犯罪意識[범죄의식]
남편과 영림을 떠나보내고 나서 옥영 여사는 찻종지도 치우지 못한 채 남편의 책상머리에 넋 잃은 사지를 가만히 주저앉혔다.
앞집 지붕 위로 얼른 바라다본 남편과 영림의 묵극 한 토막이 자기의 착각 위기를 옥영은 진심으로 빌었다.
오랜 결혼 생활 동안 여자관계로 아내의 행복감을 위축시키고 평화로운 가정에 파문 같은 것을 던져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남편이기에 또한 가정 낙원설을 소리높이 제창하여 일부 주의의 결혼 형태의 문화성을 말로나 글로나 부르짖어 온 남편이기에 정녕 그 한 토막의 묵극이 옥영에게는 착각인 것만 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명 착각은 아니었다.』
요즈음에 있어서 남편의 태도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일종의 초조가 엿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창작 생활에서 오는 초조는 분명 아니었다. 남편의 창작욕은 과거 어떤 시절에 비해서도 가장 왕성하게 불붙고 있었고 또 한 고도로 연소되고 있음을 옥영은 잘 안다.
그러던 것이 「유혹의 강」을 집필하면서부터 남편의 초조감은 눈에 뜨일 만큼 현저해졌다. 그것을 옥영은 총명하게도 작품 행동과 현실 행동의 틈에서 오는 윤리적 감정의 부조화라고 생각하였다.
『여보, 흰 머리카락 또 하나 생겼오.』
거울을 들여다보며 빗질을 하다가 남편은 무슨 투정이나 하듯이 머리카락 한 오리를 처리하기에 너무나 많은 힘을 가지고 그것을 뽑아버리는 것을 옥영은 여러 번 보았다.
『이것은 분명히 죽음의 초대장인데……』
뽑아 쥔 흰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남편을 향하여
『죽는 게 그리도 무서우세요?』
『아니야. 죽는 건 무섭지 않지만……』
『흥, 죽는 건 무섭지 않아도 청춘은 부재래(靑春不在來)라는 말이죠? 박 목사처럼 한 번 발 벗고 나서 보시구려.』
『당신이 엉엉 울까봐 못하겠소.』
『저 좋아서 하는 일을 내가 왜 울어요.』
이러한 대화에서 옥영은 남편이 지닌 초조감의 정체 같은 것을 어렴풋이나 마 붙잡을 수가 있었던 어제오늘이었다.
거기에 고영림이가 나타났던 것이다. 옥영의 눈에는 고영림은 남편을 좋아할 타입 중에서 가장 선발된 여성으로 확실히 비쳤다. 사색적인 깊이가 있고 그러한 깊이가 벌렁거리는 정열로써 감싸져 있는 것이다.
『아, 참……』
옥영은 냉큼 일어서서 남편의 책상 서랍에서 영림의 「칸나의 의욕」을 꺼냈다. 또 다른 서랍 하나에서 생긴 일과 크리스머스 때면 꼭꼭 날아오는 분홍 봉투를 끄집어내어 두 사람의 필적을 대조해 보다가
『아닌데, 필적이 확실히 다른데……』
원고와 봉투를 제 자리에 뒤집어 놓고 차종지를 들고 내려오면서
『아주머니, 이 층 좀 쓸어내요.』
손수 방을 쓸어낼 기력이 어쩐지 없다.
『그래도 그이는 좀처럼 걸려들지 않을 꺼야. 젊었을 때도 그랬는데……』
젊은 시절에 남편은 삼방 약수로 가서 한동안 원고를 쓴 적이 있다. 어떤 친구와 어울려서 술추렴을 하다가 기생 한 사람씩을 배당 받아 가지고 제각기 딴 방에서 잤다고 했다. 밤새도록 자지를 못하고 뒤채기만 하는 남편의 꼬락서니를 보고 무안도 하고 화도 나서 동도 트기 전에 기생은 뺑소니를 쳤다고, 그래서 공연한 화대만 물었노라고, 이것은 후일 그 친구들의 입에서 몇 다리를 건너 들어온 소식이었다.
그러나 「젊었을 때도 그랬는데……」라는 옥영 여사의 오덕독스(正說[정설])속에 「젊었으니까 그랬다」는 하나의 파라독스(逆說[역설])가 성립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지식은 옥영에게 없었다.
시부 강학선 교수의 성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정도로 옥영은 남편의 성실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옥영 자신의 성실을 믿고 있는 것과 꼭 같은 성실의 믿음이었다.
그러한 믿음이 허물어져야만 할 이유를 옥영은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에게 대한 애정이 없어졌다면 모르지마는 그렇지 않은 이상 남편이 지닌 성실과 애정의 결합은 이 가정을 금성탕지(金城湯池)와도 같이 수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 질 무렵 경숙이와 도현이가 계란 한 보따리 얻어가지고 돌아왔다.
『이 편지 할아버지가 주세요. 어머니 갔다드리라고요.』
『무슨 편진데……』
옥영은 시아버지가 써 보낸 편지를 읽어 보았다. 두서도 없는 글이었다.
경숙 어미 보아라.
요즈음 네 남편이 쓰는 「유혹의 강」은 좀 지나치는 데가 있다고 보았다.
인간을 파고들면 그럴는지는 몰라도 그렇게까지 파고들고 싶어하는 네 남편의 마음의 자세를 우리는 문제 삼아야만 할 것이다.
중년기의 위기는 청년기의 그것보다 폭이 넓고 뿌리가 깊다. 이런 점을 경숙 어미는 잘 이해하여 네 남편의 마음의 자세를 바로잡도록 세심 주의하여 가정의 공기를 항상 신선하게 만들고 남편의 관심이 외부로 뻗어 나가지 않도록 갑절의 힘을 써야만 할 것이다.
나와는 다소 달라서 특히 네 남편은 예술가이기 때문에 감정의 파도가 범인보다는 예민하고 섬세하고 또한 폭이 넓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며, 흔들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약하고 나긋나긋한 일면도 다분히 갖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이러한 일면은 오르지 네 시모에게서 물려받은 혈통 같지마는, 그래서 예술 부문에 종사하고 있는 것 같지마는 그러나 네 남편에게는 이십 년 가까운 가정생활에 있어서 일시적인 암영(暗影)도 가져옴이 없는 의지적인 일면도 나를 닮았는지, 또한 있다고 보는 것이니까 너의 내조만 적당히 얻을 수 있다면 이러한 위기를 잘 넘겨 보낼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총명한 경숙 어미이기에 감히 하지 않아도 무방한 말을 한 것 같으나 늙은이의 노파심으로 알아주면 고마울 뿐이다. 이런 이야기는 네 입으로 네 남편에게 할 필요는 없고 네 마음에만 간직해 두고 있음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아버님도 역시……』
자기와 꼭 같은 그 무엇을 느끼고 계시는 것이라고 옥영은 시부 강교수가 지니고 있는 인격적인 존엄성과 함께 그 다사로운 배념이 눈물겹도록 고마왔다.
『정신을 바싹 차려야겠다.』
편지를 다시금 봉투에 쓸어 넣은 옥영의 손길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어머니, 오케 피아노 상회에 백이십만 환짜리가 한대 나왔어요.』
저녁을 먹으면서 경숙이는 불쑥 그런 말을 했다.
『어떤 건데?』
『야마하 이호래요. 며칠 전에 나왔다고 살려면 그걸 사라고 김선생님이 그러셔요. 소리가 참 좋대요.』
『글쎄 샀으면 좋겠지만…… 아버지가 돈을 마저 만들어 주셔야지 않겠니?』
『아이, 참 속상해! 또 놓치겠네.』
보름 전에 아버지는 백여만 환의 인세 중 오십만 환을 갖다 주었다.
밤 여덟 시 반, 강석운과 고영림은 명동 입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해 질 무렵에 세검정에서 돌아와 명동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다.
『어젯밤 이 무렵 저는 이 십자로에서 울고 있었어요.』
『울긴…… 미스터 송과 같이 다니지 않았어?』
『같이 다니다가 저녁 먹고 여기서 헤어졌어요. 영원히 영원히 헤어졌지요.』
『결혼한다면서?』
『그저 그래 본 거죠. 제 온 넋이 선생님 품에 안겨 있는데 어떻게 딴 사람과 결혼을 하겠어요.』
영림의 정열과 의욕이 결정적으로 파동쳐 왔다. 벅차서 석운은 대꾸를 잃고 영림의 탄식의 그윽한 향기를 시인처럼 향수(享受)만 했다.
밀려드는 인파를 거추장스럽게 헤엄쳐 나가며 독백인양 석운은
『천금처럼 값비싼 봄밤이라고 했었지. 그래서 이렇듯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의 물결인가?』
다소의 취기도 보탬이 되어 있었으나 어젯밤처럼 석운은 마음 놓고 취하지는 못했다. 영림과의 동행이 강석운에게 조심성을 강요해 왔었기 때문이다.
『제가 딴 사람과 결혼을 한담 선생님은 확실히 화내 주시죠?』
그러나 석운은 못 들은 채 멍청한 표정을 일부러 지으며 시라도 읊듯이
『까다로운 지성의 무마와……』
『네?』
『희뿌옇게 둔탁한 감정의 표백을 위하여……』
『…………』
『불나비의 의욕을 지니고 갸륵하게도 몰려드는 이 수많은 생명의 기체(基體)들…… 한숨과 하품과 걸레 조각 같은 인정의 쓰레기통, 그대 명동의 밤거리……』
번잡한 입구를 빠져나오면서 영림은 석운의 팔 하나를 가만히 잡아 끼었다. 을지로 쪽으로 둘이는 꺾어지며
『명동의 생리 속에서 그러나 생명은 순간의 가치를 모색했다. 쥐어짜도 마냥 고독은 흐르기만 했고 고독의 낙루(落淚)가 범람한 페이브 위에서 거리의 서정시인은 삶의 황홀을 찾았다.』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영림은 솔깃이 귀를 기울이고 걸었다.
『술과 지분과 꿈과 아방쥬르와 스캰달에 굶주린 보헤미앙의 정열이 방탕하는 거리, 〈트로이 메라이〉(夢想[몽상])의 선율에서 도리어 현실을 발견하고 독을 마신 시인도 그곳에는 있었다. 소모된 정열과 생명을 섭취하며 명동은 살쪘다. 불나비 같은 인생을 마셔 버리는 명동의 밤거리……』
『불나비 같은 인생!』
영림은 석운의 긴 감상 속에서 그 한 마디만을 붙들면 되었다. 그것이 자기의 물음에 대한 대답인 것만 같았다.
『어젯밤 여기서 애리를 만났지.』
을지로를 건너면서 석운은 말했다.
『어젯밤도 이렇게 애리와 팔을 끼고 갔어.』
『그래 기분 좋으셨어요?』
『오늘보다는 마음이 평온했어. 불안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영림은 기뻤다. 강선생님은 불나비의 인생을 확실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아, 여기서 헤어져요.』
종로에서 석운은 팔을 풀고 손길만 잡아 쥐었다.
『저만큼 모셔다드리고 싶지만…… 그냥 여기서 헤어지겠어요.』
『아, 그러기로 해요.』
『선생님, 언제 한 번 더 만나 주시겠어요?』
그러나 석운은 이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영림의 얼굴만 빤히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어두운 얼굴이었다.
『선생님이 만나 주시지 않음 인제 아예 저는 선생님 안 찾아뵙겠어요.』
『왜?』
영림은 석운의 손을 놓고 고개를 한 번 숙였다가 다시 들며
『선생님이 사모님과 나란히 앉아 계시는 걸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
『그렇지만 그건 사모님이 못마땅해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선생님 과히 서운히 생각하실 건 없어요. 사모님이 제게 대해서 잘 해 주시면 주실수록 도리어 화가 나요.』
『하여튼 오늘은 여기서 그냥 헤어져요. 다시 만날 약속은 말고…… 또 만나게 될 때까지 헤어져 있기로 해요.』
영림은 원망스러운 듯이 말끄러미 석운을 쳐다보다가
『선생님 마음 편하실 대로 하세요. 그래야만 편하실 테니까요. 그렇지만 저도 안 찾아가고 선생님도 안 찾아 주시면 영 만나지 못할 수밖에 없군요.』
『영림!』
석운은 어두운 얼굴에 오뇌의 빛을 후딱 띠며
『서울은 좁아.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순간까지 서로 참아 보기로 해요. 영림의 주소도 나는 알고 전화번호도 찾아보면 알 수가 있으니까 말이야.』
『본국 二三二三[이삼이삼]번이에요. 합함 열이 되죠. 그렇지만 저는 이미 참지 못해서 오늘 선생님을 뵈러……』
『스톱!』
석운은 갑자기 소리를 쳤다. 영림은 놀라서 입을 호닥닥 다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림의 말을 중지시키는 호령이 아니고 둘이의 옆을 스름스름 지나가고 있는 박카아드를 멈추는 소리였다.
『오늘은 이 이상 아무 말도 없이 벙어리처럼 헤어지기로 해요. 자아 영림, 먼저 타고 가요.』
『선생님이 먼저……』
『쉬이, 말을 하면 안 돼! 우리는 지금 벙어리가 됐으니까.』
영림은 쳐다보며 조용히 웃었다. 석운도 웃었다.
여자 벙어리는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남자 벙어리가 그 손을 꼭 잡고 남은 한 손으로 여자 벙어리의 손등을 귀여운 듯이 덮었다.
작별의 악수가 애석히 끝났다. 남자 벙어리는 여자 벙어리의 등을 떠밀 듯 이 하며 차에 태우고 택시 값을 운전수에게 지불하며
『아현동까지!』
차가 떠나는데 여자 벙어리도 입을 열었다.
『생각하는 불나비.』
소학생처럼 공손히 숙이는 영림의 고개와 함께 박카아드는 네거리 로타리를 삥 휘돌아 갔다.
『귀한 물건이 사라져 갔다.』
구슬처럼 귀하고 휘황한 물건이 석운의 가슴속 한복판에서 총탄의 관통상(貫通傷) 하나를 감각적으로 남겨 놓은 채 쏘옥 빠져나간 것 같은 허전한 느낌이 돌연히 왔다.
박카아드의 보데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석운은 발꿈치를 돌렸다.
『일은 마침내 저질러졌다.』
실로 오랜 동안 푸뜩푸뜩 느껴오던 인생의 위기는 마침내 왔다.
종로 사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석운은 후딱 하늘을 우러렀다. 즐비한 빌딩 너머로 헤화동 일대에 별빛은 쏟아지고 있었다.
그 어느 별 밑에 아내는 앉아 있으리라. 자고 있으리라.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건득건득 졸고 있을는지도 몰른다.
『아아, 또 하나의 귀한 물건이…… 아니, 진정으로 귀한 물건이……』
범죄자의 심리(心理)가 석운에게 왔다.
『취기가 모자란다. 술을 먹어야지.』
의식을 무마하기 위하여 석운은 한길 가 꼬치안주 집으로 쏜살같이 들어갔다.
영림과 헤어지는 즉시로 석운의 머리에는 가정이 오고 아내가 왔다. 해로 동락의 성실한 애정을 꿈꾸고 있는 옥영에의 배반과 한 사람의 남편이라는 세속적인 위치에서 오는 일종의 범죄의식이 점점 명백히 확대되어왔다.
야릇한 감미로움을 그대로 남겨 놓고 호화로운 박카아드와 함께 사라진 칸 나의 휘황한 구슬은 석운의 심장 속에서 마냥 눈부시기만 했건만 그 어느 별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남편을 기다리는 옥영의 구슬은 비록 휘황찬란한 눈부심은 없었으나 석운의 머릿속에 오붓히 살아 있었다.
『박목사는 가정의 질곡(桎梏)을 박차고 나옴으로써 인간을 찾았다고 했다.』
아까 세검정 산속에서 영림과 애정을 교환하는 순간에는 강석운도 그렇게 느꼈다.
그 느낌에 거짓이 없다면 자기는 이와 같은 범죄의식을 갖지 않아야만 할 것이 아니냐고, 박목사의 철저한 생명제일주의(生命第一主義)가 갑자기 부러워졌다.
『나는 약하다.』
『가슴 속에 눈부신 휘황한 구슬과 머리속에 살아 있는 오붓한 구슬』
이 두 개의 구슬을 다 함께 차지할 수가 없다. 인간의 세속적인 위치가 차차 취기를 돋구어 오는 석운을 극도로 슬프게 하고 있었다.
꼬치안주 집 바텐 앞에서 컵 술을 마지막으로 들이키는 석운은 밖으로 나와 택시를 집어 탔다.
『어쨌든 일은 저질렀는데……』
거나하니 석운은 취해 있었다.
『남들도 다 하는 노릇인데, 나만 유독히 얌전할 필요는 또 어디 있어?』
속된 생각이 취기와 함께 자꾸만 머리를 들어왔다.
박목사 모양 철저하지 못한 석운으로서는 자기의 행동을 철학적으로 구명하기 전에 사회현상학적인 양식(樣式) 속에서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있었다.
『이게 다 왕자 의식에서 나오는 소리거든.』
지난날, 석운은 옥영의 뒤를 밟아 수도극장 앞 골목 북경루까지 따라갔을 때, 석운은 결국 아내의 불륜을 왕자 의식으로써 처리하고 말았다. 남들이 다 하고 있는 바로 그 양식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불현듯 돌이켜 보며 석운은 씁쓰레 고소를 지었다.
『아내의 불륜은 용서하지 못하고 자기의 그것은 눈감아 주기를 원하는 이 모순된 심정! 이러한 괘씸한 심정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차는 창경원 앞을 몰아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아내에게도 이런 종류의 모순된 심정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그런 심정이 애당초부터 없어서 그처럼들 얌전한 것일까? 있으면서도 인간이 성실해서 얌전한 것일까? 사회적 지위가 약해서 하는 수 없이들 얌전한 것일까?』
이윽고 차를 혜화동에서 멈추고 석운은 카스테라 한 상자를 샀다. 다시 차에 오르면서
『오늘 일을 아내에게 죄 털어놓고 말까? 아직도 늦지는 않으니까.』
그렇다, 아직도 늦지는 않다. 그렇게 함으로써 좀 더 커다랗게 부딪혀 올 인생의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는 것이며 아내의 비탄과 분노로써 자기의 자유로운 욕망과 행동을 구속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은 괴롭고 거추장스런 범죄의식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줄곧 들 떠 있어야만 할 감정의 파도를 가라앉히어 실락원의 비극을 최소한도에서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조치라고 석운은 문득 생각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혹한 자기 항쟁(抗爭)이 필요하였다.
신부 앞에서 참회를 하는 교인들의 심정이 철학적인 사고의 결과로서가 아니고 예술가적인 하나의 직감으로서 석운에게 왔다.
차는 멎고 석운은 정문을 들어섰다.
『아버지!』
옥영의 앞장을 서서 경숙이가 뛰쳐나오며 과자 상자를 받아 들었다.
『응, 너 아직 자지 않았니?』
『아버지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래?』
옥영은 양복을 받아 걸며
『늦으셨군요.』
『아, 좀……』
그럴 성싶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아내의 눈초리가 유심히 빛나고 있는 것 같아서 석운은 마음이 뜨끔뜨끔 했다.
아내의 태도는 일상과 추호도 다른 점이 없었으나 시선이 잠시도 쉴 새 없이 이편의 표정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까맣게 잊어먹고 있던 도선의 동무 녀석의 얼굴이 후딱 머리에 왔다. 그 녀석의 어머니의 얼굴도 왔다. 고자질?
『그래 재미있어요? 학생들과의 좌담회……』
잠옷으로 갈아 입고 안방을 들어서는데 옥영은 물어 왔다.
『작은 애들은 다 자오?』
어떻게 대답해야만 될까고 시간의 여유를 얻기 위하여 딴말을 석운은 물었다. 고백 여하의 문제가 아직 결정적으로 처리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들 자는데요.』
경숙이가 카스테라 상자를 풀면서 대답을 했다. 건넌방에서 애들은 잔다.
『아이, 카스테라야 엄마! 아버지가 오늘은 특별이세요.』
『어쩌면……』
옥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명랑했고 침착했다.
무심하다. 천사처럼 무심한 얼굴이라고, 그처럼 평온한 아내의 이십 년 가까운 행복이 자기의 고백 한 마디로써 산산이 깨어져 나갈 것을 생각하니 감히 입을 벌려 사실을 고백할 용기가 석운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진실의 고백은 죄악을 의미했다. 빈혈증이 있는 아내는 까무러칠지도 몰른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아직 세상을 모르는 온실의 꽃과도 같은 아내이기에 옥영의 그 비탄과 절망에서 오는 가슴 아픔이 석운 자신의 아픔처럼 느껴야만 할 것이 석운은 무서웠다.
『그래 학생들과 재미있게 놀았어요?』
카스테라 한 조각을 집으면서 옥영은 천연스럽게 물었다.
『그저 그렇지.』
『여태껏?』
『세검정엘 갔었지. 복잡한 시내보다도 임간좌담(林間座談)이 좋겠다고들 해서 그 길로 곧 택시를 타고……』
『그러세요. 그것 참 잘 하셨군요. 일요일이니까 사람들도 많았을 거예요.』
『많이들 나왔더구먼.』
『그래 점심이랑 저녁은 어떻게 하셨어요?』
『점심은 학생들이 초밥이랑 과자랑 사갖고 갔었고 저녁은 시내로 들어와서 먹었지.』
이처럼 미리 복선을 펴 두면 보고가 들어오더라도 발뺌이 자연스럽게 성립이 된다.
이윽고 경숙이도 건너가고 석운은 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석운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또 못 주무세요?』
한밤중에 아랫목에서 자고 있던 옥영이가 물었다. 이 남편은 불면증으로 잠못 이루는 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응.』
이리 뒤채고 저리 뒤채기만 하는 남편과 똑같이 옥영도 뒤채고 있었다.
『당신은 왜 못 자오?』
『나도 갑자기 불면증이 생겼나 봐요.』
시부의 편지가 또렷하게 되살아 오기만 했다. 묵극 한 토막도 망막에 인 박힌 채 사라지지가 않는다.
석운은 손을 뻗쳐 아랫목에 누운 아내의 손길을 말없이 더듬어 잡았다. 아내의 조그만 손길이 거기에 응하며 꼭 쥐여 왔다.
오래오래 같이 살다가 같이 죽자는 서글픈 호소처럼 자기의 손을 두 손길로 꼬옥 옥영은 감싸 쥐고 있었다.
『이 손길에는 역사가 있다.』
고난의 역사가 있고 환희의 역사가 거기에는 있었다. 옥영의 손길에서 느끼는 이 오붓하고 탐탁한 애정 속에서 석운은 고영림의 눈부신 정열이 한낱 백일몽(白日夢)처럼 허황함을 문득 느꼈다.
『고영림이가 도대체 뭐야!』
석운은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정열은 병이 아닐 것이라고 어제 석운은 애정을 교환하면서 말했다.
그러던 것이 오늘 아침, 애들이 학교엘 가느라고 새벽부터 떠들어대는 이 부산한 현실을 눈앞에 볼 때 정열은 역시 일종의 병이라는 느낌이 절실히 왔다.
들뜬 정열만으로써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생활의 톱니바퀴가 현실의 음향(音響)을 소리높이 내면서 간단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톱니바퀴의 이러한 회전 속에서는 그처럼 절실히 느껴지던 영림에의 감각이 하룻밤 사이에 차차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참 철없는 것이지.』
나잇살이나 먹은 것이 영림이 같은 어린애 하나를 적당히 처리 못해서 질질 끌려 들어갔다는 생각을 하면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다시 만날 약속을 하지 않은 것만은 참으로 잘 했어.』
흰 머리카락을 뽑아버리면서 하던 투정이 꼭 어린애들의 밥투정만 같아서 싱겁기 한이 없다.
오월이 가고 유월이 왔다.
현실의 압박감과 아울러 영림을 잊어버리고자 하는 노력이 석운의 마음을 어느 정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러나 부부 생활에 이미 오점(汚點) 하나가 찍혀졌다는 이 역사적 사실이 석운을 항상 범죄자로서 취급하고 있었다. 아내가 모르고 있는 비밀 하나를 갖고 있다는 의식이 항상 머리로 들어왔다. 그래서 아내의 눈치와 표정을 늘 살피게 되었고 태연하던 애정 생활에 인공적인 장식이 자연 필요해졌다.
그러나 그것 역시 타성이 되고 보니 비밀을 가졌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석운의 마음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유혹의 강」의 집필은 차차 진행되어 저번 날 영림에게 미리 이야기해 준 강석운의 창세기를 기록하는 대목에서 석운은 여러 번 붓을 내던지고 영림을 감각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악마와 천사의 이야기를 하면서 영림과 바꾼 정열의 한 매듭 한 매듭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피부에 왔다.
『이래서야 어디 글을 쓰겠나.』
하루에 한 회도 쓰지 못하고 석운은 책상 앞에 벌렁 나자빠져서 소설 생각보다도 영림의 생각을 좀 더 골똘히 하고 있는데 정신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럴 적마다 옥영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이 층으로 올라와서 책상머리에 마주 앉으며
『그렇게 안 써져서 어떡하세요?』
『슬럼프야, 슬럼프.』
작가 생활에 때때로 습격해 오는 슬럼프(不振狀態[부진상태])를 옥영도 잘 안다.
『기분 전환으로 어디 여행이나 하고 오셨음……』
『외국 작가들은 그렇게들 하지만, 여기서야 어디 쥐꼬리만한 원고료를 가지고는 여비도 안 나와.』
『참 우리나라 작가들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어요. 생활비도 안 대 주고 좋은 원고만 쓰라니까요.』
『차 한 잔도 먹지 말고 된장에 김치 깍두기만 먹고서 훌륭한 작품을 연방 써내라는 데야 말할 것 뭐 있어? 에크, 된장 트림이 막 겨 올라오는구나.』
옥영은 웃으며
『참 커피 한 잔 끓여 올까요?』
『그만둬요. 수지 계산이 맞지가 않아. 맹자 가라사대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도 없다고, 커피 한잔 훌쩍 들이키고 된장도 떨어져서 소금 밥 먹기는 싫어.』
커피를 끓이기 위하여 옥영이가 일어서는데 석운도 벌떡 일어나 앉으며
『여보!』
『네?』
『당신 뭐 할려고 살우?』
『당신하고 같이 죽을려고.』
『아주 막 생색을 내는군.』
『정말인 걸 어떻게 해요.』
『한 번 안아 줘.』
옥영은 얼굴을 붉히고 다시 꿇어앉으며 다가드는 남편을 가만히 품에 안았다.
『이런 아내를 나는 지금 속이고 있지.』
금방이라도 머리 위에 벼락이 쳐내려올 것만 같았다.
유월 중순경, K 신문의 「유혹의 강」은 하루 이틀씩 빠지게 되어 독자들을 실망하게 하였다. 전화로나 편지로나 하루도 거르지 말고 실어달라는 독자들의 재촉을 받고 담당 기자는 그 뜻을 작자에게 누차 전달했으나 슬럼프에 빠져서 큰일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런 상태로 유월 하순까지 갔다. 나중에는 관절염이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리만큼 석운의 창작욕은 마비되어 갔다.
그동안 석운은 하루에도 여러 번씩 영림에게 전화를 걸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석운은 끝끝내 전화를 걸지 않고 견디어 배겼다.
어떤 날 같은 때는 헤화동 로타리로 나가서 약방 전화로 본국 二三二三[이삼이삼]번의 다이얼을 돌리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탁 수화기를 던지기도 했다.
그런 날은 하루종일 책상 앞에서 뒹굴며 영림의 환영과 씨름을 하는 것이었다.
일부러 정원으로 뛰쳐 내려가서 옥영이가 열심히 가꾸는 야쓰데 분에 물도 주어 보고 걸레로 분을 반들반들 닦아 주기도 했다.
『야쓰데는 다년생이다. 칸나는 일년생이 아닌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옆에 놓인 칸나 분을 바라본다. 무서운 의욕을 지니고 줄기차게 자라나는 칸나였다.
『그렇지만 칸나는 일년생이지. 칸나의 의욕과 정열이 제아무리 왕성하게 불타올라도 서리를 맞을 무렵이면 시들어 버릴 걸 그래.』
시들어 버릴 고영림의 의욕이며 정열임을 칸나 분은 암시해 주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다년생인 야쓰데는 수명이 길거든.』
칸나와 야쓰데, 범죄 의식과 왕자 의식 속에서 작가 강석운의 기력은 차차 피로해 가기만 했다.
영림은 다시는 찾아 주지 않았다. 편지도 띄워 오지 않았다.
그동안 옥영은 어떻게 된 셈인지, 이전보다도 더 명랑했고 나긋나긋 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우수 같은 것이 한 줄기 떠돌고 있는 것도 같았다.
집필이 여의치 않음을 걱정하면서
『그렇게 고생스럽게야 어떻게 쓰시겠어요? 신문사에 말해서 아주 중단해 버리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해서 좋을 거예요.』
『아니야, 나는 아직까지 소설을 중단해 본 적이 없어. 죽어도 끝까지 쓰고야 말 테니까.』
『그래도 몸을 돌봐야지 않아요? 요즈음 얼굴이 몹시 상했어요.』
『인제 추서겠지, 문제없어.』
그러면서 석운은 주먹으로 허공을 쳤다. 그러한 남편의 태도에서 옥영은 언제나 매일반으로 그 어떤 불길을 전신으로 느끼곤 했다.
이리하여 영림과 헤어진 지 만 한 달이 된 유월 하순에 애리에게서 땐스 홀 개점 축하 파티의 초댓장이 날아왔다.
홀 이름은 「애리자」(愛梨子)였고 장소는 을지로 이가였다.
《인생과 사업과를 바꿀는지도 모르는 애리의 첫 출발을 축하하여 주시기 바라는 의미에서 맨 처음의 초댓장에다 선생님의 성함을 쓰고 있읍니다. 웃음을 팔아 먹고사는 애리가 올림》 초댓장 한 모퉁이에 애리는 써 왔다.
『마침 잘 됐군. 요즈음 울적하신데 꼭 가 보세요.』
『언젠가?』
『내일 아냐요.』
『당신도 같이 갈까?』
『아아뇨, 갈 데가 따로 있지 내가 홀엘 어떻게……』
祝賀[축하] 파티
땐스 홀 「애리자」의 개점 축하연은 오후 다섯 시부터였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나서 옥영은 한참 동안 뜰에서 서성대고 있다가 연못 물을 퍼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데
『어머니, 창길이가 아버지 봤대요. 접대 세검정에 갔을 때 아버지 봤대요.』
돌아다보니 이웃집에 사는 창길이와 함께 도선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래, 창길이 너도 그때 갔었니?』
화분에 물을 계속해서 주며 옥영은 물었다.
『네, 우리 아버지랑 엄마랑 다들 갔었어요.』
그러면서 창길이는 고무총으로 나뭇가지에 앉은 참새를 겨누었다.
『엄마, 우리도 능금 사 먹으러 가요. 아버지는 여학생하고만 가고.』
『도선이는 알지도 못하고…… 그날은 무슨 일이 계셔서 가셨단다.』
『창길이가 그러는데 여학생이 울면서 올라가더래요. 아버지는 뒤로 따라가고, 창길이 엄마랑도 다 봤다는데?』
『울면서 올라가?』
옥영은 화분에서 허리를 폈다.
『학생들이 많았지?』
창길이는 고무총을 탁 쏘며
『아니요, 혼자에요.』
『그래 둘이서 어디로 가던?』
『우리가 앉았던 자리로 올라갔어요.』
『둘이서?』
『네.』
『그래, 그 학생이 왜 울던?』
『몰라요. 우리 엄마가 그런 말 하면 안 된다고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창길이의 이 마지막 한 마디가 옥영의 눈앞을 캄캄하게 하였다.
더 물어볼 필요가 이제는 없다. 창길이에게 함구령을 내린 것만 보아도 남편과 영림의 그 날의 행동은 넉넉히 추측할 수가 있었다.
『엄마, 우리도 아버지랑 세검정에 가요.』
『그래 이제 아버지가 돌아오시거든 물어보고 다음 공일에 가자.』
『아이 좋아! 창길아, 우리도 간대요.』
이윽고 두 아이는 뒷뜰로 뛰어갔고 옥영은 야쓰데분 앞에 덤덤히 서 있었다.
창길이 어머니에게 물어보면 좀 더 똑똑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겠지마는 옥영에게는 어쩐지 그 똑똑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무서워 일부러 흐리멍덩한 추측 속에서 일루의 희망 같은 것을 붙잡고 늘어지는 편을 옥영은 취했다.
그러는데 뭉클하고 오늘 저녁 축하 파티가 가슴에 왔다.
남편의 말을 들으면 애리라는 여자는 한성 양조의 고전무의 후원으로 땐스 홀을 낸다고 했다. 그리고 그 고전무가 영림의 오빠이고 보면 그리고 또 애리와 영림이가 중학 동창생이고 보면
『그이는 오늘 저녁 영림이가 파티에 참석할 것을 예기하고 간 것이 아닐까?』
창길이의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할 때 옥영의 이러한 상상은 십중팔구 정확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거미줄!』
자기 혼자만이 모르고 있는 무슨 불길한 실마리 같은 것이 자기의 둘레를 거미줄처럼 에워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옥영은 불현듯 느끼며 부루루 진저리를 치며
『그래도 그이가 설마 그럴 수가 있을라구?』
옥영은 입속말로 경건히 종알거렸다.
「애리자」 개점을 계기로 한 오늘의 연회는 개업을 의미하는 파티인 동시에 고영해가 애리를 위하여 열어 주는 이중의 뜻을 가진 성대한 파티였다.
그러나 고영해 부자에게 있어서는 그 밖에 또 하나 중대한 복안이 이 파티에는 숨어 있었던 것이다.
저번 날, 영림은 오빠와 싸움을 하고 안방을 나설 때 부모나 오빠의 마음을 자기도 잘 안다고 하면서
『……그래서 저로서도 될 수만 있으면 준오씨와 결혼을 하려고 노력도 해 보았고 또 이제부터 노력을 계속해 보겠어요, 그것뿐이에요.』
했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영림의 이 어른다운 한 마디에 최후의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날로 영림이가 강석운을 방문한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희망은 아직도 끊기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고영해는 아버지와 의논을 한 결과 오늘 저녁의 축하연을 이용하여 영림과 송준오와의 접근을 계획적으로 꾀하여 줌으로써 영림의 망설이는 마음에 결정적인 못 하나를 박아 주어야만 하였다.
『송군, 군은 영림의 눈치만 보는 것 같은데 그처럼 약하게 나가면 여자는 휘어잡지를 못하는 법이야. 여자의 눈치야 어떻든 간에 이편의 욕망을 남자답게 솔직히 행동화해요. 눈물 대신에 완력을 가지고, 그까짓 조그만 계집애 하나를 못 휘어잡아서야 될 말인가. 오늘 밤은 기회가 좋아. 계집애 하나 못 꼬여서야 어디 남자로서 출세를 하겠나? 속임수도 좋아, 속아 넘어간 담에는 꼼짝 못 하는 게 여자야.』
한 잔 축하주에 적이 흥분되어있는 송준오의 귓속에 고영해는 그런 말을 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송준오는 듣고만 있었다.
『송군은 사냥을 못해 보았나? 매가 꿩을 덮치는 식으로 하면 되는 거야. 여자란 뭐니 뭐니 해도 남자들이 지닌 그런 종류의 힘의 세계를 도리어 동경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거야.』
고영해의 이러한 귓속말에는 고영해대로의 타산이 또 하나 숨어 있었다.
송준오가 영림에게 열중해 있는 광경을 애리는 볼 것이다. 따라서 애리로서는 송준오를 증오하지 않으면 단념해야만 할 마음의 자세를 취할 것이 뻔하다. 자연 애리는 고영해의 품 안에서 돈과 사랑을 교환할 마지막 결심을 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애리의 심리를 계산해 놓고 고영해는 고영해 대로 오늘 밤에는 유현자를 손아귀에 넣을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유현자와만 춤을 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애리는 땐스 홀 개점으로서 이미 경제적 속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무방했다. 고영해가 애리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현자를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애리의 존재를 무시하는 태도로 유현자만을 상대로 해야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유현자는 고 전무의 애정을 전적으로 믿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상이 오늘 밤 고영해가 파티에 연출할 연애극의 각본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영해의 각본은 애리 혼자만이 알고 있는 강석운의 등장을 전혀 계산에 넣지 않은 그것이었다.
오늘 저녁 이 「애리자」 축하연 무대의 등장인물은 고종국 사장과 애첩 황산옥, 송준오와 그의 부친인 은행가, 주인공인 애리와 전신이 기생 출신인 그의 어머니, 유현자를 비롯한 한성양조의 사원들, 고영해와 고영림, 그리고는 오십여 명의 남녀 내빈이었다.
홀 안은 축하 화환과 오색의 등불로 휘황찬란했다. 밴드가 있는 스테이지 후면에는 츠렁츠렁 늘어진 검정 비로드 장막을 배경으로 하여
「꿈의 전당 애리자」
라는 일루미네션이 작렬된 정열처럼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더 넓은 무도장을 중심으로 한 좌우 객석에는 한성양조의 특급주 「백부용」을 위시하여 양주와 맥주가 홍수처럼 범람했고 흰 가운을 입은 보이들이 음식 쟁반을 들고 분주하게 오락가락했다.
고영해의 인사말과 내빈의 간단한 축사가 끝났을 때 강석운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어마, 선생님이?』
애리와 송준오를 상대로 하여 식사를 하고 있던 영림이가 입속으로 그렇게 외쳤을 때는 이미 애리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보이에게 인도를 받아 들어오는 강석운을 맞이하였다.
『선생님, 바쁘신데 감사합니다.』
『애리 양 축하합니다.』
『선생님, 어서 여기 앉으세요.』
애리는 애인처럼 반겨 맞으며 석운을 자기 옆자리에 정중히 모셨다.
석운의 앞자리가 영림이었고 애리의 앞자리가 송준오였다.
『아……』
착석을 하고 시선을 들다가 석운은 가느다랗게 외쳤다.
영림은 말없이 고개를 가만히 숙여 인사를 했다.
『참 영림이 너 선생님을 안댔지? 그런 줄도 모르고 하마터면 소개를 할 뻔했다. 얘.』
영림은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애리가 흰 나일론 드레스에 핌프스를 신고 있는데 비하면 여전히 그 칙칙한 곤색 양복이 화장도 없는 영림의 모습이 어딘가 이러한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을만큼 초라하게 보였다.
『참 미스터 송, 선생님에게 인사하세요. 강석운 선생님이에요.』
애리는 그리고 석운을 향하여
『저 송준오라고, 영림을 위해서는 목숨 하나쯤 언제든지……』
순간, 영림과 송준오의 시선이 똑같이 애리의 얼굴을 무섭게 쏘아 보았다.
『강석운입니다.』
『송준옵니다.』
보이가 석운의 요리를 날라왔다.
『자아, 선생님 무슨 술을 드실까? 아, 참 선생님은 맥주당이시지.』
방글방글, 애리는 연방 웃음 진 얼굴로 석운에게 맥주를 따라 주며
『선생님, 저번 날 밤은 늦으셨지요? 어쩌면 선생님 그처럼 뵈올 수가 없어요? 저는 정말 이 년 동안 선생님을 하루도 잊은 날이 없었는데.』
석운은 웃는 얼굴로 맥주를 들며
『애리 양이 오늘은 대단히 명랑하군.』
『저번엔 선생님 앞에서 실컨 울었었지요.』
석운은 불현듯 영림을 바라보았다. 영림은 못 들은 체 식사만 하고 있었고 송준오는 경멸의 눈초리로 애리와 석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애욕의 각본이 고영해에게 있듯이 오늘 밤의 애리에게도 그런 종류의 플랜 하나가 가슴 속 깊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애리는 송준오와 몇 차례를 만났다. 그러나 송준오가 결국 애리에게서 요구하는 것은 육체적인 애욕일 뿐 애리의 고달픈 영혼을 다사롭게 무마해 주지는 않았다. 웃음을 파는 여인으로서 밖에는 더 대해 주지를 않았다.
애리는 서글퍼 강석운을 초대했다. 그것은 뭐 강석운을 사모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송준오에 대한 대항 의식에서 나온 일종의 시위운동을 의미하고 있었다.
거기에 고영해가 다가왔다.
『전무님, 강석운 선생님이 오셨어요.』
애리는 냉큼 일어나서 둘이를 소개하였다.
『응, 강석운 선생?』
고영해는 뜻밖이라는 듯이 그러나 만면에 웃음을 띄며 애리를 바라보았다.
『제가 모시었어요. 전부터 잘 아는 선생님이에요.』
『아, 그렇습니까 고영해올씨다.』
강석운도 인사를 했다.
『선생 같으신 분을 모시게 되어서 참으로 영광입니다. 허어, 애리 양이 강선생을……』
고영해는 그러면서 마주 앉은 영림을 힐끔 바라보았다. 눈치를 채고 애리는
『아이, 전무님은 영림이만 강선생님을 아는 줄 아시나봐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허어, 강석운 선생이…… 』
오늘 밤 뜻밖에도 강석운이라는 인물이 나타난 데는 필경 영림의 숨은 뜻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단정을 하며 증오의 염과 아울러 일종의 적개심이 왔다. 그러나 입으로는
『자아, 강선생, 제 술 한 잔 드십시오. 정말 잘 오셨읍니다. 애리를 후원하는 의미에서 이제부터 자주 좀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애리 양을 위해서 많은 힘을 써 주신다고 들었읍니다.』
『원 천만의 말씀을…… 자아, 그럼 나는 좀 저리로 가봐야겠읍니다. 애리는 오늘 밤 강선생을 잘 모셔야 해요.』
영림을 강석운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강석운을 애리에게 맡겨 둘 필요를 문득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염려 마세요. 선생님을 누구가 모셔 왔기에요.』
『참 그렇구먼.』
애리는 이미 자기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영림이보다는 허술하게 취급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애리가 아니고 유현자였던들 고영해는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유현자를 강석운에게 맡겨 두지는 않았을는지 몰랐다.
어쨌든 뜻하지 않았던 강석운의 등장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긴급 조치를 고영해는 취할 수밖에 없었다.
고영해는 걸어가다가 송준오의 귀에다 입을 갖다 대고 가만히 속삭이었다.
『강석운은 군의 강적이다. 영림을 잠시도 놓아주지 말라!』
송준오는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편 쪽에서 고종국씨가 송준오의 부친 송달(宋達榮)씨와 환담을 바꾸고 있는 옆에서 황산옥이가 양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댁의 아드님은 지나치게 얌전해요. 그까짓 영림이 하나쯤 못 휘어잡고 호호호……』
황산옥의 말에 송달영씨는 웃는 얼굴로
『허허헛, 내 아들이 얌전한 게 아니고 댁의 따님이 지나치게 고집이 세서……』
『허허허……』
하고 고종국씨도 웃으며
『송선생이 원체 얌전하시니까 그 핏줄기가 딴 곳으로 갔을라구요? 허허 헛……』
그러는데 고영해가 다가왔다.
『아버지, 강석운이가 저기 와 있읍니다.』
『응? 강석운이가?……』
고종국씨와 똑같이 황산옥도 놀랐다.
『영림이가 초대했다더냐?』
『자세히 알 수 없읍니다. 초대는 애리가 했다지만……』
『음.』
고종국씨는 어두운 표정을 하며
『영림이와 무슨 이야기를 하든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음, 필경에 무슨 곡절이 있어서 왔을 거야. 어디 내가 좀 가 보고 오지.』
고종국 씨의 뒤로 황산옥도 총총히 따라갔다.
그러는데 밴드가 울리며 춤이 시작됐다.
음악은 블루스.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손님들은 짝을 지어 중앙으로 몰려나왔다.
고종국씨와 황산옥은 강석운의 식탁으로 걸어갔다.
『오오, 이거 강군이 아니요?』
고종국씨는 명랑한 소리로 강석운의 어깨를 쳤다.
『아, 고사장 축하합니다.』
강석운도 일어나며 인사를 하였다.
『난 또 누구라고요 근엄하신 강교수님의 아드님께서 이런 델 올 줄은 정말 몰랐어요 호호호……』
황산옥이가 슬그머니 하는 소리였다. 강교수의 근엄함을 몸소 실험해 본 적이 있는 황산옥으로서는 그 한 마디에 실감을 느끼며 토했다.
석운은 부드럽게 웃으며 부인의 말을 묵살해 버리고 있는데 고사장은
『강교수의 아드님이 「유혹의 강」과 같은 훌륭한 소설을 쓸 줄을 몰랐다니까. 참으로 좋은 소설이거든. 매일처럼 읽고 있는데 아마도 그게 다 강 군의 경험에서 생겨난 이야길 거야.』
석운은 여전히 미소만 띄고 있었다.
아버지의 비꼬는 말이 귀에 거슬려 영림은 냉큼 일어서서 송준오와 함께 무도장으로 걸어나가서 스테프를 밟기 시작했다.
고영해도 유현자를 안고 돌아가고 있었다.
『자아, 선생님 좀 춰요.』
애리가 석운을 붙들고 나가는 등 뒤에서 황산옥은 말했다.
『이따 나에게도 강선생을 좀 빌려줘야 해요.』
『네네.』
애리는 가볍게 받아넘기며 석운과 함께 인파 속으로 파묻혀 들어갔다.
황산옥은 이윽고 송달영씨와 마주 잡았고 고종국씨는 애리의 어머니와 서투른 스테프를 밟고 있었다.
완만한 블루스가 오색 등 밑으로 감미로운 멜로디를 가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생님, 제법 잘 추세요. 언제 다 춤을 배우셨소요?』
『소설을 쓸려면 이것저것 다 알아 둬야지.』
『영림이가 우리를 연방 바라보고 있어요.』
그 말에 석운도 시선을 돌려 영림을 먼 발로 찾아보았다. 송준오의 어깨 옆으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영림이가 이쪽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애리는 송준오에게 보이기 위하여 일부러 더 석운의 가슴에 바싹 얼굴을 기대며 돌아가고 있었다.
『선생님, 저는 잘못하면 사업과 인생을 바꾸게 될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말이야? 초댓장에도 그런 말이 씌어 있던데 고전무 말인가?』
『네, 여기서 나오는 수입의 절반을 제게 준대요.』
『음, 흔히 있는 케이스야.』
『선생님, 어떻게 험 좋아요?』
『음, 그렇지만 애리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지?』
『있지만, 그이는 나를 허수롭게만 생각하고 있는 걸요.』
『누군데?』
『지금 영림이와 춤을 추는……』
『아, 미스터 송?』
석운은 약간 놀라며
『영림이와 결혼을 한다면서?』
『영림이가 말을 안 들어요.』
그러다가 석운을 빤히 쳐다보며
『송의 말을 들음 선생님 때문에 영림이가 말을 안 듣는다는데…… 선생님, 그게 정말이에요?』
석운은 대답을 못하고 시선으로 영림을 찾았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선생님 정말인가 봐요.』
『…………』
『영림이가 나빠요. 싫음 싫다고 딱 잡아떼지도 않고, 그러니까 송이 질질 끌려 들어가는 거예요.』
『음, 잘 알았어.』
『송과 결혼하게만 된담 이런 사업도 집어치우겠어요. 빨리 집어치워야죠. 그렇지 않음 결국 고전무의 세컨드가 될 수밖에요.』
연거퍼 세 차례나 애리는 석운과 춤을 추었다.
영림은 차차 초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동안 한 번쯤은 자기더러 춤추기를 청해 올 것 같았으나 석운은 어쩐지 그러지를 않았다.
한 달 동안을 꼬박 기다렸으나 전화 한 번 걸어 주지 않은 강선생이었다. 그것에 야속하기도 했지마는 오늘 이 자리에 강선생님이 나타날 줄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이 년 동안이나 교제해 왔다는 애리와의 관계가 영림의 신경을 긁어 쥐고 있었다. 저번 날 밤, 애리는 강선생님 앞에서 실컨 울었다고도 했다.
『왜 울었을까?』
여성이 남성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애정의 애달픈 고백 밖에는 없을 것이 아니냐고, 사모님의 존재만을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던 영림의 눈앞에 뜻도 하지 못했던 애리의 존재가 갑자기 확대되어 왔다.
『그렇다면 세검정에서의 선생님의 애정이 모두 다 허위의 것이었던가? 그럴 수 있는 강선생님은 분명히 아닐 것만 같은데,』
송준오와 춤을 추면서 영림은 문득 자기의 차림차림을 훑어보았다.
야들야들한 예쁨을 가진 애리의 얼굴도 얼굴이지마는 흰 나일론 드레스가 눈부시게 화려하다.
『이럴 줄 알았담 옷이라도 갈아입고 왔을 걸 그랬지.』
자기의 칙칙한 곤색 양복이 갑자기 불안을 가져왔다. 유현자도 그렇고 다른 여자들도 그렇고 모두가 다 유월의 계절과 홀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경쾌한 색채를 지닌 옷차림이 일종의 압력을 가지고 일제히 습격해 왔다.
『영림, 공을 들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데, 영림은 너무도 무정해.』
술기운이 퍼지면서 송준오는 불같은 정열을 태우고 있었다.
『영림이가 강선생을 생각한다는 건 일종의 꿈이야. 꿈도 무서운 꿈이야. 가정을 가진 이들은 결국에 있어서는 가정으로 돌아가는 건데……』
『나도 다 알아요.』
『알면서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하려는 거야?』
『누가 머 어쨌어요. 이처럼 미스터 송과 춤을 추고 있는데.』
『고마워, 오늘 밤은 나와 같이 밤샘을 해요.』
『그래요.』
『저거 봐요, 강선생은 애리하고만 추지 않어? 중년 남자들은 일정한 대상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 거야. 누구든지 젊고 곱살한 여자면 다 좋아하는 거야.』
『…………』
『젊은 사람처럼 결혼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일시적인 흥분제로서 여자를 상대로 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일이야.』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들에게는 애리도 좋고 영림이도 좋고 현자도 좋고…… 아니, 여기 있는 모든 젊은 여자를 좋아하는 취미를 갖고 있거든. 영림의 오빠를 봐요. 영림의 아버지를 봐요.』
『그것도 알아요.』
춤이 끝났다.
영림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길로 달려가서 사무실 전화로 아현동 집을 불러냈다.
『덕순 언니야? 운전수 지금 집에 가 있지? 박씨 말이야. 응, 그럼 이제 내가 부를 테니 대지급으로 옷 좀 보내 줘요. 옷장에 있는 그린 색 후레야 양복과 팔 소매 없는 로오 넥크 블라우스와 레에쓰가 달린 슬리프…… 그리구 서랍에서 비취 이어링, 귀걸이 말이야. 그리고 넥크레스도, 목걸이 몰라? 양말도 새것으로 한 켤레, 펌프스는 구두장에 있고, 아이, 속상해! 춤 출때 신는 흰 구두 있잖아. 아냐, 또 있어. 콜드 크림과 분은 갖고 있으니까 그만 두고…… 도오랑과 입 연지, 눈썹 먹, 아이샤도우 약…… 아이 참 밥통이야! 눈언저리를 꺼멓게 하는 것 있잖아?…… 그리고 로오숀, 로오숀도 두 가지 다 보내요. 화장용과 헤어 로오숀…… 머리에 바르는 것 말이야. 향수도 잊지 말고…… 메니큐어 약도…… 손톱에 바르는 것…… 분홍은 싫어. 흰 것으로 …… 대지급이라는 걸 알아야 해요. 박씨더러 그렇게 일러요. 바이바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홀 안은 점점 문란해졌다. 주흥에 겨워 성급한 젊은 축들은 지르바를 추었다. 밴드를 향하여 맘보를 청하기도 했다.
악대도 흥이 났다. 거나하게 한 잔들 걸친 판이라, 컨덕터는 춤을 추는 것 같은 흥겨운 액션을 마구 연발했다.
나이 지긋한 축들은 젊은이들의 경쾌한 춤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황산옥은 얼근해서 젊은이들과 마구 돌아갔다. 강석운과 송준오도 한 번씩 붙들리었다.
고영해는 이미 유현자를 함락시키는 최후의 단계까지 이르고 있었다.
『현자도 보면 알 거야. 현자는 애리와 나 사이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나는 애리에게는 그리 흥미가 없어. 춤 한번 출 생각도 않는다니까 글쎄.』
『그럼 뭣 때문에 애리에게 홀을 내주셨어요?』
『아, 그건 애리의 상업술을 산 것뿐이야. 이제 봐요. 모두가 다 애리에게 미쳐서 덤벼들 테니 말이야. 그런 방면에 있어서는 천재적 소질을 애리는 가지고 있다니까.』
강석운이가 송준오와 마주 앉아서 술을 들고 있는 동안 애리는 젊은 축들과 신이 나서 맘보를 추고 지르바로 핑글핑글 돌고 있었다.
당장에 애리는 젊은이들이 인기를 한 몸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룸바를 추면서도 젊은이들과 어깨를 대고 요염한 웃음을 방글방글 웃으며 홀을 한 바퀴 삥 돈 적도 있었다.
애리의 장기는 스케이팅 월쓰였다. 그러나 파트너들은 절반도 못 가서 춤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케이팅 월쓰에는 애리를 무난히 리드할 작자가 오늘 밤에는 없었다.
『애리! 애리!』
술 취한 젊은 축들은 애리를 자기네의 애인들처럼 불러대며 박수갈채로 환영을 했다.
어지간히 취한 애리는 신이 났다. 젊은이들에게 둘러싸여서 애리는 술잔을 들고 소리높이 외쳤다.
『웃음을 사 가요! 웃음을 사 가요! 애리는 오늘 밤부터 홀 「애리자」에서 웃음 장사를 시작했어요. 맥주 한 잔에 웃음 한 번, 칵텔 한 잔에 웃음 두 번.』
『으하하하하핫……』
청년들이 애리의 어깨를 좌우에서 잡고 웃으며 떠들며 고함치며 마셨다.
석운은 바라보며 후딱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애리의 그 자포자기하는 심정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석운 혼자뿐이었다.
송준오도 어두운 표정을 하고 애리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가
『강선생, 우리도 술을 듭시다.』
하고 맥주를 권해 왔다.
『네, 듭시다.』
석운은 송준오와 글라스를 맞대며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송준오는 취해 있었고 석운도 어느덧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애리는 저런 버릇이 나빠요. 웃음을 파는 여자라고 저처럼 제 입으로 선전하지 않아도 무방할 텐데……』
송준오는 그런 말을 석운에게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슨 고달픈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는데 애리가 청년들의 틈바구니를 빠져나와 맥주 한 잔을 손에 들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두 사람 앞으로 걸어왔다.
걸어오다가 애리는 후딱 걸음을 멈추고 반대편 쪽에서 조용히 걸어 들어 오는 영림을 발견하고 취안을 크게 떴다.
어디를 갔었는지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영림이가 색다른 차림새와 색다른 표정을 지니고 역시 두 사람 곁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아, 영림……』
송준오가 꿈결처럼 돌아보며 부르짖듯 불렀다.
그 돌변한 영림의 모습에 석운도 놀랐다.
화이트 그린의 후레야 스커트, 어깨에서 부터 미끈한 팔이 몽땅 드러난 로오 넥크 블라우스, 로키트가 달린 순금 넥크레스, 백색의 무도용 펌프스, 짙은 도오랑 화장의 엷은 아이샤도, 화판인 양 곱게 그려진 타오르는 입술, 파아란 비취 이어링이 양쪽 귀바퀴에서 한들거리고 있었다.
애리는 연방 눈을 깜박거렸고, 영화 화보에서 쏘옥 빠져나온 성싶은 영림의 화려한 얼굴은 바닷속처럼 조용했다. 무기미하게 조용했다.
불나비 영림이가 그처럼 호화로운 몸차림으로 나타난 것을 먼 발로 바라보자 고영해 부자도 적지 않게 놀라고 있었다. 몸치장에는 통 관심이 없던 영림이었기 때문이다.
휴식 시간이 되었다. 바이얼린 독주가 흘러나왔다. 〈오리엔털〉에 뒤이어 〈G선 위의 아리아〉, 마지막이〈트로이메라이〉.
송준오 옆에 영림은 앉아서 준오가 따라 주는 칵테일을 석 잔이나 연거퍼 마시고 있었다. 그러한 영림을 보고 송준오도 놀랐고 애리와 석운도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된 셈이야? 갑자기 화장을 하고 술도 마시고.』
석운의 팔 한쪽을 끼고 애리는 몽롱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영림은 무심히 웃어 보이며
『미스터 송을 보기가 딱해서, 내 초라한 모습이 신경에 걸리는지, 준오 씨의 시선이 자꾸만 애리에게로 뻗길레……』
『흥, 의미가 지극히 심장하구나! 나 같은 둔감으로는 알아듣기가 힘든 데…… 자아, 이왕 입에 댄 술이니 내 술 한 잔 받아요. 그리고 그 술일랑 선생님에게 드려봐요.』
애리가 따라주는 위스키를 영림은 말없이 들이키고 나서
『자아, 애리도 한 잔……』
『선생님한테 드리라는데.』
『드리고 싶음 네 손으로 드려요. 남의 손을 거치지 않음 못 드릴 사이도 아닌 상싶은데.』
『아이고, 아파라! 이건 분명 영림의 화살인데…… 자아, 선생님!』
석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잔을 받으며 어두운 시선으로 영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영림은 한 번도 제대로 석운의 시선을 붙들어 주지를 않는다. 자연스런 외면으로서 준오의 시선만 연방 붙들고 있었다.
『영림이 너 그러고 나서니까 오늘 밤의 히로인같구나.』
『감사하지만 사퇴할 테야.』
두 여인의 심리가 이상하게도 자꾸만 비뚤어져 가기만 했다.
이윽고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금 춤이 시작되었을 때 제각기 두 쌍은 서로가 다 본의 아닌 상대자를 붙들고 열심히 스테프를 밟아야만 하였다.
멋도 모르고 기뻐한 것은 송준오뿐이 아니었다. 고영해 부자를 비롯하여 송달영씨와 황산옥도 기뻐했다.
영림의 감정이 아까부터 뚫어져 가고 있는 것을 석운은 잘 알고 있었지마는 이상하게도 고사장 부자의 눈초리가 유달리 자기에게만 쏠리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석운은 가급적 영림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취기가 차차 돌면서부터 석운은 안타깝게 영림을 붙들고 싶었다. 할 이야기도 많았다. 갑자기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선 영림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아서
『영림 양, 한 번 출까요?』
월쓰가 끝나고 탱고가 새로히 시작되었을 때였다. 송준오를 비롯한 많은 감시의 눈초리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석운은 송준오 옆에서 영림을 끌어냈다.
영림은 잠자코 따라 일어섰다.
순간, 송준오의 시선이 험악하게 빛나고 있었으나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애리를 붙들고 준오도 나섰다.
『선생님, 뵙고 싶었어요.』
안기기가 바쁘게 영림은 한 달 동안 밀렸던 감정의 무더기를 어린애처럼 쏟아놓는다.
『영림, 나도……』
가벼운 포옹을 〈록크〉로써 둘이는 했다.
곡은 〈라 콤파르시타〉 기쁘다기보다도 그저 흐느껴 울고만 싶은 오열의 감정이 둘이의 가슴에 는 꽉 차 있었다.
『전화 종시 안 걸어 주셨지요.』
「프롬나아드」로 걸어 가며 영림은 혼자말처럼 종알거렸다.
『나무라면 못써.』
『제가 싫어지신 건 아니죠?』
오뇌의 시선으로 영림의 화장 짙은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너무 급속도로 좋아져서, 그래서 전화를 못 걸었어.』
『그러리라곤 생각했었지만…… 사랑처럼 의심이 많은 건 없나 봐요.』
『왜 갑자기 화장을 하고 나왔어?』
『화장도 예술이라고 선생님이 그러셨기에요. 선생님께 보여 드리고 싶어 서요.』
석운은 말없이 영림의 손을 꼬옥 쥐어 보았다.
『애리하고만 이야기하시고, 애리하고만 춤을 추시고……』
『어린애 같은 소리야. 송군이 영림이 옆에 딱 붙어 있고, 아버지랑 오빠랑 어쩐지 날 보고 야유하는 소리를 했어. 눈치를 챈 모양 같아서……』
『챘음 어때요?』
『저거 봐요. 오빠가 저기서 우리들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지 않아.』
『선생님!』
『응?』
『오빠의 제안으로 오늘 밤은 여기서 밤을 세운대요. 딴 손님들은 보내고 말이에요. 이 빌딩 이 층부터가 호텔인데, 미스터 송이 나와 함께 밤을 새우자는 거에요.』
『음, 그래서?……』
『아까 오빠가 송한테 하는 귓속말을 제가 들었어요. 오늘 밤은 저를 놓침 안 된다고요. 처음에는 모르고 왔었는데, 알고 보니 무슨 그런 상스럽지 못한 계획이 확실히 있어요.』
『알았어. 내가 그들의 계획을 중지시키지.』
힘찬 한 마디를 석운은 토했다. 흥분한 감정이 영림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현대에는 있을 수 없는 말이야. 정략결혼은 이미 낡았어!』
그 힘차게 튀어나오는 항거의 말들이 영림에게는 눈물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선생님, 어떻게 중지시켜요?』
『누구한테도 영림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아아, 선생님!』
스테프가 어지러워져서 턴이 제대로 돌아가 주지를 않았다.
『나도 같이 밤을 새우지.』
『그럴 필요는 없어요. 파티가 끝나기 직전에 선생님 먼저 나가서 기다려 주세요. 제가 어떡하든 빠져나갈 테에요.』
『어디서 기다려?』
『명동쯤에서 기다리세요. 미도파 앞에 다방이 하나 있죠?』
『아, 있지.』
『거기서 기다림 제가 어떡하든 빠져나갈 테에요.』
『빠져 못 나오면 어떻게 해?』
그것이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저희들이 아무렴 완력을 쓸라구요?』
『쓸는지도 모른다. 나와 약속이 있어서 빠져나가는 줄을 뻔히 알고 있을 테니까, 좀처럼 내보내지를 않을 거야. 어때? 나와의 관계를 저들이 알고 있는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오빠한테 매까지 얻어맞았어요. 저번의 그 혹……』
『아, 그 머리의 혹이』
『그렇지만 저희들이 세검정에서 만났던 일은 아직 모르고 있죠.』
『아, 그 혹!』
멋도 모르고 꼬옥 눌러 주던 그 피 묻은 혹을 애처로이 생각하며 영림을 위하여 무엇이든 하지 않고는 견디어 배길 수 없는 다급한 감정에 석운은 완전히 사로잡히고 있었다.
『선생님, 춤이 통 추어지지가 않아요. 선생님 발등만 밟고……』
『괜찮아. 후일 다시 추지.』
『머언 데…… 어디 머언 데로 가서 선생님과 단둘이만 진종일 춰요. 아담과 이브처럼… 에덴 동산에서』
『음.』
취흥도 도와주었지마는 구김살 없이 부풀어 오른 감정 속에서 애욕의 도피행(逃避行)을 소설처럼 석운은 상상했다.
한 편 애리는 애리대로 송준오와의 애정 투쟁을 전개시키고 있었다.
『무얼 그처럼 멍청하니 바라만 보는 거야?』
영림과 석운의 모습만 멍하니 쏘아보고 있는 준오의 손가락을 애리는 꼬집었다.
『흥, 이 양반 잘못함 독약 한 번 더 마셔야겠어요.』
그러나 송준오는 통 애리와의 춤에서 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애리!』
『응,』
『애리는 무엇 때문에 나를 그처럼 좋아하는 건가?』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는 거야요.』
『이유가 없이 좋아할 애리는 아닌 상싶은데……』
『웃음 장사라고요?』
『암!』
『웃음 장사에게도 순정은 있어요.』
『흥, 애리에게는 순정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야.』
『무슨 말이야요?』
『고전무에게도 순정을 팔고……』
『뭐라구요?』
『강석운에게 순정을 팔고……』
『………?』
『아까 보니까 수많은 청년들에게도 돌아가면서 공평하게 순정을 팔더군.』
애리의 눈초리가 험악하게 빛나며 준오의 손을 탁 놓고 우뚝 마주 섰다.
준오는 여전히 조소하는 어조로
『그런 의미의 순정이라면 오늘 밤이라도 나와 결혼을 해요.』
순간, 애리의 손길이 날쎄게 들리며
『찰싹, 찰싹……』
하고 준오의 뺨을 호되게 갈겼다.
『아, 애리!』
준오는 어두운 표정을 하고 애리를 불렀다.
그러나 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조용한 얼굴을 하고 가까운 식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가까운 식탁에서 고종국씨는 송달영씨를 비롯하여 황산옥과 애리의 어머니를 상대로 주흥에 겨워 있었다.
『너 왜 그러냐?』
어머니가 양미를 찌푸리며 애리를 바라보았다. 사십오 세의 애리의 어머니지만 이처럼 차리고 나서니까 애리의 언니처럼 젊고 예뻤다. 「애리자」
경영에서 뒷시중을 해 주기로 되어 있는 어머니였다.
『아냐요, 아무것도……』
애리는 태연한 얼굴로 웃음까지 띠어 보였다.
아들의 뺨을 갈기고 온 애리를 송달영씨는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찌 된 셈이야?』
황산옥이가 말을 건네는데
『사장님, 춤 한번 추어 주세요.』
하고 애리는 방그레 웃었다.
『어허허, 잘못하면 애리 양의 구두 코만 찌그러뜨릴 걸 그래.』
『괜찮아요. 새것 또 사 주실 테니까요.』
『어허허, 이거 갑자기 젊어진 판이로군.』
고사장의 손길을 모셔 잡고 애리는 트룻트를 밟아 주었다.
『영감 어젯밤 꿈을 잘 꾸셨오.』
황산옥이가 등 뒤에서 유쾌한 소리를 냈다.
『이거 어디 젊은 사람들과는 황송해서 출 수가 없는걸.』
아무리 보아도 자기 아들과 친해 지내는 것 같은 눈치를 벌써부터 채고 움직이는 마음을 억제하고 있던 판이라서 마음 놓고 행동할 수가 고사장에게는 없었다.
『황송해하실 것 뭐 있으세요? 아앗, 정말 구두 코를 밝으셨어요.』
『어허허…… 미안한걸.』
『구두 한 켤레는 벌써 벌어 놨어요. 호호호……』
『암 사 주고말고. 그런데 저번에는 왜 약속을 안 지켰나?』
『무슨 약속요?』
『아, 종로 코롬방 에서 만나자는 약속 말이지.』
『어마? 사장님, 그게 정말이었어요?』
얼버무려 버려도 항의도 못할만한 연륜의 차이를 애리는 이런 형식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음, 그럼 애리 양은 농담인 줄로만 알았었군.』
『그럼요, 사장님이 저 같은 애송이 사원과……』
『음.』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의 비애가 절실히 고종국씨에게 왔다.
송준오의 뺨을 갈기고 나서부터 애리는 막 술을 퍼먹기 시작했다. 애리의 상대로 석운도 지나치게 마시고 있었다. 애리는 석운을 붙잡고 놓아 주지를 않았다.
『선생님만이 제 마음을 알아줄 수가 있어요.』
춤을 추면서 애리는 울었다. 애리의 심정에 석운도 자꾸만 서글퍼졌다.
파티가 끝나기 직전에 석운은 애리의 어머니와 고사장 부자에게 인사를 하고 홀을 나섰다.
그로부터 반 시간 후에 파티는 끝나고 손님들은 몰려나갔다.
영림은 화장실로 돌아가서 아이샤도만을 간단히 지우고 이어링을 떼서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영림아, 어디 가니?』
손님들 틈에 끼어서 갈아입은 옷 보따리를 들고 나가려는데 오빠가 재빠르게 불러 세웠다.
『피곤해서 나 집에 가서 잘래요.』
『차가 와 있는데 갈려거든 같이들 가야지.』
『밤샘을 한다면서요?』
『글쎄 잔말 말고 같이 가!』
오빠가 궤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오빠도, 무슨 상관이에요?』
『얘 영림아, 아버지하고 같이 집으로 가자.』
『아버지는 정릉으로 가셔야지 않아요?』
『가는 길에 집까지 데려다주마.』
『아이, 누굴 어린앤 줄 아시나 봐요.』
『영림 씨』
하고 그때 송준오가 다가와서 조용히 불렀다.
『강선생님과 만나러 가는 줄을 오빠는 알고 있답니다. 어쨌든 안 가는 게 좋을 거예요. 영림의 일생에 관한 문젠데 집안에선들 왜 걱정을 안 하겠오.』
『흥, 미스터 송은 언제부터 우리 집안을 걱정했어요?』
그러는데 오빠가 와락 달려들어 영림의 등을 홀 안으로 밀어 넣으며
『너는 오늘 밤은 감금이다.』
비틀비틀 밀려 들어가다가
『사람을 왜 마구 떠미는 거예요?』
영림은 발악을 했다.
손님들이 밀려 나가면서 힐끗힐끗 영림을 돌아다보았다.
『이리 와!』
오빠는 영림의 팔을 잡아당기며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기를 기다릴 셈으로 식탁으로 끌고 가서 억지로 주저앉혔다.
『강석운과 만날 약속을 했었지?』
『아아뇨.』
『바른대로 말을 해.』
『하지도 않은 말을 어떻게 하라는 말이에요?』
『음, 강석운 그 자식을……』
『자식이 뭐에요? 강선생님이 뭐 어쨌게 자식이라는 거에요?』
『요년, 입을 못 닫치겠니?』
『제 주제나 좀 돌아다보고 남을 욕해요. 돼먹지 않게 스리……』
『닥쳐!』
고영해의 커다란 손길이 철썩하고 갔다.
『아이!』
영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아이, 전무님, 그만 하세요.』
술 취한 애리가 달려오면서 오빠를 붙들고 저리로 끌고 갔다.
영림은 이윽고 조용한 얼굴을 가만히 쳐들었다. 울지는 않고 있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감금을 당하면 선생님은 밤새껏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냐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영림은 빠져나가야만 했다.
영림은 불현듯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열 시 오 분 전, 영림의 초조한 시선 이 들창으로 뻗어 갔다. 울긋불긋 색칠을 한 들창 하나가 열려져 있었다.
이 층이 아닌 것만이 다행이라고 중학 시절 들창을 넘어 잔디밭으로 뛰어내리던 광경 하나가 번개처럼 머리에 왔다.
『앗, 저 계집애가……』
저편 밴드 옆 의자에 애리와 함께 앉아 있던 고영해가 벌떡 일어서면서 외쳤다.
걸상과 식탁을 사다리 삼아 어둠 속으로 영림은 창문을 뛰어내리고 있었다.
『아버지, 저 계집애가 들창으로……』
손님들의 마지막 꼬리가 밀려 나가고 있는 홀 입구로 고영해는 허둥지둥 뛰쳐나갔다.
『옛날 시골 색시들의 도망군 같군.』
택시를 타고 옷 보따리에다 빽을 같이 싸 꾸리며 영림은 한두 번 쿡쿡 웃었으나 얼굴은 사뭇 불그스레 상기되어 있었다.
미도파 앞에서 택시를 버리고 다방으로 올라갔을 때 석운은 밤늦은 다 방 한구석에서 취기로 말미암아 몽롱한 시선을 번쩍 들며
『아, 영림!』
옷 보따리를 옆구리에 끼고 다가오는 영림을 반가이 맞이했다.
『용히 빠져나왔군.』
『약속을 지켜야죠. 그래야만 선생님에게 신임을 받지요.』
『뭘 한 잔 들어야지?』
『아이, 목이 타요. 영화 그대로의 심야의 탈출이었어요. 들창을 넘어서……』
소다수를 단숨에 빨어 넘기며 영림은 간단한 보고를 했다.
『음……』
깊은 신음소리가 석운의 입으로 흘러나왔다.
『접때도 이 다방에서 소오다수로 목을 축였어요. 선생님은 골똘히 생각하면서요.』
『접때라고?』
『선생님이 출판 기념회에 나오셨던 날 밤에』
『아, 애리를 만나던 날 밤이로군.』
『그때, 선생님이 저와 만나지를 못하고 애리와 만난 것이 지금 생각하니까 도리어 잘 됐어요.』
『무슨 말인데?』
『애리는 우연히도 만나셨기 때문에 오늘 밤 선생님이 파티에 오신 거 아냐요. 전 정말 선생님이 오실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그대로 영영 만나 뵙지 못하는 줄로만 알았어요.』
『그러다 보니 애리는 우리들의 마스코트가 된 셈이로군.』
『정말이에요.』
그날 밤 애리의 등장은 확실히 한낱 우연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우연성엔 창조주의 거대한 캔버스 위에서는 이미 마련된 소재로서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좀 더 중대하게 가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열 시 반의 사이렌이 뚜우 하고 났다.
『이제 나가요.』
석운은 담배 갑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디로 나가요?』
옷 보따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우두커니 앉아서 영림은 물었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시간이 없는데.』
영림은 말끄러미 바라보며 쓸쓸히 웃을 뿐 얼맛동안 잠자코 앉았다가
『저는 갈 데가 없어요. 죽어도 집에는 들어가기 싫어요.』
들창을 넘어서까지 허겁지겁 달려온 영림의 정성을 석운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마는……
『그래도 들어가야 해요.』
『안 들어갈 테에요.』
『안 들어가면 어떡하나?』
『여기서 밤을 새우죠. 오빠랑 아버지랑은 인제 얼굴도 보기 싫어졌어요.』
『그럼 못써!』
석운은 딱했다. 집어넣었던 담배를 다시 한 꼬지 꺼내 피우다가 다시금 재떨이에 비벼 버리며
『자아, 일어서요. 이제 정말 시간이 없어.』
석운은 일어서서 돈을 치렀다.
다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쨌든 나가요.』
영림도 하는 수 없이 부시시 따라 일어섰다.
영림의 팔을 끌다시피 하며 석운은 다방을 나섰다.
어두운 밤거리에 인적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통행금지 시간 직전의 택시들이 헤들라이트를 기다랗게 뽐으며 질풍처럼 냅다 달리고 있었다.
『스톱!』
석운은 적이 당황하며 지나가는 차마다 손을 들었으나 멎어주는 차는 하나도 없다.
『야단났는걸!』
술기운이 갑자기 깨는 것 같았다.
『스톱! 스톱!』
석운은 손을 들고 뛰어나가 차를 막아 보았다. 그러나 차는 기적을 드높이 울리며 곧장 맞받아 들어오기만 했다. 하는 수 없이 석운은 피했다.
전부가 다 손님을 싣고 있었다. 귀로가 바쁜지 가끔 하나씩 지나가는 빈 차도 멎지를 않는다.
『영림이 어떻게 하지?』
『선생님만 어서 하나 붙들어 타고 가세요.』
『무슨 소리를…… 앗, 스톱!』
낡아 빠진 시보레 하나가 급정거를 했다. 석운이가 앞을 탁 막아섰기 때문이다.
『여보, 당신 죽어 보려고 그러오?』
운전수가 짜증을 냈다.
『미안합니다. 길이 늦어서…… 대금을 넉넉히 드릴 테니 태워 주시요.』
『시간이 없오!』
『그러니까 사정하는 거 아니요? 자아, 영림이 타요.』
영림의 등을 밀어 넣고 석운은 어쨌든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 갑니까?』
타협조로 운전수는 나왔다.
『아현동까지요.』
『아이구, 거긴 정말 못 갑니다. 팔 분밖에 안 남았어요.』
『아, 참 영림, 어딘가 올케네 집이 있다고 했지? 그리로 가서 자요.』
『삼청동이지만……』
영림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럼 됐어, 삼청동으로 갑시다.』
『삼청동도 팔 분 동안에 갔다 올 수는 없읍니다.』
『어쨌든 가 봐요. 대금은 청하는 대로 드릴 테니까 말이요.』
『나 참……』
휙 하고 차는 달려갔다.
석운은 후유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어쨌든 영림만 데려다주고 나면 자기는 파출소에 들어가서 밤을 새워도 무방하였다.
그러나 영림은 눈을 지긋히 감은 채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올케 옆에서 잘 수는 없지.』
강선생님의 품에서 애무를 받은 적이 있는 자기가 그런 사실을 숨기고 미스 헬렌 옆에서 하룻밤을 모른 체하고 지낼 수는 도저히 없다.
『뻔뻔스럽다.』
세검정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한 번도 올케를 방문한 적이 없는 영림이기에
『이거 보세요, 이 근처에 어디 여관 없어요?』
을지로 네거리를 건너서면서였다.
『있읍니다.』
『나 여관으로 데려다 주세요.』
그리고 석운을 향하여
『선생님은 이 차로 혜화동까지 가시고요.』
『왜 올케네 집은 안 돼?』
『거기도 못 가요.』
『왜?』
『이유가 있어요.』
그때 운전수는 초조한 듯이 속력을 늦추며
『어떡하시겠읍니까? 명수장 호텔이 다동에 있는 뎁쇼.』
『어쨌든 그리로라도 갑시다.』
차는 커브를 돌며 다동 골목으로 휘익 돌아 들어갔다.
석운은 마침내 단념을 하고 오늘 하룻밤의 운명을 재빠르게 예측했다.
석운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영림의 정열을 이 이상 더 물리칠 기력이 자기에는 있을 성싶지가 정녕 않다.
『선생님, 미안해요. 저 때문에,』
『무슨 그런 쓸데없는 말을……』
명수장 호텔 이 층 방에서 석운과 영림은 소파에 걸터앉아 씁쓰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호텔은 만원이었다. 손님이 예약한 방 하나가 있다기에 가까스로 떠밀고 들어온 두 사람이었다. 손님이 오면 내주기로 하고 들었다.
아무리 졸라도 택시는 혜화동까지 가주지 않았다.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았으나 돈 먹은 호텔이었다. 암록색 소파 셋트가 한 편에 놓여 있고 탁자 위에 빨간 카네이션 화분이 놓여 있었다.
동쪽 들창 밑에 더블베드, 머리맏 소탁자 위에는 교환대로 통하는 전화가 설비되어 있었다. 아로하 무늬의 커튼, 밑레의 「만종」이 붙어 있는 벽 밑에 아담한 화장대가 있었다.
『우리도 밤샘을 해요. 이렇게 앉아서요.』
『밤을 새우려면 야식이 필요할 텐데……』
『선생님 앞에서 술을 한 번 많이 마셔 봤음……』
『먹을 줄도 모르는 술을…… 그만둬요.』
『저번 날 미스터 송과 마지막 작별을 하면서 술을 먹었어요. 먹을 줄 모르는 술을요. 송의 정성이 공연히 서글퍼서요.』
『그럼 오늘은 무엇 때문에 술을 먹겠다는 건가?』
『선생님의 정열이 고맙고 탐탁해서요.』
기뻐해야만 할 영림의 한 마디건만 어쩐지 석운의 마음은 연방 구겨지고 어두워지기만 했다.
생각과는 달라서 이러한 장소에서 이처럼 막상 단둘이서 마주 앉고 보니, 소설적인 화려하고 감미롭고 사치한 온갖 감정과 정서는 운무처럼 사라지고 그저 연 덩어리처럼 무거운 압박감과 초조한 침울만이 전신을 휘덮어 왔다.
위기는 정말로 눈앞에 닥쳐온 것이라고, 청춘의 마지막 고비에서 이러한 위기를 가끔 인생의 아름다운 향기로 간주하고 동경까지도 하여 주던 그 순간의 공상과는 얼토당토않게 동떨어진 엄숙이 숨 가쁘게 몰아쳐 왔다.
『선생님, 왜 갑자기 침울해지셨어요?』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박목사에게는 이런 종류의 엄숙이 전혀 없었기에 그렇듯 생명의 환희만을 추궁했다. 결국 박목사는 석운 자신의 사상에서 탄생한 작품 세계적 인물이 아니었던가?
영림에게 앞날이 있듯이 자기에게는 가정이 있지 않으냐고 삼척동자도 가히 셈을 따질 수 있는 이 엄숙한 현실 앞에 또 하나의 엄숙한 현실이 석운의 눈앞에는 찬연히 꽃피고 있는 것이다.
오늘따라 화장을 하고 나선 영림의 모습이 활짝 피어난 꽃송이처럼 몽롱한 석운의 눈에는 비쳤다. 아무한테도 내주고 싶지 않은 꽃송이 하나가, 훌쩍 석운은 일어나서 보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단한 야식으로는 위스키와 샌드위치밖에 없다고 했다.
이윽고 보이가 그것을 쟁반에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각텔은 달아서 좋지만……』
영림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위스키를 억지로 들이키고 있었다. 석운은 성난 사람처럼 술을 들며 공교롭게 맺어진 오늘 하룻밤의 우연을 어떡하면 재치 있게 넘겨 보낼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의 얼굴이 술잔에 오랫동안 떠올라 있었다. 아내의 얼굴에 석운은 훌쩍 돌이키며
『영림!』
『네?』
『내일은 집에 들어가지?』
영림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응? 안 들어가? 안 들어가면 어떡허나?』
『그럼 좋아요. 제가 선생님께 하나 묻겠어요. 칸나의 정조를 저희들끼리 마음대로 처리해 버리려는 그 무서운 이리 떼의 소굴로 저를 돌려보내고 싶으세요? 대답해 주세요.』
석운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저를 버리기 전에는……』
『나는 영림은 버렸어.』
『말로만요.』
『마음으로도.』
『선생님의 눈동자가 저를 버리지 않았는데요.』
석운은 얼른 외면을 하고 벌떡 몸을 일으키며 커튼을 젖혔다.
어두운 하늘에 별은 쏟아지고 있었다.
『제가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선생님이 책임지실 필요는 없어요.』
영림도 몸을 일으켜 왔다. 석운의 팔을 한 손으로 더듬어 잡으면서 탄식처럼, 추억처럼 어두운 밤하늘을 말똥히 내다보았다.
『영림은 이미 어린 소녀가 아니에요. 제 행동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나 제가 지는 거예요.』
『영림은 역시 어려.』
『선생님은 제 나이에는 자기가 어리다는 생각은 안 하셨을 텐데요.』
『누구나가 다 자기는 어리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성장해 가고 있는 거야. 나중에 생각하면 모두가 어리석은 짓이라고 후회를 하면서도.』
『저는 후회 안 해요. 선생님과 하룻밤을 행복하게 지낸 제 귀중한 역산데요.』
『고달픈 행복이야.』
영림은 석운의 옆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선생님이 저를 정말로 사랑하신담 고달퍼 하실 까닭이 없을 텐데요. 선생님은 제 앞날의 불행 같은 것을 생각해 주시는 것 같지만…… 행 불행은 주관적인 문제니까 제 걱정 마시고 선생님이 좋으실 대로 사랑해 주심 돼요.』
석운은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오뇌에 찬 어두운 어조로
『이 하룻밤이 너무도 빨리 닥쳐온 것 같아.』
『제게는 너무 늦게 닥쳐온 것 같아요.』
『영림!』
석운은 획 영림을 돌아다보며
『정말로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해 줬어?……』
『그럼요. 여학생 시절에는 여학생처럼 어리게 생각했었고…… 대학생 시절에는 대학생처럼 어리게 생각했었죠. 그래서 저는 철이 들면서 이성을 생각할 적마다 어느 때나 그 사람을 선생님과 비교하고 있었어요.』
석운은 영림이가 낀 팔을 풀고 영림의 손을 꼬옥 한 번 쥐어 보았다. 맞받아 꼬옥 쥐어 오며
『그러나 모두가 다 선생님보다 못한 것 같고, 어린 것 같고, 선생님만이 제 인생을 이해하여 주실 것만 같아서…… 저번 날 밤, 명동 입구 십자로에서 미스터 송과 서글피 작별하고 나서 하늘의 별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저는 울면서 마음으로 외쳐 봤어요.』
『뭐라구?』
『짤막짤막하게 끊어서 읽음 시 같죠. …별들이 하늘에 고달피 조는 밤, 고달픈 영혼의 행렬은 대지에 흘렀다. 오오, 고달픈 우주여, 칸나 어이 혼자 안일 하려노.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오히려 모자람을 서러워하는 귀여운 칸나여, 그대마져 생활에 지쳤느뇨. 냉혈동물에 눈물이 흘렀다. 그윽한 동경 위에 청춘을 밭 갈자. 영혼은 타서 재나 되라. 사랑의 바다에 쪽배를 띄우자. 노는 없어도 서럽지 않다. 구원을 잡으러 바람을 타자. 오오 고달픈 우주여, 칸나여!』
고달픈 감격과 고달픈 영혼과 고달픈 정열이 네 개의 시선을 타고 물끄러미, 말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둘이는 그러고 마주 서 있었다.
『선생님도 고달프시지만 저 역시, 송은 절더러 냉혈동물이라고 불러줬죠. 그렇지만 저는 제 인생을, 제 생명을 제 손으로 밭 갈고 싶었어요. 선생님이란 그윽한 동경 위에서……』
석운을 빤히 쳐다보며 영림은 제 설움에 입술을 한두 번 삐쭉거렸다. 애달픈 눈동자에 말간 물이 조금씩 고이며, 넋을 잃은 영림의 상체가 조용히 쏠려 들어왔다.
다치면 꺼질세라, 석운은 쏠려 들어온 영림의 어깨를 가만히 품에 넣었다. 볼을 비비며
『잘 알았어! 영림의 생각을……』
『처음에는 먼데 떨어져 있어도 사모만 하고 있음 될 줄로 알았어요. 그렇지만 수양이 모자라서 그런지 그렇게 안 되는걸요.』
『잘 알았다니까.』
석운도 영림의 어깨 위에서 눈을 감고 조용히 울고 있었다.
『왜 자꾸만 가까이 오고 싶을까요.』
『그래서 들창을 넘어왔었지.』
『지붕이라도 수월히 뛰어내릴 것만 같았어요.』
귀엽다. 그저 귀엽기만 했다. 취기와 함께 그 귀여움 속에서 석운은 차차 과거의 기억이 희미해 갔다. 가정도 희미해 갔다. 옥영도 희미해 갔다.
홀에서부터 애리의 술을 연방 받아 마신 석운은 적지 않게 취해 있었다.
영림도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졸리면 저리로 가서 자요.』
『아아뇨.』
밤이 깊도록 둘이가 소파에 나란히 걸터앉아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벙어리처럼 앉아 있기만 했다. 침묵의 피로와 석운은 담배만 연방 피워 물었고 영림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맞은 편에 놓인 더블베드가 어쩐지 무서워 석운은 한 번도 그쪽으로는 발길을 하지 않았다. 영림도 그리로는 가지 않았다. 그러한 의식적인 행동이 둘이에게는 더 긴 침묵만 가져오게 하고 있었다. 침묵 끝에 한숨이 왔다.
송준오의 조급성을 영림은 생각하며 선생님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있는지 모를 일이라고 애욕의 경험이 없는 영림의 지식이 관념적인 서글픔을 빨리빨리 가져오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는 충분히 만족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사랑의 정체가 이것뿐이 아닐 것이라고 상식적인 관념에 영림은 봉착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겁쟁이야요 무얼 그처럼 심각하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계시는 거예요?』
석운의 손길을 자기 무릎 위에서 영림은 만지고 있었다.
『겁쟁이! 음, 그 겁쟁이가 지금 저 하루살이를, 저 불나비를 보고 있지.』
반만큼 열려진 창문으로 밤벌레가 날아들고 있었다.
유백색 갓으로 둘러싼 전등을 제각기 떠받고 있었다.
『유아등(誘我燈)이라고 시골에 가면 있어. 논두렁에 등불을 켜 놓으면 둘레에 있던 잔벌레가 모두들 모여 들어와서는 불에 타 죽는 거야. 하루살이도 불나비도 모두 다 죽어.』
『불나비의 이야기, 저번에도 하셨지요 명동에서』
석운의 손을 끌어당겨 영림은 자기 볼에 가만히 비벼보며
『뭐랬더라?…… 깡까로운 지성의 무마와 희뿌옇게 둔탁한 감정의 표현을 지니고 갸륵하게도 몰려드는 수많은 기체들…… 그리고 뭐랬죠?』
『몰라, 다 잊어먹었어.』
무뚝뚝한 대답과 함께 석운은 어깨를 잡아당겨 꼈다.
『아, 참…… 명동의 생리 속에서 생명은 순간의 가치를 모색했다. 고독의 낙루가 범람하는 페이브 위에서 거리의 서정 시인은 삶의 황홀을 찾았다. 그리고는 뭐죠?』
『몰라, 기억은 뜨물처럼 희뿌옇게 흐려졌어.』
영림은 석운의 품속에 고스란히 안기우며
『아, 참…… 술과 지분과 꿈과 아방취와 스켄달에 굶주린 보헤미안의 정열이 방랑하는 거리……』
석운은 안타까이 영림을 포옹하며
『나에게는 아무런 기억도 이젠 필요 없어. 있는 것은 다만 감각의 기능뿐이야. 나의 시각은 칸나의 예쁜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족했고, 나의 청각은 칸나의 영롱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되는 거야. 소모된 정열과 생명을 섭취하며 명동은 살쪘지. 불나비 같은 인생을 마셔 버리는 명동의 생리야.』
『아아, 선생님.』
『불나비는 자기의 생명을 태워 버리는 것이 삶의 의욕이요 목적이었지.』
『칸나는 벌써부터 그 불나비가 되어 있는데…… 선생님은 그렇게만 생각하는 불나비시지?……』
『막걸리같이 혼탁한 기억 속으로 생각은 이미 사라졌어. 불나비의 정열뿐이야. 칸나의 불을 느낄 수 있는 내 촉각이 있으면 그만이야…… 그윽한 이 지분 냄새, 머리칼 냄새! 그대의 이 흑칠(黑溪) 같은 머리칼 속에 내 얼굴을 흐뭇하게 담그고 아아, 이 기나긴 하룻밤을 새워 보고 싶은 욕망 ……』
격렬한 포옹에서 이윽고 접순으로……
세속적인 온갖 것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진 두 줄기의 교차된 정열 속에서 한 쌍의 불나비는 이미 침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金玉影[김옥영] 女史[여사]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고 머릿장 위에 놓여 있는 파란 유리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켰을 때 불안한 마음으로 남편을 기다리던 옥영은 일체 단념 할 수밖에 없었다.
파자마로 갈아입고 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올 리는 만무한 일이었고, 그대로 골목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릴 적마다 옥영은 솔깃이 귀를 기울이곤 했다.
외박을 하고 들어오는 남편이 절대로 아니었기에 무슨 교통사고나 생긴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으나 아까 낮에 창길에게서 들은 말이 있는 옥영으로서는 교통사고보다도 좀 더 커다란 인생의 사고를 앞질러 생각하고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한 시가 되었다. 잠이 오지가 않아 옥영은 다시 자리 위에 일어나 앉았다.
영림을 생각하며
『그래도 그이는 그렇지 않을 거야. 유혹은 느낄는지 모르나 결국은 자기를 지킬 사람이지.』
과거에도 남편은 그래 왔었다. 웬만한 유혹쯤은 수월히 피해온 남편이었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적 신뢰를 상실하지 않았는데 좀 더 가치 있는 희열을 느끼면서 살아온 남편임을 옥영은 잘 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의 취미나 성품으로 보아서 그렇게 홀가분히 좋아질 여성도 드물 것이며 남편의 정열을 전적으로 불태울만한 대상이 그리 쉽사리 나타날 것 같지도 또한 않았다 자기를 지키는데 무척 결백하고 뾰족한 일면을 가지고 있는 남편이기에 그러한 점도 옥영에게는 안심의 한 조각 요소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영림은……』
생각하면 남편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뭇 젊은 여성이 아니고 단 한 사람의 고영림이었다.
남편이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가끔 느끼는 젊음에의 그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남편임을 옥영은 안다.
『그러나 고영림은 문제가 좀 다르다.』
지금까지 옥영이가 보아온 뭇 여성 가운데서 고영림처럼 남편의 정열을 전적으로 흔들어 놓을 여성은 극히 드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이가 가장 좋아할 타입의 고영림!』
옥영은 그것이 차차 더 무서워졌다.
그러면서도 교통사고 때문에 남편이 못 돌아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끝끝내 옥영은 버리지 않았다. 그러한 사고 때문에 남편은 지금 어느 병원에 실려져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팔 하나 다리 하나가 잘라져 나갔을지도 몰랐다. 아니 잘못하면 죽었을는지도 모른다.
『아아, 그럴 바에야…… 그럴 바에야 차라리 고영림에게라도……』
고영림의 옆에서 살아 있는 남편을 옥영은 도리어 원했다.
『어서 날이 밝았으면……』
어서 날이 밝아서 남편의 생사를 확인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차차 더 다급해졌다.
전전긍긍, 뜬 눈으로 새운 하룻밤은 마침내 밝았다.
『엄마, 아버지 안 들어오셨어요?』
아이들도 똑같이 교통사고를 생각하면서 어두운 표정들을 하고 물었다.
『이제 돌아오실 테지.』
옥영은 태연한 대답을 했다.
『엄마,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을까?』
『어떻게 되긴, 어제밤 좀 늦어서 못 돌아오신 거지. 어서들 학교에나 빨리 가거라.』
아이들은 하나둘씩 어머니의 창백한 표정만 살살 살피면서 학교에 갔다.
부산하던 한때가 지나고 혜숙이만이 남은 집안은 갑자기 고요해졌다. 잠을 못 잔 자기의 뒤숭숭한 모습이 보기 싫어 옥영이가 화장대 앞에서 머리 손질을 하고 있는데 현관에서 주인을 찾는 듯싶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분이 선생님을 찾아오셨어요.』
식모가 명함 한 장을 들고 들어왔다. 정말 무슨 사고가 난 것이 아니냐고 옥영은 가슴이 덜컹 내리 앉으며
『어떤 사람인데?』
명함에는 「한성양조 전무 취체역 고영해」라고 씌어 있었다.
『한성양조의 고영해?』
옥영은 화장대 앞에서 냉큼 몸을 일으키며 불길한 예감이 고영해의 환영과 함께 갑자기 확대되어왔다.
명함을 쥔 채 옥영은 현관으로 나갔다.
『어떻게 오셨어요?』
그랬더니 코 밑에 수염이 나고 안경을 낀 신사는 모자를 벗어들며
『강선생님 좀 뵈러 왔읍니다.』
평온한 음성이었으나 표정은 무척 굳어져 있었다.
『지금 안 계십니다.』
『아, 벌써 외출하셨는가요?』
『아니요. 어제밤 볼 일이 있어서 외출하셨다가 아직……』
『아, 역시 안 돌아오셨군요.』
고영해는 잠간 동안 옥영의 눈치를 살피고 나서
『부인이시지요?』
『네. 어떻게 찾으시나요?』
『혹시 부인께서 고영림이라는 학생을 아시는지요?』
올 것이 마침내 온 것이라고 옥영은 마음이 후둘거려 견딜 수 없었으나 태연한 어조로
『네, 알고 있어요. 달포 전에 한 번 찾아온 적이 있읍니다.』
『아, 달포 전에요?』
고영해가 무엇인가 혼자서 수긍을 하다가
『고영림은 제 동생입니다.』
『그러세요.』
『영림이가 무엇 때문에 찾아 왔었읍니까?』
『문학하는 학생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좌담회를 연다고 그래서 같이 나가셨어요. 세검정으로 갔었다든가요.』
『세검정이라고요?』
『왜 그러세요?』
고영해는 또 잠시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이윽고 결심을 한 듯이
『부인께서는 그 말을 곧이 들으셨읍니까?』
『네, 곧이 들었어요.』
『알겠읍니다. 그럼 어제밤 강선생이 축하 파티에 나가신 것도 아시는가요?』
『네, 알고 있어요.』
고영해는 또 잠시 망서리다가
『부인께서는 강선생을 전적으로 믿고 겠시겠지요?』
하룻밤 사이에 믿음은 이미 완전히 흔들려지고 있었으나 옥영은 순간 모욕감을 홱 느끼며
『그런 말씀까지 저한데 물으실 필요는 없지 않으세요?』
『아, 실언을 용서하세요, 실은……』
고개를 조금 숙여 보인 후에
『실은 이런 말을 하여 부인에게 실망을 드리려고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동생을 걱정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요.』
『무슨 말씀인지 좀 더 자세히……』
마음의 자세는 이미 쓰러지고 있었으나 옥영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엄연했다.
거기서 고영해는 어제밤 영림이가 들창을 넘어 나간 데까지를 간단히 설명하고 나서
『영림이도 아직껏 돌아오지 않았읍니다. 다만 제 욕망은 한시바삐 강선생을 만나 뵙고 제 동생의 처소를 알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찾아오신 뜻은 잘 알았어요. 선생님도 동생을 염려하고 계시겠지만 저 역시……』
옥영은 어디까지나 태연자약한 태도로 말을 이어
『돌아오시는 대로 선생님이 찾아오셨던 뜻을 전하겠어요.』
『부인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 다시 찾아뵙겠읍니다.』
『언제든지 찾아 주세요.』
이윽고 정문 밖에서 차 떠나는 엔진 소리가 들릴 무렵까지 옥영은 현관에 그대로 선 채 한 걸음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얼어붙은 석고상처럼 얼굴만이 해말쑥하게 핏기를 잃고 있었다.
이윽고 비틀비틀 쓰러지려는 몸을 가누기 위하여 옥영은 응접실 문손잡이를 붙들며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보! 아무 일 없이, 아무리 일없이 집으로 돌아와 주세요. 지금도 이 순간에도 나는 당신을 믿고 싶어요.』
실은 오랫만에 아현동 본댁에서 하룻밤을 세우다시피하면서 지난 고종국씨는 큰 마누라 옆에서 아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강석운이가 언제 집으로 돌아올는지 몰라서 홀에 있는 청년 하나를 근처에 파수시켜 놓았읍니다. 강석운이가 돌아오는 대로 전화로 연락해 달라고요.』
『응, 잘 했다.』
기가 찬 표정으로 고종국씨는
『그래 그 청년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느냐?』
어머니였다.
『안 할 수가 없어서 대강 했지만,』
『음, 비밑로 해야 할 텐데.』
하고 고종국씨는 어두운 표정을 하며
『이런 소문이 송달영씨의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에는 모두가 허사다.』
어머니는 말을 가로채며
『어쨌든 영림이만 무사했으면 좋겠다. 그 빌어먹을 녀석이 글쎄 종시 내 딸을 유혹해냈구나. 여편네가 있는 녀석들이 왜 그 모양들인지 하늘이 무심하지.』
그 말에 아버지와 아들은 힐끔 서로 바라보다가 쓰다는 표정으로 잠자코 외면을 했다.
『너희 부자가 모두들 그 모양이고 보니…… 가슴 좀 아파 보라고 하늘이 벌을 주는 건 줄로만 알아라.』
『또 쓸데없는 소릴.』
고종국씨는 입맛만 쩝쩝 다시다가
『음, 강교수의 아들녀석이겠다.』
마누라의 핀잔에는 변명할 길이 없다는 듯이 고종국의 울분은 이상한 코스를 거쳐 강교수에게로 흘러가고 있었다.
『언제 한 번 맞서 볼 날이 있겠지. 내 딸만 망쳐 놔봐라, 이놈들.』
고사장은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분한 심정은 고영해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네들은 그처럼 태연히 해 젖히는 일이건만 입장이 바뀌고 보니 이처럼도 흥분할 일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거기에 비하면 마누라의 통분은 그들처럼 절실하지는 않았다. 다만 딸 자식의 그 불행한 상태가 좀 더 비참하게 확대되었을 뿐이다. 이 남편과 이 아들의 체험 세계가 한 여성을 속여 넘기는데 있어서 얼마나 음흉하고 잔인하고 거짓말투성이로 도배질이 되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처럼 분하다는 생각에는 실감이 가지 않았다.
열두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에 파수를 시켜 놓았던 박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강석운이가 이제 방금 돌아왔읍니다.』
『그래? 혼자서?』
『네, 혼자서요. 그런데 알고 보니 가끔 보던 사람이군요. 언젠가도 뻐스 정류장에서 본 적이 있읍니다.』
『그럼 됐어. 그가 만일 내가 가기 전에 어딜 또 나가거든 뒤를 밟아요. 연락은 역시 이리로 하구.』
『알았읍니다.』
고영해는 전화를 끊었다.
『영림이도 돌아올는지 모르지 않아?』
어머니였다.
『돌아야 오겠지만, 어쨌든 나는 강석운을 한 번 만나 봐야겠읍니다.』
『거기 좀 앉아라.』
기가 차서 나가려는 아들을 고사장이 부르며
『저편 쪽을 잘 다루어야 해. 이런 일이란 소문이 나게 되면 결국 여자 편에서 손해를 보는 거니까 말이다.』
『그런 줄도 알지만요, 이번 일에는 강석운에게는 약점이 많습니다.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켜 버릴 테니까요.』
집에는 이제 죽어도 안 들어간다는 영림을 호텔에 남겨 두고 석운은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자기 집 정문 밖에서 서성대고 있던 안경 쓴 청년 하나가 석운과 엇바뀌어 골목을 빠져나오며 힐끔힐끔 석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한 번 본 것 같은 인상이 뚜렷했으나 누군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정문을 들어서면서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골목 어귀에 우두커니 서서 청년도 이편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키가 작달막하고 어깨가 벌어진 곤색 더 불을 입은 청년이었다.
『엄마! 아빠 오셨어. 아빠!』
뜰에서 놀고 있던 혜숙이가 고함을 치며 바르르 뛰어왔다.
『오오, 혜숙이냐.』
매어달리는 혜숙을 얼싸안고 석운은 카라멜 꾸러미를 쥐어 주었다.
『아빠, 어디서 잤나?』
『친구 집에서 잤다.』
『왜 잤나?』
『시간이 늦어서 잤다.』
현관 앞을 지나 안뜰로 돌아갔다.
『아까 엄마가 울었어.』
『엄마가 왜 울어?』
『몰라, 경대 앞에서 울었는데.』
덜컹하고, 발각 직전의 범죄자의 심리가 왔다.
혜숙의 고함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텐데 얼굴조차 내놓지 않는 옥영의 울음은 단지 밤을 새우고 들어온 데 대한 단순한 슬픔에서가 이미 아닌 성싶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셨답니다.』
주방에서 나오며 안방을 향하여 식모가 말했다. 그래도 옥영의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뛰쳐나올 옥영이었는데……
혜숙을 뜰에 내려놓고 석운은 복도로 올라갔다. 성큼성큼 걸어가서 안방 문을 열었으나 옥영은 없다.
『여보오!』
다시 방을 나서며 석운은 커다란 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텅 비인 집안에서 석운의 목소리만이 으르렁으르렁 울리고 있었다.
『어딜 나가셨나?』
식모도 어리둥절해 있었다.
『여보! 어디 있오?』
석운은 모자를 벗어 던지고 건너방을 열고 들어갔다. 거기도 없다.
석운은 부리나케 층층대로 뛰어 올라가며
『여보!』
그러나 서재에도 옥영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소설적인 공상 하나가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집을 나갔는지도 모른다.』
무슨 유서 같은 것이라도 있을 성싶어 석운은 뛰어가서 책상 위를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서랍도 열어 보았다. 그러나 옥영의 글씨는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머니, 집에 무슨 일이 생겼오?』
층층대를 뛰어 내려오며 식모에게 물었다.
『아니요.』
그러다가 식모는 생각이 난 듯이
『참, 아까 아침에 손님이 한 분 오셨읍니다. 자동차로요.』
『손님이라고, 누군데?』
『모르는 분인데, 아씨를 만나보고 가셨읍니다.』
『사십은 채 못 됐겠고, 안경을 쓰고 코 밑에 수염이 난 사람이에요.』
『자동차…… 자동차는 깜자주 빛이고?』
『네, 그래요. 깜자주 빛이에요.』
『고영해다.』
너무나 빠르다. 이처럼도 신속히 비밀이 탄로난 줄을 몰랐다.
『그런데 옥영은. 옥영은 어딜 갔나?』
『얼마 전까지도 방에 계셨는데요. 한 시간이나 됐을까요. 방에서 주무시는 줄로만 알았어요.』
『혜숙아!』
뜰에서 놀고 있던 혜숙을 석운은 불렀다. 카라멜을 씹으며 혜숙은 왔다.
『엄마가 어디 나가는 걸 너 못 봤니?』
『못봤어.』
석운은 모자를 다시 집어쓰고 허겁지겁 뜰로 내려서서 구두를 신었다.
『내 엄마 어디 갔는지 가서 찾아올게.』
석운은 혜숙의 얼굴에다 자기 볼을 한 번 비비고 나서 정문을 향하여 뛰어나갔다.
뛰어나가다가 석운은 문득 현관 옆에 달린 응접실 쪽을 바라보았다. 항상 늘어져 있던 풀빛 커튼 한 쪽이 오늘따라 방씻하니 젖혀져 있지 않은가.
발길을 돌려 응접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다가
『아, 여보!』
석운은 기뻐서 유리창을 두드리며
『여보! 나요, 나!』
그러나 옥영은 아무런 대답도 없다.
소파에 걸터앉은 채 옥영은 소탁자 위에 쓰러지듯이 조용히 엎디어 있었다.
석운은 현관으로 뛰어들어갔다.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응접실 문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은 안으로부터 완강히 잠겨져 있었다.
『여보, 열어요. 문을 열어 줘요!』
안으로부터는 그러나 하등의 대답이 없다.
석운은 문을 두드리며
『여보, 옥영이! 나요, 문을 좀 열어 줘요!』
그래도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독을 마셨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언듯 석운에게 왔다.
『여보! 빨리 문 열어요!』
고함을 치며 석운은 두 주먹으로 무섭게 문을 두드려 댔다.
『아씨, 선생님이 돌아오셨는데 이제 문을 여세요.』
식모도 허둥지둥 혜숙을 안으며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
혜숙은 종시 엉엉 울어 댔다.
그러는데 안으로부터 옥영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나왔다.
『아주머니!』
『네, 저 여기 있읍니다.』
『아주머니는 혜숙일 데리고 저리로 가 있어요.』
『네, 네……』
식모는 얼른 돌아서서 혜숙을 안고 안방으로 사라져 갔다.
『여보, 어쨌든 문을 열어요.』
석운은 손잡이를 자꾸만 비틀어 댔다.
『문을, 문을 열기가 무서워요.』
흐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히 울고 있는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문을 열고 나를…… 만나 줘야지 않겠오?』
『당신을 보기가, 당신을 만나기가 제게는 무서워요. 입때껏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가…… 무서워서 그만 문을 걸었어요.』
『여보, 어쨌든 문을 열고 말을 해요.』
『아냐요. 당신 입에서, 당신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는지 그것이 무서워서 못 열어드리겠어요. 제발 아무 말도 마시고 저를, 저를 이대로 가만히 좀 내버려 둬 주세요.』
『아, 옥영! 나는 정말.』
『아무 말도 마시고, 입을 열지 마시고 저리로 가 계세요. 안다는 건 모른다는 것보다 나쁠 때가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어떻게 이대로 물러가 있겠오?』
『염려 마세요. 나 절대로 경솔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아, 옥영!』
석운은 뭉클하고 눈자위가 뜨거워졌다.
『아아……』
석운은 괴로와 응접실 문짝에 머리를 기대었다.
『당신이 이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나는 이대로 기다리겠오.』
안으로부터는 그러나 아무 말도 이미 들리지 않았다.
소탁자가 덜그럭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옥영이가 탁 쓰러지는 소리 같았다.
영림의 옆에 있을 때는 옥영의 기억이 희미했고, 옥영의 옆에 있을 때는 영림의 생각이 흐려졌다. 그 어느 것이나 다 같이 인간 강석운에게는 추호도 거짓 없는 진실하고도 절실한 애정의 자세였다.
남편의 최후의 한 마디가 무서워 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 옥영의 심정과 죽어도 집에는 안 들어가겠다고 온갖 세속적인 인연을 손수 끊어버리고 석운이가 돌아오기를 호텔 일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영림의 심정과 …… 석운은 이 두 갈래로 분산된 애정의 농담(濃淡)을 자기의 분별로써 저울질하고 그것을 재치 있게 처리해 나갈 기력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부닥쳐 오는 물결을 석운은 그저 수동적으로 덮어쓸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이윽고 문이 안으로부터 조용히 열리며 비애와 공포가 얼버무려진 표정을 지닌 채 한두 걸음 옥영은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아, 여보!』
석운은 달려 들어가며 뒷걸음질을 치는 옥영을 와락 부여안았다.
『무, 무서워요.』
남편의 격렬한 포옹을 숨 가쁘게 받으며 옥영은 더듬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여보!』
석운은 무섭게 볼을 비볐다.
『그래도, 그래도 돌아와 주셨군요.』
『아, 여보!』
할 말이 없다. 석운은 운다. 울음소리가 갑자기 흐느낌으로 변했다.
격정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똑같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쁜. 나쁜 남편이 나는 마침내 됐오.』
『아아……』
기적은 이미 갔다. 최후의 기대는 이미 끊어졌다.
옥영은 해말쑥하니 핏기를 잃으며 드디어 몸을 가누지 못했다. 품 안에서 차차 무거워지고 있는 옥영의 몸무게와 함께 석운은 소파에 펄썩 주저 앉았다.
『옥영, 용서해요.』
『………』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옥영을 끌어안는 대로 남편의 품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이 남편과 이 아내는 그저 자꾸 흐느껴 울기만 했다. 울음 이외의 아무것도 거기에는 있을 수가 없다.
오랫동안 둘이는 부여안고 울고 있었다. 이윽고 석운은 입을 열었다.
『나쁜 놈이 결국 되고 말았오.』
『…………』
『나쁜 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만, 그만 어떡할 수가 없었오.』
『당신만은 세상 사람이 다 나빠도 당신만은 믿었어요.』
흐느낌은 이제 점점 가시고 품속에서 억압된 한 마디와 함께 옥영은 비로 소 얼굴을 들면서 두 손으로 가만히 남편의 가슴을 밀어 놓았다.
그리고 눈물을 씻으며 남편의 얼굴을 오랫동안 빠안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옥영의 두 눈에는 금시 눈물이 가뜩가뜩 고이고 있었다.
대롱대롱 눈물이 매달린 눈동자로 남편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며, 저 볼과 저 입술과 저 손등은 이미 어제의 그것들이 아님을 생각하는 순간 옥영은 부르르 전신에 경련을 느꼈다.
『당신은 영림을 또 만나시겠어요?』
『응?』
석운은 얼른 옥영을 바라보며
『아니, 안 만나겠오.』
그러나 이것은 자신 없는 대답임을 석운은 자각하고 있었다.
『그럼 영림과의 관계는 일시적이었나요? 그렇지 않으면 진정으로……?』
『아, 옥영이!』
석운은 괴로와 옥영의 두 손을 꽉 부여잡으며
『괴롭소. 괴로워 견딜 수가 없오.』
진심으로 괴로와 하는 남편의 그 한마디를 들은 순간 옥영의 눈에서는 차차 눈물이 가시기 시작하였다.
옥영은 남편의 손아귀에서 두 손길을 가만히 빼며
『알았어요! 이제 다 알았어요. 그렇지만, 하늘이 무너질 것을 걱정 안 하고 사람들이 살듯이…… 당신을 하늘처럼 믿고 살아온 제 슬픔이 너무도 크달 뿐이에요. 세상을 몰랐어요. 온실의 꽃처럼 세상을 모르고 살아온 제 평온했던 삶의 댓간가 봐요.』
『여보, 나도, 나도 무척 노력을 했었오.』
『잘 알고 있어요. 결국 당신이 지닌 성실성이 저로 하여금 이날 이때까지 온실의 꽃으로 만들어 준 줄을 지금에 와서야 알겠어요. 그렇지만 처음부터 결혼 생활이라는 것을, 세상의 남편이라는 것을, 좀 더 허수로이 여기면서 살아왔었던들 오늘날 이처럼도 제 허무는 크지 않았을 거예요.』
『옥영이, 나는 마침내 나쁜 놈이 되고 말았지만, 나는 무척 노력을 했었오. 영림을 만난 후부터. 그것이 벌써 몇 달 전 이야기지만, 어떡할 수 없이 마음의 동요를 자꾸만 느끼고, 그 후 몇 차례 만나본 이후로 야쓰데 화분을 손수 사갖고 와서 나 자신과 싸워왔었오. 그러나 나의 온갖 노력은 이미 모두가 다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오.』
석운은 또 서글퍼졌다.
『그런 줄도 잘 알아요. 당신의 선량한 인품을 내가 잘 알아요.』
『어젯밤, 통행금지 시간까지도 어떻게 해서 시간에 대올려고 애를 써 봤지만…… 모두가 다 틀려먹고 말았오. 아니, 변명은 이미 필요가 없지.』
『잘 알았어요. 일시적인 방탕보다도 차라리 진실한 연애를 하는 편을 당신의 인격을 위하고 또 제 인격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고 농담 삼아 그런 말을 한 적도 과거에는 있었지만, 철딱서니 없는 관념적 이야기였어요. 당신을 하늘처럼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한 꿈같은 소리였어요.』
『아아, 옥영이 내가 이처럼 당신을 소중히 하고 있으면서도 왜 딴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가를 나 자신도 대체 알 수가 없구려.』
『영림을 잊어버릴 수는 정말로 없겠어요?』
일시적인 외도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에서 옥영은 물었다.
『옥영이, 조금도 거짓 없이 솔직히 말하겠오. 나는 지금 옥영을 위해서라면 당장에라도 이 한 목숨을 쾌히 바치겠지만, 그렇지만 그것은 할 수 있지만 내 목숨이 붙어 있는 지금에 있어서 영림을 잊어버릴 수는……』
『…………』
옥영은 가만히 눈을 감아 버렸다. 옥영은 이미 아무런 발언도 대답도 할 필요가 없었고 기력도 없다.
『옥영이,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영림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마음은 전혀 없오. 아, 아……』
석운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이러한 욕망이 인간에게 허용될 수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신의 노여움을 살 말이지만 옥영과 영림을 나는 다 함께 갖고 싶을 뿐이요.』
모욕감을 느끼고 옥영은 가만히 몸을 일으켜 응접실을 나와서 안방으로 총총히 걸어 들어갔다.
人間[인간] 姜石雲[강석운]
석운은 머리를 움켜쥐고 오랫동안 소파에 걸터앉아 있었다.
『일은 마침내 저질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어떻게나 사랑해 온 아내였더냐고, 나 하나만을 태양처럼 믿고 살아온 아내의 그 자그만 가슴 속에 내 스스로의 손으로 절망과 비분의 씨를 뿌려주고야만 자기 자신이 극악무도한 악당처럼 저주스러웠다.
『나는 확실히 악인이다.』
지나간 날 아내의 정조를 의심하고 북경루까지 쫓아가던 순간의 자기의 그 절박했던 심정을 불현듯 생각했다.
『그것과 꼭 같이 절박한 심정이 지금 아내의 그 자그만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렇건만 아내는 지나간 날의 자기 모양으로 격분의 정을 화산처럼 폭발시키지는 않았다. 조용히 울고만 있는 아내!
그 조용한 원망과 눈물 속에서 한 사람의 여성인 김옥영은 기나긴 인류의 역사가 지녀온 뭇 아내의 운명을 지금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석운은 생각하였다.
약자로서의 그러한 비참한 운명을 아내 김옥영으로하여금 되풀이시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정 낙원설을 소리높이 외치며 유혹의 물결이 굽이치는 이 거리를 조심성 있게 석운은 걸어왔다.
그렇건만 석운에게는 마침내 고영림의 정열을 물리칠 기력이 없었다. 그것이 인간 강석운이가 지니고 있는 성실의 한계였다.
고영림이가 조금만 더 세속적이고 상식적인 여성이었던들 강석운의 과거가 그러했던 것처럼 단순한 젊음에의 동경만으로서는 오늘의 결과를 저질러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속적인 모든 것을 걸레 조각처럼 떨쳐 버리고 나선 고영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개 벌거벗은 생명의 벌렁거림 앞에서 강석운의 성실의 한계는 무너지고 만 것이다.
어쨌든 석운은 지금 한 사람의 범죄자로서 아내 옥영이 앞에 임해 있는 것이다. 과거의 인류의 역사가 남편들의 이러한 범죄를 어떻게 취급하여 왔는가에 대한 소위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의 범죄의식도 있었지마는 이른바 부부라는 사회적인 위치를 떠나서 김옥영 대 강석운이라는 인격과 인격 앞에서 느끼는 범죄의식이 좀 더 강하게 왔다.
남편이 아내를 모욕했다는 것이 아니고 강석운이가 김옥영을 모욕했다는 데서 출발한 양심의 가책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내 김옥영의 사고 방법이기도 하였다. 떠들지도 않고 발악도 않고 조용한 눈물 속에서 원망의 시선만을 보내온 옥영의 심정을 석운은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옥영은 지금 남편에게 침범을 당한 아내의 위치보다도 더 절실히 강석운이라는 인간에게서 훼손당한 자기의 인격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강석운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석운과 옥영의 부부생활은 언제든지 내외라는 사회적 위치로서 형식적으로 영위되어 오기보다도 먼저 애정을 기초로 한 인격의 존중으로써 영위되어 왔었기 때문이었다.
『아아, 한 사람의 인격을 모욕해도 좋을 만한 자격이 내게는 있을 수 없다! 그렇다. 이제라도 늦지는 않다. 아내의 인격을 구하기 위하여 이제라도 나는 영림을 잊어야만 한다.』
석운은 훌쩍 소파에서 일어나자 응접실 안을 미친 듯이 빙빙 돌았다.
『나는 이미 사람들에게 인간의 성실을 말할 자격을 상실한 인물이다. 누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누가 내 글을 읽어 주랴. 내 자식들도 이미 이 아버지의 말을 비웃을 것이다.』
인간적으로나 작가적으로나 이미 모든 사람에게 밀려 나간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영림을 잊고 옥영을 구하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영림에 비하여 옥영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엽고 가치 있는가를 절실하게 느껴져 왔다.
석운이가 응접실을 나서서 옥영을 보고자 안방으로 들어가는데 현관문이 열리면서 고영해가 들어섰다.
『아까 오셨던 분이 또 오셨읍니다. 고영해라고 하시는 분이……』
식모가 안방으로 들어가서 내객을 통했을 때 석운은 아랫목에 이불을 쓰고 누워 있는 옥영의 앞에 우뚝 서 있다가 시선을 홱 돌렸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식모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무엇을 결심한 듯싶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응접실로 인도해요.』
석운은 일어선 채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다시 안방을 나서서 응접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고영해는 모자를 벗어 걸고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키며 인사를 했다.
『강선생, 실례하겠읍니다.』
석운도 마주 걸어가서 악수를 하며,
『어젯밤 파티는 대단한 성황이어서 거듭 축하합니다. 앉으시지요.』
『고맙습니다.』
탁자를 끼고 둘이는 마주 앉았다.
『바쁘신데 누차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아침에도 오셨더라는 말은 이미 듣고 있읍니다. 제가 없어서 도리어 실례가 되었읍니다.』
서로가 주고받은 이 예의적인 엄격한 대화에서 두 신사는 제각기 상대편에서 그 어떤 적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겠읍니다.』
『무슨 말이든지 귀담아 듣겠읍니다.』
학식으로 보나 인생의 경력으로 보나 제각기 자기다운 깊이와 무게를 두 신사는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측이 혹시 강선생의 인격을 훼손할는지는 모르겠읍니다만 어디 까지나 이 고영해의 한낱 추측이라는 점을 밝혀 두고 싶읍니다.』
『어서 말씀하시요.』
『영림은 어젯밤 집에 돌아오지 않았읍니다. 제 추측으로서는 강선생이 혹시 영림의 처소를 알고 계시지나 않는가 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영해는 석운의 얼굴을 쏘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석운은 물끄러미 마주 바라보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영해는 다시금 물어왔다.
『십중팔구 제 추측이 맞을 것만 같이 생각하고 왔읍니다.』
『잘 오셨읍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고전무의 추측이 들어 맞았읍니다.』
강석운은 명백한 어조로 고영해의 추측을 인정하였다.
『아, 역시.』
고영해는 그 너무나 명백한 수긍에 가벼운 압력을 느끼며,
『한시바삐 영림을 집으로 데리고 가야겠읍니다. 영림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처소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한시바삐 영림양을 데리고 가고 싶어하는 고전무의 심정은 잘 알겠읍니다. 그러나,』
『………?』
『영림 양은 죽어도 집에는 안 들어가겠다고 말했읍니다.』
『안 들어오겠다고요?』
고영해는 안색이 홱 변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선생은 영림이가 안 돌아오겠다는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는데요.』
『알고 있읍니다.』
『강선생 때문입니까?』
『그것은 잘 모르겠읍니다. 다만 내가 명확히 알고 있는 이유로서는 영림 양은 이렇게 말했읍니다. ── 칸나 고영림의 인생을 저희들끼리 마음대로 요리하고 마음대로 처리하려는 그러한 이리 떼 속으로는 죽어도 안 들어가겠다고 말했읍니다.』
『이리 떼라고요?』
고영해의 입 언저리가 쫑긋쫑긋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리 떼라는 말에 고영해는 모욕감을 전신에 느꼈으나 영림의 말을 이처럼 자신 있는 태도로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강석운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고영해는 또 한 번 거세인 압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강석운도 녹녹지 않지마는 그러나 고영해도 결코 녹녹한 인물은 아니었다.
『좋습니다. 이리 떼라도 좋고 호랑이 떼라도 무방하지요. 철없는 아이들은 일쑤 잘 부모님의 사랑의 말들을 쓰다고만 하니까요.』
『모르기는 하겠읍니다만 내가 보기에는 영림 양은 철없는 아이가 아니었을 따름입니다.』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아니, 그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다만 강선생은 우리들에게 영림의 처소를 알려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내게는 그런 의무가 없읍니다.』
『없다고요?』
『없읍니다. 영림 양의 의사를 나는 존중해야만 하니까요.』
『음………』
고영해는 분노와 절망을 한꺼번에 느끼면서,
『나이 찬 양반이 어린애를 유혹해내고도 하등의 양심적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요?』
석운은 순간 모욕감을 느꼈으나,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일단 그런 종류의 가책도 느껴야만 하겠지요. 그리고 느끼고도 있읍니다.』
『그렇다면 영림의 처소를 빨리 알려 주시요.』
『단지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이 찬 양반이 어린애를 유혹했다는 한 마디입니다. 고전무의 경우에서는 그러한 경험이 하나의 상식적 진실로서 통용될는지는 모르지만 이 강석운의 진실은 그러한 상식지대(常識地帶)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는 말이요.』
『무슨 뜻이요? 똑똑히 말을 하시요.』
마침내 고영해는 언성을 높였다.
『나이 찬 사람도 어린 사람에게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어린 사람도 나이 찬 사람에게 애정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요.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고 전무의 인생 철학으로서는 곧 남자들의 유혹을 연상하는 것 같지만, 그리고 그런 종류의 유혹으로써 맺어지는 남녀 관계에 참다운 애정은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유혹을 하고 유혹을 받고 정복을 하고 정복을 당하고 하는 그런 종류의 남녀 관계는 비록 고전무의 영역일는지는 몰라도 강석운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소.』
『뭐라고요? 당신이 도리어 나를 힐난하는 거요?』
고영해는 분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힐난하는 것이 아니요. 남녀의 참다운 애정이란 유혹 없이 맺어질 수 있는 생명과 생명의 불가항력적 상태를 말하는 거요. 행동이 아니요. 행동 이전이기 때문에 유혹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요.』
『그러면 영림과 당신의 관계도 그렇다는 말이요?』
『그렇소.』
석운은 단호한 대답을 했다.
『당신의 처자는 어떡할 테요?』
『알 수 없오. 나는 다만 현재에 있어서 나의 심정을 피력했을 뿐이요.』
『당신은 한 사람의 지성인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할 셈이요?』
『뭘 가리켜 지성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이미 나는 알 수 없게 되었오.』
『당신에게는 사회적인 명예가 있오.』
『걸레 조각 같은 명예일 것이요.』
이상하게도 대결 의식이 자꾸만 머리를 들었다.
『나는 당신을 사회에서 매장할 테요.』
『걸레 조각이 없어진다면 도리어 시원하겠지요.』
『나 어린 처녀를 유괴해 내다가 감금한 부덕한을 관헌에 고발할 테요.』
『나는 지금 나 스스로의 의사로서는 촌보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이요. 누가 와서 건드려 주면 오히려 다행한 일이지요.』
『에이, 이 썩어빠진 자식!』
고영해는 벌떡 일어서며 맞은 편에 앉은 석운의 멱살을 잡고 귀퉁이를 내갈겼다.
응접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식모는 아닐 테고 옥영임에 틀림없다.
석운은 가만히 앉은 그대로의 자세로 고영해의 매를 얻어맞았다.
그러나 다시금 들리는 고영해의 손길을 석운은 막으며 같이 우뚝 섰다.
『그만하고 돌아가시요. 그만했으면 고전무의 정의감과 울분심은 무마가 됐을 거요.』
그러면서 석운은 멱살을 잡힌 고영해의 손목을 힘있게 잡아 쥐며,
『일 대 일이라면 고전무의 젊음쯤은 쾌히 감당할 거요. 그러나 이 자리가 내 가정이요.』
『에이, 밸 빠진 사람이!』
고영해는 탁 멱살을 놓으며,
『오입을 하려거든 좀 재미있게 못 하고, 비린내 나는 계집애 하나 때문에 명예를 버려? 가정을 버려?』
고영해의 인생 철학으로 보면 실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다.
『충고는 감사하오. 그러나 재치 있는 오입을 나는 당초부터 원하지 않았오.』
『그럼 당초부터 손을 대지 말 것이지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라구.』
『불가항력이었오.』
『당신 같은 인간이 글을 쓰니까 사회는 파괴가 되는 거요.』
『그럴까요?』
『나이 어린 여성들을 마구 유혹해내다가는 몸을 망쳐 주고 일생을 불행하게 만들어 주는 당신 같은 인간이 글을 쓴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가 없오.』
『잘 알았오. 그 점에 대해서는 나 역시 생각하는 바가 있기에 이제부터는 고전무의 충고를 존중하겠오.』
『그런 의미에서 이제라도 결코 늦지 않으니까 영림을 돌려보내 주시오. 당신과의 관계는 절대 비밀히 하고 말이요.』
『이제 만나거든 그렇게 충고하지요. 그러나 돌아가고 안 돌아가는 것은 영림 양의 자유겠지요.』
『음, 어디까지나……』
고영해는 훌쩍 모자를 집어쓰며,
『알겠오. 당신이 어디까지나 그러한 태도로 나온다면 나는 나대로 비상수단을 쓸 수밖에 없어.』
증오의 눈초리가 석운을 무섭게 감았다.
『고전무, 잘 알았오. 비상수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주위에서 지나치게 덤비면 사태는 더욱 나빠질 가능성 밖에 없오. 영림 양의 성품도 그렇고 나 역시도 그렇소.』
『음……』
『한 마디 더 말해 둘 것은 이 사건을 해결 짓는 단 하나의 방도는 오직 시간의 흐름 밖에 없다는 것이요.』
그리고는 고영해의 손을 잡아 쥐며,
『시간의 여유를 주시요. 내 나이 이미 사십을 넘었으니 시간은 나에게 무슨 분별을 가져다줄 것이요.』
고영해는 그 말에 갑자기 언성을 부드럽게 가지며,
『강선생, 이제 그 말을 선물로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렵니다. 강선생의 분별만 믿고 가겠읍니다.』
고영해는 이제 어쩌는 수 없이 강석운의 그 한마디를 붙잡고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나에게 분별이 있어지기를 고전무와 똑같은 심정에서 원하고 있읍니다.』
『부탁합니다.』
『죄송합니다.』
석운이가 고영해를 전송하고자 응접실을 걸어 나오고 있을 때 옥영은 이미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총총히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남편과 고영해의 언쟁에서 옥영은 이미 영림에 대한 남편의 마음의 풍경을 알기에 이상 더 알아야만 할 아무런 것도 이제는 없었다.
안방으로 들어와서 옥영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혜숙은 식모가 데리고 나가고 없었다. 이윽고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남편이 들어왔다.
『여보.』
석운은 걸어가서 옥영의 머리맡에 조용히 꿇어앉았다.
옥영은 대답을 않고 아랫목 벽을 향하여 가만히 돌아누우며 이불 깃으로 얼굴 절반을 가렸다.
『옥영이 용서해 줘요.』
석운의 머리가 저절로 숙어졌다.
『내가 당신을 이처럼 슬프게 할 줄은 정말 나 자신도 몰랐던 일인데 ……』
옷장, 머릿장, 경대, 시계, 꽃병 등등, 어제의 평온이 깃들여 있던 그것들은 이미 아니었다. 그 여러 가지 가구들이 이방인(異邦人)처럼 서먹서먹한 시선으로 일제히 석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기울어진 태양이 쏟아져 들어오는 방안에 어둠은 밤처럼 충만해 있었고 불행한 감정은 해무(海霧)인 양 자욱했다.
『아무 말 마시고 어서 올라가세요. 이 순간의 내 감정을 폭발시키면 추태 밖에 발악밖에 더 나올 것이 없으니까요. 그런 추태를 당신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요. 그보다도 나 자신에게 보이고 싶지가 않아요. 그저 아무런 말도 마시고 어서 올라가세요.』
한참만에 옥영은 조용한 대답을 그렇게 했다.
석운은 또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옥영도 잠자코 있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 속에서 사발시계의 초침만이 생물처럼 똑똑똑 움직이고 있었다.
옥영은 아무 말도 하기 싫었고 할 필요도 또한 없었다. 그래서 어서어서 남편이 이 숨 막히는 방 안에서 나가 주기를 골똘히 바랐다. 그러나 남편은 좀처럼 머리맡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한 시간 동안이나 그러고 있는 동안에 석운은 불현듯 영림을 생각했다. 잠깐 다녀온다고 호텔 일실에 혼자 남겨 두고 온 영림이었다.
석운은 차차 초조해졌다. 그러한 심정으로 또 얼맛동안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네 시가 되었을 때 도선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소리가 앞뜰에서 났다.
여느 때 같으면 안방으로 뛰어들어와서 어머니에게 과자를 타 먹던 도선이가 슬며시 건넌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혜숙을 데리고 나간 식모가 도선이를 안방으로 들여보낼 리가 없었다.
『여보, 내 잠깐만 나갔다 올께.』
영림을 만나야만 했다. 영림을 호텔에다 언제까지나 처박아 둘 수는 없었다. 고영해가 찾아왔던 이야기를 하고 어쨌든 영림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래도 옥영은 대답이 없다.
『잠깐만 나갔다 올께.』
『기어코 나가셔야겠어요?』
『영림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오리다.』
『그럼 아까 당신이 영림의 오빠한테 이야기 한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과연 영림을 돌려보내고 올 수가 있을 것 같으세요?』
『…………』
석운은 대답을 못 하고 한숨을 짓다가,
『옥영이, 어쨌든 내 돌려보내고 올 테니까.』
힘없는 대답이었다.
옥영은 다시 한번 절망을 느꼈다.
그래도 옥영은 밤을 새우고 들어온 남편이 오늘로 되돌아서서 영림의 곁으로 달려갈 줄은 몰랐다.
『헤설픈 사람이면 몰라도 당신만한 사람이…… 내 이 허무한 감정을 너무도 잘 알 사람이 그래도 기어코 나가야만 하겠다는데 지금 내가 억지로 붙잡아 보았댔자 가치 없는 행동이니까 좋으실 대로 어서 나가세요.』
그러나 말과는 정반대의 감정이 옥영을 무섭게 습격해 왔다.
『그렇지만 이 순간에 있어서 내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면 영림을 만나러 나가려는 당신의 뒷덜미를 두 손으로 긁어 잡고 내동댕이질을 하고도 싶지만, 그렇지만 그러한 내 꼬락서니가 가엾어서 못하겠어요.』
옥영은 부르르 격렬한 몸서림을 느끼며,
『다만 나는 지금 당신을 미워할 수 있는 감정이 어서어서 커져서 내 마음의 키를 돌릴 수 있을 때가 오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러면 다소의 평온이라도 얻을 수가 있을 것 같애요.』
『옥영이!』
석운은 후딱 손을 뻗쳐 옥영의 얼굴에서 이불을 반만큼 잡아 젖히며 손길을 더듬어 잡았다.
그러나 옥영은 잡힌 손길로 남편의 손을 살그머니 밀어 놓으며,
『어서 나가세요.』
차가운 한 마디였다. 그리고는 다시금 이불을 뒤집어썼다.
석운은 일어서며,
『내 꼭 영림을 보내고 올께!』
아까와는 달리 힘찬 한 마디가 석운의 입을 튀어나왔다.
아까 고영해에게도 말한 것처럼 사십 대의 자기의 분별이 이 순간에 임하여 절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석운은 방을 나서자 모자를 내려쓰고 앞뜰로 내려서는데 건넌방 문이 홱 열리며,
『아버지, 어디 가세요?』
도선이의 기가 찬 목소리가 뒷덜미에서 났다. 열한 살의 어린 신경이지마는 이미 무엇인가 재미없게 되어가고 있는 불안한 가정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있는 표정이었다.
『아, 도선이냐? 볼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오마.』
『엄마는 어디 아프세요?』
『응, 어서 들어가서 엄마한테 과자를 달래 먹으렴.』
『아니에요, 안 먹어도 괜찮아요.』
안 먹어도 괜찮다는 도선의 어른다운 표정에서 석운은 성질을 달리하는 또 하나의 범죄의식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거리로 나가서 빵 사 줄까?』
『아니요.』
도선은 그러면서 아버지의 눈치만 살살 보고 있는 것이다.
『도선이가 갑자기 어른이 됐는걸.』
『오늘 밤도 안 들어오세요?』
『왜 안 들어와? 이제 곧 들어올께.』
석운은 성큼성큼 정문을 향하여 걸어나갔다.
도선은 얼른 신을 신고 아버지의 뒤를 살금살금 따라나섰다. 골목 어귀를 빠져나가 혜화동 로타리까지 도선은 따라가 보았으나 택시를 잡아타는 아버지를 그 이상 따라갈 수 없었다.
택시를 타고 무심히 석운은 창밖을 내다보다가,
『아, 도선이가 아닌가!』
뻐스 정류장 전선대 옆에서 도선은 이편을 말끔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뭉클하고 마음이 아팠다. 이미 아이들에게도 신임을 못 받는 아버지가 석운은 마침내 되고 만 것이다.
『어떡하든 영림을 돌려보내야지.』
그러나 집을 빠져나오는 골목 어귀에서부터 안경을 쓴 작달만한 청년이 뒤를 밟다가 역시 택시를 잡아타고 자기의 차를 따르고 있는 사실을 석운은 전연 모르고 있었다.
창밖에 거리가 흘렀다. 허황한 꿈결처럼 울긋불긋 간판이 흘렀다.
전선대 뒤에 우두커니 선 도선이의 얼굴, 이불을 쓰고 조용한 분노에 몸부림치는 옥영의 모습, 오늘 하주 원고를 못 썼기 때문에 모레부터는 중단될 수밖에 없는 「유혹의 강」……
이러한 뭇 극적인 장면과 극적인 심경을 석운은 지금까지 소설 속에서만 취급해 왔고 책상 앞에서만 공상해 왔었다.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어떠한 참담한 심경에도 작가 강석운은 한 사람의 방관자로서의 착각적 흥분과 희열을 맛보아 왔다.
그러한 강석운이가 마침내 현실적인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석운은 작가적인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가져지기도 했다. 그러나 톱니바퀴처럼 연달아 부닥쳐 오는 현실의 물결 앞에 그러한 관조적(觀照的)인 마음의 여유는 물거품처럼 명멸하여 밀려 나가기만 했다.
『내가 마침내 주인공이 되다니?』
「미이라」잡이가 「미이라」가 된 셈이라고, 지나간 날 이 층 서재에서 이런 종류의 극적 심경을 묘사하여 아내와 더불어 창작적 흥분을 나누던 그러한 평온은 이미 갔다.
석운의 상념은 이윽고 깨어지고 눈앞에 현실이 무자비하게 왔다. 영림이가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는 명수장 호텔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차에서 내리는데 영림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초조하게 날아 내려왔다.
이 층 창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림이가 상반신을 내밀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석운도 손 하나를 흔들어 보이며 안으로 들어가자 층계를 당황히 뛰어 올라갔다. 방으로 들어서기가 바쁘게,
『선생님!』
영림은 달려와 안기며 석운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기다렸어?』
영림은 고개만 끄떡끄떡하다가,
『다섯 시간 하고 사십이 분 동안……』
『그렇게 오래됐나?』
『그러엄.』
『이것저것 일을 좀 치르고 오느라고……』
어젯밤, 홀에서 입었던 소매 없는 브라우스와 후레아스커트를 영림은 입고 있었다.
『그동안 뭘 하고 있었어?』
『선생님 생각만요.』
석운은 볼을 비비며 힘찬 포옹을 했다. 입술도 오고 갔다.
『기달려지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확실히 행복한 일인가 봐요.』
『…………』
『기다린다는 건 괴로운 즐거움이죠.』
『즐거운 괴로움일는지 모르지.』
영림은 불현듯 시선을 들며,
『선생님, 괴로우세요?』
『아니』
석운은 명랑한 웃음을 웃어 보이며,
『영림, 점심은 먹었어?』
『아뇨』
『왜 청해 먹지.』
『혼자 먹기가 아까웠어요.』
석운은 물끄러미 영림을 들여다보며 자기는 지금 이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악마와도 같이 생각되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고 자기에게 향하는 영림의 정이 더 짙어지고 더 커지기 전에 이 정도로서 막을 수만 있다면 막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오빠가 집으로 찾아왔었어.』
『오빠가요?』
『집에서는 영림이의 걱정을 굉장히들 하고 있는데,』
『그래 오빠가 뭐라는 거에요?』
『영림이 때문에 집안에서는 초상난 집처럼 밤을 꼬박 새우고, 날더러 영림이가 있는 곳을 알려 달라는 거야.』
『그래 알려 주셨어요?』
『알려 줄 수밖에……』
『옛?』
영림의 표정이 홱 긴장을 하며 석운의 얼굴을 무섭게 쏘아 보다가,
『알겠어요. 선생님 마음 이제 다 알았어요.』
영림은 시계를 언뜻 들여다보며 침대로 뛰어가서 양복저고리를 재빨리 입었다. 경대 위에 널려져 있는 화장 도구와 함께 핸드백을 옷 보따리에 싸 들고,
『저를 집으로 돌려보내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선생님은 편하실 거에요. 그렇지만 저는 집엔 안 들어가요.』
그리고 나자 영림은 총총히 문을 향하여 뛰어나갔다.
『아, 영림이!』
석운은 달려가서 영림을 막았다.
『어딜 가는 거야?』
『어물어물하다가 오빠한테 붙들려 가기는 싫어요. 완력으로 끌어갈테니 누가 봄 얌생이꾼 같잖겠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석운은 영림을 끌고 가서 침대에 억지로 앉히었다. 영림은 다시 벌떡 일어서며,
『선생님도 오빠 편이군요. 저를 오빠의 손에 인계할 약속을 하고 오셨죠? 분명히 그러시죠?』
영림은 적이 흥분한 얼굴로 따져 왔다.
『그런 게 아니야. 하여튼 좀 진정해요.』
『싫어요. 선생님의 그 어른다운 행동, 저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놓세요.』
석운의 손을 홱 뿌리치고 영림은 다람쥐처럼 뛰어나갔다.
『영림, 아니야. 거짓말을 했어. 영림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리지 않았으니까.』
『속지 않아요. 그런 말로 저를 붙들어 두었다가 오빠가 오면 넘겨 줄 심산이지만요. 나쁜 사람! 나쁜 선생님!』
영림은 석운을 탁 밀쳐 버리고 들창 가로 뛰어갔다.
『앗, 영림이!』
그러나 어젯밤처럼 들창을 넘어 나갈 수는 없었다. 이 층의 높이를 영림은 원망스럽게 내려다보다가,
『아, 저이는?』
석운의 뒤를 따라 온 안경 쓴 청년이 맞은편 골목 어귀에서 이 층을 열심히 올려다보다가 홱 외면을 했다.
『저이는 홀 문지기,』
어젯밤 영림은 홀을 들어서면서 그 청년을 보았던 것이다.
『흥, 선생님도 상당하시군요. 오빠의 앞재비를 달고 오셨단는 말이죠?』
『아니야, 절대로 그런 건 아니지만……』
아까 석운이가 집으로 들어갈 때, 정문 앞에서 서성대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청년이 자기의 뒤를 따라온 것이 분명했고 호텔에 도착한 지가 벌써 이십 분이나 되었으니 고영해에게 전화 연락을 하고 온 것이 분명했다. 석운도 청년을 어젯밤 홀에서 본 생각이 그제서야 불쑥 났다.
『어쨌든 나는 나가요. 비겁한 선생님!』
『영림, 같이 가요.』
『싫어요. 저를 따라와서 어디까지나 오빠에게 넘겨 줄 생각 아냐요?』
『아니다. 빨리 뒷문으로 빠져나가자! 우물쭈물하다가는 오빠가 달려올 테니……』
석운은 모자를 집어쓰고 영림을 재촉하며 복도로 뛰쳐나갔다. 층계를 허겁지겁 내려가서 계산을 한 후에,
『이 호텔에 뒷문은 없나?』
『있읍니다.』
『빨리 그리로 좀 인도해 줘요.』
『이리 오십시요.』
보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 옆으로 해서 우중충한 좁은 골목으로 두 사람은 나섰다.
『이리 와요.』
석운은 앞장을 서서 청년이 지키고 있는 앞길과는 반대로 뒷길로 빠져나갔다.
어쨌든 일단 호텔로 또 가야만 하였다. 차는 광화문 앞으로 해서 남대문 쪽으로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운전수의 인도로 둘이는 남대문 밖 태양호텔로 갔다.
어쩐지 사람의 눈을 피하고 싶어 구석진 방 하나를 얻어들었다. 명수장 호텔과 어슷비슷한 장치를 한 방이었다. 식당에는 나가기 싫어 저녁 식사는 방에서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은 태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밤이 되었다. 석운은 혼자서 위스키만 연방 들이키고 있었고 영림은 창가에 기대고 서서 어두운 밤하늘만 내다보고 있었다.
가까운 정거장에서 기적 소리가 가끔 들려왔다. 어쩐지 처량만 했다. 그 처량한 기적소리를 들을 때마다 영림은 먼 이국땅을 후딱후딱 생각했다. 인간의 윤리와 사회의 질서에서 영림은 어서 바삐 벗어나고 싶었다.
석운의 설명으로 자기의 처소를 오빠에게 알리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고 오빠가 홀 청년을 선생님의 집 근처에 파수시켜 놓은 사실도 이제는 명백했다.
『선생님.』
창밖을 내다보며 영림은 불렀다.
『응?』
의자에 걸터앉아서 잔을 들던 석운은 시선을 들었다.
『술을 안 잡수심 괴로워서 못 견디시죠?』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석운은 표정을 크게 썼다.
『저도 한 잔 먹을 테에요.』
영림은 걸어와 마주 앉았다.
『영림도 술을 안 먹으면 괴로운가 본데.』
『누가 그런 말을 했어요.』
똑같은 제스추어로 영림도 표정이 컸다. 영림은 얼굴을 찡그리며 한 잔을 들이키고 나서,
『이렇게 쓴 걸 뭣 때문에 잡수세요?』
『영림은 뭣 때문에 들었나?』
『혼자서 선생님이 쓸쓸하실까 봐서……』
석운은 웃었다.
『선생님의 가정을 생각함 저도 안됐지만…… 그렇게도 선생님은 저를 돌려보내고 싶으세요?』
『아니, 그렇지만……』
잠깐만 다녀온다던 석운은 벌써 아홉 시가 넘었건만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옥영과 도선이의 모습이 머릿속에 겹쳐지면서 어른거렸다.
『초상난 집처럼 떠들어 댈 제 집이나 초상난 집처럼 조용할 선생님 댁이나 다 똑같은 위치에 놓여 있는 거예요.』
위치는 같을런지 몰라도 비극의 성질은 다를 것이라고 석운은 생각한다.
『그런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저는 선생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마찬가지 이야기야. 내가 영림의 옆을 떠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어쨌든 내 잠깐만 다녀올께.』
『어딜요……?』
『집에 말이야.』
영림은 의외라는 듯이 석운을 말끔히 바라보다가,
『다녀오세요. 어서 다녀오세요!』
영림은 냉큼 몸을 일으켰다. 석운의 모자를 손주 집어 주며,
『다녀오실 필요는 없으시고, 어서 돌아가세요!』
『…………』
영림의 입가에 조소의 빛이 가볍게 떠돌고 있었다.
『돌아가실렴 돌아가셔도 좋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드려 둘 것이 있어요.』
영림은 모자를 매만지며,
『선생님을 사모하는 제 마음이 어제와 오늘 하룻밤 사이에 어쩐지 변해진 것 같아요. 어제까지도 저는 허심탄회에 가깝도록 선생님을 돌려보낼 수가 있었는데…… 오늘은, 지금 이 순간에 있어서는 선생님을 댁으로 돌려보내기가 이처럼 애달프고 이처럼 알뜰살뜰히 싫어질 줄은 몰랐어요.』
갑자기 영림은 울먹울먹하며,
『그렇지만 기어코 돌아가신다면 하는 수 없죠.…… 그러나 영영 다시는 저를 찾지 마실 생각으로 돌아가세요!』
『영림은 무슨 말을……?』
석운은 일어서서 영림의 옆으로 다가갔다.
『선생님을 유혹한 제가 나쁜 줄 다 알지만…… 그러나 저로서는 그 길밖에 없었어요.』
『내가 유혹을 느낀 것이지, 영림이가 유혹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건 선생님의 겸손이 아니면 자존심을 붙들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지만…… 선생님 앞에 제가 나타나지만 않았던들 오늘과 같은 괴로움을 선생님에게 드리지 않아도 됐을텐데……』
영림은 혜련 올케를 생각했다. 끝끝내 돌구름 앞에 나타나지 않는 한혜련과 자기를 비교해서 생각하였다. 어떤 것이 참된 사랑의 자세인지를 골똘히 알고 싶었으나 거기 대한 정확한 대답을 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인간 위에 신이 있는 것이라고, 저는 오빠한테서 들어 왔어요. 그러한 제가 이 순간에 와서는 신을 의심하게 되었어요. 신의 섭리로 돌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영림의 어깨 위에 손 하나를 얹고 석운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저는 좀 더 많이 정신적으로 선생님을 모신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저는 선생님이 제 옆을 떠나고 싶어 하실 때는 언제든지 수월하게 돌려보내 드릴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던 것이……』
영림은 들고 있는 모자를 저도 모르게 떨어뜨리며 석운의 품속에 가만히 머리를 묻었다.
『그게 아니었어요. 돌려보내기가 이처럼 싫어질 줄은 통 몰랐어요. 신의 섭리를 따르기에는 너무도 다급한 심정…… 결국은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평범한 애정, 속된 사랑으로 변하고 말았지요.』
『영림, 알겠어! 잘 알았어!』
영림의 어깨를 석운은 힘차게 포옹했다.
『영림의 타락일런지 모르지만…… 그 타락한 애정 속에서 영림의 한 목숨이 연기처럼 없어져 주었음 좋겠어요!』
『영림, 이제 안 갈께 집에 안 가도 괜찮아!』
『하룻밤 사이에 제 심정이 이처럼 돌변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머나먼 별이라도 바라보는 것처럼 인간의 애정을 소꼽장난이나 하듯이 관념적으로 가지고 놀았지요. 인간의 애정이 이렇게도 속되고 다급한 것인 줄을 알았었더라면……』
뚜우, 뚜우, 뚜우……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소꼽장난처럼 마음대로 돼 주지 않는 애정의 정체를 기적 소리에 싣고……
『머언 데로…… 머언 데로 가 버리고 싶어요.』
『음, 머언 데로……』
『서울은 이제 싫어졌어요. 숨 막힐 것 같은 이 서울의 공기…… 인간의 질서가 따라오지 못할 심산유곡이 그리워졌어요!』
뚜우, 뚜우, 뚜우……
금방이라도 뛰어가서 무작정 영림은 기차에 오르고 싶다.
失樂園[실락원]
하룻밤이 또 새었다.
영림을 돌려보내고 곧 돌아온다던 남편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정녕 않았기에 분노와 굴욕을 가까스로 참으며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옥영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종시 돌아오지를 않았다. 어머니 옆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어두운 모습을 처량하게 바라보며 옥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쁜 아버지!』
이튿날 아침 소녀다운 의분심을 가지고 맏딸 경숙은 아버지를 나무랐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던 경숙이기에 아버지를 나무라는 감정이 그만큼 더 절실했고 컸다.
『자동차 사고가 났는지도 모르지 않니?』
도선은 아직도 어리벙벙했다.
『그래, 어저께 아버지는 택시를 타고 나갔어. 내가 따라가서 봤다!』
도선이도 도현이와 마찬가지로 교통사고를 걱정하고 있었다.
『모름 가만히나 있어!』
경숙이가 빽 소리를 치는데,
『빨리들 학교에나 가거라.』
옥영이의 조용한 한마디가 떨어지자 세 아이는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면서 학교에 갔다. 밀물이 찐 듯이 집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혜숙은 옥영이 옆에서,
『엄마, 아빠는 왜 자꾸만 안 오나?』
『아빠는 무슨 일이 생겼단다. 오늘은 돌아오실 테지.』
그러나 옥영은 이미 남편이 돌아온댔자 남편의 얼굴을 대하기가 죽어도 싫었다.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어디론가 휙 없어져 버리고만 싶다.
어젯밤까지는 그래도 남편에 대한 애정의 끄나불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미 그러한 끄나불은 완전히 끊기어 버린 것이라고, 인제는 다만 자기의 이 상처받은 감정을 처리할 방도만이 남아 있음을 옥영은 명백히 깨달았다. 남편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것만이 자기의 감정을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이었다.
『혜숙은 아빠가 제일 좋지?』
『엄마도 좋아.』
『아빠는 과자를 늘상 사 주지 않아?』
『응, 그래 아빠가 좋아.』
『정능 할머니도 좋지?』
『응, 좋지.』
『아빠하고 할머니만 있으면 엄마는 없어도 좋지……?』
『싫어이!』
『아니, 오래오래 말고, 며칠 동안만 말이야.』
『몇 밤만……?』
『응, 세 밤…… 아니, 다섯 밤만……』
『다섯 밤……? 그럼 난 할머니하고 같이 잘 테야.』
『아빠는 맛있는 과자를 사다 주시고, 할머니하고 같이 자고…… 혜숙인 참 좋겠네요!』
『아이, 좋아!』
조개비 같은 손으로 혜숙은 손뼉을 쳤다.
그러는데 신문사 사람이 찾아왔다고 식모가 들어왔다.
『응접실로 모셔요.』
이윽고 옥영은 흐트러진 머리를 간단히 매만지고 응접실로 나왔다. K 신문사 문화부 기자 송찬(宋燦)이었다. 어제저녁 무렵, 남편이 나간 후에도 송찬은 「유혹의 강」의 원고를 가지러 왔었던 것이다.
『식모 아주머니에게서 들었는데 선생님이 어젯밤도 안 돌아오셨다고요?』
걱정스런 표정을 송찬은 지었다.
『안 돌아오셨어요.』
『어떻게 됐을까요? 그런 일은 통 없으신 선생님인데……』
옥영은 잠자코 있었다.
『오늘도 원고가 못 나가면 내일은 끊기는데요.』
그때 또 현관문이 열리며 남편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영해의 목소리였다. 모르는 체하고 내버려 두었더니 식모가 들어와서,
『어저께 오셨던 분이 또 오셨읍니다.』
『이리로 들어오십사고 해요.』
『사모님, 그럼 저는……』
송기자가 자리를 사양하려고 하는데,
『괜찮아요. 송선생님만은 어차피 아셔야 하실 테니까요.』
송찬은 그만큼 강석운 내외에게 신임을 얻고 있었다.
고영해는 혼자가 아니었다. 고영해의 뒤로 영림의 어머니와 안경을 쓴 우락부락한 박청년이 따라 들어왔다.
박청년은 소파로 가서 송찬의 옆에 앉았고 고영해 모자는 옥영이와 탁자를 끼고 마주 앉았다.
『제 어머닙니다.』
고영해는 옥영에게 어머니를 소개하였다.
『네, 수고로이 오셨읍니다.』
옥영은 어수선한 머리에 손질을 하고 나서,
『찾아오신 용건은 말씀 안 하셔도 알고 있읍니다. 그렇지만 오늘도 안 들어오셨읍니다.』
기선을 제하는 의미에서 옥영은 제가 먼저 발언을 하였다.
『실은 어제 이 박군을 이 근처에 파수시켜 놨더랬읍니다. 그래서 강선생의 뒤를 밟아 다동에 있는 명수장 호텔까지 무사히 따라가서 저한테 전화 연락을 해 놓고 호텔 앞에서 기다렸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눈치를 채고 제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은 호텔 뒷문으로 빠져나가고 없었읍니다.』
옥영은 조금도 떠들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다가 조용한 대답을 했다.
『소식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도 걱정이 되시겠지만 저희들로서는 어쩌는 도리가 없어서 강선생이 돌아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작정으로 왔읍니다.』
『좋도록 하세요.』
옥영은 여전히 태연한 대답을 했다.
『어쩌면 이처럼도 얌전하고 똑똑한 부인을 두고…… 참 세상이란 알 수가 없구려!』
영림의 어머니는 자기와 입장이 비슷한 데서 오는 동정의 염을 문득 느끼며,
『올 때는 무슨 투정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는데…… 생각하면 애기 어머니야 뭐가 나쁠라구……?』
옥영은 잠자코 있었다.
『애기 아범도 아범이지, 이처럼 예쁘고 똑똑한 사람을 두고 글쎄…… 영림이 같은 어린애가 글쎄 뭐가 좋길래 이 지경이유?』
어머니는 가만히 옥영의 손등을 쓸어보며,
『딸 하나 못 쓰게 한 생각을 하면 그저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 만…… 애기 어멈더러 이런 말을 하면 무엇하리, 애기는 몇이나 되우?』
옥영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옥영은 지금 그 누구에게도 동정을 받고 싶지가 않았다. 동정은 모욕을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덧 되시오?』
옥영은 귀찮아서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더니,
『원 저런 변이…… 어쩌자구들 그러는지 글쎄 알 수가 있어야지. 남자들은 모두들 바람을 피우고 보니 이런 딱한 노릇이 어디 있노……? 마음 상하는 일이 웬만하겠오만 이런 때일수록 마음 든든히 먹고,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이제 애기 아범도 쉬 돌아올 거라우. 오늘도 안 돌아오면 부득이 경찰에 수색원을 낼 테니까…… 나쁜 녀석 같으니라고!』
옥영은 이상 더 이 늙은이의 넋두리를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냉큼 몸을 일으키며,
『나는 안에 들어가 봐야겠어요.』
간단한 한 마디를 남겨 놓고 그 질식할 것 같은 응접실을 총총히 나섰다.
『사모님!』
송찬이 따라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도 모르겠어요, 그쯤 알고 돌아가세요. 그렇지만 송선생, 선생님을 위해서 사건은 당분간 비밀히 해 주세요. 시일이 경과 되면 어차피 세상이 알 일이지만……』
『사모님, 그 점은 염려 마시고…… 저도 선생님의 처소를 가급적 빨리 알아보겠읍니다.』
송찬이가 골목을 빠져나와 혜화동 로타리로 걸어나가는데,
『아, 송군!』
달려오던 택시가 삐꺽하고 멎으며 석운이가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아, 선생님! 어찌 된 일입니까?』
『집에 들렸었나?』
『네, 지금 막……』
『집에 무슨 일은 없던가……?』
『사모님이 무진 걱정을 하고 계십니다. 그뿐인가요. 웬 사람 셋이 찾아와서 선생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셋이라고……? 코 밑에 수염이 난 사람이겠지?』
『네, 그이와 그의 어머니와 또 안경을 쓴 청년과…… 안경 쓴 청년이 어저께 선생님을 호텔에서 놓쳤다고……』
『집에서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럼요. 수염 난 작자가 사모님께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음, 알았어!』
『경찰에 수색원을 내겠다고요. 선생님, 어쨌든 들어가셔서 사모님을 안심시켜드려야 하지 않겠읍니까?』
『음, 그러려고 달려오기는 했지만……』
석운의 표정이 칠면조처럼 연방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소설도 오늘 못 넘기면 내일은 끊어집니다.』
『알아, 알고 있어.』
석운의 표정이 갈피를 못 잡고 흐렸다 개었다 했다.
『어쨌든 송군, 올라타게.』
『선생님, 그럼 댁에는 안 들르십니까?』
『들를 수가 없게 됐어.』
『그이들 때문에?』
『응, 운전수, 차를 돌려요.』
『네.』
골목으로 빽을 했다가 차는 다시 되돌아섰다.
『송군이 안 타겠다면 그대로 갈 테야.』
『탑니다, 타겠읍니다.』
송찬은 하는 수 없이 올라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주시요.』
『네, 네.』
차는 냅다 달렸다. 둘이는 부처님처럼 말이 없었다. 창경원과 원남동이 침묵 속에서 날아갔다.
『선생님.』
『…………』
『집엘 안 들어가시면 어떡하십니까?』
『들어가면 그 사람들한테 붙들려.』
『그렇지만 서로 부닥쳐서 해결을 하셔야지, 언제까지나 숨어만 다니겠어요?』
『그만한 것은 나도 알고 있어. 그렇지만 해결의 방도가 내게는 없다!』
『선생님, 어쩌다가 갑자기 이렇게 되셨읍니까?』
강석운이라는 인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송찬으로서도 옥영 이상으로 놀라고 있었다.
『나도 알 수 없어.』
『선생님, 약해지시면 안 되셔요. 사모님이 가엾으시지 않으세요. 선생님이 그처럼 좋아하시고 존경까지 하신다던 사모님이신데……』
『고마워! 허지만 나는 지금 내 의사로써 나 자신을 통솔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이야.』
『도선이랑 혜숙이랑도 생각하셔야지.』
『송군의 충고, 무진 고마우네. 아이들 생각도 하기는 하지만…… 생각뿐이야. 행동이 따르지 않는걸.』
『실례지만 후에라도 무슨 도움이 될까 하고 묻습니다만…… 영림이란 어떤 여잡니까?』
『학생인데……』
『아직 어리다면서요?』
『어리다면 어리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기도 하지.』
『지금 숙소는 어디시죠?』
『유도 신문에 걸릴 내가 아니야. 자아, 송군은 여기서 내려요. 스톱!』
돈화문 앞에서 차는 멎었다.
『그렇지만 선생님! 저한테까지 숨기실 필요가 없지 않읍니까?』
『미안하다고 생각해. 소설은 당분간 중지네. 사로 돌아가서 적당히 전달해 주게.』
『그렇게 되면 소설이 큰일 났읍니다.』
『소설보다 작가가 좀 더 큰일 났네 자아, 악수!』
차에서 내려서는 송찬의 손을 잡았다가 놓으며,
『운전수, 종로 삼가로 나가 줘요.』
『네 네.』
강석운의 택시가 저만큼 사라졌을 때, 송찬도 택시를 잡아타고 석운의 차를 따라갔다.
남대문 밖 태양 호텔로 되돌아온 석운으로부터 간단한 보고를 듣고 난 영림은 정말로 서울 거리가 시끄럽고 귀찮아졌다.
『어머니까지 출동했어요?』
『응.』
『그게 부모의 애정인지 모르지만…… 아이 지긋지긋해!』
영림은 침대 위에 번듯 나가 누우며,
『선생님.』
『응……?』
『머언 데로 가요.』
『머언 데로……』
석운은 침대에 걸터앉아서 담배만 푹푹 피우고 있었다.
『선생님, 용기 없으시지……?』
머리 뒤통수에 깍지를 끼고 영림은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용기라고……?』
『머언 데로 갈 용기 말에요.』
『누가 없다고 그랬어……?』
『없을 것 같아서……』
『흥, 요것이 사람을 마구 놀려 먹는걸!』
석운은 손을 뻗쳐 영림의 볼 하나를 꼬집어 주었다.
『용기 없으심 댁으로 아주 돌아가시든지……』
『내가 돌아가기를 영림은 원하고 있어?』
『선생님이 원하시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내가 원하는 건 이거야!』
석운은 담배를 휙 재떨이에 던져 넣고 영림의 얼굴을 자기 얼굴로 덮어 버렸다.
포개어진 두 개의 얼굴은 말을 잃고 비비적거리기만 했다.
이윽고 숨가쁜 포옹이 끝나며,
『내 언제 거짓말했나……?』
『선생님은 정말 좋아!』
안기어 오는 영림의 머리를 석운은 쓰다듬으며, 소녀 <에데>를 사랑한 늙으막의 <몬테크리스트>를 생각했고, 십칠 세의 소녀를 사랑한 칠십삼 세의 <괴테>를 생각했고, 돌아올 줄 모르는 애인의 딸에 지극한 애착을 느끼는 <장 끄리스또프>의 늙은 심경을 생각했다.
가련한 것에 대한 무한한 애착, 헌신적인 애정의 경사(傾斜)를 걷잡을 수 없이 석운은 느끼며,
『영림, 우리 먼 데로 갈까……?』
『가요, 가! 이제라도 기차를 차요.』
『여비가 필요할 텐데……』
『제 목걸이를 팔아요. 이어링도 팔아요. 가다가 찻삯이 모자라면 아무 데나 내려요.』
『가만있어!』
석운은 휙 일어서서 수화기를 들고 견지동 S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저번에 반액을 받고 아직도 기일은 차지 않았으나 오륙십만 환의 인세가 남아 있는 것이다. 경숙의 피아노 대금으로 예산을 세우고 있던 돈이었다.
S 출판사 사장이 전화를 받았으나 예산에 넣지 않았던 돈이므로 오늘 당장에 오륙십만환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후에,
『강선생이 그처럼 급하시다면 이십만 환쯤은 돌려 드릴 수도 있지만요.』
『이십만 환…… 그럼 그것이라도……』
『지금 어디 계신지, 그리로 보내 드리지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고 내가 그리로 가겠읍니다. 미안합니다.』
석운은 전화를 끊고 모자를 썼다.
『기다려요. 내 잠깐 견지동까지 다녀올께.』
『선생님!』
걸어나가는 석운을 영림은 불렀다.
『응……?』
『벌써 잊으셨어!』
『아, 참……』
석운은 다가와 작별의 포옹과 접순을 했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그러기로 약속이 암암리에 되어 있었다.
『돌아오실 때, 보스톤빽을 하나 사갖고 오세요.』
『오 케!』
호텔을 나서서 석운은 택시를 잡았다.
맞은 편 대중식당에서 점심 요기를 하며 밖을 내다보고 있던 송찬이도 뛰어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석운의 차를 따라갔다.
십 분 후, 석운은 견지동 S 출판사 앞에서 차를 버리고 안으로 총총히 들어가버렸다. 송기자도 차를 버리고 맞은편 골목 어귀로 숨어 들어갔다.
얼마 만에 석운은 출판사를 나와 광교 다리 근처에 있는 은행으로 들어갔다. 은행에서 다시금 거리로 나온 석운은 신문지에다 싼 돈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석운은 보스톤 백을 살 셈으로 을지로 쪽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데 낯익은 청년의 얼굴 하나가 마주 걸어오다가 석운의 앞에서 우뚝 멎었다.
『아, 송준오군이 아니요!』
그러나 송준오는 묵묵히 석운의 얼굴만 바라볼 뿐 대답이 없다. 감정의 상극이 라이블(戀敵[연적]) 의식과 함께 석운에게 왔다. 석운이가 휙 자세를 돌려 지나쳐 버리는데,
『강선생!』
송준오가 불러 세웠다.
『왜 그러시오?』
석운은 다시금 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영림을 만나거든 이렇게 전해 주시오…… 영림에 대한 과거의 내 순정이 너무도 아까웠다고 전해 주시요.』
차가운 한 마디였다.
『…………』
석운은 묵묵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처럼 황홀하게 받아들였던 영림의 입술이 너무도 값싼 것인 줄은 몰랐었다고 이 말도 겸해서 전해 주시오.』
그리고는 휙 돌아서 갔다.
송준오의 날카로운 두 어깨를 석운은 덤덤히 바라보다가 보스톤 백을 후딱 생각하고 다시금 을지로로 총총히 걸어갔다. 송준오의 날카로운 어깨가 망막에 남아 석운은 또 한 번 돌아다보다가,
『아, 군은……』
송찬은 종시 들키고야 말았다. 히쭉히쭉 웃으면서 다가오는 송찬을 향하여,
『과연 민완기잔 걸! 태양 호텔 앞에서는 어지간히 지루했을 텐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점심 요기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감사하오!』
석운은 송찬의 손을 부여잡으며,
『송군의 호의는 영 잊지 않을 테야. 하지만 당분간 나를 놓아주게.』
『선생님, 정말 어떻게 마음을 돌리실 수는 없읍니까?』
석운은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 뜨며,
『고마운 말이지만…… 아무 말 말고 돌아가 주게. 스톱!』
석운은 차 한 대를 멈추며,
『어서 신문사로 돌아가요. 군의 호의도 잘 알고…… 그러니까 이상 더 내 뒤를 밟을 필요는 없고…… 태양 호텔도 곧 뜰 테니까……』
『이삼일 사이에 그럼 선생님 댁으로 찾아가 뵈올까요?』
『아, 그래 그래!』
송찬은 하는 수 없이 단념을 하고 차를 타고 떠나갔다.
차가 저만큼서 커브를 틀며 사라지는 것을 보고야 석운은 비로소 백을 사러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즈음 아현동 영림의 집에서는 혜화동서 돌아온 마누라와 아들의 보고를 고종국 씨는 듣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도 없고 해서 박군을 파수시키고 돌아왔읍니다.』
『음, 잘 알았다. 그럼 내가 강석운의 아버지를 만나 봐야지.』
고사장은 냉큼 일어서서 방을 나섰다. 대문 밖에 차는 기다리고 있었다.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오입할 상대가 따로 있지, 남의 귀중한 딸을 후려내?』
달리는 차 안에서 고사장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사십 분 후, 차가 정릉에 다달랐을 때, 고사장은 자기 집에는 들르지 않고 곧장 강교수의 집 앞에서 차를 멈추었다.
넓은 대지를 둘러싼 성깃성깃한 울타리 한쪽에 대문이랍시고 목문 하나가 서 있었다. 닭장, 채소 밭, 화단이 울타리 안으로 삥 둘러 있었다.
화단에는 가지각색의 꽃이 만발해 있었고 닭장에는 백색의 레그홍, 얼룩 얼룩한 푸주마스록크가 모이를 줍고 있었다.
열 대여섯 간 되어 보이는 중고옥이 대지 한가운데 잠방하니 앉아 있었다.
심산유곡의 농가처럼 허스름한 정적과 초라한 평화가 고요히 깃들어 있는 마당 한가운데서 고종국씨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금욕과 애욕의 도가니 속에서 기름지고 살찐 고종국씨의 들뜰 대로 들떠 있는 오관이 주위의 이 고즈넉한 분위기에 당황을 했다. 위축도 했다.
자기의 호화로운 생활이 강교수의 이 검소한 생활 앞에 위축을 받아야만 할 무슨 이유가 있느냐고, 고종국씨는 일부러 위엄 있는 목소리로,
『에헴!』
하고 기침을 했다.
낯설은 기침 소리에 젊은 식모가 부엌에서 얼굴을 내밀었고 사랑방에서 한복의 강교수가 문을 열었다.
『아, 이거 고사장이 아니시요.』
강교수는 몸소 일어나서 고종국씨를 반가이 맞이하였다.
『강선생이 바쁘실 줄은 알지만 잠깐……』
『어서 좀 올라오시지요. 저번에는 실례가 많았읍니다.』
사랑문 좌우 담벼락에 낡아 빠진 초라한 액자가 하나씩 붙어 있었다.
有山有水處[유산유수처]
無榮無辱身[무영무욕신]
(산 있고 물 있는 곳에서 영화도 없고 욕됨도 없는 몸이로다.)
詩有聲之畵[시유성지화]
畵無聲之詩[화무성지시]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로다.)
오랜 비바람에 글씨는 퇴색을 했고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다.
고종국씨는 무언의 압력을 또 한 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의 기름진 삶의 방도가 조소를 받고있는 것 같아서, 그것을 배제하기 위하여 아랫배에 힘을 주며 권하는 대로 서재에 들어가 마주 앉았다.
책장에 넣다 남은 책이 주위에 산적해 있었다. 집필 중이던 모양으로 낡아 빠진 책상 위에 원고지와 펜이 놓여 있었다. 원래 넓지 못한 방이라서 세 사람만 들어앉아도 비좁을 만한 여유밖에 없었다.
강교수 부인은 돈암동 시장에 저자를 보러 가고 없었다. 그래서 식모더러 차를 끊여 오라고 하는데,
『그럴 필요는 없읍니다.』
하고 고종국씨는 주인의 호의를 차갑게 막았다.
석운과 영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동안 고사장은 시종여일하게 차가운 모습을 견지하고 있었고, 강교수는 무척 놀라면서도 마음의 침착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불미로운 사건을 강교수는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처리할 작정입니까……?』
차는 다 식어 빠지도록 고사장 앞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적어도 강교수의 자제라기에 웬만한 자각은 가졌을 줄로 알았는데…… 끝끝내 영림의 처소를 알리켜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의 불찰을 깨닫지 못하는 미실이 아닐진대 하나의 악덕한, 패륜의 자식이라고 볼 수밖에는 없오.』
이렇게 막 욕설을 퍼붓고 보니 어쩐지 고사장은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내 아들놈의 미련한 탓이라기보다도 모두가 다 이 아비의 미급한 탓입니다. 고사장 일가의 심로에 대해서는 충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 오던 강교수는 머리를 숙이며 정중히 사과의 뜻을 표하였다.
『사과로서 될 일이 아니요, 한시바삐 사건을 처리해 주시요.』
『나도 그것을 지금 골똘히 생각은 하고 있읍니다만 처리 방도가 서지를 않읍니다.』
『나쁜 놈 같으니라고! 글 줄이나 쓰는 놈이라기에 그렇지 않게 보아 왔더니…… 남의 만금 같은 딸을 꼬여내다가 감금을 시켜 놔……? 윤리학 교수의 아들놈이 아니었더라면 그 녀석은 남의 유부녀라도 꼬여 낼 망국지종이 되었을 거요.』
강교수는 송구스레 숙였던 머리를 불현듯 들고 고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 다가 침착한 어로 입을 열었다.
『고사장의 말씀이 다소 지나치십니다.』
『뭐라구요? 내 말이 도리어 지나친다구요?』
의외라는 표정이 크게 왔다.
『그렇읍니다. 일단은 사과를 드렸읍니다만 지나친 험구는 듣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흥, 알겠오! 그러다 보니 강교수도 아들놈과 동혈 동족이니만큼 아들놈의 행실을 옳다고 여긴다는 말이지요?』
강교수는 또 묵묵히 상대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고사장, 분명히 대답해 두겠읍니다만 나는 지금 내 자식의 행실을 옳다고도 말할 수 없고 그르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허어, 이게 또 무슨 소리요……?』
고사장의 눈이 그 어떤 패기로 말미암아 희번덕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만 내 아들 강석운이라는 한 사람의 인간을 믿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내 아들 석운이가 만일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 아들을 믿읍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아니 될 무슨 깊은 뜻을 품고 한 일이겠기에 내 아들을 함부로 책망할 수는 없읍니다.』
그리고는 훌쩍 일어서서,
『실례지만 나는 좀 볼 일이 있어서 나가 봐야겠읍니다.』
『음, 아들 가진 재세를 하는 거요?』
고사장도 하는 수 없이 따라 일어섰다.
『그러한 상식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다만 내 아들을 만나서 그의 숨김 없는 심경을 들어보고 싶을 따름이지요. 그리고 좋은 수습책이 발견된다면 가급적 속히 손을 쓰겠읍니다. 실례하겠읍니다.』
강교수는 옷을 갈아입으려고 안방으로 총총히 들어갔고
『잘난 놈들도 별 것 없구먼! 제 자식 믿고 싶어하는 마음은 술장수 오야 봉에게도 있어!』
고사장은 괘씸한 시선으로 강교수의 뒷모습을 쏘아 보았다.
아내의 抗議[항의]
시장에서 돌아온 부인과 함께 강교수가 혜화동 아들네 집을 찾은 것은 이럭저럭 한 시간 후가 되었다.
오후 네 시가 가까운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경숙이는 동생 셋을 데리고 건넌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안방에 있는 어머니의 동정만 조용히 살피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경숙의 말을 곧잘 들었다.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고 놀음에 팔려 떠들어 대다가도 경숙이가 시선만 조금 추켜도 금방 조용히 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허수로이 취급하기 시작한 이 가정의 보호와 옹립을 위한 책임과 사명을 열일곱 살인 경숙이가 무언중에 짊어진 형식이 되어 있었다.
그때, 옥영은 안방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다. 남편이 돌아오면 볼 수 있도록 현재에 있어서의 자기의 심경을 솔직하게 표현한 글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면 경숙이와 정릉 시부에게도 간단한 편지를 써 놓고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집을 나갈 작정을 하고 있는데 시부모가 들어선 것이다.
옥영은 얼른 편지를 서랍 속에 집어넣고 시부모를 맞이하였다. 기가 차서 들어서는 시부모의 기색에서 옥영은 이미 남편의 사건 때문에 온 것을 알고 있었다.
시부모는 얼떨김에 순서 없이 남편의 이야기를 단도직입으로 물어오는 데 대해서 옥영은 극히 침착한 태도와 어조로 지나간 일을 조리 있게 쭉 설명하였다.
『원 이런 변이 어디 있노? 다른 사람이면 모르지만 네 남편이 설마 이럴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니……?』
시부모는 이야기를 들어가는 도중에도 이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적어도 자기 남편 강학선 교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남편을 믿듯이 아들의 굳건한 인간성을 믿고 있던 시모인만큼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내린 것처럼 늙은이는 당황하고 있었다.
『음, 네 고생스런 마음이나 또 네 거북스런 처지를 잘 알았다.』
오랜 침묵 후에 강교수는 신음하듯이 말하며,
『너를 대할 낯이 내게는 이제 없다. 적어도 내 아들만은, 인간의 성실만 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고, 내가 그처럼 고창하면서 길러낸 내 아들만은 믿었었는데…… 뭐라고 너를 위로할 말이 없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
침통한 표정이 늙은 강교수의 주름진 얼굴을 무겁게 덮어 왔다.
『그렇지만 이런 때일수록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시모가 위로를 하며,
『나라가 어지러워졌을 때 충신이 나는 것처럼 집안이 평안치 못할 때 열녀가 나는 법란다. 애 아범이 과히 미련하지 않은 위인이니 이제 모든 것을 청산해 버리고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정을 지켜야지.』
『어머니 말씀이 지당하신 줄을 잘 알고 있어요.』
옥영은 고개를 소그듬히 숙이고 조용히 대답했다.
『암, 그렇고말고! 네가 엔간한 사람이라고 내 말을 못 알아들으련만 도……』
『그렇지만 어머니.』
옥영은 시선을 들어 시모를 바라보고 나서,
『미련하고 못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아무리 기를 써도 마음을 단단히 먹을 수가 없어요. 저로 하여금 마음을 단단히 가지도록 한 원인이 남편의 애정에 있었는데, 그것을 잃어버린 오늘, 무엇을 가지고 마음의 기둥을 삼으라는 말씀이신지…… 원인 없는 행동을 저는 취할 수가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열녀도 되고 싶지 않고 현모양처도 되고 싶지 않아요.』
강교수 내외는 적이 놀라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너……』
시모는 마음의 놀람을 억제하며,
『널더러 열녀가 되라는 건 아니지만 너는 네 남편의 아내인 동시에 네 아이의 어머니가 아니냐……?』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면 어쩌니?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이전처럼 못 받게 된 자식들을 위해서 이런 때일수록 아버지의 몫까지 어머니가 도맡아야만 할 텐데…』
『도맡을 기력을 저는 잃어버리고 있어요.』
『안될 말이다. 마음을 굳세게 먹어야지. 집안이 이처럼 어지러워진 경우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일을 처리해 왔는지, 너도 잘 알 것이 아니냐? 모두가 다 아이들을 생각하고 가정을 지켜 왔단다. 그것이 소위 모성애라는 건데……』
『어머니의 말씀 잘 알아 모시고 있지만, 그리고 부모님 앞에서 너무도 당돌한 말 같지만 그리고 또 제게도 그만한 모성애는 있지만, 그렇지만 세상의 아내들이 모두가 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저도 따라 할 수는 없어요.』
『무슨 말인지, 도시 알 수가 없구나. 너처럼 얌전하고 똑똑한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옥영은 고개를 숙이고,
『제가 그이와 결혼한 것은 단지 밥이나 벌어다 주는 경제적 보호를 받기 위해서 한 것도 아니고, 또 자식을 낳아서 모성애를 발휘하고 그 모성애 속에서 행복을 구하고자 한 것도 아니었어요. 오직 한 가지 영원히 변함이 없는 남편의 애정이 소중해서 결혼을 한 것이었어요.』
『그야 그렇겠지만……』
논리의 궁핍을 느끼고 시모는 시부의 표정을 언뜻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 교수는 시종여일하게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가정을 지킨다든가 자식들을 보호하고 양육한다든가 하는 것은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적어도 제 결혼 목적이나 결혼 의식 속에는 없었어요. 있다면 그것은 다만 남편의 애정을 차지하기 위한 하나의 부수적인 결과로서 밖에는 없었어요. 이런 말은 아이들이 들으면 저를 냉혈동물이라고 원망할런지 모르지만…… 그것도 하는 수 없는 일이에요. 저는 지금 한 여자로서의 숨 김 없는 결혼 목적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진실을 말하고 있을 따름이에요.』
사실 건넌방에서는 경숙이가 그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던 것이다.
『네 생각을 잘 알겠다.』
오랜 침묵 끝에 강교수가 비로소 말을 받아 왔다.
『네 생각을 잘 알지만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싶읍니다.』
옥영은 고개를 들었다.
『인간에게는 인류의사(人類意思)라는 것이 있다. 자기의 연장을 바라는 종족보지(種族保持)의 의사가 그 하나요, 인간의 번영을 바라는 문화보지(文化保持)의 의사가 그 둘이다. 그것은 인류의사인 동시에 우주의 의사요, 신의 의사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결혼은 목적이 아니고 인류의 수단인 셈이 되는 것이다. 마음의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금의 너에게 이러한 우원한 이야기가 보탬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생각의 키를 조금이라도 돌려야만 할 너에게 다소라도 도움이 되면 하고 말이다.』
『저 역시 제 마음의 키를 돌릴 수만 있다면 돌려 보고 싶읍니다.』
『그렇다면 좋아. 역시 너는 너 자신을 다룰 줄 아는 총명을 가진 사람이다.』
이 며느리의 똑똑함과 얌전함을 강교수 내외는 다시 한번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수단일진대, 오늘의 네 남편의 불미로운 행실에서 받는 네 마음의 타격을 다소라도 무마할 수 있을까 해서 하는 말인데…… 그러한 인류의사를 존중하여 너의 연장을 의미하는 아이들의 양육을 위하여 삶의 힘을 얻어야 하겠고 가정을 지킨다는 문화적 사명을 느껴야만 한다는 말이다.』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뜻을 알아들을 것 같읍니다.』
『고마운 말이야. 옛날부터 방탕한 남편을 지닌 뭇 아내들이 곧잘 고규를 지켜 왔지만, 그리고 요새 사람들은 그것을 오로지 봉건 사랑의 희생물처럼 여기고 아내들의 굴욕적인 노예 생활로서 간주하고 있지만…… 아니, 그것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는 바에 의하면 그렇게만 단정해 버리기에는 좀 더 숭고한 정신이 그들에게 깃들어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좀 더 커다란 인류의식, 좀 더 엄숙한 인간애의 사도(使徒)로서의 사명을 절실히 느끼고 자식과 가정을 지키는 데 엄숙한 긍지를 갖고 살아왔다고 믿고 싶다. 남편의 애정을 잃었다는 데서 오는 허무와 비굴의 감정보다도 가정을 지키고 어떤 생명들을 보호 양육하는 문화사적(文化史的)인 사명과 숭고한 모성애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극히 높이 평가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싶다는 말이다. 결국 그들은 인류의사의 실천자들이었다. 인생의 수단인 소아적인 결혼 의식을 지양(止揚)하고 그의 목적인 좀 더 커다란 대아적인 사명을 다해 온 것이다.』
거기서 강교수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현재의 네 다급한 감정으로서는 이런 말이 잘 들리지 않을런지 모르지만 네 마음의 키를 조금이라도 돌리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일 뿐이다.』
『아버님 말씀 감사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없지는 않아요.』
옥영은 방바닥을 손가락으로 빡빡 문지르면서,
『그렇지만 제가 그런 심경에 도달하기에는 많은 노력과 오랜 시일이 필요할 것 같아요. 또한 노력을 해서 그렇게 될런지도 의문이에요. 제 남편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안 되겠다 하면서도 결국은 영림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저 역시 아버님의 말씀이 지당하신 줄을 알면서도 결국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인간의 약점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이에요.』
『물론 노력을 해야지. 당장 되는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저는 그렇게까지 노력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버님은 인류의사니 신의 의사니 하는 말씀을 하셨지만 따지고 보면 저는 신을 생각하기 전에 인간을 생각하고 싶고 인류를 생각하기 전에 김옥영이라는 개인을 생각하고 싶을 따름이에요. 신이 있고 인류가 있었기 때문에 김옥영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김옥영이가 있었기 때문에 신이 있고 인류가 있는 거니까요.』
『어서 말을 해봐라.』
강교수는 점점 난처함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총명한 여성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마는 그 총명이 이러한 종류의 논거(論據)를 지니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강교수 내외였기 때문이다.
『당돌하다고 꾸지람하실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저는 아버님께 하나만 여쭙겠읍니다.』
『좋아.』
『아버님께서는 어머님과 결혼하실 때, 인류의사의 실천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셨는지, 그것이 알고 싶읍니다.』
『음………』
강교수는 불현 듯 옆에 앉은 부인을 바라보았다.
『아버님께서는 어머님을 사랑하시면서 결혼을 하셨다고 들었읍니다. 그러한 결혼에 있어서 아버님은 과연 어머님을 귀애하신 애정이 한낱 수단이었고 종족보지와 문화사적인 사명을 목적으로 의식하셨는지, 그것이 알고 싶읍니다. 이 말은 또한 어머니에게도 하는 물음이에요.』
『글쎄 나야 뭐 아느냐만…… 결혼을 하여 애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가지겠다고 생각하는 건 인정이 아니겠느냐?』
시모의 대답이었다.
『아냐요, 제가 드리는 말씀은 처음부터 애정 없는 결혼을 말하는 것이 아냐요. 어머님과 아버님의 경우나 또는 저희들의 경우처럼 애정을 토대로 하고 이루어진 결혼에서 말이에요. 이러한 애정 결혼에서 과연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룩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생각하시고 애정을 다만 그 수단으로서 의식하셨는지, 그 말이에요. 제 솔직한 경험을 말씀드리면 저는 남편의 애 정 그 자체가 목적이었어요. 그 애정의 결과로서 오는 결혼이라든가 출산이라든가 가정이라든가 하는 따위는 결코 목적이 아니었으니까요. 다만 그러한 결과로서 오는 결혼, 출산, 가정이라는 것이 남편의 애정을 독점하는 좋은 유대(有待)가 되고 울타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니까 그것을 구태여 거부하지 않고 허용했을 뿐이었어요.』
『음, 알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기의 대를 이어 나가고 싶어하는 본능적인 욕망이 잠재해 있는 것인데……』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생물에게 부여된 하나의 잠재의식일 뿐, 인간 의식 위에는 그것이 주목적으로 나타나 주지를 않는다는 말씀이에요. 제 생각이나 성품으로서는 더우기나 그래요.』
강교수는 마침내 대답을 잃고 말았다.
『모르기는 하지만 아버님과 어머님도 저희들과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다만 아버님께서는 어른 되신 입장에서나 전공하신 학문적 입장에서 가정의 평화와 인류의 친화를 위해서 인간의 감각을 신의 심리에 맞추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실까요……?』
강교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나는 네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강교수는 놀라는 시선을 며느리에게 조용히 던지며,
『오늘날 사십 대의 주부들이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네 어머니의 사십 대와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러기에 말이요. 내가 네 나이에는 생각도 못하던 소리다. 세상에는 도덕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서운 하늘도 있고……』
시모가 적지 않게 나무라는 소리였다.
『아냐요, 어머니. 저희들에게도 도덕은 있어요. 남만 못지않은 모성애도 있구요. 다만 저희들은 그 도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알고 싶을 따름이에요. 옛날 사람들은 모성애만으로서 가정을 지켜 왔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도 그럴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말(本末)이 전도된 삶이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씀이에요. 남편의 애정을 잃 었으니까 하는 수 없이 모성애라도 붙들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아내들의 참된 삶의 자태라든가 숭고한 인간애의 발로이기 때문에 자진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니지요.』
『어쩌면 요즈음 애들은?』
시모의 나무람은 점점 더 커갔다.
『어머님께 실망만 드려서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한 사람의 아내로서의 제 생각을 솔직히 말씀 드려 아버님의 충고와 고견을 듣고 싶을 따름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좋다, 솔직히 말해 다오. 내가 듣겠다.』
오늘 밤으로 집을 나가야만 한다는 옥영의 결심은 조금도 풀릴 줄을 몰랐다. 옥영이가 지금 시부인, 강교수에게 한 사람의 아내로서의 심경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데는 숨은 이유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슬픈 감정에서 나오는 넋두리가 아니고 집을 나가지 않아도 좋을만한 무슨 신통한 교훈의 말이라든가 또는 자기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논리의 모순 같은 것을 지적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구태여 집을 나가지 않아도 좋았다. 문제는 집을 나가지 않고도 이 굴욕적인 감정과 상처받은 인격이 무마되고 보상된다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옥영은 다시 말했다.
『모성애는 위대할런지 모르지만 뭇 아내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부부애라고 제게는 생각되어요. 부부애를 상실한 아내들이 모성애의 위대하고 숭고함을 떠메고 나오는 것은 일종의 허세일 거예요. 그렇게라도 해야만 자세가 서니까요. 뿐만 아니라, 남성들이 소리를 높여 가면서 여성들의 모성애를 극구 찬미하고들 있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아내들을 일종의 보모로서 가정에 동여매 두고 싶은 생각에서 억지로 떠맡긴 대의명분에서 지나지 못하지요. 아내들은 또 아내들로서 그러한 대의명분이라도 떠메고 나서야만 체면이나 자세도 설뿐더러 고규를 지킴으로써 경제적 무능으로 말미암은 생활난을 모면할 수가 있기 때문이에요. 경제적 자립을 피할 수 있는 사람 치고 남편의 방탕을 눈감아가며 위대하다는 모성애만으로써 가정을 지키는 데 만족해할 아내가 있을 것 같지는 정녕 않아요.』
시모는 또 새침한 표정으로 며느리를 바라보았고, 시부는 덤덤히 앉아서 며느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남자들에게는 가정생활 이외에 사업이라는 게 있다지만 여자들에게는 가정생활 그것이 인생의 전부에요. 제 남편은 여자들의 그러한 입장을 잘 이해하고 가정이 곧 낙원이라고까지 말하며 충실한 결혼 생활을 쭉 계속해 온 사람이지요.』
『그렇고 말고. 그 애가 어쩌다가 이번에 한 번 걸려들었지, 내 아들이라고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죽 신통했느냐! 그러니까 애 어미도 좀 너그럽게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남자들이란 모두 그렇다는데……』
시모의 말이 이번에는 애원조로 나왔다.
『참, 아버님. 한 가지 진심으로 여쭈워 볼 말씀이 있읍니다.』
옥영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냐, 어서 말을 하렴.』
시부는 고개를 들면서 대답했다.
『이제 어머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제 남편이 본시부터 헤실픈 사람이었다면 모르지만 그만큼 자각이 있고 굳건하고 이해심이 풍부한 사람이 이번 일을 저지른 데는 무슨…… 저희들 여성이 엿볼 수 없는 무슨 뿌리 깊은 이유 같은 것이 꼭 있을 것만 같아요. 이제 어머님도 말씀하셨지만 남자란 모두가 다 그런가요……?』
옥영은 빤히 고개를 들었다.
『모두라고?』
강교수는 얼른 외면을 했다. 며느리의 시선을 근엄한 강교수로서는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저희들은 연애결혼이었읍니다. 그이는 저를 아내로서 귀여워했을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대해 주었고 참답게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로서 대하여 주었읍니다. 어느 모로 따져 보나 빈틈이 없는 가정이었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이는 마침내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저로서 는 도저히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에요. 그것이 제게 대한 애정의 결핍에서 오는 것인지, 또는 그 밖의 무슨 다른 이유에서 오는 것인지, 어머님의 말씀대로 남자란 다 그렇다는 데서 오는 것인지……? 아버님, 제게 진실을 알리켜 주세요.』
강교수는 힘이 들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며느리에게서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일이기에 과거 대학 총장까지를 거쳐 온 윤리학 대가인 이 늙은 교육자는 다만 며느리의 입으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된 시대의 변천만을 뼈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추종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아니, 인간의 이성이다. 이성은 오로지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보배로운 재산이다. 인간이 이 보배로운 재산을 포기할 때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초극하고 있어야만 하는 그 어떤 상태를 목표 삼아 노력하며 걸어나가는 데 인간의 이상은 있는 것이다.』
명확한 대답을 피하고 강교수는 그렇게 말하여 완곡한 답변을 꾀하고 있었다.
『그러면 아버님, 있어야만 하는 그 어떤 상태를 목표 삼아 걸어나가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읍니까? 현재를 모르고 장래를 무턱대고 꿈꾸기는 싫읍니다. 남편을 모시고 일생, 이생, 삼생을 살아도 겨웁지 않을 제 욕망인데 남편은 겨우 십팔 년간을 한도로 이 가정을 버렸읍니다. 왜 그럴까요? 역시 제게 대해서 싫증을 느낀 탓이 아닐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다. 네 남편은 너를 가리켜 일생에 단 하나뿐인 여성이요. 친구요 동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저를 버리고 딴 여자에게로 갔을까요?』
『사랑이란 가다가 마음이 비이는 순간이 있는데 그러한 순간이 나쁜 환경과 우연히 겹쳐질 때, 자칫하면 후회를 가져올 행동을 저지를 수도 없지 않아 있는 건데…… 모르긴 하지만 아마도 그런 종류의 탈선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돌한 말씀이지만 아버님도 과거에 그러한 순간을 느낀 적이 계신가요?』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강교수는 다소 무안한 듯이 마누라를 힐끗 바라보고 나서,
『그러나 그러한 순간은 인간의 노력으로써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옥영은 머리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제 친구의 남편 한 분이 어떤 연회 석상에서 돌아왔을 때, 친구인 그 아내는 적지 않게 불안한 마음으로 그 연회 석상에 와 있던 젊은 기생들을 걱정하는 말을 했었다고요. 그랬더니 그 남편이 하는 말이, 당신은 무슨 그런 걱정을 하느냐고, 자기의 눈에는 그 기생들이 마치 요릿상에 놓인 술 도꾸리와도 같은 하나의 무생물로 밖에는 비치지 않았다고 하면서 아내의 신경 과민을 일소에 붙이더라는 말을 저에게 한 적이 있어요. 이런 말을 저희들 아내는 어떻게 들어야만 하는가요……?』
『남의 일은 내가 알 수 없고……』
『남의 일이 아니에요. 인간인 남성들의 일입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는 그 인간을 연구하시는 철학자이신데……』
강교수는 정말 딱했다. 며느리와 한 자리에서 남성들의 쎅스를 토론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이 거북스런 입장이 숨 막힐 것 같이 괴로왔다.
『나의 전공은 실천철학인 윤리학이다. 마음의 풍경보다도 행동에 치중하고 있는 건데… 다시 말하면 마음의 소재(所在)를 인류 의사에 맞도록 초극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곧 내 학문에 주목적인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모든 문화는 지리멸렬, 있는 것은 다만 질서와 균형을 상실한 양육강식의 정글 시대일 것이요, 본능적인 에고(自我)만이 중뿔나게 날뛰는 암흑시대로 변했을 것이다.』
『아버님 말씀 잘 알겠어요. 그렇지만 현재의 제 관심은 인간의 행동이 아니고 마음의 풍경이에요. 인류의 문화가 지리멸렬이 되건 약육강식의 암흑시대가 오건, 저는 지금 제 남편의 마음의 움직임을 알고 싶었을 따름이예요. 그리고 인제 그것을 알았어요. 젊은 기생들을 도꾸리 병쯤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제 친구 남편의 말이 진실과는 얼마나 동떨어진 말인지도 알았고 동시에 아내의 마음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한 지극한 사랑의 말인 줄도 알았어요. 그렇지만……』
옥영의 표정이 일순간 허탈한 사람처럼 몽롱해졌다.
고영림이라는 한 젊은 여성에게 남편을 빼앗겼다는 데서 오는 허무보다도 좀 더 뿌리 깊은 인류적이요, 우주적인 커다란 허무감 앞에 한 사람의 성실한 아내 김옥영 여사는 우뚝 서 있었다.
강석운 대 김옥영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편 대 아내의 문제요, 남성 대 여성의 문제였다.
결혼 생활의 허무, 따라서 뭇 여성들의 불행한 운명을 옥영은 생각했다.
한 사람의 남편을 위하여 일생을 바칠 수 있는 여성들의 애정의 자세와 한 사람의 아내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는데 노력을 필요로 하는 남성들의 애정의 자세를 옥영은 생각했다.
남녀의 이 운명적인 영원한 비극 앞에 김옥영 여사는 삶의 희망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아버님,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편이 도리어 행복했었읍니다. 안다는 건 불행한 일이지요. 세상의 모든 아내는 부처님이라고 부처님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데 아내들은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는, 어떤 외국 작품을 읽은 적이 있지만 그때도 저는 제 남편만을 믿고 있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버님을 새삼스레 존경하고 싶읍니다.』
『어쨌든 네 남편을 빨리 만나야겠는데……』
『만나셨댓자 소용이 없을 거예요. 또 만나지도 못하실 거구요. 아까 신문사 송기자가 와서 하는 말이, 남대문 밖 태양 호텔에 있었다는데 송기자에게 들킨 줄을 알고는 호텔을 곧 뜬다니까요.』
『남대문 밖 태양 호텔?』
강교수는 훌쩍 일어서며,
『여보, 당신도 같이 갑시다.』
『호텔이 어딘지……』
『남대문 밖에 가서 찾으면 알 수 있오. 신문사로 가서 송기자를 데리고 가도 좋고……』
강교수 내외는 창황한 걸음으로 방을 나서며 옥영을 향하여,
『내 어떡하든 데리고 올 테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해야 한다.』
옥영은 따라 나가서 현관까지 늙은 시부모를 전송했다.
그리고는 곧 되돌아와서 아까 쓰던 편지를 다시금 끄집어내서 펜을 들었다.
식모는 부엌에서 저녁 불을 때고 있었고 아이들은 건넌방에서 짹 소리도 없었다.
아들을 찾아 남대문 밖을 한 시간이나 헤매다가 태양 호텔을 발견한 것은 아홉 시가 넘었을 때였다.
그러나 석운과 영림은 아까 낯에 벌써 호텔을 나갔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떴는지는 물론 알 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강교수 내외가 혜화동으로 피곤한 몸을 택시에 싣고 돌아온 것은 열 시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런데 저녁 후 외출했다는 며느리 옥영은 그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의 말을 들으면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잠깐 저자를 보아 가지고 온다던 어머니였다고 하면서 모두들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박두해 옴을 따라 강교수 내외도 차차 불안해졌다. 강교수는 무슨 생각이 불쑥 들어 이 층 서재로 올라갔다. 책상 위에는 없었다.
서랍을 열었다.
『아, 역시……』
낯익은 며느리의 글씨로 봉투 둘이 들어 있었다. 하나는 남편에게, 하나는 강교수와 경숙에게 한 편지였다. 강교수는 부리나케 봉투 둘을 한꺼번에 찢었다.
《남편이였던 당신에게.
당신을 만나기가 무섭고 싫어서 나는 당분간 마음의 키를 돌릴 수 있을 때까지 당신의 옆을 떠납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마음의 자세를 잡아야만 이 가정에 물러 있을 수가 있을 것 같고 또한 네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질 수도 있을 것 같기에 이런 행동을 마침내 취하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그때가 뜻밖으로 속히 올런지, 또는 영원히 오지 않을런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읍니다.
현재에 있어서 나의 심정을 솔직히 말하면, 남편에게 버림을 받는 한 사람의 아내로서의 비애와 허무의 감정을 견디어 낼 기력이 없는 동시에 그보다 못지않은 정도로 허무의 열매밖에 가져올 수 없는 전체 여성들의 서글픈 숙명적 애정의 자세 앞에서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읍니다.
내가 지금 눈물을 거두고 이만큼이라도 조용한 심경을 가질 수 있게끔 된 것을 자기 스스로 감사히 생각합니다.
당신의 아내였던 여인》
《아버님과 어머님 앞에.
불효 소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소부의 심경은 새삼 다시 말씀드리지 않아도 헤아리실 줄 아오며 경솔하다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행동을 감히 취함에 있어서 다만 아버님과 어머님을 믿사옵니다.
네 아이의 어머니보다 한 사람의 남편을 좀 더 소중히 여기고 살아온 소부이오나 앞으로 네 아이의 어머니로서만도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이루어지기를 노력해 보겠읍니다.
오십만 환의 예금 통장의 소재는 경숙이가 알고 있읍니다.
불효 소부 상서》
《경숙이 보아라.
이런 경우에 있어서 너희들이 원할 수 있는 어머니가 끝끝내 되어 주지 못 하고 완전히 힘을 잃어버리고만 이 미련한 어머니를 나무라 달라는 한 마디밖에 더 남길 말이 없는 것을 슬퍼한다. 동생들과 함께 할아버님과 할머님의 말씀 잘 순종하기 바란다.
미련한 어머니》
편지를 움켜쥔 강교수의 손길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즈음 어두운 광야를 남쪽으로 달리는 경부선 열차 이등 객실 속에서 강석운과 고영림의 애욕의 도피행은 계속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