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
계절의 흐름에 따라 자연이 변하듯 사람 사는 일도 그렇다. 이른 봄날 들녘에 흘러넘치는 만물의 정기가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까지 스며들어 물오른 나무마냥 생기를 찾게 해준다. 그러나 시샘이라도 하듯 몰려온 먹구름에 구키의 마음은 그늘져 있다. 이월 보름부터 삼월에 걸쳐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주변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한 살 위이지만 입사 동기로 출세가도를 달려온 미즈구치가 폐암으로 입원했다. 작년 말 자회사인 마론 사로 좌천되고 나서 의기소침해 있던 미즈구치에게는 그야말로 이중의 충격이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해서 서둘러 수술을 받아 일단 한숨은 돌린 상황이었다. 구키는 문병을 갈 생각이었지만 아직 문병은 이르다는 가족들의 당부로 미루고 있다. 미즈구치의 발병 역시 봄의 정기에 체력을 빼앗긴 탓인가. 그러나 본사의 요직에서 밀려난 후 쓰러졌다는 점으로 보아 인사문제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병의 직접 원인은 아니겠지만 회사에서 좌천되었거나 일의 보람을 잃어버렸을 때 병이 찾아드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결코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다. 어쨌든 같은 나이 또래의 동료가 병으로 쓰러지자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은근히 불안하기도 하다. 다행히 구키는 지금까지 특별히 아픈 데는 없지만 린코와의 관계는 어느덧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행되어 있다. 남녀 관계는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의 계기를 통해 단계적으로 깊어간다. 두 사람의 경우가 그렇다. 함께 가마쿠라에 가고 이어서 하코네를 찾았다가 급기야는 린코 아버지의 상중에도 구키가 거의 억지를 부려 호텔에서 만났다. 그런 대담하면서도 주위 사람들을 무색케 하는 만남을 통해 두 사람 사이는 한층 깊어져 이제는 헤어지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월 보름께 둘이서 주젠지코의 폭설에 갇혀 돌아오지 못했던 사건 이후로 두 사람의 끈은 더욱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남편 조카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이틀이나 집에 들어오지 않은 린코의 행위를 사람들이 용서해줄 리 없다. 혹시라도 집에 돌아가서 남편에게 질타를 받고 큰 싸움이라도 벌어지진 않았을까. 그게 걱정스러워 구키는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틀 뒤 시부야의 맨션에서 만난 린코는 의외로 별 탈 없어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에 불과하고 우려했던 대로 큰 문제가 있기는 했다. 린코의 말에 따르면 그날 밤 11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가니 남편은 자지도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린코가 다녀왔다는 말을 건네도 대꾸 한마디 없이 그냥 묵묵히 책을 읽고 있었던 모양이다. 순간 린코는 남편의 분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지만. 그래도 일단 폭설 때문에 돌아올 수가 없어 피로연에 참석하지 못한
점을 사과했다. 그러나 여전히 남편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층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순간 '잠깐' 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린코의 등에 날카롭게 꽂혀온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다 알고 있어."
놀란 린코가 뒤돌아보자 '함께 투숙한 상대도. 장소도 알고 있어' 라며 단정적으로 말한다. 린코의 말을 거기까지 듣는 순간 구키는 정수리를 세차게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남편에 대해 린코와 기누가와에게서 단편적으로 들은 바로는 사십대 후반의 의과대학 교수이고 상당히 핸섬하고 겉으로는 특별히 흠잡을 데 없지만. 흔히 수재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냉담하고 독선적인 면이 있는 반면 남녀관계나 세상물정에 대해선 어리숙한 편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이 아내의 정부에 대해 뒷조사까지 한단 말인가. 구키는 믿을 수 없지만 린코는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당신 이름이 구키 쇼이치로라는 것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그것까지."
"그 사람 보기보단 질투심이 많아요."
그렇지만 이름까지 알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뒤를 미행했거나 아니면 사립탐정한테 부탁했을 수도 있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알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알 수 있어요. 당신에게 받은 편지도 있고 제 수첩에도 당신 이름하고 회사 전화번호를 메모해놓았거든요."
"그걸 그 사람이 봤어?"
"물론 보지 못하도록 감추고 있었죠. 하지만 당신을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그렇게까지 조심하지 않았었는데 어쩌면 남편이 그 때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린코는 항상 집에 있었잖아."
"그건 그렇지만 작년 연말부터 부쩍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으니까....."
지난해 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린코가 요코하마의 친정에 가 있는 날이 잦았던 때를 이용하여 남편은 철저하게 린코의 뒷조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번엔 여관 이름을 남편에게 말해두었거든요. 1박 정도면 문제없었겠지만 이틀씩이나 묵었기 때문에 프런트로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물었는지도 모르죠."
폭설이 내리던 그날 밤 투숙객들은 몇 되지 않았을 것이고. 예기치 않은 긴급 상황이었던 만큼 여관에서도 비교적 쉽게 외부로부터의 문의전화에 응했을 수도 있다.
"정말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나?"
"제가 왜 거짓말 하겠어요?"
지금까지 세상물정 모르는 무골호인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갑자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것 같아 섬뜩하다.
"그리고 다른 말은 없었나?"
"놀고 싶으면 가서 신나게 놀아봐. 너는 불결하고 음탕한 여자니까 라면서."
그 말엔 구키 자신을 향한 증오심도 섞여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잠자코 있는데 린코가 한숨을 내쉰다.
"나를 증오하지만 이혼해줄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구키는 린코의 말을 납득할 수 없다. 아니 그보다는 린코의 입을 빌려 듣고 있는 남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정말 아내를 미워한다면 한바탕 욕지거리라도 퍼붓고 나서 한시라도 빨리 헤어져버려야 하지 않을까 왜 맘에도 없는 부부관계를 유지하려는 걸까.
"모를 일이군."
구키가 중얼거리자 린코도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사람은 그런 식으로 저한테 복수를 하고 있는 거예요."
"복수라고? 린코한테?"
"몸을 허락하지 않는 내가 미우니까 이혼도 해주지 않고 영원히 결혼이라는 굴레를 씌워두려고. ...."
그런 복수 방법도 있나. 구키는 내심 놀랍기도 하고 그럴 듯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남편의 저의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남자라면 우선 화부터 내든가 두들겨 팬다든가 뭐 그러는 거 아닌가?"
"그 사람은 그러지 않아요."
"그렇다면 린코가 밖에서 아무리 딴 짓을 하고 다녀도 아무 말도 않고 눈감아준다?"
"눈감아준다기보다 집에 틀어박힌 채 차갑게 바라볼 뿐이죠. 설령 그 사람이 눈감아준다 해도 제가 그 사람의 아내로 남아 있는 한 어머니나 오빠는 물론 시댁 어른들이나 친척들 모두가 저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을 거예요. 이혼을 하지 않는 한 부부는 부부니까요."
린코의 말을 들으니 남편이 생각하는 복수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한 지붕 아래 살면 사는 게 말이 아닐 거야. 린코도 그 사람을 위해 집안일을 할 생각이 안 날 거고. 그쪽도 집에서 밥맛이 나겠어?"
"그 점은 문제없어요. 시댁이 나카노라서 지금까지도 시어머니 계신 데서 먹고 다니는 일이 많았고. 대학에도 자기 방이 따로 있어요. 집에서도 침실을 따로 쓴 지 오래됐구요."
"언제부터?"
"1년도 넘었어요."
1년 전이라면 두 사람 사이가 급속하게 가까워졌을 때인데 그렇다면 그 무렵부터 린코 부부 사이에 금이 가고 있었단 말인가.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이대로 지내도 괜찮겠나?"
"당신은 어떠세요?"
린코가 오히려 되묻는 바람에 구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다. 지금 당장 만족할 만한 대답은 할 수 없지만 두 사람 사이가 막다른 골목까지 몰린 것만은 틀림없다. 구키는 말없이 주젠지코에 발이 묶여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던 때를 생각한다. 그날 밤 구키는 열한시가 넘어서 집에 도착했는데 아내는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아내는 귀가하는 남편을 맞아주지 않았고 그래서 구키는 서재로 곧장 올라가 윗도리를 벗고 편안한 가운으로 갈아입으며 생각한다. 지금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아내와 얼굴을 맞대면 지난 밤 외박 때문에 말다툼이 벌어지기 십상이다. 차라리 이대로 피곤한 척 잠들어버릴까. 사실 정사를 벌인 뒤라 피곤하기도 하고 새삼스럽게 돌아오지 못한 변명을 하는 것도 우습다. 그러나 지금 시치미를 메고 어물쩍 넘어가더라도 날이 밝으면 어차피 아내와 마주칠 것이다 귀찮은 일이 벌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오늘 밤에 일이 바빴다고 둘러대며 사과하는 편이 무난할지도 모른다. 마음을 고쳐먹고 일어나 거울 앞에 서서 뭐 달라진 게 없나 확인하곤 거실로 내려간다. 짐작대로 아내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구키를 보고는 '다녀오셨어요'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구키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의외로 부드러운 말투에 안도감을 느낀다. 구키는 아내의 곁에 앉으며 '아아. 피곤하다'며 선하품을 한다.
"어젯밤 말야. 돌아오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일이 안 끝나더라구. 오늘에야 간신히 끝냈어."
아내에게는 교토의 절과 박물관에 자료 수집 차 다녀온다고 말해둔 바 있다. 그러나 그 비슷한 명목으로 몇 번이나 린코와 여행을 다녀왔기때문에 아무래도 뒤가 켕긴다
"어제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술에 취해서 그만 잠이 드는 바람에"
한 번 더 가볍게 하품을 하고 테이블 위의 담배를 집어드는데 아내가 텔레비전을 끄며 구키 쪽으로 돌아앉는다.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무리?"
아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의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싼다.
"우리 헤어질까요. 그러는 편이 낫겠죠?"
'아닌 밤중에 홍두깨' 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인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지금 아내 입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차라리 지금 헤어지는 게 저도 맘 편하고 당신도 후련할 거예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아내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평소에도 아내는 목소리를 높이거나 화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불만이 있어도 요점만 간단하게 말하고는 무관심한 태도를 취한다. 구키는 아내의 타고난 성격 때문이라고 여겼지만 오늘 밤엔 뭔가 다르다. 여느 때보다 훨씬 조용하면서 온화하게 말하는 태도에서 깊이 생각한 끝에 내린 용이치 않은 결단이 엿보인다.
"하지만 어째서 ..."
구키는 손에 든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도 잊은 채 아내에게 묻는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이해할 수 없군."
"이해 못할 게 뭐가 있어요? 이유는 당신이 더 잘 아실 텐데요."
아내의 찬찬한 눈길이 구키에게로 향하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돌린다. 설마 했지만 린코에 대해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지금까지 어떻게 그런 기색 하나 없이 '당신은 당신. 나는 나'라는 담담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을까 아내의 그런 무관심을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그간의 정황을 알고 있었다니. 구키는 자신이너무 안이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갑자기가 아녜요. 너무 늦은 거죠. 지금 저와 헤어지지 않은 채 관계가 지속된다면 그 여자도 초라해질 거예요."
"그 여자라니?"
"당신이 그렇게까지 열중하시는 걸 보면 정말 사랑하기 때문 아닌가요?"
미움이 사무쳐서인지 아내의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하다.
"제 걱정은 마세요. 저는 괜찮으니까."
지금까지 아내와의 이혼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결혼하고 칠팔 년 지나 슬슬 권태기가 찾아왔을 때. 그리고 그 뒤 다른 여자를 사귀게 되었을 때도. 만약 아내와 헤어져 혼자가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특히 린코를 알고부터는 훨씬 구체적으로 아내와 헤어지고 린코와 결혼하는 것까지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그러나 이혼에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따르게 마련이다. 우선 이렇다 할 결점도 없는 아내에게 어떻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딸아이한테는 뭐라고 이해를 시킬 것인가. 더욱이 지금까지 쌓아온 가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가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의욕이 있는가. 그러기에는 나이를 너무 먹어 지금의 생활을 바꾸기 어렵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린코가 아무 문제없이 이혼하고 자기와 새 인생을 함께 시작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문제를 생각하면 한순간 뜨겁게 달아올랐던 사랑도 식어버리게 마련이다 역시 지금의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배경으로 삼고 가끔 보고 싶을 때 만나는 편이 주변에도 폐를 끼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결국 지난 반 년 동안 구키의 내면에선 이혼해서 린코와 새살림을 차리자는 충동적인 생각과 어리석게 굴지 말자는 냉정한 생각이 서로 대립해왔다. 어느 한쪽이 쑥 앞으로 나섰다가는 뒤로 밀리고 밀렸다가는 다시 나서는 줄다리기가 계속돼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립되는 갈등 속에서 단 한 가지 즉 아내의 마음이라는 가장 큰 요인을 간과하고 있었다. 아니 간과했다기보다는 정확히 말해 아내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똑같을 것이라고 얕잡아보고 있었다.
새삼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아내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낼 수 없었던 것도. 이혼을 어렵다고 생각한 것도. '아내는 나를 사랑하고 있고 헤어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생각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만큼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아내로부터 헤어지자는 말을 들으며 구키는 지금까지 지녀온 모든 생각들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설마 아내가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괜찮으시겠죠?"
이혼을 재촉하는 아내의 목소리는 당당하고 어떤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내로서는 충분히 생각한 결론일지 모르지만 구키에게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워 선뜻 대답할 수가 없다. 어쨌든 그날 밤은 그대로 자고 다음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아내의 안색을 살폈지만. 아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담담한 얼굴로 아침식사를 준비 중이다. 어쩌면 지난 밤 이야기는 남편의 지나친 바람기를 책망하는 말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회사에 가려고 일어서려는데 아내가 조용히 말한다.
"어젯밤에 드린 말씀 잊지 마세요."
구키는 순간 고개를 돌려 아내를 보았지만 아내는 무표정으로 빈 그룻을 싱크대로 나른다.
"진심이야?"
다짐하듯 물었지만 아내는 수도꼭지를 틀어 설거지를 할 뿐 대답이 없다. 구키는 일단 말을 접고 현관으로 향한다. 구두를 신고 다시 돌아보았지만 아내는 배웅하러 나올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구키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하늘은 맑고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대지 위엔 새싹이 돋아나 움트는 나뭇가지와 함께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피부로 느낀다. 아침 공기를 가르며 천천히 전철역을 향하는 구키는 지금 이혼 요구에 몰려 있는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본다. 지금까지 이혼이란 단어는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 당사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구키는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정말 그럴 생각인가?'
반신반의하며 붐비는 전차에 시달리며 회사로 가는 동안 생각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역에 내리자 문득 딸이 생각나 공중전화 부스로 걸어간다. 결혼한 지 2년째인 딸 지카는 직장에 다니지 않아 이 시간엔 집에 있을 것이다. 전화 부스에 들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번호를 누르자 곧바로 딸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아침 일찍."
"아니 별일 아니다."
구키는 애매하게 대답하고 나서 짐짓 생각났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낸다.
"실은 말이다... 네 엄마가 헤어지자는구나."
"역시 엄마 이야기군요."
구키는 딸이 놀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딸의 목소리는 예상외로 침착하다. 오히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딸은 이미 아내에게서 전후 사정을 들었다는 말이 아닌가. 구키는 왠지 소외당한 듯한 기분을 느끼며 되묻는다.
"넌 알고 있었니?
"물론이죠. 엄마한테서 들어서 알고 있어요. 아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떻게라니?"
"엄마는 정말 헤어질 생각이시던데요."
딸에게서 분명한 이야기를 들으니 구키의 마음은 더 혼란스럽다.
"너는 아빠와 엄마가 헤어지기를 바라니?"
"저야 언제까지나 두 분이 사이좋게 지내시기를 바라죠. 하지만 아빠는 더 이상 엄마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속마음은 그 사람하고 같이 살고 싶은 거 아녜요?"
지카의 말은 모두 옳다. 그러나 모든 부부가 꼭 사랑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서로 지긋지긋해하는 부부도 있고. 애정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부부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당장 헤어지지 않는 것은 역시 부부이기 때문이다.
"그럼. 너도 네 엄마 결정에 찬성하는 거니?"
"당연하죠. 그렇게 하는 게 두 분을 위해서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지금까지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잖니?"
"그건 그렇지만 아빠가 잘못하고 계시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구키는 할 말을 잃는다.
"엄마는 지금 너무 힘들어하세요."
"혼자 살면 더 힘들지도...... ."
"물론 그럴 테죠. 그러니까 되도록 집이나 돈을 마련해드려야 할 거예요."
당연하겠지만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딸은 역시 엄마 편이 되는가 보다. 구키는 배반당한 기분이 들어 물어본다.
"난 네가 반대하지 않을까 생각했다만."
"하지만 이건 엄마하고 아빠 문제예요."
출가한 딸에게 부모의 이혼문제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두 분이 어떻게 결정내리시든 저는 상관 안할 테니 안심하세요."
구키가 가정을 외면한 채 밖에서 즐기고 있는 동안 아내와 딸 모두 강인하게 성장해 있었다. 서로의 근간 사정을 다 듣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길을 마주하고는 쓴웃음을 짓는다. 사실 이제 와 탄식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더욱이 큰소리로 울 수도 없고 기껏해야 씁쓸한 웃음을 지을 뿐이다. 어쨌든 지금 두 사람은 예상치 못한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고 그 입장이 각각 예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 정말 신기하다. 린코는 집으로 돌아가면 남편의 질타를 받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혼하자는 말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화를 내지도 않았고. 헤어지자는 말은커녕 영원히 결혼이라는 족쇄에 묶어두려는 듯 절대로 이혼해주지 않겠노라 단언했다고 한다. 그것은 구키는 물론 린코조차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뜻밖의 상황에 린코는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지만 그것은 구키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단단히 화가 나 심한 언쟁을 피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언쟁이 벌어지기는커녕 아주 차분하고 단호하게 이혼하자는 아내의 말에 구키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그럴 리가 하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어느새 이혼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그것 참 일이 이상하게 돼버렸어."
구키는 그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뭔가 서로 거꾸로 돼 있어요."
이혼당할 거라고 예상했던 린코는 결혼이라는 족쇄에 갇히게 되고. 이혼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구키는 거꾸로 이혼당할 지경에 몰려 있다.
"꼭 그렇게만 말할 순 없지."
구키가 중얼거리자 린코가 조용하게 묻는다.
"당신. 후회하지 않아요?"
"왜......?"
린코의 말에 후회한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이렇게까지 두 사람 사이가 깊어졌는데 이제 와서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구키의 솔직한 심정은 이번 일로 어느 정도 의기소침해지고 혼란스러워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토록 동경했던 이혼이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갑자기 당황스럽고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무얼까. 사회적으로 공인받은 결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게 되면 불안해지게 마련인가. 아니면 이혼이 본인의 의지보다는 상대방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아서인가.
그런 구키의 동요를 눈치 챘는지 린코가 나직이 말한다.
"당신. 혹시 후회하고 계시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세요."
''돌아가라고. 어디로?"
"댁으로....."
"지금?"
"부인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녜요?"
"아니. 이제 집에는 미련이 없어."
"정말이에요?"
다짐이라도 받으려는 듯 다그쳐 묻는 린코의 말에 구키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야."
"저도 그럴 거예요."
구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린코가 아직 결혼이라는 족쇄에 결박당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하지만 린코는......."
'전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지금 돌아가 봤자 아무 소용없어요."
"그러면 남편이 이혼에 동의하지 않을 텐데."
"상관없어요. 이혼할 수 없다 해도 몸은 자유니까요."
"사람들의 비난은 어떡하고?"
"하라죠. 뭐. 이젠 누가 뭐래도 개의치 않아요."
결연한 의지가 담긴 린코의 말에 이끌리면서 구키는 자신 또한 린코의 결심과 다름없다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이월 말부터 삼월에 걸쳐 구키의 생활은 너무도 불안정했다. 아내로부터 이혼 요구를 듣고 나서도 구키는 가끔 집에 들렀지만 다투거나 험한 말이 오간 적은 없다 겉으로는 달라진 게 없어서 어떤 때는 그런 말이 오갔다는 사실 자체를 잊기도 했다 그래서 아내가 이혼하자는 말을 꺼내긴 했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겉으론 부드러워 보여도 아내의 마음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3월 초 집에 가보니 책상 위에 이혼 서류가 놓여 있다. 아내가 일부러 구청에 가서 가져온 것인지. 한 장으로 된 이혼 서류 한 귀퉁이에 '구키 후미에'라는 서명과 도장이 찍혀 있다. 그 옆에 '구키 쇼이치全라고 서명하고 도장만 찍으면 이혼은 성립된다. 구키는 이혼 과정이 너무나 간단하다는 사실에 허탈해진다. 서류에 서명하는 것만으로 헤어질 수 있다면 지금까지 25년간 온갖 노력을 다하며 쌓아 올려온 것들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구키가 꾸물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데 비해 아내의 말투는 여전히 사무적이다.
"그 서류 말예요. 책상 위에 두었으니까 서명해서 주세요."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확인하듯 못 박는 말에 구키는 또다시 충격을 받는다. 도대체 아내는 유감이나 미련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감정 따위는 한 치도 없는 얼음같이 찬 여자가 아닌가. 생각다 못해 딸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렇게 결심하기까지 엄마가 얼마나 고민을 많이 하셨는지 아세요?'라며 제 어머니를 동정할 뿐이다
구키의 바람기 때문에 아내가 괴로워하고 있을 동안 구키는 아무것도 모르고 외도를 즐겼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보았을 때 아내는 이미 이혼을 결심한 뒤였다. 좀 더 일찍 아내의 마음을 헤아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아내의 마음을 되돌려놓기에는 너무 늦고 말았다. 구키는 고민만 하다가 이혼 서류에 사인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냥 책상서랍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게 또 시간은 흘러간다. 아내에게 이혼 서류를 받았다는 말을 린코에게는 하지 않았지만 하루하루가 마치 형이 집행되기를 기다리는 죄인의 심정 같다. 그렇게 답답하고 초조한 기분으로는 일하는 데도 지장을 주는 것 같아 차라리 당장 사인해버리고 시원하게 처리해버릴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명색이 사내인데 아내의 이혼 요구를 이렇게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들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사인을 하려다가는 하루 정도야 미뤄도 괜찮겠지 하며 도로 집어넣곤 한다.
그러나 아직도 갈피를 못 잡는 구키의 마음과는 달리 실생활은 이혼 말이 나온 후 하나하나 변해가고 있다. 전에는 린코와 시부야의 맨션에서 만나 자고 갈 때면 죄책감에 외박 핑계를 이것저것 생각해두곤 했지만 이젠 그런 신경은 뚝 끊은 채 어차피 헤어질 텐데 아무려면 어떠냐고 쉽게 생각해버린다. 외박이 늘어남에 따라 구키의 속옷이나 양말. 와이셔츠에서 넥타이 등 신변 필수품들도 하나하나 시부야의 맨션으로 옮겨놓게 된다. 그런 변화는 린코도 마찬가지로 갈아입을 옷이 점점 늘어나기만 한다. 옷가지를 정리할 공간이 필요해져 장롱도 새로 마련했고. 내친 김에 세탁기와 오븐레인지 같은 가전제품도 들여놓았다. 퇴근 후 구키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시부야 쪽으로 향하고. 어느 샌가 열쇠를 꺼내 맨션의 문을 열고서 두 사람만의 방으로 들어선다. 린코를 기다리면서 날이 갈수록 늘어난 가구들로 꾸며진 방에 혼자 앉아 있으면 어쩐지 처량하고 속절없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미래에 불안감을 느끼며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에 젖는 동안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만 간다. 3월의 절반이 지났는데도 구키는 여전히 불안하고 찜찜하다. 이혼을 요구받고도 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애매한 태도 탓도 있겠지만. 봄에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울적하고 나른한 날씨 탓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병상에 누워 지내는 미즈구치를 문병하고 나서 그의 마음은 더욱 가라앉았다. 구키가 미즈구치를 문병하고 온 것은 삼월 보름께였다. 그 즈음을 음력으로 따지면 '복숭아가 처음 웃는 계절'이라고 표현한다. 복숭아꽃이 막 피어날 무렵이지만. 미즈구치가 입원해 있는 병원 입구에는 붉은 매화와 흰 매화가 어우러져 피어 있다. 미리 약속해둔 오후 3시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미즈구치의 아내가 대합실로 안내한다. 이전부터 문병가고 싶었지만. 그녀 쪽에서 나중에 와달라고 당부해서 미뤄왔던 터이다
"수술을 마치고 이제야 건강을 되찾으셨어요."
미즈구치의 아내는 문병을 미루게 한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어둡다. 구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상태를 물어본다. 폐암 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다른 장기에까지 암세포가 퍼져 있어 길어야 6개월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의사에게 들었다고 한다.
"본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거기까지는 말할 수가 없어 일단 나쁜 곳은 들어냈으니까 괜찮다고만 해놓았습니다."
미즈구치의 아내가 면회에 앞서 구키를 대합실로 부른 것은 그런 설명을 해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에 들어서니. 미즈구치는 걱정했던 것보다 건강해 보이는 얼굴로 구키를 맞이한다.
"오랜만이네. 와줘서 고마워 ."
가볍게 미소 짓는 얼굴은 약간 창백해 보이는 것 말고는 이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빨리 와보려고 했지만 수술을 받는다기에 좀 늦었네."
"말도 마. 끔찍했다구. 다행히 이제 괜찮다니까 안심해도 될 거야.“
가까이 와달라는 미즈구치의 말에 구키는 병상으로 다가선다.
"아주 건강해 보이는 걸."
"수술은 그런 대로 참겠는데. 항암제 때문에 영 식욕이 나질 않아. 다음 달쯤에는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아."
언뜻 암세포가 퍼져 있어 앞으로 6개월 정도밖에 살지 못할 것 같다는 미즈구치 아내의 말이 떠올랐지만 구키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빨리 회사로 돌아가야지. 자네가 없으니까 좀 힘들어 보이던데."
"에이. 별스럽게. 힘들 것도 없어. 회사란 게 원래 한두 사람 없어져도 다 돌아가게 돼 있잖나."
미즈구치의 말이 왠지 가슴 아프게 들린다.
"병이란 건 참 이상한 거야 꼭 기력이 쇠약해졌을 때 나타나거든."
"작년 연말 때였나."
"그때 자네에게 얘기했다시피 솔직히 의기소침해 있었거든. 뭔가 내 모든 존재가 부정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침울해 있었는데 컨디션이 안 좋아 병원에 왔더니 암이라고 그러잖나."
미즈구치가 자회사 쪽으로 발령받은 것은 지난해 12월이었다. 그리고 미즈구치가 발병한 것은 해가 바뀌어 정식으로 자회사의 사장이 되고 나서였다
"설마 그럴 리야 있겠나."
"무슨 말을.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주 건강했다구."
그렇다면 일에 대한 열의와 긴장이 가까스로 암의 진행을 막고 있었다는 말인가.
"자넨 정말 좋아 보여. 왠지 붕붕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미즈구치가 침대에서 촉촉이 젖은 눈길로 구키를 올려다본다.
"나도 자네처럼 인생을 즐겼어야 했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말야."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아."
"아니야. 이젠 늦었어. 인간이란 어차피 늙어 죽게 마련이니까 하고 싶은 일을 만껏하고 살아야 하네."
자세히 보니 미즈구치의 주름진 눈가에 언뜻 눈물이 고여 있다. 30분 정도 문병을 마치고 병실을 나섰지만 구키는 무엇엔가 재촉당하는 듯한. 혹은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재촉당하는 느낌은 동년배의 친구가 암에 걸려 죽음에 다가선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와 비슷한 나이 혹은 더 젊은 사람의 죽음을 처음 접해본 것은 아니지만. 오래 전부터 친했고 입사 이래 같은 길을 걸어온 친구이니 만큼 그 충격이 더하다. 어느덧 자신도 그런 나이이고 또 젊지만은 않다는 생각에 미치자. 구키는 원가에 재촉당하는 느낌에 사로잡혀버린다. 그리고 마음속에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생각이 드는 것은 '좋은 일도 다 때가 있는 법이야'라던 미즈구치의 말이 가슴에 절절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미즈구치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후회하고 있다 곁에서 보면 그 나름대로 성실하게 산 것 같은데 그는 뭔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이든 사랑이든 후회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아무리 파란만장해 보이는 인생도 끝나는 시점에서 뒤돌아보면 의외로 평범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어떤 삶을 살았다 해도 후회는 남겠지만. 죽음을 가까이 두고 '내 인생은 실패야' 혹은 '그랬어야 했는데' 따위의 후회는 하고 싶지 않다. 구키는 새삼 '후회' 라는 말을 되새겨보면서 미즈구치의 눈가에 고였던 눈물의 의미를 생각한다.
'아무 의미 없이 인생의 종지부를 찍기는 싫다.'
그 순간 구키의 뇌리 속에는 린코의 얼굴이 되살아난다. 지금 린코와 나누는 사랑은 구키의 유일한 보람이다 한낱 여자 따위에 그토록 무모하게 정열을 불사르냐고 질책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일과 사랑은 똑같이 커다란 주제이며 삶을 걸어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한 여자를 사랑하고 독점하는 것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일인 양 혼신의 힘을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자 몸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 올라 린코가 기다리는 맨션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벚꽃 필 무렵의 흐릿한 하늘이 도시를 덮고 있는 오후. 꽃망울을 터뜨리기엔 아직 이르지만. 이 정도 따사로움이라면 꽃봉오리는 한층 부풀어 오를 것이다. 봄기운이 완연한 도시 속에서 구키는 전철 손잡이에 몸을 기대고 린코가 기다리는 시부야의 맨션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아직 4시 반이지만 오후부터 미즈구치의 문병을 간다며 회사를 나왔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오늘 아침 린코에게 문병 갈 거라고 말했더니 그녀도 요코하마의 친정에 들렀다가 5시 무렵까지 시부야 맨션으로 오겠다고 했다. 평소에 비하면 이른 만남이지만 둘만이 밀애를 즐길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으니 무슨 걱정이랴.
구키는 전철에서 내려 곧장 맨션으로 향한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향해 달려가 문을 열지만 린코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5시쯤에 온다고 했지만 조금 늦을지도 모른다. 커튼을 활짝 열어젖히고 난방을 넣은 뒤 소파에 앉는다. 지금쯤 회사에서는 아직 동료들이 남아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부산스러움 속에서 혼자만 빠져나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구키는 그런 비밀스러운 분위기에 만족하며 텔레비전을 켜자 재방송인 듯한 드라마가 나오고 있다. 이런 시간에 멜로드라마가 방송되는 것도 구키에게는 생소하고 신선하다. 보는 듯 마는 듯 하는 사이에 5시 반이 지나고 45분이 된다. 린코가 웬일일까. 이렇게 늦게 오기는 드문 일인데 혹시 저녁거리라도 사는 걸까. 구키는 이리저리 짐작을 하며 린코가 막 도착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그 벌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문 뒤에 숨어 있다가 막 들어오는 린코의 입술을 훔칠까. 다짜고짜 가슴에 손을 넣어 유방을 꽉 움켜잡을까. 아니면 그대로 소파로 끌고 가 쓰러뜨린 뒤 꼭 부둥켜안을까. 혼자서 이런저런 음탕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차임벨이 울리고 현관문의 손잡이 돌리는 소리가 난다. 린코가 들어온다. 한 시간 가까이 늦은 시각이다. 지금까지는 갖가지 형벌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얼굴을 보고 나니 마음이 놓인다.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해요. 친정에서 일이 좀 있었어요."
린코는 봄에 어울리는 연한 노란색 슈트를 입고 목에는 스카프를 두르고, 흰 코트와 약간 큼직한 종이봉투를 들고 있다.
"저녁은 어떻게 하지? 밖으로 나갈까?"
구키가 물어보자 린코는 봉투 안을 열어 보인다.
"역에 있는 백화점에서 먹을 걸 사왔으니까 여기서 해결하죠."
구키가 반대할 이유는 없다. 여기서 오붓하게 린코와 즐길 수 있는데 구태여 밖으로 나갈 것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한 시간이나 늦었어."
구키가 부엌에 서 있는 린코를 뒤에서 껴안으려 하자 '잠깐만'하며 몸을 피한다.
"고양이를 맡기고 오는 길이에요."
"어머니한테?"
린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 안의 물건을 꺼내놓으며 말을 잇는다.
"어머니한테 꾸중 들었어요."
"고양이 일로?"
요즘 린코가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지면서 자연히 기르던 고양이를 돌볼 수가 없었다. 그걸 남편에게 부탁하기가 싫어 요코하마의 친정에 맡기고 오는 길이다.
"어머니도 고양이를 좋아하시니까 맡기는 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면서 어머니가 못마땅해 하셨어요."
"그렇지만 여기는 고양이를 키우기에는 너무 좁고 또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도 금지되어 있잖아."
"그게 아니고. 왜 고양이를 맡겨야 할 정도로 집을 비우느냐는 거죠."
그 말은 옳다. 자기 집을 두고 고양이를 맡긴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어머니는 제가 가끔 집을 비우는 걸 알고 계셨어요. 얼마 전 밤에도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내가 없었다며 밤늦도록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느냐고 하셔서......."
어쩌면 문제는 린코의 친정에까지 알려져 아주 심각한 상황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에게 몇 번인가 이야기하려고 생각했지만 그만 말씀드릴 기회를 놓쳐서...... "
아버지를 여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닌 알고 계셨어요."
"알고 계시다고. 우리 사이를?"
"작년 가을 무렵부터 이상하다고 느끼신 모양이에요. 올 정월에 당신을 만난 뒤에도 주의를 주시더라구요."
"뭐라고 하셨는데?"
"설마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니 그러셨어요."
"그래서?"
"물론 없다고 그랬죠. 하지만 워낙 눈치가 빠른 분이라서 이미 알고 계셨을지도......."
구키는 아직 린코의 어머니를 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요코하마의 가풍 있는 집안에서 교육받은 사람답게 기품 있고 단정한 부인일 것이다.
"얼마 전 조카 피로연에 참석하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잔소리를 많이 들었고. 사흘 전에는 밤늦게 우리 집에 전화했는데 그때도 제가 없어서......."
사흘 전이라면 역시 둘이서 시부야의 맨션에서 함께 지낸 날이다.
"그때 하루히코가 받아서...."
"하루히코라니?"
"아참. 그 사람 이름이에요."
구키는 이제서야 처음으로 린코 남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이 받아서 어머니한테 아마 오늘 밤도 늦을 거라고 말했다나 봐요."
"늦는다고?"
"밖에서 자고 들어온다고까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투에서 뭔가를 눈치 채신 것 같아요."
린코는 선반에서 차와 다기를 꺼낸다.
"어머니는 그 사람을 썩 마음에 들어 하세요. 그런데 제가 밖에서 남 부끄러운 짓을 하고 다니기 때문에 돌아가신 아버지 뵐 면목이 없다면서......."
"하지만......."
구키는 할 말이 없어 소파로 돌아가 앉으며 말한다.
"언제까지 어머니에게 숨길 수는 없잖아. 괴롭지만 말씀드리면 이해해주실지도 모르고."
"말씀드렸어요."
"그래? 린코 생각을 분명하게 말씀드렸나?"
린코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까지 어머니를 슬프게 만드는 건 괴로웠지만. 오늘은 분명하게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처음엔 조용히 들으시더니만 크게 화를 내고..... 울음까지 터뜨리셔서..... "
감정이 복받쳐오는지 린코는 말을 잇지 못한다. 린코 어머니의 낭패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안 그래도 혹시나 하고 불안해하셨는데. 저한테 사실을 듣고는 크게 충격을 받으셨나 봐요. 그러더니 당신은 그렇게 행실이 헤픈 딸로 키우진 않았다며....."
구키는 묵묵히 고개 숙여 듣고만 있다.
"이런 얘기는 남 부끄러워 아무한테도 할 수 없다. 네 아버지도 틀림없이 무덤 속에서 울고 계실 거다. 그러시더니 도대체 그 사람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느냐고"
린코는 거기서 잠깐 말을 멈춘다.
"그런 이유를 어머니에게 말해보았자 소용없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었더니. 상대가 누구냐고 물어보시잖아요."
"그래서?"
"당신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어요. 이제 와서 감춰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요."
뒤돌아보는 린코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이제 전 모든 것을 잃어버렸어요."
그 한마디에 구키는 저도 모르게 린코를 끌어안는다. 이제 린코는 돌아갈 집도 남편도 없다. 게다가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해줄 친정어머니마저 등을 돌렸다. 이제 의지할 사람은 구키밖에 없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구키의 마음속에는 이 여자만큼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줘야겠다는 마음이 뜨겁게 끓어오른다. 린코 또한 이제 의지할 사람이라곤 오직 이 남자뿐이라는 강한 믿음으로 온몸을 맡겨온다. 꼭 끌어안은 두 사람은 서로 뒤엉켜 갈 곳이라곤 그곳밖에 없다는 듯이 침실로 옮겨간다. 그리고는 침대 위로 쓰러진다. 침대가 가볍게 출렁인다. 남자가 제일 먼저 더듬는 곳은 여자의 입술이지만. 마음이 금세 바뀌었는지 아직도 눈물이 번져 있는 눈꺼풀에 입술을 겹친다 여자는 순간 움찔하며 얼굴을 돌리려 하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고 뒤덮고 있다 그러는 사이 그때까지 가늘게 떨던 속눈썹도 차츰 안정되고. 흘러내린 눈물의 짠맛이 남자 입술에 전해진다. 구키는 지금 여자 눈에 고인 눈물을 빨아들이며 린코의 슬픔을
달래주고자 한다. 설령 그것이 난감한 현실을 뒤바꿔줄 만큼의 힘은 없다 해도 마음속 깊은 슬픔과 쓰라림을 달래주는 효과는 충분히 있다고 여긴다. 천천히 마지막 한 점의 눈물까지 빨아들인 뒤, 남자의 입술은 여자의 코를 순례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간지러운 느낌에 몸을 비꼬지만. 오므린 혀끝을 알맞게 자리 잡은 콧구멍에 대고 있는 동안 마음이 가라앉는 듯하다. 거기서도 눈물방울이 전해져온다. 입술과 눈과 코에 입맞춤의 세례를 받으며 자국조차 남지 않게 눈물이 씻겨질 즈음, 린코는 드디어 남편과 어머니를 버린 슬픔으로부터 벗어나 지금까지 몸 안에 숨어 있던 분방함이 되살아난다. 구키가 내미는 손에 맞추며. 때로는 손길이 늦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스스로 스커트를 내리고 속옷을 벗어 전라가 되어 말한다.
"저를 엉망으로 만들어주세요."
그것이 설령 일시적인 괴로움에서 도망치기 위한 수단이라 해도 여자가 스스로 남자 앞에 몸을 던지며 다가오는 모습은 신선하다. 엉망으로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은 남자는 열심히 그 방법을 찾는다. 엉망진창이 되기 위해서는 여자가 지금까지 품어온 상식이나 고정관념. 도덕관 따위를 뿌리째 뒤집어버려야 할 것이다. 남자는 갑자기 짐승으로 돌변해 발가벗은 여체를 덮고 있던 시트를 거칠게 벗겨낸다. 여자가 겁먹는 틈을 노려 두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좌우로 더 넓게 벌린다. 방안에 불을 켜놓지는 않았지만 여섯시를 조금 넘은 해거름이라 창 주위엔 미처 기울지 못한 어슴푸레한 빛이 떠돈다. 린코의 희고 우아한 두 다리가 허공으로 떠오른다.
"뭘 하시는 거예요?"
여자가 낭패스런 표정을 짓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는다. 넓게 벌어진 두 다리를 끌어안고 창문께로 옮겨간다. 그제서야 여자는 비로소 자신의 수풀 무성한 화원이 창을 향해 내던져져 있음을 깨닫는다.
"보여요......."
여자는 밖에서 보일까 염려하는 모양이지만 맨션 속에서 달아오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밖에서 온전히 보일 리가 만무하다. 일반적으로 상상이 불가능한 이런 자세는 여자에게 훨씬 더한 수치심과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만두라고 외치면서도 필사적으로 몸을 트는 여체와 그것을 마구잡이로 억누르려는 남자가 서로 맞서며 밀치락달치락한다. 엉겼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두 사람은 숨을 헐떡거리며 땀으로 뒤범벅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기 위한 중요한 과정임에는 변함이 없다. 마침내 여자는 힘이 빠진다. 그리고 남자의 강요를 받아들인 음탕한 자세로 몸을 떨며 다리를 살짝 열어놓고는 움직임을 멈춘다.
이제 여자의 도덕심과 수치심은 거의 파괴되었고 밖에서 보일 지도 모르는 자세를 취하고선 오히려 피학의 쾌감마저 느끼기 시작한다. 남자는 여자 안으로 침입할 결심을 굳히고 이윽고 마지막 엉망진창의 끝맺음을 향해 돌진한다. 여자의 몸은 약하지만 그 성만큼은 다채로우면서도 강인하다. 반대로 남자의 몸은 강인하지만 성은 직선적이고 취약하기 그지없다. 물론 구키에게 그 정도의 예감이 없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그런 예감이 있기 때문에 여자에게 미리 한없는 수치심을 맛보게 하고. 녹초가 되어 헐떡거리게 만들고. 충분히 아픔을 맛보게 한 뒤에야 침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결합되고 보면 그 정도의 준비는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여자의 욕정만을 달뜨게 할 뿐이다. 어쨌든 남자는 열정적으로 도전하며 때로는 목덜미와 귓불에 이빨자국을 남길 정도로 입맞춤을 퍼부어가며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그에 맞추어 여자도 차츰 만족감을 얻는다. 마침내 꼬리가 길게 이어지는 찰나의 소리와 함께 극한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희망대로 여체가 가루가 되듯 엉망의 상태인지는 의심스럽다. 적어도 엉망이 되려면 몸과 마음이 모두 갈기갈기 찢어질 정도로 부서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린코의 상태는 엉망진창은커녕 온몸이 에로의 화신이 되어 꿀맛 같은 쾌락을 좇아 일직선으로 달려가고 있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탐욕을 향해 눈을 번들거리는 정력적인 모습만으로도 이미 남자와 여자의 입장이 역전되어 있음이 명백하다. 여자를 엉망으로 만들기 위해 치욕스럽게 굴복시켜 빼앗아버리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엔가 남자는 오로지 젖 먹던 힘을 다해 봉사하는 한 마리 수컷으로 변해버린다. 지금 이 순간 남자는 여자를 빼앗기는커녕 여체에 사로잡혀버려 도저히 달아날 수 없는 애욕의 고통을 치르는 포로가 되어 있다. 포로의 고통을 비웃듯 절정에 오르고 또 오르며 희열을 거듭 느끼는 린코의 표정은 눈부시리만치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린코의 얼굴은 그다지 윤곽이 뚜렷하지 않지만 눈. 코. 입술은 단정하고 부드러운 선으로 이어져 안정되어 있다. 그처럼 여려 보이는 얼굴이 남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가 보다. 그 얼굴이 때로는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하며 간혹 괴로움에 떨고 있는 것 같기도한 셀 수 없는 변화와 교태를 부리며 활활 타오른다.
생각하면 이처럼 부드럽고 애달프면서도 음탕한 얼굴을 보기 위해 남자는 모든 정력을 쏟아 붓고 억제할 수 있는 한계를 넘나들며 사력을 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는 것처럼 미친 듯이 타올랐던 정사에도 어느덧 종말은 찾아온다. 그 종말이 여자에게 먼저 찾아오는 법은 없다. 늘 그랬듯이 남자의 유한한 성의 구조에서부터 비롯된다. 만일 여자의 성 속에서 남자가 언제까지고 자유롭게 노닐 수 있도록 조물주가 만들었다면 남자는 무한이라는 성의 바다 속에 빠져 끝없는 탐닉을 계속하다가 결국에는 죽음으로 내달릴지도 모른다.
지금 두 사람을 덮고 있는 이 정적도 오를 대로 오른 여자의 절정이 다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남자의 힘이 다해 드러난 고요함이다. 사랑의 유희 끝에 기진맥진해 쓰러져 있는 것은 늘 남자 쪽이다. 여자는 만족스런 정사로 한층 더 요염의 나래를 달고 풍만한 육체를 한껏 뽐내며 쾌락의 바다를 떠다닌다. 만약 지금의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처음에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달라'며 호소한 쪽이 누구라고 짐작할까. 여자의 애타는 호소에 꼬드김을 당한 남자가 덤벼들고 괴롭히려 들었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정사의 처음과 끝은 역전되어 정작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것은 남자 쪽이다.
몇 번씩이나 패전을 체험한 구키는 최후엔 그렇게 될 줄 알면서도 무모한 도전을 한다. 이번에도 여체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가는 자신을 보고는 무서움에 사로잡힌다. 만약 이런 패전의 쓴잔을 거푸 마신다면 어느덧 여자 뜻대로 쾌락의 세계를 휘휘 떠돌다가 마침내는 죽음의 심연으로 끌려갈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최초의 맹렬한 기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슬그머니 머리를 쳐드는 불안에 사로잡힌 구키에게 충분히 만족한 린코가 속삭인다.
"좋았어요."
린코는 그 말꼬리를 이어가며 덧붙인다.
"그대로 죽었더라면 ...."
쾌락의 정점에서 죽음을 원하는 것은 성숙한 여자만이 꿈꾸는 특권이다. 그리고 남자가 그 정도의 열락을 맛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드물게 있다 해도 그것은 일종의 변태적인 쾌락을 느끼는 경우일 뿐 정상의 남자가 그렇게까지 성의 기쁨에 빠져들기란 어렵다. 적어도 구키는 그렇게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그러나 문득 성과 죽음이 의외로 가까운 사이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맞붙어 있다는 느낌까지 든다. 오르가슴을 느낀 직후. 혹은 자위행위 중 순간적인 사정의 쾌락을 느낀 뒤 나른해지면서 혼이 달아나는 듯한 허탈감에 빠진 적이 있다. 지금까지는 그것을 사정한 후 으레 밀려오는 허탈감이려니 하고 여겨왔지만 어쩌면 그것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서막일지도 모른다.
그토록 세찬 기세로 달아오르던 그것이 사정이 끝나고 나면 그렇게 볼품없고 초라하게 위축되어 조용해지는 것을 보면서 구키는 젊을 때부터 막연히 죽음을 연상했다. 때로는 그 때문에 화가 나서 스스로에게 질타와 격려를 하곤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육체적인 위축과 정신적인 허탈감은 죽음의 이미지와 흡사하기 때문인 것 같다. 사정 직후 남자를 찾아드는 허탈감은 그것이 죽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자연의 섭리일지도 모른다.
그 한 예로 자연계를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대부분의 수컷은 사정과 함께 숨이 끊어질 듯 말듯하며 생사의 갈림길을 오락가락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사정에서 죽음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은 생명체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뒤에는 항상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게 마련이다.
여자는 눈부신 쾌락의 극한에서 죽음을 꿈꾸는 데 비해 남자는 땅 밑으로 푹 꺼져버리는 허탈감에 빠져 죽음의 유혹을 받는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무한한 여성과 유한한 남성의 뚜렷한 성차인가. 아니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준비하는 여자와 사정을 함으로써 생식에 관한 모든 일을 마치는 남자의 차이 때문인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구키의 뒤에서 린코가 뜨거운 잔열이 남은 살갗을 대며 속삭인다.
"전 무서워요."
"전에도 무섭다고 한 적이 있지. 아마."
린코는 부정하지 않고 수긍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과 다른 무서움이에요. 이대로 있다간 정말 죽어버릴 것 같은......."
"자연스럽게......."
"그래요. 이제 어떻게 돼도 좋아요. 이대로 죽기만 한다면 최고일 것 같고. 죽는 게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그런 내가 무서워요."
린코의 말은 모순되지만 에로스의 극치에서 죽음의 유혹에 사로잡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닌데."
"하지만 저는 이대로 좋아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린코는 그렇게 말하며 노래하듯 말한다.
"전 말예요. 지금이 최고예요. 내 인생에서 지금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어요."
구키가 문득 무슨 말인지 몰라 린코에게 다시 묻는다. 린코는 거침없이 대답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전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제 온몸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함을 느끼고 있어요. 그런 세계를 알게 되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하지만 린코는 이제 겨우 38살이야."
"그러니까 오히려 지금이 좋아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제부턴가 린코는 나이에 구애받기 시작했고. 고작 38살의 나이에 늙었다느니 죽어도 좋다느니 한 적이 있다. 50이 넘은 구키로서는 린코의 나이는 아직 젊고 여자의 원숙미가 활짝 피어나는 때라 생각되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달리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으면 또 그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는 것이라고 구키가 말해주자 린코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에겐 요즈음이 한계라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더 살아봤자. 이제 남은 인생은 내리막길일 뿐이에요."
"세상사라는 게 그렇게 겉모습만 중요한 건 아니라구 "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여자가 나이를 먹는 건 가슴 아픈 일이에요. 아무리 노력해도 점점 나이를 감추기 어려워지죠. 하지만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속일 수 있어요. 제 나이가 그 갈림길에 와 있다는 증거죠."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할 건 없잖아."
"물론 저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매일매일 거울을 볼 때마다 '아. 눈가에 주름이 또 하나 늘었네. 피부가 처지고 화장도 잘 안 먹는 걸' 이러고 지내는걸요. 그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진 않아요. 더구나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지금 말했으면서?"
"지금이 가장 좋은 시절이란 걸 잊지 말아주세요."
그 말끝에 구키가 얼굴을 돌려보니 린코는 가슴을 살짝 내보인 채로 말을 잇는다.
"제 입으로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게 쑥스럽긴 하지만. 지금이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 때문에 머릿결이며 피부가 매끈매끈해졌고. 가슴도 탄력 있고..."
린코의 말이 틀리지는 않다. 사실 린코의 살결은 아주 희고 뽀얀 우윳빛으로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느낌을 주어. 이십대 여성에게서는 보기 힘든 나긋함과 농염함이 듬뿍 배어 있다.
"당신한테 안기다 보니 정말 많이 변했어요."
저도 모르게 린코의 젖가슴에 손을 얹자 그 손을 꼬옥 잡으며 린코가 속삭인다.
"그러니까 저를 잊지 마세요."
린코의 말은 정확히 과녁을 맞춘 것 같지만 어딘가 모순이 있다. 지금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생애 최고라면서 죽어도 좋다고 말한다. 날이 갈수록 주름이 늘고 피부가 처진다고 하면서 지금 최고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도록 또렷이 잘 봐두라고 당부한다. 한편으론 최상임을 주장하지만 다음 순간 부정하는 말을 한다. 정말 지금이 최고이고 가장 아름다운 때라면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계속 지켜나가야 하지 않을까.
"어째서 그렇게 현재에만 집착하는 거지?"
린코는 나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특별히 그럴 생각은 아니지만 찰나적으로 스치는 느낌이랄까요."
순간 구키의 뇌리에 '찰나적'이란 단어가 강하게 박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해요. 지금 느끼는 이 순간이 행복하지 않다면 어떤 달콤한 미래도 기대할 수 없어요.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닌가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린코가 그렇게 눈앞의 만족만을 바라는 찰나주의자인 줄은 생각도 못했는걸."
"그것도 다 당신 때문이에요."
"그런가?"
"당신을 만나고 모든 것이 달라진 거예요. 제 몸도 당신 때문에 이렇게 아름답게 변한걸요."
"지금만 좋으면 좋다고?"
"그래요. 섹스라는 건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불사르는 것이니까요. 지금 이 순간만이 소중하고. 지금 이 순간만이 전부예요."
그렇다면 린코의 찰나주의는 섹스가 깊어진 결과 생겨난 것이란 말인가. 생각에 잠겨 있는 구키에게 린코가 속삭인다.
"지금 이 순간을 버리고 내일이나 내년으로 미룬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겠지요. 그때 가서 후회하고 싶지는 않아요."
린코의 말을 들으며 구키는 미즈구치가 한 말을 떠올린다. 지금 현재만이 소중하다는 린코식 찰나주의에 비추어본다면 일에만 파묻혀 살아온 미즈구치의 삶은 무엇이었는가. 구키는 미즈구치의 상태를 간단히 얘기하고 나서 덧붙인다.
"면회하러 갔더니 인생을 좀 더 즐기지 못한 걸 후회하더군."
"그 기분 잘 알 것 같아요."
린코는 살짝 구키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당신 후회하고 계시죠?"
"아냐.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다행이에요."
린코는 부드럽게 이마를 부벼댄다.
"우리들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물론."
"역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해요."
구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나이를 생각해본다. 쉰이 넘은 나이라 린코보다 한참 위이고. 남자로서는 이즈음이 마지막 무대인지도 모른다. 설령 이후에 지위와 수입이 올라간다 해도 그리 큰 의미는 없다. 한 남자로서. 아니 한 마리의 수컷으로서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죽는 환희를 느끼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이 마지막 기회이다.
"나도 많이 변했어."
"뭐가요?"
"글쎄. 뭐 여러 가지겠지."
린코는 분명히 자신과 사랑을 나누다 변했는지도 모른다. 린코는 이렇게까지 성에 탐닉하고 흐트러지는 여자는 아니었다. 섹스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지금의 모습과 비교한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담백하고 청결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변한 건 당신 때문이라고 조금은 부끄럽게 또 조금은 원망하듯 고백한다. 성에 관한 한 린코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해졌다. 청결이라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지만. 구키를 알기 전에는 성에 대해 담백했던 만큼 미숙하고 무감각했다. 그런 여체를 꽃피게 하고 성의 깊은 맛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 바로 '당신'이란 그 말을 구키는 기꺼이 즐겁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제 와 좀 더 깊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구키 또한 린코에게 계속 이끌려가고 있다. 성에 대해 린코를 이끌고 눈뜨게 해주는 사이. 어느덧 자신도 그 매력에 사로잡혀 성의 경지에 푹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절벽 끝으로 내몰려 있다. 끝없는 섹스에의 탐닉은 일과 가정에까지 영향을 미쳐 부부 사이는 거의 파국지경에 이르렀다 린코가 자신과의 사랑에 도박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털어내지 못하고. 끌려가는 동안 어느새 두 사람은 헤어날 수 없는 나락으로 함께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이 소중하며 그것만을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찰나주의 인생관에 물들어 있는 것도 린코라는 소용돌이에 휘몰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엔 인생 경험이 더 많은 구키가 모든 걸 이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끌린 것은 오히려 구키다.
"음. 그런가?"
구키의 한숨 소리를 들은 린코가 책망이라도 하듯 묻는다.
"뭐가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점점 두 사람만 주변에서 유리되어 내몰리고 있다 그런 현실을 실감하며 여자를 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거꾸로 끌려가는 상황에 놓여있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그렇다고 탄식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까지 몰리게 되니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포자기하는 심정에 빠져 있는 자신에게 어느 정도 질리면서도 나름대로 납득이 되기도 한다.
"뭐 랄까. 기분이 까무러칠 정도로 좋은데."
아직 밤이 깊어지려면 조금 더 시간이 있다. 황혼 무렵부터 시작된 정사의 여운 속에 서로의 살과 살을 맞대고 있다. 그렇게 여자로부터 풀려나 자유롭고 비생산적인 상태로 있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다. 구키는 린코의 유두를 만지작거리고. 린코의 손은 구키의 그것을 가볍게 건드리고 있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순간 린코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구키에게 파고든다. 이곳 전화번호는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두 사람은 집에는 물론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전화가 왜 울려댄단 말인가. 혹시 누군가가 두 사람이 방에 있는 것을 알고 거는 것은 아닐까. 구키는 조금 전 창가에서 린코의 벌거벗은 몸을 들어 올렸던 장면을 떠올렸지만 그런 모습이 밖에서 보일 리가 없다. 계속 벨이 울리고 여섯 번째 울리는 순간 구키가 상체를 일으키자 린코가 팔을 잡는다.
"받지 마세요."
계속 울리던 벨은 열 번을 꼭 채우더니. 마치 셈하여 헤아렸던 것처럼 뚝 멈춘다.
"누굴까요?"
"글쎄. 모르겠는데......."
구키는 집을 떠올린다. 설마 아내가 이 맨션을 알고 있을 리 없지만. 집에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솔직히 구키는 늘 마음 한켠으로는 집안일이 걱정스러웠다. 집을 비운 사이 혹시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병이 나거나. 사고를 당하는 따위의 재앙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물론 집을 비워도 행선지를 일러준다면 걱정 없지만 린코와 함께 다니면서부터는 행선지를 속이고 호텔 숙박부에도 적당히 다른 이름으로 둘러대곤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되면 만일 사고가 생겼다 해도 소식을 전할 길이 없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 휴대폰이 가장 편리하지만 린코와 만날 때는 언제나 전원을 꺼놓는다. 둘만 있을 때 아내나 회사로부터 전화가 오면 어색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방해받기 싫어 휴대폰을 꺼놓기 때문에 구키가 먼저 전화를 걸지 않는 한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알 도리가 없다 그래서 지금처럼 전화가 걸려오면 구키는 긴장을 한다. 아내에게는 맨션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전화를 걸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급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불안에 빠진다.
그런 불안은 린코도 마찬가지다. 이미 남남처럼 돼버린 남편은 제쳐두고라도. 친정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린코가 전화를 걸지 않는 한 확인할 길이 없다. 이처럼 당사자들이 연락하지 않는 한 집에서는 도저히 연락할 길 없는 일방통행이 행선지를 속이고 외박하는 남녀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문제이다. 가정을 버렸다 하면서도 이토록 애가 타는 까닭은 아직 그 인연을 확실하게 뿌리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화 벨소리가 그치자 구키는 린코에게 물어본다.
"여기 번호. 누구에게 알려준 적이 있나?"
"아무한테도 말 안했어요."
그렇다면 단순히 잘못 걸려온 전화일지도 모른다. 구키는 그렇게 자신을 안심시키며 불안에서 벗어나려 한다. 전화 벨소리 때문에 그때까지 젖어 있던 정사의 여운은 스르르 사그라든다.
"일어날까?"
"저 말예요.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요."
린코가 간절한 눈빛으로 말한다. 둘이서 눈 내리는 주젠지코에 다녀온 2월 중순 이래로 오로지 시부야의 맨션에서만 지내왔다. 밀회 장소로는 이 맨션이 적격이지만 지금처럼 전화가 걸려오면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괜히 찜찜해진다.
"그럼 말야. 곧 벚꽃이 활짝 필 테니 벚꽃구경을 갈까. 여관도 벚꽃이 피어 있는 곳으로 잡고."
"좋아요."
린코는 어린애처럼 기뻐하다가 갑자기 구키의 목으로 손길을 뻗는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목을 졸라버리겠어요."
"린코 손에 죽을 수만 있다면 무조건 만족이야."
"좋아요. 그럼 졸라드리겠어요."
린코는 두 손을 구키의 목에 대고 조르는 시늉을 하지만 이내 손길을 푼다.
"아참. 그리고 말인데요. 아베 사다였나요. 그 책 아직 안 보여주셨잖아요?"
아베 사다가 신문하는 형사에게 말한 내용을 정리한 책은 조사실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어 지금은 동료 중 한 사람이 집에 가져가 읽고 있다
"이번에 벚꽃구경 갈 때 가지고 갈게 그 대신 나도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뭔데요?"
되묻는 린코의 귓가에 나직이 말한다.
"빨간 나가지방을 가지고 와 "
"빨간색을요?"
"맞아. 그 붉디붉은 진홍색 ."
머뭇거리는 린코를 향해 이젠 명령하듯 말한다.
"그게 린코를 데리고 가는 조건이야."
"알았어요......."
잠깐 사이를 두고 승낙하는 린코의 목소리에 아직도 나른함이 묻어 있다 그 입술은 흐린 봄날 벚꽃이 필 무렵께 떨어지는 한 장의 꽃잎처럼 나풀거린다.
바라건대
꽃피는 봄날 죽으면 좋으련만
저 음력 이월의 보름달이 뜰 무렵
낙화
예로부터 벚꽃만큼 행복한 꽃도 없을 것이다. 헤이안 시대부터 벚꽃은 꽃 중의 꽃으로 군림하여. 센케류(센노리큐(不利休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다도를 좋아하던 풍류인. 훗날 정치에도 개입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서 할복 명을 받았다)를 시조로 하는 다도의 유파)의 책에도 '벚꽃은 꽃 중에서 제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춘사월. 화려하게 피어나 그 고운 자태를 한껏 자랑하다가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져버리는 벚꽃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애상에 젖게 한다. '칠일 벚꽃' 이라는 말이 있듯이 벚꽃은 고작 일주일 만에 지고 말지만 꽃으로서의 표현력은 그 무엇보다도 강하다 그래서 꽃꽂이에 사용할 때도 '도코노마(일본식 방의 상좌에 바닥을 한층 높게 만든 곳. 벽에는 족자를 걸고. 바닥에는 꽃이나 장식을 꾸며놓음)'에는 이 꽃만을 놓아야 하며 다른 꽃들과 함께일 경우에는 가장 윗자리에 놓아야 한다고 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귀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러나 벚꽃을 멀리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센노리큐 같은 사람은 '다실에는 너무나 화려하므로 꽃아 놓지 말라'며 다도회에 벚꽃을 들이지 않았다. 고요한 정취를 중히 여기는 다도회에는 너무 화려해서 적합하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과연 센노리큐만이 할 수 있는 단언이라 할 수 있겠다. 어쨌든 벚꽃이 일본인들의 미의식을 키우고 감흥을 북돋워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구키는 지금까지 벚꽃에 대한 아름다움에 끌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벚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었다 그것은 꽃피는 계절이면 다가오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따라갈 수 없는 구키의 긴장된 사회생활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매년 이맘때쯤 되면 모든 신문 방송 매체에서는 벚꽃 소식을 잇따라 발표한다. 어디 어디의 벚꽃은 얼마나 피었고 어디는 이미 만개하였다느니 법석을 떨며 텔레비전에서는 벚꽃으로 아름다운 명소의 영상을 연일 방송하지만 구키는 지금까지 한 번도 벚꽃놀이를 즐긴 적이 없다. 더러는 벚꽃이 만개한 곳을 찾아가 느긋하게 구경하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지만 늘 일에 쫓기다 보니 한 번도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고작 집 근처나 가로수에 피어 있는 벚꽃을 보며 그 좋은 계절을 흘려보내야 했다.
사람들이 벚꽃을 일러 '무심하게도' 라는 표현을 하듯이 구키의 마음에 어수선한 미련만 남기고 벚꽃이 그렇게 무심하게 지고 나서야 구키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쯤이면 구키는 벚꽃에 대한 부담과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금년만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직으로 밀려난 후에야 흐드러진 봄날의 벚꽃을 만끽할 수 있다니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다.
벚꽃하면 맨 먼저 생각나는 곳은 교토이다. 헤이안 신궁의 수양 벚꽃과 야경을 채색한 시라가와 강변의 밤벚꽃이 유명하다. 그 외에도 다이고지, 닌나지, 조난구 등 벚꽃으로 이름난 명승지가 많이 있다.
구키는 취재차 간사이로 출장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틈틈이 벚꽃을 구경한 적은 있다. 각 명소마다 피어 있는 벚꽃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숨이 멎을 정도였지만 때로는 너무 인공적이라는 인상도 강했다. 예를 들어 교토의 벚꽃은 주위의 고찰과 옛 신사 또는 잘 꾸며진 정원과 어우러져 피어 있었다. 게다가 그 뒤에는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벚꽃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려니와 그것을 배경으로 뒷받쳐주는 절묘한 풍경 때문에 한층 더 돋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완전한 아름다움이 더러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상품화되어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함께 갖추고 즐기는 벚꽃도 좋겠지만 벚꽃 그 하나만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철만 되면 부산을 떨며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자기만의 멋을 한껏 자랑하는 벚꽃의 아름다움이 더 운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구키는 린코와 함께 한적한 곳에 피어 있는 벚꽃을 감상할 만한 곳이 없을까 고민 끝에 생각해낸 것이 이즈의 슈젠지였다. 거기라면 도쿄에서 그다지 멀지도 않고. 깊은 산으로 둘러싸인 온천들이 있으니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벚꽃구경도 하며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구키가 그렇게 결정하고 린코와 함께 여행길에 나선 것은 4월 둘째 주 일요일 밤이었다. 예년의 꽃놀이 시기에 비해 늦은 감은 있지만 사월에 들어서서 기온이 갑자기 내려갔기 때문에 디즈 일대는 이제서야 벚꽃이 만개한 모양이다. 그날은 봄빛이 완연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무르
익은 봄날의 하루였다.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다. 구키는 베이지색 셔츠에 연한 고동색의 재킷을 걸치고. 린코는 연한 핑크빛 정장에 꽃무늬 스카프를 두르고 회색 모자로 멋을 냈다. 여행 떠나기 전날 봄옷을 챙기기 위해 집으로 갔던 린코는 남편을 만났을 텐데 그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말도 없다. 도대체 그 이후 린코의 가정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이번 여행을 계획했을 때부터 구키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먼저 묻지는 않는다. 린코도 잠자코 있는 것을 보면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다만 사월 초에 친정에 다녀온 린코가 불쑥 '어머니가 ‘깨끗하게 매듭 지으래’라는 말을 했을 뿐이다. 당연히 그것은 남편과의 관계를 두고 한 말이다. 이미 린코의 어머니는 사위와 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고. 게다가 린코가 밖에서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 때문에 린코를 엄하게 질책한 것이 3월 중순이었다. 그 뒤로 린코의 어머니는 딸의 행실을 참다못해 어떻게든 해결을 하라고 계속 다그치는 모양이다. 그러나 린코의 말을 들어보면 이혼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오히려 린코의 남편이다. 그것을 두 사람은 아내에 대한 일종의 복수심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점에 대해 린코의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구키가 어머니의 반응을 물으면 린코는 한숨 섞인 대답만 할 뿐이다.
"아무리 말씀드려도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하세요."
아내의 불륜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혼해주지 않는 남편의 심리를 린코의 어머니는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셋이 함께 만나서 얘기해보면 잘될 거라는 거예요."
셋이라면 린코와 남편, 린코의 어머니 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셋이서 얘기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요."
린코로서는 어머니에게 남편과의 성격 차이며 잠자리 문제에 대해 시시콜콜 얘기하기가 곤란할 것이다. 린코도 린코이지만 구키의 집안 분위기도 뒤숭숭하기는 마찬가지다. 린코와는 반대로 구키 쪽에서는 아내가 이혼을 요구해오지만 아직 확실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건만 막상 이혼을 생각하면 망설여진다. 린코가 당장 이혼하기 어려운 마당에 구키 혼자만 이혼한다는 것이 어쩐지 불안하고. 무엇보다 이십오 년 가까이 함께 해온 생활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구키는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낀다. 요즘 집에 들어가도 아내와는 거의 대화가 없고 꼭 필요한 말만 하고는 서둘러 집을 빠져나온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말다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식을 대로 식어버린 사이면서도 어색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아내의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니다. 4월 초 구키가 집에 들어갔을 때 아내는 다시 한 번 다짐하듯 말했다.
"그거 잊지 않으셨겠죠?"
구키는 이혼 서류에 도장 찍는 문제임을 알면서도 고개만 끄덕일 뿐 언제까지 찍겠다는 대답은 하지 않는다. 그대로 나가려고 하자 아내가 뒤쫓듯이 말한다.
"나도 내일부터 집에 없을 거예요."
"어디 가는데?"
무의식중에 묻고 나서 구키는 아내의 행선지를 물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딜 가든 당신과 상관없잖아요."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다. 여자와 태도는 언제나 의연하고 명확하다. 특히 헤어지는 장면에서는 더더욱 분명해서 린코도 아내 후미에도 한번 헤어지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나자 흔들림이 없다. 이에 비해 남자란 얼마나 애매하고 불확실한가. 과단성도 없고 결단력도 없다. 그것은 구키뿐 아니라 모든 남성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구키는 이쯤에서 아내와의 사이를 명확히 해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도쿄 역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신칸센 고다마호를 타고 미시마까지 가서 이즈 하코네 철도로 갈아하고 슈젠지로 향한다. 꽃놀이 철이지만 일요일 오후 늦은 시간이어선지 열차 안은 한산하다. 지금까지는 토요일에 떠났다가 일요일에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주말의 인파를 피해서 일요일에 떠나 월요일에 돌아올 예정이다. 이렇게 여유 있는 여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업무가 적어 한가한 덕분이다. 최근의 구키는 한직에 있다는 것을 탄식하기보다 오히려 그 시간을 즐기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미시마에서 갈아탄 열차가 나가오카. 오히토 그리고 나카이즈를 지나면서 우람한 산맥이 다가오고. 산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이 눈부시다. 린코가 감탄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말한다.
"전부터 이런 열차를 타보고 싶었어요."
열차는 모든 역에 정차한다. 때로는 선로 관계로 오는 차를 기다렸다가 차장의 피리 소리를 신호로 다시 움직이기도 한다. 화창한 봄날 오후에 어울리는 교외선 열차이다. 열차는 산기슭을 따라 강과 나란히 달리기도 한다 아마기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류하는 가노가와에서는 아직 은어를 낚기에는 이른 때인데도 군데군데 낚시꾼들이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다. 이 부근이 와사비(겨잣과의 다년초. 맑은 물이 계속 흐르는 자갈이 깔려 있는 바닥에서 재배된다)의 산지로 유명한 것도 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 때문일 것이다.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경치에 넋을 잃고 있는 사이에 열차는 삼십 분 만에 종착역인 슈젠지에 도착한다.
천 년 전에 코보(일본 진언종의 개조) 대사가 발견한 온천 마을인 슈젠지는 '슈젠지모노가타리'에서 알려진 것처럼 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인 겐지와 인연이 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때 이르게 지기 시작한 꽃잎이 구키와 린코의 어깨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슈젠지는 지금은 온천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구카이'에 의해 세워진 슈젠지라는 유서 깊은 절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절은 역에서 남서쪽으로 차로 몇 분 거리에 있는 도라타니바시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곳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가파른 돌층계를 올라가 절 정문을 들어서면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사찰 경내 앞으로 본당이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팔백 년 전 미나모토노 노리요리는 형 요리토모에 의해 이 절에 유폐된 후 가지와라 가게도키의 습격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게다가 요리토모의 아들 요리이에도 도라타니바시 옆의 하코유에서 호조 도키마사에게 살해당했다.
오카모토 기도의 슈젠지 모노가타리는 이 비극을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다. 훗날 호조 마사코는 자신의 아들 요리이에의 죽음을 슬퍼하여 가까이 있는 산기슭에 사즈키덴을 세웠다. 슈젠지는 이런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간직한 채 무심하게 서 있다. 기복이 완만한 지붕을 얹은 본당은 뒷산의 나무숲과도 잘 조화되어 마치 고귀하면서도 요염한 여인의 자태를 떠올리게 한다. 구키와 린코는 참배를 마친 후 다리를 건너 산기슭에 있는 사즈키덴과 요리이에의 묘를 들렀다가 다시 차로 돌아온다.
5시가 지나자 해가 기울기 시작하지만 봄날의 밝은 기운은 여전하다. 강변을 따라 좁은 온천 거리를 지나자 길이 열리고 그 앞으로 여관이 눈에 들어온다. 용마루가 육중해 보이는 입구 안쪽으로 산 모양의 박공(마루머리나 합각머리에 人자 꼴로 붙인 두꺼운 널)이 붙은 낡은 현관이 보인다. 그 앞에 차를 세우니 마중 나온 여종업원이 곧 안으로 안내해준다. 넓은 로비에는 나뭇결을 살린 테이블과 등나무 의자가 놓여 있고 그 앞으로 연못이 보인다. 연못에 떠 있는 가면극 무대를 보고 린코가 너무 멋지다고 감탄한다. 오륙백 평은 족히 되어 보이는 연못 저편에 팔작지붕의 가면극 무대가 그윽한 모습으로 비치고 있다. 그 뒤로는 울창한 나무로 뒤덮인 벼랑이다.
린코는 산을 가로지르고 강을 거슬러 올라간 끝에 갑자기 나타난 별세계에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넋을 잃고 있다. 여종업원이 안내해준 곳은 이층 안쪽 모퉁이 방이다. 들어서자마자 두 평 남짓한 공간이 있고 그 너머로 다섯 평정도 되는 다다미방이 이어진다. 또 넓게 칸이 구획된 창가를 따라 침실보다 한 단 낮은 마루방이 있고 거기서 보면 연못 일부가 내려다보인다.
"저것 봐요. 벚꽃이 활짝 피었어요."
창가 왼쪽에 활짝 피어난 벚꽃은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우수수 떨어질 것 같다.
"벚꽃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이 방을 내준 모양이야."
이 여관은 구키도 처음이다. 전에 출판부에 있던 친구로부터 슈젠지에 가면극 무대가 있는 조용한 여관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터이다.
"어머. 꽃잎이 지고 있어요."
황혼이 깃들면서 미풍이 불기 시작했는지 린코가 내민 손 위로 꽃잎이 살며시 내려앉았다가 다시 연못으로 떨어진다.
"참 조용하네 ....."
그 동안 마음 한구석을 묵직하게 짓눌러온 이혼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일들이 머릿속에서 빠져나간다. 구키는 산골짜기의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며 벚꽃의 화려함에 넋을 잃고 있는 린코를 뒤에서 살며시 껴안는다. 구키는 가볍게 키스를 하고 속삭인다.
"그거 가져왔지?"
"뭐요?
"붉은 나가지방 말이야."
"명령이니까 가져왔지요."
린코는 그 말을 남기고 욕실로 사라진다. 구키는 꽃비가 내리는 창밖을 응시하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사월의 바람이 창으로 밀려들지만 추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벚꽃 피는 봄날의 화사한 자취가 온 방을 맴돈다. 기분이 날아갈 듯하면서도 나른한 감각에 빠져든 구키가 흥얼거린다.
'바라건대 꽃피는 봄날 죽으면 좋으련만. 저 음력 이월의 보름달 뜰 무렵.'
벼슬을 마다하고 천하를 유랑하다가 생애를 마친 사이교(1118-1190. 헤이안 말기에서 가마쿠라 초기의 승려)가 노래한 한 구절이다.
여종업원이 끓여준 차를 마시며 잠깐 쉬고 난 두 사람은 목욕을 하기 위해 방을 나선다. 구키는 복도 옆에 있는 남탕과 여탕을 무시하고 그 앞의 노천탕을 들여다본다. 오후 여섯시가 지나자 날이 저물 듯하면서도 한낮의 여운이 감도는 하늘은 서서히 푸른색에서 감색으로 변해간다. 일요일 밤이라 투숙객이 적은 것일까. 노천탕에는 아무도 없고 바위를 타고 내려와 떨어지는 물소리만이 단조롭게 울려 퍼진다.
"들어갈까?"
구키가 권하자 린코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괜찮아."
만약 누가 온다 해도 둘만 있으면 자리를 피해줄지도 모른다. 구키가 다시 권하자 린코도 결심을 했는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옷을 벗기 시작한다. 열 평정도 돼 보이는 타원형의 아늑한 느낌을 주는 노천탕은 바위로 꾸며져 있다. 천장은 갈대 삿자리로 덮여 있고. 주위는 갈대발로 둘러싸여 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가려져 있으면서도 자연의 모습을 재현해놓아 절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구키가 바위에 등을 기대고 편안하게 앉아 있자니 린코가 타월을 손에 들고 들어온다. 서서히 한 발씩 발끝을 조심스럽게 탕에 담근다. 구키는 린코의 몸이 더운 물에 잠기기를 기다렸다가 연못과 경계를 이루는 지점까지 데리고 간다
"이렇게 하고 하늘을 한 번 봐"
노천탕 끝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 어름은 갈대 삿자리가 끝나 밤하늘이 그대로 한눈에 보인다. 연한 남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이 활짝 핀 벚꽃과 어우러져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런 빛깔의 하늘은 처음 봐요."
별도 달도 없는 밤하늘에서 벚꽃이 춤추듯 떨어지고 있다. 린코가 떨어지는 꽃잎을 잡기 위해 손을 내민다. 푸른 어둠이 내리는 하늘 아래 꽃잎을 쫓는 린코의 작고 하얀 몸이 춤추는 나비처럼 요염하고 아름답다. 탕에서 나온 두 사람은 방에서 식사를 한다. 한기를 느낀 그들은 가운 위에 하오리를 걸치고 창을 닫는다. 불빛을 받은 채 창가로 살짝 얼굴을 들이민 벚꽃이 여전히 곱다. 구키와 린코는 벚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식사를 한다. 푸른빛을 살려 데친 머위와 두릅을 깨소금으로 무친 먹거리가 식욕을 돋운다. 맥주를 한 잔 마신 구키는 그 고장의 특산인 따끈한 정종을 주문한다. 여종업원이 술 한 잔을 따라주고 나간다. 린코는 구키가 잔을 비우면 눈치 빠르게 술을 채운다. 그리고 갈치와 미나리를 넣어 만든 맑은장국 냄비의 불을 적당히 맞추면서 따끈하게 데워지자 작은 그릇에 담아준다. 구키는 바지런한 린코를 보면서 문득 집에서의 식사를 생각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렇게 바지런하게 마음을 써주는 밥상을 아내로부터 받아본 적이 없다 오랫동안 권태와 불신의 골이 깊어진 탓이라고 여기면서도 매우 서운했던 기억이 난다. 구키는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의 허무함을 생각하면서 린코와 남편의 식사 장면을 상상한다. 남편과 식사를 할 때 린코도 그렇게 성의가 없을까. 아니 남편과 식사를 하기는 하는 걸까.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을 하면서 구키는 린코에게 술을 따른다.
"둘이서 먹으면 밥이 맛있어."
"저도 그래요 아무리 고급 요릿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가 아니면 의미가 없어요."
구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새삼스럽게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사랑에 덧없음을 느낀다. 한때는 아내를 동경하고 가슴을 두근거리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 두 사람 사이는 식을 대로 식어 이혼을 앞두고 있는 상태다. 린코도 남편을 믿고 사랑을 맹세한 적이 있으련만 지금은 냉전 상태이다. 생각해보면 지금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모두 취기가 가셔버린 뒤의 어정정한 상태일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잔을 주고 받으며 새로운 취기로 빠져 들어간다. 맥주 한 병에 정종을 조금 마신 것뿐인데도 구키는 약간 취하는 것 같다. 린코와 함께 마시는 술이기에 취기가 빨리 도는 지도 모른다. 창밖을 내다보니 여전히 활짝 핀 벚꽃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아래로 내려가 볼까?"
아래층 로비로 내려가면 연못을 사이에 두고 가면극 무대가 보일 것이다. 여종업원이 밥상 치우기를 기다렸다가 두 사람은 하오리를 걸치고 방에서 나온다. 노천탕 입구를 지나서 다시 한 층 아래로 내려가 복도를 따라가니 정면에 로비가 보인다. 오른쪽은 문이 모두 열려 있고 연못 위에 판자로 만들어진 노대(이층 이상의 방 바깥에 지붕이 없이. 높고 드러나게 지은 대)가 돌출해 있다. 구키와 린코는 그 노대에 놓인 의자에 나란히 앉아 무의식중에 한숨을 짓는다. 여관에 도착했을 때 로비에서 연못에 떠 있는 가면극 무대를 보고 한숨 지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또 다르다. 노대의 난간 여기저기에 불이 켜지자 연못 너머에 있는 가면극 무대가 불빛을 받아 그 모습을 드러낸다. 무대는 사방 세 칸으로 바닥은 거울처럼 빛나고 그 안쪽 벽에는 노송이 그려져 있다. 무대 좌우에는 하얀 장지문이 달린 팔작지붕(위쪽은 맞배지붕으로 하고 아래쪽은 사방으로 경사지게 만든 지붕)의 분장실이 있고 분장실과 무대를 이어주는 통로가 물 위에 떠 있다. 그 모든 모습들이 위아래 대칭으로 연못에 비쳐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기만 하다. 이 가면극 무대는 가가의 마에다 가의 저택 안에 있던 것을 메이지(일왕 무츠히토가 재위하던 시대 1868-1~12) 말에 도미오카의 하치만구로 옮겼다가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왔다고 한다.
그 후 여기서는 가면극과 더불어 춤과 비파. 신나이부시(음곡에 맞추어 낭창하는 옛이야기) 등이 연못을 둘러싼 장작불빛 아래서 개최되었다 오늘 밤은 그런 공연은 없지만 싸늘한 산 공기에 휩싸인 무대는 조용하여 그윽한 정취가 한층 더 깊은 느낌을 안겨준다.
구키는 린코와 어깨를 맞대고 무대를 주시한다. 그리고 어둠속에서 광기의 가면을 쓴 여자와 남자가 당장에라도 나타날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장작불을 피워놓고 벌이는 야외 가면극인 다키기노를 둘이서 본 것은 작년 가을이었다. 가마쿠라의 다이토큐 경내에서 개최된 가면극을 보고 시치리가하마 가까운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때 두 사람의 사랑은 한창 무르익었지만 지금처럼 궁지에 몰려 있지는 않았다. 밀회가 끝나면 린코는 집으로 돌아갔고. 구키도 아내에게 잔뜩 신경 쓰며 귀가했다. 그로부터 반 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의 가정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그때는 덴구(얼굴이 붉고 코가 높으며 신통력이 있어 하늘을 자유로이 날면서 깊은 산속에 산다는 상상 속의 괴물)의 가면을 쓰고 있었지."
가마쿠라에서 본 교겐을 떠올리며 구키가 말한다. 당시만 해도 두 사람은 웃으며 즐길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교겐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라."
이런 깊은 산 속 그윽한 무대에서는 사람의 마음에 파고들어 정념의 속을 후벼내는 구경거리가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지?"
구키는 수면에 흔들리는 노대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린다.
"옛날 사람들은 여기까지 들어오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둘이서 도망친 사람도 있었겠죠?"
"남자와 여자가....."
구키는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무대 뒤쪽의 고요한 산으로 눈길을 돌린다.
"저기서 린코와 둘이 살아도 마찬가지일지 몰라."
"언젠가는 싫증난다는 건가요?"
"남자와 여자는 함께 맺어지는 순간부터 권태라는 병에 걸리겠지."
지금 구키는 사랑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젊었을 때처럼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사랑이 불타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지도 몰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린코도?"
"그래요. 그래서 불타고 있을 때 끝내고 싶어요."
불빛 속에 서 있는 가면극 무대가 발산하는 묘한 느낌 때문인지 린코의 말이 어쩐지 섬뜩하다. 구키는 갑자기 으스스한 느낌이 들어 양손을 겨드랑이에 집어넣는다. 밤이라서 그런지 공기가 제법 쌀쌀하다.
"들어갈까?"
이대로 있으면 무대의 요사스러운 분위기에 휩쓸려 아득한 옛날 세계로 끌려갈 것만 같다. 구키는 일어나서 무대에게 작별을 고하듯이 다시 한 번 돌아다보고 노대를 떠난다. 방은 기분 좋을 정도로 알맞게 따뜻하다 구키는 창문 가까이에 깔려 있는 이불 위에 벌렁 누워서 무심코 창문을 바라본다. 창가의 벚꽃이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오늘 밤 두 사람의 정사를 벚꽃이 훔쳐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어 린코를 부른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그대로 누워서 가볍게 눈을 감고 있자 린코가 욕실에서 나온다. 가운 차림에 말아 올렸던 머리를 풀어 양쪽 어깨로 늘어뜨린 모습이다.
"나가지방 안 입을 거야?
구키가 말하자 린코가 멈추어 선다.
"정말 입으라는 거예요?"
"어차피 가지고 왔잖아."
린코는 말없이 옆방으로 사라진다. 구키는 머리맡의 스탠드를 켜고 방의 불을 끈 다음 어둠 속을 응시한다. 깊은 산 속의 여관에서 그윽한 가면극 무대를 본 후 여자가 붉은 나가지방을 갈아입고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구키는 엄숙함과 음탕함은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지만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가면극에는 '신. 남. 여. 광. 귀' 라고 하는 소위 고반다테(에도(1603-1868)초기에 확립된 정식 가면극 상연의 형식으로서 신사 이야기를 다루는 가미(神)극 무사들이 다투는 슈라모노(男-여주인공이 등장하는 가츠라모노(女-미쳐버리는 여주인공이 나오는 교조모노(狂). 마귀나 초자연적인 짐승이 나오는 기리노(理)로 나뉨)의 분류가 있고 거기에는 자연히 남자와 여자의 정념이 숨겨져 있다.
바로 조금 전 가면극 무대를 보고 장엄한 기분에 사로잡혔으면서도 음심이 발동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일에는 빛과 어둠이 있게 마련이다. 존엄함 이면에 존재하는 음탕함. 세상의 고요하고 태평함 속에 숨겨진 추악함. 도덕의 그늘에 숨 쉬고 있는 부도덕이야말로 빛에 저항하는 어둠의 실체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런 어둠의 쾌락을 추구한다. 구키가 종잡을 수 없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장지문이 열리면서 붉은 나가지방을 입은 린코가 나타난다. 구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크게 뜬다. 장지문을 열고 나타난 린코는 붉은 나가지방을 입고 있지만 얼굴에는 어린아이의 천진함이 배어 있다. 스탠드 불빛을 받은 린코의 모습이 커다란 그림자가 되어 천장까지 닿는다. 순간 구키는 가면극 무대의 여자 주인공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뚫어지게 바라보자 린코의 얼굴은 차츰 가면을 쓴 마고지로(온화한 얼굴 생김새의 젊은 여자 가면)처럼 성숙한 여자의 아름다움과 근심과 요사스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변한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 구키 앞으로 가면을 쓴 여자가 천천히 다가와 두 손으로 구키의 목을 휘감으려고 한다. 구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고 목을 좌우로 젓고 나서 비로소 제 정신이 든 것처럼 숨을 크게 내쉰다.
"놀랐어."
구키의 말에 가면을 쓴 것처럼 보이던 여자는 조용히 웃으며 차츰 린코의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꼭 가면극에 나오는 여자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어."
"아까 노무대를 봐서 그래요 "
"그렇다지만 너무 닮았어."
구키는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어두운 땅에서 튀어나온 마고지로 사쿠라는 여자가면을 생각해낸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표정 속에 강렬한 정념과 음탕함이 숨겨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의 린코 얼굴도 그와 비슷했다.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모습이긴 한데 음탕해."
"누가요?"
"가면 말이 야......."
구키는 그렇게 말하고 느닷없이 린코를 껴안는다. 허를 찔려 앞으로 엎어지듯이 쓰러진 린코를 덮쳐누르고 귓전에 속삭인다.
"가면을 벗겨내겠어."
남자는 지금 악마가 되어 여자의 나가지방 속에 숨어 있는 음란한 자태를 파헤치려고 한다. 주홍빛은 이상한 느낌을 준다. 짙고 밝은 빛이면서도 동시에 핏빛 같기도 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분을 돋우는 마력이 있다. 특히 주홍빛 나가지방은 피부가 하얗고 얌전한 여자가 입으면 수컷이라는 성을 가진 남자를 달뜨게 만든다. 구키는 주홍빛 나가지방을 입은 린코를 위에서 내리누르며 아름다운 덫을 향해 돌진하는 짐승이 되어 힘껏 껴안는다. 그것은 주홍빛이 발산하는 음탕한 분위기 탓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자의 요구대로 순순히 따라준 여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기도 하다.
구키는 주홍빛 비단이 살에 닿는 기분 좋은 감촉을 만끽하면서 서서히 힘을 늦춘다. 그리고 흐트러진 옷설 사이로 보이는 가슴의 골짜기에 손을 들이민다.
"잠깐만요."
이제 곧 벗겨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 성급히 서두르는 바람에 린코는 몸을 빼서 침입해 오는 손을 저지하며 숨을 돌린다.
"이것 때문에 얼마나 애먹었는지 아세요?"
구키는 여전히 한쪽 손으로 린코의 앞가슴을 만지작거리면서 묻는다.
"만드느라고?"
"아니요. 옷집에서 다 만들어서 집으로 가져왔는데 그때 내가 없어서 그 사람이 받는 바람에..... "
린코는 요즘 남편을 '그 사람' 이라 부른다.
"알았나?"
"무심코 보았겠지만 붉은 나가지방이라 놀랐을 거예요. 뭣에 쓸 거냐고 끈질지게 물어서......."
'평소에도 기모노 속에 입잖아?"
"하지만 이걸 입고 다른 남자와 잔다는 걸 눈치 챈 것 같아요."
린코는 남편과 벌써 몇 년째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 사람이 아내의 주홍빛 나가지방을 보고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말인가.
"그래서?"
"절 보고 매춘부래요."
구키는 그녀의 남편이 꼭 자기를 빗대 말한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린코의 앞가슴에서 손을 뗀다. 주홍색 나가지방은 창녀가 입는 옷이다. 몸을 파는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고 흥분시키기 위해 짙은 주홍빛 나가지방을 몸에 걸친다. 그런 점에서는 이 옷을 천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매춘부라는 표현은 너무 심하다. 그러나 린코의 남편 입장이 되고 보면 그렇게 말하는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남편과의 성관계를 거부하던 아내가 다른 남자를 위해서 붉은 나가지방을 만들어 입는다고 상상하면 남편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구키는 린코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걱정되어 묻는다.
"매 맞았나?"
"그렇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찢어버리겠다고 해서....."
"나가지방을?"
"그러지 말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느닷없이 나를 잡고 두 손을 묶어서 ......."
린코는 거기서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도저히 말할 수 없어요."
"숨기지 말고 얘기해줘 ."
린코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더듬거리며 말한다.
"강제로 나를 발가벗겼어요."
"요구해왔나?"
"그 사람은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매춘부라고 말한 여자에게 그런 짓은 할 수 없잖겠어요? 하지만 대신 그런 모습으로 꼼짝못하게 해놓고는......."
구키는 숨을 죽이고 린코의 말을 기다린다.
"음탕한 여자에게는 이런 벌이 제일이라면서 카메라를 가지고 왔어요."
"사진을 찍었나?"
고개를 끄덕이는 린코를 보면서 구키는 선정적인 한 폭의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남편의 행동에는 질투에 눈이 먼 남자의 증오와 정념이 배어 있다.
"나 이제 싫어요."
갑자기 린코가 외친다.
"이제 절대로 집에는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린코는 단호하게 말한다. 감은 눈꺼풀 사이에서 눈물이 배어나온다. 아무리 부정한 아내라도 두 손을 묶고 발가벗긴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직접 몸을 만지거나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카메라를 이용해서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을 자극하다니 정말 냉혹한 의학도다운 복수이다. 구키는 다시는 그 집으로 린코를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면서도 구키는 요사스러운 기분에 사로잡힌다. 남편의 행동이 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린코가 당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왠지 가슴이 뜨거워진다. 구키는 이 한 장의 나가지방이 두 남자의 증오와 애정을 부추겨 미친 듯이 날뛰게 하고. 주홍빛은 남자들의 야수성을 자극하는 흉기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구키는 새로운 욕망이 솟구쳐 오른다. 린코가 남편에게 그런 짓을 당했다면 린코의 몸을 그 이상 학대하리라.
구키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주홍빛 나가지방을 걸친 린코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앞가슴을 헤친다.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린 린코는 반듯이 누워서 눈을 감고 있다. 남편 앞에서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지금은 사랑하는 남자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다. 구키는 안도감과 우월감을 느끼며 허리끈의 매듭을 풀고 옷자락을 벌린다. 순간 구키의 뇌리에 카메라를 든 린코 남편의 모습이 떠오른다. 곧게 뻗은 하얀 다리 사이에 숨겨져 있는 은밀한 곳까지 남편의 카메라에 유린당했을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욕망에 휩쓸린 구키는 그대로 덮치듯이 얼굴을 숲으로 가져간다. 가학과 피학이 이웃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과 모진 고통도 서로 접해 있는지도 모른다. 구키는 린코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은밀한 곳에서 숨쉬고 있는 핑크빛 꽃봉오리로 입술을 옮긴다. 그러나 부드러운 혀끝은 정작 꽃봉오리의 정점에서 맴돌며 애를 태운다. 폭력이나 강제와는 동떨어진 한없이 상냥하고 부드러운 애무이지만 린코는 그것이 오히려 괴로운지 몸부림친다. 가녀린 흐느낌이 차츰 헐떡이는 소리로 변하더니 잔잔하게 떨리던 상체가 뒤로 젖혀진다. 그리고 혀에 싸인 꽃봉오리는 뜨겁게 부풀어 올라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다. 이미 절정에 가까워졌음을 느낀 남자는 여전히 두 손으로 여자의 두 다리를 힘껏 잡고 입술은 은밀한 곳에 댄 채 꼼짝도 않는다. 여자의 애타는 호소에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번 빨아들이기 시작한 입술을 질 줄 모른다. 남자는 지금 여자에게 형벌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부주의하게 남편에게 나가지방을 들키고 소중한 곳을 유린당한 책임을 묻기 위해 내리는 형벌이다. 아무리 울고 애원하고 몸부림쳐도 용서할 수 없다. 남자는 이제 여자의 감각이 사타구니 한 점에 집중되어 타오르고 이미 참을 수 없는 한계에 왔다는 것을 감지한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를 생각해낸 것처럼 혀의 동작을 멈춘다. 지금 이대로 절정에 치닫게 한다면 징벌이 될 수 없다. 남자는 그것보다 훨씬 잔혹하게 굴어 여자의 숨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이 오랫동안 괴로워하고 울어대는 모습을 보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자 정신없이 타오르던 몸을 비틀며 토라진다. 여자의 헐떡이던 가슴이 가라앉을 무렵 남자의 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여자는 남자의 기습에 또다시 거친 숨을 내쉰다. 이미 한창 타오르고 있던 꽃봉오리는 당장에 불덩이가 된다. 여자는 절정 바로 앞에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몇 번 되풀이하면서 벗어날 길 없는 지옥의 고통 속을 하염없이 헤맨다. 마침내 기나긴 고통 속에서 풀려났을 때 린코는 낮고도 안타까운 소리를 내지르며 몸이 막대기처럼 뻣뻣해지도록 경련을 일으킨다.
구키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린코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꼭 감은 채 미세하게 떨고 있는 눈꺼풀. 흐트러진 나가지방 사이에서 약하게 물결치는 가슴을 보고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쉰다. 구키의 징벌은 충분히 효과를 발휘한 듯하다. 이 징벌의 미덕은 여자가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데 비해 남자의 체력 소모가 적다는 것이다 이 상태라면 남자는 몇 번이라도 되풀이해서 여자를 괴롭힐 수 있다.
"못 참겠지?"
구키는 의기양양하게 묻는다.
"항복?"
다시 묻자 린코는 주먹으로 구키의 온몸을 마구 때리며 그대로 덮쳐온다.
"어서요."
구키는 온몸으로 재촉하는 린코가 마치 머리를 산산이 풀어헤친 두억시니(모질고 사악한 귀신의 하나) 같다고 생각한다. 온몸으로 육박해오는 린코의 요구에 응해주면서도 구키는 방심하다가는 지금까지의 고문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잘 안다. 이제 최후의 징벌을 가할 때이다. 결심한 남자는 불타오르는 여자를 두 손으로 껴안고 온몸을 유린한다. 때로는 강하게 빨고 때로는 잇자국이 남도록 깨물면서 린코의 몸에 정사의 낙인을 뚜렷이 찍어간다. 마지막 순간 구키는 린코와 한 몸이 되면서도 여전히 린코 남편의 그림자를 쫓고 있다. 구키는 린코라는 매개를 통해 상상 속의 그녀 남편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고 있다. 결과가 뻔한 싸움임을 알면서도 린코 속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남편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싶다. 상대가 약하다는 것을 알고 싸우는 것만큼 마음 편하고 기세등등한 것은 없다. 특히 성에 있어서 우월하다는 생각은 남자의 용기를 북돋워 그 위력을 한층 더 증대시킨다. 구키의 투쟁심은 린코에게도 정확히 전해져서 린코는 몇 번이나 열락의 지옥을 헤매다가 제발 그만하라고 호소한다. 남자가 수컷으로서 여자 위에 군림하여 충분히 농락한 후에야 비로소 광기의 향연은 끝난다. 창밖에는 광기의 향연을 모두 지켜보았을 벚꽃이 여전히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구키와 린코는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서 이불 위에 누워 있다. 정사의 여운에서 먼저 깨어난 것은 구키였다. 구키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바로 옆에 린코가 누워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뒤에서 바싹 달라붙어 귓전에다 속삭인다.
"좋았어?"
구키의 질문에 린코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무지무지하게요."
구키는 그의 애무 하나하나에 대한 린코의 느낌을 묻는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이제 그만하라고 했는데도 그치지 않아서"
"징벌이니까."
"요즘 당신은 그만하라고 해도 안 그치잖아요. 나도 어느새 그런 방식에 익숙해졌는지도 몰라요."
린코의 말투가 어딘가 나른하면서도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들린다. 구키는 린코의 말을 들으면서 다시 여자의 불가사의를 생각한다. 바로 조금 전에 린코는 몸부림치고 때로는 숨이 끊어질 것처럼 '그만' 하라고 애원했었다. 그러나 정사를 마친 지금은 그것을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만족하고 심지어는 그만하라고 하는데도 멈추지 않은 것이 좋았다고 한다.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구키는 새삼스럽게 한숨 짓는다.
"더 이상 계속하면 당장에 죽을 것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었어."
"그래요.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게 좋았지?"
"당신에게라면 무슨 짓을 당해도 좋은걸요."
구키는 여자의 찬사를 들으면서도 그렇게까지 끝없이 깊어져가는 여자의 몸 그 자체에서 어쩐지 까닭모를 무서움을 느낀다. 지금의 린코는 성적으로 완벽하다. 그 크기와 깊이는 바다와도 같다. 고통스러운 고문도 가학도 헌신도 모두 그녀의 몸속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열락이라는 망망대해에 녹아들어가 버린다.
구키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린코의 앞가슴에 이마를 얹어본다. 그대로 다시 한쪽 손을 린코의 어깻죽지에 끼워 넣자 벌어진 주홍빛 나가지방의 소매에 닿는다. 그것을 가볍게 당기자 겨드랑이에서 소매 쪽으로 찢어진 부분이 보인다.
"찢어졌는데?"
구키가 찢어진 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자 린코는 그 손을 밀어내면서 말한다.
"아녜요. 그 사람이 그랬어요."
"그 사람이?"
"화났을 때 찢은 거예요. 급하게 꿰매는 바람에.... ."
구키는 찢어진 부분을 보면서 그것이 린코 부부 사이에 생긴 흉한 상처 자국처럼 느껴진다. 찢어진 나가지방이 마음에 걸렸는지 린코는 일어나 욕실로 사라진다. 그리고 몇 분 후 허둥대며 튀어나온다.
"큰일났어요."
돌아다보니 린코가 나가지방의 앞설을 여민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당신 잇자국이죠?"
구키는 정사를 나누면서 그녀의 온몸을 깨물었던 것을 기억해낸다.
"자아. 이것 보세요."
린코는 구키 앞에 앉아 옷깃을 벌리고 가슴을 드러낸다.
"여기도. 여기에도 있잖아요."
린코의 말대로 왼쪽 목과 가슴. 빗장뼈와 젖꼭지 언저리에 빨갛게 피가 밴 흔적이 낙인처럼 찍혀 있다
"이렇게 됐으니 난 이제 돌아갈 수 없어요."
"이제 집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잖아."
"물론 집에는 돌아가지 .않지만 이 모양으론 밖에도 나다닐 수 없잖아요."
"괜찮아."
구키는 린코의 목에 난 빨간 상처를 어루만지며 말한다.
"곧 없어져."
"곧 이라니. 언제요?"
"이삼 일이나 사오 일 "
"그러면 난 어떡해. 내일 친정에 가야 한단 말이에요."
"파운데이션으로 감추면 돼 ."
"그걸로는 어림도 없어요.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죠."
물을 것도 없이 그것은 린코를 남편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고. 동시에 몇 번씩이나 절정에 치닫는 탐욕스러운 모습에 대한 시기심에서였다. 그런 점에서는 구키의 의도대로 되었지만 지금 새삼스럽게 린코의 입에서 '돌아갈 수 없어요'라는 말을 들으니. 마침내 사태가 심상치 않은 데까지 진전되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내일 어머니와 만나기로 한 약속은 취소할래요."
"하지만 괜찮겠어?"
"보나마나 그 사람과 다시 한 번 얘기해보라는 말씀을 하실 거예요 하지만 제 대답은 분명한 거절뿐이에요."
린코는 지금까지 남아 있던 한 가닥 모녀의 유대관계마저도 끊어버린다
"당신은 어때요?"
그리고 이번에는 이야기의 방향을 구키에게 돌린다.
"당신도 돌아가지 않을 거죠?"
"물론 안 돌아가."
"하지만 가끔 들르잖아요."
"그건 옷도 갈아입고 집에 와 있는 우편물을 가지러 가는 것뿐이야."
"그것도 이젠 안 돼요. 용서 못해요."
린코는 그렇게 말하더니 느닷없이 구키의 젖꼭지 언저리를 깨문다.
"아얏?"
구키가 당황해서 몸을 빼지만 린코의 몸은 떨어질 줄 모른다.
"당신도 돌아갈 수 없게 만들어줄 거야."
"그런 짓 하지 않아도 안 돌아간다구."
"하지만 남자는 변덕이 죽 끓듯 하잖아요."
다시 린코의 입술이 젖꼭지에 달라붙는다. 구키는 아릿한 통증을 참으면서 이제부터는 린코와 함께 막다른 데까지 갈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린코는 구키의 앞가슴에서 천천히 입술을 떼고 그 자국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진다.
'그렇게 깨물었는데도 ......"
린코는 자신의 부드러운 피부처럼 선명하게 멍 들지 않는 것에 불만을 표한다. 구키가 반듯이 누워 있자 린코는 나가지방의 허리끈을 구키의 목 밑으로 밀어 넣는다.
"그대로 가만히 있어요."
타이르듯이 말하고는 목에 감은 끈을 감아 양쪽에서 천천히 조여 온다.
"이봐. 이봐......."
구키는 아직도 장난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린코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만둬. 죽는단 말이야."
"괜찮아요. 이 정도로는."
린코는 갑자기 구키의 몸에 올라타 허리끈을 양손에 잡은 채 추궁한다.
"정말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죠?"
"아까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잖아."
구키는 목과 끈 사이에 간신히 끼워 넣은 손가락 끝으로 더 이상 조르는 것을 막는다.
"만약 내게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가면 정말 죽여 버릴 거예요."
"돌아가지 않아. 돌아가지 않는다구... "
아무리 다짐을 해도 린코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만해 아베 사다 같은 짓은 하지 말라구."
순간 린코는 조르기를 멈추더니 구키의 목에 감은 끈을 묶는다.
"그 책 보여줄 거죠?"
"약속대로 가지고 왔어."
"그럼 지금 보여줘요."
"이대로?"
"물론이죠."
어쩔 수 없이 구키는 목에 빨간 끈이 감긴 채 가방 있는 곳으로 기어가서 사다의 책을 꺼내 이불로 돌아온다.
"이제 이 끈은 풀어도 괜찮은 거지?
"안 돼요. 그대로 책을 읽으세요."
린코는 허리끈을 잡은 채 다시 벌을 내리는 사람이 되어 말한다.
"누워서 당신이 제일 흥분했던 부분부터 읽어줘요."
아무래도 묘한 모습이다. 밤이 이슥한 슈젠지의 한 여관방에서 한 쌍의 남녀가 누운 채로 한 권의 책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남자는 목에 빨간 끈이 감긴 채로 책을 읽고 여자는 그 끈을 잡은 채 귀를 기울인다. 책의 내용은 성애에 탐닉한 끝에 사랑하는 남자의 목을 졸라
죽이고 중요한 그 부분을 잘라 도망친 여자가 검사에게 진술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길지만 우선 처음 부분을 읽어볼게."
조서는 5만6천 자나 되지만 그 내용은 아베 사다의 솔직하고 당당한 진술 때문인지 남자에 대한 사랑의 깊이와 무게가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자아. 읽는다."
구키가 누워서 책을 펼치자 린코는 구키의 앞가슴에 달라붙는다. 조서는 사전에 검사가 살인 및 사체 손괴 사건의 피고에 대해 예심 청구를 하고 있다. 검사가 이 사실에 대해서 더 진술할 말이 있는가 하고 묻자. 피고는 '읽으신 바와 같이 사실과 틀림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나서 일문일답 형식으로 되어 있다.
검사 : 왜 기치조를 죽였는가?
사다 : 나는 그 사람이 좋아서 견딜 수 없었고 나 혼자 독점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와 부부가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살아 있으면 다른 여자와 관계하게 될 게 아니겠습니까. 죽여 버리면 다른 여자가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검사 : 기치조도 피고를 사랑하고 있었나?
사다 : 역시 사랑했지만 저울에 달면 4대 6으로 제가 더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시다는 늘 '가정은 가정. 너는 너다. 집에는 아이가 둘이나 있고 내 나이도 있으니 이제 와서 너와 사랑의 도피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네게는 비록 보잘 것 없는 집이지만 한 채 사줄 테니 조그만 요릿집이라도 하면서 오래오래 즐겨보자'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모호한 태도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구키가 애써 담담하게 책을 읽고 린코도 숨을 죽이고 듣고 있다. 그것을 확인하고 구키는 다시 사다가 이시다 기치조에게 빠져 있던 과정을 형사 조서를 따라서 읽어나간다.
검사 : 피고는 왜 그렇게까지 이시다를 사랑했는가?
사다 : 이시다의 어디가 좋았냐고 묻는다면 딱 꼬집어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이시다는 표정이나 마음씀씀이 모두가 사람을 깔보는 법이 없었습니다. 나이가 마흔두 살이었지만 고작 스물일곱이나 여덟로 보일 정도로 멋졌죠.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고 감정이 풍부해 사소한 일에도 몹시 기뻐했고 내가 무엇을 해도 만족스럽게 여겼습니다. 또 이시다는 잠자리가 아주 교묘해서 정사할 때면 여자의 기분을 잘 헤아려 자신은 오랫동안 참고 견디며 내가 충분히 만족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 정사를 나눈 뒤에도 곧 다시 되살아나는 정력이 왕성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이시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해서 나와 관계를 갖는 것인지 시험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말씀드리기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월 이십삼일 이시다의 집에서 나왔을 때 나는생리 때문에 몸이 약간 더러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시다는 싫어하지 않고 만지고 핥아주었지요. '정말로 그 사람을 좋아하면 표고버섯이나 회를 앞에 붙여놓고 먹는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더니 이시다는 '나도 할 수 있다구'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장국에서 표고버섯을 꺼내 젓가락으로 그것을 내 안에 끼워 넣었다. 꺼내서 도로 국에 넣었는데 이시다가 정말 그것을 절반 먹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나도 나머지 절반을 먹었습니다. 나는 그런 이시다가 사랑스러워 힘껏 껴안으면서 '그 누구에게도 이 좋은 짓을 할 수 없도록 죽이고 싶다'고 말했더니 이시다는 '너를 위해서라면 죽어줄게' 라고 말했습니다.
검사 . 그 동안 여관에 계속 있었나?
사다 : 5월 4일경에 '만사키'에 있었는데 돈이 떨어져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시다의 것을 잘라버리겠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이시다는 '집에 돌아가도 하지 않아 하는 건 너하고 뿐이야'라고 말했지만 헤어져 혼자 있게 되자 질투심이 일고 마음이 초조해져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10일 밤에 이시다의 가게가 있는 나카노까지 가서 만나고. 그가 가지고 온 돈 20엔으로 역 부근의 어묵가게에서 한잔하고는 만사키로 가서 다시 투숙하게 되었습니다.
읽어 나가는 중에 구키는 왠지 몸이 뜨거워진다. 그것은 린코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린코는 어느새 구키의 앞가슴에 바싹 달라붙어서 중얼거린다.
"너무 생생하네."
사다의 진술은 솔직하고 조금도 기가 꺾인 구석이 없어 오히려 눈으로 본 것보다 사건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머리가 상당히 좋은 여자 같아."
이미 지난 일인데도 당시의 상황과 심정을 이야기하는 데 막힘이 없고 냉정하고 객관적이다.
"전에는 뭘 했었는데요?"
"원래는 간다 태생으로 낭비가 심하고 되바라진 계집아이였던 모양이야 다다미장사를 하던 집의 가세가 기울자 게이샤로 나가 여기저기 전전하다가 이시다가 경영하는 일품 요릿집에 종업원으로 들어갔는데 이름을 가요라고 했었다는군."
"그 여자 사진을 보고 싶어요."
구키는 사다 사진이 실려 있는 책의 맨 앞장을 펼친다. 사건 직후 찍은 것으로 머리는 뒤로 쪽을 찌고 갸름한 얼굴은 이목구비가 반듯한데. 조용한 눈매에는 쓸쓸한 표정이 감돈다.
"예뻐요."
"린코 닮았어 ."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부드러움 속에 남자의 마음을 이끄는 달콤한 데가 있는 것이 정말 린코와 비슷하다.
"저는 이렇게 미인이 아니에요."
"물론 린코가 훨씬 고상해 보여."
구키는 당황해서 덧붙이면서 이 여자의 아름다움 속에는 강렬한 마성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다는 서른한 살이었어."
구키는 다시 책을 읽어나간다. 형사의 질문은 마침내 사건의 핵심에 육박하고 있다.
검사 : 오월 십육일 이시다의 목을 조르면서 관계한 상황을 진술하라.
사다 : 12일인가 13일경 이시다가 '목을 조르는 게 좋다구?'라고 물었기 때문에 '그래요. 졸라봐요'하고 말하자 제 목을 졸랐어요. 그러고는 '왠지 네가 불쌍해서 싫어' 라고 말하더군요. 이번에는 내가 그의 몸 위에 올라가서 목을 조르자 이시다는 '간지러우니까 그만해' 라고 말했습니다 16일 밤. 이시다에게 안겨 있자니 그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마구 깨물었지요. 그러다가 퍼뜩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한 자극을 받으며 관계 맺고 싶다는 욕망이 솟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끈으로 조를 거예요'라고 말하고 머리맡에 있던 내 허리끈을 이시다의 목에 감고 성교를 하면서 목을 졸랐다 늦췄다 했습니다. 처음에 이시다는 재미있어 하면서 혀를 내밀며 장난스럽게 굴었는데. 목을 힘껏 조르자 그것이 꿈틀꿈틀하는 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 느낌을 말하자 '네가 좋으면 고통스러워도 참을게'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시다가 곧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싫죠?'라고 묻자 이시다는 '싫지 않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했습니다. 또다시 끈을 조였다 늦추었다 하면서 두 시간 정도 장난하고 있는 사이. 십칠일 새벽2시쯤 되었을 때였어요. 내가 아래쪽만 보면서 하다가 그만 손에 힘이 들어가 꽉 목을 조였더니 '으윽' 하는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면서 이시다의 것이 갑자기 작아져서 내가 당황해서 끈을 놓자 이시다는 '가요'하고 부르면서 나를 꼭 껴안고 우는 것 같았습니다. 이시다의 목을 살펴보니 빨간 끈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고 눈은 약간 부어 있었습니다. '목이 뜨거워' 라고 하기에 욕실로 데려가서 목을 물로 씻어주었습니다. 그때는 얼굴까지 빨갛게 부어올라 몹시 심했는데도 이시다는 거울을 보고 '너무했다' 하고 말했을 뿐 화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검사 : 의사에게는 갔었나?
사다 : 그럴까 생각도 했지만 이시다가 '섣불리 부르면 경찰에 신고할지도 모르니까 그만둬' 라고 말해서 단념했습니다. 나는 머리를 식혀주기도 하고 몸을 주물러주기도 했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아서 저녁때쯤 약국으로 가서 '손님이 싸움을 하다가 목이 졸려 그 자리가 빨갛게 됐다'라고 말하자. 카르모틴이라는 약을 주면서 한 번에 세 알 이상 먹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린코가 구키의 목에 감겨 있는 끈의 매듭을 풀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남자의 목을 너무 졸라서 얼굴이 빨갛게 부었다는 내용을 듣고 무서워진 모양이다. 구키는 매듭이 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읽어나간다.
검사 : 사건 전날 밤도 여관에 계속 있었나?
사다 : 이시다는 얼굴이 부은 채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 아침에 간단하게 야나가와(뼈를 발라낸 미꾸라지와 우엉을 질냄비에 넣고 끓여 달걀을 풀어 얹은 요리)를 먹었을 뿐이라 밤에 약을 사러 나간 김에 수박을 사와서 먹이고 그 후 우동을 하나 시키고 나는 김밥을 시켰습니다. 약국에서 사온 카르모틴을 곧 세 알 먹였지만 효과가 없다고 해서 여섯 알을 먹였는데 이시다는 눈을 깜빡깜빡하고 있을 뿐 잠들지 않았습니다. '이제 돈이 없으니 돌아갈 수밖에 없다'라고 말해서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니까 "이 집에 있으면 부은 얼굴을 여종업원이 보게 될 거야. 그러면 거북하니까 어차피 돌아가야 돼. 너는 시모야든 어디든 가 있어'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자 '그렇게 싫다고만 하면 어떡하나 너도 처음부터 내게 아이가 있는 건 알고 있었을 테고. 둘이서 함께 지낼 수는 없잖아 서로 오랫동안 즐기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참아야지 안 그러면 곤란하다구'라고 말하더군요. 마침내 이시다가 잠시 헤어져 있을 모양이구나 생각하니 속상해서 소리 내서 울자 이시다도 울면서 내게 상냥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떻게 하면 이시다와 함께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것만 생각하고. 그의 이야기는 거의 건성으로 들어 넘겼습니다.
검사 : 그래서 결국 그날 밤도 함께 잤나?
사다 : 그런 일로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에 여종업원이 주문한 닭고기 수프를 가지고 오는 바람에 그것을 이시다에게 먹이고 열두시쯤 둘이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시다는 아직 얼굴이 부어 있고 기운이 없었지만 내가 뽀로통해 있자 그곳을 애무해주면서 어떻게든 비위를 맞춰주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관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시다는 곧 '졸려서 잘 거야' 하고 '너는 자지 말고 내 얼굴을 보고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보고 있을 테니까 푹 자요'라고 말하고 이시다의 얼굴 위에 볼을 비벼주자 이시다는 꾸뻑꾸뻑 졸기 시작했습니다.
구키는 린코를 만지고 싶어서 한쪽 손을 잡고서 조서를 다시 읽는다.
검사 : 언제 죽이기로 결심했나?
사다 : 5월 7일부터 10일까지 혼자 있는 동안 이시다 생각만하면 괴로웠습니다. 차라리 이시다를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떨쳐버렸습니다. 17일 밤 이시다에게 목의 상처도 치료해야 하고 앞으로 둘이서 함께 지내기 위해서라도 지금 잠시 헤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보니. 만약 이시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내가 간호해준 것과 똑같이 그의 부인이 간호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번에 헤어지면 어차피 한두 달은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이시다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이시다는 내가 함께 죽자든가 어디로 도망치자고 해도 진심으로 들어주지 않고 조그만 요릿집이라도 하면서 즐겁게 살자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시다를 영원히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죽일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검사 : 17일 밤 피고의 허리끈으로 잠자고 있는 이시다의 목을 조른 자초지종을 말해보라.
사다 : 이시다가 잠들 무렵 나는 왼손으로 이시다의 머리를 껴안은 채 자는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이시다가 갑자기 눈을 떴다가 나를 보고는 안심했다는 듯이 다시 눈을 감으면서 '가요. 당신 오늘 밤도 내 목을 조르겠지?'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응' 하고 말하고 생긋이 웃어주자 '조르기 시작하면 최후까지 졸라줘. 도중에서 그만두면 오히려 괴로우니까 말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내가 죽여주기를 바라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농담이겠지 하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잠시 후 이시다가 잠들자 오른손을 뻗쳐 머리맡에 있던 내 허리끈을 집어서 이시다의 목에 두 번 돌려 감고 조르니까 이시다가 눈을 번쩍 뜨고 '가요?'라고 말하면서 약간 몸을 들어서 내게 매달릴 것처럼 몸을 움직였습니다. 나는 울면서 이시다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용서해주세요'라고 말하고 끈 양쪽을 힘껏 잡아당겼습니다. 이시다는 '으응'하고 한 번 신음하고는 두 손을 부르르 떨다가 축 늘어졌습니다. 끈을 놓았지만 이번에는 내 몸이 너무 떨려서 탁자 위에 있던 술을 병째로 마신 다음 이시다의 목을 다시 한 번 조르고 끈을 머리맡 아래에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아래층의 기색을 살피러 갔는데 카운터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그때 벽시계는 새벽 2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린코가 크게 한숨 짓는다. 사다가 사랑하는 남자를 죽이는 그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듣고 있는 사이에 기분이 고조된 모양이다. 구키는 잠시 사이를 두고 다시 조서를 읽기 시작했다
검사 : 그 후 피고가 이시다의 음경과 음랑을 자르고 왼팔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다음 사체와 시트에 피로 글을 남겨 '만사키' 에서 도망쳐 나온 상황을 말해보라.
사다 : 이시다를 죽이고 나니 어깨의 짐을 풀어놓은 것처럼 홀가분해지면서 기분이 명랑해졌습니다. 재빨리 맥주 한 병을 마시고 나서 이시다의 옆에 누워서 그의 입술이 마른 것 같아 혀로 적셔주기도 하고 얼굴을 닦아주기도 했지만 사체 옆에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시다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사랑스러워 아침녘까지 함께 자면서 이시다의 것을 주무르기도 하고 제 그곳에 대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이시다를 죽였으니 저도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무튼 그곳에서 나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와 헤어지기 싫어 망설이다가 문득 그의 것을 잘라서 가지고 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도 이시다의 것을 자르겠다고 하면서 보여줬던 칼이 생각났습니다. 액자 뒤에 감춰두었던 그 칼을 꺼내서 밑동에 대보았지만 제대로 잘라지지 않아서 상당히 시간이 걸렸습니다. 도중에 칼이 미끄러져 대퇴부 언저리에도 상처를 냈습니다. 그리고 고환을 자르려고 했지만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아서 음낭이 조금 남아 있었을 겁니다. 잘라낸 그것과 고환은 휴지 위에 올려놓았는데 피가 너무 많이 나와서 휴지로 꼭 막으면서 피를 왼쪽 집게손가락에 묻혀 내가 입고 있던 나가지방의 소매와 옷깃에 문지르고. 다시 이시다의 왼쪽 대퇴부와 시트에 '사다기치 두 사람뿐' 이라고 썼습니다. 그의 왼팔에 칼로 '사다'라는 내 이름을 새긴 뒤 창가에 있던 대야에서 손을 씻고 머리맡에 있던 잡지 꾸러미에서 포장지를 벗겨 거기에 그의 소중한 것을 싼 다음 옷 바구니에 벗어놓았던 여섯 자쯤 되는 이시다의 훈도시를 배에 감고 그 속에 소중한 꾸러미를 찔러 넣었습니다. 이시다의 셔츠와 바지를 입은 다음 그 위에 내 기모노를 입고 오비를 맸습니다. 그리고 방을 정리하고 피가 묻은 휴지 따위는 이층 화장실에 버렸습니다. 하지만 칼만은 신문지에 싸서 제가 챙겼습니다. 이시다에게 작별 키스를 하고 모포를 덮어준 뒤 얼굴은 수건으로 덮었습니다. 아침 8시경. 아래로 내려가 여급에게 '잠깐 쇼핑하고 올 태니 낮까지 깨우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미리 대기시켜둔 택시를 탔습니다. 사다가 사랑하는 남자를 교살하고 국소를 잘라낸 이야기는 폭설 때문에 주젠지코에 갇혔을 때 린코에게 해준 적이 있다. 중복되는 내용이지만 구키는 다시 조서를 읽어 내린다.
검사 : 왜 이시다의 음경과 음낭을 잘라서 가지고 다녔나?
사다 : 그것은 제일 사랑하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둔다면 입관할 때 그 부인이 만질 테니까. 아무도 못 만지게 하고 싶었습니다. 어차피 이시다와 함께 나올 수 없는 노룻이고 그 음경만 있으면 이시다와 함께 있는 것 같아 쓸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시다의 대퇴부와 시트에 '사다기치 두 사람뿐'이라고 쓴 것은 이것으로 이시다는 완전히 내 것이라는 제 뜻을 남들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이시다의 이름을 한 자씩 따서 '사다기치 두 사람뿐' 이라고 썼습니다.
검사 : 이시다의 왼팔에는 왜 글자를 새겼나?
사다 : 이시다의 몸에 나를 붙여 보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검사 . 왜 이시다의 훈도시와 속옷을 입고 있었나?
사다 : 그 훈도시와 속옷에는 이시다의 냄새가 배어 있고 그가 남긴 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검사 . 범행 후 도주한 경로에 대해서 말해보라.
사다 : 오월 십팔일 아침 여덟시경 여관 '만사키'를 나왔을 때는 오십 엔 정도 가지고 있었는데 우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우에노의 고물상에서 입고 있던 옷을 팔고 다른 옷과 오동나무 나막신을 샀습니다. 또 보자기를 사서 종이 꾸러미와 칼을 다시 쌌습니다. 그 후 '만사키'에 전화를 걸어서 여종업원에게 낮에 돌아갈 테니까 그때까지 깨우지 말아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네' 하고 대답하기에 아직 내가 저지른 일이 발각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안심했습니다. 그리고 전부터 신세지고 있던 오미야 선생님이 간다의 반다이칸에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걸어서 니혼바시에서 만났습니다. 선생님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나와 울어버렸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선생님과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라고 말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우에노
에서 산 옷이 너무 얇았기 때문에 신주쿠에서 히토에(여름에 입는 안을 대지 않은 홑옷)와 나고야 오비(실을 둥글게 말아 양쪽 끝에 술을 단 띠)를 사서 갈아입고 택시로 하마마치의 공원으로 가서 거기서 어차피 죽을 바에는 한 때 지낸 적이 있는 오사카로 가서 이코마야마에서 골짜기 밑으로 뛰어내리려고 생각했습니다.
조서는 드디어 사다가 체포되기 직전의 상황이다.
검사 :이시다를 살해한 날 밤은 어디에 있었나?
사다 : 오사카에서 죽으려고 생각했는데 곧바로 죽을 용기도 나지 않고 잠시라도 이시다를 생각하고 싶어서 밤 10시경 전에 투숙한 적이 있는 아사쿠사의 우에노야 여인숙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목욕을 할 때도 소중한 종이 꾸러미는 욕실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 후 이층에 있는 방에 들었는데 이불 속에서 종이 꾸러미를 펼쳐서 이시다의 그것과 고환을 바라보면서 그것에 키스하기도 하고 내 앞에 대보기도 하면서 그와 보냈던 여러 가지 추억을 떠올리자 울음이 터져 나와서 제대로 잠을 이를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카운터의 신문을 빌려서 보니 내 젊었을 때의 사진과 함께 만사키의 사건이 크게 실려 있었습니다. 여인숙에 알려질까 봐 당황해서 여관비를 지불하고. 비가 내리고 있어서 나막신과 우산을 빌려 여인숙에서 나왔습니다.
검사 : 19일부터 체포될 때까지의 상황을 말해보라.
사다 : 오사카로 가려고 했지만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야간열차를 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사쿠사로 가서 '오나츠세이쥬'의 영화를 보고 나서 시나가와 역으로 가서 오사카 행 삼등 열차표를 샀습니다. 하지만 발차 시간까지 2시간 남짓 남았기 때문에 역 매점에서 신문을 5장 샀지만 나중에 읽을 생각으로 짐 속에 넣고 근처에서 술을 마셨는데 취기가 돌아 5시가 넘어 시나가와칸이라는 여관으로 가서 마사지를 했습니다. 그러는 도중에 이시다의 꿈을 꾸었습니다. 내가 혹시 무슨 헛소리라도 했을까봐 물었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안심했습니다. 안마사를 돌려보내고 나서 밥을 먹고 석간을 보니 나에 대해서 다카하시 오덴이니 뭐니 하며 아주 대단하게 실려 있고. 같은 역에 형사가 잠복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관에서 죽으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난간이 낮아 실패할 것 같아 체포될 것을 각오하고 새벽 1시까지 안자고 있었는데 경찰은 오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튿날 아침 여종업원에게 부탁해서 별채로 옮겼습니다. 거기라면 목을 매달아도 정원까지 다리를 뻗치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년필과 종이를 빌려서 오미야 선생님과 구로카와 씨. 죽은 이시다 앞으로 유서를 세 통 써서 밤중에 죽을 생각으로 맥주를 두 병 마시고 자고 있는데 오후 4시경 경찰이 왔기 때문에 '내가 아베 사다입니다'라고 말해 체포되었습니다.
구키는 누운 채로 읽다 보니 피곤했지만 조서는 사다가 체포된 후의 심경을 이야기하는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다.
검사 : 피고는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다 : 경시청에서 신문을 받을 때는 이시다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기뻤고 밤이 되면 이시다의 꿈을 꾸기를 원했습니다. 꿈속에서 그를 만나면 사랑스럽고 기뻤습니다. 그러나 날이 감에 따라 조금씩 마음도 변해서 요즘은 그런 짓을 한 것이 후회됩니다. 지금으로서는 될 수 있는 한 이시다를 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입에 담거나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될 수 있으면 재판이라든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질문을 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관청에서 상의하여 마땅한 형을 내려주세요. 불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쾌히 형을 받을 각오로 있습니다. 변호사도 필요 없습니다.
검사 : 그밖에 하고 싶은 말은 없는가?
사다 : 이번 사건으로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색정광처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변태성욕자인지 아닌지는 저에 대해 조사해보면 잘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른 남자에게도 이시다와 똑같은 짓을 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좋은 느낌을 받아서 돈을 받지 않고 놀아준 적은 있지만 관계하는 중에도 자신을 잊은 적이 없고 때와 경우를 생각해서 간단히 헤어져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이성적으로 행동했고 때로는 남자에게 질린 적도 있지만 이시다만큼은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굳이 흠을 말한다면 약간 품위가 없지만 오히려 그런 점에 반해서 완전히 빠져 버렸습니다. 지금 제가 벌인 일로 세상 사람들이 재미삼아서 이러쿵저러쿵하고 있지만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의 것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처음엔 회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남편이 회를 좋아하면 저절로 좋아지게 되고. 남편의 잠옷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좋고.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남긴 컵의 물을 마셔도 맛있고. 남자가 씹던 음식을 입으로 건네주어도 행복할 겁니다. 남자가 게이샤를 기적에게서 빼주는 것도 자신이 독점하고 싶기 때문일 겁니다. 또 이번에 내가 한 짓을 흉내 내는 여자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짓을 한 여자들을 색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키가 조서를 다 읽고 돌아다보니 린코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다. 아베 사다의 박진감 넘치는 진술 조서에 흥분한 모양이다. 갈증을 느낀 구키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자 린코도 일어나 테이블에 마주 앉는다.
"한잔 하겠어?"
구키가 잔에 맥주를 따라주며 묻자 린코는 "지독해요"하고 중얼거린다.
"아베 사다에 대해 상당히 오해하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남자의 그곳을 잘랐다는 말만 듣고 아주 징그럽고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네요. 아주 솔직하고 멋진 여자예요."
구키는 읽어준 보람을 느끼며 빙그레 미소 짓는다.
"용케도 이런 자료를 구했네요."
"처음에는 어떻게든 읽고 싶어서 법무성에까지 부탁하러 갔었는데 거절당했어. 이유는 개인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학술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보여줄 수 없다는 거야."
"당신이 기획했던 것도 학술적인 것이었잖아요?"
"인물 중심으로 쇼와시대사를 더듬어가는 기획이니까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부탁해도 소용없었어. 문제는"
"이런 내용은 정확히 공개하는 게 사다의 명예회복에도 도움이 될 텐데."
"관공서라는 곳이 워낙 폐쇄적이어서 말이야. 여기저기 찾아보니 이런 신문 조서가 이미 나와 있더군."
"그게 어디 있었는데요?"
"이렇게 공공연하게 나돌 수 없어 깊숙이 파묻어둔 것만 모은 이른바 비본이라는 게 있어. 거기에 정확히 기재되어 있었어."
"그럼 누가 또 봤나요?"
"아마 취조 형사나 서기들이 복사본을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은밀히 흘린 것인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감춰도 의미가 없잖아요."
"그래도 감추는 것은 역시 관공서의 생리인 모양이야."
구키의 말투에서 취재할 때 느꼈던 불만스러움이 배어나온다. 린코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아베 사다의 진술서가 기록되어 있는 책을 집어 든다. 첫 장을 펼치자 사건 직후 신문에 게재되었던 사다와 기치조의 얼굴 사진이 있고 이어서 사다가 체포되었을 때의 사진이 실려 있다 이상하게도 체포된 사다도 체포한 경찰관들도 모두 웃는 얼굴이어서 마치 기념사진처럼 보인다.
"체포됐을 때 사다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겠죠?"
"너무 간단히 잡혀서...... 게다가 미인이었기 때문에 경찰도 기분 좋았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때는 경찰이나 군인이 득세하던 시대였잖아요?"
"쇼와 11년이니까 이보다 조금 앞서 2.26사건이 일어났고 일본이 차츰 군국주의로 향해가는 어둡고 불안한 시대였지. 그런 때 자신만의 사랑을 관철한 사다의 행동에 공감하면서 한순간 구원받은 것 같은 기분 말야."
린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책장을 넘긴다.
"사람들은 엽기적인 사건처럼 말하지만 이 여자가 한 짓은 변태가 아니에요. '세상에는 내가 한 짓과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여자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다만 실행하지 않은 것뿐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는 대로예요."
"그 기분 알 것 같아?"
구키가 농담 삼아서 묻자 린코는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물론 알아요. 너무 좋아지면 그런 심정이 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거죠."
"그러나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는 얼마나 사랑하는가가 문제가 되죠. 그 사람이 너무너무 좋아서 완벽하게 독점하고 싶어지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잖아요."
린코가 동의를 구하자 구키는 순간 당황한다.
"하지만 실행할 것인지 어떤지는 별 문제지."
"확실히 다른 문제겠지만 정말로 좋아지면 모르죠. 여자 속에는 언제나 그런 생각이 잠재해 있다고 생각해요."
린코가 바라보자 구키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돌린다. 구키는 숨이 막힐 듯한 더위를 느끼고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연다. 볼을 스치는 봄밤의 냉기가 상쾌하다
"이리 와봐."
구키는 린코를 불러 창가에 나란히 선다. 창문 왼쪽에 활짝 핀 벚나무가 있고 그 아래로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연못이 보인다. 그 연못은 노천탕 앞을 둘러싸고 그윽한 가면극 무대를 비추고 있는 밤의 연못 수면과도 이어져 있다.
"정말 조용해......"
구키는 조금 전에 읽은 사다의 생생한 진술서에서 도망치듯이 숨을 크게 쉰다. 깊은 산속 고즈넉한 여관에서는 사다의 사건이 아득히 먼 별세계의 일처럼 여겨진다. 정면에 솟아 있는 새까만 산의 능선 저편에 펼쳐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 린코가 말한다.
"벚꽃이 ......"
만개한 벚꽃 가지에서 생각 난 듯이 꽃잎이 지고 있다. 그 한 잎은 연못 수면에 떨어지고 다른 한 잎은 밤바람을 타고 창가에 와 떨어진다.
"밤에도 벚꽃이 지는 모양이죠?"
린코의 한 마디에 구키는 뜻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했다는 느낌이 든다. 노천탕에 들어갔을 때도 정사에 빠져 있을 때도 사다의 조서를 읽고 있을 때도 벚꽃은 계속 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우리가 자도 벚꽃은 계속 지고 있을지 몰라."
"그럼 우리 밤새 지는 벚꽃을 지켜봐요."
린코의 심정은 알지만 구키는 피로를 느낀다. 격렬한 정사 탓인지 아니면 사다의 진술서를 읽은 흥분 탓인지 아니면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인지 온몸이 나른하다. 이슥한 밤의 어둠 속에서 벚꽃만이 소리 없이 지고 있다. 구키는 린코의 어깨에 손을 얹고 속삭인다.
"잘까...... "
구키가 자리에 누웠지만 린코는 창가에 선 채 중얼거린다.
"창을 조금만 열어둘게요."
구키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이자 린코는 불을 끄고 자리에 눕는다. 부드러운 살갗의 감촉이 그리워서 손을 뻗치자 린코가 가볍게 손을 가로막으며 말한다.
"그렇다면 여자가 불쌍해요."
구키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곧 사다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라면 그런 짓은 안 해요. 아무리 좋아도 그 사람을 죽여 버리면 의미가 없잖아요."
구키도 동감이다.
"그를 죽여서 독점했다 해도 그 후 그녀의 일생이 행복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잖아요."
"형을 마치고 출소한 뒤 사다는 다시 아사쿠사 주변의 요릿집에서 일을 했는데 '아베 사다가 있는 가게입니다'라는 광고를 했다니까 좋든 싫든 상관없이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눈에 드러난 것은 확실한 모양이야. 죄를 속죄해도 살인자임에는 틀림없으니까"
"역시 살아남은 사람이 불쌍해요."
린코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국소를 잘려 살해된 남자도 불쌍하다면 불쌍하다.
"어쨌거나 좋은 일은 아냐."
"그럴까요?"
린코는 거기서 잠깐 사이를 둔다.
"한 사람만 남으니까 안 돼요."
"한 사람만......?"
"그래요. 두 사람이 함께 죽으면 좋았을 거예요.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수 있고 쓸쓸하지도 않겠죠."
구키는 숨이 답답해지는 느낌이 들어 등을 돌린다. 함께 죽어야 한다는 린코의 말에 어쩐지 거부감이 든다. 기분이 답답해진 것이 그 탓일까 생각해보지만 린코가 죽자고 제안한 것은 아니다. 사다와 같은 사건을 일으킬 바엔 함께 죽는 게 낫다고 말한 것뿐이다.
구키는 몸을 돌려 반듯이 누워 있는 린코의 앞가슴에 뺨을 댄다. 부드러운 살갗에 뺨을 대고 있는 사이에 구키의 마음은 차츰 편안해진다. 구키는 손을 뻗쳐 린코의 젖꼭지를 만지작거린다. 완만한 언덕을 넘어서 입술을 젖꼭지로 옮겨 천천히 혀를 움직인다. 좌우로 그리고 때로는 둥글게 혀를 놀리면서 구키는 머릿속이 텅 비어가는 것을 느낀다. 어머니와 자식이 태어났을 때부터 젖가슴과 입술로 맺어져 있었던 것처럼 여자와 남자도 젖꼭지와 혀로 영겁의 세월 속에 맺어져 있다. 밤의 정적 속에서 꿈꾸듯 젖꼭지에 혀를 휘감고 있는 사이에 구키는 문득 입술 끝에 뭔가가 가볍게 닿는 것을 느낀다. 잠시 뒤에 또 하나가 와 닿는다. 구키가 천천히 얼굴을 떼고 스탠드를 켜자 엷은 분홍빛 꽃잎두 개가 젖꼭지 언저리에 내려앉는다.
"꽃잎이. .... "
구키가 중얼거리자 린코가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당신 입술에도......."
구키는 자신의 입술에서 꽃잎을 떼서 린코의 앞가슴에 얹는다.
"저기서 떨어진 거야"
구키는 열려 있는 밤의 창을 바라본다.
"밤새도록 계속 지겠죠?"
이 상태라면 앞으로 하루나 이틀이면 다 져버릴 것이다.
"그대로 가만히......."
구키가 주홍빛 나가지방 사이로 드러난 어깨를 살며시 누르자 바람에 실려 온 꽃잎 하나가 린코의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를 아름답게 수놓는다.
"우리 평생에 최고의 순간이에요 "
초여름
수천 년을 피고 져온 벚꽃은 꼭 삶을 재촉하는 사람 같아서 속절없는 애석함을 자아낸다. 그래서 생명을 다하여 우수수 떨어지는 벚꽃은 바라보는 이를 허망함에 빠져들게 한다 초여름을 향해가는 계절 속에서 해는 길어지고 무수한 꽃들이 한꺼번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라도 하면 지는 벚꽃은 더욱 초라해 보인다. 등나무. 철쭉. 틀립. 석남화 등 셀 수없이 많은 꽃들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자랑하듯 피어나기 시작하고. 싱싱한 나무들은 푸르게 물들어간다 대지 위의 모든 생명체가 하나하나 빛을 발하며 약동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화려하지만 어딘가 가냘퍼 보여 수심에 젖게 하는 벚꽃 따위는 이제 한 물 갔다는 생각이 든다. 사월에 피는 꽃은 많지 않다 그래서 사월엔 벚꽃 하나에 울고 웃는다. 그러나 오월이 오면 산과 들에 무수한 꽃들이 피어나 따사로운 햇살로 더욱 빛을 발하고. 사람들은 지천으로 피어나는 꽃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만을 골라보는 즐거움을 누린다. 구키도 화사한 초여름을 온몸으로 느끼지만 마음 한구석은 바람에 물결치는 개양귀비처럼 흔들린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올해 초에 빌린 시부야의 맨션 때문이다. 슈젠지에서 서로 집에 들어가지 않기로 약속한 뒤 그곳은 두 사람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방이 비좁은데다가 임시 거처로 생각하고 세간살이도 싸구려로만 마련했기 때문에 지금은 몹시 불편하다. 좀 더 넓은 곳으로 옮기자니 비용이 많이 들고. 완전히 새살림을 차리자면 이혼 절차를 마무리하고 호적 정리도 새로 해야 하므로 그렇게 간단한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요즘 들어서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관리인이나 주변사람들이 두 사람을 부부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개중에는 뭔가 말 못할 사연이 있는 커플이 아닌가 하는 수상쩍은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래서 구키는 좀 더 큰 집으로 이사하면 어떨까. 린코의 눈치를 보며 의중을 떠본다.
구키와 달리 거의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린코는 집이 좁아서 생기는 여러 가지 불편을 더욱 절실히 느낀다. 집안일 하기에도 너무 불편하고 옷장이 작아 일부는 플라스틱 통에다 담아두고 있는 형편이다. 게다가 린코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붓글씨를 쓰는데. 다리가 낮은 밥상 위에 종이를 펼쳐놓고 글을 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럽다. 자신과 함께 지내기 위해 집을 나와 고생하는 린코가 가여운 생각이 들어 돈이 좀 들더라도 넓은 곳을 구해야겠다고 작정하지만 그때마다 린코는 한사코 반대하고 나선다. 월급쟁이인 구키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반대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몇 번씩이나 말해도 귀담아듣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집이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지도 모른다.
"당신이 매일 와주시기만 하면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그런 기특한 말을 들을 때마다 구키는 사랑스러운 마음이 새록새록 피어올라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꼭 끌어안곤 한다. 집 문제를 의논하다가도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서로 살과 살을 맞대고 있다. 사다와 진술서에 보면 둘만의 밀회 시간을 기다린 끝에 며칠씩 함께 있게 되면 끊임없이 서로의 살을 맞대고 관계를 맺었다고 되어 있는데 구키와 린코도 거의 그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항상 섹스만을 탐닉했던 것은 아니다. 서로 손이나 발을 맞대고 있거나. 구키가 린코의 가슴을 더듬으면 린코도 구키를 애무하고, 때로는 그저 바라만 보다가 잠들 때도 있다. 정성스럽게 쓰다듬어주다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서 간지럼을 태우기도 하고. 어떤 땐 관계를 맺다가 둘 다 깜빡 선잠이 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어느 날은 대낮부터 그런 행동을 하다가 갑자기 이 좁은 움막집에 갇혀버린 성의 포로가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린코가 이곳을 떠나지 않으려는 이유는 이 맨션 안에 오롯이 숨어 있는 그런 음탕한 분위기에 몸과 마음이 모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요즘 들어 린코는 부쩍 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졌다. 5월 초였던가. 일요일 저녁에 쇼핑을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가구점에 들른 적이 있다. 구키는 린코의 붓글씨 연습용 테이블을 사주기 위해 들른 것인데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거울을 발견했다. 튼튼한 다리가 달린 것도 있지만 간단한 테두리만 두른 거울도 있었다. 구키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서 린코에게 말한다.
"저걸 침대 맡에 둬볼까?"
올해 초 요코하마의 호텔에서 만났을 때 거울을 통해 린코의 엉덩이를 훔쳐본 일이 생각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말인데. 린코는 흥미를 보이며 오히려 거울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를 물어온다. 침대 한쪽이 벽에 붙어 있으므로 그 옆에 기대세우거나 한쪽 벽에 고정시켜도 될 것이다
"저렇게 큰 거울을 갖다놓으면 우리 모습이 전부 비치겠는데."
구키는 겁 먹일 요량으로 한 말인데 린코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걸 사가자며 작은 소리로 재촉한다. 두 사람은 그날 거울을 배달받고 침대 옆에 놓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이 침대에 누워 본다. 거울에 빛이 비치도록 스탠드를 켜고 거울을 기울이니 두 사람의 하반신이 떠오른다. 린코의 하얀 다리와 사타구니의 숲이 거울 속에 환히 비치자 구키는 흥분하기 시작한다. 자극을 받은 것은 린코도 마찬가지다. 구키의 그것을 몸 안에 받아들이고 환희에 몸을 떨면서 몇 번씩이나 상체를 일으켜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는 정말 대단하다며 혼잣말처럼 외쳐댄다. 구키는 린코의 모습이 사랑스러우면서도 마음 한켠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매일 조금씩 깊어가는 린코의 섹스 탐닉은 그 끝을 가늠할 수가 없다. 자신에게도 책임은 있지만. 달리기만 할 뿐 제동장치가 없는 린코라는 여자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이제 침대에 거울까지 설치한 두 사람의 방은 더욱 음탕하고 요사스러운 밀실이 되어가고 있다
한번은 쇼핑 길에 난생 처음 보는 희한한 가게에 들른 적이 있다. 시부야의 번화가에서 조금 들어간 골목길 안에 있는 이른바 섹스 숍이었다. 처음부터 갈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고 골목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발견한 가게였다. 물론 들어가 보자고 유혹한 사람은 구키였고 아무것도 모른 채 따라 들어간 린코는 가게 안에 진열된 현란한 속옷가지와 사람을 구속하는 데 쓰는 가죽제품과 채찍 따위를 보고는 그곳이 예사가게가 아님을 눈치 챈 것 같았다. 더구나 남자 성기를 본떠 만든 성인용 장난감을 보고는 여자가 들어올 곳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아챈 표정이었다.
구키의 소매를 잡고 징그럽다며 눈길을 피하면서도 흥미가 일었는지 구키의 등 뒤에 숨어 작은 목소리로 '저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하며 묻는다. 구키가 그것을 손에 들고 설명해주자 린코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놀라워하더니 이윽고 거무스름하게 돌출한 것에 슬며시 손을 대본다. 장난기가 발동한 구키가 그것을 린코의 허벅지 쪽으로 들이밀자 깜짝 놀란 린코는 두 손으로 막으며 징그럽다고 머리를 옆으로 돌린다.
"왜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데."
"몰라요?"
외면하는 린코를 놀려주려고 구키는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서 그걸 샀는데 집에 돌아오자마자 린코는 그걸 들여다보며 혼자 웃는다.
"남자들은 이런 걸 사면 즐거워지나 보죠?"
"아니야. 그 가게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여자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만든 것들이야."
"이런 것보다는 당신 것이 더 좋아요."
그 말에 구키는 일단 안심이 되지만. 어쨌든 음란한 장난감까지 구비하고 보니 작은 방은 더더욱 두 사람의 밀회를 위한 별실처럼 변해간다. 구키는 지금 린코에게 끌려가고 있다. 거울이든 성인용 장난감이든 구키의 장난기가 발동해서 사들인 것이지만. 잠깐 사이에 그런 음란한 것에 젖어들고 즐기는 쪽은 오히려 린코이다.
둘이서 장난치다 관계를 맺을 때에도 린코 쪽에서 그만두자고 한 적은 거의 없다. 구키가 힘에 부쳐 나가떨어져야 장난기어린 놀음은 끝이 난다. 성에 관한 한 여성이 남성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고 왕성하다. 아니 그 정도 표현으론 부족한지도 모른다. 여성은 일단 쾌락을 알기 시작하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처럼 그 끝을 가늠할 수가 없는 데 비해. 남자는 맹렬하기는 해도 연못의 표면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처럼 표피적이고 순간적일 뿐이다. 비유하자면 유한과 무한이 다투는 것과 같아 쾌락의 깊이나 그것을 구하는 집착에서나 남자는 도저히 여자를 따를 수 없다. 이즈음 구키는 그 사실을 새삼 실감하고 납득하고 탄복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처음에 여자를 리드하고 가르쳤던 과정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 셈이다. 최선을 다해 정성껏 가르치다 보니 어느새 제자가 훨씬 더 성장해 스승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남편들이 아내에게 깊은 쾌락을 가르치지 않으려는 이유도 이런 괄목상대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아내를 한번 그 경지로 이끌어주면 그 뒤부터 남편은 아내를 만족시킬 때까지 죽도록 노력 봉사해야 한다.
사랑하는 여자를 음란하게 변모시키고 싶어도 쉽게 내키지 않는 것은, 그것이 매일 매일의 부담이 되어 남자의 인생을 무겁게 내리누르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밖에서 사랑을 나누는 여자인 경우에는 과감히 한발 더 내디딜 수 있다. 설사 바닥 모를 쾌락을 알게 된다 한들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므로 매일의 일과가 되어 짓누르는 일은 없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재빨리 도망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구키는 밖에서 알게 돼 도망칠 수 있었던 여자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탐식당하고 있다. 벌써 1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마치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이다지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커플들의 경우에는 1년만 지나도 서로 지긋지긋해하며 헤어지기가 일쑤인데 두 사람은 헤어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욱더 가깝고 깊어지기만 한다. 어쩌면 이미 그 경지를 넘어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사랑의 지옥에 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섹스의 밑바닥 깊이 숨어 있던 비밀의 세계를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린코라는 여자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었던 세계이며 아내와도 그 어떤 여자와도 겪어보지 못한 심연의 세계이다.
린코도 마찬가지이다. 그녀 또한 구키라는 남자를 알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못 차릴 만큼 환상적인 성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러나 린코는 겉으로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린코의 매력 가운데 하나일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린코를 스치고 지나간 대부분의 남자는 그녀의 이미지를 고상하고 단정하게만 여긴다. 그래서 섹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고지식한 여자로 생각하지만 실제의 그녀는 전혀 다르다. 겉모습은 절도 있고 단아해 보이지만 일단 성의 세계로 들어서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음탕해진다. 바로 그 헤아릴 수 없는 배반의 깊이와 배덕의 기색이 남자의 색탐을 부추긴다. 요즘은 그녀의 몸 안에 숨어 있던 요염함이 겉으로도 드러나는지 둘이서 걷다 보면 남자들이 흘끔흘끔 린코를 곁눈질 할 때가 많다. 린코의 말에 의하면 공원에서 혼자 산책을 할 때면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많고. 바로 며칠 전에도 젊은 남자가 둘이나 사귀어보자고 유혹해왔다고 한다.
"제가 매력이 있나 봐요."
의문스런 말투가 미워 남자들이란 느낌으로 요염한 여자의 냄새를 맡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게 만든 건 당신이라며 책임을 떠넘긴다.
"이제부터 외출할 땐 쇠사슬로 묶어놔야겠는걸."
그러나 정작 쇠사슬에 묶여 있는 쪽은 오히려 구키이다. 구키는 지금 린코가 쳐놓은 거미줄에 완전히 걸린 신세이다. 처음에는 구키가 쳐놓은 것 같던 거미줄이 어느새 구키 자신을 옭아매는 그물이 되어 온몸을 친친 휘감고 있다. 때때로 구키는 그런 상태에 놓인 자신이 불쌍하고 한심해 보인다. 사랑하는 여자를 어렵게 품에 안았으면 좀 더 자신의 페이스대로 리드할 수는 없었을까.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결국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 휘둘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묘하게도 한계에 이르고 보니. 거기에는 그 나름대로 기분 좋은 측면도 있었다.
이제 와서 다른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중 일은 어찌되든 그저 나락으로 떨어져갈 뿐이다. 구키의 이와 같은 태도의 변화는 세상일에 대한 자포자기이기도 하며. 동시에 이런 자신의 음탕함과 타락의 본능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기도 하다. 구키의 생각이 린코에게도 전해지는 것일까? 때때로 한숨이라도 쉴라치면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라며 린코는 더더욱 두 사람만의 세계로 유혹해 끌고 가려 한다. 앞으로 전개될 두 사람의 관계나 생활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지금 같은 나태한 생활에 계속 빠져 있어선 안 된다. 적당한 선에서 확실하게 끝맺음을 해야 한다.
그러나 구키는 그런 답답한 현실과 맞설 기운이 없다. 일단 아내와의 이혼과 그에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하루 빨리 해결해야 하지만 그것 또한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아내가 다시 헤어지자는 말을 꺼낸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이대로 지내도 좋다는 생각이다. 그건 린코도 마찬가지이다. 남편과 별거상태로 지낼 뿐 그녀 쪽에서 적극적으로 이혼을 추진할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은 지금 그들만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도피이며 무책임한 행동임을 너무나 잘 알지만 이제 와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 두 사람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어둠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음탕이라는 이름의 나락이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어처구니없고 퇴폐적인 행위로 보이지만 정작 두 사람에게는 지극한 행복이다. 어둠 속을 헤매듯 정욕이 향하는 대로 떠돌다가 때때로 현기증이 날 만큼 젖어드는 쾌감 그 자체는 끝없는 행복의 낙원과 다를 게 없다. 궁극적으로 두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육체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얻게 될 쾌락의 극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방안에서 보내는 린코와 달리 매일 회사에 나가는 구키는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생활 사이에서 마침내 파탄의 싹을 키운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동료들과 나란히 앉아 얼굴 맞대며 일하는 것은 현실이고 두 사람만 사는 방에서 벌어지는 흐트러진 생활은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서로 상반된 세계를 오가며 융화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구키가 시부야의 방에서 성에 탐닉해 지내는 기색은 회사 사람들에게도 드러나게 마련인가 보다 어느 날 하루는 여비서가 그에게 요즘 좀 피곤해 보인다며 은근히 속을 떠본다. 또 어쩌다 깜빡 졸기라도 하면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며 놀려대기까지 한다. 다른 동료들은 구키에게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무라마츠는 요즘 들어 부쩍 나른하고 전보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며 건강을 걱정해주기도 한다. 구키는 그때마다 애매한 대답으로 넘기곤 했는데 5월 중순경에 마침내 계속해서 외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말았다. 무라마츠가 급한 용무가 있어서 구키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가 아내가 해준 얘기를 통해서 사태를 짐작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냉정한 아내의 말이 모든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마당에 구키로선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싸움을 좀 해서 그래. 정말 별거 아냐."
간신히 곤란한 순간은 모면했지만 구키가 현재 다른 여자와 동거중이라는 사실만큼은 마침내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말았다. 샐러리맨은 회사에서 일을 하고 그 대가로 급료를 받는다. 이런 직장의 원칙으로만 본다면 사생활이 좀 문란하다 해도 일만 제대로 하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더러는 사적인 문제가 불거져서 회사에까지 영향을 미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삼각관계에 빠졌다가 사귀던 여자가 회사에 쳐들어온다든가 부인이 상사에게 괴로움을 호소하러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다른 직장에 비해 출판사는 남녀문제에 비교적 관대한 편이지만 이런 종류의 문제를 껄끄럽게 여기는 경향만큼은 어떤 회사건 모두 똑같다.
그러나 아직은 문제가 표면으로 불거져 나온 것은 아니다 다만 무라마츠가 전화를 걸었을 때 아내가 보인 반응을 보고 지금 구키가 다른 여자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사실 정도를 동료들이 알게 된 것뿐이다. 며칠 뒤 우연히 사무실에 스즈키 실장과 단둘이 남았을 때 그는 별일 아닌 것처럼 말을 걸어온다.
"여러 가지 일로 좀 복잡한 모양이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린코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구키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다.
"글쎄. 그게......."
구키는 일단 애매하게 대답한다.
"하지만 왕성해 보여 정말 부러운 데요."
그의 말투에는 비아냥이 담겨 있다. 스즈키와 나눈 말은 그뿐이었고 앞으로 특별히 주의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스즈키의 의도는 자기도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다는 암시였고 구키는 이를 통해 조사실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는 것을 느낀다. 동료들이 알게 됐다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당황할 것까지는 없다 집을 나왔으므로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고 오히려 이쯤에서 알려진 게 다행스럽고 차라리 속 시원한 기분도 든다. 구키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타이르면서도 회사 동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이 쓰인다.
좌천에다가 가정 불화까지 겹쳐 주요 라인으로 복귀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거나 다름없다. 회사에서 우울한 일이 생기면 곧장 맨션으로 돌아와 틀어박힌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집을 나와 다른 여자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동료들이 알아챈 것뿐이지만. 그들이 모여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으면 마치 자기 얘기를 하는 것만 같고 다른 동료를 만나도 소문이 확 퍼져 이미 알고 있을 것만 같아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의심이 의심을 낳는다고 구키는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더 궁색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불안을 달래주고 잊게 해줄 사람은 역시 린코밖에 없다.
어쨌든 시부야의 작은 방으로 돌아와 린코와 함께 있으면. 두 사람만의 세계로 빠져들어 세상의 상식이나 윤리 따위는 통용되지 않는다.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한 누구에게도 비난받거나 손가락질 당할 일은 없다. 본능에 따라 나른하게 애욕에 미쳐 지낸다 해도 아무도 꾸짖거나 허물을 탓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항상 다가와주고 받아들여주는 여자가 곁에 있으므로 방안에 틀어박히게 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결과이다.
그러나 구키는 두 사람만의 방에서 바깥세상에서 쌓인 피로를 씻고 마음을 풀면서도 문득 예상치 못한 불안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대로 린코와 둘만의 생활에 빠져 지내다가 회사 동료나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어 천덕꾸러기로 전락해버리고. 결국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는 건 아닌가. 아무리 허락받지 못할 생활이라지만 이렇게 안에만 틀어박혀서 지내다간 더더욱 세상과 틈이 벌어져 끝내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구키가 그런 불안을 새삼 느끼게 된 것은 오랜만에 기누가와를 만나고 나서였다 평소처럼 그의 전화를 받고 자주 찾아가던 긴자의 일품 요릿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기누가와의 얼굴을 본 지는 지난해 가을 린코의 서예전 시상식에서 만나고 처음이므로 거의 반년 만인 셈이다. 그 동안 구키는 오로지 린코하고만 지내왔고. 그런 계면쩍음도 있고 해서 구키 쪽에서 연락을 끊고 있었다. 기누가와도 그런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었는지 만나기를 피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난 기누가와는 전보다 살이 쪄서 풍채가 좋아 보인다. 목소리도 힘이 있어 어떻게 지내느냐는 인사말도 마치 후배에게 말하는 것 같다.
"그저 그렇지 뭐 "
구키가 애매하게 대답하자 기누가와는 맥주를 단숨에 들이키며 말한다.
"린코와는 여전히 잘 지내나?"
기누가와의 찔러보는 듯한 눈빛이 싫어서 구키가 슬쩍 외면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어쨌거나 그렇게 멋진 여자는 드물어 그러니까 도망가지 않도록 땀내라고."
말로야 격려하고 있지만 야유하고 비꼬는 속내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녀가 아예 집을 나와 자네와 함께 살 정도로 용기있는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네."
"그걸 누구한테 들었나?"
"그 정도야 나도 알지. 내 정보망도 무시 못한다구."
기누가와는 뻐기듯 말하지만 문화센터의 서예 강사로 있는 린코의 친구에게서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녀 말야. 지금도 붓글씨는 계속하지?"
"매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재능 있는 사람이 썩고 있다니 정말 아까워. 이번 여름에도 출품하지 않았더군."
린코는 이번 춘계 전람회 때 도저히 서예에 열중할 수가 없다며 출품을 포기했었다.
"예전엔 집을 나와 독립하고 싶다는 말도 했었는데."
구키는 예전에 린코가 문화센터 강사를 전속으로 하고 싶다고 기누가와에게 부탁하러 갔던 일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제 자네하고 함께 있다면 일할 필요도 없겠지."
구키는 그 말을 들으며 이제 기누가와는 더 이상 린코 일을 주선할 마음이 없음을 알아차린다.
"그런 재능 있는 사람을 그대로 썩히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야."
기누가와는 그렇게 크게 한숨을 내쉰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건 자네 책임이네."
기누가와를 만난 지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구키는 괜히 숨이 막히고 거북살스러워진다. 작년에 만났을 때는 그런 느낌이 없었는데 과연 지금 이 위화감은 무엇일까. 역시 지난 반 년 동안 오로지 린코와의 사랑에만 푹 빠져 지낸 자신과 건전한 상식인으로 살아온 기누가와의 가치관 차이 때문이 아닐까.
구키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것도 모르고 기누가와는 가볍게 상체를 내밀며 구키에게 묻는다.
"그런데 말일세. 요즘 회사에선 어떻게 지내나?"
"뭐 그럭저럭."
이번에도 애매한 대답을 하자 기누가와는 짜증스러운 투로 말한다.
"자네 말투는 언제나 분명치가 않아."
구키는 그 말을 듣고 지난 봄 기누가와가 자기가 전에 일하던 신문사 출판국 쪽으로 옮겨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도 확실히 결정하지 못해 생각해보겠다며 애매한 대답을 했었는데 그 뒤로 기누가와도 다시 물어 오질 않았다.
"자네한텐 지금 일하는 곳이 가장 체질에 맞는지도 모르지."
기누가와는 에두른 표현으로 지난번 권유를 없던 일로 하려는 것 같다. 구키 또한 새삼 자리를 옮길 생각이 들지 않아 묵묵히 있는데 기누가와가 화제를 바꾼다.
"어떤가. 우리 문화센터에서 강의라도 해보지 않을 텐가."
"아냐. 이젠 됐어."
이제 와서 얼마의 사례금 때문에 문화센터에 나간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우리 문화센터를 그렇게 별 볼일 없다고 여기진 말게. 요즘에 새로운 강좌를 늘려선지 수강자가 많이 늘었다구. 상당히 실적이 좋은 편이야."
"그것 참 잘 됐군."
"그래서 얼마 전에 회사에서 사장상을 받았지. 7월 초부터는 시내 문화센터를 총괄하는 본부장이 될지도 모르네."
어쩌면 기누가와는 그걸 말하고 싶어 오늘 구키를 만나러 왔는지도 모른다.
"축하하네."
구키는 기누가와에게 맥주를 따라주며 처음 그를 만나면서 느껴왔던 그 위화감은 바로 상승하는 사람과 하강하는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생활방식의 차이가 빚어낸 틈일 거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다.
기누가와를 만나고 나서 구키는 약간 우울하다. 그렇다고 기누가와가 문화센터를 총괄하는 본부장으로 승진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은 아니다 설사 그의 지위가 높아진다 해도 서로 다른 회사에 근무하고 있으므로 구키와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보다 기누가와는 나름대로 성실히 일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는데 자신은 변변한 일도 하지 않으면서 린코와의 사랑에만 탐닉하고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세상에 낯을 들지 못할 그런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이 미워지고 창피해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런 꼴로 지내도 되는 건가. 시부야의 맨션에서 지내는 동안 끊임없이 그를 지배해 온 생각이지만 기누가와를 만나고 나자 더욱 그런 생각이 강해진다.
그리고 그 보름 뒤 유월의 장마가 시작되기도 전에 더욱 어깨를 처지게 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장마를 며칠 앞두고 암과 투병 중이던 미즈구치가 병원에서 사망했던 것이다. 미즈구치는 구키보다 한 살 많긴 하지만 입사동기여서 아주 친하게 지내왔고 승진도 같은 속도로 밟아왔다. 그러나 구키가 조사실로 좌천되고 미즈구치는 이사까지 승진했지만 지난해 말 갑자기 자회사로 전출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 직후 자회사의 사장으로 승격했으나 실력을 발휘할 틈도 없이 폐암으로 쓰러져. 3월에 수술을 받고 구키가 문병을 갔을 때 가족들은 이미 늦었다고 말했다. 그 후 걱정은 하면서도 문병을 차일피일 미루던 중 증상이 더욱 악화되었던 모양이다.
'당사 이사. 마론 사 사장. 미즈구치 고로 씨가 오늘 아침 5시 20분 서거하였습니다.'라는 사내보 뒤에 향년 54세로 돼 있는 걸 보고 구키는 삼 개월 전 문병 갔던 때 미즈구치가 한 말을 떠올린다.
'어차피 인간은 늙으면 모두 죽게 마련이니까 살아 있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해야 돼.'
죽기 전까지도 미즈구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미즈구치의 철야 행사는 그가 죽은 다음날 오후 6시부터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절에서 행해졌다. 장례 준비는 회사의 젊은 사람들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구키는 예정보다 조금 빨리 도착했지만 이미 조문객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잠시 후 독경이 시작되었다. 제단 중앙에 꽃으로 뒤덮인 미즈구치의 영정은 2~3년 전에 찍은 것인지 가볍게 웃고 있었고. 반짝이는 눈이 건강하던 시절의 패기를 느끼게 해준다. 자회사로 전출되었다고는 하지만 현역 사장인 만큼 제단 좌우로부터 식장 양끝에는 각 출판사 사장을 비롯해 편집. 영업. 거래처 등지에서 보낸 조화들이 가득 자리 잡고 있다.
구키는 그것을 보면서 까닭 없이 '요절' 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쉰네 살로 이승을 떠난 사람에게 요절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지만 동년배의 입장에서 볼 때는 역시 너무 이른 죽음이다. 미즈구치는 일이 좋아 회사밖에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먼저 죽고 자신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은 꾸역꾸역 살아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면서도 얄궂다는 생각이 든다. 이윽고 분향이 시작되고 구키도 줄을 기다리며 서 있다. 안면 있는 사람들이 꽤 여러 명 보인다. 그 중에서 입사동기로 영업부장인 나카자와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다. 한 걸음씩 제단에 가까워질수록 구키는 새삼 미즈구치가 죽었다는 것을 실감하며 영정을 향해 두 손 모아 합장했다.
"어째서 자넨 이렇게 빨리 가버렸단 말인가......."
지금 구키는 그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병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긴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무심코 암이라는 지뢰를 밟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미즈구치와 구키를 저승과 이승으로 갈라놓는 것은 이 지뢰를 밟았느냐 안 밟았느냐의 차이에 있을지도 모른다. 답답한 기분으로 분향을 마치고 유족에게 인사한 후 식장을 빠져나오니 나카자와가 잠깐 이야기나 나누자며 불러 세운다. 출구 오른쪽에 대기실이 있고. 거기에 고인과 친했던 사람들이 모여 있다. 구키는 한직에 있는 자신의 처지가 다소 마음에 걸렸지만 너무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잠깐 얘기 좀 하세."
다시 권하는 나카자와와 함께 대기실로 들어가자 이미 2~30명의 조문객이 모여 맥주를 마시고 있다. 구키는 몇몇 아는 사람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런데 말일세. 저 친구는 죽기 전에 자네를 제일 부러워하던걸."
"나를?"
구키가 되묻자 나카자와는 맥주 거품이 묻은 입을 훔치며 말한다.
"미즈구치는 알다시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저 일만 아는 일벌레였잖나."
"그래. 일을 즐기는 편이었지."
"물론 좋아하니까 그렇게 일을 했겠지. 하지만 자회사로 가고나서는 지금까지 자기 인생이 도대체 뭐였나 하는 회의를 느낀 모양이더라구. 그래서 이제부턴 조금 여유를 갖고 살아가려고 했는데 그만 암에 걸리고 만 거야."
그 비슷한 말은 구키가 문병 갔을 때도 미즈구치에게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자네처럼 살았으면 하더라구."
"나처럼?"
"에이. 나한테까지 숨길 게 뭐 있나! 지금 좋아하는 여자하고 함께 살잖아."
그 말이 나카자와에게까지 퍼졌단 말인가. 구키는 기분이 푹 가라앉는다.
"일도 좋지만 자네처럼 사랑도 하고 싶다더군. 특히 우리 나이가 되면 더 그런가봐."
"하지만 미즈구치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야 이미 늦었지만 이렇게 죽는 걸 보니 나도 왠지 쫓기는 기분이 드는 걸. 이렇게 산다는 게 뭔가 텅빈 느낌이랄까. 쓸쓸하달까......"
친구의 죽음을 겪은 직후라 나카자와의 말이 실감나긴 했지만 진실한 사랑은 잠깐 짬을 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나름대로 엄청난 부담과 고통이 따르는 일이다. 그런 속사정을 나카자와가 얼마나 알겠는가.
구키는 여기서도 가벼운 위화감을 느낀다. 나카자와의 생각은 가정은 가정대로 지키면서 밖에선 마음에 드는 여자와 몰래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다. 즉 가정의 안정과 사랑의 설레임을 모두 다 맛보고 싶은 게 그의 바람이리라. 그건 아마 사랑을 꿈꾸는 중년 남자들이면 누구나 품고 있는 공통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구키도 린코와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와 가끔 만나 식사라도 같이 하며 로맨틱한 분위기에 젖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좀 더 깊은 관계로 발전했을 때에도 그것 때문에 가정이 깨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지금 구키의 가정은 파탄 직전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상황이 돼버렸는지 구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와 있었다. 그런데 나카자와로부터 부럽다는 말을 들으니 무척 괴롭다. 나카자와가 부러워하는 것은 구키의 자유이다. 하지만 그 배후에 구키의 가정이 심각한 파탄의 위기에 처해 있고. 린코와 그만큼 깊은 사랑의 지옥에 빠져 있다고는 꿈도 꾸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카자와는 가정사라는 게 기껏해야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처럼 불화가 빚어졌다가 적당히 타협하여 서로의 성실성을 회복하고 다시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모양이다. 그런 가벼운 수준에서 오가는 정도로 남녀의 문제를 꿈꾸고 있다니. 그건 말도 안 된다.
구키는 지금 그런 안이한 분위기에 마냥 빠져들 수가 없다. 아니 젖어들 수 있다면 그러고 싶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렇게까지 깊어지면 이젠 이성이나 양식 따위로도 억누를 수 없는 단계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원죄처럼 지녀온 천부의 충동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진행되는 사랑은 다정함이나 성실함 따위와는 인연이 멀다. 그것은 숨통을 조이는 일이며 . 그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목적지는 파괴나 파멸밖에 없다. 요즘은 이런 생각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부럽다는 말을 들으니 너무 기가 막혀 미쳐버릴 지경이다.
대기실엔 조문객들이 점점 모여 들더니 어느새 사오십 명 가량되었다.
'현역에 있을 때 죽어서 그런지 역시 장례식도 성대하군.'
나카자와의 말대로 미즈구치는 자회사로 나가긴 했지만 본사의 임원이기 때문에 출판계에서부터 방송. 광고업계에 종사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한창 일할 나이에 죽은 건 안 됐지만 장례식이 만약 정년퇴직 뒤였다면 조문객은 오늘의 반도 안 됐을 거야."
제단 주위에 늘어선 조화들을 둘러보며 구키가 반박하듯 말한다.
"하지만 그 친구는 원래가 발이 넓었다구."
"그렇다고 안면만으로 이렇게 와주진 않아."
"하긴 자네 말이 꼭 틀리다고 할 수도 없겠네만......."
"인간이란 게 말야. 이용가치가 없어진 사람에겐 언제든지 냉담하게 돼 있거든."
"하지만 그럴 때 와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겠지."
"어쨌거나 자넨 좋겠어."
갑작스런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의아해하는데 나카자와가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자네 경우엔 그녀라도 묘지에 찾아오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여자 하나 없잖나."
"아니......."
구키는 부정적인 말을 툭 던지고 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음을 생각해낸다.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꼭 얘기해. 애써 그녀가 왔는데 구석에 처박아두면 안 되잖나."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나카자와는 구키의 처가 상주가 된 장례식에 린코가 조문하러온 장면을 상상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자네 경우엔 지금 사귀는 그 여자가 상주가 될 수도 있나?"
나카자와는 재미있어 하지만 그 광경 또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쨌든 장례식은 그 인간의 평생을 축소해 보여주는 그림이나 마찬가지라잖나. 미리미리 신경써두는 게 좋을 거야."
"슬슬 일어설까."
다시 새로운 조문객이 오는 것 같아 구키는 그 핑계로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이제 그 여자한테 가나?"
부정한다고 해서 그 말을 믿을 것 같지도 않아 묵묵히 있다.
"근데 말야. 설마 그 사람하고 결혼할 건 아니겠지."
"내가?"
"요코야마가 걱정하길래."
역시 린코에 관한 얘기를 조사실의 동료에게서 들은 모양이다.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자네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를 사람이라..."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다니?"
"아니. 사실 그건 옛날 일이지 "
나카자와가 쓴웃음 짓는 걸 보며 구키는 3년 전 회사에서 있었던 트러블을 회상한다. 그 무렵 구키는 편집부장이었는데 어떤 종교관련 서적의 출간에 반대한 적이 있다. 물론 출판하게 되면 그 책의 상업성은 보장되지만. 그 종교 관계자의 선전냄새가 너무 강해 회사 이미지와 안 맞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구키는 전부터 판매제일주의에 반대하던 입장이어서 그 책의 출간을 추진하던 임원과 마찰이 빛어지고 말았다. 결국 그 책은 출간되지 않았다. 당시 영업부에 있었던 나카자와는 어떻게든 중재해보려고 두 사람 사이를 오갔기 때문에 그때 일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뭘. 그때와 지금은 다르잖나."
구키는 좀 더 단호하게 다르다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은 일에 대한 그 무렵의 정열이 없다.
"자. 또 보세나."
구키는 나카자와와 가볍게 악수하고 대기실을 나선다. 역까지 걸어가 전철을 타고 시부야의 맨션으로 돌아간다. 특별히 이렇다 할 일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장례식에 가서 철야 때 가서 분향하고. 가볍게 맥주 몇 모금 마신 것밖엔 없는데 이토록 피로를 느끼는 이유는 뭘까. 미즈구치의 죽음에 상심한 탓도 있지만 나카자와나 다른 동료를 만났을 때 어쩐지 자신만이 엉뚱한 세계를 떠돌고 있다는 생각에 잠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위화감이랄까. 고독한 기분이 한층 더 피로를 증폭시키는지도 모른다.
저녁 여덟시가 넘어선지 도심으로 향하는 전철 안은 텅 비어있다. 구키는 자리에 앉아 조금 전 나카자와가 한 말을 생각해본다.
'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은 아니겠지?
농담처럼 툭 던진 말이겠지만 구키에겐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소문대로 두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나 부모자식의 의견도 무시한 채 함께 집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 방을 얻어 살면서 오로지 둘만의 세계에 몰두하고 있다. 그렇게까지 결단을 내리고 실행했다면 앞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는 린코와의 결혼이다. 주위에서 축복해줄 지는 의문이지만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새 출발을 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구키는 지금까지 린코와 결혼해서 함께 가정을 꾸려나갈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방이 좀 컸으면, 책 놓을 자리가 있었으면 하고 바란 적은 있으나 새 생활을 시작하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희한하게도 그것은 린코도 마찬가지다. 그녀 또한 자기 입으로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고. 구키 쪽에서도 그 말을 꺼낸 적이 없다. 그토록 서로에게 끌려 숱하게 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결혼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을까. 분명 린코의 남편은 이혼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그런 상태로 결혼을 강행한다면 중혼죄를 저지르는 셈이 된다. 구키의 아내는 이혼에 동의하고 있지만 막상 현실로 돌아와 보면 재산분할이나 집안일을 둘러싸고 상당히 귀찮고 번거로운 문제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그런저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섣불리 린코와 결혼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집을 나와 함께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하고 벅찬데 한 걸음 더 나아가 결혼을 생각할 여유는 더더욱 없다. 어떤 면에선 그것 때문에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그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둘이서 지내왔고. 결혼이라는 말을 꺼내기만 하면 언제든지 의기투합할 수 있을 텐데 서로 그 문제에 관한 한 입을 꼭 다무는 까닭은 무엇일까. 생각에 잠겨 있는 구키에게 또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
'혹시 두 사람 모두 결혼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몰라.'
밤길을 달리는 전철 안에서 구키는 새삼스럽게 자기 자신에게 물어본다. 뭐가 두려워서 결혼을 못하는 거지? 묻고 또 묻고 하는 사이 구키의 뇌리 속에 지난 일이 떠오른다. 지금이야 별거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난날 구키와 아내는 연애를 했었다. 물론 지금 린코와 나누는 사랑만큼 격정적으로 불타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사랑하고 서로 인생의 반려자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해 결혼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생활도 25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붕괴되고 말았다. 물론 파탄의 직접적인 원인은 구키가 린코에게 빠져들었기 때문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그 전부터 이미 상당히 사이가 벌어져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받고 자신들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랑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무참하게 무너져버린 까닭은 무엇인가.
어쩌면 구키가 지금까지 결혼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린코도 그것을 입에 담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두 사람 다 결혼을 했지만 거기서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결혼에는 타성과 게으름이라는 악마가 깃들어 있음을 생생히 경험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구키는 문득 아베 사다가 이시다 기치조를 죽인 것은 두 사람이 깊은 관계에 빠진 지 겨우 삼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광기에 찬 정사 끝에 여자는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남자를 목졸라 죽였다. 서로 알게 된지 석 달째. 마치 제철도 아닌데 피는 꽃처럼 정열이 넘쳐흐르던 때였기에 오히려 살해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두 사람이 6 개월이나 1년 뒤에 결혼이라도 했다면 그런 터질 듯한 사랑이나 독점욕은 시들해졌을 것이다. 어쩌면 끓어오르는 것이 격렬했던 만큼 식는 것도 그만큼 빨라 진즉에 헤어지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 사랑에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거듭하다 구키가 시부야에 도착한 시각은 9시였다. 역 주변은 변함없이 귀갓길을 서두르는 샐러리맨들과 한잔 걸치러 가는 젊은이들로 혼잡하다. 그 왁자지껄함에서 벗어나 한길에서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올라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진다. 그 첫 번째 모퉁이에 구키가 사는 맨션이 있다. 모두 합해야 삼십 호 정도밖에 안돼 보이는 5층 건물로 지은 지 십오 년이나 되어 상당히 낡았고. 입구에 블록으로 쌓은 벽의 일부는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다.
무슨 이유에선지 세타가야의 집으로 들어갈 때는 '귀가했구나'라는 느낌이었는데 이곳 맨션의 경우엔 둘만의 은신처에 간신히 다다랐다는 느낌이 든다. 그 때문인지 건물 안에 들어서기 전에 일단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게 된다. 물론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거리는 한산하다. 그렇게 확인을 하고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층에 내린 후 모퉁이에서 두 번째 방의 차임벨을 누른다. 린코가 방에 있을 때는 언제나 벨소리를 듣자마자 반겨주는데 오늘밤은 왠지 아무 기척도 없다. 걱정이 되어 다시 차임벨을 누르려다가 열쇠를 꺼내 열려고 하는데. 그제서야 문이 열리고 린코의 얼굴이 나타난다.
"이제 오셨어요."
늘 반기던 말이건만 오늘따라 눈이 처지고 목소리도 푹 잠겨있다.
"무슨 일 있었어?"
상가에 입고 갔던 예복을 벗으면서 구키가 묻는다.
"아까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어요."
린코는 얼마 전에 요코하마에 사는 어머니에게 맨션 전화번호를 알려드렸는데. 침울한 표정으로 보아 환영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그래서?"
"여러 말씀을 하시더니 부모자식간의 인연을 끊자고"
거기까지 말한 린코는 눈가로 손을 가져간다. 나이트가운으로 갈아입은 구키는 소파에 앉아 긴 한숨을 내쉰다. 친정어머니가 린코에게 몇 차례인가 타박했던 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결혼해서 살림하는 여자가 제멋대로 집을 뛰쳐나와 유부남과 동거를 하고 있으니 딸을 둔 어머니로서 엄하게 꾸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부모자식의 인연을 끊자는 말까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화는 갑자기 걸려온 건가?"
"여기 틀어박혀서 친정에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더니 아마 이대로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정말 인연을 끊자고 말씀하셨나?"
"예. 그러셨어요. 이제 자식도 아니니까 문지방 넘어올 엄두도 내지 말라고 그러시더라구요."
린코 어머니가 엄한 분이라는 것은 전부터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이번엔 단단히 벼르고 한마디 한 모양이다
"어머닌 아직 린코가 이혼하는 걸 납득하지 못하시는 건가?"
"아니에요. 그건 포기하신 것 같아요. 다만 분명하게 일이 마무리된 것도 아닌데 멋대로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살고 있다는 걸 질책하시는 거죠. 왜 그렇게 음탕한 짓을 하고 다니느냐. 당신이 날 그렇게 키우지는 않았다면서."
"음탕하다......."
구키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밤낮없이 이 방에서 벌어지는 그 행위는 분명 음탕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 얼마나 깊고 진한 사랑이 숨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어머니한테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나?"
"했지만 어머니한텐 안 통해요. '넌 착하고 순진해서 사기당하기 십상이고. 결국 네 몸만 망치게 되는 거야 그렇게 육욕에 미쳐서 정신 못 차리고 헤매다간 결국 너만 불행해지는 거야' 그런말씀만 하시더라구요."
구키가 더 말을 못하고 잠자코 있자 린코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이해를 시켜 드리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세요. 평생 경험이 없으셨으니 이해 못하시는 것도 당연해요."
아무리 모녀지간이라지만 이런 얘기를 하기는 쉽지 않다. 어머니는 사랑에 빠진 딸에게 육욕에 미쳐서 싸돌아다닌다고 몰아붙이는데. 딸은 어머니가 그런 경험이 없어서 이해를 못한다고 단정한다. 그러면서 딸도 자신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어머니의 편견을 속상해한다. 어머니의 말에 반발하면서도. 부모도 자식도 아니라는 험한 말에 충격 받고 울음보를 터뜨리는 걸 보니 역시 딸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사이좋았던 모녀간을 갈라놓은 결정적인 싸움으로 이끈 장본인이 자기라고 생각하니 구키는 새삼 책임을 통감한다.
"저 이제 정말 여기밖엔 있을 데가 없어요."
축 처진 린코의 어깨 위에 구키가 살며시 손을 얹는다.
"괜찮아. 언젠가는 어머니도 이해해주실 거야."
"어머니한텐 무리예요. 그렇게까지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으니까요."
"린코가 더 깊다는 얘긴가."
'어머니는 평범하고 별 탈 없이 사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며 살아오신 분이니까요."
지금 린코는 정녕 딸로서 어머니의 세계를 뛰어넘었음을 실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이해해주지 않으셔도 상관없어요. 당신만 이해해주시면......."
"그래. 잘 알아 "
린코가 무너지듯 구키의 품에 안기며 호소한다.
"안아주세요. 꼭 안아주세요."
구키가 꼭 안아주자 이번엔 큰소리로 외친다.
"절 때려주세요. 아주 세게."
"때려달라고?"
"그래요. 전 나쁜 여자니까요."
린코는 갑자기 구키의 품에서 빠져나가 가슴을 쥐어뜯듯이 블라우스의 단추를 열고 옷을 벗기 시작한다. 미친 듯이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이 된 린코의 뒷모습을 보며 구키는 자신과 똑같은 고독의 그림자를 짙게 느낀다. 구키 역시 가족은 물론 회사 동료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
이로 떠돌며 고독감에 시달리고 있다. 본인이야 일생에서 두 번 다시 없을 무겁고 깊은 사랑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랑을 향해 용감히 돌진하면 할수록 세상과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다. 주위로부터 격리되고 배척당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은 역시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이게 마련이다. 쓸쓸한 남자와 쓸쓸한 여자가 만나 마음껏 원하는 대로 해보는 것 말고는 서로의 고독을 치유할 수단이 없다. 지금 린코도 그 치유와 구원을 얻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고 있다.
"어서요. 저를 때려주세요. 그냥 때리기만 하세요."
린코는 벌거벗은 채 암굴처럼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침대 위에 푹 엎드려 있다. 마치 어두운 지하 감옥 속에 날아든 한 마리 나비처럼 어울리지 않는 느낌 때문에 구키는 순간 당혹스럽다. 정말 때려도 괜찮을까. 때려도 된다면 도대체 이 나비를 뭐로 때려주어야 좋을까. 언젠가 린코와 함께 들렀던 섹스 숍 벽에 걸려 있던 채찍은 어떨까. 그러나 끝부분이 여러 가닥으로 나뉘어있던 그 채찍이 지금 여기에 있을 리 없다. 주변을 둘러보다 구키는 자신의 바지에 가죽벨트가 매여 있음을 생각해내고는 그걸 빼내 오른손에 쥔다.
"정말 때려도 돼?"
"그래요. 어서 때려 주세요."
더 망설이면 납죽하게 엎드려 있는 나비를 도리어 욕되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키는 다시 한 번 새하얀 피부를 들여다본다. 미안한 마음으로 허락하듯 침을 꿀꺽 삼키고는 손에 쥔 벨트를 단숨에 휘두른다. 순간 피부를 파고드는 높고 둔탁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지고 비명소리에 이어 신음소리가 새나온다.
"그만..."
스스로 때려 달라고는 했지만 자신이 원해서 당하는 매질은 처음이다. 린코는 순식간에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구키는 개의치 않고 두 번째 매질을 휘두른다. 린코는 침대의 한 모퉁이에서 고통에 겨워 소리친다.
"아파요. 그만두세요."
린코는 착각했던 모양이다. 맞을 때의 물리적인 고통보다 그 매를 맞는 자기의 모습이나 학대를 받음으로써 얻는 쾌감만을 상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매를 맞아보니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아프고 괴롭기만 하다.
"그만둬요."
다시금 린코의 호소를 듣고서야 구키는 벨트를 내려 놓는다.
"아팠어?"
"당연하죠. 너무 아파요."
두세 차례 매질만으로 린코는 녹초가 된 표정이다.
"어떻게 됐어요. 상처 나진 않았어요?"
침대 맡의 스탠드를 켜고 보니 등에서 엉덩이로 빨갛게 벨트자국이 몇 가닥 나 있다.
"좀 빨개졌는데."
그렇다고 그렇게 세게 때리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난 린코가 그렇게 정말 맞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미안해."
린코는 이렇게 가끔 모순된 행동이나 말로 구키를 당황하게 한다.
"금방 나을 거야 "
구키가 하얀 피부에 부풀어 오른 빨간 줄에 손을 대자 린코가 항의한다.
"거기 마비돼도 전 몰라요."
그렇게 말하더니 이번엔 거꾸로 구키에게 제안한다.
"그래요. 이번엔 제가 당신을 때리겠어요."
"소용없어. 남자는 때려도 소용없어."
구키는 얻어맞는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린코는 때리는 보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당신이 얻어맞고 도망 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아무래도 이야기가 엉뚱한 데로 빠지는 것 같아 구키가 먼저 침대에서 벗어나 린코의 등을 내려다본다.
"하지만 정말 아름다워 ."
투명한 흰 피부 위에 나 있는 붉은 빛깔의 벨트자국이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구키가 다시 등 아래로 확 뻗어 있는 상처에 손을 대자 린코가 기겁을 한다.
"아앗. 뜨거워 ......"
린코는 얻어맞은 상처자국이 화끈 달아올랐는지 허리를 들썩인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워요."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린코는 안절부절 못하는 구키의 손을 잡아 끈다.
"안아주세요. 꼭 안아주세요."
구키가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와 누우니 린코가 파고 든다.
"제가 이상해요. 정말 이상하죠?"
린코는 애원하듯 외쳐댄다.
"빨리요?"
린코의 요구에 구키는 등의 상처를 피하기 위해 위에서부터 꼭 끌어 잡고 살을 섞는다.
"좀 더 세게요."
지금 막 벨트로 후려 맞은 것이 린코에게는 충분히 전희의 역할을 한 셈인가 보다. 충분히 젖어든 린코의 화원은 남자를 확실하게 사로잡는다. 이때쯤이면 구키가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린코가 일방적으로 이끌어가는 양상이 된다. 그러다 마침내 ‘뜨거워요. 미치겠어요’라는 말이 터져 나오자. 구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자신의 모든 정기를 쏟아 붓고 만다. 그걸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린코가 외친다.
"우리 이대로 죽어요."
최후의 말꼬리가 허공을 가르는 바람처럼 사라져가고. 마치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온 방안을 메운다. 숨죽인 채 드러누운 구키는 한바탕 휘몰아친 거센 폭풍의 경위를 반추해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린코가 자진해서 때려달라고 한 것은 자기 몸을 학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몸을 함부로 놀린다는 질책과 심지어 부모자식간의 인연을 끊자는 말까지 듣고는 충격 받고 서럽게 울었다. 혹시 그 원인이 자기 몸 안에 흐르고 있는 음탕한 피 때문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에 빠져 있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보이고 쫓아버리기 위해서는 채찍질이라도 당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순간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벨트를 휘둘러 매질을 했던 구키도 린코의 온몸에서 음탕이라는 벌레가 무수히 기어 나오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이다. 벨트로 채찍질당하고 나서 린코는 분명 몸부림치며 괴로워했지만 동시에 불안이나 부끄러움도 사라져. 지금까지보다 더 큰 희열을 만끽했다. 온몸에 숨어 있는 음탕한 벌레를 내쫓기는커녕 더 강하고 더 깊은 열락의 세계로 빠져든 것이다. 그렇다면 채찍질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히려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어 새로운 정욕을 한껏 부추기는 흥분제 역할밖에 못한 것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정사를 끝낸 뒤의 린코 피부는 왜 이다지도 아름다운지 린코는 채찍질당할 때처럼 침대에 날개를 편 채 엎드려 있지만. 등에 부어오른 붉은 선이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마치 장밋빛처럼 빛난다.
"아아. 따가워......."
린코는 계속 중얼거린다. 그것도 무리는 아니다. 채찍질을 당해 모든 모세혈관이 확장되고 피가 해일처럼 격렬하게 흐르고 거기에다 온몸이 요동치는 거센 섹스를 치른 뒤다. 린코의 전신은 끈질기게 남아 있는 여열로 아직도 불타고 있다. 그 불붙는 살갗을 접하면서 구키는 다시 생각한다. 도대체 여자가 절정에 도달할 때의 쾌감은 어느 정도인가. 여자의 성을 체험할 수 없는 남자는 기껏 공상밖엔 할 수 없겠지만 남자보다 훨씬 강하고 깊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남자도 사정하는 순간에는 강렬한 쾌감을 느끼지만 시간이 극히 짧아 그야말로 한순간에 가깝다. 그에 비하면 여자는 그 몇 배. 아니 몇 십 배가 아닌가. 일설에는 여자는 섹스하는 내내 남자의 사정하는 순간이 계속 유지되는 것과 똑같다고도 말하는데. 그렇다면 엄청난 쾌락이 아닐 수 없다. 그걸 두고 다섯 배니 열 배니 하고 떠들어대는 것이 아닐까. 그보다 더 구체적인 예를 들면 항문으로 체험하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이른바 남색을 말하는데 그럴 경우 남자들도 여성의 성감과 거의 비슷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남색 성교에 한 번 빠져들면 대부분의 남성은 그 비할 데 없는 쾌락에 파묻혀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그야말로 삽입하는 성에서 수용하는 성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 마력에 사로잡힌 남자들은 다시 정상의 성으로 돌아오기가 어렵다는 말도 있다. 그걸 보면 삽입하는 쪽보다는 수용하는 쪽의 성감이 훨씬 깊다. 여성은 그런 비정상적인 신체부위를 사용하지 않고도 남자를 압도하는 성감을 느낀다 그건 바로 여성에게는 바기나라는 신비로운 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여성에겐 남자의 음경에 해당하는 꽃봉오리가 있어 남자의 쾌감에 뒤지지 않는 성감을 얻는다. 그야말로 성에 관한 한 여자는 욕심꾸러기인 데다 호사스럽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모든 여성들이 그런 쾌락을 남김없이 체험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개중에는 아직도 그런 기관들이 충분히 개발되지 않아 성감이 얕을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선 성 그 자체를 혐오하거나 굴욕적인 것으로 느끼는 여성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면 아주 깊고 격렬한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여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정확한 비율은 알 수 없지만. 그런 경지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역시 에로스의 영역에서 엘리트로 군림할 수 있을 것이다
린코는 정사 뒤의 아련한 기분에 잠긴 채 침대 위에 흐트러져 있다. 그녀라면 그 엘리트 대열에 당당하게 선발될 것이다. 린코의 모습은 마치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 모습에는 완전한 오르가슴의 세계를 다녀온 여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풍만감과 자신감 그리고 만족감이 흠뻑 담겨 있다
"하지만 이상해."
구키가 중얼거리자 린코가 부시시 몸을 일으키며 대꾸한다.
"뭐가 이상해요?"
"미즈구치가 죽어 철야를 다녀온 밤에 우린 여기서 이러고 있잖아."
"그럼 안 되나요?"
"그런 말이 아니고 삶과 죽음이란 게 꼭 종이 한 장차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구키는 제단 위에 걸려 있던 미즈구치의 영정이 떠오른다. 건강할 때 찍어둔 사진이었다.
"장례식에 다녀오면. 다 그런 생각이 드는가 봐."
"다 그런 생각이라뇨?"
"지금 이렇게 건강해 보여도 언젠가는 모두 죽게 마련이고 단지 그 시기가 빠르냐 늦느냐의 차이뿐이라는 거지."
그 말에 수긍하면서 린코는 다시 등을 보인 채 구키의 손을 살짝 들어 자기 가슴으로 가져간다.
"어때요. 우리 함께 죽어버릴까요?"
"함께라......."
"그러니까 말예요. 어차피 죽는 거라면 함께 죽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전 지금까지 산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행복해요."
언제부터인가 린코의 마음속에는 죽음에 대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다. 린코가 바라는 것은 절정의 만족감을 느끼는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구키가 느끼는 죽음은 친구의 장례식으로 인해 되살아난 인생의 허무함 같은 것이다 같은 죽음이라도 두 사람의 느낌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구키는 그런 점이 마음에 걸려 다시 물어본다.
"아까 지금까지 산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나?"
"그래요.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정말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야?"
"물론이죠. 살아 있어도 좋겠지만.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매일 이렇게 당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잖아요."
"살아 있으면 더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만큼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죠. 확실한 건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이에요."
"린코는 아직 멀었어."
"그렇지도 않아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앞으로 하루하루가 다를 거예요. 살은 축 처지고 주름이 늘어나서 초라하게 시들어갈 거라구요."
린코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구키 또한 늙으면 회사도 그만둬야 할 것이고 어쩌면 이 사회에 불필요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럴 거라면 그냥 이대로 린코라는 꽃에 파묻혀 죽는 편이 행복할지도 모른다.
"지금이 우리 평생에 최고의 순간일까?"
"그럼요. 우리처럼 이렇게 깊이 사랑하는 사이는 절대로 없을 거예요."
그럴지도 모른다며 구키가 맞장구를 치자 린코가 천천히 돌아 눕는다.
"당신하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계속 여기서만 지내다 보니까 너무너무 답답해요."
그것은 구키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가루이자와로 가지 않을래요? 거기엔 아버지가 지어놓으신 별장이 있으니까 거기 가서 우리 둘이 지내요."
"누가 오지나 않을까?"
"괜찮아요. 늘 비어 있거든요. 거기선 뭘 해도 괜찮아요. 아무도 간섭하지 않을 거예요."
린코의 마음은 이미 무성한 나무들로 둘러싸여 정적이 감도는 가루이자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