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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1945~ )

가야산 홍류동 바위

가을날

가을의 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갠지스강

거장의 힘

겨울꽃

고백

고척동에서

곰삭은 젓갈 같은

교감(交感)

권정생

그것은 참살

그날도 요로코롬 왔으면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그대 무덤 곁에서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그리운 나무

그 사람

그 여자

그의 손

그 짐승의 마지막 눈초리가

길을 걸으며

길을 잃어야 신풍리(新豐里)가 보인다

김씨

꼬리를 자르면 날개가 돋을지

꽃샘

꽃자리

나는 자연을 표절했네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

나의 고향은

내 시는 나와 함께

너를 부르마

넋두리

넋 청(請)

노천(露天)

놀무갱갱이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누가 어머니의 가슴에 삽날을 들이대는가

눈 덮인 산길에서

눈물

눈보라 속에서

눈을 퍼내며

늙은 릭사꾼

단정학 앞에 서서

답청(踏靑)

독경

동년(同年) 일행(一行)

들리는 말로는

마스크를 쓰고 그리움에 말을 걸다

마른 눈물

맞수

매헌(梅軒) 옛집에 들어

맨주먹

먼 산

메이데이

몽유백령도(夢遊白翎圖)

물구나무서기

물구나무서서 보다

민지의 꽃

바늘귀를 꿰면서

바닷가 벤치

바람 부는 날

바람에게

바람의 노래

바위를 밀쳐내다

밝은 낙엽

백씨(白氏)의 뼈

버스를 기다리며

변신

병상에서

보리

봄날

봄소식

부끄러워라

불망기(不忘記)

불안한 신호음

불을 지피며

붉은 꽃

비무장지대

비 오는 날

사랑

사랑 사설(辭說)

사랑아 나는(원제 : 사랑)

사월(四月)에

산(山)

산화(散花)

새 그리고 햇빛

새벽노을

새벽밥

새벽이 오기까지는

새벽하늘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서경별곡

서울역 1998

석탄

선물

섬광

세상이 달라졌다

세한도(歲寒圖)

소나기

소년

쇠를 치면서

수급불류월(水急不流月)

술꾼

숲속에 서서

시(詩)가 오는 새벽

시(詩)를 찾아서

시인 본색

씻김

아가(雅歌)

아누비스의 거울

아버님 말씀

아버님의 안경

애월(涯月)

야망

양말 깁는 어머니

얕은 강을 건너며

어두운 지하도 입구에 서서

어둠 속에서

어머니, 그 사슴은 어찌 되었을까요

어머니의 지팡이

어부사(漁夫詞)

언덕 위의 집

언 땅을 파며

언제고 한번은 오고야 말

얼은 강을 건너며

업보

여기 타오르는 빛의 성전(聖殿)이

여름날의 독서

연기

연두

열쇠

오지 않는 버스

옹기전에서

용산시장에서 – 어느 여성 근로자의 일기

우도에서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

우리들의 그리움은

우울증

우전(雨田) 선생 영전에

운문사 오르는 길 저 너머

운주사에 와서

유신헌법

음지식물

이것은 시가 아니다

이곳에 살기 위해

이른 봄 저녁 무렵

이 봄의 노래

이제 내 말은

인도의 기억

일월(日月)

입춘 무렵 친구 무덤에 가서

자본주의식 신사고

자화상

작은 밭

잠 못 드는 밤에

저 너머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저 산이 날더러 – 목월시운(木月詩韻)을 빌려

제망영가(祭亡靈歌)

쥐불

지금도 짝사랑

진달래

질네야

질문

집에 못 가다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차라리 청맹이기를

첫 고백

청도를 지나며

청명

추석 달

친구에게

친구여 네가 시를 쓸 때

침묵

타지마할

태백산행

태백 하늘에 떠도는 눈발처럼

통점

파문

편지

평화

포도알

하늘을 보다 잠든 날은

학교 가는 길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항아리

해골

허수아비

호미질

화전(火田)

휴전선에서

흔적

희망

희망 공부

흰 밤에 꿈꾸다

8·15를 위한 북소리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가야산 홍류동

정희성

 

세상이 다 떠내려갈 것 같네

 

온갖 시비 물소리로 재우며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 나지 않으리라구

바위에 새긴 孤雲*의 시구

물결에 지워졌네

 

말은 흘러가고

바위만 곧게 앉아

비 오면 비 맞고

눈 오면 눈을 맞네

 

* 최치원의 호

 

 

 

가을날

정희성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가을의 시

정희성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얼마나 황홀한가

황홀 속에 맞는 가을은

잔고가 빈 통장처럼

또한 얼마나 쓸쓸한가

평생 달려왔지만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네

가여운 내 사람아

이 황홀과 쓸쓸함 속에

그대와 나는 얼마나 오래

세상에 머물 수 있을까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정희성

 

신문을 보고 있는데

이제 중학교 일 학년밖에 안 되는

아들놈이 와서 가훈이 뭐냐고 묻는다

너희 학교에 교훈이 있듯이

학급에 급훈이 있고

아마 어떤 집에는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가르침으로 주는 말이 있을 게라고 했더니

아니, 낱말 뜻이 아니라

우리 집 가훈이 뭐냐고

학교에서 적어 오랬다고 다그친다

열세 살밖에 안 되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맹랑하게 애비를 다그친다

 

글쎄…… 뭐 가훈이랄 게 있겠느냐고

그냥 건강하게 살라고 하니

여편네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그게 무슨 가훈이냐고

아이 자존심을 건드려도 유분수지

애비가 돼서 그럴 수가 있냐고

왜 이런 놈의 집에 시집와서

이 고생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고

구시렁거린다 괘씸하게

괘씸하게 나를 긁는다

이를테면 이것이 우리 집의 분열이다

 

하아…… 가문이 없어 가훈도 없다

가훈이 없어 집구석이 이 모양이고

집구석이 이 모양이니 새끼들도

애비 알기를 우습게 안다

가훈이 없다……가문이 없다……

가훈이 없어 그럴싸한 집이 없고

그럴싸한 집이 없으니

그럴싸한 가훈도 못 붙인다

 

하루는 꾼 돈을 갚으러 은행에 갔더니

거기에 가훈을 전시하고 있었다

돈푼깨나 있어 보이는 한 여자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앞에서 값을 물었다

삼만 원이라고 했다

삼만 원…… 삼만 원이면 멋들어진

가훈 하나를 살 수 있다

낡아빠진 유치한 글귀지만

삼만 원이면 가화만사성이다

 

내 선배 하나는 기자질을 하다가

입바른 소리 잘한다고 반공법에 걸리고

애비가 콩밥을 먹는 동안

아들놈은 반공 글짓기 대회에서

기특하게도 특선을 했다

가화만사성이다 이를테면

이것이 우리나라의 가화만사성이고

분단이다

최루탄이다

 

벙어리가 말은 못해도

세월 가는 줄은 안다

분단 44년에

가화만사성한 놈이 있다면

개똥이다

하아…… 삼만 원이 없다

삼만 원이 없어 가화만사성을 못한다

 

 

 

갠지스강

정희성

 

구역질을 했네

주검 타는 냄새

어슴푸레 밝아오는 갠지스강

비좁은 사원 골목을 총총히 빠져 나오며

죽음에게 붙잡힐까 뒤도 돌아보지 않았네

 

오직 죽기 위해 갠지스에 온 노인들이

내 발목을 잡고 빈손을 내밀었네

눈앞 아득한, 허기진 손들의 숲

그들로부터 도망쳐 나오며

차마 하늘을 볼 수 없었네

 

한때 

민중의 좋은 벗이 되리라 다짐했던 나

 

 

 

거장의 힘

정희성

 

거장의 힘은 독거(獨居)

와불(臥佛)마냥 모로 누워

건달파의 낯빛이었다가

세상의 첫날인 듯 고요한 날,

 

말하자면

내가 그 숲에서 홀연히 낫질을 본 것인데

허공 깊이 스윽 날을 후린 것인데

푸른 피 한 방울 튀지 않고

풀들은 일제히 눕는

장엄한 순장(殉葬)을 엿본 것인데

 

홀로 고독한 숲에서

생기를 축이고

세상의 마지막 사람인 듯

홀로 우거진 여름을 베고 돌아오는

독거노인.

 

 

 

 

겨울꽃 – 이길용(李吉龍) 화백의 그림에 부쳐

정희성

 

엉겅퀴여, 겨울이 겨울인 동안

네가 벌판에 서 있어야 한다

바람 속에서 바람을 맞아야 한다

머지않아 천지에 봄이 오리니

엉겅퀴여, 네가 엉겅퀴로 서 있지 않을 때

이 땅에 내가 무엇으로 서 있겠느냐

엉겅퀴여, 나의 목마른 넋이여

겨울이 겨울인 동안

네가 엉겅퀴로 서 있어야 한다

 

 

 

고백

정희성

 

주여 용서하소서

그가 왕이 되었으니

나는 평생 역적으로 살았습니다

말로써 무엇을 이루겠나이까

나는 기교를 버렸습니다

지상에 눈이 어두운데

하늘의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비로소 여기

천지를 헤매다 가겠나이다

 

 

 

고척동에서

정희성

 

머리 둘 곳 없는 고척동

여인숙에서 뜬눈으로 밤을 세우고

새벽이 오기 전 우리는

남은 몇 모금 소주로 목을 축여

네 이름을 부른다

밤이 우리들을 갈라놓은 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갔는가

더디고 더딘 새벽이여

새벽의 친구여

공화국의 밤은 깊고 깊어

별은 저리 총총하고

하늘 밑 외롭고 적막한 막바지길에

우리를 이렇게 세워두는구나

담벼락에 기대 너를 기다리며

차마 바라보는 구치소의 불빛

눈시울 뜨거워라

 

 

 

곰삭은 젓갈 같은

정희성

 

아리고 쓰린 상처

소금에 절여두고

슬픔 몰래

곰삭은 젓갈 같은

시나 한 수 지었으면

짭짤하고 쌉싸름한

황석어나 멸치 젓갈

노여움 몰래

가시도 삭아 내린

시나 한 수 지었으면

 

 

 

교감(交感)

정희성

 

전깃줄 위에 새들이 앉아 있다

어린아이가 그걸 보고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만

󰡒내려와라, 위험해애󰡓

 

 

 

권정생

정희성

 

조선 새는 모두가 운다

웃거나 노래하는 새는 한 마리도 없다

고, 권정생은 노래한다

아니, 운다

까치가 운다

까마귀가 울고 꾀꼬리도 울고 참새도 운다

이것이 반만년을 살아온 우리나라 농민들의

정직한 감정이라고 쓴 선생은

1937년 토오꾜오 혼마찌 헌옷 장수 집 뒷방에서

청소부 아버지와 삯바느질꾼 어머니한테서 태어나

빌어먹을! 조선에 돌아와 유랑걸식 끝에

아이들 읽으라고

글 몇 줄 남기고

어메 어메 여러번 외치다가 돌아갔다

조선 새는 모두가 운다

웃거나 노래하는 새는 한 마리도 없다

 

 

 

그것은 참살

정희성

 

경인년 11월

경북 안동에서 구제역이 발생

60일째 되는 날 아침 마침내

가축 272만 마리를 살처분했다는

뉴스 보도가 있었다

하늘에는 울음소리 가득하고

땅에는 핏물이 흥건했다

 

경인년에 이어 신묘년

또 조류독감이 발생하자

땅을 깊이 파고 마지막

새벽 알리는 닭 울음소리마저

송두리째 파묻어버렸다

세상이 적막했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갑오년 봄을 맞기가 불안하더니

밤에 제주로 가던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 이르러 침몰

수백 명 어린 생명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다에 수장시키고

사십구재가 지나도록

그 쓴 바다 깊이를 모른다

 

 

 

그날도 요로코롬 왔으면

정희성

 

감꽃 지자 달린

하늘 젖꼭지

그대여 날 가는 줄 모르고

우리네 사랑 깊을 대로 깊어

돌아다보면 문득

감이 익겠네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한마디 말

정희성

 

한 처음 말이 있었네

채 눈뜨지 못한

솜털 돋은 생명을

가슴속에서 불러내네

  

사랑해

  

아마도 이 말은 그대 귓가에 닿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다가

괜히 나뭇잎만 흔들고

후미진 내 가슴에 돌아와

혼자 울겠지

  

사랑해

  

남몰래 울며 하는 이 말이

어쩌면

그대도 나도 모를

다른 세상에선 꽃이 될까 몰라

아픈 꽃이 될까 몰라

 

 

 

그대 무덤 곁에서

정희성

 

내 못 가네 흰빛도 서러울 옷깃에

상기 못 놓아 서글픈 손길로

그대는 남아서 이 내 마음속에

산골 그늘밭에도 살아 있을 봄눈처럼

아깝고 깨끗한 사랑으로

그대는 남아서

흰빛도 차거울

그대 그냥 거기 있으니

또한 멀기도 멀 내 사랑의 길

버리고 간다 하고 내 못가네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정희성

 

이런 시대에 사는 것 자체가 죄인데

나라 없던 시절의 친일행적이나

독립투쟁이 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공이 있으면 과도 있게 마련이라고

광복절 대신 건국절을 기념하잔다

건국 이전은 글자 그대로 선사시대니까

건국 이전은 바람 부는 만주 벌판이니까

건국 이전은 말하자면 캄캄한

시베리아 벌판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우리는 나라를 두 번이나 빼앗겼다

한번은 제국주의 일본에게

또 한번은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싶은

혹은 당당하게 미화시키고 싶어하는

이 땅의 친일 친독재 세력에게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개똥이 개똥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절망이 절망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운 나무

정희성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그 사람

정희성

 

무엇을 기다리나 그 사람

동구 밖 장승 곁에 서 있네

해가 져도 장승처럼 서 있네

어둠 속에 동그마니 장승이 되었네

 

 

 

그 여자

정희성

 

돈도

남편도 없지

자식만 둘 있는

 

가진 게 너무나 많은

그 여자

 

슬픔 때문에

허리띠가 남아도는

 

 

 

그의 손

정희성

 

사람들은 그의 손이 너무 거칠다고 말한다

손끝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살아온 손이 저 홀로 곱고 아름답지 아니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작 세상을 아름답고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기름때 묻고 흙 묻은 손이다

시는 어떤가

 

 

 

그 짐승의 마지막 눈초리가

정희성

 

비무장지대의 모든 산들이

일제히 무장을 하고 나선

칠흑의 밤이었네

적인 듯 싶기에 쏘았지

힘없이 쓰러지데, 허전하게

불빛을 비추자 그것은 그러나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었어

나는 똑똑히 확인했네

불빛 속에 떨고 있는 네 다리를,

 

노루라거니 사슴이라거니

좋아 날뛰는 병사들 틈에서

대대장의 큰 손이 불쑥 나타나더니

수고했노라고 악수를 청하며

그런 식으로 하면 적을 잡을 수 있다고

친구여, 그가 나를 위로하였지

알겠노라고, 알겠노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똑똑히 확인했네

불빛 속에 떨고 있는 네 다리를,

 

참 알 수 없네

확인된 것은 짐승의 다리가 아닐세

네 다리는 살아서

죽음의 어두운 허공을 휘저으며

나의 살의를, 대대장의 살의를

우리 모두의 뿌리 깊은 살의를

입증하는 것일까

죽어가던 그 짐승의 마지막 눈초리가

탄환처럼 완강히 내 가슴에 박혀 있네

 

 

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길을 걸으며  

정희성 

 

윌리엄 브레이크와 그의 시대와

시를 생각하며, 나는 걷는다

법망이 뒤얽힌 거리를 빠져나가며

마주치는 모든 눈동자 속에서

공포에 질린 피의자를 만난다

신경을 감춘 모든 건물과

담밑에서 만난 사람들이 웬일로

말없이 눈시울을 붉히고

등뒤에서 번득이는 보안등,

불빛이 이룬 가장 깊은 그늘을 본다

사람들이 황망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면

문마다 빗장을 거는 소리,

집집마다 문틈에서 새어나오는

어둡고 비탄에 잠긴 한숨과

모든 침묵 속에서

나는 한 시대가 이룩한

가장 두렵고 아픈 소리를 듣는다

윌리엄 블레이크와 그의 시대와

세계의 다른 도시들을 생각하며

보고 듣고 그리고 나는 걷는다

 

 

 

길을 잃어야 신풍리(新豊里)가 보인다

정희성

 

신풍리에는 돌이 많다.

성긴 구멍을 숭숭 뚫어 놓고

벌어진 앞니처럼 사람 좋아 보이게 뚫어 놓고

바람이 후후 열기를 식혀 낸 각(角)돌이 많다

감귤꽃 휘날리는 돌담길이 많다.

 

신풍리에는 돌만큼 나무가 많다

무릎만 한 굴뚝을 세우고

낮은 처마에 제비를 들이기 전부터

자기들끼리 척척 땅을 갈라 잘 붙여 먹어 온

수백 년 동백나무들이 많다.

 

신풍리에는 나무만큼 山물이 많다

한라산 내린 물 밤 도와 달려와

한세상 먹먹한 가슴을 적실 때쯤

밥 한 끼 먹고 가자고

산(山)물처럼 시원한 목청이 많다.

 

날마다 해마다 부요한 마을이라 신풍리

서귀포 성산하고도 신풍리에는

길을 잃어야 비로소 보이는

문(門) 없는 문(門)이 많다.

 

사람이 금보다 귀해

사람다운 사람들이

문(門)마다 많다.

 

 

 

김씨

정희성

 

돌을 던진다

막소주 냄새를 풍기며

김씨가 찾아와 바둑을 두면

산다는 것이 이처럼

나를 노엽게 한다

한 칸을 뛰어봐도

벌려봐도 그렇다

오늘따라 이렇게 판은 넓어

뛰어도 뛰어도

닿을 곳은 없고

어디 일자리가 없느냐고

찾아온 김씨를 붙들고

바둑을 두는 날은

한 집을 가지고 다투다가

말없이 서로가 눈시울만 붉히다가

돌을 던진다

취해서 돌아가는 김씨의

실한 잔등을 보면

괜시리 괜시리 노여워진다

 

 

 

꼬리를 자르면 날개가 돋을지

정희성

  

손에서 일을 놓았다

나도 이제 이 지상에서 발을 떼고 싶다

샤갈이 그 아내와 함께 하늘로 떠오르듯

중력을 버리고 이 병든 도시로부터 가벼이

사는 동안 꼬리가 너무 길어졌다

꼬리가 끌고 온 무거운 길을 돌아보며

이쯤에서 나도 길을 내려놓고 싶다

돌아가는 길을 지워버리고

길섶에 핀 풀꽃과 인간들의 거처를 지나온

이 보잘것없는

흉측한 짐승 같은 삶의 꼬리가 밟히기 전에

꼬리를 자르면 길이 사라질까

꼬리를 자르면 날개가 돋을까

영혼이 깃털처럼 가벼워질까

 

 

 

꽃샘

정희성

 

봄이 봄다워지기까지

언제고 한번은 이렇게

몸살을 하는가 보다

이 나이에 내가 무슨

꽃을 피울까마는

어디서 남몰래 꽃이 피고 있기에

뼈마디가 이렇게 저린 것이냐

 

 

 

꽃자리

정희성

 

촉촉히 비 내리던 봄날

부드러운 그대 입술에

처음 내 입술이 떨며 닿던

그날 그 꽃자리

글썽이듯 글썽이듯

꽃잎은 지고

그 상처 위에 다시 돋는 봄

그날 그 꽃자리

그날 그 아픈 꽃자리

 

 

 

나는 자연을 표절했네

정희성

 

어떤 이는 말하네

시인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고 듣는 사람이라고

나는 새의 목소리를 빌려

나무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받아쓰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손녀가 창밖을 내다보며

저 혼자 하는 말도 받아 적네

아 자연은 신비한 것

세상 그 누구도 한 적 없는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네

어느 시인은 말했지

나는 자연을 표절했노라고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

정희성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모래처럼

외로운지를 알았다

나의 불온성에 비추어

나도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안다

그리고 모든 망가지는 것들이 한때는

새것이었음을

 

하지만 나에게 무슨 영광이 있었던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을 바라보았으나

사람들은 내가 한쪽 눈으로만 본다고

그래서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다고

세상은 그렇게 일목요연한 게 아니라고

 

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다른 무엇일 거라고

결코 상상해서는 안 된다고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이념을 내려놓으라고

그런데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버릴 수 없는 꿈이 있기에

 

나는 내가 많이 망가졌음을 알면서도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고 우기면서

내가 더 망가지기 전에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아서 그래서

나는 더 외로운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나의 고향은

정희성

 

나의 고향은 공간 속에 있지 않고

머나먼 시간 속에 있다

어린 시절 부르던

흘러간 노래 한 소절과

그것이 떠올리는 시간

아득히 먼 별에 숨어있는 한 송이 꽃처럼

믿을 수 없는 기억 속에

 

 

 

내 시는 나와 함께

정희성

 

나 떠나는 날 내 시도 데리고 가리

시는 언어구조물이라지만

서울의 아파트 같은 콘크리트 건물과는 달라서

그 속에 들어가 즐겁게 혹은 서럽게 살다가

아무도 없는 방 안 휘이 한번 둘러보고

침대에 몸을 눕힌 채 조용히 눈을 감고

그렇게 오랜 세월 흘러도 흉물스럽지는 않으리

나 죽고 나면 내 시 읽을 사람 없고

평생 두고 지은 언어구조물은 무너져

아무도 들어가 사는 이 없고

기쁨이나 슬픔도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남았다가

모래처럼 흩어지고 혹은 허공 속에 증발되어

자연으로 고스란히 돌아갈 테니까

 

 

 

너를 부르마

정희성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 쉬는

공기(空氣)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공기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여.

 

 

 

넋두리

정희성

 

시만 쓰면 다냐

살림이 기우는데

시만 쓰면 다냐

공자 말씀에 토나 달고 앉아서

술잔에 코를 박고 졸기나 하고

남들이 술값 낼 때

구두끈만 매면 다냐

나라가 꼬이면

말이 어지럽고

말이 헷갈리면

넋도 달아나느니

네 말은 뉘 집 개가 물어 가서

거렁뱅이 맨발로 떠도느냐

헷갈리지 마라,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하지 않은 것은

한국어가 아니다

 

 

 

넋청

정희성

 

춤을 추리라

부르는 소리 없이 노래도 없이

그 뉘라서 날 찾는가

날 찾을 이 없건마는

이 땅에 사람 있나

사람 가운데 사람 소리 들리지 않고

대답 소리 없어도

춤을 추리라

아린 말명 쓰린 말명 다 불러서

아으 하고 넘어가는

이승과 저승

열두 곡절 넘나드는 소맷자락아

아리고 쓰린 고통 다 불러서

이 땅에 죽은 영산

춤을 추리라

 

 

 

노천(露天)

정희성 

 

삽을 깔고 앉아

시청 청사 위 비둘기집을 본다

쩡쩡한 여름 하늘에

손뼉을 치며 날아오르는 비둘기 떼

그 너머 붉은 산비탈엔

엊저녁 철거당한 내 집터가

내 손의 흠집처럼 불볕에 탄다

손뼉을 쳐라

너는 숨죽여 울지 않아도 좋다

엊저녁 아궁지에 숨겨둔 불씨

땡볕에 주저앉은 풀포기만큼

비둘기야, 나는 울어도 좋으냐

엎드려서 짐승같이 울어도 좋으냐

 

 

 

놀무갱갱이*

정희성

 

젓갈을 먹다 보면

잊었던

어머니 말씀 떠오르네

음식 간 보다 말고

절레절레 머리 흔들며

놀무갱갱이 놀무갱갱이

 

입맛 잃고

말도 없이 혼자 앉아서

이제 그만 곡기를 끊고 싶어도

자식 우세시킬까 못한다시며

 

짜거운지 싱거운지

간도 모를

자식의 시 한 편을 손에 드신 채

어머니 눈에 고인

놀무갱갱이

 

* 논산 강경의 옛 지명이며, 짠 음식을 뜻하는 말로 쓰임. 놀무는 놀뫼에서 갱갱이는 건건이에서 온 듯함.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정희성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어디 가 조용히

혼자 좀 있다 오고 싶어서

배낭 메고 나서는데 집사람이

어디 가느냐고

생태학교에 간다고

생태는 무슨 생태?

늙은이는 어디 가지도 말고

그냥 들어앉아 있는 게 생태라고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그러는지는 모르고

봄이 영영 다시 올 것 같지 않아

그런다고는 못하고

 

* 이상국의 시 「그늘」의 첫 행.

 

 

 

누가 어머니의 가슴에 삽날을 들이대는가

정희성

  

당신은 시인을 아주 비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실용주의를 자처하는 당신들의 눈에는 시인은 아마도 가장 비현실적인

인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무어라 해도 시인은 생태주의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새에게는 새의 길이 있고 물에게는 물의 길이 따로 있습니다

물이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이 물을 건너지 못하는 것인데

당신들은 산을 뚫어 물길을 만든다고 합니다

산으로 간 배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강은 어머니나 같은 것입니다

제발 어머니를 그냥 두세요

나는 아주 불길한 꿈을 꾸다가 몸서리치며 일어나 이렇게 씁니다

 

한반도 굽이굽이

어머니이신 강이여

누가 당신의 가슴에 삽질을 합니다

어머니 아픈 가슴에

제 무덤을 파고 있습니다

스며라 배암

징그러운 저놈의 살모사殺母蛇대가리!

 

 

 

정희성

 

나는 안다

그대 눈 속에 드리운 슬픔을

내가 그윽한 눈으로 그대를 바라볼 때

그대는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그대 눈 속의 남해 바다

그대 눈 속의 보리암

그대 눈 속의 연꽃

그대 눈 속의 그림자가

그대와 함께 있기를 열망하는

나를 저물게 한다

나는 예감한다

내 눈 속에 찾아들 어둠을

 

죽음이 내 눈을 감길 수는 있겠지*

 

* 프란시스꼬 데 께베도의 시구를 인용.

 

 

 

눈 덮인 산길에서

정희성

 

눈이 내리네

바람 맞서 울고 섰는 나무들이

눈에 덮이네

그대와 걷던 산길

북한산 기슭의 그 외딴 숫막

함께 앉던 그 자리에도

눈이 내려 쌓이네

한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와도

굳은 맹세 변함없건만

괴로워라 지금 여기 없는 그대를 위해

나는 술잔을 채울 뿐

눈이 오는 날은 울고 싶어라

그러나 기약한 그날은 갑자기

눈처럼 오는 법이 없기에

빛나는 아침을 위해

나는 녹슨 칼날을 닦으리

눈보다 차갑고

눈보다 순결한 마음으로

깊이 깊이 사랑을 새겨두리

 

 

 

눈물

정희성

 

초식동물같이 착한 눈을 가진

아침 풀섶 이슬 같은 그니

눈가에 언뜻 비친

 

 

 

눈보라 속에서

정희성

 

오늘처럼 눈보라가 치는 날이면

겨울 바다가 보고 싶다는

아내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원고를 들고 마포길을 걸어

제 이름도 빼앗긴 출판사로 간다

낯익은 이 길이 웬지 낯설어지고

싸우듯 뺨을 부비듯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나는 눈시울이 뜨겁구나

시는 아무래도 내 아내가 써야 할는지도 모른다

나의 눈에는 아름다움이 온전히

아름다움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박종철군의 죽음이 보도된 신문을 펼쳐 들며

이 참담한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살아 남기 위하여 죽어 있는 나의 영혼

싸움도 사랑도 아닌 나의 일상이

지금 마포 강변에 떨어져

누구의 발길에 채이고 있을까

단 한 번, 빛나는 사랑을 위해

아아 가뭇없이 사라지는

저 눈물겨운 눈발 눈발 눈발

 

 

 

눈을 퍼내며

정희성

 

눈을 퍼낸다

북한산 날맹이에 날 새기가 무섭게

날마다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갈수록 춥기만 한 이 겨울

삽을 들고 북한산 눈을 퍼낸다

끼니마다 빈 뒤주에 고개를 처박고

아내가 숨죽여 어깨를 들먹이면

이 병신아, 이 병신아

귀뺨을 후리는 북풍에 몰려

돌아서서 북한 산마루를 보며

나는 목침 더미 같은 울음을 삼키고

삽을 들어 북한산 눈을 퍼낸다

퍼내도 바닥이 흰 서러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놈이

팔다리만 성해서 무얼 하나

공사판엔 며칠째 일도 없는데

삽을 들고 북한산을 퍼낼까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북한산 바닥까지 눈을 퍼낸다

 

 

 

늙은 릭사꾼 

정희성

 

딱히 어디로 가자고 한 것도 아니었다. 늙은 릭사꾼은 힘에 겨운 듯 야무나 강변에 나를 내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 건너편으로 죽은 자를 위한 화려한 집 타지마할이 한눈에 들어오고 강 이쪽은 눈길을 주기가 민망할 빈민들의 거처였다. 이 묘한 지점에 나를 세워두고 어쩌자는 것일까. 나는 늙은 릭사꾼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나를 향해 서 있었지만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눈길은 나를 지나 내 뒤의 무엇을 향해 있었는데 퀭한 눈으로 그가 건너다보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깨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을 뿐이었다.

 

 

 

단정학 앞에 서서

정희성

 

언젠가 고양시에서 강연이 있던 날

좀 일찍 와서 산책이나 하자는

박철 시인과 호수공원을 거닐다가

외다리로 오래 서 있는 단정학을 보았다

우리나라 논밭 드넓은 하늘을 날던

이 새를 이제 십장생도에서나 볼 수 있는데

그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우리라고 제법 크게는 지어놓았지만

그 큰 새가 날기에는 너무 좁아 보였다

중원의 넓은 들을 날던 새가 여기 와서

십년 넘게 날갯짓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외다리로 서서 먼 하늘만 바라보았을 터이다

그 새를 보지 않았어야 했다

팔을 들어 보았지만 날아지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박철 시인이 외다리로 오래

서 있는 그 단정학 앞에 나를 세워둔 것은

남모를 무슨 뜻이 있었을 성싶다

그는 짝 잃은 저 외로운 단정학에 관해

한편의 시를 쓴 적이 있다고 했다

그걸 아직 읽어본 적이 없지만

얼핏 미당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 시의 이마에도 몇 방울의 피가

맺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학의 정수리에 얹힌 붉은 점을 오래오래

바라보고 바라보며 한쪽 다리를

슬며시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해보았다

 

 

 

답청(踏靑)

정희성

 

풀을 밟아라

들녘엔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독경

정희성

 

일하고 돌아와

발 씻고

나를 마주해 앉다

 

빈 마음자리에 차오르는

빛!

 

 

 

 

정희성

 

돌을 손에 쥔다

고독하다는 건 단단하다는 것

법보다 굳고

혁명보다 차가운

돌을 손에 쥐고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불과하다는

시를 보며 돌을 쥔다

배고프지, 내 사람아

어서 돌을 쥐어라

입술을 깨물며

손에 돌을 쥐고

청청한 하늘을 보며 내 사람아

돌밖에 쥘 것이 없어

돌을 손에 쥔다

 

 

 

동년 일행

정희성

 

괴로웠던 사나이

순수하다 못해 순진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남주는 세상을 뜨고

서울 공기가 숨쉬기 답답하다고

안산으로 나가 살던 김명수는

더 깊이 들어가 채전이나 가꾼다는데

훌쩍 떠나

어디 가 절 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

멀리는 못 가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나 피운다

 

 

 

들리는 말로는

정희성

 

서구 괴정동 바닥에 밤이 오면

저 파도소리도 이젠 무서워

시골서 올라와 이 막벌이판에서

보세공장 실밥마냥 떠돌면서

일당 450원에 살자고 하는 짓이

몸이나 성한가, 아침은 자주 굶고

저녁엔 돌아와 국수로 때우고

 

어쩌다 쌀을 팔아 밥을 지어도

먹새가 좋은 애는 그래도 허기져

가게엔 잔뜩 빚만 지고

끝내는 어디로 꺼져버리고

서구 괴정동 바닥엔

끈끈한 바닷바람에 몰려

보세공장 실밥마냥 소문만 떠돌고

 

들리는 말로는 그 애가

파업을 선동하다 끌려갔다 하고

또 말에는, 실컷 배나 채운다고

무슨 설농탕집 식모로 갔다 하고

자갈치시장 어디 술집에서

창녀가 되어 몸을 팔고 있다거니

애비 모를 새끼를 배어 선창에서

비를 맞고 섰는 걸 보았다거니 하고

끝내는 바다에 몸을 던져

모든 걸 깨끗이 끝내버렸다고도 하고

그러길 잘했다고도 하고

 

들리는 말로는 또, 아직도 그 애가 괴정동 바닥

어느 구석에 실밥처럼 내려앉아

밤마다 저 해숫병 앓는 파도 소리로

뒤척이고 있을 거라 하고

그러다 물거품처럼 꺼져버릴 거라고도 하지만

어떤 이는 또, 그 애가 언젠가는

기어코 저 힘센 바다를 뒤집어쓰고

당당히 당당히 걸어 나올 거라고도 하고

 

 

 

마른 눈물

정희성

 

무엇에 혈안이 되어 살아왔던가

충혈이 심해 안과에 가니

의사가 일회용 눈물을 처방한다

살아오는 동안 눈물이 바닥나버렸다

슬프다 슬픈 일을 당하고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게 되었으니

 

 

 

마스크를 쓰고 그리움에 말을 걸다

정희성

 

툇마루에 앉으니

구절초 향내 코끝에 쌉쓸하고

 

혼자 먹는 밥이

목구녕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창호에 이는 바람에도

귀를 세우니

 

하루해 길다

아 그리운 벗들

 

보고파라 말하려니

입이 없네

 

 

 

정희성

 

세상에 입 가진 자 저마다 떠들어대서

나는 오랫동안 참고 말 안하는 버릇을 들이다가

이제는 말도 잊어버리고 말하는 재미도 잊어버리고

그것이 그렇게 마음 편해서

마침내는 시를 쓰는 것도 잊어버리고 살다가

시인이 시를 안 쓰고 말도 안하면

무엇에 쓰겠냐고 누가 혀를 차는 바람에

그도 그렇겠다 싶어 원고지 앞에 다시 앉으니

도무지 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애마냥

서투르고 그 말이라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나는 말하는 법을 새로 배워야겠다

 

 

 

맞수

정희성

 

바둑판을 무겁게 만든 건 이유가 있어서일 게다. 장기를 잘 두던 앞집 친구 일남이와 마주 앉으면 저녁 먹으라고 부르러 올 때까지 일어설 줄 몰랐는데, 그걸 늘 못마땅히 여기던 아버지가 하루는 장기판 앞에 나를 불러 앉혔다. 열 판이면 열 판 아버지는 외통수에 몰려 쩔쩔 매었고 일수불퇴인지라 물려달라는 소리도 못하고 내가 오줌 누러 갔다 와도 얼굴이 벌개진 채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끙끙 앓으며 장기알만 만지작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남들이 하는 대로 따먹은 상(象)이 마(馬) 따위를 딸그락거리며,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 하고 약을 올렸던 것인데 그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하며 장기판이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놈의 자식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나중에 혼자 있을 때 가만히 생각해보니 장기판이 너무 가벼워서 장기를 오래 두다보면 사람도 그렇게 경망스러워지는가보다 싶어, 그다음부터는 아버지하고 장기는 안 두고 바둑만 두기로 마음에 다짐을 두었던 것이다.

 

 

 

매헌(梅軒) 옛집에 들어

정희성 

 

매헌(梅軒) 옛집에 들어 지난 일을 연애(憐愛)하노니

나라는 기울어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고

찢어진 문풍지엔 바람과 비만 있구나

오늘 밤 덕산(德山)의 달이

아아라히 아름다운 이의 얼굴로 젖어 있고

이 나라여 외쳐 불러

눈물이 손에 가득하다

죽은 자여, 그대 넋이 아무리 홀로 있어도

불운한 시절에 다시 만나리라

 

 

 

맨주먹

정희성

 

손을 들여다본다

보아도, 눈 씻고 보아도 낯선 손바닥

흠집에 기름투성이

이 손이 잡을 것은 무엇인가

일을 해도 일을 해도

내 손은 빈손

찬바람이 손가락을 빠져나갈 뿐

두 손으로 얼굴을 거머쥐어도

바람은 내 얼굴에 모래를 뿌린다

나는 안다

이 추운 겨울밤

뭇사람을 비탄에 떨게 한 바람이

어떻게 한 사람의 높은 담을 치솟게 하고

한 사람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어떻게

타인을 맨주먹 쥐게 하는가

 

 

 

먼 산

정희성

 

가파른 산길 내려오다가

취한 몸 가누어 치어다보니

아슬타, 벼랑 위 피어 있는 진달래

이 봄사 늬는 잃어버린 혁명마냥 눈시울 붉혀

사월은 꽃 피어도 쌀쌀하고

삶은 갈수록 쓸쓸하구나

 

 

 

메이데이

정희성

 

노동자들의 고혈을 착취하고

울산 미포만에 우뚝 치솟은

골리앗 크레인

우리는 힘센 네 어깨 위에 올라

인간적인 삶을 외친다

메이데이

구속된 동지들을 석방하고

단체협약 준수하라고

하늘더러 들으라고

바다더러 들으라고 외친다

자본가들의 음험한 손이

우리들의 목줄을 죄어올 때

더 이상 쫓길 곳이 없어

골리앗 크레인

우리는 네 어깨 위에 서서

산소탱크를 끌어안고 외친다

죽을 수는 있어도

더이상 물러설 수는 없다고

목이 쉬도록 외친다

메아리도 없이 외친다

높기만 한 하늘이여

우리가 제 땅에 살면서도

남의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것 같구나

우리들의 힘은 우리들뿐이라고

골리앗 크레인

우리는 자본가의 어깨 위에 서서 외친다

 

 

 

몽유백령도(夢遊白翎圖)

정희성

 

풍경은 얼마쯤 낯설어야 풍경이고

시도 얼마쯤 낯설어야 시가 된다

이 섬의 이름은 원래 곡도(鵠島)

따오기 모양의 거대한 흰 날개를 가졌다는

이 섬의 아름다움은 기이하다

평화와 상생을 위한 문학 축전을 마치고

두무진(頭武津)으로 가 유람선을 탔다

아홉 시 방향을 보라

선장의 말에 시선이 한쪽으로 쏠린다

구멍 뻥 뚫린 바위 옆에 우뚝 솟은 촛대바위

괭이갈매기 가마우지 똥이 하얗게 쌓인

촛대바위 뒤로는 병풍절벽 가까스로

절벽을 기어오른 덩굴식물 사이로 초소가 보이고

구멍 속에는 초병(哨兵)이 하나 서서

장산곳 하늘의 매를 감시하고 있다

아니, 그는 아마 눈먼 아비를 위해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에

연꽃이 언제 피는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가마우지가 몇 번 자맥질을 하고

물개가 몇 번이나 솟구쳐 휘파람을 불고

괭이갈매기는 또 몇 번이나 울며 날았는지

하루 종일 심심풀이로 헤아렸을 터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다 한가운데

병사를 세워둘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언젠가는 병사들도 심봉사처럼

눈뜬 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심청이 환생했다는

연화리(蓮花里)가 여기 있을 턱이 없지

그렇지 않고서야 심청각 옆에

탱크를 세워둘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옛날 이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크기가 몇천 리가 되는지 모르나

이것이 변해 붕(鵬)이라는 새가 되었다

붕새는 얼마나 큰지

한번 날면 하늘을 뒤덮는 구름과 같았다

지금까지 바다 한가운데 웅크리고 있던 그 큰 새가

제 몸에 얹힌 온갖 것 훌훌 털고

크고 흰 날개 퍼득여 하늘로 오를 날

오기는 올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백령도가 황해바다 한가운데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물구나무서기

정희성

 

뿌리가 뽑혀 하늘로 뻗었더라

낮말은 쥐가 듣고 밤말은 새가 들으니

입이 열이라서 할 말이 많구나

듣거라 세상에 원

한 달에 한 번은 꼭 조국을 위해

누이는 피 흘려 철야 작업을 하고

날만 새면 눈앞이 캄캄해서

쌍심지 돋우고 공장문을 나섰더라

너무 배불러 음식을 보면 회가 먼저 동하니

남이 입으로 먹는 것을 눈으로 삼켰더라

대낮에 코를 버히니

슬프면 웃고 기뻐 울었더라

얼굴이 없어 잠도 없고

빵만으론 살 수 없어 쌀을 훔쳤더라

물구나무서서 세상을 보고

멀리 고향 바라 울었더라

못 살고 떠나온 논바닥에

세상에 원

아버지는 한평생 허공에 매달려

수염만 허옇게 뿌리를 내렸더라

 

 

 

물구나무서서 보다

정희성

 

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집 잃은 시민들이 시위하다 불타 죽은 아침

억울해 울면서 항복하듯 다리를 들고

팔목이 시도록 맨손으로 우리는

이 땅을 디딜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가난이 제 탓만도 아닌데

우리들의 시대는 집이 헐린 채

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도심 속의 테러리스트라 부르고 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 사람들한테 쫓겨 가자지구로 간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요르단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소년은

언젠가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장난감 총을 들고 전사의 꿈을 키우고 있고

아마 머지않아 테러리스트가 될 것이다

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이상한 나라의

황혼이 짙어지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기 시작하고

지금 집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죄를 지어

겨울이 더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

촛불을 들고 어두운 감옥으로 가리라

감옥 밖이 차라리 감옥인 세상이기에

 

* 하이네의 시 「거꾸로 된 세상」의 첫 구절

 

 

 

민지의 꽃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바늘귀를 꿰면서

정희성 

 

좁은 바늘귀를 통해

평생 어미가 들여다본 세상은

설마 늘 흐린 하늘은 아니었을라

밝고말고

 

하늘에 비추어

바늘귀를 들여다보면

젊어 외롭던 어미의 눈으로

다 커서 의젓한 석이가

곱살한 색시도 데리고 들어오고

허구한 날

손주 녀석 재롱도 심심치는 않았을라

하마 애비 없는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을 리야

 

몇치의 짧은 바늘로는

타개진 베갯닛을 꿰매듯

쉽사리 꿰맬 수 없는 너 하나를 바라

손끝에 쥔 명주실 한 파랍

어미의 질긴 목숨이

마디마디 매듭져 이어져 왔을라

 

어쩌면 그렇게 제 애비를 빼다박아

밉살스러운 내 아들 석아

이제 한 자 두어 치나 더 멀어진 바늘귀

그만치 가차와진 하늘로

오늘따라 괘씸한 네 애비 얼굴 어룽지며

수수롭게 지나가기도 한다마는

좁은 바늘귀로

평생 어미가 들여다본 하늘이

설마한들 늘 흐린 세상은 아니었을라

늘 흐린 것 아니었을라

 

 

 

바닷가 벤치

정희성

 

마음이 만약 쓸쓸함을 구한다면

기차 타고 정동진에 가보라

젊어 한때 너도 시인이었지

출렁이는 바다와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

그 위를 떠가는 흰 구름

그리고 바닷가 모래 위 작은 벤치에는

너보다 먼저 온 외로움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바람 부는 날

정희성

 

송정으로 드라이브를 했다

김남조 선생은 차창 너머로 내다보며

바닷물이 정말 짜냐고 그러신다

젊은 시인 하나가 신발 벗고 달려가

숫된 아침 파도 한 움큼을 모셔온다

놀랍지만 누구에게나 신성한 의식 같은

첫 경험이라는 게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며

고운 사람 하나 숨겨두고 싶을 만큼

작고 예쁜 어촌 마을을 더듬어 돌아나온다

일행 중 누군가가 탄식하듯 바람에 눕는

을숙도 갈대숲이 보고 싶단다

생각느니 바람처럼 살아온 나날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새들이 깃든

아직 처녀인 갈대숲을 눕혀 본 일이 없다

 

 

 

바람에게

정희성

 

바람에게 그리고 긴 긴 겨울밤이 오면 내 스스로 걸어 나가리라

흰 눈 덮인 들숲의 가막새 까욱대던 거기 바람을 찾아 가고 또 가리라

뼈로서 겨울밤을 지새우리니 뼈와 바람만이 서식(棲息)하는 그곳을 나는 믿는다

어디서 괴벗은 바람이 골수에 사무쳐서 외오곰 죽은 혼이 내는 목소리도 아주 잘 들려오는구나

나는 믿는다 바람을 바람이 내는 곧은 소리를 거기 흰 눈뿐인 들판을 내 가고야 말리니

말 탄 바람이여 이 밤에 나를 태워 아프게 아프게 채찍을 쳐라

 

 

 

바람의 노래

정희성

 

한라산 꼭대기에 올라

귀 기울여보라 제주에서는

바람도 파도 소리를 낼 줄 안다

여기는 천상에 속한 나라

누구든 이곳에 오려거든

무기를 버리고 오라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노래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

바람이 노래하는 이 장엄!

하늘이 바다고 바다가 하늘이다

 

 

 

바위를 밀쳐내다

정희성

 

꿈에라도 그대를 생각하는 날 아침이면

기운이 넘쳐난다

기운이 넘쳐 바위라도 뚫을 것 같다

그런 날은 위험한 짐승 같은 내가 무서워

바위 근처에 안 간다

 

 

 

밝은 낙엽

정희성

 

가파를 것도 없는 산길 오르다가

돌부리에 걸려 내 몸 패대기쳤습니다

단풍잎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지만

넘어진 김에 한참 주저앉아 있었지요

때 이르게 물든 나뭇잎 하나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병이 들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이

누선(淚腺)을 건드리며 떨어져내립니다

언젠가 나도 삶을 송두리째

패대기쳐야 할 날이 오겠지요

그날을 위해 저 나뭇잎의 조용한

착지법을 익히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자면 욕망으로 가득 찬 육신과 영혼의

무게를 한참은 더 덜어내야 하겠지만요

 

 

 

백씨(白氏)의 뼈

정희성

 

죽은 백씨(白氏)의 뼈 속에서

휘파람 소리 들린다

그 생전에 불어 못 본 휘파람을

비바람이 대신 분다

죽어 오랜 김대건 신부(神父)의 뼈도 뼈지만

개뿔도 믿을 게 없던

그의 해골 악문 잇사이에서도

바람은 곧잘 치음(齒音)을 낸다

엊그제 들에서 주워 온 그 흰 뼈가

가슴 어디 붙어 있던 것인지

어느 쪽을 불어도 휘파람 소리를 내는

신기한 백씨(白氏)의 뼈

살아 못 분 휘파람을

죽어 전신(全身)으로 부느니 백씨(白氏)여

 

 

 

버스를 기다리며

정희성

 

주머니를 뒤져서 동전 나온다

100원을 뒤집으니 세종대왕 나오고

50원 뒤집으니 벼 이삭이 나온다

퇴근길 버스 정거장에서 동전을 뒤집으며

앞에 선 여자 궁둥이도 훔쳐보며

동전밖에 없어 갈곳은 없고

갈 곳 없어 아득하여라

조정에선 이 좋은 날 무엇을 할까

나으리들은 배포가 커서 끄떡도 않는데

신문에 나온 여공의 죽음을 보고

동전밖에 없는 제 자신도 잃은 채

울먹이는 못난 나는 얼마나 잦으냐

말 한마디 큰 소리로 못하고

땡볕에 서서 동전이나 뒤집으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다보탑 뒤집으니 10원 나온다

주머니를 뒤집으니 먼지 나오고

먼지를 뒤집으면 뭐가 나올까

생각하며 땡볕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무엇이든 한 번 뒤집기만 하면

다른 것이 나오는 게 신기해서

일없이 일없이 동전을 뒤집는다

 

 

 

변신

정희성

 

1

고전의 어느 숲을 지나온 강물 위에

지금은 무섭도록 헤진 얼굴이 일렁이는데

이것이 글쎄 누구의 얼굴인지

이 강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몸을 던지면서

생각해 보았는지 몰라.

죽은 사람과 죽지 않은 사람

담담한 얼굴을 하고 흘러서는

그렇게 쉽사리 돌아오지는 않을 것

 

어느 후광을 따라 나섰을까 조용히

등에 칠성판을 깔고 별이나 헤고 있는지

내성의 깊이로 꺼져 들어간 강

그 가늠할 수 없는 깊이에서

우리를 붙잡는 무슨 힘이라도 있는가

내가 왜 빠지고 싶은지 나도 몰라

 

「바빌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워리가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노라

 

 

2

침착한 시간의 녹슨 고기를 낚아

빛나는 면경(面鏡)처럼 들여다볼라치면 몰라

낯설어진 우리의 얼굴을 우리가 몰라

가르쳐 준 것도 귀담아들은 것도 아닌데

부대낀 언덕 저편에서 누군가 그런다지

니힐 니힐리아 부르며 그런다지

 

진주 남강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놓은

보리알 같이 소박한 내 거문고 소리여

 

이 어지러운 강변의 오오 산 죽음

그대 여인이여,

잘리운 손목과 굳은 혀를 들어

지금은 돌아와 노래할 때라

이렇게 불러보는 나의 노래로

너를 파묻고 돌아선 밤물결은 뒤채고

삶은 또 왜 이다지 잔혹하게

나를 휘어잡는 것이냐

 

 

3

광명은 다시 어둠 속에서

신(神) 지핀 누이마냥 난무하던 적과

이방인의 자취를 흡수해 가버렸지만

빛은 언제나 음영을 거느리고 찾아들 듯

기껏 우리가 찾은 적은 우리의 벗

어둠은 항상

새로운 형태로 인식되어야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속에서 죽었을까

신화와 현실의 어중간에서 우리는 실신한다.

 

빛이 외면한 땅속 깊이 욕먕의 불을 넣어

그 무던한 밤과 어둠을 지킨

우리가 미련한 짐승의 자식인 탓일까

마늘과 쑥 대신 풀뿌리 나무껍질을 씹으며

너무도 오랫동안 강인(강인)한 여력으로

우리는 우리 속에서 우리들과 싸워왔다.

우리?

눈물이 나도록 슬픈 상징이여

 

 

4

한 번 싱싱하게 핀 적이 없는 잎들의 내부엔

여름 같은 이 겨울은 깨칠 수액(樹液)이 진(盡)한 채

온갖 시새움에 서슬이 시퍼런 신경의 가지 끝

무고(無辜)했던 내 백성의 머리,

피로에 겨운 스스로의 무게를 가누지 못해

저렇게 숱한 나뭇잎으로

잊고 싶은, 잊고 싶은 기억들이 나부낀다.

 

흡사 성 밑의 가등(街燈), 미열이 이는 기류 속으로

몇 마리의 나방이가 어둠을 털며 날아들 듯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무기력하게 만들었는가

죄 많은 왕(王)의 거대한 무덤처럼

하늘 가상이로 들어난 능선 그 밑에

살아남은 주검들의 형상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또 향나무 제기(祭器)를 닦고 있다.

망우리 주목나무 숲에서 슬픔이 살아 오른다.

시름 시름 시름이 살아 오른다.

 

 

5

그리고 사월이여, 내 자식은 거리에서 죽었다.

죽은 이방 시인의 싯귀가

한국에서 더 절실해지는

사월에, 라일락 나무숲 독한 향기 속에.

 

뒤척이는 물결 속에선 총탄이 박힌 머리가

조국이 무섭다고 중얼거리며 떠오르고

목선의 짐대가 바람결에 부딪치며

그 옛날 의로운 죽음을 말하고 있을 뿐

아무도 그것이 조국의 참된 얼굴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죽은 혼령들이 속돌에 스민 듯

시가에는 해마다 투석전이 벌어지고

최루타이 없더라도 사월이여,

스스로 우리가 울어야 할 것을 아는데도

 

 

6

혁명, 오 너의 엇갈린 문맥(文脈).

금(金)빛 게으른 소가 알 수 없는 음절을 반추하고

사사미 짐대예 올아셔 해금(奚琴)을 혀거를 드로라

 

데모가 나면 어머니 학교에 안 가도 된대요

눈이 아픈 걸요 다시 곰이나 될까 봐

 

눈을 뺀다, 빌어라, 빌어라, 눈을 뺀다

 

어쩌면 종말 같고 어쩌면 시작 같은 아침

오늘도 혁명, 얄리얄리 출근을 안 해도 되는 날

오늘의 메뉴는 마늘과 쑥

또 한 번 당신은 변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청 청사 위 비둘기 집은 위태로운 아이러니,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 안에서 목 잘린

사슴의 이야기를 전설이라고 생각할 것인지

 

 

7

밤새 우리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 다만 그것을 모르는 채

일상의 구획된 거리를 빠져나가며

나날이 개편되는 우리들,

석간의, 늘 위태한 입구에서

집적(集積)의 우울한 낱말을 손에 쥔다.

 

신라의 한 조각 불투명한 기왓장으로

사가는 매양 역사를 들여다보지만

곱게 미칠 수 없던 시대의

그 갈증 나는 아이들은 지금

소리 없는 전쟁의 기류를 타고

하얀 껍데기처럼 흐느끼고 있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밤이 기슭에 닿도록 석굴암 술집에서

마신 술을 퇴계로에서 토하고 나서

십자가에 허수아비 얼굴을 걸어놓은 사람들.

탄흔이 가신 피부 속으로 황달(黃疸)이 스민 듯

잎 진 나무들 새로 먼 해원을 바라보며

영혼의 죽은 나무 이파리를 들춘다.

이것이 주구의 얼굴인가.

누구의 얼굴이어야 하는가.

 

 

8

글쎄, 이것이 정말 거짓말인가 몰라

어항 속에서는 물고기가 익사했다는데

어느 날 우리가 우리 속에서 돌연히 죽을지

우리들의 시대에 아이들이 그런다지

니힐 니힐리아 부르며 그런다지

가르쳐 준 것도 귀담아들은 것도 아닌데

노래는 즐겁다, 노래는 끝났다 그런다지

그대 오른손이 다시금 수금(手琴 : 아코디언)을 쥐더라도

여인이여,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마디를 풀고 흐를 수 없는 우리,

웃기는 웃어도

웃으라면 내가 그렇게 웃기는 하여도

시시로 파고드는 시름의 주둥이를

종이 접듯 안으로 사릴 줄 아는 슬기로

슬픔을 접어 하늘에다 날릴 날이

다시 노래한 날이 있을까 몰라.

 

 

 

병상에서

정희성

 

실패한 자의 전기를 읽는다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실패를 위해

누군가 부정하겠지만

너는 부정을 위해서 시를 쓴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 시를 쓴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 강이 흐른다

수술을 거부한 너에게

의사는 죽음을 경고했지만

너는 믿지 않는다

믿지 않는 게 실수겠지만

너는 예언하지 않는다

예언하지 않아도 죽음은 다가오고

예언하지 않아도 강이 흐른다

네 죽음은 하나의 실수에 그치겠지만

밖에는 실패하려고 더 큰 강이 흐른다

 

 

 

보리

정희성 

 

누가 뿌린 씨이기에

이렇게 황막한 들에 피는가

푸른 잎에 선혈(鮮血) 솟구치는

야생(野生)의 보리

냉담한 겨울, 얼었던 땅

속에서 내미는 네 외로운 손을 잡고

입김에 입김을 보태느니

그리도 오랜 세월

여윈 허리 보듬고

고개에서 고개에서 그리던

한낱 보리알같이 소박한 소망이여

피어라 꽃

모진 풍상(風霜) 속에서

오히려 비수 같던 너의 뜻으로

가야 할 세월이 간 후

순금의 冠을 얹고도

도리어 고즈넉할

너 양식(良識)의 이삭아

 

 

 

봄날

정희성

 

날 좋다 햇빛 알갱이가 다 보이네

하늘에서 해가 내려 알을 슬어놓은 듯

볕 바랜 이불호청 해 냄새 난다

꺄르르 가시나들 웃음소리에

울밑에 봉선화도 발돋움하겠네

 

 

 

부끄러워라

정희성

 

부끄러워라

더 이상 분노할 수 없다면

내 영혼 죽어 있는 것 아니냐

완장 찬 졸개들이 설쳐대는

더러운 시대에 저항도 못 한 채

뭘 더 바랄 게 있어 눈치를 보고

비굴한 웃음 흘리는 것이냐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이제 그만

주민등록을 말소하고

차라리 파락호처럼 떠나버리자

아아 새들도 세상을 뜨는데*

좀비들만 지상에 남아 있구나

 

* 황지우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불망기(不忘記)

정희성

 

내 조국은 식민지

일찌기 이방인이 지배하던 땅에 태어나

지금은 옛 전우가 다스리는 나라

나는 주인이 아니다

어쩌다 아비가 물려준 남루와

목숨뿐

나의 잠은 불편하다

나는 안다 우리들 잠 속의 포르말린 냄새를

잠들 수 없는 내 친구들의 죽음을

죽음 속의 꿈을

그런데 꿈에는 압핀이 꽂혀 있다

 

그렇다, 조국은 우리에게 노예를 가르쳤다

꿈의 노예를,

나는 안다 이 엄청난 신화를

뼈가 배반한 살, 살이 배반한 뼈를

뼈와 살 사이

이질적인 꿈

꿈의 전쟁,

그런데 우리는 갇혀 있다

신화와 현실의 어중간

포르말린 냄새나는 꿈속 깊이

 

사월에, 내 친구는 사살당했다

나는 기억한다 국민학교 시절

그가 책 읽던 소리,

그 죽은 지 십여년

책을 펴면 포르말린 냄새가 난다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면

죽어서 자유로운 그의 목소리

그런데 여기엔 얼굴이 없다

눈도, 코도, 입도, 귀도,

그런데

소리만 들린다

오 하느님, 하는 소리만

생각난다

어젯밤 붙잡혀간 시인의 넋두리,

그는 부정한다고 했다

세번도 더,

조국의 관형사여

제 이름에 붙은 관형사

시인의 관이 무겁다고

머리를 떨구고

이제는 아름다운 말도 가락도 다 잊었다던

그가 돌아오지 않는 밤이 무섭다

그가 돌아올 수 없는 땅이 무섭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 땅에서 사는 내가 무섭다

그러나 나는 결코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

오, 기억하게 하라

우리들의 이름으로 불러보는

자유, 나의 조국아

 

 

 

불안한 신호음

정희성

 

사람들 품속에서 신호음이 울린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리는 저 소리

나는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지 않지만

남의 안주머니에서 들리는 신호음이

이상하게도 나를 불안에 떨게 한다

어머니가 암 수술을 받다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고

부도를 낸 동생의 빚보증 때문에

봉급을 차압해간 대한보증보험의

이진우가 거는 전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잘못하면 이 겨울에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식구들이 거리로 나앉을지도 모르는데

속수무책인 나는 전화기 옆에 있기가 싫어서

한가로운 사람처럼 거리를 쏘다니지만

내 마음과 영혼까지 압류해간

불안한 신호음은 끝까지 나를 따라다닌다

어디로 가야 하나 저승에 가면 거기에도

나를 찾는 전화가 와 있을지 모른다

'여보세요? 정희성씨 거기 와 있나요?'

'그런 사람 없다고 해. 오늘 아침에 이승에 갔다고 그래.

이승으로 가서 다시 안 온다고 그래.'

 

 

 

불을 지피며

정희성

 

오늘 밤 벌판에 나가

나는 불을 지펴야 한다

이곳에 살기 위하여

목숨 바친 친구 머리맡에

불을 지펴야 한다

무덤이 그 영혼을 어떻게 가두었는지

내 눈으로 보리라

얼음 위에 불을 피우고

얼어붙은 그의 피가

내 몸속에 어떻게 타오르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곳에 살기 위하여

어째서 그의 혼이 밤마다

언 땅속에서 탈출하며

죽음과 삶이 어떤 형식으로

만날 수 있는가를

 

 

 

붉은 꽃

정희성

 

어디쯤일까 어디쯤일까

그리움 가는 길에 발돋음하고

누구를 향한 마음에

이렇게 몸부림쳐 붉은 꽃일까

먼발치로 사라지는 세월을 두고

한세상 마당귀에 불을 지르네

 

 

 

정희성

 

비는 내려서 적신다 젖을 수 없는 것을 비는 내려서 혼자 울기도 하다가 혼자 울 수 없는 것의 속을 질러 적시기도 하다가

비는 내려서 뼈만 남는다 불편한 우리들의 잠은 무너진다 비는 내려서 메마른 시대의 죽어서 외로운 넋을 타고 비는 내려서 그날 죽은 시민과 무너진 지붕에 내린 비는 김시장(市長)만 적신 것 아니다 비는 내려서 시민은 죽고 비는 내려서 강변에서 살해된 여자의 피, 그 피는 내려서 그 여자 오빠만 적실 것 아니다 비는 내려서 피는 내려서 긴긴 여름 한철 억수로 내려서 조국의 낡은 지붕을 뚫고 비는 내려서

적신다 젖을 수 없는 것을 비는 내려서 혼자 울기도 하다가 혼자 울 수 없는 것의 속을 질러 적시기도 하다가

저 혼자 젖지 않은 비 하나가

벼랑으로 가는 길을 묻고 있다

 

 

 

비무장지대(非武裝地帶)

정희성 

 

전쟁의 허위와

곤혹한 잔해들이

풀섶에서

녹슨 쇠붙이처럼

썩은 숨을 내쉰다

피를 부르며 일어서던 능선과

저 천연덕스런 남강의 줄기,

아침마다 나는

그 허위의 목소리를 듣는다

비무장지대의

빈틈없는 공백은

콘크리트처럼 굳어서

벽이 되고

순수의 이슬과 풀잎은

도처에서 위선이 되고 역설이 된다

저 무한사정의

모든 총부리가 겨냥한 가슴은

그러나 진실한 과녁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촌충의 마디 같은

전쟁의 시간들은

구멍난 철모 속에 엎드려서

쥐새끼처럼 내다보고

나는 그 섬찍한 눈알 속에서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다시 찾는다

 

 

 

비 오는 날

정희성

 

비가 내리고

물꼬가 터진다

풀잎은 저희끼리 젖어

뺨을 비빈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고

터진 물꼬를 바라보다가

들판을 가로지른 서울행

기적소리에 놀란 아낙네

가슴에 묻은 흙은 흙

흙에서는 흙냄새가 난다

백번 천번 아니라고 되뇌어도

공사판서 죽어 온 아들은 죽은 아들

터진 물꼬는 터진 물꼬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면

풀잎은 저희끼리 흔들릴 뿐이다

 

 

 

사랑

정희성

 

사랑아 나는 눈이 멀었다

멀어서

비로소 그대가 보인다

그러나 사랑아

나도 죄를 짓고 싶다

바람 몰래 꽃잎 만나고 오듯

참 맑은 시냇물에 봄비 설레듯

 

 

 

사랑 사설(辭說)

정희성

 

가여운 입술이나 손끝으로 매만질 수 없는 사랑의 깊이를

더러는 우리가 어둑한 심장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을 왜 몰라

오늘따라 어설피 흰 살점의 눈내리고 이 겨울 우리네 마음같이 어두울

뽕나무 스산한 가지 설운 표정을 목로에서나 달래는 심정으로 훼훼

탁한 술잔을 흔들다가는 시나브로 눈발이 흩날리는 거리로 나서보지마는

언제 우리네 겨울이 인정같이야 따뜻한 것가 어두운 나무에서 반짝이는 눈빛같이야

어차피 반짝일 수 없는 우리네 마음이 아닌 것가

미쳐간 누이의 치마폭에 환히 빛나던 싸리꽃 등속의 그 꾀죄죄한 웃음결만치도

밝게 웃을 수 없다면야 순네의 슬픔에는 순네의 슬픔에 맞는 가락지

우리 모두가 우리네 슬픔에 맞는 사랑을 찾아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나서볼 일이다

 

 

 

사랑아 나는 (원제 : 사랑)

정희성

 

사랑아 나는 눈이 멀었다

멀어서

비로소 그대가 보인다

그러나 사랑아

나도 죄를 짓고 싶다

바람 몰래 꽃잎 만나고 오듯

참 맑은 시냇물에 봄비 설레듯

 

 

 

사월에

정희성

 

보이지 않는 것은 죽음만이 아니다

굳이 돌에 새긴 피

그 시절의 무덤을 홀로

지키고 있는 것은 석탑뿐

이 땅의 정처없는 넋이

다만 풀 가운데 누워

풀로서 자라게 한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룬 것은 없고

죽은 자가 또다시 무엇을 이루겠느냐

봄이 오면 속절없이 찾는 자 하나를

젖은 눈물에 다시 젖게 하려느냐

사월이여

 

 

 

산화(散花)

정희성

 

복사꽃 환히 지는 남도 봄길을

한 사람 그리며 내 홀로 가네

그대 뺨에 어렸던 고운 꽃빛이

꿈결인 듯 아련히 되살아나네

 

 

 

새 그리고 햇빛

정희성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을 보느니

물새 몇 마리 끼룩대며 날아간

어두운 하늘 저 끝에

붉은 해가 솟는다

이상도 해라

해가 해로 보이지 않고

구멍으로 보이느니

저 세상 어드메서

새들은 찬란한 빛무리가 되어

이승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새벽노을

정희성

 

어제 못다 운 사람이

성산포에 앉아 있나 보다.

 

따라 울다 못 떠난 사람이

이리 붉은 눈시울로 같이 오나 보다.

 

세상 사람들 억울한 일 한 가지씩 토해 놓아

성산포 오늘 많이 아프다.

 

 

 

새벽밥

정희성

 

충무로 사색기 인쇄소 골목

일방통행 갓길에 비켜서서

도회지의 허기가 밥때를

기다리고 있다

 

어린 과부와 산(山)만한 아들이

날치알을 비벼 주먹밥을 내주는 골목집

문이 열리자 목숨 같은 훈기가

비린 바다처럼 밀려 나왔다.

 

어묵 한 그릇 진밥에도 이가 시리다

껍질을 벗을 때가 되었나 보다

근력이 떨어진 인쇄공과 겸상을 물리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아나키스트 평전

십일 포인트 무게로 말라가는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마디진 생을 말아 쥔다

 

새벽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복권방으로 몰려가는 서슬에

길비둘기들이 눈발처럼 날아올랐고

이 해묵은 도시의 시장이 나와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화술로

시민 중심 행복 도시를 팔고 있다

 

밤새 바다는 안녕히 열렸을까

 

 

 

새벽이 오기까지는

정희성

 

새벽이 오기 전에

나는 머리를 감아야 한다

한탄강 청청한 얼음을 깨서

얼음 밑에 흐르는 물을 마시고

새벽이 오기 전엔

얼음보다 서늘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새벽이 오기까지는

저 어질머리 어둠에 불을 지피고

타오르는 불꽃을 확인해야 한다

얼음 위에 불을 피우고

불보다 뜨거운 마음을 달궈야 한다

새벽이 오기까지는

 

나는 보리라

얼음 위에서 어떻게 불꽃이 튀는가를

겨울의 어둠과 싸우기 위해

동지들의 무참한 죽음과

보다 값진 사랑과

우리들의 피맺힌 자유를 위해

 

나는 보고 또 보리라

불이 어떻게 그대와 나의

얼어붙은 가슴을 뜨겁게 하고

저 막막하고 어두운 겨울 벌판에서

새벽이 어떻게 말달려 오는가를

아아 눈보라 채찍 쳐

새벽이 어떻게 말달려 오는가를

 

 

 

새벽하늘

정희성

 

감나무 가지가 찢어질 듯

달이 걸려 있더니

달은 가고

빈 하늘만 남아

감나무 모양으로 금이 가 있다

고구려 적 무덤 속에서

三足烏 한마리

푸드덕 하늘 가르며 날아오를 것 같은

새벽 어스름

즈믄해여

즈믄해여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정희성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 끝나고 신부님한테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 사러 왔냐고

우리 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 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서경별곡

정희성

 

대동강 흘러서 내려가는 곳

풀빛 푸른 강 언덕 아니라도

평양서 멀지 않은 강가 어디쯤

정지상도 거기 서 있었으리

상사화 그러안은 모향산 보현사에

열없이 앉아 님 생각하다가

돌아오며 무심코 외워보는 진달래꽃

김준태가 들었는지 저어기가 영변이라고

가리키는 들녘 멀리 노을이 지데

삼수는 어디고 갑산은 어디일까

삼수갑산 내 못 가고

굳고 정한 갈매나무

그 드물다는 나무를 생각하며 하이야니

눈을 맞고 서 있었을 백석

남신의주는 너무나 먼데

청천강 참 맑은 물 흘러서 가데

 

 

 

서울역 1998

정희성

 

틈만 나면 서울역에 갔다

침침한 지하도 한구석에는

지쳐 쓰러진 사람들

죄 많은 내가 누워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이 먼저 와 있다

이 꼴을 볼라고 작년에

하느님이 나를 인도에 보내셨던지

북인도가 아프게 꿈에 보였다

노란 겨자꽃이 한창이었다

마알간 거울 속처럼

이상하게도 세상은 고요했고

말을 해도 소리가 되지 않았다

 

 

 

석탄

정희성

 

석탄은 묻어 있다

추억에 꿈에 어두운 지붕 위에

죽음에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석탄은 묻어 있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몸부림

더 큰 사랑을 꿈꾸는 마음 위에

석탄은 묻어 있다

갔다 오마 하고 언제나처럼

한마디 무뚝뚝한 말을 남긴 채

그이는 가서 돌아오지 않고

몇 푼 안 되는 보상금이 되어

탄광에서 죽어 온 남편의

피 묻은 작업복과

마을의 키 큰 사철나무 잎에도

석탄은 묻어 있다

간다 울지 마라

시래기가 걸린 응달진 벽

마을로 가는 신작로

바람을 맞으며 떠나는 이웃들의

무겁고 정처 없는 발길에

뻣뻣한 손바닥에

눈물 어린 눈에

펄럭이는 치마에 바람에

석탄은 묻어 있다

봄이 오면 푸르러질 저 보리밭

보리밭의 흰 눈에도

어린 자식들의 피 섞인 기침에도

뺨에 얼룩진 눈물에도

석탄은 묻어 있다

가마 어디든 못 가랴

저 캄캄한 석탄더미 너머

가도 가도 척박한 이 땅

가다가 쓰러져 석탄이 되더라도

이것들 얼굴에 더 이상은

석탄을 묻힐 수 없다

울지 마라 간다

가다가 쓰러져 석탄이 되더라도

이것들 어린 꿈에 더는

석탄을 묻힐 수 없다

 

 

 

선물

정희성

 

나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에게 남겨진 모든 시간을

내 심장이 멎은 뒤에도

두근대며 흘러갈 시간을

친구가 눈을 감던 그날

나 문득 두려움 느꼈네

이 사랑 영원할 수 있을까

나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 죽은 뒤에도 영원할 시간을

그 끝 모를 사랑의 맹서를

 

 

 

섬광

정희성

 

건너편 승강장의 그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긴 터널을 뚫고 온 지하철이 잠시 머물다 떠나가고

그대 미소로이 서 있던 자리

섬광처럼 꽃이 피는 걸 보았다

 

 

 

세상이 달라졌다

정희성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이들에겐 밥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 낮의 한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세한도(歲寒圖)

정희성

 

1. 송(松) - 완당의 그림을 그리며

참솔가지 몇 개로 견디고 있다

완당(阮堂)이여

붓까지 얼었던가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추위가 이 속에도 있고

누구나 마른 소나무 한 그루로

이 겨울을 서 있어야 한다

 

2. 죽(竹)

참대 한 줄기

수식어도 사양했다

겨울이여 생각할수록

주어는 외롭고

아아, 외쳐 불러

느낌표가 되어 있다

 

 

 

소나기

정희성

 

날 기울고 소소리바람 불어 구름 엉키며

천둥 번개 비바람 몰아쳐 천지를 휩쓸어오는데

앞산 키 큰 미루나무 숲이 환호작약

미친 듯 몸 뒤채며 雲雨의 정 나누고 있다

 

나도 벌거벗고 벼락 맞으러 달려 나가고 싶다

 

 

 

소년

정희성

 

신들의 도시 앙코르톰

소년 하나가 물이 말라가는 못에서 연꽃 한 송이를 꺾어 들고 나온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내 말을 못 알아들은 탓일까

놀라 돌아다보는 소년의 눈에 언뜻 비친 눈부처!

 

* 앙코르톰은 자야바르만 7세가 세운 거대한 도성이다.

 

 

 

쇠를 치면서

정희성

 

쇠를 친다

이 망치로 못을 치고 바위를 치고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실한 팔뚝 하나로 땀투성이 온몸으로

이 세상 아리고 쓰린 담금질 받으며

우그러진 쇠를 치던 용칠이

망치 하나 손에 들면 신이 나서

문고리 돌쩌귀 연탄집게 칼 낫

온갖 잡것 다 만들던 요술쟁이

고향서 올라온 봉제공장 분이년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다던 용칠이

떡을 치고 싶으면 용두질치며

어서 돈벌어 결혼하겠다던 용칠이

밀린 월급 달라고 주인 멱살 잡고

울분 터뜨려 제 손 찍던 용칠이

펄펄 끓는 쇳물에 팔을 먹힌 용칠이

송두리째 먹히고 떠나버린 용칠이

용칠이 생각을 하며 쇠를 친다

나 혼자 대장간에 남아서

고향 멀리 두고 온 어머니를 생각하며

식모살이 떠났다는 누이를 생각하며

팔려가던 소를 생각하며

추운 만주벌에서 죽었다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떡을 칠 놈의 세상, 골백번 생각해도

이 망치로 이 팔뚝으로 내려칠 것은

쇠가 아니라고 말 못 하는 바위가 아니라고

문고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수급뷸류월(水急不流月)

정희성

 

단양 신선생댁

벽에 걸린 글씨 한폭

그게 누구 필적인지 금세 알았네

수급불류월(水急不流月)

무딘 듯 흐트러짐 없는 글귀

누구의 문자인지 알 수 없으나

구선생이 썼으면 구선생 글이지

더 알려고 할 것도 없네

글씨도 글씨려니와 글 뜻까지도

구선생이 아니고는 쓸 수 없는 글

세월은 물같이 덧없다지만

오늘 밤도 달이 떠 물에 어리니

시절 근심하는 글쟁이끼리

단양 천변 어디쯤 자리 잡고서

술잔 들어 생신을 축하하고저

 

 

 

정희성

 

오늘 밤 이 술잔에 나를 담으려 한다

술로써는 취하지도 씻기지도 않을

내 피의 길고 긴 어둠길

서리서리 담아

혼신의 술을 빚고자 한다

취한 자에게 길이 물려줄 것은 이 술뿐

마시는 자여 보라

여적(餘適) 같은 내 몸이 새로 빚은 술

이 피의 즐거움, 이 피의 서러움으로

씻지 못할 삶을 씻어 밝히고자 한다

 

 

 

술꾼

정희성

 

겨울에도 핫옷 한 벌 없이

산동네 사는 막노동꾼 이씨

하루 벌어 하루 먹는다지만

식솔이 없어 홀가분하단다

술에 취해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낯선 사람 만나도 알은체하고

남의 술상 앞에서 입맛 다신다

술 먹을 돈 있으면 옷이나 사 입지

그게 무슨 꼴이냐고 혀를 차면

빨래 해 줄 사람도 없는 판에

속소캐나 놓으면 그만이지

겉소캐가 다 뭐냐고 웃어넘긴다

 

 

 

정희성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과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숲속에 서서

정희성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때

나는 숲을 찾는다

숲에 가서

나무와 풀잎의 말을 듣는다

무언가 수런대는 그들의 목소리를

알 수 없어도

나는 그들의 은유(隱喩)를 이해할 것 같다.

이슬 속에 지는 달과

그들의 신화를,

이슬 속에 뜨는 해와

그들의 역사를,

그들의 신선한 의인법을 나는 알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기에,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울면서 두려워하면서 한없이

한없이 여기 서 있다

우리들의 운명을 이끄는

뜨겁고 눈물겨운 여유를 찾아

여기 숲속에 서서

 

 

 

시(詩)가 오는 새벽

정희성

 

그대, 알알이 고운 시 이삭 물고 와

잠결에 떨구고 가는 새벽

푸드덕

새 소리에 놀란 나뭇잎

이슬을 털고

빛무리에 싸여 눈뜬

내 이마 서늘하다

 

 

 

시(詩)를 찾아서

정희성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 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가지지 못한 채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자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발표 안 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 한다

시를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시인 본색

정희성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

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 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서도 오골계(烏骨鷄)!

 

 

 

씻김

정희성

 

물에서 나와 산으로 쫓긴 영산

태평연월에 총 맞아 죽은 영산

저승 가다 먹으려고

도토리 한 알 손에 쥐고

올 같은 풍년에 굶어 죽은 영산

가랑잎 뒤집 쓰고 산에서 죽은 영산

애면글면 살겠다고

버섯 따다 죽은 영산

칠성산 총질 끝에 쓰러져 간 젊은 영산

넋이야 넋이로다 죽은 영산 죽인 영산

모두 다 우리 동포 아니시리

우리 형제 아니시리

 

 

 

아가(雅歌)

정희성

 

아, 제발 그대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

깃털처럼 가벼이 날아가 그대의 젖가슴에 닿을 수 있다면

스완의 목같이 늘씬한 그대 허리에 손을 얹고

건반에 뛰노는 손가락이 되어 그대를 연주할 수 있다면

오 하느님, 딱 한 번 해봤으면!

꿈에라도

벌거벗은 이 꿈 들키지 말았으면!

 

* 성경 <아가서>의 앞부분

 

 

 

아누비스의 거울

정희성

 

신전(神殿) 뒤편으로 기울어지듯 사라지는 한 사내의 쓸쓸한 뒷모습이 보였다 문명은 몰락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사라진 문명을 팔아먹고 사는 집권자는 예나 지금이나 파라오이고 운명처럼 혹은 채찍 자국처럼 목도질로 어깨가 무너져내린 사내가 오랜 세기의 해와 달이 빛을 잃도록 혈거시대인으로 살고 있다 서녘에 잠든 영혼아 그대의 심장이 깃털보다 가벼울까 문명에 바치는 나의 노래는 노래가 되지 않는구나

 

 

 

아버님 말씀

정희성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

무장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대고

옥신각신 밀리다가 관악에서도

안암동에서도 신촌에서도 광주에서도

수백 명 학생들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피 묻은 작업복으로 밤늦게

술 취해 돌아온 너를 보고 애비는

말 못하고 문간에 서서 눈시울만 뜨겁구나

반갑고 서럽구나

평생을 발붙이고 살아온 터전에서

아들아 너를 보고 편하게 살라 하면

도둑놈이 되라는 말이 되고

애비같이 구차하게 살라는 말이 되는

이 땅의 논리가 무서워서

애비는 입을 다물었다마는

이렇다 하게 사는 애비 친구들도

평생을 살붙이고 살아온 늙은 네 애미까지도

이젠 이 애비의 무능한 경제를

대놓고 비웃을 줄 알고 더 이상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구나

그렇다 아들아, 실패한 애비로서

다 늙어 여기저기 공사판을 기웃대며

자식새끼들 벌어먹이느라 눈치보는

이 땅의 가난한 백성으로서

그래도 나는 할 말은 해야겠다

아들아, 행여 가난에 주눅들지 말고

미운 놈 미워할 줄 알고

부디 네 불행을 운명으로 알지 마라

가난하고 떳떳하게 사는 이웃과

네가 언제나 한 몸임을 잊지 말고

그들이 네 나라임을 잊지 말아라

아직도 돌을 들고

피를 흘리는 내 아들아

 

 

 

아버님의 안경

정희성

 

돌아가신 아버님이 꿈에 나타나서

눈이 침침해 세상일이 안 보인다고

내 안경 어디 있냐고 하신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나는

설합에 넣어둔 안경을 찾아

아버님 무덤 앞에 갖다 놓고

그 옆에 조간신문도 한 장 놓아 드리고

아버님, 잘 보이십니까

아버님, 세상일이 뭐 좀 보이는 게 있습니까

머리 조아려 울고 울었다

 

 

 

애월(涯月)*

정희성

 

들은 적이 있는가

달이 숨쉬는 소리

애월 밤바다에 가서

나는 보았네

들숨 날숨 넘실대며

가슴 차오르는 그리움으로

물 미는 소리

물 써는 소리

오오 그대는 머언 어느 하늘가에서

이렇게 내 마음 출렁이게 하나

 

*북제주군에 있는 마을 이름.

 

 

 

야망

정희성

 

무슨 야망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닌데

내 마음 이렇게 무거운 것이냐

벗은 나더러 이념을 그만 내려놓으라 한다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도 하나하나

버려야 할 나이가 되지 않았느냐고

아무 생각 없이 거드렁거리며 놀다 가자고

그럴 리도 없겠지만 청문회에 불려나가

재산이 몇푼 안된다는 게 들통나서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냐고 추궁당할까봐

걱정인 나더러 별걱정 다한다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더러

무엇을 더 내려놓으라고

그것이 팔자고 자기 몫의 십자가라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하며

이 세상 소풍 끝내고 돌아가는

천상병 시인만큼 가볍지는 않은 걸 보면

무언가 내 마음에서 더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기는 있는지도 모르지만

 

 

 

양말 깁는 어머니

정희성

 

어머니가 흐릿한 불빛 아래서 양말 뒤축에 알전구를 끼워 구멍 난 양말을 깁고 있는 동안 나는 전과 지도서를 펴놓고 어머니 옆에 배를 깔고 엎드려 공부하며 대청마루 멋쟁이 젊은 여자들과 춤추느라고 아버지가 틀어놓은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를 따라 부르는데 어머니는 얘야 어른들이나 하는 그런 노래는 배워서 어디다 쓴다냐 느이 아부지 양말 또 구멍 났겠다 그러신다

 

 

 

어두운 지하도 입구에 서서

정희성

 

저녁 무렵, 박수갈채로 날아오르는

저 비둘기 떼의 깃 치는 소리

광목 폭 찢어 펄럭이며

피 묻은 팔뚝 함께 일어서

만세 부르던 이 광장

길을 걸으며 나는 늘

역사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종합청사 너머로 해가 기울면

조선총독부 그늘에 잠긴

옛 궁성의 우울한 담 밑에는

워키토키로 주고받는 몇 마디 암호와

군가와 호루라기와 발자국 소리

나는 듣는다, 이상하게 오늘은

술도 안 취한다던 친구의 말을

신문사를 가리키며 껄껄대던 그 웃음을

팔엔 듯 심창엔 듯 피가 솟구치고

솟구쳐 부서지는 분수 물소리

저녁 무렵, 박수갈채로 날아오르는

저 비둘기 떼 깃 치는 소리 들으며

나는 침침한 지하도 입구에 서서

어디론가 끝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을 본다

건너편 호텔 앞에는 몇 대의 자동차

길에는 굶주린 사람 하나 쓰러져

화단의 진달래가 더욱 붉다.

 

 

 

어둠 속에서

정희성

 

빛 안에 어둠이 있었네

불을 끄자

어둠이 그 모습을 드러냈네

집은 조용했고

바람이 불었으며

세상밖에 나앉아

나는 쓸쓸했네

 

 

 

어머니, 그 사슴은 어찌 되었을까요

정희성

 

어머니, 기억하세요?

그 슬픈 사슴의 이야기를.

그때 전 일곱이었어요

처음으로 어머니 손을 잡고

창경원을 구경하던 그날

모든 것이 신기했어요

우리도 서울서 살자고

떼를 쓰다 맞던 일도

어머니, 저는 다 알아요

어머니의 거친 손을.

속도 없이 저는 울기만 했고

그리고 모든 걸 잊었었지요

곰의 얼굴도 사자의 얼굴도

가엾은 사슴의 얘기도 잊었었지요

어머니도 저도 농사 일에 바빠

다 잊었지요 어머니

그 사슴은 어찌 됐을까요?

기억하세요? 그때 전 일곱이었어요

 

어머니, 모든 것이 달라졌네요

저 새도 원숭이도

새끼를 낳다 죽었다는 검은 곰도

우리가 보던 것이 아니예요

어머니, 그 사슴은 어찌 됐을까요?

제 나이 벌써 열아홉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우리는 고향을 떠났지요

아버지는 매일 같이 술에 취하셨고

그 정신에도 오빠를 가르친답시고

논밭은 다 팔아 날리고

어머니, 그런데 오빠는 여기 없어요

월남이라는 나라에서 죽었어요

오빠가 왜 남의 나라 싸움터에서

죽어야 했는지 저는 몰라요

분이야, 오빠 나갈 때까지만

아버님 모시고 고생하거라 하던

그 편지가 마지막일 줄도

저는 몰랐어요 제가 왜

남의 집 식모살이를 가야 했는지

어머니, 그 사슴은 어찌 됐을까요?

「나는 돌을 먹을 수 없어요」 하던

그 사슴을, 기억하세요? 전 일곱이었어요

 

기억하세요? 어머니

그 뿔이 잘린 꽃사슴을.

누가 저 뿔을 잘랐을까 하고

저는 물었지요

그때 전 일곱이었어요

지금은 너무나 변했어요

사슴도 곰도 옛날 것은 아니고

벌써 저는 열아홉인걸요

이 손으로 비단을 짜는걸요

그러나 어머니, 제 손을 보면

그 옛날 어머니의 거친 손이 생각나요

논바닥처럼 갈라진 어머니의 손이.

왜 왈칵 눈물이 솟는지

일한다는 게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노엽고 분했어요

오늘 경찰서에서 풀려나온 뒤

실컷 울고 싶어서 여길 왔어요

저 짐승들은 제 맘을 알 거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우리는 먹을 만큼은 받아야

일할 수 있다고 말했을 뿐예요

공장 측과 싸웠어요

며칠이고 며칠이고 굶으면서

쓰러지고 또 일어서 싸우면서.

어머니, 그리고 우리는 당했어요

이거나 먹으라고, 배고프면 이거나 먹으라고

그들은 우리에게 똥을 퍼부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끌려갔지요

믿을 수 없어요 어머니,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아실 거예요 함께 일하던 순이

산 너머 먹골에 살던 그애를.

미쳐 버렸어요 그 애가 미쳐 버렸어요

모든 것이 많이 달라졌어요

어머니, 누가 그 사슴의 뿔을 잘라 갔을까요?

기억하세요? 전 일곱이었어요

사슴도 옛 사슴은 아니고

사람도 옛사람이 아니예요

짐승 우리 앞에는 팻말이 붙어 있지요

「우리는 돌을 먹지 않아요」라고,

누군가 저 가엾은 사슴에게

돌을 던지나 봐요 어머니

그것을 먹으라고.

모든 것이 옛날과 달라졌어요

이대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어요

기억하세요? 어머니

그때 전 일곱이었어요

그러나 언제까지나 일곱은 아니예요

 

 

 

어머니의 지팡이

정희성

 

무릎 아픈 어머니께

사다 드린 지팡이

 

자식이 사준 지팡이 짚으면

자식 앞세운다고

신발장 한켠에 놓아둔 채

절며 가신 어머니

 

오늘 새벽

출근길에 보았네

어둠속, 불도 켜지 않고

허옇게 앉아계시던 자리

 

텅 빈

 

어머니

 

 

 

어부사(漁夫詞)

정희성 

 

황씨 거친 숨결에서

파도 소리 들린다

한평생 바다와 싸우고도

들어앉을 집 없어

바다가 대신 그 속에 살아

해숫병 앓고

지난해 자식 덮친

몇 척(隻) 파도가

밤마다 그의 잠을

덮치고 있다

 

 

 

언덕 위의 집

정희성

 

이 집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문을 낮게 낸 것일까

무심코 열고 들어서다

이마받이하고 눈물이 핑 돌다

낮게 더 낮게

키를 낮춰 변기에 앉으니

수평선이 눈썹에 와 걸린다

한때 김명수 시인이 내려와 산 적이 있다는

포항 바닷가 해돋이 마을

물이 들면 언제고 떠나갈

한 척의 배 같은

하얀 집

내가 처음 이 바다 앞에 섰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눈썹에 걸린 수평선이

출렁거릴 다름이었다

이 집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다 창을 낸 것일까

머물다 기약 없이 가야 할 자들이

엉덩이 까고 몸 낮춰 앉아

진득이 세상을 내다보게 함일까

 

 

 

언 땅을 파며

정희성

 

눈 덮여 얼어붙은 허허강벌

새벽종 울리면 어둠 걷히고

난지도 취로사업장 강바닥엔 까마귀떼처럼

삽을 든 사람들 뒤덮인다

뚝에 세운 깃발 찢어져라 펄럭이고

새마을 노랫소리 하늘로 솟았다가

북한강 상류로 가서 찬바람 몰아

강바닥에 엎드린 얼굴을 치때린다

호각 불면 엎어져 강바닥을 찍고

허리 펴면 노을 붉은 강뚝이 우뚝한데

노임을 틀켜쥔 인부들은

강바닥보다 깊이 패인 얼굴

다 저녁 삽을 끌고 어디로 가나

게딱지같이 강바닥에 엎디어

언 땅 후벼파 흙밥이나 먹으련만

내일은 동서기가 일을 줄지 모르겠다며

군에 나간 아들놈 걱정을 하고

몸서리쳐 돌아보는 강바닥은 전쟁터

패어나간 흙구덩에 핓빛 황혼 잠겨들고

까마귀 떼 몰려가는 강뚝으로

바람은 북한강을 몰아다가

얼굴에 냅다 흙모래를 뿌린다

 

 

 

언제고 한번은 오고야 말 - 통일을 위하여

정희성 

 

앞남산 뒷남산 다 버리고

어골물 저골물 합수하라

기름내 똥내 비린네 한데 어울어져

흉흉하게 흘러가는 저놈의 강만 보면

꼭 내 꼬라지를 보는 것 같애

언제고 한 번 속뒤집혀 으르렁퀄퀄

왼갖 잡것 다 쓸어내고 새땅 열리는

시원한 꼴 한 번 보리라

보리알 쌀알도 희한하게 합치것다

어디 말만 듣던 통일 한 번 보자

어둡고 괴로운 땅구석에 후두둑 후두둑

삼대 같은 소내기 혁명쳐 빗발쳐

언제고 한번은 오고야 말 것

비 개면 달 뜨렸다 올 때는 들로 오라

하눌더러 보라고 당당하게

풋풋한 가슴패기 열어젖히고

보리밭 너머 봄이 오는 들판에 서서

억새풀 개똥풀도 발돋움친다

산너머 백두요 물건너 제주로다

이골물 저골물 합수하고

천방져 지방져 으르렁퀄퀄

기름내 똥내 비린내 한데 어울어져

흉흉하게 흘러가는 저놈의 강바닥에

몇십년 홀로 보던 조각달은 처박고

보름달 마당가에 멍석을 펴라

꽹과리 장고도 뚱떵대것다

저 산마루 떵떵대고 붉은 달 차올라

된장국 보리밥 한술이라도

이마 맞대고 먹을 날 한 번 밝으렷다

 

 

 

얼은 강을 건너며

정희성

 

얼음을 깬다

강에는 얼은 물

깰수록 청청한

소리가 난다

강이여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물은 남몰래 소리를 이루었나

이 강을 이루는 물소리가

겨울에 죽은 땅의 목청을 트고

이 나라의 어린 아희들아

물은 또한 이 땅의 풀잎에도 운다

얼음을 깬다

얼음을 꺼서 물을 마신다

우리가 스스로 흐르는 강을 이루고

물이 제 소리를 이룰 때까지

아희들아

 

 

 

연기

정희성

 

모든 것을 알았을 때

텅 빈 나의 속

좋이 닦인 거울 앞에 서면

거짓투성이 무너진 살결에서

고독한 나의 흰 뼈

온갖 뜨거움의 끝에

바람에 날린 불티,

나는 연기일세

머뭇거리며

수이 벗어버릴 수 없는 것들의 살갗에

마지막 입술을 부비고

낮은 땅을 가볍게

외줄기로 일어서며

저 먼 무풍의 지대에서

아닌 것과 긴 것

시작과 끝의 사이

거칠은 물결을 다스려

수평선을 그어두네

오오 분별, 너는 나의 산 죽음

나는 흰 뼈의 연기일세

모든 고독의 뼈를 추슬려

은빛 새의 깃을 달고

나는 곧추 떠오르고 있네

 

 

 

열쇠

정희성

 

오오냐, 고장 난 자물쇠나 고쳐주마

목에도 잔등에도

팔뚝에도 힘찬 가슴팍에도

훈장처럼 열쇠를 걸고

금수나 강산 삼천리 방방곡곡

가가호호 골목새새

오뉴월 숨찬 개같이 헐떡대며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지폐 한 장 받아 들고

새끼들 양식도 과자도 사야지

산등성이나마 숨돌리고 들어갈 대문도

열고 들어설 방 한 칸도 없어

가난은 더 이상 내 훈장이 아니고

끝까지 열쇠만이 내 것이구나

새끼들아, 세종로 바닥 이순신 장군처럼

이렇게 칭칭 철갑을 두른 애비가

신기하냐 무서우냐 왜 아무 말 않고

애송아지마냥 눈만 끔벅대느냐

 

 

 

업보

정희성

 

일찍이 만해 스님이 머물러

시심을 닦던 백담사에

머리 못 깎은 중

일해 전 아무개가 유폐되고

그가 서슬 푸르게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온갖 고초를 겪었던 일초선사 고은은

유난히 단풍빛도 고운

깊어가는 이 가을에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생각느니

아아 어느 시인 말마따나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이냐

 

 

 

여기 타오르는 빛의 성전(聖殿)이 -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기공식에 부쳐

정희성

 

그 누가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이마가 시원한 봉우리

기슭이마다 어린 예지의 서기가

오랜 주라기(朱羅紀)의 지층을 씻어내린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리듯이

관악의 이마에 흐르는 보배로운 기름이여

영원한 생명의 터전이여

 

겨레의 염원으로 기약한 이날

헤어졌던 이마를 비로소 마주 대고

여기 새로 땅을 열어

한 얼의 슬기를 불 밝히니

「진리는 나의 빛」

이 불이 밝히는

오 한 세대의 확고한 길을 보아라

온갖 불의와 邪惡과

어둠의 검은 손이 눈을 가릴 때에도

그 어둠의 정수리를 가르며 빛나던 예지여

역사의 갈피마다 슬기롭던

아 우리 서울대학교

 

뼈 있는 자의 길을 보아라

뼈 있는 자가 남기는 이념의 단단한 뼈를 보아라

저마다 가슴 깊이 사려둔 이념은

오직 살아 있는 자의 골수에 깃드니

속으로 트이는 이 길을

오 위대한 세대의 확고한 길을 보아라

만년 雄飛의 새 터전

이 靈峰과 저 기슭에 어린 瑞氣를

가슴에 서리담은 민족의 대학

불처럼 일어서는 세계의 대학

이 충만한 빛기둥을 보아라

온갖 어두움을 가르며

빛이 빛을 따르고

뼈가 뼈를 따르고

산이 산을 불러 일어서니

또한 타오르는 이 길을

영원한 세대의 확고한 길을 보아라

 

겨레의 뜻으로 기약한 이날

누가 조국으로 가는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만족위 위대한 상속자

아 길이 빛날 서울대학교

타오르는 빛의 성전 예 있으니

누가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여름날의 독서

정희성

 

파리 한 마리 내 얼굴에 앉았다가

날아가 개똥 위에 다시 앉는다

어쩌다 골라 앉은 자리가 개똥 옆인가 싶은데

파리는 미안하다는 듯 손이 발이 되도록 비빈다

미안할 게 뭐 있는가 생각하며

신문을 보니 전아무개라는 사람은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진압했을 뿐이라 하고

노아무개는 기업인들이 성금으로 준 돈을

받아서 좋은 데 썼을 뿐이라고 법정 진술을 했다 한다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한바탕 하고

나는 신문을 접어 두고 차라리 산성일기를 읽었다

 

이십사일의 대위 내리니, 셩쳡 직흰 군사 다 젹시고 어러 죽으니 만흐니 샹이 셰자로 더브러 뜰 가온데 셔셔 하늘긔 비러 가로샤데 금일 이에 니르기는  우리 부자 득죄 하미니 일셩 군민이 무슨 죄리잇고. 텬되 우리 부자의게 화를 내리오시고 원컨대 만민을 살오쇼셔

 

 

 

연두

정희성

 

봄도 봄이지만

영산홍은 말고

진달래 꽃빛까지만

 

진달래꽃 진 자리

어린잎 돋듯

거기까지만

 

아쉽기는 해도

더 짙어지기 전에

사랑도

 

거기까지만

섭섭기는 해도 나의 봄은

거기까지만

 

 

 

오지 않는 버스

정희성  

 

버스가 오지 않는다

오지 않아도 기다린다

어디로 가는 차를 기다리느냐고

묻지 마라

나는 나를 기다리는 버스를 기다릴 뿐

그러므로

끝끝내

버스는 오지 않는다

버스가 와도

타지 않으리라

버스가 나를 기다리지 않았으므로

아아, 버스가 나를 기다리지 않으므로

나는 기다리리

그러므로

끝끝내

버스는 오지 않으리

오지 않으므로 기다리리

 

 

 

옹기전에서

정희성

 

나는 웬지 잘 빚어진 항아리보다

좀 실수를 한 듯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내를 따라와 옹기를 고르면서

늘 느끼는 일이지만

몸소 질그릇을 굽는다는

옹기전 주인의 모습에도

어딘다 좀 빈데가 있어

그것이 그렇게 넉넉해 보였다

내가 골라놓은 질그릇을 보고

아내는 곧장 화를 내지만

뒷전을 돌아보면

그가 그냥 투박하게 웃고 섰다

가끔 생각해보곤 하는데

나는 어딘가 좀 모자라는 놈인가 싶다

질그릇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실수한 것보다는 차라리

실패한 것을 택하니

 

 

 

용산시장에서 - 어느 여성 근로자의 일기

정희성

 

공장은 문을 닫았다

가진 것이라곤 노동밖에 없는 우리

꼬쟁이의 모가지는 열두 개

상처마다 옹근 매듭 아리고 쓰리어라

눈물 고인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모두들 열심히 살아가자며

용산시장 골목길을 빠져나가네

어디서들 이렇게 흘러왔는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등을 떠밀고

떠밀리며 듣는 저 아우서오가

발끝마다 질척이는 비릿한 냄새

철교 위를 지나는 기차소리는

멀고 먼 고향 길을 달려가는가

용산시장의 공기는 끈끈하여

차마 우리의 발길을 붙드는구나

노동밖에는 팔 것이 없는 우리

꼬쟁이의 모가지는 열두 개

저마다 자기들의 상품을 놓고

내일을 향해 외쳐대는 아우성이

어쩌면 재미있는 노래일 수 있으련만

삶이란 역시 힘겨운 것일까

노동판에서 돌아와 지게를 받치고

국수 그릇 앞에 쭈그려 앉은

저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이제

어디다 대고 무릎을 꿇어야 하나

처음엔 쳐다보기도 싫던 그 모습

어느덧 아버지의 얼굴로 떠오르며

모두들 그렇게 꺾여서는 안 되느니

힘을 합쳐 열심히들 살아가라고

당부하면서 눈물 속에 흐려지면서

 

 

 

우도에서

정희성

 

올레길 걷던 젊은이 하나가 카메라를 들이대며

말귀도 못 알아듣는 말을 향해 김치이 - 하는데

그 모양이 생각하면 할수록 재미있어서

한참 가다 만난 소를 보고 이번에는 내가

사진기를 꺼내 들고 마악 김치이 - 하려는데

웬 늙은이 하나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타나서는

사진 찍으면 죽여버리겠다고 난리를 친다

무슨 벼락 맞은 기분으로 곰곰 생각해 보니

아하, 여기가 참 우도(牛島)가 아닌가

소한테도 초상권이 있고 인격이 있어 그러는 게지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

정희성

 

너도밤나무가 있는가 하면 나도밤나무가 있다

그런가 하면 바람꽃은 종류도 많아서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 변산바람꽃 남방바람꽃 태백바람꽃 만주바람꽃 바이칼바람꽃뿐만 아니라 매화바람꽃 국화바람꽃 들바람꽃 숲 바람꽃 회리바람꽃 가래바람꽃 쌍둥이바람꽃 외대바람꽃 새바람꽃 꿩의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등 종류도 많은데 이들은 하나같이 꽃이 아름답다

어떤 이는 세상에 시인이 나무보담도 흔하다며 너도 시를 쓰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시인이 많은 게 무슨 죄인가 전 국민이 시인이면 어떻단 말인가 그들은 밥을 굶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다 우리나라가 아름다운 것은 시인이 정치꾼보다 많기 때문 아닌가

 

 

 

우리들의 그리움은

정희성

 

우리들의 믿음은

전쟁이 지나간 수수밭

죽은 내 형제의 머리맡에

미군이 벗어놓은

군화 속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소망은

끝끝내 결재되지 않을

보수정당의 서류함에 있지 않고

 

우리들의 사랑은

알 수 없는 기도와

못다 한 노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들의 울음은

이 봄에 생생하게 피어날

보리밭에 있고

 

시퍼렇게 시퍼렇게

물어뜯긴 선창과

파리하게 떨고 있는 공장의

캄캄한 불빛 속에 있어

 

우리들의 사랑은 다시금

순환하는 계절의 저 눈밭에

봄이 와서 붉게 피어날 진달래와

참호 속에 얼어붙은 젊은 기침과

돌이킬 수 없는 절망 속에 싹터

 

그리움은 이다지도

시퍼렇게 멍든 풀잎으로

너와 나의 가슴 속에 수런대는가

 

오오 민주주의여

 

 

 

우울증

정희성

 

사람들이 나보고

집 안에 틀어박혀

말도 안 되는 시만 쓰지 말고

비타민 디를 먹고

햇볕을 많이 쬐라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나는

아득한 전생에 상추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우전(雨田)* 선생 영전에

정희성

 

묵정밭에 비 내리니

그 아니 좋았으랴

메마른 터전에 비 뿌리니

온갖 푸나무 움트는 소리

생각느니

이 봄날 선생은 삭 틔우시고

저 아득한 들판을

누구라 거두라고 떠나시는가

어젯밤 꿈속에 학 하나이

땅 차오르며 청천을 울더니

우전(雨田) 가시매

우전(雨田) 가시매

어디 가서 다시금 시를 들을까

어디 가서 다시금 길을 물을까

세상 어지럽고

말문 막힌 지 오래

간신히 소리 돋워 노래하자니

묵구멍에 치미는 서러움이여

 

* 민족문화추진회의 터전을 일구신 한학자 신호열(辛鎬熱) 선생의 호.

 

 

 

운문사 오르는 길 저 너머

정희성

 

가을물 여위어

소리도 정갈한데

 

묵은 때 벗고저

운문사 오르는 길

 

불이문(不二門) 저 너머

하늘대는 흰 빨래

 

 

 

운주사에 와서

정희성

 

가까스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눈코 없는 돌부처들

마당 가운데 서서

그냥 비를 맞고 있습니다

 

못난 제 얼굴에도

세차게 비를 뿌리소서

 

 

 

유신헌법

정희성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국민 되는 요건은

민주공화당이 정한다

 

 

 

음지식물

정희성

 

음지식물이 처음부터 음지식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큰 나무에 가려 햇빛을 보기 어려워지자

몸을 낮추어 스스로 광량(光量)을 조절하고

그늘을 견디는 연습을 오래 해왔을 것이다

나는 인간의 거처에도 그런 현상이 있음을 안다

인간도 별수 없이 자연에 속하는 존재이므로

 

 

 

이것은 시가 아니다

정희성

 

친구여, 이것은 시가 아니다

아무리 수식한다 해도

어차피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나와 내 자식의 운명을

바로 보마

 

내 자식이 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참세상 함께 만들어가는

이것은 시가 아니라 싸움임을

분명하게 보마

 

강철노조의 조합원들이

파업한 지하철노조의 조합원들이

갇혀 있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한때는 우리들의 교실에서

우리와 함께 눈물로 시를 읽던 시절이 있었음을

아프게 기억하마

 

이것은 시가 아니다

아프게 기억하마

이 아픔이

아닌 밤 나와 내 자식의 가슴을 치고

배 창자 속에 소용돌이쳐

피눈물로 서려올 새 세상을

바로 보마

 

 

 

이곳에 살기 위해

정희성

 

한밤에 일어나

얼음을 끈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보라, 얼음 밑에서 어떻게

물고기가 숨 쉬고 있는가

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

증오에 대해서

나도 알 만큼은 안다

이곳에 살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싸우다 죽은 나의 친구는 왜 눈을 감지 못하는가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얼음을 꺼야 한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자유를 위해

증오할 것을 증오한다 

 

 

 

이른 봄 저녁 무렵

정희성

 

이른 봄 저녁 무렵

새로 나온 이시영 시집을 읽으며

그 행간에 자리 잡은

적요에 잠겨 눈을 지그시 감다가

문득 놀라 창문 열고 내다보니

언제 지었을까

아직 새 잎 돋지 않은 가문비나무 우듬지에

얼기설기 얽어놓은 까치 둥우리

새는 보이지 않고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빛 고요

옳거니!

세상의 소란이 나를 눈감게 하고

저 고요가 나를 눈뜨게 하느니

 

 

 

이 봄의 노래

정희성

 

무엇이 이 산에 꽃을 피우나

봄이 오면 해마다 진달래 피어

이 마음 울연히 붉어 오겠네

가야지 어찌 아니 돌아가리

그리운 보리밭 푸른 하늘아

정답던 친구 어디 가고

이 봄만 남아 푸르러지나

만나면 부둥켜 울고 싶어서

4월은 꽃보다 더욱 붉어라

 

 

 

이제 내 말은

정희성

 

이제 내 말은

나의 슬픔도 그대의 설움도

잠재우지 않는다

바람이 바람을 잠재우지 않고

슬픔이 슬픔을 잠재우지 않는다

슬픔을 위한 말,

슬픔을 끄미는 말,

모든 어둠의 하수인인

슬픔에 봉사하는 말,

그대와 나의 가장 깊은 곳에 회오리치던

슬픔의 찌꺼기인 눈물도

나의 것이 아니다 이제 내 말은

슬픔을 알아버렸다

가슴 쥐어뜯는 사랑도

이별도 알아버렸다

내 말은 허공을 떠돌지 않고

내 말은 죽지 꺾인 물새처럼

바다로 가서 혼자 울지 않는다

이제 내 말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인도의 기억

정희성 

 

언젠가 와본 적 있는 것처럼 낯익은 그곳

마침내 돌아가야 할 것처럼 눈에 밟히는 그곳

나는 이승과 저승 어느 지점에 서 있었을까

나비 한 마리 어깨 위에 앉았다가 날아갔다

내 영혼이 너무 무거웠는지 모른다

 

 

 

일월(日月)

정희성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 그즈음에

해와 달을 몸받아

누리에 나신 이여

두 손 모아 비오니

천지를 운행하올 제

어느 하늘 아래

사무쳐 그리는 이 있음을

기억하소서

 

 

 

입춘 무렵 친구 무덤에 가서

정희성

 

축성령 넘어 광릉

광릉 지나 진접

볕 바른 솔밭 등성이

그제 내린 봄눈

차가울 듯 푸근한

아직 스러지지 않은 흰빛

어느 영혼에서 날아오른 새인가

무덤 곁에서 눈을 쪼고 있다

 

 

 

자본주의식 신사고

정희성

 

만약에 여자들이 새로 옷을 해 입을 때

부끄러운 데는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안 가려도 좋을 곳만 가린다면

세상의 남자들은 미쳐 날뛸 것이다

천지가 뒤집힐 듯이

거리에 활기가 넘칠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하는데

민주시민 여러분!

만약에 이런 시대가 온다면

당신의 성감대는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은 말하리라

"나는 당신의 팔꿈치가 보고 싶어요"

혹은

"당신의 뒤통수만 봐도 나는 느껴요"라고

 

 

 

자화상

정희성

 

어느 천재 시인이 일필휘지로

하루저녁에 휘갈겨 쓴 시집 한 권을

읽고 읽고 또 소리 내 읽는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석 달 열흘이 걸려서야 다 읽었다

이 귀신이 필경

내가 미치는 꼴을 보고 싶겠지

낯선 거울 앞에서 나도

귀를 잘라버리고 싶다

 

 

 

작은 밭

정희성

 

평생 아이들 자라는 것만 보다가

퇴임하고 들어앉은 나에게

허구한 날 방구들만 지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아내가 불쑥 내민 호미 한 자루

하느님, 나는 손톱 밑에 흙을 묻혀본 적 없고

상추 한 잎 이웃과 나눈 일이 없습니다

아내가 얻어놓은 작은 밭이랑에

어떻게 아이들을 심을까요

내 서툰 호미질이

어린 상추 싹을 다치게 할까 걱정입니다

 

 

 

잠 못 드는 밤에

정희성

 

하룻밤에 열두 번도 더

성을 쌓고 허문다

돌아보면 아득한 사십오 년

파쇼체제 아래서

머리털이 다 빠졌다

빼앗긴 내 젊음의 한 세월이

어드메서 뿌리를 내렸을까

세상모르고 잠든

철없는 어린것들 머리맡에 앉아

허허벌판의 꼭두서니를 생각한다

 

 

 

저 너머

정희성

 

가을물 여위어

소리도 정갈한데

 

 

묵은 때 벗고저

운문사 오르는 길

 

 

불이문(不二門) 저 너머

하늘대는 흰 빨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저 산이 날더러 – 목월시운(木月詩韻)을 빌려

정희성

 

산이 날더러는

흙이나 파먹으라 한다

날더러는 삽이나 들라 하고

쑥굴헝에 박혀

쑥이 되라 한다

늘퍼진 날 산은

쑥국새 울고

저만치 홀로 서서 날더러는

쑥국새마냥 울라 하고

흙 파먹다 죽은 아비

굶주림에 지쳐

쑥굴헝에 나자빠진

에미처럼 울라 한다

산이 날더러

흙이나 파먹다 죽으라 한다

 

 

 

제망영가(祭亡靈歌) - 임자(壬子) 홍수(洪水)에 죽은 넋 보냄

정희성 

 

내가 이 비에 젖고서

또 무엇에 젖으려는가

천지엔 어둠도 많더라 물이여

씻고 씻어서 무엇을 남기려느냐

죽음은 죽음으로 흐르게 두고

물만이 물로서 흐르는구나

그러나 죽음이여

남는 것 저마다 저 홀로 있어

내 몸 외오 여기 남아

그대를 그대 홀로 흐르게 하는가

 

 

 

정희성

 

간통!

얼마나 가슴 떨리는 말이냐

만약에 간통이 죄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재미로 간통을 할까

바람 몰래 꽃잎 만나고 오듯

참 맑은 시냇물에 봄비가 설레듯

 

 

 

쥐불  

정희성 

 

한 번 속고 깜부기

두 번 속아 깜부기

건너 마을 오리발

또랑 건너 쥐새끼

 

쥐야 쥐야

씨나락은 먹지 마라

공출내고 남은 곡식

우리 양주 양식이다

논팔아 가르친 놈

눈만 뜨면 받들어총

봇짐싸 서울 간 년

밤만 되면 보지총

이통저통 북새통에

남는 건 껍데기

쥐야 쥐야

씨나락은 먹지 마라

농사꾼 굶어 죽어

네 배가 터지더냐

 

불놓자 불을 놓자

하눌더러 보라고 쥐불놓고

땅더러 보라고 쥐불놓자

내 가랭이 뜨거우면

네 사추리 불붙는다

얼음달 녹도록

불을 넘고

붉은 해 솟도록

불을 넘자

 

 

 

지금도 짝사랑

정희성

 

사람을 사랑하면

임금은 못 되어도

歌客은 된다.

 

사람을 몹시 사랑하면

천지간에 딱 한 사랑이면

시인(詩人)은 못 되어도

저 거리만큼의 햇살은 된다,

가까이 못 가고

그만큼 떨어져

그대 뒷덜미 쪽으로

간신히 기울다 가는

 

가을 저녁볕이여!

내 젊은 날 먹먹한 시절의

깊은 눈이여!

 

 

 

진달래

정희성

 

잘 탄다, 진아

불 가운데 서늘히 누워

너는 타고

너를 태운 불길이

진달래 핀다

너는 죽고

죽어서 마침내 살아 있는

이 산천

사랑으로 타고

함성으로 타고

마침내 마침내 탈 것으로 탄다

네 죽음은 천지에

때아닌 봄을 몰고 와

너를 묻은 흙 가슴에

진달래 탄다

잘 탄다, 진아

너를 보면 불현듯 내 가슴

석유 먹은 진달래 탄다

 

 

 

질네야

정희성

 

질네야 질네야

비단옷일랑 남에게 주고

네 몸 여위어 어디로 가나

 

질네야 질네야

사랑도 꿈도 잃어버리고

네 몸 여위어 비단이 되나

 

질네야 질네야

비단옷일랑 남에게 주고

여윈 몸 서러워 정처 없어라

 

 

 

질문

정희성

 

석 달에 한 번 혈압을 재고 약을 처방해 주던

담당의가 여의사로 바뀌고 질문도 달라졌다

의사가 물었다 혈압약 말고 무슨 약을 먹냐고

 

오메가 쓰리요

또?

비타민 씨요

또?

Zn-씨요

아연 아니에요? 그건 왜 먹지요?

……그냥요

 

나는 괜히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처방전을 받아 들고 나오면서 자신에게 물었다

 

왜 먹었지?

 

 

 

집에 못 가다

정희성

 

어린 시절 나는 머리가 펄펄 끓어도 애들이 나 없이 저희끼리만 공부할까봐 결석을 못했다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 여자가 어머 저는 애들이 저만 빼놓고 재미있게 놀까봐결석을 못했는데요 하고 깔깔댄다 늙어 별 볼 일 없는 나는 요즘 그 집에 가서 자주 술을 마시는데 나 없는 사이에 친구들이 내 욕할까봐 일찍 집에도 못 간다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정희성

 

발표 안 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 한다

시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차라리 청맹이기를

정희성

 

뜨고도 못 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안 보이던 헛것까지 다 보이네

너무 오래 어둠 속에 살아서일까

다 늙어 눈이 밝아질 건 뭔가

안 봤으면 좋을 꼴 보는 괴로움

 

 

 

첫 고백

정희성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 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 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

 

 

 

청도를 지나며

정희성

 

문상할 일이 있어 밀양 가는 길

기차가 마악 청도를 지나면서

창 밖으로 펼쳐지는 감나무숲

잘 익은 감들이 노을 젖어 한결 곱고

감나무 숲속에는 몇채의 집

짐 안에 사람이 있는지

불빛 흐릿한데, 스쳐지나는

아아, 저 따뜻한 불빛 속에도 그늘이 있어

울 밖에 조등을 내다 걸었네

 

 

 

청명

정희성

 

황하도 맑아진다는 청명 날

강 머리에 나가 술을 마신다

봄도 오면 무엇하리

온 나라 저무느니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

머리칼 날려 강변에 서면

저물어 깊어 가는 강물 위엔

아련하여라 술 취한 눈에도

물 머금어 일렁이는 불빛

 

 

 

추석 달

정희성

 

어제는 시래기국에서

달을 건져내며 울었다

밤새 수저로 떠낸 달이

떠내도 떠내도 남아 있다

광한전도 옥토끼도 보이지 않는

수저에 뜬 맹물달

어쩌면 내 생애 같은

국물을 한 숟갈 떠 들고

나는 낯선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보아도 보아도

숟갈을 든 채 잠든

자식의 얼굴에 달은 보이지 않고

빈 사발에 한 그릇

달이 지고 있다

 

 

 

친구에게

정희성

 

너를 기다린다 나의 오랜 친구여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나는 어둠이 오는 길목에 서서

너를 가둔 감옥의 을씨년스런 벽을 보며

오후 다섯시 반의 애국가를 듣는다

모든 사람들이 걸음을 멈춘

이 삼엄한 정지태의 한순간에

오히려 심장은 강하게 뛰고 있음을

나는 느끼며 두려워한다

두려움 없이 네 이름 부를 수 없고

두려움 없이 너를 밝힐 수 없다

몸은 노동의 고통으로 쇠약해지고

마음은 굶주리는 가족에 대한 염려와

차가운 겨울의 분노로 얼어붙을 때

오직 한 가지 뜨거운 해방의

꿈만으로 마음과 몸을 덥히며

시골에서 공장에서

신문사 앞에서 법원 뜰에서

서성대며 너를 기다리는 동지들을

타오르는 불꽃들을 나는 본다

누군들 두려움 없이

국기 앞에 설 수 있으랴

짓밟혀 쫓겨가는 길목마다

가슴 찢어 두려운 네 이름 새기고

타오르는 온몸 어둠에 던져

너를 부른다 자유여 나의 오랜 친구여

 

 

 

친구여 네가 시를 쓸 때

정희성

 

친구여, 네가 비시적(非詩的)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곳에 뜨겁게 으스러진 나의

삶이 있고, 굶주린 식구가 있고

노동이 있고

그리고 억센 팔뚝뿐이다

삽과 망치뿐이다

 

아니다 친구여, 너의 정의(正義)가 사는 곳

이 푸른 하늘 아래

뜨거운 태양이 있고, 땅이 있고

너와 나 그리고

햇빛 뒤에 패어진 그늘도 있다

 

친구여,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

침묵 뒤의 소란이,

정신 뒤의 육체가,

우정 뒤의 적의(敵意)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한때는 너와 내가 만나

시(詩)를 말하고 인생을 논하고

정치(政治)를 말하고 자유(自由)를 말했지만

친구여, 30을 넘어 이제는

나이보다 더 많은 것이

우리를 가로막는구나

 

친구여, 네가 시(詩)를 쓸 때

나는 굶는 식구를 생각했고

네가 시(詩)를 쓸 때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네가 천국(天國)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나는 죽음 뒤에 오는 것을 생각하며

네가 내민 손수건을 눈에 대고

울며 너더러 개새끼라 했구나

내가 너더러 개새끼라 했구나

 

 

 

침묵

정희성

 

수업이 끝나기 전에             

시간를 주어도 아이들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질문이 없는 교실로             

낙엽은 날아들고               

누구의 입에선가 새어 나온       

짧은 탄성 한 마디로           

눈시울이 붉어진 가을           

가을만이 확실한               

우리들의 감동이다             

메마른 몇 개의 낱말과

눈먼 문법으로 어떻게

우리들의 삶의 깊이를

측량할 수 있으랴

 

만약에 침묵이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유일한 대답이라면

비본질적인 질문으로 더 이상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으리라

아아 말 못 할 우리들의 시대

이루지 못한 꿈의 빛깔로

낙엽은 저렇게 떨어져

가을은 차라리

우리들의 감동이다.

 

 

 

타지마할

정희성

 

무굴제국 황제 샤자한이

이십년 넘는 세월 바쳐

사랑하는 이를 위해 지은

황홀한 무덤 - 타지마할

 

아름다운 이여

나는 가난하여 시의 작은 집을 짓네

 

내 마음

한켜 한켜

쌓아 올린

타지마할

 

 

 

태백산행

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 살이야 열아홉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태백 하늘에 떠도는 눈발처럼

정희성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사북 지나 고한 장성광업소

철암역두 선탄장(選炭場)

석탄더미에 내리는 눈발처럼

차라리 탄압이나 받았으면

어느 시인 말마따나

바람부리에 몰려다니는 눈발처럼

반짝이며 글썽이는 눈발처럼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제가 울고 싶으니까 나더러

웃어봐!

 

 

 

통점

정희성

 

매운 것은 맛이 아니라

통증이라고 한다

아마 사랑도 그렇지 싶다

내가 아는 한 사랑에는

지울 수 없는 통점이 있다

처음 그것은 기분 좋은

설렘으로 시작되지만

가슴 어디 께에 분명한

통증으로 온다

 

 

 

파문

정희성

 

언제부턴가 마음속

향기로운 술이 익네

그녀가 스며든 내 시 속에

작은 파문이 일어나네

 

 

 

편지

정희성

 

기루다, 기루어하다'라는 말이 있어요 '없어서 아쉽다'라는 뜻이 담긴 말인데 '그리다, 그리워하다'하고는 뉘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만해 선생이 즐겨 쓰던 말이기도 한데요 나는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이 단어가 자꾸 떠올라요 지난 삼월 이래 생겨난 현상이지요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평화

정희성

 

아흔여섯 살 김신묵 권사는 숨을 거두면서

내 죽으면 박수 치며 보내달라고 했다

칠순이 넘은 아들 문목사가

잠시 쇠고랑을 풀고 나와 박수로 어머니를 보내고

웃으며 감옥으로 돌아갔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세상에 이런 말 못할 평화가 있구나

 

 

 

포도알

정희성

 

침묵과 눈물을 위해

말과 심장을 위해

불모의 땅 어느 마당귀에

온갖 노여움을 안으로 응결시킨

포도알이 여무는가

여물어서 터지는가

 

눈만 큰 소녀여

동자에 어린 네 슬픔처럼은

영문 모를 네 슬픔처럼은

아무도 그렇게 맑은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지금

수염으로 거칠은 나의 턱은

세상의 다른 바람을 막고

허공을 받쳐 든 시렁 위에 하나

건조한 눈알을 매달아둔다

포도처럼은 아무도 포도처럼은

그렇게 생생한 기억으로

피워올릴 수 없는 우리들의 불행이

어느 세찬 물살에 모서리가 닳아 둥글게 되었나

그 속에 별이 뜨고

그 속에 바다가 쓸리고

그 속에서 모든 슬픔이 잠을 깨던

포도알의 말없는 말같이는

눈동자여

누구도 그렇게 견딜 수 없는 것을

간절히 매달려 네가

응어리졌구나

 

 

 

하늘을 보다 잠든 날은

정희성

 

법정에 서 있는 친구를 보고 돌아온 날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하늘은 유난히 맑아서

나는 새장의 새를 풀어놓았다

하늘을 알아버린 탓일까

그 작은 눈에 고인 햇빛이 너무 맑아

새는 외로워 보였다

모든 걸 알아버린 탓일까

아직도 하늘이 푸르냐고 묻던

그 친구 눈에 패인 그늘이 생각나

하늘을 보다 자리에 누운 날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햇빛이 너무 맑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학교 가는 길

정희성

 

모든 문제의 답은 학교에 있고

정답은 언제나 근엄해서

담임선생님의 얼굴 같지요

답답한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삼차방정식보다 난해하게 변해버린

선생님의 표정을 읽으며

정답까지 가는 길은 너무도 아득해

나는 가끔 다른 길을 갑니다

비록 험하기는 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엔 즐거움도 있겠지

생각하며 길모퉁이 돌아서면

찍소리 말고 공부나 하라는

어머니의 고함소리 멀어지고

친구가 다닌다는 공장을 지나면

신축공사장 인부들

오락실 근처에선 재수할 때 만난

친구의 옆모습도 보이지요

무언가 고달파 보여도

정답처럼 엄숙하지 않아서

볼수록 정다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나는 교실로 돌아오곤 하지요

그러면서 나는 자신에게 곧잘

어리석은 질문을 던집니다

-- 정답은 학교에만 있는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거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항아리

정희성

 

귀를 대보면

누가 부른다

들어오라 들어오라

들여다보면

어둠뿐

나오라

나오라 소리치면

우우우우

낯모를 짐승이 되어

우는 항아리

 

항아리 속의 어둠을 들여다본다

항아리 속의 어둠을 은폐하는 어둠을 들여다본다

나의 말이 낯모를 짐승이 되어 우는

항아리 속의 어둠이 가진 비열함을 들여다본다

항이리 속의 속임수를 욕하는 나의 어두운 말이

또다른 짐승이 되어 어디 가서 울지라도

항아리를 깨고

항아리 속 어둠을 으깨서

항아리 속에 퍼부은 내 욕설의 창자와 늑골이

보일 때까지 토명해질 때까지

 

 

 

해골

정희성

 

저 몸서리치는

캄캄한 눈구멍이

이를 악물고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한때는 저 눈에

별이 빛났으리

 

 

 

허수아비

정희성

 

참새가 참새인 것은

제가 참새인 줄 모르기 때문

 

허수아비가 허수아비인 것은

제 머리에 새가 앉아도 가만 있기 때문

 

허수아비 주인이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인 것은

허수아비가 참새를 쫓아줄 거라 믿기 때문

 

이 땅의 농부가 농부인 것은

 

그런 줄 알면서도 벼 익는 들판에 허수아비를 세우고

우여어 우여어 허공에 헛손질하기 때문

 

 

 

화전

정희성

 

불이 오른다

아침나절 굴뚝에 연기 없더니

저녁답 문전엔 弔燈이 걸려 있고

누구의 피 맺혀 얼어

검붉은 수숫대 타오르는가

흙마당 캄캄히 불은 올라

청청 하늘에 흰 눈 내린다

 

이젠 배 안 고플 김씨여

살아 있는 동안

나도 땅을 갖고 싶다던 너

이곳에 살기 위하여

너는 죽어 땅이 되는가

 

우리가 떠나는 이 산밭에

지금은 눈이 내리고

불이 오른다

오오, 서늘한 얼굴이여 타거라

눈이여, 흙담 너머 헛간 용마루

갈매봉 산마루까지

하늘 서늘히

타올라라.

 

 

 

휴전선에서

정희성 

 

철망 아래 국화송이

찬 바람에 흔들리고

물가에 푸른 쥐

철모 밑에 숨느니

어디로 가는 길일까

여기서 끊어져 이끼가 피고

무너진 길에는 정히

슬픈 물이 흐른다

고향 땅 새록새록

가슴 사무쳐

이 주먹으로 흐르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느니

병사의 총부리 끝엔

불탄 산정이 숨죽이고

노루 하나 의연히

북녘 하늘 우러른다

기러기여, 이 가을

누가 울 울음을 울고 가는가

총소리에 놀라

문득, 하늘만 높구나

 

 

 

흔적

정희성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어머니가 벗어놓은 그림자만 남아 있다

저승으로 거처를 옮기신 지 2년인데

서울특별시 강서구청장이 보낸

체납 주민세 납부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화곡동 어디 자식들 몰래 살아계신가 싶어

가슴이 마구 뛰었다

 

 

 

희망

정희성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그 전에 희망에 대해서 내가 주로 인용했던 말이라면

'희망은 결코 절망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말 정도....

 

근데 이 석 줄의 짧은 시에서는

나 자신에게서 희망을 일깨우고 갈무리하는 자세가 보인다.

정희성 시인도 제법 나이가 들었나 보다...

 

내가 이전에 술자리에서 노래 대신에 읆곤 하던 시가

정희성의 "새벽이 오기까지는"이었는데

그 시를 한번 보면 실감이 날 듯하다.

 

 

 

희망 공부

정희성

 

절망의 반대가 희망은 아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빛나듯

희망은 절망 속에 싹트는 거지

만약에 우리가 희망함이 적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을 비추어줄까

 

* '희망공부'라는 제목과 노랫말의 첫행은 백낙청 선생의 글에서 따왔고, '희망함이 적다'는 표현은 전태일 열사의 일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흰 밤에 꿈꾸다

정희성

 

좀처럼 밤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해가 지지 않는 사흘 밤 사흘 낮

시베리아 벌판을 바라보며

어떤 이는 징키스칸처럼 말달리고 싶다 하고

어떤 이는 소떼를 풀어놓고 싶어 하고

어떤 이는 감자 농사를 짓고 싶다 하고

어떤 이는 벌목을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거기다 도시를 건설하고 싶은 눈치였다

1907년 이준 열사는 이 열차를 타고 헤이그로 가며

창밖으로 자신의 죽음을 내다봤을 것이다

이정표도 간판도 보이지 않는 이 꿈같이 긴

기차 여행을 내 생전에 다시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그시 눈을 감는데

누군가 취한 목소리로 잠꼬대처럼

󰡒시베리아를 그냥 좀 내버리면 안 돼?󰡓

소리치는 바람에 그만 잠이 달아났다

더 바랄 무엇이 있어 지금 나는 여기 있는가?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가까스로 밤에 이르렀지만

아침이 오지 못할 만큼 밤이 길지는 않았다

 

 

 

8·15를 위한 북소리

정희성

 

​북을 치되 잡스러이 치지 말고 똑 이렇게 치렷다

부자유를 위해

쿵딱

식민주의와 그 모든 파괴를 위해

 

하나가 되려는

우리들의 꿈

우리들의 사랑을 갈라놓는

저들의 음모를 위해

저들의 부동산과 평화로운 잠을 위해

 

우리들의 피어린 희생을 위해

가진 것 없는 우리

하나뿐인 영혼

하나뿐인 몸을 던져

 

외진 땅 서러운 아들딸들아

아닌밤 네 형제가 없어져도

북채 잡고

세상의 모든 압제자를 위해

눈물 삼켜

딱 한 번

 

북을 쳐라

새벽이 온다

새벽이 오면 이방인과 그 추종자들이

무서움에 떨며 물으리니

누가 아침으로 가는 길을 묻거든

눈 들어 타오르는 해를 보게 하라

오오 영과 조국

동방에 나라가 있어

거기 사람이 살고 있다 하라

떄가 오면 어둠에 지친 사람들이

강변으로 나가 머리를 감고

밝은 웃음과 사랑 노래로

새로운 하늘과 땅을 경배하리니

북을 쳐라

바다여 춤춰라

 

오오 그날이 오면

겨울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모든 언어, 모든 은유를 폐하리라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정희성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나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나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족은 11월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