이라고 할까,
사월은 이러한 힘으로
겨울 내내 움츠렸던 몸을
밖으로, 밖으로, 인생 밖으로
한없이, 한없이 끌어내어
하늘에 가득히 풀어놓는다
멀리 가물거리는 것은 유혹인가,
그리움인가,
사랑이라는 아지랭인가
잊었던 꿈이 다시 살아난다
오, 봄이여, 사월이여
이 어지러움을 어찌하리.
부끄러움
조병화
인생을 다 산 이 끝자락에서
무슨 그리움이 또 남아 있겠는가만
이 외로움은 어디에 끼여 있는
사람의 때이런가
참으로 오래도 살아오면서
모진 그리움, 모진 아쉬움, 모진 기다림, 그 사랑
만남과 헤어짐,
희로애락 겪은 내게
무슨 미진함이 또 있겠는가만
아직도 채 닦아내지 못한 이 외로움은
어디에 남아 있는 사람의 때이런가
때때로, 혹은
시도때도 없이 스며드는 이 외로움
아, 이 끝자락에
이 부끄러움을 어찌하리.
부다페스트 옛 궁전
조병화
강은 어디서나 좋다
우리네 인생도 이렇게 흘러가고 있겠지
'인생무상' 그것처럼.
부처님
조병화
부처님, 제가 부처님께 하는 치성이
부처님 마음엔 차지 않으실는지는 모르나
저는 온 정성을 다하여
부처님을 치성껏 섬기고 있습니다
부처님, 그래도 더욱더 네 마음의 치성을 보여라!
하실는지는 모르나
저는 더이상은 부처님께 보여 드릴
제 마음의 치성이 없습니다
그래도 더 네 마음의 치성을 보여라! 하신다면
저는 더이상은 부처님께 보여 드릴 것이 없어
제 텅 빈 가난한 마음의 바닥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 그래도 더 네 마음의 치성을 보여라! 하신다면
저는 더 이상은 보여 드릴 것이 없어
너무나 가난해서 부끄러운
제 마음의 문을 닫을 수밖엔 없습니다.
비 내리는 나리다 공항에서
조병화
비는 내리는데도
수시로 비행기는 잘도 뜬다
어디로 떠나가는 사람들인가,
참으로 사람도 많다
나도 그 사람들 중 한 사람,
나는 지금 한국의 서울로 들어가는
아시아나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귀에 들어오는 말들이
이렇게 다를 줄이야
서로, 서로, 서로들이 사는 마을들을 찾아간다
공중을 수만 리 날면서도, 잘도
자기들이 살 수 있는 초원을 찾아가는 새들처럼
나는 나의 말을 쓰는 사람들을 찾아간다
사랑이라는 말을.
비 내리는 북경(北京)
조병화
폭우가 쏟아지는 북경 거리를
노랑, 파랑, 빨강, 분홍, 까망
우비들을 쓴 자전거떼들이 줄을 이어
높이 솟은 빌딩 사이를 누비며
쓱, 쓱, 바다 물결을 헤엄쳐 지나가는 고기떼처럼
색깔지어 지나간다
후줄근한 퇴근길
나는 대열에서 낙오한 이단자처럼
창에 기대어
이 엄청난 생존대열에 넋을 잃는다.
비
조병화
어제는 비를 맞으며 빗속에서
속삭이고 사랑을 하고
해 저물도록 비와 같이 깊은 사랑에 젖었는데
어제는 하늘에 구름이 뜨고 하늘에서
목마를 때 단비가 내리고
오월의 잎새에 단비가 내리어
나무를 키우고 노래를 키웠는데
이제는 비가 내려도 어제의 비가 아니다
사랑을 해도 어제의 사랑이 아니다
노래를 불러도 어제의 노래가 아니다
어머니의 젖처럼 신비하던 하늘도
고향의 공기처럼 즐겁던 오월도
빗물에 비를 타고 맑은 하늘이 내리던 서울도
어제처럼 가고
하늘에 구름이 아닌 구름이 뜨고
구름에서 비가 아닌 비가 내리고
죽음의 재가 비를 타고 온종일 내린다는
- 오늘은 어두운 오월이다
어제는 하늘에 우물물 같은 구름이 뜨고
하늘에서 목마를 때 목마른 단비가 내리어
개울 고기를 키우고 열매를 키우고 노래를 키웠는데
어제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하늘이 개고
빗속에 비를 맞으며 사랑을 하던 자리엔
새파란 풀이 밭을 이루고 이야기가 남았는데
이제는 비가 내려도 개지 않는 하늘이다
사랑을 해도 사랑이 빈 사랑이다
노래를 불러도 노래가 빈 노래이다
비는 내리는데
조병화
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
비에 막혀 그대로 어둠이 되는 미도파 앞을 비는 내리는데
서울 시민들의 머리 위를 비는 내리는데
비에 젖은 그리운 얼굴들이
서울의 추녀 아래로 비를 멈추는데
진종일을 후줄근히 내 마음은 젖어내리는데
넓은 유리창으로 층층이 비는 흘러내리는데
아스팔트로 네거리로 빗물이 흘러내리는데
그대로 발들을 멈춘 채 밤은 내리는데
내 마음 속으로 내 마음 흘러내리는 마음
내 마음 밖으로 내 마음 흘러내리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을 막고 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
가난한 방에 가난한 침대 위에
가난한 시인의 애인아……어두운 창을 닫고
쓸쓸한 인생을 그대로 비는 내리는데
아무런 기쁨도 없이 하는 일 없이 하루를 보내는데
하루가 오고 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
비에 막혀 미도파 앞에 발을 멈춘 채 내 마음에 밤은 내리는데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조병화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비가 오는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란다
낙엽이 떨어져 뒹구는 거리에
한 줄의 시를
띄우지 못하는 사람은
애인이 없는 사람 이란다
함박눈 내리는 밤에
혼자 앉아 있으면서도
꼭 닫힌 창문으로 눈이
가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덫을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란다
빈 날, 빈 세월
조병화
시신들이 무수히 떼를 지어 지나가는 길목에
온종일, 넓은 망을 쳤지만
이젠 보이지 않아
빈 날만 보낸다
시신들이 무수히 떼를 지어 지나가는 길목에
온종일, 넓은 망을 쳤지만
이젠 들리지도 않아
빈 날만 보낸다
아, 날마다 날마다
시신이 지나가는 길목에
온종일 넓고넓은 망을 쳤지만
눈이 가물가물, 귀가 가물가물해서
한 세월 다 가도록
이렇게 빈 날만 보낸다.
빛
조병화
어찌하여 난 내 이 외로움을
버리지 못하나
어찌하여 난 내 아픔을
버리지 못하나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다 하지 못 할 이 길
어찌하여 내 이 나를
버리지 못하나
어찌하여 이 외로운 자리
그 자릴
버리지 못 하나
빛이여
밝고 맑은 빛이여
뻐꾸기의 독백
조병화
이 산, 저 산 숨어서 살며
나는 고통 뒤에 오는 즐거움보다
즐거움 뒤에 오는 고통을 삽니다
뻐꾹 뻐꾹 뻑뻑 꾹
이 산, 저 산 푸르름에 숨어서
맑은 외로움을 살며
가시지 않는 슬픈 영혼을 토합니다
뻐꾹 뻐꾹 뻑뻑 꾹.
사람도 자연이어서
조병화
사람도 자연이어서
슬픔도 자연이어서
외로움도 자연이어서
그리움도 자연이어서
만남도 자연이어서
헤어짐도 자연이어서
사는 것도 자연이어서
죽는 것도 자연이어서
자연으로 있다가
자연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사람은 누구나
조병화
사람은 누구나 동행을 하면서
작별을 산다
눈보라치는
허허 벌판을
혹은
장미의 들을
사람은 누구나 동행을 하며
작별을 산다
서로의 인간의 깊일 모르면서
서로의 이웃의 자릴 모르면서
서로의 생각의 거릴 모르면서
작별의 시간, 그 장소
그 영원을 다는 모르면서
사람은 누구나 동행 속에서
작별을 산다
뜨거운 동침 속에서
작별을 동침한다
사랑의 높이
믿음의 높이
소망의 높이
그 성의의 높일
높혀가며
목숨 떨어지면 그뿐
뜨거이
사람은 누구나 동행을 하면서
작별을 산다
비바람치는
멍멍 벌판을
혹은
빛의 들을
사람은 누구나 동행 속에서
작별을 산다.
사람이 늙으면
조병화
사람이 늙으면
먼저 그리움이 사라지더라
그리움이 고요히 사라지면서
사랑이 따라서 사라지더라
사랑이 따라서 사라지면서
꿈이 소리 없이 사라지더라
꿈이 소리 없이 사라지면서
몸이 공기처럼 비어가더라
몸이 공기처럼 비어가면서
아, 꽁꽁 숨겨두었던 너까지 쏙 빠져가더라.
사람이 한 번 작별을 하면
조병화
그렇게 그렇게 되어서 작별을 한 후
문득 생각이 나서 그곳에 가보니
그곳엔 이미 없었습니다
그곳엔 있으리라고 믿고 가보았지만
그곳에도 없었습니다
평소에 몇 번 같이 가본 정다운 곳이 있어서
혹시나 그곳에, 하고
그곳을 멀리 찾아갔으나, 그곳에도 없었습니다
먼 하늘엔 도도히 흐르는 세월
아, 너도 먼지로 떠서, 나도 먼지로 떠서
사랑
조병화
1
시간을 탈출하는 방법을
너만이 알고 있다
시간을 탈출하는 길을
너만이 알고 있다
탈출 불가능한 이 시간 속에서
너만이 나를
탈출시킬 수 있는 비밀을 안다.
2
어디선지 사랑이 눈을 뜨고 있다
가물가물 별이 솟고 달이 뜨고
소식이 있는 곳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
3
사랑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욱 외로워지는 거
한없이 그리워지는
그 그리움을 앓는 거
가까이 있어도, 살며시 손을 만져도
4
기다린다는 건
차라리 죽음보다 더 참혹한 거
매일 매시 매초, 내 마음은
너의 문턱까지 갔다간
항상 쓸쓸히 되돌아온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고 싶은
이 기다리는 고통은
아직 네가 있기 때문이다
비굴을 넘어서
사랑은
조병화
사랑은 아름다운 구름이며
보이지 않는 바람
인간이 사는 곳에서 돈다.
사랑은 소리 나지 않는 목숨이며
보이지 않는 오열
떨어져 있는 곳에서 돈다.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는 마음
받아도 받아도 모자라는 목숨
사랑은 닿지 않는 구름이며
머물지 않는 바람
차지 않는 혼자 속에서 돈다.
사랑의 계절
조병화
해마다 꽃피는 계절이면
산에 들에 하늘에
사랑하고 싶은 마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그 누구와 같이 집을 짓고 싶은 마음
그 누구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어라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 아물아물
헤아릴 수 없는 시간에 매달려
한동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구름 끝에
그 누구와 같이 둥지를 치고 싶은 마음
그 누구와 같이 둥, 둥, 떠가고 싶은 마음
아, 해마다 꽃돋는 나날이면
내 마음에 돋는 너의 봉오리.
사랑의 노숙(露宿)
조병화
너는 내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슬프고 즐거운 작은 사랑의 숙박이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인생은 하루의 밤과 같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하루의 밤과 같은 밤에
우리는 사랑 포옹 결합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인간이다
너는 내 사랑의 유산이다
너는 내 온 존재의 기억이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인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그대로 떠나야 하는 생명
너는 그대로 있어라
우리가 가고 내가 가고 사랑이 사라질지라도
너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라
때오면 너도 또한 이 세상에 사랑을 남기고 가거라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과 숨가뿐 밤과 사랑을 남기고
가난히 자리를 떠나라
지금 이 순간과 같이 나와 같이
너는 이 짧은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짧은 사랑의 기억이다
사랑하면
조병화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서로 알게 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없는 한 인연이려니
그러다가 이별이 오면 그만큼 서운해지려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슬픔이 되려니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알게 되어
서로 사랑하게 되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여겨지려니
이러다가 이별이 오면 그만큼 슬퍼지려니
우리가 어쩌다가 사랑하게 되어
서로 못견디게 그리워지면
그것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숙명으로 여겨지려니
이러다가 이별이 오면 그만큼 뜨거운 눈물이려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흐느낌이 되려니
아,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게 될수록
이별이 그만큼 더욱더 애절하게 되려니
그리워지면 그리워질수록, 그만큼
이별이 더욱더 참혹하게 되려니.
사랑, 혹은 그리움
조병화
너와 나는
일 밀리미터의 수억분지 일로 좁힌 거리에 있어도
그 수천억 배 되는 거리 밖에
떨어져 있는 생각
그리하여 그 떨어져 있는 거리 밖에서
사랑, 혹은 그리워하는 정을 타고난 죄로
나날을, 스스로의 우리 안에서, 허공에
생명을 한잎, 한잎, 날리고 있는 거다
가까울수록 짙은
외로운 안개
무욕한 고독
아, 너와 나의 거리는
일 밀리미터의 수억 분지 일의 거리이지만
그 수천억 배의 거리 밖에 떨어져 있구나
사막
조병화
사막은 항상 추억을 잊으려는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이라고 하더라
사막엔 지금도 <마리네디트리히>가 신발을 벗은 채 절망의 남자를 쫓아가고 있다고 하더라
사막의 별에는 항상 사랑의 눈물처럼 맑은 물이 고여 있다고도 하더라
시인이라는 나는 지금 서울 명동에서 술을 술술 마시고 있는데 항상 이런 인간 사막에 살고 있는 것만 같아라
사막이여 물은 없어도 항상 나에게 밤과 별과 벗을 …
사막은 항상 네 마음 내 마음 가까이 사랑이 떨어질 때 생긴다고 하더라.
사월이 머물 무렵
조병화
어느 시골 도시
학교 교정에서 확, 쏟아져 나오는
소년, 소녀들의 얼굴들에게서
봄은 내 가슴을 연다
어떻게 저렇게도 불그스레한 볼들이 있었을까.
갓 피어오르는 복숭아꽃, 아니면
살구꽃, 먼 산의 진달래, 벗꽃들처럼
흙바람 속에서도 봄은 소년, 소녀들에게서
활짝, 피어 오른다
생명은 저렇게도 모질고, 무서운 것
바람에 바람에 자라나는 저 소년, 소녀들에게서
생명에 업힌 꿈들이
확, 확, 내게로 다가오며
할아버지, 우리와 같이 가세요, 이 봄은
하지만, 나는 이미 늙어서 이젠 기력이 없다
먼저 가거라, 그리고 자라라
무럭무럭, 하늘에 닿을도록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자라라
그리하여 이 나라의 든든한 재목이 되어라
곧고, 정직하고, 건강한.
사이공
조병화
이곳은 여자들이 고운 도시옵니다
이곳은 나무가 많은 그늘진 도시옵니다
이곳은 불란서 말이어야만 통하는
동양의 이역, 작은 불란서 파리옵니다
멀리 사이공 강을 타고 들어온 외국 선박은
지금 극동의 초입을 돌아와
동양의 물을 마시며
강변가 부두에 바람을 찾아 나온
삿갓 쓴 월남의 남녀들
이 고장 사정은 내 고장 사정과 비슷한 고장
김 서방 이 서방 박 서방
혹은 옥희 순희 정희 같은 사람이 살고 있는 곳
오래간만에 보는 동양의 얼굴들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처럼 가난들 하옵니다
나는 정객도
관리도 아니옵니다
다만 한구석 적(籍)을 가진 인간 주민
이곳은 여자들이 고운 도시옵니다
이곳은 나무가 많은 그늘진 도시옵니다
이곳은 불란서 말이어야만 통하는
동양의 이웃 작은 불란서 파리옵니다
산과 바다
조병화
산과 바다는
서로 떨어져 있어도, 항상
그리움을 대고 있습니다
솟아 있어도
가라앉아 있어도
서로 보이지 않아도
한없이, 한없이
맑은 그리움을 대고 있습니다
지금, 산과 바다는 설사
말없이 서로 떨어져 있어도
한없는 그리움을 대고 있습니다
그대로.
산다는 거
조병화
사람은 이 세상에 나와서
철이 들면서
스스로 스스로가 이 세상에 타고나온
고민을 고민하며
고민을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을 고민하면서
일생을 그렇게 지내다가
고민하면서 죽는다
살다보면 고민을 만들어 고민을 고민하며
있지도 않을 고민을 고민하면서
한치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지혜로
캄캄한 두려움을 만들며 고민한다
어둠은 어둠으로 안없이 이어지며 뚫리고
두려움은 두려움으로 한없이 이어지며 뚫리고
근심과 안심은 근심과 안심으로 이어지며 뚫리고
순간순간 아슬아슬하게 산다
아, 이 아슬아슬한 인생의 길
살며
얼마나 많았던 그 캄캄한 고비였던가
사람은 이 세상에 나와서 죽을 때까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고민을 고민하며 살며
고민을 만들어 고민을 살며
스스로 스스로가 타고 나온 고민을 살다 간다.
산사의 가을
조병화
우연히 찾아 들은 신라의 산사
오래 묵은 신라의 고찰엔 이날,
이곳에서 부처님은 부재중이시어
대웅전 텅 빈 방 안에 불상만 계시고
문밖으로 보이는 가을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더라
어디로 가셨을까,
무심히 떠가는 흰 구름 한 점
오락가락하면서
어디선지 지나가는 뻐꾸기 소리
바람이 차더라
자연도 가을 하늘, 세상도 가을, 나도 가을
가을은 깊은 적막으로 가라앉아 가면서
일체 존재는 침묵,
어디로 가셨을까,
만고 세월이 이렇게 고요한데
인생만이 번뇌로워라
어, 파란 가을 하늘, 나 하나,
산책
조병화
참으로 당신과 함께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앉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당긴과 함께 걷다 앉았다 하고 싶은
나무 골목길 분수의 잔디
노란 밀감나무 아래 빈 벤치들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누워 있고 싶은 남국의 꽃밭
마냥 세워 푸르기만 한 꽃밭
내 마음은 솔개미처럼 양명산 중턱
따스한 하늘에 걸려 날개질 치며
만나다 헤어질 그 사람들이 또 그리워들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영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영 앉아 있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살구나무
조병화
할아버지와 아버지 무덤이 줄지어
위 아래로 있는 산소 기슭에
살구나무 몇 그루를 심었더니
봄 되어 무수히 꽃이 피다 열매로 오무려져서
오늘은 열매들이 주황색으로 익어 떨어져
잔디 위에 무수히 깔려 있다
언젠가 스위스랜드 루가노 호수, 로
가던 산골 기차 차창에 어리던
열매 달린 나무들 비탈에 서서
익은 열매를 무수히 땅에 떨구던 풍경,
그 자연 풍경이 생각나며
아, 자연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연히
자연스러운 것을
인간만이 조잡스럽구나
아래 마을은 멀리 고요하고
햇볕은 떨어진 열매를 고루 만지며
조상들은 말이 없다
여름 어느 오후.
샘터
조병화
빨간 태양을 가슴에 안고
사나이들의 잠이 길어진 아침에
샘터로 나오는 여인네들은 젖이 불었다
새파란 해협이
항시 귀에 젖는데
마을 여인네들은 물이 그리워
이른 아침이 되면
밤새 불은 유방에 빨간 태양을 안고
잎새들이 목욕한
물터로 나온다
샘은 사랑하던 시절의 어머니의 고향
일그러진 항아리를 들고
마을 아가씨들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따르면
나의 가슴에도 빨간 해가 솟는다
물터에는 말이 없다
물터에 모인 여인들의 피부엔
맑은 비늘이 돋친다
나도 어머니의 고향이 그리워
희어서 외로운 손을
샘 속에 담그어본다
해협에 빨간 태양이 뜨면
잠이 길어진 사나이들을 두고
마을 여인네들은 샘터로 나온다
밤새 불은 유방에 빨간 해가 물든다
꿈이 젖는다.
생명은 하나의 소리
조병화
당신과 나의 회화에 빛이 흐르는 동안
그늘진 지구 한 자리 나의 자리엔
살아 있는 의미와 시간이 있었읍니다.
별들이 비치다 만 밤들이 있었읍니다
해가 활활 타다 만 하늘들이 있었읍니다
밤과 하늘들을 따라 우리들이 살아 있었읍니다.
생명은 하나의 외로운 소리.
당신은 가난한 나에게 소리를 주시고
갈라진 나의 소리에 의미를 주시고
지구 먼 한 자리에 나의 자리를 주셨읍니다.
어차피 한동안 머물다 말 하늘과 별 아래
당신과 나의 회화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자리를 거두고 돌아가야 할 나.
당신과 나의 회화에 빛이 흐르는 동안
그늘진 지구 한 자리 나의 자리엔
살아 있는 의미와 시간이 있었습니다.
생존(生存) - 北京 故官博物院(紫金城) 神武門
조병화
독재는 무서운 것이라 하지만
힘 있는 자만이 유물을 남기어
후대 사람들에게 관광이 되는구나
북경 고궁박물원, 신무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의 물결
아, 엄청난 인류여
열사는 지나가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짧은 생명이 먼지 같구나
얼굴, 얼굴, 입, 입, 눈, 눈, 코, 코, 귀, 귀,
보이는 것이 우주의 먼지 같은 인간들이다.
서산나귀
조병화
말은 말이로되 나귀올시다
서산나귀올시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지지리 못생긴
서산나귀올시다
뛸 줄도 모르고
날을 줄도 모르고
그대로 꾀도 부릴 줄 모르는
한 마리 서산나귀올시다
긴 긴 길을
긴 긴 세월을
말은 말이로되 고집만 센 나귀올시다
한평생 일복만 타고난 서산나귀올시다.
서산나귀의 독백(獨白)
조병화
얼마나 나는 네게
적응하려 했을까
긴 세월을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골몰하면서
얼마나 나는 네게 적응하려 했을까
비굴일 만큼
창피일 만큼
굴욕일 만큼
참으며, 견디며, 온힘 다하여
그 욕설을 풀며, 삭이며
얼마나 나는
상처 진 가슴을 살아왔을까
먼 먼 저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태어나올 때
그것이 내게 주어진 약속인 양
생각을 하면서
어쩔 수 없는 그 생애를 살며
아, 얼마나 나는
네게 적응하려 했을까
단 한 번이라도
널 풀어놓고
날 풀어놓기 위하여.
서시(序詩)
조병화
1 - 고요한 사랑
먼 훗날 어느 사랑하는 애인이
당신과 나의 이 사랑을 찾으면
당신과 나의 다 하지 못한 이 사랑은
향기로운 술이 되어 고여 있으리
먼 훗날 어느 그리운 애인이
당신과 나의 이 그리움을 찾으면
당신과 나의 다 이루지 못한 그리움은
고운 술이 되어 고여 있으리
먼 훗날 어느 사랑을 아파하는 애인이
당신과 나의 이 아픔을 찾으면
당신과 나의 다 풀지 못한 이 아픔은
투명한 짙은 술이 되어 고여 있으리
아, 그렇게
당신과 나의 이 사랑은
순결한 영혼,
영혼이 흘리고 있는 이 사랑, 이 그리움,
이 아픔은
먼 훗날,
당신과 나의 존재의 술이 되어
면면히 이어질 애인들의 빈 가슴을
훈훈히 취하게 하리.
2
무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외로움을 안다
그러나 이 외로운 사람들끼리 또 하나의 무리를
서로 감지할 땐 이미 이 외로움은 외로움이 아니다
서울로 가는 도야지들
조병화
경부 고속 도로, 기운 오후를
줄곧 서울로 묶여 가면서
도야지들이
고속으로 흔들리는 트럭 위에서
싸움을 한다
무식한 그들이
어찌 그들의 내일을 알랴만
오로지 자기만이 살겠다는
처량한 이 광경이 나를 울린다.
이긴 놈이나, 진 놈이나
서울에 다다르면
어차피 한 자리에서
같이 죽을 놈들이 아니겠는가
아, 황막한 이 이승의 풍경
1986년 4월을
불안한 비 속에서, 나는
고속으로 서울을 향하고 있었다.
서울 한구석
조병화
전쟁이 지나간 자국의 침묵처럼
녹슬은 철근에 비는 내린다
진종일을 개이지 않는 우울이
빗물이 흐르는 유리창 안에 감돌고
집을 짓고 같이 살고 싶던 내사람
내 사람이 사라진 가슴에 비는 내린다
지금 어데매 비 맞는 내 가슴 깊은 곳을
흙탕물 쏟아지는 강이 흐르고
사랑이 지나간 후줄근한 자국 그 자국에
녹슨 세월처럼 비는 내린다.
석가의 날
조병화
부처님은
아카시아꽃이 피어 만발한
향기로운 꽃의 파도를 타시고
올해는 이곳에 오셨구나
오월 하늘이 높게높게 솟은
푸른 곳에, 훤히
흰 꽃 너울너울 향기의 파도를 타시고
빙그레 웃으시며
어머님도 같이 오셨구나
아, 무한한 이 기쁨,
사람의 작은 가슴으로 어찌 다하리
이곳은 이렇게 아직도 어수선합니다
그러나 오월은 세월 중 가장 좋다는 달
편히 쉬시다 돌아가십시오
번뇌로운 불안이 가시지 않는
우리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섬
조병화
1
섬은
그리움을 갖게 하는 거리에 있어 좋다
섬은
그리움을 이어 주는 거리에 있어 좋다
섬은
그렇게 가고 싶은 거리에 있어 좋다
사람이 사는지, 누가 사는지
무어가 있는지, 그건 몰라도
섬은, 항상
그리움이 어려 있어 좋다
2
섬은 그리움입니다
저녁부터 밤새
기별을 보내고 있습니다
반짝 반짝
섬은 그저 멀리서
그리움으로 새우고 있습니다
세월
조병화
잊어야지, 잊어야지 하면서
잊어지지 않는 채
봄, 여름, 가을
올해도 어느덧 세월 갈리는
바람의 언덕
밀리며, 밀리며,
이 이간의 세계, 쓸쓸한 건
그 저문 풍경이다
가진 사람이나
갖지 않은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나
동행하면서, 동행하면서
이 혼자, 이 혼자를 견디며
세월을 넘는다
잊어야지, 잊어야지, 이 비밀
하면서
세월은
조병화
세월은 떠나가면서
기쁨보다는 슬픔을 더 많이 남기고 갑니다
봄 여름이 지나가면서
가을을 남기고 가듯이
가을이 지나가면서
겨울을 남기고 가듯이
만남이 지나가면서
이별을 남기고 가듯이
사랑이 지나가면서
그리움을 남기고 가듯이
아, 세월 지나가면서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빈자리를 남기고 갑니다
세월의 벌판에서
조병화
이승의 끝,저승의 시작,
황무무애한 이 세월의 무인 벌판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어제도 길을 찾는 일,
오늘도 길을 찾는 일,허기지도록
매일매일 온종일 그 일
이젠 사람의 눈이 쓸모가 없습니다
어머니, 그곳으로 찾아가는 길,
그 길을 묻고 있습니다
어제도 이 소원,
오늘도 이 소원, 허기지도록
이 자리
황무무애한 세월의 무인 벌판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세월의 숲속을 벗어나며
조병화
암울한 긴 숲속을 허우적이며
오랜 세월을 빠져나와
이제 겨우 눈에 보이는 먼 신작로
아, 얼마나 혼미한 세월이었던가
얼마나 초조한 세월이었던가
얼마나 암담한 세월이었던가
얼마나 불안한 세월이었던가
얼마나 캄캄한 내일이었던가
생각하면 무엇하리
햇빛을 쪼이며 먼 곳을 바라보니
보이는 것이 하늘
아련한 내일
망망한 우주이어라
인명은 천명이라,
신(神)만이 아시는 일
어찌 그 종말을 짐작하려나
암울한 숲속을 벗어나
먼 신작로로 접어들지만.
소년에게
조병화
너는 무엇보다도 먼저
죽음을 알아야 한다.
언젠가는 네게 죽음이 와서
이제 가자, 하는 말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노력한 만큼 밝은 곳을로 갈 것이 아닌가
어둡고, 캄캄하고, 보이지 않는 우주
죽어서 혼자 가는 길
어떻게 떠날 것인가
때로, 때때로 생각해 볼 일이 아니겠는가.
소라
조병화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 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소라의 초상화(肖像畵)
조병화
당신네들이나
영악하게 잘 살으시지요
나야 나대로히
나의 생리(生理)에 맞는 의상(衣裳)을 찾았답니다.
소리 없이 밤이 내리면
조병화
소리 없이 유리창에 밤이 내리면
당신이 없는 이 침실은 그대로 무덤
인색한 애정에 상한 산비둘기처럼
마음의 날개를 접고
나 돌아가는 길
영원이라는 것이 있다면 당신을 만나서 헤어지는 것
공기와 같이 냉기와 같이 사라지는 자리
소리 없이 유리창에 밤이 내리면
당신이 없는 내 가슴은 빈 당신의 무덤
인색한 애정의 부스러기를 밟으며
나 돌아가는 길.
소망
조병화
소망같이 피곤한 것이 어디 있으랴
소망같이 어두운 것이 어디 있으랴
소망같이 쓸쓸한 것이 어디 있으랴
소망같이 외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
풀 곁에 흙이 있듯이
너와 나는 그렇게
있다 가자!
소망같이 외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
소망같이 쓸쓸한 것이 어디 있으랴
소망같이 어두운 것이 어디 있으랴
소망같이 피곤한 것이 어디 있으랴.
소망이여 서서히
조병화
그 언젠가
나와 네가 약속한 그날
그날 그 언젠가 너와 내가 약속한 그날
그날을 향해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다가든다.
허허 광막한 시간의 들판
새 눈 내리며
새 발자국
먼저 간 사람없는 이 빛
이 하이웨이
소망이여 서서히 오렴
서서히 상하기 쉬운 이 가슴에
밝은 해
너와 나
새 날의 시간이여
서서히
서서히
아, 소망이여
속도에 떠서
조병화
1991년 4월 하순의 남해 고속도로는
가도 가도 막힌 데 없는 훤한 하늘의 길
새롭게 솟아오른 꽃들로 진창이었다.
솔개
조병화
하늘에 살고 싶어라
바람에
떠 있고 싶어라
날개에, 날개에
떠 있고 싶어라
바람이 쓸어 가는
하늘
인간보다 쓸쓸히
보이지 않는 곳에
눈물보다 쓸쓸히
차가이, 하늘 깊은 곳에
외로움보다 쓸쓸히
바람에 쓸려
바람에 쓸려
날개처럼
떠 있고 싶어라.
송이
조병화
막내딸이 추석이라고 송이를 보내왔다
바뻐서 못 온다고
아, 내겐 송이 냄새보다는
사람의 냄새가 그리운 것을
그러나 이것만이라도 고맙지.
숙명
조병화
지금 내가 사랑한다, 한들
또 하나의 이별을
당신에게 주게 되는 것을
지금 이렇게 늦은 세월에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 한들
머지 않아 내게 생명이 끝이 와서
어진 당신에게
또 하나의 쓰라린 이별이 되는 것을
아, 이렇게 늦게 서로 만나서
숨어서 뜨거워지는 이 그리움,
어쩔 수 없이
내가 지금 당신을 사랑한다, 한들
나의 세월의 끝에서
서로 헤어져야 하는 것을
속절없이
술이여!
조병화
술이여! 쓸쓸한 때 너는 나를 찾아 주어 좋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언제나 너를 찾아갈 수 있어 좋다 너는 공산주의도 아니요 자본주의도 아니요 아무런 주의도 아니어서 좋다 너는 당적이니 호적이니 등록이니 하는 것이 없어 그저 좋다 아무런 수속이 없어 좋다 너는 그저 너의 자리에 있는 것 백 년 천 년 몇몇 천 년을 그저 너의 자리에 소리 없이 있는 것
가장 이야기가 많으며 가장 없는 것
가장 쓸쓸하지 않으며 가장 쓸쓸한 것
가장 가난하지 않으며 가장 가난한 것
가장 잊어지지 않으며 가장 잊어지는 것
깊은 자리로 깊은 자리로 항상 혼자케 하여 주어 좋다
거처가 없는 자의 벗이여
떠나는 자의 벗이여
내일을 두고 가는 자의 벗이여
스스로 스스로에 취해 스스로를 찾아
스스로를 버리는
아
이 자유여
너는 내 곁에 언제나 있어 주어 좋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수속 없이 따짐 없이 두려워함 없이 너를 내가 찾아갈 수 있어 좋다
술 취한 원혼
조병화
시작은 마한(馬韓) 시대의 토성이라고 했다
대대로 일본의 왜구들을 막아냈다고 했다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돌로 다시
석성으로 축성을 했다고 했다
때마침 술에 만취가 된 한 거렁뱅이
노파(老婆)가 미친 듯이 성안을 돌고 있었다
마침내 임경업 장군 소실의 원혼이, 아직도
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듯이.
숨어서 우는 노래
조병화
내 영혼은
숨어서 우는 노래로 가득합니다.
내 사는
숨어서 우는 노래로 젖어 있습니다.
아, 그렇게
내 긴 생애는 숨어서 우는 노래입니다.
스카이 라운지
조병화
반도 호텔 옥상 글라스 . 룸은
서울의 스카이 . 라운지
노을이 번지는 유리창 안에서
이국종 샤보텐*처럼 술을 마신다.
하강하는 항공기처럼
가벼운 날개를 밤이 내리면
서울은 창 밖의 북극
슬픈 고도는
부부의 화해처럼 깊어만 간다.
* 샤보텐 : 소나기를 좋아하는 열대 지방의 식물.
슬픈 바람을 주는 여인
조병화
내겐 쉴 새 없이
슬픈 바람을 주는 여인이 있습니다
때를 가리지 않고
불쑥
슬픔을 주는 여인이 있습니다
소리도 나지 않으며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는 바람
나는 이 바람이 불어닥칠 때마다
저린 피를 토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허공에 나를 새겨 왔습니다
잊으려 하면 불어 닥치는
슬픈 인연
아, 얼마나 많은 세월을
이 바람에 시달려 왔던가
한 세상 이렇게
저리게 새겨 온 나의 생존
이제 흙에 묻히며 피하련가
지금도 내겐 기쁨보다
슬픔을 주는 여인이 있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이렇게 세상 다 하도록 자주
내겐 슬픔을 주는 바람이 있습니다
시간
조병화
시간도 머물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안은
묵묵히 흐르는 유구한 시간도 발을 멈추고
사랑, 그 옆에선 기다려주곤 합니다
덧없는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허무한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무정한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잔인한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고
속절없는 것이 시간이라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사랑 옆에선 발을 멈추고
시간이 중단된 우주를 마련해 주곤 합니다
언제까지나,
그러다간
사랑이 지나가면
걷잡을 수 없는 시간의 속도,
아, 그러한 세월의 길을, 사람은
인생이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속절없이.
시간 배당 -김포공항에서 9시 A.M.
조병화
내 인생 지금 80,
이것을 시간으로 따져서
그의 1/3은 기다림이었고
그의 2/3는 그 일의 실천이었다
마음의 편안, 그 여유, 그 안심,
그 일의 정확한 실천, 그 사색을 위해서
이것이 나의 인생,
이것도 나의 성격이었겠지.
시간은 마냥 그 자리
조병화
생각을 더듬으면서
생각을 여행하며
생각을 찾는 사람에겐
시간은 마냥 그 자리
어딜 가나 자욱한 시간
변하는 건 인간뿐이다.
천 년이 눈 앞에 있고
이천 년이 눈 앞에 있고
변하는 속에서
변하는 걸 살며
예까지 왔다.
바다로 시작하는 이곳, 육지 끝머리
대서양 언덕
솟은 십자가
나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쓰러지는 자리에서 쓰러진다.
변하는 건 인간사
변하는 속에서
시간은 마냥 그 자리
두고 가며, 떠나는 걸 산다.
시간이 몰린 길목에서 - 1978년을 보내며
조병화
어느새, 모르게 떠나
일년 내내
사방으로 흩어져 쏘다니다가
12월 골목으로
갑작스레 몰려드는
시간들
세월들
상한 흔적들
잘 될 거라 믿고
잘 되길 바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배신처럼
휙, 휙, 떠나 버렸던
시간들
세월들
12월 좁은 골목에서
발을 전다.
아, 이 엄청난 거래
인간쓰레기
시는 고독하다.
시는 – 캄캄한 인도 하늘을 날으며
조병화
시는 공기처럼 우주 어디에나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걸 볼 수 있는 시인에게만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보고 감지할 수 있는 감성이 있고
그걸 처리할 수 있는 지성이 있고
그걸 말로 잡을 수 있는 재능이 있고
언어로 단단히 묶어 둘 지혜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어로 단단히 묶어 둔 그 시를
아름답게 닦고, 다듬어서
고독한 영혼들에게 뿌려 주는 것이다
사막의 이슬처럼.
별처럼.
시는 영혼의 자연이어서
조병화
시를 쓰시려 하십니까.
시인으로 살려하십니까.
시인의 영혼은 큰 자연을 살아가는
고독한 겸손이옵니다
눈물도 자연이요, 슬픔도 자연이요,
사랑도 자연이요, 실연도 자연이요,
만남과 이별도 자연.
깨달음도 허망으로, 믿음도 허공으로,
큰 자연의 바람이옵니다
자연 속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닦으며 닦으며
투명한 영혼을 살아가는 큰 자연이옵니다.
시는 영혼의 화석 - 제1회 편운문학상 시상(片雲文學賞 施賞)을 마치고
조병화
가진 거 하나 없이 이 세상에 나와서
돈 들이지 않고 공부도 하고
많은 굵은 상도 탔습니다
지금 인생을 마무리지으려는, 나는
그 많은 은혜를 다 합쳐 보답도 하고
다시 가진 거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이 상을 마련했습니다
"시는 영혼의 보석"이라는
황금의 메달을 달아서.
시를 쓰면
조병화
시를 쓰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들판의 작은 풀꽃처럼.
시의 뿌리
조병화
1
시인은 자기 시의 발견을 위해서 살고,
참된 인간은 자아의 발견을 위해서 산다.
2
자기 이름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교육이다.
자기 이름에게 빛을 주는 것이 그 사람의 생애이다.
3
명예는 숭고한 기쁨이지만, 맑은 물처럼 고독하다.
4
어느 경기에도 승부가 있지만 인생엔 승부가 없다.
다만 기쁨과 슬픔이 있을 뿐이다.
5
나는 내 삶을 수시로 확인하기 위하여,
죽음과 그 이별의 시를 많이 써 왔다.
6
나의 작업실은 나와 내가 싸우는 아늑한 고독의 도장이다.
7
시인(詩人)은 스스로, 스스로의 종교(宗敎)를 만들어서
그 종교를 산다.
8
시는 살아가는 데 식량은 되지 못해도
죽어가는 데 그 위안은 된다.
9
시인은 왕왕 자기만을 생각하며, 자기만을 사랑한다.
이러한 자만심이 큰 소외감으로 이어진다.
10
시인은 자기 성(城)안에서, 성주(城主)처럼 살아간다.
때문에 그 성외(城外) 사람에겐 늘 낯설다.
11
시인은 필요 이상의 자존심을 갖는다.
그것이 운명적인 소외와 고독이다.
시인의 일생
조병화
무수한 시인들의 시를 읽어내리면서
문득 생각나는 생각,
시인들의 일생이 어찌 그리 순탄하였으랴,
인간세계 그 세속에 젖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곧게 지키면서
세속에 섞여 살아야 하는
세속 속의 생활,
이것이 어찌 그리 쉬운 일이던가
시인은 인정받지 않은 입법자, (셸리)라 했던가
인정받지 않은 시인의 법을 살려는 시인들,
이것이 시인의 숙명이라면
세속의 윤리, 도덕, 그 많은 법을 사는 세속사회에서
어찌 이단자가 아니랴
소외와 고독,
소외와 고독은 이곳에 있기에
더욱 사랑은 목숨처럼 갈구되어서
시인의 사랑은 더욱 외로운가,
오, 애인이여
지상의 구원이여
시의 운명이여
어찌 시인의 일생이 그리 순탄하랴.
신(神)과 사람은
조병화
신(神)과 사람은 기도로 이어지며
사람과 사람은 사랑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너와 나는 그리움으로 이어지며
기도와 사랑, 그 세월로 이어진다.
신(神)의 존재(存在)를
조병화
항상 숨어 있는 신이여,
항상 대답이 없는 신이여
언제까지나 이 분열된 가족을
보고만 계시렵니까
이건 너무나 잔인한 처사이옵니다
사소한 문제로 이렇게까지 분열이 되어
오랜 세월이 되다니
어찌 한 피의 가족이라 하겠습니까
오, 신이여
당신은 계시긴 계신 겁니까
진정 계시다면 이건 너무나 무거운 침묵이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싸우는 사람이나, 맞서는 사람이나
마지막엔 당신이 숨어 있는 곳으로 모이겠지만.
아름다운 여인 -어느 해 신년시
조병화
새해 새 아침에
맑은 화장을 한 여인과 스치는 건
상쾌한 일이다
피부 밑으로 맑게
흐르는 혈액이 그대로 보일 듯이
엷게 화장을 한 여인을
새해 새 물결 속에서 마주치는 건
확실히 기쁜 일이다
꿈과 사랑이 가득히 찬 마음이
피부 밖으로 솟아올라
그것이 그대로 비쳐진 여인을
새해 새 빛 속에서 바라다보는 건
신화 속의 천사를 만난 듯 황홀한 일이다.
그와 같은 꿈과 사랑을 사는
순결한 여인과
새해, 새로운 악수를 하는 건
이 세상 아닌 행복한 일이다.
아, 나의 고독은
조병화
아, 나의 고독은
만인의 가슴 가슴 깊이 숨어 있어서
찾아도 찾아들여도 끝이 없어라
나의 외로움은
만인의 가슴 가슴 깊이 번져 있어서
다는 보이질 않아
걷어도 걷어들여도
다는 걷어들이질 못하여라
그렇게 나의 그리움과 사랑은
만인의 그리움과 사랑 깊이 섞여 있어서
가려도 가려내도
다는 가려낼 수가 없어라
나의 외로움은
만인의 외로움에 엉겨 있어서
풀리지 않는 그 가슴 가슴이어서
아, 너의 가슴이어서
내 노래가 너의 노래이어라.
아리산(阿里山)의 소저(小姐)
조병화
집을 떠나는 날 인생은 시작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그건 끝난다.
멀리 가면 갈수록 그만큼
가까이 오면 올수록 그만큼
폭과, 깊이, 그 넓일 왕래하다 간다.
지금 이곳 아리산(阿里山) 산정
해뜨는 아침
햇살 쪼이며 빛을 사는 이국의 소저
집을 나와서 하늘을 돈다.
내려다보아도, 굽어보아도
보이질 않는 인간의 마음
미운 사람도 고운 사람도
엉겨서 정을 사는 인간의 마을
그리워지는 건 사람의 마을이다.
태양의 딸이여! 소저여
늙질 말라.
지구의 꽃이여! 소저여
시들질 말라.
아리산(阿里山) 높은 가지
하늘의 날개여.
아직도
조병화
아직도
사람을 살려는 마음과
사람을 버리려는 마음이
수시로 내 안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사람을 살려는 마음은
사람이 살고 있는 욕망과 애욕,
그 육신을 살려 함이오며
사람을 버리려 하는 마음은
영혼이 살고 있는 공적과 영원
그 비어 있는 고독을 살려 함이옵니다
아, 사람을 살려는 마음은
너를 살려 함이오
사람을 버리려 하는 마음은
너를 버리려 함이옵니다.
아직은 하늘 아래서
조병화
아침마다 작업실로 나오면서
나산빌라 현관을 밀고 나오자
하늘을 향하여 심호흡을 하면
마셔도 마셔도 하늘은 무량하여라
아, 하늘은 넓다, 높다, 깊다, 무한하여라
생명으로 가득하여라
한평생 마신 이 은혜 어찌 갚으리
생각하면서 작은 언덕길을 내려오면
매일 보는 빵집, 세탁소, 과일가게,
혜화동 우체국, 주유소, 부지런한 사람들
고맙게 고맙게 살아간다
어찌 삶이 고단하다 하리요.
아파트의 추석날
조병화
아파트 창 너머 추석달은 차다
싸늘하다 처량하다 쓸쓸하다
멀리 허공에 떠서 혼자 돌아선다
잃을 것 다 잃고
벗을 것 다 벗고
알몸으로 돌아서서
신비롭게 몸을 싸 주던
하얀 그 의상을 그리워한다
아련히 멀리 떠나면서.
아파트의 침묵
조병화
며칠째 203호 앞엔
우유, 신문, 우편 배달물들이 쌓이고
내내 인기척이 없다
웬일일까
노인이 이곳엔 혼자 산다는 소식,
그 노인이 혹시나 숨을 혼자 소리없이 거두고
이 안에 누워 있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
아침 길이 써늘하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저녁 길 그 문앞 복도엔 오늘도
우유, 신문, 우편물들이 그대로 말없이 놓여 있고
밤이 깊어가며 큰 아파트엔
등불들이 점철,
하늘엔 별들이 총총,
말이 없어라
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안개
조병화
안개는 다정스러우나 불안하옵니다
안이 보이질 않기 때문이옵니다
사랑은 그리운 것이나 허전하옵니다
안을 다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옵니다
아, 안개는 고요하고 다정스러우나 허망하옵니다
안을 보이지 않은 채 개이기 때문이옵니다
사랑도 그와도 같이
사랑은 아름다우나 불안하옵니다
안을 다는 알지 못한 채 이별이 오기 때문이옵니다
안개로 가는 길 – 경인 하이웨이에서
조병화
안개로 가는 사람
안개에서 오는 사람
인간의 목소리 잠적한
이 새벽
이 적막
휙휙
곧은 속도로 달리는 생명
창 밖은
마냥 안개다
한마디로 말해서
긴 내 이 인생은 무엇이었던가
지금 말할 수 없는 이 해답
아직 안개로 가는 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면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던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나는
이 길로 왔을까
피하며, 피하며
비켜서 온 자리
사방이 내 것이 아닌 자리
빈 소유에 떠서
안개로 가는 길
안개에서 오는 길
휙휙
곧은 속도로 엇갈리는 생명
창밖은
마냥 안개다.
안녕하신지요
조병화
`……,안녕하신지요? 저번 일요일에
금문교 갔다가 그쪽 상점에서, 우연히
이 엽서를 발견하고
파이프 문 아버지랑 산보 나간다고
우산 들고 나가는 아이들 모습이
정말 아버지 생각나게 해서,……'
이렇게 시작한 네가 보내 준
쥐의 가족을 그린 그림 엽서
받아 보고, 나는 어두운 방에서 혼자 울었다
파이플 물고 있는 아버지 쥐와
우산을 접어 든 새끼 쥐와
손목을 잡고 있는 어머니 쥐와
손수레에 타고 있는 꼬마 쥐와
이것들을 이끌고
하루를 들로 나가고 있는
가장의 당당한 위풍
파이플 물고 손수레를 밀고 있는
그 가장의 당당한 모습을 보며
그렇지 못한 나를 소리없이 울었다
나는 약하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풀리지 않는 이 냉혹
이 냉혹한 어둠 속에서 나는 혼자다
그 혼자를 살아오면서 이 어두운 시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먼 훗날 이러한 나의 생애가
너희들의 눈물이 될는지
수치가 될는지는 모르나
나의 시는
나의 유서
나를 다하여 나의 운명을 살아도
가장으로서의 이 어둠
미안하기 짝이 없다
다만 고마울 뿐
혼자서 운다.
약사여래 - 갓바위에서
조병화
그러니까, 그때가 어느 해였던가
대구 근교 갓바위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그 거대한 약사여래의 석상을 본 것은,
그때 나는 그 거대하시고 의젓하시고
경이로우신 모습에 크게 매혹되어
“약사여래님, 그 거대하신 몸으로
어떻게 이곳까지 올라와 앉아 계십니까,
참으로 잘도 생기셨습니다
내가 여자라면 단번에 홀딱 반하겠습니다”
바람에 날려갈 듯한 이 절벽에
약사여래님은 혼자서 천년만고이시다
밤이나, 낮이나.
약속 시간을 몰라
조병화
약속 시간이 확실치 않아
부지런히 달려와서
이쯤 되는 시간,
이쯤 되는 곳에서 만나려니 했더니
그저 하늘만 열려 있어라
급한 성미에
서둘러 서둘러 미리 미리 온 탓이지,
미리 미리 짐작한 탓이지,
세상만사는
하늘의 순리대로
때가 되면 때맞추어 정확히
그 자리에 오는 법인데
미리미리 서둘러 온 자리
하늘만 열려 있어라.
약한 것들의 힘 - 1999년 7월 말, 태풍 속에서
조병화
약한 그 물 한 방울이 골을 내는 걸 보았노,
약한 그 실바람이 화를 내는 걸 보았는가
약한 그 물방울이 하늘에서 뭉치고
약한 그 실바람이 하늘에서 뭉쳐서
하늘에서 일시에 격노한 비바람으로
쏟아져 내리면서 천지를 뒤집어
물난리 바람난리 폭풍우로 세상을 이렇게
삽시간에 온데 간데 없이 휩쓸어 내리다니,
강한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목소리 높은 사람이나 목소리 낮은 사람이나
다스리는 사람이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나
속수무책,
도도히 흐르는 흙탕물결 일색이어라
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던
저 약한 것들이
이렇게 막강한 힘으로 들이닥치다니
오, 신이여
당신은 어디에 숨어계십니까.
어느 나그네의 예언
조병화
문명선진국이 모여 있는 유럽,
한 지방이 오염으로 썩어 병들어가며
농민들이 허탈에 잠겨 있는
TV화면을 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아시아 지역은,
몇 번째로 그 멸망이 다가올까,
하는 생각에
분명 이곳도 상위권 순서로 다가오리라는 생각
그때쯤엔 나야 이미 땅에 묻혀서
더 고약한 냄새로 썩어가겠지만
그때까지 지상에 살아 남아 있는 것들은
얼마나 비참하게 고통에 시달리며 서로 썩어갈까,
지구는 지금 어디나 인간이 사는 곳
그곳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쓰레기, 오물,
물, 공기 오염으로 산천이 병들어 썩어가며
하늘마저 병들어가니
오, 조물주여
당신마저도 병들어 썩어 문드러져 있는가
머지않아 지구는 썩은 오물체로
우주의 궤도를 돌고 있으려니
그날의 마지막 증인이여
신은 계시는가.
어느 노인의 모노로구 – 편운재(片雲齋)에서
조병화
지나가는 바람이나 들렸다 갈까,
사람의 소리 하나 없는 산장에서
팔십 평생 타향에서 살아 온 도시생활을 생각하니
어제와 같어라,
그 수라장 속에서 용케도 잘 살아왔어라
잘못한 것도 있고, 아슬아슬한 것도 있고,
위태로운 것도 있고, 아찔한 것도 있고,
가끔 즐거웠던 것도 있었으나
이것이 인생이어라, 이 혼자.
가끔 지나가는 바람이나 들렸다 갈까,
산장은 마냥 고요한 자연이어라
어제도, 오늘도.
어느 노인의 회고
조병화
인생 팔십을 안개 어린 꿈을 더듬어오면서
나를 이곳까지 이끌어 준 것은
실로 맑은 그 사랑이었어라
고달플 때나, 외로울 때나, 혼미할 때나,
내게 살아오는 힘을 심어주며
약한 나를 이곳까지 이끌어 준 것은
실로 따뜻한 그 사랑이었어라
아, 외줄기 외로운 시에 매달려
억센 이 세상을 위로로, 삶의 빛으로, 살아옴에
흔들리지 않는 내 길을 내어, 고맙게도
이곳까지 이끌어온 것은
실로 끊임없는 그 사랑의 힘이었어라
이별이 잦은 이 인간세계에서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많은 이 인생을
꿈이 아롱거리는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오로지 따뜻한 그 외로운 사랑의 은혜이었어라
고맙게도.
어느 대화
조병화
한 노인과 한 소년이 나란히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한 소년에게
"어디까지 가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소년은 "멀리 갑니다"라고 대답을 하면서
할아버지는 "어디까지 가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다음 고개 너머까지 간다"라고
대답을 하시면서
"네 망태 속엔 무엇이 들어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소년은 "꿈이 들어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면서
"할아버지 짐 속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젠 아무것도 없단다"라고
대답을 하시면서
"꿈은 무거운 것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소년은 "네, 아직은 무겁습니다"라고
중얼중얼 대답을 했습니다.
어느 밤의 기도
조병화
잠이 오지 않다가
어쩌다가 잠이 시름시름 스며들면서
오락가락하다간
잠 속에선가 꿈 같은 것이
어리다가 사라지면서
슬며시 비친 어머님의 모습,
하시는 말씀이
얘야, 이젠 시간이 다 되었다,
들릴 듯 말 듯하면서 흐리멍멍한
어머님 목소리
사라지며 다시 잠이 가시는 새벽 2시
사라지신 어머님 모습 다시 보고 싶어서
눈을 감아도 잠이 들지 않는
캄캄한 빈 밤 새벽2시, 혼자서
차디찬 별바닥으로 부질없이 떨어져간다
아, 생명의 말로는 이렇게도
고통스러운 인내일까,
어머님, 이젠 손쉽게 생명을 거두어
어머님 곁으로 갈 수 있는 그 재주를
저에게 내려 주소서
저는 이렇게 기진맥진하옵니다
부탁입니다
간절히 소망하옵니다
부디.
어느 밤중
조병화
이런 절기에
고양이들은 짝짓기를 하는 것인가
하얀 달밤에 암내 낸 고양이가
담을 넘어간다
먼 곳에서 훈훈한 봄 냄새가 나고.
어느 부부
조병화
한집에 살면서
생전을 입을 닫고 사는 사나이와
생전을 귀를 닫고 사는 여인이 있었다
한 세월을.
어느 생애(生涯)
조병화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
사랑하기 위해서 시를 쓴다
죽기 위해서 시를 쓴다
때론 쓰리게
때론 아리게
때론 축축히
때론 멍멍히
때론 줄줄히
버리기 위해 시를 쓴다
빈자리가 되기 위해서 시를 쓴다
혼자 있기 위해서 시를 쓴다
아름다움의 외로움을
사랑스러움의 쓸쓸함을
깨달음의 허망함을
연습하며
실습하며
비켜나기 위해서 시를 쓴다
놓아 주기 위해서 시를 쓴다
물러나기 위해서 시를 쓴다
삶과 죽음, 그걸 같이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
소유와 포기, 그걸 같이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
相逢과 作別, 그 걸 같이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
널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
어느 생존
조병화
바람에 취해서 어설풀이
눈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노라면
마음 놓이지 않는 풍경 하두 많아서
안으로 안으로
다시 기어든다
스스로의 온도로 녹여 올리는 수액
그 달리는 수액으로
투명한 혈맥을 돌리며
가지 끝까지
매서운 겨울을 견디는
아, 완전한 이 단독 고독
하늘 어디메쯤 가서
이 고독은 풀릴까
바라던 휴식은 있을까
이 바람을 떠날 수 있을까
겨울나무처럼.
어느 소원 - 어머님 산소에서
조병화
이 계절에, 어머님은
낮엔 뻐꾸기를 듣고 계시다
꾀꼬리를 듣고 계시다
밤엔 개구리를 듣고 계시다
들으시며
무엇을 생각하실까,
공적한 이 공간에
혼자 누우시어
세월은 맑게 흐르고
캄캄히 멀어져가는 어제
어머님, 저도 이젠 그곳으로 갈
때가 되었습니다.
어느 여행자(旅行者)의 독백(獨白)
조병화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저 세상
으로 걸쳐 열려 있는
이 빛의 벌판
제한된 목숨 살며
항상 떠나는 생각
헤어지는 연습하며
낮과 밤을 산다
있는 것이 없는 거
없는 것이 있는 거
이 맑은 충만
이 순간
임재(臨在)와 부재(不在)를 왕래하며
덧없이 떠날 생각
연습을 하며
연습을 하며
작별을 산다
사람은 누구나
생(生)과 사(死), 한 몸에 지녀
한 몸에서
삶은 죽음을
죽음은 삶을
서로 돕다
몸 허물어지면 그뿐
땅으로
하늘로
아, 이별
혼자서 보이지 않는 저세상
그곳으로 또 떠나는 거지.
어느 일요일
조병화
매일 아침 책상에 앉으면, 우선
부쳐온 시집이나, 소설집이나, 수필집이나,
단순한 애독자에게서 온 편지까지,
보내온 사람의 영혼이 묻어온 우편물엔
꼭 답장을 쓴다
보내준 이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하여
그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하여
그 고마움에 답하기 위하여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매일 아침, 책상에 앉으면 습관처럼 우선
답장부터 쓰며, 하루를 시작한다
보내주신 마음,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혹은 잘 읽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길, 이렇게 쓰다가, 언뜻
아, 그 긴 인생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어두운 방구석에서 끊임없이 세월 했을까.
하는 생각 떠오른다
"생각만 하는 놈들은 창밖에 새파란 목초가
있는 것도 모르고 어둠컴컴한 방구석에서
시든 목초만 씹고 있는 어리석은 양파 같은 놈들"이라는데
어느 존재
조병화
넌 저 세상에서 무얼 보았는가.
네,
터무니없이 거대한
실로 거대한
꿈의 나무를 기어오르던
한 마리의 개밀 보았습니다.
아래 뿌리도 보이지 않는
위 가지 끝도 보이지 않는
좌우 넓이도 폭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실로 거대한 안개의 기둥같은
꿈의 나무를 기어오르던
한마리의 개밀 보았습니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더듬더듬 더듬거리며
그 중천을 기어오르던
한 마리의 개밀 보았습니다.
그걸 바라다보면서, 멀리
나는 당신이 계실 듯한 이 방향을
위로 아래로
옆으로
더듬더듬 더듬거리며
이 절벽
이 중천을 기어올랐습니다.
오로지 그뿐
실로 거대한 곧은 꿈의 나무
그 중천을
묵묵히, 그저 묵묵히
홀로 스스로를 기어오르던
한 마리의 개밀 보았습니다.
어느 천성
조병화
나는 말 한마디로 기분이 오락가락해지는
아무 데도 낄 수 없는 약한 갈대이옵니다
나는 말 한마디로 기분이 확 풀리는
아가처럼 너무나 투명해서
아무 데도 낄 수 없는 슬픈 외토리 갈대이옵니다
나는 말 한마디로 기분이 중천에 떠서
날개 찾은 천사처럼 온 하늘이 열리고
말 한마디로 기분이 확 흐려져서
날개 잃은 천사처럼 온 하늘이 캄캄해지는
마음이 금시금시 변하는
아무 데도 낄 수 없는 슬픈 외토리 갈대이옵니다
너무나도 맑고, 속이 없고, 참을성이 비어서
기쁨이나, 노여움이 수시로 온몸으로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열 많은
아무 데도 낄 수 없는 슬픈 천성의 갈대이옵니다.
어느 하이웨이에서
조병화
아무리 소리친들
멍멍
고국은 멀다
마냥 70마일 시속
엔진에 떠서
보이지 않는 길머리
길머릴 넘어도
닿지 않는
방향
창밖에 이동하는 정경은
분명 세상이지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이지
살다 가는 세상이지
이것이 바로
하며, 주위를 돌아다 보면, 마냥 그 자리
둘둘
나는 홀로다
네바다 유타 콜로라도……
주명(州名)은 달라도 어쩌면 이렇게도 먼 나라
밤, 낮이
노상에서 식사를 한다
인간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
서로 떨어진 자리
서로 가까이 다가가다 목숨 떨어지면
그뿐
그것을 산다
생각하면 사는 자 죽는 자의 풀밭
지구를 다 돌았구나
어렸을 때 아득하던 곳 다 돌았구나
자라서 버릴 것 버리고
철들은 지금 이 자리
이 노상
노상에서 나머지를 산다
1966년 6월 하이웨이
미시시피
강 건너 보이는
불빛
멍멍
떠난 자리는 멀다
어느 해결
조병화
네가 나를 미워하는 있는 만큼
나는 네게 그만큼 떠나 있으리
네가 나를 싫어하고 있는 만큼
나는 네게 그만큼 떠나 있으리
네가 나를 오해하고 있는 만큼
나는 넨게 그만큼 오래 떨어져 있으리
네가 나를 그렇게 모르고 있는 만큼
나는 넨게 그만큼 명백하게 있으리
네가 나를 경멸하고 있는 만큼
나는 네게 그만큼 슬기롭게 있으리
네가 나를 그렇게 우스개로 여기고 있는 만큼
나는 네게 그만큼 의연하게 있으리
그리하여
네가 내게 받고 싶은 만큼
나는 네게 그만큼
텅 빈 하늘로 있으리
어머니 홀로
조병화
1
서울, 인천을 두고 마지막 피난지
부산으로
부산으로 도망가지 아니할 수 없었던 때
처량한 일이었습니다
마지막 같았던 일들
당신은 바람찬 인천부두
아우성 속에서
저희들 먼저 떠나보내시며
괜찮다, 괜찮다
먼저 어서
어서
눈물 글썽
까만 조바위 흰 두루마기로
그 모습
그 말씀
어서, 손 흔드시며 어서,
늙은 것은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십이월 마지막 불어 닥치던
찬 바람
바닷바람
이거 사람의 자식으로
차마
아, 세월아
소월미도 돌아, 돌아다 보아도
까만 조바위 하얀 두루마기
외로운 갈매기
어머니 홀로
군산 앞 바다를 지나도
밤을 세워도
목포를 멀리 돌아도
다도해를 지나도
외로운 갈매기
어머니 홀로
하얀 두루마기 까만 조바위
아, 당신을 홀로 적진에 두고
이 불효
슬픈 일이었습니다.
2
어머니 급하시다기에
달라겼습니다
달려가
당신 방문 열자
어 너 왔구나
자식 무심도 하지
난 이제 틀린 거 같다
오랜 못 살거 같다
더 살 거 같지 않다
이걸로
당신이 떠나시기 전
한 주일 전 일이옵니다
여름날이었습니다
이날부터 한 주일
시름시름
당신은 자리에 누우신 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제 손을 꼭 잡으시고
스스로를 보고 계셨습니다.
어린 제 눈에도 선히 보이는
당신 떠나시는 준비
서서히
이 세상 자리 거두시는 준비
아, 그 마지막 작업
눈 감으시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떠나시는 길
고요히
정히
맑게 해 드리기 위해서
의사는 부르지 않고
당신곁에 꼭 앉아 있었습니다
일 주일을 두고
눈을 감으셨다 떴다
또 감으셨다
이 세상 두루 마지막 살펴 보시곤
하시던 모습
식어가는 그 말씀
너 거 있구나.
3
1962년, 음력 6월 3일
아침 일곱시
맑은 아침해가 높이 솟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 시간
다시 깨시지 않는
고요한 잠에 드셨습니다.
영원하다는 건 이걸 말하는 거
그 영원한 자리에
자리 옮기시어
고요히
극히 고요히
정히 눈 감으시고
깊은 잠에 드셨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그 수명 거두시던 모습
극히 고요하셨습니다
당신이 평소에 말씀하신 대로
당신이 찾으시던
그 부처님 곁으로 가심에
맑은 해 솟아오르는
아침이었습니다
하얀 새옷 갈아 입으시고
누워 계신 모습
일체가 고요한
고마움
당신 그대로의 모습이었습니다
나 먼저 간다
얘,
잠깐이다
구순히 지내다 오너라
옳지
너 거 있구나
곁에 있구나
고맙다
당신 깊은 잠 깨실까
참는 이 마음
아, 먼 흐느낌이었습니다.
4
당신이 평소 저희들에게
하신 말씀대로
당신이 떠나시던 날은
추운 겨울날도
더운 여름날도
비내리는 날도
눈내리는 날도
궂은 날도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평소 저희들에게
하신 말씀대로
당신이 가시던 날은
저희들에게 폐가 되고
괴로움이 되고
고생이 되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맑은 날이 계속되고
많은 벗들이 당신에게 인사 오고
많은 일들이
순조롭게 순서대로
잘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말씀대로
인사오신 많은 분들에게
고운 음식
맑은 음식
대접해 드렸습니다
당신이 생존해 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평소에
당신이 하신 것처럼
얘, 손님 오셨다
인사해라
대접 잘 해라
누우셔서 일일이 말씀하시는 거 같았습니다
당신이 평소 저희들에게
하신 말씀대로
당신이 떠나시던 날은
맑은 당신의 그날이었습니다.
5
이름하여 편운재(片雲齋)
당신 곁, 솔나무 밭, 낮은 언덕
당신을 수시로 뵐 수 있는 자리 골라서
당신의 묘막
깎아서 세웠습니다
남향으로 멀리 천덕산 마루
오른쪽 서편엔 아버지, 할아버지
왼쪽 동편엔 떨어져서 당신이 계시옵는 자리
그 가운데
당신을 지키옵는 창문
밤이면 밝히는 등피
낮이면 여는 창문
한가로이 당신과 같이 하는 이 자리
청청한 볕, 우물에 괴고
너구리, 산토끼 들러서 가는 오밤중
방에 누우면
당신의 손목
이름하여 편운재 - 조각구름의 집
당신을 위하여 당신 곁에
당신을 수시로 뵐 수 있는 자리 골라서
돌 모아 세웠습니다
한 세상 조각구름 둥둥 빈 하늘
지면 그뿐, 당신 곁에 창을 마련했습니다.
어머님
조병화
날 이 땅에 데려 오신 분이
어머님이지요
날 이 땅에 데려다 주시고
사랑을 해라 하신 분이
어머님이지요
날 이 땅에 데려다 주시고
먼저 가심에
다른 곳에 너의 생애는 없느니라 하신 분이
어머님이지요
벌레가 나뭇잎에 집을 짓고, 스스로
사라지듯이
내게 집을 짓고
스스로 마치심에
이 땅을 이어 가라 하신 분이
어머님이지요
조국은 먼
유언
열매 속에 가득한
꽃봉오리
소리없는
말
날 이 땅에 데려다주시고
눈물을 주며 가심에
사랑을 해라 사랑을 해라 하신 분이
어머님이지요
어머님, 당신은 지금
조병화
어머님, 당신은 지금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 않은 세상에 계시옵니다.
때론 가까이 때론 멀리
제 곁에 항상 계시오며
하얀 제 생각 속에 계시옵니다.
어머님, 당신은 지금
사람의 귀론 들리지 않는 세상에 계시 옵니다.
때론 가까이 때론 멀리
제 곁에 항상 계시오며
하얀 제 혼자 속에 계시옵니다.
어머님에게 드리는 선물
조병화
어머님,
어머님이 제게 주신 은혜는 무량하오나
어머님에게 드리는 저의 선물은
너무나 작습니다
?
남이 탐내는 돈도 없고
남이 부러워하는 권력도 없고
남이 자랑하는 명성도 없고
남이 누리는 명예도 없으나
그저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인생을 살아오며
빛이 없는 맑은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그 맑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남에게 끌리지 않고 남에게 굴하지 않고,
남에게 신세지는 일 없이 자유롭게 살면서
어머님의 그 약속대로
어머님이 내리신 그 이름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어머님이 내리신 그 이름은
때묻지 않게 살아오면서
어머님에게 드릴 그 선물을
이곳까지 간직해 왔습니다
아, 그 선물
어머님의 은혜에 너무나 작고 작고
부끄러우나
어머님의 빛으로 따뜻한 그 이름
그 이름 '조병화'
순결한 당신의 아들이옵니다.
어제 내가 나에게 하는 말
조병화
사는 날까지 그저
살아야 하는 겁니다
떠나는 것을 미리 서둘러서 생각하지도 말고
차례차례 다가오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근심스러워하지도 말고
조바심을 치지도 말고
무서워하지도 말고
어머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대로
사는 날까지 그저 공손히
차례차례 보내며
차례차례 맞으며
그저 사는 날까지 살아야 하는 겁니다
언양 미나리 - 정인섭 시인 옛고향 지나며(70.4.11)
조병화
보게, 자네 언양이라는 곳 아나
미나릿골 말일세
경부 고속도롤
대구서 올라타면 영천, 경주
를 돌아
단숨에 경상도 언양
지금은 하이 웨이 인터체인지로 변했지만
옛부터 소문난 미나릿골
맑은 시내 산간 마을
동으로 돌면 울산
남으로 내달으면 부산
앗다, 쏜살같이 뻗어버린 신식 신작로
산천이 쭉쭉 치마 벌린 길이더군
그거 또한 온통 봄빛
눈부신 개나리, 살구
바람이 뒹구는 보리밭
하늘의 노고지리
가슴 시원한 신라 서라벌
서울은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 꼬리
으스스 찬 방 두고 떠났는데
영 너머 이곳 내려앉은 남방
가시나 허벅지 같은 언양 미나리
동동주 서너 사발
취한 살구꽃
노을에
너울
너울
정박사 옛고향
곽, 김, 김, 모, 신, 전, 정, 조, 조, 조
한바탕 왁자지껄
앉았다 떠나는 사월, 칠십 년
보게, 동동주 미나리 두고 가는 자리
그 맛 아나
가시나 허벅지 같은 맑은
언양 거 말일세.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조병화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세상 어지럽게 많은 말들을 뿌렸습니다"
다 잊어 주십시오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다 잊어 주십시오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밀 한마디
"당신의 사랑의 은혜 무량했습니다"
보답 못 한 거 다 잊어 주십시오
아, 언제 이 세상 떠나더라도
이 말 한마디
다 잊어 주십시오.
언젠가 그 눈물
조병화
----마르지 아니하는 한 방울의 눈물을 위하여
언젠가 그 눈물
지금 내 눈물이옵니다
언젠가 그 눈물
지금 내 젖은 별이옵니다
언젠가 그 눈물
지금 내 젖은 빛이옵니다
언젠가 그 눈물
지금 내 젖은 말이옵니다
언젠가 그 눈물
지금 내 젖은 밤이옵니다
업보
조병화
내가 옛날,
철모르고 사냥을 갔다가
풀숲에서 한 쌍의 꿩을 발견,
오손도손 함께 있던 암놈을 쏘아 잡은 기억,
세월이 가도 오래오래 기억되더니
오늘,
혜화동 로터리 광장 한 구석에서
아침마다 그 시간 그 자리,
모이를 쪼고 있는 비둘기 수놈 한 마리
홀로,
혹시나 저놈이 그때 살아남은 그 수놈이
비둘기 수놈으로 변신하여
내 앞에 늘 어른거리며
내 가슴을 아프게 쪼고 있는 것이나 아닐른지,
생각되면서
나도 혼자 되어 이렇게 매일 아침을
아직도 혜화동 로터리를 홀로 어른거리는 것을
어찌하랴
오, 대비대자하신 부처님,
이것이 나의 업보이라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여행보고
조병화
높은 어느 봉우리를 넘는 고개 위에
한 삼십여 년을 넘게
한 자리 한 집에서
메밀국수를 팔고 있는 여인
이마에 깊이 하늘이 지나간 자리
바람과 구름을 같이 사는 세월
폭설과 폭풍에도 꼭 붙어서
아, 땅 위엔 하늘가에
이런 여인도 있었습니다.
하늘의 점, 한 점처럼
높이.
여행을 앞두고
조병화
여행을 앞두고
갈 곳을 생각하며
떠날 날짜와 시간을 살피며
서류와 여비를 챙기며
여권과 통과증을 재확인하며
미리 서두는 것이 나의 버릇이었나
이번 여행은
하도 먼 곳이어서
지도에도 없는 곳이어서
갔다 돌아온 사람도 없는 곳이어서
갔다 돌아올 수 없는 곳이어서
혼자 가는 곳이어서
이곳에 빠트린 것은 없나,
꼭, 갖고 갈 것은 없나,
아, 그날이 가까이 올수록
이 마음.
역(驛)
조병화
정거장 대리석 기둥에 기대어
오지 않는 것만 기다리고 섰다
낯없는 사람들끼리 모여들다
낯없는 방향으로 헤져 간 뒤엔
대리석 기둥과 내가 도로 남는다
그래도 나는 가슴을 안고
쮜리히행 급행열차를 기다리고 서 있는
의젓한 길손
한 노파가 개찰구 모퉁일 돌아온다
내 앞에 다정히 선다
적선을 애원한다
통하지 않는 회화이지만
나는 먼 나의 고향에서 하던 버릇을 잊지 않았다
해진 포킷 속에 허수한 손을 넣으면
낡은 인정만이 미끈거린다
아 나도 또 하나 당신과 같이
노자 없는 길손이었는걸―
언제까지나 정거장 등불 아래서
오잖는 것만 기다리고 서 있는 것인가
이 정거장만은 영 경유하지 않을 먼 지구
어느 지점을
쮜리히 행 급행 열차는 질주한다
그 수레바퀴 소리도 한없이 멀어져 가는
후방 종점에
대리석 기둥과 내가 남아 간다
밤 열 한 시
연회(宴會)가 끝나면
조병화
연회가 시작되고
가슴에 꽂아준 장미 한 송이
연회가 끝나자 소용없이 되면서
버리기가 애처로워
집으로 가지고 와서
작은 유리컵에 꽂는다
작은 유리컵에 꽂은 꽃을
애처롭게 며칠 보다간
아주 시들기 전에 꽃잎을 하나 하나 따서
두툼한 책갈피 사이에 눕힌다
이제 며칠이면 물기 하나 없는
납짝한 미이라로 되어 있으려니
이 고요한 꽃잎의 미이라는
언젠가는 하나 하나
미지의 독자들에게 편지 답장에 끼어
먼 곳으로 가려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 이 꽃송이 한 송이
애처로움이
어찌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눈물이 아니랴.
열매
조병화
한 우주가 떨어진다
서로 모순되던
희로애락의 계절이
스스로가 겪은 대로, 그만치
하나의 맛으로 엉겨서
적막한 천지로 떨어진다
폭풍의 계절도
쾌청의 계절도
하나의 우주가 되어 떨어진다
스스로의 무게로
영원(옛 엽서) - 국도 1081에서
조병화
온종일 비가 내렸읍니다
연락선이 왔다 간다는 항구로
남행열차는 쉴새 없이 달렸읍니다
삼등실 좁은 차창에
빗물이 흐르고 흐르고
수족관에 뜬 어린 시같이
싹 튼 보리밭이 보이고
포플라가 보이고, 늙은 산맥이 보였읍니다
말소리도 잠들어버린 차간에
나는
중앙아시아 어느 바다로 가는 것일게니 하고
졸음 없는 눈을 감아 보았습니다
오산 인터체인지 - 고향으로 가는 길
조병화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은, 덴마크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 들판
작별을 한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오후 일곱 시
조병화
시(詩)를 경멸하면서
나를 회의하면서
거리로 간다
거리를 비벼 간다
주로 헛된 낭만을 걸어가며
밤을 기다리는 사람의 연인이 되고 싶다
낯없는 여인들께 향수를 느낀다
먼 나라의 소도시를 걸어가는 생각이다
휘파람을 불고 싶다
샹들리에 그늘에서
순서를 잃은 과거가 당황한다
아 나의 소망아
살아서 한 번 미래를 걷고 싶다
거리를 간다
거리를 비벼 간다
나의 위치는
군상이 명멸하는 곳에서 또다시 안정하다
휘파람이 거리를 간다
오히려 비 내리는 밤이면
조병화
오히려 비 내리는 밤이면
귀를 기울이어 내 발자국 소리를 기다려 주오
비가 궂이게 쏟아져야
그대에게 가까이 가는 길을 나는 찾아 간다오
나보다 더 큰 절망을 디디고
진정 이 지구를 디디고 나는 찾아 가리오
내가 살아가기에 알맞은 풍토는
비 많이 쏟아지는 밤
이러한 밤에 절망을 뒤적거려 보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었던가
무슨 주변에 내가 더 큰 것을 바라오리오
내 것인 것만 주오
진정 내 것인 절망만 주시고
나를 괴롭지 않은 이 자리에 머물게 하여 주오
비 내리는 밤을 기다리는 사람의 절개는
그대 것인 가는 호흡을 호흡하는 것이라오
비 내리는 밤이면
귀를 기울이어 내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어주오
영 멀리 가는 그대여
옥상으로 오르며
조병화
지구가 보이지 않는 정도로 오르면
천국이 있으려나
있다 해도 어찌, 그곳까지 오르리
이 무거운 업보로
훨훨 버려도
다는 버릴 수 없는
인간의 이 외로움
그것에 묶여서 나는 아직도 이곳을 돕니다
이곳은 지상 몇 층이나 될는지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사람의 세계,
지구가 보이지 않는 정도로 오르면
천국이 있을는지
왕부정가(王府井街) - 북경(北京)에서
조병화
중국대륙 11억 5천만의 심장거리
이곳 북경와부정가(北京王府井街)는 아침부터 활발히 고동친다
우거진 가로수 그늘, 넓은 길이
중국대륙 11억 5천만의 동맥으로 흐른다
얼굴마다 수억 년 섞어 내려오는 한족들의 핏줄
눈이 또한 수억 년 앞을 내다본다
일제 식민지시절 이곳으로 도망온
망명시절의 우리 조선족들은
이 거리에서 얼마나 비통했을까
오늘 나는 이 자리에서
그들이 바라보던 허공의 하늘을 보며
흘러내리는 무수한 한족들의 물결에 부닥친다.
외로운 영혼의 섬이
조병화
내 마음 깊은 곳엔
나만이 찾아갈 수 있는 외로운 영혼의 섬이 하나 있어
쓸쓸할 땐 슬며시 그곳으로 숨어 버립니다
내 마음 가려진 곳엔
나만이 소리 없이 울 수 있는 외로운 영혼의 섬이 하나 있어
고독할 땐 슬며시 그곳으로 숨어 버립니다
아, 이렇게 내 마음 숨은 곳엔
나만이 마음을 둘 수 있는 외로운 영혼의 섬이 하나 있어
만사가 싫어질 땐 슬며시 그곳으로 숨어 버립니다
내 마음 보이지 않는
나만이 숨을 수 있는 외로운 영혼의 섬이 하나 있어
쓸쓸하고 쓸쓸할 땐 슬며시 그곳으로 숨어 버립니다.
요즘 나의 일과는
조병화
요즘 나의 일과는 잊는 일이다
나무가 하늘에 있듯이
자연으로 있는 일이다
잊는다는 일은 어려운 일이나
매일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공기가 되는 거다
텅 빈 하늘이 되는 거다
바람도 구름도 자유로이 지나가는
하늘이 되는 거다
우주 만물이 자유로이 날 수 있는
텅텅 빈 하늘이 되는 거다.
우주의 하이웨이 - 아폴로 11호 달 착륙 기념
조병화
드디어 인간은
황막한 우줄 뚫고
달에 올라가
달을 디디고
45억 년 그 창세의 신빌
돌아보고 돌아왔다
이 얼마나 엄청난
장거
토끼나 방아, 초가삼간
계수나무나 상상했던 우리네들에겐
상상조차 엄두도 나지 않았던 일
그곳에
인간은 기를 세우고
돌아왔다
35억이 오물오물 모여
하닥하닥 하닥거리며 사는
비좁은 이 지구
국경이 있고, 장막이 있고, 동족 분열이 있고
미움이 있는 이 지구
인간은 이렇게밖엔 살 수 없는 건가
달은 이제
우주의 도약대
화성으로 금성으로 또 다른 별로
존재의 영역이 넓혀지려니
인간, 형제 자매여
국경을 트고
그 악수를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올드린
그리고 마이클 콜린즈에게
우주의 그 빛을 물으며
달을 디디고
달에서
인간은 하늘의 신작롤 간다
운명을 - 어느 노인의 독백
조병화
나는 평생을 한시도 빠짐없이
스스로의 운명을 응시하면서
타고 나온 스스로의 운명을 운명으로
살지 않고, 부지런히
스스로의 노력으로 타고 나온 그 운명을 새로 만들면서
그 만들어진 새로운 운명을
쉬지 않고 살아왔어라
슬픔도 기쁨도.
유리의 성채 - 사진을 정리하며
조병화
어느 때부터인가
이곳 바람을 감지하고부턴
나는 웃음으로 나를 숨기는
지혜를 기르며 나를 살아온다
사람을 마주 보는 것이 무서워
바로 쳐다보는 것이 멋적어
맹송맹송 바라다보는 것이 미안해
그냥 보는 것이 수줍어
선뜻 얼굴 맞대는 것이 쑥쓰러워
이렇게 본의 아니게 사는것이
부끄러워
사람을 대할 때마다 깊숙이
나를 감추며, 숨기며
보이지 않게, 나타나지 않게
투명한 웃음으로 나를 지켜 살아온다
때문에 오해로 번진 나의 생애
보이지 않는 나의 생존
남은 사진마다 웃음에 가려진 얼굴들이 아닌가
이곳 바람은 너무 어려워
웃음을 방패로 멀리 사는 나의 지혜
한여름 잠자리처럼
순결한 고독처럼.
유서
조병화
1
유서를 써 두어라 한다
살아있는 동안 쓰고 남을는지,
못 남을는지, 도 모르는
달랑달랑한 돈에 대해서
유서를 쓰는 이 슬픔과 부끄러움,
미안하다
이 말 한마디.
2
나의 창작시집 50권은, 모두 하나의 테마이며
그것은 마음의 편안을 얻기 위해서
써 온 것들이옵니다. 오로지.
그 하나의 테마란
타고 나온 내 운명을
내 꿈대로 교정하는 일이었습니다.
3
나의 창작시집 50권은,
타고 나온 내 운명을 내 꿈대로
교정해 오면서 살아 온 내 생애의
한 권의 시집이옵니다.
흔들리지 않고 내 꿈을 찾아
살아 온 그 길의 기록으로.
4
나의 창작시집 50권은,
순간 순간 시의 영감으로 이어진
나의 삶의 철학이며
그 삶의 철학을 나의 언어로 새롭게
내가 낸 나의 길이며
내가 낸 나의 그 길을 걸어오면서
이번이 그 오십 번째가 되는
피곤한 내 그 영혼의 가숙이옵니다.
은어
조병화
모처럼만에 찾아든 쌍계사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였다
쌍계사에서 멀리 어머님 온기를 느끼면서
하산하는 길에
길가 식사집에서 은어구이로
점심을 한다
먹으면서 어머님 생각
혹시나, 이 은어는 그 옛날
어머님이 방생하신 그 은어는 아닐까,
잠시 수저를 멈춘다
살생하지 말라, 하시던 그 말씀
멀리 들으며, 어쩔 수 없이 살생하는
이 이승의 길
어머님, 죄송합니다
살생이 없는 그곳으로
어서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모처럼만에 찾아든 쌍계사는
어디나 은어, 갇혀 있는 은어들.
은혜(恩惠) - H 헤세 잠 위에……1962년(年) 8월(月) 9일(日) 그의 별세(別世)의 날
조병화
`잠은 긴 고독(孤獨)의 승리(勝利)이다'
85세, 작은 인생의 시간 속에서
먼 정신(精神)의 날개처럼
깊은 사색(思索)에 앉아
외로움과 즐거움이 같이 흐르는 곳
빛과 어둠이 같이 흐르는 곳
많은 혼자 속에 물러 앉아
스스로 지닌 것을
스스로 찾아
당신은 넓은 혼자를 살아 왔습니다
생명의 폭풍우(暴風雨) 속에서
청춘의 검은 방황(彷徨) 속에서
스스로의 영혼(靈魂)으로 안내해 준
당신은 최초(最初)의 내 안내인(案內人)이었습니다
허허(虛虛)히 밖으로부터 안으로 가득히
내 최초(最初)의 목소리가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
검은 빛처럼 멀리
당신은 내 혼(魂)이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위대(偉大)했습니다
동양(東洋)의 지혜(知慧)와
서양(西洋)의 사색(思索)이
생명의 자리를 깊이 높여서
스스로 만든 스스로의 집, 지금
당신은 고이 누웠습니다
하나의 생명을 다 하여
`고독(孤獨)한 것'을 완료(完了)한, 그
승리(勝利) 속에
고이 잠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을숙도(乙淑島)
조병화
귀가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갈 줄을 모르는 장난꾸러기들처럼
철새들이 다 떠난 사월 하순을
을숙도 강에는 멀리 하얀 새 몇 마리들이
모여서 물장구들을 치고 있었다
세상을 버리고, 세월을 잃고.
의자
조병화
1
그 자릴 비워 주세요.
누가 오십니까?
"네."
그 자릴 비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누가 오십니까?
"네."
그 자릴 비워 주셨으면 합니다.
누가 오십니까?
"네.“
2
그렇습니다.
이 자린 저의 자린 아니오나
아무런 생각 없이
잠시 있는 자리
떠나고 싶을 때 떠나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이 자린 저의 자린 아니오나
아무런 딴 생각 없이
잠시 머물고 있는 자리
떠나고 싶을 때 떠나게 하여 주십시오.
미안합니다.
이 자린 저의 자린 아니오나
떠나고 싶을 때 떠나게 하여 주십시오.
3
내일에 쫓기면서
지금 내가 아직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지금 내가 앉아 잇는 자리의 어제들이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시간의 숙소를 더듬으며
지금 내가 아직 생각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건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자리의 어제들이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차례에 쫓기면서
지금 내가 아직 생각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건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자리의 어제들이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4
가을마다 이 자리에 돌아오는 건
무언가를 이 자리에 잊은 거 같은
생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가을마다 이 자리에 돌아오는 건
먼 자리 가다
무언가를 이 자리에 두고 온 거 같은
생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봄, 여름, 겨울, 멀리
혼자 가다
가을마다 이 자리에 돌아오는 건
무언가를 이 자리에 잊은 거 같은
생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5
떠나야 할 시간이오나, 아직
떠나지 못하옵는 건
"내일?"
어디라 장소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어서야 할 시간이오나, 아직
일어서지 못하옵는 건
"내일?"
어디라 장소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비워야 할 이 자리, 시간이오나, 아직
비우지 못하옵는 건
"내일?"
어디라 장소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6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는 거
실로 변하는 건
움직이는 것들이다.
옛날에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 우리 이 자리에 없으려니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음에
실로 변하는 건
사람 뿐이다.
시간에 집을 지으라.
생각에 집을 지으라.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음에
실로 변하는 것은
"오고 가는 것"들이다.
7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겠습니다.
8
보이는 자리엔, 낙서를 하지 말자.
"옛날에 어느 분이 이 의자에..." 하고
나를 찾을 때
- 그 생각 속에 있자.
보이는 자리엔, 낙서를 새기지 말자.
"옛날에 어느 분이 이 의자에..." 하고
나를 찾을 때
- 그 시간 속에 있자.
보이는 자리엔, 낙서를 하지 말자.
"옛날에 어느 분이 이 의자에..." 하고
나를 찾을 때
- 그 생각 속에 있자.
9
인사말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어림에
옛날 어느 분이 내게 한 말이
"이 자릴 사랑하라."
인사말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어림에
오늘 내가 오는 분께 할 말이
"이 자릴 사랑하라."
인사말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어림에
옛날 어느 분이 내게 한 말이
"너를 위해 너를 이야기하지 말라."
인사말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어림에
오늘 내가 오는 분께 할 말이
"너를 위해 너를 이야기하지 말라."
10
가을 공원에
빈 의자 하나 놓여 있다.
나뭇잎이 떨어짐에
먼 고요함
가을 공원에
빈 의자 하나 놓여 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조병화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의 가슴에 안겨 든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읍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읍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읍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읍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읍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읍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읍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이미지 단상
조병화
1
까치 한 마리
깍, 소리치고 날으매
온 산이 울린다
아, 이 만고정적.
2
깊은 산중에서
맑은 샘을 만나듯이
나는 너에게서
존재의 기쁨을 만난다.
3
고개를 넘어도 고개
고개를 넘어도 고개
이어지는 고개에서
너를 부르면
먼 산 어디메에서
숨어서 우는 뻐꾸기.
4
먼 윤회의 길 돌다가
들른 자리.
이미 늦어서 내 자리는 없다.
5
너는 너의 눈물 한 방울에
온 몸이 무너져내린다
너의 눈물 한 방울에
끝없이 흘러내린다.
6
너는 허허 들판에 핀
작은 들꽃
바람에 산들거리며
내 발길을 멀게 한다.
7
나의 생애는
운명에게 연행되어가는 길
꿈만이 한 가닥 동행이다.
8
나의 천성은
말 한 마디로 흐려지고
말 한마디로 개어지는,
약한 갈대이옵니다.
9
나는 한평생을 살아옴에
잘못도 많았고,
실수도 많았고, 고집도 많았고,
하지 않아야 할 일도 했지만,
그 모든 인간으로 내 운명을
그대로 살아왔을 뿐이옵니다.
10
먼 하늘에 이렇게
별들이 반짝이고 있는 밤엔
당신이 훤히 보입니다.
지금 나는 그곳까지
와 있습니다.
당신 곁으로.
이별
조병화
이별을 나는 그저 그런 거
어쩔 수 없는 인간사라고 생각을 해왔습니다만
요즘엔 이별처럼 눈물인 것이 없는 것으로
온 몸으로 느끼며 살아옵니다
머지 않아 이 이승에서
내가 만난 것들과 이별을 하게 되려니
나머지 눈물론 다할 수가 없을 거 같습니다
깊이 사랑했던 거나 그렇지 않았던 거나
그땐 다 마지막 인사가 되려니
아, 마지막 그 많은 이별을 어찌 다하리
요즘엔 만나는 것이 다 이별이요
이별이 다 영원한 망각으로 생각이 되니
숨어서 우는 눈물을 다 어찌하랴
나에게 고마웠던 거나
나에게 언짢았던 거나
이별을 나는 그저 그런 거
어쩔 수 없는 인간사라고 생각을 해왔지만.
이별이
조병화
안개가 자욱이 끼어든 숲처럼
언제부터인가 나의 주변에도
이별이 자욱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사랑하던 사람도 하나하나 떠나가고
즐겁던 벗도 하나하나 떠나가고
꿈이다, 그리움이다, 외로움이다, 내일이다, 하던
긴 세월도 하나하나 떠나가고
오랜 인생을 사랑하며 다투며 지내던
아내마저 먼저 떠나려는 어두운 병실에
나는 남아
안개 자욱이 끼어든 숲처럼
이별이 자욱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어머님, 저는 지금 이렇게
이부스키
조병화
이곳은 일본 열도 큐슈
동지나해 넘실거리는
이부스키 해안
검은 모래 사장
솟는 온천
찾은 벗은
자릴 뜨고
캄캄
고요한 우주
따가운 곳에
구름이 뜬다
사람은 한 번
자릴 뜨면
하염없는 작별
머리 속에서
세월을 묵어 가는
화석
화석이지
화석에 묻힌
그 목소리
운명을 울던 여인의 목소리
생명의 벌레 소리
살기 때문에 부르는
목소리
찌, 찌
그 목소리 들으며
이부스키 미야가하마
뜬 세월
빠른 물결
검은 돌 주으며
작별을 한다
나와 나
인간은 혼자 남는 거지
이승에 단 램프
조병화
나의 목숨은 이승에 단 램프
아직은 어머님이 주신 기름이 남아
너를 볼 수가 있다
불빛이 밝은 만큼 뚜렷이
불빛이 강한 만큼 따뜻이
불빛이 퍼진 만큼 넓게
어둠을 헤치며
아직은 어머님이 주신 기름이 남아
멀리서나마, 이렇게 까마득히 멀리서나마
그냥 너를 저리도록 그리워할 수가 있다
간단없는 거센 바람 속에
영원처럼.
이승의 짐을 덜어내며
조병화
아무런 욕심도 없는 사람은 가볍다
따라서
이승과 저승 사이에 걸려 있는
강물의 다리도 가볍게 건너리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아, 요즘 날마다 날마다 버리고 버리는
이 이승에서의 짐, 그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남길 짐 하나 가려둔다
아무도 모르는 무겁고도 가벼운
사랑 하나.
이제 작은 열매일지라도
조병화
이제 작은 열매일지라도 작게 이대로 맺고
떠나려 합니다
이제 아직은 설익은 열매일지라도
작게, 작게, 이대로 열매를 맺고
힘에 겨워서 떠나려 합니다
이만해도 나에겐 고마운 세월이었습니다
이만치 열매를 맺게 해주신 것만 해도
나에겐 한없이, 한없이 고마운 은혜였습니다
많은 바람과 구름이 있었습니다
많은 눈과 비가 있었습니다
많은 밤과 낮, 해와 달이 있었습니다
변화무상, 견디기 어렵던 빛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에게 시달리다 영글은 작은 열매로
작은 열매일지라도 감사히 여기며
이제 이 자리를 물러나려고 합니다.
인간
조병화
수명에 한도가 있는 육체
안에
삶과 죽음을 한 몸으로 동거시켜
잠시 불을 밝히고 있는
이 가숙(假宿)
작별을 하며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항상 떠나는 생각
속으로 속으로
그 오늘을 산다
삶은 죽음을 품고
죽음은 삶을 키워
한 몸으로 동행을 하는 거
동행하다 그 몸 허물어지면
그뿐
그곳에서 헤어지는 거
육체는 사그러지며
불은 꺼진다
욕망은 땅에
포기는 하늘에
삶과 죽음, 서로 작별할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상
그 길목
그곳에서 나는 바람이지
삶과 죽음
한 몸에
동거하는 이 가숙(假宿)
인간관계
조병화
깊이 사귀지 마세
작별이 잦은 우리들의 생애
가벼운 정도로 사귀세
악수가 서로 짐이 되면
작별을 하세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세
너만이라든지
우리들만이라든지
이것은 비밀일세라든지
같은 말들을 하지 않기로 하세
네가 너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생각하는
깊이를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어디메쯤 간다는 것을
보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작별이 오면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사귀세
작별을 하며 사세
작별이 오면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악수를 하세.
인간의 무늬
조병화
빈 조개 껍데기를 만지고 있노라니
수억년 물결치는 바다 소리
수억년 물결치는 바다에 닦이며
이어내려 오는 조상의 무늬,
아, 이 무늬는 이 조개의 가문이 아니던가
이 가문의 문신을
줄기차게 지켜 내려오는 이 절개
어찌 숭고하다 하지 않으리,
생각하면서 나의 무늬를 찾아보는
이 아침,
내게도 나의 무늬가 비치는가
인간도 그 인간이 산 그 생애만큼
그 인간의 무늬가 있으려니
분명.
인생
조병화
그날도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지
오긴 왔지만, 그곳 그 목소리는 아니었지
기다리다가 전화를 걸었지
전화 벨소리는 오래 울렸지만
받는 사람은 없었지
밖에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지
온종일
인생은
조병화
인생은 생명으로 시작하여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것을
그리움은 뜨거운 사랑이며
가도 가도 닿을 수 없는 하늘인 것을
하늘은 영원한 것이며
영원은 항상 고독한 것을
아, 그와도 같이 인생은
사랑으로 이어지는 황홀한 희열이며
아름다운 적막인 것을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조병화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고
영화가 들의 꽃과 같고
바람이 지나면 없어져서
그곳을 다시 알지 못한다 해도
인생은 그 날이 한 날과 같고
'있음'이 들의 꽃과 같고
세월이 지나면 없어져서
그 흔적을 다시 알지 못한다 해도
너와 같이 한, 이 한 자리
마음은 가난하다 해도
생각은 가난하다 해도
말은 가난하다 해도
바람에 휘날린다 해도
인생은 혼자라는 말 밖엔
조병화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에게
외롭다는 편지를 보내는 것은
사치스러운 심사라고 생각하시겠지요
나보다 더 쓸쓸한 사람에게
쓸쓸하다는 시를 보내는 것은
가당치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리고, 나보다 더 그리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그립다는 사연을 엮어서 보낸다는 것은
인생을 아직 모르는 철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아, 나는 이렇게 아직
당신에게는 나의 말을 전할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그저, 인생은 혼자라는 말 밖엔.
인생이 그러하듯이
조병화
어머님, 저는 인생이 그러하듯이
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많은 눈물을 준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런 욕심없이 그저 그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님, 저는 인생이 그러하듯이
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저도
숨어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무런 욕심없이 그저 그리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움은 눈물이 되고, 눈물은 마음이 되고,
마음은 살아야 하는 인생의 말이 되고,
말은 쓸쓸한 인생의 길이 되었습니다
쓸쓸한 인생을 쓸쓸한 대로
저에게 주어진 그 먼 약속들을 약속대로
어머님 말씀을 하나, 하나, 빠짐없이 살아옴에
실로 아름다울수록 오히려 슬퍼지는 고운 사람을
많이 보아왔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길로
그 사람은 저 길로
나는 이 길로, 서로 따로따로
만났다간 헤어져야 하는 인생의 길목에서
차마 헤어지기 어렵던 사람도
헤어져야 하는 아픔과 체념을
삭막한 가슴에 여미면서
어머님, 저는 인생이 그러하듯이
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었습니다.
인생합승(人生合乘)
조병화
의무(義務)와 같이 살아 있는 나를
내가 안고
5인승 인생합승(五人乘 人生合乘)에 끼면
차창(車窓)은 봄.
활짝 개인 하늘 아래
경인가로(京仁街路) 80여 리(餘里) 잔잔한 기복(起伏)
과수원(果樹園) 가지들이 손목을 흔들고
보리밭 양지에 풀물이 든다.
봄봄.
인생의 안개가 온몸에 낀 채
늘어진 능선(陵線)에 아지랑이가 핀다.
인연(因緣) - 부처님 앞에서
조병화
부처님, 저는
당신이 기분 좋으신 얼굴로 보일 땐
저의 기분도 청명무량하게 개어집니다
그러나 당신이 기분 좋지 않는 얼굴로 보일 땐
저의 기분도 무량우울하게 흐려집니다
그리고 당신이 슬픈 얼굴로 보일 땐
저의 가슴도 헤아일 수 없이 슬퍼집니다
그러다가 당신이 눈물 어린 얼굴로 보일 땐
저의 작은 가슴은 담당할 수 없이 무너져내립니다
아, 부처님, 저는 어쩌다가 그렇게
어머님으로부터 변하기 쉬운 여린 마음과
약한 눈물을 많이 타고나온가 봅니다
부처님, 저는
당신이 까닭 모르게 눈물을 흘릴 땐
그대로 무너져내리는 눈물이옵니다.
일몰(日沒) - 태종대 곤포의 집에서
조병화
하늘에
어린달을 남기고
세상을 서서히 사라지는
해는
그 마지막 光焰을 바다에 뿌린다
아 다 마쳤도다
희비애락, 그 변화무쌍한 세상
인간의 더위를 다 마쳤도다
물결치는 파도에
산산이 부스러지는 그 잔해
피물결치는 그 임종
부산 태종대 곤포의 집
난간에 걸려 있는 건
적막
일체의 적막을 마시며
정에 취한다
선생님에
좋지예
더 드이소
남도(南都) 여대생(女大生)의 남부 사투리
예, 예
예,
술은 비우나
아직은 내가 다 마치지 못한 건
<나>라는 희비애락이다.
잃은 시간 속에서
조병화
긴 방파제로 싸인 뮤제 쟝콕토
석탑에 기대어
눈이 가는 대로 해안선을 쫓아
선을 긋는다.
이곳은 망똥의 서쪽 해안
억세게 몰고 오는 바람의 물결
바다의 물결
어리벙벙 머리칼을 날리며
이 그림
내일의 회상을 그린다.
한번 뜨면 그뿐,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의 장소
햇빛의 고향
슬픔과 기쁨, 같이 머물다 가는 곳
아, 생명은 유한한 거
육체는 소멸되며
어겼나 상실된 시간들이여
생각을 쫓으며
물결과 바람을 쫓으며
바라다보는 유럽의 풍경
이어서 인간들이
물가로 모인다
오, 시간이여
상실이여
푸른 방파제 끝머리, 잃은 시간 속에서
나를 그린다.
임해 교실
조병화
하얀 패각 속에서 수업을 한다.
산머루처럼 익어가던
생도들의 까만 눈알들이
전생에 혼 떼어
파란 해협의 어란(魚卵)처럼 맑다.
고사리 같은 하얀 목들은
바다를 향하여 날로 길어진다.
하얀 패각 속에서
어란처럼 맑은 눈알들에 끼여
아내와 싸우고 나온 기억을 잊어버린다.
수평에 뜬
병원선을 바라다본다.
비 내리는 날이면
나의 임해 교실은
홀리데이―.
버밀리언 표지 아래 누워
발진티푸스에 걸린 바다를 내려다본다.
생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쓴다.
아시아 작은 반도
남단으로 밀려와
하얀 패각 속에서 수업을 한다.
입원 일기
조병화
1 - 빈자리
지금 우주 어디메쯤에서
한 마리의 벌레가 죽어 가고 있다.
예수도 그곳으로 갔다
마호맷도 그곳으로 갔다
석가모니도 그곳으로 갔다
지구는 지금 텅빈 자리
그곳에 캄캄히 내가 누워 있다
이승을 바라보며.
2
까마득히 잊었던 제자가
병실에 찾아와
가랑잎 같은 나의 손을 잡고
기도를 올린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어느 먼 산길을 가고 있었다.
입춘
조병화
아직은 얼어 있으리,
한 나뭇가지, 가지에서
살결을 찢으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싹들
아, 이걸 생명이라도 하던가
입춘은 그렇게 내게로 다가오며
까닭 모르는 그리움이
온몸에서 쑤신다
이걸 어찌하리
어머님, 저에겐 이제 봄이 와도
봄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봄 냄새나는 눈이 내려도.
잎 떨어진 나무와 같이
조병화
멍하니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나와 내가 유리되어
마냥 멍하니 노상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잎들이 사라진 나무 그대로
마냥 언제까지나 노상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눈에 내리어
고요한 당신의 마음과 같이 눈이 내리어
마냥 그대로 하얀 눈에 엎이고 싶은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미지근한 이 외로운 자리에서
깨지지 않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가랑잎이 내린 나무 그대로
멍하니 마냥
당신과 같이 고요한 눈에 덮히고 싶은
그러한 때가 있습니다
자술서
조병화
나는 1921년 5월 2일,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에서
가난한 일본 식민지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나의 큰 숙명,
이 숙명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생각에
"보다 많은 인생을 살자"라는 생각이 들자
"보다 많은 인생을 살려면
보다 많은 여행을 하는 일,
보다 많은 여행을 하는 일은
보다 많은 자연의 세계를 여행하는 일과
보다 많은 영혼의 세계를 여행하는 일,
보다 많은 영혼세계를 여행하는 일은
보다 많은 책을 읽어서
보다 많은 상상의 세계를 여행하는 일"
그렇다, 보다 많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세계와
보다 많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의 세계를
후회없이 여행을 하자, 하는
사범학교 일학년 어두운 기숙사에서 얻은
아물아물한 철학으로 인생을 출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상상을 얻어내는
시를 읽으며, 시를 쓰며, 시를 살아오며
인생 팔십을 흔들리지 않는 나의 철학을 살아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연의 세계를 후회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를 후회없이
그리고 지금 당신 앞에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
조병화
1
공중을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공중을 날며 스스로의 모이를 찾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그렇게 공중을 높이 날면서도
지상에 보일까 말까 숨어 있는 모이까지
찾아먹을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아, 그렇게
스스로의 모이를 찾아다니면서
먹어서 되는 모이와
먹어서는 안 되는 모이를 알아차리는
민감한 지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지상을 날아다니면서
내릴 자리와 내려서는 안 될 자리,
머물 곳과 머물러서는 안 될 곳,
있을 때와 있어서는 안 될 때를
가려서
떠나야 할 때 떠나는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가볍게 먹는 새만이
높이 멀리 자유를 날으리.
2
자유, 그것은 자기를 살 줄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적막한 희열, 그걸 말하는 거다.
작은 들꽃
조병화
1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너나 나나 이 세상에선
소유할 것이 하나도 없단다
소유한다는 것은 이미 구속이며
욕심의 시작일 뿐
부자유스러운 부질없는 인간들의 일이란다
넓은 하늘을 보아라
그곳에 어디 소유라는 게 있느냐
훌훌 지나가는 바람을 보아라
그곳에 어디 애착이라는 게 있느냐
훨훨 떠가는 구름을 보아라
그곳에 어디 미련이라는 게 있느냐
다만 서로의 고마운 상봉을 감사하며
다만 서로의 고마운 존재를 축복하며
다만 서로의 고마운 인연을 오래오래
끊어지지 않게 기원하며
이 고운 해후를 따뜻이 해 갈 뿐
실로 고마운 것은 이 인간의 타향에서
내가 이렇게 네 곁에 머물며
존재의 신비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짧은 세상에서
이만하면 행복이잖니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너는 인간들이 울며불며 갖는
고민스러운 소유를 갖지 말아라
번민스러운 애착을 갖지 말아라
고통스러운 고민을 갖지 말아라
하늘이 늘 너와 같이하고 있지 않니
대지가 늘 너와 같이하고 있지 않니
구름이 늘 너와 같이하고 있지 않니
2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내가 지금 짊어지고 있는
이 이승의 짐 중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 사랑이로구나
가장 소중한 짐이 사랑이로구나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로구나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나는 지금 이곳, 이 자리까지
눈에 보이는 짐은 버리고 왔건만
내려놓을 수 없는 짐 하나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로구나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그런데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나누는 짐이란다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 나누는 짐이란다
가장 쓸쓸한 사람들이 나누는 짐이란다
서로 소리 나지 않게 주며 받으며
서로 멀리 이어 가는 가벼우면서도
가장 무거운 짐이란다
그런데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사랑은 소유가 아니란다
사랑은 혼자 갖는 것이 아니란다
사랑은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란다
사랑은 그저 사랑하는 것이란다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사랑은 영원히 갖고 싶어진단다
사랑은 혼자만이 갖고 싶어진단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사랑은 사랑함으로써 행복해야 한단다
사랑은 사랑받음으로써 행복해야 한단다
아, 사랑은 사랑으로 행복해야 한단다
3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너에게 끌려, 지나가는 길 멈추곤 한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너에게 끌려,
지나가는 길 흔들리곤 한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바람에 살랑거리는 너의 볼 웃음
늦은 가을 저녁 이 노을에
너에게 끌려, 너에게 끌려,
지나가는 먼 길,
되돌아보고 되돌아보곤 한다
작은 보따리
조병화
참으로 작은 보따리를 가지고
이곳까지 잘도 살아왔다
얼마되지 않는 지식
얼마되지 않는 지혜
얼마되지 않는 상식
얼마되지 않는 경험
얼마되지 않는 창작
얼마되지 않는 돈
실로 서투른 판단과 행동을 가지고
용케도 이곳까지 살아왔다
이제 머지 않아 이곳을 떠나려니
아무런 후회도 없다
어쩌면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있으랴
어쩌면 이렇게도 고마울 수가 있으리.
잠 오지 않는 밤
조병화
어쩌다가 이 땅에 떨어져서
일생을, 다시 돌아갈 길만 찾는가,
오늘 밤도
어디선지 첫닭이 운다.
장마의 계절
조병화
지금 나는 비에 갇혀 있습니다
갈 곳도 없거니와
갈 수도 없습니다
매일매일 계속되는 이 축축한
무료
적요
어찌 이 고독한 나날을 다 이야기하겠습니까
비는 내리다간 쏘와! 쏟아지고
쏟아져선 길을 개울로 만듭니다
훅, 번개가 지나가면
하늘이 무너져 내는 천둥소리
하늘은 첩첩이 검은 구름
지금 세상 만물이 비에 묶여 있습니다.
장미가 피는 해안
조병화
내가 이렇게 이 길을 오르내리는 것을
알으십니까
나뭇가지들에
깊이 닫힌 유리창 안에서
낯 모르는 소녀가 날개를 치는
피아노 소리에
어느 장미들이 귀를 기울이는
오후의 이 비탈진 길을
생각에 잠긴 당나귀처럼 조심스러이
샘을 돌아
이렇게 내가 인기척 없이 오르내리는 것을
사랑하는 그대는 알으십니끼
마을 소년과 소녀들은
수록색치는 바다로 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밀어를
오래 지닌 채
이 많은 장미 송이의 비탈진 길을 내려갑니다
인생이 기울어갈수록 가난해지는
내 마음
사랑하는 그대는 두고
이렇게 홀로 피고 지는 장미들의
수록색 치는 바다로 내리는
긴 비탈진 길이올시다
장미와 도적
조병화
아내가 집을 나가던 날.
장미를 훔쳐다 침대에 앉힌다.
행복이 계속하던 날의 불안이
침실에 고인다.
졸업식 날의 조세트 의상을 입은 채
장미는 처녀로 늙고 싶어 한다.
전쟁에 나리낑이 된 딸처럼
제멋에 지쳐 산다.
장미에선 미련한 거만이 흐른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레인코트는 다시금
안개 깊은 해협의 층계에서 나를 부른다.
아내와
해협의 하늘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날.
재방서안(再訪西安)
조병화
그 먼 옛날
우리 한국의 사신이나, 일본 사신들이
이 먼 길을 어떻게 이곳까지 왔을까,
생각을 하며
성 밖에 있는 당성(唐城) 객사에 누워 있다
서안(西安)은 역대 중국 왕조의 서울
불로장수를 꿈꾸던 泰始皇 王朝도
이곳에서 15년이었다고 한다
아, 흥망성쇠는 인간의 세계
왕조는 무너져가서 소리 없고
성 안에서나, 성 밖에서나, 지금 인민들이
소리 높여 장을 본다
역사는 이렇게 줄기차게 흘러가며
변화무상, 만고에 말이 없고
나의 인생도 이제 기울어가고 있어라
이렇게.
전쟁
조병화
알라신이 잘들 살라고 준 검은 기름이
불붙은 수라장 속에서
알라신의 자손들과
하나님의 자손들이 다같이 불바다가 되어간다.
절길로 접어들며
조병화
절길로 접어들면, 늘
어머님, 생각
지금 어머님은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먼 곳을 돌고 계시지만, 오늘은
이곳, 통도사에서 만나 뵈올 것 같아서
아침 이 산길을 오르면
계곡마다 물줄기
신라 천 년을 흘러 이어 내려오는 물줄기
물소리는 아직도 청청하나
나는 늙었다
아, 어머님 그곳까지는 너무나 멉니다, 하고
고개를 드니
고개 드는 그곳, 하늘 어디에서 울려오는
꾀꼬리 소리
길은 아직 멀고
통도사는 보이질 않는다.
조각구름의 집 - 편운재 이야기
조병화
시공을 지나는 길에 잠시 머물러 가는
하늘 아래 흰 굴뚝
조각구름의 집
산까치 해마다 새끼 쳐서
주인 빈 사이에 산으로 뜬다.
지구 동북쪽 늙은 산천
한글의 나라
경기도 안성
산간에 낀 저수지 마을
난실리 난실리
나무 나무 가지 가지
수면으로 몰려든 바람
편운재 그늘에서 쉰다.
주인은 먼 마음, 뜰 생각에 머물고
타향에 버린 세월
털어 걸고
뻐꾹꾹
가려진 유리창
남은 일월, 램프로 산다.
마신 시간을 토하며 토하며
시공을 지나는 길에 잠시 마련한
하늘 아래 흰 굴뚝
조각구름의 집
산까치 해마다 새끼 쳐서
주인 빈 사이에 산으로 뜬다.
조국(祖國)
조병화
나이 들어야 알겠데
나이 들어야 알게 되데
조국이란 그저 큰 눈물
나이 들어야 알겠데
후배들이여! 너희들은 아직 어리다
그저 하늘의 무한처럼 남의 나란 생각되지만
남의 나라! 그 맛을
아직 모른다
안되는 것 내 나라, 막히는 것 내 나라
보잘 것 없는 것
눈에 차지 않는 것 내 나라
어딜 가나 혼돈과 충돌
성취와 자유란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발가벗은 땅덩어리! 내 나라라 생각되지만
내 나라! 그 맛을
아직 모른다
쫓기는 자와 쫓는 자
묶이는 자와 묶는자
자유를 통치하는 자
그 시민을 보아라
조국은
뜨거운
결합
나이 차야 알겠데
나이 차야 알게 되데
조국이란
큰 눈물
나이 차야 알겠데.
조국으로 가는 길
조병화
먼 길로 오게나
돌아서 빙빙 오게나
참아가며 쉬지 말고 어려운 길 오게나
노변에 있는 것, 전개되는 것 다 겪으며
오로지 조국으로 가는 길
그 길로 오게나
고향에선 참아야 하네
아껴야 하네
키워야 하네
사랑해야 하네
무엇보다도 ‘같이’해야 하네
미워하지 않는 마음 들거든 오게나
버리지 않는 마음 들거든 오게나
욕하지 않는 마음 들거든 오게나
참을 수 있는 마음 들거든 오게나
같이 만들어 살 마음 들거든 오게나
땅만일세
이 세상 다 하여도 같이 할 수 있는 땅만일세.
지상에서
지하에서, 영원을 같이 할 수 있는 곳.
그 길로 오게나
어려워도 그 길로 오게나
멀어도 그 길로 오게나
노변에 있는 것, 전개되는 것 다 겪으며
오로지 조국으로 가는 길
그 길로 오게나
조롱의 새
조병화
아름답게 사랑하는 것은
자유롭게 사랑하는 겁니다
언제나 넓고 푸른 하늘로 계십시오
아무리 자유로워도
넓고 푸른 당신 하늘 안에 있습니다
소유하려는 마음일랑 버리세요
소유는 늘 불안한 번뇌이니까요
조선족 어느 여인
조병화
중국 연변에서 온 서울 주재원
조선족 어느 여인,
그곳에서 읽었다는 나의 시가 생각나서
소문 소문 물어 물어 찾아 들렀다는 여인,
순간 백두산 가던 길에
온 산야를 덮고 만발하던 야생화, 생각
바람에 바람에 낄낄낄 무수히
티없이 웃어대던 향기로운 모습 떠오르며
그 순박한 꽃 한 송이를
이곳에서 만나는 기쁨
아, 시는 이러한 것인가
문명은 오염의 시작,
잃어가는 자연,
오, 여인이여, 그대
순박하다는 것은 하늘을 사는 마음이라.
조춘(早春) - 1999년
조병화
산장(山莊) 넓은 유리창 밖에
너울거리는 나뭇가지들을 무심코 보고 있노라니
문득, 지나간 30년 세월
그때 심은 어린 초목草木들이 저 혼자 자라
하늘에 치솟아
봄이 오는 차가운 바람에
너울 너울
먼저 떠난 사람 아득히
세월도 너울 너울
아, 인생도 너울너울
나도 혼자 너울너울
오는 봄도 너울너울.
존재
조병화
길가에 아무런 이유 없이
피어 있는 작은 들꽃은, 요란은 하지 않아도
곁에 피어 있는 것만으로
길 가는 사람에게 다정한 위안을 준다
길가에 아무런 까닭 없이
피어 있는 작은 들꽃은, 요염은 하지 않아도
곁에 피어 있는 것만으로
먼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따뜻한 큰 위로을 준다
한없이 넓은 들판,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가에
아무런 따짐없이 피어 있는 작은 들꽃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곁에 피어 있는 것만으로
먼 길을 가는 적막한 길손에게
한없이 포근한 사랑을 준다
아, 그와도 같이
들꽃은 아무런 약속은 없다 해도
길가에 피어 있는 것만으로도
슬픈 세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숨은 그리움과 기쁨을
때로, 때때로, 수시로, 항상, 황홀하게
몰래 곱게 주고 있다
안개 자욱한 이 세상에서
존재, 그 순간
조병화
정적이라는 말이 있다
안개에 가물거리는 먼 그리움
떨어져 있는 혼자들을 말하는 거다
신비라는 말이 있다
잊었던 먼 사람이, 문득
눈앞에 아롱거리는 걸 말하는 거다
하늘에, 산에, 골짜기에, 호수에
넘실거리는 이 아름다움
머지않아 내가 두고 가려니
아, 사랑아, 그리움아.
종달새
조병화
난 네 하늘에 뜬
적요한 불꽃
끝 있는 목숨으로
끝없는 널 탄다
아 - 영원은 상상
고독한 거
그곳에서 난
구름이 된다
종로 네거리
조병화
오후 다섯 시면 같은 자리
고오 스톱 신호등 아래
푸른 불 기다리며
멍, 하늘을 본다
썬 글라스에 비쳐드는
속세 풍경
기억 깊은 골짜기로
템즈
세에느 내려 흐르고
라인
테베레
나일
미시시피 강둑의 바람
팔랑거리는 나뭇잎
미끄러운 냄새
종말에 가까운 여로
노을 길다
건너서 길가 `낭만' 비어 홀 등
들르면
헐건한 얼굴들
컬컬
돌아서면 영 빌 자리
오늘도 밤 깊었네
이젠
자
종로 네거리
삼백육십일
오후 다섯 시 같은 자리
고오 스톱 신호등 아래
눈, 비 내려도
푸른 불 기다리며
멍, 세월을 본다.
종말 부근에서
조병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하두 아름다워서
되찾아보았으나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아, 그와도 같이
칠십 평생이 뿌옇기만 하구나.
주점
조병화
일체의 수속이 싫어
그럴 때마다 가슴을 뚫고드는
우울을 견디지 못해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나는 먼저 아버지가 된 일을
후회해 본다.
필요 이상의 예절을 지켜야 할
아무런 죄도 나에겐 없는데
살아간다는 것이 지극히 우울해진다
한때 이 거리가
화려한 화단으로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력서를 쓰기 싫은
그 날이 있고부터
이 거리의 회화를 나는 잊었다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그러한 수속조차 이미 나에겐 권태스러워
우울이 흐린 날처럼 고이면
눈내리는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산다는 것이 권태스러운 일이 아니다
수속을 해야 할 내가 있어
그 많은 우울이 흐린 날처럼 고이면
글 한 자 꼼짝하기 싫어
눈내리는 주점에 기어들어
나를 마신다
아버지가 된 그 일이
마침내 어쩔 수 없는 내 여생과 같이.
죽음으로
조병화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지하 오 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캄캄한 것을 살아 온 거다
미움도 사랑도 모두
가난한 풀밭 머리에서 가난한 풀만 뜯다
가난히 쫓겨다니며
아까운 정들을
캄캄히 살아 온 거다
이긴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잡은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가진 자로 하여금 쓸쓸케 하여라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지하 오 미터 그 자리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그 노자만큼
쓸쓸히
죽음으로 직행을 하고 있는 거다.
죽음은 마지막 예술
조병화
필경, 산다는 것은
스스로의 먼 죽음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작업,
맑은 죽음, 티없는 죽음, 천하지 않는 죽음,
이것이 소원이려니
이러한 죽음을 향하여 작업하는 인내로운 생애,
이것은 실로 고요한 예술이어라
죽음에 이르러 후회 없는 생애,
죽음에 이르러 남에게 해 없는 생애,
죽음에 이르러 남에게 먼지 없는 생애,
스스로에게 티없는 생애,
아, 인생은 선택이려니
고요한 흔들림 없는 자기 무덤 만들기,
이것이 가장 어려운 작업이려니
매일을 보고 매일을 다듬고 매일을 다시 보고
매일을 다시 다듬으며
스스로의 무덤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죽음은 스스로의 마지막 예술이어라.
죽음처럼 허탈이
조병화
죽음처럼 허탈이 어디 있으랴
죽음처럼 허망이 어디 있으랴
죽음처럼 고독이 어디 있으랴
젊어서 오만했던 죽음의 포기
젊어서 초월했던 죽음의 감상
젊어서 무관했던 죽음의 적막
지금 눈 앞에 오락가락
서성거리며
너와 나
가는 자, 남는 자
작별의 거리(距離)에서
죽는 자의 말을 듣는다
죽는 자의 눈을 본다
죽는 자의 목을 본다
죽음처럼 약한 게 어디 있으랴
죽음처럼 가련한 게 어디 있으랴
죽음처럼 무언한 게 어디 있으랴.
중국(中國) 소수민족(小數民族)의 목소리 - 小數民族作家學會, 文協세미나에서
조병화
중공의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동등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고 있는
중공내 55개 소수민족의 넓은 草原의 散在
그 풀벌레 같은 각색의 목소리들이
찌, 찌, 맑게 이어가는
생존의 자유와 권리, 이 존재의 확인
아, 민족이여, 인간은 다만 인간일 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지각
조병화
먼 윤회의 길 돌다가
쉴 곳 찾아들었으나, 빈 자리가 없었습니다
먼 운명의 길 따라 빙빙 돌다가
한 자리 택해서 들어섰으나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지구 위에서의 작은 여행
조병화
때때로 하는
지구 위에서의 작은 여행은
언젠가는 해야 할 지구 밖으로의 먼 여행을
연습하는 여행이려니, 생각되지만
그 지구 위에서의 작은 여행은 여행에 앞서
이것저것 마음이 많이 쓰이면서
되도록 간편하게 꼭 필요한 것만 챙기지만
지구 밖으로의 먼 여행에는 무엇을 챙기지, 하는
생각
하늘을 날다 그곳에 내리고
그곳에서 다시 하늘에 떠서 이곳에 내리는
지구 위의 작은 여행
연습하면서 연습하면서
'짐이 가벼워야 높이 먼 여행자지' 깨달으며
한평생
하늘 밖으로 가는 그 여행을 준비하나니
내가 그곳으로 갈 땐
알몸도 두고 혼만 가지고 가려니
그것도 버리고.
지금 나는 다시 소라로
조병화
지금 나는
눈에 들어오는 바다가 아니라
귀로 들어오는 넓은 바닷가에서
다시 소라와 놀고 있습니다.
그 옛날 내가 젊어서 길을 잃고
흐린 겨울 바닷가에서 만났던 어린 소라는
지금은 이젠 늙고, 큰 소라가 되었으나
날로 기진맥진, 바닷물에 밀리며
찾아가야 할 고향을 찾고 있습니다.
온종일 바닷물은 혼자서 밀리고 쓸리고
철석, 철석, 술술술.
지금 내 마음은
조병화
지금 내 마음은
여름 홍수가 심하게 지나간 뒤에 남은
개울 물줄기가 말라 들어가는
한여름 하얀 대낮의 모래밭이옵니다
흘러 내려가다가 남은 작은 돌들이 드문드문
개울바닥에서 따갑게 햇볕에 타고 있는
한여름 하얀 대낮의 모래밭이옵니다
돌밭에 끼어 멀리 불그스레이
개울 바람에 산들거리는 가냘픈 패랭이꽃
한 송이, 이걸 전생의 한 인연이라 할까
이 인연으로 하여 아직은 가득한
한여름 하얀 대낮의 모래밭이옵니다
아, 아깝던 시간
그 시간이 쉴새 없이 그대로 지나가도
이젠 붙들 수 없는 힘 빠진
한여름 늘어진 하얀 대낮의 모래밭이옵니다.
지루함
조병화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지루할 거다
그 기다림이 너무나 먼 인생은
또한 지루할 거다
그 기다림이 오지 않는 인생은
더욱 더 지루할 거다
지루함을 이겨내는 인생을 살려면
항상 생생히 살아 있어야 한다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그 무엇을 스스로 찾고 있어야 한다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산다는 걸 잠시도 잊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모습을
항상 보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진눈깨비
조병화
진종일을 짜라시대의 로서아 문학처럼
저벅, 저벅, 진눈깨비가 내린다
나는 고리끼의 <밤주막>의 루카처럼
이렇게 온 종일을 지루하게
봄이 오다 멈춘 삼월을 보낸다
인생의 먼 종신유형을 받고.
진달래
조병화
날더러 어찌하라고
난 어찌하라고
진달래는 저렇게 고운 연분홍으로
확, 피어나는가
바람에 파르르 떨며
이른 봄빛에 사르르 알몸을 떨며
무거웠던 그 겨울을 활활 벗어버리고
연분홍 연한 맨살로
만천하에 활짝 현신하는 이 희열
아, 난 어찌하라고
날더러는 어찌하라고.
차창
조병화
사랑이라는 것은 이와도 같이
외로운 시절의 편지라고 생각을 하며
차창에 기대어
추풍령 마루를 넘으면
거기 낙엽이 지는 계절이
늙은 산맥에 경사지고
인생과 같이 외로운 풍경은
언젠가는 나도 돌아가야 할
그날의 적막과도 같이
긴 차창에 연속하였습니다
1952년 12월
정오의 태양이 파란 가슴에 고여들고
나는 먼 보헤미안 시절의 그와도 같이
차창에 기대어
사랑이라는 것은 이와도 같이
외로운 시절의 편지라고 생각에 잠겨갔습니다.
착각
조병화
이곳이 지구의 끝인 줄 알고 왔는데
이곳도 지구의 끝이 아니라
지구의 한복판이더라
지구는 둥근 것이라는 것을 잊고
살아가는 착각,
지구는 동서남북도 없고,
위 아래도 없는,
그저 인간만이 그 자리에서 살다가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
아, 이곳이 지구의 마지막 끝인 줄 알고
먼 길 찾아온 자리
지구는 가도 가도 끝이 아니더라.
참회
조병화
내가 어려서 철없이
잡았던 새들의 영혼은
지금 어디서 날으고 있을까
내가 어려서 철없이
잡아 기르던 베짱이의 영혼은
지금 어디서 울고 있을까
물에서 개울에서 잡아올리던
작은 물고기들의 영혼은
지금 어디서 헤엄쳐 돌까
그리고 알게 모르게 무심코
내 발에 밟혀 죽은 벌레들의 영혼은
지금 어디서 기어다닐까
아, 천지 만물, 같은 생명이거늘
나로 하여 죽어 간 그 영혼들은
지금 어디서 떠돌고 있을까
어머님
이 오만한 과오를 어떻게 사죄할 수 없을까요
내가 철없이 사랑하고, 미워하던
그 많은 인간사 죄를 씻고
당신 곁으로 가는 길을 비춰주소서.
천상과 지상 - 아시아 하늘을 날으며
조병화
하늘은 하나
푸른 품에
만민의 인간, 사랑을 품고
마냥 넓지만
지구는 지금, 한 점의 흙덩이
온 몸에 불을 안고
하늘을 돈다.
선녀의 잠자던 자리
인간의 꿈 품던 자리
약속한 자리
시간은 화약에 삭고
지구는 지금, 살을 찢는 가시망
줄줄
방어선
공격선
흠투성이
국경이라는 선에서
목숨이 탄다.
하늘은 항상 하나
별밭에
내일은 자지만
인간이 사는 별
지구는 지금, 굳어 버린 흙덩이
온몸에 불을 안고
하늘을 돈다.
천적
조병화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거다.
천지(天池)
조병화
이곳 백두산 산정, 구름이 지나가는 자리까지
부석, 부석한 길을 미끄러지며
허덕, 허덕 기어 올라와서
天池는 짙은 구름에 묻혀서
이젠 못 보고 가려니, 했던 순간
천지는 청록색 짙은 치마를 두르고
하늘의 요녀처럼 나타났다간, 금세
자취도 없이 사라져간다
아, 이 요기어린 신비
하늘의 선녀를 만났다는 만수((萬)壽의 이야기처럼
나는 멍, 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구름 속에.
천지(天池)로 가는 길
조병화
천지로 오르는 신작로 비포장 7백 리 길은
흰 구름으로 닦인 길
청, 백, 자, 홍, 황, 적색으로 만발한
야생화 벌판에 사랑을 느껴
그 벌판에 죽어 눕고 싶어라
어쩌면 저승으로 가는 길이
이럴 줄도 몰라, 어머님 저 여기 눕고 싶습니다
중얼거리며
멀리 떠가는 하얀 구름을 본다.
철학 교수 강(姜)박사의 죽음
조병화
이제 머지않아 65세 퇴직이 되면
퇴직금을 일시에 받아서
쓰고 쓰고 하다가 쓰고 나머지로
목선(木船)을 한 척 살 겁니다
장작 한 더미를 살 겁니다
기름 한 통을 살 겁니다
술 한 병을 살 겁니다
이렇게 해서
어느 날 나의 철학으로 견디던 끝날
썰물에 배를 밀고 바다 한가운데로
술을 마시며 나갈 겁니다
그리고 술에 취해서 정신이 몽롱할 때
기름 뿌린 장작더미에 불을 지를 겁니다.
그리고 배와 더불어 하늘로 하늘로
활 활 불이 되어 날아오를 겁니다.
첫 닭소리
조병화
첫 새벽을 찌르는 첫닭 소리는
아, 하늘의 은총이어라, 그 구원이어라
처음 만나는 우주의 시(詩)처럼.
첫사랑
조병화
밤나무숲 우거진
마을 먼 변두리
새하얀 여름 달밤
얼마만큼이나 나란히
이슬을 맞으며 앉아 있었을까
손도 잡지 못한 수줍음
짙은 밤꽃 냄새 아래
들리는 것은
천지를 진동하는 개구리 소리
유월 논밭에 깔린
개구리 소리
아, 지금은 먼 옛날
하얀 달밤
밤꽃 내
개구리 소리.
청춘에 기를 세워라
조병화
청춘에 네 기를 세워라
청춘에 네 그 기를 지켜라
기 아래 네 그 청춘을 엮어라
누구보다 땀 많이 간직한 생명
누구보다 피 많이 간직한 생명
누구보다 눈물 많이 간직한 생명
청춘은 푸른 바다라 하더라
청춘은 푸른 산이라 허더라
청춘은 푸른 하늘이라 하더라
해는 항시 가슴에서 솟아오르고
즐거운 젊은 날
흘러내리는 날 날이 우릴 키운다
청춘에 네 기를 세워라
청춘에 네 그 기를 지켜라
기 아래 네 그 청춘을 엮어라
초상
조병화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어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다름질 쳐 갔습니다.
초상국화 옆에서
조병화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 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 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 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추억
조병화
1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 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2
오래간만에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어느 다방에서
그러니까, 그것이 밀다원이었던가
아니면, 마로니에 다방이었던가, 에서
희미한 추억에 어리어리 말려
커피를 청하고 있노라니까
선득 다가서는 낯설은 맑은 한 소녀
"선생님, 추억이라는 시, 언제 쓰셨어요?"
이렇게 물어오는 티없는 소리
순간, 나는 그것이 어느 추억이던가에 하는 생각에
아, 나는 항상 추억 속에 살고 있는데,
하면서
"수시로"
이렇게 아무런 생각없이 대답을 했습니다
내 인생, 어느 오후
유리창 밖엔
매서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추억을 추억하며
조병화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하루, 이틀, 사흘, 걸어보던 먼 추억이
지금은 큰 바다가 되어
그 추억으로 넘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나는 지금 헤아릴 수 없이 약해진 몸으로
기진맥진 허덕이고 있습니다
좌절과 충돌, 욕설의 암초
오욕의 파도를 헤치고
굴욕의 물결
유혹의 등대를 멀리
한없이 향해해 온 이 절인고독
아직도 남은 항해는
담담한 칠십,
보이는 것이 추억이 맴도는 망망한 바다
들리는 것이 추억이 웅웅거리는 망망한 바다
느끼는 것이 추억에 젖는 망망한 바다
망각으로, 망각으로, 침몰해가는 나의 추억,
어느 한 자리에
숨어서 우는 나의 눈물
그곳에 한 여인이 하얗게 떠오른다
포말처럼
축복(祝福)
조병화
내일 아침이 허허한 空間에 꼭 돌아오리라 믿고
잠들은 아가
널더러 삶이 아름다울께라 나는 전하고 가련다.
먼동이 트는 밤은 기다림에 조바심쳐도
해돋이까지를 꿈꾸며 살자
내일 아침이 허허한 空間에 꼭 돌아오리라 믿고
잠들은 아가
두말없이 삶이 아름다울께라 나는 전하고 가련다.
출발
조병화
저 산을 올라야
황홀한 해돋이를 보겠기에
나도 미투리를 삼아 신고
신작로로 나섰다
칼칼한 동반
조병화
좀 가라앉을 만하면
다시 불어닥치는 칼칼한 바람
한세월을 뜸할 사이없이
계속, 이렇게
모질게 가시길 바라는 것이 잘못이다.
뜬구름처럼 해와 달이 지나가고
밤이면 아름다운 별이 솟는
엄청난 이 천지에서
머지않아 어디론지 사라져 갈
미세한 생명하나
가난한 품에 품고
풀을 수 없는 이 바람의 둥우리에서
오욕의 목숨을 쪼아가며
머지 않은 그날을 기다리는 이 불면
참으로 어이없는 세월
어이없이 살아 온 거다
가라앉을 만하면
다시 불어닥치는 어이없는 바람
약속된 내 이 장소
칼칼한 동반.
코르시카 산정(山頂)에서
조병화
Cargese를 떠나, 도중
피에나, 포르토, 에비사, 아이토네, 칼라쿠치아를 지나
칼비로 빠지는 산길,
어마어마한 산길,
돌아서 오르고, 올라서 돌고
해발 2,710미터의 Cinto 봉우리
2,000미터를 넘는 고개
내려다보는 지중해는
사방 청감(靑紺)의 호수, 한계가 없다.
야생하는 밤나무, 도토리나무
비탈이고, 숲이고, 낭떠러지
까마득한 하늘 꼭대기
그곳을 자동차가 돈다
산은 대리석 덩어리
희끗희끗
해풍에 깎인 절벽
그 위에
묵은 교회가 있고, 빨간 마을이 있고
가축이 있고
종소리가 있다.
까마득히 푸른 바다 위, 하늘에 솟은
마을
신에 가까이 인간들이 모인
산마을
그리운 건 인간뿐
사방 천 리 바다
아차하면 없어질 그 꼭대기
아쉬움 속에 만족을 산다
쉬엄쉬엄 바쁜 길
그 절벽을 돈다.
타향에서 핀 작은 들꽃
조병화
1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한들
어찌 내가 그 말을 하겠니
구름으로 지나가는 이 세월
너는 이승에 핀 작은 들꽃이로구나
하늘의 별들이 곱다 한들
어찌 너처럼 따스하리
너는 정교한 부처님의 창조
노쇠한 내가 조각구름으로 지나가며
너를 사랑한다 한들
이 늦은 저녁노을 어찌 내가 그 말을 하리
아,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너는 참으로 귀엽구나, 곱구나, 아름답구나
순결하구나
그러한 너를 사랑한다 한들
어찌 내가 네 곁에 머물 수 있으리
2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참으로 긴 세월
많은 이야길 너와 이야기하며 왔구나
먼 길 가던 한 쓸쓸한 길손의
하잘것없는 독백이라, 생각해 다오
먼 길 이곳까지 옴에
너의 존재로 하여 지루한 줄 몰랐구나
너의 은혜로 하여 피곤한 줄 몰랐구나
이 은혜로운 인연을 오로지
부처님께 감사할 뿐이란다
어디에 계시는지는 모르나
너와의 인연을 부처님께 감사할 뿐이란다.
이 이승의 세계엔 불모의 사막도 많은데
넓고 푸른 이 대지에 너와 같이
아름답고 고운 작은 들꽃을 주시니
얼마나 고마우신 부처님의 은총이냐
실로 부처님의 은총이 너에게 가득하구나
푸른 이 대지에 가득하구나
온 우주에 가득하구나
사랑스런운 작은 들꽃아,
하고 싶은 말이 아직도 남아 있으나
이제 나에겐 시간이 얼마 없구나
해는 하늘 끝으로 기울어 가며
멀리 가물가물 어머님이 계신 세계로 열려 있는
성문이 보이기 시작을 하는구나
참으로 고맙고 고마웠구나
부처님의 은총으로, 너의 무상의 은혜로,
이곳까지 온 고마움, 어머님 곁에 가서도
쉽게 잊겠니.
3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너를 쓰는 순간부터 너에게 끌려드는
내 마음의 흔들림은, 물론
나만이 간직하고 있는 나의 마음의 비밀이란다
그로부터 숨어서 너를 사랑하는 이 마음은
물론, 이 세상 아무도 모르는
내 마음의 비밀이란다
아, 이 이승 넓은 대지에 고요히
천진무구하게 아름답게 피어 있는 너를
사랑하면서 숨어서 그냥 지나가는 이 비밀은
물론, 나만이 지니고 있는 따뜻한
내 마음의 비밀이란다
이렇게도 황홀한 기쁨인 너를
사랑하면서도 그냥 숨어서 지나가는
이 마음의 쓸쓸함은
물론, 나만이 지니고 있는 은혜로운
내 마음의 비밀이란다
아, 때늦은 이 저녁노을을
곱고 아름다운 너를 보고, 그냥
숨어서 지나가는 이 행복한 비밀은
물론, 그래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내 마음의 비밀이란다
4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참으로 아름답구나
너는 너무나 곱고 순진해서
험악한 인간의 혹탁한 세상을 모르려니
실로 이 인간의 세상은
네가 상상할 수 없이
어지러이 쓸쓸하고, 외롭고, 무섭고,
마음 줄 곳이 하나도 없단다
작은 들꽃아, 참으로 아름답구나
너같이 아름답고 순진하고 착한 들꽃엔
이 세상 모든 것이
너같이 아름답고, 순진하고, 착하게만 보이겠지만
그런 생각은 어림도 없단다
작은 들꽃아, 너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만
이 인간의 세계엔
믿을 것이란 하나도 없단다
너같이 곱기만 하지 않는단다
너같이 착하기만 하지 않는단다
너같이 아름답기만 하지 않는단다
모든 것이 변하고, 변하고
네가 믿는 것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란 하나도 없단다
사랑하는 들꽃아, 참으로 곱구나
너는 수시로 변하는 것들을 믿어선 안된다
너는 수시로 변하는 것들을 사랑해선 안된다
너는 수시로 변하는 것들을 그리워해선 안된다
외로워도 외로워하지 말고
쓸쓸해도 쓸쓸해하지 말고
적적해도 적적해하지 말고
너의 천성 다할 때까지
바람 부는 텅 빈 대지에
먼 길 가는 외롭고 쓸쓸한 사람에게
그저 부처님 자비처럼
곱게, 아름답게, 천연스럽게, 피어 있어라.
5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너나 나나 이 세상에선
소유할 것이 하나도 없단다
소유한다는 것은 이미 구속이며
욕심의 시작일 뿐
부자유스러운 부질없는 인간들의 일이란다.
넓은 하늘을 보아라,
그곳에 어디 소유라는 게 있느냐
훌훌 지나가는 바람을 보아라,
그곳에 어디 애착이라는 게 있느냐
훨훨 떠가는 구름을 보아라,
그곳에 어디 미련이라는 게 있느냐
다만 서로의 고마운 상봉을 감사하며
다만 서로의 고마운 존재를 축복하며
다만 서로의 고마운 인연을 오래오래
끊어지지 않게 기원하며
이 고운 해후를 따뜻이 해 갈 뿐,
실로 고마운 것은 이 인간의 타향에서
내가 이렇게 네 곁에 머물며
존재의 신비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짧은 세상에서
이만하면 행복이잖니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너는 인간들이 울며불며 갖는
고민스러운 소유를 갖지 말아라
번민스러운 애착을 갖지 말아라
고통스러운 고민을 갖지 말아라
하늘이 늘 너와 같이하고 있지 않니
대지가 늘 너와 같이하고 있지 않니
구름이 늘 너와 같이하고 있지 않니...
6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이렇게
네 곁을 그냥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고만 있는 내가
야속하다고만 생각하겠지..
이렇게
네 곁을 바람처럼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고만 있는 내가
서운하다고만 여기겠지..
그러나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나는 그래야만 하는
길 가는 사람이란다.
잠시도 한곳에 머물 수 없는
먼 길 가는 허전한 길손이란다.
가진 것이란 어머님이 주신 슬픔뿐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그 무거운 어두운 눈물뿐이란다.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왜 내가
너의 곱고 귀여운 사랑을 모르겠니
왜 내가 너의 곱고 귀여운 사랑 곁에
머물고 싶지 않겠니..
그러나
나에겐 그러할 시간이 없단다.
나에겐 갈 길이
아직도 멀리 남아서
이 저녁 무렵을
어찌 네 곁에서 쉬면서,
머물다 가겠니..
아!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나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부지런히 다하여
어머님의 심부름을 마치고
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빨리 가야만 한단다.
해가 지기 전에....
7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나는 어느 날 네가 숨어서 우는 것을 보았단다
보면서
너같이 곱고 아름다운 작은 들꽃에도
슬픈 눈물이 있는가, 생각하면서
나의 가슴이 으스러지는 것을 느꼈단다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곱고 사랑스러운 작은 너의 가슴 안에도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슬픈 사연이
있었구나
깊고 깊은 비밀이 있었구나
하기야 이 세상 눈물 아닌 게 어디 있겠니
살아 있는 것들이 다 눈물이지
살아 있는 것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의
자비로운 부처님의 눈물이란다
가진 사람도 눈물이요
갖지 않은 사람도 눈물이요
불우한 사람도 눈물이요
불우하지 않는 사람도 눈물이요
행복한 사람도 눈물이요
행복하지 않는 사람도 눈물이요
너와 같이 곱고 아름다운 작은 들꽃도
고울수록 아름다울수록 그만치
마음 저린 눈물이란다
아,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슬프고 외롭고 그립고 쓸쓸한 것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란다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숙명을 참으며
참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너와 나의 이 이승이란다
21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나는 지금까지, 이곳까지
버리며, 버리며, 버리고 왔단다
버려서는 안 되는 것까지
버리며, 버리며, 버리고 살아왔단다
욕심을 버리며, 애착을 버리며
미련을 버리며, 고집을 버리며
인간사, 아까운 것들까지 버리며
오로지 맑은 꿈을 향하여
나를 살며, 나대로
내가 살고 싶은 방향으로
아픈 것을 참으며 살아왔단다
그러기에 언제나 나는 혼자였고
그 혼자를 끊임없이 견디며
그 혼자를 사랑하며 혼자를 살아왔단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슬퍼하지 않고
나를 외면하는 사람이 있어도
외로워하지 않고
나를 떠나는 사람이 있어도
서운해하지 않고
그게 그러거니
그게 그러하거니
그게 그런 거지, 여기면서
지금 이 자리, 이곳까지
다만 나를 찾아, 나로 가는 길을
한눈팔지 않고, 기웃거리지 않고
부지런히 살아왔을 뿐이란다
가볍게, 가볍게
버리며, 버리며
버려서는 안 될 것까지 버리며
34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내가 지금 짊어지고 있는 이 승의 짐 중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 사랑이로구나
가장 소중한 짐이 사랑이로구나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로구나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나는 지금 이곳, 이 자리까지 눈에 보이는 짐은 다 버리고 왔건만
내려놓을 수 없는 짐 하나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로구나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그런데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나누는 짐이란다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 나누는 짐이란다
가장 쓸쓸한 사람들이 나누는 짐이란다
서로 소리 나지 않게 주며 받으며 서로 멀리 이어 가는 가벼우면서도 가장 무거운 짐이란다
그런데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사랑은 소유가 아니란다
사랑은 혼자 갖는 것이 아니란다
사랑은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란다
사랑은 그저 사랑하는 것이란다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사랑은 영원히 갖고 싶어진단다
사랑은 혼자만이 갖고 싶어진단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들꽃아.
사랑은 사랑함으로써 행복해야 한단다
사랑은 사랑받음으로써 행복해야 한단다
아, 사랑은 사랑으로 행복해야 한단다
35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사랑보다는 꿈이란다
사랑은 간혹 변하는 수가 있지만
꿈은 변하지 않는 거란다
꿈은 자기가 버리지 않으면
항상 자기 안에 있는 보물이란다
자기 영혼 안에 있는 보석이란다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사랑은 간혹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거지만
꿈은 손으로 만져 볼 수 없는 것이란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영혼 속에서
그 영혼을 움직이고 있는 힘이란다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사랑은 간혹 어두운 눈물은 주는 거지만
꿈은 외로울수록 빛나는
영혼의 등불이란다
오, 길고 긴 이 세월을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나는 이 등불을 밝혀서 이곳까지 왔구나
무거운 사랑의 짐을 덜어내며
내려서는 안될 사랑의 짐까지 덜어내며
이렇게 먼 길을 왔구나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보다는 꿈이란다
그 영혼의 등불이란다.
41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나는 어느 날 네가 숨어서 우는 것을 보았단다
보면서
너 같이 곱고 아름다운 작은 들꽃에도
슬픈 눈물이 있는가, 생각하면서
나의 가슴이 으스러지는 것을 느꼈단다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곱고 사랑스러운 작은 너의 가슴 안에도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슬픈 사연이
있었구나
깊고 깊은 비밀이 있었구나
하기야 이 세상 눈물 아닌 게 어디 있겠니
살아 있는 것들이 다 눈물이지
살아 있는 것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의
자비로운 부처님의 눈물이란다
가진 사람도 눈물이요
갖지 않은 사람도 눈물이요
불우한 사람도 눈물이요
불우하지 않은 사람도 눈물이요
행복한 사람도 눈물이요
행복하지 않는 사람도 눈물이요
너와 같이 곱고 아름다운 작은 들꽃도
고울수록 아름다울수록 그만치
마음 저린 눈물이란다
아, 사랑스러운 작은 들꽃아
슬프고 외롭고 그립고 쓸쓸한 것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란다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숙명을 참으며
참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너와 나의 이 이승이란다
팔려 가는 소
조병화
팔려 가는 소보다 쓸쓸한 풍경이
또 있으랴
시골 버스 창 너머로 줄지어 보이는
장터로 가는 소들
나는 그 눈들을 볼 수가 없다
강을 끼고 도는
어느 읍내 가까운 긴 장길
자동차 나팔 소리에 놀라며 피하며
두리번두리번 끌려가는 소들
그 순종에 젖은 한국의 눈들을
어찌 차마 볼 수 있으리
눈을 감으면 어렴풋이 보이는
먼 부처님 미소
죽음을 철학해 왔지만
나는 아직
죽어서 가는 길을 모른다
미련을 덜어내며 이쯤 살아온 길
소망이 있다면 고통 없는 죽음뿐
팔려 가는 소의 가슴으로, 오늘은
내가 내게 팔려 간다.
편운재 기(片雲齋 記)
조병화
보이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눈이 오가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사람의 목소리 들리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작별이 바쁜 이 무상(無常) 부근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이 세상에선 평생토록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하늘 한 자리 한 생각 묻어
있을 수 있는 동안, 그냥
떠 있으려 했어요
차례가 있는 자리, 차례 속에
누구의 것도 아닌 이 차례, 가벼이
떠나려 했어요
번창의 폐허
이 이웃 부근, 버려진
영혼의 의자
시간에
앉아
보이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눈이 오가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사람의 목소리 들리는 곳엔
집을 짓지 않으려 했어요.
편지
조병화
달 없는 밤하늘은
온통 별들의 장날이었습니다
편편화심(片片花心)
조병화
꽃이 지누나
기다려도 무심한 봄날
봄이 무거워 꽃이 지누나
진관사 가는 언덕
훨훨 날리는 꽃
꽃은 피어도 님 없는 봄날
꽃이 지누나
봄이 무거워 꽃이 지누나
세상에 한 번 피어
가는 날까지 소리 없는 자리
님 그리다 마는 자리.
평화
조병화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한없이 평화로워진다
산란한 마음이 지속될 때도
불안한 마음이 지속될 때도
초조한 마음이 지속될 때도
나무를 쳐다보고 있노라면
온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아, 그렇게
먼 너를 생각하고 있노라면
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불안한 마음이 지속될 때도
초조한 마음이 지속될 때도
산란한 마음이 지속될 때도
온 세상이 불쾌한 공기로
나를 둘러쌀 때도.
풍화작용(風化作用)
조병화
이젠 너무나 늙어서
뮤즈마저 비켜가누나
이젠 너무나 늙어서
구름마저 비켜가누나
아, 이젠 너무나 늙어서
빛도 소리도 멀리 비켜가누나.
하나의 꿈인 듯이
조병화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난 것은
개이지 않는 깊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랑잎 지고 겨울비 내리고
텅빈 내 마음의 정원.
곳곳이
당신은 깊은 아지랭이 끼고
무수한 순간.
순간이 시냇물처럼 내 혈액에 물결쳐
그리움이 지면 별이 뜨고
소리 없이 당신이 사라지는 첩첩이 밤.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나고
가야 하는 것은
가시는 않는
지금은 맑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항상 하나 - 鍾鼎文(종정문) 형에게, 臺北(대북) 第一(제일) 大飯店(대반점)에서
조병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많은 고마움, 그저
흐느끼며
흐느끼며
보이지 않는 이 흐느낌, 그저
많은 벗들의 정을 안고
총총 떠납니다.
하늘은 항상
하나
하나를 나누기 위하여
우리들의 말이 있읍니다
어디나 이 땅
인간과 인간이 사는 곳에.
하루만의 위안
조병화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하루하루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병화
하루하루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를 떠나며 산다
너와 작별을 하며 산다
나를 버리면 산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스스로의 보이지 않는 줄에 매여
스스로의 운명을 살다가
스스로의 사그라진 운명 끝에서
그 멍에를 벗고
홀 홀
또 다른 곳으로 떠나는 거지만
이 떠남
이 작별
가까운 거리에서
너와 나
하루를 너를 생각하며
열흘을 너를 생각하며
한해를 너를 생각하며
시시각각을 너를 생각하며
소리 없이 소리 없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를 떠나며 산다
너와 작별하며 산다
멍, 나를 버리면 산다
아, 이 적막
너는 거기에서
나는 여기에서.
학(鶴) - 뉴욕 북교(北郊)에 있는 수화(樹話) 김환기지묘(金煥基之墓)(1913. 2. 27 ― 1974. 7. 25)에서 강신석화백(姜信碩畵伯), 허종(許鍾) 교수 안내를 받고
조병화
꿈결 같소
뉴욕 북교(北郊), 이곳 켄시소
눈 덮인 공동묘지에서
이승과 저승의 거리를 두고 다시 만나다니
세월이 꿈결이요
인생이 꿈결이요
그러니까 1966년 여름
그곳 만하탄, 형의 아뜨리에에서
포도주에 취해가며 껄껄 세상 잊고
웃어댔던 것이 어제 같은데
지금은 이곳 남의 나라 공동묘지에서
형은 하얀 눈에 덮여 있구려
백년, 천년, 만년이 그대로 침묵
멋있던 형의 모습
그 웃음
그 유모어
다시 들리지 않는
이 산바람
조형, 우리 한국인이 왜 건강한지 아오
산삼이 썩어 내리는 약수를 마시기 때문이오
이렇게 한국의 산천을 칭송하던
형이
이곳 외진 남의 나라 공동묘지에
프레드릿히니, 헨리니, 죠지아니, 그로리아니
토마스니, 제퍼슨이니, 마리아니
하는 묘명 사이에 끼어 있으니
마침내, 한국 대표로 와 있는 거 같구려
그런데 이곳에선 왜 그리 키가 작소
살아서 키다리 멋쟁이 화백이었던
형이, 이곳에선 너무 키가 작구려
그러나 그게 좋소
아담하오. 겸손하오. 아름답소.
술 한 잔 따라 놓고 향 피우는
바람 속, 이 마음
생전에 술 한 번 크게, 흐뭇하게 내지 못한
이 초라한 인생, 용서하소
아, 하늘은 높구나
올려다보는 겨울 찬 하늘
흰 구름 한 점
훨, 훨, 학의 모습
형의 모습
형은 그곳에서 학으로 떠 있구려.
한 노인이
조병화
한 노인이
옛날 파란 시절 살다간 바닷가를 다시 찾아와서
따뜻한 우유 한 잔을 청해 놓고
한적한 찻집에서
그 시절의 바다 소리를 듣고 있다
무엇을 그렇게 바삐 살았을까,
노인은 생각에 젖으면서
한 점 덧없는 꿈이었지, 하며
파이프를 깊이 문다
옛날은 시간에 묻혀 말이 없고
바다 소리만 거세게 물결친다.
한 떨기 요란스러운
조병화
한 떨기 요란스러운 모란이라고 합시다.
맑고 개인 오월 하늘 아래
어느 허물어진 궁터에 피어난
당신을 한 떨기 요란스러운 모란이라고 합시다.
줄기줄기 당신이 당신에 취할 때마다
외로움이 사무칠 때마다
긴 밤을 호올로 이슬에 젖을 때마다
당신은 한 떨기 슬픈 모란이라고 합시다.
꽃바람이 휩쓸 때마다 몰려드는 향기로운
허영과 명예에 대끼어
속속들이 익어들은 검은 씨앗을 안고
오월에 기울은 햇볕에 호올로 남은
당신은 한 떨기 시들은 모란이라고 합시다.
작은 행복이 줄기줄기 당신의 속속들이
몽당 안겨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누구도 당신 곁에 머물러서는 안 되었습니다.
한 떨기 요란스런 모란이라고 합시다.
영 내 곁에 훈훈한
한 떨기 계절을 잃은 모란이라고 합시다.
맑고 개인 인생의 하늘 아래
나와 함께 피다 질 어진 모란이라고 합시다.
한 송이 꽃
조병화
사람도 많거늘
하필
왜 나에게 꺾였나
너
한 송이
황홀한 봄날에
다 잃고 애처러워라
한식 이후
조병화
한식을 지낸 봄은 정직한 화가가 되어
온 천지에 이리저리 물감을 칠한다
황색, 홍색, 백색, 자색,
어지럽게 칠해 놓고
한 곳 그리운 곳을
색맹으로 만들어 놓는다
아, 봄은 이렇게 찬란하게 색을 칠해가며
하늘을 열어가지만
어두운 곳으로, 어두운 곳으로
나는 캄캄히 잊혀져 가고 있다.
한 인간의 생애
조병화
할아버지가 살아온 것은 바람이었어
바람에 밀려가는 한 조각 구름이었어
조각구름에 실려 가는 한 알의 작은 물방울이었어
우주를 안고 흘러가는 작은 물방울이었어
너도 내 나이가 되면 알 거야
네가 살아온 너를
그것이 바람이었는지
비였는지.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조병화
이곳까지 와서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듣는 말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는 말도 잃어버렸습니다.
뜨거운 열기에 지쳐서
그저 척 누워 버렸습니다.
멀리 그곳을 그리워 하며
더 갈 수도 없고, 안 갈 수도 없고
그저 기진맥진이 되어서
더는 나를 잃고, 누워버렸습니다.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해
조병화
아침을 일찍이 떠난 사람만이
빨간 저 해를 본다
길을 일찍이 떠난 사람만이
빨간 저 해를 본다
아,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길에서 길을 살았던가
집이 없는 사람만이
바라다볼 수 있는 저 빨간 해
아침을 일찍이 길을 나선 사람만이
저 해를 본다
혼자 길을 가며.
해마다 봄이 되면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와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해변
조병화
바다
겨울 바다는
저 혼자 물소리치다 돌아갑니다
아무래도
다시 그리워
다시 오다간 다시 갑니다
해진 해안선에 등대만이
말 모르는 신호를 반복하지만
먼 바다 소식을 받아주는 사람 없어
바다
겨울 바다는
저 혼자 물소리 치다 돌아갑니다
해인사(海印寺)
조병화
큰 절이나
작은 절이나
믿음은 하나
큰 집에 사나
작은 집에 사나
인간은 하나
햇까치
조병화
햇까치들이 철없이
깍깍 깍깍, 깍, 깍깍
정신없이 따갑게 짖어댄다
요놈들아, 조심 조심 짖어대라
조상님들 깊은 잠 깨실라
줄줄이 이어 있는
조상님들의 무덤, 마냥 고요하고
우거진 나무 숲
유월이 지나가는 고향산천
푸른 하늘, 흰 구름 한 점
이제 나도 이 곳에 묻히려니
세월 아득하여라
햇까치 철없이 깍깍 깍, 깍
어디선지 어머님 말씀
얘야, 너무 상심말라.
행복
조병화
사랑하시오
사랑하시오
서서히 사랑하시오
시간과 사귀며
서서히 사랑하시오
이 세상 끝까지
서서히
시간과 사귀며
뜨거이 사랑하시오
오래 감사히 사랑하시오.
행복은
조병화
행복은
서로 사랑하는 한 사람이면 가득한 것을
행복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쓸쓸히 돌아가는 나를 반가이 맞아주는
따뜻한 한 사람이면 가득한 것을
행복은
이 삭막한 세상에서
상처진 나의 가슴을 다 풀어 놓을 수 있는
그 한 사람이면 가득한 것을
아, 그렇게 행복은
나의 못난 슬픔이나 외로움을 받아주는
어진 한 사람이면 가득한 것을
이렇게 쓸쓸한 남의 세월에
행복은
상한 나의 마음을 깊이 파묻을 수 있는
다정한 한 여인의 가슴이면 가득한 것을
그렇게 슬프거나 즐겁거나
나만 믿고 살아가는 한 여인이면
왕자의 밀실처럼 아늑한 것을
아무런 욕심 없이
행복한 보석
조병화
당신을 진심으로 행복하게
기쁨으로 이끌어 주는 보석은
당신의 마음이옵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행복하게 하는 보석은
비취도, 다이아몬드도, 에머랄드도,
사파이어도 아닙니다
당신의 맑은 마음뿐이옵니다.
허영도, 불안도, 도취도, 위험도,
허욕의 고독도 없는 보석,
당신을 행복으로 빛내는 보석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당신의 맑은 마음이옵니다.
평생을 한결같이
헛되고 헛된 것
조병화
헛되고 헛된 것이 생이라 하지만
실로 헛되고 헛된 것은
그렇게 생각을 하는 생각일 뿐
언젠가 너와 내가 강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물은 흘러감에
다신 못 온다 해도
강은 항상 그 자리
흐르고 있는 것
이 세상, 만물, 만사가
헛되고 헛된 것이라 하지만
생은 다만 자릴 바꿀 뿐
강물처럼 그저 한자리
‘있는’ 것이다
너도 언젠가는 떠나고
나도 떠날 사람이지만
언젠가 너와 내가 같이 한자리
강 마을 강가, 이야기하던 자리
실로 헛되고 헛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그 사실이다
해는 떴다 지며
떴던 곳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감에
사람은 혼자서 살다가 가면
그뿐, 그 자리엔 없다 해도
실로 헛되고 헛된 것은
그렇게 생각을 하는 생각일 뿐
강물은 흐름에 마르지 않고
너와 내가 떠남에
실로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너와 내가 강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언젠가 너와 내가 강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헤어져야 할 날이
조병화
이젠 새로 만나서 사귀는 것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아진다
쉬이 헤어져야 할 날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일들 하나하나 떠나가고
앞으로 나도 떠나가야 할 날들 짐작하면서
이젠 새로 만나서 정드는 것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앞서진다
쉬이 헤어져야 할 날이 있기 때문이다
정들면 정들수록 그만큼 슬퍼질 것이려니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그만큼 가슴 아파질 것이려니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만큼 눈물 많아질 것이려니
아, 이젠 서로 만나서 사랑하는 것이
기쁨보다도 슬픔이 많아진다
쉬이 헤어져야 할 날이 있기 때문이다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조병화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입술,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나
작별을 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 가는 것을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할
말을 배우며 사세.
헤어진다는 것은
조병화
맑아지는 감정의 물가에 손을 담그고
이슬이 사라지듯이
거치러운 내 감정이 내 속으로
깊이 사라지길 기다렸습니다.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 나도 나하고 헤어질 이 시간에.
해와 달이 돌다 밤이 내리면
목에 가을 옷을 말고
- 이젠 서로 사랑만 가지곤 견디지 못합니다.
- 그리워서 못 일어서는 서로의 자리올시다.
슬픈 기억들에 젖는 사람들.
별 아래 밤이 내리고 네온이 내리고
사무쳐서 모이다 진 자리에 마음이올시다.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 나도 나하고 헤어질 이 시간에.
혜화동 로터리
조병화
혜화동 로터리,
울창한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을
잠든 아가를 태운 하얀 유모차를 밀고
앳된 예쁜 엄마가 지나간다
심한 장마가 지나간 오후
쨍쨍 쪼이는 햇살
눈부신 빨래처럼 따갑고
오가는 사람 한가로운 서늘한 그늘
지나는 수녀 한 쌍
신호등 건너 빨간 우체통
마냥 그 자리
오도카니 서 있고,
혜화동 로터리 분수공원
조병화
혜화동 로터리 분수공원 분수는
절기 따라 예쁘게 단장을 하면서
곱게, 아담하게, 조용히,
잘도 솟아 오른다
도시계획에서도 제외되면서
빙빙 도는 많은 차들에 둘러 싸이면서
옛날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특혜를 입은 모양인 양
유유히 잘도 솟아 오른다
어느 높은분의 무덤이라 하던가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다한 분의 무덤이라 하던가
항간에 많은 말들이 전해 내려오면서
시대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고, 행정이 바뀌어도
하나 해를 입지 않고
편안히 잘도 솟아오른다
수시로 비둘기 떼들이
빙빙 하늘을 돌며.
혜화동 뻐꾸기
조병화
아침 햇살을 받으며
혜화동 작은 언덕길을 내려오면
어디선지 은은히 들려오는
뻐꾹, 뻐꾹, ……, 그 소리
아, 어느새 올해도 그 유월이 지나가는가,
해마다 이맘때면 듣는 이 곳, 이 도시, 혜화동
그 뻐꾸기 소리
뻐꾸기는 먼 산 숲속에서 우는 법인데
어찌하여 이 뻐꾸기는
이 곳, 이 도시, 이 혜화동에 와서 울까
뻐꾹, 뻐꾹, ……,
맑고 아련하여라
내 고향 난실리는 남으로 이백 리
어머님 가신 지 어언 사십 년
하늘 높고, 세월 아득하여라
뻐꾹, 뻐꾹, …….
혜화동 우체국 아가씨
조병화
혜화동 우체국 아가씨들은 젊다
예쁘다, 명랑하다
여학생들 같다, 유니폼이 산뜻하다
농담으로 애인이 있습니까, 말을 걸면
결혼을 했습니다, 웃으며
아이도 있다고 수줍어 한다
웃는 얼굴이 유리창 햇살에 비쳐
혜화동이 환해진다
나의 우편물들은
어린 이 엄마 손에 가려져서
국내로, 일본으로, 중국으로, 미국으로 유럽으로,
온 세계로 가고,
온 세계에서 온다
우편물에 묻어, 오고, 가는
따뜻한 손의 향기,
오늘도 가고
오늘도 온다
부지런히, 정확히.
혜화동 우체국 우체부
조병화
혜화동 어귀 일대를, 무거운 행낭을 메고
이 집, 저 집, 도는 우편 배달부는
호리호리한 분이 약하게 보이나 강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찬바람이 치나
어김없이 제 시간에 우편물이 온다
어쩌다가 길에서 만나, 꾸벅하며
"선생님네 우편물이 제일로 무겁습니다" 하면
나는 미안해서 몸둘 바를 모른다
하기야, 혜화동 40년, 줄곧 한곳에서 세월했으니
혜화동 귀신 다 되었지, 생각하면서
인사받을 땐 세상 사는 것 같아서 반갑다
이렇게 나는 매일 혜화동 어귀에서
늙은 벌레처럼 돌며
때론 멀리, 때론 가까이
편지를 받으며, 편지를 띄우곤 한다
편지는 아직, 이 지구 어디엔가에
서로 살아 있다는 증거,
보고 싶다 한들 어디 그리 그게 쉬운 일인가.
호수
조병화
물이 모여서 이야길 한다
물이 모여서 장을 본다
물이 모여서 길을 묻는다
물이 모여서 떠날 차빌 한다
당일로 떠나는 물이 있다
며칠을 묵는 물이 있다
달폴 두고 빙빙 도는 물이 있다
한여름 길을 찾는 물이 있다
달이 지나고
별이 솟고
풀벌레 찌, 찌,
밤을 새우는 물이 있다
뜬눈으로 주야 도는 물이 있다
구름을 안는 물이 있다
바람을 따라가는 물이 있다
물결에 처지는 물이 있다
수초밭에 혼자 있는 물이 있다.
호올로
조병화
하늘에 먼 별들은
슬픈 채 돌아간 수없는 사람들의
화장한 눈동자라 믿고 있다
슬픈 유령처럼 떠도는 입김 아래
끝없이 연속하는 사람들이
부질없이 밤을 기다리는 것은
슬픈 채 돌아간 사람들을 위하여서는 아니다
동정을 바라다 쓰러진 사람들처럼
아 또다시 동정을 바라다 쓰러질 사람들끼리
처량한 회화를 가져야 한다
약하기 때문에 강한 것이 생명이라 알았다
그러기에 원래가 삶이 슬픈 것이었고
슬픈 삶은 환멸의 흥분을 나에게 주고 간다
나는 더 슬플 수 없는 자리에 살아 있어
동정을 기다리지 않아도 좋다
어쩔 수 없이 환멸할 육체를 가져
슬픈 채 돌아간 사람들의 노래일랑 잠시 놓고
약하기 때문에 강한 우리 회화를 하자
먼 하늘에
유령처럼 떠도는 별들은
슬픈 채 돌아간 수없는 사람들의
화장한 눈동자라 믿고
더 슬플 리 없는 지역에
동정을 바라다 쓰러질 사람들처럼
나도 부질없이 밤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혼자라는 거
조병화
밤 2시경
잠이 깨서 불을 켜면
온 세상 보이는 거, 들리는 거
나 혼자다
이렇게 철저하게 갇혀 있을 수가 있을까
첩첩한 어둠의 바닥
조물주는 마지막에 있어
누구에게나
이렇게 잔인한 거
사랑하는 사람아
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아
황혼
조병화
바다로 가는 언덕 위에 앉아
황혼이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황혼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환멸할 내 모든 것을 나도 갖고
나 홀로 가기 싫어
저렇게도 찬란한
황혼을 마주 보고 있습니다
바다로 가는 언덕 위에 앉아
오늘도
황혼이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황혼의 노래
조병화
1
예날에 지구엔
머리가 좋은 인류들이 살다가
멸종을 했습니다
스스로의 좋은 머리로
2
불가사의한 당신이 보내준 이 세상에서
참으로 잘 구경을 하고 잘 놀고 가옵니다
슬픈 거, 즐거운 거, 아픈 거, 쓰라린 거
아직은 이렇게 당신 섭리대로 잘 놀고 있습니다
73
헤어진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며
사랑하면서 헤어진다는 것도
세상의 이치이며
헤어지지 않으려 하면서도 헤어지는 것도
세상의 이치이며
사랑하며 사랑하며 헤어져야 하는 것도
세상의 이치이련가
74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살게 되는 것도
세상의 이치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못 살게 되는 것도
세상의 이치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게 되는 것도
세상의 이치이며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같이 살게 되는 것도
세상의 이치이며
황홀한 모순
조병화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 훗날, 슬픔을 주는 것을, 이 나이에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기쁨보다는
슬픔이라는 무거운 훗날을 주는 것을, 이 나이에
아, 사랑도 헤어짐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은
씻어낼 수 없는 눈물인 것을, 이 나이에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헤어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적막
그 적막을 이겨낼 수 있는 슬픔을 기르며
나는 사랑한다, 이 나이에
사랑은 슬픔을 기르는 것을
사랑은 그 마지막 적막을 기르는 것을.
황홀한 순간
조병화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 홋날 슬픔을 주는 것을, 이 나이에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기쁨보다는
슬픔이라는 무거운 훗날을 주는 것을, 이 나이에
아, 사랑도 헤어짐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은
씻어낼 수 없는 눈물인 것을, 이 나이에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헤어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적막
그 적막을 이겨낼 수 있는 슬픔을 기르며
나는 사랑한다, 이 나이에
사랑은 슬픔을 기르는 것을
사랑은 그 마지막 적막을 기르는 것을.
회상
조병화
꽃 속에서 바스라지는 웃음소리에
볼근 가슴을 비벼대던 아 젊은 날은
나와는 제일 먼 곳에서
사연 많은 긴긴 편지만 보내고 있어
편지 안에 흐트러진 긴 이야기엔
이렇다 할 아까운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건만
먼먼 호수가를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낙엽을 말아 낙엽을 피워
보얀 연기 속에 누워야 한다
슬픔이 오고 가는 모퉁이에선
작별을 하여야 했다
긴 세월 속에 어린 나를 보내야 했다
아름다운 나의 목숨을 바칠 그러한 사람이 없어도
긴 세월 속에 나는 나를 묻어야 한다
오늘도 꽃 속에서 바스라지는 웃음소리가 들려
볼근 가슴을 피어올리던
저 하늘가 가까이 또 하나
오지 못할 사연의 긴 편지가 떨어져 온다
후조
조병화
후조기에 애착일랑 금물이었고
그러기에 감상의 속성을 벌써 잊었에라
가장 태양을 사랑하고 원망함이 후조였거늘
후조는 유달리 어려서부터
날개와 눈알을 사랑하길 알았에라
높이 날음이 자랑이 아니에라
멀리 날음이 소망이 아니에라
날아야 할 날에 날아야 함이에라
달도 별도 온갖 꽃송이도
나를 위함이 아니에라
날이 오면 날아야 할 후조이기에
마음의 구속일랑 금물이었고
고독을 날려버린 기류에 살라 함이 에라
흐르는 것은
조병화
흐르는 것은
한번 자리를 뜨면
뜬 그 자리엔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려니
구름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세월처럼,
인생도 세월 따라 흐르는 것이어서
그 자리엔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어라
아, 그와 같이
매일 매일
순간순간이 이별이어라.
흙을 사는 사람들
조병화
평생을 흙을 사는 사람들,
이곳 돈황의 사람들은 흙에서 나서
흙바람 속에서 일생을 흙으로 산다
사막을 초원으로 만들고 초원으로 가꾸어서
해바라기, 콩, 목화, 수박, 오이, 야채를 재배해서
먹을 것을 장만하고,
나무들을 길러서 어디나 그늘을 만든다
나귀는 잔심부름꾼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랑스러운 가족
온종일 달랑, 달랑, 주인의 말을 듣는다
나귀는 말이 없어 처량하다
나귀는 그저 숙명을 산다.
3월
조병화
하늘을 향하여, 일제히
새 생명들이 총공격을 준비 완료하고 있다
신장비를 갖추고
온 대지 구석구석에서 그날만 기다리며
다국적 군단처럼
4월
조병화
푸른 바다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을 타고
어디선지 길게 들려오는 먼 기적 소리
언덕을 두른 긴 담 아래선
아늑히 햇빛을 쪼이며
파릇, 파릇, 잡초들의 싹이
뾰죽,뾰죽, 솟아오른다
나라를 지키다 떠난 사람들은
아직 어두운 사당 안에서 말이 없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만 사당 밖에서
다시 돌아온 봄에 풀려
옛날을 잊는다
아, 봄은 이렇게 오는 건가
세월은 만고무언,
열리는 먼 하늘에 흰 구름 한 점
오늘도 띄워 놓고
세상은 불안한 희로애락,
봄이 상륙하는 바닷가에서
무거운 겨울을 벗는다.
9월
조병화
치열했던 전투가 서서히
끝날 무렵 같은
먼 하늘
어디선지 들려 오는
귀뚜라미의 나팔 소리
불볕 화염의 종식을 고하고
긴 정적의 시작을 알리는
미세한 벌레들의 중재의 나팔 소리
무더위 인간 세상에
9월 휴전, 그 탁상이 마련된다.
이제 만물들은 제각기
제 길을 찾아 돌아들 간다.
9월의 시
조병화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의 여름만큼
무거워지는 법이다
스스로 지나온 그 여름만큼
그만큼 인간은
무거워지는 법이다
또한 그만큼 가벼워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그 가벼움만큼
가벼이 가볍게 가을로
떠나는 법이다
기억을 주는 사람아
기억을 주는 사람아
여름으로 긴 생명을 이어주는 사람아
바람결처럼 물결처럼
여름을 감도는 사람아
세상사 떠나는 거
비치파라솔은 접히고 가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