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클레어, 당신과 얘길 좀 하고 싶은데."
개러스는 클레어가 큰 걸음으로 빠르게 지나갈 때 이렇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만 들릴 수 있도록 낮춰져 있었지만 명령조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클레어는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그를 쳐다보려고 고개를 돌리지조차 않았다. 개러스가 거기 서 있는 걸 눈치 채지 못한 것처럼 하면 그의 말을 무시하기에도 한결 쉬울 것 같았다.
"부인, 잠깐 얘기 좀 합시다."
이번에는 개러스의 목소리에 약하지만 분명히 아주 날카로운 가시가 느껴졌다. 클레어는 치맛자락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그 부드러운 소환에 응하고자 거의 불가항력적으로 기우는 마음에 있는 힘껏 저항했다.
"이런 젠장, 당신이 일을 어렵게 만들려는 줄 알고 있소."
개러스는 곧장 그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클레어는 그를 무시했다. 여기는 그녀의 성이고 그녀가 주인이다. 개러스가 통제권을 갖게 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그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타인의 지도자가 되었는지 아주 잘 깨닫게 되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제어하는 타고난 위엄이 서려 있었다. 명령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을 제외하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다. 클레어는 자기도 상황이 요구할 때는 언제든 목소리에 확실한 위엄을 실을 수 있다고 되새겼다. 그녀는 열두 살 때부터 그렇게 해 왔다.
"울리치 경."
클레어는 울리치가 고개를 돌리자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칼 연습입니다, 아가씨. 개러스 경이 윌리엄과 댈런에게 무기 연습을 시키라고 명령하셨거든요."
울리치의 시선이 클레어의 얼굴에서 그녀의 바로 뒤쪽으로 옮겨 갔다. 클레어는 개러스가 마당을 가로질러 그녀가 서 있는 곳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댈런과 윌리엄은 그녀를 보다가 다시 개러스를 보았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보느라고 행동을 멈춘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윌리엄의 얼굴에 실망의 먹구름이 꼈다.
"아, 클레어 아가씨. 제발 제가 계속해도 좋다고 해주세요. 아주 조심할게요.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할게요."
댈런의 눈은 복수심에 가득 찬 만족으로 반짝거렸다. 그는 이미 클레어가 있는 곳까지 다다른 개러스를 교활하고 의기양양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난 아가씨가 우리에게 이런 위험한 기술을 억지로 배우게 하진 않을 거라고 믿었어요. 아가씬 언제나 머리가 둔한 멍청이들이나 싸움과 마상 시합 같은 데 기운을 쓰는 거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이 일에 대해서 왜 내게 상의 한 마디 없었죠?"
클레어는 울리치 앞에 걸음을 멈추고 경고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개러스는 이제 그녀에게서 겨우 몇 발짝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빠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기선을 빼앗길 것이다. 울리치는 그녀의 머리 위로 시선을 던지며 개러스의 눈과 마주쳤다.
"제 주인께서 이런 일에 명령권을 갖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개러스 경은 당신이나 그의 다른 부하들한테는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윌리엄과 댈런은 내 가족의 일부고 그들의 문제는 내 소관이에요."
"알겠습니다, 부인."
울리치는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그의 눈에는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즐거움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우릴 구해 주세요, 아가씨."
댈런은 처량하게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그냥 연습하게 해주세요, 클레어 아가씨."
윌리엄은 반대로 졸라댔다.
"난 칼 쓰는 법을 배워서 이 성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개러스 경은 훈련받은 군인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하셨단 말예요."
"그렇소."
개러스가 클레어의 옆에 도착했다.
"잘 훈련된 군인은 언제나 부족한 법이오."
그는 손을 내밀어 클레어의 팔을 잡았다. 누가 보기에도 그건 남편의 애정 표시처럼 보였다. 그러나 클레어는 그의 단단한 손가락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아프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손힘은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댈런과 윌리엄은 당신 부하가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여기에 다소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개러스의 눈빛은 단호했다.
"즉시 풀 수 없는 그런 복잡한 문제는 아니오. 나와 함께 가 준다면 당신이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설명해 주리다."
클레어는 인상을 썼다.
"글쎄요, 난 윌리엄과 댈런에게 무기 연습을 하라는 허락을 한 적이 없는데요."
"물론이오. 하지만 내가 허락했지. 그러니 모든 게 다 잘 될 거요."
클레어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어요."
"내 권리에 대해서라면, 우리 둘만 있을 때 상의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은데."
개러스는 울리치를 쳐다보았다.
"내가 부인한테 이 문제를 설명하는 동안 훈련을 계속하도록."
"알겠습니다."
개러스는 윌리엄과 댈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주어진 임무로 돌아가도록 해라. 너희들을 쓸 만한 기사로 만들려면 아직도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으니까."
"클레어 아가씨."
댈런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낑낑거렸다.
"우릴 구해 주지 않으실 건가요?"
클레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팔을 잡고 있던 개러스의 손에 힘이 주어졌다.
"연습을 계속하도록, 시인. 누가 아나? 혹시 열심히 연습하면 불유쾌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자기 목숨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될지 말이야. 더 이상 여자의 치맛자락 뒤에 숨어 있을 필요가 없어진단 말일세."
댈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의 눈은 분노로 번쩍거렸다.
하지만 개러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클레어를 끌고 마당을 다시 가로질러 건조 창고로 데려갔다.
"개러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클레어는 화를 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내 말은 사실이오. 저 소년은 남자가 되어야 하오. 그의 경우엔 빠를수록 좋지."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댈런은 내게 자기가 사생아라고 하더군. 추측컨대 그는 자기가 자란 집에서 도망쳐 나온 게 분명하오. 그는 지금 이 세상에서 혼자인 셈이오. 게다가 그의 성격은 걱정이 많은 형이지."
"그래요, 하지만……."
"만약 이 세상에서 살아 남고 싶다면 반드시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워야 하오. 내가 들어 본 그의 그 볼품없는 노래로 미루어 보건대 이 세상에서 하프 하나만 믿고 살아 나가기엔 글렀소."
클레어는 개러스의 목소리에서 우울한 확신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말하려고 하던 성난 장광설을 효과적으로 차단해 버렸다.
"당신이 지금 무슨 얘길 하는지 알고 있는 건가요?"
"물론이오. 댈런과는 달리 난 운 좋게도 아버지의 집에서 자랐소. 하지만 사생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소. 다른 무엇도 그 사실을 바꿔 놓을 순 없지. 이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이름을 만들어야 하오."
그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한기가 클레어에게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개러스가 그의 부친 집에서 자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는 그곳에서 진실로 환영받지는 못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내겐 적어도 디자이어가 있었다. 심지어 가장 힘든 시기에도 그녀에겐 언제나 가정이 있었다. 그녀에겐 자신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 자기가 속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그녀는 개러스의 강한 턱을 만지며 그에게도 이제 가정이 생겼다는 말을 해주고픈 기묘하고도 거의 저항하기 힘든 충동에 저항했다. 그녀는 그가 동정은 반가워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댈런을 염려해 주신 건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는 여기 디자이어에서 충분히 안전하게 지내고 있어요."
그녀는 쾌활하게 말했다.
"그럴까?"
"물론이죠. 윌리엄도 마찬가지예요. 이 섬에서는 한 번도 폭력 사태가 발생한 적이 없어요. 누구도 이 성이나 마을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 필요가 없었죠. 우리가 무장한 군인을 필요로 했던 건 다른 곳으로 보내는 배의 화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죠."
개러스의 입이 팽팽해졌다.
"이곳에서의 내 역할을 당신이 지극히 제한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걸 잘 알겠소. 하지만 이 섬을 보호하는 건 내 임무니까 당신도 내가 그런 문제들을 처리할 결정권은 줘야 하오."
클레어는 그를 의아하다는 듯이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혹시나 자기가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아닌가 염려됐다.
"디자이어를 지키는 데 윌리엄이나 댈런의 도움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그 문제라면, 누가 미래를 알 수 있겠소? 모든 사태에 대비해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하오."
"그건 그래요. 하지만……."
"자, 클레어, 합리적으로 생각합시다. 윌리엄에겐 운동이 필요하오. 그는 곧 그를 막무가내로 보호하려는 모친 때문에 숨이 막혀 죽거나, 아니면 돼지고기 파이꼴이 될 위험에 처해 있소."
클레어는 그가 옳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인정하긴 어려웠다. 그건 곧 현재의 전투에서 그녀의 패배를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윌리엄한테 신체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데는 나도 이견이 없어요."
그녀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더구나 그앤 남자가 지도해 주길 열망하고 있소. 그건 댈런도 마찬가지고."
이건 도가 지나쳤다.
"윌리엄이 최근 울리치 경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댈런은 현재 상태에 대단히 만족하며 살고 있는 걸요."
"너무 만족해서 탈이지."
개러스는 신중한 표정이었다.
"내가 보기엔 당신의 음유 시인은 당신 치맛자락에 매달려서 아주 작은 소리에도 경기를 일으키는 것 같소. 그의 전주인한테 호되게 당했기 때문이겠지. 그런 두려움과 싸워 이기려면 반드시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오."
클레어는 개러스에게 불만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모든 상황에 정확하게 접근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뭔가 다른 것,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관련되어 있음을 클레어는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이 장원의 명령권을 누가 갖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윌리엄과 댈런이 남자의 지도를 필요로 한다는 건 부인하지 않겠어요."
클레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신체의 균형을 되찾는데 운동이 지극히 유익하다는 점에도 동의해요. 하지만 그걸 얻기 위해서 그들한테 위험하고 격렬한 기사 훈련을 받게 할 필요는 없어요."
"울리치가 지도하는 한 둘 다 무사할거요."
"조애너가 불안해 할 걸요."
"그녀도 곧 상황에 적응할거요. 여기서 진짜 문제가 되는 건 그게 아니오, 그렇지 않소?"
"그래요."
클레어는 그를 똑바로 마주 보고 섰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게 있어요. 이 집의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명령은 내가 내려요."
개러스의 눈길은 그의 칼에 박힌 크리스털만큼이나 불가해졌다.
"클레어, 당신 혼자서 이 집과 장원을 오랫동안 책임져 왔다고 알고 있소."
"맞아요."
그녀는 서릿발 같은 도전적인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분명히 혼자서 짐을 지는 일에도 익숙해졌겠지."
"정확하게 봤군요."
"하지만 당신은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오."
"나한테 그 사실을 상기시켜 줄 필요는 없어요."
그녀는 날카롭게 반박했다.
"나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요."
개러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랑드리의 서스턴 경한테 장원을 지켜 줄 남편감을 구해 달라는 편지를 쓴 건 바로 당신이었소."
"그게 어째서요? 그 문제라면 나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내가 말하려는 건 바로 당신이 원하던 걸 얻었다는 거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아니, 그건 사실이오. 당신은 이미 내가 당신의 그 남편감 요구 사항의 모든 면을 충족시키는 사람이란 걸 확실히 했소."
클레어는 자기 혀가 진작에 닳아 없어졌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아니, 분명 그런 뜻이었소.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오. 우리들 중 누구도 원하는 걸 다 얻는 건 아니니까."
개러스는 손을 칼 손잡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우린 행운이 우리들 앞으로 날려 주는 기회를 가능한 한 붙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오."
나는 그가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상적인 신붓감은 아니었나 보다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난 여기서 한 가지 더 명확히 해 두고 싶군요."
"나 역시 마찬가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난 당신이 원했던 상대는 아닐지도 모르오. 허나, 당신이 손에 넣은 남편은 나뿐이오. 방해받지 않고 내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댈런이나 윌리엄을 훈련시키는 게 이 장원을 지키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클레어."
그때 조애너가 그녀를 불렀다.
클레어는 작업실 쪽을 쳐다보았다. 조애너는 서둘러 다가오고 있었다.
"저들을 멈추게 해줘요."
조애너는 다급하게 말했다.
"윌리엄이 아직도 저 위험한 칼을 갖고 놀고 있어요."
"내가 해결하겠소."
개러스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내 친구예요."
클레어가 반발했다.
"내가 처리하겠어요."
"당신의 남편이자 이 장원의 주인으로서, 난 당신이 이 문제에 있어서 내 의견을 존중해 주기를 바라오."
개러스의 눈빛이 갑자기 몹시 차갑고 단호하게 변했다.
"경고하겠는데,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조애너 앞에서 내 말에 반박하지 마시오."
"성 허미언의 머리카락에 맹세코, 이건 너무 지나치군요."
"만약 당신과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 하나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곧 우리의 백성들에게 혼란과 불만을 야기시킬거요. 당신은 그걸 원하오?"
우리의 백성.
이 말에 클레어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디자이어의 주민들이 이제는 개러스에게도 연결되었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는 이 장원의 영주와 그의 부인이 이견을 보여선 안 된다는 그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또 나를 교묘한 올가미에 옭아 넣었군요."
조애너가 그들이 있는 곳에 이르기 전에 그녀는 재빨리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조심해요. 언젠가는 복수할 거예요."
"복수라면 벌써 했소. 그것도 가장 무서운 복수였지. 난 아직 초야도 못 치른 남편이니까."
그녀는 그에게 재빨리 비난의 시선을 던졌다. 조애너가 급히 그들 앞으로 와 걸음을 멈췄다.
"클레어, 어째서 울리치 경한테 훈련을 멈추라고 지시하지 않은 거야?"
조애너가 물었다.
"윌리엄이 다칠 수도 있단 말야. 저애가 저 커다란 나무칼을 되는 대로 휘두르는 모양을 좀 봐."
클레어는 냉혹하게 마음을 먹었다.
"개러스 경은 저런 훈련이 윌리엄과 댈런에게 모두 이롭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 남편과 이 문제를 상의한 결과 남편이 옳다고 결정했어요. 난 그의 결정에 동의해요."
"그의 결정에 동의한다고?"
조애너의 눈이 충격으로 휘둥그레졌다.
클레어는 감히 개러스를 보지 않았다. 만약 그가 이 순간 승리감에 가득 찬 웃음을 짓고 있다면 그녀로선 그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라 버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난 윌리엄과 댈런이 기사 수업을 받는 데 동의했어요."
클레어가 말했다.
"건강에 이로운 운동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그녀는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이런 걸 허락한 적이 없잖아."
조애너가 말했다.
"에드먼드가 살해된 후엔 평생 동안 두 번 다시는 과녁에 창이 꽂히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고 했었잖아."
클레어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는 정신이 좀 없었어요."
"오라버니가 죽었을 때 내 아내가 겪었을 슬픔이 아마도 운동의 좋은 점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했던 것 같소."
개러스는 편안하게 말했다.
조애너는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당시엔 분명히 너무 슬프고 예민해져서 마음이 약해진 경향은 있었지요.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전 클레어가 남자들한테 기사 훈련을 시키는 건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분명히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클레어는 개러스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때는 내 아내가 젊은 남자한테 신체 단련과 훈련이 얼마나 유익한 건지 모르고 있었던 것 같군요."
개러스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점들을 설명해 줬더니 아내도 윌리엄과 댈런이 훈련을 받는 걸 열렬히 환영했답니다."
"뭐가 좋단 말씀이에요?"
조애너는 그를 애원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윌리엄이 크게 다칠 수도 있어요."
"사과나무에 오르거나 층계에서 떨어져 다칠 순 있어도 훈련을 받다가 그럴 염려는 없어요."
개러스는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게 말했다.
"부인의 아들은 침대에 들어 있는 것보다도 울리치 경과 같이 있는 편이 더 안전할 겁니다."
"윌리엄은 무척이나 예민한 체질이에요."
조애너가 우겨댔다.
"저런 훈련과 운동을 하면 탈진해 버리고 말 거예요."
"적절히 조절된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면 윌리엄의 몸도 튼튼해지고 성격도 활발해질 겁니다."
개러스가 말했다.
"허약한 소년들이 정규적으로 격렬한 운동을 하고 나서 크게 건강이 개선된 경우를 많이 봐 왔습니다."
"그 말씀은 전적으로 믿을 수 없군요."
조애너는 다시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클레어는 나름대로 기운을 북돋아 주는 웃음일 거라고 생각되는 표정을 가까스로 지었다.
"남편과 울리치 경이 자신들이 하려는 일이 뭔지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 줄 수밖에 없어요. 이분들은 둘 다 그런 문제에선 경험이 풍부하시잖아요."
"그런 경험들은 무법자들을 쫓을 때나 필요한 거지 어린애들을 훈련시킬 때는 얘기가 달라요."
조애너는 절망적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개러스가 반박했다.
"나는 수년 동안 내 부대에서 일해 온 군인들을 훈련시켰죠. 울리치 역시 마찬가지고요. 우린 둘 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잘 알고 있어요."
조애너는 개러스와 클레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겉으로 명백히 드러나 보이던 그녀의 초조한
기색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완전히 만족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자기가 이제 한 마음이 된 부부를 대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이상스럽게도 그것이 그녀를 더 안심시켰다.
"좋아요. 윌리엄이 다치지 않는다는 것만 확실하다면 훈련해도 좋을 것 같군요."
"윌리엄의 훈련에 관한 자세한 부분들은 이따가 저녁 식사 때 울리치 경과 의논해 보는 게 어때요?"
클레어는 조애너에게 제의했다.
"그라면 당신 질문에 모두 잘 답해 주리라 믿어요."
조애너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야겠어. 울리치 경은 아주 친절하고 예의바른 기사야. 또 학식도 풍부하시고."
"그는 윌리엄과 댈런에게 아주 훌륭한 모범이 될 겁니다."
개러스의 눈이 빛났다.
"당신이 말한 것 같은 그런 전형적인 둔한 머리에다 매너도 나쁘고 성질 고약한 기사는 아니지요."
클레어는 위쪽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성 허미언에게 힘을 달라고 빌었다.
"맞아요, 어쩌면 울리치 경은 윌리엄한테 정말 좋은 영향을 줄지도 몰라요."
조애너는 개러스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부디 결례를 용서해 주세요. 전 돌아가서 훈련하는 걸 지켜봐야겠어요."
"멀리서 보도록 해요."
개러스가 충고했다.
"안 그러면 부인 아들의 신경을 산만하게 할지도 모르니까요."
"알겠습니다."
클레어는 조애너가 홀의 계단으로 걸어가 훈련을 구경하려고 모여든 서너 명의 다른 사람들과 섞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잘 했소, 부인."
개러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한텐 쉽지 않았을 거요. 그래도 사실 이번에야말로 조애너가 자식을 싸고 도는 걸 그만두게 된 거요. 누구도 자기 자식을 영원히 보호해 줄 순 없소."
클레어는 밝게 내리비치는 햇살을 마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개러스에게 얼굴을 돌렸다.
"이번에는 당신 뜻대로 했으니 분명 만족하실 거라고 믿어요. 다음 번에는 내 관할권 내의 어떤 일에 영향을 미칠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나한테 먼저 상의하도록 하세요. 잘 알겠죠?"
"당신과 나는 이제 이 장원의 백성들한테 영향을 주는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할 입장이오, 클레어."
"성급히 결정을 내리기 전에 나와 먼저 상의해야 해요."
개러스는 다시 그녀의 팔을 잡고 건조 창고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얘기는 둘만 있을 때 끝내는 게 좋을 것 같군. 오늘 난 이미 충분히 추측과 소문거리의 표적이 됐으니까."
클레어의 시선이 그의 팔에 감긴 리넨 붕대로 갔다.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건 나도 알아요. 어떻게 사과의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한번 해 봐요."
"뭐라고요?"
"내 개인적 희생이 당신한테 얼마나 미안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 말해 보라고 했소."
개러스는 그녀를 문 안으로 밀어 넣어 향기롭고 어두운 창고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지금 날 놀리는 건가요?"
그녀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다그쳤다.
"천만에요, 부인."
개러스는 창고 안쪽에서 걸음을 멈추고 건조용 선반에 줄을 지어 늘어져 있는 꽃다발들을 살펴보았다.
"여기가 바로 당신이 디자이어의 부라고 소개한 곳이군."
클레어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요, 이건 내 작업실 중 하나예요."
"나머지 시설도 보고 싶은데."
개러스는 긴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마른 꽃과 장미 꽃잎, 오크 이끼로 가득 채워진 단지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내용물을 한 움큼 집어 내어 그것을 코에 갖다 댔다.
"달콤하군. 풍요로운 향기야. 분명히 여자 냄새야. 수익성 많은 제조 방법 가운데 하나요?"
"네, 이건 봄시장에서 잘 팔릴 거예요."
개러스가 다음 항아리로 이동하는 동안 클레어는 엉덩이에 손을 짚고 서서 발바닥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이게 마음에 드는군."
그는 또 한 번 건조시킨 향초들을 한 움큼 집어 코에 갖다 대며 말했다.
"깨끗하고 신선한 느낌이오. 여기선 바다 냄새가 나는군."
클레어는 앞가슴 밑으로 팔짱을 꼈다.
"이건 런던의 부자들이 아주 좋아하는 민트와 향료를 섞어 만든 거예요."
개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향초를 다시 항아리 속으로 떨어뜨렸다. 그는 일렬로 늘어선 테이블을 따라 어슬렁거리며 걸어가 여러 가지의 말린 꽃들이 준비되어 있는 곳에까지 이르렀다.
"이건 뭐지?"
"제비꽃, 장미, 흰붓꽃 뿌리예요. 난 이것들을 밀랍과 섞어 아주 향기로운 향수를 만들어요. 일년에 두 번씩 그걸 남쪽으로 선적하는데, 인기가 아주 좋은 편이죠."
개러스는 멀찍이 떨어진 창고의 문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옆방의 작업실은 뭐 하는 곳이오?"
"거긴 내가 향기로운 기름을 만드는 곳이에요. 그곳에서 난 말린 향초들 대신 신선한 꽃과 풀들을 가지고 작업하죠. 당신 지금 내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하는 건가요?"
"당신 일에 관한 나의 관심이 비상하다는 걸 눈치 챘소?"
개러스는 옆방으로 통하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현 상황으론 그래요."
개러스는 문을 열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호기심이 많다고 날 탓하진 못할거요. 이제 목 따는 사냥일은 그만 뒀으니 내 수입은 당신 손에 있는 거요, 부인."
그는 방 바로 안쪽에서 멈춰 섰다.
"지상의 모든 꽃이란 꽃은 다 여기 모여 있는 것 같은 냄새가 나는군."
클레어는 인상을 찌푸리며 서둘러 그를 따라 들어갔다.
"미리 말했듯이, 작업실에는 신선한 꽃잎과 다른 원료들이 가득 들어 있어요."
개러스는 커다란 뚜껑이 덮인 항아리 쪽으로 걸어가 뚜껑을 들어 올렸다. 그는 안의 내용물을 깊게 한 움큼 떠냈다.
"이런 맙소사, 이건 남자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고도 남겠군."
"장미 기름이에요."
클레어가 설명했다.
"그리고 이건?"
개러스는 또다른 뚜껑을 들어 올렸다.
"신선한 라벤더, 정향, 그리고 수없이 많은 다른 원료들을 조합해 만든 향유예요. 개러스, 내 작품에 대한 경의 관심을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거라면 부디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우린 서로 당신이 한 가지 토론을 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언쟁이오."
개러스는 라벤더와 정향의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난 언쟁을 피하려고 하는 거요."
그는 항아리의 뚜껑을 도로 덮고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세 개의 커다란 단지들을 조사했다.
"이 항아리들 속에는 뭐가 들었소?"
"꿀, 밀랍, 식초요."
클레어는 고도의 의지력으로 달아오르려는 분노를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난 여러 가지 꽃과 풀들을 이것들과 섞어 서로 다른 로션과 크림을 만들어요. 개러스, 나도 당신과 다투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훌륭하군."
개러스는 꿀단지의 뚜껑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난 언쟁은 좋아하지 않소."
그런 다음 그는 나무와 철로 만들어진 크고 무거운 압축기를 만졌다.
"이 기계 장치는 뭐라고 하는 거요?"
"육계피와 장미에서 기름을 추출해 내는 데 이걸 써요. 이건 아랍식 디자인이에요."
"이걸 어디서 구했소?"
"아버지의 유품이에요. 그분은 이걸 스페인으로의 마지막 여행 때 발견했어요.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나한테 보내신 책들과 다른 물건들 더미 속에 들어 있더군요."
개러스는 철로 된 나사 하나를 시험하듯 돌려 보았다. 그의 표정은 뭔가에 몰두한 표정이었다.
"멋지군."
"불행하게도 지금은 고장났어요. 나로선 고칠 능력이 없고요."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오. 기계 장치에 관한 설명이 있는 번역판 아랍 문서를 꽤 많이 공부한 적이 있으니까."
"정말이에요?"
클레어는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다. 이건 그녀가 지금껏 보지 못한 개러스의 새로운 면모였다.
"그렇소."
개러스는 압축기의 경첩 하나를 딸랑딸랑 울리게 했다.
"우리 아버지의 작업실들을 둘러봐도 좋아요. 그 방들은 앞마당 건너편에 있어요. 아버지가 디자이어를 떠나신 1년 전부터 줄곧 잠가 두었죠. 안에는 아버지가 여러 여행에서 발견해 수집하신 갖가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어요."
"당신 아버지의 작업실을 꼭 보고 싶군."
"좋아요. 그럼 열쇠를 드릴게요. 또 아버지가 쓰신 책들도 읽으셔도 좋아요. 그것들은 내 서재에 보관해 뒀어요."
"책도 쓰셨다구?"
개러스는 감명 받은 눈치였다.
"그건 아랍책을 번역한 제조법과 논문들이에요. 불행히도 아버지는 능숙한 번역자는 아니었죠. 읽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을 거예요."
"꼭 읽어 봐야겠군."
클레어는 갑자기 격노하여 얼굴을 찌푸렸다. 개러스가 성공적으로 그녀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우리의 협력 관계에 관한 토론을 해야겠어요."
"언제 싸우고 언제 칼집에 칼을 넣어야 하는지 아는 걸로 생계를 이어 온 남자로서 말하건대, 당신 역시 그런 논쟁은 원하지 않을 거요. 어쨌든 지금은 안 되오."
"어째서요?"
그녀가 도전하듯 물었다.
"때로는 문제를 직접 대면하지 않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이오."
"그런 신중함이 날 놀라게 하는군요. 난 당신이 노골적인 전투를 더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렇지 않소. 내 인생에서 난 줄곧 많은 전쟁을 치러 왔으니까."
"미안한 얘기지만 나로선 그 말이 심히 의심스럽게만 생각되는군요."
"진심이오."
개러스는 압축기에서 눈을 들었다.
"당신과 싸우느니 차라리 당신의 향수에서 나오는 수증기를 실컷 들이마시겠소."
"이건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에요. 우린 서로간에 이 문제를 매듭지어야 해요. 그리고 지금 그렇게 할 거고요."
"그렇게 합시다. 이게 당신이 원하는 전쟁이라면 치를 건 치러야 하겠지."
클레어는 초조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개러스, 디자이어에서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문제를 분명히 해 두도록 해요."
"좋소."
개러스는 다음 항아리로 천천히 걸어가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우선 당신이 첫 번째로 분명히 해 둘 일은 내가 당신한테 고용된 게 아니란 점이오. 당신은 나의 노동력이나 무력을 고용하지 않았소. 난 당신 남편이오."
"절대로 그 사실을 잊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난 적절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당신은 문제를 굉장히 어렵게 만들고 있어요."
"당신이 나를 고용된 경호원보다 나을 게 없는 존재로 다루는 이상, 당신 또한 상황을 어렵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요."
"성 허미언의 허리띠에 걸고 말하건대, 난 당신을 고용된 경호원처럼 다루고 있지 않아요."
클레어의 분노가 폭발했다.
"난 당신한테 남편한테 걸맞는 존경심을 보일려고 했단 말예요. 내가 보기엔 매사에 내가 너무 양보만 해준 것 같아요."
"당신은 이 상황을 그렇게 보고 있소? 억지로 양보하게끔 강요받았다고 믿고 있단 말이오?"
"그래요, 나한텐 바로 그렇게 보여요."
개러스는 테이블 하나에 몸을 기대고 가슴을 가로질러 팔짱을 꼈다.
"나는 어떻소? 나 역시 비슷한 타협을 하지 않았던가? 남편이 되는 일에 적응하기가 나한테는 간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거요?"
"당신이 겪었을 곤란한 부분들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어요."
"어디 한 번 일일이 열거해 볼까?"
개러스는 손을 들고 하나씩 손가락으로 꼽았다.
"당신은 내가 도착하던 순간부터 난 당신이 원하는 타입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소."
"경은 뜻밖의 인물이었어요."
클레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개러스는 그 말을 무시했다. 그는 두 번째 손가락을 꼽았다.
"당신은 적절한 아내의 의무를 다하지 않겠노라고 집안사람 전체가 보는 앞에서 선언해 버렸소."
"침대를 같이 쓰기로 동의했잖아요."
"또 우리의 신혼 첫날밤 결혼을 완성하는 걸 거부했소."
클레어는 분개했다.
"오늘 아침 난 그 결정을 후회했다고 말했어요. 어젯밤 아내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건 내 잘못이었어요."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밤은 그럴 준비가 돼 있어요."
그는 그녀에게 비스듬히 조롱 섞인 시선을 던졌다.
"의무라고? 침실에서 자기 책임을 완수하도록 억지로 강요받는다고 느끼는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데 대해 내가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못하는 걸 양해해 주리라 믿소."
클레어는 참을 만큼 참았다. 그녀는 똑바로 걸어가 개러스의 정면에 마주 섰다.
"그게 바로 오늘 아침 내가 기회를 줬을 때 우리의 결혼을 완성시키길 거부한 이유인가요? 그 일을 할 열의를 잃으셨다고요?"
개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날 비난하는 거요?"
클레어는 분노로 자제력을 잃었다.
"당신이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열의를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 아닌가요?"
"어떤 문제 말이오?"
"남자는 여자와는 달리 그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열의를 갖지 않는 한 남편의 의무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소리를 꽤 믿을 만한 사람한테서 들었어요."
"누가 당신한테 그런 소릴 했소?"
"마가렛 수녀 원장님이요."
클레어는 의기양양하게 되받아쳤다.
"아."
개러스는 현자인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의 말씀에 이의가 있다는 건가요?"
클레어가 다그치듯 물었다.
개러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니오, 그분의 말씀에 이의는 없소."
"당신이 열의를 되찾지 못하게 되면 우린 어떡해야 하죠? 어쩌면 결혼을 무효화해야 될지도 몰라요."
개러스는 위험스런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게 바로 당신의 계획이었군. 우리의 결합이 시작되기도 전에 끝내 버릴 생각이었어."
클레어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 속에서 지옥의 불길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 자신도 분노의 화염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제멋대로 뛰노는 혓바닥을 통제할 수 없었다.
"당신이 남편의 의무에 걸맞은 충분한 열의를 되찾지 못한다면 결혼 무효가 사실이 될 수도 있어요."
"그 친절한 수녀님은 당신한테 남자의 열의에 대해 중요한 사실 하나를 빠뜨리고 말해 주지 않았군, 부인."
"그게 뭐죠?"
"때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일들이 그걸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거요."
개러스는 천천히 소리 없이 웃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경우엔 훌륭한 언쟁이 그 역할을 하기도 하지."
클레어는 그의 눈 속에서 빛나는 어떤 경고를 읽었지만 때가 너무 늦었다. 그녀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지만 그다지 민첩하지는 못했다. 개러스는 그녀를 두 팔로 들어 올려 작업장을 단 몇 걸음에 성큼 가로 질러가서 신선한 꽃과 풀들이 가득 찬 커다란 상자 안에 떨어뜨렸다. 클레어는 향긋한 향초들 속으로 푹 파묻히면서 비명을 질렀다. 장미 꽃잎과 라벤더 잎사귀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랐으며 신선한 꽃들의 강렬한 향기가 그녀를 삼켰다. 그녀가 다시 숨을 가다듬기도 전에 개러스가 상자 안으로 뛰어들었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꽃잎의 무더기 속으로 그녀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짓누르는 동시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12
클레어는 자신의 몸 위로 꼭 밀착된 개러스의 육체적 감촉에 압도되었다. 그의 두 손이 거칠게 그녀의 머리카락과 엉켰으며 입술은 강렬하고 뜨겁게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의 체취가 지금 거의 파묻히다시피 누워 있는 향초 향기보다도 훨씬 더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좀 전에 그녀를 사로잡았던 분노와 모욕, 언쟁에 관한 것은 모두 다 잊혀졌다. 어젯밤 개러스가 그녀를 만졌던 기억이 파도처럼 몰려와 새로운 흥분 아래로 흡수되어 버렸다. 전율하는 흥분이 그녀를 휩쓸 듯 덮쳐 와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치워 버렸다. 그녀는 그 기막힌 흥분을 다시 한번 알고 싶었다. 개러스는 그녀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었다.
"축하하오, 부인. 이제껏 누구도 당신만큼 날 도발시킨 사람은 없었소. 이제 당신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요."
클레어는 그의 눈을 찾았다.
"정말로 나한테 화난 거예요?"
"지금 이 순간 내 기분이 어떤지 나도 잘 모르겠소."
개러스의 목소리는 거칠고 어두웠으며 위험했다.
"단지 우리가 이 일을 끝냈을 즈음엔 더 이상 결혼 무효란 소리는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만 알 뿐이오."
그녀는 몸을 떨었다.
"난 결혼 무효를 요구한 적은 없어요. 그저 당신이 결혼 침대에서 당신의 의무를 다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암시를 하니까 그 얘기를 꺼낸 것뿐이죠."
"이제 곧 내가 나의 의무를 다할 의도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거요."
개러스는 머리를 숙이고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가졌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속을 점령했다.
그의 깊은 키스에 반응하면서 클레어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 속에서 꽉 쥐어졌다. 그는 그녀를 위협하려고 하고 있다. 심지어 약간 겁을 주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는 그의 손길을 갈구했고 그 안의 분명한 열정이 그녀 자신의 요란한 감정에 불을 지폈다. 클레어는 그의 다리가 자신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무릎을 위로 끌어당기며 자기가 만지는 대로 그녀의 몸이 열리게끔 유도했다. 동시에 그는 그녀의 겉옷과 그 아래의 속옷 자락을 한꺼번에 움켜쥐고 허리께까지 잡아당겼다. 클레어는 몸을 떨며 그의 머리카락을 거머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탐색하는 듯한 그의 손가락에 전율했다.
"당신은 비 온 뒤의 장미보다 더 촉촉하오."
개러스는 감탄을 하며 어젯밤처럼 그녀의 몸을 더듬어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며 못 견뎌 할 때까지 어루만졌다. 클레어는 그에게 꼭 달라붙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뭔가를 요구하는 듯한 작은 비명 소리를 내며 갈라져 나왔다. 그녀는 그의 몸을 두 다리로 감싸듯 안고 더욱 그를 갈망했다.
"우린 도대체 왜 어젯밤을 고스란히 낭비했던 거지?"
개러스가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팽팽하게 들렸다.
"난 바보였소."
그는 손가락 하나를 살며시 그녀 안으로 집어넣었다.
클레어는 갑작스런 희열에 신음을 터뜨렸다. 그를 감싼 그녀의 몸이 꽉 조여 들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렸다.
"그건 내 잘못이었어요. 좀 혼란스러웠죠. 난 내가 더 기다리길 원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혼란스러웠고 난 바보였지. 완벽한 한 쌍이로군."
개러스는 그녀의 목에서 어깨까지 연이어 키스를 쏟아 부었다.
그는 두 번째 손가락까지 넣어 그녀를 탐색했다. 클레어는 숨을 헐떡거렸다.
"오."
"팽팽하고 달콤하며 열리지 않은 꽃봉오리 같아."
"그게 당신의 열의를 식게 만드나요?"
그녀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는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낮추어 그녀의 가슴 곡선을 따라 키스해 갔다.
"아니, 부인. 전혀 그렇지 않소."
그녀는 안심하며 미소를 지었다.
"기쁘군요."
"천국과 지옥이 함께 덮친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내 열의를 식힐 순 없을 거요."
클레어는 자신을 긴장시키고 부드럽게 달아오르게 만들며 촉촉하게 만드는 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욕망으로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어젯밤 처음 경험했던 그 마술 같은 긴장감이 내부에서 다시 꿈틀거리고 있었다. 기대감이 그녀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서둘러요."
그녀는 그의 귀를 깨물었다.
"제발 서둘러 줘요."
개러스는 머리를 들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가끔 디자이어를 감싸곤 하던 안개처럼 신비로웠다.
"난 독재자와 결혼했군."
"날 용서해 줘야 해요. 난 다스리는 일에 익숙해 있다고 말했잖아요."
개러스는 옷을 느슨히 하고 꼿꼿이 선 자신의 욕망을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 클레어는 그가 자신의 두 다리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동안 그의 남성을 슬쩍 보았다. 현기증이 날 듯한 흥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잠시 반신반의하는 심정이 되었다.
"이 이상 진행하기 전에 얼마간 당신의 열정을 식혀야 옳지 않을까 싶네요."
"내 열정을 식히는 일에 관한 거라면 이미 너무 늦었소."
"당신을 불쾌하게 만들 생각은 없어요. 당신이 적당한 크기가 아닌 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녀는 그를 꼭 끌어안고 목에 키스했다.
"우린 분명히 어떻게든 해 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꼭 그럴거요."
"난 지금 열렬히 원하고 있어요, 개러스."
"알고 있소."
그는 자신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고 자신을 그녀에게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가 손가락을 밀어 넣었을 때 경험했던 것과 유사한 흥분을 기대했던 클레어는 그 뭉툭하고 딱딱한 느낌에 깜짝 놀랐다. 그는 더욱 세게 눌러댔고 그녀는 혼이 나갈 지경이 되었다.
"개러스."
"날 믿어요."
"기다려요, 우리 이 문제를 더 상의해 봐야겠어요."
클레어는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우릴 여기까지 몰고 온 건 당신이 아까 이 얘길 꺼냈기 때문이오."
"그래요, 하지만……."
"날 믿어요, 클레어."
그가 속삭였다.
그녀는 마치 지옥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는 것처럼 몸에 힘을 주고 그에게 꼭 달라붙었다.
"준비됐어요."
그녀는 용감하게 말했다.
"그렇게 나쁘진 않을 거요."
그는 더욱 깊게 들어갔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솟아났다.
"적어도, 그렇게 어려울 거라곤 생각지 않소."
클레어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다 끝나거든 말해 줘요."
그는 기묘하게 반쯤 질식할 듯한 탄성을 질렀다.
"알았소, 잊지 않고 그리 하리다."
클레어는 그가 마치 위험한 무술 대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긴장하여 숨을 들이마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그는 온몸을 그녀에게 밀어 넣으며 단 한 번의 강렬한 움직임으로 칼집에 꽂으려는 칼처럼 움직였다. 그의 침입으로 인한 충격이 클레어의 목소리와 호흡을 앗아 가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개러스의 넓은 어깨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기대하고 있던 전율하는 즐거움을 도둑맞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조애너 말이 옳았어요. 결혼의 이 부분은 정말이지 굉장히 불쾌하군요."
"잠깐 몸을 그대로 둬요."
개러스도 그녀만큼이나 동요하는 눈치였다.
"가만 있어요. 꿈틀대지 말고."
클레어는 눈을 뜨고 그에게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어젯밤과 같은 느낌이 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거요."
개러스는 분명히 자신을 억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성 허미언의 작은 발가락에 맹세코, 당신은 날 속였어요, 헬하운드."
"아니, 단지 내가 처녀와는 경험이 없기 때문이오."
"당신이 너무 크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투덜거렸다.
"처음 본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개러스는 그녀의 코와 뺨에 부드럽게 달래는 듯한 키스를 쏟아 부었다.
"용서해 줘요, 클레어.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이 사과의 말이 그녀의 기분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렸다.
"사실, 난 그렇게 아프진 않았어요. 적어도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아요. 하지만 일이 다 끝난 게 아주 기쁘군요."
"클레어……."
"이제 그만둬도 좋아요. 확실히 이 결혼은 적절하게 완성된 것 같군요. 더 이상 내가 결혼을 무효화시킬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마지막으로 말하겠소, 움직이지 말아요."
개러스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고 분명하게 발음했다.
"난 그저 좀 더 편안한 자세를 찾으려고 한 것뿐이에요."
"당신이 편안하게 해주리다."
"비켜 주실 거예요?"
"아직은 안 되오."
그녀는 실망했다.
"그건 아직도 당신의 의무가 끝나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맞소."
그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서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젠 어째서 남자들이 매일 밤마다 이런 종류의 일을 하는 데 그렇게 힘들어하는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클레어는 중얼거렸다.
"남편이 애쓰는 동안 아내가 줄기차게 종알대지만 않는다면 한결 일이 쉬워지지."
"오."
클레어는 분한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당신이 집중하는 걸 방해할 의도는 아니었어요. 난 단지……."
"제발, 그만하면 충분하오."
개러스는 그녀의 입을 자신의 입으로 막았다. 그와 동시에 다시 그녀에게 자신을 밀어 넣으며 그녀를 한계치까지 채워 버렸다. 클레어는 신음했지만 그것은 고통의 신음은 아니었다. 개러스는 거의 완전히 뒤로 물러났다 다시, 또 다시 거듭해서 반복했다. 매번 극도의 통제 하에 모든 것이 이행되었다. 개러스의 딱딱한 몸과 팽팽한 근육들이 모든 사실을 다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매달린 고삐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 마리 군마였다. 모든 속박된 힘으로 언제든 기꺼이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클레어는 호흡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몸속에서 서서히 열기가 몰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불쾌하지 않았다. 개러스의 등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튜닉을 적셔 클레어의 손끝에 느껴졌다. 그것은 열정의 소산이었다. 그의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지는 기색이 없었다. 갑자기 그가 그녀의 다리를 자신의 어깨 위로 들어 올리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새로운 자세에 대해 그녀가 뭐라고 항의하기도 전에 그는 손을 그들의 몸 아랫부분으로 내려서 그녀를 어루만졌다. 어떤 경고도 없이 온몸을 휘감는 긴장감이 다시 한번 그녀를 사로잡았다.
"개러스."
"날 믿으라고 말했잖소."
그는 엄지와 검지로 그녀의 부풀어 오른 작은 욕망의 정수를 잡고 가볍게 잡아당겼다. 클레어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이 소리는 개러스의 입술에 의해 잦아들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몸을 움켜쥐고 자신의 온몸을 휘젓는 경이로운 쾌락의 파문을 선사했다. 그녀는 개러스가 내는 짧은 만족의 외침 소리를 희미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그들 두 사람이 향기로운 꽃잎의 바다 속으로 더욱 깊이 가라앉음과 동시에 그녀 자신이 내는 숨막힐 듯한 헐떡거림과 하나로 합쳐졌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개러스는 눈을 떴다. 그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지금까지 이렇게 상쾌한 기분이 든 적은 없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코 위에 떨어져 있는 장미 꽃잎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입김으로 훅 하고 불어 꽃잎이 공중에서 팔랑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실제로 향기로운 꽃잎들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는 미소 지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꽃잎들한테서 풍기는, 머리가 어찔할 정도의 향기는 그에게 극렬한 만족감을 선사한 또 다른 향기와 엉키었다. 이제 클레어는 말 그대로 그의 아내가 되었다. 결혼 취소 같은 말은 더 이상 거론될 이유가 없다. 산더미 같은 꽃잎들이 들먹거리면서 움직였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클레어가 일어나 앉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머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꽃잎들과 흐트러진 옷가지로 엉망이었다. 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수줍은 듯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말해도 좋소. 당신을 영원히 벙어리로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개러스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소매에서 노란 꽃잎 하나를 떼어 냈다. 클레어는 소리 없이 빙긋 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도 마찬가지요."
개러스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감싸 쥐고는 아래로 끌어당겨 잠시 가벼운 키스를 했다. 클레어는 더욱 몸을 밀착시켜 왔다. 그녀의 머리카락, 신선한 내음이 그의 얼굴 위를 맴돌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가슴 위에서 활짝 펼쳐진 채 천천히 그의 몸을 훑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개러스는 자신의 몸이 가볍게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당신의 열정이 다시 깨어난 것 같군요, 개러스."
"그 말이 맞는 것 같소."
개러스는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그는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갑자기 작업실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클레어는 움찔 놀랐다. 그녀는 몸을 곧게 펴고는 재빨리 자세를 추슬렀다.
"영주님, 거기 계십니까?"
울리치가 큰 소리로 불렀다.
"대장장이가 왔습니다."
"이런 젠장."
개러스는 마지못한 듯이 일어나 앉았다.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군. 안 그러면 저녁때쯤엔 우리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거요."
클레어는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로 그들이 우리가 한 일을 알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렇소."
그녀는 볼을 사랑스러운 핑크빛으로 물들였다.
"세상에, 그럼 그게 최근 사람들이 수군대던 바로 그 얘긴가요?"
"우리 결혼식의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여기 장원의 백성들한테는 큰 관심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거요."
"우리 백성들이 다른 얘깃거리를 찾아 줬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이렇게 재미있는 흥밋거리를 제공하는 한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요."
개러스는 꽃상자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는 클레어가 디자이어의 주민들을 우리 백성들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이건 좋은 징조였다.
"영주님?"
울리치가 다시 외쳤다.
"거기 계십니까?"
"여기 있네."
개러스도 소리쳤다.
"곧 나가지."
그는 몸을 돌려 클레어가 꽃더미 속에서 빠져 나오는 걸 도왔다.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는 순간 황홀감에 도취되어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꽃잎을 몸에서 떨어뜨리는 그녀는 마치 숲속 나라 침실의 마술에서 막 깨어난 존재처럼 보였다. 순간 그는 그녀의 속치마에 붉고 작은 얼룩이 묻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손을 뻗어 그것을 만졌다. 그의 입술이 소리 없는 웃음으로 팽팽해졌다.
"내가 많이 아프게 했소?"
"아니에요."
클레어는 치맛자락에 매달린 꽃잎들을 쓸어 내었다.
"그만 가 보세요. 할 일이 많잖아요. 난 옷을 좀 정리해야겠어요."
개러스는 그녀의 빛나는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것이다. 다른 어떤 남자도 아닌, 심지어 그녀에겐 기사의 표본 같은 존재였던 레이먼드 드 콜빌도 아닌 바로 그의 소유가 된 것이다. 클레어가 드 콜빌을 사랑했을 수는 있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몸을 허락하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 윅크미어의 헬하운드를 위해 몸을 지켜 온 것이다. 내 것을 잘 지키는 방법은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개러스는 치밀어 오르는 강렬한 결심과 함께 이렇게 생각했다. ‘난 당신, 디자이어의 레이디를 지킬 거요.’
"곧 그를 잊게 될 거요, 클레어."
그는 소리 내어 말했다.
그녀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누굴요?"
울리치가 빠르게 연달아 문을 세 번 쾅쾅 두드렸다.
"대장장이를 돌려보내고 내일 다시 오라고 할까요?"
"아니, 지금 나가고 있네."
개러스는 꽃잎을 뒤집어 쓴 클레어의 모습으로부터 몸을 돌렸다. 그는 문으로 걸어가 열고는 밝은 햇빛 아래로 걸어 나갔다.
"자, 울리치? 우리의 대장장이는 어디 있나?"
개러스는 아무도 클레어를 보지 못하도록 문을 꼭 닫았다.
"마구간에 있습니다."
울리치의 눈이 즐겁다는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안에서 꽤나 오래 계시더군요. 영주님이 향수의 비밀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개러스는 마당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난 언제나 뭘 배우는 일에 관심이 많지."
울리치는 몇 걸음 그에게 뒤쳐져서 걸었다.
"맞습니다. 항상 지극히 상세한 부분까지 깊게 파고드는 습성이 계셨죠."
"난 이 장원의 영주로서 큰 책임이 있어."
"물론입니다."
울리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보만이 자신의 주 수입원의 작업 과정에 무관심하지."
"아무도 당신을 바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울리치는 간결하게 대꾸했다.
"사생아, 헬하운드, 악마의 자식, 지옥의 거울을 휘두르는 자라고 부른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바보라고 부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이 마당을 가로질러 가자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개러스는 몇 명의 구경꾼들이 성급히 고개를 딴 데로 돌리는 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이 웃음을 참고 있다는 깊은 의심이 들었다. 그 의심은 대장장이 존이 입을 크게 벌리고 놀란 표정으로 그를 멍하니 쳐다보는 걸 보고는 한층 무게가 더해졌다.
"뭐가 잘못됐나, 대장장이?"
개러스는 예의를 갖추었지만 분명 협박하는 듯한 어투를 담고 물었다. 그는 그 남자가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리려는 참이었다는 분명한 인상을 받았다.
"아닙니다."
존은 입을 다물고 더러운 소매로 입을 감췄다.
"오늘은 햇빛이 너무 밝군요. 눈이 부실 정돕니다."
"햇빛이 아무리 밝기로서니 자네 대장간 불만 하겠나?"
"맞습니다요, 지당하신 말씀입죠. 영주님은 제가 분명히 밝은 데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존은 도움을 청하듯 울리치를 쳐다보았다.
울리치는 그저 씨익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까이 서 있던 군인들 중 하나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재빨리 그 장소를 떠나 마구간으로 달려 들어갔다. 개러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 문제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오랜 경험에서 그는 대장장이와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재미있어 하는 문제가 뭔지 알아내려고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좋아, 대장장이, 일을 시작하도록 하지."
개러스가 말했다.
"디자이어에 올 때 난 갑옷을 전혀 가져 오지 않았어. 필요하다면 시번에서 하나 사올 수도 있지만 자네가 투구와 장비를 만드는 데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네."
존은 칭찬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별 말씀을요."
"말발굽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 말고도 내 부하들의 장비를 수선하는 일도 잘 해낼 수 있겠나?"
존은 숨을 들이마시고 자랑스럽게 어깨를 꼿꼿이 폈다.
"물론입지요. 그런 일 정도야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아씨와 수녀님들을 위한 정교한 일들도 좀 해 본 경력이 있는 걸요. 열쇠랑 자물쇠를 만지는 일도 잘 할 수 있습니다."
"훌륭하군."
개러스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마구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야 할 일들을 보여 주겠네. 그 일이 끝나거든 내 재미있는 장치를 하나 보여 줌세."
"어떤 장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장미와 육계피 같은 꽃들에서 기름을 짜내는 아랍 기계지. 지금 당장은 고장이 나 있지만 내 생각엔 내가 고칠 수 있을 것 같네. 하지만 자네 도움이 필요할걸세."
이십 분 뒤에도 숨죽여 낄낄대는 웃음 소리는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개러스는 대장장이가 일을 하게 남겨 두고 울리치가 마구간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자네는,"
개러스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오후에 사람들이 모두 저렇게 즐거워하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겠지?"
울리치의 눈이 웃음으로 반짝거렸다.
"설명해 드릴 순 있지요. 하지만 들으시면 별로 재미있어 하시지 않을 텐데요."
"그건 알고 있어."
개러스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저렇게 다들 즐거워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 호기심이 커져만 가는군. 도대체 왜 이 근방에 있는 사람들이 웃음을 참지 못해 저러고 있는지 얘길 좀 해주게나."
울리치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건 영주님 머리카락과 튜닉에 달라붙어 있는 장미 꽃잎들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개러스는 끙 소리를 냈다.
"이런 젠장."
그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훑었다. 진홍색 꽃잎들이 마구간 바닥으로 펄럭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아가씨의 꽃잎 통 속에서 한바탕 뒹군 것 같은 모양을 하고 계십니다."
울리치가 말했다.
"우연히 그 안으로 넘어진 게 아니라면, 또 최근 사고를 자주 당하는 걸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대체 그 향수 공장 안에서 뭘 하고 계셨는지 의혹이 남지 않을 수가 없지요."
개러스는 엉덩이에 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낄낄거리는 군중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모두의 얼굴에서 즉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만족한 개러스는 머리를 돌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3일 뒤 아침, 클레어는 평상시와 같이 절벽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는 산책을 즐겼다. 그녀로선 놀랍고 은근히 기쁘게도 함께 산책을 하는 사람은 조애너가 아니라 개러스였다. 그는 그녀가 계단을 내려올 때 마당 저편에서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당신과 같이 가고 싶소."
개러스는 울리치에게 새로운 돌벽 작업에 착수할 석공들의 감독을 맡기고는 클레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두 개의 작은 내포가 있는 곳 위의 벼랑을 한 번 더 보고 싶소."
클레어는 갑자기 그날 하루가 온통 환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좋아요, 기꺼이 같이 가 드리죠. 난 베아트리체한테 향초 크림을 좀 갖다 주는 길이에요."
개러스와 함께 절벽을 따라 걷고 있노라니 소금기 풍기는 바다 공기가 그녀에게 갑자기 훨씬 역동적으로 느껴졌고 아침 냄새가 여느 때보다도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개러스가 디자이어에 발을 들여놓던 순간부터 낯설고 초조한 감정이 서로 뒤섞여 자기 안에서 싸워 오고 있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 감정들은 연금술사의 풀무만큼이나 강력했고 예측불허였다. 그러나 3일 전 개러스가 그녀의 꽃 저장통 안에서 결혼을 완성시켰을 때 이 격렬한 감정의 의미를 마침내 이해하게 되었다. 그날 개러스가 그녀를 장미 향기와 그 자신의 남성다운 체취에 흠뻑 빠뜨려 놓고 작업실에서 걸어 나가는 걸 지켜보면서 그녀는 갑자기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녀는 헬하운드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난 이틀 밤은 전에는 존재하리라고 꿈도 꿔 보지 못했던 미지의 나라로의 모험이었다. 개러스는 그녀를 육체적 감각의 절정에 오르게 하는 데 엄청난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의 팔 안에서 몸을 떨며 비명을 지르기 전까지 그는 절대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둘의 섹스로 그녀가 완전히 탈진할 때까지 그녀를 놓아 주려 하지 않았다.
"시번으로 보낼 향수와 단지들은 모두 다 준비해 놓았소?"
개러스는 절벽 꼭대기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물었다.
"네, 향수들은 장이 서는 첫날에 배편으로 시번으로 실어 날라질 거예요."
클레어는 손으로 눈가리개를 만들어 절벽 밑부분에서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바닷물을 살피는 개러스를 쳐다보았다.
"조애너와 내가 직접 가져 갈 거예요."
"내 부하들이 도와줄 거요."
개러스는 절벽 꼭대기를 따라 몇 걸음 걸어가다 다시 멈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원한다면 당신이 쓸 만한 텐트가 두 개 정도 있소."
"잘 됐군요."
클레어는 망설이며 물었다.
"뭘 보고 있는 거죠?"
"울리치 말로는 여기가 항구 말고는 해안에 작은 배를 댈 수 있는 장소라고 하더군. 그의 말이 옳았소."
"그게 염려가 되세요?"
클레어는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서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수가 빠져 나간 후여서 절벽 측면에 두 개의 작은 내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그렇소. 큰 군대가 여기에 배를 댈 순 없다는 건 분명하지만 말이오."
클레어는 얼굴을 찌푸렸다.
"디자이어에는 적대적인 무장 군인들이 상륙한 적이 없었어요."
"내 경험상으론 어떤 가능성에도 미리 대비해 두는 게 현명하오."
"경계심이 많은 분이군요."
"보호할 가치가 있는 존재가 있을 땐 그렇소."
그녀는 재빨리 그를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그가 말하는 게 자신일까, 아니면 새로운 영지일까 하고 궁금해 했다. 당연히 새로운 영지겠지. 결국 땅이야말로 무엇보다도 그를 디자이어로 오게 만든 매혹적인 미끼였으니까. 개러스는 그녀의 의혹에 찬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자기 앞에 펼쳐진 풍경을 격렬한 만족감과 동시에 신중한 표정으로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땅을 가진다는 생각에 익숙지 못한 상태임을 클레어는 깨달았다. 개러스는 마치 누군가 자신으로부터 디자이어를 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바보만이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헬하운드는 빈틈없는 사람이다. 자기 아내를 마을로 동반해 데리고 가는 지금도 그는 위험해 보였다. 칠흑처럼 검은 그의 머리카락은 바닷바람에 날려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그의 옆얼굴은 거친 절벽처럼 완고한 느낌을 주었다. 클레어는 자그마하게 한숨을 쉬었다. 개러스는 물론 디자이어의 보호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가 그녀 또한 보호하려 한다는 것을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건 그녀가 그의 보호 대상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재 사랑에 빠져 있지만, 그렇다고 개러스도 똑같기를 감히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어쨌든 지금은 아니다. 섹스에 관한 그의 지식은 그가 예전에 정열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음을 말해 주었다. 지난 3일 동안 클레어는 그가 육체적 욕망의 강렬한 힘을 제어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명령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이라고 클레어는 자신에게 상기시켰다. 침대에서조차 명령하는 건 그에게 아주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녀 자신은 아직도 그 방면에선 아주 신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빨리 배우는 학생이었다. 클레어는 비교적 안전한 화제를 찾았다.
"윌리엄과 댈런은 새로운 신체 단련 훈련에 아주 잘 적응해 가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렇소, 남자 아이들은 적절히 가르쳐 주기만 하면 보통 그렇게 되오. 울리치는 댈런이 아직도 헤매곤 있지만 그래도 연습 시간엔 제때 맞춰 나타난다고 하더군. 적어도 그 음유 시인은 바람난 부인을 둔 남편들에 관한 발라드를 더 이상 불러대지 않을 만큼은 제정신을 차린 것 같소."
"하긴 요즘은 댈런의 발라드가 꽤 시시해진 것 같긴 하지요? 어찌 보면 좀 바보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오?"
개러스는 신중한 표정이 되었다.
클레어는 웃음을 감췄다.
"아침 이슬을 받기 위해 꽃잎을 연다는 예쁜 장미에 관한 짧은 노래들이 좀 지겨워지기 시작
했어요. 내가 보기엔 그의 초기 발라드에서 느껴지던 생동감이 없어진 것 같아요."
"생동감?"
"그래요. 댈런의 새 노래들에는 위험도 없고,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는 두려움도, 긴장감 넘치는 행동도 전혀 없어요."
"부인, 날 놀리는 거요?"
"어쩌면요."
"조심하시오, 난 농담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소릴 자주 들어왔으니까."
"그럴 리가요. 난 당신이 웃는 소리도 들었는 걸요. 댈런의 병적인 사랑이나 바람난 부인을 둔 남편들에 관한 좀 더 모험심 넘치는 노래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개러스는 멈추어 섰다. 그는 그녀의 턱을 잡아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 말을 잘 들어요, 클레어. 난 내 아내가 다른 남자의 팔 안에 눕는다는 생각을 조금도 즐겁게 여기지 않소. 그보다는 그런 배신에 대해선 악마에게나 어울릴 만한 복수를 꿈꾸는 편이지."
"꼭 내가 당신을 배신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군요."
그녀가 쏘아붙였다.
"난 명예가 뭔지 아는 여자예요."
"맞소."
개러스는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지. 나 역시 그 점을 무척 다행으로 여기고 있소."
그 말에 그녀는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날 믿고 있다. 이건 좋은 시작이다.
"기왕에 이 화제를 꺼냈으니 말인데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내 남편이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요."
그의 보기 드문 미소가 다시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내가 다른 여자의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소?"
"당연하죠, 싫어요."
그녀는 당혹스런 기분이 들었지만 확고하게 말했다.
"나도 자존심이 있어요."
"자존심이라. 그게 내가 다른 여자와 누워 있는 걸 반대하는 이유요?
그게 당신 자존심을 다치게 할 거라서?"
클레어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그녀는 확실히 지금 이 순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않을 것이다. 헬하운드는 그런 고백을 맘껏 이용해 먹을 테니까.
"자존심 말고 다른 무슨 이유가 더 있겠어요?"
그녀는 순진한 척 되물었다.
"그 점에 있어선 나도 당신과 다를 게 없어요. 당신이 바람맞는 남편 문제에 그렇게 민감하게 구는 것도 확실히 자존심 때문 아닌가요?"
"맞소."
그녀를 바라보는 개러스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남자의 자존심은 심각한 문제요."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좋소, 그럼 댈런은 빗속에 핀 장미나 뭐 그런 어리석은 주제에 관한 노래들을 계속해서 불러대야겠군."
개러스는 머리를 숙여 클레어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개러스……."
"이리 와요. 벌써 늦은데다 난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소."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절벽 꼭대기 길을 따라 마을로 이끌어 갔다.
10분 후에 클레어와 개러스는 마을의 중심에 있는 수도원 담벼락에 도착했다. 지붕을 이는 데 쓸 볏단을 높이 쌓아올린 수레 하나가 덜그럭거리며 옆을 지나갔다. 그 수레를 모는 사람은 클레어와 개러스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거리로 양떼를 몰고 나오던 양치기도 똑같이 인사를 했다. 영주와 아씨가 손에 손을 잡고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 걸 보고 모두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클레어는 그 시선의 대부분이 개러스를 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개러스는 이 장원의 주민들에게 새롭고 낯설며 수수께끼투성이인 인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그의 두 손에 달려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향초 크림을 베아트리체에게 갖다 줘야 해요."
클레어는 개러스와 함께 은자의 지하실에 닿을 무렵 이렇게 말했다.
"얼마 안 걸릴 거예요."
개러스는 걸음을 멈추고 지하실의 창문을 힐끗 바라다보았다.
"커튼이 내려져 있군. 아직 자고 있는지도 모르오."
"그렇지 않을 거예요."
클레어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베아트리체는 언제나 아침 일찍 일어나거든요. 보통 일어나면 곧 커튼을 젖히죠. 어떤 소식이든 놓치지 않기 위해서요."
클레어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은 걸림쇠가 젖혀져 약간 벌어져 있었다. 마치 베아트리체가 방금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베아트리체?"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베아트리체?"
클레어는 잠시 망설이다가 살짝 열린 창문의 좁은 틈새로 손을 뻗어 모직 커튼을 양쪽으로 갈랐다.
"어디 편찮으세요? 도와 드릴까요?"
어두운 안쪽에서 나오는 대답은 침묵뿐이었다. 클레어는 작은 집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엔 전혀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다. 창문의 다른 쪽에 있는 커튼 역시 닫혀져 있어서 방은 어두운 그림자 속에 푹 잠겨 있었다. 차츰 클레어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그녀가 처음 알아본 물체는 마룻바닥에 쭉 뻗어 있는 베아트리체의 발이었다.
"베아트리체!"
클레어는 돌로 된 창문턱을 움켜쥐고 안쪽에 엎드린 물체를 더 자세히 보려고 애썼다. 개러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창문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뭐가 잘못됐소?"
"모르겠어요."
클레어는 그를 쳐다보았다.
"베아트리체가 마루에 누워 있어요. 움직이질 않아요. 개러스, 그녀가 어디 심하게 다친 게 아닌가 싶어요."
개러스는 은자의 방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문이 잠겨 있군. 열쇠가 벽에 매달려 있는 게 보이오."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죠?"
클레어가 물었다.
"사람을 보내 대장장이를 불러오도록 하시오. 빨리 움직여요, 클레어."
클레어는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대장장이는 은자의 돌벽과 조금 열린 틈 사이에 연장을 끼워 넣었다. 그런 다음 개러스와 함께 육중한 나무문을 어깨로 밀었다. 세 번째 시도에 문은 돌쩌귀에서 떨어져 나갔다. 개러스가 먼저 작은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마루 위에 엎어져 있는 시체에 눈길을 던지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죽었소. 뿐만 아니라 자연사가 아니오."
13
"살해됐군요."
클레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 받은 표정으로 개러스를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어요."
즉시 불려 온 마가렛은 멍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에요. 내가 이곳을 맡은 이래로 지난 15년 동안 이곳에서 살인이 일어난 적은 없었어요."
클레어는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내 평생 디자이어의 어디서건 살인 사건은 없었어요."
"이건 살인이 분명하오."
개러스는 초점을 잃은 은둔자의 열린 눈을 내려다보았다. 일생 동안 많은 죽음을 경험했기에 그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확신할 수 있나요?"
마가렛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쩌면 한밤중에 갑자기 병에 걸려서 도움을 청하려다가 문에 이르지 못한 걸 수도 있어요."
개러스는 시체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는 죽은 여인의 손가락 하나를 만져 보고 그것이 부드러운 것을 발견했다. 죽음 후의 강직 현상은 이미 지나간 뒤였다.
"한밤중에 죽은 건 맞지만 병으로 죽은 건 아닙니다."
그는 베아트리체의 머리 두건을 살펴보았다.
"이분은 보통 베일을 쓰고 주무십니까?"
"모릅니다."
마가렛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일종의 경배의 의미일 수도 있고요."
"단순한 허영심 쪽에 더 가까울 거예요."
클레어는 조용히 말했다.
"베아트리체는 늘어지는 턱주름에 신경을 아주 많이 써 왔으니까요. 아무도 그걸 보는 걸 원치 않았어요."
"베아트리체는 소문내는 걸 좋아했고 클레어의 향수와 향초 크림을 아주 좋아했어요."
마가렛이 덧붙였다.
"사소한 잘못 정도야 지나고 나면 다 별일 아니지요. 우리들 중 누구도 우리의 죄를 그런 사소한 실수에 국한시키진 않으니까요."
개러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녀는 잠옷을 입고 있어요."
클레어는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그런데도 베일과 같이 신발도 신고 있고요."
마가렛은 근심스럽게 개러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게 중병으로 인한 돌발적인 죽음이 아니라고 확신하시는 건가요?"
"이건 살인입니다."
개러스는 베일을 가리켰다. 섬세한 리넨은 베아트리체의 목 부분에서 심하게 주름이 잡혀 있었다.
"저 표시들이 보이십니까?"
마가렛은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그래요."
개러스는 베일의 천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마가렛은 그를 멈추게 하려는 것처럼 한 손을 내밀었다.
"뭘 하시는 겁니까?"
"목을 보고 싶어요."
개러스는 하얀 리넨을 둘둘 감아 뒤로 젖혔다.
베아트리체의 목 위로 난 거무스름하고 흉한 타박상이 모두의 눈에 똑똑히 드러났다.
"성 허미언이시여, 이분을 지켜 주소서."
클레어는 낮게 중얼거렸다.
"신이 그녀의 영혼을 편히 쉬게 하시길."
마가렛도 속삭이듯 기도했다.
클레어는 개러스를 바라보았다.
"전에 이런 흔적을 본 적이 있나요?"
"그렇소."
개러스는 베일을 도로 내렸다.
"은자는 목이 졸린 거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클레어의 눈길이 금방 존과 개러스가 부순 나무문으로 향했다.
"베아트리체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었어요. 게다가 창문도 남자가 들어가기엔 너무 좁고요."
개러스는 문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열린 문 틈을 통해 호기심어린 구경꾼들이 모여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많은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수녀와 수사들도 서너 명 같이 문 밖에 모여 서서 안을 들여다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사람들한테 각자 자기 일로 돌아가라고 해주십시오."
개러스가 마가렛에게 말했다.
"그들이 저밖에서 더 이상 떠들어대는 건 원치 않습니다."
마가렛은 신중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문으로 다가가 군중들을 해산시켰다.
클레어는 개러스의 눈과 마주쳤다.
"우리 결혼식이 있던 전날, 베아트리체는 바르톨로뮤 수사를 봤다고 주장했어요. 그가 수도원 마당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 했지요. 그는 잠겨진 문을 곧장 통과해 걸어갔다고 했어요."
"바르톨로뮤 수사?"
개러스는 자기가 엿들은 바 있던 베아트리체와 클레어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래, 맞소. 유령 말이군. 당신은 그게 다 무슨 얘긴지 내게 말해 주지 않았소."
"그건 단지 오래된 전설일 뿐이에요."
마가렛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바르톨로뮤 수사는 떠도는 수도사였지요. 수년 전에 그분이 디자이어에 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어. 그런데 그가 이 섬에 있는 동안 어떤 수녀를 유혹해서 자기와 같이 도망가자고 설득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 두 사람은 폭풍우가 치던 날 도망쳤는데,"
클레어가 설명했다.
"둘 다 높은 파도에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고 해요."
"그 일은 당신이 이 수녀원을 책임지고 있을 때 일어난 일입니까?"
개러스가 물었다.
"절대로 아니에요."
마가렛은 굉장히 불쾌한 듯 대답했다.
"나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얘기는 내가 오기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일 뿐이에요."
"나 역시 마찬가지예요."
클레어가 말했다.
"전설에 의하면 바르톨로뮤 수사는 어떤 특정한 밤만 되면 자기 연인을 찾아 되돌아온다고 해요. 그리고 그가 수녀원 마당에 나타날 때마다 재앙이 따른다고 하죠."
개러스는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들의 은자는 절대로 유령에 의해 살해된 게 아니요. 피와 살이 있는 남자가 이 흔적을 그녀의 목에 남겨 둔 겁니다."
그는 문으로 걸어가 짓밟힌 잔디를 내다보았다.
"젠장, 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을 멀리 떼어놓아야 한다는 걸 미리 생각했어야 했는데. 이젠 이 지하실 앞에 어떤 수상한 발자국이 있었는지 알아낼 도리가 없게 돼버렸군."
"개러스."
클레어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여기 뭔가 이상한 게 있어요."
"맞는 소리요. 살인이란 언제나 이상한 일이지."
"난 이상한 냄새를 말하는 거예요."
개러스는 몸을 홱 돌려 날카로운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시켰다.
"당신의 후각에는 지대한 존경심을 품고 있소. 어떤 냄새를 알아차렸다는 거요?"
"민트향이요."
"민트?"
개러스는 시체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공기의 냄새를 맡으려고 노력했다.
"과연, 아주 희미하지만."
혼란스러움으로 마가렛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민트향이 뭐가 그렇게 이상하다는 겁니까? 은자가 어쩌면 최근에 식사를 준비하는 데 그걸 썼을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클레어의 코가 움찔거렸다.
"아니에요. 이 향기는 잠옷에서 풍기고 있어요."
개러스는 다시 시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당신 말이 맞군. 바로 잠옷 자락에서 나는 냄새야."
그는 은자의 부드러운 가죽 슬리퍼 바닥에 묻은 녹색의 얼룩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신발 바닥에도 있구."
클레어는 가슴 아래에 팔짱을 꼈다.
"수녀원 정원에는 커다란 민트 꽃밭이 있어요. 베아트리체가 어젯밤 밖으로 나갔었다고 생각하세요?"
"그녀는 절대로 이 방을 떠나지 않았어요."
마가렛이 재빨리 말했다.
"수년 동안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는 걸 내가 알고 있는 걸요. 그녀가 은자라는 걸 잊지 말아요. 실제로 한 번은 밖에 나가는 걸 몹시 싫어한다고 내게 말한 적도 있는 걸요."
"그렇긴 해요. 하지만 정말로 자기가 바르톨로뮤 수사의 유령을 봤다고 생각했다면,"
클레어가 말했다.
"어쩌면 호기심 때문에 그를 따라가 보려고 방을 나섰을 수도 있어요."
"클레어, 정말 그 오래된 전설을 믿는 거예요?"
마가렛이 물었다.
"아니요,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믿었어요."
"내 아내의 말에 일리가 있군요."
개러스는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베아트리체가 어젯밤 누군가를 보고 그 사람을 유령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가 그가 하고 있는 짓을 봤을 수도 있고요."
마가렛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말이 안 돼요. 유령으로 착각할 만한 어떤 사람을 봤다면 그녀는 굉장히 놀랐을 겁니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여기 잠겨진 문 뒤에 숨어 있었을 거예요."
"누가 알겠어요?"
클레어가 말했다.
"베아트리체는 호기심이 왕성해요.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실제로 바르톨로뮤 수사의 유령을 봤다는 얘기를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자기 얘기의 증거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그러다가 그것 때문에 살해된 거예요."
"하지만 이 섬에는 베아트리체를 죽일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마가렛이 말했다.
개러스는 클레어의 고민스런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우리 함께 가서 그 민트 꽃밭이란 델 한 번 봅시다."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서실 근처에 있어요."
그녀는 몸을 돌려 길을 안내했다. 마가렛이 그녀 뒤를 따랐다. 개러스는 마지막으로 살해된 은자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런 다음 클레어와 수녀 원장을 따라 짙은 녹색의 커다란 민트 꽃밭으로 향했다. 짓밟힌 녹색 식물의 흔적은 즉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뭉개진 민트의 향기가 강하게 피어올랐다.
"최근 누군가가 여기에 서 있었군요."
개러스가 말했다. 그는 꽃밭 주변을 걸어 다니며 그것을 사방에서 관찰했다. 그런 다음 그는 벽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도서실은 이 벽의 맞은편에 있습니까?"
"네."
마가렛이 조용히 말했다.
"괜찮다면 안을 좀 보고 싶은데요."
"물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나로선 그러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군요."
마가렛은 허리띠에 매달린 무거운 열쇠 꾸러미에서 열쇠 하나를 골랐다. 그 동안 열쇠 꾸러미들은 쟁그랑거리며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여기에도 잠겨진 문이 있군요."
클레어는 마가렛이 도서실 문으로 다가가 열쇠를 넣는 동안 낮게 중얼거렸다.
"맞소."
"사람들이 살인자가 정말로 유령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클레어는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은 그걸 믿지 않죠?"
"그렇소."
개러스가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우리가 그걸 믿게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소."
마가렛은 도서실 문을 열어 재빨리 안을 살펴본 후 뒤에 서 있는 개러스와 클레어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는 모든 게 다 괜찮아요. 잠깐 동안 난 뭔가 도둑맞지나 않았을까 하고 걱정했었죠."
"그리고 은둔자는 그 도둑질을 목격했기 때문에 살해되었다는 건가요?"
개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논리적인 가정이로군요."
그는 도서실로 걸어 들어갔다. 클레어는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그들은 함께 선반에 가득한 무거운 책들을 살펴보았다. 커다란 묶음의 책들은 모두가 신중하게도 벽에 쇠사슬로 고정되어 있었다. 개러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좋은 책들을 상당히 많이 갖고 계시는군요, 원장님."
"그래요. 내가 여기 수녀 원장으로 있는 동안 이 도서실에선 한 번도 책을 도둑맞은 적이 없다는 것도 기쁘게 말씀드릴 수 있죠."
마가렛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누구든 책처럼 가치 있는 물건을 간수하는 데 신중하지 않을 순 없는 일이에요."
"개러스,"
클레어는 도서실 선반의 마지막 열에서 그를 불렀다.
"책상 하나에 책이 펼쳐져 있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
마가렛은 서둘러 걸어갔다. 놀란 눈치가 역력했다.
"모든 책들은 사용 후에 적절히 보관되고 있어요. 그렇게 하도록 내가 엄격하게 명령을 내려 놨으니까요."
개러스는 클레어가 서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화려한 문자로 가득 찬 아름답게 장식된 페이지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그 페이지의 첫글자를 감싸고 있는 정교한 디자인은 번쩍거리는 황금색과 환한 붉은 색, 그리고 풍요로운 느낌의 푸른색으로 되어 있었다.
"이건 향초에 관한 책이에요."
클레어가 설명했다.
"나도 여러 번 이 책을 참조한 적이 있어요."
"이 수녀원의 사람이 이런 식으로 책을 봤다는 건 믿을 수가 없군요."
마가렛이 말했다.
"이건 아주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다뤄선 안 돼요."
개러스는 민트 꽃밭이 내려다보이는 창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살인자가 이 책을 훔치려고 하다가 밖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깨닫지 않았나 싶군요."
"그가 가엾은 베아트리체를 죽이고 달아났다고 생각하세요?"
클레어가 물었다.
"어쩌면."
개러스는 그 문제를 한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달아나기 전, 그는 은자의 시체를 그녀의 방에 도로 가져다 놓는 수고를 했어."
"그가 무슨 수로 안쪽에서 문을 잠갔을까요?"
클레어가 물었다.
"그녀의 방문 열쇠는 아직도 그 집 안벽에 걸려 있는데요. 게다가 살인자는 그토록 원했던 책을 가지러 도서실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들킬까 봐 두려워했는지도 몰라요."
마가렛이 끼어들었다.
"그래요, 아니면 그 책은 그가 원하던 책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요."
개러스는 펼쳐진 책을 살펴보았다.
"만약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우린 아주 흥미로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인자를 찾아내야 한다는 뜻인가요?"
클레어가 물었다.
"맞소."
개러스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오."
그날 밤 개러스는 평상시와 같이 클레어가 그를 움켜쥐고 애원하며 그에게 자신의 몸을 밀어붙이고 그의 어깨를 자신의 작고 날카로운 이로 살짝 물어뜯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다음 그는 격렬한 만족감을 느끼며 그녀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녀의 작고 축축한 맨 처음의 제한을 살짝 통과한 다음 깊숙이 밀고 들어갔다. 그의 온몸을 꼭 감싸듯 조이며 그녀는 팽팽하고 뜨겁게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팔 안에서 몸을 떨며 비명을 지를 때까지 한밤의 전쟁에서 자신을 억제하려고 애써 싸웠다.
"개러스."
그는 온힘을 다해 그녀의 몸속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마침내 그는 몸을 떨며 완벽한 파도에 몸을 맡겼다. 그가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을 때, 시트는 축축이 젖어 있었고 밀폐된 침실 안의 공기에는 정열의 내음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커튼을 갈랐다. 달빛이 창문을 뚫고 쏟아져 들어와 침대 위로 흘러넘쳤다. 클레어는 조용히 누워 오랫동안 꼼짝 않고 있었다. 개러스는 그녀가 깊은 잠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을 꺼내자 그는 깜짝 놀랐다.
"당신은 마치 정열로 날 소진시켜 버리지 않으면 내가 밤사이에 달아날까 봐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섹스를 해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남편들은 아내를 다 이런 식으로 다루나요?"
개러스는 아주 조용해졌다.
"내 섹스 방식에 불만이 있소?"
"난 불평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도 잘 알잖아요."
클레어는 팔꿈치로 버티며 옆으로 누워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이 창백한 달빛 속에서 그의 얼굴을 찾았다.
"당신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개러스."
"이해할 게 뭐가 있다는 거지?"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둘둘 말았다.
"난 결혼 침대의 즐거움에 흠뻑 빠져든 새신랑이오.
그 점에 대해선 이상한 것도 기괴한 점도 없소."
"그 이상의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죠?"
"당신은 아니오."
그는 천천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점에 대해선 확신이 안 서는데요."
개러스는 그녀의 입을 가까이 끌어당겨 깊은 키스를 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고 그녀가 온몸의 힘을 빼 나긋나긋해질 때까지 놓아 주지 않았다.
"당신한테서 내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건,"
그는 충분히 그녀에게 혼란을 주었다는 만족감이 들자 이렇게 말했다.
"그건 당신이 날 욕망으로 미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점이오."
"날 놀리는군요."
"내가?"
그는 그녀의 목에 키스를 했다.
"그래요, 심각한 얘기를 피하고 싶을 때마다 항상 그렇게 하는 걸 눈치 챘어요."
"그게 바로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오? 심각한 얘기?"
그는 양 손바닥으로 그녀의 가슴을 감싸 쥐며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젖꼭지를 어루만졌다.
"난 눈치 채지 못했는걸."
"당신도 눈치 챘어요. 그저 모르는 척하려는 것뿐이죠."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소."
"그래요?"
클레어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으며 다리를 오므렸다. 그리고는 무릎 위로 팔을 두르고 손으로 턱을 받쳤다.
"내가 말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우리 결혼에 관해서 내가 말하려고 할 때마다 당신은 그저 나를 사랑해 주었죠."
"남편한테 져주는 게 그렇게 몹쓸 죄란 말이오?"
그는 그녀의 허벅지부터 무릎까지 쓰다듬었다.
그녀의 피부는 정말 촉촉한 장미 꽃잎같이 부드러웠다.
"진지한 대화를 하고 싶거든 적어도 흥미 있는 주제를 다루도록 합시다."
"어떤 주제를 다뤄야 그렇다는 건가요?"
그녀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정열에 대해 말합시다, 부인."
"정열에 대해 말하고 싶다구요? 좋아요, 그럼 그 주제로 토론을 한 번 해 보죠. 하지만 이번만은 내가 대화의 주도권을 잡겠어요."
"정말이오?"
"그래요."
그녀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의 남성을 잡았다. 그녀는 시험적으로 그것을 잡아당겼다.
"아."
개러스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것은 굉장히 흥미 있는 대화가 될 것 같군."
그녀가 이런 은밀한 행위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개러스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물론 그렇게 될 거예요."
그녀는 그의 몸 위에서 손을 뻗어 그의 남성을 감쌌다. 그의 허벅지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확실히 이 주제는 토론할 게 아주 많아요. 더군다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범위가 넓어지는 걸요."
개러스는 머리 뒤로 팔베개를 하고 치밀어 오르는 욕정을 자제하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해야 했다.
"부디 이 주제에 싫증내는 일이 없길 바라오."
"그럼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녀는 머리를 낮춰 그의 남성에 키스를 했다.
"맙소사."
개러스는 그녀의 대담한 행동에 너무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무서워요? 이건 당신이 좋아하는 주제가 아닌가요?"
그는 팔꿈치를 짚고 도로 누웠다.
"대체 뭘 하려는 거요?"
"가능한 한 완벽하게 그 주제를 다뤄 보려고요. 난 뛰어난 학자거든요."
그녀의 작은 혀가 다시 그의 남성에 닿아 따뜻하고 축축하며 감질나게 만들었다.
"이의 없으시죠?"
개러스는 신음 소리를 내며 다시 베개 위로 무너져 내렸다.
"없소, 당신이 모든 세밀한 부분까지 다 커버해 주리라 믿소."
"노력할게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대화로는 꽤 이상적인걸, 하고 개러스는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이것은 훨씬 안전한 주제였다.
마침내 클레어가 잠들었다는 확신이 든 다음에야 개러스는 그녀의 부드럽고 지나치게 감각적인 도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뭘 두려워하는 건가요?
비록 기꺼이 그런 나약함을 인정해 주고 싶어도 그는 절대로 그녀에게 그렇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가 무서워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표면상 그는 이제 평생 동안 구해 왔던 모든 걸 소유한 셈이다. 영지, 아내, 자신의 집도 있다. 그러나 무언가 아직 빠진 게 있었다. 그게 뭔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클레어가 그 열쇠를 쥐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라 설명할 순 없어도 개러스는 자기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녀를 자신에게 묶어 두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죽음을 예언했어요."
클레어는 어둠을 향해 말했다.
개러스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짝 끌어당겼다.
"오늘밤 더 자지 않을 생각이오?"
"그럴 것 같아요."
클레어는 하품을 했다.
"좀 쉬었으면 해요. 시장에선 아주 바쁠 테니까요."
"누가 죽음을 예언했다는 거요? 그 은둔자 말이오?"
"그래요. 하지만 그분은 종종 재앙이나 나쁜 징조 같은 걸 말하곤 했어요.
이번에는 불행하게도 그 말이 맞았지만요."
클레어는 그에게 몸을 기대며 다리를 그의 다리에 감았다.
"살인자를 어떻게 잡아낼 작정이에요?"
"내가 제일 자신 있어 하는 방법을 써 봐야겠지. 덫을 몇 개 놓을 작정이오."
"무슨 뜻이에요?"
"그 살인자는 도서실에서 찾고 있던 게 무엇이든 그걸 가져 갈 기회는 없었던 것 같소. 아마 다시 시도할거요. 그때 우리가 그를 잡는 거요."
"어떻게요?"
개러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매일 밤 수녀원 주변에 보초를 세워 놓고 그들에게 눈에 띄지 않도록 어둠 속에 숨어 있으라고 지시할 생각이오. 누군가 벽을 기어오른다거나 문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곧바로 알아볼 수 있는 위치에 배치해 둘 거요."
"훌륭한 계획이에요."
개러스는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솔직한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고맙소."
"그 살인자가 남자라고 생각하세요?"
개러스는 은둔자의 목에 나 있던 칙칙한 상처 자국을 떠올렸다.
"물론이오. 아주 힘센 여자라면 그녀를 죽일 수는 있었겠지. 하지만 여자라면 시체를 지하실로 질질 끌고 돌아가야 했을 거요. 베아트리체는 번쩍 들어서 옮겨졌소."
"맞아요. 그분이 꽃밭에서 질질 끌려간 흔적은 없었어요."
"자갈로 된 샛길도 마찬가지요. 조약돌들이 전혀 움직여진 흔적이 없었거든."
"관찰력이 예리하시군요."
"머리 둔한 근육 과잉의 기사라면서?"
"쉬잇."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난 실제로 당신을 그렇게 부른 적은 없어요."
"미안하오. 내 실수요. 내가 어떻게 해서 그런 인상을 주게 됐는지 도통 모르겠소."
"그만 놀려요.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그렇게 하지."
클레어는 몇 초 동안 말이 없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베아트리체처럼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노파를 어떤 사람이 죽였는지 정말 상상하기 어렵군요."
개러스는 무법자들을 쫓아다니며 보낸 과거를 떠올렸다.
"불행히도, 살인은 너무 자주 벌어지고 있소. 진짜 문제는 이유가 뭐냐는 거요."
"책을 훔치기 위해서?"
"책은 귀중한 물건이오. 그건 사실이지. 하지만 학자들한테나 해당되는 얘기요. 실제로 책 한 권 얻으려고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좀 믿기 어렵소. 또 어떤 사람이 책에 손을 대려고 했다손 치더라도, 책 한 권만 훔치러 오기엔 디자이어는 너무 멀리 동떨어진 섬이라는 걸 인정해야 하오."
"많은 학자들이 단지 특정한 책을 손에 넣으려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까지 먼 길을 여행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해요. 어떤 의미에선 우리 아버지도 아랍 논문에 대한 갈망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할 수 있죠."
"난 그런 식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았소. 하지만 당신 말이 맞는 것 같군. 험프리 경은 책을 구하려고 생명을 던졌소. 어쩌면 다른 누군가도 똑같은 일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르지."
"살다 보면 말이야,"
시번의 니콜라스는 우울하게 말했다.
"디자이어의 아가씨를 얻는 데 실패하고 나서 그랬던 것처럼 나중에야 내가 잃은 것의 완전한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자신의 행운을 충분히 즐기길 바라오, 헬하운드."
개러스는 그의 시선을 쫓아 클레어가 노란 색과 하얀 색 줄무늬 텐트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떤 상인과 값을 흥정 중이었다. 그에게 들려오는 몇 마디로 미루어 보건대 그의 아내는 힘든 흥정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그 상황을 한껏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맞는 말이오."
개러스가 대답했다. 그는 그녀의 모습에 짜릿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녀는 봄날처럼 활기에 넘치고 따스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흥분으로 밝게 빛났고 두 손은 대기를 가르며 우아하게 움직였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녀의 노란 색 그물망에서 삐져나와 있었다.
"난 행운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오."
"이 한 건만으로도 그녀는 당신한테 상당한 이익을 남겨 줄 거요."
니콜라스는 향을 첨가한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게다가 앞으로 이틀 동안 좋은 거래 건수가 남아 있지. 시장이 파할 때쯤이면 당신은 아마 저 뚱보 런던 상인보다 더 부자가 돼 있을 거요."
개러스는 문제의 그 상인이 디자이어의 향수를 사기 위해 런던에서부터 먼 길을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땅딸막하고 뚱뚱한 중년 남자였다. 그의 날카로운 두 눈은 비슷한 솜씨의 적과의 흥정에서 맛보는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세련되게 수를 놓은 모직 튜닉을 입고 있었다. 모자와 망토는 모피와 벨벳으로 가장자리를 둘렀고 통통한 손가락에는 값비싼 반지를 끼고 있었다. 가까이의 조애너는 녹색과 하얀 색 줄무늬 텐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다른 두 상인들과 힘겨운 흥정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녀는 정교하게 수를 놓은 예쁘장한 주머니와 향기로운 베개를 꽤 많이 팔았다. 그녀 역시 클레어와 마찬가지로 이 일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울리치와 개러스의 또 다른 부하는 할 일 없이 두 개의 텐트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그들은 디자이어의 물품이 쌓여 있는 테이블을 감시하며 뜨거운 파이를 먹고 있었다. 소매치기와 좀도둑은 상인, 사기꾼, 곡예사와 마찬가지로 붐비는 시장의 일부였다. 개러스는 지옥의 거울 칼자루에 손을 얹고 시번 킵 앞에 몇 줄로 세워진 다양한 색깔의 텐트들과 장사꾼들의 좌판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시장은 시번과 디자이어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몇 마일 떨어진 타지 사람들의 관심도 끌었다.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연주자들은 루트와 악기를 가지고 군중들 틈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상인들은 음식과 향을 첨가한 포도주, 에일 맥주를 팔았다. 이곳은 바쁘고 힘이 넘치며 모든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장소였다.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너무 아쉬워하진 마시오."
그는 니콜라스에게 말했다.
"시번은 이 시장에서 건전한 이익을 건질거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돈을 벌고 쓰고 있잖소."
"하긴 그렇지."
니콜라스는 씨익 웃었다.
"밝은 면을 봐야겠지. 내가 당신 아내의 날카로운 혀와 영리한 재치에 시달리지 않고도 그 숙녀분의 재능을 어느 정도 덕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거요."
"내 행운을 부정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으니 기쁘군."
"아무렴."
니콜라스는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철학자 같은 표정을 지었다.
"또 난 당신이 지옥의 거울로 날 찌를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아 기쁠 뿐이오."
"니콜라스, 당신을 죽일 필요가 없다는 걸 완전히 확신하게 됐소."
"내 그렇게 말했잖소."
니콜라스는 그의 등을 두드렸다.
"어때, 클레어는 결국 처녀였지 않소? 솔직히 레이먼드 드 콜빌이 그녀를 가지진 않았을까 하고 염려한 적은 있었지만, 그 또한 그녀를 유혹하는 덴 실패했다고 해도 별로 놀라울 것도 없지. 클레어는 여왕의 자존심을 가진 여자니까 말이오."
"그렇소."
"게다가 피는 얼음물로 만들어졌고. 당신이 굳이 내게 묻는다면 말이지만."
"경의 의견을 물은 적 없소."
니콜라스는 그 말을 무시했다.
"당신이 떠난다면 그녀는 아마 기뻐할 거요. 별로 남편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다른 남편감을 찾아낼지도 모르지."
니콜라스는 폭소를 터뜨리다가 포도주 때문에 거의 숨이 막힐 뻔했다.
"이런 세상에, 그건 꽤 근사한 농담인걸. 당신한테도 유머 감각이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했는데. 자, 좋소. 우린 이웃에다가 둘 다 랑드리의 서스턴 경한테 신하의 의무를 지고 있으니, 친구라고 할 수도 있소."
"재미있는 생각이군."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마시오. 하지만 당신 부인은 내 아내가 되어 내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었소."
니콜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다 그녀가 어렸을 때 사람들이 가르쳐 준 교육 때문이지. 그건 여자를 망치는 길이오. 그녀는 실제로 글을 읽을 줄 아는 남자와 결혼하기를 요구했소. 그걸 믿을 수 있겠소?"
"놀라운 사실이군."
"강한 칼과 무기를 갖춘 기사한테 그런 게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당신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거요?"
개러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당연히 못하오."
니콜라스는 내뱉듯이 말했다.
"도무지 그럴 필요성도 못 느끼오. 서기나 성직자를 고용해서 필요한 일을 시키면 되니까. 독서는 남자한텐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일 뿐이오."
이 사람은 살인 용의자 목록에서 빼도 되겠군, 하고 개러스는 생각했다. 시번의 니콜라스는 분명히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자를 죽이는 데는 상당히 유능한 남자임에 틀림없지만, 읽을 줄도 모르는 책을 위해 은둔자를 목매달아 죽이는 수고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개러스."
클레어는 노란 색과 하얀 색 줄무늬 텐트 너머로 한 손을 들어 올려 그를 불렀다.
"잠깐 이리 좀 와주겠어요?"
"실례하겠소."
개러스는 니콜라스에게 말했다.
"아내가 나를 찾는군."
"그러시오."
니콜라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오. 내 말을 명심해야 할거요. 세월이 지날수록 더 심해질 테니. 그녀는 명령을 내리는 버릇이 있거든. 당신은 아마 하루 종일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그녀의 변덕을 맞춰 줘야만 할거요."
"그렇게 생각하오?"
"그렇소, 지금도 눈에 뵈는걸. 그녀가 당신을 부르면 당신은 곧장 달려가 하인처럼 뛰어다니게 될 거요."
"뭐든 얻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오."
개러스는 클레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가 상인과 함께 있는 자리에 합류하는 것을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상냥한 미소를 띠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눈에는 밝은 경고의 빛이 반짝거렸다.
"개러스, 런던에 있는 고객들에게 제 향수를 팔아 주시는 현명하신 에드워드 킹스게이트 씨를 소개해 드리겠어요."
"안녕하십니까."
킹스게이트는 벨벳 모자를 벗고 개러스에게 깊은 절을 했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개러스는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클레어의 미소가 날카로워졌다.
"여기 제 친구 분인 킹스게이트 씨는 방금 저에겐 아주 적은 이익을 남겨 주고 본인에겐 매우 유리한 흥정을 끝내셨답니다."
"아닙니다."
킹스게이트는 항의했다.
"부인이 이 거래에서 훨씬 더 많은 이익을 챙기셨어요. 실제로 전 이번 여행 경비를 지불하고 나면 몇 푼밖에 건지지 못하게 됐습니다."
클레어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킹스게이트 씨는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날지도 모르는 강도가 염려스럽다는 이유로 가격을 더 깎기를 원하고 계세요."
"아무래도 무장한 군대를 고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킹스게이트는 부드럽게 설명했다.
"여행길이란 게 어떤지 잘 아실 겁니다. 위험하기 그지없지요. 게다가 내겐 값비싼 화물이 있어요. 난 그걸 보호해야만 합니다."
개러스는 마침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감이 잡혔다.
"화물 보호를 위한 무장 군대 고용에 드는 추가 비용에 대해서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 부하들 중 뛰어난 기사 셋을 보내 당신과 화물을 런던까지 경호해 주겠습니다."
상인은 그 말에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경의 부하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개러스는 지옥의 거울의 희뿌연한 크리스털 칼자루 위에 한 손을 올려놓았다. 킹스게이트의 눈길이 그 동작을 따라 움직였다.
"그들 모두 충분히 훈련되고 실전 경험이 풍부하다는 걸 보증할 수 있습니다."
"아, 그 점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경의 명성이 모든 걸 입증하니까요."
킹스게이트는 떠듬떠듬 끼어들었다.
"자, 아시겠지요?"
클레어가 재빨리 말했다.
"추가적인 경호원 고용 비용은 절약하실 수 있어요. 그와 동시에, 당신의 목숨과 재산이 유명한 헬하운드의 부하들에 의해 안전하게 보호된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안전에 대한 보장으로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어디 있겠어요?"
킹스게이트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말씀대로 더 이상 뭘 바라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경호원을 붙여 주신다면 거래는 성사된 겁니다."
"현명하세요."
클레어의 눈이 만족감으로 밝게 빛났다.
"킹스게이트 씨, 다가오는 가을에도 함께 사업을 하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물론이지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킹스게이트는 클레어와 개러스에게 또 한 번 깊은 절을 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뒤뚱거리며 멀어져 갔다.
"고마워요, 개러스."
클레어는 나지막이 말했다.
"아주 잘해 주셨어요."
"내가 유용한 존재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이오."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다음 순간 그녀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우린 좋은 팀이 될 거예요."
"당신이 즐겁다니 기쁘군."
개러스가 그녀에게 뭔가 먹을 것을 가져다 줄까 하고 물으려는 찰나, 윌리엄이 텐트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숨이 차서 헉헉거렸다. 그는 개러스와 울리치를 보고 안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댔다.
"영주님,"
윌리엄은 숨을 헉헉거리며 멈춰 섰다.
"두 분 중 아무나 저하고 함께 가주세요. 댈런이 어떤 소매치기랑 끔찍한 싸움을 벌이고 있어요. 그 도둑놈이 단검을 가지고 댈런을 찌르려고 해요."
개러스는 울리치를 힐끗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겠네. 자넨 여기서 우리 재산을 잘 지키고 있게."
"알겠습니다."
울리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소매치기의 단검에는 우연한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최근엔 다소 실수가 잦으셨어요."
14
개러스는 즉시 댈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소매치기는 비쩍 바르고 뻣뻣한 체격으로 댈런의 또래 정도 되어 보였다. 그러나 직업적인 특성으로 인해 그는 단단하고 튼튼할 뿐만 아니라 단검으로 겨루는 기본적인 기술과, 기사도 정신을 철저히 벗어나는 비겁한 기술도 함께 배워 왔다. 그는 자신의 적수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손톱만큼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비록 불리한 상황에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댈런은 겨우겨우 좀도둑을 커다란 양조 텐트 뒤쪽으로 몰아갔다. 댈런의 팔 위에 피가 묻어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단검에 베인 것이라기보다는 코에서 흘러나온 피 같았다. 개러스는 그 점을 퍽이나 다행으로 여겼다. 클레어한테 그녀의 소중한 음유 시인이 어떻게 해서 칼에 다치게 되었는지 일일이 설명해야만 한다는 건 골치 아픈 일이기 때문이었다. 댈런이 자신의 부족한 실력을 직선적이고 단호한 결단력으로 보완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는 첫 사냥에 나선 어린 사냥개처럼 겁없이 공격적으로 소매치기와 대적하고 있었다. 교묘한 접근 방법에 익숙해 있던 소매치기는 적의 굽히지 않는 공격성에 꽤나 혼란을 느끼는 듯이 보였다. 또한 그는 이 싸움이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구경꾼들 몇 명은 텐트 구석 주위로 모여들어서 결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큰 격려의 외침 소리들이 대기를 가득 채웠다. 댈런은 한 번도 다른 데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소매치기의 두 눈은 초조하게 왼쪽 오른쪽으로 번뜩거렸다. 쏜살같이 댈런을 지나쳐 군중 속으로 도망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개러스는 둥글게 모여든 구경꾼들을 한 번에 쓰윽 훑어보고 댈런이 새로 발견한 힘의 근원지가 어딘지 찾으려 했다. 그는 즉시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말쑥한 녹색 모자를 쓴 금발의 곱슬머리에 푸른 눈을 한 예쁜 소녀였다. 그녀의 흥분된 표정과 달아오른 뺨이 얘기가 어떻게 된 것인지 다 말해 주고 있었다. 댈런은 자기가 구할 소녀를 찾아낸 것이다.
"둘 다 멈춰라."
개러스는 싸움터 중간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 둘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는 두 사람 모두를 잠깐 거칠게 흔들었다. 그런 다음 그가 두 사람을 떼어놓자 그들은 그제서야 상황을 겨우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 결투는 끝났다."
개러스가 말했다.
"저 녀석이 먼저 시작했어요."
댈런은 피가 흐르는 코를 소매로 닦았다.
"저놈이 알리슨의 지갑을 훔치려고 했단 말예요."
"아니에요, 거짓말하는 거예요."
소매치기는 댈런을 번뜩이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의 단검은 부풀어 오른 그의 초라한 옷가지 속으로 어느새 마술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개러스는 알리슨이 근처에 있는 그 소녀의 이름이라고 추측했다. 그는 그녀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
"아가씨는 아직도 지갑을 갖고 있나?"
알리슨은 처음엔 놀란 듯하더니 자기에게 말을 건 사람이 디자이어의 영주라는 걸 알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볼을 짙은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네, 갖고 있습니다. 이젠 안전해요."
그녀는 허리띠에 매달려 있는 작은 가죽 지갑을 토닥거렸다. 자신의 기사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여성스러운 동경의 빛이 가득했다.
"댈런에게 감사해요."
"흥, 난 저 여자애 지갑엔 손도 대지 않았다구요."
소매치기의 눈에는 원시적인 전투의 분노가 사라지고 경계심이 나타났다. 그는 재빨리 개러스를 살펴보곤 곧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전문적인 좀도둑으로서, 그는 처음부터 군중들 틈에서 지위가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법을 익혔던 것이다. 그래야만 값비싼 계산 착오의 대가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희생물을 잘못 고르면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되기 마련이다.
"난 결백해요. 내 어머니 무덤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요."
"저 녀석은 강도에다 도둑놈이에요."
댈런이 주장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개러스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남자는 싸움을 시작할 때를 아는 게 중요한 것처럼 끝낼 때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넌 알리슨의 지갑을 지켰어. 하루에 한 가지 명예로운 공을 세우는 걸로 충분하다."
그는 소매치기를 보았다.
"썩 꺼져라. 다음부터는 내 예비 기사가 너와 또 결투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도록."
소매치기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예비 기사라고요? 세상에, 난 그가 당신의 부하인 줄 몰랐습니다."
"이젠 알겠지."
개러스가 말했다.
"이건 순전한 실수예요."
소매치기는 우는 소리를 냈다.
"누구든 저지를 수 있는 실수요."
"꺼져라."
더 이상 소매치기를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홱 몸을 돌리더니 군중 속으로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사건이 무난하게 끝나 버린 데 실망한 구경꾼들은 맥주 텐트로 되돌아가서 다시 잔을 채웠다. 댈런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개러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심이세요? 내가 주인님의 기사가 된다고요?"
"내 밑에 자네같이 용감한 사람이 들어온다면 영광이네."
개러스는 손을 내밀었다.
"나한테 충성을 맹세할 텐가, 디자이어의 댈런? 맹세를 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도록 하게. 난 내 부하들한테 절대적이고 흔들림 없는 충성을 요구하니까."
"디자이어의 댈런."
댈런은 마치 그 단어들이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되뇌였다. 그는 개러스의 손에 손을 맡기고 무릎을 꿇은 다음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오늘부터 저는 당신의 사람입니다."
"그럼 다 됐어."
개러스는 경외의 표정을 띠고 이 작은 예식을 지켜보고 있던 알리슨과 윌리엄을 힐끗 쳐다보았다.
"너희 두 사람이 증인이다. 이제부터 이 남자는 디자이어의 댈런이라 불릴 것이며 나의 부하다. 그는 나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지며 그 대가로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알겠습니다."
윌리엄은 흥분하여 속삭였다.
"어머니와 클레어 아씨한테 말할 때까지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알리슨은 댈런이 금방 용감한 음유 시인에서 영웅으로 변신한 것처럼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신은 윅크미어의 헬하운드의 부하로군요."
그녀는 그의 상승된 사회적 신분에 명백히 감동받은 것처럼 소곤거렸다. 개러스는 댈런이 비틀거리며 일어설 때 웃음을 참느라고 고생했다.
"예비 기사, 어서 가서 피를 닦아라. 숙녀분들을 놀라게 하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댈런은 가느다란 어깨를 곧게 폈다.
"닦는 걸 도와줄게."
윌리엄이 신이 나서 자청하고 나섰다.
"내가 수건을 가져 올게요."
알리슨이 말했다.
개러스는 댈런이 숭배자들에게 이끌려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음유 시인의 발걸음엔 새로 뽐내는 기운이 서렸고 그의 턱에는 남자의 자존심이 더해졌다. 남자란 일단 자기가 어딘가에 속한다는 걸 알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과 세상도 더불어 변한다.
"이제야 우리 둘만 남았군."
개러스는 클레어가 잔디 위에 펼쳐 놓은 넓고 커다란 줄무늬 천 위에 앉았다. 그는 팔꿈치를 괴고 누워 시장의 번잡한 광경을 건너다보았다.
"댈런한테서 영영 못 벗어나는 줄 알았네. 그 녀석은 오후 내내 내 뒤꿈치만 따라다녔거든."
"댈런이 그렇게 열성적으로 당신 부하가 되다니 뜻밖이에요."
클레어는 개러스에게 근처의 판매대에서 직접 사 온 저민 고기와 땅콩이 든 뜨거운 파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당신의 기사가 되는 데 그렇게 열광적일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예비 기사요."
개러스는 투덜거렸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요?"
"물론이지. 댈런이 완전히 단련된 기사의 자질을 갖추려면 아직 한참 멀었소. 창끝이 어느 쪽인지 분간할 줄도 모르니."
"분명히 그는 오늘 굉장히 큰 변화를 겪었을 거예요."
"순간적인 영웅이 되면 남자는 변하게 마련이지."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준 건 당신의 관대함이에요."
"누구도 한 남자를 영웅으로 만들 순 없소.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그 일을 해야 했던 거요. 댈런은 용기를 가지고 있었소."
개러스는 파이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이 말은 정말 하기 싫지만, 당신은 숭배자 하나를 잃어버린 거요. 안됐지만 그는 다른 아가씨한테 몸 바치기로 결심한 것 같은데."
"나도 봤어요. 어린 숙녀더군요. 게다가 푸른 눈에 금발이고요."
클레어는 열심히 파이를 먹었다. 열띤 흥정을 끝낸 후였기 때문에 그녀는 거의 굶어죽기 직전이었다.
"내가 어떻게 상대가 되겠어요?"
"소용없으니 시를 짓거나 노래 한 곡 부를 줄 모르는 남자와의 지루한 결혼 생활을 포기하고 받아들이라고."
클레어는 소리 없이 웃었다. 햇살을 받으며 네 활개를 쫙 뻗고 누워 있는 개러스는 절대로 지루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유 있고 우아했으며 먹이는 노리는 야수처럼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 다 오늘 이른 아침 도착하여 텐트를 세우고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기 때문에 아직 그와 충분히 얘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멀리서 자신과 조애너를 보호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또한 부하 한두 명을 항상 가까이 있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좀도둑이 감히 물건을 훔쳐갈 엄두도 못 냈다.
"당신하고 울리치 경은 댈런과 윌리엄한테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클레어는 천천히 말했다.
"처음에는 조애너와 내가 당신이 그 두 아이의 장래를 위한 결정을 내렸다는 데 좀 불안해 한 게 사실이에요."
그의 눈이 만족감으로 빛났다.
"남편을 갖는 일에 불안해했던 것처럼 말이오?"
"그래요."
클레어는 마지막 남은 파이 조각을 삼키고 팔로 무릎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일이 다 잘 돼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잘 되는 게 당연하지."
개러스는 마지막 남은 파이를 입 속으로 떨어뜨리면서 별 것 아니라는 몸짓으로 한쪽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연한 얘기 아니오? 결혼이 뭐 그렇게 어려운 건지 난 도통 모르겠소. 내게는 지극히 단순 명료해 보이는데."
"정말 그래요?"
클레어는 짐짓 감탄하는 것처럼 눈썹을 깜빡거렸다.
"그렇고말고."
개러스는 손바닥의 빵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남자가 집안의 지배권을 차지하고 앉아서 몇 가지 법칙만 정해 두면 끝나는 일이지. 일단 모두가 그 법칙을 알고 나면, 만사가 질서를 찾아 돌아가고 조화를 이루는 법이오."
클레어는 파이를 가져오는 데 사용했던 주머니를 집어 들어 위협하는 듯 겨누었다.
"남자가 집안의 지배권을 차지하는 거라고요? 그렇게 말했나요?"
개러스는 진정시키기 위해 한 손을 들었다.
"물론 아무 남자나 다 그런 건 아니지.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 만이오."
그녀는 그의 머리에 가볍게 주머니를 던졌다. 개러스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것처럼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어떤 남편은 이런 일로 화를 내는 사람도 있소."
그는 상처받은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에요. 당신은 평범한 남편이 아니잖아요."
절대로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 클레어는 생각했다.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남자예요.’
"평범한 남편이라면 분명히 당신을 싫증나게 했을 거요."
"맞는 소리예요."
클레어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개러스와 오후를 같이 보낸다는 것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시장의 냄새가 그녀의 민감한 코에 걸리자 그 물건들이 떠올려졌다. 그녀는 음식 판매대에서 풍겨지는 향긋한 내음과 양과 염소의 냄새, 거기다 푸른 잔디 냄새를 가려낼 수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옆에 있는 남자의 뭐라고 정의내리기 어려운 내음도 느끼고 있었다. 마치 그녀에게서 더 많은 반응을 기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개러스는 심장이 두 번 고동칠 정도의 시간 동안 기다렸다. 아무 반응이 없자 그는 그녀가 던져 준 가죽 주머니를 주어 들었다.
"이 주머니에 뭔가 남은 게 있는데."
"맞아요."
"좀 더 먹겠소?"
그는 가죽 주머니의 입을 벌리고 안을 들여다보였다.
"난 파이 하나는 더 먹을 수 있소."
"아니에요. 파이는 더 없어요."
클레어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라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건 당신한테 주는 선물이에요."
"선물?"
개러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여유롭던 그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한테 주는 거라고?"
"그래요."
그녀는 무릎 위에 턱을 고이고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개러스의 눈길에는 매우 기묘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그가 할 말을 잃은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맙소."
마침내 그가 말했다.
"보기 전에 고맙단 소린 마세요. 어쩌면 마음에 안 들지도 모르잖아요."
개러스는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어 우아하게 멋을 낸, 마개가 꼭 닫힌 병 하나를 꺼냈다. 그는 격렬한 기쁨을 느끼며 그것을 살펴보았다.
"향수? 나한테 주는 거요?"
클레어는 얼굴을 붉혔다.
"당신 한 사람만을 위해 내가 특별히 만든 거예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개러스는 조심스럽게 마개를 열고 고개를 숙여 향기를 들이마셨다.
"기다려요."
개러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저, 혹시 쑥이나 민트, 혹은 달리 마음에 안 드는 향초라도 있는지 물어 본다는 걸 깜박 잊었어요."
개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없소. 왜 묻는 거지?"
클레어는 안심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예전에 알던 사람 중에 쑥을 굉장히 싫어하던 사람이 있었거든요."
"난 쑥 냄새가 아주 마음에 드오."
개러스는 음미하듯 깊이 향기를 들이마셨다.
"이 향수는 아주아주 훌륭하군."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렇다니까."
그는 다시 향기를 들이마셨다.
"신선한 새벽 내음과 바다 냄새같이 내가 언제나 좋아하던 향기들이 여기에 다 들어 있소. 이걸 내 옷장 서랍에도 넣어 두리다."
"마음에 든다니 기쁘군요."
클레어는 살며시 웃었다.
"남자들이 모두 좋은 향기가 나는 튜닉과 리넨을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요."
"내 옛날 직업의 성격상, 기꺼이 잊어버리고 싶은 온갖 종류의 많은 냄새들을 맡았어야 했소."
개러스가 말했다.
"이 향수는 내 기억 속의 그 냄새들을 대신할 거요."
클레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법자들을 쫓아다니는 동안 어떤 냄새들을 참아야 했다는 거죠?"
개러스는 정교하게 공들여 만든 향수병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불탄 오두막과 죽은 시체들, 울부짖는 여자들과 온갖 더러운 냄새들이 동시에 생각나오. 그런 냄새들을 맡을 때마다 난 내가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걸 깨닫곤 했지. 남겨진 거라곤 그런 아수라장을 만든 놈들을 찾아 떠나는 일뿐이었소."
클레어는 소름이 끼쳤다.
"정말 안됐어요, 개러스. 당신이 그토록 자신의 장원을 가지고 싶어 한 것도 당연해요."
"이 향수를 맡을 때마다 난 당신을 떠올릴 거요."
개러스는 조용히 말했다.
"당신의 새 집인 디자이어도요."
"물론이오. 틀림없이 디자이어도 생각할거요."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못 박혔다.
"이 선물을 주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없어요."
클레어는 가뿐하게 말했다.
"그냥 보통 선물이죠."
"보통이라고? 그건 또 무슨 뜻이오?"
"물론 내 존경의 표시라는 뜻이에요."
"존경?"
"그래요. 아내가 남편한테 선물을 주는 데 또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어요?"
"좋은 질문이오, 부인."
"댈런, 래널프가 텐트 접는 걸 도와줘라."
댈런은 무엇인가에 찔린 것처럼 홱 몸을 돌렸다.
"알겠습니다."
개러스는 래널프에게 서둘러 걸어가는 음유 시인을 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뭔가 잘못됐다.
개러스는 장날 마지막 날인 오늘 정오가 마악 지나서야 댈런이 뭔가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뽐내는 듯한 걸음걸이와 예비 기사로서의 지위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그런 기색들이 몇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순간 사이에 마술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우울함과 근심어린 태도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댈런은 갑자기 영혼을 짓누르는 듯한 어떤 문제에 사로잡혀 버린 것 같았다. 누군가 말을 걸 때마다 그는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개러스가 내리는 명령을 수행은 하고 있었지만 처음 충성을 맹세하던 순간부터 줄곧 함께 하던 열의는 사라지고 없었다. 개러스는 대충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에 대해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상사병 치료는 그의 전문이 아니었다. 디자이어로 가져 갈 짐들이 어느 정도 배에 실리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댈런을 옆으로 불렀다
"댈런."
"네?"
댈런은 초조한 듯이 두 손을 옷자락에 닦았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아니야, 나랑 잠깐 좀 걸어 보자. 네게 할 말이 있다."
"알겠습니다."
댈런은 복종하듯 그 옆에서 몇 발자국 뒤로 떨어져 걸으며 불편한 눈길로 재빨리 개러스를 훔쳐보았다. 개러스는 뒷짐을 지고 이 미묘한 문제에 대한 최선의 방법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자넨 사랑 노래를 많이 불렀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문제에 문외한인 것 같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개러스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남자가 처음 정열을 느낄 때는 첫 전투를 치를 때처럼 불안정하지. 이 두 가지는 다 나름대로 강렬하고 또 자신과 주변의 세상을 보는 올바른 눈을 일시적으로 가리는 경향이 있어."
댈런은 공손하지만 멍한 표정이었다.
개러스는 한숨을 쉬고 다시 말을 꺼냈다.
"자네가 그 예쁜 알리슨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다는 건 아네. 당연히 그녀와 헤어지는 게 슬프게 느껴질 거야."
댈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가 보고 싶을 거예요."
"그렇겠지. 그건 충분히 이해가 가네.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난 그 앨 사랑하지 않아요."
개러스는 댈런을 힐끗 쳐다보았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래요. 우린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하지만 알리슨한테 난 아직 여자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그런 일을 생각하기 전에 우선 자리를 잡아야 하니까요."
"아."
개러스는 무척 안심이 되었다.
"자네 나이의 청년치고는 상당히 현명한 말이로군. 자네의 상식에 감명 받았네. 자네보다 나이가 배나 많은 남자들도 여자 때문에 바보짓을 저지르는 걸 많이 봐 왔거든.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지."
댈런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주인님이 제게 하시려던 말이 그겁니까?"
"그래, 어서 달려가서 짐 싣는 걸 도와주게."
"알겠습니다."
개러스는 댈런이 서둘러 돌아가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는 자기가 댈런의 기분을 잘못 판단한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지극히 균형을 잃은 감정들 때문에 젊은이가 괴로워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병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치명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개러스는 예전에 그런 감정들로 심하게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자살하고만 한 남자를 알고 있었다. 개러스는 자신의 새로운 예비 기사에게서 눈을 떼지 말자고 결심했다. 3일 후 클레어는 책상 앞에 앉아서 깃펜 끝을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었다. 그녀는 가장 최근에 만든 비법에 대해 고민 중이었다. 여러 가지 재료들을 섞어 훨씬 더 복잡한 조합물을 얻어내는 데 필요한 정확한 단계를 적절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자기가 방금 써놓은 것을 다시 훑어보았다. 일정량의 물을 팬에 부은 다음 그 팬을 불 위에 올려놓는다. 팬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물이 약하게 보글거리며 끓을 때 최상급의 장미 잎사귀를 듬뿍 팬에 집어넣는다. 듬뿍이라는 표현이 그다지 정확해 보이지 않았다. 헬렌 대수녀 원장님은 제조 비법을 기술할 때는 되도록 정확하게 쓰라고 조언했었다. 클레어는 '듬뿍'이란 단어를 지워 버리고 '두 주먹 분'이라는 말을 삽입했다. 명령하는 듯한 노크 소리가 단 한 번 울리고 나서 개러스가 문을 열고 성큼성큼 방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쓴 책이 펼쳐진 채 들려 있었다. 그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클레어, 우리한테 유황이 좀 있나?"
"있어요. 아버지가 다른 화학 재료들하고 같이 유황도 상당량 보관해 두셨죠. 아랍 논문에 유황을 쓰는 제조 비법에 관한 언급이 자주 나오니까요. 아버지는 그걸 실험해 보고 싶다는 얘길 종종 하셨죠. 개인적으로 난 그 물건에 한 번도 손대 본 적이 없어요. 냄새가 마음에 안 들어요."
"아주 잘 됐군. 어디 내가 직접 가서 찾아봐야겠소."
개러스는 다시 읽고 있던 책 내용을 잠시 더 훑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숯은 문제가 아니야. 얼마든지 쉽게 만들 수 있으니까."
"재미있는 제조 비법이라도 찾아냈나요?"
"장인 어른이 쓴 이 책에는 동방에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아주 괴상한 비법들이 많소."
"유황을 쓰는 건가요?"
"그렇소."
그는 무거운 책을 덮어 그것을 겨드랑이에 끼었다.
"당신은 뭘 하고 있었지?"
"책을 쓰던 중이에요."
"아, 향수 제조술에 대한 책."
개러스는 그녀의 서재 책장에 진열된 책들을 훑어보았다.
"당신의 도서관에는 수녀원에 있는 것만큼이나 책이 많군."
"나도 그 점이 매우 자랑스러워요. 물론, 이 책들 중 상당수는 아버지가 수집하신 거지만 한두 권은 내가 직접 모은 것도 있어요. 특히 헬렌 대수녀 원장님이 쓰신 책은 정말 마음에 들어요. 향초에 관한 풍부한 학식이 엿보이는 책인데, 나도 그 책을 종종 참고하죠."
"헬렌 대수녀 원장님?"
개러스가 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요."
클레어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분은 친절하게도 나와 서신 교환을 해주셨어요."
"대수녀 원장과 편지를 주고받았단 말이오?"
"정기적으로요. 향초의 속성에 관한 그분의 조언은 귀중한 것이죠. 언제 또 찾아오겠다고 하셨으니, 당신도 그분을 뵐 기회가 있을 거예요."
"아주 재미있겠는걸."
"그럼요. 분명히 우리와 이 성에서 함께 계셔 주실 거예요. 그건 우리 모두에게 큰 영광이죠."
"알겠소."
개러스는 창가 의자에 앉았다.
"지금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오. 난 당신과 댈런에 대해 얘길 좀 나누고 싶소."
"무슨 문제가 있나요?"
클레어는 얼굴을 찡그렸다.
"난 그가 예비 기사라는 새로운 지위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거나 자기 할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해도 부디 당신이 좀 참아 주세요. 댈런에겐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댈런은 자기 할 일을 잘 해내고 있소. 그건 문제가 아니오. 내가 염려하는 건 그의 우울증이 깊어져 간다는 거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클레어는 펜을 내려놓았다.
"나도 그 점이 몹시 걱정돼요. 그가 처음에 디자이어에 왔을 때만큼이나 심각하더군요. 한동안 많이 좋아졌었죠. 그런데 시장에 갔다 온 뒤론 다시 어두워졌어요."
"댈런의 과거에 대해 뭐 좀 아는 게 있소?"
클레어는 신중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아주 조금밖에 몰라요. 당신도 알다시피 댈런은 사생아예요. 신분이 높은 어떤 사람의 집에서 자랐다곤 하지만, 우리가 전에도 얘기했던 것처럼 그는 그다지 좋은 대우를 받고 지낸 것 같진 않아요."
"당신이 아는 건 그게 전부요?"
클레어는 그 질문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자기 과거 얘기는 도통 안 했으니까요."
"자기를 키워 준 그 남자에 대해서도 아무 말 안 했소?"
"안 했어요. 난 댈런이 과거와 그 남자에 대해선 잊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죠."
"아무리 노력해도 잊을 수 없는 건지도 모르오."
"글쎄요, 어떤 일은 쉽사리 잊기 힘든 것도 있지요."
"맞는 소리요. 허나 과거를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자기를 괴롭히는 악마와 맞서 싸우는 방법을 배워야만 하오."
"시간을 더 주세요. 그가 우리와 함께 지낸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내가 걱정하는 건 이 우울증이 갑자기 찾아왔다는 거요. 시장 마지막 날 전까지 그는 쾌활하고 즐거워 보였소. 난 처음엔 그가 상사병을 앓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지."
클레어는 소리 없이 웃었다.
"알리슨 때문에요?"
"그렇소, 그 문제에 대해 그와 얘길 해 봤는데 댈런은 그런 병은 앓고 있지 않다고 하더군."
개러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아주 다행한 일이지. 난 그런 병에 관한 빠른 치료 방법이나 또, 뭐 그런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는 의사는 한 사람도 모르니까 말이오."
"당신은 나한테 그런 병을 앓아 본 적 없다고 말했었지요."
클레어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소."
개러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상사병은 시인이나 바보들만 걸리는 거요."
"당연히 그렇겠죠."
"나 같은 입장에 있는 남자는 그런 병에 걸릴 능력도 없소."
"왜요? 무슨 해가 있다고요?"
"해라고?"
개러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뭐가 해로운지는 명백한 일이오. 그건 아주 위험한 열병이오. 건전한 판단력과 상식을 모조리 파괴해 버리거든."
"하긴 그래요.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다니,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좋아요, 그럼 댈런 문제로 돌아가 보기로 하죠. 당신 생각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개러스는 잠시 생각했다.
"현재 댈런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든지간에 그걸 잊고 몰두할 만한 일을 주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소."
"훌륭한 계획이군요. 나도 남자들이 어떤 문제에 몰두하면 자신을 억누르던 다른 문제는 쉽게 잊어버리는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개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당신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말을 했소?"
"아니요."
클레어는 아주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댈런을 우울하게 만드는 그 모종의 일로부터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릴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요?"
개러스는 자기가 들고 있던 책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유황과 숯을 사용하는 실험에 나를 도와 달라고 해 볼 수도 있겠지."
"분명히 재미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클레어는 잠시 흥미를 느꼈다.
"연구 결과를 실험할 준비가 되거든 나한테도 알려 줘요. 유황 냄새가 좀 거슬리긴 해도 정말 보고 싶어요."
"실험 준비가 다 되거든 말해 주리다."
개러스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춘 다음 문 쪽으로 다가갔다. 클레어는 그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방금 나눈 대화를 다시 떠올리면서 그녀 역시 울컥 밀려드는 우울함을 느꼈다.
'상사병은 시인이나 바보들만 걸리는 거요.'
그녀는 시인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었지만, 그런 상사병으로 자기 역시 괴로워하게 될까 봐 몹시 두려웠다. 몇 가지 좋은 징조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서 그는 언제나 그녀가 준 새 향수를 사용해 주었다. 또한 그의 정열이 뜨겁다는 것도 믿을 만했다. 그는 그녀에 대한 욕망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고 그녀가 그의 성행위에 그토록 완벽하게 반응하는 걸 기뻐하는 것 같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그녀가 반응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그가 향수에 관한 그녀의 지식과 기술, 총명함을 인정하고 존중해 준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 정도로는 소용없었다. 니콜라스조차 돈을 벌어들이는 그녀의 재능을 찬미할 정도의 재치는 갖고 있었다. 그녀에게 가장 큰 희망을 품게 만드는 것은 바로 몇 분 전에 그랬던 것처럼 개러스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최근 들어 더 자주 그녀의 자문을 구한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이제야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어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녀와 개러스는 의무와 책임을 공유하는 방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믿는 법을 배워 가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녀는 자기가 남편으로부터 바라던 것들을 얻어냈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그의 덩치가 좀 크다는 예외적인 사실은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녀는 사랑을 원했다. 하지만 개러스에게 사랑은 시인이나 바보들이나 하는 짓거리일 뿐이다. 이틀 뒤 클레어가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 갑자기 벼락 같이 엄청난 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뛰어오르듯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의아하게 생각한 그녀는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소리쳤고 하녀 하나가 비명을 질러댔다. 새 벽을 건축하기 위해 일하고 있던 석공들도 일을 멈추었다. 놀란 사람들이 마구간에서 쏟아져 나왔다. 말 한 마리는 히힝거리며 공포에 빠졌으며 닭 몇 마리가 순식간에 마당으로 달음질쳐 나와 미친 듯이 날뛰었다. 다음 순간 엄청난 양의 연기가 아버지의 작업실 창문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클레어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문이 박차듯 열어젖혀지고 두 사람의 형체가 햇빛 속으로 꾸물거리며 기어 나왔다. 개러스와 댈런은 회색재를 잔뜩 뒤집어쓴 채였다. 클레어는 몸을 홱 돌려 방에서 달려 나갔다. 그녀는 날 듯이 내려왔다.
"개러스, 괜찮아요?"
그녀는 홀 계단 밖으로 쏜살같이 달려나오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재로 뒤덮인 물체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유황의 매운 냄새가 확 하고 그녀의 코를 공격했다. 댈런은 힘없이 웃었다. 혼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다친 데는 없었다. 가면 같은 회색 재를 뒤집어 쓴 개러스는 치아를 드러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해냈어."
"성 허미언의 잠옷에 걸고 말하지만,"
클레어는 개러스가 달려와 자기를 번쩍 들어 올리자 숨이 막혔다.
"대체 뭘 해냈다는 거예요?"
"당신 아버지의 제조 비법 가운데 하나를."
개러스는 그녀를 빙글 돌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마당을 가로지르며 울려 퍼졌다.
"됐소, 클레어. 정말로 됐다구."
"그건 알겠어요. 헌데 이 유황 합성물이 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다는 거죠?"
"아직은 나도 모르오. 중요한 건 그 제조 비법이 효과가 있다는 거요."
클레어는 그의 검은 얼굴을 올려다보자 갑자기 모든 것이 완전히 이해되었다. 개러스는 발견의 흥분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 자신도 비록 이것보다는 덜 요란스럽긴 했어도 역시 그와 비슷한 흥분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알겠어요. 그 제조법이 확실히 제대로 효과를 봤다는 거군요. 어쩌면 당신은 전생에 연금술사였을지도 모르겠네요."
"무법자들을 사냥하던 내 전직보다 이건 확실히 더 흥미진진한 일이 분명하오."
15
석공들이 내는 쩡쩡거리는 소음과 일꾼들의 고함 소리가 일으키는 소란을 보지 않으려고 클레어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작업실 밖에서는 새로운 돌벽이 한창 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 때문에 하루 종일 소음이 들려왔다. 축복받은 고요함이 내려앉는 것은 하루 일을 끝낸 일꾼들이 떠나는 저녁때뿐이었다. 클레어는 이 작업이 어서 끝나 주기만을 바랐다. 그녀는 앞에 높인 단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새로이 말린 향초와 꽃잎을 한 주먹 집어내어 코에 갖다 댔다. 쑥 내음이 어떤 이유에선지 레이먼드 드 콜빌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쑥 냄새를 맡으면 그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재채기와 기침을 하곤 했었다. 그녀는 다른 향료와 함께 쑥이 들어간 향수로 그를 놀라게 해주었던 날을 떠올렸다. 레이먼드가 화를 내는 것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맙소사, 내게서 그 향수를 치워요.'
그는 불같이 화를 냈었다.
'쑥이 들어 있잖소. 도대체 뭘 하려는 거요. 날 죽이려는 거요?'
클레어는 몹시 두려워졌다. 그가 쑥에 예민하게 구는 이유를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황망하게 사과를 하고는 향수를 치웠다. 레이먼드는 곧 평상시와 같이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갔고 그걸로 그 소동은 끝났다. 클레어는 얼굴을 찌푸리고 어째서 오늘 그 기억이 떠오른 걸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개러스가 디자이어에 도착한 이래로 그녀는 레이먼드에 대해선 그다지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요즘은 남편 말고 다른 남자를 생각하긴 어려웠다. 개러스는 너무 크고, 압도적이며, 너무 재미있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설 자리를 남겨 주지 않았다. 그는 다른 남자들, 특히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던 남자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을 지극히 평범하게 만들어 버렸다.
"클레어?"
조애너가 작업실의 열려진 문에 나타났다. 그녀는 어둠 속을 눈을 가늘게 뜨고 들여다보았다
"거기 있어?"
"예, 여기 있어요."
클레어는 주먹 안의 향초를 다시 단지 속으로 떨어뜨렸다.
"뭐가 잘못됐나요?"
"아니야, 그저 당신한테 내가 최근에 만든 자수 디자인을 보여 주려고 왔을 뿐이야. 내 생각엔 커다란 베개에 쓰면 아주 좋을 것 같아."
조애너는 한 기사가 숙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도안이 그려진 커다란 사각형의 천을 흔들어 보였다. 그림 속의 두 사람은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있었다.
"멋지네요, 조애너. 이런 낭만적인 장면은 언제나 잘 팔리죠. 배경에 있는 저 동물은 뭐죠?"
"유니콘이야."
조애너는 만족스런 기분으로 천을 다시 접었다.
"런던의 숙녀들은 유니콘을 아주 좋아해. 그럼, 당신이 찬성한다면 마을 여자들과 수녀님들한테 즉시 이 새로운 베개 디자인을 수놓도록 시킬게."
"좋아요."
"여름 중순 때까지는 당신의 말린 향초와 꽃들을 채워 넣을 베갯잇을 잔뜩 만들어 놓을 수 있을 거야."
"적어도 이번 선적분은 목적지에 잘 가 닿겠죠. 개러스 경이 돌봐 줄 거예요."
클레어는 두 주먹의 장미 꽃잎을 단지 안에 추가했다.
"맞아, 헬하운드가 잘해 내실거야."
조애너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그분이 겨우내 우리와 같이 지내 주실지 모르겠네."
"무슨 소리예요?"
클레어는 빙글 몸을 돌렸다.
"물론 그는 우리와 함께 있을 거예요. 여기는 이제 그의 집이에요. 어째서 떠나겠어요?"
조애너는 혀를 끌끌 찼다.
"남자들이란 일단 자기 땅을 지키는 일과 상속자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언제나 떠나는 버릇이 있어. 이제 당신과 결혼했으니, 디자이어는 니콜라스나 다른 욕심 많은 남자들로부터 안전하게 된 셈이지."
"그래요. 헌데 우리의 물건에 항상 큰 위협이 되어 온 도둑들은 어떻게 하고요?"
클레어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죄어 왔다.
"부하들 몇 명을 디자이어에 남겨 두어 섬을 보호하게 시키는 건 개러스 경한테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
조애너는 한숨을 쉬었다.
"개러스 경이 떠나면 울리치 경도 같이 가겠지. 유감스런 일이야. 윌리엄이 그를 무척 좋아해. 난 개러스 경이 기대했던 것처럼 이 새로운 훈련이 내 아들한테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
"윌리엄만 울리치 경을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
클레어는 조심스레 물었다.
조애너는 얼굴을 붉혔다.
"표가 나?"
"그럼요. 게다가 그도 마찬가지로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조애너는 향초와 꽃잎이 담긴 단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날 사랑한다고 했어."
조애너는 운이 좋군, 하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그건 개러스도 여태껏 그녀한테 해 보지 않은 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기쁘군요, 조애너."
"어젯밤 그가 나한테 키스했어."
조애너는 재빨리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난 섹스가 여자한테도 남자한테만큼이나 즐거운 일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
"그래요, 하지만 난 제대로 된 남자일 경우에만 해당된다고 봐요."
조애너는 높은 의자 위에 무겁게 앉아서 무릎 위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여긴 무척 외로워질 거야, 그렇지?"
"개러스 경은 나한테 떠난다는 말 같은 건 한 적이 없어요."
"남자들은 자기들 계획을 여자와 의논하는 법이 없어. 당신도 그걸 알잖아. 당신 오빠가 문 밖으로 발을 내놓기 전까지 당신한테 미리 자기 일을 말해 준 적이 있었어?"
"없었죠. 하지만 개러스 경은 달라요. 그는 중요한 일은 나와 의논한다구요."
"개러스 경은 아직 새신부한테 빠져 있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단계에 있을 뿐이야. 그것도 곧 달라질 거야."
조애너는 슬픈 듯이 말했다.
"언제나 그런 식이지."
클레어의 위장이 조여 들었다. 그녀는 개러스가 떠난다는 생각에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그들이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이해하기 시작한 지금은 더욱 안 된다. 자기를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 이때는 안 된다.
"이 일은 내가 알아보겠어요."
클레어는 문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딜 가는 거야?"
"내 남편을 찾으러요. 그와 얘길 좀 해 봐야겠어요."
조애너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분은 지금 바빠."
"뭘 하는데요?"
"풍차 고치는 걸 감독하고 있을걸. 날개 하나를 교체하는 중이야."
"일 분밖에 안 걸릴 거예요."
클레어는 문을 나섰다. 마당 저편에 풍차가 서 있었다. 개러스와 울리치를 포함한 서너 명의 남자들이 풍차 주위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나타난 심각한 표정을 누가 본다면 그들이 꼭 열린 무덤가에 서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녀는 잠깐 멈춰 서서 저렇게 근심스런 표정을 짓는 것은 남자들이 단지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려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저 물건을 수리한다는 도전적인 일에 정말로 놀라고 있어서인지 궁금해졌다.
"개러스."
그녀는 모여 선 남자들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당신과 얘길 좀 하고 싶어요."
개러스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찢긴 천 조각에서 눈길을 떼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합시다. 당신도 보다시피 지금은 할 일이 있소."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클레어는 근처의 남자들이 청각을 곤두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일 분밖에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단호한 어조에 개러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좋소,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야."
그는 울리치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일을 계속하게. 곧 돌아오겠네."
"알겠습니다."
울리치는 제대로 웃음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재빨리 찢겨져 펄럭거리는 천으로 돌아섰다. 개러스는 클레어가 서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넓은 어깨가 그녀의 시선을 막았다.
"자, 그럼, 클레어?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급한 일이란 게 뭐요?"
클레어는 갑자기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꼭 해야만 했다.
"그저 당신이 가까운 장래에 디자이어를 떠날 건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떠난다고?"
"그래요."
그녀는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일단 땅을 얻고 내게 자기 아이를 갖게 하고 나면 곧 떠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당신의 의도가 정말 그런 건지 알고 싶어요."
개러스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이를 가졌소?"
"아, 아니에요."
클레어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렇진 않아요. 개러스, 그건 지금 대화의 요점이 아니에요. 난 당신이 이 섬을 떠날 계획인지 묻고 있는 거예요."
개러스가 싱긋 웃자 입술 끝이 올라갔다.
"이런, 지금은 그런 문제를 의논할 때가 아니오. 난 저 풍차를 고치려는 중이오."
"풍차가 당신의 장래 계획보다 더 중요하단 건가요?"
그는 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도대체 어째서 지금 나한테 그런 걸 물어 볼 생각이 든 거요?"
"그건 상관 말아요. 내 질문에 답이나 해요. 곧 이 섬을 떠날 건가요?"
"그럼, 당신은 내가 갔으면 좋겠소?"
"아니에요."
클레어는 그의 넓은 가슴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당신이 곁에 있는 게 무척 쓸모 있다는 걸 깨달았고, 또 당신이 떠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쓸모 있다고?"
"그래요, 쓸모 있어요."
"내가 어떻게 쓸모가 있단 거요?"
"음, 당신은 내가 장미와 육계피에서 기름 짜낼 때 쓰는 기계를 아주 잘 고쳐 놨잖아요."
클레어는 환하고 자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그 기계는 지금 아주 잘 움직여요."
"고맙소."
개러스는 꽉 다문 이 사이로 말했다.
"내가 만족스런 일을 해줬다니 기쁘군."
클레어는 그가 화난 것을 눈치챘다. 그녀 자신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도 내 인생 설계를 해야 하니까 당신 계획을 알고 싶다는 것뿐이에요. 그게 그렇게 지나친 질문인가요?"
그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부친의 소환이 없는 한 난 디자이어를 떠날 생각이 없소. 난 랑드리의 서스턴 경의 가신이니, 그가 부르면 일 년에 일정 기간 동안 봉사해야 할 의무가 있소. 당신도 나만큼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요."
클레어는 인상을 찌푸렸다.
"난 바보가 아니에요. 나도 그건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요. 난 지금 당신이 랑드리 경한테 해야 할 의무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개인적인 계획을 알고 싶다는 거죠."
"지금 당장은, 내 개인적인 계획이란, 저 망할 놈의 풍차를 가능한 한 빨리 고쳐 놓는 것뿐이오. 그 다음엔 석공들의 작업 진척 상황을 점검할 계획이고. 그 일을 마치고 나면 내 작업실로 돌아가 실험을 계속할 생각이오. 그걸로 당신 질문에 대한 답이 됐소?"
"절대로 디자이어를 떠날 계획은 없는 거죠?"
"없소."
"맹세할 수 있어요?"
"맹세하리다."
클레어는 강한 안도감이 밀려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좋아요.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전부예요."
개러스는 뒷짐을 졌다.
"만족했다면 부인, 이제 다시 저 풍차 고치는 일로 돌아가도 되겠소?"
"물론이에요. 일을 방해해서 미안해요."
클레어는 몸을 돌리려 했다.
"클레어."
"네?"
그녀는 동작을 멈췄다.
개러스는 찬찬한 눈빛으로 그녀를 살폈다.
"당신이 마을 사람들한테 풍차를 무료로 쓰게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소."
"맞아요. 많은 영주들이 자기 백성들이 밀가루를 빻는 데 돈을 받는다는 소린 들었지만 난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마을 사람들은 성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밀가루를 대주고 있으니, 난 그게 아주 공정한 거래라고 생각해요."
"알겠소."
그녀는 불안스레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한테 풍차 사용료를 받을 생각은 아니겠지요?"
"안 받을 거요. 이 집안에서 사업적인 두뇌를 가진 건 당신이오. 당신이 현재의 상황이 공정하다고 믿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당신과 다투겠소?"
"사업적인 두뇌라, 좋아요. 그런 소린 전에도 여러 번 들었어요."
그녀는 그에게 심술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린 둘 다 나름대로 쓸모가 있는 것 같군요."
개러스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났다.
"누구라도 당신보다 더 훌륭한 아내는 바랄 수 없겠지. 자,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 내 일로 돌아가 봐야겠소."
그는 몸을 돌려 풍차 주변에 모여 선 군중들을 향해 걸어갔다. 클레어는 잠깐 동안 동경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쓸모 있는 사람.
나는 언제나 쓸모 있는 사람이었어. 아버지가 지식을 찾아 대륙을 헤매고 다니는 동안 장원을 운영하는 짐을 진 어머니에게 그녀는 쓸모 있는 존재였다. 남편과 아버지, 디자이어의 영주로서의 책임감보다는 파리와 스페인에서 공부를 계속하기를 더 열망했던 학자 타입의 아버지에게도 그녀는 쓸모 있는 존재였다. 상속받을 영지보다는 마상 시합의 흥분과 영광에 더 굶주려 있던 오빠에게도 그녀는 쓸모 있는 존재였다.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공부하는 동안 약간의 애정 유희를 즐기기를 원했던 레이먼드 드 콜빌에게도 그녀는 쓸모 있었다. 시번의 니콜라스는 자기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는 데 그녀가 아주 쓸모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디자이어에서 나오는 수입을 높이 평가한 랑드리의 서스턴 경에게도 그녀는 쓸모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 헬하운드에게도 그녀는 역시 쓸모 있는 존재인 것 같았다. 그건 유쾌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클레어는 더 나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예를 들어서 사랑을 특별히 쓸모 있는 걸로 보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것 같은 상황이 그렇다. 그날 오후, 클레어는 마침내 탑 꼭대기에 있는 자신의 서재로 올라갈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계단 꼭대기의 모퉁이를 돌다가 댈런과 부딪쳤다.
"아야."
클레어는 뒤로 한 걸음 비틀거리면서 중심을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클레어 아씨, 죄송합니다."
놀람과 두려움 이상의 무언가가 댈런의 눈 속에서 번뜩였다.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니, 댈런? 개러스 경의 실험을 도와주고 있는 줄 알았는데."
"용서해 주세요, 아씨."
그는 초조한 듯 아래의 홀을 슬쩍 내려다보고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계단을 올라오시는 소릴 못 들었어요."
"서재로 가려던 참이야."
"오."
댈런은 튜닉 위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았다.
"괜찮으세요?"
"걱정 마. 너 때문에 다치진 않았어."
클레어는 얼굴을 찌푸렸다.
"뭐가 잘못됐니, 댈런?"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 봄 시장에 다녀온 뒤론 눈에 띄게 침울해진 것 같구나. 정말 그 예쁘장한 알리슨 때문에 고민하는 건 아니겠지?"
"알리슨이요?"
댈런은 잠시 혼란스런 표정이 되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확실하지?"
"그럼요, 아주 확실해요."
"그럼, 뭐 다른 근심거리라도 있는 거니?"
"아닙니다."
댈런은 머뭇거리다가 어깨를 반듯이 폈다. 그의 눈빛에는 슬픈, 거의 절망에 가까운 기색이 보였다.
"클레어 아씨, 아씨의 친절에 한 번도 제가 고맙단 말씀을 드린 적이 없었군요. 지금 그 말을 드리고 싶어요."
클레어는 미소 지었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야, 댈런. 넌 그 아름다운 음악과 시로 여기 디자이어의 생활을 환하게 해줬잖아. 게다가 개러스 경도 작업실에서 네가 도와주는 걸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고 있어."
"주인님은 아주 영리하신 분이에요."
댈런은 나지막이 말했다.
"아씨처럼요. 두 분을 모시게 돼서 정말 영광이에요."
"이런 고맙구나, 댈런."
"이만 실례할게요."
댈런은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내려가 봐야겠어요. 주인님이 절 기다리실 거예요."
"그럼 어서 가 보렴. 저녁 식사 때 보자꾸나."
"안녕히 계세요, 아씨. 다시 한번 제게 베풀어 주신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전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놈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넌 당연히 그럴 가치가 있어."
클레어는 자신의 서재로 걸어갔다.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무언가가 그녀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댈런이 지극히 우울한 표정을 담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확신을 주듯 웃어 보였다. 그런 다음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가 뒤에서 문을 닫았다. 그녀는 책상으로 가서 자리에 앉아 턱을 고였다. 그런 자세로 한참 동안이나 댈런이 그녀의 친절에 감사해 하던 태도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이상한 일이었어요, 개러스."
클레어는 그날 저녁 그들이 침실에 들었을 때 말을 꺼냈다.
"꼭 나한테 영영 이별을 고하는 사람 같더라구요."
"누가 이별을 고했단 말이오?"
개러스는 읽고 있던 두툼한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장인 어른은 아랍 작품을 라틴어로 훌륭히 번역해 놓으셨군. 하지만 뛰어난 작가는 아니셨던 모양이야.'
개러스는 책을 보며 생각했다. 개러스가 지금 읽고 있는 몇 가지 원소에 관한 단어들은 이해하는 데 꽤나 노력이 필요했다. 비록 그날은 하루 종일 따뜻하긴 했지만 저녁엔 평소 기온보다 약간 서늘했다. 침실의 벽난로에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밖에는 바람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내며 불기 시작하면서 새벽이 오기 전 폭풍이 몰아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댈런 말예요. 개러스, 내 말을 듣고 있는 거예요?"
"물론 듣고 있소. 당신이 말할 땐 언제나 경청하지. 오늘도 당신 말을 들으려고 풍차 고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소?"
개러스는 서투르게 갈겨 써 놓은 단어를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vapor(증기)를 쓴 건지 viper(독사)를 쓴 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분명히 증기일거야. 독사라면 문맥상 뜻이 맞질 않는다.…… 강한 열이 액체를 끓게 하여 증기로 만들고 그 증기는 또다시 액체가 되는데…….
"항상 내 말을 경청했단 말이죠?"
클레어는 강한 불신을 나타내며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지금 뭐라고 했는지 말해 볼래요?"
개러스는 불, 흙, 물, 공기의 속성에 관한 복잡한 설명에 몰두했다.
"댈런이 당신한테 뭔가 작별 인사 같은 걸 했다고 했잖소."
"나한테 이별을 고하는 것 같았다구요. 꼭 디자이어를 떠나려는 것처럼 보였어요."
"이 섬을 떠날 계획은 없다고 내가 말했잖소."
"당신이 아니라 댈런을 말하는 거예요. 거 봐요, 내 말이 맞죠?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잖아요."
개러스는 아랍 논문을 읽으려던 시도를 포기했다. 그는 불쪽으로 두 다리를 쭉 뻗으며 의자에 기대어 클레어를 쳐다보았다. 무릎 위에 책을 올려놓고 앉아 몹시 근심스런 표정을 짓느라 찡그려진 그녀의 지적인 얼굴은 순간적으로 그에게 원소에 관한 논문을 몽땅 잊게 만들었다. 내 아내. 그는 경이로운 감정을 느끼며 이렇게 생각했다. 아직도 그녀가 자기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벽난로의 불길이 윤기 나는 그녀의 검은 머리채를 돋보이게 했으며 그녀의 살갗을 더욱 풍부한 크림색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진지하고 보석 같은 눈으로 그를 계속 쳐다보았다. 그는 욕망으로 딱딱해지기 시작하는 몸을 느끼며 어떻게 하면 그녀를 달아오르게 만들 수 있을까 궁리했다. 벌거벗은 클레어를 품안에 안을 생각만 하면 언제나 그랬다.
"뭐가 문제인 것 같소?"
개러스가 물었다.
"뭔가 엄청난 걱정거리가 아직도 댈런을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가 돼요. 그는 전보다도 더 불안해하고 있어요. 그의 우울증은 전혀 나아지질 않아요."
"그래."
개러스는 불 속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상한 청년이오. 울리치도 그를 걱정하더군. 윌리엄이 오늘 오후 어떤 침실에서 막 나오는 그와 우연히 부딪쳤는데, 댈런 눈에 눈물이 고여 있더라는 거요."
"울고 있었단 말예요? 왜요?"
"윌리엄도 댈런한테 바로 물어 봤다고 하더군. 댈런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했구."
"이건 심각해요. 댈런은 걱정거리가 무엇이든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예요."
클레어가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댈런을 감시하는 수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소. 그건 울리치가 알아서 할 거요."
"그를 감시한다고요?"
클레어의 눈이 커졌다.
"왜요? 그가 행여 자해라도 할까 걱정하는 거예요?"
"가능한 얘기지. 우울증은 이상하고 때로는 위험한 상태거든."
"정말 놀라운 생각이네요."
"오늘밤은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말한 대로 울리치가 그 청년을 잘 감시할 거요."
개러스는 다시 책으로 돌아갔다.
"클레어, 우리한테 수은이 좀 있소?"
"있어요."
그녀는 멍하니 말했다.
"아버지가 어딘가에 좀 보관해 두셨을 거예요. 누가 베아트리체를 죽였는가에 대해선 더 생각나는 게 없어요?"
"없소."
"아직도 살인 동기가 책 도둑과 연관돼 있다고 믿나요?"
개러스는 연구 중인 연금술의 제조법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는 유황과 숯 합성물로 빚어냈던 강력한 폭발에 대해서 떠올렸다.
"최근에 난 장인 어른이 번역한 고대 논문들에 엄청난 비밀들이 숨겨져 있다는 걸 깨닫고 있소."
"그건 분명히 사실이에요. 하지만 수녀원 도서관에 있는 책들은 동방에서 가져 온 게 아니에요. 뭣보다도 우선 그것들은 영국의 향초와 교회사에 관한 것들이니까요. 확실히 그 어떤 것도 살인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비밀은 갖고 있지 못하죠."
"허나 도둑은 자기가 거기서 찾게 될 게 뭔지 몰랐다면 어떻소?"
개러스는 들고 있던 책의 울퉁불퉁하게 잘린 양피지 페이지를 쓰다듬었다.
"그 중에서 뭔가 엄청난 비밀을 가진 책을 찾게 될 거라고 믿었다면?"
"어떤 종류의 비밀을 말하는 거죠?"
"어쩌면 평범한 금속에서 황금을 만들어 내는 연금술인지도 모르지."
"오, 그거요. 연금술사들이 오랫동안 그런 비법을 찾아왔지요."
클레어는 비웃었다.
"우리 아버지는 언제나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셨어요."
침실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새벽이 오기 바로 직전이었다. 그 소리가 피와 펼쳐진 책이 관련된 어둡고 불안한 꿈에서 개러스를 깨웠다. 꿈속에서 그는 계속 책에 쓰여진 연금술의 비법을 읽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어들을 알아보기도 전에 피가 페이지 전체를 가로질러 흘러내렸다. 노크 소리가 울리자, 개러스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신속하고 완벽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오랜 습관의 힘으로 그는 침대 옆 아래로 손을 뻗쳤다. 그의 손은 지옥의 거울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뭐예요?"
클레어가 졸리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잘못됐나요?"
"문에 누가 와 있소."
개러스는 침대 커튼을 옆으로 젖히고 손에 칼을 든 채로 마룻바닥을 살금살금 걸어갔다.
"거기 누구지?"
"울리치입니다."
개러스는 문을 열었다. 울리치는 손에 촛대를 들고 복도에 서 있었다. 그는 옷을 전부 갖춰 입은 상태였다. 울리치는 칼을 제외하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개러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가?"
"주인님이 말하신 대로 시인이 성을 떠났습니다."
"댈런이?"
클레어는 무거운 침대 커튼 사이로 고개를 삐죽이 내밀었다.
"그가 떠났다고요?"
개러스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빈 손으로 떠났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클레어 아씨의 서재문이 열려 있더군요."
"그렇군. 결국 그 애송이는 배신자가 돼버렸어."
개러스는 조용히 말했다.
"저는 그가 위험한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습니다."
울리치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랬지."
댈런은 그 동안 이런 일에 대비해 온 걸 것이다. 비록 계속 그렇게 생각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댈런의 행동은 뭔가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건 친구가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밝혀졌을 때 느끼는 그런 슬픔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개러스는 댈런과 그가 둘 다 사생아라는 점과, 같이 실험을 하는 데 흥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유대감을 형성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틀렸음이 분명해졌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직접 처리하겠다고 하셨지요."
울리치는 침대 쪽은 보지 않았다.
"그래, 곧 옷을 입겠네. 말 한 필을 준비시켜 두도록."
"같이 가겠어요."
클레어가 말했다.
"방금 전에 폭풍이 시작됐습니다."
울리치는 공손하게 시선을 개러스에게 계속 고정시켰다.
"밖은 지금 엉망입니다."
"혼자 가겠어."
개러스가 말했다.
"안 돼요."
클레어는 커튼을 옆으로 밀어젖혔다. 높은 침대 가장자리 너머로 다리를 늘어뜨리느라 그녀의 잠옷이 무릎 위까지 올라갔다.
"같이 갈래요."
개러스는 어깨 너머로 눈길을 던지며 얼굴을 찌푸렸다.
"당장 침대로 돌아가시오."
그는 울리치를 돌아보았다.
"말을 준비시키게. 곧 내려갈거야."
"알겠습니다."
울리치는 신속하게 복도로 몇 걸음 물러났다.
개러스는 문을 닫았다.
그는 단 세 걸음만에 순식간에 방을 가로질러 와 옷장 서랍에서 옷을 집어 들었다.
"개러스, 나도 같이 가고 싶어요."
클레어는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의 튜닉과 옷이 들어 있는 서랍으로 서둘러 갔다.
"날 기다려 줘야 해요."
"안 되오.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요."
개러스는 옷을 다 입고 엉덩이 위로 낮게 벨트를 내려뜨렸다. 그리곤 칼과 칼집을 집어 들고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클레어는 낑낑대며 머리 위로 옷을 잡아당겼다.
"댈런이 뭣 때문에 이렇게 몰래 달아났다고 생각하죠?"
"여기서 훔치려던 책을 찾아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개러스는 열린 문 쪽에서 말했다.
"뭐라고요?"
클레어는 옷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그녀는 당황한 눈빛으로 개러스를 쳐다보았다.
"그가 그런 일을 했다고는 믿을 수 없어요."
"아니면 은자 베아트리체 살인 문제로 더 이상 질문 받고 싶지 않아서 도망가는 건지도 모르고."
개러스가 말했다.
그는 공포에 질린 클레어의 표정을 바라보며 아주 단단히 문을 닫았다. 말은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울부짖는 바람과 번쩍이는 번개의 불빛이 말을 놀라게 했다. 미친 듯이 왔다가다하며 날뛰던 말은 개러스가 안장에 앉자마자 얌전해졌다. 일단 고삐를 쥔 힘찬 손길을 느끼자 안정감을 되찾은 것이다.
"문을 열어라."
개러스가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래널프는 누대를 향해 뛰어갔다.
울리치는 개러스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혼자 가시겠습니까?"
"나 혼자 그 시인 녀석을 처리하겠다. 녀석이 성을 떠난 건 얼마나 됐지?"
"반시간도 안 됐습니다. 명령대로 반 시간마다 놈의 침실을 확인하라고 시켰는데 경비병이 방이 빈 걸 발견하곤 곧바로 제게 보고했고 전 곧장 영주님께 알린 겁니다."
"문으로 나가진 않았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경비병들 눈에 띄었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녀석이 들키지 않고 마당을 벗어난 방법을 알아내는 것도 흥미 있겠는데요."
"녀석을 잡으면 그것도 곧 알게 되겠지."
개러스가 고삐를 당기자 그 커다란 짐승은 열려진 문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개러스가 마을을 향해 말을 몰아 달려가는 동안 새벽의 회색빛이 섬을 가로질러 깨어나고 있었다. 그의 목적지는 항구였다. 디자이어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배를 타는 것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배는 모두 마을 부두에 정박해 있는 상태였다. 말은 천둥처럼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길을 내달려 들판과 여기저기 흩어진 오두막집들을 지나쳤다. 새벽의 이른 빛 속에서 개러스는 바람에 휘어진 꽃밭을 볼 수 있었다. 개러스가 말을 타고 지나칠 때 수녀원의 누대는 여전히 잠겨 있었다. 거리나 시장터에는 아직 아무도 일어나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개러스는 부두에 홀로 서 있는 물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댈런의 망토가 작은 배의 닻줄을 잡고 씨름하는 그의 가냘픈 몸을 휘감고 미친 듯이 펄럭거렸다. 배는 폭풍으로 소용돌이치는 항구의 바닷물 위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부두 돌벽 위에는 커다란 가죽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멈춰라, 댈런."
개러스는 울부짖는 바람 소리 너머로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너의 적법한 주인으로서 당장 멈출 것을 명한다."
댈런은 몸을 홱 돌렸다. 공포에 질린 표정이 얼굴 위에 떠올랐다.
"안 돼요, 절 보내 주세요. 전 가야만 합니다. 이 책을 안 주면 그가 절 죽일 거예요."
개러스는 말에서 뛰어내려 고삐를 기둥에 묶고 부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명령대로 해라, 디자이어의 댈런. 안 그러면 도둑과 강도를 내가 어떻게 다루는지 이 자리에서 곧 알게 될 거다."
"안 돼요."
댈런의 눈이 공포로 크게 벌어졌다. 그는 가죽 주머니를 움켜쥐고 뒤뚱거리는 배 안으로 뛰어내렸다. 작은 배가 옆으로 위험하게 기울어졌다. 댈런은 비명을 지르며 가죽 주머니를 배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는 균형을 잡으려고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 배는 다시 한번 기우뚱거렸다. 댈런은 거품을 일으키는 바닷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개러스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부두 가장자리에 닿자 동시에 발굽 소리가 길 위에 메아리쳤다. 어깨 너머로 뒤를 돌아다보니 클레어가 말을 타고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망토의 두건은 바람에 날려 뒤로 젖혀진 상태였다.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휘감고 있었다.
"개러스, 뭘 하려는 거예요?"
그녀가 외쳤다.
"당신의 시인을 바다에서 건져내어 배신의 대가를 가르쳐 줄 참이오."
"개러스, 그를 다치게 하면 안 돼요. 이런 짓을 한 데는 확실히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렇겠지."
개러스는 나지막이 말했다.
"이유는 분명 있을 거야. 교수형 시키기 전에 내 반드시 그걸 들어야만 하겠소."
"안 돼요, 그를 죽이면 안 돼요."
클레어가 소리쳤다.
"왜 안 돼? 이건 내가 도둑을 처리하는 방식이오."
댈런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개러스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그가 부글거리는 물속에서 속수무책으로 허우적거리는 모양을 보았다. 댈런이 수영을 못한다는 건 분명했다. 개러스는 자신의 긴 가죽 허리띠를 풀었다. 그는 한쪽 끝을 손목에 두 번 감은 다음 부두의 돌바닥 모서리 위로 몸을 기울였다.
"허리띠를 잡아라, 댈런."
"빠져죽는 게 더 나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넌 죽지 않을 거야. 내가 너를 위해 따로 준비해 둔 계획이 있다. 허리띠를 잡아."
댈런은 허리띠로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