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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락원 1

실락원

와타나베 준이치

 

노을

"무서워요......."

구키는 린코의 입에서 새어나온 그 한마디에 저도 모르게 여자의 얼굴을 몰래 엿본다. 지금 린코는 분명 구키의 팔에 안겨 있다. 균형 잡힌 자그마한 몸 위를 구키의 넓은 등이 덮고 있다. 희미한 불빛을 통해 훔쳐본 린코의 얼굴은 꼭 감은 눈가에 주름이 잡혀 잔물결 치듯 떨며 울고 있는 것 같다. 린코는 이제 막 뜨거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여자의 몸과 마음을 둘러싼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마음껏 환희에 젖어가고 있다. 바로 전에 '무서워요 라고 한 말은 무슨 뜻일까. 린코는 구키와 관계를 가질 때마다 그녀의 기쁨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호소해왔다. 때로는 '그만......' 이라고 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 지금 이대로......'라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또는 '좀 더...... 라고 호소한 적도 있다. 표현은 다르지만 모두 쾌락의 절정에서 터져 나온 말들이다. 그러나 '무서워요라는 표현은 이번이 처음이다. 왜냐고 묻고 싶은 마음을 다독이며 구키는 린코의 작은 몸을 힘껏 껴안는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빠져나갈 수 없는 포옹 속에서 린코는 잔물결 .치듯 거듭 경련을 일으키며 절정의 도가니로 치닫는다. 구키가 린코의 목소리를 다시 들은 것은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고 나서이다. 정숙한 유부녀의 모습이었던 린코. 그러나 지금은 조금 전의 흐트러졌던 자신이 부끄러운 듯 몸을 새우처럼 구부리고 앞가슴

에서 허리까지 시트로 감싸 안는다. 구키는 그녀의 작은 어깨에 턱을 대고 뒤에서 속삭인다.

"지금...... 무섭다고 했나?"

그녀의 귓불에 구키의 숨결이 닿는 순간 흠칫 놀라며 몸을 약간 떨었지만 대답은 없다.

"무섭다는 게...... 무슨 뜻이지?"

다시 묻자 린코는 절정 뒤에 밀려오는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뭐랄까. 몸속의 피가 역류해서 밖으로 내뿜는 것 같은. ...."

남자인 구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느낌이다.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그럼요.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 라..... .."

". 어떤 느낌?

구키가 다시 묻자 린코는 생각을 더듬듯 사이를 두고 말한다.

".... 정신없이 환희에 빠져들 때는 모든 피부가 죄어들고. 자궁이 태양처럼 뜨겁게 부풀어 오르면서 온몸 구석구석 쾌감이 넘쳐흐르는 듯.... . "

구키는 다채로운 변화를 느끼는 여체에 대해 의아하고 신기한 나머지 은근히 샘이 나기도 한다.

"여기쯤인가?

구키가 여체의 숲을 지나 자궁이 있다고 여겨지는 아랫배에 가볍게 손을 대자 린코는 눈을 감은 채로 말한다.

'거기까지 당신이 들어오지는 않았을 텐데. 깊고 강하게 찔려서 정수리까지 뭔가 관통하는 것 같은....... 그리고 이대로 어떤 일을 겪더라도 좋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서.... . "

여기까지 말하던 린코가 갑자기 등을 돌려 구키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뜨거운 열기가 남아 있는 린코의 작은 몸을 꼭 껴안으며 구키는 그녀의 느낌이 오늘 한층 더 농익었음을 실감한다. 사랑을 나누고 난 뒤 두 사람은 늘 서로 꼭 껴안은 채 잠든다. 구키의 왼팔에 안겨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옆으로 누워 다리를 서로 휘감는다. 지금도 두 사람은 그런 모습으로 누워 있다. 구키는 오른손으로 린코의 작은 어깨에서 등까지를 물결치듯 어루만져 준다. 그 순간 린코는 조금 전의 열정을 잊은 듯 조용히 눈을 감고 목 언저리에서 어깨로 그리고 등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애무에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린코의 살결은 너무도 매끄럽고 부드럽다.

"당신의 피부가 얼마나 부드럽고 매끄러운지 알아?"

린코는 낮은 소리로 말한다.

"당신 때문이에요."

여성은 만족스러운 사랑으로 인해 체내의 혈액순환이 잘 이루어지고. 호르몬의 분비가 촉진되어 피부가 윤택해지는 것일까? 당신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구키는 내심 흐뭇하여 다시 린코의

몸을 애무하지만 손가락의 움직임이 차츰 느려진다. 린코도 만족 후의 충족과 안도 속에서 서서히 눈을 감는다.

관계를 가진 후 대체로 두 사람은 가장 기분 좋은 자세로 꼭 껴안은 채 잠이 든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날 때. 린코의 머리가 구키의 어깨를 계속 누른 탓에 팔이 저린 적도 있다 상체는 서로 떨어져 있고 다리만 뒤엉켜 있기도 했다. 지금도 이대로 잠이 든다면 두 사람의 자세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살과 살이 닿았다 떨어졌다 적당히 포옹하며 침대 위에서 떠도는. 다소 흐트러지고 나른한 감각에 두 사람 모두 익숙해져 있다.

구키는 머리가 다시 맑아짐을 느끼며 커튼이 쳐진 창가로 살짝 눈을 돌린다. 저녁 여섯시가 가까워질 무렵. 완만한 해안선 저편으로 해가 지려하고 있다. 두 사람이 가마쿠라의 이 호텔에 온 것은 어제 저녁 무렵이었다.

금요일. 구키는 구단에 있는 회사에서 세시가 조금 넘어 퇴근했다. 그리고 도쿄 역에서 린코와 만나 요코스카 선을 타고 가마쿠라에서 내렸다. 호텔은 시치리가하마 해변을 바라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여름 내내 젊은이들로 붐비던 해안가도 구월에 들어선 탓인지. 택시로 채 이십 분도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구키가 린코와의 밀회를 위해 이 호텔을 택한 이유는 도쿄에서 한 시간 정도의 거리밖에 안 되지만 번거로운 도시를 떠나 여행의 기분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발코니를 통해 바다가 한가득 내다보이는 것도 좋았고. 가마쿠라라는 옛 도읍지의 정적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맘에 들었다. 게다가 오픈한 지 얼마 안 되는 이 호텔은 단골손님도 적어서 남의 눈에 띌 염려도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구키의 근무지인 겐다이 출판사는 남녀 관계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그러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호텔을 드나드는 것이 알려지면 좋을 건 하나도 없다. 가능하다면 그런 트러블을 피해서 남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처신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래서 지금까지 다른 여자와 관계할 때는 구키가 몸을 사리고 조심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요즈음 린코를 만나고부터는 필요 이상으로 남의 눈을 피한다거나 쓸데없이 마음을 졸이는 걱정 따위는 없어졌다 린코는 그런 자잘한 신경을 쓰기에는 너무도 맘에 드는 여자였다. 린코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다고 구키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구키가 이처럼 대담해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1년 전 그가 몸 바쳐 일하던 직장의 편집부장직에서 해임되어 조사실이라는 한직으로 밀려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구키에게 있어 1년 전 인사이동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구키 자신도 회사의 요직에 있으면서 승진을 꿈꾸어 왔었다. 그의 나이 쉰세 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차기 임원 후보로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고 구키 자신도 내심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승진은커녕 누가 보더라도 한직인 조사실로 밀려났다. 그 배경에는 2년 전 사장의 교체에 있었다. 새로운 사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 형성 과정에서 자신이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나 이미 한직으로 밀려난 후에 그 원인을 따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구키의 마음을 더욱 암담하게 만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미 임원 승진의 기회를 잃은 이상 이 년 후에 그의 나이는 쉰다섯 살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영원히 임원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다. 만약 인사이동이 있다 해도 더욱 한직으로 밀려나든지 . 규모가 작은 계열사로 발령받게 될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구키의 인생관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좀 더 자유롭게 살아가자. 아무리 애써봤자 어차피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인 것을.... .'

그러자 그 동안 소중하게 보듬어왔던 모든 생각들은 그 색이 바래지기 시작하는 반면. 지금까지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았던 것들이 구키의 가슴에 아주 소중한 모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부장직에서 해임된 후 '편집위원' 이라는 보직을 받았지만 실제로 일다운 일은 거의 없다. 조사실이니 만큼 각종 자료를 모으는 것이 그의 주된 업무이다 틈틈이 모아진 자료 중에서 특집 같은 것을 엮어서 그 특집에 어울릴 만한 잡지사에 기삿거리로 제공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것도 기일 내에 마감해야 하는 부담은 전혀 없다.

구키는 격무에서 벗어나서야 비로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진심으로 한 여자를 사랑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물론 아내를 비롯하여 다른 여자들에게 은밀히 호의를 갖고 바람을 피운 적은 있었다. 그러나 모두 스쳐지나가는 만남이었을 뿐 뜨겁게 불타올랐던 사랑의 기억은 전혀 없다. 구키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그 무엇인가를 이루지 못한 채 남겨 둔 셈이다.

마츠바라 린코가 구키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사랑의 만남은 늘 우연이 맺어주는 것처럼. 구키와 린코의 만남도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조사실로 밀려난 지 삼 개월이 지난 작년 말. 신문사의 문화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던 기누가와라는 친구로부터 강의를 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강의 내용은 '문장 작성법'에 대해서이고 수강생은 약 삼십 명 정도라고 한다. 구키는 자신이 현역 작가도 아니고. 단지 출판사에서 책을 편집하고 만든 경험밖에 없는데 강의는 무슨 강의냐고 친구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기누가와는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의 문장을 읽고 다루어온 경험을 살리면 된다고 구키를 설득했다 게다가 '요즘 한가하잖아?'라는 단호한 한마디에 결정적으로 구키의 마음이 동요되었다.

사실 기누가와가 구키에게 강의를 의뢰한 것은 한직에 있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용기를 북돋워주고 싶은 의도에서였으리라. 기누가와는 구키와 대학 동창이다 문과를 졸업한 후 기누가와는 신문사에 취직을 하고 구키는 출판사에 근무하며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가끔씩 만나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육년 전 구키가 편집부장으로 승진했을 때 그 뒤를 쫓듯이 기누가와도 문화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삼 년 전 갑자기 신문사가 운영하는 문화센터로 발령받아 나가게 되었다. 그와 같은 인사이동이 기누가와 본인에게 있어 바람직한지 여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도 결국은 나가게 되나 봐' 라는 그의 말을 듣고 보면 본사에 미련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일선에서 제외되었다는 의미에서 보면 기누가와가 선배여서 그로서는 구키의 심정을 헤아려 강의를 의뢰한 것이리라.

그래서 구키는 순순히 그의 뜻을 따랐다. 강의가 있던 날 문화 센터에서 한 시간 삼십 분 정도의 강의를 마친 후. 기누가와와 저녁 식사를 했다. 바로 그때 한 여자가 기누가와와 동석했다. 문화센터에서 서예를 가르치고 있는 강사라고 소개해 주었다. 그녀가 바로 린코였다. 만일 기누가와의 강의 권유에 구키가 응하지 않았다면. 또한 그가 린코를 식사에 동행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만남도 그리고 지금의 뜨거운 열애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린코와의 만남을 생각할 때마다 구키는 사랑의 불가사의랄까 숙명적인 어떤 것에 전율하곤 한다. 기누가와로부터 린코를 소개받은 순간부터 구키는 어떤 설레임과도 같은 흥분을 느꼈다. 솔직히 말해서 구키도 지금까지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와 관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젊었을 때는 물론이고. 중년이 되어서도 사귀는 여자가 있었다. 그중의 한 여자는 구키의 느릿하고 멍한 듯한 면이 좋다고 했고. 또 어떤 여자는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소년 같은 매력에 끌렸다고도 했다. 그러나 구키는 자신이 느릿하고 멍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소년 같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참 묘한 생각도 다 하는구나 라고 여겼다. 그러나 아주 나중에야 자신이 여자에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그런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린코에게 접근한 방법은 마치 소년 같다고나할까.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우선 기누가와의 소개로 한 번 만났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일주일 후 구키는 그녀에게서 받은 명함을 보고 전화를 걸었다. 지금까지 몇몇 여자들에게 관심은 있었지만 이렇게 적극적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구키는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어처구니 없었지만 한번 치닫기 시작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매일 이어지는 전화 속의 밀회 끝에 두 사람이 확실하게 맺어진 것은 금년 봄이었다.

처음 느낌대로 린코는 매력적인 여자였지만. 구키는 그 후 새삼스럽게 그녀의 어떤 면에 이끌리게 되었는지를 짚어 보았다. 빼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귀여운 인상. 그리고 약간 작은 듯하면서도 균형 잡힌 몸매와 유부녀다운 세련된 옷차림이 아주 아름답다. 서른일곱이면서도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구키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장 큰 매력은 그녀가 서예에 심취해있고. 그중에서도 해서'에 능해서 짧은 기간이지만 해서만을 가르쳐 왔다는 점이다.

처음 만난 순간 린코의 모습은 다름 아닌 해서와 같은 단정함과 기품을 겸하고 있었다. 그런 린코가 구키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면서. 어느 날 몸을 허락했다. 그리고 그 후 한 걸음 한 걸음 확실하게 무너져 흐트러져 갔다. 린코의 그런 변화 과정이 남자인 구키에게는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고 요염했다. 구키가 커튼이 쳐진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린코의 왼손이 겁먹은 듯 앞가슴을 더듬는다. 구키가 그 손을 가볍게 토닥이며 사이드테이블의 시계를 보니 610분이다.

"이제 곧 해가 질 거야."

 

넓은 창 너머로 시치리가하마의 바다와 에노시마가 보인다. 그 저편으로 석양이 지리라. 어제 두 사람이 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바로 일몰 직전이어서 에노시마로 건너가는 큰 다리 옆 구릉으로 붉은 태양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는 해를 봐야겠어."

구키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입고 커튼을 연다. 순간 눈부신 한 줄기 빛이 방 안으로 흘러들어와 바닥에서 침대 한쪽 끝으로 길게 이어진다.

"지금 막 해가 지고 있는데.... ."

석양은 에노시마와 마주 보는 언덕 위에서 하늘 절반을 붉게 물들이며 서서히 저물고 있다.

"이리 와 봐.

'여기서도 보여요."

린코는 갑자기 들이친 햇살에 약간 당황한 듯 알몸을 시트로 가리며 눈길만 창가로 돌린다.

"어제보다 훨씬 붉고 커 보여."

구키는 커튼을 활짝 열어젖히고는 침대로 돌아와 린코와 나란히 눕는다. 여름의 막바지에서 아직 열기를 품은 연무가 허공에 감돌고. 지는 해는 그 연무를 빨아들여 한껏 부풀어 있다. 해는 그 밑자락이 언덕 위에 닿자마자 빨려 들어가듯 사그라들더니 핏덩이 같은 진홍빛 구슬로 변해버린다.

"이런 석양은 처음이에요."

구키는 그 말을 들으며 바로 조금 전 자궁이 태양처럼 느껴진다던 린코의 말을 떠올린다.

'저녁하늘로 사라져가는 저 태양처럼 조금 전 타올랐던 린코의 몸도 차츰 가라앉고 있겠지 .'

그런 생각을 하며 린코의 등을 꼭 껴안고는 그녀의 아랫배에 살짝 손을 대본다. 진홍빛 빛줄기를 남기고 해가 사라지자 하늘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이어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해가 지자 곧 어둠이 찾아든다. 황금빛으로 불타던 바다는 순식간에 먹빛으로 물들고 저편 에노시마는 바닷가의 불빛을 받아 둥실 떠오른다.

구키는 어젯밤 이 호텔에 와서야 비로소 에노시마에 등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등대불은 저녁노을이 지다 만 하늘을 향해 빠르게 달려간다.

'해가 져버렸어요.'

린코가 속삭이자 구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간 린코가 집 생각을 하고 있다는 짐작으로 숨을 죽인다. 기누가와에게 듣기로는 린코의 남편은 도쿄의 어느 대학 의과대 교수라고 한다. 나이는 린코보다 열 살쯤 위라고 하니까 마흔 일고여덟 살 정도일 것이다

'그는 성실함밖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이에요.'

언젠가 린코가 농담처럼 흘린 말이다. 구키가 아는 사람을 통해 들은 바로는 린코의 남편은 키도 크고 상당히 미남이라고 한다.

'그런 남편을 두고 린코는 왜 나 같은 남자를 택했을까.'

구키는 그 점이 몹시 궁금했지만 린코에게 물어본들 솔직히 대답해 줄 리도 없고 또 솔직한 말을 들은 들 무슨 대수랴. 그것보다는 지금 린코와 만나고 있는 이 순간이 구키에게는 훨씬 더 소중하다. 지금은 서로의 집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둘만의 세계에 몰두하고 싶다. 그러나 구키의 기대와는 달리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린코의 표정에는 분명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린코와는 어제 오후부터 함께 있었으니 오늘로 이틀째가 된다. 만일 오늘 밤도 이 호텔에서 묵는다면 이틀 밤을 꼬박 외박하는 셈이 된다.

물론 린코도 처음부터 그렇게 마음먹고 왔겠지만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사이 문득 집 생각으로 불안해진 것은 아닐까. 구키는 여자의 속내를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손바닥 가득 린코의 가슴을 담아 본다. 린코의 유방은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둥글고 탄력이 있다. 구키는 한손 가득 린코의 체온을 느끼며 생각한다.

'어둠이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 순간 린코의 머리를 스쳐간 것은 무엇일까.'

구키는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튀어 나온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낙조를 바라보며 두 사람은 아직 침대속에 누워 있다.

"커튼을 닫아 주세요."

구키가 그녀의 말대로 커튼을 닫자 린코는 앞가슴을 시트로 감싼 채 침대 주위에 흩어져 있는 속옷을 찾고 있다.

"밤과 낮이 바뀐 것 같아."

돌이켜 보니 오후에 시치리가하마로부터 에노시마를 한 바퀴 돌아 호텔로 들어선 것은 세시였다 그때부터 해가 기울어 바다로 가라앉을 때까지 줄곧 침대에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어처구니없다.

구키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신다. 맥주를 마시며 저물어가는 바다를 바라보는 동안 어느 새 린코가 샤워를 마치고 구키 곁에 다가선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흰 리본을 단정히 묶고 있다.

"저녁식사는 밖에 나가서 할까?"

어제 저녁은 바다가 보이는 호텔의 이층 레스토랑에서 했다.

"하지만 지배인이랑 약속을 했잖아요."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지배인이 인사를 하러 왔길래 오늘 밤도 묵을 예정이라고 말하자. 그러면 근해에서 잡히는 전복을 준비해두겠다고 했던 말이 그제서야 기억난다.

"그럼 그리로 가지 ."

정사 후의 나른함 때문인지 린코는 호텔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오늘 밤은 취할지도 몰라 "

구키의 말에 미소 짓는 린코의 얼굴이 환하다. 조금 전의 그늘진 모습은 전혀 없다. 구키는 전화로 예약 확인을 한 다음 린코와 함께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토요일이어서 가족 동반 손님이 많다. 구키와 린코는 지배인의 안내로 예약된 창가로 인도되어 사각 테이블에 V자로 앉아 창밖을 내다본다.

"이제 아무것도 안 보이네요."

황혼 무렵까지는 창문 너머 한가득 바다가 보였는데. 해가 저문 지금은 어둠에 싸여 창밖의 큰 소나무만이 희미한 실루엣으로 비칠 뿐이다.

"대신 우리의 모습이 보이잖아 "

어둠이 내린 창은 검은 거울이 되어 테이블에 앉아 있는 두 남녀를 비추고 있다. 게다가 그들 뒤에 자리 잡고 있는 다른 손님들의 테이블과 샹들리에까지 비추고 있어 마치 창 너머로 또 하나의 레스토랑이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구키는 창 너머의 레스토랑을 바라본다. 혹시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살펴본다. 조금 전 지배인의 안내를 받으며 테이블에 앉을 때까지는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가볍게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 사이를 스쳐지나오는 동안 그의 걸음새에는 여자와 동행중인 남자의 조심스러운 심리가 배어 있었으리라. 그러나 설혹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킨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마음 한켠으로는 그런 당당함이 있으면서도 은근히 걸리는 것은 이곳이 가마쿠라이기 때문이다.

만약 도쿄의 어느 호텔이었다면. 설령 누가 보았다고 하더라도 업무상이라든가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둘러댈 수가 있겠지만 여기는 가마쿠라가 아닌가. 시내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호텔 레스토랑에서 여자와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알려진다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오해를 받더라도 할 말은 없다. 게다가 쇼난 일대는 구키의 옛 친구들과 친척들이 많은 곳이니 만큼 어떻게 그들의 눈을 완전히 피해갈 수 있겠는가. 새삼 구키는 강한 의지와 두려움이 내면에서 교차하는 것을 느끼며 마음을 다잡는다.

'길 때문에 왔다가 우연히 아는 여자를 만나게 되어 식사를 하고 있었다고 하면 별 문제없을 거야.'

생각을 가다듬고 고개를 돌리자 린코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을 곧게 펴고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 그녀의 차분한 옆모습에서는 누가 뭐라 해도 동요될 것 같지 않은 확고한 마음과 침착한 태도가 배어 나오고 있다.

식사가 시작되기 전 소믈리에(Sommeliel)가 와서 마실 것을 묻는다. 구키는 우선 가볍게 과일 향이 나는 화이트 와인을 주문하고 전채요리인 마리네(marin. 생선. 고기. 야채 등을 날것 혹은 튀겨서 향기 있는 야채나 향신료. 식초. 기름 등을 혼합한 액에 담근 요리)를 먹는 사이 지배인이 근해에서 잡았다는 전복을 큰 접시에 담아 온다.

"반은 살짝 찌고 반은 버터에 볶는 요리로 해드리겠습니다."

회로 먹기 딱 좋을 만큼 싱싱해 보였지만 구키는 주방장에게 맡기기로 한다. 창 너머로는 레스토랑의 내부가 그대로 비쳐 가까운 테이블에 앉은 사람의 얼굴까지 선명하게 보일 정도이다.

"누구 아는 사람은 없어?"

구키는 와인을 한 모금 삼키며 린코에게 묻는다

"요코하마에서 가까우니까. .. .. "

린코의 친정은 요코하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수입 가구상이다. 대학도 요코하마에서 다녔기 때문에 이 부근에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린코는 구키에게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단호하게 말한다.

"한 사람도 없어요."

처음 이 호텔에 들어올 때도 린코의 모습은 당당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까 노을을 바라보는 모습이 꾄지 쓸쓸해 보였는데. 집 걱정이라도 되나?"

"내가요?"

". 이틀이나 집을 비웠잖아."

린코는 와인 잔을 든 채 가볍게 미소 짓는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고양이예요."

"고양이?"

"집을 나올 때. 약간 기운이 없어 보였는데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 해서요."

아이 없는 린코가 고양이를 키운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그늘졌던 표정이 고양이 때문이라는 말을 듣자 구키는 맥이 빠져버린다. 그러나 그 순간. 구키의 뇌리에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근 한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린코의 남편은 아내 없는 텅 빈 집에서 고양이와 둘이 지내고 있을 것이다. 구키의 솔직한 심정은 린코의 남편과 가정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싶다. 그러나 막상 물어보려니 망설여진다. 아니. 알고 싶은 만큼 내심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틀이나 집을 비우고 걱정되는 것이 고양이라는 린코의 말에 구키는 새삼 그녀의 남편이 마음 한구석에 걸려온다.

"그 고양이 말인데. 먹이는 어떻게 하고 왔어?"

"일단 페트 푸드를 두고 왔으니까 걱정은 없어요."

남편은 식사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그러나 거기까지 물을 수는 없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우리 둘은 식사를 즐기고 있지 않은가.

소믈리에가 와서 와인을 덧따르자 기다렸던 것처럼 웨이터가 전복 요리를 가지고 온다. 미디움 스테이크와 살짝 볶은 전복에는 얇게 썬 레몬 조각이 곁들여 있다. 구키는 원래 프랑스요리 중에서도 요리 재료의 풍미를 살리는 산뜻한 요리를 좋아하는데 린코의 입맛도 그와 비슷한 모양이다.

"잘 먹겠습니다."

정사 후 린코는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쾌활하게 말하며 보여주는 린코의 나이프 솜씨는 언제나 빈틈이 없고 아름답다.

"맛있어요."

식사에 몰두하는 린코의 모습이 천진난만해 보인다. 그러나 구키의 머릿속에는 바로 조금 전 있었던 침대에서의 장면이 펼쳐진다.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맛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린코 그녀이다. 그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히 조여 오는 감촉은 현묘함의 절정이다. 남자가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린코는 전복을 먹는 데 열중이다. 그에 끌리듯이 구키도 전복을 입으로 가져간다. 식사를 마치자 아홉시가 조금 지나고 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은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을 한 병씩 비웠다. 술이 약한 린코는 양볼에서 가슴 언저리까지 발그스레하게 물들어 있다 정사의 여운이 그녀의 취기를 돋우었는지 눈가에도 붉은빛이 감돈다. 구키도 여느 때보다는 취기가 빨리 돌았지만 이대로 룸으로 돌아갈 생각은 별로 없다. 레스토랑을 나와 로비 한 구석에 있는 바를 들여다보았으나 사람들로 붐비고 있어 두 사람은 체념하고 룸으로 돌아온다.

"우리 발코니로 나가 봐요."

린코의 말에 구키가 문을 열자 그대로 정원으로 이어진다. 10미터 정도쯤에 정원수가 있고 눈 아래로는 밤바다가 펼쳐져 있다.

"바다 냄새가 나요."

바람이 약간 불어왔는지 린코는 헝클어진 머리를 흩날리며 가슴을 펴고 숨을 들이쉰다. 구키도 그녀를 따라 심호흡을 하니 바다가 더욱 가까이 느껴진다.

"에노시마가 빛에 둘러싸여 있어요.''

린코의 말대로 가로등과 자동차의 불빛으로 비춰진 해안 도로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고유르기 곶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에 에노시마가 해변의 불빛을 받아 군함처럼 떠오른다. 그 섬의 중간쯤에 위치한 등대불은 밤이 깊어질수록 빛을 더하여 해가 진 언덕에서 어두운 바다를 예리하게 비추고 있다.

"기분이 상쾌해요."

구키는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린코의 곁으로 다가간다. 한 손에 술잔을 잡고 있는 탓에 포옹은 할 수 없지만 얼굴을 가까이 대고서 긴 입맞춤을 나눈다. 바다 내음 그윽한 어둠 속에서 등대만이 그들의 입맞춤을 지켜보고 있다.

"위스키를 가져 올게 . 물을 타서 가져올까?

"스트레이트로 주세요."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정원 한 모퉁이에는 하얀 테이블과 의자가 두 사람을 유혹하듯 놓여 있다. 레스토랑을 나올 때는 왜 취했다고 생각했는데. 바닷바람을 쐬고 나니 조금은 더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바다가 보이는 우리 둘만의 카페 "

린코의 표현대로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바다를 지키는 등대의 불빛 이외에 두 사람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은밀한 카페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자니 이 작은 공간만이 현실에서 벗어나 둘만의 꿈의 세계를 떠돌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 이대로 있고 싶어요."

무슨 뜻일까? 지금 이대로 바람을 쐬고 싶다는 뜻인지 아니면 도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뜻인지를 몰라 구키는 다시 물어본다.

"여기서 계속 머물고 싶나?"

"당신도 함께 있어 주는 거죠?"

"린코가 있겠다면..."

두 사람은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린코가 입을 연다.

"하지만 무리겠죠?"

린코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구키는 새삼 자기 집을 떠올린다. 지금 구키의 식구들은 그가 이 호텔에 묵고 있는 것을 모른다. 회사에는 '좀 일찍 퇴근하겠다'며 나왔고. 아내에게는 '조사할 것이 있어서 이틀 정도 교토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남편의 거처는 회사에 전화하면 언제라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외동딸은 결혼하여 따로 살고 있고 그 후 아내는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도자기 회사의 영업 컨설턴트에 열심이다. 구키보다 귀가가 늦어질 때도 자주 있었다. 부부라고는 하지만 형식적인 대화만 나눌 정도이고. 둘이서 식사를 한다거나 여행을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한 번도 아내와 헤어지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현실적으로 오십대에 접어들면 서로 싫증도 나게 마련이다. 그들에게 무슨 애틋함이나 설레임이 남아 있겠는가. 구키는 중년 부부란 다 그런 것이려니 하며 살아왔다. 적어도 린코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더니 구키의 집과 아내 생각을 하늘 저편으로 실어가 버리고 교대라도 하듯이 그 자리에 린코의 집 걱정이 들어선다.

"조금 전에 고양이가 걱정이라고 했는데 남편 걱정은 안 되나?"

사람 많은 레스토랑에서는 차마 물을 수 없었다. 그러나 넓은 밤하늘 아래 둘만이 있고 보니 조금은 대담해진다.

"이틀이나 집을 비우고도 괜찮아?"

"전에도 비운 적이 있어요."

린코는 별들에게 고백이라도 하듯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한다.

"서예 일 때문에 가끔 선생님을 따라 지방으로 갈 때도 있고 전람회도 있었어요."

"그럼 이번에도 그런 핑계로......."

"아녜요. 오늘 밤은 친구와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틀씩이나?"

"즈시에 친한 친구가 살아요. 그리고 주말이잖아요 "

남편의 눈을 그런 식으로 속일 수 있을까 혹시 속였다 하더라도 만약 급한 일로 친구에게 연락이라도 한다면 낭패가 아닌가.

"그 친구에게 말은 해두었나?"

". 그러니 괜찮을 거예요."

뭐가 괜찮다는 말인가. 구키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린코가 단호하게 말한다.

"그 사람. 절대로 날 찾거나 하지 않아요. 일만 아는 사람이니까."

하긴 남편이 의대 교수이기 때문에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너무 방심하는 것은 아닐까.

"당신을 의심하지는 않을까?"

"지금 제 걱정을 하고 있는 건가요?"

"남편이 알게 되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알게 되면 곤란한가요?"

구키는 밤하늘을 향해 크게 숨을 내쉬며 방금 린코가 한 말을 되새긴다. 지금 여자는 남자에게 '당신과 깊은 관계에 빠진 것을 내 남편이 알게 되면 당신이 곤란한가?'라고 추궁하고 있다. 언뜻 듣기에는 질문 같아 보이지만 남편이 알게 되더라도 각오는 돼 친다는 여자의 결의에 찬 표현임에 틀림없다.

"남편이 우리 사이를 눈치 챘을까?"

"글쎄요. 어쩌면......."

"특별히 무슨 말 없었어?"

"별로......."

그 말을 듣자 구키는 다소 마음이 놓인다. 그때 린코가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한다.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럼 왜 묻지 않는 것일까?"

"묻지 않는 게 아니라. 알고 싶지 않은 거겠죠."

갑자기 바닷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마지막 ' ....겠죠' 라는 말만이 꼬리를 끌며 밤하늘 저편으로 사라져 간다. 구키는 바람의 꼬리를 좇으며 생각한다.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은 아는 것이 두렵다는 뜻인가? 설령 아내의 부정을 눈치 챘더라도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섣불리 아느니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는 의미일지도. 구키의 뇌리에는 새삼 큰 키에 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위로 보나 외모로 보나 나무랄 데 없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에 가까운 남자가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면서도 잠자코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까닭에 추궁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모른 체하며 부정한 아내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구키의 머릿속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한 쌍의 부부 모습이 떠오르며 취기를 몰아낸다.

"이상하죠. 우리 부부......?"

린코의 말에 구키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멈춘다. 사랑이 없는 부부를 이상하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그런 부부는 얼마든지 많다.

"당신 부부가 이상할 건 없어. 완벽한 부부관계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

"그럴까요. .... "

"모든 부부가 조금씩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면서도 내색만 않을 뿐이야."

"하지만 그나마도 할 수 없을 땐 어떻게 하죠?"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린코의 얼굴은 방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받아 왼쪽만 하얗게 떠올라 있다. 옆모습을 보며 구키는 그들 앞에 새로운 고비가 놓여 있음을 깨닫는다. 지금 린코는 아내가 남편에 대한 최소한의 노력마저도 할 수 없을 땐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고 있다. 그것은 이미 부부간의 한계까지 몰려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런 사태가 어쩌면 머지 않아 닥칠 것이라는 뜻일까? 아무튼 린코는 지금 구키에게 어떤 대답을 요구하고 있다.

"그럼 그 사람은 당신에게..."

무슨 까닭인지 지금 여기서 린코의 남편을 '남편'이라고 지칭하고 싶지 않다 그저 단순한 삼인칭인 '그 사람'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 사람 당신에게 요구해 오나?"

말하고 나서야 구키는 비로소 그것이 가장 묻고 싶었던 것임을 깨닫는다.

"아니요."

"전혀?"

". 내가 언제나 거절하니까."

"그래도 그 사람이 참는단 말이야?"

"참는 건지 어떤지 몰라도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는 린코의 옆얼굴에는 싫은 것은 싫다고 딱 잘라 말하는 여자의 결벽과 단호한 성격이 잠재되어 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언젠가는 하나의 고갯마루를 넘게 되어 있다. 처음 만나 사귀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통하면 단숨에 가까워져 사랑하게 된다. 그 과정은 당사자들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탄하며 . 그때는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을 정도로 불타오른다. 그러나 정상에 올랐다고 느끼는 순간 갑자기 맞닥뜨린 고갯마루에 당황할 때가 있다 쾌락을 만끽하고 이곳이야말로 바로 에로스의 낙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그 앞에는 잡초가 우거진 황무지가 가로놓여 있음을 깨닫고는 이내 숙연해진다. 바로 지금이 구키와 린코에게 있어서는 순풍을 지나 마침내 역풍을 맞이한 시점인 듯하다. 이 고비를 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두 사람의 정열에 달려 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한 달에 몇 번쯤 만나고 며칠 여행을 떠나는 정도의 밀회로 만족한다면 굳이 고갯마루를 넘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지금보다 더 자주 만나고 지금보다 더 강하게 서로를 느끼고 싶다. 서로가 진정코 그렇게 원한다면 다소의 위험이 있더라도 한 걸음 더 앞으로 내 터며 고갯마루를 넘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 용기란 말할 것도 없이 가정 파탄도 불사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것을 이른다. 그런 용기만 굳건하다면 두 사람은 더욱 자유롭게 타오르는 정열로 둘만의 시간을 음미하며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당연히 큰 희생이 따르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린코는 남편에게 그리고 구키는 아내에게 불신을 받아 사이가 벌어져 결국에는 가정 파탄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욕망을 어디쯤에서 억제하고 두 사람의 소망을 어느 선에서 만족하며 접을 것인가. 그 미묘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로 다가선다.

그녀의 말대로 하면 지금 린코의 가정은 붕괴 일보직전일지도 모른다. 아내가 남편을 거절하여 부부관계가 전혀 없다면 그런 결혼 생활이. 그런 부부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물론 그런 면에서는 구키와 그의 아내도 예외는 아니어서 구키의 가정도 위태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린코의 경우가 구키보다 더 괴로운 이유는 남편의 요구를 거부해야 하는 아내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구키의 경우 그가 요구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지 않은가. 부부 문제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입장이 이렇게도 다르단 말인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밤바람 탓일까. 구키는 지금 약간 대담해진 기분이다. 대화가 이렇게까지 진전된 이상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구키는 린코가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아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 말이야. 당신이 왜 거절하는지 알고 있나?"

"아마 알고 있을 거예요."

구키는 학구적이라는 린코 남편의 모습을 또다시 상상해 본다.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모습은 늘 안경을 끼고 단정한 모습으로 자리 잡는다. 왜일까? 현실적으로 자신의 라이벌인 그에게 그다지 미운 감정이 들지 않는다. 지금 자신은 린코라는 유부녀를 사랑하고. 그는 아내를 도둑맞은 남편이 아닌가. 그 가련한 입장이 동정을 자아내는 것인지. 아니면 아내에게 거부당하고도 묵묵히 참는 그 온화함에 대항할 의지를 잃은 것인지 구키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지금 구키의 입장이 그보다 나은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 만큼 책임도 못지않다.

"당신이 괴롭다는 거 잘 알아."

구키는 측은한 마음에 절로 린코에게 머리가 숙여진다.

"그 생각만 하면 나도 괴로워 ."

"하지만 당신은 괜찮아요. 그래도 남자잖아요."

"남자라고 다 괜찮은 것은 아니지. "

바닷바람이 한 줄기 돌풍이 되어 휘몰아쳐가고 그에 쫓기듯이 린코가 중얼거린다.

"이제 틀렸는지도 몰라요."

"틀리다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린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그런 바보 같은......."

"여자란 그런 존재 아닌가요?"

밤바람을 맞으며 린코는 가볍게 눈을 감고 있다. 그 순교자와 도 같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이 샘솟아 린코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입을 맞춘다. 바닷바람으로 눅눅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누가 먼저 이끌었는지도 모르게 침대로 향한다. 서로의 가정에 대한 대화가 깊어질수록 괴로움만 더해질 뿐. 답답한 마음에 도망쳐 온 곳이 침대였다. 구키는 갑자기 사나운 야수가 되어 린코의 앞가슴을 열어젖히며 겉옷에 이어 속옷까지 벗기려 든다. 난폭한 행동에 린코는 당황하면서도 구키의 손놀림에 맞춰 스스로 옷을 벗는다. 마치 이 순간만은 누군가의 난폭함에 이끌리고 싶다는 듯...... 서로 알몸이 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은 숨을 헐떡이며 꼭 끌어안는다. 이미 둘 사이에는 린코의 남편도 등대의 불빛이나 밤바람도 그리고 방 안의 공기 한 줌조차 들어올 틈이 없다. 뼈가 파고들 정도로 힘껏 껴안고 게걸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탐닉한다.

취기 탓일까. 뜨겁게 달아 절정의 환희에 젖어드는 것을 확인한 구키는 자신의 만족은 접어두기로 한다. 스탠드의 불빛만이 침대를 휩쓸며 지나가는 폭풍을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짐승이었던 두 사람이 격정적으로 서로를 탐닉하고 난 지금은 다리를 가볍게 휘감은 채 누워 있다. 취기와 사랑의 여운 속에서 린코의 몸은 여전히 달아 있고. 구키는 그녀의 남은 열기를 온몸으로 느낀다. 구키는 바로 그 순간. 육체야말로 진정한 언어임을 실감한다. 말로서는 도저히 다할 수 없고. 이야기하면 할수록 혼란해지는 것이 있다. 그럴 때는 몸으로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 격렬하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아낌없이 불타올라 열락의 고개를 넘고 나면 고통스러운 문제는 씻은 듯이 사라진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은 조금 전의 괴로움을 모두 잊고서 평온하고 나른한 기분으로 누워 있다. 현실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몸과 몸이 통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다. 남자는 여자가 만족한 것을 알고 나면 저절로 여유가 생기고 자신이 생긴다.

"좋았어?"

새삼스럽게 물을 것도 없다. 조금 전에 온몸으로 확인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키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싶다. 린코는 구키의 기대와는 달리 남자의 가슴에 이마를 댈 뿐이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차마 부끄럽다는 저항의 표현일까. 그러나 여자가 저항하면 할수록 남자는 더욱 그 말을 듣고 싶어진다.

"내가 좋아?"

확인할 것도 없다. 남편을 속여 가며 외박을 하고 있는데 싫을 리가 있겠는가. 그것을 알면서도 남자는 묻는다.

"좋아?"

구키가 다시 한 번 묻자 이번에는 린코가 분명하게 대답한다.

"싫어요?"

구키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린코가 단호한 말투로 대답한다.

"사실은 이런 거 정말 괴로워요."

"이런 거라니...."

"당신에게 안기는 거 말이에요."

린코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린코가 중얼거린다.

"당신에게 안길 때마다 내가 아닌 다른 나로 변하는 것이 싫어요. 이런 일로 이성을 잃다니 분하기 짝이 없어요."

이성을 잃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동물적인 본능으로 절정에 올랐다는 것이 아닌가. 구키는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하지만 만족은 하잖아."

"당신 소유물이 된 것 같아요."

"아니. 소유물이 된 건 오히려 나야."

"아무튼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다니 . 당신은 나쁜 사람이에요."

"그건 당신 책임이야."

"내 책임?"

"그래 . 당신이 너무 맛있으니까."

린코는 마치 케이크처럼 비유된 자신이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맛이 없으면 이렇게 푹 빠질 수가 없어."

"하지만 난 처음이에요."

'그럴 리가?"

"이렇게 된 거......."

머리맡의 시계를 보니 열한시가 지나고 있다. 린코는 물론이려니와 구키도 설혹 그녀가 요구해 와도 이제는 응해줄 힘이 없다. 그렇다고 그냥 잠들기는 아쉽다. 잠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두 사람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다 구지는 다시 한 번 물어본다.

"정말 좋았어?"

"그러니까 싫다고 했잖아요."

린코는 여전히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한다.

"그럼 왜 이렇게......."

"쉽게 무너졌느냔 말이죠?"

새삼 자학적인 말투의 린코에게 구키는 약간 짓궂게 말한다.

"당신같이 멋진 여자가 허락해 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당신도 멋져요."

"거짓말.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없었어."

"바로 그 점이 맘에 들었어요."

린코를 알았을 때 구키는 회사에서 한직으로 밀려났을 때였다.

"당신 또래의 남자는 모두 거만하게 굴죠. 명함을 보이며. 난 무슨 무슨 중역이다 부장이다 하면서 . 회사에서는 지위도 높고. 힘도 웬만큼 있다고 떠벌리곤 하죠. 하지만 당신은 달랐어요."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어."

"여자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상냥하고 분위기 있는 사람이......."

"분위기?"

"그래요. 당신의 첫인상은 뭐랄까 약간은 지치고 쓸쓸한 것 같은 자신의 분위기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무렵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때 당신은 이제부터는 한가하니까 쇼와시대(일왕 히로히토가 재위한 시기. 1926-1989)'에 이름을 남길 만한 여자들을 조사하고 싶다고 말했었죠. 그 얘기도 재미있었고. 그리고..... "

"그리고?"

"아주 솜씨가 좋았어요.'

허공을 보면서 린코는 분명하고 대담하게 말한다. 구키는 지금까지 여자에게 '솜씨가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몇몇 여자들이 만족해한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렇다고 테크닉이 뛰어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사실 그런 평가는 남자의 입장이 아닌 여자의 견해이고 그것도 많은 남자를 겪어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느낌일 것이다. 어쨌든 '솜씨 좋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게다가 사랑하는 린코로부터 그 말을 들으니 더욱 자신이 생긴다.

"농담이 아니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물론이죠. 그런 게 거짓말로 될 일인가요."

칭찬을 받자 구키는 다시 농담처럼 말한다.

"그럼 합격인가?"

"합격이에요."

린코는 서슴없이 대답한다.

"하지만 많은 여자들이 당신 때문에 울었겠죠?"

"아니 . 별로......."

"숨길 거 없어요...... 그래서 나도 좋았으니까."

이틀 밤을 함께 지낸 탓일까. 린코의 모습이 많이 여유로워 보인다.

"아까 이런 건 처음이라고 했는데. 그 전에는?"

"무슨 말이죠?"

알고 있을 텐데 린코는 새삼스럽게 되묻는다.

"그 사람과의 관계. ......"

"약간의 느낌은 있었지만.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럼 그때까지 특별한 느낌 같은 것은."

"그러니까 이런 것을 가르쳐 줘서 나쁜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그건 내 탓이 아니야. 오히려 린코한테 소질이 있었기 때문이야."

"이게 소질이에요?"

진지한 얼굴로 물어오는 린코가 너무나 순진해 보여 구키는 뒤에서 린코의 작은 가슴을 꽉 쥔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성의 기쁨에 눈떠가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큼 남자에게 있어서 즐겁고 자량스러운 것은 없다. 처음에는 갓 태어난 꽃봉오리처럼 여려 보이던 육체가 서서히 긴장을 푼다. 그 꽃봉오리는 차츰 유연해지며 이윽고는 커다란 꽃으로 아름답게 활짝 피어난다. 남자가 그 개화되는 과정에 동참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그 여자의 몸 속 깊이 자신의 존재가 불어넣어졌다는 증표가 된다. 적어도 남자는 그렇게 믿고 그것을 삶의 보람으로 여길 만큼 만족을 느낀다. 지금 린코는 바로 당신이 가르쳤다고 단언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구키라는 남자에 의해 린코의 몸속에 잠자고 있던 성의 감각들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그런 느낌을 몰랐다는. 다시 말해서 남편으로부터는 그런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다행이야."

구키는 새삼스럽게 린코의 귓가에 속삭인다.

"린코가 지금 한 말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거야."

지금 구키는 린코의 몸속에 쐐기를 박아 넣은 것 같은 기분이다. 이제 아무리 바둥거려도 도망칠 수 없는 굵고 단단한 쐐기가 여자의 정수리에서 허리까지 관통하고 있다.

"이제 놓치지 않아 "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도 있어요. 그러다 제가 정말로 당신에게 매이면 어쩌려구요?"

구키가 선뜻 대답을 못 하자 린코는 지체 없이 되물어온다.

"무섭지 않아요?"

구키는 새삼 아까 침대에서 '무서워'라고 중얼거리던 린코의 말이 떠오른다. 그때는 기쁨의 호소였지만 지금은 현실의 고뇌이다.

"우리는 지옥으로 떨어질 거예요."

"지옥으로?"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틀림없이 지옥으로 떨어질 거예요."

두려운 듯 린코는 구키의 가슴 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나를 말려줘요. 날 좀 제발 확 잡아줘요... "

아직도 뜨거운 잔열이 남아 있는 린코의 몸과 마음이 또다시 격렬하게 갈등하고 있다.

"그래 . 그래 괜찮아."

구키는 린코를 달래며 새삼 남녀의 성감 차이를 실감한다. 남자는 본질적으로 여자보다는 쾌락의 감도가 단순하다. 그래서 여자가 오르가슴에 이르는 과정을 확인하면서 더 큰 만족을 느낀다. 특히 구키 나이쯤 되면 젊은 시절의 난폭함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보다는 오히려 여체의 온몸 구석구석에 잠들어 있는 성감을 불러일으켜 기쁨을 느끼게 해주고. 그래서 수동적이던 여자가 자기감정을 못이겨 적극적으로 변하며 스스로 절정을 맞이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남자는 보람을 느낀다. 린코가 그랬다. 처음에는 얌전하고 붓글씨의 해서체 같은 빈틈없이 정숙한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를 둘러싼 모든 구속에서 해방되어 기쁨을 느끼며 불타오른다. 정숙한 여자로서의 상식이나 관습을 벗어버리고 성감에만 복종하며 음탕한 세계로 빠져든다. 여체가 무너지는 과정인 동시에 여체에 감추어져 있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여체의 변화과정을 확인하는 것만큼 남자에게 자극적이고 감동적인 것은 없다. 여성이 그리고 여체가 어떤 것이며 그 몸속에 무엇을 지니고 있으며 어떻게 바뀌는가 하는 모든 과정을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린코에게 구키가 아무리 성의 개발자이며 관찰자 역할을 한다 해도 한쪽은 오로지 능동적이고 한쪽은 전혀 수동적일 수만은 없다. 시작은 남자가 꾀했지만 여자가 절정의 도가니로 빠져들기 시작하면 남자도 어느샌가 아비지옥과 같은 성의 수렁에 흠뻑 빠져 함께 허우적거리게 마련이다. 절정에 오르는 길은 서로 다르지만 두 사람을 결코 갈라놓을 수 없는 이상 어느 한쪽만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가슴으로 파고드는 린코의 자그마한 등을 어루만지며 구키는 '지옥으로 떨어질 것' 이라는 린코의 말을 되새긴다.

서로가 더 이상을 욕심낸다면. 두 사람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린코는 그것을 지옥이라 표현했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쯤에서 멈추어야 한다는 호소일지도 모른다고 구키는 나름대로 이해한다.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건대 구키는 지금의 쾌락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유부남과 유부녀의 정사는 분명 비도덕적이며 윤리에 어긋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원하는 것이 왜 죄가 되어야 하는가. 상식이나 윤리 따위는 시대와 더불어 언젠가는 변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몸을 원하는 것은 영원불멸의 진리이다. 때문에 죄의식에 빠져들 것까지는 없다고 구키는 스스로 타이른다. 그러나 린코는 지금 죄의식에 갇혀 있다. 남자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여자가 겁먹으면 서로 사랑을 키우기가 어렵다.

"지옥 같은 데엔 떨어지지 않아."

구키는 윤기 나는 린코의 둥근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다독거린다.

"우린 지금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냐."

"아니요. 하고 있어요."

남편이 있는 여자의 입장인 데다가 미션계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린코의 죄의식이 더욱 깊은지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사랑하고 있잖아."

"하지만 이래서는 안 돼요. 우리 둘 다."

구키는 더 이상의 어떤 설득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저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함께 하리라는 결심뿐이다.

"그래. 그럼 우리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자 "

지금 이대로 서로를 탐한다면 분명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감정을 억제한다고 해서 그들이 천국으로 갈 수 있겠는가. 그럴 바에야 정념을 모두 불살라 그 대가로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리라. 구키의 마음 한구석에서 서서히 대담성이 고개를 든다.

"당신을 만난 것만으로도 지상에서의 가장 큰 행운이었소.“

 

 

가을 하늘

창밖으로 보이는 맞은편 빌딩의 절반만이 햇볕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다. 삼일 전 불어 닥친 태풍이 길고 긴 여름을 완전히 걷어가고 여러 날 동안 상쾌하고 해맑은 가을 하늘이 펼쳐진다. 구키는 아침부터 네 가지나 되는 신문을 다 읽고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가을 햇살이 넘실대는 창가로 눈을 돌린다. 열한시가 다 되어 가지만 사무실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다. 입구 쪽에 앉아 있는 여직원의 타이핑 소리만이 투닥투닥 진동하고 있다.

구키가 근무하는 조사실은 육층의 엘리베이터 오른쪽 복도 맨 구석에 있다. 사무실은 네 벽을 뒤로 한 채 여섯 개의 책상이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가운데에는 간단한 응접세트가 놓여 있다. 구키는 매일 아침 열시에 출근한다. 현재 조사실에는 네 명의 남자 직원과 비서 역을 겸한 여직원이 한'명 있다 구키보다 세 살 위인 스즈키가 사사 편찬을. 한 살 위인 요코야마는 사내 자료의 통계 정리를. 두 살 아래의 무라마츠는 새로운 사전 개발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언제까지 만들어야 한다는 뚜렷한 기한은 정해져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구키가 맡은 쇼와시대사 편찬도 아직 구체적인 착수단계에 들어선 것은 아니다. 그들 모두 본사의 주요 라인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그리고 아침에 출근을 하더라도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구키는 사무실의 한가로운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아 처음에는 오히려 불안했다. 그러나 반년쯤 지나자 나름대로 분위기를 익히게 되었다. 그리고 안쓰러워하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도 차츰 무감각해져 갔다. 지금도 구키는 출근은 했지만 급한 일도 없는지라 일과처럼 되어 있는 신문을 읽고 담배를 한 대 피우며 창 쪽으로 눈길을 돌린 것이다.

햇볕을 받은 빌딩 저편은 붓으로 그린 것 같은 구름 두 줄기가 비스듬하게 걸려 있고 그 앞쪽으로는 우물 정 최자 모양의 안테나가 보인다. 한적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구키는 린코의 하얀 피부와 절정의 고개를 넘기 바로 전에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를 되새긴다. 이렇게 맑고 온화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여체를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자기밖에 없을 것이라고 쓴웃음을 짓는다. 구키는 한가로움 속에서 밀려드는 린코의 환영이 오히려 원망스럽다. 옛날처럼 하루 종일 회의하랴. 협의하랴. 서류 정리하랴. 일에 쫓기다 보면 이렇게 자주 린코 생각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구키는 잠시 가을 하늘에 걸려 있는 흰구름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일어선다. 동료들은 제각기 책을 읽거나 모니터를 들여다 볼뿐 누구도 구키의 움직임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구키는 사무실을 스윽 둘러보고는 서둘러 나온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 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간다. 바로 조금 전 구키는 해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린코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이 시간이라면 린코는 혼자 집에 있을 것이다. 구키는 비상구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혼자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 휴대폰을 꺼낸다. 휴대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녀석은 부장 직에 있을 때 바쁜 일정을 돕기 위해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인데 지금은 린코와의 은밀한 통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구키가 짧은 안테나를 뽑은 다음 번호를 누르자 곧 린코의 목소리가 나온다.

". 저예요."

구키라는 것을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하다. 구키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수화기에 속삭인다.

"갑자기 목소리가 듣고 싶어 졌어 ."

"지금 회사죠?

". 당신 생각을 하던 중에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져서---"

"어떻게요?"

"둥실 떠 있는 흰 구름이 마치 당신 몸처럼 느껴져서........................"

"그런 얘기하면 못써요. 아직 점심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하고 싶어 ."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요."

"우리 또 가마쿠라에 갈까?"

둘이서 가마쿠라의 호텔에서 이틀 밤을 지낸 지 벌써 보름이 지나고 있다. 가마쿠라에서 돌아온 후 구키가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린코의 남편이다. 아내가 이틀 밤이나 외박한 것을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구키는 그것이 마음에 걸려 헤어진 이튿날 린코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별일 없느냐고 물어보는 구키에게 린코는 괜찮다는 대답뿐. 특별히 달라진 낌새는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아무 일 없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가정이 아니다. 남편이 어지간히 온순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린코가 약삭빠르게 처신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아무 문제도 없다는 린코의 말에 구키는 일단 안심이다. 그러나 외박 일정으로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는 구키의 마음이 편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번 목요일 가마쿠라에서 다키기노가 있어 ."

매년 가을 가마쿠라의 다이토큐에서 다키기노가 열린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아직 가본 적은 없다.

"괜찮다면 티켓을 사 놓을게. 하지만 공연이 밤늦게 끝날 거니까 하룻밤 묵고 와야 할 거야."

"갈게요."

너무도 간단한 대답에 구키가 되묻는다.

"괜찮아?"

"글쎄요. 하지만 가고 싶어요."

린코의 대답은 이번에도 명쾌하다. 외박이 문제될 것은 없다. 가고 싶으니까 간다는 뉘앙스로 들린다.

"그럼 곧 티켓을 예매해 놓을게 ."

"사흘이나 남았군요."

너무 앞선 표현이라고 생각한 탓일까. 린코는 얼른 말을 바꾼다.

"하지만 참겠어요. 당신도 참을 수 있죠?"

당연한 말이지만 구키가 그 동안을 못 참아 아내와 사랑을 나눌 리는 없다.

"물론?"

구키가 동의를 표하자 갑자기 토라진 말투로 바뀐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에요. 당신이 나빠요."

전화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자 여직원이 방금 기누가와로부터 전화가 왔었다고 알려준다. 친구들 중에서 기누가와라는 이름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미타가의 문화센터 소장임에 틀림

없다.

구키는 이번에는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전화를 한다. 마침 기누가와는 자리에 있다. 오늘 저녁 볼일이 있어서 시내로 나오는 김에 구키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구키는 여섯 시에 긴자의 일품 요릿집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는다.

사무실 안은 여전히 한가로워 사사 편찬 담당인 스즈키가 따분하다는 듯이 하품을 하자 모두 기다리기나 한 듯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날씨 참 좋구먼.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골프치기 딱 좋은 날이야."

스즈키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지만 요즘 구키는 골프 치러 간 적이 없다. 부장 시절. 일주일에 한 번은 갔었지만 한직으로 밀려나고부터는 오히려 횟수가 줄었다. 물론 업무상 교제 골프가 태반이었던 까닭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한가롭게 지내면서 골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노는 것도 일 속에 파묻혀 있던 중 잠깐 짬을 내서 즐겨야 재미인지도 모른다 하긴 스즈키처럼 한가해진 기회를 살려 골프를 즐기는 사람도 더러 있기는 하다.

"한가하다고 기분까지 가라앉으면 곤란하지 ."

스즈키는 그런 식으로 충고하지만 그는 구키가 린코와 사랑에 빠져 있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골프보다는 사랑이 훨씬 남자를 젊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사실이다.

서로 잡담을 나누는 사이 . 정오가 되자 모두 총총히 사무실을 빠져 나간다 대개는 지하의 직원 식당으로 가지만 구키는 회사에서 사오 분 거리에 있는 메밀국수집으로 갈 때가 많다. 거기서 때로는 예전에 함께 일하던 부서의 편집부원들을 만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구키의 마음은 매우 불편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좌천된 상사에게 말 걸기가 어색한지 서로 눈인사만 주고받았다. 그러나 요즘 구키의 마음에도 여유가 생긴 탓일까. '어떻게 지내나?' 하고 먼저 말을 걸 때도 있다.

저녁이 되자 구키는 긴자의 스키야 거리에 있는 일품 요릿집에 서 기누가와를 만났다. 요릿집은 최근 개조를 했는데 전에 와본 적이 있던 기누가와는 달라진 모습을 보고 상당히 낯설었던 모양이다.

"이거 새 건물로 바뀌어서 다른 집인가 했네."

가게의 크기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검은색으로 윤이 나던 카운터와 테이블이 새 나무 자재로 바뀌었고 좌석도 많이 늘어나 정말 다른 집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너무 밝은 거 아니야?"

오랜 단골은 이전의 가게 모습을 그리워하지만 젊은 손님들은 지금의 모습이 좋은가 보다. 가게 주인은 빙글빙글 웃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는다.

"이건 손을 안 대느니만 못한 것 같아."

이 가게의 장점이라면. 손님들이 저하고 싶은 말을 멋대로 하면서도 술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둘은 주인이 권하는 돌돔회와 도빙무시(질주전자에 송이버섯. 생선. 닭고기. 채소 따위를 넣어서 찐 요리)를 주문하고 우선 맥주로 건배를 한다.

'긴자에서 술 마셔본 지도 오랜 만이군 "

"이 정도는 내가 살게. 자네에게 빚진 것도 있고."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 .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실 거야 "

구키는 지난날 강의료 받은 것을 두고 한 말인데 기누가와는 린코를 소개시켜 준 보답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그래. 해서 선생은 안녕하신가?"

별안간 묻는 바람에 구키는 당황해서 맥주를 마신다.

"여전히 만나고 있겠지?"

"으응. 가끔......."

"그래. 난 자네가 그렇게 행동이 빠를 줄은 상상도 못했어 뭔가 위험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더군."

린코를 소개해준 사람이 기누가와였기에 구키는 린코를 사귄 지 두 달쯤 지나서 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며칠 전 문화센터에 들렀더군. 엄청나게 요염해졌던데."

린코가 담당하고 있던 해서 코스는 이미 끝났으므로 다른 서체를 가르치기 위해 센터에 나갔었는지도 모른다.

"구키. 적당한 선에서 끝내는 게 어때? 그렇게 순진한 여자를 울리면 죄받을지도 몰라 "

기누가와의 말투에는 다분히 아무것도 모르는 남의 여자를 사랑에 미치게 하고 이상한 세계로 끌어들인 것에 대한 질타가 묻어 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기누가와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여자는 처음부터 남자의 의지대로 꼭두각시가 되어 움직이고. 그녀 자신의 의지는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닌가. 말로는 여자를 소중히 여기는 것 같지만 기실 아무 의지도 없는 인형에 비유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솔직히 말해 린코의 경우. 싫다고 거부하는 그녀를 구키가 억지로 유혹하여 불륜의 세계로 끌어들인 것은 아니다.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도 있듯이. 서로 끌어당기는 어떤 힘이 없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굳이 변명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구키가 린코에게 다가섰을 때. 그녀도 뭔가를 원하고 있었다. 사랑이라던가 남자라는 구체성은 띠지 않았지만 뭔가를 갈구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들이 처음 만나기 시작했을 때 서로의 가정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어쩌다 그쪽으로 화제가 흘러갔을 때. '집에 있어도 재미없기 때문에......'라고 중얼거리던 린코의 모습에서 어떤 상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 사랑의 과정을 되돌아보자면 처음에는 분명 구키가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린코가 응하여 따라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 사람 모두 흠뻑 빠져 있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의 태도에서 벗어나 대담하게 나온다는 점에서 린코가 훨씬 적극적인지도 모른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기누가와는 둘 사이의 그런 성세한 과정을 전혀 모른다. 구키는 따끈한 정종을 기누가와의 잔에 따르면서 묻는다.

"그녀가 무슨 말 하던가?"

"아니. 다른 강사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깊은 얘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뭔가 괴로운 것 같더군."

"괴롭다니?"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모습이 그렇게 느껴졌어. 그런데도 왜 섹시해 보이더군."

순간 린코의 섹시함을 감상했을 기누가와의 눈길에 구키는 기분이 개운치 않다. 그런 기분을 뿌리치듯 구키는 화제를 바꿔 그의 일에 대해 묻는다.

요즈음 각지에서 문화센터가 생기는 바람에 경쟁이 격심한 모양이다. 다행히 기누가와가 몸담고 있는 문화센터는 전통이 있어서 그런 대로 운영을 해나가고 있지만 더 이상 심각해지면 근본적으로 경영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기누가와가 오늘 시내에 나온 이유도 그런 점을 본사와 협의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무튼 요즘은 뭘 해도 어려워. 자네는 그래도 마음은 편하잖아."

"그렇지도 않아."

한직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힘든 일도 있다 말해봤자 푸념밖에 안 되겠지만...... 구키가 생각에 빠져 묵묵히 있자 기누가와가 한숨을 쉬며 한마디 한다.

"회사라는 곳은 정말 이상해. 뼈 빠지게 일할 때나 지금처럼 한가할 때나 월급은 별반 차이가 없잖아."

그것은 사실이다. 구키도 직책 수당만 줄었을 뿐 총액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게 어디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일인가?"

"그건 나도 알아. 나도 말이야. 자네처럼 일은 적당히 하고 좋은 여자 만나 연애나 해보고 싶은걸."

"이봐. 이봐 그런 게 아니라구."

"아니긴 뭐가 아닌가? 남자가 열심히 일하는 것도 결국은 좋은 여자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고. 이것은 모든 자연계에 공통된 점이지 수컷은 목숨 걸고 먹이를 잡는다. 상대를 쓰러뜨려서 마지막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암컷의 육체와 애정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되풀이한다. . 어떤가?"

사람들이 들을까 봐 구키는 불안하지만 기누가와는 아랑곳없다.

"자네에게 자극을 받은 것만은 아니지만 나도 요즘은 사랑을 하고 싶어. 아주 멋진 여자와 로맨틱한 사랑을 말이야 이 나이에 좀 우습지?"

"아니야.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은 당연해."

"어쨌든 이대로는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잊은 채 인생을 마치게 될 것 같아 못내 아쉬워."

지금까지 기누가와는 오로지 일만 아는 남자였다. 신문사의 사회부에 있을 때도 당시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해서나 열정적으로 이야기할 뿐. 남녀의 애정문제 따위에 대한 화제는 거의 없었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구키의 입장에서 보면 약간 융통성이 없는 강직한 이미지였다. 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 갑자기 '연애를 하고 싶다'고 하니 마치 딴 사람을 만나는 느낌이다. 어쩌면 기누가와가 문화센터에서 일하며 많은 여자들을 상대로 근무한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이제 글렀어."

기누가와는 연애를 하고 싶다고 말해놓고선 갑자기 심약한 소리를 한다.

"연애를 하려면 우선 대단한 에너지와 용기가 있어야겠지?"

그 점은 구키 자신이 이미 실감하고 있는 바이다.

"자네도 잘 알다시피 샐러리맨 사회가 얼마나 엄격한가. 자네야 이제 훌훌 털어버렸으니 상관없지만. 나는 엘리트는 아니더라도 지금 자리가 본사 라인의 꼬리쯤에 올라타 있는 형편이라 스캔들은 쥐약이나 마찬가지야 우리 사회는 질투와 중상으로 엉켜 있으니 말이야."

"그래 . 엘리트일수록 자유가 없는지도 몰라."

"게다가 중요한 건 시간과 돈이야. 돈이 없으면 마음의 여유도 없다구."

기누가와는 그렇게 말하고 약간의 빈정거림이 섞인 말을 던진다.

"자네 돈은 두둑하잖아."

"그렇지 않아."

아니라고는 했지만 그 나이 또래의 다른 동료에 비해 약간의 여유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연봉은 약 이천만 엔 정도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집이 세타가야에 있다. 외동딸은 이미 결혼했고 아내도 도자기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기 때문에 구키는 상당한 용돈을 자유로이 쓸 수 있다. 물론 린코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어떤 돈도 아깝지 않다.

상념에 빠져 있는 구키에게 기누가와가 술을 따라준다. 작고 하얀 술잔이 사기로 만들어져서인지. 거기 담긴 술이 호박색으로 빛나 보인다. 호박색으로 출렁이는 술은 구키의 뇌리에 린코의 뽀얀 살결이 되어 살아난다. 지금쯤 린코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구키의 심중을 꿰뚫어본 듯 기누가와가 중얼거린다.

"자네의 체력이 정말 부러워."

장난기어린 말투를 통해 섹스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만날 때마다 하고 있는 거지?"

대답할 필요가 없어 무시하는데도 기누가와는 계속한다.

"한심하게도 나는 요즘 그쪽으로는 완전 휴업이야."

"집에서도?"

'벌써 오래 됐어. 자네는?"

구키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럴 거야 우리 나이쯤 되면 와이프가 아니라 친구 같은 존재로 여겨져 하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아."

"그럼 밖에서는?"

"하고야 싶지. 하지만 자네처럼은 잘 안 돼. 우선 그렇게 멋진 여자도 없고. 설사 있다 해도 솔직히 말해서 별로 자신이 없네."

"걱정 마. 상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

"그건 자네처럼 늘 하고 있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 나처럼 오래 쉬어버린 사람은 힘들어."

"항상 하고 있다니 그건 말도 안 돼 "

"아무튼 나이 탓인지 요즘은 안 해도 별로 아쉽지 않아. 다 이렇게 살아가는 거려니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

'너무 늙은이 같은 소리 말라구."

"섹스도 일종의 습관이야. 안하더라도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고 또 어쩌면 그게 편한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살아간다면 분명 수컷 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긴 하지 ."

거기까지 말하고 기누가와는 술을 단숨에 들이켠다.

"역시 근사한 상대를 만나면 달라질까?"

오늘 밤의 기누가와는 여느 때와는 좀 다르다. 과로 탓일까. 아니면 이런 얘기를 나눌 상대가 없는 것일까. 그의 화제는 남녀간의 성문제로 일관한다. 솔직히 말해 구키는 이쯤에서 끝내고 싶지만 기누가와는 다시 술을 주문하며 뭔가를 탐색하는 듯한 말투로 물어본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당연히 자네와의 관계를 알고 있겠지?"

"글쎄......."

"무책임한 사람."

기누가와는 다시 술잔을 들이켠다.

"머지않아 남편이 회사를 덮칠 거야. 우리 와이프를 어떻게 할 거냐고 추궁하겠지..... 그가 의사라는 건 알고 있지?"

"자네가 일러줬잖아."

"의사라먼 밤일도 잘할 텐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지? 얼마나 마음 약한 남자길래 아내의 부정을 알고도 모른 척 내색도 못할까. 어쩌면 아내를 만족시켜줄 만한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도 몰라."

"이봐. 그만해 ."

"아냐. 엘리트들 중에서도 의외로 그런 사람이 많아. 머리에 먹물은 들었겠지만 그쪽은 영 젬병이라구."

"그럴까?"

"하지만 언젠가는 남편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걸 "

기누가와는 위협하듯이 말한다.

"그러니까 가벼운 관계로 끝내."

"가벼운 관계?"

"그래. 경음악처럼 가벼운 관계 말이야."

애인이 없는 분풀이인지 기누가와는 구키와 린코 커플을 화제로 올려놓고 즐기고 있다.

"그런데 그 남편 말이야. 어쩌면 정말 무서운 사람일지도 몰라."

"?"

"린코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확실하지만. 어쩌면 그 사람도 한눈 팔고 있는지도 모르지 두 사람은 맞바람을 피우는 것을 서로 알면서도 태연하게 부부 생활을 계속하고 있거나."

구키는 기누가와의 말을 중단시키려는 듯 시계를 보더니 계산을 마친다. 계속 맞장구를 쳐준다면 기누가와의 주흥이나 돋우는 화제가 될 뿐이다

기누가와를 만나 술을 마신 지 사흘 뒤. 구키는 신바시 역에서 린코와 만나 가마쿠라로 향한다. 마침 퇴근시간대여서 전차가 붐비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신형 그린전차여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전차 안을 둘러보니 가마쿠라에서 도쿄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특히 오십대의 관리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 보인다. 다행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남녀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은 구키와 린코뿐이다. 회사 동료들이 지금 우리 둘의 모습을 보게 된

다면 얼마나 입방아를 찧어댈까 생각하고 있는데. 화려한 와인색 정장에 스카프를 두른 린코가 구키에게 바싹 다가앉으며 말한다.

"당신과 또 여행을 가게 되다니 .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다키기노를 보러 가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린코의 화제는 엉뚱한 길로 빠진다.

"전에 공업 디자이너로 일하는 헨미라는 여자 친구 얘기한 거 기억해요?"

"당신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 갔다던 친구?"

". 그 애가 유명한 회사 사장과 사귀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헤어졌대요."

"부인에게 들켰나 보지?"

"아니요. 그 사람하고 교토에도 같이 가고 홍콩에도 같이 여행 갔었대요. 그런데 그 사장이라는 사람이 어찌나 남의 눈을 의식하던지 둘은 늘 좌석을 따로 정해서 앉았대나 봐요. 예를 들면 신칸센을 탈 때도 그 사람이 9호차에 타면 내 친구는 10호차에 타고. 해외에 갈 때도 그 사람이 먼저 가고 내 친구는 다음 비행기로 가야 했대요. 친구 말로는 모처럼 일등석에 앉아 갔지만 너무 썰렁해서 아무 의미도 없더래요 차라리 일반석에 앉아 가더라도 둘이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게 더 행복할 거라나요?"

"잡지에 스캔들로 도배하고 싶지 않아서겠지."

"그야 그렇겠지만. 어디를 가든 따로 있어야 한다니 너무 비참하지 않아요? 도대체 무엇을 위한 여행이겠어요? 그 사람을 정말 좋아했지만 더 이상 그런 괴로운 짓은 싫다면서..."

"헤어진 거야?"

". 일주일 전에 만났는데 앞으로는 절대 그런 사랑은 하지 않겠대요."

친구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그 사장의 마음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지난번 가마쿠라에 갔을 때처럼 지금도 구키와 린코는 나란히 앉아 있다 구키도 내심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봤자 고작 가마쿠라까지이고 누가 본다 해도 아는 사람과 동석하고 있었다고 하면 그만이라고 나름대로 변명거리를 준비해 둔 터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어차피 일선에서 밀려난 처지라 떨어져봤자 바닥밖에 더 되겠느냐는 구키의 달라진 가치관이 버티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구키일지라도 신칸센을 타고 교토로 간다거나 비행기로 해외까지 간다면 그의 행동은 지금보다 훨씬 조심스러워질 것이다. 기차 칸을 따로 탄다거나 비행기 편을 달리 하는 일까지는 없겠지만 나란히 앉아 있는 구키의 모습에서 어색한 태도는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우스워 보이겠지만 일본 사회가 남녀 관계를 너무 구속하기 때문이랄까. 쓸데없는 참견이 지나치기 때문에 생긴 부산물이다. 업무상의 과실로 인한 인사이동은 충분한 이유가 되지만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일본사회의 현실이기에 그들은 마음 놓고 멋진 사랑 한 번 해볼 수 없다. 매스컴과 기업 내부에서는 스캔들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그래서 남자들은 주위의 눈치만을 살피며 위축된 채 살아간다. 겉으로는 성실해 보이지만 묘하게 욕망을 억제당하며 살고 있는 그들은 오늘도 한줌의 자유조차 잃어버린 채. 모략과 시기만이 만연한 어두운 사회 속에서 꼬리를 사리며 살아간다. 지금 경제계에서는 규제 완화를 부르짖고 있지만 정말로 규제완화가 필요한 것은 남녀 관계인지도 모른다. 두서없는 생각에 젖어가는 구키의 왼손 위로 린코의 오른손이 살짝 포개진다.

"하지만 당신은 어디든 함께 있어 주니까 저는 정말 행복해요."

다시 손을 휘감으며 린코가 말을 잇는다.

"당신의 그런 점이 좋아요."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 나쁠 리 없다. 그러나 이목이 집중되는 전차 안에서 이렇게 손가락을 깍지 끼며 다가앉는 린코가 조금은 부담스러워 구키는 슬며시 손을 빼며 새삼 린코의 대담성에 놀란다.

전차가 가마쿠라에 도착한 것은 오후 일곱 시가 조금 지나고 나서였다. 역에서 택시를 타고 다이토큐에 도착하자 경내 안쪽에 설치된 가설무대에는 이미 다키기노가 상연중이다. 구키는 입장권을 내고 안내원을 따라 허리를 굽혀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나아가 무대 앞 오른쪽 좌석에 앉는다. 교겐(()의 막간에 상연하는 희극)'기요미즈' 가 상연중인가 보다. 타로간자가 물 길러 가는 것이 싫어서 괴물로 분장하여 주인을 위협하고 있는 장면이다. 가을이긴 하지만 채 무르익지는 않았다. 경내를 둘러싼 숲속에서는 가끔 미풍이 불어오고 무대 양쪽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이 주위의 짙은 어둠을 한층 더 두드러지게 한다. 어둠 속에서 괴물이 다시 나타나고 그것이 타로간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주인은 놀라지 않고 괴물의 가면을 벗기자. 타로간자는 허둥지둥 도망친다. 내용이 단순한 교겐이라 린코는 미소 지으며 구키의 손을 잡는다. 어둠 속인데 어떠랴. 구키도 손을 맞잡아주자 린코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인다.

"오늘도 그 방이죠?"

보름 전 일몰을 보며 정사를 즐겼던 그 방을 말하는가 보다.

"아마도 그럴 거야."

"우리 오늘 밤 괴물놀이 할까요?"

"그럼 남자가 괴물이 되나?

". 저렇게 괴롭히는......."

구키가 머뭇거리는 사이 다시 공연이 시작된다. 이번에는 '철노(일본 고전 예능극의 하나(能樂))' 중에서 우카이 장면인 것 같다. 나그네 중이 나타나 마을 사람들에게 하룻밤 재워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교겐과는 달리 동작이 작은 무대를 보며 구키는 방금 전 린코의 말을 되새긴다.

요즘 린코는 약간 이상한 행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변태까지는 아니지만 조금만 가학적인 행동을 가해도 그녀는 쉽게 무너져버린다. 가면을 쓴 괴물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것을 상상했던 것일까. 장작불을 비껴 받은 린코의 옆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다. 다키기노는 아홉시가 다되어 끝났다. 무대를 비추던 불빛이 꺼지고 장작불이 다 타버리자 주위는 갑자기 짙은 어둠에 싸인다. 두 사람은 싸늘한 어둠 속에서 도망치듯이 거리로 나와 차를 잡아타고 고마치 거리에 있는 일품 요릿집으로 간다. 이곳은 후지사와에 살던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사토미 돈이나 고바야시 히데오 등 가마쿠라에서 활동한 문사들도 자주 찾던 곳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스탠드바가 길게 자리를 잡고 있고 안쪽으로는 방도 있지만 이 가게는 역시 스탠드바에 앉아 마음이 통하는 동료들과 어울려 마시는 것이 제격이다. 구키가 이 집을 찾은 것은 삼 년 만인데도 주인은 그를 기억하고 있다. 구키는 서둘러 맥주로 건배한다. 전에도 느꼈지만 재료의 독특한 풍미를 살린 소박한 음식 맛은 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여자와 함께 와도 어색하지 않은 차분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구키는 쑤기미와 근해에서 잡은 가마쿠라 새우회 . 그리고 도미머리 구이를 주문한다. 린코는 오늘 밤 함께 묵을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맥주는 한 모금만 마시고 정종으로 바꾼다.

"다키기노를 공연할 때는 원래 장작불빛만을 사용하죠?"

린코가 묻는다. 오늘 공연에서는 장작불 이외에 다른 조명도 있었다.

"가마쿠라의 다키기노가 상연된 것도 벌써 사십 회 가까이 될 거야. 옛날 무사들이 본 것은 지금 것과는 많이 달랐겠지 그 무렵에는 지금처럼 전깃불이 없었으니까 교토의 다이몬지노오쿠리비도 그렇잖아. 온 거리에 가로등과 네온을 모두 끈다고 생각해봐. 쥐죽은 듯 적막한 바로 그 순간. 저쪽 산에서 진홍빛을 물들이며 불꽃이 타오르는 거야. 그 화려하고 장엄한 정경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저도 모르게 합장하고 싶어질 거야. 다키기노 무대 주위에 연못을 만들어놓고 바람에 흔들리는 장작불과 연못에 비치는 불빛만으로도 지금보다 훨씬 그윽하고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르지."

"괴물도 지금 본 것보다 훨씬 무서워서 오싹한 기분이 들었을 거예요."

구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밤은 괴물놀이를 하자던 린코의 말을 떠올린다.

다키기노가 끝나고 식사를 했기 때문에 시간은 벌써 열시를 지나고 있다. 미리 부탁해 두었던 택시가 도착하자 구키는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다. 순간 산으로 둘러싸인 어둠이 가로막는다. 짙은 녹음이 코를 찔러와 그들이 가마쿠라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조금 전까지 다키기노로 활기를 띠고 있던 다이토큐도 이미 어둠에 덮여 쥐죽은 듯한 정적에 싸여 있다. 고마치 거리의 가게에서 호텔까지는 밤이라 약 십분 만에 도착했다. 프런트에서 체크인하고 키를 받고 보니 예상했던 대로 예전과 같은 방이다. 룸으로 들어가자 널찍한 침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구키와 린코는 그대로 침대로 쓰러진다.

"이제야 우리 둘만 남았군요."

전차에서부터 다키기노. 그리고 요릿집에서 느껴야 했던 사람들의 시선에서 해방되어 린코는 다소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다.

"좀 취했나 봐요."

"취하는 것이 좋아."

"그래요?"

"그래야 당신이 쉽게 흐트러지니까."

살짝 눈을 흘기는 린코에게 입을 맞추며 단추를 열고 스커트의 지퍼에 손을 댄다.

"불을 꺼주세요."

구키는 한쪽 손을 뻗쳐 스탠드의 불빛을 약하게 한다. 블라우스의 앞가슴을 젖히고 얼굴을 묻자 린코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잠깐만.... 샤워하고 올게요."

"이 대로가 좋아. ....."

"안 돼요. 땀에 젖어 있어요."

"상관없어."

구키는 린코의 수줍음을 오히려 강요하고 싶다. 남자에게는 가학적인 욕망이 담겨 있지만. 그것을 반항하며 받아들이는 여자에게는 가벼운 피학의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린코의 반항을 실감하며 구키는 오른손으로 린코의 상체를 확 안은 채 한쪽 손으로 스타킹을 잡아당긴다.

"안 돼요."

린코가 다시 반항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신축성 있는 실크 스타킹은 팬티와 함께 미끄러져 내리고. 둥글고 부드러운 엉덩이가 튀어나온다. 이제 곧 그녀는 성채를 잃게 될 것이다. 린코도 이제 체념을 한다.

"안 된다니까......."

여자가 항복하는 기색을 알아차린 남자는 기세가 더욱 등등해진다. 구키가 스타킹을 완전히 벗겨 내리려 하자 린코도 무릎을 굽혀 발끝을 구키의 손 가까이 대준다. 이미 여자는 남자의 그물에 얽혀든 것인가. 아니다. 기실 남자가 여자의 덫에 매여 버리고 만 것이다. 알몸이 드러난 린코는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이 구키의 품으로 파고든다. 린코의 매끄러운 살결을 느끼며 구키는 린코의 귓가에 선언한다.

"오늘 밤 단단히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야."

"싫어요. 그런 건."

"괴물이 되어 괴롭혀 달라고 했잖아."

린코는 여전히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나 요즘 좀 이상해요."

그것은 린코뿐만 아니라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구키는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괴물이 된 남자는 우선 여자에게 수치심을 주려 한다. 구키는 알몸이 된 린코의 어깨를 왼손으로 잡고 두 다리로 여자의 허리 아래를 휘감는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작은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사람들의 이목에서 해방된 린코는 아련한 쾌감 속으로 젖어들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서서히 괴물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남자는 언제까지나 여자를 쾌감 속에 빠져들게 두지 않는다. 왼손으로 상체를 잡은 채 구키의 오른손이 린코의 목덜미에서 등으로. 그리고 허리에서 둥근 엉덩이까지 더듬어간다. 그것도 서서히 닿을락말락 알 수 없을 정도의 부드러운 감촉으로 등줄기를 따라 천천히 내려간다. 손길이 닿을 듯 말 듯 부드러울수록 여자의 감각은 날카롭게 곤두선다. 구키의 손길이 허리를 지나 엉덩이에 이르자 린코의 입에서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만....."

아련한 쾌감이 간지러움에서 안타까움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신음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라 괴물로 변하여 여자 위에 군림할 것이다. 몸부림치는 린코를 더욱 세게 끌어안는 구키의 안타까운 손길이 등으로 향한다. 한번 간지러운 감각을 느끼기 시작한 여체가 그 감각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구키의 손가락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온몸을 기어 다닌다. 방향 감각을 잃은 손가락이 린코의 등줄기에서 옆구리로 옮겨지자.

"싫어......"

비명을 지르고 다시 헐떡이며 호소한다.

"제발......."

괴물의 실체를 린코는 이제 막 느낀 모양이다. 부드럽게 시작된 애무가 계속되는 간지러움으로 이어지자 린코는 몸부림치고 애원하지만 피물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오랜 고문 속에서 해방되자 린코는 크게 한숨을 쉬고 온몸을 축 늘어뜨리더니 느닷없이 주먹으로 구키의 가슴을 때리기 시작한다.

"너무 해요. 정말 나빠."

처음에는 부드러운 애무라고 생각했는데 깨닫고 보니 전신의 신경이 곤두서는 간지러운 고문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괴물이 되어 괴롭혀 줘요'라고 말한 것은 린코이며. 구키는 그녀의 말에 따랐을 뿐이다 스스로 원해 놓고 이제 와 원망을 하는 린코의 모습을 보며 구키는 빙글빙글 웃는다.

"너무해요....."

린코는 토라진 듯 등을 획 돌려 시트를 뒤집어쓴다. 이런 짓궂은 남자의 품에는 절대 안기지 않겠다는 의지겠지만 침대라는 공간에 알몸이 도망칠 곳은 없다. 한번 여체를 몰아넣고 뿌듯해하는 괴물은 또다시 뒤에서 슬슬 접근을 한다. 그리고 이제 겨우 호흡을 가라앉힌 여자의 귓가에 속삭인다.

"아직 멀었어. 이제부터가 더 괴롭다구."

순간 린코의 고개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그리고 두 손 가득 유방을 움켜쥔 구키의 손가락은 젖꼭지 언저리를 가볍게 기어 다닌다.

"싫어 ......."

린코는 가슴을 가리려 하지만 본능이 싹튼 유두는 이미 탱탱하게 솟아 있고 구키는 귀여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입술을 살짝 대본다.

'어쩌려구요...."

두려움에 묻지만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는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구키는 머리를 숙여 시트 속으로 파고들며 작고 단단한 유두를 입술로 감싼다. 요즘의 구키는 이전과는 많이 다르다. 삼십대에는 오로지 강하고 늠름하게 육박하면 좋은 것인 줄 알았고 사십대 무렵에 접어들면서는 약간 힘을 빼고 부드러운 접근을 시도했다. 그리고 오십대인 지금은 격렬함보다는 오히려 온화하게 서서히 시간을 들이며 부드럽게 애무에 열중할 수 있는 여유를 익히게 되었다. 젊을 때의 체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야 여자가 더 좋아하고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난폭하고 격한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보다는 상대가 애를 바짝 태울 정도로 느긋하고 부드러운 애무를 그는 터득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지도 모른다. 구키는 린코의 젖꼭지를 입에 담은 채 한쪽 손을 숲가에서 숨 쉬는 작은 꽃봉오리에 살며시 대본다. 입술로 덮고 있다고는 하지만 유두를 애무하는 것은 혀끝이고 꽃봉오리에 댄 손도 닿을까말까 할 정도이다. 부드럽고 안타까울수록 여자의 감각은 예민해진다.

여자들이 흔히 '다정한 사람이 좋아'라고 말하는 것은 외모뿐 아니라 터치가 부드러운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여자와 접할 때는 부드럽고 온화한 배려가 무기가 되기도 한다. 남자의 부드러움 속에서 린코는 솟구쳐 오르는 요사스러운 감각을 만끽하며 온몸이 녹아내린다. 그것을 알아차린 구키는 혀로 유두를 휘감고 손가락으로 꽃봉오리를 애무하자 린코의 상체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꼬인다.

"당신...."

신음인지 중얼거림인지 알 순 없지만 분명 그것은 초조이며 애타는 호소라는 것을 구키는 안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감촉을 부추기면서 여자의 입에서 애원의 소리가 새나오기를 기다린다.

"싫어요....."

지금 린코는 안타까움으로 더 이상 몸을 가눌 수 없는 절정에 있는 것 같다 더 이상 일분이라도 기다리게 한다면 자폭해서 꼭대기까지 치달아버릴 것이다. 그 아슬아슬한 한계점에서 그녀는 울부짖듯 호소한다.

"빨리......"

그 말은 듣기에 따라서 애원이고 응석이며 울음소리도 될 것이다 여자는 지금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감각 속에서 몸부림과 초조와 단말마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

"정말 ..... "

다시 호소하며 구키에게 파고든다. 그런 안타까운 몸부림을 충분히 알면서도 구키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은 린코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애원의 소리이다. '부탁이에요'라는 솔직한 그 한마디에 남자는 기꺼이 뜨겁게 불타는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한 번 더 막다른 곳까지 몰아넣고 그 소리를 듣고 싶다. 원래 쾌감의 농도가 단순한 남자는 행위 그 자체보다는 여자의 갖가지 반응에 더 민감하다. 사랑하는 여자가 타오르는 모습과 소리와 표정.... . 만화경처럼 화려하게 변화하며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그것을 실감함으로써 남자는 비로소 몸과 마음으로 충족감을 얻게 된다. 그 요구 방법은 가령 내용이 별로 없는 상품에 갖가지 부가가치를 붙여서 파는 상술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단순한 쾌락만으로 말하자면 남자의 그것은 여자를 따를 수 없다. 아직 성에 눈뜨지 않은 여자라면 몰라도 풍만하게 성숙된 여자라면 남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깊게 쾌락을 만끽할 수 있다 그 결점을 메우기 위해 남자들은 이런 부가가치로 커버해갈 수밖에 없다.

"제발.... "

린코는 이미 인내의 한계에 몰려 있는 모양이지만 구키는 더욱 잔혹한 고문을 가한다.

"지금 원하는 게 뭐지?"

여자의 참을 수 없는 안타까움에 남자는 잠시 우위에 서 있지만. 여자의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남자는 여자의 산 제물이 되어 여자보다 더욱 탐하며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남자는 우위에 있는 순간만이라도 맘껏 애를 태우고 허세를 부리고 싶어 한다. 이제 여자의 온몸은 불덩이처럼 타올라 있다. 둥근 어깨도 봉긋한 앞가슴도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고 게다가 우거진 숲속은 샘물처럼 물기를 촉촉하게 머금고 있다.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다. 이때. 남자는 서서히 그리고 약간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들어간다.

이런 과정도 이전의 구키에게는 없었던 부분이다. 젊었을 때는 상대가 허락할 기미만 보이면 곧 미친 듯이 사납게 돌진했다. 여자의 기색을 살필 겨를도 없이 자기 느낌으로만 달려들어 일초. 이초 아니 그보다 더 짧디 짧은 쾌락의 순간을 넘기고 허탈감 아닌 허탈감으로 축 늘어져버린다. 그때는 격렬한 돌진만이 최선이고 그래야 상대가 기뻐해 주리라 생각했지만 과연 여자가 만족했겠는가고 묻는다면 자신은 없다. 구키 자신이 확인해본 적은 없었지만 짐작컨대 만족은커녕 불만만을 느낀 채 돌아 누웠을 것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지금 구키에게는 용맹스럽게 자신을 잊어버리고 파고들만한 젊음이 없다. 그러나 그런 젊음 대신 부드럽고 느긋하게 상대를 리드할 수 있는 능력은 있다. 그래서 그 나이와 더불어 갖추어진 여유라는 무기로 정념에 휩싸여 활활 불타오른 린코와 확실하게 맺어질 수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실어다준 지체가 린코와의 관계에 톡톡히 한 몫 하는 셈이다.

또한 젊은 시절에는 체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린코의 오른쪽에서 맺어져 있다. 이른바 측와위인데. 이렇게 하는 자세가 은밀한 곳을 계속 애무하고 자연스럽게 요구하며 자신의 페이스를 지속할 수 있다. 게다가 비어 있는 다른 손으로 가슴이며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을 만질 수도 있고 더러는 아름다운 여체의 움직임까지 지켜볼 수 있다. 그 외에 요즘 구키가 즐기는 것으로 여자의 허리를 약간 위로 밀어 올리는 또 다른 측와위 자세가 있는데 여자의 가장 은밀하고 가장 민감한 부분을 정확히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린코는 나지막한 소리를 내면서 쾌락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구키는 린코의 절정 순간을 거의 정확하게 알아차린다. 신음소리와 더불어. 괴로움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몸부림과 더불어 그녀의 깊숙한 곳에서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부드럽고 따뜻하던 화원은 불길이 거세지면서 흡착도가 점점 강해진다. 그리고 드디어 절정에 도달하였을 때는 남자를 감싸고 있던 질벽의 전면이 물결치며 강한 경련으로 조여 온다. 린코가 환희에 젖어드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안 돼......."

이성은 억제하고 있지만 육체는 본능을 향해 치닫는 것을 깨달은 여자의 입에서 터져 나온 불균형의 조화인 듯하다. 그러나 이미 달리기 시작한 몸은 멈출 줄 모른다. 뜨겁게 부풀어 오른 화심은 질름거리는 경련을 반복하며 고개를 넘는다. 질벽은 잔주름 잡힌 비로드처럼 변하여 남자를 옥죄인다. 바로 그 순간 남자는 오르가슴을 느낀다. 이 한 순간을 위해 남자는 여자에게 부드럽고 상냥하게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막대한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 여자에게 봉사하는 것은 오로지 이 한 순간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키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억제한다. 자신의 단순하고 짧은 쾌락보다는 사랑하는 여자가 열락의 고개를 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훨씬 더 남자의 우월감과 충족감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용맹스러운 기세는 없지만 그 대신 자신을 억제하고 냉정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기술을 터득했다 그것은 격렬함과 억센 힘을 끈은 대신 얻은 대가이며 성과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 구키는 린코만을 열락의 고개를 넘게 한 채 자신은 여전히 여자의 화심 속에서 유유히 숨 쉬고 있다.

젊음만이 성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의 흥분은 대뇌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극히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겁을 먹는다거나 불안해한다거나 자신감을 상실하면 절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젊음은 체력만을 내세워 자칫하면 이와 같은 정신적인 컨트롤을 제대로 못할 우려가 있다. 구키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사회 초년시절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섯 살 연상의 여자와 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녀는 햇병아리 연극배우였는데 신주쿠의 어떤 바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바로 전 애인은 다름 아닌 연예계에서는 누구나 인정해 주는 플레이보이로서 직업은 프로듀서였다고 한다. 문제는 구키가 그녀와 관계를 맺을 때면 언제나 그가 열등감으로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남자들이란 어처구니없게도 체면이나 오기에 사로잡히기 쉬워서 여자를 품에 안을 때는 전에 사귀던 남자보다 훨씬 솜씨가 좋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구키 역시 그런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노력하면 할수록 이상하게도 더 초조해지고 위축되어 갔다. 남자들이 흔히 '델리킷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정신적인 것을 이르는 표현이다. 그러기에 더더욱 어설픈 젊음보다는 여자에 대한 안도감이나 자신감을 갖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효과적일 것이다.

구키 역시 마찬가지로 그녀와의 관계에서는 마음만 초조했지 실상 아무것도 이를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선입견 속의 플레이보이에게 젊은 육체가 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 여자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훌륭했다. 위축되어 초조감에 빠져 있는 구키를 달래주며 구키가 자신을 되찾을 때까지 얼마나 함께 노력을 해주었던가. 하지만 만약 그때 그녀가 따분한 표정으로 '남자가 시시하게......'라는 식으로 조소적이고 냉정한 말을 내뱉었더라면 구키는 애초에 자신감을 상실하여 성적 콤플렉스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인 것 같다. 혹은 만들어진다고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구키가 린코를 불타오르게 하는 원동력도 근원을 밝힌다면 그런 여자들에 의해 키워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여자와 함께 절정을 공유하는 것도 좋지만 여자만의 즐거움을 실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구키는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많은 만족과 충족감을 느낀다. 게다가 구키 자신의 만족을 접어둔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여자를 화원으로 유도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은가.

남자의 그런 미묘한 속내를 알 리 없는 린코는 화려한 절정 뒤에 밀려오는 나른함에 온몸을 맡기고 있다. 여자의 자태 중에서 운우지락 후의 모습만큼 천연스럽고 싱그러운 것도 없다. 이미 긴장도 완전히 풀려버린 상태이고 수줍음을 탄다거나 저항할 의지도 상실한 채 가벼운 마취에 걸린 것처럼 누워 있다. 이렇게 이완되고 무저항적인 모습은 평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그런 자태를 보는 남자는 새삼 한없는 사랑을 느낀다. 흐트러진 모습의 배경은 그만큼 상대를 믿고 모든 것을 맡긴다는 징표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어떤 남자인들 여자에게 사랑을 느끼지 않겠는가.

구키는 또 한 번 원한다는 듯이 살짝 껴안아본다. 마취에 걸린 듯했던 여체는 거역하지 않고 구키에게 전신을 맡겨온다. 린코의 몸은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은 채 땀이 흥건히 배어 있다. 구키는 린코의 작은 등을 토닥이며 속삭인다.

"좋았어?"

물을 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자는 다시 확인하고 싶어진다. 솔직히 수긍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다시 묻는다.

"어땠어?"

이번에는 린코도 못 들은 척한다. 남자는 그것이 얄미워 또다시 은밀한 곳에 손을 대자 진조의 몸이 비틀린다.

"싫어요."

린코는 구키의 손을 뿌리치려 하지만 아랑곳없이 더 깊은 곳을 더듬자 신비한 여체는 다시 뜨거워진다. 놀라을 정도로 빠른 여자의 회복력에 구키는 감탄한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물결치는 파도에 몸을 맡긴 해초처럼 떠돌고 있었는데 벌써 생기를 되찾아 새로운 쾌락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남자의 성을 일컬어 유한이라고 한다면 여자의 성은 무한에 가깜다. 수학적 이론을 들출 것도 없이 유한이 어찌 무한에 비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행히 구키에게는 기회가 한 번 더 남아있다. 조금 전 그 달콤한 유혹을 뿌리쳤기 때문이다 그 여력 덕분에 구키는 여자의 또 다른 욕구에 응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불타오른 여체와 대항해야 할 남자는 본능적으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다. 린코를 뒤에서 껴안으며 가슴을 어루만진다. 한 번의 절정으로 더욱 민감해진 린코는 가벼운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손 좀 줘 봐."

순간 린코는 영문을 몰라 왜요? 라며 돌아보려는 순간 구키는 린코의 왼손을 뒤로 당기고 이어 오른손을 끌어당긴다.

"뭘 하려는 거예요?"

"나쁜 손이니까."

구키가 유방에 손을 댈 때마다 린코는 간지럽다는 듯이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려 했다. 그 방해하는 손을 징벌해 둘 필요가 있다. 구키는 린코의 두 손을 뒤로 돌려 침대가에 있던 가운 끈으로 묶는다.

"이상한 짓 하지 말아요."

여자는 이제야 남자의 의도를 알아챈 모양이다. 당황하며 손을 빼려 하지만 린코의 두 손은 이미 허리 뒤로 돌려져 손목이 십자로 묶여 있다.

"그런 거......."

싫다는 듯이 두 손을 비벼대지만 단단히 묶인 끈이 풀릴 리 없다. 장난이 아니라고 느낀 린코는 갑자기 불안해진 모양이다. 어떻게든 손을 풀어보려 발버둥 칠수록 시트가 벗겨지며 알몸이 드러난다.

"풀어줘요."

쉽게 풀려지지 않자 애원해보지만 괴물이 된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혹한 징벌을 여자에게 가한다.

"불 켤까?"

순간 린코가 돌아보며 고개를 힘껏 좌우로 젓는다.

"그러지 마세요."

지금은 남자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여자에게 요구하고 강요할 수 있다 이런 드문 기회를 쉽게 보낼 수는 없다. 괴물은 욕실에서 타월을 가지고 나와 여자의 이마에 댄다.

"뭘 하는 거예요?

잔뜩 겁에 질린 여자가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남자는 절대자로서 선고한다.

"눈가리개를 한다. "

"싫어....."

몸부림치는 여자의 두 눈은 타월에 가리워져 공포스러운 어둠에 갇힌다.

"무서워......."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으나 소용이 없다. 여전히 반항하는 여자에게 괴물은 엄숙하게 최후의 선고를 한다.

"그럼 불을 켠다."

"살려주세요....."

모기 같은 소리로 애원하지만 괴물은 무시하고 스위치를 올린다. 순간 밝은 전등 빛이 여기저기서 방을 비춘다. 방 한가운데 더블 침대가 있고 그 한복판에 여자가 알몸으로 내던져져 있다. 눈이 가려지고 손은 뒤로 묶인 채 꼼짝 못하는 상태이면서도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듯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다. 둥근 어깻죽지를 지나 봉긋한 유방이 보이고 잘록한 허리를 지나 윤기 나는 엉덩이가 하얀 반구처럼 볼록하다.

여자의 몸은 불가사의한 생물이다. 아름다운 여체 그 하나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는데 거기에 약간의 치장만 해도 새로운 아름다움이 더해진다. 예를 들면 누드에 팬티 한 장. 혹은 스타킹 등으로 살짝 감춰주기만 해도 그 여자다움이 한결 두드러지며 남자를 자극시킨다. 지금 알몸의 린코에게는 손목을 묶고 있는 한 줄의 끈과 한 장의 타월뿐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연상과는 무관한 이 한 줄의 끈과 타월이 여체를 구속하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은 요염함과 요사함을 드러내며 남자에게 육박해온다. 단순한 나체가 주는 이미지는 그렇게까지 요염하지 않다. 그러나 속박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이렇게 자극적으로 변모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을 통해 망상을 환기시키는 독소와 같은 그 어떤 것이 함께 숨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손은 뒤로 묶이고 눈이 가리워진 채 알몸으로 내팽개쳐져 있다. 그 모습이 보여주는 여자의 아름다움과 가련함. 게다가 비극적인 배경으로 인해 수치심에 떨고 있을 그 내면까지를 상상하며 남자들은 흥분하고 발정한다. 이런 압도적인 매력 앞에서는 아무리 괴물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보기만 해도 구키의 몸은 뜨거워져 충동에 사로잡힌 듯 침대로 쓰러지며 린코를 꼭 껴안는다. 냉혹한 처형자인 괴물이 자신의 책무를 내던지고 음란하고 호색한 일개의 인간으로 타락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괴물은 지배하는 자의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손을 뒤로 묶인 채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는 여자의 둥글고 풍만한 엉덩이를 한껏 뒤로 내밀게 하고는 그 은밀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한다.

엉덩이 크기가 어떻고. 지금 젖꼭지는 어느 정도 검게 물들었는지를 린코의 귓가에 속삭이는 즐거움도 잊지 않는다.

"여기도 시럽이 넘치고 있군."

프루트 시럽에 빗대어 짓궂게 괴롭히는 바람에 여자는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다. 한시라도 빨리 몸이 맺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모양이지만 남자는 호락호락 넘어갈 낌새가 없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이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참을성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구키도 바로 그 한계에 와 있다. 이제 겨우 린코를 속박하고 한껏 감상하며 괴롭히기 시작했는데 그의 몸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만 린코의 부풀어 오른 화원으로 돌진해 들어간다. 순간 린코는 낮은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뒤로 젖힌다. 그리고 남자를 확실하게 포착하였다는 것을 느끼고는 서서히 허리를 움직인다. 뒤로 맺어지는 이른바 배후위로 여자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자극할 수 있다. 그것도 여자가 상체를 뒤로 젖히면 젖힐수록 정확히 밀착된다. 구키는 오히려 뒤로 약간 물러나 린코의 안타까움을 더 부추긴다. 그리고는 뒤로 묶여 있는 린코의 손을 잡고서 마치 말을 다루듯 서서히 움직인다. 바로 이 순간 구키는 정복자이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눈이 가려진 린코의 집중력은 한층 더 강해져 처음에는 수줍은듯하더니 이윽고는 사나운 말이 되어 달리기 시작한다. 결국 남자는 여자에게 지휘권을 빼앗기며 여자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서로 몸을 섞을 때 그것이 부끄러운 짓이라는 것은 남자나 여자나 공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수치심이 극도에 다다르면 서로가 대담해지는데 그쯤 되면 오히려 여자 쪽이 더 대담해져서 수치심도 망설임도 남자보다 더 빨리 내팽개쳐버린다. 처음에는 분명 남자가 여자를 범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나 끝나고 보면 흡수당한 것은 언제나 남자이다. 그리고 침대 한 모퉁이에 시체처럼 누워 있다.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정적 속에서 린코가 입을 연다.

"풀어줘요."

구키는 비로소 린코의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가리개는 정신없이 날뛴 탓인지 이미 벗겨져 있다. 구키는 린코를 풀어준다. 순간 린코는 작은 주먹으로 구키의 얼굴과 가슴을 마구 때린다.

"나쁜 사람. 나쁜 사람. 너무 해요......"

손이 뒤로 묶여 있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구키는 린코의 분풀이를 그대로 다 받아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진정되자 물어본다.

"하지만 좋았지?"

린코는 대답 대신 한숨을 몰아쉰다. 그 작은 움직임이 그녀의 유방을 통해 구키의 가슴으로 전해온다.

"처음에 괴롭혀 달라고 했잖아 "

"하지만 정말로 그럴 줄은 몰랐어요."

"다음에는 좀 더 혼내줄 거야."

"왜 그런 짓을 하죠?

"사랑하니까."

그러자 린코는 구키의 가슴에 이마를 살짝 대며 중얼거린다.

"나 요즘 이상해요."

"?"

"이런 짓을 당하고도 좋아하다니...... "

"여느 때보다 좋았지?"

". 눈이 가려지고 손이 묶여 자유가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흥분이 돼서....."

"그럼 마조히스트인가?"

"하지만 괴롭히는 것은 싫어요."

"괜찮아. 사랑하고 있으니까."

겉으로는 괴롭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은 애정이다. 가끔 그것이 고조되어 가학이나 피학으로 발전한다 해도 그 바탕에 애정이 있는 한 그것은 절대로 비정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 둘에겐 애정이 결여된 가학이나 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짓을 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거야. 우리처럼 사랑하고 있지 않은걸."

남의 정사를 낱낱이 아는 것도 아닐 텐데 구키는 확신을 갖고 대답한다.

"우리 둘뿐이야....."

격렬한 정사를 치르고 난 후일수록 둘 사이는 더욱 가까워진다. 물론 그 마음속에는 격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서로 보인 사이라는 안도감과 더불어 대담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키는 반듯이 누워 있고 린코는 모로 누워 구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구키가 생각난 듯 말한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요?

린코의 목소리가 나른함에 젖어 있다.

". 그 사람 말이야......."

지금도 구키는 차마 남편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이런 거 하나?"

"무슨 말이에요?"

그리고는 샐쭉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와는 이런 관계가 없었다고 말했잖아요."

"한번도?"

린코는 대답하고 싶지 않은지 묵묵부답이다. 구키는 너무 심했나 싶으면서도 확인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이렇게 만족스러웠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없어요."

린코는 낮고 싸늘하게 말한다. 구키는 새삼 우수한 의사라는 린코의 남편을 상상한다. 그런 남자가 아내를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정말이야?"

"그 사람은 이런 데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유능하잖아."

"유능하다는 것이 모든 것을 포함하나요?"

구키는 지금껏 린코의 남편이 의과대학 교수라는 사실에 구애를 받아왔다. 그러나 사실 지위와 섹스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지위나 경제력이 우수한 자가 모든 면에서 우위에 서서 권력을 휘두르게 마련이다 그것은 외관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모두가 인정하고 납득한다. 그러나 성에 있어서의 우위도 남자에게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은 지위나 경제력처럼 외관상으로 쉽게 알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가장 정확한 방법은 그 남자와 관계를 가져본 여자에게 확인하는 것이지만 명확한 대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서로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므로 거기서부터는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린코는 또렷이 대답해 주었다. 어디가 어떻다는 구체적인 것은 아니지만 구키가 그녀의 남편보다 훨씬 낫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다행이군......."

린코의 몸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는 문제이련만 말로써 확인을 받으니 더욱 안심이 된다.

"처음에는 정말 자신 없었어."

"왜요?"

그렇다. 정면으로 물으면 대답하기 난처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린코의 남편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는 승산이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회적 지위는 물론이거니와 경제적으로도 따를 수 없었고 게다가 그는 구키보다 젊지 않은가. 도저히 자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감행을 한 것은 린코가 너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며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대담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런 필사의 각오가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구키는 지위나 경제력으로는 린코의 남편보다 훨씬 뒤지지만. 성이라는 점에서는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위나 돈은 있지만 아내를 도둑맞은 남편과 지위와 경제력은 없지만 남의 아내를 빼앗는 남자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선뜻 대답하기는 어렵겠지만 지금의 구키로서는 다분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성이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에는 그다지 큰 차이는 없다. 서로의 몸 구조로 보더라도 남자가 여자의 몸속으로 들어가 꽃잎에 싸여 사정하는 과정은 누구나 같다. 그러나 그 행위에는 좋고 나쁜 수많은 방법이 있고 그에 따른 반응도 천차만별이다. 이 세상의 어떤 커플도 같은 방법을 공유하지 않는다. 고등 동물일수록 성에 관한 변이의 폭이 커진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있어서야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할 것이다. 어떤 커플이든지 둘만의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며 시작해 입맞춤 끝에 옷을 벗고는 관계를 맺는다. 일반적으로 밟게 되는 과정이지만 그 시간과 방법은. 예를 들어 열 명의 남자에게는 열 가지의 방법이 있고 열 명의 여자에게는 열 가지의 기호가 있게 마련이다. 이런 요소 하나하나가 합쳐져서 성의 문화를 이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출생에서부터 성장 과정. 가정교육. 교양. 그리고 경험에서 감성에 이르는 모든 것들이 성을 나누는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성이란 책이나 교육을 통해서 익혀지는 것이 아니다. 책을 통해서 남녀의 몸 구조나 기능에 대한 지식이야 익힐 수 있겠지만 그것은 현실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성이란 체험을 통해 각각의 감성으로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다. 명문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그리고 성적이 좋다고 해서 성에 대해서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학벌은 초라하지만 성에 대해서만은 완벽한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만큼 계급차가 없이 민주적인 것도 없는 것 같다.

끝도 없는 상념에 빠져들고 있는데 린코가 묻는다.

"뭘 그리 생각해요?

"? 별로.... 난 말이야 린코를 만난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던 것 같아."

구키는 그렇게 말하며 린코를 끌어안는다. 새삼 린코의 육체가 포근하다는 것을 느끼며 잠이 든다.

 

 

하얀 밤

시월의 마지막 토요일. 구키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본다. 특별히 좋아하는 프로가 있어서는 아니다. 일주일 동안 사회의 동향을 추적한 특집이나 골프 프로 등을 보다가 시계를 보니 어느덧 세시가 다 되었다. 구키는 벌떡 일어나 텔레비전을 뒤로 하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 외출준비를 한다. 전에는 구키의 모든 외출준비를 아내가 거들어 주었지만. 최근에는 거의 혼자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체크 무의 재킷에 갈색 바지를 입고 넥타이를 맨 후 미리 준비해 둔 골프백을 들고 거실로 나온다. 아내는 테이블에 앉아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연말을 맞아 도자기 세트 값의 수지타산을 미리 맞춰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다녀올게 "

구키의 말에 아내는 비로소 안경을 벗으며 돌아본다.

"오늘 밤 안 들어오신다구요?"

". 파티가 끝나면 하코네에 있는 센고쿠바라의 호텔에서 묵고 내일 아침엔 필드에 나가기로 했어."

구키가 현관으로 가자 아내도 그 뒤를 따라 배웅 나온다.

"저도 오늘은 좀 늦어요. 긴자에서 회의가 있거든요."

구키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골프백을 들고 밖으로 나온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지금 린코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골프백은 하룻밤을 묵기 위해 꾸민 그럴 듯한 변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내에게 말했던 일정마저 거짓은 아니다. 오늘 저녁 아카사카 호텔에서 시상식을 겸한 파티가 있는 것도. 그리고 센고쿠바라의 호텔에서 묵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시상식은 린코가 관계하는 서예 모임에서 주최하는 것이며. 센고쿠바라에는 린코와 단 둘이서 간다. 그럴 듯한 일정에는 동반자가 있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다. 비록 아내에게 거짓말은 했지만 이런 경우에는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것을 구키는 잘 알고 있다. 이십 년 넘게 살을 맞대고 살아온

부부간의 배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타가야구 사쿠라신마치에 있는 구키 집에서 아카사카의 호텔까지는 약 한 시간 거리이다. 구키는 운전을 하면서 집에 남아 있는 아내를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아내는 이렇다 할 결점은 없다. 나이는 구키보다 여섯 살 아래인 마흔여덟이고 둥근 얼굴이라 나이보다 젊게 보인다. 딸의 출가 후 도자기 회사에서 일을 시작할 당시 젊은 남자직원들로부터 다섯 살이나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던 것을 보면 남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가 보다. 아내는 평범한 인상이고 밝은 성격이다. 그 동안 집안일도 야무지게 잘해 왔고 딸아이도 예쁘게 잘 키워냈다. 게다가 십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는 또 얼마나 잘 모셨던가. 종합점수로 말하면 칠팔십 점쯤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무난하고 사람을 안심시키는 면이 때로는 자극이 없다는 이유로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도 있다. 솔직히 지난 십년 간 구키는 아내와 관계를 가진 기억이 별로 없다 처음부터 자주 요구하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아내라는 이미지는 여자라기보다는 생활의 동반자라는 느낌으로 자리 잡았다. 회사의 어떤 동료는 우스갯소리로 '일과 섹스는 집에 가져가지 않는 것'이라는 묘한 이론을 만들어 내기도 했는데 구키와 아내의 관계도 그에 가깝다. 너무 남자 중심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이십 년 넘게 함께 살아온 아내에 대해 '흥분'을 느끼라면 그것은 무리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낸 아내에게 혈육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래서 남자들은 '근친상간은 안 돼?라는 재치 있는 말을 만들기도 하는가 보다. 어쨌든 결혼 생활 이십오 년째 접어들고 보면 로맨틱한 감정이나 가슴 설레는 기분 따위는 기대하기 어렵다. 장점이라면 안정감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중년 부부에게 안정감과 설레임 중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둘 다를 선택한다는 것은 상당한 욕심이다. 변명 같지만 지금 구키는 오래 전에 잃어버린 설레임을 찾아 이렇게 린코에게 몰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토요일 저녁이라고는 하지만 도로는 의외로 붐빈다. 집을 나설 때는 약간 .이른 감도 없지 않았는데 지금 상태로 본다면 다섯 시까지 호텔에 도착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혼잡하기로 유명한 시부야를 빠져나와 아오야마 거리를 지나 아카사카로 향하면서 구키는 조수석에 놓여 있는 골프백을 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지금까지 가졌던 린코와의 여행은 언제나 회사에서 곧장 출발했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휴일인 오늘 아내를 집에 혼자 남겨두고 나오려니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고민 끝에 친구와 골프 치러 가기로 했다고 둘러댔다. 어젯밤부터 말을 해두었지만 아내는 별 내색이 없었고 오늘 나올 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는 아직 모르고 있다. 구키는 그렇게 단정 지으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어쩌면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내는 성격상 질투를 한다거나 화를 내는 일이 드물다.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한다. 본심은 어떤지 모르지만 적어도 구키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그 점을 이용해서 구키가 가끔 바람을 피운 것도 사실이다. 그럴 때도 그녀는 언제나 변함없이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 할지라도 결국엔 조강지처에게 돌아오게 마련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여전히 여유 있는 태도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요즈음 도자기 컨설턴트에 몰두한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혹시 따로 좋아하는 남자라도 생긴 것일까.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여자에게 사랑을 느끼는 남자가 있을까 의아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경우를 돌이켜본다면 무조건 부정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만약 아내에게 남자가 생겼다면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 구키의 입장에서 그것을 나무랄 권리 또한 없는 것도 사실이다.

호텔에 도착하니 550분이다. 시상식이 시작되기까지는 10분의 여유밖에 없다. 서둘러 주차를 하고 이층에 있는 시상식장으로 올라가 보니 이미 서예가와 그 관계자들이 입구에 모여 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 접수대로 가서 이름을 적고 있을 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린코가 다가온다. 린코는 엷은 보랏빛 바탕의 츠케사게'를 입고 그 위에 하얀 자(付下, 츠케사게 : 기모노 가운데 모든 무의가 어깨를 정점으로 위로 향하듯이 된 것) 수띠를 매었으며 우아하게 틀어올린 머리에는 진주장식이 꽂혀 있다. 기모노의 앞가슴에는 작은 국화 무의가 그려져 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바탕색이 짙어져 옷자락에는 글꽃이 화려하게 피어 있다.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보는 구키에게 린코가 의아한 얼굴로 묻는다.

"왜 그러세요?"

"아니 . 너무 예뻐서."

기모노를 입은 린코의 모습은 양장을 입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보인다. 양장 차림의 린코는 생기 있고 귀여운 인상이지만 이렇게 기모노를 입고 보니 야무지게 보일 뿐 아니라 차분하고 요염한 유부녀의 모습이다.

"좀처럼 오시지 않아 걱정했어요."

"미안. 차가 밀려서......."

구키는 린코의 뒤를 따라 시상식장으로 들어가 중앙에서 약간 뒤쪽 좌석에 앉는다.

"그럼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알았죠?"

"린코는 어디 있을 건데?"

"저기 앞좌석에 있을 거예요. 끝나면 옆방에서 간단한 파티가 있으니까 그리로 오세요."

구키가 고개를 끄덕이자 린코는 두 개의 부채 그림이 그려진 오다이코(여자 기모노의 띠를 매는 법 중 하나로. 뒤를 북통모양으로 불룩하게 맨다)를 보이며 앞좌석으로 간다.

이번 서예전에서 린코는 장려상을 받았는데 그 작품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전지 절반 정도 크기의 종이에 '신시경종(候始敬終)'이라 씌어 있다.

"시작은 온전한 마음으로. 끝맺을 때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구키가 그렇게 풀어 읽는다.

"매사가 그래야만 할 거예요 "

린코가 한마디 거든다. 지당한 말이지만 남자인 구키 입장에서 볼 때 너무 빈틈이 없어 숨이 막힐 것 같다. 린코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바로 그 점이 린코라는 여자를 지탱해 주는 하나의 기둥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1차에 대상과 우수상이 있고 장려상은 그 다음인데 이번에는 세 사람이 뽑혔다고 한다.

"시상식에 꼭 오세요."

린코의 당부대로 오긴 했지만 그녀의 남편이 와 있는 것은 아닐까 내심 불안하다. 그러나 설마 하니 같은 장소에 두 남자를 부르지는 알았겠지 하고 은근히 믿는 마음도 있다.

식은 예정대로 다섯 시부터 시작되었다. 서예가와 그 관계자를 포함해서 약 이백여 명이 참석했다 우선은 주최 측인 신문사와 서예가의 대표가 나와 인사를 한다. 구키로서는 처음 안 사실이지만 이 모임은 전국적인 규모로서 벌써 삼십 회 가까이 시상식을 개최한 전통 있는 모임이라고 한다.

주최 측의 인사에 이어 시상식이 시작된다. 대상부터 순서대로 호명되어 단상에 올라가 상과 상품을 받는다 보기에도 당당한 서예가답게 하오리(일본 옷 위에 입는 허리 가까이 내려오는 팜은 겉옷)에 하카마(일본 남자 옷의 겉에 입는 주름 잡힌 하의)를 차려입은 오십대의 남자에서부터 묘령의 부인까지 차례로 상을 받는다. 그때마다 장내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온다. 린코는 장려상이기 때문에 약간 나중에.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나란히 선다. 오십대 전후의 남자와 역시 그쯤 되어 보이는 여자 사이에 선 린코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층 더 두드러진다.

한 사람씩 호명되어 앞으로 나가 상을 받는데 린코는 두 번째로 상을 받았다. 순간 누구보다 성대한 박수갈채가 터져 나온다. 린코가 공손히 머리 숙여 상을 받는 것을 보고 구키의 마음에는 자랑스러움이 일렁인다. 모든 수상자들 중에서 특히 린코에게 시선이 집중된다. 긴장하여 약간 창백한 얼굴이 엷은 보랏빛의 기모노와 잘 어우러져 요염하면서도 얌전한 자태가 배어 있다. 단상 위에 오른 린코를 보면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외모에서부터 기모노를 벗어 버린 알몸의 아름다움까지를 가지각색으로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린코의 감추어진 모습을 모른다. 린코의 유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 속에 어떤 화심을 감추고 있는지 . 그리고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무너져 내리는지 등을 알고 있는 것은 구키 한 사람뿐이다. 이 우월감은 아름다운 연예인을 아내나 애인으로 두고 있는 남자들의 은밀한 쾌감과 같을지도 모른다. 구키가 그런 생각을 음미하고 있는 동안 린코는 다시 큰 박수를 받으며. 단을 내려온다. 그리고 수상자에 대한 짤막한 평이 있은 다음 식이 끝나자 사람들은 옆방에서 준비된 파티를 위해 자리를 뜬다. 어떻게 해야 할지 구키가 잠시 망설이고 있는 사이 린코가 다가온다.

"잠깐이면 돼요."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삼사십 분이면 빠져 나올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잠깐 참석했다가 일층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린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서예가들의 모임으로 돌아간다. 파티 장에는 시상식 때보다 사람이 더 늘어나서 삼백 명 가까이 되는 것 같다. 여기서도 주최 측의 인사가 있고 대가처럼 보이는 노선생이 건배를 선창하고는 간담회로 들어간다.

구키는 입구에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파티 장을 둘러본다. 린코가 안쪽메인 테이블에서 연배의 남자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대가는 제쳐두고서라도 일반 서예가로서는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중에서도 린코의 용모와 자태는 특히 두드러진다.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세련된 것도 아니지만 숨겨진 기품 속에는 한창 물이 오른 여자의 요염함이 넘친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느꼈는지 린코의 주위에는 남자들이 몰려 모두 웃음 띤 얼굴로 말을 건넨다. 그 동안 둘만 있어서 잘 몰랐는데 린코가 이 세계에서는 젊은 축에 드는 스타인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린코를 바라보고 있을 때 뒤에서 누가 어깨를 툭 친다.

"역시 와 있었군 "

돌아다보니 기누가와가 서 있다

"아니. . 좀 나와 달라고 하기에......."

"나도 하마터면 참석 못 할 뻔했어. 다행히 일이 좀 일찍 끝나더군"

기누가와의 시선이 린코를 쫓는다.

"린코가 남자들에게 인기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지?"

기누가와와 함께 있다가는 나중에 린코와 여기를 빠져나가기가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혼자서 따분하게 맥주나 마시고 있던 참이라 이야기상대로는 기누가와가 제격이다.

"서예 모임에 이렇게 여자가 많은 줄은 몰랐어."

"회화에도 여자가 많은데 서예는 그 이상인 것 같아. 이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 "

"보기에는 화려해서 좋잖아."

"화려하긴 하지만 자. 보다시피 대가는 압도적으로 남자가 많아. 게다가 다양한 연령층의 여자들이 모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나? 당연히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관심이 집중되겠지."

그러더니 기누가와는 당황해 손을 가로젓는다.

"아니. 린코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야 생각해 봐. 제자들 중에 예쁜 여자가 있으면 저도 모르게 잘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냐는 건 내가 아니라 남자의 본능이라구."

열심히 덧붙이는 기누가와의 말을 들으며 그런 일도 가능하다 싶어 구키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기누가와는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 말한다.

"대가의 제자들 중에는 선생이 써준 글씨를 그대로 흉내 내서 입선한 사람도 있어."

"그림 일종의 유파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인가?"

"있고말고. 그 유파의 대가가 강하면 제자는 득을 보는 것이고 아니면 손해 보는 거야."

"춤이나 화류계의 세계도 비슷하잖아."

"글쎄. 기본적으로는 다를 게 없겠지."

신문사에 근무했던 탓에 기누가와는 서예 세계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전람회에 전시되었던 작품들은 누가 사지?"

"고명한 선생이나 매스컴을 타는 극히 일부 대가들의 작품을 제외하면 나머지 대부분은 제자가 사지."

"제자가 왜?"

"한마디로 스승에 대한 충성심을 보인다 이거지."

그런 세계에 린코가 몸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갑자기 그녀에게 동정심도 들고 동시에 대견하기도 하다. 회장 안쪽에 있던 린코는 구키가 기누가와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기누가와도 알아채고는 린코가 다가오자 가볍게 손을 들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오늘은 정말 예뻐 보여. 회장에 들어서자 제일 돋보이더군."

기누가와는 평소 수줍음을 잘 타서 여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기가 힘들다고 푸념을 했었는데 오늘 보니까 그렇지도 않다.

"지금 이 친구로부터 서예계의 내막을 듣고 있었어."

구키가 화제를 바꾸자 린코가 뜨악한 표정으로 묻는다.

"무슨 얘긴데요?"

"아냐. 린코와는 관계없는 얘기야."

기누가와가 손을 내젓는 순간 신문기자 같은 중년의 남자가 린코에게 명함을 내밀고 그 뒤에서 카메라맨이 다가와 플래시를 터뜨린다. 대상도 아닌데 스타 대우를 받는 것은 린코가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구키가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고 있을 때 기누가와가 갑자기 묻는다.

"오늘의 스케줄은?"

"너무 무리하지 말게. 오늘 밤은 둘이서 천천히 축배라도 드는 게 좋을 거야."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식으로 말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본다.

"그런데 린코 남편은 안 왔나?"

그것은 구키도 내심 마음에 걸리던 것이어서 새삼 저도 모르게 회장 안을 둘러본다.

". 오지 않은 모양이군. 그렇지만 자네도 보통 담력이 아닌걸! 남편이라도 나타났으면 어쩔 뻔했나?"

구키는 린코의 부탁으로 온 것뿐이라는 말을 참는다.

"대담한 건 어쩌면 린코인지도 몰라."

기누가와가 빈정대듯이 말한다.

"설마 미인을 둘러싸고 수라장이 연출되는 것은 아니겠지?"

혼자 상상하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지만 구키는 받아주질 않는다.

"먼저 실례하네."

기누가와는 맥이 풀렸는지 십 분쯤 지나서 자리를 뜬다. 구키는 다시 혼자 남았지만 파티는 지금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는 것 같다. 메인테이블에서 참석자들과 담소를 나누던 린코는 동료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린코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으면서 구키는 조금 전 기누가와가

'대담하다'고 한 말을 다시 생각한다. 기누가와는 구키가 남편도 아니면서 파티에 온 것을 빈정대며 한 말이다. 그러나 린코는 남편이 회장에 온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혹 왔다 해도 서로 면식이 없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구키는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며 다시 맥주를 마신다. 그리고 삼십 분 정도가 지난 것을 확인하고는 일층 로비로 내려간다. 만나기로 약속한 커피숍으로 가서 구석 자리를 잡고 커피를 주문한다. 토요일 저녁이어서 그런지 주위에는 피로연에서 돌아오는 남녀들로 붐빈다. 커피가 나오고 시계를 보니 여섯시 삼십분이 지나고 있다. 이대로 하코네에 도착하면 거의 아홉시가 될 것이다. 구키는 커피를 마시며 무료함을 달래려는 듯 수첩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얼마 후 두 개비 째 담뱃불을 붙였을 때 로비 저편에서 린코의 모습이 보인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어떤 여자와 인사를 나누고는 구키를 향해 걸어온다. 손에는 큰 종이봉투가 들려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나갈까요?"

주위의 눈을 의식하는지 린코는 서둘러 자리를 떠나고 싶은 모양이다. 두 사람은 그대로 로비를 빠져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향한다. 차에 올라타고서야 비로소 린코는 마음이 놓이는지 여느 때의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간다.

"여기저기 끌고 다녀 죄송해요."

"아니. 덕분에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어 즐거웠어."

구키는 시동을 걸며 묻는다.

"곧장 하코네로 갈까?"

"아직 2차가 남아 있긴 하지만 오늘은 처음부터 참석하지 않았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 차림으로 괜찮겠어?"

린코는 기모노 차림 그대로이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어요. 거기 도착해서 갈아입을게요."

호텔 주차장을 빠져 나오자 곧 아카사카의 네온 빛에 휩싸인다.

"린코. 오늘 정말 멋졌어. 평소 얼마나 인기 있는지를 실감했다."

"그렇지 않아요."

린코는 부끄러운 듯이 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콤팩트를 꺼낸다.

"그 동안 유혹도 많았겠지?"

"걱정마세요. 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까요."

"선생이나 대가들이 대부분 남자들이던데?"

"선생이라 해야 모두 할아버지이고. 당신처럼 일방적으로 접근해온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구요."

"그래도 남자는 모르는 거야."

"걱정마세요. 모두 점잖은 사람들이니까."

차는 일단 가스미가세키 인터 체인지로 향하고 거기서부터 슈토 고속도로를 달린다. 앞에서 깜박이는 자동차 램프웨이를 보며 구키가 입을 연다.

"기누가와가 우리 보고 대담하다고 하더군."

"왜요?"

"만약 당신 남편이 회장에 왔으면 어쩔 뻔했느냐는 뜻이겠지."

"그 사람은 안 와요."

"오늘 밤 다른 약속이 있었나?"

"아니요. 하지만 오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오지 않아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린코의 말투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다. 차는 가스미가세키 램프웨이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시부야에서 요가로 향한다. 그 앞은 도메이 고속도로로 이어지는데 고텐바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구키는 엑셀을 밟으며 다시 묻는다.

"오늘 시상식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나?"

여기서도 구키는 '남편' 이라는 말을 생략한다.

"알고 있더라도 그 사람과는 관계없어요."

린코는 빛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전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한다.

"하지만 당신이 상 받는 걸 알면서도 안 온다고 했단 말이야?"

"그럼 오늘의 스케줄은 어떻게 알고 있지?"

"모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으로..."

"오늘 밤 우린 거기서 하룻밤 묵을 텐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죠."

뜻밖의 말에 구키는 핸들을 잡은 채로 되묻는다.

"그래도 괜찮아?"

"괜찮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캐묻는 사람이 아니에요."

구키로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의심은 하고 있겠지."

"워낙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니까 본인이 원하지 않는 것은 알려고 들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만약 뒷조사를 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지금의 지위를 잃게 될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린코에 대해 미심쩍어하면서도 왜....."

"남자들이라고 다 똑같지는 않아요. 나중이야 어떻게 되든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사람처럼 자존심 때문에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럼 언제까지 이렇게..."

"그래요. 그래서 그 사람도 괴롭고 나도 괴로워요."

린코의 시선이 먼 허공으로 흩어진다. 토요일 밤인데도 하행 고속도로는 의외로 한가하다. 차는 요가의 인터체인지를 지나 도메이 고속도로 3차선으로 진입하자 속력을 낸다. 도시의 불빛은 금세 멀어져 가고. 정적에 싸인 맨션과 어둠에 묻힌 숲이 차창 밖으로 빠르게 사라져 간다. 린코 부부에 대해 지금 구키가 걱정해 봤자 무슨 득이 되겠는가. 도대체 남의 아내를 빼앗은 장본인이 그 남편을 걱정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 구키는 기분을 전환하려 화제를 서예 쪽으로 돌린다.

"역시 붓을 들고 종이 앞에 서면 마음이 차분해지나?"

". 먹을 갈고 있노라면 아무리 괴롭고 복잡한 마음도 저절로 가라앉게 되죠. 그래서 붓을 잡을 때는 이미 온 마음이 정갈한 상태가 돼요."

구키는 아직 린코가 붓글씨를 쓰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조용히 먹을 가는 모습이나 종이를 마주하는 모습이 아주 단아하게 돋보일 것이다.

"그럼 글 속에는 쓰는 사람의 인품도 나타나겠군."

"그럼요. 그래서 '서예는 사람이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글씨를 빈틈없이 쓰는 사람은 성격도 빈틈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관계를 갖는 모습도 글씨에 나타날까?"

"글씨가 요염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린코의 이번 작품은?"

"유감이지만 그렇게 요염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 분위기가 나오지 않게 하려고 제가 얼마나 억제했는 줄 아세요?"

"그게 정말 가능할까?"

"한 자나 이번처럼 네 자 정도까지라면 가능한 것 같아요."

이번 린코가 쓴 글은 '신시경종'이라는 네 글자였다.

"요염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느긋하고 우아한 느낌을 받았어."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뻐요."

"하지만 나는 신시난종이라고 써 줬으면 하고 바랐는데..."

"그게 어떤 의미죠?

"시작은 음전하게. 나중은 흐트러지게."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린코가 살짝 눈을 흘긴다. 지금처럼 얌전한 린코의 모습이지만 침대에서의 그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흐트러지는 자태를 드러낸다. 그런 믿을 수 없는 변모를 찾아서 차는 어두운 도메이 고속도로를 달린다.

센고쿠바라의 호텔에 도착하니 여덟시 반이다. 도쿄를 출발하면서 아홉시 가까이 도착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길이 막히지 않아 예상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프런트에서 체크인하고 삼층의 제일 안쪽 방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간다. 전에 골프 치러 와서 묵은 적이 있다. 낮이라면 발코니를 통해 센고쿠바라의 평원과 골프장이 멀리 바라다보일 것이다. 린코는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싶었으나 시간이 늦어 그대로 저녁식사를 하러 나선다. 밖은 이미 어둠에 싸여 있다. 다이닝룸은 1층에 있고 넓은 창을 통해 수영장이 보이고 풀 아래서 올라오는 조명으로 수면이 파랗게 떠올라 있다.

"마치 동화 속의 나라 같아요."

린코는 시상식과 파티에서 긴장을 했던 탓인지 도시를 떠나자 매우 안정되어 보인다. 맥주로 건배를 하며 비로소 여유를 즐긴다. 식사는 파티에서 먹고 왔기 때문에 간단한 것으로 주문한다.

"여기까지 오니까 정말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군요."

린코의 말대로 하코네의 산 속으로 들어와 버리자 세상과는 동떨어진 것 같은 안도감이 느껴진다. 함께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죄의식 때문일까. 잠시 후 아시노코에서 잡았다는 옥새송어에다 사워크림을 곁들인 오르 되브르가 나온다. 레드 와인을 몇 잔 마신 후 구키는 조금 전의 화제였던 서예에 대해 생각한다.

"그걸 아호라고 하나? 작품에 스이교쿠라는 낙관이 찍혔던데 린코가 직접 지은 것인가?"

"물론 직접 짓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선생님이 지어주셨어요."

"마츠바라 스이교쿠라. 정말 좋은 이름이야. 한 번 정도 요염한 글을 쓰면 어떨까? 그 아호를 붙여서 말이야."

"그럼 이번에는 누군가의 연가라도 써 볼까요?"

"살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들뜬 열정은 시나브로 높아가나 어이해야 쓸쓸함을 벗을까 길을 묻는 그대여."

구키가 요사노 아키코의 노래를 읊자 린코는 과연 구키의 취향에 어울리는 노래라고 핀잔을 주고는 웃음을 짓는다. 구키는 다시 태평양전쟁 후 얼마 안 되어 사망한 데라야마 수지와 같은 시기에 데뷔하여 서른여섯 살의 나이로 요절한 나카시로 후미코의 노래를 읊는다.

"요염하기도 하고 풋풋하기도 하며 아름다움과 애정. 그 모두가 깃들어 있는 그대 나의 여인아."

구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어때. 여자의 요염함이 잘 나타나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래요.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들어요."

린코는 그냥 구키의 말을 인정해버린다.

워낙 늦게 시작한 저녁식사이기도 하지만 마치고 나니 벌써 열 시를 넘어섰다. 오늘 린코는 긴장을 한 탓인지 조금 피곤해 보인다. 식사 후 곧장 룸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서야 비로소 두 사람만이 남았다는 안도감에 구키는 자연스럽게 린코를 껴안는다. 린코도 기다렸다는 듯이 순순히 몸을 맡긴 채 입맞춤을 한다. 산속에 자리 잡은 호텔은 밤공기 속에 고요히 잠겨 있고. 린코가 가볍게 상체를 뒤로 젖히자 옷자락 스치는 소리만이 사각거린다. 린코는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창가로 다가선다. 발코니는 통유리로 되어 있고 그 너머로 하얀 테이블과 의자가 두 개 놓여 있다.

"밖에 나가 봐도 괜찮아요?"

밤바람을 쐬고 싶은지 발코니를 열고 밖으로 나가자 구키가 뒤를 따른다.

"역시 쌀쌀하군요."

밤바람이 가을의 고원을 지나간다.

"어머. 달이 저렇게 커요."

하늘을 올려다보니 거의 만월에 가까운 보름달이 밤하늘에 밝게 떠 있다. 룸 안에서는 발코니 한 면의 어둠만이 보였는데 이렇게 나와 보니 광대한 초원과 골프장이 달빛을 받아 어렴풋이 떠올라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가이린 산이 우뚝 서 있다. 공기가 맑아서인지. 둥근 달은 도시에서 볼 때보다 훨씬 크고 밝다

"이렇게 큰 달을 보고 있으면 오싹한 느낌이 들지 않아요?"

린코가 달을 올려다보며 속삭인다.

"마치 달빛이 나의 온몸 구석구석을 꿰뚫어볼 것 같은."

"그럼 오늘 밤은 달빛 속에서 발가벗겨 버릴까?"

"당신은 걸핏하면 그런 걸 생각해요."

린코는 고개를 움츠리지만 구키의 머릿속은 갑자기 떠오르는 음란한 생각으로 꽉 차온다.

"추워요."

발코니에서 따뜻한 룸으로 들어오자 새삼 밤의 냉기가 오싹 살갗으로 파고든다. 달을 보면서 구키는 엉큼한 생각에 사로잡혔지만 린코는 무엇보다 기모노를 벗고 샤워부터 하고 싶은 모양이다. 구키가 가운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눕자 린코가 불을 끈다. 순간 방 안은 어둠에 싸이고 달빛을 받은 창가만이 하얗게 떠오른다. 구키가 정적을 가르며 달려드는 달빛에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린코는 기모노를 벗기 시작한다. 침대 왼쪽의 욕실에 붙은 벽 쪽으로 린코는 몸을 약간 숙이고 있다. 옷감 스치는 소리와 더불어 오비(여자 기모노에 매는 넓은 띠)가 풀어지고 그리고 다시 몇 개의 허리끈이 풀어진 다음 오하시오리(일본 여자의 옷 길이를 키에 맞추고 그 여분을 허리 위에서 올려 꺾어 중동끈으로 매어 두는 부분)가 풀려 나간다. 처음에는 어슴푸레하던 달빛도 차츰 눈에 익으면서 은은한 정취를 자아내고 그 속에서 린코는 뒤돌아서서 장옷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옛날 신분 높은 여인이 외출할 때 얇은 옷을 머리에 꽂고 다녔는데 지금 린코의 모습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기모노를 어깨에 걸친 채 팬티를 벗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느 때 같으면 먼저 기모노를 벗고 그 다음에 나가지방(화려한 색조의 무의가 있는 긴 속옷)을 그리고 속옷을 벗을 것이다. 그러나 린코는 몸을 허락한 남자 앞에서도 뒤돌아서서 기모노를 어깨에 걸친 채 속옷을 벗고 있다. 구키가 린코에게 끌리는 것은 그런 수줍음과 기품이 동시에 배어 나오기 때문이다. 속옷을 다 벗었을까? 장옷을 걸친 뒷모습이 욕실로 사라진다. 린코는 욕실로 들어가 알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구키는 벗어 놓은 린코의 기모노에 남아 있는 냄새를 쫓으면서 하얀 달빛 속에서 생각한다. 빈틈없고 정숙한 여인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끌리는 것이다. 처음부터 흐트러져 있는 여자에게는 아무런 정취도 느낄 수 없다. 그런 남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욕실에서는 린코의 샤워하는 소리가 간간이 흘러나온다. 린코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를 생각하고 구키는 모든 불을 끈다. 린코를 위한 것 같지만 기실은 구키에게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다. 방 안은 언제 알몸이 되어도 좋도록 따뜻하고. 커튼이 젖혀진 창가에서는 투명한 달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구키는 이대로 아름다운 사냥감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욕실에서 나온 린코는 문 앞에 멈춘 채 다가올 기미가 없다. 구키가 왜 그러냐는 듯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린코가 묻는다.

"왜 커튼을 열었죠?"

설명할 필요도 없다. 구키가 잠자코 있자, 린코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닫으려 한다. 순간 창으로 쏟아지는 하얀 달빛을 받은 린코의 모습이 아름답다. 목욕을 막 끝내고 나온 알몸을 하얀 나가지방으로 감싼 린코. 허리끈이 너무 길어서인지 약간 앞으로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뒤로 살짝 젖혀진 옷깃 사이로 긴 목선과 뒤로 묶은 머리가 어렴풋한 실루엣으로 비쳐진다. 구키는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창가로 다가가 린코의 손을 잡는다.

"아까 달빛 속에서 알몸을 보고 싶다고 했지?"

"그런 거......."

구키는 린코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를 침대로 이끈다. 린코는 창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구키가 침대에 반듯이 눕히자 체념한 듯이 조용해진다.

". 이제부터 달빛 아래서 해부를 한다."

"무서운 건 싫어요."

"얌전하게만 있으면 돼. 모두 달님에게 바친다고 생각하고 가만히 있을 것?"

선고가 끝나자 우선 나가지방의 허리끈을 풀어서 한쪽으로 당겨 빼고 두 손으로 살며시 유방이 보이는 앞가슴까지 옷깃을 벌린다. 구키의 선고가 효력이 있었는지 아니면 하얗게 부서지는 달빛에 저항할 힘을 잃었는지 린코는 침대에 반듯이 누운 채 거역할 기색이 없다. 너무 고분고분 따르는 바람에 구키는 오히려 망설이지만 곧 마지막 옷자락을 연다. 순간 린코의 하반신이 움츠러든다. 체념한 듯 조용해진 여체를 보며 구키는 도둑 같은 조심스런 마음으로 옷을 벗긴다. 이미 반항할 기력이 없어진 여자는 도둑이 하는 대로 달빛 아래서 알몸을 드러낸다. 달빛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약간 돌리고 눈을 꼭 감은 채 두 손을 포개어 앞을 가리고 있다. 흰 살결은 달빛을 받아 파르스름하게 빛나고 그늘진 일부는 밀랍처럼 떠오른다.

"아름다워......."

아무리 혹독한 집행자라도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을 본다면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하물며 구키와 같이 갑작스럽게 임명된 집행자로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유혹을 이겨낼 도리가 없다. 처음에는 알몸이 드러나면 용맹스럽게 그 위를 덮칠 생각이었지만 아름다움에 황홀해져 넋을 잃고 있는 사이에 좀더 바라만보고 싶어진다. 젊었을 때는 오로지 육체적으로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했지만 나이가 든 지금은 오히려 눈으로 범하는 즐거움도 대단하다. 스스로 달빛이 되어 하얀 여체 속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그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인다. 지금 구키는 린코에게 손 하나 대지 않고 있지만 남자의 음란한 눈빛이 전신을 핥으며 기어 다니는 것을 느낀 것일까. 이윽고 린코는 못 견디겠다는 듯이 돌아 누우며 다리를 오므린다. 구키가 두 손으로 붙잡으며 린코의 귓가에 속삭인다.

"달빛이 징벌을 내린다."

파르스름한 여체는 달에게 바쳐진 산 제물 바로 그 자체였다. 맑고 깨끗한 달빛이 여체를 범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품위를 지켜야 할 것이다. 우선 당황하는 여체를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음란한 감각으로 유인하는 형벌이 어울릴 것이다. 남자는 가슴에서 허리까지 온화한 애무를 되풀이하던 중 앞을 가리고 있는 여자의 손을 발견하고는 젖힌다. 거역하려 하지만 억센 힘에 체념한 듯 작은 손이 뒤로 젖혀진다. 이미 실오라기 하나 가릴 것이 없어진 여체는 온전히 달빛에 드러나 우거진 수풀만이 한층 검게 보인다. 해맑은 살결에 검은 숲이 드러나는 순간 여체는 그때까지의 순수함을 깨뜨리며 음란함을 불러일으킨다. 눈의 기쁨만으로는 견딜 수 없게 된 남자는 한 손 가득 유방을 움켜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숲을 헤치고 들어가 숨어 있던 봉오리를 찾는다. 린코의 꽃봉오리는 이미 싹이 터 있고 화원은 사랑스러운 액으로 넘친다. 그러나 오늘 밤은 약간 달리 가고 싶다. 남자는 화원이 촉촉이 젖어 있음을 확인하고는 여자의 오른손을 잡아 천천히 숲속으로 이끌어 간다. 순간 여자는 마치 만져서는 안 될 어떤 것에 손이 닿았다는 듯이 서둘러 손을 뺀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여자의 손가락을 봉오리로 끌어당긴다. 그리고 반복된다. 그러자 린코는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한다.

"싫어요."

린코가 무슨 말을 하든 오늘 밤은 여체 속에 숨어 있는 자신의 음란한 모습을 린코 자신에게 정확히 가르쳐주어야 한다.

"가만히."

구키가 린코의 손을 잡아 끈다.

"싫어요."

린코가 손을 빼자 구키의 손가락이 사랑스럽고 예민한 그 한 점을 향해 추적한다. 구키의 일정한 리듬 속에서 이슬에 젖은 봉오리는 부풀어 올라 이제 막 퉁겨나올 것 같다. 린코는 숨을 거칠게 쉬며 몸을 움츠린다. 그리고 이내 얼굴을 뒤로 젖히더니 여느 때보다 싱겁게 끝나버린 것 같다. 손가락만으로 린코가 절정에 오른 것은 올해 들어서부터이다. 만족 후의 질름거리는 경련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구키가 묻는다.

"어때?"

"싫어요. 그런 거 이상해요."

구키는 싱겁게 끝나 버린 이유를 물어보려 했는데. 린코는 스스로 은밀한 곳을 만진 놀라움을 말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부터 가끔...... "

구키의 입을 막듯이 린코는 말꼬리를 잡아챈다.

"아니요. 그것보다는......."

린코는 고개를 좌우로 젓고 나서 응석을 부리듯 말한다.

"당신 쪽이 좋아요."

구키는 린코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그녀의 오른손을 잡으며 말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에 유키구니(賣國)-라고 있지? 도쿄에 사는 시마무라라는 남자가 눈의 고장인 에치고유자와에 있는 고마코라는 게이샤(연회석찬에서 술을 따르고 노래와 춤으로 손님을 즐겁게 해주는 여자)를 만나러 가지."

"'터널을 빠져나가자 유키구니였다'고 말하죠."

린코는 소설의 첫 부분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남자가 오랜만에 만난 고마코에게 '이 손가락만이 기억하고 있었다구'라고 말하자 그녀가 부끄러워하며 남자의 손가락을 살짝 깨무는 장면이 있어."

"영화에서 본 적 있어요."

"그 손가락이 어느 거였지?"

구키는 린코의 오른손을 들어 올려 달빛에 비쳐 본다. 가늘고 부드러운 손가락은 방금 뜨겁고 은밀한 곳에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희고 단아하다

"소설에서는 집게손가락이었고. 연극무대에서도 고마코 역의 여배우는 늘 상대의 집게손가락을 깨물지."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역시 이게 제격이야."

구키는 린코의 가운뎃손가락을 잡아 숲으로 가져간다.

"이쪽이라야 부드럽게 잘 움직일 수 있거든."

"그럼 가와바타 선생이 틀린 건가요?"

"잘은 모르지만 이것이 ..."

가운데손가락을 가볍게 놀리자 린코가 말한다.

"안 돼요. 이젠 그만해요."

구키는 아랑곳 않고 그대로 불가사의한 생각으로 빠져든다.

-유키구니-가 나온 것은 1935년경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니 훨씬 그 이전인 만요 무렵부터 남자와 여자는 똑같은 행위를 되풀이해 왔을 것이다. 모든 남자와 여자는 태어날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과 살을 서로 맞대고 따뜻한 온기를 확인하면서 서로의 은밀한 곳을 요구해 왔다. 지금 구키는 린코의 은밀한 곳에 가운뎃손가락을 가볍게 대고 있다. 개중에는 집게손가락을. 혹은 약지를 사용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쪽을 사용하건 간에 남자가 여자를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여자가 그에 응하려는 것만은 하나의 공통된 점이다. 인류가 몇 천 년 동안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또 같은 행위에 목숨을 걸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현재 그 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자신들이 천 년 전의 사람들과 같은 피가 뒤섞여 맥박 치듯 물결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런 건 ..... "

구키는 다시 촉촉해진 린코의 화원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모두가 저절로 익히게 되는 거야 "

"하지만 똑같지는 않아요."

사실 성만큼 보편적이면서도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것은 없다. 몇 천 년 전의 사람들도 그리고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모두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방법도 천차만별이고 또한 느끼는 방법과 절정에 오르는 과정도 모두 다 제각각이다. 아마도 이 세계만은 진보도 퇴보도 없을 것이다. 과학 문명이 발달한 현대인이기 때문에 더욱 능숙하고 고대인이라고 해서 미숙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있을 수 없다. 모두 제각기 체험과 실감을 통해 서서히 배우고 나름대로 좋았던 것을 시도하며 그 결과에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바로 이 세계만이 과학도 문명도 개입되지 않는 고유한 영역이며 살아 있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알몸으로 부딪치며 터득하게 되는 시공을 초월한 지혜이자 문화이다.

"그럴 거야."

구키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따뜻하고 촉촉한 린코의 속으로 파고든다. 계속된 손가락 애무에서 이어지는 확실한 포옹으로 린코의 몸은 단숨에 달아오른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달빛 아래서 조심스러웠던 여체였으나 그대로 솟아오르는 불기등이 되어 울부짖으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구키는 바로 이 순간의 린코 표정을 좋아한다.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화를 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또한 응석을 부리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딱 집어 표현할 수 없는 여러 표정 속에 여자의 끝없는 정념과 요염함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사 후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정적이 찾아든다. 아직도 열기가 남아 있는 린코의 몸에 구키가 바짝 다가가자 그녀가 말한다.

"또 달랐어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떨구고 있는 것을 보면 절정의 순간을 말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나하나가 달라요."

"깊어져 가나?"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내가 이상한가 봐요."

"그렇지 않아."

남달리 강한 자극 속에서 절정을 맞는다고 해서 부끄러울 것은 없다 어쩌면 오히려 성숙된 여자로서의 풍요로운 상징일지도 모른다. 구키는 갑자기 흥미가 솟구쳐 화심과 봉오리를 차례로 만져 본다.

"여기하고 여기가 달라?"

". 거기는 깊고 강한 느낌이고...... "

린코는 눈을 가볍게 감으며 화심의 느낌을 말한다.

"뭔가 머리끝까지 쭉 관통하는 것 같은..... "

설명해 봐야 남자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세계이다. 구키가 다시 봉오리를 만지자

"거기는 좀 더 얕고 예민하고.."

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것은 남자의 국소 감각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까처럼 막다른 데까지 몰리면 짜릿하게 전기가 흐른 것처럼 안타깝고 잔혹해요."

듣고 있는 사이 구키는 차츰 샘이 난다. 그렇게도 다채롭게. 짜릿하고 깊게 느껴지는 여자의 몸이란 과연 무엇일까. 구키는 지금까지는 오로지 린코가 느끼고 기뻐하도록 애써 왔지만 어쩌면 그 사이에 터무니없는 요물을 여자의 몸속에 키워왔는지도 모른다. 여자에 비해 남자는 너무나 평면적이고 단순한 것 같다. 여자에게는 화심과 꽃봉오리와 또는 유방 같은 성감대가 수없이 많은 반면 남자는 다리 사이 그 한 점으로 집중된다. 그 느끼는 방법도 남자는 밀려오는 조수처럼 솟아올라 넘쳐흐르면 가라앉을 뿐이다. 그 후 여운이라 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그에 비해서 여자의 감각은 린코가 말했듯이 얕지만 예리하고. 전류의 자극과 같이 안타까운 것부터 깊고 강해서 머리끝까지 관통하는 것 같은 감각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고 풍부하다. 애시 당초 승부를 겨를 수 없는 비교이다. 남자의 기쁨을 하나라고 한다면 여자의 기쁨은 그의 두 배 혹은 세 배 아니 열 배 가까이 되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욕심이 많아서 그래."

구키가 부러운 나머지 딱하게 말하자 린코가 고개를 가볍게 젓는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처음에 린코는 머뭇머뭇하며 표현이 약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린코의 느낌이 서서히 눈을 뜨자 적극적으로 변하였고 그렇게 되기까지 구키는 확실한 지도자로서 그녀 위에서 군림하고 있다는 우월감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깨닫고 보니 린코 혼자서만 훌쩍 커 있고 이제 구키는 그것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당연한 임무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여자에게 군림하는 지도자는커녕 여자에게 온몸으로 희생하는 봉사자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성장하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어."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어요."

그런 말을 듣자 과분할 정도로 고맙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린코라는 멋진 소재도 부정할 수 없다 바꿔 말해서 아무리 꽃을 잘 가꾸는 정원사라 할지라도 씨앗이 우수하지 못하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다.

"당신에게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야."

"이런 게 재능인가요?"

"잘은 모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여기가 제일 멋져."

구키는 그렇게 말하며 아직도 열기가 남아 있는 린코의 화원에 살짝 손을 댄다. 자신의 은밀한 곳을 칭찬받자 린코는 곤혹스러워한다. 성감이 깊어지면서 린코 자신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구키가 실제로 거기를 만지며 말하자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구키는 상관 않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간다구."

"사람 놀리지 말아요."

"놀리는 게 아냐. 정말 좋으니까 좋다고 말하는 거라구."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구키는 어쩔 수 없이 모든 표현을 동원하여 설명한다.

"따뜻하고 그 언저리부터 강하게 조여 와서......."

"여자는 모두 같지 않아요?"

"아니. 달라. 열이면 열 모두 다르다구."

린코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당신은 여자이기 때문에 실감할 수 없겠지만. 당신처럼 멋진 여자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여자도 많아......."

"하지만 그건 남자에 따라서도 다르겠죠?"

"물론. 맞는 말이야. 그러나 간신히 허락해줘서 기꺼이 용감하게 들어갔지만 별로 즐겁지 않은 적도 있어. 그럴 뻔 빨리 끝내고 싶어지지."

린코는 웃음을 참으며 말한다.

"남자들이란 정말 못 말려. 자기 멋대로야."

"그럴까......."

"결국 여자가 좋았기 때문에 요구했을 게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관계할 때까지는 알 수 없는걸."

"그런 소린 처음 들어요."

"그럴 거야. 아무리 남자가 그런 것을 느낀다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여자에게 말할 수 있겠어?"

린코가 그 말을 되새기자 구키는 큰맘 먹고 헤이안조 시대로 이야기를 옮긴다.

"겐지모노가타리에 로쿠조노 미야스도코로라는 여자가 나오는데 그녀는 거기가 별로 좋지 않았는지도 몰라."

'정말이에요?"

조사실로 밀려난 후 구키는 책을 읽을 기회가 많았다. 언젠가 쇼와시대사를 엮을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현대사가 중심이긴 하지만 간간이 옛날에 읽은 책을 다시 읽기도 했다. 겐지모노가타리(혜이안 시대(794 - 1192)의 궁중 생활을 묘사한 장편 소설)-도 그 중 하나로서 쇼와시대사에 남을 만한 연애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사이에 겐지가 생각나서 다시 읽어 보니 의외로 재미있었다. 이것도 좌천된 덕분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책을 읽던 중 젊었을 때는 그냥 지나쳤던 부분이 새롭게 부각되어 살아났다. 로쿠조노 미야스도코로도 그런 예의 한 여자인데 흥미를 부추긴다.

"그 여자는 신분이 높은데다가 아름답고 교양이 있으며 취미도 고상해. 외관상으로는 무엇 하나 부족한 데가 없는 이상적인 여자로 묘사되어 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모양이야."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약간 조이는 맛이 없다든가. 매끄럽지가 않다든가. 별로 따뜻한 느낌이 없다든가."

"정말 그럴까요?

"유감스럽게도 극히 드물지만."

"하지만 고쳐지기는 하죠?

린코의 질문이 차츰 진지해진다

"아주 애정이 깊은 남자가 열심히 노력하고 또 여자도 나름대로 노력하면 바뀔지도 모르지만 남자가 늘 노력할 수는 없을 거야. 왜냐하면 한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 여자를 사랑하잖아요."

"사랑은 하지만 그것이 별로 좋지 않으면 언제나 욕구 불만이 남아서 다른 근사한 여자가 생기면 그쪽으로 가게 마련이지."

"역시 남자란 못 믿을 존재예요."

"그럼 묻겠는데 말이야. 여자도 언제까지고 서툰 남자와 관계한다면 싫겠지?"

"그야 싫죠."

린코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렇다면 남자도 마찬가지야. 남자도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나 둔한 사람과는 관계를 맺기가 괴롭다구."

희미한 달빛을 한껏 받으며 남자와 여자는 침대에 누운 채 성의 불가사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겐지모노가타리-에 보면 (비오는 밤의 품평)이라는 것이 있지. 우리는 지금 '달밤의 품평'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알몸의 품평'"

구키는 한쪽 손을 린코의 숲에 올려놓은 채 이야기를 계속한다.

"로쿠조노 미야스도코로는 자존심이 강한데다가 질투가 많은 여자였기 때문에 생긴 비극이겠지만 이야기를 비극으로 이끌고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거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그런 게 씌어 있어요?"

"아니. 무리사키시키부(겐지모노가타리의 저자)가 여자였기 때문인지 그렇게 확실하게 쓰진 않았어. 아니 어쩌면 쓸 수 없었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책 내용을 읽어 보면 다분히 그렇게 생각되는 부분이 많아."

린코는 얌전하게 구키를 올려다보며 듣고 있다.

"겐지가 처음 이 여자를 만났을 때는 한눈에 반해 버렸어. 그래서 열심히 쫓아다닌 끝에 겨우 몸을 허락받고는 하룻밤을 함께 지내게 돼. 함께 맺어지기까지 그렇게 힘들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 후로는 오히려 서먹서먹해져 버려서 더 이상 서로 관계를 갖지 않게 되지."

"역시 겐지는 너무 냉정해요."

"맞아. 많은 여자들이 그렇게 생각해. 실제로 대부분의 여성 평론가들도 겐지의 냉정한 태도에 대해 입을 모아 비난하는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구키는 달래듯이 린코의 등에 가볍게 손을 댄다.

"이야기 속의 로쿠조노 미야스도코로도 겐지의 냉정함을 원망한 나머지 비극을 자초한 거야. 겐지의 부인인 아오이노우에나 겐지가 귀여워하던 유가오 같은 여자를 시기하여 그들에게 원령(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의 혼령)으로 씌워져 결국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구."

"집념이 지독히도 강한 여자였던 모양이에요."

"그래. 외골수 타입의 사람들은 겉으로는 얌전하고 조용하지만 한번 사람을 원망하게 되면 끝장을 보고야 말아."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자면 겐지가 여자에게 냉정했기 때문이에요."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야. 그러나 겐지의 입장이 되고 보면 그 또한 괴로울 거야. 아무리 남자라도 궁합이 맞지 않는 여자와 관계를 한다는 것이 즐거울 리 있겠어? 게다가 여자 쪽에서는 그것도 모르고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느냐고 계속 재촉해 온다면 누구라도......."

"그건 남자의 내심을 여자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잖아요."

린코는 로쿠조노 미야스도코로가 겐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이유가 그녀의 은밀한 곳에 매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내심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만약 남자로부터 나쁘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쇼크를 받아 재기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럴지도 몰라. 그래서 남자들은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그런 말을 여자에게 하지는 않아. 그래서 겐지도 로쿠조노 미야스도코로에게 불만은 있으면서도 한마디도 내색하지 않아. 오히려 사랑이 담긴 시와 편지를 자주 보내고. 그녀가 이세로 떠날 때에는 노노미야까지 만나러 가는 장면도 있지."

'싫은데도?"

"그럼. 자신을 그렇게 사모하는 여자에게 냉정한 태도를 취할 수는 없지. 불만은 있지만 겉으로는 여자를 치켜세워 주고.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 당시 귀족들의 다정한 태도이자 우아한 마음이었는지도 몰라."

"그런데도 겐지는 여자들에게 좋은 평을 듣지 못하니 불쌍해요"

"겐지는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그 마음이 독자들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았던 탓인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결국 겐지의 잘못이에요. 그의 어설픈 동정심이 그녀를 깨닫지 못하게 한 거죠. 그녀의 잘못된 점을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어떤 기회를 줬어야 해요."

"그렇다고 겐지가 한두 번의 관계를 맺은 다음 갑자기 안면을 싹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차갑고 비정한 남자라고 여자들한테 더욱 격렬한 비난을 받았을지도 몰라."

린코는 입을 다문다. 그러더니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이 묻는다.

"거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남자에게 묻지 않고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예를 들어 겐지처럼 한두 번 관계를 갖고 나서 두 번 다시 남자가 요구해 오지 않는다면 그런 문제가 있다고 봐야겠지 ."

"그런 경우에는 관계가 영 이루어지지 않게 되나요?"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관계를 맺을 때 뭔가 전혀 맞지 않는 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군."

하얀 달빛 아래에서 줄곧 남녀에 관한 은밀한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좀 어색하다. 이렇게 회고 맑고 깨끗한 달빛 아래서는 좀 더 고상한 얘기를 하는 것이 어울릴 법도 하지만 또 한편 생각해 보면 남녀 간의 성문제만큼 인간에게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도 없다.

"남녀 간의 미묘한 성문제를 이렇게 화제로 삼기는 처음이야.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내왔어 "

구키의 말에 린코도 솔직히 고개를 끄덕인다.

"또 하나 물어도 괜찮아요?"

구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묻는다.

"흔히 애인이나 부부 사이에 말이에요. 처음에는 아주 열심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별로 요구하지 않게 되잖아요. 그런 경우도 역시 여자의 그곳에 문제가 있기 때문인가요?"

"그건 달라. 싫증이 난 것뿐이지 거기가 나빠서가 아닐 거야."

"확실하게 꼬집어서 로쿠조노 미야스도코로의 경우와 어떻게 달라요?"

린코의 질문은 마침내 핵심을 찌른다.

"조금 전에 얘기한 것처럼 로쿠조노 미야스도코로의 경우는 한두 번의 관계에서 끝났고. 그 후로도 여러 번 기회가 있었지만 겐지 쪽에서 요구하지 않았어. 하지만 보통 부부나 애인은 달라. 되풀이되는 관계 속에서 충분히 싫증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남자의 요구가 드물어지는 경우니까 내용이 전혀 다르지."

"말하자면 몇 번이고 되풀이된 후의 싫증이라면 여자의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군요."

"물론이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보통 가정주부들의 그것이 모두 안 좋았다는 결론이 되니 그건 말도 안 되는 논리잖아."

일단 납득이 되는 듯이 보였던 린코가 다시 묻는다.

"남자들은 왜 싫증을 내는 거죠?"

"그건 또 다른 문제야."

"흔히 남자들은 집에서 아내와는 관계를 잘 갖지 않을 뿐 아니라 자세하게 가르쳐주지도 않는다고들 해요. 한마디로 무성의한 거죠. 왜 그러죠?"

린코의 날카로운 질문에 구키는 차츰 방어만 하게 된다.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왜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좀 어렵지만. 아내란 존재가 그렇잖아. 늘 함께 사는데 그걸 매번 남자에게 요구해 온다면 남자의 몸이 당해 낼 수 없을 거야. 남자들은 어쩌면 그게 두려워 농담처럼 하는 말인지도 몰라."

성에 대해서 린코가 이렇게까지 깊게 파고들며 이야기를 나누기는 처음이다. 남자의 본심을 솔직하게 다 털어놓으면 결국에는 속셈마저 들여다보일 것 같아 약간 겸연쩍어진다 그러나 이것도 서로 몸을 허락한 사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대화인지도 모른다. 구키가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는 사이 린코가 다시 묻는다.

"유럽 왕실의 경우. 황태자는 결혼하기 전부터 연상의 부인과 이미 관계를 하게 돼 있다죠?"

겐지모노가타리에서 느닷없이 유럽의 왕실로 화제가 바뀌자 구키는 당황한다.

"게다가 결혼한 후에도 쭉 그 부인과 관계를 갖는 바람에 황태자비는 마치 셋이서 결혼한 것 같다는 말도 했었다는 데. 그건 무슨 까닭이죠?"

"무슨 까닭이냐니?"

"연상의 부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젊음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황태자비가 훨씬 유리하잖아요. 그런데도 그 부인과 헤어지지 않은 이유 말이에요."

"글쎄. 왜 복잡한 문제여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 속에는 섹스의 문제가 얽혀 있을지도 모를 거야."

"그렇게 멋진 황태자비에게도 섹스에 문제가 있었을까요?"

"꼭 그런 건 아니겠지 다만. 황태자로서는 연상의 부인과 함께 있는 것에 정신적인 안정을 느꼈을지도 모르고 ... . 또 누가 알아? 섹스도 매력적이어서 헤어지기 어려웠는지도......."

"하지만 훨씬 연상인 데다 그런 관계가 아름다워 보이지도 않아요."

"이봐 이봐. 잠깐만 "

구키는 린코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는다.

"섹스란 말이야. 나이나 외모와는 별 관계가 없어. 중년이 되어도 매력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젊고 미인이지만 매력이 없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야. 요컨대 섹스만큼 사사롭고 겉으로 짐작이 불가능한 것은 없을 거야. 사실 그래서 섹스의 세계는 요사스럽고 불가사의하게 세련되어 있는지도 몰라."

"세련되어 있다고요?"

"그럼. 젊고 예쁜 여자에게 모든 게 갖추어져 있다면 그건 불공평한 거야. 그래서 조물주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섹스라고 하는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위력을 덧붙여 준 거라구."

구키는 '달밤의 품평'도 이쯤에서 슬슬 그치고 이제 잠들고 싶다. 그러나 린코는 아직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당신 얘기를 종합해 보면 여자만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어요. 남자들에게는 아무런 문제점도 없나요?"

"물론 있지 . 양상은 좀 다르겠지만 남자들에게도 조루라든지 성 불능 같은 여러 가지 고민이 있어. 그것은 특히 정신적인 영향을 받는 것이어서 여자보다 더 힘든 문제인지도 몰라."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나요?"

"자신감을 가져야겠지 . 그리고 그때는 여자의 칭찬이 가장 효과적일 거야. 그러나 여자 입장에서도 남자가 멋지기는 하지만 섹스 할 때의 분위기나 테크닉이 너무 서투르다면 싫증을 내겠지"

"그럴 거예요."

린코는 깨끗이 동의한다.

"여자도 그렇지만 남자의 경우도 섹스에 대한 불만을 듣는 게 제일 큰 상처가 되는 법이야."

"그걸 말하는 여자도 있어요?"

"글쎄. 맞대 놓고 말하기까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섹스 후의 태도로 남자는 대충 느끼게 되지. 게다가 말다툼이라도 벌어지면 앞뒤 생각 없이 딱 꼬집어서 말해버리는 여자도 더러 있어."

"그런 경험이 있나요?"

"덕분에 별로."

"별로가 아니라 전혀겠죠?"

린코가 콕 찌르듯이 말한다.

"당신의 얘기를 쭉 듣고 보니 남녀 관계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군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두 원만한 조화를 잘 이루는 커플은 별로 없을지도 몰라 "

"우리들은 문제없을 거예요. 만나서 한두 번에 끝내지 않았으니까."

"당연하지. 당신은 우리나라에서 제일간다고 내가 말했잖아."

그 말을 들은 린코가 바짝 다가 눕는다. 나긋나긋하고 매끄러운 린코의 몸을 달빛 속에서 껴안으며 구키는 잠이 든다. 새벽녘에 구키는 꿈을 꾸었다. 온통 억새풀로 뒤덮인 들판 저쪽에서 한 남자가 구키를 보고 있다. 누구냐고 물어 본 것도 아니지만 구키는 그가 린코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때 린코가 바람이 휘몰아치는 억새풀 속을 지나 구키와 남편 사이를 가르며 무심하게 저쪽 넓은 길로 유유히 사라진다. 그녀의 표정은 구키나 남편의 존재가 무관하다. 뒤에 남겨진 구키와 남편만이 요동치는 억새풀을 사이에 두고 하염없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잠에서 깼을 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 장면뿐이다. 그 남자의 표정도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뭔가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섬뜩한 느낌만이 머리에 남아 있다. 구키는 곧 옆을 돌아본다. 린코는 약간 등을 돌린 채 곤히 잠들어 있다. 잠들기 전에는 알몸이었는데 언제 일어났는지 가운을 입고 옷깃까지 여미어져 있다.

머리맡의 시계는 벌써 다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고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는지 발코니를 가리고 있는 두꺼운 커튼 끝에서 어렴풋하게 흰 빛이 일렁인다. 구키는 밝아오는 창가를 바라보며 방금 꾸었던 꿈을 생각한다. 하얀 억새풀이 꿈속에 등장한 것은 어제 센고쿠바라에 널려져

있던 억새풀의 인상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린코의 남편은 늘 구키의 머리에 남아 있는 존재여서 꿈에서도 나타났는지 모른다.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표정이나 외모도 좀처럼 종잡을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듯이 린코가 무심하게 지나쳐 간 것이 구키의 마음에 무겁게 자리 잡는다. 종잡을 수 없는 꿈을 좇다가 일어나 발코니의 커튼을 젖힌다. 창밖은 아직 짙은 안개에 싸여 있고 저 멀리 가이린 산의 산정만이 묵화처럼 희미하게 떠올라 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지만 평원을 덮고 있는 안개는 바쁘게 움직인다.

구키는 그대로 다시 잠에 빠져든다. 눈을 뜨니 일곱 시 반이 지나고 있다. 커튼 밑으로 아침햇살이 새어든다. 린코는 여전히 단잠에 빠져 있다. 구키는 살며시 침대를 빠져 나와 발코니의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본다. 맑게 갠 가을 하늘 아래 가이린 산줄기가 눈앞에 다가선다. 산허리 아래로는 여전히 하얀 안개가 감싸 안고 있어 마치 산이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장면이 이 일대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전에 이 호텔에 왔을 때도 가을이었다. 아침녘 안개가 걷히자 평원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지금도 엷은 안개를 뚫고 골프 코스 의 일부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스타트 흘 가까이에는 벌써 몇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구키는 그것을 보며 오늘 하코네에서 골프가 있다는 핑계로 집을 나온 것을 생각한다. 구키의 말을 아내가 믿고 있을까? 순간 구키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커튼을 닫자 린코가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다.

"벌써 일어났어요?"

". 잠깐. .... 잠이 깨서"

구키는 꿈속의 린코 남편이 다시 생각났지만 아무 말 없이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이대로 좀 더 자자."

맑은 가을 하늘 아래에서 골프를 치는 것도 좋겠지만 린코의 부드럽고 따뜻한 체온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대로 가운 끈에 손을 대자 린코가 말한다.

"어쩌려고요."

새삼스럽게 대답할 것도 없이 그녀와 아침 정사에 빠지고 싶다.

"일어나기에는 아직 일러 ."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하룻밤의 밀회도 이제 그 시간의 끝을 보이고 있다. 시간에 쫓기듯 구키는 가운의 옷깃 사이로 삐져나온 젖꼭지에 입술을 대고 두 손으로 그녀를 껴안는다. 창밖은 서서히 안개가 물러나기 시작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 밤의 끝자락을 잡고 있다. 꿈속에서 린코의 남편을 만났지만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구키는 굳이 린코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 섬뜩한 느낌이 오히려 구키의 성감을 고조시킨다. 아침 햇볕을 차단한 침대 속에서 구키는 여느 때보다 더 린코에게 고통을 준다. 안타까움에 방황하던 린코가 견디다 못해 '제발'이라고 몇 번이나 호소하였지만 구키는 여전히 허공에 접어둔다. 그 무심한 태도가 새벽녘의 꿈 때문이라는 것을 린코가 알 리 없다. 간신히 끝나고 나서 '매정한 사람'이라고 린코가 타박을 한다. 그 원망스러워하는 눈빛이 사랑스러워 구키가 다시 린코를 껴안고 있는 사이에 두 사람은 다시 잠든 모양이다. 허공을 헤매이다가 간신히 절정에 오른 뒤 린코는 이번에도 구키보다 더 단잠에 빠져 있는 듯하다.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아직 자고 있다.

벌써 아홉시 반이다. 커튼 끝으로는 훨씬 환한 햇살이 새어들고 새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이제 안개도 완전히 걷혔다. 맑은 하늘 아래서 골퍼들이 한창 초록 잔디 위의 하얀 공을 추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건강한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구키는 여전히 침대 속에서 린코의 체온을 즐기고 있다. 나태라고나 할까. 음탕이라고 할까. 건전치 못하고 부도덕한 세계에 혼자만 빠져 있는 것에 대해 오히려 구키는 쾌감마저 느낀다. 구키가 린코의 품으로 파고들자 린코가 고개를 약간 숙이며 천천히 눈을 뜬다.

"또 잠들어 버렸어요."

"너무 날뛰었기 때문에?"

"그런 말투는 제발......."

린코는 구키의 말을 막으려는 듯이 입으로 손을 내밀고 나서 머리맡의 시계를 본다.

"어머. 벌써 열시잖아요."

오늘은 둘이서 가을의 아시노코라도 구경하고 오후에 도쿄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음란하고 불성실한 시간도 이제 서서히 다해가는 것 같다.

"일어나세요."

린코의 재촉에 구키는 한 손 가득 잡았던 유방을 놓아주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방 안은 여전히 커튼이 닫혀진 채 밤의 연장 속에 있다. 린코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샤워부터 한다. 그 사이 구키는 텔레비전을 켠다. 두 사람이 정사에 빠져 있는 동안 세상은 특별하게 달라진 것이 없다.

린코가 욕실에서 나와 거울로 향하는 것을 보고 구키는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몸을 담근다. 하룻밤 내내 린코와 살을 맞대고 있었지만 별다른 냄새가 스민 것 같지는 않다. 구키는 특별하지는 않지만 담백한 린코의 피부를 사랑한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오자 커튼은 이미 활짝 열려져 있고 린코는 창가의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다. 뽀얗고 우아한 목덜미를 만져 보고 싶은 충동에 거울 속의 린코를 향해 말한다.

"린코는 정말 아름다워. .... "

"부끄러운 얘기지만 당신과 만나면 화장이 곱게 먹어요."

"호르몬의 분비가 활발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여기도 매끈매끈하던 걸."

살짝 엉덩이를 만지자 린코는 당황해서 허리를 튼다.

"안 돼요. 머리가 흐트러진단 말예요."

구키는 뒤에서 린코의 목덜미에 살짝 입을 맞춘다.

"섹스를 하고 나면 여자의 피부는 점점 윤이 나지만 남자는 점점 기운이 빠져 초라해지게 마련이지 "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어디 있기는? 그것이 바로 암컷과 수컷의 타고난 숙명이야. 결국 최후의 순간에 수컷은 암컷에게 먹히고 만다구."

'숙명'이라는 표현이 우스웠는지 린코는 거울 속에서 웃으며 말한다.

"불쌍한 수컷님. 빨리 옷 입으세요."

구키는 마지못해 가운을 벗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레스토랑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두 사람은 호텔을 나선다. 약간 싸늘하지만 춥지는 않다. 눈이 시릴 정도로 맑은 가을 하늘이다. 둘은 호수로 가서 유람선을 타고 아시노코를 한 바퀴 돌 예정이다. 그러나 막상 가고 보니 일요일이어서 상당히 혼잡하다. 둘은 유람선을 포기하고 하코네 공원에서 케이블카로 고마가다케로 오른다. 하코네의 산 전체와 후지 산이 보이고 멀리 스루가 만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해발 천삼백 미터의 산꼭대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는 비단처럼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어 있고 그 모습이 그대로 새파란 호수 표면에 투영되어 산도 호수도 모두 단풍으로 불타고 있다. 두 사람이 고원의 가을과 바람을 만끽하고 케이블카에서 내려 호수 끝으로 돌아온 것은 오후 4시였다. 도쿄로 돌아가려면 이제 슬슬 산에서 내려와야 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곧 길이 엄청 혼잡해질 것이다.

"어떻게 할까?"

대답이 없는 것을 보면 린코도 여기를 뜨기가 싫은 모양이다.

"늦어져도 괜찮겠어?"

다시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구키는 잠시 더 하코네에 머물기로 한다.

"고마가다케 바로 옆에 아시노코가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이 있어."

붐비기 시작한 길을 다시 빠져 나와 산길을 올라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산 높이는 고마가다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서 더욱 가깜게 아시노코를 내려다볼 수 있다. 약간 이른 저녁을 마치고 둘은 레스토랑의 정원을 서성인다. 가이린 산을 에워싼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다. 산이 높아 일몰도 빠른 탓인지 이미 어둑해진 구름 사이로 한 가닥 붉은빛이 사선을 그으며 산의 표면을 가로질러 호수 수면위로 떨어진다. 구키는 붉게 물든 하늘에 걸린 산줄기를 바라보며 린코에게 속삭인다.

"여기 더 있고 싶어?"

대답은 없지만 고개를 약간 끄덕이는 것 같아 구키는 큰맘 먹고 다시 말한다.

"하룻밤 더 있을까?"

황혼의 그림자가 떨어지는 호수를 바라보며 린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구키가 유혹은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안 될 거라는 전제 아래 던져본 말이었다.

"정말 괜찮겠어?"

"당신은요?"

되묻는 바람에 구키는 순간 대답이 궁하다. 하룻밤 더 묵으려 한다면 굳이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아내에게 뭐라고 전화를 해야 할지 아직 구실도 없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는 없지만 그래도 열시까지는 회사에 출근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린코의 집이다. 서예 모임 후 모두 함께 있었다는 구실이 이틀 밤을 설명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일은 월요일이라 남편의 출근을 도와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되겠지만 린코는......."

남편을 챙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꿀꺽 삼키며 린코의 눈치를 살핀다. 석양으로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린코가 말한다.

"당신만 괜찮다면 저도 좋아요."

드디어 해가 저물었다. 산줄기로 둘러싸인 호수는 금세 어둠에 덮인다. 그 어둡고 쓸쓸한 호수를 보면서 구키는 새벽녘 꿈속에서 보았던 린코의 남편을 생각한다. 윤곽은 흐릿해서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차가운 인상만은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어쩌면 린코는 남편과의 트러블을 이미 각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 괜찮은 거지?"

구키는 다시 다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냉정히 말해 린코를 향한 다짐은 아니다. 과연 어떤 경우에라도 린코를 책임질 수 있겠는가라는 자신을 향한 다짐이었다.

"괜찮지?"

다시 묻지만 린코는 저물어가는 산줄기를 보며 꼼짝도 하지 않는다. 하룻밤 더 묵겠다는 린코의 결심을 받아들인 구키는 레스토랑 입구에 있는 공중전화로 다가가 아까 그 호텔로 전화를 건다. 다행히 일요일이어서 어젯밤의 그 방을 잡을 수 있었다. 망설이며 집으로 전화를 걸자 다행히 아내는 없고 자동응답기가 대답을 한다. 구키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료들과 어울리다보니. 오늘도 들어갈 수 없을 거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이제 남은 것은 린코이다. 호텔방을 예약했다는 것을 알리며 구키가 말한다.

"전화... 해야지?"

잠시 생각에 빠진 린코가 허공을 보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공중전화 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몇 분도 안 되어 돌아온다.

"괜찮아?"

불안하게 물어보는 구키에게 린코는 남의 말을 하듯 중얼거린다.

"모르겠어요."

"내일은 월요일이잖아 정 무리일 것 같으면 지금도 늦지 않았어."

"당신은 돌아가고 싶어요?"

다시 되묻는 바람에 구키는 당황해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당신이 걱정 돼서......."

"나 때문이라면 걱정 말아요. 어떻게든 되겠죠."

얼핏 될 대로 되라는 것처럼 들리지만 린코가 좋다고 하는 이상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가 없다. 린코의 각오가 이런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결과야 어떻게 되든 린코와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다.

"그래. 오늘 밤 우리는 일초도 떨어져 있지 않을 거야. ! 가자."

구키는 갑자기 기분이 고조되어 린코의 손을 잡아 끈다.

"고마워"

하룻밤을 더 있겠다는 린코의 결심보다는 구키에게 머물 수 있는 용기를 불어 넣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일 것이다. 두 사람은 하룻밤을 함께 더 묵기로 결심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미 체크아웃을 해버린 호텔로 다시 돌아온 두 사람은 약간 머쓱하다. 그러나 프런트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제와 같은 방의 키를 건네준다. 주위는 이미 어두워졌고. 벨 보이가 문을 열어 불을 켜자 어젯밤과 똑같은 침대와 테이블과 의자가 기다리고 있다. 벨 보이가 짐을 놓고 나간 후에도 두 사람은 방 한복판에 잠시 우뚝 서 있다.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를 꼭 껴안는다. 어떤 특별한 말을 주고받지도 않는다. 그러나 구키와 린코는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국 당신은 돌아가지 않았군.'

'당신도 하룻밤 더 머물러 주시는군요.'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강한 포옹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구키는 더욱 팔에 힘을 주며 린코의 입술을 더듬는다.

'남편에게 야단맞아도 괜찮은 거지?'

'부인이 화를 내도 괜찮은 거죠?'

긴 입맞춤 후에 두 사람은 소리 내어 대답한다.

"아내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어."

"남편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어요."

입술을 지나 린코의 볼에 뺨을 비벼댄다. 그리고 구키는 둘이서 넘기 어려운 하나의 선을 이제 막 넘어선 것을 실감한다. 서로 사랑하지만 그 선만은 남겨두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최후의 방어선을 넘은 모양이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최전선에서 두 사람은 어쩌면 빗발치듯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쓰러질지도 모른다.

"괜찮은 거지?"

구키가 다시 한 번 소리 내어 확인하자 린코의 볼이 눈물로 젖는다. 이틀이나 집을 비운다는 결심 때문인가. 아니면 그렇게 결심하는 사이에 기분이 고조된 것일까. 그러나 이제 와서 그 이유를 물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의미할 뿐이다. 구키는 눈물로 젖은 볼을 손으로 닦아 주고 나서 린코의 블라우스 단추를 연다.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린코의 발 아래로 블라우스가 떨어지고 이어서 스커트가 미끄러져 내리지만 린코는 인형처럼 미동도 없다. 어젯밤은 하얀 달빛이 발코니에서 침대 끝까지 스며들었지만 오늘 밤은 짙은 구름에 가리워져 온 방 안이 어둠에 싸여 있다. 구키도 알몸이 되어 브래지어와 팬티만을 걸친 린코를 안고 침대로 데려간다. 침대는 어젯밤과 똑같은 넓이와 탄력으로 그들을 맞는다. 두 사람은 무너지듯 쓰러져 서로를 으스러지게 껴안는다. 서로의 가슴을 맞대고 허리를 붙이며 다리를 휘감고 있는 사이에 린코의 체온이 서서히 구키에게 스며든다. 그리고 머리를 짓누르던 집생각도. 아내와 일에 대한 생각도 모두 저편으로 아득하게 사라져 간다. 지금 이 순간은 오로지 린코의 체온에 녹아서 섞여 가고 있다. 구키는 뭔가 서서히 종잡을 수 없는 어떤 공간으로 자신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어떤 고립이기도 하고 타락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런 짓을 하고 있으면 파탄을 가져온다. 이대로 멈추지 않는다면 회사에서도 버림받고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래서는 정말 안 된다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일어나지만 현실은 나락으로 젖어가는 감각에 익숙해지고 그 타락하는 상쾌한 느낌에 몸도 마음도 모두 도취되어 버린다.

'위험해.... .'

그러나 입 안에서만 맴돌 뿐 두 사람은 또다시 욕정이 다할 때까지 서로를 탐하며 열락의 화원 속으로 아득히 떨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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