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실락원 2

그리고 1

가을이 오는 것이 아니라 가을은 이미 한여름 속에 와 있다. 십이월에 들어섰지만 따뜻한 날이 계속된다. 아침저녁으로는 섭씨 5,6도까지 내려가 제법 쌀쌀하지만 낮에는 맑게 개서 부드러운 햇살이 거리에 넘친다. 샐러리맨 중에는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치도리가후치나 황궁의 따뜻한 양지에서 볕쬐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다. 소춘의 날씨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임을 구키는 실감하며 . '츠레즈레구시럿의 한(요시다 겐코(吉田兼)의 두 권으로 된 수필. 1330-1331년경. 마쿠라노소시(枕草子)와 더불어 수필 문학의 걸작이라 일컫는다.)' 구절을 떠올린다.

"시월은 소춘의 날씨 ."

겐코 법사가 그렇게 쓴 것을 보면 초겨울의 따뜻한 날씨는 이미 중세 경부터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이때의 시월은 음력이기 때문에 양력으로 치면 십일월 초쯤이 될 것이다. 소춘이란 사랑스러운 이름이다 짧고 덧없는 봄의 아쉬움을 귀엽고 사랑스럽게 여기는 옛사람들의 정취가 배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옛사람들의 풍류는 사라지고 '소맹'이라는 말만 전해질 뿐이다. 원래 십이월은 '초겨울의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라 일컬어졌는데 아직도 소춘의 날씨가 계속되는 것을 보면 일본의 기후가 그만큼 온난하게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료함에 빠진 구키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쾌청한 한낮의 거리를 빠져 나와 약속한 다방으로 향한다. 미즈구치 고로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다.

"식사는?"

". 아직. 서두르지 않아도 돼."

미즈구치와 마주앉은 구키가 커피를 주문한다.

"이렇게 일부러 불러내서 미안하네."

미즈구치는 구키보다 한 살 위이지만 입사 동기이다. 지금은 월간지의 편집장을 역임하는 임원으로서 동기생 중에는 가장 잘 나가는 친구이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약간 우울해 보인다.

"무슨 얘긴데?"

구키가 묻자 미즈구치는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깊이 빨고 나서 말한다.

"실은 내년부터 마론 사로 가기로 돼서 말이야."

마론 사는 겐다이 출판사의 자회사로서 본사에서 떨어진 간다의 빌딩에 있다. 사장이 바뀐 후로 회사에는 한 차례 인사이동이 있었다. 미즈구치는 임원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지금의 사장과도 별 트러블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뜻밖의 인사이동이다.

"사장에게 직접 들은 얘기인가?"

". 어제 사장실로 불려갔는데. 아마노 씨의 몸이 안 좋아서 업무가 상당히 마비되고 있다면서 나보고 그쪽 일을 좀 봐달라고 하더군."

아마노는 마론 사의 사장이다. 미즈구치보다는 두세 살쯤 위인 데 당뇨병 때문에 걸핏하면 결근을 한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럼 마론 사의 사장으로 가는 건가?"

"그게 말이야. 아마노 씨는 일단 그대로 사장으로 있고. 부사장이라는 거야."

"그렇지만 곧 사장이 되겠지."

"잘 모르겠지만 거기서 사장이 돼 봤자 뻔한 얘기 아닌가?"

마론 사는 본사에서 취급하지 않는 실용서를 주로 출판한다. 사원은 스무 명 안팎으로서 경영 실적이 그다지 좋지 않은 모양이다. 본사의 상무나 전무 자리를 노리고 있던 미즈구치로서는 그 정도의 사장 자리가 눈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수락했나?"

"특별한 과실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뭐 때문에 '. 그러겠습니다' 하고 텁석 받아들이겠나. 안 그런가?"

미즈구치는 초조한 듯이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다.

"일단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은 해두었지만 사장의 속셈은 이미 전부터 정해졌던 모양이야."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생각나는군.'

"그게 무슨 소리야?"

". -츠레즈레구사-의 글 중에 (시월은 소춘의 날씨)라는 내용에 나오는 말이야.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는 것이 아니라. 가을은 이미 한여름 속에 와 있다는 뜻이 되겠지."

"과연 그렇군."

"자연도 그렇지만 인간사도 마찬가지야.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그런 움직임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거지. 다만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야."

구키는 이렇게 설명하면서 문득 린코와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 두 사람의 관계를 한여름에 비유한다면 그들은 이미 가을 속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오로지 내리막길만이 남아 있단 말인가? 구키가 딴 생각에 빠져 있는 줄도 모르고 미즈구치는 울분을 풀 데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탄식하듯 말한다.

"샐러리맨이란 정말 보잘것없는 존재야.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라도 휴지조각처럼 버려지지."

"진정해. 아직 버려진 건 아니잖나? 마론 사도 잘만 하면 더 좋은 자리가 될지 누가 아나?"

구키가 위로해 보지만 미즈구치는 한숨을 쉬며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틀렸어. 이제 와서 분발해 봤자 뻔하지. 이제야 조사실로 밀려난 자네의 심정을 좀 알 것 같네."

"이봐 이봐. 쓸데없이 날 끌어들이지 말라구."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자네와 함께 실컷 놀기라도 하는 건데."

미즈구치는 입사하고 나서 오로지 정해진 엘리트 코스만을 달려왔다. 종합잡지의 편집자로서의 재능은 물론 관리자로서의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대단한 수완가로서 잠시도 쉬지 않고 부단히 노력하는 스타일이다. 어쩌면 새로 부임한 사장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샤프하고 기민한 점이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구키는 오로지 문예 전문인으로서 한길로만 매진해왔기 때문에 오히려 작품이나 작가와 깊은 연관을 가지며 근무했다. 물론 회사에서 지위를 바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문예 세계에 빠져 있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바꿔 말하면 구키는 평생 편집자로서의 장인 기질을 지녔다고도 할 수 있다.

"자네의 생활 방식을 좀 배워야겠어."

평소 그의 언변을 생각하면 그다지 새겨들을 말은 아니다.

"이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중에 편하자고 고분고분해지지만 난 그럴 수 없어."

미즈구치는 짐짓 오기를 부린다. 남자들은 이렇게 자리에 따라 기운을 내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가 보다.

"자네는 아직 쟁쟁하잖나. 힘을 내라구."

"그럼. 좋은 여자라도 찾아서 힘을 내 볼까."

미즈구치의 농담에 구키는 가벼운 저항을 느낀다. 미즈구치는 사랑을 일을 위한 자극제나 기분 전환쯤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구키에게 있어 사랑이란 그보다 훨씬 소중하고 심각하다. 린코와의 사랑을 떠올릴 때마다 구키의 마음은 기쁨보다는 오히려 안타까움으로 답답해질 때가 있다.

"자네는 좋아 보이는군. 조사실로 갔지만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오히려 여유 있고 어떻게 보면 기운이 넘치는 것 같기도 하고."

당연한 말이지만 미즈구치는 지금 구키가 얼마나 괴로운가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이런 일을 처음 격고 보니 의논할 사람은 자네밖에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너무 심각하게는 받아들이지 말게나."

구키도 부장 직에서 해임되었을 때는 상당히 고민했었다. 그러나 고민한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시점에서 기분 전환을 할 것인가에 따라 그 후의 생활 태도도 달라질 것이다.

"종종 내 의논 상대가 되어주겠나?"

"물론이지 . 자네만 괜찮다면."

터놓고 얘기하다 보니 미즈구치도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는 모양이다. 인사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더 나눈 후 그들은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근처의 메밀국수집에서 혼자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 기누가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떤가. 별일 없나?"

린코의 서예 파티에서 만난 이후 처음이니 약 한달 만이다.

". 잘 있네. 자네는?"

"여전하지. . 가난뱅이 형편에 여유인들 있겠나?"

문화센터의 경영을 빗대어 하는 말인가 보다. 최근 강좌 수를 늘린 데 비해 수강생 수가 그대로라고 푸념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바꾼다.

"그런데 자네. 다른 회사로 옮겨 볼 생각 없나?"

갑자기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기누가와가 설명을 덧붙인다.

"내가 전에 근무하던 곳인데 앞으로 출판 부문을 좀 더 확장해서 문예 장르도 넓히고 싶은 모양이야."

전에 근무하던 곳이라면 신문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문이 본업이고 다른 부문은 부록과 같은 존재일 것이 뻔한 이치일 테고. 출판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문 출판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허술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신문사도 앞으로는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 거야. 그래서 출판에도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서 장차 문고판도 내고 싶은가 봐."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만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자네라면 충분한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일세."

결국 기누가와는 자기가 전에 근무하던 신문사의 출판국으로 옮기지 않겠는가를 타진하고 있는 것이다. 방금 전에는 동기생인 미즈구치가 자회사로 밀려나게 됐다는 말을 들었는데 구키는 지금 다른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있다. 구키는 알 수 없는 게 사람일이라고 생각하며 물어본다.

"나 같은 사람을......."

"얘기 계속해도 괜찮아?"

기누가와는 회사로 직접 전화를 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그러나 사무실에는 스즈키 한 사람만 있을 뿐이고 그가 듣는다 해도 곤란할 것은 없다.

"뭐 괜찮네만. ....."

기누가와는 안심했는지 다시 상세하게 설명한다.

"실은 지금 출판국장으로 있는 미야다라는 사람이 내 2년 선배야 얼마 전에 만났는데 자네 얘기를 꺼냈더니 괜찮다면 타진해 달라고 하더군."

"고맙긴 한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물론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건 아니네. 어차피 그쪽 일도 내년 4월이나 돼야 시작될 테니까 서두를 건 없지만 국장은 자네가 상당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가능하다면 자네를 한 번 만나보고 싶다더군."

"줄곧 출판사에서 일하던 사람인가?"

"아니. 원래는 사회부에 있었지. 상당히 수완이 좋은 사람이라 출판 일도 잘해 낼 거야"

한직에 있는 처지인 자신에게 그런 기회를 준다는 것 자체는 감사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에 대답을 할 정도로 간단한 일은 아니다.

"모처럼 이렇게 신경을 써주었는데. 미안하지만 생각할 여유를 주게."

"물론 그렇게 해야지 "

그러면서 기누가와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한다.

"그런데 그녀는 어떤가?

린코를 두고 하는 말이다.

"별일은 없지만......."

린코와는 거의 매일 전화 통화는 하지만 요즘은 별로 만나지 않았다. 특히 하코네에서 이틀 밤을 내리 외박을 한 린코는 입장이 많이 난처해졌는지 구키를 만나도 저녁 9시경만 되면 서둘러 돌아갔다. 린코는 '당분간 참아 주세요'라는 말만 할 뿐 그 이상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남편과 어떤 트러블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때마침 구키도 그런 걱정을 하고 있던 터라 기누가와의 비밀스러운 말투가 마음에 걸린다.

"그래 무슨 일이라도...... "

구키가 재촉을 하자 기누가와는 잠시 머뭇거린다.

"그녀가 설마 집까지 나올 작정은 아니겠지?"

"그런 말을......"

"아니 별 다른 이유는 없지만 실은 사흘 전에 그녀가 나를 만나러 센터로 왔더군."

구키는 어제도 린코와 통화했는데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뭔가 주저하기에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지. 그러니까 문화센터 강사를 계속하게 해달라는 거야."

"하지만 그건 그녀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린코가 문화센터에서 강사를 했던 것은 스승의 대리로 임시강사로 파견된 것이었다. 원래 강사는 린코의 스승이므로 그 사람의 허락 없이 계속 강사를 하기란 어렵다.

"선생 쪽에서도 린코와 교대하고 싶다고 말하던가?"

"그런 얘기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하러 왔겠지."

기누가와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약간 꼬는 듯한 말투로 묻는다.

"자네는 그녀한테 아무 말도 듣지 못했나?"

"아니."

"그녀 얘기로는 본격적으로 붓글씨에 도전해 보고 싶다던데. 돈이 필요해서 인지도 모르겠네."

"돈이?"

"강사를 계속하고 싶다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싶네."

물론 그런 추측도 가능하겠지만 린코가 경제적으로 쪼들릴 이유도 없고. 정말 궁하다면 구키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뿐인가?"

"잘은 모르지만 일부러 부탁하러 왔기 때문에 혹시라도 그녀가 집을 나와 독립할 생각인가 했지?"

뜻밖의 말에 구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다. 그 동안 린코는 집을 나올 낌새는 커녕 문화센터에서 일을 계속 하고 싶다는 내색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센터 일을 계속할 수는 있는 건가?"

"물론 강사는 이쪽에서 의뢰하는 거니까 안 될 것도 없지."

"하지만 스승의 양해가 없으면 곤란하지 않겠나?"

"거기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녀라면 해낼 것 같지 않나?"

"그건 또 무슨 뜻인가?"

"이런 말을 해서 어떨지 모르지만 그녀는 뭔가를 하겠다고 결심하면 어떻게든 밀고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그런 말까지 기누가와에게 듣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한번 마음먹으면 철저하게 밀고 나가는 무서운 면이 린코에게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중요한 일을 왜 자신에게는 말해 주지 않았을까. 진의를 몰라 묵묵히 있는데 기누가와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자네 정말 몰랐나?"

이제 와서 기누가와에게 무엇을 숨기겠는가? 구키가 솔직히 수긍하자 다시 묻는다.

"요즘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아니. 그런 건 없어."

이전처럼 여행은 하지 않았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만나고 있다. 하긴 린코가 매여 있는 몸이기 때문에 만나면 일초가 아쉬운 듯 서로의 정욕을 불태우고 여운에 잠길 여유도 없이 헤어지는 일이 많다

"두 사람 일이니까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잠시 사이를 두더니 덧붙인다.

"그녀가 굳이 강사를 원한다면. 나로서는 도와주면 그만이네만 우선은 자네가 알아야 될 것 같아서"

"그래. 알려줘서 정말 고맙네."

"그녀하고 잘 상의해 보게."

그리고는 문득 생각난 듯이 말한다.

"뭔가 왜 괴로운 모양이더군."

그 말을 듣는 순간. 구키의 뇌리에는 린코가 절정의 순간에 두 눈을 꼭 감고 괴롭고 안타까워하던 표정이 되살아나서 수화기를 쥔 채 눈을 감는다. 기누가와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구키는 곧바로 린코에게 전화하고 싶었지만 사무실 안이라 곤란하다. 구키는 일단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며 린코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야 할까 생각한다. 왜 상임 강사 자리를 원했을까? 기누가와는 돈이 필요한 것 같다고 했지만 과연 그처럼 단순한 이유에서일까 기누가와는 린코에게 고민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면서 어쩌면 집을 나오려는 게 아닐까 우려하고 있었다.

'그런 중대한 일을 왜 내게 먼저 말해 주지 않았을까.'

우선 린코를 만나야 한다. 그러면 의문의 타래가 풀릴 것이다. 구키는 수첩을 펼쳐본다. 그러나 십이월에 들어서면서 송년회다 파티다 해서 모임이 줄지어 있어 오늘도 내일도 일정이 꽉 차 있다. 그러나 린코만 괜찮다면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더라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일단 마음이 정리되자 구키는 담배를 비벼 끄고 휴대폰을 들고 사무실에서 나온다. 린코에게 전화를 거는 장소는 으레 엘리베이터 앞의 계단으로 통하는 비상구이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린코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오후 두시 반. 이 시간이라면 별다른 일이 없는 한 린코는 집에 있을 것이다. 낮은 신호음이 다섯 번 정도 울렸을 때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린다. 당연히 린코가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순간 구키는 무의식중에 수화기를 멀리 하고 숨을 삼킨다. 틀림없이 남자의 목소리이다. 다시 두 번 정도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속에서 들려왔을 때 구키는 도망치듯이 전화를 끊고 생각한다. 린코에게는 아이도 없고 부부만 살고 있다. 그러면 그 목소리는 린코의 남편일까. 사십대 후반이라고 들었는데 당당하고 힘찬 목소리를 듣고 보니 의외로 젊은 것 같다. 그건 그렇다치고 왜 이 시간에 집에 있을까. 분명히 의대 교수라고 들었는데 평일인 낮에 집에 있다니 이상하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겨서 들어온 것일까. 아니면 감기라도 걸려서 쉬고 있던 것일까. 그러나 감기든 목소리가 아닌 걸 보면 역시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벨이 여러 번 울린 후에 남편인 듯한 남자가 전화를 받는 걸 보면 린코는 집에 없는 것일까. 아니면 집에 있는데도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사정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런저런 추측을 하고 있는 사이에 구키의 불안은 점점 더해지고 그와 동시에 갖가지 상황이 머리에 떠오른다. 혹시 두 사람이 집에서 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원인은 린코의 외도 때문일까. 근래에 집을 자주 비운 것 때문에? 그래서 남편이 추궁하다가 언쟁이 벌어지고. 결국에는 린코가 흐느껴 울고 그때 전화벨이 계속 울린다. 그래서 남편이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전화 속의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끊어버린다. 그래서 남편은 더욱 의심을 하게 되고 린코를 더욱 몰아붙인다. 이 모든 일이 바로 자신 때문에 생겼다는 죄책감으로 구키의 상상은 나쁜 쪽으로만 달려간다. 어떻게든 린코와 연락을 취하고 싶지만 다시 남편이 받을까 봐 엄두가 나질 않는다.

'좀 기다려 보자.'

침착하라고 자신에게 타이르지만 이대로 사무실로 돌아갈 기분은 아니다. 구키는 지하 직원 식당으로 가서 커피를 주문한다. 이미 점심시간이 끝났기 때문에 사람은 드물다. 낯익은 직원

몇이 구키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이고 지나간다. 모두 바쁜 오후에 혼자 따분하게 커피를 마시는 자신을 보고 '저 사람 어지간히 한가한가 보군' 하는 눈으로 쳐다보지나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금세 린코에 대한 상념이 밀려온다. 전화를 끊은 지 삼십 분 정도 지났으니 이번에는 린코가 전화를 받을지도 모른다. 만약 또다시 남편이 받으면 얼른 끊어버리리라 마음먹고 식당에서 나와 다시 비상구 계단으로 올라간다. 이번에는 언제라도 끊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고 수화기를 귀에 대자 신호음이 간다. 아까는 다섯 번이 울린 다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지금은 여섯 번이 울렸는데도 받지 않는다. 일곱 번. 여덟 번이 울리고 열 번까지 계속되는 신호음을 들으며 구키는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일 분쯤 기다렸다가 다시 걸었지만 열 번이 넘게 울려도 받지 않는다. 아까 전화를 받은 후 린코의 남편은 밖으로 나간 것일까. 그리고 린코도 집에 없는 것일까. 구키는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또 한편으로는 실망하면서 벽에 몸을 기댄다.

도대체 린코는 어디로 간 것일까. 솔직히 지금까지는 린코와 연락을 원할 때면 언제라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린코와 자신을 잇고 있는 것은 전화선 하나뿐이고 그것이 끊어진다면 둘은 당장에 미로에 빠지고 만다. 만에 하나라도 린코가 이대로 병들어 누워 버린다거나 행방불명이 된다면 린코로부터 연락이 없는 한 구키가 찾을 길은 없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절대로 끊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쉽게 끊어져 버린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불륜이라는 관계의 취약점이란 말인가. 순간 구키는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린코가 그립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만나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구키는 찾을 도리가 없다. 그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을 기다려 저녁이나 한밤중에라도 전화를 걸어 보던가. 아니면 린코가 휴대폰으로 연락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구키는 체념한 채 사무실로 돌아와 읽다 만 자료에 눈을 돌린다. 요즘 쇼와시대사 편찬을 위해 쇼와 초기시대부터 10년대까지의 사회 풍속 자료를 수집하면서 관련서를 읽기 시작했는데 제법 재미있는 것이 많다. 특히 쇼와 10년대에 들어서는 언론과 사상의 탄압이 심해지고 2 26 사건(1936226-28. 일본의 육군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사건)'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빈번했던 동시에 남녀의 치정사건 등도 많았다. 아베 사다 사건도 바로 그중의 하나이다. 당시 도쿄 나카노구에서 요릿집을 경영하는 이시다 기치조라는 남자가 더부살이하는 여종업원인 아베 사다에게 허리끈으로 교살되었다. 더구나 아베 사다는 남자를 교살한 다음 남자의 성기를 잘라냈다고 해서 전대미문의 엽기적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구키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사건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이 살인사건에 대한 판결이다. 당시 검사측은 이 여인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는데 판결은 6년이 선고되었다 게다가 복역 중 모범수라는 이유로 감형되어 5년 만에 출소했다는 것이다. 이 온정이 넘치는 판결의 이면에는 판사가 이 사건을 단순한 살인으로 간주하지 않고. 두 사람의 애정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성애의 극치로 인한 동반자살 혹은 사랑이 고조된 끝에 일어난 광기라고 인정한 이례적인 해석이 있었다. 2-26사건 직후 군부가 득세하고 전쟁의 그림자가 일본 열도를 뒤덮었던 시대의 한 귀퉁이를 장식했던 이 이색적인 치정살인 사건은 인간미 넘치는 판결을 받아냈던 것이다. 지금 구키가 흥미를 갖는 이유는 이런 사건을 통해서 변호사의 변론 등과 더불어 이 사건을 바라보는 당시 일반 국민들의 반응을 수집하여 쇼와라는 한 시대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주시하고 싶기 때문이다. 구키의 의도는 대강의 윤곽만 잡혔을 뿐. 과연 언제 완성될 것인지는 아직 예측할 수 없다.

이렇게 자료를 읽다 말고 린코를 생각하고. 그러다가 또 다시 자료를 읽고 하는 사이에 시계를 보니 오후 5시이다. 해가 짧은 겨울 날씨는 벌써 어두워져 있다. 출판사 일이라는 것이 딱히 몇 시부터 몇 시까지라는 식으로 근무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취재를 하거나 원고를 받아 오느라고 정오가 지나서 출근을 하는 경우도 있고. 원고 교정을 시간 안에 끝내기 위해서는 심야에 혹은 새벽녘에 퇴근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편집인에게는 근무 시간이 정해져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근무를 몇 시간 하느냐보다는 책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작업 내용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긴 구키처럼 한직에 있으면 오전 열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쯤 퇴근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오늘 밤은 조사실의 송년회가 있어서 오후 5시가 지나자 모두들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 준비를 한다.

구키는 읽고 있던 자료를 정리하고 동료 요코야마와 함께 사무실을 나선다. 행선지는 신바시의 중화요리 집으로 두 사람은 회사에서 함께 택시를 탔는데 긴자에 가까워지자 교통 체증이 심하다. 십이월에 들어서인지 거리는 흥청거리고 레스토랑이나 요릿집도 사람들로 붐빈다.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경기가 회복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속되는 불경기에 초조하게 살았던 어두운 한 해를 잊어버리고 싶어서 이렇게 마시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두 사람은 약속 장소인 중화요리 집에 6시 전에 도착하여 2층에 마련된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다른 동료들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구키는 다시 아래층의 입구 옆에 있는 공중전화로 가서 린코의 집으로 전화를 건다. 6시가 다 되었으니 가까운 데로 쇼핑을 나갔었다면 이미 돌아와 있을 시간이다. 그래도 혹시 남편이 받았을 때를 대비하여 수화기를 입가에서 약간 뗀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벨만 계속 울릴 뿐 아무도 받을 기색이 없다. 벨이 열 번쯤 울리자 일단 전화를 끊고 다시 걸어보지만 역시 아무도 받지 않는다. 린코는 물론이고 남편도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설마 둘이서 여행을 떠난 것은 아니겠지. 공중전화 옆에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다른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자 구키는 전화를 단념하고 2층으로 올라간다.

조사실은 형식적으로 총무부에 속해 있어서 과거에는 총무부의 송년회에 참석했지만 2년 전부터 독자적인 모임을 가져 온 모양이다. 그래서 비서 역할을 해주는 여직원을 포함해서 다섯 명뿐인 작은 모임의 회비는 일인당 팔천 엔이다. 우선 스즈키 실장이 일어나서 인사를 한다.

"금년도 이제 막을 내리는군요. 지난 1년 동안 여러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년에도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새해를 시작합시다."

구키가 이 모임에 나온 것은 처음이다. 한마디로 조사실이라고는 하지만 각자 하는 일이 다르기 때문에 스즈키가 그런 표현을 한 것에도 일리는 있다. 스즈키의 인사말에 이어 맥주로 건배를 하고 식사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사내의 인사 문제와 각 부서에서 최근 일어난 일에 화제가 집중되더니 차츰 사적인 얘기가 나오고 개중에는 인사 처리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다. 이윽고 취기가 돌자 차츰 좌중은 흥청거리는 분위기로 접어든 다. 뭐니 뭐니 해도 조사실의 홍일점인 여비서가 제일 인기다. 그다지 미인은 아니지만 마음씨가 고운 여자이다. 자연스레 그녀를 중심으로 차제가 활기를 띤다.

나이 35살로 이혼 경력이 있기 때문에 애인이 생겼는가라는 짓궂은 질문에서 시작되어 각자 좋아하는 타입의 여자에 대한 화제로 돌아간다. 평소에는 딱딱한 표정이던 스즈키도 그런 화제에 스스럼없이 어울리더니 난데없이 여비서에게 묻는다.

"이중에서 누가 제일 인기가 있을 것 같나?"

여비서는 한 바퀴를 주욱 둘러보고는 입을 연다.

"글쎄요. 말하기가 좀 뭐하지만.... 인기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애인이 있을 것 같은 사람은 구키 부장님 같은데요."

순간 모든 사람의 입에서 ''하고 함성이 터져 나온다.

"그렇지 않아."

구키는 당황해서 부정하지만 남자들은 질투 섞인 말투로 정곡을 찌른다. 우선 스즈키가 시작을 한다.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걸 보고 수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그랬군."

그러자 요코야마가 맞장구를 친다.

"맞아! 사무실에서 나갈 때도 꼭 가지고 나가는 걸 보면...."

연하인 무라마츠까지 한마디 거든다.

"어쩐지 요즘 몹시 들떠 있더라구요."

구키가 시치미 뗄수록 동료들은 그를 안주거리 삼아 놀려댄다. 구키에게 애인이 있을 것 같다는 것으로 시작된 화제는 어느새 이미 있다는 것으로 사실화되고 구체적인 데이트 방법까지 일일이 물어 온다.

"나도 좀 배워야겠는걸."

연애와는 담 쌓은 것 같은 스즈키마저 한술 더 뜨고. 최근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 듯한 요코야마가 밀회 장소를 물어온다.

"역시 러브호텔로 가나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러브호텔을 카겠나? 사랑하는 여자를 모시려면 특급 호텔 정도는 돼야 폼이 잡히는 거라고 "

스즈키가 아는 체하며 말하자 무라마츠가 되묻는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특급 호텔을 이용하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그래서 애인이 기뻐한다면 돈이 문제겠는가?"

스즈키는 그렇게 말하더니 구키를 보고 한마디 한다.

"이 사람은 이미 집도 갖고 있고 외동딸은 출가시켰고. 부인도 도자기회사 컨설턴트를 하고 있다니까 돈 걱정은 없을 거야."

과연 조사실의 실장답게 상세한 것까지 알고 있다

"우리처럼 집 살 때 빌린 돈이 없기 때문에 유복한 편이지."

"2차를 가면서도 지갑 걱정을 해야 하는 형편이라면 어디 불안해서 느긋하게 연애인들 해볼 수 있겠나?"

"그래. 멋진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과 시간이 있어야하는 거라구." .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시간은 충분히 있는데 말이야."

요코야마가 농담 삼아서 말하자 좌석은 점점 흥이 돋우어진다. 순간 구키는 휴대폰이 울리는 것을 느낀다. 동료들과의 회식자리에서는 늘 휴대폰을 꺼놓았지만 오늘 밤만은 린코가 걱정되어 켜놓은 채로 작은 손가방 안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휴대폰은 확실히 울리고 있지만 사람들 앞이라 받기가 난처하다. 구키는 휴대폰이 울리는 작은 손가방을 들고서 황망히 방을 나온다. 바로 앞에 계단이 보인다. 그 앞에까지 가서야 겨우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린코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구키는 가슴이 뭉클하다. 휴대폰 탓인지 멀리 잔물결 같은 잡음이 섞이지만 틀림없이 린코의 목소리이다.

". 다행이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데 음식을 나르는 여자와 부딪칠 뻔했다. 당황해서 몸을 비켜서며 말한다.

"지금 어디야?"

"요코하마예요."

"잠깐 끊지 말고 기다려."

여기서는 방이 가까워서 불안하다. 통로도 너무 좁다. 구키는 전화기를 귀에 댄 채 계단을 내려와 입구에 있는 약간 넓은 공간에 서서 다시 한 번 린코를 부른다.

"여보세요."

"저예요."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전화에다 울부짖듯 말한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집에도 전화했지만 없어서......."

"죄송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가?"

"오늘 아침에 연락이 와서 갑자기 친정으로 오는 바람에. 린코의 친정은 요코하마에서 가구 수입 회사를 경영한다고 들었다.

"무슨 병으로?"

"심장 발작이래요. 어제까지만 해도 건강하셨는데 새벽녘에 갑자기......"

그런 큰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구키는 전혀 다른 상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미안...."

구키는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좋을지 갑자기 난처해져서 겨우 몇 마디를 뱉어낸다.

"너무 낙심하지 말고."

"고마워요."

"그렇지만 목소리를 듣게 돼서 정말 기뻐."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부친상을 당한 날에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말을 던져본다.

"만나고 싶어."

오늘 하루는 정말 복잡한 날이었다. 우선은 낮에 미즈구치와 기누가와로부터 여러 가지 말을 들었고. 린코와 통화를 하려다가 남편의 목소리까지 듣고 말았다. 그런 탓인지 지금 린코와 이렇게 연락이 되었는데도 아직은 불안하다

"오늘도 좋고 내일이 라도 좋아."

"그건 곤란해요."

"그럼 언제쯤......."

"다음 주 정도."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다음 주가 되려면 아직 4,5일이나 남아있다

"아무튼 만나고 싶어. 만나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구."

"무슨 얘긴데요?"

"전화로는 말하기 곤란해. 당분간 친정에 있겠지?

"내일은 철야를 해야 하고 모레는 장례식이니까 그때까지는 있어야 할 거예요. 제가 다시 연락할게요."

"잠깐 기다려 ."

구키는 매달리듯이 수화기를 확 움켜쥔다.

"친정 전화번호를 가르쳐 줘."

"어떻게 하시려고요?"

"급하게 연락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린코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번호를 알려준다. 구키는 수첩에 적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어본다.

"지금 남편도 거기에."

갑작스런 물음에 당혹했는지 린코는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한다.

"......."

"그 사람도 함께 묵나?"

"아니요. 그 사람은 돌아갈 거예요."

린코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비로소 구키는 안도의 숨을 쉬고 전화를 끊는다. 린코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안심이 되면서 한켠으로는 린코의 남편이 마음에 걸린다. 오늘 오후 전화를 받은 사람은 분명 남편이었을 것이다. 급하게 연락을 받고 대학에서 돌아와 상복이라도 갈아입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둘이서 린코의 친정으로 달려가서 지금쯤은 친척들과 마주앉아 인사를 나누고 있겠지. 검은 상복을 입은 린코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지만 그 옆에 검은 상복을 입은 총명한 남편이 나란히 앉아서 어울리는 부부라는 말을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사이에 구키는 새삼 그들이 부부라는 확실한 현실 앞에서 마음이 저려온다. 정식 부부라면 어디든지 함께 갈 수 있고 또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륜이나 애인 관계라면 공공연한 자리는 말할 것도 없고 사적인 모임에도 쉽게 동행할 수 없다. 언젠가 불륜 관계에 있던 한 여자가 탄식하던 말이 생각난다.

'그 사람하고는 남들이 있는 곳에는 한 번도 동행한 적이 없어요.'

지금 구키와 린코도 같은 처지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남들 눈을 피해 몰래 만나야 하고 둘이서 공식석상에 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구키는 자신과 린코의 처지가 한없이 안쓰러워진다. 부부관계란 얼마나 견고한 것이며. 그렇지 못한 관계는 또 얼마나 불확실

한 것인가. 구키는 새삼 그 두 관계를 가르는 세상의 벽을 실감한다. 상념을 털어버리려는 듯 휴대폰을 작은 가방에 넣고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자 모두가 일제히 손뼉을 친다.

"애인하고 연락된 거 축하합니다."

"그런 전화가 아니라. 집에 일이 좀 있어서..."

"하지만 전화기를 들고 뛰어나가는 모습이 꽤나 반가운 것 같던데 "

이렇게 되고 보면 아무리 부정해 봤자 소용이 없다 구키는 기꺼이 주흥을 돋우는 상대가 되어 줄 것을 각오하며 술잔에 따라준 맥주를 들이켠다.

송년회는 아홉시가 조금 지나서 끝났다. 스즈키. 요코야마. 그리고 비서는 노래방으로 향했고. 노래라면 질색인 구키는 무라마츠와 함께 긴자의 한 술집으로 향한다. 열 명만 앉으면 꽉 차는 좁은 바에서 무라마츠와 함께 앉아 언더록을 주문한다. 처음에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니 무라마츠가 생각났다는 듯이 묻는다.

"그런데 참 좋은 사람이 정말 있기는 있는 겁니까?"

너무 진지하게 묻는 바람에 구키가 솔직히 고개를 끄덕이자 무라마츠가 다시 물어온다.

"물론 관계도...... 가지겠죠?"

"이 나이에 플라토닉 러브라면 더 이상하잖아."

"실은 나도 사귀고 있는 여자가 있긴 한데. 요즘 아무래도 그게 약해진 것 같아서...... 나이 탓이려니 생각은 하지만. 부장님은 어떻습니까?"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니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구키가 잠자코 있자 무라마츠는 취기 때문인지 또 물어온다.

"관계를 할 때마다 매번 됩니까?"

"아니. 매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도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되어서. 부장님이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지만 요즘 들어서는 모처럼 둘이 만나도 이전처럼 깊은 느낌이 없는 것 같고......."

지나치게 대담해서 황당하기도 하지만 그의 말투가 너무 솔직해서 싫지만은 않다.

"그건 말이야. 단순히 강하고 깊이 들어간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야."

"그럴까요?"

"하다 보면 자극을 느낄 수 있는 데가 있는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는데 좀처럼 딱 들어맞는 느낌이 없어서... 여자 허리 밑에 베개를 넣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겠죠?"

"그것도 좋고 옆으로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남에게 가르칠 정도의 베테랑은 아니지만 본인이 실제로 느낀 바를 일러주자 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아무래도 우린 포르노를 통해서 그저 다짜고짜 격렬하게 하는 것만을 봐서 거기에 너무 영향을 받는지도 모르겠군요."

"그것도 그렇지만 역시 좋은 느낌이 없다면."

무라마츠가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남자들은 성에 대해서 나름대로 늘 의식하며 고민하고 있는가 보다. 구키는 갑자기 무라마츠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거듭 위스키를 권하고 11시가 지나서야 겨우 헤어져 역으로 향한다. 성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눈 탓인지 혼자 걷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린코가 그리워진다. 아까 린코의 말대로라면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너무 길다 부친이 사망한 날에 만나자는 것이 너무 경우 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구키는 린코의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어진다. 약간은 망설이면서도 길가에 있는 공중전화를 발견하자 빨려 들어가듯이 안으로 들어가 요코하마의 린코 친정으로 전화를 건다. 이런 일은 술김에 할 수밖에 없다고 자위하면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자 곧 나이든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구키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서 단정한 말투로 묻는다.

"마츠바라 린코 씨 계십니까?

"바꿔드리겠습니다."

그 여자는 조문객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잠시 후 린코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 요."

순간 구키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나야."

"무슨 일이에요?"

밤늦게 친정으로까지 전화를 거는 바람에 린코는 당혹스럽다.

"아까 전화를 받고 나서 술을 한잔 했어 . 그런데 갑자기 너무도 보고 싶어서.....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은 했지만......."

구키는 다시 한 번 큰맘 먹고 말해본다.

"잠깐 좀 만날 수 없을까?

"어떻게 그런 말을. .... 오늘은 아버지가......."

구키 역시 당치 않은 요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 내일은?"

"내일은 철야를 해야 하기 때문에......."

"철야가 끝나고 나서라도 좋으니 만나주지 않겠어? 요코하마의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침묵하는 린코에게 다시 보챈다.

"내일 밤 호텔에서 다시 전화할게. 린코. 부탁이야. 한 시간이라도 아니 삼십 분만이라도 좋으니."

왜 이런 경우 없는 짓을 하고 있는지 구키 자신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무턱대고 전화를 붙잡고 호소를 한다. 다음날 구키는 여느 때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출근했지만 그래도 머리가 무겁다. 어제 송년회가 끝난 후 무라마츠와 둘만 남아 한잔을 더할 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취하지 않았다. 문제는 무라마츠와 헤어진 후 린코에게 전화를 걸고 잠깐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하소연을 하고 나서이다. 갑작스런 부친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 있을 린코에게 왜 그런 가당치도 않은 소릴 했을까 자신도 믿을 수 없지만 린코가 남편과 함께 그녀의 친정집에 있을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화를 끊고서 거리를 헤매다가 한잔을 더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 한시가 지나고 있었다. 한시까지 술을 마신 다음날 일에 지장을 받는 것을 보면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구키는 반성을 하면서도 한직에 있게 된 것을 한편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자료를 잠시 들여다보다가는 이내 담배를 꺼내 문다. 그리고 차를 한잔 마시고 다시 생각난 듯이 책상을 향해 앉지만 이삼십 분쯤 지나면 다시 쉬고 싶어진다. 하루 종일 빈둥빈둥 지내다가 저녁때쯤 되자 겨우 머리도 맑아지고 움직일 기력이 돌아온다. 어젯밤 린코는 분명히 만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코하마까지 가겠다고 말한 이상 약속은 지켜야 한다. 구키는 회사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간단히 하고 도쿄 역에서 요코하마로 향한다. 호텔을 정한 것은 아니지만 찾기 쉬운 곳이 좋을 것이다. 생각끝에 한 번 식사를 한 적이 있는 '미나토미라이'에 있는 고층 호텔로 들어간다. 처음에는 바에서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철야가 끝날 때까지는 시간이 상당히 걸릴 것이고. 구키 자신도 좀 쉬고 싶어 큰맘 먹고 방을 잡는다.

64층에 자리 잡은 방은 바다가 보였다. 눈 아래로 야경이 펼쳐지고 빛과 빛이 이어진 베이 브리지가 내려다보인다. 여기서 야마노테의 린코 집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을 것이다. 구키는 창가에 서서 넘쳐흐르는 빛의 소용돌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철야를 하는 장례식에서 빠져 나온 린코를 바로 이 자리에서 껴안는 모습을 상상한다. 철야가 몇 시쯤에 끝날지는 몰라도 그보다는 린코의 남편이 몇 시에 돌아갈 것인가에 신경이 쓰인다. 남편이 돌아가지 않으면 린코도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10시가 되자 구키는 일단 수화기를 들었지만 아직 이른 것 같아서 도로 내려놓는다. 11시에 다시 수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를 누른다. 철야를 하고 있는 남의 아내를 불러내려 하고 있다. 그런 몰상식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구키는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고 있는 자신에게 약간 도취되어 본다. 신호음이 울리고 어떤 남자가 전화를 받았지만 남편의 목소리는 아니다. 구키는 어제보다 더 부드러운 말투로 린코를 바꿔 달라고 부탁하자 남자는.

"따님 말씀이시군요."

라고 확인한다. 정중한 말투로 보아 린코 아버지 회사의 직원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이 린코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야. 지금 요코하마의 호텔에 와 있어 ."

"무슨 말인가요?"

"어젯밤에 만나러 온다고 했잖아. 미나토미라이에 있는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어."

구키는 방 번호를 알려주며 .

"곧 와줄 수 없겠어?"

하고 조른다.

"그렇게 급하게는....."

"철야는 이제 끝났겠지 . 그 사람은?"

"조금 전에 돌아갔어요."

"그럼 빨리 와줘. 거기서라면 그렇게 멀지 않을 거야."

린코가 와주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방까지 잡았단 말인가

"제발 부탁이야.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다시 애원하다시피 말하자 린코가 대답한다.

"그럼 가겠어요. 하지만 만나기만 하는 거예요."

"물론 알고 있어."

과연 린코는 상복 차림으로 올까. 아니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올까. 어쨌든 만나면 그대로 돌려보내지는 않으리라. 구키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린코를 기다린다. 요코하마의 야마노테에 있는 린코의 친정에서 호텔까지는 차로 15,6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이다 물론 준비할 것도 있을 테니까 역시 1시간 정도는 걸릴지도 모른다. 눈은 텔레비전 화면을 향하고 있지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미니바에서 위스키를 꺼내어 물과 번갈아 가며 마신다. 시간은 벌써 열두시 가까이 되어 간다. 텔레비전에서는 '밤의 와이드 쇼'가 거의 끝나가고 다른 채널에서는 내년부터 시작될 새 프로그램을 예고하고 있다. 구키는 텔레비전을 끄고 창가에 서서 야경을 바라본다. 금년은 린코와 더불어 밝았고 린코와 더불어 저물어가는 한해였음을 회상한다. 돌이켜보니 봄에 린코와 관계를 맺은 후 둘은 마치 전기의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서로 끌어당기듯이 혹은 굶주린 짐승이 사냥감을 탐하듯이 함께 불타고 서로를 갈구해 왔다. 구키의 평생에서 가장 정열이 넘치는 1년이었고 저 멀리 잊고 있던 청춘이 단숨에 되살아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다시 위스키를 마시고 육십층이 넘는 고층에서 밤거리를 내려다보니 취기가 더해져서 저 아래 반짝이는 모든 빛 하나하나가 린코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틀림없이 린코는 밤거리의 빌딩숲 사이를 빠져나와 신호등이 깜박이는 건널목을 건너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는 호텔의 프런트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가 기다리는 방으로 뛰어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믿고 그것을 간절하게 바라며 두꺼운 유리창에 이마를 가까이 대는 순간 차임벨이 울린다. 구키는 퉁겨지듯이 일어나 문을 열면서 외친다.

"아아......."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린코이다. 검은 비단 상복에 검은 오비를 매고. 한쪽 손에는 기모노에 받쳐 입는 코트를 들고 있다. 머리는 뒤로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이어지는 가느다란 목선이 순백색 옷깃으로 여며져 있다

"와주었군."

구키는 저도 모르게 린코의 손을 힘주어 움켜잡고 안으로 이끌며 다시 중얼거린다.

"정말 와주었구나."

두 팔로 힘껏 껴안자 린코도 쓰러지듯이 구키의 가슴속에 파묻힌다. 구키는 린코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오늘이 상중에 치러야 할 철야중이라는 것도. 그리고 린코가 지금 상복을 입고 있다는 것도 모두 잊고 오로지 린코의 입술을 걸신들린 듯이 빨아들인다. 긴 입맞춤 끝에 구키는 새삼 상복 입은 린코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정말 잘 어울려."

"어떻게 그런 소릴......."

그러고 보니 상복이 잘 어울린다는 것은 좀 지나친 표현이었나 보다.

"못 오는 줄 알았어."

"하지만 '곧 와' 라고 명령했잖아요."

린코는 오비 뒤로 손을 가볍게 대고 창가로 다가서서 밤거리를 내려다본다.

"이 호텔은 처음인가?"

"방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에요."

상복을 입은 린코와 나란히 구키도 창가에 선다. 구키는 바로 조금 전 린코를 애타게 기다렸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린코의 손을 잡는다. 초겨울 깊은 밤거리를 달려온 린코의 손은 얼음처럼 차갑다. 린코의 시린 손을 따뜻하게 녹여 주며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남편은 돌아갔나?"

린코의 말투는 남의 말처럼 쌀쌀맞다.

"조금 전까지는 엄청난 질투에 시달리고 있었어."

"왜요?"

"부부니까 어쩔 수는 없지만 장례식 때 둘이서 나란히 서서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멋진 부부라는 말을 듣고 있지 않나 해서."

"그러니까 괴로운 거예요."

"괴롭다고?"

"부부니까 도망칠 수 없잖아요. 아까도 숙모님이 '너희들 잘 되고 있니?'라고 묻더군요. 게다가 숙부님은 '아이는 이제 단념한 거냐?'라는 식으로 태연히 물어 와서...... "

"쓸데없는 참견들이군."

"우리 부부 사이가 왠지 원만하지 못하다고 느끼니까 걱정해주는 소리예요."

"당신이 여기 와 있는 것을 알면 정말 큰일이겠군."

"큰일로 끝날 문제만은 아니지요."

희미한 향냄새가 배인 린코의 어깻죽지 너머로 밤거리의 불빛이 보인다. 구키는 순간 별세계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며 침대 쪽으로 린코를 잡아 끈다.

"안 돼요."

순간 린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두 손으로 구키의 팔을 풀려고 한다.

"가만히 있을게. 그냥 잠깐만 누워서"

"누우면 머리가 헝클어져요."

구키는 뿌리치려는 린코의 손을 끌어당기며 침대의 모서리에 앉는다.

"자아. 이렇게 둘이서 함께 앉아 있는 거야."

린코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침대 모서리에 앉아 흐트러지려는 머리를 매만진다.

"꼭 들어가야 하나?"

"당연하죠. 제가 분명 30분만이라고 했죠?"

그들이 앉은 침대 모서리에서도 바다 앞쪽으로 펼쳐지는 야경이 보인다. 그것을 바라보며 구키는 생각난 듯이 말한다.

"어제 기누가와가 전화했었어. 당신이 상임 강사가 되고 싶다고 부탁하러 왔다던데"

"역시 말했군요."

린코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왜 내게 먼저 말해주지 않았지?"

"당신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스승을 제치고 강사가 될 수 있을까?"

"만약 거기서 써주기만 한다면 내가 선생님께 가서 부탁해볼 참이에요."

"기누가와는 당신이 집을 나올 생각이 아닌가 하고 짐작하더군."

"나올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어요."

린코는 조금 굳은 얼굴로 창가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다. 구키는 그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린코의 무릎에 오른손을 얹었다.

"나도 나와 버릴까."

"억지 부리지 마세요."

"아니."

"당신은 할 수 없어요."

"그렇지 않아."

힘주어 말하는 동시에 구키의 오른손이 단숨에 린코의 상복 옷자락을 헤치고 들어와 흰 나가지방에 닺는다. 순간 린코가 손을 뿌리치려 하지만 구키는 개의치 않고 오른손을 무릎 사이로 밀어 넣는다.

"본격적으로 서예 일을 해 볼 생각인가?"

구키는 손의 움직임과는 관계없이 되묻는다.

"그것도 집에서 나오기 위해?"

"수입이 없으면 혼자 살아갈 수 없잖아요."

"당신에게 그런 고생은 시키지 않아."

그러면서 구키의 손이 더욱 안으로 파고든다. 린코는 당황한듯이 무릎을 붙인다. 뿌리치려고 하는 힘과 밀고 들어오려는 힘이 뒤엉켜 싸우다가 마침내 거부하는 힘을 꺾자 구키의 손가락이 린코의 허벅지 깊은 곳을 더듬는다.

"지금 이대로......."

지금의 구키로서는 린코의 피부에서 전해오는 체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두 남녀는 마치 침대의 모서리에 나란히 앉아 창 너머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여자의 기모노 앞은 벌어져 있고 상복 속의 나가지방 사이에는 남자의 손이 숨어들어가 있다. 여자는 이미 남자의 손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두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음란하고 부도덕해서 도저히 허락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일념으로 조심스럽게 너무도 진지하게 다가오는 남자의 체면을 봐주느라 묵인하고 있을 뿐이다. 그와 같은 여자의 관용을 재빨리 알아차린 남자는 허용된 작은 공간 안에서 손가락만으로 어둠 속을 헤엄치며 시치미를 떼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남자의 작전이며 교묘한 함정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런 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면서도 여자의 몸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젖어들고 있다. 그리고 오직 여자의 육체만이 마음에서 유리된 채 혼자서 떠돌고 있다. 그 순간 긴장에서 벗어난 남자의 손이 쑥 뻗치며 부드러운 꽃잎으로 싸여 있는 여자의 은밀한 곳에 손가락이 와 닿는다. 순간 '......' 하고 나지막한 소리가 새어나오고 상복으로 싸인 여자의 상체가 앞으로 꺾인다. 그러나 한 번 닿은 손가락은 사랑스럽고 은밀한 곳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그대로 단숨에 쑥 들어와 지금까지 망설이던 태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담한 동작으로 화원의 전면을 덮고 그 순간 가운데손가락이 조그맣고 예민한 봉오리에 제살처럼 덮인다. 초조함 없이 서서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린코의 은밀한 곳은 부드럽게 젖어 있다. 여전히 두 사람은 앞을 보고 있는 것이 지상 명령인 양 창을 향해 앉아 있다. 그러나 남자의 손가락은 여자의 봉오리를 맴돌며 부드럽게 애무한다. 여자의 화원에는 액이 흘러 넘쳐 흠뻑 젖어 있다. 그래서 더욱 부드러워진 손가락은 봉오리에서 꽃잎으로 나아가서는 꽃잎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려다 머뭇거린다. 남자의 손가락이 물결치는 대로 떠돌듯 맴도는 동안 여자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남자의 손을 위에서 꼭 누른다.

"그만....."

남자는 여전히 아쉬운 듯 꿈틀거리고 있지만 곧 체념한 듯 동작을 멈춘다. 대신 그 대가라도 원하듯이 여자의 귓가에 속삭인다.

"하고 싶어......"

호소하지만 대꾸도 않는 여자에게 남자는 다시 속삭인다.

"아주 잠시 만이라도......."

거기까지 듣고 있던 여자는 자신이 상중에 있는 처지임을 깨달았는지 당황하여 고개를 가로젓는다.

"안 돼요. 오늘은."

"잠깐만이라도."

"안 돼요. 가야 해요."

거역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태연하게 시치미를 뗀다.

"뒤로 돌아 봐."

순간 무슨 말인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는 여자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뒤로 돌아서 옷자락을 걷어 올리면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을 거야."

"어떻게 그런......."

이제야 남자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도망치려는 여자를 붙잡고 남자는 최후의 통첩처럼 명령한다.

"아무 말 말고 뒤로 돌아."

구키도 이렇게까지 예상하지는 않았다. 이전부터 그런 체위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한 번이라도 체험해보고 싶긴 했지만 무리라고 체념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공상에서 가능한 체위일 뿐 실제로 해볼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 꿈이 지금 눈앞에서 확실하게 하나하나 펼쳐지려 한다. 검은 상복을 입은 린코가 두 손을 침대에 짚고 머리를 숙여 웅크리고 있다. 앞에서 보면 침대에 엎드려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뒷모습은 두 다리는 세우고 무릎만 약간 굽힌 채 침대 모서리에 닿아 있다. 이렇게 엎드린 자세에 기모노의 옷자락은 오비 위에까지 걷어 올려져있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도 기모노의 검은 바탕과 나가지방의 하얀 바탕의 대비는 선명하고. 이중의 대비 속에 뽀얀 엉덩이가 보인다. 몇 번이고 거역하며 반항하는 린코를 달래면서 여기까지 이르자 구키는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쉰다. 이렇게 이상하고 요사스러운 모습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남자라면 누구나 이 장엄하고 음란한 모습을 상상해본다. 아름답게 차려입은 여자의 기모노 옷자락을 마음껏 들추며 걷어 올려보고 싶다. 그것은 남자라면 누구나 품는 음침한 사악이며 흉폭한 소망이기에 여자에게 그대로 알리는 일은 좀처럼 없다. 남자와 남자. 수컷 사이에서만 전해오는 전설적이고 아름다운 체위이다. 그러나 이 음란한 체위는 예로부터 아주 적절하고 은밀하게 즐겨 왔다.

옛날 인기가 높은 기생들은 정월이면 검은 몬츠키(가문을 넣은 일본 예복)를 입고 다카시마다(일본 여자들의 높이 치켜 올린 머리 모양) 머리를 하고 손님방에 불려 다녔다. 그때 잠깐 동안의 틈을 이용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을 경우 기생들은 1초가 아쉽고. 게다가 차려입은 모습이 흐트러지지 않은 채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이 체위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구키에게도 철야하는 밤의 짧은 시간을 이용해서 성장한 옷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맺어지기 위해서는 이것이 가장 좋은 체위이다. 지금 린코는 구키를 받아들이기 위해 아름다운 공작이 되어 비상한다. 부끄러워하고 거부하면서도 어느새 린코도 스스로 음란한 체위가 주는 흥분에 몸을 떠는 것 같다. 지금이야말로 장엄한 아름다움이 유례없는 야비와 음탕함에서 태어나 장식되고 있다는 것을 남자도 여자도 잘 알면서 바로 그 세계로 빠져들려 하고 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소년과 같은 맑은 눈으로 걷어 올린 기모노 속의 하얗고 단아한 엉덩이를 바라본다. 따뜻하고 매끄러운 피부에 닿자마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한 순간 관통해 들어간다.

"아앗.... "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내뱉으며 여자의 몸은 앞으로 꺾이지만 재빨리 남자가 두 손으로 엉덩이를 받쳐들자 허리가 안정된다. 바로 지금 두 사람은 짐승의 모습으로 맺어져 있다. 그러나 짐승과도 같은 수치심을 부추기는 이 외설적인 모습이야말로 인간 문명 이전. 아직 동물이었던 무렵부터 이어져온 원시적이지만 가장 자연스럽게 열락으로 이끄는 체위이기도 했다. 인간 본래의 야성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둘 사이에는 이미 망설임도 부끄러움도 겁낼 것도 없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지성과 교양과 도덕과 윤리 . 인류가 세상에 나타난 이후 온몸에 찌꺼기처럼 배인 모든 장식을 벗어 팽개친다. 오로지 한 마리의 수컷과 암컷이 되어 버둥거리며. 끝내는 가늘고 길게. 숨이 넘어가는 듯한 포효와 더불어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이제 한 쌍의 수컷과 암컷은 시체처럼 겹쳐진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남김없이 다 타버리는 절정의 벼랑 끝에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의 바다가 흐른다. 남자가 나른함에서 몸을 일으키고 여자는 쾌락애서 천천히 깨어난다. 열락의 고개를 넘기면서 빨리 식어가는 남자에 비해 여자는 긴 여운에 젖어 깨어남이 늦다. 그만큼 음란한 자태는 여전히 침대에 엎드린 채로 있다. 그러나 린코는 비로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달은 것 같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서 전혀 나올 기색이 없는 것이다. 5. 10분이 지나고 다시 또 십 분이 지났을 때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겨우 린코의 모습이 나타난다. 어지간히 깊은 후회에 사로잡혀 있는지 내리뜬 눈에 창백한 얼굴빛이지만 기모노는 옷깃도 오비도 단정하게 매어져 있고 머리도 단정하다. 이제 그녀는 상복을 입고 있는 얌전한 유부녀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다. 그녀의 굳어진 표정에 구키는 눈치를 보고 린코는 말없이 소파 앞으로 가서 의자에 접어두었던 코트를 손에 든다. 그대로 돌아설 것 같은 기색에 구키는 당황하며 말을 건넨다.

"돌아갈 거야?"

들릴 듯 말 듯 낮고 희미한 목소리와 고개를 끄덕이는 몸짓은 분명 돌아가겠다는 의사이다. 자신의 억지로 인해 그녀가 깊은 후회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경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구키는 알 수 없다. 그대로 문 앞에서 마주보며 구키는 고개를 숙인다.

"미안해."

짐승으로 변했던 남자는 지금 인간으로 돌아와 자신이 얼마나 파렴치한 짓을 했는가에 놀라고 어이없어하고 있다.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구키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나서 계속한다.

"하지만 너무도 원해서 ."

그것은 한 치 거짓도 없는 구키의 진심이었다. 그러나 린코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한다.

"잘못한 사람은 바로 저예요."

"아니야."

"이런 날 이런 짓을 하다니 저는 죄받을 거예요."

"그렇다면......"

구키는 상복을 입은 린코를 다시 한 번 끌어안으며 중얼거린다.

"죄를 받을 거라면. 그 죄는 우리가 함께 받는 거야."

이 세상의 어떤 사랑도 혼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여자가 지은 죄라면 당연히 남자에게도 죄가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린코의 귀에는 그런 위로의 말도 들리지 않는다. 다시 한 번 확인하듯이 옷깃을 여미며 창백한 표정으로 문을 나선다. 지금 구키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달콤한 입맞춤을 하고 싶지만 린코는 단칼에 거부하듯이 복도를 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간다. 린코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 가고 엘리베이터로 이어지는 모퉁이를 돌자 구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린코의 뒷모숩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구키는 문을 닫고 침대로 돌아와 누운 채 천장을 쳐다본다. 지금 린코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사라져간 이유는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파렴치한 행위에 대한 결별의 심정일까.

구키는 또다시 생생한 기억을 더듬지만 잔잔한 어둠 속에서 정적만이 흐르고 침대에 떨어진 머리핀 하나만이 음란했던 행위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준다. 구키는 한 손에 머리핀을 쥔 채 사라져간 린코를 생각한다. 이제 거의 집에 도착했을 것이다. 린코는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둘러댈까. 집을 나와 다시 돌아가기까지 약 한 시간 삼십 분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했다고 할지. 구키는 린코가 난처해질까 봐 걱정한다. 어쩌면 직감이 예민한 여자가 있어 단정한 몸가짐 속에 숨은 변화를 눈치 챌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철야를 하는 밤에 관계를 가졌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는 린코의 태도가 더 걱정이다. 죄의식에 갇혀 있는 사람은 작은 몸짓 하나에서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린코가 죄의식에 빠져 있다면 다른 사람의 눈에 금방 드러날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녀를 요구했지만. 호텔 방을 나설 때 창백하던 린코의 표정을 떠올리자 구키는 또다시 불안해진다.

'괜찮을까.'

걱정하는 마음은 안개가 피어나듯 린코에 대한 사랑으로 되살아나고 구키는 저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머리핀에 입술을 맞춘다. 또 다른 자극을 찾아 나선다.

 

 

첫 만남

구키는 섣달그믐부터 설날까지 이틀 동안 쭉 집에 있었다. 외동딸 지카가 남편과 함께 섣달그믐에 와주어서 오랜만에 웃음꽃도 피고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튿날 딸 내외가 돌아가 버리자 집 안은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적막해진다. 나이를 먹으면 부부 사이에 대화도 줄어든다고 하지만 지금 그들 사이에 놓인 정적은 그 이상의 것이다. 물론 구키가 먼저 아내에게 살갑게 대하면 되겠지만 지금 구키의 심정으로서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아내도 그런 남편의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아무 내색도 하지 않는다.

새해 초의 관습에 따라 초사흘 오후 아내와 둘이서 정월의 첫 참배를 나선다. 신사는 집에서 십 분 정도 떨어진 주택가 한 모퉁이에 있다. 참배하러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근처 사람들인 것 같다. 신전에 아내와 나란히 서서 합장을 하지만 새해를 기원하는 마음은 각각이다. 구키는 우선 올 한해가 편안하고 건강하기를 빈다 그리고 린코와의 사랑이 더욱 깊어지고 오래 계속되기를 빌고 또 빈다. 옆에서 합장하고 있는 아내의 올해 소원은 무엇일까. 맡은 일이 순조롭게 잘되게 해달라고 빌고 있을까 아니면 손자를 안아볼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있을까. 어쩌면 구키가 모르는 어떤 비밀을 소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참배를 마치고 길흉을 점치는 제비를 뽑아보니 아내는 대길이고 구키는 소길이다. 아내는 모처럼 대길을 뽑아서 그런지 얼굴에 미소를 머금는다. 구키는 소길을 뽑았지만 그다지 마음에 걸리지는 않는다. 어쨌든 그것으로 아내에 대한 도리를 다한 것 같은 느낌이다. 집으로 돌아온 구키는 외출준비를 한다.

"상무님 댁에 다녀올게."

새 양복으로 갈아입고 상사에게 새해인사를 간다고 했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 저녁 여섯시에 요코하마의 호텔에서 만나기로 린코와 약속을 해두었다. 올해 들어 첫 만남이다. 연말에 친정아버지를 여읜 린코는 설날을 요코하마의 친정에서 보냈을 것이다. 대부분의 재산은 이미 그녀의 오빠에게 돌아간 모양이다. 린코는 혼자 남겨진 어머니가 쓸쓸한 것 같아 함께 있어드리겠다고 했다. 전화로 그런 얘기를 듣는 순간 구키는 린코의 남편이 궁금해졌는데 오히려 린코가 먼저 물론 나 혼자서라고 말한다. 린코의 남편은 집으로 돌아간 것일까. 남편과 함께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 구키는 기분이 가벼워진다. 구키가 만나자고 했을 때 린코는 시간이 없다는 등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만나기를 꺼려했다. 며칠 전의 정사 때문에 아직도 그 죄의식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그때는 정말 미안했어."

구키는 몇 번이고 거듭 사과를 한 끝에 겨우 초사흘 저녁에 만날 약속을 받아낸다. 장소는 미나토미라이의 호텔 로비이다. 해가 바꿔면서 처음으로 약속을 받아냈지만 구키는 불안하다. 그래도 그녀가 알았다고 대답한 이상 꼭 올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정월이라 로비에는 기모노를 차려 입은 여자들이 많고 흥청거리는 분위기다. 설이 지난 지 삼일째라 그런지 연휴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가족들도 있다. 구키는 로비 끝에 있는 소파에 앉아 물끄러미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약속 시간 6시가 가까워진다. 린코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안절부절 못하고 입구 쪽으로 눈을 돌리자. 천천히 돌아가는 회전문 사이로 기모노 차림의 여자가 보인다. 구키는 튕기듯 일어나 회전문을 막 빠져나오는 린코에게 다가간다. 하얀 바탕의 기모노에 자줏빛 오비를 두르고 손에는 모피숄을 들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자 기모노의 앞가슴에서 옷자락까지 매화꽃과 가지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문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키는 린코를 마주 보며 인사를 한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기모노가 정말 아름다워 ."

린코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약간 숙인다. 린코를 마지막 만난 날 밤 창백한 표정으로 가버릴 때의 파리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식사는 위에 올라가서 하지."

구키는 요코하마의 지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아예 호텔 레스토랑에 예약을 해두었다. 스카이라운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올라가 창가자리에 앉는다. 아직 연초인 데다가 설날 분위기가 남아 있어서인지 가족 동반 손님들이 많다. 구키는 주위 시선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다. 린코도 불편한 기색이 없다. 그만큼 두 사람 모두 익숙해져 있어 대담해진 건지도 모른다. 구키는 요리를 주문하고 세리로 건배하고 나서 새삼 린코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혹시라도 오지 않을까 봐 걱정했어."

"왜 그런 생각을 했죠?"

"아니. 그저....."

그날 밤 그녀를 강요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린코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다소 마음이 가벼워진다.

"설날에는 친정에 있었나?"

". 어머니를 돌봐드리고 있었어요."

린코가 남편과 떨어져 있었다는 것은 이것으로 충분히 확인이 된 셈이다

"이제 좀 괜찮아?"

"집은 그런 대로....... 하지만 아직 어머니가 쓸쓸하신 것 같아요"

갑작스런 죽음이었기 때문에 린코의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아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당분간은 보살펴드려야겠군."

"그럴 생각이에요."

구키의 미묘한 심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린코는 시원스럽게 대답한다. 살짝 진 굴 요리에서 샴페인 향이 난다. 구키와 린코는 화이트 와인으로 건배를 한다.

"그로부터 1년이 되는군."

구키는 작년 설날에도 린코를 만났다. 그러나 그때는 식사를 같이할 정도였지 이런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1년 동안 두 사람에게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적어도 작년 1월의 시점에서 보면 린코와 이렇게 깊은 사이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한 해였어."

같은 1년이지만 어떤 사람은 선명하게 기억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모를 정도로 무의미한 경우도 있다. 그런 점에서 작년 한해는 구키의 평생에 가장 잊을 수 없는 1년이 될 것이다.

"날씨가 좀 풀리면 아타미에 한 번 더 가볼까?"

작년. 린코와의 첫 관계는 아타미에 매화를 보러 간 후에 맺어졌음을 기억한다. 아타미의 매화 전경은 오래 전부터 보고 싶었다. 우연한 기회에 린코에게 권했더니 선뜻 응해주었다. 둘은 이른 봄날에 흐드러진 매화를 만끽했다. 그리고 도쿄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바에서 술을 마셨다 구키는 린코를 그대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를 호텔로 유혹했다. 그 전에도 가졌던 둘만의 밀회 덕분인지. 아니면 칵테일의 취기 탓인지 거부하지 않고 구키를 받아들여 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싱싱하고 순진했던 그 첫날밤의 기억을 더듬으며 구키는 새삼 린코를 바라본다.

"기모노가 정말 잘 어울려."

왼쪽 가슴에서 오비까지 매화꽃이 넘치고 있다 벚꽃의 화려함에 비해서 매화의 은은하고 단아함이 린코의 이미지를 그대로 전한다.

"설에 입으려고 작년 연말에 만든 거예요."

둘의 첫 관계를 맺어준 것은 매화였다. 그래서인지 매화가 넘쳐흐르는 기모노를 입고 나온 린코의 모습에 구키의 마음은 연초부터 흔들린다. 린코는 수프를 천천히 떠먹고 있다. 팔꿈치를 약간 펴고 수프를 뜨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넋을 잃고 바라보던 구키가 중얼거린다.

"역시 당신은 벚꽃보다는 매화의 이미지가 어울려."

"무슨 뜻이에요?"

린코가 스푼을 든 채 묻는다. 벚꽃은 확실히 아름다워. 하지만 너무 화려해서 과장된 느낌이지. 그러나 매화는 애잔해서 강요하는 듯한 느낌은 전혀 없지."

"너무 수수한가."

"아니. 기품 있고 산뜻해."

"옛날에는 매화가 꽃 중의 꽃이었죠."

"나라시대까지는 분명히 매화였지만 헤이안 시대에 들어와서는 벚꽃의 인기가 더 높아졌어. 그러나 꽃과 동시에 가지까지 감상하기에는 역시 매화가 제격이지."

린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모노의 옷자락으로 눈길을 옮긴다.

"이 아래쪽은 나뭇가지만 있을 뿐 꽃은 없잖아요."

"'벚나무는 꽃을 그리고 매화는 가지를 그린다'라는 옛 서화가들의 말도 있지. 매화의 매력은 역시 그 늠름한 가지에 있나 봐."

구키는 하나의 시구를 생각해낸다.

"매화를 노래한 것으로 아주 좋은 구절이 있어 '한 줄기 매화.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그 단정함이여'. 이시다 하교의 시구야."

말하고 나서 린코가 아버지를 여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그렇다고 굳이 죽은 사람에게 어울린다는 것은 아니고. 매화에게는 뭔가 정갈하다고나 할까 장엄한 느낌이 있잖아. 벚꽃이라면 정에 흐르기 쉬운 연약함이 있는데. 매화는 조용하고 긴장된 그 사람의 분위기를 자아내거든."

"느낌은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이상해."

"왜요?"

"아니. 갑자기 어떤 생각이 스쳐서..... ."

순간 구키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린코의 흐트러진 모습이다. 그것을 매화라 해야 할까. 벚꽃이라 해야 할까 만일 매화에 비유된다면 아래위로 넘실거리며 난무하는 가지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머리를 스쳐간 요사한 생각을 떨쳐내듯이 구키는 오리 구이를 나이프로 자르면서 묻는다.

"올해의 첫 참배는?"

"상중이잖아요. 당신은?"

되묻는 바람에 구키는 아내와 함께 갔었다는 사실을 덮어둔다.

"참배는 했는데 제비를 뽑아봤더니 소길이었어."

"작년에도 그랬죠?"

"용케 기억하고 있군."

1년 전. 구키와 린코는 아카사카의 히에 신사에 함께 갔었다. 110일이어서 첫 참배라기에는 늦은 감이 없지는 않았다. 함께 신전에서 합장하고 나서 제비를 뽑아보았다. 서로의 길흉을 점치면서 금세 친해졌던 기억이 난다.

"올해 신사참배는 안 갈 건가?"

"가고 싶긴 하지만 삼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구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묻는다.

"남편은?"

"그 사람은 안 가요."

너무나 단정적인 말투에 구키는 나이프를 든 채 말한다

"아무리 상중이라지만 장인상인데 어째서?"

"그런 게 아니라 그 사람은 원래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쓸데없는 짓이라니?"

"첫 참배나 제비뽑기 같은 건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의사니까 아무래도 사고방식이 과학적이겠지."

"그럴까요?"

린코의 툭 내던지는 말투에 구키는 화제를 바꾼다.

"요코하마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야?"

"내일 돌아갈 거예요."

"그렇게 빨리?"

구키는 아직 이삼 일은 더 있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뜻밖의 말에 놀란다.

"대학은 아직 방학 중이잖아?"

린코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명랑하게 말한다.

"그게 아니라 고양이가 절 기다리고 있어요."

린코가 키우는 고양이가 히말라얀 종이라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고양이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구키는 또다시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면 그 동안 남편도 집에 없었나?"

"설날은 자기 집으로 갔을 거예요. 그 다음날부터는 집에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러면 혼자서 빈집에... "

"그 사람은 자기 서재가 아니면 마음이 불안하대요. 책에 둘러싸여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니까."

"학자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

린코는 대답하지 않는다. 구키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덧붙인다.

"남편이 집에 있다면 고양이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아무런 도움도 안 돼요. 생물 따위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의사잖아."

"그래서 더욱 고양이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거예요. 작년에도 우리 자자가 오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병원에 데리고 간 적이 있어요."

자자는 고양이의 애칭인 모양이다.

"그랬더니 병원에 가봐야 소용없다. 어차피 진단이라야 적당히 하고 낫지도 않을 치료를 할 테니까 내버려두라는 거예요. 하지만 제가 우겨서 병원에 데리고 갔다 온 후 좀 나아졌어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치료비가 비싸다나요."

"그래. 개나 고양이는 의료 보험이 안 되기 때문에 상당히 비싼 것은 사실이야."

구키가 한마디 거들자 린코가 어깨를 움츠리고 반문한다.

"그렇다고 괴로워하는 고양이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그럼. 당연하지. 고양이도 가족과 다름없으니까."

"그 사람에게 고양이를 맡겨뒀다가는 언제 실험용 동물이 될지도 몰라요."

"설마...... "

"아무튼 그 사람은 나하고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에요."

소멀리에가 와서 린코와 구키의 글라스에 와인을 따르고 간다. 구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저 아래 세상은 온갖 빛의 소용돌이에 휘감겨 있다. 그 하나하나의 불빛 아래 사람들이 살고 있고. 남녀가 짝을 지어 숨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어쩐지 묘하고 기분 나쁜 느낌마저 든다. 저 불빛 아래에는 다정한 커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커플도 있을 것이다. 그 중 린코와 남편의 커플은 원만하지 못한 축에 들지도 모른다.

수없이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구키는 어떤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린코는 왜 나 같은 남자를 사귀는 것일까. 따분한 남편의 눈을 잠시 속이며. 유부녀로서 가슴 설레임을 느끼기 위해서 잠깐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린코가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따분한 심심풀이로 어떤 설레임을 갈구하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린코의 말에 의하면 남편은 첫 참배나 제비뽑기 따위를 쓸데없는 짓으로 간주하는 사람이고,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아주 냉정한 사람이다. 그래서 고양이를 귀여워하는 린코를 이해하지 못한다. 걸핏 사소한 의견 차이 정도로 보이지만 막상 당사자들에게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론이나 이치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이나 가치관이 서로 맞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쉽사리 타협하기도 납득하기도 어려운 문제이다. 린코의 남편은 젊은 나이에 교수자리에 올라선 수재일 뿐 아니라 외모도 수려하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 속에 잠재된 성격이나 감각이 린코와 서로 맞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남편에 대한 불만이랄까 어떤 위화감이 린코의 마음을 다른 데로 향하게 했고 그래서 결국 구키와 가까워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야경을 바라보며 구키가 상념에 잠겨 있자 린코도 창가에 몸을 가볍게 기대고 밤거리를 내려다본다. 순간. 자신의 마음속을 린코가 꿰뚫어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서둘러 창에서 시선을 거두자 뒤쫓듯이 린코도 창에서 눈을 돌린다.

"남편과는 여러 가지 힘든 문제들이 있었군."

"죄송해요.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린코는 말꼬리를 흐리며 구키의 표정을 살핀다.

"아니. 말해줘서 오히려 고마워 "

남의 불행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린코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어쨌든 오늘은 연초니까."

화제를 바꾸려는 듯 구키가 와인글라스를 들자 린코도 가볍게 글라스를 부딪친다.

"행복한 한해가 되기를......."

건배를 하고 구키는 정색하며 묻는다.

"올해는 어떻게 보낼까?"

"우리들 말이에요?"

". 올해는 좀 더 자주 만나고 싶고. 또 여행도 좀 더 많이 하고 싶어."

린코가 물론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구키는 한마디 더 덧붙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오래 함께 있고 싶어 "

그리고 확인하듯 다시 묻는다.

"정말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요."

린코는 선선히 대답하고 확인하듯 되묻는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우린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다니?"

"우리들 ......"

솔직하고 날카로운 질문에 구키는 당장 대답이 궁해진다. 적당히 둘러대는 것이 통한다면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지만 린코에게 그런 애매한 대답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남자가 좀 더 자주 그리고 오래 함께 하기를 바라고 여자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서로 굳게 맹세하며 둘만의 사랑에 한껏 빠져들고 싶다. 그러나 한 발 뒤로 물러나 냉정한 자세로 '그렇다면 우리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는 순간 엄격한 현실이 되살아나서 대답이 궁해진다. 여자가 그런 질문을 던질 때. 모처럼 사랑에 흠뻑 취해 있는데 그런 걱정을 왜 하느냐고 되묻는 남자도 있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 꿈만을 좇는 로맨티스트처럼 보이는 그 남자는 어떤 대답도 필요치 않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실은 정반대이다. 너무도 확실한 대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예 눈을 딱 감고 앞일에 대해서는 모른 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린코의 경우는 다르다. 그런 애매한 대답은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고 흑백을 분명히 가리는 성격이기 때문에 어중간한 대답으로는 쉽게 납득하지 않는다. 이대로 두 사람이 더욱 불타서 격렬하게 사랑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함께 만나고 함께 여행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함께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진다면 그 종말은...... 두 사람이 더욱 견고하게 맺어질 것인가. 아니면 차마 볼 수 없는 수라장이 생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함께 나락의 저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인가.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추궁에 남자는 도저히 생각할 기력도 용기도 없어 그대로 화제를 바꾼다.

"오늘은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지?"

"이대로 이 호텔에서 묵자."

여자의 질문에는 아무 대답도 못하면서 하룻밤을 함께 지내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남자는 자신에게 타이른다. 메인 요리가 끝나고 샐러드와 치즈가 나온다. 늘 그랬듯이 그들은 식사가 끝날 때쯤 되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안절부절 못했지만 오늘 밤은 이미 정해져 있다. 구키가 이대로 여기 묵자라는 권유에 린코는 명확한 대답은 안하지만 그렇다고 싫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여자의 망설임을 눈치 챈 구키는 이럴 때는 재빨리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마음먹는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구키는 카운터로 가서 프런트에 전화한다.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더블 룸을 주십시오."

며칠 전 이 호텔에서 린코를 만났을 때는 그녀가 밤중에 돌아갔기 때문에 구키도 곧 방을 나와 버렸다. 그래서 새벽녘의 바다를 볼 수 없었다. 그때의 아쉬움 때문은 아니지만 오늘 밤은 둘이서 아침까지 함께 지내고 싶다. 예약을 마친 후 구키는 좌석으로 돌아와서 린코에게 말한다.

"숙박할 수 있도록 방을 부탁해뒀어."

"하지만....."

"이미 예약해버렸는걸."

이제 와서 린코가 돌아가 버리면 구키는 맥이 빠져버릴 것 같다.

"올해 들어 우리 둘만의 첫 만남이야."

구키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린코의 손을 살며시 잡는다.

"오늘도 기모노를 입고 와서 다행이야."

그날 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린코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다.

"다시는 안 그럴게."

그때는 시간이 없었지만 오늘 밤은 아침까지 함께 지낼 시간의 여유가 있다.

"이대로 방으로 가자."

"꼭 자고 가야 되나요?

"물론. 이제 돌려보내지 않을 거야."

"올해도 난 당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군요."

남자에게 확인하는 말 속에는 오히려 린코 자신의 자조가 담겨있다. 식사가 끝나고 홍차에 아르마냑을 부탁하자 린코는 사양하려한다. 그러나 구키는 개의치 않고 따르도록 한다.

"이 정도는 괜찮아."

린코는 알코올에 약하다. 아주 못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마셔도 취한다. 그래서 지금 마신 브랜디는 조금 후 그 효과를 확실하게 보여줄 것이다. 어차피 오늘 밤은 이 호텔에서 묵을 예정이어서 술을 마시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다. 단지 방으로 들어가 기모노를 벗을 기력만 있으면 된다. 다음 일은 그저 남자에게 맡겨두면 된다.

"저쪽이 치바 쪽인가 봐요."

구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린코는 창 저편을 가리킨다. 눈 아래로 넘치는 불빛 저편에 검은 바다가 펼쳐져 있고 그 앞으로 작은 불빛들이 가는 띠처럼 이어져 있다.

"아마 저쪽에서 해가 떠오를 거야."

요코하마에서 본다면 치바는 동쪽 방향이 된다.

"설날의 해돋이는?"

"보고 싶었지만 아직."

"그럼 내일 함께 보자."

구키는 린코를 품에 안은 채 아침 해를 맞이하는 상상을 한다.

"아마 침대에서 볼 수 있을 거야."

"그런 짓하면 천벌 받아요."

신성한 신년의 해돋이를 침대에서 누운 채 맞이하는 것이 불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부도덕의 매력도 희미하게 깃들여 있다.

"이제 올라갈까?"

구키는 음심이 밀려와 린코를 재촉한다.

"잠깐만요."

친정집에 전화를 거는 것일까. 아니면 도쿄 집에 전화를 거는 것일까. 오늘 밤 돌아갈 수 없게 된 변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금 후. 린코는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온다.

"꼭 묵어야 하나요?"

"물론."

구키가 단호하게 말하자 린코는 잠시 생각하더니 약속받는다.

"그럼 아침 5시에는 돌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그녀가 정말로 5시에 돌아간다면 같이 해돋이를 볼 수는 없겠지만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고 구키는 일어난다.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지 한 걸음 뒤진 채 따라온 린코가 방으로 들어오자 보이가 키를 두고 나간다. 구키는 린코의 몸을 으스러지게 껴안는다.

"너무도 그리웠어....."

며칠 전의 아쉬운 밀회를 오늘 밤은 그 물까지 벌충시킬 작정이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를 체념시키기 위해서는 우선은 오비를 풀어야 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꼭 그 방법을 흉내 낸 것은 아니지만 둘의 격렬한 포옹 후 어느새 오비는 저절로 풀려 바닥으로 드리워진다.

"잠깐만."

린코도 알아차렸는지 침실로 가서 스스로 오비를 풀기 시작한다. 이제 안심이다. 적어도 '돌아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구키가 한숨 돌리고 소파에 앉자 린코는 기모노를 옷장에 넣고 욕실로 들어간다. 구키도 가운으로 갈아입고 시계를 보니 9시가 채 안 되었다. 린코는 내일 아침 일찍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직 시간은 충분히 있다. 방을 둘러본다. 두 개의 방은 앞쪽이 거실로 꾸며져 있다. 벽 쪽으로는 긴 소파와 테이블이 있고. 창가에 서재용 책상이 놓여 있다. 소파 뒤의 벽면 거울은 방 내부를 이중으로 비추도록 되어 있다. 또 거실로 이어지는 침실에는 킹사이즈의 더블 침대가 놓여져 있고 넓은 창문은 침대에서 내다볼 수 있도록 시원스레 트여있다.

날이 밝으면 저 어둠 속에 잠긴 바다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그 해돋이를 둘이 함께 맞이하기 위하여 스위트룸으로 잡은 것이다. 린코가 해돋이 전에 가버린다면 아무 보람도 없겠지만. 구키는 침실의 조명을 낮추고 거실의 거울에 매달려 있는 조명만을 밝혀둔다. 베드인을 앞두고 남자는 소년처럼 가슴을 두근거리며 무드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이윽고 욕실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린코의 모습이 나타난다. 어떤 모습일까 기대했는데 린코는 하얀 나가지방에 다테마키(여성용의 폭 좁은 속띠)를 매고 머리는 위로 말아 올렸다.

"아무래도 과음했나 봐요."

샤워를 하면서야 자신이 생각보다 많이 취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약간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린코를 구키는 가볍게 껴안는다.

"괜찮아."

술에 취한 채 샤워를 마치고 나온 여자는 너무도 요염하다. 구키는 비틀거리는 린코의 상체를 부축해주며 거울 쪽으로 간다. 불빛이 눈부신지 린코는 얼굴을 돌려 구키의 팔 속에 얼굴을 묻는다. 그러나 자신의 뒷모습이 거울에 비춰지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른다. 물론 구키는 시치미 뗀 채 그저 린코의 뒷모습을 즐긴다. 말아 올린 머리 밑으로 가녀린 목덜미가 이어지고 완만한 어깨를 지나 잘록한 허리에 이르면 부드럽고 통통한 엉덩이가 보인다. 긴 나가지방을 입고 있지만 희미하게 속이 비쳐서 몸의 윤곽이 손에 잡힐 듯하다. 거울 속의 린코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구키는 엉큼한 생각이 머리를 쳐든다. 취기가 오른 린코가 온몸으로 기대어 오자 구키는 한쪽 손을 나가지방의 옷자락 앞으로 살며시 들이밀어 허리 뒤쪽 언저리까지 돌아간다. 그리고 잠시 체온을 음미하며 천천히 원을 그리듯이 애무한다.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사이에 나가지방의 옷자락이 서서히 올라가. 그 밑으로 두 다리가 무릎에서 허벅지까지 드러난다. 린코는 나가지방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모양이다. 희미한 조명 아래서 걷어 올린 나가지방의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통통한 엉덩이에 구키의 눈길이 고정된다. 너무 강한 시선 때문이었을까. 구키의 품에 안겨 있던 린코가 뭔가를 느낀 듯 뒤돌아보려 한다. 구키가 서둘러 나가지방의 옷자락을 내리지만 이미 늦었다.

"싫어."

남자의 팔에서 빠져나온 린코는 비로소 뒤에 거울이 있다는 것을 안 모양이다

"나쁜 사람."

약간의 취기로 남자 품에 안겨 기분 좋은 애무를 받고 있는데 그것이 거울에 비친 엉덩이를 보기 위한 남자의 수법임을 알아차린 여자는 정말 화가 난 듯 남자에게 일격을 가한다. 날카로운 열 손가락이 구키의 얼굴을 덮친다.

"잠깐. 잠깐만......."

지금까지 팔 속에 기대어 있던 모습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반격에 구키는 침실 쪽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달려드는 린코를 두 팔로 막아낸다.

"비겁해요. 교활해요."

여전히 손을 버둥거리는 린코의 작은 몸을 번쩍 들어 안고서 구키는 침대로 향한다. 전반전은 여자의 공격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남자의 반격이 시작된다. 번쩍 안고 왔던 여자를 침대에 내던지자 출렁이는 쿠션을 받으며 여체가 침대에 묻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위에서 덮어씌우듯이

내리누른다.

"놔줘......."

여자는 여전히 버둥거리지만 그럴수록 와인과 브랜디의 취기가 밀려와서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자아. 이제 항복해."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듯이 귓전에서 타이르던 남자는 느닷없이 다테마키를 풀고 나가지방의 앞을 벌린다. 순간 옷깃 사이로 유방이 튀어나온다. 린코의 유방은 크지 않지만 둥글고 탄력이 있다. 갑자기 튀어나온 탓인지 멍하니. 어쩔 줄 몰라 망설이는 모습이 더없이 요염하다. 린코가 가슴을 여미려고 하지만 구키는 재빨리 그 손을 잡아서 양 옆구리로 가져간다. 그래도 다시 여미려는 손이 돌아온다. 그렇게 몇 번이고 되풀이하다가 겨우 동작이 멈춘다. 몰래 거울을 통해 엉덩이를 훔쳐본 남자에게 화를 내봤지만 섣불리 난폭하게 날뛴 탓에 취기가 더욱 심해져 전신이 나른해지면서 이제 더 이상 거역할 힘이 없다. 어쩌면 그것은 린코가 바라던 건지도 모른다. 말은 않지만 린코는 오늘 밤 집에서 나오기가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상을 당해 철야를 해야 하는 날 밤에 호텔에서 음란한 모습으로 남자에게 몸을 허락했다. 그리고 지금 그런 요구를 한 죄 많은 남자를 다시 만나고 있는 것이다. 린코는 스스로에게 질리고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죄 많은 자신을 잊기 위해서는 취해서 난폭하게 날뛰고 그렇게 해서 정신도 몸도 녹초가 되도록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은 거부했지만 상대의 강제적인 요구에 어쩔 수 없었다라는 명분마저 없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올해 들어 처음이야."

구키는 이젠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린코의 귓가에 속삭인다.

"이런 것을 뭐라고 하는지 알아?"

"히메하지메(새해 들어 처음으로 하는 성교)라는 거야."

두 사람 모두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으면서도 정초에 맺어지는 상대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데 대해 두 사람은 죄의식과 더불어 배반의 기쁨도 느끼고 있다. 맺어지기까지의 망설임이 깊은 만큼 맺어지고 나서의 흐트러지는 모습 또한 걷잡을 수 없다. 조금 전 그렇게도 거역하던 린코의 입에서는 거짓말처럼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고.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몸부림치며 절정을 향해 오른다. 여체가 열락으로 빠져드는 모습에 구키도 하마터면 절정에 이를 뻔했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억제하며 린코만을 열락의 고개로 이끈다. 린코는 '그만'이라는 말과는 정반대로 연거푸 절정으로 치닫더니 기력이 다했는지 서서히 침대 속으로 가라앉는다. 만족의 여운이 가져다주는 가벼운 경련을 린코는 남김없이 만끽하고 있다. 구키는 흠뻑 땀이 밴 여체를 팔로 감싸 안으며 린코의 감각이 더욱 깊어진 것 같아 숨을 삼킨다. 그렇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깊고 풍요롭게 변모해 가는 여자의 몸이란 무엇인가. 처음에는 그 다채롭고 풍요로움에 감동하고 때로는 아연실색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격렬한 몸짓이 어쩐지 불안하다. 불안은 린코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새해부터는 당신을 그만 만날 생각이었어요."

"설마......."

"저는 늘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몸이 말을 잘 안 들어서......."

오늘 밤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린코의 몸 덕분이었는가. 구키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래서는 안 돼. 빨리 청산해야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제 몸은 어느새 당신을 만나고 있어요."

린코는 구키에게 말하고 있지만 실은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마음속으로는 만나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늘 몸에 끌려가는 바람에...... "

남녀 관계에 있어서 육체관계가 정신적 교감보다 훨씬 더 강할지도 모른다. 단순히 여자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것뿐이라면 육체의 매력만으로도 충분하며 아무런 불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몸과 마음이 서로 잘 어우러져야 깊어지는 것이 아닌가. 구키는 약간 심술을 부리며 물어본다.

"전에는 이런 식이 아니었나?"

"달라요."

"그때는 남편하고......."

구키가 입 속으로 우물거리자 린코는 정색하고 되묻는다.

"이런 얘기 들어도 싫지 않아요?"

"전혀."

"정말이죠?"

린코는 다짐하고 나서 말한다.

"부부 사인데 왜 섹스가 없었겠어요. 가끔이지만 있었어요. 다만 어떤 느낌이란 게 없었죠. 그저 섹스란 이런 것이려니 하고 살았는데 그때 당신이 나타났어요. 그래요.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변하기 시작했어요."

"그 뒤로 남편하고는."

"없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남편이 참아주나?"

"그건 모르겠지만 내가 받아들일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실례인 줄 알면서도 구키는 물어본다.

"남편의 어디가......."

"그걸 제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어요. 그 사람의 목소리? 피부?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예요."

"아무리 요구해 와도?"

"여자의 몸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아요. 남자처럼 그렇게 헤프지가 않다구요."

확실히 섹스에 관해서라면 여자 쪽이 융통성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럼 남편은 어떻게 해결할까?"

"몰라요."

린코는 쌀쌀맞게 말하고 나서 다시 구키를 쏘아보며 말한다.

"당신이 쓸데없는 걸 가르쳐주었기 때문이에요."

구키는 할 말을 잃는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가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섹스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책임이 남자 탓만은 아니라고 구키는 속으로 항변한다.

"우린 궁합이 맞는 거야."

린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두 번째부터인가. 큰일이 닥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큰일?"

"그래요. 뭔가 밑도 끝도 없는 깊은 미지의 세계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어서 무서웠어요."

행인지 불행인지 남자는 거기까지 느끼지 못한다.

"그럼 여기도...... "

구키는 살짝 린코의 유방을 만진다. 둥글고 예쁜 유방은 이전 그대로지만 만졌을 때의 반응은 지난 1년 동안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여자의 몸은 변하게 마련이야."

"하지만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그게 나쁜가?"

"나빠요. 아무것도 몰랐던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렸으니까."

"그렇지만 쾌락을 맛볼 수 있게 되었잖아."

"덕분에 이젠 돌이킬 수 없어요."

린코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유방을 주무르고 있는 구키의 손을 꼭 누른다.

"이젠 절 책임져야 해요."

"어떤 책임?"

"이제 내겐 당신밖에 없어요. 당신 말고 다른 사람과는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단 말예요."

그리고는 느닷없이 손등을 꼬집는다. 구키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다.

"아얏?"

여자 입에서 갑자기 '당신 외에는 만족할 수 없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남자라도 기쁨으로 가슴이 설레고 여자가 더욱더 사랑스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한발 더 나아가 이런 몸으로 만들어버린 책임을 지라고 한다면 순간 곤혹스러워진다. 말할 것도 없이 섹스는 남자와 여자 둘이서 완성시켜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만 책임을 전가하면 곤란하다. 게다가 구키 자신도 린코와의 섹스에 빠져 있다. 여자처럼 '당신 이외에는......' 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 린코와의 섹스에 열중하고 빠져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공범자. 다시 말해서 같은 죄인이 아닌가. 그러나 구키는 역시 남자의 책임이 더 무거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원래 여자의 성감은 남자에 의해서 촉발되고. 차츰 개발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남자가 접근하여 자극하지 않으면 여자의 성은 영원히 눈을 뜰 수 없다. 이에 반해서 남자는 선천적으로 성감을 몸에 지니고 있다. 소년기에 접어들면 저절로 사타구니 사이의 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만지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서 자위를 하게 되고 격렬한 쾌감을 느끼며 사정한다. 그 과정은 여자의 도움 없이도 가능하고 게다가 그 쾌락은 여자와 접해서 얻는 기쁨과 거의 다르지 않다. 물론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설프게 여자와 접하느니 혼자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정신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쾌감만을 놓고 봤을 때. 남자의 성은 여자의 유도로 눈을 뜨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남자의 성이 처음부터 자립적인 데 비해서 여자의 성은 잘 맞는 남자에 의해 개발되어 길들여져 비로소 성숙한 한 여자로 완성되어간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렇게 된 책임을 지라고 하는 린코의 요구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구키는 다소 과장된 제스처로 꼬집힌 손등을 어루만진다.

"갑자기 이렇게 꼬집다니 너무 심한데."

"심하지 않아요."

린코는 구키의 꼬집힌 손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내가 당신 말고는 만족할 수 없게 된 것을 고소해하고 있죠? '

"좋아하고 있다고 알지만 기쁘게는 생각하고 있어."

"나는 분해요. 당신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그렇지 않아."

"아니에요. 이대로 당신의 노예가 돼버리고 말 거예요."

린코는 별안간 일어나더니 엷은 핑크빛 매니큐어를 칠한 손가락으로 구키의 목을 옥죄인다.

"당신은 어때요? 당신도 내가 아니면 절대로 안 되나요?"

"물론 그렇지."

"거짓말이에요."

린코의 두 손이 구키의 목을 더욱 휘감는다.

"아냐. 정말 맹세하지만 당신 외엔 할 수 없어."

'거짓말은 용서 안 해요."

"거짓말이 아냐."

순간 열 개의 손가락이 목을 조인다.

"이봐. 이봐......."

처음에는 장난으로 생각했는데 린코는 아랑곳 않고 목을 힘껏 누르면서 조여 온다.

여자의 힘치고는 너무 세게 옥죄어오는 바람에 구키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캑캑 한다.

"이 손 좀 놔......."

"안 돼요."

"제발 그만...... "

목을 휘감았던 여자의 손에서 간신히 풀려난 구키가 몇 번 기침을 캑캑 한다

"너무 심했어. 그렇게 하면 정말 죽는다구."

"죽는 게 나아요."

구키는 목 언저리에 손을 대본다. 자국은 나지 않았지만 압박당한 감각은 여전히 생생하다.

"정말 사람 놀래키는군."

구키는 중얼거리며 몇 번이고 목 언저리를 손으로 문지르고 침을 삼킨다. 그런데 갑자기 구키의 몸속에서 요사스러운 감각이 솟구쳐 오른다. 바로 조금 전 린코가 '분하다'고 말하며 목을 조여 왔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린코는 의외로 본심을 담아 목을 강하게 조여 왔다. 그때 구키는 이대로 아주 먼 세계로 끌려가는 것은 아닐까 불안을 느꼈지만 동시에 달콤한 어떤 감각에 사로잡혔다. 정말 죽는가 하는 공포가 밀려들며 한편으론 차라리 이대로 의식을 잃어도 좋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도 사실 있었다. 도대체 그런 마음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스스로도 의아해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린코가 침묵을 깨고 말한다.

"당신이 미워요."

"전엔 좋다고 하더니 ......."

"그래요. 당신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이 미워요."

린코가 정색하며 말한다.

"그날 밤 제 기분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아요?"

"철야하던 날 밤?"

"그때 그런 짓을 하고.."

"집 식구들이 눈치 챘나?"

'머머니는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았어요. 그래도 차마 그런 짓을 하고 돌아왔다고는 상상을 못하셨겠지요. 하지만 아버지께 죄송스러워서......."

구키는 할 말이 없다.

"생전에 나를 그렇게 사랑해주신 아버지 상중에 그런 짓을 하다니...... 이제 난 틀렸어요. 어떤 천벌을 받아도. 지옥에 떨어져"

등을 돌린 채 린코는 목이 메인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

"내가 나빴어."

"당신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내가 그런 짓을 하다니. 나 자신이 믿기지 않아서......."

"당신이 그렇게 후회하고 있는 것을 알면 아버지도 용서해주실 거야."

아무튼 지금은 위로의 말밖에 할 수 없다.

". .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구 어쨌든 좋았잖아?"

약간 익살맞은 말투로 말하자 린코는 갑자기 등을 획 돌린다.

"그만해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좋았다니 ......."

그날 린코는 둥글고 사랑스러운 엉덩이를 흔들며 미친 듯이 치달았던 것을 구키는 기억한다.

"몹시 흥분한 것 같더군."

"그만하라니까....."

여자가 부끄러워할수록 남자는 오히려 짓궂어진다.

"한 번만 더 엉덩이를 보여줘."

뒤에서 속삭이며 내뿜는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는지 린코는 고개를 움츠리고 날카롭게 말한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아니. 할 거야."

철야를 하는 밤에 그런 짓을 하고 이제 와서 반성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구키는 더욱 가학적인 기분이 되어 린코의 어깻죽지에 가볍게 이를 대고 으른다.

"먹어버릴 거야."

"안 돼. 이상한 짓 하지 말아요."

고개를 젓는 린코를 뒤에서 껴안아 부드러운 엉덩이를 두 손으로 당기자 그에 맞추듯 린코도 둥근 엉덩이를 살짝 내민다. 입으로는 가부하고 있지만 육체는 오히려 도발적이다. 그 부드러운 피부를 구키는 살짝 손으로 매만진다.

"매끈매끈해 ."

"싫어요."

"이렇게 매끈거리면 얼마나 기분 좋은지 알아?"

"그래요?"

린코는 약간 자신이 생겼는지 엉덩이를 바싹 기대온다. 바로 조금 전에 린코와 맺으면서 필사적으로 참았던 인내가 지금 그 효과를 발휘하는가 보다. 구키는 단단하게 되살아나는 자신을 느낀다. 린코 같은 여자를 대할 때는 할 때마다 남자가 함께 치달아버린다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여자를 뜨겁게 타오르게 하고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절정이 가까워져도 억제하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렇게 참으면서까지 여자와 접해봐야 소용없다. 원래 섹스란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인데 절정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절묘한 맛이 없다면 무의미하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키의 생각은 다르다. 섹스란 단순히 생식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며. 쾌락의 공유이며. 나아가서는 남자와 여자가 창조해 나가는 사랑의 문화이다. 따라서 성이란 남자만의 논리에 의해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여자의 요구에 따라 구키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 돼."

린코는 여전히 거역하고 있지만 욕심 많은 화원은 이미 촉촉이 젖어 있다. 몸이 마음을 저버린다는 말이 있다. 이런 짓을 하고 있으면 안 된다.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만 육체의 유혹에 빠져 음란한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상태를 빗댄 말일 것이다. 더러는 그런 행위를 몹시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좀 더 냉정한 이성으로 그런 지경까지는 가지 말았어야 한다고 조소하는 여자도 있다. 모두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이란 게 어디 꼭 이치에 맞도록 행해지는 것인가. 린코가 지금 이성과 냉정을 잃어버린 것은 사실이다. 자성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성의 기쁨이 압도적으로 강해서 그것을 능가하는 것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어쩌면 후자인지도 모른다. 온갖 후회와 반성을 뿌리치고서라도 린코는 여전히 눈앞의 절박한 사랑에 온몸을 태워버리고 싶다. 이제부터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이성도 지성도 아니고 몸 깊숙한 곳에 잠재해 있는 본능 그 자체가 눈을 떠서 난폭해지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불이 붙은 여자에게 논리나 상식 따위는 역설해봐야 소용없다. 모든 것을 알면서 여전히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여자에게는 이치를 역설하는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압도적인 쾌락의 화원이 내다보인다. 한없는 어지럼 속에서 절벽 밑으로 아득히 떨어지는 열락을 경험하면서부터 여자의 태도는 바뀐다. 점점 더 대담해짐과 동시에 새로 뽑힌 성의 엘리트로서의 프라이드마저 갖는다. 지금 린코는 바로 그 대담함 속에 있다. 그래도 여전히 헛소리처럼 중얼거린다.

"안 돼요....."

그것은 최후의 성채와도 같은 양심이지만 성은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다. 모든 승부는 패배했을 때보다는 패배를 자인했을 때가 더 괴롭다. 린코는 이미 마음이 육체의 유혹에 패배한 것을 안다. 그것을 인정한 순간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하늘 높이 열락의 화원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사랑의 자극은 하나를 체험하면 또 다른 자극을 찾아 나선다. 지금 구키와 린코도 그렇다. 철야하는 밤에 상복을 입은 모습으로 받아들인 가장 괴롭고 부끄러운 정사 후 두 사람의 감각은 보통을 뛰어넘는다. 거역하면서도 린코는 한껏 엉덩이를 내밀고 구키는 그것을 갖가지 말로 사랑하고 희롱하고 그리고 최후로 맺어진다. 바로 조금 전에 아슬아슬한 절정에서 실신하다시피 허우적거리며 절정을 맞았기에 또다시 타오르기 쉬운 것일까. 린코의 몸은 마른 나무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활활 타오르다가 최후에는 낮고 긴 소리를 죽이며 마지막 절정의 고비로 치닫는다. 마음은 끝까지 육체를 억제하지만 결국 대담하게 치닫고 만다. 그런 심신의 불균형이 사랑스러워 구키는 온갖 힘을 다하여 껴안는다.

정사가 끝난 후 남자들이 이제 볼일 다 봤다는 식으로 등을 돌리며 누을 때. 여자는 가장 큰 불만을 느낀다. 맺어질 때까지는 그렇게도 사랑을 구걸하더니 끝나는 순간 손바닥 뒤집듯이 냉담해지는 남자들에게 여자들은 무례함과 방자함을 느낀다. 그러나 정사 후 그렇게 급속하게 시들어가는 것이 남자의 생리임을 생각해본다면 그런 행동에 대해 조금은 이해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남자들은 솔직하게 터놓지 않기 때문에 여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다행스럽게도 구키는 이번에도 간신히 참았기에 아직 여력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그는 등을 돌리지도 않고 린코를 다시 한 번 가슴 속에 껴안으며 사랑의 여운이 서서히 가라앉기를 기다려준다. 어쩌면 린코가 구키에게 익숙해지는 건 행위 후의 따뜻한 배려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대로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자 이윽고 린코가 연못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활짝 눈을 뜨고 구키의 목을 뚫어지게 보면서 중얼거린다.

"또 달랐어요."

그 말을 들으면서 구키는 새삼 여자의 육체가 무서워진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남자의 모든 것을 폭 감싸주던 풍만한 여체가 돌연 정체 모를 요물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몇 번이고 계속 오르면서 그때마다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전보다 좋았어?"

"새로운 느낌이에요"

남자인 구키로서는 거기까지의 감각은 알 수 없다. 아무래도 린코는 여자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말하는 듯하다.

"그런 느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글쎄 ...."

구키는 오른손을 린코의 우거진 숲 위에 얹어놓으며 묻는다.

"이 앞쪽이지?"

화심 속에서도 특히 전면이 민감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린코의 경우 그 범위가 서서히 퍼져가는 것 같다.

"아까 당신이 조금 빼는 듯했을 때는 안타까우면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밀려와서..... "

전에는 오로지 깊숙한 곳만 요구하였지만 바로 앞에도 민감한 성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 가까이를 떠돌다가 가끔 빼기도 한다.

"당신이 들어오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뭔가 강한 힘에 이끌려 당신과 이어져 있어서 당신의 존재를 느끼고 이제 어떻게 되든 좋다는 그런......."

따뜻하고 부드럽고 낙지 발의 빨판과 같은 흡착력을 가진 그 은밀한 곳에 쾌락의 꽃봉오리가 숨겨져 있다가 일제히 거꾸로 서서 요동치는 것일까.

"그렇게 좋아져서 어떡하지?"

"모르겠어요."

린코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에게 타이르듯 중얼거린다.

"이대로 죽고 싶어요."

섹스의 절정에서 '죽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여자도 있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죽은 여자가 없는 것을 보면 그대로 죽어도 좋을 정도로 쾌감이 깊다는 뜻인지. 아니면 기쁨의 절정에서 죽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소망이 담겨져 있는 것인지 구키로서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여자만의 감각이고 남자는 도저히 느낄 수 없다. 구키 자신도 린코와의 섹스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고. 그런 감각에 치달아본 적도 없다. 다만 여자와 더불어 함께 이르고 모든 것을 방출한 후 느껴지는 죽음과도 같은 것은 늘 경험한다. 그 순간에는 급격히 덮쳐오는 상실감과 더불어 한없이 전신이 오므라들고 그와 동시에 현세에 대한 욕망도 집착도 모두 잃고 이대로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성의 정점에서 죽음의 환상이 나타나는 것은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차이가 있다면 여자는 무한한 쾌락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반면 남자는 허무 속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여자의 성이 훨씬 풍요롭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구키는 약간의 질투를 느끼면서 물어본다.

"아까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했는데 정말 죽어도 좋아?"

"좋아요."

린코는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대답한다.

"하지만 섹스만으로 사람이 죽지는 않아

"그럼 목을 조여주세요."

"정말인가?"

"정말이에요."

그리고 린코는 단호하게 묻는다.

"당신은 어때요?"

"그래. 죽어도 좋아."

구키는 바로 조금 전에 린코가 목을 조르던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목을 조르는 방법으로는 혼자밖에 죽을 수 없어."

"함께가 아니라면 난 싫어요."

린코가 구키의 앞가슴에 이마를 묻는다. 넓은 이마에 살짝 입 맞추고는 찾아드는 수마에게 끌려가듯이 구키는 눈을 감는다. 구키는 꿈을 꾼 것 같다. 알 수 없는 하얀 손이 다가와 목을 조른다. 서서히 그러나 차츰 강해지는 어떤 힘에 의해 숨이 끊어질 것 같다. 빨리 그 손을 뿌리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대로 숨이 끊어져도 좋다는 마음도 있다. 린코에게 목을 졸리고 또 죽음에 대해 나눈 이야기가 마음속에 남아 있어서 그런 꿈을 꾼 것일까. 그 하얀 손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린코의 손일 법도 하지만 꿈속에서 린코는 넓은 응접실 같은 곳에서 미소 지으며 구키를 보고 있었다. 어쨌든 꿈속에서 하얀 손이었다는 기억뿐 그 손의 주인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 손이 왜 풀어졌을까. 저항한 것도 아닌데 손은 저절로 풀리고 곧 편안해졌다. 어쩌면 잠결에 린코의 손이 구키의 목에 휘감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구키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져 돌아다보지만 린코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자고 있다. 구키는 다시 꿈을 더듬어보지만 더 이상은 잡히지 않는다. 사이드테이블의 디지털시계는 630분을 알리고 있다. 문득 린코가 아침 일찍 돌아가겠다던 말이 생각나서 깨울까 했지만 너무 곤히 잠들어 있어 그냥 둔 채 하얀 가운을 입고 창가로 다가간다. 커튼을 약간 젖히자 어둠에 싸인 밤하늘 아래에 어렴풋하게 하얀 공간이 한 가닥 허리띠처럼 떠올라 있다. 날이 밝으려면 시간이 조금 남아 있지만 이제 곧 여명이 찾아올 것이다. 구키는 침대로 돌아와 린코의 어깻죽지를 살짝 흔들며 속삭인다.

"6시 반이야."

린코는 너무 졸립다는 듯이 얼굴을 침대에 파묻는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친 듯 얼굴을 돌린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지만 눈을 감은 채 묻는다.

"몇 시예요?"

"6시 반이야."

린코는 비로소 눈을 뜬다.

"정말이에요?"

'어젯밤 일찍 가겠다고 해서.."

"그랬죠."

이번에는 린코가 시계를 본다.

"큰일 났네 .... "

"시간을 세팅해두는 걸 잊었어."

두 번이나 계속 절정의 열락을 만끽한 후에 정신없이 자고 있었으니 잊어버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밖은 아직 어두워요?"

린코는 불안한 듯이 창 쪽을 본다.

"조금 밝아지기 시작했지만.... ."

"그럼 갈 거예요."

"기다려 봐."

구키는 당황해서 일어나려고 하는 린코의 손을 잡는다.

"지금 돌아가는 것도 이상하다구."

"하지만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고 싶어요. 아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잖아요."

기모노를 입은 채 아침에 귀가하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돌아가도 늦었다구."

해돋이는 여섯시 4,50분쯤에 시작될 것이다. 지금 아무리 서둘러도 집에 도착하면 이미 날이 밝은 다음이다.

"차라리 열시나 열한시에 가는 게 좋아."

"그럴 수 없어요."

여전히 일어나려고 하는 린코의 어깻죽지를 뒤에서 누른다.

"안 돼요."

거역하는 린코를 끌어당기며 구키는 앞가슴을 벌리고 유방을 움켜쥔다.

"어차피 늦었는걸."

"어떻게 그런 소릴."

"괜찮을 거야."

계속되는 구키의 애무에 린코는 최면에 걸린 듯 다시 침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구키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커튼을 열어젖힌다. 조금 전 수평선 저편에 보였던 하얀 빛줄기가 그 폭을 더욱 넓힌다. 그리고 동쪽 바다 녘에서부터 빨갛게 부풀어 오르면서 이제 곧 태양이 떠오를 것을 암시한다.

"이제 곧 날이 밝을 거야."

구키는 속삭이면서 한쪽 손을 린코의 은밀한 곳에 댄다.

"가야 돼요."

린코는 여전히 혼자 중얼거린다. 그러나 춤추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만..."

하면서도 바싹 매달린다. 날이 새기 시작한 하늘은 아침의 정사에 적당하게 밝다. 구키는 시트를 젖히고 린코의 은밀한 곳이 벌써 축축해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허리 밑으로 손을 끼워 넣고 옆에서 천천히 들어간다. 이제 린코는 거역할 마음도 없고 오히려 자진해서 받아들이듯이 다리를 약간 좌우로 벌린다. 남자는 여자의 오른쪽에 누워 있다. 구키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이는 린코의 앞가슴이 보인다. 창을 통해 부서지는 태양빛을 받아 하얗게 물결치는 린코의 상체가 서서히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타오르기 시작한 린코는 이제 태양이 떠오르는 것도 하늘이 밝아지는 것도 잊어버린 듯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해돋이가 시작되고 창 저편이 빨갛게 물드는 것과 동시에 린코는.

"안 돼.... . "

하더니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외친다.

"빨리 ......."

구키는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곧 무슨 뜻인지를 알아차린다.

"어서요. 빨리 ."

외침과 함께 그녀의 모든 점막이 남자의 살 끝을 강하게 휘어감고 빨아들인다. 동시에 남자는 동시에 지금까지 참았던 것을 단숨에 뿜어버린다.

"아악.... "

푀후의 단말마의 비명을 외치며 린코는 질름거리는 경련과 더불어 막바지로 치닫는다. 그것은 남자의 전부를 빨아들인 만족스런 외침이며 여전히 견뎌내고자 했던 한 남자를 쓰러뜨린 우렁찬 승리의 외침과도 같다. 해돋이와 더불어 그들의 정사도 마감을 한 모양이다.

정사를 시작할 때 밝아오던 창밖은 아침 해에 빨갛게 빛나며 아주 환해져 있다. 떠오르는 태양과는 정반대로 구키는 모든 정기를 잃어버리고 지금은 녹초가 되어 강가에 떠내려가는 통나무처럼 침대에 누워있다. 창밖은 벌써 바쁜 하루가 시작된 모양이지만 고층 호텔의 방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서 미동조차 없다. 다만 옆으로 누워 있는 구키의 다리와 린코의 무릎이 가볍게 닿아 있어서 그들의 체온과 피가 서로 오갈 뿐이다. 나른한 피곤함에 젖어 있는 구키에게 린코가 살며시 얼굴을 가까이 대며 중얼거린다.

"해냈어요."

상쾌한 말투에 구키가 눈을 뜨자 린코가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참을 수 없었죠?"

"이번에는 제가 이겼어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는 린코의 얼굴을 보며 구키는 새삼 자신이 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가까스로 자제하고 컨트롤 해왔는데 이번만은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은 억제하고 여자만을 열락의 경지로 보낸다는 작전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자의 반격을 받아 멋지게 정복당하고 있지 않은가.

"너무 좋았어요."

린코는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이렇게 되니 당신도 움직이고 싶지 않죠?"

하긴 지금 당장 일어나서 나갈 준비를 하라고 해도 나른해서 일어날 기분이 아니다.

"나도 안 갈래요."

린코도 그렇게 말하고는 구키의 팔 속으로 새끼고양이처럼 비비며 들어온다. 부드러운 체온을 느끼며 구키는 또 한 번 린코가 달라진 것을 깨닫는다. 내색은 않지만 린코는 지금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젠 더 이상 여자만 미친 듯이 흐트러지게 해놓고 남자는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그런 독선적이고 냉정한 태도는 용서하지 않는다. 지금껏 수동적이기만 했던 성은 이제 능동적인 성으로 변할 것이다' 라고 마치 선서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은 이내 깊은 잠으로 빠져든다. 구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은 한층 더 강해져 있다. 침대 옆의 시계는 아홉시 반이다. 새벽녘 해돋이와 맞추듯 린코와 맺어진 다음 잠든 것이 7시가 지나서였으니까 2시간 가까이 잔 셈이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하고 구키가 멍하니 생각하고 있을 때 린코가 부시시 눈을 뜬다.

"지금 몇 시예요?"

"아홉시 반이야."

"큰일 났네."

새벽녘 동이 트기 전에 돌아갈 작정이었는데 해가 중천까지 솟아 있으니 돌아가기가 곤란해진다.

"당신은 어떻게 할 거예요?"

"글쎄......"

구키의 머릿속에 새삼스럽게 집에 있는 아내가 떠오른다. 어젯밤은 상무 집에서 신년모임이 있어 늦어질 거라고 해두었지 자고 들어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무단 외박이지만 하룻밤 정도 행방을 모른다고 소란 피울 아내는 아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 돌아가서 변명할 구실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무래도 돌아가야겠어요."

린코는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말하고 일어난다.

"붙잡아서 미안해 ."

"그래요. 나빠요."

린코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홱 등을 돌린다.

"하지만 괜찮아요. 만나길 잘했어요."

"집은 괜찮아?"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신도 난처하잖아요."

구키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린코의 말투가 밝아진다.

"나뿐만 아니라 당신도 함께 난처해진다면 용서해줄 수 있어요."

"함께 난처해진다고?"

"그래요. 당신도 집에 돌아가기 괴롭죠? 그렇다면 함께 겪는 괴로움이니까 참을 수 있어요."

린코는 그렇게 말하고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욕실로 향한다. 격렬한 섹스 후에는 항상 허무감이 남는다. 린코와의 하룻밤은 여느 때보다 격렬했기에 오늘은 한층 더 깊은 허무가 밀려온다. 섹스 후에는 늘 아련한 만족만이 남기에 어떨 때는 후회가 앞지를 때도 있다. 왜 이런 짓을 하고 말았는가. 좀 더 적당한 선에서 그쳤어야 했다고 새삼스럽게 반성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린코도 같은 생각이라는 공범 의식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그것은 공범자로서 똑같은 한계에 몰렸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 한쪽만이 괴로워하고 다른 한쪽은 관계없다는 듯이 느긋하게 여유부릴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여자의 괴로움은 남자의 괴로움이며 남자의 고민은 여자의 고민이다. 구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욕실애서 나온 린코가 기모노를 입기 시작한다.

"물 받아뒀어요."

욕실로 향하는 구키에게 린코가 오비를 두르며 말한다.

"결심했어요. 이제부터는 무슨 소리를 들어도 신경 안 써요."

갑작스러운 말에 구키가 되묻는다.

'집에 있는 사람에게 말인가?"

"물론. 남편이에요."

린코는 딱 잘라 말하고. 말을 잇는다.

"이것이 우리들의 최선이에요. 그러니까 당신도 이제 집일은 잊어버려요."

여자가 이렇게까지 결심한 이상 어떻게 남자가 거부하겠는가. 연말부터 연초에 걸쳐 남자는 여자에게 여러 가지를 무리하게 강요해왔다. 그것을 여자가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며 남자는 만족스럽게 즐기고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여자는 당당하게 성장하고 대범하게 태도를 바꾸는 강한 의지를 익혀버렸다.

"괜찮죠?"

린코의 다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구키는 올 한해가 두 사람에게는 중요한 사랑의 한 막을 장식하리라는 강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헤어지는 것만큼

가슴 쓰리고 쓸쓸한 것은 없다

 

 

겨울 폭포

해가 바뀌자 인간사를 비롯한 세상 물정에 작지만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구키와 린코 사이도 지난해와는 많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구키와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린코의 심리적인 변화를 들 수 있다. 물론 지금까지 린코가 소극적이기만 했던 건 아니지만. 대부분 구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나서는 구키에게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전화할 것을 요구했고. 통화 중에 '만나고 싶어'라는 말을 먼저 던지곤 했다. 수동적이기만 했던 린코의 태도가 적극적으로 바뀐 것은 그 동안 린코의 성격으로 보아 상당한 변화임에 틀림없다 그 놀라운 변화를 결정적으로 보여준 건 얼마 전 설날에 만났을 때다. 린코는 단호하게 '이제부터는 당신과 만나는 것만 생각할 거예요'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도덕성의 문제를 떠나 새해와 더불어 적극적인 사랑을 펼치려 한 린코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이었다.

린코의 변화에 맞추기라도 하듯 밀회 장소도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주로 특급 호텔이나 도쿄 주변의 호텔로 갔었다. 가끔 러브호텔이나 패션 호텔이라는 곳으로 가기도 했지만 섹스만을 위한 곳이라는 인상이 강해 거부감이 일었다. 결국 그들은 특급 호텔을 이용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숙박은 하지 않고 잠깐 들렀다 나올 때마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밤늦게 체크아웃을 할 때면 괜히 남의 눈치도 보았다. 게다가 갈 때마다 방이 바뀌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들어가는 호텔 비용도 만만치 않은 액수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방을 하나 얻으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만날 수 있고. 돈도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구키는 방을 얻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린코도 흔쾌히 찬성했다. 두 사람만의 비밀스런 공간을 생각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말을 꺼내지 않았던 이유는 그렇게까지 일을 저질러도 될까라는 적지 않은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둘만의 보금자리를 얻기로 결정했다. 장소는 시부야로 결정했다. 시부야는 구키와 린코가 살고 있는 사쿠라신마치와 기치조지의 중간 지점에 있어서 만나기가 가장 편한 곳이다. 역까지 걸어서 십 분 거리인 데다 원룸이었다. 임대료는 월 십육만 엔으로 교통이 편리한 곳이라 좀 비싸기는 하지만 호텔 비용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계약은 1월 중순경에 마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치 신혼부부처럼 즐거워하며 살림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백화점과 슈퍼를 돌아다녔다. 침대를 비롯하여 시트와 커튼. 그리고 식기류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중하게 따져보고 샀다. 신혼 방을 꾸미듯 그렇게 한 살림을 들여놓고 나서 1월 말의 대한에 드디어 두 사람은 그들만의 보금자리에서 첫날밤을 맞았다. 절기로는 가장 추운 날이지만 낮 기온은 섭씨 10도까지 올라갔다. 한층 포근한 새집에서 갖는 첫 밀회여서인지 두 사람 모두 한층 마음이 설렌다. 평소보다 훨씬 고조된 분위기에서 정을 나눈 뒤 린코는 미리 사두었던 게와 두부. 야채를 넣어 찌개를 끓여 조그만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둘이서 마주앉아 식사를 하자니 마치 부부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서로 눈길을 마주치며 미소 짓는다.

"이 집에서 그냥 살아버릴까 봐요."

농담처럼 던지는 린코의 말에 구키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내일도 이리로 올까?"

"당연하죠. 우리들의 보금자리인걸요."

들뜬 기분에 서로 농담을 주고받다가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구키는 당황한다. 이러다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부딪칠지도 모른다. 그렇게도 둘만의 공간을 꿈꾸었는데 막상 현실로 이루어지니 불안하고 망설여지는 건 왜일까.

"낮이라면 저는 언제라도 좋아요."

"그렇다면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

낮 시간이 자유롭다는 점에서 구키에겐 다행인지도 모른다. 구키의 경우 편집자라고는 해도 잡지사의 경우처럼 현장을 뛰어다니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일이 사무실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굳이 나갈 용건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한직이기 때문에 적당한 이유만 있으면 외출해도 그다지 문제될 건 없다. 동료들끼리도 좌천당한 처지라는 묘한 공감대가 있어서 서로 감싸주기 때문에 외출이 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런 허점을 이용하는 건 아니지만 방을 빌린 후 구키는 오후에 잠깐씩 외출하는 일이 잦아졌다. 행선지를 기록해두는 메모판에 '쇼와시대사의 자료 수집을 위해 국회 도서관에 감 정도로 기입해두면 별 문제는 없다. 평일에는 린코도 집에서 나오는 게 쉽기 때문에 오후 두시에서 세시 사이에 미리 약속해두고 그 집에서 만난다. 열쇠를 하나씩 갖고 있으므로 대개는 어느 한 사람이 먼저 와 있게 마련이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미친 듯이 껴안는다. 힘든 상황에서 잘 빠져나왔다고 키스를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고는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진다. 얼핏 보기에는 벌건 대낮에 유부남 유부녀가 밀회를 즐기는 외설적인 장면이 연상되지만. 구키와 린코 입장에서는 누구에게도 거리낄 것 없는 당당한 만남이다. 구키는 죄의식을 느끼는 한켠에 모두들 일에 몰두하고 있을 시간에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야릇한 쾌감도 동시에 느끼곤 한다. 그것은 린코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요?"

말로는 걱정하지만 이미 그들은 묘한 쾌감에 깊이 빠져 있다. 방을 얻음으로써 그들의 밀회는 한결 편안한 가운데 이루어졌지만 그에 못지않게 예기치 못한 문제도 뒤따랐다. 시부야에 있는 보금자리에서 린코를 만나기 위한 구키의 외출은 눈에 띄게 잦아졌다. 외출 사유를 '국회 도서관' 혹은 '취재'로 기입하기는 하지만 그 동안 외출이 드물었던 터라 갑작스런 변화는 금방 눈에 띈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그의 태도를 문제 삼은 적은 없다. 한 번은 비서로 있는 가시타가 한마디 던진다.

"요즘 상당히 바쁘신 거 같아요."

순간 구키는 흠칫 놀란다.

"그런 거 없어."

입으로는 부정하면서 당황하는 그의 태도를 보고 어쩌면 그녀는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구키가 자리를 비웠을 때 전화가 걸려오더라도 비서가 요령껏 처리해주고 있어 약점을 잡히면 곤란하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낮에 만나고 퇴근 후에 그들의 보금자리로 달려가 근처 식당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종종 관리인과 얼굴을 마주치곤 하는데 구키와 동년배로 보이는 그는 그때마다 수상쩍은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만일을 대비해서 방을 계약할 때 본명을 감추고 기누가와의 이름을 썼기 때문에 구키의 이름이 노출될 리는 없다. 그러나 이따금씩 드나드는 걸 눈치 챈 관리인은 그 방이 밀회 장소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것 같다. 가끔 관리인이 '기누가와씨' 하고 부를 때마다 당황하는 어이없는 일이 연출되기도 한다. 호텔보다는 훨씬 느긋해서 좋긴 하지만 그 나름대로 문제가 있다. 만날 때마다 느끼지만 린코와 단둘이서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너무 행복해서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다. 이대로 밤을 지새우자는 데 동의하고 또 언제라도 그럴 각오가 되어 있다는 현실이 오히려 서로를 난처하게 만들어 괴로울 때도 있다. 둘만의 보금자리에서 그들은 부부 같은 느낌을 갖곤 하는데 그것은 일상의 사소한 행동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를테면 린코가 간단한 것을 세탁하는 김에 구키의 손수건이나 양말도 함께 빨아주고 어떤 땐 속옷을 준비해주기도 한다. 둘이서 함께 밤을 지샌 이튿날 아침이면 린코는 마치 십년을 함께 산 부부처럼 자연스럽게 구키의 속옷을 챙겨준다.

"이거 입으세요."

린코가 내민 속옷을 입으면서 속옷이 바뀐 것을 아내에게 들키지 않을까 잠시 걱정도 하지만 같은 메이커이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한다. 요즘 아내와는 냉전 상태여서 다정한 말 한마디 나누는 일이 없다. 물론 그 책임은 전적으로 구키에게 있기 때문에 아내에게 다소 미안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린코에게 온 마음이 쏠려서 도저히 아내에게 상냥해질 수 없다. 아내도 그 점을 눈치 챘는지 그녀 쪽에서도 다가올 기미가 전혀 없다. 냉전이라기보다는 서로 싸을 관심마저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가끔씩 외박을 하더라도 부부싸움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 말도 없이 외박을 한 그 이튿날 출근하려고 현관 을 나서는데 구키의 등에 대고 아내가 차갑게 한마디 내뱉는다.

"즐기는 것도 좋지만 남의 조롱거리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뜨끔하여 돌아보았지만 아내는 이미 등을 돌린 채 안방으로 사라지고 없다. 무슨 뜻일까. 어쩌면 린코와의 관계를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내가 먼저 채근하지 않는 이상 구키가 문제 삼아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결국 그날은 어정정한 태도로 집을 나왔지만. 해가 바뀌면서 아내와의 관계가 끝없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구키와 아내 사이에 패인 깊은 골만큼이나 린코와 남편 사이의 균열도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그러나 린코는 한 번도 남편과의 불화를 화제 삼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는 말 속에서 구키는 두 부부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둘이서 예정에 없던 외박을 결심했을 때 예전 같으면 린코는 집일이 걱정되어 구키 몰래 남편에게 전화를 걸 때도 있었다. 린코가 말하지 않아서 상대가 남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전화 도중 구키를 보면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리는 걸로 보아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요즘엔 갑작스런 외박에도 집에 전화 거는 기미가 없다. 오히려 구키 쪽이 걱정되어 집에 전화하지 않아도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어 하지만 거기까지 마음 쓸 것 없다는 생각에 잠자코 있다. 무단 외박을 해도 태연할 정도로 린코가 대담해진 것인지. 아니면 언제라도 마음 내키는 대로 자고 갈 수 있도록 남편과 미리 이야기가 된 것인지 몰라 구키는 석연치 않다. 이런 변화는 방을 얻고 나서 아무 생각 없이 던지는 린코의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하루는 둘이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을 때였다

"역시 둘이서 먹으니까 너무너무 맛있어요."

구키는 고개를 끄덕인다.

'남편과는 집에서 거의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집에서는요, 거의 혼자예요. 그 사람은 언제나 밤늦게 들어오고. 나도 함께 먹고 싶지 않아서...."

너무도 거침없는 말투에 구키는 오히려 불안하다.

"그렇지만 쉬는 날은 집에 있을 거 아냐."

"그런 날은 서예 모임이 있는 척하고 슬쩍 빠져나와요. 될 수 있는 대로 식사는 따로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먹어야 할 때는 식욕이 별로 없어서......."

그 말을 듣고 보니 요즘 린코가 약간 야위어 보인다.

"어디가 나의 진짜 보금자리인지 구별이 안 가요."

말하는 것으로 보아 남편과의 관계도 상당히 극한 상황까지 와 있는 것 같다. 두 사람의 가정이 무너져가는데 둘의 밀회는 이렇게 거듭되고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혼하고 정식으로 함께 사는 게 자연스러울 지도 모른다. 구키는 가끔 그런 미래를 상상해보지만 막상 단행할 엄두가 안 난다. 설령 린코가 이혼을 결심한다 해도 그녀의 남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형벌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남의 아내를 빼앗아놓고 이제 와서 그 남편을 동정하는 것도 주제넘지만. 성실하고 도량이 있어 보이는 남편으로부터 그의 아내를 완전히 빼앗아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기란 더욱 어렵다. 린코 본인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과연 헤어질 용기가 있는 것일까. 세상 체면이나 수입으로 따지자면 구키보다 지금의 남편이 훨씬 낫기 때문에 이혼이 막상 현실화되었을 때는 그 굴레를 벗어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구키에게도 이혼이라는 현실은 만만치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이혼 사유가 일방적으로 구키의 잘못에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아내와 냉전 상태지만 1년 반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극히

평범한 부부였다. 게다가 이전에는 제법 금실 좋은 부부로 소문났었고. 신혼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뜨거운 연애 끝에 맺어진 결혼이다. 그런 부부의 애정이 이처럼 식어버린 이유는 단 하나. 린코라는 매력적인 여자가 구키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의 불화는 모두 구키로 인한 것이다. 아무리 한 여자에게 푹 빠졌기로서니 아무 잘못도 없는 아내를 저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딸이 설날에 했던 말이다.

"엄마한테 좀 잘해드리세요. 아빠."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딸도 눈치 채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딸의 마음까지 떨쳐버리고 과연 이혼할 수 있을까. 이십 년을 함께 산 아내와 그렇게 간단히 헤어질 수는 없다 그러나 정말 린코와 함께 살고 싶다면 못할 것도 없다. 그렇게 심각한 상황까지 진행될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 구키의 마음이 확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부야에 방을 얻은 지 한 달이 지난 214일은 린코의 생일이었다. 그날 오후 여섯시에 구키는 시부야 역 근처에 있는 꽃집에 들러 흰 장미와 백합과 카사블랑카 부케를 사서 그들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린코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다.

"생일 축하해."

구키가 꽃다발을 한아름 린코에게 내민다.

'어머. 예뻐라. 고마워요."

꽃향기를 맡는 린코의 모습이 아름답다.

"자아. 저도 있어요."

린코가 빨간 리본이 달린 조그만 선물상자를 구키 앞에 내민다. 한눈에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이라는 것을 알겠고, 뜯어보니 조그만 카드가 들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당신에게.'

짧은 글이었지만 부드럽고 아름다운 글씨에서 린코의 상냥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여러 사람한테서 받았겠지만..... "

"아니. 린코한테 받는 게 제일 기뻐."

오늘 조사실의 비서 가시타와 전에 있던 출판부의 여직원들로부터도 받았지만 린코의 초콜릿이 가장 소중하다

"생일 선물로 무엇을 해줄까?"

"꽃만으로도 충분해요."

며칠 전 물어보았을 때에도 올해는 방을 구하느라 큰돈을 썼으니까 필요 없다고만 했다.

"그렇지만 당신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 갖고 싶은 거 없어?"

"저도 벌써 서른여덟이에요."

린코는 선물보다 자신의 나이가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나이가 몇 살이든 생일은 생일이니까."

구키의 말에 린코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말한다.

"그럼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물론이지."

"저와 함께 여행을 떠나주세요. 어디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시라는 작고 답답한 밀실에 있다 보면 때때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진다.

"어디로 갈까?"

"북쪽지방의 추운 곳이 좋겠어요. 당신과 둘이서 하루 종일 눈을 보고 있는 건 어떨까요."

린코의 말을 듣고 있는 사이에 구키는 어느덧 린코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눈 속을 거닐고 있다. 발렌타인데이에 이어지는 주말 토요일에 구키는 린코와 함께 닛코로 향했다.

"둘이서 하얀 눈만 보며 지내고 싶어요."

린코의 희망대로 눈이 많은 곳을 찾아보았지만 도호쿠나 호쿠리쿠는 너무 먼 데다가 큰 눈이라도 내리면 제시간에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 때마침 주말부터 호쿠리쿠 일대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도쿄에서 비교적 가까운 닛코의 주젠지코'로 결정했다. 벌써 십 년 전의 일이지만 구키는 한겨울에 주젠지코(도치기 현 닛코 시. 난타이 산(貴體山)기슭에 있는 호수)에 가본 적이 있었다 하얗게 눈 덮인 산 속에서 파란 하늘을 머금은 채 숨죽인 듯 고요하던 호수를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그림같이 아름답고 한적한 곳에서 린코와 단둘이 여유롭게 지내고 싶다. 그런 상상들이 구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린코는 한겨울의 주젠지코가 처음인 모양이다.

"닛코에는 꼭 한 번. 여름이 끝날 무렵에 간 적이 있어요."

"그게 언제쯤인데?

"아마 고등학생 때일 거예요."

여고생일 때 린코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운 소녀였을까 구키는 상상해본다.

"그때는 오쿠닛코까지 차로 갔었는데 길이 붐벼서 아주 혼났어요."

"한겨울이라 관광객도 거의 없을 거야."

린코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묻는다.

"내일 몇 시쯤 도쿄로 돌아오게 될까요?"

돌아올 시간까지는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키는 묻는다.

"빨리 와야 되나?"

"그렇지는 않지만......."

"그쪽에서 열한시쯤 출발한다 해도 곧장 산을 내려와서 전차를 타면 두시나 세시까지는 도착할 것 같은데......."

린코의 눈빛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인다. 아사쿠사에서 닛코까지 쾌속 전차로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오후 한시쯤 도쿄를 출발했을 때는 쾌청했는데 점점 날씨가 흐려지더니 도치기를 지날 무렵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구키는 스웨터에 재킷을 입고 다시 그 위에 검정색 오버를 걸치고 연지색 머플러를 두르고 있다 린코는 검은 하이넥 스웨터에 같은 색 바지를 입고. 그 위에 자주색 하프코트를 입고 회색 모자를 쓰고 있다 둘이 나란히 있으니 역시 부부라기보다는 애인처럼 보인다. 그것은 린코가 어딘가 모르게 세련되고 화려한 탓인지도 모른다. 밖은 바람이 부는 지 눈발이 비스듬하게 날리고. 황량한 겨울 밭에도. 농가의 지붕에도. 그것을 둘러싼 나무들의 가지 끝에도 눈이 쌓여 한 폭의 묵화를 보는 듯하다.

"아주 멀리 떠나온 것 같아요."

린코가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중얼거린다. 온 세상이 눈으로 덮여 있는 풍경이 정말 머나먼 곳으로 떠나온 듯한 기분에 젖게 한다.

세시가 지나 도부 닛코에 도착했다. 거기서 택시를 타고 주젠지코로 향한다. 구불구불한 이로하자카(도치기 현 닛코 시 우마가에시와 주젠지코를 잇는 커브가 많은 도로. 오르고 내리는 데 마흔여덟 개의 커브가 있음)를 올라갈수록 깎아지른 듯한 산의 단면이 다가오고. 그 경사면 위로 눈이 내리 퍼붓는다. 표고가 높아짐에 따라 기온도 차츰 떨어지고 눈은 하얀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호수 주위에도 눈이 내리고 있을까요?"

운전기사는 와이퍼가 바삐 움직이는 전방의 창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한다.

"산 아래와 위의 기온차가 심해서요."

그의 말에 따르면 주젠지코 앞쪽의 시라네 산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동해에서 몰려온 눈이 수북이 쌓이는 반면 남쪽은 현저하게 양이 적은 모양이다.

"글쎄요. 내려가도 큰 차이는 없을 거예요."

운전기사의 말에 구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린코의 손을 살짝 쥔다. 다정하게 손을 마주잡고 있는 두 사람을 엿보기라도 하듯 오른쪽 창으로 산 표면이 다가온다. 웅장한 모습은 난타이 산(資體山)이라는 이름과 과연 잘 어울린다. 가파르고 험준한 산세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산 위의 바람이 눈구름을 휩쓸고 가버렸는지 고개를 다 오를 때쯤에는 눈도 적게 내리고. 마치 그들을 환영하듯이 맑게 갠 하늘 위로 한줄기 햇살이 비친다. 시계를 보니 4시 전이다 해가 지려면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

"모처럼 날이 맑게 개었으니 폭포를 구경하고 호텔로 들어가자."

구키는 운전사에게 게곤노다키(96미터의 암벽에서 떨어지는 일본 3대 폭포 중 하나)로 가달라고 부탁한다.

"얼었을지도 모릅니다."

얼어붙은 폭포도 그 나름대로와 정취가 있을 것 같다. 높이 96미터나 되는 폭포를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엘리베이터로 백 미터 정도 내려가야 한다. 거기에서 다시 터널을 빠져나가면 눈앞에 게곤노다키가 나타난다. 운전기사의 말대로 너비 십 미터의 폭포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수많은 고드름이 늘어서고 일부는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으며 일부는 파르스름하게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얼음 덩어리 속에서도 폭포는 여전히 살아 있어 물을 떨어뜨리고 그 나머지는 바위를 따라서 백 미터 아래 용소에 빨려 들어간다.

"겨울 폭포는 어딘가 장엄한 느낌이 들어요."

린코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 린코가 오른쪽 바위 표면에 돌출한 기둥을 가리킨다.

"저건 뭐죠?"

"만일의 경우 사람이 떨어져도 죽지 않게 설치한 거야."

돌출한 기둥 주위에는 그물 같은 것이 부채꼴로 쳐져 있다.

"여기는 자살 명소니까 말이야."

바위를 따라 올라가 폭포 물이 떨어지는 곳에서 용소로 몸을 던지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아예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호용 울타리를 친 것이다.

"전에 열여덟 살밖에 안 된 고교생이 '불가해(不可解)'라는 말을 남기고 여기서 투신자살을 한 적이 있어."

"불가해라는 건 인생을 말하는 걸까요?

"인생인지 인간인지 자신인지...... 아무튼 깊이 생각하면 모르는 것투성이라는 뜻인지도 모르지."

겨울 폭포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린코의 옆얼굴이 비스듬한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다

게곤노다키를 보고 여관에 도착한 시각은 4시 반이었다 안내 받은 방은 다섯 평 정도의 다다미방이 딸린 아담한 일본식 방으로 넓은 베란다 바로 앞으로 주젠지코가 바라보인다. 호수 표면에 이끌리듯 두 사람이 창가에 다가서자 호수 위로 막 노을이 지고 있다. 오른쪽에는 가파른 난타이 산기슭이 뻗어 내리고 삼나무 숲과 대지를 뒤덮은 눈이 노을빛을 받아 불그레하게 물들고 있다. 그 산 너머 저편에는 눈 덮인 시라네 산이 펼쳐져 있고 그 품에 안기듯 겨울의 주젠지코가 오롯이 앉아 있다. 배 한척 떠 있지 않은 호수주변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태고시대를 방불케 하는 정적의 세계다.

"굉장해요....."

무의식중에 새어나온 린코의 탄성이 '아름답다'도 아니고 '곱다'도 아닌 '굉장하다'는 표현에 구키는 순순히 납득한다. 확실히 이 정경은 그저 '굉장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아름다움 속에 태평함과 장엄을 내포하고 있어 저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선 채 꼼짝도 않고 호수를 바라본다. 호수 표면은 시시각각으로 변모한다. 조금 전까지 노을이 물들어 있던 눈 덮인 산등성이는 서서히 색을 잃다가 마침내 흑과 백의 흐릿한 음영만이 남는다. 석양이 비친 경사면뿐만 아니라 호수 전체도 처음의 푸른색에서 남색으로 다시 회색으로 차분히 가라앉는다. 호반의 원을 두르며 쌓여 있는 하얀 눈만이 막 스러져가는 황혼 속에서 은빛의 화려함을 한껏 뽐낸다.

호수는 서서히 그러나 남김없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구키가 린코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는다. 린코가 기다렸다는 듯이 조용히 다가가서 진한 키스를 한다. 신들이 지키고 있는 호수 앞에서 키스를 한다는 것이 왠지 불손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신들 앞에서 사랑을 맹세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두 사람은 베란다에 있는 의자에 나란히 앉는다. 주위는 어둠이 짙어가고 겨울의 호수도 서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호숫가에 외로이 남은 통불만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 하얀 눈을 작고 동그랗게 허공에 띄워주고 있다.

"아마 옛날 이 부근에는 여자를 아예 접근 못하도록 했지."

구키는 언젠가 책에서 읽은 것을 생각해낸다.

"비탈길 오르는 도중에 돌려보냈기 때문에 그 당시 여자들은 난타이 산에도 올라갈 수 없었지."

"그건 여자를 더럽다고 생각해서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기실 여자가 갖고 있는 마력 같은 것이 두려웠는지도 몰라."

"여자에게 그런 마력이 있나요?"

"있을지도 몰라."

"그럼. 나도 무서워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구키를 린코가 살짝 쏘아본다.

"그럼 당신을 질질 끌고 갈까요."

"어디로?"

"호수 밑으로....."

린코의 시선은 다시 창가로 향하고. 싸라기눈이 어두운 유리창을 휘익휘익 비껴간다. 고지대의 기후는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을 증명하듯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바깥은 온통 눈 덮인 세상으로 변한다.

"저 산에도 호수에도 눈이 내리고 있겠죠?"

구키는 린코의 말을 되새기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을 호수 밑으로 질질 끌고 갈까요?'

실제로 린코가 구키를 호수 밑까지 끌고 갈 수는 없겠지만. 린코라는 여자 속에는 남자를 호수 밑바닥까지 끌고 갈 수 있는 끝없는 정념이 숨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폭포에도 눈이 내리고 있겠죠."

오는 길에 보았던 게곤노다키를 생각해낸 모양이다.

"그런 데서 죽으면 정말 추울 거예요."

"하지만 눈 속에서 죽는 것도 의외로 기분이 좋은 모양이야."

구키는 이전에 홋카이도 출신의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한다.

"눈에 푹 파묻혀 쓰러진 사람의 시체는 살았을 적의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라고 하더군."

"어차피 죽을 거라면 아름다운 얼굴을 간직한 채 죽는 것도 좋을 거예요."

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가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힐 것 같아 구키는 어둠에 잠긴 창을 등지고 거실로 돌아온다. 저녁식사를 여섯시 반에 부탁해놓고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목욕을 하기로 한다. 방에도 욕실이 있지만 모처럼 온천에 왔으니 대중탕을 이용하고 싶다는 린코의 의견에 따라서 두 사람은 일층으로 내려와 구불구불한 복도 끝으로 간다. 안내해준 여종업원의 말로는 오늘 밤은 손님이 없어서 가족탕도 사용할 수 있다고 했지만 사양을 하고 각자 남탕과 여탕으로 따로 간다. 저녁 여섯시 '무렵이라 여느 때 같으면 붐빌 시간인데 탕 안에는 아무도 없다. 구키는 커다란 욕조를 혼자 차지하고 느긋하게 온몸을 쭉 펴며 사치스러운 기분을 만끽한다. 방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고 있자니 린코가 돌아온다.

"조용해서 아주 좋았어요."

여탕도 비어 있었던 모양이다. 머리를 뒤로 말아 올린 린코는 볼에서 목 언저리까지 다소 상기된 표정이 어려 있다.

"노천탕에도 들어가 봤어요."

남탕도 욕탕 바로 앞에 있는 조그만 문을 열고 나가면 노천탕이 있었지만 눈이 내리고 있어서 구키는 들어가지 않았다.

"맨발로 눈을 밟고 갔어요."

알몸으로 눈 위를 걸어가는 린코의 모습을 상상하자 구키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노천탕에 발을 담그는 순간 온몸이 짜릿해서 너무 좋았어요. 주위는 온통 눈이 내리고 온몸이 따뜻한 물속에 잠겨 있으니까 기분이 묘해지던데요."

"그럼 나도 나중에 들어가 봐야겠군."

"고개를 드니까 어두운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려와 속눈썹 위에 서 살살 녹아내리는데 그 기분이 말할 수 없이 좋았어요."

린코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여종업원이 저녁식사를 가져온다.

"겨울이라 특별한 것은 없네요."

송구스러운 표정을 짓지만 전채에 이어서 생선회와 튀김 모듬 냄비에 오리 로스까지 잔뜩 차려져 있다.

"부르실 일이 있으면 벨을 눌러주세요."

여종업원이 나가고 둘만 남는다. 린코가 따라주는 따끈한 정종을 한 잔 들이켜고 나자 구키는 그제사 겨울 여관의 차분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린코와 술잔을 몇 차례 돌려 마시는 사이 차츰 취기가 돌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 동안 시부야의 방에서 짜릿하지만 불안한 식사시간을 갖다가 이렇게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겨울 여관에서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자니 갑자기 행복이 밀려온다.

"오길 정말 잘했어요."

이번 여행은 린코의 희망으로 생일 선물 대신 이루어진 것이다.

"고마워요."

린코의 눈가에는 취기어린 붉은 기운이 부드러움 속에서 불길처럼 반짝이며 살아난다. 새삼스런 인사에 멋쩍어진 구키는 몸을 일으켜 냉장고에서 위스키를 꺼낸다.

"저쪽에서 마실까?"

구키는 베란다로 가서 술 마실 준비를 한다. 린코는 프런트에 전화를 해서 식사가 끝났으니 치워달라고 부탁하고 베란다로 나온다.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네요."

밤이 되자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고 창을 가로질러 비스듬히 내리는 눈은 차양 밑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밤새도록 내렸으면 좋겠어요."

린코는 글라스에 얼음을 넣으며 중얼거리듯 말한다. 순간 살짝 숙일 때 벌어진 옷깃 사이로 젖가슴이 들여다보인다. 구키는 거기에 손을 들이밀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그때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여종업원이 나타난다.

"상을 치우겠습니다."

여종업원이 상을 치우고 나가자 이번에는 남자 종업원이 들어오더니 이불을 깔기 시작한다.

구키는 눈 내리는 창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술을 마신다. 남자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린코에게 속삭인다.

"이제야 우리 둘만 남았군."

방 안을 둘러보니 이부자리 두 개가 약간의 사이를 두고 나란히 깔려 있고 머리맡에는 조그만 사방등이 놓여 있다. 구키는 여관의 종업원들이 두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마음에 걸렸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고 다시 글라스를 든다. 저녁식사 때 마신 맥주와 정종. 거기에 위스키까지 섞어 마시니 사르르 취기가 올라서 기분이 좋아진다. 그 기분은 다름 아니라 오늘 밤 린코와 함께 묵을 수 있다는 편안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도 도쿄를 떠나 멀고먼 눈의 고장에 와 있기 때문에 회사와 집을 모두 잊어버리고 여유롭게 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한 잔 더 할까?"

구키가 냉장고에서 다시 위스키를 꺼내자 린코는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본다.

"괜찮겠어요?"

"아니. 안 괜찮을지도 몰라."

구키는 얼음으로 가득 찬 글라스에 위스키를 따르며 말한다.

"그것도 못할지 몰라."

린코는 그 말을 금방 알아듣는다.

"나는 상관없어요. 좋을 대로..."

샐쭉한 말투가 사랑스러워 린코의 글라스에도 술을 따르려 하자 당황하며 손으로 글라스를 막는다. 원래 린코는 술에 약한 편인데 구키를 만나면서 취하는 즐거움을 조금씩 알게 되었을 뿐이다.

"저쪽으로 갈까?"

구키는 조금 전부터 살짝살짝 엿보이는 린코의 앞가슴이 신경 쓰였는데 마주보고 앉아 있으면 만질 수가 없다. 그래서 위스키 병과 글라스를 들고 다다미방 한켠에 있는 테이블로 옮겨가서는 린코를 옆으로 부른다. 구키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하고 린코가 그 옆에 와 앉는다. 글라스에 얼음을 넣으려는 순간 구키의 손이 재빨리 린코의 앞가슴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순간 린코는 몸을 빼려고 했지만 구키의 손 안에 이미 몽실몽실한 유방이 잡혀 있어 빠져나올 수가 없다.

"왜 이러세요?"

갑자기 난폭해진 구키의 행동에 당황한 린코가 옷깃을 여미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구키의 손은 더욱 깊이 파고들어 두 사람은 가운을 입은 채 뒤엉킨다. 구키는 린코를 끌다시피 이불로 옮기고는 그녀를 뒤덮듯 껴안고 깊은 입맞춤을 한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린코는 당황하여 구키의 입이 린코의 입을 완전히 포개어 덮고 있는데도 여전히 거역하듯 얼굴을 좌우로 저어 보지만 곧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구키는 서둘러 베란다 사이의 장지문을 닫고 사방등만 켠다. 이부자리 위에 반듯이 누운 린코는 어지러운 취기를 가라앉히려는 듯 눈을 감고 있다. 구키는 약간 벌어진 가운의 옷깃을 벌려서 하얗게 드러나는 유방을 가만히 쥐어본다. 머리맡의 사방등만이 눈 내리는 호반의 여관에서 벌어지는 두 사람의 유희를 지켜보고 있다. 구키는 다시 대담하게 가운을 열어젖히고 유방을 잠시 바라본 후에 그 사이로 얼굴을 묻는다. 취기 탓도 있지만 잠시 이대로 여체의 부드러운 감촉에 파묻히고 싶다. 숨을 죽인 채 그대로 있자 반듯이 누워 있던 린코가 말한다.

"아까 밖에 있을 때 눈 속에 얼굴을 묻어보았어요."

밖이라면 노천탕을 말하는 모양이다.

"눈 속에서 죽을 때는 얼굴을 묻고 죽는 게 좋다고 했죠?"

"많이 차가웠지?"

"그렇지도 않았어요. 눈 속에 얼굴을 묻으니까 얼굴 주위의 눈이 천천히 녹아가더군요. 오히려 얼굴을 들었을 때 몹시 찬 기운을 느꼈어요."

"눈 속이 따뜻해?"

". 조금 괴로웠지만 눈이 녹아 퍼져가는 느낌도 좋았고. 이대로 잠들면. 죽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구요."

노천탕에서 린코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불안하여 구키는 상체를 일으킨다. 린코는 꿈꾸는 듯한 눈으로 허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가끔 구키는 린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지금도 린코는 노천탕에서 너무 즐거웠다고 말해놓고는 한편으로 눈 속에 얼굴을 묻고 죽음을 상상해보았노라는 말을 한다. 물론 장난이라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시도해보는 그 마음이 어쩐지 심상치 않고 불길하기까지 하다.

"왜 그런 짓을 하지?"

"그냥 한 번 해봤을 뿐이에요."

린코는 구키에게 등을 약간 돌리고 누워 있다 마치 린코에게 매달리듯이 구키도 옆으로 누워 린코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밀어 넣고는 유방을 움켜쥔다.

"조용하네요."

린코는 남자에게 유방을 맡긴 채 중얼거린다. 눈 내리는 호반에는 차 소리는 물론 사람의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귀 기울이면 눈이 내려 쌓이는 소리만이 들려올 것 같은 그야말로 정적의 세계다.

"몇 시나 됐을까요?"

"아직 열시가 안 됐을 거야."

도시라면 한창 흥청거릴 시간이다.

"아주 매끈매끈해."

구키는 린코의 앞가슴에서 하복부로 천천히 손을 움직인다. 여느 때라면 거기서 은밀한 곳으로 내려가서 요구하겠지만 오늘 밤은 취한 탓인지 그저 부드러운 피부에 파묻혀 그대로 잠들

고 싶을 뿐이다.

"싱싱하군."

탄력 있는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말하자 린코가 중얼거린다.

"제 젊은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제 겨우 서른여덟 살인걸."

"그러니까 할머니가 다 된 거죠."

"그런 말을... 린코는 아직 젊다구."

"아녜요. ... ."

린코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으며 약간 흐린 목소리로 말한다.

"저는 이제 이쯤에서 족해요."

"족하다고?"

"지금까지 산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더 이상은 필요 없어요."

"죽어도 좋다는 건가?"

"그래요. 나는 그렇게 욕심쟁이가 아니거든요."

린코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구키는 잠이 든 모양이다. 이야기가 어디쯤에서 끊겼는지는 모르지만 취기의 나른한 기분에 이끌려 눈을 감았으리라. 얼마나 잠들었던 것일까. 목이 말라 잠이 깼을 때는 사방등도 꺼지고 다다미방에서 희미한 불빛만 새어 들어온다. 어젯밤 구키가 잠들기 전에는 사방등이 켜져 있었는데 아마 린코가 일어나서 끈 모양이다. 달라진 건 그것뿐만이 아니다. 둘이 껴안은 모습으로 잠들었는데 일어나보니 린코는 약간 떨어져서 모로 누운 채 자고 있다. 구키는 손을 뻗쳐 사방등을 켜고 머리맡의 시계를 본다. 새벽 3. 아직 한밤중이지만 어젯밤 잠든 것이 10시경이었으니까 그래도 5시간 가까이 잔 셈이다. 술이 깨는 탓인지 목이 마르다. 구키는 몸을 일으켜 냉장고에서 미네랄워터를 꺼낸다. 컵에 따라 마시면서 베란다로 나가 커튼을 살짝 젖혀본다. 밖은 아직 어둠 속이지만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어 유리 테두리에까지 수북이 쌓여 있다.

구키는 쌓인 눈을 보며 어젯밤 눈 속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던 린코를 생각한다.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눈 속에서 죽은 얼굴이 아름답다는 말 때문일까. 다시 물을 마시고 눈 내리는 창을 바라보는 사이에 구키의 머리가 조금씩 맑아진다. '벌써 할머니예요. 이쯤에서 족해'라는 린코의 말을 떠올린다.

구키는 갑자기 침실 쪽을 돌아다본다. 설마 린코가 정말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어 침실로 돌아오자 린코는 아직도 옆으로 누워서 자고 있다. 구키는 사방등의 불빛 아래서 린코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본다. 긴 속눈썹이 감겨 있고 작고 예쁜 콧날이 볼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이렇게 평온히 잠든 얼굴 어디에도 죽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구키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베란다와 방 사이의 장지문을 닫은 후 다시 이부자리 속으로 파고든다. 잠들기 전처럼 린코의 겨드랑이 밑으로 살그머니 손을 넣어 유방을 잡고는 손가락 끝으로 젖꼭지 위를 살살 돌려본다. 린코는 잠투정하는 어린아이처럼 칭얼대는 소리를 내며 애무에서 도망치려는 듯 상체를 웅크린다. 린코는 더 자고 싶은 모양이다. 구키는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추고 린코의 부드러운 피부에 몸을 기댄 채 다시 눈을 감는다. 사람 피부만큼 기분 좋은 것도 없다. 서로의 느낌이나 궁합도 중요하겠지만 일단 피부가 맞닿아 있

으면 남자나 여자가 마음이 편안해지고 초조나 불안 또는 두려움마저도 모두 희미해진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서로의 피부를 접촉하면서 산다면 이 세상에 싸움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활과 일에 쫓겨 사람들은 그럴 만한 기회를 상실한 채 살아간다. 회사에 출근하느라 떨어져 있어야 하고. 사람을 만나서도 내내 부둥켜안고 있을 수는 없다 게다가 도덕이나 상식. 윤리 등 귀찮은 관념들이 생겨나고부터는 피부와 피부를 맞대는 경우는 급속히 줄어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구키는 지금 모든 살갗을 동원해서 린코의 피부와 접해 있다. 구키의 가슴은 린코의 등에 바짝 닿아 있고. 배에서 사타구니까지는 그녀의 허리와 엉덩이에 닿아 있으며. 두 다리는 포갠 채 겹쳐져 있다. 그리고 두 손은 린코의 가슴과 배를 자유롭게 만지고 있다. 이 따스한 체온과 평안을 주는 여체가 싸늘하게 식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구키는 불안에 잠기는 자신에게 또 한 번 타이르고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다. 잠결에 들리는 린코의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머리맡에 린코가 앉아 있다. 구키가 잠든 동안에도 린코는 혼자서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가 보다.

"눈이 굉장해요."

얼굴을 들자 베란다 앞쪽으로 한줄기 바람이 윙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몇 시지?"

"아직 6시예요."

구키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일어나서 베란다로 간다. 벌어진 커튼 틈새로 보이는 밖은 늦은 해돋이에다 쏟아지는 눈 탓인지 아직 어둡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유리면에 눈이 하얀 화살처럼 꽂혔다가는 사라진다.

"굉장히 사나운 눈보라군."

순간 구키는 이곳에 오기 전에 린코가 언제쯤 도쿄로 돌아갈 건지 물었던 것을 생각해낸다.

"낮이 되면 눈도 그칠 거야. 걱정하지 마."

그렇게 안심시키고 구키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구키의 말을 듣고 린코도 옷깃을 여미며 소리 없이 들어온다. 그녀의 온기를 느낀 구키는 가운의 끈을 풀어 가슴을 헤친다. 어젯밤은 너무 취해서 린코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그 벌충은 아니지만 구키는 린코의 은밀한 곳에 손을 넣고 부드러운 애무를 되풀이하면서 촉촉해지기를 기다린다. 다행히 남자의 것은 하룻밤을 쉰 탓인지 금세 생기를 되찾는다. 마침내 린코의 화원이 촉촉해지고 다시 구키가 온몸을 밀착하자 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창문을 흔들고 지나간다. 순간 구키는 광폭한 충동을 느끼며 시트를 제친다.

"왜 그래요?"

놀라는 린코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키는 잡아 빼듯 가운을 벗기고 순식간에 린코를 알몸으로 만든다. 눈보라에 싸인 겨울 여관 속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체가 온몸을 드러낸 채 누워 있다. 그것은 여관 사람들도, 스쳐지나가는 바람도 아무도 모르리라. 눈보라가 낮은 소리를 내며 스쳐간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창밖과는 대조적으로 따뜻한 방 안에는 낮은 사방등의 불빛이 알몸의 린코를 비추고 있다. 구키는 그 하얗고 풍만한 여체의 발밑에 앉아 음미하듯 내려다보고는 서서히 그 위로 엎드린다. 우선 유방에 키스한다. 만약 장지문 사이에서 누군가 엿보고 있다면 이부자리 위에서 한 남자가 알몸의 여체에게 부복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구키는 이토록 아름다운 생명체를 창조한 조물주와 그것을 바치는 린코라는 여자의 관대한 마음에 속으로 경의를 표하며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다. 아주 서서히 구키의 머리가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엷게 우거진 숲에 이르자 입술을 가까이 가져간다. 순간 린코는 작은 한숨을 토해내며 몸을 비튼다. 남자는 비로소 깨달았다는 듯이 얼굴을 든다. 은밀한 곳에 입맞춤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지금 그녀가 바라는 것은 확실한 밀착감이다. 남자가 익숙한 솜씨로 베개를 당겨 여자의 허리 밑으로 넣으려 하자 여자도 보조를 맞추며 허리를 들어준다. 그때 약간 벌어진 허벅지와 그 끝에 우거진 숲이 허공으로 살짝 떠올려진다. 여체의 자태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자세만큼 음란하고 도발적인 것은 없다. 남자는 마치 그 음란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듯이 허리를 가까이 가져가면서 여자의 두 다리를 들어 올려 좌우로 벌린다. 그리고 서서히 들어간다. 순간 창 밖에는 또다시 질풍이 울부짖듯 스쳐가고 그와 동시에 남자의 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 다리를 서로 빈틈없이 맞추고 전후로 완만하게 움직이면서 서서히 허리를 약간 밑으로 떨어뜨리는 자세를 되풀이하는 사이에 여체는 급소를 찔리며 몸부림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부끄러운 듯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던 여체는 남자의 그것이 화심 아래에서 밀어 올리자 짓이겨지는 감각을 참을 수 없는지 작은 입술을 동그랗게 벌리고 차츰 거친 숨을 내쉬기 시작한다.

정사는 숱한 계기로 시작되지만 마지막엔 항상 남자가 여자의 발밑에 항복하는 자세로 끝난다. 이번에도 남자가 여자의 알몸을 위에서 살펴보며 위압적인 태도로 시작했지만 서로의 몸을 섞고 심하게 요동치며 상대를 뒤흔드는 사이 남자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출하고 만다. 그 순간 씩씩했던 남자라는 산은 갑작스레 긴장을 잃고 산사태처럼 여체 위에 무너져 내리고 만다. 이 순간 여자는 자신의 배 위에서 용감히 군림하던 남자가 갑자기 시체로 변하여 내리누르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어쨌든 이 순간을 정점으로 남자의 몸은 한 조각의 누더기로 전락하지만 여체는 윤기 흐르는 실크로 변모한다. 이렇게 누더기로 변한 남자를 사랑스럽게 생각할지의 여부는 오직 그 전에 보여준 남자의 테크닉과 그것을 받아들인 여자의 만족도에 따라 달라진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 여관의 한 모퉁이에서 여자는 누더기가 되어 누워 있는 남자를 감싸듯이 품에 안고 한쪽 손으로는 천천히 남자의 어깻죽지를 어루만지고 있다. 섹스를 하기 전 구키가 해주었던 그 애무를 지금은 린코가 구키에게 베풀고 있다. 성의 향연이 막 끝난 후 남자와 여자는 입장이 바뀌어 있다. 여자가 풍요의 바다 위를 떠도는 데 비해 남자는 작게 위축되어 조용히 시체처럼 누워 있다. 그러나 구키는 빈사상태를 털고 일어난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기분 좋게 잠 속으로 빠져들겠지만 꽉 찬 만족감을 느끼는 여자는 고독 속엔 혼자 남겨질 것이다. 몸은 비록 노곤하지만 남은 기력을 짜내어 여체를 껴안고 살갗의 온기를 전한다. 그렇다고 또다시 설레는 쾌감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행위는 끝났지만 그저 서로 살을 맞대고 함께 편안함을 누리며 기쁨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싶다. 구키는 최선을 다하기 위해 린코를 품에 안아 자신의 앞가슴을 여자의 베개로 내어주고는 눈보라치는 아침의 선잠 속으로 빠져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선잠에서 눈을 뜬 구키가 몸을 뒤척이자 린코도 부시시 눈을 뜬다.

"몇 시예요?"

구키는 머리맡의 시계를 보고 막 9시가 지났음을 알려준다. 선잠의 여운 속에서 그냥 그대로 누워 있고만 싶다. 베란다 쪽에서 낮게 바람 스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직도 눈이 내리네."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난 구키가 베란다의 커튼을 열어젖히자 부서지듯 하얀 눈이 창으로 쏟아져 내린다. 어젯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날이 밝은 지금까지 수그러들 기미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세차게 내리고 있다. 새벽녘의 어둠이 걷히고 창밖은 밝기를 되찾았지만 눈보라 때문에 풍경은 거의 보이지 않고 베란다로 거무스름한 처마 끝만이 보일 뿐이다.

"눈이 그칠까요?"

린코도 일어나서 걱정스러운 듯이 창밖을 내다본다. 새벽녘 구키는 내리는 눈을 보며 낮이 되면 그치겠지 라고 말했지만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이 눈 내리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일어나셨어요?"

어젯밤 시중 들던 여종업원이 나타나 인사한다. 10시에 아침식사를 부탁해두었기에 준비하러 온 모양이다.

"굉장한 눈이네요."

구키가 팔짱을 긴 채 말을 걸자 여종업원은 베란다의 커튼을 젖히면서 말한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일은 좀처럼 없어요. 오늘 아침은 눈때문에 길이 막혀 신문도 배달되지 않는 모양이에요."

"도로가 막혔어요?"

"가파른 길인 데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렸으니 차는 어림도 없어요."

구키는 이로하자카의 겹겹이 구불구불한 가파른 비탈길을 떠올린다.

"11시에는 산을 내려가야 하는데."

"지금 지배인이 외부와 연락을 취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여종업원이 가볍게 인사하고 나가자 린코가 불안한 듯 눈 내리는 창을 손가락으로 문지른다. 그것을 보고 구키는 비로소 자신들이 눈 속의 주젠지코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행지를 닛코로 결정한 것은 도쿄에서 비교적 가까울 뿐 아니라 교통도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겨울이라서 어느 정도의 추위는 각오하고 왔지만 눈으로 길이 막히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걱정이 되어 텔레비전의 일기 예보를 보니 강한 저기압 전선이 호쿠리쿠 일대로부터 간토 북부지대까지 걸쳐 있어서 오후엔 날씨가 궂을 것이라고 한다. 그 동안에 남자 종업원이 이불을 개키고 여종업원이 차를 타주며 아침식사 준비를 한다. 방 안은 난방이 잘되어서 쾌적하지만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내디뎌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는 모양이다.

"이런 일은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해요."

여종업원이 미안한 마음을 담아 말하지만 그렇다고 날씨가 갤리는 없다.

"체인을 감아도 안 될까?"

"도로 여기저기가 돌풍에 쌓인 눈으로 꼼짝도 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이런 눈보라를 헤치고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이로하자카를 내려가기란 어려울 것이다. 구키는 체념하고 아침식사를 시작하지만 린코는 걱정에 휩싸인다.

'몇 시까지 돌아가면 되지?"

"늦어도 세시까지는......"

도쿄에 세시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한 시간 후에는 이곳을 출발해야만 한다.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린코가 대답하기 곤란해하는 것 같아 그 이상은 묻지 않았지만 그 시간까지 돌아가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마침 지배인이 설명하러 왔다. 지금 주젠지코와 그 아래에 있는 닛코와는 교통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당분간 방에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개통은 언제쯤?"

"눈이 그치기 전까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모양입니다. 어쩌면 저녁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듣고 구키가 뒤돌아보자 린코는 새파래진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오전 11시가 되었지만 눈은 여전히 그칠 것 같지 않다. 다행히도 싸라기눈이라 양은 많지 않지만 강한 바람에 눈보라가 몰아치며 군데군데 눈무더기를 만들고 있다.

"좀 무리겠는걸."

3시까지 도쿄로 돌아간다는 린코의 희망은 이미 불가능하다.

"전화 걸면 안 될까?"

구키가 옆에 있으면 남편에게 전화 걸기 곤란할 것 같아 슬그머니 일어나 아래층의 목욕탕으로 가본다. 프런트 앞을 지나자 칠팔 명의 손님이 짐을 다 꾸리고 밖을 바라보고 있다. 모두들 길이 막혀 돌아갈 수 없어 초조해하는 모습들이다. 텅 빈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자 린코가 다다미방의 거울 앞에 앉아 새끼손가락으로 눈꼬리 언저리를 문지르고 있다.

"어떻게 됐어?"

전화 결과가 마음에 걸려서 묻자 린코는 고개를 살며시 가로젓는다.

"양해를 구했어요."

"?"

"실은 오늘이 조카딸 결혼식 날이에요."

"조카딸이라면 린코의?"

"아니요. 그 사람의..."

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린코 남편 형이든가 누이의 딸쯤 될 것이다. 집안의 그런 큰 모임에 빠진다는 건 아무튼 큰 문제이다.

'몇 시부터?"

"결혼식은 5시부터 시작이지만. 그 후 피로연에라도 갈 생각이었는데......"

이제 곧 정오이다. 길이 뚫렸다 해도 닛코까지 내려가 도쿄에 도착하면 4시 가까이 될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을 시간까지 계산하면 도저히 시간에 맞출 수 없을 것이다.

"여기 와 있는 건 알고 있나?"

"말은 해두었지만......."

"괜찮겠어?"

묻고 나서 구키는 마음속으로 '아니.' 라고 고쳐 말한다. 남편 조카딸의 결혼식 날에 다른 남자와 온천에 왔다가 눈에 갇혀 돌아가지 못한다.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부부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지기란 불가능하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 있으랴. 오후가 되었지만 여전히 눈은 그칠 것 같지 않다.

구키는 시계 바늘이 두시에서 세시로 옮겨가는 것을 보면서 생각한다. 이제부터 눈이 그친다 해도 제설 작업이 끝나고 차가 다닐 수 있게 되기까지는 네다섯 시간 이상 필요하다. 그리고 닛코로 내려가 전차를 타고 도쿄에 도착하면 저녁 여덟시나 아홉시가 될 것이다. 그것도 운이 좋아야만 가능한 일이고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면 오늘 밤은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린코의 표정이 몹시 곤혹스럽다. 곤란하기는 구키도 마찬가지이다.

아내에게는 오늘 중으로 돌아간다고 말해두었지만 닛코에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쇼와시대사의 자료 조사차 교토에 취재 간다는 핑계를 대었기에 눈 때문에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은 이유가 될 수 없다. 아내는 그럭저럭 넘어간다 해도 내일은 월요일이라 오전 열시부터 회의가 있다. 그 시간에 맞추어 출근하려면 어지간히 일찍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쪽은 오히려 린코이다. 남편 조카딸의 결혼식에도 참석 못하고. 게다가 행선지도 확실하지 않은 채 하루를 더 외박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은데. 이번 일은 남편이 그냥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걱정을 하며 시계를 보니 세시를 지나고 있다. 여종업원이 커피를 갖다 주고 총총 사라지자마자 구키가 린코에게 묻는다.

"만약 이대로 돌아갈 수 없게 되면 어떡하지?"

린코는 대답 대신 천천히 스푼으로 커피를 젓는다.

"물론 이제 곧 그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하룻밤 더 묵게 될 지도 몰라."

"당신은요?"

"물론 돌아가는 게 좋겠지만 그렇게 못해도 어쩔 수 없잖아."

"나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당신은 오늘......."

그때 린코가 조용히 얼굴을 든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잖아요."

그렇게 말한다면 더 이상 할말이 없다. 구키가 고개를 끄덕이자 린코는 자신에게 타이르듯 말한다.

"저 이제 체념했어요."

오후 4시가 지나서 눈발은 사그라들기 시작했지만 해질녘이라 희미하게 보이던 주젠지코도 어둠에 잠기고 있다. 구키가 베란다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지배인이 온다. '곧 밤이 되면 길이 얼어붙어 더욱 통행하기 어려우니까 방 값은 받지 않을 테니 오늘 밤도 묵고 가라'고 당부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하루 더 묵는 수밖에 없다. 다른 손님들도 체념했다는 말을 듣고 구키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린코도 옆에서 듣고 있었지만 이미 각오가 선 눈치이다.

"목욕하고 올게요."

혼자 남은 구키는 눈 속에서 흘연히 떠올라 있는 호반의 불빛을 보며 작년 가을 하코네에서 이틀 밤을 묵었던 때를 회상한다. 그때는 오늘처럼 돌아갈 수 없었던 상황이 아니라 스스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정했었다. 두 사람이 자의로 머물렀기에 위험을 무릅쓴 모험을 했던 만큼 긴장과 더불어 즐거움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연의 무심함 때문에 부득이 돌아갈 수 없게된 상태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날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까닭모를 답답함이 밀려오고 궁지에 몰린 느낌이다. 그 원인은 지난 몇 개월 동안 두 사람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하코네에서 이틀 밤을 계속 묵었을 때는 서로의 가정을 무시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랄까 안심하는 마음이 있었다. 거듭된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만일의 경우 끝내면 된다는 이기심이 깔려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오늘 밤 돌아가지 못한다면 두 사람 모두에게 결정적인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구키는 베란다에서 테이블로 자리를 옳기며 담배를 한 개비 피워 문다. 그리고 하룻밤 더 묵는다는 결심을 했을 때 '체념 했어요'라고 말하던 린코를 떠올린다. 돌아갈 것을 체념했다는 말일까. 아니면 남편과의 관계를 체념했다는 말일까. 두 가지 모두일 수도 있지만 구키는 왠지 후자에 가까운 느낌을 받는다. 린코는 오늘 밤을 계기로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할까. 만약 그렇다면 구키 자신도 각오를 해두어야 한다. 어둠이 깔린 창을 바라보면서 구키는 두 사람이 점점 궁지로 빠져들고 있음을 예감한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둘은 목욕을 하고 식사를 한다. 어젯밤과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었지만 기분은 전혀 다르다. 어젯밤 여관에 막 도착했을 때는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는 주젠지코도. 일층의 대중탕도. 그리고 노천탕도 모두가 신선하고 소중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가슴 설레임은 전혀 없다 그보다는 될 대로 되라는 체념이랄까 대담성이 두 사람의 가슴에서 서서히 고개를 든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걱정해봐야 묘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고 구키는 자위한다. 그것은 린코도 마찬가지이다. 식사가 시작되자 모든 걱정을 떨쳐버리고 싶은 듯 술 마시는 속

도가 빨라진다. 린코도 달콤한 술을 자청하며 대담하게 들이켠다. 지금쯤 도쿄에서는 피로연이 한창이겠지. 린코의 남편은 아내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분노를 삭이고 있을 것이고. 친척들은 수상쩍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구키의 머리는 욱신거리고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려는 듯 다시 술을 들이킨다. 식사를 시작한 것은 6시가 좀 지나서였는데 식사를 끝내고 보니 여덟시이다. 린코의 눈 가장자리에서부터 볼까지 살짝 불그스레하게 물들어 있다. 상당히 취한 모양인데 갑자기 린코가 비실비실 일어난다.

"어때요. 우리 한 번 눈 속에 얼굴을 파묻어 볼까요?"

어젯밤 노천탕에서 눈 속에 얼굴을 파묻은 것을 말하나 보다. 린코의 발끝이 불안하다

"당신도 함께 가요."

복도로 나가려는 린코를 구키는 당황해하며 가로막는다.

"지금은 너무 취해서 위험해."

"하지만 죽을 거예요. 죽는데 위험이 무슨 소용이에요."

막무가내로 손을 뿌리치며 나가려고 기를 쓰는 린코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눈동자는 힘이 풀려 요사스러운 느낌을 자아낸다.

"자아. 당신도 일어나요."

"기다려 ."

구키는 두 손으로 린코의 어깨를 잡아 앉힌다.

"기분이 정말 좋다는데 왜 방해하는 거예요......."

린코는 여전히 불만인 모양이지만 구키는 개의치 않고 프런트에 연락해 식사를 물리고 잠자리를 봐달라고 부탁한다. 린코의 주량은 역시 한 잔 정도가 적당하다 그런데 목욕을 막 마치고 나와서는 차가운 술을 몇 잔씩이나 연거푸 마셨으니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자는데 왜 안 가는 거예요?"

린코는 아직도 눈 속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가 보지만 구키는 아랑곳 않고 여종업원에게 이부자리를 펴달라고 부탁한다. 취한 린코도 여종업원이 있는 동안은 방 한쪽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다. 여종업원이 나가자 다시 비실비실 일어난다.

"그만해......."

막으려는 구키와 나가려는 린코가 옥신각신하며 서로의 발이 뒤얽히는 순간 두 사람은 깔아놓은 이불 위로 함께 쓰러진다. 서로 엉키다 보니 구키가 밑에 깔려 있고 린코가 그 위를 덮치고 있다. 린코가 상체를 일으켜 말타기를 한다. 마부는 린코이고 말은 구키이다. 린코는 싸움에 이겨서 의기양양하다는 듯이 구키를 내려다본다. 순간 사냥감을 발견한 암 표범처럼 눈을 반짝이더니 두 손을 구키의 목으로 가져간다.

"뭘 하는 거야?"

그냥 장난일 거라 생각하지만 취기 때문인지 의외로 강한 힘으로 죄어 온다.

"이봐. 이봐"

"그만해?"

그러나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숨이 답답해지면서 기침이 캑캑 나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린코의 손에서는 힘이 빠지기는커녕 더욱 강하게 옥죄어온다. 구키는 문득 이대로 숨이 끊어지는가 보다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올려다보니 린코의 눈은 불처럼 이글거린다. 어떻게 할 작정인가. 구키는 갑자기 공포가 밀려와 목에 얽혀있는 그녀의 두 손을 뿌리친다. 구키는 심한 기침을 몇 번 내뱉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중얼거린다.

"죽는 줄 알았어 ."

"그래요. 죽이려고 했어요."

린코는 쌀쌀맞게 말하곤 말타기 자세를 명령하듯 요구한다.

"이대로 당신을 받아들이고 싶어요."

이런 체위로 맺어진 적은 몇 번 있다. 지금까지는 모두 구키 쪽에서 요구하고 린코가 망설이면서 응했을 뿐이다. 이런 체위는 여체가 속속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약간 괴롭기는 하지만 두세 번 거듭하는 사이에 린코도 조금은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음란한 모습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싫지는 않은가 보다. 그러나 이렇게 린코가 자처해서 그것도 당당하게 요구해오다니. 취기 탓일까 혹은 우연한 말타기 자세로 말미암아 자극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갑자기 대담해진 것일까.

구키는 새삼 여체의 전모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자신의 것을 쥔다. 린코는 두 눈을 감은 채 상체를 뒤로 젖히고 두 손은 유방을 가리듯 살짝 가슴에 얹고 있다. 구키는 린코의 양손을 아래로 끌어내려 아무것도 가리지 못하게 해놓고 우거진 숲 밑을 손으로 가르며 서서히 들어간다. 순간 린코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비튼다. 구키가 아랑곳하지 않고 깊숙이 들어가자 '아악......' 하고 깊고 길게 배 밑바닥까지 스며드는 듯한 비명을 지른다. 남자의 살 끝이 여자의 몸속에 잠겨서 빈틈없이 밀착되어 있다. 여자는 서서히 상체를 뒤로 젖히고 그 극한에 달하고 나면 이번에는 서서히 앞으로 쓰러지기를 몇 번 되풀이하였을 때. 쾌락의 포인트를 포착했는지 단숨에 동작이 격해진다. 밑에 깔린 구키가 린코의 허리를 가볍게 두 손으로 잡고서 서서히 홍조를 띠어가는 얼굴과 더불어 출렁이는 유방 그리고 아랫배의 옴폭 패인 점까지를 더없이 행복한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그녀의 얼굴은 경련이 일어 마치 울부짖는 것처럼 보인다. 린코가 열락의 고갯길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좌우에서 검은 날개 같은 린코의 손이 뻗쳐 나와 구키의 목을 휘감는다.

지금까지 구키는 이렇게 격렬한 폭발은 일으킨 적이 없다. 남자를 밑에 두고 그 위를 여자가 두 다리를 벌려 올라탄 자세로 절정에 치닫는다. 그것이 색다른 체위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자세로 여자가 치달으며 남자의 목을 조인다는 것은 이미 상식을 벗어나 변태에 가까운 건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 순간 구키는 이대로 숨이 끊어진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서 의식까지 혼미해졌다. 만약 그대로 일분만 더 계속되었다면 숨이 끊어졌을지도 모른다. 죽음의 세계를 잠시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 스쳐지나간 후, 구키는 심한 기침을 하며 의식이 돌아온다. 비로소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알몸의 린코가 옆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본 것은 그 후이다. 그러고 보니 린코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무슨 소리인가 외치면서 무너져 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무슨 말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두 사람이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절정을 맞은 것만은 틀림없다. 서서히 돌아오는 기억을 더듬으며 구키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본다. 손도 발도 무릎도 움직이는 것을 보면 어디 잘못되진 않았나 보다. 사방등을 바라보며 여기가 주젠지코가 바라보이는 방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린코가 돌아누우며 품으로 스며들 듯 안겨온다.

"굉장했어요."

이런 표현은 지금까지 절정을 넘겼던 린코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린코가 아니라 구키의 느낌이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구키의 목소리에 이끌린 듯이 린코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내가 왜 '무섭다'고 했는지 아시겠어요?"

절정의 순간에 린코는 '무섭다'는 표현을 여러 번 했다. 린코는 바로 이런 감각을 두고 말했을까 구키는 새삼 자신의 몸속을 훑고 지나간 감각을 좇으면서 문득 생각난 듯 말한다.

"기치조도 같은 말을 했어 ."

"그게 누군데요?

"아베 사다에게 목이 졸려 죽은 남자야."

구키의 뇌리에 천천히 쇼와시대사 자료에서 읽은 아베 사다와 또 한 남자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린코는 구키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다. 정사 후의 나른함이 묻은 목소리로 묻는다.

"아베 사다라면 그 이상한 짓을 한......."

"그렇게 이상한 건 아냐."

"하지만 남자의 성기를 잘라 죽였다면서요?"

린코는 사건의 엽기적인 부분만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건을 상세히 조사하고 있던 구키로서는 깊은 사랑을 나눈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난 지극히 인간적인 사건처럼 여겨진다.

"그녀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와전된 것 같아."

구키는 사방등의 불빛을 살짝 밀어내서 한층 어두워진 이부자리 속에서 말한다.

"그녀가 남자의 성기를 자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목을 졸라 죽인 다음의 일이야."

"여자가 남자의 목을 졸랐단 말이에요?"

". 그녀는 그 전에도 섹스를 하면서 몇 번 남자 목을 조른 적이 있었나 봐. 조금 전의 당신처럼......."

린코는 섬뜩한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구키의 가슴에 바짝 매달린다.

"난 당신을 사랑하니까 조른 거예요. 너무 사랑하는 까닭에 왠지 미워져서. ....."

"그녀도 그 남자를 너무 사랑했다구. 아무에게도 남자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저도 모르게 목을 조른 거야."

"하지만 그러면 사람이 죽어버리잖아요."

"그럼. 그러니까 죽었지 ."

구키는 조금 과장되게 린코가 조른 목 언저리를 쓰다듬는다.

". 나도 죽을 뻔했는걸."

"그렇지 않아요. 일전에 당신의 목을 장난삼아 조른 적이 있죠. 그때가 생각나서 그냥 해봤을 뿐이에요."

"아베 사다도 처음에는 장난이었어. 섹스를 할 때 더러는 서로 목을 조르며 즐겼던 모양이야."

"손으로 졸랐어요?"

"그때는 끈이었지. 세게 조를수록 남자의 것이 흥분되어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야."

"이처럼 ......."

린코는 살짝 발을 휘감으며 말한다.

"당신은 어땠어요. 목을 조르니까 좋았어요?"

목이 졸렸던 그 순간은 분명히 괴로웠다. 그러나 곧 '이제 이대로 어떻게 되든 좋다. 될 대로 돼라'는 기분에 사로잡힌 것은 사실이다.

"괴롭지만 그 위기를 넘기면 편하게 될지도 몰라."

"그렇군요."

중얼거리더니 곧 응석부리는 말투로 변한다.

"다음번에는 나도 그렇게 해주세요."

"린코 목을?"

"그래요. 내가 막 절정에 달했을 때. 알 수 있죠. 그때.... "

시키는 대로 구키는 살짝 린코의 목에 손을 대본다. 두 손으로 감싸자 가는 목이 그대로 손가락 안에 들어온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누르자 린코는 스르르 눈을 감는다. 순종하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좀 더 힘을 가하자 목구멍의 연골이 느껴지고 동맥의 고동이 전해온다. 그래도 상관 않고 조르기를 계속한다. 린코의 턱이 서서히 치켜 올라가더니 다음 순간 격하게 기침을 한다. 그제서야 놀란 구키가 손가락에 힘을 풀며 손을 탁 놓는다. 린코는 몇 번의 기침을 연거푸 하고 나서야 정상적인 호흡을 한다.

"무섭지만 뭔가 야릇한 쾌감 같은 게 느껴졌어요."

그녀의 눈빛이 꿈을 좇는 듯하다.

"그 사람은 끈으로 졸랐겠죠. 끈이라면 좀 더 괴로울 거예요."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밤도 둘이서 서로 목 조르기 장난을 했었는데.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남자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거야. 목에는 끈 자국이 나고 얼굴이 빨갛게 부었지. 여자는 냉습포를 해주기도 하고 카르모틴이라는 진정제를 먹이고 나니까 일단 안정은 됐다는군. 그런데 그날 밤도 남자가 약을 먹고 꾸뻑꾸뻑 졸면서 중얼거렸대. '당신 오늘 밤도 내 목을 조르겠지. 조르기 시작하면 손을 떼지 말고 최후까지 졸라줘. 도중에서 그만두면 오히려 괴로우니까'라고 말이야."

"그러다 정말 죽어버리면 어떡해요."

"그대로 끝내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왜요. 사랑하기 때문에?"

"남자를 아무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였겠지."

순간 베란다 앞을 스쳐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나고 사방등의 불빛이 살짝 흔들린다. 눈은 멎었지만 바람은 여전히 세게 불고 있다. 린코도 그 바람 소리를 듣고 있는지 조금 사이를 두고 묻는다.

"그 아베 사다는 뭘 하는 여자였나요?"

"목 졸려 죽은 남자는 이시다 기치조라고 하는데. 도쿄 나카노의 '요시다야' 라는 요릿집 주인이고. 사다는 그 가게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어."

"그럼 거기서 처음 알게 되었군요."

"사다가 서른한 살, 기치조가 열한 살 위인 마흔두 살이었지. 남자는 스포츠형 머리에 갸름한 얼굴이라 상당히 매력적이었나 봐. 사다는 십칠팔 세 때부터 게이샤로 나갔으니까 나이에 비해 조숙했는지도 모르지. 뽀얀 피부에 묘하게 요염한 여자였대."

구키가 아베 사다에 관한 자료를 읽은 것은 반년 전이지만 작년 연말에 다시 당시 신문을 읽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대충은 기억하고 있다

"아베 사다가 먼저 유혹한 걸까?"

"처음에 말을 건 건 역시 남자였겠지만. 그녀도 반해 있었던 건 확실해 ."

"그 남자. 부인이 있었어요?"

"물론 착한 부인이 있었지만 사다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는 거야."

"하지만 가게에 두 사람만 있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둘이는 여기저기 여관을 전전하고 다닌 모양이야."

구키는 이야기하다 보니 마치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부인에게 들키지 않았나요?"

"물론 들켰지. 그러니 더욱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며칠씩이나 여관을 전전했지. 사건이 일어난 날도 일주일 동안 아라가와에 있는 여인숙에 계속 묵은 후였다구."

"일주일씩이나 돌아가지 않았단 말이에요?"

"돌아가고 싶어도 그만 기회를 놓쳐서 돌아갈 수 없었는지도 몰라."

베란다 앞을 다시 질풍이 불고 지나간다. 둘이서 계속 있다가 돌아갈 기회를 놓쳐버린 사다와 기치조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구키와 린코로서도 남의 일 같지 않다

"어느 한쪽이 유혹했기 때문은 아니겠죠."

"물론 두 사람 모두 헤어지기 싫어서 우물쭈물했었지 그녀로서는 지금 돌아가면 사랑하는 남자를 부인에게 빼앗길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르지 ."

"나도 그래요."

갑자기 린코가 팔꿈치 언저리를 확 잡는 바람에 구키는 저도 모르게 팔을 뺀다.

"여자의 마음은 똑같은가 봐요."

뜻밖에 강한 말투에 구키는 약간 당황한다.

"아마 남자도 돌아갈 마음이 없었을 거야."

기치조의 심정을 빗대어 변명하듯 말하자 린코도 이해가 되는 모양이다.

"그럼 그들은 동반자살을 시도한 거네요."

"기치조를 죽인 뒤 사다도 자살할 생각이었던 것은 확실해."

"하지만 그 전에 남자의 성기를 잘랐잖아요."

구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시의 신문에서 읽은 기사를 떠올리며 들려준다.

"발견되었을 때 남자의 사체는 가는 끈으로 목이 졸려 있었고, 성기는 밑동부터 잘려 있었대. 게다가 시트에는 새빨간 피로 '사다기치 두 사람뿐'이라며 해서체로 크게 쐬어 있었고. 또 남자 왼쪽 다리에도 '사다기치 두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어. 그리고 왼팔에는 '사다()'라는 한 글자를 칼로 새겨놓아 피가 배어 있었다는 군 ."

"무서워라......."

린코는 구키의 앞가슴으로 파고든다.

"기치조를 죽인 건 새벽 2시경이었어. 날이 밝자 사다는 혼자서 여관을 나왔지. 정오가 지나서 하인이 사체를 발견하고는 큰 소란이 벌어졌던 거야. 그래도 '사다기치 두 사람'이라는 글로 사다와 기치조의 신원이 밝혀진 걸 보면 처음부터 도망칠 마음은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그 자른 것은?'

"종이에 조심스럽게 싸서 여섯 자나 되는 남자의 훈도시를 배에 감고 그 속에 소중히 넣어 가지고 돌아다녔어."

구키도 썩 기분 좋은 이야기가 아니어서 바싹 붙어 있었는데 어느새 린코의 손이 구키의 것을 살짝 쥐고 있다. 어느새 그런 자세가 되었을까. 두 사람이 마주보고 누운 채 살갗을 맞대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하고 있다 해도 이상할 건 없지만 지금 성기가 잘려나간 남자의 얘기를 하던 중이라 그런지 기분이 꺼림칙하다. 구키는 가볍게 빼보지만 린코는 움켜쥔 자세 그대로 오히려 시트 속으로 파고든다.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의아해하고 있는데. 순간 구키의 것이 린코의 입술에 닿으며 예민한 부분이 뜨거운 입김에 휩싸인다.

"뭘 봐...... "

가끔 부끄러운 듯 입술을 가까이 대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입속 깊숙이 넣은 것은 처음이다. 뇌수까지 뚫고 지나가는 것 같은 쾌감에 구키가 몸을 비틀자, 린코는 입술을 메고 딱딱해진 것을 쥐면서 묻는다.

"자른 것은 여기뿐이에요?"

뜻밖의 말에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옆으로 가로젓자 다시 린코가 묻는다.

"여기만이 아녜요?"

"거기하고 자루하고......."

"여기 말이죠."

이번에는 음낭을 가볍게 쥐면서 사뭇 진지하게 묻는다.

"그걸 가지고 어디로 갔어요?"

"죽으려고 시내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던 모양이야. 그래도 죽지 못하고 사흘 후에 시나가와의 여관에 있다가 붙잡혔어. 당시 신문은 세기의 엽기적 사건이라며 '피로 웃는 마성의 화신'이라느니 . '변태성의 소행' 혹은 '그로테스크 살인' 따위의 타이틀로 대서특필하며 특종거리로만 삼았지."

"그건 좀 심하네요."

"처음에는 흥미 위주로 자극적인 기사만 쓰더니 차츰 사다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어 '애욕의 종말'이라든가 '함께 죽음을 원하다'라는 식으로 어느 정도 호의적인 표현으로 바뀌었지. 체포될 당시 사다는 3통의 유서를 가지고 있었대. 그중 1통은 죽인 기치조 앞으로 쓴 것인데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당신이 죽어 이제서야 내 것이 되었습니다. 나도 곧 가겠어'라고 적혀 있었어."

"그 심정 이해가 가요."

"그밖에 오사카 행 야간열차 차표를 가지고 있었는데 도쿄에서 죽지 못해서 이전에 갔던 적이 있는 이코마야마에서 자살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야."

린코는 다시 호기심이 발동하는지 사다에 대해 묻는다.

"그래서 잡히고 나서 어떻게 됐어요?"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그제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던 모양이야. 형사가 묻자 '제가 지명 수배된 아베 사다입니다' 하고 자백하고. 취조에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솔직히 대답했지. 반년 후의 재판에서 검사는 징역 10년을 구형했지만 판결에서는 6년형을 선고받았지."

"그 정도면 가벼운 형인가요?"

"살인 형치고는 상당히 가벼운 편이지. 복역 중 모범수라 해서 다시 1년 감형을 받아 따지고 보면 오년 복역하고 출소한 거야."

린코는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해 2월에는 청년 장교들에 의해서 이른바 2.26사건이 일어나 사이토 내대신 이하 세 명의 중신이 살해되고 세상이 어지러운 때였지. 게다가 그 후 일본은 지나사변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의 또 하나의 축인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군국주의가 시대를 뒤흔들었지."

"그런 시기에 사건이 일어났군요."

"시시각각 다가오는 전쟁의 위기 속에 국민들의 정서는 그야말로 암울했지. 바로 그런 시기에 자신의 사랑에만 몰두한 사다에게 연민을 느껴 '퇴폐 밑바닥의 순애'라는 타이틀을 붙이기도 하고 그녀를 '세상을 바로잡은 다이묘진(신의 이름 밑에 붙이는 칭호)'이라는 식으로 부르는 등 비극적 사랑의 결말을 호의적으로 보게 되었지."

"그럼 여론이 그녀를 살렸다는 말이군요."

"물론 그런 영향도 있지만 사다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의 명 변론이 결정적이었나 봐."

"뭐라고 했는데요."

"아베 사다와 기치조. 이 두 사람은 마음 깊이 서로 사랑하고 있었고. 동시에 몇 만 명 중 한쌍 있을까말까 한 육체적인 적합성을 가진 아주 드문 쌍입니다. 때문에 육욕을 떨칠 수가 없어서 사랑의 극치로 불타오른 끝에 이루어진 행위입니다. 고로 단순 살인죄로 기소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변론하여 법정을 들끓게 한 거야."

"몇 만 명 중에 한 쌍의 적합성...."

"요컨대 궁합이 맞는다는 거겠지."

린코는 잠자코 있다가 하반신을 살짝 감아오며 묻는다.

"우리들은?"

"물론 몇 만 명 중의 한 쌍이지."

"정말이죠? .

"그러니까 언제나 이렇게 함께 있지."

물론 사랑에는 정신적인 유대를 빼놓을 수 없지만 동시에 육체적인 궁합도 중요하다 아니 때로는 정신적인 유대는 그다지 강하지 않더라도 육체적인 매력에 끌려서 벗어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처음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외관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지."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사는 건 불행한 일이에요."

린코의 말은 남편에 대한 불만의 토로일까.

"그런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죠?"

"다소 불만을 느껴도 참고 지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개중에는 섹스란 이런 거겠지 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럼 모르는 게 좋을까요?"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불행해요. 당신에게 쓸데없는 것을 배웠으니까."

"이봐. 이봐......."

갑자기 사태가 바뀌어서 구키는 당황해하지만 린코는 상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잖아요."

섹스에 대한 불만으로 부부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남에게 털어놓기란 어려울 것이다. 설사 말한다 하더라도 참을성이 없다라든가. 바람기가 있어서라는 식으로 해석해버린다

면 견디기 어렵다.

"궁합이 맞는 부부가 부러워요. 그러면 굳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하지만 나는 엉뚱한 사람과 만나버랐으니..... "

그런 점에서는 구키도 마찬가지라서 린코의 괴로움에 공감한다.

"어쨌든 우리는 힘들게 서로 잘 맞는 사람과 만났으니 다행이잖아."

지금은 그렇게라도 말해서 납득시킬 수밖에 없다.

시계를 보니 11시가 지나고 있다. 생각지도 않았던 아베 사다의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왜 긴 시간이 흘렀다. 밖은 여전히 강한 바람이 불어 닥치고 있는 모양이지만 눈은 이미 그쳤고 내일은 도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갈 시간은 아직 정해놓지 않았지만 10시까지 회사로 출근하려면 상당히 일찍 일어나야 할 것이다. 슬슬 잠을 잘까 하고 구키가 몸을 뒤척이자 린코가 뒤에서 매달리듯 손을 뻗쳐 사타구니를 더듬는다. 구키는 그 손 위에 가볍게 자신의 손을 얹고 타이르듯이 말한다.

"이제 그만 자자."

"만지기만 할게요."

사다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번 격렬하게 맺어졌기 때문에 구키는 더 이상 응할 힘이 없다. 그대로 부드러운 손에 맡기고 있는데 린코가 잠시 사이를 두고 부끄러운 듯이 묻는다.

"그 기치조라는 사람 그걸 잘했을까?"

구키는 순간 비교당하는 것 같아서 책에서 읽은 대로 대답한다.

"테크닉이 상당히 교묘한 남자로 정력적인 데다가 사정은 하지 않고 오래 참고 견디면서 아주 오랫동안 여자만을 기쁘게 해주었던 모양이야. 그때까지 관계를 가진 남자들 중에서는 제일 환상적으로 멋있었다고 사다 자신이 말했다는군."

"거기까지 잘라버린 건 그 탓일까?"

"왜 잘랐느냐고 형사가 묻자 '그건 내가 제일 사랑하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대로 두면 입관하기 전 염을 할 때 부인이 틀림없이 만질 테니까. 아무도 만지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게다가 그 사람의 몸은 여관에 두고 왔어도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언제나 기치조와 함께 있는 것 같아 쓸쓸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대답했더군."

"정말 솔직한 여자네요."

"시트에 '사다기치 두 사람'이라고 피로 쓴 데 대해서는 '그 사람을 죽여 버리면 그것으로 그 사람은 완전히 내 소유물이 될 것 같았어요.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서로의 이름 한 자씩을 따서 적어 놓았어'라고 말한 거야."

"그런 내용이 어디에 있어요?"

"형사의 신문 조서에 정확히 기록돼 있어."

"그걸 보고 싶어요."

"이번에 돌아가면 보여줄게."

그렇게 말한 구키는 자신의 것을 린코에게 맡긴 채 조용히 눈을 감는다. 구키는 아베 사다의 꿈을 꾼다. 닛코에서 돌아가는 길인지 구키가 전차를 타고 아사쿠사로 돌아오자 나카미세 상점가로 통하는 골목 앞에 사다가 구키 쪽을 보고 서 있다. 할머니인데도 나이답지 않게 하얀 피부와 농염한 자태에 넋을 잃고 보고 있는 사이에 사다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사다의 꿈을 꾼 것은 린코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녀같이 보이는 여자가 있다며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길래 들여다보려고 갔다가 경찰에게 쫓겨 돌아왔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인물의 꿈을 꾼다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구키가 아사쿠사의 복잡한 인파 속에서 그녀를 본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쟁 후 아베 사다가 아사쿠사 부근에서 일품 요릿집을 경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선배 편집자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선배 말에 의하면 사다는 늙긴 했지만 탄력 있고 아름다운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차츰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는 것이 싫었는지 얼마 후 그녀는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그 뒤의 소식은 모르는 모양이다.

"지금 살아 있으면 몇 살이나 되죠?"

린코가 묻는다. 1936년에 서른한 살이니까 아흔 살쯤일까."

"그럼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쇼와시대사를 편찬하는 편집자로서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도 않았으나 구키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본인이 세상에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데 무리하게 끌어낼 것까지는 없지. 게다가 그녀의 심정은 형사 신문 조서에 충분히 나와 있으니까."

구키는 거기서 사다치 이야기를 그만 뚝 잘라버리고 일어선다. 가운만 걸친 채 베란다의 커튼을 걷자 눈앞에 펼쳐지는 주젠지코가 아침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어제 종일 내리던 눈은 완전히 그치고 하얗게 깔려 있는 눈이 햇살에 반사되어 그야말로 눈부시다.

"이리와 봐."

어젯밤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린코와 정사를 거듭하고 사다와 기치조의 어두운 세계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조차 마치 외딴 세계처럼 낯설다. 그 정경을 둘이서 넋을 잃고 보고 있는데 여종업원이 들어와 소식을 전해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길이 드디어 뚫렸어요."

어젯밤은 길이 통제된 걸 걱정하고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는데 도로가 뚫렸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는데도 막상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대로 고립된 채 돌아갈 수 없게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런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마음의 동요는 이제 돌아간다고 스스로에게 타이르는 순간 온몸을 덮치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맞닥뜨릴 현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도쿄로 돌아가면 회의는 어떻게 할까. 참석할까 그냥 불참하고 오후에 나갈까. 또 아내에게는 어떻게 둘러댈까. 하는 현실이 압박해온다. 돌아가서의 고민은 린코에게도 마찬가지로 큰일이다. 결혼식은커녕 피로연에도 참석하지 않고 게다가 외박까지 했으니 남편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서로 그런 개운치 않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는 것은 이런 사태의 심각성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저주저하다가 결국 아침식사를 한 것은 8시부터이다. 9시에 여관을 나와 택시로 닛코 역에 내려 전차를 탔지만 도쿄에 도착하면 아마 점심시간쯤 될 것이다. 물론 회의에는 이미 늦었기 때문에 전차를 타기 전에 회사로 전화하여 감기 기운이 있어서 결근하겠다고 알렸지만 아내에게는 아직 연락을 못하고 있다. 그것은 린코도 마찬가지인지 집으로 전화를 거는 기색은 없다. 아무튼 11시 반에 아사쿠사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대로 혜어지기가 싫어 일단 가까운 메밀국수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오자 정오가 지나고 있다. 이대로 회사로 가면 지각 처리될 뿐이지만. 곧장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도시의 혼잡한 거리에 서서 구키는 망설이고 있다.

"어떻게 하지?"

"당신은?"

되묻는 린코의 표정이 불안해 보이지만 구키는 불쑥 엉뚱한 말을 한다.

"그럼 시부야로 갈까?"

그러나 이대로 두 사람만의 보금자리로 간다면 귀가가 더욱 늦어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고 말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괜찮겠어?라고 묻는 구키의 물음에 린코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택시를 타고 린코의 손을 살짝 쥐면서 말한다.

"우리도 사다와 기치조하고 다를 게 없군."

둘이서 방으로 돌아가면 다음에 할 것은 이미 스스로 알고 있다. 아사쿠사에서 시부야까지 약 한 시간 만에 도착하자마자 빠져들 듯 방으로 들어간다. 그다지 먼 여행은 아니지만 여행에서 돌아왔다는 편안함과 가벼운 피로로 쓰러지듯 침대에 눕는다. 지금은 서로를 요구할 의욕도 없지만 친숙한 침대에서 살과 살을 맞대고 있는 사이에 기분이 흐뭇해지고 함께 잠에 빠진다. 그 뒤 어느 쪽이랄 것도 없이 잠에서 깨고 보니 오후 3시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지만 커튼을 닫은 방 안은 어둡다. 서로 바싹 달라붙어 있는 사이에 다시 그리워진다. 그러나 어젯밤과 같이 격렬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익숙하게 구키가 린코의 은밀한 곳을 만지며 가볍게 애무를 거듭하는 동안 린코도 덩달아 달아오르며 구키의 것을 잡고 주무르고 있다. 그리고 얼마 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두 사람은 몸을 섞는다. 이미 회사도 집도 다 잊어버리고. 아니 오히려 잊기 위해 모든 여력을 다하여 쾌락에 빠지고 어느새 다시 잠든다. 다시 잠에서 깼을 때 시간은 오후 6시가 지나고 있다. 밖은 벌써 어둡다. 린코는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간단히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둘이서 맥주를 마신다.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서 잡담을 나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긴요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두 사람 모두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어느 쪽이랄 것도 없이 다시 들러붙는다. 적극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지만 가끔 서로의 깊은 곳을 만지곤 반응을 즐기면서 뒤얽힌다. 그야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는 환락과 쾌락의 한때를 보내면서 이따금 '돌아가야 하는데' 하는 생각만이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이윽고 밤 열시이다. 구키가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와서 묻는다.

"어떻게 하지?"

낮에 아사쿠사에서 나눈 말이 되풀이되고 구키가 대답한다.

"이대로 있고 싶지만 돌아가지 않을 수도 없잖아."

이런 지경까지 되었는데도 구키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재촉하고 싶지 않다. 사랑의 극치 속에 계속 빠져 있는 두 사람에게 있어서 헤어지는 것만큼 가슴 쓰리고 쓸쓸한 것은 없다. 린코는 조금은 창백한 얼굴로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샤워를 하고 화장을 고쳤다고 해서 정사의 여운이 지워질 리는 없다. 그것은 구키도 마찬가지다. 상의를 입고도 정사 후의 나른한 여운이 침전물처럼 전신에 남아 있다. 겨우 준비가 끝나자 린코가 검정 하이넥 스웨터 위에 자주색 하프 코트를 입고 회색 모자를 쓴다. 순간 구키는 두 손으로 린코를 껴안는다. 지금 새삼스럽게 이러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힘껏 껴안으면서 구키는 바라고 있다. 만약 린코의 남편이 화내며 심한 욕을 퍼붓고 혹 때리는 경우가 있더라도 부디 무사하게 있어 주기를 바란다. 그것을 극복하고 다시 만나고 싶다. 구키의 소망을 린코가 알아차린 것 같다.

"가겠어요....."

결심한 듯이 말하지만 다음 순간 돌아보는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하고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역시 불안한 것일까. 구키는 손수건을 꺼내서 린코의 눈물을 닦아준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해. 오늘 밤은 자지 않고 깨어 있을 테니까."

집으로 돌아가면 구키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비교적 관대했던 아내도 오늘 밤만은 분노를 폭발시켜 큰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키는 린코와의 약속만은 지킬 것이라고 다짐한다.

"당신만 곤란하게 만들진 않아....."

그 한마디로 린코는 마음이 좀 진정되는지 얼굴을 가다듬고 모자를 눌러 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서로의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방에서 나온다. 10시가 지난 맨션의 복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밖에 종이상자가 하나 놓여 있다. 그 옆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에서 내려 밖으로 나온다. 같은 차에 타면 또다시 헤어질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각자 따로 택시를 부른다. 그리고 택시가 왔을 때 서로의 손을 꼬옥 잡는다.

"알았지...?"

고개를 끄덕이는 린코를 먼저 태우고 택시의 미등이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본다. 구키는 오랫동안 즐겼던 호사스럽고 나른한 정사의 환회가 지금에야 겨우 끝났음을 느끼고 눈을 감는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