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실락원의 별 2

人生問答[인생문답]

 

아내를 소중히 하자!

다동 골목으로 접어들어 가면서 강석운은 누차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 사나이를 그렇게도 끈기 있게 소중히 여겨 주는 것이 세상의 아내들이었다. 그러한 아내를 일시나마 의심하고 온갖 망상을 다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한 생각이 좀처럼 가시지가 않는다.

선뜻은 하지마는 현실적인 발판이 깊숙히 뿌리 박혀있지 못하기 때문에 애인들의 애정에는 끈기가 없다. 분위기나 감정이 조금만 비뚤어지면 순간적으로 남남이 되고 만다. 시간적인 역사와 현실적인 뿌리가 희박하여 소위 미운 정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내란 소중한 존재야!

오늘의 이러한 성실한 감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강석운은 야쓰데화분을 갖고 돌아서서 아내에게 선물을 하리라고 생각하며 여학생과 약속한 다방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하고 정중한 인사를 했다.

괜찮소.

석운은 여학생과 마주 앉았다.

선생님, 시장하실 텐데 위로 올라가셔서 무얼 좀 잡수셔야지요.

그럴까요?

사실 석운은 시장했다. 북경루에서는 맥주 반 잔으로 얼버무려 버린 석운이었다.

둘이는 이층 그릴로 올라가서 들창 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선생님, 치킨 좋아하세요?

좋아하지요.

학생은 보이에게 치킨이 섞인 정식과 맥주를 가져오라고 하고

오이스터 프라이 한 접시만 더 가져오세요.

했다. 그리고 나서 석운을 바라보며 방그레 웃었다.

허어, 학생은 오이스터 프라이(굴 프라이)를 좋아하는군.

아냐요. 선생님이 좋아하신다기에 청했어요.

어떤 짤막한 글에서 안주에는 오이스터 프라이가 제일이라는 말을 석운은 쓴 적이 있다.

별것을 다 기억하고 있군.

그것뿐이 아냐요.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는 전부 알고 있는 걸요.

허어, 그래요?

선생님이 모르고 계시는 이야기까지……』

조심해야겠는 걸. 학생으로만 알았더니 흥신소 여사무원인지도 몰라.

후훗……』

학생은 쿡쿡 웃었다. 그 웃음에서 석운은 또 옥영의 모습 한 조각을 불현듯 주웠다.

석운은 웃으며

인제 그만 했으면 신분이나 좀 밝혀 보겠지. 흥신소 사원과는 마음 놓고 식사를 할 수가 없으니까……』

참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었군요.

학생은 거기서 정색을 하고 속 주머니에서 학생증을 꺼내 놓으며

저 이런 사람이에요.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 이번에는 학생 편에서 나를 경찰관으로 취급을 하는 모양인데……』

아냐요. 가짜 학생도 있을 법하구요, 또 이제부터 선생님의 솔직한 말씀을 듣기 위해서도 필요한 에티케트이에요

다소 불유쾌하지만 보라니까 볼 수밖에……』

웃는 얼굴을 지으며 석운은 학생증을 들여다보았다.

M 대학 영문과 사 년생 고영림…… 흥신소 사원은 아니로군!

석운은 유쾌한 표정으로 도로 학생증을 돌려주다가

고영림…… 고영림…… , 저 칸나?

생각나셔요?

방글방글 웃으며 영림은 빤히 석운을 바라보았다.

생각납니다. 좋은 글이었오.

되지도 않은 글을 보아 주십사구…… 죄송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는데 식사가 왔다.

그것이 칸나의 의욕의 필자 고영림이라고 생각하면 아까 아침 혜화동 로타리에서 견지동까지 같이 타고 오는 동안에 바꾼 대화의 특이성이 가히 이해가 되었다.

벌써 한 번 찾아가 뵙는다면서도…… 선생님, 예를 갖추지 못했어요, 용서하세요.

시장하던 참이라 석운의 식욕은 대단히 왕성했다. 영림도 똑같이 왕성했다.

오이스터 프라이, 많이 잡수세요. 모자라면 또 가져오겠어요.

학생은 나를 황소로 아는군.

그래서 두 사람은 유쾌히 웃었다.

, 차장의 뺨을 갈긴 것이 칸나였었군. 하하…… 유쾌하던데!

여자답지 못하다고, 선생님 속으로는 무척 흉보실 거에요.

나도 이제부터는 가끔 완력을 써야겠는 걸.

왜요?

옳게만 사용하면 완력에는 미가 있으니까……』

그러면 영림은 두 손으로 맥주병을 공손히 들고 한 잔을 따라 주며

술을 제 손으로 따라 마시면 맛이 안 난다죠?

학생이 그런 건 다 어디서 배웠오?

대학에서요.

?

사회 대학에서 말이에요.

석운은 문득 칸나의 의욕의 한 구절을 생각했다. 사회인들의 분별은 좋았으나 그것은 모두가 세속의 누룩으로 말미암아 발효해 버린 술찌꺼기 같은 그것이었다.

참 요즈음 학생들은 맥주쯤은 마실 줄 안다면서?

혼자 마시기도 거북하고 해서 그런 말로 석운은 권해보았다.

다른 학생들은 어쩐지 모르지만 저는 먹음 먹어요. 한두 병쯤은 문제없어요.

허어?

석운은 약간 놀랐다.

선생님의 그 허어에는 불량 학생이라는 의미가 팔십 퍼센트쯤은 내포되어 있을 거에요. 그렇지만 먹어도 별반 괴롭지 않고 기분이 유쾌해진다는 체질적인 조건을 저는 지금 설명해 드리고 있는 것뿐이에요.

허어?……』

석운은 마침내 포크를 멈추었다.

그러니까 이번 허어에서는 선생님의 퍼센테이지를 좀 달리해 주셨음 좋겠어요.

마주 보면서 영림은 곱게 웃었다.

다소 달라졌오. 성실성이 팔십 퍼센트, 불량성이 이십 퍼센트…… 이것은 칸나의 의욕에서 느낀 것과 비슷한 불량이요.

선생님, 무척 기뻐요! 저를 그처럼 알아주시니 말이에요. 아무리 저 자신을 호의적으로 생각해도 이십 퍼센트의 불량성은 확실히 있는 것만 같아요.

그만하면 대단히 우수한 성적이요.

그럴까요?

그렇다고 나는 보지요. 오십 퍼센트의 성실성과 오십 퍼센트의 불량성…… 이것이 대다수라고 나는 보아요.

그렇담 이런 결론이 되겠군요. 작가 강석운 선생이 제아무리 성실하다고 해도 이십 퍼센트의 불량성은 확실히 갖고 있다고 단정을 하고, 인제부터 칸나는 선생님을 모시기로 하겠어요. 무방하시죠? 항의 같은 건 없으시죠?

시종여일하게 방긋방긋 웃는 낯으로 고영림은 이론의 전개를 꾀하고 있었다.

곤란한 학생인 걸!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그 선생님을 시험해 보려는 학생, 언지를 잡아서 뒷날의 증거로 삼으려는 학생임이 분명한데……』

선생님은 지금 대답을 회피하고 계시지만 구태여 대답을 듣지 않아도 결론은 이미 나왔으니까, 그렇게 믿고 제가 이야기를 좀 하겠어요.

대체 무슨 이야긴데……?

이십 퍼센트의 불량성이면 충분한 이야기에요.

?

석운은 덤덤히 영림을 바라보았다.

강석운은 고영림의 솔직 무구(無垢)하면서도 무척 재미있는 논리 전개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차차 심금이 건드려지기 시작하였다. 영림의 논리는 항상 미소의 부드러움으로 감싸져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똑딱하지가 않아 보였다.

영림의 이러한 미소 전술은 순전히 올케를 위해서였다. 만일 올케의 문제가 없이 강석운 대 고영림의 경우라면 필요 이상의 미소 전술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뭏든 사람이 백 퍼센트로 성실하기가 어렵다는 인간성의 약점을 강석운이 자기가 입으로 직접 인정하였다는 사실은 우선 고영림에게 있어서 성공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써는 노력하는 강석운의 행동을 좌우하기는 또한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서 좀 더 책임 있는 말을 강석운의 입을 통하여 직접 들어야만 하였다.

그런 것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무슨 이야긴지는 모르지만 천천히 듣기로 하고 우선 권해도 좋다면 한 잔 권하겠오.

석운의 입장에서 보면 먹을 줄 안다는데 안 권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에 영림은 치킨을 뜯던 손을 멈추고 석운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여전히 미소 띤 표정으로 말하였다.

선생님, 그건 서양식 예의에요.

뭐가?

선생님이 권하고 싶으심 권하는 것이지, 제 의향을 물으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석운은 웃었다.

일일이 상대편의 의향을 물어보고 행동하는 것이 문화 민족의 예의런지는 모르지만 저는 별로 좋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언제나 그렇지만 석운은 말을 듣는 편이고 말을 하는 편이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칸나의 의욕의 필자이고 보면 더 많은 말을 듣기 위해서도 자기의 의견을 먼저 내세워서는 아니 되었다.

거기에는 이해성은 있지만 지극한 정성은 없어요. 식욕이 없는데도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자꾸만 권하지요. 얼핏 생각하면 야만인 같아서 경멸하고 싶지만 그 지극한 정성에는 눈물겨운 데가 있다고 보아요.

학생이야말로 이해성이 풍부하군요.

선생님도 제 말에 동감이시죠?

동감입니다.

석운은 유쾌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선생님이 동감해 주신다니 정말 기뻐요! 그럼 됐어요!

되다니…… 뭐가 됐다는 말이요?

인간의 지극한 정성을 알아주실 수 있는 선생님이란 것을 발견하고 저는 무척 기뻐요.

무슨 영문인지, 도시 모르겠는걸. 학생의 태도는 나를 일일이 테스트 (試驗[시험])하는 것만 같아.

후훗……』

포크를 든 손으로 영림은 입을 가리웠다.

자아, 이왕 먹을 줄 아는 술이라니까 한 잔 들어요.

먹을 줄 몰라도 권하고 싶음 권하는 거에요. 선생님은 암만해도 지나치게 점잖으세요. 신사이기는 하지만요.

이거 말마다 탓하고 보니 큰일인걸

호호호…… 그렇지만 오늘은 사람의 눈도 있고 해서 그만두겠어요. 다음 날, 선생님을 또 뵙게 되는 자리에서 먹겠어요. 제 의향과 능력을 묻지 마시고…… 선생님이 진심으로 한 잔 권하고 싶으실 때…… 그때는 독약이라도 마실런지 모르죠.

이야기는 무섭게 비약을 했다. 석운은 대꾸를 잃은 채 물끄러미 학생의 얼굴을 바라보며 들었던 맥주병을 자기 잔에 따랐다.

아까 견지동 출판사 앞에서 내릴 때 느낀 동요보다 좀 더 강렬한 정신적 흔들림이 석운에게 왔다. 편지를 받았을 때까지 합치면 세 번째의 흔들림이었다.

선생님, 오늘 제가 선생님을 뵙고자 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용건만 이야기하겠어요. 어떤 젊은 여자의 생명에 관한 중대한 인생 문답이에요.

, 무슨 그런 케이스가 생겼오?

인제 선생님이 동감에 주신 두 가지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에요.

두 가지 문제?

선생님, 벌써 잊어먹음 어떡하세요? 식욕이 없더라도 지극한 정성을 가진 상대편의 권이람 한두 숟갈 뜨는 것이 한국 사람의 인정이라는 이야기와 또 아무리 성실한 사람이라도 이십 퍼센트의 불량성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와…… 이 두 가지 이야기에 선생님이 동감해 주시지 않으셨어요?

, 그래서?

어쨌든 동감하셨죠?

그래 동감은 했오.

그럼 됐어요! 이제 이야기 하겠어요.

영림은 적이 안심을 하는 표정이 되며

이런 경우에는 선생님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 친구인 어떤 여자가 어렸을 때 어떤 청년 한 사람을 사모했어요. 그때 여자는 열네다섯의 소녀였고 남자는 스물네다섯의 청년이었지요. 청년은 여자를 나이 어린 소녀로만 믿고 어린애 취급을 했는데 여자는 소녀다운 심정으로 청년을 몹시 그리워했었지요. 나이 어린 소녀의 몸이라 마음속을 이야기할 수는 도저히 없고 그러다가 두 사람은 영영 헤어져 버리고 말았어요. 그 소녀야말로 먹음 죽을 줄 아는 독약이라도 그 청년이 먹으람 눈을 딱 감고 먹었을는지 몰라요.

석운은 불현듯 영림을 쳐다보았다. 독약이라도 마실런지 모른다는 이야기는 아까 영림 자신이 입에 담은 한 마디였기 때문이다.

거기서 영림은 강석운에 대한 한혜련의 사모의 정을 추상적으로 쭉 이야기를 하고 그때의 그 청년이 지금은 세상이 다 아는 이름 있는 국회의원이라고 했다.

선생님의 의견을 들어가지고 저는 그 국회의원을 찾아갈 결심이에요.

찾아가서는?

죽기 전에 한 번만 만나 주라고요.

책임 문제는 아니니까……』

그건 저도 알고 그 여자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 동무인 그 여자도 국회의원을 찾아가 보겠다는 저를 굳이 만류하면서, 정말 제가 찾아간다면 혀를 깨물던가 독약을 먹고 죽어버리겠다는 거에요.

.

강석운은 그 비연의 여주인공에 대하여 동정의 염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참 미인이에요. 뭐라고 할까? 요즈음 유행하는 저희들의 말을 빌면 생김 생김이라든가 몸 매무새가 그거야 말로 날씬하지요. 보슬비에 젖은 해당화도 좋고 배꽃도 좋지만 그런 따위는 비교도 안 되리만큼 예뻐요. 동성인 저까지도 꼭 안아 주고 싶도록……』

석운은 웃었다.

정말이에요. 선생님! 안으면 꺼질 것같이 보드랍고도 가련한 여인! 조금만 건드리면 톡 하고 떨어져 버리는 양귀비꽃, 조그만 누르면 터져 버리는 슈우크림의 말랑말랑한 체질을 지닌 포류의 여인이에요.

굉장한 찬미인걸! S 언니가 아닌가?

한 번만 만나 주면 병이 날런지도 몰라요. 자비스런 의사가 된 셈치고 한 번만 만나 달람 안 만나 줄까요?

그건 사람 나름에 달렸겠지만……』

선생님 같으심 어떡하시겠어요? 물론 선생님은 예술가니까 만나주시겠지만요. 감격성과 이해성이 다 함께 풍부하실 테고 또 예술가적 로맨티시즘을 살리기 위해서도 만난주시겠지만 저 편은 소위 예술을 모르는 정치가고 또 어딘가 도학자적인 데가 있는 사람이니까 어려울 것 같기도 해요.

곤란한 문젠 걸!

식사는 디저트 코스에 들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곤란한 인생 문답을 나에게 제시한 건 학생이 처음이요.

과일을 깎으면서 석운은 말했다.

그래요?

학생은 내가 예술가니까 쉽사리 만나 줄 것으로 믿는 모양이지만 예술가에 대한 학생의 인식이 너무 낡아요. 오늘의 예술가는 십구 세기적인 서정(抒情) 제일주의로서는 도저히 감당해 나가지 못하리만큼 지성의 요청을 받고 있어요. 인텔리전스(知性[지성])란 지적인 존재 이유의 구명을 말하는 것이니까 동정이라든가 하는 감정이 행동화되려면 반드시 인텔리전스와의 민주주의적 타협이 성립되어야만 하지요. 감정의 미가 때로는 이성의 추로 변하는 것은 그러한 타협이 성립되어야만 하지요. 감정의 미가 때로는 이성의 추로 변하는 것은 그러한 타협이 없이 감정이 독선적(獨善的)으로 발동하기 때문이요.

영림이가 결코 그것을 모르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강석운으로 하여금 십구 세기적 예술가로 밀어 버림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뿐이다. 그래서 동감한다는 말을 억제하고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온갖 독재주의가 그러하듯이 감정의 독재주의도 결국에 가서는 행동의 파탄을 일으키고야 말지요. 나도 그 여인의 가련한 운명에는 만감의 동정을 가집니다. 될 수만 있으면 어떻게 손을 뻗쳐 주고 싶어요. 그러나 손을 뻗칠 수 없는 것이 그 국회의원의 현실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국회의원이 나와 똑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면 우선 국회의원의 부인을 방문하여 납득시켜야 할 것이에요. 그 길 이외에 사건을 처리할 방도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요.

영림은 물끄러미 석운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기의 생각과 틀림이 없다.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의 성실성이 영림의 가슴에 뭉클하고 왔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인간 강석운의 성실성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림은 이전처럼 그러한 강석운을 찬양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 성실성을 자기의 것으로서 차지할 수 없는 일종의 질투와 초조감을 영림은 불현 듯 느꼈다.

선생님은 대단히 냉정하셔요.

했다.

결론을 너무 빨리 지우니까 일편 냉정하게 보이는 것이지요. 그 슈우크 림과도 같은 말랑말랑한 여인을 동정하는 대목에서 내가 오랫동안 어물어물 답보만 하다가 한 서너 시간 후에 이상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면 학생은 아마 나를 무척 다사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했을 거요.

그 말에 영림은 손뼉을 치고 표정을 크게 쓰면서 외쳤다.

으와! 선생님, 굉장한 심리학자시네요!

석운도 놀랐지마는 주위에 앉았던 손님들이 모두 이편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학생은 그런 대목에서 이처럼 감격할 줄을 안다는 것은 실로 좋은 소질의 소유자라고 석운은 반대로 감심을 하며

남의 이야기에 대한 동정심은 그리 오래 가지를 못하는 거요. 학생은 그것을 내가 냉정한 탓으로 돌리지만 그건 내가 제삼자이기 때문에 생기는 냉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거요.

알아듣겠어요. 선생님 말씀 참 재미있어요. 지성적이에요.

, 재미있지요.

석운은 웃었다.

그럼 선생님이 만일 그 국회의원의 입장에 서셨담 좀 더 오랫동안 동정을 하실 거 아냐요. 따라서 결론도 그처럼 냉정하지가 않으실 거구요.

아마 그렇겠지요.

선생님 바쁘시지 않으심 거리를 좀 걸으실까요.

이야기는 이제 끝났오?

아직 조금 더 있어요. 여기는 답답해서 걸으면서 이야기하겠어요.

석운이가 계산을 치르려는 것을 영림은 굳이 막으며

학생이라고 얕잡아 보심 싫어요.

학생이 웬 돈이 있을까?

양공주 노릇은 안 하니까 선생님 과히 걱정마세요.

층계를 내려오면서 석운은 이 학생의 인품을 마음속으로 채점(採點)하여 보았다. 판정(判定)은 단연 A급이었다.

저녁 무렵, 을지로 네거리는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빌딩 유리창에 놀이 탄다.

선생님과 이렇게 같이 한 번 걸어 보았음 하는 생각, 어렸을 적부터 가끔 해 봤어요.

둘이는 거리로 나서서 남대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렸을 적이라고, 언제부터?

제가 칸나를 좋아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러니까 여학교 시절부터죠.

『…………』

대답을 하면 싱거운 소리 밖에 튀어나올 것 같지가 않아서 석운은 잠자코 있었다. 그러냐고 하기도 김빠진 소리요 고맙다는 대꾸는 더구나 싱겁다.

그저 이처럼 젊은 여성과 나란히 서서 걷는 것 그 자체가 유쾌할 뿐이었다. 상실했던 청춘을 다시 찾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오늘만이 아니다. 이전에도 그러했었다.

참 오늘은 제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닌데……』

영림은 후딱 그것을 생각하고 말머리를 다시 돌렸다.

제 이야기는 후일 다시 뵈일 때 하기로 하고…… 선생님 봉선화 좋아하세요?

봉선화?…… 좋아하지요.

봉선화의 전설두 좋아하시구……』

그럼요.

미스 헬렌도 좋아하셨죠?

미스 헬렌? 누군데요?

한혜련, 생각 안 나세요?

한혜련…… 모르겠는 걸.

지금으로부터 십구 년 전…… 선생님이 사모님과 달콤해 계실 때…… W 대학의 사각모를 쓰고…… 원산 송도원 해수욕장에서…… 그래도 모르셔요?

모르겠는데…… 그런 일이 있기는 있었지만……』

큰일 났네요!

뭐가 큰일이야?

백사장에 아로새긴 헬렌 한과 돌구름의 이야기……』

, 아 그때의 그 조그만 소녀?

석운의 기억은 비로소 희미하게 소생하기 시작했다.

소녀야 다 조그맣지만…… 그렇지만 마음은 조그맣지가 않았답니다.

참 그 소녀에게 봉선화의 전설을 이야기해 준 생각이 나오. 얼굴이 희고 귀엽다고 생각했던 소녀가 분명히 있었오.

새끼손가락 둘에 봉선화 물을 들여 주셨지요. 그 소녀가 지금은 서른둘, 돌구름 강석운의 환영을 십구 년 동안 안고 살다가 지금은 오늘 내일 하는 목숨이지요.

아아……』

석운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선생님 걸으면서 이야기해요.

둘이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한혜련이가 바로 제 올케에요.

올케?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선생님의 애독자지요. 겨울철 석 달을 남겨 놓고는 십구 년 동안은 새끼손가락에 봉선화 물을 들여온 여인…… 모습처럼 고운 마음씨의 여인…… 반생을 두고 돌구름만을 생각하다가 병에 쓰러진 여인……』

아아, 무슨 말인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소!

석운은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저는 선생님의 인간성을 굳게 믿고 왔어요. 미스 헬렌의 이러한 비극을 선생님은 못 본체하지는 않으실 거에요.

미스 헬렌…… 그 소녀는 이름을 영어로 모래밭에 썼었오!

선생님이 그때 이야기해 주신 봉선화의 전설처럼…… 거문고를 타던 봉 선화의 운명처럼.

불행히도 거문고는 피리 소리보다 높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비극…… 학녀를 임금님 옆에 바라보는 순간 봉선이는 죽었지요!

『…………』

그렇지만 한혜련은 아직 살아 있어요. 죽은 후에 꽃다발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는 것보다는 죽기 전에 돌구름의 모습 한 번 보여 주신담 좋은 약이 될 거에요. 생명수가 될 거에요.

『…………』

진고개 입구로 해서 퇴계로 넓은 길로 둘이는 접어 들어갔다.

영림은 올케와 오빠의 관계를 비롯하여 우수부인 한혜련의 불행한 과거를 상세히 이야기하였다.

그동안 석운은 쭈욱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까지 강석운이가 부딪친 인생 문답 중에서 곤란한 문제를 이번에는 몸소 실천해야만 하는 딱한 단계를 이르러 버린 것이다.

학생이 조금이라도 나를 생각한다면 왜 이런 딱한 문제를 가지고 오는 거요?

얼마 만에 석운은 무겁게 입을 뗐다.

선생님이 무척 곤란해하실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언니의 삶이 하두 딱해서.

학생!

?

솔직하게 대답하겠오. 내 솔직한 대답을 학생이 지닌 총명으로 잘 처리해주시오.

알아듣겠어요. 결국 국회의원의 부인을 찾아가서 승낙을 얻으라는 것이죠?

그처럼 너무 빨리 결론을 내려 버리면 아까처럼 냉정하다는 비난을 받을 것 같아서 얼맛동안 여기서 답보를 하겠오.

두 사람은 마주 쳐다보며 조용히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 심경으로는 무턱대고 그 여인을 만나 보고 싶소. 그처럼 오랜 시일을 두고 나를 생각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념도 있고, 또 그 서양 애들처럼 귀엽던 소녀가 지금에 와서는 어떻게나 변했는지, 거기 대한 호기심도 지극히 왕성하오.

그러나 내게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오!. 다음 말씀은 그거죠?

석운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학생, 결론이 너무 빠르오.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자기를 사모해 주었다는 한혜련에게 보다는 석운은 이 학생에게 좀 더 호기심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내 아내를 사랑한다든가 안 한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고,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내와 남편의 사회적 지위라는 말이요.

무슨 말씀이신데요?

내가 그 여인을 만나러 간다면 내 아내가 좋아할 것 같소, 싫어할 것 같소?

선생님이 무슨 딴생각이 있어서 가시는 것도 아니고…… 그거야말로 한 사람의 의사로서 잠깐 다녀오는 것이 무어가 그처럼 싫을까요?

학생은 아직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무언지 모르오.

경험이 없으니까 모르지만…… 아마도 사모님이 바가지를 무척 긁으시나 봐!

그리고 허리를 꾸부러뜨리며

, 하하핫…… 아이, 우스워!

영림은 자즈러들게 웃었다.

그런 게 아니요. 바가지를 긁는다는 게 문제가 아니고…… 만일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를 오랫동안 사모하다고 죽게 되었을 때, 남편 되는 사람이 자기 아내에게 문병 가기를 즐겨 허락할까요?

그렇지만 여자와 남자는 세계가 다르지 않아요?

뭐가 달라요?

『…………』

영림은 대답을 못했다.

학생의 총명으로써 여자의 사회적 지위를 스스로 격하(格下)한다는 건 서글픈 일인걸.

그제서야 영림은 실토를 했다.

실은 저도 그걸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오빠와도 무척 싸웠지만……』

그걸 잘 알면서도 학생이 모르는 척한다는 건 확실히 좋지 않은 태도 야.

언니의 마음이 너무나 가엾어서…… 선생님, 미안합니다!

영림은 고개를 숙이며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강석운은 그대로 임을 다시금 발견하고 마음이 풍족했다.

그렇지만 저는 선생님의 마음에 비밀을 알고 있어요.

?

석운이가 머리를 돌리는데

저리 올라가서 다리 쉬임을 하고 가요.

영림은 남산 쪽을 가리켰다.

소나무가 서 있는 풀밭 하나가 남산으로 올라가는 비탈길 초입에 있었다.

내 마음의 비밀이라고…… 내가 무슨 비밀을 갖고 있기에 학생이 안다는 건가?

풀밭에 나란히 앉아서 석운은 담배에 라이터를 그어댔다.

선생님, 요즈음 와서 마음의 공허를 때때로 느끼시죠?

무슨 말이야?

시치미를 떼셔도 다 아는 걸요.

, 학생이야말로 심리학자 모양인데……』

알아 맞쳤죠? K 신문에 나는 유혹의 강을 읽음 다 알아요.

그건 소설이고…… 그건 작품 세계야.

, 선생님이 저를 정말로 얕잡아 보시네요. 아주 소학생 취급을 하실 모양이야.

석운은 대답을 피하고 담배만 푹푹 피우고 있었다.

선생님의 불량성을 이십 퍼센트로 계산한 건 오산일 것 같아요. 적어도 사오십 퍼센트는 될 거에요.

시세 폭락인걸.

선생님의 시세가 폭락해서 슬퍼할 사람은 사모님뿐일 거에요.

석운은 후딱 학생을 돌아다 보았다. 영림의 그 무척 도발적인 한 마디가 하마터면 석운의 조심성을 깨뜨려 버릴 뻔하였다.

영림의 시선은 멀리 시가 한구석에서 못박힌 듯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무척 자극적이었으나 표정은 대단히 무심하다. 그러한 세련된 포즈를 이 학생은 어디선가 습득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흐르는 침묵 속에서 영림은 강석운의 반응의 정도를 계산하고 있었고 강석운은 영림의 정열의 중량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그러나 석운의 계산에는 자꾸만 갈래가 생겼다. 오늘의 이 회견이 한혜련을 위한 것인지 영림 자신을 위한 것인지, 좀처럼 석운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의구심은 고영림 자신에게도 있었다. 말로는 올케를 위하고 있는 것 같지만 감정으로는 제 일을 처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둘이 다 감정의 통일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영림은 독심을 먹고 자기를 눌렀다.

선생님의 시세가 폭락해서 제일 기뻐할 사람은 한혜련일 거예요.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선생님 잠깐만 다녀와요. 선생님의 불량성도 좋고 자비심도 좋아요. 한 시간 동안만 빌려주세요.

석운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한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불량성이건 자비심이건 내 일은 내가 처리하지요. 그러나 그 여인은 남편이 있는 몸이요. 오빠는 나의 방문을 하나의 불륜으로서 간주할 것이요.

오빠의 일은 제가 처리할 테에요. 오빠는 선생님의 방문을 알 턱이 없으니까요. 본질적으로 이 일이 불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이상 오빠만 모르면 그만이 아냐요?

학생은 어리오. 내가 그 여인을 사모한대도 가기가 어렵지요. 또한 그 여인이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준다면 그러한 곤란한 처지에 나를 세우려 하지는 않을 것이니까요.

그래요. 올케는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혀라도 깨물고 죽는다고 했어요.

맞았오. 그 여인의 생각이 옳소!

식욕이 없는데도 권에 못 이기어 한 술 뜨는 자비심과 이십 퍼센트의 불량 성을 이용하려던 고영림의 계획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리고 말았다.

 

 

危險地帶[위험지대]

 

의욕이 강한 반면에 고영림은 무척 담백한 일면도 있었다. 헬렌과 돌구름을 한 자리에 모아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영림은 절실히 깨달았다. 인간 사회에 그러한 완강한 장벽이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영림은 통탄하였으나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또한 강선생을 모시고 가는 날에는 시 댁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올케가 정말로 독약을 마실런지도 몰랐다. 그만큼 나약한 올케이기도 하기에 영림은 간단히 단념해 버리고 말았다.

단념을 하고 나니 감정의 통일이 생겨서 영림의 이야기는 아까처럼 조심성을 유지하지 않아도 무방하였다. 따라서 고영림의 독특하고 발랄한 대화가 자유롭게 튀어나와도 좋았다.

선생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사실은 올케도 강 선생님을 그처럼 깊히 생각하고 있는 건 아냐요. 옛날 해수욕장에서 만났던 그 청년이 작가가 되었다니까, 단순한 호기심에서 선생님 이야기를 가끔 한다는 것뿐이에요. 그걸 제가 무척 과장해서 말한 거예요. 소설적으로 꾸며대서……』

한혜련에게 집중되어 있는 신경을 풀어 주지 않는 한, 강선생은 무슨 인생의 숙명적인 부담 같은 것을 느끼고 항상 마음 한구석에서 괴로워할 것만 같았다. 이왕 희망 없는 이야길진대 강선생으로 하여금 한혜련의 이야기를 깨끗이 잊어버리게 하여 드리는 것이 영림으로서의 도리 같기도 해서 앞말을 취소해 버렸다.

? 꾸며댄 이야기라고?

, 선생님을 한 번 테스트해본 것 뿐이예요.

나를 테스트해 봤다나를 한 번 떠봤다는 말인가?

.

나의 무엇을 떠보았다는 말인가?

선생님의 지조라고 할까? 말하자면 불량성과 성실성의 퍼센테이지를 말이에요. 호호호홋……』

영림이가 유쾌하다는 듯이 웃어대고 있는데 날카로운 한 마디가 총알처럼 석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웃음을 그첫!

지극히 불쾌한 표정이 홱 석운의 얼굴을 덮어 왔다.

어마?

순간, 영림의 웃음은 꼬리를 잘리운 금붕어처럼 팔딱팔딱 뛰다가 그만 꽉 얼어붙고 말았다.

나쁜 사람! 전형적인 아푸레 학생이다!

강석운은 풀밭에서 휙 몸을 일으켰다.

, 선생님……』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던 영림은 그렇게 외치며 한 걸음 다가섰다.

손윗 사람이라고 대접을 받겠다는 건 아니야. 한 사람의 인간 대 인간의 문제다! 그대를 인간적으로 대해 왔던 내가 우선 불찰이었어!

사태가 이처럼 돌변할 줄은 정말 몰랐다. 석운에게서 마음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한 자기의 행동이 이처럼 결과를 맺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고영림이었다.

마치 시정의 사깃군보다도 더한…… 그대야말로 교양의 발판을 상실한 현대적 총명의 심볼이라는 걸 알아야 해.

영림의 고개가 차츰차츰 수그러졌다.

그렇다고 해서 앞말을 또 다시 취소하여 강선생에게 마음을 부담을 주기도 안됐고 그것은 또한 강선생의 정열을 자기에게로 집중시키는 데 있어서 커다란 방해물을 될 것도 같았다. 이럴 줄을 알았던들 올케의 이야기를 애 당초 꺼내지 않았던 것만 못하다고 영림은 마음속으로 뉘우쳐 보았으나 이미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바쁘니까 나는 먼저 가겠오.

석운은 모자를 집어쓰고 성큼성큼 풀밭을 걸어 나왔다.

앗 선생님! 잠깐만…… 잠깐만 진정해 주세요!

영림은 뛰어가자 석운의 앞에 탁 막아섰다.

선생님, 조그만 진정하세요. 저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는 선생님을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정말 없어요!

영림은 두 손길로 석운의 양복 앞자락을 붙들고 애원하듯이 말했다.

비끼시오!

석운은 다소 침착한 음성이 되며

학생의 변명을 들어야만 할 필요도 없고 의무도 없오.

그것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제 편에서 들려 드리고 싶어요!

나는 학생을 교육시키는 선생님도 아니고 또한 보호자도 아니요.

음성은 다소 부드러워지고 있었으나 석운의 감정은 차차 더 뿌리 깊게 비뚤어지고 있었다.

선생님, 제 잘못을 제가 잘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취한 행동이라면 더욱 괘씸한 학생이 아닌가!

아냐요. 처음에는 몰랐지만 선생님의 꾸중을 듣는 순간, 제 잘못을 너무도 잘 알았어요.

잘못을 알건 말건 내게는 하등의 상관이 없오. 나는 다만 교양 없는 한 사람의 학생의 방문을 받은 것, 다방에서 만나 주면 좋겠다기에 만나 준 것, 그리고는 마침내 학생에게서 조롱을 받은 것…… 그것뿐이요.

, 선생님, 결코 조롱이 아니었어요.

처음 만난 사람을 그처럼 농락하고도 조롱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 결국은 그렇게 돼 버렸지만…… 거기에는 그 어떤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어요.

무슨 사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로는 존경한다면서 행동으로는 농락을 했오. 나는 정말 시간이 바쁜 사람이요. 학생이 비끼지 않으면 내가 비껴가지요.

양복 앞자락을 잡은 고영림의 팔을 조용히 떠밀고 석운은 풀밭을 천천히 걸어나갔다.

조용히 떠미는 석운의 손길이 예상 밖으로 완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손길의 완강한 힘과 정비례하는 분량의 악화된 감정을 영림은 불현듯 느끼 고

아아, 종시 선생님을 놓쳤다!

여학생 시절부터 마음으로 줄곧 모셔 오던 선생님이 아니었더냐고, 경솔했던 자기의 실수를 절실히 뉘우치며 핑하고 뜨거워 오는 눈시울을 영림은 어린애처럼 손등으로 눌렀다.

풀밭을 나서서 비탈길을 석운은 성큼성큼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비뚤어진 그의 감정을 그대로 실은 것처럼 강석운의 두 어깨가 무척 날카로와 보였다.

한 번쯤은 뒤를 돌아다 볼 것도 같아서 뜨거워 오는 눈시울에서 손등을 떼고 말끄러미 영림은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감실감실 작아져 가는 석운의 뒷모습은 그냥 딱 앞만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감정이 차츰 격해지며

선생님!

손 하나를 흔들어 보이며 영림은 소리 높이 불러 보았다. 안 들릴 리는 만무한 거리였으나 대답도 없고 돌아보지도 않는다.

선생님!

『…………』

………………!……』

『…………』

어머나?

종시 돌아보지 않은 채 석운의 모습은 완전히 비탈길 밑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영림의 입술이 삐죽삐죽 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이그러진 입술 위로 눈물이 한 줄기 주루루 흘러내렸다.

오늘 처음으로 만난 본 강선생님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오랜 시일을 두고 사귀어 오던 애인에게서 배반을 당한 것 같은 절실한 감정을 영림은 느꼈다.

석운은 비탈길을 총총히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자기를 부르는 영림의 목소리가 두세 번 들렸으나 대답할 감정은 통 움직이지가 않았다.

저런 학생이야말로 잘못하면 어마어마한 노릇을 대담하게 해치울 우려가 다분히 있어.

석운은 진정으로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암소한테 물린 격이라고, 석운의 분노는 점점 더 넓이와 깊이를 가지고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참으로 맹랑한 노릇이다!

칸나에 대하여 갖고 있던 호의의 가지가지가 일순간에 운무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마침 잘 됐어!

칸나의 언어 행동에서 정신적인 동요 같은 것을 불현듯 느끼곤 하던 자기 자신을 얼른 돌이켜 보며 그러한 흔들림이 더 커지기 전에 위험지대에서 안전지대로 간단히 빠져나올 수 있게끔 되어 버린 오늘의 석운은 마음으로 축복하였다.

저런 학생과 교제를 하다가는 큰코를 다치지!

학생이 총명하기 때문에 다치는 코도 어마어마하게 클 것이라고 강석운은 앞질러 생각하며 어서 빨리 꽃집으로 가서 야쓰데 화분을 찾아다가 아내에게 선물하는 즐거움을 맛보리라 생각하였다.

비탈길을 다 데려가서 퇴계로 넓은 길로 들어서는데 발걸음 하나가 또박또박 따라오고 있는 것을 석운은 문득 깨달았다.

그 학생인가?

그 학생인지 모른다. 그러나 돌아다 볼 감정은 조금도 없다. 변명을 듣고 싶은 생각도 또한 없다. 그만한 학생이면 변명쯤 얼마든지 꾸며댈 수가 있을 것이 아니냐고, 재치있는 학생의 대화에 감심을 했던 것만큼 석운은 일종의 증오까지 느끼고 있었다.

발걸음은 그냥 따라오고 있었다. 석운의 걸음걸이가 빠르면 빠른 대로, 늦으면 늦은 대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또박또박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얼마나 걸었을까?…… 발걸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다가 이윽고 석운의 오른 편 쪽으로 검은 어깨와 함께 자색 구두 코가 나타났다. 아까부터 보아오던 칸나의 평화였다.

다소 부자연스럽게 치기를 느끼기는 했으나 석운은 그냥 황혼이 깃들기 시작한 서편 쪽 하늘을 곧잘 바라보면서 걸었다.

놀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청보랏빛 하늘이 점점 어두워 가고 있었다.

울툭불툭 고르지 못한 거창한 톱날인 양 즐비한 회색 빌딩의 이 지붕 저 지붕이 거대한 모자이크처럼 청보랏빛 하늘에 물들여져 있었다.

영림도 말이 없다. 말이 없이 어디까지나 나란히 서서 걸어오고 있었다.

말다툼을 한 애인들처럼 묵묵히 두 사람은 걸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학생인걸!

석운의 편에서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치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이 어른답지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상하실 거에요. 이처럼 넓은 길인데 하필 왜 바싹 붙어서 걷느냐는 말씀이죠?

영림의 목소리는 이미 서글퍼 있지는 않았다. 이전처럼 또릿또릿한 어조였다.

그것도 있지만, 그뿐만이 아니야.

그러실 거에요. 어떻게 보면 착실해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시정의 사깃군 같기도 하고……』

남성을 다루는 편이 상당히 능숙한걸.

다소의 경험을 쌓았으니까 그렇겠지만…… 선생님이 상상하시는 것보다 는 아직 순진할 거에요.

제 자랑을 제가 하면 객관적인 박력이 없어져.

오해하시면 슬퍼요. 저는 지금 신과 대화를 하고 있는 거니까요.

말을 삼가요! 학생과 같은 인간이 신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는 건 신에 대한 모독이야!

석운의 언성은 또 갑자기 높아졌다.

신에 대한 모독이라는 말을 듣고 영림은 지극히 슬펐다. 영림은 정말로 신과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올케 한혜련에 관한 이야기를 취소한 것을 석운은 인간의 불신(不信)으로서 계산하고 있지마는 영림의 입장으로서는 강석운의 심기를 덜어 주기 위한 하나의 정의를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의 오해를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풀어 드릴 수 없는 것을 슬퍼할 뿐이에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풀어 드릴 수 있는 문제이기에 선생님의 오해를 산 채 저는 제 이야기를 계속하겠어요.

역시 신과의 대화인가?

그래요. 거짓 없는 이야기라면 신은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믿으니까요.

마음대로 해 봐요.

칸나는 오늘 선생님과의 회견에 있어서 출발을 잘못했었어요. 칸나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의욕을 존중했어야만 했어요. 쓸데없는 영웅주의, 쓸데없는 자기희생…… 그런 종류의 자기답지 않은 감상주의가 도대체 잘 못이었어요.

무슨 말인지, 도시 못 알아듣겠는걸.

못 알아들으실 거에요. 못 알아들으신 채 이 대목은 그대로 보내 주세요

그래서……』

오늘 제가 선생님을 만나 뵌 시간이 아까 아침 녘에 한 삼십 분, 그리고 네시서부터 지금까지가 두 시간 반, 그러니까 도합 세 시간 밖에는 되지 않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제 선생님이 화가 나서 내려오실 때, 칸나는 울었어요.

그제서야 비로소 석운은 영림의 옆얼굴을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영림의 얼굴은 그냥 앞을 향하고만 있었다.

아냐요. 제가 말을 또 잘못 했어요. 칸나는 좀처럼 울지를 않으니까요. 칸나는 좀처럼 울지를 않으니까요. 칸나가 운 것이 아니고 칸나의 눈에서 육체의 배설물인 말간 물방울이 솟아 나왔다고 말하는 것이 적당한 표현일 거예요. 운다는 건 설명이고, 눈물이 솟아 나왔다는 건 묘사니까요. 설명보다는 묘사가 정확성을 띄고 있을 테니까요.

비뚤어졌던 감정과 별개의 의미에서 석운은 다시금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거기서 칸나는 생각했어요. 단지 세 시간밖에 만나지 못했던 사람 때문에 눈물이 솟구쳐 나올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고요.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눈물이 솟아 나오고 있었으니까요.

석운은 또 영림을 돌아다보았다.

아무리 돌아다 보셔도 화장을 한 얼굴이 아니니까 눈물자욱은 보이지 않을 거예요. 사깃군 같은 거짓말을 잘 하는 전형적인 아푸레 학생의 말이니까 선생님이 곧이들으실 리는 만무하겠지만 저는 지금 신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용서하세요. 선생님이 옆에 계시는데 딴 분과 이야기를 해서 미안해요.

영림은 비로소 얼굴을 돌리고 석운을 쳐다보며 방그레 웃었다.

칸나의 뾰족하면서도 한편 무척 소박한 성격이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직접 석운의 심장에 왔다.

인제부터 나하고만 이야기해요. 딴 사람과는 이야기 말고……』

석운도 미소를 지었다.

솔직하게 들어 주심 이야기하겠어요.

아까처럼 떠보지만 않는, 솔직한 이야기라면 솔직하게 듣지요.

그럼 됐어요. 이제부턴 절대로 솔직할 테에요.

그럼 됐어. 나도 이제부터는 절대로 솔직하게 들을 테니까……』

이 순간에 있어서의 저의 솔직한 욕망은 선생님을 한 번 유혹해 보고 싶다는 거예요.

『…………』

나를 유혹한다?

석운은 적지 않은 놀람을 가지고 물었다.

동화 백화점을 지나 명동 쪽으로 둘이는 걸어가고 있었다. 날은 이미 저물어 전등이 켜져 있었다.

유혹이라는 것보다도…… 결국은 그것이 유혹이겠지만…… 제가 이렇게도 선생님을 좋아하고…… 오래 오래 선생님을 제 옆에 모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뿐이에요. 이런 생각이 다 선생님을 유혹하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나를 유혹해서 학생에게 이로운 점이 별반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이해득실을 저는 문제로 삼고 있는 건 아냐요. 제 감정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뿐이에요.

나를 그처럼 호의적으로 생각해 주는 건 감사하지만…… 학생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도 그런 감정은 죽여 버려야만 해.

어른다운 그리고 선생님다운 말씀이에요. 그렇지만 그런 말씀을 제 앞날을 위해서 하시는 건지, 혹은 선생님의 평화로운 가정을 위해서 하시는 건지?

돌을 다 위해서 하는 거야. 여자의 행복은 일생에 한 번밖에는 없어. 그처럼 소중한 행복의 대상은 따로 있을 거니까……』

제가 예측하고 있던 그대로에요.

그대로여서 다행이지요.

선생님의 안전을 위해서는 다행일 거에요.

동시에 학생의 안전을 위해서도 다행이지요.

선생님, 이제 그 학생이라는 말을 좀 집어치워 주시면 좋겠어요. 고영림이라는 떳떳한 이름이 제게는 있어요. 칸나라는 별명도 있구요. 그런데 하필 왜 학생, 학생 하면서 사제지간의 윤리로서 자꾸만 견고한 삼팔선을 그어 놓으려는 거에요?

허어, 참 학생은……』

또 학생이에요? 선생님한테 학생이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어쩐지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아주 질색이에요. 선생님은 어른이라는 안전지대에 버티고 앉아서 허어허어 하고 어린애 취급을 해두시는 것이 위험하지 않아서 편하시겠지만…… 저는 그런 종류의 핸디캡은 싫어요.

그럼 어쩌면 좋은가?

일대일로 가는 거예요. 선생님도 아까 그런 말씀하셨죠. 인간 대 인간의 문제라고요. 나이 스물넷임 어린 애 취급은 면해야지 않아요?

그럼 좋아. 영림 양은……』

영림 양…… 영림 양…… ., 젖비린내 나는 아이가 갓을 쓴 것 같아서 감각에 맞지 않아요.

그러나 나는 미스 김이라든가 미스 고라든가 하는 말은 구역질이 나서 못 해.

그건 저도 동감이에요.

석운은 조금 생각하고 나서

영림씨는 어때요?

아이구 서먹서먹이야! 그저 영림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편이 융통성이 있어서 좋아요.

융통성이 있어?

남이 볼 때는 사제지간 같아서 무난하고, 단둘이 있을 때는…… 후 훗……』

?

애인 같잖아요?

번화한 명동 입구를 지나칠 무렵이었다.

석운은 대꾸를 잃은 채 후딱 영림을 돌아다보았다. 영림의 얼굴은 곧장 전면을 향하고 있었다.

석운은 지금 자기가 위험지대에 놓여 있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할 만큼 마음의 동요를 느끼고 있었다.

영림이가 내뱉은 한 마디가 이미 청춘의 상실을 자각하고 있는 강석운의 영혼을 앞질러 가면서 꼭꼭 자극해 왔다. 마치 배설기(排雪機)와도 같이 앞길을 열어 주면서 고영림을 떠밀어가며 걸어나가고 있는 셈이었다.

석운은 자극에서 받는 마음의 동요를 배제하고 억압하기 위하여 일부러 물었다.

영림은 내가 쉽사리 유혹을 당할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말에 영림은 핼끔 석운의 표정을 살피고 나서

웬만해서는 당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건 표면에 나타난 문제이고 마음으로는 가끔 유혹을 받고 있을 거예요. 그걸 선생님은 교양이라든가 하는 따위의 노력으로써 극복해 나가고 있을 뿐이죠. 그렇지만……』

?

선생님의 그러한 노력이 일단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날에는 성실도 없고 체면도 없을 거예요. 가정도 없고 사모님도 없어요.

허어? 그런 걸 영림은 어떻게 다 알고 있어?

다 알아요. 선생님이 갖고 계시는 아름다운 꿈과 본질주의가 합작을 하는 날에는 세속적인 온갖 것이 무가치하게 되고 말 거니까요.

한낱 독자로서 이렇듯 신랄하게 작가 강석운의 본질을 찔러 올 줄은 정말 몰랐다. 그것은 비단 독자로써 뿐만 아니었다. 친구들 중에서도 강석운을 이만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리 쉽사리 내 노력이 허물어질 것 같은가?

선생님의 노력이라고는 별다른 것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다만 선생님의 노력을 허물어뜨릴 만한 상대자가 아직까지 선생님의 눈앞에 나타나지 가 않았을 뿐일 거예요.

그래 영림은 허물어뜨릴 것 같은가?

영림은 한참 동안 대답을 주저하다가

저도 노력해 봐야죠. 선생님의 노력을 허물어뜨릴 때까지……』

위험인물이구나!

반가운 인물이 될 때가 올런지 누가 알아요?

상당히 자신을 가지고 하는 말인데……』

자신이 아니구요, 역시 끈기 있는 제 노력일 거에요.

무엇 때문에 그런 힘든 노력을 해야만 하느냐 말이요.

선생님이 그저 좋으니까.

모를 일인걸! 여러 모로 보아서 나는 적임자가 아닐 텐데……』

이것 보세요.

?

선생님의 성격으로나 인생관으로나 따져 볼 때 선생님이 그중 좋아할 수 있는 타입의 여성이 즉 칸나 고영림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아주 지나친 경솔한 말 같지만요. 저는 오랫동안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경솔했으면 용서하세요. 용서하시고 맞았음 맞았다고 안 맞았음 안 맞았다고 솔직히 한 마디만 대답해 주시면 좋겠어요.

맞았어! 솔직히 대답해서 나는 아직껏 영림과 같은 여성을 대해 본적이 없었오!

신음하듯이 석운은 실토를 하였다.

선생님, 기뻐요! 굉장히 기뻐요! 그럼 됐어요.

되다니……』

제 노력의 절반이 줄어들 테니까요.

어물어물하다가는 안 되겠는걸.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해야겠어!

농담조지만 사실도 그랬다.

영림은 말없이 웃었다.

을지로 로타리를 건너 석운은 아까 야스데를 맡겨둔 꽃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들러서 화분을 하나 찾아갖고 가야겠오.

칸나 고영림이가 풍기는 강렬한 분위기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졌던 아내의 모습이 갑자기 확대되어왔다.

선생님, 야스데를 무척 좋아하시나 보요. 이런 먼데서까지 사 가지는 걸 봄……』

별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잘못 건드려서 그만 화분을 깨뜨렸지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사가시는 거군요.

석운은 그저 웃기만 했다.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화초는 뭐에요? 이담 원고 찾으러 갈 때 사갖고 가겠어요.

그럴 필요는 없지만…… 석류 같은 걸 좋아하지.

알았어요.

주인더러 택시를 부르래서 화분을 실었다.

제가 댁까지 선생님 모셔다드려도 무방하시죠?

무방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오. 이야기가 있으면 다시 만나지. 내 집으로 찾아와도 좋고……』

야스데 화분을 바라보면서 영림과 더불어 달콤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어쩐지 석운에게는 마음에 걸렸다. 영림과의 드라이브를 즐기려거든 차라리 야쓰데 화분을 한길 가에 내동댕이치던가 그렇지 않으면 야쓰데 화분 옆에서 한시바삐 영림을 멀리하고 싶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감정의 불안정이 석운은 생리적으로 괴로왔다. 그것도 걸프랜드와의 경쾌한 사교라든가 일시적인 매소부 등속과의 드라이브라면 모르거니와 칸나 고영림의 의욕은 뿌리가 깊다. 칸나가 야쓰데를 모욕하느냐? 야쓰데가 칸나를 경멸하느냐? 두 사람 중의 하나는 결국에 있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알겠어요. 그럼 선생님 후일 다시……』

놀러 와요. 대개는 집에 있으니까……』

언제 놀러 갈는지 모르니까…… 영영 안 갈런지 모르니까…… 떠나가시기 전에 한 말씀만 더 드려 두겠어요.

, 좋아요.

칸나의 의욕이 다소 강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불량 취급을 받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제 아버지나 제 오빠에게 인간적으로나 애정적으로나 버림을 받고 있는 제 어머니나 올케의 입장을 옹호할 줄도 아는 칸나라는 사실을 동시에 알아두고 가시는 것이 좋으실 거에요. 그것뿐이에요. 선생님, 편히 주무세요.

편히 돌아가요.

악수를 하고 싶지만 아껴 두기로 하겠어요.

그리고는 홱 돌아서서 명동 쪽으로 또박또박 영림은 걸어갔다.

차는 떠났다. 달리는 백글라스로 석운의 시선은 얼마동안 영림의 뒷모습을 붙든 채 놓아 줄 줄을 모르고 있었다.

상당한 학생이다.

거짓 없는 감탄의 한 마디를 석운을 토했다.

오늘 강석운이가 고영림에게서 받은 온갖 자극과 감동은 순전히 정신적인 그것이었다. 고영림이가 지닌 육체의 냄새를 맡을 수 있기에는 영림의 개성이 너무도 강렬하였다.

개성이나 교양이 뚜렷하지 못한 여성일수록 육체의 냄새가 풍기는 법이다.

아니, 그러한 여성일수록 남성들에게는 육체밖에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당한 여성이야!

석운은 다시 한번 되풀이하다가 후딱 정신을 차리며

위험인물! 위험인물!

하고 중얼거렸다.

진실한 연애를 할 수 있는 여성일수록 강석운에게는 위험했기 때문이다.

건드려 보다가 그만둘 수 있는 연애가 아니다. 칸나는 무섭다. 무섭고도 귀엽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석운은 야쓰데 화분을 무심중 어루만지며 입속으로 외쳤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마음속으로 외치면서도, 야쓰데 화분을 무심중 어루만지면서도 석운의 의식 속에는 이 몇 시간 동안에 걸쳐 고영림이가 남겨 놓고 간 강렬한 환영만이 자꾸만 확대되어 갔다.

얼굴 모습이나 몸 매무새보다도 고영림의 말이 더 좋았다. 대화의 형식도 현대적 센스를 담뿍 담뿍 지니고 있었지만 대화의 내용이 더욱 좋았다. 쓸데없는 대화는 한 마디도 없었다.

후추 알처럼 매우면서도 소박하고 선량하기때문에 부드러움이 있었고 지성적이기 때문에 논리에 모순이 없어서 듣기에 지극히 상쾌하다.

지나칠 듯 지나칠 듯 하면서도 컨트롤이 있어서 탈선을 하지 않는 대목에서 고영림은 동시에 겸양의 미까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형식은 아쁘레 같아 보이지만은 내용은 아쁘레가 아니었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젊은 여성들처럼 천박한 자존심에서 톡툭 튀어나오는 독선적인 감정의 노출이었기 때문에 유치해 보이지도 않았고 불쾌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대화는 중단됨이 없이 일정한 논리의 궤도를 타고 어디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저는 사모님의 입장도 잘 이해하고 있어요.

헤어질 직전에 고영림은 방탕한 남편을 가진 어머니와 올케에 비유해서 그런 의미의 한마디를 종시 첨부해 놓았다. 악수도 후일로 아끼어 두었다. 여유있는 행동이라고, 고영림에 대한 채점율을 에이 플러스(A·+)라고 석운은 고쳤다.

고영림! 고영림!

자기 인생에 이런 종류의 여성이 뛰어들 줄은 몰랐다.

중년의 남성들이 유혹을 받는 것은 그 태반이 여성들의 육체에서였다. 청춘의 상실을 탄식하고 서글퍼하는 그 대상은 대개가 다 육체의 젊음이었고 영혼의 젊음은 아니었다. 그렇건만 고영림은 육체보다도 영혼의 젊음을 가지고 석운에게 육박해 오고 있는 것이다.

어두운 거리가 창밖에 흐르고 있었다. 창경원 앞을 차는 지나는 모양이었다. 담배를 꺼내려던 손길이 언뜻 뻗으면서 야쓰데 잎사귀를 어루만졌다.

아내란 도대체 무엇일까?

십팔 년 동안에 걸쳐 애정과 신뢰를 지니고 있는 아내 김옥영의 존재와 단 세 시간 동안에 걸쳐 그것을 느끼게 된 고영림의 존재를 석운은 무심중에 비교하고 있었다.

인간을 신뢰하는 점에 있어서는 아직 고영림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애정에 있어서는……』

그러다가 석운은 단번에 앞말을 취소하였다.

영림에게서 느낀 것은 애정이 아니다. 단순한 감동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종류의 감동은 멀지 않은 장래에 있어서 애정으로 변할 가능성이 지극히 많달 뿐이다. 고영림이가 자꾸만 보고 싶고 만나서 이야기 하고 싶어지는 순간, 자기의 감동은 비로소 하나의 애정으로 변모를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여튼 오늘 밤 나는 고영림에 관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까지 사실대로 아내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또는 말해야만 할 것인가?

석운 자신은 말하자면 끝까지 수동적 태도를 취해 왔을 뿐 아니라, 영림의 의욕에 대해서는 어른다운 충고도 했다. 그렇고 보면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석운은 생각했다.

(내외간에 비밀을 가진다는 것…… 가정의 파괴는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법이다.)

 

 

安全地帶[안전지대]

 

혜화동 로타리에서 차는 멈추고 아이들을 위해서 과자 한 상자를 샀다. 그리고는 곧장 혜화동 골목으로 접어 들어갔다.

정문 앞에서 차 멎는 소리를 듣고 맏딸 경숙이가 사내 동생 둘을 거느리고 뛰쳐나왔다.

아버지, 뭐 사 왔어요?

열 살짜리 도선(道善)이가 차에서 내리는 석운을 우선 붙잡았다.

도선아, 그러지 마! 어떻게 매번 사 오시니?

열다섯의 도현(道賢)이가 언니다운 수작을 했다. 그러면서도 의례 사왔으려니 하는 짐작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자아, 이건 너희들 것!

그것 봐! 안 사갖고 올 아버지야?

도선은 과자 상자를 들고 다람쥐처럼 쪼르르 뛰어갔다.

너희들은 이 화분 좀 맞들고 들어가거라.

어마, 화초 분 또 사오셨네요.

, 이건 너의 어머니 거다.

아버지는 그저 어머니만……』

요즈음에 와서 경숙은 그런 말을 곧잘 했다. 아버지를 찬양하는 말이었으나 몇 퍼센트쯤 질투도 있을 것이라고 석운의 짐작은 거기까지 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크면 말 한마디 허수로이 못하겠다고, 옥영은 조심을 하고 있는 터이다.

협소는 했으나 아담한 정원이었다. 콩크리트로 만든 조그만 못 가에 화분 이 주루루 놓여 있었다. 야쓰데도 화분 속에 있었으나 나무가 적다. 겨울 한 철을 책상 위에서 난 야쓰데였다.

어머니, 빨리 나오세요. 굉장한 푸레센트에요!

경숙이가 또 안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그래? 아버지가 엄마한테 푸레센튼가?

글쎄 빨리 좀 나와 보세요! 아버지가 지금 엄마한테 인삿말 받으려고 기다리고 계신데요.

요것이!

석운은 금새 권투 선수가 되면서 스트레이트를 넣는 시늉을 했다.

엄마!

경숙이가 목을 움츠러뜨리며 소리를 치는데

아버지, 맞서 봐요?

도현이가 아퍼 칼의 태세를 취하면서 달려들었다.

옳지. 인제야 호적수다. 계집애는 상대가 안 돼!

그러면서 석운이가 몸가짐을 바로 잡는데

뻐억……』

하고 석운의 옆 엉덩이에 편취가 하나 들어 닿았다.

야아, 손들었다! 손들었어!

석운이가 두 손을 번쩍 드는데 정신이 갑자기 환해지며

아이구, 커다란 어린애. 한 분 또 나타나셨군!

부엌 전등을 복도에 내 걸며 옥영은 뜰로 내려섰다.

글쎄 어머니, 이 야쓰데 좀 보세요. 어떻게나 큰지. 어머니를 위해서 정성 들여 사오신 거래요.

어쩌면…… 크기도 하네요.

어머니, 인제 인사하세요.

감사합니다.

소학생처럼 옥영은 절을 했다.

으와, 한 커트 찍어 두고 싶은 씬이야!

경숙은 손뼉을 치며 호들갑스럽게 웃어 대고 나서

엄마와 아버지는 그마니스트라니까!

했다.

, 요즈음 애들은 못하는 말이 없어.

옥영은 다소 민망했고 석운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도현은 못 물을 퍼서 야쓰데 화분에 부어 주고 있었다.

오늘은 아버지가 일찌감치 들어올 것 같다고 해서 모두들 저녁을 안 먹고 기다리고 있는 참이라고 했다.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어서들 저녁을 먹어요.

석운은 푸푸 세수를 하며, 자기가 고영림에게 황홀해 있는 동안 집안 식구들은 시장기를 참고 있는 것이라고 석운은 적지 않게 미안해졌다.

저녁 잡수셔야죠?

석운의 모자와 옷을 들고 옥영은 물었다.

나는 이른 저녁을 먹었는데……』

오늘 밤 원고 쓰세요?

어디가…… 오늘은 파이야. 머리가 뒤숭숭해서……』

그럼 술이나 조금 데워요?

, 그러는 게 좋겠오. 그런데 혜숙(惠液)은 어디 있오?

비누질을 하며 석운은 물었다.

벌써 자는 걸요.

금년 일곱 살 먹은 막내딸이다.

옥영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술상을 차리기 시작했고 식모는 저녁상을 보아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세수를 마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면서 석운은 그처럼 강렬하게 떠오르던 고영림의 환영이 조금씩 희박해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됐어!

마음이 차차 가라앉기 시작하는 자기 자신을 좀 더 힘차게 붙들기 위하여 석운은 일부러 손을 뻗쳐 물방울이 달랑달랑 맺혀져 있는 야쓰데 잎사귀를 한번 건드려 보고 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진지 잡수세요.

나는 먹었다. 어서들 먹어라.

네에.

둥그런 상에 둘러앉아서 아이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조금 후에 옥영이가 술상을 보아 가지고 들어왔다.

애들하고 같이 먹겠오.

아버지와 한상에서 먹는 것은 아이들은 좋아했다.

부산한데 따로 잡수세요.

아니야, 같이 먹어.

옥영은 술 주전자와 안주를 아이들 옆에 옮겨 놓으며

아버지가 오늘은 늦어져서 너희들한테 미안하신 모양이시다.

머리에 빗질을 하고 나서 석운은 아이들 틈에 끼어 앉았다.

잔이 작은 걸, 비루 술잔 갖다 줘요.

어머나? 일주는 작아야 술맛이 나신다더니…… 아주머니, 술잔 하나 가져와요.

네에.

오십 고개의 식모가 술잔을 가져왔다. 옥영은 술을 따르며

아이, 한 주전자가 다 들어가네요.

어쩐지 석운은 목이 자꾸만 갈하다. 반 술잔을 단숨에 석운은 들이켰다.

맥주인 줄 아시나 봐?

옥영은 놀란다.

목이 갈해서……』

그럼 오늘은 원고도 안 쓰실 텐데 한잔 드시고 일찍 주무세요.

, 그래야겠오.

늦은 저녁이라, 아이들은 열심히 숟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열심히 식사를 하고있는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즐거운 노릇이었다. 석운의 가슴속에 화락(和樂)이 깃들기 시작했다. 들떴던 감정이 또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끼자

고영림이가 다 뭐야!

석운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그렇게 외치고 나니 또 조금 마음이 평온해졌다.

, 출판 계약은 어떻게 됐어요?

숟가락을 멈추며 기대에 찬 옥영의 얼굴이 반짝 들렸다.

, 잘 됐오. 인세는 절반식 나눠서 두 번에 받기로 했오.

, 경숙아, 이번에는 정말로 아버지가 네 피아노를 사 주신단다!

으와……』

경숙이 숟가락을 내동댕이치고 벌떡 일어나서 어린애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빙글빙글 맴돌다가

아이구, 아버지!

하고, 희열에 넘치는 외침과 함께 등 뒤로부터 석운의 목을 껴안았다.

애두 참, 좋으면 저러는가?

옥영도 만족했고

아이구, 목이야! 숨이 막혀!

석운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영림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했다.

이윽고 아이들을 하나둘 흩어져 갔다. 도현이와 도선은 저희들 방으로 과자 몇 낱씩을 배급 받아 가지고 갔다. 경숙은 오쭐오쭐 춤을 추면서 명륜동으로 피아노 연습을 갔다.

그래서 말이요, 한편으로는 당신을 믿으면서 눈앞에 전개되는 광경은 딱딱 들어맞거든 다방에서 요릿집 뽀이를 만난다던가…… 그 뽀이의 인도를 받아 호화판인 자가용 차를 몰아 댄다던가…… 목적지는 틀림없이 호텔이 아니면 요정이라고 생각을 했지.

어쩌면 당신은……』

아니나 다를까, 당신은 마침내 북경루로 자취를 감추었거든. 나미아미타불! 될 대로 다된 일이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손을 들고 있었오.

오늘 석운이가 겪은 이야기를 상세히 하고 나서

어쨌든 나로서는 실로 좋은 경험을 한 셈이요. 실제로는 여편네를 떼움이 없이 떼운 경험을 샅샅이 했으니까 말이요.

술기운이 휘잉 돌아 석운의 이야기가 다소 조잡해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것도 작가적인 하나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시름없이 상 귀에 앉아 있던 옥영의 눈에서 눈물이 스루루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냐요.

옥영은 넋을 잃고 도리도리를 조용히 하여 보이며

잘못 생각하시면 정말 슬퍼요. 작가적인 성장보다도 저는…… 저는 당신의 인간적인 성장을 좀 더 소중히 여기고 싶어요.

, 글쎄 그런 줄은 알지만……』

작가로서 성공해 주는 것보다는 인간으로서 착실해 주시는 편을 저는 택해요.

, 그건 글쎄 잘 안다니까……』

당신이 후세 만대에 걸친 위대한 작가가 되어 주는 것보다도…… 이 조 그만 가정 속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어 주고 좋은 남편이 되어 주는 편이 나는 훨씬 행복해요.

, 글쎄…… 나 참……』

이런 말을 나는 비로소 하지만……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나를 무척 속된 인간이라고 당신이 경멸할런지는 모르지만 나는 문학이라든가 예술이라든가 하는 세계를 전연 모르는 인간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예술로써 인간을 그르칠 바에는 예술을 버리고 인간을 구하고 싶어요.

알 수 있는 말이요. 눈물을 닦고…… 울긴 왜……』

내가 언제 당신에게 눈물을 흘가분히 보였어요. 나는 좀처럼 울지를 않아요. 그렇지만 오늘 일만은 눈물이 나와서 못 견디겠어요.

그처럼 충격이 강했던가?

저희들의 결혼 생활은 이미 십팔 년이나 됐어요. 그런대도 당신은 아직 나라는 인간을 모르고 있는 것이 슬퍼요.

당신을 의심해서…… 잘못됐어요!

남자들은 자기네가 불순하니까 여자들도 모두 그럴 것처럼 착각을 하는 모양이지만…… 윤리적으로나 생리적으로나 태반의 여자는 그렇지 않을 거예요. 모르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잘 알았오. 미안하오!

아이, 그렇게 말하면 도리어……』

옥영이가 눈물을 씻는데

자아, 악수…… 악수를 해요!

석운의 손길이 밥상 위로 뻗어 갔다.

나 참……』

옥영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고 남편의 손길을 잡다가

아야앗! 좀 가만히……』

아파?

아프지만…… 아픈 만큼 기억에 남아서 좋아요!

이런 것을 가리켜 부부의 애정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눈물 어린 옥영의 미소 하나가 십팔 년 동안, 고락을 나누어 온 공존(共存)의 역사를 아주 간단히 석운으로 하여금 회상케 하고 있었다. 웃음 속에 눈물이 있었고 눈물 속에도 웃음이 있었던 과거야말로 이인삼각(二人三脚)의 거룩한 상부상조의 역사였다.

이제부턴 정말 야쓰데 화분을 소중히 해야겠어요.

스스로를 꾸짖고 반성하기 위하여 한낱 좌우명(座右名)으로서 야쓰데 화분을 사갖고 온 남편의 성의가 눈물겹도록 옥영에게는 고마웠다.

, 소중히 해 줘요.

부드럽게 웃으며 석운은 잔을 들었다.

당신의 마음이 거칠어졌을 때, 나는 열심히 야쓰데 화분을 가꾸겠어 요.

좋은 말이요!

그 순간, 석운은 불현듯 고영림을 생각했다. 입으로 가져가고 있던 술잔 속에서 고영림의 의욕에 불타는 얼굴이 석운을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석운은 한두 번 머리를 휙휙 흔들었다.

술에 무슨 티가 있어요?

옥영은 식탁 너머로 술잔을 바라보았다.

아니……』

석운은 훌쩍 잔을 기울여 술을 마셔 버리며

, 아까 그 학생 말이요. 다방에서 만나자던……』

, 그 학생을 만났었어요?

만났는데…… 거 언젠가, 글을 써 보낸 독자가 있지 않았오?

글을 써 보낸 독자라고…… 어느 사람?

독자로부터 편지를 많이 받기 때문에 옥영은 얼른 짐작이 가지 않았다.

더구나 남편에게 온 편지에는 간섭을 하지 않는 옥영이었다.

작년 가을인가? 왜 내가 읽어 보래서 읽어 본 원고가 있지 않소? 칸나의 의욕이라는……』

, 그 여자에요?

옥영도 생각이 났다.

그때, 옥영은 칸나의 의욕을 읽고 나서 참으로 좋은 소질을 가진 여자라고 칭찬을 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올바르게 인생을 괴로워할 줄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크리스챤 출신인 옥영은 결국에 있어서 신의 섭리를 따른 칸나를 극구 찬양하고 나서

우리들과는 제네레에순이 달라서 세대적인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나와 비슷한 데가 있어요.

나도 그런 생각을 했오. 당신과 같은 데가 있다고…… 그러나 당신은 칸나보다는 무척 조용한 편이요.

세대가 달라서 그럴 거에요.

아니요. 세대도 세대지만…… 결국 성격 문제야. 인생관은 시대의 영향을 받기가 쉽지만 성격은 시대를 추월한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

동감이에요. 얼핏 보면 같은 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많구먼요.

사물을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점은 같은데…… 가만히 따져 보면 다른 점도 많아.

칸나는 나보다 의욕이 강하고 또 표현주의에요.

그렇소. 그래서 당신은 조용해 보이고 칸나는 떠들썩해 보이는 거요.

칸나는 나보다 더 뜨거워요.

맞았오. 당신은 칸나보다 차겁지.

뜨거우면 이내 식어요.

차가우면 이내 더워지지가 않구……』

그대신 더워만 지면 날래 식지도 않을 거에요.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두 사람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 학생이 무슨 용건으로 만나자는 건가요?

지난 이야기를 회상하며 옥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내외간에 비밀을 가져서는 아니된다고, 아까 택시에서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옥영에게 이야기할 생각을 석운은 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고영림의 의욕과 정열을 그대로 고스란히 아내 앞에 털어놓는 것은 도리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좋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석운 자신으로는 별반 탓할만한 행동도 없었는데 공연히 아내의 신경만 건드려 놓는 결과만 될 것 같았다.

진실이 도리어 인간 생활을 좀먹는 경우가 있는 것이라고 석운은 고영림에 관한 이야기를 적당히 조절해서 들려줄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다.

문학 이야기겠죠?

옥영은 이미 앞질러 생각하고 있었다.

, 자기의 원고를 보아 주었다는데 대한 인사를 겸해서 저녁을 샀는데……』

글을 읽어 보면 그만한 예의는 알 법한 학생이에요.

대답이 담백하다. 옥영은 추호도 남편의 말을 의심할 줄을 몰랐다.

그런데 말이요. 미스 헬렌이라고……』

석운은 거기서 결혼 직전, 원산 송도원에서 만났던 한혜련의 이야기를 상세히 하여 간신히 옥영의 기억을 새롭힌 후에 그 한혜련이가 지금은 고영림의 올케라는 말을 하고

가끔 내 이야기를 한다는 거요.

그래요? 참 그런 애가 그때 있었던 것도 같애요.

그런 정도의 호기심 밖에 옥영은 더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고영림이란 그 학생은 당신과 이야기가 어울릴 거에요. 여러 가지 점으로 봐서 당신과 일맥 통할 데가 있음직한 학생 같던데……』

역시 옥영은 그런 점에 더 흥미를 가지는 모양이었다.

, 그만하면 인간은 돼 먹은 학생이야.

저번에 원고와 함께 보내 온 편지를 보면 당신을 극진히 존경한다고 했던데…… 얼마나 존경합디까?

화락한 미소와 함께 옥영의 말이 넌지시 날아왔다.

, 그건 분명히 나를 살금살금 떠 보는 질문인데……』

떠보긴…… 내 언제 당신을 그처럼 못 미더워 했어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지나치게 믿는 건 다소 문제야.

석운의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석운의 마음은 아내의 그러한 믿음 앞에 고 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찍힐 땐 찍혀도 찍힐 때까지는 믿고 살 테에요. 믿는 자를 배반하는 것처럼 큰 죄악은 없다고, 이건 당신의 지론이었으니까.

좋은 말이요.

아내의 믿음이 크면 클수록 유혹에 대한 자기의 저항도 따라서 클 것이라고, 십팔 년 동안의 아내와 세 시간 동안의 고영림을 비교해 보던 자기 자신을 석운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했다.

그 학생이 이제 원고를 가지러 온다니까 한번 만나 봐요. 당신과도 이야기가 맞을 거야.

만나 볼 테에요.

좋은 상대가 될 거야.

그래요?

옥영의 호기심은 차차 커가고 있었다.

아이, 졸려!

주무세요.

식모더러 술상을 치우게 하고 옥영은 남편의 자리를 보아 놓았다.

경숙이가 오늘 밤엔 잠을 못 잘 거에요.

, ……』

옥영은 밖으로 나가고 석운은 자리에 들었다.

술의 양이 다소 지나쳐서 석운은 자꾸만 눈이 감겨졌다. 잠이 들을락말락한 몽롱한 의식 세계에 타오르는 당홍색 칸나꽃이 한 떨기 눈부시게 내려쪼이는 햇볕 속에서 찬연히 꽃피어 있었다.

비밀을 가지는 남편이, 강석운은 마침내 되어 버렸다.

 

 

戀愛散賣業[연애산매업]

 

미스터 송 오늘 뜻하지 않은 돌발사가 생겨서 오늘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따라서 촬영대회는 혼자 다녀오세요. 모델이 예쁘니까 신이 나실 거에요. 그렇지만 그 모델에게는 집의 오빠가 매니저로 항상 따라 다니니까 웬만큼 마력을 내기 전에는 함락이 잘 안 될 거에요. 어쨌든 성공을 빌어요. 미안해요. 즉일 한시 쟈스트. 고영림 송준오씨 앞

호수 다방 전언관에서 송준오(宗準五)는 고영림의 편지를 집어 들고 읽고 있었다.

오늘 두 시부터 한강 백사장에서 열리는 아마추어 촬영 대회의 모델은 한성 양조의 여사무원인 이애리(李愛梨), 대학 이학년까지 다니다가 가정 사정으로 중퇴를 한, 고영림과는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촬영 대회라야 고영림과 이애리를 중심으로 한 몇몇 젊은이들의 사교 파티의 전주곡을 의미하고 있을 뿐, 사진 예술에 대단한 열광자들은 아니었다.

결국 고영림과 이애리가 발산하는 젊음의 향기를 폐부 깊이 호흡해 보려는 남성들이 몇 사람 모인달 뿐이다.

송준오는 작년 가을, 고영림의 사랑을 잃고 독약을 마셨던 바로 그 청년이다. 작년 봄 대학 법과를 마치고 도미(渡美)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고영림이가 못 미더워 유학을 연기하고 있던 중에 음독 사건을 일으켰다.

그 후 송준오는 한 해 겨울 쭉 집에만 처박혀 있다가 이른 봄부터 거리를 나다니는 몸이 되어 영림의 사교 그룹에도 얼굴을 나타냈다.

송준오의 아버지는 모 퇴직 고관으로서 목하 K 은행의 상무이사였다.

한성양조의 고종국 사장과는 상거래도 있고 아들의 그러한 심정에 눈물겨워 하며 고종국 사장에게 누차 정식 혼담을 청해 보았으나 고사장도 딸의 의사를 좌우할 힘이 없었다. 고사장과 아들 고영해(高英海)의 입장으로서는 송준오와 인척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한성양조의 재정적 배경이 견고해지기때문에 될 수만 있으면 그렇게 되기를 절실히 바랬으나 그럴 적마다 영림은 혼담의 동기를 불순하다고 매양 거절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영림이가 송준오를 싫어하는 것도 또한 아니었다.

음독까지를 한 데 대해서는 동정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동정심이 영림의 정열을 전폭적으로 불사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송준오의 어딘가 여성적인 나약한 성격과 몸 매무새가 영림에게는 싫었다.

영림의 편지를 읽으면서 송준오의 해사한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곤색 양복에 모자는 쓰지 않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은 채 레지에게서 종이 한 장을 빌려 신경질적인 조그만 글씨로 송준오는 다음과 같이 써서 전언판에 끼워 놓고 다방을 나섰다.

미쓰 이애리 돌발 사건이 생겨서 촬영 대회에는 참석을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송준오

송준오는 이윽고 다방을 뚜벅뚜벅 나왔다.

그러나 송준오가 열어젖힌 다방 문을 헵번 머리가 하나 홀가분히 들어섰다. 보오얀 회색 투피스의 이애리였다.

왜 나오세요?

, 잠깐……』

송준오는 주저하다가

돌발사건이 생겨서요.

돌발 사건? 무슨 일이 생겼는데요?

글쎄 무슨 일인지…… 나도 잘……』

?

애리는 송준오를 떠밀다시피 하며 다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낯익은 레지를 향하여 물었다.

아직들 안 왔어요?

아까 고영림씨가 와서 편지를 써 놓고 갔어요.

편지?

그러다가 애리는 준오의 표정을 물끄러미 살펴보며 종알거렸다.

알았어! 돌발 사건의 의미를……』

준오는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준오씬 종시 안 갈 테야?

글쎄 돌발 사건이 생겨서……』

영림이가 없음 사진도 못 찍어?

그러다가 애리는 전언판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하고 쪽지를 뺐다. 읽고 나자 애리는 쭉쭉 찢어 버리며

, 세기적 싱검둥이라니까!

매서운 눈으로 애리는 핼끔 준오를 흘기고 나서

미안하지만 나 종이 하나 주세요.

레지는 웃으며 종이를 내주었다.

고전무님 오늘 갑자기 피치 못할 돌발 사건이 생겨서 촬영 대회에는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황송하리 만큼 미안해요. 그 대신 내일은 세 번만 더 웃어 드리겠어요. 바이바이! 애리가 정성껏 씀

겉에다 고영해 이름을 쓰고 전언판에 꽂아 놓았다.

애리를 바라보며 준오는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자아, 이제 나가요. 나도 돌발 사건이 생겼어!

애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준오의 등을 떠밀었다.

모델이 가지 않으면 돼?

모델에게는 돌발 사건이 생김 안된대?

나 참……』

애리는 레지를 향하여

고전무가 오셔도 암말 말아야 해요.

네 네, 염려 마세요.

레지는 웃으면서 두 사람에게 눈 전송을 했다.

내일은 세 번만 더 웃어 드린다고 쓰던 데…… 거 무슨 말이요?

다동 골목을 거리로 빠져나가면서 준오는 물었다.

, 그거 말이요? 호호호……』

애리는 카들카들 웃고 나서

들어봄 아주 간단한 이야기야. 고전무가 말이에요. 최소한 하루에 다섯 번만 웃어 달라는 거야.

자기보구?

, 그래. 오늘은 미안도 하구 해서 내일부터는 세 번만 더 웃어 줄 테야.

세 번을 더 웃어 주면 그만큼 봉급도 올라가겠군.

다른 사원들과의 비율도 있으니까 봉급은 못 올라가지만 보이지 않는 보너스가 가끔 나온대요.

그것야 말로 웃음을 파는 거로군.

웃음쯤 팔아서 보너스가 두둑히 나옴 오죽 땡이야.

여자란 참 좋은 밑천을 갖고 있어!

그러니까 남자 본위인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거지 뭐야? 주먹다짐을 못 하는 대신에 웃음으로 해 보도록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거 아냐?

!

준오는 코웃음을 쳤다.

따지고 봄 그렇지 뭐야? 준오 씨는 팔자가 좋으니까 코 구멍에서 흥 소리가 튀어나오지만…… 삼만 환 남짓한 월급으로 여섯 식구가 한 달 동안을 살아 나가겠어?

『…………』

웃음쯤으로 여섯 식구가 살아가고 동생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준오씨와 같은 순정파로선 상상도 못 할 거야.

준오는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애리를 이해는 하면서도 그러한 애리에 동감을 하기에 송준오의 사회적인 시달림이 너무나 박약했다.

여성들의 웃음이 팔린다는 사실을 나는 조물주에게 감사히 생각해요.

그렇지 않았음 우리 여섯 식구는 벌써 거덜이 났게?

웃음을 파는 여자!

그런 생각으로 애리를 바라보니, 이해는 가면서도 먼저 경멸의 정이 앞장을 섰다.

웃음을 팔기에는 마침한 몸매였다. 짧막이 커트를 한 헵번 헤어에 얄싸하고 갸름한 얼굴이 요사스럽도록 야실야실했고 하이힐 위에 얹혀진 날씬한 아랫도리를 몬로 타이트가 팽팽하게 감싸고 있었다.

애리가 송준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준오가 음독 사건을 일으킨 후부터의 일이었다.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실연 자살을 한담?

먹고 살기에도 바쁜 이 시대에 한가스레 독약을 마시고 꿈틀거리던 송준오를 상상하고 애리는 코웃음을 쳤다.

, 그래? 싫음 그만두려므나. 여자가 너 하나뿐이더냐? 한 남자 앞에 세 추럭 반이야, 세 추럭 반!

그랬음 되지 않느냐고, 애리는 위로 절반 경멸 절반의 감정을 가지고 준오에게 타이른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 동키호테와도 같이 시대착오적인 송준오의 순정이 주옥같이 소중하기도 해서 송준오를 끈기 있게 애리는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어딜 가는 거요?

을지로 입구에서 송준오는 걸음을 멈추었다.

돌발 사건이 생겼담서? 영림이한테 전화 걸어 줘?

웃지도 않는 새침한 얼굴이다.

참 애리씨도 돌발 사건이 생겼다면서?

준오는 웃으면서 말했다.

생겼어, 중대한 돌발 사건! 연애보다도 더 중대한 사건이야.

그게 뭔데?

인간 생사에 관한 문제야. 그대 화폐는 가졌겠지?

화폐?

돈 말이야, ! 돈이란 말은 이미 속될 대로 속돼 먹어서 입에 담기도 싫어. 그런 쾨쾨묵은 봉건적 관념에 비함 얼마나 신선해요! 가졌지, 화폐?

, 약간은……』

그럼 청춘사업 좀 해 봐요.

무엇을 해요?

아이구, 일일이 번역을 해 바쳐야만 하니, 이건 스틱 걸이 아니고 모름지기 콘사이쓰 대용품인걸

애리를 대하면 말문이 자꾸만 막힌다. 얼른 이해되지 않는 말을 애리는 곧잘 썼다.

어서 좀 번역을 해봐요.

애리가 만일 고사리나 올드미스처럼 새들새들 말라 빠졌담 일종의 사회사업이 되겠지만 말이야. 오월 하늘 밑에 청청히 푸른 신록(新綠)처럼 애리는 단물이 뚝뚝 흘러! 물 한 방울이라도 얻어먹고 싶음 어서 어서 청춘사업을 많이 해 둬야지! 아이, 시장해! 빨리 점심 사요.

애리는 배를 움켜쥐며 요사스레 웃었다.

참 애리씨는 못하는 말이 없어!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지만 그러한 애리가 귀엽기도 했다.

글쎄 생사에 관한 일이라니까! 전무님만 모시고 왔음 중국 요리는 문제가 없었는데……』

준오는 웃으면서 다시금 명동 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는데

, 마침 저기 보이는구먼! 아서원 간판이……』

애리는 앞장을 서서 이미 그리로 또박또박 걸어가고 있었다.

팔자가 늘어진 실연 자살 미수자의 눈에는 거렁뱅이의 창자를 십여 개 빌려 갖고 온 줄로 알 거예요! 호호호……』

호들갑스럽게 웃어 대며 홱 애리는 돌아섰다. 돌아서서 눈 한쪽을 살며시 감아 보이며

어때? 이만함 몬로나 헵프번이 왔다가 울고 가겠지?

준오는 웃으면서

웃고 갈는지 누가 알아?

, 비트는 말이겠지만…… 이편에서 그대를 비틀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대의 순정이 지나치게 지극해!

뭘 잡수셔요?

아서원 이층 걸상 방에 둘이가 마주 앉는데 차 두 잔을 따라 놓으며 보이는 물었다.

냉채 하나, 나조기 하나, 양잠피 잡채 하나, 그리고는 맥주!

애리는 외듯이 단숨에 음식을 청했다.

네네.

보이는 물러가고 애리는 준오를 향하여 방긋 웃어 보였다.

이제 그만 웃어요. 웃음 값을 청구해 오는 날에는 화폐 부족이야.

송준오도 차차 유쾌해졌다.

염려 말아요. 그건 준오씨가 베풀어 주는 청춘사업에 대한 댓가로서 지불되고 있는 거니까요.

점심 한 끼에 웃음이 몇 번인고?

점심 나름에 달렸어. 설렁탕 한 그릇도 점심은 점심이니까……』

차 한 잔 살 때는 어떻게 해요?

가만히 앉아서 마셔만 줌 되지.

그런 때는 주지 않는가요?

웃음 미찌게?

그래서 두 사람은 또 한바탕 웃어 댔다.

애리씨, 이제 정말 그만 웃어요. 웃음이 과불(過拂) 되는 날에는 수지 계산이 안 맞을 테니까.

아냐. 이건 나 자신의 생리적 요구에 의해서 웃는 거니까 화폐 가치로의 웃음과는 별도 계산을 해야만 되는 거야.

셈이 아주 밝군요!

현대 여성치고 셈 어두운 사람 봤어? 겉으로는 얌전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모두들 호박씨를 까고 있는 거야. 탁 터놓은 만큼 나는 승부가 정정당당하지만…… , 그저 보기만 해서는 얼굴이 보살처럼 얌전해 보이지! 마리아처럼 순결해 보이구……』

참 애리씨는 유쾌해!

준오는 감심을 했다.

유쾌하지! 영림의 생각 같은 건 아득해졌지?

사실 준오는 영림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빙그레 웃었다.

웃지만 말고 그럼 그렇다고 솔직히 말해 봐요. 도대체 영림의 어디가 좋다는 말이야? 아이구, 그 지긋지긋한 심각파!

그러면서도 애리는 그 야실야실한 얼굴을 갸웃하고 조금 수그리며 눈꼬리 웃음을 곱게 웃어 왔다.

준오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 여성으로서의 요염한 매혹은 영림보다 애리가 월등하게 짙었다. 준오는 그러한 생리적인 가슴의 흔들거림을 억제하면서

애리씨 그 웃음은 뭐요? 계산에 드는 거요?

암 들지! 상품용이니까, 계산에 넣지 않음 수지가 안 맞아.

상담한 상품인걸!

그만 함 화폐 가치 있어 봬?

우등품이야!

마음에 들었음 됐어!

?

점심값 지불은 그걸로써 청산이 됐다는 말이에요. 호호홋……』

그러는데 요리가 들어왔다.

참 고마운 일이지 뭐야. 웃음 하나로써 이런 산해진미가 수월히 입속으로 들어온다는 건 참으로 신령하신 조물주의 거룩한 혜택일 수밖에…… 』

그리고는 맥주를 준오의 잔에다 따라 주며

자아,, 변변치 않은 음식이지만 많이 들어요. 웃음을 팔아서 한 턱 하는 점심이에요.

헤에?

사양할 것 없어. 얻어먹기가 미안하면 다음엔 준오씨가 저녁을 사면 되잖아?

맥주도 몇 잔 수월히 마셨지마는 애리는 참으로 맛있게 식사를 했다.

고전무님 지금쯤은 푸푸하면서 또 어느 접대부를 끼고 낮술을 마시노.

고전무한테 빚을 많이 지고 있는 모양이군요.

맥주 몇 잔에 준오도 얼근해졌다.

아냐, 나는 나대로 빚을 죄 청산했는데 고전무가 아마도 계산을 잘못하고 있는가 봐. 워낙 사업가란 욕심이 많아서 이자에다 또 이자를 붙이는 복리 계산법을 사용하는 모양이야.

웃음만 가지고는 청산이 잘 안되는 모양이지.

손목 몇 번 잡히어 주었어.

준오는 웃으며

순목은 웃음보다 비쌀 거 아니요?

그러기에 말이야. 게다가 덤꺼정 주었는데……』

덤이라니……』

손등에 입술을 갖다 대기에 내버려 두었어.

, 하하핫……』

그러한 애리를 마음속으로서는 경멸을 하면서도 송준오는 술기운과 함께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한 마디 한 마디에 도발과 유혹을 당하고 있었다.

그따위 덤쯤으로는 고전무의 계산이 맞지가 않는 모양 아니요?

그러기에 말이야. 양복 한 벌쯤 입혀 놓고 으시대는 걸 봄 가관이라니까!

양복?

이거 말야, 이거!

애리는 자기가 입고 있는 회색 양복을 턱으로 가리켰다.

, 그것도 웃음의 댓간가?

손못의 댓가라니까……』

거 괜찮은 장산 걸! 손등에다 입 한 번 갖다 대게 하면 말쑥한 양복이 한 벌!

그래서 하는 말이야. 생각함 신통하기 짝이 없다니까 글쎄. 사내자식들은 도대체 어떻게 돼 먹어 준 동물인지 알 수가 없어.

참 알 수 없는 동물이야!

준오는 동감을 했다.

요즈음 그럴 듯하니 차리고 나다니는 여자들을 가만히 봄 태반이 다 비슷비슷한 연애의 산매업자(散賣業者)들이야.

연애의 산매?

독약만 마실 줄 알았지, 세상 물정에는 깜깜이로구먼!

깜깜이니까 독약을 마셨겠지.

정신 좀 똑똑히 차리고 독약 살 돈으로 이제부턴 점심이나 가끔 사요.

점잖음 점잖은 대로, 야하면 야한 대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기의 애정을 가장 비싸게 팔아 보려고 이 손님 저 손님을 살금살금 건드려 보는 거지, 뭐야? 건드려 보는 데서 구두도 생기고 핸드빽도 생기고 차 한 잔 점심 한 그릇, 영화관이나 음악회, 심지어는 십오 환 짜리 전차 표까지 공짜로 생기게 되니, 여자들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야.

그러고 보면 남자로 태어난 게 불행인걸.

말해서 뭘 해! 괜히 척하고 싶은 여성들은 남성들의 횡포니 뭐니 하고들 떠들어 대고 있지만 생각함 남자들이야 말로 불쌍한 동물들이야. 잘난 놈 못난 놈 할 것 없이 모두들 여자 앞에서는 히쭉히쭉 까불까불이지. 부처님도 여자 앞에선 웃는다면서?

하하하핫……』

그러나 준오는 다음 순간, 웃음을 갑자기 거두고 나조기를 집으러 오는 애리의 손가락 둘을 무심중 잡았다.

나릇나릇한 두 손가락이었다.

애리의 고개가 후딱 들리며 준오의 순정을 삼켜 버리려는 듯이 눈꼬리 웃음이 달려왔다.

별안간 이게 뭐야?

손가락 둘을 잡힌 채 애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빨간 매니큐어가 준오의 손아귀 속에서 알린알린 꽃피어 있었다. 독사의 대강이처럼 세모난 손톱이 애리의 일면을 상징하는 것 같아서 다소 꺼림찍도 했지만 그만큼 스릴도 있었다.

애리, 나는 완전히 영림을 잊어먹고 있어!

준오의 스물다섯 살이 혈관 속에서 꿈틀꿈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영림이와 애리가 무슨 관련성이 있다는 거야?

준오가 마침내 들떠 왔다. 애리는 적지 않게 그것을 기뻐했지마는 일단은 젖혀 봐야만 애정의 댓가는 오르는 것이다.

영림이 때문에 애리가 빛을 냈다는 거야?

아니야! 애리를 좀 더 먼저 사귀지 못한 것을 탓할 뿐이야.

어쨌든 이 손가락 놓고 말해요. 이럼 수지 계산이 들어맞지가 않아. 점심값은 아까 다 청산을 하지 않았어?

애리!

준호는 손가락을 잡은 채 훌쩍 일어났다.

이건 분명히 과불이야. 이러다간 장사 밑천 들어먹을라!

준호는 애리의 곁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자 애리의 손등에 입술을 비볐다.

아냐, 아냐! 이건 분명히 양복 한 벌 값인데……』

애리는 걸상에서 일어서며 손을 빼려 했으나 힘으로 대항하기에는 애리의 손길이 지나치게 나릇나릇했다.

애리, 인제부턴 나를 사랑해 줘요!

손등에다 입을 대며 준오는 우울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사랑이라고……… 어떡허는 게 사랑이지?

애리는 일종의 요부다! 요부지만 나는 좋아졌어!

아이구, 대접에 치어서 숨도 못 쉬겠네요.

애리!

순진한 사람일수록 격하기가 쉽다. 준오는 와락 달려들어 애리의 두 어깨를 안아 오며

나만을…… 나만을 사랑해 줘요!

그런 소릴 하니까 레코드가 팔리는 거야. 요즈음 잘 팔리는 왈츠가 있잖아? 나 하나의 사랑」……』

나는 애리의 웃음을 살 테야! 애리의 전부를 살 테야!

무섭게 육박해 오는 준오의 얼굴을 애리는 들고 있던 나무젓가락 두 개로 살짝 방패를 삼으며 상반신을 뒤로 반뜻 젖혔다. 침침한 어조로

안돼!

어째 안되는 거야?

입술은 비매품(非賣品)이야!

누구한테도 비매품이야?

그건 상업상 비밀이니까 말할 수 없어.

준오는 입 언저리가 쭝긋쭝긋 경련을 했다. 타오르는 눈초리로 애리를 쏘아보며

고전무한테는 팔았겠지?

순간, 애리의 눈꼬리가 발끈 치켜지며

팔았음 어때?……』

토라진 한 마디가 총알처럼 튕겨 나왔다.

나한텐 왜 못 파는 거야?

그대한텐 안 팔아! 절대 안 팔아!

고전무보다 값비싼 댓가를 지불하면 되지 않아?

어쨌다구?

애리는 외치자 들었던 두 개의 젓가락으로 준오의 뺨따귀를 호되게 내갈겼다. 한번…… 두 번…… 세 번……

준오는 탁 애리의 몸뚱이를 놓았다.

젓가락 두 개가 준오의 면상을 향하여 날아갔다. 애리는 핸드백을 들었다.

, 애리! 애리씨!

그러나 애리는 이미 한 쪽 어깨로 날카롭게 문을 떠밀어 젖히고 돌팔매 하듯이 복도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장사아치에게도 순정은 있는 것이라고, 자기의 순정을 남과 같이 돈으로 사러 드는 준오가 그지없이 원망스러워 애리의 입술이 마침내 비쭉비쭉 일그러졌다. 눈물이 글썽거려 층계가 희뿌옇게 뭉그러져 있었다. 계단 하나를 헛짚어 하이힐이 퉁그러지면서 몬로 타이트의 솔기가 두 치나 터져 나갔다.

 

 

肉體派群像[육체파군상]

 

한성 양조는 노량진에 있었다. 넓은 대지에 양조 공장이 기다라니 서 있었고 커다란 창고 안에는 청주백부용(白芙蓉)을 비롯하여 사오종의 렛텔을 달리하는 술궤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백부용은 해방 직후부터 질이 좋다는 평판을 받고 있는 술로서 고종국 씨가 이 양조소를 떠맡게 된 것은 일사 후퇴로 부산에 피난을 갔던 무렵이었다.

사변으로 말미암아 공장 시설을 하나도 옮기지 못하고 적치하에 남겨 두고 온 전 경영자가 전국 여하에 불안을 느끼고 내버리다시피 한 싸디싼 가격으로 고종국 씨에게 넘겨 버린 것은 서울 재수복 직전의 일이었다.

재수복이 되기가 바쁘게 고종국 씨는 아들 고영해와 함께 노량진 공장을 시찰하고 시설이 거지반 그대로 남아 있는 사실을 알았다. 포탄으로 말미암아 공장 한구석이 파괴되었을 뿐 양조용 기재가 전쟁에는 불필요했던 사실을 은근히 축복하였다.

그동안 고종국 씨 부자는 파괴된 부분과 기재를 충분히 마련해 놓고 있다 가 칠이칠 휴전 협정이 되기가 바쁘게 대지급으로 양조를 시작하였다. 백부용은 날개가 돋힌 듯이 팔렸다. 한때는 미처 뒤를 대지 못하여 채 익지도 않은 신주를 내서 신용을 떨어뜨린 적도 있었지마는 그때는 또 그때대로 렛텔을 달리하여 다른 이름으로 내서 팔았다. 그러는 동안에 백부용은 다시 신용을 회복하게 되어 무서운 기세로 방방곡곡으로 파고 들어갔다.

여자는 양귀비, 술은 백부용!이런 광고가 매일처럼 신문지 몇 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광고문은 고사장 자신이 창안한 것으로서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백부용을 마시는 것이 인간 최대의 행복이라는, 고사장 자신의 인생 철학을 광고문에다 삽입하였다.

이 광고문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고, 고사장의 술친구들은 극구 찬양을 하였다.

뭐니 뭐니 해도 별 것 없어! 그게 제일이지, 제일이야! 자고로 하는 말 이 팔 고비를 베고 물한 표주박 마셔도 낙이라고 했지만, 돼먹지 않은 소리 야. 그런 쓸데없는 허세 때문에 인간은 참된 행복을 놓쳐 버리고 말거든. 그대 성현 군자들 말 좀 해보라니까. 글쎄 양귀비의 보드러운 무릎이 그래 뼈대가 딱딱 맞치는 팔 고비보다 못해? 백부용의 방염한 향기가 맹물보다 못해?

친구들 중에서도 양심이니 교양이니 도덕이니 문화니 하는 따위의 위인들을 일부러 청해놓고는 백부용을 먹여 가면서 그런 말을 고사장은 일쑤 잘했다.

그러한 고사장이 지금 이 층 사장실 팔걸이 교의에 반석같이 파묻혀 인접한 사무실로 통하는 여닫이문을 활짝 열어 놓고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이즈음 고사장은 이 여닫이문을 곧잘 열어 놓는다. 이유는 사무원들의 집무 태도를 보살핀다는데 있었지마는 고사장의 팔걸이 교의와 이애리의 사무 탁이 문을 통과하는 일직선 위에 위치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만지지는 못해도 보는 것쯤이야 어떨라구?

눈요기만으로도 고사장은 어지간히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만큼 고사장은 늙음에의 자각이 뼈에 사무쳐 왔다.

책꽃이에서 장부를 뽑아 쥐던 애리가 이편을 무심중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그머니 숙이며 해쭉 꽃웃음을 보내 왔다.

고사장의 시선이 당황을 하다가 허쭉 맞웃음을 웃었다.

분명히 나를 싫어하지는 않는 모양인데……』

공장은 내놓고 사무원만 이십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여사무원이 애리까지 넷, 애리는 선전부 책임자라는 명목을 갖고 있었으나 고전무의 비서역으로 서 더 많이 자질구레한 일을 보아 주고 있었다.

고사장이 여닫이문을 가끔 열어 놓기 시작한 것은 저번 벚꽃이 한창이던 무렵, 수도극장 앞 북경루에서 강교수 부자를 만난 이후부터의 일이었다.

수도극장 앞에서 소설가 강석운에게 색시 집에를 가자고 했을 때, 강석운은 여학생과 만날 약속이 있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그때의 강석운의 한 마디가 고사장의 가슴에 뭉클하고 왔다. 황산옥이나 술집 아가씨들만 주물고 있던 고사장의 격을 건드리는 것만 같아서 여학생에게 대한 식욕이 부쩍 났다.

외도에도 일종의 권위가 있는 것이라고, 접대부들만 건드리고 돌아간 자기의 이력서가 갑자기 빈약하게 여겨졌다. 용모가 좋고 교양이 있고 나이가 젊은 상대일수록 정복의 가치가 있고 권위가 서는 것이라고, 더 늙어서 허리를 못 펴기 전에 어서어서 이력서의 한 대목을 훌륭하게 빛내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연령의 차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권위가 설 것 같았다. 육십의 늙음을 가지고 이십대의 젊음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은 소박한 인간 욕망의 최대의 것인 동시에 생명력의 순수한 환희를 의미하고 있었다. 그것은 되살아 온 청춘을 보증하는 동시에 시들어가는 생명을 위한 보혈제이기도 하였다.

나는 아직 늙지 않았다!

이렇게 호통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늙음의 추격(追擊)을 받고 있다는 서글픈 발버둥이기는 하지마는 그 발버둥질, 그 몸부림이야말로 단두대 위에 올라선 사형수의 그것과도 같이 처참하고도 진지한 생명력의 절규를 의미하고 있다.

애리는 여학생이 아니지마는 이년 전까지도 자기 딸 영림이와 동창이던 사실을 생각하면 여학생이나 별반 다름이 없었다.

생글생글 웃기도 잘하고 차분차분 달라붙기도 잘하고 애리를 생각할 때, 고사장은 자기의 공상이 전연 불가능한 일만 같지는 않았다.

시선이 또 마주쳤다. 이번에는 고사장이 먼저 싱긋이 웃어보였다. 애리도 또 생긋이 웃어 왔다.

아이구, 고년 사람 잡겠다!

애리의 그 야들야들한 웃음이 총알처럼 심장에 왔다. 젊었을 시절에 느끼던 몇 갑절의 성능(性能)을 지니고 심장을 흔들어 왔다. 심장의 흔들림은 다음 순간, 격렬한 진저리로 변하며 고사장의 심신의 감미롭게 쳐 왔다.

이게 암만해도 내가 불량해서 그런지 모를 일이야.

고사장은 불현듯 옆집에 사는 강학선 교수를 생각했다.

강교수는 수양을 많이 쌓은 위인이니까 자기처럼 이렇듯 감미로운 진저리는 느끼지 않을런지 모른다고, 언제 한 번 기회가 있는 대로 강교수의 솔직한 술회가 듣고 싶어졌다.

고 야들야들한 웃음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다소의 명예와 체면과 그리고 생명과 전 재산을 포기해도 아깝지가 않을 성싶었다.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라고, 옛날 사람들은 좋은 말만 골라서 했거든!

고사장은 진심으로 감심을 하며

인생의 황혼이다! 아주 어둡기 전에…… 채 밤이 오기 전에……』

죽어서 한 줌 황토가 되면 그만이 아니냐고, 인생 최후의 도박을 고사장은 꿈꾸기 시작하였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애리는 끈기있게 고사장을 위하여 꽃다운 웃음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애리는 고사장을 위해서만 웃는 것은 아니었다. 고전무를 위해서도 같은 종류의 상품을 발송하고 있었다.

고전무는 애리와 같은 사무실 안에 있었다. 사장실로 통하는 여닫이문과 남쪽 한길에 면한 들창 사이에 커다란 사무탁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나이는 삼십 오륙세, 안경을 끼고 코 밑에 챠푸린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이 수염은 아버지 고 사장이 기르래서 기른 수염이다.

나이 어려 보이면 한 수 깍이고 들어가는 거야. 장사아치의 눈은 매 눈보다도 밝다는 걸 알아야 해.

사실 수염을 길러 놓고 보니 누구나가 다 사십 대의 듬직한 신사로 보아 주고 있었다. 유들유들한 얼굴이었다.

담배를 붙여 든 엄지손가락으로 챠푸린 수염을 건드려 보면서 계산서에다 주문 전표와 출고(出庫) 전표를 끼워 가지고 온 젊은 사원을 앞에 세워 놓고 도장을 찍어 결재를 했다.

젊은 사원이 물러가기가 바쁘게 고전무는 엄지손가락으로 연방 수염을 건드리면서 맞은편 쪽에 앉아 있는 애리를 바라보며 싱긋이 눈 하나를 감아 보였다.

애리도 똑같이 눈 하나를 야실야실 감아 보였다.

저번 촬영대횟날 돌발 사건으로 말미암아 고전무를 따버리고 송준오와 행동을 같이 한 이후부터 웃음 세 번을 더 웃어 줌으로써 애리는 책임을 면제가 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으나 고전무의 노여움이 워낙 컸었기 때문에 눈 하나를 감아 보이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와서는 선전부 책임자로서의 임무보다도 더 사무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고전무의 노여움이 클 밖에 없었던 것도 또한 무리는 아니었다. 그날, 아서원 골목으로 접어 들어가고 있는 애리와 송준오의 뒷모습을 회사용 지프 차 안에서 고전무는 보았다. 부를까 하였으나 점심 요기를 하고 곧 올 것만 같았기에 곧장 다방으로 달려가 보았더니만 애리의 편지가 돌발 사건을 고하고 있었다.

이튿날, 고전무는 통 애리의 웃음에 호응해 오지를 않았다. 웃음을 웃어 주어도 본체만체, 엄지손가락으로 챠푸린 수염만 못살게 건드리며 푸푸 담배 연기만 호기 있게 내뿜고 있었다.

그 이튿날도 그랬고, 또 그다음 날도 그랬다.

그러한 고전무가 애리에게는 다소 걱정이 되고 있었다. 웃음이 도시 팔리지가 않는다. 웃음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생사에 관한 문제라고 단골 손님을 놓친다는 것은 풋나기 장삿군이 하는 짓이다.

그런 줄을 뻔히 알고는 있으면서도 팔리지 않는 웃음을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좀 더 실속 있는 상품을 만들어 보려고 애리는 전에 비하여 갑절이나 짙은 웃음을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고전무는 표정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애리는 하는 수 없이 고객의 범위를 확장하여 고사장에게 웃음을 발송하는 한편 고전무에게는 딴 상품을 팔아 보기로 했다.

눈 하나를 감아 보이는 상품이 마침내 팔렸다. 그날 저녁, 고전무는 똑같은 아서원에서 저녁을 샀다.

순진한 송군을 유혹하면 안 돼. 송군은 결국 영림의 사람이야.

상품의 독점욕이 드디어 질투로서 노골화했던 것이다.

애리의 왼편 쪽으로 비스듬히 장부계의 유현자(兪賢子)가 앉아 있었다. 도틈도틈한 얼굴에 까무죽죽하고도 발가우리한 철색 피부를 가진, 애리와 동년배의 여사무원이었다.

퍼머의 웨이브가 요즈음에 와서 갑자기 희한해졌고 거무죽죽하던 철 늦은 투피스가 어느덧 안개가 보오얗게 돋은 크림색 후레야 양복으로 변해 있었다.

현자도 웃음을 판 게로군.

새 양복을 입고 나온 날 애리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누구한테 팔았을까?

그런 눈치로 며칠을 지내보니 손님은 틀림없는 고전무님이었다. 고전무의 이상야릇한 눈짓이 연방 뻗어갔고 그럴 적마다 유현자는 얼굴을 붉히며 장부로 병풍을 치곤했다.

모두들 장사를 펴 놓았군. 무슨 상품을 팔았을까?

모르긴 모르지만 얼굴을 붉히며 장부 병풍을 치는 폼이 암만해도 웃음만 판 것 같지는 분명코 않다. 잘못하면 밑천까지 들어먹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스타크(在庫[재고]) 없는 상인의 말로를 애리는 걱정하고 있었다.

바로 그 유현자가 장부에다 전표 나부랑이를 끼워가지고 고전무 앞으로 하느적 하느적 걸어갔다. 공손히 아주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결재를 받기 위하여 장부를 고전무 앞에 내놓았다.

일상은 여자의 얼굴만 보면 히쭉거리던 고전무가 예외 없는 일로 쳐다도 보지 않고 무뚝뚝했다.

어쩌나 보자고 애리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열심히 선전문을 연구하는 체하면서 찢어지도록 시선을 치켜 이마를 짚은 손가락 사이로 고양이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장부와 전표에 결재 도장을 말 없이 찍다가 고전무는 후딱 손을 멈추며 전 표 한 장을 들여다 보며 얼른 구겨서 주머니에 쑥 쓸어 넣었다. 그리고는 힐끔 애리 편을 바라보고 나서 장부와 전표를 도로 집으려는 유현자의 손등에다 들고 있던 도장을 톡 하고 한 번 찍어 주었다.

애리는 쿡하고 웃었으나 소리를 낼 수가 도시 없다. 이윽고 머리를 드니 고전무는 엄지손가락으로 수염을 건드리며 점잖게 시치미를 뗐고 제자리에 되돌아온 유현자는 전표를 정리하면서 얌전하게 시치미를 뗐다.

상업술도 진보를 하는 것이라고, 백부용판매에만 소용되는 줄로 알았더니 연애 판매에도 전표가 필요했다. 거기 대한 결제 도장은 손등에 찍어야만 한다는 것도 오늘이야 애리는 납득이 되었다.

단골손님을 빼앗기면 파리나 날리고 있는 신세가 되겠기에 어떡하나 보자고, 한참 후에 애리도 일어섰다.

이래서 월급장이 노릇을 하면 사람을 버린다고 좋건 싫건 자질구레한 데까지 동료들과 비교가 되어지고 있는 자기 자신의 화폐 가치가 애리의 자존심을 극도로 서글프게 하였으나 이런 종류의 경영주나 상사들 앞에서 인간의 가치를 주장한다는 것은 너무나 철딱서니 없는 노릇이기에 애리는 서슴치 않고 자리를 일어서서 고전무 앞으로 토라지게 걸어갔다.

애리의 손에는 결재 용지와 함께 선전도안(圖案)이 잡혀져 있었다.

이번 초하(初夏)의 선전은 이렇게 한 번 해봤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러면서 도안을 내놓았으나 고전무는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애리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거 양복 멋진 걸! 몬로 스타일!

고전무 자신의 화폐로 만들어진 애리의 양복을 고전무는 지금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어서 결재해 주세요. 좋지 않으시담 다시 만들어 가지고 오겠어요.

그러나 전무 고영해는 그냥 딴소리만 했다.

암만 봐도 멋진 양복이야. 몬로 스카아트에는 곡선미가 풍부해서 멋지다니까!

동료들이 하하 웃었다.

웃음쯤 문제가 아니지만 애리는 다소 귀찮아져서

멋지지 않음 수지가 맞겠어요?

?

손등이 닳도록 힘늘여 번 화폐로 만들었는데……』

순간, 고전무는 당황한 표정으로

손바닥이 닳도록이겠지! 말이란 너무 빨리하면 실수가 많아

아냐요. 분명히 손등이었어요!

했다. 어지간한 고전무도 적지 않게 겸연쩍은 얼굴로

손등으로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여기 있잖아요?

으음, 손등이건 손바닥이건 어쨌든 양복만은 멋져!

그렇게 얼버무리며 애리의 손등에서 모닥불이 일도록 비벼대던 자기의 입술을 뻐억 고전무는 쓸어내렸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를 동료들은 알 까닭이 없다. 그것을 고영해는 다행으로 여기며 비로소 선전도안을 펴놓고 시선을 던졌다.

던지다가 고영해는 문득 만년필을 꺼내 들며

이건 이렇게 고치는 게 좋지 않아?

하고 커다란 소리로 중얼거리며 탁상일기 한 장을 뜯어내 가지고 다음과 같이 썼다.

애리, 정말 그러기야? 두고 봐!애리는 웃었다. 웃으면서 만년필을 뺏어 들고 썼다.

두고 봐야 또 손등에다 모닥불을 피시겠지.고영해가 또 썼다.

이번에는 손등만 가지고는 잘 안 될 걸.애리가 또 썼다.

상품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가격은 균일하지 않읍니다.고영해는 히쭉히 웃으며 지극히 음탕한 시선을 들어 애리를 쳐다보았다.

애리는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전무님 이번 도안은 그럴 듯 하죠?

응 잘했어.

아직 들여다보지도 않고 고영해는 잘 됐다고 소리 내어 칭찬하면서 비로소 도안에 시선을 던졌다.

?

광고문보다 먼저 도안이 눈에 띄었다.

벌거벗은 마리린 몬로가 실크해트를 쓰고 다리 하나를 번쩍 쳐들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영화 잡지에서 도려낸 것이었다. 배경은 캬바레, 바아텐이 뒤에서 소반에다 술병을 올려놓고 서 있었다. 그 술병의 렛텔을 애리는 백부용으로 고쳐 놓고 있었다.

한쪽 손으로 허리를 끼고 다리 하나를 공중으로 쳐들은 몬로의 다른 한쪽 손이 앞으로 쭉 뻗어 있었다. 그 뻗어 있는 몬로의 손에다 술이 철철 쏟아져 나오는 백부용병을 애리는 그려 넣었다. 그 밑에서 술잔을 하나씩 들고 쏟아지는 술병을 받으려는 청년, 장년, 노년의 신사를 여남은 명 그려 놓았다. 미술과를 다니다 중퇴한 애리로서는 그만 쯤의 회화는 문제가 없었 다. 선전부에 취직이 된 것도 그만한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어!

고영해는 감심을 하며

『…여자는 몬로, 술은 백부용……』

그러한 간단한 광고문이 도안 맨 위에 가로 씌어져 있었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였다.

양귀비가 몬로로 변한 대담한 선전도안이었다.

어때요? 그만함 선전 효과는 백 퍼센트죠?

고전무는 표정을 빤히 바라보면서 애리는 물었다.

음 확실히 독창적이야!

벌거벗은 육체파 여우 몬로의 요염한 사지가 발산하는 꿈틀거림을 안주로 하여 백부용의 방순(芳醇)한 향취에 도연히 취해 보고 싶다는 것은 확실히 애주가들의 구미를 자극하는 최대의 꿈인 것이라고, 고영해는 생리를 달리하는 한낱 여성인 애리가 그것을 명확히 지적해 온 그 센스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애리의 감각은 확실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영해는 동시에 몬로 타이트로 팽팽하게 감싸진 애리의 꿈틀거리는 육체의 도발을 받고 있었다.

포스타 용이로군.

신문이나 잡지에도 무방하죠.

아주 기발한 광고 도안이지만 양귀비를 몬로로 고친다는 대목은 사장의 결재가 필요한걸. 양귀비는 사장의 영원한 애인이야.

육체파 여성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육체파 신사라는 말은 금시초문인 걸.

호호호홋……』

애리는 웃고 나서

육체파 신사를 모르세요?

모르겠어, 어떤 종류의 신산가?

전무님 같으신 분!

?

고영해는 히쭉 웃으며

내가 그처럼 육체미가 풍부한가?

오해하셨군요.

?

잠든 시간만 빼놓고는 진종일 돈벌이 생각과 여자의 육체만 상상하는 신사를 두고 하는 말이에요.

, 잠든 시간만 빼놓군.

웬간한 고전무도 얼굴이 붉는다.

우등생인 육체파 신사는 잠든 시간도 빼놓지 않는다면서요?

무슨 말이야?

그런 종류의 꿈만 꾼다면서요?

어지간한 애리도 음성을 낮추었기 때문에 동료들의 고막은 흔들리지 않았다.

요것이?

고영해는 기안(起案) 용지에 도장을 탁 눌러 결재를 하고 나자 저도 모르게 손길이 그냥 뻗어 가며 애리의 손등에다 톡 하고 도장을 찍었다.

이건 무슨 결재죠?

유현자에게도 그랬었기 때문에 애리는 도장의 의미를 알아야만 했다.

애리에 대한 독점권을 의미하는 거야, 그 도장 임자의 승인 없이는 함부로 상품을 팔면 안 돼.

소위 매점(買占)이로군요.

오늘은 밤 일이 있으니까 가지 말고 기다려요.

야근 수당은 톡톡히 나오겠죠?

, 나오지.

손등 일이에요? 손바닥 일이에요?

요것이 정말……』

고영해는 히쭉 웃고 나서

빨리 사장한테 가서 결재를 맡아요.

.

애리는 그 걸음으로 결재 서류를 들고 또박또박 사장실로 들어갔다.

고영해는 애리가 사라지기가 바쁘게 아까 주머니에 구겨 넣은 전표를 끄집어냈다. 유현자의 편지였다.

오늘 밤 아홉 시에 예의 장소에서 기다리겠어요. 전무님, 꼭 와 주세요. 현자 올림

야근이 겹쳐 놓고 보니 대단히 바쁜걸!

고전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힐끔 유현자를 바라봤다.

평온한 얼굴로 유현자는 장부 기입에 열중하고 있었다.

여기 또 하나의, 좀 더 심각한 육체파 신사가 있다.

고영해는 지금 한창 청춘의 긍지를 갖고 있기때문에 애욕 수렵(狩獵)에 있어서도 마음에 여유가 있었지만 나이 육순이 되고 보면 그러한 여유는 좀처럼 젊고 눈부신 여성 앞에서는 저절로 마음이 수그러지는 일종의 비굴감을 고사장은 감출 수가 없었다.

원통한 노릇이다!

고사장은 자기의 비굴감을 그렇게 외치며 마음속으로 통분하게 여겼으나 중년 바람이 불면서부터 천군만마 사이를 오락가락한 그 방면의 효장(驍將)도 머리에 서리를 이고 보면 열등감부터가 먼저 머리를 들어왔다.

양귀비가 몬로로 변한다는 말이지요?

늙은 사장으로서의 권위도 세워야 하겠기에 속과는 정반대의 점잖은 말을 우선 고사장은 뱉아야만 하였다.

그럼요. 시대의 첨단을 걸어야만 될 백부용인데 양귀비가 뭐예요? 시대적 감각이 예민해야만 광고는 효과가 있는 거니까요.

여닫이문은 애리가 들어올 임시에 이미 제 손으로 닫았기 때문에 사무실과는 별천지가 된 사장실이었다.

그럴까? 몬로가 그처럼 일반 대중에게 인기가 있는가?

그럼요. 사장님, 못 보셨어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는 영화……』

봤지, 봤어!

젊은 축들이 지닌 취미에 영합(迎合)이나 하려는 듯이 고사장은 호기 있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자기의 늙음을 캄플라즈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세요? 어쩌면……』

애리는 몬로의 표정 그대로를 따라 감동 섞인 놀람을 요사하게 나타내 보이며

사장님, 역시 무척 젊으세요.

고사장의 얼굴이 헤짝해지며

어허헛, 그러다 보니 애리는 나를 팔십 노인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로군.

육십은 팔십보다 확실히 이십 년은 젊다. 그 이십 년의 젊음을 수학적으로 애리의 마음속에 인 박아 주고 싶어서 팔십의 노령을 고사장은 일부러 인용을 한 것이었다.

아냐요. 실은 사장님께서 육순이라는 말을 듣고 저는 깜짝 놀랐어요.

그래? 그럼 몇 살쯤으로 보았노?

십 년쯤은 젊게 보아 주기를 기대하는 심정이 고사장의 표정에 알알이 떠올랐기에 애리는 시치미를 똑 떼고

육십이 뭐에요? 오십으로도 많이 본 거죠.

그래?

고사장은 알숭달숭한 꽃무늬가 박힌 헹커취를 꺼내어 입언저리를 문지르며 지극히 만족해하였다.

머리나 갓 깎으시고, 샤스나 갓갈아 입으신 날 같은 때는 오십이 뭐예요? 사십 칠 팔로 밖에는 정말 안 보이시는걸.

어허헛, 갑자기 십년이나 젊어졌으니, 이거 정말 한턱해야겠는걸!

그것이 비록 애리의 인삿말이라고 가정해도 그것이 결코 고사장은 싫지가 않았다. 인사로라도 그런 말을 받을 수 있는 젊음같은 것이 아직도 어느 한구석에 남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고사장은 솔직하게 기뻐했다.

정말 한턱하세요?

정말이구 말구!

아이, 기뻐!

애리는 하이힐로 발치 방아를 어린애처럼 찧으며 귀여운 포즈로 손뼉을 쳤다. 참으로 귀엽다. 그 귀여움을 차지할 수만 있다면 나머지 생을 포기해도 뉘우침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고사장은 황홀한 심정으로 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주옥과도 같은 귀여움을 혓바닥 위에 올려놓고 대굴대굴 굴려 보았다.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절실히 희구할 때, 인간은 자기가 지닌 최고 최후의 가치와 교환할 것을 가끔 생각한다. 그것은 명예와 재산, 한 걸음 더 나가 서는 생명의 포기를 의미하고 있었다.

고사장은 거리를 거닐 때, 때때로 그런 것을 생각해 보곤 하였다. 안개가 보오얗게 떠도는 싱싱한 과일을 연상시키는 새파란 젊은 여자들을 볼 적마다 고사장은 항상 육순의 연령을 생각했고 흰 머리에 손길이 저절로 갔다.

급기야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생각하고 한숨을 후유 내쉬었다.

그러다가도 미련은 그대로 남아서 전 재산과 바꾸어 볼 생각도 하여 보고 생명의 포기도 가끔 상상해 보았다. 육순이 지닌 생명의 나머지에 그 무슨 가치가 있으련만 그렇게 하여 인생의 마지막 한 토막을 화려한 정열로 불태워 보고도 싶었다.

그러한 종류의 대상이 하나 지금 고사장 앞에서 귀여운 재롱을 부리고 있 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 황송해서……』

뭐가 황송해?

저 같은 애숭이 사원이 어떻게 사장님의 한 턱을 얻어먹겠어요?

기실 황송한 것은 자기 편이라고, 고사장은 만족한 얼굴로

괜찮아, 민주주의에는 남녀노소의 구별은 없어. 이따 아홉 시쯤 해서 시간이 있을까? 십 년이나 젊어졌으니까 저녁 한 턱쯤은 해야만 옳을 거야.

다소 시간이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마는 사원들의 눈도 있고 해도 길고 해서 거리가 캄캄해질 무렵을 고사장은 일부러 택한 것이다.

글쎄 전무님만 무슨 일이 없으시담 모르지만……』

애리가 고전무의 비서를 겸임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명목이 전무지, 실상은 아들 고영해가 회사 일 전반에 대한 실권을 쥐고 있기 때문 에 비서가 필요할 만큼 바빴다. 고사장은 그저 뒤에서 큰기침만 하고 앉아 있으면 되기 때문에 비서가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오늘 밤에는 연회도 없으니까 시간은 있을 텐데……』

관계자들과의 연회가 있을 때마다 애리는 고전무와 동반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종로에코롬방이란 양과자점이 있는데 거기서 기다리면 돼. 내가 그리로 갈게.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 봐서 가겠어요.

아까 고전무도 손등에 도장을 찍어 주면서 기다리라고 했다. 밤 일이 한꺼번에 밀려서 약간 불안스럽기도 했지마는 어떡하든 될 것이라고, 애리는 장사에 신을 내기로 하였다.

그것은 하여튼 전무도 이 광고 도안에 결재를 했다는 말이지?

그럼요, 사장님도 이제부터는 애인을 바꾸셔야겠어요.

허어, 애인을 바꾼다? 내가 무슨 애인을……』

애인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고사장에게는 청춘의 감미로운 노스탈쟈(鄕秋 [향추])를 가져오고 있거늘 하물며 애리처럼 귀여운 여성의 입으로부터 그 한마디가 서슴지 않고 흘러나오는 것을 볼 때, 고사장은 그 순간, 자기의 늙음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사장님의 애인이 양귀비인 줄도 다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쾨쾨묵은 양귀비보다야 몬로가 훨씬 현대적 관능이 풍부하죠.

현대적 관능……』

고사장은 황홀한 중얼거림과 함께 그 현대적 관능을 몬로에게서 찾아보기 전에 먼저 눈앞에 날씬히 서 있는 애리의 몸 매무새에서 더듬고 있었다.

어디 한 번 애리의 말을 신용해 보지!

고사장은 도장을 탁 찍으며 시선을 떨어뜨린다. 떨어뜨린 시선 아래 실크 해트를 쓴 몬로의 나체가 다리 하나를 쳐들고 있었다.

 

 

愛慾[애욕]金慾[금욕]

 

퇴근 시간이 넘어도 고전무가 자리를 뜨지 않으면 좀처럼 사원들은 퇴근할 생각을 갖지 못한다. 규칙상으로는 여덟 시 반 출근에 다섯 시 퇴근으로 되어 있지마는 이 규칙이 제대로 실행되는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윗사람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면서 일을 하는 체 해야만 되었고 그러다가 여섯 시 일곱 시가 되어도 고전무의 승낙이 없이는 엉덩이를 들지 못한다.

그것은 비단 한성양조 뿐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네다섯 명의 사원을 가진 조그만 기업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풍습이 만연되고 있었다. 그만큼 오늘의 중역 계급은 직권 이외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애리는 이 회사에 취직해 온 그날부터 규칙대로 퇴근 시간만 되면 또박또박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그러한 애리를 사원들은 일종의 신화처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고사장 따님의 동무니까 그만큼 관대히 보아 주는 것이라고 사원들은 생각하고 있었으나 애리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었다.

집단생활이니만큼 다른 사원들과 보조를 맞추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보다 못해 고전무는 어느 날 충고를 했다. 거기 대해서 애리는 말했다.

퇴근 시간이 넘어서 퇴근하지 않는 사원을 본받으라는 건 대학에서도 배우지 않았어요.

여기는 학교가 아니고 사회요.

사회가 학교의 논리를 무시하기 때문에 오늘의 부패와 혼란이 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요. 전무님도 대학을 나오신 분이기에 사칙(社則)쯤은 읽을 줄 아신다고 보았는데요.

고영해는 모욕을 느끼고 권력 행사를 단번에 해 버리고 싶었으나 영림의 동창이기도 하고 그보다도 좀 더 딴생각이 강해서

그런 말을 하면 출세를 못 하오. 교단과 다르니까 대세의 물결이 흐르는 대로 어물어물 흘러가야 하는 거요.

술 장수 선전이나 해 주고 출세할 생각은 꿈에도 안 하니까 전무님의 충고는 별로 고맙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뭘 하려고 이런 회사에 취직을 원했오?

목구멍이 원수가 돼서요.

허어? 그렇다면 주위와 좀 보조를 맞추어요.

악이 선에게 보조를 맞춰야지, 선이 악에게 보조를 맞출 수는 없는 일 아냐요?

허어, 그게 그처럼 선악으로서 논평될 문젠가요?

살인강도만이 악은 아냐요. 온갖 약속 위반은 모두 다 악을 의미하는 거니까요. 여덟 시간 반씩 일해 주고 한 달 만에 이만칠천 환의 보수를 받기로 하고 입사했으니까요.

그러는 애리를 그대로 방임해 두었다가는 회사의 분위기가 깨질 것도 같아서 전무의 비서라는 명목으로 비서 수당 팔 천환을 붙여서 애리의 발목을 밤늦게까지 동여매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전무가 오늘은 어떻게 된 셈인지, 퇴근 시간 정각에,

오늘은 일찌감치들 나가지.

했다. 그래서 사원들은 웬 떡이냐고 모두들 퇴근을 했다.

가만히 보니, 유현자가 나갈 때, 고전무에게 인사를 하는데 허리만 굽히는 것이 아니라 눈인사가 이상하게도 짙었다. 그것을 고영해는 엄지손가락으로 챠푸린 수염을 건드리면서 가볍게 받아넘기고 있었다.

흐응, 사고는 사고야!

텅 비인 사무실에서 책상을 치우며 애리의 날쌘 후각이 사냥 개처럼 발동을 하고 있는데

미스 리!

하고, 고전무의 목소리가 날아오길래 얼굴을 들었더니, 눈 한쪽은 이미 싱긋이 감겨져 있었고 수염 언저리가 쭝긋쭝긋 움직이고 있었다.

시치미를 떼고 그대로 내버려 두려다가 얼른 유현자와의 경쟁의식이 머리를 들어 눈 하나를 가만히 감아 주었더니만

잠깐 기다려!

하고 고전무는 훌쩍 일어나서 사장실로 총총히 사라져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 안에서 애리는 책상을 치우고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숙직 사원이 한두 번 들어왔다가 나갔다.

어떡할까?

사장도 만나자고 했고 전무도 기다리라고 한다.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적당히 처리를 해야겠는데 시간 관계가 어떻게 될런지 고전무의 시간표가 아직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짐작조차 가지가 않는다. 사장과의 동석은 오늘이 처음이기 때문에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되는 경우라면 사장과의 약속을 지키리라고 애리는 생각을 했다.

따르릉따르릉고전무 책상의 전화 종이 운다.

애리는 콤팩트를 백에 집어넣고 홀가분히 걸어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 한성양조입니다.

고전무 계세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여기는 아현동인데요. 고전무 잠깐 대주세요.

어마, 영림이 아냐? 나야, !

, 애리였었군! 오랜만이야. 어때, 바뻐?

여전하지만 바쁠 땐 또 바뻐.

선전 일이 뭐가 많아서 그리 바쁠까?

선전도 선전이지만……』

전무님의 비서역이 바쁘지?

영림아, 너 비꼬는 거니?

비꼬긴…… 사실인걸!

말 말아 얘. 미스터 송이 독약을 다시는 마시지 않아도 괜찮게 됐다면서?

이것은 애리가 한 번 떠보는 말이다.

? 무슨 말인데

이것 역시 역효과를 바라는 애리의 교묘한 심리 작전이다. 이런 말을 하면 할수록 동정을 하기 전에 반항을 하기 쉬운 영림의 성격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가 그따윗 말을 하지?

출처를 밝힘 말싸움을 하러 다녀야 될 테니 귀찮아서 취소할 테야.

, 전무님의 말씀이겠지.

사실 오빠는 송준오를 매부로 삼고 싶어 하는 말을 여러 번 했었기 때문이다.

추측은 맘대로지만 나는 책임 안 져.

무슨 그따위 일로 책임 문제까지……』

축복합니다.

뭘 말이야?

미스터 송과의 경사스런 약혼 말이지 뭐야?

애리는 또 한 번 되집어 따져 놓았다. 따지면 따질수록 영림과 송준오의 거리는 멀어지고 반대로 자기와 송준오의 거리가 짧아지는 것이다.

나 참 애리도……』

고영림의 센스와 언변도 상당하지마는 밑바닥에 가시가 돋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 있어서는 애리의 언변에 일보를 양보하는 셈이 항상 되고 있었다.

한 번 만나, 좀 놀러 오라니까 글쎄.

영림이처럼 한가스런 신세가 못 돼서 미안해.

그럼 슬퍼! 내 마음 몰라?

, 알긴 알지만…… 잘 알아. 너는 나보다 확실히 선량해.

또 신세타령인가?

그것도 다소 있지만 말이야. 어쨌든 너는 정신파(精神派)고 나는 육체파라니까……』

오늘 밤 좀 놀러 오려므나.

어디가…… 오늘도 야근이야.

, 연회두 한 곳이면 좋게? 늙은 축 넓은 축, 애리의 몸뚱이가 한두 서넛쯤 있었음 수지가 맞겠어.

그처럼 바쁨 봉급을 인상해 달라려므나.

어디가…… 지독한 깍쟁이들인데……』

내가 말 좀 해볼까?

천만에! 사람은 제 실력으로 살아야지, 남의 힘만 빌림 잠자리가 나빠.

오빠 좀 대 주겠어?

대줘! 하고 왜 명령을 하지 못하고……』

애리야, 그럼 정말 눈물이 나!

인제 안 그럴께! 미안, 미안! 잠깐만 기다려.

애리는 수화기를 대고 사장실 문을 열었다.

전무님, 전화 받으세요.

사장실 문을 애리가 여는데 모자를 쓰고 퇴사하는 사장을 모시고 고영해가 뒤로 따라 나오고 있었다.

고영해는 책장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고 사장은 애리의 전송을 받으며 복도로 나갔다. 나가면서 고사장은 애리의 인사를 턱으로 받으며 눈으로는 아홉 시 약속을 애리의 시선에다 다지고 있었다. 애리도 알아듣겠다는 듯이 눈인사를 또 한 번 했다.

그래서 말에요, 언니 문제에 관해서 오빠와 한 번만 더 의논해 보고 싶어요. 최후적으로……』

최후적으로? 뭐가 그리 급해서 너는 자꾸만 서둘러 대는 거냐?

고영해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애리가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영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애리의 귀에도 들려오고 있었다.

남은 앓아서 누워 있는데 오빠는 뭐에요? 병문안 한 번 안 가보구 ……』

내가 병문안을 가서 날 병 같으면 하루에 열 번이라도 가겠다만…… 하루 아침에 더친 병이라더냐?

어쨌든 이야기가 있어요. 오늘 밤은 빨리 돌아오세요.

안 되겠는 걸. 오늘 밤은 조금 바쁘다. 회사 일로 연회가 있어. 이야기가 있거든 내일 아침에 하려므나.

아침엔 학교엘 가야지, 늦잠만 자는 오빠를 어떻게 기다리라는 거예요.

어쨌든 알았다. 오늘 내일로 어떻게 될 병이 아니니까 너무 서둘러 대지 좀 말아라.

악덕한!

뭣이?

채칵.

전화는 끊기었다. 고영해는 하는 수 없이 불쾌한 얼굴로 수화기를 놓고 애리를 바라보았다.

영림이죠?

계집애가 나잇살이나 먹었다고 건방지게……』

어느 계집애 말에요? 여기도 그만한 나잇살을 먹은 계집애가 하나 서 있는데……』

불쾌한 표정이 갑자기 펴지며

애리는 귀여워!

영림이보다도?

물론이지. 그놈의 계집애 돼먹지 않게스리…… 나가.

고영해는 모자를 쓰고 애리와 함께 사무실로 나섰다.

지프 차 운전수가 병으로 결근을 하여 두 사람은 택시를 잡았다.

한강 일대에 보트가 떴다. 철 이른 벌거숭이 떼도 모래사장 위에 오구구 했다. 한강 인도교를 택시는 건너고 있었다.

오늘 밤도 연회가 있어요?

, 애리와 단 둘이의 연회가 있어.

무서워!

뭐가 무서워?

손등에 또 모닥불이 필까 봐서……』

손등에만 피면 다행이지.

고영해는 애리의 손길을 자기 무릎 위로 끌어다 놓고 손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남자들은 왜 자꾸만 만나지 못해서 그러는지 몰라?

애리는 정말로 그것이 하나의 커다란 의문으로 되어 있었다.

좋으니까 그러는 거야.

좋음 그러나?

남녀의 애정은 접촉에의 욕구에서 생기는 거야.

그건 남자들의 경우일지 몰라도 여자는 좀 달라요.

어떻게 다른고?

피부적인 접촉보다도 먼저 정신적인 접촉을 희구하고 있는 거예요. 결국은 피부적인 데까지 가지긴 하지만 말이에요.

애리도 차차 영림을 닮아 가는군.

닮아 가는 게 아니라 실정이 그렇다는 말이지.

그렇지만 애리는 육체파가 아니야?

노오!

애리는 토라지게 그것을 부인하며

내가 육체파이기를 남성들이 요구했을 뿐이야. 거기에 응하고 있는 것뿐이라니까……』

애리는 갑자기 송준오가 그리워졌다.

성남극장을 지나고 서울역 앞을 지났다.

고영해에게 손 하나를 잡힌 채 애리는 천연스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고영해도 애리의 얼굴을 때때로 바라볼 뿐, 잠자코 앉아 있었다.

남성들이 육체파이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거기 응하는 것뿐이라는 애리의 한 마디가 고영해에게는 무척 서운했지마는, 그리고 손 하나를 내주고도 마음으로는 끄떡도 않는 애리가 항간의 창기를 연상시키고 있었지마는 그렇건만 고영해는 애리의 그 허수아비와도 같은 육신의 일부분을 놓아 주기가 싫었다.

마음으로는 자기를 얕잡아 보고 있는 애리를 뻔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애리의 손길을 놓지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기도 하였다.

도대체 사내자식들은 어떻게 돼 먹은 동물인지 알 수가 없어!

이것은 지난날, 애리가 뱉은 한 마디지마는 그것을 고영해는 지금 자기 자신이 마음속으로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든가 애정이라든가, 그런 종류의 정신적인 흔들림은 티끌만큼도 섞이지 않은 애리의 다섯 손가락이 어쩌면 이처럼 자기의 전신을 불사르게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도 생각하는 자기 자신을 비웃어 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좀 더 정직하고 진지한 자기가 고영해에게 는 도사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자기 역시 애리를 정신적으로 알뜰살뜰히 사랑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애정의 사깃군, 사랑의 장사아치 같은 애리의 불손한 언어 행동에 접할 때마다 이제는 이미 김이 빠지고 단물이 찌여서 다시는 돌보기도 싫어진 아내 혜련이가 인간적으로는 훨씬 존경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고영해는 가끔 느껴 왔다.

그렇건만 지금 고영해는 애리의 한낱 껍질에 지나지 못하는 다섯 손가락을 한혜련의 전부라도 바꾸고 싶은 격렬한 충동을 뭉클뭉클 느끼고 있었다.

나긋나긋한 손가락 다섯을 오작 오작 뜯어 먹고 싶은 이 왕성한 식욕! 이것이 사랑이 아닐진대 뭣을 가리켜 사랑이라고 정의(定義)를 지을 것이냐?…… 인격에나 정신에는 침을 뱉아 가면서도 손가락은 뜯어 먹고 싶도록 식욕을 건드려 왔다.

아내 혜련을 처음으로 탐낼 적에도 그러하였다. 아니, 온순한 혜련에게는 정신적으로 우러러 볼만한 아름다움도 또한 못지않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오랜 시일에 걸친 부부생활의 권태와 병마로 말미암은 육체적 매력의 상실이 왔다.

한낱 껍데기에서 더 지나지 못하는 육체적 매력의 상실이 이렇듯 한혜련이 지닌 내면적인 아름다움까지를 거부할 줄은 몰랐다. 애리의 다섯 손가락과 바꾸어질 만큼 한혜련의 가치가 폭락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신주의자들 잠꼬대 같은 수작을 고영해로서도 일소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육체가 있으니까 영혼이 있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에게 섹스의 매력을 부여한 조물주의 창의(創意)는 단순히 그 구조를 달리하는 육체적 조건에 있었다.

그것을 내면생활에까지 연장시켜 영혼의 가치를 육체의 가치 이상으로 끌어올리려고 온갖 인위적인 노력을 힘써 온 형이상학자(形而上學者)들이야 말로 인류를 현혹시킨 위대한 사기사였고 조물주의 의도한 바를 모독한 사탄의 무리들이라고 말한 강석운의 유혹의 강의 주인공 박목사의 한 마디를 고영해는 생각하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나는 애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창밖을 무심히 내다보고 있던 애리가 얼굴을 돌리며, 흥 하는 표정으로

어떡하는 게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가요?

애리의 손길을 잡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남대문을 지나 차는 진고개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애리의 손길을 놓아 주고 싶지 않은 이 절실한 심정! 이것이 인간의 진실! 이것이 인간의 진실일진대 이 진실을 우리는 소중히 해야만 될 거야.

운전수 양반이 웃어요.

운전수 양반으로 웃게끔 만들어 놓은 것이 모두 다 도학자의 족속들, 인류의 사기꾼들이야. 남녀가 사랑한다는 것은 웃을 일도 아니고 울 일도 아니니까…… , 스톱!

진고개 입구, 어떤 고급 그릴 앞에서 차는 멎었다.

넓은 홀을 지나 둘이는 특별실로 돌아갔다. 보이에게 식사를 주문하고 나서 저고리를 활활 벗어 걸었다. 그리고는

애리 아가씨도 벗으시지요.

등 뒤로 돌아가서 애리의 저고리를 벗기며

이쯤 되고 보면 비서 수당은 내가 받아야겠는걸.

애리는 잠자코 있었다. 물수건으로 손가락을 닦고 있는데 목덜미에 입술이 왔다.

뭐에요?

비서 수당으로 받는 거야.

그러나 애리는 별반 떠들지도 않고 쥐었던 물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아내며

상살(相殺)를 해 버릴 모양이지만 그건 안돼요.

, 계산이 분명한걸.

고영해는 애리와 마주 앉았다.

분명한 게 좋지 뭐에요? 결국은 상품을 팔고 사는 거니까 전무님도 사랑이니 애정이니, 죽겠다 살겠다 하는 따위 군더더기를 붙일 필요는 없어요.

좋아, 흥정이 명백해서 좋아.

상인들이 걸핏하면 인간적이니 양심적이니 하는 따위의 말로써 상대방의 계산 의식을 약화시키는 것과 매일 반이지 뭐에요.

허어?

고영해는 가슴이 다소 따끔했다.

그러니까 전무님도 결국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따위의 탈을 쓰고 제 계산 의식을 마비시켜 보자는 거지만……』

잘 안 되겠어?

잘 안될 거에요.

, 이러다가는 사나이의 밑천 들어먹겠는걸.

사나이의 밑천이란 주먹과 돈밖에 더 있어요?

주먹과 돈?

놀라실 것 없어요. 전무님이 마음을 턱 놓고 저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결국 그 두 가지 권력을 등지고 있기 때문이죠. 주먹이 세니까 저한테 얻어맞을 걱정은 없을 것이고 금력이 있으니까 온갖 애로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있기 때문이죠.

고영해는 아연히 애리를 바라볼 뿐, 마침내 대꾸를 잃었다.

그렇지만 저는 주먹이 약하니까 잘못하면 얻어 맞을런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항상 느끼죠. 또 생활이 빈곤하니까 물욕의 유혹을 늘상 받고 있어요. 주먹에 대한 위협을 무마하고 물욕에 대한 다소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제가 갖고 있는 오로지 하나의 생활 능력이 있다면……』

애리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상대편의 표정을 한 번 살피고 나서

연애…… 아니, 연애의 냄새를 파는 길밖에 없어요. 잘못하면 밑천까지 들어먹게 될런지도 모르지만요, 들어 먹은 사람들도 수두룩 하지만 말예요.

틀렸어! 이야기가 심각해서 틀렸어!

고영해는 돌연 커다란 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제가 그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니까 심각히 들리는 거예요. 그렇지만 말은 하지 않아도 그러한 심정은 적든 많든 태반이 다 갖고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식사가 왔다.

자아, 술을 들어요. 심각하면 우울해. 가볍게 명랑하게 어물어물 살아 나가는 거야.

어물어물해서 이득을 보는 건 남성들이지만 어물어물하다가 코를 다치는 건 여성들이라니까 글쎄.

술을 들고 식사를 하는 동안 고영해는 쭉 애리라는 한 여성의 구김살 없는 성품과 음영(陰影) 없는 벌거숭이 생태(生態)를 생각하고 있었다.

애리!

?

몇 잔 권한 위스키를 사양치 않고 받아 마신 애리의 피부는 윤이 반지르르 돌고 있었다.

아귀처럼 닭고기를 뜯어 먹는 애리가 오늘따라 무척 예쁜걸.

그러한 애리에게서 과거에는 빈민 계급의 무교양과 더러움을 느끼고 경멸해 오던 고영해였었다.

이브가 닭고기를 뜯어 먹을 때와 마찬가질 거예요. 그렇지만 전무님은 얌전을 빼고 호물호물 녹여 삼키는 숙녀들을 더 이쁘게 보실 텐데……』

아니야, 생각이 갑자기 달라졌어!

어떻게 달라졌어요?

애리를 보는 눈이 오늘 밤 갑자기 달라졌어. 솔직히 말하면……』

솔직히 말해 봐요. 나는 다 털어놨는데……』

고영해는 물끄러미 애리를 바라보며

나는 오늘 밤, 애리에게서 인간의 본질 같은 것을 발견했어. 말하자면 애리는 도회지 야생녀(野生女), 현대의 이브다!

윤기 띈 시선을 애리는 들었다. 두 손으로 닭의 다리를 뜯어 먹는 그대로의 자세로

칭찬이야? 핀잔이야?

좀 전까지는 핀잔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 애리의 좋은 점을 나는 여태껏 발견 못하고 있었다. 애리의 육체만을 나는 탐내 왔다. 솔직히 말해서 애리야말로 얼마간의 화폐로 환산해 버리면 그만인 그런 가치밖에 없는 여성이라고 생각해 왔었고 또한 그런 생각 밑에서 애리를 희롱해 왔다.

좋지 뭐야? 전무님이 화폐로써 나를 희롱할 생각을 하니까 나는 또 나대로 전무님을 희롱해 보는 거니까……』

좋아! 계산이 분명해서 좋아. 과거 나는 여러 층의 여성들을 사귀어 보았지만 모두가 다 하나처럼 사랑의 탈을 쓰고 왔다가는 화폐의 탈을 쓰고 물러가 버렸어. 우리들 상인이 인간적이니 양심적이니 하는 탈을 쓰고 대하는 거와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지금 내 눈앞에서 아귀처럼 닭의 다리를 뜯고 있는 애리는 아무런 탈도 베일도 쓰지 않았다. 정신적인 글자 그대로 정신적인 벌거숭이다.

!

애리의 은 상대편의 말을 비웃을 때도 쓰지마는 그와 정반대로 상대편의 말을 전적으로 수긍할 때도 가끔 쓴다.

, 탈을 안 씀 베일이라도 써야 할 텐데 나처럼 홀랑 벗어 버리니까, 어떤 순정파가 말하기를 나를 가리켜 요부라는 거야. 요부지만 좋다는 거요. 요부면 나뻐야 할 텐데 왜 좋다는 걸까요? 전무님은 오늘 밤, 나를 요부로부터 이브로 승격을 시켜 주셨지만요.

애리는 지금 Κ 신문에 연재되는 유혹의 강을 읽는가?

요즈음 얼마 동안은 못 읽었지만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소설 속에서 작자는 주인공 박목사의 입을 통하여 이런 말을 했어. 인간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쪽 벌거벗을 때, 여성은 이브가 되는 동시에 요부가 되는 것이며 남성은 아담이 되는 동시에 악마가 되는 것이라고……』

애리는 놀라며 닭의 다리를 접시에 도로 놓았다. 무언지 절실히 느끼면서도 해명하지 못하고 있던 수수게끼 하나가 드디어 풀리어 나는 것 같았다.

참 좋은 소설이야. 애리도 꼭 계속 읽어요. 특히 애리나 나 같은 사람은 공명하는 바가 많을 테니까……』

읽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강석운 선생님 일찌기 한 번 뵌 적도 있어요.

그래?

학생 시절, 어떤 자리에서 한 번 봤어요.

이야기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그렇지만 나는 여태껏 내가 이브일런지는 몰라도 요부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럴 거야. 거기 대해서 작가 강석운씨는 이렇게 말했어. ……영육(靈肉)으로 완전히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였다. 이브는 요부가 아니었지만 아담에게는 확실히 요부였다. 이브의 요사스런 매력이 아담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담은 생각하기를 이브는 무슨 요사스런 술책으로 자기를 유혹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브가 아담을 유혹한 것이 아니고 아담이 이브에게 유혹을 느꼈을 뿐이라고……』

전무님도 그 말에 동감을 하세요?

동감하지!

고영해는 과거에 지닌 수많은 남녀 관계 그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기뻐요!

애리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홍차를 들었다. 드는 찻잔에 위스키를 따라 주며 고영해는

웃음을 팔아서 생활을 한다고, 애리는 거리낌 없이 그것을 탁 터놓았지만…… 그리고 그러한 애리를 세상 사람들은 흰 눈으로 바라보며 요부 같다 고들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을 나는 애정의 합리화라고 생각하지. 모르긴 하지만 인간의 애정에는 두 가지 속성(屬性)이 있다고 봐. 하나는 애정의 순수성이고 다른 하나는 애정의 합리성(合理性)이다.

술 장수 작은 오야붕이 어려운 말을 너무 많이 해요.

얕보면 안 돼. 이래 봐도 대학은 우수한 성적으로 나왔어. 전공은 사회과학이지만 취미는 생물학이야. 학교 교편도 사오 년 잡아 봤어.

금시초문이 돼서 미안합니다.

애리는 까딱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나 영림의 동무인 애리가 그것을 모를 리는 물론 없었다.

술장수가 학력이라든가 지식을 내세우면 술이 잘 안 팔려.

알았어요. 인제 이야길 어서 계속해요.

애정이 비교적 순수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처럼 생존경쟁이 극심하지 않던 과거의 일이야. 지나간 시대에는 애정의 합리성을 불순하다고 보아 왔지만 오늘에 와서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보아지고 있는 거야. 애정은 속속 합리화되고 있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의 마음속에는 삼부의 순수성과 칠부의 합리성으로 형성된 애정의 자세가 도사리고 있다고 나는 보는 거야. 그리고 그 삼부의 순수성마저 예술가들의 회고적(懷古的) 취미의 대상밖에 안 될 뿐, 그들의 현실적인 애정의 자세는 세속적인 합리성에 있었어. 애리, 내 말 알아듣겠어?……』

얕잡아 보지 말아요. 지금은 비록 술장수네 집에서 화초(花草) 노릇을 하고 있지만 이래뵈도 얼마 전까지는 미술 대학생이었어. 더구나 기생 출신인 우리 어머니가 다섯 차례나 남편을 바꾸지 않으면 아니된 뜨내기 가정 속에서 눈치 밥을 얻어먹고 요만큼 자란 애리야. 그만한 말귀도 못 알아들 음 벌써 나가떨어졌게?……』

, 금시초문인 걸!

정말로 고영해는 처음 듣는 소리다. 애리의 가정 내막을 영림이도 그처럼은 몰랐기 때문이다.

알아듣는다면 지극히 좋아. 그런데 여기서 나는 여성들의 합리화를 한낱 허영이나 불순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아.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성은 약자이기 때문에 완력이라든가 금력이라든가 또는 명예나 권력 같은 강한 것에 대하여 여성들이 본능적으로 동경하는 욕망의 자세…… 그것의 실천이 곧 애정의 합리화라고 보고 싶어.

전적으로 동감이에요.

애리는 흥분한 어조로

전무님 상당하세요! 술장수 오야붕으론 좀 아까워!

애리와 고영해의 생활철학은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인간 본위의 애정의 순수성은 이제 이 거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하나의 신화로 변했어.

그래요. 애정과 생활의 합리화가 있을 뿐이에요. 인간 자체에도 정열을 느끼지만 그보다 못지않게 물질과 권위에 대해서도 정열을 느끼고 있어요. 나만이 불순하고 불량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요.

애리의 이러한 생활철학은 애리를 노리고 있는 고영해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유리했다.

아니야,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을 애리는 다만 솔직하게 쏟아 놓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그러한 애리를 존경해.

애리를 바라보는 고영해의 눈이 한층 더 정열에 익어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나도 전무님을 존경해요.

존경한다는 말을 어떠한 의미로 쓰는지는 모르지마는 어쨌든 똑같은 한마디가 두 사람의 거리를 형식적으로 접근시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결국에 있어서 생활 능력을 의미하는 남성의 경제권과 여성의 육체권(肉體權)…… 서로 대립되는 이 두 가지 권위에 대한 각기의 욕망이 남성에게 있어서는 애욕으로서 나타나는 것이고 여성에게서 있어서는 물욕으로서 나타나는 것이야. 이 두 가지 욕망에 대한 조절과 타협이 애정이라는 아름다운 탈을 쓰고 남녀의 결합을 형성한다고 보아. 이것은 남의 취미인 생물학과 나의 전공인 사회학의 교훈이야. 애리는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있지만 단념했어요?

?

애정과 생활이 합리화되지 않기 때문에요.

송준오 군을 사랑하고 있지?

사랑하지만 저편에서 싫다는 거예요.

?

영림과의 관계도 있고…… 또 내 사상이 나쁘다는 거예요.

사상이 나쁘다? , 그건 애리가 너무 솔직한 탓이야. 솔직하면 손해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탈을 쓰고 마음의 풍경을 말하지 않아야 돼.

손핸 줄은 알면서도 탈을 쓰기가 싫어요.

참 딱한 성격인걸!

고영해는 갑자기 침울해졌다. 애리처럼 적나라하게 자기의 알심을 꺼내 보이는 여성을 아직껏 본 적이 없다. 사랑이니 애정이니 하는 가면이라도 쓰고 오면 속은 체하고 건드려 보아도 무방이지마는 생활을 위하여 갓난애처럼 쪽 벌거벗은 애리의 허위 없는 삶의 자세를 눈앞에 볼 때 가긍하고 측은한 생각이 한 조각 남은 고영해의 양심을 쳤다. 몇 장의 화폐를 위하여 홀랑 벌거벗고 나선 창기처럼 서글픈 데가 있었다. 펄펄 타오르던 정열이 불꽃이 탁 시들어지며

인제 가요.

고영해는 훌쩍 일어서서 저고리를 입었다.

벌써?

의외라는 듯이 애리도 일어났다. 좀 더 치근치근 달려 붙지 않는 것이 이상도 했지마는 다행이기도 했다. 고영해가 저고리를 입혀 주었으나 아까처럼 목덜미에 입술은 와 닿지 않았다.

그릴을 나서서 어두운 거리를 두 사람은 묵묵히 걸었다. 전무님이 왜 갑자기 침울해졌는지를 애리는 통히 모른다.

전무님, 무슨 기분 상하신 일이라도 계셔요?

아니……』

그럼 왜……』

갑자기 서글퍼졌어. 서글프도록 애리가 귀여워졌어.

무슨 말씀이에요?

나도 잘은 모르지만…… 나는 이 순간, 애리를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어.

『…………』

애리는 잠자코 있었다.

진고개 입구를 빠져나와 둘이는 명동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애리, 돈벌이하고 싶지?

고영해는 갑자기 물었다.

하고 싶지만…… 능력이 없어요. 기껏해야 연애의 냄새를 파는 것뿐이지. 남처럼 대담하지 못하니까 돈 있는 양반의 이 호나 삼 호는 될 수 없고……』

왜 남들은 곧잘 되던데……』

, 이래 뵈도…… 보기에는 양공주같이 보여도 아직 나는 버어진(處女[처녀])이야. 이 호 삼 호의 생활은 우리 어머니의 과거로써 충분해. 진저리가 나도록 보아 왔으니까 되풀이할 생각은 꿈에도 없어요.

마침 한 사업체가 하나 났는데 해볼 생각 없어?

돈벌이 되는 거야요?

벌리지, 잘하면 유망해.

뭔데……?

하나는 땐스 홀이고 하나는 빠아…… 우리 회사와 관련이 있는 덴데 목하 영업 중이지만 얼마 전에 내놨어.

애리는 잠자코 있었다.

그런 방면에서 성공할 소질이 애리에게는 확실히 있어.

불량성이 풍부하다는 말이죠?

뭣보다도 계산이 밝아서 좋아. 연애의 냄새만을 팔 수 있는, 그런 비상한 재주를 절실히 필요한 사업이거든.

내 재주 가지고 될까?

충분해. 건달 놈팽이와 난봉만 안 나면 충분해.

그런데는 자신이 있어요. 돈 없는 사나이는 날개 없는 새니까, 애당초부터 흥미가 없어요. 그런 염려는 없지만 내 나이가 좀 어리지 않아요?

괜찮아. 내가 뒤에 있으니까……』

빠아보다는 땐스 홀이 좋아요. 자본이 많이 들겠지만……』

정말 생각이 있어?

왜 생각이 없겠어요? 잘함 우리 여섯 식구가 살아날 판인데…… 내 힘이 모자람 어머니더러 좀 나와 달랄 수도 있어요.

, 어머니…… 몇 살이신데?

마흔다섯이지만 차리고 나서면 그럴 듯하죠. 그런 방면에는 손도 익으시니까.

좋아! 그럼 적극적으로 추진시켜 보기로 할 테야.

애리에게 비로소 희망이 생겼다. 그런 사업체만 손에 들어온다면 사나이들에게 연애의 냄새를 팔지 않아도 무방하였다.

지금까지 애리를 너무 조급하게 사랑해 보려던 내가 불찰이었어. 조급하게 사랑하고 조급하게 내버리기에는 아깝다는 것을 오늘 밤 절실히 느꼈어.

헤어질 무렵, 을지로 네거리에서 고영해는 말했다.,

애리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고 내가 정말로 애리를 좋아할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해요. 이건 넣어 둬.

칠만 환짜리 수표 한 장을 애리에게 쥐어주었다.

어마?

애리는 놀랐다.

아무런 댓가도 요구하지 않을 테니 아쉬운 대로 가용에 보태 써요.

실은 오늘 밤, 이 수표 한 장으로 애리를 유혹해 볼 요량을 하고 왔던 고영해였다.

그 고영해가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끈을 탁 늦추었다. 조급하게 가까워지면 조급하게 멀어진다. 결국에 있어서는 경제권과 육체권의 교환이기는 하지마는 서로의 목적이 너무 뚜렷해서 싱겁기 비길 데 없을 뿐 아니라, 연애의 냄새만 팔려는 애리가 손쉽게 건드려질 것 같지도 또한 않았다.

사람은 역시 옷을 입고 마음의 탈을 쓰는 것이 신비로운 여음이 있어서 좋아. 애리가 거짓이라도 좋으니 사랑의 탈을 쓰고 올 때를 기다릴 테야, 잘 가요. 내일 또 봐요.

택시를 잡아타고 시청 쪽으로 사라지는 고영해를 애리는 모퉁이에서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 사장님과의 약속이 있었지!

그러나 애리의 손목시계는 이미 아홉 시 이십 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잘 됐어!

수표가 생기고 또 굉장한 사업체가 굴러오게 된 애리에게 있어서 사장은 이미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희망이 왔다!

자기에게도 인제부터는 물욕에 굴하지 않아도 좋을 만한 생활이 올런지 모른다고, 커다란 희망을 한 아름 품고 청진동 자기 집을 향하여 활기 있게 걸어갔다.

 

 

칸나의 抵抗[저항]

 

악덕한!

그보다 세 시간 전, 고영림은 침을 뱉듯이 오빠와의 전화통 속에다 그 한 마디를 내던지고 찰칵 수화기를 놓았다.

전화는 대청마루에 있었다. 영림은 자기 방을 거쳐 동쪽 정원에 면해 있는 응접실을 겸한 양실로 나가자 테이블 앞에 되는대로 몸을 던지며 유리창 밖을 분연히 내다보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서둘러야 하나?

오빠와 올케 한혜련과의 이혼 문제를 본인들보다 한층 더 서둘러 대는 자기 자신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오빠에게 냉대를 받고 있는 올케에 대하여 동정하는 마음도 물론 있었고, 전 여성의 약하디 약한 사회적 수난(受難)을 옹호하고 분개하는 대국적인 심사도 또한 있었다.

그러나 하루바삐 올케가 고씨 문중에서 이적(離籍)이 되어 자유로운 몸이 되기를 원하는 심사에는 좀 더 까다로운 영림의 심리적인 갈등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림의 자기저항(自己抵抗)을 의미하고 있었다.

미스 헬렌과 돌구름의 이야기를 했을 때, 강선생은 말하기를, 무턱대고 한혜련을 만나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강선생은 그것을 감히 하지 않 다. 거기에는 강선생 자신의 가정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마는 호적상의 남편이 한혜련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올케에 대한 강선생의 인간적인 흥미와 작가적인 호기심은 마침내 꺾이어졌다. 꺾이어진 그 틈바구니를 타서 자기는 강선생을 유혹했다. 강선생은 사십 대의 지성을 가지고 그것을 점잖게 물리치기는 했으나 내심으로는 확실한 유혹을 받고 있었다. 영림은 그날 저녁 강선생의 태도에서 그것을 명확히 느꼈다.

이것은 결코 공평한 승부가 아니다.

자기와 똑같은 자유로운 신분으로서 올케 한혜련이 강선생의 눈앞에 나타나기를 영림은 차차 더 절실히 원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올케의 입장을 일부러 불리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영림은 죄진 사람처럼 마음이 자꾸만 구겨지고 어두워진다.

이러한 마음의 구김살과 어둠을 제거해 버리지 않고서는 올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영림에게는 없다. 한 달 전, 강선생을 만나고 돌아온 영림은 올케의 신신당부대로 미스 헬렌의 이야기도 통 꺼내지 않았노라고 보고를 했었지마는 어쩐지 올케의 애인을 가로챈 것처럼 마음이 꺼림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바삐 올케를 이적시켜, 미스 헬렌이 지닌 봉선화의 서글픈 애수와 영림이가 지닌 칸나의 불타는 의욕을 동시에 강선생 앞에 제시함으로써만 강 선생의 참다운 애정의 자세를 엿볼 수가 있는 것이라고 영림은 생각했다.

이 한 달 동안, 영림은 칸나의 저항이라는 제목으로써 강선생과의 회견기를 집필하면서 그것을 골똘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영림은 만년필을 들고 다시금 원고지와 마주 앉았다. 집필된 칸나의 저항은 이미 백 장을 넘고 있었다.

칸나의 저항칸나의 의욕의 속편의 형식으로서 집필되고 있었다. 칸나의 의욕에서는 영림이가 여학생 시절부터 불살라온 아름다운 욕망을 표현해 보았지마는 칸나의 저항에서는 그 신화인 양 아름답던 동경이 마침내 행동화되어 강석운을 만나 본 이후에 있어서의 영림의 심정이 적나라하게 기록되고 있었다.

강선생을 만난 것은 이미 한 달 전, 벚꽃이 한창이던 무렵이었다. 벚꽃은 하염없이 지고 눈부신 신록의 오월이 왔다. 신록은 짙어 검푸른 녹음의 유월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으나 영림은 다시 강석운을 찾지 않았다.

그것은 강선생에게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경사(傾斜)가 너무도 급하고 가파로왔기 때문이었다. 만나 본 것은 단 몇 시간에 지나지 않았지마는 이미 여학생 시절부터 기울어져 오던 마음의 경사이기에 이제 다시 한번 만나는 날에는 남달리 의욕이 강한 영림으로서는 자기 자신을 걷잡을 수가 도저히 없을 것만 같았다.

원고가 아직 강선생님의 손에 묵고 있으니까……』

찾아갈 만한 구실은 충분했다. 영림은 그러나 악물고 찾아가지 않았다.

강선생을 다시 한번 만나 뵈어 인생을 말하고 문학을 말하고 우주를 말하고 영원을 말하고 사랑을 말해 보았음 한이 없을 텐데……』

뜰안 돌산 틈바구니에서 기승을 부리며 싱싱히 피어나는 칸나의 줄기찬 성장을 바라보며 영림은 한숨을 짓다가 탁 책상 위에 엎디어 버리곤 했다.

그러나 영림은 그러한 강렬한 의욕을 누르는 데까지 눌러 보고 있는데 조용한 희열을 또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조용한 희열을 행복의 높이에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자신이 영림에게는 있었다.

만나면 질식할 것 같은 기쁨이 있을 것 같았으나 그 기쁨을 아껴 두는데 좀 더 깊이 있는 기쁨을 영림은 느끼는 것이었다.

강선생님과 헤어질 때, 악수를 아껴 둔 것처럼……』

그렇듯 줄기찬 기대를 가슴 깊이 품고 이렇듯 조용할 수 있는 자기만족 속에서 영림은 정원의 검푸른 나무 잎사귀를 바라보며, 칸나의 저항을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다.

강선생은 점잖케 칸나의 유혹을 물리쳤다. 그것은 그러나 도리어 역효과를 냈을 뿐이다. 좀 더 많은 분량의 불량성을 발휘했었던들 칸나는 제물에 물러났을런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칸나의 의욕이 분별없이 날뛰지는 못했다. 사모님의 입장을 생각한다는 말이 간사스럽기도 하고 새삼스럽기도 해서, 불신한 남편을 가진 어머니와 올케를 동정도 할 수 있는 칸나라고, 일부러 깨우쳐 드리기도 했다. 원고는 언제 찾으러 갈런지 모른다고도 했고 영원히 안 갈런지도 모른다고 했다. 찾으러 가지 않고는 견디어 배기지 못할 때까지…… 돌부처처럼 움직이지 않을 결심을 칸나는 그 순간 했다. 의욕이 정열에까지 연소(燃燒)되기 전에 함부로 움직인다는 것은 양쪽을 다 함께 욕되게 하고 스포일(그르침)할 우려가 다분히 있기에 칸나 는 별꽃이 오순도순 돋아난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가만히 외쳤다.

칸나여, 조용 하자! 조용히, 조용히 의욕을 연소시키자!이것은 칸나의 저항속에서 강석운과 헤어진 직후의 감상이었다.

영림은 조용히 의욕을 연소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월여가 지난 요즈음에 와서는 영림은 비로소 한 시도 안절부절을 못하고 삥삥 돌아만 다니는 자신을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 오월의 신록이 육칠월의 녹음으로 변모를 하듯이 벌렁거리던 의욕의 불길은 마침내 타서 쇠붙이를 녹여 버릴 수 있는 새파란 정열의 불꽃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날, 송준오에게서 때때로 느꼈던 피부적인 것이 아니고 송준오에게서 늘상 그 결핍을 느끼던, 좀 더 넓고 깊이를 지닌 인간적인 신뢰와 애정에서 오는 정열 같았다. 자기의 참된 가치를 알아주고 또한 자기가 그것을 상대편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 대 인간의 동지애(同志愛)가 남녀라는 이성 위에서 형성되고 육성되어 마침내 정열에까지 연소된 것이라 고 생각하였다.

칸나는 요즈음, 분명히 자기의 연장(延長)을 강선생에게서 느꼈다. 칸나는 강석운이라는 옥토(沃土) 깊이 뿌리를 박고 거기서 양분을 섭취하여 줄기를 뻗고 잎을 기르고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폭위(暴威)가 그 옥토를 뒤흔들어 버릴 때, 칸나는 뿌리째 송두리째 나자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한낱 연약한 칸나가 강선생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제넘은 착각이다. 다만 칸나는 강석운이라는 옥토 위에서 육체가 성숙하고 인격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따름이다.

칸나의 저항에서 영림은 마침내 그렇게 기록하게끔 되어 있었다.

영림은 안타깝게 강석운의 옆이 그리워졌다. 고요한 영혼의 대화로써만 흡족할 수가 영림에게 없게끔 되었다. 영림의 시각은 강석운의 무뚝뚝한 모습을 그리워했고 영림의 청각은 강석운의 부드러운 음성을 탐냈다.

그러나 영림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견디어 배겼다. 그것은 오로지 강석운이 기혼자이기 때문이었다. 칸나의 저항에서 영림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칸나는 한층 더 스스로 움직이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강선생이 기혼자라는 세속적인 도덕률의 압력을 느껴서가 아니다.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도 또한 될 수 없다. 좀 더 참되고 깊은 의미에 있어서의 인간 대 인간의 모랄은 강석운 대 칸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모님 대 칸나에게 있다. 칸나는 사모님을 모른다. 사모님이 어떠한 인간적 가치의 소유자인가를 측량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꼭 한 번 만나 봐야만 하겠다. 만나 보고 나서 만일 사모님이 지닌 인간 가치의 총결산(總決算)이 칸나보다 떨어진다는 결론을 얻었을 때, 칸나는 조금도 서슴치 않고 강선생을 전취(戰取)하기 위하여 줄기차게 움직여도 무방할 것이며 신도 그러한 칸나의 행동을 꾸짖지는 못할 것이다.그때까지는 아무리 강선생이 그리워도 스스로의 의사로써 강선생을 찾아가지 않으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영림은 운명까지를 피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니, 영림은 그러한 불가피한 운명이 두 사람 사이에 있어지기를 골똘히 바랬다. 여기서 영림이 가 생각하는 운명이란 길거리 같은 데서 우연히 강석운을 만나게 되는 일이다. 영림의 의사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그러한 종류의 우연은 곧 신의 의욕이며 사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거리를 싸돌아다녀도 외출이 별반 잦지 않은 강석운을 우연히 만나기는 좀처럼 힘이 들었다. 아니, 강선생을 만나려고 일부러 돌아다니는 행동 자체가 이미 우연이 아니기에 최근에는 외출조차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한 영림이가 어제 우연히도 전화를 통하여 애리의 입으로부터 송준오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송준오를 한 번 만나 보아도 무방할 것 같은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만년필을 던지고 영림은 다시 마루에 나가서 송준오의 집에다 전화를 걸었다. 송준오는 마침 집에 있었다.

송준오를 만나기 위하여 영림은 서대문 네거리에서 종로 쪽으로 가는 전차를 탔다.

송준오는 신당동에서 산다. 종각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오랫만에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것이 영림의 의향이었다.

아까 애리로부터 전화로, 송준오와 약혼을 한다지 않느냐는 말을 듣는 순간, 영림은 불현듯 송준오를 한 번 더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어쨌든 송준오는 영림을 위해서 음독까지 한 사나이였다. 한 사나이가 한 여자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 최고의 지순(至純)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같은 값이면 자기의 정열이 강선생에게서 타는 것보다는 송준오에게서 타 주었으면 모든 것이 편하다. 사모님이라는 한 여성이 차지하고 있는 아내의 지위와 인격을 욕되게 함이 없이 자기의 의욕을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편하고 좋은 일이냐고, 어쩌다가 강선생을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기 전에 한 번 더 송준오에게 접해 봄으로써 자기에 대한 최후의 저항을 영림은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것은 올케 한혜련을 하루바삐 고씨 문중에서 이적시켜 자유로운 신분으로 만들기 위해서 영림 자신이 한층 더 서둘러 대는 것과 마찬가지 성질의 저항이었다.

가망은 없지만 어쨌든 신중을 기하는 의미에서 한 번만 더 만나보자.

그런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영림은 종로에서 내렸다. 이 저항의 정신은 그의 강렬한 의욕과 더불어 하나의 가치체(價値體)로서의 인간 고영림이 존재의 의의(意義)와 생명력의 소재(所在)를 규정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즈음, 택시에 몸을 싣고 송준오는 종로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영림이가 일부러 전화를 걸어 준 데 대한 고마운 마음에 어린애처럼 송준오는 젖어 있었다. 자존(自尊)의 자세를 갖출 수 없도록 기진맥진한 자기 자신에게 세속적인 혐오의 염을 순간적으로 준오는 느꼈으나 그것을 끝끝내 내세우기에는 고영림에게 향하는 연연한 감정이 다급하게 앞장을 섰다.

아아, 고영림!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오히려 모자람을 느끼는 고영림!

그 서둘러 대는 감정 속에서 자기 멸각(自己滅却)을 준오는 또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준오는 울고 있었다.

죽음의 초대다!

죽음의 초청장과도 같은 영림의 전화를 받는 순간, 준오는 서슴치 않고 그의 초청에 응할 것을 결심했었다.

준오는 알고 있는 것이다. 영림이가 오랫동안 흠모하던 강석운 선생이 마침내 영림의 앞에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준오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달 전, 한강 백사장에서 애리를 모델로 하여 촬영대회를 열자던 날, 영림은 돌발 사건을 빙자하여 종이 조각 하나를 다방 전언판에 꽂아 놓고 사라져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준오는 애리가 발산하는 강렬한 육체의 냄새를 코가 저리도록 맡으며 아서원에서 점심을 먹었다.

뾰르통해서 애리는 사라져 갔으나 준오는 갈 데가 없다. 지향 없는 마음을 발걸음이 이끌어 갔다. 남산에 올라 푸른 하늘을 속절없이 쳐다보며 한두 시간을 준오는 구름과 놀았다.

구름에 지쳐서 내려오는 길에 준오는 영림의 돌발 사건을 목격하고 절망을 느꼈다. 숲 새로 몸을 숨기고 준오는 보았다. 경사진 비탈을 강석운은 총총히 걸어 내려갔고 소나무 곁에서 영림은 울고 있었다.

이윽고 영림은 강석운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 내려갔고 영림이가 울고 섰던 바로 그 소나무 밑에서 준오도 울었다.

그것이 벌써 한 달 전의 일이었다.

그 한 달 동안 준오는 영림을 깨끗이 단념하고 애리를 사랑해 보려고 무진 노력을 꾀하여 보았으나 오로지 그것은 순간적인 신념일 뿐, 포말처럼 노력은 허무했다.

그러한 영림이가 오늘 나를 불렀다. ?

동정으로써 움직일 고영림이가 아니기에 일부의 희망 같은 것을 품어도 보았으나 결국에 있어서 영림의 의식 세계에는 강석운과 송준오와의 비중 문제가 도사리고 있겠기에 젊음만으로서는 대결하기 힘든 압력을 숨 가쁘게 느끼며 독배를 마시러 나가는 소크라테스처럼 자기 멸각의 의식이 준오에게는 비장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송준오의 이 최후의 보이팅(投票[투표])이 무엇을 결과 하든 그는 이미 두려운 것이 없었다. 운명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는 지금 죽음을 예측하는 최후의 향연에 참석하고자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차가 멎었을 때, 종각 앞에서 영림은 손을 내젓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읍니까?

아뇨, 지금 왔어요.

오랫만입니다. 그동안……』

준오는 말꼬리를 잇지 못하고 얼굴부터 붉혔다.

준오씨도 그동안……』

, 그저……』

영림의 모습을 정답게 핥고 있던 준오의 시선이 후딱 발부리로 떨어져 내려갔다. 음독 사건이 있은 후부터 준오는 시선을 잘 들지 못했다. 영림의 시선과 마주치는 것을 준오는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한 준오가 영림의 마음을 쥐어짜고 가슴을 아프게 했다.

준오씨가 좋아하는 초밥 먹으러 가요.

그렇지만 영림씨는 양식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떨어뜨렸던 시선을 준오는 들어보였다.

흐흥……』

영림은 서글프게 웃어 보이며

오늘은 초밥 먹기로 해요. 나도 먹고 싶어요.

그럼 저리로 가지요.

둘이는 나란히 서서 을지로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해 질 무렵이었다. 거리는 소란했으나 둘이의 심경은 호수처럼 조용했다.

호수처럼 깊이도 했다.

왜 수염도 좀 깎으시고, 그러시지죠?

존댓말을 쓰지 않을 수 없으리만큼 준오의 얼굴이 홀쭉해 있었고 수염이 파아랗게 돋아 있었다.

, 수염……』

준오는 쓸쓸히 웃으며 입 언저리에 손을 갖다 댔다.

미국은 언제쯤 떠나세요?

할 말이 없어서 영림은 물었다.

, 미국…‧… 여권이 아직 안 나왔읍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임을 영림은 알면서도

그렇게 오래 걸리나요?

여기저기 걸리는 데가 많아서…… 아주 귀찮답니다.

준오씨가 서두르지 않으니까 그런 거 아냐요?

준오는 잠자코 있었다.

영림도 잠자코 있었다.

화제가 없다. 화제가 없으면 영림은 괴롭다. 죄진 사람처럼 침묵이 무섭다.

요즈음 사진 많이 찍으세요?

별로……』

, 저번에는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미안합니다.

차차 더 영림은 송구만 해진다.

아니요, 미안은……』

돌발 사건의 내용을 알고 있기에 준오는 도리어 탓할 수가 없다. 탓을 하다 가는 추한 질투심만 튀어나올 것 같았고 이만저만한 질투심도 또한 아니기에 일단 입 밖에 냈다가는 수습할 방도가 전연 있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애리, 여전하죠?

침묵이 싫어서 영림은 또 물었다.

여전하더군요.

애리, 요즈음에 점점 더 예뻐지던데……』

준오의 마음 자세를 영림은 떠 보고 있는 것이다.

준오는 또 잠자코 있었다.

집의 오빠가 눈이 벌개서 쫓아다니지만…… 애리의 마음은 딴 곳에 있어요.

『…………』

그걸 나는 잘 알고 있죠.

애리씨의 마음은 화폐에 있다고 하더군요.

화폐?

돈이란 말이 봉건적이라서 안 쓴다고 하더군요.

애리다운 감각이에요. 그렇지만 애리를 얕잡아 봄 안돼요. 애리의 언행에는 애리다운 철학이 있어서 좋아요.

매소부의 철학 말입니까?

어조가 비웃고 있었다.

그처럼 한 마디로 제껴 넘길 수 없는 무엇이 애리에게는 있다고 보아요. 가정이 다소 불우해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지만요. 그러니까 준오씨도 이해를 좀 하셔야만 될 거에요.

웃음을 팔아먹는다고 내놓고 장담하는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말입니까?

그건 아직도 애리를 모르는 말이에요. 여자들의 태반이 갖고 있는 깜찍한 데가 애리에게는 없어요. 탁 터놓는 개방된 성격에다가 자기의 논리에 도취하는 버릇이 있어서 실지로 마음먹고 있는 것보다 훨씬 과장된 말을 해요. 그래서 잘못함 오해를 받지만…… 실지의 행동은 옆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대담하지는 못하죠.

영림씨가 왜 갑자기 애리씨의 열렬한 옹호자가 됐읍니까?

사실이 그러니까 그러는 거죠.

그만해 두시오.

뱉듯이 준오는 말했다. 영림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가

애리는 고독한 애에요. 거기에는 명랑하고 이야기가 무척 딱딱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딱딱한 사람이 육체의 냄새를 그처럼 피워요?

그게 다 고독하기 때문이죠. 애리의 그처럼 솔직한 성격은 이해하지 못하고 모두들 불량하다고만 보아 주고…… 애리를 참답게 사랑해 주는 남성이 없기 때문에 애리는 애리대로 더 한층 기승을 부려 가면서 반항을 하고 있는 거예요.

몸을 팔아 가면서까지 반항을 할 수가 있을까요?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애리는 아직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을 거에요.

어머니가 기생 퇴물레기라지요?

문제는 거기 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모르긴 하지만 어머니를 지지리 학대해 온 남성들에게 대한 반발심 같은 무슨 그런 것이 있지나 않을까 하고요.

무서운 여자로군요.

모르는 일이에요. 조금도 무섭지 않은 애예요. 진심으로, 그리고 인격으로만 대해 준다면 아주 폭삭 녹아 버릴 애죠. 고독한 사람일수록 인정에는 약해요. 눈물이 많구요.

애리씨에게 눈물이 있어요?

모르긴 하지만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서는 많이 울 거예요. 낮에는 싸우고 밤에는 울고…… 도리어 나 같은 인간이 눈물이 없는 편이죠.

『…………』

준오는 문득 영림을 쳐다보았다. 단념하라는 선전 포고와도 같아서 준오는 가슴 속이 뜨끔했다.

준오의 시선을 피할 셈으로 영림은 문득 외면을 하다가

, 강선생님이……』

외면을 한 영림의 시야에 강석운의 얼굴이 오벌래프의 스크린처럼 휘익 뛰어 들어왔다.

을지로 네거리에서의 일이었다.

강선생님이라는 영림의 불의의 외침은 지나간 한 달 동안, 그것과 가파르게 저항해 오던 칸나의 압축된 영혼의 몸부림이었고 고뇌에 찬 오랜 진통 끝에 신의 축복을 받으면서 분만(分娩)하는 또 하나의 생명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소박하고 와일드하게 주장하는 고고(呱呱)의 소리와도 같았다.

그것은 칸나가 여태까지 지니고 있던 생명의 연장 같기도 하였고 그것의 신생(新生) 같기도 하였다.

고영림은 자기 속에 두 개의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있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며 강석운 선생이 타고 있는 전차 안을 말똥히 바라보는 그대로의 자세로 불현듯 걸음을 멈추었다.

명동 쪽으로 대가리를 두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전차가 파도치는 자동차의 행렬을 따라 을지로 로타리를 굼벵이처럼 꿈틀꿈틀 건너가고 있었다.

배꼭이 들어선 비좁은 전차 꼬리께서 강선생은 혁대에 매달려 창밖을 내다보고 서 있었다. 그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라서, 점점 멀어져 가기는 했지마는 강선생의 표정의 움직임을 희미하게나마 영림은 붙잡을 수가 있었다.

강선생은 영림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의의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조금 숙여 보이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것은 그러나 순간적인 표정에 그쳤을 뿐, 웃음을 후딱 거두어 버린 강선생의 얼굴에는 무관심의 평온이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의식적인 평온이며 무관심임을 영임은 이윽고 깨달았다.

왜냐하면, 손 하나를 들어 보이고 한두 번 흔들어 보이기도 한 영림에게 강선생은 아무런 반응도 움직임도 보여 주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거리가 멀어지며 강선생의 모습이 차차 작아져 갔다. 그러나 손도 흔들어 주지 않았고 작별의 고개도 숙여 주지 않았다. 다만 시선이 멀어지고 시각(視角)이 좁아짐을 따라 강선생의 얼굴이 조금씩 위치를 변해 가며 이편 쪽을 열심히 바라보고 섰을 뿐, 다른 아무런 동작도 강선생에게는 없었다.

강석운 선생이지요?

이윽고 저만큼 전차가 사라져 갔을 때, 송준오는 무뚝뚝하게 물어 왔다.

, 강선생 아세요?

사람은 모르지만 얼굴만을 알지요. 언젠가 학교에 과외(課外) 강의를 하러 왔었으니까요.

둘이는 묵묵히 로타리를 건넜다.

로타리를 건너서서도 둘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꺼낼만한 화제도 없었거니와 새삼스런 화제가 간사스럽기만 했고 온갖 화제가 감정의 파도 속에서 무의미한 포말처럼 껌뻑껌뻑 꺼지기만 했다.

명동 한복판, 초밥을 잘한다는 어떤 가뽀야이 층에 마주 앉아서도 둘 이는 아무런 화제도 끄집어내지 앉았다. 그래도 화제의 궁핍을 느끼지 않을 만큼 감정의 물결은 둘이에게 있어서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아니, 화제가 하나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화제로 끄집어 내기에는 둘이가 다 같이 무섭다. 상극되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두 젊은이는 똑같은 무게를 가지고 강석운의 존재를 생각하고 있다.

준오씨, 많이 드세요.

초밥 접시가 들어오고 스끼야끼도 끓었다. 싫다는 준오를 억지로 달래며 영림은 술도 권했다.

영림씨는 왜 들지 않소……?

몇 개 집어 먹다가 가만히 앉아서 자기를 말끄러미 쳐다만 보는 영림에게 준오는 물었다.

먹는 것보다 이렇게 앉아서 보는 것이 더 좋아서……』

영림은 쓸쓸히 웃었다.

준오도 똑같이 쓸쓸히 웃었다.

안 먹는다는 술을 영림은 억지로 권했고 그럼 같이 들자는 술을 영림은 쾌히 마셨다.

억지로 권하고 싶고 쾌히 들고 싶은 감정이 영림에게는 끓었다. 술맛을 알아서가 아니건만 먹으면 먹을 수 있는 술이기도 했고 준오가 따라 주는 술이 어쩐지 인간 하나의 생명처럼 존귀함을 후딱 후딱 느끼기 때문이다.

영림씨가 술을 든다는 건 정말 드문 일인데……』

먹으면 먹는다면서도 좀처럼 들지 않던 영림의 술이기에 준오는 기뻤다.

준오씨 앞날에 행복이 있기를 빌고 싶어서요.

얼굴에 별반 오르지 않는 영림의 술인가보다. 영림이 보다 준오가 더 빨리 빨개졌다.

행복이라고요?

준오는 얼른 시선을 떨어뜨리고 제 손으로 술을 따라 훌쩍 들이키며

내 행복을 갖다 줄 사람은 영림씬 줄로만 알았는데…… 그 영림씨가 내게 행복이 있기를 비는군요.

얘기하고 있던 것처럼 준오에게 있어서는 마침내 죽음의 초대연이 되어지고 있었다.

준오씨.

영림은 쓸쓸히 웃으며

나는 노력했어요. 오늘도 노력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노력하고 있어요.

영림은 괴로와 준오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오늘 저녁의 영림씨의 호의가…… 결국에 있어서 영림씨의 과거를 영원히 묻어 버리려는 장송연(葬送宴)을 의미한다는 거지요?

뚫어지듯 노려보는 준오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영림은 불현 듯 고개를 들며

아냐요. 그런 의미에서 만나잔 건 결코 아니에요.

그렇다면 일부러 나를 불러 내서…… 나를 이처럼 울려 놓을 심사는 어디서 나왔읍니까?

아냐요, 일부러 그런 건 아냐요. 그것만은 믿어 주세요.

괴롭다. 정말로 괴롭다. 그렇지만 헤어질 때까지는 아직도 한두 시간의 여유가 있다. 그 순간까지 영림은 칸나의 일생을 이 순진한 청년에게 맡길 수 있으며 거기서 또한 칸나의 강렬한 의욕과 정열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칸나의 생명을 완전히 불태울 수가 있을런지 모른다는 판정이 내리어지기를 절실히 원했다.

동정의 눈물을 뿌리면서 장송연을 베풀어 보는데 최후의 흥취가 있다는 건가요?

영림은 두 눈을 가만히 감으며

나는 그렇게까지 잔인하지는 못해요. 잔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를 만든 거예요.

영림도 울고 있었다. 두 눈을 감고 비스듬히 꿇어앉은 자세 그대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동정의 눈물이 얼마나 값싼 것인지도 잘 알고 있고…… 잔인을 향락하리만큼 마음이 표독스럽지도 못하고……』

영림씨는 그럼 뭣 때문에 지금 눈물을 흘립니까? 나로서는…… 값싼 동정의 눈물일지라도…… 그처럼 울어주는 것이 황송하리만치 기쁘기는 하지만요.

하기 싫은 대답이지만…… 물어 주시니 대답을 하겠어요.

영림은 조용히 눈물을 찍어 내며

영림은 지금 영림 자신과 싸우고 있는 거예요. 그 싸움이 너무도 강열해서 우는 거예요.

『…………』

최후의 일순간까지 자기 자신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 보는 것뿐이에요.

강석운 선생을 사모하고 있읍니까?

순간, 흠칫 몸서리를 쳤으나 이윽고 영림은 조용히 눈을 떴다.

꺼내서는 아니 될 화제를 송준오는 끝끝내 꺼내고야 말았다.

영림은 오랫동안 준오를 바라보며 앉아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묻고 싶지도 않은 말을 물었읍니다.

준오는 제 손으로 또 술을 따라 마셨다. 취기가 감정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묻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지만 영림씨의 분명한 심경을 알아야만 하겠기에……』

준오씨, 술 같이 들어요.

영림은 잔을 들었다. 그러나 준오는 잔을 들 생각은 통히 않고,

영림씨!

준오의 목소리는 격정에 떨고 있었다.

알고 싶어서 묻기는 했지만…… 대답을 그만둬 주시오. 기다림의 행복을 남겨 두기 위하여 갑자기 듣기가 싫어졌읍니다.

준오는 흑흑 흐느껴 울었다.

준오씨, 굳세 주세요. 준오씨의 앞길은 그거야말로 대해처럼 양양해요.

어린 동생을 달래는 듯 같은 감정이 항상 영림에게는 앞장을 선다. 준오를 대할 적마다 영림은 누나가 되고 있었다. 일찌기 두 사람 사이에 포옹이 있었을 때, 영림은 자기가 준오에게 포옹을 받는다는 생각보다도 자기편에서 준오를 포옹해 준다는 느낌이 한층 더 강했다. 처음에는 무심중 지나쳐 버리곤 했으나 그러한 느낌이 차차 커져가면서 불만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러한 불만이 오늘도 또 왔다. 잘하면 메꾸어 질런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고 왔던 불만이었다.

준오씨, 인제 가요. 눈물을 씻고……』

영림이가 일어서서 준오의 저고리를 벗겨다 입혀 주는데 준오의 얼굴이 눈물과 함께 다가왔다.

영림은 눈을 감고 시주나 하는 것처럼 준오의 격렬한 포옹과 입술을 조용히 받았다.

영림! 죽어도 나는 영림을 잊을 수는 없어! 죽어도 못 놓겠어!

『…………』

영림은 너무도 무정해! 냉혈 동물이야!

『…………』

사람의 목숨 하나가 그처럼 초라했던가요? 이 절망…… 이 암흑……』

『…………』

영림도 울고 있었다.

강석운이…… 강석운이 영림의 애정을 가로채 간다면…… 나는 그를 죽여 버려도 좋아!

모르는 말이에요. 그 선생님에게는 아무런 불찰도 없어요. 자아, 인제 가요!

무어가 선생님이야? 그따위가 선생이야? 부인도 있고 자식이 있는, 지성이 있다는 문화인이 제자를 꼬여내?

준오씨는 술이 좀 취했어요. 자아……』

영림은 가까스로 준오의 완강한 포옹에서 빠져나오며

인제 나가요. 술이 지나치면 어머님이 또 걱정을 하실 텐데…… 정말 좋은 어머님이세요.

지나치게 총명한 것이 영림은 탈이야. 어머니 걱정까지 해 주지 않아도 좋아요.

비틀거리는 준오를 부축하고 영림은 거리로 나섰다. 어두운 거리였다.

큰길로 나가 택시를 불러 세우고 준오를 영림은 태웠다.

신사동까지 모셔다드려요.

네네.

영림은 택시 값을 치르고 나서

자아, 악수!

그러나 준오는 쭈그리고 앉아서 두 손으로 덮어 버린 얼굴을 무릎 위에 파묻듯이 한 채 아무런 대답도 없다. 우정을 나서면서부터 준오는 술이 깬 듯 이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어서 악수!

준오는 홱 얼굴을 들며 두 손으로 영림의 손목을 꽉 부여잡고 눈물 어린 자기 볼에다 격렬히 비벼댔다.

영림, 행복해요!

진심으로 준오는 영림의 행복을 바라며 말했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인 것처럼……

고마워요!

준오가 아까운 듯이 놓아 준 손길로 영림은 한 번 더 수염이 깔깔한 준오의 턱과 볼을 만져 보았다.

이윽고 차는 떠나고 영림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꼬딱 서 있었다.

명동 입구 십자가 한 모퉁이에서 송준오가 타고 간 택시의 빨간 테일 라이트가 을지로 어귀로 감실감실 감돌아들 무렵까지 영림은 꼬딱이 서서 말똥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보며 영림은 울고 있는 것이다.

어둠이 빛깔을 몽땅 삼켜 버린 지 그리도 오래지 않은 초저녁, 현실과 피로만을 한 짐 짊어지고 넋 없이 늦은 귀로를 재촉하는 생활인의 비장하리만큼 무표정한 얼굴의 행렬이 십자가에는 있었다.

저렇듯 남들은 모두가 다 생활에 지쳐 있는데……

나는 왜 이렇듯 울고 섰어야만 하나.

의식주에 시달림이 없는 한 인간의 눈물이 아무리 생각하여도 지금 영림 자신이 느끼는 것처럼 존귀해 보이지는 정녕 않았다.

결국은 교단의 눈물이요, 상아탑의 눈물이다.

스스로 자기의 눈물을 다루어 보고 자질해 볼 수 있는 가능(可能)이 솟구치는 눈물 밑바닥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불행이다!

그런 것이 다 칸나 고영림의 불행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슬픔이면, 슬픔, 기쁨이면 기쁨, 그 자체 속으로 파고들고 그 자체 속에 침몰하지 못하는 자기의 까다로움을 영림은 어둠 속에서 말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림은 다음 순간, 그 세속적인 불행 속에서 이내 빠져나올 수 있는 발받이 하나를 붙잡고 외쳤다.

그렇다. 그네들만이 생활인이 아니고 고영림이도 하나의 생활인이다.

의식주를 위한 생활만이 생활은 아니다. 자기도 일 년 후면 의식주를 위하여 걱정을 하겠지마는 오늘의 고영림이도 한 사람의 진지한 생활인임을 자각하였다.

먹고 사는 것만은 생활은 아니다. 생활이란 각기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다하려고 몸부림치는 노력을 노력하고 있는 인간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목하 영림에게는 의식주를 위한 임무는 아직 없다. 있는 것은 다만

올바르게 배우는 것과 올바르게 청춘을 밭 가는([]) 것뿐이다.

이리하여 고영림은 자기의 눈물이 지닌 존귀한 뜻을 다시금 찾을 것만 같았다.

그럼 나는 무엇 때문에 지금 이렇듯 울어야만 하나……?

냉혈 동물이라는 원망스런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진 송준오의 영혼의 흐느낌과 암흑 같은 절망이 눈물겨워서 우는지도 몰랐다. 강석운 선생이 그리워서 자기는 울고 있는지도 또한 몰랐다.

그러나 영림은 이윽고 마음으로 도리도리를 했다.

아니다, 아니다.

그 어느 것도 영림에게는 진정한 눈물이 아니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건만 영림의 설움은 자꾸 복받쳐 오르기만 했다. 자기 눈물의 참된 뜻을 구명하기 전에는 이 어둑컴컴한 십자로 한 모퉁이에서 한 발자국도 뜰 수가 없다.

이 어두운 밤거리 십자로에 꼬딱이 서서 그 네 갈래로 뻗어진 어느 길이 자기의 길인지를 영림은 택해야만 했다.

나는 왜 이처럼 고달피 울까?

순간, 영림은 후딱 하늘을 쳐다보며

그렇다. 이 설움은 서글픈 설움이 아니고 고달픈 설움이다.

무심중 뱉은 한 마디가 영감인 양 영림에게 왔다.

그렇다. 고달픈 설움! 고달픈 설움!

영림은 그냥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별들이 하늘에 고달피 조는 밤 고달픈 영혼의 행렬은 대지에 흘렀다.

오오, 고달픈 우주여 칸나 어이 혼자 안일하려뇨.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오히려 모자람을 서러워하는 귀여운 칸나여.

그대마저 생활에 지쳤느뇨 냉혈 동물에 눈물이 흘렀다.

그윽한 동경 위에 청춘을 밭 갈자.

영혼은 타서 재가 되라 사랑의 바다에 쪽배를 띄우자 노는 없어도 서럽지 않다.

구원을 잡으러 바람을 타자 오오, 고달픈 우주여, 칸나여.

십자로의 영림은 그냥 울고만 섰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